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처럼 선택받은 자였을까?"
그녀가 어째서 틈새에서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원작에서도 그저 아이들의 정체성, 그리고 귀족이라는 것에 대한 고민을 넣어 주는 역할만 하고 사라졌을 뿐이니.
"그런 건 모르겠지만, 이대로 두면 제2의 루페라가 나오겠지."
"맞아요. 그런데... 꼭 우리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여기서 죽으면, 밖에선 모두가 잊는다고 했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빌런을 탑에서 죽여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그, 혹은 그녀가 세상에 남긴 발자취를 모두 끊어 버리기 위해서였다.
무척 잔인한 말이었지만, 이건 여기 있는 이들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이곳에서 죽으면, 선택받은 이들을 제외한 모두에게 잊힌다.
어떤 인물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발자취, 흔적이 모두 없어지는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야말로 죽음이지. 완벽한.'
마누스는 바람의 마법을 압축해, 검처럼 만들었다.
꿀꺽, 누군가의 긴장감이 그대로 드러난 소리.
데몬, 몬스터를 죽이는 것과 사람을 죽이는 것은 느낌 자체가 다르겠지.
하지만, 인간이라고 해서 생명의 무게가 더 무겁냐고 물으면 글쎄.
확실하게 답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렇기에, 마누스는 거침없이 목을 잘라 버렸다.
서걱-.
"윽-."
절단면이 마찰열로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이런 곳에서 피를 뒤집어쓰고 싶진 않았으니.
데굴데굴 구르는 목은, 아이러니하게도 너무도 평온한 표정이었다.
본래는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독설을 쏟아 내야 할 얼굴이었다.
하지만 마누스의 마법 때문에 그 이벤트가 모두 스킵되어 버린 모양.
"끝났군."
"-그러네."
"후아, 뭔가 되게 길었던 느낌인데, 안 그래요?"
피어슨이 깊은 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월말 평가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던 사건.
데몬이 밖으로 나오는 것도 한동안 줄어들겠지.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며 사건의 끝을 바라봤다.
처음으로 죽음의 문턱을 구경하고 왔다.
여기 있는 모두가 절실하게 느꼈다.
"우린, 더 강해져야 해."
"-맞아요."
"마누스 선배가 없어도, 이런 놈쯤은 이길 수 있어야 한다구요. 그게...."
마누스는 푸념하는 이들의 말을 끊고, 큰 소리로 말했다.
"괜찮다."
"-도움이 되는...."
"항상 말했지. 너흰 그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니, 자책하지 말아라.
조급해하지 말아라.
"너희는 스스로의 힘을 과소평가할지 모르지만, 기대 이상으로 잘해 주고 있다. 특히 아나이스."
"-네?"
"밝게 빛나는 태양은, 스스로 빛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
그녀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푸른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스스로 움츠러들지 말라고.
자책하지 말라고.
"알겠, 어요-."
"모두 느끼는 바가 있겠지. 더욱 나아가기 위해선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할 거다. 하지만...."
마누스는 연설하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해야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다.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이들이 있으니, 다소 길더라도 확실하게 뜻을 전하고 싶었다.
본래 뛰어난 자 옆에 있으면 열등감이 생길 수 있다.
허나, 그걸 향상심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들은 눈부신 빛을 뿜어낼 것이다.
원작에서 플레이어들이 그랬던 것처럼.
각 분야에서 최고가 되듯, 열등감에 잡아먹히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
"열등감은 버려라. 질투하고 경쟁하는 건 좋다. 하지만, 그게 열등감으로 번지는 순간 더 나아갈 수 없을 거다."
"네, 선배."
"오올, 좋은 말 해 주는데? 맞아.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말렴. 너희들은 친구잖아, 안 그래?"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
그래.
친구끼리 질투할 수도, 경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쁜 마음으로 이어지는 건 안 된다.
"명심할게요."
"다들 고생했다. 아, 그리고 케일. 넌 잠시 날 따라와라."
"네."
"그럼 해산인가요?"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고 긴 전투가 끝났다.
그들에겐, 많은 변화를 가져다줄 전투였다.
[전투 종료]
『 ??? - 키메라 / 미아 : 아나벨』
<케일은 패시브 : [카운터]를 익혔다.>
<기예르모, 니아가 파티에 합류했다.>
<모두의 레벨이 올랐다.>
<케일 : 38> <아나이스 : 35> <알라노 : 41> <멜라니 : 36> <피어슨 : 34>
<에머슨 : 34> <기예르모 : 40> <니아 : 44>
<사역마의 레벨이 올랐다.>
<알비온 : 17>
<피닉스 : 11>
* * *
모든 전투가 끝난 후, 아이들이 무사히 기숙사까지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 케일과 마누스는 블랙과 화이트가 있는 공간에 도착했다.
노곤하고 힘든 몸이었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피할 수 없겠지.
케일은 끔뻑끔뻑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블랙과 화이트 앞에 섰다.
그 모습을 본 두 존재가 마누스를 가볍게 힐난했다.
"애 좀 재워라."
"마법 배우러 왔습니다."
"너, 우리 말은 듣니?"
마누스 역시 약간이지만,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격전을 치렀으니 몸은 멀쩡해도 노곤한 정신은 어찌할 수 없었다.
천하의 마누스라도 그렇게 피곤했으니, 다른 아이들은 오죽할까.
"문제를 치웠습니다. 재앙은 다른 이가 만들어 내고 있었더군요."
"그렇습니까. 역시, 탑을 이용해서 무언가를 이루는 자들이 있겠군요."
마누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은 이곳에 있어야만 하는 자신들의 운명이 한탄스럽기만 했다.
밖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세상을 위협하는 것들을 한 번에 단죄할 수 있으리라.
그들은 과오가 있었다.
어리석었던 과거 때문에, 일이 이렇게 꼬여 버렸는지도 모른다.
자책하고 있는 블랙에게 화이트가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야, 뭘 그렇게 꿍해 있냐? 그게 우리 잘못이냐? 다른 놈들 잘못이었지. 그래,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예. '칼리고' 마법과 '플라투스' 마법을 배울 겁니다."
"벌써 그 정도 경지에 올랐니? 대단한데-. 이 꼬마도 같이?"
"배울 수 있을 겁니다. 쓰는 건 아직 무리겠지만."
어둠의 광선을 내뿜는 3클래스 흑마법 : 칼리고.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4클래스급 고대 마법 : 플라투스.
중후반부까지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는 마법들이며, 3, 4클래스 카덴차 레시피에 유용하게 쓰이는 마법들이었다.
새로운 마법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케일의 졸린 눈이 번뜩였다.
화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법진을 펼쳐 보였다.
화려하게 피어나는 두 개의 마법진.
화이트는 이만한 마법 두 개를 아무렇지도 않게 동시에 펼쳤다.
그것도 아주 느리고, 정확하게.
"어때, 할 수 있겠어? 이번 건 좀 어렵다?"
역으로 그려지는 도형과 화려한 별 모양의 마법진.
케일과 마누스는 마치 따라 그리기를 하듯, 자연스럽게 마법진을 펼쳐 냈다.
케일은 하나씩, 마누스는 한꺼번에 두 개를 동시에.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블랙의 눈빛에 이채가 떠올랐다.
대체 '카이사르'는 무슨 존재이기에, 저렇게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걸까.
아니, 카이사르 중에서도 저 아이가 특별한 거겠지.
'흥미롭긴 한데-. 뭘까, 이 불안함은....'
아무렇지도 않게 문제를 척척 해결하는 대담함과 능력.
그건 마치 이전 세상을 구했던, 위대한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 위대한 존재도 결국....
"쓸데없는 생각 하지, 너 또-."
"언제 제 눈알을 훔쳐 가셨습니까? 아주 귀신같군요."
"X랄, 눈에 초점이 없다 야. 어떻게 하면 날 더 열받게 할지, 아니면 옛날 생각이라도 하고 있겠지."
"역시, 당신은 못 속이겠군요."
블랙은 잡생각을 그만두고, 등을 돌려 떠나가려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미래는 변한다.
똑같은 운명을 계속해서 맞이하는 건, 바보 같은 사람이나 하는 짓이다.
그는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각종 게임들을 바라봤다.
저런 게임에서도 변수는 존재하고, 단 한 번의 수로 결말이 뒤바뀔 수 있다.
하물며 한낱 게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인생에서야, 똑같은 운명을 맞이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들은 지켜보는 자.
"믿고 기다리면 되겠죠."
"저 녀석들, 진짜 보통이 아니야. 솔직히 인간의 재능이라곤 믿기지 않아, 아직도."
"저도 봐서 알고는 있지만... 예.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좋겠군요."
화이트는 피식 웃고 두 남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건, 자신이 톱니바퀴라는 것을 인지한 이들뿐.
이미 두 사람은 자신들이 아주 거대한 톱니바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들이 없어진다면, 운명이라는 시계에 아주 큰 고장이 날 것이라는 것 역시-.
* * *
케일까지 무사히 보낸 마누스는 노곤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몸을 맡겼다.
스르륵, 그의 감각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익숙하면서도 강력한, 그림자의 기운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공자님."
"별거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시는 것치곤, 금방 잠에 빠져드실 것 같네요. 피곤하시더라도 잠깐 마시고 주무세요."
그녀는 김이 은은하게 나는 차를 내밀었다.
정신을 맑게 해 주는 차.
이름 모를 허브의 향이 몽롱한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한 모금, 입에 머금으니 제대로 이야기할 정신까지 돌아왔다.
"루페라는 어떻게 되었나."
"...죽었습니다."
"그렇군."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더군요. 외부인의 소행인 것 같습니다만."
마누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렇게 되었는가.
에레시스의 소행이겠지.
오갈 데 없는 엑스트라, 그것도 악역의 끝은 죽음뿐이라는 건가.
"연고는 있던가."
"아니요. 그가 죽었는지는... 아마 아무도 모를 겁니다. 어쩌면 우리도 차차 잊어 가겠지요."
"그렇군."
마누스는 다시 흘러가는 검은 하늘을 바라봤다.
누군가의 죽음에 의연할 순 있어도, 완전히 감정을 털어 버리는 건 아직 조금 이른 일일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그 여파는, 아무리 카이사르라 할지라도 조금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감각이었다.
"힘드시면, 언제든지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그러지."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마누스는 차를 모두 마시곤 아덴에게 잔을 건넸다.
싱긋 웃은 그녀는 스르륵, 그림자로 돌아가며 멀어져 갔다.
그녀를 떠나보내고, 마누스는 조용히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보상을 받는 순간만큼은 참을 수 없으니까.
아니, 어쩌면 이런 거라도 확인하지 않는다면, 아주 옅게 찾아온 우울함을 떨쳐 낼 수 없을 것 같아 그랬는지도 모른다.
제92화
- 인간은, 사건을 겪으면 변화한다
* * *
[S4 클리어]
[점수를 계산합니다.]
[루페라의 의도를 밝힘 / 범인 색출 / 사상자 소수 / 미아 : 아나벨 사살 / 동료들의 감정 변화]
[종합 : S]
[보상 : 마석 결정 XXL 3개]
[5년 이내 스킬 선택 습득권 1장 / 알비온 전용 스킬 선택권 1장 / 알비온 특제 영약 / 모든 스킬 습득 시간 - 10%]
[세계선의 방향이 곧게 나아갑니다.]
[앞으로 더 많은 시련이 닥쳐올 것입니다. 자신만의 결말을 향해 정진하세요.]
마누스는 누워서 보상을 확인했다.
5년 이내라-.
그리고 알비온 전용 스킬 선택권은 또 뭘까?
마누스는 항상 마나의 부족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최고급 슈퍼카에 항상 절반만 연료가 차 있는 느낌이랄까.
알고 있는 것들은 많은데, 사용할 수가 없으니 무척 답답했다.
누가 보면 재수 없다고, 얼마나 더 욕심을 내야겠냐고 욕할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원래 있는 이들이 더한 법.
'마나를 더 끌어와야겠군. 아니면....'
5년.
꽤 제한적인 숫자였다.
쓸 만한 스킬은 전부 몇십 년 단위에 있는 스킬들이었으니.
의아했다.
이번 스토리는 지금까지 겪어 온 사건 중에 가장 어려웠다.
그런데도 보상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
아니면 다른 보상이 더 가치 있는 건가?
마누스는 전리품을 모두 꺼내 보았다.
[호잉?]
알비온이 킁킁거리며 특제 영약 앞에서 기웃거렸다.
고민할 거 있나.
마누스는 곧바로 영약을 알비온에게 먹여 보았다.
와앙-.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려 영약을 삼키는 알비온.
[호잉-!]
그러고는 침대 구석으로 가,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마누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남은 보상을 모두 사용하기로 했다.
마석 흡수는 밤새 하면 될 것이고, 스킬을 골라야 할 차례였다.
'먼저, 내 스킬을 배워야겠군. 5년 이내 패시브, 마나 관련 검색.'
[검색 결과가 28건 있습니다.]
[마나 증대(소) - 30일]
[마나 역류 - 30일]
....
스킬이 주르륵 나열되었다.
마누스는 마음에 드는 걸 골라, 바로 습득했다.
그가 배운 스킬은 바로 [마나의 찬란한 축복].
한 턴마다 회복하는 마나의 양을 50%나 늘려 주는, 조건부 스킬.
[하이 레스티오]와 더불어, 최고의 회복 스킬 중 하나였다.
5년에 한에서는 이것이 최선이었고, 그의 목표 중 하나인 '힘법사' 역시 조금 멀어졌다.
그가 생각해 둔 것은 '마투술'을 바탕으로 한 근접전의 발전.
'내일 교수님을 찾아뵈어야겠군.'
보상은 아직 남아 있었다.
알비온 전용 스킬 선택권.
이런 것도 주는구나.
사역마를 빠르게 키울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장점이었다.
벌써 밥값을 쏠쏠히 하는 친구인데, 스킬까지 더해 준다면 전력에 큰 보탬이 되겠지.
무엇보다 홀로 다니는 경우가 많은 자신의 단점을 완벽하게 보완해 줄 수 있으리라.
그는 스킬 선택권을 사용했다.
"어-?"
[알비온 전용기 : 파멸의 빛]
[피닉스 전용기 : 지옥 불꽃]
[청룡 전용기 : 천뢰]
[현무 전용기 : 해일]
....
"...아니 벌써 이런 걸 퍼 준다고?"
각 사역마의 전용기가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사역마만이 배울 수 있는, 일종의 궁극기라고 할까.
벌써 배울 수 있는 것도 놀라운데, 다른 사역마의 궁극기를 훔쳐 배울 수 있다니.
왜 본인에게 돌아온 보상은 제법 짠지 대번에 깨달았다.
이렇게 대놓고 사역마를 키우라는데, 응당 그 요구에 응해야겠지.
스킬 목록을 주욱 훑어보던 마누스는 한 스킬을 보고는 즉각 결정했다.
[황룡 전룡기 : 부활의 숨결]
[마나의 절반을 소모해 팀원을 부활시킨다. 한 전투에서 5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
[부활한 팀원은 최대 체력의 절반, 최대 마나의 절반을 회복한다.]
[이는 사역마의 레벨이 올라갈수록 늘어난다.]
"이걸로 결정하지."
[알비온이 부활의 숨결을 습득합니다.]
[알비온의 마나가 부족해, 해당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건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일단 마석 결정 하나를 알비온에게 주는 것으로 하고, 나머지 두 개는 마누스 본인이 섭취하기로 했다.
커다란 마석 두 개를 입에 털어 넣고, 늘어나는 마나를 느꼈다.
미아 교수와의 전투에서 얻은 마나보다, 이 결정 두 개에서 얻을 수 있었던 마나가 훨씬 더 많았다.
모두 흡수한다면, 아마 4클래스 카덴차 두세 번은 무난하게 사용할 수 있겠지.
마누스는 잡념을 지우고 마석 흡수에 열을 올렸다.
성장해 있을 자신을 기대하며, 그는 밤을 지새웠다.
* * *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
새근새근, 룸메이트의 숨소리를 들으며 케일은 생각에 잠겼다.
다들 무얼 하고 있을까.
몸은 괜찮을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 등등.
사실, 그녀는 처음 살인 현장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과거.
아카데미가 아닌 다른 곳에 있을 때 으레 있었던 일이었다.
죽음이란 건, 생각보다 더 가까이 있더라.
'요새 아나이스가 걱정이네.'
아나이스.
당돌하고 명랑한 친구의 성격이 조금씩 변해 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마누스도 말했었지.
