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환하게 물들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세찬 바람이 불어, 주변의 모든 것을 쓸어 갔다.
진짜 신의 징벌이 내리친 듯, 주변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마누스 본인조차 그 위력에 감탄할 정도였다.
'역시 패시브를 조합하는 게 맞았어.'
이 정도는 게임 대미지로 환산하면 얼마 정도일까?
내 적정 사냥터는?
마누스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궁금증이 몰아쳤다.
하지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제한적인 정보 속에,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수밖에.
마법의 여파가 가시고, 황무지를 바라봤다.
"...대체."
"일단은 끝났군."
"대, 대단해요."
드레이크의 사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그네는 몸을 뺐는지,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우글거리던 망자 역시 말끔히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시간이 다시 흘러갔다.
――――――――――!!
고요했던 시간의 틈새가 사라지고, 곧이어 왁자지껄한 함성과 고함이 난무했다.
마누스와 알라노가 있는 구역에 있던 자들은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뭐지?"
"아무것도 없는데?"
"마, 마누스다."
오연하게 서 있는 마누스와 그 주변 일행들.
그들과 텅 빈 황무지를 번갈아 가며 보던 학생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드레이크 사체가 바로 증발해서 다행이네요."
"그러게. 하마터면 진짜 이상해질 뻔했는데. 하... 이게 무슨 일이냐 대체."
마누스는 고개를 돌려 불이 환하게 켜진 이사장실을 바라봤다.
저곳에서 지켜보고 있을 존재가 이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황궁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
이미 많이 비틀린 운명.
원작에서는 개입이 늦었던 황궁이지만, 그림자 암살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아덴이 살아 있는 걸 알게 된다면?
여러 가지로 고민이 많아졌다.
형형색색의 마법이 밤을 비췄다.
펑펑 터지는 폭죽처럼, 마누스의 머릿속도 여러 가지 생각으로 환하게 빛났다.
* ♟ *
동이 트기 시작했다.
본래 수많은 인명이 죽었어야 할 밤은, 그저 학생들의 연습장이 되었을 뿐이었다.
빛이 들자, 망자들은 모두 재가 되었다.
죽음의 신이 반기를 드는 날이 끝났다.
그 모습을 확인한 학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 그들을 보던 마누스가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승리의 달콤함을 만끽하는 건 나중에 해도 괜찮았다.
지금은 꼭 확인해야 할 사안이 있었으니.
몸을 돌려 막 출발하려 했을 때, 그의 소매를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케일이 그 올망졸망한 눈망울을 빛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익혔어요, 3클래스 마법."
"잘했군. 덕분에 사상자가 없었다."
"앞으로도 잘할 수 있겠죠?"
"꾸준히 노력한다면."
케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제, 얼간이는 아니겠죠?"
"물론."
마누스가 깊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끝으로, 소매에서 손이 떨어졌다.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노력해라. 방심하지 말고."
"-네."
케일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학생들이, 사람들이 기를 쓰고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케일의 주변엔 그녀보다 능력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일행과 합류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복기와 정산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나중에 동아리실에 들어가서 복기하자. 전투 후에 복기하는 건, 정말 필요한 일이야."
"알겠습니다. 오답 노트 작성이군요. 진짜... 마누스 선배가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어요. 으아-! 그 드레이... 읍읍!"
아나이스가 또 나불거리는 피어슨의 주둥아리를 손바닥으로 막았다.
왠지 그녀의 이마에 힘줄이 빡 돋아난 것 같았다.
"그 조등으르 드믈으."
"읍읍-!"
"맞아. 그건 우리만 알고 있어야 해. 언젠가... 이들 모두 알게 될 날이 오겠지."
알라노 역시 주의를 주었다.
피어슨은 코까지 막아 버린 아니아스의 손을 탁탁 치며 발버둥 쳤다.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이는 건 덤.
알라노는 고개를 돌려, 마누스가 걸어가는 곳을 바라봤다.
항상 바쁘게 움직이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하긴 싫었다.
친구로서, 그리고 같은 길을 걸어 나가는 동료로서 그와 나란히 걷고 싶었다.
"마누스. 오늘도 네 도움만 받는구나."
그와 그녀가 떨어져 있는 긴 시간 동안, 마누스는 어떤 심정으로 지냈을까.
그 많은 낮과 밤 동안, 저렇게 되기까지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까.
어서 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열정과 비전을 가지고 노력해야겠지.
햇살은 금세 떠올라, 찬란하게 대지를 비췄다.
혹독했던 새벽이 온전히 지나갔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환한 웃음을 지으며,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전투 종료!]
<케일의 레벨이 올랐다.>
<아나이스의 레벨이 올랐다.>
<피어슨의 레벨이 올랐다.>
<알라노의 레벨이 올랐다,>
<멜라니의 레벨이 올랐다.>
<케일은 새로운 스킬을 익혔다.>
<알라노는 새로운 스킬을 익혔다.>
<케일 : 18>
<아나이스 : 17>
<피어슨 : 15>
<알라노 : 24>
<멜라니 : 19>
『이벤트 사망자 : 0
부상자 : 17
결과 : SS+』
* * *
이사장실.
닉스 이사장은 멍하니 눈앞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
아름다운 이목구비.
단정한 복장은 전형적인 메이드의 표본이었다.
은은하게 짓고 있는 미소가 정말 아름다웠다.
그녀는 방금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카이사르 가문에서 온 아덴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하녀장을 모집하셔야 할 것 같아, 이렇게 왔습니다.>
"자네... 아무리 봐도 베로니카인데."
"그녀는 죽었습니다. 저는 아덴입니다. 이사장님."
"이거 참 어떻게 된 건지...."
닉스 이사장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가 시원스럽게 얘기라도 해 주면 좋으련만, 생글생글 웃고 있기만 하니-.
이 답답한 속을 어디다 풀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똑똑-.
복잡한 생각이 차오르기 시작할 때, 정신을 맑게 해 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마누스입니다."
"오, 어서 들어오게. 어서."
마누스는 아덴과 닉스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이사장은 눈빛으로 해명을 요구했다.
엉덩이가 조금 들썩이는 걸 보아, 아주 궁금한데 이사장의 체면 때문에 가까스로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마누스가 운을 뗐다.
"이사장님."
"그래. 얘기하게."
"이사장님은, 저희 편입니까."
"무슨 말인가 그게."
닉스 이사장.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본편 끝까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분석을 좋아하는 누군가는 그가 꼭 필요한 존재지만, 어딘가 켕기는 구석이 있다고도 말했다.
특히 황궁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다고 분석한 글이 꽤 됐지.
"탑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황궁과 카이사르 중에서, 이사장님은 어느 쪽을 선택할지 묻는 겁니다."
"...."
흐음-.
닉스 이사장이 고민했다.
두 손을 깍지 껴 모으고, 표정을 살짝 가렸다.
"베로니카에 대해선 알고 있었지. 그녀가 어떤 일을 수행하는지도."
"그래서 제가 죽였습니다. 베로니카를."
"...그녀는 마스터급 암살자였네."
"거짓말 탐지 마법을 사용해도 달라질 건 없을 겁니다."
너무나 자신감 있는 말투와 어조에, 이사장의 머리가 더욱 혼란으로 가득 찼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떤 모습을 보여 줘야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그의 고민이 점점 깊어졌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베로니카, 아니 아덴.
굳은 얼굴과 깊고 어두운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마누스.
그의 고민은 바위에 부딪혀 흐르는 바닷물처럼, 어지럽게 너울거렸다.
제43화
- 학업은 이어진다
* * *
이사장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동이 트고 있었고, 바삐 움직이는 이들의 소리가 들렸지만 이곳의 시간만큼은 멈춰 있었다.
아덴과 베로니카.
그리고 카이사르와 마누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 있어 마누스와 아덴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
누군가는 고작 한두 사람이라고 할지 모른다.
'이들은 외압으로부터 아카데미를 보호하는 방파제이기도 하지.'
이사장은 십수 년 동안 미토스 아카데미를 지켰다.
총장이 여러 번 바뀔 동안, 오직 이사장 홀로 굳건히 이 아카데미를 유지하고 있었다.
교수도 중요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학생들이다.
"자네를 도와주지. 황궁에는 이 일을 은폐하도록 하겠네."
"그럼, 대답해 드려야겠군요."
마누스는 이사장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준비해 둔 상황이었다.
아덴에겐 그저 이사장실에 가서 상황 설명만 해 놓으라고 했다.
고용인이 어떤 것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는 암살자답게, 그녀는 마누스가 바라는 것을 그대로 이행했다.
"강력한 적이 등장했습니다."
"강력한 적이라면...."
"이사장님도 보셨으리라 믿습니다. 드레이크."
닉스 이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법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전투에도 문외한이었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공기를 쩌렁쩌렁 울리는 괴성.
흔들리는 성벽과 굉음.
듣지 못할 리가 없잖은가.
본래 이곳에 처리하지 못한 사체가 남아 있으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시간과 시간 사이에 등장한 괴물이었다.
그 시간에 움직일 수 있는 건, 탑 안에 있는 데몬과 선택받은 자들뿐이었으니.
"설마, 외부인이 드레이크를 부렸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말씀드린 적 있을 겁니다. 대비를 잘해야 한다고."
"흠... 그래. 분명 그랬지."
그게 이런 의미였나.
이사장은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원했다.
마누스는 에레시스, 그들이 부리는 망자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때문에 전력 확충이 필요했고, 베로니카의 신분으로 있을 때 자신 뒤를 쫓는다는 것 역시 파악했다는 내용.
그 말은 아덴 역시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누스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누스가 이야기를 풀어 나가면 풀어 나갈수록, 놀라움만 가득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마치 모든 일을 알고 계신 것 같네요.'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미행도, 베로니카의 정체도, 이사장과의 관계도 알고 있던 거다.
그 행동 하나하나가 그녀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지난날, 자신은 마누스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처음부터 여기까지 생각하고 계셨나요?"
"베로... 아니, 아덴 말이 맞는다면, 마누스 자네는 정말 다시없을 마법사가 되겠군."
"별로 대단한 건 아닙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겠죠."
허허-.
겸양인지, 자만인지 모를 멘트였다.
이사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게 바로 카이사르일 테니까.
"아덴은 꼭 필요한 전력이 될 겁니다. 이상 현상도 이미 알고 있었을 테니."
"안 그래도 그 얘기를 해야 하던 참이었네. 그녀 역시 틈새에서 움직일 수 있는 모양이거든."
"이상 현상이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들어가 본 적도 있습니다. 금방 나왔습니다만."
아덴은 긍정했다.
탑에 들어가 보진 않았지만, 그 공간이 심상치 않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곳에 수시로 들어갔던 학생들이 있었다는 것도.
굳이 들어가지 않았던 이유는, 딱히 수상한 곳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곳에 발을 들이기엔, 그녀는 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까.
아덴은 마누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런 곳에 계속 드나들며 실력을 키우셨던 건가. 아까 전투 역시, 그곳에서 구해 온 도구로군요.'
어쩌면, 다른 방면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녀가 탑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이사장 역시 아덴을 바라보며 다양한 가능성을 그려 봤다.
무려 마스터급 암살자다.
"좋네. 내 적극적으로 두 사람을 돕도록 하지. 이제 우린 한배를 탄 거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이사장의 눈엔, 두 사람이 제법 잘 어울려 보였다.
완벽하게 변신에 성공한 아덴.
오갈 데 없어진 그녀를 품은 카이사르 마누스.
앞으로 탑을 오르고, 에레시스라는 놈들의 습격에 대비해야 할 터.
비밀을 공유하는 전력이 늘면, 위험부담은 커지지만 힘은 늘어난다.
이사장은 힘을 키울 때라고 생각했다.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겠군. 그리고....'
에레시스.
갑자기 등장한 놈들의 정보를 알아내야 할 터다.
수백 년.
미토스 아카데미가 등장한 이래, 그런 단체는 듣도 보도 못했다.
관자놀이가 아파 왔다.
왜 자신이 활동할 이때만 이렇게 문제들이 터지는지....
그래도 어쩌겠는가.
"문제가 많지만, 오히려 좋습니다."
"맞습니다. 이사장님. 뿌리가 드러난다면, 정확하게 뽑을 수 있는 곳이 보이겠지요."
두 사람의 말을 들으니, 고개가 절로 움직였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목표가 정확하게 보인다는 건, 노려야 할 곳도 명확해진다는 뜻이었으니.
"난 지원을 아끼지 않겠네. 나머진 자네들이 알아서 하게."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었다.
이사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 * *
아카데미 내부에선 꽤 많은 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부상자를 수습하고, 여기저기 부서진 곳을 손봐야 했다.
피해가 아예 없진 않았다.
다만, 죽은 이가 없었을 뿐.
그 중심에 우뚝 선 자는 단연 알라노였다.
교수 한 명 없이, 오로지 본인의 힘으로 성벽 한쪽을 완벽하게 틀어막은 자.
그 위명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중이었다.
"...낯간지럽네."
"에이, 그만큼 잘하셨다는 거 아니겠어요?"
"정작 중요한 때 활약한 건, 저기 있는 친구였는데 말이지."
팔짱을 끼고, 바람을 맞고 있는 폭군.
안 보이는 곳에서,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를 했음에도 생색 한 번 내지 않는 친구.
진짜 동료.
"우리도 저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요?"
"노력해야겠지. 우리가 모르는 시간 동안, 마누스는 남몰래 많이 노력했을 테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죠. 으으-. 괜히 과거의 저를 혼내 주고 싶네요."
아나이스가 알라노의 옆에서 투덜거렸다.
그녀의 승부욕이 활활 타올랐는지, 두 주먹을 꾹 쥐고 있었다.
고작해야 1년.
학창 시절에야 정말 큰 세월이지만, 자라 온 세월을 본다면 글쎄.
그 1년을 크게 보는 이는 어디에도 없을 거다.
그럼에도 마누스는 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존경스럽기도, 얼른 따라잡고 싶기도 한 존재.
그가 있는 한, 성장은 멈추지 않겠지.
의욕이 불타올랐다.
"얼른 끝내고, 낮엔 공부 좀 해야겠어요. 설마 포션 파는 가게가 부서지진 않았겠죠?"
"후후, 보기 좋네. 그럴 거야.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지치지 말렴. 알겠지?"
아나이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녀의 뒤를 따라, 케일과 피어슨, 멜라니가 뒷정리를 위해 움직였다.
알라노 학생들을 지휘하여 정리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오늘 하루는 푹 쉴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아무리 대륙 최고의 교육기관이라고 해도, 이런 날까지 수업을 돌릴 정도로 악랄하진 않았다.
평화로운 교정.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가는 광경이 알라노에겐 퍽 소중했다.
마누스만큼 하기 위해선, 그녀 역시 쉴 수 없었다.
언젠가, 그녀도 위기의 순간에서 영웅처럼 등장할 수 있기를 바랐다.
'에레시스. 우리밖에 대응하지 못할 적이 등장했어. 그러니....'
5클래스, 그 마의 벽을 뚫어 낼 준비를 해야겠지.
어른이 아니라고 해서 5클래스 마법을 뚫지 못할 이유도 없다.
끊임없이 정진하면, 곧 도달할 수 있을 거다.
그녀는 굳게 믿고 있었고, 아직 좌절하지 않았다.
바쁜 나날이 이어질 거다.
학업과 평화를 둘 다 잡아야 하니-.
"기다려 그곳에서."
알라노가 마누스가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마누스가 탑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이 없을 때, 자신만큼 해야 한다던 그의 말.
그런 건, 오늘 같은 상황을 말하는 것이었으리라.
'나도 느꼈으니까.'
그녀 역시 느꼈다.
알라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모든 것이 움직이는 그 시간이 너무도 아깝다는 걸 자각했기에.
* * *
마누스는 옥상에 올라, 자신만의 시간을 가졌다.
아덴에겐 평소처럼 행동하라는 지시를 내려놓은 상태.
바람만이 부는 곳에서, 그는 물끄러미 무언가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뭘 골라야 할까.'
흘러가는 시간은 무척 중요한 것이었지만, 그만큼 고민도 진득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 필수적인 스킬들은 모두 익혔다.
그가 쏘는 1클래스 마법이 남들이 쓰는 3클래스 마법과 비슷한 위력을 지니기 시작했다.
기초 공사를 탄탄히 했으니, 이젠 화려한 건축물을 위한 뼈대를 올릴 차례였다.
이번에 베로니카라는 암살자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며 느낀 것이 있었다.
"몸이 너무 허약하니까, 그 점을 강화해야겠는데."
이 게임에서의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운동신경이 뛰어나야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구 기준일 뿐, 이곳 세계에선 마법사 역시 체력과 방어력이 약한 축에 속했다.
마누스는 재밌는 상상을 했다.
뛰어난 마법사에게 접근했는데도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면?
그 마법사가 난사하는 마법을 피해 겨우 접근했는데, 마법사가 주먹으로 팬다면?
"투자할 가치가 충분하지."
예로부터 힘 법사는 누군가의 로망이자 최고의 예능이었다.
이 세계에서도 만능 마법사를 만들고 싶었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그렇게 되리라.
[버클리의 마음가짐 : 70년]
[버클리. 그들은 누군가를 지키는 데 있어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이들이었다. 조그마한 상단에서 출발했지만, 특유의 덩치와 꽉 들어찬 근육은 최강의 방패로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누군가를 경호하고, 지키는 것. 초대 가주는 그것을 버클리 가문의 신조로 삼았다.]
해리슨 가문이 지키기 위해 배제하는 가문이라면, 버클리 가문은 물리적으로 누군가를 지키는 가문이었다.
수호자의 정점.
모든 것을 막아 내는 철벽이라고 평가받는 가문의 의지였다.
[모든 피해 감소 50%]
[최대 체력 30% 증가]
[매 턴 체력 회복 10%]
[어떠한 상태 이상이든 2턴 후 회복]
오래 걸려서 그렇지, 효과는 역시 절륜했다.
마누스는 거침없이 선택했다.
70년.
엄청난 숫자의 압박감이 전해졌지만 괜찮았다.
'숫자는 결국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으니.'
시간이 지나고, 자신이 활약하고 간섭한다면 시간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으니.
하나는 계속 돌리고, 스킬 슬롯을 늘리는 방법을 찾아보면 되겠지.
나머지 하나는 뭘 할까?
그의 즐거운 고민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눈에 띄는 스킬이 들어왔다.
특별한 스킬.
그러나, 플레이어였을 땐 결코 쓸 수 없었던 스킬.
'이거, 더 재밌겠는데.'
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제44화
- 강인한 정신력은 체력에서 나온다
* * *
마누스는 타이머가 돌아가는 스킬의 상세 설명을 유심히 보았다.
분명, 35층에서 나왔던 보스였지.
제2의 뉴비 절단기이자, 상태 이상이 얼마나 귀찮고 짜증 나는 스킬인지 알려 주는 보스.
그 보스의 스킬 중 하나는, 바로 100% 확률로 랜덤한 파티원에게, 랜덤한 상태 이상을 걸어 버리는 것.
어지간한 흑마법보다 악랄한 그 스킬은, 일명 '샷건'이라고 불리는 행위를 하게 만드는 스킬.
'이건... 조커 카드로 남겨 두는 것도 괜찮겠지.'
흔히 초보들이 실수하는 것이 있다.
공격력.
무조건 공격력이 강한 스킬만 애용한다는 것이다.
그건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은 맞지만, 분명한 선입견이었다.
[망각의 구름 : 120일]
[너희는 망각 속에, 아무것도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랜덤한 적에게 랜덤한 상태 이상 효과 부여]
[100층 이하에 서식하는 데몬 / 60레벨 이하 생명체는 해당 스킬은 절대 막을 수 없음 (단, 해제는 가능함)]
순수 한글로 만들어진 스킬 이름.
