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거대한 땅굴 돔 전체에 랫맨의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으...."
피 냄새에 현기증을 느낀 디라일라가 코를 틀어쥐었고, 클라인은 복잡한 심정에 눈살을 찌푸렸으며, 아네이스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대단해."
아네이스는 어떻게든 방금 셰인이 마법으로 펼친 검로를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
그만큼 셰인의 바람 칼날은 아네이스에게 있어 이상적인 검술의 표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나 셰인이 이를 막았다.
"아네이스. 방금 내가 한 말을 기억하나?"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라고?"
"맞다. 내가 보여 준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분석한 길일 뿐. 너는 너의 검을 갈고닦아야 한다. 참고하되 매몰되지는 마라. 그 순간 너는 스스로의 길에 가로막혔을 때, 그걸 헤쳐 나가는 방법을 잊어버릴 테니. 선지자는 마법사에 한정되지 않는다."
"...알았어."
"그리고 클라인."
"예."
"내 전투를 보고 느낀 점이 있더냐?"
"...."
셰인의 물음에 클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많은 랫맨의 시체를 바라봤다.
셰인은 결코 랫맨을 편하게 죽이지 않았다.
어떨 때는 랫맨의 급소를 피하고 거동이 불편하도록 만들어 동료 랫맨들을 흥분하게 만들고.
또 어떨 때는 일격에 죽이며 죽음의 공포를 새겨 넣었다.
마치 몬스터의 본능에 각인시키듯.
셰인은 랫맨의 행동 하나하나에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도록 조절한 것이다.
소름이 끼치도록 몬스터에 대한 습성을 파악한 태도.
거기에 더불어 셰인은 랫맨이 어중간한 공포를 느낄 때 몇 놈을 풀어 주고 다른 동료 랫맨을 부르도록 내버려 뒀다.
그 결과.
처음에는 십수 마리에 불과했던 랫맨의 숫자는 지금 보는 것처럼 수십 마리로 불어나게 됐다.
그뿐만 아니라, 셰인의 바람 칼날은 분명 클라인의 검술과 비슷했으나, 그 성질이 전혀 다른 것이었다.
패도적인 검술.
마치 세상을 오시하는 듯한 자세는, 세상을 감싸는 듯하던 클라인의 검술와는 크게 달랐으니.
이는 검을 휘두르는 자가 추구하는 의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셰인은 그러한 결과를 클라인에게 요구했다.
디라일라나 아네이스에게 말했던 것처럼 스스로 길을 개척하라는 게 아닌, 길을 제시하는 태도.
클라인은 그 사실이 혼란스러웠다.
형님은 분명 평소 까칠한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이런 패도적인 성격을 지니진 않았다.
언제 이런 변화를 겪은 것일까.
'무슨 일을 겪었길래 이런 검을 보여 주시는 걸까.'
동시에 클라인의 몸이 떨렸다.
이는 옅은 두려움, 거부감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클라인은 한편의 마음속에 생기는 작은 변화에 혼란함을 느꼈다.
그런 셰인의 길이,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무의식 중에 깨달은 것이다.
이는 클라인의 천재적인 검술에 대한 이해도 때문이었다.
전투에 있어서 동정이란 전혀 쓸모가 없는 것.
전투는 그야말로 광기 그 자체였고.
검에는 결코 동정 따위의 부드러운 감정이 들어갈 여지가 없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그 완성형을 바로 눈앞에 뒀으니.
이런 훌륭한 교과서를 클라인의 재능은 결코 흘려 보내지 않았다.
'여태까지 내가 휘두른 검은, 무엇을 위한 검이었지?'
분명 이 이후 오랜 고민이 클라인을 뒤따라 다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전처럼 클라인의 검에 적을 동정하는 감정이 들어갈 일은 없을 터.
비록 셰인만큼 패도적인 검술은 되지 못할지언정.
스스로에게 망설임을 제시하는 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5일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6화
26화 준비(4)
진득한 진청색 피를 온몸에서 흘리는 트롤의 괴성이 숲에 울려 퍼졌다.
아네이스는 지친 몸을 이끌고 그런 트롤과 마지막 대치를 이어 갔다.
트롤의 가죽은 수십 번에 걸쳐 베이고 찔려 넝마처럼 변한 지 오래.
그마저도 타고난 회복 능력으로 몇 번에 걸쳐 체력을 회복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너무 오래, 그리고 또 많이 회복했기 때문일까.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친 트롤은 더 이상 상처를 회복하지 못했고, 이내 무릎을 꿇었다.
한편 아네이스의 상태는 결코 좋다고 볼 수는 없었다.
여기저기 구른 흔적은 당연했고, 마지막까지 발악하는 트롤은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최후에 생명을 불태우듯 휘두른 놈의 몽둥이를 미처 제대로 흘리지 못하고 내상까지 입은 듯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네이스는 얼굴에 미소가 자리해 있었다.
생사결.
비록 몬스터였으나, 신체강화를 제외한 어떠한 마력도 쓰지 않고 순수 인간의 힘으로 상대하는 트롤은 그야말로 하나의 벽처럼 느껴졌으니.
그 벽을 기어코 부수어 버린 아네이스에겐 이 고통 또한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휘두르라던 셰인의 말처럼, 아네이스는 이번 전투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것도 저런 괴물을 상대로 1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말이다.
특히 마지막을 장식했던 트롤의 그 공격은 아네이스에게 작은 깨달음을 가져다주었다.
죽기 직전 마지막 생명을 불태우는 트롤의 공격은 아네이스의 '예지'를 살짝 비틀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겨우 실마리를 잡은 수준이었으나, 이 감각을 잊지 않고 계속해서 되뇌다 보면 분명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 터.
"...고마워."
만약 셰인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경험을 언제쯤 맛볼 수 있었을까?
아네이스는 이번의 작은 깨달음을 셰인 덕분에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솔직하게 감사를 표했다.
"네가 직접 성취한 일이다. 나보다는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끼도록."
"...부끄러워하는 거야?"
"헛소리."
"훗."
그런 아네이스의 미소에 셰인이 고개를 돌려 남은 팀원들을 바라봤다.
클라인은 같은 검사로서 아네이스의 깨달음에 순수한 축하 인사를 건넸고, 디라일라는 여기저기 구른 탓에 피를 흘리면서도 웃는 아네이스를 보며 기가 죽어 있었다.
하지만 이내 디라일라도 활짝 웃음꽃을 피웠다.
방금 저 트롤이 이 던전에서 마지막 상대였기 때문이다.
"으아, 드디어 끝났다."
일행은 그대로 앉아서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앞서 디라일라와 클라인 또한 고블린이나 코볼트를 상대했고, 그중에는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을 자랑하는 '워 보어'라는 이름의 멧돼지 무리 또한 토벌하느라 지친 탓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쉬었을까.
일행들이 쉬는 사이 셰인은 쓰러진 트롤에게 다가가 녀석의 목에 걸린 나뭇잎 목걸이를 끊어 들었다.
'예정대로 이것까지 얻었군.'
이번 던전에 들어온 이유.
팀원들의 전력을 가다듬는 것도 있었지만, 셰인의 최종 목표는 바로 이 트롤이 목에 걸고 있는 나뭇잎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이나 평범해 보이고, 실제로도 별다른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그런 나뭇잎.
그러나 셰인은 이 나뭇잎의 진정한 활용처를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 숲 자체가, 그리고 이 트롤이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나뭇잎이었다.
'세계수의 나뭇잎. 이걸 먹는 건 두 번째로군.'
유일하게 엘프와 대화할 수 있는 수단을 얻은 셰인은 일행들의 시선을 피해 나뭇잎을 씹어 삼켰다.
* * *
"아으! 죽는 줄 알았네, 진짜."
던전을 마치고 아카데미에 돌아온 일행들은 먼저 해산하기로 하고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이래저래 팀의 첫 던전 토벌을 무사히 마친 만큼 축하하는 자리라도 가지는 게 어떨까 싶었지만, 그럴만한 체력이 남은 사람은 없었다.
마력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한 채로 진행한 던전 토벌은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보통 피곤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셰인은 거기에 할 일이 더 있었다.
따로 모험가 협회와 아카데미에 복귀 서류를 제출하고, 또 던전에서 얻은 전리품을 현금화하면서도 분배 또한 해야 했기 때문이다.
"형님. 제가 좀 도와드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바쁘시지 않습니까."
그 외에도 셰인은 라비아타와의 협업과 관련해 아직 정리해야 할 서류가 남아 있는 상태였다.
여러 모로 바쁜 나날이 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셰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괜찮다. 나는 그리 지치지 않았다. 그보다는 돌아가서 이번 토벌에서의 전투를 복기해 보도록 해라."
"으음... 그래도."
"괜찮대도. 어서 가 봐라."
"...그럼,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클라인까지 떠나고 홀로 남아 이어지는 업무를 모두 마친 셰인은, 근처 골목길로 들어가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확실히, 조금 바쁜 하루가 되긴 하겠군."
진짜 사냥은 바로 지금부터였다.
* * *
"뭐, 뭐냐. 도대체 뭐냔 말이다!!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고, 이 씨발 새끼야...!"
셰인은 언젠가 나이가 들어 노쇠한 슬라임을 본 적이 있었다.
멀쩡한 슬라임과 다르게 코어가 불안정했던 슬라임은 점액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흐물거리기만 했었다.
"워, 원하는 것이라도 있느냐? 마, 말만 해라! 어? 내 돈이고 뭐고 전부 넘기겠다. 그러니, 그러니 뭐라 말 좀 해 보란 말이다...!"
눈앞에 있는 이 살덩어리의 이름 모를 귀족을 보니 그때 그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그 늙은 슬라임과 다르게 눈앞의 살덩어리는 말이 많다는 것 정도일까.
"제발, 제발... 목숨만은...."
눈앞의 귀족은 극도의 공포에 다리 사이를 축축하게 적시며 필사적으로 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존재는 무언가 다르다.
새하얀 가면과 대비되는 검은 안개로 몸을 감싼 이 존재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별장에 침입한 직후부터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의 호위 기사들을 죽여 버렸다.
평범하게 죽이는 것도 아니었다.
몇몇은 싸우지도 않았음에도 그대로 미쳐 버리며 허공에 검을 휘둘렀고, 또 어떤 기사는 벽과 바닥에 생성된 정체 모를 이빨에 의해 씹어 삼켜졌다.
그럼에도 이 가면의 존재는 어떠한 말 한 마디 내뱉고 있지 않으니, 그 침묵으로부터 오는 공포가 귀족의 정신을 잠식하고 있었다.
"히, 히힉! 그, 그럼 저건 어떠냐! 엘프, 엘프다! 아주 어렵게 구한 이종족이란 말이다. 어지간한 귀족 놈들도 구경하기 힘든 물건이라고!"
귀족의 말에 셰인이 시선을 돌려 한쪽에 손과 발이 속박된 한 여인을 바라봤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과 대비되게 그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는데.
그중에서도 소지와 약지가 잘린 왼손은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았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거품이 가득했다.
'엘프에게 포션이라도 먹인 모양이군.'
그러나 포션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약품이기에, 다른 종족에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는 독극물에 해당되니 저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한편 셰인이 엘프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귀족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저걸 주마! 그러니 이대로 떠나 다오. 그러면 절대 너를 쫓으라는 명령 따윈 하지 않겠다. 평생 조용히 살 것이야!"
"...."
그러나 셰인이 여전히 말없이 엘프를 쳐다보자, 두려움에 의해 정신이 나가 버린 귀족은 생존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이, 씨발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라 하지 않았느냐!!"
거의 비명이나 다름없는 괴성을 내지른 귀족이 품에서 단검을 뽑아 들고는 그대로 셰인을 향해 돌진했으나.
그걸 두고 볼 어둠의 정령이 아니었다.
셰인을 감싸고 있던 어둠이 귀족의 손을 포박하고 그대로 그 육중한 몸뚱이를 들어 올렸다.
[Krrr... 주인님.]
정령이 정중하게 물어 왔고, 셰인은 공중에 매달린 채로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버둥거리는 귀족을 지그시 바라봤다.
"어쩌면, 잠깐의 평화에 취했던 것일지도 모르겠군."
그러면서 다시금 시선을 엘프에게 돌렸다.
"아니면, 너무 여유를 부렸다거나."
본래라면 이대로 녀석을 붙잡아 심문이라도 할 생각이었으나, 다 부질없이 느껴졌다.
살리에르를 상대할 때도 그랬다.
생각해 보면 회귀 전의 셰인은 지금보다 더 악독하고 처절하게 상대를 짓밟았다.
그게 인류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던 고귀한 영혼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타락이 없어진 이후, 셰인은 적을 너무 유하게 상대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저 붙잡고 심문이라니.
이 얼마나 인간적인 사고방식이란 말인가.
"영혼이 망가지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지."
그러면서, 셰인은 살덩어리 귀족을 위아래로 훑었다.
"먹어라."
[예, 주인님.]
"영혼 한 조각 남기지 말고."
그 말에 어둠으로 일렁이는 아가리를 벌리던 정령이 멈칫거렸다.
[하지만 그러기엔 아직 제 힘이....]
"내 힘을 보태 주지."
[아아...!]
여태까지 그저 물질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던 오리진의 양이 달라졌다.
마치 빗물로 고인 물줄기가 세찬 강줄기가 되듯.
셰인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오리진의 질과 양이 모두 한껏 늘어났다.
[너무, 너무 맛있습니다. 황홀합니다, 주인님...!]
"됐으니 이거나 먹어치워라."
[예!]
"끄윽, 끼이이익!"
가진 바 형상이 훨씬 뚜렷해진 어둠의 정령이 점차 다가오며 이빨을 번들거리자 귀족이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이내 축 펴지며 팔다리가 늘어졌다.
과도한 공포로 인해 기절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둠의 정령이 입을 멀려 귀족을 집어삼켰고, 그제야 이 자리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셰인은 두 눈을 감고 어둠의 정령과 동화했다.
녀석에게 먹힌 귀족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방금, 셰인이 정령에게 명령한 것은 단순히 귀족을 먹어치우라는 내용이 아니었다.
영혼의 섭취.
다만 영혼은 어둠의 정령으로서도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셰인은 이를 위해 자신의 오리진을 녀석에게 전달했다.
이와 같은 일은, 이미 전생에 너무 많이 해 왔기에 숨 쉬듯 쉬운 일이었다.
다만 셰인은 여태까지 그 방법을 무의식중에 쓰지 않고 있었다.
그때의 자신은 타락으로 인해 그 행동에 이런 짓거리에 거리낌이 없었다.
단순히 물리적 죽음이 아닌 영적 죽음은 필요 이상의 잔인함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굳이 이런 것들을 상대하는 데 대수가 어디 있겠나.'
당장 셰인이 상대하는 게 전생처럼 무고하며 고귀한 영혼을 가진 적도 아니고.
그저 인류를 좀먹는 거머리나 진드기 같은 놈들이 아니던가.
"평화에 취해 있던 거지."
그렇게 셰인은 이름 모를 귀족이 남긴 영혼의 조각을 모아 그것을 토대로 정보를 모았다.
귀족의 이름은 리암 알친.
하이엘 왕국 출신의 자작.
6년 전에 연합국으로 들어옴.
타종족의 고통으로 우월감을 느끼는 성적 취향.
"별 쓸데는 없었군."
그러면서, 셰인은 품에서 두꺼운 책을 꺼내 들었다.
"이것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것도 시간이 걸리겠어."
여기저기 손때가 많이 탄 책은, 이전에 죽은 살리에르 백작이 생전에 만들어 둔 거래 장부였다.
거래 장부는 매우 세밀하게 적혀 있었는데, 거래 상대의 이름과 날짜, 품목은 물론이고 심지어 어디서 몇 시에 누구를 통해 거래를 이뤘는지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과연 살리에르와 거래를 했던 놈들은 자신들의 목줄을 잡고 있는 이 장부의 존재를 알까?
아마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장부에는 셰인이 가장 원했던 정보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래서 혹여 리암 알친의 기억 속에 그와 관련된 정보가 있을지 몰라 영혼을 살펴본 것이었지만, 쓸데없는 추잡한 기억만이 읽힐 따름이었다.
"놈의 영혼을 더 살펴보도록. 이종족 노예와 관련된 정보라면 모조리 기억해 둬라."
[알겠습니다, 주인님...!]
만족스러운 포식을 했기 때문일까, 어둠의 정령의 대답에는 어느 때보다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럼 이제... 진짜 볼일을 보도록 할까."
[이미 능멸당한 몸, 더 이상 어찌할 생각하지 말고 죽여라!]
이딴 소리나 내뱉는 정신 나간 엘프였으나, 어쨌든 셰인의 메자이아 대수림 공략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였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7화
27화 준비(5)
엘프(Elf).
아카샤의 대봉인이 있기 전, 숲의 주인이었던 종족.
세계수를 자신들의 신으로 모시며 살아가던 그들은 아름다운 외모에 숲을 사랑하는 심성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 알려져 있으나.
실상 몽상가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엘프들은 결코 온순한 종족이 아니었다.
그들은 숲을 사랑하는 요정이자 숲지기였으며, 또 숲의 패왕이나 다름없는 존재들.
그들은 자신들의 숲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스스럼없이 목숨을 던질 만큼 호전적으로 변하는 종족이기도 했다.
때문에 대수림의 공략을 위해선 엘프들의 적개심을 줄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물론 그에 대한 준비도 마친 상황이다.
[진정해라. 너를 해하려 온 게 아니니.]
[...?!]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닌,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셰인의 목소리에 엘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당연하지만 엘프들은 인간들의 말을 할 줄 모른다.
그들이 아카샤에 의해 던전이나 요람에 봉인되기 전에 인간은 고작 한 줌밖에 되지 않는 벌레 같은 종족이었으니.
당연히 인간의 언어를 알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만큼 셰인에게 죽은 살리에르 백작에 의해 리암 가문에 팔려온 엘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인간이 언제 이렇게 번성했단 말인가?
세상은 왜 이렇게 변한 거지?
어떻게 마력도 쓰지 못하던 벌레 같은 종족이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몸이 떨리는 치욕 속에서 엘프는 몇 번이고 자살을 시도하고 싶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자살을 시도할 때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매번 자신에게 치욕과 능멸을 선사하던 저주받을 인간이 낄낄 웃으며 뭐라 말했으나 엘프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당연하지만, 귀한 노예가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귀족들의 아티팩트 때문이었다.
그렇게 매일 같이 치욕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이 흰 가면을 쓴 남자가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자신과 같은 엘프어를 하는.
[너, 너는 무엇이냐. 분명 동족의 향은 느껴지지 않는데. 어떻게 우리의 커넥트 로드를 쓸 수 있는 거지?]
커넥트 로드는 엘프들의 대화 수단이다.
인간들과 다르게 엘프들은 자신들만의 특수한 저주파 마력으로 대화를 나눈다.
그것이 바로 엘프의 언어.
그러나 이 저주파 마력은 비슷하게 따라 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특별한 마력의 줄기.
바로 세계수의 나뭇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셰인이 트롤에게서 때어 낸 나뭇잎 목걸이. 그게 바로 엘프들이 신성시하는 세계수의 나뭇잎이었다.
[너는 누구냐!]
그렇기에 엘프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말은, 오만했다.
[봉인을 깰 자다.]
[뭐, 뭐라?]
[세상에 자유를 내릴 자이고 너희들의 친우가 될 자.]
[...!]
마치 세상을 오시하듯,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 눈동자에 엘프, 엘라 루 오르카가 떨리는 심정을 가라앉히고 간신히 물었다.
[내게 원하는 게 뭐지?]
[너희 동족의 자유.]
[무슨....]
[해방을 원하지 않나?]
[...원한다.]
저 말에 아니라는 거짓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지금도 던전과 요람에 갇힌 그녀의 동족들은 영원히 반복되는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
어떤 영문인지 오르카는 제한적이나마 봉인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그 이유를 찾아보기도 전에 인간들에게 붙잡혀 치욕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엘프는 다급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 자유를 위해서 나는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
일단 눈앞에 있는 자가 자신을 죽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기에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자유를 위한 갈망. 그걸 내게 바쳐라. 그거 하나면 된다.]
[너에게 종족 전체가 속박되라는 것이냐!]
[아니. 그 갈망을 채울 힘을 나를 위해 쓰라는 말이다. 내가 곧 너희의 자유가 될 것이니.]
[믿을 수 없다.]
공포는 공포였고, 신념은 신념이었다. 엘프들의 신념은 굳건하다.
때로는 그들의 가냘픈 외모 때문에 그들이 강자에게 굴복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엘프들은 고대에 그 지옥 같은 곳에서도 자신들의 숲을 지켜 낸 용맹한 전사들.
절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동족을 팔아먹는 일은 하지 않는다.
설사 눈앞에서 친족이 살해당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기에 셰인 또한 눈앞에 엘프를 고작 말 몇 마디로 협력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직접 경험하게 해 주는 수밖에.
[알고 있을 테지. 봉인된 너희들이 시간이 멈춰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봉인에서 빠져나온 너 또한 다르지 않다. 알고 있지 않나?]
[....]
오르카는 셰인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전부 맞는 말이었으니.
존재의 시간 자체를 빼앗긴 오르카는 성장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정체된 존재.
이는 성장이라는 생명의 축복이 가로막힌 것이다.
[새로운 탄생으로 인해 봉인에서 벗어나지 않은 너희에게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하나,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셰인은 일렁이는 어둠을 압축하고 또 압축하며 양손에 자신의 오리진과 마력을 모았다.
룬어는 단 한 글자.
모방.
회귀 전, 타락에 물든 셰인이 제1군단장으로서 군림할 수 있던 이유.
질리도록 써 왔던 단 하나의 마력 패턴을 짜내어 엘프에게 건넸다.
[이, 이건....]
오르카는 생전 처음 보는 그 마력 패턴을 거부하려 했으나, 신체가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스스로 기어 다니고, 일어서서 걷는 것처럼 본능에 새겨진 것과 같았다.
[흡?!]
자신에게 흡수된 마력 패턴으로부터 거부할 수 없는 절대자의 기운이 느껴진다.
마력 패턴은 셰인의 눈빛에 스며든 것과 질적으로 다른 무언가.
그게 내면으로 들어오자, 오르카는 무언가 해방된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내, 내게 무슨 짓을....]
[해방감. 아주 짧지만, 너를 옥죄고 있는 봉인을 해 주했다.]
육체적으로 느껴지는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영기에 민감한 엘프인 오르카는 스스로의 영혼에서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이는 마치, 아카샤의 대봉인이 있기 전의 감각이었다.