열등감에 잡아먹히면 안 된다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사건은 일단락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번 스며든 번뇌와 고뇌가 한 번에 사라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어떻게 하면 친구의 복잡한 감정을 차근차근 풀어낼 수 있을까.
그녀가 내뱉는 한숨이 더 깊고, 길어졌다.
같은 시각.
아나이스는 피곤과 싸우며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특별하다.
남들보다 많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고, 특별한 경험까지 하고 있잖은가.
그런데도, 그녀는 함께 탑을 오르는 친구들에게 언제나 민폐였다.
파수꾼을 잡을 때는 꼴사납게 나뒹굴었으며, 이번에도....
그녀는 집중이 되지 않는 듯, 연거푸 한숨을 내뱉다가 책을 덮었다.
"뭐 하고 있냐, 아나이스-."
자괴감이 섞인 푸념.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잠은 어차피 다 잤다.
내일 푹 자지 뭐-.
휘몰아치는 감정이 가슴을 너무 답답하게 만들어,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지금 자 버리면, 자신만 빼고 모든 것이 앞으로 훅 멀어져 버릴까 봐.
그녀는 마누스의 말을 떠올렸다.
<열등감은 안 된다.>
질투와 열등감.
향상심과 조급함.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단어들 사이의 간극을 이해하기엔, 그녀는 아직 너무 어렸다.
대체 뭘까-.
선배가 말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은, 태양처럼 찬란히 빛나는 플로이스의 마음가짐은....
고민은 깊어 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점점 고민의 수렁으로 기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물속으로 가라앉듯, 태양의 소녀는 생각의 끝자락을 붙잡고 꿈속에 잠겼다.
* * *
연무장.
밤바람을 맞으며 은은한 불빛에 몸을 드리운 소년.
이제 청년으로 넘어가려는 소년의 인상은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처음 겪어 본 이상 현상.
자신이 탑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
무엇으로부터인지 모를 선택받은 자라는 것.
강력한 적, 무수히 많이 치러진 실전.
"누나. 드디어, 길을 찾은 것 같아."
그는 항상 소망하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빛을 잃은 누이가, 다시 환한 햇살을 받아 보기를.
떳떳한 가문의 기둥이 되어, 위대한 가문이 되는 것.
어그러진 모든 것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
한때 원수 같았던 마누스는 정식으로 사과한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강해질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참으로 불공평하지.
남들은 거닐 수 없는 시간에서 특별한 것들로 마나를, 체력을 기를 수 있었다.
'이제, 가문을 더 위로 올려놓을 수 있어. 그렇게 된다면-.'
절망에 빠진 아버지도, 기울어 가던 가문도, 홀로 가문을 지탱해 오신 어머니도.
비틀려 버린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그는 앞으로 나아가기라.
버클리 가문은 자신으로 인해 전성기를 맞이할 것이다.
부정한다 해도,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다.
아카데미에서 배운 것은 비단 무력만이 아니었다.
선택, 그리고 교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주는 영향력에 대해 배웠다.
경험은 곧 지혜가 될 테고, 그의 가문을 부유하게 만들리라.
전투의 지식과 생활의 지혜를 두루 갖추는 것.
아카데미를 벗어나 세상으로 나아갔을 때, 그 누구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답은 탑에 있다.>
그래, 마누스의 말이 맞았다.
그의 가문에서 내려오는 말이 떠올랐다.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해 위험을 곁에 두어라.>
<항상 긴장을 놓지 말고, 아무도 진실로 믿지 말아라.>
<지켜서 신의를 만들되, 그들이 언제든지 품을 떠날 수 있음을 명심하라.>
"수호자는 언제나, 내일의 적을 지킨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비관적인 말들이었지만, 냉정한 현실을 일깨워 주는 말이기도 했다.
기예르모는 다시 한번 가문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오늘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반추했다.
부족한 점을 보완해야 더 높은 곳에서도 그 누구라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으니.
그는 천재였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4
날이 밝았다.
아덴에게 보고가 하나 올라왔다.
마누스의 방에서 기묘한 기류가 흘러나와, 들어갈 수 없다는 것.
아덴은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렇게 씁쓸해하셨는데, 밤새 무슨 변고가 있진 않았을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마누스는 터무니없이 강했다.
게다가 그의 옆에는 신수라고 불리는 알비온도 있지 않던가.
'기척을 감지하지 못하진 않았을 텐데-.'
"제가 가 보죠."
"감사합니다. 하녀장님."
"다들 평소처럼 부탁드립니다."
휘하에 있는 하녀들이 고개를 숙였다.
아덴은 소리 없이 발걸음을 옮겨, 마누스의 방 앞에 도착했다.
그곳엔 휘몰아치는 마나의 소용돌이가 진로를 방해하는 중이었다.
푸르게 돌아가는 흐름은, 아덴까지 넋을 잃게 만들었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녀는 손을 뻗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으니-.'
스르륵-.
그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림자를 통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놀라웠지만, 극복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의 경지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높았다.
"공자님- 어라?"
소용돌이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마누스가 아니었다.
새하얀 털이 보였다.
등에 솟은 날개와 미려하게 뻗은 몸뚱이.
기다란 꼬리와 맹수를 연상케 하는 머리.
분명, 그것은 새하얀 털이 달린 '드래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만히 웅크리고 고르게 숨을 내쉬고 있는 생물.
마누스와 똑같은 마나를 품고 있기에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성장했군요. 알비온."
솜뭉치에서 털 달린 드래곤으로.
조금은 이상한 진화 방향이었지만, 어쨌든 커졌다.
아덴은 귀여운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도로 회수했다.
아주 중요한 순간인 듯한데,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녀는 다시 그림자를 통해 빠져나갔다.
하녀들에겐 별일 아니었다고, 그러니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남기러 가야겠지.
사람은 사건을 통해 성장하고, 선택을 통해 나아간다.
마누스 역시 사람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매달고는 앞으로의 일을 기대해 보았다.
위대한 인간.
그 너머의 무언가로 성장할 공자님을 상상하며-.
제93화
- 왜 나한테만
* * *
하루는 매일 반복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사건들이 발발한다.
무한히 반복되는 하루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은 아주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그것이 역사를 만들었고, 위대한 마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 무수히 많은 하루 속에서 또 한 발자국 나아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 오전이었다.
아직 어스름한 회백빛 어둠이 이불처럼 아침 햇살을 가리고 있는 시각.
이사장, 그리고 각 반의 교수들이 모두 모여 누군가의 답안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가 올해 몇 살이죠?"
"16세죠."
"허허-."
교수들은 카이사르 마누스가 만든 새로운 마법을 보고 혀를 찼다.
자신들은 16세 때 무얼 했는가.
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 마법 하나로 일가를 일구어 낸 사람들.
그것도 모자라 모든 가문의 자제들을 가르칠 수 있는 뛰어난 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재능.
복잡한 감정에 휘둘리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학생이 바로 마누스였다.
"참신하군요. 이런 발상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닙니다만."
"무엇보다 적은 마나로 구현할 수 있도록 마법진을 짜낸 것이 놀랍습니다. 위력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만-."
"캐스팅이 빠른 마법사라면 목숨 하나 값 정도는 충분하겠어요. 허허."
마누스는 새로운 마법을 창조했다.
사실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마법이 생겨나고 사장되길 반복하는 곳이 이곳, 록스 대륙이었으니.
하지만, 이 어린 나이에 이렇게 적당하고 범용성 있는 마법을 만들었다는 것이 놀라운 것이다.
마법진을 새로 만든다는 건, 수많은 시행착오를 전제로 하는 작업이었다.
아는 지식 안에서, 이렇게 범용성 있는 마법을 몇 시간 만에 만들어 내는 건 지금 교수들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오히려 아는 것이 많기에, 고려할 것도, 마법에 대한 욕심도 많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건 연구해 볼 가치가 있겠어요."
"클래스를 높여서 연구를 진행하면, 마도사들도 쓸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더도 없이 만점이겠군요."
"그렇지요 허허-."
교수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더불어, 곧 있을 학회에 초빙하면 어떻겠냐는 말까지 나왔다.
수많은 마탑의 인재들이 한곳에 모여 자신들이 연구한 마법을 공유하는 자리.
카이사르의 마탑에서도 그 자리를 빛내기 위해 찾아오겠지.
아카데미 소속 마법사들도 학회에 참석해야 하는 의무를 지녔다.
이따금 뛰어난 인재들을 조수로 데려가, 경험을 시켜 주는 것도 교수들의 몫이었다.
이 정도 지식, 이해력, 설계력이라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뚝, 맥이 끊겼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맥없이 처박아 버린 목소리의 주인공은 마투학 교수, 헤스 제니퍼였다.
그녀는 교수들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마누스와는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있었다.
본래 어제 했어야 하는 이야기였지만,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하루 미뤄졌다.
아직 학생들이 등원하지 않았으니, 조금 더 기다리면 되겠지.
제대로 된 이야기도 나눠 보지 않았는데 다른 교수가 채 가게 놔둘 순 없었다.
-절대로.
"걔는 내가 미리 점찍었다. 마투학 배울 시간도 없어 죽겠는데, 학회를 데려가? 내년쯤엔 보내 주도록 하지."
"마누스 학생은 원소학 전공이 아니었습니까?"
"아무리 봐도-."
"그건 모르는 일이지. 딱 1년만 맡아 볼 생각이니까, 결정은 그다음에 하자고."
막무가내식 화법에, 교수들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트레일 교수와 샨들러 교수가 허허 웃으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들은 수많은 학생을 제자로 들였고, 그들은 훌륭한 마법사로 성장했다.
심심찮게 찾아오는, 아니- 오히려 골라서 키울 수 있었던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제니퍼는 상황이 조금 다르지.
마투학은 그야말로 '재능'의 학문이었다.
오랜만에 발견한 재능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욕심.
"1년. 그 아이가 마투학을 어느 경지까지 달성하리라 보십니까?"
"나도 잘 몰라. 하지만, 보통내기는 아닐 테지."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인데, 저희가 홀랑 뺏어 가면 형평성에 어긋나겠지요. 마누스 학생을 보면, 솔직히 없던 욕심도 생기긴 하고요."
"1년만 기회를 다오. 녀석이 전공을 뭘 선택하든 상관없다. 다만, 녀석은 다양한 걸 체험하고 선택의 폭을 넓혀야 해."
교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보았다.
원소 마법과 체술, 그 절묘한 조화가 만들어 낸 통쾌한 한 방을 보았다.
보통 원소학을 공부한다면, 마법진을 만드는 것에만 능숙할 뿐.
마투에 쓰이는 마나 운용은 완전히 별개였다.
마나를 외부로 돌려서 쓰는 원소 마법과 달리, 내부에서 폭발적으로 터뜨리는 것이 마투였으니.
사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배운다는 건, 검과 마법을 동시에 배우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마누스 학생이라면, 경험 정도는 괜찮겠지요."
"우려도 됩니다. 정진하고 있는 길에 혹여 방해되는 건 아닐지-."
"나도 마법사거든? 적어도 늬들보다 두 배는 많이 살았단다. 이 누나에게 맡기고 1년만 기다려."
제니퍼는 피식 웃으며 회의장을 나섰다.
교수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은 구구절절 맞는 내용이었기 때문.
황궁의 전설이라는 이명을 가진 여인이었다.
젊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나이는 어림짐작으로 70이 넘는다는 소문도 있었다.
경험과 지식, 그리고 강함이 압도적인 제니퍼였다.
까다로운 그녀의 눈에 들었으니, 어떻게든 하겠지.
"그렇지만, 학회에 참여할 수 없다는 건 아쉽군요."
"흘흘, 교수님께서 살살 꼬셔 보시지요."
"그럴까요?"
트레일 교수와 샨들러 교수가 허허 웃었다.
마누스를 향한 교수들의 욕심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 * *
그 당사자인 마누스는 오늘도 무수한 시선을 받으며 교정에 들어섰다.
어쩐지, 오늘따라 시선이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무슨 일일까.
일부러 느긋하게 등교했기에, 학생들이 평소보다 많았다.
딱히 눈에 뜨일 만한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럴까.
카이사르의 마음가짐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지금도 이 시선들은 적응이 어려웠다.
동물원에 있는 원숭이가 된 기분이랄까.
'썩 기분 좋진 않군.'
그가 본관의 로비로 들어갔을 때, 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커다란 현수막에, 『카이사르 마누스! 내 연구실로 와라! -마투학 교수-』라고 쓰여 있는 걸 보았다.
하아-.
원작에서도 기행을 많이 벌이는 교수이기에, 앞으로 다양한 일을 겪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래서였군."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 나름대로 안 들리게 속삭이는 것 같았는데, 애석하게도 모든 내용이 귀에 쏙쏙 박혔다.
이런 걸 뭐라 그러더라... 그래.
'수치 플레이라니. 두고 보자.'
마누스는 애써 무표정을 연기하며 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눈이 마주친 이들이 '히익!' 하며 시선을 피했다.
하룻밤 사이에 부쩍 깊어진 눈동자는 마주치기만 해도 원초적인 공포를 이끌어 냈다.
모세의 기적처럼 좌악 갈라지는 학생들을 지나, 마누스는 마투학 교수가 머물고 있는 곳까지 향했다.
아주 작은 복수심을 품에 안은 채.
-똑똑.
"마누스입니다."
"들어와라."
고풍스러운 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딱딱한 철제 가구가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었다.
인테리어라고 하기엔 거리가 먼, 그냥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널어 둔 배치였다.
한쪽에는 철제 허수아비가, 다른 한쪽에는 건틀릿과 그리브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광경이 보였다.
책상 역시 고풍스러운 나무가 아닌, 딱딱하고 차가운 철제 책상이었다.
"왔군. 간밤에 별일은 없었겠지?"
"예."
"현수막을 보고 온 건가? 역시 걸어 두길 잘했어."
잘하긴 개뿔.
그냥 밑에 있는 조교나 하녀를 시켜서 부르면 될 것을, 그렇게 쪽팔린 짓을 했어야 했는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마누스는 묵묵히 그녀의 용건을 기다렸다.
묘하게 들떠 보이는 표정이, 자신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 많아 보였으니.
그녀가 제안할 것은 대충 예상이 되었다.
문제는 2학기부터 시작하는 마투학 수업을 어떻게 시간을 내어 전수할 것인지였다.
"내 제자가 되어 볼 생각은 했느냐?"
"누군가의 제자가 된다는 건, 아직 이르다고 봅니다."
"흐흐,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폭군이 누구 밑으로 들어간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교수마저 폭군이라는 단어를 자신에게 붙일 줄이야.
낯간지러움을 넘기며, 다시 얌전히 기다렸다.
제니퍼 교수는 말을 길게 하는 편은 아니지만, 필요한 정보를 알아서 잘 설명해 주는 캐릭터였다.
애초에 궁금증이 생길 수 없는 말을 하니, 그녀의 교양 수업도 제법 인기가 있다고 묘사되었다.
수업만 잘 들어도 만점을 맞을 수 있는 것이 그녀 수업의 모토였으니.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기다리고 있자, 제니퍼의 입이 다시 열렸다.
"방과 후에 3시간. 딱 그 시간만 투자해 다오.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건 모두 가르쳐 주마. 그렇게 되면 2학기까지 기다릴 필욘 없겠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음? 뭐지?"
"왜 저에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모든 걸 전수해 주시겠다고 하시는 겁니까?"
제니퍼는 푸근하게 웃었다.
젊은 모습이었지만, 왠지 할머니의 깊은 주름을 연상케 하는 웃음이었다.
"난 내 유지를 잇느니, 뜻을 이어 가느니 하는 건 관심 없다. 그저 마투라는 공부가 이어지기만 하면 된다."
마투학은 비교적 역사가 짧은 무예였다.
더불어 익힐 수 있는 자가 극소수인, 비주류 무예이기도 했다.
그 무예로 정점이 되어 버린 제니퍼는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마투학은 재능의 공부지. 익히기 까다롭고 익히려 하는 이도 적다. 그런데 이렇게 인재가 나타났으니, 욕심이 날 수밖에."
"알겠습니다. 저도 제 약점을 보완하고 싶긴 했습니다."
"약점? 네게 약점이 있느냐?"
"마법사의 고질병은 제아무리 천재라도 안고 가야 할 문제지요."
제니퍼는 마누스의 눈빛을 보고 일순간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녀가 무어라, 감상을 말하려 했을 때, 문 바깥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마음이 급했음일까.
제니퍼는 손을 휘저어 문을 열어 버렸다.
앞에서 노크를 위해 손을 들어 올리던 핑크빛 머리칼이 움찔하는 모습이 보였다.
멍하니 서 있는 여학생이 슬금슬금 안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저, 저기이-."