아마 유저들이 직접 사용하지 않았던 스킬이라 그랬는지도.
마누스가 주목한 효과는 바로 맨 마지막 줄.
'절대 막을 수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 정말 짜증 나는 보스가 되었지.'
이제 곧 있으면 마주하게 될 것이다.
상태 이상이라는 것에 무지한 이들이다.
이 세계에서, 재도전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직접 옆에서 그들을 지켜 주어야겠지.
건조했던 바람에 온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씩, 날씨가 더워지는 중이었다.
'이제 4월인데, 이런 바람이라니.'
내륙에 있는 미토스 아카데미는 삭풍이 부는 지대였다.
그나마 여름엔 남쪽에 있는 거대한 강이 바람에 촉촉함을 더해 주었다.
이 촉촉함이 눅눅함으로 바뀔 때, 거대한 재앙이 찾아올 것이다.
첫 번째 데모니움은 튜토리얼.
두 번째 데모니움부터는, 진짜 '보스'의 성격을 가진다.
강력한 전멸기.
다양한 상태 이상.
계속 소환되는 잡몹.
'적어도 녀석들이 3클래스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하겠어.'
비단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주력 딜러 모두가 3클래스 정도는 무리 없이 다룰 정도가 되어야 할 터.
자신만 강해져서는 안 된다.
이론 공부를 열심히 하고, 탑에선 일정 구간을 반복하며 숙달해야 할 때가 왔다.
일명 제1 폐사 구간이라고도 전해지는 곳이 도래했다.
마누스는 과거의 생각에 잠겨,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여긴 하루하루가 지루하지 않아서 좋네."
화면과 텍스트로 넘기는 감각과 직접 24시간을 보내는 감각은 차원이 달랐다.
뚝뚝 끊기는 하루가 아닌, 자투리 시간에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으니까.
큰 고비 하나를 넘겼다.
잠시 동안의 평화가 찾아왔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그는 걸음을 옮겨, 다시 지식을 탐닉하기 위해 움직였다.
'스킬, 서브 퀘스트, 가문의 이야기. 기예르모인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그는 오늘도 학업을 위해 정진했다.
* * *
"후우우-."
땀을 뻘뻘 흘리며 어지러운 숨을 가다듬었다.
짧은 금발의 끝이 땀으로 뭉쳐, 야성미를 더했다.
거대한 방패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럼에도 굳게 쥔 주먹은, 결코 방패를 놓지 않았다.
마누스와의 대결 이후, 그는 많은 생각을 했다.
수호자들의 약점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지.
더 강한 마법사들을 상대하는 방법이랄지.
'-편지는 잘 갔겠지.'
누이가 편지를 읽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등등.
망자가 날뛰는 밤에도 뇌리에 둥둥 떠다니는 생각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방패를 들고 이따금 날아오는 투사체를 막았을 뿐.
"기예르모. 오늘도 정리하고 갈 거냐?"
"그러지."
"좋아, 부탁한다. 오늘은 좀 쉬엄쉬엄하라고. 조만간 생존 평가인 거, 알지?"
기예르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 수호자, 마법사들이 한 조가 되어 일주일간 생존하는 프로젝트.
학점과 굉장히 밀접한 연관이 되어 있으며, 다양한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곳이기도 했다.
2학년.
본격적으로 미토스 아카데미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시기였다.
소문으로는 마누스, 그자는 벌써 3학년 수업을 듣고 있다지.
그 소문이 진짜든 아니든, 분발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기예르모."
"...네가 여긴 무슨 일이지?"
별로 듣고 싶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날의 굴욕은, 아직 기예르모의 마음속에 불을 지피고 있었으니.
이곳, 기예르모가 있는 곳은 훈련장이었다.
주로 수호자, 전사 지망생들이 사용하는 곳이기도 했다.
마법사는 이 시간에 도서관에 있거나 마법을 연습할 수 있는 곳에 몰려 있겠지.
각종 쇳덩이가 널려 있는 이곳은, 마법사와 거리가 먼 장소였다.
"훈련하러 왔다."
"-뭐?"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마법 공부를 해도 모자랄 판에 갑자기 쇠를 들겠다니.
여전히 그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가득 차 있는 친구였다.
가볍게 스트레칭하는 마누스를 보며, 기예르모는 작게 혀를 찼다.
몸의 단련은 막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무식하게 달려드는 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었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기예르모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온 이상, 여기서 훈련할 이유는 없었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으니.
"정리하고 가라."
마누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스트레칭에 열중했다.
쯧-.
괜히 방해받았다고 생각한 기예르모는 혀를 차고 밖으로 나섰다.
하루 이틀 하고 말겠지.
기예르모 역시 가문을 위해, 성적 유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다음 주부터는 일주일간 생존 시험이 치러진다.
바쁜 건 마누스만이 아니었다.
"후우욱-."
반면, 마누스는 현대에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운동기구를 바라보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몸을 만들고, 체력을 키워야 한다.
이는 홀로 움직이는 일이 많은 자신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얼굴로 사는 데, 조각 같은 몸 한 번 정도는 만들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마나의 힘이라면, 3:500은 물론이고 1톤까지도 가능하겠지.
다행히 방구석에서 운동에 관한 유튜브를 제법 봤었다.
'그걸 여기서 사용할 줄은 몰랐지만-.'
직장에서 여유가 생기면 꼭 운동하겠다고 다짐했었지.
운동은 개뿔, 매일같이 야근에 새벽부터 출근에 아주 뭣 같은 하루하루였다.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후욱-."
거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누스의 육체는 제법, 아니 많이 튼튼했다.
물론, 그래 봤자 운동 좀 한 일반인 수준이었지만.
그렇게,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 * *
"다음 주에 있을 생존 평가에 대한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다음 날.
미토스 아카데미는 쉬지 않았다.
평가, 평가, 평가.
일부러 급을 나누고, 서로에 대한 경쟁을 부추기는 것.
그것이 미토스 아카데미의 교육 철학이었다.
대륙으로 흩어진 이들은 적으로, 혹은 아군으로 다시 만나게 될 터다.
그 축소판을 지향하고 있는 만큼, 그들의 교육은 항상 가혹했다.
"생존 평가는 인공 섬에서 진행됩니다. 2학년 전원이 각자 생존하는 서바이벌입니다."
생존 평가의 중요한 포인트는 다음과 같았다.
1. 살인 및 범죄행위 금지(적발 시 퇴학)
2. 이틀째부터 시련을 해결해야 한다.
3. 인원별로 특수한 임무가 부여되며,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4. 모든 행동은 마법으로 기록된다.
"중요한 이야기는 이상입니다. 학교 전통이기 때문에 이미 정보를 알고 있는 학생들도 많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시련은 매번 달라진답니다."
교수들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시련을 던져 주었다.
오직 마누스만이 알고 있는 미래.
그는 천천히 게임 내용을 되새기며 설명을 들었다.
시련의 내용은 다양했다.
알라노가 주인공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으면서 텍스트에 줄줄 쓰여 있었지.
다만, 문제는 플레이어가 직접 시련을 겪지 않아 마누스 본인도 이 생존 평가라는 것은 처음 겪는 일이라는 것.
'기대되기도 하고....'
-조금은 불안했다.
텍스트로 일어났었던 일주일간의 이야기.
알라노는 분명, 이렇게 말했었다.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긴 했지만, 모두가 무사했어.>
<걱정해 주는 거니? 착하네.>
<두 번 다시 생존 평가는 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일러스트.
탑 공략마저 쉴 정도로 무리했던 일정이었다고만 알고 있었다.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제법 궁금했다.
"생존 평가에선 어떤 물품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실력으로만 생존해야 할 겁니다."
"굶어 죽는 일은 없겠죠?"
학생 하나가 손을 들어 물었다.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학생을 굶겨 죽이진 않겠지.
"신호탄을 지급해 드릴 겁니다. 그걸 사용하면 응급반이 그곳으로 향합니다. 또한, 치명상을 입을 시 강제적으로 인공 섬 밖에 있는 구조선으로 이송되는 마법진 전체가 설치되어 있답니다."
"다행이네요."
"미토스 아카데미는 여러분에게 가혹한 환경을 제공할 겁니다. 하지만 죽이진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교수의 입가가 의미심장하게 올라갔다.
소환학 전공을 맡고 있는 콕스 : 샨들러 교수의 웃음.
2학년이 된 주인공에게도 제법 보였던 웃음이었지.
그때마다 크고 작은 사건이 터져, 콕스 교수는 유저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자자했다.
하지만 본인의 능력이 뛰어나, 수습은 그럭저럭 잘하는 편이었다.
"이번 주 능력 평가는 없습니다. 다만 망자의 밤에서 보여 준 행동들이 평가에 반영될 겁니다."
"에엑-?!"
"그, 그런 얘기는 없었잖아요!"
샨들러 교수가 자료를 정리하며 해당 발언을 한 학생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누군가를 잡아먹을 것같이 섬뜩했다.
다소 날카로운 말투가 쏟아졌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보고해야 합니까? 내가?"
"아, 아닙-."
"2학년인데도 아직 깨닫지 못했다면, 아카데미를 나가 가문 품에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샨들러 교수의 말은 뼈를 때리고, 살을 발라 버리는 일격이었다.
아카데미를 그저 평화로운 곳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위한 일침.
"이곳은 전장입니다. 경쟁하며 위로 올라서는 법을 배우는 곳이지요. 물론 그 외에도 교류, 인맥 등등 배울 건 많습니다만...."
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의 행동 중, 의미 없이 보이는 것은 없으니."
"-아, 알겠습니다."
결국, 본전도 못 찾고 찌그러진 2학년 A반 학생.
아마, 성적에 민감한 친구였겠지.
자신이 A반이라고 안도했을 수도 있겠다.
마누스도 다시 한번 상기했다.
이곳, 미토스 아카데미는 대륙의 정세가 그대로 담겨 있는 곳임을.
평화롭게 묘사된, 모든 유저들의 낭만인 미토스 아카데미는 없었다.
'그런 곳이었지.'
수천 명의 인원이 모여, 서로를 밟고 올라서는 곳.
위에서 내리쬐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는 곳.
그곳이 바로 아카데미였다.
마누스는 웃었다.
이런 무한 경쟁 속에서, 더는 무력함에 몸부림치지 않아도 되니까.
없는 재능을 좇으며, 홀로 자괴감에 빠질 필요는 없었으니.
-역시, 마누스는 이곳이 좋았다.
멸망을 막을 수만 있다면.
제45화
- 돈 벌어 와라
* * *
본격적으로 듣는 소환학 수업.
마누스는 샨들러 교수와 함께 3학년 교실로 불려 가, 그들과 똑같은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소환수를 다루는 캐릭터는 있었으나, 게임을 즐긴 유저들 사이에선 평가가 그리 좋지 못했지.
헌데 직접 소환학을 들어 보니, 꽤 흥미가 생겼다.
주인공은 다양한 학업 루트를 짜, 스킬을 익힐 수 있었는데, 그중 소환학도 포함되었다.
문제는 그 망할 게임사가 'K'의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뽑기 시스템을 넣어 놨다는 것.
"사역마를 소환하고 싶은 학생들은 언제든지 연구실로 찾아오세요. 3학년부터는 공식적으로 사역마를 데리고 다닐 수 있으니까요. 후후."
사역마.
소환사의 마나를 먹고 사는 이 생명체는, 다양한 차원에서 이쪽으로 넘어온다-라는 설정이었다.
"사역마는 반려동물보다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간혹 그들을 핍박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나중에 큰 화를 당하지요."
샨들러 교수는 그 말을 끝으로 수업을 마쳤다.
사역마를 소환하는 방법, 어떻게 하면 사역마와 교감할 수 있는지, 소환할 수 있는 사역마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등등.
마나가 충분해지는 3학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역마를 길들일 수 있다는 설정.
아마 초반부터 사역마가 날뛰면 전투 난도가 급격하게 하락하기 때문이겠지.
'소환사의 마나를 먹고 성장해야 하므로 소환사의 말을 거스를 수 없다고 했던가.'
그렇기에 사역마는 기본적으로 소환사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는 처지라고 하지.
그걸 악용하는 이들도 분명 있었다.
이 좋은 사역마들을 왜 안 쓰냐.
주인공이 3학년이 될 때는 평균 레벨이 60이었기 때문.
사역마는 처음 소환할 때 무조건 레벨이 10으로 고정되어 나타나니, 당연히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냥 본신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니까.
뽑기에 효율마저 꽝인 사역마를 키우는 유저는 극히 드물었다.
물론, 마누스는 해 봤다.
그리고, 그 사역마가 레벨 90이 넘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목격한 유저 중 한 명이었다.
'지금 소환할 수 있다면, 앞으로 도움은 될 거야. 문제는 3학년이 되어야 쓸 수 있다는 건데-.'
이럴 때는 이사장 찬스를 쓰거나, 아예 아카데미 밖에서 사역마를 키워야 했다.
아카데미 밖에서 키우는 사역마야, 아카데미 소관이 아니었으니.
"일단...."
연구실로 찾아가 봐야지.
마누스가 교재를 챙겨, 샨들러 교수의 뒤를 쫓았다.
그러다, 누군가와 마주치게 되었다.
분홍 머리가 인상적인 멜라니였다.
그녀는 제법 밝은 얼굴로 그에게 인사했다.
"선배. 이제 빚을 갚을 수 있게 되었어요."
"빚이라면...."
"동아리를 위한 의뢰가 들어왔어요. 리비를 통해서 정보를 모은 보람이 있네요."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행동했던 결과들이 돌아왔다.
상인으로서 도와준다던 멜라니는, 적절한 일거리를 물어 왔다.
케일의 그 눈동자가 생각났다.
분명 잘못한 것은 없는데도, 선명한 눈동자에 깃든 것은 분명한 미안함과 죄책감이었다.
모두 돈 걱정은 하지 않고 살았을 텐데, 자신 때문에 신경 쓰였을 테니.
"잘했다."
"헤헤, 칭찬받았다. 동아리실로 오실래요?"
"방과 후에 보지."
"네-!"
마누스는 이미 사라져 버린 샨들러 교수의 뒤를 쫓았다.
케일은 다양한 사건을 처리하며 강해질 것이다.
세상을 경험한다는 건, 생각보다 정말 값진 일이니.
'나도, 이 세상을 경험하며 또 성장할까?'
마누스는 복도를 거닐며 뇌까렸다.
30년.
그가 살아왔던 삶이었다.
세월을 겪으며 어른이 되어 간다고 하지.
어머니도, 아버지도, 다른 어른들도 그렇게 말했다.
나이를 먹으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고.
그 '나이'라는 건, 결국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사회의 장치들... 변화하는 무언가를 온몸으로 겪었기 때문이리라.
다시 어려졌고, 조금 다른 사상이 주입되었다.
카이사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경험들이 마누스의 앞에 차례대로 나타났다.
여기서 더 성장한다면, 자신은 과연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아-."
한참을 고뇌하는 사이, 커다랗고 고풍스러운 갈색 문이 시야를 턱 막았다.
그것을 보고, 마누스는 작게 미소 지었다.
문을 열어 보기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그게 인생 아니겠는가.
<그러니 거침없이 나아가라. 무슨 일이 닥치든, 그걸 극복한 힘만이 중요하다.>
누군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래, 카이사르라면 응당 그래야겠지.
마누스는 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 소리가 제법 경쾌했다.
"들어오세요."
"마누스입니다."
샨들러 교수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었다.
사역마를 끔찍이도 사랑한 그는, 수많은 사역마를 키우고 다시 이계로 돌려보내는 작업을 했었다.
그런 그가 애지중지하는 사역마가 보였다.
"오오, 카이사르의 별이 오셨군요. 어떻게, 수업은 들을 만하셨습니까?"
"덕분에 많은 걸 배웠습니다."
"후후, 소환학이란 그런 것이지요. 미약하지만, 그 끝은 창대할 것입니다. 제 바르바로스도 그렇게 자라났거든요."
작은 도마뱀이 보였다.
항상 샨들러 교수의 왼쪽 어깨에 자리하고 있는 귀여운 녀석이었다.
처음 이 녀석을 보는 사람이라면, 무심코 손이 나갈 정도로 깜찍한 사역마.
허나 바르바로스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면, 모두가 엉덩방아를 찧게 될 것이다.
이 녀석은 이전에 상대했던 드레이크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하고, 강력한 녀석이었으니.
"저 역시 사역마를 소환할 수 있겠습니까?"
"흐음-. 본래 3학년부터 허락되는 행위입니다만.... 그대는 조금 특별하긴 하지요."
"아카데미의 본래 교칙은 그게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설령 기숙사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모든 시간이 멈출 때에만 필요할 테니까.
사역마 입장에선 불편하겠지만, 마나는 실컷 먹여 줄 수 있었다.
마누스는 괜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답을 기다렸다.
노교수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약간의 웃음기가 있는 것을 보아, 또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건가 싶었다.
"이 사안은 협의를 거쳐야겠지요. 본래 아카데미 교칙은 '합당한 자격을 지닌 자들'이 사역마를 거느릴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럼-."
"그 자격을 시험받아야 할 겁니다. 보통은 그런 자가 전혀 나오지 않기에 3학년으로 제한을 둔 것이지만...."
샨들러 교수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기대감, 작은 흥분.
오랜만에 빛나는 재능을 찾은 희열.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표정이었다.
이건 제법, 기대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 증명이라는 것이 뭔지 궁금하지만, 그건 자연스럽게 알게 될 터다.
"마침 오늘은 정기 회의 날이지요. 내 한번 건의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카이사르의 사역마라.... 후후, 아주 좋군요. 이만 나가 보세요. 아가가 낮잠 잘 시간이라-."
마누스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연구실을 나섰다.
샨들러는 그가 나간 곳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사역마.
그 오묘하고도 신비한 존재는 소환사의 모든 역량을 종합해서 나타난다고 믿었다.
카이사르.
그 위대한 가문의 샛별이 소환한 사역마는 어떤 모습일까.
어쩌면, 자신이 키우는 바르바로스보다 훨씬 위대한 존재가 강림할지도.
"그 오만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카이사르에서-. 저런 인물이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나. 흘흘."
오늘 회의는 제법 재밌을 것 같았다.
그 깐깐한 교수들이 무어라 말할까.
그들 역시- 위대한 마법사의 탄생을 보고 싶지 않을까?
* * *
동아리실.
멜라니는 오늘도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는 친구들을 바라봤다.
알라노 역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동아리실에 들러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멜라니가 베시시 웃었다.
오늘은 제법 중요한 날이었으니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아무도 모르는 시간대에서가 아닌, 평범한 일상에서의 도움이라 더 뿌듯한 감정이 밀려왔다.
오늘따라 밝은 얼굴이었는지, 옆에서 케일이 말을 걸어왔다.
"기분 좋은 일, 있어?"
"아, 으응. 케일도 들으면 기분 좋아질 만한 일이야."
"-잘됐다."
배시시 웃는 그녀의 모습이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착한 아이가 더 활짝 웃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곳도 더 훈훈해지겠지.
달칵-.
때마침 문이 열리고, 마누스가 등장했다.
그는 푸른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더니, 멜라니와 눈을 마주쳤다.
멜라니가 결연한 눈빛이 되었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닌 일이지만, 멜라니는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타입이었으니.
"케일."
"네."
푸른 눈동자끼리 마주쳤다.
마누스는 잠시 뜸을 들이다, 그냥 직설적으로 뱉어 버렸다.
"돈이 없다고 그랬지."
"-네에."
