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화
1화 광명
셰인.
그는 자신의 심장에 성스러운 기운이 담긴 검이 꽂힌 순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아아. 이제야...."
7대 죄악 중, 질투에 속하는 타락의 힘.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속박해 오던 그 힘이 비로소 사라져 갔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심장에 박힌 성검에 의해.
이내 그간 아무리 많은 생명을 죽여도 찾아오지 않던 광명이 그의 눈에 새겨졌다.
"형... 님?"
반쯤 부서진 가면 너머로, 자신의 동생이자 인류의 희망, 용사 클라인의 얼굴이 보였다.
용사가 악당을 무찌른 순간이건만.
녀석의 표정은 어찌 저리 당혹에 차 있을까.
셰인은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깨달았다.
"클라인... 너는, 여전히 빛나는구나."
"형님...? 형님이 어째서...."
스윽-
셰인의 덜덜 떨리는 손이 클라인의 볼을 쓸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힘에 부친 듯 점점 아래로 처졌다.
타락의 힘이 그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만큼, 생명력 또한 스러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0년... 만이구나.'
한때의 욕심이 불러온 참사.
그 이후로, 셰인은 단 한시도 평안하지 못했다.
질투라는 이름의 타락에 빠져,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조직'과 함께 수많은 왕국을 불구덩이에 처넣었으니까.
지금에 이르러, 한 줌 남은 인류는 한 사람을 주축으로 모여 저항군을 결성했다.
그 사람은 셰인이 질투한 대상이자 증오해 마지않던 동생, 클라인이었다.
그러나 셰인은 맑은 정신으로 10년만에 보게 된 동생에게 조금의 증오도 느끼지 않았다.
지난 10년간 자유라곤 조금도 쥐어지지 않던 타락의 안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동생의 검에 담긴 신성한 힘 때문일까.
본래 증오만 가득했어야 할 그 자리에는 죄책감만이 남았다.
셰인은 뭐라 입을 열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그러나 그는 죄인이다.
씻을 수 없는,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
그의 명령으로 무너진 수많은 왕국과, 그 안에서 죽어 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삶의 터전은 물론이요 그들의 가족, 친우, 연인마저 빼앗아 버린 최악의 악당.
그게 바로 자신, 클레이튼 R 셰인이었다.
최후의 최후.
셰인은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긴 자신의 동생, 클라인을 올려다봤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제 형의 정체를 이제야 알아본 동생.
녀석이 이렇게 슬퍼할 줄 알았다면, 가면을 보다 더 튼튼하게 만들어 둘 것을.
아니. 애초에 스스로의 의지대로 움직이지도 못했을 몸,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셰인은 형이 된 사람으로서 마지막으로 그런 동생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비록 세상 모든 사람들의 분노와 저주를 받아 마땅한 악당이지만.
그럼에도.
"미안해하지 말거라. 죄인은 네가 아닌 나였으니."
인류의 희망인 용사이자 동생에게, 형으로서 그 어깨에 올려진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 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셰인은 두 눈을 감았다.
마치 동생에게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말라는 듯.
평온한 얼굴로.
* * *
눈을 뜨자 보인 것은 커튼 너머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이었다.
그런 햇살의 온기를 담은 이불은 서늘함과 포근함을 함께 선사했고, 머리를 감싸고 있는 베개 또한 따스한 아침을 맞이하기에 최고로 푹신했다.
"또 그 꿈이구나."
잠에서 깬 셰인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몸이 그 포근함에서 벗어나기 싫다 앙탈을 부렸으나, 셰인은 상관치 않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울창한 나무로 가득한 저택의 뒷동산이 보였다.
아침의 시작을 알리는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모두, 그가 평소 보아 왔던 풍경과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었다.
죽음으로 가득한 고성의 정상에서 지내 왔던 나날들.
어디를 보더라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죽음의 땅.
그러나 지금은 어디를 보더라도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한 세상이지 않나.
셰인은 잠시 시선을 돌려 방 한쪽 구석에 배치된 거울 앞에 섰다.
검은 머리카락과 로즈베리 빛깔의 눈동자.
여기까지는 예전과 다를 바 없었으나.
거친 피부와 깡마르기만 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깨끗한 어린 피부와 훤칠하기만 한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젠 인정해야겠군."
클레이튼 R 셰인.
조직 '무명'의 7대 죄악을 담당하던 간부 중 '질투'를 대표하던 그는, 15년 전 과거로 회귀했다.
* * *
마리아는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찻잔에 차를 우리고 있었다.
걱정의 이유는 다름 아닌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이자 클레이튼 가문의 장남인 셰인 때문이었다.
"하아...."
매일 아침마다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에게 차를 가져다주는 것.
모든 귀족가의 고용인들이 하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마리아는 하루 일정 중 그게 가장 힘든 일이었다.
그런 마리아를 보며 그녀의 동료 하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리아. 요즘 왜 그렇게 죽을 표정이야?"
"어? 아... 별거 아냐."
"아항. 셰인 도련님 때문에?"
동료 하녀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하자, 마리아는 가뜩이나 안 좋은 기분이 더더욱 우울해지는 것만 같았다.
알면서 물어보긴 왜 물어봐?
클레이튼 R 셰인.
연합국에서 그 유명한 대상단이자 백작가 가문의 장남인 셰인 도련님.
고작 하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도련님은 그야말로 신과 같이 부러울 게 없는 사람처럼 보였으나, 그의 성격은 저택 내에서도 유명했다.
마리아는 올해로 5년 차 하녀로서 제법 짬을 먹은 상태였지만, 언제나 기분이 저기압인 셰인과 마주하는 일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차라리 욕하고 때리기라도 하면 도망이라도 갈 텐데.'
마치 세상 모든 것을 저주하는 듯한 표정에, 한낱 미물을 보듯 자신을 바라보는 무심한 눈동자.
거기에 혹여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그 무심한 눈동자에 진득한 혐오감이 섞이는 걸 보노라면 소름이 끼쳤다..
마리아로서는 그 눈동자와 마주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었다.
특히나 지난 이틀.
이젠 하다하다 셰인에게서 살기마저 느낀 마리아는 정말이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리아의 동료 하녀 또한 그런 마리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료 하녀의 표정에서 동정이라는 감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고생 때문에 마리아는 집사장에게 무한한 신임을 받고 있었으니까.
그로 인한 질투로 저렇게 비꼬듯 말해 오는 것이었다.
어디 그뿐이던가?
동료 하녀가 모시는 사람은 이 가문의 둘째 도련님인 클라인이었다.
동 세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천재라 알려진 천재 중의 천재.
지금에 들어서 10년 이상 검을 잡고 전장에서 살아온 가문의 기사들마저도 클라인 도련님을 상대할 수 있는 이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출중한 능력을 보이고 있었다.
모시는 사람의 위세에 따라 가문 내에서의 지위가 달라지는 게 고용인의 법도가 아니던가.
그런데, 동료 하녀로선 마리아가 자신의 주인보다 못한 주인을 모시면서도 집사장의 신임을 받고 있으니 아니꼽게 보인 것이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화를 꾹 참은 마리아는 동료 하녀의 비웃음을 무시하고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 셰인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똑똑-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셰인이 가볍게 말했다.
"들어와라."
"예, 도련님.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어제도 봤던 하녀, 마리아였다.
항상 들어올 때마다 긴장한 듯 얼굴이 굳어 있는 소녀.
셰인은 그런 소녀가 조금은 낯설면서도 익숙하다는 기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도 그럴 게, 셰인이 회귀한 지 오늘로서 3일 차다.
처음 이틀 동안에는 자신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주변을 의심했다.
혹여 조직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른다는 의심이었다.
그 때문에, 그제와 어제도 저 하녀에게 매우 냉담한 표정으로 나가라 명했다.
그러나 오늘에서야 회귀했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체감하게 된 이상, 행동거지를 다르게 할 필요가 있었다.
"차향이 좋군."
"예?"
"차향이 좋다고 말했다."
"...?"
물론, 그런 셰인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마리아는 도대체 왜 이 사람이 안 하던 칭찬을 하고 그러나 의심이 부풀어 올랐다.
"지난 이틀 동안에는 미안했다."
"...!"
"좋지 못한 꿈을 꿨거든."
"아, 아닙니다. 도련님."
목소리에 딱히 진정성이 느껴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어쩐지 의무처럼 느껴지는 사과.
그러나 본래 나쁜 짓만 일삼던 사람이 어쩌다 한 번 착한 일을 하면 돋보이듯.
마리아는 정말 천지가 격변한 듯한 느낌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찻잔은 1시간 뒤에 다시 찾아가도록."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방 밖으로 나온 마리아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방금 자신을 바라보던 셰인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웬일이래...."
그 눈동자는 여전히 무기질적으로 느껴졌지만.
어째서인지 조금은 감성적으로 느껴졌다.
* * *
세인은 오래간만에 감상에 잠겼다.
타락은 결코 이유 없이 찾아오지 않는다.
물론 조직에서 자신에게 심은 타락의 힘은 분명 강력했다.
하지만 마력이 인간의 마력기관이라는 매개체가 필요하듯, 타락 또한 성장을 위한 매개체가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회귀 전의 셰인은, 그 누구보다 타락에 걸맞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질투.
다름 아닌 제 동생, 클라인을 향한 질투였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자신의 동생보다 못하다는 현실.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 보내오는 비교의 시선.
물론, 셰인이 처음부터 동생을 질투했던 것은 아니다.
아주 어릴 적의 셰인 또한, 명석한 두뇌로 사람들에게 천재라는 소리를 들어 왔으니까.
그러나 그의 동생 클라인은 셰인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지혜로운 사람이었고.
그에 더해 검술에 대한 타에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인가.
마력의 사랑을 받는 천부적인 재능까지 지니고 있었으니, 가히 클라인은 기원 후 다신 찾아볼 수 없는 천재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그렇기에 훗날 조직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인류의 희망으로서 용사가 될 수 있던 것이다.
그러한 재능을 가졌던 동생이기에.
셰인은 한때 질투에 미쳐 있었다.
그리고 타락이 성장하기에 그러한 셰인의 질투는 너무도 달콤한 영양제와도 같았을 터.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렀음일까.
아니면 전생에서 죽기 전, 동생이 자신의 심장에 찔러 넣은 성스러운 검의 기운 때문일까.
지금의 셰인으로선, 이 질투라는 감정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셰인은 옅게나마 자신의 마음에 남아 있는 질투를 마저 지우고 싶었다.
이미 질투는 질리도록 해 봤다.
그것도 질투의 화신이 되어.
수많은 인류를 학살하는 것으로.
그렇기에 셰인은 자신 안의 감정을 세밀하게 살펴봤다.
그리고, 회귀 전의 마지막.
타락의 힘에서 자신을 해방시켰던 자신의 동생을 떠올렸다.
그 얼굴에는 진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
그 당시, 유일하게 남은 혈족을 스스로의 검으로 찔러 죽였다는 죄책감.
그리고, 어깨 위에 잔뜩 짊어져 있는 사명감까지.
'나는 동생을 질투하는가.'
그에 대한 해답은 아니오, 였다.
그러자 마음 깊숙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마지막 질투의 감정마저 모래알처럼 사그라졌고.
생애 처음으로 셰인의 머리는 더없이 맑아져, 마치 광명을 맞이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쯤,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클라인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셰인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에 지었던 미소를 입에 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화
2화 단초 (1)
클레이튼 L 클라인.
17살이라는 나이에 훤칠한 키.
반짝이는 금발에 푸른 벽안의 눈동자에는 옅은 망설임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유인즉, 자신의 형님 셰인 때문이었다.
아카데미에서의 방학 이후, 형님은 방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1학기가 끝나기 전, 동급생에게 처절할 정도의 패배를 했다는 소식 때문일 것이다.
그 뒤로 한 달이 다 되어 갈 동안 재차 셰인을 찾아갔으나, 돌아오는 것은 적의에 찬 냉담뿐.
둘의 아버지 클레이튼 J 로웰도 그런 형님을 내버려 두라는 말만 하고 신경을 끈 상태였다.
아버지는 둘이 어린 시절부터 자식에 대한 큰 관심이 없었다.
클라인은 그 이유를 잘 알았다.
여러 사건사고 속에서 로웰은 자식을 포함한 인간 자체에 감정을 쏟으려 하지 않았다.
그나마 클라인에게는 가주의 후처인 어머니가 있었지만, 자신의 형님인 셰인에겐 본처였던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기에.
형님은 크게 삐뚤어질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마저도 그런 형님을 경계하는 상태였으니.
형님은 이 저택에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위치였다.
그랬기 때문일까, 형님은 언제나 자신이 다가오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나까지 형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형님에게 남을 이가 없어.'
그렇기에 클라인은 포기하지 않고 형님과 가까워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후, 좋아."
오랜만에 다시 셰인의 방 앞에 선 클라인은 얕은 심호흡과 함께 입을 열었다.
"형님, 클라인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평소처럼 평범한 목소리로 묻자, 의외로 금방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와라."
그 목소리에 클라인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처럼 무뚝뚝한 목소리는 똑같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이 미묘하게 달랐던 것이다.
그런 의아함 반, 걱정 반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찻잔을 들고 창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셰인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
"아버지께서 부르셔서 찾아왔습니다."
"굳이 고용인을 쓰지 않고."
"예...."
왜 괜히 찾아왔냐며 핀잔을 주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침 잘 왔다. 안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니."
"예?"
하고 싶은 말?
평소에는 자신과 단 한 마디도 엮이고 싶지 않아 하는 형님이 무슨 일인가.
살짝 긴장감이 들 때.
셰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미안하다."
"...?"
"그동안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너를 매몰차게 대했구나."
"...!"
낯부끄러울 정도로 직관적인 말에, 클라인은 머리에 번개라도 맞은 듯 몸을 가눌 수 없었다.
"형님...?"
"그냥, 그 말을 하고 싶었다."
조금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인 셰인의 입가에서, 클라인은 처음으로 제 형의 아주 옅지만 확실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 * *
낯부끄러울 정도로 직설적인 사과.
그 행동에 대한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마음가짐을 확인하고자 하는 행동이었을 뿐.
"지금부터라도 바뀌면 되겠지."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 시점은 조직에서 자신에게 접근하기 5년 전의 세상.
최악까지 치달은 상황이 아니었다.
물론 이제 와서 동생에게 사과를 했다 한들, 셰인의 상황이 많이 나아지지도 않을 것이다.
여전히 이 방 밖에는 그런 셰인을 백안시하는 이들이 많을 테지.
회귀 전의 셰인은 바로 그러한 인간들에 의해 천천히,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비교 대상이 됐던 클라인과 그런 그를 보조해주며 셰인을 경계해온 계모, 레이첼.
그리고 무엇이든 필요성만 따지고 보는 셰인의 아버지....
'로웰.'
철저한 실력주의자.
그게 바로 로웰이었고, 그런 로웰의 근처에는 인성이 어찌 됐든 실력만 출중한 인물들만 남았으니.
그런 셰인과 클라인이 비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백작가의 장남임에도 차남에게 밀린다는 것은 셰인이 다니던 아카데미에서도 좋은 놀림거리가 됐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딜 가든 셰인은 남들에게 비교만 당하는 삶을 살아왔고,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조직은 그런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던 끝에 타락시키는 데 성공했고.
자신을 죽음이자 타락의 해방으로 이끌어 낸 동생의 얼굴을 봤을 때.
셰인은 처음으로 주변의 시선에서 벗어나 진실된 태도로 동생과 마주할 수 있었다.
수많은 인간들을 죽인 악의 간부가 자신의 형이었음에도, 형을 자신이 죽였다는 죄책감이 가득했던 얼굴.
세상에는 그런 인간도 있던 것이다.
그게 가족이라는 것이고.
그 소중한 감정이, 지금의 셰인을 만들 수 있던 것이다.
"죽음 끝에서 깨달은 감정이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감정."
비록 타락의 힘으로 인해 행한 행위였지만 셰인은 너무 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관여했다.
이제 와서 그게 없어진 일이라 한들, 셰인은 회귀 전 클라인의 어깨에 걸린 짐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무거울지도 모를 짐이 어깨에 놓인 듯한 느낌을 들었다.
"바꿔야지."
평생 다시없을 기회일지도 모를, 지금의 상황을.
* * *
"바뀐 것 같구나."
"...무슨 말씀입니까."
아카데미로 떠나는 당일 날.
로웰은 웬일인지 가족끼리 식사를 하자는 명목으로 셰인과 클라인을 식사 자리에 불러 냈다.
본래 가족들에게 큰 관심을 쏟지 않는 로웰로선 드문 일이었다.
"전에는 시체만도 못한 너의 눈빛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특히 동생을 보는 눈에서도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구나."
"...."
그 말에 셰인이 입을 다물자 좌불안석에 빠진 것은 클라인이었다.
언제부터 가족에게 신경을 썼다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아니, 애초에 아들의 눈빛이 그러했으면서 여태 말 한 번 하지 않았던 것인가.
혹여 형님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진 않을까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셰인은 별다른 감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꿈을 꿨습니다."
"꿈?"
"예."
"무슨 꿈이었느냐?"
"클라인이 내지른 검에 심장에 꿰뚫리는 그런 꿈이었습니다."
"푸흡!"
난데없는 꿈 이야기에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히 클라인이었다.
내가?
형님한테?
형님, 도대체 저를 어떻게 보시고....
"허."
어처구니가 없던 것은 가주인 로웰도 마찬가지였는지 그가 드물게 표정에 변화를 보였다.
"기묘한 꿈이로군."
"물론 꿈이지만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이라도 잘해 주고자 합니다."
"...형제간의 우애가 좋아서 나쁠 것은 없지. 알았다."
그 말을 끝으로 로웰은 다시금 식사를 이어 갔고, 그 뒤로 더 이상 이어지는 대화는 없었다.
'레이첼은 잠시 자리를 비웠나 보군.'
현 가모이자 셰인의 배다른 어머니, 레이첼이 만약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무슨 소리를 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셰인이 했던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고용인들의 입으로 전해질 내용이라 달라질 건 없을 테지만.
그렇게 식사가 끝나 갈 무렵, 로웰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 잘 다녀오거라."
"예, 아버지."
"알겠습니다."
무뚝뚝한 그 안부 인사에 셰인과 클라인이 답했고, 먼저 로웰이 식당을 나갔다.
전생에는 어땠더라.
'생각났군.'
전생에 셰인은 이날 로웰과 대판 싸웠었다.
이유는 다름 아닌 아카데미를 자퇴하겠다는 자신의 선언 때문이었다.
당시 이 무렵의 자신은 무척이나 지쳐 있었다.
고용인들에게 비교당하고, 아카데미에서 비교당하고.
여기저기 그를 비교하는 시선뿐.
때문에 그들에게서 벗어나 여행을 가고자 로웰에게 청했었고.
당연히 돌아오는 것은 거절이었다.
'당시에는 가주가 피도 눈물도 없다 생각했지.'
물론 사회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귀족에게 있어서 아카데미 졸업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정말 그것 때문만이었을까.'
결국 이때 아버지의 협박에 못 이겨 아카데미에 갔으나, 결국 끝내 적응하지 못한 셰인은 도망을 갔었다.
그렇게 자유를 찾아 여행을 떠났을 때.
자신에게 돌아왔던 것이 무엇이었지?
'귀족의 의무를 포기한 귀족가의 망나니.'
딱히 셰인이 망나니처럼 누군가를 죽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간의 사람들에게, 셰인은 귀족으로서 의무를 저버린 귀족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현재 셰인이 살아가고 있는 연합국에서 아카데미란 그런 의미를 품고 있던 것이다.
'가주는 그런 미래를 예측했을 터.'
그러니 자신의 자퇴를 협박까지 섞어 가며 말리려 했을지도 모른다.
셰인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여전히 로웰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생각에 전환점을 둔다면 서로의 간극이 좁혀지지 않을까.
그렇게 언제고 로웰과 진지한 대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이었다.
"형님."
"음, 왜 그러느냐."
식사를 마친 클라인이 말을 걸어왔다.
클라인은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형님께 검을 겨누지 않을 겁니다."
"...."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만약 전생의 네가 내 정체를 알았더라면 검을 내게 겨눴을까.
셰인은 전생의 마지막에 동생이 지었던 표정을 떠올렸다.
죄책감에 버무려진 그 얼굴에는 깊은 후회가 담겨 있었다.
* * *
그날 오후.
셰인은 자신의 직속 하녀인 마리아에게 필요한 물품들이 담긴 가방을 받고는 클라인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
바로 오늘, 셰인과 클라인은 한 달 간의 휴식기를 끝마치고 아카데미로 돌아간다.
물론, 셰인에게는 보다 오랜만의 아카데미였다.
'아카데미라....'
전생의 셰인이 망가진 이유는 다양했지만, 무엇보다 그 시작은 역시 아카데미였다.
학생들의 얕보는 시선, 비교의 시선도 시선이었지만.
처음으로 셰인이 엇나가기 시작한 무렵은 아카데미로 가던 길에서의 사건이었으니까.
'내가 가장 큰 열등감을 느꼈던 사건의 단초. 이번에는 그리 쉽게 당하지만은 않을 거다.'
그 당시를 떠올리며, 셰인은 클라인과 함께 기사단이 호위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3화
3화 단초 (2)
클레이튼 가문의 영지에서부터 아카데미까지 거리는 꽤 있는 편이었다.
때문에 평범하게 생각하면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해 아카데미에 가는 게 맞겠지만, 이 세계에서 텔레포트가 허용되지 않는 장소가 몇 군데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제국의 황궁이 그러했고, 제국을 포함한 다섯 국가가 연합하여 만든 연합국이 그러했다.
셰인과 클라인이 가는 아카데미는 그 연합국의 정중앙에 위치했기에, 텔레포트는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아카데미를 향해 가는 마차 안.
클레이튼 가문의 기사단에게 호위를 받으며 가는 동안 셰인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5년 뒤. 녀석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셰인을 타락으로 이끌었던 조직, '무명'이 세상에 드러낼 것이다.
셰인이 타락하든, 타락하지 않든.
그들의 계획에는 변화가 없을 터.
그러려면 먼저 그때 다가올 풍파를 대비해 힘을 키워야만 했다.
동시에 셰인은 자신의 동생 클라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라 불리던 용사.
