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IBTFP / Chapter 3 - 3

Chapter 3 - 3

내가 할 수 있는 거.

-방패를 세우는 것이 비겁한 게 아니라고.

설마 그 선배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

당당하게 실력으로 찍어 누르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선배랑 탑 올라갈 땐 어땠어?"

"-굉장했지."

"어떤 면에서?"

아나이스는 궁금했다.

그 최고의 실력자인 마누스는 탑에서 어떤 모습일까?

무척 궁금했다.

폭군일지, 든든한 선배일지.

피어슨이 고개를 들어 어젯밤에 있던 일을 생각했다.

"마법을 무슨 검 휘두르듯이 쓴다니까? 그냥 딱 이상향이지 이상향."

"부럽다아-. 속성은? 속성도 자유자재로 쓰셨어?"

"그럼-. 가면 달린 놈들이 앞뒤로 딱 오는데, 한 손으로 [엣지]를 쓰고 다른 한 손으로 [이그니]로 막고, 그다음엔 전기로 빠직-!"

속성도 자유로워, 캐스팅 속도도 빨라, 위력도 어마어마하고 마나도 부족하지 않다.

대체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긴 있는 걸까?

아나이스는 옆에 있는 케일을 바라봤다.

그래, 얘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

가만히 있는 타입이었지만, 그녀는 확실히 천재였다.

"너에게 건다. 케일."

"-응?"

"네가 1년 안에 선배 좀 따라잡아 봐. 둘이 비슷한 거 같은데."

케일이 배시시 웃었다.

"그런가?"

"오늘 능력 평가 아니야? A반을 노려 보자!"

옆에서 격려해 주는 이들이 있다는 거.

언제 느껴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이런 일상이 깨지지 않길 바랐다.

그때처럼, 다시 한번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꽤나 슬플 것 같았으니까.

어쩌면, 살아갈 의지를 잃을 수도 있겠지.

케일은 두 사람의 얼굴과 미소를 눈에 담았다.

오늘 평가에서, 점수가 잘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1학년 학생들은 모두 2번 운동장으로 나와 주세요.]

드디어 시작되었다.

교정에서 1학년들이 우르르 빠져나오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케일은 문득, 시선이 느껴져서 시선을 옮겼다.

저 멀리, 로브를 휘날리고 있는 마누스가 보였다.

동경하고 있는 자가 보고 있는데 허투루 할 순 없겠지.

케일은 두 주먹을 꾸욱 쥐었다.

의지의 표명이었다.

"모두 모였나요? 능력 평가를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순서는 케일 학생입니다."

수십 쌍의 눈초리가 뒤통수를 때리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다.

홀로 나서는 것이 싫어, 말수를 아꼈다.

이 아카데미라는 곳은, 살벌한 전장과도 같았다.

진짜 친구 외에는 모두 자신을 경쟁자로 보고 있으니, 당연히 의식이 될 수밖에.

그래도 해야만 한다면, 그를 떠올리며 비슷한 모습을 보여 주리라.

"케일. 시작하세요."

능력 평가는 다양한 과정으로 나뉘어 있다.

마법 발현.

발현 속도.

명중률과 지속력.

실전 테스트.

위기 대처 능력.

'선배라면, 어떤 모습으로 이들 앞에 섰을까.'

1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의 일기장을 들춰, 과거를 보고 싶었다.

이날의 기억이 있다면, 참고해서 복사하고 싶었다.

선배는, 어떤 심정으로 부담을 이겨 냈을까.

마누스를 생각하니, 케일은 떨림이 잔잔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요한 눈을 생각했다.

무표정한 얼굴에 앙다문 입술을 생각하며 마법을 전개했다.

"오오-."

누군가가 탄성을 내질렀다.

선명하게 타오르는 진홍빛 불꽃.

기초적이면서도 파괴력의 기준이 되는 마법 : [이그니]가 점잖게 타올랐다.

[크륵-.]

그녀의 앞에는 마법으로 조종하는 오크가 있었다.

동공은 풀려 있었지만, 야성은 그대로였다.

위협을 감지했는지, 오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몽둥이를 들고 맹렬하게 달려오는 거구의 근육질.

학생 수준에서는 충분히 위협적인 모습이었지만, 케일의 눈은 고요하기만 했다.

이미 그녀는 수라장을 겪었으며, 죽음의 위기도 넘겼다.

고작 마법으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따위, 그녀의 마음을 흔들 수 없었다.

유려하게 휘두른 팔과, 그 끝에서 나아가는 불꽃.

거기에 더해 곧바로 이뤄지는 캐스팅.

"오오-!"

"실화냐. 저거-."

"평민이 어떻게 저런 속도의 캐스팅을-."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실력.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들어간 불꽃의 화살이 오크의 안면을 후려쳤다.

퍼엉-!

작은 폭발 소리였지만, 그 후가 문제다.

[크르르륵-!]

얼굴에 불이 붙어, 당황한 오크.

뒤이어 전기의 화살이 오크의 사지를 강타했다.

감전되어, 몸을 찌르르 떠는 오크는 불쌍하기까지 했다.

케일은 무아지경으로 마나를 쏟아부었다.

'마무리.'

그녀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마나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오크의 머리를 정확히 포착했다.

빛나는 62개의 선분이 더욱 거대한 마법을 만들어 낸다.

'책에서 봤던 마법.'

교과서엔 무수히 많은 마법 술식이 적혀 있다.

그걸 가지고 연구하는 것은 선행 학습이 아니다.

오히려 권장하는 쪽.

마법은 실전이다.

앞으로 치고 나가는 학생을 나무라는 선생은 아무도 없었다.

인상 깊게 봤던 마법이 그녀의 손에서 펼쳐졌다.

[페리오]

2클래스 마법이자, 물리계 마법.

마나로 이뤄진 망치가 오크를 후려쳤다.

콰아앙-!

독수리 반에서나 들릴 법한 타격음이 울리며, 오크의 안면이 함몰됐다.

눈알이 튀어나오고, 이빨이 모조리 빠졌다.

[크륵-.]

짧은 울음소리와 함께 졸도해 버린 오크.

무척 깔끔한 일격이었다.

짝짝짝-!

마법으로 오크를 조종하고 있던 교수가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훌륭해요! 벌써 2클래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니, 알라노가 떠오르는군요. 다음 라운드까지 가도 무리 없겠어요."

"네."

그녀는 짧게 답했다.

오크 다음은 트롤이다.

아주 많이 약화된 녀석이지만, 이 녀석은 쓰러뜨리라고 만든 몬스터가 아니었다.

위기 대처 능력.

압도적인 몬스터를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마법사는 전투도 중요하지만, 생존도 중요하다.

오히려 전투보다 생존이 더욱 중요하다는 주장도 있을 지경이니, 말 다 했지.

후우-!

그녀가 작게 심호흡 했다.

[흐흐-]

여느 판타지 소설과는 다르게, 이곳에서의 트롤은 날씬하고 근육질이다.

오크보다 훨씬 뾰족한 엄니를 가지고 있고, 툭 튀어나온 코가 인상적인 종족이었다.

몬스터보단 하나의 인종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설도 있을 정도.

"트롤의 주 무기는 투창입니다. 그들만의 마법인 주술도 사용할 수 있지요. 어디, 한번 볼까요?"

교수의 미소가 짙어졌다.

트롤은 광기를 억누르지 않았다.

그들이 아직도 몬스터 취급을 받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흉포함과 정도를 모르는 잔혹성.

이걸 주체하지 못해서 그들이 지성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거다.

투창.

마법보다 빠르고, 정확한 무기는 퍽 위협적이었다.

[흐하-!]

기묘한 소리를 내며 투창을 던지는 트롤.

트롤은 마나를 잘 다루는 몬스터.

창끝에 실린 마나는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엣지]

케일은 침착하게 마법을 완성했다.

파지직-!

한 장의 꽃잎이 창을 막아 냈다.

아슬아슬한 힘겨루기를 하는 와중, 트롤이 두 번째 창을 집었다.

'나도-.'

케일의 반대편 손이 활짝 펴졌다.

이번에 사용할 마법은-.

[페리오]

머리가 살짝 지끈거렸다.

확실히 클래스가 올라갈수록, 들어가는 마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래도 할 수 있었다.

[흐아아-!]

"쳐 내."

직선으로 날아오는 창의 궤도를 포착했다.

망치 모양으로 구현한 마법이 창끝을 후려쳤다.

퍼어엉-!

마나와 마나가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냈다.

역주행한 창이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되돌아가, 트롤의 이마를 때렸다.

반사가 아니라 튕겨 낸 거기 때문에 살상력은 없었다.

그렇지만, 트롤을 기절시키는 덴 충분했다.

무지막지한 타격이 한 방에 빈사 상태로 만든 것.

실로 대단한 재능이며, 실로 대단한 컨트롤이었다.

"오오오-!"

"봤어? 봤어?"

"와, 저게 뭐야? 실화냐 진짜."

이제 고작 1학년인 학생들에겐, 머릿속에서나 그릴 법한 전투 방식이었다.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다.

교수 역시 눈을 홉떴다.

놀라우리만치 정확하고 강력한 마법이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케일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서, 담당 교수는 누군가의 잔향을 느꼈다.

그래, 작년에도 이런 이가 있었지.

학생들 사이에선 폭군이라고 불렸다지?

버릇이 고약해, 징계 위원회를 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꿋꿋하게 그 위세를 밀고 나갔고, 수석으로 2학년까지 올라갔다.

'반면 이 학생은 매우 착하네.'

아직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태생부터가 달랐다.

사람을 많이 상대하다 보면, 그 사람의 성향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오랜 경험은 보다 날카로운 직감을 가지게 하니까.

그 데이터가 말하고 있었다.

카이사르와 견줄 수 있는 재능에, 훨씬 선량한 학생이라고.

그렇기에 더욱 기대가 되었다.

파지지지직-!

트롤은 새카맣게 타는 냄새를 풍기며 절명했다.

딱히 위기랄 것도 없는 승부였다.

"와아-."

짝짝-.

누군가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그 오묘한 마성에 이끌린 학생들은 모두 케일에게 찬사를 보냈다.

요란스럽진 않지만 고풍스러운 축하가 이어졌다.

케일은 쑥스러운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다 문득, 마누스가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아직도 보고 계시는구나.'

그 역시 조용히 박수 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가슴에 뿌듯함이 들어찼다.

"정말 잘했습니다. 비록 약화되었다곤 하나, 트롤을 잡긴 쉽지 않죠. 좋은 곳에서 배울 수 있을 거예요. 축하합니다."

"-네."

케일이 희미하게 웃었다.

교사는 그 웃음마저 마누스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제17화

- 같은 반이 되었어요!

* * *

학창 시절에 친한 친구끼리 떨어진 경우는 흔하게 벌어진다.

고학년으로 올라갈 때.

초등, 중등,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

그 밖에 다른 이유로.

미토스 아카데미도 마찬가지였다.

월반을 하기 위해 서로 노력했지만, 한 명만 올라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오늘 어떻게 됐어?"

"이따 발표 나잖아. 기다려 봐."

"으으- 아직도 점심시간이라니!"

식당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1학년 세 사람.

세 사람 모두 능력 평가를 받았다.

아나이스와 케일은 자신의 능력으로 평가를 받았지만, 피어슨은 조금 달랐다.

<선생님! 제 친구를 섭외해도 되겠습니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말할 무렵, 피어슨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말했다.

마누스가 했던 설교가 떠올랐다.

그래서 질러 보기로 한 것.

'어차피 공격 마법으로는 A반으로 못 올라가.'

그렇다면, 색다르게 접근해야지!

자신이 잘하는 걸 해야지!

그렇게 생각한 것이 바로 독수리반에 있는 친구를 섭외하는 것.

<저는 공격 마법을 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강화 마법은 그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마누스 선배가 그랬습니다! 혼자 싸우는 것이 마법사가 아니라고. 뒤에서 동료들과 함께 싸울 줄 아는 것도 재능이라고 했습니다!>

대놓고 마누스의 이름까지 판 피어슨은, 같은 F반 수준에 있는 기사를 초대했다.

객관적으로 보이는 성과에, 교사까지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아나이스는 얼마 전 선보였던 이그니라를 이용해 오크고 트롤이고 모조리 통구이로 만들었고.

결론적으론, 세 사람 모두 압도적인 성적을 거뒀다.

"점심 먹고는 2학년 차례지?"

"1학년들은 2학년 능력 평가를 구경할 수 있대."

"-정말?"

오물오물, 얌전히 밥을 먹고 있던 케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나이스가 포크를 가지런히 정리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고학년들의 능력 평가를 보는 건 아카데미 전통이라고 하더라. 선배들의 실력을 보고 배우라는 것 같아."

"오오-. 이거 참 좋은 교육 방식이네. 그럼 우리가 볼 반은 정해져 있지 않나? 솔직히 궁금하잖냐. 폭군의 능력 평가라니~."

피어슨이 호들갑을 떨었다.

아나이스가 주책 좀 떨지 말라고 그의 어깨를 팡팡 때렸지만, 내심 동감하고 있었다.

마누스.

그리고 알라노.

두 사람의 능력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그런 생각을 한 건 이곳에 앉아 있는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2학년이겠지?"

"당연하지. 해리슨과 카이사르잖아! 얼마나 굉장한 모습을 보여 줄지 기대된다."

"2학년 시험 대상은 뭐였지?"

1학년과 2학년의 난이도는 급격하게 차이 난다.

오죽하면 실전으로 가기 위한 길목이라고들 얘기하겠는가.

2학년 첫 평가가 너무도 중요했기에 붙여진 이름이겠지.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얼른 말하라는 듯, 은근히 시선까지 주었다.

"2학년? 첫 번째가 오거 아닌가?"

"오거? 미친-."

오우거.

혹은 오거라고 불리는 종족.

평균 신장 2.5m~3m 정도 되는 거인족을 뜻하는 말이다.

그들의 완력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15배라고 평가된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지만, 웬만한 갑옷보다 질기고 단단한 피부가 위협적이었다.

오크와 더불어, 오거 역시 무기술의 달인이었다.

다 큰 오거는 익스퍼트급 기사도 당해 낼 수 없을 텐데-.

"그냥 오거가 아니라 레서 오거라고 들었어. 두 번째는 교수와 직접 대련하는 거였나?"

"진짜 지옥이네."

1학년과는 결이 다르다.

고작 1년 동안 저런 걸 상대할 수 있나 싶었지만, 미토스 아카데미의 교육을 잘 따라온다면 무리 없이 해낼 것이다.

그게 이곳, 대륙 최고의 아카데미가 갖는 자부심이었다.

"야아아아-! 반 배정 떴다아아아-!"

식당에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말.

세 사람은 천천히 움직이던 식기를 빨리했다.

눈을 마주치고 동시에 움직이는 것이, 오래 일한 팀 같았다.

게 눈 감추듯 식사를 해결하고 일어난 일행은 허겁지겁 공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누가 어디에 배정받았을까?

케일은 오랜만에 두근거림이라는 걸 느꼈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느낀 것이 얼마 만일까.

그 옛날, 어른들과 함께 소풍을 가기 위해 잠들던 때가 생각났다.

비록 출발할 순 없었지만, 그때의 기분이 생각나 얼굴이 꿈틀거렸다.

아나이스가 케일의 손을 잡고 길을 뚫었다.

"잠깐만-. 지나갈게-."

"지나갑니다! 미안미안!"

그 옆에는 피어슨이 함께했다.

그들은 거대한 대자보를 바라봤다.

A반부터 F반까지.

그들의 눈이 천천히 자신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어-?"

시작은 피어슨이었다.

그의 눈이 어딘가에 박혀, 떨어질 줄 몰랐다.

"케일!"

"와! 학년 수석이야?"

"케일! 축하해!"

모두의 시선이 케일을 향해 쏟아졌다.

케일은 수백 명의 학생들 중,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A반 1번.

작년엔 폭군의 왕좌였던 그 번호가, 이번엔 그녀를 찾아왔다.

모두의 축하 속에서, 케일은 얼떨떨하게 웃었다.

그녀는 그의 박수를 떠올렸다.

왠지, 마누스도 이렇게 웃고 있지 않았을까?

* * *

[2학년 학생들은 능력 평가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마누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1학년은 F반으로부터 시작하여 위로 올라가는 방식이라면, 2학년, 3학년, 4학년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방식이다.

작년 A반 1번으로 졸업한 마누스라도, F반으로 추락할 수 있는 구조였다.

분기별로 진행되는 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다면, 학년 수석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많은 시선이 따라왔다.

여전히 불편한 시선이었다.

'그래도, 제법 익숙해졌어.'

학교생활도 제법 익숙해졌다.

옛 생각이 나기도 했지만, 그런 재미없는 학창 생활이랑은 격이 다르달까.

의미도, 미래도 불투명한 공부를 하는 것보다, 직접적으로 성과가 보이는 마법이 더욱 재밌었다.

-아마, 그건 받아들이는 뇌의 기능이 달라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

어쨌든, 능력 평가는 게임의 콘텐츠로도 등장할 만큼 중요한 이벤트였다.

실제로 어느 반에 배정받느냐에 따라, 학생들의 대우나 배울 수 있는 마법도 달라졌으니까.

"지금부터 능력 평가를 시작하겠습니다. 뱀 A반은 이쪽으로."

각 반별로 지정된 구역에서 치러지는 평가.

당연히 타 학년 학생들은 마누스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기 위해서 한쪽으로 몰렸다.

마누스는 시험을 위해 미리 준비하고 있는 상황.

"준비되셨습니까?"

마누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마법으로 소환된 거구가 등장했다.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오우거였다.

붉은 안광은 이미 이성을 잃었다는 걸 증명했으며, 상처가 가득한 근육은 얼마나 많은 싸움을 해 왔는지 보여 줬다.

질질 흐르는 침, 거대한 검, 위협적인 뿔.

털이 없는 머리.

-그 모든 것이 공포를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하지만-.

'이걸 움브라들이 처리했단 말이지.'

작년, 그의 그림자가 얼마나 대단한 퍼포먼스를 보여 줬는지 모른다.

힘은 적절하게 숨기는 것이 좋다고들 말하지.

하지만, 보여 줄 땐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이 낫다.

그래야 어쭙잖게 덤비는 떨거지들이 사라지니까.

보여 주기로 했다.

그가 왜 폭군으로 불려 왔는지.

파직-.

푸른 눈동자에 내달리는 마나가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켰다.

[이그니 - 쿠스]

불꽃을 화살 형태로 날리는 마법.

마누스의 주변에 도깨비불이 피듯, 무려 열 개의 마법진이 나타났다.

여기서 끝나면 천하의 카이사르가 아니지.

"-피어라."

64개의 선분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불의 위력을 증폭시키는 속성은 하나.

바람 속성뿐이다.

[프로첼라]

돌풍이 불었다.

바닥에서 생성된 마법진이 초록빛 마나를 뿜어냈다.

지켜보던 이들의 옷자락이 펄럭일 정도의 돌풍.

카덴차로 조합하지 않아도, 이 정도 응용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원소에 대한 이해.

흔히 상성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걸 이해하면, 충분히 선보일 수 있는 기술이다.

마누스는 노련한 지휘자가 되어 마법을 조종했다.

[으어어어-!]

오거가 한 발자국을 내디딜 때, 바람 마법을 실은 불꽃의 화살이 팔, 다리에 적중했다.

펑펑 터지는 불은 살을 태우고, 근육을 찢었다.

오거는 고통스러운 듯, 두 발자국을 더 물러섰다.

[크아아아악!]

부웅 떠오른 오거의 신체.

이 세계는 기본적으로 '턴제'에 기반해 전투가 돌아가는 것 같았다.

공격을 맞으면, 공격을 한다.

맞히지 못하면 회피 판정, 막아 내면 블록 판정.

'세상까지 이해하는 건, 재미가 없는데.'

카이사르의 눈이 세상을 바라보는 건, 현대인이 게임 화면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적응이 빠른 건지도 모른다.

오거가 공격하는 걸, 어떻게 피해야 할까.

'다른 건 딱 한 가지.'

바로 상대방의 턴에도 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거다.

열 발의 불화살을 맞고도 멀쩡한 오거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마누스가 서 있는 자리로 내려앉았다.

바위 덩어리가 쏟아져 내려오듯, 압도적인 무게로 찍어 누르는 오거.

"날아가라."

퍼엉-!

어느새 마법을 캐스팅해, 오거를 날려 버리는 것으로 응수했다.

그 짧은 순간에 돌풍을 불러일으킨 건, 그야말로 일류 마법사에게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속도였다.

방어에 성공했으니, 이젠 내 차례겠지.

오거의 살 타는 냄새를 더 진하게 맡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마법은 아나이스도 선보였던 마법.

화르르륵-!

이그니에서 한층 진보한 마법이자, 불 마법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마법이 떠올랐다.

[이그니라]

[프로첼라]

양손에 서로 다른 마법진을 생성시키는 것을 '더블 캐스팅'이라고 부른다.

2학년 수준에서는 당연히 무리고, 웬만한 성인 마법사도 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재능이 충만해야 겨우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을, 마누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다.

"와, 저게 말이 되냐?"

"더블 캐스팅을 저 속도로 펼친다고?"

"진짜 괴물은 괴물이다."

스킬을 동시에 두 개 쓴다는 느낌만으로 자연스럽게 펼쳐진 기예.

마법을 쓸 때의 짜릿함은 게임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느낌이었다.

카덴차를 사용할 것까지도 없었다.

두 원소의 조합만으로도 오거에겐 치명적일 테니까.

쿠아아아아아----!

열풍이 불었다.

이전에 사용했던 마법, [아타불루스]보다 현저히 약하지만 비슷한 광경을 연출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케일, 아나이스는 소름이 돋았다.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때의 광경은 뇌리에 똑똑히 박혀 있었다.

[으어어어어어-!]

열풍에 휩싸인 오거는 고소한 냄새와 함께 시커멓게 탄 잿더미가 되었다.

황금 뱀 A반 1번.

학년 수석다운 모습이었다.

쿠웅-.

