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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 7

77화 난공불락 (2)

셰인의 기사를 본 클라인은 금방 아버지인 로웰에게 연락을 취했다.

[음, 안 그래도 너에게 셰인이 남긴 메시지가 있었다. 진행 중인 탐사가 끝나면 찾아와 달라더구나. 그 이종족 소녀와 함께.]

거의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던전 탐사에 매달렸던 클라인은 셰인의 부름에 곧바로 응했다.

오크들과의 전쟁이라니!

드워프 전초기지 던전에 찾아가기 전까지 이런 소식은 듣지 못했기에, 클라인은 가장 먼저 디라일라에게 의사를 물었다.

"엥. 아룬비다라고? 오크들? 오크들이 마력을 써?"

그 한 달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디라일라는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이긴 했으나, 셰인의 부름을 거절하지 않았다.

최근 셰인 덕분에 클라인과 함께 붙어 다니며 여러 던전을 탐사한 덕에 디라일라도 모험가들 사이에서 상당한 유명세를 굳게 얻지 않았던가.

그에 대한 고마움도 있고, 현재 1황녀와 2황녀가 공동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정치적 견해도 포함된 선택이었다.

이후로 클라인은 예의상 남은 세 사람에게도 의중을 물었는데, 그중 알렉스가 가장 먼저 나섰다.

"저도 가고 싶습니다! 꼭 껴 주십시오!"

최근 클라인에게 매일 같이 검술을 배우고 있던 알렉스는 이상할 정도로 셰인에게 우호적이었다.

거기에 클라인의 친우인 알 로스는 순전히 전쟁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이유로 참여했고, 아르티아는 최근 마법사로서 이름을 알리는 셰인에게 제법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정기를 활용한 마법이라면 우리 할아버지도 관심이 많았는데...."

그렇게 클라인의 팀원 모두 아룬비다행 포탈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정작 와 보니 비두론 성의 상황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반쯤 무너져 있는 성벽과,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몬스터와의 혈전.

사방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에 일행들의 기가 살짝 죽어 있는 상황에, 셰인이 앞장서 그들을 안내했다.

"늦지 않게 와 줘서 다행이구나, 클라인. 오래간만이다. 몸은 잘 챙기고 있지?"

"아, 네, 형님. 저야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좀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며칠 동안 잠을 못 자서 그렇다. 마법도 많이 썼고. 아무튼, 먼 길 오느라 고생했을 테니 좀 쉬면서 설명을 듣겠느냐?"

"...예. 형님."

포탈을 탄 덕에 거리로 인한 피로감은 없었으나, 정작 셰인 본인이 피곤해 보였기에 클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너희의 파견은 모험가 협회 소속으로 처리될 거다. 그와 관련된 협상안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공표가 될 테지."

"그렇습니까...."

"당장 어느 정도까지 정해졌는지는 말해 주기 힘들지만, 보상안이 상당하니 그 부분은 걱정할 거 없다."

클라인의 관심사는 딱히 돈 같은 게 아니었으나, 팀원들을 이끄는 팀장으로서 팀원들의 이윤에는 민감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셰인 또한 이러한 이야기를 우선적으로 해 줬던 것이다.

그때, 아르티아가 손을 들며 물었다.

"모험가 협회에 들어가는 수수료를 제외하고 다른 보상안은 받지 않을 테니, 당신이 제게 직접 보상을 해 줄 수 있을까요?"

"아르칸 총관님의 손녀인가. 어떤 보상을 말하는 것이오?"

"정기를 마력 패턴으로 공식화시켰다고 들었어요. 그 메커니즘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그 정도라면 어렵지 않소."

그녀의 제안을 세인은 받아들였다.

아르티아는 전격계 마법을 쓰는 마법사였기에, 대규모 전쟁에서 특히 힘을 발휘하는 마법사이기도 했다.

거기에 마법 연합 총관의 손녀이기까지 했으니 그 실력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도 그녀는 셰인의 전생에서 클라인과 함께 활약했던 영웅 중 한 명이기도 했고.

"저, 저는 셰인 님에게 마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알렉스?"

그 말을 들은 알렉스가 용기를 내어 손을 들며 말하자 셰인이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골의 순박한 청년이었던 알렉스는 그간 단련을 꾸준히 해 왔는지, 어느덧 제법 전사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본래라면 알렉스가 저런 의견을 낼 만한 영향력이 없을 테지만 셰인은 알렉스의 말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너는 다재다능한 게 주무기이니 몇몇 마법을 배우는 것도 좋겠지."

전생에서의 알렉스는 다양한 무구를 활용한 변화무쌍한 전투를 추구하는 스타일이었다.

거기에 마법까지 추가된다면 필히 전생보다 더 좋은 활약을 할 수 있을 터.

마력을 깨우치기에 늦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클라인이 곁에서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을 보면 마력을 다루는데도 능숙한 듯하니 가르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반면 디라일라와 알 로스는 딱히 셰인에게 바라는 게 없었기에 조용히 황실에서 마련하는 보상안을 받기로 했다.

"그럼, 본격적으로 지금 상황을 설명하마. 일단 당장은 그리 불리한 편이 아니다."

"그렇습니까?"

성벽이 반파된 모습에 불리하지 않을까 싶었으나, 이어지는 셰인의 말에 디라일라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 여기서도 내가 활약해야 한다고?"

"그래. 현재 성벽의 보수가 필요한 상황이니, 너의 힘이 중요하지. 물론 활약하는 만큼 그만한 보상이 돌아갈 거다."

"으... 그렇다면야."

예전에는 많은 관심을 받으며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었던 디라일라였으나, 메자이아 대수림 이후 끊이지 않던 관심에 자신이 생각했던 그림과 다르다고 생각한 그녀였다.

클라인과 아르티아 덕분에 그러한 접촉이 많이 사라지긴 했으나....

"아나스타샤 황녀님께서도 너의 이름을 기억하겠지."

"으음? 그, 그렇단 말이지?"

황실의 관심은 좀 다르지 않나.

일전에 들어 본 바에 따르면 황태자는 나쁜 놈이고, 거기에 대항하고 있는 게 1황녀와 2황녀라고 했으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연을 이어 두는 게 좋으리라.

언젠가 자신의 가족들, 헤르메스 모험단을 찾기 위해서라면 인간들의 고위층과 커넥션을 만들어 둬야 하니까.

"어렵지 않은 일이지! 거기다 내가 최근에 좋은 걸 먹었걸랑."

"좋은 거?"

"흐흐, 들어는 봤나 몰라. 형상 기억 광물! 고대 드워프들이 만든 광물을 이 몸이 직접 섭취했다 이 말이지. 맡겨만 줘!"

"호오...."

저건 셰인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형상 기억 광물의 효과는 셰인도 전생에 익히 겪어 봤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네가 다른 곳에 투자할 시간이 훨씬 늘어나겠군."

"으응?"

그러자 어느새 셰인의 눈빛이 노예를 바라보는 그것처럼 변하자, 디라일라는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원래 단체에서는 너무 잘하는 티를 내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삶의 지혜를, 디라일라는 너무 늦게 알아채고 말았다.

* * *

"하나의 속성을 깨우친 마법사는 백 명의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익숙해진 마법사는 천 명의 사람의 능률을 따라가며, 대가(大家)를 이룬 마법사는 만 명의 사람들이 우러러보도록 만들지요."

미미르의 말에 아나스타샤는 성의 테라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고작 하루.

7만이라는 숫자의 몬스터의 공세를 막느라 넝마가 된 성벽이 디라일라의 활약으로 인해 복구되기까지 필요한 시간이었다.

지난날.

셰인은 보급품의 품목을 바꿔 포탄과 마석, 그리고 클레이튼 가문으로부터 엘프의 정기가 담긴 플라스크를 구입하는 데 집중했다.

포탄과 마석은 전진해 오는 몬스터의 수를 최대한 줄이는 데 쓰였고, 엘프의 정기가 담긴 플라스크는 전투 중 부상을 입은 이들을 치료하는 데 주로 쓰였다.

거기에 전투의 양상 또한 바꾸었는데, 성벽을 지키기보다는 최대한 성벽을 활용하여 부상자를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덕분에 성벽이 하루하루 무너져 내렸지만, 셰인이 디라일라를 데리고 오는 것으로 단번에 걱정이 날아갔다.

과연 지하인이라 해야 할까.

대지를 다루는 데 있어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디라일라는 비명을 지르며 성벽의 재건을 도맡아 했다.

"으아악─!"

물론 디라일라의 마력량에도 한계란 존재하기에, 그녀는 소가 여물을 먹듯 마석을 섭취해 가며 성벽을 보수해야만 했다.

평소에 그렇게 못 먹어서 안달이 났던 마석을 바로 오늘이 되어서야 한없이 먹게 되었으나, 먹는 족족 빠져나가는 마력에 그것을 감당하는 그녀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펌프질을 하고 있었다.

"훌륭한 인재로군."

인재욕이 그다지 많지 않던 아나스타샤마저 탐욕 어린 시선으로 디라일라를 바라볼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 아니겠는가.

"너는 저런 인재를 잘도 알고 지내는구나."

아나스타샤의 말에 셰인이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연합국의 아카데미 아닙니까. 찾아보려면 저런 인재는 충분히 발견할 법합니다."

"내 누이가 괜히 인재에 대한 욕심을 보이는 게 아니었어."

아룬비다의 특성상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아나스타샤였기에 그녀는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셰인의 포탈로 인해 아룬비다가 배척받을 시기는 지났기 때문이다.

"덕분에 방어하는 데 있어 어려움은 많이 줄어들겠어."

앞으로 1황녀, 올리시아의 선발대가 오기까지 총 5일 정도 남은 상황.

성벽이 보수된 지금,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무난한 방어를 이룰 수 있을 듯싶었다.

"흠....글쎄요. 어떨런지."

셰인의 그 한마디에 미미르도 표정이 굳어졌다.

"아마, 놈들도 보고 있을 겁니다. 하루 만에 성벽이 재건되는 저 기적을."

"음?"

그에 아나스타샤가 무슨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바라보며 다음의 말을 기다렸다.

"아마, 곧 총공세가 시작될 겁니다."

과거, 50년 전의 오크들은 인간들과의 전쟁을 통해서 인간에 대해 파악했을 것이다.

때문에 인간의 군대가 그 몸을 일으키기 위해서 얼마 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는 얼추 알고 있을 터.

그러니 놈들의 입장에서는 그전에 비두론 성의 성벽을 허물어야 했으나, 예상과 다르게 하루 만에 복구되는 현실을 마주했으니 놈들 또한 시간이 없다는 것을 파악했을 것이다.

"과연.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로군. 그 어느 때보다 격한 공격이겠어."

"예. 그래도 그만큼 시간이 걸릴 테니... 준비는 해 둬야겠습니다."

"둘에게 맡기도록 하지."

"예. 그리고 황녀님."

아나스타샤의 집무실에서 나가기 전, 셰인은 그녀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음. 그래."

* * *

셰인과 미미르의 걱정처럼, 그 뒤로 3일간은 평소와 다르게 평온한 시간이 흘러갔다.

첫날의 웨이브 이후로 오크들은 대포의 위력을 다시금 깨닫고 몬스터들을 한 번에 많이 보내기보다는 짧게 오래 보내는 방향으로 나갔다.

철저하게 소모전으로 가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그러나 성벽이 보수된 지금, 더 이상 그 수를 쓸 수 없게 됐으니 이번에는 작정하고 모든 몬스터를 보낼 예정인 것이다.

그렇게 올리시아로부터 이틀 후 선발대가 도착한다는 서신을 받은 날.

이른 새벽부터 몬스터 군단의 최종 공격이 시작됐다.

"으, 으와...."

어둠 속에서 빗나는 무수한 숫자의 붉은 눈동자에 디라일라가 질렸다는 듯 몸을 움츠렸다.

무려 8만에 다다르는 숫자의 몬스터 군단.

기존에 예상했던 걸 넘어서는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대형 몬스터의 수는 그리 많이 보이지 않았으나, 대신 중형과 소형 몬스터가 주를 이루었다.

과연 이번 최후의 몬스터 웨이브를 얼마만큼의 출혈로 막느냐에 따라 향후가 달라질 것이다.

뿌우─!

마지막 몬스터 웨이브를 알리는 뿔피리의 소리가 널리 퍼져 나갔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8화

78화 난공불락 (3)

비두론 성벽에서는 최후의 공격이라는 듯 포탄이 쉴 새 없이 쏘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만의 몬스터 대군은 그 포화 속에서도 지체 없이 비두론 성으로 전진해 나갔다.

철저히 자신들의 적이 누구인지 알기에 할 수 있는 몬스터 대군의 야행(夜行).

고작 수십 문의 대포로는 해일처럼 몰려오는 몬스터의 수가 줄어드는지 확인조차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게 달아오른 대포의 입구가 식을 줄을 모르고 불꽃을 쏘아 댔다.

적이 모래사장의 모래처럼 많다면 어딜 쏴도 맞는다는 얘기였으니.

이윽고 포화 속의 행군을 마친 몬스터들이 성벽의 코앞까지 다가와 성문을 두드리려던 찰나.

"틴더(Tinder)."

셰인이 바닥을 향해 1서클 마법, 틴더를 발현하자 땅 내부로부터 셰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룬 마법이 발동했다.

[5중첩], [5증폭], [압축], [팽창].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대폭발이 일어나 하늘을 밝혔다.

일전에 라비아타의 원소 마법을 보고 응용한 방법이었다.

사방에 몬스터의 피륙이 터져 나가고, 대지가 우르르 울렸다.

그야말로 대재앙.

폭발의 여파에서 한참을 벗어난 몬스터들조차 흔들리는 땅에 의해 넘어질 정도였다.

한편, 난리가 난 몬스터 대군과는 다르게 비두론 성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여전히 대포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오고, 궁병들도 화살이 허락되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시위를 당겼다.

셰인이 팽창의 방향을 전방으로 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 셰인이 신중에 신중을 기해 만든 5중첩 룬 마법의 향연.

중첩이라는 게 단순히 마법을 여러 번 새긴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룬 마법을 새기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 공간을 벗어나면 개별로 취급되기에 중첩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허락된 공간에 최대한 다른 글자와 겹치지 않도록 써 내려가며, 또 동시에 그로 인해 내려가는 안정성까지 챙기려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거기에 중첩이 될수록 필요한 마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덕분에 마석은 또 얼마나 소비했던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몬스터 대군의 숫자는 줄어든 것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폭발로 인해 생긴 구덩이로 몬스터들이 몸을 내던진다.

계속해서 꾸역꾸역, 끊임없이 밀려오는 몬스터들은 서로가 서로를 짓밟으며 성벽을 올라타기 시작했다.

"끊는 기름을 뿌려라!"

성벽에서 대기 중이던 인원들이 펄펄 끓는 기름을 성벽 아래로 때려 부었고, 열에 약한 아룬비다의 몬스터들은 속수무책으로 성벽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럼에도 몇몇 몬스터들의 날카로운 손톱은 사정없이 단단한 성벽을 파고들어 위로 향한다.

넓은 성벽을 지키기 위한 기름도 이미 동이 난 상태.

마치 도화지에 개미가 올라가듯 성벽 위로 몬스터들이 올라가려는 그 순간.

"으아악! 이 개씨발놈들아악─!!"

그때, 성벽 위. 어느 마법진 위에 서 있는 금발에 구릿빛 피부의 소녀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과격한 욕설을 내뱉었다.

지난 며칠 동안 심장통에 두통까지 시달려 가며 성벽을 보수하던 디라일라였다.

그녀의 눈에는 마치 수명을 갈아 넣은 일생의 명작이 벌레들에게 갉아먹혀지는 기분이었으리라.

그런 디라일라가 마력을 휘두르자, 그간 디라일라의 마력을 한가득 머금고 있던 성벽이 일제히 흔들거렸다.

이윽고.

성벽이 제 몸을 지키기 위해 몸을 웅크리는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세워졌다.

그 한 번에, 성벽에 들러붙어 있던 몬스터들은 온몸이 꿰뚫린 채 또다시 땅으로 추락했다.

"끄에엑!"

그러자 마석까지 섭취해 가며 준비한 마법이 발동되어 그 반동으로 두 눈을 까뒤집은 디라일라가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주민 중 한 명이 그런 디라일라를 후송하고,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외쳤다.

"개문(開門)하라!!"

디라일라를 마지막으로 마법에 무지한 몬스터 대군의 숫자는 그야말로 대폭 줄어들었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것은 셰인과 디라일라라는 세기의 어린 천재 마법사들 덕분이기도 했지만, 이만한 대규모 마법진을 설치할 수 있도록 보급된 마석도 한몫했다.

이마저도 1황녀, 올리시아가 끊임없이 황태자 새뮤얼 측에 도발하고 요구하며 가져온 결과였다.

아마 여태껏 쓴 마석만 하더라도 한 도시를 5년간은 운용할 마석량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거의 몬스터 군단의 숫자 또한 눈에 띄게 확 줄어든 상황.

거기에 가장 위협적인 대형 몬스터들은 대부분 대포의 포화를 견디다 못해 넝마가 된 상황이었으니, 아군의 병력이 성문 밖으로 나가 싸워도 될 상황이 만들어졌다.

또다시 뿔피리의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지고, 육중한 성문이 열렸다.

"우와아아아아!!"

"죽여 버려!!"

"이 지긋지긋한 개새끼들아!"

디라일라의 마법으로 인해 몬스터 대군이 주춤한 사이, 아룬비다의 주민들이 총력전이라는 의지를 다지며 달려들었다.

인간과 몬스터의 충돌.

요 보름이 되어 가는 사이 수십, 수백 차례나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했던 전사들이 각자의 무구를 들고 몬스터의 급소를 노리고 들어갔다.

혼자서 백을 상대하는 게 가능한 이들은 그야말로 일당백을 찍으며 몬스터를 쓸어 버렸고, 홀로 상대하기 힘든 중형 몬스터에게는 서너 명이 붙었다.

포화로 인해 넝마가 되었어도 강인한 대형 몬스터에게는 수십이 달려든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혈향이 퍼지고, 무엇이 몬스터며 무엇이 아군의 시체인지 구분이 힘들 정도의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아무리 단련된 전사들이라 하더라도 몰려오는 몬스터 대군의 앞에서는 급소를 내어 줄 수밖에 없었으나, 그들은 스스로의 몸에 꿰뚫리는 도중에도 결코 무구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몬스터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뛰어난 육체로 전장의 상황을 단 번에 파악하고 있는 아나스타샤는, 한 명 한 명의 전사자가 나올 때마다 그들과 보내왔던 추억을 떠올렸다.

매년 아룬비다에는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때마다 전사자는 반드시 나오며, 그들의 충성어린 죽음은 아나스타샤의 가슴에 지금까지도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그리고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상자에 그녀는 눈을 감아 피하지 않고 끝까지 응시했다.

악 깨문 입술에서는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듯, 눈물 대신 핏물이 흘러나와 턱 아래로 흘러내려 바닥을 적셨다.

끝내 그녀는 자신의 등에 매인 대검을 뽑아 들었다.

"잊지 않을 것이다."

"...."

"반드시 잊지 않을 것이야. 내 영혼에 맹세코."

"...."

"너희 무명이라는 조직이 내게 한 짓을, 결코 잊지 않겠다. 그러니 너희도 목숨을 걸어라. 아니."

"...."

"그 오만한 영혼을 걸어라."

"그하하하하하─!!"

혹한의 날씨보다도 차가운 그녀의 분노를 맞이한 짐승의 남자, 카르후는 자신의 전신에 베여지듯 들어오는 그 살기에 대소를 터뜨렸다.

자신보다 머리가 두 개는 작은 여인이 내뿜는 기세가 실로 만만찮지 않은가.

역시 찾아오기를 잘했다.

"아암! 이 정도는 되야 이 카르후의 상대가 되지! 그하하핫!!"

* * *

셰인은 조직의 성향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앞서 자신과 라비아타에 의해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너무도 큰 피해를 입은 무명이, 과연 이번에도 두 손 놓고 보고만 있을까?

앞서 자신들의 실수로 인해 북부까지 찾아와 놓고?

절대 아니었다.

본래부터 무명이라는 조직은 자신들의 계획대로 하되, 한 차례 방해가 들어오면 그 다음부터는 결코 방심을 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러니 이번 몬스터 웨이브라는 혼란을 틈타, 가장 효과적인 시기에 그들의 개입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생각하는 가장 효과적인 시기란 언제일까.

