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르르륵-!
화염의 정령이 힘을 주었다.
[인챈트 : 샐러맨더]
멜라니의 분홍 머리칼이 붉게 물들었다.
화염의 정령, 그 자체가 되어 버린 멜라니의 일격.
데몬들은 화염에 휩싸여 펑펑 터지기 시작했다.
"...이야, 진짜 대박이네."
"무사한가."
뒤쪽에서 마누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척이나 반가운 소리였다.
피어슨이 푸후-.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아봤다.
"선배. 진짜 죽다 살아났습니다요. 근데 정령의 힘이라는 게... 저렇게 무지막지한 거였습니까? 워낙 희귀해서야 원-"
"확실하게 보조해라. 이제 아나이스와 케일을 찾으러 가야 하니까."
"알겠슴다."
마누스가 전투에 가세했다.
콰르르르-!
3클래스 마법이 전장을 휘저었고, 데몬들이 순식간에 녹아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리비가 털썩, 주저앉았다.
멜라니의 찬란한 모습을 보며, 그녀는 뚝뚝 눈물을 흘렸다.
옆에 있던 피어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보고 있냐? 저렇게 멋있는 애를 죽이려고 한 거야, 넌."
"아니야...."
"으휴. 네가 열심히 해서 극복할 생각을 해야지, 남을 끌어내리면 너도 같이 추락하는 거 모르냐?"
리비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은 어떻게 될까.
멜라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여러모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윽고, 전투가 끝났다.
마나를 상당히 많이 소모한 멜라니가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속이 다 시원한 전투였다.
마음속에 있었던 응어리가 씻은 듯이 없어진 기분.
-정말 상쾌했다.
"선배. 감사합니다."
"저 애는 어떻게 할 거지?"
멜라니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처연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리비가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 은은한 분노가 깃들었다.
『이벤트 분기점』
[멜라니 각성 → 정령사]
[멜라니가 동료로 합류했다.]
제31화
- 인생이 망하는 건, 꽤 쉬운 일이다
* * *
아나이스와 케일은 환상적인 호흡으로 적들을 무찔렀다.
마석과 아티팩트가 꽤 많이 떨어졌다.
두 사람이 옮기기엔 과할 정도.
"후아... 이거 어떻게 다 옮기지?"
"주머니에?"
"으- 로브 터지겠네. 일단 되는대로 넣자. 나중에 아공간 주머니도 하나 사고."
케일은 주섬주섬 마석과 아티팩트를 챙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뭔지 알 수 있다면, 좋은 것만 추려서 갈 텐데-.
애석하게도 두 사람은 감정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평생 관련 없을 것 같았던 마법이, 이토록 필요할 줄이야.
같은 생각을 하며, 두 사람은 주변을 정리하고 통신을 넣었다.
"선배? 피어슨? 어디쯤이에요?"
"가고 있는 중-. 너희 둘만 합류하면 돼."
"길은 알고?"
탑에서 길을 찾는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일 텐데.
이렇게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경우라면 더욱.
피어슨은 마치 자기가 길을 찾는 것처럼 득의양양했다.
"에헴. 우리에겐 천하무적 만능 해결사, 폭군 마누스 선배님이 있잖아. 잘 찾아가는 중이니까, 걱정 말고 기다리셔."
"그, 그래. 그런데 옆에 계신 거 아니야?"
"맞아. 헉-."
통신은 그걸로 끝났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보나마나 주책맞은 피어슨이 또 한 소리 들었겠지.
아니면 버려졌거나.
"휴... 어쨌든 잘 끝난 모양이야."
"리비는?"
"-나도 잘 모르겠어. 선배가 왜 데리고 왔는지, 또 어떻게 할 건지."
"버리고 가려나?"
섬뜩한 말이었다.
탑 안에 갇힌다는 건, 실제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
간접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솔직히, 그런 걸 상상해 본 적은 없었다.
아나이스와 케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리비는 죄를 지은 것이 맞다.
하지만 그 죄의 무게를,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 맞는 걸까?
고민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 * *
네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특히 멜라니는 그 소심했던 아이가 맞는지, 살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 마누스는 멜라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저 아이가 금지된 약물을 썼더군. 침식이 일어나 이곳으로 끌려온 거다.>
<네가 선택받지 않았다면, 모두의 기억에서 잊힌 채 살아갔겠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그 공포감과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거다.
그러면서, 마누스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냥 두고 나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저 아이는 영영 이곳에서 헤매게 될 거다.>
<만약 이 탑에서 죽는다면... 우리 외에는 아무도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지구라트.