눈썹이 조금은 아래로 내려간 건, 착각이 아닐 거다.
감정 변화가 거의 없는 그녀였지만, 돈이란 제법 민감한 사안이다.
하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많을 나이다.
단순히 탑에 오르기만 할 정도로 가혹한 삶을 살기엔, 그 삶은 너무도 찬란했다.
행복은 돈이 많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지만, 돈이 많으면 적어도 불행하진 않다.
그녀가 어떤 감정으로 살아가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보단 더 풍족해질 터다.
"돈 벌어 와라."
"-네에?"
"그건 제, 제가 설명할게요. 괘, 괜찮나요?"
앞뒤가 아무것도 없는 멘트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멜라니였다.
저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그녀답지 않게 발 빠르게 대처하고 나섰다.
멜라니는 작게 한숨을 쉬고 케일을 바라봤다.
"리비를 시켜서 급히 의뢰가 필요한 건을 알아 왔어. 주말에는 자유롭게 나갈 수 있으니까-."
"의뢰로구나."
알라노가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멜라니가 긍정했다.
"가볍게 할 수 있는 의뢰들이야. 부족한 자금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아...."
케일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멜라니는 당황해, 얼른 그 공을 마누스에게로 돌렸다.
케일이 자금난을 겪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왜 마누스가 자신에게 그런 부탁을 했는지도 깨달았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마누스가 앞을 많이 내다본 것 아닐까?
멜라니의 입술이 달싹였다.
"마, 마누스 선배가 예전부터 부탁했던 거였어! 그, 그러니까아-."
"멜라니의 공이 크다. 그녀에게 감사하도록."
"선배에에에-!"
마누스는 피식 웃고는 케일의 큰 눈동자를 바라봤다.
여기서는 살짝 조여 줄 필요가 있겠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돈을 벌어서 강해지는 데도 신경 써라. 돈은 익숙해질 때까지 많은 재앙을 몰고 다니니."
"정말, 고마워요."
"별거 아닌 돈일 거다. 어쩌면 고단한 일을 하고도 보수를 적게 받을 수 있다."
마누스는 단단히 경고했다.
현대에 사는 이들이 듣는다면, 부당한 세상이라고들 얘기하겠지.
본래 그런 세상이고, 그런 게임이었다.
단순히 고양이 한 마리를 찾는다는 임무조차, 하루를 꼬박 소모할 수 있는 현실이니까.
하지만, 그곳에서 얻는 모든 경험은 케일을 특별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더불어 홀로서기를 하고 있는 그녀에게 더없이 좋은 인연도 만들어 주겠지.
"아카데미 밖에는 세상이 있다. 이곳과는 전혀 다른... 더 험한 세상이지."
"알고 있어요."
케일 역시 세상을 겪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이라기엔 너무 선명했던 것들.
좋은 기억이라고는 없었던 탓에, 그녀 역시 세상이 어떤 곳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안 좋은 곳이라는 거.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자들이 많다는 거.
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마누스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은, 제법 희망을 주는 단어였다.
"그 험한 세상 속에서 좋은 인연은 분명 있겠지.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인연도 찾아보고 와라."
"...네. 그렇게 할게요."
케일은 눈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복잡한 그녀의 심경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윽고, 그녀가 마누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있을까요? 좋은 사람들...."
"글쎄."
그의 대답은 오묘했다.
마누스의 말대로 험한 세상일 터다.
그 속에서 소중한 인연을 얻는다면, 그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간 보람은 충분할 것이다.
적어도 마누스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난 여태까지 그런 자를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었다. 다 내 업보인지도 모르지."
왜냐하면, 그는 30년을 살면서 그런 존재를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으니까.
소돔이 멸망한 이유를 아는가.
그 거대한 도시 속에 단 열 명의 의인이 있다면, 멸망케 하지 않겠다던 신의 말.
필사적으로 찾아 나서던 그 노력에도....
단 열 명의 의로운 자를 찾을 수 없었던 탓에 멸망했다.
케일은 그의 말을 다시 생각했다.
희망을 던졌던 마누스의 말.
그건 사실-.
[간섭이 시작되었습니다.]
[케일의 성향이 변화합니다.]
제46화
- 두 번째 의뢰
* * *
마누스가 떠나간 뒤 동아리실.
정적이 머물고 있는 방에서, 케일은 마누스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자신은 그런 인연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했지.
그렇다면 자신들은?
아직 그런 인연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걸까.
검은 치마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선배도 참 선배야. 우리끼리 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지 않을까?"
아나이스 역시 팔짱을 끼고 뾰로통한 표정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그녀는 멜라니의 포장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번엔 알라노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선배. 그렇지 않아요? 맨날 혼자 다니는 게... 설마 그런 것 때문이었을까요? 우리는 아직 동료라고 인정하지 않는?"
"그러진 않을 거야."
알라노는 아나이스의 투덜거림에도 차분하게 응대했다.
그녀는 마누스의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의 성격과 지금의 성격.
그 둘 사이의 차이를 알고 있는 그녀는, 떨어져 있던 무수한 시간 속에서의 경험을 유추해 봤다.
말, 그리고 행동은 그 사람의 인생이자 인격이며, 경험의 산물이다.
선했던 이가 무심하게 변한 건, 분명 그런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마누스의 말이 맞아 케일. 세상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정말 힘들지. 때론... 아주 친한 사람이 배신할 수도 있는 거니까."
"저희는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
아나이스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응수했다.
두 주먹에 힘이 꼭 들어가 있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분한 모양.
알라노 역시 그에게 인정받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얼까.
"그 마음, 변치 말고 간직하렴. 너희들 모두."
"물론이죠. 조금 까칠하고 가끔 재수 없긴 해도 항상 우릴 위하고 있잖아요. 아직 못 미더운 것도 이해가 가는데요? 더 노력하라는 거겠죠. 우린 애송이들이니까-."
간만에 맞는 말을 하는 피어슨이었다.
아나이스 역시 한숨을 폭 내쉬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 있는 마누스가 그들을 바라볼 때면, 아직 철없는 애송이 같은 느낌이겠지.
힘이 조금 있다고 자만감에 빠지지 말라는 말이겠지.
털썩 앉아, 그녀가 케일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응?"
"-더 노력해야지."
"얘는 항상 긍정적이네."
케일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무언가를 향한 열망.
그건, 마누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의지였다.
아나이스를 비롯한 모두가 그녀의 의지를 느꼈다.
알라노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격려했다.
그의 곁에 올라설 때까지, 이들을 이끌어야 하는 존재는 바로 자신이었으니.
"다들 힘내서 노력하자. 마누스는 신이 아니야. 언젠가 그도 힘에 부칠 때가 있겠지. 그럴 때... 우리가 옆에 있어 줘야 할 거야."
"...맞아요."
아나이스도, 케일도, 피어슨과 멜라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망자의 밤.
하마터면 참사가 벌어질 뻔한 그날.
마누스는 결정적인 순간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순간을 놓치고 있을 성격이 아닐 텐데, 무얼 하다가 늦게 나타난 걸까.
문득, 멜라니가 궁금증을 드러냈다.
"그, 근데요-. 그날... 선배는 어디 계셨던 걸까요?"
"그건 나도 아는 바가 없는데... 무언가 바쁜 일이 있었던 거 아닐까?"
알라노 역시 궁금했던 건 마찬가지였으므로 해당 물음에 궁금증을 얹었다.
딱 몇 초만 늦었어도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처음부터 함께했더라면 그 쫄깃했던 감정도 없었겠지.
-그림자가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고 했지.
어쩌면, 그는 더 큰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 냈을 수도.
"어쩌면 그런 상황을 일부러 유도한 걸지도 모르죠. 그런 식이었잖아요."
"-일부러 그러진 않았을 거야."
케일이 나직이 말했다.
마누스가 그들에게 항상 강해지는 걸 요구하지만, 일부러 죽음에 이르는 상황까지 내몰진 않았다.
그건 누구보다 케일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나이스는 조금씩 불만이 쌓여 가는 중이었다.
카이사르는 분명 대단하다.
지금 그녀로서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경지였다.
'나도 적극적으로 도움이 되고 싶은데....'
곁에서 함께 걸어가고 싶었지만, 그는 항상 한 발자국 앞서 걸었다.
등을 맡기는 것이 아닌, 자신들을 보호하려는 위치.
아나이스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쯤 우릴 제대로 봐 줄까?"
그녀의 말엔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아나이스는 조금 더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마누스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만약 그날... 진짜 우리를 사지로 내몰았던 거라면.'
그러면 어떡해야 하지?
그러다 만약 누군가가 죽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아나이스의 마음속에, 조금씩 의심의 싹이 트고 있었다.
심지어 본인조차 모르는 작은 씨앗이었다.
* * *
아카데미에서 한번 의뢰를 받으면, 해당 기관에서 의뢰를 맡았던 인원에게 재임무를 신청할 수 있었다.
해당 의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경우에만 가능했으며, 해당 임무를 수행할 때는 출석 인정을 받는다.
똑똑-.
기숙사에서 독서를 즐기고 있었던 마누스의 집중력이 깨졌다.
두꺼운 책을 덮음과 동시에 아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덴입니다.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나가지."
문을 열자, 검은 단발 메이드가 편지를 내밀었다.
무언가 익숙한 장면이었다.
이곳에 온 첫날에 보았던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카이사르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편지.
아덴이 편지를 건네주며 덧붙였다.
"가문에서 정식 의뢰서를 보냈습니다. 아마 이전 평가의 뒷일이 생겼나 봅니다."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봉인을 뜯고 편지를 살폈다.
보낸 이는 가주인 라베스가 아니었다.
그의 누이, 인비데아가 보낸 서신.
'가긴 해야겠군. 가만 보자.'
당분간 탑을 오르는 것 외엔 일정이 없었다.
데모니움이 나올 시기는 아직 더 남은 상황.
문제는 생존 평가와 시기가 겹친다는 건데-.
"급한 게 아니면 다음 주로 미뤄야겠는데."
서신의 내용을 보면, 시간 날 때 오라는 말뿐이었다.
당장 급한 건 아니라는 소리.
당장은 생존 임무에 집중할 차례였다.
그곳에서 알라노의 성장을 재차 끌어낼 수 있다면, 맘 놓고 디레 교단을 상대할 수 있겠지.
"답장을 써야겠지."
마누스는 뒤이어 온 하녀에게 편지지와 봉투를 가져오라 부탁한 뒤, 만년필을 들었다.
어떻게 답장을 보내야 할까.
톡톡, 잠시 종이를 두들긴 펜촉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무뚝뚝하지만, 상대방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문체.
수차례 보고서를 작성해 보았던 마누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의 펜이 마침표를 찍었고,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메이드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가문으로 보내면 되겠습니까?"
"부탁하지."
메이드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다 문득 멈춰 섰다.
본래 메이드는 학생에게 사적인 질문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사건은 메이드들에게 큰 의문점을 남겼다.
같은 메이드.
그것도 그녀들을 통솔했던 메이드장의 이야기다.
마누스는 망자의 밤, 자리를 오랫동안 비웠다고 들었다.
"공자님."
"뭐지."
"하녀장님은 어떻게 돌아가셨을까요?"
마누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이 최선.
알고 있는 자는 적을수록 좋았다.
메이드는 머뭇거리다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더 물을 순 없었다.
카이사르의 사람들은 인내심이 많지 않다지.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이야기를...."
마누스의 잔혹한 일상을 들었던 메이드였는지, 잘게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허나 그녀의 두려움과 달리, 마누스는 그저 손을 휘젓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2학년이 된 후, 사람이 완전히 뒤바뀌었다던데, 그 소문이 진짜인 모양.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녀가 사뿐사뿐 사라졌다.
마누스는 편지를 보낸 후, 조용히 지식을 탐닉할 뿐, 사라진 메이드 따위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5클래스. 카이사르의 재능으로도 벅찬 건 사실이군.'
단순 계산으로만 512개의 선분에 일일이 마나를 짜 올려야 하고, 술식마다 적용되는 모양도 외워야 했다.
어떤 선분에 얼마만큼 마나가 들어가는지에 따라 마법의 형태도 다르게 나타난다.
어찌 보면 그가 중고등학교에서 배웠던 것보다 훨씬 심도 있는 배움이었다.
그래도 좋아하는 걸 하다 보면 재밌지 않던가.
수학 공식, 역사 연도를 외우는 건 끔찍이도 싫어하는 학생들이, 게임 스킬, 구조, 원리, 사거리, 그 밖에 모든 것들을 달달 외운다.
'이것도 비슷하지. 나에게는 삶의 낙이었던 게임이었으니까.'
그때를 생각하니,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저 멀리, 편안한 호텔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뒹구는 기분.
옛 사진첩을 뒤지며 추억에 잠기는 기분.
-문득, 마누스는 그게 정상인가? 에 대한 생각에 다다랐다.
이곳에 온 지 고작 몇 주.
한 달이라는 시간도 되지 않은 기간에, 이렇게 아득해질 수 있을까.
"...스킬의 영향인가."
본질은 변하지 않았지만, 조금씩 융화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나 해서 스킬 창을 살펴봤다.
[키아사르의 마음가짐]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마음가짐.
그래, 마음가짐의 문제다.
의외로 답은 금방 나왔다.
"기대가 되는데."
남자.
그 위에 덧씌워진 카이사르의 마음.
또 덧붙여질 다른 마음들이, 그에게 어떤 변화를 줄지.
어떤 방향으로 성장시킬지.
'재밌겠어.'
우뚝 선 영혼에 다양한 마음이 덕지덕지 붙어 마누스라는 인격체를 만들 거다.
다중 인격 따위가 아닌, 거대한 포용력과 어떤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가지게 될 거다.
마누스의 직감이, 카이사르의 뛰어난 오성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마누스는 미소를 매단 채, 지식의 탐닉을 이어 갔다.
아직 자신은 완성되지 않았다.
* * *
대한민국, 아니 세계 어느 곳을 찾아봐도 이런 호화스러움은 없을 거다.
천장은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오팔 등으로 수놓아진 거대한 그림들이 빼곡하게 늘어져 있었다.
저 위에 있는 보석 하나만 빼다 팔아도, 일가가 십수 년은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랗고, 아름다운 보석들이었다.
기둥은 어떤가.
거대한 금강석을 통째로 깎아 만든 대들보는, 긴 복도, 거대한 문과 창틀, 돔 형태로 되어 있는 지붕을 떠받들었다.
번쩍번쩍한 장식,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는 샹들리에는 달빛을 반사하는 것만으로도 내부를 환하게 비췄다.
"-이상입니다."
"그래. 고생했다. 늦었는데 이만 가서 쉬도록."
"옥체 강녕하시옵소서, 폐하."
"오냐-."
나른한 얼굴.
새치 하나 없이 단정하게 내려온 검붉은 갈색 머리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이제는 주름이 조금씩 파이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그 난리 통에 살았나. 거기다 충실한 부하까지 얻었군."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카이사르.
그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위대한 마법사.
제국을 떠받들고 있는 세 개의 기둥 중 하나.
내외부에서의 적을 통제하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 그 선대, 또 거슬러 올라가 만들어 낸 황족의 결정체.
-자신의 먼 친척이자 둘도 없는 친우 외에는 그 꽃을 다시 피우지 못할 줄 알았는데.
"먼 조카한테 주는 선물로는 제격이겠지."
그가 피식 웃었다.
분홍 머리의 암살자.
유독 정이 많고 마음이 약했던, 그러면서도 맡은 바 임무를 착실하게 이행했던 친구였다.
-제국의 주인이자 드넓은 황궁의 주인인 켈러 브레들리 역시 알고 있었다.
베로니카.
아덴은 이곳에서 오래 묶여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래, 차라리 황실보단 카이사르에 가는 편이 지내기는 편할 것이다.
보고 내용을 떠올린 그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베로니카는 애초에 이 임무를 실패했을 거다.
만약 그녀가 죽였다면, 베로니카를 대했던 마누스의 그릇이 그것밖에 되지 않았던 거겠지.
"이젠 해리슨인가. 카이사르는 통과했지만... 해리슨은 어떨지 모르겠군.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겠어."
아직 그가 원하는 만큼 빛나는 존재는 없었다.
하물며 둘도 없는 친우인 라베스마저.
언젠가, 온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게 된다면-.
더없이 찬란한 존재가 필요할 터다.
제47화
- 막간의 시간 속에서
* * *
오늘 평화로운 카이사르 가문.
라베스는 평소처럼 침실에서부터 식당까지의 긴 길을 걸어가며 보고를 들었다.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문득, 옛이야기가 생각나는 날이었다.
선조들은 언제나 전쟁 속에서 살아갔다고 하지.
무어라 불렸더라....
몬스터는 아니지만, 더 사악한 존재와 대륙을 두고 싸웠다고-.
"이상으로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인비데아가 일을 잘해 주고 있군."
"그렇습니다. 천재...시니까요."
카이사르의 가문에서, 천재라는 허들은 제법 높았다.
이곳도 망자의 밤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참 오랜만이었다.
라베스는 공국의 외곽, 시내, 성내를 직접 내려다보며 마법을 쏘아 냈다.
아들딸, 가신들의 전투 장면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검은 머리와 푸른 눈동자가 번뜩일 때마다 천지를 뒤흔드는 마나가 요동쳤다.
압도적인 파괴력을 지닌 장남.
유려하면서도 균형 있는 힘을 지닌 장녀.
아직은 서툴지만, 미래가 기대되는 막내.
'마누스는 홀로 지하 던전 하나를 토벌했다고 했지.'
그곳에 쌓인 시체는 온통 불에 그을려 있었고, 흑마법사로 추정되는 이는 바싹 말라비틀어져 있었다고 한다.
열기로 손상된 곳이 여기저기.
안은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 텁텁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고-.
'분명 마나가 별로 없었던 신체였다. 헌데 그런 위력의 마법을 뿜어낼 수 있던가.'
요새 라베스의 고민거리가 된 주제였다.
이곳은 마나가 지배하는 공간.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신기할 것 없음을 자각하고는 있다.
그래도 정도라는 것이 있고, 이론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요 몇 주.
마누스의 급격한 변화는 나름 이론에 통달해 있다고 자부하는 라베스마저 혼란스럽게 했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만한 재능을 숨길 수는 없었을 거다.
다름 아닌 자신의 눈을 피할 순 없었으니.
'조사를 해 보는 걸로 하고....'
생각을 정리하자, 거대한 식당의 문이 눈앞에 펼쳐졌다.
정자세로 대기하고 있는 사랑스러운 자식들.
그리고 더욱 사랑스러운 자신의 반쪽.
오늘도 이 훌륭한 하루를 완성하게 해 준 하늘에 감사하며, 라베스는 걸음을 옮겼다.
"다들 왔군."
여느 때와 같은, 그러나 매일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식사는 맛있었고,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허기가 질 때, 혹은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무언가를 먹고, 마시고, 씹는 행위는 정신을 맑게 해 주는 효과가 있었다.
푹 쉬고 난 다음, 맛있는 것을 먹으며 이야기하는 시간은 그 이유가 다 있음이다.
장녀가 입을 열었다.
"디레 교단이 북동쪽에 있는 사막의 사원에 똬리를 튼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토벌함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북동쪽의 사막이라면, 그래. 녀석들이 좋아하는 위치로구나."
한때 마법사들이 악마 숭배를 자행했던 곳.
누군가의 저주로 모든 건축물이 토사에 매몰된 지역이자, 강력한 몬스터들이 등장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곳에 모여 있다면, 필시 강력한 망자와 몬스터의 군대를 부리고 있으리라.
악마들을 숭배하는 자들은 사특한 것들을 재료로 활용하는 걸 좋아했으니.
