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오크의 혈마법 (1)
특수 수색대는 빠른 시간 내에 편성되었다.
편성대 인원은 펠리스를 필두로 셰인과 수색대 삼총사인 케빈, 맥고완, 해커츠였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여! 특수 수색대라니! 특수 수색대라니!!"
당연히 케빈은 길길이 날뛰었다.
특수 수색대?
이름만 봐도 뒈지기 딱 좋은 이름이지 않나.
거기에 2황녀, 아나스타샤의 직속으로 만들어진 조직이기에 빠져나갈 수도 없었을뿐더러, 펠리스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마당에 항의조차 쉽지 않았다.
삼총사는 머리를 맞대고는 자신들끼리 황녀에게 혹여 잘못한 일이 있지 않나 곰곰이 머리를 굴려 봤으나,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자자, 발광은 거기까지 하고. 우리 작전에 브리핑 들어간다."
펠리스의 그 한마디에 삼총사는 결국 입을 다물고 그쪽이로 시선을 옮겼다.
이 아룬비다에서 밉보이면 안 되는 대상이 딱 셋이 존재한다면, 황녀와 그녀의 보좌관 미미르, 그리고 바로 눈앞에 있는 펠리스다.
"미리 말해 두는데, 지금 내가 하는 말은 결코 외부에 흘려서는 안 된다. 알겠냐?"
"...진짜 벌써부터 목이 조여 오는구먼."
"그러게 말임다."
"염병 쌌다, 진짜."
삼총사는 말은 그리하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우리 작전의 핵심은 북상이다."
"북상이라면 어디까지 가는 겁니까?"
"첫 번째 목표는 오크의 근거지 탐색이다."
"이런 미친."
펠리스의 말에 해커스가 대뜸 욕설을 내뱉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크의 근거지는 이곳 비두론 성이 세워지고 50년이 지나도록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장 저 날고 긴다는 황실에서도 50년 전에 실패했던 일을 고작 5명이서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에 맥고완이 이어서 물었다.
"...질문 있슴다. 갑자기 왜 오크의 근거지를 찾는 검까?"
"네 말처럼 갑작스럽지만, 지랄 맞게도 오크가 마력을 쓰기 시작했댄다."
"예?!"
삼총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오크가 마력이라니?
금시초문의 사태에 삼총사가 말을 잇지 못하자 펠리스는 셰인에게 턱짓했다.
이제부터는 셰인이 설명할 차례였다.
"오크가 마력을 쓰는 것과 동시에 몬스터 웨이브를 부추기고 있다."
이어지는 긴 설명에도 삼총사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셰인의 말을 납득했기 때문이 아니다.
너무도 황당한 정보가 한 번에 풀렸기에 도무지 뇌가 이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크가 마력? 그것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혈마법이라고? 오크들이 그걸 써서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켜? 지금 나보고 이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이러한 의문이 뒤따라오는 것도 당연했으나.
결국 이들은 머리로는 이해를 못했음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삼총사는 아룬비다의 주민임과 동시에 또 군인이기도 했다.
결국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겠나.
"유언장이나 남겨야겠슴다."
"염병, 읽어 줄 인간이 있기나 하고?"
"지랄 났네, 지랄 났어."
입으로는 저리 욕을 내뱉었으나, 셰인은 속으로 저 셋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누가 봐도 목숨이 걸린 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못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2황녀의 카리스마인가.'
괜히 전생에 아룬비다의 주민들이 황녀의 반란에 동참했던 게 아니었다.
"작전의 시작은 내일 새벽부터다."
"아직, 남은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작전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고, 최소한 이건 알고 싶어서. 오크의 근거지를 찾을 만한 단서는 있습니까?"
"있다."
그에 답한 것은 펠리스가 아니라 셰인이었다.
"내가 독자적으로 만든 추적 마법으로 오크의 흔적을 쫓을 예정이지."
"어... 마법? 아...."
케빈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알겠다는 듯 수긍했다.
마법은 개뿔도 모르는데 관련된 마법이 있다잖나.
'어쩐지 몬스터들이 기습할 때면 귀신 같이 알아차린다 했더니.'
추적 마법인지 뭔지를 쓴 모양이다.
"아무튼, 단서는 충분하니 아예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공을 세우느냐에 따라 앞으로 이 아룬비다의 처우가 달라질 수도 있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번에는 펠리스가 물어 왔다.
이는 펠리스도 미미르에게 따로 듣지 못한 사항이기 때문이다.
"오크가 마력을 쓰기 시작한 사태인데 이걸 제국에서 가만히 보고 있을까?"
셰인의 말에 펠리스는 어딘가 헛웃음을 들이켰다.
그럼 그렇지, 역시 저 나이에 이르는 생각은 저 정도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허, 물론 보고만 있지는 않겠지. 한 5년 전쯤이었다면 말이야."
펠리스의 말에 삼총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셋 중에 외부, 그것도 제국의 정황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펠리스는 지속적으로 외부로부터 제국의 정황을 받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지금 제국에서 북부를 신경 쓸 겨를은 없을 텐데."
"당장 제국이 북부에 의도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지. 그럼 그걸 해결하면 될 일이고."
"그게 이번 작전이랑 연관이 있다고? 글쎄. 내가 보기에 제국은 이 빌어먹을 성이 무너진다 해도 눈길 하나 안 보낼 것 같은데?"
조금 과장된 것 같지만, 실상 저 말은 사실이었다.
현재 황실의 실질적 권력을 휘두르는 황태자에게 2황녀, 아나스타샤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테니.
그러나 펠리스의 물음에도 셰인은 따로 답하지 않고 웃음만 지었다.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일이지."
애초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던가.
슬슬 아룬비다에 온 목적이 실행되고 있었다.
* * *
예정과 다르게 미미르는 곧바로 황실로 향하지 않았다.
셰인이 한 달이라는 시간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빠르게 떠나고 싶었다.
황실에서는 자신들이 배척하는 아나스타샤의 존재로 인해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연합국의 관심마저 무시하지는 못한다.
국가 여론이 좋지 못하면 하다못해 황실로부터 금전적 지원이라도 받지 않겠는가.
시간이 금이라는 말처럼, 조금이라도 빠르게 찾아가 여론전을 펼치고 이와 관련된 내용을 외부로 퍼뜨릴수록 찾아오는 이득은 비례해서 커질 것이다.
그럼에도 미미르가 기다린 이유는, 그만큼 셰인의 제안에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동시에 미미르는 셰인이 해 왔던 제안을 떠올리며 부르르 떨리도록 두 눈을 감았다.
평소 감정 변화가 흔치 않는 미미르는 얼마 만에 자신의 심장이 이렇듯 쿵쾅거리는지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았다.
'그냥 찾아온 게 아니었군요.'
처음에는 셰인도 다른 마법사들처럼 아룬비다의 조사를 위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이 혹독한 환경에 많은 이들이 포기하긴 했으나, 그런 인물들이 없진 않았으니.
셰인이 잘 해내고 있을 때도 그 생각은 변치 않았다.
물론 다른 마법사들과 다르게 조금 기대할 만한 구석은 있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외부인으로서의 기대치였다.
안 그래도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논문 하나만으로 그만한 관심을 받았던 셰인이었으니 아룬비다라고 못할 게 있겠냐는, 딱 그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제 셰인이 해 온 제안은 그런 미미르의 판단을 통째로 뒤집어엎을 수준의 폭탄 발언이었다.
- 기회가 있을 겁니다.
- 기회? 무슨 기회를 말하는 겁니까?
- 황녀님께서 다시 황실에 발을 들일 기회 말입니다.
- ...?!
다분히 정치적인 발언이었다.
여태까지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 이곳까지 찾아오는 이들도 많았다.
주로 가문에 이름값이 없는 기사들이 혹여나 2황녀를 통해 황실과 연이 이어지지 않을까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작금의 황실은 아나스타샤를 완벽하게 배척하고 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머지않아 시간만 축내다 파견 기간을 끝내고 돌아갔다.
혹시 셰인도 그런 인물이지 않을까, 라는 고민을 해 봤으나 결과적으로는 아니었다.
애초에 셰인의 가문에서 현 황실의 분위기를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고, 셰인은 다른 이들처럼 그저 몸뚱이만 와서 떡만 받아먹고 갈 위인이 아니었다.
직접 자신이 아나스타샤의 위치를 변동시킬 작정으로 찾아온 것이다.
- 계획대로만 흘러간다면 이는 결코 헛된 망상이 아닙니다.
그 말이 결국 미미르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어느덧 아나스타샤를 모신 지도 15년이 다 되어 간다.
말괄량이 꼬마 아가씨에서 성숙한 한 명의 여인이 되기까지.
그녀를 곁에서 모셔 온 미미르에게 셰인의 말은 너무도 달콤했다.
다만 평소 이성적인 미미르라면 저런 말에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곳 아룬비다의 세월이 황실에 대한 기대감을 흔적조차 없이 앗아 가 버렸으니.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어디 한번 믿어 보도록 할까요.'
물론 어디까지나 지금 당장으로서는 망상에 불과한 제안이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테지.
하지만.
- 이번 일이 잘 돌아간다면, 황태자를 칠 겁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평온을 즐기고 있을 그 미치광이의 목에 예리한 단검이 꽂힐 예정이지요.
그 말을 내뱉은 셰인의 눈동자에 담긴 살기.
수십 명을 죽인 사형수도 보내져 오는 이곳 아룬비다를 다스리는 데 일조하고 있는 미미르다.
그런 미미르조차도, 그만큼 농후한 살기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의지와 계획, 그리고 야망까지 존재하는 그 소년의 말을 들어봄직 하지 않은가.
미미르는 창가를 통해 이른 새벽부터 저 아룬비다를 향해 나아가는 셰인과 일행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들이 성벽 너머로 사라졌을 때, 이후 도움이 될 만한 서류를 하나라도 더 모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66화
66화 오크의 혈마법 (2)
단잠에서 외눈을 뜬 사이클롭스는 자신을 잠에서 깨운 원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손가락 하나만 한 크기의 푸른 피부를 지닌 존재가 일곱.
이게 웬일인가.
사이클롭스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고는 양팔로 땅을 짚었다.
육중한 몸뚱이가 일어나자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가끔 있는 일이다.
저 푸른 피부의 애송이들은 가진 힘은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투지가 지나치다.
때문에 곧잘 자신들의 힘을 시험코자 이렇듯 찾아오는 일이 있었다.
나름 긴 세월을 살아온 사이클롭스는 몇 번이고 저런 애송이들을 상대했고, 그때마다 그는 제법 괜찮은 식사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그리 좋지 않았다.
사이클롭스는 자신이 누워 있는 바위 아래를 두어 번 두들기고는 오크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바위로 막아 둔 이 땅굴에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의 새끼가 잠들어 있었다.
그러니 저 멋모르고 찾아온 불청객들을 빠르게 물리쳐야만 했다.
"의식을 거행한다!"
가장 선두에 선 푸른 피부의 오크가 그리 외치자, 뒤에 서 있던 여섯 마리의 오크들이 각자의 무기를 땅에 내려찍었다.
평소라면 십인대장인 선두의 오크만 나섰겠지만, 눈앞의 사이클롭스는 그 정도로 단순한 상대가 아니다.
얼마 전에 사냥한 아이스 트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기에, 오크들은 각자의 무기를 움켜쥐고 육중한 몸을 일으킨 사이클롭스를 포위해 나갔다.
가장 먼저 움직인 이는 가장 앞서 있는 십인대장이었다.
"쿠오오오오오-!! 명예를 위하여!"
"""위하여!!"""
투박한 강철 검이 사이클롭스의 발목을 노리고 들어온다.
처음에는 자신의 육체를 믿고 무시하려 했던 사이클롭스였으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느새 오크 십인대장의 검에서 피어오른 불길한 핏빛 마력 때문이었다.
처음 보는 마력이었고 오크들이 언제부터 저런 걸 쓰기 시작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긴 세월 아룬비다에 군림해 온 사이클롭스는 직감적으로 저게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나 포식자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이클롭스가 저들을 상대로 오만할지언정 긴장을 푸는 일은 없었다.
발 구르기 한 번에 오크들이 만든 포위진이 단번에 무너졌다.
단단한 땅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그로 인해 만들어진 여파에 의해 오크들이 단숨에 튕겨져 나갔으나, 능숙하게 낙법을 펼친 십인대장 오크가 곧바로 달려들었다.
사이클롭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몸이었으나, 그럼에도 인간들 기준으로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오크의 움직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날렵했다.
그러나 거대한 눈동자를 지닌 사이클롭스는 그런 십인대장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사이클롭스의 거대한 발이 십인대장의 몸을 노리고 날아왔다.
누가 봐도 바위에 계란을 치는 격이었으나, 그럼에도 십인대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단 한 번.
단 한 번만 버티면 된다.
십인대장은 그런 사이클롭스의 발차기를 강철 검으로 맞섰다.
하지만 이는 십인대장의 오만이었을까.
사이클롭스의 발차기는 마치 투석기에 실려 날아오는 돌덩이와 같았다.
십인대장은 단 1초도 버티지 못하고 날아가 형편없이 바위에 처박혔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오크들이 달려들었다.
사이클롭스가 다시 한번 발구르기를 시전하고, 그 위력에 오크들은 또다시 땅을 굴렀으나 이번에도 곧장 일어나 재차 달려들었다.
이에 사이클롭스의 상체가 낮게 주저앉았다.
마치 폭포에 단련된 바위처럼 묵직한 사이클롭스의 주먹이 달려드는 오크들을 향해 날아갔다.
양 사이드에서 달려들던 오크들은 좌우로 펼쳐져 그 공격을 피했고, 중앙에 서 있던 두 오크만이 공중으로 도약했으나 사이클롭스도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주먹의 방향을 바꿨다.
"...?!"
십인대장처럼 자신들의 무기로 그의 공격을 막아 보려 했으나, 사이클롭스의 주먹이 모인 마력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주먹질 한 번에 두 오크가 허공에서 고깃덩이가 되어 저 멀리 날아갔다.
볼 것도 없이 즉사였다.
그럼에도 남은 네 마리의 오크는 당황한 기색 없이 사이클롭스에게 달려들었다.
"크워어어어─!"
사이클롭스의 발목에 상처를 입히는 데 성공한 오크들은 광분한 사이클롭스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
감히 하찮은 오크들에게 상처를 입은 사이클롭스가 핏발 선 눈으로 오크들을 노려보며 목에 마력을 집중했다.
"크오오오오오오오─!!"
일대의 대지가 상처 입은 사이클롭스의 살기어린 피어에 반응해 낮은 진동을 토해 냈다.
그러나 살아남은 오크들은 그런 사이클롭스의 피어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이클롭스가 눈가를 꿈틀거렸다.
이 아룬비다에서 사이클롭스의 피어를 정면에서 받고도 멀쩡히 서 있는 생명체는 얼마 없었다.
그 정도로 강렬한 살기라면 적어도 동요한 기색을 보여야 했는데.
그럼에도 오크들에게 그러한 기색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명예를 위하여!!"
그때, 저 멀리 날아갔던 십인대장 오크가 비틀거리며 함성을 외쳤다.
어떻게?
사이클롭스는 자신의 힘을 믿었다.
방금 주먹에 즉사를 면치 못한 두 오크처럼 저 십인대장 또한 죽음을 면치 못했어야 했는데, 어떻게 살아남았단 말인가.
하나 십인대장은 그런 사이클롭스의 의문에 답할 생각이 없는지 조각이 나 손잡이만 겨우 달린 검을 바닥에 내던지고는 허리춤에서 두 장검을 뽑아 들었다.
"""명예를 위하여!!"""
다시 한번 사방에서 오크들이 달려들었다.
그에 사이클롭스가 또다시 발구르기를 시전했으나.
이번에는 이전과 달랐다.
오크들은 강력한 사이클롭스의 마력에 대항했고, 아까처럼 형편없이 나뒹구는 일 없이 곧장 사이클롭스에게 달려들었다.
촤아악─!
"크와아악!!"
다르다.
고작 그 짧은 시간에 오크들의 기세가 바뀌었다.
그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사이클롭스는 혼란에 빠졌다.
다시 한번 자신의 발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오크들의 공격이 아까와 다르게 굉장히 매섭다.
처음 십인대장 오크의 마력을 보고 느꼈던 불길한 직감이 맞은 것이다.
그제야 사이클롭스는 직감적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치챘다.
방금.
오크들에게 다시 한번 발목이 깊게 베이면서 몸이 휘청거렸다.
관절 부위에 자상을 입었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마력이 단숨에 빠져나가는 감각에 일순 현기증이 느껴진 것이다.
"죽음 끝에 영광 있으리!!"
그런 사이클롭스의 혼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오크 십인대장이 두 검을 높이 치켜든 채 도약해 왔다.
사이클롭스도 거기에 반응해 다시 한번 주먹을 들었다.
저 네 마리의 오크가 펼치는 합공도 위협적이지만, 특히 저 십인대장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가히 사이클롭스조차도 위기 의식을 느끼도록 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주먹과 투박한 두 검이 마주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까와 판이하게 달라졌다.
방금 막 네 마리의 오크들에게 베인 발목으로 인해 하체에 체중이 집중되지 않은 탓에 주먹에 힘이 덜 들어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오크 하나 날리지 못할 이유는 될 수 없다.
그런데 어째서.
눈앞에 오크는 날아가기는커녕 자신의 주먹에 두 검을 꽂아 넣는단 말인가.
황급히 다른 손으로 십인대장을 날려 보내려 했으나, 사방에서 달려드는 네 마리의 오크가 그것을 방해했다.
전투가 곧, 사냥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놈들의 사투를 바라보는 다섯 쌍의 눈동자는 끝까지 그런 놈들의 사냥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 * *
며칠 전.
비두론 성을 떠난 특수 수색대는 셰인을 따라 며칠 동안 오크의 흔적을 뒤쫓은 결과, 사이클롭스의 서식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부터는 일반적인 수색대도 상부의 허가 없이는 결코 들어오지 않는 위험 지역이었다.
사이클롭스는 이곳 아룬비다에서도 천적이 없기로 유명하면서도, 한 번 목표로 한 사냥감을 끝까지 쫓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 마리만 비두론 성 근처에 출몰해도 초비상에 들어갈 정도로 위협적인 몬스터이니만큼, 괜한 관심을 끌지 않는 게 최상이었다.
그런 사이클롭스가, 단 7마리의 오크들에게 사냥당하고 있었다.
"미, 미친. 이게 무슨 일이야."
셰인의 은폐 마법으로 몸을 숨기고 있는 상황.
일행들은 숨을 죽이고 그런 오크의 사냥을 지켜봤다.
숨소리도 조심히 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케빈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사이클롭스는 3품의 마스터도 상대하기 벅찬 존재니까.
적어도 자신만의 시그니처를 완성한 기사가 아니라면 사이클롭스를 1:1로 상대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당장 비두론 성에 사이클롭스가 등장하면 수십 명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상대해야 하는 게 바로 저 거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7마리의 오크가 사냥을 이어 가고 있으니.
물론 그 과정에서 2마리가 피떡이 된 채로 죽어 버렸지만, 단 7마리가 사냥한 것치고 적은 수의 피해였다.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펠리스도 경악 섞인 눈으로 오크들을 바라봤다.
사이클롭스는 그 뒤로도 오크 한 마리를 더 죽이는 데는 성공했으나, 끝내 집중적으로 공략당한 발목으로 인해 무릎을 꿇었고, 뒤이어 오크들의 대장처럼 보이는 쌍검의 오크에게 외눈이 찢어발겨지며 전투의 종지부가 찍혔다.
한데, 거기서부터 기이한 행위가 이어졌다.
끝내 목이 베여진 사이클롭스의 피를, 가장 앞서서 싸웠던 오크 한 마리가 들이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뭐, 뭐야. 지들끼리 하는 의식 같은 건가?"
인간들 사이에서도 간혹 몬스터의 피를 마시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후를 지켜보니 단순히 의식만 치르는 것은 아닌 듯 보였다.
