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에 나오지 않았던 일들을 처리하며, 언제든 조커 카드로 나설 수 있게 준비해 둬야 한다.
입구 쪽에서 아덴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걸 보았다.
그래도 알라노가 어떤 소환수를 뽑는지 정도는 지켜봐야겠지.
"흘흘, 이거 참 기대되는군요. 마누스 학생은 공을 많이 들여야 할 겁니다. 그렇담 알라노 학생은 어떨까요?"
"저도 귀여운... 아니, 좋은 사역마를 키웠으면 좋겠어요."
"바라는 대로 될지 아닐지는... 오직 운명이 결정하는 법이랍니다."
알라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마법진 앞에 섰다.
후우-.
가볍게 한숨을 쉰 그녀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파지직-!
마법진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알라노의 피를 머금고 공명하기 시작한 마법진이 붉게 물들었다.
마누스는 팔짱을 끼고 그 결과를 지켜봤다.
'기대되는걸.'
[끼야아악-!]
화르륵-.
불이 일었다.
시뻘건 화염이 허공에서 유영했다.
자세히 보니, 불꽃을 두른 작은 새가 파닥파닥 날갯짓을 하는 중이었다.
"어머-."
"오오! 피닉스! 피닉스라니!"
게임사는 보통, 우리가 아는 로망을 높은 티어에 집어넣는 경우가 많다.
이 게임도 마찬가지.
피닉스, 페가수스, 백호, 청룡 등등.
수많은 신화 속 신수들은 전부 S랭크로 등록되어 있었다.
피닉스 역시 마찬가지.
검은 눈동자에 붉은 깃털.
그리고 날개와 꼬리에서 타오르는 홍염은, 뭇 사람들의 로망이었다.
"이 아이도 귀엽네요. 안 뜨겁네?"
"피닉스는 전설 속에 내려오는 신수입니다. 내 살아생전 절대 볼 수 없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알라노 학생이 이 노인네의 소원을 이뤄 주는군요."
[삐약-!]
역시, 크고 동그란 눈으로 알라노를 올려다보는 것이 무척 귀여웠다.
쟤는 그래도 불꽃 때문에 하찮아 보이진 않았다.
솜뭉치와 비교하면, 정말 멋있는 녀석이었으니.
"축하한다."
"-고마워. 잘 부탁해?"
[삐약!]
아직 병아리 수준의 사역마는 무척 힘차게 답했다.
정말 하찮고, 정말 귀여웠다.
알라노가 피닉스를 쓰다듬었다.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흘흘, 그러십시오. 이거... 아카데미가 떠들썩해지겠군요. 역시 재능 있는 자들은 다릅니다."
샨들러 교수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마누스를 배웅했다.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한 알라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가 어딜 간다는 소식은 아직까지 없었으니까.
"어디 가?"
"가문. 의뢰가 들어왔다."
"아아.... 조심해야 해."
"아이들을 부탁하지."
알라노가 옅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시 아버지와 형제, 자매를 보러 간다.
디레 교단이라고 했던가.
'또 어떤 수작을 부렸을지 기대되는군.'
더불어 의뢰를 완수하면, 법칙에 따라 두둑한 보상이 나오겠지.
디레 교단은 후반, 에레시스와 더불어 상당히 짜증 나는 녀석들이었다.
지금 그 세를 줄여 놓는 것이 좋으리라.
텔레포트 마법진에 올라탔다.
가족들의 인식은 그간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어서 오십시오. 어디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카이사르 공국."
"알겠습니다. 좌표를 설정합니다."
환한 빛이 마누스를 감싸 안았다.
눈을 떴을 땐, 그리우면서도 익숙한 공기 안에 들어와 있었다.
카이사르 공국.
검은 머리의 마법사들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텔레포트 마법진 밖으로 향했다.
기별은 넣었다.
조금 있으면 기사단이 마중 나오겠지.
"이곳이 공자님의 고향이로군요."
"좋은 곳이지."
카이사르 공국.
위대한 마법사의 가문 중 한 곳이었다.
제국을 떠받드는 세 기둥 중 하나.
아덴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카이사르 공국의 전경을 바라봤다.
황궁이 위치한 제국의 수도에 비하면 단출한 도시였다.
그렇지만, 확실히 평화로웠다.
덜 북적거리고 덜 번화했다.
주민의 얼굴은 밝았고, 조용하면서도 힘 있는 발걸음이 눈에 띄었다.
"정말 좋은 동넵니다. 사람들의 얼굴이 무척 밝습니다."
"가자."
오늘은 마중 나올 때, 마차를 부르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카이사르 공국을 온전히 느끼고 싶은 마누스의 변덕 때문이었다.
그의 머리는 아주 비상해, 마차로 갔던 길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걸어가는 또 다른 이유는, 아델에게 카이사르 공국을 소개해 주려 했기 때문.
아름다운 거리, 활기찬 사람, 자랑스러운 가문을 소개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저 멀리서 붉은 깃발이 나부꼈다.
"비키거라!"
"모두 고개를 조아려라!"
"도련님의 행차시다! 모두 길을 터라!"
언제나와 같이, 카이사르의 위상을 드높이려 애쓰는 존재들.
그들이 등장하자, 길을 거닐던 사람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고개를 조아리고, 자신들에게 좋은 땅, 좋은 집을 제공하는 이들에게 경배했다.
검은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
카이사르의 특색은 먼 곳에서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음이라.
투구를 깊게 눌러쓴 이들이 마누스 앞에 섰다.
"모시러 왔습니다. 도련님."
"가지."
"이분은?"
"내 전속 비서다."
기사들을 통솔하는 자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감히 궁금증을 드러낸 것에 대한 사죄.
그리고 친절하게 답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호위하겠습니다. 말은 필요하십니까?"
"되었다."
마누스는 걷는 것을 좋아했다.
그건 과거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느껴지는 새로운 풍경.
퐁퐁 피어나는 생각들.
걷는 행위는, 인간에게 있어 많은 것을 얻게 해 주는 행위였다.
적어도 마누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누나의 부름에도 이제 오다니, 꽤 당돌해졌구나, 동생아."
"공녀님을 뵙습니다!"
쩌렁쩌렁한 울림이 그녀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그녀 앞에서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건, 같은 성을 지닌 이들뿐.
아덴 역시 그간의 눈치를 통해 깊게 고개를 숙여, 새로운 가족을 맞이했다.
"학생은 본분을 다해야지."
"어머, 1년 전에 네가 했던 말이랑은 전혀 다른걸? 옆에는?"
"아덴이라고 합니다."
누이, 인비데아는 찬찬히 아덴을 살펴봤다.
짙게 드리운 그림자는 제아무리 그녀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강하다.
동등, 혹은 그 이상.
앞에 있는 마누스 역시 몇 주 사이에 부쩍 마나가 늘었다.
눈동자의 깊이는 어떤가.
마치 아버지를 보는 것같이, 깊고 고요했다.
"메이드치곤 과한 것 같다만...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가자."
그녀가 몸을 돌렸다.
그 걸음걸이 끝엔, 휘황찬란한 마차가 대기하는 중이었다.
마누스와 아덴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어서 타거라. 설마 걸어간다는 소리는 하지 않겠지?"
"...가지."
느긋하게 가려고 했는데, 친절하게 마중 나온 누이가 그걸 막아 버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편하게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덴과 마누스는 마차에 올랐다.
두 번째로 방문하게 된 가문.
여전히 집은 그리운 곳이었으며, 언제 돌아와도 편한 곳이었으니.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아련한 향수를 일으켰다.
제56화
- 가족 받아라!
* * *
다시 돌아온 집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인비데아는 그간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이야기해 주었는데, 디레 교단은 이미 대륙 곳곳에 암처럼 전이된 것 같다고 했다.
차분하면서도 조리 있는 설명에, 마누스도 상황이 단번에 이해되었다.
"무슨 이유로 사막으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에 정착했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누나라면 내 도움이 필요 없었을 텐데."
"이건 내 시험이야. 또, 아버지께서도 궁금해하셨거든."
그가 갑자기 수면 위로 부상한 이유.
1년 동안 힘을 얻은 것이 유지되는지.
라베스의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탑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과연, 라베스도 알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아카데미를 졸업하셨다고 했지.'
그 당시에는 탑이 없었을까?
마누스는 나름대로 궁금증을 키웠다.
언젠가 시간이 된다면, 아버지께 물어볼 수 있겠지.
마차는 공국을 달려, 거대한 저택에 도착했다.
공국의 중심이자, 카이사르 가문이 기거하고 있는 저택이었다.
문이 열리고, 마차가 들어섰다.
이미 준비를 시켜 두었는지, 아카데미에서보다 훨씬 절도 있는 모습의 하녀들과 기사, 마법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작은 황궁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곳보단 훨씬 낫지."
아덴은 그저 미미한 미소만 띨 뿐,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절도 있는 환영 인사를 받은 마누스는 메이드 하나에 아덴의 방을 내어 주게 했다.
그녀는 메이드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었기에 별다른 오해는 없었다.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신단다. 올라가 보렴."
"고마워. 사막으로는 언제 출발할 예정이지?"
"내일 오전에."
준비할 시간은 충분했다.
인비데아는 떠나기 전, 마누스에게 넌지시 말했다.
티란니스.
그의 형이자 가문의 장남에 대해서였다.
"오라버니와는 되도록 마주치지 말거라. 실력은 폭군인데 마음은 좀생이 같은 그 양반이 널 곱게 보고 있지 않더구나."
"충고 고마워."
마누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덴과 함께 가주가 기거하고 있는 사무실로 향하는 길.
마누스 옆에 선 그녀는 저택을 감상하며 눈빛을 빛냈다.
아름다운 곳이다.
황궁은 지나치게 화려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곳은 필요한 곳에 필요한 아름다움을 더한 느낌이었다.
누가 꾸몄는지, 정말 미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생각을 했다.
"같이 들어가지. 소개해야 하니."
"알겠습니다."
아덴은 두 손을 모으고 다소곳이 섰다.
그들을 안내한 라베스의 비서가 고개를 숙이며 문을 두들겼다.
똑똑-.
고급스러운 목재에서 나는 좋은 울림.
그 이후 들려오는 것은 자상한 목소리였다.
"들어오너라."
"실례하겠습니다."
비서는 문을 열어 주었다.
마누스는 발소리를 죽이지 않았지만, 아덴은 소리가 나지 않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정면에서 본 라베스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
"든든한 호위로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지."
"잘 왔다. 그간 마나가 더 늘어서 왔구나. 사역마도... 알비온인가?"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하얀 털 뭉치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라베스를 바라보다, 마누스의 목 뒤로 쏙 숨었다.
그가 내뿜는 기품과 분위기, 그리고 마나의 짙은 중압감 때문이겠지.
보통 사람들이 라베스를 바라보면 홀린 듯 쳐다보거나, 혼절하곤 한다.
초월적인 미모와 초월적인 실력이 만들어 낸 환상의 조화 때문이었다.
카이사르 가문에서 생활하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이런 것에 면역이 되어 있어야 하는 법.
"귀여운 녀석이로군. 카이사르는 사역마보단 본신의 힘으로 싸우는 걸 선호하지. 나도 그랬고."
"언제고 도움이 될 겁니다."
"부정할 수는 없지. 그래, 옆에 있는 자가 황궁에서 이쪽으로 넘어온 탕아인가?"
라베스의 시선이 아덴에게로 향했다.
아덴은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대륙 최고의 마법사 중 한 명인 카이사르 라베스.
그를 본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고, 강력한 압박감이 전해졌다.
마스터.
마법사로 따지자면 5클래스를 완숙하게 다룰 수 있는 경지다.
그런 경지에 올랐음에도 마누스 앞에선 한없이 작아지기만 했다.
'이게, 대마도사. 대륙 최강의....'
"아덴입니다. 공자님께 신세 지게 되었습니다."
"어려워하지 말게. 황궁 생활은 힘들었겠지?"
따스한 말이었다.
라베스는 옅은 웃음을 띠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누스와 무척 닮아 있었다.
마누스가 이대로 자란다면, 저런 모습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
"황궁도 자네가 떠나간 걸 알고 있다네."
"...그런."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황제 역시 자네를 구속할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 시험한 거겠지."
아덴은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그녀는 황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약간의 자괴감이 몰려왔다.
허나 라베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가문에서 자네에 대해 조사를 좀 했네. 어렸을 때부터 황궁에서 자랐다지?"
"-그렇습니다. 베로니카란 이름으로 활동했습니다."
"맞아. 그런데, 그게 단순히 자네를 살육 인형으로 만들기 위함은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졌네."
이건 마누스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게임 속 대사를 급히 떠올렸지만, 기억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베로니카는 그저 황궁, 황제, 그 밖의 인물들에게 휘둘리다 주인공에게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 전부.
종국엔 에레시스와도 접촉하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바뀐다고?
그는 혼란스러움을 감추고 라베스가 하는 말을 조용히 들었다.
"자네는 본래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가기 위해 키워진 암살자네. 그렇기에 감정을 말살하지 않았고, 세뇌조차 진행하지 않았지."
"그래서 제가 이렇게 있을 수 있었던 건가요."
"그렇네. 적어도 내 아내가 알아본 바로는 그러해. 마지막 임무가 무엇이었지?"
아덴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는 흘끔, 마누스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래도 그가 있는 자리에서 말하기엔 부담스러운 내용이겠지.
허나 마누스는 이미 좋게 풀린 일에 대한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난 괜찮다."
"망자의 밤에, 몇몇 학생들을 죽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거기엔 마누스가 포함되어 있었나?"
아덴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당장 목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아버지 앞에서 당당히 '아들을 죽이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하기엔 너무도 부끄러웠다.
"마누스가 죽었다면, 다음은 해리슨의 꼬마였을 거라네. 그들은 시험한 것이야. 물론, 자네가 죽이지 않을 거란 확신도 있었겠지."
"저는...."
아니다.
아덴은 마누스를 죽이려 했다.
마누스의 초월적인 힘이 없었다면, 그는 필시 죽었으리라.
그게 황제의 시험이었다고?
어느 누구도 통과하지 못할 시험이었다.
마누스는 지극히 예외적인 사항.
오히려 살아남은 것이 더 신기할 지경이었으니.
"후후, 괜찮네. 카이사르였기에 통과할 수 있었겠지. 본디 시험이란 그런 것이네. 이젠 너무 마음 쓰지 말게나."
"과분한 말씀입니다."
"요점은, 황제는 자네를 추격하지 않을 거란 뜻이야. 내 아내, 베니니타스는 이런 쪽 정보 수집에 능통하지."
들어 본 적 있었다.
아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교계의 여왕.
모든 정보를 쥐고 흔드는 자.
그것이 마누스의 어머니이자, 카이사르 공국의 여왕이었으니.
그녀가 다니는 곳이 곧 핫 플레이스였고, 그녀가 입은 옷의 디자인이 유행을 선도했다.
말투는 곧 모두가 따라 하는 유행어가 되었지.
"그러니 이젠 카이사르의 품으로 들어와, 마누스의 그림자가 되어 주게."
"그것이 제가 속죄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라베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브로치를 손에 들었다.
"일어나게."
왼쪽 가슴에 달리는 검은색 브로치.
눈동자 모양에, 마법 지팡이가 교차한 모양은 카이사르의 표식이었다.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증표이기도 했다.
아덴의 눈이 떨렸다.
황궁과 달리, 이곳은 임무를 주지 않았으니까.
마누스가 말했다.
이젠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다고.
"이젠 자네도 가문의 일원이라네. 내 아들을 잘 부탁하지."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이건 명령이 아니야. 아버지로서 하는 부탁일세."
아덴은 깊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이용당하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비록 황제의 큰 그림이었을지라도, 그녀가 걸어온 삶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유기되었던 강아지가 새로운 집을 찾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녀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 했다.
그 훈훈한 모습에, 마누스의 얼굴에도 옅은 웃음이 피었다.
"너도 조심하거라. 황제의 시험은 계속 있을 거야. 그는 강한 사람을 찾고 있지."
"이유를 아십니까?"
"자세한 건 모른다. 황가에서 내려오는 비밀 때문일 텐데. 뭐, 상관없는 일이다."
라베스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는 카이사르의 저력을 믿고 있었으며, 마누스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 어떤 시험과 시련도 통과해야만 한다.
그것이 카이사르였으니까.
"아무튼, 황궁에 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어도 되겠구나. 두 사람은 그리 알고 아카데미 생활에 전념하거라."
"알겠습니다."
아덴을 환영하는 일은 그렇게 끝났다.
이젠 본격적으로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였다.
라베스는 지도 한 장을 내어 주었다.
마법으로 매핑해, 정교하게 제작된 지도였다.
북동쪽에 있는 이름 없는 사막.
그저 사막이라고 불리는 곳에, 점 몇 개가 보였다.
"그곳이 인비데아가 조사를 완료한 지역이다. 본래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었다만, 갑자기 이렇게 되었지."
"그래서 제가 필요한 겁니까?"
"아카데미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몸으로 부딪치는 실전이라고 생각한다."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탑에서 계속 실전으로 단련하는 중이었으니까.
직접 몸으로 부딪쳐 가며 싸우는 것.
미지의 공간에서 난관을 헤치며 나아가는 것.
그 모든 것이 사람을 단단하게 완성하는 법이다.
라베스는 또 다른 뜻을 품고 있던 것 같았다.
"네 누이에게 들었다. 권력에 관심이 없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해도 되겠지. 그녀를 시험하기 위해서 너를 불렀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까."
라베스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하는 것.
그 어떤 단어가 나와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건, 정말 좋은 자세였다.
그가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꽤 흥미로운 내용이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자신의 형제, 자매는 권력에 대한 욕심이 큰 모양이었다.
제57화
- 위대한 탑
* * *
인비데아와 티란니스.
두 살 터울인 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좋은 친구이자,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나란히 아카데미에 입학한 두 사람은, 학년 수석을 절대 빼놓지 않았다.
그녀, 그리고 그는 카이사르 가문이라는 거대한 힘을 손에 넣고 싶어 했다.
아카데미에서, 다양한 의뢰에서, 권력과 가문의 힘이 얼마나 크게 적용되는지 몸소 깨달았으니까.
티란니스는 본인의 무력이 강한 아버지처럼 모든 것을 홀로 해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건... 저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일 뿐. 아무도 널 탓하는 자가 없단다."
"그렇다면 인비데아 누님은 어떤 스타일입니까?"
인비데아는 부족한 부분을 주변에서 채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본신의 무력 역시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는 자였다.
그 부족함은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다.
인비데아는 전형적인 왕의 기질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누가 봐도 인비데아는 훌륭한 군주의 자질을 가진 이였다.