라베스는 물끄러미 딸을 바라봤다.
"할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그리고, 마누스에게 의뢰를 요청했습니다."
그녀 역시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수많은 러브 콜을 뿌리치고 다시 가문의 일원으로 돌아온 인비데아.
막내는 이미 권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마누스는 재능이 부족했다.
다음 세대를 잇는 중요한 역할로서, 그녀는 자신의 오빠와 경합을 치르는 중이었다.
카이사르에서 경합이란, 모든 것을 의미한다.
식사 예절부터 아카데미, 졸업 후의 행방과 가문의 일 등등.
-인비데아는 무섭도록 성장하여, 제 오라비를 위협하고 있었다.
"-너는 아직도 그 반푼이를 믿고 있느냐, 동생아."
장남이 입을 열었다.
거만하고 여유롭다.
가늘게 뜬 눈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이미 맹수의 눈동자를 가졌으며, 그 압박감은 가히 폭군이라는 이명다웠다.
라베스는 입을 다물고 남매간의 설전을 지켜보기로 했다.
마누스.
안중에도 없던 셋째가 갑자기 부상하기 시작했다.
-퍽 재밌지 않은가.
"저는 성과를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어요."
"그래. 응원하마. 그가 있으니 난 필요 없겠구나."
인비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인 티란니스는 마누스를 끔찍이도 싫어했다.
과거, 마누스 때문에 포로로 잡혀 있던 그 시절이 생각났기 때문이리라.
실패하지 않을 임무였고, 실패해서도 안 되는 임무였다.
카이사르가 가는 길엔 결코 패배가 없어야 했으니.
티란니스는 아직까지 마누스가 미웠다.
"난 아직도 그놈을 믿을 수 없다.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하고 말 거다."
"그럼 제가 잘 키워 보겠습니다. 전 보았거든요."
가능성.
그녀를 보좌하고, 카이사르 가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줄 가능성.
인비데아는 마누스와의 만남에서 확신을 얻었다.
투자할 가치는 분명 있었다.
예상보다, 그는 너무 많이 변해 있었으니까.
"-마음대로 해라."
티란니스는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라베스는 그녀에게 일을 맡겼고, 그녀는 승낙했다.
식사를 마칠 무렵, 비서가 문을 두들겼다.
"둘째 도련님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가져오너라. 차는 여기서 먹도록 하지."
"바로 내오겠습니다."
라베스는 가족들에게 이만 일어나도 좋다 말했다.
첫째와 막내는 할 일이 있었기에 일어났고, 인비데아 역시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비서의 말이 없었다면.
"가주님 외에도 첫째 공녀님께도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아, 그럼 나도 여기서 읽어야겠네."
그래서 다시 앉았다.
두 사람은 유려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이 쓰인 봉투를 하나씩 받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잠시 지나가고 두 사람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가주인 라베스는 헛웃음을 지었고, 장녀 인비데아는 살포시 인상을 찌푸렸다.
인비데아는 편지를 마법의 불길로 태워 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마누스가 안 온다고 하던?"
"-네. 생존 평가 이후에 온다고 하네요. 그동안 철저하게 조사하면 될 것 같습니다."
라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한 아이이니, 잘하겠지.
인비데아는 숱한 전장을 다닌 베테랑이었다.
딱히 무언가 말하지 않아도 잘해 낼 터.
그보다, 그는 마누스의 편지에 눈이 갔다.
종종걸음으로 사라진 딸에게서 눈을 뗀 그가 다시 편지지로 시선을 옮겼다.
『아버지께.
잘 지내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망자의 밤엔 별 탈 없으셨는지요.
디레 교단 외에도 다양한 적이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중략)
황궁에서 저를 시험하려 하는군요.
조만간 새로운 식구를 소개하러 가겠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길 원하셨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무탈하시고,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마누스-』
"...기특한 녀석."
아버지로서, 이런 아들의 모습을 보자니 뿌듯함이 차올랐다.
마누스는 많이 변했다.
제법 기특한 소리도 할 줄 알았다.
불과 한 달 전.
그가 편지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보냈던 때가 생각났다.
그것보다, 드디어 황궁에서 움직인 건가.
'친우여, 내 아들은 만만치 않을 것이네.'
지금쯤 턱을 괴고 제국의 대소사를 관리하고 있을 친구가 생각나, 웃음이 그려졌다.
항상 전장을 꿈꾸며,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던 친구.
빛나는 별을 찾아, 끊임없이 정보를 모으는 녀석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두 아들딸에겐 관심이 없었는데, 갑자기 셋째에게 관심이라도 생긴 걸까.
그러고 보니-.
'해리슨 가문의 꼬마도 있었지.'
친구의 생각이 어찌 되었든, 그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물론, 아들의 목숨은 빼앗을 수 없을 테지만.
그가 허공을 향해 말했다.
"들으라."
그림자들이 일렁였다.
제아무리 친우라고 하지만, 엄연히 지켜야 할 선은 있는 법.
그가 선을 넘지 않도록, 적당히 견제하는 것도 아비가 해야 할 일일 터다.
"아카데미에서 황궁의 움직임을 주시하라."
[명을 받듭니다.]
온화한 눈동자는 사라졌다.
맹수의 눈빛이라고 칭했던 티란니스보다 더욱 흉포하고, 정제된 눈빛이 드러났다.
자상한 아버지가 아닌, 대륙을 호령하는 위대한 마법사.
그림자 앞에서 자유로울 단체는 없다.
설령 그것이 황궁일지라도.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베니니타스가 한마디를 거들었다.
"도울까요?"
"오랜만에 부탁하겠소. 부인."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고 와야겠어요."
그녀가 일어섰다.
라베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국의 왕비.
평민 출신임에도, 당당히 이 자리에 앉은 베니니타스가 움직인다.
사교계의 여왕이자 귀부인들의 우상.
한번 지적한 목표물을 절대 놓치지 않는 사냥꾼.
어쩌면, 라베스보다도 많은 것을 알고 있을 여인이 움직인다.
"거리에 나갈 거예요. 재단사를 부르고, 새 옷을 맞춰야겠어요. 허락해 주실 거죠?"
"-물론. 오랜만에 부모 노릇을 하겠군."
"기쁘네요."
마누스가 모르는 곳에선, 그를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시간은 흐른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른다.
누군가는 지식의 탐닉을, 누군가는 앞으로 있을 미래에 대한 대비를.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각자 다른 형태로, 다른 크기로 맞물려 돌아간다.
열심히 돌아가는 톱니바퀴들이 합쳐져,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라베스, 베니니타스, 그리고 어딘가에서 돌아갈 톱니바퀴들이 먼지를 털고 움직였다.
어디를 가리키는지,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고장 난 나침반처럼.
* * *
"그래서, 2학년에게 특혜를 주잔 말입니까?"
"특혜라니요. 엄연한 교칙입니다. 누군가 학생들의 실력을 믿지 못해, 멋대로 결정해 버린 것이지만요."
미토스 아카데미.
전 학년의 교수들이 참석하는 회의에서 다소 흥미로운 주제가 나왔다.
2학년.
실력과 마나가 되는 이들의 사역마 소환 허가.
몇몇 보수적인 교수는 고개를 저으며 반대했지만, 샨들러 교수는 강하고 정확하게 어필했다.
보수적인 교수들 역시 옛 교칙을 들먹이니 할 말이 없어진 모양.
그나마 반박할 수 있는 것이 미숙하다는 점이었다.
"2학년은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사역마를 잘못 다뤄 사고라도 난다면 어쩔 겁니까?"
"문제는 또 있습니다. 학생들끼리의 차별 문제가 대두될 수 있습니다."
그 발언을 한 교수가 '무슨 소리를 한 거지?'라며 눈을 끔뻑였다.
실수였다.
반대하고 나섰던 교수 몇몇이 쯧, 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미토스 아카데미에서 차별성을 논한다?
이는 교육자로서 실격이었다.
여긴 그런 곳이다.
더 높은 곳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는 곳.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려는 이들에게 그에 맞는 지식과 강함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 바로 미토스 아카데미일 터.
평등은 없다.
배울 의지와 능력이 되는 이들이 혜택을 받아야 하는 곳이 미토스 아카데미다.
"흘흘, 이사장님. 저렇게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닉스 이사장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대답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분명 미토스 아카데미는 강자를 육성하기 위한 곳.
능력이 되는 이들을 억제할 필욘 없다.
"미토스 아카데미는 나약한 학생에게 베풀 호의는 없습니다."
그의 무거운 목소리가 교수들에게 다시 한번 각인시켜 주었다.
미토스 아카데미는 재능 있는 자들의 앞길을 막지 않는다는 걸.
"반대로, 재능 있는 자들에게 아낌없는 기회를 줘야 하는 곳이 이곳, 미토스 아카데미입니다."
"흘흘, 다음 강의에서 좋은 조교로 써먹을 수 있겠군요."
승리자는 샨들러 교수였다.
제48화
- 재앙과 함께하는 생존
* * *
이틀이 더 지났다.
오늘은 한 주가 시작하는 월요일.
주말 동안 푹 쉬었던 학생들이 다시 나오는 날이기도 했다.
2학년을 제외한 이들은 평가가 있는 날.
자신이 이룬 자리를 지킬 것인가, 올라갈 것인가, 아니면 추락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평가.
생존 평가도 마찬가지였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일주일 동안 생존할 겁니다."
"각자 마법으로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십시오. 불법적인 방법은 불가능. 정당한 결투는 가능합니다."
서로 다른 두 교수가 설명을 이어 갔다.
가혹할 것이다.
어쩌면 죽음 직전까지 가는 이들도 있겠지.
공포와 절망을 겪는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뉜다.
그대로 침몰하거나, 두 번 다시 같은 기분에 빠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거나.
이번 평가는 그걸 시험하는 것이다.
<생소한 환경에서도 적응하는 정신력,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 임무를 극복하는 자세를 시험한다.>
2학년.
이제 막 아카데미에서의 적응을 끝마치고 본격적으로 도약하는 시기다.
줄지어 이동하는 2학년 학생들을 보며, 트레일 교수가 미소 지었다.
기대되는 학년이다.
공교롭게도, 이번 2학년은 대륙 3대 공국 중 두 곳의 자제가 있는 학년이었으니.
두 사람의 재능이 어디까지 꽃필지, 또 그에 버금가는 재능이 얼마만큼 찬란하게 피어오를지, 퍽 기대가 되었다.
"신호탄을 가지고 마법진 안에 서십시오. 임무는 인공 섬으로 도착하면 전달될 겁니다."
"신호탄이 곧 목숨입니다. 다들, 무운을 빕니다."
두 교수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학생들을 배웅해 주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순서는 마누스와 알라노.
출석 번호 순으로 들어가니, 곧 실력순이란 말과 같았다.
일련번호가 적힌 신호탄을 품에 넣고, 마누스가 걸음을 옮겼다.
"힘내, 마누스."
"너 역시."
두 사람은 나란히 마법진 안쪽으로 들어갔다.
우웅-.
마나가 일렁였고, 곧이어 환한 불꽃이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단 몇 줄로 표현된 텍스트 속 일주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미래를 모른다는 불안감보다, 설렘이 앞섰다.
알라노.
그리고 마누스 자신.
오직 둘만의 에피소드가 펼쳐질 테니.
* * *
인공 섬은 제주도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섬이다.
중앙에 거대한 산이 있었고, 산꼭대기에서 흐르는 시냇물은 강물이 되어 섬 곳곳에 흘렀다.
동굴, 나무, 바위-.
거대한 지형지물이 곳곳에 나, 빼어난 경관과 쉴 곳을 제공하게끔 만들어졌다.
마누스는 원래대로 돌아온 시계를 확인하며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마나를 넓게 펼쳐, 주변을 훑었다.
얼마 가지 않아 눈에 보일 계곡.
뒤쪽은 숲.
"적당히 살 만한 곳인가."
동시에 그의 앞에 하늘하늘,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임무를 위한 종이.
'어떻게?'라는 생각은 품지 않았다.
이곳은 뭐든지 가능한 세계였으니.
<서쪽 끝에 있는 바닷물과 물고기를 구해 올 것.>
"음."
이 섬은 크다.
그것도 엄청나게.
실제로 알라노 역시 학생을 마주친 것은 딱 두 번뿐이라고 했을 정도.
이곳이 동쪽인지, 서쪽인지, 남쪽인지 북쪽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애석하게도 비행 마법은 이 세계관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아직도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 스킬 창을 바라봤다.
역시, 마법사도 강인한 체력과 근력을 가져야 한다.
'몸이 강인하면 굳이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지금 마누스의 몸뚱이는 운동 좀 하는 일반인에 불과했다.
일차 목표를 정했다.
위치를 알기 위해선 높은 곳으로 향해야겠지.
이곳이 어디든, 일단 위치를 알아야 한다.
적당히 높은 봉우리가 보였다.
섬의 서쪽 끝.
예정에도 없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사박-.
발걸음을 옮김과 동시에, 눈앞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메시지가 보였다.
오직 마누스만을 위한 메시지였다.
[DLC 스토리가 시작되었습니다.]
[자신만의 운명을 개척하세요.]
[S2 - 재앙 속 살아남기]
[보상 : '마음가짐' 종류의 스킬 습득 시간 -10년]
피식 웃었다.
그래, 10년이 어디냐.
아직 초반부고, 무수히 많은 퀘스트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방치형의 묘미는 기다리는 것.
마누스는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걸음을 옮겼다.
산책하는 기분을 만끽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주말마다 누군가의 부름으로 자주 갔었던 산이 생각나, 쓴웃음을 지었다.
군대에서도 부사관과 함께 산을 타며 나물, 약초 따위를 캐던 때가 생각났다.
이것저것 물어봐, 산세를 제법 읽을 줄 알게 되었다.
'땀 좀 흘리겠네. 가는 길에 식량도 구해야 하고-.'
이곳에선 카이사르 특유의 딱딱함이 무뎌지는 기분이었다.
본래 남자의 평범한 마음이 강하게 튀어나왔다.
그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 * *
이사장실에 손님이 찾아왔다.
그들은 검과 방패, 지팡이가 함께 있는 엠블럼을 달고 나타났다.
대륙 어디에서나 그 문양에 관해 물으면 똑같이 답할 것이다.
제국.
그것도 황실에서 근무하는 자들의 상징이었으니까.
황궁에서 냄새를 맡은 건가-.
이사장의 얼굴에 불쾌함이 번졌다.
"미리 기별이라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저희도 급하게 온 겁니다. 이사장님. 폐하께서 급히 소식을 듣고는 파견 보내셨죠."
"그래요. 당신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파견된 이들은 모두 마법사였다.
공격 마법은 4클래스 수준이었지만, 마법진에 관련된 일이라면 능히 5클래스 마법사라고 불릴 자들.
이사장은 일말의 불안감을 안고 그들에게 물었다.
-답은 예상보다 더욱 정신 나간 종류였다.
"생존 평가가 진행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만."
"시련의 수준을 올리라는 폐하의 명이 있어 왔습니다."
"-지금도 아카데미는 일정한 기준에 따라 변별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시련.
일주일 중 엿새 동안 이뤄질 재앙.
비가 심하게 몰아친다거나, 가상의 적이 나타난다거나.
다양한 환경적 변화를 주어 가혹함을 더하는 것이다.
지금도 꽤 수준 높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미토스 아카데미가 세워질 당시, 내로라하는 마법사 가문들이 모두 달라붙어 만든 마법진이었다.
재능 있는 자들을 선별할 수 있는 변별력을 지닌 수준으로 설정한 지 십수 년.
"-그런데, 그 기준을 멋대로 바꾸라는 겁니까?"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가 꼭 강행하겠다고 하시는데 어떡합니까."
"후우-."
닉스 이사장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잠시 눈두덩이를 지그시 눌렀다.
베로니카의 일도 그렇고, 어째 황궁의 개입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황제와 자신은 계약 관계였다.
그는 제국에 속하지 않았고, 엄밀히 따지자면 제국 황제의 말을 따를 의무도 없었다.
허나 이사장은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남남이고 계약관계일지라도, 이곳, 미토스 아카데미의 절대적인 후원자는 황제임을.
"이번만입니다. 저희도 떠밀려 온 거라.... 부탁드립니다. 이사장님."
"맞습니다. 저희도 좋아서 왔겠습니까. 학생들이 고생해서 남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마법사들의 하소연이 들렸다.
그래, 이들도 고용된 입장이고 편하게 일하고 싶었겠지.
뜬금없이 아카데미까지 날아와서 마법진을 손보고 싶진 않았겠지.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자칫 잘못했다간 학생들이 죽을 수도 있는 문젭니다."
"그 문제는 저희가 해결하겠습니다."
"예. 다 방법을 마련해 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사장은 불안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도-.
그래도 하는 수 없겠지.
"안전은 꼭 책임져야 합니다. 이건 장난이 아닙니다."
마법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꽤 긴 설전이 오갈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쉽게 허락이 떨어진 것.
그들은 거듭 인사하며 준비된 것들을 펼쳐 보였다.
"여기 보시면-."
"여기서 말할 것이 아니라, 교수들을 소집하겠소. 잠시 기다리고 계시오."
"아, 그편이 낫겠군요. 알겠습니다."
똑똑-.
때마침 문 뒤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건만-.
마법사들이 놀란 눈빛을 교환했다.
"아덴입니다. 손님이 오신 듯하여...."
"마침 잘됐군. 들어오게."
문이 열리고,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은 아덴이 등장했다.
닉스는 마법사들의 안내를 부탁했다.
목적지는 회의실.
"따라오시지요."
마법사들은 조용히 그녀를 따라갔다.
닉스 역시 자리에서 일어서, 한창 평가를 감독 중인 곳으로 향했다.
황제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설마, 벌써 베로니카에 대한 것을 알아차렸던 걸까?
그 앙심으로 마누스에게 해코지를 하려는 거라면-.
닉스 이사장은 걸음을 옮기며 불안감을 숨기려 무던히 애써야만 했다.
'확실히, 황제는 보통이 아니지. 하지만 카이사르를 함부로 건들면 황제의 권력도 약해질 것이야. 게다가 거긴 해리슨도 있고.'
결론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황제는 무리수를 둘 수 없다는 것.
해리슨과 카이사르.
그 위대한 가문들이 자녀의 죽음을 좌시할까?
무능한 마법사였다면 모를까, 두 자제는 최고의 재능을 펼치는 중이었다.
그 누구도 두 가문의 분노를 피해 갈 수는 없을 터.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이사장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의 표정과 호흡은 어느새 안정적으로 변해 있었다.
"계약을 이행해야 하니-."
큰 전력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마누스와 알라노를 믿었다.
그도 찔리는 면이 있으니, 어울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결정한 이상, 행동은 빨라야 한다.
그는 마법학 교수들을 호출했고, 학생들의 양해를 구한 뒤 바삐 회의실로 향했다.
교수들이 하나둘씩 도착했다.
미리 도착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두 마법사가 교수들을 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제의 마법사가 여긴 무슨 일로-."
"자세한 이야기는 교수님들이 모두 모이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상석에 앉은 이사장은 교통정리를 시작했다.
샨들러 교수가 느릿하게 문을 닫은 것을 끝으로 모든 마법학 교수가 모였다.
모두가 이사장을 바라봤다.
이제, 말해야 할 차례였다.
#4
날씨가 우중충했다.
알라노는 하늘을 바라보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멀뚱히 서, 하릴없이 임무를 바라봤다.
-그녀가 머리를 긁적였다.
임무 내용도 어처구니없거니와, 영 내키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어쩌겠는가.
성적을 위해서라도 하긴 해야지.