사이클롭스의 피를 마시는 대장격 오크를 제외하고 살아남은 4마리의 오크가 그런 대장격 오크를 둘러싸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고는 굳은 의지가 담긴 자신들만의 언어로 외쳤다.
"명예를 위하여!"
"형제여! 우르부라크에서 보자!"
"우리의 고향에서 영혼의 자유를 되찾으리라!"
앞서 오크의 기억을 차지한 셰인은 그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자 사이클롭스의 피를 들이켠 대장격 오크가 외마디 괴성을 내지르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들고 있던 쌍검으로 동료 오크를 향해 내지른 것이다.
그에 일행들은 깜짝 놀랐으나, 오크들은 마치 이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차분하게 그런 대장 오크를 상대로 물러서 각자의 무기를 쥐어 잡았다.
대장 오크의 몸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흉흉한 붉은빛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스스로가 사이클롭스라도 된 것마냥 어마어마한 괴력을 내뿜으며 무기를 휘두르자, 남은 네 마리의 오크들이 가까스로 그 공격을 막아 냈다.
결국 근력을 버텨 내지 못한 쌍검이 동시에 부러지고, 대장 오크는 그마저도 필요 없다는 듯 내던진 뒤에 맨 손으로 오크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네 마리의 오크들은 눈앞의 오크가 자신들의 대장이었다는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하게 합공을 펼쳐 갔고, 이내 네 마리 중 유독 덩치가 큰 오크가 대장 오크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다.
"명예로운 죽음을!"
"종족에게 영광을!"
"형제에게 안식을!"
"우르부라크를 위하여!"
"""위하여!!"""
그렇게 허무하리만치 죽어 버린 대장 오크.
네 마리의 오크들은 장례를 치르듯 쓰러진 대장 오크 앞에 서서 각자 다짐을 외쳤고. 최후에 대장 오크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은 오크가 허리춤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러고는 경건한 자세로 죽은 오크의 심장으로부터 피를 뽑아내 마시기 시작했다.
"우오오오오오!!"
그러자 피를 마신 오크의 몸으로 붉은 기운이 터져 나오더니, 다시금 몸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앞서 죽은 대장 오크와는 다른 장면이 펼쳐진 것이다.
"씨발...."
그에 케빈이 중얼거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저건 마치, 마치....
"광신도 같군."
펠리스가 그 말을 이어받았다.
일행들의 생각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 한 명.
셰인을 제외하고.
그런 셰인의 눈동자는 한없이 깊게 가라앉은 채, 오크들의 의식을 지켜봤다.
이윽고 놈들은 죽은 오크들의 시신과 사이클롭스를 수습하고, 외곽에서 경계하던 오크들까지 돌아왔을 때 사이클롭스가 지키던 바위로 향했다.
방금 대장 오크의 피를 마신 오크가 저 무거운 바위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 안에서는 성인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사이클롭스가 이빨을 들이밀고 있었다.
물론 성체 사이클롭스가 당한 마당에 녀석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오크들은 사이클롭스를 제압한 뒤, 죽은 오크들을 자루에 담듯 새끼 사이클롭스도 담아서 질질 끌고 갔다.
이윽고 오크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가 되고서야, 셰인은 은폐 마법을 풀었다.
"이, 이봐. 방금 그거 무슨 일이야?"
그러자 가장 먼저 케빈이 셰인에게 물어 왔다.
고작해야 18살의 소년이 그걸 알 수나 있나 싶겠으나, 그만큼 답답해진 것이다.
저 소년은 그 메자이아 대수림의 비밀도 풀어 낸 인물이었으니, 어쩌면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셰인은 그런 케빈의 질문에 답해 주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왜, 고든의 혈마법이 가진 특징이 보이는 거냐.'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죽인 조직의 고위 간부, 고든.
아직 그자의 영혼을 흡수 중인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셰인이 알아볼 정도로 오크들의 의식에서는 진하게 고든이 창조한 혈마법의 기운이 풍겼다.
일전에 아나스타샤와 마주했던 오크는 단순히 혈마력을 일으키는 수준이었고, 그 오크의 파편화된 기억 속에서도 이와 관련된 정보는 없었다.
아무튼 당장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전생에는 없던 조직의 개입이 의심된다는 것.
셰인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겸, 설명을 요구하는 케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방금의 그 전투력이 평균적이진 않을 거다. 일시적인 현상일 테지."
"그게 무슨 소리요?"
"사이클롭스와의 첫 전투 당시에, 분명 오크들은 사이클롭스에게 밀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오크들이 밀려나지 않게 됐지. 그 기점이 어디서부터인지 기억하나?"
"...사이클롭스가 처음으로 오크의 공격을 허용했을 때지."
"그래. 그때부터 놈들의 기세가 달라졌지. 이는 혈마력이 가진 여러 특징 중 하나다."
"혈마력?"
그게 뭐냐는 듯 일행들이 시선이 섞였으나, 셰인은 조용히 이어서 설명했다.
"혈마력은 다양한 방법으로 쓰이지. 대표적으로 흑마법이 그중 하나고."
"놈들이 흑마법을 쓴다는 거냐?"
"얼추 비슷하다."
"...듣자 하니 메자이아 대수림에서도 흑마법사가 출현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것과 연관이 있나?"
날카로운 질문을 해 온 이는 펠리스였다.
"어쩌면."
그에 셰인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에 놈들이 행했던 의식에서 유사한 부분이 보이는군."
일이 복잡하게 꼬이는 시점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67화
67화 오크의 혈마법 (3)
셰인의 말을 들은 펠리스가 악귀처럼 표정을 구겼다.
흑마법사라는 족속들은 애초에 상종을 해서는 안 되는 이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미친놈들의 의식 같은 게 아니었나?"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니더군. 다른 오크들은 일시적으로 강화된 것에 불과했지만, 마지막에 동족의 피를 마신 놈은 달랐다."
이전의 오크들이 다룬 혈마력은 다른 존재의 마력이 외부로 분출되려는 성질을 이용한 방식이었다.
때문에 그 마력이 모두 분출되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겠지만.
동족의 피를 마셨던 오크는 분출되려던 마력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마, 동족의 피를 마신 그 녀석은 사이클롭스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겠지."
"미, 미친.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한데? 아니 씨발, 누구는 수십 년 동안 단련해서 마력을 늘리는데, 고작 사냥 한 번 성공했다고 그렇게 강해진다고?"
셰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한정 강해지는 건 아니다. 일단 다른 존재로부터 얻은 마력이기 때문에 스스로 마력의 총량을 늘리지는 못해. 거기에 같은 몬스터를 상대로 똑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동일한 개체라 하더라도 인간들마다 마력의 성질이 다르듯, 몬스터들 또한 그러할 테니. 오크 한 개체 당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거다."
"어, 그, 그래?"
그건 생각보다 큰 페널티였다. 한 번 성장하고 나면 더 이상의 진화는 없다는 말이니.
"그리고 아까 봤던 것처럼, 처음 사이클롭스의 피를 마셨던 녀석의 희생도 감안해야지. 사이클롭스의 마력을 정화하기 위해 스스로의 생명력을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동족에게 흡수되도록 만들었으니까."
"그럼 다른 놈들도 같은 방식으로 강해질 때마다... 끄응, 엄청 비효율적이구먼."
"문제는 오크라는 놈들이 수를 불리는 데 이골이 난 놈들이라는 거고."
"아, 맞다. 그것도 그렇지."
극히 드물게 쌍둥이를 낳는 인간과 다르게, 오크는 한 번 출산할 때마다 5~6마리씩 새끼를 낳는다. 많을 때는 10마리를 동시에 출산하는 걸 생각하면 미친 번식력을 지닌 것이다.
그렇기에 저런 비인간적이고도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강해질 수 있는 것일 터.
"머리가 아파 오는군... 저런 놈들이 때로 몰려온다라."
그간 인류가 압도적인 숫자의 오크를 상대로 밀리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마력을 사용할 수 있냐 없냐의 유무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든 오크가 저런 식으로 마력을 사용한다면, 제아무리 제국이라 하더라도 우위를 점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아니, 펠리스만 하더라도 오크들의 공세에 의해 비두론 성벽이 무너지는 광경을 떠올렸는지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다른 삼총사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가고 있었다.
"너희가 생각하는 미래를 만들지 않으려고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게 아닌가."
"음...."
"그, 그렇슴다."
"마, 맞는 말이지."
그러다 펠리스가 눈가를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오크들의 본거지를 안다고 해서 해결할 방안이 있나? 물론 놈들을 공격하는 데 수월해지긴 하겠지만, 이곳은 전쟁을 일으키기에 그리 좋은 지역이 아냐."
괜히 황실이 이곳을 버려 놨겠는가.
몇 차례의 군대를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기에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제 와서 오크들의 근거지를 밝힌다고 해서 이전에 실패했던 이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국에서는 완벽하게 아룬비다를 포기하고, 산맥 바로 아래까지 전선을 물릴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러면서 펠리스는 보다 안 좋은 가설을 떠올렸다.
'그마저도 시간을 지체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하면 밀려오는 오크들에 의해 비두론 성은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이고, 그사이에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생겨날 것이다.
그러면 제국에서는 끝까지 막아 보려 했다는 명분과 함께 처치 곤란한 아룬비다의 난민들에 대한 문제 또한 해결하게 되지 않겠나.
현 제국의 실태를 보아하니 이마저도 실현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그에 대한 대비는 이미 생각해 둔 게 있다. 그걸 위한 수색 작전인 거고."
"단순히 오크의 본거지를 찾는 게 아니었어?"
케빈의 물음에 셰인은 일전에 미미르와 나눴던 이번 특수 수색대의 목표를 간결하게 설명했다.
"일차적인 목표는 오크의 본거지를 찾아내는 거고, 두 번째는 마력을 쓰는 오크를 생포, 마지막 세 번째는 오크가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키는 방식을 알아내는 거다."
"쯧. 미미르 그 양반. 이렇게 무거운 부탁을 했으니 그 값은 나중에 철저히 받아야겠어. 어째 하나도 쉬운 일이 없군 그래."
펠리스는 중얼거리듯 그리 말했으나, 그런 그의 말과 다르게 입가에는 흉흉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럼 어찌 됐든 저런 것들을 상대로 전투를 펼쳐야 한다는 거군. 마음에 들어."
오랜만에 투쟁심이 들끓는 느낌이었다.
삼총사는 그런 펠리스를 미친놈 보듯 바라봤으나, 셰인은 그의 투지를 보며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곧 질리도록 싸워야 할 거다."
* * *
셰인의 말은 머지않아 사실로 다가왔다.
오크들과 사이클롭스의 혈투가 끝난 지 며칠이 더 지난 시점.
일행들은 오크의 뒤를 쫓은 결과, 그들이 인간들처럼 전초 기지를 만들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크들의 기지는 아직 미완성인 상태였다.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막을 초소는 만들어졌으나, 내부는 아직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럼 정리를 해 보지."
"내부에 오크들의 숫자는 약 80여 마리. 그중 40마리는 노예처럼 보이며, 다른 오크들에 비해 확연히 체구가 작아."
"거기에 자잘한 노동은 놈들이 모두 도맡고 있다."
"그리고 중앙에는 놈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오크, 가칭 백부장이라 부르는 놈이 거주 중인 건물이 보이지."
"우리의 목표는 그 백부장 오크다."
막힘없이 이어지는 셰인의 설명에 펠리스가 물었다.
"계획은? 무작정 쳐들어가자는 말은 아닐 테고."
특수 수색대를 책임지고 있는 펠리스답게 타당한 물음을 해 왔다.
"우리의 숫자가 적으면, 환경을 이용하면 될 일이지."
"...?"
전생에 조직의 말단이었을 무렵.
조직의 명령에 의해 수많은 던전을 공략하고 다녔던 셰인이다.
지금보다 더 악독한 조건 속에서 얼마나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자신을 입증해 왔던가.
적은 숫자로 많은 수의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는 이골이 나 있었다.
셰인은 삼총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달리기는 잘 하나?"
"...?"
처음 특수 수색대로 뽑혔을 때 느껴졌던 불안감이 다시금 엄습해 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삼총사는 결코 추위 때문만은 아닐 오한을 느끼며 셰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 *
장작이 타오르며 훈훈한 공기가 맴도는 넓은 방.
율랙타르는 자신의 내면에서 날뛰려는 야성을 억누르는 데 온 신경을 쏟아붓는 중이었다.
그러는 사이, 그런 그의 뒤로 늙은 오크 주술사가 다가와 율랙타르의 어깨를 두드렸다.
"흐으...."
"클클클. 워소드의 아들 율랙타르. 버티기 힘겨워 보이는구나."
"의식은, 다 되어 가나?"
"그래. 준비는 끝났다. 이젠 네 녀석이 이겨 내는 일만이 남았지."
율랙타르가 붉은빛이 감도는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자, 늙은 오크 주술사가 내미는 정체불명의 고깃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먹어라. 그리고 이겨 내라. 그리하면 너는 진정한 우리 오크의 용사가 될 것이다."
"...."
한 눈에 봐도 구역질이 나게 생긴 고깃덩어리다.
듣기로는 무엇의 심장을 재료로 만들었다던데.
하나 그딴 건 율랙타르가 알 바 아니었다.
으적─
율랙타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주술사가 내미는 고기를 씹어 삼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절하듯 바닥에 쓰러졌다.
"크흐흐. 머지않았구나. 우리 종족이 자유를 되찾을 그 날이...."
주술사는 쓰러진 율랙타르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그런 율랙타르가 아닌 다른 무언가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우리의 신은 끝내 우리를 버릴 것이고, 미래는 스스로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지."
그러면서 주술사는 자신의 목에 걸린 토탬을 손에 쥐었다.
"우르부라크를 위하여."
신이 여태껏 자신들을 조종해 왔듯이.
우리 또한 마지막까지 신을 이용하리라.
그렇게, 주술사는 식음도 전폐한 채 율랙타르가 눈을 뜨기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이틀이라는 시간이 흐르고서야 율랙타르가 두 눈을 떴다.
"이겨 낸 모양이구나. 워소드의 아들이여."
"...별거 없었군."
"클클클. 그런 것치고는 땀을 제법 많이 흘린 것 같다만... 아무래도 좋다. 준비를 갖춰라. 밖으로 나가 마지막 의식을 치러야겠다. 우리 100명의 형제들 또한 기다리고 있다."
"다 왔나?"
"그래."
십인대장을 넘어 백부장이 되는 일은 오크들에게 있어 영광스러운 날이다.
때문에 백인대에 소속된 모든 오크들이 모이고, 백부장이 되는 의식을 치르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한바탕 시끄럽겠군."
"그렇겠... 으음?"
그때, 주술사는 허옇게 뜬 눈으로 고개를 돌려 바깥 방향을 바라봤다.
"이게 무슨 소리지?"
"왜 그러지?"
"바깥이 시끄럽군. 아무래도 형제들이 불청객까지 끌고 온 모양이야."
"좋군. 안 그래도 누워 있느라 몸이 근질거리던 참이었는데."
뿌우우우우우──!
아니나 다를까 율랙타르가 자리에서 일어서기 무섭게 적이 출현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고, 둘은 동시에 밖으로 나갔다.
"몬스터들이 몰려온다!"
"사이클롭스도 보인다!"
"강인한 전사, 율랙타르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를 이끌어 줄 전사! 율랙타르의 의식이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저들을 막아 내리라!"
그에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오크들 너머로, 저 멀리서 대량의 몬스터들이 달려오는 광경이 펼쳐졌다.
"몸풀기에 딱 좋은 시험대로군."
의식도 의식이지만, 역시 율랙타르는 이런 식으로 자신을 입증하는 것이 성미에 맞았다.
평소 자신이 쓰던 투박한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선 율랙타르는 이제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야성을 터뜨리며 포효했다.
"쿠오오오오오─!"
"율랙타르!"
"워소드의 아들이 일어났다!"
"그에게서 강인한 영혼이 느껴진다."
"의식을 이겨 낸 새로운 용사가 탄생했다!"
"율랙타르! 율랙타르!"
그에 혼비백산으로 움직이던 오크들이 율랙타르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고, 율랙타르는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내가 써 내려갈 역사에 이름을 남길 자는 누구인가! 나, 워소드의 아들 율랙타르의 곁에 설 형제여! 앞서 나아가 스스로를 증명해라!"
"우오오오오─!"
그에 오크들이 각자의 무기를 힘껏 쥐고 함성을 내지르며 몰려오는 몬스터를 향해 달려갔다.
율랙타르는 이 전투가 이제부터 자신이 써 내려갈 역사의 첫걸음이 되리라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과 먼 저리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두 쌍의 눈동자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주접들이 대단하군."
한 오크에게는 역사가 될 전투가, 누군가에게는 저런 박한 평가를 받고 있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68화
68화 전초 기지 (1)
율랙타르는 몰려오는 몬스터 무리를 바라보며 자신의 내부에 몰아치는 투지를 다스렸다.
의식이 진행되기 전보다는 사이클롭스의 마력이 내뿜는 야성을 조절하기가 수월해졌으나, 여전히 넋 놓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무기를 들고 달려 나갈 것만 같았다.
이윽고 자신을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 100명의 오크들이 몬스터 무리와 부딪혔다.
처음부터 나서는 것도 효과가 좋을 테지만, 율랙타르는 나름 오크들 중에서도 현명한 오크였다.
무작정 전투만 잘해서는 안 된다.
보다 극적인 효과를 봐야만 했다.
새로운 백부장으로서 가치를 보이려면, 전장에 어려움이 있을 때 비로소 나서야만 하는 것이다.
율랙타르는 이러한 감각으로 지금도 한참 노동을 하고 있는 노예 오크의 신세를 벗어날 수 있었다.
빠르게 변화하는 전장의 상황을 지켜보던 율랙타르는 한쪽에서 아이스 트롤들이 날뛰는 장소를 주목했다.
아직 몬스터의 마력을 섭취하지 못한 오크는 다른 존재로부터 마력을 빼앗아 일시적으로 신체를 강화한다.
때문에 뛰어난 재생력의 마력을 지닌 아이스 트롤은 유독 오크들에게 힘을 쓰지 못하는 편이었다.
재생력을 믿고 깡으로 달려드는 전투 방식을 선호하는 아이스 트롤의 입장에서 마력을 빼앗는 오크는 치명적으로 다가왔으니.
한편, 아울베어가 몰려든 장소는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애초부터 마력에 의지하기보단 뛰어난 신체 능력으로 싸우는 놈들이다 보니, 마력을 빼앗는다고 아이스 트롤만큼 크게 우위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조금은 밀려나도 괜찮다.
어차피 이곳은 몬스터의 침입을 대비해 협곡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거점에 지어진 기지였으니. 보다 타이밍을 재다가 들어가도 괜찮으리라.
그에 슬슬 활약할 때가 찾아온 것 같다 판단한 율랙타르가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율랙타르의 기감에 위협적인 마력이 감지됐다.
"후욱...!"
자신의 감에 따라 위를 바라보기 무섭게.
쿠르르릉─!!
그들의 전초 기지를 보호해 주고 있던 협곡으로부터 위협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신의 분노가 담긴 망치가 협곡을 내려친 듯한 소리.
얼마나 대단했는지 한 번 전투에 집중하면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못하는 오크들마저 그 소리에 시선을 돌릴 정도였다.
"돌아와라! 모든 병력은 돌아오도록!"
그에 불길함을 느낀 율랙타르가 서둘러 오크들을 불러일으키려 했으나.
쿠르르르르르릉──!
다시 한번 터진 협곡의 울음소리에 오크들은 그 명령을 채 듣지 못했고, 율랙타르가 느꼈던 불길함은 곧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본래라면 든든한 방벽이 되어 그들의 전초기지를 안전하게 지켜 줬어야 할 협곡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율랙타르의 눈앞에, 훗날 종족을 위해 싸워 줘야 할 자신의 백인대 중 절반이 바위에 파묻히는 광경이 펼쳐졌다.
