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크게 뜬 세 여인과 한 명의 남자.
이들에게 있어, 아직 자신은 어려운 선배일 터.
적당한 거리감은 유지하되, 이들의 정신적인 부분을 캐어해 줄 정도로만 간섭하면 되겠지.
자신의 이야기를 아무런 편견 없이, 그저 들어 줄 수 있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안정감이 대단하다고 한다.
'그 정도면 되었다.'
자신은 알라노처럼 세심한 성격이 아니었다.
허나 이들이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 주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일.
전생에는 하지도 못하고 할 생각도 안 했던 선배 노릇이라는 걸 해 보기로 했다.
한마디를 던졌을 뿐인데, 벌써 부담감을 어느 정도 벗어던진 이들이 보였다.
젊다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인가.
실패를 겪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거다.
"설령 너희들이 구하지 못해도, 너희에겐 잘못이 없다. 이 세계가, 탑이, 그리고 데몬들이 잘못했을 뿐이지."
"...그래도 우리밖에 해결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맞아요. 우, 우리가 실패하면... 결국 죽는 거잖아요."
마누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는 거다. 후회는 인생에 도움이 안 되니."
그의 이야기는 어린 친구들에게 잔잔한 파문을 만들었다.
죽어 가던 눈빛에 생기가 돌아온다.
마누스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간섭을 확인했습니다.]
[신체 능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좋군. 짤막한 상담으로도 보상을 얻을 수 있다니.'
이런 보상이라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상담에 임할 생각이 있었다.
조그마한 것들이 쌓이다 보면, 충분히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
어쨌든, 오늘은 두 사람이 살아 있는 걸 확인했다.
불안감은 초조함을 만들고, 초조함은 조급함을 만든다.
마누스의 역할은 루페라를 찾는 것과 이들이 잘 버틸 수 있도록 붙들어 주는 것.
조급함은 언제나 큰 사고를 부르는 법이니-.
"너희들은 잘해 주고 있다."
"-네."
후배들이 미소 짓는다.
그래, 지금은 이걸로 되었다.
이젠 다시 학생으로 돌아갈 때였다.
그들은 한층 밝은 얼굴로 아카데미 내부로 향했다.
"아, 그리고-."
'고된 일정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월말 평가를 준비함과 동시에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을 해결해야 하니까.
마누스의 마지막 말을 들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래도 이들은 누군가가 희망과 정의, 약간의 오글거림을 넣어 만든 존재들.
충분히 잘해 내리라 믿었다.
* * *
황금빛 시계가 움직이는 시간.
마누스는 블랙과 화이트를 찾아왔다.
나머지는 오늘도 수색에 나선 상황.
한 손에는 유행하는 보드게임이 잔뜩 들려 있었다.
오늘도 지루한 표정으로 카드 패를 바라보고 있던 블랙이 흘끔, 그를 쳐다봤다.
지루함이 뚝뚝 묻어 있는 얼굴에서, 한순간에 밝은 얼굴로 바뀌는 모습이 제법-.
그가 패를 묻어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지루한 카드 게임이 끝났다.
"아- 이길 수 있었는데! 너 때문이잖아!"
"선물 가져왔는데, 다시 가져가야겠군요."
"뭐?! 야 블랙, 너 카드 패 좀 본다. 아... 이 새끼 또 기술 썼네."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마누스는 보드게임들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본론을 이야기했다.
데몬이 탑 밖으로 나왔다는 건, 꽤 심각한 문제다.
시간의 틈새에 있는 이들이 현세로 나온 것이다.
있어선 안 될 존재들의 침범.
블랙은 은은한 조명의 빛을 받아 푸른 빛을 내뿜는 마누스의 눈동자를 보았다.
"데몬이 탑 밖으로 나왔습니다."
"-뭐? 그거 불가능한 일일 텐데?"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든, 자력으로 나왔든, 결과가 그렇습니다."
마누스의 말은 차가웠다.
화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다니, 어딘가로 향했다.
블랙은 반대로, 마누스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 보기로 했다.
그의 눈동자는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이 탑을 지탱하고 있는 거대한 무언가가 느슨해졌다는 것.
흔히 사람들이 결계라고 부르는 것의 일종이었다.
"화이트가 확인하러 갔으니 곧 이유가 밝혀질 겁니다. 따로 피해를 보신 건?"
"사람 두 명이 실종됐습니다."
"저런... 조속히 처리해야겠군요."
블랙이 살풋, 인상을 찌푸렸다.
외부인은 이 일에서 철저히 고립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세상의 탐욕, 그리고 혼란과 맞설 수 있었다.
자신들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몸.
그래서 더욱 외부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길은 저희가 제시하겠습니다. 보상도 두둑이 드리지요."
"이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해서 그런 겁니까?"
블랙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매하게 올린 입꼬리가 그의 심경을 대변해 주었다.
여기서 붙들고 늘어져 봤자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대신, 마누스는 이들에게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뜯어내기로 했다.
"그렇담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십쇼. 제가 해결할 테니."
"-오히려 바라던 바입니다. 보잘것없는 곳이지만, 성심성의껏 도와 드리겠습니다."
"야아아-! 큰일 났어!"
두 사람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하는 사이, 화이트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녀는 그 아름다운 얼굴에 경악이라는 감정을 한껏 뿌려 놓은 채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블랙은 화이트의 눈동자가 심히 떨리는 걸 바라봤다.
저자가 이렇게 당황했던 적이 있던가?
아니-.
우리가 탑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저런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던가?
"현실과 틈새의 경계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어. 이대로라면 데몬들이 계속해서 희생자를 만들겠지."
"우리들의 힘과 연관이 있는 겁니까?"
"아마. 외부의 존재와 계속해서 접촉했기 때문이겠지."
그녀의 두 눈은 마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블랙 역시 마누스와, 그와 함께 탑을 헤집고 다니는 일행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대들은, 구원자인 동시에 재앙을 불러오는 자들이군요."
"지구라트. 이 틈새에서, 우리는 그런 존재겠지요."
마누스는 화이트가 했던 말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영역에서나, 보금자리를 침범하는 이들은 침입자일 뿐이니.
하지만, 그래서 멈추겠냐고 묻는다면 단호히 고개를 저으리라.
"그래도 괜찮습니다. 나아갈 이유와 목적은 충분하니까."
"-그래?"
화이트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운동을 아주 좋아하는, 그리고 학창 시절에 털털한 성격으로 인기가 많았던 어느 누나가 생각나는 미소였다.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면, 길을 알려 주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하는 거야."
그녀의 말은, 곧 선전포고였다.
선택받은 자들과 탑.
현세와 지옥 간의 작지만, 치열하고, 끔찍한 전쟁을 알리는 선전포고.
마누스는 남몰래 두 손을 꾹 쥐었다.
많은 희생자가 나올 것이다.
그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일들도 잔뜩 일어나겠지.
'그러니, 뭐든지 다 뜯어내야겠군.'
눈앞에 적극적으로 호구를 자처하는 이들이 있다.
데몬, 데모니움과의 전쟁에서, 그들의 지식은 꼭 필요할 터.
마누스는 선언했다.
"당신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준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꽤 자신만만한데?"
"그렇지 않으면, 탑에 잡아먹힐 테니까요."
두 사람의 얼굴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그래, 그렇겠지.
탑은 그런 곳이었다.
공포를 먹고, 절망을 마시며 성장하는 곳이었다.
"제 친구를 먼저 찾아야겠습니다."
"좋아. 우리가 도와주지. 현세에 며칠 못 돌아갈 거야. 괜찮겠어?"
그 전쟁의 전초전이 될 사건.
그건, 루페라와 에머슨을 찾는 일이었다.
마누스는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69화
- 미래를 예측하는 자
* * *
얼추 수 시간은 지났을 거다.
아니, 어쩌면 하루가 훌쩍 지났을 수도 있다.
이렇게 주린 배가 요동치는데, 어떻게 하루가 안 지났을 수가 있을까.
주워 먹을 거라도 있다면, 귀족이고 뭐고 당장 체면을 버렸을 거다.
그녀가 귀족답게 있을 수 있는 까닭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층층마다 구비되어 있는 편의 시설은 다 어디로 증발했는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가지고 있던 시계는 완전히 멈췄고 아카데미는 미궁,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누가 구하러 오긴 할까?'
계속해서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지만, 슬슬 한계였다.
마나는 휴식을 통해 회복하면 되지만, 체력은 그냥 쉰다고 회복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마땅히 생리적인 현상을 겪게 된다.
자연스러운 현상들이 모두 막히니, 진짜 죽을 맛이었다.
마나로 배고픔을 이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상황은 점점 절망적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허나, 에머슨은 위기에서 주저앉아 있는 이가 아니었다.
'무조건 살아서 밑으로 내려가는 거야.'
그녀에겐 그 누구보다 생존에 특화된 능력이 있지 않은가.
분석한 것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괴물들에게서 느껴지는 마나가 적어진다는 것.
보통 마나가 많으면 강력한 퍼포먼스를 보여 주기 마련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밑으로 내려가다 보면, 자신 수준으로도 극복할 수 있는 몬스터가 나오겠지.
그들을 죽이면 마실 것, 하다못해 쓰레기라도 나오지 않을까.
프라이머리 가문은 생존에 있어, 물불 가리지 않았다.
"이제 중턱 정도인가.... 조금만 더 가면...."
그녀는 아래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확연히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중간중간, 까마득하게 높은 마나를 지닌 이들이 느껴졌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은 혼자였다.
그런 이들의 이목을 피하긴 쉬울 것이라 판단, 계속해서 밑으로 내려갔다.
그것이 아주 치명적인 실수인 것도 모른 채-.
에머슨은 계속해서 가시가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조금만 더 가면, 땅을 밟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
'이 아래는 괴물이 혼자야. 그러니까-.'
외곽으로 돌아가면 충분히 이목을 피할 수 있겠지.
에머슨의 특기는 색적과 추적.
그녀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치명적인 단점도 함께했다.
터벅-.
조심스럽게 내디딘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어둠 너머, 그 무시무시한 마나의 존재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존재가 눈에 보였다.
"...아."
그리고, 동시에 방의 구조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방의 구조를 확인한 순간, 피어나고 있던 희망의 씨앗이 짓밟히는 느낌을 받았다.
외곽으로 돌아간다고?
이목을 피할 수 있다고?
이 좁디좁은 방에서,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콰직-.
계단을 밟은 다리에서 힘이 빠져, 미끄러졌다.
그 소리가 공간을 쩌렁쩌렁 울렸다.
[큼-?]
아아-.
에머슨은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가면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신은 그녀에게 선택지를 내려 주었다.
죽더라도 맞서 싸울 것인지, 아니면 추하게 도망칠 것인지.
"흐읍-!"
다리가 굳어, 움직이지 않는다.
이따금 경험담에서 듣거나 책에서 읽거나 역사에 나오는 한 장면을 묘사하는 것을 들었을 때,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위기에 처한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어 가는가.
다 극적인 연출을 위한 이야기라고 믿었다.
주먹으로 다리를 미친 듯이 내리쳤다.
마나를 돌려, 어떻게든 일어서려 했다.
[큼-!]
침입자를 발견한 파수꾼이 다가온다.
쿵-.
근육이 가득한, 마치 오거에 가면 하나를 덩그러니 씌워 놓은 것 같은 비주얼.
거체가 한 발자국 다가올 때마다 사신의 낫이 목덜미를 파고드는 것 같았다.
'움직여-, 움직이라고오-!'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후들후들 떨리는 몸은 아직도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움직이라고!
제아무리 소리쳐도, 몸은 묵묵부답이었다.
[크음-!]
파수꾼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이들을 지키는 이들.
죽음의 신을 섬기며, 그들에게서 태어난 이들이었다.
그들 뒤로 침입자가 올라갈 수 있을 땐, 그들의 삶이 다하는 순간뿐.
그렇기에 파수꾼은 격렬한 분노를 터뜨렸다.
가면 속에서 웅웅 울리는 그의 포효가 에머슨을 더욱 옥죄었다.
침입자는 용서치 않고 죽음의 신 곁으로 보낸다.
그것이 바로, 파수꾼의 임무다.
* * *
첫째 날.
일행은 탑의 새로운 부분을 탐색했다.
탐색 가능한 시간이 여덟 시간으로 늘어났다는 걸 확인했다.
둘째 날.
일행은 계속해서 탑을 올랐다.
셋째 날.
오늘도, 그들은 탑을 올랐다.
"저 위에-."
"응, 느껴져."
"혼자 여기까지 내려온 거야?"
다섯 명의 학생들이 마법을 난사하며 길을 뚫었다.
그들의 발걸음은 쉬지 않고 내달렸다.
한 톨이라도 마나를 아껴야 앞으로의 싸움에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
눈앞에 계단이 보였다.
그 위에, 거대한 마나가 느껴지는 것도.
-에머슨이 있다.
마나에 민감한 알라노와 케일이 그 사실을 대번에 알아챘다.
"프라이머리 가문이라고 했지?"
"네. 추적술이 뛰어난 마법사들이죠."
알라노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계단 앞에서, 그녀는 부스트 마법을 전개해 단번에 다음 층으로 날아올랐다.
프라이머리 가문은 전투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나온 행동이었다.
'내 학생은, 내가 지켜. 지금은 마누스도 없으니까-.'
까드드득-.
얼음꽃이 피어났다.
가장 속도가 빠른 놈으로 준비했다.
저 멀리, 오거처럼 거대한 무언가가 보였다.
"흐읍-!"
알라노는 앞뒤 따지지도 않고 냅다 마법을 날렸다.
2클래스, 그녀의 주특기 마법인 [글라치에]였다.
얼음의 창을 던진 그녀가 곧바로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퍼서석-!
얼음의 창이 파수꾼의 뒤통수에 작렬했다.
비산하는 은빛 가루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흩날리는 은빛 가루는, 에머슨에게 있어 신의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기적이라고 말하는 편이 나으려나.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그녀의 두 눈망울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거기! 괜찮니?"
"네, 네-! 괜찮아요! 괜찮아요!"
울먹이는 목소리가 그간의 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에머슨은 몰랐지만, 장장 사흘간의 수색이었다.
얼마나 높은 곳에서부터 내려온 것인지, 과연 프라이머리 가문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무사하니 다행이다.
이젠 파수꾼을 처리하는 일만 남았다.
1학년, 그리고 알라노는 매일 탑을 오르며 샅샅이 뒤졌다.
새로운 지형에 적응할 새도 없이, 그들은 무작정 적들을 해치우며 탑을 올랐다.
"하필 마누스 선배가 없을 때 만나네."
"에머슨! 에머슨 맞지?!"
멜라니는 같은 반 친우를 반갑게 불렀다.
에머슨은 익숙한 목소리에,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웠다.
아무도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을 것 같아서.
귀족이라는 걸 떠나, 그런 인생의 끝은 맞이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젠 살았다.
죽지 않아도 된다.
"다들 전투준비. 상대는 강적이야."
"에머슨! 틈을 봐서 이쪽으로 와!"
"아, 알겠어!"
에머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화려한 마법진이 허공에 생성되었다.
순식간에 캐스팅을 완료한 이들이 공격을 퍼부었다.
[이그니오]
[글라치아스]
[아타블루스]
팀의 화력을 담당하는 세 명의 마법사가 마법을 뿌려 댔다.
콰아아앙-!
파수꾼은 그 모든 공격을 정면으로 맞았다.
층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타격, 입혔겠지?"
"일단 지켜보자."
"내가 앞으로 갈게."
멜라니가 앞으로 나섰다.
연약한 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누구보다 단단한 방어력을 지니고 있는 든든한 탱커.
그녀의 신체 능력을 피어슨의 더욱 튼튼하게 받쳐 주었다.
-우리가 도와줄게!
-요즘 너랑 있어서 아주 좋아!
꺄르륵, 이 순간에도 밝게 웃는 정령들이었다.
멜라니의 핑크빛 머리칼이 노랗게 물들었다.
동시에 마나로 이뤄진 돌 갑옷이 그녀의 몸을 빈틈없이 매웠다.
[인챈트 : 노움]
[크으으으으음-!]
연기가 걷히고, 멀쩡한 파수꾼이 거대한 팔을 휘둘렀다.
쿠웅-!
멜라니가 마나를 실어 일격에 맞섰다.
단순한 주먹.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커헉-."
"멜라니!"
압도적인 충격.
새된 비명도 아닌, 숨이 턱 막혀 소리조차 낼 수 없는 신음이 흘렀다.
단단하리라 믿었던 돌 갑옷은 형편없이 부서졌고, 그녀는 실이 끊어진 연처럼 구석으로 날아갔다.
