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인류의 그림자
독자적으로 개발한 공식을 풀어 버린다는 행위는 일반적인 마법사들의 관점에서 큰 손해라고 볼 수 있었다.
마법사란 무릇 자신이 만들어 낸 마법을 통해 이름을 알리고, 그 비밀을 잘 간수해 뒀다가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때문이다.
허나 셰인은 그런 일반적인 마법사로 살아갈 생각이 없기도 했고.
애초에 이 정도 공식은 마탑의 장로급 마법사들이 엘프들과 접촉하게 되면 금방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니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려질 거, 차라리 정보를 풀어 마법사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크게 봤을 때 명성에 더 큰 도움이 됐다.
"허허, 우리 마탑에도 홍복이 찾아오겠어."
케이튼이 껄껄 웃었다.
'부럽다! 앞으로 이 소년의 명성은 오래토록 이어지겠구나.'
마법사는 물론 금욕도 대단하지만, 그만큼 명예욕도 중요시하는 이들이다.
비록 셰인이 이번에 알린 공식은 기초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기초적인 만큼 근본에 가장 가까운 것이었다.
이후 정기와 관련된 마법이 발전할 때마다 셰인이 만든 공식이 그 밑바탕으로 깔린다는 의미이니, 이는 셰인의 명성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널리 이어질 것이다.
그것도 고작 1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말이다.
'난 저때 뭐 하고 살았더라?'
물론 이제 한 마탑의 장로가 된 만큼 케이튼도 결코 젊은 시절 방탕하게 보내 온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셰인과 비교하면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케이튼이 자아성찰에 들어간 사이, 셰인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케이튼 님. 저번에 말씀드린 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됐습니까?"
"아, 그거 말인가. 안 그래도 자네가 무사히 귀환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착수에 나섰네. 아마 진행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은 없을 것 같군. 엘프 측의 허가만 있다면 대수림에서 정기를 추출할 마법사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걸세."
일전, 셰인은 케이튼과 함께 연구를 진행했을 당시 몇 가지 사업을 제안했었다.
대표적인 사업은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엘프들의 도움을 받아 정기를 추출하여 판매하는 것.
이후 정기를 이용한 회복 마법 스크롤을 만들 예정인 셰인은 분명 이게 먹힐 만한 사안이라고 판단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정기가 담길 마법 플라스크를 개발할 마법사들의 영입이었는데.
이런 부분에 있어선 이런저런 사업을 진행해 본 장로 마법사인 케이튼이 이 일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하지만 보다 수월하게 하려면 자네의 도움도 필요할 걸세."
"이번 기회에 연회에 참석하면 되겠습니까?"
"척하면 척하고 알아듣는군. 하하, 맞네."
케이튼의 인맥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칠 테지만, 메자이아 대수림이 개방된다면 그곳에 파견 나갈 마법사들을 설득할 인물도 필요했다.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는 이곳에 머물며 돕겠습니다."
"음, 그래 주게나. 그런데 이후 따로 일정이 있는가?"
"예. 곧 계급 심사가 있지 않습니까."
"아아, 그렇군."
연합국에서 주도하는 계급 심사.
이 때문에 아카데미에서도 5년차에 들어선 생도들이 지금도 바쁘게 준비하고 있을 터.
1년에 단 2번밖에 없는 이벤트이니만큼 케이튼도 이해했다.
"그럼 오늘부터 바로 연회에 참석할 생각인가?"
"굳이 일을 미룰 필요는 없겠지요."
"알겠네. 그럼 나도 짧게 준비를 마치고 움직이도록 하지. 같이 가세나."
"예, 알겠습니다."
* * *
전생에 셰인은 연회와 썩 인연이 없는 편이었다. 아니, 오히려 악연만 가득했었다.
때문에 연회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 또한 일로 치부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전생과 다르게, 이번 생의 연회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셰인이지 않은가.
어느새 연회가 지속된 지도 5일차.
마지막 날이니만큼 앞서 다른 날보다는 참여한 마법사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덕분인지 며칠 동안 케이튼의 소개로 마법사들과 연을 맺던 셰인은 시간이 남아 홀로 테라스에서 포도주를 마셨다.
'이제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챙겼나.'
메자이아 대수림이 개방되기까지 필요한 준비는 모두 끝냈다.
이제 엘프들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본격적으로 인간과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면 굳이 셰인이 나서지 않더라도 추가적인 이득이 절로 굴러 들어올 터.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이번 연회에서 만나길 기대했던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바쁜 와중에도 중간중간 이렇듯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음에도 기다리던 인물이 나타나지 않자, 머릿속에 계획을 다시 한번 정리하려 할 때였다.
"안녕하세요, 신사분?"
별안간 기다렸던 목소리가, 셰인의 뒤에서 들려왔다.
* * *
겉으로 보기에 현 제국은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 중이다.
실제로도 대외적으로 제국에 반하는 세력은 없었고, 계속되는 경기의 호황으로 국민들 또한 안락함을 느끼고 있었으니.
그러나 제페르 디 아르샤 올리시아, 현 1황녀는 지금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8년 전. 다음 황제로 내정되었던 올리시아의 첫째 오빠인 황태자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비어 버린 황태자의 자리에 누가 앉을지에 대한 치열한 정치 공방이 오가고 있는 상황.
게다가 황제는 섣불리 후계를 지목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님이 유유부단하신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오라버니가 너무 노골적인 게 문제야.'
황제는 반신반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사람의 본성을 읽는 데 탁월한 재능을 타고 난 올리시아는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둘째 오라버니, 제페르 디 와이어트 새뮤얼은 교활한 뱀과 같은 사람이다.
그것도 극독을 품고서 수풀에 몸을 가리고 숨어 있는 뱀.
그러나 황제조차도 반신반의하고 있을 만큼, 평소 새뮤얼은 제 아버지를 닮은 인자한 웃음으로 주변에 녹아들어 있었다.
때문에 새뮤얼은 귀족들 사이에서 이미 황태자라 불리고 있으나....
올리시아는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상황적으로 여의치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이미 자신의 쌍둥이 동생인 아나스타샤 또한 섣불리 새뮤얼에게 이빨을 들이댔다가 지금은 북방으로 내몰리지 않았던가.
혹독한 날씨가 사시사철 이어지는 그곳에서, 매해 몰려오는 몬스터 웨이브를 막고 있으니 외부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을 터였다.
'그래도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지.'
그렇기에 올리시아는 몸을 잔뜩 낮추고, 이후 자신의 힘이 될 인재를 모으러 다니고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황실에 들어온 귀족들이 그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관점이 바뀌었다.
황실의 권력도 권력이지만, 실상 국제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이들은 연합국에 소속된 귀족들이었으니.
자연스럽게 올해부터는 그런 귀족의 자제들이 모이는 연합국 아카데미에 시선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여러 인재들이 눈에 띄었고, 그중에서 한 소년이 깊게 각인되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져 어깨 바로 아래까지 내려왔고, 짙은 로즈베리색 눈동자에서는 감정의 고저가 느껴지지 않았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와인 잔 안으로 그의 눈동자 색과 같은 포도주를 흔들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바로 이 소년.
클레이튼 R 셰인.
무려 100년 만에 개방된 요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젊은 천재였다.
"안녕하세요, 신사분?"
올리시아의 말에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수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장인의 손길에 의해 탄생한 이 와인보다도 존귀한 자를 뵙습니다."
단순한 움직임과는 다르게 그 태도에서는 품위와 절도가 느껴졌다.
"어머. 저를 알아보시나요?"
예상외인 것은, 다른 이들의 관심을 피하기 위해 올리시아가 가면을 쓰고 있었음에도 셰인은 자신을 바로 알아봤다는 것이다.
"제국의 꽃이라 불리시지 않습니까. 세상에 단 둘밖에 없는 분을 잊을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이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네요. 그때 아카데미의 복도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죠?"
"예."
올리시아는 셰인의 반응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기복 없는 표정이라 감정을 읽기 힘들긴 했으나, 그렇다고 피하는 모습은 아니었으니.
그런 올리시아는 셰인을 보면 볼수록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여태껏 어떤 사람이든 잠깐이라도 마주해 보면 어렵지 않게 그 사람의 성향을 읽을 수 있었지만.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셰인에게서는 조금의 내면도 엿볼 수 없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기에 잠시 침묵에 빠져 그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셰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제가 제국의 꽃이라 과분하게 불리고 있지만, 꼭 꽃이 벌을 기다리고만 있으라는 법은 없잖아요? 그래서 찾아왔답니다."
"과감하시군요. 하지만 아쉽게도 원하는 답변은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 셰인의 말에 올리시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역시 오라버니가 먼저 선점한 건가?'
나름 새뮤얼의 눈을 피해 인재를 영입하려 했던 시도는 무산되는 듯했다.
어쩐지 이만한 인재가 있음에도 새뮤얼이 직접 수를 쓰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아쉽게도 저는 저지먼트 기사단의 아네이스와 약혼을 한 사람입니다. 또한, 제가 찾는 사람도 따로 있지요."
"그렇... 군요."
이건 몰랐던 소식이다.
저지먼트 기사단이라면 최근 오라버니의 행보를 지지하고 있는 황실의 기사단이지 않나.
백사자의 오러를 휘두른 그들은 본래라면 정치적인 성향을 띄워서는 안됐으나, 7년 전. 그들의 단장이었던 린트베르크 K 로버트의 사망 이후부터 그와 정반대되는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 로버트 단장의 딸과 약혼을 했다라.
셰인을 놓친 것은 아쉬운 일이었으나, 생각보다 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정보를, 이 사람이 괜히 줬을까?
올리시아의 본능이 그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또 해 주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예. 저는 대외적으로 가문에 얽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동생은 아닙니다."
"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무력을 챙기십시오."
"...좋은 말씀이네요."
물론, 클라인 또한 그녀가 생각하던 인재 중 한 명이긴 했다.
오히려 셰인이 제대로 이름을 알리기 전에는 클라인을 위주로 보고 있었으니.
"그리고 그림자 밑을 잘 보셔야 합니다."
"그림자... 밑이요?"
"예. 생각보다 바닥에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한 귀물들이 떨어져 있기 마련이니까요."
"음...."
언뜻 듣기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철저한 정치 싸움으로 가득한 황실에서 새뮤얼의 눈을 피해 남몰래 자신의 세력을 챙기고 있는 올리시아는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림자, 바닥.
때마침 이 연합국에는 인류의 그림자라 할 수 있는 도시가 있지 않던가.
바닥 아래, 지하도시라는 존재가.
그리고 그 저지먼트 기사단원 중 한 명이, 최근 지하도시의 한 축을 담당하던 살리에르 백작의 저택에서 숨을 거뒀다.
대외적으로도, 황실에서도 그 사건은 저지먼트 기사단이 또다시 제국의 어둠을 바로잡았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올리시아 또한 무언가 석연찮은 기색을 느끼긴 했으나, 큰 틀에서 벗어나진 않았으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듣고 보니 아무래도 무언가 미심쩍음을 느꼈다.
'살리에르 백작은 한때 이름 있는 상단을 운영했었는데. 클레이튼 가문 또한 거대한 상단을 운영 중이야.'
그런데 그 클레이튼 가문의 자제와 저지먼트 기사단의 영애가 엮인다라.
이걸 과연 우연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적어도 올리시아는 그렇지 판단하지 않았다.
이는 분명 귀중한 정보였다.
저지먼트 기사단이 지하도시와 얽힌 정황이 포착된다?
황실의 이름에도 악영향을 끼칠 터였으나, 그만큼 큰 약점을 잡는 것이라 봐도 좋았다.
저지먼트 기사단은 오라버니의 수족 중 가장 큰 손일 테니.
'그런데 왜 이걸 나한테?'
올리시아의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분명 귀한 정보였으나, 그걸 말하는 이가 바로 그 당사자인 셰인이었으니.
어떤 목적으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 준 걸까?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섣불리 믿기에는 힘들었으나, 그렇다고 아예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
자신을 옮아매겠다는 이유로 새뮤얼이 함정을 파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저지먼트 기사단을 내건다?'
그 교활한 새뮤얼이 할 도박은 아니었다.
적어도 새뮤얼 또한 아직 올리시아가 가진 황실에서의 발언권을 우습게 볼 정도는 아니라 판단하고 있을 테니.
오랜만에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가고 있는 와중에, 셰인이 입을 열었다.
"이런 일에 대해 도움이 되는 친구를 알고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천 리 밖의 세상을 내다보는 녀석이지요."
"...네?"
"베른슈타인 후작 가문의 차남을 만나 보시지요. 그리고 반드시 그를 영입하셔야 합니다. 결코 쉬운 녀석이 아니니 너무 마음 놓으시면 안 됩니다."
"그게 무슨...."
"그럼 전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뵐 때는 보다 서로의 진실된 모습으로 마주하길 바라겠습니다."
가뜩이나 복잡한 마당에 무슨 소리냐 묻기도 전에 셰인이 자리에서 떠났고, 홀로 남은 올리시아는 단아한 머리를 헝클었다.
"하아. 어렵네, 어려워."
기껏 와서 인재를 낚아 보려던 올리시아는 뜬금없이 떠맡은 숙제에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는 셰인이 남기고 간 와인잔을 들어 한 번에 입에 털어 넣고는 자세를 바로 하고 하늘 위에 떠 있는 달빛을 바라봤다.
'클로이 오라버니... 왜 그리 일찍 떠나셨나요. 올리시아는 너무 어렵네요. 이것저것. 모든 게.'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가면 같은 미소가 아닌 진짜 자애로운 미소로 자신을 바라봐주던 첫째 오라버니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54화
54화 불손한 의도
보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드디어 엘프들이 메자이아 대수림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라비아타를 통해 한 차례 외부로 연락이 갔던 터라, 대수림의 앞은 소문의 엘프를 보려는 인파로 북적북적했다.
거기에 각종 기자들이 취재를 위해 이미 며칠째 자리를 잡아 두고 텐트를 친 상태였고, 그 사이에는 마법사들도 여럿 있었다.
"엘프들이 그렇게 아름답다던데."
"고대 문헌에도 그렇게 나와 있었고, 실제로 귀족 나으리들 소문들을 들어 보면 보통이 아니라더라고."
그저 구경을 위해 몰려든 하이엘 왕국의 국민들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이렇게 흥분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허허, 그렇게 말이야. 엘프들의 마법이라니."
"듣기로는 정령술에도 조예가 깊다는데, 꼭 좀 들어 봤으면 좋겠구먼."
나이 든 마법사들은 주책이라 불릴 만큼 흥분된 상태로.
"이야, 이거 몇 달 간은 메자이아 대수림과 관련된 기사만으로 살아도 되겠어."
"왜 안 그러겠어. 이제 라비아타라는 이름만 올려도 팔려 나갈 텐데."
기자들은 이후 벌어들일 수익을 기대하며 메자이아 대수림의 입구를 바라봤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른 새벽이 지나가고 서서히 해가 그 모습을 보일 때, 숲의 경계선으로 연녹빛이 흘러나왔다.
"어어!"
"와아!"
인파들의 환호와 함께, 대수림을 가리던 수풀이 저절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사슴과 다람쥐, 다양한 새들이 등장하며 그 가운데 엘프 여왕 프리실라와 그 곁을 따르는 장로 엘프들이 등장했다.
"와...."
"어우, 저건...."
"저, 저게 진짜 존재할 수 있는 외모라고...?"
과연 여신이 존재한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소문의 엘프를 구경하기 위해 몰린 인파들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기자들조차도 사진 찍는 것조차 까먹은 채 멍하니 엘프들의 자태를 바라보기만 했다.
마법사들도 그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그래도 그들은 금세 프리실라의 주변으로 무형의 마력이 퍼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흥미로운데."
"그러게 말이야. 저것도 엘프들의 마법과 관련된 건가?"
"고서에 나오는 서큐버스들의 매혹과는 좀 다른 거 같은데...."
"신기하구먼."
스스로를 지식인이라 자부하는 이들인 만큼 프리실라의 외모에 감탄하기도 잠시, 금세 마법적 학구열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인간 여러분. 저는 엘프들의 여왕, 프리실라라고 한답니다."
마치 아기 새가 우는 듯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기자들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기 바빴다.
다만 이전처럼 막무가내로 달려가 인터뷰를 진행하지는 못했다.
프리실라가 은연중에 내뿜는 감히 범접하기도 힘들 정도의 분위기도 분위기였으나, 무엇보다 기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이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연합국에서 보내온 사절단.
제아무리 기자들이 국민의 알 권리를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들만큼은 예외였다.
알 권리를 외치는 목이 쥐도 새도 모르게 떨어질 줄 누가 안단 말인가.
기자들은 목숨을 아낄 줄 아는 이들이었다.
"크, 크흠. 환영합니다. 숲의 종족들이여. 이 늙은이는 이번 사절단의 대표를 맡은 일라이자 J 카터라고 합니다."
"네, 만나서 반가워요. 일라이자라고 부르면 될까요?"
"편하실 대로 불러 주시면 되겠습니다."
카터는 노련한 정치 귀족답게 프리실라의 외모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고로 들었던 것처럼 미혹과 비슷한 마법을 쓴다는 사실을 파악하고는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보아하니 쉬울 것 같지는 않군.'
고대에서나 잘나가던 이들인 줄 알았더니....
예상외로 프리실라의 행동은 하나하나가 인간 귀족들의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
단순히 여왕으로서의 품격이 아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예법까지 온몸에서 습관처럼 보일 정도이니.
이는 이미 인간 사회의 예의를 파악했다는 것이다.
한 종족을 이끄는 여왕이 저 정도로 준비를 해 왔으니 어찌 긴장을 하지 않을까.
이 정도 눈치도 없었더라면 카터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올 일도 없었다.
하지만 카터는 너무 인간적인 발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상대는 무려 고대에서부터 살아남은 종족이었고.
그들이 가진 무력의 과시는 인간의 상식을 깨 버리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어머. 그게 카메라, 라는 마도구인가요? 정말 신기하네요."
"헙."
카터와 가볍게 인사를 마친 프리실라는 그리 멀리 있지 않던 기자의 카메라를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
"음, 그러고 보니 기자 여러분은 그 카메라라는 것을 이용해 대중들에게 정보를 알린다고 했던가요? 괜찮다면 기자님에 한해서 딱 하나. 질문을 허용할게요."
"그건...."
프리실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카터가 곤란함을 보이기도 전에, 기자는 잽싸게 입을 열었다.
"에, 엘프들은 인간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바란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물론이죠. 저희는 인간 여러분이 기원전이라 부르는 고대 때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만 힘을 발휘했답니다."