* * *
협곡에 의해 보호받는 오크들의 전초기지를 들어갈 수 있는 방법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무작정 은폐 마법 등을 활용해 들어간다 하더라도, 저기서 무사히 정보를 빼오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조직의 개입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그들이 물리적인 정보를 아무렇게나 내버려 뒀을 리가 없으니.
거기에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도 힘든 위치이니만큼 그런 도박수에 목숨을 걸 이유가 없다.
해서, 셰인은 차라리 적들의 시선을 한 곳에 몰리도록 만들기로 했다.
최근 아룬비다의 몬스터들은 지속적인 오크들의 습격으로 인해 오크의 냄새에 민감한 상태다.
한가득 벼르고 있을 터이기에, 셰인은 일전에 사이클롭스 서식지에서 채취한 오크의 피가 담긴 주머니를 삼총사에게 넘겼다.
"니미. 이걸 가지고 뛰라고?"
몬스터를 유혹하기 위해 만들어진 약재까지 넣은 데다, 냄새를 증폭시키는 마법까지 추가된 피주머니를 받자, 삼총사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그냥 뒤지라는 말이랑 뭐가 다른 검까?"
맥고완이 그 질문에, 셰인은 미리 준비해 둔 알약 3개를 그들에게 넘겼다.
"엘프의 정기를 활용한 약이다. 평소보다 생명력이 넘쳐 날 테니, 알아서 사용해라."
"병 주고 약 주고 아주 지랄 났네."
그러나 결국 셋은 셰인의 작전을 받아들였고, 이내 작전대로 움직였다.
다만 이 작전은 단순히 몬스터를 끌고 온다고 성립되는 게 아니었다.
성의 주민들이 밖으로 나가 빈집털이를 하려면, 그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성문을 굳게 닫아야 하지 않겠나.
셰인은 이를 실행하기 위해 며칠 동안 '파동'과 '증폭' 룬 마법을 활용한 마법진을 협곡 이곳저곳에 설치하고 다녔다.
마력으로 이어진 이 마법진들의 역할은, 중심이 되는 단 하나의 마법진으로부터 전해지는 충격을 그대로 전달하는 역할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중심이 되는 마법진에 충격을 가하는 것뿐.
그건 멀리 갈 필요 없이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협곡이 무너져 내리기 바로 직전.
"이거, 진짜 해도 되는 건가?"
펠리스는 밝게 빛나는 마법진 위에 서서 불안하다는 듯 셰인을 바라봤다.
"안심해라. 필요한 준비는 다 해 놨다. 몇 번이나 설명하지 않았나."
"끄응... 그렇긴 하다만."
그럼에도 영 불안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듯, 펠리스의 표정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옛날에 비슷한 상황에서 마법사 새끼가 마법진을 잘못 그렸던 적이 있었지. 그때 뒤질 뻔한 뒤로 마법사라는 작자들은 영 믿음이 안 간단 말이다."
그에 셰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 부하들도 너를 믿고서 목숨 걸고 몬스터들을 유인하러 갔다. 계속 이러면 곤란한데."
"아─! 알겠어, 알겠다고!"
그렇게 발악하듯 소리친 펠리스는 결국 손에 들린 워 해머를 꽉 움켜쥐고는 셰인이 따로 표시해 둔 마법진을 노려봤다.
"후우...."
정신을 집중해 마력을 응집시키자, 워 해머가 옅은 떨림을 보였다.
마력과 무기가 공명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위로 선명한 마력이 코팅되어 갔다.
단순한 파괴만으로는 안 되기에 마력으로 만든 코팅을 뾰족하게 세운 펠리스는 양팔을 높이 치켜올렸다.
그리고 내려치는 순간─.
콰아아아앙─!
마치 광산 개발용 마력 폭탄 수십 개가 모여 터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오며, 그들이 서 있던 동굴이 큰 소리와 함께 무너지기 시작했다.
"됐나?!"
"아직. 한 번 더!"
"젠장!"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하며 흙무더기가 머리 위로 떨어졌으나, 앞서 셰인이 방호 마법을 펼쳐 둔 탓에 압사당할 일은 없었다.
그를 믿고 펠리스는 온 힘을 다해 다시 한번 워 해머를 내려쳤다.
워 해머가 마법진에 다시 한번 닿는 순간, 펠리스는 감각적으로 손에 느낌이 왔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몬스터의 골통을 박살 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리고 그런 느낌은 펠리스를 배신하지 않았다.
단번에 무너지는 동굴 안쪽에서, 앞서 그려 둔 마법진으로부터 빛이 터져 나왔다.
셰인과 펠리스는 빛무리에 휩싸여 이내 동굴에서 모습을 감췄다.
이윽고 협곡의 아래.
앞서 몬스터를 몰아 온 삼총사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협곡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친, 이게 마법사인가?"
"아님다. 펠리스 님의 힘임다."
"아니, 병신아. 펠리스 님의 힘 하나만으로 협곡을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었겠냐?"
"이 멍청이들아. 그게 무슨 상관이냐! 오크 놈들이 샌드위치가 되고 있는데! 으하하! 다 뒤져라!"
셋이 감탄하고 있는 것처럼, 무너져 내리는 협곡에 의해 일어난 결과는 보고 있는 입장에서도 경악으로 돌아올 정도로 대단했다.
비교적 가파른 전초 기지의 입구에서 특히 피해가 가장 컸는데, 그 근처에서 몬스터들과 전투를 치르고 있던 100여 마리의 오크 중 절반이 저 자연재해에 의해 한 줌의 고깃덩어리로 변해 가는 장면은 어딜 가도 다신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하늘이 무너졌다!"
"신께서 우리를 버리셨는가?!"
"우리의 형제들이 협곡의 신께 노여움을 샀다!"
당연히 남은 오크들도 혼비백산에 빠져 소리를 질렀다.
삼총사는 저 오크들이 뭐라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상황을 저주하고 있는 말을 하고 있을 게 뻔했으니.
화아아악-!
그때, 머지않아 셰인이 미리 그려 둔 마법진 위로 빛무리가 생성되더니, 그 안에서 셰인과 펠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왔다!"
"대단한 활약이었슴다, 펠리스 님!"
"으하하, 다 뒈져 버려라! 이 오크 새끼들아!"
케빈과 맥고완은 모습을 드러낸 둘을 보며 환한 안색으로 둘을 반겼고, 해커츠는 생체 망원경으로 저 멀리서 벌어지는 오크들의 소란을 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으악, 씨발! 어지러워!"
예전부터 마법에 대한 불신이 뿌리 깊은 펠리스는 텔레포트 마법으로 인해 생긴 여파에 속을 뒤집는 느낌에 헛구역질을 하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한편, 셰인은 자신의 발 아래로 펼쳐진 마법진이 이론대로 잘 작동되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속성력이 강한 이곳 아룬비다의 마력 특성상 텔레포트 마법을 쓰지 못한다는 게 세간의 평가였으나, 이를 극복한 셰인이 기어코 텔레포트 마법을 펼친 것이다.
이는 앞으로도 유용하게 쓰일 예정이었다.
그러던 셰인은 한참 오크의 전초 기지를 바라보며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는 해커츠에게 다가갔다.
"상황은?"
"그걸 말이라고 해?! 저놈들 아주 샌드위치가 됐다고! 으하하, 목숨 걸고 달린 보람이 있구만!"
끝내 작전에서 가장 위협적인 다수의 오크들을 전초기지 밖으로 몰아내는 데 완벽하게 성공한 일행들은 천천히 셰인의 부유 마법을 활용해 전초 기지 내부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휘유. 장난 아니네. 마법사라는 건. 어? 아악!"
해커츠가 그런 평을 남기며 앞으로 걸어갈 때, 펠리스가 그런 해커츠를 거칠게 뒤로 내동댕이쳤다.
산사태로 일어난 흙먼지와 눈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백부장 오크, 율랙타르가 그 안에서 기습을 가해 온 것이다.
찰나의 순간, 한 오크의 검이 해커츠가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갔다.
"크와비타! 워츠바크 두 다라!"
"워이, 씨발! 뭐야?"
불길한 붉은 마력을 휘감은 백부장 오크의 등장에 삼총사가 뒤로 물러섰다.
눈앞에 있던 이 오크가 벌인 사이클롭스와의 전투를 떠올리면, 자존심 상하지만 자신들이 상대할 적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에 펠리스가 워 해머를 들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뭐라는진 모르겠지만, 상황은 심플하군."
"죽이지는 마라, 펠리스."
"무얼. 사이클롭스의 공격에도 안 뒤지던 놈이니 그리 간단하게 죽지는 않겠지."
셰인의 말에 그리 대답한 펠리스가 자세를 잡자, 율랙타르도 그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시작된 전투.
그사이, 셰인은 주변을 훑어봤다.
바깥의 오크들은 아직 기지로 돌아올 정신은 없을 거다.
갑작스러운 산사태에 더해 몬스터들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을 테니.
그렇다면 남은 변수는 이곳에서 노동을 담당하고 있던 오크들뿐이었다.
"케빈, 맥고완, 해커츠. 너희는 저 오크들을 상대해라. 보아하니 마력을 쓰지 못하는 것 같으니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뭐, 그 정도야 어려울 거 없지. 알겠수다."
"비실거리는 게 상대하긴 쉬울 것 같슴다."
"야, 입 닥쳐. 꼭 그렇게 말하면 뭔가 일이 터진단 말이야. 가뜩이나 아까 죽어라 달려서 다리도 아파 죽겠구만."
그렇게 삼총사가 슬슬 모이기 시작하는 오크 노예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때.
"클클클."
지난 며칠 동안 백부장이 머물고 있던 거처에서 한 늙은 오크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걸어 나왔다.
낡은 거적때기를 입고서, 나무로 된 지팡이를 손에 쥔 오크는 재미있다는 듯 셰인 일행들을 바라봤다.
"오크 샤먼."
셰인은 그런 오크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눈을 빛냈다.
펠리스와 대치 중이던 오크의 마력이 며칠 전과는 다르게 안정적으로 바뀌었다.
그사이 눈앞의 오크 샤먼과 같은 건물에 있었으니, 오크들의 의식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저 녀석은 생포할 필요도 없이 영혼을 흡수해 기억을 읽어야만 했다.
'어쩌면 전생에는 없던 조직의 개입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해서 삼총사를 부르려 할 때, 오크 샤먼이 무언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으나 가만히 지켜봐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셰인은 지체 없이 마력탄을 날려 보냈다.
그러나 놈도 방비를 해 두고 있던 것인지, 붉은 보호막이 생성되어 셰인의 공격을 차단했다.
이윽고 그 짧은 시간 안에 무어라 중얼거리며 지팡이로 땅을 내려찍은 놈의 주변으로, 붉은 마력이 휘몰아치며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뭐, 뭐야!"
"어어?"
"저, 저 새끼들 왜 저러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삼총사가 고개를 들어 시야를 다시 확보했을 때.
"크오오오!"
"크칵, 그아아아악!!"
아까까지 무기력함에 시달린 듯한 표정으로 다가오던 노예 오크들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더니, 이내 일제히 포효하기 시작했다.
"에라이, 씨발. 그럼 그렇지! 일이 쉽게 흘러갈 리가 없지!"
"이 뚱땡이 새끼야! 내가 썅, 입 다물라고 했지? 아오!"
"미, 미안함다! 미안함다!"
해커츠의 막말에 맥고완이 사과하는 사이에도 삼총사는 무기를 들고 심상치 않은 오크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깡말라서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던 노예 오크들은, 그 짧은 사이 핏줄이 파랗게 올라와 어느새 붉게 변한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침을 질질 흘리며 이지를 상실한 듯한 모습이었으나, 명백히 이쪽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69화
69화 전초 기지 (2)
"흐읍!"
"합!"
"으랴앗!"
오크들의 기세가 달라지긴 했어도, 그간 아룬비다에서 살아남은 삼총사는 차분히 대응에 나섰다.
셋이 제일 먼저 한 행동은, 적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상대가 정체불명의 능력을 쓰는 만큼 셋은 경각심을 최고조로 끌어올려 견제를 해 나갔다.
그리고 그 대처는 정답이었다.
붉은 마력을 뿜어내는 오크들은 기존 오크보다 다른 점이라고는 근력이 더 강해진 수준이었기에, 상대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에 많은 적을 상대하기 위해 일격으로 죽이기보다는 부상자를 늘리는 쪽으로 선택한 그들이었으나, 오크들은 부상을 입었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야, 저 새끼들 트롤처럼 달려든다!"
"알겠슴다!"
"오케이!"
그중에서도 가장 짬이 많은 케빈은 노예 오크들의 변화를 민감하게 캐치하고는 다른 둘에게 알렸다.
오러에 감긴 무기에 당했음에도 오크들은 내상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달려들었다.
이렇게 되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일격에 적을 죽이는 방향으로 옮겨야만 했다.
셋 모두 망설임 없이 전투 스타일을 바꾸자, 오크들도 하나둘씩 차가운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크흐흐."
그럼에도 오크 샤먼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뭔가 준비하고 있는 게 있는 모양이군.'
셰인은 오크 샤먼이 들고 있는 지팡이를 유심히 지켜보면서도, 틈이 날 때마다 삼총사가 활약하는 전투에 마력탄을 날려 보내 적절한 서포팅을 이어 갔다.
오크 샤먼을 먼저 노리고 싶었으나, 놈은 핏빛 마력으로 만들어진 보호막 안에 있었기에 단순한 마력탄으로는 뚫는 데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한편, 펠리스도 힘겨운 전투를 이어 가고 있었다.
분위기상 백부장으로 파악되는 오크는 과연 셰인이 말했던 것처럼 사이클롭스에 준하는 파괴력으로 펠리스를 압박해 왔다.
이전에 봤던 사이클롭스처럼 발을 굴러 자세의 밸런스를 무너뜨리거나, 폭발적인 도약력으로 찔러 들어오는 공격은 하나하나가 위협적이었다.
'이런 공격을 맞고도 버텼다라.'
그에 펠리스는 삼총사가 그러했듯, 먼저 적을 탐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신중하게 적의 공격을 피하고 견제 용도의 공격만 간간이 날리며 시간을 끌었다.
다만 놈의 공격 하나하나가 굉장히 위협적이라는 것과, 혈마력이라는 생소한 마력을 쓰는 상대인 탓에 그만큼 움직임을 크게 해야만 했다.
"크오오오오─!"
그에 백부장 오크, 율랙타르가 덩치에 걸맞지 않게 쥐새끼처럼 피해 다니는 펠리스에게 포효를 터뜨렸다.
혈마력이 담긴 포효는 어찌보면 사이클롭스가 내뿜던 몬스터 피어보다도 위협적으로 다가왔으나, 펠리스는 별달리 흔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한 번에 끝내야겠군. 역시 그게 맞겠어."
여태까지 자잘한 움직임만 보이던 펠리스가 자세를 고치고 워 해머를 움켜쥐었다.
저쪽이 한 방이라면, 이쪽도 한 방으로 깔끔하게 승부를 봐야 하지 않겠나.
율랙타르는 활활 타오르듯 투지 어린 눈으로, 펠리스는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단 한 방을 위한 준비를 이어 갔다.
* * *
"흐읍!"
양옆에서 들어오는 곡괭이와 송곳을 피한 케빈은 귀신 같이 그 사이에 보이는 틈을 보고 창을 내질렀다.
그에 어김없이 오크의 심장을 꿰뚫는 손맛이 느껴졌고.
케빈이 다음 동작을 위해 창을 뽑아내려 할 때, 심장이 꿰뚫렸음에도 아직 죽지 않은 오크가 케빈의 창을 붙잡았다.
"쯧."
죽기 직전,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창을 으스러져라 붙잡은 오크 탓에, 상황판단을 끝낸 케빈은 창을 포기하고 허리춤에서 숏 소드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동료의 희생을 본 오크들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단 번에 세 마리가 케빈을 향해 달려든 순간.
그걸 지켜보고 있던 셰인이 마력탄 두 발을 날려 두 마리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그사이 남은 한 마리의 목을 벤 케빈이 다시금 달려가 창을 회수했다.
"휘유! 마법사 양반이 전장을 좀 볼 줄 아는군!"
여태까지 셰인과 함께 한 전투에서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케빈도 점차 셰인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전투가 이어지는 사이, 오크 샤먼의 추가적인 개입 없이 어느덧 노예 오크들의 수도 상당수 줄어들고 있었다.
어느덧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정리되고 있는 과정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 그럼에도 오크 샤먼은 얼굴에서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때.
"크아아아아아─!"
펠리스와 율랙타르의 전투도 어느덧 끝맺음을 보이고 있었다.
사이클롭스의 마력을 지닌 율랙타르의 공격이 하나하나 치명적이긴 했으나, 펠리스는 생각만큼 어렵지 않게 적을 상대했다.
저만한 속도를 가진 적을 상대하는 게 처음이 아닌 펠리스로서는 오히려 사이클롭스보다 율랙타르를 상대하는 게 더 간편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사이클롭스의 마력을 가졌다고는 해도 신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내구성마저 늘어나는 것은 아니니.
서로 한 방을 노리고 싸운다면, 아직 사이클롭스의 힘에 채 적응하지 못한 율랙타르보다는 노련한 펠리스가 우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끝내 율랙타르의 야성이 폭발해 동작 하나하나가 커지던 그 순간, 펠리스는 몇 번의 빈틈을 흘려보낸 끝에 완벽한 순간을 포착할 수 있었다.
율랙타르가 양손에 쥔 검을 앞으로 쏘아지듯 내지르는 그때.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몸을 한 바퀴 돌린 펠리스.
오러로 코팅되어 끝이 날카롭게 선 워 해머가 그대로 율랙타르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콰직!
최대한 마력을 끌어 모아 방어를 해 봤으나, 펠리스의 워해머는 그런 율랙타르의 노력이 무색하게 망설임 없이 관자놀이를 파고 들어왔다.
메긴기요르드(Megingjörð).
수십 년 동안 목숨을 걸고 연구한 펠리스의 시그니처.
비록 셰인의 힘을 빌렸으나 협곡마저 무너뜨렸던 일격.
그렇게, 긴 탐색전을 마친 전투가 끝을 고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머리 절반이 함몰되어, 율랙타르는 그대로 바닥에 몇 번이고 처박히며 결국 쓰러졌다.
혈마력의 효과 때문일까.
머리가 반이나 함몰 되고서도 율랙타르는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게 최선인 듯, 율랙타르는 한쪽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오크 샤먼에게 시선을 던졌다.
"크르으으...!"
지금도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있는 저자라면 무언가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 희망을 담고 바라봤을 때.
비로소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오크 샤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생했다, 율랙타르. 너의 이름은 우리 종족의 영웅으로서 기억될 것이다. 너의 그 힘은, 더 뛰어난 인재에게 향할 것이야. 크흐흐흐흐."
그러나 들려온 말은 율랙타르가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순간, 심장에서부터 알 수 없는 열기를 느낀 율랙타르가 오크 샤먼의 이름을 부르짖으려던 그때.
오크 샤먼이 지팡이로 땅을 내려찍자, 피로 얼룩진 전초 기지가 불길하게 떨려 오며, 죽은 노예 오크들의 시체로부터 붉은 기운이 흘러나와 대지에 스며들었다.
살아남은 노예 오크들은 두려움에 떨며 괴성을 내질렀고, 그에 심상찮음을 느낀 일행들이 이 일의 원흉이 되는 오크 샤먼에게 달려들려던 찰나.
다시 한번 오크 샤먼이 지팡이를 내려찍자, 마치 혈관이 둘러싸듯 붉은 마력이 펼쳐지며 전초 기지를 집어삼켰다.
하늘이 붉은 마력에 뒤덮이기 직전.
"현혹되지 말고, 마력은 쓰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일행들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 * *
이렇다 할 반응도 채 하기 전에 핏빛 마력에 집어삼켜진 케빈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젠장. 이번엔 또 무슨 개짓거리를 한 거지."
세상천지가 붉다. 어찌 된 일인지 방금 전만 해도 자신의 바로 옆에서 싸우고 있던 맥고완과 해커츠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염병할 흑마법사. 이 새끼들은 사술 없이 뭘 하는 꼬라지가 없어."