끝없이 펼쳐진 역경을 뚫고, 제1군단장의 자리에 서 있던 자신마저 쓰러뜨린 클라인이니.
어쩌면 자신이 나서지 않더라도 녀석은 지난 삶처럼 스스로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적들을 쓰러뜨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클라인은 얼마나 많은 절망을 겪었던가.
조직은 클라인을 죽이거나 타락시키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했고, 클라인은 그 모든 것을 이겨 냈지만 동시에 너무 많은 아픔을 겪었다.
전설 속 영웅이 그렇듯, 녀석은 많은 것을 잃어 가며 영웅의 길을 걷는다.
셰인은 이번 생에서까지 녀석이 그런 일을 겪길 바라지 않았다.
'그러려면 일단 내가 강해져야겠지.'
지금도 조직을 막을 다양한 방법이 떠올랐으나, 당장 셰인의 능력으로는 모두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강해질 방법은 많다.'
굳이 타락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조직에 있었을 무렵 가지고 있던 정보들을 떠올리면 강해질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그중에서도 셰인이 떠올린 방법은.
'룬 문자.'
현 인류가 알지 못하는, 고대의 종족 중 그마저도 선택받은 존재들만이 썼다고 알려진 마법 문자.
룬 문자를 다루던 대표적인 존재로는 드래곤이 있었다.
마법의 종주라 부릴 만큼 마법의 창조자가 쓰는 룬 문자라면, 마력의 절대량은 상관이 없어질 터.
듣기로 룬 문자를 터득한다면 마력의 총량과 상관없이 모든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했지만....
적어도 셰인은 그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의 분석력으로도 룬 문자를 이해하기란 요원한 일이었으니.
'대신 응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셰인은 룬 문자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을 어느 한 인물을 잠시 떠올리고는 이내 눈을 감았다.
'그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지.'
서서히 저물어 가는 태양을 보며, 어느새 셰인과 클라인을 태운 마차는 산의 외곽에 있는 자그마한 마을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다.
* * *
마을을 지키는 자경단원 알렉스는 따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경계 초소 바깥을 바라봤다.
언제나 똑같은 풍경에, 변하지 않는 공기의 냄새.
항상 같은 시간에 찾아오는 교대 인원들.
그러나 오늘만큼은 평소와 달랐다.
언제나 조용하기만 한 마을에, 그 유명한 클레이튼 백작가의 사람들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마을에 별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아주 조용히, 여관에서 짐을 풀고 하룻밤을 머문 뒤 새벽 일찍 마을을 떠나니까.
마을의 촌장도 아닌 젊은 자경단원이 클레이튼 가문의 직계는커녕 그들을 모시는 기사조차도 얼굴을 멀리서나 보는 게 끝일 테니.
"여, 알렉스. 교대하러 왔다. 이 부러운 놈아."
"왔냐."
교대 타임의 동료 자경단원이 도착하니 알렉스가 씩 웃으며 맞이했다.
"아까 하보크 상단도 왔더만? 아주 진창 마시겠어."
"진창 마시긴 뭘 마셔. 그래 봐야 내일 또 경계 근무 있어서 쓰러질 때까지 마시지도 못하는데."
동료의 부러움이 섞인 말에 이렇듯 대답했지만, 알렉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가질 않았다.
동료도 아는 것이다.
술은 많이 못 마시겠지만, 술보다 더 귀한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그래도 그 사람들 말에 너무 귀 기울이지 마라. 밖에 나가면 개고생이잖냐."
"뭐 밖에 아는 게 있어야 나가든 말든 하지.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라."
그러면서 알렉스는 동료와 교대를 마치고, 곧장 마을의 유일한 술집으로 향했다.
본래 여관의 창고로 사용됐던 이 건물은 몇 년 전부터 클레이튼 가문의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면서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로는 마을이 제법 커져서 만들었다지만, 알렉스의 아버지는 그저 촌장이 클레이튼 사람들이 머무는 자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여관과 술집을 따로 구분지어 뒀을 뿐이라 말했다.
그리고 알렉스도 그 이유가 더 맞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렇게 낡은 술집입구에 들어서니, 벌써부터 떠들썩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자자, 마셔라, 마셔!"
"대장! 이걸로 그 일은 잊어버리자고!"
"오냐, 우리가 언제 내일을 생각하고 살았냐?! 마시자!"
거친 외모의 남자 열댓 명이 얼마 없는 술집의 좌석을 죄다 차지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도 때마침 술집에 들어온 알렉스를 발견하곤 씩 웃으며 맥주잔을 추켜올렸다.
"어이어이, 이거 시골 촌놈 알렉스 아냐?!"
"으하하, 얼굴이 아주 보기 좋게 탔구만!"
"이제야 좀 남자답게 생겼어, 크하하하핫!"
하보크 상단을 호위하는 용병단.
하보크 상단은 클레이튼 가문이 운영하는 클레이튼 상회에 소속된 상단이었다.
그들은 매년 이맘쯤에 클레이튼 가문이 이 마을에 찾아오는 것을 알고 똑같은 날에 비슷한 시간에 맞춰 찾아온다.
그리고 방금 알렉스를 반긴 이들은 그런 상단을 호위하는 용병단이었다.
"웨이튼 단주님. 잘 지내셨습니까?"
"으하하하하! 단주님이란다! 아이고, 닭살 보여?! 내 팔 좀 봐!"
"야, 이 새끼들아. 요즘 세상에 저렇게 예의 바른 청년이 어디 있다고 놀리냐, 이 못 배워먹은 새끼들아! 니들도 단장님이라 불러!"
"일 없수다, 대장님! 낄낄낄!"
마치 오래 지낸 형제들처럼 그들은 서로 웃으며 농담을 주워 담았고, 알렉스는 그런 그들 사이에 어색하게 앉았다.
"그래, 오늘도 왔구나. 잘 지냈냐?"
용병단의 대장, 웨이튼의 말에 알렉스가 굳은 미소를 보였다.
"이 마을에 뭐 다른 게 있겠습니까. 평소처럼 지냈습니다."
"흐흐, 그래. 원래 그러고 사는 거지."
"그런데 오늘도 그 일 때문에 찾아오신 겁니까?"
"뭐, 그렇겠지. 원래 이쪽 양반들 생각이 다 클레이튼 사람들 눈칫밥 먹는 데 최적화됐으니까."
"그래 봐야 뭐 달라지는 게 있기는 합니까?"
"그거야 모르지. 원래 인생이란 게 도박 같은 거 아니겠냐. 어느 쪽 도련님이 더 우세한가. 그 확률이 얼마나 한쪽에 치중되어 있는가. 그런 걸 따지는 거지. 그리고 거기에 올인 베팅을 때리는 거고."
웨이튼의 말처럼 하보크 상단이 원하는 것은 클레이튼 가문의 두 형제에 대한 정보였다.
정확히는 셰인과 클라인, 그 둘 중 누가 가주의 자리에 가까운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럼 누가 더 우세한 겁니까? 보통 장남이 이어받지 않습니까?"
"농사나 술집 주인, 여관 주인처럼 배우면 할 수 있는 것과 다르게, 저 귀족 나으리들이 하는 일에는 재능이라는 게 필요하지. 단순하잖아. 장남보다 차남의 재능이 더 뛰어나면 차남이 받는 거다. 그리고 저 귀족 나으리의 가문은 방금 내가 말한 케이스고. 그런 거다."
"...."
그러고 보니.
언제 한 번 촌장님이 마을 어르신들과 하던 이야기에서, 장남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올해 아카데미 휴식기가 시작하던 때, 장남이 아카데미에서 처참히 패배하고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던가?
"그래도 배부른 소리지. 저 대단한 가문의 장남이 가주 후보에서 물러난다 해도 설마 땡전 한 푼 없이 쫓겨날까?"
분명 나 같은 놈이 평생을 일해도 만지기 힘든 돈을 받고 쫓겨날 거라며 웨이튼이 피식 웃었다.
"푸... 아무튼, 나도 그런 신세나 돼 봤으면 좋겠군. 하다못해 그러면 저번처럼 뒈질 뻔한 일도 없을 거 아냐."
언제나 지루한 마을에서 이런 바깥세상 이야기는 아주 재미난 이야깃거리였다.
어릴 적 할아버지가 해 주시던 허무맹랑한 용사의 이야기보다, 이런 쪽이 알렉스는 훨씬 더 재미있었다.
언젠가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게 꿈인 알렉스에게 그 바깥세상에 대한 정보란 쉽게 들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새끼, 표정 보니 딱 우리 말론이 생각나는구먼."
"아,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웨이튼의 말에 알렉스는 용병단원들의 얼굴을 확인하며 그리 물었다.
말론.
알렉스처럼 다른 시골 마을 주민이던 그는 웨이튼에게 잘 보여 용병단원이 된 케이스였다.
알렉스는 지난번 용병단의 방문 때 그를 보며 굉장히 부러워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말론도 그런 알렉스의 시선을 즐기듯, 한껏 콧대가 높아진 모습이기도 했고.
그랬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왜겠냐."
"...?"
"쯧. 우리가 묻어 줬다. 용병단에 흔히 있는 일이지 뭐."
"에이, 저 촌놈 때문에 우리 대장님 기분 또 다운 되셨다!"
"대장, 어디 우리가 내일을 생각하고 살았답디까? 말론 그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우리도 잘 알고! 대장도 맨날 우리한테 말해 주는 사실 아닙니까!"
"맞아, 맞아!"
알렉스는 용병단원들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용병들에게 죽음이란 늘 언제나 곁에 두고 사는 역병 같은 존재였으니까.
"후, 그래. 뭐, 그렇게 됐다. 새꺄, 그러니까 너도 괜히 용병 같은 거 하겠다고 깝치지 말고 니네 마을이나 잘 지켜. 여기서는 네가 고블린만 때려잡아도 영웅 소리 들을 테니까. 알겠냐?"
"그러고 보니... 예전에 뵀던 다른 분들이 안 보이는데...."
"어랍쑈, 대장. 이 새끼 이거 우리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 모양인뎁쇼. 이러니까 씨발 아무리 용병들이 뒤져나가도 새로운 놈들이 충당되는 거라니까! 어휴, 병신새끼. 하여튼 목숨 아까운 줄을 몰라요."
"근데 우리도 그 병신새끼 아니냐?"
"맞는 말이다, 처맞는 말!"
용병들은 우울해지려는 분위기를 살려 보려는지, 더더욱 호들갑을 떨며 수다를 떨었고, 끝내 알렉스는 그들에게 있던 일을 들을 수 있게 됐다.
"별거 아냐. 그냥 던전 웨이브가 터졌는데 하필 재수없게 우리가 그 근처에 있던 것뿐이지. 그나마 근처 도시의 기사단이 훈련을 위해 주변에 있었다는 게 다행이었지. 안 그럼 우리도 다 뒈졌어."
"...고생하셨겠습니다."
"고생은 씨발, 좆빠지게 했지. 돈도 못 받고 말이야. 쯧, 그런 게 바로 개죽음이라고, 개죽음!"
그러면서 웨이튼이 술이 가득 담긴 잔을 쭉 들이켜 마셨다.
"아주 좆같았지. 숲 외곽에 난 길을 통해 걷고 있는데, 갑자기 저 멀리서 굉음이 들렸어. 너 그거 아냐? 몬스터 피어라고, 트롤쯤 되는 놈들은 대부분 몬스터 피어라는 걸 내뱉거든. 그걸 들으면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몸이 굳어 버리기 일쑤지."
크아아아아-!!
"그래, 마치 저렇게 세상이 떠나가라... 잠깐."
이야기를 하던 웨이튼이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술집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쿠오오오오오오오--!
다시 한번 멀리서 들려오는 괴성.
"이런 씨발."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현실에서 들려오자 웨이튼의 표정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 * *
쿠오오오오오오오--!
멀리서 들려오는 포효 소리.
누군가에게는 공포의, 또 누군가에게는 낯선 존재감의 소리였겠으나.
또 누군가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하면서도 혐오스러운 소리였다.
"시작됐군."
그리 중얼거리며 일어난 셰인은 포효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정 기간 방치된 던전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현상, 던전 웨이브.
곧 있으면 녀석들은 마을을 향해 진군할 것이다.
셰인은 잠시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때, 자신은 억지로 기사단의 지휘권을 뺏어 전장에 나섰다.
결과만 말하자면, 셰인은 결국 마을을 지키지 못했고, 마을 주민들의 원성을 샀으며, 그의 무능함은 이곳 용병단에 의해 소문이 나면서 셰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만심만 가득한 무능한 귀족으로 낙인이 찍혔었다.
당시에는 클라인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억지로 지휘권을 가졌으나, 그렇다고 마을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마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돌아온 것은, 죽은 가족의 시신을 품에 안고 원망에 찬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마을 주민들과.
억지로 지휘권을 잡고서도 실패한 자신을 보며 질린 표정을 짓는 기사단원들의 눈빛뿐.
때문에 그날 이후, 셰인은 더 이상 남을 위해 살기 않기로 다짐했고.
더더욱 이기적인 성격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딱히 이제 와서 사람들의 선망과 존경이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도 셰인은 스스로 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 했고, 셰인의 지휘력이 부족해서 일어난 사고도 아니었으니 전적으로 그의 잘못만이라 할 수는 없던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나서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하지 않는 것보단 나은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무엇보다, 훗날 '무명'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명성은 필수였으니.
이미 해질녘이 된 마을이 부산스러워지는 소리를 들으며, 셰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섰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4화
4화 단초 (3)
쿠오오오오오--!
그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먼저 반응한 사람은 다름 아닌 클라인이었다.
고작 17살의 나이에, 클라인은 저 멀리 떨어진 산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진득한 살기를 누구보다 먼저 눈치챈 것이다.
동시에 방 한편에 세워진 검을 집고 곧장 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런 클라인 보다 조금은 느리지만 기사단에서는 가장 빠르게 반응해 나온 사람은 그들을 여기까지 호위해서 온 기사단장, 레이어드였다.
"도련님!"
"예."
둘은 별다른 말도 하지 않고 지금의 상황을 이해했다.
던전 웨이브.
물론 클라인은 그걸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실전에서 몬스터와 싸워 본 경험도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으니.
그럼에도 클라인은 뛰어난 본능적 감각에 맡겨,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먼저 마을 주민부터 대피시켜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다들 들었나! 마을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곧바로 마을 동쪽으로 모여라!"
"알겠습니다!!"
뒤늦게 나온 기사단원들이 부산스럽게 바깥으로 뛰쳐나갔고, 그 뒤를 이어 셰인이 걸어 나왔다.
"클라인."
"형님."
"던전 웨이브구나."
"...맞습니다."
설마하니 형님도 그걸 바로 알아차릴 줄은 몰랐는지 클라인의 눈동자에 잠깐 놀라움이 서렸다.
결코 형님을 얕봤기에 보인 태도는 아니었다.
그저 형님이 놀라울만큼 침착했기에.
"어찌하겠느냐?"
셰인의 물음에 클라인은 잠시 주춤했다.
본래 그가 알고 있던 형님이라면 여기서는 자신에게 묻기보다 먼저 명령권을 쥐려 했을 테니까.
형님은 존중하지만,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몬스터들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형님을 존중해야 하는 게 맞는 걸까.
그런 고민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린 클라인은 셰인의 물읍에 답하고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을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마을의 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됩니다. 때문에 저는 레이어드 기사단장과 함께 먼저 녀석들을 타격할 생각입니다."
"그래라. 지휘권은 너에게 맡기마."
레이어드도 그런 차분한 셰인의 모습에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 역시 셰인이 저렇듯 쉽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거기다 지휘권까지 클라인에게 맡겼다.
물론 진짜 지휘권은 기사단장인 레이어드에게 있겠지만, 클라인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그는 굳이 자신이 지휘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단, 기사단원 5명은 남기고 가거라. 나는 여기서 마을을 지키겠다."
"...알겠습니다."
이건 명령에 가까운 요구였지만, 클라인은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어쨌든 마을을 지켜야 할 비상 전력은 있어야 함이 옳았고, 마을의 자경단원으로는 저 멀리서 들려온 몬스터 피어를 이겨 낼 이는 얼마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형님,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몸 성히 다녀오거라."
그런 셰인의 말에 클라인과 레이어드 기사단장 둘 모두 어깨를 흠칫거렸으나,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당장은 변한 셰인의 행동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보다, 한시라도 빨리 이번 소동을 마무리해야 했으니까.
* * *
몬스터 피어가 들리자마자 웨이튼 용병단은 곧장 자신의 화주가 머물고 있는 숙소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이미 전투태세를 갖춘 클레이튼 가문의 기사단이 분주하게 밖을 뛰어다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기사단원들은 마력이 실린 목소리를 내며 시민들에게 대피 명령을 내렸다.
"젠장. 쪽팔리게...."
그때, 때마침 숙소에서 나온 단주와 눈이 마주친 웨이튼은 그런 단주의 명령을 기다렸다.
"끄응, 웨이튼 대장. 어떻게 하면 좋겠나?"
"단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번 웨이브보다 따로 있지 않습니까?"
"크흠! 그렇지."
단주는 이런 웨이튼의 눈치가 퍽 마음에 들었다.
웨이튼의 실력은 평범한 용병대의 평균보다 아주 살짝 높은 정도였으나, 단주의 기분을 알아서 맞춰 주는 행동력만큼은 상위급에 해당됐기 때문이다.
때맞춰 웨이튼이 한 기사를 붙잡고 상황을 물었다.
"기사님! 혹시 외부로 몬스터 토벌에 나서시는 겁니까?"
기사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그의 차림새를 보고는 표정을 풀었다.
"그래, 맞다. 기사단장님과 함께 나갈 예정이다."
"지금의 병력만으로는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혹시 이쪽 병력을 피해 마을로 오는 몬스터는 없을지...."
"그건 걱정 마라. 우리 쪽도 5명이 남기로 했으니."
기사의 말에 웨이튼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가만 보자, 분명 차남의 실력이 어지간한 기사단장들보다 실력이 좋다고 했었지. 그럼 분명 차남 쪽이 토벌대에 포함되겠군?'
계산을 마친 웨이튼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 그럼 혹시 저희가 전선에 나가는 걸 도와도 되겠습니까?"
"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물론 병력은 조금이라도 더 있는 게 이득이긴 하지만, 굳이 용병단의 힘까지 빌릴 필요성이 있나 싶은 기사였다.
그만큼 기사가 믿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그런 기사의 기색을 읽은 웨이튼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래도 혹여 녀석들이 전선을 넓게 가진다면 마을에 피해가 가지 않겠습니까. 이래봬도 전장 밥만 10년이 넘게 먹은 몸입니다. 던전 웨이브도 몇 차례 겪어 보았지요. 결코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힘을 보태겠습니다."
"그럼, 5분 뒤에 동쪽 경계 초소로 오도록. 늦으면 기다리지 않고 갈 것이고, 만일 이쪽 지휘관님이 허가하지 않는다면 물러나야 한다."
"물론입니다."
그렇게 기사는 다시금 바쁜 발걸음을 옮겼고, 웨이튼은 뒤에 서 있는 단주에게 다가가 말을 이었다.
"분명 외부로 나가는 쪽이 차남일 겁니다. 제가 그쪽에 최대한 시야에 들어오게 할 테니, 나머지는 알아서 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후후후, 웨이튼. 역시 자넨 나와 계속 함께 가야겠네."
"별말씀을."
그렇게 웨이튼이 이제 막 술기운에서 벗어난 동료들을 부르려 할 때.
"웨, 웨이튼 님."
"응? 알렉스. 무슨 일이냐. 너도 들었잖냐. 어서 사람들 대피시키지 않고 뭐 하고 있어?"
"혹시. 된다면 저도 함께 나갈 수 있겠습니까?"
"뭐?"
그러자 언제나 호탕한 웃음을 짓던 웨이튼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지금은 실제 상황이다.
고작 시골이 시시하다는 이유로 마을을 떠나고자 하는 애송이 놈이 건방지게 나설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 웨이튼의 표정을 알아본 알렉스가 급하게 변명을 내던졌다.
"저도 압니다! 제 부탁이 무례하다는 것을. 하지만, 그래도 이곳은 제가 나고 자라곤 고향입니다. 고향의 위기에서조차 도망치는 머저리가 어떻게 바깥세상에서 살아남겠습니까?"
"개소리 하지 말고 넌 주민들이나 대피시켜. 그게 네 고향을 위한 일이다. 알겠냐?"
"이미 사람들은 대피하고 있지 않습니까...! 결코 방해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웨이튼 단장님!"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차라리 여기서 주먹으로 코뼈를 뭉개 버리면 알아서 돌아가지 않을까?
그렇게 마음먹고 주먹을 올리려 했으나.
"절대로 도와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제 두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바깥세상을...."
"...쯧."
웨이튼은 알렉스의 두 눈을 응시했다.
두려움이 가득한 눈동자다.
전장에서 숱하게 봐 왔던, 전장의 병아리들이나 가지고 있을 법한 눈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에 대항하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것은, 과거 첫 전장에 나섰던 웨이튼조차 갖지 못했던 눈동자였다.
"뒈지거든 날 원망하지 마라."
"가, 감사합니다!"
그렇게 웨이튼이 등을 돌렸을 때, 때마침 숙소에 나온 어느 한 남자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척 보자마자 20살이 채 되지 않는 미소년이 숙소 밖을 나오고 있었다.
흑발을 길게 묵어 늘어뜨린 소년.
누가 보더라도 귀족과 같은 복장을 입고, 로즈베리 색상의 눈동자로 웨이튼에게 잠깐 시선을 보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렸다.
'저게 그 말로만 듣던 클레이튼 가문의 장남인가?'
듣기로는 제 동생의 재능을 질투하고 능력은 없으면서 욕심만 많은 귀족이라 들었다.
'가능하면 얽히고 싶지 않은데.'
모든 귀족들이 그러진 않겠으나, 능력도 없으면서 권위만 내세우는 귀족에게 괜히 걸렸다간 제 명에 못 살고 죽기 마련이다.
실제로 주변 용병단 단주 중 한 명도 그런 식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정리당한 걸 들어 보지 않았던가.
'그래도 선두에 나가진 않는다니 다행히 얽힐 일은 없겠군.'
* * *
'어디서 봤었지.'
