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2년 후 (2)
셰인이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해 온 일은 결코 적지 않았다.
대외적으로는 틈틈이 논문을 발표하며 마법사로서의 명성을 넓히는가 하면, 가문의 사업 중 일부를 맡으며 아룬비다에 급격한 상업적 성장을 안겨 줬다.
거기에 산왕으로부터 받게 된 아카샤의 아카식 레코드의 활용법을 연구하면서, 그동안 정체되어 왔던 마법사로서의 실력도 늘려 어느새 4서클의 마법사가 되었다.
또한 산왕의 대변인으로서 오크들이 흡혈귀의 마력이 아니더라도 마력을 깨우칠 수 있도록 연구를 진행했다.
앞으로 오크들이 해 줘야 할 일이 결코 적지 않은 터라 이것은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직 산왕의 봉인에서 벗어나지 못한 흡혈귀에게 금제를 가할 방법을 찾아내는 대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비록 오크들에 의해 강제로 채혈을 당하며 정상적인 성장을 이루지 못한 흡혈귀였으나, 그녀는 엄연히 '진혈'이라 불리는 순혈 중 순혈의 피를 이은 흡혈귀지 않나.
혹여라도 그녀가 폭주를 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아나스타샤의 영혼을 복구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앞으로 1황녀인 올리시아와 함께 아나스타샤가 해 줘야 할 일이 많았기에 이 역시 신경 써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산왕으로부터 얻은 마력의 근원을 통한 영혼의 복구법. 그걸 실현시켜야만 했다.
하나같이 쉬운 일이 없었으나, 셰인은 잠도 최소한으로 줄인 채 매일같이 연구에 매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 비효율적이지 않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셰인에게 아나스타샤가 그리 말해 왔다.
"뭐가 말입니까?"
"그대가 해야 할 일 중 대부분은 외부하고 소통을 해야 하지 않나."
"음."
그것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는 했다.
마법적 논문의 경우에는 클레이튼 가문의 후원을 받고 있는 카비르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과 협업 중이라 대부분 낮에 시간을 소모한다.
뿐만 아니라, 셰인은 의외로 마법사로서 갖춰야 할 서클에 대한 심층적인 개념이 부족했다.
이는 전생에도 그렇고 이번 생에도 마찬가지로 마법은 쓰되, 추구하는 방향성이 달랐기 때문이다.
하여 그 부분은 마탑의 장로인 케이튼의 자문을 제법 받아야만 했다.
그뿐이던가?
군사 회의를 할 때면 미미르와 함께 아나스타샤를 보조하러 가곤 하지 않던가.
그야말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이런 식으로 낮에 다른 이들과 소통에서 소모되는 시간이 있던 만큼 아나스타샤의 증상을 봐야 했던 셰인은 낮에 시간이 주로 부족했던 것이다.
"어차피 나도 군사 회의에 시간이 잡아먹히는 일이 많으니, 차라리 저녁에 그대의 방으로 찾아가도록 하지."
"황녀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남들이 들으면 기겁할 만한 일.
다 큰 남녀가 한 밤에 같은 방에 있다니.
그것도 제국의 꽃이라 불리는 아나스타샤와?
물론 소문을 퍼뜨릴 인력 자체가 없었기에 이상한 추문이 퍼지는 결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아무튼.
그 결과 아나스타샤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물리적 접촉도 잦아질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맨살을 드러낸 아나스타샤의 등에 손을 올리는 등.
남들이 보면 필시 오해할 만한 행위가 잦았으나, 둘 다 딴 마음을 품는 일은 하지 않았다.
만약, 그 사고가 터지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아카식 레코드의 도움으로 마력의 근원을 어느 정도 해석하는 데 성공한 시점.
슬슬 근원석으로부터 아주 일부분의 힘을 뽑아 아나스타샤의 영혼에 접목시키는 과정에 자그마한 결함이 생기고 말았다.
셰인의 영혼은 이미 한 번 마력의 근원에 우연찮게 영향을 받은 상태였고, 아나스타샤 또한 방금 막 마력의 근원에게 영향을 받은 상태였다.
그 거리를 충분히 벌려 두지 않고 섣불리 접근하던 중, 둘의 영혼이 극히 짧은 시간 동안 결합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그 결과 셰인은 아나스타샤의 기억을, 아나스타샤는 셰인의 기억을 일부분 서로 엿보게 되고 말았다.
'그나마 중요한 기억은 아니라서 괜찮나.'
다행히 아나스타샤가 셰인의 영혼과 결합하는 와중에 본 기억은, 산왕과 대화하는 장면 중 일부였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다른 시간선에서 어떤 죽음을 맞이했는지 끝내 보고 말았다.
그게 문제였던 걸까.
아나스타샤는 그 과정에서 끝내 깊은 슬픔에 매몰되고 말았다.
다른 시간선에서의 일이었으나, 결국 같은 영혼이 겪은 사건이다.
셰인이 가지고 있던 그 기억과 마주한 순간 아나스타샤는 당시의 자신과 깊게 몰입되어 극심한 공허함과 무력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때는 정말 위험했다.
아나스타샤의 영혼은 이미 상당히 금이 간 상태였는데, 전생에 소멸되어 버린 자신의 영혼과 일순간 공명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대로 그녀가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없던 셰인은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아나스타샤가 그런 셰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전생에 노처녀로 죽었군."
"...예?"
그런데 하필 저 얘기를 꺼내는 순간이 아나스타샤의 영혼을 돌보기 위해 서로 맨살이 닿고 있을 때였다.
거기에 비록 셰인은 다른 영혼을 분해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읽는 일이 잦았으나, 그래도 영혼이 결합된 적은 처음이었기에 그녀의 기억을 읽게 되면서 적잖은 여파가 있는 상태였다.
만약 그때 조금만 더 냉정했더라면 그날 밤 사고를 치는 일까지는 가지 않았을 텐데....
하필 서로의 몸이 맞닿은 상태였고.
하필 셰인이 읽게 된 아나스타샤의 기억은 처음 아룬비다로 온 상태로 그녀가 가장 외로울 당시였으며.
하필 그날따라 밤하늘을 비추는 두 달이 너무도 아름다웠을 뿐이었다.
"뭘 그리 생각하고 있어? 전날 밤이 그리도 좋았나?"
"...."
문득 상념에서 깨어난 셰인은 아나스타샤의 저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긍정을 하려 하니 셰인에게 익숙하지 못한 이 감정은 너무도... 뭣한 것이었고.
부정을 하자니 아나스타샤에게 실례가 될 것 같았다.
"훗. 됐다. 그럼 점도 귀엽군."
살다 살다 귀엽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 본 셰인이 자연스럽게 눈살을 찌푸리던 그때, 아나스타샤가 이어서 말했다.
"아무튼, 오크들의 마지막 근거지까지 뿌리를 뽑았군. 이제는 종전이야."
"...그렇군요."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걸린 전쟁이 드디어 끝맺음을 맞이한다.
이는 분명 좋은 소식이었다.
"올리시아의 군대는 아직 남아서 광산의 개발 쪽으로 인원을 돌리겠다더군."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아마 당분간 군대를 일으킬 일은 없을 테니."
"흠. 말만 들어 보면 언젠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아나스타샤의 말에 셰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도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지난 시간 동안 지하도시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전 하이엘 왕국의 기사단장, 애덤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 * *
-최근 이종족 노예를 대량으로 사들이는 움직임이 포착됐습니다.
수정구로부터 애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가. 주로 사들이는 쪽은?"
-완벽하게 파악은 못했습니다만, 주로 4층의 경매장에서 거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중에는 저희가 주목 중이던 인물도 포함됐습니다.
"그때 그 정보상이로군."
-...예. 맞습니다.
지하도시의 경매장이라면 익명이 철저하게 보장되어 있는 장소였으나, 애덤이 줄곧 시선을 떼고 있지 않던 존재가 있었으니.
왕국에서 애덤을 암살하려 했던 정보상의 리더였다.
"아직 섣불리 판단하기는 힘들겠지만, 당장으로서는 놈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가정을 해야겠군."
-...조직입니까?
"아마도."
-좀 더 자세히 파 보겠습니다.
"아니, 내가 직접 찾아가지."
-괜찮으시겠습니까?
애덤의 걱정은 괜한 것이 아니다.
최근 클레이튼 가문의 위명이 얼마나 높던가.
근 2년 동안 가장 핫한 메자이아 대수림과 아룬비다의 상권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클레이튼 가문이다.
또 동시에 클라인은 모험가들 사이에서, 셰인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상당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 셰인이 직접 지하도시와 관련됐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다면 그 이름값에 상당한 영향이 생길 터.
"걱정 마라. 신분은 철저히 숨길 테니."
하지만 셰인에게 이름값은 목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니다.
쓰일 때 쓰고 아닐 때는 말아야 하는 것에 굳이 매달릴 필요는 없다는 의미다.
-그리 말하신다면...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걸릴 생각도 없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셰인은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지하도시로 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그런가. 당분간은 이별이겠군."
"예. 하지만 저는 여기에 있어야 할 것 같군요."
"알겠다. 그런 걸로 해 주지."
슬슬 황태자 측에서도 셰인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을 터.
그들의 눈이 이곳 아룬비다에도 숨어 있을 테니, 적당한 알리바이는 필요했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는 데 가장 적절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셰인은 자신의 방에 설치한 포탈을 통해 은밀히 아룬비다에서 빠져나왔다.
* * *
지하도시는 총 5층으로 구분이 지어진다.
그중 지하 1층은 적당히 불법적인 루트를 통해 들어오는 물건들이 판매되는 지하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2층은 보다 법적 제재가 강한 물건들이 즐비하고, 3층부터는 투기장이나 도박장, 적당한 크기의 정보상들이 있다.
주로 3층까지는 적당히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이 들어온다면, 4층부터는 본격적으로 지하도시의 어둠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지하 경매장이 존재한다.
지하 경매장에서는 철저하게 신분을 감추고 진행되는 경매인 만큼, 극히 희귀한 물건들이 들어온다.
그중에는 이종족 노예는 물론이고 같은 인간마저 노예로 팔리고 있으며, 마약과 불법 도핑제 등도 적지 않다.
그 외에는 살인 청부업이나 고급 정보상 등 수많은 불법이 난무하는 장소이며, 5층부터는 지하도시의 최상위 간부들만 출입이 허가되는 구역이다.
"갈 길이 멀군...."
그런 지하도시에서 현재 3층에 자리를 잡은 애덤은 그리 중얼거렸다.
어느새 이 지하도시에 들어온 지도 2년이 넘은 시점.
애덤은 최대한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데 집중했고, 그 결과 나름 3층에서 제법 존재감 있는 정보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애덤이 원하던 구역은 4층이었다.
주로 고급 정보가 오가는 장소이며, 어느 곳에 가더라도 남부럽지 않은 대접을 받는 거물들이 등장하는 장소.
하이엘 왕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사(祕事)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현재 거주 중인 3층으로는 부족했다.
그러나 4층부터는 지하 세계에서 로열이라 불리는 이들만이 자리를 허가받을 수 있었고, 실상 4층부터 5층에 자리를 잡은 이들과 인맥이 없는 이상 3층이 한계였다.
"끈을 만들지 않으면 힘들 것 같은데...."
그렇게 답답함을 느끼고 있으려던 찰나.
"없으면 만들어야지. 그뿐이지 않나."
"...오셨습니까."
그런 애덤의 등 뒤로 민무늬 가면을 쓴 존재, 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91화
91화 거래 장부 (1)
"끈을 만든다는 말씀입니까?"
지하도시에 급격히 늘어나는 이종족 노예를 위주로 한 거래의 진상을 파악하려면 보다 깊은 지하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니 아래층과의 끈이 필요한 애덤의 질문에 셰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끈을 만들 필요가 있나. 자리가 나면 그때 차지해도 될 일이지."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실제로 선례가 있지 않나?"
"음...."
셰인의 말을 이해한 애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가지 선례가 있다면, 본래 이곳 지하도시를 주름잡던 패밀리 중 하나인 흑마법사 집단의 경우, 5층을 지배하던 파이브 패밀리 중 하나였다.
그들은 주로 암시장을 다스렸는데, 38년 전에 일어난 제국의 흑마법사 토벌 작전에 의해 붕괴되고 말았다.
때문에 암시장을 다스리던 패밀리의 자리가 공석이 되자, 그 자리는 긴 싸움 끝에 남은 패밀리 중 하나가 차지하게 됐다.
"하지만 파이브 패밀리에서 포 패밀리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굉장히 배타적입니다."
애덤의 말처럼 단순히 하나의 패밀리가 사라진다고 해서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물론 하나의 패밀리를 정리하는 것조차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지. 살리에르 백작의 죽음 이후, 노예상을 주로 다스리던 쪽에서 신흥 강자가 나오지 않았나."
"그렇긴 합니다만...."
과거 이종족 노예를 주로 다스리던 살리에르 백작.
디라일라를 납치했다가 셰인에게 죽음을 맞이한 그는 비록 5층의 패밀리에는 속해 있지 못했으나 나름 4층에서는 거물로 통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패밀리를 정리하는 방법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놈들은 외부에서의 공격에 굉장한 단합력을 보입니다."
"굳이 외부를 움직일 필요는 없지. 자기들끼리 싸우도록 만들어도 될 일이니까."
"...내분을 노리고 계시는 겁니까?"
그건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어쨌거나 지하도시는 개인의 이익이 뭉치고 뭉쳐서 만들어진 공간이었으니.
하지만 그들 또한 한 번의 내분이 지하도시의 권력 구도를 어떻게 바꿀지 잘 아는 탓에 그 부분에서도 철저한 선을 지키고 있는 마당이다.
애덤이 그 부분을 짚고 들어왔다.
"애덤. 세상에는 돈으로 안 되는 일 따위는 없다."
"예?"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면, 그건 돈으로 해낼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돈이 부족했을 뿐인 거지."
"...?"
도대체 얼마만큼의 돈을 투자할 생각인 걸까.
아무리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하지만 이 지하도시의 권력 구도를 단순히 돈 하나만으로 해결한다고?
애덤은 셰인의 말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외부에서 보는 지하도시의 선입견과 다르게, 지하도시는 폭력 하나만으로 돌아가는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상당 부분의 폭력은 절제되며, 나름대로의 선을 철저하게 지키는 편이다.
때문에 지하도시의 사람들은 폭력을 휘둘렀을 때 순간적으로 들어오는 이득과, 참았을 때 훗날 돌아올 이득을 계산할 줄 아는 머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이들을 단순히 많은 돈으로 휘두르는 게 가능할까?
"말하지 않았나. 돈이 적기 때문이 아니라고. 그저 가지기만 하더라도 수많은 이들의 머리 위에 군림할 수 있는 물건이라면, 얼마나 탐이 나겠어."
"그런 물건이 있습니까...?"
"물론. 특히 4개의 패밀리가 환장할 만한 물건이지."
도대체 그 물건이 뭐길래 저러는 걸까.
애덤은 셰인이 품에서 꺼내는 하나의 낡은 책을 바라봤다.
"은밀하게 소문을 퍼뜨려라. 망자가 남기고 간 혼돈이 나타났다고."
* * *
디라일라를 납치했다가 셰인에게 살해당한 살리에르 백작은 포 패밀리에 들어갈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영향력이 적었느냐 하면 결코 아니었다.
그는 4층에서도 최상위권에 위치한 사람이었으며, 스스로 가지고 있던 정보 조직도 결코 약하지 않았다.
5층의 포 패밀리의 바로 밑 단계였다고 봐도 좋았다.
제국의 고위층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그만한 위치에 올라간 것은 그만큼 살리에르 백작의 수완이 좋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놈이 죽은 지도 벌써 2년째로군...."
5층의 포 패밀리 중 하나.
통칭 '금광'.
투기장과 도박장을 운영하고 있는 패밀리의 이름으로, 금광의 주인인 엘도라트는 한때 포 패밀리를 긴장하게 만들었던 한 귀족의 이름을 떠올렸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데 급급했던 탓에 호위조차 제대로 두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지만, 실제로 그만한 조심성 때문에 놈이 죽던 그 순간까지도 포 패밀리는 살리에르 백작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놈의 죽음으로 인해 한때 지하도시는 남겨진 이권을 두고 거친 경쟁이 이뤄지기도 했다.
"그냥 조용히 죽고 사라질 놈인 줄 알았더니."
이 지하도시를 30년 넘도록 거닐고 있는 엘도라트는 이 도시에서 한껏 명성을 날리다 사라지는 존재들을 수도 없이 봐 왔다.
그럼에도 살리에르 백작만큼 급부상하는 존재들은 몇 없었다.