"들어오너라. 조교에게 듣고 왔느냐? 멜라니 학생 맞지?"
"네. 해리 멜라니라고 합니다."
멜라니는 쭈뼛거리며 안쪽으로 들어왔다.
제니퍼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앞으로 방과 후에 연무장으로 오도록. 이제부터 마투학을 전수해 줄 테니까."
지극히 독단적인 결정이었으며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이었다.
학생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제니퍼는 그 어떤 비난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제94화
- 막간
* * *
멜라니는 혼란스러웠다.
제니퍼 교수라고 하면, 들은 바가 있는 인물이었다.
황궁의 전설.
마법사는 근접전에 약할 것이라는 편견을 깬, 피스트 마스터.
그녀가 있는 한 황궁은 절대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 대단한 사람이 자신을 불렀다.
연구실에 도착하니 웬걸, 마누스까지 미리 와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뭐지?"
"제가 정말, 마투술을 배울 수 있을까요?"
그녀는 자신감이 없었다.
마투학은 엄청난 재능을 가진 이들만 배우는 것이라 알려져 있었다.
정령을 다루긴 하지만, 솔직히 막무가내로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인 자신이 마투학을 배울 수 있을까?
몸 쓰는 일엔 영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주눅 들었다.
"정령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배울 자격은 충분하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기만 한다면, 마투를 능숙하게 쓸 수 있을 것이야."
"알겠습니다. 해 볼게요-."
"자신감을 가져라. 네 재능은 대륙 전체를 뒤져 봐도 얼마 없는 것이니."
멜라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떠다니는 정령들 역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은 보통 사람에겐 절대 보이지 않는다며, 자랑스러워해도 된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래도 몸 쓰는 일인데, 고된 일이겠지?
멜라니는 일상의 변화가 달갑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끔찍했던 지난날을 생각했다.
'강해져야 하지 참-.'
자신은 전투에서 전위를 담당하는 마법사였다.
수호자, 전사가 하는 일을 나약한 마법사의 신분으로 해야 한다는 것.
마투학은 그녀에게 있어 긍정적으로 고려할 공부가 아니었다.
그녀가 선택한, 앞으로 걸어 나가야 할 운명에서 반드시 필요한 공부였다.
탑을 오르는 것.
당장 포기해도 될, 인생에 있어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길 아니던가.
'난, 강해지고 싶어.'
멜라니는 결의를 다지고 제니퍼를 바라봤다.
저 기대감 가득한 눈빛.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왕이면 긍정적인 마음으로 부딪쳐야겠지.
이건 이해득실을 따지는 상업이 아니었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이제야 보기 좋은 눈빛이 되었구나. 그래, 둘 다 방과 후에 보자꾸나."
"-네."
두 사람은 동시에 답했다.
제니퍼는 나가기 전,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투학은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쉽지 않을 거다. 진득하게 생각하고 결정하거라. 그 누구도 무어라 하는 이는 없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전, 이미 결정했어요."
마누스, 멜라니가 차례대로 답했다.
멜라니는 차분하게 답하는 마누스를 보고는 궁금한 점이 생겼다.
두 사람은 연구실을 나와,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멜라니는 쭈뼛쭈뼛,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했다.
마누스 선배는 언제나 어렵고, 또 고마운 사람이었으니까.
훤칠한 키와 어느 귀족과 견주어도 빛나는 얼굴.
아카데미 학생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오묘한 분위기는, 말을 걸기 힘들게만 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아, 그게-."
멜라니의 표정을 흘끔 본 마누스가 입을 열었다.
분명, 무언가 할 말이 잔뜩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성격상, 이런 일을 겪었는데 얌전히 넘어갈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지.
소심하긴 하지만, 그녀는 에머슨과 비슷할 정도로 관찰력이 뛰어난 소녀였다.
관찰력이 뛰어나다는 건, 그만큼 궁금증도 많다는 거겠지.
멜라니는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선배는, 어째서 그렇게 마법을 잘 펼치는데도 마투학을 배우는 거예요?"
"난 약점에 대해 관대한 편이 아니니까."
"선배도 약점이 있나요?"
마누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에겐 모두 약점이 있지."
"-저도 열심히 할게요."
"기대하지."
짧은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멜라니는 마누스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자연스럽게, 그녀는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마누스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남몰래 미소 지었다.
그녀가 하는 고민과 사색이, 더 높은 곳으로 올려다 줄 것이다.
자신을 관철하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다.
막혀 있을 때, 발자취를 점검해 보는 건 아주 중요한 선택지였다.
"그럼, 이따 뵐게요."
꾸벅, 그녀가 인사 후에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마누스 역시 수업을 듣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간섭이 시작됩니다.]
'이놈의 간섭은....'
뭐, 그래도 좋은 일인가.
이 세계의 결말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
미지의 적.
알 수 없는 사건들.
예상치 못한 인물의 행동까지.
"...쉬운 게 하나도 없군."
그 모든 것을 예방하는 길은 없다.
다만, 그 모든 시련이 닥쳐도 꿋꿋이 버틸 힘은 충분히 갖출 수 있다.
그것이 마누스 본인이 가진 진정한 축복이자, 이 세계를 즐길 수 있는 원동력이었으니.
* * *
"얘들아! 반 배정 떴다!"
1학년, 2학년 교실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마침 수업을 듣고 나오던 케일과 일행들은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과연, 이번 평가는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사람들이 바글바글, 학년 게시판 앞으로 모여들었다.
조바심 담긴 얼굴, 들뜬 얼굴, 초조한 얼굴....
십인십색의 표정과 함께 게시판 앞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케일, 이번엔 어떨 것 같아?"
"잘 나오지 않을까?"
그녀는 누군가의 물음에 답했다.
시험은 완벽했으니까.
그런데, 누가 물어본 거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지만, 질문을 한 자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뭐지?
그녀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곤, 다시 게시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그녀의 옆엔 동료들이 서 있었다.
그들도 퍽 궁금한 참이었다.
'그동안 우리가 해 왔던 것들. 절대 헛되지 않았을 거야.'
수많은 실전을 치렀다.
밤을 새워 공부하기도 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경험했기에 더욱 단련에 힘썼다.
"아-!"
누군가 탄성을 내질렀다.
[평가 발표]
[A반 1번 : 케일]
[A반 2번 : 플로이스 아나이스]
[A반 3번 : 해리 멜라니]
....
[A반 8번 : 피터손 피어슨]
"됐어-!"
멜라니가 환호했다.
아쉽게도 에머슨은 B반 1번이었다.
그래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녀는 B반에서 턱걸이로 지내고 있었으니까.
환한 얼굴이 된 아나이스.
그리고 친구들.
자신 역시 결실을 거뒀다.
"이번에도 해냈구나, 케일."
"고마워."
"다음엔 내가 1번이 되도록 노력하겠어."
아나이스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케일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져 줄 생각은 없지만, 선의의 경쟁은 언제든지 환영이었다.
마누스가 말한 향상심.
그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하지만, 케일은 아직도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한마디 거들었다.
"이상한 짓으로 이기는 건 안 돼. 알겠지?"
"다, 당연하지. 나는 플로이스야. 당당하게 빛나는 가문의 일원이라고."
그녀가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당당해 보이는 그녀는, 아주 조금이지만 스스로 빛나고 있었다.
케일은 진심으로 깊은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응원했다.
두 사람의 시너지가 탑의 정상까지 닿길 바라면서.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새로운 반으로 향했다.
케일과 일행들 역시 A반으로 향할 준비를 서둘렀다.
"나만 B반이네. 다음 평가 때는 꼭 올라가겠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에머슨. 나 없어도 잘 지낼 수 있지?"
멜라니가 미안한 듯한 눈동자를 해 보이자, 에머슨은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미토스 아카데미는 기본적으로 경쟁을 부추기는 학풍을 지니고 있잖아.
이렇게 서로를 위하지만, 실상은 경쟁의 도가니 속에 던져진 거라구-.
"얘는,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딱 기다려. 금방 내가 앞 번호를 차지할 테니까."
"알겠어. 에머슨이라면 잘해 낼 거야."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너나 잘해. 알겠어?"
에머슨은 알고 있었다.
멜라니가 제니퍼 교수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그 까다롭고 무시무시한 제니퍼 교수님이 그녀를 제대로 키워 보고 싶어 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에머슨이 보기에, 그건 새로운 시련으로의 한 걸음이었다.
마투학이라니.
"마누스 선배랑 알라노 선배는 역시 1등, 2등이겠지?"
"그러지 않을까?"
"하긴, 우리가 걱정할 건 아니지. 우리는 열심히 우리 할 일이나 하자고. 이제 에머슨만 모이면 다 A반인가? 우리는 역시 특별하다니까~."
"좀 조용히 해."
두런두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형성하며 교실로 향했다.
같은 반에서 듣는 수업은 어떨까.
그들은 모두 들뜬 마음이 되었다.
"부럽다. 나도 저기 끼고 싶은데...."
누군가, 그들을 바라보며 뇌까리는 말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그들 역시 선망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음을, 그래서 더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게 되었음을 몰랐다.
그렇기에, 그들을 향해 쏟아질 더 많은 더러운 감정 역시 알 수 없었다.
* * *
마누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1등을 거머쥐었다.
그 뒤로 알라노가 있었고, 2학년을 빛낼 친구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루페라의 이름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씁쓸한 현실에, 마누스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알라노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어쨌든 사건은 마무리되었고, 새로운 반으로 이동해 수업을 들을 시간이었다.
"알라노, 마누스, 잠시 저 좀 보지요."
"트레일 교수님."
같은 반으로 향하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트레일 교수가 다가왔다.
그는 두 사람에게 다가와, 인자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월반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정식으로 3학년이 되어 수업을 받는 일이죠. 어떻습니까?"
"아-."
알라노가 나직이 감탄했다.
마누스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 줄이야-.
그녀는 눈을 감고 고민했다.
과연, 이 길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
"저는 괜찮습니다. 교수님."
먼저 대답한 것은 마누스였다.
알라노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조기 졸업의 혜택은 대단하다.
사회에 한 발자국 먼저 나가는 것이 얼마나 큰 이점이던가.
기사가 된 전사들, 그리고 수호자들 역시 1년 차이로 서열의 차이가 심하게 나뉘곤 했다.
그런데도 거절하겠다니-.
"알라노 학생은요? 아,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던가요? 충분히 시간을 드릴 테니, 생각해 보시고 말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교수님."
"두 사람의 평가. 잘 봤습니다. 정말 아카데미에서 다시없을 팀워크였어요."
"감사합니다."
그는 미래가 기대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남기고는 두 사람을 지나쳐 사라졌다.
잠시간의 정적 후, 알라노가 물었다.
마누스는 왜 이토록 학교에 남는 걸 지향하는 걸까.
"왜 월반을 안 하는 거야? 너라면 사회에 나가는 게 낫지 않아?"
"그냥, 변덕이다."
"변덕?"
"학창 시절에 머물러 있다는 건, 나중에 추억할 일이 많아진다는 거지. 그냥... 젊음을 즐기고 싶을 뿐이다."
알라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그래도 학창 시절에 추억할 거리가 많다는 건,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알라노는 생각을 정리하며 교실로 향했다.
마누스가 남긴 알쏭달쏭한 말.
어쩐지, 오늘 수업은 머릿속에 잘 안 들어올 것 같았다.
그가 한 말을 생각하느라 하루 종일 고민할 게 뻔했으니까.
제95화
- 몸 쓰는 일은 머리가 좋아도 힘들다
* * *
늘 그렇듯, 수업은 평이했다.
새롭지 않은 반, 새롭지 않은 커리큘럼.
그 속에서도 마누스는 자신이 몰랐던, 혹은 놓쳤던 지식들을 차근차근 흡수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방과 후가 되었다.
마누스는 아카데미 정복을 벗어 던지고 활동이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여태 한 번도 입지 않았는지, 원단 냄새가 고스란히 배어나는 검정색 트레이닝복.
게임 속이라 그런지, 현대의 그것과 재질이 비슷한 모습이었다.
'이걸 한 번도 안 입었다니, 진짜 아무것도 안 했구만.'
"빨래는... 어차피 하녀들이 해 주니까 상관없나."
군대에 있을 때나 홀로 살았을 때 빨래며 청소며, 온갖 것들을 홀로 했을 땐 참 귀찮고 지겨웠는데.
여기선 하녀들이 모두 해 주니까 이만큼 편한 것도 없었다.
이제 구르러 가야지.
평생 운동이란 것과 거리가 멀었지만, 목표가 있는 운동이라면 환영이었다.
마투학과 원소학을 극한까지 익힌다면, 중간에 등장하는 난적들도 상대하는 데 용이하리라.
"-가 볼까."
마누스는 당당하게 걸어, 연무장으로 향했다.
제니퍼 교수가 미리 연무장을 비워 놨는지, 그곳만 아무도 없었다.
멜라니와 제니퍼 교수.
딱 둘만 우두커니 서 있었을 뿐.
"도착했군."
"제가 기다리게 했습니까."
"아니, 3학년 수업은 원래 늦게 끝나니까 괜찮다. 자, 지금부터 마투학에 필요한 테스트를 실시하겠다."
멜라니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제니퍼 교수의 수업은 악독하기로 소문났다.
수업 인원은 아예 없을 때가 훨씬 많을 정도.
어쩌다 신청하는 이들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잘할 수 있겠지.'
굳게 마음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불안한 마음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녀가 잘게 떨리는 눈으로 제니퍼 교수의 선고를 기다렸다.
교수님은 손으로 연무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뛰어라. 나가떨어질 때까지."
"여길... 뛰면 되나요?"
"이제부터 두말하지 않겠다. 뛰어."
마누스는 가볍게 조깅을 시작했다.
멜라니 역시 허겁지겁 뛰었다.
버클리의 마음가짐이 절로 발동되었는지, 마누스의 머릿속에 지식들이 차곡차곡 떠올랐다.
숨은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다리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고, 팔은 어떻게 휘둘러야 하는지.
힘의 세밀한 배분 역시 가능했다.
버클리 가문은 육체적으로 완성된 가문이었다.
그들이 수백 년 동안 쌓아 올린 지식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허억-! 허억-!"
한편, 멜라니는 무작정 달리기만 할 뿐, 요령은 전혀 없었다.
악과 깡으로 버티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정령들이 무슨 지식이 있어 생물학적인 무언가를 알려 주겠는가.
한 바퀴, 두 바퀴까진 괜찮았다.
세 바퀴까지도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네 바퀴가 넘어갈 때부터 멜라니의 자세가 무너졌다.
다섯 바퀴짼, 걷는 건지 뛰는 건지 모를 정도로 허우적댔다.
"뛰어라! 더 뛰어!"
제니퍼 교수는 쓰러지려고 하는 멜라니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어떻게든 몸을 움직였다.
멜라니가 일곱 바퀴를 뛰었을 때, 마누스는 이미 열 바퀴를 넘어서고 있었다.
'저놈은 대체....'
땀이 흐르고, 머리칼이 젖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호흡을 유지하고 뛰는 모습이 정말 마법사가 맞는 건지 의심될 지경이었다.
지금 그의 모습은, 마치 잘 훈련받은 전사 생도와 흡사했으니.
제니퍼는 혀를 내둘렀다.
역시, 저 재능은 썩히기 힘들었다.
흡사 마치 어렸을 때의 자신과 똑같지 않은가.
그때의 자신은 저런 시선을 받지 못했었다.
'나와는 시대가 다르니, 오히려 축복이라 할 수 있겠군. 대체 카이사르는 무슨 괴물을.... 제 누이와 형도 저러진 않았지 아마?'
그녀 역시 카이사르의 자제들을 봤었다.
비록 인연이 닿지 않아 수업하진 않았지만, 그 압도적인 재능은 실로 위대하다 느꼈다.
낯간지럽게 자신을 칭송하는 이들이 훗날, 저들을 칭송하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저 꼬맹이는 어떤가.
알아보고 싶었다.
저 무저갱 같은 재능의 바닥은 어디인지.
그녀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마누스! 속도를 높여라!"
"후욱-!"
호흡이 훅 내뱉어지며 마누스의 발이 빠르게 움직였다.
대답은 사치.
한 호흡, 한 걸음에 집중하며 더 빠르게 달렸다.
솔직히 놀라웠다.
힘들 때마다 호흡을 내뱉고, 멈추고 싶을 때마다 꾹 참았다.
뭐라고 하더라?
세컨드 윈드 현상이 몇 번이고 찾아왔다.
'이게 육체를 쓰는 느낌이로군.'
흘끔, 반대편을 보니 아직도 멜라니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을 보며 의식도 흐릿한 상태 같았지만, 아직 몸이 움직였다.