셰인은 마을 밖으로 나가는 기사단과 웨이튼, 그리고 알렉스의 뒷모습을 보며 짧은 생각에 잠겼다.
셰인은 알렉스의 이름도,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으나, 묘하게 얼굴에서 익숙함을 느꼈다.
전에 자신이 이 마을에 왔기 때문에?
아니다.
전생에도 마을 주민들의 얼굴과 촌장도 봤었지만, 셰인은 그들을 전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하다 못해 촌장도 아닌 고작 마을의 자경단원 하나를 기억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보다 미래에 만났을지도 모르겠군.'
지금이 아닌. 먼 미래에서.
아마 좋은 관계로 만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생의 셰인과 좋은 관계인 인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으니.
그쯤 되어서 셰인은 알렉스에 대한 관심을 껐다.
그런 셰인을 향해 기사단원 중 한 명인 로드윌이 다가왔다.
"도련님. 마을에 방책이라도 펼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예?"
"그리고 용병들은 마을 주민의 호위로 물려라. 여기 있어 봐야 도움이 되진 않을 터이니."
용병대는 끝내 기사단을 따라가지 못했다.
기사단을 따라간 인물은 전령 역할을 수행할 웨이튼과, 주변 지리를 잘 아는 마을 주민인 알렉스뿐.
그 외 용병대는 마을에 남아 주민들을 지키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알겠습니다."
기사단원 로드윌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잠시 지었으나,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진 않았다.
자존심 강한 셰인의 말에 토를 달아 봐야 좋을 것도 없었고, 실제로 마을이 위기에 처할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로드윌의 표정에 그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파악한 셰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보기에, 아까 그 피어의 주인은 누구일 것 같나?"
뜬금없는 질문에 로드윌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트롤의 피어였습니다."
"맞다. 그것도 살기가 진득한 피어였지."
"예."
셰인의 설명이 이어졌다.
"사람들이 흔히들 하는 착각이 있다. 트롤이 그저 무식한 재생력과 근력만 있을 뿐이라 생각하지."
"...그 외에 다른 게 있습니까?"
로드윌의 입장에서, 트롤과 마주친 적도 없던 셰인이 저런 말을 하는 게 어찌 보면 우습게 들릴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로드윌은 그런 셰인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
"트롤은 영리한 몬스터다. 또 기습과 같은 함정을 팔 줄도 아는 녀석들이지."
"함정... 말입니까?"
로드윌이 알고 있는 트롤은, 무식한 재생력과 바위마저도 일격에 부숴 버리는 근력으로 적을 몰아치는 몬스터였다.
그런 녀석이, 함정 따위를 판단 말인가?
"토끼를 잡는데 늑대가 사력을 다하겠나?"
"...."
하기사. 트롤에게 있어서 기사라면 모를까, 일반인들은 그저 먹기 좋은 사냥감에 불과할 터.
"자연에 있는 트롤들도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적을 파악하고,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이 섰을 때 그 힘을 발휘하지. 혹은, 자신이 이길 수 없다 판단하면 기습 같은 나름의 작전이라는 것도 펼친다."
몇 번이고 트롤과 싸워 봤으나, 트롤에게 그런 면모가 있었음은 처음 알았기에, 로드윌은 조용히 그런 셰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러니 트롤은 함부로 몬스터 피어를 내뱉지 않는다. 굳이 있다면, 사냥감을 상대할 때 정도. 그것도 아까처럼 살기가 진득한 피어가 아닌, 적의 발을 묶어 두기 위한 용도다."
"그럼 아까 트롤의 피어는 무엇입니까?"
"트롤이 살기 섞인 피어를 내지르는 경우는 두 가지 뿐. 하나는 많은 수의 적을 앞에 뒀을 때, 그리고 다른 하나는."
"...."
"자신의 주인을 위해 파수꾼의 자리에서 벗어나 사냥꾼이 되었을 때다."
주인?
무리 지어 다니지 않기로 유명한 그 트롤에게 주인이라니?
로드윌은 그런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셰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은 채 저 산등성이로 시선을 돌렸다.
희미한 마력의 불꽃과, 고함 소리.
전투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5화
5화 단초 (4)
"전방에 몬스터들이 보입니다!"
그 외침을 시작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산으로 올라온 지 어느덧 30분 정도 흘렀을 무렵, 기사단은 전방에 보이는 몬스터들과 격돌했다.
"...대단하군."
전령의 역할로서 전투에서 배제된 웨이튼과 알렉스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절로 나오는 감탄사를 숨기지 못 했다.
특히, 알렉스의 경우에는 그 충격이 더더욱 컸다.
평생 시골에서만 살아왔고, 몬스터라 해 봐야 이따금 뒷산에 자리 잡는 소규모 고블린 무리 정도가 전부였다.
그보다 무서운 것은 이따금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늑대나 곰과 같은 짐승 정도일까.
그 무시무시한 짐승들보다도 기사들은 빠르고 용맹하게 자신들의 검을 휘둘렀다.
던전 웨이브에 포함된 몬스터는 적게는 고블린부터 각종 무기를 들고 있는 코볼트, 거기에 트롤 열댓 마리가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몬스터의 수는 총 150여 마리.
이 정도면 소형 웨이브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거기에 대적하는 기사단의 수는 총 30여 명에 불과했지만, 기사단원 중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불리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첫 충돌에서 기사단은 각각 들고 있는 방패와 창을 이용해 접근하는 고블린이나 코블트 따위를 정리했고, 측면에서 파고드는 워 울프 같은 마물들은 검을 든 기사들이 일격에 베어 버렸다.
기사단도 기사단이었지만, 특히 최선두에 서 있는 소년이 눈에 띄었다.
나이는 분명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외모의 소년은, 제 머리색과 비슷한 화사한 금빛의 검강을 휘두르며 수려한 동작으로 몬스터들을 베어 나갔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본 알렉스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멋지다...."
"감탄하는 건 좋다만, 정신줄까지 놓지는 말아라."
"헙, 예!"
웨이튼의 경고에 알렉스도 멍했던 눈에 힘을 부릅 주고는 주변을 살펴봤다.
아직까지 트롤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지 않았기에, 아직 전장의 상황은 순조로웠다.
한편, 그런 트롤을 보고 있던 사람은 알렉스뿐만이 아니었다.
클라인은 워 울프를 베어 넘기는 과정에도 트롤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치 이쪽의 전력을 가늠하듯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트롤들.
녀석들이 나서기 시작하면 기사들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된다.
아무리 단단한 갑옷을 입고 있다 한들, 트롤의 괴력이 담긴 주먹은 그런 갑옷을 뚫고 안에 있는 사람을 묵사발 내기에 충분했기에.
본능적으로 분석하고 상황을 직시하는 눈.
이는 클라인이 가지고 있는 재능 중 하나였다.
클라인은 굳이 의식하지 않더라도, 상황을 인지하는 게 가능했다.
레이어드는 그런 클라인의 눈빛을 보며 내심 소름이 돋았다.
이제 겨우 17살에 불과한 소년이, 마치 20년도 더 전장에서 살아간 노장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으니까.
그걸 느끼는 것은 비단 레이어드뿐은 아니었다.
기사단원들도 레이어드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자신들이 모시는 주군의 아들이 뛰어날수록, 그들의 사기는 점차 올라갔다.
그렇게 전장의 열기가 더해지고 있을 때.
드디어 트롤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오오오오-!!
가장 선두에 있던 트롤의 피어를 시작으로, 남은 트롤들도 일제히 피어를 쏘아 보냈다.
"커헉!"
알렉스는 그 피어에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았고, 웨이튼이 그런 알렉스를 부축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이게 마력을 다루는 몬스터와 인간의 전투다."
"예, 예!"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피어에 그나마 알렉스가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던 이유는 선두에서 싸우고 있는 기사들의 마력 덕분이었다.
몬스터와 마물들을 상대로 내뿜는 기사들의 마력이 방패처럼 허공에 맺혔다.
'그래도 꼬맹이 주제에 여전히 눈빛이 죽지는 않았군.'
웨이튼은 그런 알렉스를 잠시 쳐다보다 다시금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트롤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자, 클라인은 전장의 좌측에서 전방으로 몸을 옮겼다.
'여기서 전투가 지체돼서 좋을 게 없어.'
기사단은 분명 트롤을 모두 막기에 충분한 전력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다른 몬스터들이 마을로 향해 갈지 몰랐다.
물론 마을에도 형님과 다섯 명의 기사단원, 용병대와 자경단이 있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변수를 줄이고 싶은 게 클라인의 목표였다.
"흐읍-!"
클라인의 코어에서 마력이 끓어올랐다.
전신을 휘감은 마력은, 이내 서른 명의 기사들이 내뿜던 마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마력의 용오름을 피워 올렸다.
동시에 클라인이 검을 가로로 휘두른 순간.
용오름은 실제로 용이 되었다.
그러나 용은 그저 찰나의 형상만을 유지한 채 바람처럼 날아갔고.
전장의 선두로 향하던 트롤들과 그런 트롤 곁에 있던 몬스터들을 단숨에 폭발시켜 버렸다.
전투라고 불릴 수 없을 정도의 일방적인 폭력.
그 말도 안 되는 힘 앞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하던 몬스터들도 겁을 집어 삼켰다.
적을 멸살하기 위해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몬스터의 군대도, 저 존재 앞에서는 그저 불 앞의 부나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몰아붙여라!"
그때, 레이어드의 외침과 함께 기사단이 마력을 끌어올려 단숨에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전투에 조금도 패배를 생각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그릇의 천재가 있었고.
바로 그 천재가 자신들이 모시는 도련님이었기에.
이윽고 마지막 트롤이 베어졌을 때.
클라인은 방금 막 자신이 직접 베어 낸 트롤을 보고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건...."
마지막 트롤의 시체에서부터, 아주 옅은.
검푸른 마력이 물의 형태를 취하며 허공으로 사그라졌다.
"설마...?"
뒤늦게 클라인이 고개를 치켜들어 외쳤다.
"전령! 어서 빨리 마을로 돌아가 전원 마을 밖으로 대피하라 전하세요!"
"예? 아! 알겠습니다!"
뒤늦게 웨이튼이 의아함을 담으면서도 알렉스를 붙잡고는 전장에서 벗어났고, 클라인은 아직 의아함에서 벗어나지 않은 기사단에게 명령을 내렸다.
"당장 마을로 돌아갑니다!"
* * *
한편, 셰인은 숲 너머에서 용오름이 치솟는 것을 보고는 전투의 끝이 왔음을 깨달았다.
'금방 끝났군.'
일반 용병들만 투입했더라면, 혹은 클라인이 없었더라면 이번 전투는 며칠이고 이어졌을 터.
여태까지의 그림은 전생과 비슷했다.
그 당시에도 클라인은 셰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다가 트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선보였다.
그리고.
"여기까진 그때와 마찬가지고."
마을의 경계선. 숲의 어둠 속에서.
셰인은 불길한 마력을 품는 존재를 느꼈다.
지난 삶, 셰인은 이때 당시 멀리서나마 녀석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시체를 물고 늘어진, 어둠이 가진 순수한 힘.
어둠의 정령 중 하나인 썩은 나무 정령을.
당시에는 몰랐으나, 썩은 나무 정령은 이 밤 속에 자신의 어둠으로 존재감을 숨기고 이곳까지 찾아왔다.
'이러니 전생의 내가 몰랐을 수밖에.'
만약 그때 지금처럼 예비 병력을 마을에 남겨 뒀더라면 적어도 마을 주민들이 대피할 시간은 벌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생의 셰인은 모든 병력을 이끌고 나갔고, 빈 집이 된 마을은 썩은 나무 정령에게 맛 좋은 식사 자리가 되고 말았다.
"전투 준비."
"예? 헙!"
셰인의 나지막한 한마디에 로드윌을 포함한 다섯 명의 기사단원들이 뒤늦게 어둠의 정체를 깨닫고 전투 준비를 외쳤다.
쿠웅-!
썩은 나무 정령이 가진 특유의 검푸른 오오라에 휘감긴 오우거의 등장.
그것도, 머리가 둘이나 달린 트윈 헤드 오우거였다.
덩치에 맞지 않게 은밀히 움직이던 트윈 헤드 오우거는 사냥감들이 눈치를 챈 걸 깨닫고는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을 감싸고 있던 어둠을 주변으로 폭사했다.
오오오오오오--!!
"흡!!"
단순한 어둠의 폭사만으로도, 다섯 명의 기사단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자리에 버텨야만 했다.
트윈 헤드 오우거.
4품의 엑스퍼트라면 사력을 다해 상대해야 하고, 보다 안전하게 상대하려면 못해도 3품의 마스터는 되어야 상대할 수 있는 괴물.
가뜩이나 그런 존재가, 어둠의 정령마저 품고서 그 힘을 전신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위험하다....'
기사단원들은 썩은 나무 정령의 존재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저 오우거가 위험하다는 경종은 동시에 울리고 있었다.
'우리끼리 놈을 죽이기엔... 역부족이다.'
5인의 기사단원들의 실력은 6~5품의 엑스퍼트.
죽음을 각오한다면 죽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가려면 적어도 여기서 둘 셋은 죽음 혹은 치명적인 부상을 각오해야만 했다.
그들은 결코 죽음이 두렵지 않았으나, 방금 놈의 등장과 함께 터진 포효 소리가 본대에도 들렸을 터.
그렇다면 여기서 마을의 피해를 어느 정도 감수하더라도, 시간을 끌어야 했다.
이미 주민들도 모두 대피한 상황이니.
놈이 마을 안쪽까지 들어가는 것을 막을 뿐이라면, 이쪽도 충분히 버틸만하다는 계산이 섰을 때.
셰인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어설픈 생각으로 놈을 상대할 생각은 버려야 할 거다."
기사들의 시선이 아주 잠깐 셰인에게 향했다.
놀랍게도, 기사들조차 다리에 온 힘을 쥐고 버텨야 했을 어둠의 힘에, 셰인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채로 트윈 헤드 오우거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까짓 게.'
한편, 셰인은 오우거의 몸에 기생하고 있는 썩은 나무 정령에게서 적의를 읽었다.
숲의 부정적인 기운이 모여 만들어진 어둠 속성의 정령.
썩은 나무 정령은 자신의 마력을 터뜨렸으나, 셰인으로선 놈의 위협은 봄바람의 산들바람 정도로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셰인은 10년이 넘도록 7대 죄악이자 타락 중 하나인 '질투'에 지배되지 않았던가.
'내게 그따위 음험한 마력이 통할 것 같으냐.'
그런 셰인에게 고작 저따위 정령의 기세는 조금도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질투'라는 이름의 타락은 모든 세상의 생명체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또 증오하는 존재.
'언데드'의 근원인 힘이었으니까.
지난 삶, '무명'의 제1군단장이었던 셰인은 모든 언데드들의 왕이자 죽음 그 자체였고.
고작 숲 하나가 가진 '죽음'의 기운으로는 셰인을 어찌할 수 없었다.
"기사단은 들어라. 단 일격. 그 안에 놈을 정리할 테니, 사력을 다해 빈틈을 만들어라."
"...알겠습니다!"
보통 때라면 기사들은 저런 셰인의 말에 조금도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셰인에 대한 일말의 믿음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썩은 나무 정령의 위협을 받고 적의를 불태우는 셰인의 목소리에는 감히 기사들이 항거할 수 없는 절대자의 기운이 담겨져 있었다.
클라인과 같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닌, 영혼의 밑바닥에서부터 소름 끼치도록 서늘한 복종의 명령.
평소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적의 앞에서 셰인의 명령은 오히려 기사들에게 알 수 없는 믿음을 선사했다.
기사들이 일제히 자신들의 무구에 마력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선두에 선 5품 엑스퍼트, 로드윌은 검과 방패에 마력을 부여해, 오우거의 빈틈을 찾아봤다.
셰인은 그런 로드윌과 기사들에게 조언을 던졌다.
"놈의 실체는 어둠의 정령이다. 평범한 오우거를 생각하고 덤볐다간 순식간에 어둠에 잡아먹힐 테니, 항상 어둠이 존재하는 공간을 조심해라."
"...예!"
셰인의 조언을 들은 기사들이 단숨에 달려들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적의 공격을 흘리며 상대의 저력을 파악할 터였으나, 지금은 그러한 여유조차 있지 않았다.
수많은 전장을 겪은 전사의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놈이 제대로 공격하기 시작하면, 자신들은 단 1분도 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단순히 오우거였다면 모를까, 정령의 힘까지 더해진 저 괴물은 당장 그들만으로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한편, 셰인은 자신의 심장에 맺혀진 두 개의 서클을 맹렬히 돌리고 있었다.
고작 2서클에 불과한 셰인이었지만, 셰인의 마법은 특별했다.
아니, 애초에 그에게 서클의 개념은 어디까지나 마력의 총량에 불과했다.
그는 어둠의 왕이자 수억의 언데드 대군을 이끌던 군단장이었다.
이제 와서 마법의 수식 따위, 그에게는 애들 장난처럼 비틀 수 있었다.
'단숨에 죽여야 한다.'
정령은 기본적으로 매개체가 있어야만 힘을 낼 수 있다.
그리고 저 어둠의 정령이 쓰고 있는 매개체는 이미 죽은 트윈 헤드 오우거였고.
결국 저 오우거를 파괴해야만 저 정령을 제압할 수 있었다.
맹렬하게 돌아가는 서클에, 셰인은 자신만의 변화를 추가했다.
룬어에서 파생된 곁가지 기술 중 하나.
'증폭.'
셰인이 만든 마법 술식 속 마력 간의 거리가 늘어나며 마법의 범위가 늘어났다.
절대적인 총량은 그대로였으나, 그 크기만큼은 결코 2서클이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물론, 이대로는 2서클 마법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거기에, 셰인은 한 가지 기술을 더 추가했다.
'중복.'
마법에 마법을 중복시키는 기술.
언뜻 보아서는 단순히 마법 하나를 더할 뿐인 기술로 보일 수 있었으나, 마법의 중복은 기본적으로 사장된 기술이었다.
마법에 정해진 술식에는 그 용량이 정해져 있고, 거기에 억지로 중복을 해 봐야 이미 가득 찬 컵에 물을 채워넣는 것에 불과하기에.
그러나 셰인은 증폭으로 마력 간의 간격을 넓혔고, 그 자리에 그대로 똑같은 수식을 그려 넣었다.
'속성은 '금(金)'. 형식은 절삭.'
펼쳐진 셰인의 손 위로 마력으로 이루어진 푸른 원반이 만들어졌다.
원반은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고, 이내 곧 마력의 반발력으로 인해 붉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원반의 크기는 넓어지면서, 또 동시에 절삭력이 높아져 갔다.
이윽고 원반이 피처럼 붉은빛을 띄웠을 때, 셰인의 입이 열렸다.
"지금!"
그 찰나의 외침을 기사들은 놓치지 않았다.
그 잠깐의 사이에 기사들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으나, 셰인의 명령에 몸을 아끼지 않고 최후까지 남은 마력을 쥐어짜 동시에 오우거의 발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트윈 헤드 오우거, 썩은 나무 정령은 그런 기사들의 공격조차 무시하고 셰인의 손에 들린 원반을 경계했다.
그러나 그러기엔 사방에서 들어오는 기사들의 합공을 경시할 수 없었기에, 녀석은 최후의 발악으로 어둠의 힘을 모아 방어막을 펼쳤다.
'흡수'의 성질을 지닌 어둠의 방벽이 셰인이 날린 붉은 원반을 막아서는 순간.
"감히!"
절대자의 영혼을 지닌 셰인의 마력이 담긴 외침은 곧 피어의 형태가 되어 썩은 나무 정령의 영혼을 사정없이 흔들었고.
영혼의 흔들림은 곧 녀석의 마력에 커다란 균형을 만들었다.
그 균형을 뚫은 붉은 원반은 매우 정확하게 트윈 헤드 오우거의 상징인 두 개의 머리를 반듯하게 지나갔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원반은 그대로 숲을 향해 날아가 지나치는 모든 것을 베어 버렸다.
그렇게, 두 개의 머리가 떨어진 오우거는 중력의 힘으로 바닥에 쓰러졌고.
기사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셰인을 바라봤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클라인의 능력을 의심한 적 없는 기사들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셰인에게서 클라인에겐 느낄 수 없는, 항거할 수 없는 위압감을 느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6화
6화 단초 (5)
웨이튼과 알렉스는 전력을 다해 마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본래라면 마력을 다루는 웨이튼이 알렉스보다 훨씬 빠르게 앞서 갔겠지만, 이 주변의 지리는 알렉스의 손바닥 안이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친구들과 동네의 산이란 산은 죄다 들쑤시고 다니지 않았던가.
30명의 기사단과 함께 할 때와는 다르게, 인간들은 보통 다니지 않는, 흔히들 말하는 동물들의 길을 통해 마을로 향해 갔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그래, 나도 알겠다!"
둘은 도대체 클라인이 무엇을 보고 마을이 위험에 처했다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그 트롤들조차 단 일격에 도륙을 내버린 사람이 하는 말이 결코 허언일 리가 없었다.
그러한 생각에 둘이 마을 근처에 도착했을 무렵, 둘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검은 기운을 일렁이는 거대한 오우거가 있던 것이다.
그것도 머리가 두 개나 달린 트윈 헤드 오우거!
이는 웨이튼조차도 단 한 번 본 게 전부였던 엄청난 몬스터였다.
그런 괴물이, 불길한 어둠에 휩싸여 있는 모습은 혹여나 꿈에 나올까 두려울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다섯 명의 기사들은 트윈 헤드 오우거를 일제히 공격하고 있었으나, 그 묵직하면서도 빠른 공격 한 번 한 번에 기사들은 입에서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기로 한 듯, 두 걸음 물러서면 세 걸음을, 세 걸음 물러서면 네 걸음을 나아가 오우거를 압박했다.
그럴수록 오우거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어둠의 힘이 기사들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다.
이따금 그림자가 있는 방향에서 가시가 튀어나오기까지 하니....
단언컨대 웨이튼은 저 전투에서 단 5초도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기사들의 뒤에 서 있던 한 남자가 외쳤다.
"지금!"
그러자 방금까지도 격렬하게 오우거를 몰아치던 다섯 명의 기사들이, 일제히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며 오우거의 발을 붙잡았다.