죽음의 신은 이곳에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다.
탑의 제물이 된 인간은 그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다.
그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되어 어딘가에 나뒹굴 뿐.
진정한 죽음.
탑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이들 외엔, 그 누구에게도 회자되지 않는 저주가 걸리는 것이다.
이토록 끔찍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그래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네 앞길을 막을 친구 아니야?
-지금부터 싹을 잘라 둬야 해.
-나 같으면 벌써 버리고 갔어!
역시, 정령들은 상당히 극단적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죽을 뻔한 자신에게 내리는 상이라고 하면 괜찮을까?
'그래도.'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어린 나이에 쉽게 되는 일이었다면, 이 세상 사람들 절반은 날아갔겠지.
멜라니는 정령들을 바라봤다.
'도움을 주는 건 괜찮은데, 결정은 내가 할 거야. 알겠지?'
-히히 좋아!
-문제없어!
-우리는 네 분신이야. 그러니 편할 대로 해.
멜라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 두 명의 학생이 보였다.
아나이스와 케일.
1학년 에이스들의 등장이었다.
두 사람은 일행을 발견하자마자 손을 흔들었다.
이젠 제법, 탑 안에서도 태연하게 움직일 줄 알게 되었다.
"고생했어! 선배도 고생하셨습니다."
"멜라니. 무사해서 다행이야."
케일은 가장 먼저 멜라니를 챙겼다.
주인공다운 행보였다.
이런 식으로 동료를 늘려, 나중엔 세계관 최강자 중 한 명이 되지.
'동아리가 아니라 거의 무력 집단이 되었지.'
멜라니는 케일의 환대를 받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절망적인 공간에서, 이렇게 밝은 미소를 지을 수 있다니.
이런 친구들 곁이라면, 즐거운 아카데미 생활을 이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덕분에 활활 타올랐던 증오심도 사그라들었다.
그래, 일단 내려가서 생각하자.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만 가득 찼을 땐, 절대로 그 생각을 따라가지 말거라.>
<시간이 흐르면, 머리는 자연스럽게 차분해질 것이다. 그때 다시 한번 생각해 봐라.>
좋은 조언이었다.
해리 가문이 왜 최고의 상인 가문 중 하나인지 문득 깨달았다.
멜라니는 깊은 한숨으로 안 좋은 생각을 뱉어 냈다.
"고마워. 구해 줘서."
"친구니까."
"-응. 친구니까."
전형적인 게임 안에서의 모습을 보며, 마누스가 작게 웃었다.
모니터 안에서 볼 때도 꽤나 소름이 돋았는데, 막상 옆에서 보니 그저 쓴웃음만 흘러나왔다.
[간섭을 확인했습니다.]
[현재 습득하고 있는 스킬의 소요 시간이 30일 줄어듭니다.]
'역시, 이런 식의 간섭은 도움이 된단 말이지.'
중요 캐릭터들의 사건을 해결하면, 이렇게 보상이 돌아온다.
그러니까, 결국 적극적으로 간섭해서 최대한 많은 스킬을 배우면 된다는 것.
이제 모두 모였으니, 내려갈 일만 남았다.
"시간 없다. 얼른 내려가지."
"-예."
리비에 대한 처분은 조금 더 유예하기로 했다.
모두가 그녀를 죽이는 것에 반대했다.
마누스 개인의 일이었다면, 가차 없이 죽였을 것이다.
조금은 답답하고 어리숙해도, 이들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는 지켜보는 자.
강요하는 자가 아니었으니까.
* * *
어찌어찌, 로비에 도착한 일행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남은 시간은 단 10분.
중간에 1층으로 통하는 포털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마 내일도 수업을 빼먹었어야 했을 거다.
"후아-! 겨우 끝났네. 멜라니! 진짜 잘 싸우던데?"
"고, 고마워."
"다시 소심하게 돌아왔네. 엄청 귀여워! 케일이랑은 또 다른 매력이네."
아나이스가 멜라니를 꽉 껴안았다.
멜라니는 쑥스러운 듯, 가만히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
리비는 아직도 혼이 나간 듯, 모든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결정해라. 라우어 리비는 어떻게 하고 싶지?"
"...아직 모르겠어요."
"죽이는 것도 방법이다."
"아뇨, 그건 싫어요. 하지만... 벌은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있어요."
멜라니는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어쩌면,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벌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악마가 인간에게 내린, 형벌의 도구라고도 말했다.