정령들이 둥실둥실 떠서 빙글빙글, 응원 아닌 응원을 하는 모양이었다.
정령들을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건지-.
"더 빨리 뛰어라, 아니, 전력으로 뛰어라!"
지금도 충분히 빠른 속력인 것 같은데, 더 빨리?
질질 끄는 것보다 그게 낫겠지.
마누스는 다시 숨을 훅 내뱉고 전력을 다해 뛰었다.
웅웅 울리는 바람 소리가 땀방울을 흩날리게 만들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어서 더 뛰라고, 더 멀리 가라고 힘껏 움직였다.
그렇게 서른다섯 바퀴.
마누스가 더 이상 뛰지 못하고 다리가 풀려 넘어질 때까지 달린 거리였다.
"...800m 연무장을 서른다섯 바퀴나 뛰어?"
"허억... 허억... 이 정도면...."
"미친놈. 내 살다 살다 너 같은 놈은 처음 봤다. 멜라니도 조금만 더 하면 되겠고."
제니퍼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800x35는 28,000이었다.
28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뛴 것이다.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육체였다.
십 대에 이 정도로 완성된 육체는 난생처음 봤다.
검을 잡았어도, 방패를 들었어도 대성할 놈이라는 거다.
"둘 다 잘했다. 역시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구만. 두 사람 모두 정신력이 아주 뛰어나군. 내 훈련을 그럭저럭 잘 따라올 수 있겠어."
"...."
두 사람은 바닥에 널브러져, 가만히 제니퍼 교수를 올려다보았다.
본래 이러면 예의에 어긋나지만, 그녀가 마나를 이용해 두 사람을 꼼짝도 못 하게 막았기에 저항하지 않았다.
제니퍼는 회중시계를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아주 조금 남았으니, 남은 시간은 이론 공부를 하자."
그녀는 마투학에 대해서 설명했다.
기원이나 역사, 왜 이 무술이 만들어졌는지, 이런 것 대신 바로 수련을 시작할 방법을 알려 주었다.
마투학은 다른 게임의 격투와 똑같았다.
모 게임에 나오는 <넨 마스터>라든가, <기공사>라든가 하는 것들.
거기다 우리가 생각하는 '오리지널 격투가'를 섞은 직업이었다.
"마투학의 핵심은 신체를 늘리는 것에 있다. 남들은 검과 방패, 그리고 구현된 마법을 이용하지. 하지만 마투학은 오로지 신체를 이용해야 해."
신체는 무기가 될 수 있다.
극한으로 단련된 신체는 어떠한 무기보다 효율적이다.
이 게임, 이 세계에서 그런 법칙은 통하지 않았다.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철은 검을 만들 수 없었다.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칼슘은 몬스터의 뼈로 만든 갑옷을 뚫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은 인간은, 그저 나약한 생물일 뿐이었다.
"마나를 다뤄 보이지 않는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마투학의 핵심이지."
"무형의 기운이라는 거군요."
"맞다. 다양한 자세가 있고, 다양한 방법이 있지. 요전에 선보였던 네 붕권 같은 자세에서도-."
퍼엉-!
가볍게 내지른 제니퍼의 주먹.
하지만 터져 나간 것은 5m 밖의 모래들이었다.
발사하는 개념이 아닌, 마나를 이용한 확장의 개념이라니.
어렴풋이 알 것 같은 느낌에, 마누스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멜라니 역시 대충 개념은 이해한 것인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니퍼는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원리는 이해했으니 나름대로 연구해 봐라. 근육통이 심할 거다. 그걸 재주껏 푸는 것도 너희 능력일 터. 내일은 더 힘들다. 각오하고 오도록."
"네에-."
"아직 대답할 기운이 남아 있는 걸 보면, 내일도 문제없겠군. 고생했다."
제니퍼는 그 말을 남기고 훌쩍 사라졌다.
멜라니는 팔다리가 후들거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마누스는 자신에게 치유 마법을 건 뒤, 멜라니에게도 같은 마법을 걸어 주었다.
겨우 몸을 일으키게 된 멜라니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죽는 줄 알았어요."
"고생했다. 제법 하던데."
"헤헤... 저... 강해질 수 있겠죠?"
멜라니는 아직도 불안한 듯 보였다.
마누스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이제 제법 자신감을 얻은 모습을 보니, 걱정할 필욘 없겠다 싶었다.
"아주 많이 강해질 거다."
"네, 반드시-."
그녀가 힘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후, 어기적어기적 사라졌다.
마누스 역시 마법으로 몸을 푹 절여 버린 땀을 없애 버린 뒤, 걸음을 옮겼다.
당분간 또 몰두할 거리가 생겼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었지.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고.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님은 잘 알지만, 이건 머리가 좋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아니, 머리가 좋으면 훨씬 더 고된 길로 스스로 들어가는 꼴이지.
'그래도 마투학은 배워 둬야 해.'
변수에 대항하기 위해선, 최대한 많은 힘을 가져오는 것이 맞겠지.
게다가, 곧 거대한 보스전이 기다리고 있다.
마법사의 천적이기도 한 녀석이니만큼, 마투학은 필수였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은 많았다.
고쳐 나가야 할 일도 많았고.
* * *
"오늘 멜라니는 안 오나?"
"그럴 것 같은데-. 한창 바쁘잖아. 탑 올라갈 체력이나 있겠어? 거기서 더 시달렸다간 바로 몸살이지. 치유 마법도 소용없을걸?"
"그럼 우리끼리 올라가야 하나?"
니아가 흘끔, 기예르모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선을 받은 금발의 수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탑에 올라갈 순간을 마다하지 않았으니까.
니아 역시 탑 안에서 강함을 얻고자 했다.
조금의 위험을 감수하면 그 어떤 마법사보다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수단이었으니, 올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오늘도 모일 수 있는 인원은 올라가자. 저 둘은 바쁠 테니까 놔두고."
"좋아요. 그럼 리더는 누가 하죠?"
"알라노, 그리고 케일이 하면 되겠지. 안 그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알라노가 리더로 굳어지는 추세였다.
그녀의 지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니.
알라노는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고, 케일 역시 마다하지 않았다.
모두가 함께 올라갈 때는 알라노가, 찢어질 때는 둘이 나눠서 맡기로 합의를 보았다.
동아리실에서 훤히 보이는 연무장.
오늘도 두 사람은 달리고, 구르고, 팔다리를 내지르는 훈련을 하는 중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제 1학년 학생회장 선출 기간 아닌가?"
니아가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을 마주치며 말했다.
모두가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그래.
학기에 적응했으면 반장을 뽑아야겠지.
"너희들은 나갈 생각 없니?"
니아의 말에, 분위기가 변했다.
학생회장.
공교롭게도, 학생회장에 가장 근접한 1학년들이 여기에 모두 모여 있었다.
니아의 얼굴이 새침하게 변했다.
"좋은 구경거리가 되겠는걸?"
그 경쟁의 장에 뛰어들어, 서로에게 마나를 퍼붓게 될 광경이... 아주 기대가 되었다.
제96화
- 의도된 분열
* * *
학생회장.
마누스가 기억하고 있는 게임에서, 학생회장과 학생회는 아카데미에서 교수 다음으로 영향력이 강한 이름이었다.
왜 그런 것 있잖은가.
학교에서 한 살 많은 선도부가 교문 앞을 지키고 있다면, 그렇게 떨렸던 기억.
그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시선을 피하고-.
특히 개발자들이 학교에 다닐 시기는 그들의 권력이 더욱 강했을 때라고 밝혔다.
선생들과 결탁해, 자유를 갈망하는 학생들을 억압하는 공포의 존재.
"어떻게 할 거야?"
"-으응?"
케일이 아나이스의 물음에 멍하니 답했다.
그녀는 앉아 있는 케일 앞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케일은 그녀의 물음에 잠시 생각했을 정리했다.
까딱이는 아나이스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관심 없다고 얘기할 참이었다.
케일은 그저 이대로의 생활을 이어 가고 싶을 뿐.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려 했을 때, 아나이스가 그녀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말했다.
"참가해 줘. 학생회장 선출."
"어? 난... 안 할 생각이었는데."
"중간에 포기해도 상관없어. 학생회장 선출은 종합적인 평가를 한다지. 그중에... 마법을 겨루는 평가도 있고."
"아나이스. 난...."
아나이스가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래, 무례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서로 모든 걸 걸고 겨뤄 보고 싶어. 케일."
"난 친구를 해치고 싶지...."
그녀의 말이 기폭제가 되었고-.
"왜 네가 항상 위라고 단정 짓는 건데!"
아나이스의 적발이, 마나로 인해 일렁였다.
케일은 불같은 그녀의 분노를 직격으로 맞곤, 잠시 침묵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아나이스는 케일이 얼어 있는 사이, 그녀와 마누스를 매도해 버렸다.
"재수 없어. 너도, 마누스 선배도."
"어이어이, 왜 그러는 건데? 아나이스. 진정하고, 케일, 괜찮아?"
케일은 눈만 끔뻑일 뿐, 아직도 얼떨떨한 상태였다.
어쩌면 당황해서 감정이 올라오기 전일 수도.
피어슨이 둘 사이로 끼어들며 중재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나이스는 씩씩대며 동아리방을 나서기 위해 몸을 돌렸다.
케일은 친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친구.
그건 어떤 일이 있어도 등을 지켜 줘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왜....'
이건,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잖아.
뭐가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뭐가, 자신과 마누스 선배를 싫어하게 만들었을까.
아니, 그것보다 참을 수 없는 건-.
"-그 말, 취소해."
케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눈동자 역시 적의로 번들거렸다.
아나이스는 홱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케일을 똑바로 응시했다.
플로이스의 자존심.
치기 어린, 그러나 누구나 한 번쯤은 겪을 꼿꼿함이 케일과의 대립을 첨예하게 만들었다.
"무슨 말? 대체 내가 무슨 말을 취소해야 하는데?"
"나는 욕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선배를 욕하는 건, 아무리 친구여도 못 참아."
"웃기고 있네. 대단한 선배 사랑 납셨어. 너도 그렇고 선배도 그렇고.... 둘 다 짜증 나. 그 내려다보는 시선. 동료? 말로만 동료겠지. 그냥 부하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난 널 부하로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 마누스 선배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마누스 선배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그는 우리를 위해 많은 걸 해 주고 있는 사람이라고 그토록 말했는데!
케일의 머리칼 역시 마나로 인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중간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에머슨이 벌떡 일어났다.
"너희 왜 그래? 지금 같은 편끼리 싸워서 어쩌자는 거야?!"
"같은 편? 웃기지 마. 탑 같은 거, 안 올라가도 돼."
콰앙-!
아나이스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갑자기 왜 저런대."
"케일, 괜찮아?"
"난 쟤 좀 달래고 올게. 미안-!"
피어슨도 아나이스의 뒤를 따라 나가 버렸다.
완전히 박살 나 버린 분위기.
선배들은 이미 떠나 버렸고, 1학년끼리도 분열이 일어났다.
에머슨은 케일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그녀가 듣기에, 사소한 말실수가 있긴 했으니까.
"...기분 나빴을 거야. 친구를 해칠 수 없다고 했던 말."
"그래도, 이번 일은 양보할 수 없어."
"하아.... 마음대로 해. 난 모르겠다."
에머슨도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케일은 털썩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선언했다.
"-참가할 거야."
"정말?"
"응. 그래서, 아나이스에게 물어봐야겠어."
그렇게 자신과 싸우는 것이 소원이라면, 응해 주리라.
그녀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처음 가져 보는 감정이었다.
무척 생소하고, 또 무서운 감정이기도 했다.
* * *
피어슨은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 붉은 머리를 쫓았다.
대체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묻고 싶은 것이 무척 많았다.
피어슨은 아나이스의 오랜 친우였다.
그녀는 다짜고짜 이럴 사람이 아니었다.
왜 그런 건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여 자신들이 모르는 누군가 그녀에게 영향을 끼쳤는지 물어봐야 했다.
"야, 아나이스! 어디 가!"
"...."
그녀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계속 나아갔다.
보다 못한 피어슨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무어라 소리치려 했지만, 피어슨의 입술은 달싹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붉어진 얼굴.
잔뜩 일그러져, 설움을 참고 있는 표정.
눈물로 엉망이 되어 버린 눈두덩이.
간신히 소리를 참고 있는 듯한 입술은, 측은함을 넘어 화가 나게 만들었다.
"왜 이러고 있어? 왜 네가 화내고 울고 있냐고-!"
"으흑, 나, 나...."
그녀는 목이 멘 듯, 오열을 삼키며 무어라 말하려고 했다.
피어슨은 답답한 마음에,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고 조용한 곳으로 향했다.
아나이스는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힘없이 끌려가기만 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곳이었다.
마누스가 애용하던, 항상 사색을 즐기던 곳.
피어슨은 아나이스의 얼굴을 마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어? 왜 그래? 혹시 탑에서 정신 공격에 당한 거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러면? 케일이 남몰래 잘못한 거라도 있어? 우리 몰래 막 협박했다거나? 아니면 마누스 선배가?"
"그런 거 아니라고-!"
"...그럼 왜 그러는데. 우리가 몇 년을 알고 지냈는데, 말해 줄 수 있잖아."
아나이스는 밤새 고민했던, 그리고 오늘 낮까지 고민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다소 과격한 방법이었다.
그래, 그녀도 잘못된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찢어질 듯, 그녀를 옥죄어 오는 가슴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그녀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케일의 성격을 이용해,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선택.
"사실, 내가 니아 선배에게 부탁한 거야."
"뭐? 뭘?"
"운 띄워 달라고, 부탁한 거라고."
피어슨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그럼... 이 상황을 직접 설계했다는 거야?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그래서, 그렇게 대판 싸우고 나온 거야? 그냥 좋은 말로 하면 되잖아. 어?"
"그러면, 저 착해 빠진 애가 진심으로 나랑 싸워 줄까?"
"...."
치밀해서 놀랐고, 무모해서 더욱 놀랐다.
마지막 말에, 케일도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인데....
피어슨은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나이스는 아직도 눈물을 흘렸다.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다.
피어슨은 연거푸 한숨을 쉬며 여린 친구를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그저, 말없이 서럽게 울고 있는 친구를 안아 줄 뿐이었다.
"에휴, 어떡하겠냐. 난 그래도 널 응원하는 수밖에."
"...고마워."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 마누스 선배에게 가자. 사과도 할 겸."
아나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케일이 화난 포인트는 그녀 자신 때문이 아닌, 마누스라는 존재에 대한 언급 때문이란 걸 잘 알고 있잖은가.
그렇다면 미리 화를 잠재워야겠지.
또, 아나이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마누스 선배이지 않을까.
피어슨은 예전, 탑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서 말을 덧붙였다.
"옛날에 선배가 탑 안에서 나한테 해 줬던 말 때문에 내가 A반에 들어간 거 아니겠냐. 선배가 내쫓을지도 모르지만... 원래 절박하면 붙들어야지. 안 그래?"
"...케일이 먼저 갈 수도 있잖아. 내가 무슨 염치로 가. 됐어."
"에이, 그러지 말고.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나중에 마누스 선배가 진짜 너 싫어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빨리 눈물 닦고 가자."
"아아, 좀 천천히 가-!"
피어슨은 아나이스의 손을 잡고 다시 이동했다.
질질 끌려가는 그녀는 소매로 눈물을 훔친 후에 겨우 정신 차릴 수 있었다.
아주 옛날부터 보아 온 어린 소년의 등.
훌쩍 커 버려, 벌써 이렇게 듬직해졌나 싶었다.
하지만, 그녀 성격상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싫었다.
케일에겐 언젠가 사과해야겠지만... 학생회장 선출전에서 붙을 때까진 적이었다.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리라.
"이제 됐어."
"정신 차렸어? 그럼 다행이네. 얼른 가자. 케일이 먼저 찾아가기 전에, 우리가 선수 쳐야 해."
"그...."
"응? 왜, 또 울 거야?"
"아니야, 이 멍청아! 그... 고, 고맙다고."
"어... 에이, 뭐 친구 사이에. 당연하지. 우리 평생 친구 아니야?"
아나이스가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래, 평생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니까.
그 친구가 피어슨이라고 생각하니, 퍽 다행이란 감정이 들었다.
변덕스럽고 불같은 자신의 곁에서 항상 능글맞은 태도로 붙어 있는 피어슨.
아나이스는 어느새 흐르지 않는 눈물을 의식하며 걸음을 옮겼다.
저기, 열심히 구르고 있는 마누스를 향해서.