그제야 웨이튼과 알렉스의 시선이 방금 외쳤던 소년을 향해 갔다.
검은 머리의 소년은 한쪽 손에 불길한 핏빛의 원반을 만들어 내더니, 있는 힘껏 오우거를 향해 날렸다.
오우거 또한 그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파악했는지 어둠의 방어막을 펼쳤으나.
"감히!"
다시 한번 소년의 외침에 방어막이 크게 흔들렸다.
흔들린 것은 오우거뿐만이 아니었다.
알렉스는 아예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져 버렸고, 웨이튼도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항거할 수 없는 절대자의 목소리.
단언컨대 웨이튼은 과거 트윈 헤드 오우거의 몬스터 피어도 이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독이 되었음일까.
셰인의 목소리에 웨이튼의 영혼이 흔들렸고.
동시에 오우거의 머리들이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웨이튼과 알렉스는 순간이나마 녀석의 그림자가 이쪽을 향해 뻗쳐 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 *
로드윌을 포함한 다섯 명의 기사단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셰인을 바라볼 때, 셰인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전생에서 겪었던 것이지만,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정령들은 항상 끈질겼기 때문이다.
물론 육체로 삼고 있던 오우거의 머리 두 개를 모두 떨어뜨렸으니 썩은 나무 정령에게도 존재의 격이 흔들릴 정도의 타격은 갔겠지만.
도주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해가 진 밤이었으니, 어둠의 정령인 썩은 나무 정령이라면 어디로든 그림자에 숨어 버릴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지금 셰인만큼 어둠의 마력에 민감한 사람이 없기에 쉽게 간파할 수 있을 터지만.
괜히 사람들이 돌아왔다가 사람의 몸에 들어가면 그보다 골치 아픈 일은 없다.
처치도 곤란해지고, 그림자에 숨은 것과 다르게 인간의 몸에 숨어 버리면 아예 그 안에서 동면을 해 버리기에 직접 몸을 만지지 않는 이상 간파하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셰인의 눈에 마을 동쪽 입구에 주저앉아 있는 청년과 중년 남성의 모습이 보였다.
알렉스와 웨이튼이었다.
"음."
클라인이 먼저 보낸 전령인가?
셰인이 그렇게 생각할 때쯤.
알렉스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고, 웨이튼도 그런 알렉스와 함께 다가왔다.
"그, 괜찮으십니까?"
"이쪽 일은 마무리되었다. 그쪽은?"
이미 저쪽도 정리가 됐으리라 예상했지만, 그래도 일단 물었다.
그러자 생각대로 저쪽 또한 알렉스와 웨이튼에 떠날 쯤엔 대장격이던 모든 트롤이 죽었고, 나머지는 고블린과 코볼트 등의 잡다한 몬스터가 전부라고 했다.
코볼트는 조금 위험할지 몰라도 고블린 정도면 몇 마리가 도망치더라도 마을의 자경단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을 터.
"그, 기사단의 사람 중 젊으신 분이 제게 마을로 찾아가 대피하라고 했습니다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그러면서 셰인은 한쪽에 쓰러진 오우거를 바라봤다.
한편, 알렉스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숲에서 보았던 클라인의 무위도 무위였지만, 심장을 울리던 셰인의 외침은 알렉스로 하여금 경외심을 품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이 사람과 한 마디라도 더 주고받고 싶다는 생각에 머리를 굴릴 때쯤.
갑자기 셰인이 웨이튼을 향해 손을 뻗었고.
이변은 그때 발생했다.
"컥! 웨, 웨이튼 님...!"
셰인의 손짓과 거의 동시에 여태까지 입을 열지 않았던 웨이튼이 알렉스의 목을 쥐어잡고는 뒤로 물러선 게 아닌가.
"동면을 취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나 보군."
셰인이 싸늘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고, 알렉스는 목으로부터 전해지는 압박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가까스로 시선을 웨이튼에게 돌렸을 때.
웨이튼은 어느새 검은 안개에 휩싸여 있는 상태였다.
'도대체 어떻게?!'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하는 의식 속에서, 알렉스는 이쪽을 향해 여전히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셰인을 바라봤다.
"인, 간. 나를, 놓아 줘라. 그럼, 이 인간. 산다."
평소 호탕했던 웨이튼의 목소리라 믿기지 않을 만큼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 따위가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이 인간. 죽는다."
"너를 놓아주면 더 많은 인간들이 희생되겠지."
"그러면. 협상은."
"늦었다."
"...?"
거절이 아닌, 늦었다 라니.
썩은 나무 정령이 의아함을 드러내기도 전에, 녀석의 발밑으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인간...!"
순식간에 위로 솟구친 흙에 의해 정령이 속박됐다.
땅은 마치 강철이라도 된 듯, 정령이 아무리 힘을 쥐려 해 봐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떻게?!"
웨이튼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으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정령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아직 성인도 채 되지 않은 소년이 무영창으로 마법을 펼친단 말인가?
물론 정령이 살았던 기원 전 시기를 떠올리면 그러한 존재들이 없던 것도 아니었으나.
자신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마법을 발동시켰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마력은 곧 정령을 구성하고 있는 힘이건만!
다른 건 몰라도, 자신조차 모르게 마법을 펼쳤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작 너 따위가 이해하겠나."
셰인 또한 그런 그 얼굴에 떠오른 경악의 의미를 알고는 하찮다는 듯 웃었다.
"자, 잠깐, 인간! 이 인간, 을 죽일 생각인가!"
"못할 건 뭐지?"
그러면서, 셰인은 한쪽 손을 올려 마력으로 수식을 그려냈다.
그러자 쭉 편 그의 손 위로, 금속 검신이 생성됐다.
"...!"
셰인은 새롭게 삶을 시작한 뒤로, 인간을 죽일 생각은 그리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렁하게 넘길 생각 또한 없었다.
어디까지나 무자비한 학살에 가까운 짓을 하지 않겠다는 거지, 적을 살려 두겠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네놈이 그 몸뚱이에 남아 있어 봤자, 그 남자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아니, 오히려 죽기를 바랄 테지."
신체의 권한은 빼앗기고, 내면에 잠든 채 육체를 유린당하는 기분이 어떠한지는 이 세상에 셰인보다 더 잘 아는 인물은 없었다.
어느새 셰인의 손 위로 만들어진 금속 검신은 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잘 가라."
"자, 잠깐만요!"
그렇게 셰인이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날로 변한 손으로 놈의 목을 치려는 순간.
알렉스가 달려들어 그런 셰인의 팔을 붙잡았다.
평민이 감히 귀족의 몸에 손을 대다니.
그것만으로도 몰매를 맞는 것이 당연했으나, 셰인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는 것으로 그런 알렉스를 노려봤다.
"방금 듣지 않았나? 이대로 둬 봐야 이 남자는 죽는다."
"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알렉스가 간절한 표정으로 그런 셰인의 팔을 붙들고 두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셰인의 머리에 하나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살아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피투성이가 된 남자는 등 뒤로 세 자루나 되는 검을 매고서 금발의 미남자에게 그런 부탁을 하고 있었다.
피투성이 남자는 애절한 표정으로 그런 미남자를 바라봤고.
[...미안합니다.]
금발의 남자는 곧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이윽고, 홀로 남은 피투성이 남자는 등 뒤를 돌아 셰인을 바라봤다.
아니, 정확히는.
셰인의 눈을 대신하는 언데드 대군을 바라보며 외쳤다.
[개죽음은 되지 않을 것이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힘들어 보이는 남자는, 그렇게 자신의 등에 달린 검을 들고 날뛰던 끝에 15기의 데스나이트를 쓰러뜨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너였군."
"예, 예?"
"...."
당시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머리는 새하얗게 샜고, 여기저기 흉터투성이인 모습이라 지금처럼 평범한 시골 청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지만.
분명했다.
전생에 클라인과 함께 황녀가 갇힌 도시에서 그녀를 구하기 위해 찾아왔던 결사단원 중 한 명이었다.
그 과정에서 클라인과 황녀를 제외한 모두가 셰인의 언데드 군단에 목숨을 잃었고, 알렉스는 그중 마지막까지 클라인을 지키다 삶을 마감한 결사단원이었다.
만일 그때 알렉스가 클라인을 절벽 밑으로 피신시키지 않았더라면 목숨도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 아래 있던 기연도 만나지 못했을 터다.
'그래서 얼굴이 익숙했던 것인가.'
셰인은 잠시 그런 알렉스를 바라보다, 이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능하면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러나 미래의 클라인의 곁에 설 정도의 실력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선택받은 이중 한 명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
셰인은 어쩔 수 없이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심하고, 여전히 묶인 채 움직이지 못하는 썩은 나무 정령과 눈을 마주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지."
"뭐라?"
그런 썩은 나무 정령이 제대로 대답도 하기 전.
셰인은 정령이 들어가 있는 웨이튼의 몸 안으로 마력을 흘려 넣었다.
"들어와라. 네놈이 살 길은 이것 하나뿐이니."
"...인간. 건방지군."
동시에, 웨이튼의 몸 안에 스며들었던 검은 안개가 서서히 셰인을 향해 옮겨 갔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화
7화 단초 (6)
어둠 계열 중 하나인 썩은 나무 정령은 셰인의 행동을 비웃었다.
방금 셰인이 한 행동은, 자신의 심상 세계로 어둠의 정령을 끌어오는 행위였다.
어찌보면 자신의 홈그라운드에서 싸운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는 큰 착각이었다.
어둠의 정령은 기본적으로 생명체의 마이너스 감정, 즉 음기를 먹고 성장한다.
그 중에서도 인간은 가장 감정적인 생명체.
제아무리 강한 인간이라도, 아니. 설사 고대의 그 대단한 종족들조차도 어둠의 정령을 자신의 심상세계에 들이는 미친 짓따윈 하지 않는다.
보아하니 제법 영혼이 강한 인간이긴 했으나.
아무리 발악한다 한들 생명체에게는 반드시 음기가 존재하기 마련이고, 음기가 존재하는 이상 어둠의 정령은 그 어떤 상대가 온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숲을 지키는 정령으로서, 얼마나 많은 죽음을 보아 왔던가.
정령은 인간의 어둠이 어디서부터 진해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죽음이다.
이제부터 셰인은, 그간 썩은 나무 정령이 보아 왔던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며 인격이 마모될 것이다.
밖에서는 찰나의 시간 동안 수십 번의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살아났을 때 또다시 다가올 죽음으로 인해 두려움에 떨테지.
그렇게 음기는 더더욱 생겨날 것이고, 그게 정령을 더욱 성장시키는 힘이 될 터.
그러나, 썩은 나무 정령의 예상은 셰인의 내면에 들어온 직후부터 비틀어졌다.
-뭐, 냐. 이건....
죽음.
썩은 나무 정령은 그 누구보다 죽음에 있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셰인의 내면에 들어온 직후.
썩은 나무 정령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지평선 저 너머까지 쭉 이어진, 셀 수도 없을 숫자의 시체밭이었다.
-이게, 도대체....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오로지 죽음뿐.
그 참상은 수백 년을 숲에서 살아온 어둠의 정령마저도 기가 질리게 만들었다.
그쯤 되자,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이건.
자신이 알던 죽음이 아니다.
-뭐냐. 무엇이냔 말이다-!
어둠의 정령은 결코 스스로 느낄 수 없는, 느낄 리 없는 감정을 깨닫고 현실을 부정했다.
그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고작 저따위 시체들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게 아니다.
저 시체들을 만든 원인.
자신과 비슷한 어둠이지만, 더없이 깊고 심오한 어둠의 티끌을 마주했기에 느끼는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문득 뒤를 돌아봤을 때.
수많은 시체 위에 올라, 왕좌에 앉아 있는 셰인의 모습이 보였다.
-뭐냔 말이다....
그리고 그런 셰인의 가슴은, 찬란하게 빛을 내뿜는 검에 의해 꿰뚫려 있었다.
셰인은 마치 단잠을 자듯 미소 짓는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본능적인 깨달음.
이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시체들은, 저 인간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저건 도대체 무엇인가.
저것은 죽음인가?
아니, 아니다.
한없이 죽음에 가까우나, 그와 다른 무언가였다.
그때, 감겼던 셰인의 눈이 뜨였다.
-도, 도대체... 어떻게 필멸자 주제에. 이런 세계를....
어둠의 정령이 두려움에 떨며 하는 질문에는 그 어떠한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싸늘한 침묵.
방금까지 정말 그 포근한 얼굴이 맞나 싶을 정도로, 두 눈을 뜬 셰인의 얼굴은 아무런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고.
그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눈동자가 검게 물들기 시작할 때.
무언가가 썩은 나무 정령을 향해 다가왔다.
그것은, 죽음과는 한없이 가까우나.
그와 다른 무언가.
'소멸'이었다.
* * *
마을에 도착한 클라인과 기사단은 마을 입구에 쓰러져 있는 트윈 헤드 오우거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이 거대한 몬스터가, 어떻게 아무런 존재감도 뿜지 않고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을까.
사건에 대한 경위는 아직까지 피를 흘리며 응급처치를 막 시작하고 있던 다섯 명의 기사들에게 들을 수 있었다.
"그 뒤로, 쭉 저 상태십니다."
"...서둘러 마법사를 불러야겠군. 도련님, 어찌하시겠습니까?"
침대에 곤히 누워 잠든 셰인을 바라보며 묻는 레이어드의 말에 클라인이 침울한 기색으로 답했다.
"형님이 깨어나면 함께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런 클라인의 말에 레이어드도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하니, 그 첫째 도련님이 고작 용병 따위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며칠 동안, 셰인은 평소와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다.
여전히 무미건조한 눈빛은 똑같았지만, 언제나 클라인을 향해 보내던 적의적인 시선도 찾아볼 수 없었고, 이번 일도 그러했다.
하지만 레이어드는 그런 셰인을 책망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됐든 클레이튼 백작가의 자제분이시다. 고작 평민을 위해 저런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지.'
물론, 셰인의 속을 알 수가 없던 레이어드는 설마하니 셰인이 자신의 내면에 날뛰는 정령을 상대하기 귀찮아 웨이튼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까지는 떠올릴 수 없다.
"로드윌. 미안하네만 자네가 다른 친구와 함께 다녀와야겠군. 마탑에 정확히 상황을 설명하려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필요하니까."
그나마 마을에 남아 있던 다섯 명의 기사단원 중 가장 실력이 좋았던 로드윌이기에, 그는 그나마 거동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로드윌도 그런 레이어드의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다.
쓰러지신 첫째 도련님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됐던 것이니.
어찌 기사의 귀감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당장 정령에 의해 쓰러지신 도련님을 구하려면 마탑에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었기에.
그렇게 로드윌이 자리를 뜨려는 순간이었다.
"갈 필요 없다."
"...도련님!"
침대에 누워 있던 셰인이 조용히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단장님. 지금 뭐 하고 계신 겁니까!"
"무슨 짓입니까!"
어느새 레이어드가 한쪽 손을 검 손잡이에 올려 둔 것을 보곤 주변의 기사들이 대경하는 목소리를 냈다.
클라인 또한 그런 레이어드를 노려봤다.
"정말 셰인 도련님이 맞으신지 먼저 확인해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먼저 뒤로...."
"그거라면 확인해 보면 될 일이지. 호들갑 떨 필요 없다."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킨 셰인의 말에 레이어드는 긴장의 끈을 풀지 않고 그런 셰인이 내민 손목을 붙잡았다.
"...."
그런 레이어드의 마력이 셰인의 신체 내부를 쑥 훑고 지나갔고, 어둠의 정령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도련님이시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됐다. 마을은?"
"복귀한 기사단에게 주변 정찰을 시켰고, 그들이 돌아온다면 마을 주민들도 다시 불러들일 예정입니다."
"알았다."
그렇게 뒷정리를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간 뒤, 레이어드와 로드윌, 그리고 다른 기사들이 방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셰인과 클라인 단 둘이 남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거냐."
"...어째서 그런 위험한 행동을 하신 겁니까, 형님."
"걱정해 주는 거냐."
로즈베리 눈동자가 바다처럼 푸른 클라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클라인의 모습에 셰인이 피식 웃었다.
"별로 위험한 일은 아니었다. 필요한 일이기도 했고."
"...."
"너라도 같은 일을 했겠지."
"저는...."
"이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그보다 클라인."
"예?"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며 종자가 필요하지 않더냐?"
"...?"
갑작스러운 셰인의 말에, 클라인은 두 눈을 깜빡일 따름이었다.
* * *
다음 날, 이른 새벽.
기사단은 짐을 챙기고 마차와 함께 다시금 마을을 떠날 채비를 갖췄다.
촌장은 아직 마을 주변에 몬스터가 있지 않을까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기사들이 주변을 모두 훑고 지났으며, 별다른 몬스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셰인은 부상당한 기사들을 위해 마을의 마차를 요구했다.
촌장은 무척이나 속이 쓰린 듯한 웃음을 지으며 마차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마을을 지키다 부상당한 기사들을 위한 것이었고, 상대는 그 대단한 클레이튼 가문이었으니까.
어찌 보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듯 보였으나, 결국 저 또한 사람이 가진 다양한 모습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기사단이 마을을 떠나기 전, 웨이튼의 고용주인 하보크 상단주가 그 값을 대신 치렀다.
그는 마을을 위해 전력을 다한 클레이튼 가문을 향해 칭송을 내뱉기 바빴다.
한편, 클라인은 창밖으로 부상당한 기사들을 태운 마차의 마부석에 앉아 있는 알렉스를 바라보며 셰인에게 물었다.
"왜 저 사람을 제게 붙여 주신 겁니까?"
마을을 떠나기 전.
셰인은 알렉스를 찾아가 클라인의 종자가 되어 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사실 물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통보에 가까웠다.
무례하다고 느낄 만큼 일방적인 말이었으나, 알렉스는 그런 셰인의 말에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행에 합류했다.
"재능이 있는 녀석이다. 곁에 두고 잘 키워라."
"그렇... 습니까?"
의아함이 담긴 클라인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셰인이 알렉스를 데리고 온 이유는, 굳이 전생의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지금과 그때의 알렉스는 달라졌다.
마을에 있는 가족과 친우, 동료들이 죽는 일도 겪지 않았고, 전생처럼 세계에 위기가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가 전생에 어떤 기연을 겪어 강해졌는지 알 수 없었으나.
셰인의 눈은 인간의 영혼을 꿰뚫어 본다.
그리고 알렉스는 놀라울 정도로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물론 클라인과 비교하면 그 빛이 많이 줄어들겠지만.
'어둠의 정령에게 붙들렸을 때도 녀석은 멀쩡했지.'
비록 흔들렸을지언정, 무릎 꿇지는 않았다.
셰인은 그것만으로도 알렉스에게 합격 점수를 내줬다.
영혼이 맑은 이들은 언제나 시련을 이겨 내고 강해지기 마련이니까.
전생에 수없이 많은 영웅들을 봐 왔던 그들의 영혼이 얼마나 티 없이 맑았던가.
셰인은 자신의 감이 확실하다고 판단했다.
잘만 키운다면, 전생과 달리 제대로 키워 준다면. 보다 더 찬란한 빛을 내뿜을 녀석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영혼이 빛나는 클라인의 곁에 붙여 뒀다.
맑은 영혼은 보다 더 맑은 영혼에 이끌리고 성장하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마차는 쉴 새 없이 바퀴를 굴려 움직였고, 어느새 저 멀리서 도시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쭉 들고서야 보이는 거대한 성벽과, 그런 성벽 위에 서 있는 수많은 병사들.
그 모습을 본 클라인이 문득 떠올린 듯 셰인에게 물었다.
최근 셰인은 클라인의 물음에 금세 답해 왔다.
비록 단답형이긴 하지만, 예전처럼 불쾌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진 않았기에.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질문했다.
"형님은 이번에 무슨 학과에 들어갈 생각이십니까?"
클라인의 물음에 셰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치 이미 생각해 둔 일이라는 듯한 즉답이었다.
"지휘학과다."
"예...?"
"학과 시험은 같이 치르겠구나, 클라인."
전생과는 또 다른 선택.
영문을 모르는 클라인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런 제 형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올해는 여러모로 지휘학과의 황금기이지."
머리가 반쯤 허전한 아카데미의 총장, 하우젠 G 크로노스는 커다란 소파에 앉아 그런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 앉은 중년의 남성, 리바이 벤자민은 미소를 지르며 자신의 스승을 바라봤다.
"황금기 말입니까?"
"그래. 자네는 아주 좋은 황금기에 이곳에 온 걸세."
총장, 크로노스의 말처럼 현재 아카데미는 역대 최고의 황금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학생들의 수준이 뛰어났다.
"제국을 지키는 저지먼트 기사단장의 딸부터 시작해 다양한 인재들이 우리 아카데미에 있다네. 그 중에서도 클레이튼 가문의 차남이 또 대단하지."
"아, 그 이름은 저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교수들이 자신의 밑천을 모두 드러내게 하는 녀석이라 했지요."
"맞네. 특히 검술과 마력의 컨트롤은 여느 교수들보다도 뛰어나다고 하더군.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이 아니라 백을 깨우친다고들 하니, 세기의 천재라고 교수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해."
"그 생도가 지휘학과에 온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그러니 자네도 밑천이 털리지 않도록 잔득 주의해야 할 거야!"
크로노스의 말에 벤자민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저는 어디까지나 생도들의 마음가짐을 교육할 뿐입니다. 그 정도 생도라면 제가 딱히 건드릴 게 없을 지도 모르겠군요."
"이런, 자네까지 그러면 어쩌나? 그래도 자네는 제국 기사단장 출신이지 않나."
"적응하지 못하고 도망친 모지리일 뿐입니다."
"쯧쯧... 그때 내 말했잖나? 자네는 제국의 기사단 따위보다 모험가가 되는 게 천성일 거라고."
"하하, 그때 그 충고를 들을 걸 그랬습니다."
오랜만에 스승을 만났기 때문일까?
벤자민은 크로노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나저나 슬슬 생도들이 찾아올 시간이군."
"그렇군요."
"그래도 자네가 보는 눈 하나는 있지 않나. 특히 자네가 있던 칼바람 기사단은 재능이 상당한 이들로 모여 있다고 들었는데."