-계약서.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영혼을 걸고 하는 계약서.
멜라니는 리비를 용서한 것이 아니었다.
지극히 상인처럼 조치했을 뿐.
"죽어서는 빚을 갚을 수 없거든요."
"-좋은 생각이다."
썩 만족스러운 조치였다.
리비는 절망이 드리운 얼굴로 덤덤히 심판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가벼운 장난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순간이 끝났다.
일행은 무사히 탑을 나섰다.
알라노가 도착하면 탐사를 계속하겠지.
마누스 역시 계속해서 강해질 거다.
'멜라니. 예상보다 더 빨리 합류하게 되었다. 이것도 내 영향이겠지.'
스토리가 조금씩 빨라지고, 캐릭터의 성장이 미묘하게 빨라졌다.
탑 위로 올라가는 속도 역시 조금씩 빨라질 거다.
이벤트들이 발생하고, 다양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비를 더욱 단단히 해야 한다.
이제 곧 외부에서도 적이 올 것이다.
아카데미의 적은, 탑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오늘은 진짜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누구 때문에 아주 난리를 쳐 놔서 말이야."
"...미안해, 나 때문에-."
아나이스의 말에 뜬금없이 멜라니가 답했다.
으잉?
붉은 머리의 소녀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 너 말고! 저기 쟤 있잖아."
"...."
밤은 깊어만 갔다.
세 사람은 조잘조잘 떠들며 기숙사로 향했다.
마누스는 일렁이는 그림자를 발견하고, 그곳에 시선을 주었다.
누군가 이곳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빤히 쳐다봤다.
일렁이는 것은 금방 사라졌다.
마누스는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걸어가는 이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지, 태연하게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그나마 감지 타입은 피어슨뿐인가.'
오직 피어슨만이 고개를 한번 휘휘 돌려, 주변을 훑었다.
허나 마지막까지 발견하지 못한 듯, 다시 대화에 끼어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에 대한 간섭은 어디까지 해야 할까.
미리 싹을 자르기엔 아직 본인이 가진 힘이 너무도 나약하다.
답은 하나.
빠르게 강해지기 위해서는 다양한 루트로 캐릭터에 간섭해야 한다.
'그게 빌런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거라면...?'
마누스의 생각이 차근차근 정리되었다.
베로니카.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몇 없다.
그녀 역시 자신의 정체를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
베로니카 본인이 빌런으로 등장하는 데에는 많은 서사가 있다.
마음의 상처.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
'그걸 해결한다면, 거대한 전력을 우리 쪽으로 흡수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문제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도 거대하다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해결책은 작은 말에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거든."
아무도 들리지 않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마누스.
일행은 무사히 복귀했고, 다시 아침이 밝았다.
멜라니는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교수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밤새 동아리실에 있다가 잠들어서 감기에 걸렸는지... 낮에 기숙사에 들어가서 잤습니다."
"...그래. 몸은 괜찮은 건가?"
교수는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면서도 일단 그녀를 걱정해 주었다.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변명임은 알고 있었다.
허나 일이 잘 풀리고, 멜라니 역시 아무에게도 죄를 묻지 않았다.
이건 미토스 아카데미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교사는 학생의 개인적인 일에 시시콜콜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
직속 제자를 뽑는 것이 아니라면, 깊은 관여는 금물이었다.
"네, 지금은 말끔히 나았습니다. 수업도 열심히 들을게요."
"좋다. 어제 필기한 내용은 친구들에게 빌리도록. 몸이 안 좋으면 양호실에도 가 보고."
"감사합니다. 교수님."
멜라니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
여전히 그녀를 뒤에서 욕하고 다니는 이들이 있었고, 상인 가문이라며 무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멜라니 본인이 달라졌다.
"뭐라고 했니, 지금-?"
살벌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에 대한 불의를 용서하지 않는 이.
내면에 있던 감정들을 숨기지 않으며 지내기로 한 이상, 멜라니는 이제 소심한 아이가 아니었다.
"잘하고 있군."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마누스가 슬쩍 웃음을 지었다.
캐릭터의 변화가 빠르면 빠를수록, 세계의 평화는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누스를 지켜보는 이가 또 있었으니.
"...이사장님께 말씀드려야겠군요."
분홍빛 머리칼이 마누스를 바라봤다.
폭군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어제 있었던 일은 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그녀의 입장으로선 궁금한 점이 너무도 많았다.
