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화염, 바람, 전기.
사대 속성이라고 칭해지는 속성 마법이 마누스의 옆에서 자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캐스팅이 끝나는 순간, 저 마법들이 자신을 향해 날아들겠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포기해서야 되겠는가.
분명 교수들은 이렇게 말했다.
패배해도 괜찮으니,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보여야 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라도-.'
이를 악물고 마법을 완성했다.
콰아앙-!
전기를 뚫고 화끈한 열기가 그를 덮쳤다.
몸을 굴려 다음 마법을-.
콰지지직-!
준비할 수가 없었다.
스가리아는 보았다.
'이런 괴물 같은 새끼-!'
한 개의 마법이 날아드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마법진이 허공에 생성되었다.
텀이 아예 없는 수준으로 마법이 발현되는 광경에, 스가리아는 열심히 몸을 굴릴 뿐이었다.
툭툭, 고양이가 앞발로 공을 가지고 놀듯, 마누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3학년 마법사를 농락했다.
부푼 꿈을 안고 올라온 3학년 마법사.
그의 전투 의지를 꺾는 작업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이뤄졌다.
처참하고 절망적이지만, 어쩌겠는가.
"허억-. 허억-."
"3학년이라고 해서 조금은 긴장했더니만...."
마누스는 작게 한숨을 쉬고 마무리를 위해 마법을 선보였다.
이전에도 선보였던 4클래스 바람 속성 마법 [템페스토].
날카로운 광풍이 나약한 인간의 육신을 찢어발기기 위해 이빨을 드러냈다.
* * *
"만만치 않은데? 마누스라고 했던가. 다른 2학년들도 그렇고."
"저게 다라면, 나한테 안 될걸?"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고양이의 앞발처럼 상대방을 농락하는 마법을 뒤쫓았다.
쉽다.
그녀의 눈은 다른 이들보다 더 섬세한 것들을 보게 해 주었으니까.
예로부터 드래곤은 마법의 종주라고 불렸다.
그 피를 이어, 아브렐 니아는 상대방의 마법을 예측할 수 있는 눈을 얻었다.
분명 속도는 빠르지만, 저게 다라면 그는 그녀를 절대 넘어설 수 없으리라.
그녀는 팔짱을 끼고 스가리아라고 하는 남자를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아브렐 가문의 자제 되시죠?>
<존경하고 있습니다!>
<참 건방지네요. 2학년 주제에-. 제가 녀석들의 힘을 빼고 오겠습니다!>
<3학년의 위신을 여기서 떨어뜨릴 수 없잖습니까?>
"...참, 한심하기도 하지."
꼴사납게 바닥을 구르다, 체력이 바닥나 거대한 마법을 맞고 리타이어.
실력도,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마법사로서 최강의 자리에 오르고 싶은 까닭은 누군갈 깔아뭉개기 위함이 아니었다.
가문의 부흥.
다시금 위대한 가문으로의 도약을 위해 최강의 자리를 갈구할 뿐.
스가리아라고 하는 이는 자신의 추종자처럼 행동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녀는 항상 무표정으로 일관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거친 방법을 써서라도 떼어 놓는 건데."
"원래 유명해질수록 날파리가 꼬이는 법이야. 난 그래서 쟤가 마음에 들어."
"그래? 좀 본받아야겠네."
확실히, 마누스는 폭군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자기 멋대로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 하며, 잔혹한 결투 방식까지.
적어도 그들이 보기엔 그랬다.
저 스가리아라는 남자가 어떤 민폐를 저질렀는지도 모른 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는 경기이기에, 니아는 깔끔하게 마법 한 방으로 정리하고 내려온 후였다.
얼마 있지 않아, 마누스의 경기도 끝났다.
"아브렐 니아, 카이사르 마누스. 다음 경기 준비하세요."
아직 무대에 서 있는 마누스.
4클래스 마법을 맞아 들것에 실려 가는 스가리아.
아브렐 니아는 푸른 눈동자를 보며 슬쩍 웃었다.
자신을 보고도 자신만만한 태도가 영 거슬렸다.
그렇다면, 드래곤의 피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 줘야겠지.
고른 호흡, 안정된 마나.
'역시,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었구나.'
마법사도 전사, 수호자들과 똑같았다.
마나를 많이 쓰면 지치고 힘들기 마련이지.
그런데도 저런 호흡이라면, 마나의 절반도 쓰지 않았으리라.
두근거리는 심장이 그녀의 감각을 일깨웠다.
무대에 오르자,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강렬해졌다.
그래, 어쩌면 자신은 관심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우릴 주목하고 있네, 느껴지니?"
마누스에게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 역시 흘끔 주변을 한 번 둘러봤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을 줄 알았는데, 니아는 돌연 깔깔 웃었다.
그녀는 보았다.
푸른 눈동자에 짙은 마나가 모이는 것.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귀족.
위대한 가문의 피를 짙게 물려받은 이였다.
"하핫! 너도 즐겁구나! 좋아, 재밌게 놀아 보자. 승패에는 연연하지 말고."
"-좋습니다."
마누스가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누군가는 말한다.
실전에선 실력의 30%를 숨겨야 한다고.
또 누군가는 말한다.
압도적인 힘이야말로, 세상을 편하게 살아가는 힘이라고.
마누스는 선택하기로 했다.
상대가 위대한 가문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마법사라면, 그에 걸맞은 상대가 되어 주겠다고.
"준비됐겠지?"
3.
2.
1.
교관의 카운트가 떨어졌다.
콰르르릉-!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법을 전개.
중앙에 거대한 폭발을 만들었다.
마누스는 그녀가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단번에 파악했다.
황금색으로 번들거리는 용의 눈동자.
만약 저 눈동자를, 세계를 구하는 데 쓸 수 있다면-.
[간섭을 시작합니다.]
"내기 하나 하시죠."
"-내기?"
"제가 이기면, 우리 동아리에 들어오는 걸로."
"내가 이기면?"
마누스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면서도 마나는 충실히 움직여, 새로운 마법을 계속해서 뽑아냈다.
압도적인 연산 능력.
미증유의 마나.
니아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단순히 빠르다.
단순히 강하다.
때론, 무식하게 단순한 것이 상대하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미리 알고 받아치는데도 이렇게 벅찰 줄이야-.'
"원하시는 건 어떤 것이든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거 정말이지?"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도 자신만만한 태도.
고고하고 아름다운 저 자태를 무너뜨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브렐 니아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드래곤의 피가 반응했다.
기폭제는 마누스의 마지막 말이었다.
"어차피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요."
저 건방진 후배를 기필코 무릎 꿇리리라.
니아의 황금빛 눈동자가 더욱 짙게 빛났다.
제80화
- 마법의 격투술
* * *
2학년과 3학년.
일반적인 인식이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승부가 싱거워질 경기에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시선이 몰렸다.
교수, 학생 할 것 없이 여유가 되는 이는 모두 그곳을 바라봤다.
3학년 제일의 마법사 아브렐 니아.
2학년 제일의 마법사 키이사르 마누스.
학년을 무시한 채 결투를 바라보면, 미래를 책임질 천재들의 격돌이었다.
"이야-. 수준이 굉장히 높은데요?"
"마투학까지 배웠으면 참 좋았을 텐데."
무수히 많은 시선 속엔 제니퍼와 황궁 정보원의 것도 섞여 있었다.
정보원은 한때 자신의 상관이었던 자에게 말했다.
"에이-. 저 정도 마법 실력이면 마투학을 배우라는 것 자체가 실례 아닙니까?"
"저 정도 재능이면 뭘 배워도 대성할 놈이지. 안 그래도 1학년 중에 눈에 띄는 녀석이 있더군."
제니퍼는 격렬한 마법사들의 향연에서 눈을 돌려, 두 주먹으로 수호자의 방패를 후려치고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아직 1학년이지만, 그 희귀하다는 정령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이.
이미 정령학 교수는 물론, 여러 단체의 인물들이 그녀를 주목하는 중이었다.
대부분 마법사가 원소학을 지망하고 있는 지금, 정령을 이용해 전투를 이끌어 가는 마법사는 히든카드의 가치가 있었다.
제니퍼는 저 연약한 육체를 빨리 입맛대로 바꿔 보고 싶었다.
"황궁으로 보내면 잘 클까?"
"보내면 잘 크겠죠. 안 갈 확률이 너무 높아서 그렇지."
작은 한숨이 어울리지 않게 흘러나왔다.
마투학.
확실히 마법사라는 칭호를 달고 쓰기엔 어울리지 않는 학문이긴 했다.
세상의 인식이 그렇게 변해 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제니퍼는 오늘도 자신의 제자가 될 사냥감을 물색하기 바빴다.
마투학은 황궁의 무술.
'그 명맥이 끊기게 놔둘 수는 없지.'
하지만, 그녀의 다짐과는 달리 눈은 계속해서 화려한 마법을 좇았다.
특히 2학년과 3학년이 맞붙는 광경.
기본 3클래스 마법들이 난무하는 광경.
마법사란 저렇게 싸워야 마법사다운 걸까.
제니퍼는 남들이 들으면 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오래 살아온 인물이었지만, 아직도 세상의 흐름을 따라기엔 벅차다고 느꼈다.
'세상의 흐름에 따라가야만 마법사는 아닐 텐데.'
쿠와아앙-!
그녀의 짧은 상념은 폭음에 묻혀 사라졌다.
마투학이 아니어도 화려하게 싸울 수 있다.
하지만, 어딘가 부족하다.
서로에게 화려한 마법을 날려 대지만,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했다.
제니퍼였다면, 아니 마투사였다면 캐스팅할 시간에 몸으로 부딪쳐 끝내 버렸을 것이다.
실제로 마누스와 니아는 누가 더 정교하게, 누가 더 빠르게, 누가 더 강하게 마법을 펼치느냐를 두고 겨루는 중이었다.
"와, 진짜 살벌하네."
"위대한 가문은 위대한 가문인가 보다."
"...."
케일을 비롯한 모두가 그들의 시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동시에 자각했다.
아직 그들은, 세상에 나가기엔 너무도 여리고 나약한 존재라는 걸.
특히 루페라는 이를 악물고 그 경기를 지켜봤다.
속도, 위력, 지식.
어느 것 하나 자신이 따라갈 수 없는 위력이었다.
'오히려 잘됐어.'
올라갈 놈은 올라가게 둔다.
자신은 철저하게 밑에서부터 반란을 꾀하면 되는 거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가 노리는 건 몬스터 사냥 시간이니까.'
제아무리 괴물 같은 놈이라도 한계는 있겠지.
루페라는 그녀가 준 시약을 확인했다.
품 안에 고이 잠들어 있는 이건, 확실한 변수가 될 것이다.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저놈들을 나락으로 보내 버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앞으로 벌어질 일에 흐흐, 기묘한 웃음을 흘린 루페라.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여인의 눈동자 역시 부드럽게 휘었다.
* * *
'무식해. 그런데 왜 이렇게 강한 거야?'
'얘, 도대체 마나가 얼마나 많은 거야?'
'아니, 뭐 이런 괴물 같은 남자가 다 있어?!'
쉴 새 없이 마법을 펼친 지 약 10분.
슬슬 입에서 단내가 올라왔다.
마법을 유지하는 것도, 다른 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힘에 부쳤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2학년 후배는 아직도 쌩쌩해 보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어째서, 2학년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 느껴지는 걸까.
"후우-."
그가 한숨을 후욱 내쉬었다.
손을 휘젓자, 다시 마법진이 그려졌다.
3클래스, 바람 속성 마법.
니아는 신음을 흘리며 대응했다.
일단은 버틴다.
속성의 상성과 방어 마법을 조합해, 그의 마나가 떨어질 때까지 버틸 심산이었다.
'정말, 끈질기군.'
반면, 마법진을 완성한 마누스도 혀를 내둘렀다.
자신이야, 희대의 사기적인 능력으로 능력치를 빵빵하게 올려 두었으니 사기캐가 맞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4클래스 마법을 퍼붓지 않아도 수십 번의 마법을 펼쳤다.
[하이 레스티오]가 없었다면 진즉에 밀렸을 터다.
이젠 마나가 간당간당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마법이 아니었다.
'어차피 마투는 배우려고 했었으니-.'
아브렐 니아는 인비데아를 떠오르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마법사였다.
그녀가 이대로 큰다면, 아브렐 가문은 위대한 가문으로 올라서겠지.
그래서 더욱 탐났다.
마법사는 화력의 중심이자, 다재다능한 인재들이었다.
전사, 수호자도 분명 중요했지만 딜링의 중심은 마법사였으니.
딜러가 많으면 앞으로 나오는 강적들도 상대할 수 있겠지.
"후우-."
육체를 쓰는 방법은 어설프다.
전생에도 운동하고는 담을 쌓고 살았다.
월급을 받으며 하루하루 야근으로 연명하는 이가 운동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아주 어렸을 때 배웠던 태권도라든지, 학창 시절에 보았던 레슬링 선수의 기술을 따라 하며 놀았다든지 하는 것들.
마누스는 기억의 심연에서 끌어낸 움직임을 그대로 이행했다.
'이걸로 끝이다.'
[이그니라]
콰르르르르-!
화염이 뱀처럼 꾸물거리며 쏘아졌다.
그와 동시에 마누스가 땅을 박찼다.
신기한 일이었다.
마나가 절로 움직였다.
'어떻게 해야 더 빠르게, 더 강하게 움직일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라도 알려 주듯,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쿠웅-!
"뭐야, 마투-!"
"흐읍-!"
어설프지만 흉내 낸다.
버클리 가문의 패시브, 강화된 신체, 카이사르의 마나 보정까지.
그렇게 해서 제법 그럴듯한 움직임이 완성됐다.
쿠웅-.
진각을 밟고, 그대로 손을 내뻗었다.
어딘가에서 나왔던, 마치 '오아-!'라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자세.
손끝에서 터져 나간 마나 덩어리가 폭발했다.
"꺄아아악-!"
콰아앙-!
새된 비명을 지르며 경기장 끝으로 날아간 니아.
서로의 마법이 충돌하자마자 달려드는 신형을 본 그녀는 미처 대응할 수 없었다.
전사, 수호자가 있기에 작금의 마법사는 근접전에서 너무도 약하다.
비어 버린 마나.
단내가 날 정도로 띵한 머리.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압박을 받은 복부.
'이 이상은 무리야.'
그녀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졌다.
분했지만, 승복할 건 해야겠지.
동시에 천재들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도 깨달았다.
"졌네. 으윽, 마지막에 마투를 꺼내 들 줄이야. 어디서 배웠어?"
"그냥 해 본 겁니다."
"-그냥?"
얘는 대체 뭐 하는 애람?
니아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그냥이라고?
지금까지도 놀라운 일의 연속이었는데, 대체 어디까지 놀라게 할 참인가.
그리고... 어디까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 참인가.
"동아리 가입이라고 했지? 약속은 약속이니까... 평가가 끝나면 찾아갈게."
"고생하셨습니다."
마누스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와아아아아아-!
경기가 끝났다고 판단된 순간, 정적에 휩싸였던 주변이 거대한 함성으로 가득 찼다.
니아는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모든 이가 자신을,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아낌없는 환호.
이런 찬사를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져도 환호해 주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죠."
"...너를 위한 환호가 아닐까?"
"들어 보시죠."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환호성.
면밀히 뜯어보니, 확실히 들렸다.
자신을 향해 멋지다고 하는 이들.
최고의 경기였다고 하는 이들.
존경한다고 하는 이들 등등.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연호했다.
벅차오르는 감정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하아-. 이 정도면 만족했어. 다음에 한판 더 해. 그때는 나도 만만치 않을 테니까."
마누스는 옅은 미소를 짓곤 몸을 돌렸다.
그 장면은 모두의 뇌리에 깊게 박혔다.
특히, 한 사람에게 더욱.
"바, 방금 보셨습니까?!"
"그래. 봤다."
"카이사르에서 마투학을 쓰는 사람이 있던가요?"
제니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가 있었다면 그녀가 모를 리가 없지.
그녀가 보기엔 한참 부족한 수준이었지만, 마누스가 내지른 일수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가 단순히 승리를 위해, 혹은 퍼포먼스를 위해 한 수를 내보였을 리는 없겠지.
3학년 톱이라 불리는 아브렐 가문의 장녀였다.
그녀를 상대로 유의미한, 그것도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강맹한 일격이었다.
모두에게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을 터다.
"폭군은 폭군이라 이건가."
폭군은 힘이 없으면 자리를 지킬 수 없다.
그 잔혹하고 제멋대로인 자가 힘을 잃은 걸 자각한 순간, 숨죽이고 있던 승냥이가 폭군을 물어뜯을 테니까.
아직 10대에 불과한 저 소년은 본능적으로, 혹은 뛰어난 오성으로 자각했을 것이다.
1년, 어쩌면 그 이상.
꼭꼭 숨겨 둔 수를 지금, 가장 최적의 타이밍에 선보였다.
3학년에게는 안 된다며 조롱하며 멸시했던 이들에게 단단히 경고하기 위해서.
"목표가 생겼다."
"예?"
"저놈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 내 수업을 듣게 만들어야겠어."
"그, 그 정도예요?"