허나, 라베스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
"아버지는 누가 더 가주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말해 줄 수 없구나. 하지만 응당 카이사르의 가주라면, 그 존재감만으로도 좌중을 휘어잡을 수 있어야 한다."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원하는 바를 간접적으로 들었다.
모든 것은 마누스, 자신에게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 힘을 실어 주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매우 달라지겠지.
그런 집안 알력 싸움은 관심 밖이었지만, 언젠가는 관여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때를 대비해, 풍파에 휩쓸리지 않도록 단련해야겠지.
'권력에 가까이 갈 필욘 없지만, 휘둘리지도 말아야겠지.'
"일단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출발하거라."
"알겠습니다."
"마법사단에서 한 분대, 기사단에서 한 분대가 갈 것이다. 미리 만나는 것도 좋겠지."
마누스는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아덴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닫히는 너머, 라베스는 날카로운 눈매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더 뛰어난 전속 그림자를 얻었잖은가.
'티란니스, 인비데아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건만.'
반푼이였다.
그래서 감추려고 했었다.
카이사르의 이름에 먹칠은 하지 말아야 할 테니까.
그런 아들이, 불과 한 달 사이에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업적들을 이뤄 내고 있었다.
권력에 관심이 없다고 한들, 권력이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터.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어, 라베스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앞으로 잘해 보거라."
네 행보가, 카이사르의 차후 방향을 결정할 수도 있으니.
아무도 모를 미소를 지은 라베스가 창문을 바라봤다.
일렁이는 그림자들이 꿈틀거렸다.
그들도 느꼈겠지.
이 가문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음을.
* * *
마누스는 바로 옆방에 아덴을 넣어 두곤 마법사단이 머무는 곳을 찾았다.
얼굴 정도는 봐 두자는 것이 그의 생각.
기사단이 머무는 곳이 성체처럼 되어 있는 병영이라면, 마법사가 머무는 곳은 탑이었다.
최고의 마법사 가문답게, 그 규모는 여타 가문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아카데미보다 거대한 마탑을 운용하고 있는 곳이 카이사르 가문이었다.
그 엄청난 규모에, 마누스는 혀를 내둘렀다.
'진짜 마법사들은 여기 있었군.'
아카데미에서 지내는 풋내기가 아니라, 진짜 실전을 치르고 연구하는 마법사들.
미토스 아카데미가 대학교라면, 이곳은 대학원이자 직장인 샘.
거대 기업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곳이었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마법사들이 검은 머리를 보고 수군거리기 바빴다.
아직 이들에게, 마누스란 미지의 존재이며 소문으로만 듣던 이였으니.
사람들은 검은 머리의 도련님을 바라보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마누스 도련님.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저는 안내원 빅스라고 합니다."
"내일 임무에 나가는 이들을 보러 왔다."
"아 그러고 보니...."
들려오는 소문은 마탑에서도 갑론을박이 펼쳐졌던 주제였다.
홀로 사교도 집단의 의식을 막은 둘째 도련님.
마탑 소속 마법사 대부분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지 못했다.
'정말인가? 느껴지는 마나는 상당한데-.'
마누스는 자신의 마나를 숨기는 편이 아니었다.
숨길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압박감이 빅스에게도 느껴졌다.
"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마침 공녀님도 와 계십니다."
"가지."
"알겠습니다."
거대한 타워가 무려 다섯 개.
저택 뒤에 높이 솟아 있는 첨탑은 위대한 마법의 상징이었다.
그 위용은 전 대륙에 널리 퍼져 있으며, 제국 수도, 해리슨 가문에 있는 마탑과 더불어 대륙 3대 마탑으로 불렸다.
게임에서는 그저 텍스트만으로 표기되었던 카이사르 공국 마탑의 존재.
마누스는 천천히 거대한 건축물을 바라봤다.
건물 자체에서 마나가 스멀스멀 피어나는 느낌.
마나로 만들어진 거대한 나무 같은 형상으로 보였다.
'대단하군.'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나가 꿈틀거렸다.
마누스는 그 마나를 받아들이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미토스 아카데미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내부 구조에서 익숙함을 느꼈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마법사들이 한 번씩 마누스를 바라봤다.
그들은 잠시 멈춰 서서, 누군지 고민하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긍지 높은 마법사라도 가문 앞에서는 그저 평범한 회사원일 뿐이었다.
"도련님이 익숙하지 않은가 봅니다."
"이곳에 온 건 처음인가?"
"예?"
빅스가 되물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뒤통수가 싸해졌다.
마누스는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이 마치 화났을 때의 라베스를 보는 것 같았다.
그제야 빅스는 카이사르 마누스라는 이름을 제대로 떠올릴 수 있었다.
폭군.
카이사르의 무능한 망나니였던 자.
그가 빛과 같은 속도로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되묻고 말았-."
"됐고, 내가 묻는 말에만 답하라."
"아-. 2년 전에 한 번 방문하셨습니다."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담 2년 전, 자신은 이곳에서 무얼 했던가.
걸음을 계속 옮기며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을 찾았다.
"2년 전, 난 뭘 했지?"
"한참 책을 읽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후론 흥미를 잃고 떠나가셨습니다."
2년 전에 나는 무얼 했을까.
마누스는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무얼 위해 멸시와 조롱을 받으며 이곳에 발을 들였을까.
어렴풋이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마누스 자신도 괴로웠겠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과, 높기만 한 마법의 벽.
'애정 결핍인가.'
남자와 아주 비슷한 점이 많았다고 생각하며, 거대한 인공 승강기에 올랐다.
아카데미와 아주 똑같이 설계된 것을 보아, 확실히 영향을 많이 받은 모양.
조잘조잘 떠들며 들어온 다른 마법사들이 마누스를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승강기 안은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찼다.
눈빛으로 의견을 교환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마누스 아니야?'
'맞아. 여긴 왜 왔대?'
이런 눈빛들이었다.
정작 마누스 본인은 아무런 관심조차 두지 않았지만.
30층.
마누스와 빅스가 내릴 층계였다.
"여깁니다. 공자님."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각종 서적과 지도, 칠판이 늘어져 있는 곳이었다.
작전을 지휘하는 곳 같았는데, 인비데아와 어느 한 마법사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빅스가 똑똑, 열려 있는 문을 두들겼다.
"실례합니다. 마누스 님을 모셔 왔습니다."
"부른 적은 없는데-."
인비데아가 말을 멈추고, 마누스를 바라봤다.
함께 논의하던 이 역시 시선을 마주쳤다.
마누스는 빅스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는 앞으로 나섰다.
"작전을 같이해야 하는 사람 정도는 봐 둬야지."
"이건... 의외로군요. 반갑습니다. 공자님. 에이번이라고 합니다."
그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마법사였다.
40대?
50대?
이제 탱글탱글한 피부와 작별한 것을 보아, 중년으로 접어들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그대에게 존칭을 사용해야 하는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엄연히 공자님의 신분이 더 높으니까요."
"그럼 그러지."
인비데아는 다소 놀란 눈으로 마누스를 바라봤다.
그건 빅스 역시 마찬가지.
아직 마누스의 인식이 바뀌려면 더 노력해야 하는 모양.
"아카데미에서 많이 배웠나 보네. 좋은 일이야. 이리 와."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공자님, 공녀님."
인비데아는 빅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종종걸음으로 물러나는 그를 뒤로하고, 작전의 핵심이 되는 세 사람이 뭉쳤다.
인비데아는 움브라들이 가져온 정보를 전달하는 중이었다.
그녀 깔끔하게 정리한 자료를 마누스에게 넘겨주었다.
그곳엔 움브라들의 정보로 작성한 약도와 지도, 유적의 정보가 적혀 있었다.
간단하게 넘기니, 그 내용들이 머릿속에 쏙쏙 들어와 박혔다.
"입구 주변만 조사했군. 주변에 위협은 없는 건가?"
"맞아. 움브라들이 안전은 확보해 두었어. 내일 우리가 해야 할 건, 유적을 탐사하고 그 안에 있는 사교도를 박멸하는 거야."
"유적은 이것 하나뿐인가?"
인비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움브라의 눈은 피해 갈 수 없다.
거기다 카이사르 가문 직속 마법사단이 철저하게 조사했다.
공을 들인 만큼 성과는 충분하다고 판단한 인비데아가 일을 시작한 것.
"우리는 유적에만 집중하면 돼. 알겠지?"
"그렇다면 더 이야기할 건 없겠군. 내일 언제 모이는 거지?"
"동이 트는 시각에 정문 앞으로."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왔을 때와 같이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그 종잡을 수 없는 행동에, 인비데아는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제멋대로다.
그리고 거침없다.
오히려 그 모습이 그녀의 가슴에서 묘한 이끌림을 만들어 냈다.
일종의 확신이랄까.
"그 옛날, 가주님의 모습이 보이는군요."
"그런가? 내 눈엔 아직도 철없이 막 행동하는 동생으로 보인다만."
"허허, 동생을 많이 아끼시나 봅니다."
인비데아는 피식, 코웃음을 쳤다.
동생을 아낀다?
그저 가문의 중요한 전력이 될지도 모르는 인재를 아끼는 것뿐이다.
마누스는 확실히 믿음직한 카드로 성장하고 있었다.
적절하게 이용한다면, 강력한 세력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매개체가 될 것이다.
그녀는 큰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와는 다른 길을 걸어 나갈 것이다.'
모두가 강해져, 그 어떤 세력에게도 위협받지 않는 곳.
가문 하나가 능히 천하를 오시할 수 있을까?
그 오래된 물음에, 인비데아는 결과로 답하려 했다.
마침 좋은 제물이 나타났다.
좋은 조력자 역시 나타났다.
티란니스는 홀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지만, 천만에.
"무릇, 한 손으로는 천하를 움켜쥘 수 없는 법이지. 본인은 다른 손을 만드는 거고."
"그리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이만 물러나지요."
에이번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몸을 돌렸다.
인비데아는 그가 떠나간 후에도 한참을 작전실에 남아 있었다.
지나가는 마법사들이 절로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철저하게 계획하는 모습.
'이번 일로 오라버니도 생각을 고쳐먹겠지.'
보여 줄 것이다.
자신의 선택과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렇게, 달이 졌다.
해가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아침.
"다들 모였나?"
은은한 긴장감이 흘렀다.
힘 있고 굵은, 여전사의 그것과 비슷한 인비데아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동이 텄다.
작전 시작이었다.
제58화
- 개미지옥 속 달콤함
* * *
동이 튼 카이사르 저택은, 뛰어난 영상 매체에서나 볼 법한 정경을 연출했다.
뾰족뾰족 솟은 첨탑, 그 위에 뿌려지는 황금빛 햇살.
마누스는 고개를 돌려, 동이 트는 모습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전생에는 차 안에서 자주 보던 풍경이었는데.'
운전 좀 해 본 사람은 선글라스도, 틴팅도 되어 있지 않은 차에 비치는 황금빛 햇살이 얼마나 짜증 나는지 알 거다.
꾸역꾸역, 그 어마어마한 인파와 도로 위의 무법자들을 뚫고 출근할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
상쾌한 바람마저 불어, 마누스의 정신을 맑게 해 주었다.
"...이번 원정에는 많은 것이 걸려 있지 않다. 하지만, 잡초는 빨리 뽑을수록 좋지."
그녀의 연설이 귀에 들어왔다.
많은 것이 걸려 있지 않다는 말.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는 사람이 딱 두 명 있었다.
마누스 자신과, 마법사단을 이끄는 에이번.
카이사르 안에서, 모든 것은 평가 대상이다.
인비데아는 아주 능숙하게 좌중을 휘어잡았다.
연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갔다.
[목적]
[동기부여]
[사기 증진]
'확실히 아카데미 밖이 더 위험한 세계라니까.'
마누스는 옆에서 열심히 떠들어 대는 누이를 보며 감탄했다.
언변은 자신 없었는데, 옆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잠들어 있던 대원들의 얼굴에 생기가 피어났다.
전투 의지가 가득 들어 있는 눈매는 인비데아의 연설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보여 주었다.
"-출발한다."
그녀가 몸을 돌렸다.
찰랑거리는 흑발이 금빛으로 물결쳤다.
가볍게 말에 올라탄 그녀가 행군을 시작했다.
마누스 역시 말 머리를 돌렸다.
'확실히 천재는 천잰가.'
현실에서 승마는 꽤 고급 스포츠였다.
그저 쳇바퀴 굴러가듯 현실을 살아갔던 남자에겐 상당히 머나먼 일이었지.
그래, 가끔 옆 나라에 서식하는 하얀 말이 기행을 부린다는 얘기 정도는 들었다.
요는 말 한 번 타 보지 않았던 자신이, 너무나도 능숙하게 승마를 하고 있다는 것.
마누스가 본래부터 익혀 왔던 탓인지, 아니면 이것도 시스템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마누스는 그저 받아들이기로 했다.
"승마 실력은 확실히 나보다 좋구나."
"뭘."
"아덴이라고 했나? 그렇게 따라와도 괜찮은지 물어봤으면 좋겠군."
그녀는 흘끔,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밤새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아덴은 아침 일찍 마누스를 찾아와 말했다.
<제가 공자님을 호위하겠습니다.>
딱히 무슨 일이 생기겠냐마는,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몰라 기름과 성수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덴이 있으면 적어도 죽진 않겠지.
"상관없을 거다. 이게 일이었던 자니까."
"저런 호위는 어디서 구했는지...."
누이의 푸념을 들으며, 그들은 사막으로 향했다.
황금빛으로 시작된 하루는 청명했고, 하늘은 곧 푸르게 변했다.
행군하기에도, 전투를 치르기에도 적합한 날씨였다.
* * *
날씨가 좋다고 생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누스는 사막이 왜 사막이라 불리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마나를 아끼기 위해 잠시 맨몸으로 버텨 봤는데,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말에도 함께 마법을 걸어 주거라. 사막은 말에게 정말 힘드니까. 필요한 마법은-."
인비데아의 조언에 맞춰, 각종 마법을 쏟아 내야만 했다.
딛는 바닥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마법.
주변 온도를 유지해 주는 마법.
실제로 게임에서 쓰이는 마법이기도 했다.
어떻게 쓰이냐고?
모든 것은 탑이 말해 줄 거다.
"다 왔군."
"이건... 마치 개미지옥 같군요."
함께 말을 끌고 온 에이번이 모래 구덩이 아래 보이는 유적을 바라보며 말했다.
감탄스러울 정도로 신비스러운 광경이었다.
노란 모래로 파묻힌 검은 유적지.
생긴 것은 마치 고대의 성을 떠올리게 했다.
기이한 마나가 요동치는 것이, 안쪽에서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인비데아도, 애이번도 느꼈는지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상태였다.
"카이사르의 영토에서 뻔뻔하기도 하지."
"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에이번도 4클래스를 무리 없이 난사할 수 있는 수준.
기사단원 역시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이들만 모았다.
카이사르란 그런 곳이었으니까.
인비데아는 어떤가.
5클래스 마법을 난사하는 그녀는, 티란니스에 이어 최연소 마도사에 이름을 올린 이다.
아카데미에서야 최강자였지만, 세상으로 나오자마자 들러리가 된 기분.
그래도 상관없었다.
"탐지 마법을 펼쳐라."
"-예!"
인비데아를 비롯해 모든 마법사들이 마나를 일으켰다.
합동 마법.
거대한 마법진이 허공에 생겨났다.
마누스도 손을 뻗어, 마법 발동에 일조했다.
'무슨 마나가-.'
'뭐지 이건?'
또래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압도적인 마나양.
빠르게 차오르는 마법진 속 마나에, 모두의 시선이 마누스에게로 향했다.
아카데미 밖은 괴물들 소굴이었지만, 마누스가 괴물이 아닌 건 아니었다.
당당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푸른 눈동자가 마법진을 응시했다.
인비데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누스를 바라봤다.
느껴지는 마나가 많다고는 생각했는데, 이 정도였나?
"완성해야지."
"-아 그래. 그래야지."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려, 마법의 시동어를 외쳤다.
합동 마법은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행하는 마법.
주 시전자가 시동어를 외치면, 그에 따라 모든 이들이 마나를 조작해야 했다.
"콰에로!"
피잉-.
거대한 파장이 주변을 훑었다.
끝도 없이 퍼져 나가는 파장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색적했다.
사막에 숨어 있는 땅벌레, 웜, 바위 밑에 붙어 있는 자그마한 생명체까지.
그것은 허공에 뜬 지도나 다름없었다.
모든 생명체의 정보를 마법진에 투영해 주고 있었으니.
주변 안전을 확인한 인비데아는 탐지 마법에도 걸리지 않는 유적지를 바라봤다.
"모레로 쌓여 있지만, 움브라가 확인한 바로는 안쪽은 외부와 단절된 듯하다. 각별히 주의하도록."
"알겠습니다. 돌입하겠습니다."
기사단원들이 모래를 타고 구덩이 안쪽으로 내려갔다.
그 뒤를 마법사단이, 마지막으로 인비데아와 마누스가 따라 내려갔다.
텁텁한 모래가 얼굴을 때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편의와 청결은 사치인 것을 알기에.
유적 내부는 그야말로 고성.
밖이 사막이라는 걸 완전히 부정하듯, 깔끔하고 고풍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1층엔 움브라들의 말대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군. 기사단. 아래쪽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아라."
"알겠습니다. 세 명씩 조를 나눈다. 움직여라."
"마법사단이 보조하라."
인비데아는 척척 명령을 내리고 인원을 분배했다.
어딜 가서든 제 할 일을 똑 부러지게 할 인물들이었다.
인원을 나눈다고 문제 될 일은 없겠지.
"난 단독으로 움직이지."
"그걸 내가 허락할 거라 생각해?"
"딱히 허락을 구한 건 아니야. 내 호위는 제법 강력하거든."
인비데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휘권자는 바로 그녀 자신.
단독 행동은 심각한 결격사유였다.
"사사롭게는 누이지만, 여기선 네 지휘권자야. 명령을 어기면 불이익은 온전히 받는단다?"
"그렇다면 지휘권자가 함께 움직이면 되겠군."
어느새 그는 마법을 발동시킨 후였다.
희미하게 빛나는 길이 길을 안내해 주었다.
사기적인 스킬이자, 남캐를 꼭 파티에 넣어야 하는 이유.
[둑스]
피어슨만이 가지고 있는 희대의 사기 마법이 그의 손에서 퍼져 나갔다.
인비데아는 여기저기를 수색하는 기사, 마법사들을 바라보며 남은 이가 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동생의 능력을 볼 기회이기도 하지.
"-좋아. 다만 명령은 내가 내려."
"마음대로."
마누스는 빛을 따라 걸었다.
그의 누이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머릿속으로 계속 의문을 그려 냈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
'아버지의 눈을 속일 순 없었을 텐데.'
아니면, 특별한 재능이 있던 걸까?
그것을 이용해 능력을 숨겼다면?