"아무리 생각해도 일부러야 이건."
혼자 있었기에 조금 풀어진 모습.
알라노는 다시 한번 푹-, 한숨을 쉬고 쪽지를 바라봤다.
악질이야, 정말.
<다른 사람의 임무를 5번 방해하세요.>
해리슨, 그리고 알라노의 성격과 전혀 맞지 않는 임무.
그녀는 넓은 들판을 바라보았다.
일주일 동안 드넓은 섬에서 다섯 명의 학생을 마주해야 하며, 또 그들이 임무를 성공시키지 못하도록 방해까지 해야 했다.
그녀는 시험의 취지를 다시 떠올렸다.
가혹한 환경에 적응하는 정신력.
무얼 뜻하는지, 교수들이 무얼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세상은, 마냥 착하기만 해서는 살 수 없었으니까.
"...일단 하나."
그녀의 눈빛이 돌변했다.
평생 누굴 사냥하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야 할 걸 하지 않으며 살지도 않았다.
한 번쯤 이런 경험도 필요하겠지.
그녀가 마나를 피워 내며 천천히 움직였다.
분명 규칙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상호 합의하에 이뤄진 결투는 허용한다'고.
제49화
- 재앙이 닥쳐온다
* * *
"후우-."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마법으로 날려 버릴 수 있었지만, 마누스는 일부러 땀을 듬뿍 흘렸다.
등산은 훌륭한 하체 운동이자 유산소 운동이었으니.
그는 틈틈이 하고 있었던 훈련의 일환으로 몸을 움직였다.
수호자들의 전투를 보고 느낀 것이 많았으니까.
마누스는 옷에 맺혀 있는 땀만 날리는 선에서 계속 몸을 움직였다.
'그놈의 등산... 진짜 싫었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또 좋다.
역시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툭-.
마나를 쏘아, 먹음직스러운 열매를 땄다.
게임에서 익힌 지식은 스토리에 관한 것만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쓰이는 아이템과 환경, 다양한 지형까지 통달했다는 뜻.
달콤한 과육을 입 안 가득 머금으며, 마누스는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산세.
나무의 결과 방향.
햇볕이 들어오는 강도와 위치 등등.
자연에서도 알아낼 수 있는 단서들은 정말 많았다.
거기에 명석한 두뇌가 합쳐지니, 머릿속에서 지도가 생생하게 그려졌다.
이곳이 어디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서쪽이 어딘지는 알아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로드맵부터 그려 보자고.'
여행을 할 때, 동선을 짜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번 생존 평가도 마찬가지.
모험을 하든, 임무를 수행하든, 출장을 가든.
미리 일정을 잡고, 일어날 일들을 대충이나마 예측하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고민한다는 것.
그것 자체만으로도 여행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진달까.
훈련도 겸해, 그는 손수 목적지까지 올라왔다.
아침에 출발했으나, 벌써 해가 정점을 찍고 기우는 중이었다.
어림잡아 오후 두세 시.
이제부턴 제법 속도를 내야 하겠지.
'내려가면 냇가가 있군. 오늘은 거기서 묵으면 되겠고....'
냇가를 건너면 아무것도 없는 초원이 나온다.
광활한 대지를 누비는 초식 몬스터, '코모도'가 보였다.
거대한 갑각과 육중한 몸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
성격이 온순하고 길들이기도 쉽지만, 야생에서 마주친 코모도는 꽤 조심해야 할 녀석들이었다.
녀석들이 사는 지대는 얼마 있지 않아 초원이 되어 버린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
허나 마누스에겐 저 녀석들이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겐 좋은 단백질 공급원이지."
초원 너머, 사막이 보였다.
모래를 헤엄치며 퐁퐁 튀어 다니는 사어(沙魚) 무리도 포착됐다.
그리고 다시 펼쳐지는 수해.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너도밤나무 숲을 지나서 다시 계획을 짜기로 했다.
'서둘러 움직이자.'
이제 곧 재앙이 찾아올 거다.
한가롭게 수련할 시간은 이제 끝났다.
진짜 생존을 위해 움직일 차례였다.
파직-.
전신에 마나를 둘렀다.
수호자들이 쓰는 마나 이용 방식.
아직 조금은 어설펐지만, 처음 한 것치곤 그럭저럭 쓸 만한 수준이었다.
머릿속으로 동선을 그린 마누스가 움직였다.
재앙이 시작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 * *
"으으-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미안. 나도 사정이 있단다."
"학생회장이면 다냐 이- 읍읍읍으븝-!"
마나로 움직이는 넝쿨이 시끄러운 소리를 차단했다.
은발의 사냥꾼, 알라노는 완벽하게 전투 불능이 된 동기를 바라봤다.
어느새 해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파아앙-!
포기를 알리는 신호탄이 하늘을 수놓았다.
이 신호탄은 번호가 새겨져 있어, 학생과 1:1로 매칭된 형태.
신호탄이 터졌다는 건, 곧 해당 학생이 탈락했다는 말과도 같았다.
"곧 해가 지니까, 오히려 좋지 않을까?"
"으븡브읍-!"
입이 막혀 있지 않았다면, 험한 말이 마구 쏟아져 나왔을 거다.
눈으로 험한 욕을 마구 쏟아붓는 동기생을 뒤로하고, 어느새 황혼으로 물든 수풀을 거닐었다.
이제 곧 시련이 찾아올 것이다.
그녀는 아직 닥쳐올 시련이, 재앙으로 변했다는 건 알지 못했다.
방금 탈락시킨 이의 임무는 <최대한 많은 식량을 모아라>였다.
그가 모으고 있던 것을 모조리 빼앗았으니, 허기질 염려는 없었다.
'이제 머물 곳을 찾아야겠구나.'
밤엔 모두가 위험하니 움직이지 않을 거다.
몬스터의 습격도 조심해야 했으며 떨어진 체력을 충분히 보충해야 했으니까.
귀족들은 위생도 신경 쓴다.
-곧, 그게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될 테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사실을 몰랐다.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이곳도 틈새의 시간이 존재할까?'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알라노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항상 들고 다니던 회중시계가 없으니, 시간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고작 시간을 확인할 수 없을 뿐인데, 이렇게 불편한 일이었나.
'마누스... 그리고 애들은 잘하고 있으려나.'
마누스는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고, 1학년 후배들은 열심히 탑에 오를 거다.
그녀가 없어도 탐사는 계속되어야 할 거다.
많은 적이 생겨났다.
평화롭던 일상에서, 갑자기 세상을 구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
그 무게감을 나눠 가질 동료들이 있기에 버틸 수 있는 거다.
'이럴 때가 아니지.'
일주일.
절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생존해야 하지만, 수련을 멈출 순 없다.
그녀는 주변에 간단한 안전장치를 설치한 뒤 술식을 짜 올렸다.
5클래스.
인간을 뛰어넘는 분기점이자, 일류 마법사들이 발을 들인다는 영역.
천재이기에 넘볼 수 있고, 희대의 재능이기에 도전해 볼 수 있다.
노력하는 천재이자, 해리슨의 별이 반짝이며 빛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왔다."
푸르르르륵-!
재앙이 시작되었다.
* * *
푸륵-!
푸르륵-!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누스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러고는 신비한 현상에, 인상을 살풋 찌푸렸다.
붉은 물.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괴생명체.
물에서 뭍으로 올라오는, 개구리를 닮은 생명체.
오돌토돌하게 올라온 돌기, 큰 눈깔은 징그러움을 더했다.
"시련치곤 선을 넘는 것 같은데."
이러면 난도가 대폭 올라간다.
사흘이나 버티는 자가 있을까?
피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건 시련이 아니라 재앙이다.
어째, 가는 길마다 운명이 멋대로 날뛴다는 생각이 드는 건 착각이려나?
화르륵-.
"개구리 통구이는 어떤 맛인지 궁금했는데-."
수풀을 뒤덮는 화염이 몰아쳤다.
후끈한 열기에 닿은 피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역겨운 냄새가 머리를 띵하게 만들었다.
푸르르륵-!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개구리 떼.
'라눙'이라 불리는 생명체였는데, 어른 머리통만 한 개구리였다.
"불타라."
[이그니라]
콰르르르르르-!
화염의 기둥이 솟구쳤다.
내려앉은 어둠의 장막을 가르고, 환한 빛을 뿌렸다.
마법의 불이었기에 옮겨붙는 성질은 없었지만, 열기에 닿은 것이 모두 거멓게 죽어 갔다.
"-아."
후욱, 다시 선선한 바람이 불었을 땐 주변이 모두 검게 변해 있었다.
피의 강이 졸졸졸 흘렀다.
식수를 자연적으로 구할 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재가 되어 버린 검은 덩어리들이 널브러져, 돌멩이처럼 굴러다녔다.
쯧, 마누스는 혀를 찼다.
모처럼 식량으로 써먹으려 했건만, 불 조절에 실패했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패시브와 패시브.
위력과 위력이 중첩되어 나타난 파괴력은 어마어마했다.
훗, 하고 미소가 지어질 정도.
허나 마누스는 무뚝뚝한 얼굴을 한 채 앞으로 나아갔다.
손가락으로 붉은 물을 찍어, 살짝 혀를 가져다 댔다.
비릿한 맛이, 틀림없는 피였다.
푸르르륵-!
"무한 리젠도 아니고...."
경험치나 마석 결정이라도 주면 모를까, 지금 녀석들은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맞서 싸워야 할 존재가 아닌, 피해야 할 존재인 것.
마누스는 걸음을 옮겼다.
파앙-!
파아앙-!
어두운 밤하늘에, 아름다운 불꽃이 수놓아졌다.
신호탄.
첫날 밤이지만 족히 열 개가 넘는 신호탄이 하늘 위를 날았다.
뒤이어, 푸른 빛이 해당 지역에서 넘실거렸다.
"변별력 하나는 제대로겠군. 얘는 좀 잘 익었네."
마누스는 적당히 익은 개구리 뒷다리를 뜯어 보았다.
뿌직-.
식감은 무척 질긴 칠면조 다리를 씹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대충 허기를 누른 그가 계속해서 서쪽으로 움직였다.
'이것도 누군가의 개입인가. 아니면....'
원래 이런 난이도였던 걸까.
당장 알 방법은 없었다.
그저 견디고, 나중에 진상을 파악하면 되겠지.
어느덧 여명이 비쳐 오기 시작했다.
빛을 싫어하는 라눙의 습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햇볕이 대지를 비추자, 개구리들은 다시 냇가로 총총 뛰어 들어갔다.
느긋하게 수련이나 하며 일주일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제법 긴장해야 할 것 같았다.
역시, 미토스 아카데미의 교육 수준은 다르구나-라고 생각했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4
생존 이튿날.
강이 피로 변한 채였고, 심한 악취와 건조한 바람이 불었다.
마누스는 코모도 한 마리를 잡아, 초원을 질주했다.
생존 셋째 날.
강이 피로 변해 있었고 심한 악취가 맴돌았으며, 야생동물에게서 고름이 피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선 살아 있는 몬스터를 잡아야만 했다.
마누스는 타고 왔던 코모도를 구워 먹었다.
생존 넷째 날.
강이 피로 변해 있었고 심한 악취가 맴돌았으며, 야생동물을 먹을 수 없었다.
거기에 곤충들이 일제히 부화해, 모든 것을 휩쓸었다.
마누스는 불의 장막을 둘러, 곤충들의 접근을 차단한 채 서쪽으로 향했다.
생존 다섯째 날.
강, 악취, 동물, 곤충에 더해, 하늘에서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올 때, 작은 얼음 결정으로 변했다.
"세상이 멸망해도 지금보단 얌전하겠네."
우박인지 진눈깨비인지 모를 무언가가 대지를 열심히 때리는 중이었다.
비가 내리자마자 무수히 많은 신호탄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끝까지 남은 이들이 얼마나 될까.
알라노는 무사히 살아남았는지 궁금했다.
천재이지만, 생존에 대한 지식은 부족할 테니, 아마 꾀죄죄한 몰골로 안간힘을 쓰고 있겠지.
그래도 탑에서 성장한 경험들은 그녀를 부쩍 강하게 만들었을 터다.
"슬슬 움직여야겠군."
아직 바다는커녕, 제대로 흐르는 강도 발견하지 못했다.
시련인지 재앙인지 모를 가혹함이 은근히 그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
코모도를 구워 먹지 않았더라면, 이미 쫄쫄 굶고 바깥으로 쫓겨났으리라.
그는 하늘에서 내리는 거대한 쓰레기들을 뚫고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여섯 번째 날.
잠에서 깬 마누스는 의아함을 느꼈다.
"충분히 잔 것 같은데...."
몸이 말해 주고 있었다.
휴식은 충분했고, 포만감은 없었으니 상당히 많은 시간이 지났으리라.
하지만 왜일까.
왜, 세상은 이토록 어두운 것일까.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역겨운 악취는 그대로였고, 안식처 밖에는 아직도 우박이 떨어지고 있었다.
인공 섬이 아니라 지옥이 아닐까.
그래도 나아가야 했다.
이깟 시험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을 보낸 그도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별거 아니었지. 수행평가나 학교 성적 따위는-.'
하지만, 이미 영혼 한구석에 자리한 마음이 허투루 하는 것을 거부했다.
무엇을 하든, 끝까지 완벽하게 수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빛 한 점 없는 하루.
마누스는 빛의 구체를 띄운 채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미약한 빛조차 없어, 스스로 빛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는 술식을 하나 더 짜 올렸다.
[둑스]
이젠 본격적으로 길잡이가 필요한 때다.
쿠우웅-.
그러다 문득, 이질적인 소리를 들었다.
빛이 없는 세계에서, 모든 것이 암녹색으로 바뀌었다.
"침식이... 일어나지 않을 텐데."
본디 법칙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게임의 법칙은 '아카데미에서만 침식이 일어난다는 것'이었을 터.
게임의 근간이고, 세계를 형성하는 그 법칙이 깨졌다.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50화
- 불미스러운 일은 찰나의 순간일 뿐이다
* * *
혼란스러웠다.
법칙이 어그러진다는 건, 상당히 불쾌한 일이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멈춰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악취가 느껴지지 않았고, 우박도 허공에 멈춰 있었다.
"...왜지?"
쿠웅-.
저 멀리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이 틈새에서 움직일 수 있는 존재는 두 가지로 국한된다.
선택받은 인간이거나, 데몬이거나.
마누스는 다시 마법을 펼쳤다.
[둑스]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이 바뀌었다.
미지의 존재가 있는 곳으로 이끌리듯 향했다.
'방향은 정확해. 어쩌면 알라노가 위험할 수도 있다.'
불미스러운 일은 이걸 말하는 것이었을까.
여기서 알라노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여섯 시간.
어쩌면 그 이상을 버텨야 할지도 모른다.
[우우우우우우우우-.]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저주파가 공기를 찌르르 울렸다.
산을 누비는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꿈틀대는 것이 보였다.
그건, 거대한 언덕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꿀꺽-.
그 엄청난 힘에, 마누스는 처음으로 무력감을 느꼈다.
거대한 벽.
아니, 그건 거대한 자연이었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데몬인가.'
데몬?
데모니움?
어떤 것으로 불러야 할지 모를 정도로 거대한 생명체.
게임에선 등장한 적도, 언급된 적도 없는 존재였다.
멍하니 거대한 존재를 올려다보자, 스스로 빛을 만들어 내는 거대한 안광이 마누스를 바라봤다.
스스로 빛을 만드는 자와, 빛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가 서로를 인지한 것.
[우우우우우우우우-.]
허나, 거대한 존재는 마누스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거대한 존재는 그렇게 땅을 걸어가, 서서히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체...."
알라노도 느꼈을 거다.
거대한 존재.
그 압도적인 기운은, 평범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가 말했던 불미스러운 일이란 건, 어쩌면 이걸 말하는 걸 수도.
인공 섬.
그리고 미토스 아카데미.
아직 본편에선 밝혀지지 않은 비밀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간섭이 시작되었습니다.]
무언가의 간섭이 시작되었다.
어떤 간섭인지, 누구에 대한 간섭인지도 알 수 없는 간섭.
마누스는 본능적으로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의 축이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걸 느꼈다.
대체 게임이 품고 있던 세계는 얼마나 거대한 것이었을까.
DLC에서 풀어 나갈 비밀들은 무엇이었을까.
처음으로 마누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더 빨리....'
흐르고 있는 시간이 무척 느리다고 생각했다.
더 빨리 강해져야 한다는 압박감이 처음으로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단 하나의 존재.
단 한 번의 마주침이 만든, 불미스러운 일이었다.
* * *
"허억-! 허억! 허어억-!"
털썩, 무릎과 두 손바닥을 지면에 대고, 알라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떨려 왔고, 밀려오는 공포감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우웨에에엑-!"
간신히 배를 채웠건만, 결국 모두 게워 낸 것.
허여멀건 토사물이 수풀을 적셨다.
한참을 띵한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대체 저 생명체는 무엇이었을까.
이 인공 섬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알라노는 흘린 눈물을 닦으며 겨우 몸을 추슬렀다.
"으...."
'저런 데몬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어. 게다가 지금은 자정도 아니야.'
절망감과 무력감을 느꼈다.
마누스는 저 괴물을 보며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정말 멀리서 봤지만, 그 크기와 힘은 세상이 그녀를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겨우 찾은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 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어찌어찌 일주일 중, 마지막 날까지 버텼다.
먹기 싫은 것을 먹었고, 임무에 나갔던 경험을 더듬어 어떻게든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그냥 종일 자고 싶은걸.'
문득, 마누스와 1학년 후배들이 보고 싶었다.
차라리 탑을 오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
품에 있는 신호탄이 그녀를 유혹했다.
어서 편해지라고, 손가락 하나면 빛이 있는 곳, 따스한 물이 있는 곳으로 보내 줄 수 있다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콩콩-.
그녀는 뒤통수를 나무에 찧으며 잡념을 털어 냈다.
"여기까지 왔잖아. 포기하면 다 없었던 일이 되는 거라고-."
그녀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역한 악취와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환경이었지만, 그녀의 정신력은 강인했다.
알라노는 한 사람을 생각하며 마지막 하루를 견뎠다.
-그의 머리카락이 생각나는 하늘색이었다.
* * *.
"처참하군요."
"크흠-. 저희도 어쩔 수 없는 입장이라...."
상황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이사장의 감상이었다.
마법진을 손본 마법사들이 침음을 내뱉었다.
황제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지만, 결과가 이 정도로 처참할 줄은 몰랐다.
미토스 아카데미 역사상 최악의 평가였다.
살아남은 인원은 단 다섯 명.
수백 명의 학생 중에, 단 다섯 명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이게 황제의 뜻입니까? 아무런 변별력도 지니지 못했을 텐데요."
"...."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답답한 상황이었다.
인공 섬은 당분간 사용이 불가할 정도로 망가졌다.
마법진을 무리하게 추가하고 고쳐서인지, 기후를 관장하는 장치가 완전히 망가졌기 때문.
결국, 내년에는 인공 섬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았다.
닉스 이사장은 반드시 대가를 받아 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건 보상안을 마련해 오셔야 할 겁니다. 설령 황제의 뜻이 아니라도-."
"폐하께서 이걸 주셨습니다. 안 그래도 일이 모두 끝난 후에 전달해 드리라고...."
마법사는 마법을 이용해 커다란 궤짝 하나를 소환했다.
쿠웅-.
바람을 일으키며 나타난 궤짝.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무게에, 장식 역시 호화스러웠다.
"마법진 복구 비용으로는 충분할 겁니다. 더불어 학생들에게도 보상을 주라는 폐하의 전언이었습니다."