그런 프리실라가 안심하라는 듯 카메라를 바라보며 그리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기자가 넋을 잃고 카메라를 작동시키려는 순간.
"그래서 말씀드리고 싶어요. 우리 엘프들은 엘프에게 우호적인 분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만... 그 반대가 된다면 어떻게 되는지를."
"예? 그게 무슨...."
그때, 프리실라가 가볍게 허공에 손을 내젓자 뒤로 우거진 나무의 뿌리가 땅을 박차고 올라왔다.
"흐억!"
"저, 저게 뭐야!"
그리고 그런 나무의 뿌리에는, 열댓 명의 복면을 쓴 이들이 꽁꽁 묶여 있었다.
이미 생을 마감한 듯 보이는 그들은 축 늘어진 채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계신 여러분처럼 친절하고 인내심이 깊은 분들만 계시지는 않은 모양이에요. 안타깝게도 저들은 우리 엘프가 그저 팔아먹을 상품처럼 보였던 것 같아요."
그때, 아직까지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던 것일까.
뿌리에 속박된 이들 중 한 명이 꿈틀거렸다.
"사, 살려... 살려 주어...."
가늘지만 생존을 향한 갈망을 내비쳤으나.
복면의 사내에게 돌아온 것은 거친 나무의 뿌리 한 가닥이었다.
단숨에 목에 휘감긴 뿌리가 사내의 목을 비틀고는, 이내 다시금 땅 밑으로 모습을 감췄다.
한 번에 십수 명의 시신들이 사라졌다.
"본래라면 산 채로 우리 아이들의 거름이 되도록 했겠지만...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그걸... 아. 생매장이라고 하던가요? 윤리에 벗어난 일이라고 들어서. 친히 생은 마감시켜 줬답니다."
무섭다.
기자는 분명 아까와 똑같이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프리실라의 얼굴을 보면서도 이전과 다르게 온몸에 소름이 돋고 땀이 흘러내렸다.
"인간 여러분. 다시 한번 말씀드릴게요. 우리 엘프들은 여러분과 적대할 생각이 없답니다. 우리는 그저 과거처럼, 우리의 영역에 허락 없이, 불손한 의도를 가지고 오시지만 않는다면... 여러분을 환영하겠습니다."
그런 프리실라의 모습에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아름다운 외모가 가지고 있는 역사는, 과연 고대에 걸맞은 잔혹함이 깃들어 있음을.
"그럼, 재차 말씀드릴게요. 어서 오세요, 인간의 사절단 여러분."
그러면서, 프리실라는 무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험가와 기사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호위 받듯 멍하니 서 있는 카터를 향해 짙은 미소를 지었다.
* * *
엘프들의 등장으로 연합국이 다시 한번 크게 진동했다.
많은 사람들은 벌써부터 인간과 엘프 사이에 전쟁의 조짐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싶었으나, 다행히 프리실라가 일으킨 사건은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실상 이는 연합국의 실수나 체면 문제도 있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연합국 또한 엘프들의 등장으로 그들을 납치하려는 일단의 무리가 분명 등장하리라 예상했다.
하여 긴 경계선을 만들어 침입자가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 뒀으나, 일단의 무리들은 그마저도 예상했는지 사방으로 긴 땅굴을 파고 메자이아 대수림에 침입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엘프의 납치를 한 번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기에 벌인 일이었으리라.
앞서 연합국에서도 대대적으로 자신들이 감시하고 있으니 무단으로 메자이아 대수림에 침입하지 말라 경고를 했음에도 생긴 일이니.
그 외에도 여러 정치적인 문제로 일이 마무리되었고, 의외로 살벌했던 첫 만남과는 다르게 사절단은 자신들의 일을 잘 마무리하고 성공적으로 엘프들과의 동맹을 맺게 됐다.
물론 이후로도 조율할 일이 많을 테니 회담은 끊임없이 이어질 터였으나....
셰인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 알기도 했거니와, 애초에 지금과 같이 이미지를 굳히라 했던 것은 셰인이 프리실라에게 직접 해 줬던 조언이었으니.
절벽에 핀 꽃.
셰인이 원하는 인간들 사이에서의 엘프들의 이미지였다.
한편, 셰인은 보름 만에 돌아온 아카데미를 별 어려움 없이 활보하고 있었다.
유명세와 달리 셰인에게 직접 다가오는 이들은 없었다.
이미 메자이아 대수림과 관련해서 궁금한 것은 클라인과 디라일라, 아네이스에게 한참 동안 물어보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굳이 나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셰인에게 다가가 물을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시선이 꽂히는 것까지는 피할 수 없었는데, 이는 교무실에 들리기까지 쭉 이어졌다.
"아, 어서 오게, 셰인."
그런 셰인을 반긴 인물은 리바이 벤자민. 학과시험에서 시험관을 담당했던 지휘학과 수석교수였다.
"이것 참. 물어보고 싶은 게 많지만, 안 그래도 자네 또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 같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닐세, 아니야. 오히려 감사는 이쪽이 해야지. 인류의 긴 숙원 중 하나를 풀어 주지 않았나. 교수로서 이런 말을 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 또한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자네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네."
"교수님 또한 훌륭한 모험가를 많이 배출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런. 그래도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아서야 쓰겠나. 하하! 항상 무표정한 자네가 아부도 할 줄 아는군. 아무튼 말이 길었네. 여기, 자네가 찾던 것일세."
"예.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벤자민이 내민 것은 계급 심사와 관련된 서류였다.
이미 계급 심사는 진행 중이었고, 셰인은 다른 곳에서의 일정을 처리하느라 유독 늦게 찾아온 케이스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시기가 늦어 괜찮은 파견 의뢰는 대부분 빠져나갔네. 자네가 보고 있는 게 전부이지."
아카데미에서 개별적으로 보는 시험과 다르게, 계급 심사는 연합국에서 배정되는 파견 의뢰를 수주해야만 했다.
이는 셰인이 아무리 대단한 업적을 세웠다 한들 벗어날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굳이 그런 게 아니더라도 셰인은 이번 파견의뢰를 피할 생각이 없었다.
그야, 셰인이 그리고 있는 인류의 미래에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 그곳에 있었으니.
"남은 건 세 군데 정도로군요."
"맞네. 대부분 남들이 기피하는 파견 의뢰지."
그러면서 벤자민은 어딘가 기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굳이 추천한다면... 북방의──."
"여기가 좋겠습니다."
"음?"
벤자민이 무어라 말을 마치기도 전에, 셰인은 벤자민에게 받은 파견 의뢰 서류 중 하나를 골라 책상 위에 올려 뒀다.
[북방 강철의 숲, 아룬비다의 비두론 성벽 전초기지 파견 의뢰서]
현 시점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그녀와 만나려면 지금이 최고의 적기라 할 수 있었다.
훗날 북방의 난이라 불렸던 제국 최대 규모의 반란을 주도한 제국의 두 송이 꽃 중 하나.
제페르 디 나타샤 아나스타샤를 만나기에는.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55화
55화 두 번째 놀이
"흐음."
셰인은 오랜만에 아카데미 도서관을 찾아왔다.
여기저기서 꽂히는 시선을 무시하고 서적 하나를 찾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셰인이 선택한 서적은 '제국의 역사'.
앞으로 가게 될 북부에 관한 정보를 훑어보기 위함이었다.
제국의 건국 이래, 제국이 크게 흔들리는 사건이 여러 번 있었다.
그중에서도 대전쟁과 흑마법 토벌전처럼 전 대륙이 떠들썩해지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제국 자체가 흔들린 사건들도 여럿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제국의 북부, 아룬비다 지역에서의 일이었다.
'오크 군단의 침략.'
감히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오크 군단이 제국의 수도를 향해 남하한 사건이었는데, 이때 당시 제국은 북부 영토 전체의 75퍼센트를 오크들에게 내줬던 전적이 있었다.
그야말로 난리가 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당시만 해도 오크를 우습게 생각했던 제국의 황제와 정치 귀족들은 부랴부랴 군대를 일으켜 오크들을 물리쳤다.
그 전쟁에 소모된 시간만 하더라도 1년.
제국의 땅에서 오크의 흔적을 완전히 뿌리 뽑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3년이 훌쩍 넘었다.
복구에는 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이유에서, 제국은 북방의 아룬비다 지역에 비두론이라는 이름의 성을 세웠다.
일종의 전초기지였는데, 다시는 이전과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아냄과 동시에, 오크들의 본거지를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몇 차례 제국의 군대가 나서기도 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시도 때도 없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혹독하고 드넓은 산맥에 군대를 일으키는 것부터가 무리한 감행이었다.
거기에 틈만 나면 달려드는 오크들의 군세에 인간들은 속수무책.
그에 더불어 산맥에서의 오크들은 남하했을 당시보다 더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보급조차도 쉽지 않아 결국 몇 차례나 이어진 토벌은 무산으로 돌아갔고, 지금의 상황이 50년가량 이어진 것이다.
때문에 지금도 이따금씩 50년 전 오크들이 일으킨 공포를 떠올리는 인간들이었으나.
'인간은 망각의 생물이지.'
지난 50년 동안 이상 없이 평화가 이어지자, 인간들은 당시의 위험을 망각했다.
기억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 오크의 군단이 다시 한번 남하하게 된다.
그뿐이던가?
그 타이밍에 하필 북부를 책임지던 2황녀, 제페르 디 나타샤 아나스타샤가 반란을 일으키게 되면서 제국은 한 차례 홍역을 치르게 된다.
'반역의 황녀라.'
사실 북부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셰인도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애초에 그 사건은 조직이 관여되어 있지도 않았고, 조직은 제국의 북부에 관심이 아예 없었으니.
'굳이 관심을 둘 이유가 없는 곳이라 했지.'
북부는 조직에게 있어서도 애매한 지역이었다.
단순히 혹독한 환경이라 굳이 건질 게 없다는 이유가 아니다.
조직은 몬스터가 위치한 곳, 이종족이 위치한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조직 아래 머물도록 만들었으니, 원래대로라면 오크 또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조직은 의도적으로 북부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으니, 애초에 오크라는 종족 자체가 이미 주인이 있는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산왕.'
북부의 산맥을 통째로 쥐고 있는 어느 한 존재가 조직의 발걸음을 막아선 것이다.
다만 전생의 셰인은 굳이 조직이 건드리지 않는 지역에 대해 알아보지 않아서, 대략적인 정보만 파악해 뒀었다.
그저 고대시대 이전, 신화시대서부터 이어진 '산왕'이라는 존재가 어떠한 연유로 오크라는 종족을 통솔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때문에 아직 파견을 가기까지 시간이 제법 남아 있으니, 그전에 정보를 좀 더 수집하고 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뒤로 조금 더 아카데미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던 셰인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여, 여기 계셨군요."
말더듬이 천재, 베른슈타인 오스튼이 어느새 셰인의 뒤에 서 있었다.
* * *
지휘학과에 들어오고 지휘자로서 팀원을 구한 오스튼은 최근 공략 대상이 된 던전과 관련된 서적을 읽고 있었다.
이미 머릿속에 다 들어온 정보였지만, 멍하니 있기 보단 책을 읽으며 계획을 정리하는 게 오스튼의 습관 중 하나였다.
그렇게 그날도 평소처럼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늦은 밤. 오스튼은 언제나 도서관에서 가장 마지막에 나가는 생도였다.
그래서 별명도 도서관 말더듬이라 불리지 않던가.
평소라면 지금쯤 읽던 책을 정리하고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을 시간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아카데미의 귀빈실.
평소라면 이 주변조차 올 일이 없는 오스튼은 드물게 놀라고 있었다.
"음, 그 사람이 말한 것처럼...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보리밭을 떠올리게 만드는 백금발의 머리카락과, 숲 속 비밀스럽게 존재하는 연못 같은 에메랄드 눈동자.
그저 앉아서 찻잔을 들고 있을 뿐임에도 고고하게 보였으며, 유약해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풍기는 분위기에서는 자연스러운 고귀함이 느껴졌다.
'...제국의 두 송이 꽃. 제페르 디 아르샤 올리시아.'
공석에서는 얼굴조차 보기 힘든 1황녀가 왜 자신을 찾아온 걸까.
아니, 이유는 이미 파악했다.
애초에 저 황녀와 눈을 마주하자마자 오스튼은 알 수 있었다.
이 여자는,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두터운 가면을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사람에 대해 파악하는 게 일상인 그런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은 저 여자도 진즉에 파악했을 터.
하지만 찾아온 이유를 알아낸 것과는 다르게, 어떤 연유로 자신을 찾아왔단 말인가.
옅은 경계심과 함께 오스튼이 입을 열었다.
"화, 황송합니다. 황녀님. 그, 그런데 그 사, 사람이라 하면. 누구인지 무, 물어도 되겠습니까?"
"음... 클레이튼 가문의 장남이에요. 따로 만날 일이 있었는데, 당신의 이름을 들었거든요."
"아."
그제야 오스튼은 뭔가 막혀 있던 것이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안 그래도 바쁠 사람이야. 나를 소개한 이유는... 뭔가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건데.'
일단 황녀와 얽힌 일이다 보니 정치적인 색을 띠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셰인이 황녀와 얽힐 일이 무엇일까.
아직 대외적으로 셰인이 아네이스와 약혼을 맺었다는 것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터라, 해당 정보를 모르는 오스튼은 생각의 경로를 달리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 대수림 탐사에서 황실의 호위 기사단이 전멸했다고 했던가?'
순식간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오스튼이 알기에 최근 황실의 많은 기사단이 은연중에 현 황태자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호위 기사단 또한 그럴 확률이 높았다.
만약 셰인과 호위 기사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면,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스튼이 셰인의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않으나, 호위 기사단은 전멸했음에도 셰인과 함께 간 팀원들은 모두 무사하지 않았던가.
좋은 사이였더라면 호위 기사단이 전멸하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황태자와 대립하는 구도를 가지고 있다는 건데. 나를 통해 1황녀를 지지하라는 말인가?'
뭐가 됐든 오스튼에게 있어서 나쁠 일은 아니었다.
셰인이 그린 그림이 무엇이든, 오스튼은 눈앞의 황녀가 제법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을 만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보고 그림자 밑을 잘 보라고 일러 주더군요. 바닥에는 사람들이 놓친 귀물이 떨어져 있다던가요? 그와 관련해서 당신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고 조언했어요."
어찌보면 웃기는 일이다.
셰인도 그렇고 오스튼도 그렇고.
둘 다 생도의 신분이지 않은가.
황실의 정치가 그리 만만한 것도 아닌데, 고작 생도의 말만 듣고 행동하다니.
어찌 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그 일을 행한 사람이 1황녀, 올리시아라면 달랐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나만큼은 자신 있던 그녀의 눈엔 눈앞에 있는 오스튼이 만만한 사람은 아니라 생각이 들었으니.
"당신 보고 앉아서 천 리를 내다보는 사람이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도움을 좀 받을까 싶어서 찾아왔어요."
"그, 그렇군요. 제가 어, 어떻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한편, 오스튼은 올리시아의 말을 듣자마자 셰인이 말하는 의미를 간파했다.
'지하도시에 황태자와 관련된 무언가가 있다는 거구나.'
그게 황녀와 관련이 있다면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일 게 분명했다.
'지하도시와 최근 일어난 스캔들은... 살리에르 백작. 그래, 그자가 있었어. 도하도시에서 이종족 노예로 장사를 하고 있다 했었고. 거기에 셰인, 그 사람이 메자이아 대수림으로 떠나기 전에 엘프 하나를 데리고 갔었다 했지. 손가락이 몇 개 없는 엘프를... 바로 그 전에도 귀족 하나가 살해당했고.'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진 오스튼은 도대체 셰인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귀족 살해자라니?
셰인이 직접 죽였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으나, 어찌 됐건 연관이 있다고 확신했다.
이건 위험해도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니지 않나.
'재미있는데.'
하지만 반대로 오스튼은 심장이 멋대로 날뛰는 것을 느꼈다.
"지, 지하도시의 노예 시장. 그, 그쪽을 파다 보면 무언가 나, 나올 것 같습니다."
"지하도시의... 노예 시장이요? 아...."
거기까지 들은 올리시아는 무언가 깨달은 것이라도 있는지 두 눈을 반짝였다.
'이 멍청이!'
그제야 살리에르 백작이 노예를 다뤘다는 것을 떠올린 올리시아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오스튼이 도달한 결과까지 이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눈앞에 있는 오스튼에게 적지 않은 감탄을 했다.
고작 몇 마디를 나눴다고 저런 조언을 하다니?
이건 정말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보석이지 않은가.
올리시아는 잠시 두 눈을 감았다. 번들거리는 욕망을 자제하기 위함이었다.
그와 동시에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셰인은 이미 너무도 유명해졌지만, 오스튼은 아니지 않은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인재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분명 오스튼의 존재는 언젠가 올리시아의 가장 날카로운 검이 될 것이다.
오스튼 또한 재미있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한 조언으로 이 황녀님은 곧바로 무언가 바로 깨달은 눈치이지 않은가.
오스튼은 적당히 멍청하거나 적당히 똑똑한 사람이 조종하기엔 편하다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하나 자신이 한 조언을 곧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처음 겪어 보는 유형이었다.
당장 학점을 위해 꾸린 팀원들 또한 오스튼이 한나절을 설명해야 알아듣지 않던가.
그렇게 한 사람으로 인해 만들어진 두 사람의 인연이 어떤 결과를 만들지.
그 미래는 오직 단 한 사람만 알고 있을 터였다.
* * *
"이젠 굳이 말더듬이 연기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보는데. 서로 알 만한 사이가 아닌가?"
셰인의 말에 오스튼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 그런 거치고는 우리가 그리 많이 만난 사이는 아, 아니지 않습니까?"
"너에게 만난 횟수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텐데."
"...."
애초에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오연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셰인의 모습을 본 오스튼의 눈가에 웃음이 어렸다.
"이거, 그래도 쑥스러운 건 어쩔 수 없군요. 이런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건 처음인지라."
"그렇겠지. 넌 조심성이 많은 인간이니."
"흐음... 제 착각이 아니라면, 어째 저에 대해 잘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착각은 아니다. 너라는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라 자부할 수 있지. 그 유명한 1황녀보다도 말이야."
"하하. 여러모로 재미있습니다. 여태 말 몇 마디 주고받고도 당신이라는 사람은 영 파악하기가 힘들어요. 마치... 안개. 예. 검은 안개가 가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비슷하게 맞췄군."
