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다시금 눈을 떴을 때, 디라일라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법진이 정상적으로 발동이 된 것을 확인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탐사대의 숫자가 확연하게 줄어 있었다.
"이게 무슨...."
당혹스러움을 느낀 것은 디라일라 뿐만이 아니었다.
하이엘 기사단의 애덤도 탐사대의 인원들이 모두 보이지 않자, 이게 어찌 된 일이냐는 듯 라비아타를 바라봤다.
셰인의 마법진에 그 다음으로 관여한 사람이 라비아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비아타는 이 상황을 알기라도 했던 것인지 평소처럼 미소를 지었다.
"당황하지 마.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아. 안 느껴져?"
"...!"
그녀의 말에 애덤의 기감이 경고음이라도 내뱉듯 사방에서 적의가 느껴졌다.
"하이엘 기사단, 전원 전투 준비!"
한 왕국을 대표하는 기사단답게, 그들은 능숙하게 검을 뽑아 들며 전투에 대비했고, 이내 그들은 어둠 속에서 안광을 내뿜으며 다가오는 적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저건...!"
적들의 정체에, 애덤의 얼굴에는 잠깐의 경악과 함께 극도의 분노가 점철됐다.
"감히!!"
애덤의 고함 소리와 함께 주변으로 살기가 터져 나갔고, 라비아타도 두 주먹에 불꽃을 피우며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전투를 준비했다.
한편.
그런 적들을 맞이하고 있는 이들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마법진이 발동되고 눈을 뜬 클라인과 아네이스, 그리고 도미닉과 램퍼트 모험단 또한 다가오는 적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노오옴!! 너희는 뭐 하는 놈들이더냐!"
애덤과 비슷하게 분노가 담긴 검을 휘두르던 도미닉은 상대를 보며 이러한 감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눈앞에 있는 이 기괴한 생명체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크륵, 크어."
익숙한 얼굴들.
그러나 그 아래로부터 이어지는 몸의 형체는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어떤 개체는 애벌레의 몸체에 8개의 다리를 기괴하게 움직이며 바닥을 돌아다녔고, 어떤 개체는 사마귀의 그것과 같이 생긴 날카로운 팔과 벌레의 날개를 가진 녀석도 보였다.
그러나 탐사대에게 충격을 가져다 준 이유는, 바로 그들의 얼굴이 여태까지 잃은 동료들의 얼굴이라는 것.
누가 보더라도 인간과 벌레를 대상으로 키메라 실험을 한 흔적에, 도미닉도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비록 조직과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다고는 해도, 이런 식으로 긍지 높은 황실 기사단원들의 시체를 써먹어서는 안 됐다.
'역시 믿을 수 없는 종자들이다!!'
셰인이 마법진을 수정하는 작업을 하는 동안, 도미닉도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다.
그 사이 또다시 찾아온 새로운 조직원에게 마법진 작업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 조직원의 머리를 잘라 버리고 싶었으나, 그때도 결국 참을 수밖에 없었다. 대의를 위해서.
운이 좋았던 것일까, 조직은 성공적으로 셰인의 작업에 핵심이 되는 목적지를 살짝 비트는 데 성공했고, 다시 한번 탐사대가 갈라지도록 만들었다.
거기까지는 좋았으나, 조직의 실수로 인해 다크엘프들에게 죽은 기사들의 시체가 키메라가 되어 나타나는 일은 도미닉으로서도 상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으드득...."
나이가 든 뒤로 이렇게까지 화가 났던 적이 얼마 만이던가.
그런 도미닉의 기세를 눈치챈 누군가가 외쳤다.
"도미닉 경! 지금처럼 무리하게 전투에 임해서는 안 돼요!"
"자네는 지금 저걸 참으라는 겐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램퍼트 모험단장 일렉사가 그리 외치자 도미닉은 이빨을 으득 씹었으나, 내뱉은 말과는 다르게 머리가 냉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노장답게 그는 빠르게 이성을 되찾고 냉정하게 상황판단을 했다.
'그래. 여기서 이 늙은이의 실수로 자네들의 희생을 물거품으로 되돌려서는 안 될 일인 게야.'
끝내 도미닉이 검을 회수하며 램퍼트 모험단이 세운 방패 뒤로 돌아가 한 차례 숨을 돌렸다.
"후우. 미안하네. 늙은이가 주책없이 날뛰었구먼."
"...아니에요. 그보다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시나요?"
"아무래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닐세. 일렉사 양. 저쪽에 얼굴이 같은 개체들이 보이는가?"
"예."
도미닉의 말처럼, 저 키메라들 사이에서는 얼굴이 서로 같은 개체들이 곧잘 보였다.
얼굴 외에도 목 아래로 이어진 벌레 특유의 육체도 마찬가지로 같은 형태를 띄고 있었는데, 도미닉은 거기서부터 몇 가지 단서를 추려냈다.
"예전에 흑마법사들을 상대하며 본 적이 있네. 저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아무래도 놈들에게 모체가 따로 있는 것 같구먼."
"...놈들이 증식한다는 말씀입니까?"
일렉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당장 기괴한 외형은 둘째치더라도 놈들의 공격 하나하나가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높은 확률로 그럴 걸세. 다른 거라면 모를까, 얼굴의 형태까지 똑같은 개체들을 설명하려면 그것 외에 떠오르는 게 없으이."
"그럼, 여기서 계속 놈들을 상대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말씀이로군요."
"아무래도 그렇게 봐야 할 것 같구먼. 아마 우리와 떨어지게 된 다른 이들도 이와 비슷한 상태일 테니...."
"저들 중에 가장 최근에 죽은 자는 채 보름이 되지 않은 키메라도 있습니다."
"잘 봤네. 아마 이런 식으로 증식시키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지도 모르겠어."
"도대체 어떤 집단이길래 이 정도의 무력을...."
"...."
일렉사의 말이 비수처럼 도미닉의 가슴에 박혔다.
확실히.
어쩌면 황실은 적들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저런 키메라들이 얼마나 생명을 유지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런 짧은 시간 내에 저 정도 전력을 만든다는 게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었으니.
거기에 황실의 기사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저런 키메라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는 것은, 얼마만큼 황실이 우습게 보이고 있는지 잘 보여 주는 방증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에요. 클라인이 이쪽에 있으니, 적어도 전력이 부족하진 않을 것 같아요."
"불행 중 다행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게지."
일렉사의 말처럼 전방에서 마력을 풀어헤치며 전투에 임하는 클라인은 전혀 지치는 기색 없이 묵묵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클라인의 표정은 어두웠는데, 그 이유는 탐사대가 갈라지기 전에 셰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클라인. 아마 나와 또다시 떨어지게 될 일이 있을 거다. 그때는 당황하지 말고, 닥쳐 오는 위협에 대비해라. 내 몸 하나 건사할 자신은 있으니까. 알겠느냐.'
마치 이번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다는 뉘앙스로 말하는 셰인의 그 한마디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표정이 굳어 있던 것은 클라인뿐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묵묵히 클라인을 보조하며 검을 휘두르는 아네이스의 표정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는데, 그녀는 당장 눈앞의 적보다 아까 도미닉이 내뱉은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뭐 하는 놈들이냐!'
이런 상황에서도.
도미닉이 내뱉은 그 거짓말.
아네이스의 감은 도미닉이 적들의 정체를 알면서도 저리 내뱉었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도미닉에게 달려가 그 거짓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으나.
이번에도 아네이스는 꾹 참았다.
아직 거짓을 밝히기에, 아네이스가 가진 정의에는 힘이 없었으니.
그러한 생각에, 또다시 아네이스는 습관처럼 떠오르는 의문을 머리 한 구석에 박아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그러한 의문 덩어리를.
* * *
빛이 저물자마자 셰인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푸른 오러에 휩싸인 검이었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는 듯, 셰인의 코앞에서 터진 중첩 마력탄이 검을 튕겨 냈다.
"큭?!"
설마 이 기습에 대응할지 몰랐던 것일까.
황실 기사단원이 얼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고, 뒤이어 날아오는 중첩 마력탄을 빠르게 베어 낸 뒤, 셰인에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
기사단원의 말에 셰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봤다.
텔레포트 마력패턴이 발동하기 전까지 보이던 다른 탐사대원들은 어디로 가고, 황실 기사단만이 자리를 메꾸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느냐니...."
그러면서, 셰인은 천천히 그들을 향해 비웃듯이 말했다.
"굳이 대답할 가치가 있는 질문은 아니로군."
말 그대로, 셰인은 저들에게 설명해 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의문은 해소될 테니.
비록, 저들이 납득할지는 다른 문제겠지만.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40화
40화 끝나 가는 탐사 (5)
고든이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런 무능한 놈 같으니라고!"
다크엘프가 사라졌다는 보고를 마친 조장급 조직원이 10일 가까이 지나도록 상부에 보고가 없자, 조직의 상부에서는 이상함을 느끼고 고든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제야 조직원마저 실종됐음을 깨달은 고든은 이젠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가뜩이나 자신의 연구를 방해하는 탐사대 때문에 민감한 마당에, 일을 맡긴 조직원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으니.
물론 어딘가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을 게 틀림없었기에, 결국 그는 하던 연구를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고든의 분노는 얼마 가지 않아 사그라졌다.
워낙에 변덕이 심한 성격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번 상황이 그리 나쁘게만 보이지는 않았던 까닭이다.
"이놈들로 실험해 보면 괜찮겠군."
실종된 조직원이 가지고 온 탐사대원들의 시체를 보며, 고든은 예전부터 해 왔던 키메라 연구의 성과를 보기로 했다.
워낙 눈에 띄는 키메라였기에 조직에서도 아직 쓸 때가 아니라 판단하고 묵혀 뒀으나,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굳이 쓰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거기다, 놈들도 곧 온다고 했으니. 시간 끌기 정도는 되겠군. 흐흐흐."
그렇게, 광기의 연금술사는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쓰러진 시체들에게 다가갔다.
"부디 너희는 실망시키지 말아 다오, 나의 아이들아."
그렇게 작업에 몰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실종된 조장급 조직원을 대신해 평조직원이 가지고 온 탐사대의 현황을 듣게 된 고든은 더더욱 얼굴에 미소를 피웠다.
"엘프들의 마법진을 파악한 인간이 있다고? 고놈 참 신기한 놈이로군!"
비록 자신을 귀찮게 한 탐사대였으나, 연금술사답게 흥미로움을 참지 못하는 고든은 그 자그마한 소식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 귀찮은 벌레들 사이에서 제법 쓸 만한 녀석이 있었어. 흐흐."
고든은 자신의 흥미를 끈 상대의 이름을 조직원에게 물었고, 이내 조직원에게 듣게 된 이름을 고든은 되새기듯 중얼거렸다.
"셰인, 셰인이라... 잘하면 내 조수로 써먹어도 되겠어. 반항하면 귀찮으니 이것저것 고쳐 봐야겠지만 말이야."
이 나이에 들어서도 새로운 일거리는 질리지가 않았다.
그렇게, 고든은 자신에게 찾아올 탐사대를 기다리며 콧노래를 불렀다.
* * *
"가치가 없다고 느껴지면, 있게 만들어 줘야겠군."
황실의 기사단원 중 한 명, 에버닉의 말과 동시에 기사단 전원이 무기에서 오러를 피워 냈다.
과연 한 명 한 명이 4품의 엑스퍼트들이었고, 개중에는 3품 마스터에 다다르는 벽에 근접한 이들도 적지 않게 보였다.
여태까지 다크엘프들의 습격에 살아남은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듯, 그들이 피워 내는 살기는 확실히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셰인은 그들의 기세에 밀리지 않고 지그시 그들을 바라봤다.
방금 전, 셰인의 기습을 효과적으로 피했던 덕분일까.
황실의 기사답게 상당한 내공이 쌓인 그들은 본능적으로 주변의 마력부터 탐지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셰인이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신중하군."
"원래 준비된 마법사만큼 무서운 법은 없으니."
비록 이만한 거리에서 마법사를 죽이지 못한다면 기사로서 그만한 수치가 어디 있겠냐마는.
그래도 그들은 신중했다.
이윽고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기사 중 한 명이 말했다.
"순순히 투항한다면 고통 없이 편안한 죽음을 선사하지."
"항상 느끼는 거지만, 너희 호위기사단들은 개소리를 그럴듯하게 내뱉는 습관이 있군. 얼마 전에 내 손에 죽은 머저리도 그랬지. 세상에 편안한 죽음 따위는 없다."
"쯧. 역시 하르페는 너에게 죽었나."
예상했던대로 셰인은 호위기사단의 저의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자 가장 앞서 있는 에버닉은 살짝 소름이 돋았다.
이제 고작 18살의 소년이 가진 표정 관리와 그 심계는 놀라울 정도였으니.
만약 자신들의 단장인 도미닉이 조금이라도 경계를 풀었다면, 황실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다.
"가자."
기사단 전원이 한순간에 달려들었다.
확실히 엑스퍼트 4품의 수준이라 해야 할까.
다 함께 수많은 고비를 견디며 합을 맞춰 온 그들은 셰인이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이 날카롭게 들어왔다.
"틴더(Tinder)."
그러나 동시에 셰인도 1서클 마법, 3중첩 틴더를 시전하며 주변에 불길을 터뜨렸다.
주문과 함께 6개의 불꽃이 터져 나오자 기사단의 발걸음이 멈췄다.
"...?! 대비하라!"
고작 1서클 마법, 틴더.
화력만 봐서는 고작해야 살짝 화상을 입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3중첩이나 되니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래 봐야 1서클일 뿐인 틴더.
오러로 몸을 감싸는 기사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준은 아니었다.
실제로 가장 앞에 선 에버닉의 명령에 기사들이 오러로 몸을 감싸자 불길은 덧없이 사라졌다.
"일반적인 1서클 마법의 화력이 아니군... 확실히 무언가 한 수가 있긴 했던 건가."
평소 봐 왔던 마력탄과는 다른 마법에, 기사들이 잠시 움찔했지만 그것도 정말 잠깐에 불과했다.
이 정도로는 자신들을 어찌할 수 없음을 파악하고는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셰인이 원하던 것이었다.
"아까 했던 말 중에, 맞는 말이 있었지."
"뭐?"
"준비된 마법사는 무섭다고 했던가. 딱 맞는 말이다. 지금의 너희들을 보면."
"...? 아!"
그제야 틴더에 의해 밝혀진 주변을 확인한 에버닉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콰과과과곽-!!
이어서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벽과 바닥으로부터 틴더와는 비교도 하기 힘들 폭발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갔다.
폭발로 인한 반발력이 오러를 두른 기사들의 몸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그러게 주변 환경을 잘 확인하셨어야지."
그런 기사들의 발밑으로는, 화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터지는 시스투트리 나무의 뿌리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물론, 단순히 저 정도 폭발력으로 4품 엑스퍼트 수준의 실력자들을 쓰러뜨리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셰인이 준비한 것은 단순히 이 정도가 아니었다.
"이게, 무슨... 커헉!"
기사들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검은 송곳들.
그 모두가 하나같이 기사들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어, 어떻게...."
똑같이 심장이 꿰뚫린 에버닉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셰인을 바라봤다.
"그리 놀랄 것도 없지. 스스로의 마력에 의해 죽은 것뿐이니."
"그게, 무슨 말...."
"알 거 없다. 아까 말하지 않았나. 세상에 편안한 죽음 따위는 없다고."
"이렇...."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에버닉은 원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흐음. 확실히, 쓸 만하군."
그런 에버닉의 죽음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셰인은 방금 전 전투를 상기해 봤다.
사실 셰인이 가진 절대적인 무력만 따지자면, 저들에게 못 미쳐도 한참 못 미친다.
그러나 이렇게 저들을 쉽게 이길 수 있던 이유는, 아까 말했던 것처럼 마법사인 셰인이 치밀하게 준비해 뒀기 때문이다.
'그때 그 일 덕분에 일이 잘 풀리는군.'
지난번, 디라일라를 구출하며 살리에르 백작의 별장에서 저지먼트 기사단원인 다이라와 싸웠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저지먼트 기사단은 마력과 오리진이 섞인 자신들만의 오러를 사용한다.
오러의 속성은 흡수.
마력을 흡수하는 성질을 띈 저지먼트 기사단은 마법사들에겐 저승사자요, 같은 기사들을 상대로도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했는데, 다이라에게서 뽑아낸 흡수라는 속성은 현재 셰인의 오리진, 탐욕과 굉장한 시너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거기에 어둠의 정령이 가진 어둠 속성까지 가미되어 이번 전투가 쉽게 이어졌는데, 셰인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어둠 속성과 함께 자신의 오리진을 황실 호위 기사단 전원의 그림자에 숨겨 뒀다.
다만 그때까지는 기사단이 자신들의 그림자에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도록 마력을 담지 않은 탓에 물리력이 포함되지 않았는데, 대신 한 가지 명령을 내려 둔 상태였다.
기사단원들이 평소 흘리는 마력을 흡수하고 그 성질을 터득하라는 것.
덕분에 기사단원들의 마력에 반발력이 생기지 않도록 만들었고, 틴더를 통해 시스투트리의 뿌리에 화속성이 담긴 마력을 주입시켰다.
그 결과 나무뿌리의 폭발이 기사단원들의 그림자에 숨겨진 자신의 오리진에 마력을 부여해 물리력을 담아 낸 것이다.
실로 완벽한 그 기습은 과연 기사단원들은 심장에 꿰뚫리는 그 순간까지 자신들이 무엇에 당했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먼저 처리하셨군요, 셰인 님.]
그때, 뒤에서 다크엘프 오베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난번, 엘프들의 여왕, 프리실라와 만난 이후로 다크엘프들은 셰인의 지휘권을 인정하며 그의 밑으로 들어오길 자처했다.
마력에 민감한 엘프들인만큼, 다크엘프들은 자신들의 존재가 동족들에게 좋은 영향이 가지 않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상처는 없으십니까? 죄송합니다. 저희가 제때 도착하지 못한 탓에.]
[아니, 됐다. 어차피 너희 도움이 필요했던 것도 아니고, 아직 너희가 나설 차례도 아니니까.]
[....]
오베른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오베른을 보며 셰인은 조용히 물었다.
[내 밑으로 들어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나?]
[아직 그 정도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습니다.]
[손에 피를 묻혀야 할 일이 많을 거다.]
[그건 이미 제 누이... 여왕님과 끝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셰인 님. 당신이 우리 동족을 위해 준다면.]
오베른은 프리실라와 같은 핏줄을 타고 난 엘프였다.
오베른은 자신들이 아카샤의 대봉인에 의해 이곳에 봉인되어 있는 동안,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파악하고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할지 합리적인 고민을 했다.
그 결과, 대수림에 봉인되어 있는 동족들을 위해 셰인을 따라 인간들의 세계에서 영향력을 높이겠다는 이유로 복종을 선택했다.
오베른은 여왕의 핏줄인만큼 이미 다크엘프들에게 굳건한 신뢰를 받고 있었고, 이는 곧 통솔력으로 이어졌다.
이런 이들이 제 발로 찾아왔으니, 셰인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현 상황은 어떻지?]
[아직까지 인간들... 그러니까 탐사대의 전력이 밀리는 그림은 아닙니다. 다만 숲의 외곽에서부터 정확히 이곳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던 존재가 곧 도착할 것 같습니다.]
[존재감을 숨기지도 않고 온다라. 확실히 끝장을 보겠다는 의미로군.]
[느껴지는 마력을 봤을 때... 만약 그 존재가 합류하게 된다면, 탐사대에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놈의 마력을 내게 전달할 수 있겠나?]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비록 다크엘프가 된 탓에 더 이상 정순한 엘프의 마력을 쓰진 못하겠으나.
그래도 이곳에서 살아온 지 고대를 기점으로 해도 백 년이 넘어가는 오베른이다.
나무와 나무끼리 연결된 엘프들의 연락망은 여전히 사용할 수 있었고, 이내 곧 오베른은 외부에서부터 다가오고 있다는 침입자의 마력 일부를 나무로부터 받아 올 수 있었다.
'호오.'
그리고 그 마력은, 셰인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았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41화
41화 끝나 가는 탐사 (6)
이번 탐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드래곤 하트의 실존 가능성과 셰인이 세운 이론으로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안전을 확보하고 중심부까지 갈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 확인이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드래곤 하트의 획득이며, 목적 자체는 황실과 조직하고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드래곤 하트란 과연 무엇일까.
실상 드래곤 하트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이들은 얼마 없었다.
남들이 생각하는 드래곤 하트는 기원후, 인류의 역사상 드러난 적 없는 보물이다.
그저 취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힘을 얻을 수 있는, 그러한 보물이라고만 알 뿐.
그렇기에 이곳 메자이아 대수림에 위치한 드래곤 하트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 이들은 세상에 몇 없었다.
그중 한 명인 라비아타는, 자신의 앞에서 '쏟아진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달려드는 키메라 군단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진짜 심장 한번 되찾기 힘드네. 뒤로 빠져!"
디라일라가 흙으로 급조한 방벽 뒤에서 전투를 치르던 하이엘 기사단 전원이 라비아타의 목소리를 듣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동시에 라비아타의 손끝에서 다량의 붉은 구체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플레임 오브 헤이즈(Flame orb haze).
수십 개의 화염구가 전방으로 나아갔다.
하나하나가 농후하게 압축된 화기를 가지고 있던 구체들이 일제히 폭발을 일으키며 키메라 군단의 몸을 액체처럼 터뜨렸다.
그런 키메라들의 체액조차도 곧바로 증발해 버릴 정도로 압도적인 화력.
그러자 과할 정도로 공동 내부에 붉은 안개가 차들었다.
라비아타는 미세한 마력의 조정으로 안개를 건너편 통로까지 가득 메운 뒤, 다시 한번 마법을 영창했다.
헤이즈 밤(Haze bomb).
동시에 다시 한번 터지는 붉은 안개는, 키메라가 들어오는 통로마저도 지옥의 불구덩이로 만들어 버렸다.
"허어...."
한 순간에 정리되어 버린 현장을 바라보는 애덤은 할 말을 잃었다.
과연 마법사다운 화력이라 해야 할까.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몇 분이고 해야 할 캐스팅도 없이 즉발로 날아간 마법치고는 화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라비아타라는 명성답군.'