거구가 넘어갔다.

전투는 싱겁게 끝났다.

당연한 일을 해낸 마누스는 묵묵하게 어느 한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역시, 지켜보고 있군.'

일렁이는 마나의 흔적이 보였다.

이전, 그림자를 만났을 때와 똑같은 패턴.

그래, 가만히 있을 카이사르가 아니겠지.

마누스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교수에게 말했다.

"다음 시험, 바로 보시죠."

그렇다면 보여 주면 된다.

그들은 똑똑히 보고할 것이다.

위대한 가문 아래, 위대한 핏줄이 개화했음을.

교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정해진 합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평가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카이사르.

그리고 자신의 잠재력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했다.

마누스의 눈동자가 푸르게 물들었다.

제18화

- 내가 바로 카이사르다

* * *

교수와의 대련은 2학년 이후의 학생들이 가장 꺼리는 시험 중 하나였다.

3클래스 이상의 마법을 난사하는 교수를 상대로 5분이나 버텨야 하는 시험.

미토스 아카데미의 교수들은 세계 최고의 실력자들이었고, 그들의 자존심은 하늘을 찔렀다.

당연히 날아오는 마법 하나하나가 치명적이다.

2학년을 맡은 교수, '트레일'.

화염과 빙결이라는, 전혀 상반된 속성을 수준급으로 다루는 교수였다.

과목은 '원소학'.

순수한 원소 마법이 그의 전공이었다.

원소 마법 중 대부분은 공격 마법이니, 트레일 교수의 공격력은 말 안 해도 절망적인 수준이라는 것.

"학생에게 절망적이라고 해서 절망 교수라고 불리지 아마?"

"푸흡-. 그게 뭐야."

정보가 빠른 피어슨이 크레일 교수에 대한 설명에 들어갔다.

피터손 가문의 피는 속이지 못하는지, 그는 학교에 들어오자마자 여러 정보를 수집하고 다녔다.

피터손 가문의 시초는 바로 마법사가 아닌 '트레저 헌터'였으니까.

그들이 가진 수집욕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피터손의 진짜 능력은 바로 마당발과 거기에서 오는 거대한 인프라였다.

피어슨 역시 그 마당발 기질을 십분 발휘한 것.

"진짜야. 저 교수님은 필수 과목인 원소학을 가르치시는데, 매년 학생 수준에선 감당할 수 없는 과제를 내주신다고 했어."

"엑-."

"-우리도 내년에 들어야 하는 거지?"

케일이 물었다.

그런 당연한 말씀을-.

피어슨은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러니까 1학년 때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고. 나는 뭐... 이미 가망이 없다. 제군들."

"말이나 못 하면-. 잘 봐 둬야겠다. 배울 게 많겠는데?"

아나이스가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경기장을 바라봤다.

교수와 괴물 학생의 전투라니.

마누스의 진짜 실력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마누스는 아직, 3클래스 이상의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설마, 아직 배우지 못한 걸까?

아니면?

"3클래스 이상 되는 마법을 볼 수 있겠는데?"

"크으-. 이게 마법사의 꽃이지! 시작한다, 시작한다."

마주 보고 선 마누스와 트레일 교수.

교수가 마나로 만든 화염구를 굴리며 입을 열었다.

"마누스 군에겐 강도 높은 마법을 시연해도 괜찮겠지요?"

"상관없습니다."

"그렇담, 기본 3클래스 이상의 마법으로 상대하겠습니다. 기대되네요."

화르륵-!

마누스 역시 똑같은 마법을 선보였다.

3클래스 마법, [이그니오].

마누스가 눈을 올려, 일렁이는 곳을 바라봤다.

피식 웃은 그가 다시 시선을 내려 전투를 준비했다.

"시작하죠."

콰아아앙-!

엄청난 열기가 경기장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다음 마법을 사출했다.

물과 바람.

원소와 원소의 대결이 치열하게 이어졌다.

"아주 좋습니다!"

그간 마석을 흡수한 보람이 있었다.

마나가 차오르는 속도는 또 어떤가.

마누스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저게 진짜 괴물이지."

"저 성격만 아니면 진짜...."

"왜에-. 나는 저 성격이 그렇게 멋있던데."

재잘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화려한 마법이 터지며 드리우는 음영이 그의 미모를 돋보이게 했다.

흩날리는 머리칼이 헝클어지며 야성미를 더했다.

관객석에서 그의 모습을 보고 있는 학생들은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넋을 잃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공방은 치여 치열함을 더해, 본격적인 마법 폭격이 시작됐다.

불덩이가 날아오는 걸, 세 장의 꽃잎으로 막아 내는 마누스.

그 꽃잎을 변형시켜, 날카로운 표창으로 날리며 견제.

'지금 이걸로 마나는 거의 다 썼군. 큰 거 한 방 날리고 끝내야겠어.'

콰우우우우-!

공기가 울었다.

교수의 눈이 커졌다.

마누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갑니다."

32개. 64개. 128개까진 어느 마법사까지 쓸 수 있다.

대체로 마법에 관한 공부를 진득하게 하면, 거기까지는 뇌에서 무리 없이 그려 낼 수 있다고 하니까.

하지만 그 이후부턴, 재능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마누스의 재능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3클래스 마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바람 소리.

비행기를 타면 나는 소리가, 마누스의 손끝에서 휘몰아쳤다.

"벌써? 이거 제법-."

콰르르르르르-!

트레일 교수도 눈을 감고 집중했다.

그의 손끝에서는 끝없이 발광하는 전격이 목줄을 맨 채 달려 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꿰뚫어라."

[템페스토]

나선형의 바람이 창처럼 쏘아졌다.

콰르르르르-!

땅거죽을 뒤집어엎는 위력은, 기사들이 쏘아 내는 투창보다도 위력적이었다.

빠지지직-!

트레일도 손을 뻗어, 전격 마법을 내뿜었다.

두 마법이 충돌했고, 세계가 환하게 물들었다.

"...평가는 여기까지 하지요."

"-고생하셨습니다."

결과는 사뭇 놀라웠다.

툭툭, 먼지를 털고 있는 트레일 교수와 그을린 옷자락을 보고 있는 마누스.

더 하면 결과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트레일 교수의 명백한 우위였다.

"와아-."

짝짝-.

누군가가 감탄에 겨워 손뼉을 쳤다.

그 감정이 번져, 경기장 전체로 소리가 번졌다.

큰 공연처럼 터져 나오는 갈채는 아니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감을 들게 하는 소리였다.

특히 다음 순번인 알라노가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마누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는 깔끔함.

"멋있어! 멋있어!"

"진짜, 여기 아니면 어디서 저런 마법을 보겠냐~. 진짜 호강한다."

"저게 카이사르구나."

학생들이 술렁이는 소리를 뒤로하고, 마누스는 고고하게 자리에 앉았다.

눈을 들어, 일렁였던 부분을 바라봤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도 적응이 안 되네. 완전 관종 아니냐 이거-.'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치고는 퍽 박했다.

진짜, 현대에 이런 식으로 살면 딱 관종 취급받기 좋지 않은가.

몰라, 좋을 대로 생각하라지-.

이젠 생각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알라노의 화려한 마법 쇼는 마누스가 보여 준 것 못지않게 인상적이었다.

확실히 그의 존재가 자극되었는지, 전력을 다해 부딪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평화가 최우선이던 해리슨에게 저런 면이 있었구나.

'내 존재만으로 성격조차 바뀐다는 걸까.'

고민했다.

가설이 맞는다면 앞으로의 행동 방침도 신경 써야 할 것이다.

언제, 어느 타이밍에 나타날 것인지, 대화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단어들의 선택과 그들이 느끼는 감정까지.

'피곤하네.'

피곤한 일이라는 걸 인지하면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카이사르의 방식에 잠식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뭐-.

이 세계에서는 이편이 살기 편하겠지.

평가가 끝났다.

이번에도 수석은 수석이었다.

마누스는 돌아가는 길에 날짜를 가늠해 보았다.

"슬슬 준비해야겠군."

적은 내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 *

케일, 아나이스, 피어슨.

삼총사는 나란히 새로운 반으로 향했다.

새로운 반에서의 생활은 어떨까.

세 사람의 표정에서는 그 두근거림을 손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복도를 거닐던 도중, B반으로 무리가 지나가는 걸 보았다.

한 명의 여성이 두 명의 여성에게 둘러싸여 가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어깨동무를 한 두 명의 여성과 함께 웃으며 가는 사람.

"우리도 저렇게 갈까? 응? 기왕 내가 가운데서-."

"-조용."

케일이 쓸데없이 중얼거리는 피어슨의 말을 끊어 내고 뒤를 돌아 지나간 무리를 바라봤다.

특히 가운데 있던 여성-.

이름도, 얼굴도 처음 봤지만 알 수 있었다.

저 아이, 괴롭힘당하고 있을지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그저 고개를 돌렸다.

이곳, 미토스 아카데미에 오기 전 깨달은 것이 있었다.

'너무 참견하면, 언젠가 약점이 되어 돌아온단다.'

선뜻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어쩌면 잘못 본 걸 수도 있잖아.

그녀는 홀로 합리화하며 다시 몸을 돌렸다.

"왜 그래? 쟤들 친한 애들인 것 같은데-."

"-아무것도."

그때 그 선택을 누군가가 말렸다면.

혹은 누군가가 케일 자신보다 단호하게 나섰다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세상에는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주 작은 선택이 만들어 낸 결과를 믿지 못하며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 하는 자들.

제아무리 주인공이라도, 그런 시련에 들지 말라는 법은 없다.

* * *

2학년 황금 뱀 A반 1번.

카이사르 마누스.

그 자랑스러운 이름표를 보며, 이 생활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본래 지구에서의 남자는 보잘것없는 성적에, 보잘것없는 외모를 가졌었다.

그냥 평범한 회사원.

'아니, 그마저도 잘렸던 백수였나.'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건이긴 했지만, 어쨌든 만만하니까 건드렸겠지.

제대로 대처도 못 한 채 어버버 하며 당한 건, 순전히 자신이 못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야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자위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눈과 마음으로는 그 약함 자체가 죄악으로 비쳤다.

이게 잘된 일인 건지-.

그래도 나약하게 살아가는 것보단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축하해. 이번에도 수석 자릴 지켰네."

"더 분발해라."

"그래야지. 널 따라잡으려면."

어느새 옆엔 알라노가 자리하고 있었다.

1학년과 달리, 2학년은 외부 수업을 위한 준비로 오후 수업이 없었다.

미토스 아카데미 학생은 외부에서 귀중한 경험을 쌓고 돌아온다.

아카데미, 왕국, 기사단, 마법사단 등등.

인재를 원하는 곳은 얼마든지 있었고 그들을 시험하기 위한 무대는 전 대륙에 널렸다.

2학년부터는 그런 곳을 찾아다니며 실적을 쌓는 구조다.

"임무는 봐 둔 것이 있나?"

"응, 나는 가문에서 맡긴 일을 처리하려고. 딱 적당한 난이도라서-."

해리슨이 내린 임무는 까다롭기로 유명한데, 알라노라면 잘해 내겠지.

반면 마누스는 아직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원작엔 전혀 없는 내용이라, 뭘 결정하기도 뭐했다.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에선, 그저 알라노가 전투에서 잠시 이탈한다는 내용뿐이었으니까.

그러니, 이 선택은 원작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마누스 본인의 의사에 따라 달린 것.

첫 번째 수행평가이자, 앞으로의 학점을 위해서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이 시점에서 발생하는 일은 전혀 서술되어 있지 않다.'

알라노가 하는 의뢰조차 간단한 텍스트로 넘어갔으니-.

그렇다면 직접 고르는 수밖에 없겠지.

"나도 슬슬 골라야겠군."

"아 그러고 보니-."

알라노가 무언가 생각난 듯, 손가락을 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마누스는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4

"이제... 그만...."

"뭐? 그만? 더러운 상인 주제에 그만?"

한 명의 여성은 두 명의 여성을 마주 보고 있었다.

도저히 홀로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였기에, 그녀는 웅크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온몸이 아팠다.

미토스 아카데미에선 '공개적인 장소'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건 금지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음지에선 권력을 형성하는 것이 인정된다는 뜻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도 제재할 수도, 감독할 수도 없었으니.

"네 가문 때문에 우리 가문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알아?"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아직도 입만 살아서는-."

얼굴에 불같은 통증이 일었다.

눈앞이 번쩍였고, 순간적으로 꿈을 꾸는 것 같은 느낌에 빠졌다.

"넌 죗값을 치러야 해."

"그만-."

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분노에 찬 마법사는 마법이 아닌, 손과 발로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속으로 외쳤다.

'제발, 누가 도와줘-.'

제19화

- 소녀는 구원자를 찾는다

* * *

그것은 우연이었다.

마누스가 딱히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흘러간 사건.

그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일부러 먼 거리를 돌아갔다.

교정에서부터 기숙사까지.

그가 생각한 내용은 별것 없었다.

케일과 일행들이 성장할 발판을 어떻게 마련해 줄 것인가.

어떤 조언을 해 주고, 어떤 길을 걷게 해 줄 것인가.

'흑마법은 언제쯤 알려 주는 것이.... 음?'

학생 세 명이 보였다.

한 명은 구석에 몰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남은 두 사람은 한 사람을 둘러싸고 윽박지르는 중이었다.

머리가 아파져 올 정도로 지독한 광경이었다.

그 옛날 자신이 생각나기도 했다.

본래의 마누스처럼 폭군으로 생활했던 몸이 아니다.

그는 지배당하는 쪽이었다.

심하게 괴롭힘당하진 않았지만, 존재감도 없었다.

'그래, 저 아이가 있었지.'

안 그래도 슬슬 접촉하려고 했다.

분홍빛으로 시작해, 오색으로 빛나는 머리칼이 특징인 캐릭터.

처음 일러스트가 공개되었을 때, '이게 무슨 사람 머리냐!'라고 욕을 많이 먹었더랬지.

하지만 막상 인 게임으로 보니, 상당히 잘 뽑혔던 캐릭터였다.

상인 가문에서 나고 자라, 손익계산에 밝고 정령과도 계약한 천재.

동부 최대 상인 가문인 '해리' 가문의 이단아로도 알려져 있다.

'가문에 적이 좀 많았지?'

해리 가문은 냉철하고 계산적이다.

그렇기에 사정 따윈 봐주지 않기로 유명했다.

상인은 신뢰가 생명.

그것은 자신이 물건을 내어 줄 때도 중요하지만, 그 반대도 마찬가지.

제때 대가를 치르지 못하면, 가차 없는 손속으로 유명한 가문이다.

극초반, 이런 배경 때문에 고통받는 캐릭터인 '해리 멜라니'.

'자연스럽군.'

마치 누군가가 짜 놓은 판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만남이라니.

아주 좋은 기회이지 않은가.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건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그래야 조금 더 기억하고, 조금 더 찾아오게 만들 수 있으니까.

"그만해, 그만-."

"닥쳐 이 쓰레기 같은 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서는-."

"네 가문 때문에 오빠의 꿈이 좌절됐어. 그리고 어머니는 아직도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고-!"

그게 왜 자신 때문이란 말인가-.

멜라니는 끊임없는 질타와 비난, 핍박에 피폐해져만 갔다.

당장 마법을 쏘아 내고, 이들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한 줄기, 이성의 끈이 그걸 지탱해 주고 있었다.

냉철한 가문의 인간과는 달리 그녀는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다.

감성이 아주 풍부했기에 평범한 인간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았다.

예를 들면-.

내가 다 쓸어 줄까? 응?

말만 해, 내가 다 죽여 줄게.

이런 쓰레기들과 노닥거릴 시간이 있나? 죽여 버려-.

'아니야-.'

그녀의 귓가에서 속삭이는 끔찍한 소리.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몸을 꽉 감쌌지만, 그들의 충동질은 멈추지 않았다.

죽여라, 괴롭혀라, 저들에게 고통을 주어라, 녀석들은 너를 업신여기고 있다, 넌 할 수 있잖아, 왜 가만히 있는 거야, 널 무시하는 건, 우리를 무시하는 거야, 그러니까 당장 저들의 눈을 뽑고, 저들의 혀를 가르고, 배에 있는 것들을 꺼내고, 다시는 올려다보지 못하게 무릎을 꺾어 주고, 네 가치를 증명하고,

"잡것들이 설치는군."

세뇌하려는 듯, 고통스러운 속삭임 속에서 꺼내 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멜라니는 꼭 감은 눈을 떴다.

정신없게 만드는 소리도, 육체의 고통을 주는 동급생의 손길도 없어졌으니까.

그곳엔, 거대한 마나로 존재감을 뿌리는 남자가 있었다.

멜라니의 곁에 맴돌며, 항상 살인과 폭력을 부추기는 존재들이 겁을 먹고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녀를 괴롭히던 동급생들이 숨을 삼켰다.

"마, 마누스 선배-."

"선배! 들어 보세요, 얘는 그 악명 높은 해리 가문이라고요!"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마누스의 푸른 눈동자가 움직였다.

시리고 차가운, 감정이라고는 들어 있지 않은 그 동공은 무자비하게 그들을 응시했다.

-그래서 뭐?

이런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 오히려 소리를 높인 쪽이 민망해질 지경.

숨 막힐 정도의 적막이 하나, 둘 이어졌다.

그리고 그의 핑크빛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여긴 미토스 아카데미 아니었던가?"

"...."

그가 하는 말은 그들의 행동을, 마음가짐을 찢어발기는 비수였다.

이곳은 미토스 아카데미다.

밖에서 어떠한 신분과 과거를 지녔든, 이곳에선 한 명칭으로 불리고 취급받는다.

미토스 아카데미 학생.

이것만큼 간단하고 명료한 정체성이 없다.

이곳은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신분 따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공간, 미토스 아카데미였다.

오로지 학생으로서의 실력으로만 평가받는 곳이지 않던가.

"후회할 짓은 하지 마라. 결국, 추해지는 건 본인이니."

"...가자."

이를 악물고, 어쩔 수 없는 힘 앞에 퇴장하는 이들.

그들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 동기와 이유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 동기와 이유가 행동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아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

그 사정을 일일이 봐주는 건, 상황을 개판으로 몰고 가는 지름길임을 알고 있었다.

"-사라져라, 너희들이 넘볼 아이가 아니니."

-넌 뭐야!

우리의 친구를 괴롭히지 마!

이번에야말로 도와줄게!

도와줄게 도와줄게!

"그마아안-! 다 꺼져어-!"

멜라니가 두 귀를 막고 버럭 소리쳤다.

그녀를 괴롭히던 악의적인 목소리가 사라졌다.

허억-, 허억-, 숨을 내쉬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마누스는 그녀가 진정되길 기다렸다.

식은땀을 훔친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신비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이 사람이....'

폭군.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사람을 그렇게 불렀다.

무자비하고 손속에 자비가 없는, 더없이 귀족 같은 이였다고 그랬지.

그는 오만하고 남들을 벌레 보듯 했지만, 그 실력 하나만으로 아무도 건들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는 찰나의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이자처럼 강했다면, 그 아이들은 날 괴롭히지 않았을 텐데.

부럽기도 하고, 질투가 나기도 했다.

"정령이군."

"보이시나요?"

마누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멜라니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는 상인 가문에서 나고 자라, 은원 관계에 민감한 삶을 살았다.

타고난 성격과는 별개로 그런 환경은 멜라니를 변하게 만들었다.

"제가 꼭 은혜를 갚겠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별것 아니지만, 값은 받아야겠지."

"저도 그게 편해요."

마누스는 잠시 생각했다.

해리 멜라니는 이렇게 여리여리하게 생긴 것과 다르게, 탱커 포지션이다.

거기다 정령을 이용한 딜링도 뛰어난, 그야말로 1티어 국밥 캐릭터였다.

그리고 또 하나.

캐릭터의 능력치를 추가로 성장시킬 수 있는 서브 퀘스트 담당 NPC 역할도 겸했다.

무대가 극히 한정적인 학교라는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해 주는 것.

"그렇다면 지금, 해리 가문의 일원으로 돌아올 수 있겠는가."

"네?"

"마법사가 아닌, 상인으로서 대가를 치러라."

멜라니는 멍하니 마누스를 바라봤다.

무얼 요구하는 것일까.

자신이 가문을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는 걸까?

아니,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도 빚은 갚아야 한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가 아니라면... 가문의 힘을 빌리고 싶은 건가요?"

"아니, 네 힘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상인의 일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힘이라고 할 수 있는 뭣도 없는 상황.

지식도, 힘도, 자금도 없는 어린 학생이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마누스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다리가 되어 주면 된다. 바깥세상에서는 인재를 많이 필요로 하니."

"아-."

그녀는 똑똑했다.

이렇게 말하는데도 못 알아들었다면, 애초에 미토스 아카데미에 입학하지도 못했을 거다.

멜라니.

아니, 해리 가문으로서 자랑할 것이 하나 있긴 있었다.

-인맥.

상인 가문이라는 특성상, 압도적인 인맥을 갖추고 있었다.

마누스는 서브 퀘스트 라인을 먼저 뚫음과 동시에, 이번에 눈여겨본 임무를 위해 그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멜라니의 시선이 마누스가 들고 있던 작은 종이로 향했다.

2학년들이 한다는 외부 임무 의뢰서.

마누스는 아마, 저 일에 대한 도움을 받고 싶은 거겠지.

그 정도라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도와 드릴게요. 가문에 연락만 해 두면 될 거예요."

"고맙군. 앞으로 도울 일이 있으면 찾아와라."

마누스는 그 말을 남기고 휑하니 사라졌다.

지금은 여기까지.

더 개입한다면 그녀가 진정한 힘을 발휘하기 위한 무대가 어그러질 터.

-아쉽지만 마누스는 철저히 외부인이니까.

멜라니는 고요함 속에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이 듣고 싶어 듣는 소리가 이토록 소중했던가.

"하아-."

그녀 역시 터덜터덜 길을 걸었다.

그들의 속삭임은 더 들리지 않았다.

간만에 찾아온 평화였다.