"놈의 거래 장부가 드러났다... 라."
한때 이종족 노예를 다루는 데 있어 전권을 쥐고 있다해도 무방했던 살리에르 백작의 거래 장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는, 그러한 소문이 지하도시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엘리엇. 네가 생각하기에는 어떻지?"
"인위적으로 퍼지고 있는 소문으로 보입니다."
지난 30년 동안 자신을 따르고 있는 수하에게 그리 묻자, 수하는 준비된 말을 이어서 내뱉었다.
"그 소문의 근원지를 파악하려 찾아본 결과, 정보상들 위주로 퍼지고 있는 듯합니다."
"정보상이라. 쥐새끼인가?"
엘도라트의 금광과 마찬가지로 포 패밀리를 차지하고 있는 '시궁쥐'.
주로 정보상과 청부업을 담당하고 있는 패밀리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시궁쥐 또한 소문의 출처를 알아보고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누가 이런 재미있는 장난을 치고 있을지 궁금하군."
이종족 노예는 제국을 시작으로 대부분의 국가가 불법으로 지정된 사항이다.
그럼에도 이종족 노예의 관심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능 때문이다.
마력을 가지지 못했던 인간에게 이종족이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그런 이종족을 향하는 폭력은 때로 마약과 같은 유흥을 선사했으니.
모든 사람이 그러는 것은 아니나, 가학심이 강한 이들에게서 그런 성향이 곧잘 보이고는 했다.
현 황제는 그런 인간의 가학심이 곧 기원전 인류의 두려움을 강조하는 것이라 판단하고 이를 제국법으로 엄격히 금지시켰다.
그런 살리에르 백작의 거래 장부라니.
"걸릴 수밖에 없는 소문을 만들어 냈군. 거기다 실력도 좋아. 안 그런가?"
소문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만큼 은밀하게 소문을 퍼뜨리는 것도 보통의 실력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하도시에서는 황제도 부럽지 않을 권력을 누리는 게 바로 포 패밀리지 않나.
비록 시궁쥐만큼은 아니더라도 지하도시 내의 정보망은 충분한 금광에서도 아직 소문의 출처를 확인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분위기를 보아하니 시궁쥐 또한 비슷한 처지 같지 않나.
"모두 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널 탓하는 게 아니다. 엘리엇. 그만큼 상대가 쉽지 않다는 거지."
그러면서 엘도라트는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출처는 알지 못해도 좋다. 하지만 놈들의 목적만큼은 얼추 예상이 되야 하는데."
"높은 확률로 내분이 그 목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역시 그렇겠지. 하지만 다른 목적일 확률은?"
"돈이 목적일 가능성도 제할 수는 없습니다. 행동 패턴으로 미루어 봤을 때, 오히려 그쪽의 가능성이 더 높겠지요. 하지만...."
"돈이 목적이라면 그걸 팔려고 하지는 않겠지. 거기다 이렇게까지 소문을 내는 걸 보면 상대도 이 지하도시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다는 말이야."
"...맞습니다."
당장 포 패밀리 중 하나인 금광과 시궁쥐가 이토록 관심을 갖을 만한 물건이 바로 살리에르 백작의 거래 장부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두 패밀리도 마찬가지일 터.
거기에 적힌 이름값만 해도 얼마일 것이며, 그것을 활용한 돈벌이 수단이 얼마나 넘쳐 나겠는가.
당장 팔아치우는 것으로도 큰돈을 만질 수는 있겠으나, 그걸 활용해 더 큰돈을 벌거나 높은 지위를 얻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놈들에게 그걸 활용할 만큼의 배포나 능력이 없어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엘도라트도 그렇고 그의 수하인 엘리엇도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봤다.
"그저 좀도둑은 아니었을 거야. 무려 그 저지먼트 중 하나를 죽인 놈이니."
살리에르 백작 본인은 무력이 별 볼일 없었으나 그를 지키고 있던 기사는 무려 시그니처를 깨우친 자였고.
그 기사와 함께 살해당한 저지먼트 기사단의 실력을 생각해 보면 상대는 살리에르 백작의 정체를 알고 찾아갔다는 말이 된다.
"재미있어. 아주 일이 재미있어지겠어. 안 그런가, 엘리엇?"
"주인님의 기대만큼이나 지하도시에 상당한 지각 변동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맞아. 분명 대단히도 큰 게 찾아올 거야."
이렇듯, 지하도시에 퍼진 소문으로 인해 포 패밀리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소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외부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그게 정말입니까?"
"...아직은 소문에 불과하나, 들리는 바에 따르면 지하도시의 포 패밀리들 또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겠군요."
새뮤얼은 낮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그간 살리에르 백작의 죽음으로 인해 얼마만큼의 손해를 봤던가.
새뮤얼이 아주 세심하게 준비해 둔 사람이니만큼 그 피해도 상당했다.
"살리에르 백작... 죽을 거면 조용히 죽었어야죠. 쯧."
새뮤얼은 살리에르 백작의 자식마저 죽었다는 사실이 새삼 아쉽게 다가왔다.
만약 살아 있었더라면 애비가 감당하지 못한 죄를 물었을 터인데.
그러면 뭐 하겠나. 이미 죽어 없는 이들인 것을.
"소문이 만약 진실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쪽에서 확보해야만 합니다."
비록 살리에르 백작과 새뮤얼의 관계를 증명할 만한 것들은 모두 소실되었다고는 하나, 거래 장부에 남아 있는 이들의 대부분이 새뮤얼의 밑에 있는 수하들이었다.
그런 수하들에게 큰 약점이 잡히는 것은 새뮤얼 또한 손발이 묶이는 일과 마찬가지.
게다가 지금은 아룬비다에서의 실책으로 인해 쌍둥이 황녀에게도 상당한 관심이 쏠리고 있는 마당이 아닌가.
비록 빠르게 대응한 덕에 두 황녀에게 밀리고 있진 않았지만, 더 이상의 실책은 두고 볼 수 없었다.
"메자이아 대수림 건에 대해서는 얼마만큼 정리됐죠?"
"이제는 안정권에 들어갔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그쪽 인력도 전부 지하도시로 투입하세요. 명심해야 합니다. 살리에르 백작의 장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차지해야 해요."
"...뼈에 새기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리고, 만약 일이 번거로워질 것 같으면...."
"...."
"들개를 푸세요."
"...알겠습니다."
새뮤얼의 말에 그의 수하가 잠시 몸을 흠칫거렸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92화
92화 거래 장부 (2)
시간이 흐를수록 소문은 점차 지하도시에 넓게 퍼져 나갔다.
처음에는 단순히 살리에르 백작의 거래 장부가 지하도시에 풀렸다는 정도의 지라시에 불과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에는 다양한 살점이 붙기 시작했다.
살리에르 백작의 숨겨진 아들이 거래 장부를 통해 돌아온다더라.
누군가 숨겨진 거래 장부를 통해 거물들을 협박하고 있다더라.
등등. 다양한 지라시가 덧붙여졌으나, 그중 가장 사람들의 지지를 사고 있는 것은 곧 4층의 지하 경매장에 거래 장부가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연막작전이군.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야."
"연막이라면...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더 높겠군요."
셰인의 말에 애덤은 금방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왕실의 정치 놀음을 지켜봤던 기사단장 출신이라 그런지 이해가 빨랐다.
"장부의 존재를 최대한 숨기고 싶은 존재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뭐, 당연한 말이겠지만요."
"가장 의심해 볼 수 있는 건 제국인가."
"살리에르 백작의 출신 때문입니까?"
"맞다. 애초에 살리에르 백작은 현 황태자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니만큼 신경이 쓰일 테지."
"...괜찮으시겠습니까? 황실에서 본격적으로 움직인다면 일이 필요 이상으로 커질 수도 있습니다."
애덤의 말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황실이 이곳 지하도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위기에 몰렸다고 생각되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비록 쌍둥이 황녀에게 빌미를 주는 꼴이 되겠지만, 적어도 장부를 타인에게 빼앗기는 것보다야 나은 선택지였으니까.
"딱히 상관없다. 어차피 장부가 누구에게 넘어가든 상관할 일은 아니니. 오히려 일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에겐 좋은 일이지."
"하지만 반대로 너무 큰 관심을 끈다면 물건을 넘기는 과정에서도 분명 잡음이 심할 겁니다. 경매장에 물건을 올리는 과정에서부터 작업이 들어올 가능성이 상당합니다."
과연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하도시의 생태를 제대로 파악했는지, 애덤은 예리한 부분을 찌르고 들어왔다.
확실히, 경매장의 시스템상 판매자의 신원을 확실히 숨기거나 경매품의 도난을 방지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지만.
경매품을 경매장에 넘기는 과정에서 생기는 사고까지 경매장 측이 책임을 지지는 않을 터.
물론, 어지간한 무리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간 경매를 담당하고 있는 패밀리가 결코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겠지만, 상대가 같은 패밀리거나 황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하지."
하지만 셰인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 없다고 일단락을 지었다.
그러자 애덤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눈앞의 청년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왔는지 여실히 봐 오지 않았던가.
나중에야 듣게 된 일이지만 메자이아 대수림 때부터 아룬비다의 오크 남하 사건까지.
저 청년이 가지고 있는 혜안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진심을 다해 따르기로 한 것이고.
"그리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그러니 이 이상 관여하는 것은 수하로서 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 황실에서 따로 연락이 왔습니다. 1황녀 측입니다."
"안 그래도 언제 연락이 올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조심스럽게도 접근했군."
2년 전, 1황녀 올리시아에게 새뮤얼이 지하도시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조언을 해 주지 않았던가.
그로 인해 애덤이 지하도시에서 자리를 잡아 가며 올리시아와 조심스러운 커넥션을 가지게 되었다.
-먼저 연락을 주셨네요. 오랜만이죠? 얼굴을 보는 건 1년만인 것 같네요.
"오래만입니다, 황녀님."
-네. 잘 지내고 계시죠? 1년 전이랑 다르게 훨씬 남자다워지셨네요.
"감사합니다. 황녀님께서도 더 아름다워지셨군요."
-어머, 감사해요. 그래도 제 동생과 지내다 보니 훨씬 부드러워진 것 같네요?
"...."
설마 올리시아에게도 말한 건가.
-그런 표정 지으실 거 없어요. 제 동생이 원래 어릴 때부터 소유욕이 제법 있었답니다? 제게 손대지 말라고 경고하는데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어요.
"...그렇습니까. 몰랐던 사실이군요."
-평소에는 욕심이 없다가도 한 번 자기 거라 정한 건 죽어도 내놓는 법이 없었답니다. 참참, 이런 얘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닌데 말이죠. 최근 지하도시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러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저 또한 황녀님께서 연락을 주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셰인의 말에 올리시아가 묘한 미소를 띄웠다.
현재 아룬비다의 토벌 이후, 아나스타샤와 더불어 올리시아의 주가는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실상 아룬비다의 맹주인 아나스타샤보다도 더 그러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봐도 좋았다.
정치에 영 관심이 없어 최소한으로 활동하는 아나스타샤와 다르게, 올리시아는 지난 2년 동안 마음껏 자신의 능력을 선보여 왔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는, 지금도 셰인에게 시험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 황녀가 직접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소문에 관해 듣게 된 건 보다 전이에요. 다만, 오라버니 쪽에서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탓에 저로서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어찌 보면 너무 새뮤얼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닌가 싶겠지만, 셰인은 올리시아가 현명한 판단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살리에르의 거래 장부는 현 시점에서 새뮤얼에게 있어 가장 민감한 약점이었으니.
그럴 때 섣불리 나서는 것보다는 추후를 위해 정보만 얻어 두는 것이 올리시아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이었으리라.
"황실 측에 이렇다 할 변화가 있었습니까?"
그런 셰인의 물음에 올리시아가 비로소 제대로 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이번에는 자신이 한 발 앞섰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들개'가 움직일 것 같아요.
"들개라...."
-어머, 혹시 알고 계셨나요?
"들개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들이 움직이는 것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확실히 올리시아의 정보력이 앞섰다.
들개는 새뮤얼이 살리에르 백작만큼이나 세밀하게 관리 중인 사냥개들이다.
저지먼트 기사단이 명분을 앞세워 움직인다면, 그들은 음지에서 활동한다.
정치적 방해물을 정리하거나,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해 새뮤얼이 철저히 숨겨 둔 병력.
'본래라면 1년 뒤에나 움직일 녀석들이 벌써부터 활동을 시작했군. 그만큼 황태자도 급해졌다는 말이겠지.'
그리 생각한 셰인이 이어서 말했다.
"만족스럽군요. 알겠습니다."
-충분한 거래라 생각해도 될까요?
"예. 나중에 좋은 소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확실히 제법 괜찮은 정보를 얻은 만큼, 셰인은 가면을 쓴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아참, 그리고 한 가지 허락을 맡고 싶은 일이 있어요.
"허락, 말입니까?"
일어서던 자세 그대로 멈춘 셰인이 되물었다. 제국의 황녀가 허락을 맡아야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듣던 셰인은 이내 두 눈을 감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셰인의 허락을 맡을 만한 사안이었다.
"예. 상세한 계획 내용과 함께 보내 주십시오."
올리시아와의 대화를 끝으로, 셰인은 이제 본격적으로 활동할 채비를 갖췄다.
뜨거운 감자에 불과한 소문에, 불을 지필 시간이 찾아왔다.
* * *
어느덧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지하도시에 퍼지고 있던 살리에르 백작의 거래 장부와 관련된 소문은 이제 더욱 덩치를 불려 가고 있었다.
본래라면 이쯤에서 별다른 소식이 없는 한 서서히 줄어들어야 했으나, 그런 기색 없이 소문은 점차 덩치를 키워만 갔다.
다만 이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거래 장부가 경매장에 올라오리라는 소문보다는 이를 활용해 누군가 이득을 보려 한다는 음모성 추측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그에 애덤이 셰인에게 의문을 표했으나, 오히려 셰인은 주제와 다른 소문을 더 키우라고 명령했다.
"준비해야 할 게 있다. 그러니 그때까지 불이 꺼지지 않도록 부채질만 하도 충분해."
"음... 알겠습니다."
때문에 황실에서는 이전과 다르게 오히려 소문을 가라앉히고 싶어 했으나, 애덤의 활약으로 더욱 음모성 추측이 가득해지는 논란이 불거지고 있는 가운데.
지하도시와는 달리, 지상에서는 거래 장부와 관련된 소문은 아는 사람이나 알 법한 내용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어느 날 일어난 사건만 아니었더라면.
평소처럼 조용한 아침.
디라일라는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기를 맞이해 커피와 부드러운 빵과 함께 티타임을 가졌다.
아카데미 졸업 후. 지난 2년 동안 바쁘게 움직인 만큼, 디라일라도 상당한 돈을 모아서 이제는 혼자 그럭저럭 지낼 만한 원룸을 구할 수 있었다.
"아, 청소를 한번 싹 해야겠네."
하지만 바쁜 나날을 보내 온 탓에 기껏 전세로 뽑은 집에 먼지가 제법 쌓여 있었다.
해서 차분한 아침 식사만 끝내고 오랜만에 집안 청소를 해 볼까 싶던 그때.
"푸흡?!"
그러한 마음으로 신문을 펼친 디라일라는 신문의 절반 이상을 채운 대문짝만 한 사진을 보고 마시던 커피를 뿜고 말았다.
"뭐뭐, 뭐야?!"
어째서 지금 상황에 데자뷔를 느끼는 걸까.
[특종! 2년 전에 등장했던 귀족 살해자. 또다시 출몰했나?]
[하루 사이에 죽은 두 명의 귀족들! 귀족 살해자의 목표는 이종족 노예의 자유?]
[속보! 현 의장 헤일로 마일드. 아직까지 사건을 조사 중. 섣부른 판단은 너무 이르다.]
"아니, 그동안 조용한가 했더니...."
그간 잊고 지내던 가면의 사내를 떠올린 디라일라는 갑자기 활동하기 시작한 그의 모습을 보며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안락하기만 하던 이 원룸이 갑자기 감옥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쾅쾅쾅!
"힉."
"안녕하세요! 디라일라 양! 매일속보에서 찾아왔습니다!"
"안에 계십니까?! 우리도시에서 온 기자입니다! 잠깐 인터뷰 가능하시겠습니까?!"
벌써부터 특종의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들이 몰려왔다.
이제는 제법 인간 사회가 돌아가는 꼴을 파악한 디라일라는 숨소리마저 죽인 채 지금의 상황이 일단락되기를 기다렸다.
'으아아! 이런 관심은 사양이라고!'