그 어느 때보다 삼엄한 경계가 느슨해지고, 지휘자가 스스로의 주변보다 전방을 주시하는 시기.

또한, 그 지휘자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고 무명이라는 이름답게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최적의 방법.

바로 총공세의 때였다.

그 사실을 셰인에게 앞서 들은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앞에서 자신의 살기만큼이나 투지를 터뜨리는 카르후를 노려봤다.

그간 아룬비다를 지키며 제국에서 보내 오는 극악무도한 실력의 살인마나, 샐 수 없이 상대한 사이클롭스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투지가 그런 아나스타샤를 거침없이 후려쳤다.

그럼에도 아나스타샤는 일말의 흔들림 없이 양손으로 쥔 대검을 놈에게로 향했다.

"하─ 아주 잘됐군, 잘됐어. 이 카르후가 고작 암살 따위의 일이나 한다기에 그리 실망이 클 수가 없었는데. 이리도 강인한 전사가 내 앞에 서다니. 아주 좋군."

수인족 중 웅족의 핏줄을 타고난 카르후는 자신의 야성을 숨기지 않고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서로 간에 잡담은 필요 없겠지. 전심전력으로 날 상대해야 할 거다. 기껏 훌륭한 적을─."

콰아앙─!

카르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런 그의 뒤에서 펠리스의 묵직한 망치가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상대의 방어력을 무시하는 성질을 지닌 펠리스의 시그니처가 벌써부터 발현됐다.

"거, 덩치도 큰 놈이 말도 많군."

손을 타고 올라오는 묵직한 타격감이 방금 전 공격이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알렸으나, 펠리스는 카르후가 날아간 방향에서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몇 채의 건물을 뚫고 날아간 그곳에서부터 흙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크하하하하하─!"

먼지구덩이 사이에서 카르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펠리스가 전력을 다해 휘두른 공격에도 불구하고 카르후는 머리에서 피를 조금 흘릴 뿐, 치명적인 데미지는 없는 듯했다.

"퉤."

한 바탕 크게 웃은 카르후가 피와 이빨 섞인 침을 내뱉고는 자세를 잡았다.

"간다아!!"

카르후는 곰 같이 우직한 자세를 취하며 그대로 달려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곰과 같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도가 상상 이상이었다.

앞서 이어질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펠리스가 놈의 이동경로를 예측하고 워 해머를 휘둘렀으나, 카르후는 마치 갈대와 같은 유연한 움직임으로 펠리스의 공격을 피하고 왼 주먹을 위로 쳐올렸다.

그에 다가올 충격을 대비한 펠리스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저 주먹은 위험하다.

자신이 전력을 다해 휘두른 워 해머보다도 치명적이다!

'젠장.'

이미 휘두른 자세에서 이를 막을 방법은 없다. 급히 발을 놀리며 놈에게 발차기를 날려 봤으나 무게 중심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발차기였다.

카르후는 그 단단한 맷집을 믿고 그대로 주먹을 휘두르려던 찰나,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섬뜩함에 곧장 주먹을 회수하고 뒤로 물러섰다.

도저히 인간의 신체로는 불가능할 정도의 유연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카르후의 감은 틀리지 않았다.

방금까지 카르후가 있던 자리로 거대한 대검이 내리꽂혔다.

"후우. 신세를 졌습니다, 황녀님."

"가뜩이나 너무 많은 죽음이 이어졌다. 명령이니, 결코 죽지 말도록."

"황은이 망극하군요. 흐흐."

"아바마마는 살아 계시니 그런 말은 쓰지 말도록 하지."

방금까지도 목에 서늘한 감각이 느껴지는 카르후는, 둘의 대화에도 씩 웃으며 투지를 불태웠다.

그는 이러한 감각에 오히려 투지를 불태우는 투사의 기질을 타고났다.

하나 그런 놈의 투지에도, 아나스타샤와 펠리스의 살기도 결코 밀리지 않았다.

"재미있어 보이네~? 나도 껴도 될까~?"

그때, 별안간 허공에서 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은 흰머리를, 반은 검은 머리를 허리 아래까지 길게 늘어뜨려 묶은 소녀의 물음에, 카르후가 씩 웃으며 말했다.

"뒤에서 보조만 해라. 난 이 즐거움을 되도록 오래 느끼고 싶으니."

"저런... 아쉽네~ 알겠어!"

전쟁 중의 이 혼란을 즐기듯, 소녀는 입꼬리를 잔뜩 올리며 허공에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누웠다.

"싸워라~ 싸워라~ 아무나 싸워서 이겨라~"

"그거 참 힘이 나는 응원이구만! 그하하하하!"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9화

79화 난공불락 (4)

절반 이상을 정리했다지만 여전히 몬스터 대군의 숫자는 많았다.

3만이라는 숫자는 고작 몇천이 감당하기에는 힘들었으나.

힘든 전시의 상황 속, 한 소년으로부터 치솟는 금빛 용오름은 다른 이들로 하여금 용기백배하게 만들었다.

한 번의 휘두름에 열이 넘는 적이 쓰러진다.

그의 발자취가 지나간 장소에는 오로지 황금빛 용에 의해 급소를 허락한 몬스터들이 줄지어 쓰러졌다.

아이스 트롤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한 전사의 머리가 박살 나기 직전, 금빛 용이 아이스 트롤의 머리를 통째로 가르고 지나갔다.

그 주변으로 나풀거리는 황금빛 마력으로 만들어진 실오라기는 주변의 모든 적을 말살시켰다.

압도적인 무력.

그 모든 것이 이제 겨우 17살이 된 한 소년에 의해 일어나고 있었다.

클레이튼 L 클라인.

그런 그의 곁에서 알 로스는 클라인에 의해 중상을 입었음에도 꾸역꾸역 살아남아 움직이는 몬스터를 처리했고, 그간 클라인의 검술을 꾸준히 학습하던 알렉스는 클라인이 다니는 경로에 방해가 되는 소형 몬스터들을 상대로 변화무쌍한 전투를 벌였다.

그때, 밤하늘에 먹구름이 끼는가 싶더니 번쩍이는 빛과 함께 낙뢰가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과연 저것이 하나의 번개가 만들어 낼 수 있는 풍경인 것일까.

지금도 연속해서 떨어지고 있는 낙뢰가 지나간 자리에는, 검게 타오른 수십 마리의 몬스터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단 한 번의 마법이 수천의 몬스터를 전투불가 상태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꺄아악!"

그리고 여지없이 구슬픈 비명이 성벽 위에서 울렸다.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풀썩 쓰러졌다.

그녀는 디라일라처럼 마석을 매개체로 자신의 한계 이상의 마법을 끌어올린 아르티아였다.

방금 일으킨 천뢰라는 마법은 그녀보다 한 단계 위인 7서클 마법사나 쓸 수 있는 마법이었으니.

그마저도 상당한 시간을 들여 캐스팅해야 하는 마법을 발현시킨 것이다.

당연히 당장 아르티아가 발현하기에는 무리였으나, 쓰러진 디라일라를 보며 괜한 승부욕이 불타올라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으으... 그, 그래도 내가 더 버텼다...."

차마 디라일라처럼 꼴사납게 혼절할 수는 없던 아르티아였으나, 끝내 그 말을 내뱉고는 똑같이 혼절해서 쓰러졌다.

고작 한 번의 마법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단 번의 마법이 일으킨 바람은 결코 작지 않았다.

후방에서 휘몰아친 낙뢰의 후폭풍으로 인해 감전에서 벗어나지 못한 몬스터들이 앞으로 전진을 못하자, 전방에서 몬스터를 끊임없이 상대하던 사람들에게 한숨 돌릴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그렇게, 동이 트기 시작하며 모습을 보인 태양은 전쟁의 여신은 인간들에게 미소를 짓는 듯했다.

* * *

회귀 전.

셰인의 전생에 조직에는 셰인을 포함한 총 7명의 군단장이 존재했다.

셰인은 그중에서 '질투'를 담당하는 군단장이었으며, 생자를 향한 원혼의 질투를 매개로 압도적인 숫자의 언데드 군단을 다뤘다.

때문에 셰인의 군단은 백전불태요, 불멸의 군단이었으나.

무의 끝에 다다른 자를 상대하기에는 아무래도 부적합한 경향이 강했다.

반면, 그런 존재들을 상대하기 위한 부대는 여럿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강인한 군단이 있다면 바로 '분노'를 담당하는 이었다.

그러나 그는 분노라는 이름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언제나 '그하핫!'하고 호탕한 웃음과 함께 전투를 즐기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랬던 그가 '분노'를 담당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단 한 번.

그가 진심으로 분노했을 당시, 그는 스스로가 '분노'의 군단장이 될 수 있음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 분노는 전대 '분노'를 담당했던 군단장에게 향했다.

자신의 승부를 방해하고 적을 가로챈 그 행위에 분노를 터뜨린 그는 단번에 자신의 상사였던 군단장에게 덤벼들어 당당히 그를 죽이고 자신을 입증했다.

그자가 바로 웅족의 사내. 카르후였다.

* * *

울컥─!

길고 길었던 전투의 공방 끝에 펠리스가 입에서 각혈이 한 움큼이나 흘러나왔다.

바로 직전.

카르후가 휘두른 주먹을 피했음에도 그 여파만으로도 내상을 크게 입은 것이다.

"미, 미친...."

만일 이번에도 아나스타샤가 대검을 휘둘러 카르후의 공격을 흘리지 않았더라면 정통으로 맞았을 것이다.

흘린 공격을 받아 낸 것뿐임에도 이 정도다.

정타를 허락했다면 필시 죽음에 이르거나 그 근처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을 터.

그러나 상황이 악화일로를 그리고 있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펠리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억지를 부리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자신의 상대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은 짐짝에 불과하다.

"크으... 미안합니다, 황녀님. 제 역할은 여기까지 같습니다."

펠리스의 한마디에 아나스타샤도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자인 펠리스가 전장에서 물러서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르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하하핫! 주제를 알고 빠지는 것도 전사로서의 덕목이지!"

그런 카르후는 이제 아나스타샤를 직시할 때, 뒤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암~ 이제 슬슬 지루해지려는데."

"걱정 마라, 광대야. 이제야 겨우 재미있어질 때이니."

그렇지 않냐는 듯 카르후가 아나스타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겨우 몸 풀기가 끝났는데 말이야. 그쪽도 그렇지? 그하핫."

"...후우."

그런 카르후의 물음에 아나스타샤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자신의 손에 쥐인 대검에 집중했다.

쉽지 않은 상대다.

전투에 있어서 첫째로 중요한 것은 발이요 둘째로 중요한 것은 눈이라 하였다.

그만큼 상대방의 움직임을 통해 공방이 성립되는 게 전사들의 전투다.

그러나 눈앞의 상대는 말도 안 되는 유연함으로 공격에 허와 실을 섞고, 뿐만 아니라 그 한 방 한 방이 상대를 반드시 죽일 위력을 담고 있다.

거기서부터 오는 압박감은 보통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뒤에 있는 소녀의 농간인지, 카르후의 움직임에 환영까지 뒤섞이며 전투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만약 다양한 종류의 살기와 투지를 경험해 온 둘이 아니었더라면, 눈앞의 존재에게 진즉에 사망했을 터.

결국, 아나스타샤는 전력이 아니라면 상대할 수 없는 적임을 인정했다.

"우선 사과하도록 하지."

"음?"

"영혼을 걸라 말했음에도 미리 나서지 않았어."

그런 아나스타샤가 성인 남자가 두 손으로 들어도 무거울 법한 대검을 한 손으로 집고, 다른 손으로는 펠리스가 놓고 간 워 해머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런 아나스타샤의 양쪽 눈으로 푸른 귀화가 일렁거렸다.

"이제부턴, 진정 영혼을 걸어야 할 거야. 난 이미 걸었으니."

순간, 푸른 귀화가 순식간에 아나스타샤의 몸을 집어삼켰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대검과 워 해머를 들고, 자세를 취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무기의 조합으로 인해 말도 안 되는 자세가 펼쳐졌으나, 카르후는 자신의 뛰어난 직감이 외치는 경종을 무시하지 않았다.

이러한 위기감을 느껴 본 적이 얼마 만이던가.

카르후의 호쾌한 웃음이 비두론 전체에 떠들썩하게 울렸다.

"그하, 그하하... 그하하하하하핫!! 좋다, 좋아! 그럼 이쪽도 전력을 다해 주마!"

2미터가 넘어가던 그의 덩치가 단숨에 3미터로 늘어났다.

거기에 눈이 붉은빛으로 빛나니, 마치 바깥에 있는 몬스터들의 그것과 흡사했다.

심신이 단련된 기사들조차도 기에서 밀릴 정도로 놈이 내뿜는 기세는 어마어마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였다.

"그럼, 나는 이쪽과 어울리도록 하지."

검은 머리카락에 로즈베리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던 카르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직후.

카르후의 발밑으로 룬 마법이 발동됐다.

[팽창].

단번에 공간이 팽창하며 카르후에게 깃들어 있던 소녀의 마법이 흩어져 버렸다.

카르후 스스로가 쓴 게 아니라, 흑백의 소녀가 발현한 마법이었기에 마력이 다시 제 주인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혼란을 즐기는 어릿광대야. 어디 한번 내게도 혼란을 심어 보거라."

그러자 흑백의 소녀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어랑~? 넌 누군데 나에 대해 그렇게 잘 아는 걸까~?"

"어디 한번 맞춰 보거라. 네가 퍽 좋아하는 놀이가 아니더냐."

"와아? 이거 진짜 궁금한데~? 그럼 진짜 놀아볼까?!"

퐁-!

방금까지 비교적 평범한 차림이었던 소녀가 연기에 휩싸이더니, 어느새 마술사의 그것과 같은 복장으로 바뀌었다.

커다란 중절모의 챙을 잡은 소녀가 입을 열었다.

"그럼, 쑈를~ 시작합니다!"

순식간에 셰인과 소녀의 주변으로 검은 벽이 생성되며 둘을 가두었고, 그 순간까지도 셰인은 아무런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다.

* * *

변화무쌍.

셰인의 회귀 전에는 그 타이틀이 주로 알렉스를 가리키는 전투법이었으나, 세상에는 그러한 방식의 전투를 즐기는 이가 한 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천부적으로 뛰어난 무재(武才)를 타고났으며, 무기를 다루는 법에 있어서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우치는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서부터 조개만 한 작은 손으로 다양한 무기를 익혀 갔다.

이윽고 제법 나이가 들어 이젠 소녀라고 불릴 정도로 성장한 그녀는 자신의 몸보다 배는 더 큰 대검을 휘두르며 기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소녀가 바로 제국의 두 번째 꽃, 제페르 디 나타샤 아나스타샤였다.

부웅-! 콰앙-!

주먹에 허와 실이 섞인다.

그 속도 또한 덩치에 걸맞지 않게 매우 잽싸며 또한 유연하기가 그지없다.

그러나 압도적인 파괴력 앞에서 그 모든 기예는 하나의 재롱에 불과했다.

세상에 그 누가 웅족의 카르후에게 힘으로 밀리지 않을까.

카르후의 근력은 사이클롭스조차도 능가할 정도의 힘이 담겨 있건만.

아나스타샤의 무기에 담긴 귀화처럼 푸르게 타오르는 불길은 그런 카르후조차도 뒤로 물러서도록 만들었다.

'어떻게 인간이 이런 힘을 내는 거지?!'

조직에 가담한 만큼 카르후는 눈앞의 여인이 휘두르는 힘이 무엇인지 진즉에 파악했다.

오리진.

아주 극소수의 인간들 사이에서 발현된다는 그 힘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 카르후는 의문을 떠올렸다.

보통의 인간은 저만큼 선명하게 오리진을 사용하지 못한다.

해 봐야 황실의 저지먼트 기사단처럼 마력과 오리진을 섞어서 쓰는 정도.

그러나 눈앞의 여인은, 그런 것 따위 하나 신경 쓰지 않고 대검과 워 해머를 휘둘렀다.

거기에 변칙적이기가 가히 카르후 못지않았다.

대검을 둔기처럼 사용하는가 하면, 어느 순간에 검으로 둔갑하지를 않나.

워 해머를 휘두르는 척하며 투척하고, 가까스로 그 공격을 피하면 뒤이어 대검이 둔기마냥 날라든다.

그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아나스타샤는 저만한 대형 무기들을 마치 나뭇가지 휘두르듯 가볍게 움직였다.

그러나 카르후는 수많은 전투과 전쟁, 혈투를 즐겨 온 존재다.

그 역시 유연한 몸놀림으로 아나스타샤의 모든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며 체력을 아끼고, 최후의 한 방을 준비했다.

저 가공할 파괴력은 카르후조차도 인정하겠으나.

저것은 명백한 오버 파워였다.

그러니 기다리고 기다린다면 빈틈이 나오지 않겠는가.

때문에 카르후는 이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언제든지 공격을 쑤셔 넣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렇게 몇 차례의 공방이 오갔을까?

아나스타샤의 대검이 땅에 처박히고, 워 해머가 아래서 위로 올라간 바로 그 순간.

"흐읍!"

카르후의 오른손에 온 힘이 집중됐다.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음속과 같은 속도로 아나스타샤의 명치를 향해 파고 들어갔다.

이건, 먹혔다.

바위도 두부처럼 부수는 주먹이 내는 파괴력은 설령 사이클롭스조차도 견디지 못하고 전신의 터져 나가는 공격이다.

그러나.

"커흡?!"

마치 모기가 때리기라도 한 듯, 아나스타샤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뒤로 물러서며 워 해머를 내려쳤다.

'이게 무슨?!'

제아무리 카르후라 하더라도 완벽하게 들어간 공격 이후에는 방심이 잇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나스타샤의 워 해머에 내려쳐져 온몸이 부서질 듯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카르후의 머릿속에는 온통 의문만이 남았다.

도대체 어떻게?

전심전력을 다하면 작은 동산마저 지형이 뒤바뀔 정도의 충격력을, 저런 여인이 버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멀쩡해 보였고, 그대로 몇 번이나 워 해머를 내려쳤다.

한 대 한 대가 마치 거대한 성벽이 내려찍는 듯한 충격이 잇따랐다.

그렇게 몇 번이고 내려치는 사이, 어느새 바닥에 피로 이루어진 살덩이 같던 카르후가 사라졌다.

어느새 검은 벽이 사라지며, 흑백의 소녀가 카르후를 자신의 곁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으아! 괴물, 괴물!"

그러나 그녀는 쓰러진 카르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셰인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어떤가, 광대여. 인생 처음으로 겪어 보는 혼란은?"

"...으으, 몰라 이 괴물아! 너랑 안 놀아!!"

"저런. 벌써부터 그런 말을 하면 섭섭한데."

"메롱이다, 이 괴물 멍청아! 흥! 가자, 곰탱아!"

"그, 그하.... 내가, 내가 저다 마이지...?"

온몸의 뼈가 바스라지고 이빨은 전부 부러져 버렸음에도 카르후는 여전히 투지가 사라지지 않은 눈빛으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투지가 맞았다.

"그래, 네가 졌어! 이 바보 똥깨!"

"나 고미라고 며 버으 마해."

"그래, 이 미련 곰탱아! 그리고 이 괴물! 이번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그러면서, 둘은 나타났을 때처럼 신출귀몰하게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마치 그대로 접히듯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흐음...."

셰인은 그렇게 사라진 둘을 전혀 아쉬워하는 내색 없이 보내 줬다.

카르후라면 모를까, 그 흑백의 소녀는 지금의 셰인으로서도 소멸시키기에는 불가능한 존재였으니.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자.

7군단의 군단장이 아님에도 제8의 악이라 불리며 조직조차도 통솔이 불가능한, 말 그대로의 '혼란'은, 소멸하고 싶다고 소멸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걱정은 없었다.

이미 방금의 만남으로, 셰인은 조직에게 하나의 독극물을 투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이제는 시간이 가져올 결과만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그러면서 셰인은 어느새 푸른 귀화를 꺼뜨린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며 말했다.

"죽어 가고 계시는군요, 황녀님."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0화

80화 합류

이치에 맞지 않는 힘을 탐하면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조직에 의해 타락한 적이 있던 셰인은 그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이들이 이치를 따르지 않고 힘을 탐하다 사그라진 이들을 수없이 봐 오지 않았던가.

때문에 일반적으로 세계가 허락한 선 아래서만 힘을 탐하거나, 이치에 맞도록 조정하는 법이다.