여태까지는 일행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라비아타 홀로 앞서 나가서 따로 전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렇게 직접 그 현장을 바라보니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건 그저 재해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후, 타는 냄새가 별로 향긋하진 않네. 화염 내성 마법 걸어 줄 테니까, 다시 앞으로 나아가 보자고."
"...알겠소."
"네...."
똑같이 속성을 다루는 마법사로서 디라일라 또한 느끼는 게 있었는지 살짝 질린 기색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길 얼마.
탐사대원들은 하나같이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하군."
죽은 동료들로 만든 키메라들의 시체는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눈앞에 죽어 있는 키메라들의 상태는 어딘가 이상했다.
"마치 무언가에 쥐어짜여진 듯 죽었어. 뭐지?"
어느 정도 나아갔을 때부터 등장하는 키메라의 시체들.
그 모습에 탐사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무에 얽힌 채 죽어 있는 키메라들이, 애덤의 말처럼 말라 비틀어져 죽은 것이다.
"뭐, 대충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거 같네."
라비아타의 말에 애덤이 물었다.
"예측 가는 게 있소?"
"응. 여기서 이런 짓을 할 존재는 몇 없거든. 흐음, 이거 전투가 생각보다 쉽게 끝나겠는데."
"...?"
"뭐, 가다 보면 알 거야. 근데 다들 표정 관리는 잘 하라고. 보면 깜짝 놀랄 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좀 설명해 주시오."
애덤이 한숨을 내쉬며 그리 말해 봤으나 라비아타는 빙긋 웃어만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길을 따라 걷던 도중, 그들은 라비아타가 했던 말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에, 엘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디라일라와 하이엘 왕국의 기사단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색찬란한 빛과 함께, 이 지하 공동에 자그마한 숲이 형성됐다.
싱그러운 풀들은 마치 이 상황이 기쁘기라도 한 듯 산들거리며 춤을 췄다.
거목으로 자라난 버드나무의 잎들은 자신의 아래 앉은 여인을 가리기라도 하듯, 그녀의 주변에서 흔들거린다.
반짝이는 백금발의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모습이, 이 공간을 채우는 햇살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호수가 담긴 것만 같은 눈동자가 탐사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동화에서나 볼 법한 몽환적인 풍경.
그러나 탐사대는 마냥 그런 여인의 모습에 넋을 놓고 있을 수가 없었는데.
그런 그녀의 주변으로 수많은 키메라들이 말라비틀어진 채 식물에 얽혀 죽은 모습에서부터 오는 괴리감은 그들에게 충분한 위기 의식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가히 아름다운 여인이 하프를 연주하며 그런 탐사대를 반기듯 입을 열었다.
"아아. 음. 아, 안녕, 맞나? 안녕하세요?"
수백 년 만에 입이라는 기관을 통해 대화를 시도한 여인.
엘프들의 여왕, 프리실라는 그렇게 미소를 지으며 탐사대와 마주했다.
* * *
"...끔찍하군."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도미닉은 이빨이 으스러지도록 입을 앙다물었다.
나름 기사로서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라 자부할 수 있던 그였다.
과거 흑마법사들과의 전쟁에서도 얼마나 끔찍한 광경을 봐 왔던가.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이러한 풍경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
"...."
그리고 다른 인원들도 도미닉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클라인의 활약을 주축으로 전투를 이어 간 일행들은 여전히 몰려오는 키메라 군단을 상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길 얼마, 도착한 장소는 눈살을 절로 찌푸릴 풍경이었다.
"끼륵."
"카르르르."
여태까지 상대해 온 키메라들은 모두 하나같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두고 도미닉은 모체가 따로 있을 것이라 판단했고, 안타깝게도 그런 그의 판단은 맞아들었다.
죽은 탐사대원들의 시체.
그러나 당연하게도 멀쩡하게 시체만 남아 있지는 않았다.
시체의 아래로 팽창했다 수축하기를 반복하는 알 주머니.
마치 인간의 피부 조직을 강제로 불려 만들어진 듯한 그 알 주머니에서는 여태껏 그들이 상대해 왔던 키메라들이 잉태되고 있었다.
그 수가 총 열에 다다르니, 고약한 악취와 함께 끔찍한 그 풍경은 일행들을 경악에 빠뜨리게 하기 충분했다.
도대체 이런 짓을 저지른 존재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클라인은 생에 처음으로 격한 분노를 느꼈다.
"아아...."
도미닉 또한 키메라들의 모체 사이로 보이는 자신의 기사단원들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여태껏 생각은 해 왔으나.
역시 황실과 끈이 연결된 조직은 상종해서는 안 될 존재들이다.
지금은 비록 죽은 시체들로 이루어진 풍경이나, 언제 저 풍경이 제국으로 뻗을지 모른다.
그나마 단원을 잃지 않았던 일렉사가 정신을 붙잡고 말했다.
"도미닉 경. 제가 경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요."
"...알겠네. 나이가 들어 마음만 여려지는 것 같으이. 미안하네, 자네들. 다 내가 부족했기 때문일세. 이제 그만 편히 쉬게나."
다행히 도미닉도 그간의 경험 덕분에 패닉에 빠지지는 않았다.
클라인 또한 단순히 감정에 휘말려 움직이는 성격이 아니었고, 아네이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데 익숙했다.
다만 도미닉의 남은 기사단원들은 아직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런 모습을 보며 도미닉이 괴로운 마음을 애써 감추며 소리쳤다.
"정신 차리거라, 이 못난 것들아! 동료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 저 어린 핏덩이들도 정신을 차리고 있는데, 이게 무슨 추태인 게야!"
그 말에 가까스로 충격에서 벗어난 기사단원들은 살기가 풀풀 풍기는 기세를 드러냈다.
"미안하네. 그럼 바로 정리에 들어가야겠구먼."
지금도 꾸역꾸역 키메라를 낳고 있는 모체들을 바라보며 일행 전원이 달려들려던 순간.
"힛, 미안, 미안해. 저런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내 형제라고. 멋대로 죽이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위에서 들려오는 가벼우면서도 가느다란 목소리에, 일제히 시선이 위로 향했다.
그 순간 클라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강렬한 살기에 반응해 검을 휘둘렀다.
카앙-!
"히히힉. 실패, 실패했다. 역시, 네가 제일 강하구나?"
"웬놈이냐!"
한 순간에 클라인에게 달려들었다가 기습에 실패한 존재는 공중제비를 돌며 안정적으로 바닥에 착지했다.
"저건...."
나타난 적의 모습을 보자, 일행들은 인지부조화에 걸린 듯 몸을 굳혔다.
거친 갑각에 감싸인 다리는 개구리의 그것과 비슷했고. 상체는 근육질로 뒤덮인 고릴라를 떠올리게 만들었으며, 얼굴은 8개의 눈을 가진 거미를 연상케 했다.
하나같이 자연의 법칙을 무시한 채 만들어진 듯한 존재.
"키메라로군."
"히히... 정답, 정답이야."
검은색 털이 수북한 놈의 머리에 달린 거미다리가 끼릭거리며 기분 나쁜 움직임을 취했다.
"끔찍하게도 생겼군...."
"힉, 왜 다들 내 얼굴만 보면 그런 표정을 짓는 걸까? 아빠, 아빠는 나보고 항상 예쁘다고 해 주시는데! 히히힉!"
그리 말하는 녀석은, 뒷짐 지고 있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서, 그런 표정을 짓는 녀석들은 전부, 전부 이렇게 만들어 줬어."
"...?!"
우직하게 생긴 고릴라의 손에 들린 것은, 악력에 의해 뭉개진 사람의 얼굴.
뒤늦게 그 얼굴을 알아챈 일렉사가 절규하듯 외쳤다.
"카르로트!"
그제야 일행들 중 몇몇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그곳에는 힘에 의해 강제로 목이 뽑혀 나간 시체가 바닥에 쓰러져 피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이 짧은 사이, 탐사대원 하나를 죽이고서 클라인에게 기습을 가했단 말인가.
방금까지 단순히 키메라라는 정도의 인식을 가졌던 일행들 내면에 적의 위험도가 격상했다.
적어도, 여기서 저자와 대등하게 다룰 정도의 실력자는 없었다.
"전원, 방진!"
동료를 눈앞에서 잃었으나, 일렉사는 철저하게 격한 감정을 억누르며 침착한 명령을 내렸다.
다행히도 그녀의 단원들 또한 동요하던 마음을 거둬내고 방패를 들어 전열을 가다듬었다.
일단 적은 단 한 명.
그러나 일반적인 몬스터라 생각해서는 안 됐다.
"히, 재밌겠다. 놀이, 놀이하자! 나랑 놀자아아!!"
그에 키메라의 공격이 시작됐다.
놈이 자세를 낮춘다고 인식하기 무섭게, 놈의 다리가 쭉 뻗어 나가며 방패를 치켜든 일렉사의 모험단에 달려들었다.
콰아아앙-!
그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도약을 통해 놈이 휘두른 주먹이 방패를 후려쳤다.
평소처럼 굳건하게 방패를 들고 있던 그들은 묵직하다못해 터지듯 들어오는 그 공격에 뒤로 밀려났다.
여태까지 그 어떤 공격이 들어오더라도 후방을 안전하게 지켜 왔던 그들이 밀려난 것이다.
"무슨 힘이...!"
"히히히! 친구들은 조금, 조금 튼튼하네에에!!"
방패를 디딤판으로 쓰며 발차기를 날린 키메라가 거리를 벌리기도 잠시, 아네이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뭔가 이상해."
"이상하다니, 뭐가?"
아네이스의 중얼거림에 반응한 클라인의 질문해 왔다.
"뒤에 있던 사람을 죽이는 것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근데 왜 우리는 저 사람이 쓰러진 것조차 느끼지 못했지?"
"음?"
그러자 클라인도 의아함을 느꼈다.
적은 분명 은밀하면서도 강하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시체가 쓰러지면서 났을 기척조차 일행들이 느끼지 못한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저 방패를 봐."
"아!"
일렉사 모험단원들이 들고 있는 마력으로 만들어진 방패는, 평소보다 그 빛이 선명하지 않았다.
"단순히 강하기만 한 게 아니야. 뭔가 다른 게 있어."
"확실히...."
아네이스의 말을 듣고보니 클라인도 상황을 판단하고 주변에 마력을 흘려 봤다.
그러자 평소라면 물 흐르듯 흘러야 할 마력이, 무언가에 방해라도 받는 듯 흐트러졌다.
"어쩌면, 반마력 장비가 있을지도 몰라."
그런 아네이스의 평에, 클라인의 얼굴도 굳어졌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42화
42화 끝나 가는 탐사 (7)
라비아타의 부관, 아르디아 제임스는 자신의 감을 믿는 사람이었다.
한때 대륙에서 가장 유명했던 암살단체의 수장이었던 그는 신중하긴 했으나, 위기 상황이 오면 스스로의 감을 믿고 움직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감은 제임스에게 많은 위기로부터 구원을 가져왔고,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조직에 의한 다크엘프들의 습격으로 탐사대가 찢어진 이후, 제임스는 탐사대에 다시 복귀하기보단 독단적으로 움직이기를 선택했다.
단체가 아닌 혼자라면 충분히 살아남을 자신도 있었거니와, 탐사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시선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라비아타 또한 이런 제임스의 판단을 믿고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고, 계획대로 홀로 돌아다니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위험.'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위기감에 제임스는 그림자 속에 자신을 숨겼다.
음차원의 마력.
한때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암살 단체의 수장답게, 최소한의 신체기능만을 남겨 둔 채 그림자에 스며들었다.
"에잉, 쯧쯧. 역시 급조해서 만든 것치고는 영 힘을 못 쓰는구나."
꼬장꼬장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위험한 요람에 평범한 노인이 있을 리는 만무할 터.
제임스는 습관적으로 이곳에 있을 법한 인물들을 추려 봤다.
이곳까지 오면서 키메라들의 모습도 확인한 제임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에 있을 법한 인물 중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고든. 그 자인가.'
한때 흑마법사 집단의 수장이었던 고든.
과거 연합국과 전면전을 펼쳤던 흑마법사 집단은 현재 괴멸된 상태였고, 연합국의 수장인 제국에서는 흑마법사를 이끌었던 고든이 사망했음을 공식으로 발표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제임스가 이끄는 정보 단체가 주시하고 있는 조직에서 활동 중인 것을 확인했었다.
'좋지 않은데.'
다른 것은 몰라도 고든의 능력만큼은 진짜였다.
고작 탐사대 하나가 상대하기엔 벅찬 존재였으나, 이내 제임스는 생각을 달리 했다.
제임스가 알고 있는 고든이라면 자신이 이곳까지 온 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만큼 고든은 다방면으로 뛰어난 존재였고, 음차원의 존재를 모르지도 않았을 테니까.
거기다 그가 다루는 언데드도 없는 것을 봐서는, 메자이아 대수림의 특성상 언데드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듯싶었다.
'엘프들의 눈을 피하고 있는 건가.'
어쩌면 일이 생각보다 쉽게 흘러갈지도 모르겠다.
다만 지금 곧바로 라비아타에게 가기보다는, 탐사대보다 먼저 메자이아 대수림에 찾아온 또 다른 모함단원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라비아타도 안심하고 전력을 다할 수 있을 테니.
그리 판단한 제임스가 몸을 빼려던 찰나.
"끌끌. 게 누구냐. 쥐새끼처럼 숨어서 보지 말고 나오거라."
'...!'
고든의 시선이 어둠이 일렁이는 방향으로 향했다.
* * *
제임스가 고든의 주거지에 도착하기 한참 전.
[그게 정녕 가능한 겁니까...?]
오베른의 물음에 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셰인은 이번 탐사대의 주적인 고든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전생에도 그랬지만, 고든의 정체가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을 무렵, 사람들은 그저 그가 미친 연금술사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물론 그 잔혹하리만치 천재적인 면모 또한 부각됐지만, 이미 한 번 연합국에 의해 패배했던 패배자에 불과했으니.
그러나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하나 있었다면, 그의 재능은 고작 천재적이다, 라는 표현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문제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재능은, 조직과 만나게 되면서 진정한 악마의 꽃을 탄생시켰다.
예를 하나 들면 고든이 만든 키메라 군단은 단순히 흑마법사가 만든 키메라와 비교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현재 이종족들이 봉인된 지금, 오로지 인간에게만 허락되어 있는 '종의 성장'이 가능한 생명체였기 때문이다.
이를 간단하게 봐서는 안 된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고든이 만드는 키메라는 늘어날 것이고, 그 한 마리 한 마리가 다양한 몬스터의 장점만을 추려 만든 생체 병기나 마찬가지다.
그런 존재들이 성장마저 가능하다면, 이 얼마나 불합리하단 말인가.
[그중에서도 넘버링이 붙은 녀석들은 까다롭지.]
넘버링.
고든이 특히나 애정하며 자신의 친자식이라 부르기까지 하는 키메라 생명체들.
아직은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으나, 미래에는 그러한 키메라 생명체들이 하나하나 군단을 다루는 수준까지 성장하면서 인류에게 공포로 다가온다.
[그러한 개체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녀석은 알파지.]
[알파, 말입니까.]
[그래. 놈은 조직의 입장에서 보면 실패작이다. 군단으로 활용하기엔 불가능한 놈이니.]
[한데 왜 가장 까다로운 겁니까?]
[반대로 말하면, 단일 개체로도 조직에서 쓰일 정도로 강하다는 말이니까.]
고든의 첫 키메라인 알파는, 고든이 한참 제국을 향한 적의가 가득했을 당시에 만든 키메라였다.
당시 제국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연합국의 토벌대에 의해 자신이 이끌던 흑마법사 단체가 전멸했을 때.
고든은 자신이 당한 수법 그대로 제국에게 돌려주고자 했다.
다만 군단을 원했던 조직의 의도와는 달랐기에 단 한 마리에 만족했어야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파는 까다로운 상대였다.
[놈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반마력 파장을 일으키는 키메라니. 생명의 근원인 마력을 거부하는 상대가 어찌 까다롭지 않을까.]
[반마력... 그런데, 왜 그런 존재를 탐사대에만 맡겨 두시는 겁니까?]
앞으로 나아가던 길.
현재 셰인이 가고 있는 방향은 탐사대가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오베른의 그런 의문에, 셰인은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마력을 주축으로 성장한 인류에게 마력을 흩트리는 반마력 생명체는 위협적이나.
아직 알파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었고, 더군다나 그곳에는 그런 알파의 최대 천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 * *
"히히히, 우리 같이 놀자아아!!"
알파의 괴성과 함께 다시 한번 램퍼트 모험단원들의 방패가 크게 흔들렸다.
그들의 오러가 언제 끊길지 모르듯 위태롭게 휘엉청거리자, 더 이상 방어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클라인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저 속도를 눈으로 따라잡긴 힘들어.'
키메라, 알파는 클라인의 동체 시력으로도 따라잡기 힘들 만큼 순간가속의 속도가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응? 네가 놀아주게?! 좋아!"
아까 기습에 실패했던 클라인이 앞으로 나오자, 너무도 쉽게 알파의 시선이 끌렸다.
그런 알파가 다시 한번 제자리 멈춰 도약 자세를 취하자, 클라인은 그대로 뽑아 든 검의 경로를 정했다.
하지만.
씨익.
직전에 보인 알파의 웃음에 황급히 검을 휘수하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콰앙-!
본래는 알파가 도약하는 순간에 맞춰 그 경로에 검을 휘두를 작정이었다.
한번 도약을 시도하면 도중에 경로를 바꾸지 못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보인 알파의 웃음에 클라인은 본능적으로 무언가 틀어졌음을 느끼고는 자세를 바꿨고, 다행히 그 감은 틀리지 않았다.
본래라면 정면에서 들어왔어야 할 공격이 측면에서 날아왔다.
살기를 느끼고 대비하고 있던 덕에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지만, 그 묵직한 무게감에 클라인이 들고 있던 검에서 좋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흐읍!"
그 순간 검을 비틀어 알파의 주먹을 흘리고, 마력으로 강화된 발차기를 녀석의 복부에 쑤셔 넣었다.
"키헤헥!"
"...!"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다.
그런 느낌이 들기 무섭게, 알파가 뒤로 몸을 피했다.
"아으, 아파, 아파! 히히... 근데 재미있다. 어떻게 알았지?"
그런 알파의 물음을 뒤로하고, 클라인은 녀석의 뒤에서 움찔거리는 무언가를 바라봤다.
그것은 성인 몸통의 크기만 한 사이즈의 꼬리였다.
분명 처음에는 본 적 없던 꼬리가, 클라인과 눈이 마주치고 도약한 순간에 나타난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몸뚱이인지.
클라인은 한 차례 넘긴 고비를 뒤로하고 외쳤다.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한 공격이 놈에게 먹혀듭니다!"
방금 막 자신이 파악한 정보를 탐사대에 알린 후에도 클라인은 최전선에 서서 일렉사 모험단에 가해지는 부담을 조금씩 덜어 줬다.
"히히, 조금 답답하지만, 이런, 이런 방법도 재미있어. 응. 히히히."
하지만 탐사대가 무작정 유리해지지도 않았다.
반마력 파장으로 인해 알파의 공격의 대부분을 가담하고 있던 일렉사 모험단원들이 빠르게 지치기 시작했고, 처음과 다르게 방패에 유지되던 오러 또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바람 앞에 놓여 언제 꺼질지 모르는 불꽃처럼.
이미 그 사실을 진작에 파악한 알파는 굳이 클라인이나 황실 기사단원들을 노리기보단 앞장서서 방패를 들고 있는 이들을 노렸다.
그나마 그중에서 가장 위협적인 이는 아네이스였는데, 그녀의 오러는 반마력 파장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 아네이스는 뒤에서 모체가 낳는 키메라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상황.
그러던 중.
"끄윽...!"
아까부터 알파의 집요한 공격을 담당하고 있던 모험단원 중 한 명이 부들거리는 팔을 늘어뜨렸다.
정신력과 관계없이 이미 팔 근육이 괴사하기 시작하며 더 이상 뇌의 명령을 듣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히히, 친구, 친구 아파 보인다. 그런데 더 못 놀겠네. 히히."
마치 일방적으로 개미를 학살하는 이유 없는 악의를 지닌 아이의 표정처럼.
순수한 악의로 무장한 알파의 주먹이 또 한 명의 희생자를 만들어 냈다.
"젠장, 타일렉!"
"씨발!"
방패를 늘어뜨린 동료를 대신해 자리를 메우던 단원 한 명이 빈틈을 보였고, 짐승과 같은 본능을 가진 알파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방패 사이로 자신의 꼬리를 우겨넣어 단원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것만으로도 단원의 얼굴은 뭉개진 채로 바닥에 쓰러졌고, 더 이상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썅!"
결국 일렉사의 입에서도 욕이 터져 나왔다.
특히 그는 도미닉과 황실 기사단을 노려봤는데, 아까부터 그들은 소극적으로 움직이며 틈만을 보고 있었다.
'이딴 게 황실의 기사단원이라니!'
북부의 성벽을 지키고 있는 고향의 기사들보다도 못한 그 모습에 일렉사가 분노를 터뜨릴 때쯤.
죽은 동료를 기릴 틈도 없이 알파가 다시금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공격이 통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방패 밖으로 나온 클라인이 일렁이는 오러에 휩싸인 채 알파의 주먹을 막은 것이다.
그러나 검에 부담되는 충격으로 인해 검이 부러진 순간, 알파는 자세를 잃지 않기 위해 꼬리를 놀려 클라인의 심장을 노렸다.
"키힛?!"
생전 겪어 본 적 없는 화끈한 통증이 꼬리로부터 느껴지자, 알파가 뒤로 크게 물러섰다.
어느새 잘려 나간 꼬리.
탄탄한 근육으로 외피를 단단하게 보호하고 있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알파의 신체는 오러로 감싸인 검을 막을 수 없었다.
한편, 클라인은 뒤로 크게 물러선 알파를 쫓지 않았다.
"잠시 빌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카르로트도 스스로 도움이 된 걸 좋아했을 거예요."
클라인의 손에 들린 검은 알파의 첫 기습에 당한 모험단원의 검이었다.
그에 클라인은 잘린 상태에서도 버둥대는 알파의 꼬리를 다시 한번 가르고, 일렉사에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제가 앞서겠습니다. 외람되지만 단장님께서는 녀석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형식으로 방진을 짜 주십시오."