"예?"
"오스튼. 너는 진정 너에게 마력이 없다고 생각하나?"
"...."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오스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태생적으로 마력 불능자로 태어난 오스튼은 단 한 톨의 마력도 느낄 수도, 쌓을 수도 없었다.
"예. 이미 찾을 수 있는 고서란 고서는 다 찾아봤습니다. 저는 마력을 다룰 수 없는 몸입니다."
"그런가. 하지만 또 모를 일이지. 가끔 인간은 자신이 파악하지 못했을 뿐인 것을 지식의 전부라 생각하기도 하니까."
"...."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쪽으로도 정보를 주지. 그보다 황녀와의 만남은 어땠나?"
"흥미로웠습니다. 제 생에 당신 다음으로 재미있는 사람이었죠."
거짓이 아니었다. 황녀와의 만남은 앞으로도 기대가 됐을 정도였으니.
본래라면 정치에 관련해서는 보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다가갈 생각이었던 오스튼이, 스스로의 생각마저 바꿀 정도로 재미있었다.
"근데 제게 그분을 소개해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번째 놀이를 위함이지."
"두 번째 놀이라...."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처음 시작이 학과시험 당시 누구의 논문이 더 높은 점수를 받느냐였다.
결과적으로 셰인의 논문이 더욱 화제가 되어 승자는 셰인이 되었지만 말이다.
"이번 놀이는 저번보다 훨씬 자극이 심할 거다. 제국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일이니까."
"...놀이치고는 많이 위험해 보이는군요."
"그만큼 너에게 흥미로운 일이 될 거다. 이 제국에는 네가 알지 못한 무리가 있거든. 놈들이 제국을 뒤에서 주무르고 있어."
"...그렇습니까?"
"황태자는 놈들이 부리는 마리오네트에 불과하지. 그러니 그에 미리 대응해야 한다."
누가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음모라 말할지도 모른다.
기원 후 가장 거대한 나라를 뒤에서 조종하는 무리가 있다니?
하지만 오스튼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근거 없는 음모는 그저 망상에 불과하지만, 이 사람은 아니다.'
벌써 살리에르 백작과 연관되기도 했고, 실제로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황실의 기사단과도 엮인 적이 있는 셰인이지 않은가.
적어도 비상한 오스튼의 머리로는 이게 단순한 망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가끔 연락하지. 그때마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다."
"알겠습니다. 기대하도록 하죠."
거기에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을 것 같았기에, 오스튼은 망설임 없이 셰인이 내미는 손을 마주 잡았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56화
56화 산왕
일차로 왔던 사절단이 돌아간 뒤, 장로들과 회의를 마친 프리실라는 짐짓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휴우. 이런 일은 또 오랜만이네요."
정치. 엘프와는 영 연관이 없는 단어였다.
엘프들은 고대시대부터 상대가 누구든 자신들의 숲에 다른 종족이 오는 것을 극도로 꺼려해 왔다.
간혹 허락해 주는 존재가 있다면 채굴을 위해 찾아오는 드워프나 지반의 마력을 취식하기 위해 찾아오는 지하인 정도뿐.
그랬기에 이런 정치적인 일을 할 필요가 없던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네요. 그 거름으로 삼아도 모자랄 존재들이 등장했으니.'
프리실라는 한쪽 탁상 위에 올려진 고든의 머리를 바라보며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고든. 수면기에 든 엘프들을 납치해 다크엘프로 만들었던 빌어먹을 혈마법사.
지금은 누군가에 의해 머리가 반쯤 박살이 난 상태다.
셰인이 말하길 스스로를 '무명'이라 칭하던 그들의 존재는 엘프들에게도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이 메자이아 대수림 내에서 엘프의 시야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 가장 큰 방어 수단인데, 그걸 무력화시키지 않았던가.
이 와중에 탐욕에 젖은 인간들과 전쟁을 하는 것은, 수천의 엘프를 다스리는 여왕으로서 맞지 않는 판단이라 생각했다.
다행히 몇몇 장로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이번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세상이 바뀌었다면, 그에 걸맞게 변화를 추구해야 하지 않던가.
"하지만 지루한 건 어쩔 수 없는... 아."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던 프리실라는 숲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에 두 귀를 쫑긋 새웠다.
"안 그래도 지루했던 참인데. 잘됐네요."
프리실라는 자신의 정기가 느껴지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면을 쓴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세요, 셰인 님. 어쩐 일로 오셨나요?"
"일이 잘 진행되고 있나 확인할 겸, 물어볼 게 있어서 왔다."
"물어볼 거요? 당신이 모르는 것도 있었네요?"
셰인의 말에 프리실라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대수림의 개방과 관련해서 가장 큰 도움을 준 존재가 바로 셰인이지 않은가.
이후 일어날 일을 마치 예지라도 하듯 풀어 놓은 덕에 인간들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아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지. 아무튼, 북방에 대해서 아는 게 있나?"
"음. 뜬금없네요. 북방이라...."
프리실라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두 눈을 감았다.
고대에는 하루가 지나면 새로운 종족들의 왕국이 지어졌고, 또 하루가 지나면 무너지기를 반복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살벌했던 시기였으니만큼, 잠시 기억을 더듬을 필요성이 있었다.
"환경을 물어보는 것 같지는 않은데. 뭐가 궁금하신 걸까요?"
"북방의 푸른 피부의 오크들. 그리고 그들의 배후에 있는 산왕의 존재."
"으음.... 푸른 피부의 오크, 라는 건 저도 처음 들어 봐요."
프리실라의 말에 셰인은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애초에 제국이 북부로 발을 뻗었을 때만 해도 당시에는 푸른 피부의 오크는 볼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모습을 드러낸 만큼, 고대에도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생각해봄직 했다.
"하지만 오크라는 종족 자체에 관련된 기억은 좀 있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 오크들은 그리 대단한 종족은 아니었어요. 하루가 다르게 싸웠고, 매우 전투적이었죠. 하지만 그런 성격과는 다르게 아무래도 힘에서는 많이 밀렸어요."
인간들과 비교해서 오크들은 신체적으로 월등하나, 그렇다고 고대에 잘나가던 종족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마력을 다룰 줄 모르며, 신체 능력으로만 따진다면 수인족에게 밀렸으니.
다만 압도적인 번식력과 호전적인 성격으로 인해 굳이 먼저 건드리는 짓을 하는 종족들은 없었다.
"그런데 다른 종족들이 오크를 귀찮게 봤던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오크라는 종족을 두려워해서 피한 건 아니거든요."
그게 오크들에게 오만함을 불러 왔다.
"그 당시 새롭게 부임한 족장은 제법 야심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자신들의 수를 이용한다면, 다른 종족들을 상대로 싸울 수 있다고 판단했던 거죠."
아예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실제로 전생에 제국은 그 어마어마한 오크들의 뿌리를 뽑느라 한동안 고생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인해전술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은 단순히 숫자로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존재하는 법이다.
"그들은 첫 상대부터 잘못 건드렸어요. 하필이면 흡혈귀를 건드리고 말았죠."
이곳,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상대한 고든이 썼었던 혈마법의 모체.
흡혈귀는 그야말로 두려움 그 자체인 종족이었다.
조용히 자신들만의 고성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몇 년에 한 번씩 식사의 시간이 찾아오면 세상 밖으로 나간다.
그 주기가 찾아오는 시기만큼은 대부분의 종족이 숨을 죽였는데, 이는 엘프들조차 그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본래라면 흡혈귀를 건드렸다고 해서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물론 흡혈귀들에 의해 부락 몇 개가 날아가긴 하겠죠? 그러나 오크들은 기어코 선을 넘고 말았답니다."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쓴 것인지.
오크들은 흡혈귀의 고성에 기습적으로 난입해, 어린 흡혈귀들의 생명을 앗아 갔다.
가뜩이나 종족의 수가 턱없이 모자란 흡혈귀, 그중에서도 로열이라 불리는 진혈의 흡혈귀의 핏줄을 건드린 것이다.
이후 터져 나온 흡혈귀들의 분노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일 터.
"단 하루. 오크들의 본거지인 우르부라크가 괴멸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어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오크들은 단 하룻밤만에 몰살. 수백의 오크들만이 도망쳐 간신히 멸종을 피할 수 있었답니다."
태생이 게으르고 움직이지 않는 흡혈귀들이었으나, 한 번 움직이면 전 대륙의 종족들이 숨을 죽인다.
프리실라가 말하기를, 그 당시 하루라도 전투가 일어나지 않으면 기적이라 불리던 고대의 대륙에서는 놀랍게도 며칠이나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혹여나 흡혈귀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무튼, 소문으로 듣기에 당시 족장의 아들이었던 오크가 추악한 발악 끝에 도주하는 데 성공했어요. 그는 자신을 따르는 몇몇 오크들만을 데리고 북상했다고 했죠."
"그런 일이 있었군. 그럼에도 고서가 남지 않았다니. 신기한 일이야."
"아마 두려웠기 때문이 아닐까요? 당시의 인간들 또한 마력을 다루지 못했던 것은 똑같았고, 혹여나 자신들의 행동으로 흡혈귀들의 시선이 끌릴지 몰라 두려워했을 거예요. 음, 당신 앞에서 이런 말을 하기엔 좀 그렇지만, 그때의 인간들은 그저 다른 종족들의 귀찮음으로 살아남을 수 있던 거니까요."
"있던 사실을 수치로 여길 생각은 없다. 그리고 애초에, 모든 종족의 승리자는 결국 인간이었으니."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긴 하네요."
여기까지 듣고 난 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의 오크들에 대한 기원.
흡혈귀들에게 전멸당한 오크들이 그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분명 산왕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음... 그런데 흥미롭기는 하네요. 그 푸른 피부의 오크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셰인과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프리실라의 얼굴에도 의문이 떠올랐으나, 그 결이 달랐다.
"애초에, 그곳에는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인데 말이죠. 역시 인간들의 신인 아카샤가 무슨 짓을 벌인 걸까요?"
"그게 무슨 소리지?"
"푸른 오크들이 서식하고 있다는 그 산맥은, 산왕이 살고 있는 곳이거든요."
"그건 알고 있다."
"어머,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산왕이 거주하는 그곳에는 어떠한 생명체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어요. 애초에 당시 흡혈귀들이 오크 족장의 아들을 내버려 둔 이유도 산왕이 거주하던 북부로 갔기 때문이거든요."
알아서 죽을 길을 가는데 굳이 쫓아가서 죽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산왕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이지?"
"으음.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답니다. 산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그저 남들이 지어 준 것일 뿐이고, 그곳에 들어갔다가 살아 돌아온 존재는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 거대한 산맥의 주인을 보고 산왕이라 부른 것뿐이죠."
"그런가."
아쉽지만 그 오랜 시간을 살아온 프리실라조차 모른다면, 더 이상 따로 알아낼 방법은 없을 듯했다.
'어쩔 수 없나. 부족한 정보는 직접 가서 챙겨야겠군.'
여기서 놈들과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없다면, 직접 가서 얻으면 될 일이다.
그쯤 생각을 정리한 셰인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프리실라가 그런 셰인을 멈춰 세웠다.
"아, 그러고 보니 가지고 계신 정기를 상당히 소모하셨던데."
"내버려 둬도 알아서 사라지는 기운이니까."
"그렇긴 해도, 우리는 그러니까... 음. 인간들의 언어로 동업자, 라고 하는 사이잖아요? 혹시 모르니 다시 채워 드릴게요. 이제 와서 셰인 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리 엘프들도 곤란해요."
프리실라의 입장에서 셰인은 한편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지만, 또 유일하게 무명이라는 조직에 대해 현 시점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프리실라의 말에 셰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셰인이 가진 오리진과는 영 조합이 맞지 않았고, 어둠의 정령 또한 극도로 불편해하기에 지금도 자신의 그림자에 숨겨 둔 상태였지만... 언젠가 써먹을 날이 오지 않겠나.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프리실라의 정기는 쓸 방도가 많았다.
"좋아요. 앞서 드린 정기가 조금 혼탁해졌으니... 회수하고 다시 새로운 정기로 채워 드릴게요."
"...마다할 필요는 없겠지. 알겠다."
이전처럼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댄 프리실라가 셰인의 내부에 깃든 자신의 정기를 회수하고, 새로이 정기를 불어넣었다.
그때처럼 숲 내음이 셰인의 코끝을 스쳐 지나가고, 프리실라는 평소처럼 웃음을 지었다.
"다 됐어요."
"음."
이전처럼 풍족하게 채워진 생명력에 육체가 기뻐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만한 정기라면, 치명상을 입더라도 한 번은 회복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 가 봐야겠군."
"참, 성격도 급하시네요. 아직 제 말은 다 안 끝났다고요?"
"할 말이 더 있나?"
"이전에 셰인 님이 말했던 그 사람이 왔어요. 아마 지금쯤이면 눈을 떴을 거 같은데...."
"...그런가. 지금 바로 보러 가지."
결국 일이 일어났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 셰인이 움직일 준비를 하자, 프리실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어쩐지 제가 일방적으로 부려 먹어지는 기분이네요."
"어차피 거래로 이루어진 일이 아닌가."
"그 거래에 제가 북방에 관한 정보를 말해 줘야 한다는 내용은 없었잖아요?"
맞는 말이기는 했다.
거기에 이렇듯 써먹을 수 있는 정기도 받지 않았던가.
"여왕으로서의 체면도 있답니다. 나중에 제 부탁도 하나쯤 들어 주세요."
"알겠다. 그렇게 하지."
어차피 조직을 상대하려면 엘프들의 조력도 필요하기에. 셰인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가 볼까요? 그, 하이엘 왕국의 기사분께요. 이름이... 애덤이라 했었죠? 꽤 중한 상처를 입고 왔더라고요."
"살아만 있으면 된다. 그가 가진 특유의 감각은 여러모로 유용할 테니."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57화
57화 애덤의 우울
"자네들 이전에 나온 단원들은 없었네."
애덤은 그 대화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언가 섬짓한 기분은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평생을 섬겨 온 왕실이 자신에게 무언가 수작을 부릴 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대수림 탐사 도중, 조직의 등장으로 인해 당시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라는 이유로 기사단원들을 전령으로 보내지 않았던가.
그래서 애덤은 프리실라에게 모두가 대수림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을 듣곤 그들이 무사히 복귀했는지 확인하려 했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이 이것이었다.
자신의 명령 없이 함부로 사라질 부하들이 아니기에, 애덤은 결국 홀로 그들이 사라진 경위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그런 애덤의 행동은 그가 감히 예상도 못한 결과로 돌아왔다.
"커, 헉...."
몇 날 며칠이고 단원들의 정보를 찾고 다녔음에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에 애덤이 지하에서 정보를 다루는 정보 길드에 찾아가 관련된 정보를 의뢰했던 날 밤.
애덤은 자신의 심장에 정확히 파고든 단검을 바라봤다.
무언가 잘못됐다고 판단하기도 전에 단검은 애덤의 심장을 두어 번 더 찌르고 난 뒤에 완전히 뽑혀 나갔고, 힘없이 쓰러진 애덤은 자신의 침실에 침입한 존재를 겨우 볼 수 있었다.
창가에서 들어오는 달빛에 비춰진 자는 애덤이 정보를 의뢰했던 정보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쯧. 이러니 내가 기사 따위를 하지 않는 거야. 힘만 쓸 줄 알고 제가 모시는 주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하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애덤이 원통함에 무어라 입을 열기 직전.
화아악──!
"뭣?!"
애덤의 가슴에서부터 연녹의 빛이 터져 나오며, 동시에 애덤의 신형이 사라지고 그의 침실에는 당황스러운 표정의 암살자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 * *
"...그렇게, 된 것이오."
애덤의 설명을 모두 듣게 된 셰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직은 이미 왕국에도 손길을 뻗었던 거군."
"...조직? 그때 그 키메라를 조종한 자들을 말하는 것이오?"
"맞다. 그들은 이미 많은 국가에 마수를 뻗치고 있지. 그래도 아직 깊숙이 파고들지는 못한 모양이야. 해 봐야 국왕 정도인가."
"그게 무슨 소리요! 폐하께서 그런 사특한 이들과 손을 잡았다니!"
"믿고 싶지 않다는 심정은 알아줄 수 있으나, 그렇다고 현실을 부정하지는 말아라. 너도 이미 알고 있지 않나."
"...."
차마 애덤은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물론 당장은 심증에 불과하나.
정보 조직이 의뢰자를 암살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분명 왕성에서도 내성에 위치한 기사단장의 침소까지 침입했다는 것은 내통자가 있다는 말이었으니.
"그대는, 이 사실을 그때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것이오?"
애덤은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떠나던 날, 셰인과 했던 대화를 떠올리고는 그렇게 물었다.
"제국도 그럴진대, 너희 왕국이라 해서 다를 건 없겠지."
"도대체 어떻게...."
"인간이 가진 탐욕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놈들이기 때문이다. 본래 인간이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영혼도 팔 수 있는 자들이 아닌가."
"...그래도 말조심하시오. 아직 폐하께서 그들과 손을 잡았다는 증거는 없으니."
셰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이쯤에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접 이해할 날이 머지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휴식을 취해 둬라. 아무리 프리실라의 정기로 부상의 악화를 막아 뒀다고는 하지만, 심장이 몇 번이나 쑤셔진 걸 바로 고칠 정도는 아니니."
"알겠소. 그래도 그 마법 스크롤은... 고맙소. 이 일은 잊지 않도록 하지."
이전에 셰인이 애덤에게 줬던 편지는, 이런 일을 예상하고 넘겨 뒀던 엘프들만의 이동 수단이었다.
부상을 입은 엘프를 세계수의 수액으로 만들어진 연못에 곧바로 이동시켜 주는 비상 마법.
애덤에게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그럼, 먼저 일어나지."
"...."
분명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할 것이다.
대관절 셰인의 정체는 무엇이고.
어떻게 저렇듯 엘프 여왕과 단둘이 움직일 만큼 친분을 쌓았는지 등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지만, 당장은 심신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하기로 한 애덤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현실은 냉담하기만 했다.
* * *
"왕실에서, 그렇게 공표를 했단 말이오...?"
"그래."
애덤이 메자이아 대수림으로 돌아온 지 이틀 후.
하이엘 왕국에서는 애덤의 사망 소식을 공론화했다.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안타깝게도 사망했다는 것.
그 말을 들은 애덤은 참담한 심정을 숨길 수 없었다.
애덤은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으나, 그럼에도 메자이아 대수림을 개방하는 데 함께 있던 영웅으로 알려지지 않았던가.