만약 지금 하는 행동마저 자신의 속내를 감추려는 것이라면?
'아무튼,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겠어.'
솔직히 놀라웠다.
그만한 마나에, 그만한 마법 실력이라니.
어쩌면 그는....
"여기 있군."
"-응?"
"내려가는 입구.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는데."
"그, 그러네. 그렇다면 다 같이 내려가야 할 거야 대기해."
이건 또 뭐야.
인비데아는 혼란 위에 또 다른 혼란이 턱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평소, 덤덤한 말투를 잃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오늘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인 반응을 보였다.
수색을 통해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아닌, 단번에 정답을 찾아 버린다.
이게 말로는 쉬울지 몰라도, 실전에선 그렇지 않았다.
시행착오, 변수, 그 밖의 다양한 상황들이 얽히고설킨 상황이 많이 발생하니까.
"후우... 정말 모르겠네."
인비데아는 생각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모든 의문은 시간을 들여 풀어도 늦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녀는 이런 잔재주를 아무리 퍼부어도 굴하지 않을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공녀의 신호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이들이 모였다.
계단은 기이한 마나 방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슬쩍 손을 가져다 대니 강하게 밀어내는 반발력이 느껴졌다.
"이걸 해제해야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면 된다. 에이번, 이리로."
두 사람이 열심히 머리를 맞대고 있는 사이, 마누스는 메시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직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이 세계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메시지.
달콤한 과실을 바탕으로 유혹하는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서브 퀘스트 : 전조]
[마나 방벽이 해제되기 전에 진입하면 홀로 퀘스트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보상이 낮아지지만, 생존 확률이 증가합니다.]
[다 같이 입장할 시, 보상은 증가하지만 생존 확률이 낮아집니다.]
슬쩍 손을 넣어 보니, 마누스 본인은 아무런 제약 없이 통과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개를 돌려 진행 상황을 살폈다.
시간이 조금 걸리는 모양인데-.
텍스트 내용을 해석하자면, 지금 안에선 뭔가 소환하거나 강화를 하고 있을 테지.
그걸 홀로 처리할 것이냐, 아니면 다 같이 들어가서 레이드를 할 것이냐에 대한 문제.
마누스는 곰곰이 생각했다.
보상은 크면 클수록 좋다.
어차피 들어가서 홀로 처리하지 못할 문제라면, 다 같이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기다리는 것이 낫겠군.'
고인물은 타협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현실이라고 해도, 지금 이만한 전력을 이길 수 있는 집단은 그리 많지 않다.
마누스는 굳게 믿었다.
'아직 초반이니, 변수는 없을 거다.'
초반부치고는 엄청난 적들과 싸운 기분이 들긴 했지만, 별일이야 있겠는가.
마누스는 가만히 결계가 해제되길 기다렸다.
그는 몰랐다.
플래그는, 생각만으로도 일어날 수 있음을.
-말이 씨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생각만으로도 현실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제59화
- 믿어 본다
* * *
데몬.
그 위에 그들을 다스리는 데모니움이 있다.
뜻풀이하자면, 악마나 데몬이나 똑같은 말이지만 이 세계관에서는 둘의 뜻은 다르다.
죽음의 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정보 외엔 그 어느 것 하나 밝혀지지 않았던 데몬과 달리, 악마는 꽤 자세한 설정들이 늘어져 있었다.
'마계의 주민이라고 했었나.'
여느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클리셰처럼, 흔한 설정.
마계 중간계, 그리고 성계로 나뉜 세계에서 살아가는 종족 중 하나가 바로 악마다.
그 옛날, 솔로몬이라는 지고한 왕이 수족으로 부렸다던 72개의 악마 가문.
막중한 임무를 끝내고, 솔로몬 왕은 72개의 가문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을 만들어 주었다.
그곳이 바로 지금에 와서, 마계라고 불리는 곳이 되었다지.
진부하지만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흥미를 유발하는 설정이었다.
"거의 다 됐습니다."
"안쪽에서 뭔가 일어나고 있긴 한가 봅니다. 이렇게 복잡한 술식의 결계라니."
"저어- 인비데아 공녀님."
기사단의 분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팔짱을 끼고 상황을 지켜보던 인비데아는 고개를 돌려, 질문한 이를 바라봤다.
실력은 뛰어났지만, 평소 조심성이 많기로 유명한 분대장이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선 대담함을 길러야 한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 그가 불안한 듯, 눈동자를 잘게 떨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지원을 부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흠-."
인비데아는 더 말해 보라는 듯, 눈빛으로 물었다.
어리고 총명한, 그리고 조심스러운 분대장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의 조심성은 단순히 소심한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만한 유적을 점거했는데도 경비 하나 세워 두지 않았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조사해 본바, 교단은 북부 지역에서 세를 불리고 있답니다."
"그래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에 하나, 총력을 다해 시간을 끌고 있는 거라면...."
그의 생각은 타당했다.
정확한 이유를 가지고 의견을 전달하는 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고 말고는 온전히 지휘관의 재량.
인비데아는 분대장의 기분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완곡하게 거절하려 했다.
마누스의 입이 열리기 전까진.
"이렇게 철저하게 방비를 했으면, 더욱 빨리 뚫고 들어가야지."
"네?"
"지원군이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하여 오는가? 걸어서 오는 데만 한나절이다."
"...."
분대장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의견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마누스는 진실을 알고 있었으니, 옳고 그름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었을 뿐.
신중한 건 좋지만, 더 확실하고 정확한 길이 있음에도 머뭇거리는 건 머저리다.
"에이번."
"예, 공자님."
"해제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8분 하고도 32초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만."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이면 되겠지.
8분이라면, 홀로 버틸 수 있을 거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허나 그의 가설은 아마 맞을 거다.
이 게임을 수도 없이 플레이했던, 이상향이나 다름없던 이 세계의 사건 법칙은 이미 모두 꿰고 있었으니.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인비데아의 뾰족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무슨 생각일까? 동생?"
"먼저 가서 술수를 막고 있겠다. 꼭 구하러 오라고."
옅은 웃음과 함께 계단 아래쪽으로 향하는 마누스.
한창 작업에 열중하고 있던 이들이 어어? 하는 사이, 마누스의 몸은 결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너어-!"
인비데아의 평정심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콰앙-!
그녀가 결계를 강하게 내려쳤음에도 둘 사이를 막고 있는 마법의 장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공녀답지 않음은 중요치 않았다.
"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냐!"
"나도 몰라. 슬쩍 만져 봤는데, 되더라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성을 내는 인비데아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저 어깨를 으쓱이고 덤덤하게 말을 내뱉는 것뿐.
쑤욱-.
그가 내민 손이 결계를 통과해 인비데아의 어깨에 닿았다.
"빨리 오기나 해."
"마누스! 멈춰라! 야-!"
뒤를 돌아, 손을 휘적이며 내려간 마누스.
인비데아는 체통도 잊은 채, 그를 계속해서 불러 세우려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동생은 마치 제물이 되는 아무개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저게 진짜, 혼자 멋있는 척은-!"
"공녀님, 일단 진정하시지요."
"...."
그녀의 동공이 작아지고,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평소 냉정하고 이지적인 이미지로 굳은 인비데아 공녀가 아닌가.
그 이미지는 그녀 자신이 오랜 기간 빚어낸 것이다.
"큼큼-! 빠, 빨리 해제하도록. 저 멍청한 동생을 구하러 가야 하니까."
"허허, 알겠습니다."
에이번은 주름을 깊게 만드는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일은 평생 간직해야겠지.
저 공녀님의 차가운 눈초리를 평생 받아 내고 싶지 않다면.
작업은 이어졌고, 초조함이 더해졌다.
둘째 공자가 사지로 들어갔다.
더불어 '꼭 구하러 와라.'라고도 말했다.
그들의 머리가 바삐 돌아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허억-."
미약한 숨소리가 들렸다.
공녀는 그 소리를 감지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곳엔 무릎을 꿇고, 검은 복장을 한 여인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다.
모두가 그녀를 발견하고 경계심을 끌어 올리려는 것을 손을 들어 막는다.
질끈 감고 있는 두 눈.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마나.
"아덴이라고 했나? 무슨 일이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분한 듯, 단어 하나하나를 씹어뱉듯 말했다.
마스터다.
5클래스, 그 너머 6클래스를 바라보고 있는 마도사와 비슷한 경지의 마스터다.
그런 그녀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키겠다고 했는데-."
"진정하라. 그대."
"...추태를 부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그대의 충성심을 얻은 내 동생이 부러워지는군. 저 결계는 왜 내 동생만 들여보내 주었는지...."
인비데아의 한숨이 깊어졌다.
검은 암살자, 아덴이 몸을 일으켰다.
복면으로 가리고 있는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제 주군과 떨어진 그 비통함과 분노가 눈에서 보였다.
인비데아는 아덴의 눈을 보고 두 가지 생각에 휩싸였다.
부러움.
저런 심복을 얻은 것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또 한 가지는-.
* * *
어둠.
지독히도 싫어했지만, 왜인지 친숙했던 색.
마누스는 괴수의 아가리처럼 어둡고 깊은 곳을 헤쳐 나갔다.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처럼 꼬인 나선형의 계단.
그 끝에는 희미한 보라색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 세계관에서, 보라색은 불길함과 사특함을 암시한다.
'디레 교단. 이쯤에서 나왔던 악마는... 나도 지식이 없는데.'
디레 교단과 엮이는 건 본래 나그네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다.
완벽한 오리지널 스토리이기 때문에, 오로지 마누스 본인의 판단과 역량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
하지만 왜일까.
두려움보단 보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렘이 더 컸다.
[כֹּה-מָצָא]
알 수 없는 언어였다.
분명한 건, 의식이 거의 완성되었다는 것.
마누스는 걸음을 빨리해, 계단의 끝에서부터 펼쳐진 공간으로 들어섰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지럽게 흩뿌려진 마법진의 원료는 피.
그것도 인간들의 피였다.
"어째, 얘네들은 하는 짓이 매일 똑같은지."
게임사도 게임사다.
참신한 거 없나?
맨날 이렇게 징그러운 걸 보는 것도 이젠 질리던 참이다.
하지만, 때로는 익숙함이야말로 인간의 오감을 자극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이 그로테스크함.
익숙한 사체의 질감과 풍경.
실제로, 마누스는 그것으로부터 역겹다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으음-? 역시 손님이 오셨군요. 아아, 당신은-."
"너."
마누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건, 감히 보금자리를 침범한 이들에게 짓는 맹수의 웃음이었다.
마치 사이비 종교의 목회자처럼, 두 팔을 벌리는 익숙한 실루엣.
어딜 가 있나 했더니, 이런 곳에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당신을 다시 볼 수 있다니, 정말 행복합니다."
마누스는 그의 입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동시에, 그의 입도 열렸다.
두 사람이, 같은 말을 내뱉은 건 기적이나 우연이 아니었다.
"당신을 여기서 죽일 수 있으니까요."
"당신을 여기서 죽일 수 있으니까요."
그 대사는 마누스에게 희열을, 남자에겐 당혹감을 안겨 주었다.
마누스는 짙은 웃음을 그리며 손에서 마나를 피워 냈다.
빠지직-.
사람은, 생각보다 안 좋은 기억을 오랫동안 안고 간다.
"왜-, 당황스럽나? 나그네. 아니지."
"...."
구우우우우-.
공간 전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 마누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의식은 그가 마지막에 들었던 괴어로 인해 끝났다는 걸.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다.
더불어, 카이사르에 대한 공포감을 확실히 새겨 넣을 생각이었다.
나는 네 머리 꼭대기에 있다.
"플라투스 가스펠. 참으로 가증스러운 이름이로군."
"어, 어어어어-."
"사자 굴에 들어왔으면, 당연히 잡아먹히는 것도 생각했겠지."
콰르르르릉-!
새하얀 전격이 나그네, 플라투스 가스펠에게 날아갔다.
투명한 방벽에 비껴가는 전격.
간단한 마법에 과민한 반응이었다.
수준이 맞지 않는, 무려 3클래스의 방어 마법을 펼친 나그네.
마누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 자비롭게 마지막 기회를 주지. 넌 아직 이용 가치가 있으니까."
"하... 하하!"
플라투스는 분노를 담아 웃었다.
입가가 비틀리고, 눈에 힘이 들어가 있는 모습이 마누스의 심장을 간질였다.
누군가를 약 올리는 것이 이토록 재밌었던가.
자신도 몰랐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것 같아, 입가가 절로 올라갔다.
쿠구구구구-.
유적이 요동치고, 나그네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저자는 케일의 손에 죽어야 한다.'
지금 죽이고 싶었으나, 동료들의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놈이다.
아직 영글지 않은 제물이었으니, 방생하기로 했다.
"아니면 여기서 죽여 주지."
콰르르르륵-!
인사치레로 날렸던 마법과는 격이 다른 전격.
플라투스는 이를 악물고 공간을 열어젖혔다.
그의 특기인 전이 마법.
"다음에 다시 보지요. 지금 절 놓아준 걸 후회하게 될 겁니다. 후후-."
마누스는 이미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상태였다.
그가 바라본 것은 플라투스 뒤에 펼쳐진 마법진.
다른 곳으로 한 번에 이동시켜 주는 전이 마법진을 분석하기 시작한 것.
'저건 고유 능력인가.'
누군가의 패시브처럼, 지식으로 습득할 수 없는 능력인 모양.
여유가 될 때 배운다면,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겠지.
공격적인 스킬만 익힐 필요는 없을 거다.
"그리고...."
콰르르르-!
재단이 무너졌다.
의식이 완성되었고, 그곳에 있던 모든 부정한 것이 사라졌다.
피범벅이었던 자리는 누가 청소라도 해 둔 것처럼 깔끔했다.
"왔군."
[으어어어어어어-!]
거대한 새의 얼굴.
오우거보다 훨씬 커다란 몸집.
검은 마나가 주변을 잠식했다.
'오리아스인가.'
탑에 있는 웬만한 데몬보다 강력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누스는 품에서 기름과 성수를 꺼냈다.
그는 당당했다.
그 어떤 존재도, 카이사르를 막을 순 없었다.
제60화
- 거인 사냥꾼
* * *
악마.
전설의 마법서, 레메게톤에 기록된 72개의 가문으로 구성된 마계의 주민들.
평화롭게 살고 있는 이들이지만, 그들 깊은 곳엔, 솔로몬에 대한 증오가 남아 있다.
인간.
중간계에 대한 증오는 선조로부터 뿌리내린 근원이었다.
[인가아아아안-!]
"그나마 다행인가."
서열 59위.
이집트의 신, 오시리스와 이름이 비슷한 악마 : 오리아스.
능력은 망자를 일으키는 것과 탁월한 육탄 공격.
'분명, 훗날 성전 이벤트에서 나오는 녀석이었지.'
그것도 잡몹으로.
오히려 좋았다.
72개의 가문을 한꺼번에 때려잡는 것보다 차근차근 무너뜨리는 쪽이 편하니.
[우어어어어어어-!]
신화 속 오시리스와 달리, 게임 속 오리아스는 그저 무식한 새대가리에 지나지 않았다.
쿠웅-!
이곳에는 망자가 없다.
그러니, 본체만 주의하면 될 것이다.
"7분."
420초라는, 끔찍이도 긴 시간.
마누스는 감각을 날카롭게 세우며 마나를 움직였다.
쿠웅-!
거대한 발이 바닥을 부수며 돌진했다.
어정쩡한 방어 마법으로 적의 위력을 시험하는 것보다, 두 발로 뛰는 것이 훨씬 낫다.
지금 그의 목표는 버티는 것이지 녀석을 죽이는 것이 아니었으니.
오리아스가 주먹을 내지르는 것.
굉음이 터지며 시야가 텁텁하게 막히는 것.
이명이 들리는 것은 동시라고 느껴질 만큼 시간 차가 없었다.
[폴게트라]
콰지지직-!
악마의 팔을 타고 전격이 흘렀다.
오리아스는 특유의 강인한 육체를 믿고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으나, 이는 마법사를 너무 얕본 것이다.
[우어어어어-!]
잘게 경련하는 악마 위로, 거대한 물리력이 쏟아졌다.
콰아아앙-!
2클래스지만, 꽤 많은 양의 마나를 때려 박아 후려치는 물리 마법.
[페리오]
오금을 얻어맞은 악마의 자세가 일순간 무너졌다.
틈을 놓칠 마누스가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이라면, 제법 긴 마법도 영창이 가능하다.
두 개의 마법진이 동시에 만들어졌다.
더블 캐스팅.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는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집중력은, 기예를 낳았다.
[라비오] - [알투스]
버프에 버프를 더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유저들의 호기심은 곧 찬란한 결과로 이어졌다.
마누스도 마찬가지.
[더블 스프레드]
[콘솔리다티오]
굳건하게 지은 성벽은 능히 압도적인 물리력을 막아 낸다.
콰아앙-!
반격으로 흩뿌린 자갈과 돌무더기가 마누스의 전신을 때렸다.
하지만 그는 눈을 가려 시야를 보호하고, 술식을 완성한다.
[콘솔리다티오] 스킬의 또 한 가지 능력.
캐스팅 속도 두 배.
거기다, 위력도 두 배.
'딱 한 번뿐이지만-.'
게임으로 치자면 총 세 턴 동안 사전 준비를 해야 하는, 효율 나쁜 스킬.
버프, 적의 공격을 막아낸 후, 공격.
알투스 외에 다른 방법으로 버프를 거는 것은, 위력을 증폭하는 대신 턴을 잡아먹게 만들었다.
허나, 이곳은 현실이고, 카이사르의 압도적인 재능은 쓸데없는 시간을 소비하게 두지 않았다.
마누스의 머릿속에 적의 정보가 떠올랐다.
오리아스.
약점은 빛 속성.
'마침, 가장 위력적인 마법도 신성 마법이지.'
샤라라락-.
지식이 마구 담겨 있는 책자가 펼쳐진다.
머릿속에서 빛나는 레시피 하나를 꺼내, 그대로 현실에 구현한다.
[우어어아아아아-!]
강력한 일격을 날리기 위해,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그렸다.
계속 견제하며 피하는 그림.
당당히 맞서 싸워, 녀석을 꺾는 그림.
그 밖에도 다양한 가능성들이 마누스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간섭이 시작됩니다.]
거슬리는 메시지를 치우고, 최적의 시나리오를 채택해 적에게 맞섰다.
회복된 마나를 다시 마법진에 쑤셔 넣었다.
쿠웅-!
자세를 완전히 회복한 악마가 성벽보다 훨씬 거대한 공성추로 그를 짓이기려 했다.
[파룸] - [담노]
[더블 스프레드]
울컥-.