제니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입가엔 어느새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입가에 호선을 그린 것이 어떤 뜻인지 알고 있었던 정보원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끊이지 않는 환호성 속에 바로 다음 경기가 시작되었다.
마누스는 지치지도 않았는지, 마지막 경기까지 연승으로 마무리 지었다.
[다음은 단체전입니다. 각 조원들과 뭉쳐서 대기해 주세요.]
[1분 후에 무작위 추첨이 있을 예정입니다. 연속으로 치러지는 경기이니만큼, 좋은 성적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이제 본게임이 시작되었다.
쌕쌕 숨을 몰아쉬며 다가온 두 남녀.
알라노, 기예르모는 당당하게 연승을 거두며 저력을 보여 주었다.
두 사람에게 따라온 대진운도 한몫했지만, 3학년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마누스는 두 사람을 보고 미소 지었다.
"지치진 않았겠지?"
"당연하지. 우리가 해 왔던 싸움은 이것보다 더 힘들었는데."
"-날 뭘로 보는 거냐."
서로 다른 대답이 들려왔지만, 결론은 둘 다 멀쩡한 것 같았다.
후우-.
마누스가 숨을 고르자 마나와 체력이 훅 차올랐다.
시간은 자신의 편이었다.
셋만 지친 것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에게 크고 작은 전력 소모가 있었을 터.
교수들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진짜 실력은 만전의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진짜 평가니까, 빨리 끝내지."
소모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얼마나 전력을 보존하는가.
어려운 상황에서 기지를 얼마나 발휘하는가.
이 모든 상황을 평가하기 위해 힘을 빼놓았겠지.
[지금부터 조별 평가를 실시합니다.]
[각 조의 번호를 잘 확인해서 경기장에 오르시기 바랍니다.]
종반전이 시작되었다.
제81화
- 제발 내 제자가 되어 주라
* * *.
쿠아앙-!
방패를 앞에 든 기예르모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자신에게 다가올 충격에 대비해서?
아니,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그랬으면 기세등등하게 나서, 방패로 적들의 머리를 후려갈겼을 텐데.
그게 아니라 뒤쪽에서 날아드는 마법 때문에 제대로 활약조차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은 성벽이 된 느낌이었다.
"으아악-! 그만해!"
"우리가 졌다! 이제 그만!"
"괴물 같은 새끼들!"
기예르모는 슬그머니 방패를 내렸다.
손을 내저으며 땅을 기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이들이 촉망받는 인재가 맞나 싶었다.
벌써 세 경기째 이런 패턴이었다.
자신이 앞을 단단하게 틀어막고 있으면, 뒤에서 어마어마한 마법이 날아왔다.
상대방이 달려들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형형색색의 마법이 날았다.
그러고는 폭발.
"경기 종료!"
그리고 끝.
이게 연속으로 반복되니, 기예르모는 허탈할 지경이었다.
마법사라는 이들이 이렇게 존재감이 강렬했었나?
수호자가 아무것도 못 할 정도로?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니, 미소를 지으며 몸을 풀고 있는 두 남녀가 보였다.
세 경기 연속으로 마법을 난사했으면서 저게 뭐야.
대체, 어떤 방식으로 저렇게 많은 마나를 축적한 걸까?
'정체가 뭐냐, 너희.'
기예르모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는 없었다.
넘어서기 힘든 산을 정복하며,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은 사치였나.
'격차가... 말도 안 되잖아. 이건.'
수호자들은 동료와 팀워크를 그 무엇보다 중요시했다.
한쪽이라도 구멍이 뚫리면, 지키고자 하는 대상을 지킬 수 없었으니.
그렇기에 못난이가 있어도 맞춰 주고, 이끌어 나가는 것이 수호자 팀의 소양이었다.
그런데, 마법사들은 달랐다.
그들은 한 명, 한 명이 전략 병기였으며 거대한 화력을 퍼부을 수 있었다.
방패만 들어야 하는 허수아비.
뛰어난 마법사는 적들이 다가오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실력으로 누나를 위해 복수하겠다고 했었나.'
고작, 이런 실력으로?
어림도 없었다.
그는 더 강해져야 한다.
세상엔, 저런 괴물들이 득실거릴 테니까.
"고생했어, 기예르모."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거라면, 열심히 했지."
"네가 있으니까 우리가 마음 놓고 마법을 쓸 수 있는 거지."
알라노는 말을 예쁘게 하는 제주가 있었다.
그 말을 들으니 비참했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아주 조금.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분명했다.
"아무리 천재라도 말이 안 되는군. 어째서 그렇게 막대한 양의 마나를 쌓을 수 있던 거지?"
"그건 평가가 끝나면 알려 주지."
"그 약속, 꼭 지키길 바라지."
이제 남은 경기는 한 경기.
얼른 끝내고 알아내고 싶었다.
대체 저들이 속한 동아리가 어떤 비밀을 감추고 있는지.
와아아아-!
나직한 탄성이 흘렀다.
마법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당당하게 서 있는 이들.
"쟤들도 너희 동아리 소속이었지?"
"맞아. 우릴 뛰어넘을 수도 있는 애들이야. 마누스는 예외지만."
알라노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활약하고 있는 1학년 후배들을 바라봤다.
탑에서의 전투는 호흡을 정교하게 맞추지 않으면 위로 올라갈 수 없었다.
끝없이 몰려오는 데몬.
거대한 파수꾼과의 싸움.
지쳐 가는, 그리고 힘이 떨어지는 동료를 보호해야 하는 중압감.
그 모든 것들을 이겨 내며 탑을 올라가고 있는 이들에게, 이 평가는 너무도 쉬운 과제였다.
특히 케일은, 1학년의 마누스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압도적이고, 파격적이었다.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궁금하면 동아리에 들어와라. 그리고 우리의 힘이 되어 주면 된다."
"거기에 들어가면, 확실히 강해질 수 있는 건가?"
"물론."
마누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예르모는 주먹을 꾹 쥐고 그들을 지나쳤다.
알라노가 마누스를 바라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비밀을 아는 친구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은데, 괜찮을까?"
"내가 아무나 데려온 것 같나?"
"-음? 아니었어?"
알라노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누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못 미더운 건지, 아니면 자신이 너무 걱정거리를 만들어 놓지 않은 건지....
그는 다음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그도 선택을 받을 거다."
"정말? 그랬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믿어라.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알라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내 그녀는 밝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는 틀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믿고 기다리면, 언젠간 이뤄지리라.
기예르모.
그가 전력으로 합류한다면, 이전과 같은 불상사는 줄어들 것이다.
'멜라니만으론 힘들어. 기예르모든 누구든, 우릴 지켜 줄 사람이 필요해.'
알라노는 단 한 마리의 파수꾼이 진형을 휘저어 놨던, 어쩌면 모두가 탑 안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더욱 정진해야겠지만-.
그보다 더 확실한 방안이 필요했다.
'마누스의 말이 사실이고, 그가 진짜 선택받은 자로 각성할 수 있다면-.'
그는 더없이 큰 전력이 될 것이다.
일단은 기다려 봐야겠지.
일단 시간의 틈새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부터가 관건일 터다.
그것도 아니라면-.
* * *
마지막 경기 역시 싱겁게 끝났다.
이번에는 3학년 중에 내로라하는 이들이 덤벼들었으나, 기예르모의 신들린 실력이 발휘되었다.
검을 비껴 막고, 마나를 이용한 기술로 달려오는 전사를 무력화시켰다.
그사이 쏟아지는 마법들은, 세 명의 적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냥 마법도 아니고 마지막까지 3클래스의 마법을 퍼붓는 2학년의 천재 두 명.
그들의 화력은 일개 학생이 버텨 내기엔, 너무도 가혹했다.
"경기 종료!"
3학년 상대로 전승.
2학년이라는 짐을 얹고도 3학년을 찍어 눌렀다.
실로 천재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을 실력에,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이들은 지금 역사의 한 장면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며 떠들었다.
그만큼 마누스, 알라노, 기예르모의 활약은 인상 깊었다.
특히 마누스는 니아와의 경기를 통해 그 주가를 한 번 더 올렸으니....
[30분간 준비 시간을 가진 후에 사냥 평가를 진행합니다.]
[각 학년별로 준비된 몬스터가 다르니, 철저하게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공지를 듣자마자 시험을 모두 마친 루페라는 어디론가 향했다.
다행히 그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약간의 마법을 펼쳐, 남들의 이목을 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음?'
하지만, 몇 명은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은밀하게 사라질 수 있는 건, 모든 이의 이목을 돌릴 수 있을 때나 가능한 법.
마누스 역시 그를 발견한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조용히 고민하다, 그는 처음으로 가문의 힘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직접적인 간섭을 명하진 않았지만, 아카데미 여기저기에 상주해 있는 건 분명하니까.
그 어떤 은신도 자신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움브라."
[부르셨습니까.]
"대기하고 있는 자는 몇 명이지?"
[저를 포함 두 명입니다. 불상사를 막기 위해 대기 중입니다.]
"방금 사라진 붉은 머리 소년을 감시해라."
[-명에 따르겠습니다.]
수많은 그림자 중 하나가 옅어졌다.
그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 감시하진 않았지만, 만약을 위해 언제든지 나설 준비를 하고 있던 그림자들.
자신이 잊힌 건 아닐까, 의문을 표하길 수일.
카이사르의 은밀한 그림자, 움브라는 처음 자신을 찾아 준 둘째 공자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잊지 않고 계셨구나!'
자신의 힘만으로 아카데미 생활을 이어 나가겠다고 선언한 지 어언 한 달.
그날 밤, 자신을 향해 더는 감시도, 지원도 필요 없다고 말한 공자는 철저하게 제 말을 지켜 나갔다.
그림자는 무엇이든 지켜볼 수 있었지만, 무엇도 기억해서는 안 되는 존재.
이번 일도 그러할 것이다.
움브라는 그림자를 타고 루페라의 뒤를 쫓았다.
* * *
"이봐. 카이사르 마누스, 맞나?"
"그렇습니다. 제니퍼 교수님."
움브라를 보내고, 가만히 앉아 마나를 회복하고 있는 마누스에게, 제니퍼 교수가 다가왔다.
지금 마누스가 덤빈다면, 일격에 게임 오버가 될 정도로 강력한 마투사.
아직 제국이 왕국이란 이름으로 불렸을 때, 홀로 수백의 암살자를 도륙했던 사실은 아직도 전설로 회자될 정도라고 하지.
그녀 앞에선 마누스도 제법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마투사 루트로 주인공을 굴렸을 때, 주인공 캐릭터는 제니퍼의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전사, 수호자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심각한 훈련을 소화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게임 속 캐릭터에게 조의를 표했었지.
'강하다. 실제로 보니 더욱.'
"자네, 아직 전공을 정하지 않았지?"
"예."
"생각해 둔 전공이 있나?"
그녀의 물음은 어딘가 머뭇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게임사 공인, 아카데미 최강자가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제법 어색했다.
항상 당당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 제니퍼의 아이덴티티였는데 말이지.
마누스는 고개를 저어, 그녀의 본심을 이끌어 내기로 했다.
"아직은 없습니다만, 일단 원소학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네, 내 제자가 되지 않겠나?"
"제자라면-."
제니퍼의 눈동자가 활활 타올랐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항거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교수가 직접 제자라는 말을 꺼낸다는 건, 꽤 커다란 일이었다.
게다가, 그 교수가 부임 이래 딱 두 명의 제자만 두었던 자라면 더욱.
거기에 더해, 교수가 아카데미 최강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면, 말의 무게는 더욱 늘어난다.
그녀는 진지한 눈빛으로 마누스에게 말했다.
"내 직속 제자로 들어와라. 내 모든 것을 네게 전수해 주고 싶으니."
"음-."
"아니, 부디 내 제자가 되어 다오. 네가 졸업 후에 어딜 가든 상관하지 않겠다."
"교수님!"
그녀의 옆에 있었던 정보원이 깜짝 놀라 말할 정도로 저자세로 나온 제니퍼 교수.
보통 평정심을 잃지 않는 마누스마저 당황하고 말았다.
그가 생각하던 이미지와는 너무도 달라, 그 간절함이 절절하게 전달되었으니까.
예상을 벗어난 것들은 언제나 가면을 깨뜨리는 법.
지금의 마누스가 그랬다.
"교수님. 일단 평가가 끝나고 더 깊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내가 추태를 부렸군. 미안하네. 그럼 평가 후에 교수실로 찾아올 수 있겠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누스는 고개를 숙이며 제니퍼에게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바라던 바다.
마법적 지식은 몰라도, 신체 능력을 함께 단련할 수 있는 마투는 지금 마누스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으니.
다만, 덜컥 수락하기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건, 빌런의 꼬리를 잡는 일이었다.
제82화
- 사기꾼의 말에, 구원은 없다
* * *
아카데미 역사 교수, 미아는 조용히 경기를 관람했다.
그녀가 루페라에게 지시한 건 간단했다.
그저 준비한 약품을 몬스터 근처에 가져다 두라는 것뿐이었다.
약에 취한 몬스터들이 날뛰기 시작하면, 모든 일은 끝날 테니까.
교사라는 점은 이점이 정말 많았다.
그 멍청한 나그네는 아직도 이곳이 성지인 줄만 알고 있겠지.
하지만, 탑은 그저 기회의 장일 뿐이었다.
루페라가 잘해 준다면, 이제 슬슬 인원을 늘려도 되겠다 싶었다.
'아카데미를 먼저 장악하면... 귀족들도 몰아낼 수 있겠지. 후후-.'
시작은 작은 꿈이었다.
사람들은 평민을 업신여긴다.
수많은 역사 속에 평민들이 있었음에도, 귀족들은 언제나 평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냥, 인식을 바꿔 주고 싶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그녀는 갖은 비극을 겪었다.
부모님이 억울하게 끌려갔고, 어딘지 모를 영지에서 방황했다.
평민이라 과거를 숨기는 것은 쉬운 일이었지만, 그만큼 안정적인 삶도 요원했다.
'반드시, 평민들이 우뚝 서는 세상을 만들 거야.'
가시밭길을 걸은 그녀의 이상은 곧, 욕망이 되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재능을 찾아 아카데미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곳은 기회의 장이며, 거대한 흐름을 만들 수 있는 곳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그녀는 수년 동안 준비해 왔다.
꽤 많은 희생자를 낳았지만, 괜찮았다.
그들은 모두, 귀족들이었으니까.
"어디 잘난 귀족들의 힘을 보자고."
그녀는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 곳에서 평가를 바라봤다.
손에는 학생들이 열심히 푼 답안지가 들려 있었다.
이곳은 그녀의 교수실.
당연히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었다.
똑똑-.
"하녀장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아 네, 들어오세요."
그녀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답했다.
하녀장.
얼마 전에 바뀌었다지.
하물며 위대한 가문인 카이사르에서 파견 왔다고 했다.
그녀는 혹여 꼬투리를 잡힐까, 철저하게 주변을 살폈다.
문이 열리고, 그녀는 시험지 뭉치를 들고 오는 하녀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요즘 하녀장은 저런 것까지 하나?
"트레일 교수님이 바쁘셔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아니에요. 고생이 많으시네요."
"과찬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죠."
서로 웃는 가운데, 서로 별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하녀장은 작은 병 하나를 품에서 꺼냈다.
미아 교수는 그게 무엇이냐는 듯, 눈빛으로 물었다.
빙긋, 작게 웃은 하녀장이 입을 열었다.
"학생이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름이... 아, 모리스 학생이었네요."
"아-. 감사합니다."
"그럼, 고생하십시오."
아덴은 조용히 물러났다.
다시 방문이 닫히고, 미아 교수는 미심쩍은 눈으로 병을 바라봤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이런 걸 줬다고?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아카데미에서도 똑같았다.
평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은근히 무시하는 이들도 있었으니.
아니,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
그들의 눈초리, 그들의 행동과 질문, 그들의....
미아 교수는 어느덧 불쾌한 표정으로 변한 채, 병을 한쪽으로 치웠다.
찰랑거리는 음료수.
본래라면 받아 마시지 않았을 성격이었지만, 모리스라는 이름이 걸렸다.
'그도 평민이었지. 친구끼리 사이좋게 이용해 볼까.'
그런 의미에서, 이 음료수는 잘 마셔 줘야지.
그녀는 찰랑거리는 음료수를 개인 짐이 있는 가방에 넣었다.
다음 계획을 생각하며, 그녀는 루페라의 이름을 불렀다.
"루페라, 루페라, 네가 잘해 줘야 한단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채점을 이어 갔다.
마음 같아선 귀족들의 평가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진짜 아카데미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그러던 와중, 그녀는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답안지를 보았다.
"...무슨."
[카이사르 마누스]
유려한 필체로 쓰인 그의 이름을 보자,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폭군?
그래,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언젠가 반드시 끌어내려야 할 이름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녀의 본능적인 증오와는 달리 이성은 그를 칭찬하고 있었다.
요점만 짚어, 깔끔하게 정리한 서술형.
단 한 개의 문제도 틀리지 않은 객관식.
한데, 마지막 문제는 아예 작성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아직 2학년 수준으로는 무리겠지. 후후."
마지막 문제는 답안지가 없었다.
최종 보고를 위한 회의를 할 때, 아주 좋은 얘깃거리가 생기지 않았는가.