"...괜찮으시겠어요? ...아니, 제가 잘 못 물었네요. 알겠어요. 당신을 믿어 보도록 하죠."
어느새 용오름이 피어오르는 클라인의 모습을 보며 알렉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이 말씀하신 기회는 이런 거였나.'
반마력의 원리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클라인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주변에 퍼진 마력이 마치 그물에 걸린 물처럼 흐트러지는 것을 보고, 클라인은 자신의 폭발적인 마력을 피워냈다.
여전히 이 폭력적인 마력량을 한 번에 통제하기엔 어려움을 겪었으나.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여기서 통제할 수 없다는 이유로 미적거리다간, 방금처럼 또다시 희생자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아파, 아파아아악!!"
8개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굉음을 내뱉는 알파의 모습을 보면, 무슨 이변이 일어날지 모른다.
실제로 아까보다 반마력 파장이 더욱 거세게 일었으나.
고작 그물 따위로는 몰려오는 거대한 파도를 이겨 낼 수 없는 법이니.
잔잔한 호수가에 잠들어 있던 용이 승천하듯, 클라인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압도적인 마력량은 그러한 반마력의 그물조차 거둬내기 충분했다.
이윽고 탐사대는 거둬져 가는 반마력 파장에 편안함을 느꼈다.
흔들리는 촛불처럼 불안정했던 오러는 다시금 단단한 방패의 형상을 만들어 냈고, 그제야 반격의 시간이 찾아왔다.
* * *
클라인의 활약이 시작되자 전투의 흐름이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오러를 되찾은 일렉사의 모험단은 이전과 다르게 알파를 포위하는 형식으로 방진을 만들어 놈이 쉽사리 도약을 하기 힘들도록 공간의 제약을 만들었다.
그때마다 클라인은 놈이 도약하기 전에 앞서 달려들었고, 반대로 답답해진 알파가 억지로 공격에 들어가면 반드시라 해도 좋을 정도로 클라인의 반격이 들어왔다.
어느새 놈의 속도에 클라인이 익숙해진 것이다.
"왜, 왜?! 왜 너희는 안 죽어어?!!"
그 사이 알파의 신체에 여기저기 상처가 쌓였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격통도 알파의 불안정한 정신을 갉아먹었지만, 그보다는 여태까지와 다르게 자신에게 순순히 죽지 않는 적들의 존재는 알파의 내면 깊이 뿌리 잡은 악의가 그의 정신을 더욱 크게 흔들었다.
"후우...."
그러나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는데, 확실히 알파는 무언가를 죽이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다.
불리한 지금의 상황에서도 탐사대의 빈틈을 찌르고 들어오는 공격은 하나같이 위협적이었다.
조금의 실수만으로 죽음에 내몰리게 만들 정도였기에.
하지만 그러한 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기회를 만들어 낸 덕분일까.
"주거어어어엇!!"
모험단원의 방패에 내쳐진 알파가 괴성을 내뱉으며 크게 도약하며 램퍼트 모험단원에게 달려들자, 단원은 크게 뒤로 물러서면서도 자신의 오러를 분출시켜 놈이 허공에 뜨도록 만들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클라인과 아네이스가 동시에 달려들어 알파의 어깻죽지와 옆구리를 크게 베어 냈다.
"캬아아악!"
끝내 알파가 바닥에 쓰러지고, 그제야 일행들은 긴장 섞인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단일개체 하나가 이만한 인원들을 상대하며 고전을 면치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렇게 드디어 끝났다고 판단됐을 무렵.
클라인이 알파의 마무리를 위해 다가가기 직전.
뒤에서부터 짧은 섬광이 터져 나왔다.
"아?"
"...?!"
방금까지 용오름을 피워 내던 클라인의 오러가 사라지고, 동시에 아직 방패를 내리지 않은 램퍼트 모험단의 오러 또한 순식간에 사라졌다.
동시에 신체 균형이 어그러진 일행들이 고개를 뒤로 돌리자, 그곳에는 멀쩡하게 서 있는 도미닉이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안하게 됐구먼."
그런 도미닉의 손 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섬광을 뿌려 대는 육각면체 오브가 놓여 있었다.
그런 오브에서 퍼지는 섬광은, 방금까지 알파가 만들어 낸 반마력 파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게 일대의 마력을 동결시켰다.
"자네들은 여기서 이만 사라져 줘야겠네. 황실의 미래를 위해. 인류의 미래를... 위해."
어느새 검을 뽑아 든 도미닉은 자신의 기사단원들과 함께 일행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런 도미닉의 그림자 밑으로 일렁이는 어둠을 본 사람은, 클라인이 유일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43화
43화 끝나 가는 탐사 (8)
"그 꼬맹이, 도대체 이걸 어떻게 안 거지?"
"어머, 저도 방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답니다."
라비아타의 혼잣말에 반응한 사람은 엘프의 여왕, 프리실라였다.
프리실라가 키메라의 모체들을 정리하고 짧은 소개를 마친 이후, 그녀와 탐사대는 앞으로 나아가는 길 끝에 마주한 흑빛 바위를 바라봤다.
다만 그저 검기만 한 바위는 아니었는데, 애덤과 그의 기사단원이 신중하게 그것을 향해 다가가려 하자 라비아타가 그를 제지했다.
"만만히 보고 갔다간 순식간에 침식된다?"
"침식? 라비아타. 그대는 이것의 정체를 아는 것이오?"
"엉. 이게 저렇게 생겼지만... 그래도 드래곤 하트라고."
"...?!"
그 말에 기사단 전원이 행동을 멈췄다.
눈앞에 있는 저게 이곳까지 온 이유, 드래곤 하트란 말인가?
"그런 것치고는 그저 평범한 돌처럼 생겼소만."
"뭐, 보고 믿어야겠다면야."
라비아타가 손끝에 피워 낸 불덩이 하나를 바위 근처에 보내자, 가만히 있던 바위로부터 음습한 기운이 흘러나와 순식간에 불덩이를 집어삼켰다.
"이, 이게 무슨...."
그 모습에 애덤을 포함한 그의 기사단원들이 뒤로 황급히 물러섰다.
"이런 게 드래곤 하트란 말이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에 애덤이 기겁을 하며 묻자, 라비아타가 피식 웃었다.
"뭘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였던 것' 이라고 표현해야겠지?"
"자세히 좀 설명해 주시오."
"말하자면, 오염된 거야. 무언가에 의해."
"그게 지금의 상황과 관련이 있소?"
"응. 방금 보니까 이걸 이렇게 만든 녀석들이 저 키메라 무리를 만들었을 확률이 높거든."
"그뿐만이 아니랍니다. 제 형제자매들도 저 오염된 드래곤 하트에 의해 다크엘프로 타락하고 말았죠."
본래 드래곤 하트는 엘프들이 신성시하는 세계수의 중심부에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엘프들이 수면기에 들어가고, 여왕인 프리실라 또한 그 힘이 상당히 약화되어 있는 사이에 조직은 드래곤 하트를 탈취, 이런 식으로 자신들만이 아는 장소에 옮겨 뒀다.
프리실라도 숲의 기운을 받아 드래곤 하트의 위치를 찾으려 했지만, 조직에서는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도무지 찾을 방법이 없었는데.
얼마 전에 자신을 찾아온 가면의 남성, 셰인에 의해 이 위치를 전달받았다.
다만 홀로 와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라 조언하고 탐사대와 함께 찾아오라는 말도 들었는데, 직접 찾아오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 엘프들이 거부할 수 없는 마력으로 오염되어 있군요."
"음, 그러네."
셰인은 이러한 상황까지 예측하고 라비아타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 꼬맹이... 정체가 뭐지?'
조직에 대해서는 라비아타도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 정도로 놈들과 관련된 정보를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셰인은 마치 이 상황을 전부 알고 있었다는 듯 행동했기에, 라비아타의 의구심이 점점 더 깊어져만 갈 때.
옆에 있던 애덤의 물음이 그런 라비아타의 상념을 일깨웠다.
"그게 무슨 의미요?"
"...다른 드래곤의 마력이 섞여 있어. 이 드래곤 하트는 드래곤이 죽으면서 모든 마력이 자연으로 돌아간 상태인데, 여기에 누군가 장난질을 친 거야."
"그럼 배후에 드래곤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오!"
애덤의 말은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라비아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헌에 의하면 드래곤들은 더 이상 이 세계에 관여할 수 없게 됐어. 아마 고대에 남겨진 드래곤의 아티팩트를 이용해서 이 짓거리를 한 거 같은데."
라비아타의 단호한 어조에도 애덤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드래곤의 힘이 담긴 아티팩트라니...."
"아무튼 애송아. 네가 나설 차례다."
"애송, 아니 디라일라라는 이름이 있는데 왜 그렇게 불러요."
"내 맘이야. 어쨌든 이건 너한테 달린 문제야."
"끄응, 어째 나한테 일이 몰리는 거 같은데... 정말 제가 해도 되겠어요? 가뜩이나 탐사대도 이렇게 나눠졌는데."
디라일라의 물음에 라비아타가 평소처럼 털털한 웃음을 보였다.
"어차피 네가 아니면 이걸 건드릴 수 있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애초에 텔레포트 같은 경우에는 원래 계획된 거기도 했어."
"네?"
"뭐, 그런 게 있다 이 말이야. 아무튼 안심하고 일단 한번 파악해 봐. 보니까 지금 저 드래곤 하트가 이 주변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 그것부터 풀어야 우리가 힘을 쓸 수 있을 거야."
"눼에...."
뭔가 찜찜했지만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기에, 디라일라는 먼저 이 주변의 대지부터 차근차근 공명을 시도해 봤다.
"아...."
주변의 대지는 드래곤 하트에 심어진 마력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속성 지배력.
포악하다 못해 오만하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지배력은 대지를 두려움에 떨도록 만들었다.
그런 지배력 때문일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디라일라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이전이라면 다르게, 스스로가 가진 재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나를 따라와. 어서!'
지하인으로서 대지속성에 대한 지배력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눈앞의 마력을 이기지 못한다.
당장 주인조차 없는 마력이었음에도 지배력의 수준은 디라일라를 아득히 상회할 정도였으니.
하지만 디라일라에게는 저 마력이 품지 못한 또 다른 게 있었으니. 바로 속성 친화력이다.
디라일라는 저 마력에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배제시키고 주변 대지로부터 영향권을 가지고 왔다.
그들은 자신과 친숙하면서도 디라일라의 카리스마 있는 지도력에 조금씩 끌려왔다.
어르고 달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단호한 기세로 대지의 신뢰를 조금씩 이쪽으로 끌고 오자, 점차 반응이 돌아왔다.
'좋아, 된다. 이대로 천천히....'
주변 대지와의 공명에 정신을 쏟고 있는 디라일라를 보며 라비아타도 내심 다시 한번 감탄했다.
확실히 지하인이기 때문일까.
주변의 대지가 조금씩 정화되는 게 눈으로 확인될 정도였으니, 그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정말 빠르네요. 우리 엘프들이었다면 얼마나 걸릴지 기약할 수 없었을 텐데."
그는 프리실라도 마찬가지였는데, 드래곤 하트는 엘프들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프리실라는 감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엘프들이 길게는 수년에서 십수년을 매달려야 겨우 해낼 수 있는 일을, 지금 이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하고 있으니.
그렇게 작업이 순탄하게 진행되나 싶은 순간.
"아, 이런."
드래곤 하트로부터 꿈틀거리는 검붉은 촉수를 보며, 라비아타가 탄식을 내뱉었다.
"역시 조치를 취해 뒀나."
"저, 저게 무엇이오?"
점점 크기를 반투명한 촉수의 형태에 애덤이 당황하며 묻자, 라비아타가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고대 어느 멍청한 추종자 놈들의 찌꺼기야."
"고대? 추종자의 찌거기라니?"
"예로부터 타인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도가 튼 놈들이 있었어. 그놈들을 추종하던 것들이 만든 거지."
남의 것을 훔치는 데 미친 것들이니, 드래곤 하트의 존재에 눈이 돌아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저 지하인 꼬맹이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어머, 불청객들이 오고 있네요."
대수림의 나무들을 통해 키메라 군단까지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오는 프리실라가 상황이 악화되고 있음을 말해 줬다.
"끄응. 저 촉수는 내가 직접 해결할게. 나머지 좀 부탁해."
"...한번 해 보겠소."
디라일라는 여전히 드래곤 하트의 정화 작업 중이라 힘을 보탤 수 없는 상황이었고, 라비아타도 저걸 상대로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온갖 정신을 쏟아야 할 때였다.
"젠장. 이건 쓰고 싶지 않았는데. 당분간 얼마나 쓰러져 있을런지."
라비아타는 자신의 턱 아래를 쓸어내리며 그리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 지하인 소녀가 없어진다면 저 드래곤 하트를 언제 다시 정화할 수 있을지 기약을 잡을 수 없었다.
다행히 엘프의 여왕, 프리실라가 있는 이상 몰려오는 키메라 군단을 상대하는 데 크게 고역은 없을 테지만....
"하아. 일이 힘들게 됐네요. 이곳의 나무들은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니...."
그녀 또한 이곳의 오염된 마력으로 인해 전력을 다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자신의 팔찌에 걸린 마법을 풀어 기다란 장궁으로 형태를 바꿨다.
"직접 활을 든 게 얼마 만지 모르겠지만, 부디 제 솜씨가 녹슬지 않길 바라야겠죠?"
"...그랬으면 좋겠소."
한 눈에 봐도 눈이 돌아갈 정도의 엘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음을 지었지만, 차마 애덤은 저 웃음에 가슴이 두근거리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상황이 허락해 주지 않았으니.
키에에엑-!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키메라의 울음소리가 마치 이 탐사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것 같아, 애덤은 기나 긴 탐사로 인해 지친 몸을 이끌고 전선에 나섰다.
"고지가 멀지 않았다, 전우들이여. 검을 들고 우리 왕실의 저력을 보이자!"
* * *
"아네이스. 이제 자네가 움직여야 할 때이구먼."
"...제가요."
도미닉의 말에 아네이스는 그가 왜 자신에게 저런 말을 했는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도미닉의 손에 들린 육각면체 오브에서 나오는 일정한 파장은 퍼지는 범위만큼 마력을 동결시켰다.
그러나 마력이 동결된 것은 황실 측 또한 마찬가지였고, 지금부터는 순수 육체적인 능력만 가지고 전투를 이어 가야 한다.
비록 램퍼트 모험단이 알파와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긴 했으나, 이 육각면체의 오브는 그리 오랜 시간 지속되지 않기에.
도미닉은 순수 마력이 아닌 오리진이라는 힘을 쓰는 저지먼트 기사단, 즉 아네이스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비록 마력까지 온전히 쓸 수 있을 때에 비하면 부족하겠으나, 마력을 쓰지 못하는 일반인을 상대로는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할 테니.
"아네이스. 이는 황실의 뜻인 합일(合一)을 위함일세."
"...그게 뭔데요."
"...온전히 하나된 인류. 지금처럼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말함일세. 그곳에는 서로를 미워하지도, 증오하지도 않는 오롯이 인간만을 위한 세상이지."
그게 바로 인류를 위한 정의라며.
도미닉은 아네이스를 설득했다.
정의.
참 어려운 말이다.
아네이스는 뒤를 돌아봤다.
앞서 있던 전투로 인해 지친 기색이 여력한 램퍼트 모험단과, 아직 여력이 남은 듯 보이는 클라인.
그에 반해, 이번 전투에서 몇몇 위협적인 키메라만을 상대한 덕에 멀쩡한 황실의 기사단.
하지만 이런 유불리의 상황은 아네이스에게 아무래도 좋았다.
어느 쪽이든.
지금의 상황에서는 자신이 어디에 서든 유리함을 가지고 올 수 있었으니까.
다시 한번 도미닉의 말이 떠올랐다.
정의를 위해.
물론, 아네이스도 이제는 잘 안다.
이곳에 있는 클라인은 죽을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램퍼트 모험단이야 무언가 자신들이 원하는 게 있기에 황실과 이해득실이 얽혔다고 하지만, 적어도 클라인은 전혀 연관이 없었으니까.
그는 그저 자신의 형을 따라 탐사에 나선 일개 생도일 뿐.
저들이 말하는 미래라면, 여기서 클라인이 억울하게 죽어야 할 이유 또한 없었다.
그러니 저것은 가식이며 위선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아네이스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여기서 아네이스가 클라인의 편에 선다 한들, 여러 사람이 있는 지금 아네이스의 선택이 황실의 귀에 들어가지 말라는 법도 없었으니.
아네이스는 그렇게나 정의를 부르짖는 황실의 거짓을 파악할 때까지. 그리고 스스로의 힘이 갖춰질 때까지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찾아온 선택의 순간.
아네이스는 하나의 결론에 미치고 말았다.
'나도, 그렇구나.'
가식. 위선.
저지먼트 기사단을 포함해 정의를 외치는 이들의 말 속에 숨어 있는 진실된 모습.
만약 여기서 다시 한번 황실의 편에 선다면.
자신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아네이스는 스스로의 검에 오러를 피워 냈다.
티 없이 맑은 순백의 오러는, 끝내 그 검끝을 황실 기사단에게 향했다.
"...결국, 그런 선택을 하는구먼. 안타까운 일이야. 조금만 상황이 다르게 흘러갔더라면, 이곳의 모든 인재들을 우리 황실이 품을 수 있었을 것을. 제국의 눈이 어두웠던 것을 탓해야 함이지...."
그러면서, 도미닉과 황실 기사단은 뒤로 물러섰다.
"...?"
"하나 굳이 우리의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감사히 여겨야겠구먼."
"...!"
"히힉... 인간, 인간은 역시 재밌어. 나도 껴도 돼?"
어느새 뒤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보다 빠르게, 아네이스의 검이 뒤로 휘둘려졌다.
카앙-!
"히히히! 좋아, 나도 낄게. 응─?!"
그 짧은 사이. 클라인과 아네이스에게 베인 상처가 상당히 아문 알파가 아네이스의 검에 튕겨져 멀리 도약했다.
"빨리 처리하시게, 괴물. 황실의 은총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으니."
"아쉽지만, 히히! 알겠어!"
아무래도 좋았다.
좀 더 놀고 싶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강한 인간들을 나뭇가지 꺾듯 죽이는 것 또한 하나의 재미였으니.
알파는 굳이 아네이스와 시간을 끌기보다, 간신히 버티고 있는 램퍼트 모험단으로 시선을 향했다.
"큭.... 황실이 더러운 건 여전하군요."
"욕이라면 얼마든지 받아 주겠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야."
일렉사가 살기 어린 눈으로 도미닉을 바라봤으나, 도미닉은 그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이제 다시 놀자아아아!!"
그렇게 알파가 램퍼트 모험단을 향해 날아드는 순간.
퍼억-!
그런 알파의 측면에서 무언가가 쏜살같이 달려들어 놈의 옆구리가 움푹 파이도록 걷어찼다.
그로 인해 아까 아네이스에게 베인 상처가 다시금 찢어지면서, 알파는 고통어린 괴성을 내지르며 벽에 처박혔다.
"무슨?!"
갑자기 나타난 황금빛 오러.
그 존재를 확인한 도미닉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희미하나, 그 빛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클라인은 자신의 오러와 같은 찬란한 황금빛 눈동자로 날아간 알파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지금이었구나.'
순간, 클라인은 떠올렸다.
[그때가 찾아오면, 걱정하지 말고 네가 가진 모든 마력을 풀어 보아라. 그럼 내가 하는 말이 뭔지 알게 될 테니.]
며칠 전, 셰인이 했던 그 말은 바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형님은 알고 있었어.'
탐사대의 배신자가 누구인지 파악하고, 지금의 상황을 자신에게 맡긴 것이다.
형님이 이런 상황을 어떻게 예측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생애 처음으로 자신이 가진 최대한의 마력을 쥐어짜며, 그 압도적인 양으로 반마력 파장을 가까스로 이겨 낸 클라인은 언제나 샘물과 같이 넘쳐흐르던 마력이 빠르게 고갈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빠르게 끝내야 해.'
지금은 평소의 전력도 내기 힘든 상황이었으나, 아직 상처를 다 회복하지 못한 알파라면 아까처럼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을 터.
아네이스가 황실 기사단을 상대하는 사이 클라인은 알파를 완전히 죽여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이변은 클라인에게만 일어나지 않았다.
-파직.
클라인의 마력량을 버티지 못한 육각면체 오브에 금이 간 순간.
"...?!"
도미닉은 자신의 발아래 무언가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숙이기도 전에, 그런 그의 그림자가 제 주인인 도미닉을 집어 삼켰다.
"단장님!"
그에 기겁한 황실 기사단이 도미닉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이를 아네이스가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이윽고 도미닉을 완전히 집어삼킨 그림자는 마치 무언가를 음미하듯 꾸물거리더니, 이내 도미닉의 몸에서 빠져나와 사람의 형체를 띄웠다.
[맛있군. 역겨운 인간의 위선이란 이리도 달콤하구나.]
그림자.
어둠의 정령은, 마력이 동결된 도미닉을 손쉽게 제압하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어둠 속으로 홀연히 모습을 감춰버렸다.
그 모든 게,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44화
44화 끝나 가는 탐사 (9)
고든의 시선을 느낀 제임스가 바짝 긴장할 때, 그런 그의 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든."
"...!"
여태 자신의 뒤로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제임스는 잠깐 섬뜩함을 느꼈으나, 이내 숙련된 암살자답게 기척을 내지 않고 상황을 관망했다.
"끌끌끌. 처음 봤으면 대뜸 상대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자기 이름부터 말해야 하지 않겠느냐?"
고든의 말에 셰인은 답하기보단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쯧쯧. 요즘 젊은 것들은 예의라는 게 없어. 그래... 이름이 셰인이라 했던가?"
그러면서 고든은 주변을 쭉 훑어봤다.
"그런데 혼자 온 것이냐?"
"굳이 다른 사람이 더 필요한가?"
"끌끌. 자신감 하나는 대단하구나. 아무래도 내가 꽤 얕보인 모양이야. 하긴, 꽤 시간이 흐르긴 했지. 아무래도 좋아. 안 그래도 너에게 이것저것 궁금한 게 있던 참이었다."
방금 막 알파로부터 전해져 오던 신호가 끊겼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자신의 첫 자식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갈 줄이야.