[설마, 설마... 드래곤! 너는 드래곤인가?]
아카샤의 대봉인마저 무시할 수 있는 마력.
그것은, 모든 종족의 정점에 선 존재이자, 세상을 수호하는 데미갓(Demigod). 반신의 영역에 들어선 드래곤들 밖에 없었다.
[아니. 지금은 단순히 따라 한 것에 불과하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나는 단지 미래를 제시했을 뿐이다. 지금도 단편적으로 따라 한 것에 불과하지. 시간이 지나면 너는 다시 봉인될 것이다.]
[....]
셰인의 말처럼, 봉인에서부터 자유를 되찾은 영혼이 아주 천천히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영혼에 쇠사슬을 거는 듯한 감각.
오르카는 두 눈을 감았다.
[너를 따르겠다. 단, 선택은 종족의 몫이다.]
[그거면 충분하지.]
결국, 자유를 갈망하는 너희는 거절하지 못할 테니까.
셰인은 가면 너머로 미세한 웃음을 보였다.
이로써 메자이아 대수림을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는 끝마쳤다.
리암 알친의 별장에서 일어난 사건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대서특필로 연합국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 * *
"으와. 기사 내용 한번 살벌하네."
아침 신문을 펼치고 식당에 앉은 디라일라는 심각한 표정으로 해당 기사를 읽었다.
[단독! 또다시 피살된 연합국 귀족. 살해 동기는 이종족 노예?]
[지난 날 4월 27일에 연합국 남부 외곽에 위치한 리암 알친 자작이 그의 별장에서 피살된 채 발견됐다.
이번 사건의 맡은 수사 기관에서는 지난 밤 일어난 처참한 살해 현장을 얼마 전에 피살된 살리에르 백작의 사건과 동일 인물이라 판단하고 있다고 한다.
....
하여, 이러한 두 피해자의 피살 방법이나 상황 등을 유추했을 때, 본 기자 또한 수사 기관과 비슷한 생각이다.]
바로 어제 일어난 귀족 살인 사건.
요 한 달도 안 되는 시기에 벌써 두 명이나 되는 귀족이 살해당한 일은, 결코 가볍게 다가오지 않았다.
특히나 디라일라에게는 더더욱 그러했으니.
심지어 이번에 죽은 리암 알친 또한 이종족 노예를 몰래 데리고 있다가 죽었다고 알려지지 않았나.
그 증거로 리암 알친의 시체 위로 그가 남긴 거래 장부가 있었다.
"뭐, 뭘 그렇게 시, 심각하게 봐?"
한편, 식당에 앉아 그런 디라일라에게 다가온 사람은 지휘학과 학과시험에서 2등을 차지한 베른슈타인 오스튼이었다.
"어? 아. 이것 좀 봐 봐. 또 귀족 한 명이 살해당했어."
"휴, 흉흉하네."
"그치? 앞으로 밤에 돌아다니면 안 되겠다."
"여, 여긴 연합국의 주, 중앙이야. 이런 크, 큰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은 저, 적어."
"아, 맞다. 그랬지."
"그, 그나저나 요즘 바쁜 것 가, 같던데."
오스튼의 물음에 디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보름 동안 아주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말도 마. 무슨 이상한 제약을 걸고 던전을 클리어 하라는데, 아주 죽을 맛이라니까?"
"제약?"
기왕 이렇게 된 거 잘됐다며 디라일라는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이거 보이냐? 이 누님이 요만한 흙으로 던전을 돌파했다? 머리가 아주 쪼개지는 줄 알았다고. 그 덕분에 기술적으로 많이 늘긴 했지만."
"으, 음...."
오스튼은 그런 디라일라가 내미는 한 줌의 흙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품에서 작은 외안경을 꺼내 흙을 보다 자세히 훑었다.
외안경은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오스튼도 마력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마도구였다.
"이, 이거, 마력이 스며든 거 아, 아니야?"
"엉? 아니, 그야 뭐. 내가 쓰는 흙이잖아."
"아, 아니, 마력으로 코팅이 됐다는 게 아니라, 말 그, 그대로 흙에 마력이 스며든 것 가, 같다고."
"으응?"
그제야 디라일라도 자신이 꺼낸 흙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러자 정말로 오스튼의 말처럼 흙에서 희미하게 마력이 느껴지는 게 아닌가!
"어,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하, 하하. 꼭 나, 나처럼 말을 더듬네."
"아니, 근데 이거 뭐야, 정말?"
"최, 최근에 이 흙을 조, 조종하는 데 힘이 덜 들어가지 아, 않았어?"
"조금 익숙해졌다는 느낌이 들긴 했는데...."
무기물에 마력이 스며드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실제로 마력을 한가득 품은 마석도 던전에서 곧잘 발견이 되고, 실제로 마석 광산도 있을 정도이니.
때로는 오래된 물건에 마력이 스며들어 그 자체로 아티팩트가 되는 경우 또한 있다.
그러나 디라일라가 놀란 이유는, 이 흙을 쓰기 시작한지가 고작 보름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단순히 그 짧은 시간 동안 마력을 담아서 쓴다고 무기물에 마력이 스며든다면, 세상에는 아티팩트가 여기저기 넘쳐날 것이다.
자연스럽게 무기물에 마력이 담기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셰, 셰인은 너한테 이, 이걸 보여 주고 싶어 했던 거 같은데."
디라일라는 처음에 셰인의 제약을 받았을 때, 단순히 마력의 컨트롤을 늘리는 방법인 줄 알았다.
실제로 그녀의 생각처럼 이 정도로 흙을 컨트롤해 본 기억이 없기에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그녀의 마력 컨트롤은 나날이 진보하고 있었으니까.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닐 터.
지하인도 아니면서 지하인인 자신보다 더 특성을 잘 알 리가 있나.
아무튼 이는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굉장한 호재였으니.
"너, 너라면 이걸 좀 더 다, 다양하게 쓸 수 있지 아, 않을까?"
"으음...."
오스튼의 말에 디라일라도 생각에 잠겼다.
마력이 스며든 흙.
그렇다면 이건....
"내가 먹어도 되겠는데?"
"어?"
"나, 마력이 스며든 광물이면 뭐든 먹을 수 있으니까."
언제나 숨기고 싶었던 뾰족한 이를 내보이며 디라일라가 말하자, 오스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이 마력은 네가 직접 만든 마력인데, 마, 마력이 늘어날까?"
"단순히 늘어나는 효과만 보자면 쓸모없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내 마력에 대한 이해력 자체는 높아질 거야."
사람이 본인의 장기를 직접 볼 수 없듯이, 마력도 비슷했다.
스스로의 마력에 대한 이해력을 높이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디라일라는 단순히 자신의 마력이 스며든 흙을 섭취하는 것만으로도 마력에 대한 이해력이 늘어나는 것이다!
이는 분명 평범한 인간들은 생각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와... 대박."
그렇게 지금의 훈련이 얼마나 유용한지 깨달은 디라일라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당장 비싼 마석을 먹지 않더라도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달은 셈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네이스의 합류로 이 팀에 머물러도 되는 게 맞나 싶었던 디라일라였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여기 딱 붙어 있어야겠다."
"자, 잘 생각했어."
* * *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비단 디라일라뿐만이 아니었다.
셰인은 이후 메자이아 대수림으로 향하기 전까지 컨디션을 조절하라며 대기하라 했으나, 클라인과 아네이스가 의욕을 내비쳤다.
셰인이 지휘했던 던전에서의 깨달음을 잊고 싶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덕분에 디라일라도 던전을 클리어 하며 돈도 벌어들일 겸, 흙에 마력을 품기 위해 그들과 함께 던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던전에서는 항상 클라인과 아네이스의 논의가 이어졌다.
"그러니까, 아네이스 양의 검이 반드시 나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아주 조금의 변화면 되죠."
"그래. 그런데 네가 쓰는 검술은 변칙적이지만 그게 너무 본능에 치중되어 있어. 본능에 따라 상대의 급소만 노리니까, 오히려 그 변칙성이 죽는 느낌."
"아, 그래서 어제 그 대련에서...."
"응. 그런데 네가 썼던 그 검술에 변칙점은 어떤 의식의 변화로...."
그러는 사이에 라비아타 모험단과 약속한 시간이 찾아와, 일행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약속 장소인 하이엘 왕국의 어느 고급 식당에 도착했다.
그리고.
일행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누군가에게로 향했다.
비단 아름답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요정의 외모.
가만히 있음에도 희미한 빛무리가 흘러나오는 듯한 이종족, 엘프 오르카였다.
[언제나 인간들의 시선은 역겹군.]
[참아라.]
[...알겠다. 동족을 위해 그리하지.]
오르카는 약지와 소지가 없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얼굴을 가렸다.
"야, 야. 너 저 엘프는 어떻게 데리고 온 거야?"
디라일라의 질문에 클라인과 아네이스 또한 비슷한 의문을 담은 표정을 보였다.
"알 거 없다."
"뭐?"
"깊게 알려 하지 마라."
"...우씨."
"노예 같은 건 아니다. 그녀에게는 도움을 받을 게 있어서 말이지."
"뭐? 무슨 도움?"
"그건 차차 알게 될 테니 기다리도록."
"끄응...."
그러다 이내 표정을 핀 디라일라는 조심스럽게 엘프를 향해 다가갔다.
어쨌거나 같은 이종족이 아니던가.
괜히 없던 친근감도 생기려 해서 어색하게 친근한 미소를 그리며 다가갔다.
"어, 안녕하세요?"
"...."
당연하지만, 인간의 말을 하지 않는 오르카는 디라일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셰인을 바라봤다.
[굳이 이런 것들을 상대해야 하나?]
[말도 통하지 않으니 무시해라.]
[그러지.]
"저기 안녕하세요? 저기요? 응? 저기요? 나 누구랑 얘기하니?"
그렇게 디라일라의 이종족 친구 사귀기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8화
28화 짧은 신경전
라비아타라는 이름은 특별하다.
단순히 유서 깊은 모험단, 강한 모험단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 이름이 특별한 이유는, 그들이 기원 후 처음으로 인간 사회에서 마력을 사용한 집단이기 때문이다.
초대 라비아타 모험단장은 던전에서 인간이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아냈고, 그 지식을 아낌없이 세상에 풀어 인류 전체에게 말도 안 되는 성장을 선물했다.
그뿐이던가?
역대 라비아타 모험단장들은 하나같이 역사적인 발견을 해 왔고, 그때마다 인류는 크게 진보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라비아타라는 이름은 현 인류에게 있어서 결코 가벼운 이름이 아니었다.
그래서 셰인을 제외한 일행들은 모두 아닌 척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하하! 이거 진짜 대단하네. 고작 보름 만에 이만큼 준비했다고? 제임스. 우리가 그때 했던 계약이 민망하지 않아?"
"정말 할 말이 없군요."
라비아타는 크게 웃으며 셰인의 준비성에 감탄했고, 깐깐해 보이는 제임스조차도 그런 그녀의 말을 인정했다.
'와...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네.'
같은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셰인과 라비아타가 나누는 대화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디라일라는 어이가 없었다.
대략 2시간 전.
라비아타와 제임스가 약속 시간에 맞춰 등장하고 식사를 마친 후, 일행은 곧바로 메자이아 대수림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실상은 셰인의 독무대라 봐도 좋을 정도였다.
"보름 만에 그 깐깐한 마탑의 장로한테 인정받은 건 당연하고 그 양반한테 마도구까지 뜯어 왔다니. 정말 듣고도 믿기지가 않네."
"보통 깐깐한 이들이 아니긴 하지요."
지난 보름 동안, 셰인은 일행들과 던전 토벌을 마친 뒤, 독자적으로 이번 메자이아 대수림의 탐사 준비를 이어 갔다.
그 과정에서 마탑의 인물들과 접촉하고 탐사에 필요한 마도구를 양도받았고, 다른 엘프도 아닌 메자이아 대수림 출신의 엘프까지 어디선가 데리고 왔다.
특히 엘프의 등장에 라비아타가 크게 놀랐는데, 그 이유는 메자이아 대수림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대수림에는 저 귀쟁이들이 그렇게나 아끼는 세계수가 있잖아. 그 말도 안 되는 환경에서 저 귀쟁이들하고 싸우기까지 하면 보통 피곤한 게 아니거든."
사실상 메자이아 대수림의 기괴한 기상 현상과 맞물려 숲의 패왕인 엘프들과 전투를 치르라는 것은 불가능한 임무였다.
그런 와중에 대화의 창구가 되어 줄 엘프까지 데리고 왔으니, 라비아타의 입장에서는 자다가 떡이 떨어진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거 참, 그쪽에선 이렇게까지 준비해 줬는데 나는 안 좋은 소식이나 들고 왔네. 라비아타라는 이름에 면목이 없어."
"안 좋은 소식이라면...."
"뭐, 이번 우리의 탐사에 거머리들이 좀 들러붙었어. 그 녀석들한테는 우리 모험단의 이름값에 네가 퍼뜨린 드래곤 하트가 참을 수 없이 향기로운 꿀단지 같았겠지."
그러면서 라비아타의 설명이 이어졌다.
내용인즉슨, 제국과 메자이아 대수림과 접경 지역인 하이엘 왕국에서부터 동반 파견을 보내 왔다는 것이다.
"거기다 모험가 협회에서 최근에 이름 좀 날리고 있는 모험단도 같이 좀 부탁한다고 붙여 왔더라고. 아주 사방에 도둑놈들밖에 없다니까."
"모양새가 그리 좋지는 않군요."
"맞아. 자기들 이름값은 지키고 싶으면서, 또 정보는 얻고,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도 적으니 기회다 싶었겠지."
"저기, 그래도 모두 명성이 적지 않은 곳인데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나요?"
도중에 디라일라가 손을 들어 묻자, 라비아타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떨까 싶지만, 결국 어른의 사정이라는 거지. 다른 거라면 모를까, 여태껏 발견된 적 없던 드래곤 하트에 대한 거니까. 이쪽을 견제할 겸, 기회가 되면 자기들이 꿀꺽할 심산인 거야. 가뜩이나 위험한 요람에서 우린 같은 인간들끼리 신경전을 펼쳐야 한다는 거고."
"그리고 정말 눈앞에 목표물이 나타났을 땐, 신경전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
셰인의 첨언에 디라일라가 '아....'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에 이번에는 클라인이 조심스럽게 질문해 왔다.
"그럼 왜 굳이 그들과 함께 가는 겁니까?"
"요람 내부에서는 문제가 일어나면 해결이라도 할 수 있지, 외부에서 적으로 돌아서면 시작부터 일이 꼬이는 수가 있거든."
"예...?"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그 녀석들의 제안을 거절하면 뒤에서 무슨 수작질을 할지 모른다는 거야. 특히 하이엘 왕국의 경우에는 메자이아 대수림 접경 국가이다 보니 우리가 요람으로 향하는 길을 아예 막아 버릴 수도 있지."
"하지만 요람의 토벌은 인류의 숙원인데, 그런 짓을 했다가는...."
그 말에 제임스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물론 그렇게 대놓고 가로막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명분은 그들에게 있죠. 혹여 요람에서 뭘 잘못 건드릴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며 이의를 제기하고, 그와 비슷한 논리로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형성하면 여론도 어떻게 될지는 모릅니다."
"거기다 그 부분을 주관하는 게 연합국의 모험가 협회인데, 이번에는 그치들도 여기에 한 발 걸쳤잖아."
"예. 그러니 이에 대해 안정성을 확인하겠다는 이유를 들먹이며 시간을 쓰는 것 정도는 그들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라비아타의 이름값이 대단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국제 여론마저 어찌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정면에서 맞붙는 거라면 모를까 그런 식의 여론전은 라비아타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으니.
"...어렵군요."
"왜 그렇게 복잡하게들 산데...."
"정의롭지 않아, 그런 짓은."
클라인과 디라일라, 아네이스가 차례대로 질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고, 라비아타는 그런 셋을 보며 쓰게 웃었다.
본래라면 이 정도까지의 견제가 들어오진 않았을 것이다.
여론전으로 몰고 가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요람에 들어갈 때마다 이런 식의 방해가 들어온다면 국민들도 바보가 아니기에 들고 일어설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가뜩이나 그 이름값과 전력만으로도 이동국가라는 이명에 걸맞은 라비아타 모험단이, 전설로만 알려졌던 드래곤 하트까지 손에 넣으면 어찌 될까?
국가급 권력을 가진 조직이 그만한 보물을 차지하는 것도 크게 문제가 될 사항인데, 그게 고작 하나의 조직에 들어간다?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 됐든 그런 이유로 내일 탐사가 시작될 때 인원이 좀 늘어나 있을 거야. 그 부분은 이해 좀 부탁할게."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 뭐라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대신 이 부분은 내가 잊지 않을 테니 기대하라고. 그럼 다들 잘 쉬고, 내일 다시 보자."
"예. 들어가십시오."
긴 이야기가 끝나고서야 라비아타와 제임스가 식당을 떠났고, 그들의 인기척이 없어졌을 때 디라일라가 축 처진 목소리로 말했다.
"던전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피곤하네...."
그 말에 클라인과 아네이스도 반박할 수 없었다.
"정작 내일이 되면 오늘이 그리워질 거다. 그러니 컨디션 조절은 알아서 하도록."
일행들은 셰인의 그 말이 사실임을, 금방 실감할 수 있었다.
* * *
"하, 듣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정말 이런 어린 생도들을 데리고 가는 게 맞는 선택입니까? 요람 탐사는 애들 탐험 놀이가 아닙니다."
자신을 애덤이라 소개한 하이엘 왕국 출신의 기사단장이 눈썹을 찌푸리며 셰인과 그 일행들을 바라봤다.
어딘가 날카로운 인상의 소유자인 그는 각자 인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그 말을 내뱉었다.
그에 호응하듯, 옆에 있던 황실 호위 기사, 도미닉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확실히 좀 나이가 어리긴 하구려. 요람의 이름이 그리 가볍진 않을진대. 램퍼트 모험단장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자기 목숨은 자기가 챙기는 것으로 하죠."
마지막으로, 아무래도 좋다며 중얼거리듯 답하는 모험가 협회의 이름으로 나온 램퍼트 모험단장, 일렉사까지.
그들의 태도에 라비아타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이라고 진심으로 셰인 일행을 배척하려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이 탐사가 시작된 이유는 바로 셰인의 논문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각자의 이해득실을 위해 모인 자리.
그들은 이번 탐사에서 최대한 통제권을 붙잡고 싶어서 저런 신경전을 벌이는 것이다.
어찌 됐든 셰인과 그 일행들은 아직 아카데미 생도들이었으니까.
그때, 파견 나온 이들에게 시선 한 번 돌리지 않은 셰인이 라비아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라비아타 님. 계약서의 내용, 기억하십니까?"
"어?"
갑자기 계약서?
무슨 말인가 싶어 계약서의 내용을 떠올려 보던 도중, 제임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 계약서의 내용상, 셰인 님의 협력 대상은 어디까지나 라비아타 모험단에 한정됩니다."
"그럼 제가 저들에게 배려해 줄 필요는 없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죠."
"이 시간부로 저는 저들을 독자적인 세력으로 판단할 겁니다. 저들의 생존 여부는 제 알 바 아닙니다."
파견 세력의 태도에 셰인은 저들을 없는 이들로 취급하기로 결정했다.
"하,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군. 요람 탐사가 그리 만만하게 보이던가?"
곁에서 그 말을 들은 하이엘 왕국의 기사단장, 애덤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걸어왔다.
그러나 셰인은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려 했으나, 누군가 그런 셰인의 앞을 막아섰다.
"이봐. 우리 단장님께서 말씀하지 않나. 어려서 눈에 뵈는 게 없나 보지?"
파견단에 포함된 기사 중 한 명이 거대한 덩치를 들이밀며 그리 말하자 분위기가 삽시간에 경직됐다.
"후우."
"한숨?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웰스. 그만해라. 저쪽의 입장이 저러니 우리도 그에 맞게 취급하지."
"하, 단장은 사람이 너무 착해서 문제요."
애덤이 말리는 척 말했으나, 결국 이 또한 기선 제압을 위한 연극에 불과했다.
"이런 애송이들은 인생의 매운맛을 모르지. 그 잘난 가문의 이름 하나 믿고 왕국의 기사단장에게 이따위 태도를 보이는 걸 보면 말이야."
그러면서 웰스라 불린 기사가 셰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던 순간.
라비아타가 그 손을 막았다.
"야."
"엇."
"적당히 하지?"
"...."
그 한마디에, 웰스는 눈살을 한 번 찌푸리고는 라비아타의 손을 뿌리치고는 말했다.
"뭐, 알겠소. 그 유명한 라비아타의 말이니 이쯤 하지."
그렇게 웰스가 기사단으로 돌아가자, 라비아타는 셰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야야, 아무리 그래도 죽이려 한 건 좀 아니지."
방금,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했으나 라비아타만은 셰인의 왼손 아래로 모이는 은밀한 마력을 눈치챘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지난번 라비아타가 봤던 마탄과는 전혀 다른 살상력을 지니고 있었다.
"...신세를 졌습니다. 제가 타인과의 접촉은 극도로 혐오하는지라."
신세를 졌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방금은 정말 저 웰스라는 기사를 불구로 만들 생각이었다.
회귀 후 많이 유해지긴 했으나, 셰인은 기본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혐오한다.
인류를 지키려는 것은 어디까지나 다가올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서였고, 또 그 과정에서 망가져가는 클라인을 지켜 주고 싶기 때문이지 결코 그들이 예뻐서가 아니다.
방금처럼 성격대로 행동했다면 일이 귀찮아졌을 터.
"어우, 두 번 손대면 목숨까지 잃겠네."
그렇게 라비아타가 농담을 내뱉으며 멀어졌고, 이어서 일행들이 다가왔다.
"야 이, 진짜 저것들 싸가지가 없네? 잘 참았다, 잘 참았어."
뒤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던 디라일라가 대신 화를 냈고, 아네이스와 클라인의 표정도 그리 좋지 않았다.
특히 클라인은 파견단으로 돌아가 동료들과 대화하고 있는 웰스를 보는 눈초리가 좋지 못했다.
'저 녀석이 사람한테도 저런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나.'
그 모습이 퍽 재미있던 셰인은 방금 느꼈던 혐오감이 씻기는 듯했다.
"됐다. 어차피 저 웃는 표정들이 절망으로 바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그 말이 실현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 *
대수림 초입에서는 불행 중 다행으로 속성이 뒤섞인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빨리 달려라, 빨리!"
그럼에도 애덤은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의 휘하 기사단원들에게 소리쳤다.