그러지 않으면 어떤 이유로든 어울리지 않는 힘에 의해 무너지니.

그리고 지금 바로 눈앞에, 그런 사람이 서 있었다.

"이상한 일이야. 나조차도 이 힘에 대한 원리를 잘 모르는데, 너는 마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니까."

아나스타샤의 그 말에 셰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그 힘을 오리진이라 부릅니다."

"오리진?"

"인간이 가진 감정에 물리력을 담는 능력이지요."

"...그건."

셰인은 손 위로 새하얀 오러를 일렁거렸다.

황실에서 허락한 힘.

저지먼트 기사단이 쓰는 백사자의 오러이지 않은가.

"저지먼트 기사단이 쓰는 오러도 거기서 기인한 힘입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쓰고 있는 거지?"

셰인이 오리진이라 명한 능력은 황실에서도 아주 비밀리에 쓰이고 있는 힘이다.

그마저도 연구가 매우 뎌딘 탓에 황실의 검이라 명한 저지먼트 기사단에게만 전수되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셰인은 그녀의 물음에 답하기보단, 자신의 할 말을 이어서했다.

"일반적으로는 이렇듯 마력을 섞어 물리력을 담습니다. 황녀님처럼, 오리진 그 자체를 활용하여 물리력을 생성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만들었다. 언뜻 들어서는 대단한 일처럼 보일 테고, 또 대단한 게 맞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따릅니다."

그러면서, 셰인은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아나스타샤의 영혼을 바라봤다.

"정제되지 않은 그 힘은, 죽음을 불러옵니다."

그녀의 영혼에 전체적으로 퍼진 실금은 금방이라도 깨질 듯 위태롭게 보이기만 했다.

* * *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영혼을 복구하는 방법 따위는 없다. 적어도 셰인의 지식에 의하면 그러했다.

인간의 영혼과 피를 매개체로 삼아 혈마법을 쓰던 고든조차도 그와 관련된 지식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힘은 더 이상 쓰시면 안 됩니다."

"꼭 미미르처럼 잔소리를 하는군."

다음 날 아침.

다시 한번 아나스타샤에게 찾아가 그리 말한 셰인에게 그녀는 조금 질린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제부터 몇 번이고 반복하며 하는 소리이지 않나.

"지금은 전시 중이야. 지휘관이 스스로의 몸을 아끼겠다고 전쟁에서 물러나는 순간 패배는 약속된 것이나 마찬가지지."

"더 멀리 보십시오."

아나스타샤가 오리진을 사용하며 단 한 번 막은 카르후의 공격은 그만큼 대단했다.

겉으로는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았으나, 그동안 내부에서 분열이 시작되던 아나스타샤의 영혼에 외부까지 실금이 퍼지도록 만들었으니.

괜히 카르후가 자신의 공격이 먹힌 순간 방심을 한 것이 아닌 셈이다.

"앞으로도 제국에는 황녀님의 힘이 필요할 것입니다. 백성들을 생각하시지요."

"...."

저렇게 말하니 아나스타샤로서도 할 말이 빈곤해졌다.

"알았다니까."

"꼭입니다."

"그래."

그동안 아나스타샤와 1황녀인 올리시아를 이용해 제국의 안정을 되찾을 구상을 하고 있던 셰인에게 이번 일은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아무튼, 내일이면 드디어 선발대가 도착하겠군."

말을 돌리듯 아나스타샤가 하는 말에 셰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아룬비다는 제국의 군대가 오기 전에 전력을 보존한 상태로 몬스터 대군을 막아 냈다.

물론 인명 피해가 상당히 컸으나, 그 정도는 수용 범위 내였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쓰러져 자고 있는 디라일라와 아르티아의 활약이 큰 덕분이었다.

"황녀님."

그때, 전장의 뒷수습을 하고 있던 미미르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며 들어왔다.

그만큼 미미르의 표정에는 급박함이 느껴졌는데, 이후 그의 보고를 들어 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오크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번 전쟁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보고였다.

* * *

"과연 인간들은 강하군."

푸른 오크의 대족장.

파가부탄의 그 한마디가 공간을 무겁게 만들었다.

지난 보름의 시간 동안 오크들이 보낸 몬스터 웨이브의 수는 무려 10년이라는 세월을 투자해서 만든 결과였다.

그러나 그만한 수의 몬스터 웨이브로도 인간들의 성, 비두론의 성벽을 무너뜨리기엔 역부족이었고, 곧 있으면 인간들의 수는 오히려 늘어날 터.

"거기에 암살도 실패했지."

"...."

그 말에, 이곳에서 유일하게 오크가 아닌 존재들이 고개를 떨궜다.

조직, 무명에서 파견을 온 파견원들은 지금도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카르후가 누구던가.

차후 군단장으로 거론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겨우 21살의 여인을 이기지 못하고 반 시체가 된 상태로 돌아온 것이다.

조직의 정보력에 의하면 2황녀, 아나스타샤에게 그만한 무위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도 없었기에 이는 더욱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그에 엘더 샤먼, 카르가토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해도... 우리의 계획에는... 차질이 없다...."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계획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저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반파됐던 성벽이 고작 하루 만에 모조리 복구됐다.

그뿐이던가.

몬스터 웨이브의 총공세에서는 성벽을 타고 올라가던 수많은 몬스터들이 거대한 가시로 변형된 성벽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죽음을 맞이했던가.

대족장이 그 점을 찝어 말하자 카르가토는 여전히 문제가 없음을 알렸다.

대족장, 파가부탄보다도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엘더 샤먼이 직접 하는 말이다.

그에 파가부탄은 카르가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명의 파견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래의 물건은 이번 대업의 결과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의는 없겠지."

"...물론이오."

고든이 남겨 둔 혈마법을 오크들에 전수해 주긴 했으나, 카르후가 큰 소리를 탕탕 낸 것에 비해 암살에는 실패했으니 무명의 파견원들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든, 고든의 혈마법은 진짜였으니.

그가 창시한 마법을 주술로서 발현시키기 위한 준비는 끝마쳤다.

지금쯤 자신들의 승리라며 웃음을 피우고 있을 인간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그 15만의 몬스터 대군조차도, 그들의 계획 중인 혈마법을 위한 준비 과정에 불과했음을.

이제는 그 과정을 끝마치고 실행에 옮길 단계가 되었다.

* * *

오크의 가장 큰 무기는 뭐니 뭐니 해도 압도적인 숫자다.

다산이 기본인 그들은 많은 숫자로 적을 밀어붙인다. 불과 10년이면 성인식을 치를 정도로 성장 속도 또한 빠르기에, 그들의 인해전술은 고대에서조차도 먹혔던 전술이었고, 이는 지금에 와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50만.

늦은 밤.

성벽 너머로 보이는 오크들의 그 숫자는 미미르의 사역마가 알려온 것이다.

무려 50만이라는 숫자의 오크들이 전부 혈마력을 쓴다.

부상을 입힌 적으로부터 마력을 뽑아내는 놈들은 지치지 않는 전사다.

그런 숫자를 고작 몇천이라는 인원으로 막아야 한다는 사실에, 아나스타샤를 향한 충심으로 무장한 아룬비다의 주민들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해전술의 큰 장점 중 하나인 '압도'가, 인간들의 마음에 공포를 심은 것이다.

그럼에도 주민들은 흔들릴지언정 무너지지 않았다.

인간이란 공포 앞에서 무너지기 쉬워지나, 반대로 말하면.

"어디 한번 죽어 보자!"

"이 씹새끼들아! 한 놈당 100마리씩 잡으면 우리가 이긴다!"

"염병, 내가 아룬비다에서 죽인 몬스터 숫자만 하더라도 1천이 가뿐히 넘어가는데, 그것도 못할까!"

공포를 이겨 냈을 때. 혹은 공포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더 이상 몰릴 곳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

인간은 강해진다.

콰과과과광─!!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대포의 폭음이 재차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이전과 다르게 셰인의 마법진이 포함되지 않은 대포알이다.

귀한 화약이 마치 물 쓰듯 빠져나가고, 수많은 오크들이 그 포화 속에서 한 줌의 핏물이 되어 사그라진다.

그럼에도 너무 많은 숫자가 이를 무산시키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듯했다.

혈마력을 쓰는 오크들을 상대로는 마법조차 쓰기 쉽지가 않았다.

한 번 마법을 펼칠 때면 많은 수의 오크들을 죽일 수 있겠으나, 그 여파에서 살아남은 오크들은 더욱 강인해져서 찾아올 테니.

일격필살.

놈들을 죽이는데 가장 필요한 능력이다.

대포가 비명을 지르며 그 내구성의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불꽃을 뿜어냈다.

"끝이 없네, 시벌."

어느 한 주민의 말이 비수처럼 파고든다.

끝내 대포가 더 이상 불을 내뿜지 못하게 될 때가 됐음에도 놈들의 숫자에는 별반 차이가 없는 듯 보였다.

이윽고 주민들이 활의 시위를 당겼다.

죽이지는 못하겠으나, 이렇게라도 놈들에게 부상을 입혀 둬야만 했다.

수천의 화살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또다시 활시위가 당겨지고, 튕긴다.

어찌나 많은 화살이 날아갔는지, 쉴 새 없이 퍼부어지던 10만 발의 화살은 끝내 모두 동이 났음에도 오크들의 숫자는 여전했다.

"흐음...!"

그에 미미르가 신음을 흘리며 준비된 마석과 함께 성벽 아래로 마력을 불어넣었다.

카가가가각─!

그러자 메자이아 대수림에서부터 공수해 온 특제 나무 씨앗들이, 미미르와 마석, 그리고 엘프들의 정기가 담긴 플라스크에 반응해 급속도로 성장하며 가시덤불이 되어 성벽을 감쌌다.

이로써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이어서 오크 대군이 단단한 가시덤불에 막힌 성벽을 무구로 내려치기 시작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오크대군은 끊임없이 성문을 두들기며, 준비해 둔 사다리를 성에 내건다.

아니면 밧줄에 묶인 갈고리를 던져 타고 온다.

성벽의 주민들이 서둘러 이를 막아 보려 하지만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법.

하물며 지금은 백 손이 필요한 순간이 아니던가.

오크들은 가시덤불이 자신들을 옮아매어 와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성벽을 두드리며, 또 그와 비견되도록 많은 수의 오크들이 끝내 성벽을 넘기 시작했다.

"죽여!"

"으아아!!"

아직 마력을 흡수하지 못한 오크는 그리 강하지 않다.

그에 성벽을 지키는 주민들도 신체를 마력으로 강화한 채 검을 휘두르며 창을 내찌르고 방패로 밀어 성벽 아래로 떨어뜨린다.

그럼에도 여전히 오크의 인해전술은 인간들의 방어를 한낱 발악에 불과하도록 만든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엘더 샤먼은 화룡점정(畫龍點睛)으로, 비소를 지었다.

"시작... 하라."

전장의 후방.

엘더 샤먼 카르가토를 중심으로 백여 마리의 오크 샤먼들이 각자의 주술을 읊었다.

"샤 두아 비 코두아...."

"샤 두아 보 하바나...."

"샤 두아 투 보고아...."

어둡던 밤하늘이 붉은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푸른 달빛이 분노한 듯 붉게 변하고, 대지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15만이라는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몬스터의 피를 한가득 머금은 대지가, 주술에 이끌려 자신들이 머금던 피를 일제히 내뱉기 시작했다.

더불어 인간들의 반격에 의해 죽어 나간 오크들의 피도 일부 섞이며, 흡사 피 안개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크오아아아아아─!!"

푸른 오크들이 일제히 공명하듯 울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야!"

"몰라, 씨발! 그냥 죽여!"

성벽 위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인간들은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을 참아 내며 울부짖는 오크들의 목과 심장을 꿰뚫었으나.

"커헉?!"

오크들은 쓰러지지 않았다.

심장이 꿰뚫리고, 목이 베여져도 움직인다.

15만이라는 몬스터들의 피를 흡수한 놈들은 죽음조차 미뤄 둔 채 달려든다.

흡사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가 된 듯, 놈들의 무기에 인간들이 파죽지세로 밀려 나갔다.

이윽고 성벽이 무력하게 뚫린 그 순간.

"마력을 사용해라! 적의 머리를 부수어라!"

기어코 아나스타샤의 명령이 내려오자 인간들도 그간 참아 왔던 마력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비록 불사처럼 보이나 죽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목이 떨어져 나가면 필사(必死)였으니.

결국 성벽을 포기한 인간들이 뒤로 물러서 해일처럼 몰려오는 오크 군단을 노려보던 그 순간.

"나를 고용한 값은 아주 비쌀 거야."

한 여인의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짐과 동시에.

밤하늘에 태양이 떠올랐다.

아니,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붉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인이 오연하게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쾅."

아득한 세월 동안 열기라고는 품어 본 적 없던 대지가, 만들어진 태양에 부르르 울기 시작했다.

동시에, 태양이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이동요새 라비아타의 등장.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오크 군단의 최후방에 수십, 수백 개의 포탈이 생성됐다.

"전군! 제국의 땅을 밟은 대가가 무엇인지 톡톡히 보여 주도록!"

과거 황실의 기사단장이었던 한 사내, 리바이 벤자민의 명령에, 1만 5천이라는 숫자의 군대가 검을 뽑아 들며 응했다.

선발대가 아룬비다의 땅에 첫 발을 내디뎠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1화

81화 격전

어둠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든 산왕은 시간의 흐름을 바라봤다.

고대를 넘어 신화시대서부터 살아온 산왕은 세상이 창조되는 그 순간에도 살아 숨 쉬고 있던 존재다.

고로 이 세상이 탄생하고 시간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을 때부터 시간이 만들어 내는 강을 들여다볼 자격이 있었다.

인간들에게는 긴 시간이나 산왕에게 있어서는 잠깐의 단잠에 불과한 그 시간 속에서, 그는 지금의 시간선 외에 길이 이어진 그 흐름을 지켜봤다.

마치 깊은 심해를 담은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간선이다. 분명 자신이 존재했던 시간선임에도 불구하고 보이지가 않는다.

그에 산왕이 의아함을 느낄 때쯤, 현재의 시간선 속 작은 빛을 발견하고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작디작은 불빛.

그 불빛은 금방이라도 깨질 듯 금이 가 있었으나, 그럼에도 찬란한 빛을 띠고 있었다.

산왕에게 있어서도 극히 찰나의 시간.

그는 그 빛을 본 직후에 그 짧은 시간 동안 탐욕이라는 감정을 느꼈으나, 이내 곧 안정을 되찾았다.

"그랬군."

작은 불빛이 잠시나마 심해처럼 가려진 또 다른 시간선을 비추자, 그제야 산왕은 그 가려진 시간선 속 비밀을 조금이나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재미있는 유희가 되겠어."

바뀐 시간선을 이해한 산왕은 그렇게 꿈속을 헤매듯, 두 눈을 감았다.

자신이 보낸 초대장에 상대가 응하길 기다리며.

* * *

셰인이 이곳 아룬비다에 오도록 추천한 인물이자, 학과시험 당시 담당관을 맡았던 지휘학과 수석교수, 리바이 벤자민은 한때 제국에서 알아주는 황실의 기사단장이었다.

그는 타국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무위로 자신을 입증했고, 스스로의 시그니처를 깨달은 기사이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올리시아가 그토록 탐내던 인재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참전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은퇴 기사를 다시금 전쟁에 참여시키는 행위는 제국법상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만 가능한 일이었고, 벤자민이 참전한다는 것은 결국 제국 스스로가 이번 상황을 위기 상황이라 판단했다고 자명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벤자민은 이번 전쟁에서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새길 수 없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스스로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밝혀 왔다.

황실의 정치에 마음이 부러진 지금에서도 아나스타샤를 생각하는 그의 충심 때문이었다.

"전군! 진격하라!"

그런 벤자민의 명령에, 올리시아를 따르는 황실의 기사단이 말에 올라탄 채 랜스를 들고 돌격했다.

황실의 기사단이 품은 마력이 랜스에 담기고, 전투마가 투레질과 함께 질주를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는 최후방에서 주술을 외고 있는 오크 주술사들이었다.

"크와비타! 파 다르게르 워나후!"

그에 후방에서 나타난 인간들을 향해 주술사를 지키던 오크들이 달려들었다.

혹시 모를 위기 상황에서 주술사들을 지키기 위해 특별한 주술을 걸어 둔 오크들은 일전 펠리스가 상대했던 백부장급 오크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끈질긴 생명력을 무장한 놈들이라 하더라도, 단 한 번의 공격에 상반신 전체가 날아가면 불사라 할 것도 없이 죽기 마련.

벤자민은 번개처럼 흐르는 마력을 쌍검에 두른 채 태풍처럼 오크들 사이를 휘저었다.

뇌영(雷影).

번개와 같은 속도에 그림자가 쫓아가지 못하고 잔상만이 남겨진다.

그리고 그 잔상이 남고 간 자리에는 반드시라 해도 좋을 정도로 오크들이 쓰러져 있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사이클롭스의 마력을 휘감은 오크들이었으나, 그럼에도 그 빛과 같은 속도에 반응하지 못한 채 목이 잘려 나갔다.

"막아라, 막아!!"

"뒤를 부탁한다, 형제여!"

"우르부라크에서 보자!"

결국 기사단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몇몇 오크들이 직접 기사단에게 뛰어들더니, 그대로 폭발했다.

혈폭.

몬스터의 야성을 담은 피를 터뜨리는 자살 기술.

백부장쯤 되는 능력을 지닌 오크들이나 쓸 수 있는 그 자폭에 대다수의 기사들이 휘말렸고, 전광석화로 움직이던 벤자민조차도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자살한 오크의 핏물이 땅을 타고 주술사들을 지키는 방어막에 흡수되었다.

이젠 내부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높아진 농도.

부상자를 뒤로하고 다시금 정비한 기사단이 달려들어 남은 오크들을 정리한다.

기사단 또한 결코 적은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나, 그 덕에 주술사를 지키던 최후의 오크마저 끝내 차가운 아룬비다의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어느덧 주술로 강화한 방어막은 성벽처럼 튼튼하게 주술사들을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에, 벤자민이 번개처럼 검을 휘둘러봤으나 이내 공격은 덧없이 튕겨져 나왔다.

"으음...!"

튕겨져 나올 때의 반발력이 상당하다.

방금, 전력을 다해 휘두른 탓에 벤자민은 자신의 찢어진 손바닥을 보며 신음을 삼켰다.

그때,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생하는군, 벤자민."

"...대니얼 님."

"그래, 나다."

사자의 갈기를 떠올리게 만드는 사내.

명불허전 황실의 검. 저지먼트 기사단의 단장, 올리버 G 대니얼.

그가 백염의 오러를 휘감긴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좀 도와줄까?"

"그래주면 고맙겠군요."

"으하하, 그리하지!"

그는 호탕하게 웃음 지으며 검을 휘둘렀다.

촤악-!

그러자 방금까지 벤자민의 검에도 일절 흔들림 없던 방어막이 단숨에 갈라졌다.

마력을 흡수하는 오러.

백사자의 오러 앞에서는 혈마력도 부질없이 사그라질 뿐이었다.

"쿠, 쿠와비타! 에루버 바크!"

그에 오크 샤먼들이 화들짝 놀랐으나, 이미 벤자민의 검은 움직이고 있었다.

일순간에 백 마리의 오크 샤먼 중 열이 목을 베였고, 뒤이어 저지먼트 기사단이 움직였다.

"전원! 황실의 정의를 보여라!"

기사단장 대니얼의 명에 기사단원들이 백염의 오러를 두른 채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절반이 되는 샤먼이 정리되자, 엘더 샤먼, 카르가토가 두 눈을 부릅뜨며 토템이 달린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그러자 미리 준비해 둔 주술이 발동되며, 피의 막이 기사들을 감쌌다.

* * *

하늘에서 태양이 떨어진다.

이런 광경을 목도한 이가 어디 있을까.

이 비현실적인 광경은 몬스터의 야성에 잡아먹힌 오크들의 발걸음조차도 멈춰 세웠다.

태양이 떨어지고 있는 바로 아래로는 아직 닿지도 않은 오크들의 피부가 거품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불사의 몸을 지니게 되었다지만 고통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몬스터의 야성으로도 견딜 수 없는 최악의 격통에 오크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이윽고.

결코 만나서는 안 될 태양과 대지가 맞부딪치자 말 그대로 공간이 소멸됐다.

오크들은 한 줌의 핏물도 남가지 못한 채 산화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건 차라리 행운이었다.