그런 애덤이 침소에서 대량의 핏자국을 남기고 사라졌음에도 왕국에서는 그런 애덤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사망했다 알렸다.
이게 무엇을 뜻하겠나.
이틀이나 지나고서야 애덤은 겨우 현실을 인정할 수 있었다.
"제안 하나를 하지."
"제안...?"
"나는 조직과 적대하고 있다. 황실조차 일부가 조직에 가담하고 있는 지금, 조력자가 필요해."
"...전부터 궁금했던 것이 있소. 당신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오?"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천천히 알려 주도록 하지."
저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었으나, 애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당장 이곳에서 얼마나 지낼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설사 엘프들이 받아 준다고 해서 평생 이곳에 숨어 살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말해 보시오. 당신이 말하는 제안을."
"현명하군. 본론부터 말하자면, 정보 조직이 필요하다. 연합국에 자리 잡은 지하도시에 대해 파악할 필요가 있어."
"지하도시?"
"그래. 그곳에 얽매인 인간들은 결국 조직에 의해 약점이 잡힐 수밖에 없거든. 은밀한 사생활이 없는 귀족은 있을지 몰라도, 한 번만 손을 댄 귀족은 없지 않나."
"...부정할 수 없군."
"해서 지하도시에 한 축을 담당할 이들이 필요하다. 나는 내 조력자들을 지하도시에 내려보내고, 밑에서부터 주도권을 잡아 갈 생각이다."
"...내가 그곳에 간다고 도움이 되겠소?"
이번 일을 겪어서인지 애덤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듯 보였으나, 셰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군."
확실히, 애덤의 전투 실력은 특별히 뛰어나다고는 하기 힘들다.
물론 한 왕국을 대표하는 기사단장이었으니 그 실력이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나, 기사들이 꿈에도 그리는 자신만의 시그니처가 없다는 게 애덤의 현실이었다.
살리에르 백작가에서 봤던 워나드는 애덤보다 품계는 떨어졌으나, 자신만의 시그니처를 가지고 있던 위협적인 기사였다.
하지만 애덤이 시그니처가 없음에도 왕국의 기사단장이 될 수 있던 것은, 애덤 특유의 '감' 덕분이었다.
고작 감 하나만으로 왕실의 기사단장이 되다니.
그럼 그 왕국이 이상한 게 아니냐 할 수 있겠으나.
물론 그것 하나만 가지고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을 전적으로 믿고, 행동에 나설 줄 알아야 하니까.
"네가 타고난 그 감이 그저 우연의 일치라 생각하나?"
"...?"
"인간에게 있어서 감이라는 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생각하지만, 이는 근거 없는 편견이다."
"그게 무슨 소리요?"
"고대에는 너보다 뛰어난 감을 가지고 생존하던 종족도 있었지."
"그게 지금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오."
"어쩌면 너에게 그들의 피가 일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다."
그러자 애덤이 기겁을 하며 물었다.
"...! 내, 내가 하프라 말하는 것이오?"
"하프까지는 아니겠지. 애초에 내가 알고 있는 그 종족들은 자신들의 감을 전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자들이었으니. 해 봐야 아주 오래전에 이뤄진 일이었을 터. 지금에 들어서야 어쩌다 네가 그 능력을 깨닫게 된 것일 뿐."
"...."
그에 애덤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생각해 보면 애덤은 스스로의 감이 태어났을 때부터 이러지는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는 어린 시절에도 지금과 같은 능력은 없었으니.
셰인은 그와 관련된 계기가 있으리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8살 즈음의 일이었소."
그러다 생각을 이어 가던 끝에 애덤은 한 가지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과거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간 적이 있었소. 그런데 하필 산에서 막 내려온 늑대 무리와 마주치고 말았지. 그때 한 녀석에게 팔을 크게 물린 적이 있었소."
덕분에 며칠 동안 고열에 시달려 죽을 뻔했으나, 그 뒤부터 묘하게 몸에 기운이 났으며 잔병치레도 없어지고 무엇보다 특유의 감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애덤은 말했다.
"늑대라...."
그렇다면 견족 수인일 확률이 높았다.
전생에 셰인이 봐 왔던 수인족들 중에서도 특유의 감이 뛰어났던 녀석들이니.
"네가 가진 감을 성장시킬 방법은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정말이오?"
"그래. 높은 확률로 견인 수인족과 연관이 깊은 듯싶으니. 수단을 찾게 되면 알려 주지."
"그건 고맙소. 하지만 그게 지금의 상황을 역전시키는데 도움이 되진 않을 듯한데."
"그것도 생각해 둔 게 있다. 그러려면 네가 내게 협력을 해야겠지."
"방법을 물어도 되겠소?"
그 정도는 미리 설명해 줄 수 있었다.
앞으로 애덤이 자신의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고.
"네가 알고 있던 왕실의 분위기는 어떠했지?"
"왕실의 분위기?"
"그래. 최근 혹은 그보다 이전에 분위기가 한 번 반전된 적이 있었을 텐데."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 아니. 율리무스 국왕은 자신의 후계자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소. 국왕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럴 준비를 하고 있었지. 하지만 1년 전쯤에 어느 순간부터 국왕의 건강이 좋아지기 시작했소. 덕분에 계승 작업 또한 뒤로 미뤄졌고."
"그렇겠지. 그럼 이쯤에서 뭔가 짚이는 게 없나?"
"국왕의 건강이 조직과 연관이 있다는 말이오?"
"많은 인간들이 불멸의 삶을 바라지 않나. 조직은 불멸은 불가능할지라도, 그 정도 착각은 할 수 있게 만들 능력은 있지."
"그랬군. 그래서...."
하이엘 왕국의 국왕이 조직과 손을 잡았다면, 당시 메자이아 대수림에 있던 일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조직은 막고자 했을 것이고.
당연히 율리무스 국왕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역시 내 단원들은...."
"황실 기사단원들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젠장!"
참담한 기분이었다.
평생토록 하이엘 왕국의 기사단장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온 애덤이었기에.
국왕의 타락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한데, 국왕의 권력이 강해지면 그에 불만을 가질만 한 세력들이 여럿 있지. 그중 가장 큰 불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누구일까?"
"...설마."
애덤은 정치가 난무하는 왕국에서도 기사단장을 했던 사람이다.
셰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금세 파악한 그가 얼굴을 구겼다.
"슬슬 나이를 먹기 시작하는 자식들은 불안하겠지. 그것도 자신들의 손아귀에 거의 다 들어왔던 권력이 도로 빠져나갔으니 오죽할까."
"반란을, 부추기자는 거요?"
"성공하면 혁명이지. 그에 따른 명분도 충분하지 않나. 너는 앞으로 지하도시에서 자리를 잡을 거다. 시작 과정은 우리 가문 쪽에서 도와주도록 하지."
"...당신의 가문도 무언가 복잡한 일에 얽힌 모양이군. 알겠소. 내게 선택지는 없을 테니.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해야만 할 일이지."
"알겠다. 이와 관련된 일이 끝나면 다시 양지로 나간다 해도 관여치 않겠다."
"그것 참 고마운 배려로군."
이로써 다크엘프들을 이끌 인재가 마련되었다.
이제는 정말 북부로 향할 시간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58화
58화 강철의 숲, 강철의 여인 (1)
북부의 아룬비다는 매년 인력 부족에 시달리지만, 그럼에도 제국으로부터 지원을 많이 받지 못하는 지역이다.
아카데미에서도 파견 의뢰 중에서 가장 인기가 없기로 소문이 난 장소인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로 교통이 불편하다.
워낙 기후가 좋지 않은 지역이다 보니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하기도 힘든 실정이었다.
거기에 더해 아룬비다 지역은 전술적인 특성상 거대한 산맥의 중턱에 위치해 있어 이동하는 데도 상당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흐음...."
"괜찮으십니까?"
앞에서 들려오는 길잡이의 목소리에 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을 만하다."
"인내심이 대단하시군요."
길잡이의 물음에 셰인은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고 대답했다.
험준한 산맥으로 인해 이곳은 기사들에게도 한 번에 오르기에는 강당한 강행군을 요구하는 곳이다.
기사들보다 체력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셰인으로서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차라리 고든을 상대했을 때가 편했군.'
그나마 프리실라에게 받은 정기가 아니었더라면 지금보다 더 힘들었을 것이다.
"마법사님께서 이곳까지 파견을 오신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인데, 어쩌다 한 번씩 오시는 분들은 가는 데만 일주일 이상이 걸립니다. 셰인 님께서는 그분들에 비하면 대단하신 거죠."
"굳이 칭찬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남은 거리는 얼마나 되지?"
"이제 반나절 정도만 가면 됩니다. 다만 기지 근처에는 몬스터가 서식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군."
"예?"
길잡이는 어느새 자신의 주변을 둥둥 떠다니는 마력탄을 발견했다.
"벌써부터 신고식이 시작된 모양이야."
동시에 수십 개의 마력탄이 허공에서 서로 튕겨지며 주변 바위 사이로 날아가자.
깨개개갱-!!
이곳저곳에서 아이스 워 울프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칼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산맥의 위에서, 오연하게 서 있는 셰인은 길잡이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몬스터들의 피 냄새가 더 퍼지기 전에 움직이지."
"아, 알겠습니다!"
* * *
"음. 도착했다고?"
"예, 황녀님."
한 여성의 담백한 목소리에 부하로 보이는 이가 무릎을 꿇은 상태로 대답했다.
언제나 영하로 내려가 있는 날씨로 인해 얼어붙은 창가로 산란한 빛이 여성을 밝혔다.
옅은 실버블루 톤의 머리카락은 잔뜩 해진 머리끈에 묶여 어깨 아래로 내려왔고, 한 겨울의 얼어붙은 호숫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은빛 눈동자는 감정이 메마른 듯 보였다.
"여기서는 황녀님이라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저도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제게는 영원히 황녀님이십니다."
"고집 하고는."
제페르 디 나타샤 아나스타샤.
제국의 두 송이 꽃 중 하나로 불리며, 1황녀의 쌍둥이 자매인 그녀는 현재 아룬비다 영주이며, 동시에 전초기지인 비두론 성의 성주이기도 했다.
그녀의 담백하고 고저 없는 목소리만큼 그녀가 쓰고 있는 집무실은 삭막하기만 했다.
갑옷이 걸려 있는 갑옷 거치대와 책상, 그리고 쌓여 있는 다양한 서류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 그 메자이아 대수림을 개방한 영웅이라."
"과연 일렉사가 알려온 정보대로의 사람일지 궁금하군요."
"듣자 하니 메자이아 대수림의 탐사가 시작된 이유도 그 소년 때문이라고 들었는데."
"예. 그가 학과시험을 통해 발표한 논문으로 시작된 사건이었지요."
아나스타샤는 거의 보름 전, 일렉사가 보내 온 보고서를 떠올렸다.
일렉사는 이곳 아룬비다의 출신으로, 스스로가 외부의 소식을 알리는 정보원이 되겠다며 지원자들을 차출하고 나간 여인이었다.
밖으로 나간 지 어느덧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상당한 명성을 쌓은 그녀 덕분에, 이렇게 외부와 단절된 곳에 있음에도 외부의 소식을 파악할 수 있었다.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 짓는 성격에, 감정 변화가 극도로 적다. 반면에 소문과 달리 동생인 클레이튼 L 클라인을 상당히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전투력 또한 마법사치고 근거리에서 싸우길 주저하지 않으며, 마력탄을 위주로 기상천외한 방법을 구사하며 전투를 치른다. 학술적 능력이 뛰어난 것을 넘어 비범하게 느껴지며, 라비아타 모험단주에게도 인정받는 모습을 곧잘 보였다.' 이렇단 말이지. 그런데 그런 인재가 여기까지 직접 왔다는 말이고."
"그렇습니다. 일렉사도 처음에는 얕보고 있다가 한 번 크게 데였었죠."
"맞아. 그랬었지. 갑자기 아룬비다 영지의 모든 몬스터 부산물에 대한 독점권을 요구해 왔다고 했던가?"
메자이아 대수림의 초입 단계에서 셰인을 무시하던 행보를 보였던 일렉사는 이후 그의 능력을 뼈저리게 체감하고 저러한 계약을 맺었다고 했다.
당시 그 보고서를 받고 얼마나 황당했던가.
물론 아룬비다에서 나오는 특산물이라고는 넘쳐 나는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해체해서 얻게 되는 마석과 부산물 정도가 전부였다.
이걸 외부로 넘기는 것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수익을 벌어들일 테지만, 특유의 험한 지형 탓에 그마저도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마차도 다닐 수 없는 가파른 산맥을 타고 올라오는 마당에 무슨 무역을 하겠다는 건지.
1년에 2번씩 오는 지원품을 받는 것도 적지 않은 예산을 제국에서 감당하고 있으니, 상인들 입장에서 아룬비다는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셰인은 저러한 요구를 해 왔고, 일렉사는 이를 받아들였다.
실상 오히려 거래가 된다면 아룬비다의 이득이었다.
가뜩이나 잔뜩 쌓여만 있는 악성 재고들을 처리할 수 있을 테니.
"그래서 허락을 하긴 했는데, 여기까지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어."
"영특한 소년이라 들었습니다. 분명 머릿속에 남들이 모르는 무언가 뜻이 있겠지요."
"그러길 바라야지."
"황녀님. 황족으로서의 처신을 지키시지요."
갑자기 이어지는 충신의 조언에 아나스타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무런 말도 안 했다."
"아무리 우리 아룬비다에 오는 파견원이 없다지만, 첫날부터 황녀님께서 직접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은 황족의 체면이 서지 않습니다."
"그래도 궁금한데."
"참으시지요."
"...."
"황녀님."
"쯧. 알겠다. 미미르, 그대가 그리 말하니 어쩔 수 없지."
"혹여 몰래 나가시면 아니 됩니다."
"내가 그리 신용이 없나?"
"그렇습니다."
"...황족의 체면을 지켜 다오."
"제게 믿음을 주신다면 얼마든지 그러하겠습니다, 황녀님."
얼굴에 겨울 한파에도 꿋꿋할 것 같은 철판을 깐 채로 내로남불을 시전하는 충신, 미미르의 말에 결국 황녀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럼 그리 알고 있겠습니다. 그래도 제가 직접 얼굴을 보긴 할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
결국 미미르가 집무실 밖으로 나가고, 홀로 남아 서류를 읽던 아나스타샤는 방금의 상황을 개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저런 녀석이 충신이라고... 음...."
그러면서 아나스타샤는 방금 미미르와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이걸로 592번째 거짓말을 쳤군. 다시 생각해 보니 충신이 맞는 것 같아."
그러면서 아나스타샤는 일렉사가 보내 온 보고서를 찾아 다시금 읽으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아룬비다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이곳의 영주님이시자 정당한 황실의 일원이신 제페르 디 나타샤 아나스타샤 2황녀님의 보좌관인 카시아스 H 미미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번에 아룬비다 영지로 파견을 오게 된 클레이튼 R 셰인입니다."
미미르는 생각보다 고풍스러운 셰인의 태도에 속으로 살짝 놀라움을 느꼈다.
18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메자이아 대수림을 개방한 영웅이란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면 어느 정도 뻗대는 느낌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의 태도엔 오만함이나 방만함은 한 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예. 메자이아 대수림을 개방한 영웅을 눈앞에서 보게 되니 제국의 미래가 밝음을 새삼 느끼는군요. 황녀님께서는 몰려 있는 집무로 인해 나오시지 못하셨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이해합니다. 제국의 북부를 책임지고 계신 분이지 않습니까."
"예. 일단 오는 길에 노고가 많으셨을 테니, 피로를 좀 푸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피로는 이후에 풀기로 하고, 파견과 관련하여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저를 따라오시지요. 성을 한 바퀴 돌면서 그에 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미미르는 셰인의 옆에 서서 걷기 시작했고, 셰인도 그런 미미르를 따라 걸어갔다.
"먼저 이곳 아룬비다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외부적으로 알려진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국의 북부를 책임지고 있음에도 상황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단도진입적으로 말해서, 이곳 아룬비다는 모든 것이 부족한 영지입니다."
미미르는 영지의 장점보다 단점을 부각시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애초에 장점이 없는 것도 그러했지만, 그 과정에서 셰인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관찰하기 위함이었다.
"본래 아룬비다는 과거 황실에서도 꽤 큰 신경을 쓰고 있던 영지였습니다. 언제 푸른 오크들의 남하가 이루어질지 모르니 말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첫 푸른 오크들의 남하가 이루어진지도 어느덧 50년째.
그동안 전초 기지로 세워진 비두론 성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오크들의 침공을 막아 왔다.
하지만 50년 전과 같이 폭풍과 같은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으니.
거기에 이 혹독한 환경은 지원 인력마저 끌고 오는 게 순탄치 않았다.
몇 년이고 바깥세상은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이런 영지에 누가 자원을 해서 오겠는가.
그에 반해 꾸준한 오크들의 침입 시도와 함께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 사상자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으니.
영지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에 제국은 한 가지 묘수를 떠올리니.
전투에 능한 사형수나 중한 범죄자, 그리고 정치에서 밀려난 황족 혹은 귀족을 파견하는 것으로 부족한 인력을 충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외부에서 좋지 않은 이유로 끌려온 이들의 사기가 좋을 리 없었고, 지금은 이렇듯 제국에서도 방치한 영지가 되어 버렸다.
'때문에 아나스타샤의 또 다른 이명은 '꺾인 꽃'이지.'
셰인의 생각처럼 그녀가 제국에 있을 당시에는 기사도를 내세우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던 아나스타샤다.
그러나 그녀는 모종의 이유로 이곳, 아룬비다에 좌천되어 들어왔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가 단 1년도 버티지 못하리라 생각했으나, 아나스타샤는 그저 겉으로만 기사도를 내세운 여인이 아니었다.
고작 14살이라는 나이에 좌천되어 온 아나스타샤는 지난 7년 동안 이곳에서 굳건하게 자신의 위치를 지켰다.
그뿐이던가.
거의 무너지다시피 했던 지휘권자의 권한을 되살리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하여 영지를 본격적으로 활성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외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굳이 환경적인 요소를 제외하더라도, 제국에서 버려진 이들이 모이는 장소가 아니던가.
제국에서는 이제 꺾인 꽃이라 불리는 아나스타샤가 이곳을 평생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시선이 지배적이었다.
여기까지 미미르의 설명을 모두 듣게 된 셰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부정적인 이야기만 했음에도 셰인의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자, 미미르는 긴가민가해졌다.