비릿한 맛이 목구멍으로부터 올라왔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마나를 가져다 써서 그런지, 날뛰는 마나가 내부를 진탕으로 만들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만한 위력이 아니면, 저 고위 악마는 꿈쩍도 하지 않을 테니까.
적어도 불편하게는 만들어 놔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저 악마의 피지컬은 무식하고 대단했으니.
'뼈를 취하고, 살을 내준다.'
그는 한계에 도전했다.
아무리 하늘에 닿을 재능이라 하여도, 개화하는 시기는 저마다 다르다.
그 시기를 앞당기는 것은, 웅크리고 있을 잠재력을 폭발시킬 트리거.
마누스는, 무겁고도 위대한 재능을 짊어지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시간이 느려지고, 적의 공격이 선명히 보였다.
무수히 나뉜 찰나에, 서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인간과 악마.
[우어어어-!]
콰아아앙-!
아찔한 고통과 정신이 끊어질 듯, 몰려오는 격통에 이를 악물었다.
마누스는 어마어마한 물리력이 담긴 주먹에 맞아 나가떨어졌다.
그 여파는 공간의 끝, 벽이 갈라지고 부서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끄으-."
그 강인하던 마누스도 고통에 신음할 만큼, 오리아스는 강하고 빨랐다.
하지만-, 마지막 일격을 버텨낼 방패를 완성함으로, 승리의 조각들이 모두 맞춰졌다.
[이지스]
4클래스의 트리플 캐스팅.
기적 같은 일을 홀로 해냈다.
누군가 보았다면, 실로 마법의 신이 강림했노라고 말했을 기적.
마누스는 온몸이 진탕이 되는 순간에도, 끈을 놓지 않았다.
완성됐다.
4클래스의 마법 두 개로 이뤄진, 회심의 일격이.
[아아-]
악마와 대비되는 천사가 어두운 공간에 강림했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마누스는 마지막 선분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아돌레오]
그것은 위대한 마법사의 탄생을 알리는 제헌이었다.
새하얗게 내려앉은 천사가 빛의 방패를 내세운다.
악마는 다시 한번, 그 경이로운 물리력을 휘둘렀다.
빛과 어둠의 대결처럼 묘사되는 격돌.
[우어어어어-!]
검은 피가 비산했다.
역겨운 감촉이 마누스의 전신을 덮쳤다.
후욱-.
'하이 레스티오'로 인해, 기절할 순간을 간신히 넘겼다.
"후우우-."
처참했다.
4클래스 마법은 실내에서 쓰기엔 부적합한 것들이 많았으니까.
더군다나 각종 패시브에, 카덴차에, 그 카덴차로 만들어 낸 버프까지 걸고 쓴 마법이었다.
쿠구구구구구-.
"...실수했군."
유적의 근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악마, 오리아스는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어 울부짖는 중이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 죽을 것 같았다.
마누스는 잘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를 질질 끌어, 오리아스와 멀어졌다.
서로 죽지 않았지만, 서로 공격도 할 수 없는 상황.
거기다 유적지까지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위쪽에 변화는 있겠지.'
충돌의 여파로 건물이 흔들리며 결계도 없어진 모양.
후욱-.
그는 격통을 삼키며 위를 바라봤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아주 많이.
* * *
무너지려 하는 유적.
격렬한 마나의 여파.
간헐적으로 들리는 괴성.
모든 것은 제아무리 침착한 인비데아라고 해도, 급한 발걸음을 옮기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대체... 내가 없는 동안 널 무얼 하고 있었던 거야.'
지상까지 느껴지는 강력한 마나의 파동과 격렬한 전투의 여파.
인비데아는 입술을 꾹 깨물고 부스트 계열 마법까지 쓰며 지하로 내려갔다.
꼭 구하러 와 달라는 말.
그 말이 왜 그렇게 가슴을 깊게 누르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래도 형제구나.
그래도 가족이구나.
인비데아는 그걸 느끼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누스-!"
"공자님!"
"악마입니다!"
하반신이 날아가, 천천히 마누스 쪽으로 기어가는 거인.
인비데아는 그 모습을 보고 치솟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감히-.
감히-.
"감히이이이-!"
콰르르르르르-!
분노에 찬 마나가 쏟아져 나왔다.
마누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마나의 격류.
감정에 동화되어 거칠게 날뛰는 마나가 순식간에 마법진을 그렸다.
[아르도르 - 쥬덱스]
태양의 열을 길게 뽑아 만든 것처럼 강렬하고 뜨거운 불의 광선이 악마의 몸을 지졌다.
누군가의 어렸을 때, 혹은 다소 시간이 많이 남았던 시절.
돋보기로 개미를 지지는 것처럼 잔인하고 끔찍한 마법이었다.
[우어어어어-! 우어어어!]
괴성을 내뱉으며 발작하는 악마.
인비데아는 그마저도 듣기 싫어, 목을 지져 버렸다.
이내, 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끔찍하고 잔인한 광경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악마에게 동정심을 가지지 않았다.
"공자님.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그래."
사실 죽을 것 같았다.
트리플 캐스팅이라는 벽.
4클래스 마법을 연달아 펼친 것.
카이사르가 아니었다면.
보정을 받는 캐릭터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간 쌓아 왔던 내실이 아니었다면 분명 죽었을 터다.
"앞으로는-."
아덴이 한달음에 달려와, 마누스의 피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훑었다.
그녀의 눈에, 그렁그렁 맺힌 것은 분명 눈물방울이었다.
마누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암살자가 그렇게 울어도 되나."
"앞으로는 절대 절 두고 가지 마세요."
떨리는 눈동자 속에 간절함이 담겨 있는 걸 발견한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덴은 죄책감과 안도감, 두려움 등이 섞인 눈동자로 마누스를 바라봤다.
그사이, 쿵쿵거리며 발작하던 악마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모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번에도 둘째 도련님인 마누스가 대부분의 상황을 해결해 버린 것.
인비데아 역시 마누스에게 한달음에 달려와, 그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니?"
"그럭저럭."
"회복 마법 쓸 여력도 없어 보이네."
아주 조금씩 마나가 회복되고 있었지만, 욕조에 물 한 컵 넣는다고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마누스는 통증을 어루만지는 따스한 빛에 몸을 맡겼다.
격렬하게 분비되었던 아드레날린이 사그라들며 시달리던 격통이 가라앉았다.
"공녀님. 유적이 무너지려 하고 있습니다."
"기사단은 악마의 사체를 챙겨라.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간다."
"예-!"
수습은 빠르게 이뤄졌다.
마누스는 비척비척 일어나, 두 여인을 바라봤다.
하나같이 걱정을 듬뿍 담고 있었는데, 아덴은 그렇다 쳐도 인비데아까지 이런 눈빛을 보낼 줄은 몰랐다.
가문 내에 있는 형제자매들은 믿을 수 없고, 서로 견제하는 줄만 알았는데.
막상 실전을 겪으니 그것도 아닌 모양.
"다시는 무모한 짓 하지 마. 알겠어?"
"노력하지."
"그래도 이번엔... 네 공이 커."
당연한 말이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저 큰 악마가 약자들을 노리고 날뛰었을 테니.
무분별하게 날뛰는 걸 상대하는 것보다, 이렇게 가둬 놓고 패는 것이 훨씬 효율적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지.
그 결단력.
상황을 판단하는 지혜.
뛰어난 마법 실력까지.
'허허 이것 참, 가문에서 또 별이 등장했구나.'
세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에이번이 짙은 웃음을 지었다.
카이사르 마누스.
가문의 힘이 더욱 거대해지고 있다는 방증이자, 카이사르 가문의 핏줄을 진하게 이어받은 자의 등장.
카이사르라는 핏줄과 그 재능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했다.
몸이 떨리고 털이 쭈뼛쭈뼛 설 정도의 마나 폭풍.
사체가 되어 있는 악마는 웬만한 몬스터보다 강력한 잔재가 느껴졌다.
그런 악마를 홀로 맞서 싸워, 미숙하게나마 승리까지 거뒀다.
'아쉽구먼, 아쉬워.'
그 전투 장면을 직접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처절하면서도 숭고한 결투를 보았다면, 인생에 다시없을 경험을 눈에 담았을 것이다.
"카이사르의 앞날에 찬란한 영광이 있기를-."
에이번의 말대로, 그곳은 정말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저들이 앞으로 가문을 영광으로 이끌겠지.
더불어-.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던가. 잡것들이 설치는구나."
조금씩 돌아가는 세계의 삐걱거림이 느껴졌다.
신이시여, 당신은 무슨 계획으로 세계를 어지럽게 하나이까.
에이번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진심을 담아 물었다.
유적은 고요했고, 임무는 무사히 완수했다.
[서브 퀘스트 완료]
[보상이 지급됩니다.]
그리고 가장 기다리던 순간이 도래했다.
제61화
- 이제야 준비가 되었다
* * *
아주 좋은 날씨였다.
자신의 누이, 인비데아가 써 주는 회복 마법은 그야말로 최고의 효과를 지녔다.
마누스는 유적지를 나오는 길에 보상을 확인했다.
서브 퀘스트가 맞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난도였지만-.
그만큼 엄청난 보상을 받았다.
메인 보상보다 오히려 이쪽의 보상이 더 좋을 정도.
"음-."
"아직 몸이 안 좋습니까?"
"아니, 신경 쓰지 말도록."
이 현실이, 무미건조한 삶이 아니라는 걸 알려 주는 메시지 창.
가장 기대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경황이 없어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귀환하는 길에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서브 퀘스트 완료!]
[악마 처치 기여도 : 95%]
[59위 격파]
[히든 피스 : 나그네 달성]
주르륵 나열되는 행동의 결과.
마누스는 눈을 굴려 본론으로 넘어갔다.
이런 건 지면만 차지할 뿐, 도움 되는 일은 아니니까.
[보상 : 마석 결정 L 10개]
[스킬 슬롯 +1]
[히든 피스 발견 보상 : 10년 이하 스킬 쿠폰 1개]
[기여도 보상 : 10년 이하, 플레이어블 캐릭터 제외 스킬 쿠폰 1개]
'미쳤는데.'
당장 익힐 수 있는 스킬이 두 개.
10년 이하의 스킬이라지만, 그게 어딘가.
내실을 탄탄하게 다질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한 번에 스킬 세 개를 돌릴 수 있는 보상도 주어졌다.
만신창이가 되어 가면서까지 악마를 잡아낸 보람이 있지 않은가.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품이 두둑해지는 것이, 마석 결정이 들어온 모양.
문득, 왜 자신에게 이런 호의를 내려 주는지도 궁금해졌다.
이 이야기의 끝엔, 과연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
지금은 고민할 필요 없겠지.
'뭐가 됐든, 난 이 세계가 좋다.'
이룰 수 없던 것을 이뤄 내는 쾌감.
검과 마법, 방패로 이뤄진 세상.
낭만과 로망이었던 세계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것까지.
여기서 만든 인연들은 순수하고 굳건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세계이기에 가능하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좋았다.
추잡하고 더러운 현실보단, 아름답고 순수한 가상이 낫다.
물론, 이곳도 그렇게 깨끗한 세상은 아니겠지만.
"몸은 괜찮느냐."
"덕분에."
"큰 수확이다. 저렇게 생생한 악마의 사체라니. 좋은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겠어."
그래, 그게 있었지.
악마의 몸뚱이는 몬스터 이상으로 희귀하고 효율 좋은 재료였다.
특히 마법 무구를 만들 때 핵심 재료로 들어가기도 하지.
평화로운 시기에 악마의 사체를 구할 수 있었겠는가.
아마 긴 연구와 실험을 거친 후에 제작에 들어갈 것이다.
그쪽 분야는 마누스도 아는 바가 별로 없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내 몫도 있나?"
"그걸 말이라고-. 저런 네가 잡은 거잖아. 그러니 우선권도 네게 있지."
"다행이로군. 만들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마누스는 앞으로의 계획을 그려 봤다.
뛰어난 파티원, 정말 엄청난 재능을 가진 이들이 많지만 그 모든 것이 어그러질 때를 대비해야 한다.
이미 나비는 춤을 췄고, 거대한 태풍이 만들어지고 있을 터다.
'힘이 생겨서 나쁠 건 하나도 없지.'
예나 지금이나 힘 있고 권력 있는 자가 살아가기 편한 법.
마누스는 자그마한 공동체에서도 그걸 뼈저리게 느껴 왔다.
힘.
그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원초적으로 필요한 요소였다.
'검색.'
생각을 정리한 마누스는 곧바로 쿠폰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런 건 아끼면 똥 된다.
어차피 기회는 많았고, 강해질 시기도 충분하다.
그러니 주저 없이 사용해야지.
[원하시는 스킬을 검색해 주세요.]
'10년 이내, 파수꾼의 패시브.'
[검색 결과 : 257건]
[목록]
[탑의 의지 : 8년]
[모르스의 은총 : 9년]
....
주르륵 나열되는 스킬.
게임 밸런스상, 플레이어가 익힐 수 있는 스킬보다 훨씬 효율이 좋은 적들의 스킬.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는 플레이어와 다르게 정해진 패턴을 구사하는 AI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누군가는 생각했다.
<진짜 보스 스킬 하나만 있어도 솔플 쌉가능인데;;>
많은 이들이 동감한 내용이기도 하지.
마누스 본인도 고개를 끄덕였을 정도로 맞는 말이었다.
많은 이들이 모드를 통해, 또 치트를 통해 시도했던 것.
'그걸 지금 내가 할 수 있단 말이지.'
피식, 헛웃음이 흘러나올 정도로 부조리했다.
몬스터와 탑에 있는 데몬들에게 말이지.
마누스는 신중하게 스킬을 골랐다.
'이게 좋겠군.'
이번에 악마와 전투하며 느낀 것이 있다.
마나의 부족함, 그리고 유리 대포.
그걸 극복해야, 앞으로 홀로 전투하게 되었을 때 한계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철벽 태세 : 9년]
[나의 아이야. 지구라트를 지키거라. 그 어떤 적이 오더라도 너희들의 보금자리를 지키거라.]
[네 몸은 철벽과도 같으니, 그 어떤 침입자라도 네 몸을 뚫을 순 없으리라.]
[모든 대미지 -15%]
[모든 부정적인 효과 감소 20%]
[신체 강화]
역시 심플하지만, 강력한 스킬.
마누스는 바로 쿠폰을 사용했다.
꾸드득-.
몸이 변하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진다.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급격하게 운동을 한 것처럼 근육통이 내달렸다.
말이 흔들릴 때마다 온몸이 뻐근했지만, 티를 낼 수조차 없었다.
'집에 돌아가서 할 걸 그랬나.'
약간의 후회는 덤.
그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옆에서 말을 타고 가는 인비데아에게 회복 마법을 한 번 더 부탁한 것.
"그건 출발하기 전에 말했어야지."
그녀는 핀잔을 주긴 했지만, 순순히 회복 마법을 걸어 주었다.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다음 스킬을 찾았다.
마나가 부족하다면 언젠가는 익혀야지 했던 스킬.
'마나의 축복 검색.'
[검색 결과 : 1건]
[마나의 축복 : 6년]
'배운다.'
[마나의 축복]
[마나는 모든 것을 이루는 근간.]
[대륙을 이루는 것 역시 마나. 모든 축복은 곧 마나로부터 이뤄질 것이다.]
[존재여, 운명을 거스르지 말지어다.]
[최대 마나 +15%]
[마나 회복량 +10%]
[모든 스킬 마나 소비량 -10%]
쿠폰을 써서 바로 배우자, 충만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졌다.
최대 마나양이 늘어나고 자연으로부터 빨아들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하이 레스티오]로 늘어나는 회복량 역시 덩달아 증가했다.
순식간에 차오르는 기분은, 음식을 먹지 않아도 계속해서 배부른 느낌이었다.
만족스럽게 스킬을 배웠다.
내실이 더욱 탄탄해졌으며, 강력한 마법 포대로서의 기반을 마련했다.
'다음은 돌릴 스킬인데-.'
이건 뭘 돌려놔야 잘 돌렸다고 생각할까.
그의 고민이 깊어졌다.
마누스가 깊이 고민하는 사이, 아덴은 그를 면밀히 살폈다.
인비데아와 에이번, 다른 이들 역시 마누스의 얼굴을 흘끔흘끔 쳐다봤다.
무얼 생각하고 있을까.
천재 도련님은 어떤 고민에 잠겨 있을까.
"이게 좋겠군."
그가 중얼거리자 그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 * *
가문으로 돌아온 이들은 열렬한 환호 속에 귀환했다.
거대한 악마의 사체는 그 무엇보다 귀한 전리품이었고, 사막에 잠자고 있던 위협을 처리한 건 위대한 업적이었다.
만 하루도 안 되어서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가문의 일원.
라베스는 중요한 업무를 제쳐 두고 몸소 그들을 마중했다.
그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모두 고생했다."
그의 옆에는 카이사르의 안주인, 베니니타스 역시 서 있었다.
그녀는 오늘도 세련된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현대의 시선을 가지고 있는 마누스가 보더라도 정말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인비데아가 대표로 나와, 간략하게 보고했다.
악마를 잡았다는 것.
그리고 디레 교단을 처리했다는 것.
"애석하게도 유적지는 무너졌습니다."
"그건 좀 아쉽군."
"조사대를 꾸려 나머지를 조사할까요?"
라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거기까지만 하면 되었다.
이들이 할 일은 충분히 해 주었다.
라베스는 이후의 계획을 간략하게 밝혔다.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은 끝났다. 고작 그런 일에 카이사르의 인력을 낭비할 필요 없지."
"알겠습니다. 가주님."
"그래, 인비데아. 이번에 마누스는 어떤 활약을 펼쳤지?"
라베스가 궁금한 것은 바로 그것.
뒤에서 구경만 한 조연이었는지, 직접 나서 임무를 멋지게 해결한 주연이었는지.
인비데아, 에이번.
쟁쟁한 두 마법사 사이에서 마누스가 어땠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마누스를 흘끗 쳐다보고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라베스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그 궁금증이 더욱 치솟았다.
애매한 활약이었을까?
가문의 이름에 먹칠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주 잠시의 기다림이었지만, 기다란 심지에 불이 붙은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이윽고 인비데아의 입이 열렸다.
"악마를 잡은 건 마누습니다. 토벌의 전부를 그가 했죠."
"거짓말-."
반항기가 담긴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그곳엔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는 티란니스가 서 있었다.
인비데아는 그의 표정을 보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약 오르지?
너는 하지 못한 것을, 나는 해냈으니까.
네가 시기하고 질투하던 것을 난 받아들였으니까.
그건 우월감의 표출이었다.
"아니, 그는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 재능을 입증했습니다. 아무도 뚫지 못하는 결계를 홀로 뚫고 들어가, 이 거대한 악마와 싸워 이겼죠."
"거짓말! 네가 그랬다고? 카이사르 마누스! 네가 말이냐!"