죽음은 곧 고통의 해방을 뜻했으니.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그 폭발 범위에 걸쳐져 있던 오크들은 사정이 달랐다.

신체의 절반이 녹아내렸다.

그럼에도 주술에 의해 끈질긴 생명력은 그들이 죽음으로 향하는 길을 막아섰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오크들이 죽거나 전투 불능의 부상을 입었다.

그에 라비아타는 자신이 직접 만든 하나의 지옥도를 보며 기침을 내뱉었다.

"크으, 젠장. 아직 무리인가."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얻었던 드래곤 하트를 이식하는 과정이 진행 중이건만, 너무 무리하게 움직이고 말았다.

아마 이번 일이 끝나면 또 몇 달 동안 요양해야 할 터.

"그러게 적당히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런 라비아타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제임스가 한마디 내뱉자, 라비아타가 빽 소리 질렀다.

"이 새끼야, 네가 맨날 돈돈 이러니까 내가 여기까지 온 거 아냐!"

"아무리 그래도 드래곤 하트가 채 이식되기도 전에 달려 나올 줄 누가 알았습니까?"

"끄응...."

사실 제임스도 속으로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라비아타는 인간들의 세상에 간섭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여태껏 황실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금화로 탑을 쌓아도 될 수준의 보상이 제시됐음에도 라비아타는 눈 하나 꿈쩍했던가?

그런데 이번에는 직접 인간들의 사건에 간섭한 것이다.

"뭐, 어쩌겠어. 받은 도움이 있는데."

평생의 숙원이었던 드래곤 하트를 손에 넣지 않았던가.

그에 큰 도움을 주었던 셰인의 부탁이 있던지라, 라비아타는 특별히 이번에 한해서 이렇듯 모습을 내비친 것이다.

"그럼 들어가자고. 나머진 알아서 하겠지."

그 많던 오크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을 본 라비아타는 욱신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포탈로 향했고, 제임스도 그런 라비아타의 뒤를 따라 포탈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 *

"세상에...."

태양이 떨어진 이후.

그 광경은 성벽 너머에서 한참 전투 중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도 빠짐없이 전해졌다.

혹독한 이곳에서 난로 앞에서도 느낄 수 없던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밤하늘이 밝게 빛나며 말도 안 되는 굉음이 들려왔다.

마치 하늘이 분노하여 태양을 내린 듯한 광경.

그럼에도 아룬비다의 주민들은 전투를 멈출 수 없었다.

앞서 셰인에게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임을 듣기도 하였고, 몬스터의 야성에 집어삼켜진 오크들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성벽과 상당히 거리가 떨어진 위치에 태양이 떨어졌기에, 여전히 성벽을 넘어오는 몬스터의 수는 적지 않았다.

"흐읍!"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빛을 내는 이는 다름 아닌 클라인이었다.

황금빛 오러를 내뿜는 그의 주변으로 오크들의 시체가 쌓여 갔다.

평소에는 적의 핏방울도 몸에 닿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클라인이었지만, 전쟁에서는 그럴 겨를조차 남지 않았다.

자신이 활약할수록 죽는 사람들이 적어진다.

그 사실에 클라인은 더욱더 마력을 뿜어내며 적들을 일사불란하게 베어 나갔다.

그런 클라인의 곁에서 부상으로 인해 빠져 있던 펠리스도 워 해머를 휘두르며 오크의 머리통을 부숴 나갔다.

살아남은 이들은 클라인과 펠리스가 있는 방향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필사의 사투를 벌였다.

그러던 와중에 하늘 위로 따사로운 빛이 흘러내렸다.

라비아타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태양이 아닌, 생명을 보듬는 엘프들의 정기가 모이고 모여 부상자들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자잘한 상처들은 눈에 띄는 속도로 회복되어 갔으니, 인간들의 전의가 불타올랐다.

"이것들아, 네놈들만 무적인 줄 아냐?!"

"죽여 버려 그냥!"

이어지는 전투 속.

끝내 아나스타샤 또한 대검을 뽑아 들어 전장에 나섰다.

일격필살.

한 번의 휘두름에 반드시라 해도 좋을 정도로 오크들이 쓰러진다.

서로가 죽고 죽이는 혼란스러운 전장의 상황 속에서 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 그즈음이었다.

[세상의 이치에서 벗어난 존재들아.]

다시금 제 색을 되찾은 밤하늘의 위로, 진정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나는 너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그 안에서, 민무늬 가면을 쓴 검은 망토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무(無)로 돌아가라.]

허공에 떠오른 남자가 손을 움켜쥐자.

전장에 심연과 같은 어둠과 함께 급격한 변화가 찾아왔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2화

82화 강철의 여인

아래서 위로 손을 움켜쥐는 단순한 손짓.

그러나 이어지는 결과는 결코 단순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비두론 성을 주변으로 설치되어 있던 마법진이 발동되며 순식간에 주변을 에워쌌다.

검은 기운을 담은 마력은 온갖 것들이 혼합되어 공간을 지배하기 시작하니, 탐욕의 오리진이 전장을 가득 채운 오크 샤먼의 주술을 향해 마수를 뻗어 나갔다.

본래라면 그 술자인 엘더 샤먼이 꽉 붙잡고 있어야 했을 터이나, 벤자민과 저지먼트 기사단의 등장으로 인해 엘더 샤먼은 더 이상 주술의 주도권을 잡을 겨를이 없었다.

"아, 안 돼!"

빼앗기기 시작한 주도권을 엘더 샤먼이 뒤늦게 되찾아오려 했으나, 셰인의 탐욕은 한 번 물고 늘어진 먹잇감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엘더 샤먼은 그나마 남은 주도권으로, 이 일의 원흉으로 보이는 저 민무늬 가면의 남자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에 일제히 성을 향하던 오크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민무늬 가면의 남자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순탄치 않았다.

이미 40퍼센트 이상 빼앗긴 주도권으로 인해 주술로 야성을 다스리던 오크들이 동족을 향해 이성을 잃고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krrrrr...!]

거기에, 그 혼란 속에서 가면의 남자의 앞을 막아서는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둠을 형상화시킨 듯한 존재는 무수히 흘러 들어오는 셰인의 오리진을 탐하며 짐승처럼 오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나 수만의 오크들이 달려드는 것을 홀로 막기에는 역부족.

땅 아래로 내려온 셰인은 하위 마법, 윈드 커터를 소환해 냈다.

그러나 일반적인 윈드 커터와는 다르게 그 크기가 어지간한 롱 소드에 비견될 만큼 컸고, 그 수가 무려 백 자루에 달했다.

셰인은 이제 70퍼센트까지 빼내 온 주술의 주도권 쟁탈 작업도 멈추고 온 신경을 백 자루의 검에게 돌렸다.

압도적인 집중력이 백 자루의 검에 새겨지자, 하나하나가 일류 검사의 일격에 맞먹는 위력을 갖췄다.

전생에 수없이 탐해 온 인재들의 검.

압도적인 언데드 군단 앞에서도 찬란한 영혼의 빛을 머금고 인류의 미래를 위해 검을 휘두르던 결사단의 검술이 지금 이 순간, 오크들을 향해 펼쳐졌다.

훗날 어느 천재가 창조한 합격진(合擊陣).

백화야행(百花夜行).

백 개의 꽃잎이 흩날리듯 펼쳐지는 검진이었으나, 셰인이 독자적으로 개량한 제2형, 백귀야행(百鬼夜行)이 펼쳐졌다.

어둠과 어둠을 타고 흐르는 백 자루의 검이 셰인이 허락한 공간을 넘는 순간 한 줌의 핏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럼에도 오크들은 엘더 샤먼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수백, 수천의 오크들.

그럼에도 셰인이 펼친 마법의 검무는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그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셰인의 신체로부터 쉴 새 없이 마력이 빠져나갔다가 흡수된다.

이전이라면 이 마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 버렸을 심장이, 이제는 굳건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성능은 확실하군.'

드래곤의 역린(逆鱗).

이 세계가 창조되면서 탄생한 그들은 모든 종족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였으며, 또 동시에 마력의 주인이었으니.

그 권능에 따라 드래곤의 역린은 이만한 마력이 들어왔다 빠지는 것의 대부분을 감당하고 있었다.

"흐읍─!"

하나, 그 또한 무적은 아니었으니.

셰인이 심장에 머금을 수 있는 마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아직 2서클에 불과한 심장이 내뱉는 마력은 아무리 빠르게 흡수와 분출을 반복한다 한들 그 절대적인 양 자체는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 한 덩치의 오크가 거대한 글레이브를 휘두르자 합격진이 바스라졌다.

마치 들어오라는 듯 훤히 열려 있는 그 구멍 속으로, 한 마리의 오크가 발을 내디뎠다.

"너는 누구냐."

오크 대족장. 파가부탄이 이쪽을 향해 글레이브를 겨누자, 셰인도 입을 열었다.

[운명을 거스른 자. 그리고, 너희들의 신이 기다리고 있는 자다.]

"알 수 없는 말이로군. 우리들의 신께서는 우리의 미래를 더 이상 관여치 않으신다."

조직, 무명이 접촉해 온 순간부터 산왕은 더 이상 오크들에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에 오크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행하라는 의미로 이해했고,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신탁 따위는 내려오지 않은 것이다.

산왕이란 오크들에게 애증의 존재였다.

그가 있기에 이 혹독한 아룬비다에서도 살아남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었고, 더더욱 나아가 어린 흡혈귀의 피로 마력을 깨우칠 수 있었으나, 그들은 신와 펼쳤던 내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오크라는 종족은 신의 장난감으로 전락했다.

[글쎄. 과연 그럴까?]

그에 셰인은 펼쳐 뒀던 합격진을 거두고 파가부탄을 바라봤다.

셰인이 보기에 이미 오크들은 그들의 신인 산왕이 만들어 둔 거대한 체스판의 체스말이 된 상태다.

그저 무명의 간섭으로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라 믿고 있을 뿐.

"쓸데없는 말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피차 마찬가지로군.]

태어난 순간부터 신의 은총을 한 몸에 받은 파가부탄의 힘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샤먼의 주술로부터 자유로운 그는 으스러져라 움켜쥔 글레이브를 움직였다.

그에 맞춰 대족장을 따라 오크들이 달려들려는 그 순간.

셰인의 몸에서부터 절대자의 마력이 터져 나왔다.

산왕의 은총을 받은 파가부탄마저 주춤할 수밖에 없는 절대자의 존재감.

모든 종족의 정상에 존재했던 드래곤의 피어는 달려들던 모든 오크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몬스터의 야성에 잡아먹힌 오크들은 그 힘에 대항할 수단이 없었다.

"크르...."

오크 군단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에 비로소 혼자가 됐음을 느낀 파가부탄이 이를 갈며 다시금 달려들었다.

하지만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날아드는 검에 막히고 말았다.

휘두르는 이 없이 자유로이 움직이는 바람의 검.

그런 검이, 백 자루가 되어 파가부탄을 향해 달려든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개수작을!"

파가부탄은 날아드는 검을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터뜨려 냈다.

산왕의 힘이 담긴 글레이브의 힘이었다.

하지만 셰인은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쉴 새 없이 회전하는 셰인의 서클.

수십 자루의 검이 사라짐과 동시에 다시금 같은 숫자의 검을 생성하여 파가부탄의 발걸음을 막은 것이다.

"이따위 바람으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하나 그러는 사이에도 파가부탄은 분명 한 걸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셰인 또한 백 자루의 검을 조종함과 동시에 새롭게 소환하는 작업에 발걸음을 쉬이 옮기지 못했다.

그러나 검의 공세는 점차 거칠어져 간다.

합격진이 펼쳐질 때처럼, 생성되는 즉시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가속했다.

그러자 파가부탄의 걸음속도가 점차 느려진다.

[다가오는 게 마치 굼벵이 같구나.]

오만한 셰인의 말이 파가부탄의 행동에 불을 지핀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파가부탄이 크게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그러자 글레이브에 담긴 마력이 터져 나오며 일순, 백 자루의 검이 일제히 한 줌의 바람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퍼억-!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파가부탄이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하나 파가부탄이 땅을 박찬 순간 이미 재생성된 검이 그런 파가부탄의 허벅지와 어깻죽지를 크게 베고 지나갔다.

"닿았다, 빌어먹을 놈아."

그럼에도 파가부탄은 큰 입을 씰룩이며 바로 앞까지 당도한 셰인을 향해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아래에서 위로.

글레이브는 그대로 셰인의 허리부터 머리까지 훑고 지나갔다.

그러나.

파가부탄이 기다리던 파육음은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

글레이브가 쓸고 지나간 셰인은 마치 잔영처럼 사라지고, 이내.

"krrrr...."

어둠의 정령이 그 자리를 대신해 그런 파가부탄을 비웃으며 사라졌다.

파가부탄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어둠의 정령은 역소환되어 셰인의 그림자로 돌아왔으나.

이미 싸움은 끝났다.

"커허헉─!"

백 자루의 검이 파가부탄을 향해 일제히 날아와 꽂혔다.

탐욕은 파가부탄을 보호하는 산왕의 힘조차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마치 고슴도치처럼 전신에 검이 꽂힌 파가부탄이 두 손을 늘어뜨리고.

아슬아슬했던 이 전투의 종지부를 짓기 위해 셰인은 그대로 백 자루의 검을 녹여 파가부탄을 에워쌌다.

그러자 동시에 수많은 이빨이 그런 파가부탄을 먹어치웠다.

[초대장을 보냈으니, 그에 응해야겠지.]

분해되어 가는 파가부탄의 영혼.

그리고, 그의 영혼 깊숙이 파고 들어간 산왕의 편린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울리기 시작하며, 셰인의 정신세계로 침범해 나갔다.

* * *

피로 물든 머리끈이 묶인 옅은 실버블루 톤의 머리카락의 여인.

그런 여인의 앞으로 지평선을 가득 매운 오크 군단이 다가왔다.

피 칠갑이 된 채, 반쯤 부서진 대검의 옆으로 피에 물든 워 해머가 쥐어져 있다.

셰인은 마치 세계를 관조하는 신이 된 듯한 눈빛으로 여인을 바라봤다.

푸른 불꽃이 그런 그녀를 집어삼키듯 타오른다.

제페르 디 나타샤 아나스타샤.

제국의 2황녀.

그녀의 뒤로는 오크들만큼은 아니나, 무장된 인간의 군대가 그런 그녀를 노려보고 있다.

제국을 배반한 배신자를 바라보는 눈빛이다.

반역자.

이곳 아룬비다의 주민들로부터 봉기를 일으켜 대부분의 북부 영주들을 학살한 여인.

그로 인해 제국은 황급히 군대를 일으켜 세우고 북부까지 찾아와 반역자를 향해 검을 세웠다.

그리고, 그런 반역자의 주변으로부터 수백의 시체들이 줄을 지었다.

끝까지 자신들의 황제, 아나스타샤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다.

셰인은 그들 중 태반이 눈에 익었다.

이곳 아룬비다에 오면서 보게 된 삼총사와 펠리스 또한 그 시체들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이로써 제국은 지켰다."

이윽고, 황녀는 마지막 그 순간.

자신의 검을 제국이 아닌 오크들에게 향했고.

부동의 마음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 모습은 가히, 강철의 여인이었다.

가늠할 수 없는 숫자의 오크들을 향해 달려드는 그녀의 발걸음은 거칠 것이 없었으나, 잔뜩 금이 간 그 영혼이 부서지고, 가루가 되어, 산화되는 그 순간까지 하나라도 더 많은 적을 베고 뭉갰다.

그리고 그 끝에.

오크들은 경의를 담아.

인간들은 두려움을 담아.

강철의 여인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봤다.

[참으로 영웅에 걸맞은 최후이지 않느냐.]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산왕은 신으로서 그런 아나스타샤에게 모든 경의를 담아 그리 말했다.

이는, 달라진 시간선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3화

83화 영혼을 바쳐라

하나의 장면에 불과했으나, 셰인은 그 속에서 무수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전생의 아나스타샤가 일으킨 반란은, 순전히 제국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무명의 간섭이 없던 전생에는 오크들이 끊임없이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켜 비두론의 성벽을 두드렸다.

한 달에 한 번 간격으로 진행되는 웨이브 속.

아나스타샤는 몇 번이고 제국에게 이번 일의 심각성에 대해 알렸으나, 이번 생과 마찬가지로 제국에서는 이를 가볍게 무시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세 달.

무려 2년의 세월 동안 몬스터 웨이브의 공세를 막은 비두론 성은 더 이상 성의 역할을 이어 가지 못 했고.

수천에서 고작 수백만이 살아남은 아룬비다의 주민들을 향해, 아나스타샤는 천명했다.

"이 아룬비다의 황제가 되겠다."

그리하여 아나스타샤는 비두론 성을 포기하고, 그간 병력을 빼내기 싫어 엉거주춤하던 북부의 귀족들을 향해 칼을 뽑아 들었다.

더 이상 가릴 게 없어진 그들은 신속했고, 무능한 북부의 영주들은 이를 막아 내지 못했다.

끝내 영주의 목이 성벽에 걸리고 살아남은 주민들이 이를 제국에 알리자, 그제야 반란임을 인지한 제국이 부랴부랴 군대를 일으켜 오크가 남하하고 있는 북부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동료들을 잃은 아나스타샤는, 마지막까지 황녀로서 제국을 지키기 위해 오크 군단을 향해 달려들었고.

제국은 '우연찮게' 아나스타샤를 제압하기 위해 올라온 군대를 동원하여 남하하는 오크들을 막을 시간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어떠하더냐, 아해야.]

산왕의 그 물음에 셰인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이제 와선 어찌 돼도 좋은 이야기로군."

아나스타샤의 희생은 아름다웠다.

셰인이 봐 왔던 그 어떠한 영혼보다도, 심지어 미래의 클라인조차도 빛을 바랄 정도로 밝게 타오르다 사그라졌으니.

그러나 이는 이미 전생의 이야기였고, 전생에선 그런 아나스타샤의 희생이 무의미하게 제국은 무너져 내린다.

[정말 무의미했을 것 같으냐?]

다시 한번 이어진 질문.

그 물음에 셰인은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인정했다.

"계기가 되었군."

그런 아나스타샤의 죽음. 그리고 무능한 제국의 추악한 행태.

이를 본 1황녀, 올리시아가 과연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까.

아나스타샤의 최후를 듣게 된 올리시아는 더 철저한 준비를 하게 되었고, 그 무너지는 문명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 후 클라인과 합류하여 멸망해 가는 인류에 한 줄기 빛이 되어 등장했으니.

그렇기에 클라인이 셰인에게 맞닿을 수 있었고, 지금의 새로운 시간선이 만들어질 수 있던 것이다.

"무의미하지 않았어."

[맞다. 모든 일에는 계기가 존재하는 법이고, 그 끝에는 이렇듯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법이지.]

산왕이 이어 말했다.

[나는 그녀와 내기를 했단다. 나의 아이들로부터 제국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그런 내기였지.]

끝내 산왕은 아나스타샤와의 내기에서 지고 말았다.

아나스타샤는 제 영혼을 바쳐 제국을 지켜 냈고, 산왕은 더 이상 오크들에게 관여치 않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북부의 난은 마무리가 지어진 것이다.

[아해야. 나는 오롯이 존재하는 자다. 다른 시간대의 나라고 해도 다르지 않지.]

"그래서 놈들이 개입하기 시작했나."

[그렇단다.]

산왕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전생과 다르게, 이번 생에 산왕은 더 이상 오크들에게 개입하지 않았다.

이는 전생부터 이어져온 산왕과 아나스타샤의 약속이었기에.

때문에 무명은 이를 간파하고 오크들에게 개입할 수 있던 것이다.

산왕은 더 이상 오크들에게 간섭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

[나는 이야기를 사랑한단다. 또 이야기에 걸맞은 영웅 또한 사랑하지. 운명을 거스르는 아해야. 너는 그 이야기에 걸맞은 주인공이로구나.]

"잘못 본 것 같군. 나는 빛나지 않는다."

자신이 다루는 오리진처럼 한없이 어두운 존재라면 또 모를까.

[아니, 너는 분명 영웅의 자질을 가지고 있단다. 영웅에게 색 따위는 상관없지. 어떠하냐. 너 또한 나와의 내기를 하지 않겠느냐?]

"내기."

[그래. 내기란다.]

산왕의 물음에 셰인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전생에는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산왕의 존재.

그 존재가 지금, 자신에게 개입을 시도한다.