알라노는 황급히 쓰러진 멜라니에게 향했다.
입가에서 선혈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치명상이었다.
"멜라니, 정신 차려."
"으으... 저, 저거... 너무...."
멜라니의 입술이 달싹이며 힘겹게 말을 쏟아 냈다.
말을 하는 건지, 막혔던 호흡을 내뱉는 건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꺄아악-!"
알라노가 회복 마법을 펼치려고 하는 사이, 또 다른 비명이 들렸다.
한쪽으로 날아간 붉은 머리의 여성, 아나이스.
어느새, 파수꾼은 진형 한가운데서 난동을 부리는 중이었다.
알라노는 그 모습을 보며, 이 파티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지금까진 그들의 천재성과 뛰어난 마법으로 어떻게든 극복했다.
하지만, 이제야 그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전사, 그리고 수호자가 필요해.'
"에머슨, 이쪽으로 올 수 있겠어?"
피어슨이 소리쳤다.
알라노는 급한 대로 멜라니를 회복시키기 위해 회복 마법을 사용했다.
푸른 마법진이 그녀의 손을 타고 형상을 갖춰 나갔다.
[프로펙터] (1클래스 회복 마법입니다.)
지금 알라노가 익힌 유일한 회복 마법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회복 마법도 조금 더 익혀 둘걸.
눈을 질끈 감았다.
저 데몬은, 케일이 쏜 마법조차 몸으로 받아 냈다.
[크으으음-!]
쿠웅-!
자신의 전격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몸으로 받아 낸 파수꾼.
앞을 막아 줄 이가 없으니, 다음 마법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마나를 과도하게 사용해, 푸른 머리칼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얼굴 이곳저곳에 덕지덕지 붙은 머리칼을 떼어 낼 틈도 없었다.
아나이스도, 멜라니도, 알라노도 없었다.
파수꾼이 자신을 노리는 것도 당연했다.
"뒤, 뒤로!"
콰아앙-!
흙먼지가 비산했다.
케일은 두 눈을 끔뻑이며 자신 앞에 박힌 주먹을 보았다.
방금 분명-.
"숙여!"
머리칼이 흩날릴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후우웅-!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파공성이 머리 바로 위에서 스쳤다.
어지간한 보호 마법도 뚫어 버릴 위력에, 케일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가 가라앉았다.
"옆으로 굴러!"
케일은 구르는 것 대신, 마나를 쏘아내 반탄력으로 몸을 밀어냈다.
화가 잔뜩 난 파수꾼이 두 손으로 땅을 찍어 댔다.
층 전체가 흔들리는 충격에, 케일은 꿀꺽 침을 삼켰다.
그리고 에머슨 쪽을 바라봤다.
그녀의 두 눈이 마나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
프라이머리 가문이 귀족 가문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능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으윽-."
"멜라니, 괜찮아?"
"-네. 감사해요."
그녀는 갈비뼈 부근을 움켜쥐고 일어섰다.
뼈가 조각났었지만, 알라노의 빠른 응급처치로 겨우 원상 복구되었다.
덕분에 알라노는 마나가 상당히 소모되었지만-.
그녀는 자신을 위해 힘써 준 선배를 보며 말했다.
고작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진 자신이 싫었다.
동시에 저 건방진 근육 덩어리에게 한 방 먹여 주고 싶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정령들.'
-왜?
-괜찮아?
-미안해! 저 녀석 강하네!
'힘을 더 빌려줘.'
멜라니가 품에서 작은 플라스크 하나를 꺼냈다.
망자의 밤 이후,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 싶어 항상 품속에 챙겨 두었던 아이템.
이곳저곳 금이 가 있었지만, 내용물이 새진 않았다.
"선배, 아나이스를 부탁해요."
"전투에 참여하는 건 허락할 수 없어."
"한 방, 먹이고 올게요."
멜라니의 눈빛은 처음 제대로 된 능력을 각성했을 때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전투 의지를 활활 불태우고 있을 때, 에머슨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녀석은 순수한 물리 공격만 통해! 그러기 위해선 전사가 있어야-."
"내가 할 거야."
황금빛으로 물든 멜라니가 한 걸음 나섰다.
케일이 황급히 그녀의 뒤쪽으로 물러났다.
멜라니는 이곳에서 증명하고 싶었다.
마법을 쓰지 못해도, 파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위기에 빠진 친구들을 자신도 구할 수 있다는 걸.
치이이익-.
그녀의 머리에 누런 기름이 쏟아졌다.
"이제부터 나에게 명령해 줘."
"...멜라니?"
쿠웅-!
두 손을 겹쳐, 그 엄청난 주먹을 막아 낸 멜라니가 씹어뱉듯 말했다.
에머슨은 그 모습을 보며 전율했다.
짓밟혔던 희망의 씨앗은, 잡초처럼 다시 살아났다.
"내가 이놈 면상을 쳐부숴 줄 테니까."
멜라니의 한마디가, 그녀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제70화
- 전사의 자격
* * *
정령.
게임 속에서, 그들은 모호한 존재로 묘사된다.
우리가, 그네들이 알던 정령과는 배경도 설정도 다른 존재들.
그들은 정령계에 속한 것이 아닌, 인간에 의해 태어난다는 설정이다.
그렇기에, 그 무엇보다 인간의 감정에 솔직하게 반응한다.
그들은 인간의 감정이 실체화된 존재.
그렇기에, 인간들의 격렬한 감정을 통해 성장한다.
[느껴라.]
[우리의 힘을 느껴라.]
[솔직해져라.]
[너는 곧 우리고 너는 곧 우리일지니.]
주문과도 같은 말이 멜라니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정령이라는 걸 외면하지 않기로 했을 때부터, 그녀는 이런저런 서적을 많이 찾아봤다.
선대에 이름을 날렸던 정령사는 많이 있었고, 그들은 후대를 위해 자서전을 집필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질 때.
감정을 극한으로 끌어 올릴 수 있을 때, 정령은 진화한다.
멜라니는 지금, 그 상황에 직면했다.
'다 부숴 버리고 싶어, 노움.'
-빌려줄게. 힘.
덕지덕지 붙어 있던 암석이 매끈한 철판으로 변했다.
대지의 정령 : 노움의 힘이 한 단계 진화한 것이 느껴졌다.
철컥-.
가공되지 않았던 암석이 그 무엇도 막을 수 있는 철판이 되는 것처럼, 멜라니를 감싸고 있던 정령의 마법이 더욱 단단하게 변했다.
-부숴.
"숙이고 배를 때리면 돼!"
인지함과 움직이는 건 동시였다.
가면 안에서 힘을 쥐어짜는 소리가 들렸다.
웬만한 전사도 단번에 박살 날 정도의 근육.
그 폭발적인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을 감당하기엔, 멜라니의 육체는 너무도 나약해 보였다.
인간의 육체는 나약하지만, 정령의 힘과 지구라트에서 특별히 제작한 기름의 축복이 더해졌다.
일정 시간 동안이지만, 압도적인 출력을 내줄 수 있게 만드는 기름.
대상은 파수꾼.
멜라니의 작은 육체에서, 거구와 같은 힘이 뿜어졌다.
[크으음-!]
후웅-!
길게 감아 오는 훅을 피했다.
따끔한 바람이 멜라니의 뒷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흐으읍-!"
배운 건 없다.
하지만, 정령들이 알려 주고 있었다.
쿠웅-!
땅을 강하게 밟자, 노움의 힘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부숴 버려!
에머슨의 명령은 정확했다.
멜라니는 젖 먹던 힘까지 더해, 주먹을 올려쳤다.
통렬한 어퍼컷이 파수꾼의 복부를 강타했다.
쿠아아앙-!
[쿠으으으으-!]
됐다.
고통스러워하는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멜라니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한 방에 나가떨어진 수치심,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무력감, 끔찍했던 고통을 돌려줘야겠다는 복수심이 한데 뒤엉켜, 그녀의 주먹을 매섭게 만들었다.
"그대로 몰아붙여!"
"죽어어어어-!"
전투에 돌입한 멜라니는 평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과감하고, 또 과격했다.
조그마한 체구에서 뿜어지는 정령의 넘치는 힘.
마법사들을 몰아붙였던 파수꾼이 맥을 못 추고 얻어맞기 시작했다.
에머슨의 눈엔 보였다.
물리 공격을 맞으니, 덩달아 종합적인 방어력도 낮아지고 있다는 것.
눈이 지끈거렸으나,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이, 이제 마법도 통해.... 물리 공격으로 방어력을 낮추고 싸워야 하나 봐!"
"케일. 맡길게."
알라노가 멀쩡한 케일을 바라봤다.
장기전은 옳지 않다.
급하게 뽑아 올린 힘은, 생각보다 더 빨리 꺼지는 법이니까.
결정타를 날릴 인물은 딱 하나.
파티의 화력을 제대로 담당하고 있는 그녀뿐이었다.
푸른 머리가 마나의 힘으로 솟구쳤다.
저 괴물 같은 파수꾼을 끝장내기 위해선, 강력한 한 방을 조합해야 한다.
'생각하자.'
마누스라면, 어떤 마법을 생각했을까.
강력한 방어력을 관통하는 마법이 필요하다.
머릿속에 난잡하게 떠다니는 마법 술식들.
그중, 저 두꺼운 근육 안으로 침투할 마법 두 개를 떠올렸다.
3클래스.
처음 시도해 보는 것이지만, 괜찮다.
선배도 했듯, 나도 할 수 있을 테니-.
'-한번 봤잖아.'
그녀의 천재성이 발휘된다.
숨겨져 있던, 비극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가문의 피가 깨어난다.
지직-.
양손에 동시에 그려지는 마법진.
[더블 스프레드]
[임펠로] - [폴게트라]
망치.
거대한 망치를 상상하며 마법을 선택했다.
3클래스 물리계 마법, 임펠로.
3클래스 전격 마법, 폴게트라.
이걸로, 내부와 외부를 진탕으로 만들리라.
제아무리 두꺼운 갑옷이라도, 안쪽으로부터의 충격을 보호할 순 없다.
끝없는 전격은 적의 내부를 파괴할 것이며, 그 길은 망치가 열어 줄 것이다.
[마누비아 : 마르쿠스]
울컥-.
그녀의 입에서 비린 맛이 느껴졌다.
고작 3클래스 두 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것은 너무도 힘든 과정이었다.
천재라고 칭송받는 알라노조차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괴랄하고 복잡한-.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야지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조합.
세계의 축복을 받은 이의 마법이 쏟아졌다.
"피해, 멜라니-!"
멜라니는 연타를 멈추고 훌쩍 물러났다.
과부하가 걸렸는지, 풀썩 무릎이 꺾였다.
갑자기 눈앞에 있던 적이 사라진 탓일까.
파수꾼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 틈을 번개의 망치가 놓치지 않고 짓이겼다.
콰지지지지지직-!
한 번이 아니다.
케일은 단발성 마법으로 끝내는 것이 아닌, 계속해서 망치를 휘두른다는 느낌으로 마법을 휘둘렀다.
"나도 도울게! 천재 마법사 피어슨의 버프 마법이라고!"
피어슨의 마법이 전신에 흐르던 부담을 많이 줄여 주었다.
그가 왜 파티의 필수 멤버로 꼽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한 번 휘두를 수 있는 마법을 다섯, 여섯 번이 넘게 휘두를 수 있도록 해 주었으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에머슨이 힘껏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마성의 힘이 담겨 있었다.
게임 속에서 원망도, 환호도 많이 받는 포지션인 프라이머리 에머슨.
케일은 그녀의 목소리에 힘입어, 힘껏 마법을 휘둘렀다.
[크어어어어어어-!]
장작 타는 냄새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푸스스슥-.
데몬을 구성하고 있는 가면이 점차 사라졌다.
기괴한 소리와 함께, 데몬의 몸체도 함께 사라졌다.
하아-.
누군가의 한숨이 들렸다.
그건, 전투의 끝을 알리는 신호였다.
에머슨이 겨우 두 발로 설 수 있었을 때, 정신을 잃고 있던 아나이스가 깨어났다.
"괜찮니?"
"-네. 아윽."
죽다 살아났다.
방어 마법을 펼쳤음에도 기억이 뚝 끊긴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가 멀쩡히 전투를 치른 모습이 보였다.
으득-.
분했다.
왜 자신은....
"에머슨이 아니었다면 다 죽었을 거야. 마법사만으론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네."
"다들 무사해요?"
"멜라니와 케일이 잘해 줬지."
알라노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가 보내는 신뢰의 눈빛.
그건 아나이스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향해 있었다.
아나이스는 후-. 한숨을 쉬었다.
'나는... 약하구나.'
이들이 힘을 합쳐 거대한 데몬을 쓰러뜨리고 있을 때, 자신은 꼴사납게 기절해 있었다.
먼저 기절했던 멜라니조차 일어나 싸웠는데, 자신은 한가롭게 자빠져 있었다.
너무 분하지만, 동료들을 미워할 순 없지 않은가.
내가 약한 탓이다.
이들을 쫓아가기 위해선, 더 많은 지식과 힘이 필요하겠지.
당분간 홀로 탑을 올라 볼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나이스. 다 끝났으니까 이제 그만 내려가자."
"-알았어요."
그녀는 자신을 보고 다가오는 동료들을 보았다.
피어슨.
한창 재능을 꽃피우고 있는 소꿉친구는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순수한 걱정이 담겨 있다는 건, 그 누구보다 아나이스 본인이 잘 알았다.
"괜찮냐? 그놈 우리가 아주 작살을 내 놨다. 요즘 월말 평가 한다고 공부 그렇게 하더만-."
"-됐어. 괜찮아."
고마워.
미안해.
이 간단하고도 쉬운 말이 왜 나오지 않는 걸까.
그녀는 복잡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가시가 돋친 말을 내뱉었다.
내민 손을 잡지도 않은 채.
피어슨이 아하하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아나이스는 차마 그 손까진 떨쳐 낼 수 없었다.
"다들... 너무 멋있었어요."
에머슨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진두지휘한 알라노를 비롯해, 괴력을 발휘하는 멜라니와 압도적인 마법을 퍼부었던 케일.
그것을 보조해 주는 피어슨까지.
모두가 있었기에 그 괴물을 이길 수 있었던 거겠지.
힘이 다해, 비틀비틀 걸어온 멜라니가 겨우 입을 열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구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뿌듯해,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온몸이 쑤셔. 내일 수업 못 듣겠는데."
"오늘 진짜 짱이었다고, 멜라니."
"하, 하하-. 고마워."
폭주했던 자신이 생각나서일까, 멜라니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붉게 물든 것이, 어지간히 부끄러운 모양.
피어슨은 데몬, 파수꾼이 떨어뜨린 아티팩트, 마석 결정을 주웠다.
작은 반지.
완드.
그리고 마석 결정.
"참 신기하네. 이런 건 어디서 났을까?"
"이, 이거. 아티팩트예요?"
"응. 우리는 감정도 할 수 없고... 그래서 그냥 이사장님께 맡겨서 팔고 있어. 곧 정산금이 들어올 텐데."
"잠깐만요."
에머슨이 완드를 건네받았다.
아니, 거의 낚아챘다고 해야 맞겠지.
누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그녀가 마나를 일으켜 완드와 접촉했다.
감정.
이 세계에서, 감정은 선택받은 이들만 할 수 있는 재주였다.
마나와 물건이 융합하면 특수한 현상이 발생한다.
그것을 이용해, 인공적으로 특수한 물건을 만들 수 있었다.
"감정? 지금, 감정하는 거야?"
"프라이머리 가문이 왜 그렇게 돈이 많은지 아세요?"
에머슨은 자랑스럽게 웃었다.
프라이머리 가문.
재력으로만 따지자면 위대한 세 가문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부를 쌓은 곳.
그 이유가, 지금 여기서 드러났다.
"저희 가문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물건을 판별하는 재주를 타고난답니다. 그걸 갈고닦으면, 이렇게 감정도 할 수 있지요."
"우와-. 그러면... 우리가 쓸 만한 것도 감정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럼요. 제가 적합한 것들을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목숨값치고는 싸지만... 앞으로 도와 드릴게요."
일행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감정을 거치지 않은 물건과 거친 물건.
이 둘의 값어치는 원석과 세공된 보석의 차이보다 더 벌어졌다.
에머슨만 있으면, 이들은 곧 돈방석에 앉게 될 거다.
모두가 케일을 바라봤다.
그녀는 이곳에서 유일한 평민.
이제 그녀도 수월하게 돈을 벌 수 있으리라.
"잘됐다, 케일. 탐색에 필요한 자금 외엔, 네 몫을 제대로 챙겨 줄게."