"오라버니. 가주님의 앞입니다. 정신 차리세요."
라베스는 티란니스를 바라봤다.
그리고 물었다.
"왜 마누스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나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던 애송이가 저런 악마를 쓰러뜨렸단 말씀입니까? 아버지, 아니 가주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저 녀석은 한 달 전만 해도 1클래스 마법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놈입니다."
"그래서 불가능하다?"
"마법이란 건,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밖에선 어땠을지 몰라도 가문의 모든 이가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는 진짜 마법사가 아니었다는 걸."
티란니스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로 마누스를 바라봤다.
저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
넘실거리는 마나.
저 모든 것들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마누스는 피식 웃었다.
그래,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건 맞지.
현실에서도 한 달 남짓한 시간에 사람이 변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그가 살던 현실이 아니다.
"왜 기적이 저에겐 일어나지 않을 거라 보십니까."
"-뭐?"
덤덤했지만, 힘이 있었다.
티란니스는 순간적으로 당돌했던 그 옛날의 마누스를 떠올렸다.
자신의 재능을 굳게 믿고, 명랑하게 빛났던 그 시절의 동생을.
"기적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법이죠."
그가 손을 올려, 마법진을 그렸다.
막대한 양의 마나를 필요로 하는, 4클래스의 마법진이었다.
어렵지 않게 마법진을 구축한 것을 본 모두가 작은 감탄을 흘렸다.
티란니스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재능이 넘쳤다면, 왜 그때는 재능을 발휘하지 않았는가.
아직도 그에겐, 끔찍한 기억이었다.
빠지지직-.
"그때의 일이라면, 만회할 준비는 되었습니다."
"저건-."
마누스의 다른 한쪽 손에도 마법진이 피어났다.
똑같은 4클래스.
다른 마법.
4클래스 더블 캐스팅이라는, 그 압도적인 재능이 보였다.
"...내가 너를 믿어야 하는 이유가 있느냐."
"형이 동생의 잘못을 감싸지 않는다면, 누가 가족이라고 부르겠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
그의 머리 위에 떠오르는 하나의 마법진에, 모두가 경악했다.
악마를 물리친 비결.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는 재능.
그 모든 것이, 세 번째 마법진을 통해 증명되었으니.
마누스는 단단한 어투로 말했다.
올곧은 눈으로 티란니스를 바라봤다.
"저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트리플 캐스팅.
저 나이에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지금 가문의 망나니였던 마누스가 해내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는 과오.
업보를 쌓아 갔던 지난날을 깨끗하게 만들 준비가 되었다.
제62화
- 위대한 마법사가 되렴
* * *
그것은 충격이었다.
어지간한 재능은 이름도 못 내밀 정도의 카이사르에서, 모두를 놀랠 재능이 탄생했다.
초인이 아닌, 인간의 수준에서 끝이라고 하는 4클래스 마법.
단순한 4클래스 마법은 조금의 재능만 있으면 충분히 달성할 수 있는 경지다.
하지만, 그걸 더블 캐스팅으로 펼치는 건 또 다른 이야기.
생각을 좌우로 쪼개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어렵다는 더블 캐스팅.
복잡한 마법진을 다르게 그려야 하는 건, 타고난 이들 외엔 불가능한 기예였다.
'그런데 셋이라고?'
한 번에 세 개.
그건 또 다른 이야기다.
역사상 트리플 캐스팅을 사용한 마법사는 손에 꼽았다.
영롱하게 빛나는 세 개의 마법진.
티란니스는 그걸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진짜... 트리플이라고?"
"이 정도면 준비는 충분하겠지요."
"하! 왜...."
그가 부들부들 떨었다.
어째서-.
어째서 저런 놈한테!
이를 간 그가 씹어뱉듯 말했다.
"그래, 인정하지. 언제고 가문에 꼭 도움이 되길 바란다."
"그럴 예정입니다."
티란니스는 이후, 무례를 용서해 달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인비데아도, 라베스도, 베니니타스도 놀랐다.
아니, 전 가문의 사람들이 놀랐다.
카이사르의 가주는 생각했다.
어쩌면, 당대 최고의 마법사는 티란니스도, 인비데아도 아닌 마누스가 될지도 모른다고.
과연 그가 권력에서 멀어질 수 있을까?
"무리하지 말거라. 이제 카이사르에서 널 무시하는 자는 없을 테니."
"감사합니다."
"자식들이 잘 큰다는 건, 아비로서 더없이 기쁜 일이지. 하지만 잊지 말거라. 자만은 언제나 자신을 좀먹는 기생충이 될 테니."
모두가 공감하는 말이었다.
자만심은 언제나 사람을 좀먹고 크는 법.
그 자만심은 성장을 저해한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길을 막고 하늘을 손으로 가리는 격이지.
라베스는 오늘 하루, 성대한 만찬을 준비하겠노라 말했다.
악마의 사체를 마탑으로 가져갔고, 남은 이들은 여독을 풀었다.
카이사르에 있는 의료진들이 모두 마누스에게 들러붙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잠시 살펴볼 테니, 모두 나가 주십시오."
의료진이 모두를 물렸지만, 아덴은 안절부절못하는 상태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가 다시 말하려 할 때, 마누스가 입을 열었다.
"내 호위다. 놔두도록."
"아, 알겠습니다."
마누스의 말은 천금과도 같은 위력을 지니게 되었다.
망나니였던 그의 과거, 압도적인 재능, 악마를 잡은 실력까지.
가문 내에서 그를 무시하는 이는, 곧 카이사르 자체를 무시한다는 것과 같았다.
의료진들은 고개를 숙일 뿐, 감히 말대꾸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가문 내에서도 꽤 영향력 있는 이들이라고 해 봤자지.
아덴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어렸다.
* * *
저녁.
마누스는 한가롭게 책을 읽고 있었다.
마탑에서 5클래스 마법에 대한 서적을 빌려 와, 차근차근 머릿속에 지식을 입력하는 와중.
[호잉-!]
일부러 방 안에 두고 있었던 솜뭉치, 아니 알비온이 다가왔다.
괜스레 신경을 못 써 준 것 같아,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귀여운 솜뭉치가 볼에 몸을 비비적거렸다.
마누스는 녀석에게 마석 결정 다섯 개를 내밀었다.
"이거 먹고 흡수하렴."
[호잉!]
솜뭉치의 입이 와앙- 하고 벌어졌다.
마석 다섯 개를 한꺼번에 삼킨 알비온이 침대로 뽈뽈 날아갔다.
본능적으로 보금자리를 찾아 들어간 것인지, 몸을 웅크리고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거면 레벨이 꽤 오르겠지.
마누스는 귀여운 솜뭉치에게 눈길을 준 다음,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리려 했다.
들려오는 노크 소리만 없었다면.
"있니?"
인비데아의 목소리였다.
마누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문 너머에는 편한 복장을 한 누이가 보였다.
부드러운 눈에 안정된 분위기.
인비데아는 그에게 정중한 말투로 얘기할 것을 권했다.
거절할 것도 없어, 마누스는 그녀를 안쪽으로 들였다.
"무슨 일?"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왔어."
"무모했다면 사과하지."
그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카이사르가 자신의 힘을 믿고 일을 해결한 건 당연한 일이다.
이미 해결된 일로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었다.
"사과할 필요 없어. 오히려 자랑스럽지. 카이사르의 이름을 드높였으니."
"그렇담 다행이군."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러 왔어."
고고한 그녀가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다니.
다소 놀라운 말이었다.
하인을 시켜 다과를 내오라 했는지, 곧 먹음직한 쿠키와 차가 도착했다.
그녀는 잠시 창문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는 듯싶었다.
깜빡이는 눈꺼풀에 달려 있는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마누스는 향긋한 민트 향이 나는 찻잔을 들었다.
'제법 맛있는데.'
"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솔직히 죽는 줄 알았단다."
"사실 나도 반쯤은 도박 수였지."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조그맣게 벌리고 마누스를 바라봤다.
정신 차리기 전에도 무모한 성격은 알아줘야 했지.
그런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는 설 새삼 느꼈다.
"뭐... 어쨌든 티란니스 오라버니에게도 인정받은 것 같아 다행이야. 본론은 이게 아닌데-."
"오늘은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얘기해도 돼."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누스의 말대로 시간은 많았으니, 느긋하게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인비데아는 마누스가 부러웠다.
그녀는 가지지 못한 것들을 마누스는 하나씩 가져가고 있었으니.
젊음.
좋은 호위.
뒤늦게 개화했지만, 압도적인 재능까지.
"내가 살아생전, 너를 부러워할 날이 올까 싶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구나."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건 채 대화를 이어 나갔다.
"새로운 자극이야. 오히려 방향이 정해졌달까.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날 정치에 끼워 넣을 생각이라면 사양하지."
"그런 게 아니야. 널 제대로 후원하고 싶어서 온 거지."
이건 또 무슨 이야기지?
이건 자칫 잘못하다간 깊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발언이었다.
누가 누굴 후원한다니.
마누스는 가문의 직계다.
함부로 밀어주겠다는 이야기를 꺼낸다는 건, 그녀도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는 거겠지.
마누스는 그 이유를 물었다.
"위험한 건 알고 있나?"
"위험? 내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놈들은 내가 찍어 누르면 돼."
"뭐, 그렇다 치자. 그런데 난 딱히 후원받을 필요 없다는 거, 알고 있겠지?"
후후-.
인비데아는 소리 내어 웃었다.
괜한 자존심을 부리는 걸까.
방금 그 멘트로 인해, 아직 마누스가 세상을 제대로 겪어 보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
이 세상은 험난하다.
누군가의 푸시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아카데미 2학년생.
아직 세상을 알기엔 너무도 이른 나이였다.
"난 네게 많은 걸 줄 수 있어. 네가 어려서 잘 모를지도 모르지만-."
"그래. 뒷배를 얻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좋아."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비데아는 자신이 어리다고 생각하겠지?
미안하지만, 마누스 본인도 세상의 쓴맛 똥맛 단맛을 모두 느껴 본 인간이었다.
학연, 혈연.
지연은 잘 몰라도 나머지 두 개는 인생에 지대한 영향이 있음을 안다.
카이사르의 장녀.
현대로 치자면 삼성 그룹의 장녀쯤 되려나?
"훗, 잘 생각했어. 난 카이사르를 내 것으로 만들 거야. 널 이 위대한 가문의 가장 강력하고 고귀한 마법사로 만들어 줄게."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처음 봤을 때와 달리,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심경에 변화가 있었는지 살갑게 대하는 모습도 보였다.
마누스를 통해 무엇을 느낀 것일까.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홀로 있을 땐, 이따금 전생의 행동이 튀어나오곤 한다.
"점점 복잡해지네."
인비데아가 문을 닫고 나간 순간-.
그 앞에 기묘한 메시지가 생성됐다.
[간섭을 확인했습니다.]
[세계의 방향이 크게 변화합니다.]
[보상을 획득합니다.]
'-갑자기?'
수많은 간섭 중 하나가 결실을 보았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모든 것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는 메시지.
그래.
자신이 없는 곳에서도 세계는 흘러간다.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입맛대로 바꿀 순 없겠지.
그러나, 그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들을 바꿀 수 있다면.
'아카데미뿐만이 아니었어.'
[보상 : 모든 스킬 습득 시간 20% 감소]
[한 번이라도 간섭했던 대상이 지닌 스킬 습득 시간 50% 감소]
"이야...."
웬만해선 감탄사를 내뱉지 않는데, 이번엔 달랐다.
이런 혜자 보상이라니.
이런 기세로 간다면, 100년이 넘는 스킬도 뚝딱뚝딱 배울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뿌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다시 책을 읽었다.
클래스 마법을 스킬로 후다닥 배울 생각은 아직 없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공부하는 학문인데, 소소한 재미를 빼앗길 순 없지.'
지식의 탐닉은 이젠 그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이 세계에 적응하는 매개체이기도 했다.
굳이 클래스 마법을 익히지 않는 건, 나름대로의 보람을 찾기 위함이었다.
밤은 깊어졌다.
문득 아카데미에 있는 친구들은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탑이 활동을 시작할 시기였나.
날짜를 확인한 그가 책을 덮고 일어나, 창밖을 확인했다.
"해야 할 일이 또 늘었군."
의미 모를 중얼거림이 밤바람을 타고 흐른다.
이미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앞으로 더 많은 것이 변하겠지.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는 자들은 결국 도태되기 마련이다.
자신도 살아남기 위해, 꾸준히 나아가야 할 터다.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다행인가.'
어느새 자정이 되어, 세상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마치 카이사르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이곳은 침식이 일어나지 않아, 오랜만에 평화로운 밤을 만끽했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숨겨진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그가 없는 공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 * *
"-으음."
인비데아는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잠에 들었다.
오늘따라 생각이 많았다.
마누스.
카이사르.
다른 가족들과 그녀가 그리는 미래.
그런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 잠을 설쳤다.
끙끙거리길 한참.
그녀의 표정이 풀어지며 수마에 몸을 맡겼다.
그와 동시에, 세상이 암녹색으로 변했다.
"...."
카이사르의 보안은 완벽하고, 감히 이곳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는 자는 없다.
그래서 더욱 곤히 잠들었는지도 모른다.
허나 그녀는 몰랐다.
지금 그녀를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구름도, 바람도,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는 걸.
평생 몰랐을 터다.
하지만, 그녀를 감싸고 있던 뒤틀림은 금방 없어졌다.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자고 있는 여인의 주변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세계의 흐름은 기울었다.
그 선 위에 있는 사람들의 운명 역시.
제63화
- 재앙이 흘러내린다
* * *
세상이 암녹색으로 물든 시각의 탑.
본래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곳에서, 검은 물체가 흘러나왔다.
철퍽-.
슬라임처럼 끈적이고 불길한 마나를 풀풀 풍기는 무언가는 서서히 제 형체를 갖췄다.
[음-!]
가면.
그 불길하고 오묘한 존재에서 특유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본래 가면을 쓴 존재들은 탑에 귀속되어야 함이 옳다.
지구라트.
죽음의 신이 권능을 부려 세운 탑은, 세상에 깃든 모든 죽음을 봉인한 곳이라고도 불렸으니까.
[으음-!]
철퍽-!
하나의 소리가 더 들렸다.
둘.
아주 미약한 변화였다.
가면은 조용히 암녹색 세상을 유영하다, 이내 어디론가 사라졌다.
탑의 위층이 막혀 있었고, 선택받은 이들이라 불리는 이들은 또 다른 세상에서 눈을 떼고 있었다.
그들의 본분은 어디까지나 학생이었으니.
하나라도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저 높이, 짐을 떠받들고 있는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이들.
[음음-!]
[음!]
그들은 어둠 속을 주시하지 않았다.
언제나 사건은 평안 속에 일어난다.
두 가면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두 개의 가면이 사라졌다는 걸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각자의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재앙은 그렇게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후아아암-. 하루에 여섯 시간이라도 따로 공부할 수 있으니까 되게 유리한 것 같지 않아?"
"응. 그러네."
암녹색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는 두 여인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지 않았다.
위험하긴 했지만, 기숙사는 탑으로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바쁘게 지식을 쌓는 중이었다.
남들은 겪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공부하는 맛이라니.
현대의 많은 학생이 들으면 기겁할 발언과 생각이었지만, 이곳 마법사들은 지식을 탐닉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시간을 쏟는다.
시간을 들인다는 건, 곧 강해진다는 말이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정말 우리는 축복받았어.'
아나이스는 멜라니와 케일과 함께 월말 평가를 위한 공부 중이었다.
A반이라는 위치를 사수하기 위해선 밤낮없이 공부해야 하는 위치.
이번 월말 평가는 대련과 필기, 몬스터 사냥.
세 가지 모두 중요한 과목이다.
특히 필기시험은 악명 높기로 소문난 트레일 교수가 직접 낸다고 하니, 마법적 지식을 제대로 습득해야 할 터다.
'선배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떠오른 의문이었다.
임무는 잘하고 있을까?
선배라면 월말 평가에서 당연히 수석을 차지하겠지?
"...응?"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그녀가 고개를 돌려 보니, 케일과 멜라니 역시 멍하니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발견한 아나이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제안한 것.
모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의 말대로, 이제 집중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해산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나이스는 새근새근 잠든 여인을 바라봤다.
다름 아닌, 자신의 룸메이트였다.
'얘네들은 꿈에도 모르겠지.'
문득, 선택받은 자들의 기준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잠시 고민했지만, 당연하게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나이스는 자리를 정리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이불을 끌어안고 눈을 감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씩 어둠에 젖어 갔다.
* * *
날이 밝고, 마누스는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당당하게 임무 성공을 인증하는 문서를 들고서.
오늘 하루 역시 특별할 것 없는 나날이었다.
[호잉!]
부쩍 몸집이 커져, 이제는 손바닥에서 주먹만 하게 변한 솜뭉치가 어깨에 올라와 소리쳤다.
알비온 덕분에 마누스의 이미지가 아주 부드러워졌는지,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학생들이 흘끔흘끔 쳐다봤다.
그러다 마누스와 마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건 똑같았지만.
"마누스, 돌아왔구나."
"별일 없었나."
불타는 날개를 가진 피닉스가 눈밭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그 모습을 보고 우스꽝스럽다고 할지 모르나, 감히 학생회장인 알라노와 신수 피닉스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마누스가 알라노가 아닌, 피닉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자, 알라노가 마누스의 소매를 잡았다.
그녀의 눈에 다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알라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여, 여기가 아니면 싫다고 하더라. 뻔히 보지 말아 줄래?"
"미안하군."
마누스가 웃음 참기에 실패했다.
쿡쿡 새어 나오는 웃음에, 알라노는 더욱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
별일이야 없었고, 곧 있을 월말 평가를 준비해야 하는 시즌이었다.
알라노는 노트 한 권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지난 수업. 월말 평가는 대련, 몬스터 사냥, 필기야."
"언제나와 같군."
"그렇겠지만, 아카데미에서 뭔가 변수를 준비할 거야. 나도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어."
학생회장도 모르는 일이라면, 교수들끼리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리라.
그 어떤 조건을 붙여도 이겨 낼 자신이 있는 마누스는 곧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제 곧 탑의 다음 구역이 열린다.
그 조건은 '어떤 사건'을 해결하는 것.
모두를 불러 모아, 다음에 있을 일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려 줘야겠지.
대놓고 얘기하면 좋겠지만, 아직 녀석들은 성장할 때다.
'이제 고작 한 달. 앞으로 3년은 더 강해져야 한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들이 평안한 날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누스 자신도 마찬가지.
"오늘 수업 후에 동아실에서 보지."
"다 같이?"
"그래. 부탁한다."
알라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누스가 자신들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노라고 확신했다.
망자의 밤 때도 그랬었지.