여기서 거절하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산왕은, 이 세계에서 배제된 존재니까.

때문에 셰인이 거절한다 하더라도 산왕은 이 세계에 개입할 수단이 없기에 물러설 수밖에 없다.

다만 본신의 존재감이 이토록 거대하고, 또 아카샤의 대봉인으로부터 자유로운 오크와 엮였기에 이렇듯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뿐.

"받아들이지."

여태껏 산왕과 내기를 했던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왔다.

오크들은 그토록 바라던 마력을.

아나스타샤는 오크로부터 제국의 평화를 가지고 왔다.

이번에는 셰인의 차례였고, 셰인 또한 원하는 바가 있었다.

[좋다, 좋구나!]

산왕의 우렁찬 웃음소리와 함께 정신의 세계는 무너져 내리고, 끝내 눈을 뜬 셰인은 거의 그와 동시에 허리를 굽혔다.

후웅─!

압도적인 파괴력이 담긴 글레이브가 방금까지 셰인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간다.

"과연 좋구나!"

백 자루의 검에 꼬챙이가 됐던 오크의 대족장, 파가부탄이 웃음을 터뜨리며 글레이브를 휘두른 것이다.

"신으로 추앙받던 것치고는 기습이 날카롭군."

"아무렴, 내게 있어서 영웅이란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내는 자일지니! 내 스스로는 하나의 관객에 불과하다!"

웃음을 터뜨리는 파가부탄, 아니. 산왕은 자신이 강림한 파가부탄의 육신을 눈 깜짝할 사이에 복구하며 다시금 달려들었다.

신화시대부터 이어져 온 어느 한 신의 존재감이 전장을 가득 채웠다.

가히 패도적이라 말할 수 있는 그 존재감은 전장의 모든 이들을 멈춰 세웠다.

움직일 수 있는 자는, 드래곤의 역린을 흡수한 셰인뿐.

앞서 파가부탄의 영혼을 분해하며 산왕의 힘마저 소화해 낸 탐욕의 오리진이 사방에 흩뿌려지는 산왕의 힘을 또다시 집어삼켰다.

만일 드래곤의 역린을 섭취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잡아먹혔을 그 패도적인 기운이 백 자루의 검에 담기기 시작했다.

"후하하하핫!!"

웅장한 웃음소리.

백 자루의 검이 허공을 어지러이 수놓는다.

그에 산왕이 글레이브를 움직여 휘두르자, 단 한 번에 백 자루의 검이 사그라졌다.

자신의 힘이니만큼, 그 누구보다 파쇄가 손쉬울 수밖에.

하나 사그라지는 검들 중 몇몇.

산왕이 보기에도 결코 적지 않은 마력이 담긴 검 몇 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타오르는 붉은 마력.

만일 산왕이 개입할 수만 있다면 반드시 보고 싶었던 여인, 라비아타의 마력이었다.

아직 대지에 남은 그녀의 마력을 여태껏 한데 모아 왔던 셰인이 일제히 터뜨렸다.

태양이 떨어졌을 때보다 그 힘은 비견할 수 없이 줄어들었으나.

[팽창], [압축], [폭발], [5중첩].

한 순간 팽창하며 터지는 힘을 압축하고, 폭발의 룬 마법으로 폭발력을 다섯 번 중첩시킨 그 힘은, 범위는 협소해졌을지언정 라비아타가 떨어뜨린 태양보다 더 강렬하게 터져 나갔다.

셰인이 가진 드래곤의 역린과 같은 드래곤 하트를 섭취한 라비아타의 마법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과연 대단한 아해로고!"

그럼에도 산왕은 그 폭발 속에서 약간의 그을림만 보일 뿐, 다시금 글레이브를 휘둘러 화기를 날려 버렸다.

그 여파만으로도 셰인은 몇 장이나 되는 마력 실드를 만들어 방어해야만 했다.

신과 비교하면 한없이 나약한 오크라는 종족의 몸에 들어간 탓에 그 한계가 명확했으나, 그럼에도 한 종족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이 발휘되어 가고 있었다.

"이는 내가 그린 오크라는 종족의 한계란다."

산왕이 설명을 하는 도중에도 글레이브가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움직인다.

이는 정점에 도달한 소드 마스터가 검을 휘두르듯,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때마다 퍼지는 여파만으로 땅이 베이고 바위가 무너지며 주변의 지형이 뒤바뀌니.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만났던 고든보다도 훨씬 강대한 모습에, 셰인이 결국 두 눈을 감았다.

"영혼을 바쳐라. 그런 거군."

신을 향한 도전.

이를 아무런 출혈 없이 승리하려는 행위 자체가 신을 향한 모독이며, 또한 오만일 것이다.

셰인은 자신의 오만함을 인정하고, 이내 자세를 바로잡았다.

"황녀에게는 미안한 일이야."

셰인의 다짐을 알아차렸기 때문일까, 산왕은 휘두르던 글레이브를 멈추고 그런 셰인을 응시했다.

셰인이 양팔을 내리자 허공을 어지러이 수놓던 백 자루의 검이 모조리 사라졌다.

그러면서 셰인은 아나스타샤가 선보인 기술을 떠올렸다.

셰인이나 저지먼트 기사단처럼 다른 힘을 빌리지 않은, 한 개인의 굳건한 다짐만으로 만들어 낸 오리진.

그 대가로 쓰일 때마다 영혼이 깎여 나가는 그 힘을 떠올리며, 분석한다.

이윽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두 눈을 뜬 셰인의 눈동자는 온통 새카만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세상은 심연보다 두려운 어둠으로 메워져 나갔다.

* * *

"저, 저게 뭐지?"

엘더 샤먼의 함정에 빠져 환영 속을 거닐던 벤자민은 어느새 거두어 진 환영에서 벗어나 하늘을 가득 뒤덮은 어둠을 바라봤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빨려 들어갈 듯한 감각.

벤자민은 여태껏 살아오며 이런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도대체."

마찬가지로, 제국의 검으로서 수없이 많은 적을 단죄해 온 저지먼트 기사단장, 대니얼마저도 이는 맹세코 본 적 없는 현상이었다.

* * *

마법의 여파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디라일라와 아르티아는 거의 동시에 눈을 떴다.

거대한 힘의 움직임을 감지한 본능 때문이었다.

그렇게 둘은 눈을 뜨자마자 이상하리만치 어두운 병실을 바라보다 이내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무수한 밤하늘의 별조차 집어삼킨 어둠.

그리고 달이 있던 그 자리에, 붉은 피를 흘리는 눈동자가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꿈이구나."

"꿈이네."

아주 안 좋은 악몽을 꾸는 것이 분명하리라.

둘은 다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아니, 빠져드는 척했다.

* * *

오크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추자, 클라인 또한 무아지경으로 휘두르던 검을 멈추고 밤하늘을 바라봤다.

별빛을 잡아먹는 어둠과, 달 대신 자리한 붉은 눈동자.

그리고, 지면을 가득 채운 정체 모를 뾰족한 가시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이빨이었다.

무수히 돋아난 뾰족한 이빨은 자신에게 걸린 오크들을 산채로 씹어 먹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마력에 민감한 클라인은 이 항거할 수 없는 힘의 주인이 누구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 클라인은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의 존재를 찾아다녔다.

* * *

꾸물거리는 어둠이 셰인을 휘감기 시작한다.

그에 산왕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런 셰인'이었던 것'을 바라봤다.

두려움이 아니다.

희열.

자신이 여태껏 마주해 온 그 어떤 생명체보다도 한계에 도달한 자를 마주한, 진정한 영웅의 면모.

그러나 저것을 과연 영웅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인가.

핏물을 흘리는 눈동자와 이빨이 뒤섞인 덩어리가 셰인을 집어삼키고, 이내 그것은 점차 덩치를 불리기 시작했다.

"흐하하하! 과연, 과연이로구나! 이는 영웅의 재목(材木)이로다!"

2미터, 5미터, 10미터.

이윽고. 산왕이 고개를 바짝 들어야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거대한 존재가 그런 산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늘 대신 날카로운 이빨이.

영롱한 눈동자 대신 붉은 피를 흘리는 어둠이.

길게 늘어난 그 존재는, 승천하지 못한 용이었다.

무엇이든 씹어 삼키는 단단한 이빨로 무장된 용은, 침인지 피인지 진득한 무언가를 흘리는 아가리를 벌렸고, 이내 포효를 터뜨리며 산왕을 향해 질주해 나갔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4화

84화 제국의 영웅들

"오크들의 군대는 와해됐다."

"...."

"오크 대족장의 죽음은 확인되었고, 남은 살아남은 패잔병들만이 이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지."

"...."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했다."

아나스타샤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아룬비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전쟁의 승리가 결코 달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지 멀쩡히 살아남은 이들보다 사상자가 훨씬 더 많았고, 그중에서는 목숨을 잃은 이들이 태반이었다.

전쟁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기 마련.

거기에, 전쟁의 마지막.

붉은빛과 함께 하늘 높이 승천한 검붉은 용은 많은 이들에게 두려움을 남기고 떠나갔다.

"고개를 들어라, 용사들이여. 너희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몇몇이 고개를 들어 아나스타샤를 바라봤다.

오크들이 성벽을 넘어왔을 때,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웠던 사람.

명부상실 이곳 아룬비다의 맹주이자, 자신들이 따르는 강철의 여인.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아룬비다의 주민들은 얼굴에 자부심을 띄웠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이어지고, 앞으로도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을 테지. 만일 그럴 때가 찾아온다면 지금처럼 고개를 들어라. 그리고 현실을 봐라. 우리는 이 전쟁에서 살아남고, 제국을 지킨 영웅이다."

항상 부동의 자세로 이곳 아룬비다를 지키고, 언제나 흔들림 없던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디 찬 아룬비다의 바람마저도 그녀의 눈물을 식히지 못했다.

미미르는 그런 황녀의 모습을 바라봤다.

정치와 거리가 멀고 머리를 쓰는데 귀찮아하는 아나스타샤였지만, 이곳 아룬비다의 주민들은 모두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 있으리라.

'먼 길을 돌아왔군요.'

이곳 아룬비다의 주민들은 대부분이 범죄자다.

강도와 살인, 그리고 엇나간 길을 걸어가던 이들이 대부분.

제국의 사람들은 이들을 더러운 범법자라 침을 뱉고, 이곳에서 흘리는 피는 마땅히 치러야 할 응징이라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들은 틀림없는 범죄자다.

그렇기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자 그 누구보다도 이곳 아룬비다를 수호하려 애쓴다.

그런 그들의 노력마저 조롱거리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

아나스타샤는 저들이 그 누구보다 이번 전쟁의 주인공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곳 아룬비다에 오게 되면서 얼마나 많은 악인들을 봐 왔던가.

감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온 이들은 이곳에 와서도 적응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아나스타샤는 그 누구보다 앞서서 검을 휘둘렀고 정의의 철퇴를 내렸다.

그렇게, 그녀는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수많은 피를 흘려 이곳 아룬비다의 맹주가 될 수 있던 것이다.

이제 와서 남은 이들은, 하나같이 사연이 있는 이들 밖에 없다.

경쟁자에게 아내를 잃어 복수심에 불타오른 사람.

누군가에게 모함을 받아 사형수가 된 사람.

불치병에 걸린 아들의 부탁에 그 생을 직접 마감시켜 준 사람 등.

누군들 사연이 없겠나 싶겠지만, 이곳 아룬비다에는 특히나 바깥에서의 삶에 지칠 대로 지쳐 온 이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곳에 스스로 찾아와 자신들의 삶을 마감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저들이 아니라면 누가 이 아룬비다를 이번 전쟁에서 지킬 수 있었을 것이며, 앞으로도 누가 지킬 것인가.

아나스타샤는 눈앞에 있는 이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다는 사실에 황녀는 눈물을 흘렸고, 이곳 아룬비다의 주민들은 자신들이 유일하게 충성을 맹세한 여인의 눈물을 두 눈으로 응시했다.

더 이상 그들의 눈빛에 슬픔과 두려움은 남아 있지 않았다.

"더 나아가자.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전쟁을 우리의 손으로 끝맺음을 지으리라!"

"""우와아아아아!!"""

* * *

"새뮤얼 님."

그 부름에 황태자는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한 발 늦었다고 합니다."

"쯧. 이번에도 절 실망시키는군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후우….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야겠죠. 너무 욕심이 많았으니."

최근 황태자와 그의 지지자들은 굉장히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일차적으로 메자이아 대수림의 개방으로 생겨난 교역 루트의 확보에 매달리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차적으로 살리에르 백작의 죽음 이후 연합국 지하도시의 동태를 살피는 절차를 밟고 있었다.

거기에 이번 아룬비다의 사건으로 인해 군대를 차출하는 등.

이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해결하려 하니 당장 황태자의 입장에서는 손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역시 인력이 부족하군요."

특히 살리에르 백작이 거느리고 있던 지하도시의 인력이 전부 소실된 것은 너무 큰 손실이었다.

이는 무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준비해 왔던 일이었기에.

이종족 노예를 소지한 귀족의 살인 사건이 두 번이나 일언 탓에 관련된 귀족들 또한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는 상황이지 않던가.

"조직도 별 도움은 안 되고 있고...."

아니, 오히려 방해되는 감이 컸다.

무명은 새뮤얼에게 허락도 맡지 않고 제국의 북부를 탐하려 하지 않았던가.

그와 관련된 소식을 조직원으로부터 듣게 된 것도 바로 얼마 전이었다.

놈들은 이번 기회에 1황녀와 2황녀의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한 희생이라 생각하라며 말해 왔고, 훗날 필요한 순간을 위해 오크의 병력을 빌려 준다는 말로 새뮤얼을 꼬드겼다.

그 때문에 못 이기는 척 군대를 일으킬 준비를 늦췄다.

아룬비다가 무너지고, 북부의 영지가 제법 큰 손실을 받았을 때 영웅처럼 등장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리되면 1황녀와 2황녀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은 물론이고 이대로 다음 왕좌를 향한 길이 더욱 견고해졌을 터이나....

욕심이 너무 과했던 것일까.

오히려 그 선택은 다른 쌍둥이 황녀의 등에 날개를 달아준 꼴이 되고 말았다.

굳이 생각하려 하지 않아도 이후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눈에 선했다.

언제나 눈치 싸움에 급급하기만 하던 몇몇 정치 귀족들은 이참에 두 황녀에게 붙어 유리한 자리를 점하고자 할 테지.

그나마 아나스타샤의 경우에는 거리도 멀거니와 애초에 그녀 스스로가 정치에 별다른 뜻이 없기에 안심할 수 있었으나, 다른 한 명은 달랐다.

"귀찮게 하는구나, 동생아."

1황녀, 올리시아.

여태까지는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아왔으나, 최근에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그 은밀함 속에서 칼을 갈고 있다 들었다.

특히 이번 아룬비다에 선발대를 보내는 과정에서 올리시아는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몇몇 올리시아를 따르던 가신들이 이번 아룬비다의 원정에 대해서 목소리를 얼마나 높였던지, 이전에 몬스터 웨이브와 오크 군단의 남하를 부정했던 새뮤얼의 가신들은 입 한 번 뻥긋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도 수그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곁에서 그 혼잣말을 듣고 있던 가신은 그 서늘한 목소리에 몸을 움찔 떨었다.

이전까지의 여유는 사라지고, 차가운 분노만이 남겨진 모습.

"오랜만이야, 이런 기분은... 아주 오랜만이라고."

찰나의 순간 짐승처럼 두 눈을 빛냈던 새뮤얼은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가면 같은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이런... 미안합니다. 잠시 감정이 격해졌군요."

"아, 아닙니다. 황태자님."

"아무튼 아룬비다에 관련된 일은 포기하도록 하죠. 대신 뒷말이 없도록 전쟁의 뒤처리는 깔끔하게 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예."

"이번 일로 흔들리는 가지들이 있다면, 바로 쳐내도록 하세요."

"...그리하겠습니다."

새뮤얼는 자신 밑에 있으면서도 다른 형제들에게 시선을 돌리는 가신 따위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렇게 가신이 떠나가고, 홀로 남은 새뮤얼은 다시금 책을 펼쳤다.

그러나 책의 활자가 읽히는 대신, 어느 한 사람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렇게 왜 그리 어리석게 떠나가셨습니까, 형님... 형님이 계셨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전 황태자.

제페르 디 셰르다 클로이.

만약 그가 지금 있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새뮤얼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의 가면을 씌운 채,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 * *

새뮤얼이 아룬비다와 관련된 일을 깔끔하게 포기한 이유 중 하나는 저지먼트 기사단의 활약이 예상보다 적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적의 중요 간부를 죽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더라면 보다 정치적 거름으로 써먹을 수 있었을 테지만, 아쉽게도 저지먼트 기사단은 오크들에게 대족장 다음으로 중요한 엘더 샤먼을 놓치고 말았다.

전장에 나타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용만 아니었더라면 분명 잡았을 터이나, 이제 와서 후회한들 어쩌겠는가.

그때로 돌아간다 한들, 당시에 굳었던 몸이 움직였을지는 모를 일이니.

제국은 뒤늦게 부랴부랴 군대를 일으켜 예상 시간보다 빠르게 아룬비다로 향했으나, 그들이 할 일이라고는 패잔병이 되어 돌아다니는 오크나 몬스터 따위를 정리하는 것뿐.

일단 소강상태에 들어간 군대는 보다 깊은 북부로 향할 준비에 들어섰다.

여기까지가, 여태 기절해 있던 셰인이 듣게 된 정보였다.

"그렇군요."

"그래. 그렇지."

그러면서 아나스타샤는 침대에 누워 있는 셰인을 바라보며 능글맞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썼지?"

"...."

"썼네, 썼어. 그치?"

"...."

"왜 이러실까. 나한테는 그렇게 쓰지 말라고 해 놓고. 안 그런가?"

"...예. 썼습니다."

전쟁이 끝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작전 중 셰인과 보내온 시간이 많았기 때문일까.

아나스타샤는 한결 편해진 모습으로 셰인을 대했다.

반면, 셰인은 그런 능글맞은 웃음을 짓는 저 얼굴이 보기 싫었다.

정령을 통하지 않고 물리력을 일으키는 오리진.

셰인은 전쟁 당시, 산왕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본인의 오리진에 물리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은 셰인도 기억하지 못했는데, 아나스타샤가 쓰는 것을 보고 따라 했다가 상상 이상의 파괴력에 본인 스스로가 통제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셰인 스스로에게 굉장히 혐오스러운 일이었다.

스스로가 가진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머저리 같은 짓은, 전생에 이미 충분히 겪어 봤기에.

셰인의 약점을 잡은 아나스타샤는 그 부분을 집요하게 노려 댔다.

평상시 미미르에게 당하는 것을 풀기하도 하는 것처럼.

"비밀리에 기절한 너를 끌고 오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나 해?"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오리진을 본격적으로 터뜨리기 시작한 셰인은 산왕과의 전투 후, 그대로 의식을 잃고 전장 한가운데 쓰러졌다.

앞서 자신과 비슷한 기운, 오리진을 느꼈던 아나스타샤가 가장 먼저 정체불명의 용이 나타난 장소로 향했고, 그 결과 셰인을 데리고 올 수 있던 것이다.

"이것저것 숨기는 게 많은 것 같은데. 그런 건 천천히 듣도록 하지. 설마 황녀 앞에서 뭘 숨기지는 않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앞으로 아나스타샤가 제국의 정치에 가담하기 위해서는 셰인 또한 그녀에게 어느 정도 자신을 밝힐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녀의 말처럼 모든 것을 말해 줄 생각은 없지만.

그러는 한편, 셰인은 아나스타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방에 홀로 남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셰인이 마법을 사용하던 도중, 갑작스레 등장한 용으로 인해 마력이 꼬여 그 여파로 부상을 입은 상태라 일러 뒀다.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선 셰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나스타샤는 카르후의 공격을 한 차례 막은 것만으로도 영혼에 금이 갈 정도였다.

물론 그전에도 꾸준히 써 왔을 테니 영혼이 상해 있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리 쉽게 금이 가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방어가 아닌 공격.

그것도 산왕을 향해 그만한 힘을 폭주시켰던 셰인은 어떠한가.

거울을 들여다본 결과, 놀랍게도 셰인의 영혼은 조금도 상처를 입은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단단해진 것 같았다.

'이런 말이었나.'

셰인은 폭주 후, 어렴풋이 기억나는 산왕과의 대화를 떠올려 봤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5화

85화 정령의 변화

비늘 대신 이빨이.