'의도를 알 수가 없군.'
그저 마법사로서의 호기심을 채우러 온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고행의 길을 걷는 기사처럼 단련을 위해 찾아온 것일까.
여태까지 이곳으로의 파견을 신청한 이들은 대부분이 그러했고, 간혹 아나스타샤의 관심을 얻어 황실과 끈을 만들어 보겠다며 찾아오는 이들 또한 있었다.
물론 전부 더 이상 황실과 연을 유지하지 않기에 헛된 걸음이라는 것을 깨닫고 대충 파견 기간만 채우고 떠나 버렸지만.
과연 이 소년은 그들 중 어디에 포함되어 있을까.
아니면, 아직까지 미미르가 만나 보지 못한 쪽에 속해 있을까.
'당장은 지켜봐야겠군.'
한참 전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이 소년이 무슨 연유로 찾아왔을지.
미미르는 보다 시간을 두고 보는 쪽을 선택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59화
59화 강철의 숲, 강철의 여인 (2)
지난 이틀 동안 셰인은 비두론 성에 머물며 미미르에게 아룬비다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인근에 출몰하는 몬스터나 푸른 오크들의 주 출몰 지역과 그들의 특성 등.
그중에는 아룬비다 주민들의 성향에 관한 정보도 들을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이곳의 주민들은 좋지 않은 이유로 끌려온 이들이 아니던가.
그 때문인지 아룬비다는 듣도 보도 못한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득실거리는 마경으로 불리고 있었다.
때문에 미미르는 조금은 걱정스럽다는 말투로 셰인에게 이와 관련된 조언을 해 주었다.
아카데미에서 파견을 온 셰인은 지휘학과인 탓에 현재 남아 있는 수색대 중 팀장 자리가 하나 비어 있는 곳에 셰인이 배치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뭐야. 지휘관으로 온 귀족 나으리라고? 아주 지랄 났구나, 지랄 났어."
"이런 어린 새끼 말을 들으라고? 아무리 우리 범죄자라지만 뒤지라는 거랑 뭐가 다르냐!"
"씨발, 이 애새끼야. 만약 우리 앞에서 조금이라도 얼타는 순간 그 곱디고운 얼굴이 불어터진 오크 새끼들마냥 될 줄 알아라! 알겠냐?"
그리고 그런 미미르의 걱정처럼, 수색대원들은 결코 쉽게 셰인을 인정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하나같이 험악하게 생긴 수색대원들은 온갖 인상을 찌푸리며 막말을 내뱉었다.
애초에 저들은 스스로가 더 이상의 밑바닥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아룬비다에 올 정도라면 중한 범죄를 일으켰기에 평생 이곳에 살아야 하는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때가 떠오르는군."
"뭐, 새꺄?"
"이 새끼가 어르신이 말하고 있는데 처웃고 있네. 아주 상황 파악이 안 된 모양이야."
"어디 건드릴 수 있으면 건드려 봐! 이곳 생활을 아주 지옥으로 만들어 주마."
거기에 끼리끼리 모인다 하지 않았던가.
이런 이들끼리의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있기에, 이들에게 한 번 찍힌다면 아룬비다에 소문이 쫙 퍼져 어딜 가든 비슷한 상황이 연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셰인은 그런 그들의 온갖 모욕적인 언사에도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음을 지었다.
"스스로가 밑바닥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그 아래에 또 다른 바닥이 있는 걸 모르더군."
"얘 지금 뭐라는 거니?"
"허, 참나. 이거 말로 해서는 안 되겠네."
"어디 새로 온 애새끼가 얼마나 버티는지 좀 보자고."
그러나 미미르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셰인은 이미 전생에 밑바닥 중 밑바닥, 끝없이 추락하는 나락의 구렁텅이에 거하던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는 저런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우선, 인간 언저리까지는 끌어올려야겠군."
* * *
평소처럼 오전 업무를 위해 서류를 확인하고 있던 미미르는 영지업무와 관련된 서류를 가지고 오는 비서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예, 미미르 님. 여기, 지난 주 수색대의 활동 내역과 현재 남은 보급품 관련 서류입니다."
"그래요. 그나저나, 그는 잘 적응하고 있나요?"
"아... 그 사람이요."
미미르의 질문에 비서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미미르가 언급한 사람은 다름 아닌 셰인이었다.
어느새 셰인이 아룬비다에 도착한 지도 며칠이 지난 시점.
며칠 동안 아룬비다에 대해 들었던 셰인은 현재 팀장 자리가 공석으로 남아 있는 수색대 팀 중 하나에 들어갔다.
'별일 없으면 좋겠지만....'
아마 그러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미미르가 이곳 사람들에게 앞서 경고를 해 주는 방법도 있겠지만, 어차피 그들의 성격상 진심으로 셰인을 받아 줄 리가 없다.
미미르가 알고도 막지 못하는 방식으로 셰인을 배척시킬 테니.
하도 이전 파견인원들에 대한 평판이 주민들 사이에서 좋지 않다 보니 이런 일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
주민들 입장에서 파견 인원은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라는 동질감도 없는데다가, 파견 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이곳 주민들을 바닥에 흩뿌려진 취객의 오물처럼 바라보지 않던가.
거기에 몇 번이고 이 험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이곳의 주민들을 상대로 말도 안 되는 갑질을 부리는 행동까지 겪고 나니 아나스타샤의 이름값이고 나발이고 간에 파견 나온 이들에게는 이런 식으로 대하는 전통이 만들어진 상황.
어차피 다른 목적으로 온 것들이니, 적당히 기를 눌러 주고서 시간만 때우다 보내려는 것.
일반적인 파견 인력은 그러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파견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떠나거나, 어디 한 자리에 처박혀 말 그대로 시간만 채우고 떠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때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군요.'
덕분에 황실 측 정치 귀족의 아들 중 한 명이 정신병까지 얻어 돌아갔을 때, 얼마나 많은 질타를 받았던가.
그 외에도 다양한 소문들이 퍼지면서 가뜩이나 인력도 부족한 마당에 파견 지원조차 오지 않으려 한다.
당연히 미미르도 이와 관련해서 여러 번 고민을 해 봤지만 이런 류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한편, 미미르의 비서는 무언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수색대 인원들이 그분께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흐음...?"
의아한 일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지 않은가.
그 말은 어지간한 외압에는 굴복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았다.
"특이하군요."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남쪽 경계 지역으로 향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뒤부터는 수색대 인원들도 비교적 온순해졌다고...."
"그렇습니까? 남쪽이라면... 아,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알겠네요. 확실히 그는 영리한 구석이 있어요. 그럼 한 시름 놔도 되겠군요."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비서의 말에 미미르는 옅은 웃음을 보이며 한 가지 걱정거리가 덜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데, 황녀님께서는 요 며칠 안 보이시는군요."
"예. 어디서 또 뭘 하고 있는 건지...."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고는 있는데, 그때마다 무언가 바쁘다는 투로 대화를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뭐, 그런 모습이 한두 번이 아니니 어쩔 수 없지요. 음."
그런데 그럴 때마다 두통이 이는 일이 생기지 않았었나?
싶었으나.
이미 쌓인 업무가 많았기에, 미미르는 결국 관심을 거두고 자기 할 일에 매몰되기 시작했다.
* * *
사람이 모이기 시작하면 본능적으로 하는 일이 무엇일까?
바로 서열 정리다.
무의식중에 리더를 가리기 시작하고 또 그를 추대하는 식으로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하려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런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리더를 의지하는 성향이 강하다.
물론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을 테지만.
"그래서, 날 찾아오셨다?"
"그래."
리더가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럴 가능성 또한 무척이나 적었다.
"참나, 어이가 없군. 고작해야 이제 막 성인식을 치렀을 애송이한테 당하다니 말이야."
이곳, 아룬비다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는 거구의 남자, 펠리스는 여기저기 멍이 든 상태로 서 있는 수색대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어찌 됐든 상관없는 일이지. 나야 거래만 확실하면 되는 일이니. 그러니 일단 거래 내용은 들어 봐야겠는데."
거래.
셰인은 펠리스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힘으로 제압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굳이 그런 방법을 쓸 이유는 없었다.
겪어 본 결과, 그랬다간 더 귀찮은 반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돈은 필요 없는 것 같군."
"오, 척하면 척이군. 그래, 맞다. 여기서 돈은 길바닥에 쓰러진 몬스터의 부산물보다도 쓸모가 없지."
펠리스의 말처럼 세상과 고립된 아룬비다에 금품은 필요가 없었다.
사용할 방법도 없었고, 성에서 나오는 보급 이외에는 그들에게 주어진 권한이라고는 없었으니.
"우대권을 주지."
"하, 우대권? 그건 또 뭔 헛소리냐."
"올해가 지나기 전에 내 가문에서 이곳에 교역을 틀 예정이다. 그럼 방금 네가 필요 없다 말했던 금화의 가치가 수직 상승하겠지."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우리가 이런 곳에 있으니까 대가리에 든 게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아?"
"믿고 안 믿고는 상관없지. 정작 그때가 돼서 땅을 치고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지만."
펠리스는 셰인의 말을 듣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당연히 눈앞에 있는 애송이의 말에 신용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뭘까. 저 목소리에 들어 있는 확신은.
그래서 일단 조금 더 들어 보기로 했다.
"방법은?"
"두 달."
"뭐?"
"두 달 안에 이 영지에 많은 변화가 찾아올 거다. 그때까지 기다리도록."
"참... 아주 당돌한 애새낀데."
다짜고짜 자기 밑에 있는 대원들을 줘 패고 와서는 하는 말이 거래라 해 놓고, 정작 그 내용은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
"뭐, 좋다. 기다려 보도록 하지."
그러나 생각 외로 펠리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전에도 한 번, 이와 비슷한 제안을 받고 지금의 자리에 앉았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도 이런 식으로 말했지....'
덕분에 지금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던가.
펠리스는 몇 년 전, 자신에게 찾아와 당돌하게 자신을 지지하라는 제안을 해 왔던 황녀, 아나스타샤를 떠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물론 그냥 해 주지는 못해. 이쪽이 받은 것도 없는데 베풀기만 해 주면 밑에 것들이 지들 멋대로 생각하기 바쁘거든. 안 그래?"
"그렇지."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딱 하나. 다른 놈들한테 널 건드리지 말라고 말해 주는 것뿐이다. 저놈들에게 인정을 받는 건 네가 할 일이지."
"좋아, 그렇게 하지."
저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앞으로 자신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방해만 들어오지 않아도, 이후 일이 복잡해질 일은 없을 테니.
"그럼 가봐. 다음에 볼 때는 그럴듯한 게 있어야 할 거야."
그렇게 펠리스의 추객령을 받은 셰인은 고민할 것도 없이 빠져나왔고, 뒤이어 엉거주춤 자신을 따라오는 수색대원들을 바라봤다.
"저쪽과 거래는 끝났군. 이제 우리끼리의 대화만 남았어."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대장이 우릴 네놈한테 팔아먹었다고?!"
당연히 반발은 뒤따라왔으나, 셰인은 그런 그들의 불평에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답했다.
"꼬우면 범죄를 일으키지 말으셨어야지."
"이런 씨발...."
"저 벙어리 새끼는 왜 아무런 말도 없어!"
"야, 이 신참 새끼야. 넌 지금 분하지도 않냐?!"
그때, 수색대 삼인방은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서 있는 누군가를 향해 그리 외쳤다.
온몸을 갑주로 뒤덮은 그는 얼마 전에 새로 배정받은 인원이라 했는데, 모종의 이유로 입을 열지 못한다는 모양이었다.
다만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스스로를 샤샤라 소개할 뿐이었다.
"...."
또 유일하게 셰인이 도착했을 때도 아무런 말없이 가만히 있던 인물이기도 했다.
"썅. 벙어리 새끼."
결국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샤샤의 모습에 삼총사는 입을 꾹 다물고는 셰인을 바라봤다.
절대 인정하지 않을 거라는 맹세를 담아 쏘아보고 있는 모습이, 셰인에게는 우습게만 보였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60화
60화 강철의 숲, 강철의 여인 (3)
수색대 삼총사 중, 멀대 같은 키를 가지고 있는 케빈은 셋 중 그래도 아룬비다에서의 짬이 가장 높은 인물이었다.
때문에 죄수들 사이에서 대장인 펠리스가 자신들을 버린 것을 믿을 수 없어 직접 찾아갔다.
"왜 너희들을 버렸냐고?"
펠리스는 그런 케빈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우리가 밖에서 범죄자라 낙인이 찍혔다고 해도 그렇지, 저런 애송이에게 목숨을 맡겨야 하는 게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케빈은 자신의 의견이 타당하다고 여겼다.
물론 아룬비다에 모인 이들 대부분이 범죄자거나 황실에 찍혀 몰려온 귀족들이다.
당장 펠리스 또한 그렇지 않던가.
하지만 펠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흠, 그렇게 생각할 만하지. 근데 말이야."
"예?"
"그 애송이, 우리가 여태 생각하는 것처럼 그냥 막 온 건 아니더라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자, 이번 보급품이다. 읽어 봐."
그러면서 펠리스는 케빈에게 편지 하나를 넘겨줬다.
"이건... 어어?"
케빈은 외부에 가족이나 지인이 없는 탓에 편지를 주고받을 일이 없으나, 펠리스는 자신의 가문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은 일이었으나, 이마저도 귀중한 기회였다.
이곳에서는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 방법이 없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케빈은 얼마 만에 읽어 보는 건지 모를 편지지를 만지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가 떨렸다.
"요, 요람이 개방됐다고? 엘프? 이게 무슨...."
"뭐... 우리가 나갈 수도 없는 마당에 요람이 개방되고 나발이고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하지만 아무리 외부에서의 소식이라지만 요람의 개방이다.
인류의 거대한 숙원 중 하나가 풀린 것이다.
세상과 단절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게 역사적으로 얼마나 거대한 사건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거기에 제국에서는 이번 일에 대한 대대적인 민심 잡기를 위해 성대한 축제를 열었고, 그 과정에서 아룬비다 또한 덕을 볼 수 있지 않았던가.
물론 평소보다 보급품이 더 많이 들어온 수준에 불과했지만, 아룬비다의 주민들은 그 이유까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늘어난 보급품의 이유가 이랬다니.
"메자이아 대수림... 이라는 요람을 개방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더군. 그 애송이가."
"세상에...."
"너희도 봤지? 이번에 늘어난 보급품. 그게 다 저 애송이가 논문 하나 잘 내서 시작된 일이다, 이 말이야. 알겠나?"
"...."
그러면서 펠리스는 케빈에게 보다 자세히 설명했다.
언뜻 보면 이곳은 폭력을 과시하는 힘이 전부일 것 같지만, 의외로 정치라는 게 중요했다.
예전 같았으면 저런 의문 따윈 폭력으로 제압했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시기가 아니지 않나.
아나스타샤가 만들어 온 또 다른 그들만의 질서였다.
"나도 너희들한테 그 애송이를 전적으로 믿으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근데 방해는 하지 마. 우리 신조가 뭐지?"
"...당한 만큼 갚는다."
"그래. 어쨌든 이번에 후하게 들어온 보급품은 저 애송이가 몇 개월이나 그 정글 속에서 개고생하면서 만들어 낸 거잖나."
"끄응...."
"내 말이 어려운 건 아닐 텐데. 그치? 선입견만 가지지 말라, 이 말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외부에서 오는 새끼들한테 어떤 시선으로 취급받았는지 잘 알잖아."
"...알겠습니다."
일단 고개를 끄덕인 케빈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외부에서 셰인의 명성이 어떻든 간에 아룬비다를 처음 찾아온 애송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으니.
일단은 두고 보겠다는 스탠스를 취한 것이다.
그래도 셰인의 묵직한 마력탄에 얻어맞은 것에 대한 앙금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어디 한번 실력 좀 보자고.'
여태까지 고작 일신의 능력만 믿고 아룬비다에 도전했던 파견원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에는 십수 년을 아룬비다에서 살아온 이들보다 강한 이들도 적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아룬비다는 혹독한 환경과 더불어 언제 몬스터가 나올지 모를 정도로 몬스터가 많은 지역이다.
자신들의 전 팀장 또한 적지 않은 무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휴식 중 튀어나온 몬스터에 의해 부상을 입고 얼마 가지 않아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뿐만 아니라, 어설픈 지휘력으로 팀 전원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경우도 숱하게 봐 왔기에 케빈은 두 눈 크게 뜨고 셰인을 감시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첫 수색 작전이 펼쳐졌다.
* * *
외부에서 아룬비다의 주민들을 향한 시선은 고우려야 고울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범죄자들이 아닌가.
그나마 지휘관에 속해 있는 이들의 경우에는 중앙 정치에서 좌천되어 들어온 귀족이라고는 하나, 대부분이 범죄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본래라면 셰인 또한 그런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조직의 밑바닥을 봐 왔기에, 인간 사회에서 쫓겨난 이들이 얼마나 추락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셰인이 이들에게 무작정 폭력을 선사하기보다 대화를 선택한 것은, 그것이 일 처리의 효율에 좋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전생에 그들이 보인 2황녀, 아나스타샤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었다.
반란이라는 것은 혼자 일으킨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만큼, 이곳 아룬비다 주민들의 협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전생에 이들은 아나스타샤의 반란에 참여해 끝까지 그녀의 곁을 지키다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기에 대화를 시도해 볼 마음이 생긴 것이다.
적어도 마지막까지 그들은 황녀의 곁에서 의리를 지키다 생을 마감했으니.
그리고 실제로 다른 파견인력들은 시도조차하지 않은 펠리스와의 거래는 효과적이었다.
적어도 아룬비다에 퍼져 있는 파견 인력에 대한 노골적인 적의가 셰인에게 향하지는 않았으니.
물론 그렇다고 시선에 호의를 기대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셰인이 하는 일에 대한 반항이 없는 것만으로도 셰인은 만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두 달 후에는 그러한 시선조차 없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일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몰두하기만 하면 될 뿐이다.
"흐음...."
수색대의 하루 일과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다.
"뭐, 준비는 끝났슈."
아룬비다의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울 때쯤 수색대 삼총사 중 케빈이 다가와 입을 열자, 셰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출발하지."
"얘들아, 가잔다!"
"알겠슴다."
"얼마 만에 수색이냐."
"...."
삼총사와 샤샤가 출발하고, 셰인은 얼마 전에 지급받은 지도를 펼쳐 수색을 시작했다.
수색 작업은 매일 정해진 지역을 통과하며 돌아다니고, 그 과정을 서류화시켜 상부에 보내면 되는 일이다.