그러나 그 슬픔을 달래 줄만큼, 눈앞에 있는 존재는 고든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이 귀쟁이 놈들의 마력 패턴을 어떻게 파악했는지도 궁금하고... 보아하니 분석력이 인간의 수준은 아닌 것 같구나. 아해야, 일단 예의상 한 번 물어보마. 내 성격에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지극히 드문 일이니 잘 듣거라. 내 제자가 되어 볼 생각이 있느냐?"
스스로 말한 것처럼, 고든은 본래 남에게 허락을 받는 성격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셰인이 가진 남다른 분석력이 그만큼 그의 흥미를 끌어낸 것이다.
"이래저래 흥미가 생기더구나. 고대 마법인 룬어를 쓰는 것도 그렇고, 그걸 직접 개량한 것도 제법 봐줄 만했다. 내 제자가 되기엔 충분하지. 어떠냐?"
"거절하지."
"쯧, 그럼 그렇지. 역시 머리만 보관해야겠구나. 걱정 말거라. 곧 있으면 내 제자가 되도록 만들어 줄 터이니."
그 말은 결코 허풍이 아니다.
비록 지금은 이렇듯 추레한 모습을 하고 있는 연금술사지만, 그는 한때 전 대륙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흑마법의 정점에 서 있던 이였으니까.
"내 비록 소싯적처럼 고풍스럽게 싸우진 못하겠으나, 그래도 재미있는 연구는 많이 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게 있지."
고든은 자신이 앉아 있던 책상 서랍에서 그로테스크한 가면을 꺼냈다.
"이게 무엇일 것 같나?"
"...여전히 취미가 고약하군."
"호오. 이것도 벌써 알아봤느냐?"
"네크로노미 마스크(Necronomi mask)."
고든이 개발한 최악의 발명품이자, 이곳에 오면서 가장 경계하던 물건이다.
한 인간의 피부를 살아 있는 채로 뜯어내 그 피해자의 피로 숙성시키고, 원혼이 담긴 가면.
"흐하하. 맞다. 내 나름의 역작이라 할 수 있지."
그만큼 어느 정도 상정 내에 들어 있는 물건이었다.
다만 아직 조직과 결탁한 지 오래되지 않아 그 수준이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으나,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을 보니 저 물건은 고든이 조직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완성된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 마스크의 개수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다는 것일까.
'이전에 봤을 땐 저 가면이 수십 개나 있었지.'
때문에 전생에서의 고든은 무려 한 개 군단을 그 혼자 감당해 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무위를 자랑했다.
"참으로 마음에 드는 물건이지. 내가 만들었지만 말이야."
그만큼 저 가면의 위력은 얕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고든이 마스크를 얼굴에 쓰자, 순식간에 그로부터 퍼져 나오는 기세가 흉악해지기 시작했다.
"부디 너무 빨리 쓰러지진 말거라. 나도 이걸 실전에 쓰는 건 처음이니 말이다. 힘 조절이 안 돼서 무심코 죽여 버릴 수도 있거든. 끌끌!"
그리 말하는 고든의 손에는 어느덧 썩은 피처럼 탁한 붉은빛 검이 쥐어져 있었다.
'확실히 이때에는 이미 완성이 됐군.'
재료로 쓰인 인간의 신체 능력을 그대로 가져다 쓸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권능.
네크로노미 마스크의 효과였다.
놈에게서 풍기는 기세를 보아하니 필시 저 마스크에 재료로 들어간 인간은 3품의 마스터 수준에 다다른 인물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고든이 달려들었다.
황실의 호위 기사단, 도미닉과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 수준의 몸놀림.
아니, 파괴력 면에서는 오히려 더 뛰어났다.
그러나, 셰인은 그런 고든의 횡베기를 가벼운 움직임으로 피했다.
동시에 중첩된 마탄을 그의 얼굴을 향해 날려 보냈다.
고든도 호락호락 당하지 않고 손에 오러를 감싸 날아오는 마탄을 파훼했다.
"호오... 생각보다 빠르구나."
옅게 감탄사를 내뱉은 고든은 셰인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가면 너머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법사 중에 이만한 반응속도를 가진 사람은 흔치 않았으니.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놀라기에는 너무 일렀다.
고든의 기술은 확실히 인간들에게 재앙이나 마찬가지일 테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이라는 종에 한 해서일 뿐이었으니.
"혈마법이로군. 흡혈귀에게 피라도 빨렸나?"
"...아는 게 참 많은 아해로구나."
고대 종족, 흡혈귀.
기원전에 존재했다고 알려진 이 종족은 혈마법의 시초가 되는 종족이었으며, 그들이 가진 피에 대한 권능은 수많은 종족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하지만 고든이 쓰는 혈마법은 과거 흡혈귀를 추종하던 일단의 무리들이 따라 만든 열화판에 불과했다.
"그래, 내가 오만했구나. 사실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게 나뿐만은 아닐 테지. 그래서 놀랍긴 하다만... 그걸 안다고 해서 지금의 상황이 달라지진 않는다."
확실히, 아는 것뿐이라면 현 상황의 타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도 셰인은 흡혈귀라는 고대 종족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은 모르고 있었으니.
"오만하다라, 그래. 네놈은 오만에 어울리지 않지."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만나 본 적 없던 흡혈귀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지, 고든에게 약점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 * *
전생에 인류는 허망하게 멸망의 길을 걸었지만, 그렇다고 잠자코 당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조직에서 요직에 앉아 있는 고든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몇 차례 고든을 죽이기 위한 원정대를 보낸 전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패뿐.
어떨 때는 일당백으로 싸우는 검귀가 되었다가도, 또 어떨 때는 하늘에서 비처럼 불덩이를 쏟아내는 대마법사가 되기도 했다.
밤에는 어둠 속에 숨어들어 원정대의 간부를 암살했으며 이른 새벽에는 천 리 밖에서도 활을 쏘아 표적을 제거하는 레인저가 되었다.
홀로 수십의 거장이 되어 원정대를 가지고 노는 고든의 악명은 당시 인류가 가진 실낱같은 희망을 무참히 짓밟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어느 한 천재는, 고든의 다양한 면모보다 그가 가진 힘의 원천으로 시선을 돌렸다.
따지고 보면 한 명의 인간이 그 모든 재능을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모든 것은 그것을 가능케 만드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천재는 고든이 가진 힘의 원리를 중점으로 파악했고, 그 결과 단 한번.
원정대는 고든을 패퇴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 위업은 모두가 말더듬이라 무시하던 한 청년에 의해서였으니.
그 이름은 베른슈타인 오스튼.
당시 오스튼은 스스로가 가진 예지에 가까운 분석력으로 고든에 의해 수차례 원정대가 학살을 당할 때에도 놈에 대해 모든 것을 분석했고, 그 결과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고든은 고대 흡혈귀의 샘플을 우연찮게 얻어 그 인자를 자신의 신체에 합성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진정한 흡혈귀로 거듭나지는 못했다.
애초에 그가 가진 지식은 어디까지나 흑마법에 기반되어 있었고, 그 흑마법마저도 혈마법의 열화판조차 베끼지 못해 만들어진 결과물이었으니.
찾으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약점은 분명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오스튼은 그걸 놓칠 리 없는 인물이었고.
끝내 원정대는 단 한 번의 기회를 살려 고든을 패퇴시킬 수 있었다.
셰인은 그 방법을 알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당시에 오스튼은 대다수의 마법사들을 통해 자신이 세운 이론을 입증했다는 것이고, 지금의 셰인은 그때처럼 자신을 도와줄 다른 마법사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셰인은 개의치 않았다.
"기회는 단 한 번. 고귀한 용의 자손에게 닿았던 일점(一點)."
"흠?"
"목표는 치명(致命)."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군. 아무튼 이제 슬슬 대화가 지루해지기 시작했으니, 마무리를 지어야겠어. 아쉬워하지는 말아라. 어차피 내 제자가 된다면 싫어도 많은 대화를 나눠야 될 테니. 끌끌."
다시금 고든이 자세를 잡고 움직였다.
검붉은 오러로 이루어진 검이 현란하게 허공에 검로를 그렸다.
그 궤적을 따라 날아드는 검강은 마치 다방면에서 날아오는 기사들의 검을 일제히 상대하는 것만 같았다.
더구나 그 마력량조차 우습게 볼 게 아닌 탓에 어지간한 마법으론 방어할 수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셰인은 손끝에서 마력탄을 발사시켜 검강을 향해 날려 보냈다.
"어리석은! 그깟 마탄으로 막아 보려는 거냐!"
하지만.
타앙-!
본래라면 저 정도 마탄 따위 가볍게 상쇄하며 셰인의 팔다리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어야 할 검강이, 놀랍게도 마탄에 의해 상쇄되었다.
고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네놈... 그 마력을 어떻게 구사한 게냐...!"
그야 방금 셰인이 보인 마력은, 고든이 그토록 혐오하던 황실에서나 볼 수 있던 마력이었으니.
과거 자신의 흑마법사 집단을 붕괴시킨──
"황실의 고양이들이 쓰는 것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구나."
"아니, 틀렸다. 나이가 드니 보는 눈도 퇴화한 모양이로군."
"뭐라?"
"그딴 되다만 기술을 굳이 따라 할 필요가 있을까. 보다 더 진보된 기술을 만들면 되는 것을."
"...만든다? 고작 스물도 채 되지 못한 네 녀석이?"
"혈마법의 열화판에 불과한 네 기술이라면 솔직히 황실의 기술을 쓸 필요도 없다."
"...흐흐. 그런 말투도 오랜만이구나. 내 기술이 열화판에 불과하다? 웃기는 소리!"
열화판.
그건 고든의 역린이었다.
실제로도 그는 고대 흡혈귀의 샘플을 가지고도 그들을 따라잡지 못했기에.
그로부터 느끼는 열등감은 분명 존재했다.
물론 고든의 기술은 뛰어나다. 하지만 셰인이 가진 분석력은 그런 고든의 기술마저 이해하고, 보다 진보하기에 이르렀으니.
타인의 피와 혼으로 숙성시킨 가면?
그저 쓰기만 해도 재물의 생전 능력을 그대로 쓰는 기술?
셰인은 그게 바로 고든의 한계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저 열화판에 다다르는 것.
그저 복사에 이르는 것.
그것만으로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고작 2서클 마법사에 불과한 셰인이 3품의 마스터에 다다른 고든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셰인은 그저 따라 하기보다, 더 진보된 방향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셰인은 알고 있었다. 고대 흡혈귀들의 능력과 우열을 가를 수 없는 성능을 보이던 또 하나의 능력을.
인간의 7대 욕망 중 하나, 탐욕.
디라일라를 감금했던 귀족의 별장에서 탐닉한 저지먼트 기사단원, 다이라의 힘을 파악해 마력에 오리진을 담는 능력으로 고든의 오러를 흡수시켜 파훼하고.
황실 기사단원들로부터 강탈한 수많은 기억, 경험이 그런 고든의 움직임을 눈으로 읽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비록 셰인은 고든처럼 육체적인 능력으로 승화시키지는 못하나, 애초에 그들의 육체적인 능력은 셰인에게 하등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고작해야 열화판, 복사판을 가지고 오는 저런 가짜 따위에게 질 이유가 없던 것이다.
"끌끌, 끄흐흐흐, 이 내가 열화판? 가짜에 불과하다고? 마음이 바뀌었다. 내 너를 중히 여겨 제자로 받아들이려 했지만, 이 변덕 심한 노인네의 화를 너무 건드렸어."
그에 고든은 들고 있던 검으로 또다시 검강을 날려 대고는, 그사이 품에서 또 다른 가면을 꺼내 썼다.
셰인이 아까처럼 마탄으로 대응하는 사이에 이번에는 핏빛으로 물든 냉기가 폭풍을 일으켰다.
그에 셰인은 그 누구보다 뛰어난 화속성 마법사, 라비아타의 기술을 떠올렸다.
그러나 화속성을 지니지 못한 셰인은 화속성과 가장 근접한 '분해'의 룬어를 추가한 마법으로 대응했다.
핏빛으로 이루어진 냉기 폭풍은 적은 마력으로 만들어진 마력 안개에 의해 산화되듯 분해되어 사그라졌다.
다시 한번 고든의 가면이 바뀌었다.
"이노오오옴!!"
이번에는 혈마력으로 만들어진 활에서 번개처럼 화살이 쏘아져 나갔다.
순식간에 날아드는 십여 발의 화살 세례가 셰인의 급소를 노리고 날아든다.
이건 다른 누군가의 기억을 빌릴 필요도 없이, 중첩 마탄을 날려 화살의 방향을 비틀었다.
그사이 고든의 손에는 거대한 배틀액스가 들린 채 태산을 무너뜨릴 기세로 묵직한 한 방을 노리고 들어온다.
어려울 것도 없이 중첩 헤이스트 마법으로 그 자리에서 벗어나 피했다.
대신 그 자리를 파고든 배틀액스가 바닥을 내려치자, 거대한 구덩이가 파이며 흙과 나무의 파편들이 셰인을 향해 날아왔다.
중첩된 마력 실드로 방어하고 흙먼지가 가득한 공간에 수십 발의 마탄을 날려 보낸다.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혈마력으로 이루어진 방패와 검을 든 고든이 달려들었다.
그것은 녀석의 오판이었다.
차라리 튼튼한 재질로 만들어진 진짜 방패라면 모를까, 흡수의 성질을 띈 셰인의 마력은 오히려 강철보다 꿰뚫기 쉬웠다.
제아무리 3품의 마스터가 가진 오러라 해도, 마력으로 만들어 낸 세 자루의 마력검이 일제히 한 점으로 달려들자 고든의 방패가 마치 거미줄처럼 실금이 쩌적 그어진다.
다시 한번 중첩 헤이스트로 거리를 벌리자, 그제야 고든의 움직임이 멈췄다.
"흐흐... 그래, 인정하마. 고작 이 정도로는 네 녀석을 잡아 죽이기엔 힘들겠어."
가지고 있던 모든 가면을 썼음에도 셰인에게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으니.
그에 고든에게 남은 것은 지금의 상황을 인정하는 것뿐이었다.
"한데, 그건 네 녀석 또한 마찬가지지."
그러면서 고든은 스스로의 가면을 검지로 툭툭 건드렸다.
"이게 있는 이상 나는 너를 죽이진 못하더라도, 시간을 끄는 정도는 가능하다는 말이다. 심장이 꽤 뻐근하지 않으냐?"
고든은 핵심을 짚었다.
확실히, 2서클로 인해 부족한 마력은 고든의 마력을 흡수하는 것으로 충당하고 있었지만, 그 내구성까지는 따라가지 못한다.
실제로 끊임없이 마력을 분출하고 흡수하는 과정을 겪으며, 셰인의 마력 코어는 상당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을 끈다? 아니지. 시간을 끈 건 네가 아니다."
"...?"
"내가 끌었지."
어느새 바닥에 널브러진 셰인의 마력은,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고 미약한 빛을 뿜으며 서로 연결되고 있었다.
룬어.
[팽창], [굴절], [수축].
공간이 뒤틀려짐과 동시에.
"지금."
여태껏 그림자 내부에 숨어 있던 한 명의 암살자가 뛰쳐나왔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45화
45화 끝나 가는 탐사 (10)
전생에 오스튼이 고든을 패퇴시킨 방법은 생각보다 심플했다.
상대가 대응하기 힘든 수를 쓴다면, 애초에 그 수를 쓰지 못하도록 원천 봉쇄를 한다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누구든 생각할 수 있을 법한 수를 쓰기 힘들었던 이유는 혈마법에 대한 정보가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오스튼은 그 제한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수차례 원정대와 고든의 전투를 파악한 뒤 거의 해체하다시피 고든의 혈마법을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흡혈귀의 권능이 아닌, 그 열화판인 혈마법의 약점은, 무엇이든 진실되게 자신의 것으로 가질 수 없다는 가짜라는 것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 가짜를 본체에서 분리시키면 되는 일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이 이어진 오스튼은 바로 실행에 옮겼고, 단 한 번의 시행착오 없이 고든을 패퇴시키는 데 성공한다.
"...!"
주변에 흩뿌려진 셰인의 마력에 의해 공간이 팽창된다.
동시에 그 공간은 무엇도 존재하지 못하는 진공 상태가 만들어졌고, 그 자리에는 마력조차 외부로 튕겨져 나간다.
주인이 없는 마력은, 세상의 의지에 의해 자연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인이 없는 마력이란 무엇을 뜻함일까.
공기 중에 포함된 마력을 제외한다면, 이미 죽어 사라진 자의 마력을 혈마력으로 변질시켜 억지로 붙잡고 있는, 세상의 의지를 배반한 어느 한 노인네에게 해당된다.
팽창과 동시에 고든이 소지 중이던 모든 가면이 튕겨져 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고든은 셰인에게 들어올 공격에 대비했으나, 셰인은 고든에게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그 행동에 고든의 사고가 1차적으로 멈췄을 때, 고든의 등 뒤로 불빛이 터져 나왔다.
아무런 물리력도 없는 간단한 1서클 마법, 라이트(Light).
그로 인해 고든의 그림자가 셰인이 있는 방향으로 길게 늘어지다 이윽고 벽의 그림자와 맞닿았다.
그림자에 숨어 있던 누군가는, 그 찰나를 놓칠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았다.
뒤늦게 음차원의 마력을 감지한 고든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단검이 그런 고든을 스쳐 지나갔다.
"크륵...!"
단검은 부드럽게 고든의 목을 베고 지나갔고, 순식간에 피분수가 일었다.
단 1초도 되지 않는 순간.
승부는 그 짧은 순간만으로 충분했다.
"후우... 아직 실력이 녹슬진 않았군요."
쓰고 있던 안경을 바로잡으며 뒤를 돌아본 제임스는 반쯤 잘려 덜렁거리는 목을 부여잡은 고든을 바라봤다.
철저한 암살자답게, 그는 다시 한번 고든의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
덜렁거리는 목이 공처럼 날아가 벽에 부딪치며 뭉개지고, 그제야 제임스는 안심하고 셰인을 바라봤다.
"...셰인?"
그저 아카데미 생도에 불과한 그가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냈음이 놀라웠던 제임스가 자초지종을 묻기 위해 셰인을 불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바닥에 쓰러진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그를 보며 제임스가 황급이 다가가려던 그 순간.
"주인님께 손대지 말아라, 인간."
쓰러진 셰인의 배후에서 등장한 어둠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어둠의 정령? 주인이라고?"
통상적으로 계약이 불가능하다 알려진 어둠의 정령이 계약한 것도 모자라 인간을 '주인'이라 부르는 상황에 제임스가 잠시 당황하며 물러섰다.
단순 계약이 아닌 주종 관계가 확립됐다는 의미이지 않은가.
"krrrr... 그때와 같은가."
제임스의 반응에 관심이 없던 어둠의 정령은 쓰러져 있는 셰인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애도했다.
아마, 차라리 죽음을 바라고 싶어질 것이다.
기본적으로 어둠의 정령으로서 인간과 같은 감정이 없음에도, 정령은 그런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야, 지금쯤 상대는 과거 자신보다 더한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고 있을 터이니.
그 당시의 기억은 없으나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 정도만 파악하고 있던 정령은, 지금의 자신이 아닌 썩은 나무 정령이 느꼈던 공포가 지금도 본능에 새겨져 있었기에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 * *
"크윽?!"
달려드는 키메라의 공격을 흘려보내고 반격을 가한 애덤은 간신히 신음을 삼켰다.
비록 다른 곳보다 통로가 넓으나, 여전히 비좁게 느껴지는 이 나무 밑 통로에 몰려오는 키메라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보다 애덤과 그의 기사단원들을 괴롭히는 것은,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너무도 뜨거운 열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오!'
뒤에서 느껴지는 열기의 원인이 누구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바로 라비아타였다.
라비아타는 드래곤 하트에서부터 촉수가 등장하기 무섭게 저렇듯 열기를 일으켰는데, 당장 저쪽으로 시선을 돌려 봐야 보이는 것은 실명할 듯 타오르는 불길뿐이었다.
한편 안에 있는 디라일라가 걱정됐으나, 그런 애덤의 걱정과 다르게 디라일라는 라비아타의 보호를 받는 덕에 그을린 흔적은커녕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다만 디라일라를 자신의 영향권에서 지키는 것이 한계인 라비아타는 그다지 여유롭지 않았다.
'젠장, 쉽지가 않네.'
차라리 수만이라는 숫자의 군대를 상대로 평원에서 싸우는 게 쉬웠지, 이런 제한된 공간에서 자신의 열기로부터 다른 이들을 지키기에는 당장 라비아타가 가진 마력이 너무도 파괴적이다.
그걸 가까스로 컨트롤하며, 눈앞에 있는 촉수를 상대하는 일은 라비아타에게도 까다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나, 당장 스스로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지금.
마력의 컨트롤은 더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다.
저 촉수는 타인의 마력에 대한 주도권을 강탈하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어지간한 속성 지배력이 있지 않는 이상 저 촉수에 대항할 수단은 그리 많지 않았고, 당장 라비아타는 어떠한 이유로 자신이 가진 속성 지배력을 외부로 돌린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저 촉수에 대항하려면 이러한 폭주의 상태에 돌입할 수밖에 없던 것이고.
'그 멍청한 녀석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메자이아 대수림에 들어온 직후부터 자신이 가진 속성 지배력을 일부 부여받은 단원을 떠올리며 라비아타가 이를 악물고 있던 그때.
"어?"
방금까지 라비아타의 마력을 잡아먹기 위해 발악하던 촉수의 기세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뜻밖의 변화에 호응이라도 한 것일까.
"으아아아아악!!"
갑자기 허공에서 들려오는 괴성에 시선이 돌아갔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작은 불꽃이 튀더니, 이내 그 기세를 급격히 불려 가며 사람의 형태를 띄워나갔다.
"이 몸, 등자아아앙!!"
마치 차원을 불태우는 듯한 불길. 그 속에서 한 남자가 튀어나오며 라비아타를 보고는 씩 웃었다.
"미안, 단장. 좀 지각했다. 하하핫!"
"저 썩을 놈이...."
이곳 메자이아 대수림에 먼저 들어와 있던 라비아타의 단원.
이그니스의 등장이었다.
"어디서 뭘 하고 있던 거야!"