콰과과과과과──!!
다만, 마치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폭우가 쏟아져 내렸을 뿐.
마치 둑이 터진 것처럼 사방에서 강이라 불러도 될 정도의 물줄기가 터져 나오며 일행들을 압박해 왔다.
한편, 이 사태를 일찍이 눈치챈 셰인의 일행과 라비아타 모험단은 저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는 상황.
그런 그들의 행동을 눈여겨보고 있던 황실의 호위 기사, 도미닉과 램퍼트 모험단 또한 그 뒤를 바짝 쫓아가고 있었다.
유일하게 뒤처진 것은 하이엘 왕국의 기사단뿐.
물론 그들이 뒤늦게 움직였던 것은 아니다.
갑자기 아무 말 없이 달리기 시작한 셰인을 따라간 나머지 일행들보다 1분 정도 늦었을 뿐이다.
나름 신속하게 움직였다 해도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에서 나무뿌리 사이로 터져 나오는 물줄기에 발이 꼬일 뻔했다.
거대한 나무의 뿌리로 만들어진 동굴.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인지 거대한 나무뿌리가 시작되는 나무의 밑으로 커다란 입구가 뚫려 있었다.
앞서 달리던 셰인과 일행, 그리고 라비아타 모험단은 이미 나무의 밑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저 안으로만 대피한다면 숨 돌릴 틈은 있을지도 모른다.
"크아악! 사, 살려우흡?!"
그때, 무리에서 가장 뒤떨어져 오고 있던 기사 중 한 명이 나무뿌리 사이에서 터져 나온 물줄기에 맞아 쓰러졌다.
"웰스!"
하필이면 아까 셰인을 위협했던 기사였다.
이에 그걸 두고 볼 수 없던 애덤이 달려가 그를 끌고 오려 했으나, 애석하게도 웰스는 넘어짐과 동시에 물줄기와 함께 저 아래로 빨려내려갔다.
하도 물줄기의 힘이 강했기에, 웰스가 재빠르게 검을 땅에 꽂아 넣었음에도 순식간에 쓸려 버린 것이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9화
29화 진입
동료를 잃은 절망감을 애써 뒤로하고, 애덤과 그의 수하들은 가까스로 나무 내부로 통하는 입구로 들어갈 수 있었다.
"허억, 허억."
전력질주를 했기 때문일까, 그들은 하나같이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웰스 이외에는 낙오된 기사단원은 없다는 것.
그러는 한편, 일행들은 한쪽에 마련된 공간에 모여 지도를 펼치고는 각자의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 작태에 분노가 차오른 애덤이 일행을 향해 다가갔다.
"라비아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미리 이렇다 말이라도 해 줘야 하지 않았소? 이쪽은 방금 단원 한 명을 잃었단 말이오!"
"...하아. 저기, 지금 놀러 왔어?"
"뭐라?"
"여긴 요람 안이야. 댁들은 보살펴야 할 아이들이 아니고.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방금은...!"
"쯧, 이래서 기사들은 안 받으려고 했던 건데."
물론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방금 같은 경우 경고 정도는 던져 줄 수 있었다.
그랬다면 그 웰스가 그리 허무하게 쓸려 내려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라비아타도 그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었다.
"나라고 해서 사태를 알고 달려간 게 아니야. 자문역으로 온 이 친구가 달리기 시작해서 나도 달린 거지. 여기가 평범한 던전일 줄 알아?"
"큭...."
"여긴 요람이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이라고. 게다가 나는 분명 달리라고 소리쳤어. 그뿐이야? 분명 입장 전에 무장은 최대한 가볍게 하라고 했었지? 근데 그걸 무시한 사람이 누구였어?"
그런 라비아타의 말에 애덤이 입술을 씹었다.
확실히 요람에 진입하기 전에 앞서 라비아타는 일행들에게 무장을 최대한 가볍게 하라는 경고를 남겼다.
그러나 애덤은 그 의견을 적당히 흘려들었다.
마력을 수련한 기사들은 갑옷을 착용하고 있더라도 깃털처럼 가볍게 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땅이 축축하고 푹 파이는 땅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거기에 자체적으로 하이엘 왕국이 탐사를 진행했을 때에는 이렇게 초입부터 폭우가 내린 적은 거의 없었기에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또한 패인 중 하나였다.
"자자, 애덤 단장. 진정 좀 해 보시구랴. 물론 일이 이렇게 된 것에 애도를 표하는 바일세. 하지만 아직 대수림의 초입 아닌가? 그러니 쓸려 나간 그 기사도 무사할 가능성이 있네. 어쩌면 요람 밖으로 튕겨져 나갔을 수도 있지. 다행히 크게 무거운 장비들은 모두 벗어 두지 않았나?"
라비아타와 애덤 사이에 험악한 기류가 흐르자 그 사이를 막아선 것은 황실에서 나온 도미닉이었다.
"거기에 라비아타 단장의 말에도 일리가 있네. 우리가 너무 들떠 있던 게지. 5대 요람이라는 이름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어."
도미닉과 애덤은 기사단 출신이다.
그들은 주로 같은 인간이나 몬스터에게 강하지, 이런 환경적 요소에 빠른 적응을 요구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하지만 도미닉은 애덤과 다르게 노련한 기사였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함과 동시에 태도를 변경하는 데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아까 보니 셰인, 자네가 먼저 달리기 시작하더구먼. 분명 자네는 이 대수림의 예측 불허한 날씨를 예측할 수 있는 거겠지?"
그렇게 자연스럽게 자신의 본론을 꺼내들었다.
"아까 무례한 태도를 보인 것은 사과하겠네. 그러니 우리도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겠나?"
그가 고개를 숙이자, 그의 뒤에 있던 기사들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셰인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사과는 받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당연한 것으로 제게 무언가를 요구하시는군요."
"...크흠, 너무 티가 났나?"
도미닉이 면목 없다는 듯 웃었다.
"확실히, 자네는 아카데미 생도이지만 또 모험가이기도 하지."
모험가는 대가를 받는 자들이다.
그들 또한 라비아타를 따라오는 조건으로 이후 라비아타 모험단에 이익을 가져다줄 거래를 마친 상황.
그러나 요람으로 입장하기 전, 셰인은 앞서 자신과는 계약한 바가 없다며 따로 행동하겠다고 했다.
"목숨을 지킬 수 있는 정보를 얻는 것에 뭘 아끼겠나. 그래, 무엇을 원하고 계신가? 미리 말해 두지만, 황실의 권한을 사용하는 데엔 한계가 있네."
그 말에 셰인은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자신의 조건을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클레이튼 가문의 가주가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정도의 조건으로 하겠습니다."
"흐음... 알겠네. 그 정도라면 내가 어찌할 방법은 있을 것 같구먼."
"단,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제공하는 정보는 어디까지나 라비아타 모험단과 황실의 호위 기사단뿐입니다. 그리고 이 계약 내용은 도미닉 경. 당신이 돌아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행할 수 있도록 서류로 남겨 두길 권하는 바입니다."
"음, 철저하구먼. 그것도 수용하겠네."
둘의 대화에 결국 다급해진 것은 램퍼트 모험단과 하이엘 왕국 기사단뿐이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번 탐사에서 떨어져 나갈 게 분명했다.
그나마 이번의 경우에는 그 폭우에 속성력이 부여되지 않아 그저 달리기만 했으면 됐지, 이후 산성이 섞인 비나 닿는 것만으로도 신체가 얼어붙는 재앙과 같은 기상과 마주하게 되면 복귀조차도 못할 수 있었다.
"자, 잠깐만요. 램퍼트 모험단도 거래를 요청하겠습니다. 그에 앞서 보여 드렸던 무례에 대한 사과도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먼저 나선 것은 램퍼트 모험단장인 일렉사였다.
"그쪽에서는 무엇을 내걸겠습니까?"
일렉사가 잠시 주변의 시선을 확인하고는, 이내 조용히 말했다.
"거래 내용이 유출되고 싶지 않아요. 비밀 유지 서약을 해 주신다면 바로 거래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어서 셰인과 일렉사는 둘이서 한쪽 구석에 가서 대화를 나눴고, 이내 일렉사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왔다.
그러자 가장 곤란해진 것은 하이엘의 애덤이었다.
출발 전부터 셰인의 신경을 가장 건드린 것도 그였고, 그로 인해 단원을 잃은 상황에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애덤도 남은 부하들을 생각해서라도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아까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오. 원하는 거래 내용을 말한다면 재량껏 맞춰 보겠소."
이번 탐사대의 서열 정리가 끝난 순간이었다.
* * *
"하하, 생각보다 야무지지 않냐?"
한쪽에서 파견을 나온 이들에게 이후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셰인을 바라보던 라비아타가 그렇게 말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수완이 좋군요. 그저 짐덩어리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저런 식으로 수익을 창출하다니."
"...아무튼 이 돈 귀신은 봐도 꼭 지 같은 것만 봐."
"아가씨께서 직접 모험단의 회계를 담당하시면 그런 말은 쏙 들어갈 겁니다. 개처럼 돈을 버는 건 저인데 쓰는 인간들은 물불 안 가리고 쓰니 이런 말이 안 나오게 생겼습니까?"
"아아, 그만그만. 귀에서 피 터질 거 같으니까 그만."
"예, 더 말해 봐야 들어야 할 사람들은 한 명밖에 없으니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죠."
그 말에 라비아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금 말했다.
"그러는 너도 저치들한테 엄청 뜯어냈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이쪽은 아가씨의 이름값이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클레이튼 가문이 작은 가문은 아니라지만, 저 나이에 저들을 상대로 전혀 기죽지 않고 오히려 저렇게 몰아붙이는 것도 재능입니다."
첫 만남과는 달리 제임스의 평가가 상당히 후해지자 라비아타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진짜 돈 귀신이라니까."
"이제 다 누구 탓입니까?"
"그만!"
* * *
일행들이 멈춰 서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품에서 꺼낸 기상 관측구를 살펴보던 셰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겠습니다."
이 마도구는 요람에 오기 전, 셰인과 마탑의 장로가 머리를 맞대며 만든, 대수림 공략을 위한 장비였다.
"앞으로 15분. 다음 체크 포인트까지 이동합니다."
그리고 대수림 공략을 위한 계획에는 마도구뿐만 아니라 한 가지 사실이 전제되어 있었다.
대우기로 인해 매번 지형이 바뀌는 대수림이지만, 단 하나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
바로 셰인과 그 일행들이 머물렀던 거대한 나무들이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이 거대한 나무들은 어마어마한 빗물에도 쓸려 나가지 않고, 굳건하게 그 자리를 지켰는데, 대수림에서의 이동은 대부분 이런 나무를 찾아가는 형식으로 이어질 예정이었다.
램퍼트 모험단장 일렉사는 자신의 단원들을 다독이며 선두에 선 일행들을 쫓아 뛰어갔다.
그러면서 일렉사는 아까의 선택을 떠올리며 재차 잘한 선택이라 스스로를 칭찬했다.
대수림에 입장한 지 어느덧 반나절.
만약 셰인이 챙겨 온 기상 관측구가 없었더라면 일렉사 일행은 여기까지 도달하지조차 못했을 것이다.
하늘 위로 심상치 않은 마력의 변화가 느껴지는 것을 눈치챌 때는 늦는다.
그럴 때마다 하늘을 쳐다볼 때면 이미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으니.
나름 베테랑 모험단으로서 자부심이 있던 일렉사는 단원들의 목숨을 위해 기꺼이 그러한 자존심을 꺾어 버렸다.
'그래도 아직 만회할 기회는 있어요.'
전투에 있어서만큼은 자신 있는 일렉사였다.
평생을 몬스터를 상대하며 살아온 그녀와 그녀의 단원들은 이곳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일까?
위기는 갑자기 찾아왔다.
"남은 시간 3분! 빠르게 돌파합니다!"
다음 목적지로 향하던 도중에 마주친 몬스터 무리.
한 마리, 한 마리가 어린아이 수준의 크기를 가진 대형 벌레였다.
그레이트 우드 패러사이트.
움푹 꺼지는 땅으로 인해 이동에 제약이 있는 일행을 비웃기라도 하듯, 녀석은 땅 위를 제 안방처럼 빠르게 휘젓고 다녔다.
게다가 녀석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산성액은 나무의 뿌리마저 녹일 정도로 지독했다.
하지만 일행의 대처는 침착했다.
"방진(方陣)! 저(沮)!"
일렉사를 위시한 단원들이 앞장서 방패를 앞세우자, 방패에 덧씌운 마력이 반응하며 마치 자그마한 성벽을 만들 듯 전방을 막아섰다.
"과연, 북방의 민족이라 이 말인가!"
해마다 몬스터 웨이브가 규격 외로 터져 나오는 제국의 북방.
그곳의 출신답게 일렉사와 그녀의 단원들은 방어를 하는데 있어서 특출난 능력을 보였다.
그에 도미닉이 크게 칭찬하며 마찬가지로 검을 뽑아 들고는 검에 마력을 모으며 외쳤다.
"전원, 황실의 저력을 보여라!"
"""예!"""
"웰스의 울분을 풀어야 할 시간이 왔다! 기사단, 발검!"
애벌레들이 한차례 산성액을 내뱉고 다음을 준비하는 사이, 황실의 기사단과 하이델 왕국 기사단이 애벌레들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이빨과 단단한 외피를 자랑하는 몬스터였으나, 기사들의 오러 앞에서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순식간에 도륙이 나는 애벌레들.
그러나 살아남은 녀석들은 금세 자신들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땅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날카로운 이빨은 단순히 나무를 파먹기 위한 물건이 아니었다.
오히려 애벌레들은 땅 밑으로 들어가자 물 만난 물고기처럼 땅을 헤집고 다니며 기습적으로 튀어나와 일행들의 발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다행히 기감에 민감한 기사단원들이었기에 그런 공격에 당하지는 않았으나.
"1분! 디라일라!"
"오우케이!"
시간이 이 전투를 길게 허락하지 않았다.
셰인의 외침에 디라일라가 화답하며 마력이 담긴 발 구르기를 시전했다.
그러자 디라일라를 중심으로 마력의 파장이 울려 퍼지더니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일대가 흔들렸다.
그리고.
-끼이익!
이내 땅 안에서 애벌레들의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내부에서는 제 집처럼 드나들던 땅이 순식간에 몸을 찔러 오는 창으로 변해 애벌레들의 숨통을 끊어 내고 있었다.
"헤헹, 감히 내 앞에서 땅으로 들어가?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한 거지."
"쓸데없는 소리는 됐고, 어서 달려라!"
"에이, 진짜! 잘했으면 칭찬이라도 해 줘!"
그렇게 셰인의 일행이 먼저 달려가고, 아직 남은 몬스터들을 황급히 처리한 나머지 인원들도 나무 내부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으, 와...."
"여. 왔구나? 다행히 낙오자는 없네? 햐~ 그 사이에 또 쏟아지는 거 봐라. 안 그래도 찝찝했는데 좀 씻고 와야 하나?"
앞서 도착한 라비아타가 환히 웃으며 들어온 일행들을 맞이했다.
시커멓게 그을린 채로 연기를 모락모락 내고 있는 수 백 마리의 애벌레들과 함께.
그 광경에 일렉사는 아까 자신이 했던 다짐이 민망해졌다.
* * *
대수림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3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속성이 뒤섞인 비가 내리지는 않았으나, 반대로 말하면 그런 기후와 마주치는 중심부와는 거리가 멀다는 의미였다.
비가 내리고 그사이 최소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물이 빠지고서야 허락된 이동 시간.
그마저도 대부분이 10분에서 20분이 채 안 되는 시간이다 보니 탐사대의 전진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디라일라는 허락된 휴식 시간 동안 자신의 마력을 점검하고는 이내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으. 이거 보통 힘든 게 아니네."
다른 이들과 달리 디라일라는 체력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녀가 빠른 템포로 달릴 수 있던 이유는 이 땅에 넘쳐 나는 마력 덕분이었다.
디라일라는 그나마 남들보다는 덜한 편이었다.
땅의 마력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흡수할 수 있는 디라일라와 다르게, 마력 불안정 현상으로 인해 다른 일행들은 마력을 수급하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피로한 것은 어쩔 도리가 없으니.
바닥에 누워 있는 디라일라에게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쪽에서는 이미 짧게 눈을 붙이고 있는 이들도 있었으니까.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최대한의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한쪽에서 기름 먹은 천으로 무구를 다듬고 있는 아네이스와 클라인에게 시선을 맞췄다.
"역시 전사라 그런가? 생각보다 여유가 보이네."
"하하, 아무래도 전투는 그리 많이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네가 체력이 낮은 거야. 운동 좀 해."
지난 보름 동안 말을 놓게 된 클라인이 웃으며 답했고, 아네이스는 체력이 부족해 보이는 디라일라에게 일침을 가했다.
"우 씨, 나 정도면 양반이야! 나보다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예 틀린 말은 아니네. 마법학과 생도들은 대부분 앉아 있으니까."
"그런 기준 이하의 사람들을 평균으로 생각하지 마."
"에이, 진짜."
토라진 디라일라가 나무에 뚫린 구멍 너머를 바라봤다.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마냥 쏟아져 내리는 빗물.
디라일라는 나름 비가 내리는 날에 운치를 즐겼기에 비가 싫지만은 않았으나, 이곳에 온 이후로 싫어질 것 같았다.
"하, 그래도 생각했던 것만큼 치열하지는 않네."
처음에는 파견을 나온 이들과의 마찰 때문에 이번 탐사가 굉장히 숨 막히는 여정이 될 거라 생각했던 것에 반해, 그들은 첫날 셰인에게 꼬리를 만 이후로 이렇다 할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황실에서 나온 도미닉과 램퍼트 모험단의 일렉사는 셰인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주며 조언을 받기까지 했다.
부디 탐사가 이대로만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 셰인이 다가왔다.
"보는 눈을 길러야겠군."
"엉? 뭐야. 너도 쟤처럼 잔소리하게?"
"잔소리라기보단 충고다. 좀 더 세상을 넓게 보라는."
"무슨 소리야?"
"네가 보는 것만큼 여기에 얽힌 인간들이 순수하지 않다는 말이다. 쉬는 것으로 뭐라 하진 않겠지만, 저들에게 긴장의 끈은 놓지 마라."
"...?"
뭔진 모르겠으나 셰인의 말에 디라일라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 하니 이처럼 던전 내부를 탐사하다가 일어나는 범죄가 적지 않다고 했다.
더군다나 디라일라는 인간들에게 한 번 납치까지 되어 봤던 몸이 아니던가.
그녀는 엉거주춤 누웠던 자세를 바로하고 일행들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흠흠. 조심해야지, 음."
'그래도 황실과 왕국, 거기에 라비아타까지 포함된 이번 탐사에 설마 허튼짓할 사람이 있을까?'
디라일라는 그리 생각하며 괜히 찜찜해진 생각을 접고는 애써 눈을 감았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30화
30화 거짓말
본론부터 말하자면, 셰인은 이 탐사의 끝이 어떻게 끝날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힘을 합쳐 대수림을 탐사하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담합일 뿐.
각자의 목적은 다른데 목표가 같다면, 이 사이에서 불화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누군가는 자신도 모르는 타락을 향해서, 누군가는 명예를 위해서, 누군가는 답답한 자신들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또 누군가는 기나 긴 기다림의 끝, 해방을 위해서.
그리고 셰인은, 그 사이에서 이해득실을 모두 챙겨 갈 예정이었다.
그에 따라서 셰인으로선 완벽하게 자신의 편을 구분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중에 적과 중립, 그리고 아군은 확실하게 정해 뒀으나, 애매한 자가 한 명 있었다.
"역시, 애매해. 생각 없이 검을 휘두른다니."
그리 중얼거리는 아네이스를 바라보며 셰인은 생각에 잠겼다.
최근, 아네이스는 요람으로 출발하기 전, 준비 단계에서 던전을 토벌하며 얻은 작은 깨달음에 진도가 막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곧잘 보였다.
백발의 머리카락 사이로 고민에 빠진 푸른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셰인의 경우 항상 무표정으로 자신의 페이스를 지킨다면, 아네이스의 경우에는 반대로 너무 많은 생각에 잠겨 있어 오히려 파악이 어렵다고 해야 할까.
'철혈의 정의, 아네이스.'
셰인의 전생에, 아네이스는 조직을 위협할 정도로 위협적인 몇 안 되는 존재 중 한 명이었다.
다만 아네이스의 경우에는 반대로 인류의 몰락을 가속시키는 존재이기도 했는데, 셰인은 그 이유를 하나로 꼽았다.
오로지 흑과 백으로만 바라보는 시선.
아네이스의 정의에는 중간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정의에 있어서 중간은 있으나 아군과 적군이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전생의 아네이스는 범죄자가 자신의 친구든, 가족이든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심판에만 몰두한 여인이었다.
죄인의 처벌 행위로 인해, 인류의 사회에 큰 악재가 닥치는 것 또한 그녀가 알 바 아니다.
오로지 정의를 실천하는 것.
때문에 셰인이 조직에 막 가담하고 군단장이 되기까지, 그녀는 수많은 악인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처형했다.
때로는 필요악이라는 이유로 죄를 저지르는 자를.
때로는 인류를 위협하는 조직의 존재들을.
그렇기에 그녀는 철혈의 정의라는 이명을 얻었고, 누구든 그녀의 앞에서 죄를 범하기를 두려워했다.
해서, 셰인에게 아네이스는 애매한 존재였다.
당장의 셰인은 인류를 위해 '필요악'을 자처할 생각이었기에.
만일 지금의 아네이스가 회귀 전에 셰인이 봤던 그 철혈의 정의와 동일했다면 고민할 것 없이 아네이스를 자신의 적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아네이스는 아직 그 정도까지 몰리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면 과거와 다르게 그녀를 컨트롤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셰인은 천천히 그런 아네이스를 탐색하며, 다가올 기회를 기다렸다.
* * *
어느덧 메자이아 대수림의 탐사가 시작된 지 한 달째 되던 무렵.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에 의해 나무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기어코 비에 속성이 담기기 시작한 것이다.
메자이아 대수림의 방대한 숲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해 새하얀 도화지가 되어 갔다.
이때부터는 초입과 다르게 단순히 비가 그친다고 이동할 수는 없었는데, 이에 대한 대비책 또한 셰인이 준비해 두고 있었다.
[부탁하지.]
[알겠다.]
메자이아 대수림 출신의 엘프, 오르카가 바로 그중 하나였다.
오르카는 대수림에 온 직후부터 쌓아온 엘프의 마력 일부를 탐사대가 쉬고 있던 나무의 내부로 흘려보냈고, 이내 미약한 흔들림과 함께 나무 밑으로 하나의 통로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 이건?"