* * *

기숙사로 돌아온 마누스는 쪽지를 살폈다.

그곳에 적혀 있는 건, 익숙한 가문의 문장이었다.

외부 임무, 유저들이 서브 퀘스트로 불렀던 것들은 등급이 있다.

동색 임무부터, 은, 금, 백금, 루비, 다이아, 미스릴까지.

2학년 기준, 가장 뛰어난 A반이 맡는 임무는 보통 금에서 백금.

이것도 학년 전체를 통틀어 알라노 수준은 되어야 맡을 수 있는 임무였다.

'거기서도 곁다리 수준이었던가.'

그런 임무에서도 보조, 혹은 견학 수준으로 다녀오는 것이 미토스 아카데미 학생의 역할이다.

그야말로 재능을 보는 곳이었기 때문.

그런데 이건....

"다이아 임무라니, 카이사르답다고 해야 하나."

이건 무슨 의미일까.

2학년 한정으로 들어온 임무에, 다이아 등급이라니.

적어도 홀로 성체 오거를 쓰러뜨릴 실력이 아니라면 거들떠보지도 않겠다는 의미다.

필체가 꽤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본래 몸이 가지고 있던 기억의 잔재일까, 아니면 화면으로 많이 보았던 필체이기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베일에 싸여 있던 가족들 얼굴을 볼 수 있겠군."

<조사 의뢰>

<카이사르령, 기사 실종에 대한 단서를 찾으러 갈 것>

<임무 수행 : 기사단 호위>

<소속 : 카이사르 마법사단>

<소요 시간 : 이틀>

가문에서 무슨 일이 있는 모양.

마누스는 궁금했다.

최강이라고 칭송받는 카이사르 가문의 모습은 어떠한지.

가족...이라고 불려야 할 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그를 맞이할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던 아버지는, 과연 자신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도.

그래서 이 의뢰를 골랐다.

곧 있으면 [하이 레스티오]의 습득이 끝난다.

한 턴에 한 번씩 HP/MP를 채워 주는 필수 패시브.

이제 장기전을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그동안 마석을 바짝 흡수해야겠군.'

출발은 바로 내일이지만, 시간은 충분했다.

원작에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 찬란한 가문의 모습을 눈에 담기 위해, 오늘도 탑을 오를 생각이었다.

'보스... 잡아 볼까.'

알라노가 빠져 있는 상태에서 탑을 오르진 않을 거다.

오늘 탑은 마누스 본인의 독무대라는 것.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는 가벼운 몸을 이끌고, 탑으로 향했다.

제20화

- 돌아온 탕아

* * *

카이사르 가문의 아침이 밝았다.

거대한 저택.

웬만한 마을 수준의 규모를 자랑하기에, 저택이라고 불러야 할지 의문이 드는 곳에 볕이 들었다.

눈부신 여명 아래, 거대한 제국이 눈을 떴다.

사용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마법으로 잠들어 있던 모든 것을 깨우고, 가문의 주인이 일어나길 기다렸다.

완벽히 해 놓지 않으면 주인이 실망할 터.

그렇게 된다면, 오늘 하루의 기분이 굉장히 찝찝할 것이다.

"기침하셨습니까."

"음."

검은색 머리.

푸른 눈동자.

어딜 가도, 어디에서 봐도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댈 수 있는 외모의 남성이 깨어났다.

마법으로 정제된 물을 마시고,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만끽하며 바닥에 발을 딛는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첫째는."

"어제 준비를 모두 마치고 돌아오셨습니다."

"가지."

카이사르의 주인.

위대한 마법사.

마법의 황제라고 불리는 인물이 발걸음을 옮기는 것으로 카이사르 가문의 하루가 돌아간다.

그는 조용히 걸으며, 모든 것을 체크했다.

퍽 만족스러웠는지, 그의 입은 굳게 닫힌 채였다.

그를 보좌하는 비서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꾸벅, 극진한 예를 취한 비서는 듣기 좋은 목소리로 오늘 하루 있어야 할 일을 읊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라베스 가주님. 보고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카이사르 라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머무는 곳에서부터 식당까지는 성인 보폭으로 약 10분이 걸렸다.

이는 선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었다.

긴 복도를 지나며 풍경을 보고, 저택을 거닐며 사용인들과 눈을 마주친다.

밤새 저택에 문제는 없었는지, 침입자와 부상자는 없었는지, 또 아침이 밝았을 때 어떤 일이 생겼는지 자세하게 듣기 위해서 만들어진 동선.

큰 가문의 일은 크고 많은 법.

"-여기까지가 보고 사항입니다. 그리고, 미토스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의뢰인가."

"그렇습니다. 지원자가 있다고 하더군요."

"이름은?"

라베스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났다.

사실 지원자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었는데, 설마 그런 불친절한 임무를 수락할 줄은 몰랐다.

궁금증이 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호기심을 이끄는 소재는 많지 않았는데-.

"그게...."

"적대 세력에서 신청했나?"

"둘째 도련님입니다."

우뚝-.

절대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라베스의 걸음걸이가 멈췄다.

혹시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다시 물었다.

극히 드문 일이었다.

"내 아들, 마누스가 지원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아카데미 공인 서신입니다. 잘못되었을 리는 없을 겁니다."

"손님맞이를 철저히 하라."

비서는 고개를 숙였다.

손님이라니.

아직 라베스는 그를 인정하지 않고 있던가.

움브라 중 하나가 보고를 올렸을 터다.

그는 소문을 믿기보단, 자신의 두 눈을 믿었다.

움브라는 둘째 도련님인 마누스가 드디어 재능을 개화한 것 같다고 말했지.

재능이란 그렇게 쉽게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잘 알았다.

'그게 정녕 사실이라면-.'

라베스는 바삐 움직이는 가문의 식솔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둘째.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아들이지만, 실망감이 더 많은 아이였다.

아픈 손가락이라고들 하지.

그런 아이가 바뀌길 바라며 애써 아카데미로 보냈다.

그의 형과 누나도 미토스 아카데미에서 수석을 놓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결과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바뀌었느냐. 아들아.'

식솔들은 그를 '내놓은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같은 식구들마저, 마누스를 무시하거나 천대했다.

단지 재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어루만진 것은, 오직 그의 어머니 '카이사르 베니니타스'뿐이었다.

재능은 물려받지 못했지만, 성격은 가장 카이사르와 똑같았던 마누스.

하지만, 그 어느 아비가 아들을 미워하겠는가.

가주로서의 인격이 강했기에 그를 보듬어 줄 수 없었다.

아직도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짐이었다.

복잡한 심경을 뒤로하고, 그들은 식사 자리에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가주님."

각 별채에서 도착한 가족들이 모였다.

딸 둘. 아들 하나.

애지중지 키워 온, 카이사르의 미래.

라베스는 무뚝뚝한 얼굴로 테이블의 가장 끝에 앉았다.

그가 앉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마나를 듬뿍 먹여 재배한 채소와 고기들.

일반인들은 평생 한 번 먹기도 힘들 정도의 호화스러운 만찬이 차례차례 흘러나왔다.

"별일들은 없었겠지."

"예, 가주님."

"오늘, 마누스가 온다."

뜬금없는 소리에 일순간 식기 움직이는 소리가 멎었다.

그가 없어 집안이 조금 조용해졌나 싶었는데, 이게 웬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살풋 인상을 찌푸린 장녀가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지금 아카데미에 있어야 할 시기가 아닙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설마."

라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도 모르진 않았다.

미토스 아카데미에서 치러지는 외부 임무 평가.

드물게 가문에서 의뢰를 보냈다는 건, 가족 전부가 알고 있었으니.

"맞다."

"은슬로 경의 실종은... 이미 처리된 문제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묵직한 물음은 단순히 되묻는 것이 아니었다.

장녀는 순간 엄습하는 압박감을 가벼이 받아 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 즉시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조아렸을 기운이 식탁 전체를 지배했다.

장녀, 카이사르 인비데아.

그녀는 당당하게 제 할 말을 건넸다.

옛날의 그는 이제 없다.

그녀가 생각하는 마누스는 난폭한 망나니, 가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였다.

"그는 재능이 없습니다. 다이아 등급의 임무를 맡을 재량이 안 된다고 판단됩니다만."

"그건 내가 판단한다. 딸아."

무거운 공기가 한층 짙어졌다.

가주는 마나를 사용하지도, 일부러 분위기를 잡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을 뿐이다.

자신의 딸처럼.

-그런데도 이 분위기, 이 중압감은 대체 무엇인가.

식기의 달그락거리는 소리, 식솔들이 바삐 움직여 스치는 옷자락 소리.

음식을 담는 소리, 심지어 창문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새들의 지저귐 소리까지.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주인이 웃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했다.

"앉거라."

"-네."

장녀, 인데비아는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라베스가 적막을 깨부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입을 연 것은 고작 5초 남짓한 시간 안에서였다.

그의 한마디로, 분위기가 다시 원상태가 되었다.

"너희들이 어떤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지는 잘 안다. 하지만, 꽃은 저마다 피는 시기가 있지."

혹시 모르지.

그 시기가, 15년이 지난 지금일지도.

라베스는 가주이기 이전에 이들의 아버지였다.

올바르고 강하게 키워 낼 의무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지켜보자꾸나. 과연 녀석이 꽃을 피웠는지."

그래서, 마지막 기회를 주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이견은 없었다.

그들은 의견을 피력할 수 있을지언정, 결정할 순 없었다.

그 결정권을 가지기 위해 후계자가 되고, 가주가 되기 위한 싸움을 이어 가야 하니까.

자녀들의 심기는 퍽 불편했다.

차남이자 남매 중 셋째.

그는 당연히 후계자 서열에서 제외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찬란하게 핀 꽃이라면?

'불편하군.'

누군가의 생각은, 곧 자녀들 전체의 생각과 같았다.

그들은 보았다.

탕아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은은한 미소를.

* * *

집으로 향하는 길은 의외로 간단했다.

현대에 나온 게임의 공통적인 요소가 하나 있다.

유저의 편의를 봐주기 위한 '빠른 이동' 시스템.

현실이 되었지만, 그런 부분도 충실히 구현되어 있었다.

텔레포트 마법진.

특정 좌표를 입력하면, 그곳으로 단번에 이동할 수 있는 이동 수단이었다.

"카이사르령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마누스가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미토스 아카데미와는 다른 공기가 느껴졌다.

카이사르 공국은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중 한 곳이다.

1년 365일 기온이 영상 10도에서 20도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맑은 날이 대부분이며, 강우량 조정은 마법사들이 알아서 한다.

농사짓기도 좋고, 주변에 절경이 많아 관광지로도 인기.

'이런 곳에서 살았다 이거지. 재벌 안 부럽네.'

현대의 재벌이 제아무리 날뛰어 봤자 나라를 소유하진 못한다.

물론 그들이 대단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현대에선 법률과 제도가 막고 있지 않던가.

그런데 여긴 오직 카이사르만을 위한 공간이다.

법도, 제도도, 이곳에 있는 주민들도 모두 카이사르라는 이름에 귀속되어 있다.

그 흔한 호위 하나도 대동하지 않은 채였지만, 마누스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의 머리칼만 보고도 사람들은 접근하지 않았으니까.

"-음?"

저 멀리, 제일 거대한 건축물을 향해 걷던 도중 사람보다 훨씬 큰 높이의 무리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붉은색, 아주 귀한 염료로 물들인 망토를 나부끼는 일련의 무리.

그들은 모두 적갈색 말을 타고 있었으며, 아주 위엄 있는 모습으로 가도를 거닐었다.

길을 걷던 이들이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주인의 충실한 검이 길을 지나가고 있다.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경의를 표했다.

"길을 터라!"

"어서 비키거라!"

다소 강압적으로 보였으나, 그들은 빠르게 움직여야 했으며 시민들을 안전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다소 언성이 높아지는 거야, 어쩔 수 없겠지.

모두의 고개가 낮아졌을 때, 유일하게 그들을 올려다보는 이가 있었다.

검은 머리칼을 스치는 바람이 꽤 선선했다.

성벽처럼 다가오는 기사들이 그의 앞에 우뚝 섰다.

붉은 망토가 휘날렸다.

"도련님을 뵙습니다."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환영하듯 울렸다.

카이사르의 주인 중 하나가 돌아왔다.

망나니, 버림받은 아이라고 불렸지만- 그래도 카이사르다.

"모시러 왔습니다."

거대한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들은 이 마차를 위해 시민들을 물리고 길을 텄던 것이다.

마누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의 성격을 알 것만 같았다.

어딜 가나 아버지란 사람들은 똑같은 걸까.

못나고 말썽만 피우는 아들이지만, 그래도 가족이라는 걸까.

'그렇지 않다면, 카이사르라는 이름값을 유지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

어찌 됐든 상관없다.

그는 이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고, 호의를 베풀었다면 기꺼이 받아들이리라.

마차는 마법 처리가 되어 있는지, 고급 세단을 타는 느낌이었다.

편안하게 앉아, 밖을 바라봤다.

아직도 고개를 들지 않는 사람들.

그들에겐 모두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미미한 공포심.

같은 인간임에도 우러러보는 미지의 감정이 그들 모두에게서 느껴졌다.

'이것도 나쁘지 않지.'

평범한 남자였을 때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기분이었다.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것이 본래 마누스의 심성인지, 남자가 가지고 있었던 심성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출발하지."

"-예."

마차가 출발했다.

마누스는 저 멀리 보이는 저택을 보며 뇌까렸다.

아버지.

탕아가 갑니다.

제21화

- 못다 피었지만 찬란하다

* * *

솔직히 감탄했다.

현대에 지어진 궁전도 이렇게 크진 않을 거다.

그래, 여긴 공국이었지.

헛웃음이 나왔다.

미토스 아카데미의 교정 넓이와 비슷한 크기인데, 이걸 개인이 소유하고 있다니.

수백,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정과 비슷한 규모.

그곳을 관리하는 자들만 수백 명일 터.

'이런 곳에서 살았단 거지.'

정문이 보였다.

황금색과 붉은색으로 치장된, 화려함의 극치.

오직 선택받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문이 열렸다.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고, 유려하고 매끄럽게.

사용인들이 보였다.

모두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로, 마차를 똑바로 응시했다.

하나같이 미남 미녀들이었는데, 게임 속 설정을 잘 반영한 것 같았다.

그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는 장면은, 가슴속에서 뭉클한 감정을 이끌어 냈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함께 올려 퍼지는 환송의 합창.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마누스는 극진한 대접과 함께 땅을 디딜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왜 이곳이 최강의 가문 중 하나이며, 위대한 곳이라고 불리는지 깨달았다.

옥죄어 오는 마나가 심상치 않았다.

마치 드래곤볼에 나오는 수련의 방처럼 이곳만 중력이 배가되는 기분.

'저 사람이-.'

그는 고개를 돌려,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내려오는 사람을 마주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가장 선두에 선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라는 걸.

자신보다 더욱 검고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머리칼.

짙은 마나를 담고 있는 푸른 눈동자.

마누스는 볼 수 있었다.

'압도적이다.'

그의 주변으로 일렁이는 마나는, 자연재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보면 구역질이 날 정도로 압도적인, 전율스러운, 공포감이 치솟는 마나.

저게 바로 절대자.

마누스 본인이 목표로 해야 할 이상향이었다.

"아들아."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마누스는 예를 취했다.

게임에서 흔히 보던, 그런 예법.

카이사르의 몸은 생각하는 것만으로 완벽한 자세를 연기했다.

아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 나온 라베스는 놀라움을 감추며 덤덤히 말했다.

그는 진정 꽃을 피웠는가.

흥미가 점점 자라나기 시작했다.

"임무 때문에 왔다고."

"그렇습니다."

"네 누나를 만나 보거라. 그 아이가 책임자니."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후를 더 나눴으면 좋겠지만, 솔직히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혔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 가득이었다.

그는 조용히 자리를 벗어나려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붉은 머리칼의 여인과 눈을 마주쳤다.

뭘까, 이 그리운 기분은.

그녀는 아련한, 그리고 자애가 가득한 눈빛으로 마누스를 바라봤다.

"아들, 오랜만이구나. 보고 싶었단다."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렇게 의젓한 표정과 몸짓으로 인사를 할 줄 알았다니.

항상 응석 부리던 아이가, 진짜 카이사르의 모습을 갖추고 나타났다.

그녀가 조용히 웃었다.

"그간 고생 많았니? 응?"

"아닙니다."

"우리 아들. 뭔가 심경에 변화가 있었나 보구나."

"이제 카이사르란 이름에 걸맞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어머니, 베니니타스가 조용히 웃었다.

대견하다는 듯이 웃는 그녀의 눈동자엔 슬픔이 어렴풋이 보였다.

왜 그런 것일까.

마누스는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시간이 없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실종 사건은 참 많은 걸 내포하고 있었다.

이 게임에서 보통 실종 사건의 주범은 '교단'이었고.

'꼭 등장하는 단서들이 있지. 내 예상이 맞는다면, 그것 위주로 찾아가면 될 거다.'

마누스는 보고를 듣기 위해 여독을 풀기도 전에 누이의 방으로 향했다.

안내를 맡은 사용인이 고개를 조아리고 종종걸음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감히 마누스에게 말을 걸지도, 옥체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 망나니 같던 둘째 도련님이 맞는가?

마치 현 가주님의 젊은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아무런 위엄도 없었고 껄렁껄렁한 모습이었던 마누스는 없다.

"이쪽입니다."

"고맙군."

마누스의 말에 사용인의 몸이 굳었다.

고맙다니-.

성격이 싹 바뀌었다는 것이 사실이었구나-.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문이 열렸다.

붉은빛으로 물든 공간감이 이질적인 느낌을 만들었다.

방이 아니라 펜트하우스를 보는 것 같은 공간.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가자, 여성치곤 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방에 스스로 찾아오다니, 정말 변했나 보구나."

마누스는 말없이 소리의 근원지를 돌아봤다.

빙의하기 전의 그였다면, 눈이 돌아갈 정도의 마녀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주 두꺼운 서적을 탐독하고 있었는지, 앞에 있는 테이블엔 고급스러운 커버로 싸인 책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임무에 대해서 들으러 왔는데."

"예의범절이라는 것의 인식도 변한 모양이야."

뭐, 상관없겠지.

그녀는 책을 덮으며 일어섰다.

심오한 마나가 주변을 지배했다.

역시 카이사르 가문은 괴물들의 집합소였다.

그녀는 안부를 묻지도, 실력에 대한 것을 묻지도 않았다.

그저 임무에 대해 브리핑을 시작할 뿐.

누이, 인비데아는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을 시켰다.

"준비 끝났습니다."

"따라와라."

세 사람이 향한 곳은 작전 테이블 비슷한 곳이었다.

거대한 지도가 중앙에, 현황판처럼 보이는 간이 칠판.

여기저기 널브러진 서류가 있었다.

인비데아는 마누스를 그곳에 데려다 놓고,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그녀의 말, 몸짓, 눈빛에는 불만이 한가득하였다.

못마땅한 동생을 보는, 아니 그 이하의 것을 보는 태도.

그간의 배경을 생각해 본다면, 저런 반응도 당연한 거다.

그렇다면, 그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겠지.

마누스는 침착하고 안정된 눈빛으로 누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은슬로 경. 델타 기사단의 분대장 중 한 명이다. 그가 북쪽 숲에 순찰을 나갔다가 실종되었지. 흔적은 몇 가지 찾았지만, 이렇다 할 단서는 없다."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그래서인지 머릿속에 더 쏙쏙 들어오는 걸지도.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의문의 문양이 남아 있다. 그리고 피가 묻은 단검 하나가 놓여 있었지. 나머지는 이상하리만치 깨끗해."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마누스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문양, 그리고 피 묻은 단검.

게임 속 세계관에서 이런 짓을 하는 건 딱 한 단체뿐이었으니.

"디레 교단."

"음?"

"흑마법을 상징하는 역오망성, 그리고 해골이 달린 피 묻은 단검."

"어떻게-."

인비데아는 설명해 주지도 않았던 디테일까지 말하는 마누스를 보며 조금 놀랐다.

그런 정보는 가문에서도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정보였다.

당연했다.

이제 막 처음 등장한 녀석들이니, 규모, 인원, 어떤 성향인지, 또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 모두 파악해야 했으니.

뭐든지 처음이 어렵다.

조사를 시작하기 전, 그 준비 단계가 지루하고 오래 걸리는 법이다.

"디레 교단을 꾀어내는 방법은 간단해."

그들은 악마들을 숭배한다.

죽음의 신과 연관되어 있는 악마.

뻔한 이야기지만, 게임은 클리셰가 들어가야 하는 법.

세계관 최강자급의 악마를 숭배하는 교단이 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너-, 그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 물었어."

"디레 교단은 피에 민감하지. 그들이 불러내려는 것에 대한 제물. 그것을 바치기 위한 '신성한 피'가 필요해."

"카이사르 마누스-!"

폭풍 같은 마나가 공간을 때렸다.

분노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누이는 마누스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녀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대체, 이런 정보는 어디서 났으며, 왜 이토록 자세하게 알고 있는 건지.

경우에 따라선 다양한 상황을 의심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아직 어머니도 알아내지 못한 정보다.

"어째서 네가 그 정보를 알고 있는지 물었어. 대답해라."

"난 의뢰를 해결하러 왔고, 그에 따른 지식을 알고 있을 뿐이야.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성은 못 느끼겠는데."

"너-."

파지직-.

그녀의 마나가 공격 의사를 가지고 술식을 만들어 내려 했다.

허나 마누스는 태연하게 마나 속을 헤집고 걸어 들어가, 지도와 단서를 살폈다.

그 태연자약함에, 인비데아는 헛웃음이 나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겁쟁이에 무능력자, 항상 형제들과의 접촉을 꺼렸던 아이였다.

마법 하나 쓰지 못해, 가문의 반푼이로 자랐던 마누스였다.

'어째서, 내 마나에 반응을 안 하는 거냐. 본래 무섭다고 뛰쳐나가야 하는 겁쟁이였잖아.'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차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동생에게 마법을 쓰진 못했다.