"헷. 지금은 상황이 급하잖아. 나중에 설명할게. 근데 나도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거든."
그러면서 이그니스는 기세가 줄어든 촉수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근데 하나는 확실하지. 저 망할 촉수 놈부터 어떻게 해야겠다는 거."
그러면서 이그니스는 자신의 가슴으로부터 하나의 불꽃을 피워 내 그것을 라비아타에게 건넸다.
"다시 가져가라고, 단장."
"빌어먹을 놈."
불꽃이 라비아타에게 돌아가자, 이그니스는 다시금 자신의 자취를 감췄다.
불의 정령, 이그니스.
여태까지 메자이아 대수림을 파악하기 위해 먼저 들어왔던 라비아타의 정령이 돌아오면서, 그동안 건네줬던 속성 지배력 또한 제자리를 찾았다.
라비아타는 폭주하던 자신의 마력이 다시금 자신의 주도하에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후우, 좋아. 일단 이 망할 것부터 끝내 버리자고!"
여태까지는 그저 폭주하듯 휘두르던 마력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화력이 집중적으로 촉수를 향해들었다.
이윽고 기세가 줄어들기 시작한 촉수는 그에 대항하지 못한 채 끝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고.
한참 집중에 들어섰던 디라일라에게도 희소식이 들려왔다.
"어? 갑자기 애들이 온순해졌어요!"
"그렇단 말이지...! 거기 기사단! 다들 엎드려!"
"...!"
라비아타의 말에 애덤과 그의 기사단원들이 일제히 몸을 피했다.
그러자 라비아타는 여태까지 드래곤 하트에 집중되고 있던 자신의 마력을 몰려오는 키메라 군단을 향해 날려 보냈다.
어마어마한 화력이 애덤과 그의 기사단원들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가며 통로에 있던 모든 키메라를 집어삼켰다.
놀랍게도 여태까지 라비아타의 화력 때문에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고 있던 애덤과 그의 기사단원들은 어느새 열기가 자신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부드럽게 휘감겨 오는 온기가 지친 그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제 좀 끝내자, 이 지겨운 것들아!"
그 열기 속에서도 동료를 방패 삼아 살아남은 키메라들이 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금 달려들었으나.
그 기세는 이전과 다르게 확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대수림의 탐사가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 * *
한 순간의 방심으로 일어난 사태에, 고든은 놀라면서도 화가 나긴 했지만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지금은 이렇게 물러설 수밖에 없겠군. 쯧, 아쉽게 됐어.'
본래라면 조직에서 더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만도 했으나, 고든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래 봐야 인간에 불과하다고 얕잡은 것도 문제였으나, 자신의 역작인 다크엘프의 완성이 얼마 멀지 않았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다크엘프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꽁꽁 숨겨 둔 드래곤 하트에 탐사대가 도달했으며, 정작 자신은 이렇게 그 어린 애송이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비록 실수하긴 했으나, 완전한 패배는 아니다.'
그래도 이번 일로 인해 얻은 데이터의 양이 결코 적지 않았다.
아쉬운 게 있다면 드래곤 하트를 완전히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거야 다음을 노리면 된다.
비록 자신의 육체는 죽었으나, 그는 본래 영혼을 다루는데 능숙한 흑마법사이자 혈마법사다.
죽은 몸뚱이는 버리고 본래 자신의 육신으로 영혼은 알아서 돌아갈 터.
'대관절 그 애송이가 가진 지식이 얼마인지 모르겠군.'
다만 셰인의 존재가 고든을 걸리게 만들었다.
이곳에 온 이후부터, 셰인의 주도하에 고든이 준비해 둔 모든 수가 사라지기 시작했으니.
조직에서 철저히 숨겨 왔던 드래곤 하트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도.
천연 요새 역할을 하던 메자이아 대수림의 기상 현상을 파악한 것도.
엘프들이 아닌 이상 알 수가 없는 지하 터널의 존재 여부도.
엘프들만이 쓸 수 있는 텔레포트를 활용한 것도.
전부, 전부 그 애송이의 발상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이쯤 되니 심증적으로 다크엘프가 사라진 것도 셰인이 한 짓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뭐가 됐든, 나중에 놈들에게 알아보라 시키면 될 일이지.'
어쨌든 지금은 다시 본래의 육체로 돌아가 이번에 얻은 데이터를 정리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쓰고 있던 육체가 죽은 직후부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깜깜한 시야만 이어지고 있을 뿐.
과거 연합군과의 전투에서도 살아남은 자신의 비기다.
지금이라면 공간을 통과한 채 본래의 육신으로 돌아가도 충분한 시간이 흘렀음인데, 여전히 시야가 어두웠다.
'이게 무슨 일이냐.'
무언가 이상했다.
그 낌세를 느낀 직후, 고든의 시야가 밝아졌다.
그곳은, 핏빛으로 불길한 색에 물든 하늘과 그 아래로 지평선 너머까지 시체들이 늘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 가운데.
왕좌에 앉은 채, 성스러운 검에 찔려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46화
46화 수확의 시기 (1)
고든은 셰인의 내면에서 발악하고 울부짖으며 발버둥 쳤으나, 그 추레한 노인이 맞이하게 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심상 속 세상.
이는 제아무리 영혼을 다루는데 통달한 존재라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스스로가 영혼을 다루는 흑마법사이자 혈마법사였기에 그 결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본래 영혼이란 빛나면 빛날수록 옅은 빛들을 끌어모아 다 함께 강해지지만.
반대로 어두운 영혼은 타인의 영혼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다.
고든 또한 자신의 추악하고 더러운 영혼으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양분으로 삼았던가.
그러나 셰인의 영혼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저 무저갱보다도 더욱 깊고 어두운 영혼은, 고든조차도 항거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어, 어떻게!'
그 깊은 내면을 바라본 고든은 그제야 셰인이 품고 있는 어둠의 정체를 알아봤다.
최근 자신이 연구 중이던 본질의 타락.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의 힘을 극한으로 이끌고 그것을 부정의 힘으로 오염시키려던 그의 연구 결과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아, 안 돼. 안 돼!!'
그게 고든을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도대체 놈이 누구길래 자신이 개발하고 연구한 그 결과를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그 순간에도 고든은 학자이자 연금술사였고, 마밥사였다. 끝내 그 진실을 알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고든에게 죽음보다 더한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이윽고.
소멸.
고든은 여태껏 자신이 농락해 온 여타 실험체들의 영혼보다 더 끔찍한 최후를 예감했다.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절대자의 의지가 고든의 영혼을 잘게 분해시켰다.
아무리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 봐도 보이지 않았다.
'크에에에엑──!'
끝내 고든은 자신의 모습처럼 추레한 발악 끝내 완전한 소멸을 맞이했다.
이전 어둠의 정령처럼 실수란 없었다.
영혼의 찌꺼기조차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소멸된 것을 확인한 셰인은 두 눈을 감고 감상에 잠겼다.
이 노인의 죽음은 단순히 한 악인의 죽음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고든은 조직이 인간 세계에 완벽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가장 뛰어난 조력자였고, 그의 죽음은 곧 전생에 완전무결했던 조직의 계획에 크디큰 말뚝을 박아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로부터 오는 쾌감을 만끽하며, 셰인은 떠올렸다.
처음 시작은 오스튼과의 놀이가 원인이었다.
그전까지는 아직 조직에게 대항하기 위해 힘을 기를 시기라 판단하고 큰 움직임을 보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훗날 조직의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였던 오스튼와 연을 유지하는 것을 생각해 그를 만족시킬 만한 결과가 무엇일지 생각이 미쳤다.
이 시기에 큰 사건들 대부분은 조직과 연관이 있었고, 셰인 또한 조직에서 보내 왔던 시간이 있던 만큼 대부분의 큼지막한 사건들은 조직과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부터 계획이 시작됐다.
사실 계획이라기보단 몽상에 가까웠다.
그 모든 것이 확률 싸움에 불과했으니.
드래곤 하트로 라비아타의 시선을 끌었다.
그 물건에 대해 세상 누구보다 염원하고 있을 존재가 바로 라비아타였기에 높은 확률로 자신에게 접근해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셰인 또한 이곳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원하는 물건이 있었기에, 그녀가 온다면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뿐이던가.
메자이아 대수림을 떠올리니 이 시기에 있을 인류 최악의 연금술사, 고든까지 생각이 뻗쳤다.
셰인의 기억에 의하면, 이 시기의 고든의 연구는 아직 완벽하지 않았으니까.
지금의 자신이라도 충분히 잡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어찌 됐든 그 모든 일은 확률에 불과했으나, 결국 그 확률을 전부 뚫고 이렇듯 원하던 결과를 손에 쥘 수 있었다.
"후우."
"krrr... 주인님."
눈을 뜬 셰인 자신의 곁에 서 있는 어둠의 정령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독특한 정령을 다루고 있군요, 셰인."
"예."
무언의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제임스의 눈빛이었으나, 그에 응해 줄 필요성이 없었기에 셰인은 어둠의 정령을 바라봤다.
"녀석의 시체는?"
"껍데기만 버려두고 왔습니다, 주인님."
"그런가."
황실의 호위기사단, 도미닉의 행방까지 확인한 셰인은 그제야 제임스를 바라보고 말했다.
"일단 탐사대로 돌아가도록 하죠."
"...좋습니다."
제임스의 의문이야 어찌 됐든. 이제 일의 마무리를 확인하러 갈 차례였다.
* * *
"인간 여러분들을 이곳까지 초대한 건 엘프 역사상 제가 처음이에요."
프리실라의 말에 일행들은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셰인과 라비아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감미로운 목소리에 남녀노소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기, 그래도 도와준 사람들한테 그 엿 같은 목소리 좀 안 내면 안 될까?"
그에 라비아타가 한 소리를 하자 프리실라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하세요."
"너희 귀쟁이들이 목소리에 이상한 짓을 하는 걸 한두 번 봤어야지."
"아쉽지만 걸렸으니 어쩔 수 없네요."
그러면서 프리실라는 자신의 목소리에서 마력을 제외시켰다.
엘프들은 자신들의 외모가 전 종족 중에서도 최상위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고, 이를 활용할 줄 알았다.
목소리에 마력을 부여해 상대방의 적의를 줄이는 것.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니나, 모르고 있으면 당하기 쉬웠다.
"흠흠, 아무튼, 메자이아 대수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인간 여러분."
그러면서 프리실라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도록 할게요."
한 손을 가슴 위에 올리고 고개를 숙인 그녀는 고귀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잠시 후, 다시금 고개를 든 그녀는 현재 상황을 설명하기에 들어갔다.
"인간들의 신, 아카샤에 의해 우리가 이곳 메자이아 대수림에 봉인된 뒤로 여러분들이 상대했던 어떤 단체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답니다. 그들은 세계수의 시선을 피하고 자신들의 터전을 잡은 뒤, 수면에 취한 우리 엘프들을 납치한 것만으로도 모자라 저렇듯 생체 실험까지 자행했죠."
저 뒤에는 보랏빛 피부의 엘프들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비록 저렇게 변해 버린 탓에 우리 엘프와는 많이 달라져 버렸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한 가족인 사실은 사라지지 않죠. 여러분들이 저 아이들도 구해 준 거랍니다."
그뿐이던가. 오염된 드래곤 하트를 정화해 주기까지 한 덕분에 조직의 뿌리까지 뽑아 낼 수 있었다.
"그런 의미로, 엘프들의 여왕, 프리실라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눈앞의 인간들을 인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
그에 일행들 전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는 인류에게 있어서, 세 번째 요람을 클리어 했다는 신호였기에.
이로 인한 파급력이 얼마나 대단할 것인가.
이는 그 누구도 감히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 * *
기본적으로 인류가 요람을 정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해당 요람에 속한 주인 종족의 우두머리를 수차례 토벌하는 것.
그게 몇 번이 될지는 모른다. 첫 번째 요람에서는 4번으로 끝났고, 두 번째 요람에서는 7번으로 늘었다.
많은 마법사들이 그러한 부분에 대해 연구해 봤으나, 여태껏 그 비밀을 풀어낸 자들은 없었다.
반면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은 바로 주인 종족의 우두머리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여태까지 이 방법이 성공했던 적은 없었다.
단지 아카샤가 직접 그리 말했다는 게 풍문으로 들려왔기에 그러한 방법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을 뿐.
하지만 현 인류는 그 방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요람과 던전을 포함해 모든 이종족과 몬스터들은 인간에게 극도의 적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으니까요."
프리실라의 목소리가 셰인의 귀를 간지럽혔으나, 무표정으로 듣고 있던 셰인은 그저 고개를 묵묵히 끄덕일 따름이었다.
탐사대가 한동안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한 뒤, 셰인은 프리실라와 따로 대담할 시간을 가졌다.
"그대들의 신, 아카샤는 이곳 요람이라 불리는 곳에 다양한 종족들을 봉인했죠."
아카샤의 대봉인이 뜻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시간의 정체.
아카샤의 대봉인이 진행된 장소는 시간의 반복성을 띄게 된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늙지 않는다.
죽어도 시간이 지나면 되살아난다.
모든 성장이 멈춘다.
던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렇기에 저주였고 봉인이었다.
늙지 않고 죽지 않으나 그럼에도 미칠 수가 없고. 시간이 반복되니 육체적, 정신적 성장도 멈춘다.
성장이 멈추기에 배움을 행할 수 없다.
아이를 가지고 종족의 부흥 또한 불러오지 못한다.
그렇게 그들은 수백 년의 정체된 시간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지금도 봉인된 수많은 종족들은 자신들이 봉인된 이후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프리실라에게 조직은 공포나 마찬가지였다.
이 반복되는 봉인 속에서 그들이 납치하고 생체 실험을 가한 다크엘프들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지 못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당신의 등장은 우리 엘프들에게 희망이나 마찬가지였죠."
프리실라는 탐사가 시작된 그 순간부터 인간들의 등장을 눈치채고 있었다.
메자이아 대수림의 전역은 그녀의 눈 아래 있음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럼에도 쉽사리 탐사대를 내쫓을 수 없던 이유는 조직의 존재 때문이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들이 또 얼마만큼의 동족들을 납치해 갈지 몰랐기에.
"그래서 더욱 감사하답니다."
그리 웃으며 프리실라가 말했지만, 이번에는 셰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라고 공짜로 일해 준 것은 아니다. 앞으로 내가 내밀 도움의 손길 역시 마찬가지고. 또 인간으로 인한 위협이 이번으로 끝은 아닐 것 터."
"아마, 그렇겠죠."
셰인에게 대수림 바깥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듣게 된 프리실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엘프들은 배타적인 성향을 띄우기로 유명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으며, 이는 기원전에도 마찬가지였으니.
하지만 오히려 기원전의 환경이 엘프들을 더더욱 배타적으로 내몰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강인한 종족들이 많았으니.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멸족이 당연시되는,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전히 배타적이긴 하겠지만....
"좋아요. 어디 한번 이야기 해 보도록 할까요. 우리 엘프들의 고향, 메자이아 대수림의 개방에 대해서."
프리실라의 그 말 한마디에, 셰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천문학적인 금액의 돈벌이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47화
47화 수확의 시기 (2)
요람의 개방은 전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 만큼 역사적인 일이다.
아마 모든 국가는 어떻게 해서든 요람에서 나오는 천연 자원들에 대한 지분을 확보하고 싶을 터.
그러나 역사적으로 개방되어 왔던 요람들과 다르게, 이번에는 주인이 확실히 존재하는 요람이다.
그 주인은 당연히 엘프들.
주인이 존재하는 이상 제아무리 제국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발을 들일 수는 없다.
물론 엘프들이 인간들의 접근을 완전히 막으려 한다면 인간 측에서 엘프들에게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명분이 없지 않느냐 할 수 있겠지만, 인간으로서는 거대한 이해득실 앞에서 명분은 그리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셰인은 인간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들의 탐욕이 이기심으로 발전하지 못하도록.
그로 인해 인간들간의 분열을 야기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이득 앞에서 인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의 등에 칼을 꽂을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들이었지만, 반대로 이득 앞에서는 철천지원수끼리도 손을 잡을 수 있는 이성을 가진 동물이었으니까.
그 중간에서 컨트롤을 잘 해내야만 했다.
그와 관련해서 셰인은 며칠 동안 프리실라와 향후 계획과 관련된 논의를 해야만 했다.
"후, 좋아요. 대부분의 문제는 다 정리했네요?"
"그렇군."
"참, 저답지 않게 너무 많은 일을 했어요. 어서 아이들이 깨어나야 저도 편안해질 텐데요."
그런 프리실라의 엄살에도 셰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금 말을 이었다.
"때가 되면 그 물건을 받으러 오지."
"준비해 두고 있을게요. 그래도 앞으로 진행될 일에 차질이 없다는 가정하에 드리는 것이니, 그 부분은 알아주셔야 해요?"
메자이아 대수림의 개방은 비단 셰인에게만 이득으로 이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엘프들 또한 요람을 개방하면서 일어났어야 할 수많은 진통들을 미리 대비할 수 있게 됐으며.
인간들의 시선이 이곳에 쏠리기 시작하면 조직에서도 섣불리 이전처럼 작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그로 인해 프리실라는 이곳, 메자이아 대수림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보물 하나를 셰인에게 약속했다.
이후 세상에 드러날 일이 없는, 이제는 단 하나뿐인 보물.
드래곤의 역린.
과거 모든 종족의 정점에 있던 존재가 가진 정기가 모여 있는 물건이자, 훗날 셰인에게 있어서 조직에 대적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물건이었다.
"드래곤 하트가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아직 마음 놓고 있을 때는 아니지. 할 일이 있지 않나."
셰인이 한 말에 프리실라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메자이아 대수림의 개방에 있어서 가장 우선시되는 일 두 가지.
바로 마력 불안정 현상과 수면기에 들어간 엘프들을 깨우는 일이었다.
"음~ 그렇죠. 애초에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셰인, 당신이 말했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기니까요. 하지만 이건 저라고 어떻게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랍니다. 세계수에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모양이에요."
"바로 가도록 하지."
"음... 원래 다른 종족을 세계수의 아래까지 데리고 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그러면서 프리실라가 셰인을 바라봤다.
"그곳에서 네가 가진 힘이 얼마만큼 늘어나는지 알고 있다. 따로 맹세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이런. 그것까지 알고 계신가요? 정말 모르는 게 없네요."
"알고 있는 것만 알 뿐이다."
이윽고 둘은 세계수의 중심부로 향했다.
다만 평범하게 걸어서 가는 것은 아니었고, 여왕의 방에 설치된 마법진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그렇게 도착한 세계수 앞.
사람들의 상상만큼이나 거대한 나무가 하늘 높이 뻗어 올라가 있는 모습은 과연 장엄하면서도 엄숙한 기분이 들도록 만들었다.
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던 이 거대한 나무는 외부가 어떤 환경이든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올곧게 서 있었다.
거기에 세계수의 내부는 말 그대로 요람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수많은 엘프들이 세계수의 내부에 맺힌 열매 안에 들어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인간들이 쉬이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었으나, 그보다 더한 것이 존재했다.
세계수의 아래, 무언가가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이다.
"원 포 올(One for all.). 그린 드래곤이로군."
"...네, 맞답니다."
거대한 세계수의 뿌리가 내린, 두 눈을 감은 채 긴 잠에 빠진 듯 보이는 그린 드래곤.
그린 드래곤의 이름은 고대 언어로 '전체를 위한 하나'라는 의미로, 이름처럼 그들은 스스로가 세계수라는 거대한 초목이 되어 숲을 형성한다.
그리고 인간들은 물론이고 엘프에게도 아득한 시간 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단 한 번. 그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시기가 있다.
수천 년 동안 숲을 일군 그린 드래곤은 때에 맞춰 수면기를 끝내고 산란을 한 뒤, 다음 세대를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마력을 방출하여 자식에게 전승하고 숨을 거둔다.
그때가 바로 엘프들이 수면기에 들어설 때다.
다음 세대의 드래곤과 마력을 공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죽은 드래곤은 다시 자신이 일평생 일군 자연으로 돌아가고, 새로운 세대의 그린 드래곤이 깨어나면 엘프들의 수면기도 동시에 끝맺음을 맺는 것이다.
그러나 긴 시간 동안 아카샤의 대봉인으로 인해 '성장'을 허락받지 못한 해츨링이 마력을 받아들이지 못하자 마력이 다시금 자연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이걸 어찌하면 좋을까요."
그린 드래곤은 엘프들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이며, 엘프들의 근원이나 마찬가지인 존재다.
때문에 가장 큰 문제는 해츨링과 깊은 교감을 진행 중인 엘프들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교감 중에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기에 해츨링이 깨어나지 않는 이상 엘프들 또한 이변을 깨닫지 못하고 언제까지고 잠에 빠져 있을 테니.
프리실라의 걱정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왕인 프리실라는 수면기에 들 수 없기에 그들의 정신체에 간섭할 권한 또한 없었으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군."
"정말요?"
"다만 네가 가진 정기가 필요하다."
"어머!"
그러자 프리실라의 얼굴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어지며 몸을 배배 꼬았다.
"너무 직설적인 거 아니신가요?"
"...이상한 말로 알아듣지 말지."
"헤, 장난이었답니다."
그러고는 언제 얼굴을 붉혔냐는 듯, 프리실라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물어 왔다.
"정기가 필요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 저들의 마인드 로드에 간섭할 예정이다."
"음, 상당히 위험한 행위네요."
마인드 로드란 현재 그린 드래곤의 해츨링과 엘프들의 정신체가 모여 있는 가상의 공간을 뜻한다.
셰인은 그곳에 자신의 정신을 불어넣어 엘프들을 깨울 예정이었으나,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해츨링이라고는 하나, 위대한 존재인 드래곤과 평균 수명이 수백 년에 다다르는 엘프들이 가진 수천의 정신체로 이루어진 사상의 흐름 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
오랜 시간 준비하지 않는다면 프리실라조차도 위험할 정도였다.
그러나 셰인은 달랐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타락에 의해 스스로의 내면에 갇혔을 때.
그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는 공간은 1분이 10년 같았고 때로는 100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흐른 듯한 세상이었으니.
그런 장소에서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셰인은 스스로의 기억을 수천, 수만, 수억 번을 되감으며 자기 자신을 또렷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저 공간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다만 스스로를 지키는 것까지는 가능할지라도, 수많은 사상이 한데 얽힌 그곳에 멋대로 침입했다간 곧바로 적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그들에게 가장 친숙한 엘프 여왕, 프리실라의 정기가 필요했다.