난데없는 기자들의 외침 속.
디라일라는 양쪽 귀를 막고 없는 척 두 눈을 꾹 감았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이미 과거에 제국의 심문까지 받았던 몸이지 않나. 이제 와서 알 것도 없는데 왜 갑자기 찾아온단 말인가.
거기에 귀족 살해는 중죄 중의 중죄로 통하는 만큼 괜히 연류되었다가는 좋은 꼴을 못 본다.
'집에 남아 있던 식량이 얼마나 있더라....'
해서 자진 감금 생활을 각오하고 있을 무렵.
거짓말같이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멈췄다.
"어?"
"제법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군."
"어어어억?! 헙!"
"걱정 마라. 외부에 우리 목소리가 나갈 일은 없으니."
의자에서 그대로 뒤집어 자빠진 디라일라가 황급히 두 손을 입에 가져다대는 것을 보며.
가면의 사내, 셰인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93화
93화 거래 장부 (3)
불길한 기운을 담고 있는 검은빛의 검들이 허공에 떠다니며 주변의 병사들을 학살하고 있다.
이미 화려한 저택은 붉은 핏빛으로 가득했고, 그 참혹한 현장을 만들어 낸 것은 저 불길한 기운을 지닌 열 자루의 검이었다.
하나하나가 절정에 다다른 기사의 검술을 구사하는 저 악마의 검 앞에서 남은 기사들은 힘겨운 전투를 이어 나갔으나, 끝내 이겨 내지 못한 채 하나둘씩 쓰러져 나갔다.
그리고 그런 학살의 현장에서, 민무늬 가면을 쓴 존재가 무심한 발걸음을 옮겼다.
"너, 너는 도대체 뭐냐. 무엇을 원하길래 이, 이런 짓을...!"
"...."
"도, 돈이냐? 아니면 이종족? 가져갈 테면 다 가져가라. 그러니 제발 목숨만큼은...!"
가면의 존재, 셰인은 마치 한 번 본 연극을 다시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런 귀족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 무심함에 귀족은 순간 살아남은 줄 알았으나, 이내 가슴으로부터 화끈한 통증이 느껴져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곳에는 여태 자신의 사병과 기사들을 학살하던 검이 꽂혀 있었다.
"크, 크륵...."
아무런 말도, 설명도 없이 그저 갈 길만을 걷는 저 존재가 마냥 두렵기만 하면서도, 이제 그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잠시.
"주인님. 먹어도 되겠습니까?"
"그래라."
희미해지는 의식 속, 뒤에서 들려오는 어린 소녀의 목소리에 귀족은 더없이 불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 *
"으헥!"
셰인이 만든 어둠의 공간으로부터 몸을 숨기고 있던 디라일라는 지하실에 도착하고서야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으으... 다신 겪고 싶지 않아."
원체 대지로부터 기억을 읽는 재주가 뛰어난 디라일라는 셰인의 그림자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에 지속적으로 압박을 당하는 느낌을 겪었다.
이는 셰인이 숨긴다 해도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닌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그런데 여긴 어디예요?"
"어느 귀족의 저택이다. 2년 전까지 활발하게 이종족 노예를 사들이고 있던 놈이지."
"아, 아니 그런 곳에 저는 왜...."
"네가 왜 도와야 하는지 이유가 궁금하다 하지 않았나?"
"아니이... 그게 이런 곳에 데려와 달라는 말은 아니었는데에...."
생명의 은인이니 이치에 맞다면 응당 가면의 존재에게 협력할 의지가 있던 디라일라였지만, 최소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아야만 했다.
해서 자신의 집에 찾아온 가면의 존재에게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냐며 물었고, 그 결과가 지금에 다다른 것이다.
"너라면 읽을 수 있겠지. 이 공간에 깃든 기억을."
"으...."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2년 전, 살리에르 백작에게 납치를 당했을 당시 그곳 지하실에서 겪었던 기억들은 디라일라에게 크나큰 충격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 현장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이로서, 현실을 바로 봐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 이제 제법 힘도 좀 있고. 끗발도 있으니까 도움이 좀 되지 않으려나.'
나름 2년 동안 다양한 모험을 해 오며 명성을 알려오지 않았던가.
만약 이러한 형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다면 무언가 효과가 있지 않을까.
'아니, 안 되겠구나.'
생각해 보니 이제 좀 끗발이 있다 한들, 제국의 황제조차 법으로 금지시킨 일을 버젓이 하고 있는 자들이지 않나.
디라일라는 그런 자그마한 희망을 일찍이 지워 버렸다.
"흐으윽...."
대신 눈앞의 존재에게 자신의 도움으로 이런 놈들의 뿌리를 뽑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도울 의사가 있던 디라일라는, 천천히 이곳 저택에 얽힌 다양한 기억들을 읽어 내려갔다.
그중에서 가장 음습하고, 암울하며, 두려운 기억들.
모두 그 결말이 좋지 못했다.
디라일라는 구토감을 간신히 참으며─
"구웨엑!"
끝내 참지 못하고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게워 냈다.
대지에 얽힌 기억들은 하나같이 절망과 공포, 혼란, 짙은 슬픔, 세상에 대한 증오 따위로 가득했다.
마치 정신이 오염되는 듯한 기분,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되는 그 감각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셰인이 그런 디라일라의 어깨를 붙잡았다.
"단 하나의 인간이 만들어 낸 광경은 어떠했나."
"어떻긴 씨발... 좆같은 새끼, 잘 뒤졌다 싶죠. 썅...."
앙상한 뼈와 가죽만 남긴 채 죽어 있는 귀족의 시체를 바라보는 디라일라의 표정이 절로 사나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인간들이, 대륙 곳곳에 생겨나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어...? 그, 그건 힘들지 않을까요. 모든 사람이 그러는 것도 아니고...."
나름 이제 세상을 겪어 봤다 말할 수 있는 디라일라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저렇지는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셰인의 말에 디라일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
디라일라는 이런 기억이 한없이 펼쳐지는 세상을 떠올리자마자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만약 자신이라면, 그런 세상에서 한시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근데 그런 이야기는 갑자기 왜 하는 건데요...?"
"현재 그걸 실현시키려는 놈들이 있다. 지금 하는 일은 그걸 색출하는 작업이고."
"음... 그런데 이렇게 막 죽여도 될까요? 벌써 3명 짼데...."
디라일라의 걱정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금으로서는 이렇게 죽은 귀족들도 켕기는 게 있기에 연합국 측에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긴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연합국에서 자발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실제로 이미 그런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는 상황이다.
"걱정 마라.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이니."
"다른 계획도 있어요?"
"애초에 지금 하는 건 검증이었다. 이젠 거래 상대에게 찾아갈 차례지."
"거래 상대라면....'
"지하도시의 개장수. 놈에게 갈 예정이다."
"개장수...?"
디라일라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셰인은 그런 그녀에게 이어서 말했다.
"네가 할 건 거기까지 길을 안내하는 것 정도다."
"어... 저는 그 개장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요."
"가 보면 알게 될 거다."
"음... 알겠습니다."
뭐가 됐든 나쁜 놈들 혼내 주겠다는데 빠질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둘은 어둠 속에 녹아들어 다시금 모습을 감췄다.
* * *
통칭 개장수.
5층의 포 패밀리 중 암시장과 경매장을 담당하고 있는 그는 여기저기 퍼져 있는 신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벌써 3명째로군."
어두운 방 안. 희미한 마력등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빛이 골동품으로 가득한 방 내부를 비추었다.
"음~ 그러게 말이야. 누군진 몰라도 아주 섹시하게 일을 벌이고 있네?"
그런 개장수의 말에 호응한 인물은 마약과 도핑, 그리고 윤락가를 운영하는 포 패밀리의 일원 '미스 슈'였다.
"목적이 뭐길래 저러는 것 같아?"
미스 슈의 물음에 개장수가 피식 웃었다.
"뭘 알면서 물어. 분명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겠지."
현재 외부에서 귀족 살해자라 불리는 존재는 연합국 사회에서도 커다란 이슈로 자리 잡고 있었다.
동시에 많은 이들이 귀족 살해자와 피해자인 귀족을 욕했는데, 법으로 금지된 이종족 노예를 사들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조사 결과 인간 노예도 적잖이 있었던 터라 더더욱 여론이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는 상황.
그러나 둘에겐 그런 상황 따윈 알 바 아니었다.
둘은 이게 귀족 살해자가 자신들에게 보내는 시그널이라는 것을 진즉에 눈치챘다.
"장부가 진짜라는 걸 보여 주고 있군."
굳이 검증까지 갈 필요 없이, 자신이 직접 살리에르 백작의 거래 장부가 진짜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곧 접촉해 오려나?"
"글쎄. 조심성이 많은 놈이니 어떻게 접근해 올지 모르겠군."
"어머, 조심성 많은 사람들 다 죽었나 봐? 밖에서 저렇게 귀족을 살해하고 다니는 인간인데."
"지하도시에서 여론을 조작하는 능력만 봐도 알 법하잖아. 놈은 철저해."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그러면서 미스 슈는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은 채 다리를 꼬았다.
"그럼 이후를 기대할게~ 그래도 우린 쌍둥이 남매잖아? 같이 해먹자고."
"약쟁이들이나 잘 관리해라. 다른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우리가 알아챘으니 그것들도 눈치를 챘을 거야."
"그건 걱정하지 말고. 그럼 난 간다? 얘들아, 가자~"
그 말을 끝으로 미스 슈는 자신의 의자를 받치고 있던 노예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개장수는 그런 미스 슈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남매라고 해서 반드시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지. 특히, 나 몰래 다른 일을 꾸미고 있으면 더더욱. 안 그런가? 귀족 살해자."
"...."
골동품이 한가득 쌓여 있는 공간에서 민무늬 가면을 쓴 존재는, 언제부터 그곳에 있던 것인지 의자에 앉아 그런 개장수를 바라봤다.
"제법 흥미로운 물건들이 많군. 취미가 아주 고상해."
지하 5층.
개장수의 저택에 도착한 셰인이 그리 말하자, 개장수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금화가 뭔지도 모르는 것들이 버려 둔 물건들이지. 보는 눈이 없다면 사서 손해를 보는 법이야."
"그럼 그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이지?"
"글쎄...."
개장수는 가면의 존재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훑어봤다.
수십 년 전.
어렸던 자신과 쌍둥이 동생이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봐 왔던 수많은 인간 군상들 중에서 이만한 작자는 보기 쉽지 않았다.
"적어도 네가 깔고 앉은 골동품들보다야 위험해 보이긴 하는군. 함부로 먹었다간 배탈이 나겠어."
"그런가. 생각보다 조심성이 많군."
"이봐, 이 바닥이 원래 그렇다고. 이 지하도시에서 살아남는다는 게 어디 무식한 힘 하나만으로 될까. 먹을 거 아닐 거 구분할 줄 알아야 야생에서 살아남는 법이지."
"그렇다면 이건 어떻게 보이지?"
가면의 존재, 셰인은 제법 손때가 탄 두꺼운 서류 더미를 보였다.
"흐흐, 그거 아주 독이 그득그득 들어 있는 물건처럼 보이는군."
"...."
"하지만, 독극물도 쓰기 나름이겠지... 동생에게 들어 보니 독도 약재로 쓰인다더군."
"쓰기 나름이라는 거지."
"거래 방법은?"
"낙찰이 되면 방범용 인챈트를 풀어 주도록 하지. 날짜는 다음 주 경매부터."
"좋아, 좋아. 이야기가 아주 빠르게 진행되는군. 이런 건 좋아하는 편이지. 알았다."
"미리 말해 두건대... 괜한 욕심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방금 말했잖나. 독도 약재로 쓰인다고. 무식하게 혼자 처먹을 생각은 없어."
개장수가 어깨를 으쓱이고, 셰인은 한쪽에 거래 장부를 두고 사라졌다.
"갔군... 흐음."
셰인의 기척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개장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래 장부를 확인했다.
자신의 손에 들어오는 과정에서도 굉장히 시끄러울 것이라 생각했던 물건이, 상상 이상으로 쉽게 들어왔다.
이곳 5층은 제국에서도 함부로 발을 들이지 못할 정도로 방비를 자랑하고 있지 않나.
모든 패밀리가 그렇겠지만, 경매를 담당하는 개장수는 특히 방비에 힘을 줬다.
단순히 경비를 세운다거나 함정을 설치하는 것뿐만 아니라, 고대에 존재했던 드워프의 설계도를 일부 차용한 복도도 있었다.
개장수가 방비해 둔 이 복도는 적어도 그가 만든 이후 무단으로 통과한 인물은 없었는데.
셰인이 최초로 그곳을 통과한 것이다.
"위험하군. 위험해...."
상대가 자신에게 적의가 없어서 망정이었지, 만약 그게 아니었더라면....
설마하니 대지를 다스리는 지하인이, 그것도 앞서 드워프의 전초 기지 던전을 클리어한 존재가 셰인의 곁에 있을 줄은 상상조차 못한 개장수는 그리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 만에 흘려 본 건지 모를 식은땀을 뒤로한 채, 그는 거래 장부를 따로 보관하며 이어질 경매의 보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한편, 애덤이 만들어 둔 근거지에 돌아온 셰인은 디라일라를 클레이튼 가문으로 보냈다.
한참 귀족 살해자의 존재로 인해 어수선한 상황에 괜한 사건에 휘말리는 것보다, 차라리 가문에서 보호하는 게 맞다 판단했고, 디라일라 또한 수긍했기 때문이다.
"오셨습니까."
"그래. 개장수에게 물건은 맡겨 놨다."
"후우... 가장 큰일은 해결됐군요."
애덤이 한 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애덤도 이번 일에 적잖은 활약을 하고 있었다.
이 지하도시에서 포 패밀리의 정보망에 걸리지 않고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록 하지."
"...드디어."
"그래. 하이엘 왕국의 2왕자에게 연락을 취해라."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94화
94화 지하 경매장 (1)
하이엘 왕국은 최근 호황의 나날을 누리고 있는 중이다.
본래부터 연합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였던만큼 교역이 활발했고, 최근 메자이아 대수림이 개방하지 않았던가.
메자이아 대수림과 국경이 맞닿은 하이엘 왕국의 변방은 덕분에 최고의 격변을 지나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러나 국가의 무사태평한 나날을 걱정하는 인물들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하이엘 왕국의 세 왕자였다.
"아버님이 날이 갈수록 건강해지는군."
그들 중 맏형인 올리버 드 헬리손이 그리 말하자 셋째인 아르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도 최근에는 휘어잡으신 모양이야. 전혀 빈틈이 없어."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리신 건지...."
왕권이 강화되고 있는 소리는 그야 왕자들에게 좋은 소식이었다.
어찌 됐든 선대가 귀족들을 휘어잡은 상태에서 왕좌를 물려준다면 그 덕을 보는 이들은 다름 아닌 왕자들이었으니.
그러나 문제는 왕자들의 나이가 30대를 바라보고 있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왕위를 물려받아야 할 시기였고, 실제로도 2년 전에는 왕자들끼리 왕위 쟁탈전을 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왕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건강해지는 것을 넘어 젋어지기까지 했으니.
그 시점에서 국왕은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멈추고 다시금 왕권을 잡았다.
그런지도 어느덧 2년이란 시간이 흐른 상태이니.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왕자들은 조바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메이슨. 넌 어때?"
첫째 왕자가 묻자, 둘째 왕자인 메이슨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싶더니 뒤늦게 반응하며 입을 열었다.
"음, 글쎄. 형들이랑 별다를 건 없지. 나도 간신히 내 사람을 붙잡고 있는 중이니까."
현 국왕이 왕위 쟁탈전을 철회하기 전까지는 세 사람 모두 다양한 귀족들을 포섭하느라 바빴다.
그러나 국왕의 힘이 강해지자 몇몇 귀족들은 다시금 그의 밑으로 들어갔고, 남아 있는 왕자들의 불만은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었다.
"쯧. 답답하군."
차라리 국왕이 무언가 문제라도 일으킨다면 이를 문제 삼을 수 있겠으나, 현재 하이엘 왕국은 그 어느 때보다 호황의 시기를 걷고 있었다.
때문에 왕자들은 그저 이렇듯 모여 한탄을 하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때, 둘째 왕자 메이슨이 먼저 일어났다.
"여기서 이러고 있어 봐야 아버지 심기만 거스를 거야. 난 먼저 일어날게."
"후. 너 말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일단은 해산하자."
"알았어."
메이슨의 말처럼 당장 아버지의 눈에 찍히고 싶은 사람은 없었기에, 첫째 왕자의 말대로 세 사람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다 방으로 돌아온 메이슨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애덤 기사단장님. 정말 살아 계셨군요."