다만 아룬비다의 특성상 언제 날씨가 나빠질지 모르고, 또 동시에 예기치 못한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특히 아룬비다는 그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정도로 생명력이 질긴 몬스터들이 대부분이다.
피부가 꽁꽁 언 얼음마냥 딱딱한 아이스 트롤이나, 두꺼운 지방층과 근육으로 신체를 보호하는 아울베어, 눈 밑을 파고 다니는 아이스 웜 등.
하나같이 쉽게 상대할 몬스터가 아니었다.
"정지."
"정지람다."
"예이."
"...."
그렇게 수색을 이어 가던 중, 수색대는 아울베어의 서식지에 돌입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혹한의 바람이 아울베어가 서식하는 숲에서부터 불어왔다.
잎은 찾아보기 힘든 앙상한 나무가 줄줄이 서 있는 숲의 입구.
얼어붙은 바위며 나무 할 것 없이 나 있는 아울베어의 손톱자국은 위협적이었다.
바위는 말할 것도 없고, 겨울둥이 나무의 경우 강철처럼 단단한 내구성을 자랑하는 탓에 강철의 숲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장소.
평소에는 셰인의 태도에 듣는 둥 마는 둥 의욕을 찾아보기 힘든 삼총사였으나, 아울베어의 서식지에 도착하자 눈빛부터 달라졌다.
"...아울베어라."
아울베어는 위험하기가 아주 대단한 몬스터다.
크기는 일반적인 오우거보다는 조금 작으나, 근육질적인 외관과 다르게 움직이는 소리가 매우 은밀한 몬스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었다간, 엇 하는 사이에 아울베어의 강력한 손톱에 의해 자신의 신체가 3등분 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재빠르기까지 해서, 차라리 오우거를 상대하는 게 편하다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수색대의 임무 중에는 이러한 몬스터들이 얼추 얼마나 있는지, 그리고 그들의 생태계가 지난번과 얼마만큼의 변화가 있는지 등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포함됐다.
그렇게 한동안 아울베어의 서식지 앞을 살펴보던 셰인은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이동하도록 하지."
"예이."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서식지의 중반까지 걸어가던 셰인이 입을 열었다.
"뭔가 이상하군."
셰인의 혼잣말에 삼총사 중 덩치를 담당하고 있는 맥고완이 물었다.
"음? 무슨 말임까?"
"아울베어의 움직임이 없다."
"아, 그거 말임까. 원래 아울베어는 쉽사리 기습하거나 하지는 않슴다."
맥고완이 익숙하다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본래 아울베어는 특유의 덩치도 있고 한 번 상대하기 시작하면 난폭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기본적으로 놈들은 야행성이다.
"밤이 아니라면 기습도 쉽사리 하지 않슴다."
하지만 그만큼 조심성도 많은 녀석들이다.
어떤 상대가 됐든 간에 이 아룬비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리한 위치에 서야만 안전한 사냥이 가능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셰인 또한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지 않았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조용하다 생각이 들지 않나?"
"어? 그러고 보니 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슴다."
그제야 다른 일행들도 자리에서 멈춰 섰다.
아울베어가 야행성이고 또 조심성도 많은 녀석이라 낮에는 어지간해서 기습을 하지 않는 놈들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자신들의 서식지에 들어온 침입자를 그저 지켜만 보고 있는 놈들은 아니었다.
최소한 특유의 올빼미 소리, 아룬비다의 주민들이 밤의 울음소리라 부르는 녀석들의 위협 행위가 이어지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지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전임 팀장의 공백 이후 오랜만에 아울베어의 서식지에 찾아온 삼인방은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거, 아무래도 서식지를 옮긴 것 같은데...?"
그나마 이러한 경험을 여러 번 해 봤던 케빈이 그리 의견을 내놨고, 셰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른 무언가에 의해 밀려났다는 소리가 되겠지."
"쯧, 이거 일이 복잡하게 됐슈. 당장 가서 보고부터 해 봐야겠는데."
"아니. 좀 더 둘러보고 가도록 하지."
"앞에 뭐가 있는 줄도 모르고 간다는 말이유?"
"그게 수색대의 임무 아닌가?"
"...이보슈."
"말해라."
"댁은 잘 모르나 본데, 여긴 그렇게 물러터진 생각으로 돌아다니다간 죽기 딱 좋은 곳이요. 아룬비다 수색대 철칙 3번째. 무언가 쎄하다 싶으면 보고부터 해라. 이게 기본 철칙이란 말이올시다."
이곳에서는 괜한 영웅 심리로 움직였다간 뼈도 추리지 못한다.
어차피 이곳 아룬비다는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사태가 곧잘 일어나길 마련이다.
그걸 굳이 파헤치겠다고 들어가 봐야 목숨을 보전하기도 힘들뿐더러, 그래 봐야 결국 이어지는 결론은 하나뿐이다.
"어차피 몬스터들의 영역 싸움이요. 그 끝은 몬스터 웨이브고."
실상 이런 이상 현상이 일어날 때면 반드시라 해도 좋을 정도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었다.
원리는 그들도 알지 못한다.
아룬비다의 몬스터들은 그저 호기심으로 판단할 놈들이 아니었으니.
"그러니 괜히 여기서 뒈지기보다, 미리 가서 알린 후에 몬스터 웨이브에 대비하는 게 훨씬 낫다, 이 말이오. 알겠슈?"
"글쎄... 나는 의견이 좀 다른데."
"하, 그래. 곱게 말해서 알아들을 리가 없지. 어디 들어나 봅시다."
팔짱을 끼고 고깝다는 듯 바라보는 케빈의 태도에도 셰인은 나무라지 않았다.
저들에게는 저들의 입장이라는 게 있을 것이고, 그들의 경험상 그게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몬스터들의 영역 다툼이라, 많이 일어나는 일이지. 하지만 그에 따른 전조 현상은 반드시 일어난다."
"...그렇긴 하지."
아룬비다는 던전이 아닌 자연 상태 그대로 몬스터가 존재하는 몇 안 되는 지역이다.
그렇다 보니 영역 다툼이 굉장히 활발한 편인데, 셰인은 이에 관해 다양한 조사를 하고 찾아왔다.
"일차적으로 몬스터들 간의 영역 다툼의 시작은 외부에서 박힌 돌을 빼낼 때 일어나지. 그렇다면 그에 따른 대대적인 몬스터들의 이동이 감지된다."
"그렇지."
거기까지는 케빈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고, 셰인은 품에서 두꺼운 서류를 꺼내보였다.
"봐라. 이게 지난 한 달 동안 아룬비다에서 일어난 몬스터들의 이동 경로다."
"...? 그건 또 어디서 난 거요?"
"수색대의 팀장이 됐는데 그저 놀고만 있었을까. 파견된 입장인 만큼 파견지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건 가장 기본적인 일이지 않나?"
"허."
여태 저런 기본적인 일조차 하지 않은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케빈은 여태껏 파견 인력 중 저런 태도를 보인 인물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기야, 그 요람을 개방한 영웅 중 한 명이라 하지 않았던가.
분명 나이에 걸맞지 않는 모습이 있었을 터.
케빈은 그 사실을 빠르게 인정하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특히 아울베어의 서식지를 밀어 버릴 정도의 힘을 지닌 몬스터는 아이스 트롤 정도다. 놈들의 재생력과 방어력은 아울베어조차도 어찌하지 못할 정도지. 하지만 최근 한 달 동안 아이스 트롤의 이동 경로는 여기서 멀찍이 벗어나 있다."
"...."
"거기에 아이스 트롤은 무리 지어 다니지 않는다. 때문에 한 몬스터 무리의 서식지를 강탈하려면 그만큼 시간이 걸린다는 말이지. 다른 수색대의 보고에 따르면 바로 지난주까지 아울베어는 이곳에서 평소처럼 활동했다는 내용이 있군."
"...."
"또 이는 아울베어도 마찬가지이긴 하나, 대신 번식기에는 다르지. 지금은 아울베어가 번식기가 시작될 무렵이고, 이때의 아울베어는 최소 가족 단위로 몰려다닌다. 즉, 지금은 아이스 트롤도 쉽사리 접근하는 시기가 아니야."
케빈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셰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전부 케빈이 자신의 선임들에게 배워 왔던 것 그대로였으니.
"그, 그럼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뭐요? 번식기가 시작될 무렵이라 사나워질 시기의 아울베어가 이렇게 급하게 사라지다니. 결국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는 소리 아니요?"
"누가 해결하자고 했나? 원인이 무엇인지, 그 원인을 찾을 수 없다면 자그마한 단서라도 있는지 확인하자고 했지. 언제까지 저 성벽 하나만 믿고 이렇게 안일하게 움직일 생각이냐."
"...!"
그 말에 케빈을 포함한 삼총사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하, 하지만 지난 50년 동안 저 성벽에 뚫린 적은...."
"똑같군."
"...? 뭐가 똑같다는 거요?"
"저 등 따시고 배부르게 지내고 있는 제국의 정치 귀족들과 똑같이 안일하다고 말했다."
"...!"
"그리고 그들의 안일함이 너희에게 어떻게 돌아왔지?"
셰인의 말에 케빈은 결국 뒤통수를 해머로 세게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내가 저 혐오스러운 정치 귀족놈들과 똑같다고?
당장이라도 저 건방진 주둥아리를 뜯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으나, 케빈은 감히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셰인의 무표정한 저 얼굴, 저 눈빛에서는, 마치 자신들을 시험하려는 듯한 의도가 읽혀졌기에.
케빈이 그 의도를 읽을 수 있던 이유는 간단했다.
저 눈빛은 자신들이 파견 인력에게 보내왔던 표정이 아니던가.
심지어 이곳에 오면서까지 셰인에게 보였던 표정이기도 했으니.
결국 삼총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움직이지."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61화
61화 강철의 숲, 강철의 여인 (4)
나무와 바위 할 것 없이 길게 늘어진 핏자국과 혈향이 난무하는 가운데, 셰인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어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케빈을 포함한 삼총사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당황해하고 있었다.
딱 보아하니 여러 마리의 아울베어가 전투를 일으킨 흔적이었다.
피를 제외하고도 아울베어의 깃털과 손톱 자국이 이곳저곳에 흩뿌려진 이 풍경으로 짐작하건대 보통의 혈투가 일어난 게 아닌 듯했다.
다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면, 정작 아울베어의 시체는 단 한 구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오크로군."
"어어. 맞네, 맞어. 여기들 보라고. 발자국이 오크 놈들 거야."
"그런데 오크 놈들이 어떻게 아울베어를 잡은 거지?"
"그러게... 그놈들한테 아울베어는 천적일 텐데."
고대에도 마력을 사용하지 못했던 오크는 여전히 마력을 쓰지 못한다.
때문에 놈들이 두꺼운 지방과 근육으로 온몸을 보호하는 아울베어를 사냥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터.
물론 어마어마한 숫자의 오크들이 달려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으나, 당장 찍힌 발자국만 보자 하면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때부터 조짐이 있었나.'
전생에 들었던 어느 한 기억을 떠올린 셰인은 이번 수색 작전을 여기서 마무리 짓기로 했다.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군. 이대로 돌아간다."
"아, 알겠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원...."
어째 분위기가 싸하다 느낀 케빈이 냉큼 고개를 끄덕인 그때.
파앙─!
"으헉?!"
갑자기 소환되어 숲을 향해 날아간 셰인의 마력탄으로 인해 케빈이 주춤거렸다.
"뭐, 뭐 하는 거요?!"
"전투 준비."
"어엇, 이봐 케빈! 저기!"
삼총사 중 가장 작은 체구를 가진 해커스의 외침에 일행들의 시선이 마력탄이 날아간 지점으로 향했다.
"우오오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이는 올빼미의 머리를 가진 곰, 아울베어였다.
본래 낮에는 기습을 잘 하지 않는 녀석이었으나, 동족의 피 냄새에 흥분한 상태였다.
"그나마 한 마리라 다행이군!"
케빈은 자신의 주무기인 장창에 마력을 두른 채 아울베어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얼마 전, 셰인의 마력탄에 형편없이 날아가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습으로 인해 반응을 못했을 뿐이다.
케빈 또한 이곳에 오기 전에는 나름 이름을 알리던 평민 출신의 기사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오러가 담긴 창이 아울베어의 눈을 향해 찌르고 들어갔다.
그 사이에도 사방에서 날아오는 마력탄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던 아울베어였으나, 녀석 또한 전투에 능하기는 마찬가지.
자신의 피부를 뚫지 못하는 마력탄보다는 케빈의 창이 더 위협적이라 판단하고 마력탄을 무시한 채 케빈의 창을 막았다.
뒤이어 도끼를 든 맥고완이 합세하고, 남은 해커츠는 짧은 숏소드 두 자루를 든 채 주변을 경계하면서 아울베어의 신경을 거슬리도록 만들었다.
과연 셋은 셰인에게 시험하듯 시선을 보냈던 만큼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몬스터를 상대하는데 있어, 노련함만 보자 하면 하이엘 왕국의 기사단원들보다도 높다고 판단될 정도였다.
거기에 서로 간의 단합력도 좋아서 금세 아울베어는 온몸에서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하핫, 보이냐, 신입? 이게 바로 선배의 위엄이다, 이거야!"
케빈도 여태 셰인에게 압도되기만 하던 감정을 풀기라도 하듯, 샤샤를 향해 그리 외쳤다.
"...."
그런데 그때쯤, 또 한 마리의 아울베어가 퍼진 혈향에 반응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발견됐다.
스르릉─!
"어, 이런. 야, 임마 신입! 멋대로 나서지 마!"
그에 샤샤가 검을 뽑아들었다.
멀리서 케빈이 이를 만류했으나, 샤샤는 개의치 않고 다른 한 마리의 아울베어를 향해 달려들었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음에도 그의 움직임은 마치 깃털 같았는데, 등 뒤에서 뽑아 든 대검이 묵직하게 떨어져 내렸다.
이에 아울베어가 양팔로 이를 막아 냈으나, 그 두꺼운 지방과 근육을 뚫고 뼈에 금이 가는 충격이 이어졌다.
"쿠어어어─?!"
예상치 못한 격통이 양팔에서부터 올라오자 아울베어가 뒤로 크게 물러섰다.
단언컨대 아이스 트롤이 최대 힘으로 후려치는 몽둥이도 저런 파괴력을 내지는 못하리라.
"뭐, 뭔...."
"허어...."
그에 자신이 아까 선보였던 찌르기와 비교되는 케빈과 힘으로는 어디서 밀려 본 적 없던 맥고완이 입을 헤─ 벌렸다.
평소 샤샤에게 벙어리라 놀려 대던 해커츠의 표정도 좋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외부에서 온 파견 인력과는 다르게 이곳에 소속된 주민들 사이에서는 힘과 실력이 최고 아니던가.
그런 측면에서 샤샤의 전투 능력은 셋을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긴장 풀지 마라. 더 온다."
셰인의 말에 뒤늦게 해커츠가 반응했다.
"3시 방향에서 둘 더 온다!"
아울베어의 수가 점차 늘기 시작했다.
다만 처음 등장했던 아울베어는 맥고완의 도끼에 끝내 머리가 쪼개졌고, 샤샤가 상대하던 녀석 또한 샤샤의 검에 의해 양팔이 부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몰려오는 아울베어들과 전투를 이어 갈 필요는 없었다.
"후퇴한다!"
"알겠슈!"
셰인의 명령에 삼총사와 샤샤가 고개를 끄덕이며 냉큼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가장 뒤에 남은 해커츠가 뒤따라오는 아울베어를 견제하려 했으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아울베어가 일정 간격 이상 거리를 좁힐 때마다 중첩된 셰인의 마력탄이 아울베어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눈이 큰 아울베어의 유일한 약점이 바로 얼굴인 점을 노린 것이다.
얼마나 추격전이 이어졌을까.
해가 질 무렵, 아울베어의 서식지인 강철의 숲에서 벗어나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그들은 아울베어의 추격을 완전히 뿌리칠 수 있었다.
"허억, 허억. 이상한데. 여기 밖으로 놈들이 안 쫓아오다니."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케빈이 한 혼잣말에 셰인이 답했다.
"지난 날 오크들에게 받은 습격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군."
"아...."
생각이 또 그렇게 이어질 수 있겠구나 싶었던 케빈이 고개를 끄덕였고, 셰인은 일행들을 이끌며 비두론 성으로 향했다.
* * *
"뭐, 그럼 우리 먼저 들어가 보겠슈."
"그래."
그래도 한 번 같이 싸워 봤기 때문일까, 케빈을 포함한 삼총사가 셰인에게 보내오는 눈빛은 이전보다 경계가 많이 헐거워져 있었다.
안면까지 전부 뒤덮은 투구를 쓴 샤샤는 가만히 셰인을 응시하다가 이내 자리를 비웠고, 홀로 남은 셰인은 보고를 위해 미미르에게 찾아갔다.
"음...."
한참 업무에 시달리고 있던 미미르는 셰인을 보고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시지요. 듣자 하니 오늘 첫 수색 작전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어떠셨습니까?"
"나름 순조로웠습니다. 과연 북부의 전사들답게 전투에 능하더군요."
"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네요. 그래도 그들이 쉽게 따르지 않았을 텐데, 대단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셰인은 미미르에게 자신이 겪은 일과 관련해 입을 열었다.
"아울베어의 서식지에 오크들이 출현했습니다."
"아울베어의 서식지라면 강철의 숲인데... 그곳에 오크가요? 이상하군요. 오크들은 보다 북쪽으로 올라가야 나오는데 말이죠."
"다른 수색대의 기록을 찾아 봐도 오크들이 대규모로 이동했다는 정보는 없었습니다. 실제로 아울베어의 서식지에서 발견된 오크의 발자국 수로 봤을 때, 놈들은 대여섯 마리로 뭉쳐 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으음...."
뿐만 아니라, 아울베어를 사냥하고 떠난 것 같다는 추가적인 발언에 미미르가 양 눈썹을 좁혔다.
"고작 오크 다섯이서 아울베어를 사냥했을 리가 없는데, 이상한 일이로군요."
"무언가 이변이 있다고 밖에 설명이 안 됩니다. 다른 수색대에 오크들을 주의하라 명령을 내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첫 수색 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과를 가지고 오셨네요.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이 정도 조언만 하더라도 미미르는 알아서 잘 해결하리라.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부탁이요? 무슨 일인지요."
"성벽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권한을 받고 싶습니다."