총명기 있는 눈동자에서는 피눈물이.

넘치는 정기가 흘러나와야 할 입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질이 흘러나오는 용.

이는 셰인이 전생에 직시한, 승천하지 못한 용의 후손인 라비아타를 본떠 만든 형상이었다.

전생의 라비아타는 조직의 함정에 빠져 타락한 드래곤 하트를 섭취하게 되면서 타락에 오염되었고, 조직조차 어쩌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적어도 무력적인 면에서, 당시 라비아타는 셰인이 봤던 그 어떠한 존재보다도 강력했다.

당시의 그녀는 메자이아 대수림을 모두 불태우고서야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죽음을 맞이했었다.

셰인은 무의식중에 순수한 파괴의 화신이었던 당시의 라비아타를 떠올렸고, 지금에 이르러서 그 모습이 탐욕의 오리진에 의해 재현되고 있었다.

타락한 용이 아가리를 열고 달려든다.

산왕은 그런 용의 아가리를 글레이브로 크게 베어 냈으나, 글레이브는 순식간에 이빨로 이루어진 비늘에 의해 삼켜졌다.

그대로 용에게 씹어 삼켜진 파가부탄의 육신은 그대로 갈기갈기 찢겨지기 시작했다.

'글렀군.'

산왕의 본체라면 힘이 흡수되기도 전에 용을 찢어발겼겠지만, 이 육신은 그만한 힘이 없었다.

그렇게 분해되어 이제는 산왕의 티끌만이 남은 영혼은, 붉은 하늘을 마주했다.

그곳에는 왕좌에 앉은 채, 세상을 오시하듯 내려다보는 셰인이 앉아 있었다.

"그대가 이겼다. 이로써 나와의 내기에서 이긴 존재는 네가 세 번째로구나."

"하나는 알겠는데, 다른 하나는?"

"오래전 고향을 잃고 내게 찾아온 어린 오크였지. 그는 작은 몸으로 스스로의 부족을 이끌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사이클롭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했단다."

마력조차도 쓰지 못하는 오크가, 수십 마리가 목숨을 걸고 달라붙어야만 죽일 수 있던 사이클롭스를 홀로 잡은 것은 산왕에게 신선한 재미를 선사했었다.

그렇기에 오크를 수호하는 신이 되어, 아카샤의 대봉인에서도 그들이 봉인되지 않도록 지킨 것이다.

"재미있군."

"아무튼, 운명의 강을 거슬러 온 아해야. 너는 내게 무엇을 원하느냐."

그 물음에 셰인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미 정해 둔 것은 있었으나, 막상 앞에 닥치게 되니 다른 질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신이 과거로 돌아오게 된 이유.

만일 그것을 자신의 분석력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계에 다다른다면.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흐름을 거스를 수 있다는 의미이지 않나.

그러나 셰인은 생각을 달리했다.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신화에서부터 살아온 저 산왕조차도 거스를 수 없는 불가해의 영역.

셰인은 이치에 맞지 않는 힘을 탐할 머저리가 아니었다.

"손상된 영혼을 복구하는 힘. 그걸 가지고 싶다."

"...현명한 질문이구나. 그래, 영혼의 손상은 존재 그 자체를 멈추게 만들지. 아주 위험한 일이야."

산왕의 영혼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단순히 빛무리에 불과한 저 모습 때문에 알아볼 수 없었으나, 영혼 그 자체가 기뻐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내게 적지 않은 유희를 안겨 준 여인이다. 비록 다른 시간선에서의 일이었지만, 내게는 상관없는 일이지."

그런 셰인의 의중을 읽은 것인지 산왕은 가볍게 덧붙여 말했다.

"손상된 영혼을 복구하는 방법에는 총 세 가지가 있단다. 첫 번째로는 시간."

"시간?"

"그래.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 한, 시간이 흐르면 손상된 영혼은 자연스럽게 복구가 되지. 하지만 이는 살아 있는 자에게 해당되지 않는단다."

"그럼 소용이 없겠군."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두 번째로는 영혼의 각성. 흔히 너희 인간들이 '환골탈태'라 부르는 경지에 다다르거나, 영혼 자체가 성장하여 격을 탈피하는 경우지."

"...마찬가지로 쉬운 일은 아니고."

"영혼이라는 것 자체가 상처를 입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 않느냐. 마찬가지로 복구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란다."

"마지막 방법은?"

"너희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마력의 근원. 그걸 섭취하게 된다면 손상된 영혼을 복구할 수 있단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번째 방법을 강제적으로 일으키는 방식이지."

"...부작용이 있겠군."

마력의 근원.

몬스터가 섭취할 경우, 존재를 탈피해 더 상위의 개체에 다다르게 되는 돌.

셰인이 앞서 어둠의 정령에게 먹인 희귀한 광석이다.

다만 이는 인간이 섭취할 수 없는 물건이기도 했다.

어찌 된 일인지 인간은 마력의 근원을 섭취하면 체내 마력이 폭주하며 사망에 이르니.

수많은 마법사들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결과는 모두 실패.

실험에 참여한 인간은 모두 사망에 이르렀기에, 끝내 연합국에서는 이와 관련된 연구를 불법으로 지정하고 아예 막아 버렸다.

"너희 종족은 아카샤라는 신을 배출한 종족이지 않으냐. 이미 그 이상 근원이 성장할 방법은 없는 것이지. 이는 이치에서 벗어난 일이기에, 세계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영혼이 곧 근원이지 않나. 성장이 불가능한데 어떻게 탈피가 가능하다는 거지?"

"영혼과 근원은 다른 이치란다. 근원은 종족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값을 의미하는 것이고, 영혼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것이지."

"...."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으나, 감은 잡혔다.

혹시나 싶어 마력의 근원을 안전하게 섭취할 방법에 대해 물었으나.

"나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아직 탄생하지 않은 지식은 모른단다. 작은 아해야. 너는 그 길을 스스로 걸어야만 해."

"...."

"다만, 이래서는 나와의 내기에서 이긴 자에게 주는 보상으로는 적절치 않은 감이 있구나. 그래서는 안 될 일이지. 이걸 받거라."

산왕은 정사각형의 큐브를 넘겨 보냈다.

"이게 뭐지?"

"어느 위대한 대마법사의 서고란다. 이제는 신이 되어 버린 한 사내가, 아직 인간이었을 적 간직해 둔 서고이지."

"아카식 레코드...!"

인간의 신. 아카샤가 승천한 서고의 이름.

그저 떠도는 전승에 의하면 우주의 진리가 저장된 공간이라 했던가.

그러나 산왕은 그런 셰인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달라. 아쉽게도 그 서고는 그런 대단한 것이 아니란다. 말 그대로 서고일 뿐이지. 굳이 말하자면... 그래. 아카식 레코드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단다. 하나의 티끌 정도조차 되지 않지."

"...그런가."

"실망한 것 같아서 미안하구나."

"아니, 전혀. 오히려 다행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셰인은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을 탐하려 하지 않는다.

전생에 이미 한 번 겪어 봤던 일이었으니.

그렇다고 이 물건이 대단하지 않다는 것 또한 아니다.

무려 신이 인간이었을 적 남기고 간 서고. 그게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이니 어찌 대단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안에 있을 지식이 얼마나 방대할지는 셰인조차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그걸로 만족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그때, 여기까지가 대화의 끝이라는 것을 고하듯, 산왕의 말이 이어졌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 이번 잠은 즐겁겠구나."

"잠?"

"세계에서 방출된 내가 이렇게까지 개입하지 않았더냐. 이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할 차례란다."

"그런가. 이번이 마지막 만남이겠군."

"그렇지."

이 신화시대의 흔적으로 남겨진 존재가 꾸는 꿈은 어떠할까.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그 꿈이 이어질까.

필멸자인 셰인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건 내 선물이란다. 더 이상 내게는 필요치 않는 것이지."

"...?"

사그라드는 산왕의 편린으로부터, 푸르스름한 작은 빛이 셰인에게 흘러 들어와 흡수되었다.

"선물은 본래 내용물을 모를 때가 두근거리는 법. 그것의 사용 방법은 네가 스스로 깨닫길 바라마. 그럼 잘 있거라."

"...."

그렇게 산왕의 편린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분명 드래곤의 잠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긴 수면기에 들어갈 터.

뜻밖의 존재가 개입된 이 사건은 이렇게 아무도 몰래 끝이 났다.

* * *

그리고 현재.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의 영혼이 예상과 다르게 멀쩡한 것을 확인한 셰인은 어둠의 정령을 불러냈다.

산왕이 말했던, 셰인이 이미 걷고 있는 길이라 했던가.

회귀 후, 셰인이 마력의 근원과 관련됐던 적은 어둠의 정령뿐이었기에 확인차 어둠의 정령을 불러냈건만.

"음...."

"주, 주인님...."

어찌 된 일인지.

정령에게 뜻밖의 변화가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셰인을 닮은 로즈베리 색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차 있다.

이전, 거의 짐승에 가까웠던 외형은 어디로 가고 한 소녀가 오들오들 떨며 셰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셰인의 드넓은 상식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이 사태에, 어둠의 정령이 자그마한 입을 열었다.

"그게...."

때는 셰인이 산왕과의 대화가 끝나고, 전투의 여파로 인해 정신을 잃었을 당시로 돌아간다.

어둠의 정령은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셰인의 상태에 굉장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특히 감정의 영역에서 많은 것을 공유했는데, 본래 존재의 어두운 감정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보니 이는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던 중, 셰인이 산왕과의 전투에서 오리진을 자신에게 거치지 않고 곧바로 쓴 탓에 셰인의 영혼에 거대한 균열이 생기고 말았다.

이는 어둠의 정령에게 소멸의 위기였다.

도무지 어찌해야 될지 모르던 그때, 어둠의 정령은 자신의 내면에 깃든 마력의 근원을 떠올렸다.

정령의 티끌이었던 자신이 지금의 존재가 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물건.

셰인의 곁에서 영혼에 대한 이해력을 갖췄던 어둠의 정령은, 아직 자신이 채 소화하지 못한 마력의 근원을 황급히 집어삼켰다.

그리고 셰인의 영혼과 연결되어 있는 자신을 매개로, 오리진이 자신을 거쳐 넘어갈 때처럼 마력의 근원에 담긴 힘을 셰인에게 건넨 것이다.

명백한 도박에 가까운 행위였으나, 그만큼 당시 셰인의 영혼은 위태로웠다.

다만 그 과정에서 셰인의 영혼에게 생긴 균열이 너무도 거대한 탓에 남아 있는 마력의 근원으로는 치유가 불가능했고, 한 번 복구되기 시작한 셰인의 영혼은 탐욕스럽게 어둠의 정령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의도치 않게 셰인과 영혼이 극히 일부 뒤섞이게 된 존재가 다시금 탄생하게 된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감히 주인님께 허락도 받지 않고 이런 일을 저지른 제게 벌을 주십시오...."

더 이상 이전과 같이 짐승 같은 울음소리도 내지 않고 아담해진 체구로 소녀와 같은 모습을 한 채 저리 말하는 이 장면은 누가 본다면 파렴치한이라 욕할 테지만.

셰인의 생각은 거기까지 뻗지 못했다.

오히려 그런 소녀의 모습을 보다 진지하게 바라보며, 남모를 고민에 빠져든 것이다.

'왜 그 여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저 소녀의 모습은, 셰인에게 너무도 익숙한 어느 한 사람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전생에 유일한 셰인의 말동무.

때문에 이번 생에 몇 번이고 찾아보려 시도했던 한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어둠의 정령을 보며 셰인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6화

86화 과거

회귀 전.

"안녕? 반가워. 거기 있는 게 꽤 답답해 보이네?"

검은 공간에서 셰인은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두 눈을 떴다.

그럼에도 여전히 끔찍한 어둠만이 보일 뿐.

"너는... 누구지?"

"음, 글쎄. 과연 그게 중요한 걸까?"

중요하고말고.

셰인이 있는 이곳은, 하나의 물리적 공간이 아닌 정신으로 이루어진 공간이지 않은가.

자의식이 생긴 질투가, 육체의 소유권을 지닌 셰인조차도 질투하여 주인인 셰인을 내면에 가둬 버리지 않았나.

이치에 맞지 않는 힘을 탐한 결과였다.

아무튼 소녀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누구냐는 질문에 답하지 않은 소녀는, 이따금씩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오고는 했다.

그 간격이 며칠인지, 아니면 몇 시간인지, 혹은 몇 년인지조차 제대로 분간되지 않는 정신적 공간.

이따금 말을 걸어오는 소녀의 존재는 셰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때로는 혹시 자신이 미쳐 버려서 상상 속 인물을 만들어 낸 게 아닌가 싶었으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차라리 완전히 미쳐 버린다면 이 저주받을 공간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였으니.

하지만 셰인은 스스로가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차라리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리고자 방향을 돌렸다.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당연하지만 신체의 주도권을 다시 되찾는 것이었다.

조직에 가담하고 수많은 마법적 지식을 터득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자신이 들었던, 이해하지 못했던 마법들도 다시금 뜯어 보고 해부하며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이 제법 결과를 가지고 온 것일까?

의식의 최심부에 갇혀 지내기만 하던 셰인은 어느새 자신의 또 다른 자아, 질투가 보고 듣는 광경을 공유할 수 있는 경지까지 다다랐다.

하지만 노력으로 가능한 것도 딱 거기까지.

그 이상의 결과는 가져올 수 없었다.

그렇게 또다시 소녀와 마주하게 됐을 때, 셰인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라. 역시 대단하네. 벌써 거기까지 도달한 거야?"

이따금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던 소녀가 질투의 자의식을 통해 셰인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토록 궁금했던 소녀의 정체는, 유령에 가까웠다.

영혼이라 해야 할까.

그녀는 타인의 몸에 빙의된 채, 영혼의 상태로 셰인에게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그 대상은 매번 달라졌다.

때로는 고든이 될 때도 있었고.

때로는 디라일라의 몸으로.

때로는 카르후의 몸에 빙의한 채로 셰인에게 말을 걸어왔다.

도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그 역시 몇 번이고 물어봤으나, 그때마다 소녀는 답해 주지 않았다.

다만, 셰인은 그녀를 볼때마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정확히는 이 세계의 존재 같지가 않다는 말이었다.

"언젠가 다가올 때를 위해 준비해 두는 게 좋을 거야. 거기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도록 해. 알았지?"

또한 틈이 날 때마다 저런 말을 내뱉곤 했는데, 실제로 회귀 후 셰인은 그 덕을 크게 봤다.

물론 소녀의 그 말 때문에 준비했던 건 아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의식의 세계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지식을 탐구하는 것 외에는 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때로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고는 했다.

"확실히 저쪽과는 다른 재미가 있단 말이야."

"이쪽의 서고지기의 성향 때문이겠지?"

"무슨 말이냐고? 신경 쓰지 마. 그냥 넌 너대로 하고 있는 일을 하면 돼. 아하하."

* * *

아무튼.

"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현재로 돌아와.

셰인의 질문을 받은 어둠의 정령은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저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단지, 주인님의 영혼과 엮이는 과정에서 이 모습과 매우 흡사한 존재를 봤습니다."

"...."

그저 무의식의 일종일까.

어쩌면 오리진을 일으킨 여파로 인해 손상이 심각했던 영혼은 무의식중에 셰인이 가장 위태로웠을 당시 조금이나마 의지할 수 있던 말동무를 떠올렸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어둠의 정령은 대부분 그 소녀와 비슷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으나, 용암을 담은 듯한 주홍빛 눈동자가 아닌 셰인과 같은 로즈베리 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떨지 마라. 단지 생각할 게 있었을 뿐이니까. 그러니 이제 그만 일어나도록 해."

"가, 감사합니다!"

어둠의 정령이 멋대로 일을 벌인 것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러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자신의 영혼이 어떤 꼴이 됐을지 몰랐으니.

다만 칭찬 또한 하지 않았다.

혹여나 다음에 쓸데없이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럼, 이름을 지어 줘야겠군."

"...! 저, 정말입니까?!"

그에 어둠의 정령이 크게 기뻐했다.

이름이라는 것은 단순히 한 대상을 부를 때 쓰는 게 아니다.

존재에 대한 가치성을 확보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 존재가 가진 역사가 담기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어둠의 정령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가치를 찾을 수 없었다.

이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더더욱 셰인의 인정을 바라 왔던 것이다.

"이름은...."

그러나 어둠의 정령은 다음으로 이어지는 셰인의 말에 그 기쁨이 확 죽고 말았다.

"검둥이가 좋겠군."

아무리 자신의 주인이 경외의 대상이라지만, 저건 아닌 것 같았다.

* * *

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황태자 새뮤얼의 지원 아래 일은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지지부진하던 연합국과의 협상도 빠르게 진행이 되며, 한참 여름을 지내고 있던 모험가들은 혹독한 아룬비다의 날씨에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춥다, 춥다 하더니만 진짜 장난 아니군."

"어우. 이거 진짜 보통 격전이 아니었겠는데?"

"무슨 시체가 이렇게도 많은지."

거기에 이곳저곳에 숨져 쓰러진 몬스터와 오크의 시체들은 이곳이 얼마나 격전지였는지 새삼 깨닫게 만들었다.

무려 50만 대군의 오크 군단과 15만의 몬스터 웨이브이지 않은가.

모르긴 몰라도 당분간 무구를 다루는 업종에서는 행복의 비명을 지르리라.

아룬비다의 몬스터들은 하나같이 상대하기가 까다롭지만, 그만큼 다양한 재료로도 쓰일 테니.

그렇게 오크의 근거지로 향할 준비가 차곡차곡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몇몇 중진들끼리 모이는 회의가 진행됐다.

가장 먼저 아룬비다의 영주인 제페르 디 나타샤 아나스타샤.

다음으로는 제국에서 파견된 저지먼트 단장, 올리버 G 대니얼.

마지막은 연합국에서 파견 온 하얀나무 모험단의 단장, 말셀러스였다.

말셀러스가 단장으로 있는 하얀나무 모험단은 비록 라비아타나 지금은 사라진 헤르메스 모험단과 비교하면 급수가 떨어지나, 활동량만 보자면 단연코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모험단이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런 말셀러스의 걸걸한 목소리가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그는 그 목소리만큼이나 큰 덩치의 소유자였는데,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그 턱수염으로 인해 제법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으나, 그와 다르게 두 눈동자는 마치 소처럼 순둥한 눈망울을 하고 있었다.

"사나이 말셀러스. 황녀님과 이곳의 주민들의 활약에 감동받았습니다. 제국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겁니까, 대니얼 경?!"

태도만 보면 이건 뭐 압박하는 게 아닌가 싶었으나, 말셀러스는 진심으로 이곳 아룬비다에서 일어난 전쟁의 결과에 감동하며 물은 것이었다.

반면 자신이 따르는 황태자의 입지가 좁아지긴 했으나, 황실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대니얼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하는 척했다.

"동감이오. 설마하니 이토록 훌륭하실 줄이야. 제국의 귀감 아니겠소."

"와하하! 대니얼 경이 그리 말하니 참으로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황녀님!"

"칭찬은 고맙군. 하지만 이 또한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던 덕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니, 서둘러 전쟁을 끝내기 위해 우리가 이곳에 모인 것이고."

"암, 암! 그렇지요! 제가 너무 떠들기만 했군요. 바로 회의에 들어가시지요!"

회의의 주제는 아나스타샤가 말한 것처럼,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준비였다.

오크의 군대는 해체됐으나 아직 놈들의 근거지가 멀쩡히 남아 있는 상황.

또다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려면, 놈들의 근거지를 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앞서 아룬비다를 무탈하게 지킨 덕분에 이번 회의에서 발언권이 강한 아나스타샤의 주도하에, 회의는 빠르게 진행됐다.

황태자 또한 이번 일의 경우 관망의 제스처를 취했기에 대니얼도 황녀의 의견에 별다른 토를 달지는 않았다.

군대의 편성은 생각보다 심플했다.

각개격파.

아룬비다의 주민들은 펠리스를 필두로.

연합국의 모험단은 말셀러스를 필두로.

황실의 군대는 저지먼트 기사단을 필두로 오크의 군단을 각개격파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리 효과적이진 않을 것 같습니다만."

대니얼의 말처럼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다.

각개격파라 하더라도 이미 적의 군대가 와해된 마당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

그러나 곁에서 아나스타샤를 보좌하는 미미르가 그 말을 받았다.