"마, 맞아. 우리는 딱히 돈 들 구석이 없는걸."
"이제 네 힘으로 돈을 벌 수 있겠네."
에머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흔쾌히 케일을 도와주겠다 말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법도 하건만, 이들은 더 큰 무언가를 내다보았다.
"물론, 우리 몫도 조금은 챙겨 가야지. 에머슨, 너도 감정할 때마다 챙겨 가고."
"당연하지. 호의는 베풀되 공짜는 안 되는 법이야."
케일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들끼리 간단하게 회의를 한 결과, 다음과 같은 룰이 정해졌다.
1. 우선 분배는 아티팩트 적합률이 가장 높은 이에게.
2. 아무도 갖지 않는 아티팩트는 팔아서 공정하게 분배.
3. 에머슨은 무조건 수수료 1%를 챙긴다.
4. 동일한 적합률이 나왔을 때, 그것과 비슷한 장비를 쓰던 사람이 갖는다.
이상이었다.
떠드는 사이, 완드의 감정이 끝났다.
에머슨이 감정 결과를 발표했다.
"마나 회복이 조금 붙어 있어. 빙결 마법 위력이 증가하는데?"
"그렇다면...."
모두가 알라노를 바라봤다.
빙결 마법 하면 알라노가 가장 먼저 떠올랐으니까.
허나, 그녀는 완드를 마다하고 모두에게 말했다.
"오늘 내가 한 건 없는데, 이런 걸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네. 일단 시험 케이스로 케일이 써 보는 건 어때?"
"아... 제가요?"
"그래. 넌 특별한 능력이 있으니까, 마나 회복이 필요할 거야."
실로 대인배스러운 면모였다.
에머슨이 케일에게 완드를 내밀었다.
그녀는 멍하니 완드를 받아 들었다.
아카데미 수업에서는 사용할 수 없겠지만, 탑에서는 분명 도움이 될 터다.
완드를 쥐고 마나를 사용하자, 완드가 공명하는 것이 느껴졌다.
소폭이지만, 확실히 마나가 순간적으로 증가했다.
"굉장해."
"축하해. 일단, 내려가자."
에머슨 구출 작전은 무사히 끝났다.
루페라는 마누스 홀로 맡기로 했으니, 그를 믿는 수밖에.
알라노, 케일은 조잘조잘 떠들며 기숙사로 돌아가는 에머슨을 보며 생각했다.
그녀의 능력이 있다면, 탑을 오르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하지만, 그녀를 구출하는 것과 동료로 맞이하는 일은 별개라는 사실을 그들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
[전투 종료]
『힘 - 2 : 오르도르』
<멜라니의 정령들이 한 단계 강해졌다.>
<케일은 완드 : 최대 마나 소량 증가 / 얼음 속성 증폭(소)을 얻었다.>
<케일, 아나이스, 알라노, 피어슨의 레벨이 올랐다.>
<케일 : 33>
<아나이스 : 32>
<알라노 : 37>
<피어슨 : 31>
<에머슨을 무사히 구출했다.>
제71화
- 귀환
* * *
마누스는 홀로 탑을 조사하는 중이었다.
블랙, 그리고 화이트가 적극적으로 협력해 준 덕분에 루페라가 어디 있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생각보다 저층이었고,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이런 건 지식이 있어도 순수한 노가다니, 어떻게 할 수가 없군.'
게임이 현실이 되며, 이런 부분의 공략은 상당 부분 쓸모없게 되어 버렸다.
사람의 생각이야말로 변수 덩어리다.
루페라가 다른 마음이라도 먹고 움직인다면, 처음부터 다시 찾아야 하는 것.
마누스는 알비온의 성장 겸, 마석 결정을 수집하며 탑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오늘도 수확은 없었다.
솜뭉치가 이제 솜사탕 정도가 된 것 빼곤, 허사였다.
"이렇게까지 오래 걸리는 일이었나."
이제 슬슬 아카데미에 출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업을 듣지 않으면 단순히 출석 점수만 까이는 것이 아니었으니.
수업 내용은 물론, 교수의 눈에도 미운 털이 박힐 수 있었다.
오히려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달고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가진 것이 많고, 주목받는 자리일수록 시기하고 질투하는 이들이 넘쳐 날 테니.
언제고 기회를 노리는 자들이 수두룩하겠지.
'여기까지 해야겠군.'
마누스는 수색을 마치고 귀환하기로 했다.
아이들에겐 무어라 말할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럴 리 없겠지만, 그들 역시 사람이기에 실망도 하겠지.
홀로 무언가를 하겠다는 객기를 접을 때도 되었나 싶었다.
누군가와 힘을 합친다는 건, 아직 어려운 일이었다.
전생의 그도 누군가와 힘을 합쳐 무언가를 해결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돌아간 블랙과 화이트의 방.
"성과는 없었군요."
"이상하네. 우리 눈을 피해 갈 존재는 없는데."
화이트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들이 가진 지식, 그리고 능력을 통해 탑에 '외부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
누군가를 추적하는 것 역시 간단한 일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었다.
실제로 성능을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그게 신뢰성이 하나도 없다는 걸 증명했다.
화이트가 푸욱 한숨을 쉬었다.
"하-. 진짜 우리도 오래 있긴 했나 보다."
"그러게 말이에요. 장치를 손볼 때가 되긴 했나 봅니다."
그들은 거대한 원판을 바라보고 말했다.
이걸로 외부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 같았는데, 마치 우주를 그려 놓은 것 같은 판이었다.
원작에선 나오지 않았던 묘사.
마누스는 궁금증, 그리고 번뜩이는 무언가에 대해 물었다.
"예전에도 이와 같은 사태가 있었습니까? 밖에선 그런 기록이 남아 있던데요."
"음-. 사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는 잘 몰라."
"여러분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지구라트에 영향을 끼치는 이들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저희도 할 일이 없었죠."
블랙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요컨대, '신경 쓸 일이 없어서 안 봤기 때문에 모르겠다'였다.
화이트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 딴청을 피우는 중이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이들은 인간도 아니었고,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도 아니었으니.
마누스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질문을 마무리 지었다.
"어쨌든, 지금은 힘닿는 데까지 도와 드리겠습니다. 루페라라고 했나요. 다시 오시면 찾아 놓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보드게임은 천천히 해 보시길."
"후후, 감사합니다."
블랙은 잔잔하게 웃으며 테이블에 널려 있는 보드게임들을 바라봤다.
진짜 한가득 사 왔다.
이 정도라면, 족히 몇 년은 가지고 놀아도 될 정도였다.
마누스의 센스는 여기서 발휘되었다.
모두 변수가 가득 들어가 있는 게임 위주로 사 왔다.
심리 싸움, 두뇌 싸움, 그밖에 무작위성 요소가 가득 들어가 있는 게임들.
이건 블랙의 눈으로도 볼 수 없는 변수 덩어리들이었다.
"언제든지 말만 해. 내가 아는 걸 다 가르쳐 줄 테니까."
"조만간 마법을 배우러 오겠습니다."
"흑마법 말고도 많으니까, 언제든지 와."
화이트가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떠나간 후,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몇 년 정도였지?"
"글쎄요. 한... 50년은 된 것 같은데."
"쟤가 데려온 여자애도 쓸 만해 보이던데."
블랙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좀 놀라웠다.
한 시대에 이토록 엄청난 재능을 타고난 이가 연속으로 나타나는 일은 드물었다.
적어도, 두 존재가 살아왔던 시간 속에선 그랬다.
한 세대, 30~40년 사이에 차근차근 태어나는 경우는 많았지.
하지만, 동 세대에 이렇게 인재가 폭발한 적은 거의 없었다.
"확실히, 변화가 오려나 봅니다."
"하-.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야, 진짜."
"조금만 더 기다려 보죠. 어쩌면-."
블랙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형상을 구체화시켰다.
젊은 남녀들이 자신들을 구원해 주는 모습.
누구인지, 등을 지고 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조만간,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흐흐, 그래? 다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건가?"
블랙은 말없이 웃었다.
그녀의 말처럼 자유를 찾을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항상 불만에 찌들어 있던 화이트가 의욕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걸어가, 다시 탑을 훑기 시작했다.
그녀의 열정이 다시 솟구친 것처럼, 잠잠했던 세계가 변하려 하고 있다.
블랙은 이 답답한 곳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도 비참해졌다.
* * *
마누스는 아침 일찍 일어나, 마나로 피곤을 날려 보냈다.
이사장실에 들렀다가 수업에 가기 위해선, 새벽같이 일어나 준비해야만 했다.
월급을 받으며 생활했던 그때가 생각나는 새벽이었다.
언제 봐도 어색함이 드는 얼굴.
전생에 이런 얼굴로 살았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에이-.
지나간 일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비참해질 뿐이다.
"가자."
지금은 이대로의 삶을 만끽하면 그뿐이지.
대한민국에서 개발한 게임이라 그런가, 현관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신발이 참 인상적이었다.
이런 걸 또 못 참는단 말이지.
구두까지 신으니 완벽한 제복이 완성되었다.
달칵, 문을 열고 나서니 은은한 불빛이 드리운 복도가 보였다.
붉은 카펫이 소음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보이는 고풍스러운 그림은 이곳이 판타지 세계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너도 일찍 학교 가나 보다."
"...."
그러다 문득, 뒤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걸음이 멈췄다.
아니, 들릴 리가 없어야 할 목소리였기에 그렇겠지.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곳엔, 붉은 머리를 단정하게 자른 남자가 서 있었다.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한 손엔 마법 지팡이를 들고 있는 남자.
분명, 익숙한 얼굴이었다.
"어, 나 누군지 모르는 거 아니지?"
"-루페라."
"기억하네, 다른 사람에게 영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는 줄 알았거든."
"결석을 꽤 오래 했더군."
섬찟한 느낌을 애써 누르고 태연하게 받아 주었다.
루페라는 하하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남자의 멱살을 잡고 싶었으나, 신중해야 한다.
"아, 고향에 잠깐 다녀왔거든.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그렇군."
괴리감.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마누스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루페라 역시 더는 말하지 않고 마법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자부했던 본인이다.
이 게임을 수십, 수백 번을 클리어했다.
자신과는 달리,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 있었으니.
그렇기에 자만했던 걸지도 모른다.
최강의 캐릭터로 빙의해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꿈은 아닐 테고.'
꾸욱-.
주먹을 쥐어 봤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손끝의 감각이, 꿈이 아니라는 걸 방증했다.
루페라.
"-저기."
"뭐지."
경계심이 잔뜩 올라 있어, 딱딱한 말투가 절로 나왔다.
루페라는 공격적인 반응에 움찔, 놀란 모습을 보였다.
어째서일까.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이 연기같이 느껴지는 건.
"혹시 수업 노트 좀 빌릴 수 있을까? 알라노에게 부탁하고 싶은데 괜한 오해를 살까 봐 좀...."
"나도 없다."
"-그, 그래. 알았어."
순간, 루페라의 표정에 금이 가는 것이 보였다.
아주 잠깐이지만 분명 그건....
"역시 카이사르라 그런지, 노트 같은 건 없어도 되는구나."
"아니."
마누스는 루페라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순간 흔들리는 눈동자가 보였지만, 이내 자신을 똑바로 응시해 온다.
예로부터 그런 말이 있었다.
약한 자가, 모두 선한 건 아니라고.
지금 루페라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 역시 그 문장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런 자들은 많이 봤다.
'옛날 생각 좀 안 나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
선하고 착한 척.
약자인 척, 순박한 척, 어려운 척은 다 하면서 정치질하는 부류.
옛날이라면 힘이 없었기에 당하고만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카이사르의 이름을 달고, 누군가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그렇기에 행동한다.
약자를 잡아먹고,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멍청한 소리 좀 그만하지."
"아, 아니-."
"우리가 언제 대화를 나눴던 사이였던가."
"...."
"그리고, 너랑 나랑은 듣는 수업 자체가 다르다."
아-.
루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사과를 건넸다.
"미, 미안. 반가운 마음에 그만...."
"난 반가워야 할 관계를 쌓지 않았는데."
어차피 뒷공작을 펼칠 거라면.
어차피 험담하게 될 거라면.
그냥 시원하게 들이박는 것이 훨씬 낫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때로는 적당한, 아니 많이 또라이가 살기 편하다는 걸 직접 두 눈으로 봤으니까.
문이 열렸다.
적막을 깨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먼저 가지. 학생회장이 걱정하고 있더군. 제대로 보고해라."
"어, 어어-."
발소리가 멀어져 간다.
루페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한 번, 두 번.
걸음을 옮겼지만, 떨리는 다리는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카이사르 마누스.
3학년 수업을 듣고 있는 천재.
으득-.
분한 마음에 이빨을 강하게 깨물었다.
너무도 높은 벽처럼 느껴졌다.
'저런 걸 어떻게 깨부수라고.'
말이야 쉽지.
조금이나마 강하다는 것에 눈을 떴기 때문일까.
그가 얼마나 높은 곳에 올라 있는지, 저기까지 올라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 버렸다.
과연, 자신이 올라갈 수나 있을까 싶은 경지.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가능성이라는 것이 생긴 이상, 포기하라는 말은 넣어 둘 생각이었다.
그는 재수 없는 뒤통수를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먼저, 해야 할 일부터 하자.'
귀족의 콧대를 눌러 주는 건, 나중 일이었다.
루페라는 그녀가 말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제72화
- 부작용은 모든 것에 있다
* * *
아침부터 이사장실에는 심각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마누스.
아덴.
닉스 이사장.
알라노.
케일.
이 다섯 사람은 루페라가 다시 등교했다는 것에 대해, 놀라워하는 중이었다.
여기 있는 모두는 루페라를 원래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
홀로 돌아온 경우는 처음이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어쨌든, 잘된 것 같으니... 아덴, 당분간 지켜봐 주게."
"알겠습니다."
"알라노에게도 부탁하지요. 같은 반 학생이니, 감시해 주세요."
알라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루페라에 대한 문제는 더 두고 볼 일이었고, 에머슨에 대한 건으로 넘어갔다.
에머슨은 일단 이상 없이 등교했다는 것이 케일의 보고였다.
이쪽도 별문제는 없어 보였다.
진짜 안건은 그녀를 어떻게 동아리에 끌어들이느냐였다.
그녀가 보여 준 미래 예지 정도의 예측 실력.
"그녀는 적의 패턴을 보고, 분석하고, 예측하는 데 특화되어 있습니다. 꼭 영입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친구를 위험한 곳에 끌어들여도 괜찮은 걸까요?"
케일의 눈꼬리가 조금 처진 건, 기분 탓이 아닐 거다.
그녀는 탑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데몬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한 번 갇혔던 이를 들여보내는 건 잘하는 걸까?
적어도 본인의 의사는 충분하게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소 알라노의 말을 잘 따르는 케일이었지만, 이번엔 다른 의견을 내보였다.
다행히, 알라노는 케일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했다.
"그 말도 맞아. 어디까지나 선택이 중요한 거지. 우리가 강요할 일은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단다."
"제가 물어보긴 할게요. 아, 그리고-."
케일은 감정에 관한 이야기도 꺼냈다.
감정은 아무나 할 수 없었다.
아카데미 내에서도 감정사는 딱 한 명뿐이었다.
그마저도 올해는 안식년이라 탑에서 모은 아티팩트를 다양한 절차를 거쳐 현금화했어야 했다.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되니, 이젠 현지에서 장비 조달까지 할 수 있었다.
감정사는 몸값이 대단하다.
"철저하게 보호해야겠군요. 케일 학생이 신경을 좀 써 주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감정사를 납치해 노예로 부려 먹는 곳도 왕왕 있는 만큼, 그녀의 보호는 필수 요소였다.
탐욕과 범죄 앞에선 귀족이라고 무사할 수 없는 법이니.
마누스는 잠자코 듣고만 있다, 이만 돌아가 보라는 말에 몸을 돌렸다.
일단은 지켜보자는 것으로 결론이 났으니, 그 역시 지켜보는 수밖에.
실은 생각할 것들이 많아,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변수.
이건 마누스가 극히 경계하는 말이었다.
'이놈의 변수 때문에 애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거든.'
어딜 가나 변수는 존재하지만, 이번엔 선을 넘었다.
하지만 방법은 있을 거다.
이 세계에 등장하는 빌런은 정해져 있다.
특히 네임드 빌런은 더욱 그렇지.
자, 생각해 보자.
루페라는 홀로 탑을 빠져나왔을까?
아니면-.
"선배."
"음?"
상념을 깬 건, 케일의 맑은 목소리였다.