"이젠 기사단장이 아닙니다, 왕자님."
2년 전과 다르게, 눈이 훨씬 깊어진 왕실의 충실한 기사가, 왕자의 방에 앉아 있었다.
* * *
메자이아 대수림 사건 이후로 조직과 관련된 미래의 지식은 꽤 많은 부분을 사용할 수 없게 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득을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이는 사람에 대한 지식이었다.
인류 멸망 당시에는 많은 인간 군상을 볼 수 있었다.
끝없이 몰려오는 조직의 군단 앞에서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들의 본심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으니.
그중에서 셰인이 눈여겨본 사람 중 하나는 하이엘 왕국의 2왕자, 올리버 드 메이슨이었다.
딱히 메이슨 왕자가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낸 것은 아니다.
다만 잦은 테러와 제국과의 전쟁, 그리하여 황폐화된 왕국을 마지막까지 지킨 단 하나뿐인 왕자였을 뿐.
그는 자신을 따르는 기사들과 함께 조직의 군대에 맞서 용맹히 싸우다 전사했고, 셰인은 그 기억을 토대로 2왕자에게 접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 시간대에서 알아본 2왕자도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에 따라 2왕자에게 접근한 애덤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에 대해 조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상하다고 느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요."
메이슨은 2년 전,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복귀한 애덤의 사망 소식에 적잖이 당황했었다.
애덤이 막 왕실에 기사로 임명됐을 당시, 메이슨의 호위 기사로 활동했던 적이 있었다.
때문에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막 복귀했을 당시에도 메이슨과 잦은 대화를 나누고는 했다.
"그렇게 급사하기에는 너무 건강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병사를 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하여 메이슨은 독자적으로 애덤 사망에 관해 수사를 해 봤으나.
어느 날.
자신이 정보를 알아 오라 시켰던 수하가 방문 앞 나무 상자에 머리만 남겨져서 돌아오는 일이 있었다.
그 이후 이 일의 위험성을 깨달은 메이슨은 그에 관한 수사를 포기했었다.
하나 며칠 전, 과거 긴급 상황을 가정하고 만들었던 애덤의 수신호가 적인 편지가 메이슨 왕자의 방에 도착해 있었다.
"왕자님의 걱정대로 저는 암살 시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렇게, 죽을 뻔했지요."
그러면서 애덤은 자신의 가슴팍을 열며 당시 정보 단체 수장의 단검에 찔렸던 흔적을 보였다.
몇 번이고 찔린 것에 더해 독까지 묻어 있던 터라, 엘프들의 세계수에서 치료를 받았음에도 흉터가 선명히 남아 있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왕자님께서 수하의 수급을 받으신 것처럼, 저도 알면 안 되는 진실에 다가가려 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애덤은 당시 자신이 겪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메자이아 대수림를 탐사하던 당시 내부 상황을 알리기 위해 제국의 기사단과 자신의 기사단원 몇 명을 섞어 밖으로 보내려 시도했다는 것.
엘프 여왕이 확실하게 나갔다는 증언과 다르게 왕실에서는 어느 누구도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나오지 못했다는 말.
그리고 그에 관해 수사를 하던 도중 왕실 내부에서 암살 시도를 받았다는 것까지.
"그렇다면 역시 아버지가 그런 겁니까?"
"예. 현재 국왕은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전 흑마법사의 수장, 고든이 속해 있는 무명이라는 단체와 결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무명이라...."
하지만 그렇다 한들 메이슨 왕자가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무명이라는 단체와 결탁했다는 것과 별개로 왕국은 무사태평하지 않나.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애덤의 말에 메이슨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예?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현재 제가 속해 있는 단체에서 따로 지하도시를 수사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은 의심하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전국적으로 테러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전혀 상상도 못한 소식 때문이었다.
* * *
"테러... 말입니까?!"
며칠 전.
애덤은 이어지는 셰인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현재 하이엘 왕국의 국왕이 뭐가 아쉽다고 테러를 일으킨단 말인가?
현재 하이엘 왕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호황의 시기를 달리고 있을 때가 아니던가.
"아마 그게 조직에서 국왕에게 내건 조건이었겠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테러라니요. 자칫 잘못했다간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하이엘의 국왕이 젊음에 미쳤다고는 해도, 전쟁까지 일으킬 위인은 아니다.
적어도 애덤이 생각하기엔 그랬다.
셰인은 인간의 탐욕이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 알았으나, 굳이 애덤의 편견을 깰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하이엘의 국왕은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 없을 테니.
"거기까지 가진 않을 거다."
"어떻게 그리 확신하십니까?"
"아직 조직이 바라는 순간이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바라는 순간... 말입니까."
"그래."
조직은 자신들이 그리고 있는 완벽한 상황이 아니라면 결코 먼저 나서지 않을 것이다.
'아직 내부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놈들이다.'
현재까지 조직은 인간 정보원을 많이 쓰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 시대가 인류에 의해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지, 결코 인간을 위해 쓰이는 게 아니다.
훗날 전쟁이 일어나면 아카샤의 대봉인에서 뛰쳐나온 이종족과 몬스터가 조직의 가장 큰 무력을 차지하게 될 테니.
'그때까지 놈들은 일을 그르칠 생각이 없을 거다.'
지금의 시기라면 아직 내부 정리가 끝나지 않았을 시점이니....
'그렇다면 지금은 그 밑 작업이라 봐도 좋겠지.'
이종족을 끌어들여 테러를 일삼도록 만들고, 인류 전체에게 이종족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 주기 위한 준비 단계일 뿐.
하이엘의 국왕이 이종족 노예를 끌어들이는 이유 또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하이엘의 2왕자에게 준비를 해 두라고 일러 둬라. 그나마 그자의 밑에 있는 이들이 충직한 편이니."
결국 이와 관련된 일을 전부 끝마치기 위해서는 지하 경매가 진행되어야만 한다.
테러가 일어나든, 뭐가 일어나든.
어찌 됐든 간에 지하 경매가 시작되어 4층과 5층의 정보를 얻어야만 했으니.
* * *
지하도시의 정보상은 대부분이 점조직 형태로 이어진다.
거기다 조심성도 굉장히 많기 때문에, 끄나풀을 잡아서 기억을 읽는다 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다.
"그렇다면 아래서부터 죽여 가며 올라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둠의 정령... 검둥이에서 아나스타샤의 극구 반대로 '아르카네'라는 제대로 된 이름을 받은 그녀의 물음에 셰인이 답했다.
"말했잖나. 조심성이 많다고. 아랫것들이 하나둘씩 죽기 시작하면 아예 자취를 감춰 버릴지도 모르지."
"그렇군요...."
셰인이 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 한들 이번 일을 벌인 주동자에 다다르기도 전에 놈들이 숨어 버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한편 아르카네는 딱히 그 사실이 궁금했다기보단 영혼을 분해하는 과정에서 받게 되는 오리진이 없어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한편, 옆에서는 또 다른 소녀가 셰인에게 말을 걸어왔다.
"주인님."
"왜 그러지, 에블린."
밤하늘의 달처럼 은은하면서도 찬란한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한 채 셰인을 바라봤다.
"배고파요."
"먹보. 항상 주인님께 할 말이 배고프다는 말 밖에 없어?"
"그래도 배고픈데."
흡혈귀.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은 이 소녀에게도 이름을 지어 줄 때, 아나스타샤에게 드문 힐난의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그대... 동물을 제외한 다른 무언가에게 이름을 지어 주지 말도록. 이토록 아름다운 소녀에게 흡혈이가 가당키나 한 이름인가!'
나름 2년 동안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힘을 조절하는 방법까지 배운 에블린은 이젠 비교적 대화를 나눌 수준은 됐다.
물론, 수백 년 동안 고통 이외에 맛본 것이 없는 만큼 자신의 의지를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긴 했지만.
"조금만 기다려라. 곧 식사할 시간이 찾아올 테니."
"주인님 거 마시면 안 돼요?"
"가끔은 외식도 해 봐야지."
"다른 피는 맛없던데...."
"주인님이 하시는 말씀에 토 달지 마. 흡혈귀."
"응. 알았어."
말은 저렇게 해도 항상 같은 일을 반복하는 에블린이기에, 아르카네는 못 미덥다는 눈치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편 에블린 또한 아르카네가 자신 못지않은 먹보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그녀가 하는 말은 대부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편이었다.
그렇게 둘이 투닥거리고, 셰인은 이를 지켜보며 갈 길을 걸었다.
언뜻 보면 아름다운 두 소녀가 투닥거리며 길을 걷는 평화로운 풍경처럼 보일지 모르나....
지하도시에서 그런 시선을 받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독특한 외모를 한 두 여자와 가면남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곳저곳에서 시선을 한가득 받은 셋은 이내 4층으로 향했다.
4층엔 셰인만큼이나 시선이 끌리는 존재들이 여럿 있었다.
셰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가면이나 로브 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수많은 경호를 거느린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오늘이 바로, 지하 경매가 시작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95화
95화 지하 경매장 (2)
살리에르 백작의 거래 장부에 대한 소식이 조금씩 식어 가고 있을 무렵,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개장수는 자신이 거래 장부를 손에 넣었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와 동시에 그는 포 패밀리 전원을 모아 회의를 진행했다.
"하, 아닌 듯 보이면서 정작 이틀을 남겨 두고 회의를 진행하는군."
그에 참여한 포 패밀리 중 금광은 통짜 금으로 만들어진 턱을 쓸어내리며 그리 말했다.
"아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리 좀 양해를 구하지. 이쪽도 좀 쫄려서 말이야."
"천하의 개장수가?"
"이거 물건을 건네받은 루트가 좀 비이상적이어야지. 상대가 상대다 보니 나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걸 노리는 놈들도 그만큼 위험할 테고."
"어머나. 우리 오라버니가 언제부터 그리 조심스러웠는지 모르겠네?"
한편 개장수의 쌍둥이인 미스 슈도 거들자 개장수가 피식 웃었다.
"뭐야. 너희 둘. 언제부터 연애를 시작한 거야? 둘이 아주 짝짜꿍이 맞군그래."
"그야 돈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어때, 자기. 우리 오늘부터 1일?"
"지랄 말지? 내 고귀한 피는 너 따위가 받아 낼 게 아니다."
"어머, 별꼴이야. 여자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정말."
말하는 것과 다르게 미스 슈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곧장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물건은 확실히 받았다는 것 같고. 우리를 부른 것도 방어를 위해서지?"
"맞아. 내가 최근에 알아보니 이게 또... 제국과 연관이 있단 말이지."
"제국?"
"설명은 아까부터 입 다물고 있는 시궁쥐에게 들어 보지."
그러자 아까부터 신문을 얼굴에 덮은 채 자고 있던 사내가 퍼뜩 일어났다.
"어, 엉? 누가 나 불렀냐?"
"그래, 너. 기껏 불러 놨더니 잠이나 처자는 네놈을 부른 거다."
"어어, 뭔 일인데 이리 날카로우실까. 무슨 일인데?"
"이번 일에 제국이 관여되어 있다는 것 정도는 파악하지 않았나?"
"어... 그렇지?"
"그걸 자세히 말해 보라는 거다."
시궁쥐는 여타 다른 패밀리의 리더들과 다르게 굉장히 꾀죄죄한 몰골을 한 채, 더벅머리 끝자락을 입으로 씹으며 입을 열었다.
"어이쿠. 아무리 그래도 우리 쥐새끼들이 피땀 흘려 가며 얻은 정보인데, 너무 막 풀라고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이미 충분한 정보를 풀었다고 보는데. 이 자리에서 쫓겨나고 싶나?"
"커흐흠. 그건 아니지. 그래도 오늘은 식당에서 밥 좀 먹고 싶은데...."
"쯧."
시궁쥐의 말에 보다 못한 금광이 대신 금화를 던졌다.
"어이쿠. 이거 감사합니다~!"
그제야 목을 가다듬으며 시궁쥐가 입을 열었다.
"어디 보자... 제국... 황실이라... 황실. 그래, 맞아. 황실에서 들개를 풀 거라고 하던데?"
"들개?"
"우리 개장수 아저씨 장사가 잘될 날인가 보구먼."
"들개라는 게 정확히 뭐지?"
"정확히 말하자면 황실은 아니고, 황태자가 직접 키운 사냥개라던데... 정확한 규모까지는 나도 모르겠구먼."
"그렇다면 그 외에는?"
"별의별 잡다한 것들이 다 모이겠지 뭐... 아니, 근데, 그전에 이 멤버부터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시궁쥐의 말에 다른 세 명이 인상을 썼다.
"우리를 좀도둑 취급하는군."
"맞아~ 우리 중 하나가 박살 나면 어떤 꼴이 일어나는지, 이미 38년 전에 봤잖아?"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로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지, 시궁쥐."
"어이쿠야. 이거 반응들이 뜨겁구먼. 언제부터 우리끼리 이렇게 형제애가 넘쳤다고. 큼큼. 뭐, 아님 말고. 그보다 나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그 물건을 받게 된 루트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시궁쥐의 의문에 다른 둘도 개장수를 바라봤다.
확실히, 자기 몸 챙기는 거 하나만큼은 이 패밀리 중 가장 신중한 인물이 아니던가.
그런 이가 어떤 방법으로, 이들 셋 중 어느 누구도 모르게 물건을 전달받게 된 것인지 궁금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객의 정보를 풀어서야 쓰나. 관심 갖지 말지?"
"오케이. 그렇다면야 뭐."
애초에 그저 한번 찔러 본 것에 불과했던 시궁쥐도 알았다는 듯 관심을 끊었고, 다른 이들도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제 어떻게 경매를 순조롭게 풀어낼지 고민해 보도록 하지."
긴 사담 끝에서야, 그들은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회의가 진행되는 도중에도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번 경매가 결코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 * *
지하도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어두운 장소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다른 층이라면 몰라도 VIP 중 VIP만 들어올 수 있는 4층의 경우에는 천장을 전부 태양석이라 불리는 발광석으로 대낮처럼 밝은 거리를 유지한다.
거기에 지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함을 자랑하기에, 처음 이곳에 찾아온 이들은 개장수가 지어 둔 웅장한 성체에 넋을 놓기도 했다.
때문에 이곳이 개방되는 경매 날에는 무수히 많은 이들이 찾아오나, 오늘은 특히 더했다.
덕분에 성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하나같이 신분을 확인하느라 바빴고, 수많은 인파는 줄을 서 가며 경매장으로 들어가길 고대했다.
"진저리 치게 많구먼."
"그러게. 특히 이번에는 경매품이 하나밖에 없다고 들었는데."
"쯧. 살리에르 백작인지 뭔지가 도대체 뭐길래 저러나."
"이 멍청한 놈. 그 인간하고 연류된 귀족이 어디 한둘이겠어? 듣기로 이번 경매가 시작되자마자 벌써부터 자수하는 양반들이 나오고 있다던데."
"뭐? 아니, 누구 좆되라고 그 내용물을 사방팔방에 풀겠어? 아무리 그래도 자수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왜겠어. 최근에 지상에 귀족 살해자라는 놈 때문에 그렇겠지."
"아아... 그건 나도 소문으로 들었지."
몇몇 경비병들의 그러한 수다는 이내 경비대장의 등장으로 끝맺음을 지었고, 그들은 삼엄한 경계 속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성 내부로 들어서면 화려한 장식과 함께, 마치 정말 귀족들의 연회라도 되는 것처럼 수많은 음식들이 기다란 테이블 위로 올라가며 찾아온 손님들의 입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손님들이 들어왔을까.
몇몇 연이 있는 손님들은 서로 뭉쳐서 앉기 시작했을 무렵, 화려한 연회장의 발광석이 꺼지기 시작하며 은은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안녕하십니까,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도 이곳 프티크에 찾아오신 것에 무한한 감사의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경매사가 단상 위에 모습을 드러내자, 각자 대화를 나누고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몰렸다.
잠시의 침묵 끝에 경매사가 과장스러운 몸짓과 함께 입을 열었다.
"오늘은 처음 뵌 분들도 참 많이 보이는군요. 그만큼 이번 경매에 올라올 물품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이겠죠."
그의 말처럼 오늘 처음 경매장에 찾아온 이들도 한쪽에 무리를 짓고 그런 경매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경매사 또한 수많은 손님들을 바라보며 가면 속에 숨겨진 그들의 표정을 읽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곳 4층의 지하 경매장에서 경매사를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눈치가 필요한 법이었다.
'저쪽은 시궁쥐의 사람들인가? 그리고 방금 했던 말로 움찍거린 인간들은 장부에 적혀 있는 놈들이겠군.'