이번에도 지침을 내려 줄 것이다.
그의 비밀이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다만, 지금 그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임에는 틀림없겠지.
'조금씩 조사를 하고 싶지만... 카이사르는 건들지 못하니까.'
카이사르 가문에서도 탑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면.
그에 따른 대항책을 수십 년 동안 준비했다면.
지금 마누스가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알라노는 친구를 믿어 보기로 했다.
"내가 전달해 놓을게. 오늘도 3학년 수업?"
"그래. 이따 보지."
마누스는 로브를 휘날리며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와 그녀는 서로의 수업에 집중하기 위해 헤어졌다.
이변이 시작된 것은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마누스라는, 거대한 이레귤러의 눈을 피해 일어났다.
자리는 두 개가 비어 있었다.
2학년 A반.
최고의 수재만 모아 놓은 곳에, 빈자리는 정말 어색한 광경이었다.
'하나는 마누스고... 다른 하나는 누구지?'
교수가 들어오기 전, 알라노는 누가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확인해 보았다.
실력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들이다.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았을 터.
'가문이 없었고.... 루페라인가?'
평민 중에서도 실력자는 분명 있다.
귀족의 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루페라가 대표적인 예였다.
특히 마누스를 무서워하던 동기였다.
붉은 머리칼에 작은 키.
한쪽 얼굴에 있는 점 하나가 인상적인 친구였다.
조용하고 소심하지만, 마법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친구였다.
'임무를 수행하러 갔나?'
"모두 반갑다. 월말 평가 때문에 바쁠 텐데, 오늘은 특별 수업을 해 보자꾸나."
때마침 교수가 들어와 반가운 이야기를 건넸다.
연금 수업.
포션과 약품을 제조하는, 다소 실용적인 학문이었다.
특히 조합법을 외우는 건 필기시험에서 변별력을 기르는 문제들로 출제되었다.
간단한 인사 후에 출석을 부르는 교수님.
알라노는 교수님의 대사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마누스 학생은 3학년 수업을 들으러 갔으니까, 결원은 없네요."
"교수님, 루페라 학생이 안 왔습니다."
알라노가 바로 답했다.
평민이라곤 해도 아카데미 학생이다.
그런데 교수라는 작자가, 그를 잊을 수 있나?
아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성실하기로 소문난 연금술사.
수백, 수천 가지가 넘는 약재를 달달 외우는 교수였다.
쓰임새부터 생김새, 냄새와 특징 등등.
"음? 루페라? 그런 사람은 우리 아카데미에 없습니다만."
"-네?"
알라노는 순간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아니, 진짜 까먹은 건가?
아니면 마법에 걸렸나?
혼란스러움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촉망받던 인재였다.
1년간 같은 A반에 있었고, 교수들과도 나름 친분이 있었던 친구였다.
그런데, 루페라라는 이름을 모른다고?
"가문에서의 일과 착각하신 거 아닙니까? 음... 아무리 생각해도 루페라라는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군요."
"아, 제, 제가 착각한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하하, 요새 일이 많을 때죠. 쉬엄쉬엄하세요. 그럼,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알라노는 얼빠진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설마 자신과 같이, 루페라를 기억하고 있는 이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
허나 그 누구도 그녀의 표정과 감정에 공감하고 있지 않았다.
모두가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너 뭐 잘못 먹었어?'
'너 오늘 이상해.'
알라노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들을 보며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왜, 왜 자신만 인지의 부조화를 겪는가.
아니, 다른 이들은 왜 루페라를 기억하지 못하는가.
수업 시간이 지나가는 내내, 그녀는 갑자기 나타난 이변에 대한 원인을 생각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모두 고생하셨어요."
"고생하셨습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알라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평소 절대 뛰지 않던 그녀였다.
귀족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았던 알라노였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허울, 모조리 집어치우며 3학년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마누스!"
느긋하게 수업을 마치고 3학년 교실에서 나온 마누스를 발견.
그녀는 눈에 뵈는 것이 없었기에, 폭군이라 불리는 마누스의 손목을 덥석 잡고 걸음을 옮겼다.
마누스와 함께 수업을 듣고 있던 이들이 모두 이상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쳐다본 것도 당연지사.
"어머, 쟤네 둘 뭔가 있나?"
"하긴... 저 둘이면 제법 잘 어울리지 아마?"
"해리슨이랑 카이사르잖아. 저렇게 친한 것도 이해는 가."
그런데 저렇게 헐레벌떡 뛰어올 정도라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혹시 가문끼리 혼담이라도 오갔나?
본래 소문은 천리마처럼 빠르게 달리는 법이고, 아카데미에 소문을 좋아하는 이는 많았다.
알라노는 정말로 심각한 일 때문에 움직였지만, 이미 인식이 뒤틀려 버린 사람들은 헛소문을 만들기만 했다.
갑작스럽게 자신을 끌고 가는 알라노를 바라보는 마누스.
그 역시 드물게 당황했다.
"큰일이라도 났나?"
"마누스. 루페라라고, 기억나?"
당연하지.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들었으니,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유독 자신을 무서워한다는 것도.
A반의 유일한 평민이라서 더욱 뇌리에 깊게 남아 있었다.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마누스의 머리로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라노는 하아-, 하고 깊은 숨을 내뱉었다.
"다행이야."
"무슨 일이지? 설마...."
마누스는 이다음에 벌어질 일을 알고 있었다.
아직, 아직 그 일이 일어날 시기는 아니었다.
월말 평가 후, 탑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가 시나리오의 시작이었을 텐데.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알라노에게 물었다.
불길한 예감이 틀리길 바라면서.
하지만, 늘 그렇듯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하는 법.
"아무도... 아무도 루페라를 기억하지 못해. 아무도-."
"...."
마누스의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제64화
- 왜 탑을 올라야만 하는가
* * *
인물이 어떠한 행동을 하는 데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게임, 소설, 여타 캐릭터가 등장하는 매체에선 정말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지.
동기와 목표, 꿈.
이런 것들은 캐릭터를 움직이는 힘이자, 사건을 움직이는 힘이었다.
마누스가 전생에 파고들었던 이 게임은 이 동기를 꽤 나중에 부여해 준다.
바로 지금.
이 사건이 터진 후부터.
그래서 초반 진입 장벽이 꽤 높다고들 했던 기억이 피어났다.
'벌써 일어날 사건은 아니었는데-.'
월말 평가가 끝난 후, 이 사건의 전조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탑에 들어간 아이들이었다.
이 시기에 탑에 들어가면, <묘하게 데몬의 수가 적다.>라는 특별한 문구가 뜨게 되어 있었다.
이후, 끝까지 탑을 오르내리면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라며 두어 번 더 오르게 만든다.
그사이, 두 명의 실종자가 생기고 일이 진행되는 것인데-.
이렇게 갑자기 일이 터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것이 세계선의 변화인가.'
어쩌면 시스템은 계속해서 경고했을지도 모른다.
여긴, 네가 알고 있는 그 세계가 아니라고.
그러니 철저하게 대비하라고.
"1학년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을 거다. 지금 찾아가지."
"-그래."
"이 일은 이사장님께만 알리면 된다."
알라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복도를 거닐자, 주변이 깨끗해졌다.
간혹 마주친 이들도 서둘러 길을 비켜 주었다.
고작 2학년.
이제 신입생 티를 막 벗은 학생들치곤, 대우가 너무 좋았다.
두 사람을 향한 소문은 점점 커져만 가는 계기이기도 했다.
마나로 움직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학년이 있는 곳까지 내려간 그들.
"헉-."
"실례하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이 흠칫 놀라며 좌우로 쫙 갈라졌다.
마누스가 앞에, 알라노가 뒤에.
두 사람의 진격을 가로막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1학년 A반.
"어-?"
"선배!"
초조한 얼굴로 무어라 이야기하고 있었던 삼인방이 마누스와 알라노를 발견하고 오도도 뛰어나왔다.
피어슨이 아나이스의 채근에 B반으로 뛰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마누스는 푸른 눈을 빛내며 조용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선배, 큰일 났어요-."
"서, 선배들! 얘들아!"
B반에서도 수업이 끝났는지, 멜라니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동아리 회원들이 모두 모였다.
케일이 눈동자를 잘게 떨었다.
불안감이 마구 보이는 것이, 꼭 비 맞은 강아지 같았다.
마누스는 입을 열었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으니.
"혹시, 너희들만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 있나."
"아, 아무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요."
"2학년도 마찬가지야. 루페라라고, 기억나니?"
알라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고, 다행이 1학년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이럴 땐 그 불안감을 공유하는 것이 낫다.
머리를 맞대면 해결책이 나오기도 하니-.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마누스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이야기를 공유하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세계선이 변한다.
변수가 만들어진다.
카이사르라는 이름 아래, 자만심이 몸을 휘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선 안 된다.
자신뿐만 아니라, 이들도 성장해야 한다.
마누스는 다시 한번 시스템이 처음 주었던 편지 내용을 상기했다.
"탑. 지구라트의 영향력일 거다."
"탑이요?"
"그래. 단서는 두 가지. 우리만 기억하고 있다는 것과 밤사이에 일어난 일이라는 거다."
본래는 케일과 알라노가 했어야 할 추리.
빙빙 돌아갔던 과정을 과감하게 없애고, 단번에 정답을 내놓았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선 힘이 있어야 한다.
이번에도 꽤 강력한 보스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더불어, 마석을 옴팡지게 캐낼 기회이자 처음으로 '장비'라는 개념이 도입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파밍이 시작되는 시기지.
"-맞아요. 우리만 기억하고 있다는 건, 탑과 관련되어 있을 수 있죠."
"문제는 탑에서 일어나는 건가?"
"가만히 있던 탑이, 왜 이제 와서...."
의문점과 해결책.
그 모든 것들이 뒤엉켜 혼란을 만들어 냈다.
궁금한 것도 많을 테고, 알아보고 싶은 것도 많겠지.
언제나 답은 탑에 있었다.
앞으로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온다.
그들을 구출하는 것이, 지금 해야 할 행동이었다.
"탑 밖에서 일어난 일이니, 탑 밖에 무언가가 있을 확률이 높아. 어쩌면... 데몬이 밖으로 나왔을 수도 있겠다."
"그게 정말이라면-."
"찾는 것부터가 일이겠는데요."
고민은 깊어졌다.
담소는 거기서 끊겼다.
다음 수업을 위한 종소리가 울렸으니.
"수업 끝나고 본격적으로 얘기하자. 다들 수업 잘 듣고."
"-네."
"그, 그래도 같이 고민할 수 있으니 좋네요."
멜라니가 수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모두가 옅은 미소를 매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무엇보다 마누스가 이 세상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이었다.
모두가 해산하고, 마누스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는 곳.
허나, 마누스는 그곳에 남아 있는 온기를 발견했다.
'슬슬 각성할 땐가.'
시기가 딱 맞아떨어지긴 하지.
마누스는 생각을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 * *.
요즘 이상한 꿈을 꾼다.
기예르모는 수면 부족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누스를 만나고, 그에게 간접적인 사과를 들은 다음부터였을 거다.
아니었던가.
생존 평가를 치른 다음이었던가.
언제부터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악몽과 불면증 덕에, 그의 집중력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피로를 푸는 방법은 마법사가 잘 알고 있으니, 요 며칠 황금 뱀 반에 기웃거렸다.
'쟤들은 항상 모여 다니는군.'
심각한 표정으로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
마누스를 비롯해 모여 있는 1학년 수재들이 보였다.
그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루페라... 기억...."
'루페라?'
분명 평민 출신의 마법사였지.
꽤 실력 있는 학생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가 뭐?
잠시 호기심이 일었지만, 이내 신경을 꺼 버렸다.
그는 비약을 받기 위해 교수님을 찾아가기로 했다.
마나를 다루고, 강력한 육체를 지니고 있음에도 정신적인 문제는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이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왜 계속 그 이름이 걸리는지 모르겠군."
그는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다음 수업을 위해 서둘러 사슴반으로 돌아갔다.
루페라.
루페라.
그가 누구였더라?
왜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언급했던 거지?
혼란이 기예르모의 머릿속을 감쌌다.
아냐, 분명, 누군가-.
"...난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거지?"
그가 머리를 털어 내며 비약을 얻기 위해 움직였다.
루페라?
그런 이름은 들어 본 적도 없는데.
기예르모의 혼란스러운 표정은, 어느새 예전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게, 루페라라는 이름은 세계에서 희미해져만 갔다.
기억하는 이들은 오직 탑에 들어갔다 온 이들뿐.
아무도 모르는 사건 속에, 시간은 점점 흘러가기만 했다.
* * *
사건이 발생했으면 대책을 세워야 한다.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
오늘 배운 게 뭐였더라?
케일은 수업이 모두 끝난 후에도 책상에 고개를 박고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야, 마누스는커녕 다른 2학년도 따라가지 못할 것 같았다.
나, 잘하고 있는 걸까?
'월말 평가... 잘할 수 있겠지?'
왠지 자신감이 없어졌다.
1번이라는 자리까진 몰라도, A반에서 내려가고 싶진 않았다.
그녀에게 주변 시선이란 건 항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A반에 들어오고 난 뒤, 모든 것이 바뀌었다.
사람들의 시선.
마법을 펼칠 때마다 터지는 탄성.
그리고 특별한 무언가를 한다는 것까지.
"케일. 괜찮아?"
"어? 으응-."
그녀는 아나이스의 말에,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짓눌러 오는 이 부담감을 이길 수 있는 까닭은, 이렇게 괜찮냐고 물어봐 주는 친구가 있기 때문이겠지.
마음씨가 고운 아나이스가 케일의 볼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봤다.
붉은색, 걱정으로 잔뜩 물든 그녀의 눈동자가 케일의 눈에 담겼다.
그녀의 모습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흘러나왔다.
"얼굴이 좀 상한 것 같은데, 마법이라도 걸어 줄까?"
"아니야-. 진짜 괜찮아."
"그렇담 다행이고. 얼른 가자. 선배들 기다리겠다."
케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월말 평가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음을 상기했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 듯, 아나이스와 피어슨이 조잘거리며 떠들었다.
"진짜, 오늘 뭐 배웠는지 기억나? 안 그래도 월말 평가 때문에 머리 아파 죽겠는데 말이지."
"나도-. 집중 안 돼서 큰일이야."
"케일, 넌 어때? 수업 들을 만해?"
피어슨이 물었고, 케일은 잠시 어떻게 답해야 할지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녀들의 동기인 프레이지아 에머슨.
멜라니와 같은 B반으로, 탐색과 지원에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던 친구였다.
모두가 그녀의 이름을 잊고 살기 시작했다.
함께 웃고, 공부하고, 성질내고 했던 추억과 기억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제아무리 괴로운 기억이라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단다.>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괴로운 기억이라도 계속 상기해야 성장한다.
이불 킥도 차 본 사람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거다.
반드시 모두를 원상태로 돌려놓겠다고 다짐하며, 케일은 동아리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엔 오랜만에 보이는 인물도 있었다.
단정하고 차분한, 모두를 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인상의 이사장님.
"다들 도착했군. 편히 앉게. 알라노에게 이야기는 들었네."
"수업 받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과라도 들면서 얘기하세요."
동아리실엔, 또 다른 얼굴도 있었다.
검은 단발이 아주 잘 어울리는 하녀장, 아덴이었다.
1학년 학생들은 달칵, 그들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이들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하러 왔고, 그것은 외부인에게 알려져서 좋을 것이 하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그것이 소문과 가십에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는 하녀장임에야.
이사장이 학생들의 눈빛을 보고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미리 앉아 있던 마누스에게 묻는다.
"아직 얘기하지 않았나?"
"그럴 필요가 없었죠."
"허허 이것 참.... 뭐, 좋네. 이 기회를 빌려서 얘기하면 좋을 것 같으니."
마누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덴은 훌륭한 조력자가 될 것이다.
탑 내부라면 모르겠지만, 외부에서의 수사는 그녀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모두가 혼란스러워 하는 때에, 마누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곧 모든 학생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아덴도 선택받았다. 탑 외부에서 우릴 도와줄 거다."
"맞습니다. 저는-."
슈륵-.
그녀의 신형이 그림자에 휩싸여 사라졌다.
아덴이 나타난 곳은 1학년들의 뒤.
섬뜩한 그녀의 목소리는 사신의 유혹처럼 들렸다.
"여러분들을 은밀하게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이랍니다."
"...."
잊고 있었다.
마법사만이 세상을 움직이는 건 아니고, 세상엔 정말 강한 자가 많다는 걸.
제65화
- 기억을 되찾는 여행
* * *
케일은 누군가 목덜미를 날카로운 칼로 간지럽히는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면, 그 칼이 자신을 무자비하게 찔러 죽일 것 같은 공포감.
하녀장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아덴이 이토록 무서운 존재였을 줄은 몰랐다.
누군가가 말했던 적이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한 단체의 '장'을 맡는다는 건, 대륙 어디 내놔도 전혀 꿀리지 않을 사람이란 것.
어디서 들었더라.
"-장난은 여기까지 하지요.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다시 앞으로 돌아와, 공포감에 젖어 있는 학생들을 다독였다.
아덴은 정보 조작, 요인 암살, 그 밖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정보 획득이 특기였다.
아직 어린, 새파란 학생들 몇몇 기분 정도야 순식간에 풀어 줄 수 있었다.
아나이스, 그리고 피어슨은 그녀가 자신들을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에 살짝 발끈했지만 거기까지.
애초에 격이 다른 이라고 인식했기에, 반발심이 금방 사그라들었다.
마누스가 포섭했다는 말 역시 1학년들이 안심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다.
"아나이스."
"네."
"망자의 밤에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었지."
마누스는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는 버릇은, 곧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밀은 최대한 없는 것이 좋다.
오해를 없애기 위해, 그가 입을 열었다.
"아덴은 뛰어난 암살자다. 그녀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아-."
"밖에서 우릴 도와줄 거다."
모두가 아덴을 바라봤다.
공포감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엔 선망과 신뢰가 자리하고 있었다.
카이사르, 그리고 마누스라는 존재가 가진 영향력이었다.
그는 꾸준히 신뢰를 쌓아 왔고, 언제나 후배들을 위해 움직였다.
이젠 믿을 수 있었다.
아나이스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붉혔다.
'괜히 부끄럽게-.'
잊고 싶은 기억을 들추는 건 반칙이지.
하지만 그녀도 얻어 가는 것이 있으리라.
이사장은 상황 설명이 끝난 것을 인지하고 본격적으로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여태 탑에서 이상 현상이 발생한 일은 없었네. 처음 관측되는 일이지."
"전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저희가 모르는 희생자가 엄청 많을 수도 있겠네요."
무서운 말이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시체로 남는다.
이 세계에서 살아갔던 흔적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 아닌가.