하아-.

작게 한숨을 쉰 그녀가 추궁을 포기했다.

그녀는 여느 소설에서 나오는 악녀가 아니었다.

카이사르로서 품위는 지키고자 했지만, 딱 거기까지.

"다른 사람은 실종된 건 없나 보군."

"맞아. 지금은 은슬로 경 홀로 사라졌지만, 피해자가 속출할 수도 있지. 조사를 더 할 때까지 미뤄 둘 생각이었단다."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라면 충분하다.

디레 교단은 서브 퀘스트 라인의 최종 보스라고 할 수 있다.

보상도 톡톡히 받을 수 있고-.

무엇보다 히든 마법을 하나 배울 수 있거든.

흑마법의 끝이라고 불리는 마법 [플레나리우스].

디레 교단과 엮인 일이라면, 반드시 루트를 뚫어 놔야 할 과제였다.

"바로 출발할 수 있겠지?"

"동생이라도 보고 가지 그러니."

마누스는 대답하지 않고 단서와 지도를 챙겼다.

게임에서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직접 해당 장소를 찾아가야 했으니-.

생각보다 가족들은 따스한 사람들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나.

다른 이들은 어떨까.

궁금했지만, 이틀이라는 시간 동안 해결하는 것이 낫겠다 판단했다.

탑에 올라가지 않으면 부족한 마나를 채울 수 없었다.

'탑 손실은 못 참지.'

여긴 게임처럼 몰아서 노가다할 수 없는 곳.

매일매일 꾸준히 탑에 들르지 않으면, 상당히 손해를 보는 구조라는 뜻.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니, 낭비할 틈은 없었다.

"시간이 없어서. 방학 때 보자."

"마누스. 정말로 꽃을 피웠다면, 너도 이 가문의 주인이 되려고 할 거니?"

"그런 거엔 관심 없어."

인비데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호해 보이는 그의 모습은, 의미 모를 신뢰를 주기 충분했으니.

인비데아는 그에게 패 하나를 내밀었다.

"기사단을 움직일 수 있는 패. 잘 이용해서 실종 사건의 전말을 밝히길 바라."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도 심성이 착한 이들이었는지, 만화나 소설에서 보는 적대감은 없어 보였다.

하긴, 그러니 마누스가 깽판을 치고 폭군 노릇을 했는데 편지로 타이르는 정도겠지.

생각보다 좋은 집안이구나-.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건, 미묘하게 깃든 인비데아의 눈동자 속 감정 때문이었다.

가족끼리 싫어하고, 가족끼리 증오하고.

그런 건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아니면 그저 지켜보는 걸지도.'

마누스는 방을 나섰다.

그와 동시에, 기다리던 메시지가 떴다.

[하이 레스티오 습득 완료]

[배울 스킬을 선택해 주세요.]

[현재 스킬 슬롯 - 1개]

스킬 슬롯이 하나라는 건, 이걸 더 늘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건 차차 알아 갈 수 있겠지.

이곳이 진짜 게임 속 세상이라면,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튜토리얼은 반드시 존재할 테니까.

다음 스킬은 뭘 고를까?

그가 스킬 목록을 떠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기사단이 머무는 숙소.

'궁금하네.'

이곳의 기사단은 어떤 수준일지.

서브 퀘스트 라인을 따라가는 데 도움을 준다면, 충분히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자들인지.

그의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서브 퀘스트 : 은솔로 경의 실종 시작』

<숲으로 들어가, 실종의 흔적을 쫓아라.>

제22화

- 서브 퀘스트 : 디레 교단

* * *

병영.

혹은 기사단 숙소라고 불리는 곳.

붉은 독수리를 상징으로 하는 카이사르의 기사단에는 대륙 최고 수준의 인재들만 모여 있었다.

미토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항상 거론되는 이름이기도 했다.

대기업은 복지도 좋다는 말이 있듯, 이곳 록스 대륙도 마찬가지.

대륙 전체로 퍼져 있는 가문들은 기업과 비견된다.

좋은 기업에 취업하고 싶은 건, 사람이라면 당연한 심리.

"둘째 도련님을 뵙습니다!"

"은슬로 경 실종 건으로 왔다."

"안 그래도 보고를 받았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지원자들이 도착해 있습니다."

마누스는 깍듯한 보고, 철저한 위계질서에 가슴 깊이 감명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상관이 된 기분이 이런 건가?

본래의 인격이 꿈틀거리며 좋다고 아우성치는 걸 겨우 억눌렀다.

병영은 깔끔했다.

대한민국 군대에서도 맨날 청소하라고 그렇게 닦달하더니만, 여기도 다른 건 없는 모양.

픽, 의미 없는 웃음을 흘리며 2층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인가?"

"예. 차기 분대장 이하 열 명의 기사입니다."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느껴지는 마나 역시 최상이었다.

품평하듯 바라보는 시선 때문일까, 그들의 표정에서 긴장감이 묻어났다.

그들에게 있어, 마누스는 회장님의 망나니 아들이나 다름없을 테니-.

"평소 은슬로 경과 친분이 있던 사람은 거수하라."

차기 분대장이 손을 들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레게브라고 밝혔다.

각이 진 얼굴이 육중한 갑옷과 퍽 잘 어울렸다.

"단독 행동을 하거나 이상행동을 보인 적은 없나?"

"실종되기 전날 밤, 이상한 기도문을 읊긴 했습니다. 우연히 들은 것입니다만."

"다음엔 숲에서 단독 행동을 했겠군."

레게브의 안색이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걸 어떻게 예상했냐는 눈치.

전형적인 수법이다.

본작에서도 묘사되어 있는, 디레 교단의 트레이드마크.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지도를 한 번 들여다보며 다음 배울 스킬을 결정했다.

'스킬 : 둑스 검색.'

[검색 결과 : 1건]

[둑스 - 6시간]

'습득한다.'

타이머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숲까지 걸어가는 데 1시간 남짓.

지금 시간은 오후 4시경.

디레 교단은 밤을 좋아한다.

사냥감을 잡기 위해선, 사냥감이 좋아하는 곳과 시간에 덫을 놓아야 하는 법이다.

기사들을 바라보고 마누스가 얘기했다.

"다섯 시간 후에 숲으로 출발한다. 여기 모인 인원은 시간에 맞춰 집합하도록."

"...."

"대답."

"예, 예! 알겠습니다!"

기사들의 대답을 듣고, 마누스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남은 다섯 시간 동안은 도서관에 있는 마법 서적이나 탐독할 생각이었다.

활용할 수 있는 술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똑같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오롯이 자신에게 달렸다.

마누스는 생각했다.

이곳으로 오기 전 같은 생활은 하지 않겠노라고.

'이곳은 재밌거든.'

익숙함보단 새로움을, 과학보단 마법을 익히고 싶었다.

도구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대보단,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이곳이 훨씬 적성에 맞았다.

조금은 들뜬 걸음이 되어, 그가 공부를 위해 걸음을 옮겼다.

* * *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것 같은 기사단 회의실.

마치 가주가 왔다 간 것처럼 고요하고 가라앉은 분위기가 맴돌았다.

후아-.

누군가가 한숨을 푹 내뱉는 것으로, 경직된 분위기가 풀렸다.

"둘째 도련님 맞지?"

"어.... 나도 처음에 아닌 줄 알았다."

"아카데미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수군거리는 기사들의 목소리엔 놀람과 경악이 잔뜩 묻어났다.

본래 망나니 상사 앞에서는 누구든지 깍듯한 법이다.

더럽고 치사해도 뭐 어쩌겠는가.

오히려 그런 사람에게 인맥을 만들어, 교묘하게 이용해 먹는 놈들도 허다하다.

그런데 이번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똑 부러지게 변해서 나타났다.

흡사 어린 가주님을 보는 것 같았다.

"자 자, 다들 약속 시간까지 늦지 않게 집합해. 괜히 또 밉보여서 털리지 말고."

"알겠습니다."

"저렇게 보여도 그 망나니야. 실수해서 안 좋은 말이 위로 올라가게 하지 말자고."

"넵!"

기사들은 평판을 위해서라도 발 벗고 나서야 하는 존재다.

조금은 못 미덥고 의심스러운 도련님이지만, 그들은 주군을 위해 검을 드는 기사.

그들은 자신의 검과 목숨을 기꺼이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병영이 분주해졌다.

숲은 제법 위험한 곳이었다.

도련님이 다치거나 똑같이 실종된다면, 그날부로 기사단은 없어질 수도 있으니.

"한 치의 실수도 없어야 한다. 알겠지?"

"알겠습니다!"

우렁찬 소리는 병영 전체를 울릴 정도였으니, 그들의 기개와 다짐을 드러냈다.

그렇게, 해가 할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든 시각.

텁-.

이젠 답답해 보이지 않는 서적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시계는 정확히 오후 8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누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숲으로 가, 디레 교단을 마주할 시간이었다.

그가 습득한 '둑스' 마법은 일종의 길잡이 역할을 해 준다.

배울 수 있는 캐릭터는 피어슨 단 한 명.

'그래서 녀석을 빼지 못하는 것도 있지.'

마나의 길을 따라가면, 플레이어에게 반드시 이득인 것이 나오니까.

다음 층으로 가는 계단, 황금 고블린이라고 불리는 '광대' 아르카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 등등.

지구라트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요소를 찾는 용도로 쏠쏠하게 이용할 수 있는 마법.

그의 가설이 맞는다면, 서브 퀘스트의 목적지를 찾는 데 아주 도움이 될 거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병영 앞에 도착하니, 이미 기사들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도열해 있었다.

"오셨습니까!"

"출발하지."

마누스는 그들을 슥 보고 모두가 왔다는 걸 파악했다.

기사들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마누스를 보며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그래, 소문이 돌았지.

둘째 도련님이 변했다는 것.

옛날 같았으면 갑옷이 마음에 안 든다며 정강이를 깠을 거다.

이젠 그런 것 하나 없이, 바로 임무로 들어갔다.

'이게 진짜 무슨 일이야.'

'가주님은 좋아하시겠네. 그런데 아가씨나 첫째 도련님은 좋아하시려나?'

'괜히 복잡해지는 거 아니야?'

가문은 기업과 같다고 했고, 사회 속에선 언제나 알력 다툼이 존재한다.

균형이 아슬아슬하게 맞는다면 자잘한 견제는 있을지언정 안정기에 들어선다.

지금 카이사르가 딱 그러했다.

세 명의 구도가 딱 맞아떨어져, 후계자를 위한 경합이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기본적으로 우애가 좋은 남매라 혈전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거야 나중엔 모르는 일이고.

'그런데, 저분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것도 각성한 듯이 재능을 활짝 개화한 채로.'

맨 앞에서 걸어가는 신입 분대장, 레게브가 뇌까렸다.

이건 이거대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특히 자존심 강하고 평소 마누스를 싫어했던 첫째 도련님.

그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벌써부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장녀가 그를 걱정하는 쪽에 속했다면, 장남은 그를 경멸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가문이 혼란에 휩싸일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다.

"숲은 위험합니다. 지금부턴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아니, 내가 앞장선다."

"위험합니다. 도련님께서 혹여 무슨 일이라도 당한다면, 가주님께서 용서치 않을 겁니다."

마누스가 레게브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숲의 초입.

빛이 줄어들고, 수천 미터나 되는 구덩이가 내뿜을 만한 어둠이 보였다.

풍부한 마나가 있고, 다양한 약초와 질 좋은 나무, 희귀한 몬스터가 있어 카이사르 공국에서도 꽤 중요한 위치에 있는 숲.

"난 이곳에 의뢰를 수행하러 온 아카데미 학생이다. 보호를 받아야 할 도련님이 아니야."

"...알겠습니다."

레게브의 눈에서 흔들림이 사라졌다.

마누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다시 몸을 돌려, 숲으로 들어갔다.

[아르보르 숲]

'시작은 이곳이었나.'

디레 교단이 원작에 나오는 순간은 이미 세력을 어마어마하게 확장하고도 모자라 레메게톤의 악마까지 불러낸 다음이었다.

분명히 그 시작점이 있었을 터.

그곳이 바로 여기인지, 아니면 대륙의 어딘가인지 확인할 기회였다.

만약 이곳이 근원지라면-.

"저쪽이군."

오늘 뿌리를 뽑아야 할 터다.

마나를 움직였다.

공통 마법인 [필라-록스]를 사용했다.

유저들의 명칭은 [라이트].

빛의 구체를 이용하는, 흔히 아는 마법이었다.

뿅 하고 떠오른 마법의 구체가 어둠을 몰아냈다.

'마법. 그것도 상당한 수준이다.'

'저걸 영창도 없이-. 역시 카이사르의 핏줄은 핏줄인가.'

소문에 둔감한 기사들도 알고 있었다.

마누스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반푼이였다는 걸.

그런데 이런 수준의 마법이라니.

기사들의 두 눈에서 믿음이 자라났다.

숲의 외길이 끝날 즈음, 마누스에게 좋은 소식도 찾아왔다.

[둑스]의 습득이 끝난 것.

['둑스'의 습득이 완료.]

[습득할 스킬을 선택해 주세요.]

[현재 슬롯 - 1개]

'이건 조금 오래 걸리긴 하지만, 익혀야 하니-.'

카덴차와 조합하면 정말 사기적인 패시브가 하나 있긴 하다.

주인공은 익힐 수 없었지만, 커뮤니티에서 항상 떠들곤 했었지.

카덴차와 조합하면 가장 사기적인 스킬이 뭔지.

마누스도 항상 생각했었다.

이 게임의 근간이 되는 카덴차와의 시너지가 좋은 스킬은 무엇인지.

주인공이 더 강해지는 것을 바랐던 남자가 항상 상상했던 것.

'마법사의 마음가짐 검색.'

[검색 결과 : 1건]

[마법사의 마음가짐 - 100일]

'쯧.'

100일.

세 달이라는 시간은 꽤 길었다.

그는 걸음을 옮기며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다음 보스가 나오기 전까지, 얼추 시간이 맞는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이건 포기할 수 없는 스킬이었다.

[마법사의 마음가짐]은 마법사 자체의 능력을 대폭 올려 주는 패시브 스킬이었으니.

[마법사의 마음가짐]

[마법사가 되려 한 이유는 무엇인가?]

[왜 마법사가 되려 했으며, 마법을 쓸 때의 마음은 무엇인가.]

[마법사는 의지로 움직이는 생물이다.]

마나가 요동치는 방향이 느껴졌다.

'둑스'가 발동되어, 희미하게 길을 비췄다.

마누스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은 스킬 설명을 빠르게 훑었다.

[마법을 중첩해서 사용할 시 공격력 중첩]

[다중 마법 보조]

[정신계 공격에 대한 면역]

[소모 마나 30% 감소]

'배운다.'

망설일 이유는 없다.

그동안은 혼자의 힘으로 성장하면 될 일.

본래 더블 캐스팅의 천재라는 콘셉트를 가진 캐릭터에게 붙어 있는 스킬이다.

'다중 마법 보조'와 '중첩해서 사용할 시 공격력 중첩'은 카덴차와 엄청난 시너지를 낸다.

대충 계산해도 본래 위력의 200%는 넘게 나오는 패시브.

이것만 익힌다면, 3클래스 마법으로 이뤄진 스프레드만으로 정리될 수준.

100일이라는 기간이 절대 아깝지 않은 스킬이었다.

시계가 돌아갔다.

최강에 가까워지는 한 걸음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 * *

밤에 오는 숲은 깊고 고요했다.

찌르르 울리는 벌레도, 나뭇잎을 스치는 맹수도 잠들어 고요했다.

이따금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들은 빛을 향해 다가오지 않았다.

거침없이 나아간 마누스는 드디어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흔적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곳인가."

"그렇습니다."

"경계를 강화하고 둘씩 조를 나눠 주변을 수색한다. 레게브는 나와 함께 가지."

기사들이 움직였다.

마누스는 수상한 공간이 있으면 말하라고 일렀다.

디레 교단은 지하를 좋아한다.

통로가 바로 호랑이 굴의 입구였다.

[둑스]

마나가 흘러 나갔고, 희미한 빛이 마누스에게 길을 인도했다.

그 길의 끝에는 작은 돌이 있었다.

아니, 돌로 위장한 지하 통로였다.

손을 휘저어, 마나로 돌을 치워 냈다.

어둠.

겨우 몰아낸 어둠이 모두 이곳에 집결해 있는 것 같은 어둠.

"...분대원을 부르겠습니다."

"아니."

[본 서브 퀘스트는 1인용입니다.]

[홀로 입장할 수 있습니다.]

[보상 : 스킬 슬롯 +1]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마누스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도련님!"

"그곳에 대기하고 있어라."

"아니-!"

어둠에 먹히는 것 같은 마누스를 따라 레게브가 황급히 지하 통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파직-!

허나 어둠은 그를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레게브가 식은땀을 흘리며 쩌렁쩌렁 소리쳤다.

그가 검을 들고 내리쳤으나, 자기 손만 아플 지경이었다.

"-X 됐다."

공허한 그의 말이 어둠 속을 맴돌았다.

『서브 퀘스트 : 디레 교단의 은신처』

<지하 통로 안에 있는 교단의 실체를 파악하라.>

제23화

- 흑마법 그렇게 쓰는 거 아닌데

* * *

깊은 어둠.

세상과 홀로 떨어져 있는 것 같은 괴리감이 드는 공간이었다.

터벅터벅 걸을 때마다 울리는 소리는 이 통로가 얼마나 깊은지 알려 주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어둠이라, 라이트 마법이 없었다면 굴러떨어져 죽었을 정도의 깊이였다.

횃불도 하나 없고, 빛이 통하는 길 자체가 없는 공간.

마누스는 침착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나선형으로 꼬인 계단의 끝에 다다랐을 때,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역겨운 냄새가 훅 풍겨 왔기 때문에.

비릿한 냄새의 정체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역시, 피를 아주 좋아하는군."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통로가 좁고 길었기에 소리가 울렸다.

마누스는 걸음을 계속해서 옮겼다.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를 찬송하는 송가의 음률과 비슷했다.

언뜻 들리는 노랫말은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노랫소리에 가까워지자, 누군가를 송가하는 현장이 뚝 멈췄다.

"누가 이곳에서 위대한 의식을 방해하는가."

"...."

그곳엔 빛이 있었다.

하지만, 그 빛은 어둠에 삼켜지기 직전이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횃불은 오망성의 끝에 자리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피.

그들은 신성하다고 여기는 피로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그 중심엔 실종된 것으로 보이는 기사의 시체가 자리했다.

옷은 모두 벗겨져 있었으며 내장이 들어가 있을 복부는 텅 비어 있었다.

갈비뼈 아래로는 아무것도 없는, 그러면서도 고통에 물들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평온하게 갔으면 일단 되었다.

"감히-."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마누스의 분노를 자극하는 요소가 있었다.

파지직-.

그의 전신에서 위험한 마나가 튀었다.

불길하게 요동치는 마나를 감지한 이곳의 주인이, 고개를 홱 돌렸다.

"이럴 수가-."

벌겋게 물든 이빨이 보였다.

흔들리는 빛에 맞추어 이빨에 낀 살덩어리들이 마누스의 분노를 더욱 치솟게 했다.

이곳은 게임 속이라는 건,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내 가족이 있는 집에 들어와, 내 가족의 것을 멋대로 빼앗은 죄는 무겁다."

"신성한 피! 신성한 피가 오셨다!"

녀석은 아무런 죄책감도, 공포심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저 신성한 피를 외치며 미친 듯이 웃을 뿐.

마누스는 볼 것도 없이 그에게 마법을 날렸다.

빠지지직-!

전격 마법이 화살 모양으로 쏘아졌다.

어둠을 불살라 먹으며 나아간 전격의 화살.

화악 밝아진 곳을 바라본 마누스가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어차피 맞을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으니.

"그에에엑-!"

"모두 신성한 피 앞에 제물이 되어라! 나는 그 피를 제물로 바칠 준비를 할 테니!"

흐히히- 하고 웃은 송가의 주인이 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괴생명체를 조종했다.

디레 교단과 엮이면 수도 없이 상대해야 하는 녀석들.

언데드형 몬스터인 [브리온]이 마누스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마누스는 다시 마나를 일으켰다.

양손에 찬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떼로 몰려오는 브리온을 한 방에 처리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중, 가장 즐겨 쓰던 마법을 선보일 시간이었다.

[이그니라] - [필라-록스]

[더블 스프레드]

[결과물 : 솔라 벤투스]

빛의 구체가 아닌, 화염의 구체가 떠올랐다.

작은 태양이 뜬 것처럼 뜨겁고 환하게 빛나는 구체가 어둠을 몰아냈다.

달려들던 브리온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배배 꼬았다.

녀석들의 약점은 화염 속성.

애초에 약한 놈들이라 숫자만 많을 뿐이다.

제작자가 초, 중반, 플레이어들의 마나를 빼먹기 위해 만들어 둔 녀석들이었으니.

"그에에에엑-!"

"그아아아아아-!"

"꺼져라, 버러지들."

콰아아아아-!

열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악을 멸하는 신성한 태양처럼, 화염과 빛을 머금은 구체가 적을 남김없이 태워 버렸다.

본래 3~5턴 동안 도트 대미지를 넣어 주는 마법이었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더 좋았다.

"후-."

2클래스 마법을 연달아 두 개나 펼치는 건, 그에게도 제법 부담되는 마나가 소비된다.

이럴 때를 대비해 익힌 것이 바로 레스티오 스킬.

한숨 한 번을 내뱉을 동안, 사용했던 마나의 대부분이 회복되었다.

피로감은 말끔히 없어지고, 또렷한 정신이 그곳을 채웠다.

후끈한 열기에, 송가의 주인이 뒤를 돌아봤다.

이미 브리온들은 모두 재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상황.

"오오-. 역시 신성한 피를 가진 이는 다르군요! 아주 좋은 제물이 되겠어요!"

시뻘건 이는 볼 때마다 분노를 치밀게 했다.

비쩍 마른 주제에, 느껴지는 마나는 꽤 높은 편이었다.