[간섭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무렵, 마누스는 하나의 메시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누군가의 운명이 비틀리는 걸까.
그걸 알아내는 것 또한, 오롯이 그의 몫이리라.
제32화
- 하녀장 베로니카
* * *
아카데미의 일상은 여느 때와 같이 흘러갔다.
2학년 전원이 복귀했고, 알라노 역시 훌륭하게 그 임무를 완수했다.
해리슨이 내린 임무는 무려 언데드 소굴을 토벌하는 것.
그곳에서 알라노는 무지막지한 마법 실력을 뽐내며 멋지게 제 실력을 발휘했다.
변화는 곳곳에서 일어났다.
B반은 멜라니가 서서히 장악 중이었으며, 그녀도 탑에 대한 존재를 알았다.
"이상으로 보고를 마칩니다."
"이상 현상에 대한 조사라.... 아쉽지만, 그것은 나중으로 미뤄야겠네."
"-예?"
이사장실.
그곳에서는 베로니카가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기숙사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에서 일어나는 전반적인 일을 관리, 감독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하녀장의 역할은 생각보다 더 많았으며, 귀족들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 인물의 요청을 단칼에 잘라 낸 닉스 이사장.
그는 쓰고 있던 안경을 추켜올리며 상황을 설명했다.
"이제 곧 '코르푸스'의 밤이 시작되는 건 알고 있을 걸세."
"아 벌써 때가...."
"그때를 대비해야 하네. 죽음이 드리우고 있으니까. 미토스 아카데미라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지."
"이해했습니다. 그럼,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로니카가 고개를 숙였다.
닉스 이사장은 떠나려는 베로니카를 잠시 붙잡았다.
잠시 코르푸스의 밤에 대해 생각하느라 중요한 물음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는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제국 황실에선, 아직 움직임이 없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녀는 잔잔한 웃음을 보이며 문을 열고 나섰다.
이사장에게 보고한다면, 뭔가 확실한 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녀의 인상이 조금 구겨졌다.
항상 웃는 그녀의 표정에 금이 간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누군가 본다면, 또 이상한 소문이 돌겠지.
베로니카는 얼른 표정 관리를 하며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아-.'
저 멀리, 마누스가 걸어오는 중이었다.
혹시 봤으려나?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자신이 조금 한심했다.
본래 이런 곳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지?
자리가 사람을 바꾼다고, 항상 평화로운 곳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며 살다 보니 성격이 너무 유해진 건 아닐까 싶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공자님."
"좋은 아침."
기분 전환 삼아 인사를 건네니, 저쪽에서도 똑같은 인사가 돌아왔다.
그녀의 걸음이 다시 한번 멈췄다.
이상했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평범하다."
"인사를 건네는 것이 처음이라-."
마누스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
이 간 큰 튜토리얼 보스는, 세계관에서도 꽤 강한 축에 속했던 베로니카한테 겁도 없이 덤볐던 놈이다.
성격을 죽이고 사는 베로니카여서 망정이지, 시간이 조금만 어긋났어도 다음 날 시체로 발견되었을 것이다.
-요새 부쩍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 물론 이성적인 관심이 아니라 새롭게 변한 '마누스'에 대한 관심이겠지.
마누스는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랬군. 내 주의하지. 홀로 생각할 것들이 많아서."
"아, 그러실 필요는-."
"하녀장을 무시할 사람은 아카데미 내에 아무도 없지 않던가. 그럼."
그저 할 말만 하고 지나간 마누스.
하지만, 그 몇 마디가 베로니카에겐 정말 크게 다가왔다.
하녀장.
그 위치에서 근무한 지도 어언 10년이 넘어갔다.
남들이 이 아카데미에 들어올 나이가 되었을 때, 그녀는 이곳 하녀장으로서의 임무를 맡았다.
수도 없이 많은 귀족이 그녀를 깔보고, 하녀처럼 대했지만, 꾹 참아 왔다.
그중에 최악?
-단연코 카이사르 마누스라고 할 수 있었다.
'정말, 인격이 바뀐 것 같네.'
누군가 영혼이라도 집어넣은 것 같은 느낌.
설마 흑마법사의 술수에 말려서 강제 전이라도 당했으려나?
그러기엔 그의 실력이 너무도 뛰어났다.
"저렇게 대놓고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후후-.
말 한마디로 인해 이렇게 기분이 좋아도 될 일인가?