"세상에...."
놀랍게도 나무 밑으로 열린 공간은 빗물 하나 새지 않고 조명까지 밝혀진 제대로 된 통로였다.
"여긴 뭐 하는 곳입니까?"
하이엘 왕국의 기사, 애덤의 질문에 답한 것은 제임스였다.
"아마도 엘프들이 만든 공간 같습니다. 저도 고서에서나 읽어 봤지, 실제로 있을 줄은 몰랐군요."
고대 종족인 엘프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얼마 없으나, 세계 최고의 모험단 라비아타에 소속된 제임스는 엘프에 대해 비교적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에게 닥칠 대재앙... 그러니까 아카샤의 대봉인이 아닌, 메자이아 대수림의 이러한 기상현상을 예견하고 있던 모양입니다. 때문에 대봉인이 실행되기 전, 그들은 세상에서 황급히 모습을 감추고 이처럼 자신들만의 환경을 만들었다, 라는 고서를 읽은 적 있습니다."
"끄응... 이런 게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에 좋았을 것을."
애덤의 말에 일행들도 비슷하게 생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도 나와 준 게 어디인가 싶지만, 어느덧 메자이아 대수림의 탐사도 한 달이 지난 시간.
그동안에 인명 피해가 아예 없던 것이 아니었기에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해서 저도 이곳 출신의 엘프를 찾아보려 했습니다만, 역시 쉽지가 않더군요."
제임스의 말처럼, 애초에 아카샤의 대봉인에서 벗어나와 현재를 살아가는 이종족은 그리 흔치 않았다.
그마저도 봉인의 여파로 인해 자신들이 살아갔던 던전이 아니라면 마력을 운용하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이들이 많았다.
실제로 오르카 또한 대수림에 들어오고 나서야 엘프의 마력을 쓸 수 있었으니.
디라일라가 특이하다면 특이한 케이스일 것이다.
"본래는 이곳 엘프들과의 소통을 위해 데리고 왔습니다만, 이런 능력까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셰인은 굳이 관심을 사고 싶지 않아 그리 말하며 대충 얼버무렸다.
어쨌든 그로 인해 탐사의 속도에 가속도가 붙으려던 찰나.
"이런, 여기라고 마냥 평화롭지만은 않은가 봐."
라비아타의 말에 전방에서 다수의 몬스터들이 출현했다.
대부분 땅에 굴을 파고 살아가는 벌레 종류의 몬스터들로, 이전에 봤던 그레이트 우드 패러사이트도 보였다.
"확실히 적은 숫자가 아니군...."
도미닉도 침음성을 흘릴 만큼 벌레 군단의 수는 '수백'이라는 수를 쓸 정도로 무지막지했다.
바닥부터 벽, 천장 할 것 없이 들러붙은 녀석들은 이내 탐사대를 발견하고는 이빨을 내밀었다.
"이런 괴물들이 넘쳐 나는 공간이라니. 도대체 기원전 대수림이 어떤 곳이었을지 쉬이 상상이 가질 않는군."
그렇게, 일행들은 지친 몸에 마력을 부여하며 이어질 전투에 대비했다.
* * *
"젠장!"
가까스로 끝난 전투. 모두가 각자의 정비를 마치고 쉬고 있을 때, 한쪽에서 애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이번 전투에서 또다시 휘하 기사단원 한 명을 잃었는데, 이로써 애덤과 함께 온 단원 15명 중 4명이 사망했다.
전투에 있어서 사상자가 나오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하필 다른 탐사대원들 중에서는 사망에 이르는 자까지는 나오지 않았던 것.
그러나 다른 이들이라고 마음이 편한 상태는 아니었다.
황실의 호위 기사단, 도미닉의 휘하 기사들도 크고 작은 부상을 달고 있었으니.
그중에는 왼쪽 팔꿈치 아래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도 있을 정도로 부상의 정도가 심각한 이도 있었다.
그로 인해 탐사대는 이참에 이곳에 베이스 캠프를 차리고 주변의 지리부터 파악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여태까지는 대수림의 특성상 베이스캠프를 깔 방법도 없었거니와 탐색의 진행이 더딘 탓에 그럴 수 없었으나.
이제는 비를 막아 줄 방법이 생긴 만큼 더 이상 탐사를 반드시 급하게 진행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렇게 한 차례 베이스캠프를 준비하고 난 뒤.
도미닉은 탐사대 인원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대로 움직이기엔 탐사의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남은 물자들로 버티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네만...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나?"
도미닉의 제안은 인력을 나눠서 이 나무 밑 통로를 수색하자는 것이었다.
위험도는 아무래도 높아지겠으나, 전투보다는 수색을 목표로 물자를 얻자는 것.
"그러면 너무 지체되지 않겠소?"
그의 제안에 애덤이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으나, 도미닉은 수하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부상자도 너무 많지 않은가. 이 상태로 탐사를 진행해 봐야 피해만 불어날 것 같으이."
"끄응...."
확실히.
탐사대는 제법 지친 상태였다.
대수림의 기후 때문에 몬스터가 그리 많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반대로 탐사대처럼 악독한 기후에 살아남고자 몬스터들이 한 곳에 모이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에 일정 시간 안에 몬스터를 뚫고 억지로 들어가야 하니, 마음이 급해서 부상자나 사망자가 나오는 경우도 상당했다.
"나도 일단은 찬성. 이 통로가 나무로 만들어져서 아무래도 내 마법은 마음대로 쓰기가 힘들거든."
그에, 여태까지 몬스터를 처리하는 데 가장 큰 활약을 해 왔던 라비아타가 찬성표를 던졌고, 뒤이어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구먼. 우선 피해가 가장 큰 하이엘 왕국 측에서 베이스캠프를 지켜 주시게. 우리는 주변을 탐사하도록 하지. 물론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정보를 얻기 위함이니 각자 다른 소속에 자신의 소속을 섞는 걸세."
"뭐야, 할아범. 여태까지 사람 좋은 척하더니 역시 믿기 힘들다 이거야?"
"허허, 뭘 하든 확실히 하는 게 좋지 않겠나? 오히려 나중에 말이 나올까 봐 노파심이 드는구먼."
노회한 기사답게 그는 융통성 있는 제안을 해 왔고, 짧은 조율 끝에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정확하게 하기 위해 돌아가면서 팀을 바꾸는 게 좋겠네."
이내 이어지는 수색 작전.
라비아타와 인원들이 각각 수색을 하며 며칠이 지난 결과,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났다.
정확히는 오르카가 또다시 메자이아 대수림의 비밀 하나를 밝혀낸 것이었다.
평범하게 나무의 뿌리로 만들어진 벽이 열리더니 내부에서 다양한 식용 식물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여태까지 군용 식품만 먹던 탐사대의 일원들에겐 가뭄의 단비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이어지는 수차례의 수색.
그날은 아네이스가 황실의 기사단과 수색을 이어 갈 차례였다.
"허허, 황실의 자랑이 오셨군그래. 그러고 보니 이렇게 인사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구먼. 대니얼 그 친구는 잘 지내고 있나?"
"...우리 단장님하고 아는 사이세요?"
시작된 수색 작전.
지난 며칠 동안 왔다갔다 했던 만큼 익숙해진 길을 따라 걸으며 아네이스는 도미닉의 말에 답했다.
"물론, 알고말고. 그 친구나 나나 황실에 몸을 담은 지가 몇 년인데. 그거 알고 있나? 그때 대니얼이 황실에 소속되기 전에 내 밑에서 몇 개월 수련을 한 적이 있었네. 자네의 전 단장, 로버트와 함께 말이야. 둘은 사이가 참 좋았어. 죽마고우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사이였지."
"...."
하나.
"로버트의 일은 참으로 안타깝지. 당시에 대니얼이 얼마나 슬픔에 잠겼을지 나는 감히 상상도 되지 않네."
둘, 셋.
"그렇게 친했던 녀석들이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로버트의 유지를 자네가 잇고 있으니 나 또한 안심되는구먼. 지금의 저지먼트 단장인 대니얼도 그 사실을 기꺼워하고 있을 걸세. 허허."
그리고 넷, 다섯.
"특히 저지먼트 기사단과 우리 황실의 호위 기사단은 함께 많은 작전을 펼쳤네. 저지먼트 기사단은 정의를 위해, 우리 황실 기사단은 적들의 악의가 폐하께 미치지 않게. 그리고 그것은 지금에 와서도 달라지지 않았구먼."
또다시. 여섯, 일곱.
"해서,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네. 제국을 위해, 황실을 위해. 그리고 정의를 위해서 말일세."
마지막으로 여덞.
아네이스는 투명한 바다처럼 푸른 눈으로 도미닉을 바라봤다.
그 짧은 시간.
도미닉이 내뱉은 여덟 번의 거짓 속에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면 되느냐고? 흐음, 일단 처음에는 바짝 숙이면 된다, 아네이스. 그리고 강해지거라. 네가 그 거짓말을 타도할 수 있는 힘과 확신이 생겼을 때까지.]
언젠가 자신의 양아버지에게 들었던 그 말처럼.
"네, 제가 도움이 된다면요."
아네이스는 강철 같은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 * *
'좋지 않군.'
아네이스의 그림자에 어둠의 정령을 숨겨 뒀던 셰인은 자신에게 전해 오는 아네이스와 도미닉의 대화를 지켜보며 그리 생각했다.
아네이스의 정의는 위험하다.
그녀는 분명 악한 마음이 아닌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검을 휘두르지만, 그 정의를 감당하기에 인류는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이다.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언젠가 그녀는 폭주에 가까운 상태에 다다를 것이다.
지금도 하나하나, 조금씩 단서를 수집해 가며 자신의 검을 벼르고 있으니.
타인의 거짓을 알아차리는 그녀의 능력은, 차츰 자신이 제거해야 할 대상을 정하고 있었다.
'그전까지 녀석이 가진 원인을 파악해야 하는데.'
전생에도 셰인은 그저 아네이스가 폭주하듯 죄인들을 썰어 대는 것만 봐 왔지, 그녀가 어째서 그런 상황에 처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몇 가지 유추해 볼 점이 점은 있었다.
전생에 그녀가 첫 정의를 심판한 대상에 대한 사실이었다.
'저지먼트 기사단.'
황실의 가장 날카로운 검이, 자신들이 키운 아네이스에 의해 완벽하게 분쇄된다는 점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31화
31화 검은 꽃
실상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 저지먼트 기사단을 위시한 황실의 기사단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수많은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으니.
회귀 전 아네이스가 그들에게 철혈의 정의를 내린 것은 필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나 문제가 있다면, 아네이스는 정의를 실현한 뒤의 후폭풍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결과적으로 그로 인한 뒷감당은 남은 이들이 해야만 했다.
그런 그녀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나, 보다 정리된 혼란을 준비하고 싶은 셰인은 아네이스가 가진 정의의 원인을 알아볼 이유가 있었다.
'실수했군. 아네이스와 이렇게 빨리 엮이게 될 줄은 몰랐다.'
가능하다면 디라일라를 구하며 죽였던 저지먼트 기사단원의 영혼을 파헤쳐 봤어야 했다.
'하지만 대신할 것은 있나.'
아니, 어쩌면.
오히려 더 나은 단서를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셰인은 수색을 끝마치고 돌아오는 아네이스와 도미닉의 일행들을 바라봤다.
* * *
수색이 진행된 지도 어느덧 보름.
충분한 휴식을 마친 일행은 다시금 탐사를 위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 터널에 길잡이도 있으니 탐사가 쉬워졌군. 목표 지점까지 얼마나 걸리지?]
[인간들의 기준으로 열흘 정도다. 그리고 인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뭐지?]
[내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나의 동족은 너희 인간들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그땐 어떻게 할 예정이지?]
[굳이 이 인원들이 모두 들어갈 필요는 없지. 거기다, 당장 너의 동족들도 새로운 적을 만들고 싶지는 않을 테니.]
순간, 오르카의 걸음이 멈췄다.
잠시 셰인을 응시하던 그녀는 다시금 발걸음을 재촉했고, 재차 물었다.
[새로운 적? 동족들에게 적이 있다는 말인가?]
[그래. 그들은 나와 비슷하지만, 보다 강경하게 너희 동족들을 노리고 있지.]
[그들과 아는 사이인가?]
[놈들은 날 모른다. 하지만 나는 놈들을 알고 있지.]
메자이아 대수림의 드래곤 하트.
그 물건을, 조직이라고 해서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메자이아 대수림을, 그리고 거기에 살고 있는 엘프들을 꾸준히 압박하고 있을 터.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오르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지 않나? 너희 인간들이 던전이라 부르는 이 현상은 아카샤, 인간들의 신이라는 존재에 의해 시간이 붙잡혀 있다. 이곳에 있는 우리 동족들은 죽더라도 죽지 못하고, 살더라도 살지 못한다.]
마치, 저주와 같이.
라며 오르카가 말했고 셰인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이라면 그렇지. 하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는 법이다.]
[예외?]
[내가 너에게 잠시나마 아카샤의 봉인을 해주했던 것을 기억하나.]
[...설마. 그들에게도?]
[그들에게 봉인을 풀 정도의 능력은 없다. 다만, 다른 방법으로 대봉인의 눈을 잠시 피할 방법은 있지.]
아카샤의 대봉인은 언뜻 보면 완벽한 듯싶지만, 아예 구멍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오르카도 시간이라는 것 자체는 여전히 봉인되어 있으나, 육체적 자유는 되찾지 않았나.
디라일라 또한 마찬가지.
오히려 디라일라는 아카샤의 대봉인으로부터 완벽한 자유를 되찾은 이종족 중 한 명이었다.
대봉인에는 이렇듯 구멍이 존재하고, 그중 몇 개는 인간들의 신 아카샤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있었다.
그러나 조직은 그 구멍을 다른 방법으로 활용했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봉인되어 왔음에도 너희에게 정신적 타격이 없는 이유를 아나?]
[아마도, 시간의 되새김 때문이겠지.]
던전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초기화가 된다.
죽었던 몬스터는 되살아나고, 파괴된 주변 지형이 원상 복구된다.
당연히 그로 인해 생겼을 정신적 피로도 초기화되기 마련.
그러나 이 던전은 어떠한가.
[부폐한 사체가 많은 것 같지 않나?]
[...!]
그제야. 오르카는 이곳까지 오면서 지나쳐 온 몬스터들의 부패된 사체들을 떠올렸다.
물론, 던전에 부패된 몬스터의 사체가 없을 이유는 없다.
만일 그들이 봉인되기 전에 죽었던 것이라면 이해가 되니까.
하지만 많아도 너무 많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사체를 파먹는 애벌레들의 수도 결코 적지 않았다.
[이 던전의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제대로 흐르고 있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비틀어졌다고 봐야 할 터.]
[무슨 말인가.]
[누군가에 의해 시간선이 갈라졌다는 말이다. 여전히 이곳은 봉인되었지만, 시간 하나만큼은 이어지고 있지. 그리고 이 비틀어진 시간선은 너희 동족들에게 제법 고통스러운 시간이 되고 있을 거다.]
[....]
오르카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 * *
탐사를 진행한 지 얼마나 됐을까.
해를 볼 수 없는 지하의 특성상 시간 감각이 점차 흐려지고 있을 때부터, 탐사대는 이변을 감지했다.
"뭔가 이상하군."
방금 막 전투를 끝내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애덤이 탐사대의 지휘관들을 모아 그리 말했다.
"음, 확실히. 저 벌레들의 출현 빈도가 높아지고 있네."
"그렇소. 다만 그것뿐만이 아니라 왠지...."
"유인되고 있는 것 같아요."
라비아타가 애덤의 말을 받아치고, 애덤이 추가적으로 이상함을 표할 때 일렉사도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구먼. 이상하게 길이 막힌 곳이 많았지."
마지막으로 도미닉의 말처럼, 일행은 어디론가 유인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흐으음. 이 늙은이의 경험에 따르면, 이럴 때는 신중하게 가는 게 맞는 것 같네만."
"또다시 일정이 지체되고 싶지는 않으나, 도미닉 경의 말에는 찬성이오. 거기에 최근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시선 또한 느껴지고 있던데."
"으음, 그런가?"
도미닉의 말에 애덤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감이라며 일축했다.
한편, 셰인은 애덤의 말에 속으로 살짝 놀랐다.
'괜히 왕실의 기사단장이 아니란 말인가?'
이번 탐사대 중에서 애덤 측의 인원들은 전투력이 가장 떨어지는 편이라고 평가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 외로 애덤의 기감이 예민했던 것이다.
그 라비아타마저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놈들의 시선을 애덤이 느끼고 있었다니.
제법 놀라운 일이었다.
'놈들이 움직였나?'
어찌 보면 오히려 여기까지 왔는데도 지나치게 조용한 것이라 해도 좋았다.
조직의 성격상 자신들의 일에 방해될 이들은 일찌감치 치워 두는 치밀함을 보였을 테니까.
'굳이 움직이지 않은 이유도 알겠군.'
물론, 조직이 이번 탐사대를 쉽게 봐서 내버려 둔 것은 아니다.
그저 이 많은 탐사대를 한 번에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을 뿐.
때가 되면 녀석들은 그간 준비해 둔 것들을 서둘러 풀기 시작할 게 분명했다.
'역시, 그게 나오기 시작하겠지.'
애덤이 느꼈다는 기척.
그것 하나만으로도 놈들이 준비한 카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셰인은 눈치챘다.
이제부터는 진짜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셰인이 아무리 주의한다고 해도, 토벌대에 그 사실을 말할 수도 없는 노릇.
당분간은 아카데미 일행들에게 떨어지지 말라는 말 정도만 남겨 둔 상황에서.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습이다!!"
평소처럼 지하 터널을 따라 걷고 있을 때였다.
가장 먼저 라비아타와 셰인이 발걸음을 멈췄고, 그다음으로 애덤이 주춤한 순간, 주변의 발광석이 일제히 터지며 주변을 어둠으로 물들였다.
그 직전에 애덤이 소리쳤으나, 가뜩이나 얼마 되지 않던 발광석이라는 광원이 사라지고 동시에 들어오는 공격에 당황하지 않을 이가 어디 있을까.
"크아악!"
"끄아아아!"
다급하게 일렉사의 모험단이 방패를 들어 방어에 들어갔으나, 공격해 오는 이들은 능숙하게 뒤에 있던 기사단을 노리고 들어왔다.
"이게 뭔 날벼락이야?!"
전방에 있던 라비아타의 손에서 불길이 치솟자, 금세 주변이 밝혀졌다.
공격해 오던 적들은 기분 나쁘게 꾸물거리는 정체 모를 그림자들.
탁한 보랏빛 기운으로 이루어진 녀석들은 어둠 속에서 탐험단의 목을 쥐어 오고 있었다.
이어지는 격렬한 전투.
클라인은 지난날까지 얻은 깨달음으로 보다 정형화된 용오름을 피워 내며 검을 휘둘렀고, 아네이스도 그 옆에서 백색으로 빛나는 오러를 흩날리며 적을 베었다.
디라일라는 흙으로 빗어진 창과 방패를 만들어 침착하게 전장을 컨트롤해 나갔으나, 전장의 혼란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젠장, 이놈들 뭐야! 오러! 오러를 피워라!"
"으으... 소용없습니다! 베어도 계속 움직입니다!"
"이, 무슨?!"
오러에 몸이 베였음에도 움직이는 적들이라니!
오러는 단순히 절삭력을 높이기 위해 발현하는 기술이 아니다.
수련법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오러에 베이게 되면 내부의 마력이 진탕이 되기에, 살상력의 차원이 달라진다.
하나 놈들은 그런 공격에도 끄떡하지 않고 달려드니, 기사들이 혼란에 빠지는 건 당연했다.
생각보다 피해가 커질 것 같자, 셰인은 직접 해결 방법을 말할까도 싶었으나, 이내 먼저 클라인이 소리쳤다.
"단순히 베는 것으로는 효과가 적습니다! 선이 아닌 면으로 공격해야합니다! 타격으로 공격하십시오!"
그에 기사들 몇 명이 곧바로 오러의 형태를 바꿨다.
대수림에 있는 동안 클라인도 상당한 활약을 해 왔기에 몇몇 기사들은 클라인을 내심 인정하고 있던 덕분이었다.
그들은 황실이나 왕실에서 나온 이들이니만큼, 금방 전투의 흐름을 읽고 방식을 바꿨다.
오러를 형성하던 마력의 형태가 묵직하게 바뀌기 시작하자, 이내 클라인의 말처럼 효과가 나왔다.
"적은 타격에 약하다! 그 점을 명심하고 전투에 임하도록!"
가장 먼저 실천했던 애덤의 외침에 기사들도 응답했다.
그렇게 적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하면서 점차 전장의 열기가 사그라졌다.
"후우...."
쓰러진 적들의 모습을 보며, 일행들은 앞서 전투에서 피해를 입은 이들부터 살펴봤다.
"이게, 무슨...."
적들의 공격을 허용한 이들은 하나같이 기괴한 형태로 죽음을 맞이했다.
시체 위에는 검은 꽃이 피어났고, 시체는 마치 모든 마력을 뽑아먹힌 것처럼 창백했다.
그걸 본 라비아타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꼭...."
동시에 라비아타의 시선이 오르카에게 향했고, 오르카는 쓰러진 적들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게, 당신이 말한 적들의 수작인가?]
[그래.]
적들을 감싸던 보랏빛 기운이 사라진 그곳에는, 핏줄이 파랗게 올라온 엘프들이 쓰러져 있었다.
[다크엘프다.]
* * *
탐사가 잠시 미뤄지고, 일행들은 다시 한번 회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메자이아 대수림에 이런 형태의 몬스터가 있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없소. 하이엘 왕국에서 수십 년 동안 자체적인 탐사를 통해 알아본 사실이오."
애덤의 말에 도미닉이 물었다.
"으음... 하지만 그 탐사대가 중심부까지 온 건 아니지 않나? 그래서,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고?"
그에 애덤이 아직 창백한 표정이 가시지 않은 오르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 확인된 외형만 봐서는 엘프와 매우 흡사합니다. 다만, 엘프는 저런 모습이 아니지요."
"음, 그렇지."
비록 아카샤의 대봉인에서 자유로운 엘프는 그리 많지 않으나, 적어도 그들이 아는 엘프에게 방금과 같은 특성은 없었다.
"라비아타 단주, 그대는 뭘 좀 아는 게 있소?"
그에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한 애덤이 물었고, 라비아타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엘프라는 종족이 숲의 주인이라는 것 정도는 다들 알고 있지?"