* * *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주먹과 발을 휘두를 때마다 찐득한 뻘 속에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마누스는 멈추지 않았다.
앉아서 지식을 탐하고 마법을 수련하는 일보다 훨씬 재밌었으니까.
왜 사람들이 운동 중독에 걸리는지 알 것만 같았다.
팔다리를 격렬하게 움직이고, 마나를 가속해 무형의 기운을 발출하는 것.
그건, 슬슬 평화롭고 지루하게 느껴지려던 일상을 크게 뒤흔든 감정이었다.
"오늘도 고생했다. 이틀 만인데, 벌써 몸 쓰는 일이 제법 익숙해졌구나. 따라 할 만한가?"
"그럭저럭, 재밌습니다."
"고무적인 발언이군. 멜라니 역시 잘 따라오는 것 같고...."
오늘 배운 건 격투의 기본.
발, 주먹, 그리고 몸 곳곳에 있는 곳을 쓰는 법을 배웠다.
몇 달이 걸릴지 모를 기초 작업이라고 생각했건만, 마누스는 물론이고 멜라니도 제법 잘 따라오고 있었다.
"정령의 힘을 다룬다는 건, 마투학의 근본을 이어받았다는 걸 깨달아야 할 텐데. 후후, 그럼 내일 보자꾸나."
"들어가십시오."
"몸 잘 풀고, 푹 쉬거라."
제니퍼는 언제나 그랬듯, 훌쩍 떠나 버렸다.
마누스는 스스로에게 회복 마법을 걸고 자리를 털며 일어섰다.
멜라니 역시 정령들의 도움으로 비칠비칠 일어날 수 있었다.
그녀가 마누스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예의 바른 모습을 보여 주니, 제법 정이 갔다.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점도 동질감을 형성하기에 좋은 발판이었고.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수고했다."
멜라니는 터덜터덜, 정령들과 이야기하며 걸어갔다.
이젠 제법 정령과 소통하는 방법을 체득했는지, 밝은 얼굴이었다.
자신도 할 일을 해야겠지.
오랜만에 누이에게 편지도 써야 하고.
아버지, 어머니께 안부도 물어야 할 터다.
평가의 결과를 내심 기대하고 계실 테니까.
"선배에에에에에-!"
할 일이 많은데, 저 멀리서 뛰어오는 두 사람이 보이는 건 운명일까.
아니면 그저 할 일 없는 후배들이 재미없는 자신에게 놀아 달라고 찾아온 것일까.
알 수는 없었지만, 저렇게 힘차게 찾아오는 후배들을 무시할 정도로 모질진 않았다.
마누스는 두 명의 후배, 아나이스와 피어슨을 바라보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왠지, 또 상담을 해 줘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제97화
- 스스로 내몰린 자의 성장
* * *
마누스, 아나이스, 그리고 피어슨은 구내에 있는 카페에 앉았다.
동아리실로 가려 했으나, 피어슨이 간곡히 부탁해 카페로 오게 된 것.
그곳엔 아직도 케일이 있을 테고, 세 사람이 그곳에 들어갔다간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지겠지.
피어슨은 눈치가 없어도 그 정도로 벽창호는 아니었고, 마누스를 무사히 카페로 인도하는 데 성공했다.
마누스는 문득, 이곳 커피의 맛이 궁금해졌다.
지구에서 먹던 아메리카노와 어떻게 맛이 다른지.
"난 아메리카노로 하지."
"넵. 제가 주문하고 오겠습니다. 넌 뭐 마실래?"
"...난 그냥 물."
"으휴, 너 딸기 좋아하지? 알아서 사 온다."
피어슨이 휑하니 사라졌다.
아나이스는 엉망이 된 몰골로 흘끔, 마누스를 쳐다봤다.
이렇게 보니, 문득 공포감이 몰려왔다.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그 무심한 눈빛.
엄격하고 불같았던 아버지도 저런 눈빛은 아니었다.
바라보고 있으면 하염없이 순종적이게 만드는, 잡아먹힐 것 같은 눈빛.
"할 말이 있다고 들었는데."
"네, 사실... 케일이랑 좀 싸웠거든요."
"음."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싸웠을까?
꽤 케어를 많이 해 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내면의 나약함을 극복하지 못했던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곧 학생회장 선출 기간이었던가.
한 학년의 장을 정하고, 그 장이 4년 동안 이어지는 시스템이다.
1년에 한 번, 연말에 학생회장 자리를 탈환할 기회가 있다.
플레이어는 선택할 수 있었다.
'이것도 제법 재밌는 이벤트였지.'
다양한 친구들이 다양한 이유로 참가하게 되는, 일종의 경연이었다.
미토스 아카데미는 경쟁이 모토다.
그러니, 학생회장도 가장 강하고 똑똑하고 지휘를 잘하는 이가 뽑혀야 한다는 것.
회장이 되면 받는 혜택 역시 꽤 되었다.
장학금과 학생회를 꾸릴 수 있는 권한.
각종 행사를 주선하고, 다양한 인맥을 쌓을 수 있는 권한 등등.
'학생회장이 되면 이벤트가 많아지기도 하고, 자금도 원활히 수급되었지. 그래서 편하게 하려면 학생회장을 하는 게 좋은데....'
"학생회장 건 때문인가."
"맞아요. 제가... 좀 심한 말을 했거든요. 선배에 대한... 얘기도."
"대충 예상이 가는군."
"죄송해요. 저는...."
마누스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아직 자존감을 다 찾지 못했는지,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플로이스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모습에, 마누스는 이 아이를 어떻게 해 줘야 하나 고민했다.
케일이 아무리 다재다능하고 어마어마한 재능을 지녔다지만, 후반에 아나이스, 알라노가 없으면 안 된다.
어떤 이들은 주인공을 버퍼 포지션으로 쓰는 이들도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의 딜링 능력은 뛰어났다.
그것도 그거지만, 그냥 한 사람으로서 아나이스가 저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옛날이랑은 다르니....'
그 옛날엔 인간관계에 대한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냥 자기 살기에 급급했고, 워낙 더러운 인간들만 주변에 깔렸었으니까.
그들의 학창 시절, 그들의 성장 과정은 중요치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냈다는 것이 중요할 뿐.
그에 반해, 이들은 정말 순수한 감정으로 자신을 존경하고 따랐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성장 과정에서 나쁜 길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보듬어 주는 것 정도야.
익숙하지 않아 아직도 힘들지만, 말을 들어주고 방법을 제시해 주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
"나에 대해서 얘기한 건 괜찮다. 이렇게 찾아와서 사과할 정도라면 진심이 아니었던 거겠지."
"죄송해요."
"저의가 궁금하군. 왜 케일과 싸웠지?"
"후우-."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마누스가 괜찮다고 하니,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죄책감이 조금이나마 사라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의 가슴을 짓이기고 있는 친구에 대한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케일과의 격차를 알고 싶었어요. 제가 나아갈 방향도.... 걔하고 붙어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케일은 착하지."
"네에, 그래서 진심을 끌어내기 위해.... 저도 알아요. 친구를 이용하는 나쁜 애라는 거."
"케일은 뭐라고 했지?"
케일이 진심이라면, 지금의 아나이스는 이기기 어려울 터다.
그녀는 카덴차라는, 희대의 사기 스킬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아나이스는 '약한 것'에 대한 불안감과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알라노와 다른 이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내던질 정도였으니까.
답은 간단했다.
아나이스에게 억지로 강함을 주입해 주면 되는 거지.
예전 알라노가 그랬던 것처럼.
"그냥... 엄청 화난 모습이었어요. 그렇게 화를 낸 모습은 처음 봤어요."
"내 이야기를 했다면, 아마 진심으로 덤벼올 거다."
"...."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마누스의 말이 비수처럼 푹푹 꽂혔다.
할 말이 없지.
친구의 역린을 건드렸으니.
각오하고 있었는데도 막상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고 일을 저지르니,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지금의 넌 케일을 통해 증명하려고 하는 건가. 나쁘지 않지."
"...네?"
마누스는 아나이스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여기서 그녀를 비난하면 죽도 밥도 안 되겠지.
밤새 고민한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퀭한 얼굴과 핏기가 사라져, 창백해진 얼굴.
생기는 없어지고, 머리는 산발이 되었다.
평소 뽀얗던 피부와 구김 없이 입고 다니던 외투도 엉망이었다.
"어쨌든, 네가 내건 해답이지 않은가. 나에게 직접 사과까지 한 걸 보면, 그 각오는 인정할 만해."
"아...."
"얘기 잘하고 있어? 여기, 아메리카노입니다."
"고맙군."
마누스는 마나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걸 살짝 식힌 뒤, 한 모금 마셔 보았다.
음-.
매일 아침마다 마셨던 아메리카노와 별반 다르지 않은 맛.
신 맛도 덜하고, 에스프레소 자체가 연한 것 같았다.
그는 일반적인 아메리카노(2샷)을 먹으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집중이 잘 되지 않는 체질이었다.
그래서 항상 연하게 주문을 부탁했었는데, 그와 비슷한 맛이었다.
학생이라고 배려해 준 건가?
"흠, 그래서 강해지고 싶어 날 찾아온 건가?"
"네... 염치없지만, 부탁드릴게요. 강해지고 싶어요. 도움이... 되고 싶어요."
"난 항상 말한다. 넌 지금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하지만, 자기만족이 안 된다면야."
방법은 있다.
당분간 홀로 탑을 왕래하려고 했었는데, 오히려 잘된 건가.
알라노는 몇 층을 홀로 올라가고 지쳤지?
그녀는 마누스와 단둘이 파수꾼 하나를 처리했다.
아나이스는 어떨까.
그녀는 어디까지 버티며 올라갈 수 있을까.
붉은 눈동자에 절박함이 보였다.
지금 그녀라면, 눈부신 성장을 이룩할 수 있으리라.
마누스는 아나이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절박한가?"
"...네. 무척."
"케일에게 사과하는 건 네 역량이다. 어쩌면 평생 그녀에게 미움받을 수도 있겠지."
"...."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경험이 없는 그녀에겐 이런 짓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우둔한 건지, 아니면 아직 지혜롭지 못한 건지 모르겠다.
불안했다.
친구와 영원히 틀어질 수도 있다는 것에.
눈시울이 붉어지고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녀는 나아가기로 했다.
죄책감을 딛고 강해져서, 다시 돌아가리라.
당당하게 사과하고 관계를 회복하리라.
그러기 위해선, 강해져야 했다.
"선배."
"마음이 섰나."
"네. 제가 심한 말을 했고... 제가 큰소리 뻥뻥 쳤으니까, 그에 맞는 실력을 가지고 싶어요."
"네게 지금 가장 부족한 점이 뭐지?"
아나이스는 즉답했다.
"마법... 그리고 마나의 부족이에요."
"그렇담 답은 정해졌군."
마누스는 피어슨과 아나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답은 언제나 탑에 있다. 네가 찾는 답도, 아마 그곳에 있을 테지."
"...알았어요."
"피어슨은 하던 대로 움직여라. 아나이스에 대한 건, 얘기하지 말고."
"넵. 맡겨만 주십시오."
피어슨이 근엄한 표정으로 척, 고개를 숙였다.
기사들을 흉내 내는 것이, 제법 우스꽝스러웠다.
아나이스는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이기적인 제 욕심을 받아 주셔서."
"알면 됐다."
그 무뚝뚝함이 더 따스하게 다가오는 건 왜일까.
아나이스는 무릎이라도 꿇고 감사하다고 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곳이 만약 동아리실이었다면 주저 없이 그렇게 했겠지.
보답하는 길은 하나뿐.
멋대로 내뱉은 말을 지키는 것과 친구에게 사과하는 것.
적어도 그녀에게 부끄럽지 않은 마법사로 다시 서는 것.
지금 가서 사과하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아나이스는 택하지 않았다.
'다음에 같이 탑을 오를 땐, 내가 도와줄 거야.'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 기숙사로 향했다.
마누스의 앞에는 어김없이 메시지가 떴다.
[간섭이 시작되었습니다.]
[신중한 선택이 필요한 때입니다.]
"흠-."
마누스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메시지.
아마, 중요한 분기점이리라.
이런 메시지를 볼 때마다 부담감이 정신을 짓눌렀다.
가뜩이나 벗어난 것이 많아 신경 쓸 것이 많은데, 이미 원작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스토리 라인이 빗나갔으니.
그가 할 수 있는 건, 원작에 있는 지식을 최대한 활용해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
더불어, 변수를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을 만한 힘.
불행한 것들을 막아 내고 예기치 못한 재앙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
'복잡하네.'
"선배, 그럼 저도 일어나 보겠습니다."
마누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사라진 그 자리에서, 마누스는 잠시 고민했다.
2학년, 3학년은 이 사태를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자신의 발언권은 상당한 수준이니, 아마 말을 하면 들어줄 것이다.
마누스는 잠시 아나이스의 처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라면, 조용히 힘을 키우고 싶겠지.
'멋대로 결정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케일을 달래 주며 아나이스를 응원하는 것.
그래서 다시 마주했을 때, 서로에게 감정이 남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마누스가 해 줄 수 있는 전부겠지.
"슬슬 패배를 겪을 때도 되었지."
시련이 없는 주인공은 뭔가 재미없잖아?
마누스가 자리에서 일어서,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동아리실.
두 사람의 극적인 결투를 위해서, 마누스는 연출을 담당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아나이스뿐만 아니라 케일에게도 동기를 심어 줘야겠지.
마누스는 아나이스가 태양처럼 환하고 따스한 빛을 뿜어낼 때까지 밀어줄 생각이었다.
'너는 그동안, 어떤 빛을 낼 것이냐.'
케일.
너는 더 찬란한 빛으로 승부를 볼 것이냐.
아니면, 아주 잠깐 그림자가 될 것이냐.
마누스는 궁금해졌다.
그녀의 디폴트 성격이 어떤 것인지.
그걸 확인하기 위해, 그는 분쟁이 시작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98화
- 라이벌
* * *
동아리실엔 케일 홀로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왜 아나이스는 그런 선택을 했으며, 마누스 선배를 싫어하는지.
자신의 실수보다, 그것이 더욱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어째서, 어째서 마누스 선배를 미워하는 거야.
그는 우리를 위해 얼마나....
케일의 눈동자가 탁한 빛을 발했다.
하지만, 아나이스가 소리쳤던 말들이 케일의 마음 한편을 쿡쿡 찔렀다.
'정말 그랬을까. 나는-.'
자신을, 그리고 친구들을 부하로 생각했다던 말.
아니라고 부정해도, 그게 사실이었을까?
머리에 손을 얹고 마구 헝클어뜨렸지만, 나아지기는커녕 더 복잡해지기만 했다.
한 달.
짧으면 짧은 시간이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여정이 기다리는지도, 어떤 재앙이 닥칠지도 모르는 상황에 이렇게 분열하는 것이 맞는 걸까?
케일의 머리는 아니라고, 정신 차리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은 아직 아나이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아아아-."
그녀답지 않게 깊고,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동아리실의 문이 열렸다.
그녀의 눈이 자연스럽게 문 뒤에서 나오는 사람을 좇았다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짙은 검은색 머리칼.
수려한 이목구비는 오늘따라 더욱 차갑게만 보였다.
그는 소식을 들었을까.
아니면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을까.
"오, 오셨어요."
"다른 이들은 없나 보군."
"네. 벌써 저물녘이잖아요."
"너는 왜 혼자 있나."
케일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마누스는 그 맞은편에 앉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분위기가 좋지 않은데, 무슨 일이 있었지?"
"아, 그게에...."
케일은 우물쭈물하다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아나이스가 그런 말을 했어도, 그녀는 친구였다.
힘들었을 텐데, 마누스의 분노까지 감당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밉지만, 친구를 위하는 단어들을 조립해 말했다.
아나이스와의 일은 자신이 해결하고 싶었으니까.
"제가... 좀 심한 말을 했어요. 그것 때문에 평소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봐요."
"예를 들면?"
"그러니까아-."
케일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마누스는 그들과 함께 탑을 오른 것이 드물었으니, 분위기를 잘 몰랐겠거니 했다.
그녀는 최대한 아나이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쪽으로 설명했다.
누가 보면 왜 그러냐고, 너 호구냐고 소리칠 정도로 착해 빠진 심성이었다.
마누스는 그녀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만 있었다.
내심 만족한 미소를 지으려다가도 무거운 분위기에 그러지 않았다.
'확실히 주인공이라 이거지.'
"...그렇게 된 거예요."
"그렇군."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케일은 무언가를 기대했지만, 마누스는 그저 한마디를 건넬 뿐이었다.
"응원하마."