"-이 정도까지 내다보고 계셨단 말입니까?"
"제국의 황제 폐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무언가를 항상 보고 계시겠죠."
닉스 이사장은 조심스럽게 궤짝을 열어 보았다.
그곳엔 제국 황실의 엠블럼이 박힌 쪽지 한 장과 막대한 양의 금은보화가 들어 있었다.
능히 아카데미 1년 예산은 충당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사장은 천천히 쪽지를 읽어 보았다.
황제가 친히 보낸 편지였다.
『친애하는 미토스 아카데미 이사장께.
황제의 이름으로 파견을 보내고, 멋대로 권력을 행사한 것에 대해 사과부터 해야겠지.
이 편지가 갔다는 건, 그대가 본 황제가 요구한 것들을 잘 행했다는 뜻.
무례를 용서하게.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으니.
이번 시련을 통과한 자들에게 성대한 상품을 내려 주게나.
이는 나, 제국의 황제가 시험한 무대에서 당당하게 그 능력을 입증한 전사들이니.
황제가 그들을 주시할 것이네.
내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하지.
항상 자부심을 가지게.
미토스 아카데미는 대륙 최고의 교육기관이자, 대륙의 평화를 위해 힘쓰는 기관이니....』
닉스 이사장은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나오면 뭐라 할 수 있는 구석도 없잖은가.
슬슬 귀환자를 맞이하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이사장은 이후의 일을 그려 봤다.
멋진 단상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일주일 동안 고생한 학생들에게 멋진 하루를 보내게 해 주고 싶었다.
"트레일 교수님. 시상식을 해야겠지요?"
"이번엔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생이 많았으니, 조금은 풀어 줘야겠지요. 흘흘."
샨들러 교수와 트레일 교수가 동의해 주었다.
그들 역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상황실에 들러, 일주일간의 진행 상황을 지켜봤다.
유례없는 난이도에 모두가 탈락했지만, 마지막 다섯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
샨들러 교수가 손가락을 들어 제안 한 가지를 더 얹었다.
"이건 어떻습니까. 통과한 다섯 명에게 사역마 소환의 기회를 주는 겁니다."
"...그거 괜찮군요."
"저도 찬성입니다."
사역마는 마나를 다룰 수 있다면, 직업과는 관계없이 소환이 가능했다.
물론, 마나와 더 많이 친한 마법사가 유리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어쨌든, 보이는 특혜라는 건 중요했다.
어느 누군가가 말했듯, 미토스 아카데미는 평등을 주제로 한 교육기관이 아니었으니.
충분히 납득 가능한 보상이었고, 그들은 충분한 자격을 보여 주었다.
"왈가왈부할 필요도 없겠군요. 이 정도 시련에서 증명한 자들이라면."
"그럼, 결정하겠습니다."
닉스 이사장의 선언을 끝으로, 보상이 결정되었다.
상황실에서 나온 교수들이 이제 막 귀환한 학생들이 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누스를 비롯한 다섯 명의 학생들이 도착한 곳은 거대한 강당.
인공 섬으로 향했던 텔레포트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강당이었다.
꾀죄죄한 몰골, 수척해진 인상.
엄청난 시련의 여파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모습의 학생들이 보였다.
"-모두 고생했네."
"평가치고는 가혹하더군요."
모두가 만신창이로 귀환했을 때, 유일하게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마누스가 입을 열었다.
이사장과 교수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숨길 필요는 없겠지.
이사장은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했다.
"황궁, 제국의 찬란한 태양께서 여러분을 시험했습니다.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을 겁니다."
마누스는 말이 없었다.
알라노는 놀란 듯, 주저앉아 있으면서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마누스와는 다른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페하께서 내리신 보상은 무엇이죠?"
금색의 머리칼.
단단한 신체를 지닌 채, 너덜너덜해진 방패를 지닌 기예르모였다.
그 역시 2학년 중에서는 톱에 속하는 인재.
기예르모는 마누스와 알라노를 흘끔 보고는 다시 이사장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법부 동기들은 강하다.
무려 세 명이나 통과했으니-.
'하지만, 합당한 보상은 분명 각 클래스별로 준비해 뒀을 거야.'
기예르모.
그리고 '글라디' 가문의 기사 지망생.
이 둘은 보상을 독식할 기회가 주어진 것.
이사장은 빙긋 웃으며 보상 목록을 말했다.
역시 황제라 그런지, 그 보상의 통이 매우 컸다.
질은 또 어떤가.
"먼저 순위부터 발표해야겠죠. 1위는 마누스 학생입니다. 2위는 알라노, 3위는 기예르모 학생이군요."
4위는 글라디 가문, 5위는 마법사 B반에서 나왔다.
이사장의 입술이 나풀거리며 보상을 쏟아 냈다.
일단 두당 50골드.
게다가 고위 마법이 새겨진 망토가 지급될 예정이다.
마법사들에겐 아티팩트가, 기사에겐 검이, 수호자에겐 갑옷이 지급되었다.
거기에 차등 지급되는 상금까지.
'돈은 별로 필요 없는데.'
마누스는 골드보단 아티팩트에 관심을 보였다.
동시에 반가운 알림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언제나 그렇듯, 보상을 받을 차례였다.
『시나리오를 정산합니다.』
이번에도 그만의 이야기가 끝났다.
이젠 또 다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야 할 차례였다.
제51화
- 잘하고 있었냐?
* * *
[S2 클리어]
[점수를 계산합니다.]
[모든 시련 극복 / 미지의 존재 확인 / 알라노 생존 / 임무 완수]
[종합 : S]
[보상 : 마석 결정 XL x 10개]
[스킬 습득 시간 - 50% 쿠폰 1장]
[세계선의 방향이 변화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시련이 닥쳐올 것입니다. 자신만의 결말을 향해 정진하세요.]
황제가 준 보상보다, 이편이 더 좋았다.
마나도 빵빵하게 회복할 수 있고, 블랙과 화이트에게 흑마법을 배울 수도 있었다.
마석 결정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행복한 고민거리가 늘었다.
"별일 없었어?"
"나는 딱히."
"그거... 봤어?"
알라노는 아직도 잘게 떠는 중이었다.
마누스 역시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떠올리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강인한 해리슨이 이렇게나 떨고 있다니.
마누스는 손을 올려,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떨리는 몸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봤지만, 적대적이진 않았다. 그 얘기는 일단 묻어 두지."
"...그래야겠지."
그녀가 잘게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걷히지 않은 공포의 잔재가 정신을 좀먹고 있었다.
마누스는 나직이 말했다.
"오늘은 좀 쉬어라. 탑은 내가 다녀올 테니."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누스 역시 그때를 생각하면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탑에서 스트레스나 좀 풀까.
1학년들이 탑을 어떻게 올라가고 있을지 궁금했다.
이제 슬슬 35층에 도달했을 터.
그가 1학년들을 보러 가겠다고 말하자, 알라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겠어? 너도 피곤할 텐데."
"슬슬 녀석들도 한계에 부딪힐 것 같아서."
"난 항상 도움만 받는구나."
알라노가 고개를 숙였다.
그토록 위대한 가문의 장녀였지만, 마누스 앞에서는 항상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마누스는 옅은 웃음과 함께 반대편 손도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
커지는 눈망울이 퍽 인상적이었다.
마누스는 진심을 다해 말했다.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어, 고, 고마워."
창백한 얼굴에 홍조가 돌았다.
다소 진정된 듯 보여, 마누스가 몸을 돌렸다.
따스한 온기가 남은 것 같아, 알라노는 제 어깨를 더듬어 보았다.
"덕분에 홀로 처리할 일들에 집중할 수 있다. 너희에겐 항상 감사하고 있어."
"-앞으로도 도울 일 있으면 말해 줘."
그녀의 말은 겉치레가 아니었다.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금발의 수호자는 아직 마법사를 믿지 못했다.
하지만, 동료를 챙기는 모습은 수호자에게도 귀감이 될 만한 모습임엔 틀림없었다.
이상했다.
그가 가지고 있던 편견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기에.
변화를 받아들이기엔 갑작스러웠고, 강렬한 기억은 새로운 경험을 밀어냈다.
'마누스.'
기예르모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마법 처리가 된 갑옷은 그가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폭군을 끌어내릴 때 도움이 되겠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생존 평가가 끝났다.
마누스는 당연히 학년 전체 1등을 차지했다.
* * *
"그거 들었어?"
"뭔데?"
점심시간.
우물우물 급식을 먹고 있던 피어슨이 말했다.
케일은 눈빛으로 물었고, 열심히 음식을 입에 넣고 있는 중이었다.
아나이스는 우아한 동작으로 포크를 내려놓고 피어슨의 말을 들었다.
멜라니 역시 마찬가지.
피어슨은 항상 흥미로운 소식을 가지고 오곤 했으니까.
"이번에 선배들 생존 평가 했잖아. 거기 완전 난리도 아니었데. 마지막 날은 뭐더라? 빛도 한 점 없었다는데?"
"그래서?"
"2학년 중에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딱 다섯! 그 다섯 중 둘이 우리 마누스 선배랑 알라노 선배였다잖냐. 크으-. 역시 문화 교류 동아리는 뭔가 달라도 달라."
아나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이야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2학년 선배들이 무더기로 탈락한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는데-.
심드렁한 아나이스.
멜라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은 우물우물, 계속 음식을 먹으며 눈빛을 초롱초롱 빛냈다.
"야야, 너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르는구나? 내가 시련에 대한 것도 정리해 봤는데-."
뒤이어 들려오는 내용은 심드렁하던 아나이스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섬뜩한 내용이었다.
강이 피로 변하질 않나, 동식물들이 죽질 않나, 우박이 내리고, 빛이 사라지고-.
거기까지는 몰랐던 이들이 어느새 밥 먹는 것도 멈춘 채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네 사람뿐 아니라, 어느새 동기 학생들까지 피어슨 곁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확실히, 그의 언변은 주변을 휘어잡는 능력이 깃들어 있었다.
"진짜야? 그렇게 난도가 높았다고?"
"살아 나온 게 기적 아니야? 누구 안 죽었대?"
"우리 위대하신 폭군이 인공 섬을 점령했다는 얘기 아니냐. 성격은 조금 까칠하고 맨날 찰난 척해서 재수가 좀 없지만, 아카데미 최고의 마법사 아니겠어?"
"...."
피어슨은 잘난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떠들어 댔다.
친구들의 반응이 없자, 그는 더욱 텐션을 높였다.
후후, 나의 이 화려한 언변에 빠져들고 있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열심히 입을 놀리는 피어슨.
조동아리에 [알투스] 마법을 건 듯, 쉴 새 없이 입술이 나풀거렸다.
"크으, 폭군과 여왕이 당당하게 생존한 모습! 진짜 마법사들의 귀감이지. 암암. 그런데 있잖아, 마누스 선배는 사실-?"
"재미있군."
스산한 목소리였다.
피어슨은 한참 떠들던 입을 다물고 끼긱-, 고장 난 인형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의 마누스가 푸른 안광을 빛내며 서 있었다.
아-.
그제야 깨달았다.
친구들이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던 건, 생태계의 정점이 등장해서였구나.
멜라니와 아나이스는 고개를 돌렸고, 케일은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구원해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너, 너희 진짜 치사한 거 아니냐, 엉?"
"계속해 보지, 피어슨."
"죄, 죄송합니다아아아아-!"
결국, 그가 선택한 건 도주였다.
식판을 들고 재빠르게 뛰어가는 그를 보며 피식 웃은 마누스가 케일을 바라봤다.
푸른 머리칼.
자신을 닮은, 초롱초롱한 눈동자.
-세계를 구해야 할 이 세상의 주인공치곤... 다소 맹한 모습이었다.
두 볼은 음식을 한껏 넣어, 햄스터처럼 부풀었다.
저도 모르게 쿡, 찔러 보고 싶었으나 카이사르의 마음이 온몸을 던져 막아 냈다.
"...동아리실에서 보지."
"넴-."
우물우물-.
케일은 계속해서 음식물을 씹으며 답했다.
마누스는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향한 방향은 피어슨이 뛰어간 쪽이었다.
어쨌든, 저 조동아리는 한 번쯤 참교육을 해 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가 사라진 후, 푸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층 농밀하고 진득한 마나.
마누스는 또 한 번 성장을 이룬 걸까.
아나이스는 선배가 남기고 간 마나의 잔향을 느꼈다.
단순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더 대단했던 모양인데. 마누스 선배가 저렇게 마나를 흘리고 다닐 정도면-."
"응-. 그런 것 같아. 말로만 들어선 실감이 안 나는걸."
멜라니가 답했다.
그녀는 곁에 떠다니는 정령들을 바라봤다.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이 불안했다.
"진짜 괴물은 괴물이다."
"피어슨... 명복을 빌어 줘야겠지?"
"걔는 좀 맞아도 싸지 않을까?"
엇갈린 반응.
멜라니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여전히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플로이스.
그 화려한 태양의 가문의 장녀는 인상을 쓰고, 마누스가 사라져 간 방향을 바라봤다.
멜라니는 그 소심한 성격 탓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피어슨이라면 그녀의 표정을 발견하자마자 무슨 일 있었냐고 들이댔을 테지만, 그는 여기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무슨 일일까.'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입속에서 맴도는 말을 삼키고,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나이스는 궁금하거나 부당한 것, 자신의 기준에서 그릇된 일들을 참지 않으니까.
플로이스 가문의 마음가짐이라면, 반드시 그러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날 뿐.
그녀도, 그도, 어느 누구도 몰랐다.
-상처를 돌보지 않았을 때, 비로소 생기는 것들이 있음을.
고름은, 아무런 관심도 없을 때 퍼진다는 걸.
* * *
동아리실.
먼저 도착한 마누스는 이사장에게서 받은 아티팩트를 살펴봤다.
스킬 쿠폰은 주저 없이 '버클리의 마음가짐'에 써 버렸다.
마석 결정은 일단 다섯 개를 흡수, 나머지는 블랙과 화이트를 만나 상담해 볼 예정이었다.
[Dii te ament]
[그대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설명은 그것이 다였다.
금으로 된 팔찌.
마치 못을 구부려 놓은 듯한 디자인은, 현대에서 언뜻 보았던 주얼리 브랜드의 상품과 비슷했다.
차이점이라면 박힌 보석이 조금 더 크다는 것과 은은하게 마나가 흐른다는 점일까.
'이건 분명, 황궁 에피소드에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인데.'
일명 축복의 팔찌.
전투에서 한 번, 즉사급 공격을 막아 주는 아이템이었다.
후반부에 아주 유용하게 쓰이는 아이템.
플레이어들이 황궁으로 불려 갔을 때 생기는 스토리에서 입수할 수 있었는데, 바뀌었다.
이걸 황제가 선뜻 내어 줄 줄은 몰랐다.
본편의 끝까지 황제는 그 속내를 비치지 않았지.
'언뜻 보면 무언가 알고 있는 것 같았는데.'
플레이어를 계속해서 시험하고, 시련에 빠뜨리는 포지션.
적당한 먹이를 던져 주고, 사냥개를 사육한다는 느낌.
게임사에서 푼 정보가 극히 제한적인 곳 중 하나였다.
세계선이 변하고 있다.
조금씩 사건이 뒤틀리고, 누군가가 한 날갯짓이 커다란 폭풍을 불러오겠지.
그중에 황궁과 황제도 끼어 있을 거다.
'여긴 본편의 세계가 아니니-.'
달칵-.
그의 상념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마누스 본인의 호출을 받고 온 새내기들.
네 명의 선택받은 학생들이 동아리실에 집결했다.
"선배, 저희 왔어요."
"-앉지."
네 사람은 쪼르르 앉았다.
평소 같았으면 웃고 떠들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을 터다.
하지만 마누스가 있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존재감만으로 분위기가 꽉 눌리는 것을 느낀 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소 지친 건 맞았으나, 그 가라앉은 기분을 후배들에게 풀고 싶진 않았으니.
"다들 탑은 어디까지 올라갔지?"
"34층에서 멈췄어요. 계속 그 주변에서 마석을 흡수하고 있어요."
"잘하고 있군."
"35층에 한번 가 보긴 했는데...."
케일이 입을 열었다.
옆에서 아나이스와 피어슨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마 자신이 없었던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사실 마누스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혈기왕성하고 실력도 부쩍 늘었겠다, 2학년들 없이 뭔가를 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이들에게 정신 공격을 버틸 내성은 아직 없었다.
"보스를 만나고 죽을 뻔했겠지, 맞나?"
"...."
고개가 점점 내려간다.
마누스는 거기에 더해, 이들의 정곡을 때리는 말을 더 날렸다.
"멜라니, 아니면 피어슨이 도와줘서 가까스로 도망쳤겠군."
"...마, 맞아요."
멜라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빠져나왔겠지.
괜찮았다.
몸으로 하는 경험, 특히 안 좋은 경험이라면 뼛속 깊이 새겨지기 마련.
다시는 겪지 않겠다는 의지가 다양한 방어기제로 표현된다.
미약한 공포감이 느껴졌다.
"오늘, 35층을 돌파한다."
"가, 가능할까요? 상대는...."
"지금 너희들이 대처하지 못할 건 딱 한 가지다. 알고 있으니, 극복해야겠지."
나, 마누스가 함께할 테니.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올망졸망한 눈망울 네 쌍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간섭이 시작되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탑으로 와라."
네 쌍의 눈빛이 변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제52화
- 혼란과 공포를 딛고 일어서는 법
* * *
그날의 공포는 아직도 케일을 괴롭혔다.
붉게 충혈된 눈을 한 채, 자신을 쫓던 아나이스.
주저앉아 엉엉 울던 피어슨.
마법이 제대로 영창되지 않아, 그 천재성을 발휘할 수 없었던 자신까지.
멋대로 향한 대가는 컸으며,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후우-."
작게 숨을 뱉어 본다.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날숨이 아닌, 잘게 떨리는 한숨.
그날 이후 사흘이 지난 오늘.
마누스와 알라노가 한창 인공 섬에서 재앙을 극복하고 있을 때, 그들은 35층에 올랐다.
케일도 있겠다, 전력도 빵빵하겠다, 그들은 당당하게 파수꾼 앞에서 마법을 휘갈겼다.
단단한 내구로 무장한 보스는 그들의 마법을 견뎌 내고, 한 가지 마법을 시전했다.
'다시 설 수 있을까.'
강렬한 경험은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이건 인간이 가진 본성이며, 무의식적으로 끌리거나, 피하는 걸 택한다.
특히 안 좋은 방향으로 형성된 기억은, 깊은 트라우마를 남기기도 한다.
제 손으로 동료를 구할 수 없었던 경험은, 마음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었다.
마법은 꽤 자신 있는 분야였다.
어렸을 때부터 재능 있다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하지만-.
"케일-. 안에 있어? 자는 거 아니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부르는 동료, 아나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케일은 널브러져 있던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진즉 준비는 끝내 두었다.
미약한 두려움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을 뿐.
눈을 들어, 자신보다 조금 더 위에 있는 아나이스의 눈동자를 살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꽤 친해진 케일의 눈에는 보였다.
그녀 역시, 미약한 불안감이 깃들어 있다는 걸.
"-가자."
"그래. 멜라니는 벌써 내려갔어."
멜라니는 피어슨과 합류하겠다며 먼저 내려간 상황.
두 사람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기숙사 밖을 나섰다.
평소 같았으면 조잘조잘 떠들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불쑥 말했다.
"...잘할 수 있겠지?"
"마누스 선배가 같이 가니까-."
"만약 선배가 우릴 버리고 가면 어떡해?"
아나이스는 불안감을 그대로 표출했다.
마누스.
알라노.