"물론이오."
"그런데 사실 엘프라는 종족이 단순히 숲에서 강하기 때문에 숲에 사는 게 아냐. 애초에, 그들의 특성은 숲과 크게 관련도 없고."
"흐음?"
그녀의 말에 사람들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엘프란, 숲에서 살아가는 종족이었기에.
"사막에서 사는 엘프도 있고, 극지방에서 사는 엘프도 있어. 애초에 엘프는 그저 주변 환경에 따라 적응이 달라지는 종족이란 말이지. 엘프들은 단지 숲이 지닌 마력의 정순함 때문에 그곳에 있는 거야."
"그렇다면 저 엘프들은 무언가에 오염됐다고 보면 되는 겐가?"
대충 이해한 도미닉의 물음에 라비아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요람에 무언가 변칙적인 일이 생겼나 봐. 숲 전체가 저런 마력에 휩싸이진 않았으니까, 일부만 저런 상태라는 거겠지."
"흐음... 어쨌든, 저들의 기습은 위협적이오. 놈들의 마력에 상처를 입는 순간 아까 희생당한 이들처럼 된다는 말이니."
앞서 전투에서 죽은 인원들은 급소를 당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져 이내 죽음을 맞이했다.
상처 부위로부터 보랏빛 꽃을 피워 낸 채로.
"그런데 자네는 아까부터 거기서 뭘 하고 있나?"
한참 회의 중일 때, 도미닉이 셰인을 향해 물었다.
셰인은 이번 전투에서 사망한 시신으로부터 꽃을 채취했는데, 품에서 모노클을 꺼내 착용하고는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적을 상대하려면 그에 앞서 적에 대해 알아야겠죠. 그들이 남긴 꽃에 단서가 있지 않을까 싶어 보고 있었습니다."
"흐음, 일리가 있는 말이구먼. 혹시 무언가 찾은 게 있나?"
도미닉의 물음에 일행들의 시선이 셰인에게 모였다.
직접 오지도 않고 메자이아 대수림의 기상 현상에 대한 가설마저 새운 셰인이었다.
그가 직접 본다면 무언가 다른 게 있지 않을까?
셰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32화
32화 분열
"본론부터 말하자면 라비아타 단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 엘프들은 숲의 마력이 아닌 다른 마력에 의해 이러한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당장 상황에 도움이 되는 말은 아닌 것 같소만... 혹시 다른 것은 없소?"
애덤의 물음에 셰인이 고개를 저었다.
"다만 사막과 극지방에 사는 엘프들과 다르게, 이들은 오염된 상태입니다."
"오염이라면?"
"엘프들은 자신들의 마력을 주변 환경에 맞게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이 엘프들은 강제적으로 마력을 변화시켰습니다. 인위적이라는 겁니다. 굳이 말하자면 흑마법사가 시체를 조종하는 것과 비유할 수 있겠군요."
"...흑마법!"
그에 일행들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썩어 들어갔다.
지금은 제국과 연합국에 의해 소탕됐다지만, 당시에 흑마법사들이 대륙에 얼마만큼의 피해를 줬는지, 이들 중 모르는 이는 없었다.
"물론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겠습니다만. 결과는 비슷합니다. 이들은 언데드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베는 공격에 별 소용이 없던 것이죠."
"끄응...."
확실히 셰인의 말대로라면 아까의 전투가 설명이 된다.
반대로 말하면 약점도 확실하다는 건데.
"그럼 화염 속성에 약하겠구랴. 언데드라하면 불이 가장 효과적이니."
그러나 도미닉의 나지막한 말에도 셰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타격기가 가장 효과적일 겁니다. 아니면 빛 속성이나. 말이 언데드나 다름없다지만, 정작 언데드는 아니니까요."
정확히 말하자면, 이 다크엘프들은 조직의 미완성작이다.
당장 이들에게 이성은 없으나 조금만 더 다듬어진다면 완벽하게 이성을 가진 본격적인 살인 기계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 셰인은 다행이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전생의 셰인은 완성된 다크엘프들을 봤었으니까.
그들이 등장하는 것만으로, 이 탐사대는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음을 맞이할 게 분명했다.
"...셰인. 방금 그대는 인위적이라 말했소. 내가 이해한 게 맞다면, 이게 인간의 소행이라 봐도 무방한 것이오?"
애덤의 질문은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단순히 몬스터라면 일의 심각성은 내려간다. 이 또한 탐사대가 원하던 정보 중 하나였으니.
그러나 인위적이라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 고대에 존재하던 마법이 아닙니다. 애초에 이건 마법이라 부르기도 힘들지요. 연금술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이 요람에, 우리를 제외한 또 다른 존재들이 있다는 게로구먼. 우리는 그들에게 유인당하고 있던 것이고."
탐사대는 어디까지나 이번 메자이아 대수림이라는 요람을 알아보기 위해 온 것이지, 내부에 알 수 없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 숲에서 엘프를 오염시킬 정도의 존재들이라니?
그들의 권한에서 이미 벗어난 일이다.
"나는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다고 생각하오. 당장 얻은 정보만 하더라도 이미 충분하다고 보고 있고."
먼저 애덤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비록 그들이 목표했던 드래곤 하트에 대한 실마리는 얻지 못했으나, 어찌 됐든 셰인이 새운 가설이 대수림에서 먹힌다는 사실을 파악했으니까.
그뿐이던가?
오르카의 존재로 인해 보다 수월하게 대수림을 탐사할 수 있는 방안까지 찾아냈다.
이는 여태까지 꽉 막혀 있던 대수림의 해결 방안을 찾아낸 일인 만큼, 결코 적은 수확이 아닌 것이다.
"물론 그렇긴 하네만, 그렇다고 마냥 안심하고 돌아가기도 힘들지 않겠나?"
반대로 도미닉은 좀 더 탐사를 해 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대수림에 있네. 그것도 엘프를 이 지경으로 만들 정도의 기술력을 가진 놈들이 말이야. 하다 못해 놈들의 정체나 일의 진행도는 알아 봐야 하지 않겠나?"
언뜻 들어 보면 도미닉의 말에도 일 리가 있었다.
일행들이 침묵하자, 도미닉이 말을 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누가 봐도 수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네. 이게 대륙에 어떤 불화를 가지고 올지 몰라. 하물며 대수림과 가장 가까운 것은 하이엘 왕국이 아니던가."
"끄응...."
그 말에 애덤도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침음성을 삼켰다.
"...하지만 이 일을 외부에 알릴 자들은 필요하다고 판단되오. 자칫 여기서 우리가 나가지 못하는 상황마저 배제할 수는 없진 않소?"
"이해하네. 하지만 이 대수림의 변덕적인 날씨를 뚫고 어찌 외부까지 이 사실을 알릴 수 있겠나? 이 늙은이는 여기서 병력을 나누는 일은 오히려 앞서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변수가 될 수 있다고 보는구먼."
"그 말에는 오류가 있소, 도미닉 경. 애초에 변수는 이미 생겨났소. 그 변수가 두렵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되는 일이오. 아니라면, 최소한 외부에 이 사실을 알려야 우리의 다음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소?"
"...틀린 말은 아니구려. 하지만 결국 이번 탐사대에서 선택권은 라비아타 단장에게 있네. 단장,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나?"
끝내 결정권은 라비아타에게 미뤄졌고, 이내 그녀도 애덤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애덤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지. 일단 외부에 이 사실을 알릴 인원부터 추려 보자고."
한 번 이야기가 나오자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이내 곧 황실 호위 기사단과 하이엘 왕국의 기사단에서 인원을 차출하기로 했다.
애덤은 따로 차출된 자신의 기사단원들을 불렀다.
"제국 측 놈들의 낌새가 이상하다 느껴지면 먼저 치거나 도주하도록. 반드시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폐하께 알려야 한다. 알겠나?"
"예."
* * *
"후방에서 습격!"
차출 인원들을 내보내고 다시금 탐색이 이어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하이엘 왕국의 기사단원 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갑자기 천장을 뚫고 등장한 애벌레들과의 격렬한 전투 중, 후방에서 다크엘프들의 기습이 시작됐다.
이처럼 다크엘프들은 정면에서 달려들기보다 탐사대의 빈틈을 공략해 왔다.
때문에 외부로 소식을 알릴 전령들이 차출된 이후부터 탐사대의 움직임은 소심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오늘은 다른 날보다 더 거센 공격이 시작됐다.
"젠장할 몬스터 놈들이!"
"죽어라!"
이어지는 전투의 치열함. 그에 라비아타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놈들의 첫 습격을 제외하면 여태껏 기습만을 해 가며 탐사대의 발목을 잡는 수준이었던 놈들이, 오늘은 사생결단을 낼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원하고 있다는 것인데.
문제는 놈들의 숫자가 탐사대에게 큰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 꿍꿍이가 무엇일까.
순간, 라비아타의 동공이 마치 파충류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마력? 아니, 저건....'
다크엘프들의 발 아래로 음습한 무언가가 스멀스멀 움직여 땅으로 퍼져 나갔다.
그 직후, 방금까지 천천히 움직이던 다크엘프의 마력은 라비아타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쏜살같이 주변 나무의 뿌리들로 스며들었다.
"아! 모두 여기로 모여!"
오염됐다고는 하나, 엘프의 마력이다. 순식간에 나무로 흡수된 녀석들의 마력이 무슨 일을 일으킬지 모른다.
라비아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모이기도 전에.
오염된 마력에 닿았던 나무들이 순식간에 일행들을 덮쳐들었다.
* * *
숲에서 엘프들을 상대하기 까다로운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숲 전체가 엘프의 신체 일부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성장조차 눈으로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느린 나무들이, 마치 지능적인 동물처럼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공격해 온다.
누군가는 단순히 숲을 태우면 되지 않냐고 하겠지만, 이 세상에는 다양한 나무가 있는 법.
거센 불길로도 타지 않는 나무가 있는 반면, 태웠다간 커다란 폭발을 일으키는 나무까지 아주 다양하다.
하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다크엘프에 의해 오염된 나무의 뿌리는 그저 덩치를 급격하게 불리며 길을 막아선 것 외에는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고 잠잠해졌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한참 격렬한 전투 중에 있던 터라 일행들이 나뉘어졌다는 것.
"아, 젠장. 저 녀석들, 여태까지 저런 걸 숨기고 있었어?"
사실 라비아타도 이런 일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엘프가 등장했다는 것으로도 일단 이곳이 특성상 일행들은 언제든지 목에 칼이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만큼 숲에서 엘프들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다크엘프들은 여태껏 나무를 조종하는 모습은 전혀 보인 적이 없었기에, 그에 따라 탐사를 진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수를 쓰다니!
'그래도 다행이라면 녀석들의 한계가 이 정도라는 건가?'
라비아타는 바닥에 쓰러진 다크엘프들을 바라봤다.
녀석들은 고작 나무로 길을 막은 것만으로도 힘을 다했는지, 창백해진 상태로 쓰러져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탐사대 일행이 다크엘프의 사망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탐사는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은데."
그 모습에 라비아타가 그리 말했다.
비록 고작 길을 막은 수준에 불과하지만, 어찌 됐든 명백하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다크엘프가 나무를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은 이 나무 터널에서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야 할 것 같소. 하지만 그전에, 정리부터 해야 할 것 같군."
현대 탐사대에 남은 인원은 대략 26명.
그러나 지금 이곳에 모인 이들은 고작 14명.
나머지 일행들은 다크엘프의 소행으로 갈라진 상황이다.
"하, 일단 사람들 찾는 일부터 시작해 보자고."
"라비아타, 당신의 마법으로 저 나무들을 태울 수는 없소?"
"어려운 일은 아냐. 그런데 이 나무들, 저 다크엘프의 마력에 오염됐잖아. 저런 걸 내 불로 지졌다간 어떤 중독 현상이 일어날지 몰라."
"아... 그렇다면 오염되지 않은 곳으로 간다면 어떨 것 같소?"
"그것도 힘들어. 난 몬스터에 대해서는 척척박사지만, 나무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든. 그런데 과연 그 엘프들이 이 통로를 그저 보기 좋으라고 나무의 뿌리로 만들어 놨을까? 내가 봤을 때는 아냐."
모르긴 몰라도 엘프들의 대비가 있을 것이고, 실제로 이곳까지 오면서 열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터지는 나무들도 없잖아 있었다.
그 때문에 라비아타는 자신의 주무기는 화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뿐이던가.
"괜히 잘못 태웠다가 통로가 무너지면 그땐 우리가 조난당하는 거라고."
"...어렵게 됐군."
그 외에도 다수의 방안으로 떨어지게 된 탐사대와 다시 만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클라인이 제안을 하기도 했고, 디라일라에게 거는 기대감도 나타났다.
"제 마력으로도 안 되겠습니까?"
셰인과 떨어지게 된 클라인이 직접 나서서 말했다.
'형님....'
던전에 들어온 뒤부터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곧잘 보였던 셰인이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와 떨어졌다는 사실이 클라인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하물며 요람에 오기 전, 반드시 형님을 지키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필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에 불이 안 된다면 앞도적인 마력량으로 나무를 파헤치는 방법을 제시해 봤으나.
비슷하게 통로가 무너지면 곤란한 것은 매한가지였고, 디라일라가 무너지는 통로에서 흙무더기를 책임진다는 방안도 나왔지만....
"으음,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요."
사실 디라일라는 최근 곤란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디라일라의 부름에 땅이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해야 할까?
지하인인 디라일라는 땅에 얽힌 미세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땅은 정말 다양한 생명체와 자신을 공유한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땅과 가장 친한 생명체가 있다 하면, 그건 바로 나무였다.
"다크엘프들이 죽은 이후부터, 나무들이 분노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곳의 흙이 제 뜻대로 잘 안 움직여요."
평소라면 이런 제약은 별 소용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나무와 밀접한 엘프들의 지역이었고, 엘프의 마력에 감화된 나무들은 다른 지역의 나무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강한 의지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이 땅과 밀접한 관련이 생긴 것이고.
"어쩔 수 없네. 직접 움직이면서 찾아보는 수밖에."
가능하다면 크게 움직이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본래 조난을 당하면 그 자리 그대로 있는 게 가장 안전하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니.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곳은 던전이라는 것이고, 각 일행들의 식량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니 행동을 빠르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바로 움직여 보자고."
라비아타의 결단에 일행들도 각자 고개를 끄덕였고, 클라인은 입술을 깨물며 검을 든 손에 힘을 쥐었다.
'반드시 찾아가겠습니다, 형님.'
* * *
한편.
일행들과 떨어지게 된 셰인은 황실의 호위 기사, 도미닉과 그가 이끄는 기사단원 몇 명, 그리고 램퍼트 모험단원 몇 명이 모인 공간에 있었다.
그나마 여기서 서열이 가장 높은 도미닉이 눈살을 찌푸리며 길을 가로막은 나무의 뿌리를 바라봤다.
일반적인 나무뿌리와 다르게 하나하나가 성인 남성보다도 두꺼운 크기를 자랑하는 뿌리들이 복잡하게 얽힌 상황.
이에 몇몇 기사들이 오러를 일으켜 나무를 베어 봤으나, 겨우 흠집만 날 정도로 견고했다.
"이거, 아무래도 우리가 함정에 당한 것 같구먼. 나는 이대로 길을 따라가 봐야 한다고 생각하네만. 자네들은 어떤가?"
도미닉의 물음은 셰인과 램퍼트 모험단원들에게 향했다.
셰인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고, 램퍼트 모험단원들도 자신들의 단주와 떨어진 게 불안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에서도 어쩌지 못하고 있으니 저쪽도 찾아서 움직이는 방향으로 잡고 있을 걸세. 여태까지로 봐 왔을 때, 몇몇 지점에 합류 지점이 있었으니 일단 그걸 찾아 움직이는 게 맞는 것 같구먼."
"알겠습니다. 램퍼트는 도미닉 경을 따라가겠습니다."
"저도 별다른 이견은 없습니다."
그나마 년차가 높은 램퍼트 단원이 그리 말했고, 셰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말해 줘서 고맙네. 그럼 간단하게 정비를 마치고 출발해야겠구먼."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 좋은 미소를 잃지 않은 도미닉과, 언뜻 보기에는 주변의 경계를 풀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기사단원들.
그러나 셰인은 분명히 봤다.
셰인은 다크엘프들이 등장한 순간 이쪽으로 다가오던 황실 측 사람들의 움직임.
마치,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말이다.
그러나 셰인은 앞서 걷는 도미닉을 보며 비소를 지었다.
'이거, 기회가 넝쿨째로 굴러 들어온 격이군.'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33화
33화 여기서 왜 나와?
황실의 호위 기사, 하르페는 이번 불침번이 시작되기 전, 자신의 상관인 도미닉의 부름을 떠올렸다.
"이보게, 하르페. 슬슬 때가 된 것 같구먼."
"때라면...."
"셰인. 저 아이는 뛰어난 인재이지. 하지만 아직 인류에게 준비되지 않은 인재일세. 안타깝지만 여기서 정리해야겠어."
하르페는 도미닉의 표정을 깊게 바라보지 않았으나, 그의 목소리에서는 진정으로 안타깝다는 감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현재 황실에서 준비하고 있는 대국적인 일은, 저만한 인재를 포기하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업적이었기에.
인재욕이 강했던 도미닉이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오늘 야간에 기회가 있을 걸세. 그들이 자네에게 도움을 줄 테니, 자네도 당분간 몸을 숨기고 있게나."
그리고 이어지는 불침번의 시간.
도미닉의 말처럼, 기회는 얼마 가지 않아 금방 찾아왔다.
어둠 속에서 달려드는 다크엘프들.
그에 맞춰 하르페도 검을 뽑아 들어 그들의 장단에 맞추기 시작했다.
"내가 적들을 막아 보겠네! 자네가 먼저 가서 이 사실을 기사단에 알려야 해!"
"알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셰인은 크게 당황한 기색 없이 하르페의 말을 따라 뒤로 달려 나갔다.
그에 하르페는 계획했던 대로 다크엘프 둘을 놓쳤고, 놈들은 실수 없이 달려가던 셰인의 등에 검을 꽂아 넣었다.
"큭...!"
짧은 단말마와 함께 셰인이 쓰러지기도 잠시.
"...끝났군."
다크엘프들의 단검에 찔려 바닥에 쓰러진 셰인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게다가 셰인의 허리에는, 보랏빛 꽃이 피어나기까지.
죽음.
타깃의 확실한 죽음을 확인한 하르페는 그런 셰인의 주변에 서 있는 다크엘프들을 바라봤다.
"너희들의 역할은 끝났다."
그러면서 하르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남은 다크엘프들의 목을 베어 버렸다.
한 순간에 세 명의 다크엘프가 머리를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나머지는 놈들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나도 이제 몸을 숨겨야겠군."
방금까지 자신을 위해 셰인을 살해한 다크엘프의 시체를 바라보는 하르페의 눈에는 깊은 혐오의 감정이 담겨져 있었다.
이종족은 인류의 적.
비록 황실의 대국을 위한 일이었기에 임시나마 손을 잡았지만, 그조차도 하르페에게는 혐오스러운 일이었다.
한편, 하르페는 쓰러진 채 미동도 보이지 않는 셰인을 바라보며 홀로 중얼거렸다.
"쯧, 미안하게 됐군. 하지만 이 또한 인류를 위해서다. 그 희생을 내가 기억하마."
이런 시기가 아니었더라면 황실에서 중히 기용했을 인재였겠으나.
하필 메자이아 대수림의 드래곤 하트를 거론하다니.
그러한 안타까움에 하르페가 뒤돌아 걷던 직후.
"나도 기억하마. 네가 가진 역겨운 위선과 그 기억을."
"...!!!"
들려서는 안됐을 셰인의 목소리와 함께, 하르페는 경악하기도 전에 자신에게 들러붙는 어둠에 집어삼켜졌다.
* * *
외부에 알려진 굳건한 황실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상 현 황실의 내부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현 황제의 예기치 못한 건강 악화.
아직까지는 그 옥좌에 앉아 있는 황제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고 쓰러지며 그 뒤로 평생 일어나지 못한다.
그 와중에 다음 옥좌의 주인에 가장 가까운 이는 작금의 황태자, 제페르 디 와이어트 새뮤얼.
황태자인 새뮤얼은 오래전부터 은밀하게 자신의 수족을 늘리고 있었다.
그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는데, 본래의 황제와는 다르게 황태자는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추켜세우고, 만약 따르지 않는 이들은 아무도 모르게 숙청했다.
나날이 건강이 악화되고 있는 현 황제는 그런 황태자의 실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훗날, 역사대로 시간이 흘러 황제가 된 새뮤얼은 인류 역사상 가장 폭력에 취한 황제, 전쟁에 미친 전쟁광이 되어 인류의 미래에 거대한 재앙을 가지고 온다.
하지만 그 재앙은 여러 악재들과 조직의 오랜 준비로 인해 만들어진 예정된 재앙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수많은 기사들은 황태자 새뮤얼의 대국적인 '합일'에 경도되어 있었고.
그리고 이번 탐사대에서 파견을 나온 황실 호위 기사단 또한 그런 새뮤얼의 손가락 중 하나였다.
'황태자님께서 드래곤 하트에 지대한 관심을 지니지만 않으셨어도... 영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구먼.'
황실의 사람답게, 도미닉은 귀족이면서 동시에 천재인 셰인의 처리가 영 아쉽기만 했다.
하지만 훗날 있을 '합일'을 떠올리면, 이는 충분히 필요한 일.
만약 이번 작전이 잘 먹혀 들어간다면, 이후에 필요한 합일에 많은 도움이 될 터였다.
그를 위한 희생이 아니던가.
'언젠가 하르페에게 술이라도 사 줘야겠구먼. 이런 궂은일을 시켰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본인이 역겨운 위선자임을 알지만, 도미닉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후우. 광명은 언제 찾을는지."
아무튼, 지금쯤이면 명령을 받은 하르페가 셰인과 다크엘프들을 처리하고 지금쯤 모습을 숨겼을 터.
기다리던 아침이 찾아오고, 새벽 동안 불침번을 서야 했던 셰인과 하르페가 사라지자 잠시 혼란이 일어났으나, 이내 곧 멀지 않은 장소에서 다크엘프들의 시신을 확인하고는 암울한 침묵이 흘러갔다.
"...안타까운 일이로고. 하지만 여기서 그 둘을 찾으러 갔다간, 본대와 떨어질 위험이 있을 것 같구먼. 일단 이동부터 해야겠네."
그런 도미닉의 말에 일행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앞으로 나아갔다.