그러면서 케빈은 기억을 더듬어 셰인이 말했던 여러 정보들을 떠올려 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흑마법은 아니라 했던가.
타인의 혈액에 녹아 있는 마력을 통해 다루는 혈마법이라고 했었다.
거기에 이 괴상한 현상이 일어나기 직전에 셰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현혹되지 말고 마력은 쓰지 말라고 했지?'
그렇다면 일단 마력을 쓰지 않는 게 좋을 듯싶었다.
긴장된다고 무턱대고 힘을 빼는 짓도 미련한 일이었으니.
그러자 별다른 일 없이 시간이 흐르기도 잠시.
케빈의 시야에 무언가가 잡혔다.
"...지긋지긋한 오크 새끼들."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푸른 피부의 오크. 그러나 생각대로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다.
오공에서 피를 흘리며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아무래도 혈마법과 관련이 있는 걸까.
케빈이 자신의 애장인 창을 들고 경계를 하고 있으려니, 이쪽으로 시선을 돌린 오크가 달려들었다.
"커헉?!"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달려드는 속도가 비이상적이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케빈의 바로 앞까지 도달한 오크의 주먹이 정확히 케빈의 명치를 쑤시고 들어왔다.
상상 이상의 파괴력에 몇 차례나 바닥에 내뒹군 케빈은 서둘러 정신을 차려 앞을 바라보기도 잠시. 어느새 자신의 앞에 도달한 오크의 무릎팍이 짓쳐들어왔다.
"쿱!"
얼굴에 적중된 그 일격에 뇌가 흔들리듯 시야가 뒤엉켰다.
'뭐야!'
여태껏 상대해 본 적들과 차원이 다른 속도다.
그럼에도 케빈은 섣불리 마력을 쓰지 않았다.
이상 현상.
굳이 아룬비다가 아니더라도 몇 차례 던전을 탐험해 본 이들이라면, 이상 현상에 대한 기본적인 내성이 생기기 마련이다.
던전이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평소 다혈질처럼 보이는 케빈이지만, 전투에 들어가면 그 누구보다 냉정해지는 그다.
'저 새끼, 움직임이 뭔가 이상한데.'
오크의 무릎에 날아간 케빈은 격통에 뜨이지 않으려는 눈을 억지로 떠서 오크의 움직임을 다시 한번 지켜봤다.
또다시 이쪽을 향해 도약하는 오크의 움직임에서 이상함을 느낀 케빈은 첫 타격에 멀리 날아간 창 대신 다시 한번 허리춤에서 숏소드를 쥐어 잡고는 달려드는 오크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여지없이 그 찌르기는 빗나갔고, 다시 한번 명치에 주먹이 날아들었다.
"커흐, 이런 씨팍!"
또 한 번 몇 번이고 바닥을 굴렀으나, 덕분에 몇 가지 정보를 터득할 수 있었다.
'저 새끼. 움직임에 전조가 없잖아.'
나름 뛰어난 전사인 케빈은 적의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다음 행동을 예측하는 게 가능하다.
그런데 저 오크는 그런 게 조금도 없었다.
마치 실이 끊긴 인형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만 같은 느낌.
거기에.
'이렇게 처맞고 있는데도 움직여지는 건 기적이지!'
느껴지는 격통에 비해 몸은 생각보다 자유롭게 움직여진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른 케빈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환영이라든가 뭐, 그런 건가. 염병할."
마법사가 아님에도 거기까지 추측한 것은 훌륭한 일이었으나, 케빈은 더욱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 애송이. 여기까지 내다본 건가?'
마지막에 외쳤던 셰인의 한마디가 그런 케빈에게 더욱 큰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그럼에도 상황이 나아질 일은 없었다.
마력도 쓰지 못하는 상황에 케빈이 할 수 있는 대처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그저 유일하게 이 현상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한 셰인이 지금 이 상황을 타파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썅...."
이젠 하다하다 증식까지 시작한 오크를 바라보며, 케빈은 각오를 다졌다.
* * *
"크흐흐... 산제물이 알아서 걸어 들어왔구나."
오크 샤먼은 각자의 위치에서 허공에 검을 휘두르고, 도끼를 내려찍는 일행들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를 인지하지 못한 채, 각자의 환영에 시달리며 공포에 빠진 저 표정들이란. 몇 번을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그뿐이던가? 놀랍게도 이곳에 있는 인간들 하나하나가 오랜 시간 정순하게 마력을 쌓아 온 실력자들이지 않나.
특히 허공에 워 해머를 든 채 날렵하게 움직이고 있는 펠리스는 오크 샤먼에게 있어 최고의 재료가 될 예정이었다.
저들의 시체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그런 오크 샤먼은 천천히 시선을 셰인에게 향했다.
다른 일행들과는 다르게 유일하게 두 눈을 감은 채 서 있는 소년.
인간 마법사 또한 흔치 않은 재료다.
저 어린 인간은 죽이지 않고 살려 둔 채로, 가진 지식을 모두 토해 내야 하리라.
그런데 혹시 벌써 기절한 건가 싶은 순간.
"흥미롭군."
"...?!"
갑자기 눈을 뜬 셰인은 정확히 오크 샤먼을 응시하고 있었다.
"토템이라. 혈마법에 주술을 접목하니 이런 식으로도 쓰이는군. 오랜만에 재미있는 구경을 했다."
"어떻게...?!"
인간의 언어를 모르는 샤먼은 셰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자신이 펼친 주술에 전혀 영향을 입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그 사이에도 셰인은 혼자 중얼거리듯 재차 입을 열었다.
"본디 이만한 수준의 마법을 준비하려면 지속적으로 많은 재료가 들기 마련이지. 하지만 주술은 다르군. 준비하는 과정은 복잡하지만, 한 번 준비되면 공격을 가하는 입장에서 이보다 더 날카로운 비수는 없었겠어."
"환영의 재료로는 주술에 걸린 대상의 마력을 이용하는 건가? 그래. 대상의 마력으로부터 기억을 읽고 실체화를 시키는군."
"맥고완과 해커츠는 당했나. 펠리스도 마력을 사용했군. 케빈이 버티고 있는 건 좀 의왼데. 뭐, 괜찮겠지."
앞서 주술이 발동되기 전.
셰인은 끊임없이 오크 샤먼의 주변을 관찰하며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샤먼의 행동은 달리 말하자면 이미 할 수 있는 행동은 전부 다 끝마쳤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으니.
그 결과 오크들이 죽을 때마다 미세한 혈마력의 움직임을 감지했고, 그것을 역추적.
전생의 기억과 고든의 기억이 가지고 있는 혈마법의 특징과 대조하며 셰인은 주술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대강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직접 주술이 발동된 지금.
셰인은 일행들이 보고 있는 환영이 어떠한지 직접 볼 수 있었다.
오크를 제외하더라도 다양한 몬스터와, 인간들에게 쫓기고 있는 일행들.
그럴수록 그들이 마력을 쓰는 강도가 점차 강해졌고, 혈마력이 거기에 반응해 조금씩 환영에 물리력이 추가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환영에 불과했던 격통이 점차 실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전에 죽인 이들까지 끌고 오니. 정신이 버틸 리가 없지."
그에 셰인은 다시금 오크 샤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걸로 나를 죽이려면...."
그러면서 셰인은 서서히 마력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를 확인한 오크 샤먼은 당혹감에 굳어 있던 얼굴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어리석은 인간 마법사.
결국 마력을 쓰고야 말았구나.
하지만, 그런 샤먼의 미소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대륙은 멸망시키고 왔어야지."
셰인의 주변으로부터 검은 마력이 피어오르기 무섭게.
오크 샤먼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시체.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전초기지를 가득 채우고도 한참을 너머 가파른 협곡의 벽면에서도, 협곡의 위에서도 시체들이 떨어져 내린다.
수없이 많은 인간의 시체에, 오크 샤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 인간. 도대체 이게 무슨...."
"너의 주술은 감당할 수 있나? 이 죽음들을."
그에 비해 선명하다 못해 섬뜩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사방에서 넘쳐 나는 시체들 사이에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0화
70화 전초 기지 (3)
하늘에서 시체로 이루어진 비가 쏟아져 내린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하나같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인간들의 시체다.
혈마력을 다루고 죽음에 익숙하다 자부한 오크 샤먼조차도 겪어 본 적 없는 그 수많은 죽음이 그의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 이럴 리가 없다. 이럴 리가 없어! 어떻게 고작 한 명의 인간이 이만한 수의 죽음을 겪는단 말이냐!"
주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크 샤먼은 눈앞에 펼쳐진 이 죽음의 비가 결코 허상 따위가 아님을 진작에 간파했다.
흔들리는 것은 오크의 정신뿐만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한계란 존재하는 법.
당연히 샤먼이 준비해 온 주술 또한 한계가 존재했다.
과도하게 많은 죽음으로 인해, 이를 환영으로서 재정립하는 샤먼의 주술 또한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샤먼이 황급히 주술에 손을 쓰기 시작했으나, 전초기지 전체를 감싸고 있는 주술은 샤먼의 명령에도 아무런 반응을 나타나지 않았다.
주술의 명령권이 강탈당한 것이다.
"어, 어떻게!"
"남의 것을 빼앗아 썼으면, 본인의 것이 빼앗기는 것도 각오를 했어야지."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샤먼은 셰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한 거냐!"
이게 혈마력의 큰 약점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술자에 의해 만들어진 마법이나 주술에 대한 소유권이 불분명하다는 것.
일반적으로 다뤄지는 마력은 명확한 소유권이 존재한다.
그러나 혈마력은 타인의 것을 빼앗아 쓰는 만큼, 자신이 쓸 수 있도록 개조하는 과정에서 마력의 소유권을 상실한다.
그렇게 되면 혈마력에 대해 더 깊은 이해도와, 거기에 쓰이는 마법 혹은 주술을 자세히 아는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강탈을 당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과거 고든 또한 그러한 점을 경계하여 혈마력의 본 소유자를 생체로 가공한 마스크를 만듦으로써 대처를 했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크 샤먼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린 상황에, 셰인이 재차 입을 열었다.
"어디 한번 감당해 보도록."
차갑게 쓰러진 시체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수백, 수천, 수만의 시체가 동시에 팔과 다리를 기괴하게 꿈틀거리는 장면은 인지 부조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는 상황에도 오크 샤먼은 자신의 주술이 타인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듯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단 말이다! 어찌 한낱 인간이 위대한 선조들의 주술을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시체에겐 말이 통하지 않는 법.
서서히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시체들, 이젠 수십만에 다다르는 시체들의 퀭한 눈동자가 오크 샤먼을 향해 갔다.
그 수많은 죽음을 마주한 오크 샤먼이 침을 질질 흘리며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암,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꿈이로구나. 크허허허."
끝내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 오크 샤먼은 미련하도록 자신에게서 벗어난 주술의 주도권을 빼앗으려 시도했다.
그러자 반대로 주술이 술자인 오크 샤먼을 공격을 해 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셰인이 주술의 통제 권한을 샤먼에게 돌려보내자, 그간 셰인이 감당하고 있던 통제력이 해일처럼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수많은 죽음의 환영을 감당하지 못한 주술이 오크 샤먼의 뇌를 까맣게 태우기 시작했다.
"크허허, 크헤헤헥!"
통제되지 않는 주술의 힘 앞에서 오크 샤먼은 칠공에서 피를 쏟아 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시체들 또한 정신이 무너져 가는 속도는 더더욱 부추겼다.
그런 오크의 발밑으로, 검은 이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대로 죽으면 이쪽이 곤란하지."
어느새 셰인의 오리진에 반응한 정령이 오크 샤먼의 발밑에서 그 심연과 같은 아가리를 열었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크 샤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술자가 사라진 주술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혈마력으로 이루어진 돔 형태의 구가 사라지고, 어느덧 해가 지고 있는 아룬비다의 하늘이 비춰졌다.
"크헉, 이 씨벌놈의 오크 쉑... 으잉?"
그때, 허공에서 줄곧 숏 소드를 휘두르다 넘어지기를 반복하던 케빈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어, 애송, 아니지. 뭐라 해야 돼? 아무튼 마법사 양반. 끝난 거요?"
"그래."
그러자 케빈은 단번에 풀린 긴장으로 인해 다리가 풀려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푸, 푸하... 씨부레 아주 뒤질 뻔했네. 아니 근데 이 양반들은 왜 쓰러져 있는 거야? 서, 설마 뒤진 건 아니겠지?"
케빈과 다르게 무심코 마력을 쓴 맥고완과 해커츠는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펠리스도 몸 이곳저곳에서 출혈을 일으킨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다행히 셰인이 주술을 금세 해제한 덕에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테지만, 정신적 데미지는 상당한지 곧장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설명은 나중에 하도록 하지. 일단 일행들을 챙겨라. 나는 저 건물을 좀 수색하고 오지."
"어어, 알겠슈. 염병... 그 뭐냐. 고맙수다. 덕분에 목숨은 건졌네."
"...할 일을 했을 뿐이지."
"거 생긴 것과 다르게 부끄럼이 많은 모양이구먼. 크흠."
케빈은 무안한 듯 그리 말하며 쓰러진 동료들에게 다가갔다.
그 또한 주술의 여파로 인해 정신적 데미지가 상당한 탓에 몸이 잘 안 움직였지만, 아룬비다의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극한의 상황에 노출되는 경우가 제법 잦은 편이었다.
제일 상황이 심각해 보이는 펠리스에게 다가가는 케빈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셰인은 그대로 백부장 오크와 오크 샤먼이 거주했던 건물로 향했다.
건물 내부는 이상한 약초향과 혈향이 동시에 퍼지는 기묘한 공간이었다.
셰인은 그 두 향이 보다 강해지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이내 오크 샤먼의 방으로 추정되는 곳에 도착했다.
마치 흑마법사의 연구실을 보는 것처럼 불쾌한 실험의 흔적들이 즐비해 있었으나.
셰인은 그런 것에는 일절 관심을 돌리지 않고, 동물의 가죽이 쌓인 장소로 향했다.
종이를 만들 줄 모르는 오크들이 대신해서 쓰는 말린 가죽 위에 동물이나 몬스터의 피로 오크어가 적힌 두루마리였다.
그것들을 빠르게 살펴보던 셰인은 이내 원하는 두루마리를 챙기고는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끄응. 이거 할 말이 없군."
밖으로 나와 보자 펠리스는 어느새 정신을 차린 모습이었고, 케빈은 쌍코피를 흘리며 연신 투덜거리고 있었다.
"염병. 챙겨 주려는 사람한테 대뜸 주먹이나 날리고 말이야.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그러게 누가 마력을 쓰라고 했나? 젠장."
"거 미안하다니까."
보아하니 샤먼의 주술로 인해 한가득 살기를 품고 있던 펠리스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본능적으로 바로 앞에 있던 케빈에게 주먹이라도 날린 모양이다.
"두 번 미안하면 사람 죽이겠습니다, 그려. 손으로 막아서 망정이었지, 아니었음 내 골통이 부서졌을 거 아닙니까."
"크흠...."
할 말이 없는지 펠리스는 덩치가 큰 맥고완을 둘러메고는 셰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상황에 대한 설명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필요한 건 챙겼나?"
"그래."
"그럼 바로 움직여 보자고. 바깥에 있는 놈들도 슬슬 기어 들어오려는 것 같으니까."
그러면서 펠리스는 한쪽에서 그 짧은 사이에 말라비틀어진 백부장 오크의 시체를 바라봤다.
"쯧. 살아 있는 오크는 밖에 있는 놈들 중에서 하나 골라 가져가야겠군. 미안하게 됐다."
"어쩔 수 없지. 우리가 죽인 것도 아니고."
"뭐, 그렇지?"
그렇게 떠날 채비를 갖춘 셋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맥고완과 해커츠를 둘러멘 상태로 미리 준비해 둔 밧줄을 이용해 가파른 협곡을 올라갔다.
* * *
"후우, 뒤지겠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고 작은 캠프를 차리니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다.
정신을 잃었던 맥고완과 해커츠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사냥감을 찾을 겸 나갔던 펠리스는 그 사이 혼란 속에서 길을 잃은 오크 한 마리를 기절시켜 데려왔다.
"아오, 마음 같아서는 죽여 버리고 싶네."
"맞슴다."
맥고완과 해커츠가 기절한 오크를 향해 이를 갈며 그리 말했으나, 그 말을 들은 케빈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둘에게 쏘아내듯 입을 열었다.
"내가 죽이고 싶은 건 너희들이다, 이 말종 새끼들아. 마력을 쓰지 말라 했는데 왜 써 가지고 뒤질 뻔하냐고."
"아니, 그럼 오크 놈들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달려들어서 날 쥐어 패는데 그걸 가만히 맞고 있으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맞슴다."
"지랄. 말이라도 못하면."
"크흠."
한편, 자신도 당한 게 있기에 펠리스도 한차례 헛기침을 내며 일행들의 시선을 모았다.
"아무튼, 셰인. 살아 있는 오크의 표본은 구했고, 놈들의 근거지 탐색은 어떻게 됐지?"
"관련된 정보는 입수했다. 이제 복귀만 하면 돼."
"그럼 이건 이제 터뜨려도 되겠군."
그러면서 펠리스는 씨익 웃으며 손에 들린 푸른 신호탄을 들고 흔들거렸다.
길었던 특수 수색 작전이 끝맺음을 알릴 신호탄이었다.
* * *
늦은 시간.
눈과 함께 달빛이 내려오는 발코니에 선 아나스타샤는 북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런 그녀의 뒤로, 미미르가 나타나 그녀에게 뜨거운 홍차를 가져다 건넸다.
"미미르."
"오늘도 나와 계십니까. 며칠째입니까. 날씨가 찹니다."
"걱정 마라. 그 정도로 나약하진 않으니까."
"이렇게 있어 봐야 할 수 있는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안하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해지겠지."
셰인과 펠리스, 그리고 케빈을 포함한 삼총사가 오크의 근거지를 찾기 위한 여성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아나스타샤는 보름 전부터 발코니에 나와 늦은 시간까지 그들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긴장되십니까."
"글쎄. 긴장이라는 걸 언제 해 봤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그래서 잘 모르겠어."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이곳으로 좌천되다시피 온지도 벌써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14년 동안 당연하다시피 여겨 온 황실의 풍요로운 삶이 끝났을 때에도.
일방적인 적의만 보내 오는 아룬비다의 첫날밤에도.
해일처럼 몰려오는 몬스터 웨이브 속에서조차 긴장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는 아나스타샤였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긴장을 하고 있을까?
아나스타샤는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을 파악할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은 긴장이라는 것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저 익숙하지 않기에 모르고 있는 것일 뿐.
"황실로 다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그런 미미르의 기습적인 질문에도 심장은 오히려 차갑게만 느껴졌다.
황실.
저 어두운 밤하늘 속에서도 빛나는 별과 같은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긴장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다.
"미미르. 나는 그렇게 먼 미래까지 볼 줄 몰라. 당장 내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사람이거든."
이곳 아룬비다의 날씨처럼 냉철한 마음으로 여기에 서 있는 이유는, 저 먼 황실의 일 보다 최근 이곳 아룬비다에서 벌어지는 기현상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오크들이 마력을 쓰기 시작하고,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키려 한다.
당장은 전조 현상에 불과했으나, 그게 현실로 다가온다면 과연 자신은 이곳 아룬비다를 지킬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위기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이 아나스타샤를 이곳에 서 있도록 만들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미미르는 탄식했다.
눈앞의 여인이 아장아장 걷던 시절부터 모셔 왔다.
그럼에도 그녀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한 것이지 않나.
셰인이라는 소년의 제안을 들었을 때, 이곳 아룬비다보다 황실을 바라보는 자신과 다르게 아나스타샤는 당장 스스로가 이끄는 이곳 아룬비다를 더 걱정하고 있었다.
이런 면모를 봐 왔기 때문에 아나스타샤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것이 아닌가.