"황궁에 발을 들이는 이들의 재능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닙니까. 이미 가공된 원석을 가지고 왔을 뿐입니다."
"이 사람이 겸손은."
"그래도, 이따금 발굴되지 않은 원석을 보는 것도 재미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게. 때로는 나중에서 발견되는 원석도 있을 따름이니."
"예."
그 말을 끝으로 벤자민은 스승에게 인사를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원석이라...."
제국의 권력 다툼에 지쳐 은퇴한 벤자민에게는 자그마한 소망이 있었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그 역겨운 권력 다툼의 중앙에 있을 어느 한 사람.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인재가 있다면, 그런 인재를 설득시켜 붙여 주고 싶다는 정도의 소망.
자신처럼 나약하게 도중에 떨어져 나가는 도망자가 아니라, 든든하게 그 사람을 곁에서 보좌해 줄만한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화
8화 학과 시험 (1)
"음냐."
메이어 디라일라는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에 사 온 머핀을 한입에 처리하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오물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네가 그런 것도 먹냐?"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디라일라는 인상을 팍 썼다.
"머미까. 사라 바 머느데."
"쯧, 다 먹고 말해라. 품격 없이."
목소리의 주인은 아르민 N 폴론.
제국 출신의 남작가 자제였다.
디라일라는 어느새 자신의 옆에 선 이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건들거리는 태도도 태도지만, 무엇보다....
"내 밑으로 들어오면 그런 건 배터지게 먹게 해 준다니까?"
평소에는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로 행동하면서, 또 실력은 실력대로 본답시고 자신을 영입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 왔기 때문이다.
꿀꺽.
"뭡니까. 사람 밥 먹는데. 관심 없다니까요."
부유한 상인 가문의 자제인 폴론은 돈으로 사람을 사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곤 했는데, 이는 디라일라가 혐오해 마지않는 일이었다.
"비싸게 굴긴. 어차피 갈 곳도 없으면서."
그리고 이렇게 거절하면 꼭 저따위 말을 내뱉는데, 마음 같아서는 뒤집어엎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일단 귀족과 평민 간의 신분 차이도 있지만, 저 갈 곳이 없다는 말에 부정할 수 없는 게 디라일라의 처지였기 때문이다.
하프 이종족.
디라일라의 평생을 쫓아다니는 꼬리표 때문이었다.
당장 머핀을 씹던 이빨부터가 인간들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짐승의 그것처럼 뾰족하고 딱딱한 이빨.
지하에 사는 고대 이종족, 지하인의 피가 절반 섞여 있는 디라일라의 특징이었다.
이 특징 때문에 디라일라는 어디를 가든 눈총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나, 제법 아카데미에서 성적 좀 내고 있지 않나... '
지극히 객관적인 시선이었지만, 사실 그녀의 자기평가는 상당히 과소평가되어 있었다.
적어도 실기와 필기를 합치면 아카데미 내에서도 그녀보다 윗줄에 있는 이들은 열 손가락을 넘지 못했으니까.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봐라. 내가 지휘학과에 들어가서 너를 받아 주면 그나마 부족한 수행 평가 점수도 받을 수 있을 거 아냐."
니 새끼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세요.
"그러니까 괜히 헛짓거리 하지 말고 나한테 붙어. 솔직히 나처럼 너 같은 걸 편견 없이 봐 주는 사람이 또 어디 있어?"
지랄은 1절만 해도 충분한데 왜 이 새끼는 2절, 3절까지 가려는 걸까.
이마의 실핏줄이 터질 것 같은 감각에 디라일라가 마음속으로 평온을 되새기는 사이, 한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어, 저 사람인가?"
"누구?"
"저기 저 금발벽안의 미남. 소문의 클라인 아니야?"
"아? 진짜? 어떻게 알아?"
"어릴 때 연회에서 본 적이 있거든."
"대박."
디라일라와 폴론의 근처에 있던 신입생도들이 정문을 바라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클라인.
그 말도 안 되는 재능은 이미 아카데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외부에서도 그 압도적인 재능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생도였다.
주변에서 그런 클라인을 동경과 선망어린 시선으로 보는 생도들이 디라일라의 눈에 제법 들어왔다.
참... 자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어딜 가든 저렇게 선망 어린 시선을 받겠지.
조금은 부럽다….
만약 자신에게도 저런 명성이 있었더라면 폴론 같은 멍청이가 달라붙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때, 폴론이 그런 신입생들에게 다가갔다.
"너희들, 클라인은 처음 봐?"
"어, 네."
"처음이에요."
"하하, 내가 저 녀석하고 좀 면식이 있어."
그런 폴론의 말에, 디라일라는 폴론이 말을 건넨 신입생도들의 면면을 살펴봤다.
다들 한 미모 하는 얼굴들이다.
그나저나 너, 진짜 클라인 알긴 하냐?
면식이라는 게 대련 수업에서 개처발린 기억을 면식이라 하는 건 아니겠지?
"전투학과에서도 검술에 있어서는 이미 교수님들을 뛰어넘었다고."
"와, 소문대로네요?"
"그치. 대단하지? 나도 몇 번이나 검술을 섞은 적이 있는데, 단 4합도 견디기 힘들었어. 교수님들도 쟤 상대로는 10합을 못 버티시지."
그치. 3합 정도는 버텼지.
그것도 같은 귀족으로서 존경한다며 3합만 봐주면 안 되겠냐고 빌었잖아, 이 빌어먹을 놈아!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신입생도들은 더욱 눈을 빛내며 폴론을 바라봤다.
"그럼 이제 아카데미에 나올 이유가 없지 않아요?"
"듣기로는 이미 유명 모험단이나 왕실에서 눈여겨보고 있다고 하더라. 쟤랑 3합 이상 겨룰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제법 이름 있는 모험단에서 연락이 온대. 나한테도 왔거든."
"와! 선배도 정말 대단한 분이셨네요!"
"후후, 뭘 그런 걸로."
그러던 중, 신입생도의 시선이 그런 클라인의 곁을 걷고 있는 셰인에게 향했다.
"근데 옆에 있는 분은 누군가요? 분위기가 되게... 고풍스럽네요."
"누구? 아. 머저리 셰인이잖아."
"네? 셰인이요?"
세기의 천재라 알려진 클라인의 곁에 서 있는 셰인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사람이었고, 폴론은 또 한 번 아는 척을 하며 입을 나불거렸다.
"그래. 지 동생의 재능을 질투하는 머저리 셰인. 머리는 제법 똑똑한데, 마력 친화력이 부족해서 5년이 되도록 아직도 2서클에 불과하지. 그러면서 지 동생은 질투해서 이것저것 해 보려는데, 죄다 실패해."
"아... 그랬군요."
"쟤는 무시하고 다녀. 어차피 성격도 더러워서 누구랑 붙어 다닐 인간도 아니니까."
"조언 감사합니다!"
디라일라는 그런 폴론의 말에 잠시 과거를 회상해 봤다.
저놈. 클라인에게 진 뒤에 바로 셰인한테 대련을 신청했었지, 아마?
디라일라의 기억이 분명하다면 2서클 마법사와 10분 이상 대련을 했던 게 바로 폴론이었다.
'그때 뭐라 했었지? 자기도 마법을 배운다고 마법만 쓰겠다고 했던가?'
폴론의 검술은 제법 뛰어났지만, 마법도 그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간신히 2서클 마법을 펼치는 정도일까?
당시에 셰인에게 한참 고전하다가, 결국 거리를 좁히고 격투술로 셰인을 제압했던 폴론이었다.
한편, 디라일라는 그런 셰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클라인이 유명인사인만큼, 그의 형인 셰인 또한 항상 화두에 오르내렸다.
당장도 클라인을 주제로 이야기하던 생도들이 옆에 서 있는 셰인에게 멸시의 시선을 보냈다.
디라일라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남이야 뭘 하고 살든 말든 자기 일이나 잘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쟤도 참 인생 피곤하겠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셰인을 보던 중, 디라일라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저 녀석, 원래 저런 분위기였나...?'
남들보다 감각이 뛰어난 디라일라는 마지막으로 셰인을 봤던 기억을 떠올려 봤다.
딱히 말을 주고받은 적은 없지만, 같은 수업을 들으며 옆에서 봐 왔던 기억이 있었다.
그땐 뭐라 해야 하나.
좀 우중충하고 세상의 모든 걸 짜증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 같았다고 한다면....
지금은 표정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자신을 향한 시선을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뭐, 내가 알 바는 아니지. 지금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시선을 돌리려 할 때.
문득 디라일라는 주변이 조용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선을 돌려보니, 잔뜩 위축된 표정으로 서 있는 폴론이 고개를 바닥으로 향하고 있는 게 아닌가.
"...?"
비단 폴론뿐만이 아니라, 그런 폴론의 TMI를 듣고 있던 여생도들도 시선을 슬며시 돌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쭉 훑어보는 셰인의 모습이 보였다.
"어우, 무슨 사람 눈빛이...."
아까처럼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은 무표정이었지만.
디라일라는 본능적으로 고개가 숙여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뭐라 해야 할까.
꼭, 맹수가 지그시 자신을 내려 보고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다만 침묵은 아주 잠깐뿐이었기에 교내는 다시금 떠들썩한 소리로 가득해지기 시작했고, 어느새 셰인은 쓴웃음을 머금은 클라인과 함께 자리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쯧쯧...."
셰인에게 별 관심이 없던 생도들은 각자 제 갈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반면 셰인의 험담을 입에 담고 있던 이들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무안하다는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중에는 폴론도 껴 있었다.
* * *
클라인은 지금의 상황이 불편했다.
아카데미에 오자마자 클라인과 셰인이 받은 상반되는 시선들.
최근 며칠 동안 셰인은 어쩐 일인지 자신에게도, 가문의 사람들에게도 살갑게 굴진 않을지언정 날을 세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카데미에서 이러한 시선을 받다 보면 또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 것이다.
그렇게 불안한 눈빛으로 셰인을 바라볼 때.
셰인이 지그시 입을 열었다.
"클라인."
"...예, 형님."
"그런 표정 지을 거 없다. 아니, 짓지 마라."
"예?"
"나는 더 이상 주변 사람들의 시선 따위, 아랑곳 하지 않을 것이다."
"...."
"그리고 때로는 네 그런 시선이 사람의 마음을 더욱 무너뜨린다는 것을 알아 두거라. 나는 불쌍하지 않으니까."
"...! 저, 저는 그럴 마음이...."
설마하니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그제야 클라인은 그동안 형님이 자신에게 보였던 태도를 떠올렸다.
혹시, 내 이런 태도가 오히려 형님을 더 불편하게 만들어왔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셰인은 그런 클라인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찰나에 지나가서, 집중한 채로 보지 않았더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미소였다.
"난 이제 괜찮다."
"...죄송합니다, 형님."
"됐다. 저들의 시선 또한 결국 시샘에 불과하니. 너를 이길 수 없기에 너와 비교되는 사람을 찾는 거고, 그게 나일 뿐이다.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지. 나는 스스로의 비굴함도 눈치채지 못하고 남을 질투하는 머저리들에게 상처 입지 않을 것이다."
질투 그 자체였던 셰인이다.
고작 저따위 질투에 상처를 받는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웃기지 않겠는가.
"...."
그러면서, 셰인은 방금까지 클라인에게 지어 줬던 미소하고는 전혀 다른, 조금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주변을 훑어봤다.
그런 셰인과 클라인의 대화를 들었음일까.
혹은 무저갱처럼 그 끝을 알 수 없는 셰인의 눈빛 때문일까.
생도들은 일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뭐, 뭐야. 듣던 거랑 완전히 다른데?'
'사람 눈이 무슨....'
'서, 선배? 정말 머저리가 맞아요?'
'어우....'
그렇게 눈빛만으로 생도들의 시선을 돌리게 만든 셰인은 보란 듯이 클라인을 봤고, 클라인도 쓴웃음을 머금었다.
비록 그가 바라는 만큼 셰인에게 사교성을 요구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상처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클라인은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험장에 도착한 뒤.
시험장에는 그들 외에도 다수의 생도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셰인과 클라인의 또래였다.
모두 셰인과 클라인처럼 아카데미 5년차 생도들이다.
"다 온 것 같군. 환영한다. 나는 올해서부터 지휘학과의 수석교수가 된 리바이 벤자민이라 한다."
그의 자기소개에 이곳에 모인 생도들은 벤자민의 얼굴을 본 적도 없으면서 그를 알아봤다.
제국의 기사단 중 하나인 칼바람 기사단의 단장!
비록 타국의 남작 출신이었지만, 오로지 실력 하나만으로 제국의 기사단장이 된 전대미문의 인재였기에,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름을 들어 봤을 인물이었다.
그 정도는 돼야 아카데미에 들어오자마자 수석 교수가 될 수 있는 걸까.
생도들은 하나같이 눈을 빛내며 그런 벤자민을 바라봤다.
한편, 셰인은 나름 속으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벤자민은 전생에도 셰인이 봤던 인물이었다.
치열한 전장에서, 스스로의 불꽃을 마지막까지 불태며 떠나간 노장.
비록 10년 뒤의 일이었지만, 당시 그를 상대했던 셰인의 군단은 고작 단 한 사람으로 인해 5일이나 진군을 늦춰야만 했다.
잠시 그때를 회상하던 셰인은, 새삼 다른 감정으로 벤자민을 바라봤다.
그 전까지의 벤자민은 재능이 썩 뛰어난, 남들보다 영혼이 조금 더 강한 사람에 불과했으나.
당시 전장에서 보여 줬던 벤자민의 영혼은 셰인조차도 타락으로 물들일 수 없을 만큼 강건했다.
'미래의 인재로군.'
이번 삶을 살아가면서 미래에 도움이 될 만한 인재가 눈에 띄는 것은 나름대로 셰인에게 신선한 재미를 선사했다.
한쪽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클라인의 곁에 서 있는 알렉스도 그중 한 명이었으니까.
전생에는 허무하게 사그라진 그 영웅의 영혼들을, 셰인은 결코 그리 보내지 않을 예정이었다.
셰인이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벤자민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이제부터 너희는 학과 시험을 봐야 한다. 만약, 학과 시험에 통과하게 되면 앞으로 나와 함께 1년 동안 지휘학에 대해 배우게 될 것이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9화
9화 학과 시험 (2)
벤자민은 생도들의 얼굴을 면밀하게 살펴봤다.
대부분은 눈을 빛내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셰인처럼 별다른 감정 없는 표정이기도 했다.
"지휘학은 아카데미에서 가장 뛰어난 생도들만이 들어올 수 있다. 그러니 시험의 기준은 아주 엄격할 것이다."
이어지는 벤자민의 설명은 이러했다.
이제부터 생도들은 골렘술사가 만든 전투인형들을 고르고, 환영 마법으로 이루어진 인공 던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 인공 던전을 얼마나 이상적인 형태로 클리어 하느냐를 두고 채점을 할 것이며, 이 결과는 모든 생도들에게 개방된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알고는 있었는데...."
"역시 점수가 전부 까발려지는 건 좀 그렇군."
지휘학과에 지원하는 학생들 대부분은 귀족 출신의 생도들이다.
그러다 보니 자존심 또한 강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는 꼭 필요한 절차였다.
비단 이번 시험뿐만은 아니다.
앞으로 지휘학과에서 모든 점수는 타학과 생도들에게 공개된다.
이유는 아카데미의 존재 이유하고도 제법 연관이 있었는데, 연합국에 존재하는 아카데미는 다른 일반적인 아카데미들과 다르게 사관학교에 가까웠다.
생도들의 주적은 다름 아닌 던전의 몬스터들.
이 세계는 아직 미지가 많은 세계다.
인간들이 차지하고 있는 구역은 얼마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던전의 집합체, '요람'에 의해 봉인되어 있다.
인류는 점점 불어나고, 그에 따라 땅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니.
그로 인해 긴 시간 동안 대륙이 전쟁의 화마로 뒤덮였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찾아온 평화의 시간. 인간들은 더 이상 무의미한 피를 흘리기보단 '요람'을 토벌하고 땅을 넓히기로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렇게 여러 국가가 모여 만들어진 게 바로 연합국이었으며, 그런 연합국의 아카데미는 당연히 던전의 클리어가 주목적이 됐다.
그런 만큼 지휘관은 모든 전력을 통괄하는 자리로서 철저한 실력자만이 생도들을 영입해 직접 팀을 꾸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그러니, 지휘학과의 생도는 다른 생도들에게 자신의 실력을 어필해야 하고, 뛰어난 팀원을 받아들이려면 스스로 실력이 뛰어남을 보여야 했다.
철저한 실력주의 학과.
그게 바로 지휘학과였다.
셰인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 또한 그런 실력주의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이유에서였다.
여태까지 남들보다 부족하다고 알려진 자신의 이미지를 단번에 바꾸기엔, 이런 지휘학과의 시스템이 더없이 잘 어울렸으니까.
"던전의 종류는 하나다. 여기에 던전에 대한 설명서가 있으니, 가져가도록."
벤자민의 말에 5년차 생도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벤자민의 앞에 놓인 설명서를 가지고 갔다.
"형님 것도 제가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래라."
굳이 거절할 것도 아닌 일이라, 셰인은 가만히 앉아 있다가 클라인이 가져온 설명서를 읽었다.
전생의 셰인은 지휘학과에 지원하지도 않았고, 따로 그 시험에 대해 알아볼 정도로 주변에 관심이 많았던 것도 아닌지라 시험에 관해서는 딱히 기억나는 게 없었다.
"흐음."
"설명도 나름 친절하군요."
"그렇구나."
설명서의 내용은 심플했다.
생도별로 포인트가 총 1천 포인트까지 지급되며, 그 포인트를 이용해 여러 타입의 골렘을 차출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던전의 종류는 땅에 굴을 파고 사는 커스 고블린 던전이었다.
그저 고블린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던전은 여타 다른 평범한 던전들과는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포인트로 골렘을 대여하고 싸운다라."
"전투에서는 오로지 골렘만 써야 하는 것 같습니다. 본인의 힘으로 몬스터를 제압하면 탈락이라 하는군요."
"그렇구나. 너는 어떤 골렘을 가지고 갈 생각이냐."
"고블린들이 다니는 땅굴이니, 날렵한 타입을 위주로 할 생각입니다."
괜찮은 선택이었다.
고블린이 사는 지형은 주로 천장이 낮고, 통로도 비좁은 게 일방적이었으니.
"형님은 어떤 타입을 고르실 생각입니까?"
"음."
설명서를 보던 도중 떠오른 방법이 있긴 했다.
그렇게 무심코 입을 열려던 그때.
문득, 오늘 클라인이 보였던 태도를 떠올렸다.
생도들의 시선에 걱정부터 하는 클라인의 모습.
어쩌면 자신의 딱딱한 이미지가 클라인에겐 부러지진 않을까 걱정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럴 땐, 조금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 줘도 되겠지.'
호기심이 들기도 했다.
이런 말을 하면, 녀석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비밀이다."
"예?"
"비밀."
그러면서, 셰인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퍽 장난기 있는 모습에, 클라인은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바, 방금 그거.
장난이라고 치신 건가?
어떻게 받아야 하지?
살면서 단 한 번도 셰인에게 이런 장난을 받아 본 적 없던 클라인은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고.
셰인은 그 모습이 웃겨 더더욱 미소를 지었다.
* * *
인공 던전에 들어가면 본인의 무력은 쓸 수 없기에, 생도들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골렘을 선택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벤자민은 앞서 다른 교수들에게 인적 사항을 체크한 생도들의 얼굴을 찾아다녔다.
그중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인물은, 클레이튼 L 클라인.
역대 최고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알려진 천재 중의 천재.
그 외에도 다양한 생도들이 찾을 수 있었다.
'린트베르크 J 아네이스. 총장이 말했던 그 사람의 딸인가.'
같은 제국의 기사단 출신으로서, 모를 수가 없는 린트베르크라는 이름.
실제로 제국 내에서도 린트베르크라는 이름은 모르는 이들은 없을 정도로 드높았다.
그런 사람의 딸이라고 하니 자연히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앞서 교수들에게 인적 사항을 들은 생도들이 눈에 들어왔다.
눈밑까지 내려온 다크서클에 우중충한 얼굴을 한 베른슈타인 후작가 가문의 차남, 베른슈타인 오스튼.
신체적 능력은 절망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으나, 머리는 쓰는 데 있어서는 도가 튼 소년이었다.
앞서 교수들도 놀라게 만든 논문을 만들었다고 했던가.
제국의 남서쪽을 지키는 볼드윈 가문의 장남과 현 마탑주의 손녀도 이어서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단언컨대 이중 가장 기억에 남을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저건... 뭐 하는 짓이지?"
검은 머리를 뒤로 묶어 늘어뜨린 로즈베리색 눈동자를 지닌 소년.
클레이튼 R 셰인.
어느새 생도들이 각자의 골렘들을 고르고 자리로 돌아갔을 무렵.
가장 뒤늦게 고른 셰인은, 비단 벤자민 뿐만이 아니라 여타 다른 생도들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었다.
* * *
베른슈타인 오스튼은 멍하니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도중, 주변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평소 생각이 많아 멍한 표정을 짓는 일이 많은 그였다.
"하하, 저거 진짜냐?"
"완전 미친놈이네."
"또 어떻게든 자기 동생보다 시선 좀 끌어 보겠다고 저러는 것 좀 봐라."
"저러니 머저리 소리를 듣지."
앞서 골렘의 선택을 끝마친 생도들은 전방을 주시하며 누군가를 한참 비웃고 있었다.
오스튼도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눈으로 시선을 돌린 곳엔 클레이튼 R 셰인이 있었다.
그 유명한 클라인의 형이었다.
"조금... 특이하네."
평균적으로 생도들이 고른 골렘의 수는 적에는 10기, 많게는 20기 사이를 맴돌았다.
당장 방금까지만 해도 가장 적은 수의 골렘을 소유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오스튼, 바로 자신이었다.
그는 총 11기의 골렘을 선택했다.
그러나 당장 셰인이 고른 골렘의 수는 고작 3기뿐.
그러니 응당 생도들의 비웃음을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땅굴이라고 인원을 최소화하려고 한 건가?"
"그래 놓고 덩치 큰 엘리트 대검 전사는 왜 뽑은 거지?"