여태까지는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사실에 도미닉은 속으로 작은 위안을 얻으며 걸었으나, 그가 알 수 없는 곳에서 그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기고 있었다.
* * *
서로 등을 맞대며 전투를 지속하던 디라일라와 아네이스는 클라인의 무용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부럽다.'
'천재라는 게 저런 걸 보고 말하는 건가?'
마력을 풀풀 풍기며 최전선에서 몬스터를 말 그대로 학살하고 있는 클라인의 모습이란.
분명 요람에 입장했을 때 당시만해도 성장속도 자체는 클라인이나 아네이스와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셰인과 떨어지자마자 클라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폭발적인 성장을 보여 주고 있었다.
단순히 마력으로 찍어 누르는 게 아니라, 그 마력 한 가닥 한 가닥이 적의 생명을 위협하며 움직인다.
검에서 망설임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고, 예전에 셰인이 가르쳤듯 보다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최적의 경로를 따라 급소만을 노린다.
그리하면 남은 인원들이 알아서 급소를 타격당한 몬스터를 정리할 테니까.
그러한 살벌한 전투에 여태껏 무관심했던 탐사대원들의 시선이 클라인에게 몰리기 시작했다.
"대단하군...."
"소문으로 역대 최고의 천재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허."
몇몇은 순수하게 대단하다는 시선을, 또 몇몇은 재능이라는 잔인한 현실의 벽 앞에서 짧은 절망을 내비쳤다.
클라인의 본격적인 활약 덕분일까, 그동안 부진했던 탐사대의 발걸음이 빨라졌으나.
이런 탐사대에게 또다시 위험이 찾아왔다.
"다크엘프다!!"
탐사대가 찢어진지도 어느덧 5일차에 접어들 무렵.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던 다크엘프들이 다시금 전장에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이전과 극명히 달라진 점이 있었다.
확연히 다른 기세.
본능에 몸을 맡기듯 무작정 달려들지 않고, 이쪽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투.
직전에 느낀 낌새가 다르지 않았음일까, 적들은 공격을 피하고, 막으며 누군가에게는 경상을, 누군가에게는 확실한 죽음을 선사했다.
"아오, 이 성가신 것들!"
그에 라비아타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마력을 개방, 순식간에 적들이 있던 공간에 화염에 퍼부어지며 시야를 가렸다.
한편, 한쪽에서 그들의 전투를 관망하고 있던 오르카는 어느새 자신에게 접근한 다크엘프를 마주했다.
[서른두 번째 가지의 나뭇잎, 오르카.]
[...!]
[그분의 뜻을 따라 이곳에 왔다. 이 말을 전하라 하더군.]
[그분?]
[시간이 없다. 이제부터 전달하겠다. 내용은──]
[잠깐, 그게 도대체...!]
내용을 들은 오르카가 다크엘프에게 무언가 묻기도 전에 그는 다시금 연무 속으로 사라졌고, 이내 연무가 가셨을 때 더 이상 다크엘프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렇게 오르카가 혼란에 빠져 있기도 잠시.
"아직 전투가 가능한 사람들은 아직 경계 풀지 마! 경상인 사람들은 부상자들부터 먼저 옮겨!"
"아아아, 제이콥!"
"젠장!"
이번 전투에서 또다시 나온 희생자들 앞에서, 탐사대는 복수의 불길을 태우고 있었다.
그중에는 같은 엘프라는 이유만으로 오르카를 혐오 어린 시선을 바라보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로, 탐사대의 정신은 점차 피폐해져 가고 있었다.
* * *
잠에 빠져 있던 디라일라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걸음을 느끼고는 눈을 떴다.
하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요람 내부였기 때문일까.
이제는 이 정도에도 금방 눈을 뜰 정도로 지금의 상황에 익숙해진 디라일라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어?"
그러자, 그곳에는 오르카가 무릎을 굽힌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오르카 씨? 저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아니, 말 못했지 참."
메자이아 대수림의 엘프, 오르카.
이번 탐사 기간 동안 몇 번이고 디라일라가 말을 걸어 보며 대화를 시도했지만, 눈길 한 번 준 적 없던 그녀가 오르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근데 무슨 일로... 라고 하기엔 말을 못하는데. 아, 답답해."
언어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은 디라일라가 오르카에게 뭐라 말을 전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고 있던 그때, 오르카가 주변에 돌멩이를 주워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맞네. 그림은 그릴 수 있었지, 참."
그러면서 디라일라는 그녀가 그리는 그림을 세심하게 바라봤다.
"이건 나고, 이건 오르카 씨고. 음, 그러니까 나랑 같이 어디를 가고 싶다는 건가? 아! 화장실?"
그런 디라일라의 말에 오르카는 잠시 인상을 쓰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요즘 분위기가 영... 그렇지?"
최근, 다크엘프의 등장으로 인해 오르카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아진 와중에 그녀 홀로 움직였다간 탐사대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른다.
특히, 도미닉과 떨어지게 된 황실의 호위 기사들은 오늘 있던 다크엘프하고의 전투에서 동료까지 잃었으니.
당장 오르카를 보는 시선이 매우 흉흉했다.
저들에게 다크엘프든 엘프든,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을 테니.
괜스레 황실 호위 기사단원들이 머무는 쪽에서 시선을 돌린 디라일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케이, 바로 가요."
여태까지 마치 인형처럼 표정에 변화가 적었던 오르카가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접근했던 게 마음에 들었는지, 디라일라는 훌쩍 일어나 불침번들에게 말한 뒤 오르카와 함께 외부로 나왔다.
"흠흠. 그래도 여태까지 꾸준히 말을 건 보람이 있구나. 후후."
그동안 이 엘프와 친해지기 위해 얼마나 말을 걸었던가.
처절한 무시로 일관됐지만, 디라일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거 인간들 사이에서 살기도 팍팍한 마당에, 같은 이종족끼리 말이라도 트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거기다 손가락이 몇 개 없는 걸 보면 분명 힘든 시간을 보냈을 터.
디라일라는 오르카가 자신에게 차가운 이유가 타인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라 생각하고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 근데 우리 좀 깊게 온 거 아닌가요? 저기요, 어디까지 가세요? 아이 참. 여기에 우리 말고 누가 있다고... 이렇게 멀리 올 필요 없어요."
너무 일행들과 멀리 떨어진 게 아닌가 싶었던 디라일라가 그리 말해 봤지만, 오르카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기요? 저기요! 여기서 더 멀어지면 위험해질 거 같은데!"
그렇게 디라일라가 뒤에서 부르기를 한참.
오르카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 드디어 멈췄네! 아니 무슨 볼일 한 번 보겠다고 이렇게 멀리... 까... 지... 어?"
그때쯤, 디라일라도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 앞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아?"
그리고 그 사이에서 등장한 존재는, 디라일라도 익히 알고 있던 존재였다.
"다, 당신은...."
문제는 그가 홀로 등장한 게 아니라, 등 뒤로 십여 명의 다크엘프를 동반하고 있다는 것.
"네가 왜 여기서 나와...?"
검은 기운에 휩싸인, 새하얀 민무늬 가면의 사내.
셰인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34화
34화 타오르는 미소
며칠 전.
전생에 다크엘프를 지휘한 적이 있던 셰인은 다크엘프의 마력이 상대에게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하르페가 놓친 척 달려드는 다크엘프의 공격은 셰인으로선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황실 호위 기사단원 중 한 명인 하르페를 처리한 뒤, 셰인은 남는 시간 동안 상처를 치료하며 하르페의 기억을 정리했다.
그가 살아온 대부분의 쓸모없는 기억들은 지워 버리고, 황실과 연관된 기억들만 가다듬으며 정보를 수집하기도 잠시.
"별건 없군."
대부분 셰인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제외하면,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황실과 얽힌 이해득실 정도만 파악할 수 있었다.
실상 이것도 어느 정도 유추하고 있던 부분이기는 했다.
그 기억의 내용은 현 황태자, 제페르 디 와이어트 새뮤얼이 드래곤 하트를 노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조직과 연계하여 드래곤 하트의 일부분 혹은 그에 준하는 것을 얻고, 이번 탐사를 실패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들의 목적이었다.
굳이 새로울 것도 없는 정보라 셰인은 대충 머리 한편에 이 정보를 남겨 두고, 이내 약속된 시간에 맞춰 찾아온 다크엘프들을 바라봤다.
녀석들은 명령받은 기억과 다르게 셰인이 멀쩡히 살아 있자 곧바로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런 다크엘프들의 전투는 맥없이 끝나 버렸다.
어느새 이 공간을 가득 채운 셰인의 오리진을 품은 어둠이 다크엘프들을 향해 옥죄어 왔기 때문이다.
"이대로 살육 기계로 만들기엔 아깝지."
가뜩이나 그리 많지도 않은 엘프들이다.
하지만 그 적은 숫자만으로도 전생에 수많은 인류의 중진들을 암살하는 데 도가 튼 놈들이었고.
살려 둔다면 분명 쓸 일이 많을 녀석들이다.
셰인은 오리진의 일부를 엘프들에게 주입했다.
'하기야. 그 정신 나간 녀석의 발명품이니.'
가뜩이나 이지를 상실해 표정 변화가 없던 다크엘프들이 팔과 다리를 축 늘어뜨리고는 입으로부터 탁한 무언가를 내뱉기 시작했다.
다크엘프의 몸에 스며들었던 오염된 마력과 찌꺼기였다.
[정신이 좀 드나?]
[여, 여긴....]
어느새 셰인의 오리진으로부터 풀려난 다크엘프가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잡고 고개를 들었다.
그들이 올려다본 셰인은, 새하얀 민무늬 가면을 쓰고 있었다.
* * *
셰인이 조직에 몸을 담고 있던 시간은 고작 10년에 불과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생각하면 이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일 뿐이지만.
셰인은 그 10년이 결코 짧다고 말할 수 없었다.
"거기에 있는 시간을 잘 이용하는 게 좋을 거야."
타락한 자아에 밀려 스스로의 내면에 갇힌 셰인은 검은 머리카락에 마치 용암을 품은 듯한 주홍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를 떠올렸다.
그녀는 셰인의 진정한 자아를 알아차리고, 때때로 마주칠 때면 저런 식으로 시간을 잘 이용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했다.
내면에 있을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녀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녀의 말처럼 셰인은 스스로의 내면에 갇힌 상황에서도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타락한 자아는 끝까지 자신을 물고 늘어지며 놓아주지 않았고, 스스로 지쳐 내면 속에서 완전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내면의 셰인을 괴롭혔다.
내면의 세계에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통하지 않는다.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음에도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 같다가도, 1초가 10년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기이한 개념의 공간.
남들에게는 고작 10년에 불과했을 시간이었을 테지만, 셰인에게 10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개념으로 그곳에서 버텨 왔던 것이다.
때문에 내면에서 봐 온 외부의 지식들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뜯어보며 이윽고 습득에 이르러 결국에는 더 진화하는 과정까지 다다랐으니.
결국 그 소녀의 말처럼.
셰인은 그 시간을 결코 헛되게 쓰지 않은 셈이었다.
* * *
잠시 과거를 떠올렸던 셰인은 이지를 되찾은 다크엘프들을 바라보며 그때 그 소녀를 떠올렸다.
'너의 말처럼 됐군.'
단지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였기에 여러 정보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그녀의 말이 옳았다.
당장 지금으로서도 그 소녀의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셰인은 어쩐지 자신의 회귀가 그녀와 매우 깊은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평소 이성적인 판단이 아닌, 감정에 기댄 판단이라 그 생각이 오래 이어지진 않았지만.
'당장 생각한다고 알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아무튼.
그때 그 소녀가 말했던 것처럼, 회귀 전.
타락한 자아가 받아들이던 정보를 모두 알고 있던 셰인은 눈앞의 다크엘프들에게 이성을 되찾게 하는 일 정도야 어려울 것도 없었다.
애초에 요람에 오기 전부터 다크엘프와 조우할 상황을 시뮬레이션해 뒀으니.
[우리가, 어째서 이런 몸이 된 것인가.]
[...설명해 다오. 너의 정체는 무엇이지? ]
아직 오염의 여파에서 완벽히 벗어나지 못한 다크엘프들이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셰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젠가, 어느 엘프에게 했던 것처럼.
[너희의 자유를 되찾아줄 자다.]
셰인은 천천히, 그러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설명을 이어 갔다.
* * *
셰인이 다크엘프에게 이성을 되찾아 준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우선, 엘프는 기본적으로 육체에 마력을 받아들이는 성질을 가지고 태어난다.
물론 엘프라고 해서 아무런 마력이나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고,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걸 무시할 정도로 강력한 마력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셰인은 바로 그 마력 패턴을 분석하고, 따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
물론 셰인이 그러한 마력을 만들어 내는 것은 당장으로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미 다크엘프들에게 심어진 마력을 비틀어, 기존에 그가 알고 있던 마력 패턴으로 바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까, 저희가 살기 위해서는 종족을 설득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로군요.]
[맞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다크엘프들이 품고 있는 마력에는 당장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당장 다크엘프들이 미완성품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다크엘프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마력을 충분히 보충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이들은 이지를 상실했고, 조금만 싸워도 금방 마력이 바닥나 스스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다크엘프들에게 남은 특유의 마력을 베이스로 두고, 셰인의 모조한 마력이 대신 소모되도록 유도하여 그러한 사태를 막고 있지만.
이도 언제까지고 이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다크엘프들에게 동족의 설득을 종용한 것이다.
물론 그들 또한 엘프이고 이지를 되찾은 만큼 동족을 배신하는 행위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셰인을 적으로 두기에는 이미 그들은 너무 거대한 적을 앞에 두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적들은 엘프들을 잡아다 다크엘프로 만들고 있었고, 그 수가 적은 엘프들에게 이런 식으로 전력이 빼앗기는 것은 큰 위협이었으니.
물론 순전히 셰인을 믿을 수는 없는 노릇.
셰인 또한 그들의 처지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만큼, 단 하나의 조건만을 말하고 있었다.
[붉은 정령사초를 섭취하지. 그리고 너희 엘프의 수장을 만나러 가겠다.]
붉은 정령사초.
정령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그 독초는, 인간이 섭취할 시 그 섭취량에 따라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근원의 맹세도 하겠다.]
[...!]
고대의 종족들에만 알려져 있는 맹세.
이름이 거창한 만큼, 맹세를 어겼을 시의 페널티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는데, 이는 단순히 마력을 동결시키는 붉은 정령사초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뜻을 따르도록 하지요.]
[좋아. 그럼 먼저 너희의 오염된 동료들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찾아봐야겠군.]
[예.]
이후, 셰인은 자신의 마력이 허락하는 수준까지 다크엘프들을 받아들였고, 그 수는 총 14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
14명의 다크엘프와 함께 등장한 셰인을 향해, 디라일라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당신... 당신이 이번 일의 배후였어요?"
물론, 그녀가 충분히 해 봄직한 오해를 하면서.
그야 디라일라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의 셰인은 누가 봐도 흑막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그동안 탐사대를 괴롭혀 온 다크엘프에게 둘러싸여져 있지 않은가.
하지만 셰인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비슷하지만 다르지. 나는 이들에게 강요와 협박이 아닌 선택과 자유를 선사했으니."
"무슨 선문답 같은 얘길...."
"네가 보기에 이들이 지금껏 만나 왔던 녀석들과 똑같아 보이나?"
"어...."
그제야 디라일라는 셰인의 뒤에 서 있는 다크엘프들을 바라봤다.
놀랍게도 여태까지 만나 왔던 다크엘프들과 다르게, 그들의 눈에는 흐릿한 기운이 담겨 있지 않았다.
당장 지금도 호기심이 담긴 표정으로 자신과 오르카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그자의 저주로부터 벗어난 이종족이 있다니. 거기에 땅의 종족이라. 오랜만에 보는군.]
[우리의 형제 또한 있다. 어째서 저 둘이 함께 다니는 거지?]
[정말, 저자의 말처럼 저주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는 걸까?]
[...선택은 동족들이 해 줄 테지.]
이러한 다크엘프들의 다양한 표정, 그리고 오르카의 평온한 얼굴에 디라일라는 일단 무조건적인 적의는 풀기로 했다.
"그럼, 우리가 상대했던 다크엘프하고는 다르다는 거, 맞죠?"
"그래."
순전히 저 말을 믿어 줄 수는 없었으나, 일단 대화는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깨달은 것이지만, 오르카가 괜히 자신을 이 자리에 끌고 온 게 아닌 것 같았으니.
"그럼 무슨 일로──."
그런 이유로 디라일라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야, 그게 진짜였으면 좋겠네."
"...?!"
"정말 그 다크엘프들이랑 상관없는 거, 맞지? 그랬으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타오르듯 붉은빛을 머금은 머리카락의 여인, 라비아타가 반대편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양손에 피어오른 불꽃처럼, 타오르는 미소를 지으며.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35화
35화 이변
라비아타의 등장에 디라일라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디라일라야 어쩌다 다리 하나 걸친 탐사대원일 뿐이지만, 직접 탐험대를 이끌고 있는 라비아타는 다크엘프들에게 당해 왔던 울분이 있었을 테니까.
실제로 그 표정이 더없이 사나웠는데, 그에 가면의 사내, 셰인은 별 부담 없이 라비아타를 맞이했다.
"주인공이 등장하셨군."
"뭐, 내가 오는 걸 알기라도 했나 봐?"
"다르지. 네가 이곳에 오는 걸 알고 있던 게 아니라, 내가 너를 초대한 거다."
"초대라... 이상하네? 난 초대장을 받은 적이 없는데."
"가장 귀찮은 녀석들부터 죽이지 않았나. 그게 바로 초대장이지."
"하!"
셰인의 말에 라비아타는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역시, 황실 놈들만 죽이던 이유가 있었구만?"
"응?"
그 말을 들은 디라일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실?
"아."
그러고 보니. 지난 전투 때, 다크엘프에 의해 죽은 이들은 모두 황실의 호위 기사단원들뿐이었다.
"그래서 너도 일부러 연막을 터뜨린 게 아닌가."
"뭐, 맞긴 해. 저 녀석들의 시선이 뻔히 저 엘프에게 향했더라고. 뭔진 몰라도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겠다 싶어서 지켜보려고 했지."
그 말처럼. 라비아타는 지난 전투 때 화가 난 모습으로 큰 폭발 마법을 선보였으나, 실상 파괴력은 그리 높지 않았다.
오히려 그로 인해 퍼진 연기 때문에 시야가 가릴 정도였으니.
"그래서, 초대한 이유가 뭘까? 참고로 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작자는 태생부터 못 믿는 병이 있어요. 말 잘하는 게 좋을 거야."
"무얼 그리 날을 세우나. 그건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해도 될 일이지."
"흥."
그러면서, 셰인은 뒤에 서 있던 다크엘프들에게 말했다.
[잠시 자리를 비워 줬으면 하는군.]
[괜찮겠습니까? 저자에게 느껴지는 마력이 심상치 않습니다.]
다크엘프 중 한 명이 셰인에게 그리 물었다.
'하긴. 마력에 민감하기로는 어느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엘프들이니.'
라비아타가 가지고 있는 마력의 분위기를 파악한 다크엘프의 걱정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다크엘프라고 해서 셰인을 진심으로 생각해 한 말은 아니었다.
어찌 됐든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원흉을 제거해 줄 희망이 아닌가.
[저자 역시 너희 종족에게 자유를 만들어 줄 존재다. 필요한 일이지.]
[...알겠습니다.]
그러자 다크엘프들이 자리를 비켰고, 디라일라 또한 그들을 따라 함께 자리를 비웠다.
"이야. 딴 건 몰라도 용감한 건 칭찬해 줄게. 설마 나랑 단둘이 남겠다니. 이거 찐하게 데이트 한번 해 줘야겠는데?"
"필요 없습니다, 라비아타."
여태까지 어둠에 파묻혀 잔득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와 다르게, 라비아타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어... 이건 나도 좀 놀랐는데."
새하얀 민무늬 가면을 벗은 셰인을 바라보며, 라비아타가 그리 말했다.
* * *
라비아타는 제어할 수 없는 존재다.
일찍이 셰인은 라비아타를 그렇게 인식했다.
힘으로만 따지자면 전생의 클라인에게 밀리지도 않았고, 단순한 화력만 보자면 오히려 클라인보다 앞설 정도다.
그뿐이던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현 인류와 비교하면 호수와 바다만큼의 차이를 보였고, 지략 또한 결코 밀리지 않았으니.
라비아타라는 이름은 그만한 이름값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조직에서도 가장 위협적으로 보고 있던 적이었고.
만약 조직의 수작에 걸리지만 않았더라면, 전생에 셰인을 죽인 자는 클라인이 아니라 라비아타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셰인은 그러한 이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데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분명 라비아타는 힘으로 제어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으나, 반대로 말하면 필요에 의해 손을 잡을 수 있는 동맹의 자격은 충분했으니까.
"어, 저기. 혹시 정체가 뭐야?"
"클레이튼 가문의 장남이며 메자이아 대수림의 비밀을 풀어낸 클레이튼 R 셰인. 그게 접니다."
"뒤에 수식어가 몇 개 더 필요하지 않아? 귀족 살해자라던가? 그런 거."
지략이 뛰어나다는 게 괜한 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라비아타는 셰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셰인이 해 왔던 몇 가지 일을 곧바로 유추해 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 엘프만 보면 뻔하잖아? 솔직히 의심이 없던 건 아니었는데. 내가 생각해도 좀 허무맹랑해서 말이야."
엘프. 오르카를 가리켜 말한 라비아타의 말에 셰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저 디라일라라는 이종족 꼬맹이도 너 옆에 있고.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
"예. 맞습니다. 귀족 살해자라는 이명이 붙어도 할 말이 없군요."
"하... 그래. 일단 일이 좀 복잡한데. 설명 좀 해 줄 수 있을까?"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대수림에서 저열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무명. 그런 이름이었지, 아마?"
전생에 셰인이 몸을 담고 있던 조직의 이름, 무명.
그 이름이 라비아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예. 맞습니다. 그리고 황실의 어리석은 놈들은 그들과 손을 잡고 있지요."
"그 늙은이가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무슨 용기로?"
이런 라비아타의 말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 메자이아 대수림은 셰인의 논문으로 인해 넓은 대륙에 다시 한번 수면 위로 올라온 상태였고.
거기에 살아 있는 전설이나 마찬가지인 라비아타까지 직접 그 확인에 나섰다.
이미 온갖 이들의 눈과 귀가 쏠려 있는 상황.
거기서 황실이 무슨 짓을 했다간, 인류를 위한 연합국부터 흔들릴 가능성이 있었다.