암살자로서 키워졌지만, 사람의 인격을 버린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인격을 버리지 않았기에 더 높은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무인에게도 감정은 중요한 요소였고, 기계적으로 수련만 해서는 경지가 올라가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녀는 마스터다.
-어린 나이에 올랐지만, 글쎄.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차라리, 오늘 있었던 인사가 더 인상 깊을 정도.
그녀에게 마스터란 존재는, 딱 그 정도였다.
* * *
이사장실에 들어선 마누스는 어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했다.
새로운 전력, 그리고 리비에 대한 처우.
탑의 조사까지 순조로운 상황이었으니.
닉스 이사장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오히려 전력이 늘어 버리는 꼴이 되었다.
라우어 가문은 결국 몰락의 길을 걷겠구만.
"잘해 줬네. 자네도 이번에 다이아 등급의 임무를 수행했다지? 축하하네."
"아닙니다. 이제 그 밤이 오겠군요."
"그렇네.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는 중이야."
[코르푸스의 밤].
통칭, 망자들의 축제.
유일하게 무언가를 지켜야 하는 이벤트이며, 전 대륙에서 가장 기피되는 시기.
21년 만에 돌아오는 축제의 밤이 딱 이 시기에 겹쳤다.
대륙의 망자들이 일시에 일어나, 산 자를 향해 원망을 쏟아 내는 이벤트.
그렇게 한번 후련하게 쏟아 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진다는 설정이다.
죽음의 신이 자신의 백성을 늘리기 위해 안배한 것이라고 하는데....
'개뿔, 그냥 그 당시에 타워 디펜스가 유행해서 그렇지.'
랜덤 어쩌구 디펜스.
그 당시 꽤 유행하던 게임이었다.
각종 만화를 소재로 한 디펜스 게임이었는데, 개발자가 그걸 감명 깊게 했나 보다.
순전히 억지 설정이었지만, 이벤트 안에 있는 내용만 놓고 보자면 꽤 잘 그려졌다.
탑을 등반하는 것이 아니라, 디펜스 게임으로 밀고 나가도 좋았겠다는 평가를 받았던 스토리.
본격적으로 세계관이 어두워지는 시점이기도 했다.
"조금 더 철저하게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미토스 아카데미는 제국의 황실군도 함부로 뚫지 못하는 곳이네. 걱정할 필요는 없어."
마누스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생각했다.
단순히 며칠 견디면 되는 수준이 아니다.
미토스 아카데미에 내린 재앙이 될 것이니까.
단순히 미래를 알고 있다는 말로는 개연성이 부족하다.
적어도 경각심 정도는 가지게 해야 할 텐데-.
그래, 그런 방법이 있었지.
"카이사르 가문에서 내린 계시이기도 합니다. 이번 밤은 아주 끔찍할 거라더군요."
"...카이사르에서?"
마누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능 치트 키 카이사르의 이름을 빌리면 된다.
그의 아버지는 인외의 경지인 7클래스 마법을 완벽히 익힌 남자다.
그가 싼 똥은 마나로 만들어져 있다고 해도 믿을 사람이 수두룩하단 얘기지.
대충 둘러대도 믿을 거란 얘기다.
"자네는 가문과 엮이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알겠네. 조심하도록 하지."
"그럼, 가 보겠습니다."
"멜라니 학생은 탐사에 동참하겠다고 하던가?"
"-아주 훌륭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더군요."
닉스가 흡족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3학년 수업을 함께 듣길 원했다지?
역시 카이사르의 핏줄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문이 닫혔다.
마누스는 3학년 교실로 향했다.
오늘은 2학년 수업이 아닌, 3학년 수업을 듣는 날이었다.
'기대되는데.'
전에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학업의 즐거움.
점차 이 세계에 적응해 나가는 자신을 볼 때마다, 진짜 마누스가 된 기분이었다.
"마누스 학생?"
"...안녕하십니까."
익숙한 얼굴이 그를 알아봤다.
원소학 교수, 트레일이었다.
그가 성큼성큼 마누스의 곁으로 다가왔다.
푸른 호수를 닮은 눈은, 그 옛날 먼발치에서 바라봤던 라베스 공작을 빼다 박았다.
이 총명한 학생은, 이제 본격적으로 비상할 준비를 마쳤다.
그렇다면, 미토스 아카데미의 교사 된 입장으로 해야 할 일은 한 가지.
"오늘 제 수업 듣죠? 전에 보여 주었던 마법 실력이라면, 따라오시는 데 문제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 학생, 묘하게 성격이 변한 것 같은데-?