이번 경매에 가장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을 인물들이 바로 장부 속 등장인물들 아니겠는가.
이 또한 정보가 되기에, 경매사는 끊임없이 그러한 기록들을 머리에 욱여넣으며 숙련된 자세로 진행했다.
"그렇다면 거두절미하고, 이번 경매의 진행 방식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초대장에 적혀 다들 알고 계시다시피 이번 경매는 단 한 물품만을 가지고 진행됩니다."
"또한, 시작 단가는 1,000골드부터입니다. 입찰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50골드 이상부터 진행이 가능합니다."
"경매품은 인챈트가 적용되어 내용물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하여 입찰에 성공하신 이후 판매자가 직접 인챈트를 해제할 예정이오니, 이 점 참고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프티크에서 경매품을 보호해 주는 구간은 정확히 물품을 건네드린 순간부터이니, 판매 이후에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배상할 책임이 없다는 점 또한 상기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손님들 간의 신경전이 이어지는 과정 중, 단상 위로 조명이 집중됐다.
"그럼 소개합니다. 화제의 물건, 살리에르 백작의 유품인 거래 장부입니다!"
집중된 조명 위로 유리 케이스 안에 들어가 있는 거래 장부의 모습이 드러남과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파란빛이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그러자 거래 장부가 담긴 유리 케이스 위로 푸른빛이 흘러나오며 1,000으로 표시되던 숫자가 급격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완벽한 블라인드 경매를 위해 마련된 마법 장치였다.
은은한 조명과 함께 숫자는 끊임없이 올라갔고, 조용한 클래식만이 흘러나오는 내부와 다르게 손님들 사이에서는 치열한 눈치 싸움이 연신 이어지고 있었다.
* * *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끌어모아야 해!'
'제발, 그게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만큼은!'
그중에서 가장 절박한 이들은 앞서 살리에르 백작과 거래를 했던 전적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한때의 욕망으로 인해 일을 저지른 과거의 자신을 백 번 천 번 저주하며 끊임없이 올라가는 숫자를 바라봤다.
이미 단가는 시작 금액의 1천 골드를 넘어 4천 골드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
살리에르 백작과 거래를 했던 귀족들은 새뮤얼 황태자의 도움으로 이렇듯 다 같이 돈을 모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새뮤얼 황태자의 자금까지 더해진 지금, 돈이 부족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아무래도 물건이 물건이다 보니 확신할 순 없었다.
동시에 과거의 자신들만큼이나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 버린 살리에르 백작에 대한 원망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 멍청한 자식은 왜 장부 같은 걸 남겨서!'
'그렇게 조심하더니 혼자 편히 뒤져 버렸구나!'
그 생각을 하는 짧은 사이에도 어느덧 금액은 6천 골드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작은 도시의 1년치 세금을 훨씬 넘긴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숫자는 여전히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다.
한편, 그런 귀족들과 다르게 제법 여유로운 표정으로 경매에 가담하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금광의 엘도라트의 수하, 엘리엇이었다.
'멍청한 녀석들.'
그는 한쪽에서 치열하게 숫자판을 노려보고 있는 귀족무리를 보며 비소를 지었다.
필시 저 물건은 놈들이 생각하는 금액 그 이상으로 올라갈 것이다.
얼마의 출혈이 있든 간에, 시간을 들여 저들을 상대로 뽑아낼 수 있는 돈은 훨씬 많을 테니까.
뿐만 아니라 저 물건은 양지로 올라가 자리를 잡게 해 줄 열쇠나 마찬가지다.
본래라면 이곳 지하도시에 저런 식으로 거래 장부가 등장하는 일도 극히 드물다.
애초에 장부는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소유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여는 순간 파괴되도록 만드는 게 기본이니까.
어느 정도 지하도시에서 거래를 해 온 이들이라면 모두가 했을 법한 행동이었으나, 살리에르 백작은 그 작업을 하는 것조차 혹여 황태자에게 걸릴까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런 사달이 일어난 것이지만, 엘리엇이 알 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따르는 주인을 위해 저 물건을 앞에 내놓을 수만 있으면 됐으니.
적어도 부귀영화에 빠져 돈을 탕진해 온 저따위 귀족들보다, 수십 년 동안 쌓아 올린 지하도시의 금화가 훨씬 더 높게 쌓아져 있으리라.
엘리엇이 그렇게 저들에게 시선을 떼고 있는 사이에도 경매 금액은 계속해서 올라가 1만 골드를 찍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쯤 되자 가장 먼저 초조해진 것은 귀족 무리였다.
아직 여유 금액은 여전히 많았으나, 금액이 올라가는 속도가 전혀 줄어들 기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나 올라갔을까.
경매사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시작 금액이 너무 적었던 모양입니다. 이제부터는 호가를 500골드로 올리겠습니다!"
"이런 젠장! 10배나 올리는 게 말이나 돼?!"
그러자 곳곳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96화
96화 지하 경매장 (3)
가격을 올려 부를 때마다 500골드씩 상승하기 시작하자 절반이 넘는 인원이 입찰을 포기했다.
이어서 2만 골드까지 치솟았을 때는, 거기서 절반이 더 줄어들었고, 계속해서 5만 골드에 다다랐을 쯤엔 몇몇 인원들만이 참여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미, 미친....'
'회수 가능한 금액이 맞기나 한 거야?'
'아무리 저걸로 털어먹는다 해도 5만 골드까진 안 나올 것 같은데....'
'광기의 현장이로군.'
작은 도시라면 몇 년은 쓸 예산이 단 하나의 거래 장부에 의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한편, 장부에 이름이 실린 귀족들은 얼굴이 몇십 분 사이에 핼쑥해졌다.
'어, 어쩔 거요?'
'여기서 더 지른다고? 감당이 가능한 일이 맞소?'
'세상에, 이제 6만 골드란 말이오!'
일찍이 귀족들은 자신들끼리 모은 돈은 모두 끌어다 쓴 상태고, 이제는 황태자의 지원금마저 손을 대고 있는 상황.
하지만 여전히 숫자가 올라가는 기세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귀족 무리와 다르게 여전히 입찰을 시도하고 있는 이들의 표정은 여유로웠고, 금세 가격은 8만 골드까지 올라 버렸다.
이제부터는 정말 치킨 게임이다.
귀족 무리도 황태자에게 큰 약점이 잡히게 된 마당에 황태자의 돈을 아낌없이 끌어다 쓸 것이고, 여타 다른 참가자들 또한 물러설 생각이 없었으니.
이윽고 10만 골드, 12만 골드, 그리고 15만 골드에 다다랐을 때부터는 귀족들 중 한 명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이 이상 돈을 쓰는 게 의미가 있을까?'
이미 귀족들끼리 모은 돈보다 황태자가 내야 할 금액이 더 늘어난 상황이다.
세상에.
15만 골드가 어디 동네 개 이름도 아니고, 대영지를 다루는 귀족이거나 대형 상단을 꾸리는 이들이 볼 법한 숫자이지 않나.
하는 거라고는 영지민들에게 세금을 걷는 것 이외에 이렇다 할 돈벌이가 없는 귀족들은 더 이상 글렀다고 판단했다.
'여기까지 합시다.'
'아, 아직이오! 이렇게 포기했다가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이럴 때를 대비해 황태자께서 준비해 둔 게 있다고 하지 않았소!'
'하, 하지만....'
'이제 16만 골드요! 우리가 나서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액이 계속 올라가고 있지 않소! 정말 여기에 희망이 있다고 보시오?'
'크윽....'
황태자가 준비해 둔 수는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뤄 두고 싶었다.
자칫 잘못해서 일이 어그러지기라도 했다간 일이 어찌 되겠는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들이 줄줄이 엮여 들어올 게 뻔했다.
'알겠소....'
하지만 더 이상 그들이 내몰릴 구석 같은 것은 없었다. 이미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그저 황태자의 플랜대로 일이 잘 돌아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귀족 무리가 입찰을 포기했든 아니든 경매는 계속해서 진행됐다.
이제는 거의 20만 골드 단위로 넘어갔는데, 지켜보고 있는 이들조차 정말 저 거래 장부에 저만한 이점이 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의 금액이었다.
그렇게 23만 골드에 다다랐을 때가 되어서야 입찰 경쟁은 끝맺음을 맺었고, 경매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총 금액 23만 2천 골드로 49번님께서 입찰에 성공하셨습니다!"
이곳 지하도시에서도 좀처럼 보기 드문 금액의 거래가가 나오자 몇몇은 탄성을 질렀고, 또 몇몇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부분의 이들은 그저 한 번 찔러나 보자 싶어서 온 이들이었기에 '아니면 말고'라는 표정이었고, 한탄을 한 자들은 대부분이 귀족 무리에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49번 팻말을 들고 있던 엘리엇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까지 자신과 경쟁을 한 인물은 다름 아닌 시궁쥐의 쌍둥이 여동생, 미스 슈의 수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경매는 포 패밀리 중 금광이 승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저걸 어떻게 들고 가느냐인데.'
아마 당장 문제가 터지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경매장은 포 패밀리에 의해 삼엄한 경비가 진행 중이지 않은가.
공격하는 입장에서도 굳이 지금 벌집을 건드릴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실상 포 패밀리의 수하쯤 된다면 여기서 가면을 쓴다 한들 소용이 없는 일이니.
엘리엇을 잘 기억해 뒀다가 대상이 물건을 받는 직후에 공격을 가해 올 터.
하지만, 세상이란 게 원래 사람의 예상과는 다르게 돌아가지 않던가.
"그럼 이번 입찰에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이후 진행되는 만찬회에도 많은 참석 부탁드립... 어?"
그때, 경매장 전체에 푸른빛의 마력 파티클이 흩뿌려졌다.
순간 무슨 상황인지 뒤늦게 파악한 경매사가 재빠르게 경비대를 부르는 호출기를 눌렀다.
동시에 경매사는 손님들을 안심시키려 했으나.
마력 파티클이 뿌려지는 여러 공간으로부터 텔레포트 마법의 포탈이 펼쳐졌다.
"어, 어떻게?!"
이곳 지하도시도 텔레포트 차단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푸른빛 입자가 뭉쳐 끝내 포탈이 완성되었다.
"꺄, 꺄아아악!"
"저게, 저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포탈에서 등장한 것은 새하얀 털과 긴 귀를 지닌 짐승. 토끼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토끼와는 다르게 그 크기가 하나같이 성인 남성과 비교될 정도로 거대했고, 또 동시에 기괴했다.
헝겊으로 만들어진 정장의 옷차림.
그러나 두 눈은 터질듯 부풀어 오른 상태였고, 이빨은 토끼가 아니라 사나운 짐승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나 있다.
그런 토끼 수십 마리가 포탈에서부터 꾸역꾸역 들어왔고.
이윽고 50여 마리가 연회장을 가득 메울 무렵, 닫혀 가는 포탈에서 누군가가 물 흐르듯 튀어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신사 숙녀 여러분."
포탈에서 나온 존재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이 정도로 화려한 파티장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서 찾아온 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포탈에서 나온 존재는 품위 있는 말투로 그리 말해 봤으나, 그 말을 듣고 안심하는 손님은 어느 누구도 없었다.
그야, 저 존재 또한 토끼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정확히 말하면 몸은 사람처럼 보였으나, 머리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토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토끼의 얼굴이 사람 말을 하는 기묘한 현상.
다른 토끼들보다는 인간의 형태에 가까운 그는 길쭉한 다리에 어울리는 세련된 정장, 그리고 허리춤에 달린 회중시계를 손에 들며 시간을 확인하듯 바라봤다.
"안타깝게도 초대장을 받지 못했기에, 이렇게 난입하게 되었군요. 부디 우리들에게도 이번 경매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면 감사하겠습니다."
토끼 신사가 말은 정중하게 했으나 그의 수하로 보이는 토끼들은 이미 이곳저곳에 퍼진 연회장의 음식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에 손님들이 비명을 지르며 한쪽 구석으로 몰렸다.
그 작태를 지켜본 경매사가 사납게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오는 것이냐!"
"이런. 정말 안 되겠습니까?"
토끼 신사는 다시 한번 정중하게 물어봤으나, 대답으로 돌아오는 것은 경매사의 거부가 아니라 연회장의 입구로부터 들려왔다.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발생했다. 전원 도핑을 마치고 놈들을 상대해!"
경매사의 호출기에 반응해 곧바로 난입해 온 경비대가 각자의 품에서 알약을 꺼내 들어 망설임 없이 먹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경비대의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그 상태로 각자의 무기를 든 경비대가 한참 테이블 위의 음식을 폭식 중인 토끼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런... 우리 아이들은 좀 사나워서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데 말이죠...."
그러나 토끼 신사의 걱정과 다르게, 경비대는 각자의 무기에 마력을 두른 채로 한참 포식 중에 있던 토끼들을 무참히 베어 나갔다.
검에 목이 베이고, 메이스에 머리가 깨져나가는 토끼들.
하지만 토끼들도 잠자코 당해 주기만 하지는 않았다.
먼저 공격이 들어온 이상, 토끼들도 토끼의 것이라 믿기지 않는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을 들이대며 경비대에게 달려들었다.
경비대는 이런 마수와 전투를 치른 경험이 제법 있던 모양인지 쉽사리 당해 주지 않았으나, 전투의 양상은 그리 일방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끄아아악!!"
첫 번째 피해자가 나왔다.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토끼가 내장을 질질 끌며 경비병의 다리를 물어 버린 것이다.
턱힘이 얼마나 강한지, 보호구조차 씹어 삼키며 경비병의 다리가 뜯겨져 나갔다.
"조심해라! 놈들의 생명력이 비정상적이야!"
피해자가 연속해서 속출하자 경비대장이 그리 외쳤다.
바닥에 쓰러진 토끼들이 마치 좀비마냥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한 채 끝까지 들이대고 있다.
아니, 머리가 부서지고도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지 않나.
저건 생명력이 끈질긴 게 아니라 죽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머리와 사지를 주로 공격해라! 놈들이 쓰러지고도 공격하지 못하게 막아!"
연이어 경비대장의 명령이 내려오자 경비병들도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았다.
그로테스크한 광기의 현장.
이를 지켜보던 손님들이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몇몇 토끼들이 그런 손님들에게 향했기 때문이다.
"가서 막아!!"
경매는 이미 망쳤으나, 손님이 다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이번 경매를 진행한 개장수의 이름이 추락할 테니까.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몇몇 경비병이 달려들었다.
"경매에 참여만 시켜 주셨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로군요."
그 광경을 지켜보던 토끼 신사는 손에 들린 회중시계의 끝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이, 이게 무슨!"
"이거 뭐 하는 놈들이야!!"
그 작은 행동은 전장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방금까지 피와 내장을 줄줄 흘리던 토끼 괴물들이, 마치 시간이 되돌아가기라도 하듯 원상복구가 되는 게 아닌가.
"저 새끼부터 잡아!"
그에 눈치 빠른 경비대장은 이 사건의 발단인 토끼 신사부터 노리라는 명령과 함께 자신도 토끼 신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토끼 신사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의 품에서 아이 손바닥만 한 지팡이가 들려 나오더니, 어느새 성인이 집고 다닐만한 지팡이로 변모한 것이다.
토끼는 마치 펜싱을 하듯 자세를 잡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경비원을 나무랬다.
"명을 달리할 선택을 하셨군요."
동시에 토끼 신사가 자세를 낮추는가 싶더니, 찰나의 순간 모습이 사라졌다.
"뭣."
하지만 단순히 사라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달려들던 경비병 몇몇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헛!"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토끼 신사가 지팡이를 내보였다. 지팡이에는 방금 쓰러진 자들의 심장이 꼬챙이처럼 꿰여 있었다.
"무, 무슨."
그 광경을 확인한 경비대장이 뭐라 말을 잇기도 전에, 또다시 토끼 신사가 전장을 지배하듯 돌아다녔다.
"젠장... 보통 놈이 아니다. 중복 도핑을 해!"
결국 부작용을 각오하고 중복 도핑을 시도하라는 경비대장의 말에 지금도 꾸역꾸역 연회장으로 들어서고 있는 경비병들이 중복 도핑을 시도했다.
그러자 안 그래도 비대하게 커진 그들의 근육이 보다 몸집을 키우며 전투의 양상을 바꿔 갔다.
검으로 그저 베는 것이 아니라 마력의 파동을 일으켜 공격당한 토끼의 신체를 분해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중복 도핑을 하지 않은 경비병들은 구석에서 아직까지 비명을 지르고 있는 손님들을 비상 탈출구로 안내했다.