이 던전의 주인이 손을 뻗었다.

불쾌하고 역겨운 기운을 풍기는 마법진이 완성됐다.

마누스는 해당 마법진을 보자마자 무슨 스킬인지 알아맞힐 수 있었다.

'[이냐부스]인가.'

상대방의 인지력을 떨어뜨리고, 적아를 구분하지 못하게 하는 정신계 마법.

흑마법 중 가장 떨어지는 등급이지만, 게임에선 여간 까다로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정신계, 저주 마법은 그 존재만으로도 턴을 낭비하기에, 기피 대상 1순위였다.

음울하고 퇴폐적인 기운이 마누스에게 쇄도했다.

보통의 마법사라면, 방어 마법을 펼치거나 기운을 피해야겠지.

"신성한 피! 신성한 피가 오신다아아아-!"

"미친놈에겐 매가 약이지."

마누스는 흑마법을 정면으로 맞았다.

파직-.

상당히 기분 나쁜 바람이 후욱 불었다.

던전의 주인은 기대감에 몸을 떨었다.

제아무리 카이사르의 도련님이라고 해도, 흑마법에 직격한 이상-.

"-으응?"

"조잡하구나."

파지지직-.

그 더러운 눈이 커졌다.

활짝 펼쳐진 손.

일렁이는 푸른 눈동자.

그는 이지를 잃지도, 눈빛이 흐려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러운 것을 맞아, 극도로 분노한 맹수와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흑마법을 쏘아 낸 자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날 정도로.

마누스는 마법을 펼치지 않은 손으로 은슬로 경의 시신을 자신의 뒤로 옮겼다.

아주 훌륭한 마나 컨트롤.

그의 눈동자는 착 가라앉아, 은은한 마나의 빛을 눈물처럼 흘렸다.

[이냐부스]

[알투스]

마누스의 눈은 뒤쪽에 있는 브리온에게 향했다.

끊임없이 달려드는 잡몹 수준이지만, 역시 물량은 거슬렸다.

빠지직-.

그의 마법이 완성되었다.

"흐, 흑마.... 어떻게-!"

던전의 주인이 몸을 떨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흑마법은 악마의 은총을 받아 사용하는 마법.

신성하다고 여겨지는 인간은 배울 수 없는 것이 정석이거늘-.

혼란으로 물든 눈동자가 데룩데룩 굴러갔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공포.

잔인한 짓을 일삼던 그도, 본질은 감정을 가진 인간이었기에.

본래 포식자는 더 큰 포식자 앞에서 몸을 숙이는 법이다.

허나, 이 미천하고도 비루한 동굴의 주인은 그러지 않았다.

"네 짐승에게 물어뜯겨라. 버러지."

네가 그러했던 것처럼.

마누스가 선언하며 손을 휘둘렀다.

던전의 주인이 발사했던 것과는 격이 다른 흑마법이 쏘아졌다.

당연하지만, 고작해야 좀비, 스켈레톤 격의 브리온이 흑마법에 내성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마누스의 마법에 노출된 브리온들의 눈이 회까닥 돌아갔다.

"그에에에에엑-!"

한 놈이 괴성을 지르는 걸 시작으로, 브리온들의 폭주가 시작됐다.

다닥다닥, 벽에 붙어 있던 놈들이 밑으로 내려와, 상잔한다.

검게 썩어, 악취가 풍기는 피가 튀었다.

던전의 주인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듯,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초급 던전이라 그런가-.

마누스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쉬운 전개였다.

본래라면 빠르게 혼란을 풀고 정비.

그 후에 반격이라는 패턴을 보여야 하지만, 이 녀석은 아닌 모양.

그렇다면 오히려 좋지.

"고작 이런 거에 잡히다니...."

아마 기습을 당했거나 흑마법에 당했겠지.

지금 시기는 흑마법에 대한 방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때니까.

너무 평화로웠기에 일어난 불감증이었다.

"정신 차려! 너희들의 적은 내가 아니란 말이다!"

"그어아아아아-!"

좀비처럼 몰려드는 브리온은 당연히 던전의 주인에게도 달려들었다.

퍼엉-!

마법을 이용해 달려오는 녀석들을 떨쳐 냈다.

"으아아아-! 비키란 말이다! 신성한 피! 신성한 피를 가져와! 신성한- 끄아아아!"

마누스는 멀찍이 떨어져, 브리온에게 게걸스럽게 뜯기는 던전의 주인을 바라봤다.

브리온은 죽으면서도 딱딱하게 굳어, 던전 주인의 몸을 서서히 압박했다.

상처 입고 빠져나갈 구멍마저 막힌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사, 살려, 살려 줘어-, 살려 줘어어어!"

마누스는 대답 대신 마나를 피워 냈다.

바로 전에 시전했던 마법인 [솔라-벤투스]를 다시 꺼내 들었다.

화륵-.

거대한 구체가 다시 한번 열풍을 몰고 왔다.

그 광경은 흡사, 태양신 아폴론이 부정한 것을 태우러 강림한 모습.

브리온의 썩은 살점이 말라비틀어지고, 서서히 타들어 갔다.

"그아악! 그아아악!"

소름 끼치는 비명이 귓가를 때렸다.

악몽에서 끊임없이 괴롭힐 것 같은 사자의 비명이 동굴 전체를 울렸다.

수십 마리의 브리온이 울리는 귀곡성은 결국, 한 사람을 위한 장송곡일 뿐.

던전의 주인 역시 열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마나를 짜 올려 최대한 몸을 방어했지만, 마누스는 희대의 사기 스킬을 가지고 있는 괴물이다.

[하이 레스티오]

후욱-.

숨을 내쉴 때마다 몸이 가벼워진다.

마치 시간을 되돌리듯, 마나와 체력이 회복되는 기분은 신비로우면서도 만족스러웠다.

꾸준히 회복되는 유지력 덕분에 마나의 구체를 온종일이라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열기를 얼마나 버틸지, 발악하는 모습이 궁금하군."

삐뚜름하게 웃는 모습은 인간이 아니라, 그가 숭배하는 악마라고 해도 믿길 정도였다.

그는 악의를 가지고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거다!

한 번에 죽일 수 있음에도 화력을 조정하여 자신을 고문하고 있는 거다!

살이 뜨겁다 못해 익는다.

마나는 바닥났고, 그를 짓누르고 있던 브리온은 모두 말라비틀어져 버렸다.

사후경직으로 결박되어 있는 사체들이 그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이, 저자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광경이었다면.

"아아, 나의 군주 벨리알이시여-."

그대의 욕망을 충족시킬 그릇이 바로 이곳에 있나이다.

부디 제 희생으로 이 그릇을 발견하시어-.

그대의 욕망 그릇으로 삼으소서.

"-신성한 피가 잔에 흘러 넘칠지니."

화르륵-.

그의 몸에 불이 붙었다.

광기에 사로잡힌 남자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마누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고통을 잊은 것인지, 아니면 너무 고통스러워 미쳐 버린 것인지-.

그는 히죽 웃는 낯짝으로 마지막 말을 읊었다.

"그대는 신성한 주인의 그릇이 되리라-."

화르르륵-.

던전의 주인은 전신에 불이 붙어, 그렇게 빛이 되어 사라졌다.

그가 남긴 말은 퍽 의미심장했다.

'벨리알.'

악의 군주.

지옥의 왕.

반란의 군주라고 불리는 악마들의 왕이자, 서브 퀘스트 라인의 끝판왕.

"후-."

역한 냄새를 마법으로 날려 보내며, 마누스는 벨리알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벨리알이 강림하진 않았으나, 이곳은 DLC의 세계.

혹시 모르지.

-그 끝에서 그와 자신과 대적하고 있을지도.

어쨌든, 일은 끝났다.

저 멀리서 갑옷이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킬 슬롯이 하나 늘어났습니다.]

[습득할 스킬을 선택해 주세요.]

[현재 스킬 슬롯 - 1개]

[세계에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모든 스킬 습득 속도가 30% 증가합니다.]

물론, 보상도 톡톡히 챙겼다.

제24화

- 너도 카이사르였구나

* * *

헐레벌떡 뛰어온 기사들의 표정은 황망함과 당혹감, 혼란스러움이 범벅된 채였다.

언데드 몬스터인 브리온이 떼로 죽어 있었으며, 그토록 찾아 헤맸던 기사의 얼굴이 보였다.

그뿐인가.

여기저기 그을린 풍경과 진동하는 탄내는 그로테스크함을 더했다.

"이게...."

"왔군. 이자가 은슬로 경이 맞는가?"

"어... 그, 그렇습니다! 이런... 어째서 이런-."

레게브는 털썩 주저앉아, 은슬로 경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곱게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당장에라도 깨우면 일어날 것같이 생생했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아래로 내리면 그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의식을 치르고 있더군. 악마와 관련된 일 같았다."

"악마라니."

"이런 더러운 새끼들-!"

우르르 몰려온 기사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마누스는 그들을 흘끔 본 뒤, 레게브에게 명령했다.

"먼저 돌아가 있겠다. 이곳을 정리하고 시신을 잘 옮기도록. 날이 밝으면 이곳을 다시 찾기 위해 표식을 남겨 두는 것도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도련님."

마누스는 착잡해 보이는 레게브의 어깨를 툭툭 다독여 주었다.

그 손길은, 은슬로 경을 친형처럼 따랐던 레게브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단순한 행동이었지만, 눈을 감은 은슬로 경이 항상 해 주던 제스처였기에.

그를 생각하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둘째 도련님 마누스.

자신의 선임이었던 은슬로.

'도련님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그건 본인밖에 모르는 일이겠지.

분명한 건, 카이사르의 앞날이 더욱 밝아졌다는 거다.

기사들도 그를 다시 봤다는 듯, 연신 수군대기 바빴다.

입과 손이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도 카이사르였던 것이다.

단지, 꽃을 피우는 시기가 지금이었던 것일 뿐.

"이걸 홀로 처리하셨다니, 대체...."

"역시 그분도 카이사르였어. 진짜 대단하네."

대단한 가문에 대단한 사람.

그곳에 속해 있는 자신들도 제법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새로운 것을 보면 마음이 들뜨고 그런가 보다.

그들도 감정이 있는 인간이었기에, 당연한 이야기였다.

* * *.

저택은 고요했다.

마누스는 정문을 지키고 있는 이들을 지나, 안으로 향했다.

눈을 들어 보니, 불이 켜진 곳이 보였다.

본관 가장 위쪽에 있는 방.

가족 중 누군가가 야심한 시각까지 깨어 있는 모양이었다.

마누스는 누가 깨어 있는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방 안에서 압도적인 마나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

'그는 날 어떻게 평가할까.'

옛 생각이 잠시 났다.

평범한 아버지는 열심히 돈을 벌어 오셨다.

하지만 그는 폭력적이었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그런 사람이었다.

라베스라고 했던가.

그분은 어떤 분일까.

어떤 분이었을까.

지금이라면, 조금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저 멀리서 시선이 느껴졌다.

'이야기 좀 하자꾸나.'

마치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아,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도 궁금한 것이 많겠지.

그건 마누스도 마찬가지였다.

"어서 오거라."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 결과는 어떠했지."

마누스는 집무실 안을 눈으로 한 바퀴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라베스는 어떤 단어를 좋아하고 무슨 화법을 좋아하는지 생각하며 말을 조립했다.

"디레 교단이라는 놈들이었습니다. 죽을 때 벨리알이라는 이름을 불렀습니다. 은슬로 경은 아쉽게도...."

"디레 교단. 처음 듣는 이름이구나. 벨리알을 숭배하고 있다고?"

벨리알뿐만이 아니라 레메게톤의 72악마를 모두 숭배하고 있는 녀석들이지만. 말을 아꼈다.

이제 어머니가 나설 차례다.

너무 많은 것을 발설했다간 도리어 의심받을 수 있겠지.

"그렇습니다. 벨리알 말고도 다른 무언가를 숭배할 수도 있겠죠."

"그런 놈들이 공국에 기어 들어왔다 이거지. 간이 큰 녀석들이군."

"이곳에 왔다는 건, 이미 다른 곳에서부터 세력을 불려 왔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

라베스가 눈을 들어 마누스를 쳐다봤다.

자신의 어렸을 적 눈매를 빼닮은 아들.

본래 그가 이런 표정을 지었던가?

장녀, 장남보다도 더욱 자신을 닮은 아이였다.

그래서 그가 비뚤어졌을 때, 재능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더욱 심하게 몰아붙였는지도.

그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내일 내가 나서서 처리하마. 늦었다. 들어가거라."

"알겠습니다."

마누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걸음을 옮겨 문고리를 잡을 때까지, 라베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베스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아들아."

"-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식당으로 오거라. 오랜만에 온 가족의 얼굴을 보며 식사하고 싶구나."

마누스가 옅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아침에 뵙겠습니다. 아버지."

라베스와 마누스의 표정은 어딘가 닮아 있었다.

늦은 밤,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이 따스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이 찬란하게 피어나는 중이라는 걸 깨달았다.

두 사람 모두 기분 좋은 밤을 지새울 수 있는 날이었다.

다음 날.

마누스는 아침 일찍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어제 있었던 일을 보고받은 그가 일이 처리되었다는 걸 확인했다.

시신은 잘 안치되었고, 장례식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디레 교단은 이제 거대한 적과 맞서겠지. 그걸로 억제력은 생긴 셈이다.'

원작에선 탑에 오르랴, 여러 가문을 돌며 퀘스트를 해결하랴, 디레 교단에 맞서 악마들의 부활을 저지하랴, 정말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카이사르 가문에서 디레 교단에 대한 존재를 알았다.

"아버지께선 무슨 말을 하셨는가?"

"앞으로 공국의 순찰을 강화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도 외진 곳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조치한다고 하셨습니다."

"역시 아버지시네."

때로는 단순한 조치가 상당히 효과적일 때가 있는 법.

괜히 군대에서 생각 없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 아니다.

통제해야 할 수가 많고,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으면 더욱 그렇겠지.

당분간 이 일에서 손을 떼도 되겠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모두가 도착해 있다고 하는 식당.

일부러 조금 늦게 도착해, 이목을 끌었다.

"들어가시지요."

"모두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주, 라베스를 제외한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마누스를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거대한 문이 열리고, 연회장을 연상케 하는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어서 오너라. 일을 멋지게 해냈다지?"

"기사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어머니."

"가주님께서 드물게 기뻐하셨어. 손님이 아닌 가족으로서 이곳에 부르신 이유도 그 때문이지."

"가주님께서 오십니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누스도 비어 있는 자리로 가, 아버지를 기다렸다.

평상복 차림으로 식당에 등장한 라베스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 자리에 오는 동안 무척 오랜만에 모인 얼굴들을 죽 바라봤다.

모두가 훌륭한 카이사르의 일원으로 성장해 있었다.

가장 골칫거리였던 마누스마저 그 재능을 한껏 부리지 않았던가.

"오늘은 기쁜 날이다. 그러니 웃고 떠들며 먹자꾸나."

"네, 가주님."

모두가 한목소리로 답했다.

마누스는 형제, 자매들의 눈빛을 살폈다.

형이자 장남, 사 남매 중에 첫째는 여전히 못마땅하게 그를 쳐다봤다.

장녀이자 남매 중 둘째는 의외라는 눈빛을, 막내는 아직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였다.

그들은 무어라 할 말이 많아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궁금증과 질투, 시기와 질타는 넣어 두는 자리였다.

"들거라."

가주의 말을 시작으로 식사가 시작되었다.

항상 조용하던 식사 자리가 잔잔한 웃음과 대화로 가득 찼다.

형, 누나, 동생도 피식 웃음을 짓고는 대화에 참여했다.

마누스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이곳이 좋았다.

-동기부여는 확실했다.

* * *

"물어보고 싶은 건 많지만, 그건 나중에 따로 물어볼게."

"고마워."

누나, 인비데아가 그를 배웅하기 위해 마당으로 나왔다.

형과 동생은 아직도 어색한 것인지, 아니면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인지 나오지 않았다.

오직 그녀만이, 동생인 마누스를 챙겨 주었다.

이전,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던 그녀의 속내는 질투가 아니었다.

못나고 어리숙한, 그러면서도 감정적이고 다혈질인 동생을 걱정해서였다.

그의 못남은 비단 홀로 못난 것이 아니었으니까.

'너도 카이사르였구나.'

"조심히 가렴."

"방학 때 보자."

그녀가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마누스는 조금은 짙은,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은 뭇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만한 표정이었다.

마차는 떠나갔다.

인비데아는 한참이나 그 모습을 바라봤다.

'나에게도 지원군이 필요하지.'

그녀의 눈빛이 변한 건, 한순간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오직 그녀 자신만이 알고 있겠지.

카이사르 가문에서의 일이 그렇게 끝났다.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채, 서로의 시간은 흘러갔다.

언제나 그렇듯, 쉼 없이 계속.

#4

아카데미에 도착한 마누스는 익숙한 기분에, 안락함을 느꼈다.

2학년 기숙사는 한산했다.

하루 만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이는 거의 없었으니.

그는 걸음을 옮겨, 교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임무 확인증을 제출하면, 평가에 반영되는 것.

시간, 성공 여부 등, 학생은 열어 볼 수 없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한가하게 업무를 보고 있던 교수들이 마누스의 등장으로 인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다이아 등급을 수주했다는 건 온 아카데미에 퍼져 있는 사실.

그들 중 몇몇은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까지 했다.

보통 금 난이도의 임무는 일주일을 꽉 채워서 완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물며 다이아 난이도의 임무는 얼마나 걸릴 것인가.

나도는 의견으로는 일주일도 모자라거나 금 난이도보다 훨씬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이게 뭐야.'

하루.

마누스는 단 하루 만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제아무리 카이사르 가문이라고 해도 임무는 특별한 계약에 의해 생성되고, 또 평가된다.

사람은 조작할 수 있어도 임무의 내용을 조작할 수는 없다.

물론 다양한 편법이 존재하지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

"임무, 포기하셨나요?"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입니까?"

마누스가 당당하게 걸어왔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교수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는 말은, 고작 하루 만에 다이아 등급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거다.

당당하게 내민 임무 완료 확인서.

카이사르의 문양이 선명하게 찍힌 문서였다.

문서 조작인지 아닌지는 마법으로 확인해 보면 될 일.

"확인했습니다. 성공 여부는 검증 후에 알려 드리도록 할게요. 내일 다시 찾아오세요."

"알겠습니다."

마누스는 사라졌다.

오늘도 홀로 탑을 오를 생각이었다.

마석을 잔뜩 흡수해 둬야, 다음 에피소드에서 쓸데없는 희생을 막을 수 있다.

바삐 걸음을 옮긴 이후, 교무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마누스의 얼굴에는 은은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첫 임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제25화

- 증오의 끝은 없다

* * *

B반.

멜라니는 오늘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수업을 들었다.

그 사건, 마누스가 자신을 도와준 날 이후 아무도 그녀를 건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B반.

아니 그 이상에서 자신에 대한 소문은 꽤 안 좋게 퍼진다는 걸 깨달았다.

소심한 그녀의 성격으로는 해명할 용기도, 능력도 없었다.

말을 걸어오는 친구가 없어졌다.

함께 밥을 먹는 이가 없어졌다.

쉬는 시간마다 말을 걸어오는 이가 없어졌다.

호의적인 눈빛을 보내는 이가 점점 냉소적인 시선을 던졌다.

-홀로 고립되는 자신을 볼 때마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차라리 이게 편하지 뭐.'

상인 가문에서 난 마법사.

그 이단아에게 쏟아진 애정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을 가지게 해 주었다.

재능도 뛰어난 편이니, 찬란한 학창 생활을 그렸다.

근데 이게 뭐야-.

'아직도 망설여?'

'우리가 해결해 준다니까?'

'너에게 해로운 것들이야. 다 없애 버려야 해.'

귓가에 들리는 이 말만 없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멜라니는 작게 고개를 저어, 헛소리를 내뱉는 정령들을 떨쳐 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그녀의 한숨은 깊어만 갔다.

오늘은 2학년이 없는 날이다.

요번 주 내내 없겠지.

"더러운 년."

"마누스 선배는 또 어떻게 꼬셨대? 그 잘난 가문이 얼마를 원했을까?"

"마누스 선배가 그럴 거라곤 생각 안 하는데-. 그냥 불쌍한 애가 보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야?"

쉬는 시간마다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말.

그런 이들을 죽여 주겠다며, 허락해 달라는 말.

말.

말-.

말!

'진짜 귀를 잘라 버릴까.'

분홍 머리는 푹 엎어져, 들려오는 말들을 쳐 냈다.

그사이 사람들이 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람의 귀는 듣고 싶지 않은 것도 들리기 마련.

그녀에게도 자연스럽게 소리가 들려왔다.

들리지 않는 걸 듣는 것도 인간의 축복인가.

그녀는 두 팔 사이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귀를 닫았다.

-그의 이름이 나오기 전까진.

"마누스 선배."

"아-. 이번에 다이아 등급 임무 맡았다며. 설마 포기한 건가?"

마누스.

그녀를 도와준, 아카데미 내에서 아무도 못 건드리는 폭군.

친구 하나 없는 그녀가 유일하게 아는 사람.

잘된 건지, 아닌 건지-.

마누스라는 이름 덕분에 그나마 직접적인 괴롭힘이 많이 줄었지.

어떻게든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이어 가고 있을 때, 놀라운 사실이 또 들려왔다.

"벌써 해결했대."

"뭐-?!"

"하루 만에 그 '카이사르'에서 내린 임무를 해결했대! 그것도 완벽한 성공!"

"진짜? 얘기 좀 자세하게 해 봐, 혹시 짜고 친 거 아니야?"

조작.

카이사르 가문이라면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다.

교수들이 제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카이사르의 가주만 할까.

그래서 대형 가문들은 항상 조작 검증을 받고, 아카데미와 따로 계약해 사고를 방지했다.

결과는-?

어느새 멜라니도 쫑긋,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당연히 임무 완료! 그것도 한 치의 트러블도 없이 완벽하게-."