그녀는 키득키득 웃으며 기꺼운 상상을 펼쳐 놓았다.
이미 비틀어져 버린 자신의 심성도, 마누스란 아이가 어떤 기적을 행했는지도-.
그 모든 것들을 자각하지 못한 채로.
* * *
루페라는 기억했다.
그녀가 준 달콤한 꿈을.
그녀가 준 가능성이라는 동아줄을.
저 위에 있는 이들을 끌어내릴 수 있는, 비밀 계단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역사를 가르쳤으며 지식은 매우 뛰어났다.
또한, 루페라만 아는 비밀이 있었다.
사실 그녀는 연금술에도 꽤 조예가 깊다는 것.
'그 결과가 바로 이거지.'
뽕-.
뚜껑 열리는 소리가 아주 경쾌했다.
그는 조용히 괴물들이 있는 곳으로 접근했다.
철창에 갇혀, 죽을 순간만 기다리고 있는 불쌍한 놈들.
루페라는 교수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철창을 지키고 있는 경비는 있었으나, 우리 주변으로 가지 않아도 충분히 이행할 수 있는 임무였다.
경비병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는 시약을 바닥에 뿌렸다.
'이걸로 됐다.'
간단한 임무였다.
하지만, 그 여파는 절대 작지 않겠지.
미아 교수가 준 시약은 몬스터 안에 흐르는 흉포함을 일깨우는 시약이었다.
달콤한 냄새가 퍼졌다.
가장 먼저 냄새를 맡은 녀석들이 효과를 강하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앞에 있는 녀석들은 '귀족'들이 상대할 몬스터였다.
'녀석들이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구경하게 될 거야. 그리고... 나는 그 틈을 타서 차근차근 올라가는 거지.'
회복 마법은 만능이 아니었다.
부상을 입은 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 외상의 치유가 아닌 트라우마였으니까.
회복 마법으로 말끔히 부상을 치유했지만, 거대한 트라우마가 남아 재능이 꺾이는 이들도 있었다.
루페라가 노리는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미아 교수는 트레일 교수와 면담을 가졌다고 말했다.
거기서 무슨 수를 써 두었겠지.
<내가 알아서 해 두었으니, 걱정하지 말렴.>
<트레일 교수를 구워삶는 거야, 일도 아니지.>
<오히려 깔끔하게 정리했다고 좋아했단다. 멍청하긴-.>
둘만의 공간 안에서 들었던 말들.
루페라가 거침없이 행동할 수 있게 만든 밀언이었다.
임무를 완수하고 조용히 자리를 뜬 그곳에, 그림자가 솟아났다.
"음-."
남자, 루페라의 행동을 모두 지켜봤던 움브라는 마나를 움직였다.
킁킁, 냄새를 맡아 보기도 하고 바닥에 흩뿌려진 시약을 일부 채취하기도 했다.
이미 바닥에 스며들어 샘플을 구하기 힘들었지만, 움브라들은 실력이 뛰어난 이들.
고작 이 정도 기예로 이루지 못한다면, 카이사르를 수호하는 그림자로서 체면이 서질 않지.
마나가 바닥을 훑었고, 그림자는 능숙하게 샘플을 채취했다.
'처음 보는 시약이로군. 하지만... 뭔가 불길하긴 해. 일단 보고부터 할까.'
움브라는 다양한 지식을 갖췄지만, 독자적인 발명품까지 단번에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모든 것은 샘플을 얻어, 다양한 방면으로 연구를 통해 알아내는 법.
그는 으레 그랬던 것처럼 다시 사라졌다.
아무도 그가 왔다 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사이, 철창 안에 있는 몬스터들의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 * *
[보고드립니다.]
"말하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약을 뿌린 이후 다시 광장으로 복귀했습니다.]
"시약의 색은?"
[붉은색이었습니다.]
"알았다."
마누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정보를 조합해, 루페라가 사용한 시약이 무엇인지 추측했다.
미아.
스스로 성을 붙여, 탑의 귀족이 되고자 했던 망상가.
그녀는 스스로 '아나벨'이라 부르며 귀족을 처벌하려는 인형이 되고자 했다.
미아 교수가 내뱉은 말.
하나같이 역겨웠던, 그리고 멘탈을 흔들어 놓았던 발언들.
'분명 붉고 푸른, 그리고 하얀색의 시약을 사용했었지.'
푸른 시약은 데몬을 불러들이는 효과를 지녔다.
하얀 시약은 데몬의 자아를 조종했지.
마지막으로 붉은 시약은, 그들의 능력치를 대폭 상승시키는 시약이었다.
그녀가 언제부터 해당 시약을 개발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시약 중 하나겠지.
그렇다면-.
'빨리 움직여야겠군.'
미리 대응했다면 좋았겠지.
명분도 없이 행동했다간 도리어 당하는 건 이쪽일 것이다.
상대방은 그래도 아카데미 교수 신분이니.
이제 증거를 잡았으니 움직일 수 있었다.
그가 향한 곳은 이사장이 대기하고 있는 곳이었다.
아직 평가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다.
빠르게 다녀와야지.
"이사장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
생각을 정리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자니, 어느새 뒤에 따라붙은 기척이 느껴졌다.
마누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반응은 어떻지?"
"별 반응 없었습니다. 그래도 촉매는 놓고 왔으니, 그녀의 성격상 그걸 버리진 않을 겁니다."
"잘했다."
"후후, 과찬입니다. 이런 건 재밌네요."
아덴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과거에 비해 너무도 쉬운 난도의 임무들.
마누스는 약속을 철저히 지켜 나갔다.
미아 교수가 의심된다면, 그녀를 죽이라고 명령하면 될 터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명분도 명분이었지만, 아덴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가서 케일에게 조심하라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그림자가 멀어졌다.
똑똑-.
언제 봐도 고풍스러운 문이 낭랑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닉스 이사장은 들어오라는 소리를 하였고, 마누스는 움브라에게 받은 샘플을 챙겨 안쪽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인가요?"
"탑에서 돌아온 루페라가 이런 시약을 가지고 있더군요."
"어디 봅시다."
닉스는 샘플을 받더니 외눈 안경을 꼈다.
아티팩트인 듯, 은은한 마나가 깃들어 있었다.
잠시 시약을 살펴본 그가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도 발견했을 거다.
이사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던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루페라는 탑에서 모종의 계약을 한 것 같습니다. 이 안에, 우리가 모르는 세력이 암약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아카데미 안에서... 그럴 수 있겠군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평가는 계속 진행되어야 합니다. 마누스. 당신을 믿고 있겠습니다."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페라를 심문해 주십시오. 저는 오늘, 탑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닉스 이사장은 적절한 답을 내놓았다.
움직여야 할 때다.
일단, 적의 계획을 멋지게 부수는 것부터 해야겠지.
이 게임에서 끝까지 가는 악역은 없다.
그저 할 일을 다 하고 사라지는 것이 그들의 역할일 뿐.
지금껏 이야기를 이끌어 왔으니, 이만 퇴장할 시기였다.
제83화
- 눈부신 성장과 헛된 꿈
* * *
몬스터.
인류의 오랜 적들로, 군집을 이룬 이종족을 얘기했다.
지성이 있는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종족도 있었다.
이들에게 인류애니, 도덕성이니 하는 잣대는 하등 필요 없었다.
가축보다 더한 존재가 바로 몬스터니까.
야생동물 수준이 아닌, 그야말로 적대감을 지닌 '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런 몬스터가 흉포한 숨소리를 내며 철창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왜 이래?"
"그러게. 이놈들도 지들 죽을 자리를 알아보는 건가?"
몬스터는 마법으로 속박되어 움직일 예정이었다.
평가 준비가 한창인 지금, 철창에 갇힌 몬스터가 경기장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철창을 열어 보기 전까진 그 누구도 정체를 모르는 몬스터.
그들의 고함이 울려 퍼질 때마다 심약한 이들이 움찔움찔 떨었다.
이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전투였다.
물론 여차하면 안전 요원과 교수들이 나서긴 하겠지만-.
"케일 님."
"-아. 하녀장님."
"마누스 공자님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케일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덴의 말을 듣기 위해 눈망울을 끔뻑였다.
아덴은 부쩍 늘어난 그녀의 마나를 느끼며, 천천히 마누스의 말을 전했다.
"몬스터가 흉포해진 것 같습니다. 평소보다 주의하셔서 싸우셔야 할 겁니다."
"알았어요."
"친우분들에겐 제가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케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를 타고 사라진 아덴을 보며, 케일은 살풋 인상을 찌푸렸다.
마누스가 이렇게까지 경고할 정도라니.
망자의 밤 이후 처음이었다.
방심하지 말아야지.
[크아아아아-!]
한쪽에서 소름 끼치는 괴성이 들렸다.
케일은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꼈다.
데몬들보다 강한 몬스터도 분명 존재했다.
드레이크 같은 몬스터라면, 어지간한 데몬은 물론이고 파수꾼마저 밟아 버릴 수 있으리라.
설마 그런 몬스터까지 가지고 오진 않았겠지.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무대에 오르기 위해 준비했다.
이것만 마무리하면, 한 달간의 여정이 끝난다.
'잘할 수 있을 거야.'
팀원들을 돌아보자, 그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의 팀원은 멜라니와 아나이스.
피어슨과 에머슨은 전사 친구와 함께 조를 편성했다.
[지금부터 사냥 평가를 시작하겠습니다. 각 조원은 안내받은 위치로 서 주세요.]
학생들은 저마다의 구역으로 섰다.
1학년부터 시작되는 평가.
덜컹거리는 몬스터의 몸부림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후우-."
[1학년은 레서 오거를 상대합니다. 무운을 빕니다.]
레서 오거.
2학년이 단독으로 상대할 정도의 몬스터지만, 경험이 적은 1학년에겐 버거운 몬스터.
첫 번째 순서는 대체로 '귀족'들이 많았다.
덜컹거리는 철창이 무대로 올라왔다.
"내가 녀석의 발을 붙잡을게."
"하던 대로, 알지?"
멜라니와 아나이스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철컹-.
문이 열렸다.
모두의 눈빛이 달라졌다.
멜라니의 두 눈에서 황금색 광채가 뿜어졌다.
차르르르륵-!
정령의 힘으로 갑옷을 입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신비하고 경이로웠다.
[크어어어어어어어-!]
철창의 문이 열리고 유일한 탈출구를 향해 거친 포효를 내지르며 나온 레서 오거.
인간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할 육체 능력으로 인간의 영토를 위협하는 몬스터가 멜라니를 향해 돌진했다.
쿵쿵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이, 꼭 이전에 만났던 거대한 파수꾼을 연상케 했다.
똑같은 패턴에, 똑같은 주먹질.
멜라니는 보통의 마법사처럼 정면에서의 대결을 지양하지 않았다.
정령들이 속삭였다.
-가서, 부숴.
"흐으읍-!"
호흡을 들이마셔,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녀가 내지른 주먹 위에 마나로 만들어진 무형의 기운이 보였다.
콰앙-!
격돌에도, 그녀는 밀리지 않았다.
'나도 성장했다고-.'
"지금이야!"
[넥토]
콰드드득-!
마나로 이뤄진 쇠사슬이 레서 오거의 팔다리를 묶었다.
아주 훌륭한 속박 마법이었다.
마무리는 아나이스였다.
마치 처음부터 두 사람의 행동을 알고 있었다는 듯, 최고로 강한 마법을 완성했다.
[이그니라]
[알투스]
태양이 피어나듯, 거대한 화염구가 그녀의 머리 위에 넘실거렸다.
붉게 물은 눈동자가 레서 오거를 또렷이 응시했다.
그녀가 몬스터에게 죽음을 선고했다.
"죽어-!"
콰르르륵-!
거대한 화염구는 빛살이 되어 오거를 불태웠다.
보통의 레서 오거라면 불구가 되었거나, 죽었을 화력이었다.
모든 교수들이 그들의 깔끔한 합을 보고 감탄할 정도였다.
역시 A반.
누군가는 환호성을 지르며 그들의 활약을 추켜세웠다.
"아직이야."
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건 케일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마나의 영향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다.
일렁이는 불꽃 속에, 투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크아아아아아아-!]
"속박 풀렸어!"
"이번엔 내가 걸게."
아나이스가 속박 마법을 준비했다.
레서 오거는 피부가 늘어진 상태로 멜라니를 훌쩍 뛰어넘었다.
하지만, 멜라니는 이런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항상 예상치 못한 것들까지 생각해 보거라.>
상인으로서의 가르침이었지만, 전투라고 해서 다를까.
거센 바람이 불었다.
초록빛으로 바뀐 멜라니의 신형이 잔상을 남기며 움직였다.
[인챈트 : 실피드]
"어딜-!"
오거의 속도를 뛰어넘어, 힘찬 귀싸대기를 날려 버린 멜라니.
바람의 힘으로 가속한 그녀는 돌풍처럼 날아가, 오거의 뒤통수를 발로 날려 버렸다.
-제트킥이었다.
듣기만 해도 등짝이 매우 아플 것 같은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우어어억-!]
비참한 소리와 함께 철푸덕 쓰러지는 오거.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아나이스가 다시 속박 마법을 걸었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사지를 속박당한 오거.
들썩이는 것이, 보통 힘이 아니라는 걸 감지한 아나이스가 케일에게 말했다.
"워, 원래 레서 오거가 이렇게 강해?!"
"선배가 조심하라고 한 이유가 있을 거야, 집중해, 아나이스."
멜라니가 오거의 등짝을 한 번 더 후려친 후에야 겨우 몸부림을 제압할 수 있었다.
케일은 큰 거 한 방을 준비하기로 했다.
본래 마누스가 보는 앞에서 선보이려고 했지만-.
"바람이여 오라-."
쿠르르르륵-!
압도적인 마나가 뿜어졌다.
그 모습을 본 교수들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들뿐만이 아닌, 각 기관의 관계자도 놀랐다.
"아니, 지금 1학년 아닙니까?"
"1학년이 저런 마법을 쓴다고?!"
"어느 가문이야? 누구야?"
콰르르륵-!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이전, 마누스가 트레일 교수와의 대련에서 선보였던 그 마법이었다.
강화되었어도 레서 오거였고, 감히 이 마법을 버틸 순 없으리라.
[템페스토]
4클래스.
완숙한 경지의 마법사가 선보일 수 있는 마법이 1학년의 손에서 펼쳐졌다.
콰르르르륵-!
대기를 찢어발기며 나아가는 바람의 창.
소용돌이 모양으로 공기를 가르는 바람 마법은 널브러져 있던 오거를 정수리부터 분쇄해 버리기 시작했다.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고, 내장과 뼈가, 근육과 지방이 통째로 갈려 나갔다.
그로테스크한 광경이었지만,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 오오-."
"우오오오오오-!"
"와아아아아아아아-!"
안전을 위한 방벽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후욱-.
숨을 몰아쉬며 마나를 정돈하는 케일.
아나이스와 멜라니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뼉을 마주쳤다.
"잘했어!"
"언제 4클래스까지 익힌 거야?"
"헤헤-."
케일은 무대를 내려가며 배시시 웃었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와 눈을 마주쳤다.
그곳엔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가 있었다.
슬쩍 웃음을 짓는 그의 미소가, 그녀의 웃음을 더욱 짙어지게 했다.
하지만 그 행복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어어어어-!]
"저, 저거 위험한 거 아니야?"
멜라니가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레서 오거가 미쳐 날뛰기 시작한 경기장들.
실력이 뛰어난 이들은 그럭저럭 잘 대처해 나갔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점점 수세에 몰렸다.
"그러게. 교수들이 슬슬 개입할 것 같은데."
"우, 우리 때문에 위험해지는 상황은 없겠지?"
모두의 이목이 케일 조에 쏠려 있었다.
그사이 무슨 일이라도 발생한다면?
비극은 언제나 방심했을 때 찾아오는 법이고,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문제가 속속 터지기 시작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가 주인공이 아니었고, 모두가 실력자가 아니었으니까.
"으아아아아-!"
동시다발적으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교수가 일어나, 본격적인 개입을 하며 큰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들은 레서 오거 따위, 한 손으로도 상대가 가능한 실력자였다.
여기저기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레서 오거는 미친 듯이 날뛰며 아직 영글지 않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몬스터 상태가 이상한데?"
"그러게. 왜 저렇게 날뛰는 거야? 침까지 질질 흘리고?"
"그래도 교수님들이 보통 분은 아니잖아."
뱀반뿐만 아니라 독수리, 사슴반을 담당하는 교수들도 있었다.
어느 나라의 소드 마스터 출신도 있었고, 가디언 마스터라는 칭호를 가진 수호자도 존재했다.
그들이 있는 이상, 학생의 안전은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상을 입은 자들은 있었으나 죽은 이는 없었다.
피를 질질 흘린 이들은 의료반이 붙어 회복 마법으로 상처를 치유했다.
하지만, 이미 그들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작은 공포심이 싹텄다.
'예상대로야. 흐흐.'
루페라는 대기하며 그 광경을 느긋이 지켜봤다.
다행히 사태는 잘 수습되었고, 그다음부터는 레서 오거의 흉포함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중간에 낀 귀족들이 좋은 점수를 받은 건 아쉽지만, 그 정도쯤이야.