그때.
콰아아아아앙─!!
외부로부터 폭발음이 들림과 동시에.
"끄아아아아악─!"
경비병들이 들어오던 통로로부터 비명이 들려왔다.
새로운 침입자들의 등장.
복도의 경비병을 뚫고 연회장에 찾아온 이들의 첫인상은 과연 인간이 맞기나 할까 싶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새하얗다 못해 투명하게 느껴지는 피부.
하나같이 털 한 가닥 남지 않은 머리와, 입마개를 쓴 채 등장한 그들은, 투명한 피부와 대조되게 경비병들의 피로 온몸을 흠뻑 적신 상태였다.
"이런... 토끼들의 놀이터에 들개가 난입했군요."
"백염...?!"
침입자들은 하나같이 양손에 하얗게 타오르는 오러를 검처럼 감싸 만든 상태로 서 있었다.
황태자의 들개가 귀족 무리의 호출에 의해 등장한 것이다.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가 되어 가는 풍경 속.
난장판인 아래층과 다르게 2층에서 이 상황을 직관하고 있던 민무늬 가면의 사내는 조용히 읊조렸다.
"개판이군."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97화
97화 지하 경매장 (4)
셰인은 점입가경으로 치닫는 1층의 연회장을 바라보며 비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고작 장부 하나로 인해, 고작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얼마나 더 많은 피해가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새롭게 난입한 들개들은 과연 새뮤얼이 직접 키운 만큼의 실력을 보이고 있었다.
백염은 현 인류 사회에서 가장 이기적인 능력이다.
맞닿는 상대의 마력은 즉시 흩트리면서, 정작 자신은 인류의 가장 무기 중 하나인 오러를 사용하니까.
불합리함의 극치일 수밖에 없었고, 마법사에게는 저승사자인 이유가 있었다.
셰인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렸다.
전생에도 들개의 존재는 있었으나, 애초에 황태자가 무너진 이유는 철혈의 정의, 아네이스 때문이었지 조직 때문이 아니었다.
해서, 들개의 정확한 전력을 모르고 있던 셰인에게 이번 전투는 그들의 전력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전체적인 전투력은 저지먼트 기사단보다는 못하군.'
들개의 전투는 마치 짐승 같았다.
실제로 놈들에게 자아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하나하나가 눈빛에 진득한 살기만이 가득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모를까, 현 시점에선 저지먼트 기사단과 비교하면 확실히 밀리는 추세다.
그럼에도 백염이라는 사기적인 성능의 오러와, 저렇듯 비교적 양산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새뮤얼은 이미 상당한 고점을 매겨 뒀을 터.
실제로 셰인이 보기에도 활용할 가치가 충분했다.
하지만 애초에 저지먼트 기사단의 순수 전투력도 셰인의 눈에 차지 않는 마당이니, 딱 그 수준에 불과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전장의 상황을 지켜보던 셰인으로서는 비웃음이 절로 나오는 풍경이었다.
과연 놈들은 알까.
지금 저 현장 자체가 더 이상 벗어나오지 못하는 거미줄과 같다는 것을.
몸부림치면 칠수록, 거미줄은 놈들의 목을 더더욱 죄어 나갈 터.
그러니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셰인의 비소는 더욱 짙어지기만 했다.
한편, 이 상황을 전혀 웃지 못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금광 패밀리의 엘리엇이었다.
* * *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 거냐.'
입찰에 성공한 엘리엇은 저 거래 장부를 자신의 주인에게 가지고 돌아갈 의무가 있었으나, 도저히 그럴 틈이 보이지가 않았다.
목표인 거래 장부는 전장의 한가운데 있는 상황이었고, 더불어 개장수가 특별히 마련한 보안 케이스에 들어가 있어 몰래 빼내는 것조차 쉽지가 않은 상황이다.
'저게 황실의 들개들이라고?'
거기에, 새롭게 개입하기 시작한 들개의 출현은 엘리엇의 심경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반마력 파장.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마력의 흐름을 흩트리는 저 힘은 분명 저지먼트 기사단만의 특권일 텐데, 어째서 저들이 쓰고 있는 걸까.
상식 밖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콰아아앙─!
그런데 그때, 또다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아까도 복도 방향에서 들려오던 소리였는데, 성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하자 몇몇 귀족들이 비명을 질렀다.
천장을 비추던 샹들리에가 흔들거리는가 싶더니 바닥으로 추락해 그 파편이 사방에 튕겨져 나가고, 또다시 폭발음이 들려왔다.
"밖에 있는 경비대는 뭘 하고 있는 거야!"
아무리 내부에 침입자들이 발생했다지만 외부를 지키는 인력도 있을 터인데 계속해서 이런 폭발음이 들린다.
포 패밀리가 동시에 지키는 만큼 병력이 적은 것은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말이 되질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만큼 대대적인 공격이 들어오고 있지 않나.
저만한 폭발을 일으킬 정도의 폭발물이나 마법이 정보망에 걸리지 않을 이유가 없음에도, 이런 상태라면....
'설마.'
그리 좋지 않은 상상이 떠오르기 직전, 다시 한번 거대한 폭발음이 들리며 천장이 무너지는 것을 시작으로 엘리엇의 시야가 차단됐다.
* * *
"쿨럭!"
먼지 구덩이 틈에서 살아남은 엘리엇은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폭발은 연회장을 무너뜨리는 것에만 집중했는지, 살상력은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었다.
"으윽...."
"젠장,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또한 지하도시의 4층까지 올 수 있는 VIP들이 모래처럼 많은 곳이지 않나.
물론 모래라고 하기엔 과장이 좀 심했으나, 적어도 여기 있는 이들 모두 자기 몸 하나 지킬 정도의 재력은 충분했다.
하나같이 자신을 보호해 줄 방어 마법 인챈트 스크롤이나, 혹은 스스로 그럴만한 실력자들은 무사히 폭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개장수가 고생 좀 하겠군.'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손님들 입장에 이만큼 화가 나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기껏 VIP라고 대접해 놓고 이러한 상황이 일어났으니.
모르긴 몰라도 당분간 개장수가 고생할 게 훤하리라.
'이럴 게 아니지.'
금세 정신을 차린 엘리엇은 자신의 원래 목표를 떠올렸다.
살리에르 백작의 거래 장부.
본능적으로 장부가 위치했던 자리로 시선을 돌리자, 여전히 그 주변으로는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괴물 같은 놈들...."
경비대는 도핑 효과와 더불어 포 패밀리의 지원으로 받은 장비 탓에 큰 피해는 없어 보였다.
이전에 부상을 입은 이들이야 죽음을 면치 못하겠으나, 아직 건재한 이들은 이 상황에서도 전투를 이어 가고 있었다.
토끼 신사 또한 멀쩡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니, 멀쩡할 뿐 아니라 깔끔한 정장에 먼지 한 톨 없을 정도로 깨끗하다.
반대로 들개는 제법 부상이 많은 듯 보였다.
백염이 마력을 쓰는 상대에 한해서는 무적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나, 그 외의 물리력에는 평범하기 때문이다.
무너지는 천장의 돌무더기를 완전히 피하기에는 무리가 있던 모양인지, 여기저기 깔려 죽은 들개들이 여럿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가....'
뿐만 아니라 토끼들도 깔린 상태에서 신체를 복구하는데는 시간이 걸리는 모양인지, 아직 돌무더기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홀로 남은 토끼 신사 또한, 발을 디딜 곳이 불안정한 지금, 이전만큼 날뛰지는 않고 있었고.
반대로 경비대는 아직 전력을 보전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물건을 건네받기에는 썩 괜찮은 상태처럼 보였다.
'일단 물건부터....'
그렇게 엘리엇은 소싯적 암살자로 활동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기척을 죽인 채로 거래 장부가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조금만 더.... 바로 지금!'
쏜살같이 장부를 향해 달려들던 그 순간.
그 경로 밑, 돌무더기에서 손이 튀어나오며 그런 엘리엇의 움직임을 막아섰다.
"뭣!"
"순서를 어기면 곤란하지요."
"너!"
돌무더기에서 튀어나온 이는 엘리엇에게 익숙한 존재였다.
"1호, 감히 지금 내 앞을 막아선 거냐?"
"감히라 할 게 뭐 있겠습니까. 피차 노리는 목표물도 같은 마당에. 흐."
1호. 미스 슈의 수하.
토끼 신사가 난입하기 전, 경매장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엘리엇과 경쟁했던 미스 슈의 수하였다.
"네놈, 개장수를 배신할 생각인가?"
"이 바닥에 배신이랄 게 뭐 있겠습니까? 자식새끼도 시장에 팔아먹는 세상인데."
"개자식들이...."
"그건 저기 있는 들개 놈들에게나 할 말이고. 아무튼 이건 내가 챙겨 가겠수다."
그러면서 1호는 여유로운 태도로 거래 장부를 향해 걸어갔다.
"누구 마음대로!"
그에 격분한 엘리엇이 휴대용 라이터를 양 주먹에 쥐고 달려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라이터처럼 보이나, 실상은 마도구인 그 장비에 마력을 부여하자 금세 엘리엇의 주먹을 감싼 건틀릿으로 변형되었다.
하지만 엘리엇은 그런 1호에게 미처 다가가지 못했다.
"경비대장! 설마 네놈도?"
"뭐, 그렇게 됐습니다."
경비대 중 일부가 엘리엇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경비대장은 엘리엇 또한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기에, 그는 몇 걸음 물러섰다.
"네놈들... 이런 짓을 하고도 살아남을 것 같으냐?"
"어쩌겠습니까. 이쪽도 둘이 붙은 상황인데."
"...둘?"
그제야 엘리엇은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챘다.
"쥐새끼랑 창녀가 붙었군."
"역시 눈치 하나는 백단이시라니까."
뒤에서 거래 장부를 팔랑거리는 1호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그래도 끗발은 이쪽이 더 있지 않겠어? 그쪽처럼 패배자들끼리 뭉쳐 있는 곳보다야, 용의 꼬리만도 못하는 것보다 뱀의 머리가 낫지 않겠냐고."
패배자. 용의 꼬리만도 못한 존재.
이는 금광, 엘도라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뱀의 꼬리라는 건... 그렇다면 이 폭발 사건도 저 새끼들이 만들어 낸 거라는 거고.'
그 많은 수의 경비대의 수색을 피하고 연회장을, 더 나아가 개장수의 성을 일부 무너뜨릴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아무튼 일이 그렇게 됐으니 이건 가져가겠수다. 슬슬 다른 날파리도 꼬일 것 같으니."
"그렇게 둘 것 같으냐!"
비록 엘리엇 혼자 저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힘들겠으나, 그렇다고 시간을 끌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심지어 저쪽은 지켜야 할 게 있지 않나.
당장 파괴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놈들도 저게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참 거치적거린다니까."
그에 1호도 롱 나이프를, 경비대장 또한 무기를 쥐고 오러를 피워 올리던 그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흐릿한 검은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장미...?"
그것은, 검은 장미의 꽃잎이었다.
그런 꽃잎이 하늘에서 수백 장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게 뭔...."
그에 경비대장의 밑에 있던 수하 중 하나가 무심코 꽃잎을 만졌다.
그 순간.
"엇."
단순한 꽃잎이 아니었던 걸까.
꽃잎의 끝자락에 손가락을 베인 경비병이 따끔한 감각에 손을 뺀 직후.
"어어?"
마치 탈진이라도 한 듯 다리에 힘이 풀린 경비병은 그대로 쓰러져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어억, 그어어억!"
그와 함께 비명을 지르더니, 이내 그런 경비병의 손끝으로 검은 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
이라고 중얼거리기도 전에 엘리엇의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기 싫으면 알아서 몸을 보호해라.]
"...?!"
놀란 엘리엇은 본능처럼 마력을 일으켜 몸을 보호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꽃잎의 위험을 눈치채는 게 늦어 반응이 늦었고, 그 대가는 참담했다.
"아악, 아아아아악!!"
"이게 도대체 무슨... 끄아아악!"
"...?! ...!!"
"끼이이익!"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경비병도, 들개도, 기괴한 토끼마저도.
꽃잎에 닿는 즉시 생채기를 입음과 동시에 전신에서 검은 꽃이 피어올랐다.
1호와 경비대장은 엘리엇이 몸을 보호하는 것에 반응해 재빨리 대비를 한 덕에 그 참사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대부분은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누구냐!!"
1호가 무너진 건물 사이로 걸어 나오는 존재들을 향해 소리쳤다.
터벅- 터벅-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여유로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사사삭-
기척 없는 발걸음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며 그들을 포위했다.
검은 의상으로 몸을 가리고, 마찬가지로 검은 민무늬 마스크로 얼굴마저 가린 존재들.
그러나 마스크 너머로 검은빛 피부의 뾰족한 귀는, 그들의 종족을 예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다크엘프...?"
다크엘프의 등장과 함께.
"보는 눈은 있는 편이군."
건물 너머에서 새하얀 민무늬 가면을 쓴 존재, 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98화
98화 지하 경매장 (5)
남루한 차림새에 더벅머리의 남자, 시궁쥐는 늘어지게 하품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흐아암. 이걸로 지하도시는 얼추 정리가 됐으려나...."
그러면서 어기적 일어난 그는 자그마한 케이스에 담긴 쥐 한 마리를 꺼내 다리에 작은 쪽지 케이스를 달았다.
"난 귀찮으니까 네가 대신 가라."
갈색의 쥐는 마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쪽지 케이스를 다리에 매단 채 뽈뽈 움직여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한 여성이 그런 시궁쥐의 거처에 들어왔다.
다만 혼자서는 아니었는데, 왕좌처럼 생긴 의자 아래를 노예들이 받치며 들어오고 있었다.
"어어, 왔어?"
"하아. 언제 와도 냄새가 역한 곳이네. 돈도 많이 벌 텐데, 좀 꾸미고 사는 게 어떨까?"
미스 슈.
그녀가 부하와 함께 등장하며 지저분한 시궁쥐의 거처를 나무랐다.
"귀찮은데 어쩌겠어. 그보다 일 처리는 어때?"
"성이 무너지는 것까지 보고 왔어. 그 멍청한 개장수도 이제 끝이야."
"흐음... 그렇단 말이지."
이번 작전은 생각보다 즉흥적인 감이 있었다.
본래라면 시궁쥐도 이렇게 빠르게 이빨을 들이밀 생각은 없었으나, 도대체 누구의 실력인지 살리에르 백작의 장부를 활용해 지하도시 전체를 광기에 빠뜨리지 않았나.
때문에 지금이 위기이자 기회라고 판단한 시궁쥐는 곧바로 미스 슈에게 은근슬쩍 정보를 흘렸다.
"하이엘 국왕이 젊어지고 있는 방법을 얻을 루트가 정말 있단 말이지?"
이렇게.
미스 슈는 예전부터 나이에 대한, 그리고 더 나아가 미모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필요하면 자신의 유일한 혈육조차도 배신할 정도로.
때문에 이런 식으로 정보를 푼다면 이쪽으로 넘어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정말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쉽게 넘어올 줄은 몰랐군.'
사실 혈연이라는 게 어찌 보면 참 애매하지 않나.
어떨 때는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을 것처럼 단단하다가도, 또 어떨 때는 나뭇가지 꺾는 것보다 쉽게 꺾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미스 슈의 경우에는 개장수와 함께 이 지하도시에서 겪어 온 역경이 있으니 나름 끈끈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시간이 흐르자 달라진 모양이다.
"물론이지. 하이엘 국왕의 약점을 잡고 있는 카드도 이쪽에 있다고."
"그게 뭔데?"
"2년 전에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생환한 애덤이라는 기사. 놈에게 암살 청부를 맡겼던 게 바로 그 국왕이야. 거래 내역도 확실하게 남아 있고."
"흐응... 그렇단 말이지."
메자이아 대수림은 지금도 떠들썩한 이슈다.
무려 100년 만에 개방된 요람이며, 지금도 탐사대를 이끌었던 라비아타에 대한 칭송이 이어지고 있는 와중이다.
거기에 하이엘 왕국의 민심 또한 자국에서 영웅이 탄생했다는 형태로 이뤄지고 있으니.
만약 그 영웅의 죽음이 사실 국왕의 암살 모의였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실 국민의 지지가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문제는 국왕의 실수를 지금까지 두 눈 똑바로 뜬 채로 기다리고 있을 세 왕자의 존재다.
미스 슈도 그러한 사실을 곧바로 간파하고 금세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말이야. 개장수를 버리는 카드로 쓰는 이유가 뭐야?"