최근 한 달 동안 생활하면서 느낀 바가 컸다.
물론, 플로이스 가문도 한가락 하는 가문이고, 어디 가서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가문이었다.
태양을 부린다는 가문으로 칭송받는 플로이스지만, 그 둘과는 격이 달랐다.
해리슨, 그리고 카이사르.
둘의 재능은 그녀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불안감과 조급함이 커져만 갔다.
고작 한 달이었지만, 소녀의 감성은 그만큼 예민했으니까.
"그럴 리가 없어."
"난...."
-불안해.
아나이스는 친구가 걱정할까 봐, 뒷말을 쓰게 삼켰다.
그녀의 불안감을 다른 동료에게도 전이시킬 필요는 없다고 느꼈으니까.
케일은 아나이스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나이스."
"-응?"
"마누슨 선배는... 우릴 위해 많은 걸 하고 계셔."
"그, 그렇지."
케일은 단호하게,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평소의 아나이스를 보는 것 같은 매서운 눈빛으로.
"-그러니까 의심하지 마."
"...."
아나이스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 알고 있었다.
의심은 무슨, 오히려 그에게 엎드려 절해야 할 처지이지 않은가.
"...의심하는 거 아니야."
천천히, 다시 곱씹어 본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자정이 다가오기 전, 아나이스와 케일은 서로를 마주했다.
한 명은 완고한 믿음으로, 다른 한 명은-.
"불안해서 그래. 마누스 선배랑 알라노 선배가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실망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럴 사람들이 아니야."
"나도 알아, 알고는 있어. 하지만... 그날 기억나?"
망자의 밤.
그날의 일을 조사하고 있던 아나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마누스 선배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그래서 불안했어. 우릴 시험하려 드는 건 아닐지-."
어디서 지켜보며, 그들을 계속해서 품평하고 앞으로의 가치를 가늠하는 건 아닐지.
그래서 35층에 도전하자고 말했던 것도 그녀였다.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 언제고 떠나갈 것같이 멀어져 버린 두 선배.
항상 사랑받고 살아왔던 아나이스에겐, 흔들릴 듯 불안한 관계는 생소한 것이었다.
흔한 귀족 가문의 자녀들이 하는 착각이 있다.
세상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거.
"-그런 거 아닐 거야."
"하아... 나도 모르겠다. 왜 이러는지."
"...물어볼까?"
케일은 별다른 고민 없이 말한 내용이었지만, 아나이스에겐 아니었다.
은연중에 가지고 있던 열등감이 켜켜이 쌓여, 곪아 가고 있었기에 행동하지 못했던 것.
확실한 정황을 파악하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겠다는 생각에, 오해가 깊어졌다.
케일은 미친 듯이 흔들리는 아나이스를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누스 선배에게 조금은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조금만 더 자신을 드러내면 좋았을 텐데-.
"물어보자. 왜 그랬는지."
"그, 그래도 될까?"
"-응."
선배라면, 분명 답해 주리라.
케일은 굳게 믿었다.
앞으로 많은 시일을 함께해야 할 동료이자, 친구였다.
여기서 깨질 인연이었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던 것이 나았으리라.
케일은 이 인연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잘못된 길로 가는 이를 바로잡아 주는 것도, 친구의 역할이라 배웠으니까.
* * *
"...조금 늦는군."
"차, 찾으러 다녀올까요?"
무뚝뚝하게 중얼거린 마누스에게 반응해, 멜라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누스는 고개를 저었다.
중얼중얼-.
갑자기 열띤 학구열을 보이는 피어슨에게도 눈길을 주었다.
애써 무시하고 있던 감정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오른다.
본능이 거부했던 그날의 기억들이 떠오르며, 정신적으로 내몰린 탓이겠지.
앞으로 갈 길이 멀다.
'극복해야지.'
더 심한 패턴을 가진 존재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35층은 전초전일 뿐,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지 못한다면 올라갈 수 없었다.
오늘은 혼란과 공포 위에 서는 법을 알려 줄 것이다.
'상태 이상을 푸는 방법이야 많지만-.'
보통은 아이템을 사용하거나, 전용 스킬을 사용하곤 한다.
후에 합류하는 동료가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한 다음엔, 상태 이상도 그다지 신경 쓸 요소는 아니다.
하지만, 이곳은 현실.
이곳에서의 상태 이상이라는 건, 깊은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외상 후 스트레스를 평생 안고 가야 할 수도 있는 상황.
아직 어린 학생이기에, 정신과 감정을 조종하는 공격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 게이트는?"
"아, 28층에 게이트가 있어요."
"애들이 도착하면, 먼저 가 있어라."
멜라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멜라니의 성장이 원작보다 빨라서 다행이었다.
정령들도 생각보다 빠르게 협조 태세로 돌입한 것 같아, 믿음직스러웠다.
마누스는 블랙과 화이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35층을 위해 배워야 하는 마법이 있었으니까.
문을 열고 들어가자,
"후... 오늘은 그 사기 눈깔 쓰면 뒈진다."
"그런 거 안 쓰고도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화이트 정돈 말이죠."
여전히 사이가 좋아 보이는 두 사람.
구두 소리가 들리고, 인기척이 느껴진 것인지, 두 존재의 시선이 마누스에게로 향했다.
화이트가 의도적으로 테이블을 난장으로 만들며 일어섰다.
"오-! 오랜만이다!"
"...하아. 오래간만입니다."
거의 다 이겼던 판이었는지, 물끄러미 테이블을 보던 블랙도 한숨을 쉬며 마누스를 반겨 주었다.
마석 결정 XL.
이거라면 원하는 마법이 무엇이든, 한 가지는 확실하게 배울 수 있겠지.
"마법을 배우러 왔습니다."
"뭐 배울 건데?"
"[플람마]."
화이트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번져 갔다.
블랙 역시 마찬가지.
[플람마]는 일반적인 마법이 아니었으니까.
인간이 아닌, 드래곤이 만들었다는 마법.
하급 마법이지만, 지금 인간들은 쓰지 않고 있는 고대 마법이었다.
화이트가 블랙을 바라봤다.
"이거... 배울 수 있냐?"
"그의 역량이면 충분할 겁니다."
"좋아. 가르쳐 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그럼 대가는?"
마누스는 품속에서 마석 결정 하나를 꺼냈다.
플람마 마법을 배운다는 것보다, 마석 결정을 보고 취하는 리액션이 더욱 컸다.
"이거 준다고? 너 호구야?"
"당장 가진 게 이것밖에 없습니다만. 뭣하면 적립해 주시죠."
"좋아. 이 정도면 몇 달은 거뜬하겠는데."
블랙 역시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고위 데몬들이 가지고 있는 마석 결정일 텐데-.
구하게 된 경위가 궁금했지만, 블랙은 입을 아끼는 쪽을 택했다.
이 남자는 특별한 힘을 지녔다.
이곳에 갇힌 자신들과 달리, 남자는 탑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지금은 조용히 받아, 힘을 기르는 것이 우선일 터다.
"플람마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는데, 어떻게 알았어?"
"저는 카이사르입니다."
"카이사르... 아, 카이사르?"
화이트가 놀라 물었다.
카이사르는 들어 본 적 있었다.
무수히 많은 시간을 살았던 두 존재가 기억하는 가문.
그만큼 카이사르는 전통 있고 유서 깊은 가문이라는 얘기.
화이트는 유심히 그를 바라봤다.
이렇게 보니, 더 잘생긴 것 같기도?
"역시, 천재의 핏줄은 다르네. 기억난다 야. 어쨌든, 플람마라는 거지?"
고대 마법.
숨겨진 요소 중 하나로서, 본래 특정 루트를 통해 정보를 입수해야 배울 수 있는 마법이다.
2회 차부터는 해당 정보를 미리 알고 있으니, 제한이 풀려 버리는 맹점이 있었다.
마누스는 그걸 이용한 것.
"잘 따라 해. 고대 마법은 생각보다 어렵고 복잡하니까."
우웅-.
밝은 빛이 퍼져 나갔다.
흑마법, 신성 마법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마법.
얽히고설킨 기하학적 술식이 마누스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신비롭군.'
마나의 배열, 안에 들어간 마나의 흐름.
그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
기존 클래스 마법과는 또 다른 느낌.
별을 따라 그렸던 선분이, 아르카나의 모양을 형상화하고 있었다.
[플람마]
그것은 황제의 축복이자, 모든 상태 이상을 제거하는 마법.
거대한 왕관 모양을 본뜬 마법진이 축복을 완성했다.
마누스는 천천히, 그리고 정확하게 마나를 뿜어냈다.
"-오오."
다소 어두웠던 공간이 밝아졌다.
마누스는 집중했고, 그 누구보다 완벽한 술식을 재현했다.
카이사르.
그 위대한 혈통의 재능은 고대 마법의 정수를 완벽히 이해했다.
"과연,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건가."
"고대 마법은 '무속성' 마법이지. 약점을 찌를 수 없지만, 어떤 마법에게도 방해받지 않아. 익혀 두면 두고두고 쓸모가 있을 거야."
화이트는 웬일로 말이 길었다.
마법을 익히는 덴 5분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플람마는 2클래스 수준의 마법이었으니, 원리만 이해한다면 어려운 마법은 아니었으니까.
시험 삼아 마법을 구현해 본 마누스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화이트가 입을 열었다.
쩝, 하고 입맛을 다신 그녀가 아쉬운 듯, 한 가지 마법을 더 알려 주려 했다.
"이만큼이나 받고 그냥 보내기엔 아까운데, 하나 더 배우는 건 어때?"
"시간이 없습니다."
"에잉, 그럼 볼일 다 보고 잠깐 들러."
그녀가 휘휘, 손을 저었다.
이들은 한번 내뱉은 말은 무조건 지킨다.
그것이 이 세계의 법칙이었다.
마누스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밖으로 나섰다.
로비는 텅 비어 있었다.
아마 먼저 올라간 거겠지.
준비는 끝났다.
이제, 후배들에게 공포를 이기는 방법을 전수해 줄 차례였다.
제53화
- 극복은 한순간
* * *
지구라트 28층.
네 사람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탑을 올랐다.
마나 결정을 모으고, 자금 마련을 위해 아티팩트를 모았다.
"아 케일."
"-응?"
"알라노 선배가 그러는데, 다음 주에 아티팩트를 판 돈이 도착한다고 그랬어."
멜라니가 말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자잘한 의뢰를 수행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전액 장학금으로 들어왔다고 해도, 본래 사회에 속한 인간은 숨만 쉬어도 돈이 필요한 법.
공부하는 것도, 경험하는 것도 모두 돈이 필요했으니까.
콰아앙-!
이젠 제법 호흡이 척척 맞는 네 사람은 파죽지세로 35층까지 올라갔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자."
"-응."
"이번엔 실수하지 말고 잘해 보자. 우리가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하겠어? 이날을 위해서 내가 아주 기깔 난 마법을 준비해 왔다는 말씀!"
파수꾼이 지키는 곳 앞에, 마침 휴식 장소가 있었다.
오늘은 운이 좋게도 양호실.
그들은 지친 몸을 달래고 마석을 흡수하는 등, 마누스를 기다렸다.
조용히 전의를 다지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이쪽에 올라온 지 30분 정도 지났나?
무서운 속도로 홀로 올라온 마누스가 네 사람 앞에 당당하게 섰다.
"-엄청 빨리 오셨네요?"
"너희들 덕분에 데몬과 마주칠 일이 적었다. 가자."
네 사람이 일어섰다.
예전 기억이 떠올라, 가슴을 간질였지만 마누스라는 존재가 그 두려움을 단단히 막아 주었다.
[법황 - 2]
[혼돈의 권좌]
의자에 앉아 있는 괴인.
그저 앉아 있을 뿐이지만, 2클래스 이하의 마법은 먹히지도 않고 약점도 없다.
거기다 전용 스킬인 [망각의 구름]까지 사용하니, 아주 악명 높은 보스였다.
[흐음-.]
보스가 인식했다.
피어슨은 언제나 그랬듯, 버프 마법을 쫙 둘렀다.
진일보한 마법.
공격력과 방어력이 높아지고, 눈이 좋아졌다.
반사 신경을 높여, 회피율까지 높이는 효과.
전투준비가 끝났다.
마누스는 한 발자국 물러섰다.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네."
일단 지켜봐야겠지.
후배들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부족한 점은 무엇인지 확인해야 할 차례였다.
지금도 누군가에게 간섭이 적용되고 있겠지.
이 전투가 끝난 후엔, 간섭 몇 가지가 종료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섭이 끝나면 보상도 받을 수 있으니.'
예상컨대, 해당 캐릭터의 근본을 바꿀 수 있는 간섭에 가까울수록 보상도 클 것이다.
기대가 컸다.
쿠우웅-!
드디어 전투가 시작됐다.
"온다-!"
첫 번째 공격은 광역 바람 마법.
멜라니와 케일이 나서, 멋지게 상쇄했다.
바람의 정령을 인챈트한 민트색 머리칼의 멜라니.
2클래스 바람 속성 마법인 [아니마]로 맞부딪치는 케일.
뒤이어 붉은 화염이 내달렸다.
안전하게 캐스팅하고 있던 아나이스가 우월한 딜링 능력을 선보인다.
[이그니라]
[알투스]
시간이 오래 걸린 만큼, 위력적인 마법.
후끈한 열기가 마누스의 얼굴을 붉게 스쳐 갔다.
아나이스도 그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증거.
[흐음!]
두 번째 패턴이 등장했다.
문이 열리고, 왕좌를 지키는 기사가 나타난다.
[전차 : 8]
물리 공격에 강하고, 속성 마법에 취약한 녀석들이었다.
"멜라니, 다시 막아 줘!"
"맡겨 둬."
평소와 다른, 다른 인격이 아닐까 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모습.
민트색 머리칼이 금발로 바뀌었다.
쿠르릉-!
그녀의 주변 땅이 마나를 머금고 일렁였다.
[인챈트 : 노움]
단단하고 강인한 성격의 정령이, 멜라니를 단단하게 감쌌다.
콰아앙-!
거대한 창과 방패.
마치 옛 기사들의 전투 방식을 꼭 빼닮은 데몬들이 멜라니를 향해 돌격했다.
창을 세우고, 방패로 몸을 가린 채 멜라니를 노리는 데몬.
한눈에 봐도 웬만한 마법사는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위력이었다.
어떻게 대응할까, 마누스는 여전히 흥미로운 눈빛으로 전투를 지켜봤다.
'내 예상보다 훨씬 강한데.'
얼추 20레벨은 되어 보이는 스펙.
느껴지는 마나도 충분했고, 스킬의 위력도 예상보다 강력했다.
충돌은 강렬했지만, 멜라니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버프 빵빵하게 줬다!"
"-고마워!"
단단해진 두 손으로 창끝을 잡아 세운 멜라니.
게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생생한 액션이 이곳에서 펼쳐졌다.
콰아앙-!
케일은 [아타블루스]를 이용, 그대로 기사들을 태워 버렸다.
아나이스는 계속해서 보스의 본체를 공격하는 역할을 맡은 모양.
이상적인 포지션이었다.
[흐으으음-!]
파수꾼이 분노했다.
체력이 일정 비율 이상 떨어졌다는 증거다.
고작 이 정도 시간에 저렇게 체력을 빼다니.
역시, 본인이 없이도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었구나.
괜스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분노한 왕좌는 네 개의 속성을 교체해 가며 2클래스 마법을 퍼부었다.
케일과 멜라니는 탱커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며, 이번 패턴도 무사히 넘겼다.
"후우-. 그래도 저번보단 나아."
"힘내자, 얘들아!"
이제 온다.
왕좌에 앉은 가면의 눈이 빛났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다.
마나가 이리저리 얽히며, 탁한 구름을 뿜어냈다.
구름이라기보단, 안개에 가까운 것들이 쫙 깔렸다.
모두가 긴장으로 바짝 얼었다.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났기 때문일까, 주인공 캐릭터이자 모든 능력치를 몰빵받은 케일마저도 몸이 뻣뻣하게 굳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정신 차려라."
"으으, 으아아아아-!"
피어슨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아나이스에게서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고, 케일의 눈망울이 떨렸다.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는 것이 애처롭게까지 느껴졌다.
"멜라니."
"네, 넷!"
멜라니는 눈이 붉게 물들었지만, 이내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정령들이 개입해, 곧바로 도와준 모양.
마누스는 사기적인 패시브, [카이사르의 마음] 덕분에 정신 공격에서 멀쩡하게 버텼다.
툴팁이 중복되었지만, 마음가짐의 스킬이 훨씬 우위에 있기 때문이겠지.
마누스는 어떻게든 자신들을 괴롭히는 감정을 억제하려는 1학년 후배들을 바라봤다.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진 않았다.
한번 겪어 본 바가 있어서 그런지, 나름 잘 제어하고 있는 듯했다.
'역시, 현실은 다르구나.'
자신은 저런 스킬에 영향이 없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지.
게임에선 수 턴간 진행되는 상태 이상.
단순 체력/마나로 이뤄진 데이터가 아니기에, 그 사투가 처절했다.
"나름 합격이다."
마누스는 어떻게든 이겨 보려는 이들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피어슨이 붉게 물든 눈으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걸 가볍게 피한 마누스는, 술식을 짜 올렸다.
쿠웅-!
그사이 공격을 감행하는 왕좌.
"날뛰지 마라."
오른손엔 환한 마법진이, 다른 한 손엔 푸른 마법진이 그려졌다.
콰지지직-!
더블 캐스팅으로 3클래스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보인 마누스.
[폴게트라]
[흐으음-!]
탑이 환하게 빛났고, 보스는 침음을 흘리며 잠시 비틀거렸다.
그와 동시에, 정신적 고통에서 해방시킬 마법이 완성되었다.
[플람마]
환한 빛이 안개를 몰아냈다.
고대, 마법의 종주였던 드래곤이 펼쳐 냈던 마법.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마법이 펼쳐졌다.
"-어?"
"기분이...."
환한 빛이 휩쓸고 지나간 후, 케일, 아나이스, 피어슨은 서서히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필사적으로 버텼던 순간이 무색하게, 정신이 멀쩡해졌다.
모두가 마누스를 바라봤다.
그는 마치, 길가에 버려져 있는 쓰레기를 주워 치운 것 같은 말투로 말했다.
"정신을 맑게 해 주는 마법을 배우면 된다. 돌아가서 알려 주지."
"새, 생각보다 별거 아니잖아?!"
피어슨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 생각보단 별것 아니다.
극복하고 난 뒤엔, 고작 그런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지.
마누스는 피식 웃었다.
"알겠으면 빨리 처리해라."
"좋아-! 본때를 보여 주자고!"
쾌활하게 외치는 피어슨의 목소리에, 모든 이들이 다시 공격을 퍼부었다.
케일과 멜라니는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 주며 모든 공격을 차단했다.
아나이스 역시 그간의 울분을 토해 내듯, 격정적인 화염 마법을 날렸다.
"죽어어어어-!"
아나이스의 혼신의 힘을 다한 3클래스 마법이 작렬했고-.
[흐으으으음-!]
결국, 마법의 포화 속에 보스는 재가 되었다.
제법 격렬한 전투였고, 내용 역시 훌륭했다.
마누스는 가볍게 손뼉을 마주쳐, 승리를 축하했다.
전투가 끝났다.
모두의 환호성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차갑고 어두운 탑 안에, 생기가 맴돌았다.
[전투 종료]
<파수꾼을 쓰러뜨렸다.>
<케일, 아나이스, 멜라니, 피어슨의 레벨이 올랐다.>
<케일 : 25>
<아나이스 : 22>
<멜라니 : 21>
<피어슨 : 20>
* * *
파수꾼과의 전투가 끝난 후.