"음, 그렇다면 좋아요. 제 정기를 나눠 드리도록 할게요."
설명을 다 들은 프리실라가 양손을 셰인의 어깨 위에 올리고는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했다.
풀 내음이라 해야 할까.
애초에 세계수의 중심부에 있으니만큼 그 어느 때보다 청량한 풀 내음이 가득했으나, 프리실라에게서 나는 향기는 또 달랐다.
서로의 코가 닿고, 끝내 입술이 닿기 직전.
프리실라의 입술로부터 조금씩 옅은 풀빛의 정기가 셰인의 입을 통해 들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프리실라가 천천히 얼굴을 도로 빼내자, 셰인은 자신의 내면에 충만하게 차오르는 자연의 기운을 느꼈다.
'상성이 별로 좋지는 않군.'
신체 자체는 이 기운을 받아들이며 엄청난 생명력에 환호하고 있었으나, 반대로 셰인의 오리진은 이러한 기운을 극도로 꺼리는 경향을 보였다.
'혐오하고 있어.'
어둠 또한 자연의 일부였으나 엄연히 기운이 다른 법.
셰인이 가진 어둠은 생명력과 상성이 좋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이것으로 준비는 끝났다.
"차암. 표정에 변화 한 번 없으시네요. 무뚝뚝한 사람."
"그게 놈들을 상대할 때 가장 올바른 태도일 테지."
"그것도 그렇겠네요."
아무튼 이로써 준비가 끝났다. 셰인은 엘프들의 정신체가 모여 있을 그린 드래곤의 품속 알을 향해 다가갔다.
* * *
"우와...."
"...다시 보기 힘든 광경이겠네."
"응."
며칠 뒤.
프리실라의 허락을 받은 탐사대는 세계수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신기하게도 세계수 주변으로는 이 변덕스러운 기후의 원인인 마력 불안정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멸망하는 세상 속에서 오로지 자신들만 남은 것 같은 몽환적인 기분이 탐사대의 가슴에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변화는 금방 시작됐다.
항상 먹구름이 껴 있던 메자이아 대수림에 조금씩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풀 내음이 가득한 마력이 대수림에 퍼진 모든 나무로부터 흘러나와, 혼란으로 가득했던 주변의 마력들을 어르고 달래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혼란으로 가득한 마력이 진정하며 조금씩 나무로 흡수되는 모습은 마치 숲속에서 거대한 실크 커튼이 휘날리는 풍경을 자아냈다.
"아...."
"아름답다."
커튼을 따라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이 개어 갔고, 따스한 햇살이 숲 전체에 생명력을 되찾아주고 있었다.
[아─♫ 아아─♪]
아래서부터 수많은 목소리들이 하모니를 이루며 탐사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긴 잠에서 깨어난 수천 명의 엘프들이 혼란에 빠진 대수림의 마력을 달래기 위한 자장가를 부르고 있었다.
하나 엘프들의 하모니는 마력만을 달래지 않았다.
"흑...."
"...그, 멍청한 녀석."
"왜 먼저 간 거냐.... 워렌."
"너희와 이 풍경을 보고 싶다."
이곳까지 오며 잃은 동료들을 위한 레퀴엠.
이제는 이곳에 없는 자신의 친우를 떠올리며, 탐사대원들은 굵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에 마치 바람이 다가와 그런 눈물을 대신 훔쳐 주듯 스쳐 지나갔다.
분명 이 슬픔은 오래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일이 되면 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고, 죽은 동료들보다는 빛나는 미래를 생각할 것이다.
냉정하다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무기를 들고 전선에 나서는 인간들에게 죽음은 너무도 가까웠고, 슬픔은 사람과 죽음을 연결하는 족쇄와 같았으니.
슬픔을 떨치는 것 또한 생존의 방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동료들이 죽은 순간이나 그들의 빈자리를 기억하기보다, 죽은 이들과 함께 보내온 추억을 더욱 회상하는 것으로 나쁜 기억들을 떨쳐 낸다.
그러니 참으로 다행이지 않은가.
이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회상하는 동료들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아름다웠노라 영원히 기억될 테니.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48화
48화 수확의 시기 (3)
그간 요람의 바깥세상에서는 라비아타의 탐사대로 인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많은 기자들이 앞에 대거 대기하며 마공학 형체 기억기... 카메라를 들고 탐사대가 언제 나오나 매일같이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어어! 저기!"
"어! 뭐, 뭐야?!"
요람 밖에서도 저 멀리 보이는 먹구름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마치 천상의 커튼처럼 하늘을 가득 매운 신비로운 빛줄기가 반짝이자 그간 지루함에 카드놀이를 하고 있던 기자들이 일제히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들어 마구 셔터를 눌러 댔다.
"와... 이거, 들어 본 적 있어! 고대에는 극지방에 저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본 거 같은데."
"이름이 뭐였더라? 오라라?"
"아! 오로라!"
"맞아, 그거!"
"근데 메자이아 대수림에 저런 현상이 관측된 적이 있던가?"
"그럴 리가 있나? 저긴 매번 비만 주구장창 내리던 곳인데."
하나같이 안면식이 있는 기자들은 입으로는 수다를 떨면서 손으로는 바쁘게 마법 양피지에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인쇄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글쎄. 아무래도 탐사대가 무슨 일을 한 것 같은데...."
그렇게 기자들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어어억?!!"
때마침 과거 마탑 소속이었던 기자 중 한 명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보... 봉인! 봉인이 해제됐다!!"
"뭐? 뭐가 해제돼?"
"요람! 요, 요람이 개방됐어!"
그 말에, 순간 모든 기자들이 등줄기를 타고 들어오는 기이한 느낌을 느끼곤 몸을 굳혔다.
이는 기자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촉.
특종에 대한, 그것도 여태껏 느껴 본 적 없던 거대한 특종의 감이 울리고 있던 것이다.
"개방? 우, 우리가 아는 그 개방 맞지? 요람이 클리어됐다고?!"
"그렇다니까!! 입구에서 느껴지는 요람 특유의 마력막이 사라졌어!"
"야! 이 씨!!"
기자들은 서둘러 자신들의 마차로 돌아가 각자의 수정구를 찾고는 상대편에 있는 누군가에게 호들갑을 떨며 소리쳤다.
"아, 글쎄!! 지금 메자이아 대수림이 개방됐다고, 개방!"
"그래, 그거!"
"100년 만에 처음으로 개방된 요람이야!!"
그리고 이 거대한 특종은, 당분간 기자들에게 행복한 비명을 지르게 할 천고의 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 * *
해일처럼 몰려오는 인파를 본 적이 있는가.
요람이 개방되고 일주일 후.
엘프들의 도움을 받아 대수림의 입구로 나온 탐사대는 예상치 못한 질문 세례를 받아야 했다.
"나왔다!"
"라비아타도 있어!"
"어, 근데 수가 많이 적은데?"
"일단 달려가!"
그중에서도 가장 앞에 있던 기자들이 단숨에 탐사대 앞까지 달려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음성 저장 마법이 걸려 있는 수정구슬 상자를 들이대며 외쳤다.
"요람의 봉인이 해제됐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말씀 좀 부탁드립니다!"
"요브람 마탑 학회에서 나왔습니다! 메자이아 대수림의 중심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커튼 모양의 빛과 함께 먹구름이 사라졌습니다! 요람의 봉인 해제와 관련이 있는 게 맞습니까?!"
'으와.'
그 모습을 본 디라일라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나름 인간 세계로 나온 이후부터 연합국의 수도에서 살아왔던 디라일라는 나름 사람을 많이 봐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정도가 다르지 않은가.
탐사대에게 달려들던 곤충형 몬스터들도 저렇게 달려들진 않았다.
한편 라비아타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에 대한 인터뷰는 나중에 할게. 일단 지금은 협회에 먼저 알려야 할 사실이 있거든. 오늘 저녁 중으로 공지 나갈 테니까, 다들 기다리고 있으라고. 빨라도 내일 중으로 시간 잡을 거야."
하지만 고작 그 정도 말에 물러설 기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라비아타의 명성이고 나발이고 간에 일단 당장 일어난 일부터 취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그러시지 마시고 가볍게 한 말씀만!"
"메자이아 대수림에는 엘프들이 살았다는 고대 기록이 있습니다! 그들을 만나 보신 겁니까?!"
하지만 이내 그런 기자들은 이후에 나온 각 왕국의 파견원들에 의해 밀려나고 말았다.
라비아타의 의중을 확인한 이상, 일단 저 기자들을 떼어 내고 안에 있던 일을 들어야 했으니.
그렇게 탐사대는 전부 인근 도시의 성에 도착했다.
성주는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고, 본래 성주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다양한 국가의 중진들이 앞다투어 이번 일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윽고 다음 날 아침.
라비아타의 말처럼 따로 기자 회견이 열렸고, 그 날 이후로 세간은 발칵 뒤집혀졌다.
[특종! 인류의 미래가 더욱 밝아졌다! 메자이아 대수림 개방!]
[메자이아 대수림에 숨겨진 비밀들과 엘프들!]
[라비아타의 탐사대는 어떤 방법으로 탐사가 아닌 클리어에 성공했는가?]
[알 수 없는 집단에 의해 몰살당한 황실의 호위 기사단. 그 내막에는 무엇이 숨어 있나!]
[50인의 영웅들이 그려 낸 한 편의 소설 같은 이야기!]
당연하지만 100년 만에 이루어진 요람의 개방은 수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는 소재였다.
그뿐이던가.
여태까지 토벌 형식으로 진행되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번 요람은 주인 종족의 인정으로부터 이루어진 일이 아니던가.
마탑 또한 이번 사태를 결코 가볍게 보지 않았고, 자신들이 소속된 왕국의 왕을 매일 같이 찾아가며 제발 대수림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몸이 달아오른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모험가들도 메자이아 대수림이 개방되면서 생기게 될 신규 던전들에 관심이 많은 상태였다.
기본적으로 요람이 개방된다고 해서 모든 구역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남은 던전들은 여전히 봉인되어 있는 상태고, 그러한 던전들은 아무리 토벌한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새로운 천연 자원이 매립되어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인데, 모험가들의 관심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는 것이다.
한편 시끄러운 외부와는 다르게 셰인 일행은 따로 마련된 거대 저택에서 동료들과 함께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외부 활동은 이번 탐사대를 이끌었던 라비아타와 제임스가 대부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 하이엘 왕국의 기사단은 떠날 채비를 갖춘 뒤 따로 셰인을 찾아갔다.
애덤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떠나기 전에 그대에게 사과를 하고 싶소."
"...."
"탐사 초기에 자네를 무시했던 언행에 대해 모두 사과하겠소. 미안하오."
"죄, 죄송합니다."
애덤의 사과에 맞춰 남은 기사단원들도 고개를 숙였다.
그 와중에 재미있는 인사가 한 명 끼어 있었는데, 그는 탐사 초기에 대수림의 폭우에 떠밀려 내려갔던 기사단원, 웰스였다.
그는 도미닉이 말했던 것처럼 운 좋게 물살에 떠밀려 요람의 입구까지 도착할 수 있었고, 홀로 따라가기란 불가능이라 판단하고 요람 밖으로 나오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는 그 몇 달 사이에 많은 수의 기사단원이 죽고, 황실의 호위 기사단은 아예 전멸했다는 소식에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아무튼.
애덤은 첫 만남과는 대조되게 셰인을 존중하고 있었기에, 셰인 또한 그를 위해 준비해 둔 편지 한 장을 그에게 넘겼다.
"이건?"
"사과를 받겠다는 의미로 드리는 겁니다. 기분이 나쁘실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홀로 있을 때 읽어 보십시오."
"아.... 알겠소."
"반드시, 혼자 있을 때 읽으셔야 합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한번 강조하는 셰인에게서 무언가 느낀 게 있는 걸까.
원래부터 감이 좋았던 애덤은 그 말을 가볍게 듣지 않았다.
아무튼 하이엘 왕국에서 마련해 준 대저택에서 애덤과 그의 기사단원들이 나가자, 그 뒤를 이은 것은 램퍼트 모험단의 일렉사였다.
"나중에 다시 한번 보겠네요, 셰인."
"예. 그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애덤과 그의 기사단원들이 왕국의 부름을 받고 이곳에서 벗어났다면, 램퍼트 모험단의 경우에는 필요 이상의 관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실상 그들은 이번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될 때까지 다시 모습을 드러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의 위에 있는 누군가가 그것을 반기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애덤과 일렉사마저 떠나게 되니, 대저택이 굉장히 조용해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주 조용해진 것도 아니었는데, 클라인의 경우에는 요람에서 알파와 도미닉과의 전투에서 얻은 깨달음을 정리하느라 매일같이 밖에서 검술을 단련했고, 디라일라 또한 그런 클라인의 옆에서 대지와의 교감을 이루며 나름 성장을 하고 있었다.
한편, 그런 둘과 다르게 아네이스는 무언가 깊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으며 셰인에게 찾아왔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하도록."
"황실의 기사단을 죽인 사람. 너야?"
"...."
아네이스의 질문에 셰인은 그런 그녀의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봤다.
동이 트기 직전의 새벽하늘처럼 연보랏빛으로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는 언뜻 무심하게 보였으나, 셰인은 그 안에 숨겨진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불신.
아주 뿌리 깊은 불신이 아네이스의 내면을 점차 잠식하고 있던 것이다.
그 눈동자는 마치 전생에 봤던 철혈의 정의를 보는 것 같았다.
셰인은 장고 끝에 입을 열었다.
"맞다. 내가 죽였지."
"...."
거짓 없이 돌아오는 그 대답에 아네이스는 잠시의 침묵 후에, 다시금 셰인에게 물었다.
"왜?"
"그들은 현 인류에 있어서 해악이니까."
"알고 있는 게 있어?"
"어느 정도는."
셰인의 대답에 아네이스가 잠시 눈을 감았다.
"합일, 이라는 게 뭔데?"
"현 황태자가 꿈꾸고 있는 망상이지."
"망상?"
"녀석은 전쟁 없는 인류를 위해 전쟁을 바란다."
"...그건 모순이야."
"그래, 모순이지."
이어서 셰인이 설명했다.
"전 국가를 통합한 하나된 국가. 녀석은 연합국이라는 시스템 체재를 무너뜨리고 오롯이 제국의 통치하에 이루어지는 세상을 바라고 있지. 그러기 위한 전쟁을 바라는 것이고.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로는."
"표면적인 이유."
"알고 보면 단순한 전쟁광일 뿐이다. 지독한 기회주의자이며, 자신이 가질 권력에 대한 욕심만이 그득한 놈이지."
그러나 그뿐만이라면 그리 위협적이지 않다.
문제는 따로 있다.
"다만 놈에게는 그럴 의지도, 능력도, 세력도 충분하다는 것이고, 그 가능성이 한없이 높다는 데 있다."
"...그게 그들이 말하는 정의야?"
"정의라면 정의겠지. 자신의 모순된 모습을 숨기고 싶기에 만들어 낸 가면이, 언젠가부터 스스로의 얼굴이라 생각하게 된 케이스니까."
"...."
아네이스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예전부터 생각해 왔던 황실의 모순 가득한 거짓말들.
그러나 놀랍게도 눈앞에 있는 소년이 하는 말은 하나같이 진실이라고 아네이스의 귀가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깊이 고민하고 있는 아네이스의 모습에, 셰인은 한마디 덧붙였다.
"아네이스. 혼자 고민하고 혼자 판단하는 행동은 분명 유능하나, 모든 일을 그리 진행하지는 마라."
"...."
"적어도 너의 약혼자가 된 사람으로 이 정도 충고는 하고 싶군."
어딜 봐도 약혼자들끼리 나눠야 할 대화는 아닌 듯싶었지만, 셰인도 그렇고 아네이스도 그런 걸 생각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아네이스는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나보다 강한 적을 상대할 때는 세 가지 방법을 이용한다."
문득 시작되는 셰인의 말에 아네이스가 다시금 경청했다.
"첫 번째는 준비를 하는 것. 적은 너를 모르지만 네가 적을 알고 있을 때 필요한 방법이지."
"두 번째는?"
"두 번째는 시류를 기다리는 것. 어쭙잖은 기회를 찾기보다, 확실하게 찾아올 기회를 기다리는 거다. 그 방법으로는 그 시류가 찾아올 시기를 예측하는 것이 중요하지."
"...."
"마지막 세 번째는, 그 두 가지 모두를 손에 쥐는 일이다."
"어려워."
아네이스가 내뱉은 그 짧은 말에 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의가 곧 힘이라고 배워 온 아네이스에게는 어렵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 모순으로 가득한 황실에서, 아네이스는 홀로 그 모순을 깨닫고 고민하며 살아왔으니.
그렇기에 셰인은 말했다.
"어려울 게 없지. 너는 그중 두 개를 해결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내가?"
"그래. 준비는 내가 할 것이고, 시류 또한 내가 만들 것이다. 그러니 내 약혼자인 너는 이미 그 둘 모두 얻은 것이나 다름없지."
"오만해."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내 오만에는 방심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 말하는 셰인의 로즈베리색 눈동자는 한 점의 흔들림 없이 아네이스를 바라봤다.
"조만간 그 기회가 있을 때 보여 주도록 하지. 내가 해 온 준비와 그 시류가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
그 말에 결국 아네이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그녀의 민감한 귀는 셰인이 한 점 거짓 없이 말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49화
49화 수확의 시기 (4)
탐사대가 밖으로 나온지 이주일이 지나갈 무렵.
라비아타의 대외적인 일정도 대략적으로 끝맺음을 하고 셰인과 그 일행들도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혹시 몰라 한 번 더 말해 두겠지만, 황실과 관련된 일은 침묵해야 한다."
"어, 오케이."
"알겠습니다, 형님."
"응."
아카데미에 도착하기 직전. 셰인은 일행들에게 그렇게 상기시키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당연하게도, 다수의 기자들과 함께 수많은 생도들이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번 메자이아 대수림의 개방 소식에 가장 뜨겁게 달궈진 곳이 바로 연합국의 아카데미였기 때문이다.
디라일라는 앞서 몇 번이고 이런 인파를 봤지만 여전히 익숙하지가 않아서 어색하게 웃었고, 클라인은 평소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으며, 아네이스와 셰인은 표정에 별 변화 없이 그러한 인파들을 맞이했다.
사방에서 기자들이 인터뷰를 한 번이라도 따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이내 그들은 아카데미 측에서 나온 가드들과 교수들로 인해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아카데미의 총장인 하우젠 G 크로노스까지 등장했다.
"할 말이 많지만, 이 말부터 해 주고 싶구나. 정말 고생 많았고,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크로노스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며 셰인 일행을 맞이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들이 좀 더 쉴 수 있게 편의를 봐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너무 많은 관심을 받고 있어서, 총장의 입장에서 일단 대수림의 탐사가 어떠했는지 들어야 할 의무가 있었기에.
아니, 하다못해 그러했다는 세간의 인식이 필요했다.
"힘들겠지만 너희들의 시간을 좀 빼앗아야 할 것 같다."
"괜찮습니다."
가장 앞에 있던 셰인이 대표해서 그리 말하자, 크로노스도 인자한 웃음을 머금고는 그들을 총장의 개인 사무실로 데리고 왔다.
"사실 모험가 협회와 국회 측에 이미 탐사 진행 관련 서류는 받았단다. 다만 이번 일로 몇 가지 충고를 해 주고 싶어 이리 불렀지."
"어떤 말씀이든 받겠습니다."
"허허, 별건 아니야. 그저 노파심에 하는 소리지. 자네들이 이루어 낸 업적은 나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업적이야. 하지만, 그로 인해 너무 젊은 나이에 얻게 된 명성이 오히려 자네들에게 독이 될까 걱정이 됐네."
크로노스의 말에 셰인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는 그저 듣기만 하기보다, 무엇이 문제가 될지 셰인이 먼저 입에 올리는 것이 옳았다.
"예. 저희의 이름값을 노리고 다가오는 이들도 많으리라 예상됩니다."
"오, 말하지 않아도 잘 아는군. 맞아. 분명 많은 곳에서 자네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올 테지."
그 정도야 셰인도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물론 아직 지금 상황이 어리둥절하기만 한 디라일라와 다른 일행들은 아니겠지만.
당장 사람들이 보내 오는 환호에도 어버버 하고 있는 마당에 그런 걸 걱정할 틈이나 있었겠나.
"내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을 봐 왔지. 그중에는 남들이 평생을 일궈도 얻지 못할 명성을 단번에 얻는 이들도 적지 않았어. 원래 이런 바닥이 아니던가. 그치?"
"예, 맞습니다."
그 말처럼 던전에서 의도치 않게 숨겨진 비밀을 찾았다던가,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현상을 풀어냈다는 등.
다양한 이유로 급격히 명성이 늘어나는 이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등장했다.
"나는 그런 이들이 어떻게 등장하고 또 어떻게 몰락하는지 봐 왔어. 자네들도 그런 일을 겪지 않길 바래서 이리 따로 불렀네. 하물며 요람의 개방을 이루어 낸 영웅들이 아닌가. 이는 100년 만에 일어난 일이라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하지만 그게 자만으로 이어지지 않길 바랄 뿐이네."
크로노스 총장은 진심을 담아 그리 말했다.
셰인 또한 크로노스는 인류에게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비단 그가 이런 참교육자의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셰인의 전생에서 크로노스는 조직이 세상에 태동할 무렵에 세상을 떠났다.
연합국에서 일어난 조직의 테러 사태.
당시에 크로노스는 아카데미 생도들을 지키기 위해 가장 최전선에서 전투를 치렀고, 그 일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때문에 크로노스는 셰인이 존중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면 문제가 생길시 상담을 위해 찾아와도 괜찮겠습니까."
"음. 물론이지. 사양하지 말게. 나 또한 100년 만에 등장한 영웅의 스승이 된 것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으니 말이야. 허허허."
크로노스는 그리 말하며 그들을 배웅해 주었고, 남은 일행들도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아네이스는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복잡한 상태였다.
방금 크로노스가 말했듯, 자신은 이용할 가치가 생겼고 이는 곧 황실의 체스 말이 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디라일라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한 번 쉽사리 사람을 믿었다가 어떤 꼴을 당했던가.