몸을 돌리자, 그녀는 불안을 품고 있는 눈동자로 마누스에게 다가왔다.
너무 의존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차마 주인공의 약한 모습에 화를 낼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련한, 친구를 걱정하는 표정을 하며 다가온 아이를 매정하게 대할 수 있을까.
마누스는 침착하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케일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탑을 올라가면서,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어요."
"무슨 문제가 있었지?"
"마법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만났거든요."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파티원들의 직업 밸런스가 중요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 케일이 느끼는 벽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마누스는 의외로 간단한 해답을 내놓았다.
"그럼 동료를 늘려야겠군."
"위험한 곳에 가려는 이가 있을까요?"
"계기는 생긴다. 기다려라."
케일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직도 불안감을 감출 수 없는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마누스는 조용히 허리를 숙여,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잘게 떨리는 눈동자였지만, 유독 마누스를 바라볼 때면 그 떨림이 없어졌다.
그녀의 눈동자에, 자신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세상은 자신보다 훨씬 더 무뚝뚝하고 매정하다.
남들은 어렵다고 하는 자신을 바라보듯, 세상도 비슷한 시각으로 바라봤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다.
"무서워하지 마라. 무서우면 능력을 기르고, 지식을 탐해라. 무엇이 와도 널 방해할 수 없도록."
"-전, 잘하고 있는 거죠?"
"충분히."
케일이 작게 웃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그녀의 얼굴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주인을 보며 안도한 반려동물 같았다.
불안감이 찾아올 때마다 확인받고 싶은 건 당연한 심리였다.
케일의 마음속 안식처는 이미 마누스 한 사람뿐이었다.
어떤 어리광을 부리더라도 받아 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그 어떤 시련 때문에 흔들려도 굳건한 울타리가 되어 줄 것 같은 사람.
"헤헤, 그럼 더 열심히 할게요. 언젠간... 선배도 따라잡을 수 있겠죠?"
"그럴 거다."
네 재능은 이 세계관 최강이거든.
자신의 재능을 믿고 나아가는 것.
당장 넘어서지 못할 장애물이라도,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것.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도전하는 자세가 필요했다.
"언제나 널 믿어라."
"네."
"몇 번째인지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징징거리면 탑에다 버려두고 올 거다."
마누스는 그녀가 계속 어리광 부린다면, 홀로 탑을 헤쳐 나가지 못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쓴소리도 곁들여 주곤, 몸을 돌렸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은 퉁명스러운 마누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누구보다 자신들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홀로... 서라는 거겠지.'
이 이상의 어리광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이미 마누스는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많은 일을 해 주고 있었다.
자신이 힘들다고, 계속 매달리는 건 민폐일 터.
케일은 순간 욕심이 생겼다.
마누스가 홀로 나아가는 건, 이젠 싫었다.
함께하고 싶다.
'그러려면, 더 강해져야 해.'
그가 자신을 믿고 홀로 움직이는 것까지 허락할 정도로 강해져야 한다.
실력을 늘리기 위해선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겠지.
탑에 가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분명, 마법이 통하지 않았던 데몬도 파훼법이 있을 거다.
끝없는 실전과 지식의 탐구만이 그녀가 걸어가야 할 길이었다.
* * *
"...음."
마누스는 멀뚱히 서서 갑작스럽게 등장한 메시지를 바라봤다.
두 가지의 메시지였다.
다소 뜬금없는 타이밍이라 다소 당황했다.
수업을 듣기 위해 3학년 교실로 올라왔고, 책상 위에선 솜사탕이 되어 버린 알비온이 뒹굴거리고 있었다.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DLC 스토리가 진행됩니다.]
[세계선이 변한 결과가 조금씩 드러납니다.]
[분기를 거쳤습니다.]
[S3이 삭제됩니다.]
[S3의 보상이 S4로 이관됩니다.]
[S4 - 외톨이의 헛된 꿈]
[보상 : ???]
[키워드 : 루페라 / 기예르모 / 에머슨 / ??? / 월말 평가]
'이것도 DLC... 그리고 드디어 분기가 나뉘는구나.'
이제부턴 정신 바싹 차려야 할 거다.
지식은 기본 바탕이 될 뿐,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어 주지 않을 거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원작의 캐릭터가 성장해 나갈수록 자신도 강해진다는 것.
[간섭을 확인했습니다.]
[최대 마나 보유량이 소폭 증가합니다.]
방금 상담에서 케일의 심경에 변화가 있었던 모양.
그나저나 배신자라.
거기다 키워드엔 예상치 못한 이름이 쓰여 있었다.
에머슨, 루페라는 그렇다 쳐도 기예르모가 이 스토리에 연관이 있나?
어쨌든 부딪쳐 봐야 해법을 찾을 수 있겠지.
기예르모라....
'일단 모두 지켜봐야겠군.'
생각만 해선 답이 나오지 않는다.
안 그래도 탑에 올라가는 인원 중, 수호자나 전사 클래스가 필요할 시점이기도 했다.
그가 참여하는 이유는 다소 유치했지만, 어쨌든 조만간 제 발로 찾아오게 될 것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트레일 교수가 들어와, 수업 시작을 알렸기 때문.
"이제 다음 주면 월말 평가로군요. 모두 준비는 잘하고 계시겠죠? 이번 월말 평가의 주제는 '협동'입니다."
협동.
이번 월말 평가는 이벤트성 시나리오이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다른 직업군을 소개하는 시나리오이기도 했다.
버클리 기예르모가 파티에 합류하는 시기도 바로 이때.
전사를 상징하는 검은 독수리.
수호자를 상징하는 푸른 사슴.
마지막으로 마법사를 상징하는 황금색 뱀이 한데 모여 평가를 치르는 장이었다.
"나름 큰 행사처럼 준비하고 있습니다. 각 가문에 초대장을 보냈고, 각 나라에 있는 기관에서도 올 겁니다."
어-.
이건 예상에 없었는데?
갑자기 규모가 확 커졌다.
왜 갑자기 DLC 스토리로 편성되었을까.
지금 트레일 교수로부터 그 해답이 나오는 중이었다.
그의 입에선, 예상치 못한 내용이 흘러나왔다.
"황궁에서 직접 행사를 지원했습니다. 이번 월말 평가에서, 여러분은 전 대륙을 상대로 실력을 뽐내야 할 겁니다."
그 원인이 뭘까.
트레일 교수는 마누스와 시선을 마주치며 말을 이어 갔다.
마치 너 때문이라는 듯이.
마누스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망자의 밤.
그때의 일이 여기까지 흘러왔구나.
황제가 보내는 평가단이 도착한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사안이지만, 여러분은 미토스 아카데미의 학생입니다. 잘해 내실 거라 믿습니다. 아 그리고-."
트레일 교수는 마누스를 콕 집어 얘기했다.
그의 눈이 살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저 웃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마누스 학생은 선택해야 할 겁니다. 2학년과 평가를 치를지, 3학년과 평가를 치를지."
"3학년과 치르면, 메리트는 있습니까?"
트레일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토스 아카데미는 뛰어난 성적을 낸 이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돌려준다.
왜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그의 말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모든 이가 기대하고 있었다.
카이사르 마누스.
그의 재능은 가족들과 같이 최상위에 속해 있었고, 유독 그는 기행을 많이 벌였다.
"3학년과 월말 평가를 치렀을 시, 월반이 될 수 있습니다. 조기 졸업이 가능하다는 얘기죠."
웅성거림이 커졌다.
이제 2학년인 마누스를 공식적으로 3학년에 편입시킨다는 말이다.
이는 굉장히 큰 혜택이자, 역사상 몇 없었던 처우였다.
기본적으로 미토스 아카데미는 재능 있는 이들만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들에 맞게 커리큘럼을 짜다 보니, 그 수준 역시 매우 높았다.
그곳에서 월반을 한다?
웬만한 이들은 따라오기도 벅찬 수업에서?
'대단한 거 아니야?'
'쟤 재능이 그 정도였다고?'
'괴물이네 뭐네 했는데, 진짜 교수님들이 보기엔 더 괴물인가 본데.'
3학년들의 눈동자가 심상치 않았다.
마누스는 덤덤히 시선을 받아넘기며, 생각에 잠겼다.
일단 3학년과 겨룬다면, 뭔가가 나오지 않을까?
트레일 교수는 생각에 잠긴 마누스를 보며 미소 지었다.
저렇게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으니.
2학년과 3학년은 그 격차가 꽤 크다.
성장할 시기에 1년간 받아들이는 지식의 차이는, 당사자들이 느끼는 것보다도 훨씬 컸다.
"알겠습니다."
"그럼,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마누스 학생은 천천히 고민해 보시고, 오늘 오후까지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마누스는 멍하니 칠판을 바라봤다.
이런 순간에도, 그의 재능은 찬란하게 발휘되어, 모든 수업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제73화
- 외톨이가 되었다
* * *
"저기-."
"무슨 일이죠."
"그래서, 3학년들이랑 붙을 거야?"
수업은 무사히 끝났다.
트레일 교수의 수업은 언제나 기본을 중요시했다.
기본적인 지식 위에 탄탄히 쌓아 올린 금자탑이야말로, 최고의 마법을 구현할 수 있는 밑거름이라고 여겼으니.
그런 수업 끝에 들려온 것은 질문이나 마법에 대한 의견 교환이 아닌, 3학년과 붙을지 말지 물어보는 질문이었다.
마누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제 실력이 어느 정도로 통하는지 알아보고 싶군요."
"오-. 우리도 긴장해야겠는걸. 나름 우리도 A반인 거, 알지?"
"알고 있습니다."
한 학년 선배인 여성이 살풋 웃었다.
게임 기반이라 그런지, 못생긴 이들은 없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3학년 황금 뱀 A반 '아브렐 니아'.
출석번호 1번으로, 5클래스에 근접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여인이었다.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이 인상적인 여인.
그녀는 분명,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은 자였다.
"아브렐 가문이 다시 도약할 기회가 온 것 같네. 잘해 보자, 카이사르."
"-저야말로."
아브렐 가문.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가문으로, 마법 명가로 불리는 곳이었다.
본래 위대한 가문 중 한 곳이었지만, 드래곤의 피가 옅어져 다소 위세가 떨어졌던 가문.
이번 대에 그 위대한 피를 짙게 물려받은 여인이 생겼으니, 그자가 바로 니아였다.
남청색 머리칼에 황금빛 눈동자.
그녀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확실히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위대한 가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네. 너도 최고의 팀을 찾길 바랄게."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래, 월말 평가는 팀전이었지.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팀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3학년을 이길 드림 팀을 꾸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미안한 말이지만, '탑을 올랐던 이들'과 일반 학생들의 차이는 크다.
"재밌겠군."
그의 웃음이 울려 퍼졌다.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2학년으로 팀을 꾸려야겠다.
팀원은 셋.
구성은 자유였다.
그가 트레일 교수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재미있는 판을 만들기 위해서.
* * *
수업이 끝난 후, 루페라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본래 친구였던 이들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관심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
수업 시작 전, '마법의 역사'를 가르치는 미아 교수님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없는 것이 당연한 듯, 그렇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기분이었다.
"대체...."
확인이 필요하다.
그는 교실을 나서, C반으로 향했다.
그곳에 자신과 절친한 친구가 있었으니, 확인해 보면 될 것.
그 묘한 곳에 갇혔다 나온 뒤부터, 모든 것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물론 마법 실력은 부쩍 늘었지만, 그만큼 잃은 것도 많았다.
C반에 도착한 그가 노트를 챙겨 일어나려는 친구를 발견했다.
그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이-. 모리스!"
"응?"
모리스라 불린 남성이 그를 바라봤다.
그러곤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 잠깐의 시간이, 루페라에겐 영겁 속에 갇힌 느낌을 주었다.
의문 섞인 시선도 잠시, 모리스는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친근함이 섞인 모습.
루페라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안녕. 어 그러니까-."
"내 이름도 까먹은 거냐? 루페라잖아."
"루페라? 아아-. 루페라!"
모리스는 진짜로 반가운 듯,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해 왔다.
평소와 같은 모습에, 루페라는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나 없는 동안 잘 지냈냐?"
"뭐? 어디 갔다 왔어?"
"사흘이나 없었는데, 그동안 나 없이 뭐 했냐."
"아- 그랬나?"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과 다른 사실이 생기면,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기억을 맹신하는 경우가 대부분.
하지만 모리스는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않았다.
모리스는 본디 성격이 착한 아이였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고 맞춰 주는 성격.
'혹시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나?'라고 생각해, 일단 한 발자국 물러선 것.
당연히 옛날부터 친구였던 루페라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너... 기억 안 나?"
"뭘? 어디 갔다 왔는데? 궁금하다. 요즘 월말 평가 시즌이잖아. 그것 때문에 신경 못 썼나 보다."
"그럴 수도 있지.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좋지."
두 사람은 곧,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
하지만 루페라도, 모리스도 알고 있었다.
지금 관계는 어딘가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걸.
왠지 모를 어색함이 감돌았다.
두 사람은 그 어색함을 애써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관계를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조금 더 지켜봐야겠는걸.'
지켜보는 이 역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를 지켜보는 것 마찬가지.
지켜보는 이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그 누구도 모르는 사이, 한 사람의 운명이 비틀리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최악의 형태로.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음? 내가 왜?"
실제로, 모리스는 루페라와 밥을 먹으며 그런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루페라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으로 모리스를 바라봤다.
없어졌다고 했나?
모리스는 제아무리 생각해 보려 해도, 루페라에 대한 기억을 찾을 수 없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은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이곳, 미토스 아카데미에 처음 들어올 때의 기억 역시.
문제는 그 이후, 그와 관련된 기억은 대부분 없어졌다는 것.
'왜 이런 거지.'
"...아무것도 아니다. 나 먼저 일어난다."
"그래. 평가 준비 잘하고."
"-그래."
루페라는 자리를 정리하고 먼저 일어섰다.
모리스는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 뿐, 별다른 리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넌 그러지 않았잖아.
항상 나와 함께 일어나려 했잖아.
'젠장-.'
달라진 친구의 모습을 본 루페라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감정 때문에,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식기를 모두 정리한 그가 빠르게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우에에에엑-!"
답답함, 절망감, 허무함.
여러 감정이 뒤섞인 무언가가 그의 심신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난도질당한 기억.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그는 계속해서 속을 게워 내야만 했다.
"흐으-. 흐으으-."
변기를 잡고 한참을 흐느껴야만 했다.
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왜 나의 추억을 앗아 갔는가.
나의 추억과 기억은, 이렇게 사그라졌구나.
"다들 기억을 못한다... 이거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 여자가 말했던, 밖에선 네가 없어져도 모를 거란 말.
그래, 그런 거였어.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아아... 인생 X같네."
평민으로 태어나, 가난한 삶을 살아왔다.
겨우 마나라는 재능을 깨쳐, 미토스 아카데미에 들어왔다.
평민 중에 뛰어나다는 이유로 장학금을 겨우 받아 다니게 된 아카데미.
1년간 겪었던 은근한 차별 속, 겨우 올라온 A반.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가던, 켜켜이 쌓아 올린 추억들이 한순간에 없어졌다.
단지 누군가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단지, 누군가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
"-이렇게 된 거, 다 없애 주겠어."
추억도, 기억도, 과거도 없다면, 미래를 바라보면 된다.
모두에게서 기억이 없어졌다고?
그렇담, 이제부터 새로운 기억을 심어 주면 된다.
월말 평가.
그때부터 시작하면 되겠지.
루페라의 눈동자가 빛났다.
마치 상처 입은 야수의 눈빛처럼 사납게 번들거렸다.
"다 죽었어."
그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었다.
남들은 겪지 못한 시간 속에서, 홀로 힘을 키워 낼 수 있었으니까.
그 힘만 이용한다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을 터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반강제로 끌려온 자와, '선택'되어 스스로 탑에 들어간 자는 엄연히 다른 존재임을.
그보다 먼저 축복을 누리고 있는 자들이 있음을 몰랐다.
그는 외톨이.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쌍한 외톨이일 뿐이었다.
* * *
"-그걸 허락해 달라는 말씀입니까?"
"3학년이 저와 팀을 이뤄 줄 것 같지 않습니다만."
"그것도 그렇군요. 생각해 둔 자는 있습니까? 전부 뱀반이라면 안 될 겁니다."
트레일 교수는 사무실에서 마누스와 독대하는 중이었다.
그의 취향으로 꾸며진, 정갈하면서도 오컬트적인 분위기에 마누스가 칭찬을 건넸을 땐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마누스가 꺼낸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3학년과 월말 평가를 치르되, 2학년과 팀을 이루고 싶다는 것.