"황실은 아마 거기에 큰 신경을 쏟지 않고 있을 겁니다."
"쯧. 그 망나니 새끼 때문이군."
라비아타의 말에 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일도 그 미친놈이 꾸민 일이라는 거겠고."
"...예. 그런데 라비아타."
"응?"
"괜히 서로 탐색전을 펼치는 건 그만하도록 하지요. 그 정도 사실이야 이미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애초에 당신도 황실과 연결이 있을진대."
"와... 이거 좀 오랜만인데."
그러면서, 라비아타의 두 주먹에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내가 좀 자존심이 세거든. 이런 식으로 누군가 내 머리 위에 서 있는 게 지독히도 싫단 말이지."
그런 라비아타의 행동은 셰인도 이미 예측한 바였다.
"우연이로군요.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만."
그러자 동시에 셰인의 품에 있던 어둠의 정령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 대치 상황을 깨뜨린 건 라비아타였다.
두 주먹의 불길을 꺼뜨린 라비아타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 유명세가 싫은 건 아닌데, 귀찮은 게 많단 말이지."
굳이 한 번 위협해 봤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라비아타였지만.
셰인은 방금 라비아타가 왜 저런 위협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내 위에 누군가 있는지부터 확인해 보고 싶었겠지.'
외부에 알려진 셰인의 나이는 이제 겨우 18살.
그런 마당에 당장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셰인이 누군가의 밑에 있을 것이라 판단했을 라비아타였으나.
방금 셰인의 행동으로 라비아타는 끝내 판단을 마쳤다.
"진짜 특이하네. 정말 혼자 움직이는 거 같은데. 내가 황실과 연결된 건 어떻게 알았어?"
"황태자의 황실 호위 기사단, 2황녀의 램퍼트 모험단, 그리고 1황녀의 낮새가 될 사람은 얼마 없지 않습니까."
"낮새라. 하하, 틀린 말은 아니네."
서로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탐사대였으나, 실상은 달랐다.
황태자와 1황녀, 2황녀까지 가담한 이번 탐사대는 어찌 보면 황실의 복마전이 여기로 옮겨져 왔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난장판인 상황이었다.
셰인 또한 그 사실을 진작에 파악했었다.
이후 정세에, 황실은 빠질 수 없는 세력이었으니.
"뭐, 됐어. 어차피 나도 의뢰를 받은 것뿐이니까. 의뢰 보상으로 얻을 것도 충분히 얻었고."
별거 아니라는 듯 라비아타가 어깨를 으쓱였다.
실제로도 라비아타의 입장에서는 그저 의뢰 하나를 받은 것에 불과했다.
물론, 이 사실을 알려지면 1황녀에게는 상당한 위협으로 다가갈 것이다.
다름 아닌 그 라비아타 모험단이 의뢰를 받는 일은 결코 가볍게 받아들일 일이 아니었으니까.
아직 황태자의 눈치를 잔뜩 보고 있을 1황녀로서는 혹여나 그러한 이유로 자신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을 싫어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무튼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무려 나를 초대했는데 별 볼일 없는 말을 꺼내진 않겠지?"
그 말에 셰인은 옅게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셰인이 이렇게까지 라비아타에게 정체를 드러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가 가진 세계 최고의 모험가라는 명성에 자부심이 있었고, 또 받으면 받은 만큼 대가를 확실히 치르는 인물이었으니.
"온전한 드래곤 하트를, 이번 탐사가 끝나기 전에 넘겨드리겠습니다."
"온전한이라.... 그게 무슨 말일까?"
라비아타의 사나운 미소가 흥미진진하게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셰인은 이번 탐사에 대한 목표 중 절반을 이뤘다고 확신했다.
* * *
"뭐야? 다크엘프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허리가 굽은 추레한 노인의 목소리가 음습한 나무 동굴에 울려 퍼졌다.
겉보기에는 너무도 추레해, 그저 성격 나빠 보이는 노인처럼 보였으나.
그런 그의 앞에 서 있는 부하는 온몸이 떨리는 공포를 가까스로 참아 내며 입을 열었다.
"예, 고든 님. 현장에 나가는 다크엘프들이 계속해서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도대체 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 게야! 분명 귀중한 실험체라고 하지 않았어!"
"분명 적들과 조우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 복귀하는 과정에서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췄습니다."
"고작 시킨 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그렇게 무능해서는 키메라의 재료로도 쓰기 힘들겠군. 쯧!"
갑작스럽게 메자이아 대수림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면서 동시에 그 유명한 라비아타의 탐사대가 이곳에 들어섰다.
그에 따라 조직에서는 고든을 위해 다양한 지원을 보내려 했으나, 고든은 그를 만류했다.
괜히 너무 큰 지원을 받았다간 엘프 여왕의 눈에 띌 가능성도 있었으니.
자신의 실험에 방해될 게 분명했다.
때문에 조직에서는 거기에 맞춰 여태까지 여러 수법과 황실 호위 기사단까지 뒤에서 몰래 조종하며 시간을 끄는 데는 성공했으나, 거기서 문제가 터져 버렸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머리는 떼어 내고 나머진 실험의 재료로 썼을 테지만... 운이 좋구나. 지금은 너처럼 쓸모없는 것의 손이라도 필요할 때이니."
그 말에 부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다크엘프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누가 감히 내 작품에다가 허튼 짓을... 흥. 어쩔 수 없군. 일단 남겨 둔 것들이라도 제대로 챙겨라. 도대체 조직에서는 뭘 하고 있길래 정보 관리조차 똑바로 하지 못하고 있는지 원."
다시 한번 혀를 찬 노인, 고든은 추가로 말했다.
"그리고 내 귀중한 실험체들이 어디로 갔는지도 파악해 놓거라. 만약 이번에도 시킨 일을 하지 못한다면.... 그래, 제법 쓸 만하게 만들어 주마."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고든의 말에 결국 한차례 몸을 떤 부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가치를 증명해야 할 게야. 내 밑에 있을 가치가 없다면 재료로 써야 할 테니까. 끌끌끌."
그리 말하며, 고든은 부하들이 가지고 온 탐사대원들의 시체를 보며 추레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훌륭한 재료가 있어서 저놈이 얼마나 쓸모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언제 화가 났냐는 듯 콧노래까지 불러 가며, 노인은 이번 일을 별 볼일 없는 이변이라 생각하고 넘어갔다.
한편, 고든처럼 예상에 없던 이변에 당황한 사람은 또 있었다.
"젠장!"
탐사대와 떨어진 황실 호위기사단은 거듭되는 전투 아닌 전투에 짙은 피로감을 내보이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상대는 마치 그림자처럼 검의 경로에서 벗어나 어둠에 몸을 숨겼고, 바로 옆에서 휘둘려지는 단검에 팔이 베이고 말았다.
"크아악!"
온몸의 마력이 팔로 집중되는 것이 느껴지자마자 기사는 곧바로 단검에 베인 자신의 팔을 스스로 잘라 냈다.
기사로서 한쪽 팔이 사라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고 있었으나, 저들의 검에 베이면 어찌 되는지 여태껏 잘 봐 오지 않았던가.
아니나 다를까 바닥에 떨어진 팔의 상처 부위로부터 보랏빛 꽃이 피다가 이내 시들며 가루로 화했다.
"이 빌어먹을 귀쟁이 놈들아! 도대체 뭘 하자는 게냔 말이다!"
또다시 부상자가 속출하는 전투.
그에 도미닉이 울분 섞인 고함을 소리쳐 봤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느새 몸을 숨긴 다크엘프로 인해 도미닉의 기사단은 그 자리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마력으로 강화된 기감으로도 적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으니.
황실의 기사단이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짧은 기습으로 치고 들어왔다가 사라지는 짓거리도 어느덧 나흘째.
잠을 잘 때도 편안히 잘 수가 없었고, 언제 목이 노려질지 모른다는 공포감은 그 용맹한 황실 기사단이라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이는 명백히 전투라기보단, 사냥을 당하는 행위에 가까웠으니.
"빌어먹을 이종족 놈들!"
또다시 간발의 차이로 다크엘프를 놓친 도미닉이 분노에 차서 그리 고함을 내질러 봤으나, 어둠 속에서 모습을 숨기고 그들을 지켜보는 다크엘프들은 차가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36화
36화 끝나 가는 탐사 (1)
"어떻게 그런 일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겐가?"
고든에게 명령을 받은 조직원은 들려오는 도미닉의 말에 한껏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정말로 다크엘프가 공격해 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랬지. 그것도 수십 번이나. 이쪽의 피해가 얼마나 큰 지 알기나 하나?"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저희 쪽에서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걸 내가 몰라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줄 아나? 하루라도 빨리 지금 사태를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게야. 내 단원들의 인내심도 그리 길지는 않으니."
이는 괜한 위협이 아니었다.
당장 도미닉의 기사단원들만 해도, 조직원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살기가 번들거렸으니.
'젠장....'
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된지 모르겠다.
어째서 다크엘프들이 자신들의 통제에서 벗어난 거지?
물론 연금술과 관련된 지식이 없는 조직원은 결국 고든에게로 생각이 미쳤다.
'미친 노친네. 그렇게 자신하더니, 이따위 문제를 일으켜?'
그렇게 속으로 고든을 씹어 대며, 조직원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혹시 다크엘프들에게 특이 사항은 없었습니까?"
"없었네. 그저 치고 빠지기만 반복하더군. 기존 탐사대에게 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것치고는 피해가 큰 것 같습니다만."
"지금 우릴 의심하는 겐가?"
"아닙니다."
"자네 상부에게 똑바로 전달하게. 이번 일이 어떻게 마무리되든, 우리 황실의 믿음을 일부 잃어버렸다는 것을."
"...예."
고작 황실의 개에게 이따위 취급을 받는 게 짜증 났지만, 조직원은 다시 한번 참았다.
조직의 계획에 황실과의 끈은 결국 자신의 감정 따위보다 수십만 배는 더 중요할 테니까.
"그럼, 저는 바로 보고 드리러 가 보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자면, 죄송합니다."
"썩 꺼지게. 자네 얼굴을 조금만 더 봐도 무심코 검을 뽑을 것 같으이."
"...."
그렇게 조직원이 떠나고, 도미닉은 그런 조직원의 뒷모습을 살기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 노부가 그리도 만만해 보이나 보구먼. 아니, 우리 황실의 위상이 줄어든 것일지도 모르겠어.'
일이 이 지경까지 온 이상, 도미닉은 더 이상 조직을 믿을 수 없었다.
누가 아는가?
드래곤 하트를 독점하겠다는 이유로 이쪽의 전력을 미리 떨어뜨리려는 행위일지.
아니, 도미닉은 오히려 그쪽이 진실이라 무게를 두었다.
애초에 자신이 모시는 황태자 또한 비슷했으니.
[만일, 그들이 틈을 보인다면 드래곤 하트는 우리 쪽에서 가져올 수 있도록 해 보죠.]
[걱정할 건 없습니다. 만약 그만한 사안에 빈틈을 보인다면 그들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우위를 차지하면 될 뿐이니까요.]
[그게 아니라면 우리도 놈들을 이용하면 되는 겁니다.]
[저들이 십수 년에 가깝도록 메자이아 대수림에 붙들려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억하세요. 전 인류를 책임질 우리 제국의 이름은 그리 가볍지 않다는 것을.]
도미닉은 자신이 모시는 황태자가 했던 말을 떠올렸고, 그 말에 따라 행동해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렇기에 다크엘프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자신들을 공격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다크엘프의 변화가 정말 자신들의 생각처럼 일부러 한 짓이 아니라면, 도미닉이 넘긴 블러핑 정보 또한 조직에게 날카로운 검이 되어 돌아갈 테니까.
"결국, 승자는 우리 황실이 될 것이다."
한편, 도미닉이 그러한 다짐을 하고 있을 때, 자리에서 벗어난 조직원의 얼굴은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저놈들, 딴생각을 하고 있군.'
다크엘프가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 말을 피하는 도미닉의 행동은 조직원에게 그러한 확신을 주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이 살벌한 조직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인간이다.
그만큼 눈치고 있었고,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는 데 능숙했으니.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에 자신의 전임자들처럼 고든의 실험체가 됐을 터.
조직원은 도미닉이 보였던 태도를 떠올리며 이 사실을 빠르게 고든에게 알려야겠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나 그런 다급한 마음 때문일까.
그는 자신의 발 아래로 어둠이 일렁이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흠...."
머릿속을 메우는 조직원의 다양한 기억들.
그중에서 필요한 것들만 뽑아내고 정리한 셰인은 별 감흥 없는 얼굴로 기억을 갈무리했다.
사실, 이렇듯 타인의 기억을 뽑아내는 일은 결코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애초에 기억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정의하는 것인지라, 자칫 잘못하면 기억에 잡아먹혀 스스로가 누구였는지 혼란에 빠져 광인이 되기 쉬웠으니.
그저 단순하게 필요한 기억만 받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 전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행위인 것이다.
부모에게 버려졌든, 무언가 끔찍한 사고를 당했든, 복수가 되었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사연이 있고, 그러한 사연들은 모이고 모여 기억을 강탈한 존재를 압박한다.
그러나 셰인에게는 이러한 압박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야, 누구보다 스스로의 내면을 관찰했어야 했던 셰인이었으니.
회귀 전, 타락한 자신의 의식 아래로 밀려 내면에 갇혔던 시간이 얼마나 길었던가.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과 같은 일은 너무도 쉬울 따름이었다.
지금, 기억을 정리하면서 보다 중요한 일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것처럼.
[그래서,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단도진입적으로 말하자면, 예. 그렇죠.]
눈앞에 있는 엘프들의 여왕 앞에서도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셰인도 분명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게 분명했다.
[솔직히 놀랍기는 하네요. 고작 몇백 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인간들이 이렇게까지 성장할 줄은. 그래요. 놀라워요.]
그러면서 엘프들의 여왕이 고개를 들었다.
아마,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녀의 미모를 보는 순간부터 몸이 경직되었을 것이다.
마치 자연의 사랑과 축복을 그대로 받은 것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미모는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화이트골드의 머리카락에 새하얀 피부는 마치 한겨울 눈이 쌓인 산처럼 보였다.
눈동자에는 에메랄드 빛 호수가 잠들어 있었고, 굳게 다문 입술은 마치 긴 시간의 기다림 끝에 맺힌 새빨간 사과와 같은 색이었다.
하지만, 셰인에게는 그저 앞으로 자신과 협력해야 할 대상.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미모에 혹하기에는, 이미 셰인의 인격적인 부분이 너무도 마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과 다르게, 과연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네요.]
[인간이라....]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다.
인간은 탐욕 그 자체였으니.
탐욕이라는 게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인류는 강해지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고, 그래서 엘프의 수명보다도 짧은 시간 안에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
탐욕은 진보의 밑거름이고, 이게 곧 종족의 성장을 가져다 오니까.
하지만 때때로 인간은 그러한 탐욕에 잡아먹히기도 하는 존재다.
[하면, 도움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도 되겠나?]
[음, 글쎄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도 역시 고민이 되긴 하네요.]
그러면서 엘프의 여왕, 프리실라는 잎을 동동 띄운 물을 마시며 호수가 담긴 눈으로 셰인을 바라봤다.
[보이는 모습만큼 여유롭진 않아 보이는데.]
[이해해 주세요. 우리 엘프들이 이런 걸요. 인간들과 다르게, 우리는 긴 세월을 살아가잖아요?]
[수명이 길다고 반드시 엘프들처럼 느긋한 건 아니지. 그리고 모든 엘프가 그런 것 또한 아니고.]
[어머, 정면에서 반박당하니 할 말이 없긴 하네요. 음, 사실 곤란한 건 맞아요. 우리 아이들은 수면기에 들어서, 적들에게 대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도대체 그들은 세계수의 봉인을 어떻게 깨고 들어올 수 있던 걸까요?]
그 질문에 셰인은 가볍게 설명했다.
[세계수의 정체를 알지 않나. 적 또한 그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지.]
[아하...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그 '다크엘프'라는 것으로 될 수밖에 없던 것이로군요.]
전생에 엘프들이 조직에 의해 그리도 무력하게 흡수당할 수밖에 없던 이유.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이어져 있겠지만, 그중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엘프들의 수면기 때문이었다.
수천 년에 한 번, 엘프들은 수면기에 접어든다.
그 이유는 현재 메자이아 대수림의 관계와 비슷한데, 수천 년에 한 번씩 메자이아 대수림에는 이렇듯 마력 불안정 현상이 일어난다.
그때마다 엘프들은 스스로를 수면기에 접어들도록 만들고, 세계수의 봉인 속에서 지금과 같은 시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고작 5~10년 사이로 안정기에 접어들었어야 할 대수림은 아카샤의 대봉인으로 인해 수백 년 동안 이어졌다는 것이고.
조직은 세계수의 봉인을 풀고, 세계수가 아니라면 수면기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엘프들을 데리고 실험에 강행한 것이다.
그동안에는 수면기에 들지 않는 엘프의 여왕, 프리실라 홀로 조직을 상대하고 있었다.
다만 조직도 멍청하지는 않아서, 이 숲의 여왕인 프리실라와 정면에서 대적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철저하게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고 수면기에 든 엘프를 납치해 고든을 통해 다크엘프로 만들었다.
[그래서 아주 답답하답니다. 이 숲에서 제 눈을 피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믿음이 깨져 버렸거든요.]
셰인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메자이아 대수림을 지켜 주는 세계수의 마력에 대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들 중 하나가 바로 조직이었으니.
[그런 마당에, 그들보다 더 정교하게 제 동족을 활용하는 당신이 나타났네요. 그러니 어떻게 함부로 믿을 수 있겠어요?]
당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다크엘프의 모습만 보더라도, 프리실라의 의견은 타당하고도 넘쳤다.
그녀는 현재 수면기에 들어간 수천의 엘프를 책임지고 있는 여왕이었으니까.
[확실히, 거래라는 것은 서로 믿을 수 있는 신용이 필요하지.]
[네, 맞아요.]
[필요하다면 근원의 맹세도 하겠다.]
[어머, 정말요?]
그러자 프리실라의 표정에 옅게 놀라움이 스쳤다.
지금 당장 이곳, 엘프들의 요람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근원의 맹세를 했지만, 고작 적의를 가지지 않겠다는 정도의 맹세는 쉬운 편이었으니.
[하지만 그게 만능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계시죠? 계약의 내용과 과정까지 제게 설명해 주셔야 해요.]
[어려울 건 없지.]
사실, 근원의 맹세는 지금 셰인이 한 것처럼 가볍게 해서는 안 될 행위다.
스스로의 근원을 걸었다는 것만큼, 만약 맹세를 어길 시에는 존재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소리였으니.
고대에서도 그리 자주 사용되는 거래 방법은 아니었다.
어찌 됐든 스스로를 판돈으로 올리는 것이 아니던가.
가능하다면 셰인도 이러한 행위는 하고 싶지 않았으나, 인간인 이상 그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방법은 이보다 효과적인 게 없었다.
고대의 종족들을 던전에 봉인시킨 존재가 바로 인간이었던 아카샤였기에.
[그 정도라면 믿을 수 있겠네요. 좋아요.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그만큼 엘프들에게는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
본 역사에서, 끝내 조직의 손길을 벗어나지 못 했던 엘프들이 얼마만큼의 악명을 떨쳤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런 위험쯤이야 감수할 만했다.
더구나 메자이아 대수림에 깃든 드래곤 하트는 그녀의 협력이 없다면 얻을 수 없었으니.
[아참. 그러고 보니, 제 형제자매들을 저런 모습으로 만든 장본인은 꼭 제 앞에 데려다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만큼은 제 손으로 직접 찢어 버리고 싶거든요.]
화사한 미소와는 다르게 살벌한 프리실라의 말에도, 셰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 * *
조직의 계략에 의해 탐사대가 흩어진지도 어느덧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나눠진 탐사대는 생각만큼 어렵지 않게 합류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단순했다.
"다크엘프들이 나타나지 않는군요."
그간 탐사대를 괴롭히던 다크엘프들의 등장 빈도가 현저히 줄어든 것.
클라인의 그 말에 일행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은 편해진 얼굴로 식사를 마쳤다.
"으아, 그래도 지치는 건 똑같네."
디라일라의 말처럼, 일행들은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미 탐사가 시작된 지 2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그간의 피로는 단순히 쉰다고 풀리는 게 아니었으니.
"거기다, 다행이네. 셰인이 멀쩡하다니."
"응... 그치."
디라일라의 말에 클라인도 얼마 전보다 훨씬 안정적인 미소를 지었다.
며칠 전, 라비아타가 혹시 몰라 셰인에게 걸어 뒀던 생명 추적 마법이 느껴졌다는 소식을 전해 온 것이다.
그동안에는 메자이아 대수림의 마력 불안정 현상 때문에 제대로 관측되지 않았는데, 셰인의 마력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졌다는 소식에 클라인은 한숨 놓은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도 없었는데, 그 이유는 아직 셰인이 합류하지 못했다는 것도 있었지만, 라비아타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 때문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알리지 마."
그 한마디는 다양한 의미를 포괄하고 있었고, 클라인은 그걸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순해 빠지지 않았다.
'탐사대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
설마하니 같은 탐사대에 배신자가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클라인이었기에,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클라인이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셰인은 황실 기사단과 함께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도 살아남은 몇몇 황실 기사단이 있었고, 클라인은 굳게 입을 다물며 아네이스를 바라봤다.
아네이스 또한 저지먼트 기사단으로서 황실과 연관이 있지 않나.
'...내가 너무 민감한 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만약 셰인이 관여된 게 아니었다면 클라인도 이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다음 날 저녁.
거대한 나무뿌리로 만들어진 공동 아래에서 갈라졌던 탐사대는 다시 한번 합류할 수 있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37화
37화 끝나 가는 탐사 (2)
다크엘프들의 기습이 사라지게 되니 탐사대의 진행 속도는 날이 갈수록 거침이 없어졌다.
물론 메자이아 대수림의 명성에 걸맞게 몬스터들의 등장 빈도도 많아졌으나.
급격하게 성장한 클라인과 아네이스의 활약과 다시금 흙을 다룰 수 있게 된 디라일라의 가세는 탐사대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것과 같았다.
그렇게 셋이 중심이 되어 앞으로 나아가기를 며칠.
탐사대는 드디어 다른 통로들과 연결된 공동에 도착할 수 있었다.
뜻밖에 그곳에 먼저 도착한 이들은 다름 아닌 램퍼트 모험단이었다.
"아, 오셨군요."