"으음... 홀로 나가겠다는 말씀입니까?"
"예."
실상 안 될 말이다.
이곳 아룬비다는 현재 군사 지역이나 마찬가지라,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었으니.
이는 아룬비다의 주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셰인 님에게만 특혜를 준다는 선례를 남길 수는 없으니까요. 혹시 혼자 다니시려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마법사로서의 호기심입니다. 아룬비다는 아카샤의 대봉인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지역이지 않습니까."
"음... 그렇죠."
"그와 관련해 정보를 수집해 볼 생각입니다."
"흐음."
셰인의 부탁에 미미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 본 적도 없는 메자이아 대수림 관련 논문으로 인해 마법사들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패러다임을 만들어 낸 소년이지 않나.
혹여 이 아룬비다에서 비슷한 업적을 세운다면, 황실에서도 아룬비다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부족한 지원을 더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대신, 2인 1조로 다닌다면 허락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군요. 그 정도라면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예.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지요, 셰인 님."
필요한 허락은 받았다.
이제 남은 것은 누구를 데리고 나가느냐인데.
당연하지만 삼총사는 대번에 얼굴을 구기며 거절 의사를 보내 왔다.
"미쳤수? 정해진 수색 지역이 아니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데."
"어, 미안함다. 제 목숨은 귀함다."
"나도 굳이...."
해 봐야 이득도 없는 고생을 뭐 하러 하겠는가.
해서 따로 담배 같은 기호품이라도 가져다 줘야 하나 생각할 때쯤.
"...."
"샤샤?"
수색대에 신입으로 들어온 샤샤가 그런 셰인의 어깨를 치며 종이 한 장을 건네 왔다.
-메자이아 대수림에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 줘. 직접 듣고 싶군.
"메자이아 대수림에 관해서? 어려울 건 없지."
강철의 숲에서 보였던 샤샤의 무위는 과연 대단했으니, 함께 데리고 갈 만했다.
그리 생각한 셰인은 다음 날부터 샤샤와 함께 수색이 끝난 후, 따로 밖으로 나와 아룬비다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62화
62화 강철의 숲, 강철의 여인 (5)
서서히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시간.
셰인은 낮에 수색대 업무를 끝내고 샤샤와 따로 나와 조사를 이어 갔다.
그간 수색대가 작성한 보고서를 미미르에게 받은 셰인은 지난번 아울베어의 서식지에서 있던 것처럼 기존에 볼 수 없던 현상이 일어난 지점을 토대로 돌아다녔다.
-뭘 확인하려는 거지?
그런 작업이 일주일가량 이어졌을 무렵.
샤샤가 셰인에게 쪽지로 그런 질문을 해 왔다.
"오크들의 이변을 확인하고 있다."
이미 시간이 흐른 탓에 흔적이 없어진 곳도 많았다.
그럼에도 셰인은 관련된 지역이라면 빠짐없이 다니며 주변을 훑고는 그저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이번에도 주변 지리를 확인하고, 잠시 주변에서 마력과 교감하던 셰인이 그만 자리를 뜨려고 하자 다시 한번 샤샤가 쪽지를 내밀어 왔다.
-이럴 거면 차라리 더 깊숙한 곳까지 가 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래 봐야 상대의 경계심만 부추길 뿐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
"이렇게 알아서 찾아오도록 만들어야지. 호기심이 생기도록."
"...!"
그때, 샤샤는 그동안 셰인이 몇 번이나 보여 왔던 마력탄이 떠오른 것을 보자마자 등 뒤에 매인 검에 손을 올렸다.
"퀴이익─!"
하지만 역시 한 발 앞서 셰인의 마력탄이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무언가를 향해 날아갔다.
"...오크?"
나무 뒤에서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푸른 오크 한 마리였다.
그게 얼마나 놀라웠는지 벙어리였던 샤샤가 입을 열 정도였다!
"...!"
그제야 자신이 입을 열었다는 사실에 샤샤가 슬그머니 셰인의 눈치를 봤으나, 셰인은 여전히 바닥에 쓰러진 오크를 바라볼 뿐이었다.
"기절했나. 흐음."
무려 중첩된 마력탄이었기에 오크는 얼굴이 함몰되듯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
하지만 셰인은 마력탄을 풀지 않고 오히려 그 수를 더 늘렸다.
그 모습에 샤샤가 의아함을 표하기 전에 먼저 검을 뽑아 들었다.
눈앞의 소년을 그리 오랜 시간 봐 오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수색대에서 보내온 시간은 나름 농후했다.
이 아룬비다는 그만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곳이니.
그런 셰인의 감이라면 일단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게 올바른 일이리라.
"크르륵!"
그러자 쓰러진 오크가 발작을 일으키더니, 방금까지 기절해 있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펄떡 일어나 피로 물든 눈으로 둘을 바라봤다.
"크와비타! 워나후!"
인간은 알아들을 수 없는 자신들만의 언어를 내뱉으며, 광기에 젖은 듯 놈의 몸으로부터 불그스름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과연 방금까지 기척 없이 뒤좇아 오던 존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살벌한 기운이었다.
그러자 다시 한번 샤샤가 입을 열었다.
"마력...? 오크가 어떻게?"
어지간히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런 감상은 일단 뒤로 물려 두시죠."
"...!"
셰인의 존댓말에 샤샤가 다시 한번 놀랄 겨를도 없이, 마력탄이 오크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오크는 이전과 다르게 기민한 움직임으로 셰인의 마력탄을 피하고 오히려 앞으로 쏘아져 나왔다.
혹한의 날씨에 단단하게 얼어 있는 땅에 발자국이 새겨질 정도로 우악스러운 돌진력이었다.
"워나후!!"
동시에 허리춤에 차인 두 자루의 손도끼를 쥐어 든 오크가 달려들었으나 중간에 경계하던 샤샤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지체 없이 앞으로 나아간 긴 대검이 오크의 쌍도끼를 막아 내고, 오히려 힘으로 압도해 검을 위로 쳐올렸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오크의 양팔이 하늘 높이 떠오르고, 그사이에 샤샤는 저 대검이 낼 수 있는 속도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날렵하게 오크의 양팔을 잘라 냈다.
"쿠오오오오─!"
자신의 양팔에서 느껴지는 섬찟하면서도 화끈한 감각에 오크가 괴성을 내질렀으나, 뒤이어 날아온 셰인의 마력탄이 그런 오크의 머리를 후려쳤다.
"크웍, 크와비타! 워, 워나후!!"
그럼에도 오크의 투지는 사라지지 않았고 그대로 자신의 피로 물들어 번들거리는 입을 샤샤에게 들이밀었다.
이에 샤샤가 뒤로 물러섰고, 또다시 마력탄이 날아와 오크의 머리를 강타했다.
중첩 마력탄을 몇 번이나 허락했던 터라, 오크는 끝내 얼굴이 함몰된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끝났군요."
오크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불그스름한 기운이 사라지고서야, 셰인은 마력탄의 소환을 멈췄다.
"...마력을 쓰는 오크라."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자 샤샤가 셰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걸 예상했던 건가?"
"요 며칠 소수의 오크로는 감당하기 힘든 몬스터들이 계속해서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마력을 쓰는지는 둘째 치고, 무언가 특별한 수단을 얻었으리라는 생각은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재미있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의 투구를 벗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재미있어, 너."
"영광입니다, 2황녀님."
샤샤... 아니, 제페르 디 나타샤 아나스타샤.
제국의 두 송이 꽃 중 하나를 담당하고 있는 그녀는 강철이 떠오르는 굳건한 기세로 그런 셰인을 바라봤다.
차디 찬 아룬비다의 바람이 그런 그녀의 실버블루 빛깔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 * *
"미쳤습니까, 황녀님?"
"미안."
"미치셨습니까?"
"미안."
"미쳐 버린 겁니까?"
"미안하다니까!"
다음 날 아침.
미미르는 서류 작업을 하던 와중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아나스타샤를 질타했다.
당연히 자신이 잘못한 일을 인지하고 있던 아나스타샤는 몇 번이고 사과를 해 봤으나, 날아오는 말이 고울 리가 없었다.
세상에.
어떤 황녀가 이 험난한 아룬비다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돌아다닌단 말인가!
물론 이와 같은 일이 몇 번 일어난 적이 있긴 했다.
그때는 이곳 주민들 사이에서의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건 어디까지나 비두론 성벽의 보호를 받고 있는 내부에서였지,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외부를 돌아다니는 일이 아니었다.
"다른 때도 아니고 당장 언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날지 모르는 시기 아닙니까. 진정 이 미미르가 피 말라 죽는 꼴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지. 알았으면 나가진 않았을 거야."
"역시 미치신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이걸 어찌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군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자신이 모시는 사람이 미쳐 버린 마당에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만."
"후우."
결국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얼굴을 한 번 쓸고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가 미친 게 아니라 세상이 미친 거지. 오크가 마력을 썼다. 이게 미친 게 아니고 뭐가 미친 거겠어."
"그럼 둘 다 미친 것으로 하지요."
"...."
질타는 거기까지 하고, 미미르의 표정은 확실히 좋지 않았다.
당장 이렇게 구박이라도 해야 황당함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것 같았으니.
"혹시 그 개체만 특별한 것 아닙니까?"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정신 차려."
적어도 최근에 서식지를 습격당한 몬스터들과 관련된 보고서를 보건대, 한두 마리가 일으킨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자 미미르는 기가 차다는 듯 아나스타샤를 바라봤다.
"미친 황녀님에게 그런 소리를 듣다니. 제가 미쳐버리겠군요."
"진짜 미칠 것 같으니까 그놈의 미친 소리 좀 그만하지."
"예.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최근 다른 몬스터들의 서식지에서 일어난 이변 현상은 마력을 쓰는 오크들의 소행이로군요. 흐음...."
그제야 현실을 직면한 미미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영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놈들이 무언가 준비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봐야겠죠."
"그래야겠지."
미미르의 말처럼 오크들이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물론 이 점은 이전까지 받아 온 보고와는 별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미미르가 보다 심각해진 표정을 짓는 이유는, 이전의 보고에서는 오크들이 마력을 쓰지 못한다 생각했던 것이고, 지금은 아니지 않나.
오크가 마력을 쓰기 시작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몇 가지 위험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당장 최악을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몬스터 웨이브지."
"한 차례로 안 끝나는 게 문제겠군요."
이전까지 몬스터 웨이브는 그저 자연 현상처럼 일어났다.
사시사철 혹독한 추위를 자랑하는 아룬비다이지만, 그래도 나름의 계절이라는 게 존재한다.
얼마나 덜 춥고 더 추운지에 대한 차이일 뿐이지만, 의외로 이로 인해 다양한 몬스터들의 영역 다툼이 일어난다.
그래서 영역 다툼에서 밀려난 몬스터 웨이브는 예측하기가 비교적 쉬웠다.
그마저도 1년에 1, 2번을 넘지 않기에 막을 만했으나....
"오크들이 머리를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미르의 말에 아나스타샤도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 웨이브의 시기를 녀석들이 컨트롤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당장 오크들의 수준이 어떠했는지 당장 아나스타샤가 직접 겪어 보지 않았던가.
거기에 지금 오크들은 적은 수로 이쪽이 모르게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을 만큼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다.
"흐음...."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쪽이 적들의 속셈을 알았다고 해서 이렇다 할 대처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아룬비다가 그 강력한 몬스터 웨이브를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굳건한 성벽이 있기 때문이다.
당장 수색대 또한 성벽이 없는 외부에서 갑작스러운 기습이 일어나면 사상자가 속출하지 않던가.
물론 전쟁을 하자면 못할 것도 없으나, 그렇게 되면 피해가 말도 안 되게 커진다.
그러니 일이 그렇게 커지기 전에 황실의 도움을 받아야 할 테지만, 애초에 이곳 아룬비다는 제국에서 버림 받은 이들이 모이는 곳.
뭐가 예쁘다고 바로 지원이 오겠는가.
증거도 없이 대뜸 찾아가서 오크들이 마력을 깨우치기 시작했고 그들이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킬 생각인 것 같다고 말해 봐야 진짜 미친 사람 취급 받을 게 뻔했다.
"증거를 모아야겠지, 아무래도."
"예. 그게 가장 확실합니다."
"흐음...."
둘의 고민은 그날 해가 질 때까지 이어졌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63화
63화 변화, 그리고 대응 (1)
늦은 밤. 아나스타샤와 미미르가 한참 회의에 들어가고 있을 무렵.
"흐아암."
비두론 성 내부, 지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감옥을 지키고 있는 경계병은 멍한 표정으로 흔들거리는 촛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새는 영 조용허네잉...."
올해로 마흔에 들어선 경비병은 오랜 시간 이곳, 비두론의 지하실에 위치한 감옥을 경비해 왔다.
그런만큼 이곳에 대한 역사도 상당히 빠삭했는데, 최근에 들어온 신입은 그런 선임 경비병의 혼잣말에 반응해 물었다.
"예전에는 안 이랬어요?"
"엉? 아. 그치. 지금이야 황녀님이 오신 뒤니까 이렇게 텅 비어 있긴 한데... 흐흐, 어디 입 좀 털어 볼까잉?"
"어, 넵. 궁금합니다."
안 그래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아룬비다이지 않은가.
신입은 몹시도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선임을 바라봤고, 선임은 피식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공짜로?"
"에이, 설마요. 여기 쩐 있습니다."
"흐흐, 그래. 억울하거들랑 말아라잉? 나중에 너도 너 후임한테 똑같이 말해 주면 되니까."
"물론이죠, 헤헤."
신입이 내미는 담배 한 개비를 받은 선임이 입술을 적시며 시동을 걸었다.
"아따, 언제였더라? 그래, 일단 황녀님이 오시기 전과 후의 차이를 말해 줘야겠지?"
아나스타샤.
제국의 두 송이 꽃이라 불리는 그녀가 아룬비다의 영주로서 오게 된지도 어느덧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전까지 아룬비다는 말 그대로 무법지대라 해도 좋았다.
툭하면 살인이 일어났으며, 힘이 곧 진리고 자리였다.
다양한 파벌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하루가 다르게 서로에게 신경전을 펼쳐 댔다.
"그중에서도 이곳 지하실은 진실의 방이라고도 불렸었제잉."
"진실의 방이요?"
"엉. 와서 묶이고 좀 몇 대 맞다 보면 없던 죄도 술술 불었거든. 아주 하루하루가 피 마르는 나날이었지."
"와. 그럼 황녀님이 오신 이후부터 달라진 겁니까?"
"어? 어. 맞지, 맞어. 그때가 아주 죽여줬지."
현재 아룬비다에 남아 있는 주민들은 2황녀에게 우호적이지만, 그 당시에 살아남은 주민들은 알고 있었다.
2황녀는 결코 리더십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마어마하게 죽어 나갔으야."
"예? 죽어요? 여기서요?"
"그지. 지금이야 너처럼 해 봐야 탈세 정도 한 놈들이나 여기서 살아남지. 예전에는 살인범이나 강간범도 툭하면 들어왔으야."
"아... 다른 선임분들에게 들은 것 같습니다."
"그제. 그런데 그런 것들이 황녀님이 황녀로 보였겠어? 죽일 대상이거나 강간할 대상이었제."
선임은 당시의 분위기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땐 제국에서 황녀님을 버렸다는 말이 절로 나왔을 정도였으니 말 다한 기제. 근디야, 이게 웬걸. 본토에서 보내 온 게 꽃이라 불리는 황녀가 아니라 칼 든 망나니였네?"
"예에?"
지금으로서는 잘 상상이 가지 않는 신입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자라고 무시하고 덤벼든 놈들은... 흐, 아야, 여기 지하실이 왜 그렇게 깨끗한지 아냐?"
"어, 글쎄요?"
"7년 전에는 이곳이 사시사철 아주 피 냄새가 옴팡진 곳이었다 이 말이야. 신선한 피부터 갈색으로 죽은 피까지 아주 다양했다니께."
"허, 허어...."
설마하니 그런 시기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한 신입은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대된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옴마, 너도 보니까 딱 여기 알맞게 생긴 인재구마잉. 벌써 기대되지?"
"아래 있는 건 사람이 아니잖아요."
"흐흐, 그지. 그 육시럴 놈들 때문에...."
선임은 괜히 말하다가 말았다.
이곳에 오래 있었던 만큼 알고 지내던 주민들도 많았고, 그중에는 오크들에게 당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이들도 적잖이 있었기 때문이다.
"쯧. 마음 같아서는... 응?"
"예? 왜 그러세요?"
"아니, 아니여. 방금 뭔가 본 것 같았는데 잘못 봤나 봐."
"에이, 저 그런 거 안 통합니다."
"어허이, 이놈이? 됐다, 그래. 잘못 본 거지."
선임은 어째서인지 방금 촛불 아래 그림자가 이상하게 움직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저 야간 근무가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고 뒤이어 후배와의 수다를 이어 갔다.
* * *
지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셰인은 철창 아래, 특수한 마법 가공 처리가 된 쇠사슬로 꽁꽁 묶인 푸른 피부의 오크를 내려다봤다.
얼굴이 함몰된 상태로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는 녀석은 입에 재갈까지 물려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셰인을 바라보는 놈의 눈빛엔 아직 투지가 남아 있었다.
"눈빛은 볼만하군."
셰인은 나름 녀석을 인정했다.
이런 투사(鬪士)는 싫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에는 싫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악역의 자리에 서야만 할 때가 존재하는 법이다.
"어쩌면 나도 놈들과 다르지 않을지 모르지. 아니, 근본적으로 본다면 한없이 닮아 있을지도 몰라."
언젠가 제국을 위한 일이라며 스스로를 달래던 어느 한 늙은 기사가 떠오른 셰인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털어 냈다.
"하지만 내 악의에 선의가 희생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러니, 나를 증오해도 좋다. 투사여."
적어도 너는 명분이 존재하지 않나.
인류의 적으로서.
나는 그 적의 목을 베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망나니가 되어 주리라.
그런 스스로의 다짐 속에서 오리진을 일으킨 셰인은, 거대한 아가리 속으로 집어삼켜지는 오크를 바라보며 두 눈을 감았다.
깊디깊은 셰인의 정신 속에서 오크의 영혼이 잘근잘근 분해되어 갔다.
그리고 한 오크의 삶이, 통째로 셰인에게 옮겨져 들어왔다.
언젠가 있을 복수의 나날.
두 번의 패배로 이어진 종족의 암울한 미래.
그러나 이제는 없을 실패를 다짐하며 일으키는 거룩한 전쟁의 준비.
그리고.