긍정적인 방향이니, 굳이 신경 쓸 필욘 없겠지.
트레일은 이 학생이 어디까지 올라갈지 궁금했다.
그 쟁쟁한 형제/자매들을 제치고 어쩌면....
"3학년 수업은 본격적인 고급 마법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아 그리고, 오늘 새로운 학생이 수업을 들을 겁니다."
마누스는 당당하게 걸어, 트레일 교수 옆에 섰다.
3학년 학생들의 눈이 커졌다.
하나같이 비슷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카이사르 마누스다. 잘 부탁하지."
"와-. 우리가 선배인데?"
"근데 좀 마음에 드는데?"
"이번에 4클래스 마법도 썼다며? 그러면 뭐..., 인정이지."
누군가 손을 불쑥 들었다.
교수님이 눈빛으로 그의 발언권을 허락했다.
아카데미 학생에게 가장 큰 사안이라고 하면 역시 성적이다.
경쟁자, 그것도 카이사르라는 어마어마한 녀석이 끼어드는 사건이었다.
-당연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확실히 해야지.
"쟤는 성적에 반영되지 않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성적은 2학년 기준으로 책정됩니다. 여러분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오오-.
학생들이 낮게 감탄했다.
그래, 이래야 정상적인 거지.
제아무리 3학년이어도 감히 카이사르의 재능과 맞설 사람은 없었다.
그저 지식을 탐닉하러 온 손님.
미치도록 부러운 재능의 주인공.
마누스의 위치는 딱 그 정도였다.
"수업 시작하죠. 마누스 학생도 편한 곳에 앉으세요."
터벅터벅 걸어가는 마누스에게 수많은 시선이 꽂혔다.
호기심, 부러움, 약간의 경계 등등.
'여전히 부담스럽네.'
마누스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봤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는 부담스러움이 느껴졌다.
버릴 수 없는 근본적인 자아가 느끼는 거겠지.
마누스는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엔 원작에 나오는 인물은 없으니, 맘 편하게 수업을 들을 수 있겠어.'
간섭하지 않아도 되고, 오롯이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시간이라는 것.
그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수업을 들었다.
트레일 교수의 3학년 수업은, 그 질부터 달랐다.
마법진을 구축할 때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 마법진을 효율적으로 구축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4클래스, 그 이상 고위 마법을 사용하는 자들은 어떤 방법으로 사용했는지.
"실제 마법사들이 사용했던 술식을 분석했습니다. 그들과의 인터뷰도 제법 나눠 봤습니다만, 아직 자료가 부족하긴 하군요."
열정적인 트레일 교수의 수업.
이는 광란의 밤이 오기 전, 마누스에게 새로운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의 머릿속이 새로운 지식으로 꽉 채워졌다.
'재밌네.'
이곳에 와서야, 학업에 열중하게 된 마누스였다.
지난날의 허송세월을 만회하려는 듯, 그의 손과 머리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33화
- 재앙에 앞서
* * *
3학년 수업은 매우 흥미롭게 끝났다.
4클래스.
그 이상에서도 통하는 이론들이 칠판에 빼곡히 적혀 있었다.
마누스는 당연하게도 모든 내용을 이해했다.
'이걸로 속도가 더 빨라지겠어.'
이제 부족한 것들을 채울 시간이었다.
마석이 더 필요했다.
더 많은 마력을 가지고 싶었다.
오늘의 목표는 25층.
'그리고 슬슬 버스 기사 하나를 키워야겠지.'
다른 일행에게는 미안한 말이었지만, 오늘은 딱 한 사람만 키울 생각이었다.
미래를 대비하는 일은 꽤 고독했다.
혼자만 알고 있는 사실들이 시시각각 다가올 때마다, 부담감은 배로 번졌다.
마음 같아선 주인공들에게 모두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래서야 이야기가 제대로 흘러가지 않겠지.
게임은 주인공들에게 항상 질문을 던졌다.
선택을 강요하고, 정답이 없는 선택지들을 던져, 꾸역꾸역 나아가도록 했다.
'알라노, 베로니카.'
이번 에피소드에서 감정선이 깊게 드러나는 두 캐릭터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나은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 간섭할 필요가 있다.
직접 게임을 플레이할 때와 다른 점이라면, 선택지로 인한 결과들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
더불어, 주인공이 아닌 제3자라는 점이다.
많은 희생자를 낳는 에피소드.
누군가는 스토리를 적어 내려갈 때, 오직 주인공과 주변 인물에게만 집중했을지도 모른다.