"...네."
"언젠가 틀어질 수 있는 것도, 다시 만날 수 있는 것도 친구다. 아나이스가 했던 짓이 심각한 것이 아니라면, 조금 기다려 봐라."
"그래서 물어보고 싶어요. 그녀의 전력을 받아 낼 수 있는 건... 저뿐이니까."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
케일은 현명했다.
그녀는 착했지만, 무모하지 않았다.
냉철했고 판단은 빨랐다.
그건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하기로 했다.
친구의 도전을 받아들였고, 서로의 스트레스를 날려 버린 후에 차분히 대화하고 싶어 했다.
"불편한 시간일 거다. 하지만, 그 후엔 더욱 단단해질 거다."
"네."
"아나이스를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마누스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케일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가고, 케일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했던 말과는 달리, 아나이스는 정말 엄청난 재능을 가진 마법사였다.
특히 그녀가 쓰는 화염 속성 마법은 자신의 마법보다 뛰어났으니까.
자신은 범용성이 넓고, 뭐든지 익힐 수 있는 특징을 가졌다.
그 때문일까, 아직 그녀는 아나이스만큼의 깊은 이해를 보이지 못했다.
'내가 넘어야 할 과제야.'
그녀는 창밖을 보며 다짐했다.
그래.
마누스는 신이 아니다.
그녀에겐 무척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때로는 넘지 말아야 할 선도 있는 거겠지.
이번만큼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학생회장 자리는 관심 없지만....'
적어도 떠밀려서 하진 않을 것이다.
이건 그녀가 선택한 길이었으니까.
* * *
자정.
아나이스는 주변을 휙휙 확인하고 기숙사 밖으로 나섰다.
심한 일을 겪어서일까, 오늘은 탑에 오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좋아.
얼른 가자.
아나이스는 레드 카펫을 질주하며 아무도 없는 복도를 가로질렀다.
혹여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면 들킬까 봐, 계단으로 후다닥 내려갔다.
꽤 높은 곳에 있는 기숙사지만, 그녀의 열정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흐악, 흐억! 안 들켰겠지?"
괴상한 숨소리와 함께 기숙사의 사각지대까지 도착한 아나이스.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지만, 여전히 눈치챈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어둠 속에 몸을 숨겨, 이동하려 했다.
"데려다 드릴까요?"
"흐아아아악-?!"
"어머, 실례."
갑자기 들린 소리에, 그녀는 진심으로 놀라 풀썩 주저앉았다.
떨리는 몸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잠행복을 입고 있는 여인이 서 있었다.
목소리는 아주 익숙했다.
매일 아침, 하녀들을 통솔하던 그 목소리였으니까.
아나이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빽 소리쳤다.
"노, 놀랐잖아요!"
"죄송합니다. 은밀하게 움직이라는 공자님의 명이 있었거든요. 이렇게까지 놀랄 줄은.... 후후."
"으으... 그건 그렇고, 저도 데려갈 수 있나요?"
"그럼요."
아덴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녀가 아나이스의 손을 잡고, 능력을 발휘했다.
어둠 속에서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슈르륵-.
아나이스는 기묘한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눈을 떠 보니, 어느새 황금빛 시계가 있는 로비 앞이었다.
그곳엔 홀로 시계를 바라보고 있는 마누스가 서 있었고.
"데려왔습니다. 공자님."
"고맙군."
"오늘은 저도 견학할 수 있는 건가요?"
"원한다면."
아덴이 싱긋 웃었다.
아나이스는 그녀 홀로 탑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마누스의 옆에 있는 새하얀 생명체를 발견했다.
어라? 저런 것도 있었나?
그녀의 궁금증은 이내 아덴의 말로 인해 풀렸다.
"알비온이랍니다. 많이 컸죠?"
"사역마라는 게... 보통 저렇게 급격하게 자라나요?"
"제 지식을 벗어나는 일이지만, 그렇게 되었더군요."
알비온의 고개가 아나이스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크르릉- 작게 울었다.
새하얀 털이 난 드래곤이라니.
심지어 날개에도 보송보송한 털이 나 있었다.
"알비온?"
알비온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영리한 놈이었다.
마누스는 그런 알비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나이스에게 말했다.
"오늘의 파트너는 이 녀석이다. 아나이스."
"두 사람은요?"
"숙련된 조교."
여차하면 나설 테지만, 직접 관여하진 않을 예정.
마누스는 알비온이 가져온 마석을 분배해 흡수할 예정이었다.
압도적인 힘을 갖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아덴에게도 나눠 주면 돌아오는 몫은 얼마 없겠지만, 일단은 그 정도로 만족해야지.
이번 노가다의 목적은 알비온의 성장, 그리고 아나이스의 폭렙이었으니.
마누스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매달며 말했다.
"각오는 됐겠지? 학생회장 후보."
"-네. 물론이죠."
아나이스의 눈동자가 열정으로 빛났다.
스스로의 힘으로 탑을 오른다.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발상이었다.
탑은 위험했고, 항상 그녀를 사지로 몰아간 곳이었으니까.
그녀는 자신과 눈을 마주친 알비온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능력을 쓰니?"
"회복 마법, 그리고 버프 마법이다."
"직접적인 전투 마법은요?"
"그건 시험해 봐야겠군."
사실 마누스는 이미 알비온의 성능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리 알려 주면 재미없지.
알비온의 능력치에 기대서 전투를 치르려 할 수도 있었기에 알려 주지 않았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커 버릴 줄은 몰랐으니까.
지금이라면 알비온 홀로 저층 파수꾼을 잡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아나이스에겐 더더욱 비밀에 부칠 수밖에.
"알비온, 실전을 경험하고 와라. 훈련이다."
알비온이 작게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격해 보이지만, 실로 상냥한 주인.
사역마는 주인을 돕는 생명체였다.
그런데 알비온은 여태 주인에게 도움만 받아 온 것 같았다.
아버지처럼, 아낌없이 자신을 위하는 존재.
그간 받아 왔던 것을 갚을 날이 왔다.
마누스는 알비온의 생각을 읽은 듯, 미소 지으며 사역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출발하지."
"네."
그들은 적당한 층을 잡아 탑 안으로 사라졌다.
탑 로비에는 째깍거리는 시곗바늘 소리만 가득했다.
* * *
다음 날.
아나이스는 당당하게 수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에머슨을 제외한 A반 모두가 그녀를 내심 걱정했지만, 아무도 내색하지 않았다.
알아서 돌아오겠지.
그녀도 일단은 학생 신분이니, 매일매일 빠지는 건 불가능하겠지.
A반 학생들은 오늘따라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중, 피어슨은 남들과 다른 고민을 하는 중이었다.
'마누스 선배가 알아서 하겠지만....'
놀라운 건, 마누스는 등교했다는 사실이다.
둘이 같이 탑으로 떠났다면, 한 명만 돌아오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설마 잘못된 건 아니겠지?
피어슨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녀가 잘못된다면, 마누스 선배라도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
정말 최악의 상황이기에 일어날 일은 희박했지만....
그는 꿀꺽, 침을 삼키며 다짐했다.
'아무래도 찾아가서 물어봐야겠어.'
피어슨은 마음을 굳히고 어서 쉬는 시간이 되길 기다렸다.
앞에서 무어라 떠드는 교수님의 말이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나이스, 잘하고 있는 거겠지?
걱정이 점점 커져, 비극적인 생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피어슨은 애써 고개를 저어 부정적인 생각들을 털어 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심력을 쏟을 필욘 없겠지.
'그나저나, 얘들은 탑에 올라가긴 할까?'
그러다 마주치면 어쩌나?
이런 분위기에도 탑에 올라가고 싶진 않을 거다.
아니, 어쩌면 분기탱천한 케일이 올라가자고 할지도 모르지.
일이 어떻게 돌아가려나.
피어슨은 조용히 눈치를 보며 수업을 끝마쳤다.
기대했던 쉬는 시간이 돌아왔고, 그가 마누스를 찾아 나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을 때였다.
"잠깐 주목해 주세요-."
1학년을 담당하는 조교가 등장했다.
평소 연구실에서 썩고 있는 그들이 등장했다는 건, 아카데미의 진짜 중요한 시기가 도래했다는 거겠지.
그들은 한 뭉텅이의 유인물을 들고 학생들을 바라봤다.
언뜻 보이는 곳엔, <학생회장 후보 신청서>라고 적혀 있었다.
제99화
- 정점에 도전하라
* * *
케일은 양피지를 들고 적혀 있는 글자를 차근차근 읽어 내려갔다.
학생회장 선출.
중간고사를 제외하면 전반기 최대 행사라고 할 수 있는 경연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와닿지 않았다.
일반 평가와는 달리, 학생회장은 엄선된 이들만 치를 수 있는 경연.
그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케일은 계속해서 규칙을 눈에 담았다.
1. 학생회장 후보는 10명의 추천인 서명을 받아야 한다. 반과 학년은 상관없다.
2. 학생회장 후보는 교수님과 심층 면담을 거쳐 선발된다.
3. 학생회장 후보는 조교와의 대련을 통해 무력을 입증해야 한다.
4. 학생회장 후보는 후보와의 경쟁을 통해 학생회장의 자리에 어울림을 증명해야 한다.
5. 학생회장은 1년에 한 번, 자기방어를 통해 자리를 지킬 의무가 있다.
'어렵다.'
첫 번째 문제부터 난관이었다.
아브렐 가문이었던 니아는 인맥을 통해 추천인을 받았다.
알라노 역시 마찬가지.
4학년 학생회장은 애초에 한 달 만에 학년 전체를 휘어잡은 제왕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귀족의 가문인가?
아니다.
다양한 인맥을 가지고 있나?
아니다.
뛰어난 카리스마로 학년 전체를 휘어잡을 수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괜히 나간다고 했나?'
조금, 아주 조금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열 명의 친구도 없구나.
나에겐, 함께 탑을 올라가는 이들이 전부구나.
케일은 갑자기 밀려오는 자괴감에 옅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곳에서 발목을 잡힐 줄이야.
그녀에게, 인맥이란 정말 덧없는 단어였다.
언제나 그 끝은 좋지 않게 끝났으니까.
그런데....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하나...."
평민.
그리고 귀족.
이곳, 아카데미엔 구분이 없다고들 말하지만 한 달 동안 지내면서 보고 들은 것이 있었다.
케일 자신이 특이한 케이스이지, 보통은 귀족은 귀족끼리, 평민은 평민끼리 뭉쳐 다니는 것이 일상이었다.
자,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평민임에도 귀족들이랑 어울려 다니는 자신을,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귀족은 어울리지도 못할 이가 귀족이랑 어울린다고 생각하겠지.
반대로, 평민은 자신들이 아닌, 귀족들과 놀아난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케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 멜라니에게로 향했다.
멜라니는 애초에 학생회장 따위, 관심 없다는 듯 양피지를 고이 접어 가방 한구석에 넣어 둔 상태였다.
그녀는 케일의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멜라니 역시 들어서 알고 있었다.
케일과 아나이스.
제법, 아니 무척 친해 보였는데....
사람 일이란 건 알 수 없는 거구나.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이 될 수도 있다. 이건 상인의 일뿐만 아니라, 어딜 가나 통용되는 사실이지. 그러니-.>
새삼,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것을 전해 주려 했는지 떠올랐다.
아 참,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멜라니는 잠깐 새려는 의식을 부여잡고 케일에게 입을 열었다.
"케일은 참가하려고?"
"으응. 아나이스를 그냥 둘 수 없으니까."
"-케일은 정말 착하네. 아마 내 성격이었으면... 그 자리에서 어떻게든 결판을 냈을 것 같은데."
"아나이스가 그러는 건, 궁지에 몰려서일 거야. 한 달 정도밖에 안 봤지만, 알 수 있는걸."
멜라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케일의 심성은 착했다.
어쩌면 아나이스 역시 이런 케일의 성격을 이용한 것이 아닐까?
만약 자신이라면....
'내가 자꾸 무슨 생각을.'
멜라니는 작게 고개를 젓곤 손을 뻗어 케일이 가진 양피지를 쥐었다.
"이리 줘. 서명해 줄게."
"고마워. 응원해 줘서."
멜라니는 웃음을 지었다.
케일은 모르고 있겠지만, 멜라니는 중도를 지킬 생각이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두 사람 모두 조금씩 잘못한 부분이 있었으니까.
잘못의 경중을 따지는 것이 아닌, 사실만 알아볼 뿐이었다.
따라서, 아나이스가 오더라도 기꺼이 서명해 줄 생각이었다.
누군가는 그녀가 일방적으로 케일에게 폭언을 퍼부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나이스가 꾹꾹 참고 있던 부분을 건든 건 케일이었으니까.
"열심히 해. 케일의 실력이면 경연 본선에는 진출할 수 있을 거야."
"응. 힘낼게."
케일은 주변을 둘러봤다.
A반 학생들 대부분은 자리에 앉아서 복습하거나, 마법을 연습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아니면 학생회장 후보 신청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거나.
한 명은 아예 서명을 받으러 돌아다니기까지 했다.
벌써 경쟁은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
케일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겐 모두 받아 보자.
'에머슨, 피어슨, 그리고....'
아나이스.
오늘따라 그녀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건 무리일까.
케일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에머슨이 있는 B반으로 향했다.
* * *
"선배! 선배!"
"...."
니아와 함께 수업을 들은 마누스는 헐레벌떡 뛰어오는 푼수를 바라봤다.
저렇게 이목 좀 안 끌었으면 좋겠는데, 가뜩이나 서 있기만 해도 시선이 몰려 항상 예민해져 있는 상태이지 않은가.
1학년.
주변 눈치를 살피지 않고 직진하는 남정네가 마누스 앞에 섰다.
"서, 선배. 흐억, 지, 질문이, 흐어억-!"
"따라와라."
마음 같아선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그냥 놔뒀다.
피어슨의 지금 심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으니.
원작에서도 아나이스와 피어슨은....
마누스는 졸졸 따라오는 피어슨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마초적인 성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 역시 든든한 캐릭터였으니까.
누군가를 지켜 주는 능력 하나만큼은 최고이지 않을까.
"어머, 난 빠져 줄게?"
"선배도 오시죠. 짚고 넘어가야 할 얘기니."
"...그, 그럴까?"
니아는 순간적으로 마누스의 기세에 압도되어, 한 걸음 물러섰다.
저 수려한 무표정은 왠지 모르게 사람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녀 역시 이 사건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상황.
찔리는 것이 있었기에 그녀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누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에이, 아나이스가 그렇게 말할 리가 없잖아?
니아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마누스의 뒤를 쫓았다.
"...여긴 자주 오게 되네요."
"좋은 장소지."
여전히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는 테라스.
마침 교실과도 가까워, 잠시 바람 쐬기 참 좋은 곳이었다.
니아는 와아- 하고 걸어가며 테라스 난간을 잡고 밑을 구경했다.
피어슨은 마누스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아나이스의 행방이 제일 궁금했으니까.
"아나이스는 어디 있나요? 설마 탑에 가둬 놓은 건 아니죠? 아니면 잘못됐거나, 어떻게 된 건 아니죠?"
"걱정하지 마라. 문제없이 탑에 있으니."
"타, 탑에 있다고요?!"
"그래."
피어슨은 옛날, 탑에서 처음 마누스에게 대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무시무시한 기억은 아직도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울컥하려는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때의 마누스와 지금의 마누스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 정도로 까마득했으니까.
자신도 강해졌지만,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피어슨은 내면에서 날뛰는 걱정과 부담을 꾹 눌러 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정말 괜찮은 거 맞죠?"
"내 사역마와 함께 있으니 괜찮다."
"사역마라면... 알비온이요? 그 솜뭉치?"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어슨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이었다.
여태 잘 활약하지도 못했던 사역마랑 같이 있다고 안전이 보장되나?
안심하라고 했던 마누스와 달리, 피어슨은 더 큰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 모습을 눈치채지 못할 마누스가 아니었다.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이, 꼭 주인을 잃어버린 강아지 같아 손으로 피어슨의 머리를 꾹 눌러 잡았다.
"가장 믿어야 할 친구가 이런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니. 머저리라는 평가는 여전히 철회할 수 없겠군."
"...그렇지만, 탑은 위험한 곳이잖아요. 파수꾼이라도 만나면 어떡해요!"
"그 정도 안배도 없이 두고 왔겠나."
"...."
피어슨은 입을 다물었다.
마누스가 피어슨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런저런 효과로 전사 후보생급 육체를 지닌 마누스였다.
마법사로선 처음 겪어 보는 격통에, 피어슨이 격렬하게 반응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으아아아아-!