사람에게, 그것도 입신양명을 꿈꿔 등용문으로 몰려온 학생들에게 이만큼 잔인한 일이 또 있을까.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것이 통째로 증발하는 상상은,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쳤다.
사랑받았던 어린 시절, 재능을 꽃피우던 시기, 치열하게 공부하며 교우 관계를 다지는 아카데미 시절까지.
"그렇네. 하지만 지난 15년 동안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네. 이번이 최초 사례일 수도 있어."
"그것도 아니면, 일정한 주기가 돌아온 것일 수도 있겠네요."
알라노가 타당한 의견을 내놓았다.
그때도 그냥 넘어갔을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희생자는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졌겠지.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어떻게든 되돌려야 한다.
케일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요."
"맞아. 그래서 우리가 있잖아. 적어도 우린 찾아 줄 수 있으니까."
"둘 중 하나겠네요. 멜라니 때처럼 탑으로 끌려갔거나, 아니면 외부에서 나온 데몬들에게 당했거나."
추리는 제법 정확했다.
마누스는 아직 나설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잠자코 있었다.
이들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추리하고, 생각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할 줄 알아야지.
그는 잘못된 방향만 짚어 주면 되겠지.
어디 한번 마음껏 재능을 펼쳐 봐라.
'멜라니. 네 힘이 필요할 거다.'
"저, 저기... 혹시 옛날 자료 있지 않아요?"
"옛날 출석부 말인가?"
"죽었다면...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것 같아요. 이사장님이 바쁘실 수도 있었겠죠."
그렇지.
멜라니는 아주 정확하게 요점을 파악했다.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큰 단서.
이사장이 도와준다면, 그런 기록들을 들춰 볼 수 있을 것이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처리되었는지.
아니면 아예 세계에서 존재가 사라져 죽는지.
그 점을 잘 파고들어야 할 것이다.
"좋아, 그럼 아덴이 인솔해서 다녀오면 되겠군. 내가 열쇠를 내어 주지."
이사장의 허락이 떨어졌다.
마누스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어느새 딱딱 의견을 내고 행동하는 이들을 바라봤다.
프라이머리 에머슨.
그리고 루페라.
"두 사람은 반드시 돌아올 거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케일이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좋은 눈빛이었다.
이제 슬슬 주인공으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케일.
마누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권리와 자격은, 그에 맞는 책임과 부담감이 뒤따르는 법.
오직 자신들밖에 할 수 없다는 부담감은, 아마 모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들을 괴롭힐 것이다.
"바로 움직이자. 적어도 월말 평가가 끝나기 전까진 해결해야지."
"네."
"가죠!"
학생들이 움직였다.
마누스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호잉!]
그의 어깨에서 하루 종일 잠만 잤던 알비온이 깨어나, 그에게 볼을 부벼 왔다.
케일이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빛냈다.
느릿느릿, 걸음을 느리게 해 맨 뒤에 있던 마누스와 나란히 걷는다.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퍽 어울리지 않았다.
플레이어블 캐릭터일 때의 그녀는 거침없고 시크한 면모가 돋보였으니까.
이게 본래의 성격이었던가.
"저-."
"만져 봐라."
마누스는 기꺼이 알비온을 그녀의 어깨에 올려 주었다.
과연 주인공이어서 그런지, 기본적으로 높은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 모양.
알비온이 동그란 눈을 끔뻑이며 케일을 바라봤다.
와아-.
그녀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나중에 그녀도 사역마를 길들이게 한다면, 제법 좋은 전력이 되리라.
알비온과 교감을 나누던 그녀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저도. 나중에 꼭 키우고 싶어요."
"사역마는 신경 쓸 것이 많다."
"오히려 좋아요. 저는 쭉 혼자였으니까."
가슴을 울리는 말이었다.
그녀의 배시시 웃는 표정이 애처로워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니겠지.
마누스는 아무런 말 없이 앞을 보았다.
무어라 말해야 할까.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음은,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전생에서도 그는 누군가에게 따스한 말을 건넨 적이 없었다.
성격이 그렇다기보단, 그럴 사람 자체가 없다는 말이 맞겠지.
"-그렇다면 공부해라."
"네에-. 그러려고요."
삐딱하게 전달한 말도 순수하게 받아들여 주는 그녀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사건의 실마리를 찾았으니,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이제 마누스도 사건이 어떻게 돌아갈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대로 흘러갈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변수가 생겨 그를 사지로 몰아넣을지.
그가 할 수 있는 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쏟아붓는 것뿐.
부디 다가올 재앙과 시련이 그의 한계를 뛰어넘지 않길 바랐다.
* * *
기록 보관소.
이곳은 원작 스토리에서도 알라노 홀로 들어갔다는 내용만 나왔을 뿐.
실제 게임에서 묘사된 공간은 아니었다.
주인공은 같은 시각, 외부에서만 활동했었으니까.
"나도 여긴 처음이네."
"학생회장인데도 들어올 일이 없었나 보네요."
"맞아. 이곳은 서기관들만 들어올 수 있거든. 이사장님하고 총장님도 포함."
그녀는 학생회장이 할 일은 딱히 대단치 않다고 덧붙였다.
사실 만만치 않은 일을 처리하고 있었지만, 가문에서 부모님이 처리하는 일을 보았던 그녀에겐, 진짜 별것 아닌 일들이었다.
"빨리 찾아보자. 우르르 몰려와서 파헤치면 안 좋은 소리가 나오거든."
"네."
"여기선 마법도 쓸 수 없으니까, 손수 찾아야 해."
조작과 분실, 그 밖에 다른 보안의 이유를 들어서 이곳은 마법 자체를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 아카데미 전체가 뒤집힐 만큼, 보안이 상당한 곳이었다.
이사장의 허락이 없었다면, 절대 들어올 수 없었을 곳이기도 했다.
학생들은 발 빠르게 움직여, 기록들을 훑어봤다.
마누스 역시 한 손 거들었다.
여기선 [둑스] 마법도 쓸 수 없었으니, 손수 찾아야 한다.
'그래도 대충 어디 있는지 알고 있지.'
<21년 전 기록부에서 이걸 찾았어.>
실제 알라노의 대사였다.
그 기억을 더듬어 자료를 찾아 나섰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마누스는 정확한 단서가 들어 있는 문서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눈을 빛내며 기록을 천천히 훑어봤다.
자잘한 사건 사고를 기록하는 곳에서 문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21년 전 사건이었다.
'...결국, 이때 시체를 발견했군.'
변사체로 발견된 두 명.
이름도, 신변도 알 수 없는 변사체 둘이 발견되었다는 보고였다.
역시 그가 아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알라노 역시 이걸 근거로 들어, 아직 두 사람이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지.
이것이 탑에 있는 데몬을 죽여야 하는 이유였다.
인물과 단체가 행동하게끔 만드는 동기부여.
꽤 무거운 주제였고,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지 알려 주는 시점이기도 했다.
화면 밖에서 볼 땐 그저 한 편의 잘 짜인 각본에 불과했지만, 직접 마주하니 그들의 감정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하긴, 이들은 어리지. 30대인 나도 죽음을 받아들이기엔 힘든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특별한 능력, 그것도 다른 이들과 다른 시간을 산다는 것만으로 모든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
죽음과 마주하고, 멸망을 막아 내야 하고.
수도 없는 사건에 휘말려,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하는 운명이다.
기록부의 공백을 바라보던 마누스는 이내 부정적인 생각을 접었다.
남들은 경험할 수도 없는 곳, 남들은 겪어 보지 못할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
"찾았다."
"-정말?"
"역시, 선배."
조용조용, 그러나 확실한 감탄을 하며 동료들이 몰려왔다.
마누스는 밝은 얼굴의 동료들을 보며 기록을 내주었다.
예전 기록을 살펴본 알라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멜라니 말이 맞았어. 이것만으로 단정 지을 수 없지만, 가능성은 충분해."
"그렇다면-."
"아마 죽으면 모든 기록이 말소되고 시체가 되는 모양이야. 탑의 저주겠지."
"...끔찍하네요."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렸고 모두가 공감했다.
사건의 실마리를 찾았다.
이젠 더욱 구체적인 해결 방법을 모색할 시간이었다.
마누스는 어떻게 하면, 이들이 더욱 효율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이 게임을 관통하고 있는 문장을 생각해 냈다.
모든 답은 탑 안에 있다.
'이 녀석들을 모두 탑으로 보내야겠군.'
그의 가정이 맞는다면, 아마 더 위로 올라가는 관문이 열렸을 것이다.
파수꾼을 처리하고 이들을 더 높은 곳으로 올려 보낸다.
그사이, 자신은 밖에서의 일을 처리한다.
시간이 난다면, 자신 역시 탑에 들러 마석 결정 노가다를 실시한다.
아주 완벽하고 멋진 시나리오였다.
항상 계획은 그럴듯한 법.
일단 실행에 옮기고 나서 변수에 대처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나와 아덴이 이 일을 조사해 주지. 너희는 탑으로 가라."
"탑이요?"
"모든 것은 탑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러니, 그 해답도 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마누스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제66화
- DLC가 너무 혜자다
* * *
보스.
어떠한 조직의 우두머리, 혹은 실력자, 상사, 지배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
현대에 와서, 이 '보스'라는 단어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이 보스라는 단어가 가장 널리, 그리고 대중적으로 쓰이는 매체는 단연 게임일 터다.
마누스는 이 게임의 수많은 보스들을 꿰고 있었다.
데이터마이닝으로 알아낸 패턴, AI, 스킬.
어떤 패턴을 사용하고, 파훼법은 무엇인지까지.
'그런데 지금은 도통 모르겠단 말이지.'
밤이 되었다.
마누스는 아덴과 함께 교정을 거니는 중이었다.
그의 발 앞에는 희미한 선이 길을 안내해 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이 마법도 피어슨에게 알려 주긴 해야 할 거다.
아니면 이미 본능적으로 터득하려 할 수도 있겠지.
계기만 던져 준다면, 피어슨은 홀로 충분히 둑스 마법을 익히겠지.
"이쪽으로 가면 뭐가 나올까요?"
"아마."
"공자님은 항상 확신에 차서 움직이시네요."
발걸음 소리조차 죽이며 걷고 있는 아덴.
그녀가 한 발자국 앞서 걷지 않았다면, 유령과 대화하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아덴은 신기한 듯, 달빛을 받아 빛나는 눈빛으로 마누스를 바라봤다.
그는 항상 앞서 움직이고, 정확하게 움직인다.
마치 미래를 알고 있는 것처럼.
아덴은 그런 마누스에게 무한한 믿음이 생겨났다.
"진짜 미래를 볼 수 있으면 좋겠어."
"후후, 그런 사람은 신이라고 불리겠지요. 인간이 어찌 그러겠습니까."
아덴이 뒤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다.
마스터인 자신조차 일개 학생에게 패배했다.
지금에서야 일개 학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때는 그랬으니까.
마누스 역시 완벽하게 모든 것을 대처할 순 없다.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거 아닌가.
"공자님은 저만 믿으시지요. 어떠한 변수가 발생하든,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고맙군."
아덴의 눈동자는 결연했다.
마누스는 그녀가 보내는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항상 약속을 상기했다.
그녀는 이제 원하지 않는 전투에서 빠지게 될 것이다.
설령, 그것이 마누스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라고 해도.
그럴 리는 없겠지만, 진짜 중요한 길목에서 그런 일이 발생한다고 하면 마누스는 주저 없이 그녀를 보내 주리라.
마음을 다잡고 앞으로 나아가길 한참.
"여긴...."
"왜 이쪽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군."
아직 드문드문 불이 켜진 곳.
게임의 주 무대가 되는 본관과 달리, 스토리에선 그저 저장 공간으로나 쓰였던 곳.
거대한 기숙사의 건물 안쪽으로 [둑스] 마법의 희미한 빛이 이어졌다.
마누스는 품에 넣어 두고 다니던 회중시계를 바라봤다.
이제 곧 12시.
왠지 둑스 마법이 이 시간까지 빙빙 돌려 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데몬이라는 것들이, 기숙사에 침입한 것이 아닐까요?"
"끌고 나올 수 있겠지."
이면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은 웬만해선 티가 나지 않는다.
허나 같은 공간에 심각한 피해가 발생하면, 흔적이 원래 세계에도 남는다는 것이 설정.
물론, 탑은 제외였고, 거긴 완벽하게 독립적인 공간으로 취급된다.
게임 속 세상이니, 자세한 원리까지는 몰랐다.
어쨌든, 기숙사 내부에서 날뛰면 좋지 않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물론 이사장에게 말하면 금방 처리될 테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욘 없었다.
"제가 잠입해서 유인해 볼까요?"
"그것도 좋은 방법이로군."
"공자님은 전투준비를 끝내 주시길."
그녀가 생긋 웃고 스르륵,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마누스는 마법을 점검하며 이면 세계를 바라봤다.
오직 붉은 달빛만이 세상을 비추는 공간.
이 세계의 기원은 무엇일까.
'차차 알아갈 수 있겠지.'
마누스는 생각을 정리하고 전투준비를 마쳤다.
둑스 마법은 여전히 기숙사 안쪽을 가리켰다.
마누스는 알비온을 어깨에 올리고 차분히 기다렸다.
'이번에도 보스가 나올까.'
[DLC 스토리가 시작되었습니다.]
[자신만의 운명을 개척하세요.]
[S3 - 앞당겨진 재앙]
[보상 : 모든 스킬 습득 시간 - 5% / 사역마 경험치 부스트]
보상이 제법인데?
5%는 큰 그림을 위한 보상이겠지.
그리고 사역마 경험치 부스트.
이것 역시 제법 큰 보상이었다.
"DLC가 혜자긴 혜자야. 그렇지?"
[호잉-!]
솜뭉치가 폴짝폴짝 뛰며 긍정했다.
무어라 말하는지는 알고 있는 걸까?
평소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그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피어났다.
뭇 사람들이 본다면, 절로 얼굴을 붉힐 정도로 푸근한, 아빠 미소였다.
확실히 알비온의 존재감은 마누스의 날카롭고 단단하던 이미지를 많이 희석시켰다.
신수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이 작은 생명체는, 마누스에게 애교를 부리며 놀아 달라고 보챘다.
옛날, 강아지 한 마리도 못 키웠던 여건이 생각났다.
'지금이라도 잘 키워 주마.'
사무치게 외로워, 반려견이라도 키워 볼까 했었다.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정보를 확인하던 중, 자신 같은 사람은 절대 반려견을 키워선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지.
지금은 다르다.
사역마는 마나라는 영양분만 있으면 따로 밥을 챙겨 줄 필요도, 산책을 시켜 줄 필요도 없다.
배변 훈련을 할 필요도 없고, 어딜 데려간다고 해서 제재를 받는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반려(伴侶).
평생을 단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였다.
"마법은... 대충 버프 마법이랑 치유 마법인가."
[호잉!]
1클래스 수준이지만,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될 거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상태 창 같은 건 없었지만, 머릿속에 상태 창처럼 떠오르는 정보는 있다고나 할까.
손에 올려 두고 조금 놀고 있자, 기숙사 안에서 급격하게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마 아덴이 표적을 발견하고 움직인 거겠지.
다른 이들은 탑에 들어갔고, 자신은 홀로 이상 현상을 조사하는 중.
'어디, 얼마나 성장했는지 시험해 볼까.'
항상 'DLC' 스토리에선 새로운 진실이 드러나거나, 전혀 모르는 사건이 하나씩 진행되었다.
이번에도 똑같겠지.
본편 스토리에선 풀어내지 못했던 것들을 풀어낼 것이다.
언제든지 마법을 펼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쳤다.
곧, 섬뜩한 마나가 느껴졌다.
콰앙-!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날렵하게 등장한 아덴.
"공자님. 꽤 덩치가 큰 녀석들이네요. 적은 둘입니다."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여성 영웅들이 할 법한 착지자세로 안착한 아덴.
쿠웅-.
곧이어, 정문으로 나오는 가면이 보였다.
마누스는 기숙사 안쪽에서 등장한 가면의 정체를 인식하곤, 입가를 비틀었다.
다시 보스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
보스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곳은 게임.
보스는 게이머에게, 정말 다양한 경험을 제공한다.
"골치 아프군."
"어떻게 할까요?"
다양한 경험, 다양한 체험이 그 게임의 볼륨을 결정짓는다면, 이번 DLC는 아주 성공적이라 할 수 있겠다.
비록 현실이고, 한번 실패하면 끝이라는 스릴감도 곁들었지만 말이지.
[케케-!]
기묘한 울음소리가 오감을 자극했다.
다섯 개의 팔.
각 팔에 달린 무기들.
전신을 뒤덮고 있는 갑주.
설마, 여기서 저 아르카나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마누스는 비틀린 웃음을 더욱 짙게 만들고 마나를 끌어 올렸다.
가면 위에 선명하게 쓰여 있는 로마자는, 비탄과 재난, 불명예를 상징한다.
"저 녀석들에게 물리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어머, 저도 물리 공격만 할 줄 아는 건 아니랍니다."
"보조 부탁하지. 약점 속성은 얼음, 그리고 어둠 속성이다."
아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품에서 단검 하나를 꺼냈다.
암살자라 마법에는 문외한이지만, 그들도 마나에 속성 정도는 담을 수 있었다.
그녀는 여유롭게 단검을 돌리며 물었다.
여기선 자신이 나서는 것이 맞을까?
"정말 보조만 해도 될까요?"
"네가 나서면 시시하지."
마침 시험해 보고 싶은 것도 있으니-.
마누스의 결정을 들은 아덴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데몬들에게 달려 나갔다.
훗날 잡몹 수준으로 떨어지지만, 지금은 까마득하게 높은 수준의 데몬.
로마자 16은 '탑'의 아르카나를 의미했으며 평균 레벨 50을 훌쩍 뛰어넘는 괴물들이었다.
까드드득-.
손에서 피는 얼음꽃이 아닌, 대기 중의 수분에서 꽃이 피었다.
'처음 시도해 보는 거지만-.'
"시간 좀 걸릴 거다."
"괜찮답니다. 놀고 있지요."
나름 이벤트 보스로 나온 것 같은데, 어림도 없지.
말 그대로 이벤트일 뿐, 진짜 보스만큼 임팩트가 있진 않았다.
거기다가, 저 가면은 오르카의 목걸이를 각성시키는 재료 중 하나이기도 하다.
빵빵한 지원과 적절한 보스.
게다가 트리플 캐스팅을 완성한 지금, 이제 그걸 시도할 수 있다.
수많은 레시피가 뇌리에 떠올랐고, 메뉴판에서 음식을 고르듯 적당한 것을 선택했다.
"읏차-."
반면, 검은 마나를 휘두르는 아덴이 두 보스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그녀의 전투 기술은 마누스조차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날카롭다.
지성 따위는 없는 데몬이 무얼 하겠는가.