"아룬비다의 특성상 굳이 분란을 만들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음...."

대놓고 이쪽을 적대하는 말이었다.

황태자의 사람으로 구성된 황실의 군대는 아룬비다와 섞일 수가 없는 조합이었으니.

가뜩이나 외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시선이 곱지 않은 아룬비다의 주민들이다.

굳이 분란을 만들어 저쪽이 물어뜯기 좋은 먹이를 줄 필요가 없는 일이지 않나.

대니얼도 그저 한 번 찔러 본 것뿐이었기에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부대 편성을 마치고 작전 회의가 진행되며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다만, 이후 진행되는 전쟁의 구도는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상반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오크들의 엘더 샤먼, 카르가토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지금의 상황을 정리했다.

오크는 인간들에게 패배했다.

그것도 일반적인 패배가 아니라, 처참히 대패하고 말았다.

대족장인 파가부탄은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고, 50만 대군은 대부분이 죽거나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아무리 오크들의 번식력이 좋다고 한들 50만 대군은 쉽게 만들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아룬비다의 혹독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어린 오크들의 수도 결코 적지 않았고, 마력을 깨우치는 과정에서 또 한 번 걸러지기 때문이다.

그뿐이던가?

조직, 무명의 개입으로 인해 산왕을 저버린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반발이 일어났던가?

파가부탄의 리더십과 카르가토의 판단으로 그러한 오크들은 숙청하거나 혈마력을 거둬들여 노예로 부렸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불만이 쌓였으나, 이후 인간들의 비옥한 땅을 차지한다는 원대한 목표,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오크들의 고향인 우르부라크로 돌아가자는 명목이 존재하지 않았나.

그런 와중에 이런 대패를 하고 말았으니.

그만한 군세를 다시 회복하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애초에 현 상황까지 이끌어 낸 카르가토를 남은 오크들이 신용할지도 미지수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그럼에도 카르가토는 아예 재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지는 않았다.

내부의 분열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단합되는 법.

현재 인간들은 자신들의 근거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테니, 그것을 기반으로 다시금 권력을 붙잡으면 된다.

그리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또 다른 대족장을 내세우면 될 터.

그렇게 카르가토가 오크들의 근거지에 도착했을 무렵.

그런 카르가토를 반긴 것은 다름 아닌 가면을 쓴 한 명의 사내와, 그런 그의 뒤를 지키고 서 있는 수많은 오크 무리였다.

"늦었군. 종족의 수치여."

"너는...!"

전쟁의 많은 패배 요인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용을 부린 사내는, 아룬비다의 날씨보다도 서늘한 눈동자로 그런 카르가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7화

87화 반란

며칠 전.

셰인은 손에 들린 두 개의 물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둘 다 산왕에게서 받은 것인데, 하나는 직육면체의 아카식 레코드.

다른 하나는 푸른빛을 띄우는 구였다.

그중에서도 셰인은 푸른빛을 띠는 구를 먼저 살펴보고 있었는데, 거기서는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뭐라고 해야 할까.

문득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성스러운 검을 쥔 채, 가면을 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클라인.

며칠의 전투 끝에 셰인은 그런 클라인의 검에 가슴을 꿰뚫렸고, 그로 인해 질투의 자아가 소멸해 버렸다.

그리고 이 푸른빛의 구에서는 당시 셰인이 느꼈던 신성함이 담겨져 있었다.

다만 눈앞의 푸른 구체는 전생에 클라인이 휘두르던 성검보다 파괴적인 성향이 더 짙었는데, 이건 아마 클라인의 성검에 담겨 있던 기운과 주인이 다른 탓에 일어난 일인 듯싶었다.

"그런가. 이게 바로 신성이라는 것이군."

그 힘에 대해서는 셰인도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위압감이 좀 있어 보이는 수준에 불과했으니.

전생의 경우, 클라인은 당시 성검으로 오리진을 무력화시키는 용도로 썼다.

그 덕분에 질투의 인격이 사라진 것이니.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이 산왕의 신격은 용도가 많이 다른 듯 보였다.

셰인은 한쪽에 치워 뒀던 오크의 토템을 꺼내 들었다.

"보다 지배 쪽에 치우쳐져 있다라."

그 즉시, 셰인은 이 신성의 사용법이 무엇이고, 산왕이 왜 자신에게 이것을 넘겨준 것인지 의도를 파악했다.

"제법 괜찮은 선물이야."

셰인은 그런 산왕의 신성을 망설임 없이 입으로 가져가 삼켰다.

* * *

늙은 오크 바투칸은 조용히 두 눈을 감은 채 평소와 같이 산왕의 신전을 지키고 있었다.

"세월이... 변했군."

세월이 흐르면 시대도 바뀐다지만, 오크들에게는 그러한 격언이 그다지 통하지 않았었다.

이 혹독한 북부에서는 별달리 변화라 할 만한 게 없었으니.

그러나 요 몇 개월 간, 오크들은 너무 많은 격변의 시대를 지나오고 있었다.

자신들을 무명이라며 다가온 이들의 등장이 그 시작이었다.

현 대족장인 파가부탄과 엘더 샤먼 카르가토는 무명과 손을 잡고 오크 종족을 거두어 준 신을 배반했다.

인간들과 전쟁에서 승리하고 고향을 되찾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족 포식을 강행했고, 이를 거부한 동족은 모두 노예로 만들어 버렸으니.

주로 성인식을 막 치른 오크들은 그런 이를 따라 과거를 잊고 더 이상 신전을 찾아오지 않게 됐다.

그나마 바투칸은 신전을 지키는 신전지기인 터라 그 격변에서 살아남아 노예 신세로 전락하는 꼴은 면할 수 있었으나, 그렇다고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같은 동족을 포식하고 강해지는 것에 과연 의미가 있는가.

바투칸은 그 의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감았던 눈을 떠, 한쪽에 묶여 있는 한 소녀를 바라봤다.

마치 저 밤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달 중 하나를 닮은 찬란한 은발을 가진 소녀는, 의식이 없는지 쇠사슬에 묶인 채 무력하게 앉아 있었다.

"애초부터 우리 오크에게 영광이란 있었는가."

수백 년의 시간 동안 이곳에 갇혀 있는 흡혈귀 소녀.

그녀의 피는 오크들에게 특별한 힘을 가져다주었고, 이 혹독한 북부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원래부터 오크라는 종족은 다른 종족에게 기생하여 살아남아 왔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상황에 자신이 뭐라 말을 덧붙이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가.

비록 자신들의 고향, 우르부라크를 멸망시킨 종족이었으나....

애초에 원인을 따지고 본다면 저 어린 것들의 목숨을 먼저 취한 오크들의 오만이 그 이유였으리라.

반면에 인간들은 어떠했던가.

바투칸은 50년 전 인간들과의 전쟁 당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오크 중 하나였다.

이미 50년이나 흘러 버린 세월이지만, 바투칸의 머릿속에서 그때의 장면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50년 전에 마주했던 인간들은, 마치 오크라는 종족이 꿈꿔 왔던 미래 같았다.

다른 종족의 것을 탐하지 않고, 스스로 성장해 나가는 종족.

비록 그 육체는 나약할지언정 미래를 향한 끊임없는 탐구심을 통해 성장해 나가고, 서로 단결하여 외부의 적을 물리치는 이들.

그 모든 것이, 바투칸에게는 눈부시면서 동시에 절망을 선사했다.

이미 오크들의 내전은 일어났고, 패배했다.

어쩌다 이리 되었단 말인가.

북부의 초대 대족장, 아르가투는 스스로의 힘만으로 사이클롭스를 죽였다.

당시의 그 기적은 자신들의 신마저 놀래킬 정도이지 않은가.

그 영광 앞에 오크들은 미래를 봤다.

하나, 지금은 더 이상 그러한 미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또다시 패배할 테지."

영광 없는 오크들에게 진화란 없다.

다른 존재의 것을 탐하는 것만으로는 고향을 되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선견지명이 있는 오크로군."

"...!"

그때. 그런 바투칸의 뒤로부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본 그 자리에는 어둠에 휩싸인 채 민무늬 가면을 쓰고 있는 존재가 서 있었다.

"...누구시오. 이곳은 무명에서 온 그대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한 장소가 아니오."

그에, 바투칸은 조직에서 찾아온 인물이라 생각하고 축객령을 내렸다.

실제로 파가부탄과 카르가토 또한 조직과 협력은 했으나, 이곳 신전에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 놨으니.

신전이 더럽혀지는 것을 걱정하기 보단, 오크에게 마력의 원천인 흡혈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가면의 존재는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쇠사슬에 걸려 있는 소녀를 향해 다가갔다.

"나가라 하지 않았소!"

"아름다운 존재로군."

바투칸은 당장 저자를 내쫓으려 했으나, 어째서인지 그에게서 풍겨 오는 기세는 바투칸으로 하여금 항거할 수 없는 존재를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면의 존재, 셰인은 말을 이었다.

"늙은 오크여. 과거의 영광을 아는 오크여. 그대는 이 존재가 아름다운 이유를 알고 있나?"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소."

"이 흡혈귀라는 종족은 기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하여금 흡혈을 하여 살아가는 종족이지. 다른 종족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음이야."

"...."

"그럼에도 이들이 그토록 강할 수 있던 이유가 무엇일 것 같나?"

강함.

오크들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힘.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바투칸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모르겠소. 이 비루한 오크가 그런 것을 알기나 할까."

"이들의 존재가 곧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이지."

"그게 무슨 말이요?"

"다른 존재로부터 승리하고 이긴다. 이는 세상에 가장 간단한 법칙 중 하나가 아닌가. 흡혈귀라는 이 종족은 그 누구보다 세상이 정한 법칙에 잇따르는 존재지."

인간도 마찬가지다.

밭을 기르고, 동물을 키우며, 때가 되면 잡아먹는다.

한데 이게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일일까?

아니.

생태계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저들이 특히 강한 이유가 무엇인가. 사실 그에 대한 이유 따위는 없다. 그저 세계가 설계한 대로 태어났다는 게 전부지."

"...그렇다면 모두 부질없는 짓 아니오?"

"아니지. 그렇다면 그들의 것을 배우고, 그게 안 된다면 비슷해지려고 해야겠지."

"그게 지금의 지경에 이른 것이지 않소."

"달라. 너희는 너희의 의지가 아니지 않나. 단 한 번이라도 스스로의 의지로 이 힘을 다루려 했나? 이 힘에 대해 연구하고, 발전시키며 자신들의 한계를 맛보았나? 아니지. 너희는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어. 그저 아기 새마냥 어미가 식사거리를 잡아 오도록 기다리며 머리를 내밀고 있을 뿐이었지."

"...!"

흔히들 하는 착각이 있다면, 오크가 단순히 무식하기만 할 뿐인 종족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단히 착각한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 마력을 다루지도 못하면서, 마력을 사물에 담을 줄 아는 종족이다.

비록 몇몇 선택받은 샤먼만이 가능한 일이었으나, 어찌 됐든 종족 그 자체가 해낸 일이라는 말이다.

"이제 그만 둥지를 떠나 날개를 펼쳐야 할 때가 오지 않았나."

"...그건 또 무슨 말이오. 둥지를 떠나다니."

"너희 군단은 패배했다."

"...."

"그리 놀라지 않는군."

"예상은 했소. 50년 전에 마주했던 인간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니."

"그래, 맞다. 인간은 그리 쉽게 당하지만은 않지. 너희 50만 대군은 끝내 인간의 성벽을 제대로 넘어 보지도 못하고 무너졌으며, 15만의 몬스터 대군 또한 차가운 이곳의 대지와 하나가 되었지."

"...그러는 그대는 누구요."

"너희들이 따르는 신의 대변자."

"뭐라?"

그러자 바투칸의 두 눈이 사나워졌다.

종족의 치부를 말하는 것도 괜찮았다.

모두 맞는 말이었으니.

신전에 찾아온 것도 참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신전에서, 자신들의 신을 모욕하는 말 따위는 도저히 들어 줄 수 없었다.

"너희의 신은 더 이상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라는 대변자를 보냈지."

"헛소리!"

"이걸 보고도 그리 생각하나."

동시에, 셰인은 거인에게 받았던 신성을 내보였다.

푸른빛이 감도는 그 빛은, 바투칸으로 하여금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니.

"그, 그걸 어떻게...?"

너무도 익숙한 저 빛은 자신들의 신, 산왕이 신탁을 내릴 때 내뿜던 빛이지 않던가.

뿐만 아니라 종족이 신을 경배하기 위해 만든 토템에 신성을 깃들도록 만들 때, 신전지기인 바투칸이 항상 봐 오던 빛이었다.

지배자로서 느껴지는 힘.

이제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그 신격이, 다시금 바투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찌 된 연유로 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겠소?"

"산왕과 마주했다. 그리고 그와 내기를 했고, 내가 승리했지. 산왕은 더 이상 이 세계에 관여할 수 없게 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셨는가...."

바투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신의 대변자.

그 말은 허언이 아닐 테니.

"무엇을 바라시오."

"나는 신처럼 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대등한 존재는 될 수 있지."

"대등...?"

"너희의 고향, 우르부라크를 되찾을 수 있는 힘을 내주지. 대신, 너희는 내게 협력해라. 너희가 신에게 버림받게 만들고, 또 너희의 믿음을 저버리게 만든 이들에게 칼을 들어라."

"무명에서 온 자가 아니었군...."

바투칸은 생각에 잠긴 듯 두 눈을 감았다 이내 다시금 셰인을 직시하며 말했다.

"우리 종족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소?"

"가서 전해라. 너희 종족을 이끌던 신의 대변자가 찾아왔노라고."

"...그리하겠소."

그 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기지를 지키고 있던 오크를 포함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예 오크들은 셰인이 전해 온 처참한 종족의 패배에 분노했다.

노예가 된 오크들 또한 자신들의 처지가 그저 종족의 미래를 위한 희생이라 생각했으니.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기에, 이처럼 가장 밑자리에서 참고 견뎌 왔던 것이다.

그러나 패배했다.

대족장은 그 죄를 묻기도 전에 죽음에 이르렀고, 그런 대족장의 앞잡이였던 엘더 샤먼, 카르가토는 자신의 몸뚱이만 영위한 채 이곳을 향해 찾아오고 있단다.

대부분의 오크들은 이게 자신들의 신이 실망했기에 일어난 일이라 생각했다.

거기에 앞장 선 오크는, 그래도 한때 오크들 사이에서 큰 지지를 받고 있던 신전지기, 바투칸이었다.

"신전지기! 너는 저 정체도 알 수 없는 자를 종족의 일에 끌어들이는가!"

"대족장님의 호의로 살아남은 그 명줄을 앞당기는구나!"

당연히, 노예와 반대파 오크들을 감시하기 위해 남겨진 오크들은 곧장 무기를 쥐어들며 위협해 왔으나.

"당장 일족이 어떤 길로 나아가는지도 모르는 버러지들이 말이 많구나."

이어지는 셰인의 말에 오크들이 당장 흥분을 하고 나섰다.

"감히!"

"죽어라!!"

상대가 어떻게 오크어를 하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감히 반란을 부추기려는 저자를 이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되었기에, 그들은 곧장 무기를 쥐고 셰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셰인의 그림자가 일순간 늘어나더니, 어둠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내 그들의 공세를 막아 냈다.

"인간!"

"아니, 다른 무언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전신에 검은 갑옷을 차 려입은 채, 양손은 셰인의 오리진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이빨이 이를 막아 냈다.

마음 같아서는 감히 주인님께 무기를 들이댄 놈들의 사지를 찢어 버리고 싶었으나, 참았다.

이 또한 셰인의 명령이었으니.

"오크들이여. 너희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50만 대군은 모두 고향 땅조차 밟지 못한 채 사그라졌다. 인간들의 성벽은 여전히 굳건하게 서 있으며, 그 너머로 인간들이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 대족장 파가부탄은 죽음으로서 50만 동족의 죄를 갚지 못했고, 엘더 샤먼 카르가토 또한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비굴하게 살아남았다. 그럼, 이제 너희가 선택할 시간이다. 어찌할 테냐."

셰인은 그런 노예 오크들을 바라봤고, 그들의 두 눈에는 의지가 깃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대족장이 인간들에게 패배했다는 것이... 정말이오?"

그중 한쪽 팔이 잘린 오크가 그리 물어 오자, 셰인은 품에서 하나의 토템을 꺼내보였다.

"그건...."

"대족장의 증표!"

"정말 패배했단 말인가!"

그러자, 대족장 측에 서 있던 오크들의 얼굴에는 절망이 떠올랐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8화

88화 흡혈귀

그렇게, 카르가토는 두 눈 멀쩡히 뜬 채로 자신의 부족이 통째로 강탈당하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어떻게든 발악을 해 보려 했으나, 준비된 상태가 아닌 샤먼은 무력하다.

카르가토는 기약 없는 복수를 다짐하며 차가운 벌판 아래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그림자 밑으로 한 소녀가 숨어든지도 모른 채.

셰인은 그런 카르가토를 일부러 살려서 보냈다.

황녀에게 공을 최대한 몰아주려면 아직 죽여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대변자여. 어찌할 생각이오?"

"인간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할 거다."

"음?"

"내가 이미 수를 써 뒀다. 그보다, 우선 흡혈귀를 만나 봐야겠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녀는...."

"괜찮다. 생각해 둔 것은 이미 있으니."

흡혈귀는 위험한 종족이다.

단 몇 명으로 하룻밤 사이에 과거 오크들의 고향, 우르부라크를 초토화시키지 않았던가.

당장 한 마리만 날뛰더라도 셰인이 감당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셰인에게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갑의 입장에 서 보겠군."

그러면서, 셰인은 신전으로 향했다.

* *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공간.

한 점의 빛조차 들어오지 못하는 이곳에 한 소녀가 두려움 가득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밤하늘의 달처럼 찬란한 은발과, 아룬비다의 눈밭보다도 창백한 피부.

거기에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지닌 소녀의 눈에서는 아무런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오크들은 자신들이 마력을 깨우치기 위해 이 소녀에게 흡혈을 당하고, 그 피를 채혈해 왔다.

그리고 그 피를 마시는 것으로 마력을 터득해 온 것이다.

그러나 흡혈귀에게 있어서 혈액이란 생명력 그 자체인 탓에, 소녀는 매번 채혈을 당할 때마다 생살이 뜯겨져 나가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런 시간을, 무려 수백 년 동안 겪어 왔으니.

소녀는 더 이상 고통에 몸부림 칠 기운조차 모두 소진하여, 눈동자에는 무기력함만이 남아 있었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그러한 고민도 샐 수 없을 만큼 해 봤으나, 기억에도 없던 어린 나이에 납치를 당한 어린 흡혈귀는 그 해답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

"...."

셰인은 그런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동질감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곳은 갇힌 소녀의 정신세계.

그녀가 직접 만든 정신세계는 이처럼 아무것도 없는 흑색의 공간에 불과했다.

그만큼 그녀에게 있어서 무엇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전생의 셰인조차도 이러지는 않았다.

셰인에게는 있던 말동무조차 없이, 이 어린 소녀는 지금처럼 새카만 공간에 혼자 갇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고통을 두려워하며 수백 년이라는 시간을 견뎌 온 것이다.

그 시간 속 느껴지는 고통을, 감히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눈앞의 소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셰인. 그 스스로 밖에 없었다.

하지만 셰인은 지금 이 눈앞의 소녀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니다.

그걸 다시금 스스로에게 인지시키며, 셰인은 입을 열었다.

"나가고 싶나."

"누구...?"

인간의 언어는커녕 언어라는 것 자체를 알 리가 없는 소녀였으나, 정신세계에서는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이 고통만 가득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으냐."

"아...."

진득한 피가 담긴 듯한 눈동자가 놀라움에 커진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한 또 다른 존재.

이 검은 공간과 고통뿐이 전부였던 소녀에게 이러한 경험은 생전 처음이었기에 당황한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셰인은 그런 소녀의 말을 천천히 기다렸다.

지금 저 소녀가 느끼는 감정을 전부 이해한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비슷한 상황을 겪어 봤기에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바깥이라는 게, 존재하나요?"

세상에 대한 제대로 된 개념도 확립되지 못한 소녀의 질문에, 셰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훨씬 다채로운 세상이 존재하지."

"이곳처럼 아프지는 않나요?"

"글쎄. 그건 네가 하기 나름일 거다. 하지만, 여기서처럼 아무 이유 없는 고통은 찾아오지 않지."

"아...."