그들의 의사를 중요시할 것이며, 그는 월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것 때문에 트레일 교수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불리함을 안고 가려는 이유가 있을까. 같은 3학년이라도 함께 팀을 이루고 싶은 이들은 많을 텐데.'
트레일 교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마누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잘 믿지 않는 성격이었다.
하도 덴 것이 많아,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게 되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월반?
가산점?
교수의 특혜?
그런 것들은 모두 시기 질투의 명분이 될 뿐이다.
3학년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후배를 좋은 시선으로 볼까?
"생각해 둔 이들은 있습니다. 그들은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좋아요. 다음 주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되도록 같이 오셨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마누스는 기품 있는 몸짓으로 인사를 건넨 뒤, 조용히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그 뒷모습을 보며, 트레일 교수가 흥미롭다는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정말 갑작스럽게 추진된 일이었지만, 시간은 충분했다.
의미 있는 평가로 남기 위해선, 다양한 변수들이 존재해야겠지.
숨어 있던 인재들이 볕을 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 할 것이다.
각 학년에서 찬란하게 피어날 준비가 된 이들이 널려 있을 터다.
똑똑-.
즐거운 상상 속에 빠져 있을 때, 상념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는 미아 교수의 목소리였다.
평소 다른 교수들과 교류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일일까.
"들어오세요. 미아 교수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트레일 교수님."
"바쁘신 줄로 알았는데....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아끼던 것을 내놓아야겠군요."
그가 손을 휘젓자, 찬장이 열리며 찻잔과 재료들이 둥실 떠올랐다.
미아 교수는 수줍은 듯, 작은 미소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곧, 깊고 청량한 향과 함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완성되었다.
달큰하고 깊은 맛.
끝맛은 청량해, 과연 황궁에서 인기가 많은 차임을 알 정도였다.
이름이 '레소난티아'였나?
미아 교수는 감탄 끝에 입을 열었다.
"요새 평가 준비로 고생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을까 하여 찾아왔어요."
"하하, 총괄인 제 책임인데 도움이랄 거야 있겠습니까. 하지만 준비할 것들이 많은 건 사실이지요."
"사실, 저는 마법도 쓸 줄 모르고, 필기시험 문제도 다 내버려서-. 이번에 꽤 중요한 자리잖아요. 호호."
그녀의 따스한 마음씨는 트레일 교수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게 했다.
미아 교수는 평민 출신임에도 미토스 아카데미의 교수 자리에 오른 인재였다.
그녀의 방대한 역사적 지식은 모든 교수가 인정할 정도.
트레일 교수는 차를 음미하며 고민했다.
그녀는 필기 담당이기도 해, 이미 문제 고안을 끝내 두었을 터.
그가 고민하고 있을 때, 미아 교수의 입이 열렸다.
"그럼, 이런 방법은 어떠신가요?"
"무엇이죠?"
"그건-."
제74화
- 무지는 때로, 용기를 만든다
* * *
미아 교수가 떠나간 후, 트레일 교수는 상념에 잠겨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그녀가 했던 발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미아 교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미토스 아카데미의 어두운 부분을 확실하게 짚었다.
미토스 아카데미는 재능 있는 자들을 선발하고, 재능 있는 자들을 키운다.
평등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커리큘럼.
무한한 경쟁과 평가 속에, 많은 이들이 도태되고 떨어져 나간다.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미아 교수는 이젠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귀족들.
특히 가문이 있는 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무기를 하나씩 쥐고 태어나기 마련.
고유의 마력이 짙게 섞인 피는 고유한 능력을 가지게 해 주었으니.
그런 이들이 아카데미에 들어오는 것까진 좋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래서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들은 경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번에는 숨겨져 있는 이들의 재능을 끌어냈으면 좋겠어요.>
<도와주세요. 교수님.>
"어렵군, 어려워-."
후우-.
한숨을 쉬었다.
그는 한쪽에 걸려 있는 곰방대를 바라봤다.
오래전에 끊었지만, 오랜만에 기호 식품 생각이 간절하게 나는 중이었다.
그녀는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를 들고 왔다.
지금도 아카데미 내에서는 보이지 않는 대립이 조금씩 발생하는 중이었으니까.
귀족이 모든 것을 이끌고, 평민이 아무런 힘도 없었던 옛날이 아니었다.
요즘은, 평민 중에서도 능력 있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이사장님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하군. 그리고...."
트레일 교수 역시 귀족이기에 알고 있었다.
귀족.
'로열 블러드'라 불리는 그들이 가진 저력은 일반인이 따라올 수 없는 잠재력을 지녔다는 걸.
그들의 기득권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폐쇄적인 그들의 특성상, 새로운 가문이 나타나 판을 뒤집어엎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미아 교수의 발언은 이 나라, 이 대륙의 근간을 뒤흔들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그의 고민은 깊어졌다.
'일단, 이 이야기는 묻어 둬야겠구나.'
그는 결국, 한쪽에 걸어 두었던 곰방대를 집어 들었다.
시가라는 좋은 물품이 있었지만, 그는 유달리 곰방대를 포기할 수 없었다.
* * *
검은 독수리 반.
유독 평민들이 득세하고 있는 이곳에서, 재미있는 소식이 들려왔다.
카이사르 마누스가 3학년과 함께 평가를 치른다는 것.
유독 귀족을 싫어하는 이들이 그 소식을 들었다.
레벨리-말리토.
평민들이 모인 곳이었지만, 이젠 아카데미 내에서 기득권으로 성장하고 있는 집단.
그곳에 붉은 머리의 사내가 찾아왔다.
"그게 정말이야?"
"네, 저 역시 평민의 몸이잖아요. 제가 왜 귀족 편을 들겠습니까."
"그래, 루페라라고 했었나?"
"네."
레벨리-말리토의 3학년은 마나로 유형화된 칼날을 일으킬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흔히 오러라고 하는 기술이었다.
마법에 클래스가 있다면, 전사는 일정한 경지로 나눈다.
오러를 일으킬 수 있는 경지를 흔히 '소드 유저'라고 불렀다.
검 하나로 능히 수십의 군사와 맞먹는다고 하여, 십인장의 경지라고도 한다.
독수리반 3학년은 기본으로 갖춰야 할 소양이기도 했고.
"흐음-. 재밌겠네."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귀족의 콧대를 눌러 줘야지."
"카이사른데?"
카이사르.
그 이름이 가진 압박감은 상당했다.
최강의 귀족 가문 중 하나.
타고난 재능과 냉철하고 잔혹한 성격 때문에 폭군이라 불린다지.
하지만 그건 2학년까지의 이야기고.
3학년부터는 받는 교육도, 평가의 질도 달라졌다.
실력 역시 마찬가지.
완숙한 성인으로서 자리 잡는 시기이기도 했다.
"우리도 같은 A반이거든?"
"그건 그렇지."
"다 같은 A반인데 왜 쫄아. 한번 붙어 보자."
독수리반 3학년들이 작당을 시작했다.
루페라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누군가가 그에게 알려 준 사실을 그대로 알려 주니, 일이 척척 진행되었다.
문제는 자신.
카이사르와는 당분간 척을 질 생각이 없었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마주함은 본인의 무능함을 절실히 깨닫게 해 주었다.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너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재능이 보인단다.>
<왜, 내가 가르치지 못할 것 같니?>
<편견은 나쁜 거야. 역사에서도 그렇게 가르치잖니.>
그 사람이 말한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며칠 동안, 그는 비약적인 실력 상승을 이뤄 냈다.
아직 시간은 충분했고, 카이사르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냥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미토스 아카데미는 대련이나 평가 도중, '예상치 못한 사고'를 당해도 너그러이 넘어가는 편이었다.
높은 클래스의 치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교수가 항시 대기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점을 이용한다면-.
'평범한 평민이 아니게 되는 거라고.'
루페라는 두 주먹을 꾹 쥐었다.
소박하게 살았던 과거는 이제 없다.
귀족들에게 치여, 겨우 A반에 들었던 자신도 이제 안녕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평민.
한계가 분명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바꿀 수 없는 미래를 부수고 싶었다.
그렇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참이었다.
"이봐, 너도 이참에 우리랑 2학년을 제패하는 건 어때?"
"뱀반에도 슬슬 우리들의 세력을 늘릴 때가 됐지."
"저는 좋습니다."
루페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아 교수의 수업이 떠올랐다.
마침, 오늘 배운 내용에도 그런 것이 있었지.
기반은 정말 중요하고, 행동을 지지해 주는 세력 역시 무척 중요하다.
여론은 곧 명분이 되고, 명분은 대의를 만든다.
세력과 세력이 부딪칠 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무척 중요한 사안이라는 것.
'이것도 나쁘지 않겠어.'
뱀반.
마법사는 유독 귀족들의 세력이 강했다.
평민들은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무척, '아예'라고 할 정도로 드물었으니까.
마누스, 그 괴물 같은 녀석을 3학년이 붙들고 있는 사이, 자신이 귀족들을 하나씩 꺾는다.
꽤 그럴듯한 작전이라고 생각했다.
당장 생각나는 이들이 몇 있었다.
그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조금만 공유한다면?
'그림이 대충 그려지네.'
루페라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럴듯한 계획이라는 것이 더욱 자존감을 높여 주었다.
이제 과제는 딱 한 가지가 남았다.
루페라 자신의 실력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리는 것.
그건, 미지의 공간에서 그녀가 해결할 문제였다.
아마도 좋은 방법을 내어 줄 것이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잘 가라. 잘해 보자?"
루페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도 모르고 있는 것이 많았다.
무지(無知)의 탑은, 결코 공들여서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 달콤한 유혹은, 쓸데없는 용기를 만들어 냈다.
만용이라는 이름의 용기였다.
* ♟ *
마누스는 수업을 열심히 들은 후, 동아리실로 향했다.
오늘 에머슨과 루페라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끝내기로 했으니.
3학년 수업은 2학년 수업보다 조금 더 길었고, 결국 그가 동아리실의 문을 열었을 땐 모두가 도착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를 발견하고 모든 사람이 반가움을 표현했다.
웃는 얼굴들이 썩 보기 좋았다.
[호잉!]
솜뭉치가 어깨 위에서 튀어 나갔다.
알비온은 케일의 손바닥 위로 안착했다.
가끔 보면 유독 그녀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확실히 주인공다웠다.
"어서 와."
"어서 오세요, 선배!"
후배들과 친구의 환영을 받으며, 마누스는 빈자리에 앉았다.
실질적인 리더로 대우해 주는 것인지, 그곳은 가장 상석이었다.
피어슨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다들 모였으니 회의를 시작해도 될 것 같습니다! 에머슨 양이 우리 문화 교류 동아리의 가입 제안을 흔쾌히 받아 주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목숨을 구원받았으니,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주고 싶어서요."
마누스가 에머슨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경고 차원에서 말했다.
"위험한 일이다. 비밀을 발설할 수도 없다. 그래도 함께할 건가?"
"-네."
그녀의 표정은 단호했다.
아나이스와는 다른 자신감이었다.
그녀는 고고하며 우아했다.
마치, 마누스의 어머니인 베니니타스를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자아냈다.
아나이스가 어린아이 같은 활발함이라면, 에머슨은 도도한 귀족 아가씨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말했다.
우아한 몸짓이, 사교계에서 이름 좀 떨칠 것 같았다.
"저는 제 능력이 유용하게 쓰이는 곳을 찾고 있었어요. 여러분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느꼈답니다. 프라이머리 가문의 능력을 갈고닦을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요."
"재밌군."
"에머슨. 진지하게 고민하고 결정한 것, 맞지?"
케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아직도 위험한 곳에 친구를 끌어들인 건 아닌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에머슨은 우아하게 웃었다.
프라이머리 가문은 탐험 정신이 강하다.
그녀도 어쩔 수 없는 가문의 일원이었다.
"저는 모험이 좋아요. 제가 탑에서 강해진다면, 가문에도 도움이 되겠죠."
"비전투 인원이니까, 후방에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위험하면 언제라도 그만둬야 해."
에머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아리실에 있는 모두가 자신을 위해 주고 있었다.
그 사실이 얼마나 기꺼운지, 그녀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후후, 여러분들을 보니 제 결정을 후회하지 않겠어요. 앞으로 뒤에서 서포트해 드리겠습니다."
"감정도 부탁해?"
"당연하죠. 저만 믿으세요."
호호 웃으며 호언장담하는 에머슨.
그 믿음직스러운 모습에 모두가 환하게 웃었다.
전력이 는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었다.
동시에 무척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새로운 전력이 늘었다는 건, 그만큼 탑에서 쏟아지는 데몬의 수준도 높아진다는 것이니까.
'말도 안 돼. 왜 그렇게 단정 짓는 거야?'라고 물어도....
그것이 이 세계의 법칙이라는 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마누스는 화제를 자연스럽게 돌렸다.
축하해야 할 일이 끝났으니, 이젠 심각하게 다뤄야 할 문제로 넘어가야겠지.
"루페라를 지켜본 결과는 어떻지?"
"그는... 조금 이상했어."
"어떻게요?"
알라노는 루페라를 지켜본 결과를 설명했다.
탑에서 돌아왔지만, 결과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모리스라고 했던가.
그와 무척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졌다.
마치 아카데미의 기억만 도려낸 듯이.
알라노가 본 것은 식당에서의 일까지였다.
"-그 이상은 나도 잘 모르겠어.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
"그렇군."
마누스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루페라에 대한 기억은 모두가 가지고 있을 터다.
단지, 그걸 억제하고 있는 뭔가가 있을 뿐이지.
마누스의 입가가 비틀렸다.
가증스러운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에.
일러스트로만 봤을 때도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었던 인물.
'여기서도 똑같았지.'
이따금 그의 얼굴을 봤을 때, 마누스는 인상을 찌푸렸었다.
에레시스의 두 번째 간부이자, 나그네와는 라이벌 관계였지.
신도를 이끌며 다니는 나그네와 달리, 홀로 연구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문제가 조금 빨리 출제되었을 뿐이고, 기출 문제의 변형이 일어났다.
하지만 문제의 해답도, 응용문제도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떤 유형이든 큰 어려움은 없을 터다.
해법은 간단했다.
'나그네와 달리, 그 녀석은 필요 없지.'
그러니, 빨리 치워 버리는 것이 상책이리라.
제75화
- 팀원을 모으자
* * *
그것은 꽤 당혹스러운 제안이었다.
알라노는 커다란 눈동자를 끔뻑이며 다시 물었다.
지금, 마누스가 무슨 말을 한 걸까?
놀란 건 그녀만이 아니었는지, 다들 말이 없었다.
정작 제안을 건넨 마누스는 태연한 눈빛이었다.
마치 이게 일상인 것처럼.
아무것도 특별한 것은 없다는 듯이.
"왜, 무리인가?"
"무리랄 건 없지만...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래. 네게도 좋은 경험일 거다."
마누스가 제안한 내용은 간단했다.
3학년과의 평가에서 함께하자는 것.
3인 1조로 치러지는 평가에서 두 번째 조원으로 참여할 것을 제안받은 것이다.
알라노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3학년은 분명 강하다.
하지만, 그들도 언제까지고 2학년 수준에 머물 수는 없었다.
"좋아. 할게. 그런데, 다른 한 명은 어떻게 할 거야?"
"생각해 둔 친구가 있다."
"그렇다면 맡길게. 그럼, 이제 해산해도 되지?"
마누스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가 제안을 듣는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알라노는 그가 누군지 매우 궁금했지만, 말을 아꼈다.
마누스는 최고의 학생 중 한 명이었다.
1학년 때도 압도적인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폭군이라는 이명도 무릅쓰고 행동했다.
그런 그가 어중이떠중이에게 제안할 리는 없을 터다.
"그걸 왜 나에게 묻나. 동아리장은 알라노, 넌데."
"후후, 고마워.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평가 잘 받고, 탑을 올라가고 싶으면 미리 말해 둬."
네-!
회의가 끝났다.
마누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 이들은 탑으로 아티팩트를 구하러 가겠지.
실제로 이 시기는 많은 플레이어들이 장비를 맞추겠다고 탑에서 살게 되는 시기였으니까.
보아하니 케일도 완드 하나를 얻은 모양이었다.
마누스는 문득, 자신도 장비를 구비해야 하나- 생각했다.
'아직은 뭐....'
굳이 장비가 필요한가 싶기도 했다.
지금 있는 아티팩트는 죽음의 위기에서 딱 한 번 구해 주는 팔찌와 오르카의 목걸이뿐.
어차피 오르카의 목걸이가 완성되는 순간, 다른 아티팩트는 필요 없을 터다.