"진짜 멍청하네."
들려오는 소리에 오스튼의 시선이 잠시 그쪽으로 향했다.
분명 이름이....
'폴론이었나.'
제국 출신의 남작가 자제.
오스튼이 폴론에게 시선이 끌린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오스튼 또한 엘리트 대검 전사를 선택했기에, 자연스레 잠시 시선이 끌렸을 뿐.
그러자 폴론은 그런 오스튼의 시선이 못마땅했는지 표정을 잔뜩 구겼다.
"뭘 봐?"
"아, 아무것도."
"쯧."
그렇게 혀를 한 번 차고는 다시금 자신의 동료들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시금 시선을 셰인에게 향한 오스튼은 잠시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 봤다.
마력을 쓸 수 없는 마력불능자인 오스튼이었지만, 그는 머리를 쓰는 것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다.
당장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수천 가지의 던전들이 들어 있었고, 그 던전의 클리어 방법과 자신이 직접 고안해 낸 공략법 또한 존재했다.
자신이라면 저 정도 병력만으로 던전을 클리어 할 수 있을까?
클리어 자체는 가능할지 몰라도, 제한시간 안에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마력을 쓰지 못한다는 자신의 조건 내에서 일어나는 일.
만약 마력을 쓸 수 있다면?
오스튼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본래 있던 자신의 계획을 구성하고, 그 위에 가정을 더한다. 그리고 그 끝에 이어지는 정답은?
'...과연, 머저리가 되는 건 누구일까.'
오스튼은 머릿속으로 정해 뒀던 자신만의 경계대상에, 셰인이라는 두 글자 이름을 추가했다.
위험도는, 가장 위에 적혀 있었다.
* * *
던전 내부로 발을 들이자마자 셰인이 내린 평가는.
"꽤 잘 구현해 놨군."
정도였다.
축축한 바닥의 감촉, 땅굴 내부에 진동하는 지독한 냄새, 어두운 땅굴에서도 시야를 밝혀 주는 발광이끼까지.
어지간한 실력이 아니고서야 결코 구현할 수 없을 법한 환경에 셰인은 짧은 감탄사를 내뱉고는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땅 밑으로 옅은 진동이 느껴졌다.
마치 저 깊은 지하에 드래곤이 울기라도 하듯.
결코 좋은 징조는 아니었기에 셰인은 그 자리에 멈춰 서 상황을 응시했다.
우르르르르르-
아니나 다를까.
땅에서 느껴지는 진동이 점차 심해짐에 따라 땅굴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셰인은 뒤에 서 있는 골렘들에게 명령했다.
"내가 손을 올리면 호흡을 참도록."
"...."
"...."
딱히 목소리로 화답하진 않았으나, 골렘들의 심장 위치에 심어진 푸른 마력석이 붉은빛으로 바뀌었다.
명령을 수행 중이라는 의미다.
이윽고 땅의 진동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지금."
벽면의 구명에서부터 녹색 연기가 터져 나왔다.
셰인도 함께 숨을 참고 눈을 가늘게 떴다.
동시에 발광이끼에서 보다 밝은 녹색 빛이 흘러나오며 점차 연기가 사그라졌다.
땅굴 전체를 감싸고 있던 지독한 냄새의 원인.
바로 땅속에 매립되어 있는 대량의 독기 때문이었다.
이곳의 발광이끼들은 바로 이러한 독기를 주 영양분으로 살아갔고, 사람들은 흔히들 이곳을 세이브 존이라고 불렀다.
"이제부터 시작이로군."
하루에 4번씩. 일정한 주기에 따라 터지는 이 독기는 커스 고블린들의 천연 요새가 되어 주었다.
그러니 이제 막 독기가 사라진 지금이 앞으로 나아갈 타이밍이었다.
더구나 이곳이 언제까지고 안전하다 볼 수는 없었다.
삼 일에 한 번씩 발광이끼가 포자를 터뜨리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때는 독기를 흡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당연하게도 전멸.
시험은 탈락이다.
"지금쯤 다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겠어."
고작 삼 일 안에 클리어 해야 하는 던전.
이런 던전을 주로 스피드런이라 불렀고, 시험에도 안성맞춤인 형태였다.
다급함만큼 사람의 본질을 알아보기 쉬울 때가 없을 테니 말이다.
'작년까지의 시험은 이 정도 난이도가 아니었을 텐데.'
이번 시험을 기획한 인물은 아주 지독한 인물일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셰인은 한가롭게 주변을 훑어보다 골렘들에게 딱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주변을 경계하도록."
그러고는, 자리에 앉아 녹색 빛을 띄우는 발광이끼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셰인은 발광이끼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0화
10화 학과 시험 (3)
"아오, 답답해. 저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조교수 알프렌은 자신의 앞에 떠 있는 마법 화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화면에는 다양한 각도로 인공 던전에 들어가 있는 생도를 촬영 중이었는데,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클레이튼 R 셰인.
소문의 클라인의 형이었다.
어느덧 조교수의 일을 시작한지도 5년 차.
다양한 생도들을 지켜본 조교수였지만, 단언컨대 저런 생도는 처음 봤다.
"벌써 3시간째 저러고 있네. 무슨 정신병이라도 있나?"
본래라면 지금 이 시기는 굉장히 바쁠 시기다.
교수들과 조교수들은 60명 가량의 생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기록하며 점수를 매기는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면 속 셰인은 벌써 3시간이나 같은 자리에서 멀거니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그걸 지켜보는 알프렌도 답답하다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당장 기록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셰인이 무얼 하든 그 자리에서 꼭 보고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아... 쟤들은 바쁘네."
알프렌은 힐끔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동료를 바라봤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표정과 다르게, 동료 조교수는 진득한 자세로 자신과 비슷한 마법 화면을 바라보며 상황을 기록하는 중이었다.
동료 조교수가 담당한 생도는 베른슈타인 오스튼.
아카데미 내에서 머리로는 당할 자가 없다 할 정도로 뛰어난 생도였으나, 마력을 다룰 수 없는 마력불능자라는 치명적인 단점 또한 함께 있는 생도였다.
선천적으로 마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신체.
그 때문에 소문으로는 가문에서도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자식이라 한다.
그의 아카데미 행은, 사실상 가문에서 배푼 마지막 자비였던 셈.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똑똑하다면 가문에서도 쓸 만하지 않겠냐고.
그러나 귀족 사회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게 문제였으니.
대부분의 귀족 가문은 자식 중 한 명이 가문의 대를 이으면, 남은 형제자매들은 모두 가문을 떠나 야인의 삶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언제 자신의 등에 비수를 꽂아 자리를 차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머리가 비상한 자를 옆에 둔다?
하물며 남작가, 자작가도 아닌 국왕의 사촌쯤 되는 핏줄을 이은 후작가가?
언어도단.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오스튼은 아카데미 내에서도 소문난 공부벌레였다.
하루라도 도서관에 들르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였으니, 하루의 시작을 도서관에서 시작하고 폐관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다가 몇 권의 책을 매일같이 대여해 간다.
그러니 항상 눈가에 다크서클이 사라질 날이 없는 것이다.
그런 오스튼의 성실함은 조교수들 사이에서도 유명할 정도였다.
"이런 게 부러울 때가 다 있네...."
뭐라도 하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한 탓에, 알프렌은 괜히 입맛을 다졌다.
또 다른 생도를 관찰하는 동료 조교수도 보였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까, 그의 주변에는 제법 뛰어난 생도들을 관찰 중인 조교수들이 있었기에.
이 지루한 시간을 조금씩 한눈을 팔며 다른 생도들의 활동을 지켜보던 알프렌은 새롭게 눈에 들어온 인물을 흘겨봤다.
"린트베르크 J 아네이스라...."
제국에서 여러 의미로 이름 높은 저지먼트 기사단장의 자녀.
지금은 세상을 떠난 린트베르크 K 로버트의 딸인 아네이스 또한 아카데미의 유명인사 중 한 명이었다.
만약 클라인이 없었다면 아카데미 최고 우등생은 분명 아네이스였을 것이다.
그녀는 지난 5년 동안 단 한 번도 순위 밖으로 이름이 내려간 적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언제나 클라인의 뒤에 이름을 올렸고, 필기 성적에 있어서는 대부분 오스튼에게 밀릴 때도 있었지만 언제나 성적은 뛰어났다.
당장만 보더라도 아네이스는 뛰어난 전술로 커스 고블린을 돌파하며 최선두로 나아가고 있었다.
심지어 그 클라인과 오스튼보다 빠른 속도였다.
그만큼 동료 조교수는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기입하고 있었다.
"저건 별로 안 부럽네...."
앞으로 던전의 클리어가 나오려면 적어도 이틀은 더 두고 봐야 하는 상황.
그런 마당에 계속 저런 페이스가 유지된다면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곤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 상황이 좋은 건 아니지."
알프렌은 여전히 화면 속에서 땅만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는 셰인을 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 더 지난 후의 일이었다.
* * *
"지, 지금쯤 최선두는 아, 아네이스가 달리고 있으려나...."
11기의 골렘들이 질서정연하게 커스 고블린을 정리 한 직후, 오스튼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오스튼은 이번 지휘학과 시험에서 수석을 노리고 있었기에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마음이 급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거기까지는 그의 계산 내에 들어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네이스는 평소에 말수도 적고 고분고분한 편이지만, 행동하는 데 있어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때문에 남들은 커스 고블린이 파둔 함정을 경계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시간에, 저돌적인 돌진으로 그러한 함정을 무력화시키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저 무식하기 때문에?
그럴 리가.
아네이스는 클라인과 오스튼 때문에 평가절하된 부분이 있을지 몰라도, 객관적으로 봤을 땐 어지간한 중견 모험단의 단장보다도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
마력 컨트롤 또한 어마어마하고, 직감도 날카로운 탓에 어지간한 함정이 아니고서야 아네이스가 그런 함정에 시간을 잡아먹힐 일은 없다.
그 외에도 오스튼의 머릿속에는 다양한 생도들의 평소 실력을 토대로 시뮬레이션이 돌아갔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 그런 오스튼의 머릿속을 들여다봤다면, 소름이 돋다 못해 두려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의 시뮬레이션의 결과는, 당장 조교수들이 모여 있는 상황실의 내용과 크게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생도들의 패턴, 성향, 그들이 고른 골렘의 종류와 숫자.
그 모든 것이 오스튼에게는 굳이 볼 거 없는 미래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에도 예측하기 힘든 인물이 있다면, 다름 아닌 셰인의 존재였다.
"그, 그 사람은... 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어느 정도 예측은 되었다.
그러나 당장 그가 어떤 성과를 보였을지는 그런 오스튼조차 쉽사리 장담할 수 없었다.
"마, 만약....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그게 맞다면."
그리고 그게 지금쯤 순조롭게 진행 중이라면.
셰인의 클리어 속도는, 이후 자신조차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를지도 모른다.
오스튼은 그렇게 판단했고, 놀랍게도 그런 그의 예측은 몇 시간 후에 저절로 증명되었다.
* * *
몇 시간 뒤.
한편, 모두가 오스튼처럼 태평하거나 아네이스처럼 빠르게 던전을 주파해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의 생도들은 처음 겪어 보는 던전에 당황하거나, 자신들이 책이나 남들의 입담으로 전해 들은 것으로 배운 것과는 다르게 현장에서 부딪치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난감함을 표할 때가 많았다.
"이런 씨발...."
대표적으로 폴론이 그러했다.
처음에 기세등등하게 커스 고블린을 처리할 때까지는 좋았다.
난폭하긴 하지만 그래 봐야 고블린이었고, 골렘들의 실력도 생각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폴론은 골렘의 성능과 뛰어난 자신의 지휘 실력이라면 못해도 이틀 안에는 던전을 클리어 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그러나 이는 큰 착각이었다.
폴론은 골렘이라는 생각에 체력 배분을 생각지 못했고, 골렘술사가 설정해 둔 '체력'이 한계치에 다다를수록 실수가 늘어나며 부상당하는 골렘들도 늘어났다.
그 차이를 인지하는 게 너무 늦었고, 제대로 인지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너무 던전의 깊숙한 곳에 들어온 이후였다.
그때부터는 휴식을 취하고 싶어도 제대로 취할 수가 없었다.
땅굴 내에 온통 피 냄새가 진동을 하자 커스 고블린들이 벌떼처럼 몰려오기 시작한 탓이었다.
흔적을 지우는 등의 역할을 하는 아처 골렘들은 커스 고블린이 흥분한 타이밍을 모르고 따로 정찰에 보냈다가 정리당한 상황.
벌써 커스 고블린이 주변을 모두 포위한 모양인지, 후방으로 보낸 골렘들조차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남은 전력은 15기.
처음 던전에 들어왔을 무렵 21기의 골렘을 가지고 왔던 걸 생각하면 벌써 6기나 잃어버렸다.
그것도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말이다.
심지어 부상을 당하지 않고 멀쩡한 골렘은 고작 8기뿐이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사실, 폴론 정도의 실력이면 분명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아직까지 던전에 직접 들어간 적도 없고, 지휘를 해 본 적도 없던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인재에 속한다.
그저 잃기만 한 게 아니라, 폴론 또한 나름 생도들 중에서 빠르게 던전을 주파한 쪽에 속하니 말이다.
그러나 폴론이 이렇게 초조해하고 있는 이유는 작년의 시험과 다르게 이번 시험의 난이도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쯧.... 지금쯤이면 다른 놈들도 고생하고 있겠지."
폴론이 짜증을 내면서도 머릿속으로 이후의 일을 차근차근 정리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허공에 알림이 울렸다.
[띠링- 안내드립니다.]
"깜짝이야! 뭐, 뭐야?"
마치 머리에 직접 울리는 듯한 딱딱한 여성의 목소리에 폴론이 몸을 크게 움찔거리다 이내 정신을 차렸다.
"잠깐. 분명 아까 설명서에 안내음이 들리긴 한다고 했는데...."
폴론이 알기로, 이러한 안내음은 벌써 들려올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면 무슨 시험에 사고라도 일어난 건가?
그런 생각이 찰나에 지나갔으나.
[현재 시각 오후 오후 11시 55분.]
[첫 번째 던전 클리어가 이루어졌음을 알려 드립니다. 이상입니다.]
"미친?!"
이어지는 안내음은 이변 따위는 없다는 듯 담담한 목소리로 그러한 사실을 알렸고.
그와 동시에 아직까지 탈락하지 않은 50여명의 생도들은 일제히 얼굴에 경악한 표정이 되었다.
유일하게 표정에 변화가 그리 크지 않았던 사람이라고는.
"하아, 역시."
어느 정도 이런 상황을 예지에 가까운 예측을 했던 베른슈타인 오스튼과.
"...빠르네."
여전히 지휘에 집중하며 작은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린 린트베르크 J 아네이스.
그리고.
[클리어를 축하드립니다.]
해당 안내음을 듣고 있던 셰인뿐.
평균적으로 던전 진행률이 3분의 1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의 일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1화
11화 학과 시험 (4)
인공 던전을 지켜보고 있던 상황실에 비상이 걸렸다.
"미친! 지금 몇 시야?"
"시험 시작하고 15시간 47분!"
"고작 16시간 만에 던전 하나를 클리어 했다고? 진짜?"
"빨리 교수님들께 알려!"
알프렌은 허둥지둥 발걸음을 옮겨 교수 휴게실로 향했다.
평소라면 던전 클리어가 진행되더라도 교수를 깨우러 가는 일은 없었겠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교, 교수님!"
"음. 알프렌. 무슨 일인가?"
한때 기사단장이었던만큼, 다급한 알프렌의 발걸음 소리에 이미 잠에서 깨 있던 벤자민이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행시간 15시간 47분. 던전을 클리어 한 생도가 나왔습니다."
"...15시간 47분이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표정에 변화가 없던 벤자민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렸다.
"최단 기록이로군."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복장을 갖췄다.
"알프렌. 역대 지휘학과 시험에서 가장 짧은 클리어 타임이 몇 시간이었지?"
"이, 26시간 21분이었습니다."
"거의 10시간을 단축시켰구먼."
물론 역대 시험 모두 던전의 타입과 몬스터의 동료가 제각각이었으나, 기본적으로 던전은 짧으면 이틀, 길게 잡으면 일주일 정도는 소요된다고 봐야 한다.
그런 마당에 고작 16시간?
벤자민은 수많은 던전을 경험했고 또 들어왔다.
던전에 들어가는 이들의 실력에 따라 클리어 속도가 천차만별일 테지만, 그 벤자민조차도 셰인과 똑같은 조건으로 던전에 들어간다면 그 안에 끝낼 자신은 없었다.
"기록일지는 가지고 왔나?"
"예, 예. 여기 있습니다."
맨 처음, 셰인이 던전에 들어갔을 때 있던 일에 대한 설명이 주르륵 나열됐다.
이는 여태껏 셰인의 행동을 하나하나 상세히 기록하던 알프렌이 고생한 흔적이었다.
"그러니까, 함정으로 가득한 땅굴에 또 함정을 파서 커스 고블린을 처리했다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셰인이 데리고 간 세 개체의 골렘.
다만 셰인이 고른 골렘은 하나하나 모두 값비싼 골렘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 번째는 어둠에 몸을 숨기고 움직이는 암살자, 다른 하나는 흙마법에 능통한 마법사, 마지막 하나는 거대한 대검을 든 엘리트 전사였다.
암살자와 엘리트 대검 전사의 경우에는 각각 150포인트가 들어갔고, 마법사는 200포인트나 날아갔다.
그렇게 남들은 10~20개체의 골렘을 데리고 갈 때, 셰인은 500포인트를 남겨 두고 단 세 개체의 골렘만 들고 간 것이다.
이를 보고 여타 다른 생도들은 비싼 골렘만 가지고 가면 던전이 클리어되는 줄 아느냐며 비웃었지만, 실은 모두 계획된 일이었다.
흙마법사와 암살자를 이용해 커스 고블린들이 설치한 함정을 교묘하게 바꾸어 도리어 커스 고블린이 함정에 걸리도록 유도했다.
그 결과 평소처럼 안전한 줄 알고 지나가던 커스 고블린이 함정에 빠져 즉사했고, 셰인은 그 뒤로 한 마리는 중상만 입힌 채, 다른 함정으로 고블린들을 유인해 왔다.
"운영에 있어서 능력이 말도 안 될 정도로군...."
셰인의 깔끔한 행동에 벤자민은 입을 다물지 못 했다.
이게 정말 던전에 처음 들어간 생도가 생각할 수 있는 일인가?
적을 깔끔하게 죽이기보다, 활용성을 먼저 찾는다.
잔인함은 악독한 취향이지만, 셰인의 행동은 냉철한 잔혹함이었다.
"저 땅굴은 하루에 4번씩 일정한 주기에 따라 독기가 땅굴을 가득 메우지. 녀석은 그 시간도 정확히 계산했군."
"마, 맞습니다. 거기다 놀랍게도...."
"그래. 고블린이 주로 쓰는 마취제를 분연구에 쑤셔 넣었어."
그 결과, 분연구에서 독기가 터져 나오자, 그와 함께 마취제도 동굴을 가득 메웠다.
그러는 사이 셰인은 고블린들의 마취제와 함께 있던 해독제를 천에 적셔 마스크처럼 쓰고 다니며 던전을 활보했다.
"그런데 벤자민 교수님. 저건 괜찮은 겁니까?"
조교의 말에 벤자민은 피식 웃었다.
조교가 말한 것은, 셰인과 골렘들 전체에 씌워져 있는 발광이끼였다.
"지휘관이 직접 만들긴 했지만, 전투에 사용된 게 아니지 않나. 녀석은 규정대로 고블린에게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마취제가 퍼짐과 동시에 셰인은 멀뚱히 기다리지 않았다.
아무리 마취제를 분연구에 쏟아 넣었다 하더라도 커스 고블린은 기본적으로 신체에 마취제의 항체가 만들어진 몸이다.
일정 기간 몸이 굳긴 할 테지만, 그게 길게 지속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서부터 셰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바닥과 벽에 난 발광이끼를 몸에 두르고 독기가 아직 채 가시지도 않은 상황에 움직인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 보기엔 도박에 가까웠다.
"발광이끼는 땅 밑으로 자기들끼리 연결된 줄기가 있지. 발광이끼가 독기를 빨아들여 생명력이 강할 거라 착각들 하는데, 아니잖나."
"예. 조금만 줄기를 상하게 만들어도 줄기와 연결된 발광이끼들이 단체로 죽어 버리죠. 미세한 마력으로 연결된 녀석들이라, 마력에 민감한 사람이 아니라면, 혹은 그와 관련된 기술을 배우지 않았다면 낭패였을 겁니다."
"그렇지. 녀석은 그걸 알고도 발광이끼를 자신의 몸에 두른 것이고."
"그럼 처음에 몇 시간 동안 땅을 보고만 있던 것도...."
"그래. 발광이끼의 줄기들끼리 연결된 마력 패턴을 확인하고 있던 것이지."
"저는, 그게 가능하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누군가는 생각해 봤을 법한 일이지. 그걸 직접 행동으로 옮길지는 본인의 판단 여부겠지만. 녀석은 스스로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던 거고, 그걸 실현시킨 것뿐인 것이지."
제국의 기사단장직에 있던 벤자민은 수많은 인재들을 봐 왔고, 그들이 만들어 낸 놀라운 일들을 여럿 봐 왔기에 그리 놀라울 것도 없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천재가 있는 법일세."
그렇게, 셰인은 스스로 만든 마취제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고블린을 손쉽게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주술사 고블린을 마주하는 것까지 확인한 벤자민은 밖으로 나가 셰인을 맞이할 준비를 갖췄다.
* * *
"대단하더군. 채 하루도 지나지 않고서 던전을 클리어 할 줄이야."
"감사합니다."
셰인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벤자민의 칭찬을 받아들였다.
"그거 아나? 스피드런의 최고 기록은 26시간이었네."
"제가 10시간을 단축시켰군요."
"또 커스 고블린 던전의 클리어 방법에 대해 획기적인 발견을 하기도 했지."
"그렇습니까."
"26시간이라는 그 최고 기록을 누가 세웠는지 아나?"
당연히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기억할 셰인이 아니었기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대충 누구일지는 감이 잡혔다.