이 기세를 몰아 더 위로 올라간 일행은 결국, 막다른 길에 봉착했다.
아직 두 번째 구역이 열리지 않은 것을 확인한 마누스.
"여기까진가 보군."
"그러네요."
"대체 탑이란 건... 누가 만들었을까요."
마누스도 탑에 대한 진실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고개를 저었다.
게임 설정으로는 죽음의 신, 모르스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진짜는 아무도 모르지.
자신이 밝혀내야 할 숙제이기도 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더불어, 이제 케일에게도 블랙과 화이트를 소개해 줄 시간이 됐다.
본격적인 리더로 키우기 위해선,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어야 했으니.
"케일."
"네에?"
두 사람이 말똥말똥 뜬 채로 마누스를 바라봤다.
케일의 재능은 일반 캐릭터와 전혀 다른 격에 놓여 있다.
어쩌면 카이사르마저 뛰어넘을 수도 있을 정도.
그러니, 블랙과 화이트가 그녀에게 아낌없이 마법을 전수해 줄 것이다.
그들은 재능 있는 자들을 좋아하니까.
마석 결정은 흔쾌히 마누스에게 넘어갔다.
"이젠 네가 이 역할을 해야 한다."
"저는... 그 마법을 모르는걸요."
"알려 줄 이가 있다."
케일의 눈동자가 빛났다.
새로운 마법.
새로운 지식.
탑에 올라가고 나서부터, 그녀는 점점 힘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로비로 도착했고, 피어슨과 멜라니가 먼저 기숙사로 돌아갔다.
아나이스는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케일이 마누스의 소매를 붙잡았다.
"저기, 아나이스가 할 말이 있나 봐요."
"말해라."
"어- 저, 그게-. 그...."
마누스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아나이스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말을 더듬었다.
계속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마음속으로 솎아 내며 눈을 감았다.
마누스는 조용히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아나이스는 심호흡을 깊게 한 뒤, 그 푸른 눈동자를 응시했다.
"선배는, 저희를 동료로 생각하고 계신 거죠?"
"물론이다. 내가 못하는 일들을 너희가 하고 있지."
"쓰, 쓸모없다거나 하는 생각은-."
마누스가 눈을 감고 그녀의 말을 잘라 냈다.
어느새 불안감이 싹트고 있었나.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이 손에 담긴 온기가, 그녀의 불안감을 녹일 수 있을까 고민하며.
"걱정하지 마라."
"...."
"너흰 내 옆에 설 거다. 머지않았겠지."
세상을 구할 아이들이다.
더욱 단단해져야 할 테고, 더욱 많은 고비를 넘겨야 할 거다.
지금보다 더 감정이 격렬해질 때가 많을 터다.
그럴 때마다, 딛고 올라갈 수 있는 단단한 정신적 지주가 필요하겠지.
이들의 속마음을 게임으로나마 들여다보았던 마누스의 결론이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그러나 따스한 손길을 건넸다.
"너희들을 믿고 있으니까, 내가 홀로 움직일 수 있는 거다."
"그렇다면-."
"더욱 훌륭해질 거다. 의심하지 말고 나아가라."
마누스의 단단한 말에, 아나이스의 눈빛에 머물렀던 불안감이 희미해졌다.
그녀가 밝게 웃었다.
[간섭을 확인합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덩달아, 마누스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제54화
- 배우는 자
* * *
사람과 사람 사이엔 갈등이 존재한다.
갈등의 원인은 다양하고, 해결할 방법도 다양하다.
보통의 지성인이라면 대화를 풀거나, 영원히 그 문제를 안고 살아가겠지.
마누스 역시 대화는 꼭 필요하다고 느꼈다.
카이사르.
무뚝뚝하고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성격은 본인도 자각하고 있었으니.
'생각보다 더 여렸지.'
아나이스는 당차고 당돌하고, 용감한 아이였다.
게임에서도 그렇게 묘사되었고, 그녀가 홀로 고민하는 묘사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개입하고, 심경의 변화가 있을 줄이야.
"-이곳으로 들어가면 되는 건가요?"
"그래."
케일과 마누스는 비밀의 방 앞에 서 있었다.
들어가기 전, 마누스는 간섭 보상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건 꽤 놀라운 이야기였다.
[간섭을 확인했습니다.]
[플로이스의 마음가짐의 습득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매우 큰 단서였다.
플로이스는 아나이스가 속해 있는 가문.
태양처럼 찬란하게 타오르고 불꽃처럼 정열적인 성격의 가문이었다.
능력도 전부 공격적 성향에 몰려 있는 스킬.
상대방에게 간섭하게 된다면 해당 스킬도 줄어들게 되는 걸까.
도통 기준을 알 수가 없었다.
'아직은 초반이니... 여유롭게 생각해 보자.'
흘러갈 시간은 많았다.
조금 더 표본이 모인다면 확실한 기준이 생길 테고, 행동 방침도 확실히 정할 수 있으리라.
엔딩, 그 너머에 있는 이야기는 더욱 험난하겠지.
마음을 다잡고, 케일과 함께 블랙, 화이트를 만나러 들어갔다.
"-여긴."
"이곳에서 다양한 걸 만들고, 배울 수 있다."
"신기해요. 왜 이런 곳을 몰랐을까요."
숨겨진 곳이니까.
당연한 말을 하는 대신, 마누스는 앞으로 나아갔다.
여전히 지루한, 그리고 따분한 포커를 치고 있는 두 사람.
화이트는 화를 내고, 블랙은 웃으며 맞받아치고.
"손님을 데려왔습니다."
"오- 왔어?"
"가끔은 포커 말고, 다른 게임을 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순수한 호기심에 물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치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아는 게임이 없습니다."
아-.
마누스는 큰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런 부분도 무심코 넘겼었지.
플레이어로서 게임을 플레이할 때, 블랙과 화이트는 그저 스킬/아이템을 위한 NPC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사정이나 자세한 이야기 등은 전혀 관심이 없었지.
마누스 이전의 남자는 그런 성격이었다.
주변엔 관심 갖지 않으며, 필요한 일만 하는.
"다음에 선물이라도 사 드려야겠군요."
이 세계에도 체스, 오델로 같은 보드게임은 차고 넘쳤다.
이곳은 현실.
그들에게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었다.
"오 그래? 그럼 우리 간단한 거래 하나 할까?"
"말씀하시죠."
화이트가 말했다.
그녀는 손가락 하나를 척 들고 말했다.
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해 주었다.
"게임 하나 가르쳐 줄 때마다 마법 하나씩 알려 줄게. 어때?"
"좋습니다."
"그러고 보니 손님을 오래 세워 뒀네. 이쪽은?"
할 말을 모두 끝내고 그제야 케일을 돌아보는 화이트.
아직, 그녀의 관심은 마누스에게 훨씬 오래 머물러 있었다.
그것도 좋지만, 케일도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할 터다.
잠시 고민했다.
무얼 말해야 이들이 케일에게도 관심을 쏟아 줄까.
그냥 질러야지 뭐.
"제가 가장 아끼는 후배입니다."
"-네?"
"확실히...."
케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를 올려다봤다.
무심한 듯,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예전과 많이 다른 감정이 묻어났다.
눈동자 자체가 부드러워진다는 말.
언젠가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이었는데, 이해가 가질 않았었지.
케일은, 이제야 그 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차가웠던 푸른 눈동자에 깃든 감정.
그건 분명, 따스한 무언가였다.
"아끼는 후배? 둘이 얼레리꼴레리?"
"화이트. 제발-."
"아아, 나도 알아! 난 아무리 봐도 쟤가 연애 같은 걸 할 관상으론 안 보인단 말이야."
화이트는 무표정한 마누스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케일 역시 다시 표정을 원래대로 돌려놨다.
아니, 조금 뾰로통해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니겠지.
케일도 알고 있었다.
마누스가 했던 말은, 단순히 관심을 이쪽으로 돌리기 위한 립 서비스라는 걸.
그래도-.
'아냐. 나와는 격이 다른걸.'
후우-.
눈을 감고,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녀는 잠자코 마누스의 말을 들었다.
"아까 못 받은 마석값, 받으러 왔습니다."
"얘한테? 뭘 가르칠 건데?"
"플람마. 이 아이에게도 알려 주시죠."
"좋아, 어렵지 않지. 그것만으론 좀 더 남으니까, 서비스로 이것도 줄게."
화이트는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작은 구슬 하나가 나타났다.
그곳엔 로마자로 VIII가 쓰여 있었다.
여덟 번째 아르카나, 힘이 담긴 구슬이었다.
"이거 필요하지?"
"감사합니다."
마누스는 오르카의 목걸이를 꺼내고, 구슬을 받아 깨뜨렸다.
여섯 번째 문양이 채워졌다.
이제 절반.
열세 개의 빈 곳 중, 여섯 곳에 빛이 들어왔다.
"얘야, 우리는 천천히 공부나 해 볼까? 이리 오렴."
화이트가 케일을 이끌었다.
마누스는 그녀가 마법을 배우는 걸 지켜봤다.
그사이, 블랙이 마누스에게 다가왔다.
그는 오르카의 목걸이를 유심히 바라보며 대뜸 입을 열었다.
이건, 확실히 지식을 알아야 할 테니.
"본래 아르카나는 스물한 개죠. 그런데 이 오르카의 목걸이엔 왜 열세 개밖에 없을까요?"
"운명, 사신, 별, 달, 태양, 심판, 세계."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
마누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카의 목걸이는 인간이 만들었고, 인간이 다뤘던 물건이었으니까.
블랙은 오르카의 목걸이를 바라보고 마누스를 다시 바라봤다.
자신들보다 훨씬 오래 살았던 무언가가 남긴 유물.
분명 위험한 물건이었음에도, 왠지 마누스라면 잘 다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는 인류 최강의 재능이다.
"당신이 다루지 못한다면, 다른 이들도 다루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알고 있습니다. 잡아먹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블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누스의 눈빛에서 결연함과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다.
블랙의 눈은 제법 특별했으니.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마석은 저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품 중 하나거든요."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마누스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케일은 플람마를 손쉽게 배우는 중이었다.
[간섭이 시작되었습니다.]
또 보이는 메시지.
누구에게 간섭한 것인지, 무엇을 위한 간섭인지....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이 문장은, 이 세계를 살아갈 때 보람을 더해 주었다.
마누스는 사라지는 메시지 너머, 찬란한 마법진이 더없이 밝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역시, 케일은 재능이 넘쳐 났다.
그녀의 앞길을 잘 이끌어 주기만 한다면, 능히 세계를 구할 수 있으리라.
* * *
무사히 탑을 공략하고, 쌓였던 오해도 풀었다.
케일에겐 다양한 전술을 알려 주기도 했다.
이제 그녀는 동료들에게 더욱 효율적으로 지시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아나이스는 감정이 잘 풀렸는지, 그녀는 다시 쾌활하고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이젠, 마누스 본인도 조금씩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곤 했다.
주말이 지나갔다.
오늘 마누스는 중요한 볼일이 있는 날이었다.
"-저도 같이 가고 싶습니다."
"하녀장 일은?"
"다른 이에게 인수하면 됩니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메이드복을 입고, 검은 머리칼을 단정하게 정리한 미인이 답지 않게 고집을 부리는 중이었다.
본래 토 달지 않고 고분고분한 것이 그녀의 성격이었을 텐데.
그래서, 마누스는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차분히 물었다.
"왜 같이 가고 싶어 하는 거지?"
"이젠 그곳이 제집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장님은?"
아덴은 빙긋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참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 언젠가는 얼굴을 봤어야 할 사이였다.
"짐 싸."
그녀와 동행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아덴은 화사한 미소를 짓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이젠 보고를 하러 갈 차례였다.
2학년 총괄 교수인 트레일 교수에게 들르기 위해, 기숙사를 나섰다.
자잘한 짐은 필요 없었다.
어차피 집까지는 텔레포트 마법진 한 방이면 도착하는 시대였으니.
"-흠, 임무를 위한 결근이라.... 알겠습니다."
"과제와 숙제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숙제는 딱히 할 필요 없지요. 평가 준비 시기와 겹치지만, 그건 임무 평가로 대체하겠습니다."
과연, 합리적인 대처였다.
트레일 교수는 자랑스러운 눈으로 마누스를 바라봤다.
가문에서 재차 학생을 찾는 일은 드물었다.
그들의 일을 해결하는 것보다, 아카데미에서 지식을 쌓는 일이 더욱 가치 있게 시간을 쓰는 것이니까.
하지만, 카이사르라면 그 이야기가 달라진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수업 내용은 알라노 학생에게 전달해 주도록 하겠습니다."
마누스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보고도 끝냈으니 떠나기만 하면 되는 상황.
그가 몸을 돌리려 할 때, 트레일 교수가 책상에 있던 서류를 확인하고 마누스를 불러 세웠다.
"아 참. 샨들러 교수님께서 사역마 소환 의식을 준비하고 계신답니다. 사역마를 소환하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교수님은 지금 대강당에 계시니, 가 보세요."
사역마라....
게임 극초반에 뽑아 놓을 수 있다면, 엄청난 메리트였다.
3학년이 되어야만 소환할 수 있다는 제약 하나 때문에 외면받았던 특성.
그 특성을 십분 활용할 때가 왔다.
지금 키운다면 그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분명히.
"준비 끝났답니다."
"잠시 대강당에 간다. 먼저 대기하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아덴이 카이사르 가문과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건 슬슬 소문이 퍼져 가고 있었다.
베로니카가 죽고, 카이사르 가문에서 제 아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말도 돌 정도였으니.
그녀가 모두 판을 깔아 놓은 거였지만, 마누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메이드들도 그저 인사를 건넬 뿐, 수상한 눈길을 보내진 않았다.
새삼 아덴의 수완이 얼마나 좋은지 느낄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샨들러 교수가 기다리고 있는 대강당에 들어섰다.
"오, 마침 딱 오셨군요. 후후."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세요. 마침 알라노 학생도 소환 의식을 치르기 위해 왔답니다."
알라노가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그래, 알라노 역시 사역마를 다룰 조건이 된 것.
두 사람 모두 사역마를 길들이고 키운다면, 실로 엄청난 전력이 될 터다.
상당히 만족스러운 보상이었으며, 데몬들과의 전투에서 더 나은 전력 확충이 될 터다.
언젠가 사역마가 제 성능을 발휘할 때가 오면, 모두를 놀라게 할 테니까.
'설레는 건 오랜만인데.'
뽑기 시스템에 대한 설렘 반, 새로운 반려동물을 얻는다는 것에 대한 설렘 반.
마누스는 샨들러 교수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기다리던 시간이 도래했다.
제55화
- 하찮은데 귀여워
* * *
사역마.
일종의 반려동물이다.
지구, 현대에 사는 동물들과 달리 이들은 지성이 높았고 사용자의 마나를 먹고 산다.
종류는 천차만별.
애벌레부터 드래곤까지.
그 종류만 해도 무려 302가지에 달했다.
캐릭터는 일생일대의 운을 시험받게 되는데, 바로 딱 한 번 있는 이 사역마 소환 의식이다.
"자, 이리로 오세요."
"바로 시작하는 겁니까?"
"그래요.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샨들러 교수는 인자한 눈웃음 속에 날카로운 관찰의 빛을 숨겼다.
당연히 마누스는 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세이브/로드 신공을 발휘하지 않는 이상, 딱 한 번밖에 기회가 없는 소환 의식.
S등급에 있는 사역마를 뽑는다면, 당연히 축복받은 캐릭이었으며, 반대는 저주받은 캐릭으로 불렸다.
F부터 S등급까지 있는 사역마.
"이쪽에 서서-."
소환 의식은 간단했다.
마나를 주입하고, 피를 흘리면 끝.
반영구적으로 마나의 일부를 사역마에게 흘려 주어야 하기 때문에, 마나 손실이 제법 있는 편이었다.
이는 게임에서도 마나의 10%를 사용할 수 없도록 구현되었다.
원한다면 더 많은 마나를 넘겨주는 것도 가능했고.
어쨌든, 이제 운명의 시간이 도래했다.
"피를 내야 합니다. 따끔할 거예요."
"...."
마누스는 따끔함을 느끼며 자신의 엄지에 몽글몽글 피어나는 핏방울을 바라봤다.
이 세계에 와서 피를 흘리는 건 처음이지 아마?
새삼, 카이사르의 몸에도 피가 흐른다는 걸 깨달았다.
"마나를 흘려 넣으세요. 저 너머에 있는 존재를 느끼며...."
저 너머에 있는 무언가와 공명하려는 의지.
샨들러 교수의 말은 최면처럼 들렸다.
눈을 감고, 마법진에서 느껴지는 공명을 음미했다.
확실히, 무수히 많은 존재감이 느껴졌다.
이 세계로 넘어오기 위해서 갈망하고 갈구하는 이들의 존재감이었다.
하나같이 하찮았다.
S등급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강한 것은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
"나와라."
마누스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마나를 더 불어 넣었다.
무수히 많은 존재감 중, 자신과 가장 강하게 연결되었다고 생각한 존재를 향해 말했다.
이리 와서, 나와 함께 평생을 살자고.
공간 너머 유기되어 있는 생명체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마누스는 마나를 이용해서 생명을 끄집어냈다.
자, 어느 누가 나오느냐.
[호잉?]
색다른 소리가 들렸다.
영혼을 울리는 귀여움이랄까.
새하얀 털 뭉치가 나왔다.
"호오-."
"이건...."
마누스는 조그마한 생명체를 바라봤다.
그의 눈이 떨렸다.
자그마한 털 뭉치처럼 보이는 생물은 새하얀 날개를 달고 있었다.
고양이를 닮은 외형은, 그의 차가운 마음을 일순간 살살 녹였다.
"알비온이로군요. 신수라고 불리는 친구죠."
"알비온이라...."
처음엔 F급 사역마로 분류되었지만, 레벨이 99가 찍히는 순간 돌변하는 신수.
육성은 힘들지만, 그야말로 신수로 귀환하는 엄청난 녀석이었다.
약 30레벨까지의 스킬은 단 두 개.
치유 스킬인 [프로펙터].
피어슨도 가지고 있는 스킬, [라비오]였다.
그래도 뭐, 잘만 키우면 엄청난 성능은 보장되는 것이었으니.
"잘 부탁한다."
[호잉!]
울음소리 한번 특이하네.
어린 말이 내는 소리에, 마누스가 은은한 웃음을 지었다.
귀여운 사역마라니.
뽑기 운은 나쁘지 않은 거로.
역시 카이사르라고 해야 하나.
알비온이라면 상당히 좋은 신수였다.
나쁘지 않았다.
'10% 정도만 줄까.'
자연스럽게 알았다.
어떻게 하면 마나를 넘겨줄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성장시킬 수 있는지.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부지런히 탑에 갈 이유가 생겼다.
알비온을 키우려면 무수히 많은 마나 결정이 필요할 테니.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올려다보는 알비온을 어깨에 올려 두었다.
[호잉-!]
솜털 같은 무게감과 그 귀여운 외모에, 마누스의 차갑던 이미지가 조금 옅어진 느낌이었다.
알라노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알비온을 바라봤다.
하찮고 귀여웠다.
이런 생명체를 키우다니, 마누스답지도 않았다.
"귀여워라. 나도 이런 친구를 소환할 수 있을까?"
"그야 모르지."
소환수가 사역마를 선택하는 것이 아닌, 사역마가 주인을 선택하는 것이었으니.
알라노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마법진 위에 섰다.
그녀 역시 좋은 사역마를 소환한다면?
'내가 개입할 일들이 줄어들겠어. 그렇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