"대박-. 다이아 등급 아닌 거 아니야?"

"너네, 아카데미 시스템을 너무 물로 보는 거 아니야? 등급은 가문이 임의로 조정하는 것이 아니잖아-."

신성하고 공정한 마법으로 선정된 임무.

그 등급은 누군가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에서 찍히듯 나오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그걸 '신의 의지'라고 한다지?

아무튼, 그렇게 생성된 다이아 등급의 임무를 성공했다는 거다.

놀라웠다.

아카데미 역사상 두 번째라고 했나?

"그래서? 평가는 어떻게 됐대?"

"나도 그 이상은 잘 몰라."

"어? 왜에-!"

한참 떠들던 친구가 맥 빠지게 이야기를 끝냈다.

이건 조금 선 넘었지-.

멜라니도 움찔, 몸을 떨었다.

궁금해 죽겠는데 물어볼 수도 없고.

'궁금해? 궁금해?'

'우리가 알아봐 줄까?'

'근데 그 애는 너무 무서워~.'

'맞아! 무서워! 무서워!'

정령들의 말에 잠시 혹했다.

아냐. 정령들 말은 듣지 말자.

한번 말을 들어주었다간 또 어떤 방식으로 귀찮게 할지 몰랐다.

그래, 그냥 조용히 살아가자.

조용히 실력을 키워서, 방어할 힘이라도 갖자.

그렇게 생각하며 쉬는 시간을 보낼 때쯤, 그를 찾아온 목소리가 들렸다.

"해리 멜라니."

"-네?"

반사적으로 고개를 번쩍 들고 휙, 소리가 나는 방향을 쳐다봤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오묘한 감정이 들게 하는 목소리였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목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봤다.

그곳엔 수려한 외모의 남자, 마누스가 서 있었다.

퐁당 빠지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푸른 눈동자가 멜라니를 똑바로 응시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봐, 내가 뭐라 그랬어-.'

'와, 진짜 친분이 있는 건가?'

'상인 가문이잖아. 뭔가 금전적인 거래가 오가는 거 아니야?'

이상한 소리는 듣지 않기로 했다.

스윽-.

마누스가 소리가 난 쪽을 훑어보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래, 저런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잠시 얘기 좀 하지."

"-네!"

고개를 쳐든 것처럼, 번쩍 일어섰다.

소심한 성격이 아닌 빠릿빠릿한 움직임이었다.

교실 밖으로 나가니, 마누스는 세 사람과 함께 있었다.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소녀.

푸른 머리칼에 아름다운 소녀.

그리고 어딘가 푼수기가 다분해 보이는 남자.

마지막으로 검은 머리칼의 마누스까지.

"친하게 지내라."

마누스는 그 말을 남기고 걸음을 옮겼다.

-이게 무슨 일이람?

멜라니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지금 이 친구들을 소개해 준 건가?

그녀가 멍하니 일행을 바라보자, 제일 붙임성이 좋은 피어슨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안녕? 멜라니 맞지?"

"어- 으응. 아, 안녕."

"반가워. 피어슨이라고 한다. 선배가 소개해 주겠다고 해서 찾아왔는데, 너도 실력이 꽤 있나 봐? 사실 선배가 좀 무섭- 으악!"

"우리도 얘기 좀 하자 이 칠칠아."

피어슨의 어깨를 잡고 밀어낸 붉은 머리 소녀, 아나이스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멜라니는 그녀의 도움으로 남몰래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따스한 날, 대지를 밝게 비추는 태양 같은 소녀였다.

이런 이가 자신 앞에서 미소 짓는 것은 멜라니를 살짝 주눅 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내 용기를 얻어, 손을 내밀었다.

부드러운 손의 따스함이 외로움을 녹여 주는 것 같았다.

"어머, 손 되게 작다-. 엄청 귀엽네!"

"그, 그래?"

"인형 같아~. 해리 가문이라고 했지?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있으면 알려 줘."

"으응-."

멜라니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이스는 멜라니의 머리카락을 유심히 바라봤는데, 오묘한 빛을 띠는 색상이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머리카락도 엄청 예쁘네-. 케일이랑 결도 비슷하고-."

"야야, 케일도 소개해 줘야지. 혼자 떠들고 있냐?"

"내 정신 좀 봐, 여기 예쁜 애는 케일이라고 해. 둘 다 조용한 편이라 어울려 다니면 좋을 것 같다."

케일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피어슨이 시끄럽고, 아나이스가 화사한 느낌이라면, 케일은 아름다웠다.

같은 여자임에도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였으니-.

케일이 도톰한 입술을 달싹였다.

슬쩍 눈이 휘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제는 제법 자연스러워진 미소가 멜라니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케일이야."

"반가워. 해리 멜라니야."

"앞으로 잘 지내보자."

부드럽게 속삭이는 말이 묘하게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정령들도 웬일인지, 가만히 있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나저나 깜짝 놀랐다. 진짜."

"그러게, 설마 마누스 선배가 친구를 소개해 준다고 하다니."

"친구? 소개?"

어느새 B반 아이들이 흘끔흘끔 문을 통해 쳐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멜라니는 유독 다른 사람 시선에 민감했다.

그건 정령들의 시선을 계속 받아 왔기에 절로 발전한 감각인지도 몰랐다.

"응. 우리 동아리에 적합한 인재라고 했지?"

"맞아. 우리는 정말 특~별한 동아리를 만들었거든. 무려 그 알라노 선배와 마누스 선배가 한꺼번에 있는 동아리라고."

"얘, 우리 동아리 가입하지 않을래?"

그건 정말 파격적인 제안이자, 상인 가문의 본능이 꿈틀거리게 만드는 말이었다.

어떻게 할까-.

멜라니는 고민했다.

플로이스, 그리고 피터손 가문은 해리 가문에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곳.

그래, A반 친구들과 함께라면 지긋지긋한 괴롭힘도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시끄러운 정령의 말 대신, 다정하고 발랄한 친구들의 말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멜라니는 도피처를 찾고 싶었다.

"-응. 어디로 가면 돼?"

그래서 답했다.

이들이라면, 자신이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줄 것 같아서.

이들이라면, 자신이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방과 후에 동아리실 끝 방으로 오면 돼. 제일 작은 방. 알겠지?"

"-응."

"아, 종 치겠다. 그럼 이따 봐~."

세 사람은 손을 흔들며 자신의 반으로 걸어갔다.

갑작스럽게 생긴 친구.

조금은 혼란스러웠지만, 그래도 좋은 친구가 생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카데미에 오고 나서, 교류다운 교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행복한 생각의 끝엔 그 남자, 마누스가 떠올랐다.

자신이 왕따당하는 걸 알고 친구들을 소개해 준 걸까?

'백마 탄 왕자님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잖아.'

그녀는 전에 했던 거래를 똑똑히 기억했다.

상인으로서 도와 달라는 말.

상인은 논리적이고 똑똑해야 하지만, 절대 고객 위에서 가르치려 들면 안 된다.

고객이 원하는 걸 곰곰이 생각하는 것도 상인이 해야 할 일이겠지.

'갑자기 생긴 친구. 그리고 자신은 관심 없는 듯 떠났어-.'

그녀가 가녀린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고민이 있을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소꿉친구가 탐정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

교실 안은 적막으로 휩싸여 있었다.

멜라니는 그들을 한 번 둘러보고, 자리에 앉았다.

저들에게 신경 쓸 시간에, 고객의 의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낫지.

'짜증 나-.'

그런 멜라니를 보는 시선 중, 누군가는 질투심에 활활 사로잡혀 있었다.

리비.

바우어 가문의 장녀이자, 해리 가문의 앙숙 중 하나.

아니, 앙숙이 아니라 채무자와 채권자 간의 관계라고 해야겠지.

"너 때문에 아버지가...."

사연 없는 증오는 없다고 했던가.

리비는 압도적인 재능을 타고났다고 믿었다.

하지만 결국, 이게 뭔가.

무너져 가는 가문을 일으켜 세울 인재는 자신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세상은 넓었고 천재들은 많았다.

뚜둑-.

그녀가 잡고 있는 펜이 우그러졌다.

마누스.

그리고 A반 학생들 셋이 저 가증스러운 년을 찾아왔다.

그러고는 시시덕거리며 웃고 떠든다.

'왜 나는-, 저런 사람이 관심 가져 주지 않는 거야?'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누스는 그녀를 콕 집어 A반 친구들을 소개해 주었다.

아니, 저 자리는 내가 가져야 한다.

저 악마의 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이유 없는 증오는 없고, 그 증오는 더욱 커져만 갔다.

제26화

- 질투의 끝에서 찾은 재능 (1)

* * *

마누스는 도서관에 도착했다.

밤이 될 때까지 시간을 보내려면 이곳만 한 곳이 없었다.

수없이 많은 책들.

글자, 수식, 종이 내음.

도서관은 지식의 보고라고 하지 않던가.

마누스의 눈에도 그 말은 틀리지 않아 보였다.

지식을 글자의 형태로 묶어 쌓아 놓은 탑.

도서관은 그런 장소였다.

'옛날엔 책이랑 담을 쌓고 살았지. 마음가짐 하나가 이렇게까지 달라질 일인가.'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예전엔 그게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살아갔다.

의미 없이 보낸 날들.

소득 없이 돌아가야 했던 길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마법사의 마음가짐 - 68일 XX시간]

[공격의 소양 - 17일]

'잘 돌아가고 있네.'

이젠 마누스에게 의미 없는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겠지만.

방치형 재능이라는 것이 시간의 질을 부쩍 높여 주었다.

보이는 성장은 삶의 원동력이 되었고, 끝이 보이는 세계 역시 항상 그를 재촉했다.

첫날, 방에서 깨어났을 때 펼쳤던 책은 이미 몇 번이고 독파했다.

더 어려운 책에 도전해 보길 여러 번.

2학년인 마누스는 벌써 졸업생이나 교수들이 읽을 법한 자료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흠-."

이번에 새로 익힐 스킬은 [공격의 소양].

기본 공격력 +30%라는, 아주 심플한 스킬이었다.

그리고 강력한 스킬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30% 추가 대미지.

아무 조건도 필요 없었고, 마나가 더 드는 것도 아니었다.

이 무식하고도 엄청난 스킬은 당연히 플레이어가 익힐 수 있는 스킬이 아니었다.

'이거, 두 번째 데모니움이 가지고 있던 스킬이었지.'

흔히 뉴비 절단기라고도 하는 보스.

두 번째 만월에 등장하는 보스의 패시브 스킬 중 하나였다.

데이터 마이닝이라는 걸 통해 알아낸 보스의 기술과 스킬.

그것을 바탕으로 한 공략들이 넘쳐 났던 게임이었다.

마누스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뿐 아니라, 보스, 악마, NPC들의 스킬까지 검색하고 배울 수 있었다.

이 공격의 소양은 꼭 배워야 할 스킬 중에 하나였다.

"이제 슬슬 5클래스 마법을 배워 볼까."

작게 뇌까린 그가 고급 마법 서적을 스르륵 살폈다.

가장 안쪽, 학생들의 손이 잘 닿지 않는 곳까지 들어갔다.

마법으로 관리를 하고 있는지, 책들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5클래스 마법 이론>

- 카이사르 우프론 -

우프론.

아마 카이사르의 조상 중 한 명이겠지.

자연스럽게 책을 집어 들었다.

카이사르의 입장에서 쓴 책은 어떠할까.

그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에 빠져 있었다.

날이 저물어 갈 동안, 마누스의 시간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시간도 흘러갔다.

저마다의 생각을 가지고, 선택의 갈림길에 도달하게 했다.

"여기가 레벨리-말리토 애들이 모이는 곳, 맞아?"

"-넌 뭐냐?"

바우어 리비는 검은 독수리반을 찾아갔다.

귀족이 권력을 꽉 잡고 있는 뱀반과는 달리, 독수리반의 기득권은 이 레벨리-말리토의 간부들이었다.

귀족이지만, 평민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던 리비는 스스럼없이 그들을 찾아갔다.

"안녕? 너희가 그렇게 싸움을 잘한다면서?"

"...일단은 기사 지망생이니까 그렇지. 무슨 일이야? 뱀반에서."

"의뢰 하나 하려고 하는데, 어때?"

의뢰?

간부 : 카스트로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마법사들이 여기까지 찾아와 의뢰를 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서로 소 닭 보듯,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이였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찾아와 대뜸 의뢰라니?

여기까지 굳이 찾아온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나 들어 보기로 했다.

"콧대 높은 귀족이 보내는 의뢰라.... 좋아, 들어 보지. 뭔데 그래?"

"너희, 해리 가문 알지?"

"당연히 알지. 그 악명 높은 상인 귀족을 누가 모를까."

상인은 평민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들이었다.

모든 것은 돈에서부터 나온다.

살아가는 모든 것엔 돈이 든다.

해리 가문은, 어떤 의미에서 웬만한 귀족 가문보다 훨씬 유명했다.

그 악랄하고 냉철한 사업 수완은 돈을 부리는 마법사라는 수식어까지 붙을 정도였으니까.

설마, 그 가문과 일이 있었나?

-이거 재밌게 돌아가고 있잖아?

"그 가문의 딸을 좀 괴롭혀 주고 싶은데."

"소문에 의하면, 그 카이사르 마누스 선배랑 접점이 있다고 하던데-."

"알 게 뭐야. '직접적인' 폭력 행사만 안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리비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까?

어디, 똑똑한 귀족 나리의 생각을 들어 보기로 했다.

상인을 건드는 건 꽤 위험한 일이다.

가문끼리의 보복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지만, 돈이란 어떻게 유통하느냐에 따라 직간접적으로 얼마든지 피해를 줄 수 있었으니까.

"간단해. 그냥 밤에 그년을 불러내서 하루 동안만 가둬 놓는 거지."

"뭐야, 그냥 애들 장난이잖아."

"맞아, 장난. 그냥 내가 좀 기분이 안 좋아서-. 장난 좀 쳐 보려고. 그 정도면 괜찮지 않아? 혹시 몰라, 누가 백마 탄 왕자님처럼 짠! 하고 나타나서 구해 줄지."

"그 장난에 맞춰 줄 용의는 없는데. 뭐... 우리 애들 중에서도 해리 가문에 원한을 가지고 있는 애들이 있긴 할 거야."

리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리 가문은 적이 많다.

직접 괴롭혔다 걸리면 안 되니, 적당한 장난만 치는 것이다.

리비는 티 나지 않게 괴롭히길 원했다.

자신이 받는 고통을 아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이 자괴감과 무력감.

지독하리만치 조여 오는 성적의 압박.

'너도 이 공포를 느껴 봐야 해.'

카스트로는 그녀의 눈을 보고는 곧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저렇게 증오에 찬 눈빛은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악에 받쳐 죽기 전에 쏘아 내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오늘 밤이라 이거지? 알았어. 어디로 가면 되지?"

"이왕이면 동아리방으로 하자."

"좋아. '장난'이니까 대가는 딱히 필요 없고, 가끔 정보만 좀 가져다줄래?"

그 정도야 뭐.

리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B반도 높은 거다.

콩라인도 높은 거야.

리비는 사교성도 좋아, 친구도 많았다.

레벨리-말리토에게 뱀반의 정보를 전달한다면, 이쪽도 마법사 쪽에 손을 뻗을 수 있을 거다.

그렇다면 그 세력을 조금이나마 이용할 수 있겠지.

그리고 꼭 실력을 인정받아, A반으로 향하고 학생회에도 들어갈 생각이었다.

'난 할 수 있어.'

반드시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한다.

가문의 모든 것을 걸고 이곳에 왔으니까.

* * *

오랜만에, 멜라니는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동아리방.

그저 단순히 친목 동아리라고 하는 주제에, A반만 세 명에 2학년 수석과 차석이 있는 동아리다.

고작 해리 가문인 자신이 이곳에 들어와도 되는 걸까?

"그래서 내가 말이야, 그 기사 가문의 마차에 숨어들어서 장장 사흘을 들키지 않고 있었다니까? 그 쿰쿰한 냄새에 더러운 욕설에, 아주-"

멜라니는 피어슨에게 붙잡혀,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었다.

말이 너-무 많았지만, 묘하게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달까?

통통 튀는 그의 매력은 피어슨의 말을 알게 모르게 듣게 만들었다.

물론, 시간이 아주 많은 경우에만-.

멜라니는 호로롭- 따스한 차를 마시며 그들과의 교류를 즐겼다.

어째선지, 그렇게 시끄럽게 굴던 정령들도 여기 오고 나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온전히 사람 목소리만 들어 본 것이 얼마 만일까. 이토록 평화로울 줄이야-.

"얘, 너는 어떤 마법을 쓰니?"

아나이스가 옆에 앉아서 물었다.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마법이라-.

순간 정령과 교감할 수 있다는 말을 할까 하다,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서포트 계열이 좋았다.

적의 능력치를 낮추고, 약화시키는 것.

그렇게 천천히 적의 숨통을 조여 가는 것이 선호하는 전투 방법이었다.

-그래서 말했다.

"나는 직접 싸우는 것보다 약화나 강화 마법을 좋아해."

"오- 나랑 똑같네! 나도 공격 마법은 영 젬병이어서 말이야, 내 재능이 A반 정도라는 건 진짜 몰랐는데-."

"조용히 좀 해 봐. 그래서? 한번 연습하러 가 볼래?"

"그, 그래도 될까?"

아나이스가 환하게 웃었다.

대화 몇 마디만 나눠 봐도 알 것 같았다.

소심한 친구는 활발하고 적극적인 이들을 부담스러워하지.

그렇다고 소심한 사람이 맞춰 줄 필요는 없다.

멜라니는 아나이스에게서 활발함 속에 빛나는 상냥함을 느꼈다.

주도적으로 대화를 걸어 주고, 맞춰 주고, 함께 웃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친구.

-이런 친구라면 얼마든지 사귀고 싶었다.

"그럼! 원래 우리끼리 수련하면서 노는 거지. 서로 봐줄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응, 고마워."

멜라니가 배시시 웃었다.

많은 사람들을 보다 보니, 인상과 말투만으로 누군가의 성격을 유추할 수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문의 수많은 고객을 어깨너머로 본 경험이 살아났다.

그래,

이 친구들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녀가 조금은 짙은 미소를 지었다.

"가자. 수련하러."

가만히 있었던 케일이 벌떡 일어섰다.

아나이스가 멜라니의 옆에 붙었고, 피어슨은 연신 떠들어 대며 자신의 능력을 어필하는 중이었다.

이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갔으면-.

'이 친구들이랑은 정말....'

이 학교를 졸업하고 한 명의 마법사로서 우뚝 설 때까지 함께했으면 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처음 봤고,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미래를 아는 건 오직 신만이 가능한 일이니까.

그래도 이 행복을, 이 따스함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겐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였고, 허물없이 대해 준 유일한 친구들이었으니까.

앞으로 이들이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나도 좋은 친구가 될 테니까.'

적어도 이 아카데미에서는 끝까지 함께하고픈 친구들이었다.

* * *

뿌듯한 하루를 보낸 멜라니는 기숙사로 돌아왔다.

오늘 하루, 이대로만 끝난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 같았다.

이런 날은 매일 오는 것이 아니었다.

침대에 풀썩 누워, 오늘 있었던 일을 되돌아보았다.

둥둥 떠다니는 정령들이 보였지만, 그마저도 귀여워 보였다.

-재밌었어?

-난 무서웠어.

-맞아! 무서워! 무서워!

정령들이 꺄르르 웃으며 떠들었다.

무섭다고?

누가 무섭다고 그래?

멜라니는 피식 웃으며 노곤함을 즐겼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 일어나기 싫은데.

그래도 손님을 세워 두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이럴 때 쓸데없이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손님을 세워 두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없단다.>

그래서 일어섰다.

멜라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낯선 얼굴이 서 있었다.

"...누구?"

"안녕?"

무슨 일일까-.

또 나를 해코지하러 오는 건 아니겠지?

멜라니는 잔뜩 굳은 얼굴로 이름 모를 여자를 바라봤다.

그녀는 리비의 이름을 언급했다.

"리비가 잠깐 사과하고 싶다는데?"

"사과?"

"응, 그간 자기가 너무 못나게 군 것 같대. 지금 일 층에서 기다리고 있어."

진짜일까?

아니, 리비는 그럴 애가 아니다.

그렇게 증오에 찬 눈빛이 한순간에 바뀔 수 있겠는가.

그건 본인이 제일 잘 안다.

누구보다 그런 사람들을 아버지의 옆에서 많이 지켜봤으니까.

멜라니의 입술이 달싹였다.

"...니야."

"응?"

"아니잖아. 사과하러 온 거."

"...."

이름 모를 학생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이렇게 의심이 많은 아이였나?

"친구 말도 못 믿니? 진짜 사과하러 왔어. 한 번만 믿어 줘."

"정말이야?"

"그래. 걔는 밖에서 너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는데? 기숙사 안에서는 누가 들을까 봐 쪽팔린대."

멜라니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리비는 다시 한번 말했다.

"그럼 말만 전하고 갈게. 그래, 여기는 미토스 아카데미지. 가문의 일은 잠시 접어 두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해서 그렇다고 전해 달래."

"...."

"역시 상인의 가문 아니랄까 봐, 보기보다 냉정하구나?"

그것이 멜라니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아니잖아.

한 번만.

딱 한 번만 믿어 볼까?

이들이 말하는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싶다는 생각이 그녀를 움직이게 하려 했다.

-하지만.

"-어?"

"휴... 연기하는 것도 힘드네."

'왜... 이렇게....'

스르륵 눈이 감겼다.

억지로 일어나 보려 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평화는 아직 오지 않았다.

시야가 완전히 암전되는 것으로, 그녀가 풀썩 쓰러졌다.

제27화

- 질투의 끝에서 찾은 재능 (2)

* * *

아카데미에는 금지된 물품이 몇 가지 있었다.

주로 타인의 마음을 조종하거나 몸을 구속하는 물건들이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감금하거나 납치가 일어난다면, 특히 곤란한 물품이었으니까.