"흥, 내 오빠라는 작자지만, 간이 너무 작잖아? 우린 몇 번이고 지상으로 자리를 옮길 기회가 있었어. 그런데도 이곳이 안전하다는 이유로 나갈 생각은 조금도 하고 있지 않았지."
그러면서 미스 슈는 잔주름이 보이는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알잖아. 이곳 지하도시의 생태가 어떤지."
"약해지면 잡아먹히지."
"그래. 아무리 이곳에서 절대 권력을 쥐고 있다 한들, 약해지면 바로 잡아먹히는 거야. 우린 명분 따위 필요 없으니까."
지상에서는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훗날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을 테지만, 이곳 지하에서는 나이가 들어 약해지는 순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
그만한 자리에 올라갈 때까지 너무 많은 피를 손에 묻혀 왔기 때문이다.
거기에 여성인 미스 슈는 자신의 가장 큰 무기인 미모가 점차 사라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니, 난 이 기회에 지상으로 올라갈 거야. 겁쟁이는 여기서 살라지. 아니, 죽으라지."
실제로 이번 지하 경매 사건으로 인해 개장수가 어디까지 밀려 나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함께 피해를 본 금광이 이를 두고 볼 일은 없을 테니 완전히 죽지는 않겠지만... 그래 봐야 금광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밖에 더 되겠나.
'그렇게 돼도 지하도시의 패권은 이쪽이 확실하게 부여잡겠군.'
멀쩡한 금광과 이번 사건으로 인해 기반을 반쯤 잃게 된 개장수.
그에 반해 전력을 확실하게 보전 중인 미스 슈와 시궁쥐.
이들의 패권 다툼의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이후 지하도시의 권력 계층이 바뀐 후에는 미스 슈도 염원하던 지상으로 자리를 옮길 터.
그리되면 지하도시의 실질적인 패자는 바로 시궁쥐가 된다.
'이번 일이 다 끝나면 좀 푹 쉬어야겠어.'
자신답지 않게 급하게 움직이느라 몸이 노곤했다.
적어도 한동안 귀찮은 일은 생기지 않을 테지.
"흐아암. 그놈의 힘이 뭐라고 이러고 있는지...."
그렇게 그가 나태하게 한숨을 내쉬고 있을 무렵, 복도로부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보스. 상황 보고가 들어왔어."
그사이 경매장 쪽 상황이 정리가 된 걸까.
시궁쥐는 수하의 목소리에 나른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 들어와."
"보, 보스, 상황 보고가 들어왔어."
"그래! 들어오라니까? 응...?"
"보, 보스, 보스, 사, 상황 보고, 보고가 들어왔어."
그때, 눈을 열고 들어온 수하의 눈동자를 본 시궁쥐는 순간 강렬한 불길함을 느끼며 외쳤다.
"제길, 막아!!"
그 외침과 동시에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에 숨어 있던 암살자들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들의 검이 수하의 목을 치기 전에, 먼저 들어온 수하의 핏빛 눈동자가 맹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 * *
보랏빛을 머금은 검은 장미꽃잎이 허공에 나풀나풀 날아다닌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다크엘프와 셰인의 모습은 얼핏 몽환적으로 비춰졌으나, 그 꽃잎이 일으키는 광경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끄으, 흐아아악!"
"마, 마력이익...!"
나풀나풀 떨어지는 꽃잎에 의해 생채기가 생기는 순간, 그 상처로부터 마력과 생명력이 뽑혀 나가 새로운 보랏빛 꽃이 발아한다.
그렇게 쓰러진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꽃잎에 의해 더욱 베이고, 또다시 꽃이 발아하기 시작한다.
죽은 자들의 위로 꽃이 한 무더기로 개화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공포의 현장 속.
이 상황의 주동자처럼 보이는 셰인은 다크엘프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살아남은 것들부터 정리하도록."
"예."
2년간 인간의 언어를 배운 다크엘프의 수장이자, 엘프 여왕 프리실라와 같은 핏줄을 타고난 오베른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다크엘프들이 움직였다.
뒤늦게 마력으로 자신의 몸을 보호한 이들은 이어지는 다크엘프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밀려 나갔다.
떨어지는 꽃잎을 막기 위해 전신에 마력을 두른 것만으로도 불리한 마당에, 재빠른 다크엘프의 공격마저 피하기엔 역부족이었으니.
"...! ...!!"
백염을 두른 황태자의 들개들도 주변을 날아다니는 꽃잎을 불태우며 자신들에게 달려드는 다크엘프의 공세에 대비했다.
들개와 다크엘프의 검이 맞부딪혔다.
그러나 들개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다크엘프의 검은 백염에 의해 쉽사리 부서지지 않았는데, 이는 세계수의 가지로 연마한 검이었기 때문이다.
"흡!"
뿐만 아니라 다크엘프들 또한 마력을 쓰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였으나 그들에게는 세계수의 정기가 있었다.
정기로 신체를 강화하고, 그저 짐승처럼 덤비기만 하는 들개와 다르게 그들은 동료와 함께 검술을 구사하며 완벽한 팀워크를 선보였다.
그러자 들개들도 하나둘씩 밀리기 시작했고, 전황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뭐 하는 놈들이냐!"
한편, 셰인을 마주한 1호와 경비대장은 그런 셰인을 잔뜩 경계하며 노려보고 있었다.
유리했던 전장의 상황이 급격히 기울었다.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한참 날뛰고 있던 토끼 신사도 셰인을 향해 달려들지 않았다.
셰인은 1호와 경비대장을 보기보다, 그런 토끼 신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너의 주인에게 안부를 전해 주거라."
"...이거, 듣던 대로 정말 흥미로운 분이시군요."
셰인을 알아본 토끼 신사는 아직도 꽃잎에 죽어 가는 자신의 괴물 토끼들을 바라봤다.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닐뿐더러,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는 무너진 개장수의 성을 바라보고는 허공에 손을 올렸다.
"주인님의 명도 있으시니,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쇼에서 뵙도록 하죠."
그대로 그가 손을 내리긋자, 왔을 때처럼 텔레포트 포탈이 열렸다.
토끼 신사는 금세 그 안으로 사라졌고 뒤이어 괴물 토끼들도 연기처럼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마치 원하던 것은 다 얻었다는 듯, 아무런 미련도 보이지 않고 사라지는 모습. 뒤늦게 1호가 허공에 대고 외쳤다.
"이봐, 이건 이야기가 다르잖아! 어디로 가는 거야!"
그러나 그의 외침에 돌아오는 말은 없었고, 그는 잔뜩 핏발이 선 눈으로 셰인을 노려봤다.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잘못 걸린 줄 알아라."
"후우, 한동안 앓겠군."
그러면서 1호와 경비대장은 품에서 꺼낸 약을 집어삼켰다.
변화는 빠르게 찾아왔다.
1호의 덩치가 불어남과 동시에 멀쩡한 피부에서 털이 솟아 나오기 시작했고, 이는 경비대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1.8미터쯤 되어 보이던 그들의 덩치가 어느새 3미터까지 늘어나는 과정을 바라보던 셰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든의 연구가 그래도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군. 수인족의 피를 정제한 약인가."
이미 죽어 사라진 존재지만, 여전히 그가 남긴 흔적은 세상 이곳저곳에 남아 있었다.
"그래 봐야 불완전한 건 똑같지만."
그에 짐승으로 변한 1호와 경비대장이 달려들자, 셰인의 주변으로 다크엘프들이 모여들었다.
오베른의 검이 날카로운 1호의 발톱을 막고, 경비대장은 멀리서 날아오는 화살에 경로가 막혔다.
"굳이 시간을 끌 필요는 없지."
그러면서 셰인은 바닥에 팽창 룬 마법을 새겨 발동시켰다.
"뭐, 뭐냐!"
"흐읍?!"
견족 수인인 1호와, 웅족 수인인 경비대장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수인족의 마력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불완전한 마법에 기대니 그런 꼴이 나는 거다."
"무슨 짓을 한 거냐!!"
"크흐으윽...!"
한편, 경비대장은 강제로 수인족의 마력에 분리되는 과정으로 인한 부작용에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굳이 저 마법의 약점을 강의해 줄 생각이 없던 셰인은 허공에 무수한 검을 소환했다.
"그럼, 이만 정리하도록 하지."
"크아아악!!"
순식간에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이 경비대장의 몸에 쑤셔박혔고, 뒤이어 셰인이 소환한 바람의 검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누가 이렇게 끝날 성싶으냐!!"
어찌 된 일인지 경비대장과 다르게 부작용 증세를 전혀 보이지 않은 1호는 바닥에 연막탄을 던져 시야를 차단시켰다.
그러는 사이 약을 다시 한번 섭취한 1호는 늑대의 형상을 취한 채 그대로 자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어느새 저 멀리까지 달려 나간 것이다.
"반쪽짜리 수인이었나."
"...따라갑니까?"
"흐음. 아니, 됐다. 어차피 여기서 도망쳐 봐야 죽을 곳을 찾아가는 것이니."
"알겠습니다."
셰인의 말에 별다른 의문도 가지지 않고, 오베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거래를 마저 해 볼까."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한편,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엘리엇은 간신히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셰인의 말에 대답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99화
99화 늑대와 기사
지하 경매장에서 간신히 벗어난 1호는 미스 슈 패밀리의 간부들만이 이용하는 통로를 통해 5층으로 향했다.
'겨우 살았나.'
경비대장은 허무하게 죽어 버렸지만, 그래도 이번 일에 대한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번 일을 일으키며 경비대장 정도야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지 않았나.
비록 경비대장의 밑에 있던 수하들마저 죽은 것은 뼈아팠으나, 그건 개장수도 마찬가지.
애초에 경비대장 자체가 개장수의 수하였던 만큼, 놈의 배신으로 인해 개장수의 손해만 크다고 봐야 했다.
'이대로 주인님과 합류해서 지하 경매장을 정리해기만 하면 되는데....'
도대체 마지막에 등장한 민무늬 가면의 정체가 무엇일까.
토끼 신사야 앞서 시궁쥐에게 들었던 인물이었으니 그러려니 했으나, 민무늬 가면의 등장은 1호에게도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더군다나 황태자의 들개마저 손쉽게 처리하던 다크엘프의 존재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래 봤자 장부는 이쪽에 있다.'
1호는 마지막까지 손에서 놓치지 않은 장부를 보며 그래도 속으로 안심했다.
만약 그 가면의 사내가 이 장부를 원한다면 이걸 통해 거래를 할 수도 있을 테니.
'그러니 일단 돌아가야... 응?'
그렇게 통로를 걸어 나온 1호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고요하다.
물론 5층에서, 그것도 시궁쥐의 영역에 소란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냐마는, 그래도 그 흔한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근처에 경비 겸 수면을 취하고 있을 거지들도 보이지 않았다.
'벌써 전쟁 준비에 들어가고 있나?'
어딘지 모를 불안감을 떨친 1호는 그리 생각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준비가 빠르군.'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오는 길에 사람 하나 마주치지 못한 1호는 금세 시궁쥐의 거처까지 도착했다.
이곳에 있을 자신의 주인, 미스 슈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서자, 그를 반긴 것은 수많은 거지 차림의 사람들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사람이었던 것들이었다.
"어...?"
너무 충격적이라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 했던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1호는 잠시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그거... 주인님 건데."
달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은발에, 피가 흐르듯 붉은 눈동자의 소녀가 한때 인간이었던 것들의 위에 올라타 그런 1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뭐냐. 넌 도대체...!"
시궁쥐의 전력은 1호조차도 다 파악하지 못했다.
워낙에 비밀스러운 것도 그랬지만, 그가 거느리는 거지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특급 암살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모두 시체가 되어 소녀의 의자가 되어 있었다.
"나...? 에블린. 주인님의 명령을 받아서 왔어. 근데... 놓쳐 버렸네. 둘 모두. 그래도, 네가 찾아와서 다행이야. 그거 가지고 가면 주인님이 칭찬해 주시겠지."
"뭣...."
1호가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피처럼 붉은 눈과 마주하자 마치 뱀 앞에 선 개구리가 된 듯, 온몸이 긴장하여 움직이지 못했다.
압도적인 포식자.
1호가 본 소녀는 그러했다.
"얘들아, 저걸 가져와."
이 자리에는 1호와 소녀 외에는 아무도 없는데 저 소녀는 누구에게 저리 말하는 것일까.
설마 숨어 있던 누군가가 있는가 싶어 주변을 둘러본 1호였으나, 이내 그는 누군가 자신의 발목을 잡은 순간 소녀가 말한 대상이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시, 시체가...!"
그의 발치에 쓰러져 있던 시체.
그리고, 소녀에게 깔려 있던 시체들이 몸을 일으켜, 소녀처럼 붉게 변한 눈으로 그런 1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 * *
"죄송합니다. 물건은 놓치고 말았습니다."
"아니, 괜찮다. 그래도 네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여 보고하는 엘리엇의 모습에 금광 엘도라트는 그런 그를 탓하지 않았다.
"대신 귀한 손님을 모시고 왔어."
"...."
"그래, 거래 장부의 주인이자, 바깥에서는 귀족 살해자라 불린다지. 뭐라 부르면 되지?"
"아무렇게나 불러라."
"그럼 대충 흰 가면이라 부르도록 하지. 그래, 흰 가면 씨. 나에게 볼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지?"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
"하하, 원래 그런 성격이라서 말이야. 고향에서는 시달린 게 좀 있었지."
"그런가. 그럼 본론부터 말하도록 하지. 거래를 하러 찾아왔다."
"거래라... 장부는 이미 놈들의 손에 넘어갔다고 방금 막 들었는데."
엘도라트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셰인을 바라봤다.
"내용물만 안다고 써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장부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도 있으니."
엘도라트가 핵심을 찌르고 들어왔으나, 셰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네 목적은 고작 거래 장부 따위가 아니지 않나."
"흐음. 마치 내 목표가 뭔지 아는 눈치인데."
"지상."
"음?"
"고향의 땅을 떳떳하게 밟는 것. 그렇지 않나, 황제의 피를 이은 자여."
"...!"
셰인의 이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인물은 엘리엇이었다.
그는 순간 셰인을 기습해야 하나 고민했으나, 뒤이어 그런 그의 목 아래로 서늘한 감각이 느껴져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새 소환된 어둠의 정령, 아르카네가 칼날로 변한 팔을 그의 목에 두고 있던 것이다.
"크흐흐... 그것까지 알고 있단 말이지. 정체가 정말 너무 궁금해지는데... 일단 그 칼은 좀 치워 주지. 이래봬도 내가 유일하게 믿는 수하라서 말이야."
"아르카네."
"예... 주인님."
셰인의 부름에 아르카네가 조용히 팔을 거두자, 그제야 엘리엇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말의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식은땀을 흘리며 슬그머니 시선을 뒤로 향한 엘리엇은 방금 자신의 목에 검을 겨눴던 소녀를 바라봤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에, 로즈베리 눈동자를 지닌 소녀는 방금 전, 엘리엇에게 흉흉한 기세를 내뿜던 것과 달리 다소곳한 자세로 셰인의 곁에 서 있었다.
'도대체....'
한편, 엘리엇이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엘도라트는 여전히 눈앞의 민무늬 가면의 사내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내 정체를 알고 있다니 재미있기는 한데... 날 어떻게 위로 올려 보내 주겠다는 거지?"
엘도라트.
본명은 제페르 디 퀘이어트 엘라인.
현 황제의 형제이며 황위 쟁탈전에서 패배해 지하도시로 들어와 42년 동안 버텨 온 사내다.
"애초에 너의 목적은 황실로 돌아가는 게 아니지 않나."
"...그런 건 진작에 포기했지."
한때는 그러한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이곳 지하에서 쥐새끼처럼 숨어 살다가, 언젠가 다시금 황위에 도전할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38년 전에 일어났던 흑마법사의 테러 사건.
그리고 그 후에 분노한 제국을 지켜본 엘도라트는 그 순간부터 황위 탈취에 대한 꿈을 완벽하게 접어 버렸다.
"그 빌어먹을 백염 앞에서는, 뭘 할 수가 없었으니까."
지하도시에서 무력으로 가장 강했던 흑마법사가, 저지먼트 기사단 하나에 의해 붕괴되고 와해되는 것을 똑똑히 지켜본 엘도라트는 자신의 꿈을 진작에 포기했다.
"이제는 저 빌어먹을 인공 천장만 보고 싶지 않을 뿐이야."
때문에 엘도라트는 그저 지하도시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만족했으나, 나이가 들어 갱년기라도 온 것일까.
여전히 그의 가슴 한편에는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이 남아 있었다.