"잘하고 있네. 흐흐."
뒤쪽 순서는 대부분 평민이었고, 그들 중 대다수가 레벨리-말리토에 가입되어 있었다.
평소에도 교류가 잦았던 만큼, 그들은 마누스가 말한 '소꿉장난'식의 훈련을 지속한 상황.
레서 오거 정도는 그런 훈련으로도 충분히 격파할 수 있었다.
[1학년 평가가 끝났습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다음은 2학년 평가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학생들은 준비해 주세요.]
루페라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자신의 실력을 보여 줄 차례였다.
덜컹거리는 거대한 철창.
미리 연습했던 대로 하기만 한다면, 좋은 성적을 보여 줄 수 있으리라.
'어차피 괴물들은 다 위로 올라갔으니까.'
적어도 2학년에선 자신이 최고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결의를 다지고 무대 위로 올라섰다.
2학년이 상대할 몬스터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다들 연습한 대로만 해. 알겠지?"
"그래."
"아, 알겠어."
팀원들이 못 미더웠지만, 괜찮았다.
주입식 교육이란 아주 훌륭했고, 거기에 폭력을 동반하니 그럭저럭 쓸 만한 팀이 완성되었다.
미친 몬스터들이 날뛰는 모습이 보였다.
<아, 네 몬스터도 아마 조금은 날뛸 거란다.>
<이럴 때일수록 실력을 발휘해야 하거든. 알겠지?>
<네가 얼마나 가능성 있는 마법사인지, 어떤 위기가 와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걸 보여 줘.>
자신도 붉게 물든 눈동자를 지닌 몬스터를 사냥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 있었다.
그가 씨익 웃고 경기를 준비했다.
1학년에 다소 기묘한 아이가 있었지만, 걔는 자신과 상관없고-.
이제 2학년의 주역이 될 일만 남았다.
자신도 언젠간, 저 괴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모습을 상상하며 전투를 준비했다.
그것이 얼마나 헛된 꿈인지도 모른 채-.
제84화
- 날뛰는 놈들에겐 매가 약이다
* * *
2학년 평가에서 실력이 드러난 건, 단연 루페라와 그의 팀원들이었다.
2학년이 상대한 몬스터는 거미형 몬스터인 '아라크네'.
모두가 알고 있는 몬스터였으며, 모두가 알고 있는 공격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시약의 효과로 광폭화된 아라크네는 거미줄을 뿜고 거대한 다리를 휘두르며 2학년 학생들을 유린했다.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속수무책으로 떨어져 나가는 사이, 루페라의 팀은 멋지게 난관을 극복했다.
"잘한다!"
"멋있다-!"
그 멋진 광경에 많은 이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잘한 이들에게 찬사를 내보이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
이 어찌 뿌듯하지 아니한가.
루페라는 벅차오르는 행복함과 가슴 깊이 몰아치는 충족감을 만끽하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평가는 만족스러웠다.
미리 받아 본 시험 문제에, 미리 알고 있는 몬스터의 패턴.
괄목상대한 마법 실력까지.
"설마 2학년에서 또 4클래스 마법을 쓸 수 있는 자가 나올 줄은 몰랐군요."
"그러게요. 이번 2학년들은 상당히 재능이 넘칩니다."
"평민이라고 했던가요? 이대로 쭉 큰다면 성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루페라를 평가하는 이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평민이 '성(First name)'을 가진다는 건, 곧 귀중한 핏줄로 인정받는다는 뜻.
다시 말해 귀족이 된다는 뜻이었다.
남들이 보기에 루페라는 그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선보인 4클래스 마법.
화염 속성의 [이그니스]는 새로운 신성이 나왔음을 증명했다.
"루페라."
"-예?"
"잠시 가 줘야겠다."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행복함은 잠시.
헛된 꿈을 꾸는 외톨이는 곧, 현실에 부딪혔다.
어리둥절할 새도 없이, 루페라는 아카데미를 수호하는 이들에게 조용히 붙들려 사라졌다.
일개 학생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압박감이 그를 짓눌렀기에, 서늘한 가슴을 움켜쥐며 걸음을 옮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같은 시각, 미아 교수의 연구실로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없습니다."
"이미 자취를 감췄습니다."
모든 것을 내다보고 있던 미아 교수가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이들과 함께 이동했던 닉스 이사장은 확신했다.
찔리는 것이 없다면 굳이 자리를 비울 필요도 없겠지.
마지막으로 확인할 것이 있었다.
마누스가 이사장실을 떠나기 전 했던 말.
<촉매를 심어 두었으니, 어쩌면 본거지를 밝혀낼 수도 있을 겁니다.>
"음료수병이 있는지 확인하세요."
"-없습니다."
책상엔 시험지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 그녀가 가지고 있던 중요한 물품들은 모두 없어진 상태였다.
음료수 역시 마찬가지.
왜 그녀가 그걸 가져갔는지 알 수 없었다.
마누스의 말대로 되어 가고 있는 것에, 닉스 이사장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것이 그의 말대로, 그의 추측대로 되어 가고 있는 상황.
어딘가 모르게 위화감이 감도는 건 기분 탓일까.
'아니면, 그저 운이 좋았던 건가? 알 수가 있어야지-.'
마누스가 모든 것을 쥐고 흔들고 있다는 건, 어불성설일 터다.
그러나 닉스 이사장의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던 의구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아니, 아직은 믿고 나가야 한다.
마누스는 아카데미를 위해, 후배들을 위해 노력하는 학생이었다.
더불어 위대한 가문에 속해 있는 초신성이기도 했다.
그를 의심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이곳에 있는 모든 걸 조사하도록 하세요. 평가는 예정대로 진행됩니다."
"알겠습니다. 이사장님."
닉스 이사장은 누군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가 이사장 앞에서 명령을 이행했다는 걸 보고했다.
아카데미의 아주 깊은 곳.
일반 학생들은 절대 가지 못하는 곳으로 향할 차례였다.
아주 오랜 기간 사용하지 않았던 금지이자, 아카데미의 진정한 어두운 장소.
닉스 이사장은 고개를 끄덕이곤, 걸음을 옮겼다.
"평가가 끝나는 대로 각 학년의 학생회장, 그리고 모든 교수와 카이사르 마누스를 데려오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착잡한 심정을 숨기기 힘들었다.
미아 교수는 아카데미에서 오랜 기간 근무했던 교수였고, 수도 없이 많은 제자를 배출한 사람이었다.
대륙의 역사를 그녀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는데....
평화에 찌들어, 나태한 삶을 살아간 대가는 제법 쓰게 다가왔다.
치열하게 살아왔던 순간들이 종잇조각처럼 흩어지는 기분을 맛보며, 이사장은 앞으로의 일을 고민했다.
당장 미아 교수의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부터가 고민이었다.
"후-. 역시 용서할 수 없겠어."
틈새에서 벌어진 일은 양지에 있는 이들이 알지 못한다.
그녀가 마누스가 말했던 '악당'이라면, 분명 틈새, 탑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 괴리감을 어떻게든 지워, 현실의 사람들에게 그럴듯한 소설을 제공해야 했다.
사실 그 어떤 처리보다 이것이 가장 까다롭지 않은가.
"-무슨! -놔요!"
저 멀리, 범죄자의 소리가 들렸다.
재갈은 물리지 않았는지, 공포감에 젖은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전쟁도 전투도 없는 곳에서, 평범하게 태어나고 자라 온 이에겐 감당키 어려운 곳이겠지.
밖에선 함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제는 어둠을 직시해야 할 때인가.'
이사장의 얼굴에 드리운 음영이 조금씩 짙어졌다.
* * *
3학년이 상대할 몬스터를 보고, 마누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상식적으로 17살 애들한테 이런 공포감을 이겨 내라는 게 말이 되는 세상인가?
하긴, 대한민국은 17살 친구들에게 1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공부만 시키기도 하지.
문화와 세상의 차이일 뿐, 청춘을 불살라 무언가를 이룩하려는 건 똑같았다.
여기서는 이런 것이 치열하게 치르는 모의고사나 다름없지 뭐.
[크르르-.]
네발로 굳건하게 대지를 딛고 서 있는 거대한 생명체.
뻣뻣하게 난 털은 가시와 같고, 촘촘하게 뭉쳐 있어 갑옷과도 같았다.
번뜩이는 두 눈은 나약한 이의 감정을 잡아먹을 것 같은 무시무시함을 담았다.
회색 늑대.
북쪽에서는 황야의 사신이라 불리는 몬스터 '트리온 울프'.
높이 3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생명체가 철창 너머로 마누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기예르모. 네 역할이 중요하다."
"-그래."
"버프 마법을 둘러 주마."
[지금부터 평가를 시작하겠습니다.]
철컹-.
철창이 열리고 터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누스는 손을 휘저어, 기예르모에게 각종 마법을 쏟아 냈다.
저건 미친 늑대였다.
레벨링은 20대 후반 정도로 되어 있었지만, 시약의 효과로 공격력, 방어력, 스피드가 증폭되었겠지.
게다가 저놈은 지능마저 뛰어난 몬스터였다.
[호잉!]
품속에 있던 알비온에게 의지를 보냈다.
이제 제법 커진 솜뭉치가 마나를 쥐어짜내, 버프 마법을 시전했다.
[라비오]
"알라노, 구속 마법을."
"알았어."
마법 딜링의 핵심은 구속 후 화력을 퍼붓는 것.
마누스는 평가를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그는 기예르모의 잠재력을 끌어내 보기로 했다.
[옵스]
[포텐티아]
3클래스, 체력과 방어력을 비약적으로 늘려 주는 마법 : 옵스.
3클래스, 근력과 물리계 스킬의 대미지를 대폭 늘려 주는 마법 : 포텐티아.
마누스는 아주 능숙하게 더블 캐스팅을 펼쳐 기예르모 안에 있는 잠재력을 끌어냈다.
[포텐티아].
어딘가 익숙하다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을 터다.
흔히 잠재력을 포텐셜이라고 하지.
이 마법은, 히든 피스가 적용되어 있는 마법이었다.
"가라, 탱커."
"하압-!"
황소 같은 돌진이 늑대를 향해 쇄도했다.
동시에 알라노의 속박 마법이 늑대의 발을 묶었다.
거친 포효와 함께 속박 마법이 풀렸다.
쿠우우웅-!
기예르모는 압도적인 질량에 숨이 턱 막히는 걸 느끼며 방패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밀릴 순 없지.'
내가 뚫리면, 뒤에 있는 동료가 죽는다.
동료가 죽으면 중요한 전투, 혹은 전쟁에서 패배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 어떤 공격에서도 겁을 집어먹지 않는다.
그 어떤 공격도 막아 낼 수 있다고 자신한다.
설령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기기긱-.
마나를 담은 육체가 비명을 질렀다.
[크라아악!]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불만이었는지, 늑대의 육중한 앞발이 방패를 마구 후려쳤다.
텅텅 울리는 충격에 내부가 진탕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수호자는 고작 이 정도로 무너지지 않는다.
"아직 멀었어?!"
쿠웅-!
두 발을 힘차게 박아 넣고, 굳건한 성벽처럼 지켰다.
기예르모의 마나가 응집하여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투타멘]
방패에서 환한 빛이 일었다.
빛은 곧 장막이 되어, 외부의 공격을 확실하게 차단했다.
다시 한번 알라노의 속박 마법이 늑대를 묶었다.
마누스는 더욱 확실하게 적을 몰아넣기 위해 공통 마법을 준비했다.
마법진이 생성되었고, 그가 원작 주인공 캐릭터로 즐겨 사용하던 마법이 뿜어져 나왔다.
'혼란 마법은 몬스터를 상대할 때 아주 유용하거든.'
[투르바]
2클래스 공통 마법이 늑대의 안면에 직격했다.
직후, 늑대는 발작하듯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이래서 상태 이상이 무서운 거다.
'역시, 시약으로 강화된 이들에겐 상태이상 공격이 잘 통하는군.'
원작과 완전히 동일한 설정.
나중에 [망각의 구름]이 완성되면, 이런 놈들은 때로 덤벼도 문제 없겠지.
아니, 대규모 전쟁에서도 마찬가지겠지.
일부러 마나도 적게 들였고, 출력도 아주 낮췄다.
"알라노."
"알았어."
콰드득-!
늑대를 완전히 결박하는 데 성공했다.
마누스는 양팔을 활짝 펼쳤다.
마음 같아서는 카덴차를 쓰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대신, 모두가 경악할 만한 마법을 보여 주기로 했다.
화려한, 그리고 거대한 마법진 두 개가 동시에 형성되었다.
모두의 표정이 우스꽝스럽게 변해 가고 있었다.
[템페스토]
[이그니스]
위대한 가문은 언제나 업적을 남기곤 했다.
카이사르의 두 남매가 그랬으며, 해리슨이 그러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 나이에 누가 이런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는가.
위대한 경지에 발을 닿은 건, 과연 어떤 마법사였을까.
귀를 찢을 듯한 폭풍.
모든 것을 태울 것 같은 화염.
"미친놈들에겐 매가 약이지."
단 하나의 아티팩트도 없이, 본신의 마나와 본신의 실력으로 구축한 더블 캐스팅.
1학년에서 나온 4클래스 퍼포먼스를 압도적으로 날려 버릴 극강의 화려함.
마누스가 손을 뻗자, 열풍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글라치아스 - 파리에]
알라노가 다급하게 얼음의 벽을 형성했다.
증기가 피어나고 마법의 여파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늑대는 가죽 한 장 남기지 못하고 절명했으며 5클래스까지 막아 낼 수 있다던 방벽이 흐물흐물해졌다.
'아직 이 정도로는 5클래스에 못 미치는 건가.'
정령의 속삭임을 비롯해 무수히 많은 스킬의 축복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5클래스의 벽은 아직도 높은 모양.
마누스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공간에서 홀로 몸을 돌렸다.
"고생했다."
그의 한마디가, 정적을 깨부쉈다.
제85화
- 동정심은 심판을 막아 주지 못한다
* * *
"마누스 학생."
"예."
"이사장님께서 호출하셨습니다. 함께 가실까요."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페라가 끌려가는 모습은 보았다.
아마 그것 때문에 부른 모양.
알라노에게도 사람이 접근하는 걸 보았다.
"1학년 제외, 모든 학생회장들이 참여할 겁니다. 먼저 안내하겠습니다."
마누스는 선선히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장내는 시끌시끌했다.
그의 곁으로 1학년 후배들이 모여들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반짝이는 표정을 보자니, 마음이 다 푸근해졌다.
그들이 마누스와 알라노에게 물었다.
"지금 바쁘신가요?"
"고생하셨어요. 선배."
"동아리실에서 보지. 고생했다 모두."
마누스의 말에 금방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나는 이들.
그들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챘다.
눈빛으로 인사를 나눈 마누스와 후배들.
고개를 돌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마누스는 지금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었다.
몇 줄의 텍스트가 떠올랐다.
<아카데미의 깊숙한 곳. 항상 청결함과 정숙함을 미덕으로 삼는 아카데미였지만, 이곳만큼은 달랐다.>
<습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람을 절로 불쾌하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어둠을 밝히는 건 환한 불이 아닌, 조잡하게 타오르는 횃불뿐이었다.>
<빛과 어둠은 공존한다고 했던가. 이곳이 바로, 아카데미의 어둠이었다.>
"이곳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아카데미 건물은 지하 5층까지만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만큼 높은 건물을 짓기 위해선 더 깊은 지하가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바람의 영향이나 기타 잡다한 것들은 '마법'이라는 이름 아래 해결이 된다고 하지만, 지하 공간만큼은 그 실용성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아카데미의 건물 지하 6층부터, 지하 10층까지도 분명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일반 학생들은 모르는 공간일 뿐.
마누스 역시 이 공간을 알고 있었다.
"여긴... 뭘까?"
"아카데미의 가장 어두운 곳."
일명, 시궁창.
죄를 짓고, 아카데미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오게 되는 곳이자, 숨겨진 던전이기도 했다.
뭐, 아직은 까마득하게 먼 이야기일 뿐이지만.
기름 냄새, 썩은 무언가의 냄새, 오물이 그득한 냄새....
모든 것이 마누스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귀족, 그것도 공작의 자제가 이런 더러운 곳을 와 보기나 했겠는가.
그건 알라노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녀도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역시 여긴 너무 수상해."
"동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그걸 걱정해야 할 사람은 한 놈뿐이지."
자신들은 참고인 자격으로 왔을 뿐.
이곳에서 고통받을 이는 딱 한 놈뿐이었다.
* * *
루페라는 절망을 느꼈다.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또 얼마나 무지했는지 알아 버렸다.
미토스 아카데미는 그의 생각대로 막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곳곳엔 괴물들이 있었고, 보이지 않는 곳에도 눈이 있었다.
미아 교수가 내민 동아줄은 썩어 문드러진, 그것도 바닥이 없는 줄이었다.
왜 그걸 몰랐을까.
왜-.
"내가 무슨 잘못이 있는데, 나는 이상한 곳에 끌려갔을 뿐이라고! 왜 아무도 내 말을 믿어 주지 않는 거야!"
"...."