사실 그런 사건은 꽤 자주 일어나는 편이었다.

그래서 세운 원칙이 바로 '미토스 아카데미는 모든 가문의 영향에서 자유롭다'라는 것.

금지된 물품을 가지고 온 대가는 퇴학 및 가문에 대한 제적.

"이거 진짜 괜찮은 거 맞지?"

"뭐 어때. 보는 사람도 없는데."

"맞아, 장난이잖아? 그냥 소소하게 할 수 있는 장난-."

리비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다시 여유로운 웃음을 되찾았다.

이게 들키겠는가.

철저한 준비를 해서 온 것이다.

절대로 들킬 일은 없었다.

목격자도, 증거도 없었으니까.

문제는 이놈들의 입을 막는 것이었다.

그래서, 리비는 교묘한 말솜씨를 섞었다.

-사람은, 자신이 한 행동에 죄책감이 없을 때, 더욱 거침없이 행동한다.

심각하지 않다며, 이건 범죄가 아니라며 합리화한다.

그래, 이건 그저 장난이니까.

"우린 얼른 가져다 두고 오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알겠지?"

"골탕 좀 먹어 보라지."

"진짜 아카데미만 아니었으면 확-."

자신들이 어떤 짓을 저지르는지도 모르는 채, 리비의 인솔 아래 본관으로 향하는 일행.

들키지 않게 살금살금 이동한 그들은 무사히 본관에 도착했다.

그래, 오늘 동아리에 가입했다고 했지?

그래, 그렇다면 그곳에 익숙해지게끔 만들어 줘야지.

어차피 하루다.

하루만 버티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거야.

'내가 구해 주면 되는 거야. 그리고 마누스 선배랑 연을 트자.'

리비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큰 그림이 그려졌다.

마누스.

이 아카데미의 폭군이자 홀로 다이아 등급의 임무를 하루 만에 완수한 사람.

이미 학생 수준이 아니라고 정평이 나 있으며, 지금 바로 마법병단, 마법사단에 입단에도 문제없을 사람이라지.

그녀의 가문을 살리기 위해선, 마누스의 힘이 필요했다.

해리 가문이 절대 넘보지 못할 뒷배경.

멀리 도약할 수 있는 발판.

누군가 들으면 참 건방지고 허황된 꿈이라고 생각할 당돌함이었다.

일행은 동아리실 끝 방에 도착했다.

"얼른 넣어 버려."

"문은?"

"놔둬. 깨어나면 알아서 오겠지."

수군거리는 독수리반 아이들을 보며, 리비가 다시 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머리가 나쁜 애들은 안 된다니까.

동아리실 한쪽 구석에 멜라니를 아무렇게나 넣어 둔 이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곧 순찰 시간이었다.

달칵-.

문이 닫혔고, 리비는 보이지 않게 마나를 움직였다.

[클라도]

철걱-.

문이 밖에서 잠겼다.

힘이 조금이라도 있는 성인 남자라면 충분히 풀어낼 수 있는 마법.

하지만 갇혀 있다는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겠지.

'이거면 됐어. 밖에서 기다리다가 다시 와야지.'

멜라니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 홀로 버려졌다.

그리고 그녀가 있는 곳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침식이 시작되었다.

한순간의 선택은 언제나 운명을 바꾼다.

오늘, 그녀의 선택 역시 마찬가지였다.

치기 어리다고 할 수 있는 선택.

-때로는 유치한 선택이, 거대한 폭풍을 몰고 오는 법이다.

나비의 날갯짓이 그러하듯이.

* * *

시간이 조금 지났다.

리비는 약효의 지속 시간을 계산한 후, 여유롭게 본관으로 향했다.

질질 짜고 있을 멜라니의 얼굴이 선했다.

열리지 않는 문을 두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녀도 마법을 쓸 수 있으니, 벌써 나왔을 수도 있을 거야.

걸음걸이가 점점 빨라졌다.

'제발 질질 짜고 있어라. 그래야 내 그림이 완벽해진단 말이야.'

두근거리는 마음이 커졌다.

동아리실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이렇게까지 가슴이 뛰었던 일이 언제 있었던가.

기대감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동아리실 앞.

리비는 심호흡을 내뱉고, 문을 열었다.

"-어?"

마법은 그대로였다.

문고리가 돌아가지 않는 것을 보아, 확실히 그대로였다.

그녀는 얼른 마법을 해제했다.

아직 안 풀렸거나, 안에서 질질 짜고 있겠지!

그녀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최대한 표정에 신경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멜라니-!"

휙휙.

주변을 둘러봤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완벽하게 비살상용 약을 썼다.

-절대 죽을 리가 없어.

그녀는 계속해서 동아리방을 살폈다.

"...어?"

-없다.

멜라니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게 뭐지?

혹시 창문으로 도망갔나?

여긴 10층이 넘어가는 높인데?

이마가 축축해졌다.

리비는 연신 두리번거렸다.

'뭐야, 멜라니 똑똑하잖아?'

결국,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몰래 빠져나간 후에 마법을 다시 걸어, 눈속임을 하는 것.

어쩌면 지금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탐지, 탐지 마법-.'

리비는 탐지 마법까지 써 봤다.

하지만, 여전히 걸리는 것은 없었다.

뭐지 이 찝찝한 기분은-.

"뭐야 진짜 재미없게."

리비는 그렇게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내일 물어보면 되겠지.

그녀의 두 눈이 착 가라앉았다.

이 정도 장난으로는 안 통한다 이거지?

'두고 봐.'

역시, 증오의 나락은 끝이 없었다.

리비의 눈은 더욱 차갑게 변할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또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알지 못했다.

-증오에 눈이 먼 자는 오히려 피해자를 저주하며 기숙사로 돌아갔다.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한 때는 다음 날, 같은 반에 멜라니가 나오지 않고 나서부터였다.

교수가 멜라니의 이름을 불렀다.

"멜라니? 멜라니 학생?"

"어제 무서운 꿈이라도 꿨나 봐요. 늦잠 자고 있는 거 아닐까요?"

리비는 일부러 자리에 없는 멜라니를 놀리듯 말했다.

그녀의 룸메이트는 다른 반이었기에,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

"그녀의 룸메이트가 몇 반이었죠?"

"C반이요!"

"그렇군요. 확인해 봐야겠네요."

미토스 아카데미의 교사들은 학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아카데미라고 해서 안전한 곳이 아니다.

어느 곳보다 안전하다고 소문난 곳이지만, 수많은 이해관계가 모인 곳이다.

관계에 있어, 배경이 가진 힘은 정말 크다.

집안, 과거, 성장한 방향성과 가족들.

그 가족이 가진 이력과 특성.

아직 본인보단 가문이나 배경, 아버지 어머니에 따른 평가를 더 많이 받는 곳이 바로 아카데미다.

교사들도 알고 있다.

해리 가문은 적이 많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설마,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은 아니겠지.'

B반의 담임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기서 이상한 미소를 짓고 있는 리비의 말대로 별일 없었으면 좋으련만-.

그의 불안감은 점점 커졌다.

수업을 진행하는 것보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거기, C반으로 가서 멜라니의 룸메이트를 데려오세요."

"알겠습니다."

종종걸음으로 사라진 학생 한 명.

교사는 잠시 걱정을 미뤄 두고 오늘 있을 수업을 브리핑했다.

아직 1학년이고, 학교에 적응할 기간이었다.

벌써 수행평가와 결투 평가, 다양한 실습을 하는 2학년보단 훨씬 널널한 편.

이론과 연습, 모든 과목에 대한 맛보기를 위한 기간이랄까.

"오늘부터 각 분야의 교수님들이 차례대로 교육을 진행할 겁니다. 여러분은 2학년까지 결정할 '전공'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전공.

종류는 다음과 같았다.

순수한 원소를 다루며 공격적인 마법을 다루는 원소학.

강화, 약화에 관련된 마법을 다루는 지원학.

무술과 마법을 합쳐, 근접전을 활용하게 되는 마투학.

아주 드물지만, 정령과 소통할 수 있는 이들이 선택하는 정령학.

마법을 이용해, 다양한 포션을 제작하는 연금학.

마지막으로 퍼밀리어와 소통하고, 그들을 사육하는 소환학.

"전공은 크게 여섯 가지로 나뉘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더 많은 특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양한 수업을 들으며, 자신의 적성을 찾아야 할 겁니다."

"네-."

"의욕이 넘쳐서 좋군요. 선배들이 없는 일주일간, 여러분은-."

드르륵-.

교사의 말이 끊겼다.

C반에 다녀왔던 학생이 어벙벙한 표정으로 교실 문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아.

뭔가 잘못됐구나.

표정만 보고도 분위기를 유추할 수 있었다.

이거, 또 난리가 나겠는데-.

"어... 선생님."

"기숙사에 안 들어왔다고 하던가요?"

"네? 네-. 어제 멜라니는 기숙사에 안 들어왔대요."

어-?

이상하다?

그 말을 들은 리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동아리실에도 없었고, 기숙사에도 없다고?

집으로 갔나?

'어떻게 된 거야?'

이상하잖아.

이거 설마, 누군가 못된 짓 한 건 아니겠지?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 교사가 학생들에게 대기하라고 한 후 황급히 밖으로 나섰다.

"모두 자리에 대기하고 있으세요."

"...뭐야?"

"무슨 일인데? 멜라니 없어졌대?"

"누가 납치한 거 아니야?"

교사가 없어지자마자 교실이 소란스러워졌다.

뭐야 이거-.

전신의 모공이 활짝 열리는 느낌은, 썩 불쾌했다.

리비는 꿀꺽, 아무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왜? 왜 없어졌어?'

혹시 그 돌머리들이 수작 부린 건 아니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대체 뭐냐고-!

머리를 계속해서 굴려 봤지만, 나오는 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야기는 빠르게 퍼졌다.

해리 멜라니의 실종 사건이었다.

* * *

"해리 멜라니가 실종되었다는 겁니까?"

"그렇다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좀 나서 주었으면 좋겠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마누스에게 교사들이 찾아왔다.

아침부터 아카데미 내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해리 멜라니 실종 사건.

그 수사를 의뢰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2학년 중 복귀한 이들은 몇 명 되지 않았다.

각자 타지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인원이 부족했다.

조교들? 그들은 이미 노예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3학년, 4학년에게 맡기자니 형평성에 어긋난다.

실력도 뛰어나고, 시간도 남고, 성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인재.

마침 딱 있지 않던가.

다이아 등급의 임무를 하루 만에 완료하고, 선행 학습 할 필요도 없이 뛰어난 마법사.

지금 아카데미가 원하는 인재였다.

"물론 공짜로 해 달라는 것은 아니네. 성적에 관련된 걸 제외한다면, 내가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지."

눈앞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1학년 수석 교수인 이릴레스 트렌트 남작이었다.

오직 마법 실력 하나만으로 귀족 작위를 받았고, 그 명맥을 이어 오는 가문의 가주이기도 했다.

이런 사람의 도움이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무언가?"

"3학년 수업을 듣고 싶습니다."

"...뭐라?"

뜬금없는 말이라, 트렌트 교수가 눈을 크게 떴다.

2학년 수업부터는 내로라하는 가문 자제들도 따라가기 벅찬 내용이 많았다.

이제 갓 2학년으로 올라온 학생이 3학년 수업을 듣는다?

따라올 수 있는 건 둘째 치더라도 2학년 성적까지 망칠 수 있는 일이었다.

"3학년 수업은 정말 어렵네. 기본적으로 4클래스 이상의 마법들을 다루니까."

"괜찮습니다. 4클래스라면 이미 사용할 수 있습니다."

"...."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눈빛을 받았다.

마누스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교수를 바라봤다.

되는 걸 된다고 하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

제28화

- 질투의 끝에서 찾은 재능 (3)

* * *

"으-?"

멜라니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여긴, 어디야?

온통 어두컴컴한 곳이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찬찬히 기억을 되짚었다.

그래, 분명 방 앞에 이름 모를 여학생이 찾아왔었지.

달콤한 향기가 났고, 몸이 무거워진 것까지 기억했다.

'달콤한 향이라면 설마....'

그녀는 금지된 포션을 떠올렸다.

해리 가문에서 운영하는 상단에서도 아주 조심스럽게 취급하는 물건.

상인 가문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는 물품은 많았고,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으 추워-."

오랜 기간 누워 있었는지, 몸이 찼다.

으스스한 한기가 몸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었다.

학교는 아닌 것 같았다.

대체 여긴 어딜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여기야!

-여긴 위험해! 위험해!

-나가야 해!

'너희들은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어?'

-물론이지!

-아주 위험한 곳이야!

-나가야 해!

떠도는 정령들이 이렇게 반가울 데가.

정령들은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 멜라니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불길한 마나가 넘쳐 났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공포감이 치솟았다.

언뜻 보이는 창밖은 흘러가지 않는 시간처럼 멈춰 있는 구름으로 가득했다.

게다가-.

"하늘이... 왜 저래?"

달이 떠 있으니 검은 하늘이어야 하는데, 마법을 부린 것처럼 이상한 색상이었다.

이상했다.

너무 이상한 공간이었다.

[큼?]

그리고 이 소리-.

간헐적으로 울려 퍼지는 소리.

분명 호의적이지 않을 거다.

위험하다고 했으니, 분명 그러겠지.

-이쪽이야!

-얼른 와!

-들키면 큰일 나! 큰일 나!

멜라니는 숨을 죽이고 움직였다.

직감적으로 들키면 큰일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호흡이 가빠졌다.

'대체 여긴 어디야-. 무서워, 무섭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정령들을 따라가는 것뿐.

변변찮은 공격, 방어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멜라니는 그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정령들이 부디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길 바라며-.

그녀는 기약 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마누스는 3학년 수업 청강을 허락받았다.

1학년 전체를 심문할 권리가 주어졌다.

공문이 전파되었고, 마누스는 사건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멜라니 납치 사건은 원작에 없던 사건이었다.

또 무언가가 변한 모양.

원작에선 자연스럽게 서브 퀘스트 루트를 열어 주고, 정령에 대한 재능을 개화하는 스토리로 넘어간다.

-지금 그녀가 죽는다면, 아주 귀중한 전력 하나를 잃어버린다는 뜻.

'추궁할 사람은 있지.'

멜라니의 라이벌이자 대척점으로 등장하는 캐릭터.

중후반엔 잘못을 뉘우치고 멜라니와 잘 지낸다는 스토리를 지니고 있지만....

마땅히 벌을 받아야지.

그녀의 질투심은 충분히 일을 저지르고도 남을 정도니까.

최악의 경우, 탑에 갇혀 있을 수도-.

생각을 정리한 마누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창 점심을 먹을 시간이다.

'그들은 알고 있나?'

문득 궁금해졌다.

친구가 없어졌단 사실을 안 케일 일행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원작에 없던 이 사건에서, 원작 주인공들은 멜라니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을지.

그들이 진짜 순수한 학생들이라면, 어떻게든 대책을 내놓을 것이다.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오갈 데 없는 영혼의 안식처를 만들어 주어야겠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거대한 식당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주인공 일행이 그를 발견하곤, 헐레벌떡 뛰어왔다.

"선배!"

"마누스 선배!"

"선배, 들었어요? 지금 멜라니가...."

마누스는 그들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는 눈동자는 그들의 순수함을 증명했다.

그래, 이런 이들이었지.

가면 뒤에 진짜 얼굴을 숨기고 있는 현대와 달리, 이들은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었지.

비록 그것이 만들어진 마음일지라도,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다.

그거면 되었다.

"알고 있다. 교수님들께서 내게 전권을 위임하셨지."

"그렇다면-?"

"멜라니를 찾는다. 심문할 사람은 정해져 있다."

마누스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리비.

그녀의 상징인 금발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나 잡고 물었다.

마누스의 시선이 닿은 학생이 무슨 경기를 일으키듯 반응했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사람이 실종된 일이다.

"라우어 리비는 몇 반이지?"

"네? 어... 저, 저도 잘...."

"B반입니다. 선배."

다행히 학생들은 아주 협조적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마누스가 물어보는 내용이니, 1학년 후배들은 상전 대하듯 답했다.

취조실에 끌려온 죄인처럼 술술 불어 버리는 학생들.

덕분에 취조는 참 편했다.

식당에 온 김에 느긋하게 주인공 일행과 식사를 마쳤다.

어차피 수업을 듣기 위해선 B반으로 돌아올 테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지.

"선배, 혹시 저처럼 탑에 갇힌 거 아닐까요?"

"-아마도."

피어슨은 마누스의 대답을 듣고 숨을 들이켰다.

탑.

아직도 홀로 갇혔을 때의 공포감이 꿈에서 나올 정도다.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탑도, 혼자 올라가라고 하면 분명 불가능하겠지.

안 그래도 공격 마법은 사용할 줄 모르는 멜라니가 그곳에서 버틴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B반이라면 생존은 어떻게든 하겠지만, 시간이 없다는 거다.

"지금이라도 구하러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정확한 판단은 방과 후에 알려 주지."

"하지만 늦으면...."

걱정도 당연한 것.

그들은 탑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괜찮다. 그녀는 특별한 능력이 있으니."

"...."

그의 말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눈치를 보는 후배들.

마누스는 말없이 그들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비로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멜라니는 친구였다.

친구가 된 이상, 나쁜 일에 휘말리는 건 두고 볼 수 없는 노릇이지.

게다가 '탑'에 관련된 일이었다.

해결할 수 있는 이는 자신들밖에 없다는 사명감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좋군.'

탑과 멸망.

데몬과 사건.

주인공 일행을 끈끈하게 묶어 주는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고 있다.

이 든든한 유대감은 학창 시절에 형성되어야만 한다.

성인이 되고 집단에 들어가고 여러 이해관계가 얽히는 순간, 진심을 다한 유대감은 없어질 테니까.

-조금은 부러웠다.

이미 마누스 본인의 마음엔 순수함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가늠하기도 힘들었으니.

주인공이 되어 가상의 유대감을 나누는 것도 좋겠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 역시 가치 있는 일이다.

애초부터 주인공들을 이용해 먹으려고 했던 마누스다.

'딱 이 정도 관계가 좋다.'

세계를 지키도록 이용하고, 세계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얻고.

딱 좋은 관계라고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마누스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또 혼자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는 걸까.'

그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는 건, 천하의 마누스도 모를 일이었다.

* * *

1학년 황금 뱀 B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해리의 실종은 1학년이 감당하기엔 꽤나 큰 사건이었다.

그 사건의 주동자라고 할 수 있는 리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교수들이 백방으로 찾아다니고, 심지어 가문에도 연락해 보았지만, 멜라니는 행방불명 상태였다.

그녀는 일이 심각하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왜, 왜 이렇게 된 건데-!'

숨이 턱턱 막히고, 사고가 정상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독수리반 녀석들에게 몰래 찾아가 봐도,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을 뿐.

시원스러운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네가 이상한 장난 치자고 그래서 이 지경이 됐잖아!>

<멍청한 마법사, 네가 알아서 해.>

<우린 모른다고 할 테니까-.>

믿진 않았지만, 최소한의 도리라는 것이 있을 줄 알았던 레벨리-말리토는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함께 잘못했음에도 발을 쏙 빼려고 하는 행태가 너무 괘씸했다.

두고 봐-.

어떻게든 함께 끌고 갈 테니까.

리비는 이를 갈며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라우어 리비. 맞나?"

어쩐지 섬뜩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한 번 들어 본 목소리였다.

아카데미에서 한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

"누, 누구-."

정신이 없었던 그녀는 알고 있음에도, 쭈뼛쭈뼛 반응했다.

푸른 귀화가 그녀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은 그 색만으로 피할 수 없는 존재감을 만들었다.

카이사르 마누스.

그가 리비를 찾아왔다.

그녀는 그와 딱히 접점이 없었지만, 마주친 적은 있었다.

"마누스다.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메, 멜라니 일이라면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난 뭘 물을지 얘기하지도 않았다. 그걸 물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군."

온몸이 쭈뼛 서는 느낌.

단어 하나라도 잘못 내뱉었다간, 그대로 물어뜯길 것만 같았다.

어느새 그녀의 볼을 타고,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 그게-."

"전에 본 적이 있지. 멜라니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한 건, 너밖에 없다."

"그, 그래서요? 제가 미쳤다고 멜라니를 납치하나요? 멜라니의 가문과 제 가문이 어떤 사이인지도 모르면서-?"

그 푸른 눈동자가 무서웠지만, 리비는 살기 위해서 발악해야만 했다.

인정하면 죽는다.

자신의 꿈은 물론, 가문의 미래도 끝이다.

그러니까, 여기선 절대 발뺌을-.

"가난한 가문이 돈을 빌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 네 가문 일을 모를 것 같았나?"

"...."

리비의 안색이 조금씩 하얗게 변했다.

핏기가 없는 그녀의 얼굴은, 언뜻 병자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나약한 모습에도 마누스의 추궁은 멈추지 않았다.

"똑바로 말하는 것이 좋을 거다. 만약 멜라니가 직접 돌아와서 증언한다면, 얘기는 더 복잡해질 테니까."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멜라니의 말을-."

거기까지 말한 리비는 문득 떠오르는 지식이 있었다.

도리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마법.

허나, 사람을 살리는 일이거나, 범죄자를 심문할 땐 사용이 허가된 마법이 있다고 들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겐, 접근조차 허용되지 않는 지식일 텐데.

"범죄자로 취급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묻는 거다. 멜라니에게 무슨 짓을 했지?"

교수는 바보가 아니다.

미토스 아카데미가 품고 있는 지식은, 생각보다 더욱 방대한 것이었다.

교수들은 지금 누군가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저 학생의 치기 어린 장난으로 끝내고 싶은 교수들의 배려다.

아직 범죄자가 되기엔 너무도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이들이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교수가 아니다. 범죄자에 대한 배려는 모른다. 그러니 말하지. 리비, 멜라니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

그녀는 직감했다.

그 어떤 변명을 해도 통하지 않겠구나.

이미 카이사르 마누스는 모든 것을 알고 왔구나.

그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질투는 점점 커져, 거대한 업보가 된다.