그러자, 그녀의 눈동자에서 자그마한 물기가 어리더니 이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왜 눈물이 나는 걸까.

고통에 겨울 때만 나오던 게 아니었던 건가.

새로운 깨달음을 느낄 시간도 없이,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고 싶어요. 여기서...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그래.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내가 도와주마."

"가시는 거예요...?"

문득 불안하다는 듯 소녀의 두 눈이 떨렸다.

두려울 테지. 생전 처음 보는 존재에게도 이렇듯 의존하고 싶어 할 만큼.

"내가 여기 있을수록 네가 밖으로 나오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괜찮으냐."

"...."

"자주 찾아오마. 이제 이곳에서 고통을 겪는 일도 없을 테니, 안심하거라."

"아아...."

정말 그 고통이 이젠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까.

셰인은 소녀에게 잘 있으라는 말을 남긴 채, 그 공간에서 사라졌고.

소녀는 언젠가 셰인이 다시 찾아올 날만을 기다리며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 * *

"잘 다녀왔소?"

눈을 뜬 셰인을 반긴 존재는 바투칸이었다.

신전지기인 그는 셰인이 흡혈귀 소녀의 정신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그 주변을 지키기 위해 서 있었다.

"그래."

"신기하군. 여태까지 정신이 깨어 있었다니."

바투칸은 어딘가 묘한 표정으로 흡혈귀 소녀를 바라봤다.

사실, 둘은 서로가 앙숙이라 해도 좋을 사이였다.

바투칸은 자신들의 선조가 모조리 흡혈귀에게 몰살당해 고향을 잃은 처지가 되었고.

소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이곳까지 납치를 당한 것이었으니.

여태까지 소녀의 존재를 딱히 신경 쓰지 않았던 바투칸이었으나, 이어지는 셰인의 설명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인격이 형성되고, 동시에 우리가 피를 뽑아 쓸 때마다 고통을 느꼈다는 건가."

바투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월이지 않은가.

무려 수백 년 동안 생살이 뜯겨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 아무런 지식도 없이 그저 갇혀 지냈다는 사실이 바투칸으로 하여금 씁쓸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오크의 오만함이 잘못이었을까, 흡혈귀의 잔혹함이 문제였을까.

바투칸은 그 둘에 우선순위를 정하지 않았다.

단지, 바투칸은 이제라도 소녀가 자유롭길 바랐다.

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저 소녀의 고통이 곧 오크라는 종족의 미래가 달린 일이었으니만큼, 바투칸은 감히 거기에 의견을 달 수 없었다.

"바투칸. 너는 우선 종족을 다스려라. 나는 방법을 찾도록 하지."

"방법이라면?"

"이 흡혈귀가 없더라도 너희가 마력을 다룰 수 있는 방법. 그걸 알아오겠다."

"...! 그런 게 가능한 일이오?"

"인간도 할 수 있던 일이다. 이미 선례가 있던 일이니만큼, 너희라고 못할 것은 없지."

"으음...!"

다만 그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무수한 노력이 필요할 터.

그럼에도 셰인이 이리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신이 남기고 간 아카식 레코드 덕분이었다.

"자주 찾아오도록 하지. 내부 관리는 철저히 하도록."

"알겠소. 그리하도록 하지."

"특히, 기술을 깨우치도록 해라. 전투보다는 기술의 발전이 너희 종족의 미래를 감당할 테니."

"기술이라...."

오크라고 무식하게 둔기만 들고 싸우는 것은 아니다.

그들 또한 쇠를 다를 줄 알았고, 몬스터의 부산물로 다양한 장비를 만들 줄 알았으니.

"필요한 일에 대한 분류를 확고히 하도록."

앞으로 오크들은 셰인을 위해 해 줘야 할 일이 많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오크들의 고향을 되찾아 줘야겠으나, 셰인은 오크들의 고향 우르부라크에 관한 대략적인 지식은 알고 있었다.

어차피 조직과 맞서 싸우다보면 우르부라크 또한 다시 오크들의 품에 돌아올 터.

"가끔 찾아오도록 하지."

"알겠소. 그런데, 엘더 샤먼은 어떻게 할 생각이오?"

"놈들이 자리를 잡았다고 했나?"

"그렇소. 그리고 그 수가 상당하지."

비록 50만 대군이 패배로 인해 많이 죽었지만, 여전히 많은 숫자가 살아남았다.

엘더 샤먼 카르가토는 용케 흩어진 오크들을 규합시키고 자신들만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어 낸 상황.

바투칸은 혹여 카르가토가 이곳을 향해 진격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셰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여기로 와서 전쟁을 해 봐야 녀석에게 유리할 게 없다. 놈도 이미 너희가 마음을 돌린 것을 알고 있으니."

언젠가 놈에게도 여유라는 게 생긴다면 피의 복수를 감행하려 할 터이나....

글쎄. 놈에게 과연 그런 여유가 생길 날이 찾아올까.

"당장은 놈도 다가올 인간의 군대에 대응하려 할 테지."

카르가토는 더 이상 인간의 영토를 침략할 생각이 없었다.

대신 50년 전처럼, 인간의 군대를 상대로 꾸준히 소모전을 펼치며 알아서 나가떨어지기를 노리고 있을 터.

더군다나 아직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는 무명의 입장에서 이렇듯 와해된 오크는 더 이상 쓸모가 없을 터.

유일하게 놈들이 흥미를 가지고 있을 만한 게 흡혈귀였으니, 그 부분만 주의한다면 될 일이다.

'그래 봐야 산왕의 기운 때문에 놈들이 손을 댈 방법도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고, 셰인은 다시금 비두론 성으로 돌아왔다.

* * *

"어디를 그리 쏘다니고 다니나."

자신의 방에 설치되어 있던 포탈을 활용해 돌아온 셰인을 반긴 것은 다름 아닌 아나스타샤였다.

"오크들의 근거지에 다녀왔습니다."

"그런가. 일은 잘된 모양이군."

"예. 그렇습니다."

아직 자신의 정체를 완벽히 밝히지 않은 올리시아와 다르게, 아나스타샤에게는 셰인도 상당한 정보를 푼 상태였다.

그녀의 성격상 그러한 정보들을 통해 정치적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깔려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제국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충분한 결단력까지 갖추고 있는 사람이지 않은가.

이런 사람은 괜히 정보를 숨기기보다, 풀어줌으로써 믿음을 사는 게 더 이로웠다.

"전쟁의 기간은 어느 정도로 보고 있지?"

"지금으로서는 최대 2년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아룬비다를 포함해, 아직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북부의 땅은 굉장히 넓다.

거기에 엘더 샤먼인 카르가토는 그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오크였으니.

이미 자신의 본거지를 제외하더라도 더 많은 부락을 만들어 둘 예정일 터.

놈은 분명 철저한 게릴라전으로 전쟁의 양상을 이어 갈 것이다.

반면 셰인의 포탈 덕분에 황실의 군대는 보급에 큰 문제가 없어졌으나, 여전히 아룬비다의 혹독한 날씨는 해결방안이 없기에, 전쟁은 그만큼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무겁군."

"어차피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 2년 동안 황태자를 견재할 수단이 무궁무진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앞서 이미 두 황녀에게 여론전으로 밀린 새뮤얼은 이번 전쟁에서 발을 뺄 수단이 차단됐다.

그런 만큼 전쟁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 최대한 공을 쌓아 밀렸던 여론에 대항하려 할 터.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마냥 밝지는 않았는데, 그 과정에서 고통받을 병사들의 걱정 때문이었다.

분명 많은 사상자가 생길 테지.

그러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내버려 두면 그 희생이 같은 인간에게 몰려가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새뮤얼의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지금 흘리는 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희생이 생겨날 것이다.

오히려 지금 하는 행위는 미래에 일어날 유혈 사태를 줄이기 위한 일이었으니, 아나스타샤도 이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더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더 노력해야겠군."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면서 셰인은 아나스타샤가 직접 타 온 홍차를 집어들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9화

89화 2년 후 (1)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흐른다지만.

보내는 사람마다 시간의 가치는 달라지며, 또 누군가에게는 남들에게 잠깐의 시간에 격변의 시기를 보내기도 한다.

"세 분 모두 고생 많았습니다."

"뭘, 우리가 하는 일이 그렇죠."

"맞슴다."

"아주 그냥 뿌리가 뽑혀졌더만요. 하하핫!"

갑작스레 눈보라가 몰아치던 날.

아룬비다의 삼총사, 케빈과 맥고완, 해커츠는 정찰을 끝마치고 돌아와 미미르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2년 전, 특수 수색대 임무를 무사히 마친 그들은 체계적으로 직위가 개편된 아룬비다에서 공을 인정받아 상급 간부의 위치에 올랐다.

"오크들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그 빌어먹을 놈이 뒤진... 아니 죽은 이후로는 완전히 와해됐습디다. 오히려 인간만 보면 도망치더라 이 말입니다."

케빈의 보고에 미미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군요. 이젠 슬슬 종전을 선포해도 될 시기가 된 것 같습니다."

어느덧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대족장 파가부탄의 죽음 이후 남은 오크들을 대동했던 엘더 샤먼, 카르가토의 세력은 추악한 발악 끝에 아나스타샤의 지휘하에 토벌이 완료됐다.

2년 동안 끈질기게 근거지를 바꿔 가며 철저하게 게릴라전으로 이어 갔던 놈이었으나, 끝내 꼬리가 밟힌 것이다.

그 후로는 오크들도 무력화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황실의 군대 역시 물러갔고.

"그치들이 없으니 아주 살맛납니다, 그려."

"아무래도 이쪽의 주민들과 어울리기에는 힘든 이들이었죠."

황실의 군대는 초기에 아룬비다에 머물다가 진군이 시작된 시점에서 따로 거점을 만들어 그곳에서 지냈다.

다만 군사 작전을 펼치다 보면 마주치는 경우가 제법 많았는데, 그때마다 아룬비다의 주민들과 다양한 문젯거리를 만들어 왔다.

"그래도 다른 분들과는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뭐, 황실에 소속된 놈들처럼 우릴 무시하는 인간들은 없으니... 우리도 마냥 싸움닭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리고 그 뭐냐, 황녀님께서 많이 도와주고 계신다는데 우리가 막돼먹게 움직여서야 쓰겠습니까."

"황녀님께서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기껍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지난 2년 동안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아룬비다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했다.

약 50년 전에 일어났던 오크의 남하 이후 일어난 군단의 침범.

이를 막기 위해 2년 전 아룬비다가 얼마만큼의 희생을 했고, 또 성공적으로 막아 냈던가.

비록 지금도 당시에 모습을 나타냈던 불길한 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15만이라는 몬스터 웨이브와 50만 대군의 오크 군단을 막아 낸 결과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맥고완. 팔은 좀 괜찮습니까?"

"예. 이젠 많이 익숙해져서 이 팔로도 홍차를 타 마시고 있슴다."

"그거 잘된 일이로군요."

"임마, 넌 앞으로 평생 황녀님께 충성을 맹세해야 돼! 그 팔 하나 붙이는데 얼마나 돈이 들어갔는지 아냐?"

"당연한 소리 하는 거 아님다, 해커츠."

육중한 체구의 맥고완은 지난 전쟁에서 한쪽 팔을 잃었다.

그러나 다행히 특수 수색대의 임무를 무사히 완수한 보상으로 마탑에서 공수해 온 마공학 인공 관절 시술을 받을 수 있었다.

"아무튼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이만 들어가서 쉬도록 하세요."

삼총사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최근 완공된 목욕탕을 향해 달려갔고, 미미르는 그런 그들을 배웅하며 테라스로 나갔다.

지난 2년 사이, 아룬비다에는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아룬비다의 남쪽 성문에 거대하게 설치되어 있는 텔레포트 포탈.

지금도 여러 사람들이 이용 중인 저 포탈을 중심으로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아직 아룬비다에는 제법 많은 수의 몬스터들이 남아 있다.

몬스터의 시체가 사라지고 마석이나 낮은 확률로 부산물을 얻을 수 있는 던전과 다르게, 아룬비다는 던전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던가. 덕분에 녀석들의 부산물은 비싼 값에 거래되곤 한다.

클레이튼 상회에 소속된 상단이 이를 사들였고, 지속적으로 추가 매입을 하고 있는 상황.

자연스럽게 숙박 시설의 필요성으로 이어졌다.

거기에 이전에는 별 활용 가치가 없던 금화의 가치가 수직 상승하고, 여타 평범한 도시처럼 아룬비다에서도 화폐를 이용한 거래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아룬비다에는 마석 광산은 없을지언정 질 좋은 철광산이나 희귀 금속이 잠들어 있는 광산이 많았다.

1황녀인 올리시아는 북부의 맹주인 아나스타샤와 협약을 맺어 그러한 광산을 개발하기에 착수했고, 그 덕분에 인부들도 대거 고용되고 있는 시점이지 않나.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골드로 아룬비다의 시설들을 한 차례 뒤집어엎으며 이른바 산업 혁명이 일어난 것과 같은 효과를 보게 됐다.

이제 종전 선언만 이루어진다면 일반인들도 관광을 위해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

오크들이 억지로 이루어 낸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몬스터들의 개체수가 급감한 지금, 아나스타샤는 아룬비다의 주민들과 올리시아의 지원군을 통해 인간들의 영역을 더욱 넓히는 단계에 들어섰다.

과연 2년 전이라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변화였을까?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게 된 계기는 단 한 사람의 등장에서부터 시작됐다.

"지금쯤 뭘 하고 있을는지요."

2년 전.

그 누구보다 아룬비다를 위해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그는 어느덧 늠름한 청년이 되었다.

* * *

"드디어 끝!"

디라일라의 외침과 함께 모험가 협회에서 방금 막 나온 클라인과 그의 동료들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던전도 꽤 성공적이었네."

"꽤? 이럴 때는 완벽했다라고 표현해야지."

알 로스의 말에 답한 사람은 마법연합 총관의 손녀 아르티아였다.

그녀의 말처럼 방금 그들은 또 하나의 던전을 완벽하게 클리어하고 관련된 보고서를 모험가 협회에 제출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이로써 그들이 미개발 던전을 클리어한 횟수는 총합 20회가량.

일반적으로 생각해도 결코 적은 양이 아닌데, 더 놀라운 건 모든 던전이 정보조차 확보되지 않은 미탐사 던전이란 것이다.

가히 말도 안 되는 성과였다.

때문에 그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활동했으나, 덕분에 실력도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겪어 보지 못한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도 월등해졌고, 무엇보다 확고한 명성을 얻어 이곳저곳에서 협업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고마워. 덕분에 이번에도 신세를 졌네."

그중 하나인 아네이스가 인사를 건네 왔다.

전대 저지먼트 기사단장인 로버트의 딸이자, 셰인의 약혼녀였던 그녀도 최근 적지 않은 명성을 얻고 있었다.

애초에 저지먼트 기사단이라는 이름값도 있었으나, 그와 별개로 그녀 스스로가 만들어 낸 팀원과 상당한 양의 던전을 클리어 했기 때문이다.

이번처럼 클라인과 함께 협업을 이어 가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녀 스스로 탐사를 진행하는 일이 더욱 많았다.

"아, 응. 너도 고생 많았어. 음... 그런데 요즘은 어때?"

"뭐가?"

"그... 형님이랑 파혼된 거."

"딱히.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아."

셰인과 아네이스의 약혼은 결국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현 저지먼트 단장인 올리버 G 대니얼이 급격히 성장하는 클레이튼 가문을 더 이상 컨트롤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셰인도 그렇고 아네이스도 그렇고, 둘 모두 약혼 관계라는 게 무색할 정도의 사이였기에 크게 신경을 쓰고 있던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둘은 서로의 관계를 각자의 목표를 위해 이용해먹은 감이 없잖아 있을 정도였으니.

오히려 그 사이에 낀 클라인만 어정쩡해진 그 관계가 아쉬웠을 따름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겪는다면 셰인에게 큰 변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어떤데?"

"형님?"

"응."

"여전히 아룬비다에 머물고 있어."

이제는 거의 종전에 가까워진 상황이었으나 셰인은 아룬비다에서의 일에 제법 많이 관여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제 겨우 안정기에 들어선 메자이아 대수림의 건으로 인해 바쁜 클레이튼 가문의 가주, 로웰을 대신해 아룬비다에서 많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클라인의 답변에 아네이스는 무언가 실망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무렵.

"아, 그리고 이거. 형님이 너에게 전해 달라고 했어."

"편지?"

"응."

클라인에게 건넨 편지를 받은 아네이스는 그걸 품에 갈무리하고 언뜻 미소를 지었다.

"아직 잊지 않았구나."

"아...."

그러자 클라인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겉으로 보기에 아네이스는 여전히 셰인에게 어느 정도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클라인의 착각에 불과했다.

아네이스가 기다리고 있던 것은 셰인과 했던 어느 한 약속 때문이지, 약혼에 관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클라인은 표정 변화가 극히 드문 아네이스가 저렇듯 미소를 지을 때마다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쉽다, 정말.'

셰인이 바뀐 지도 어느덧 3년에 다다르고 있는 상황.

클라인도 더 이상 셰인이 이전처럼 돌아가리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보다 부드러워질 수 있지 않은가.

'그래. 언젠가 그런 날이 오겠지.'

한편 클라인이 모험가 협회에서 큰 명성을 거머쥔 반면, 셰인 또한 마법사들 사이에서 확고히 이름을 새겨 두고 있었다.

지금도 셰인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의 논문이 발표되면서, 그때마다 비슷한 학파의 마법사들이 곡소리를 내고 있는 상황이다.

1년 전쯤에는 아르티아도 비슷한 일을 겪었기에 한동안 클라인이 대신 시달려야만 했다.

"클라인 님. 그럼 다음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그런 클라인에게 말을 걸어온 이는 알렉스였다.

그 또한 이제는 어엿한 전사의 모습을 갖췄는데, 등 뒤로 다양한 무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검과 한 손 도끼, 단창과 활 등.

클라인에게 검술을 배우고, 이따금 협업을 위해 함께 다니는 모험단으로부터 기술을 흡수한 알렉스는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훌륭한 모험가였다.

이미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백병지왕(百兵之王)이라는 대단한 칭호까지 얻지 않았던가.

정작 알렉스 스스로는 그 칭호가 과분하다며 꺼리는 듯했으나, 그만큼 무기를 다루는 능력에 있어서 많은 모험가들에게 인정을 받은 상황이었다.

"아, 당분간은 휴식기를 가지려고. 2년 동안 열심히 해 왔으니까, 몇 개월 정도는 정비를 해야지."

원래라면 진작에 가져야 할 시간이었으나, 일행들 모두 의욕이 넘쳐 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는 단순히 던전을 클리어 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명성이 늘어날 것도 없었기에 일행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시려나...."

이따금 편지를 주고받긴 하나, 셰인도 바쁜 시간을 보내는 듯했고.

클라인 또한 셰인이 전해 준 던전의 정보를 토대로 탐색을 진행하느라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나도 편지 좀 보내 봐야겠다.'

그래도 이제는 얼굴 한 번쯤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클라인은 많은 인파들로 가득한 도시를 걸어갔다.

* * *

두 눈을 뜬 셰인은 자신이 잠들어 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평소처럼 세안을 마친 후 옷을 차려입었다.

그대로 의자에 앉아 자신에게 도착한 클라인의 편지를 뜯어 읽었다. 아네이스가 자신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는 이상한 오해와 함께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셰인의 방.

침대로부터 꾸물거리는 움직임이 감지됐다.

"음. 편지인가? 혹시 다른 사랑하는 님에게서 온 건 아니겠지."

이불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아나스타샤였다.

태어난 모습 그대로의 나신의 몸으로 이불 속에서 고개를 내민 그녀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셰인을 바라봤다.

"비슷합니다."

"호오? 이 나를 두고 다른 여자의 이름을 찾나?"

"여자는 아닙니다. 제 동생 클라인에게서 온 편지이죠."

"그것참 다행이군. 아니었다면 오늘 밤에 완전히 잊어버리게 하려고 했는데."

"...."

본론만 말하자면 편지 속 클라인의 걱정은 하등 쓸모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눈앞의 아나스타샤가 있는 이상, 클라인이 생각하듯 셰인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니게 됐으니.

어쩌다 이렇게 됐더라.

아나스타샤와 이런 관계가 시작됐던 게.

셰인은 괜히 떠오르려는 어젯밤의 기억을 애써 무시하며, 이 관계의 시작을 떠올렸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90화

90화 2년 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