미미르는 혹한의 날씨에 금방 식으려 하는 찻잔에 마법을 걸어 다시금 데우고는 여전히 북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는 황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름 황실에서 보내 왔던 시간이 길었다 보니, 사람을 보는 눈이 제법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따금 제가 가늠하기 힘든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리고 그런 이들은 반드시라 해도 좋을 정도로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고개가 아플 정도로 높게 올려다볼 정도로.
"...그래?"
"예. 그런데 또 그런 일을 여러 번 겪다 보니 웃기게도 그것과 관련된 감이 늘어난다 이 말입니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남들보다 특출난 무언가가 있는 사람들. 이곳 아룬비다에서도 여럿 겪었지요. 이곳의 특성상 높은 곳까지 가지는 못했지만요."
그러면서 미미르는 황태자를 거론하며 살벌한 살기를 감추지 않았던 그 소년을 떠올렸다.
"그런데 셰인에게서는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음? 반대로 그에게서 무언가를 느꼈다고 할 줄 알았는데."
"하하. 오히려 지금 단계의 저조차도, 그리고 제가 황실에서 봐 왔던 어느 누구보다도 무엇 하나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인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그가 얼마나 성장할지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네."
"황녀님을 보좌하는 이 미미르를 믿어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믿은 그 소년 또한 믿어 보십시오."
미미르의 그 말에 아나스타샤는 보고 있던 하늘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하하, 그래. 확실히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둔 모양이야."
"...이거, 타이밍이 제법 괜찮았군요. 하하."
둘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느새 저 먼 북쪽으로부터 푸른빛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거리였으나, 둘의 눈에는 저 푸른빛이 너무도 선명히 보였다.
앞서 셰인과 그 일행들에게 작전이 완료되면 터트리라 넘겨줬던 신호탄이 별천지인 아룬비다의 하늘에서도 유독 밝게 빛나고 있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1화
71화 왜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나 (1)
"크하, 뒤질 뻔했다!"
"따뜻한 물에 씻고 싶슴다...."
"거기에 맥주 한 잔 걸치면 인생 끝이지. 흐흐...."
녹초가 된 삼총사가 비투론 성벽을 넘어서자, 경계를 서거나 여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아룬비다의 주민들이 하나둘씩 시선을 보내 왔다.
삼총사야 밖에 자주 드나들지만, 펠리스가 직접 나서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 펠리스는 어깨에 무언가 커다란 자루를 들고 있었다.
"이봐, 케빈. 뭐 하다가 온 거야? 펠리스 님은 또 언제 나가셨고."
그에 경계를 서고 있던 이들 중 한 명이 물어 오자, 케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 알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이 걱정 없이 사는 것들아!"
"뭐래. 아주 지랄을 해요, 지랄을. 어디 몬스터라도 잡고 온 건가? 크기를 보면 얼추 오크 같은데. 펠리스 씨. 뭡니까?"
펠리스 역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좀 더 있다가 말해 주지. 그보다 황녀님은?"
"뭐 그렇게 숨길 게 있다고... 음, 평소처럼 위에 계시지 않겠습니까? 새벽에 미미르 님이 밖으로 나가긴 했는데."
"그래? 그럼 잘 전달된 거군. 알았다. 계속 수고해라."
"아 진짜 계속 숨길 겁니까? 예?!"
그러한 질문을 뒤로한 채, 삼총사는 먼저 자신들의 숙소로 돌아갔고, 셰인과 펠리스만이 성 내부로 들어갔다.
1층에 들어가자, 평소처럼 갑옷을 입고 있는 아나스타샤가 둘을 반겼다.
"고생했다, 제군들. 그게 오크인가?"
"예. 놈은 지하에 내려놓을까요?"
펠리스의 물음에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셰인. 그대는 나와 따로 얘기 좀 하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남은 펠리스마저 성의 지하로 향하고, 셰인은 아나스타샤를 따라 그녀의 집무실로 향했다.
"미미르에게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잘도 그런 이야기를 당사자 없는 곳에서 말하더군."
"황녀님께서 거절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어째서?"
"이 험한 아룬비다의 주민들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받고 계신 분이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명령을 따르는 이들만 남았으니."
섬뜩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또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제법 힘든 청소였지."
"그럼 또 청소해야 할 시기가 찾아오겠군요."
"...어린 나이에 제법 말에 살기가 담겨 있군."
미미르가 말이 맞았다.
눈앞의 이 소년이 품고 있는 살기는, 아나스타샤가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의 살기였다.
살기라는 것은 다양하다.
전장에서 적을 죽이기 위해 병사들이 내뿜는 가공되지 않은 거친 살기와.
1:1 상황 속 서로를 향해 남긴 비수를 위해 흐르는 정제된 살기.
혹은 정치 속에 담긴 음험한 살기 등.
그 모든 것이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발현된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소년의 살기는,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감정이 없는 살기라고 해야 할까.
셰인이 의도적으로 내보이고 있는 살기는 마치... 무기물을 죽이려는 듯한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생명체를 죽인다는 의식 없이, 그저 테이블 위에 쌓인 먼지를 치우는 듯한... 그런 살기였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저렇게 되었을까. 아니면 태생부터가 저런 살기를 가지고 살아온 걸까.
그런데 어째서 저 기운이 익숙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아나스타샤는 자신과 불과 4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이 소년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걸 굳이 참는 성격이 아니었다.
"듣자 하니 내 오라버니에게 비수를 날리려는 것 같은데. 이유를 알 수 있겠나?"
"인류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오라버니가 말이지...."
아나스타샤는 기억을 더듬어 자신의 오라버니를 떠올렸다.
기묘한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도통 알 수 없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자신의 쌍둥이 누이와 비슷하지만, 결이 다르다.
1황녀인 제페르 디 아르샤 올리시아는 그저 본능적으로 사람에게 호감을 이끄는 이다.
반면 오라버니인 제페르 디 와이어트 새뮤얼은 올리시아와 비슷하게 미소라는 가면으로 표정을 가리고 있지만, 정작 올리시아처럼 자연스러운 미소가 아니다.
후천적으로 배워서 만들어 낸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의 소년과 자신의 오라버니가 겹쳐 보였다.
살기.
그래, 살기다.
어릴 적, 새뮤얼은 이따금 벌레를 잡아 죽일 때와 같은 표정으로 타인을 향해 그러한 시선을 보냈던 것이 기억났다.
다만 눈앞의 소년과 차이점이 있다면, 어쨌든 벌레 또한 생명체라는 것이고.
눈앞의 소년이 가진 무기질적인 살기와는 결이 조금 달랐다.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 물으셨었지요."
"그랬지."
"그때 황실의 호위기사단장에게 목숨을 위협받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들었죠. 그들의 목적을."
정확히 말하자면 영혼을 흡수하는 것으로 파악한 것이지만.
관련된 정보는 아나스타샤 또한 이미 외부에 정보원으로서 파견된 램퍼트 모험단의 일렉사의 보고로 들었던 적이 있었다.
"인류만을 위한 유일한 나라. 하나로 통합된 인류의 나라. 그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듣기에는 좋으나, 실질적으로는 독재 정치지."
"이미 많은 부분에서 준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길어 봐야 3년에서 5년. 곧 계획이 진행될 겁니다."
물론 셰인의 개입으로 인해 전생과 달리 조직과 불화가 생기긴 했으나, 새뮤얼의 계획은 고작 그 정도로는 막을 수 없다.
"흐음... 내가 그 말을 왜 믿어야 하지?"
이쯤에서 아나스타샤는 한 번 셰인을 떠보기 위해 그런 질문을 했으나.
"여전히 제국을 사랑하지 않으십니까. 이곳 아룬비다보다도 더."
"...!"
그 말에, 아나스타샤는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 * *
아나스타샤와의 만남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온 셰인은 평소처럼 방 주변으로 방음 마법과 알림 마법을 펼치고 자리에 와 앉았다.
타인의 영혼을 해체하는 과정에는 아무래도 비교적 주변을 향한 경계가 무뎌지기 때문이다.
아직 오크 샤먼의 영혼을 해체하지 않은 상황.
셰인은 복귀하는 동안 미뤄왔던 일을 하기 위해 준비를 마치고는 낡은 테이블 위에 물건들을 늘어뜨렸다.
오크 샤먼의 영혼을 살펴보기 전에 앞서, 일전에 지하 감옥에서 죽인 오크의 토템을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흔히들 인간이나 이종족이 쓰는 물건에는 옅게나마 염(念)이 존재한다. 특히 토템처럼 신성시되는 물건에 더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염이 전혀 보이지 않는 물건이라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셰인은 한참 동안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토템을 살펴봤다.
먼저 마력을 부여해 별다른 반응이 없는지 검토하고, 오리진도 마찬가지로 사용해 봤으나 역시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흐음...."
한참을 비슷한 방법으로 알아봤으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으로 접근한다면 어떨까.
물건에서 찾아볼 수 없다면 이걸 사용했던 이들에게서 찾아봐야겠다.
아직 어둠의 정령에게 붙잡혀 절규하고 있는 오크 샤먼의 영혼으로 시선을 돌렸다.
셰인의 의지를 읽은 어둠의 정령이 여태껏 여러 번 해 왔던 그 일을 능숙하게 시작했다.
"이건 좀 멀쩡하군."
앞서 지하 감옥에서 봤던 오크와 다르게, 오크 샤먼의 기억은 파편화되어 있지 않았다.
다른 차이가 있는 걸까.
여태까지와 다르게 셰인은 오크 샤먼의 인생을 전반적으로 훑어봤다.
그런 와중에, 대략 50년 전.
늙은 오크 샤먼이 아직 한참 어린 오크였던 시절.
샤먼은 자신들이 모시는 신의 신전으로 향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크의 손재주를 감안하더라도 굉장히 정교하고 또 거대한 신전 앞.
그그그극─
신전에 걸맞은 거대한 석문이 천천히 열리자, 셰인은 무언가 기시감을 느꼈다.
뭐라 해야 할까.
세상에 동떨어진 존재를 범접했을 때의 느낌.
그와 동시에.
[흥미롭구나.]
'...!!'
석문 너머로부터 정체모를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셰인은 직감했다.
이는 기억 속 샤먼에게 걸려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몰려들어와 셰인을 옥죄었다.
마치 세상이 빙글빙글 돌다 못해 무너지고, 지금 서 있는 위치가 자신의 방인지, 아니면 낯선 오크들의 신전인지.
이는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 셰인의 영혼이 뒤흔들렸기에 일어난 일이다.
수천의 엘프와 해츨링의 마인드 로드에 간섭했을 때도 이 정도의 존재감을 느끼지는 못 했다.
마치 타락으로 인해 만들어진 질투의 인격이 세인을 의식의 수면 깊은 곳에 가뒀을 때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농후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머리로 경종이 시끄럽게 울리는 것만 같았다.
셰인의 내면에서 방금 막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정령이 울부짖었다.
항거 할 수 없는 절대자로부터, 제 주인을 지키고자 사냥개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그 울부짖음에는 깊은 공포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운명의 폭포를 거스르고 헤엄쳐 온 아해야. 너로 인해 세상의 운명이 뒤바뀌었구나.]
이어지는 질문에 셰인은 입을 열지 않았다.
두려워서?
아니.
대관절 저 존재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온몸이 눈앞에 있는 거대한 존재에 의해 부들부들 떨려왔으나, 그의 머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철저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맹렬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셰인은 왜 자신이 이 상황에 기시감을 느꼈는지 깨달았다.
무명에 있었을 적, 무명의 정상에 있던 존재와 마주했을 때가 바로 이러했다.
그러나 지금 느껴지는 존재감은 오히려 그 당시 겪었을 때보다 더욱 농후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빠르게 자신의 상황과 과거에 있던 일들을 정리해 가며 지금 상황에 대해 유추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절대자. 드래곤. 대수림. 프리실라. 북부의 오크. 그리고.
'산... 왕?'
아룬비다에 오기 전, 프리실라에게 북부에 관해 물었을 때 들었던 산왕의 존재.
때마침 자신은 오크의 영혼을 해부하고 있지 않았나.
고대 시절, 산왕이 존재한 북부에 들어간 마지막 종족 또한 오크였기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추론이었다.
그러자 의지와 상관없이 잔뜩 굳어 버린 몸에 의해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상대방으로부터 호기심이 느껴졌다.
그 간단한 감정의 편린마저도 셰인의 정신이 뒤틀리는 듯했다.
[호오. 그래, 맞다. 언젠가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었지.]
'어떻... 게 내게 간... 섭한 거지...?'
[재미있구나. 나를 보고도 그런 질문을 하다니. 그래, 그 토템은 오크들이 나를 섬기기 위해 만든 것이지. 거기에 너의 존재가 운명을 바꾸었다. 이 우주의 신인 아카샤가 이를 허락했구나.]
'아카샤...?'
다시 한번 셰인의 영혼이 크게 흔들렸다.
가져서는 안 되는 물건을 가진 것처럼, 무거운 무게감이 짓누르는 듯했다.
[아쉽지만 이 이상 말해 줄 수는 없겠구나. 그래... 우리는 다시 한번 만날 운명이다. 너를 지켜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겠어. 그때가 된다면 우린 더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할 테지. 진정 영웅의 길을 걷고 있는 아해야. 그날이 하루빨리 오길 고대하고 있으마.]
"...!"
순식간에 거대한 존재감이 흐릿해진다.
그에 셰인이 무언가 더 묻기도 전에 산왕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고, 어느새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셰인은 신음 한 번 흘리지 못한 채 바닥에 떨어진 토템을 바라봤다.
"...역시, 쉽지가 않군."
생각지도 못한 거물이 뜻하지 않는 타이밍에 등장했다.
이게 앞으로의 계획에 무슨 차질이 생길까.
셰인으로서도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 * *
미미르가 황실에 도착한 지도 어느덧 나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앞서 미리 연락을 취하고 중요한 일이라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흘이나 걸린 것이다.
물론 황제는 이 제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럼에도 아룬비다의 이변은 결코 가벼이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긴 여전하군요."
그리고 정작 그 만남이 성사됐을 때도, 미미르는 생각했던 것처럼 온갖 모욕만 당해야만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오크가 마력을 쓴다고?]
[설사 그 말이 맞다 하더라도 그 미개한 오크들이 어떻게 몬스터를 끌어모아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킨다는 말이오? 말 같은 소리를 해야 믿어 주던가 하지.]
[제대로 된 증거도 없는 마당에 우리 보고 병력을 일으키라는 말씀입니까?]
[혈마력이라 했소? 고든은 이미 죽었고, 흑마법 전쟁 당시에 그들의 뿌리는 뽑혔소. 그런데 하물며 인간도 아닌 마력도 쓰지 못하는 미개한 오크들이 쓴다니. 농담도 정도껏 하셔야지.]
탁- 타닥- 타다닥- 탁-
황실의 정치 귀족부터 북부의 영주들까지. 하나같이 목청을 높이며 그리 말해 왔다.
특히 북부의 영주들은 자신들의 이권이 걸린 일이라 더더욱 눈빛이 곱지 않았다.
아룬비다의 혹독한 날씨 특성상, 군대를 일으키려면 보통 많은 물자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
탁- 타닥- 타다닥- 탁-
미미르는 오히려 그런 그들을 보며 속으로 비웃음을 지었다.
어찌 저리 생각과는 조금도 다르지 않게 움직이는지.
회의 당시 일정한 간격으로 손가락을 책상에 튕기던 미미르는 그리 생각했다.
물론 그들의 말이 무조건 틀리다고는 할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증거 하나 없이, 그저 말만 번지르르하게 내뱉으면 누가 믿을까.
하지만 하다못해 일을 보다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조사대를 파견하겠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설마하니 황제를 눈앞에 두고도 헛소리를 내뱉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재고할 가치가 없다는 듯 우롱에 가까운 태도를 일관했다.
진정 제국을 걱정한다면, 50년 전 오크들의 남하 사태를 떠올린다면 저런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의 태도를 보고 미미르는 속으로 안심할 수 있었다.
그야.
탁- 타닥- 타다닥- 탁-
"정겨운 소리네요. 그렇죠?"
그래야만 자신들의 작전대로 이야기가 흘러갈 테니.
미미르는 그리 생각하며, 늦은 밤에 자신의 객실로 찾아온 여인을 반겼다.
"어른스러운 여동생이 아직 귀여울 때 천둥소리가 무섭다며 제 방문을 두드릴 때마다 냈던 소리였죠."
가을 보리밭을 연상케 하는 백금발의 머리카락.
숲을 떠올리게 만드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테이블을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리며 그리 말했다.
"그래서, 할 말이라도 있나요, 미미르 경?"
1황녀. 제페르 디 아르샤 올리시아가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2화
72화 왜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나 (2)
처음의 시작은 소문이었다.
제국의 저 먼 북쪽.
고대 흡혈귀의 흔적이 발견됐다더라.
하는 그런 도시 전설과 같은 소문이 말이다.
고대 종족에 관해 언급되는 소문은 워낙 이 바닥에 자주 퍼지는 탓에 처음에는 그리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 소문의 출처가 메자이아 대수림의 탐사에 포문을 열었던 셰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급격한 관심이 기울기 시작했다.
모험가들의 성지인 연합국.
특히 마탑 소속 마법사들의 관심이 지대했다.
이미 셰인의 이름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유명했고, 벌써부터 엘프들이 주로 쓰던 정기를 활용한 마법이 상당 수준까지 연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소문의 출처가 정확한지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을 무렵.
또 다른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그쯤이었다.
북부 아룬비다의 영주인 2황녀, 아나스타샤가 직접 확인한 일이며, 이로 인해 제국에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소식이었다.
물론 연합국 입장에서 제국이 그 요청을 거절하든 말든 일절 상관없는 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장의 상황과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무, 뭐? 오크들의 남하?"
"몬스터 웨이브?"
"그런데 조사조차 안 들어갔다고? 완전 미친놈들 아니야?!"
50년 전.
당시 북부의 대부분을 오크들에게 함락당한 사건으로 인해 전 대륙의 경제가 박살이 나지 않았던가.
그때 당시에도 연합국은 대륙의 중심이었으며, 그 연합국에서 가장 큰 역할을 맡고 있는 제국이었는데, 그런 제국이 오크들로 인해 북부가 함락당했으니 제국의 금화 가치가 수직 하락하는 것은 당연했고.
시장 경제의 중심이 되었던 제국 금화의 가치 하락은 연합국의 경제에 치명적이었다.
때문에 그 소문에 의해 각 나라에서 파견된 타국의 귀족들이 제국 소속 귀족들에게 달려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연합국의 제국 소속 귀족들은 그와 관련된 정보를 쥐뿔도 모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관련된 정보를 자연스럽게 얻었을 테지만, 제국 자체에서는 미미르가 찾아온 건에 대해서 그리 심각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단순히 2황녀가 황실의 관심을 끌어 보려는 수작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말을 해 줘야 대비를 할 것 아니오!"
"우리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오!"
그러니 저렇게 타국의 귀족들이 큰 소리를 쳐도 할 말이 없던 것이다.
제국 소속의 의원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뭘 아는 게 있어야 말해 줄 텐데, 관련된 정보라고는 도시에 퍼진 소문 정도가 전부였으니.
이대로 상황이 흘러갔다간 다른 귀족들에게 무능하다는 인식만 남을 판이었다.
그러던 와중, 제국 측 의원들에게 셰인이 소속된 가문인 클레이튼으로부터 서신이 도착했다.
의회 소속 귀족들에게는 가뭄의 단비나 마찬가지인 상황.
서신을 확인한 이들은 밝은 얼굴이 되어 곧장 의회로 달려 나갔다.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온다고 하오!"
"그게 정말이오? 증거라면?"
"혈마력을 쓰는 오크를 생포했고, 추가로 전투 기록이 담긴 영상을 가지고 온다 하더이다."
"소문이 진짜였다니!"
"그럼 발표는...?"
"카비르 마탑 소속인 케이튼 장로의 이름으로 학회를 따로 연다고 했소. 장소는 당연히 메지셔널 위습이고."
"으음...!"