그 이면에 대해서 생각한 것은, 딱 한 줄의 대사였다.
<당신들은, 내가 어떤 짓을 했는지 알지 못하겠지요.>
<아무도 모르게 업적을 세우고 자만심에 취해 있는 당신들 뒤에서,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녀의 처절한 외침은 무얼 의미했던 것이었을까.
왜, 그녀가 플레이어들과 다른 길을 걸어가야 했을까.
수많은 회 차를 거듭하며, 마누스는 생각했었다.
베로니카.
축제가 일어났던 밤에, 그녀는 무얼 했을까.
'그걸 막는다면, 그녀의 운명이 바뀔지도-.'
주인공은 주인공이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그 뒤의 이야기들.
방치된 이들의 이야기에서도 간섭이 필요하다.
비극은 줄어들수록 좋다.
마누스의 지론이었다.
생각을 접어 두게 만드는 목소리, 항상 쓰고 있는 향수의 내음이 오감을 자극했다.
"마누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곧 닥칠 밤에 대해서."
"또 많은 사람들이 죽겠지?"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하얀 은빛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껴, 그녀의 얼굴을 드러냈다.
그녀 역시 죽음에 대해선 민감하게 반응한다.
-학생회장이라는 지위 역시, 그녀의 감정을 극대화하는 데 한몫했겠지.
장례식에서 통곡하던 그녀의 모습은, 이곳으로 날아오기 전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던 명장면이었다.
얼음 공주라고 불렸던 알라노가 그렇게 서럽게 울 줄이야-.
그런 장면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누스 본인이 간섭해야 할 일 천지였다.
"적어도 이곳에선, 참사를 막을 거다."
"방법이라도 있어?"
"탑."
저주받은 탑이지만, 동시에 가능성을 품고 있는 곳.
오늘은 그곳에 다시 올라, 필요한 것들을 가져와야 했다.
마누스는 품속에서 전해지는 금속의 감촉을 느꼈다.
-비록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었지만, 모든 해결책은 그곳에서 나온다.
필요한 물건도, 강해질 수단도, 심지어 스토리의 핵심 아이템까지.
탑을 오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알라노."
"-응?"
"탑, 같이 가지."
그리고, 그녀에게 전수해야 할 것도 많았다.
실질적 리더로서, 그녀는 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무력했던 자신에게 자괴감을 가지지 않도록, 더욱 몰아붙일 타이밍이었다.
적어도 오늘, 그녀의 레벨을 20 정도까지만 끌어올린다면 좋겠는데-.
-마누스의 사악한 계획을 모르고 있는 알라노는 밝은 얼굴로 되물었다.
항상 홀로 다니던 마누스가 같이 가자고 하다니!
드디어 동료들과 교류를 하려는 걸까?
"정말? 같이 올라가는 거지?"
"그래. 우리 둘만."
"-어?"
이게 무슨 소리야?
설마 한가롭게 옛 분위기를 내자고 하는 건 아닐 거다.
그럴 거였으면 정말 운치 있는 곳에서 보자고 했겠지.
마누스의 푸른 눈동자가 알라노를 응시했다.
왠지, 데몬보다 더 무서워 보이는 건 착각일까?
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가르쳐 줄 것이 많으니, 꼭 오도록."
"...."
그녀는 선뜻 답할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압박감이 그녀의 입술을 굳게 막았다.
마누스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알라노가 한 발자국 물러났다.
"믿고 있겠다."
"-알았어."
결국, 알라노는 대답하고 말았다.
그녀 앞에 기다리고 있는 건, 가혹한 사냥과 끝없는 노다가뿐임을 알고 있었을까?
이마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흐른 것은 착각이 아닐 터다.
* * *
심야.
마누스는 탑을 오르기 위해 채비를 갖췄다.
암녹색으로 변한 세계 아래, 그는 죽음의 탑에 입성했다.
그 뒤를 따라온 알라노.
1학년 동료들은 어제 일도 있고 하니, 푹 쉬어 두라고 일렀다.
꿀꺽-.
알라노는 황금빛 시계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맨 처음 탑에 발을 들였을 때가 생각났기 때문일지도.
"둘이서 오른다니, 역시 조금 무리하는 거 아닐까?"
"괜찮다. 아르카나와 약점은 모두 꿰고 있으니까."
"...그래. 가자. 마석이라도 잔뜩 흡수해야겠네."
좋은 마음가짐이다.