괴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아악! 선배! 제 뇌는 그렇게 단단하지 않아요! 아니, 많은 지식이 들어 있지 않아요! 살려 주세요! 으아아악-!"
"알았으면 입 다물고 기다려라.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응원이니까."
"...넵."
궁금증도 해결해 줬겠다.
마누스는 다음 수업을 위해 걸음을 옮기려 했다.
"잠깐, 그 탑. 혼자 들어가서 안 나오면 어떻게 되는 거야?"
"틈새에 갇히게 됩니다. 하루와 하루 사이를 건너뛰게 되는 거죠."
"그럼... 계속 거기에 있으면 시간 아까운 거 아니야?"
"대신 마석을 최대한 많이 뽑아먹을 수 있겠죠."
"아하...."
니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가 앞발을 들어 올리는 표정.
세로로 찢어져 있는 동공이 조금 확장되었다.
마누스는 그 모습을 보며 단단히 일렀다.
"혹여 '충분한 준비' 없이 탑에 홀로 들어갈 생각은 마십쇼. 생각보다 더 위험한 곳입니다."
"어머 웃겨. 방금까지 걱정하지 말라던 사람이 어디에 있는 누구였더라?"
"충분한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겠죠."
마누스는 그 말을 남기고 테라스를 나섰다.
니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쳇, 진짜 엄청 잘 아는 것처럼 얘기하네."
"잘 아는 거 맞을걸요?"
의외로, 마누스를 두둔하는 말은 피어슨에게서 나왔다.
"...물론 나보다야 잘 알겠지만-."
"처음 탑을 발견한 것도, 혼자 제집 드나들듯 오르내리는 것도, 파수꾼의 약점을 아는 것도, 또... 약점을 가르쳐 주시는 것도 마누스 선배인데요?"
"...그, 그래?"
니아는 문득, 이전 등반을 생각했다.
적절하게 떨어지는 브리핑.
약점 속성을 찌르는 절묘한 마법.
높은 클래스의 마법을 쓰지 않고도 잡아내는 기술.
마누스는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걔는, 어떻게 그런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 걸까?'
마치 무수히 많이 잡아 본 것처럼 말이야.
참으로 수상하지 않은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무런 의심 없이 따라온 얘들이 진짜 이상한 거 아니야?
니아는 톡톡, 손가락으로 입술을 두들기며 생각했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니야?
'언제 제대로 물어봐야겠는데.'
혹여 마누스가 나쁜 마음을 먹고 있는 거라면?
더불어, 마누스가 가스라이팅을 통해 아군을 늘리려고 하는 거라면?
왜 이렇게 순진한 거야, 아직 1학년이라 그런가?
그렇게 따지자면 알라노는 왜 동조하고 있는 걸까?
알쏭달쏭.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다.
의심의 불길은 완전히 꺼지지 않았고, 새로운 장작을 찾아 불길을 옮겨 갔다.
새로운 인연은 언제나 새로운 위기를 불러오는 법.
니아의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
제100화
- 벌어지는 균열
* * *
사흘이 더 지났다.
오랜만에 아나이스가 교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모습에 A반의 이목이 그곳으로 향했다.
뜨거운 빛을 담았지만, 차가운 눈동자가 주변을 훑었다.
아나이스는 별다른 반응 없이 무표정하게 책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달그락거리며 수업을 준비하는 소리만 울려 퍼지는 교실.
'아, 죽겠다. 진짜, 그 선배 너무한 거 아니야?'
아나이스는 속으로 마누스를 욕하며 퀭한 눈을 비볐다.
진심,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마나의 힘을 빌려 가까스로 정신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아이들에게 인사하는 것도 힘들어서 그저 눈만 마주쳤을 뿐, 별다른 반응도 하지 못했다.
내일부턴 조금 여유로워지니 아이들하고도 조금씩 관계를 회복해야겠지.
분위기가 매우 어색했지만, 나서서 회복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죽겠다 진짜-.'
그녀는 기절하지 않은 것이 기적일 정도로 혹사당하고 왔으니까.
하마터면 씻지도 못하고 등교할 뻔했다.
'...아나이스.'
케일은 퀭한 눈동자의 아나이스를 바라봤다.
지금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무어라 말을 걸어 볼까 했지만,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일 분위기였다.
지금은 그냥 감정이 사그라들 때까지 기다리자.
케일은 그렇게 생각하고 수업에 집중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부터는 배운 모든 것이 평가 및 중간고사에 나올 테니까.
'지금은 집중하자. 집중.'
'케일, 미안해. 조금 회복되면... 그리고 네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게 되면, 제대로 사과할게.'
상반된 마음이 엇갈렸다.
아나이스는 흘끔, 정면을 보고 있는 케일을 바라봤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는 오늘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울컥한 그녀였지만, 곧 부질없다는 걸 깨닫곤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두 사람 사이에 낀 이들은 그야말로 좌불안석.
어색한 공기 사이에 갇힌 느낌이어서 숨마저 막힐 정도였다.
'진짜, 지옥이다.'
피어슨이 남몰래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멜라니는 두 사람을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을 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교수가 들어오고, 그가 아나이스를 발견하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흘이나 결석한 건, 성적에도 큰 영향이 있을 터다.
게다가 사흘 전에 큰 이슈가 있었으니, 전달해야겠고....
무엇보다 안색이 매우 안 좋았기에 안부를 물어야 했다.
"아나이스 학생. 오랜만입니다. 요 며칠 무슨 일이 있었나요?"
"몸이 안 좋았습니다."
"그렇군요. 몸 관리도 자신의 역량입니다. 아프면 힘들고 서럽잖아요? 그러니 자기 관리에 좀 더 열을 쏟으시기 바랍니다."
"...네."
그녀는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답했다.
교수는 푸근한 인상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수업을 시작했다.
오늘은 꽤 복잡한 강의였다.
딱딱거리는 분필 소리와 학생들의 필기 소리.
공책 넘기는 소리만이 강의실에 가득 울려 퍼졌다.
오늘 수업은 유난히 학생들의 집중력이 뛰어나 보였다.
때문일까, 교수의 강의는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아나이스 학생은 절 따라오세요."
아나이스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척비척,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그녀의 몸짓에 피어슨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으니까.
속삭이듯, 그러나 똑똑히 들리도록 말했다.
"야-! 아나이스-! 괜찮아아-?"
"...."
아나이스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휘적휘적 걸어갔다.
왜일까.
항상 발랄한 모습만 보이던 그녀가 좀비처럼 걸으니, 영 적응되지 않았다.
그뿐일까.
피어슨의 가슴을 쿡쿡 찌르는 이 느낌.
입술을 삐죽 내밀게 하고, 눈동자를 떨리게 만드는 이 느낌은, 분명 서운함이리라.
피어슨은 멍하니 아나이스를 바라봤다.
가장 친하다고 느끼는 친구는, 그렇게 교실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피어슨, 안 따라가?"
"...지금은 놔두는 게 낫겠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내가 가서 뭐 하냐. 귀찮기만 하지."
"그래도...."
멜라니가 옆에서 그를 부추겼지만, 피어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누스, 그리고 아나이스가 말한 대로 지금은 그녀를 믿어야겠지.
비록 초췌한 몰골에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걸음을 옮기는 그녀지만.
선배가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은 몰골이지만, 참아야겠지.
꾸욱-.
피어슨은 으스러져라,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이렇게도 무력한 것이었나.
강해지고 싶다.
피어슨의 마음속에 강한 열망이 피어났다.
[간섭을 시작합니다.]
누군가의 눈앞에, 운명이 변화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는 조용히 자신만의 불꽃을 조용히 피워 냈다.
강한 열망은 운명을 비튼다.
피어슨의 선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 ♟ *
아나이스는 양피지를 들고 쓰인 글을 읽어 내려갔다.
음음, 그렇구나.
열 명이라....
그냥 아무나 붙잡고 말해도 해 주지 않을까?
플로이스 가문은 위대한 가문까진 아니지만, 나름대로 명망 있는 귀족가였다.
그들이 피워 내는 찬란한 불꽃은 태양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
소규모지만 자체적으로 마법을 연구하는 곳도 있었고, 가진 바 무력과 재산도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딸. 네가 써야 할 자산과 인물들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단다.>
<가문을 빛내기 위해선, 우리가 가진 자산을 언제,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가 정말 중요하거든.>
아나이스는 가주님, 아버지의 말을 기억했다.
틈만 나면 이야기했던, 가문에 대한 자각과 힘에 대한 인식.
특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힘을 꺼렸다.
귀족, 그리고 거대한 가문의 자제는 존재만으로도 파괴력이 대단하더라고.
어딜 가나 그 힘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수두룩했거든.
이번엔 그 힘을 좀 이용할 생각이었다.
'열 명이라, 금방이지.'
가문과 연이 닿아 있는 자들만 수십이었다.
그들을 조금만 이용한다면, 첫 번째 과제는 쉽게 해치우리라.
케일, 그리고 탑에 함께 올라갔던 동료들의 서명은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건 그들을 곤란하게 한 대가이자, 홀로 케일에게 서기 위한 고행이라고 생각했으니.
아나이스는 B반부터 천천히 돌아 볼 생각이었다.
처음은... 그래, 바우어 가문의 노예로 해 볼까.
"오늘은 푹 쉬라고 했으니까... 가자마자 자야겠다."
피곤해 죽을 것 같았다.
그녀는 비척비척, B반으로 향했다.
오늘도 평화로운, 그러나 언제 지옥으로 처박힐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붉은 머리칼이 B반으로 들어가자, 모두의 이목이 아나이스에게 쏠렸다.
평소 쾌활한 이미지가 아닌, 어딘가 망가져 있는 듯한 모습.
기괴한 분위기를 풍겨서일까.
일순간 그들은 떠들던 소리를 낮췄다.
"...이것 좀 서명해 줄래."
"어? 그, 그럴까?"
리비는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그 사건이 있었던 이후, 그녀는 정말 쥐 죽은 듯 조용히 살았다.
이따금 멜라니가 시키는 것들을 해 나가며, 정상적인 삶을 되찾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공포는 아직도 그녀에게 악몽이라는 형태로 찾아오곤 했다.
어디 가서 말도 못 하는 비밀은, 리비를 점점 갉아먹고 있었다.
정작 그녀는 자각하고 있지 않았지만.
"여기. 학생회장... 힘내."
"...."
아나이스는 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1학년 전체에 붉은 머리 좀비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갔다.
2학년, 3학년의 학생회장이 모두 황금 뱀반인 만큼, 은밀한 반발심이 생긴 것도 덤이었다.
"이번엔 우리 독수리반이 회장을 가져가야 하지 않겠어?"
"레벨리-말리토가 회장 자리를 가져가면, 학생회까지 집어삼킬 수 있게 되지. 그거 아주 좋은데?"
독수리반.
레벨리-말리토의 본거지로 쓰이는 동아리실.
그곳엔 오늘도 실력 있는 평민들이 모여 학생회장 후보에 대한 토론이 한창이었다.
2학년은 알라노라는 어마어마한 천재가 있어 계획이 무산되었다.
3학년 역시 아브렐 니아라는, 드래곤의 핏줄을 이은 괴물 때문에 엄두도 못 냈다.
4학년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이번엔 해 볼 만했다.
"그 평민 마법사는 어떻게 됐지?"
"요즘 귀족들이랑 사이가 별로 좋지 못한가 봅니다. 데면데면하던데요?"
"그래? 흐음...."
철저한 계급제로 구분된 레벨리-말리토 안에서의 삶.
하지만 누구나 실력만 된다면 간부 자리도 노려 볼 수 있는 조직 문화 때문에 별 불만은 없었다.
1학년을 제패하고 장으로서 군림하고 있는 이, 자신의 키만큼 거대한 검을 쓰는 독수리반 학생이 히죽 웃었다.
귀족? 평민?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권력이고, 세력이고, 힘이었다.
힘과 권력.
그건 언제나 귀족들의 것이었지.
"아카데미의 판도를 뒤집을 때가 됐어. 어이, 걔 서명하기 힘들 거야. 너희들이 도와줘라."
"받아들일까요?"
"그럴걸? 원래 절박하면 안 하던 짓을 하거든."
킬킬 웃는 그의 모습은 같은 조직의 일원이 보더라도 사악해 보였다.
일단 밑 작업부터 해야겠지.
대검을 천으로 닦고 있는 이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 그래. 일단 오늘 하루는 귀족 애들한테 걔 얘기 좀 퍼뜨려."
"그럴까요?"
"응. 그래야 자연스럽게 우리 쪽으로 오지."
"확실히.... 알겠습니다."
한쪽에서 열 명의 추천인을 받아 온 누군가가 그에게 양피지를 내밀었다.
양피지 위에는 '카스트로'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전사의 왕이 되고자 하는 평민.
그의 이야기는 어디선가 들었던 용사의 이야기를 닮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평민에서, 왕국, 제국 신민들에게 칭송받는 용사까지.
카스트로는 항상 용사를 꿈꿨다.
하지만, 용사는 항상 혼자가 아니었다.
뛰어난 동료가 필요했다.
'이런 쓰레기들 말고, 진짜 동료가 필요해.'
용사의 옆엔 항상 강력한 동료가 있었다.
마법을 펑펑 날려 대는 대마도사.
앞을 든든하게 지켜 주는 가디언.
어떤 부상을 입어도 상처를 치유해 주는 치유사 등등.
용사는 강력한 동료가 뒤를 받쳐 주어야 한다.
그중에 대마도사의 자격을 갖춘 이가, 동기 중에 있는 것 같았다.
평가 기간에 봤던 그녀의 마법은 사뭇 대단했다.
'마누스, 알라노 같은 인간들은 우릴 거들떠보지도 않겠지.'
하지만, 평민이라면 어떨까.
그 거대한 재능이 도리어 자신들을 향해 칼을 들이민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까진 제법 친하게 지내는 것 같은데-.
카스트로는 진득하게 웃었다.
자신의 학생회장 추천을 위한 열 명의 이름들을 살펴보며, 앞으로의 그림을 그려 봤다.
누군가는 덧없는 꿈이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꿈을 좇는 것이야말로, 진짜 용사가 되는 과정이 아닐까.
<너는, 누구보다 빛나는 재능을 가졌단다.>
<너라면 용사가 될 수 있겠지. 자유롭게 그 재능을 펼치거라.>
평민.
그러나 너무나도 빛나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던 부모님의 말씀.
카스트로는 오늘도 그 말씀을 새기며 자신의 길을 굳게 믿고 걸어가려 했다.
그 끝이, 어떤 결말로 이어지는지 알지 못한 채.
제101화
- 절박함은 때로 어둠을 몰고 온다
* * *
아나이스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1학년 조교가 행정을 처리하는 곳으로 향했다.
1학년을 총괄하는 교수는 독수리반의 딕슨 미카엘 교수.
필연적으로 독수리반을 통과해 가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마주치는 이들마다 마찰 없이 지나갔다.
이따금 아는 얼굴이 있으면 고개를 까딱여 인사해 주었다.
열 명.
그녀에겐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여어-. 아나이스."
"...뭐니?"
아나이스 앞에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이가 나타났다.
이름이 뭐더라?
기억에 없는 이였다.
평소라면 무슨 용건일까, 혹은 누가 부르나, 같은 생각을 했겠지.
그런 여유로운 생각을 할 정도의 여유가 없었다.
예민함을 죽이기 위해 최대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했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앞을 막으니 순간적으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비켜 줄래. 바쁘거든."
"요즘 네 친구랑 사이가 안 좋다며?"
"꺼져-."
그녀의 입매가 비틀렸다.
터벅터벅, 힘없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남자가 이죽였다.
아무리 봐도 어딘가 망가진 사람처럼 보이는데.
조금 더 자극하면, 안 되겠지?
그렇다면 그저 경각심만 심어 주면 되겠지.
이미 벌어진 균열을 깊고, 넓게 벌리는 건 아주 쉬운 작업이었으니.
"네 친구. 열 명을 어디서 채울 것 같아?"
아나이스는 대답할 가치도 느끼지 못해, 그저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분명 다른 반 아이들이 알아서 서명해 줬겠지.
자신도 쉽게 해냈으니, 사흘이나 시간이 있었던 시간 동안 이미 다 끝내 놓았으리라.
첫 관문도 통과하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학생회장으로 당당히 선 후에 다시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지금은 해야 할 일에 집중하자.
아나이스가 조교실로 슥 사라졌다.
"생각보다 친구에 대해 아는 게 없는데?"
"그러게. 아니면 진짜 틀어졌던 건가?"