그러자 의회의 분위기가 더욱 심각해졌다.
만약 헛소문이었더라면 그저 이런 일도 있었구나 하고 넘어갈 일이었지만, 다름 아닌 클레이튼 가문이 직접 서신을 보내 온 내용이었으니.
소문은 사실이라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부터는 정치적인 선택지가 대폭 늘어난다.
그 말인즉슨, 귀족들의 입장에서 굉장히 위험한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때문에 아직 의회에서 발언권이 얼마 없거나 가문의 힘이 약한 이들은 기회로, 이미 잃을 게 많은 이들은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제국의 중앙 정치 귀족 놈들은 왜 북부의 요청을 거절한 거지...?"
이만한 사태를 그저 증거 불충분으로 넘긴 제국을 향한 불신이 싹튼 순간이었다.
* * *
"자네는 언제나 날 놀라게 만드는군. 허허."
케이튼은 몇 달 만에 보는 셰인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뛰어난 인재를 환영하는 그의 입장에서 셰인은 찾아올 때마다 놀라운 발견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혈마법이라... 최근 들어 위험한 마법이 자주 발견되는군."
마법사로서 흑마법과 혈마법이 얼마나 큰 위험을 안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케이튼은 자연스럽게 걱정의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셰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제 슬슬 그 마법들을 수면 위로 올려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째서지?"
남들이 들으면 기겁할 말이었으나, 케이튼은 차분히 셰인에게 되물었다.
눈앞의 소년이 가지고 있는 시야가 유별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위험에 대한 무지(無知)는 대처하지 못하게 만드는 재앙의 근원입니다. 인류가 처음 마력을 깨우치기 시작했을 때, 스스로를 선택받은 자들이라 하여 마력을 남발하던 시기가 있지 않았습니까?"
"으음. 확실히 그렇지. 기원 후 극초기에는 그러한 경우도 상당했다고 들었네."
"흑마법과 혈마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위험성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대처할 수 있는 기관을 따로 만들어야겠지요."
"흐음.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야. 다만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걸세. 36년 전에 있었던 흑마법사들과의 전쟁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많으니."
"걱정 마십시오."
셰인이 그리 말했으나, 그래도 케이튼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만큼 셰인이 방금 했던 발언은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머지않아, 학회가 시작됐다.
1년에 한 번 열려도 많은 마당에 올해만 들어 두 번이나 열렸음에도, 많은 마법사들이 참석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전에 셰인이 발표한 엘프들의 정기를 활용한 마법의 연구가 한참 유행 중이지 않은가.
이미 어느 정도 자신만의 이론을 세운 마법사들은 여러 귀족이나 상인의 눈에 띄어 상당한 금액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기에, 다양한 마법사들이 모여 단상 위에 선 셰인을 바라봤다.
뿐만 아니라, 드물게 마법 학회에 뜻밖의 인물들도 대거 찾아왔다.
요 며칠 소문에 시달리던 연합국의 정치 귀족들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클레이튼 R 셰인입니다. 몇 달 만에 선배님들을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또한, 이 자리를 찾아 주신 의원님들께도 감사의 말씀 올리겠습니다.]
셰인은 이전과는 다르게, 먼저 자신이 가지고 온 결과물을 선보였다.
이 자리에 마법사만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부터 클레이튼 R 셰인 마법사님께서 직접 촬영해 온 증거 영상을 시청하겠습니다.]
진행자의 말이 이어지고 학회가 점차 어두워지더니, 이내 셰인이 준비한 수정구가 허공에 오크들과 사이클롭스의 전투를 그려 내기 시작했다.
오크들의 전투는 광기, 그 자체였다.
자신들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철저히 적을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것은 과연 용맹함일까, 무모함일까.
이는 결과가 말해 주었다.
여러 오크가 죽었음에도 그들은 조금의 주저 없이 사이클롭스에게 기어코 상처를 내는 데 성공했고, 점차 전투의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윽고 오크 십인대장이 사이클롭스의 거대한 외눈에 검을 꽂아 넣는 것을 결정타로, 놈의 거구가 쓰러지자 학회에 모인 의원과 마법사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말 오크가 마력을 썼다.
그것도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괴이한 방법으로, 저 거대한 사이클롭스가 쓰러진 것이다.
마력에 있어서 저항력이 있는 사이클롭스는 어지간한 마법사들에겐 상처조차 입힐 수 없는 존재이지 않나.
이에 마법사들이 깊은 침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후 이어지는 오크들의 의식.
죽은 사이클롭스의 피를 마신 오크가 폭주를 하더니, 여태 곁에서 함께 싸워 온 오크들은 그런 오크를 죽이고, 또다시 그 오크의 피를 마신다.
과연 혈마법다운 괴이한 의식이었다.
이윽고 영상이 끝나자, 질의 시간이 찾아왔다.
역시나 질문의 시작은 가장 마지막에 있던 의식에 관해서였다.
"놈들이 마지막에 행했던 그 의식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오?"
[차후 저희가 알아본 바, 오크들은 죽인 몬스터의 피를 섭취하는 것으로 피에 담긴 마력을 자신들의 신체에 담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몬스터의 야성 따위와 같은 것이 함께 깃들기에 그 야성을 담을 제물을 정하는 것이지요.]
"한 번 걸러 내서 쓴다는 것이군. 동족의 목숨을 걸고...."
[맞습니다.]
그 이후로도 셰인은 아룬비다에서 얻어 낸 정보를 아낌없이 풀어냈다.
오크들이 쓰는 혈마법의 방식과 그 결과, 그리고 치명적인 약점.
마지막으로 오크 샤먼이 펼쳤던 주술에 대해 말할 때는 여러 마법사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주술은 마법과 비슷한 면이 있기에, 오크 샤먼이 펼친 주술의 성능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파악했기 때문이다.
"환영에 물리력을 담는다라... 거기에 대상이 마력을 쓰기만 하더라도 발동된다니. 조건도 너무 쉽지 않나?"
"아무리 마법이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는 학문이라고는 하지만, 주술은 특히나 치명적이군."
"이런 마법이 군대에 펼쳐진다고 생각하면...."
"복잡해지지. 오히려 강하면 강할수록 당하게 되니."
특히 무려 3품의 마스터 실력에 다다른 펠리스가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마법사들에게도 공포로 다가왔다.
작금에 들어서 인간들에게 마력은 없어선 안 되는 것이기에.
마법사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할 쯤, 셰인은 또다시 준비해 둔 물건을 단상 위에 올렸다.
[이것은 오크들의 전초 기지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오크어로 적혀 있는 가죽이 번역된 채로 공개되자, 글을 읽은 이들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가죽에 피로 적인 내용인즉슨.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켜 아룬비다를 함락하겠다고 적혀 있는 게 사실이오?"
"진정 오크들과 전쟁이 벌어지는가!"
가장 먼저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은 의원들이 그리 외쳤고, 마법사들 또한 안에 적인 내용을 마법적인 시점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토템을 활용한 주술로 몬스터를 조종한다니...."
"정확히 말하자면 유인에 가깝겠어."
"아무리 방어를 한다 하더라도 토템의 효과 반경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야 할 텐데."
"토템을 옮기기만 해도 효과가 발휘되니,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지 않소?"
"끄응... 난해하군."
새로운 마법에 흥미를 가지고 찾아온 마법사들도 어느새 일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표정이 심각해졌다.
마법사들 또한 연구를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50년 전에 일어난 사태를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의원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렇다면 현재 아룬비다는 어떤 대책을 마련 중이지?"
[안타깝게도 현재 아룬비다의 인력만으로는 오크들의 계획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보다시피 오크들은 그 방대한 숫자로 이미 아룬비다보다 더 넓은 포위망을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에 적힌 대로라면 총 184군데가 이와 같은 백인대로 구성되어 전초 기지를 세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게 오크의 무서운 점이었다.
많은 숫자를 통한 인해전술.
뿐만 아니라 놈들은 토템과 고든의 혈마법을 통해 전생의 셰인이 알고 있던 것보다 더 전술적인 움직임을 취하고 있었다.
"방법이, 없다는 것인가?"
[그와 관련해서 황실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지요. 해서 저는 이 증거들을 가지고 이곳 연합국에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 이는 결국 제국에서 일어나는 일일세. 그 문제의 해결을 연합국에 끌어들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제국의 화폐가 연합국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는 하나, 고작 화폐를 인질로 삼아 이 위기를 넘기기에는 명분이 부족하다.
결국 제국에서 먼저 나서줘야 연합국도 거기에 발 맞춰 움직인다는 것인데.
"제국은 이번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에요."
그때.
누군가 학회의 문을 열며 그리 말하자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가을 보리밭을 떠올리게 만드는 금발의 여인이 그곳에 서 있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3화
73화 장난스러운 표정
1황녀, 제페르 디 아르샤 올리시아의 등장에 몇몇 눈치 빠른 귀족들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바로 간파해 냈다.
'결국 황실의 정치 싸움이었나?'
현재 아룬비다는 2황녀인 아나스타샤가 맡고 있고, 그런 황녀의 요청이 거부됐다.
여기까지는 추론에 불과했지만, 1황녀까지 몸소 나선 것을 보면, 분명 황태자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이리라.
올리시아는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바라보며 평소처럼 미소를 지었다.
"아쉽게도 황실에서는 증거 불충분으로 이번 건을 미뤄 두기로 했어요. 이미 메자이아 대수림으로 인해 중요성에서 밀린다 판단한 것 같더라고요."
"...."
마치 너희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는 올리시아였지만,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한 몇몇 사람들은 그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하면, 황녀님께서는 우리 연합국이 아룬비다로 파견을 가길 바라시는 겁니까?"
황실의 현실을 눈치챈 인물 중 연합국의 의장인 헤일로 마일드의 질문에 올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런 도움을 주신다면 우리 황실도 잊지 않겠지요."
"글쎄요...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떨지."
그런 의장의 부정적인 태도에 동감한다는 듯 다른 의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제국의 화폐 가치가 높다고는 하지만 지금부터 밑 작업을 들어간다면 어느 정도 출혈을 각오하더라도 막을 방법은 있었으니.
굳이 위험한 도박에 참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제아무리 연합국이 제국의 권력에 비교적 자유롭다고는 하나, 추후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이의 코털을 건드릴 필요가 있겠는가.
"물론 저 또한 가만히 도움만 받을 생각은 아니랍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이 조금만 모인다면, 저도 제 이름을 걸고 황실에 제대로 된 군대를 요청하겠습니다."
"음...."
이렇게 된다면 명분에서도 그림이 산다.
만일 방어전에 있어서 큰 출혈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건 제국의 이름값에 먹칠을 하는 것이지 연합국 입장에서 손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그대로 황실에 빚을 지운다면 남는 장사로 봐도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회의 인물들은 표정이 펴질 줄을 몰랐다.
기왕 제국의 원정에 참여한다면 이기는 방향으로 가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50년 전과 다른 그림이 그려질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올리시아의 의견에 동참한다 하더라도 과연 그 혹독한 아룬비다에서 오크들과 제대로 된 전쟁을 준비할 수 있을까?
50년 전 제국이 어떻게 아룬비다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떠올리면 그리 희망적이지 않았다.
물론 그 사이 기술적 진보가 있었으니 완전히 같은 그림이 그려지진 않겠으나....
반대로 말하면 오크들 또한 마력의 사용이라는 발전을 이루어 냈다.
의회의 귀족들과 마법사들이 이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이유는, 이 또한 제국의 치욕으로서 역사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눈치 빠른 올리시아는 저들의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아차렸다.
"괜찮아요. 다들 걱정하시는 게 뭔지 잘 알고 있답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 인류는 과거의 실패로부터 진보하는 존재랍니다."
그러면서, 올리시아가 셰인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럼, 이어서 두 번째 발표에 들어가겠습니다. 이번 발표는 앞서 시연에 도움을 주신 카비르 마탑의 아르키아 J 케이튼 장로님께 감사의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러자 마법사들의 눈이 다시금 반짝였다.
앞서 학회를 열 때, 셰인이 한 가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던가.
몇몇 마법사들은 설마하는 눈치로 셰인을 바라봤다.
셰인은 그런 이들의 시선을 느끼며 마법이 인챈트된 스크롤을 펼쳐 들었다.
마력에 반응한 스크롤이 푸른빛을 내뿜으며 회장을 매우자, 이내 둥근 포털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테, 텔레포트?!"
마법사들의 도시, 매지셔널 위습은 텔레포트 차단 마법진이 설치된 도시다.
다만 몇몇 이들은 앞서 셰인이 언급한 케이튼의 손에 들린 스크롤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정적으로 매지셔널 위습에 걸린 텔레포트 차단 마법진을 무효화하는 스크롤이었기 때문이다.
[정기를 활용한 신개념 이동 수단, '라이프 텔레포트'입니다.]
그런 포털의 내부에서, 철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갑옷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옅은 실버블루 톤의 머리카락이 해어진 머리끈으로 묶인 채 목 아래까지 늘어졌고, 눈밭을 연상케 만드는 메마른 은빛 눈동자가 회장을 쭉 훑었다.
"오랜만이야, 올리시아."
"어머. 이런 식으로 마주할 줄은 몰랐네요. 정말 많이 컸어요. 이 언니보다도 더."
제페르 디 나타샤 아나스타샤.
제국의 두 번째 꽃, 2황녀가 포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 *
가혹한 기후만큼이나 인간의 앞길을 막는 것은 험악한 지형이다.
특히 그 두 가지가 엮여 있다면, 이는 인간이 살기에 힘든 지역이라 부른다.
작금에 들어서 인간이란 교류를 통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룬비다는 제국에서도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매년 위협적인 몬스터 웨이브를 막느라 보급품을 보내 줘야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차가운 기운을 담고 있는 아룬비다의 마력 때문에 텔레포트도 못하는 상황.
한마디로 계륵과 같은 땅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이동 수단만 어떻게 해결이 된다면 아룬비다도 충분히 값어치 있는 땅이 될 수 있었다.
메자이아 대수림처럼 마석이 잠들어 있지는 않으나, 그 외에 다양한 광산이 깃든 땅이었으니.
그뿐이던가.
매년 일어나는 몬스터 웨이브로부터 얻게 되는 부산물은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몬스터의 사체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일반적인 던전과 다르게, 이곳 아룬비다는 던전에 포함되지 않은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는 장소이지 않던가.
방법만 생긴다면 충분히 금싸라기로서의 가치가 있는 땅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문제가 바로 눈앞에서 해결된 모습에 많은 이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특히 귀족들은 1황녀와 2황녀가 손을 잡았다는 사실과, 이후 명분이 그 둘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흘러가기 시작했음을 눈치챘다.
반면 마법사들은 정말 셰인이 정기를 활용한 텔레포트 마법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으아아악!"
"젠장, 늦었다!"
"내, 내 연구비가, 시간이...!"
개중에는 셰인과 동일한 연구를 진행 중이던 마법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무려 황녀가 직접 그 성능을 확인한 저 마법 이상으로 뛰어난 결과를 낼 리가 없지 않나.
[보시다시피 해당 지역인 아룬비다를 중심으로 정기를 마력 코드로 재배치하는 것으로 안정성을 확보한 텔레포트가 가능해졌습니다.]
"자, 잠깐. 그게 가능한 거요? 정기를 해석해서 마력 코드로 만들었다고?"
지금 셰인이 하는 말은 마치 다른 종족의 언어를 그대로 인간의 언어로 바꿨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물론 시간을 충분히 들인다면 그것도 가능한 일일 테지만, 고작 혼자의 힘으로, 그것도 몇 개월 만에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게 마법사들은 믿겨지지가 않았다.
거기에 마력이라는 것은 언어처럼 인간이 창조해 낸 것조차 아니지 않은가.
아직 베일에 싸인 게 많은 것이 마력이다.
그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마법사들을 향한 셰인의 다음 말은 그들이 뒷목을 잡기에 충분했다.
[많은 어려움과 시행 착오가 있었으나 그 덕에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건 무슨 아카데미 수석 입학을 교과서만 보고 해냈다는 것도 아니고.
'이게 재능이라는 건가....'
'늙으면 죽어야지. 암, 저런 어린 것들에게 추월당하다니! 죽어 마땅하지!'
'저 코드를 알아내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돈이 떨어질 텐데...!'
실상 아룬비다처럼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버려진 지형이 얼마나 많던가.
저 텔레포트 마법진이 상용화만 된다면, 그로 인한 인센티브를 받는 것만으로도 돈방석에 앉을 수 있으리라.
많은 마법사들이 질투 혹은 선망 어린 시선으로 셰인을 바라봤다.
도저히 저런 나이에 이룰 수 있는 업적이 아닌지라 의심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으나, 앞서 라비아타도 인정한 마법사이지 않은가.
재능이라는 것이 잔인하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마법사들이기에, 결국 현실의 씁쓸함을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셰인에 의해 열린 학회는 마무리가 지어졌고, 무려 7년 만에 상봉한 두 황녀는 따로 방을 잡아 서로를 마주했다.
"할 이야기가 많겠지요?"
"응. 그런데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네."
백부장이 습격을 받았던 것 때문일까, 최근 오크들의 동향이 심상찮다는 보고를 받았기에, 가능한 한 이곳에서의 일정을 빠르게 마치고 돌아가야 하는 아나스타샤다.
"아쉽네요. 그래도 7년 만의 만남인데."
"어쩌겠어.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걸. 이번 위기만 잘 넘기면 그때 해후를 풀어도 되겠지."
"그래요... 아무튼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올리시아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며 자신의 여동생을 바라봤다.
이 배다른 쌍둥이 동생은 어릴 적부터 탁월한 신체 능력으로 전선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황실의 품위보다는 병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으며, 드래스보다는 갑옷을, 아름다운 코사지보다는 뜨거운 심장으로 이 제국을 지키고자 했다.
그런 아나스타샤가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아룬비다라는 척박한 땅에 버려진 것이다.
어찌 보면 경쟁자를 하나 제거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올리시아는 그 사실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결국, 아나스타샤는 하나의 본보기였을 뿐이었으니까. 자신의 오라버니인 새뮤얼이 자신에게 대항하는 존재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한.
그래서일까.
아나스타샤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올리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나선 게 의외인가요?"
"응. 언제나 오라버니의 눈치만 살폈으니까. 내가 떠나던 그 순간까지도."
아나스타샤는 딱히 올리시아를 탓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있었을 뿐.
그렇기에 올리시아는 전혀 기분 상한 내색 없이 미소를 지으며 홍차가 담긴 잔을 들며 말했다.
"달리기 위해 자세를 낮추듯, 저도 비슷한 상황이었거든요."
7년 전 그날 이후. 올리시아는 가급적 몸을 사리며, 기회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본래라면 벌써부터 움직일 생각은 없었으나, 그토록 기다리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는 게 없다고 판단한 새뮤얼이 방심을 했고, 로즈베리 눈동자의 소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렇게 밥상이 차려진 상태이니만큼 어떻게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 좋아.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그 사람에게 따로 들은 건 없었나요?"
"나머지는 언니가 알아서 해결할 거라고 하던데? 난 와서 듣고 결정만 하라고 했어."
"참... 기껏 사람을 불러 놓고 해결은 전부 이쪽에게 맡겨 두는 건가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올리시아의 표정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
재밌었던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이.
하나부터 열까지 셰인이 모두 손을 쓰려고 했다면 올리시아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반감이 들었을 터.
그러나 셰인은 판만 깔아 두고 나머지는 올리시아에게 맡겨 놨다.
마치 탐스러운 요리 재료들을 눈앞에 내놓고 마음껏 요리해 보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재료들을 망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일을 키워 보도록 하죠."
그러면서 올리시아는 빙긋 웃어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며 과거를 떠올렸다.
언제였을까.
아주 어릴 적, 자신을 괴롭히던 새뮤얼에게 복수를 하기 직전의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이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위치는 너무 많이 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4화
74화 버린 자와 선택하는 자
테라스로부터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에 한 금발의 청년이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그 모습엔 범상치 않은 자태가 흘러나오니, 누가 보더라도 그가 고귀한 혈통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청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비교적 어두운 방으로 이어졌다.