"제발, 제발 내 말 좀 들어 주세요! 제발! 나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라고요! 미아 그 교수가 전부 시킨 거라고요!"
눈앞에 많은 이들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사장은 조용히 눈을 감고 모두가 도착하길 기다릴 뿐.
루페라는 눈물을 흘리며 호소해 보았지만, 범죄자의 말을 듣는 이는 없었다.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러 봤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침묵뿐.
결국,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추욱 늘어졌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는 밀실의 문이 열렸다.
루페라는 들어오는 이들 중, 마누스가 있는 걸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저 녀석이 왜-.'
허나 그는 아무런 말 없이 팔짱을 낄 뿐,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봐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대체, 저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설마 저 녀석이-.
"도착했습니다. 이사장님."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모두 도착했습니다."
뒤이어 교수들이 모두 도착했다.
아브렐 니아, 그리고 이름 모를 남학생 또한 자리를 지켰다.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교수들의 눈초리였다.
저들은 자신을 보며 무슨 말을 쏟아 낼까.
'하-.'
이젠 모르겠다.
어차피 죽을 인생이었으니, 그냥 이대로 죽는 것도... 괜찮겠냐고.
억울해.
억울했다.
대체 왜 이런 비극의 주인공이 자신이어야만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자신이 대체 뭘 잘못했는데-!
"다들 모였으니 시작하지요. 오늘 있었던 평가에서, 이런 시약이 나왔습니다. 몬스터의 흉악함을 증폭시키는 효과로 추정됩니다만-."
"오늘 있었던 일이 이 시약 때문이군요."
"그 시약을 뿌린 것이 이 학생입니다. 루페라."
"흠-."
교수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루페라.
들어 본 적 있는 학생이었지.
이번 평가에서도 제법 인상 깊은 활약상을 남겼다.
하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던 교수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인지의 부조화.
구출받지 않고 선택받지도 않은 자가 탑에서 스스로 나왔을 때 일어나는 부조화가 발생했다.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이 어땠죠?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2학년 뱀반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할 질문들입니다. 트레일 교수님."
"예."
트레일 교수는 마법을 펼쳤다.
여기 있는 모두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범죄자들을 심문하거나 치열한 정보전을 펼칠 때 사용하는 마법.
본래 흑마법에 가까워, 금기시되는 마법이지만-.
독은 때로 약처럼 쓰일 때도 있는 법이다.
마나가 루페라의 머리에 스며들었다.
저항도 잠시, 압도적인 기량 차이를 가진 트레일 교수의 마법을 막을 순 없었다.
그의 눈동자가 멍해졌다.
이제, 질문할 일만 남았다.
'진실만을 말하게 되는 마법인가. 심문하기엔 저것만큼 좋은 것도 없지.'
마누스는 이사장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모든 질문은 그가 한다.
루페라의 사정을 알고 있는 그라면, 질문과 단어의 선택을 신중하게 하겠지.
첫 번째 질문이 나왔다.
"루페라. 당신이 이 시약을 풀었습니까?"
"-네."
"누구의 사주를 받았죠?"
"미아 교수입니다."
대답은 깔끔했다.
교수들의 표정에서 감정의 일렁거림이 느껴졌다.
동료의 배신이라니.
미아 교수는 뱀, 사슴, 독수리 할 것 없이 두루두루 친하던 이였는데-.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알고 있습니까?"
"-귀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
루페라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그 배신감에 무게 추를 턱 얹었다.
교수들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이 세계에서 귀족은 단순히 권력을 가진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특별한 능력, 특별한 핏줄을 가진 자들.
자신만의 능력을 갈고닦아, 일가를 이룰 정도로 발전시킨 이들.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일가를 이룬 이들을 말했다.
귀족을 무시한다는 건, 역사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며 그들이 들인 시간을 무시하는 것과 같았다.
"지금 미아 교수는 어디 있죠?"
"-모릅니다."
"다른 일은 사주받지 않았습니까?"
"틈새에서 강해지라는.... 우웩-!"
루페라의 입에서 거무튀튀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교수 중 한 명이 황급히 회복 마법을 펼쳤다.
새하얗게 질려 가던 루페라의 안색에 혈색이 돌았다.
이사장은 아차 싶었다.
다행히, 교수들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
마누스와 알라노 역시 흠칫 놀랄 정도로 아슬아슬한 발언이었다.
이사장은 작게 한숨을 내뱉고 다음 질문을 이어 갔다.
"피해자는 당신 혼자입니까?"
"-예."
직후, 이사장은 이런저런 것들을 더 물었다.
그녀와 협력하고 난 뒤에 어떤 일을 했는지, 자신도 그 계획에 동참할 생각이 있었는지 등등.
루페라는 분명 선택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스스로 악인이 되고자 했다.
결단은 빨랐다.
동정심이 일 만한 이야기였으나 그 아련한 감정이 범죄를 덮어 주진 않는다.
그는 선택할 수 있었다.
선택의 기로에서 잘못된 길로 빠진 것은 오롯이 그의 책임이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퇴학 및 추방. 그리고 미아 교수는 수색 후 사살하겠습니다."
교수들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귀족, 평민 할 것 없이 모두가 같은 의견을 보냈다.
그녀는 평화를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언젠가 미아 교수가 힘을 얻고, 세력을 얻어 다시 나타난다면-.
세상은 크든 작든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만큼 위험한 생각이었으니까.
"여기서 있었던 일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면 안 됩니다. 특히 학생회장 여러분."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해산해 주시지요. 자네들은 날 따라오도록 하게."
교수들이 한 명씩 밀실을 나섰다.
모두가 나가고 알라노, 마누스, 그리고 이사장과 정신을 잃은 루페라만이 밀실에 남았다.
닉스 이사장은 착잡한 심경을 숨기지 않았고, 알라노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이가 범인이었기에 멍하니 서 있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죠? 미아 교수가 범인이라는 것."
"루페라가 돌아온 날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왜-."
'그야 물론 원작을 알고 있으니까-' 같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이전, 루페라가 아카데미 뒷골목에서 깽판을 치고 있을 때, 그에게 딱 걸렸으니까.
"그녀는 선택받지 않았음에도 루페라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군. 자네 홀로 짐작했던 이유는 있나?"
"그녀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홀로 무언가를 할 수 있었다면, 굳이 루페라가 필요 없었겠죠."
이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미아 교수가 아카데미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한 건 없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무언가 했겠지만- 수가 틀렸으니 잠적했겠지.
"신기하군. 루페라를 강제로 각성시킨 것이 능력인가."
"이사장님 말씀이 맞는다면, 희생자는 계속 늘어 갈 거예요. 탑 안에서 생존할 방법을 알고 있다면 잡는 건 무리겠지요."
"답은 하나로군."
이사장의 눈빛이 알라노, 마누스에게 향했다.
그 저주받은 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이들은 이 어린 학생들뿐이었다.
이번에도 이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해 미안하지만, 그만큼 얻는 것도 있을 거다.
"편의를 최대한 봐줄 테니, 이번에도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답엔 단호함이 묻어났다.
이사장은 결연한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럴 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능력이 없어 믿고 맡기는 것.
때로는 편안할지 몰라도, 대부분은 답답한 경험이었다.
* * *
평가가 모두 끝난 후 동아리실.
1학년들은 새로 들어온 두 선배와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마누스에게 패배한 니아가 1학년들에게 호기심을 느껴 다가간 것이었지만.
황금색, 용의 눈동자를 지닌 그녀는 신비한 매력을 지닌 여인이었다.
호기심을 느낀 1학년은 금방 입이 터졌고, 니아는 빠르게 동아리에 녹아드는 중이었다.
반면, 기예르모는 그저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얘는 안 오네. 얘기가 길어지나?"
"그...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어음.... 루페라라는 아이가 사고를 쳐서, 징계를 내렸지. 난 3학년 학생회장이니까, 다녀왔단다."
"그러고 보니, 1학년도 곧 회장을 선출하겠네. 너희들 다 A반이지? 관심 가진 사람 있어?"
모두가 그저 동그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니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1학년이라 귀엽네. 요것들. 학생회장 자리는 사실 별것 없어. 그냥...."
덜컥-.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공기가 착 가라앉는 느낌이 들며 마누스, 알라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나중에 설명해 줄게."
찡긋, 윙크를 하며 물러나는 니아.
마누스는 부쩍 늘어난 동아리실 인원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쓰레기 소각장에 갈 시간이었다.
제86화
- 쓰레기 소각장으로
* * *
마누스는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더불어, 앞으로의 할 일도.
모든 사정을 들은 1학년들은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으며, 아직 사정을 모르는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특히 아브렐 니아는 방금 이사장이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했던 사안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어 대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잠깐-. 이사장님이 분명 아무런 얘기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건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입니다."
"사정이라는 게 대체 뭔데?"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마누스는 잠시 머릿속을 정리했다.
언제나 할 말을 조리 있게 하는 건 어려운 과제였으므로, 시간이 필요했다.
누군가에게 지식과 사정, 앞뒤의 배경을 주입하는 역할은 언제나 마누스의 몫이었건만, 이번에는 달랐다.
알라노가 먼저 입을 열어 새로운 멤버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여러분은 공간과 공간 사이에 틈새가 있다는 걸 믿나요?"
"그런 게 어디 있어-."
"믿지 않는다."
니아와 기예르모는 딱 잘라 말했다.
알라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기이한 비밀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세계와 세계의 틈새.
탑, 지구라트.
그들이 압도적으로 강해진 이유와 탑에서 일어나는 재앙.
그간의 사건들과 미아 교수, 루페라의 일까지.
모든 일을 듣고 난 두 사람은 도저히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지, 요상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지금 그들이 서 있는 이곳도, 다른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거잖아?
"그 틈새에서 새어 나가는 모든 것들이 재앙이 될 거예요. 여기, 동아리에 모인 이들은 틈새를 거닐며 싸울 수 있는 이들이랍니다."
"-놀라운데. 아직 내가 자각하지 못했다는 건, 선택이란 걸 받지 못했다는 건가?"
"강제로 들어가는 방법은 있습니다."
"그게 뭔데?"
미아 교수는 지구라트의 존재를 안 다음부터 평생을 연구에 매진했다.
탑의 구성.
탑으로 들어올 수 있는 조건.
탑에서 나간다면, 혹은 죽는다면 일어나는 일.
정확히 21년 전부터 일어난 연구는, 플레이어들에게도 많은 정보를 던져 주었다.
그 지식은 커뮤니티 사이트에 많이 퍼져, 이런저런 추론 글을 낳았다.
왜 있지 않은가.
스토리를 추론하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예측하며 글을 쓰는 사람들.
'그런 글들을 보길 잘했지.'
"선택받은 자와 함께 강제로 침식을 여는 겁니다. 안전한 장소인 양호실에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가능할까?"
"이사장님의 허락이 있다면, 어려운 일도 아니지요."
마누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사장을 들먹였다.
니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미토스의 아카데미의 이사장은 모든 행정을 총괄하는 자리였다.
일개 학생이 부탁을 함부로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거다.
적어도 니아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여기 있는 이들은 이사장의 권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사장이 경비 아저씨야? 그렇게 막 부탁하고 그러면 들어줄 것 같아?!"
"-네."
모두가 답했다.
똑같은 톤, 똑같은 눈빛으로.
기예르모만 빼고.
어벙한 표정이 되어 버린 니아는 이내 삿대질을 시작했다.
"문제가 있어! 문제가 있다고 이거! 너희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끄덕끄덕.
그들은 기어코 부정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우스운 장면에, 마누스도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맛에 학생들이랑 노는 거지.
"이사장님 역시 비밀을 알고 계십니다. 탑에 맞설 전력이 우리밖에 없기 때문에 도움을 주실 거예요."
"-아, 그, 그런 거였어?"
나만 바보야?
나만 바보 된 거야?!
니아가 푸욱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런데 왜 양호실이야?"
"거기가 가장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안전 구역.
그곳은 탑의 영향에도 변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선택받지 못했던 리비가 사용했던 방식으로 들어가면 되겠지.
문제는 두 가지였다.
양호실이 몇 층에 형성되는지 모른다는 점.
리비는 딱 한 번만 들어갔었지만, 니아는 지속적으로 들어간다는 점.
그에 따라서 생긴 부작용은 알 수 없다는 점.
'니아는 원작에서 탑을 오르지 않았지.'
완전히 제3자를 전력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추론 글에선 이런 말이 있었다.
<그냥 설정인지, 아니면 게임사가 생각 없이 사용한 설정인지는 모르겠지만, 탑 안에서 누구랑 접촉하느냐가 관건인 듯.>
<루페라는 데몬들에게 이끌려서 갔지. 에머슨도 그랬지만, 결국 두 사람은 다른 루트를 거쳐서 탑에서 나왔잖아.>
<게임에선 구현되지 않았지만, 이게 맞으면 이론상 아카데미에 있는 사람이든 뭐든 다 때려 넣고 구출하면 전력화 가능하지 않을까?>
말이 되는 소리인 것 같기도 했다.
니아는 첫 번째 표본이 될 것이다.
끌어들이긴 했지만, 그녀가 과연 탑에서 전력으로 활약할 수 있을까?
"오늘 밤, 탑으로 들어가 미아 교수를 잡는다."
"-네."
"아덴이 촉매를 심어 두었고, 미아 교수는 촉매를 들고 사라졌다. 병을 만진 이상, 그녀는 우릴 피해 갈 수 없다."
마누스는 작전을 브리핑했다.
팀은 두 개로 나눌 것이다.
기예르모, 니아를 포함한 자신.
그리고 알라노와 케일이 지휘하는 나머지였다.
에머슨이 감지할 수 있는 범위와 통신 구슬을 준비한다면, 합류는 문제없을 것이다.
양쪽에서 가까운 쪽이 기다리는 것으로.
니아의 경우엔 적응이 필요하니, 반드시 이쪽으로 붙어야만 했다.
[간섭이 시작되었습니다.]
[신중한 선택이 필요한 때입니다.]
마누스는 눈앞에 뜬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매 순간, 의지를 담아 행동할 때마다 사건이, 세계가 변한다.
이번에는 어떤 선을 따라 항해할 것인가.
세계가 지향하는 곳이 낭떠러지일지, 아니면 낙원일지 알 수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겠지.
그럼에도 그는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선배."
"-응?"
"어쩌면 루페라에게 닥친 비극이 선배에게도 올 수 있습니다."
"그건 좀 무서운데."
사실 그녀를 동아리에서 내쫓는 방법이 가장 좋았다.
자신이 지독하게도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도 부정하지 않았다.
마누스의 목표는 단 하나.
새로운 삶에서, 이야기의 끝을 보는 것.
그것도 아주 무사히.
그렇기에, 그는 더 많은 전력을 탑에 욱여넣을 생각이었다.
설령 그것이 누군가의 마음을 헤집는 일이라 해도.
"언제든 발을 빼셔도 됩니다."
"있지, 조금 생각해 봤는데."
니아는 마누스의 푸른 눈이 부러웠다.
저 검은 머리와 푸른 눈에서 나오는 기이한 분위기.
위대한 가문의 상징은 언제나 그녀를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나도, 저들과 같이 서고 싶다.
은발과 흑발. 그리고 황금빛 눈동자.
"너처럼 강해지려면, 그래서 내가 가문을 이끌고, 나아가 위대한 가문이 되려면 이대로 걸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다면-."
"어차피 선택은 내가 하는 거잖아. 어떻게든 되겠지."
니아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드래곤의 피가 가진 치명적인 외모가 은근히 마누스를 압박했다.
물론, 그녀는 그럴 생각은 없었겠지만.
그래.
선택은 자신의 몫이고, 그 선택의 책임 역시 본인이 지는 것이다.
하지만 마누스는 잊지 않았다.
그 원인 제공자 또한, 자신의 선택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끝까지 책임져야겠지.'
부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주인공.
그리고 DLC 스토리의 수혜자로서 좋은 방향으로 풀리길 바랐다.
* * *
해가 지고, 밤이 되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고, 이제 시간이 되길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들의 말대로, 밤에 양호실까지 들어오는 일은 정말 쉬웠다.
우두커니 앉아 있는 니아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시계를 쳐다봤다.
마누스, 그리고 기예르모.
둘 다 재미와 위트, 뭐 그런 것이랑은 거리가 멀어서인지 조용히 자기 할 일만 할 뿐이었다.
에휴-.
'어쩌다 이런 파티에 끼게 된 건지-. 딱딱하네.'
"이제 들어갑니다."
"진짜 여기가 미궁으로 변하는 건가?"
"보면 안다."
기예르모는 방패를 살펴보곤 꽉 동여매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감이 가득 찬 눈빛.
투쟁을 바라는 눈빛에, 마누스는 왜 그가 원작에서도 활약했는지 이해했다.
목표가 있는 자들은 그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할 수 있다.
이곳에 있는 모두는 크고 작은 목표가 있는 이들.
아마 탑에서도 적응을 잘하겠지.
"가만히 있으세요."
"으응."
마누스가 니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마나를 동화시키고, 존재감을 하나로 합쳤다.
입구에서 들어가는 이들과 도중에 들어가는 이들.
들어가기 전, 마누스는 친절하게 일러 주었다.