마누스는 마음 편하게 캐스팅에 집중할 수 있었다.
고오오오오오-.
가공할 정도의 마나가 휘몰아쳤다.
마스터인 아덴도 깜짝 놀랄 만큼.
'다시 보는 거지만, 역시 대단한 사람이네요.'
후웅-!
데몬이 거칠게 무기를 휘둘렀지만, 그녀의 그림자도 쫓지 못했다.
데몬들이 마나를 의식해서일까, 둘 중 하나가 마누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틈을 놓칠 아덴이 아니다.
"어딜 가려고."
[케엑-!]
그녀의 단검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죽이진 않았지만, 시선을 끄는 덴 충분한 공격.
깔끔하고 정확한 공격은 다시 어그로를 끌었다.
그사이, 세 개의 마법진을 완성한 마누스는 한 차원 높은 경지에 오르길 원했다.
본래 이 게임의 주인공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
하지만, 작금의 주인공보다 훨씬 높은 이해도를 가지고 있는 마누스의 능력.
"이제 되셨습니까?"
"그래-. 적당히 몰아주면 된다."
세 개의 마법진이 공명한다.
얼음 속성 두 개.
바람 속성 하나.
비록 2클래스의 마법이었지만, 그걸 골자로 만드는 새로운 마법은 2클래스가 아니었다.
[트리플 스프레드]
[글라치에] - [글라치에] - [아니마]
[결과물 : 보레아스]
마법진이 쪼개져, 새로운 문양을 만들었다.
암녹색의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새로운 마법진은,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북풍을 불러냈다.
두 개의 마법이 아닌, 세 개의 마법을 합쳤다.
2클래스 3개의 마법은, 순간적으로 5클래스에 버금가는 위력을 만들어 냈다.
기본적으로 트리플 캐스팅을 달성해야 이룩할 수 있는 기적이다.
지금 마누스의 실력으로도 이것이 한계일 정도로, [트리플 스프레드]는 기적에 가까운 마법이었다.
"피해라."
"-어머."
콰자자자자작-!
북풍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얼려 버리지 않는다.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상대방이 인지한 순간은 이미 늦었다.
게임에선, 이 능력을 도트 대미지로 구현했었지.
현실에선 어떤지 궁금했다.
저 건방진 침입자들이, 어떤 형태로 죽어 갈지.
[켁?]
"저런 마법은 본 적이 없는데, 독자적인 마법인가요?"
"그런 셈이지."
새하얀 입김이 나왔다.
겨울이 한참 전에 지나갔는데도 한겨울보다도 시린 바람이 불었다.
그 중심에 있는 건,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얼음 나무.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자란 새하얀 나무가 이곳을 겨울로 만들었다.
탑에 핀 얼음꽃이 단단한 탑을 무너뜨리는 광경은, 그야말로 황홀경이었다.
제67화
- 시나리오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 *
마나가 흐려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데몬을 가둔 마법은 지속해서 생명력을 빼앗았다.
가면이 얼어서 깨지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각종 스킬로 떡칠된 마누스는 50레벨의 화력을 훌쩍 넘기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2회 차에 걸맞은 능력이랄까.
아덴은 몸을 아릿하게 찌르는 감각에 팔뚝을 쓰다듬으며 감탄했다.
'이게 공자님의 고유 능력.... 지난번에 보여 주었던 능력과 이 능력을 합치면....'
순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다음은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직 십 대 후반이 맞나 싶을 정도로 거대한 힘.
아직은 앳되고 어린 공자님이 대성한다면, 어느 경지에 올라 세상을 바라볼지 궁금했다.
자신은 감히 오르지 못할 곳에 올라, 세상을 오시하겠지.
전신이 쿵쿵 울릴 정도로 짜릿한 기분이 아덴의 전신을 지배했다.
"-주변에 느껴지는 기척은 없습니다."
"우리도 탑으로 가지."
"-예."
마누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문득, 두 개의 탑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었다.
어둠으로 물든 지구라트와 달빛을 받아 밝게 빛나는 기숙사.
빛과 어둠으로 대비되는 두 개의 세상을 암시하듯, 전혀 다른 명암을 가지고 있는 쌍둥이 탑.
문득, 그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빛으로 보호받고 있는 탑도, 어둠으로 물든다면-.
'아니, 그건 예정되어 있지 않은 일이잖아.'
지금 해결해야 할 문제는 새로운 전력인 에머슨을 구하는 일이다.
그녀가 있어야 앞으로의 등반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
그뿐이랴.
그는 스토리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맡는 아이다.
'루페라... 그 이름이 계속 걸리는군.'
루페라.
본편에서도 등장한 적 있는 이름이다.
그저 지나가던 엑스트라 정도로 나왔던 이름.
선택 퀘스트로 지나갔던 그녀의 이름이, 왜인지 모르게 따갑도록 그의 인식을 찔러 댔다.
어쨌든, 탑으로 들어가 보면 알 수 있을 거다.
모든 답은, 탑으로부터 나오는 법이니까.
* * *
어둠 속에서 눈을 떴을 때, 느껴지는 것은 격통이었다.
어딘지 모를 공간.
차가운 공기와 숨을 쉬기 힘든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목소리를 내 봐도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다.
붉은 달이 보였다.
손을 뻗어 봤지만,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대체 여긴 어디야.'
여인은 창문을 통해 주변을 둘러봤다.
분명 익숙한 풍경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이따금 옥상에 올라가 보는 정경이 생각났으니.
아마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어째서 세상이 이렇게 변했으며 이 수수께끼의 공간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
왜 자신은 이곳에 있는지도 알아내야겠지.
'학교인 건 분명한데.... 누가 납치했나?'
기억이 깡그리 날아갔다.
마지막 기억이라고는 그저 수업을 받고 숙제를 하고, 잠들기 위해 침대로 올라갔던 것뿐.
그 이후 눈을 떠 보니 이곳이었다.
"으음-."
그녀는 눈을 감았다.
마나를 집중해, 특기를 펼쳤다.
광범위하게 깔리는 마나가 건물을 샅샅이 훑었다.
그리고-.
"이, 이게...."
느껴지는 모든 것에, 그녀는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어마어마한 공포가 온몸을 옥죄었다.
이곳이 아카데미이긴 한 건가?
혹시 몽마의 마법에 홀렸나?
그것도 아니라면,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숨이 거칠어지고, 눈앞이 노래졌다.
"말도 안 돼...."
덜덜 떨리는 몸은 쉽사리 명령을 따라 주지 않았다.
느껴지는 기척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움직여, 거대한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흡-.
숨을 참았다.
들려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녀는 마법사였지만, 전투와는 거리가 멀었다.
'왜 하필-.'
눈물이 찔끔 흘렀다.
짧게 숨을 끊어 쉬며, 제발 발견하지 말라고 빌었다.
프라이머리 에머슨.
예로부터 '길잡이의 가문'이라고 불렸던 곳의 차녀, 에머슨.
그들의 특기는 전투가 아닌, 수색, 색적, 광범위한 탐지와 적의 파악이었다.
그 짙은 피는 에머슨에게도 이어져 내려와, 그녀는 최고의 길잡이를 꿈꿨다.
'적대적 감정은 없어. 그냥 지나가는 것뿐이야.'
터벅-.
터벅-.
소리가 가까워진다.
기둥을 스쳐 지나가는 발걸음 소리에, 에머슨은 숨을 멈췄다.
쿵쾅쿵쾅 뛰는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터벅-.
터벅-.
기척이 멀어진다.
발소리 역시 멀어진다.
그녀는 가늘고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떻게 하지?'
다시금 눈을 감고 집중해, 건물을 훑는다.
무수히 많은 생명체, 아니... 이걸 생명체라고 불러야 할까.
그 수많은 존재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의 절망은 커져만 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는 그들을 피해 갈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것.
누군가 구해 줄까?
'여기서 죽을 순 없어.'
억울하게 죽는 건 사양이었다.
그래.
날이 밝을 때까지만 버티자.
그러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에머슨은 마음을 다잡고 움직였다.
여기는 위험해.
이 괴물들이 가지 않는 곳이 있을 것이다.
그곳을 찾아 들어가야 했다.
* * *
"읍-"
여기, 평민 출신의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루페라.
불편해서 일어나 보니, 온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입은 막혀 있었고, 온몸은 결박당해 있었다.
흐릿한 시야에는 낯선 인물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의 소리를 들었음일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인물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일어났구나."
아니, 그 목소리는 낯설지 않았다.
이제 또렷해진 시야에 보이는 사람.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그녀는 분명, 루페라도 아는 사람이었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탓에,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루페라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가 쿡쿡 웃었다.
놀라고 있는 루페라의 눈빛을 즐기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놀라운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졌다.
"밖에 나가고 싶지? 그런데 어쩌나. 지금 밖에 나가도 널 기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읍-. 으읍-!"
그게 무슨 소리냐고, 나는 황금 뱀 반의 A반이라고 소리쳤다.
입이 막혀 있었지만, 그녀는 어째서인지 눈빛만 보고도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유추한 것 같았다.
부드러운 손길이 루페라의 볼을 쓰다듬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나는 지금, 여기서 죽는 걸까?
그의 눈은 쉴 새 없이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렴. 너는 정말 드물고 신선하고... 아무튼 귀한 사람이니까. 멋대로 해칠 생각은 없단다."
"읍-!"
그럼 풀어 주든가-!
루페라는 온몸을 옥죄고 있는 구속을 풀기 위해 마나를 일으켰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나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법사에게 있어, 마나가 움직이지 않는다니.
싸움 좀 한다는 일반인보다도 나약한 것이 마나 없는 마법사다.
루페라는 절망감에 휩싸여, 고개를 떨어뜨렸다.
멀쩡히 자고 일어났는데, 이게 무슨 꼴인지....
그의 감정은 절망에서 분노로, 분노에서 체념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너무 감정을 죽이지 말렴. 곧 풀어 줄 테니까. 얌전히 있겠다고 약속한다면 또 모르지. 지금 바로 풀어 줄지. 아, 얘기는 좀 해 볼까?"
그녀가 손을 흔들자 단단히 막혀 있던 입이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숨통이 트이자, 루페라는 절규하듯 말을 쏟아 냈다.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보내 주세요,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 저는 아무런 잘못도 안 했다고요!"
"착하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함부로 귀족 가문을 건들 수 없거든. 네 출생이... 알잖니?"
"평민이기 때문에... 저를 이렇게 만든 겁니까?"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민.
귀족들의 행패가 사그라들고, 평민을 위한 정책들이 많이 생겼다곤 하지.
작금의 시대는 평민이 살아가기 편한 시기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
언제나 밑에 있는 자들은 귀족들을 떠받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할 뿐.
밑거름 되는 것이 평민들이라는 점은 아직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 요즘 귀족 가문들은 평화에 찌들어서 그런지, 너무 덩치를 불렸거든. 참 이상하지?"
"...."
루페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네가 평민이기 때문에.'라는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을 뿐.
여인은 귀족들을 향해 조소를 지었다.
그 비틀어진 사상이 그리는 미래는 무엇일까.
루페라는 분노와 살겠다는 공포 대신, 궁금증이 머리를 조금씩 채우는 걸 느꼈다.
평민이기 때문에 자신을 데려왔다고?
'그렇다면, 날 어딘가에 써먹겠다는 얘긴데.'
밖에 나가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얘기는 또 뭘까.
호기심.
누군가는 그 호기심이 파멸을 불러온다고 하지만, 조금이라도 생각할 수 있는 생물이라면 호기심은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루페라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저를 죽이려고 하는 건 아니죠? 실험에 쓴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죠?"
"어머, 그런 섭섭한 말씀을. 내가 너를 이곳에 부른 건, 모든 이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란다."
"아카데미에선 제가 없어졌다는 걸 알고 있을 거예요."
아카데미의 힘은 일개 가문, 혹은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 위대한 가문들조차, 아카데미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니.
역사 공부를 하며 느낀 바가 많다.
루페라는 미토스 아카데미가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는 것쯤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숨겨진 공간 하며, 궤를 달리하는 교수진.
대체 어떻게, 어디서 튀어나오는 건지 모를 자금.
"괜찮단다. 이곳은 우리가 지내 왔던 세계와 전혀 다른 곳이거든. 음... 일종의 틈새라고나 할까?"
"틈새...요?"
"오직 선택받은 사람만이 이런 특권을 누릴 수가 있지. 그리고 나는, 선택받지 못한 자들을 강제로 틈새로 이끌 수 있는 수단을 알고 있단다."
"그래서, 아카데미에선 절 못 찾는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지.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녀는 루페라에게 달콤한 과실을 내밀었다.
그 달콤한 혀가 속삭이는 밀어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대체 어떤 마법사가 힘을 추구하지 않는가.
대체 어떤 평민이 입신양명의 꿈을 꾸지 않겠는가.
루페라에게 내어진 손은, 그를 절망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었다.
"어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힘을 키우는 거야. 그리고 그 잘난 인간들에게 네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 되었는지 보여 주는 거지."
"정당한 방법으로 키운 힘이라면...."
"그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방법으로 힘을 키울 수 있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루페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인간은 항상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설령, 자기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갈 결정이어도.
루페라는 입을 열었다.
여인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제68화
- 침입자의 정의
* * *
탑.
마누스를 제외한 모두가 탑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여섯 시간.
황금빛 시계가 허락한 시간을 모두 사용했지만, 에머슨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의 표정은 딱딱해졌고, 말은 점점 없어졌다.
묵묵히 자신이 할 일만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모두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에머슨에 대한 걱정, 다음 희생자가 반드시 나올 것이란 공포, 혹여 그 희생자가 자신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에머슨, 대체 어디 있는 걸까.'
케일은 가장 앞에 가는 알라노의 은빛 머리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디 있는 거야-.
에머슨을 찾지 못한다면, 왠지 모를 죄책감에 시달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도 알고 있다.
여기 있는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저 사고였음을.
하지만, 어리고 순수한, 아직 학생인 이들에게 이 부담감은 실로 무거운 것이었다.
오죽하면 그 말이 많던 피어슨도 무겁게 침묵했을까.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하아-."
"조금만 더 찾으면-."
알라노도 같은 마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찾고 싶었다.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 계속 이 탑을 오르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탐색은 많은 체력과 정신력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그녀의 눈에도 지금 후배들의 상태는 심각했다.
이런 상태에서 탐색을 강행했다간, 이들도 사고를 당하겠지.
"다들 피곤하니까 일단 쉬어야 해."
"하지만...."
"기약 없이 탑을 헤매다 우리도 당하면? 길게 보자 얘들아."
알라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이 맞다.
그런 말을 하는 알라노의 눈빛과 표정 역시, 편치 않았음을 모두가 보았다.
멜라니는 분한 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케일은 공허한 눈동자로 주변을 훑었다.
'내일 그녀가 시체로 발견되면 어쩌지-'라는, 끝없는 불안감.
그들의 불안감을 조금 덜어 주기 위해, 아나이스가 애써 입을 열었다.
"괜찮아. 프라이머리 가문이잖아."
"프라이머리 가문.... 맞아요. 희망은 있겠네요."
"문제는 다른 한 명이지."
에머슨은 특유의 능력을 살리면 희망이 보였지만, 문제는 루페라였다.
그는 평범한 마법사.
가문의 피를 물려받지 못한, 전형적인 공격형 마법사였다.
어디에 속해도 제 몫을 충분히 해낼 수 있지만, 그 이상 올라가기엔 매우 힘든.
그렇기에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을 거다.
끊임없이 헤매다, 계속 몰려드는 데몬들을 상대할 것이다.
그러다 체력과 마나가 고갈되어 쓸쓸하게 죽어 가겠지.
"-가자."
"내일은, 꼭 찾아요."
"그래야지."
그들은 하루 만에 친구가, 선배가 죽지 않을 것이란 희망을 품고 탑을 나섰다.
돌아가는 길, 알라노는 1학년들에게 당부를 거듭했다.
그녀의 눈길이 지친 영혼들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푹 쉬어. 너희들이 지치면 안 돼."
"선배도, 푹 쉬어야 해요."
케일의 입이 달싹이며 알라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알라노는 더없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내일은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꼭 그렇게 하자고 다짐하고 헤어졌건만, 머릿속은 왜 그렇게 복잡한 것인지-.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가 뜬눈으로 밤을 보내야만 했다.
* * *
다음 날.
케일은 퀭한 눈을 비비며 가까스로 기숙사에서 벗어났다.
몸이 으슬으슬한 것이, 감기 기운이 좀 도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여러모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기숙사 앞에서, 아나이스와 멜라니가 터벅터벅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둘 역시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왠지 동질감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안녕-. 잘 잤어?"
"-아니."
"우리도 그래. 어휴.... 일단 가자."
교정으로 향하는 길에, 그들은 피어슨을 만났고 마누스를 마주쳤다.
일부러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우두커니 서 있는 마누스.
귀여운 솜뭉치 하나를 어깨에 올리고 있는 그의 모습은, 어젯밤 지독히도 그들을 괴롭혔던 불안감을 씻어 내는 청량함을 가지고 있었다.
케일은 그의 모습을 바라보자마자 괜스레 웃음이 피어났다.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숨길 수 없는 생리 현상이랄까.
그녀의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선배에-."
"왔군."
오늘따라 케일의 눈이 퀭하고, 표정은 잔뜩 풀어져 있었다.
혹시 어젯밤, 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닐지 걱정되는 마음에 한마디 건넸다.
"현혹이라도 당한 건 아니겠지."
"그런 거 아녜요. 단지, 잠을 못 자서...."
"걱정 마라. 시체가 나왔다는 보고는 없으니."
케일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침 일찍, 이사장에게 향했다.
시체는 오전 여섯 시에 교정 어딘가에서 발견된다.
다행히도 오늘 아침, 그 어디에서도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는 없었다.
일이 생겼다면 아덴이나 이사장이 제일 먼저 그들을 불러냈을 것이다.
하루를 무사히 넘겼다.
"수업 잘 듣고, 퍼지지 않게 조심해라."
"네에-."
"선배는 괜찮아요?"
걱정해 주는 물음에,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다가온 아나이스가 살갑게 물은 것.
요새 부쩍 그녀는 마누스에게 살가웠다.
평소 성격도 친근감이 넘치는 아가씨였지만, 그때의 면담 이후 더욱 쾌활해졌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긍정적인 변화였다.
마누스는 친근하게 다가오는 이들의 표정 속에서, 참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음을 느꼈다.
[간섭을 시작합니다.]
이런 말 한마디도 간섭에 포함되는 건가.
어떻게 해 주어야 할까.
무슨 말, 무슨 표정, 무슨 행동을 해야 이들에게 힘을 줄 수 있을까.
"힘든 일 있으면 얘기해라. 알라노나 나에게."
"-정말요?"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