"그렇군요. 저의 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라...."
"예. 현재 매지셔널 위습에서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흐음...."
청년, 제페르 디 와이어트 새뮤얼은 여전히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마치 누군가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움직임이군요. 안 그렇습니까?"
"1황녀와 2황녀가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미리 계획된 일임은 맞는 것 같습니다."
"누구일지 궁금하군요. 제 몸 지키기 바빴던 첫째 누이와 추락한 둘째 누이를 움직이게 만든 이가...."
"매지셔널 위습에서 학회를 연 인물은 클레이튼 가문의 장남이라고 합니다."
"아아. 그 상인 가문의 장남입니까. 이번에도 일을 화려하게 시작했군요."
혹시 그 소년이 이번 일의 배후일까 싶었지만, 새뮤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18살에 불과한 소년이 두 황녀를 직접 움직였다?
말이 되지 않았다.
그의 가문인 클레이튼의 가주가 아니고서야.
그러나 반대로 클레이튼 가문의 가주는 정치와 거리를 두는 인물이다.
"그러고 보니 저지먼트 기사단에서 그 가문과 접촉했다고 들었는데. 별다른 성과는 없었답니까?"
"메자이아 대수림의 개방으로 인해 바쁘다는 답변만 돌아오고 있습니다."
본래라면 상인이라는 점을 이용해 연합국의 지하도시에 똬리를 틀게 만들 예정이었다.
황실에서 밀어 주고 클레이튼 가문의 크기를 생각하면 일전에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살리에르 백작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올 수 있었을 테니.
하지만 그런 클레이튼의 가주에게 메자이아 대수림이라는 더 큰 떡이 놓여져 있는 마당에, 위험성이 다분한 지하도시는 그리 매력적인 요리가 아닐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대니얼 단장이 실망하고 있겠군요."
"...."
까악─ 까악─
그때.
테라스 난간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새뮤얼은 익숙하다는 듯 그런 까마귀의 발치에 놓인 종이뭉치를 집어 들었다.
"참... 요즘은 그자들과 위치가 바뀐 것 같단 말이죠."
종이를 펼쳐 읽은 새뮤얼은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새뮤얼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남자는 그런 새뮤얼의 미소가 섬뜩하다고 느껴졌다.
여태껏 자신의 말을 듣지 않던 수하들에게 짓던 미소와 같다고 해야 할까.
그들이 최후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한다면, 이 섬득함은 괜한 게 아니었다.
"군대를 움직여야겠습니다. 이대로 제국을 생각하는 황족이 누이들밖에 없다는 인식이 생기면 곤란하죠. 이 제국의 안위를 그 누구보다 걱정하는 것은 저이니 말입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하면, 차출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슬슬 대니얼 단장이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려 북부를 호령하는 오크들을 상대하는 일이니. 나머지는 알아서 말 잘 듣는 이들로 고르도록 하십시오."
저지먼트 기사단.
황실의 검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학회가 끝난 바로 다음 날.
셰인은 오랜만에 맡는 숲 내음에 눈을 떴다.
과거 비 내리는 소리가 가득했던 메자이아 대수림은 어느새 제법 많은 수의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이곳에 얽힌 이윤과, 아직 떨어질 게 남은 과자부스러기를 받아먹기 위한 행렬이 줄을 잇고 있는 것이다.
다만 수명이 긴 엘프들은 조용한 것을 원했고, 그에 따라 프리실라가 한 번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의 수를 제한해 두었기에 이전보다는 많지 않았지만.
프리실라의 정기가 담긴 세계수의 잎으로 메자이아 대수림에 도착한 셰인은 평소처럼 프리실라를 찾아갔다.
"오랜만이네요. 그런데 피부가 더 하얘지신 것 같아요."
프리실라가 미소를 띠며 그리 말하자, 셰인은 적당히 받아 주며 본론을 꺼냈다.
"드래곤의 역린을 받으러 왔다."
"어머.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요?"
처음 둘의 계약은 메자이아 대수림의 안정이었다.
아직 진행 중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인간들 사이에서 메자이아 대수림에 나오는 이득이 한가득 얽힌 상태다.
그러니 더 이상 전쟁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없게 된 지금.
엘프들은 셰인과 프리실라의 계약처럼 이제 안정기에 들어섰다고 봐도 좋았다.
"좋아요. 조금 이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여전히 당신의 가문에서 많은 부분을 도와주고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프리실라는 자신의 가슴에 양손을 올렸다.
"음...."
옅은 신음과 함께 프리실라의 손에 마력과 정기가 모이기 시작하자, 연녹색 빛줄기가 조금씩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심장으로부터 하나의 보석이 형체를 갖추며 그녀의 손 위에 놓여졌다.
얉은 모습을 한 보석은, 그 어떠한 보석보다도 찬란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에메랄드하고는 비교조차 안 될 찬란함 앞에, 셰인은 지난 생을 통틀어 두 번째로 보는 드래곤의 역린을 바라보곤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결국 이걸 다시 한번 갖게 되는군.'
전생에 드래곤의 역린은 지금처럼 고귀한 자태를 취하고 있지 않았다.
조직에 의해 한껏 오염되고, 고든의 온갖 실험이 끝난 뒤에야 자신의 손에 들어왔던 것이지 않나.
보석으로부터 느껴지는 힘 자체는 전생보다 적었으나, 근본적인 질은 훨씬 잘 갖춰진 상태다.
애초에 역린이 가진 힘보다는 근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더 중요했던 셰인이기에 오히려 좋았다.
"다만 이걸 드리기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뭐지?"
"이걸 가지고 뭘 하고 싶으신 가죠?"
"전쟁."
"...."
"전쟁을 막을 전쟁. 그게 내가 원하는 거다."
아이러니하지 않나. 전쟁을 막기 위한 전쟁이라니.
"그렇게 해서 뭘 얻겠다는 건가요?"
"때론 두려움이 전쟁을 억제하기도 하는 법이지. 걱정 마라, 프리실라. 너의 종족에 득이 되면 득이 됐지, 해가 될 일은 일절 없을 테니. 넌 지금처럼 인간들에게 있어 우호적인 종족이면 된다. 인간들의 호의를 받고, 또 그들의 존중을 받으면 돼. 잘 자라나는 나무처럼, 햇빛에만 있으면 된다."
그 밑에 있는 그림자는 내가 책임질 일이니.
그렇게 뒷말을 덧붙인 셰인을 바라보는 프리실라의 눈빛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가야 할 수밖에 없는 길을 걷는 동생을 바라보는 누나의 표정과 같다고 해야 할까.
"...거래할 뿐인 우리의 관계에 제가 더 말을 더할 필요는 없겠죠. 하지만 셰인."
"왜 그러지?"
"안식을 찾을 자리는 찾아보세요. 당신의 정신력이 얼마나 강하다 한들, 결국 당신 또한 한 명의 인간이니까."
"그건 걱정할 거 없다. 이미 있으니."
녀석도 지금쯤 열심히 움직이고 있을까.
셰인은 자신의 동생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고, 프리실라는 가만히 그런 셰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당신을 위한 안식을 찾아야죠. 아직은 어리석은 사람.'
그렇게, 프리실라는 평소처럼 셰인에게 자신의 정기를 교체해 주며 둘의 만남은 조용히 마무리 지어졌다.
* * *
"이, 이게 뭐여?"
"허미...."
"이, 이게 전부 물자라고? 여기 아룬비다에?"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만...."
"이렇게 미치면 얼마든지 환영이지, 썩을 새끼야!"
아룬비다의 이른 아침.
비두론 성에 모인 주민들은 영지의 앞에 차곡차곡 쌓이는 물자들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언제나 마차 하나 분은 될까 싶을 정도로 적은 물자만 보다가, 성의 입구에 방해가 된다 싶을 정도로 한가득 쌓이는 걸 본 게 얼마 만이던가.
아니, 정확히는 본 적도 없는 수준이었다.
최근 메자이아 대수림이 개방됨에 있어서 물자가 조금 풍족하게 들어온 감이 있었으나, 그마저도 조금이라는 말을 써야 할 정도에 불과했으니.
"흠흠. 안녕하십니까! 저는 클레이튼 상회에서 온 하보크 상단의 하보크 메링턴입니다. 혹시 처분이 힘든 몬스터의 부산물이 있으십니까? 아주 합리적인 가격에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푸짐한 인상을 가진 한 상인의 용기 어린 외침에 주민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격? 저 양반이 뭘 모르고 하는 말 아냐? 여기에 금화가 무슨 쓸모가 있다고?"
"야 이, 멍청아. 저거 안 보이냐?"
"포탈?"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진 포탈.
그에 아룬비다 주민들도 의아하다는 듯 포탈을 바라봤다.
"저게 왜?"
"아오, 이 돌대가리. 야, 우리가 왜 매번 물자가 엿 같이 부족했는데? 왔다갔다 뒤지게 힘들어서 그런 거 아냐! 근데 저기에 포탈이 생겼다는 건 이동이 편해졌다는 거고!"
"아!"
그러나 그저 좋다고 보고 있는 이들이 있는 반면, 오히려 걱정 어린 시선으로 쌓이는 물자를 바라보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뭔가 일이 터지려는 것 같은데."
"미미르 경이 황실에 가서 받아 온 건가? 그냥 주진 않을 텐데...."
"저 포탈이 열려서 개방된 거 아냐?"
"아니지, 아니야. 그럼 저렇게 상단이 오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물자가 저만치 쌓이는 건 말이 안 되잖아."
"하기사... 그런데 무슨 문제가 터지려면 상인들도 안 와야 하는 거 아닌가?"
"전쟁을 안 겪어 봐서 하는 말이지. 전쟁터야말로 일획천금의 기회라고. 돈에 눈이 멀어 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 말이야."
"아아...."
"그럼 진짜 무슨 일이 터지려는 건가?"
"저번에 펠리스 님이 나갔다 온 거랑 관련이 있는 건가?"
아룬비다의 주민들 사이에서 그런 의문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그날 저녁.
아나스타샤가 모든 주민들을 한데 모았다.
저녁이 되어 더욱 추워진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룬비다의 주민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그녀의 부름에 응했다.
"제군들. 우리는 현재 바람 앞에 선 촛불이다."
그 말에 주민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시작부터 저런 말로 분위기를 잡는 걸까?
그 이유는 금세 밝혀졌다.
"최근 나는 한 가지 제보를 받았다. 오크들이 마력을 쓰기 시작했다더군. 그리고 확인 결과, 그 보고가 사실이라 판명됐다."
"...! 마, 마력 말입니까?"
"아니, 그 무식쟁이 오크 놈들이 어떻게 마력을 씁니까?"
"글쎄. 너 같은 놈들도 쓰는데 그놈들이라고 못 쓸까?"
"이 미친놈이?"
쿵!
한참 소란이 가중되려 할 때, 아나스타샤가 대검의 끝으로 땅을 내려치며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하여, 비밀리에 편성한 특수 수색대가 오크들의 전초기지를 습격, 그 결과 오크들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쿵!!
"전쟁. 오크들은 50년 전과 같이, 제국의 북부를 정복하고자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다."
"...."
쿠웅!
"그들은 고대 흡혈귀의 마법을 이용해 마력을 깨우치고, 자신들만의 주술을 만들어 작위적으로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키려 하고 있다."
"...!"
쿵! 쿵!
"제군들. 이번 겨울은 특히 더 혹독한 나날이 이어질 것이다."
쿵!! 쿵!!
"하나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단 한 번도 적들에게 우리의 성벽을 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가?"
쿠웅! 쿠웅!
"또한! 이번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롭지 않은 겨울이 될 터. 나의 용사들이여. 들어라. 외부에서 우리는 버려진 자들이라 비웃을 테지만, 그건 착각이다. 저들에게 그런 선택권 따위는 애초에 주어진 적도 없었다."
쿠웅!! 쿠웅!!
"착각하지 마라, 제군들!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저 제국을 저버릴 것인가, 아니면 이 손으로 직접 지킬 것인가. 그 선택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말이다!"
쿠웅!! 쿠웅!! 쿠웅!!
"제군들. 어찌하겠나. 우리를 버렸다 비웃는 저들을 우리도 똑같이 버리겠는가? 아니면 우매한 자들에게 현실을 보여 주며 그들의 착각을 바로잡겠나!"
어느새 아룬비다의 주민들은 아나스타샤의 타이밍에 맞춰 자신들도 지면에 발을 구르고 있었다.
얼마 만일까.
이 혹독한 날씨에도 이렇듯 심장이 뜨거워진 것이.
7년 전.
아나스타샤가 아룬비다에 첫 발을 들였을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두 눈을 빛냈다.
자신들과 다르게 이곳 아룬비다에서도 눈빛에서 단 한 번의 절망을 띄운 적 없던 강인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들 모두 그녀를 따르기로 한 것이고.
바로 지금.
그들은 또다시 자신들이 시험대 앞에 섰음을 깨달았다.
"물론이지요, 황녀님!"
"저 바깥 놈들에게 알려 줍시다! 우리가 누구인지!"
"버리긴 누가 버렸답니까!"
"맞습니다! 선택지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오오오옷!"
그리고, 그들은 결코 아나스타샤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녀의 말처럼, 자신들의 위기는 곧 제국의 위기요, 이번 전쟁을 잘 마무리한다면 제국 놈들도 더 이상 자신들을 경시하지 못하리라.
그 믿음직스러운 영광의 길에는 바로 2황녀, 제페르 디 나타샤 아나스타샤가 앞장 설 것이니.
비로소 전쟁의 준비가 끝났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5화
75화 폭풍전야
"피의 기억이... 읽히지가 않아...."
엘더 샤먼의 느릿한 말이 파문처럼 퍼져 나갔다.
무너진 전초 기지 내부.
앞서 셰인을 포함한 특수 수색대가 다녀간 이곳은 이미 전초 기지로서의 역할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때문에 이러한 보고를 들은 엘더 샤먼은 죽은 오크 샤먼의 피에 얽힌 기억을 읽어 보려 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이럴 수가, 있는 건가...?"
"음~ 글쎄? 사실 우리도 그 늙은이가 만든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든~."
그에 대답한 사람은 이제 10살이나 됐나 싶은 소녀였으나, 그녀는 자신보다 몇 배는 더 큰 엘더 샤먼의 앞에서도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누가 알았겠어? 고든, 그 음흉한 늙은이가 그렇게 갑자기 죽어 버렸을 줄은."
소녀의 말처럼,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조직의 핵심 간부로 있던 고든이 죽었다는 사실은 조직에게 꽤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그간 고든이 홀로 담당하고 있던 다양한 연구들도 일순간에 모두 멈춰 버렸고, 앞으로 큰일을 해 줘야 할 드래곤 하트도 끝내 온전한 형태로 라비아타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때문에 이렇게 북부까지 찾아와 흡혈귀의 마력을 사용하는 오크에게까지 찾아온 것이 아니던가.
그때, 소녀의 곁을 지키고 서 있던 남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하하! 이거, 인간들에게 한 방 먹은 모양이군."
"인... 간?"
"그래. 옅지만 놈들의 냄새가 느껴져."
2미터가 넘는 엘더 샤먼의 덩치에도 전혀 밀리지 않는 건장한 체구의 남자.
꽉 끼는 정장을 차려입고는 구릿빛 피부의 스킨헤드를 쓸어 만졌다.
오크들의 시체를 보면 이미 시간이 꽤 지난 상태였으나, 스킨헤드의 남자는 그럼에도 확신에 차서 그리 말하고 있었다.
"냄새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데?"
소녀의 물음에 스킨헤드 남자가 기존의 백부장이 썼던 건물을 가리켰다.
"저쪽인데? 저 건물로 들어갔어."
"역시 개코라니까!"
"그 주둥이 뜯어 버리기 전에 닥쳐라. 난 곰이라고."
이윽고, 엘더 샤먼은 기존의 이곳에서 죽은 오크 샤먼의 방에서 사라진 물건들을 확인했다.
"인간들이... 우리...의 계획을, 눈치챈 것... 같군."
"일이 복잡하게 됐는데? 여기 있는 가죽들도 몇 개 챙겨 갔다는 건 너희들의 언어를 해석할 줄 안다는 거 아냐."
"게다가 몬스터들이 싸운 걸 보면 그쪽으로 의심을 지우게 만들고 시선을 돌리려던 거 같은데?"
남자와 소녀의 말에 엘더 리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대족장에게, 찾아가 봐야겠군...."
인간들이 계획을 눈치챘다.
그들은 숫자도 적고 수명도 짧지만 그만큼 자신들의 위기에 민감한 종족이다. 이미 이쪽의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
그들은 왔던 것만큼이나 신속하게 자신들의 본거지로 향했다.
곧 있을, 인간들과의 전쟁을 위해.
* * *
비록 올리시아가 전쟁을 한다고는 했으나, 전쟁이라는 게 하루 이틀 만에 뚝딱 이뤄지는 일이 아니다.
대륙은 이제 막 한여름이 시작하는 와중에 북부의 원정을 위해 병사들이 입어야 할 보온 장비를 마련하고, 얼마만큼의 군사를 보낼 것인지, 그리고 그 군사를 누가 책임질 것인지 등 여러 모로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나마 연합국은 상황이 달랐다.
모험가들은 평소에도 험지를 돌아다니는 이들이기에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는 게 빠르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도 이윤 없이 움직이는 이들이 아니기에 제국에서 적절한 보상안이 나오기 전까지는 먼저 움직일 생각 따윈 없을 터.
"한 달이라더군."
아나스타샤의 그 말에 셰인과 미미르는 조용히 경청했다.
"먼저 보내 주는 물자들로 최대한 한 달 동안 버티라는 것이 황실의 뜻이야."
"...더 빠르게는 안 되는 겁니까?"
"폐하의 건강이 많이 악화되셨어. 그보다 더 빠른 원정은 아무래도 힘들 거야."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셰인이 준비한 포탈이라 해야 할까.
다급하다면 언제든지 황실에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도 있었고, 1황녀인 올리시아는 보름 안에 선발대를 보내겠다 말했었다.
"그래도 마냥 절망적인 상황만 있는 건 아니지. 보상안을 우선적으로 마련한다면 모험가들도 선발대가 올 쯤에 찾아올 테니까."
"그럼 중요한 건 앞으로 보름이겠군요. 오크들이 과연 그 전에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킬지...."
미미르의 희망 어린 말이 나오기 무색하게 셰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크들도 움직일 겁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데?"
"오크들의 뒤에는 조직이 있으니, 놈들도 우리 쪽에서 눈치챘다는 것을 이미 확인 했을 겁니다."
"조직이라...."
전생과는 다르게 '무명'의 개입 이후, 오크들의 움직임은 확연히 빨라지고 있었다.
본래라면 몇 년 후에나 본격적으로 움직였을 오크들이 벌써부터 전초 기지를 지으며 눈에 띄는 행동을 하고 있지 않나.
어쩌면 전생과 다르게 이미 상당 부분 전쟁의 준비가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먼저 움직였다는 것을 알았으니, 오크들도 이쪽이 대응하기 전에 속도전을 걸어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적어도 며칠 안에 오크들의 수작이 들어올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셰인은 섣불리 밖으로 나가기보단, 성 내부에서 방어에 전념하는 게 좋다는 조언을 남겼다.
보좌관인 미미르도 셰인의 의견에 찬성하니,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 * *
"이야, 진짜 때깔 좋다!"
"그러게... 언제 망가질지 몰라서 불안하기만 했던 무기들이었는데."
그간 모아둔 몬스터의 부산물을 팔아 번 돈을 통해 물자를 구입하고 영지민들을 무장시키는 한편, 삼총사는 다른 일행들과 함께 성벽 앞 도랑을 손보며 돌아다녔다.
영지 내에 셰인을 제외한 단 하나뿐인 마법사, 미미르도 더없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이거... 놀랍군요."
미미르는 셰인이 넘기고 간 보고서를 바라보며 오랜만에 마법사로서의 학구열이 불타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셰인의 보고서에는 마법으로 보수하거나 개선이 가능한 성내 다양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마법사인 미미르가 알아볼 수 있도록 해당 문제들을 해결할 마법을 공식으로 적어 두기까지 했다.