"거야 조금 있으면 밝혀지겠지. 근데 진짜 걔가 우리 쪽으로 넘어오면, 1학년은 평민이 꽉 잡는 거네?"
응응, 그러게.
남자가 다가온 동료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이라고 했나?
그녀 본인은 귀족들과 어울려 다니느라 잘 모르겠지만-.
사실 평민 중에서는 그녀에게 환상을 품고 있는 자가 꽤 많았다.
비록 귀족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억눌려 표현하는 자는 적었지만.
서명 역시 마찬가지.
자신의 이름이 떡하니 박혀 있는 건, 미운털 박히겠다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걸.
아나이스의 뒷모습을 보던 이들은 순순히 몸을 돌렸다.
말 몇 마디로 관계를 부술 수 있는데, 굳이 드잡이질할 필욘 없지.
"우린 카스트로한테 보고하러 가자."
"그래."
바람잡이로 나선 두 사람은 다음 계획을 위해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아지트에서 기다리고 있을 대장에게 보고할 거리가 생각보다 많았으니.
* * *
아나이스는 조교에게 신청서를 내밀었다.
빼곡히 적혀 있는 귀족들의 이름.
조교는 그들의 서명을 확인하고 서류를 쌓아 두었다.
아나이스가 꾸벅, 인사를 건네고 가려 했다.
조교는 서류들을 살펴보며 궁금한 듯 아나이스에게 입을 열었다.
정말 순수하게 궁금증이 묻어 나오는 말투였다.
"네 친구도 학생회장 후보에 신청하려나 본데, 생각보다 어려운가 봐."
"네?"
"언뜻 봤는데, 아직도 신청서 들고 돌아다니던데?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
아나이스는 떨리는 눈동자로 조교를 바라봤다.
조교 역시 그녀의 표정을 읽곤,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소문으로 듣기엔 둘이 엄청 친하다던데-.
당연히 알 거라 생각했던 일이었다.
여차하면 네가 좀 도와 달라고 말할 생각이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이 좀 꼬인 것 같았다.
"어... 몰랐나 보네. 걔 재능도 있어 보이는데, 도와주는 건 어때? 경쟁자에게 이런 말 하긴 좀 그런가?"
"...네. 경쟁, 이니까요."
아나이스는 멍하니 중얼거리고 조교실을 나섰다.
조교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내 관심을 꺼 버렸다.
할 일이 산더미였다.
일면식도 별로 없는 학생의 사정이야, 깊게 파고들 이유는 없지.
"으... 이거 또 언제 다 처리하냐."
이 앞에 어떤 찬란한 길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뿐.
조교는 오늘도 열심히 일을 할 뿐이었다.
달칵-.
"하아-."
문이 닫히고, 아나이스는 착잡한 심정을 숨기지 않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케일, 이 멍청한 거.
자연스럽게 상황이 그려졌다.
귀족은 귀족 나름대로, 평민은 평민 나름대로 그녀를 꺼리겠지.
붙임성도 별로 없는 애를 누가 예쁘다고 학생회장으로 밀어주겠는가.
그녀는 감언이설로 상대방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자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뒤를 봐줄 성격도 아니다.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아나이스는 생각보다 케일의 면모를 자세히 꿰뚫고 있었다.
'그 멍청이.'
분명 우직하고 정직하게 돌아다녔겠지.
발품을 팔았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케일에게는 메리트가 없을 거라 생각할 거다.
최고의 마법사?
그건 케일 본인의 이름을 드높이는 재능이지, 콩고물을 바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가문에 대한 이득이라든가, 앞으로 잘 챙겨 주겠다든가, 아니면 학년 전체에 영향을 끼칠 만한 공약을 내걸든가.
케일은 아직, 그런 정치적인 것에 무척 서투르겠지.
"아... 그런 의미였구나."
아나이스는 문득, 조교실에 들어오기 전 독수리반 애들이 했던 얘기를 상기했다.
누가 보냈는지, 머리도 나쁜 이들이라고 생각했다.
아카데미는 정치판이다.
정치판에서, 과연 비밀이 있을까?
하-.
그런 술수를 썼단 말이지.
피곤하고 예민한 상태여서 그럴까, 아나이스의 생각이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괘씸했다.
가증스러웠고.
'내가 어떻게든 밟아 주겠어.'
지금은 잠시 소원해진 관계일지라도, 케일은 그녀에게 너무도 소중한 존재였다.
속이 검은 놈들이 친구의 마음을 마음대로 유린하게 둘 순 없었다.
너희들 뜻대로 될까?
플로이스의 인맥, 플로이스의 힘을 너무 얕봤어, 응?
"가만 안 둬."
원래는 빠르게 기숙사로 돌아가, 충분한 휴식을 취하려 했다.
그런데 이놈의 동기들이 쉬려고 하는 날 가만히 놔두질 않잖아.
아나이스는 터벅터벅, 좀비 같은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살아 있는 인간을 쫓는 좀비처럼 번뜩였다.
* * *
"미안, 다른 애 찾아볼래?"
"...응."
"우리도 그러고 싶은 건 아닌데... 알지?"
케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까워하는 눈빛이 케일의 마음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벌써 사흘.
이제 앞으로 남은 기간은 이틀뿐이었다.
벌써 신청한 이들은 어떤 전략을 구상할지, 어떤 문제가 시험에 나올지 궁금해하며 공부에 몰두했다.
하지만, 케일은 아직도 열 명의 추천생 서명을 받지 못했다.
A반부터 F반까지 열심히 돌아다녔지만, 거절하는 학생이 훨씬 많았다.
'쉬운 게 하나도 없네.'
그녀가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쓸쓸한 걸음걸이로 교실을 나섰다.
그녀에 대한 소문은 쫙 퍼진 상태였다.
뱀반뿐만 아니라 독수리, 사슴반 역시 모두 거절당했다.
심지어는-.
<이번에 귀족들이랑 사이 안 좋아졌다며? 소문 다 났더라. 내가 만약 서명해 주면, 걔들한테 무슨 꼴을 당하겠어? 미안.>
대놓고 지금 상황을 표현해 주는 이도 있었다.
케일은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실감했다.
힘도 없고, 세력도 없으며 뒤를 봐줄 만한 배경도 없는 이 보잘것없는 학생을 밀어주는 이는 몇 없었다.
여섯 명.
사흘 동안 발품을 팔아 서명받은 이들의 숫자였다.
에머슨, 멜라니, 피어슨.
그리고 독려해 준 귀족 가문 자제 셋.
'이래 가지곤, 아나이스에게 꼴사나운 모습만 보이게 될 거야.'
정정당당히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그녀와 동등한 위치까지 올라갈 필요가 있는데-.
현실은 너무도 냉혹했고 마음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자괴감이 물밀 듯 밀려왔다.
이 절망적인 상황을 헤쳐 나갈 방법이 없을까.
마누스, 니아, 알라노라면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귀족 친구들이라도-.
'아니야. 이건 오로지 나 혼자 하기로 했잖아.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어.'
케일은 흐르려는 감정을 다잡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딜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그녀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망토에 수놓아진 검은색 독수리.
그들은 케일에게 다가오며 웃음을 드러냈다.
독수리반은 그녀에게 좋은 인상이 아닌데, 저렇게 살갑게 다가오다니.
그녀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다.
"안녕? 너 요즘 유명하더라. 힘들지?"
"우리가 좀 도와주려고 왔어."
살랑살랑 웃으며 자신에게 다가온 이들.
케일의 기억엔 없는 친구들이었다.
"도와준다고?"
"맞아. 너 평민이지? 우리도 평민이거든. 같은 평민끼리 잘해 보자."
"귀족들이 너 밀어내고 있는 거, 다 소문났어."
"난 괜찮은데."
케일은 한 번 거절했다.
그녀는 전학 온 날, 자신을 끌고 가려던 이들을 생각했다.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접근했던 귀족들과 달리 그들은 같은 평민이면 같은 소속이어야 한다면서 윽박질렀다.
"아나이스? 걔는 가문의 힘을 이용해서 벌써 제출했던데? 너, 걔랑 경쟁하려는 거 아니야?"
"...맞는데, 너희들의 도움은 필요 없어."
"하하, 같은 평민끼리 왜 그래? 지난 사흘 동안 귀족 애들한테 무시당했던 걸 생각해 봐. 그러고도 귀족들한테 손 벌리고 다닐 거야?"
"...."
케일은 지난 사흘간 받았던 언사를 떠올렸다.
확실히, 썩 유쾌한 감정은 아니었다.
무시와 조롱, 멸시까지 받았던 지난 사흘간의 기억.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딱딱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독수리반 아이들이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하면 넘어올 것 같은데?
'너도 별수 없지.'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 봐야 평민의 신분을 벗어날 순 없을 거다.
귀족들의 무수한 견제를 받으며 아카데미 생활을 이어 가겠지.
"그렇게 무시당할 바엔 우리랑 함께하자."
"맞아. 우리가 팍팍 밀어줄게. 아카데미에서 언제까지 귀족들이 설치게 놔둘 거야?"
그들은 원대한 꿈을 가지고 행동했다.
언젠가, 귀족들을 무너뜨리고 지금의 평민이 기득권을 잡는 것.
그렇게 조금씩, 평민들의 영향력을 높여 나가는 것이다.
아카데미에서 기득권을 잡는다면, 아카데미 밖에서도 점점 영향력을 높일 수 있을 테니까.
평민도 재능이 있고, 충분히 강해질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 주기 위해 움직이는 것.
그것이 레벨리-말리토의 목적이었다.
"어머, 웃기고 앉았네."
"야, 평민, 저리 꺼져."
"어어-? 늬들 뭐야?!"
반대편에서 일련의 무리가 등장했다.
한눈에 봐도 귀티가 흐르는 자들.
여덟 개의 왕국, 하나의 제국을 지탱하고 있는 크고 작은 기둥들.
가문이라는 이름하에, 귀족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케일을 사이에 두고, 첨예하게 대치했다.
케일은 그 중간에 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왜....'
그녀의 머리가 복잡해져 갔다.
제102화
- 본래 전쟁은 작은 이유에서 시작된다
* * *
세계사에선 크나큰 전쟁이 많이 일어나곤 한다.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백년전쟁, 한국전쟁 등등.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전쟁이고, 전쟁의 원인은 정말 다양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 전쟁의 시발점은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한 것이 상당히 많다는 거.
역사에 조금만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알 것이다.
큰 사건으로 번지기 전, 사람들의 심리는 이미 변질되어 있다는 걸.
지금, 이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케일을 두고, 평민과 귀족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
평민은 이 땅을 지켜 주는 귀족들에게 존경심을 품지 않았고, 귀족은 근간이 되는 평민을 천박하게 여겼다.
"저기-."
"우리가 서명해 줄 테니까, 그런 재능으로 평민이랑 놀지 마."
"그래. 그거 알아? 여덟 왕국이랑 제국 모두, 평민이 귀족이 될 수 있는 길이 충분히 열려 있는 거?"
귀족들은 평민 학생들을 고깝게 본다.
그건, 노력하지 않고 이미 가진 자들을 끌어내리려 하기 때문.
출세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그것이 제국, 더불어 이 대륙이 살아남은 방식이었다.
세상이 안정되고, 평민이 스스로 안주하길 수 세기.
노력해서 얻으려 하지 않고, 그들은 위에서 내려오는 것들을 받아먹으며 몸집을 키웠다.
"그게 제대로 이뤄지나? 평민 출신 귀족이라고 제대로 대우도 안 해 주는 게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넌 신입생을 선배처럼 대하니?"
설전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케일의 인상이 점점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누가 보낸 건지 모르겠지만, 잘못된 선택이다.
케일은 이런 개판 오 분 전인 상태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왜 일이 계속 꼬이는 건지, 답답하기만 했다.
언성이 점점 높아졌고, 급기야 하지 못할 말까지 쏟아 내는 이들.
"엄마 아빠 잘 만나서 떵떵거리는 주제에-."
"그러는 너희는, 부모 잘못 만나서 그렇게 천박하게 태어났니?"
"그만해."
케일이 나직이 말했다.
분명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말했지만,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시끄러웠던 곳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느새, 그들은 케일이 내뿜는 마나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평민이든, 귀족이든, 상관없어. 서명할 사람만 하고 돌아가 줄래?"
"...그래. 우리가 못 볼 꼴을 보였네."
"하.... 그래. 여기서 이러고 있을 사안이 아니지."
"잘 선택해야 할 거야. 케일."
케일이 뱉은 말에, 모두가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케일에게 경고하고 떠나가기도 했다.
아카데미에 있는 이상,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지.
복도에서 모두의 이목을 끌며 설전을 벌이는 건, 모두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행동이었다.
가뜩이나 교수와 이사장, 실질적으로 아카데미를 운용하고 있는 이들은 귀족과 평민의 대립을 좋지 않게 보고 있었으니.
이렇게 파벌을 나눠서 싸우고 있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불이익이 올 수밖에 없었다.
케일이 중재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누군가에게 미운털이 박혔겠지.
"여기, 열 명 다 채운 거 축하해. 이제 공부 열심히 해야겠네."
"...고마워."
결국, 그들은 귀족과 평민이 두 명씩 서명을 해 주고 떠나갔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독수리반 학생들은 떠나갈 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말한 거, 잘 생각해 봐."
"휴... 쟤들,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이들이지?"
"응? 아마... 그럴 거라 생각해."
푸른 머리칼의 남자가 말했다.
플로이스 가문과는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그래서 그녀의 친우를 도와주기로 했던 사슴반의 남자였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반가워. 케일이라고 했던가? 난 드라인이라고 해. 같은 평민이지만... 나도 위로 올라가고 싶거든."
"잘 부탁해."
마지막으로 서명을 진행한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플로이스 가문은 귀족일 텐데, 드라인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일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케일은 신청서를 챙겨, 걸음을 옮겼다.
드라인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뇌까렸다.
"영애. 영애가 말씀하신 친구는...."
그는 뒷말을 삼키고 몸을 돌렸다.
레벨리-말리토라고 했던가.
조만간 그쪽에서도 움직일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교수들의 눈을 피해 움직이는 건, 예전부터 있던 일이었으니-.
어쩌면 교수들 사이에서도 알 수 없는 알력이 존재하는지도.
어떻게 해야 할까-.
드라인은 눈을 빛내며 아카데미 내부를 둘러봤다.
오늘도 평화로운 곳.
허나, 그 평화를 유지하는 댐에 거대한 못이 박혔다.
드라인은 다시 케일을 돌아봤다.
'저 친구가 급류에 휩쓸리지 않길 바라야겠지.'
작은 충돌은 언젠가 큰 싸움으로 번진다.
인간관계.
서열.
상대방을 찍어 누르고 싶은 지배심.
가학심.
이 밖에 부정적인 감정들이 소용돌이쳐, 추악한 결과를 만들 것이다.
"누가 되든, 내 목적은 하나뿐이니."
그가 걸음을 옮길 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어? 그럼 나도 가도 되나?"
"음?"
뒤를 돌아봤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드라인은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한 말을 잘못 들었나? 하며 걸음을 옮겼다.
* * *
"고생했다. 그래도 잘 받아 왔네."
"감사합니다."
"아, 네 친구."
"네?"
조교는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한쪽만 사정을 말해 주는 건, 조금 그러니까....
인생은 공평해야지.
"걱정 많이 하는 것 같더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렇군요."
케일이 작게 웃었다.
하지만, 아직 그녀에게 다가갈 순 없었다.
이야기를 듣는 건 아나이스에게서다.
그래, 아나이스가 진심으로 자신을 싫어할 리가 없잖아.
케일은 조금, 아주 조금 기분이 나아짐을 느꼈다.
귀족이니 평민이니 했던 대화들의 불쾌함이 씻겨 내려갔다.
"건투를 비마. 네가 학생회장이 되면, 아마 오랜만일 거야."
평민 출신 학생이 학생회장이 된다.
아카데미 내부에서도 몇 안 되는 케이스였으며, 그들 모두 예외 없이 귀족의 성을 받았다.
차별 어쩌구 하는 이야기도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들.
하지만, 그들은 뛰어난 오성과 재능을 바탕으로 점차 가문의 위세를 키워 갔다.
힘이 빠진 가문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새로운 가문이 그 자리를 채운다.
그런데, 요샌 그런 이들이 많이 없어졌다.
"나도 그냥 책으로밖에 보지 못해서 잘 모르지만, 힘내."
"감사합니다."
케일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그녀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다른 이들이 자신의 정체를 알면, 무어라 말할까?
누구는 좋아할 테고, 누구는 배신감을 느끼겠지.
어쩌면, 지금까지 쌓아 왔던 관계가 모두 뒤틀려 버릴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