황제 같은 게 아닌, 제대로 된 황족으로서의 권위를 이어 영지를 지배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
"그게 가능하리라 보나?"
셰인의 확언에 엘도라트의 두 눈에 희미한 열망이 깃들었다.
이젠 나이가 들어 눈가에 잔주름이 가득함에도 그는 지상으로의 귀환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멀쩡한 영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애초에 그런 영지가 남아 있지도 않겠지만."
"흐음."
"하지만 상당한 크기에 미래가 충분한 영지라면 있지. 어떤가?"
"그런 영지가 남아 있다고?"
그런 곳에 과연 황위 쟁탈전에서 패배한 황족을 보내 줄까?
하지만, 이어지는 셰인의 말에 엘도라트는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추위는 잘 견디나?"
* * *
엘도라트와의 만남이 성사된 이후, 셰인은 금광이 따로 마련한 저택으로 몸을 옮겼다.
"정말 해내셨군요...."
얼마 지나지 않아 앞서 미리 연락을 받은 애덤이 찾아왔다.
휘황찬란한 저택에 들어온 애덤은 자신의 정보망을 통해 한참 난리가 난 지하도시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받고 있었다.
워낙 이런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가는 동네가 아니던가.
그 난리 속에서 목숨을 건진 손님들이 이미 관련된 소문을 쫙 퍼뜨리고 있을 터였다.
"어떻게 이번 사태가 일어날 줄 아셨던 겁니까?"
엘리엇과 마찬가지로 애덤 또한 이번 습격이 경매가 끝난 이후, 물건이 넘어가는 시기일 것이라 예상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셰인은 예상이라도 한 듯 다크엘프를 대동하고 그 장소에 찾아갔다.
"다른 건 몰라도 황태자는 이미 준비하고 있었겠지."
"황태자? 들개를 말하는 겁니까?"
"그래. 놈 또한 사람을 풀어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고, 애초에 물건이 경매장에 넘어가기 전에 일을 처리하려 했을 거다."
"아... 그런데 소리 소문 없이 물건이 넘어갔지요."
"그래, 맞아."
다른 때라면 모를까, 이번 살리에르 백작의 장부는 지하도시를 한동안 시끄럽게 만들던 물건.
거기에 다른 층과 다르게 4층의 유일하게 존재하는 경매장, 그것도 포 패밀리의 일원인 개장수에게 물건이 들어갔다.
당연히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마당에 소리 소문 없이 물건을 건네는 것부터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셰인은 이를 해냈다.
"황태자 입장에서는 불안했겠습니다."
"그래. 입찰자에게 물건이 건너가는 상황조차도 허무하게 놓치긴 싫었겠지."
그러므로 입찰이 실패한 순간부터 황태자가 키운 들개의 난입은 필수적이었다.
"황태자가 만약 입찰에 성공했다면 어쩌실 생각이었습니까?"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지. 아무리 금화가 지하보단 지상에 굴러가는 게 많다지만, 몰래 쓸 수 있는 돈도 그럴까?"
"음. 확실히, 검은 돈의 양만 따지면 지하를 이길 수는 없겠지요."
"그래."
아무리 황태자라지만 지하 경매장처럼 비밀리에 진행되는 곳에 그만한 금액을 투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거기까지 이해한 애덤이 제3의 세력인 토끼 신사에 관해 물으려던 찰나.
"다녀왔어요, 주인님."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온 에블린에 의해 그런 애덤의 말문은 닫힐 수밖에 없었다.
"바빠요?"
"아니, 안 그래도 널 기다리고 있던 참이다. 가서 한 일은?"
"미안해요. 두 마리는 놓쳤어요."
"시궁쥐와 미스 슈겠군."
"네. 휘리릭- 하더니 후루룩- 사라졌어요."
에블린의 황당한 설명에 애덤이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을 무렵.
에블린은 여전히 당당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건 챙겨 왔어요."
끼이익.
"헉!"
이어지는 애덤의 기겁한 목소리는 당연한 것이었다.
열린 문 너머로부터 기척을 숨긴 채 움직이고 있는 마흔 명의 노숙자... 시궁쥐의 청부업자들이 서 있었으니까.
그들은 피처럼 붉은 눈에 초점을 잃은 듯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셰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에블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다."
그중에는 청부업자들과 다르게 유독 옷이 멀쩡한 자가 껴 있었다.
얼굴도 익숙한 그는 지하 경매장에서 도주했던 1호였다.
"애덤. 네가 가진 능력을 각성시킬 때가 온 것 같군."
"예, 예?"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들려오는 말은 애덤을 놀래키기에 충분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00화
100화 흑마법사의 비사
셰인은 풀린 눈을 한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1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그의 품에서 약 케이스를 꺼낸 셰인은 이리저리 약을 훑어보고는, 애덤에게 넘겼다.
"이게 뭡니까?"
"이종족의 피를 정제하여 만든 도핑제더군."
"피, 피를 정제합니까?"
"그래."
도핑제를 유통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미스 슈였으니, 어쩌면 그녀가 흑마법사와 커넥션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애덤은 그런 약 케이스를 꺼림칙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혹, 부작용은 없는 겁니까?"
"보아하니 같은 혈통의 수인족을 대상으로는 부작용이 거의 없던 것 같더군."
적어도 1호는 허무하게 죽은 경비대장과 다르게, 두 번이나 약을 먹었음에도 멀쩡하게 돌아다녔다고 한다.
물론 연속해서 복용한다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안 좋을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복용은 한 번만 할 거다. 자기가 가진 힘을 약에 의지해야만 쓸 수 있는 반푼이 같은 능력은 아무런 소용도 없지."
당장 경비대장이 어떻게 죽었는지 떠올린다면, 셰인의 입장에서는 가치를 논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저것과 다르게 네가 가진 수인족의 피가 더 옅은 것 같으니 그걸 손봐야겠지. 지금은 단지 피가 가지고 있는 수인족의 힘을 한차례 일깨우는 용도에 불과하다."
"음... 알겠습니다."
셰인의 말에 애덤은 표정을 바로하고 진지하게 붉은 알약을 바라보다, 망설임 없이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크, 크윽...!"
애덤의 피에 깃든 수인족의 피가 도핑제에 깃든 수인족의 혈마력에 반응하며 전신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애덤은 압도적으로 밀려오는 고통에 순간 정신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기사로서 단련된 단단한 근육이 찢어졌다 재생되길 수십 차례 반복하고, 그럴 때마다 그의 신장이 비정상적으로 크기를 부풀렸다.
시야가 붉게 물들며 동시에 그의 정신은 순식간에 수인족의 야성에 물들어 갔다.
이윽고 인간의 세상이 아닌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한 은빛 털이 애덤을 감쌌다.
"은랑족이라...."
셰인은 잠시 전생에 만나 봤던 수인족, 그것도 견족 수인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아 숭배를 받던 은랑족을 떠올렸다.
은랑족은 모든 견족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지만, 그들이 견족에게 숭배를 받는 이유는 다름 아닌 뛰어난 육감 때문이다.
제대로 밝혀진 것은 없으나, 은랑족은 자신들이 가진 육감으로 위기를 예지하고 동족들을 챙겼기에 견족에 숭배를 받을 수 있던 것이다.
애덤은 바로 그 은랑족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였다.
"근데 역시 반푼이로군."
하지만 그 피를 일깨우는 데 들어간 혈액이 일반 견족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일까.
애덤은 이지를 상실하고 앞으로 돌출된 주둥이를 으르렁거리며 셰인을 향해 적의를 보였다.
그러자 그 적의를 감지한 어둠의 정령, 아르카네가 셰인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와 그런 애덤과 대치했다.
"아르카네. 정신 차리게 해 줘라."
"예, 주인님."
"...멍멍이. 털이 부드러워 보여."
한편 에블린은 그런 애덤을 바라보며 두 눈을 빛냈다.
아무리 수인족 중에서도 알아주는 은랑족이라지만, 고귀한 진혈의 흡혈귀 앞에서는 그저 은빛 강아지로 보일 따름이었다.
* * *
애덤은 금방 아르카네에 의해 제압되었다.
한편 셰인은 에블린이 데리고 온 미스 슈와 시궁쥐의 수하들의 기억을 쭉 훑으며 머릿속의 계획을 차곡차곡 정리해 나갔다.
"이때부터였군. 시궁쥐가 무명에 가담하게 된 건. 아니, 어쩌면 무명에서 보낸 게 시궁쥐였을 수도 있겠어."
전생의 기억대로, 시궁쥐는 이 시점부터 무명에 가담하고 있었다.
다만 전생의 이 시점에 셰인은 아직 말단에 불과한 조직원이었기에 시궁쥐와 얽힐 일이 없어서 확신하진 못했다.
'미스 슈가 개장수로부터 암시장의 정보를 파악하고 시궁쥐가 이종족을 긁어모은 건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셰인은 어느새 도착한 목적지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미스 슈의 본거지.
그녀의 본거지는 금광과 개장수의 성하고 제법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지하에 있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건물.
내부로 들어가니 외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철저하게 귀족의 흉내를 내는 것 같다고 할까.
한눈에 봐도 복도마다 미술품과 값비싼 풀 플레이트 갑옷 거치대를 마련해 둔 것이 황실의 복도를 걷는 것만 같았다.
"추하군."
하지만 그래 봐야 모든 게 한순간에 사그라들 거품이다.
셰인은 그리 짧은 평을 내리고는 복도를 걸어갔다.
전투가 있을 줄 알았으나, 미스 슈의 수하들은 사라진 자신들의 보스를 찾기 위함인지, 아니면 애초에 자신의 거처에는 사람을 두지 않는 것인지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저택을 수색하고 다니던 셰인은 1층 중앙 로비로 돌아와 주변을 훑어봤다.
"흐음."
로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벽에 걸린 거대한 그림이었다.
미스 슈의 초상화.
뇌쇄적인 차림새와 포즈를 취한 채 그려진 그림을 잠시 바라본다.
"찢어라."
"예, 주인님."
명령을 받은 아르카네가 즉시 반응해 그림을 찢어발기자, 그 너머로 나무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에 마력을 집중하자, 내부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 무슨 소리지?"
"글쎄... 오늘따라 위가 조용하던데."
"그 미친년이 다시 돌아오려나 보군."
"쉿, 조용히 해."
"젠장. 어쩌다 우리가 이런 꼴을...."
초조, 분노, 절망, 회한 등등.
다양한 부정적 감정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렇게 문을 열고 내부를 들여다보자, 그곳에는 역한 냄새와 함께 비쩍 마른 20여 명의 노인들이 메마른 눈으로 셰인에게 시선을 보내 왔다.
"흑마법사들인가."
"...?"
"처음 보는 사람인데."
"누구시오?"
문 너머는 작업실에 비루한 차림의 노인들이 그런 셰인을 바라보고 물었다.
평소 자신들을 찾아오는 미스 슈나 그녀의 수하와는 전혀 다른 복장을 하고 있지 않나.
"그렇군. 38년 전으로부터 살아남은 흑마법사들인가."
"...!"
"어, 어디서 뭐 하는 누구시오!"
"정체를 밝히시오!"
흑마법사들 사이에서 큰 동요가 일어났다.
흑마력을 양손으로 두른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으나, 셰인은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흑마법사라면 일단 공격부터 하고 봤을 텐데, 그들은 어째서인지 두려움을 먼저 느끼고 있던 것이다.
"흑마법의 패턴도 이상하군. 고든의 그것과는 달라."
"...! 고든!"
"그 개밥으로 줘도 시원찮은 놈을 아는 것이냐!"
그 말에, 그제야 그들의 감정이 보다 격해졌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두려움보다도 뿌리 깊은 분노였다.
"고든을 아나?"
"그걸 말이라고 묻는 것인가?"
"그놈으로 인해 우리가 어떤 일을 겪었는데!"
흑마법사들의 반응은 셰인에게 있어 퍽 재미있게 다가왔다.
고든은 모든 흑마법사들의 스승이자 존경의 대상이고 또 두려움을 선사하는 존재이지 않나.
그러나 저렇게 분노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셰인도 처음 봤다.
"고든은 죽었다."
해서 셰인은 먼저 대화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들은 셰인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흐흐, 그래. 그렇게 생각하겠지. 무식한 놈들이 뭘 알겠느냐."
"놈은 살아 있다. 고작 날붙이 따위에 베였다고 죽을 작자가 아니란 말이다!"
"마력을 죽이는 백염이라 해서 놈의 영혼마저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저들의 불신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전대 흑마법사의 수장이었던 고든은 그만한 인간이었으니.
하지만 셰인은 알고 있었다.
고든의 영혼이 어떻게 분해되어 사라져 갔는지.
"그렇겠지. 네크로노미 마스크를 연구하며 영혼 분리 마법에 통달한 작자였으니."
"...! 그걸 어떻게!"
"혈마법의 존재를 알고 있단 말인가?"
흑마법사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38년 전, 제국과 흑마법사들의 전쟁에서 고든은 혈마법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에 아직 완성되지 못한 네크로노미 마스크의 불안정한 실험으로 인해 테러처럼 보이는 사고가 일어났고, 그에 분노한 제국이 지하도시까지 처들어와 무차별적인 학살을 벌인 것이지 않나.
38년 전의 진상을 알고 있던 흑마법사들은 들끓는 감정을 조율하며 다시금 셰인을 바라봤다.
"다시 묻겠소. 그대는 누구시오?"
"고든을 죽인 자. 그리고 놈의 영혼을 완전히 파괴한 사람이다."
"...믿을 수 없군. 이곳은 어떤 연유로 찾아오게 된 것이오? 미스 슈의 허가를 받은 것인가?"
"그 여자의 허가를 받을 이유가 없지. 꼬리를 만 개처럼 이미 도망쳤는데."
"도망...? 그 여자가?"
흑마법사들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셰인을 바라봤으나, 셰인은 이를 설명하기보단 행동으로 보였다.
"에블린."
"네, 주인님."
셰인의 부름을 받은 에블린이 그림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소, 소녀...?"
"그림자에서 나왔다고? 음차원을 저렇게 쓸 수도 있는 건가?"
"느껴지는 저 영혼의 격은 도대체...."
남루한 저 차림세와는 다르게 흑마법사들은 에블린의 격을 금방 알아보고 떨리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놈을 저들에게 보여 봐라."
"알겠어요."
그 말에 에블린은 다시금 그림자로 들어갔다가, 한 사람의 수급을 챙기고 나왔다.
"1... 1호!"
"저 빌어먹을 개자식이 어떻게?"
"저자의 말에 사실인가?"
본래 이곳에 남아 있을 미스 슈의 수하들에게 보여 기를 꺾고 시작할 생각으로 들어왔던 1호의 수급은 흑마법사들에게도 잘 먹혀들었다.
"이제 대화를 나눌 생각이 좀 들었나?"
"...만약, 그대의 말대로 미스 슈가 없다면...."
"지금이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가."
"이 빌어먹을 곳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오?"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아 그들은 이곳에 자체적으로 있던 게 아닌 감금과 비슷한 형태로 있던 모양이다.
"따라와라. 적어도 여기보단 비교적 안전한 곳이 있으니."
"...이보게들. 일단 저자를 따르는 게 좋겠구먼."
"하, 하지만 이렇게 나가도 괜찮은 것입니까? 만일 저자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가 무슨 유리병에 갇힌 벼룩인가! 그 이상 뛸 수 있음에도 뛰지 못하는 병신은 아니지 않나. 우린 지금 바깥으로 도약해야 할 때일세!"
"아...!"
그나마 그들 중 가장 나이가 있어 보이는 흑마법사의 설득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고, 굳은 결심이 보이는 표정으로 셰인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설득된 흑마법사를 데리고 조금 더 미스 슈의 저택을 탐색하던 셰인은 몇몇 자료를 찾아낸 것으로 만족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후 금광의 저택으로 돌아가, 흑마법사들의 사정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우린 고든과 다른 학파의 흑마법사였다네."
"다른 학파? 흑마법사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나?"
"물론 일반인들이 보기에 우리 흑마법은 그저 음침한 이들이 모여 사악한 악마를 다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고든 그 미친 작자가 가진 사상과 우리가 가진 사상은 전혀 다르다네."
"사상이라."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흔히들 흑마법이라 하면 방금 저 늙은 마법사가 말했던 것처럼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저주에 걸린다는 편견이 있다.
하지만 흑마법 또한 마법에 불과했고, 세상의 이치 내에 존재하는 힘이며 인간의 능력으로 컨트롤이 가능하다.
"흥미가 생기는군. 자세히 듣고 싶은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그리고 이어지는 늙은 흑마법사의 이야기는, 셰인도 처음 들어 보는 그들만의 비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