예전에는 마냥 이름값이 높아지면 남들이 함부로 건들 수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정작 지금 그 상황이 들이닥치자 현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해 보니까 난 아무런 백도 힘도 없는 명성만 높은 이종족이잖아...?'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냥 좋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러자 디라일라는 셰인과 클라인에게 더더욱 붙어살아야겠다고 판단했다.
'클레이튼 가문의 이름값이 어땠더라....'
한편, 둘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셰인은 클라인과 따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클라인. 한동안은 따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음... 아쉽지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클라인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머리가 나쁘지 않은 클라인이니만큼, 방금 전 총장과의 대화에서 깨달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너는 모험가 협회 측 위주로 자리를 다지고 있어라. 이게 거기에 도움이 될 거다."
"이게 무엇입니까?"
두꺼운 서류 뭉치.
그 내용은 아직 모험가 협회 측에서 토벌하지 못한 미토벌 던전 리스트였다.
물론 단지 리스트만 건넨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전생에 셰인이 조직에 가담했을 무렵 클리어한 던전들이었기에, 던전을 진행함에 있어 필요한 정보들도 함께 담겨 있었다.
적혀 있는 주의사항만 유의한다면 클라인의 실력으로도 무리 없이 클리어가 가능할 터.
"음, 알겠습니다. 그러면 형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대외적으로 이름을 알릴 예정이다. 어차피 가주님도 이미 몸이 달아오르셨을 거다."
"아... 아무래도 그렇겠군요."
"어차피 이번 학기 성적은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실기에서 얻어야 할 점수는 이번 메자이아 대수림의 탐사로 말할 필요도 없을 수준이고, 남은 것은 필기 정도인데 그거야 시험 날짜에 맞춰 오기만 하면 된다.
5년차 생도는 굳이 아카데미에 출석을 하지 않더라도 슬슬 외부 활동을 할 시기이기 때문에 아카데미에서 터치를 하지 않았다.
단 하나. 곧 있을 계급심사를 제외한다면, 더 이상 아카데미에서 시간을 끌지 않아도 됐다.
'이제부터는 명성 관리를 해 나가야겠군.'
아직 엘프의 여왕 프리실라에게 드래곤의 역린을 받아 오지 못했고, 적어도 메자이아 대수림의 엘프들이 안정된 시기를 찾으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때까지는 굳이 던전이나 다른 요람에 찾아갈 필요가 없기에, 셰인은 이제 외부적인 명성 관리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디라일라. 너는 당분간 클라인을 따라다니면서 성장에 힘쓰도록 해라."
"어? 응. 알겠어."
마침 클레이튼 가문과 떨어질 이유가 없던 디라일라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후 각자의 기숙사로 헤어지기 전에 셰인은 따로 아네이스를 불러 단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그 와중에 클라인이 또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갔으나... 이제는 슬슬 익숙해지려는 마당이다.
"무슨 일이야?"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불렀다."
"걱정."
"그래. 너도 알겠지만 당장 황태자는 움직이지 못해. 도미닉의 황실 호위 기사단은 황태자가 대외적으로 쓸 수 있는 제법 큰 손이었으니까. 그중 하나가 잘려 나간 탓에 그걸 처리하느라 바쁠 거다."
"아...."
"그뿐만 아니라 황태자가 아닌 황실의 입장에서 이번 기사단의 몰살이 가볍게 볼일은 아니지. 국제 정치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하이엘 왕국의 기사단도 어느 정도는 살아남았고, 램퍼트 모험단은 유실이 그리 크지 않았다. 오로지 황실의 기사단만 몰살된 사태다 보니, 황실의 이름에 먹칠을 한 것이라 여길 거다."
"응."
"그러니 황태자보다는 아직 황권을 잡고 있는 황제 쪽에서 움직일 거다. 그러면 황태자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테니, 네가 걱정하는 일은 당분간 벌어지지 않겠지."
"그렇... 구나. 다행이다."
표정 변화가 드문 아네이스가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황태자와 얽힌 저지먼트 기사단의 내부 사정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아네이스의 입장에서, 그들의 입맛대로 부려지는 것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을 테니.
셰인 또한 괜한 압박으로 아네이스가 폭주하기 전에 미리 이렇게 안심을 시켜 둔 것이다.
이번에 도미닉의 기억을 이어받으면서, 셰인은 그간 아네이스와 황실에 얽혀 있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세부적인 단계까지 가려면 조금 더 정보가 필요할 테지만, 컨트롤할 수 있는 한도 내의 정보는 다 얻은 셈이다.
이윽고 아네이스가 돌아간 후, 홀로 남은 셰인은 평소처럼 스스로의 내부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셰인이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보였던 활약은 결코 적지 않았으나, 여전히 무력적인 면에서는 부족함이 많았다.
비록 황실의 호위 기사단을 전원 죽이는 데 성공했고, 최악의 연금술사, 고든 또한 소멸시키기는 했으나, 이게 무력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호위 기사단이야 오리진의 힘을 모르고 있었기에 당한 것이고, 그에 더해 전원이 방심하고 있던 탓도 있었다.
거기에 고든은 애초부터 완성된 존재가 아니었고, 고든이 본래 육신으로 돌아가 흑마법까지 써 가며 네크로노미 마스크를 썼다면 결코 셰인이 이길 수 없는 상대였을 테니.
철저하게 상황이 허락한 상태에서의 전투만을 유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일단 지금은 부족한 마력량을 커버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지금처럼 룬 마법으로만 부족한 부분을 메꾸다가는 지난번 고든과의 전투에서처럼 약점이 드러날 가능성이 있으니, 오리진에 대해서도 더 깊게 생각해야 했다.
'이건 드래곤의 역린을 얻으면 해결될 문제로군.'
그래도 드래곤의 역린만 떠올리면 마냥 차갑기만 하던 셰인의 가슴이 든든해졌다.
전생에 조직에서 드래곤의 역린으로 어떤 일을 일으켰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고든이 조직의 대장장이었다면, 드래곤의 역린은 조직의 군대나 마찬가지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로써 조직은 큰 무기 두 개를 단 한 번에 잃은 셈.
이후 조직에서 어떤 행동 변화를 가지고 올지 모른다.
아마 이제부터는 이번 메자이아 대수림 때처럼 미래의 정보를 가지고 조직에게 큰 비수를 날리는 짓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셰인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어차피 한계가 드러날 정보였지.'
애초에 귀중한 미래의 지식을 가지고, 미래가 바뀌어 쓰지 못할 거란 생각에 전전긍긍하다가 얻을 것도 못 얻는 멍청이가 될 생각은 없었다.
스스로의 심상 세계의 확인을 마친 셰인은 생각의 정리 또한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려먼 이제부터 바쁘게 움직여야겠군.'
클라인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곧장 던전 탐사에 나설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 현재 그들이 얻은 명성은 어디까지나 부풀려진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의 이름값이 사라지기 전에, 이 명성을 진짜 자신의 명성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기 위한 첫 걸음으로, 셰인은 오랜만에 자신의 아버지, 클레이튼 가문의 가주 로웰과 대화를 해 보기로 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50화
50화 수확의 시기 (5)
최근 로웰은 굉장히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저지먼트 기사단의 단장인 올리버 G 대니얼이 조심스럽게 제안해 온 지하도시에 관련된 내용을 검토하는 것부터가 일단 상당한 시간을 잡아먹고 있었지만,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어디까지나 검토하는 수준이라 위험도를 체크하는 경우였기에, 외부 정보망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기다렸다 판단을 하면 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작업만 3개월이 넘게 걸릴 정도로 로웰은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다름도 아니고 연합국의 그림자를 차지하고 있는 지하도시와 관련된 일이 아니던가.
자칫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클레이튼 상단의 명성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 신용이 중요한 상단에 그러한 결함은 치명적이었으니.
그러나 이제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메자이아 대수림의 개방 때문이었다.
이 일로 인해 로웰은 지난 3개월 동안 고생했던 지하도시 안건조차도 뒤로 확 미뤄 버렸다.
다음 황권을 차지할 황태자를 지지하고 있는 저지먼트 기사단의 부탁이었긴 했으나, 메자이아 대수림 건은 정말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개방만 됐다면 이 정도로 바쁘진 않았을 것이다.
현재 메자이아 대수림의 주인은 엘프이며, 라비아타가 이끈 탐사로 인해 그들의 인정을 받았고, 현 인류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해 놨다는 소식은 이야기가 다르다.
그렇다면 그저 먼저 가서 침부터 발라 둔다는 논리가 통하지 않을 터.
로웰은 다방면으로 엘프들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 것과 동시에, 이후 연합국에서 주도할 메자이아 대수림의 외교 사절단에 포함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러나 로웰은 이렇게 바쁜 시간들이 너무나도 편안하게 다가왔다.
일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나, 일을 하면 할수록 머리가 개운해지기 때문이다.
'...덕분인가. 요즘 잠도 잘 오는군.'
늦은 밤.
마력등에 의해 밝혀진 서재에서 한참 쌓여 있는 서류를 일일이 확인하고 있던 로웰은 잠시 눈을 쉬게 할 겸 눈두덩이를 주무르고 있었다.
그때, 책상 위에 올려 둔 수정구에서 옅은 빛과 함께 진동이 울렸다.
"음."
이 늦은 시간에 자신에게 연락하는 이가 누구일까.
수정구에 비춰지는 색을 보아하니 정보팀에서 보내 오는 수신은 아니었다.
그렇게 수정구에 마력을 흘려보내자, 안에서 셰인의 얼굴이 비춰졌다.
"음... 셰인. 오랜만이구나."
[예, 가주님. 이번 메자이아 대수림과 관련해서 연락드렸습니다.]
"그래. 안 그래도 연락을 한 번 하려고 했다."
이는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최근에는 바빠도 너무 바쁘기도 했거니와, 당장 셰인 또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을 것이라 판단해서 아직 연락을 취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으니.
"그보다, 급한 일이더냐."
[아닙니다.]
"그럼 직접 보며 대화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기사단을 보내 주마."
[...예. 알겠습니다.]
부자간의 짧은 대화가 끝이 나고, 다시 색을 잃은 수정구를 바라보며 로웰은 두 눈을 감았다.
누구를 닮은 셰인을 봤기 때문일까.
로웰은 최근 바쁜 통에 잊고 지냈던 과거를 떠올렸다.
'엘리나.'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버린 전 부인이 떠오른 것이다.
전 부인 엘리나의 죽음은 로웰로 하여금 많은 것을 바꾸게 했다.
본래도 그의 차가웠던 그의 성향은 더욱 극단적으로 바뀌었으며.
전 부인을 떠올리는 게 너무 힘들어 이토록 일에 매달리지 않았던가.
셰인을 보는 것조차도 엘리나를 떠올리게 만들었던 터라, 로웰은 자식들에게도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차가운 심장을 가졌던 터라 사람들은 로웰이 감정이 메말랐다고 평하지만, 반대로 차가운 심장을 가졌기에 첫 배우자를 향한 사랑은 그 누구보다 뜨겁게 불타올랐었다.
그리고 그 뒤로 찾아오는 냉기는 그 누구도 쉽사리 달래지 못한 것이었고.
로웰은 또다시 찾아오려는 두통을 피하고자 다시금 서류로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음 한편, 이후 찾아올 셰인이 가지고 올 일거리를 기대하며.
* * *
며칠 되지 않아, 셰인은 기사단과 함께 가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작 몇 달에 불과한 시간이었으나, 그사이 가문에서 셰인의 위상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최근 로웰이 그렇게 붙잡고 있는 메자이아 대수림의 탐사대에 직접 껴 있던 인물이고, 그뿐만 아니라 라비아타가 직접 계약하도록 만든 논문을 만든 장본인이었으니.
오는 내내 가문의 기사단원들도 행색 하나하나에 조심성이 묻어났다.
"어, 어서 오세요, 도련님!"
그런 셰인의 담당 메이드인 마리아는 누가 보더라도 긴장한 표정으로 그런 셰인을 반겼다.
셰인은 마리아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본론부터 물었다.
"가주님은?"
"아, 지금 서재에 계세요. 준비가 되면 바로 올라오라고 하셨어요."
"그럼 바로 가지."
"아... 알겠습니다!"
마리아가 앞장서서 걷는 사이, 가문의 사람들은 셰인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게 사람의 위치라고 해야 할까.
몇 달 전, 가문에서 떠나기 전에서 셰인의 분위기가 바뀌어 있다는 것을 눈치챈 고용인들도 적지 않았으나, 외부에서 어마어마한 명성을 가지고 돌아오니 사람의 품격부터가 올라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거기에 로웰은 클라인도 아닌 셰인을 가장 먼저 불렀고, 단 둘이 대담까지 나눌 예정이니.
단번에 가문 내에서 셰인과 클라인의 서열이 뒤바뀐 순간이었다.
물론 클라인은 그런 걸 신경 쓸 위인이 아니었으나.
"...왔구나, 셰인. 고생이 많았다."
가문에서 단 한 사람. 거기에 크게 신경을 쓸 사람이 있었다.
다니엘 L 레이첼.
셰인의 배다른 어머니이자 클라인의 친모인 현 가모가 바로 그러했다.
클라인의 명성이 올라간 것은 레이첼로서도 환영할 일이었으나, 하필이면 거기에 셰인까지 끼어 있는 게 문제였다.
아니, 오히려 이번에 단기간 성장한 사람만 보자면 세인이 더 우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라비아타의 탐사가 시작된 이유가 바로 셰인의 논문 때문이었으니.
이미 다양한 마탑 측에서 클레이튼 가문에 셰인과의 만남을 주도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모험가로서의 명성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 실질적인 명성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였기에.
레이첼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셰인은 레이첼에 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아예 무관심으로 둘 일도 아니다.
어쨌든 마음 여린 클라인의 생모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셰인은 레이첼의 인사에 마찬가지로 예의를 차렸다.
"예, 레이첼 님. 클라인은 함께 오지 못했습니다만, 이 편지를 전해 달라 했습니다."
셰인은 클라인에게 받아 준 편지를 레이첼에게 건네며, 마지막까지 고개를 한 차례 숙이고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레이첼은 잠시 셰인이 건넨 편지지를 보고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어찌 될런지."
레이첼의 입장에서 셰인은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처음 레이첼이 클레이튼 가문에 왔을 때의 분위기는 결코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웰은 막 부인을 잃은 시점이라 레이첼의 앞에서도 곧잘 슬픈 표정을 지었을 당시였기에.
같은 여자로서 안타까움을 느끼는 한편, 그 모든 부담은 레이첼 홀로 감당해야만 했다.
당시에는 전 부인인 엘리나를 따르던 기사들도 많았더랬다.
때문에 그 사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야 할 레이첼은 자연스럽게 딱딱해질 수밖에 없었고, 로웰은 여전히 레이첼을 챙기기보단 가문을 돌보는 데 힘을 썼으니.
이 집안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클라인밖에 없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해 오던 셰인이 이렇게 유명해져 버렸으니....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졌다고 하니.'
아직 셰인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아카데미로 떠나던 날, 호위에 나섰던 기사들의 말에 의하면 이전처럼 클라인과 날을 세우는 일은 없다고 했으니 일단은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렇게 레이첼은 방으로 돌아가 클라인이 보낸 편지를 보며, 조금씩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그 아이가....'
클라인이 보내 온 편지에는, 온통 형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것도 이전과 다르게 부정적이지 않고 전부 긍정적이기만 한 내용에, 레이첼은 더욱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 * *
"흐음... 놀랍구나."
로웰의 서재에 도착한 이후, 셰인은 가벼운 인사와 함께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있었던 일의 대부분을 설명하는 데만 어느덧 30분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무렵.
"그렇다면, 황태자와의 거래는 위험하다는 것이군."
"아마 버리는 말로 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로웰은 어느덧 의자의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느끼고는 무심히 손을 뗐다.
셰인에게서 듣게 된 전모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도미닉... 그 늙은이가 셰인을 노렸다라.'
그간 가족들에게 정을 떼고 살아왔던 로웰이다.
그럼에도 셰인이 암살을 당할 뻔했다는 소식이 로웰의 무의식중에 분노를 일깨우게 만들었다.
일에 있어서도 철저히 사무적으로 살아왔던 로웰이기에 이러한 감정의 변화는 낯선 것이었다.
그 때문일까. 로웰은 이 어색한 감정을 지우고자 보다 사무적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래도 황태자와의 끈은 계속 잡아 두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흐음."
"시간에 쫓기는 건 저들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저들에게는 정보가 없고, 우리에겐 있으니 그걸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겠지."
셰인의 말 또한 틀린 게 없었다.
어찌 됐든 괜한 피바람을 막기 위해 라비아타와도 상의해서 도미닉과의 일은 일단 수면 밑에 묻어 두기로 결정하지 않았던가.
거기에 증거가 없는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증인이 많기는 하나, 단순히 증인만으로 황실을 압박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물론 라비아타의 이름값을 생각한다면 충분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그 여자는 이쪽에 관심이 없겠지.'
도와달라면 라비아타가 그걸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셰인은 굳이 라비아타와 생긴 인연을 그런 식으로 소모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황태자를 당장 어찌할 단계는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서 무리하게 황태자를 친다고 해도 이쪽에서 볼 만한 이득은 없었으니.
괜한 진흙탕 싸움만 될 뿐이었다.
"시간은 이쪽에 있습니다. 황태자의 측근이 사라져 혼란에 빠진 지금, 그들이 감히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이쪽의 덩치를 키워야 합니다."
"나도 거기에는 동의하는 바다. 그렇기에 메자이아 대수림의 개방 문제에 있어 신중을 기하고 있지."
"그 부분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무엇이냐."
"현재 가주님의 권한 하에 얼마만큼 드실 수 있으십니까."
"흠?"
셰인의 그 단호한 물음에 로웰이 잠시 의문을 품었다.
마치, 말하는 만큼 떠먹여 주겠다는 듯한 말로 들렸으니까.
"우리 가문의 모든 것을 총동원한다면, 얼마만큼 먹을 수 있습니까. 대수림에 넘쳐흐르는 금맥 말입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51화
51화 수확의 시기 (6)
인류는 하나의 요람이 개방될 때마다 엄청난 성장을 이루어 왔다.
이번 메자이아 대수림만 해도 얻을 게 상당했는데, 첫 번째로 가장 중점을 둬야 할 것은 바로 마석 광산이었다.
현 인류의 모든 부분에 들어간다 해도 좋을 정도의 기초 재료인 마석은 던전에서 몬스터를 토벌해도 얻을 수 있지만, 이는 마석 생산량의 20퍼센트 정도를 차지할 뿐 나머지 80퍼센트는 마석 광산에서 채굴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물량이 부족한 탓에 마법사들은 어떻게든 마석의 효율성을 높이는 연구에 매달려 있는 상황이고.
이런 마당에 메자이아 대수림이 개방되면서, 상단을 포함해 수많은 국가기관에서는 과연 메자이아 대수림에 매장된 마석이 얼마나 되는지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누가 보면 우스울 수도 있을 것이다.
메자이아 대수림이 개방되었다고는 하나, 인간의 땅은 아니었으니까.
주인인 엘프가 떡하니 있는데, 침은 남이 먼저 흘리고 있으니.
하지만 적어도 셰인은 그럴 자격이 있었다.
가뜩이나 수도 적은 엘프들은 굳이 그 많은 마석 광산을 놀려 두고 있을 이유가 없었고, 그에 대한 권한 중 일부도 프리실라에게 받아 온 참이었다.
"얼마만큼 먹을 수 있는가...."
"정확히 탈이 나지 않는 수준이어야 합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로웰은 셰인이 어째서 저런 오만한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게 헛된 말은 아니라 판단했다.
비록 작년까지만 해도 부족하다는 평을 많이 받아 온 셰인이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클라인과 비교된 평판 문제였지 셰인 스스로가 남들보다 뒤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니.
오히려 머리를 쓰는 데 있어서는 로웰을 닮아 뛰어난 구석이 있었다.
로웰은 잠시 머리를 굴렸다.
얼마 전까지 있던 문제들로 인해 혼잡했던 문제들은 모두 한쪽 구석으로 몰아 두고, 당장 셰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정보들을 토대로 계산에 들어갔다.
'이 녀석이 도대체 어떻게 그런 부분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로웰이 방금까지 셰인에게 들은 것은, 메자이아 대수림에 매립되어 있는 마석의 총량과 질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는 단순히 탐사대에 속해 있다고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다.
그 넓은 메자이아 대수림에 마석 광산이 얼마나 있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는 필시 엘프들과 긴밀한 이야기가 오간 게 분명했다.
"1등급 마석 광산 2개 정도는 무리 없이 차지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무리하면 3개까진 가능하겠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듯하군요. 그보다는 명분과 실리를 챙기면서 2등급 광산을 챙기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마석 광산의 주인이 엘프였고 그들의 여왕인 프리실라에게 대부분의 권한은 받을 수 있었으나, 그렇다고 셰인이 전부 차지하려 한다면 당연히 배탈이 나기 마련이다.
크게는 황실이나 귀족 사회의 견제가 시작될 수 있고, 연합국 차원에서 견제가 들어오는 수가 있다.
이럴 때는 적당히 나눠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말 잘 듣는 상단을 고르는 것도 중요하리라.
"하지만 그것도 많은 감이 있다. 이건 어찌할 테냐."
그렇다 하더라도 1등급 마석 광산 2개는 상당히 큰 먹이었다.
당장 소화를 하기 위해서는 클레이튼 가문에서도 인력을 총동원해야 할 정도였으니.
거기에 1등급 마석 광산은 황실마저도 고작 8개 정도를 가지고 있을 뿐인데, 그 와중에 일개 백작 가문이 2개나 차지하는 것은 역시 명분에서 부족한 감이 있었다.
"아예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다른 이들과 다르게 셰인은 메자이아 대수림의 탐사가 시작되도록 만든 논문의 저자였다.
당연히 그 부분에 있어서 명분은 결코 부족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부족한 명분은 굳이 셰인이 노력해서 채울 필요는 없었다.
"필요한 명분은 엘프 측에서 채워 줄 것입니다."
"흐음. 확실하더냐?"
"예."
"그렇단 말이지...."
"그 외에도 메자이아 대수림에 만들 지부도 따로 생각해둬야합니다."
"음."