장비도 중요하겠지만, 아직 구미가 당기는 수준은 아니었다.
보류하도록 하고,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그는 걸음을 옮겨, 수호자 지망생들이 한창 훈련 중인 곳으로 향했다.
* * *
"하압-!"
"흐아아압-!"
거친 기합과 차가운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
구슬땀을 흘리며 거친 숨을 내쉬는 광경이 인상적인 곳.
한때 이곳에서 수호자들의 약점을 지적해 준 적이 있었지.
마누스는 천천히 연무장을 훑었다.
그가 찾고 있는 이가 훈련 중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금발의 귀공자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비지땀을 흘리며 방패를 휘두르는 모습.
'저러니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지.'
그의 일러스트는 항상 그런 식으로 그려졌다.
애초에 여자 플레이어를 노리고 만든 게임이 아니긴 했지만, 혹시 모를 유저들이 있지 않을까 해서 만든 캐릭터 같았다.
운동하는 '정말 잘생긴' 남자 캐릭터.
그것이 버클리 기예르모의 모티브였으니까.
어떻게 아냐고?
게임사가 대놓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실제로, 그들의 생각은 적중해서 기예르모는 정말 높은 인기를 가지고 있었다.
"어?"
"저, 저기, 마법사 아니야?"
"그러게, 마법사가 여긴 왜.... 흐억?"
"야야, 카, 카이사르잖아!"
으레 그렇듯, 그의 등장만으로 일대가 소란스러워졌다.
1학년은 아예 너 나 할 것 없이 훈련을 중단했고, 2학년 중 몇몇은 기예르모를 불렀다.
이따금 보이는 3학년은 인상을 찌푸릴 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저벅-.
유일하게 정장식 제복인 마누스의 구두 소리가 넓게 퍼졌다.
그의 시선은 기예르모에게 정확히 꽂혀 있었다.
누구라도 알 수 있듯, 아예 티를 내며 걸었다.
"마법사 나리가 땀내 나는 곳엔 왜 오셨대?"
"맞아. 여기서 훈련이라도 하려고?"
남자 하나.
여자 하나.
마누스의 앞을 가로막는 이가 있었다.
3학년인 것 같았는데, 느껴지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마누스는 그저 짧게 답했다.
볼일이 있어서 왔다고.
그것이 또 고까웠는지, 그들은 마누스의 앞을 가로막은 채 비켜 주지 않았다.
"선배에게 건방지네. 2학년 아니야?"
"맞아. 뱀반에선 어떨지 몰라도 여긴 독수리- 으억?"
마누스는 그저 손을 한 번 휘저었다.
압도적인 마나가 3학년의 나약한 신체를 끌어냈다.
전사, 수호자도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 역시 순간적으로 마나를 개방했지만, 턱도 없었다.
전율할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기량.
손짓 한 번만으로 3학년 수준의 학생을 가볍게 끌어내리는 컨트롤.
그 모든 것은 '폭군'으로서의 이미지를 더욱 확고하게 굳혔다.
"시끄럽군. 선배 대접해 줄 때 알아서 꺼져라. 버러지들."
"너-."
"이번엔 입도 막아 줄까."
우웅-.
마법진이 생성되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입을 다무는 이들.
쯧, 혀를 한번 찬 마누스는 불쾌하다는 듯 손으로 가슴께를 털었다.
오만하고 건방지다.
하지만, 그 태도야말로 카이사르에 가장 어울렸다.
그는 널브러져서 분노로 부들부들 떠는 이들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소란에, 기예르모도 진즉에 수련을 멈추고 눈길을 주었다.
'여전히 괴물 같은 실력이군.'
어째,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고강해진 것 같았다.
2학년?
아니, 저 정도 실력이면 4학년이나 졸업생 수준이라고 봐야겠지.
어쩌면 더 높은 경지에 다다랐을지도 모른다.
꾸욱.
방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알라노, 그리고 독수리반의 에이스와 비교되곤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마누스와 견줄 수 있는 이라고 하는 이가 없었다.
"기예르모."
"-왜 부르나."
낮게 깔린 목소리가 기분이 좋지 않음을 암시했다.
밝게 빛나는 금발과 짙은 흑발.
두 사람이 마주 본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둘은 예전부터 앙숙이라고 불렸으니까.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지 않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번 평가에서 내 조가 되어라. 3학년들과 싸울 기회를 주겠다."
"-뭐?"
기예르모는 '그 소문'이 진짜임을 확인했다.
2학년의 폭군이 월반을 위해 3학년을 때려눕히겠다고 선언했다는 것.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지만, 어쨌든 3학년과 평가를 치른다는 건 맞았다.
3학년들은 조소했다.
어느 누가 2학년인 그와 조를 짜겠는가.
아니, 설령 조를 짜도 제대로 굴러가겠는가.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들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더불어, 자존심도 커졌다.
"언제까지 2학년과 놀 건가."
"...재미있긴 하군."
기예르모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향상심이 대단하다는 것.
그 감정이 비록 자신 때문에 생성되었지만, 향상심을 자극하는 것만큼 효율적인 건 없었다.
3학년.
비록 한 살 터울이지만, 학생들에겐 1년이라는 차이는 정말 크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어찌 보면 미토스 아카데미라는 사회의 베테랑이기도 했다.
기예르모는 피식 웃었다.
"좋다. 나머지 한 명은 누구지?"
"알라노."
"해볼 만하겠군."
그가 씩 웃었다.
마누스는 챙겨 온 종이를 내밀었다.
그곳엔 버클리 기예르모의 이름이 유려한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사인은 마나로 대신하면 된다.
미토스 아카데미의 학생, 그것도 굉장히 우수한 학생이라면 이 정도는 우습게 할 수 있었으니.
기예르모는 손을 움직였다.
치이익-.
두꺼운 양피지에 마나로 이뤄진 글씨가 새겨졌다.
수호자, 그리고 전사 지망생들이 보는 앞에서, 기예르모는 선전포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2학년이, 3학년과 싸워 이기겠노라고.
"아 그리고-."
마누스는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마나의 막을 둘렀다.
무협지에서나 나올 법한 기예였지만, 그는 생각한 것만으로도 이런 기술을 펼칠 수 있었다.
그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질문했다.
"우리가 왜 이렇게 강해졌는지, 궁금하지 않나?"
"...."
금발의 사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누스는 침묵을 지키는 사내에게서 보았다.
끝없이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
자신도, 마누스나 알라노처럼 높이 올라가고 싶다는 갈망.
적어도 이 아카데미 내에서는 최고의 수호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엿보였다.
그래서 웃었다.
생각보다, 이 친구를 여정에 끌어들이기가 쉽다고 생각하여.
"그렇담 우리 동아리에 찾아와라. 지키고 싶잖은가. 그것이 버클리 가문의 근간이니."
마누스는 마나를 거두고 몸을 돌렸다.
그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양피지를 바라보며, 버클리 기예르모는 눈을 빛냈다.
그래, 지키고 싶다.
한때는 자신을 원망했었다.
'-누나.'
이건 악마의 속삭임일 것이다.
하지만, 지키기 위해선 악마와의 계약을 이행하고 그 계략까지 깨부술 힘이 필요했다.
마음이 바로 섰다.
그 순간, 마누스에게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간섭을 확인했습니다.]
[보상을 획득합니다.]
[버클리의 마음가짐을 습득합니다.]
놀라운 일이었다.
마누스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
한 걸음씩 대지를 디딜 때마다 마음이 일렁였다.
버클리.
단단한 철의 가문의 마음이 그에게 스며들었다.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라도 지키고 싶은 마음.
작은 은인을 구해 준 것에서 시작한 마음이, 곧 가문의 정체성이 되었다.
'재밌네.'
이걸로 카이사르의 마음이 흔들릴까?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버클리 가문의 근간이 감정 한구석에 똬리를 튼 것이 느껴졌다.
이 감정은, 필요하면 나올 것이다.
그 어떤 가지도, 뿌리를 흔들 순 없었으니, 이 또한 마찬가지의 원리리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했다.
거대한 시간의 탑을 쌓은 과정이, 마누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스킬 슬롯이 1개 남았습니다.]
[배울 스킬을 선택해 주세요.]
잊고 살다 보면 강해지는 능력.
하지만, 조금만 신경 쓴다면, 남들보다 훨씬 더 강해지는 능력.
아이러니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삶이 재밌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마누스는 짙은 미소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변수투성이.
한 치 앞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이 그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그는 혀를 굴리며 다음 스킬을 바로 입력했다.
[정령의 속삭임]
[소요 시간 : 35년]
[정령들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존재했으며, 그들의 감정을 먹고 사는 존재다.]
[그렇기에 그들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속성과 친하며,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들의 속삭임을 들으라. 정령들의 이야기는 곧, 적들의 오만함을 깨부술 것이다.]
[어둠, 빛, 물리 속성을 제외한 모든 속성 공격력 +50%]
[마법 적중 시, 일정 확률로 적의 속성 방어력 / 저항력을 없앰]
[해당 능력은 클래스가 높은 마법일수록 확률이 증가합니다.]
"이걸로 하지."
[정령의 속삭임을 습득합니다.]
마누스는 양피지를 쥐고 트레일 교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래, 이번 평가가 끝나면 그 빌런을 처리해야겠다.
효용 가치가 없는 쓰레기는 빨리 태워 버려야 환경에도 이로운 법이니.
제76화
- 열심히 말고 잘
* * *
소문이란 건 참 무섭다.
특히 사람과 관련된 소문은 더욱 무서운 속도로 퍼져 나간다.
말이라는 매개체는 오묘하고도 사악한 것이라,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었다.
아카데미라는 특성상, 그 소문은 더욱 크게 와전되고, 더욱 깊이 왜곡되었다.
마누스.
최고의 마법사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인재가, 드디어 혁명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3학년의 아성에 도전하는 자.
그 위명이 아카데미 내부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마누스. 학생회 분위기가 좋지 않더라."
"상관없다."
오늘도 마누스는 3학년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카이사르 가문이기 전에, 그는 2학년 마법사였다.
3학년 입장에선 건방진 후배라는 것.
손윗사람들은 본래 하극상을 싫어하기 마련이었다.
그건 3학년도 마찬가지.
특히, 3학년 학생회는 마누스를 고깝게 보고 있었다.
알라노는 태연하게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마누스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선배는 위험해. 알지?"
"음."
"정말, 걱정해 주는 보람이 없네."
"-괜찮다. 이미 우리 둘은 그녀가 갖추지 못한 것들을 많이 갖췄으니."
마누스는 정말 태연해 보였다.
알라노는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잘생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모르는 누가 봤으면, 핑크빛 분위기가 펼쳐지고 있을 거라 판단할 정도로 물끄러미.
걱정이 많은 자신이 잘못된 것일까.
누군가가 의욕을 불태우고, 자신을 향해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어왔지만, 알라노 본인에게 쏟아지는 감정은 익숙하지 않았다.
위대한 가문이라 불리는 집안.
거기다 빼어난 외모와 뛰어난 재능까지.
'부담스러워하는 건가.'
"흠흠-."
마누스는 시선을 의식하고 눈을 돌렸다.
눈을 마주치자, 황급히 눈동자를 굴리는 것이 퍽 귀여웠다.
옛날엔 저런 시선들로 인해 착각했던 적이 있었지.
작은 희망, 혹은 아주 작은 자존감 챙기기.
하지만 이젠 간질간질한 감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많은 사람과 스쳐 가고, 그들의 시선과 인식을 받으며 살아간 세상 속에서 깨달은 것들이.
'그렇게 무뎌지게 만들었나. 나도 찌들긴 찌들었나 보네.'
"괜찮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린 더 강해."
"-응.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뒤에서 말하는 것들에게 가장 좋은 처방전은 직접 보여 주는 거지."
실컷 떠들라고 해라.
그런 놈들치고 실속을 챙기는 이들이 없더라.
진짜 무서운 놈들은 떠들며 소문을 만들고 다니는 자들이 아니라고.
마누스는 어린아이들의 뜬구름 잡는 헛소문은 애교 수준인 곳에서 살아왔다.
힘이, 마나가, 그 밖에 다른 수단이 없으니 다른 이들을 끌어내리기 위해선 말로 승부를 봐야 했으니까.
정치, 소문, 음해....
질리도록 경험했던 것에 비하면, 여긴 힐링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3학년이라.... 이길 수 있겠지?"
"그래. 정 불안하면 탑에 다녀오는 건 어떤가. 쓸 만한 아티팩트를 구해서 오는 것도 좋겠군."
"동의해. 후배들에게 물어봐야겠네. 먼저 일어날게."
"음."
마누스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멀어져 가는 기척을 느꼈다.
그녀도 나름대로 목표가 생겼을 것이다.
남은 것은 주어진 시간 내에 얼마나 많은 것을 준비하느냐겠지.
5클래스.
그 너머 6클래스의 정수까지 담겨 있는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디까지 읽었더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기척 안으로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후우-."
오늘 책 읽긴 글렀군.
텁텁한 소리를 내며 닫힌 책이 그의 기분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금발의 사내가 곧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저렇게 존재감이 강렬하니,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이봐."
"...."
마누스는 턱을 들고 그를 쳐다봤다.
기예르모는 불만이 가득한지,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혀 있는 상태였다.
그는 한숨 섞인 말투로 한쪽을 가리켰다.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며 열심히 훈련하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우리도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훈련 같은 걸 말하는 건가?"
"그래. 2학년 중엔 네가 최강일지 몰라도, 3학년부턴 아니니까."
"웃기는군."
"뭐?"
빠득-.
뭔가 위험한 소리가 난 것 같았지만, 마누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두꺼운 책으로 훈련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가리켰다.
웃기지도 않는다.
저게 훈련이라고?
마나,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볼 수 있는 마누스에겐 그저 소꿉장난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적나라하게 쏟아 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딴 식으로 훈련할 거면, 저번에 나와 대련했을 때의 움직임을 복기하는 게 백 배는 이로울 거다."
"지금 수호자와 전사들을 모욕하는 건가?"
"모욕이라는 말도 그만한 긍지와 노력이 수반되었을 때나 할 수 있는 말이지."
[간섭이 시작되었습니다.]
마누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만히 있자니, 내려다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서로의 시선이 부딪쳤다.
기예르모는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려 했지만, 애써 꾹꾹 눌러 참았다.
수호자는 누군가를 지키는 자이기에, 지켜야 할 대상에게 증오를 품을 순 없잖은가.
지난날의 관계야 어찌 되었든, 지금은 그를 지켜야 하는 입장이니.
마누스는 그런 기예르모의 눈빛을 아주 정확히 읽어 냈다.
그의 마음을 달래는 것도 그가 해야 할 일이겠지.
'어떤 말을 해 주는 게 좋을까.'
듣기 좋은 말이 있고, 무작정 내뱉는 말이 있다.
지금까지 마누스가 그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면, 지금은 조금 달라야 할 터다.
소중한 전력이고, 장차 영웅이 될 인재였으니까.
원작보다 더 성장한 그의 뒤에 서 있으면, 훨씬 든든해지겠지.
그러기 위해 간섭하기로 했다.
마누스는 '열심히'와 '잘'의 차이점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잘 들어라. 훈련은 '열심히'가 아니라 '잘'해야 하는 거다."
"...."
"저렇게 비지땀을 흘려서 뭐가 얻어지지? 체력? 근력? 한계까지 내몰리지도 않는 육체가 성장해 봐야 얼마나 성장하지?"
기예르모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모욕은 누가 했던 거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불만이 있었던 건가?
혼란스러운 와중, 그의 가슴을 후벼 파는 단어들이 마누스의 입에서 나왔다.
그래, 아니꼽고 재수 없는 녀석이지만-.
틀린 말을 하는 녀석은 아니었으니까.
"단순히 땀을 흘려 시간만 보내는 거라면, 난 사양하지. 주어진 시간은 똑같은데, 왜 더 가치 있는 일에 신경 쓰지 않는 건지 모르겠군."
"그래도 합은 맞춰야 할 거 아닌가."
"그건 내가 알아서 맞출 테니, 넌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어처구니가 없군. 마법사가 그런 발언을 해?"
"마법사이기 이전에 리더다. 3학년?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허황된 것들인지 깨닫게 될 거다."
기예르모는 자신감 넘치는 그의 말에 내심 안도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어설픈 훈련보다, 개인의 역량을 높이는 편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거지.
흘끔, 기예르모는 언뜻 보이는 마누스의 책의 제목을 읽었다.
그러고는 속으로 경악했다.
『원소와 5클래스 이상의 마법 이론』
'괴물 자식.'