"이런 부분에서는 또 정보가 부족하군. 부끄럽지만 나일세."
"역시 그러셨군요."
"별로 놀라진 않는군?"
"벤자민 수석교수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뛰어난 안목과 적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는 지휘력. 이미 제국뿐 아니라 연합국에서도 유명하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벤자민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하나 묻고 싶군. 엘리트 대검 전사는, 마지막에 그 전투를 예상하고 데려갔던 건가?"
벤자민의 물음에 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전투.
던전의 끝에 도달했을 때 셰인이 마주한 것은 슬슬 마비 효과에서 거의 다 벗어난 주술사였다.
그러나 주술사 옆에 있던 다른 커스 고블린들은 아직 덜 깬 탓에 녀석을 제압하기까지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압'이라는 결과였다.
셰인은 거기서 당장 커스 고블린 주술사를 죽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잠시 두 눈을 감고, 마력의 흐름에 집중했다.
그렇게 주변을 주시하던 셰인은, 엘리트 대검 전사에게 명령해 한쪽 벽을 부수라 명했다.
잠시 후, 흙먼지가 일어나며 무너진 벽 너머로는 보랏빛 마력석이 허공을 둥둥 떠다녔다.
보통 푸른빛을 머금은 여타 다른 마력석과는 다른 형태의 돌.
"책에서만 봤습니다만, 꽤 잘 구현해 놨더군요."
그것은, 몬스터들에게 더 없기 귀중한 마력의 근원이라는 돌이었다.
몬스터가 섭취 시, 한 단계 더 높은 상위종이 될 수 있는 방법.
셰인은 그 돌을 고블린 주술사의 입에 억지로 집어넣고, 경과를 지켜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블린 주술사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며, 매스 홉 고블린 주술사라는 상위 개체가 되었을 때.
셰인은 놈이 눈을 뜨기도 전에 엘리트 대검 전사를 시켜 놈의 목을 따 버렸다.
보통이라면 매스 홉 고블린의 시체가 남았을 자리에 금빛 코인 하나가 남겨졌다.
"그런데 이건 뭡니까?"
그때 주운 코인을 품에서 꺼내 들어 묻자, 벤자민이 웃으며 말했다.
"입장권일세."
"입장권 말입니까?"
"아카데미 내에 저장되어 있는 아티팩트들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 있나?"
"그런 게 있다는 소문은 들어 봤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 소문으로만 알려진 이야기였다.
셰인 또한 그와 관련된 내용으로 자세히 아는 것은 없었다.
"'저장고'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이라 생각하면 된다네."
"...."
"그리고 그곳에서 자네가 원하는 물품 한 가지를 선택할 권리가 있지. 물론, 대가도 있다네."
"대가 말입니까?"
"만약 자네가 계속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한다면, 언젠가 한 번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해 줘야 할 걸세."
"...알겠습니다."
애초에 아카데미 강의가 대가인지도 잘 모르겠다.
연합국 아카데미에서 일일 강의를 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
그 자체만으로도 스스로의 이름값을 높이는 행위이기에, 손해 볼 게 없다 생각한 셰인은 품에 금색 코인을 잘 넣어 뒀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별거 없네. 배정된 숙소에서 쉬도록. 물론, 일주일 뒤에 있을 필기시험도 준비해야겠지만."
이어지는 대답에 셰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옮겼고, 벤자민은 그런 셰인을 주의 깊게 바라봤다.
마법학과 교수의 말에 의하면 셰인은 머리를 쓰는 데 재능이 있었다고 하니 필기시험도 어렵지 않게 합격할 것이다.
그러다 문득, 벤자민은 셰인의 무미건조한 눈빛을 떠올렸다.
언뜻 세상사 전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던 눈빛.
아무런 감정도 보여 주지 않던 그 눈을, 벤자민은 본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전장에서 살아간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던 눈.
심지어 셰인의 눈은 그보다 더 속을 알 수 없을 정도고 깊어서, 계속 보고 있자면 자신마저 감정이 지워질 것 같은 그런 위험한 눈빛이었다.
고작 저 나이에 어쩌다 저런 눈을 가지게 됐는지.
"특이하군."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감에 불과했기에.
벤자민은 등을 돌려 자신의 남은 업무에 충실하기로 했다.
* * *
나른한 오후였다.
클라인의 시험이 끝날 때까지 방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셰인은 줄곧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고 있었다.
지난 삶, 언제나 타락에 의해 신체의 주도권을 빼앗긴 이후, 언제나 가슴속에 응어리진 감정과 타락의 힘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회귀를 한 후로 타락의 힘이 느껴지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마음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일종의 트라우마라 해야 할까.
이렇게 시간이 날 때면 언제나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며 증세가 없는지 확인해야만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던 도중, 셰인은 자신의 심상세계 내부에 무언가 검은 응어리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저건...?'
보다 가까이 다가가 응어리의 정체를 확인하던 도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런 셰인의 집중을 깨뜨렸다.
"형님. 안에 계십니까?"
"...그래. 잘 끝냈느냐."
"예. 무사히 끝냈습니다."
전생에도 나름 지휘에 일가견이 있던 클라인이었기에.
셰인은 거기에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후 셰인은 밖에서 함께 식사라도 하지 않겠냐는 클라인의 용기 어린(?) 제안을 받아들이고 함께 복도를 걷던 도중.
"거기 신사분들."
"...."
"예? 저희 말입니까?"
맞은편 복도에서 걸어오던 한 소녀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춰 섰다.
"네. 두 분이서 걸으시니 마치 유명 화가의 화폭 같군요.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이렇게 불러 세웠답니다."
유명 화가의 화폭이라.
셰인은 저 말이 자신들보다, 눈앞에 서 있는 소녀에게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여기서 만나는군.'
클라인보다도 반짝이는, 마치 가을의 보리밭을 연상케 하는 백금발 머리카락. 그런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장발에.
청량한 숲과 같은 에메랄드 빛 눈동자는 소녀의 아름다움을 더더욱 부각시켰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작은 얼굴에 모두 담겨 있으니, 그 아담함에 남자라면 절로 보호 본능이 자극될 것 같은 외모였다.
그러나 소녀의 목소리에서는 알 수 없는 권력자의 기운이 담겨 있었으니.
사람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셰인의 눈에 비친 그녀는 외관과는 다르게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강철의 벽으로 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지휘학과 실기 시험장으로 가고 싶어서요.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곳이라면 2관 건물 뒤로 가시면 됩니다."
"어머,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소녀가 자리를 떠나고, 셰인은 그녀의 자취가 사라질 때까지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확실히... 정말 아름다운 분이셨지요?"
"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셰인이 가볍게 수긍했다.
"...?"
그러다 뒤늦게 클라인의 표정을 확인한 셰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모르게 능글맞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클라인이었다.
분명 무슨 쓸데없는 오해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셰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은 알까.
방금 지나간 그 여자가, 제국의 두 송이 꽃 중 첫 번째인 제1황녀 제페르 디 아르샤 올리시아라는 사실을.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2화
12화 학과 시험 (5)
벤자민은 제법 흐뭇한 기분이 들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음을 깨달았다.
어느덧 시험이 치러지고 3일이 지난 시점.
방금 막 마지막 생도가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왔다.
그사이 던전을 클리어 하지 못한 생도도 많았지만, 클리어한 생도 또한 그 수가 결코 적지는 않았다.
그뿐이던가.
무엇보다 벤자민을 흐뭇하게 만들면서도 세월의 야속함을 느끼게 만드는 이유는, 상단에 있는 3명의 생도들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말할 것도 없이 클레이튼 R 셰인.
당장 아카데미를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로 경이로운 속도를 보이며 던전을 클리어한 생도였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울진대, 올해 20년 동안 깨지지 않았던 벤자민의 던전 클리어 기록을 깨뜨린 생도가 둘이나 더 나왔다.
먼저 베른슈타인 오스튼.
마력불능자라는 이유로 가문에서 배척받던 생도는, 셰인보다 4시간 늦게 던전을 클리어했다.
놀랍게도 그의 던전 클리어 방식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셰인과 닮은 점이 많았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발광이끼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뿐일까.
오스튼 또한 고블린을 죽여 얻은 마취제를 분연구에 넣어 고블린들을 단체로 마취시키고 수월하게 토벌하는데 성공했다.
다만 셰인과는 다르게 발광이끼를 통해 시간 단축을 하지 못해 셰인보다 4시간이 더 걸렸다.
심지어 지휘를 하는 것만 보았을 때, 그 누구보다 노련하고 예측에 가까운 지휘 실력을 선보이며 던전을 클리어했다.
남은 한 명은 그런 오스튼보다 3시간 늦게 클리어했다.
과거 벤자민보다 몇 시간 차이 나지 않았지만, 그런 벤자민보다도 빠른 속도로 던전을 클리어한 것이다.
린트베르크 J 아네이스.
그녀는 셰인이나 오스튼처럼 던전의 지형지물을 활용하지는 않았으나.
탁월한 지휘력으로 던전을 돌파했다.
특히 무엇보다 탁월했던 것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골렘의 수준을 빠르게 분석하고, 그를 토대로 지휘함에 있어 한 치의 오차가 없도록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단순히 지휘에 있어서 카리스마는 모든 생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셰인은 싸울 일 자체를 극단적으로 줄이고, 오스튼은 어마어마한 예측으로 미리 작전을 구상해 뒀다면.
아네이스의 경우에는 실시간으로 전장을 파악하고 그때그때 맞춰 명령을 내리는 타입이었다.
전체적으로 전장을 보는 눈은 과거 20년 전의 벤자민보다 우월하다는 증거였다.
"스승님의 말씀이 맞았군."
이 정도의 인재풀이면 지금의 지휘학과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황금기가 맞았다.
당장 지휘학과뿐만이 아니라, 다른 학과에서도 역대급으로 뛰어난 생도들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세월의 흐름이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런 시기에 그들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어찌 보면 교수로서 최고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륙의 평화를 가지고 올 인재들이지."
"어머, 그런 인재라면 저도 귀가 솔깃해지네요, 벤자민 기사단장님."
"...언제 오신 겁니까."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온 백금발의 소녀에게 천천히 고개를 돌린 벤자민이 낮은 한숨과 함께 그리 물었다.
딱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별 신경은 쓰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굳이 지금의 감상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 정도로 기품 있는 발걸음은 그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에이, 그래도 기왕 온 건데. 그런 질문보다는 차부터 내주지 않겠어요?"
싱글싱글 웃고 있는 얼굴은, 어느 누가 보더라도 얼굴을 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제 막 청순하게 핀 꽃처럼 사람의 마음을 어딘지 모르게 치유하는 미소였으나.
벤자민의 마음은 메마른 고원처럼 딱딱하기만 했다.
"황녀님께서 직접 아카데미에 행차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칫, 정말 쌀쌀맞으신 건 황궁에서나 여기서나 마찬가지네요. 자유의 몸이 되셨다길래 조금은 사람이 유해졌나 했는데."
당연하지만, 황녀에게 이러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것도 벤자민쯤 되었기 때문이었고, 실제로도 지금 둘의 상황에서 벤자민은 황녀에게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여전히 당신의 머릿속에는 제 동생만 가득한가 보죠?"
"황실 기사단으로서 저는 두 분 모두에게 아무런 정치적 도움을 드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동생에게 인재라도 보내 주려고 아카데미에 오신 거 아니에요? 절 너무 얕보고 계시네요."
"...."
제국의 두 송이 꽃.
제페르 디 아르샤 올리시아는, 청순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이 대화의 본질을 꿰뚫었다.
분명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건만.
벤자민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하아, 세상이 참 야속하기도 하지. 동생에게는 당신과 같은 인재가 가득한데, 왜 저에게는 승냥이 같은 것들 밖에 없을까요?"
"잘 모르겠군요."
"흥, 아무튼 제게 도움이 되기 싫다는 말씀이시네요."
흥이 식었다는 듯, 그녀는 볼을 뾰로통하게 부풀리고는 고개를 픽 돌렸다.
저런 모습 하나하나가 남자의 심리를, 더 나아가 사람의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는 것을 벤자민은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사람을 홀리기만 해서?
아니다.
사람으로부터 본능적으로 호의적인 감정을 느끼게 만들고 그 사이에 만들어진 틈을 노리는 것이다.
그녀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도 했고, 사람의 심리를 읽는데 있어서 그녀만큼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은 여태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이거 하나만큼은 좀 알려 줘요. 오늘 길에 재미있는 두 사람을 봤거든요."
"저도 아카데미에 온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에이, 진짜. 그래도 좀 들어 봐요. 보아하니 단장님의 제자 같던데."
"...."
더 이상 단장이 아니라고 딴지를 걸고 싶었지만, 벤자민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이쯤 되니 귀찮아졌기 때문이다.
"클레이튼 가문의 형제를 봤어요. 소문으로 듣던 것처럼 둘 다 모두 훤칠하던걸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특히... 검은 머리의, 그러니까 형인 셰인이라는 남자 말이에요. 뭐 하는 사람이에요?"
그 말에 벤자민도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이 황녀님의 눈에, 과연 그 무기질적인 표정의 소년이 어떻게 비춰졌을까.
벤자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저 소문으로 판단할 생도는 아니라는 것 정도입니다."
"헤. 단장님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재능에 있어서는 괜찮다는 거네요."
황실 소속의 기사단장이었을 무렵부터 벤자민의 인재를 보는 눈은 정확하기로 소문이 났었다.
그런 그의 말이니만큼, 황녀도 두 눈을 빛내며 복도에서 봤던 남자를 떠올렸다.
자신의 외모에 자부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청순한 외모를 어떤 식으로 휘둘러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그녀다.
여태껏 그녀의 외모에 연정을 품지는 않을지언정 호감조차 느끼지 않는 남자는 없었다.
적어도 첫 인상에는.
하다못해 일말의 변화라도 있어야 했건만.
그 남자는 어떠한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벽과 대화를 나누는 느낌.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그 눈은, 올리시아로 하여금 심장을 떨리게 만들 정도로 심유했다.
그저 냉혹하다거나 냉철하다, 따위의 말이 아니다.
그 이상의 무언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도 않지만, 물건처럼 여기지도 않는다.
이따금 사람을 물건처럼 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물건을 품평할 때 감정이 동반되듯 미세한 변화가 찾아온다.
올리시아는 그런 것조차 놓치지 않고 파악하는 눈을 가졌으나.
그 남자는 도대체 세상을 어떤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걸까.
그런 호기심이 들었던 것이다.
"음, 아무튼 알겠어요. 일단 단장님이 무슨 목적으로 아카데미에 왔는지 알았으니 그걸로 됐어요. 동생 쪽은 딱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벤자민은 그 말에 작은 안심을 느꼈고, 올리시아는 그런 감정조차도 놓치지 않았다.
언제나 청순한 외모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홀리는 올리시아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런 제 동생이 부러웠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카데미에도 관심을 좀 쏟아 봐야겠네.'
한편, 벤자민으로 인해 온 아카데미였지만 황녀는 벌써부터 벤자민보다는 이 아카데미 자체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아직 정치계에 발을 들이기 너무 어린 병아리들이라 벌써부터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까처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만약 복마전과 같은 황실의 정치에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를 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벌써부터 흥미가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움직여야지요. 탐욕스러운 오라버니는 뭐든 다 먹어치우려 할 테니까요.'
그런 생각을 하며, 올리시아는 자신의 흥미를 애써 밑으로 가라앉혔다.
* * *
일주일은 금세 흘러가, 어느덧 필기시험일이 찾아왔다.
"그, 형님. 괜찮으십니까?"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더냐. 저들의 눈치 볼 거 없다. 어차피 알아볼 사람들은 금방 알아보니까."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조교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져 나가던 셰인의 신기록이 아카데미 전체로 확산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생도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몇몇 교수들은 그런 소문을 헛소문 취급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진짜 제 실력으로 한 게 맞을까?"
"그걸 믿냐? 그 셰인이야. 열등감에 쩔어 있는 놈이 어떻게 지휘학과 시험에서 최고 기록을 세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무리 그래도 아카데미 교수들을 돈으로 매수하는 게 가능할까...."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이러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셰인은 거기에 별 신경은 쓰지 않았다.
"어차피 필기시험까지 끝나고 점수가 공개되면 더 이상 저런 말도 못 꺼낼 거다."
필기시험의 경우에는, 한 명의 교수가 내는 것이 아닌 수십 명의 전문가들이 문제를 가지고 시험 당일에 찾아온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당일 날, 선택된 몇 개의 문제들만이 선정되는 형태의 시험.
아무리 돈으로 사람을 매수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아카데미에서도 정말 몇 명만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 어디에도 알리지 않고 내는 문제를 돈으로 매수해서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심지어 학과장이라 하더라도 그 문제의 출처를 모두 알지는 못하기에, 컨닝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불가능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적어도 나는 머리를 쓰는 일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참견이었군요."
"뭘 또 사과까지."
그렇게, 셰인과 클라인은 함께 시험장으로 들어섰고, 그곳에는 어느새 50명으로 줄어든 생도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 왔나? 왔으면 자리에 앉도록."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해 조금은 수척해진 벤자민이 시험장에 들어오자 시험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들 알겠지만, 이번 시험은 일주일 동안 치러진다."
필기시험이 무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부여됐다.
이것만으로도 도대체 얼마나 난이도가 높은 문제가 출제되었다는 걸까.
작년과 다르게 실기 시험부터가 불지옥 난이도였기에 그 난이도에서 살아남은 생도들은 조금씩 긴장을 머금었다.
어찌 보면 실기가 가장 중요한 시험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지휘학과 시험은 실기보단 필기에서 더 많은 수의 생도들이 탈락한다.
그 이유는....
"이 시험지에는 총 다섯 문제가 적혀 있다. 그동안 너희는 도서관과 지정된 시험실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이를 인지하고 행동에 임하도록. 괜히 쓸데없는 관심이 의심을 살 수 있다는 것 또한 잊지 말아라."
고작 다섯 개의 문제가 일주일이라는 시간 필요할 정도였고, 그 문제의 해답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작은 규모의 논문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험지가 배부되었고, 시험이 시작됐다.
배정받은 시험실 책상 앞에 앉아 그런 시험지의 내용을 천천히 훑어본 셰인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이건....'
문제의 난이도가, 셰인에게 다른 방식으로 고민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3화
13화 학과 시험 (6)
소문으로 듣던 대로, 지휘학과의 문제는 난이도가 상당했다.
'던전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예시로 들고 생도들의 판단력을 확인하는 건가.'
다만 어려운 점은, 문제에서 제시한 상황이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었다.
셰인은 왜 학과 측에서 도서관의 출입을 허용했는지 알 것 같았다.
확실히, 이런 문제는 당장 생도 중에서도 제대로 된 답안을 내는 생도가 없을 터.
그러니 도서관의 출입을 허용하고 일주일이나 되는 시간을 내준 것이다.
특히 가장 마지막 문제는 던전의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방법으로 클리어할지 제시하라는 문제였기에, 시간을 조금이라도 허투루 썼다간 모든 문제를 풀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어찌 한다...."
다만 셰인에게는 이 문제들이 별 어려울 게 없었다.
다섯 문제에 나오는 모든 던전의 특성과 클리어 방법이 셰인의 머릿속에 떠올랐으니까.
다만 걸리는 게 있다면.
당장 셰인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현재 인류에 알려진 던전의 지식이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그걸 알아보기 위한 비교 검증이 필요했다.
자칫 잘못해서 아직 인류가 파악하지 못한 지식을 적어 넣었다간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으니까.
그건 셰인이 원하던 결과가 아니었다.
어디까지 당장 셰인이 원하는 것은 클라인의 곁에 서 있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명성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 이상의 시선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셰인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도서관으로 향했다.
해당 문제들에 대해 알아보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테니.
물론, 그렇다고 너무 적당히 할 생각은 없었다. 어느 정도 논란은 생기되, 귀찮을 일로 이어지지는 않을 정도로.
그 선을 지켜야 했다.
거기에, 도서관에 가서 만날 사람도 있었고.
그렇게 자리를 옮겨 도서관으로 향하자, 이미 몇몇 지휘학과 지원 생도들이 도착한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셰인의 등장과 함께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 왔다.
본래 있던 학과에서도 엘리트 소리를 질리도록 들린 녀석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은 감히 생각도 하지 못할 속도로 던전을 클리어 한 셰인이 의심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셰인은 그러한 시선들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책상에 앉아 기록 서적을 펼쳤다.
아무런 내용도 적혀 있지 않은 새하얀 백지.
셰인은 거기에 자신이 원하는 서적과 관련된 키워드를 적어 냈다.
그러자 백지였던 서적에 관련 서적들의 이름이 스스로 적히기 시작했고, 셰인은 그중 하나를 체크했다.
그러고 다음 장을 넘겨 보니, 셰인이 체크한 서적의 시작 문구가 보였다.
아카데미 내에 등록된 대부분의 서적은 이 기록서적으로도 찾을 수 있는 편리한 시스템.
셰인은 그렇게 조용히 자신의 할 일에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읽었을까.
이미 대부분의 생도들은 돌아가고, 단 몇 명만 남아 있는 새벽 늦은 시간.
오늘은 이 정도면 됐다 싶어 기록서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난 셰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아, 알고 있었군요."
셰인의 뒷자석에 앉아 있던 오스튼이 말을 더듬으며 마찬가지로 기록서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일정 주기마다 시선을 보내는데 그럼 그걸 모를까. 무슨 일이지."
"자, 잠깐 대화 좀 나눌 수 있, 있을까요."
도서관에 찾아온 두 번째 이유.
오스튼의 접근을 기다렸던 셰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자리를 좀 옮기도록 하지."
* * *
전생에 타락한 뒤의 셰인이 오스튼과 만난 것은 단 한 번이었다.
그리고 둘에게는 그 한 번의 만남이, 수십 수백 번을 만나는 것보다 더욱 값진 만남이었을 것이다.
당시는 조직과 인간들의 전쟁이 한참이었다.
아니, 겉으로 보기에는 조직이 인간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있을 때였다.
클라인으로 인해 황녀가 조직에 의해 포위된 도시에서 탈출하고 그 결과 인간들이 다시 결집되기 시작할 무렵.
조직의 제1군단장인 셰인을 향해 인간들이 접촉해 왔다.