하이엘 왕국과 이어진 메자이아 대수림은 지리적으로 봤을 때도 매우 훌륭한 위치였다.
대수림의 북으로 이어진 거대한 산맥을 넘어가면 이후부터는 또 다른 요람과 이어져 있으며, 서쪽으로는 드넓은 바다가 펼쳐지고 동쪽은 암석 지대가 펼쳐진다.
그 암석 지대를 더 나아가면 또 다른 요람이 등장하니, 그야말로 모험가들에겐 최고의 요충지가 탄생하는 셈이다.
그러니 상업적으로 발달할 가능성도 무긍무진했으니, 이에 대한 추진 또한 지금부터 준비해야 했다.
그 말에 로웰은 다시금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으나, 그는 쉬는 것보다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인물이다.
'이대로 간다면....'
이번 대수림 건을 제대로 마무리만 한다면, 적어도 제국과 연합국 내에서 클레이튼 상단은 절대적 지위를 얻을 수 있을 터.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남들에게 귀족가의 망나니라 불려오던 셰인이 물고 왔다는 게 여전히 얼떨떨하긴 했으나.
어쨌든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네가 말한 대로 일을 추진하도록 하마."
"예."
"그래, 그리고...."
"...?"
"음."
이걸 뭐라 말해야 할까.
여태껏 가족들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해 왔던 로웰이었으나, 아무래도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셰인과 클라인이 물고 온 기회를 제외하더라도, 두 자식이 그 위험한 요람에서 생존해 왔다는 것이 로웰에게 적지 않은 안도감을 가지고 온 것이다.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리 큰 감흥이 생기지 않았는데, 이렇듯 멀쩡히 살아 돌아온 모습을 보니 마음이 움직였다.
'...우습구나.'
하나 이제 와서 여태껏 버려두다시피 키워 온 셰인을 걱정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 또한 위선처럼 보이지 않겠나.
로웰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신이 가진 감정은 이제 와서 내비칠 만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도저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비라는 무게감은 이 한마디를 끝내 내뱉게 만들고야 말았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예. 감사합니다, 가주님."
"그래. 들어가서 쉬거라."
셰인도, 로웰도.
여전히 서로 간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영원히 이 간격이 좁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흐른다면.
보다 얼굴을 보고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이 멀게만 느껴지는 거리가 좁혀질 날이 올지 누가 알겠는가.
적어도 둘 중 한 명이 포기하지 않는 이상, 그 가능성은 언제든 열려 있으리라.
* * *
최근 마법사들의 도시, 메지셔널 위습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유는 다름 아닌 메자이아 대수림의 개방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와 별개로 마법사들의 흥미를 끌 만한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엘프들의 마법!
자신들이 전공하는 마법이 아닌 이상에야 별 관심이 없는 마법사들이었으나.
이종족의 마법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해당 이종족의 마법이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따라 그게 자신들의 마법에 어떤 영향이 오게 될지 누가 안단 말인가.
때문에 평소 연구 중 폭발 사고가 아닌 이상에야 소란스러운 일이 없는 도시에는 틈만 나면 마법사들끼리 모여 엘프들의 마법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던 와중에 도시 측에서 오랜만에 학회를 열기로 결심하고 모든 마탑의 탑주들에게 초대장을 보내 왔다.
"드디어!"
"이얏호!!"
본래라면 이런 학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메지셔널 위습에 모여들었다.
평소 같은 초대장이라면 별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테지만, 초대장에 초청 인물 중 그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평소 발걸음이 무겁던 마법사들이 한달음에 학회 건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오, 매브릭. 오랜만에 보는군."
"멀린. 자네도 오랜만이구먼. 거의 10년만이던가?"
"언제 그리 시간이 흘렀는지 원."
"그러게나 말이야."
기대감에 부푼 마음 때문일까.
오랜만에 만난 마법사들은 서로의 신변잡기를 해 가며 학회 건물 내부를 뜨겁게 달궜다.
하지만 그 대화도 얼마 지나지 않다 다른 주제로 넘어갔는데.
"그나저나 발견된 엘프의 마법이 어떨 것 같나?"
"글세? 일단 두고 봐야겠지. 당장 국회에서 내놓은 답은 없으니."
"그나마 오늘 초청 건으로 어느 정도 들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크게 기대하긴 힘들겠지."
"크흠."
두 마법사는 그리 말하면서도 귀를 붉힐 정도로 잔뜩 흥분하고 있었다.
실상 두 마법사들의 대화처럼, 그리 크게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일단 엘프들의 마법이니 만큼 그에 대해 파악하려면 엘프에게 직접 배우든가, 긴 시간 끝에 해부하다시피 연구하는 수밖에 없었으니.
전자의 경우에는 엘프가 자신들의 마법을 그 정도로 상세하게 알려 줄 리가 없기에 논외였고, 후자의 경우에도 상당 수준의 마법사가 가야 그나마 파악할 수 있지 않겠나.
그나마 마법사라면 연합국 아카데미 출신의 생도 두 명이 들어갔다는데....
그래 봐야 생도 출신 아닌가.
심지어 둘 다 마탑에 가입되어 있지도 않은 터라 큰 기대는 어려운 게 당연했다.
"그러니 우리가 더더욱 나서서 의회에 발의를 해 봐야지."
"암. 그렇고말고. 듣자 하니 엘프들이 쓰는 텔레포트 마법이 그렇게 은밀하다던데."
"아마도 엘프 특유의 마력 적응력 때문에 그런 것 같아. 그래도 전체적인 구조만 파악할 수 있다면 탐사용으로도 쓰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얼마나 걸릴지는 미지수로군."
두 마법사처럼 기대는 크지만 그래도 너무 앞서 나가지는 말자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딱 한 명. 그러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다들 뭘 모르는구먼. 그 녀석은 불세출의 천재야!'
제법 중후한 나이에 콧수염을 기른 그는 카비르 마탑의 장로, 케이든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이번 학회에 초청된 인물과 만나 보고 또 함께 연구까지 진행해 본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자신의 후원자에게 온 의뢰였기에 적잖이 귀찮아했지만 그 태도가 얼마나 이어졌던가!
당시 그 인물과 만난 이후로 자신의 제자들이 죄다 오징어처럼 보이기 시작한 케이든은 언제고 그자와 다시 만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대어를 낚고 왔으니, 이번에는 자신을 얼마나 놀래킬지 벌써부터 기대가 돼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그러다 이윽고 실내가 어두워지면서 진행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음성 확장 마도구를 통해 진행자의 목소리가 회장을 가득 채웠다.
[아아. 안녕하십니까. 오늘 진행을 맡게 된 마일즈라고 합니다. 거두절미하고 오늘 이렇게 모이게 된 이유는 다들 아시다시피 메자이아 대수림의 엘프 마법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번 초청 건에 있어 초대된 분은 마탑 소속이 아니니, 이번 주제와 관련된 질문만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짧은 진행자의 말이 이어지고, 이내 회장의 중앙 계단에서부터 한 사람이 등장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로즈베리색 눈동자.
짧은 지팡이를 들고 등장한 사람은, 이곳 학회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에 지나치게 어린 소년이었다.
이윽고 단상에 올라선 소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학회 측에서 준비한 음성 확장 마도구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는, 생긴 것처럼 앳되어 가늘었으나 이 자리의 누구도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알 수 없도록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목소리가 다시금 회장에 울려 퍼졌다.
[이번 엘프 마법과 관련되어 학회에 초청된 클레이튼 R 셰인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훌륭한 선배 마법사님들 앞에 서게 되어 영광입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52화
52화 수확의 시기 (7)
명성을 제대로 다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명성을 키우는 방법도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중 셰인이 선택한 방법은 고지식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선망받는 이들의 인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법사들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자신들이 가진 지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고, 또 배움에 대한 절박함을 가졌으니 이름을 알리기에는 이만한 이들이 없었다.
하지만 셰인이 아직 생도 신분인 것에 더해, 마탑 출신이 아니라는 점은 큰 약점에 속했다.
그러니 지금 가지고 있는 이들의 호기심이 꺼지기 전에 먼저 채워 줘야만 했다.
[거두절미하고 첫 시작은 질문부터 받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인 발표자가 할 말은 아니었다.
발표자는 자신이 가지고 온 정보를 푸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마법사들은 자신들이 관여하고 있는 학문이 아닌 이상에야 빠르게 관심이 식는 이들이었고, 셰인은 가능한 이곳의 모든 마법사들의 관심을 끌어올릴 방법을 이미 떠올렸다.
아무리 관심 없는 학문이라도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주제를 보여 주면 될 일이니.
그에 이곳에 모인 마법사들이 거의 동시에 손을 들어 올렸고, 진행자 중 한 명이 고른 마법사의 질문이 시작됐다.
"마르디 마탑의 세르게이라 하오. 이번에 메자이아 대수림의 개방과 동시에 탐사의 결과로 어떠한 마법적 지식을 얻을 수 있었소?"
[엘프들의 마법에 관한 본질과 기본적인 응용 정도는 파악해 왔습니다.]
"음...!"
기다렸다는 듯 답한 셰인의 말에 마법사들의 얼굴에도 과연 흥미가 생겼다.
고작 생도 출신이긴 하지만, 탐사 전 논문으로 한 차례 다양한 마탑을 뜨겁게 달군 전적이 있으며, 그 요람에서도 살아남은 마법사가 하는 말이었으니.
충분히 기대해 볼만한 사안이었다.
"호르콰이 마탑의 멜피스입니다. 그렇다면 그 본질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 가능하겠습니까?"
[예. 일단 준비해 둔 것부터 보여 드리겠습니다.]
셰인은 단상에 마련된 칠판에 어떠한 공식을 적었다.
학회에 참석한 마법사들은 학회 측에서 나눠 준 두 손바닥만한 원판을 바라봤고, 거기에는 셰인이 칠판에 적은 공식이 그대로 따라 적혔다.
[이게 엘프들이 마법을 다루는 데 필요한 공식입니다. 기본적으로 엘프들이 가진 마법의 본질은 친화성입니다. 그들은 수백, 수천 년 동안 자신들의 마력 적응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대수림과 동화되었고, 그를 바탕으로 아주 적은 마력만으로도 메자이아 대수림이라는 그 방대한 영역에 영향력을 펼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예.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엘프들의 시야에 벗어날 방법이란 없습니다. 그곳의 모든 식물들이 그들의 눈이고 또 귀가 될 테니 말입니다.]
그 말에 회장이 대번에 시끄러워졌다.
이게 말이야 쉽지,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복잡한 과정과 긴 시간이 필요했을지 짐작됐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법사들은 다시 한번 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직 인류가 마력을 다루기 시작한 지 고작 몇백 년밖에 되지 않은 터라, 고대 종족들과는 아무래도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이것은 셰인이 인간들에게 하는 경고와 마찬가지였다.
혹여라도 엘프들에게 전쟁을 시도하거나, 납치 따위의 짓을 시도했다가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한 번쯤 생각해 보라는 그런 의미였다.
괜히 엘프들이 기원전에 고작 수천의 숫자로 제국보다도 넓은 메자이아 대수림을 지배할 수 있던 것이 아니다.
거기에 셰인이 내보인 마법 공식은, 철저하게 마력 적응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에 인간들로서는 똑같이 따라 한다 한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 말인즉슨, 인간들의 수준으로는 엘프들의 마법에 간섭할 여지가 없다는 의미였으니.
"하르멘 마탑의 가르파 세르지오일세. 그렇다면 엘프들의 마법을 통해 우리 인간들이 배울 수 있는 게 무엇이라 볼 수 있겠나?"
그때, 자신을 세르지오라 소개한 마법사의 질문은 다소 시험적인 질문이라 할 수 있었다.
당장 이곳에 있는 마법사들도 엘프들의 마법을 활용할 방법이 곧장 떠오르지 않은 마당에 고작 생도 신분인 셰인이 그걸 떠올릴 가능성은 적었으니.
[당장에 큰 변화를 가지고 올 수 있다고 확언하기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여태까지 그래 왔듯, 모방을 시작으로 새로운 길을 창조해 내지 않았습니까. 마치,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그러면서, 셰인이 허공에 손을 대고 짧게 주문을 외우자, 그의 손 위로 마력이 가닥가닥 나오며 하나의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허어...!"
그에 질문을 해 온 마법사를 포함해 이곳에 모인 이들 모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려지는 푸르른 풍경은 그 무엇보다 생동감이 넘쳐 보였다.
드넓은 초원과 그 위를 뛰어노는 산양들.
초원의 뒤로 태산이 펼쳐지며, 하늘 높이 떠오른 구름 사이로 내비치는 태양은 강렬한 생명력을 품고 있었다.
학회에 모인 마법사들은 이게 단순히 마력으로 자아낸 풍경화가 아님을 깨달았다.
햇살 아래로 느껴지는 따스함은 심신을 안정시켜 줬으며, 뿐만 아니라 나이 든 신체가 활력을 되찾고 있었으니.
마법사들은 대경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하나같이 셰인을 바라봤다.
[이는 메자이아 대수림의 주인인 엘프의 여왕에게 받은 정기입니다. 그를 토대로 만든 것이죠. 재료로 엘프들의 정기가 필요하다는 가정이 필요합니다만, 이를 이용해 응용할 방법은 무궁무진합니다.]
엘프 여왕의 정기를 사용했다는 것은 둘째 치고, 한 생명체의 정기로 이러한 마법을 쓰는 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현 마법사들의 개념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방식이었다.
물론 현 인류가 가진 마법적 지식만을 토대로 본다면 그들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시점일 뿐이었다.
[엘프들은 이렇듯 자신들의 적응력을 통해 숲의 정기를 다룰 수 있습니다. 아니, 이 말에는 어폐가 있군요. 엘프들의 정기가 곧 숲의 정기이고,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 질문이오. 그렇다면 역시 우리 인간들이 이를 활용하기란 요원한 일이지 않소?"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정기를 활용한 마법이라 했을 때 여러분들이 떠올린 한 학파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에 몇몇 마법사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럴 수밖에.
자연의 정기와 다르게 생명체의 정기, 즉 생명력을 사용하는 학파가 분명 존재했지 않았던가.
수십 년 전에 연합국에서 직접 토벌하며, 그 전쟁의 참혹함을 겪어 봤던 마법사들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랬지. 놈들이 그랬어...."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후!"
[예. 바로 흑마법이죠. 비록 그 방식과 사상이 잘못된 학파이긴 합니다만, 엘프들이 정기를 다룰 수 있듯, 인간이 정기를 다룰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으음...!"
몇몇 마법사들은 침음을 내뱉었으나, 그렇다고 아예 반대할 수만은 없었다.
여전히 많은 마법사들에게 흑마법이란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단어였으나, 그럼에도 이를 반대할 수 없는 이유는 명확했다.
그야, 그를 대비해 셰인이 지금 보이고 있는 마법이 있었으니.
눈앞에 떡하니 그 결과가 있는데 어떻게 그걸 부정할 수 있겠는가.
마법사들은 고지식하지만, 결코 눈앞에 펼쳐진 결과를 피하는 인간들이 아니었다.
한편 셰인의 논문을 근거로 함께 연구한 전적이 있던 카비르 마탑의 장로, 케이튼은 셰인이 펼친 마법을 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질문하십시오.]
"음. 자네의 이론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느껴지네. 그렇다면 앞서 모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걸 설명해 드리려면 앞서 말씀드린 정기의 명확한 정의가 필요하겠군요. 방금 제가 흑마법과 비교를 했습니다만, 실상 흑마법에서의 정기와 지금 제가 보여 드린 정기는 성향부터가 다릅니다.]
"음. 확실히, 흑마법사가 다루는 마법은 다소 패도적이고 거칠기가 이를 데 없지."
[그 이유는 흑마법에서 다루는 정기는 생자의 죽음으로부터 뽑아내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에게서 나오는 정기는 본연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성질을 띄우는데, 이를 마력으로 억압하고 죽은 자의 기운으로 다루기 때문에 생기가 오염되기에 일어난 일이지요. 즉, 세상의 의지를 배반한 행위라 볼 수 있습니다.]
"맞네. 우리 마법사들은 세상의 의지를 배반하는 게 아닌, 새로운 질서를 쫓는 이들이니."
[예. 반면, 방금 제가 다룬 정기는 생명체의 생명력과는 다르게 이미 자연 그 자체에 존재합니다. 때문에 흑마법사처럼 죽은 자의 기운이라는 매개체가 없기에, 엘프들처럼 스스로가 자연과 동화되지 않는다면 다루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자 케이튼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는데, 그렇다면 아무리 엘프 여왕이 나눠 준 정기가 있다 하더라도 방금 셰인이 보여 준 마법은 불가능하다는 것 아닌가.
그렇게 떠올리고 보니 더더욱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해서, 저는 엘프들의 마력 적응력을 모방해 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만, 그 공식을 적자면 이렇습니다.]
다시 한번 뒤에 비치된 칠판으로 다가가 새로운 공식을 적어 넣었다.
아까하고는 다르게 마력 적응력을 위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지라 이번에는 대부분의 마법사들도 바로바로 공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처럼, 엘프들이 만든 마법과 다르게 적응력 위주가 아닌 마력 패턴을 위주로 사용했습니다.]
엘프의 적응력은 인간들의 적응력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인간들 중에서도 뛰어난 적응력을 지닌 이들조차 엘프들 사이에서는 저능아라고 불릴 정도로 부족했으니.
그렇기에 셰인은 시선을 바꿔, 마력 적응력이 아닌 패턴 분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가. 이런 방법이 있었군."
"확실히, 서클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마력 패턴을 외부에서부터 만든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근데 이걸 어디에 써먹을 수 있지?"
"예끼, 이 사람아! 아까 그 마법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나나? 이 회장 전체를 밝히고도 그만한 치유력을 보인 마법이지 않나. 그걸 한 점에 집중시킨다면 어지간한 트롤의 피로 만든 회복 포션보다 효과가 좋아!"
"이 늙은이 성격 좀 보소. 끄응, 아무튼 그렇구먼."
확실히 아예 길이 없을 때와는 다르게 셰인이 한 가지 길을 보여 주자 거기서부터 곁가지가 늘어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이는 비록 아무런 준비도 없이 쓸 수 있는 마법은 아닙니다만, 자연의 정기만 있다면 얼마든지 사용이 가능한 방법이지요. 그렇다면 자연의 정기를 어떻게 자력으로 얻느냐. 실상 이 방법까지는 제가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다만 엘프들의 도움이 있다면 이 또한 시간이 걸리더라도 해결할 방법이 있으리라 판단됩니다.]
거기까지 듣게 된 마법사들은 셰인이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비웠다.
그 이상 질문이 있을까도 싶었지만, 앞서 듣게 된 내용과 여태 셰인이 보여 준 공식을 해부해 보기에도 바쁜 시간이었다.
이로써 마법사들의 흥미는 충분히 이끈 셈이었다.
아직 인간들이 자력으로 자연의 정기를 뽑아 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고민을 사서 하느냐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집중해서 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셰인의 마법에서 보였던 회복력이었다.
단순히 기력을 보충해 주는 수준이었으나 어느 마법사가 했던 말처럼, 이 넓은 회장을 가득 채우는 수준임에도 그 정도라는 것은 가히 획기적이었으니.
셰인이 명성을 바라고 있는 만큼, 마법사들 또한 명성이 고픈 이들이었다.
왜?
명성이 있어야 곧 돈이 되니까.
트롤의 피로 만들어진 포션의 존재가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얼마만큼의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던가.
비록 완벽한 치료법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많은 모험가들이 부상의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 낼 수 있었다.
덕분에 당시 포션을 만들어 낸 마법사는 어마어마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명성과 금화를 손에 쥐지 않았던가?
만약 여기서 셰인이 풀어낸 정보를 토대로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다면, 자신들에게도 그러한 기회가 오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결국 명성과 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말이고, 이는 학파의 종류를 무관하게 관심이 쏠릴 만한 아이디어였다.
적어도 정기를 다루는 데 있어서 익숙한 학파는 없었으니 말이다.
즉,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돈방석에 앉는다는 말이나 진배없었다.
* * *
당연하지만 학회가 단 한 사람 때문에 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열린 학회이니만큼, 자신들의 연구에 전진이 있던 마법사들도 연구를 발표하기 위해 차례대로 단상 위에 올라갔다 사라졌다.
그러나 마법사들의 귀에는 거의 박히지 않았는데, 심지어 발표자조차도 빨리 발표를 마치고 다른 일에 몰두하고 싶어 하는 인상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앞서 셰인이 발표한 자료 때문이었다.
학회가 끝나고 마련되는 연회가 시작되기 전.
셰인은 밖에 준비된 마차에 앉아 누군가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카비르 마탑의 장로, 케이튼이었다.
그는 굉장히 흥분된 표정으로 셰인에게 한참 동안 메자이아 대수림에 있던 일에 대해 물었고, 셰인은 성심성의껏 그 질문에 대답했다.
물론 숨길 것은 대충 숨기고 말을 이었는데, 이를 모두 다 듣게 된 케이튼의 얼굴에는 어느덧 진중함이 묻어났다.
"고든... 그자가 살아 있었단 말인가."
그 이유는 몇십 년 전에 일어난 토벌에 의해 사라진 흑마법사들의 우두머리, 고든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어찌 됐든 라비아타와 이야기를 끝낸 것처럼 셰인은 고든의 죽음을 라비아타의 공으로 돌렸다.
아직 그만한 흑마법사를 이겼다는 명성까지는 셰인에게 필요가 없었으니.
하여튼 라비아타가 고든의 죽음을 확언했기에, 케이튼의 얼굴에도 그나마 안심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이번 발표는 여러모로 말이 많을 것 같구먼. 자네도 참... 속이 엉큼한 데가 있어."
그러면서 케이튼이 웃음을 지었다.
"언뜻 보면 자네가 만든 공식을 너무 쉽게 공개한 것이 아닌가 싶겠지만... 다른 꿍꿍이가 있겠지?"
"예. 맞습니다."
그런 케이튼의 물음에도 셰인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그야 당연한 말이지 않나.
기껏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얻어 온 엘프들의 마법을 외부로 알리는데, 겨우 명성 하나만 챙기기엔 손해 보는 장사다.
그러니 챙길 수 있는 것은 더 챙겨야 하는 것이, 상인 가문의 사람으로서 당연한 덕목이나 마찬가지였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53화
53화 인류의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