"탑은 전력을 다해 싸우는 곳이 아닙니다. 그 점만 명심하시면 됩니다."
"알았어."
3.
2.
1.
모든 시간이 멈추고, 오직 그들과 저주받은 이들이 살아가는 공간이 도래했다.
암녹빛으로 물든 공간이 게이트처럼 열렸다.
발을 들이자, 어둠이 세 사람을 덮쳤다.
깨어나는 곳은 어디일까.
마누스는 결연한 표정으로 어둠을 맞이했다.
* * *
"하아-. 진짜 되는 일이 없네."
[크음-.]
탑의 어느 곳.
미아 교수는 눈에 보이는 음료수병을 보다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모리스가 주었다고 했지?
마법으로 처리된 보온 성능은 확실했다.
그녀의 원대한 꿈이 일그러졌다.
틈새를 강제로 열어 숨어들지 않았다면, 속수무책으로 잡혔을 거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데몬을 바라봤다.
"이 정도면 완성한 것 같은데, 이걸 빼낼 방법이 없단 말이지."
아무래도 조금 더 약한 아이들을 내보내야 할까?
모리스.
그래, 모리스가 있었지.
이번에는 그냥 이지를 남겨 두면 안 되겠는걸.
"그냥 꼭두각시로 만들어서 차곡차곡 쌓아 두는 것이 낫겠어. 음-."
그녀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자신만 살아 있으면 다음 계획은 얼마든지 세울 수 있었다.
이 탑은 그녀에게 끊임없는 재료들을 공급해 주니까.
문득, 그녀는 나그네를 떠올렸다.
죽어도 싫지만, 그와 함께 무언가를 한다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아니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람."
그 미친놈이랑 엮인다면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이다.
실속은 없고, 선동하며 세력을 불리는 데만 관심 있는 관심 종자 같으니라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모종의 거래를 해야 할 터.
나그네는 그녀가 이곳을 아주 오래전에 발견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어디 처박혀서 연구나 하는 줄만 알겠지.
그녀는 필요한 재료를 어디서 공수해야 하나 고민했다.
"실마리 하나만 더 잡으면, 이 예쁜 아이를 내보낼 수 있는데 말이지-."
조용히 미소 짓는 그녀의 시선 끝엔, 거대하고 흉측한 것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에게서는 도저히 '예쁘다'라는 단어가 나올 수 없는 실루엣.
이미 뒤틀려 버린 그녀는 정상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후후, 조금만 기다리렴."
이제 널 세상에 내보내, 더러운 것들을 지워 버릴 수 있겠구나.
그녀의 웃음은 예술품을 보는 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 끝에 있는 것은 끔찍한 괴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제87화
- 빌런과 영웅 사이
* * *
탑.
어딘지 모를 곳부터 시작한 마누스 일행은 바로 에머슨과의 통신을 시도했다.
그녀가 탐지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듯, 통신 구슬은 먹통이 되어 있었다.
니아가 주변을 살펴보며 마누스에게 물었다.
"학교가 이런 곳으로 변할 줄은 몰랐네. 그나저나 여긴 몇 층까지 있는 거야?"
"모릅니다."
"-학교는 딱 100층인데, 여기도 그러려나?"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마누스는 그녀의 말을 넘기고는 마나를 펼쳐 보았다.
원작 스토리는 탑 정상을 정복하지도 못하고 끝났었다.
결국, 비밀을 밝혀내는 것은 마누스의 몫일 터다.
마누스는 [둑스] 마법을 펼쳤다.
길을 안내해 주는 하얀 선이 그들의 앞길을 비췄다.
오직 마누스에게만 보이는 신비한 나침반.
"가죠."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에머슨과의 합류?
아니면 미아 교수의 은신처?
그것도 아니라면, 강력한 아티팩트?
어쨌든, 하얀 안내자는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겠지.
그의 걸음걸이는 거침없었다.
"길은 알아?"
"그럴 리가요."
"그런데 이렇게 막 가는 건-."
니아는 걱정스레 물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은 이 일에 문외한이나 다름없었고, 이들은 한 달이나 이런 일을 해 왔다.
뭐 하고 있는 거람.
누가 봐도 자신이 훈수 둘 입장은 아닌데.
"미안. 아무 말 안 할게. 가자."
마누스는 조용해진 니아를 보며 미소 지었다.
확실히 원작에서 선택받지 못한 이들 중, 재능이 뛰어난 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들을 모두 탑으로 욱여넣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는 니아와 달리, 기예르모는 연신 주변을 경계했다.
무언가 튀어나오면 언제든지 대처할 준비를 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히 옮겼다.
저런 성격 때문에 게임 내에서도 자주 대사가 나오곤 했다.
'감회가 새롭네.'
대부분 홀로 다녔기에, 이렇게 북적북적한 느낌은 오랜만이었다.
이제 슬슬 팀을 두 개로 나눌 때도 되었다.
장비 파밍, 탑 공략, 그리고 남는 인원은 외부로 돌려야겠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기예르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방에 뭔가 있군. 적인가?"
"그럴 거다. 이곳은 우리 외엔 모두 적이니."
"그럼-."
철컥-.
갑옷이 곧 교복인 수호자의 부츠 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등장한 가면.
거대한 말 위에 타고 있는 기사 모양의 데몬이 들이닥쳤다.
'꽤 높이 올라온 모양인데.'
기억났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정보를 정리했다.
[힘 - 5]
[목 없는 기사]
[약점 속성 : 바람]
[화염, 빙결 마법 반사]
[레벨 : 35~40]
60층 언저리에 나오는 데몬.
거대한 마상 창을 들고, 갑주를 입은 데몬.
파수꾼을 제외한 중형급 데몬이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이기도 했다.
마누스는 마나를 일으켰다.
적절한 곳에 떨어진 것 같았다.
후발 주자를 기다리는 것보다, 먼저 올라가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낫겠지.
지금쯤, '그것'을 보며 히죽거릴 면상을 생각하니, 빨리 올라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솟아났다.
"화염, 빙결 마법은 사용하면 안 됩니다. 물리 공격이 뛰어나고 바람 속성이 약점이니, 캐스팅할 시간만 벌어 주면 됩니다."
"-내가 막지."
"나도 도울게."
미토스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보통 재능으로 입학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들의 삶은 언제나 치열했다.
특히 3학년인 니아는 이런저런 경험을 헤쳐 나가며, 실전을 치를 만큼 멘탈이 단단해져 있었다.
콰르르르-!
멈춰 있던 대기가 요동치며 바람이 몰아쳤다.
2학년, 3학년이 내뿜는 마나가 데몬들에게 향했다.
압도적인 전투였다.
* * *
"여보세요? 마누스 선배! 선배-!"
"아직도 안 돼?"
"-응. 조금 더 올라가야 하나 봐."
멜라니의 활약으로 죽였던 파수꾼이 있는 층부터 시작한 케일 일행.
벌써 48층까지 올라왔지만, 아직도 통신이 개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에머슨은 눈을 감고 감지를 활성화했다.
그녀의 감지 범위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리는 존재감.
그마저도 빠르게 멀어져 버렸다.
눈을 뜨고, 대기하고 있는 팀원들에게 말했다.
"어서 가자. 한참 위에 있는 것 같아."
"어휴, 하필이면 마누스 선배가 있는 파티가 위로 갔네. 이러면 우리가 따라잡을 수나 있을까?"
피어슨이 한숨을 내뱉었다.
까마득하게 올라갈 생각을 하니, 벌써 눈앞이 캄캄해졌다.
본래 작전은 합류해서 함께 올라가는 것이었는데-.
계획대로 되면 그것이 인생이겠는가.
어쨌든 길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리라.
에머슨의 안내를 받아, 그들은 전투를 최대한 피하며 탑을 등반했다.
'길이라도 알려 주는 마법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문득, 피어슨은 길잡이의 필요성을 느꼈다.
마누스의 말이 떠올랐다.
'네 재능은 공격 마법에 있지 않다'라는 말.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도 마법을 창조할 수 있지 않을까?
'돌아가면 한번 해 봐야겠다.'
목적지만 있고 정확한 방향을 모르는 항해는 무척 길고, 지루하고, 고된 법이다.
방향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마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방식으로 구현해야 할까?
피어슨의 고민이 깊어졌다.
에머슨의 활약에 힘입어, 그들은 빠른 속도로 탑을 주파했다.
시간이 없었다.
고작 여덟 시간.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 가기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 * *
탑 67층.
마누스는 거대하고 불길한 기운을 느끼며, 웅장한 문 앞에 서 있었다.
바로 이곳.
하얀색 선이 이끄는 대로 찾아오니 도착한 곳은, 미아 교수의 연구실이었다.
67층부터 70층까지.
세 층을 통째로 쓰게 된 미아 교수.
그녀가 탑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계기는 의외로 간단했다.
나그네의 힘을 빌려, 탑으로 숨어든 것.
"여기가-."
"후배들이 올 때까지 기다릴 텐가?"
기예르모가 물었다.
마누스는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원작대로라면 1학년들이 활약해야겠지.
하지만, 마누스의 직감이 그래선 안 된다고 말했다.
미아 교수는 말로 상대를 농락하고 시약으로 데몬을 부리는 자.
시간이 지체될수록, 그녀의 전력은 막강해질 터다.
"들어가지."
"우리만으로 될까?"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정도 레벨대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빌런은 없었다.
미아 교수는 빨리 치우는 편이 좋다.
아이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아직 10대.
어린아이들이 그녀의 저급한 말을 듣는 것보다, 한 발자국 성장이 늦더라도 안전한 길로 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마누스는 그렇게 생각했고, 결정을 내렸다.
"-지금 우리 전력을 뛰어넘는 적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며, 거대한 문을 열었다.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그 앞에 보이는 건, 3층을 통으로 뚫어 낸 것 같은 높은 천장과 중앙에 뻗어 있는 나선형 계단이었다.
3층 높이에 있는 난간 위로, 그들이 찾던 인물이 서 있었다.
아마도 미리 알고 있었겠지.
이곳을 끔찍이도 아끼는 인물이니까.
"어머-. 여기까지 진짜 올 줄은 몰랐네."
"교수님. 진짜 교수님이 그랬어요?"
"뭘 말이니?"
니아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루페라의 입에서 들었던 충격적인 말.
그 말이 진짜인지 묻고 싶었다.
"귀족들을 없애야 한다는 말, 진짜 그랬어요?"
"-그래."
단호한 말에, 마누스를 제외한 두 사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위험한 마나가 스멀스멀 피어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아 : 아나벨은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돼지 같은 귀족들이지. 자신의 피만 믿고 나대는 대륙의 암 덩어리들. 너희 아버지, 어머니, 그 위로 올라가면 다 똑같이 출발했는데 말이야."
"무슨-."
"귀족이나 평민이나 출발은 똑같았지. 그런데 지금은 어떻지? 그 더러운 피가 대를 이어 흐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귀족이라는 이름을 받잖니?"
그녀의 말은 신랄했다.
이는 귀족의 사상을 부정하는 말이었으며, 아직 제대로 자아를 형성하지 않은 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실제 지구에서의 귀족들은 어떨지 몰라도, 이 세계에서의 귀족은 대륙의 평화를 지킬 전력이었다.
"조상 잘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이들은 모르겠지. 다른 이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당장 거리에 나가 본 적 있니? 응?"
"-그냥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라."
그녀의 말을 끊은 건 마누스였다.
지루한 연설을 듣는 것 같은 표정.
마나를 머금은 푸른 눈동자는 미아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같잖다는 눈빛.
미아는 그 모습을 보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 마누스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귀족이 왜 귀족인지도 모르는 버러지가 귀족을 논하는가."
"닥쳐! 네가 평민들의 고통을 뭘 안다고-."
"왜 알아야 하지? 그들이 두 발 뻗고 잘 수 있는 것이 누구 때문인데."
귀족은 지키는 자다.
고귀한 피를 보존하며 시민을, 땅을, 대륙을 지키는 이들.
제국과 왕국이 부여한 첫 번째 이름은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전쟁이 나면 평민은 대피하지만, 귀족들은 전장에 나선다.
징집군이 없는 이 세계는, 모든 전쟁을 귀족 휘하에 있는 이들이 도맡아 한다.
오직 명예와 사명감을 지닌 이들만이 귀족가의 문을 두드리는 것.
"그래, 잘난 귀족 나리들에게 떠들어 봤자, 평민들의 고통은 알지 못하겠지. 그러면 알게 해 주면 되겠지? 그 잘난 피로 어디 한번 막아 봐."
그녀는 대화를 거부했다.
본래 이 대화는 케일이, 아나이스가, 그 밖에 다른 이들이 들었어야 할 대사였다.
심성이 착한 아이들은 별것 아닌 말에도 고민했고, 레벨리-말리토에게 흔들리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마누스는 다르다.
그는 이 세계를 이해하며 살아왔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에게 아나벨이 하는 말은, 그저 뒤틀린 신념을 지닌 선동꾼이 나불거리는 것으로밖에 와닿지 않았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제부터 버텨야 할 겁니다."
"-버텨?"
"아이들이 올 때까지 버텨야죠."
"언제 올 줄 알고-?!"
금방 올 거다.
마누스는 별걱정 없이 마법진을 만들었다.
이참에 마석 노가다나 좀 해 둘까?
[큼!]
[크음-!]
어둠 속에서 가면의 모습이 속속 비쳤다.
그녀가 수많은 시간을 들여 모아 둔 데몬들.
창고에 박혀 있던 것들이 적을 멸하기 위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미아는 난간에서 그 모습을 보며 광소했다.
그렇게 귀족의 피가 대단하다면, 어디 살아 나가 봐라.
"그것이 그렇게 지키고 싶다면-! 어디 힘껏 발버둥 쳐 봐! 아하하하하핫-!"
듣기 싫은 웃음소리에, 기예르모가 말했다.
"저걸 먼저 떨어뜨리면 안 되나?"
"딱히. 그러면 얻을 걸 못 얻거든."
"-뭐?"
마누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말하지 않았던 것이 있었는데, 미아 교수와의 전투는 플레이어들이 애용하는 노가다 장소이기도 했다.
끝없이 몰려오는 잡몹에, 새로 얻은 튼튼한 탱커.
거기다 만능 마법사.
한 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딜러까지 있는 상황.
축제의 시간이었다.
제88화
- 파밍과 노가다는 즐거워
* * *
데몬들이 몰려왔다.
이건 인 카운터의 숫자가 정해져 있는 게임이 아니었다.
현실.
제한도, 제약도 없는 현실이었다.
빼곡하게 몰려온 데몬이 미궁의 층 전체를 채웠다.
보는 이로 하여금, 물량의 압박을 느끼게 만들 물량.
하긴,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아 온 데몬들이니.
"잔챙이들뿐이로군."
콰르르릉-!
가볍게 날린 전격 마법이 적들 사이사이를 노닐며 데몬을 태워 버렸다.
후두둑 쏟아지는 마석 결정들.
마누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마나가 차올랐다.
끝없이 차오르는 마나는 2클래스 이하의 마법이라면, 거의 무한정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거기다 덕지덕지 붙은 패시브는 적들의 방어를 꿰뚫고 죽음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투타멘]
거대한 장막이 되어 앞을 탄탄하게 막아 낸 기예르모.
그는 진짜 살의로 가득 찬 적들을 가로막으며, 마누스의 말을 이해했다.
왜 그들이 이토록 강해졌는가.
1학년 A반 이들이 흉포한 몬스터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던 이유.
마누스가, 알라노가 3학년들과 당당히 맞설 수 있었던 이유.
이런 지옥 같은 풍경에서, 살의로 번뜩이는 괴물들을 상대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이런 곳에서 싸워 왔던 건가.'
텅텅 울리는 방패가 언제 우그러질지 모르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갑옷을 비껴 나가는 쇠붙이에 오싹함과 식은땀이 흘렀다.
생사를 가르는 진짜 실전.
아카데미에서는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짜릿함과 스릴감.
기예르모는 어느새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 이거다.
죽음과 줄다리기를 하는 이 실전!
'이곳은, 날 완성해 줄 곳이다.'
미친 듯이 움직이는 몸뚱이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 마누스가 왜 소꿉장난을 언급했는지 알겠다.
[이그니스]
콰르르르르르-!
불로 만든 뱀이 원을 그리며 데몬들을 불살랐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데몬을 남김없이 태워, 한순간 빈 공간을 만들어 낼 정도로 압도적인 파괴력.
후우-.
깊은숨을 내뱉은 니아는 곧 마나 포션을 들이켰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두둑이 챙겨 온 보람이 있었다.
"끝이 없네, 도대체가."
"다른 층에서 전부 끌어모은 것 같은데-."
"다들 마나는 괜찮아?"
니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렇게 안 보였는데, 생각보다 걱정이 많은 스타일이다.
마누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기예르모도 말없이 방패를 들어 올렸다.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천재가 많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이렇게 괴물일 줄이야.
이들이 있기에 든든했다.
1학년 후배, 그리고 알라노까지 올라온다면 어떨까?
"아직 애들은 소식 없고?"
"곧-."
-선...들 ...배!
"조금 더 가까이 와라. 우린 67층에 있다."
-알았... 금방...게요!
"이제 오는 모양이군.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겁니다."
"좋아-."