그동안 셰인이 아룬비다에서 지내는 동안 꾸준히 준비해 온 보고서였기에, 그만큼 완성도가 훌륭했다.
"확실히 나이가 들긴 들었나 봅니다."
같은 마법사로서, 셰인은 뭐랄까. 독특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마법사는 이미 정해진 길을 걷는 반면, 셰인은 끊임없이 다른 길을 걷고자 하는 면이 보였다.
그렇다고 이미 만들어진 길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 길을 활용해 새로운 대로를 개척해 내니, 선배 마법사로서 스스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셰인은 진보적인 마법사였다.
"공식대로 따라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군요...."
언젠가 시간이 난다면 셰인과 마법에 관해 의견을 나누고 싶을 정도였지만, 당장은 해야 할 일을 우선시하기로 했다.
한편, 셰인과 펠리스는 성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젠장. 누구는 도랑이나 파고 있는데."
"그러게 말임다. 힘듬다."
"야이 근육 돼지 새꺄! 삽질 100번에 허리 한 번 펴라고 했지!"
"너무함다, 해커스."
그런 셰인과 펠리스를 바라보며 성벽 앞 도랑을 파고 있는 삼총사가 그리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펠리스가 귀를 휘적거리며 셰인에게 물었다.
"마법진 설치하러 가는 거냐?"
"그래."
지금의 사회에서 마법사가 중요한 이유다.
공성전이 벌어졌을 때, 마법사는 단순히 멀리서 마법만 팡팡 쏘는 존재가 아니었으니.
지도를 펼친 셰인은 미리 체크해 둔 지점에 찾아가 다양한 마법진을 설치하고 다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투자했을까.
첫 시작은 남들이 한참 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었다.
"황녀님. 정찰대의 보고입니다."
"음...."
며칠 동안 황실과 연합국의 중진들의 원거리 회의를 거치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서류 작업을 하느라 바빴던 아나스타샤는 두 눈을 감은 채 미미르의 보고를 들었다.
"반나절 거리서부터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감지됐다고 합니다."
"규모는?"
"...수를 헤아리기가 힘들다, 라는 보고로군요."
"그렇단 말이지...."
매년 일어나는 몬스터 웨이브는 얼추 천 마리 내외에서 일어난다.
때문에 몬스터의 숫자를 눈대중으로 맞추는 데 이골이 난 정찰병들조차도 수를 헤아리기가 힘들다는 보고를 해 온 것이다.
이제 정말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아룬비다 영지민들에게 혹독한 겨울이 시작됐다.
* * *
유려한 선을 그리며 검이 휘둘리자, 마지막까지 보고를 지키고 있던 진흙 골렘이 무너져 내렸다.
"으아앗! 이제 좀 끝내자, 망할 것들아!"
디라일라의 발 구르기 한 번에 대지가 요동치며 사방을 포위하고 있던 헤비 그렘린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발치에서 무수히 솟아난 대지의 창이 사정없이 헤비 그렘린들의 다리를 뚫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중상을 입은 헤비 그렘린들을 향해 전격 마법이 쏘아져 나갔다.
단련된 쇠로 무장된 그렘린들이었으나, 오히려 전격 마법에 의해 내부에서 통으로 그을려졌다.
한편, 한참 입구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던 전투학과의 생도들도 전투의 마무리를 지었다.
"으아! 드디어 끝났다!"
"그러게... 다들 고생 많았어. 어디 다친 곳은 없지?"
클라인의 물음에 방금까지 입구에서 침입해 오려던 그렘린을 막고 있던 알 로스가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지! 내가 누구냐, 알 로스 님 아니냐! 하하."
해맑게 웃는 그의 뒤로 큰 챙 모자가 눈에 띄는 마법사 소녀가 다가오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뒤에서 그렘린 몇 마리 상대한 게 전부면서 뭘 그렇게 대단하다는 듯 말하는 거야?"
"아니, 아르티아. 네가 마법 쓰는 시간은 뭐 거저 벌어지냐? 다 나랑 알렉스가 뒤져라 노력해서 만들어 낸 시간 아냐!"
"천박하긴. 뒤져라가 뭐니, 뒤져라가?"
"아오. 야, 알렉스. 너도 한마디 해 봐!"
"어... 아, 아냐."
"에라이."
"흥, 쟤처럼 입이라도 다물고 있으면 몰라."
"뭐래. 지도 디라일라보다 밀리면서."
"...! 너 지금 말 다 했어?"
"다 했다, 뭐!"
여느 때처럼 말싸움을 시작하는 두 사람을 보며 클라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몇 번이고 말려 봤으나, 성격상으로 안 맞는 건지.
알 로스와 마법 연합의 총관의 딸, 아르칸 T 아르티아는 저렇듯 항상 말싸움을 해 댔다.
그러면서 클라인은 둘 사이에 껴서 이도저도 못하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평범한 인상의 소년.
형님과 함께 아카데미로 돌아오던 중, 던전 웨이브로 인해 위기에 처한 마을에서 인연을 맺어 자신의 하인이 된 이였다.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막 돌아왔던 시기, 뒤뜰에서 홀로 목검을 휘두르는 알렉스의 검을 본 클라인은 알렉스에게 검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원채 열정이 뛰어나고 무기를 다루는 데 익숙한 알렉스를 클라인이 기껍게 본 것이다.
그 뒤로는 여러 던전을 함께 데리고 다니자 알렉스는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다만 마력을 깨우치는 게 늦은 탓에 마력 운용은 아직 미숙했으나, 알렉스는 다양한 무기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자신의 재능을 꽃피웠다.
"아무튼 다들 고생했어. 이제 그만 위로 올라가자."
지난 한 달 동안 클리어에 전념한 고대 드워프의 전초 기지.
기대했던 드워프하고의 만남은 없었으나, 대신 땅 밑에 지어진 전초 기지를 차지한 헤비 그렘린들과 조우한 그들은 오늘에서야 던전을 클리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기대와 다르게 드워프들의 보고에는 별다른 물건이 없었다.
"에이. 드워프제 무구 좀 들어보나 싶었는데."
알 로스가 아쉽다는 듯 그리 입맛을 다셨다.
한 달 동안 어두운 땅 아래서 고생한 것에 비해 큰 이득은 없던 것이다.
"그래도 마석은 많네."
"그러게... 어?"
그때, 디라일라는 한쪽 구석에 정사각형 모양의 광물을 발견하고는 입술을 축였다.
"저기, 나 마석은 포기할 테니까 저거 하나만 주면 안 돼?"
"음?"
"어머, 이건...."
그때, 아르티아가 광물의 가치를 알아봤는지 자세히 들여다봤다.
"으음... 마법적으로 연구할 가치는 있겠지만, 나한테는 그리 필요가 없겠네. 좋아. 나도 입찰은 포기할게."
"저게 뭔데 그래?"
알 로스의 물음에 아르티아의 설명이 이어졌다.
"형상 기억 광물. 고대 드워프들이 성벽을 지을 때 쓰는 물건이야. 지금에 들어서는 아주 드물게 발견되는 광물인데... 아직 연구가 덜 됐거든. 입찰 경매에 올리면 제법 값은 받을 수 있겠지."
"뭐, 내가 써먹을 수도 없겠네. 그럼 나도 포기."
"나도 필요 없을 거 같은데."
"음, 그럼 이건 디라일라한테 넘기기로 할게."
"오예! 고마워, 다들!"
그렇게 원정을 끝낸 일행들이 한 달 만에 밖으로 나왔을 때.
알 로스가 신문팔이 소년이 들고 있는 신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야. 클라인. 저거 네 형 아냐?"
"응?"
거기에는 대문짝만하게 셰인의 사진과 함께 이러한 글이 적혀 있었다.
[메자이아 대수림의 비밀을 밝힌 천재 마법사, 클레이튼 R 셰인. 이번에는 북부에 얽힌 오크들의 혈마법을 발견하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6화
76화 난공불락 (1)
흔히들 전쟁 전은 폭풍전야와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룬비다의 주민들에게는 일상과도 같아서, 평소처럼 날카로운 살기를 숨기고 성벽 너머를 바라봤다.
그러다 시작된 전쟁은 방금 전의 고요함이 어디로 갔나 싶을 정도로 혼란과 광기로 가득 차게 된다.
성벽 너머.
몬스터 군단이 자신들의 흉성을 해소하기 위해 성벽을 향해 다가온다.
오크 샤먼이 펼친 주술의 효과일까?
몬스터들의 눈이 밤하늘 아래서 붉은빛으로 물들어 흉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일반인들이 보면 오금이 저릴 게 분명한 광경.
하나 아룬비다의 주민들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때를 기다렸다.
그때 구름에 가려진 달빛이 아래를 비추자, 몬스터 군단의 최전선에 서 있는 몬스터들이 보였다.
시작부터 아이스 스톤 크랩이 일렬로 다가왔다.
평소 바위를 먹으며 지내는 그들의 외피는 튼튼하기가 강철과도 같았기에, 어지간한 파괴력이 아니고서야 뚫기가 힘들었다.
그런 그들의 뒤로는 성을 포위하기 위해 비교적 작은 소형 몬스터들이 주를 이뤘다.
중간중간에는 아울베어나 아이스 트롤과 같은 중형급 몬스터들이 성문을 부수기 위해 다가왔다.
그리고 가장 끝에는 사이클롭스와 오우거와 같은 대형 몬스터들이 있었다.
놈들의 손엔 큼지막한 바위가 하나씩 들려 있었는데, 놈들의 근력을 생각하면 저 정도 크기의 바위는 성벽을 지키는 대포의 사정거리와 맞먹을 정도로 날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몬스터들이 한 대 모여 오크 샤먼의 주술에 의해 더더욱 강화되니 그저 다가오는 것으로도 느껴지는 압박감이 대단했다.
이윽고 몬스터 군단이 대포의 사정거리까지 다가온 순간.
포문의 조준을 마친 포병들의 귀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쏴라!"
콰콰콰콰콰콰쾅─!!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와 같이 포문으로부터 거대한 대포알이 터져 나왔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발포음에 아이스 스톤 크랩이 몸을 잔뜩 웅크려 다가올 충격에 대비했다.
그와 동시에, 대포의 포문 바로 앞.
포탄 앞에 마법진이 전개됐다.
[가속], [중첩], [관통].
지난 며칠 동안 미미르가 밤까지 새어 가며 포문에 새겨 둔 마법진 위로 셰인의 룬어가 빠짐없이 적혔다.
날아가는 포탄이 마법진을 통과해 중첩된 가속이 붙고, 동시에 기존의 사거리를 벗어나 멀리까지 날아갔다.
그 결과 대형 몬스터가 있는 곳까지 피해가 확산되고, 바위를 던질 준비를 하던 대형 몬스터들은 대포에 의해 몸이 꿰뚫렸다.
동시에 몬스터의 몸을 뚫고 나온 포탄이 땅에 처박힘과 동시에 터지자, 그로 인한 철파편이 주변에 있던 몬스터의 몸을 또다시 관통했다.
단 한 번의 공격만으로도 몬스터 군단의 후열이 박살이 났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준비된 마법사는 무섭다고 했던가?
그러나 그런 마법사가 무섭기 위해서는, 그만한 재력도 필요한 법이다.
'황실의 금화가 좋긴 좋군.'
그 짧은 시간 안에 공수해 온 대량의 마석.
그걸 조금만 활용한다면 지금처럼 초장에 몬스터 군단의 힘을 확 빼고 시작할 수 있었다.
뒤이어 날아오는 포탄에 또다시 피륙이 허공을 날아다니자, 혈향을 맡은 몬스터들이 괴성을 지르며 그대로 달려들었다.
자신들의 야성을 숨기지 못하는 몬스터의 특성상, 놈들은 빼지도 못할 운명인 것이다.
이게 몬스터들의 한계였으나, 반대로 말하면 그렇기에 강한 점도 분명 있었다.
목숨 따위 돌보지 않는 소모전이 이루어진다면 이쪽의 피해가 훨씬 클 테니.
"개문(開門)!"
포탄과 화살의 비를 맞고 넝마가 된 몬스터 군단을 확인한 아나스타샤가 그리 외치자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리며 제국에서 수급해 온 장비를 갖춘 영주민들이 모두 달려 나갔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 동안 아룬비다에서 살아온 이들은 각자의 무기를 쥐고 달려오는 몬스터를 맞이했다.
순식간에 전투로 인한 광기가 전장을 가득 채웠다.
검사의 검에 아이스 트롤의 목이 단번에 떨어져 나가고.
팔 한쪽이 날아간 채 살아남은 오우거의 주먹질에 방패를 든 전사가 방패와 함께 저 멀리 날아간다.
사이클롭스의 발 구르기에 수십이나 되는 인간들이 넘어지며 전선이 무너지는가 하면.
수십 명이 사이클롭스에게 달려들어 기어코 그 목숨을 빼앗는다.
죽고 죽이는 전쟁이 이어지고, 밤이 지나 새벽이 되고 동이 틀 무렵.
몬스터의 피로 이루어진 강이 흐른다 해도 좋을 정도로 몬스터의 시체들이 아룬비다의 차가운 바닥을 덥히고 있었다.
한 차례 끝난 몬스터 웨이브.
수만의 몬스터가 끝내 목숨을 잃었으나, 반대로 인간들의 피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사상자의 수는 총합 200가량.
그 중에 목숨을 잃은 이의 숫자는 채 10명이 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아나스타샤와 미미르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생각보다 피해가 많은데."
고작 수천으로 수만의 몬스터 군단을 막았음에도 이러한 평가가 나온 이유는 역시 이번 웨이브가 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수색대가 확인한 몬스터의 총 수는 십만이 넘어가는 상황.
이번 웨이브에 소모된 몬스터의 수는 얼추 1만 7천여 마리로 확인되니, 적어도 이러한 웨이브가 최소 6번 이상 더 진행된다는 말이다.
그뿐이던가?
인간들의 힘이 빠지길 기다리고 있는 오크들의 존재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다만 이처럼 몬스터 웨이브가 몰아서 오게 된다면 성을 지켜야 하는 작금의 상황에 성을 보수할 방법이 마땅찮아진다.
때문에 인명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성문을 열었으나.
"지금의 상황을 본다면 이후 성문을 열 수 있는 횟수는 최대가 3번입니다."
미미르의 평가에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웨이브의 예측 시간은?"
"이틀 후, 새벽으로 판단 중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앞으로 올리시아의 선발대가 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총 열흘.
과연 그 안에 성벽을 무사히 지킬 수 있을까?
이쪽의 피해가 너무 커진다면 이후 도착할 지원군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힘들어진다.
아무리 똥개도 제 집에서 반은 먹고 들어간다 한들, 숫자의 차이를 메우기엔 힘든 일이니.
반대로 성벽이 무너진다면 지원군이 온다 해도 오크들과의 전쟁이 제대로 될 가능성이 없다.
아무리 봐도 상황이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그때, 셰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보급 품목을 바꿔야겠습니다."
* * *
겉으로는 나른해 보이는 오후.
해질녘의 석양을 바라보며 올리시아는 얼음이 동동 띄어진 티를 마시며 잠시나마 생긴 여유를 즐겼다.
이처럼 단순히 티타임을 가지는 것처럼 보임에도 고귀함이 느껴졌으나, 이는 물 위 백조와 같을 뿐이다.
실제로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새뮤얼의 가신들과 앞으로 다가올 전쟁을 대비해 힘겨루기를 하고, 물밑 정치싸움으로 치열한 시간을 보냈으니 말이다.
올리시아에게 있어서 이번 일은 첫 반기이자,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만일 이번에도 황실에서 새뮤얼의 입지에 밀리게 된다면, 도리어 올리시아의 힘이 쭉 빠져나가게 될 테니.
그리된다면 재기 불능이다.
그럼에도 이렇듯 한숨 돌릴 수 있는 이유는, 눈앞에 있는 소년 때문이었다.
"화, 황녀님. 말씀하신 다, 담당 보급의 무, 문제는 해결했습니다."
베른슈타인 가문의 차남, 베른슈타인 오스튼.
일전의 만남 이후 올리시아는 몇 번씩 오스튼과 만남을 가졌고, 그 결과 지금처럼 바로 곁에 두고 쓰는 지경에 이르렀다.
몇몇 가신들은 타국 출신의 귀족인 그가 황실에, 그것도 황녀의 직속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도 않아서 보여 준 오스튼의 유능함에 그들도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한 올리시아에게 저런 인재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오스튼이 건넨 서류를 받은 올리시아는 잠시 읽더니, 입을 열었다.
"수고 많았어요. 덕분에 저도 이렇게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네요."
"아, 아닙니다."
"그래도 여전히 속도가 느리네요... 과연 제 여동생이 그 험난한 시간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셰인이 만든 포탈 덕분에 아룬비다와의 소통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른 실정이다.
때문에 현재 아룬비다가 얼마나 태풍 앞에 놓인 촛불과 같은지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
십만 대군의 몬스터 웨이브라니.
거기에 아룬비다의 몬스터가 가진 평균 전투력이 어디 낮다고 할 수 있던가.
그러한 몬스터들이 십만이나 움직이는 와중에 무려 그들을 상대로 보름을 버텨야 하는 일이다.
처음 지어졌을 때부터 난공불락으로 지어진 비두론 성이지만 과연 자신들이 도착했을 때 멀정한 외관을 지킬 수 있을까?
그러한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튼은 황녀보다 훨씬 여유로운 얼굴로 말했다.
"괘, 괜찮을 거, 겁니다."
"음. 이유는요?"
"그곳에는 그 남자가 있으니 말입니다."
"어라, 방금은 말을 더듬지 않으시네요?"
"하, 하하. 여, 연습 중이긴 하, 합니다."
"흐음...."
황녀는 이미 오스튼이 말더듬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오스튼이 저런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내버려 두는 이유는 그게 저 자만의 처신법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라면 셰인이요? 물론 그 사람도 대단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개 한 명의 사람이 십만 대군의 몬스터 웨이브를 어찌할 방법이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으나.
"아,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 그의 재능은 다, 단순히 그 정도가 아, 아닙니다. 그가 사람을 쓰, 쓰는 눈은 정확하기가 저, 저나 황녀님 이상입니다."
"어머... 그렇단 말이죠."
이젠 제법 오스튼을 봐 온 황녀는 그가 누군가를 인정하는 모습에 나름 놀란 눈치였다.
평소 오스튼은 저렇듯 자신감 없는 모습을 일관하면서도, 결코 타인을 인정하는 언행 따위는 일절 없지 않았나.
그런만큼 오스튼의 눈동자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그럼 제가 너무 무리하며 움직이지 않아도 되겠네요?"
"마, 만약 제가 그, 그라면... 화, 황녀님께서 와, 완벽한 준비가 끄, 끝났을 때를 기다릴 것 가, 같습니다."
"그렇단 말이죠...."
본래라면 시일을 앞당겨 선발대를 보내려 했으나, 오스튼이 저렇게까지 말하니 보다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게 맞을 듯싶었다.
그렇게, 올리시아는 오스튼과 늦은 밤까지 새뮤얼의 움직임에 다양한 대응을 논하며 시간을 보냈다.
* * *
"으으아! 추, 추워!"
두꺼운 털옷을 곰처럼 껴 입은 디라일라가 생전 처음 겪어 보는 혹독한 날씨에 깜짝 놀라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 디라일라의 뒤로 클라인과 알렉스, 알 로스와 아르티아가 순서대로 포탈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들의 이어지는 그들의 표정 또한, 디라일라와 큰 차이가 없었다.
"어서 와라. 생각보다 늦었군."
일행들을 맞이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셰인이었다.
평소 언제나 깔끔한 모습을 유지해 온 셰인이 약간은 초췌해진 모습으로 그들을 반겼다.
그런 셰인의 뒤로는, 여전히 전투가 진행 중인지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반파된 비두론 성벽이 보여지고 있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7화
77화 난공불락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