모든 업보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

리비는 그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폭군 앞에선,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하-."

자포자기한 심정은, 곧 체념으로 깨어난다.

리비의 입이 열렸다.

제29화

- 멜라니 구출 작전

* * *

사람의 머리를 뒤지는 마법.

기억을 조작하는 마법.

사건을 재구축하는 마법.

마법이 발달한 이래, 가장 먼저 발명되고 널리 쓰였던 마법이다.

그것으로 인해 마법이 더욱 발전하고 인류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 설정 중 하나.

하지만, 시대가 지남에 따라 그럼 마법은 곧 금지된 마법으로 치부되었다.

"저는... 그냥 장난이었을 뿐이에요. 아무런 해를 가하지도 않았다구요-."

"-따라와라."

마음 같아선 대놓고 범죄자 취급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웠다.

범죄자가 궁지에 몰리면 경찰을 찌르는 법.

불안한 마음가짐으로는 제대로 된 말을 들을 수 없다고 판단, 리비를 조용한 곳으로 이끌었다.

"자세하게 말해 봐라."

"...그게-."

리비는 더듬거리며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했다.

멜라니를 납치해, 잠시 동아리방에 가뒀다는 사실.

얼마 후에 데려오려고 했지만, 이내 없어졌다는 것도.

물론, 금지된 약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거까지 말했다간-.

"금지된 약품을 썼겠군."

"...!"

설마, 마음까지 읽을 수 있는 건가!

어떻게 알아낸 거야?!

리비의 몸이 통째로 떨렸다.

'이렇게 찔러봐도 반응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도 신기하군.'

왜 원작에서 질투에 사로잡혀, 악역이 되었음에도 높이 올라가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었던 거다.

이런 자가 한 가문을 책임질 수 있을까?

"수업 후에 동아리실로 찾아와라. 찾아오지 않는다면-."

"아, 알겠어요! 제발 교수님껜 말씀드리지 말아 주세요. 전, 전 제 가문을 책임져야 해요!"

"-그럼 그때 보지."

마누스는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리비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결국, 그녀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 * *

"어떻게 됐어요?"

"운이 없었군, 멜라니를 동아리실 안에 가뒀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 침식이 일어난 모양이다."

"그렇다면...."

마누스는 동아리실에 들러,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해 주었다.

소식을 들은 아이들이 분노했다.

"절대 용서 못 해. 탑이 어떤 곳인데-!"

"맞아요.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평소 불같은 성격인 아나이스는 바로 성격을 드러냈다.

피어슨 역시 은은한 분노를 내보이는 중.

마누스는 가만히 듣고 있던 케일을 돌아봤다.

'녀석은 과연, 어떤 성격일까.'

자신이 주인공일 땐 플레이어의 성향에 따라 선택지가 바뀐다.

수없이 많은 분기와 대사.

선택할 수 있는 행동.

그곳에서 주인공은, 플레이어 자신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선?

아무도 플레이하고 있지 않은, 디폴드값으로 설정된 주인공 케일은 어떤 인물일까?

마누스의 호기심이 케일을 향했다.

"-친구를 꼭 찾아야 해요."

그녀의 눈동자는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누스 자신을 닮은 눈동자가 마나로 일렁였다.

그것은, 원작에서 그녀가 분노했을 때 일러스트로 표현되었던 표정과 똑같았다.

그래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그러지. 자정 전에 이곳으로 모여라. 같은 곳에서 탑으로 들어간다."

"들어갈 방법이 있나요?"

"강제로 공간을 열고 들어갈 거다."

"...알겠습니다."

알라노가 없는 이상, 안전을 책임질 누군가가 필요했다.

더군다나 이번 작전은 정식 루트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안전 요원이 필요했다.

'준비해야 할 것이 있겠군.'

시간은 꽤 빡빡했다.

작전을 하달한 마누스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1학년은 1학년끼리 준비할 일이 많겠지.

이런 이벤트가 훗날 또 나오긴 한다.

건물 내부에서 탑으로 들어가는 작전.

그 작전 때에는 일정한 층을 기점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이벤트였지.

'통신 마법을 사용하는 건, '그녀'가 합류한 다음이지. 지금은 아니다.'

그러니까, 만일을 대비해 서로 통신할 수 있는 마법 아티팩트를 구해야 했다.

그리고 탑에 들러, 블랙과 화이트를 만나야겠지.

외출 허가를 받는 건 퍽 쉬운 일이었다.

이미 그는 수사의 전권을 받았으니, 명분은 충분했다.

마법 물품을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쉬운 일이었다.

통신을 위한 작은 구슬은 각종 시험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아티팩트.

학교 바로 앞에 형성되어 있는 상가 지구.

"안녕히 가십시오-!"

카이사르.

그 압도적인 재력을 가진 가문이 뒷받침되고 있는 한, 자금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당분간 이 도구를 쓰면서 통신하면 되겠지.

직후, 블랙과 화이트에게서 일회용 도구를 얻어왔다.

"이거 진짜 쓸 거야?"

"네."

"...위험할 텐데."

"감수해야겠죠."

화이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모아둔 마석이 조금 나갔지만, 어차피 손실은 탑에서 채우면 된다.

"그럼."

그는 몸을 돌려 탑 로비를 빠져나왔다.

준비는 얼추 끝났다.

'이제 아이들만 모이면 되겠군.'

리비의 말에서 레벨리-말리토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일단 급한 건 멜라니를 구출하는 것.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 명맥이 얼마 남지 않은 집단이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할 때.

마누스가 거대한 탑을 올려다보았다.

'부디 살아 있길 바라마.'

그래야 네 재능이 환하게 필 테니.

밤이 될 때까지, 마누스는 조용히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동아리실에서 책을 읽는 것은 제법 운치가 있었다.

한창 5클래스에 대한 책에 열중하고 있을 때, 갑작스러운 손님이 도착했다.

"계십니까? 베로니카입니다."

"들어오지."

베로니카.

그림자 암살자가 이곳엔 무슨 일로 온 걸까.

마누스의 집중력이 한껏 높아졌다.

문이 열리고, 분홍빛 머리칼을 지닌 메이드, 베로니카가 들어왔다.

그녀는 나름 숨긴다고 하지만, 저렇게 발소리도 내지 않고 걸어서야-.

베로니카는 고풍스러운 몸짓으로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를 건넸다.

"늦은 시각입니다. 슬슬 기숙사로 돌아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이곳에서 공부할 생각이라. 안 되는가?"

베로니카는 잠시 멈칫하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 시간에만 잘 들어온다면, 아카데미 어디에서 지내든 상관은 없었다.

심지어 졸업만이 목적인 학생들은 이따금 수업도 빼먹곤 했다.

"안 될 것은 없지요. 그럼 경비에게 미리 알리겠습니다."

"고맙군."

"방은 치워 두겠습니다. 괜찮겠지요?"

마누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언으로 하는 축객령에, 베로니카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살금살금 사라졌다.

달칵, 문을 닫은 베로니카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 스스로 공부를 한다는 것도, 자신에게 이렇게 상냥하게 대해 준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건 진리일 텐데. 어째서 이렇게 변한 건가요.'

이래서야, 1년 동안 준비해 왔던 일이 모두 허사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할까-.

베로니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세상일,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진리겠지요.'

에휴-.

그녀는 남몰래 한숨을 쉬고 걸음을 옮겼다.

본관을 나가기 전, 베로니카는 무리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인원은 넷.

'저 아이들은-.'

1학년 A반에 배정받은 아이들이었지.

한 명을 둘러싸고 걷는 모습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 인원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때,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리비. 멜라니 실종 사건과 관련이 있는 인물. 설마... 마누스가 오늘 동아리실에 있는 것도?'

그녀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이건 또 흥미로운 사건이지 않은가.

설마, 해코지라도 하려는 걸까?

'일단 지켜보는 거로-.'

그녀는 기척을 숨겼다.

이제 곧 자정이다.

가장 야심한 시각에, 저들은 무엇을 하려는 걸까.

"얼른 들어가."

"-응."

리비는 세 명의 동급생에게 끌려오다시피 했다.

마누스의 이야기를 들은 케일과 아나이스가 득달같이 찾아가, 그녀를 끌고 왔기 때문이었다.

이제 돌이킬 방법은 없다.

리비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한 아름 매단 채 동아리실에 들어갔다.

그녀가 멜라니를 가뒀던 곳에, 자신이 속박되어 들어왔다.

숨 막힐 정도로 무거운 분위기가 맴돌았다.

"-왔군."

"얘도 데려왔어요. 근데... 얘는 못 들어가는 거 아닐까요?"

마누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 방법은 원작에서 빌런들이 사용하는 방법이라 가급적 쓰고 싶지 않았지만....

악은 악으로.

미적지근한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얘는 내가 알아서 데리고 들어간다. 그리고... 멜라니의 가능성을 봐야겠지."

"나는 가끔 선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어. 너희도 그래?"

끄덕끄덕-.

아나이스의 말에,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이 아니라 평소에 두루두루 그러겠지.

아나이스의 속삭임을 들은 마누스가 피식 웃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이내 '윽'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피했다.

시간이 되었다.

하루와 하루가 맞물리는 시간.

유일하게 정식 입구가 아닌 곳에서 탑으로 뛰어들 수 있는 시간이 도래했다.

마누스는 리비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윽-."

"가만히. 그리고 너희, 이걸 받아라."

마누스는 품 안에서 통신용 구슬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주파수는 이미 맞춰 두었으니, 마나만 주입한다면 통합된 채널로 연결될 것이다.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탑에 들어가면, 굉장히 위험하다.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가까이 있는 팀원들과 합류하도록."

"-알겠습니다."

카리스마.

정확한 전달력.

믿을 수 있는 지식.

케일을 비롯한 이들이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앞서 말한 것도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사안이지만, 가장 큰 것이 하나 있었다.

-압도적인 실력.

그 어떤 적을 만나더라도 이길 것 같은 실력.

그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가, 1학년 아이들에게 무한한 신뢰감을 주었다.

"그럼, 출발한다."

"-예!"

자정까지 10초.

마누스는 리비의 마나 위에, 자신의 마나를 덧씌웠다.

탑이 리비까지 '자신'이라고 인식하게 만드는 수법.

아직 이 아이들에겐 알려 줄 필요가 없겠지.

게임 후반에서나 알아차리는 방법을 벌써 알려 줄 필욘 없다.

이런 악한 방법은 폭군인 자신만 알고 있어도 충분하니까.

'악역은 내가 짊어진다.'

그러니, 너희는 올곧게 나아가 세상을 구해라.

5.

4.

3.

2.

1.

"들어간다."

마누스는 품에서 '도구'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화악-!

그들이 있는 자리에 암녹색 게이트가 생겨나, 선택받은 이들을 집어삼켰다.

시야가 뒤집혔다.

모든 것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마누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 * *

탑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리.

어두운 실내.

이따금 보이는 핏물들.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는 거야?'

배가 고팠다.

목도 말랐고, 생리 현상도 해결할 수 없었다.

잠은 고사하고 잠시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최악-.

"이럴 줄 알았으면 생활 마법도 배워 둘걸."

작은 소리로 푸념을 해 보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자신은 여기서 죽는 걸까?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소리 소문 없이?

-그럴 수는 없잖아.

떨리는 다리를 짚고 기댔던 기둥에서 몸을 뗐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날 이곳으로 보낸 이들의 면상은 꼭 봐야겠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자까지 쳐서 이 빚을 받아 낼 거다.

그 전까지 절대 죽을 수 없었다.

의지는 다졌으니, 이제 방법이 필요하다.

'저 아이들을 믿어야 할까.'

정령.

태고부터 존재한 특별한 존재들.

소수의 사람들만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던 존재.

지금까진 방해만 되었던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번엔 도와줄 수 있겠어?"

그녀가 수줍게 입술을 달싹였고, 정령들이 희게 웃었다.

그 웃음은 너무도 순박해, 마치 아기가 웃는 것 같았다.

아이의 웃음은 순수하지만 그 속은 모르는 법.

-물론이지!

그 미소는 더없이 순수했다.

제30화

- 네 욕망은 그게 아니잖아

* * *

어딘지 모를 탑 내부.

마누스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일어섰다.

옆에는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한 리비가 널브러져 있었다.

어디쯤일까.

높이를 가늠해 보고자, 근처에 있는 창문으로 향했다.

기괴한 모양의 달.

멈춰진 구름.

'꽤 높이 올라온 것 같은데.'

어림잡아 20층 내외.

위층은 보스를 잡기 전까진 올라갈 수 없으니, 최고 높은 곳이어도 25층을 넘기진 않았으리라.

통신 구슬을 작동시켜 보았다.

"마누스다. 들리는 사람은 응답하도록."

"-들립니다! 여긴 피어슨! 와, 저 혼자 떨어졌는데요, 몇 층인지도 모르겠어요! 이러다 저희도 조난당하는 거 아닙니까?!"

"대기하도록."

이것도 이벤트의 일종이라고 취급된다면, 길잡이는 자신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고?

이럴 때를 대비해서 길잡이 마법을 익히지 않았던가.

[둑스]

희미한 마나의 빛이 떠올랐다.

과감한 시도를 할 때는, 언제나 대비를 해 두어야 한다.

술식의 성능은 충분히 검증됐다.

"...으-."

"일어나라."

"여, 여긴-, 여, 여기가 어디-."

"이동한다. 죽고 싶지 않다면 빠르게 움직여라."

리비는 벌떡 일어섰다.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을 틈도 없었다.

마누스는 폭군이라는 이름답게 가차 없었다.

둘은 이동을 시작했다.

리비는 잔잔하게 떨리는 몸을 가누며 주변을 둘러봤다.

분명 아카데미 내부에서 들어왔는데,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대체 여긴 어디고, 이들은 어째서 이런 곳을 아는 걸까.

궁금증은 많았지만, 그녀는 무언가를 물어볼 처지가 아니었다.

"선배! 여긴 아나이스예요! 전 케일이랑 같이 있어요!"

"금방 가겠다."

"그런데, 데몬들이 좀 많네요!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아요!"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빨리했다.

길은 보인다.

모든 팀원들을 안전하게 지상까지 데려가는 데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 * *.

[큼!]

[큼큼!]

멜라니는 위기에 봉착했다.

가면을 쓰고 있는 괴생명체.

괴상한 소리는 공포감을 극대화시켰다.

'술식, 술식을 짜야-.'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알고 있는 술식과 마법은 분명히 있었으나, 마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법사의 기본 소양은 집중력과 참착할 줄 아는 정신 상태였다.

전투는 언제, 어디서 벌어질지 모르는 일.

가혹한 환경에서도, 마법사는 이성을 잃으면 안 된다.

멜라니는 그런 점에서,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없는 편이었다.

-얼른 도망가!

-위험해!

-위험하잖아!

우리가 도와줄게-.

그러니, 더 이상 거부하지 마-.

정령들의 속삭임이 커졌다.

멜라니는 애써 그들의 소리를 무시하며 마나를 짜 올렸다.

빠지직-.

그녀가 알고 있는 공격 마법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할 수 있었다.

아니, 해야만 한다.

"제발-."

[큼큼-!]

가면들이 점점 포위망을 좁혀 왔다.

수많은 실패 끝에, 멜라니는 가장 기초적인 마법을 완성할 수 있었다.

[아우라]

바람이 몰아쳤다.

세찬 바람은 가면을 덮쳤다.

하지만, 수많은 가면 중에 쓰러진 녀석은 단 하나도 없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가면의 존재들.

멜라니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왜 쓰러지지 않는 거야-?!

'어떻게 해야-.'

[큼-!]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생긴 녀석이 달려들기 위해 기이한 소리를 내었다.

기이이잉-!

전조.

공격이 시작되려는 건 알았지만, 멜라니는 무얼 해야 하는지 몰랐다.

'죽는-.'

"어이어이-! 내 친구한테 무슨 짓이야-!"

콰르르륵-!

조잡하지만 확실한 화염 마법이 작렬했다.

화염에 휩싸인 톱니바퀴 괴물이 애처로운 비명을 질렀다.

[크으으음-!]

"오, 녀석의 약점은 화염 속성인가 본데, 멜라니! 괜찮냐?"

어둠 속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동아리에서 친해진 사람 중 한 명, 피어슨이었다.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감이 멜라니에게 닿았다.

"으윽, 이거 너무 많은데?"

눈앞에 있는 녀석들만 해도 대략 열 마리 정도.

게다가 뒤쪽에서도 가면들이 계속 몰려오고 있었다.

멜라니는 피어슨을 보고 화색이 돌았다.

"피, 피어슨-."

"괜찮아? 어디 다친 덴 없고? 여긴 피어슨, 지금 멜라니를 찾았습니다!"

조그마한 구슬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피어슨.

혼자 온 것이 아님을 깨달은 멜라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모두들, 구하러 와 준 거구나-.

안도감에 다리가 풀릴 것 같은 것도 잠시, 이어지는 피어슨의 말에 다시금 정신이 번쩍 들었다.

피어슨은 홀로 있을 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물이었으니까.

"여기 사방이 적이거든요? 빨리 와 주셔야 해요!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구요!"

"최대한 버텨라."

치직-, 하는 소리와 함께 들린 것은 무뚝뚝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였다.

마누스.

그 철인 같은 자도 자신을 구하러 와 준 건가?

멜라니는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해야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옆에 있다면 들리겠군. 멜라니."

"에? 아, 네! 드, 들려요."

"정령을 거부하지 마라. 네 재능은 기껏해야 보조 마법만 쓰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뭘 안다고-.

멜라니는 순간, 반발심이 들어 소리칠 뻔했다.

그녀의 소심함, 그리고 마누스라는 존재가 아니라면 그러했을 것이다.

정령은 위험한 존재다.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성스럽고 자연에 한없이 가까운 존재가 아니라고.

이들은 살육을 일삼고, 계약자에게 나쁜 마음을 심어 주려는 이들이라고.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정령은 인간의 마음을 대변하는 존재다. 네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면, 평소에 위험한 생각을 품고 있다는 뜻이겠지."

"아니에요-!"

멜라니가 두 눈을 감고 소리쳤다.

아니야-.

나는 친구들에게 그런 감정을 품지 않았어!

상인의 가문 밑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머릿속으로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났음에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증오가 피어나지 않았다.

더럽고 추악한 감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폭군이라고 불렸지. 지난 1년간, 날 증오하고 있는 이들도 많을 거다."

"...."

"난 아직도 얼간이들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들을 향해 호의를 베풀지도 않을 거다. 지금 구슬을 들고 있는 녀석처럼-."

"엑? 선배, 너무한 거 아닙니까?!"

피어슨이 반발하거나 말거나, 마누스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 모든 사람은 잘못을 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모든 사람에게, 모든 행동을 옳게 가져갈 수는 없다.

"싫어하는 녀석들이 있으면 싫어해라. 화를 내고 싶으면 내라는 거다. 정령들이 대신 화를 내 주진 않아."

"...."

멜라니는 고개를 푹 숙였다.

싫어하는 이들은 잔뜩 있었다.

그저 도덕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간섭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

-우리가 도와줄게!

-네가 손해 볼 필요가 뭐가 있어!

정령들이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가면들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피어슨이 다시 불길을 쏘아 냈다.

[크으으음-!]

"어이 멜라니! 꾸물거릴 시간 없다고! 정령이든 뭐든, 지금은 힘이 필요해. 여기서 죽을 생각은 아니겠지?!"

"-당연하지."

마나가 요동쳤다.

멜라니는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정령들을 바라봤다.

이젠 정말 시간이 없었다.

마법을 잘 못해도, 괜찮은 걸까?

정령이 있다면, 괴롭힘당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으아아아-! 멜라니이이이이-! 나 죽어어어-!"

[큼-!]

데몬의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온갖 마법들이 날아왔고, 피어슨은 엣지를 펼쳐 겨우 막고 있을 뿐이었다.

꽃잎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이젠, 정말로 결단을 내릴 때였다.

멜라니가 손을 내밀었다.

"힘, 빌려줘."

-좋아! 이때를 기다렸어!

-네 앞길을 막는 것들, 다 부숴 버려!

정령이 멜라니에게 쇄도했다.

그녀의 신형 위에, 푸른 마나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멜라니 전용기 : 잉코르포로]

-우리의 지식은 곧 네 지식.

-우린 인간의 마법은 쓰지 않아.

-정령의 힘으로 적들을 부숴 버려!

꾸드득-.

멜라니의 가녀린 두 주먹에 힘이 실렸다.

머릿속에서 미친 듯이 반복되는 영상은, 꿈이 아닐 터다.

그녀의 눈동자가 푸르게 빛났다.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알겠어."

집중력이 약해,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싸울 방법은 많다.

그녀의 진짜 재능은-.

"흐아압-!"

콰아아아앙-!

푸른 주먹이 섬광을 만들었고, 데몬 하나의 가면이 산산이 부서졌다.

피어슨이 입을 떡 벌리고 파격적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 가녀린 여인이, 맨주먹으로 데몬을 격파하는 모습이라니!

"서, 선배, 이거 맞아요? 메, 멜라니가-."

"시끄럽고, 그녀를 도와줘라."

"아, 넵-!"

피어슨은 자신의 주특기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버프 마법이 멜라니에게 쏟아졌고, 그녀는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래, 그녀의 포지션은 '탱커' 혹은 '근접 딜러'.

정령을 이용한 압도적인 신체 능력 강화.

방어력과 물리 공격, 거기다 속성까지 더해지는 범용성을 갖춘 캐릭터다.

제대로 각성한 멜라니는 그동안의 울분을 풀듯, 미친 듯이 적을 분쇄했다.

-공격은 우리가 막아 줄게!

-가서 다 부숴 버려!

-네 욕망에 충실해!

데몬 역시 마법과 물리 계열 스킬을 사용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데몬은 '전차-9'.

하급에 속한 데몬이지만, 비전투 인원이 모두 무찌르기엔 무리가 있는 녀석들이었다.

"죽어어-!"

"...무서운 처자였네."

콰앙-!

그녀가 가면을 향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데몬이 비명을 지르며 터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