마법이 날았다.
방패가 적의 공격을 막았고, 차근차근 적들을 분쇄했다.
그 모습을 모두 보고 있던 미아는 으득, 입술을 씹었다.
그래, 대단한 학생들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버틴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보통의 마법사라면 벌써 나가떨어져야 했을 물량을 퍼부었으니까.
'저 녀석, 저 녀석이 문제로군.'
카이사르 마누스.
아카데미에 입학 후, 항상 화제의 중심이었던 애송이.
무표정하게 마법을 부리며 데몬을 쓸어 담는 폭군.
아직 병력에 여유는 많았다.
조금 더 난이도를 올려, 저들을 괴롭혀야지.
낄낄거리며 웃는 그녀의 모습은 일그러진 가면과 다르지 않았다.
데몬이 쓰고 있는 가면은 그들의 마음을 나타낸다고 하지.
그녀의 가면은 어떤 아르카나를 가지고 있을까.
"날뛰어라! 나의 노예들아!"
촤악-!
붉은 시약이 뿌려졌다.
광포함을 더하는 특수한 시약이 데몬들의 위로 내려앉았다.
[크으으으음-!]
가면이 붉게 물들었다.
진정한 2페이즈의 시작이었다.
이제 슬슬 힘에 부칠 거다.
마누스는 기예르모에게 말했다.
"입구 쪽에서 싸워야 한다. 뒤로 물러나."
"-알았다."
능력치가 대폭 증가한 데몬들은 서로를 물어뜯는 것도 서슴지 않고 진격했다.
오직 적을 말살하는 것으로 움직이는 가면의 괴물들.
조금씩 숨이 차오르는 것을 억누르며, 세 사람은 문을 등지고 버티기에 들어섰다.
빈틈이 생겨, 조금씩 안으로 흘러들어 오는 공격이 늘어 갔다.
그 틈을 메우는 것은 의외로 작은 솜뭉치였다.
따스한 빛이 너덜너덜해진 갑옷을 감쌌다.
[호잉-!]
"큭, 나도 사역마를 소환할 걸 그랬나-."
"지금 네 마나로는 무리다."
"쳇-."
마누스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데몬들은 끝이 없었다.
셋을 죽이면 다섯이, 다섯을 죽이면 열이 그 공간을 채우는 상황.
그렇게 얼마쯤 싸웠을까.
모두의 마나가 간당간당한 상황에서, 오로지 마누스만이 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마누스의 뒤에서 마나를 회복하는 중이었다.
"너만 남았네?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꼴좋구나. 후후후-."
"후우-."
[하이 레스티오]로 회복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데몬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어림잡아 오십.
마누스는 최대한 숨을 고르며 마나를 일으켰다.
'이제 곧이군.'
노가다는 끝났다.
그는 눈을 굴려, 바닥에 널브러진 마석과 아티팩트들을 바라봤다.
그래, 이 정도라면 당분간 마석 노가다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그의 손끝에서 마법진이 피어났다.
"멍청한 것."
입가를 비틀며, 참을 수 없는 조소가 흘러나왔다.
이제 연기도 끝이다.
시간도 끌 만큼 끌었다.
그의 비웃음을 본 미아는 감정 조절이 안 되는 듯, 얼굴을 흉측하게 일그러뜨렸다.
[프로기디움]
아무런 면역도 없는 놈들에게 퍼부어지는 강력한 상태 이상 마법.
[망각의 구름]보다 위력은 낮지만, 잔챙이들 상대로는 충분했다.
잡몹들에겐 치트 키나 다름없는 마법이 데몬들을 덮쳤다.
마약 가루를 뒤집어쓴 것처럼 일그러지는 풍경.
가면을 뒤집어쓴 데몬들이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자기네들끼리 서로 죽이거나, 미쳐 날뛰는 놈들.
구석으로 가다가 밟혀 죽고, 이리저리 도망 다니고, 광분하여 스킬을 난사하는 데몬들.
"이, 이게...."
"왜, 우리가 놀아 주니 재밌었나?"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어어어어어-!"
광기에 찬 목소리가 공간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것은 비통함일까, 억울함일까.
붉게 충혈된 눈동자는 그녀의 감정이 극한까지 내몰려 있다는 걸 증명해 주었다.
"더, 더 몰려와라, 더-!"
그녀가 푸른색 시약을 미친 듯이 뿌렸다.
냄새를 맡고 넘어온 데몬이 빈 공간을 다시 채웠다.
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데몬들과 뒤엉켜 사태만 악화시킬 뿐이었다.
마누스는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봤다.
포션을 마시고 핼쑥해진 모습으로 숨을 고르고 있는 두 사람.
"이런 방법이 있었으면, 진즉 했어야지-."
"적을 속이려면 어쩔 수 없거든요."
니아는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마누스를 탓하진 않았다.
덕분에 아주 좋은 경험을 얻었으니까.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붙여 본 적이 있겠는가.
제아무리 천재여도 한계는 분명 존재한다.
아직 영글지 않은 이들에겐, 한 번쯤 한계라는 걸 절실히 알게 해 주어야 할 테지.
전투력 측정은 끝났다.
이젠, 반격할 차례였다.
-선배! 저희 도착했어요!
"들어와라."
타이밍 역시 알맞았다.
바람이 불었다.
거대한 문이 열리며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했다.
당당하게 들어온 이들은 아직 쌩쌩했고, 이곳까지 올라오며 적당히 몸이 풀린 상태였다.
에머슨은 길잡이, 그 자체였다.
오죽하면 그녀가 합류하고 난 뒤에 미니 맵이 개방되겠는가.
"선배, 괜찮아요?"
"다들 다친 곳은 없죠?"
여섯 명.
이전과 전혀 다른 규모의 지원군이었다.
마누스 역시 든든함이 느껴질 정도.
반면, 미아는 갑자기 들이닥친 이들을 보며 입을 벌렸다.
아니, 탑에 들어올 수 있는 이들이 저렇게 많았단 말인가.
루페라가, 자신이 특별한 것이 아니었던 건가?
왜 이렇게 많아?
"하나같이 귀족, 귀족밖에 없잖아!"
그녀는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이대로 있다간 여태 모은 연구 자료들이 모조리 날아가게 생겼다.
그녀는 하얀색 시약을 몸에 뿌리고 2층으로 내려갔다.
[큼큼-]
전투의 냄새를 맡았는지, 격렬하게 꿈틀거리는 거체.
그럼에도 자신의 명령을 충실하게 기다리는 것이, 공을 들여 훈련한 전투견을 보는 것 같았다.
스윽, 가면을 한 번 쓰다듬은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가서, 모두를 죽이렴."
[크음-!]
거대한 실루엣이 움직였다.
쿠웅-!
공간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큰 울림이 들렸다.
거대한 데몬은 덩치에 걸맞지 않게 날렵한 움직임으로 도약했다.
콰아아아아앙-!
무자비한 등장에, 밑에 있던 데몬들이 모두 짓이겨지며 마석을 토해 냈다.
사실상 진짜 보스전이라고 할 수 있는 데몬의 등장.
[데몬 : 타입 키메라]의 등장이었다.
"저게... 뭐야?"
"가면이...."
"으윽, 징그러."
저마다의 감상을 내뱉는 학생들.
마누스는 시험 삼아 상태 이상 마법을 날려 보았다.
[크음-?!]
잠시 움찔한 키메라.
하지만 이내 고개를 털어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아, 상태 이상에 면역이라고 봐야 했다.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망각의 구름이 쓸모없어지는 이유이기도 하지.
0.n초 만에 해제하는 데몬과 데모니움이 수두룩하게 나오기에, 상태 이상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했다.
"역시, 통하지 않는군. 에머슨."
"네!"
"지휘를 부탁하지. 난 잠시 후에 전선에 복귀하겠다."
"네?!"
마누스는 손을 뻗어 흩어져 있는 마석을 긁어모았다.
그의 앞에 수북이 쌓인 마석 결정들.
그중 일부는 기예르모와 니아에게로 향했다.
노가다와 파밍을 했으니 전리품을 얻을 차례였다.
그는 구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니아와 기예르모에게 말했다.
"마석 결정을 흡수한 후에 전투에 참여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버티고 있을게요, 에이, 걱정 마세요. 그래도 A반 친구들인걸요!"
피어슨이 엄지를 척 올리며 믿음직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런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걸 보니, 확실히 파티에 도움이 되는 인물이라니까.
마누스는 피식 웃고, 눈을 감았다.
마석 결정을 흡수하는 방법은 사전에 설명해 주었다.
마누스, 기예르모, 니아는 나란히 앉아 흡수를 시작했다.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잘못해서 공격이라도 받으면, 큰 피해를 받을 테니까.
"꼭 보호해 드릴게요."
케일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미아 교수를 잡아 두기 위해서 무리했을 터다.
자신들이 오기까지, 만신창이가 되어 가면서 적의 수를 줄여 주었다.
이렇게 부담을 줄여 주었는데, 여기서 약한 소리 할 수는 없었다.
거대한 데몬은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여기엔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이 잔뜩 있었다.
"멜라니. 조심해. 회피 위주로 전투해야 해."
"-알았어."
[크으으으으으어어어어어-!]
키메라의 비명과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다.
대형 쓰레기를 소각할 시간이었다.
제89화
- 지향점
* * *
"온다!"
에머슨의 지휘가 시작되었다.
키메라는 약점 속성이 없지만, 그렇다고 반사하거나 흡수하는 속성 역시 없었다.
그야말로 깡딜로 밀어붙여야 하는 보스.
앞으로는 이런 종류의 보스가 수두룩하게 나올 것이다.
제일 먼저 움직인 것은 알라노였다.
빠른 캐스팅 속도를 장점으로 내세우는 그녀인 만큼, 거대한 얼음 창을 만들어 냅다 던졌다.
[크으으으으-!]
가면 중 몇이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흘려 댔다.
허나 거체에 타격을 입혔냐 하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아나이스와 케일의 마법이 날았다.
폭음과 함께 자욱한 연기가 후욱 피어났다.
연기 속에서도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거체가 선명하게 보였다.
어지간한 마법은 단단한 내구도를 이용해 버텨 내는 모양.
"다들 방어 마법!"
[크으으음!]
키메라가 땅을 후려쳤다.
단단했던 미궁의 땅이 갈라지며 파편이 일행들을 향해 쇄도했다.
각자 방어 마법을 전개해 피해를 막을 수 있었지만, 간과한 것이 있었다.
애초에 키메라가 노린 것은 생생한 전투원이 아니었으니까.
그걸 발견한 것은 케일이었다.
그녀의 시계가 느리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마석을 흡수하고 있는 상태에서 저런 파편을 맞으면 무사할 리가 없다.
보호해야 한다.
케일은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더블 캐스팅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엣지]
[알투스]
그것도 강화 마법까지 더한 더블 캐스팅.
푸른색 꽃잎이 자신, 그리고 선배들 앞에 형성되며 파편을 튕겨 냈다.
천만다행이었다.
다시 공세를 이어 가기엔, 보스의 턴은 끝나지 않았다.
"다시 온다!"
화르르륵-!
거대한 화염 마법이 잡다한 데몬들을 태우며 엄청난 기세로 퍼졌다.
이번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대처하는 이들.
얼음 방벽이 솟아올랐고, 바람으로 불길을 갈랐다.
케일 역시 방어 마법을 펼치기 위해 준비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렇게 된다면 또 번거로운 작업을 거쳐야 할 터.
그러지 말고, 손쉬운 방법은 없을까?
'어라-.'
케일은 한 발자국 걸어가면서 보았다.
선명하게 빛나는 마나의 흐름을, 거칠게 노니는 화염의 흐름을.
그녀의 눈이 붉게 빛났다.
무언가를 하려는 듯, 가만히 손을 뻗었다.
"-이리로."
화르르르르-.
화염이 움직였다.
키메라는 마법을 끝까지 컨트롤하지 않았다.
그저 마법을 만들고 던졌을 뿐.
이 광경을 마누스가 봤다면, 코웃음 치며 방어 마법을 전개하지도 않았으리라.
"케일?"
"저, 저게 가능한 일이야?"
"뭐 어때! 저렇게 괴물 같은 실력이면 우리야 더 좋지!"
피어슨이 하하 웃으며 엄지를 척 올렸다.
케일은 화염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해 마나를 움직였다.
키메라가 끝까지 마법을 붙들고 조종했다면 모를까, 지금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한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본능이 이끄는 대로 손을 뻗었을 뿐.
만약 마누스가 보았다면, 미소를 지었을 광경이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재능 중 하나를 개화했다며 고개를 끄덕였겠지.
"가라."
[카운터 : 레플렉시오]
주인공이 익히게 되는 패시브.
붉은 눈동자로 변하면 그녀의 전투력은 최고점에 이른다.
그녀의 핏줄이 고귀하다는 증거.
그녀의 숨겨진 피의 능력이 천천히 발휘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크흐음!]
자신이 쏘아 낸 공격에 맞은 키메라가 신음을 흘렸다.
덜그럭-.
두 개의 가면이 떨어졌다.
부스스 사그라지는 가면들.
에머슨은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녀의 마나가 키메라를 훑었다.
그래, 분명 느껴지는 생명력이 줄어들었다.
"계속 공격해 봐. 분명 저 가면이 떨어지는 거랑 연관이 있을 거야."
"-알았어."
케일은 눈대중으로 가면의 개수를 세 보았다.
열다섯 개.
남은 개수는 어림잡아 열다섯이었다.
긴 싸움이 될 것 같았다.
한 번에 큰 충격을 준다면, 여러 개의 가면을 떨어뜨릴 수 있을까?
그녀가 즐겨 쓰는 마법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익숙한 것만큼 무섭고 특별한 것은 없지.
콰르르르르륵-!
[아타블루스]
삭풍을 닮은 화염이 키메라를 덮쳤다.
지금까지 들어갔던 그 어떤 공격보다 강력한 공격이 키메라에게 작렬했다.
쿠웅-.
키메라는 화염을 몸에 두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며, 케일에게 거대한 주먹을 날렸다.
"읏-."
콰아앙-!
파편이 그녀의 뺨을 스치며 생채기를 만들어 냈다.
주륵, 뜨듯한 피가 긴장감을 더욱 배가시켰다.
까딱 잘못하면 목숨이 날아갈 수 있다는 압박감.
왜인지 모르게, 케일은 평소 자신보다 더 많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하기엔 모든 것이 평소와는 달랐다.
'내가 왜 이러지-.'
"이번엔 바람 속성이야!"
키메라는 다양한 데몬을 엮어 만든 합성체.
다양한 속성을 다루는 것도 가능한지, 바람 역시 자유자재로 다뤘다.
이번에도 다른 이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방어했고, 케일은 다시 한번 바람을 조종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이번에도 될 거야.'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
자칫 잘못하면 팔다리가 깔끔하게 절단될 정도의 위력.
푸른 마나를 담고 짓쳐들어오는 바람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언제나 자만은 자신을 좀먹고 결국 파멸로 이끌기 마련.
케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불과 달리 바람은 그 속도가 워낙 빠르고 중구난방으로 뻗쳤다.
난폭한 투견과 같이 뻗어 나가는 마나를 제어하지 못한 케일의 손이 거칠게 튕겨 나갔다.
"아-."
"케일-!"
촤좌좌작-!
선혈이 튀었다.
끔찍한, 난생처음 겪어 보는 고통에 눈물이 절로 새어 나왔다.
오만함.
그리고 무모함이 불러일으킨 참사.
"끄으으-."
아팠다.
너무 아파, 머리가 생각을 끊어 버리는 것 같았다.
힘없이 무너지는 몸을 받아 줄 그 무엇도 없는 상황.
결국, 그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괜찮아?! 케일!"
"으으...."
고통에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붉었던 눈동자는 다시 푸르게 돌아왔다.
잘게 떨리는 눈동자가 그녀의 고통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은 본 알라노는 자신이 전선에서 빠지길 희망했다.
케일은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순간적으로 엄청난 화력을 뿜어낼 수 있는 전력.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자신이 힐러 포지션으로 들어가는 것이 맞았다.
"내가-."
[호잉-!]
마누스의 품에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알라노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새하얀 솜뭉치가 뽈뽈 날아와, 케일의 어깨에 안착했다.
"...알비온?"
[호이잉-!]
그 큰 눈망울을 꽈악 감고, 마나를 쥐어짜 내는 알비온.
솜뭉치의 전신에서 따스하고 푸른 빛이 흘렀다.
치료 마법 중, 가장 기초적인 마법인 [프로펙션]이 케일의 상처를 보듬었다.
"알비온-."
"케일, 일어날 수 있겠어? 곧 다음 공격이 와."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상처 입었다고 주저앉아 있다간, 그대로 탑에서 절명할 수도 있는 상황.
케일은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난적은 항상 저마다의 해결책으로 극복해 왔다.
마누스가 없어도 그들은 언제나 위기를 헤쳐 나갈 저력을 보여 주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괜찮아. 할 수 있어."
피는 멎었지만, 상처를 완전히 회복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마나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이 있었고, 팔다리도 온전히 붙어 있었다.
마법사로 살아가면서 이 정도 상처는 상처 축에도 끼지 않겠지.
케일은 다리에 힘을 줘 일어섰다.