보통 학생이라면, 아니 웬만한 마탑의 마법사도 이해하지 못할 서적이었다.
아카데미 내에서도 교수가 읽거나 논문을 위해 참고 자료용으로나 사용할 수준의 책.
그러나 마누스는 저런 책을 스스로 이해하고, 공부하는 중이었다.
그제야 기예르모는 눈앞의 마법사가 얼마나 까마득한 괴물인지 인지했다.
고개를 돌려 훈련...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체조를 하는 학생들을 바라봤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예르모가 봐도, 저건 소꿉장난에 불과했으니.
'잘...해야 한다고.'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던 세계가 부서졌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가 해 왔던 것들은 모두 허사였던 걸까?
아마 그건 아니겠지.
의문이 커져 나가는 걸 막은 건 다름 아닌 마누스였다.
"고민이 많은 것 같은데, 넌 열심히만 하면 된다."
"재능이라는 건가."
"이해가 빠르군."
기예르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납득했다는 듯, 선선히 자리를 떴다.
열심히.
잘.
재능 있는 자들이 노력하면 반드시 빛을 보는 이유.
남들은 머리까지 써 가며 골머리를 썩여야 할 때, 그들은 열심히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해리슨이, 버클리가 그랬다.
그 밖에 다른 가문 중에서도 재능 있는 자들이 그러했다.
'하지만, 재능도 무한한 것이 아니지. 그때가 되면, 또 다른 답을 찾아야 할 거다.'
듬직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마누스의 눈빛이 푸르게 빛났다.
사실 그가 걱정하는 것도 일리는 있었다.
실제로 아카데미에서 조원을 모은 이들은 모두가 합을 맞추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 있었으니.
하지만 왜일까.
마누스가 보기엔, 그저 놀이에 심취해 있는 것만 같았다.
저들에겐 죄가 없다.
재능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일 뿐.
'나도 마찬가지였지.'
씁쓸한 과거를 삼키며, 그는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더 거부감이 드는 걸지도 모른다.
저들을 보고 있으면 보잘것없던 자신이 떠올라서 그런 걸지도.
그는 다소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불쾌했던 기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히 가라앉았다.
카이사르의 마음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 덕에, 마누스도 냉정한 감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차라리, 이게 나아.'
나약한 자신은 필요 없다.
그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하등 쓸모가 없었으니까.
* * *
알라노는 준비를 위해 자료실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정보력은 어디까지나 2학년에 국한되어 있었다.
3학년은 3학년 학생회가 관리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당장 3학년과 붙어야 하는 상황.
특히 이번 평가는 제국에서 크게 후원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많이 격해질 테고, 다양한 사고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후우... 어쩌다 이렇게 돼서는."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을 위해서라도 정보 수집은 필수.
그녀는 학생회가 가진 정보를 이용하기로 했다.
무리수를 둘 필욘 없었다.
이름과 가문 정도만 알아도 충분할 테니.
마누스, 그리고 자신에겐 그 정도 지식으로도 충분히 대응책을 생각할 수 있으리라.
학생회실에 다다랐을 때, 그녀의 앞으로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알라노, 안녕."
"...루페라구나."
"맞아. 평가 때문에 찾아왔어."
선량한 얼굴로 다가오는 루페라.
어딘가 모르게 찝찝한 것은, 그녀가 그의 치부를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일까.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루페라의 얼굴이, 아주 두꺼운 가면으로 이뤄져 있는 것 같았다.
알라노는 절로 내려가는 입꼬리를 붙잡으며 루페라의 말을 받아 주었다.
일단 대화 자체는 정상적으로 해야 할 테니까.
"혹시, 조원이 없다면 나랑 하지 않을래?"
"-미안. 난 3학년들과 평가를 치르기로 했거든."
"뭐?"
이번엔 루페라가 놀랄 차례였다.
그의 가면이 아주 조금, 아주 미세하게 부서졌다.
알라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냉철하게 돌아섰다.
얼음 여왕이라는 별명이 떠오를 만큼 단호한 행동이었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기로 했거든. 그 애랑."
"...."
그건, 오해를 아주 많이 불러일으키는 발언이었다.
제77화
- 질투와 증오는 이따금 무리수를 만든다
* * *
학생회실 앞에서, 루페라는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방금 들은 소리가 뭔가 싶어서.
혹시, 아직도 그 기묘한 공간에 갇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손끝과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이곳이 현실이라는 걸 생생하게 각인시켰다.
지금, 내가 들은 소리가 현실이라 이거지?
"하-."
어처구니가 없었다.
설마, 위대한 가문의 그녀가 그 폭군과 친할 줄은....
착오가 생겼다.
본래 루페라 본인의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알라노.
그리고 레벨리-말리토의 간부 하나를 이용해서 2학년을 장악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 계획이 시작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대체 그놈하고 무슨 연이 있는지부터 알아내야겠어.'
요새 붙어 다닌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라노까지 3학년 시험에 지원할 줄이야.
학생회장인 그녀는 2학년의 자리를 고수할 줄 알았다.
아니, 애초에 3학년과 붙는 것은 마누스 혼자가 아니었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비틀비틀, 그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쓸쓸히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 된 이상-.'
그는 선택해야 했다.
부글부글 끓는 감정을 표출할 곳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았으니까.
그는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눈빛은 차가웠으며 목적 없이, 그저 살육을 원하는 맹수와 같았다.
아카데미에는 밝은 면도 존재했지만, 분명 어두운 면도 상당했다.
루페라는 그곳에 발을 들인 것이다.
"음?"
"여기 올 얼굴은 아닌데."
"누구였지?"
시선이 느껴졌다.
불량한 이들 특유의, 여기저기서 도태된 자들의 시선.
호기심과 동질감.
그리고 한 명의 희생양이 들어왔구나- 하는 동정심.
루페라는 그 모든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너희들이 나를 멋대로 판단하지?
제대로 적응도 못해, 아카데미에서도 음지를 전전하는 것들이-.
"야."
한심하고 저열한 것들의 낯짝을 보고 있자니, 알라노에게 당했던 무시가 떠올랐다.
그 더러운 기분이 그의 감정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루페라 안에 있던 폭력성이 세상 밖으로 뛰쳐나오기 위해 발톱을 휘둘렀다.
"야? 너 누구그악!"
"하등 쓸모없는 쓰레기들이 왜 눈을 그따위로 뜨고 있는 거지?"
자신은 선택받았다.
너희들은 못 올라가는 곳에 올라갈 수 있다고.
늬들이 뭔데 그딴 눈빛을 뜨고 있는 거야.
루페라의 마법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그녀가 준 약은 마나를 대폭 늘려 주었고, 오성을 확대해 주었으니까.
그런 그가 펼치는 폭력은 도태되어 음지에 숨어든 이들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큰 힘이었다.
"말해 보라니까. 왜 그딴 눈으로 날 쳐다봤냐고-."
"아니, 난-."
"그래, 내가 이곳에 왔다고 해서 너희 같은 벌레들과 똑같은 줄 알았지. 하, 이거 기분 더럽네."
"자,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 이거 놔."
루페라는 그의 말을 듣고 씩 웃었다.
잘못했다고?
그렇담 벌을 받아야지.
"잘못했으면 죗값을 치러야지. 응?"
콰드드득-.
섬뜩한 소리와 비명이 흘렀다.
아카데미의 음지에서 새로운 폭군이 탄생하려 하고 있었다.
끔찍하고도 무서운, 그러나 너무도 천한 자였다.
"아주 잘되고 있네."
아카데미 창문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누군가가 웃음을 지었다.
루페라가 알고 있다면, 당연히 아카데미에서 활동하는 자일 터.
그녀는 폭력의 장면을 두 눈에 똑똑히 담았다.
의도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더러운 귀족 놈들의 뿌리를 뽑을 기틀이 마련되는 거지.
아카데미 내부가 아주 재밌게 돌아갈 거야.
"싸움 구경은 언제나 재밌단 말이지. 그 건방진 꼬마도 슬슬 폭군의 자리에서 내려올 때가 됐지?"
그녀는 흥얼거리며 계속 창밖을 바라보며 처절한 광경을 즐겼다.
그녀의 위에 누가 있는지도 모른 채.
* * *
"예상을 한 치도 빗나가질 않는군."
아무도 없는 곳.
마누스는 책에서 잠시 눈을 떼고 저 아래를 바라봤다.
마침 맞은편 건물에서 그녀가 아주 잘 보여, 절로 시선이 옮겨 갔다.
그 밑, 개미처럼 아웅다웅하며 움직이는 이들도 보였다.
루페라는 뒷골목을 점령하려는 것처럼 아카데미의 음지를 휘젓고 다녔다.
텍스트로 보고 있을 땐 별 감정이 들지 않았는데, 직접 보니 그만큼 추한 몸부림도 없었다.
이래서야, 일진 놀이랑 뭐가 다르단 건지.
"역시, 저걸 먼저 없애야겠어."
문제는 그녀의 은신처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그건 블랙과 화이트에게 물어보면 되려나.
그것도 아니라면, 에머슨에게 탐색을 부탁해야겠지.
그녀와 직접 부딪치는 건 평가가 끝난 다음.
자신이 가장 뛰어나다며, 귀족들에게 반감을 품은 이가 몰락하는 건 꽤나 통쾌했다.
저 여인이 주인공에게 나불거렸던 말들이 혹여 변수가 될까, 마누스는 고민했다.
'애들 관리해 주는 것도 제법 익숙해지긴 했는데-.'
저 여자가 하는 말은 볼 때마다 찝찝했단 말이지.
수도 없이 읽고 들었던 자신도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데, 처음 겪는 다른 이들은 어떨까.
저 여자를 제압하고 난 뒤엔 나불거리는 주둥이부터 어떻게 해야 할 터다.
그것 말고도 개인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원작에서는 흐지부지 넘어갔었지만, 저 여자도 에레시스의 간부 중 하나일 터다.
그런데 나그네와는 정보 공유를 완전히 하고 있지 않았다.
'저 여자가 탑의 존재를 알아낸 지도 꽤 지났는데, 나그네는 이제야 탑의 존재를 알아차린 걸 보면....'
둘 사이에 뭔가가 있다든가, 아니면 에레시스 내부에서도 여러 종파가 나뉘어 있든가겠지.
의외로 배경 설정이 친절하지 않았던 게임이었단 말이지.
마누스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머릿속에 그리며 미소 지었다.
"실컷 웃어 두라고."
언제나 하늘 위엔 또 다른 하늘이 있는 법.
애석하게도, 저 여자는 그걸 몰랐다.
* * *
시간은 흘렀다.
각자가 치열하게 준비했던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학생들이 자신의 기량을 내뿜는 시간이 도래했다.
아카데미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인 중간고사, 기말고사, 연말 평가도 아닌데 북적임이 대단했다.
각지에서 인재를 탐하려는 이들이 속속 모였다.
필기, 대련, 몬스터 사냥.
이 대륙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필수적인 항목들을 체크하는 시간이었다.
결과와 과정을 모두 평가하며, 교수의 종합 점수로 반이 갈린다.
1학년들에겐 첫 번째로 반 쟁탈전이 벌어지는 시점이기도 하지.
실제로 게임에선 A반에 가까울수록 스킬 익히는 속도가 빨라지게끔 구현했다.
'교수들이 가르쳐 주는 것도 많아지고.... 어쨌든, 지켜봐야겠군.'
1학년 주인공 일행들이 얼마나 잘해 나갈까.
솔직히 걱정할 건 없었다.
이만큼 떠먹여 주었으면 A반에 계속 머무는 건 알아서 해야지.
변수라고 한다면, 역시 루페라일까.
요 며칠, 루페라의 마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더럽고 끈적한, 그러면서도 언제든지 날카롭게 찌를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는 마나.
더없이 순수하고 깨끗한, 그리고 끝도 모를 정도로 정순한 마누스 본인의 마나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마나였다.
"오, 저 애가...."
"벌써 대단한 기세를 뿜어내는군요."
"에잉, 우린 못 먹을 감 아닌가. 어차피 카이사르 마탑으로 들어갈 테니."
"하긴... 그렇죠."
마누스에게 우르르 쏠렸던 시선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누가 감히 카이사르의 자제를 탐낼 수 있단 말인가.
위대한 가문의 분노를 견뎌 낼 수 있는 놈들만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으리라.
마누스에게서 옮겨 간 시선이 닿은 곳은 알라노, 기예르모, 그 밖에 다른 인재들이었다.
알라노와 기예르모 역시 장래가 탄탄한 친구들이었다.
두 팔 벌려 환영할 곳이 있었고, 그곳이 대륙을 호령하는 집단이었다.
'저런 이들 말고, 어디 없나.'
황궁에서 파견 나온 정보원이 주변을 훑었다.
3학년부턴 데려갈 인재들을 어느 정도 추려 두었다.
3년이라는 데이터가 쌓이고 쌓여,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었다.
재능과 노력, 성품이라는 건 단기간에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떡잎이 푸르고 싱싱하게 자라 있는 이들은 이미 1학년 때부터 그 싹을 무럭무럭 자라게 만들었다.
앞으로 그 위치가 뒤바뀔 일은 극히 드물 터.
그가 진짜 주목하고 있는 이들은 1학년과 2학년.
'오늘은 1학년에서 좀 찾아볼까. 대련까진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니-.'
일단 교수들에게 물어보는 것부터 시작해야지.
가장 가까이서 그들을 지켜보고, 그들을 평가하는 이들이었다.
교수들의 평가야말로 제법 정확하다고 봐야겠지.
다른 이들은 필요 없고, 딱 세 명에게만 물어보면 된다.
원소학의 트레일 교수.
소환학의 샨들러 교수.
그리고 마투학의 제니퍼 교수.
"흠, 그 괴물을 다시 만나야 한다니, 내키진 않지만."
"누가 괴물이라는 거냐. 멍청한 놈아."
쾅-!
난데없이 머리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소리 지를 새도 없이 주저앉아 머리를 문지르며 위를 쳐다봤다.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할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정보원은 흘끔, 등 뒤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생각했던 괴물이 그곳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기척 좀 내고 다니시면 안 됩니까? 대장님의 주먹은 무기라니까요."
"네놈 주둥이를 탓하거라. 그리고 내가 황궁에서 나온 지가 언젠데 아직도 대장 타령이야?"
허리까지 오는 개량형 외투.
배꼽이 다 드러나 보이는 탱크톱.
움직임이 편한 바지에 단단한 워커를 신고 있는 여인.
처음 캐릭터가 공개되자마자 판타지 세상에 웬 스트리트 패션이냐고 말이 많았던 여인.
하지만, 파격적인 행보와 그녀의 과거 행적 등이 알려지면서 단숨에 인기 캐릭터가 되었다.
헤스 제니퍼.
마투학 교수이자, 평민에서 작위를 수여 받고 귀족이 된 여인.
제국의 철퇴라고 불렸던 자였다.
"어쨌든,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대장, 아니 교수님."
"오냐. 황제가 또 일을 벌여서는 골치 아프게 되었구나."
"하하, 그만큼 학생들에게 관심이 많다는 뜻이겠지요."
제니퍼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인재가 많다.
물론, 자신과는 연이 없는 인재들이었지만.
"트레일 놈이 부러워. 좋은 놈들을 많이 채 가고 있으니."
"그런가요? 하긴, 교수님 수업은 지옥 그 자체...."
"뒈지고 싶냐?"
"하하, 농담입니다. 마투학이 인기가 없긴 한가 보네요."
씁쓸한 말이었다.
마투.
그것은 황궁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무술이었다.
병장기를 차고 있지 않은 이들이 방심한 적을 때려눕히기 위해 만들어 낸 무술.
적의 방심을 유도해 치명상을 입히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마법사를 인간 병기로 만들어 주는 무술로 발전했다.
하지만 수호자, 전사들의 무학이 있는데 굳이 마투학을 배우려는 마법사는 없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
"2학년 중엔 아무도 없더군. 저놈은 좀 탐나던데 말이야."
제니퍼의 시선이 어느 한 곳으로 향했다.
무심히 걸어가는 푸른 눈동자의 남자.
근골도 튼튼하고 가지고 있는 마나도 정순하다.
그 깊이는 또 어떤가.
하지만 그는 그녀가 절대 가질 수 없는 보물이었다.
쩝, 입맛을 다시고 있으니 옆에서 정보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1학년 중엔 없습니까?"
"1학년이라.... 내 수업은 2학기부터 잡혀 있긴 한데, 역시 A반에 있는 녀석들이겠지."
"A반... 알겠습니다. 커피라도 드시렵니까?"
"오랜만에 옛 부하에게 대접받는 것도 좋지. 가자."