-아파.
-힘들어.
-난 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해?
-누가 좀 구해 줘.
오크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느 한 소녀의 처절한 좌절.
"이건...."
한 영혼에 다른 영혼이 뒤섞여 있다.
아주 작은 파편, 티끌에 불과했으나 이는 결코 흔치 않는 상황.
셰인의 뇌리로 지난날 프리실라와 이야기를 나눴던 때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혹시?'
생각지 못한 가설이 떠오른다. 셰인의 머리가 급격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방금, 일반적인 정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중요한 단서를 잡았을 지도 몰랐다.
그렇게 볼일이 끝나 돌아가려던 그때, 셰인은 문득 비쩍 말리 비틀어진 오크의 시체를 바라봤다.
무언가 걸려서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강인한 전사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아 두려던 것뿐.
그러나 그 우연이 하나의 계기를 만들어 냈다.
"저건...."
오크의 목에 걸려 있는 자그마한 토템.
아룬비다의 산맥을 표현한 것인지, 산이 조각되어 있는 토템에 셰인의 시선이 끌렸다.
별다른 마력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런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나무 조각에 불과했으나.
셰인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셰인의 눈은 특별하다.
대상의 영혼을 볼 수 있는 만큼, 사물에도 그 영혼에 담긴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일종의 물건에 담긴 염(念)의 색깔을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크가 가지고 있는 가죽 갑옷이라던가 다른 물건에서는 오크가 사용하던 것처럼 강렬한 붉은색이 눈에 띄었는데, 단 하나.
저 토템만큼은 달랐다.
색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는 특별한 일이었다.
어떤 물건이든 만든 자에 의한 염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거기에 토템이라는 물건은 무언가를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적과 같은 역할이니만큼 염이 강하게 배어 있을 수밖에 없는 물건인데.
왜 저것에서는 아무런 것도 느낄 수 없을까.
마치 색으로 가득 찬 세상에 홀로 무채색을 띠고 있는 듯했다.
"...."
셰인은 어둠의 정령을 시켜 오크의 목에 걸려 있던 토템을 끊어 손에 쥐었다.
"연구해 볼 가치가 있겠군."
이제 진짜 목적은 다 끝냈기에, 그제야 셰인은 다시금 어둠 속에 파고들어 발걸음을 옮겼다.
* * *
다음 날이 되자 미미르에게 지하실에서 일어난 일에 관한 보고가 들어갔다.
"흐음...."
차가운 감옥 아래.
얼굴이 함몰된 푸른 피부의 오크가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로 풀썩 쓰러져 있는 모습은 섬뜩하기 그지없는 풍경이다.
"오크어를 모르기에 어떻게 할지 두고 볼 생각이었습니다만... 자결인가요?"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새벽 동안 후임과 수다를 떨었던 경비병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분명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간 흔적이 없었는데, 교대자와 교대하기 전 확인차 들어가 보니 오크가 저런 상태로 죽어 있는 게 아닌가.
선임 경비병은 지금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어쩔 수 없군요. 아마 우리가 모르는 자결 방법이라도 있던 모양입니다."
아쉽긴 했지만 타살의 흔적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애초에 마력을 쓸 수 없던 오크가 마력을 썼으니만큼, 그에 대한 부작용일지도 모를 일이리라.
미미르는 그리 판단하고 일을 그 자리에서 마무리했고, 지난 밤 아나스타샤와 주고받았던 대화를 떠올렸다.
'특수 수색대를 더 빨리 준비해야겠군요.'
오크들이 무슨 일을 준비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미미르는 아나스타샤와 그들이 무엇을 준비 중인이 알아보기 위해, 아룬비다의 깊은 협곡으로 들어갈 특수 수색대를 만들 예정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은 바로 셰인이었다.
"무력으로만 본다면 다른 사람도 많아. 하지만 셰인이 가지고 있는 기감은 나보다도 뛰어나더군."
한때 기사의 황녀라 불리던 아나스타샤가 하는 말이다.
무력으로만 봤을 때는 이곳 아룬비다에서 가장 뛰어난 그녀가 직접 판단한 내용이었으니, 이는 믿을 만한 정보였다.
언제 몬스터들의 기습이 일어날지 모르는 아룬비다에서 셰인이 가진 기감은 분명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력인데, 이게 또 복잡했다.
'황녀님이 가시는 게 가장 확실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곳의 지휘관이 직접 가는 것은 위험도가 너무 높았다.
거기에 제국 측에 보낼 서류를 준비하려면 미미르가 직접 나서서 제국으로 향해야 하는데, 미미르를 제외하면 서류 작업을 할 사람이 아나스타샤밖에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일손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그 사람밖에 없군요.'
미미르는 머릿속에 떠올린 사람을 만나기 위해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64화
64화 변화, 그리고 대응 (2)
"후욱, 후욱...."
아룬비다 주민들의 우두머리, 펠리스는 등에 덤벨을 짊어지고 팔 굽혀 펴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문 앞에서 멈춘 발소리의 주인 또한 문도 두드리지 않고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듯했다.
이윽고 만족할 만큼의 운동량을 채우고서야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덤벨을 바닥에 내려놓은 펠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 직접 행차하시는 일은 드문데. 이 덤벨보다 무거운 주제를 들고 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온몸에서 땀을 흘리던 펠리스가 문을 열자, 미미르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저 덤벨 정도의 무게로 끝났으면 저도 좋겠군요."
"후우... 그럼 그렇지. 일단 들어오쇼. 땀 냄새가 좀 나긴 할 건데, 피 냄새도 잔뜩 맡아 본 양반이니 괜찮겠지."
"그럼 사양치 않겠습니다."
방에 들어온 미미르는 잠시 펠리스의 방을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자기 개발에 열심이시군요."
"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할 게 뭐가 있다고.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하면 사람이 미치는 법이지. 그래, 내 성격은 잘 알 테니 본론부터 들어가는 게 어떨까 싶소만."
"저야 좋습니다. 예, 본론부터 말하자면... 오크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흐음."
펠리스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한쪽 손에 들린 아령을 까딱거렸다.
그러면서도 미미르가 하는 설명에는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무슨 일인가 싶었으나, 듣다 보니 점차 입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아령이 들린 손도 움직임을 멈췄다.
펠리스도 그저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닌지라, 현재 몬스터들의 서식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알 수 없는 기현상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마력을 쓰는 오크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니?
그러나 이는 놀랍게도 황녀가 직접 확인한 일이라고 했다.
"특수 수색대를 편성하고 싶다라. 좋소. 어찌 됐든 나도 이곳의 주민이니 마다하지는 않도록 하지. 다만, 편성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히 듣고 싶은데."
"팀장은 펠리스 당신에게 맡길 예정입니다. 다만, 작전지휘자도 따로 붙을 예정이지요."
"그 외부에서 온 애송이요?"
"그렇습니다."
"나보고 이곳에 도착한 지 보름도 채 안 된, 그것도 아직 성인식조차 치르지 못한 애송이에게 지휘권을 양도해야 한단 말이오?"
펠리스의 억양이 무거워졌다.
어찌보면 황녀의 보좌관인 미미르에게 저런 태도가 올바른가 싶겠으나, 펠리스는 결코 미미르가 정한 선을 넘지 않았다.
미미르 또한 펠리스에게 필요 이상의 존중을 받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아나스타샤가 그런 걸 받아야 하는 성격이었다면 그녀의 이름값을 위해서라도 고압적으로 나왔을 테지만, 아나스타샤 본인 스스로가 그런 것을 싫어하기에 미미르와 펠리스는 이러한 관계가 이어질 수 있었다.
실제로 펠리스는 아룬비다를 다스리는 데 중요한 인재이기도 했고.
"그렇지는 않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작전 지휘 자문인 정도 되겠지요. 판단은 펠리스, 당신이 하면 됩니다."
"흐음...."
펠리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애송이가 곧 이 아룬비다에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라 말했던가.
두 달 안에 결과가 나올 것이라 했는데, 아직까지는 들려오는 소식이 없었다.
물론 마력을 쓰는 오크를 발견한 게 변화라면 아주 큰 변화겠지만.
녀석이 말했던 뉘양스는 이런 게 아니지 않나.
"지휘권만 내게 확실히 준다면 맡아 보도록 하겠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제국에 관련 정보를 올려야 해서 당분간 영지에는 없을 예정이거든요."
"황녀 홀로 둬도 되겠소?"
"이번엔 각서까지 받았으니 괜찮겠지요."
"그쪽은 황녀님을 너무 믿는 게 문제요. 쯧. 뭐, 그래도 허튼 짓을 할 분은 아니니, 그쪽이 말하는 대로 하리다."
"예.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는 길에 선물이나 좀 가지고 와 주쇼."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렇게 둘의 대화가 끝나고.
미미르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셰인이 머무는 거처로 향했다.
가볍게 노크를 하자, 안에서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오십시오."
"예. 들어가겠습니다."
방문을 열자마자 미미르는 놀라움에 눈이 살짝 커졌다.
"이게... 뭐죠?"
"올해부터 작년까지의 수색대 보고서와 제가 개인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마법입니다."
본래라면 삭막하기 그지없을 셰인의 숙소는 마치 거대한 종이 뭉치로 이루어진 상자처럼 느껴졌다.
온 벽에는 셰인이 말한 것처럼 다양한 수색 보고서들이 붙어 있었고, 나무로 만들어진 칠판에는 아룬비다의 지도가 크게 펼쳐져 다양한 표식들이 위에 적혀 있었다.
거기에 방 중앙에서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원형 구슬 위로는 복잡한 마법 공식이 투영되어 있기까지.
잠시 그걸 지켜보던 미미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미르 또한 과거 뛰어난 마법사로 이름을 알렸던 만큼, 마법 공식을 읽는 데 어려움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본 건데. 어디였지?'
유쾌한 기억이 아닌 불쾌감이 동반되는 것을 봐서는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닌 듯했다.
"여, 열심이군요. 뭔가 알아낸 게 있습니까?"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날 조짐은 확실히 보입니다."
"흐음...?"
그 말에 미미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 또한 수색대의 보고서를 매일같이 받아 읽지 않던가.
오크들의 움직임이 수상하기에 몬스터 웨이브를 의심하고 있긴 했으나, 저렇게 확정짓지는 못했다.
"무슨 단서라도 잡은 게 있습니까?"
만약 잡혔다면 이는 아주 희소식이었다.
이를 근거로 황실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황실 자체에서 도움을 받기엔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로써 국제 사회에 알릴 기회가 생기고, 모험가들의 관심을 끌지도 모른다.
"예. 안 그래도 이에 관해 찾아뵐까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셰인은 자신이 표식을 남겨 둔 아룬비다의 지도로 향했다.
"보시면 오크들이 습격한 대부분의 몬스터 서식지는 번식기에 들어설 무렵입니다."
"예. 그건 들어서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게 몬스터 웨이브와 큰 연관점을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죠."
저 현상을 봤을 때 미미르가 바로 떠올린 것은 몬스터의 조련이었다.
그러나 몬스터와 짐승은 다르다.
갓 태어난 몬스터라 해도 조련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그마저도 매우 온순한 몬스터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크들이 습격한 몬스터들은 온순하기는커녕 사납기 이를 데 없는 녀석들이지 않은가.
애초에 몬스터를 조련해서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킨다는 것부터가 기본적으로 식량이 부족한 이곳 아룬비다에서는 상식적으로 힘든 일이다.
"예. 그래서 여러 가지 고민을 해 봤습니다만, 이들의 행동과 연관이 있을 만한 방법으로는 이것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셰인은 품에서 꺼낸 마도 촬영기를 보였다.
마도 촬영기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허공에 투사되자, 얼마 전, 아나스타샤와 함께 상대했던 오크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크의 마력 말입니까?"
"맞습니다. 이들의 마력 패턴을 공식화해서 만들어 본 게 바로 이것입니다."
"예? 고작 마력 패턴만 봤다고 공식화가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드물게 깜짝 놀란 미미르가 셰인을 바라봤다.
그건 마치 오르골의 내부도 보지 않은 채, 소리만 듣고 내부 설계도를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일반적인 상식선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 복잡하진 않은 관계로 오래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투박하기 그지없었죠."
그러나 셰인의 분석력은 상식선에서 이해가 가능한 부류가 아니었다.
물론 셰인도 고등 마법처럼 복잡한 수식이라던가, 고위 기사의 마력 패턴까지 알아보지는 못한다.
정확히는 너무 오래 걸린다 해야 할까.
그러나 오크의 기억을 습득하기도 했던 덕에 이걸 공식화하는 데는 그리 어려움이 따르지는 않았다.
경악한 미미르를 뒤로하고 셰인은 굳은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 갔다.
"그런데 우리 생각보다 일이 심각한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공식, 어딘가 익숙하지 않습니까?"
"예. 안 그래도 보자마자 무언가 떠오를 것 같습니다만, 그게 뭔지는 아직 모르겠군요."
"혈마법입니다."
"...?!"
혈마법. 과거 당시 흑마법사들과의 전쟁에 참석했던 미미르는 어째서 자신이 저 공식을 보자마자 불쾌감부터 떠올렸는지 곧장 알 수 있었다.
"오, 오크들이 혈마법을 쓴단 말입니까? 아니, 그보다 당신은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미미르의 표정이 보다 심각해졌다.
흑마법과 혈마법은 전 대륙을 통틀어서 가장 금기시 되는 마법들이었고, 그런 만큼 그에 관해 알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죽하면 마탑의 탑주들조차도 그 두 마법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알지 못하는 실정 아닌가.
그러나 아직 완벽하게 소화한 것은 아니나, 고든의 영혼을 해체했던 셰인은 그 두 마법이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메자이아 대수림을 탐사했던 당시, 키메라를 다루던 전 흑마법사 수장, 고든의 연구실에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허어...."
그러고 보니 보고서에 고든이 나타났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물론 세간에는 고든이 엘프 여왕, 프리실라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에 그의 연구실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았던 미미르였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이들은 모종의 혈마법을 통해 마력을 깨우친 듯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혹, 오크들이 키메라를 쓸지도 모른다는 겁니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아마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어째서죠?"
"일단 흑마법은 기원후에서야 인간들에 의해 개발됐고, 현대의 혈마법의 경우 또한 그 고든이라는 작자가 기존의 혈마법을 흑마법과 접합시켜 만든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아...."
확실히. 셰인의 말처럼 고든은 그만한 전적을 가지고 있던 마법사였다.
미미르도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흑마법과 혈마법은 기원 후 많은 개조를 거쳤다는 말이다.
"그들의 마력 패턴을 공식화한 결과를 보면 이는 원조 혈마법에 가깝습니다."
"음... 그렇다면 확실히 키메라까지 다가가기엔 무리가 있겠군요."
혈마법에 대한 원리까지는 모르나, 마법으로 인한 결과 정도는 마법사들도 원한다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기에 미미르도 금세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맞습니다. 원조 혈마법은 주로 육체 강화에 특화되어 있죠."
"그렇다면 어째서 그게 몬스터 웨이브를 유추할 수 있는 방법이 되는 겁니까?"
"...말씀드렸다시피, 혈마법의 원조는 육체 강화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그 이론은 몬스터의 마력 인자를 혈관에 때려 박는 일입니다."
"그럼 설마...."
"예. 크게 봤을 때는 몬스터를 통솔하게 되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그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다른 곳이라면 이 이론이 먹힐지도 모른다.
무리를 이루는 몬스터야 외부에 차고 넘치니.
그러나 아룬비다에 있는 대부분의 몬스터는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러지 않는 몬스터도 제법 있으나, 오크들이 찾아간 몬스터는 대개 단일개체로 돌아다니는 몬스터란 말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몬스터의 마력 인자를 통해 동족인 것처럼 흉내를 내더라도 통솔 자체는 불가능하다.
동족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다면 이빨을 들이댈 몬스터들이지 않나.
그러나 셰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몬스터들이 사나워지는 시기가 있지 않습니까."
"...일월식(一月蝕)."
"예. 두 개의 달이 하나로 뭉치는 시기에는 유독 몬스터들이 사나워지고, 뭉쳐 다니기 시작하죠."
끝내 미미르는 침묵에 빠졌다.
아직까지는 망상에 불과한 이론일 뿐이지만, 눈앞의 소년이 어떤 존재던가.
한 번도 가 본 적 없던 메자이아 대수림의 마력불안정현상을 고작 아카데미의 학과 시험에서 밝혀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을 허투루 들을 정도로 미미르는 우둔하지 않았다.
거기에 이론적으로, 심리적으로도 틀린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아직은 보다 연구해 봐야 할 일이지만, 제 생각에는 오크들의 계획은 이럴 듯합니다. 혈마법으로 몬스터의 마력 인자를 흡수하고, 모종의 방법으로 일월식을 흉내 내어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킨다."
"그 웨이브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현상이 되겠군요... 한데, 도대체 오크들이 어떻게 혈마법을 쓸 수 있는 겁니까?"
그에 대해서는 셰인도 아직 추측에 불과하나, 떠올린 것은 하나 있었다.
오크의 영혼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들려왔던 한 소녀의 처절한 울음소리.
그리고 오크들에게 얽힌 역사.
아마 오크들은....
'어린 흡혈귀들을 다 죽인 게 아니었나.'
프리실라가 말해 주었던 북부 오크들의 기원.
그 과정에서 오크들이 어린 흡혈귀들을 습격하지 않았던가.
높은 확률로 그 흡혈귀 중 하나가 지금까지도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오크들에게 붙잡힌 채 착취당하고 있을 터.
그러나 셰인은 그 사실을 굳이 미미르에게 말하지 않았다.
"고대에도 오크들은 마력을 다루지는 못했으나, 마력을 사물에 담는 주술은 사용할 줄 알았습니다. 오크 샤먼이라는 존재가 있었으니, 아마 그와 연관이 있을 거라 추정됩니다."
"후... 복잡하군요. 이를 본국에 어떻게 알려야 할지."
그나마 북부의 최전방에서 변화의 바람을 정면으로 받아 내는 미미르였기에 셰인의 말을 듣고 가까스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이 아룬비다를 쓰레기장쯤으로 여기고 있는 황실에서는 높은 확률로 셰인이 한 말을 믿지 않을 터였다.
오히려 개소리하지 말라며 비웃음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렇게 고민하는 미미르의 모습에, 셰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미르 님. 한 가지 제안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미미르는 무표정으로 저런 말을 내뱉는 셰인을 바라봤다.
분명 아무런 표정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으나, 마치 누군가를 향한 살기가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65화
65화 오크의 혈마법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