흘끔, 뒤를 돌아보니 마누스에게서 거대한 마나가 느껴졌다.
그 많은 마석을 흡수하려니, 당연한 일이겠지.
그녀는 본능적으로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너무 무리했어. 정석대로 가자.'
알비온이 적대감을 보이며 으르렁거렸다.
조그마한 솜뭉치가 그래 봤자 얼마나 위협적이겠냐마는, 왠지 모르게 든든한 느낌이 충만해졌다.
알비온이, 마누스의 사역마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다시 자신감이 차올랐다.
"이번엔 얼음-!"
콰드드득-!
얼음의 창이 모두를 노리고 쏘아졌다.
케일은 꽃잎을 생성해, 창을 비껴 냄과 동시에 계산했다.
아타블루스는 3클래스에 버금가는 화력을 지녔다.
그럼에도 타격을 입히지 못했으니, 이는 어떠한 법칙이 있겠지.
에머슨도 그 법칙을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이번엔 나도-.'
꽃잎이 지고, 광풍이 몰아쳤다.
바람 마법으로 다쳤으니, 자신도 바람 마법으로 응수하리라.
4클래스의 마법이 뿜어져 나왔다.
[템페스토]
콰르르르륵-!
광풍으로 만들어진 창이 키메라의 한 부분을 꿰뚫었다.
푸른색 가면이 모조리 떨어져 나간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아나벨이 보고 있는 3층까지 여파가 닿았다.
유리 긁는 소리와 함께, 투명한 막이 미아 교수를 단단하게 보호했다.
"아하하핫! 고작 그런 마법으로 날 위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니? 우리 예쁜 키메라가 아파하는 걸 보니, 내 마음도 찢어지네-."
그녀는 푸른 시약을 뿌렸다.
그러자 다시 흘러 들어오는 데몬들.
이번엔 하얀색 시약을 뿌리며 말했다.
"나의 적들을 모두 죽여라."
어느새 구름이 걷혔다.
마누스가 깨어나기 전에 물량을 확충한다면 저 건방진 것들을 쓸어버릴 수 있겠지.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가서, 더러운 귀족들의 피를 흩뿌려라-!"
"우린 여기서 죽어 줄 생각 없거든! 이 못생긴 노처녀야-!"
"노, 노처녀?!"
통렬한 한 방이었지만, 그건 그녀의 분노만 부추기는 꼴이 되어 버렸다.
미아 교수는 설정상 30대 중반.
이 세계에서 30대 중반까지 결혼하지 못한 자들은 노총각, 노처녀라 불리는 것이 현실이었다.
으득-.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나며, 그녀는 충동적으로 행동했다.
아끼고 아낀, 그녀가 평생을 바쳐 만든 시약들을 모조리 집어 든 것.
생각보다 깊게 비틀린 그녀의 성격은, 상상할 수 없는 충동적 결과를 만들어 냈다.
"모두 이 자리에서 죽이고, 또 죽여 주마!"
핏발이 선 눈.
끝까지 혈압이 차올라, 붉게 달아오른 피부.
그녀는, 파멸로 이끄는 문을 열고야 말았다.
쨍그랑-.
그녀의 정수가 담긴 시약들이 한꺼번에 깨지며, 거대한 혼란을 낳았다.
"죽어! 죽으라고오오오-!"
광기에 찬 울음이 대전을 광기로 물들였다.
키메라에 붙은 가면이 일제히 울음을 토했다.
붉게 물든 가면이 내뿜는 마나에, 1학년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가슴을, 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기세를 죽였다.
이길 수 있을까.
그들의 머릿속에,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것이 생겼다.
"이거... 할 수 있겠지?"
"약한 소리 하지 마. 공략법은 파악했으니까."
"-알려 줘."
케일이 마나를 일으키며 말했다.
에머슨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떨어진 가면이 해답을 알려 주고 있었다.
제90화
- 징벌
* * *
붉게 물든 가면의 공세는 벅찼다.
이를 악물고 전력으로 마법을 펼쳐야 겨우 버틸 수 있는 위력들.
케일마저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광포하고 난폭한 마법의 흐름이었다.
'이대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해.'
화르르르륵-!
거센 화염을 바람으로 가르며, 알라노가 입술을 깨물었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모두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특히 공격 마법 한 번을 쓸 때마다 마나 소모가 심한 아나이스가 가장 위태로워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는 고민했다.
아직 마누스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들에게 많은 것을 맡겼지만, 아직 자신과 일행들은 그가 잠시 맡긴 짐을 들어 줄 능력이 부족한 건 아닐까.
자괴감이 슬슬 고개를 들 때쯤, 무너지는 이가 생겼다.
"으아아악-!"
피어슨의 마나가 다했는지, 애써 유지하고 있던 방어 마법이 깨졌다.
후끈한 열기가 몰아쳤고, 화상을 입은 듯 붉게 그슬린 피부가 연기를 내며 이글거렸다.
고통.
싸움에는 언제나 고통이 동반되지만, 아직 어린 학생들에겐 견뎌 내기 힘든 일이었다.
"흐으으윽... 아파아아아, 아프다고오오!"
"아나이스, 잠시 엄호를."
"네!"
포지션을 바꾸었다.
버퍼가 사라진 이상, 그의 목숨은 짐 덩이가 되어 버렸다.
유일하게 회복 마법을 쓸 수 있는 알라노가 피어슨의 얼굴에 회복 마법을 퍼부었다.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이제 남은 마나도 간당간당했다.
공세로 돌릴 여력은 없었고, 방어와 회복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빨리 뛰었다.
마나가 많은 축에 속하는 자신도 이럴진대,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더 강했어야 했어.'
강함에 대한 열망.
그건 비단, 알라노만 품은 생각이 아니었다.
덕지덕지 붙은 가면을 떼어 내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강력한 마법이 연달아 날아온다.
그걸 막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고 머리가 아파 왔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건, 곧 마법사로서 제 기능을 못한다는 말과 같았으니.
'내가 조금 더 강했더라면-.'
아나이스가 자책하듯, 주먹을 꽉 쥐었다.
그들의 사기는 점점 최악으로 치닫는 중이었다.
강력해진 키메라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이들을 몰아쳤다.
[크으으으음-!]
빠지지직-!
전격이 아나이스를 향해 날아왔다.
그녀는 전력을 다해 [에지스] 마법을 펼쳤다.
가까스로 펼친 두 장의 꽃잎, 키메라의 마법은 그녀의 노력을 비웃듯 꽃잎을 무참히 깨부쉈다.
전기를 머금은 꽃잎이 조금씩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며, 아나이스는 눈을 감았다.
'그래도, 가장 약한 내가 죽는 게-.'
새하얀 섬광이 그녀의 감은 눈꺼풀을 비집고 백광을 만들어 냈다.
저만한 마법을 맞고 살아남을 체력은 없었다.
남은 이들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겠지.
그러나 한참 기다렸지만, 그녀를 죽음으로 이끄는 충격 따위는 없었다.
슬며시 눈을 뜨자, 화려한 다섯 장의 꽃잎이 그녀의 앞을 막아 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깨져 버린 그녀의 얇은 꽃잎이 아닌, 큰 꽃잎을 가진 해바라기처럼 단단한 방어 마법.
"-아."
"잘했다, 아나이스."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토록 듣고 싶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으니.
뒤쪽으로부터 오싹한 기운이 등을 타고 흘렀다.
선배들이 눈을 떴다.
* * *
충만한 느낌.
이렇게 많은 마석을 한꺼번에 흡수한 적은 처음이었다.
안 그래도 많은 마나였는데, 이젠 만전이라면 5클래스 마법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을 수준까지 올라왔다.
짧은 시간에 이렇게 강해져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다들 꼴이 말이 아니군.'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키메라는 원작보다 훨씬 빠르게 폭주했다.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미아는 연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중이었다.
아마도 무언가 변수가 생긴 모양이겠지.
[사니타스]
4클래스의 광역 치유 마법.
틈틈이 관련 서적을 읽어 두었던 것이 톡톡히 밥값을 했다.
상처투성이였던 후배들의, 친구의 몸뚱이가 말끔히 치료됐다.
영웅은 항상 극적인 순간에 나타나는 법.
지금 이들에게 마누스는 하늘에서 내려온 영웅, 그 자체였다.
안도의 한숨이 여기저기서 퍼졌다.
철그럭-.
마나를 모두 회복한 기예르모가 구겨진 방패를 들고 앞에 섰다.
"이런 방법이었군. 이래서...."
이건 사기잖나.
피식 웃음이 흘렀다.
여기라면, 최고의 수호자가 되는 것도 꿈은 아닐 터다.
이대로 쭉 성장한다면, 지고한 경지라는 가디언 마스터에 이르는 것도 꿈은 아닐 테지.
"자기 닮은 것을 만들어 놨군, 노처녀."
"닥쳐어어어어어-! 저 녀석들을 뭉개 버려!"
미아 교수는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듯,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마누스는 키메라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가면의 수를 확인했다.
열다섯 개 중에 여섯 개의 가면이 떨어졌다.
공략법은 알아낸 모양.
자신이 없어도 이만큼까지 해냈다는 것에, 괜스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본래 이 보스는 기예르모의 탱킹력을 바탕으로 깨 나가야 하는 녀석이었다.
'전문적인 탱커가 없이도 이 정도라.... 나름 괜찮군.'
그는 마법사들의 자책을 몰랐다.
스스로 판단하고 평가했을 뿐.
키메라가 거대한 얼음 창을 만들었다.
마누스는 아직도 빛나는 꽃잎을 움직여, 거대한 벽을 만들었다.
"공략법은 찾은 것 같군."
"네. 하지만...."
"괜찮다."
자신이 오기까지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자신들을 탓할 생각인가.
마누스는 그제야 아이들의 눈빛을 살폈다.
힘이 없어, 아무 의욕도 없는 눈빛.
고통에 시달려 공포감에 젖은 눈빛.
분명 10대 아이들이 견디기엔 너무 가혹한 일들이 펼쳐졌겠지.
마누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가만히 놔두는 것도 좋겠지만....'
이왕이면 더 좋은 기억을 심어 주고 싶었다.
너무 오냐오냐해 주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이들은 고통과 한계를 자각했다.
어렸을 때의 상처는 평생을 안고 가야 하는 트라우마로 남는다.
마누스는 이 아름답고 발랄한 아이들이 그런 아픔을 짊어지고 가길 원치 않았다.
게임 속이라고 하지만, 그가 살아 숨 쉬는 곳은 현실이니.
징벌을 내릴 대상을 찾아 철퇴를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버거운 상대로 이 정도까지 버텼다는 건, 그만큼 성장했다는 뜻이니-."
환한 빛이 일었다.
트리플 캐스팅.
그 어떤 천재도 이 나이에 이룩하지 못했던 지고한 경지가 펼쳐졌다.
[마누비아]
전기로 된 뱀이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프뤼나]
거대한 얼음 수정이 까드득, 거대한 창으로 변했고-.
[파룸]
이전, 나그네를 징벌했던 천사가 강림해 징벌할 준비를 끝마쳤다.
그 모습을 본 미아 교수가 경악했다.
4클래스.
마법사로서 한 단체의 중요한 자리를 맡을 수 있을 만큼의 경지.
그걸 동시에 세 개나 펼치는 건, 이미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경지였다.
512개의 각기 다른 선분을 동시에 그린다고 생각해 보라.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태연하게 한 마누스가 손을 뻗었다.
[크으으으으으-!]
4클래스.
단순히 위력만 봐도 키메라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마법들이 쏟아졌다.
딱 한 번의 공격이었지만, 키메라는 거의 빈사 상태까지 몰렸다.
가면이 후두둑 떨어지며, 몸체엔 검은색 가면만이 남아 있었다.
흑마법으로 떨어뜨릴 수 있었지만, 여기서 흑마법을 사용하는 것보다 그냥 위력으로 잡아 버리는 것이 좋겠지.
내려가는 길에 흑마법 몇 개를 배워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마누스는 케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케일."
"네-."
"네가 목표로 할 경지를 보여 주마."
케일의 눈망울에 힘이 돌아왔다.
누군가 그를 보며 '왜 케일만 편애하냐!'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미안한 얘기지만, 이야기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이에게 모든 것을 쏟아붓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직 그녀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
오직 그녀만이 펼칠 수 있는 마법.
마누스는 세 개의 마법진을 다시 펼쳤다.
"마법은 두 개만 합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트리플 스프레드]
[엔시스] - [파룸] - [이그니스]
지끈-.
두통이 일었다.
아직 4클래스를 가지고 카덴차를 펼치는 건 무리인가.
며칠 요양할 생각으로 펼치긴 했지만, 반동이 생각보다 거셌다.
마누스는 이를 악물었다.
집중력을 최고로 끌어 올려, 그만의 마법을 완성했다.
4클래스 마법 중에, 가장 파괴력이 높은 것들만 골라 만든 특별한 레시피.
[프랑고 : 네파스]
마물을 깨부순다는 의미의 마법이 발현됐다.
쿠르르르르르-.
대전이 진동했다.
새하얀 천사가 징벌을 내리기 위해 강림했다.
4클래스 물리계 마법으로 실체를 더하고, 천사의 손에 불의 검을 쥐여 주었다.
불의 검으로 낙원을 지키는 대천사처럼 키메라를 내리찍는 천사.
콰아아아아아아-!
새하얀 섬광이 일었다.
[투타멘]
[이지스]
기겁한 기예르모와 니아가 서둘러 이들을 보호했다.
불기둥이 천장을 뚫을 기세로 솟구쳤다.
열풍이 벽을 때리며 숨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그 여파는 미아 교수가 있는 곳까지 미쳐, 그녀를 벽에 패대기쳐 버렸다.
단말마처럼 비명을 지른 그녀는 의식을 잃었고, 천사가 사라진 다음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모든 것을 멸하는 심판의 천사가 강림해, 모든 것을 쓸어버린 것 같았다.
"...."
그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이걸 위해서 이토록 끈질기게 버텨 왔던 걸까.
각자의 마음에 다른 생각이 피어났다.
누군가는 다음 목표에 대한 향상심이, 누군가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든든한 안도감이, 또 누군가에게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아득함에, 발아한 절망감이-.
전투는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후우-."
마누스는 눈을 감고 날뛰는 마나를 점검했다.
아직도 여운이 가시지 않아, 진탕된 내부를 다스려야만 했다.
[호잉!]
따스한 느낌에, 슬쩍 눈을 떠 보니 열심히 치료 마법을 써 주고 있는 알비온이 보였다.
녀석, 그래도 사역마라고 주인은 알뜰하게 챙기는 것이, 퍽 귀여웠다.
[하이 레스티오]가 제 능력을 발휘하며 진탕된 내부를 진정시켜 주었다.
"너무한 거 아니야?"
"뭐가 너무하죠?"
니아가 투덜거리듯 말해, 마누스가 물었다.
태연한 그 표정이, 왜 더 얄미워 보이는 걸까.
"이렇게 한 방에 끝낼 거였으면, 우린 그냥 쉬고 있을걸."
"여파를 잘 막아 주셨잖습니까."
"참 나. 그나저나... 저건 어떡할 건데?"
니아가 위를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기절해 있는 노처녀, 아니 미아 교수를 향해 올라갔다.
마누스는 잠시 고민한 후, 단호하게 말했다.
"죽입니다."
어떠한 고민도 필요 없는, 깔끔한 방법.
죄책감은 모두가 가질 필요 없다.
본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마누스 본인이 안고 가면 그만일 터다.
원망과 질타는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쓰레기를 치우는 것은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고, 그 더러운 일을 하는 사람들은 본디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어도 괜찮았다.
세상을 구할 수만 있고,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열 수만 있다면.
제91화
- 쓰레기는 누군가가 치워야 한다
* * *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직 이들에게 사람을 죽인다는 건, 다가가기 힘들 주제일 수도 있었다.
마누스는 그런 이들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아직 감성에 젖어 있다면 사람을 죽이지 말라느니 똑같은 사람이 될 뿐이라느니,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겠지.
하지만 현실은 생각한 것보다 더욱 추잡한 법이고, 쓰레기는 땅에 묻어 봐야 곧 다시 악취를 풍길 뿐이었다.
누군가가 치워야 하고, 어디선가는 태워야 하는 것이 쓰레기의 처리 방법.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같이 가요."
의외로 제일 먼저 나선 것은 아나이스였다.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뚜벅뚜벅 걸어, 마누스의 옆에 섰다.
꾸욱 쥔 주먹이 그녀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아나이스.
본래 태양처럼 밝게 빛나야 할 그녀는 우울한 낯빛을 띠고 있었다.
왜 그런지, 무슨 일 때문인지 묻지 못할 만큼.
마누스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말없이 걸었다.
그 뒤로, 케일과 알라노가 움직였다.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지. 우리도 마냥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아닌걸."
"-맞아요. 우리도 죽을 뻔했어요."
자신을 죽이려 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다.
누군가는 그것이 대인배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마누스의 생각은 달랐다.
"-앞으로 더한 꼴도 보게 될 거다."
발소리가 점점 많아졌다.
마누스를 필두로, 모두가 계단을 올랐다.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서.
"이 사람은 어떻게 들어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