내용인즉, 회담을 한 번 갖자는 제안이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그러한 제안을 허락한 적 없던 셰인은 처음으로 받아들였고, 홀로 인간들의 진영으로 향했다.
그 이유는 최근 황녀가 인간들에게 구출된 이후부터 조직의 진군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전부터 그러한 전황은 있었다.
아무리 조직에서 그에 대한 문제점을 찾으려 했으나,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받아들인 것이다.
고작해야 밟혀 죽을 때 꿈틀거리다 생을 마감하는 인간들이, 조직의 진군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이유가 궁금했으니까.
그렇게 회담에 도착해서 처음 본 이가 오스튼이었다.
오스튼의 뒤로 황녀와 클라인이 보였다.
현명했다.
수만의 군대보다 클라인이라는 존재 하나만으로 셰인은 함부로 손을 쓸 수 없었으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오스튼이라고 합니다."
"무명이다."
무명(無名).
당시 셰인의 이름이 아닌 조직의 이름.
이름이 없다는 의미의 이름이라니.
아이러니 했지만, 누구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회담은 딱히 평화라든가, 항복 따위의 선언이 오가진 않았다.
서로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한 발버둥.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할 수 있는 1시간의 회동이 끝났을 때.
셰인은 오스튼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사람과 사람의 대화.
이름에 담긴 역사.
그가 걸어온 행적.
셰인이 가진 어둠은 인간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그 감응력은 모든 군단장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우월했다.
그러니 적어도 회귀한 뒤의 셰인은 단언할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 말더듬이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자신뿐일 것이라고.
심지어 오스튼 본인보다도 말이다.
* * *
"던전을 클리어한 방법을 어떻게 떠올렸는지가 궁금하다?"
셰인의 그러한 물음에 오스튼이 어수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드, 듣고 싶습니다."
오스튼의 말에 셰인은 굳이 숨기지 않고 말했다.
"누군가에게 배웠지."
"배, 배웠다 하심은?"
"머리를 쓰는 데 있어서 그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배웠다."
"누, 누구보다 뛰어난 사, 사람... 말입니까? 그, 그게 누구인지 무,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 물음에 셰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스튼의 두뇌는 전생에 그랬듯 셰인이 조직을 찌르기 위해 가장 날카로운 검이 될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그리고 오스튼의 오감은 누구보다 뛰어나지만, 그만큼 경계심도 많다.
다만.
전생처럼 타락의 힘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만큼 오스튼의 감정에 대한 온전한 파악은 불가능했으나, 어느 정도는 구분이 가능했다.
일정한 경계심과, 참기 힘든 호기심.
당장은 모종의 이유로 저런 멍청한 모습으로 자신을 숨기고 있을 만큼.
여기서 너무 갑작스러운 정보의 공유는 녀석에게 혼란만 가져다줄 뿐이었다.
천천히.
하지만 녀석이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지 않도록.
셰인은 그에 가장 어울리는 답변을 내놨다.
"그런 걸 주고받을 만큼 우리가 서로를 잘 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아, 그, 죄,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됐다. 대신, 놀이를 하나 제안하지."
"노, 놀이 말입니까?"
"그래. 이번 필기시험에 누가 더 높은 점수를 받나. 단순하고 유치하지만 심플한 방법이지."
"승자에게 보, 보상이 있는 겁니까?"
"말했잖나. 이건 놀이라고. 내기가 아니다."
셰인의 말에 오스튼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눈을 빛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는 좋습니다."
* * *
방으로 돌아온 오스튼은 평소 멍해 보이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차가운 냉소를 띄웠다.
"놀이라...."
클레이튼 R 셰인.
지난번 실기시험 이후, 오스튼은 그에 관한 정보를 수소문해 알아봤다.
대부분의 정보들은 주로 오스튼도 평소 알고 있던 내용에 불과했다.
동생을 시기하고, 그로 인해 많은 무리수를 두기도 했던 사람이라거나.
평소의 오만한 성격으로 주변인들에게 차갑게 대한다거나 등.
그러나 그런 정보들 중 비교적 최근에 나온 정보가 있었는데, 외곽에 위치한 마을 주변에서 던전 웨이브가 바로 그것이었다.
클라인을 위주로 한 기사단들이 던전 웨이브를 토벌하고 마을을 구했다는 내용.
대부분 클라인의 위용이 다시 한번 아카데미에 퍼지는 내용이었지만, 오스튼은 그보다 셰인의 활약이 더욱 놀라웠다.
썩은 나무 정령의 출현, 어둠의 정령에게 잠식당한 트윈 헤드 오우거를 단 일격에 보내 버렸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생도들은 헛소문이라 치부했지만, 오스튼이 봤을 때 단순히 헛소문으로 취급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사회는 능력주의 사회다.
트윈 헤드 오우거라면 숙련된 기사들도 각오를 하고 덤벼야 했고, 베테랑 용병들도 출혈을 감수하고 사냥해야 하는 몬스터.
거기에 어둠의 정령까지 깃든 놈을 단 일격에?
연합국 아카데미에는 수많은 인재들이 있고, 찾아보면 분명 비슷한 성과를 낼 수 있는 사람 또한 있을 것이다.
당장 오스튼의 머릿속에도 열댓 명의 생도가 떠오를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분명 작년까지만해도 셰인의 실력은 트윈 헤드 오우거는커녕 고블린 부락조차 혼자 정리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
'사람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 있나?'
그뿐이던가.
아카데미에서 지내는 동안 동생 클라인과 말 한마디 나누는 걸 본 적이 없던 셰인이다.
그러나 최근 무슨 일이 있었는지 클라인과 함께 다니는 경우도 많았고, 아주 드물긴 해도 클라인을 향해 미소를 보일 때도 있다고 한다.
이 정도면 그저 사람이 바뀌었다 할 수준으로 치부할 정도가 아닌 것이다.
거기에 뛰어난 오성을 지닌 오스튼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분명, 그에게 무언가 있을 것이라고.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흥미의 영역이었고, 오스튼은 그저 흥미만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충분한 경계심 또한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셰인과의 대화는 그런 경계심의 벽마저 금이 가게 할 정도로 흥미를 돋웠다.
'놀이라고?'
셰인의 뜬금없는 제안.
오스튼은 셰인이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경계심을 셰인 또한 알아본 것이다.
그러니 천천히 친해지자고.
서로에 대해 알아가자는 형식으로 이번 필기시험에 누가 더 높은 점수를 받는지 따위의 말을 꺼낸 것이다.
언뜻 보면 이상할지도 몰랐다.
친구라면 그냥 서로 대화 몇 마디 주고받고 친해지면 되는 거 아닌가?
아카데미에서도 교실에서 금방금방 친구들을 사귀고 파벌을 만드는 이들이 있지 않았나.
굳이 이런 번거로운 짓까지 해 가며 서로에 대해 알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오스튼에게는 충분히 필요한 일이었다.
남들처럼 아무 생각 없이 친해지기엔, 오스튼의 오성은 너무 뛰어났다.
후작가의 자제로서 그는 수많은 인간군상을 만나 왔고, 오스튼의 뛰어난 오성은 그런 이들의 인격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돈 한 푼에도 덜덜 떠는 사람.
가진 돈으로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
그런 사람 옆에서 아부를 떠는 사람.
쥐꼬리만 한 권력으로 세상을 위시하려는 사람.
수많은 권력을 가지고도 더 욕심내는 사람.
오스튼의 눈으로 봤을 때 인간들의 세상은 '욕심'이라는 것 하나로 돌아가고 있었다.
욕심은 곧 질투를 유발하고, 질투는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
그러나 그 감정들은 하나같이 위험한 것들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 감정들로 인해 인간성을 잃어버린다.
물론 인간성 따위가 없더라도 잘 먹고 잘사는 사람은 언제나 넘쳐 난다.
그러나 오스튼이 봤을 때, 최소한의 인간성은 반드시 필요했다.
인간성이 없어지면, 인간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리되면 남는 것은 파멸뿐.
마력이라는 힘이 없는 오스튼은 그런 인간들의 곁에 있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을 부리려면 그만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한 바보 연기였다.
굳이 평범함을 연기하지 않고 바보 연기를 하는 이유 또한, 타인의 관찰을 쉽게 하기 위함이었다.
본래 사람이란 족속은 자기보다 못한 이들에게 감정의 벽을 허물고 본래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기 쉬우니까.
당연히 평범함을 연기하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무시받고 귀찮은 일들이 생겨났지만, 반대로 오스튼은 그런 사람들을 파악하는 데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바로 며칠 전까지는 말이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셰인을 만나기 전까진.
오스튼은 5년의 아카데미 생활 동안 셰인을 여러 번 봐 왔고, 그에 대한 파악도 끝난 상황이었나.
그러나 아카데미의 휴식기가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됐을 무렵부터 달라진 셰인은, 오스튼이 조금도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이 되어서 돌아왔다.
아예 처음부터 파악하기 힘든 사람은 봤어도 이렇게 변하는 경우는 없었기에.
오스튼은 책상 앞에 앉아 시험 문제를 내려다봤다.
"이런 놀이라면, 언제나 환영이죠."
오스튼은 팬을 들어 시험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시각 그처럼 책상 앞에 앉은 셰인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어렵군."
처음에는 현 시대 인류의 수준에 얼추 맞을 정도로만 문제를 풀 예정이었다.
그러기 위해 도서관에 갔던 게 아니던가.
그러나 오스튼과 만나게 됐고, 놀이라는 것을 제안하고서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본래라면 이런 제안을 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 오스튼에 대해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그러나 이 시대의 오스튼은 아직 어수룩한 경계심이 남아 있었다.
어수룩한 경계심.
차라리 명백한 경계심이라면 거래라도 가능했지만, 미래의 오스튼과 달리 당장의 오스튼은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필기시험 점수 따위나 논하는 놀이를 제안했던 것이고.
그러자 오스튼은 흥미를 보였다.
분명 그 오스튼의 흥미라면, 적당히는 끝나지 않겠지.
쓸데없는 관심은 귀찮고 때로는 위험마저 초래할 테지만.
그 정도 귀찮음과 위험 따위, 미래의 오스튼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떠올리면 감수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4화
14화 학과 시험 (7)
"이게 가능한 일인가?"
일주일 후.
필기시험이 끝나고, 생도들의 시험지를 확인하던 벤자민은 당혹스러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올해의 지휘학과 시험은 상당히 난이도가 있는 편이었다.
스피드런 형식의 커스 고블린 던전도 그랬고, 필기시험 또한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난해한 던전을 위주로 골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생도들이 그러한 필기시험에 어려움을 표했고, 개중에는 모든 문제를 풀지조차 못한 생도들도 더러 보일 정도였다.
특히나 벤자민은 이번 시험에서 오스튼이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 예상했다.
이유는, 이 필기시험이 단순히 던전의 클리어 방법만을 유도하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던전의 특성 이해.
커스 고블린 던전은 그나마 던전 중에서도 제법 쉬운 쪽에 속했다.
이유는 그나마 던전의 생리가 물리 법칙에 의해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인류가 발견한 던전 중에는 그러한 물리 법칙조차 무시하는 던전들이 등장한다.
사막의 땡볕 아래 얼음 폭풍이 부는가 하면.
사나운 북극 지방에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사막이 펼쳐지기도 한다.
심할 때는 거대한 마력의 흐름으로 인해 시간 축이 무너져 고대의 어느 시대에 떨어지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이는 단순히 뛰어난 지휘력만으로는 던전을 클리어 할 수 없기 때문에 나온 문제다.
던전에는 다양한 기현상들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뛰어난 지휘관이라면 이러한 기현상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해결법을 찾아야 하니까.
다만 이러한 기현상들을 이해하려면 마력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마력을 다룰 줄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오스튼은 그런 마력을 다루는 게 불가능했다.
거기에 셰인 또한 마찬가지.
비록 셰인은 2서클에 해당되는 마법사였지만, 그럼에도 마력친화력과 감응력이 모두 부족하지 않았던가?
당연히 둘 모두 이번 시험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 벤자민은 판단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그런 벤자민의 예측을 과감하게 부정했다.
"어렵군, 어려워. 이런 시각에서의 이론은 처음 보는데."
"그렇다고 이걸 맞다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지 않습니까?"
"아니아니, 그런 결론을 내기에도 억지입니다. 당장 이론적으로 봤을 때, 메자이아 대수림의 마력 패턴을 생각하면 아예 가능성이 없지도 않잖습니까?"
"저도 비슷한 의견입니다. 오스튼 생도의 논리대로라면 '놓지 않는 늪'의 현상도 이해가 됩니다."
"단순히 입자의 밀집도로 생각할 게 아니라, 입자의 성질에 변화를 주는 마력을 예측한다라. 예, 저도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중력 에너지와 입자 밀집도가 아닌 마력으로 인한 입자의 성질 변화라면 그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대한 이론이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당장 벤자민의 앞에 있는 이들은, 이번 필기시험을 제출하기 위해 모인 다양한 전문가들이었다.
던전을 연구하는 마탑의 마법사, 학자, 현직 베테랑 모험단의 단장까지.
다양한 이들이 모여 오스튼이 제출한 시험 문제의 답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저들은 모두가 자신들의 분야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위세 높은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아직 채 성인도 되지 못한 소년이 낸 문제의 답에 대해 저 정도로 열과 성을 다해 토론을 하고 있다니.
물론 그들이라고 해서 오스튼의 시험지에 나온 '놓지 않는 늪'의 현상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기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던전은 너무 많았고, 그 던전들에도 평범한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현상이 샐 수 없을 만큼 있었을 뿐.
반면, 셰인의 시험지에 대해서는 그러한 전문가들조차 입을 다물었다.
"이건...."
"어렵군요."
"무슨 시험지를 마탑 논문급으로 내놓았는지."
"정말 이걸 일주일 만에 풀어 낸 게 맞습니까?"
셰인의 시험지는 빽빽한 글자와 함께 여벌의 문서가 5장이 추가로 등장했다.
"그래서 다른 문제들은 평범하게 풀어 낸 것에 반면, 이 문제만큼은 이 정도의 정성을 들였군요."
"그러니 이건.... 당장 우리로서도 이 이론이 맞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마탑의 수석 마법사가 결국 백기를 들었고, 이론적인 부분에서만큼은 가장 뛰어난 마법사의 사실상 항복선언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벤자민 수석교수님. 아무래 이 문제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이젠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도 않은 벤자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다른 문제들만 하더라도 전부 정상적으로 풀어냈으니, 합격에는 문제가 없겠군요. 성적순위의 발표만 조금 늦게 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일주일만 시간을 주신다면,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내놓겠습니다."
그러면서, 벤자민은 셰인이 낸 시험지를 조심스럽게 마탑 출신의 마법사에게 건넸다.
[메자이아 대수림의 대우기(大雨期) 공략법]
현재 인류가 요람 탐사의 앞으로 나아가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5대 요람 중 하나인 메자이아 대수림.
하루만에 강의 위치가 바뀔 정도로 어마어마한 수준의 비가 쏟아져 토벌대가 항상 애먹게 만드는 요람의 비밀이, 아카데미 필기 시험지에 풀려 버렸다.
* * *
사흘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합격자 명단이 나왔다.
그러자 생도들 사이에서 의아함이 생겨났다.
"왜 성적표 공개가 미뤄진 거지?"
이러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여러 소문을 불어왔고, 그에 대한 해답은 금방 밝혀졌다.
"생도 중 한 명의 답안 때문이라고?"
그 소문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추측성 소문도 소문이거니와, 설마하니 셰인이 그러한 결과물을 내놨다는 것이 생도들 사이에서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그런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기 위해 디라일라가 교내 게시판 앞에 섰다.
그의 옆에서는 평소처럼 음침한 얼굴의 오스튼이 함께 있었다.
"오올~ 오스튼. 진짜 합격했네?"
"으, 응. 어려운 건 아, 아니었으니까."
"크크... 어렵지 않기는. 올해 지휘학과 시험 완전 불지옥이었다던데. 합격자가 고작 20명 정도밖에 없잖아."
"...."
오스튼은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었고, 디라일라는 그런 오스튼을 뿌듯하게 바라봤다.
디라일라와 오스튼의 관계는 그리 신기할 게 없었다.
이종족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배척받는 디라일라와, 당장 가문에서 버림받은 오스튼은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제법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야. 네가 붙었으니까 나 좀 네가 하는 지휘에 껴 줘."
"어, 내가? 너, 너 정도 실력이면 다, 다른 사람들이 눈여겨보고 있지 아, 않을까?"
"참말로 그렇겠다, 야."
오스튼의 말에 디라일라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애당초 이종족인 자신을 데려다 써 줄 만한 지휘학과 생도가 있기나 할까?
그나마 떠오르는 것은 폴론이었지만, 그 인간의 패거리에 들어가서 좋은 꼴은 못 볼게 뻔했다.
'아니면, 내가 내 처지에 너무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건가?'
까득.
그런 생각에 디라일라는 습관적으로 이빨을 갈았다.
이놈의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 도저히 적응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단장님이 계실 적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쩝, 미안. 방금 한 말은 무시해 줘."
디라일라는 그리 말하며 등을 올렸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오스튼의 지휘 아래로 들어간다 한들 이종족인 자신이 있다면 오스튼도 다른 생도들을 영입하기 힘들어질 게 아닌가.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었기에, 디라일라가 포기하려 할 때.
"글쎄. 세상에는 내 생각보다 재미있는 사람이 많더라고. 아마 한 명은 그런 너를 알아보고 있지 않을까?"
뒤에서 들려오는 오스튼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그런 디라일라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어, 방금 뭐라고?"
"으, 응? 아, 아무것도 아, 아냐."
돌아서서 본 오스튼은 평소처럼 음침한 얼굴에, 말을 더벅이며 멍청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상하네. 분명 방금 말을 안 더듬은 거 같았는데.
하도 주변에서 들려오는 생도들의 북적거림으로 인해 잘 들리지 않았기에, 디라일라는 별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아! 저기 클라인이다!"
"옆에 셰인도 있네."
"그러게. 그러고 보니 그 머저리 셰인도 지휘학과에 합격했네?"
"소문으로는 클라인보다 점수는 좋다던데."
그때 바로 옆에서 다른 생도들의 대화가 들려와, 디라일라는 저도 모르게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클라인.
시기와 질투가 난무하는 아카데미에서, 그런 시기질투조차 허무도록 만드는 천재 중의 천재.
듣자 하니 이번 지휘학과의 실기시험에서는 그럭저럭 평범한 점수로 던전을 클리어했다고 들었다.
'저런 인간 밑으로 들어가면 편할 텐데....'
그러기엔, 클라인은 이미 아카데미에서 흔히 요즘 애들이 하는 말로 인싸 중의 인싸였다.
자신은 아싸 중의 초 아싸였고.
클라인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그의 추종자들에게 무슨 협박을 들을지 예상이 된 디라일라는 벌써부터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면, 셰인은 최근 아카데미에서 기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지휘학과의 실기시험에서 저 오스튼보다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는 것이 디라일라에게는 놀라운 부분이었고.
생도들 사이에서는 전 저지먼트 단장의 딸인 린트베르크 J 아네이스보다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는 부분에서 상당히 고평가되고 있는 듯했다.
듣기로는 여전히 남들과 어울리지 않는 성격은 그대로라고 하는데....
'그래, 차라리 저 인간한테 지휘를 받으면 편할지도 모르겠네.'
적어도 같은 인간이나 이종족이나 차별 없이 무시하는 성격은 똑같을 테니까.
'에휴, 어쩌다 내 신세가 이래 됐는지.'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디라일라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방금 했던 생각 때문일까, 셰인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향했고, 발걸음도 이쪽으로 향했다.
그런 셰인의 뒤로 클라인이 따라왔다.
평소 사람들에게 시선을 두는 일이 드문 셰인이, 웬일인지 한 사람에게 오랫동안 머문 게 신기해서였다.
디라일라는 그 시선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도 여기저기서 눈칫밥 먹은 경험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에 민감한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셰인의 시선에서 느낀 것은, 아주 미약한 동정... 인가?
뭐지. 나를 알고 있나?
싶은 생각을 할 때.
"시험은 잘 준비했나?"
그런 셰인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디라일라가 아닌 뒤에 서 있던 오스튼이었다.
어느새 셰인의 시선은 디라일라에게 떨어져 오스튼에게 향해 있었다.
"네, 네. 셰, 셰인 님도 시험은 잘 치, 치셨습니까?"
"그런 편이지. 기대해도 좋다."
"재, 재미있어지겠군요."
오스튼은 그리 말했고, 셰인은 슬쩍 시선을 디라일라에게 옮겼다.
다시금 시선이 옮겨졌을 때는 아까와 같은 동정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평소처럼 무감정한 표정이었다.
"메, 메이어 디라일라입니다. 우, 우리와 같은 5년차 새, 생도이죠."
"그런가."
갑자기 옆에서 뜬금없이 자기소개를 한 오스튼의 행동에 디라일라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을 때, 가만히 서 있기도 뭐 했던 디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아... 마법학과 디라일라야. 그, 수업에서도 몇 번 얼굴은 본 거 같은데. 맞지?"
"기억이 나는군."
"어... 그래. 그렇다고."
"...."
디라일라는 왠지 이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셰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한편 셰인의 동생인 클라인은 무언가 감동받은 듯한 표정으로 셰인을 바라봤다.
"형님... 드디어 친구가 생기셨군요."
라는 소리를 들은 거 같은데.
무슨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셰인은 말도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클라인도 오스튼과 디라일라에게 매력적인 웃음을 보이며 형을 잘 부탁한다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곤 셰인을 따라갔다.
"야, 야. 오스튼. 왜 갑자기 저 인간한테 날 소개한 거냐?"
"으, 응? 아... 그, 그냥? 디라일라 너 나, 나 말고 다른 사람하고 아, 알고 지내는 일이 어, 없으니까."
"와, 씨. 이렇게 뼈를 때리네."
"그, 그래도 알고 지내서 소, 손해 볼 건 없을 거야."
"아~ 그러세요?"
디라일라는 잠시 당황했지만, 별 상관없는 헤프닝이라 생각하고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당장 이 별 의미 없는 해프닝보단, 오늘 하루 일정을 걱정해야 함이 올바를 테니까.
"난 과외 수업이나 하러 가야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