하지만 램퍼트 모험단도 보통 고생을 한 게 아닌지 다들 크고 작은 부상을 달고 있었으나, 적어도 사상자는 없는 듯 보였다.
"이야, 다행이다. 먼저들 와 있었네?"
"예. 도중에 몬스터들의 부화장을 마주치는 바람에 전투가 좀 격했습니다만... 그 외에 큰 위협은 없더군요."
"그래? 이쪽은 다크엘프들이 좀 나오긴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안 나오더라고. 그래도 여기 이 양반이 활약을 좀 했어."
"...그래 봐야 부족했소."
애덤이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실제로 애덤이 가진 민감한 기감은 다크엘프들의 습격을 대비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줬으나, 실상 실력이 가장 뒤떨어지던 하이엘 왕국의 기사단은 이제 애덤을 포함해도 4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
큰 피해를 입은 애덤의 표정은 자신의 활약에 비해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다들 용감하게 싸웠어. 이 라비아타가 그들을 기억해 주지."
"...말이라도 고맙소."
어찌 됐든 살아 있는 전설로 알려진 라비아타 모험단의 단장이 하는 말이다.
오만하게 들릴지 몰라도, 라비아타 또한 애덤의 목숨을 여럿 구했기에 그도 일단 감사를 표했다.
"뭐, 마음 같아서는 바로 움직이고 싶긴 하지만... 아직 한 팀이 남았으니까 좀 기다려 보자고. 2~3일 정도 기다려 보고 안 온다 싶으면 그때 출발하는 걸로. 어때?"
"네, 그렇게 하죠."
"알겠소."
이런 라비아타의 제안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캠프를 준비하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주변 탐색을 끝내고 충분히 안전을 확인한 뒤 취침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드디어 마지막 탐사대가 합류했다.
황실에서 나온 호위 기사단의 단장인 도미닉과 그의 단원들이었다.
그러나 탐사대는 그런 그들을 보고 어서 오라며 환대할 수는 없었다.
"피해가... 컸던 모양이오."
황실 호위기사단의 인원은 어느새 절반밖에 남지 않았고, 또 남은 이들의 눈빛에 지독한 살기가 가득한 것을 보아하니 보통 고생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허허, 노부의 실수요. 설마하니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우리 쪽을 노릴 줄은 몰랐던 게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나, 도미닉은 순순히 자신들이 부족했다며 인정했다.
그러나 속은 전혀 달랐으니.
'기필코 이 일은 잊지 않을 것이야.'
도미닉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조직원이 다녀간 이후 한동안이라도 습격이 없을 줄 알았던 게 패착이다.
속도를 높여 한시라도 빨리 합류하려 했으나, 바로 어제 다크엘프들의 대대적인 기습이 있었다.
그것도 함정까지 파 놓은 매복!
마지막으로 자신을 보며 떠났던 조직원이 만약 눈앞에 나타난다면, 이번에는 무슨 이유를 대든지 고통스러운 최후를 선사해 주겠다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래도, 마지막에 웃는 자는 내가 될 것이다.'
비록 이번 일로 인해 황실 기사단이 큰 피해를 봤으나, 따지고 보면 다른 이들이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았다.
그나마 항상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램퍼트 모험단이 그 수를 온전히 보전하고 있지만, 공격에 나서는 기사단들의 수가 크게 줄어든 상황이니.
이대로 천천히 탐사를 이어 가면서 램퍼트 모험단의 수를 줄이고 나아간다면 후에 충분히 자신이 상황을 주도해 나갈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렇게 노회한 기사는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자신의 계획을 정리했으나.
또다시 그의 계획이 어그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형님!"
"클라인."
다음 날.
셰인이 탐사대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 * *
셰인의 등장에 가장 먼저 민감하게 반응한 사람은 다름 아닌 클라인이었다.
"형님!"
최근의 활약으로 탐사대의 관심을 크게 받고 있던 클라인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그쪽으로 몰렸다.
탐사를 시작하고서도 한동안 몸단장이 깔끔했던 셰인의 복장은 여기저기 해져 있었고, 살짝 야윈 모습은 이만저만 고생한 게 아닌 듯했다.
그에 클라인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살아서 돌아왔다는 사실에 신께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지금 바로 포션을...."
"클라인. 난 괜찮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가벼운 탈수 증상에 불과하니."
탈수 증상이라기보다는 다크엘프들을 유지하는 마력으로 인한 마력 부족 현상이었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오오, 셰인, 자네가 무사해서 참으로 다행일세."
그때.
셰인의 등장에 기겁하면서도, 복마전 같은 황실에서 수십 년을 버텨 온 도미닉은 표정 변화 한 번 없이 셰인을 맞이했다.
물론 셰인 또한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말에 답했다.
"저와 함께 있던 기사는 안타깝게도 지킬 수 없었습니다. 다크엘프들의 공세가 워낙 대단했던 터라."
"...아닐세, 아니야. 하르페도 자신의 희생을 결코 헛됐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
아주 짧은 시간이었으나.
도미닉의 표정에 잠시나마 안도가 스쳐 지나갔다.
기껏 계획을 짜 둔 상황에서 혹여나 하르페가 셰인을 건드렸다는 정황이라도 드러났다간, 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수가 있었으니.
도미닉은 평소보다 인자한 표정으로 셰인을 반겼고, 이내 곧 탐사대는 출발 전, 다시 한번 작전 회의 시간을 가졌다.
그런 와중, 셰인의 한마디에 탐사대원들의 표정에 경악이 떠올랐다.
"뭣, 그게 정말이오?"
"예. 다크엘프를 피해 있던 도중, 엘프들의 대규모 텔레포트 마법진의 존재 여부를 확인했습니다."
셰인의 말은, 이 방대한 메자이아 대수림의 탐사에 있어서 가뭄의 단비나 마찬가지인 소식이었다.
일반적으로 던전 내부에서는 아카샤의 대봉인으로 인해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할 수 없지만, 대봉인 이전에 설치된 마법은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램퍼트 모험단장, 일렉사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마법은 인간이 아닌 엘프가 만든 마법이에요. 비록 제가 마법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사용해도 안전에 문제가 없는 게 맞는지 걱정은 드네요."
"으음, 타당한 이유일세. 나도 마찬가지로 그런 걱정이 드는구먼. 혹시 안전한 방법을 알아냈는가?"
거기에 마침 잘 됐다는 듯 거드는 도미닉의 말에 셰인이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불안한가.'
겉으로는 여유로운 듯 보이는 도미닉이겠지만, 그로서는 탐사대의 힘을 줄이기 위해 보다 질질 끌어야 할 이유가 있을 터.
그런 마당에 이런 방법이 제기됐으니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그럴수록 셰인은 더더욱 여유로워졌다.
적이 조급해진다는 것은, 실수를 유발할 확률이 늘어난다는 의미였으니.
"예, 이론적으로 가능합니다. 우선 이를 알려면 메자이아 대수림에 사는 엘프들의 특징을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엘프의 마법이니만큼, 엘프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고대에 엘프들이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주변의 마력에 동화되는 특징을 극도로 활용해 이곳 메자이아 대수림을 완벽히 자신들의 통제권 아래 놓았기 때문이다.
엘프들은 부상을 입더라도 숲의 생명력으로 빠르게 회복하며, 동시에 나무를 조종할 수 있고 그들이 다루는 마법 또한 나무와 연관이 깊었다.
그 중에서도 나무와 나무를 연결하는 뿌리 속에 흐르는 마력을 다루는 데는 따라올 자가 없었는데, 그들은 이러한 나무들의 마력을 오랜 세월에 걸쳐 자신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나무와 나무 사이로 이동하는 정기를 통해 자신들의 의식을 먼저 옮기고, 그것을 좌표로 활용해 순간적으로 나무끼리 얽혀 있는 마력을 확장시켜 이동하는 텔레포트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설명을 모두 듣게 된 라비아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음, 일단 텔레포트가 구동하는 방식은 이해했어. 그런데 그걸 어떻게 사용할 건데? 그건 엘프들만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이잖아."
그 말처럼.
메자이아 대수림이 엘프들에게 있어서 무적의 영역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바로 엘프들만 사용이 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숲의 마력에 엘프만큼 동화되는 이들은 몇 없었고, 그걸 또 엘프들의 입맛에 맞춰 발달시킨 이들도 없었으니.
만일 지금처럼 엘프들이 수면기에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탐사대는 메자이아 대수림의 입구에도 들어가지 못했을 게 뻔했다.
그러나 셰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우리에게도 있지 않습니다. 비록 나무는 아니더라도, 자연에 속한 마력에 그만큼 동화율을 자랑하는 존재가."
그러자, 라비아타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쏠렸고, 다른 이들도 그에 따라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엥?"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디라일라가 있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38화
38화 끝나 가는 탐사 (3)
"에엑! 저기,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그런 중요한 건...."
탐사대의 시선을 끌게 된 디라일라가 기겁을 하며 거절하려 했으나, 셰인이 그 말을 끊었다.
"너에게 모두 맡길 생각은 없다. 네가 그 정도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어, 그럼 다행인데. 마지막 말은 꼭 필요한 말이었니?"
"다만, 디라일라. 너의 역할이 중요한 건 달라지지 않았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이곳의 대지는 의지력이 강한 이곳의 식물과 연결되어 있다."
"어, 그렇지."
"이제부터 나는 엘프들이 만든 마법진을 손볼 예정이다. 그 주체를 나무에서 흙으로 옮길 생각이지. 너는 거기에 맞게 이곳의 대지와 동화율을 높여라."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갑자기... 끄응. 아냐, 한번 해 볼게."
당황스러운 요구였으나, 이내 디라일라는 마음을 고쳐먹고 셰인의 말에 따랐다.
그녀 또한 생도 신분이기 이전에 한 명의 모험가였고, 팀장의 말에 따라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렇게 셰인은 엘프들의 마법진을 개조하는 데 몰두하기 시작했고, 바닥에 앉아 이곳의 대지와 교감하던 디라일라를 향해 라비아타가 다가왔다.
앞서 셰인의 부탁을 받은 라비아타는 디라일라의 옆에 마찬가지로 앉아 속성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
불을 다루는 마법사로서 이름 높은 라비아타답게, 그녀는 속성에 대해 순도 높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른 것처럼, 자연도 성향이 서로 다르기 마련이지. 불이라고 다 같은 불이 아니고, 대지라고 다 같은 대지가 아니란 말이야."
"아...."
"아마 밖에선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었을 거야. 네가 가진 속성 친화력은 그 어떤 종족보다도 뛰어났을 테니까."
"네, 네. 맞아요."
라비아타의 말처럼, 이곳의 대지는 바깥과는 달랐다.
오랜 기간 나무와 함께 해온 메자이아 대수림의 대지는 디라일라에게 호의적이기는 했으나, 외부처럼 맹목적인 믿음으로 다가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여기서는 다르지. 엘프들은 오랜 시간 동안 이곳의 자연과 친화력을 쌓아 왔고, 그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거든."
이어서 라비아타는 설명했다.
"그런데, 너는 네가 가진 재능 때문에 하나 착각하고 있는 게 있어."
"착각이요?"
"그래. 너희 지하인들이 가진 건 속성 친화력만은 아니야."
"...?"
"고대에 지하인들은 대지의 주인이었어. 그 엘프들마저도 자존심을 뒤로하고 지하인과 친분을 유지할 정도로, 땅에 있어서만큼은 지하인들이 으뜸이었단 말이지. 이게 왜 그런지 알아?"
"음... 잘 모르겠는데요."
"엘프는 다방면으로 친화력이 뛰어나. 자신들의 마력패턴을 자연과 맞추면서 그로 인한 친화력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머무는 자연과 하나가 되지. 이런 숲을 제외하고도 엘프들은 사막과 설원 지대에서도 잘 사는 이유가 바로 이거란 말이지. 그런 그들이 왜 지하인과 친분을 유지해야만 했을까? 이유는 단순해. 바로 지배력 때문이야."
"지배력이요?"
"그래, 지배력. 지하인이 특별한 이유가 뭔지 알아? 속성 지배력이라는 힘은, 어느 한 종족을 대표하는 힘이기 때문이야. 그래서 인간들도 속성 친화력은 알아도, 지배력에 대해서는 모르지. 적어도 인간들 중에 지배력을 소유한 사람은 여태까지 한 명밖에 없었어."
얼마 전, 어둠이라는 속성을 지배하고 있던 셰인을 떠올리며 라비아타가 이어서 말했다.
"어느 한 종족이라면, 설마?"
"맞아. 드래곤. 유일하게 속성에 있어서 절대적 지배력을 지닌 종족들. 지하인의 지배력은 비록 드래곤에게는 밀리지만, 그렇다고 드래곤이 지하인보다 대지를 더 잘 다뤘던 건 아니야. 친화력과 지배력. 이 두 개 모두를 갖춘 존재는 너희 지하인이 유일하거든."
"으음. 그런데 잘 믿기지가 않네요. 그 드래곤보다 지하인이 더 대단했다니...."
디라일라에게 자신감이 없는 게 아니다.
단지 그만큼 드래곤이라는 이름에는 무게감이 있었으니.
그러나 라비아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말했잖아. 드래곤은 속성 지배력이 대단한 만큼, 친화력은 없었다고. 그 차이가 만들어 낸 결과야. 말하자면, 당근과 채찍의 개념이지. 그런 의미에서 엘프들은 나무가 자라는 땅만큼은 지하인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던 거야. 만약, 지하인들이 자신들의 지배력일 행사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들이 말라 죽었을 테니까."
"아...."
그런 라비아타의 말을 이해하기까지, 디라일라에게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방법을, 찾은 거 같아요."
그렇게 혼자 고민하고 실행에 옮겨 본 디라일라가 맑은 웃음을 보이며 말하자, 라비아타는 작게 감탄했다.
종족 자체의 특성이긴 했지만, 그래도 여태까지 모르고 살았던 자기 종족의 특성을 말만 들었다고 파악하는 게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으니.
'꼭, 이 녀석만 그런 건 아니지.'
디라일라를 제외하더라도 클라인과 아네이스의 재능 또한 결코 만만찮았다.
라비아타로서는 이런 인재들을 곁에 둔 셰인의 정체가 점점 더 궁금해질 따름이었다.
* * *
한편, 아네이스는 머릿속에서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네이스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흐르는 기세를 읽을 줄 알았고, 그렇기에 도미닉과 황실 기사단이 다시금 탐사대에 합류 한 순간부터 그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변화를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럴수록 아네이스의 귀는 점차 민감해져 갔다.
사람들의 대화를 하나하나 놓치지 않았고, 다양한 정보를 머릿속에 풀어내며 점차 스스로의 목표가 무엇인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자 지난번에 도미닉이 해 왔던 제안을 떠올렸다.
정의.
저지먼트 기사단과, 도미닉의 황실 기사단이 아네이스에게 항상 말하는 단어.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아네이스에게 다르게 다가왔다.
그게 무엇일지 여전히 아네이스는 알 수 없었으나.
오랜 시간 동안 그녀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질문하고 있었다.
정의란 무엇인가.
아직 정의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네이스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린 그림이 저런 질문을 하는 것부터가, 의심의 싹을 틔우기엔 충분하다는 사실을.
* * *
"클라인."
"형님?"
셰인의 부름에 클라인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쪽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동안 많이 성장한 것 같구나."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성장을 이룰 수 있었으나, 클라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저 겸손하기 때문이 아니다.
전투를 치를수록, 클라인은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힘이 부족하다는 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힘은 넘쳐 난다.
그 어떤 적도 클라인의 검 앞에 대적할 수 없었고, 실제로도 갑충형 몬스터들은 클라인의 검 앞에서 자신들의 방어력을 자랑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클라인은 스스로 부족한 게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로 기교였다.
넘쳐 나는 마력과 그걸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다른 의미다.
여태까지는 그러한 불편함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외부에서는 언제나 넓은 지형에서 싸울 수 있었고, 고작해야 만나 본 고블린들은 전력으로 싸울 필요조차 없었으니까.
그나마 트롤을 상대로 어느 정도 힘을 보일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전력을 다 해 본 경험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좁은 지형에서 산성액을 내뱉으며 돌진하는 곤충형 몬스터들은 하나하나가 위협적이었고, 땅 내부를 헤집고 등장하는 몬스터의 날렵함은 그 어떤 몬스터들에게서도 겪어 본 적 없는 까다로움을 느꼈다.
그런 와중에도 클라인이 가진 힘은 일당백의 능력을 보여 주고 있었으나, 그럴수록 스스로의 실력이 불편하다고 느껴졌다.
보다 잘할 수 있음에도 그럴 수 없다.
여태까지는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나, 한차례 셰인과 강제로 떨어지게 되면서 스스로를 더 몰아붙이다 보니 그러한 결과에 다다른 것이다.
"드디어 벽에 다다랐구나."
셰인의 그 짧은 말에서 클라인은 곧바로 그 안에 내재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벽...."
여태까지 특별히 벽이라는 것을 느껴 본 적 없던 클라인은 아직 그걸 스스로 깨기에는 경험이 부족했다.
"클라인. 마력이라는 게 무엇일 거 같으냐."
"마력, 말입니까?"
그 질문은 누가 들어도 난해하다고 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클라인은 그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금 주저하는 듯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이전까지는 마치 저를 지켜주는 단단한 성벽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 성벽은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서, 다가오는 상대에게 절대 밀리지 않고 오히려 적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근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단단한 성벽.
그러나 벽은 움직이지 않는다.
클라인은 그 사실을 최근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누군가 이런 클라인의 심정을 본다면 미친놈이 아니냐며 욕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클라인의 마력 컨트롤은 다른 이들이 보기에 진정한 재능이라는 게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본인은 생각이 달랐다.
"언제나 제 뜻대로 움직여 줄 거라 생각했지만, 아닌 거 같습니다."
거기까지 말을 들은 셰인은 미세한 웃음을 지었다.
"스스로가 성벽이라 말해 놓고, 성벽이 움직이길 바라는구나, 클라인."
"아... 하하."
그 말에 클라인도 스스로의 비유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며 슬며시 웃었다.
"클라인. 너의 문제는 다른 누구에게 말해도 제대로 된 조언을 듣기 힘들 거다."
"왜... 그렇습니까?"
"그야, 세상에 너 같은 천재는 또 없을 테니까."
"음...."
대놓고 자신을 세워 주는 말에 클라인이 부끄럽다는 듯 콧등을 긁었으나, 셰인은 이 말에 한 치도 과장을 섞지 않았다.
그만큼 클라인이 가진 재능은 천재들 사이에서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홀로 고고히 태어난 새는 자신을 챙겨 줄 동료나 가족이 없다면 하늘 높이 날아가는 기술을 배우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 클라인이라는 이 새는, 나는 법을 배우기도 이전에 자신의 날개가 얼마나 큰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러니 날려고 해도 날지 못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력을 측정해 본 게 언제지?"
"한 8년은 된 것 같습니다."
9살.
그때부터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클라인의 재능은 이미 꽃을 피우고 있었다.
당시 특별 주문했던 마력 측정기가 한계치에 다다르게 측정될 정도였으니, 클라인의 마력 순도는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지금이라면?
클라인은 스스로 어느 위치에 있는지 모르는 독수리나 다름없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거라. 조만한 기회가 있을 테니."
"기회라면...."
"그때가 찾아오면, 걱정하지 말고 네가 가진 모든 마력을 풀어 봐라. 그럼 내가 하는 말이 뭔지 알게 될 테니."
"...알겠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형님."
"아니다. 조언이랄 것도 없으니."
어차피 때가 되면 찾아온다는 것을 미리 말해 준 것뿐이기에, 셰인은 다시금 시선을 돌려 마력 패턴을 개조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로써 준비는 서서히 끝을 맺고 있었다.
이 길었던 메자이아 대수림의 탐사를 완벽하게 끝마칠 준비를.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39화
39화 끝나 가는 탐사 (4)
드디어 셰인의 작업이 끝나고, 디라일라도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특히 디라일라는 라비아타의 가르침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는데, 그녀는 이번 기회에 스스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후우, 이거 긴장되네."
셰인이 그린 마력 패턴 안에 자리 잡은 디라일라는 굳은 표정으로 이곳의 대지와 교감을 시작했다.
주변에는 이어질 전투를 대비하여 탐사대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개중에는 이런 셰인과 디라일라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도미닉이었다.
'좋지 않군.'
틈이 생기면 드래곤 하트를 차지해야 하는 황실의 입장에서, 지금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일단 이 탐사는 셰인과 라비아타라는 두 인물로 인해 가능했던 건데, 이번에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황실에서는 언제 또 드래곤 하트를 얻게 될지 미지수인 상황이었으니.
거기에 도미닉은 셰인 또한 불안한 요소라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아직까지 셰인이 황실을 향해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아서 어느 정도 안심은 하고 있으나, 어쨌든 자신이 암살을 명령한 하르페는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만약 셰인이 지금 보이는 모습이 연기고, 탐사 종료 후 밖으로 나갔을 때 당시의 일을 공론화한다면....
도미닉의 입장에서 셰인은 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하필이면 저지먼트 기사단의 소속인 아네이스와 약혼 관계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자칫 잘못하면 셰인의 처분을 두고 황실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모른다.
그럴 가능성은 낮겠으나, 혹여나 셰인이 밖으로 나가서 하르페의 암살 계획을 공론화한다면 황실이 꼬리 자르기에 들어가는 수가 있었다.
이후의 위기, 그리고 황실에서의 입지를 생각해서라도 여기서 셰인을 정리해야만 했다.
'어렵구먼....'
하지만 도미닉의 생각처럼 이전과 다르게 셰인을 처리할 타이밍이 그리 쉽게 생기지는 않았다.
이전과 다르게 마력 패턴을 개조하는 시도를 하는 탓에 불침번에서도 제외됐고, 항상 사람들이 모인 중앙에서만 작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도미닉은 초초한 마음이 들었으나, 아직 그에게는 활용할 카드가 여럿 남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도미닉의 시선을, 셰인 또한 모르고 있지 않았다.
* * *
마무리 확인 작업까지 마친 이후, 탐사대는 한곳에 모여 자리를 잡았다.
중심부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됐든 평화적으로 넘어가진 않을 테니.
이윽고 탐사대가 모인 마력 패턴 아래로 옅은 푸른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더니, 빛은 점차 강해져 탐사대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 빛이 정점에 달했을 때, 중앙에 있던 디라일라는 자신의 마력을 셰인이 그린 마법진에 주입하기 시작했고, 이내 푸른빛은 짙은 다갈색으로 변하며 강렬한 마력의 파동을 만들어 냈다.
그러다 빛이 점차 사그라졌을 때, 그 자리에는 어느 누구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