그녀와 그가 몸을 돌렸다.
그들이 관심 있는 것은 오직 대련과 사냥.
시간이 남는 동안, 든든하게 배나 채울 생각이었다.
'1학년 A반이라-.'
정보원은 A반을 되새기며 걸음을 옮겼다.
초반부터 제니퍼와 만난 건 행운이었다.
그녀의 안목을 살짝 빌리면, 인재들을 찾을 수 있겠지.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제78화
- 상상만 하랬더니 만들어 버렸네?
* * *
평가는 지체 없이 시작되었다.
마누스는 3학년들과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갑자기 몰려온 인파에, 학생들은 다소 긴장한 듯 보였다.
하지만 평가가 시작됨과 동시에 긴장감 대신 팽팽한 전의만 남았다.
지켜야 하는, 혹은 쟁탈해야 하는 싸움이었다.
단순한 평가가 아닌, 가문과 자신의 명예가 걸린 싸움이었다.
옛 추억을 일으키는 장면임과 동시에, PTSD를 일으키는 이벤트이기도 했다.
물론, 게임이니 공략으로 인해 모두가 만점을 받는 시험이었지만.
마누스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문제를 달달 외웠었지.'
"지금부터 세 시간. 그 안에 모든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감독으로 들어온 교수가 마법을 펼쳤다.
일명 '안티 필드'라고 불리는 마법.
마나를 억제할 뿐만 아니라, 마나를 사용하는 이를 감지하는 마법이기도 했다.
이 시험은 순수한 지식만을 테스트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어쭙잖은 커닝은 바로 실격 처리되었다.
애초에 할 수도 없었지만.
시험지 넘기는 소리, 펜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이따금 고민하며 작게 한숨 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옛날 생각나네.'
긴장된 분위기와 사각거리는 소리.
그 무거웠던 중압감이 사라지고 광경을 바라보자, 약간의 추억이 생각났다.
돌아가시기 전, 부모님은 꽤 엄하셨지.
시험 성적을 숨기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던 적도 있었다.
곧 부질없다는 걸 깨달았지만.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이곳이 진짜 시험장임을 깨달았다.
'단순히 암기만 해서는 풀어낼 수 없는 문제들이 많아. 역시 미토스 아카데미라는 걸까.'
플레이어들에겐 고난도 지식을 요구하는 문제는 풀게 하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텍스트 형식으로 나왔던 지문 중 몇 가지를 추려 문제로 만들었지.
하지만 실제 문제지는 훨씬 고난도의 문제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패시브 아니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다니까.'
마법 술식을 풀어내, 시험지에 새겨 넣는 문제도 있을 정도.
그야말로 마법적 지식을 테스트하는 시험이었다.
마누스는 거침없이 펜을 놀렸다.
수업 시간에 배웠던, 아니, 보고 들었던 내용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났으니.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자신만의 해석을 더한 풀이를 써 나갔다.
그렇게 정신없이 시험을 치르고, 마지막 문제에 도달했다.
'흠.'
[번개, 3클래스 이상, 상태 이상 효과를 하나 넣은 마법 술식을 만들어 보시오.]
[5점]
[마법 술식을 만들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의 창의력을 보여 주세요.]
새로운 마법.
말만 들었을 땐, 식겁할 만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교수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집단지성이라는 말이 있듯, 머리가 많이 모이면 하나는 얻어걸리기 마련이다.
수백, 수천 명의 상상력을 그러모아 쓸 만한 아이디어를 추려 낸다면, 새로운 마법의 뼈대를 세우는 것도 가능했다.
아직 미숙하지만, 분명히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의 아이디어.
마지막 문제는 아직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들의 생각을 추려 낼 문제였다.
'마법이라-.'
마누스는 상상력과 효율성을 모두 생각해 보았다.
지금 구현된 전격 마법은 공격 쪽에 치중되어 있었다.
전격이라 함은 무엇인가.
고열로 생물을 태워 버리고, 생물의 신호 체계도 망가뜨릴 수 있다.
전류, 전압 등등... 관련 용어는 많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전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기능만 생각해서 마법을 만들어 보면 될 것이다.
'마비. 그리고 마법사의 고질적인 약점을 커버할 수 있는 부분이면 되겠군.'
트랩 형태의 마법을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밟거나 사용자의 의지로 발동할 수 있는 마법.
거기다 감전을 통한 일시적인 마비.
고열의 폭파.
'이 정도면 3클래스 정도의 위력은 되겠군. 조금 더 개량한다면 2클래스까지도 낮출 수 있을 거다.'
마누스는 눈을 감고 이론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집중했다.
술식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했다.
해당 효과를 넣은 선분을 짠 다음, 충돌하지 않게 모형을 만들면 되는 것.
3클래스이니, 128개의 선분을 마나의 충돌 없이 이어 붙여야 한다.
충돌, 충돌, 충돌.
마누스의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전쟁이 일어났다.
이리저리 선분을 이어붙이며 최적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128개의 선분으로 만들 수 있는 도형은 과연 몇 개일까?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카이사르의 재능이 실패할 가능성들을 쳐 냈다.
나무가 곧고 바르게 자라기 위해서 불필요한 가치를 쳐 내듯,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불필요한 술식을 배제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됐다.'
완성했다.
이론일 뿐이지만, 어쨌든 됐다.
남은 것은 마나를 이용해 실제로 시연해 보는 것뿐.
마누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들이 많이 빠져 있었다.
남은 시간은 약 5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만큼이나....'
까딱 잘못했다간 시간이 오버될 뻔했다.
그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뭐죠?"
"마지막 문제 때문에 잠시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 문제라면... 마법 술식 문제로군요. 그냥 적어도 됩니다만."
"마법, 완성했습니다."
마누스는 덤덤하게, 그러나 충격적인 내용을 입에 담았다.
그가 눈을 감고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때, 많은 이들이 의문 섞인 눈초리를 보냈다.
누군가는 '제아무리 카이사르라고 해도 3학년 수준은 무리인가 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남아서 끙끙거리고 있는 이들이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번쩍 들 정도였다.
"-네?"
"안티 필드가 펼쳐져 있어, 시연이 불가능하군요. 옮겨 적기엔 시간이 부족하니, 교수님이 판단해 주시죠."
"...정말입니까?"
마누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는 손을 휘저어, 교실 전체에 깔려 있던 마나를 거뒀다.
다른 이들의 커닝 여부보다 마누스의 말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으니까.
여기 남아 있는 몇몇의 성적이 대폭 뛰어도 괜찮다.
어차피 내실이 튼튼하지 못하면 금방 추락할 테니까.
그가 들뜬 어조로 말했다.
"그럼, 여기서 펼쳐 보세요. 제가 감독의 권리로 판단하겠습니다."
"그럼...."
파지직-.
마누스는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했던 마법을 차근차근 조합했다.
마나가 올올이 펼쳐지며, 기하학적인 문양을 만들어 냈다.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묘리를 알아본 교수.
입이 천천히 벌어지며 있을 수 없는 일에 경악했다.
완성된 마법이 교실 바닥에 펼쳐졌다.
[스킬 : ???을 습득했습니다.]
[고유 마법입니다.]
[이름을 지어 주세요.]
'이런 것도 있었나.'
게임 시스템으로는 구현되어 있지 않은 메시지.
마누스에게 새로운 자극을 던져 주는 메시지였다.
나만의 마법을 창조하는 것.
단순히 마법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카덴차]라는 스킬 아래, 수백, 수천 개의 새로운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마누스는 이 세계의 법칙에 맞게 이름을 말했다.
"포베아라고 지어 봤습니다만."
"포베아. 함정이란 뜻이로군요. 아주 잘 어울려요."
[스킬명 : 폴게 - 포베아]
[새로운 마법이 세계에 등록됩니다.]
[세계에 간섭합니다.]
[세계선이 변화합니다.]
[해당 마법은 이제 세계 곳곳에서 연구되기 시작할 겁니다.]
[주의하십시오. 당신의 지식이 엔딩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음....'
솔직히 놀라웠다.
생각 없이 만들어 낸 마법이고, 별것 아닌 지식이라고 생각했다.
푸른 마법진이 생동감 있게 맥동했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이들의 눈빛이 거슬렸다.
게임 속 세계관이지만, 흐름은 현실과 같다.
자신 말고도 누군가의 작은 행동이 세계의 흐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을 품고 있겠지.
'너무 나대지 말라는 건지, 아니면....'
약간의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만약, 혹은, 그 밖에 부정적인 단어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와는 별개로, 교수의 입에서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마누스의 마법을 살펴본 후, 당연하다는 듯 나오는 반응.
마누스 본인의 입장에선 놀라울 것도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감탄을 터뜨리거나 놀라거나 칭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
"허어-! 이런 경이로운 일이...!"
"이 정도면 해답으로 충분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정도면 당장 마탑에 등록해 연구를 시작해도 되겠습니다."
"그럼, 이대로 마법진을 새겨 넣겠습니다."
교수는 마법진을 새길 수 있는 용지를 준비해 주었다.
3클래스.
전혀 낮지 않은 마법 수준이었다.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었던 건 이런 마법을 구상하기 위함이었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경이로웠다.
그의 재능, 그의 상상력, 그의 지식.
그 모든 것이 교수를 놀랍게 하고 있었다.
"이 영광의 순간을 함께해서 영광입니다. 학생."
"저야말로."
치지직-.
마법 술식이 새겨졌다.
교수는 그 종이를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스럽게 품에 넣었다.
그는 오늘 아주 중대한 임무가 생겼다.
이 술식이 적힌 두루마리를 안전하게 보관하고 보고하는 것.
어쩌면 위대한 여정의 시작일지도 모르는 이 학생의 결과물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
그는 벅찬 얼굴로 마누스를 배웅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마누스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시험장을 나섰다.
문을 열고 나오자, 먼저 시험을 치른 알라노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눈을 반달 모양으로 만들고는 의문을 건넸다.
"늦게 나왔네? 아슬아슬한걸."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시험은 어땠지?"
"그럭저럭, 잘 본 것 같아. 기예르모랑 같이 식사하자."
나란히 걸음을 옮기며 식당으로 향하는 둘.
마침 기예르모도 시험을 모두 보고 나왔는지, 복도 끝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수호자들은 역사적인 지식, 가문과 가문에 얽힌 사건을 짚어 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하지.
기예르모는 실제로 역사와 인물, 각 가문과 나라의 관계에 밝은 편이었다.
문제가 터졌을 때, 항상 어느 편에 서야 할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조언을 주는 역할이기도 했다.
그가 두 사람을 발견하곤 곧게 다가왔다.
"모두 시험은 잘 봤겠지?"
"물론이지. 넌 어때?"
기예르모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더 물을 것도 없이 잘 봤다는 뜻이겠지.
3학년들이 그들에게 눈총을 보냈지만, 세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마나 엘리베이터가 세 사람의 몸을 싣고 하강했다.
언뜻 보이는 밖은 인산인해를 이뤄, 진짜 전 대륙에서 주목하는 평가임을 알려 주었다.
실기의 배점은 20점.
나머지 두 과목이 합쳐서 80점이나 된다는 뜻이다.
"이제부턴 긴장해라."
"-응."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봐야지."
세 사람은 전의를 다지고 있었지만, 실은 그 누구보다 위험 분자로 취급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거대한 광장으로 향하는 그들의 눈빛이 빛났다.
세 사람을 바라보는 경쟁자들의 눈빛 역시 흉흉했다.
이곳은 미토스 아카데미.
오직 강자를 가려 내기 위한 교육의 장이었다.
제79화
-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고
* * *
미토스 아카데미는 강자를 배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
따라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강자를 배출하기에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번 평가 역시 마찬가지.
교수들이 나와, 평가의 무대가 될 장소를 즉석에서 마련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자재들이 손짓 한 번에 착착 정렬된다.
지휘자처럼 손을 슥 흔들면, 오와 열을 맞춰 둥실둥실 떠올라, 중앙 광장에 터를 만든다.
그 경이로운 광경을 바라보며, 외부인들은 미토스 아카데미 교수진의 저력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전 대륙의 가문에서 다음 대를 책임질 이들을 맡겨도 되겠다는 확신을 준다.
퍼포먼스란,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행해지는 법이었다.
[지금부터 10분 후, 대련 평가를 시행합니다.]
[황제 폐하의 특별 서신으로 인해, 개인전 3경기, 단체전 4경기, 합계 7경기를 연속으로 치르게 됩니다.]
[승패는 관계없습니다만, 그렇다고 패배가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멋지게 싸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세요.]
"개인전도 있었나?"
"그러게, 묻어가려는 놈들 어떡하냐, 개인전이라니."
"뭘 어떡해. 평소에 공부 안 한 자신을 탓해야지. 교수들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았나."
희비가 엇갈리는 공지가 흘러나왔다.
교수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3인 1조로 평가를 진행하면 묻어가려는 자가 분명 나오겠지.
그래서야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수도, 아니면 조금 더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 세분화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건, 요행은 절대 바라면 안 된다는 것.
개인전, 단체전 할 것 없이 무작위로 추첨이 되어 순서가 정해졌다.
마누스의 조는 공교롭게도 첫 번째 순서였다.
연속으로 일곱 경기를 치러야 하는 만큼, 장내의 분위기는 숨 가쁘게 돌아갔다.
"2학년 A반 카이사르 마누스, 맞나?"
"네."
"3학년 스가리아, 맞나?"
"예!"
마누스의 첫 상대는 3학년 C반의 남학생이었다.
전형적인 세계관의 평범한 마법사.
성이 없는 걸 보아, 평민인 것 같았다.
마누스는 가만히 전투준비를 하며 교관의 신호를 기다렸다.
그사이, 스가리아라고 하는 이가 진중한 분위기를 깨고 입을 열었다.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의 사담은 어느 정도 허용되는 분위기였다.
"2학년이라고 안 봐준다."
"...."
"2학년이랑 3학년의 차이를 모르는 것 같은데, 어차피 넌 '그분'에게 질 운명이야."
굳이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 마누스는 그저 마나를 정렬하고 언제든지 마법진을 가동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온몸을 관통하는 미지의 힘.
강력하고도 큰 덩치의 마나를 이리저리 핸들링하는 건, 성능 좋은 스포츠카를 서킷에서 모는 것 이상의 재미를 선사했다.
반면 스가리아는 눈앞에 있는 후배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폭군이라고 하지.
2학년과 3학년의 교류가 아예 없었기 때문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었다.
이렇게 자신의 앞길을 막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양측, 준비되었나."
두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누스는 스가리아가 아닌, 다른 전투를 생각하며 카운트를 기다렸다.
전의를 불태운 스가리아의 몸에서, 마나가 스멀스멀 피어났다.
3.
2.
1.
"시작-!"
반구 형태의 마나 장벽이 형성되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스가리아는 가장 자신 있는 2클래스 화염 마법으로 선공을 시작했다.
화르륵-!
마나가 모이고, 마법진이 온전히 제 모습을 갖췄다.
짜릿한 쾌감.
마법을 성공적으로 발현했을 때의 쾌감에 젖어, 목표가 있는 곳으로 발사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경악했다.
"느리군."
3학년이라는 이름이 고작 이 정도였던가?
이미 마누스는 두 개의 마법을 캐스팅해, 거대한 얼음의 창 두 개를 띄워 놓고 있었다.
속성별로 준비하려고 했지만, 그거까지 보여 주기엔 눈길을 너무 많이 끌 것 같아 자제했다.
[이그니오]
[글라치에 - 텔룸]
화염과 얼음이 격돌했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얼음을 녹이지 못한 화염은 그대로 냉기에 먹혀 사라졌다.
마법과 마법이 부딪쳤을 때, 승부는 두 가지로 갈렸다.
마법의 속성과 마나의 질과 양.
첫 번째는 같은 수준의 마법에서 상성 간의 우위를 점하는 방법이며, 두 번째는 압도적인 마나로 속성과 약점을 무시하고 찍어 누르는 방법이다.
흔히 말해 딜찍누라고 하던가.
"이익-."
콰장창-!
스가리아는 몸을 굴러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따가운 얼음 조각이 몸에 두르고 있는 마나 방벽을 두들겼다.
죽지만 않으면 회복 마법으로 부상을 치료할 수 있으니, 교관도 딱히 제지하는 건 없었다.
스가리아는 마법을 다시 영창했다.
상대의 특기는 얼음 마법인가?
그렇다면 그보다 속도가 빠른 전격 마법을 사용하면 그만이었다.
빠지직-.
위력은 다소 떨어질지라도 속도는 자신 있었다.
"-어?"
"여전히 느리군. 언제까지 기다려 줘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