탑에 들어갈 땐, 항상 이득을 생각하고 들어와야 하는 법.
마누스가 조용히 웃었다.
"가지. 오늘은 가능한 한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 간다."
"조금이라도 무리한다면, 내가 직접 널 끌고 내려올 거야."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무리는 내가 아니라 네가 할 거니까.
마누스는 뒷말을 삼킨 채 전송 장치로 향했다.
보스를 클리어한 층마다 설치되어 있는, 일종의 빠른 이동 시스템.
탑은 두 사람을 집어삼켜, 죽음으로 인도하려 했다.
도착한 층은 17층.
마지막으로 보스를 잡았던 층이었다.
"간단히 브리핑하지. 이 앞부턴 '법황' '절제' 아르카나가 추가로 등장한다."
"약점은?"
"빙결, 전격, 물리 계열. 파악은 네가 해라. 일정한 법칙이 있을 테니까."
알라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계속 생각했었다.
왜 마누스는 굳이 오늘, 자신을 홀로 탑에 불러내었는가.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생각들이, 지금 이곳에서 단단하게 그 의미를 찾아갔다.
많은 이유를 생각했었다.
밀회를 즐기려는 건가? 라는 생각도 아주 조금은 포함되었지.
'날 강하게 만들고 싶구나.'
의욕이 샘솟았다.
그래,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선 강해져야 한다.
가문에서는 아직 그녀를 꽃처럼 키운다.
하지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선 화려하기만 해선 안 되겠지.
누구보다 그녀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좋아. 해 보겠어."
"가자."
누군가 장미를 조형할 때, 항상 빼먹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가시.
날카롭고, 치명적인-.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꽃을 지킬 수 있는 가시.
지금 알라노가 조형해야 할 것은, 아름다운 꽃이 아니었다.
어떠한 위협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가시.
그녀는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인지했고, 그 누구보다 효율적으로 가시를 빚어낼 것이다.
* * *
[킥킥-!]
아르카나 특유의 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푸른 가면이었다.
'8'이라는 숫자가 뇌리에 박혔다.
[키이익-!]
화염이 번졌다.
발을 놀려, 열기를 피한 알라노가 주특기인 빙결 마법을 선보였다.
[글라치에]
얼음 망치가 그녀의 손에 단단히 들렸다.
가까운 거리에서 싸우는 마법사의 정석을 보여 주듯, 그녀의 몸짓은 빠르고 간결했다.
허리를 비틀어 휘두른 망치가 가면을 깨부쉈다.
[키이이익-!]
"법황 8은 얼음 속성이 약점인가. 대충 감을 잡았어."
벌써 20층을 주파하는 중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 채, 그녀는 마나를 사용하고 채우고를 반복했다.
수도 없이 많은 데몬들을 잡았다.
알라노는 확실히 천재였다.
게임 속 세상답게, 데몬들에게는 법칙과 기믹이 존재했다.
가면의 색, 숫자.
아르카나의 종류와 생김새.
'이제야 눈에 들어오다니. 나도 아직 멀었어.'
데몬을 쓰러뜨린 후, 알라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근처, 조금 위에 아주 강력한 존재가 기다리고 있음을.
"위쪽에 강력한 존재가 느껴져. 곧 도착하겠는데?"
"정확하다."
마누스 역시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라노의 교육은 착실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전투를 거듭할수록 전반적인 능력이 우상향을 그렸다.
마법 선택, 발현.
약점 포착, 조준.
마나의 분배와 체력 조절까지.
역시 훈련 중 가장 좋은 것은 실전이었다.
"둘이서 해결할 수 있겠지?"
"날 믿어라."
마누스가 바로 앞에 보이는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알라노가 그 뒤를 따르며 전투를 복기했다.
생각해 보니, 마누스가 제대로 된 마법을 쓴 경우가 있던가?
그가 충분히 마나를 비축해 두고 있다면, 강적을 만나더라도 여유가 있겠지.
조금 괘씸하기도 해, 잠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힘들었던 순간은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도 도와주지 않았다는 건-.
"마누스."
"음?"
"너는, 내게 바라는 것이 많은가 봐?"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되물었다.
"많이 부담스럽나?"
"어?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네 기준을 알고 싶을 뿐이지."
"내가 없을 때, 나만큼 해 주길 바라고 있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들은 생각은, '무섭다'였다.
마치 훌쩍 떠나 버리려는 사람처럼,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알라노가 불쑥, 그의 손목을 잡았다.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간절함이 묻어 나오는 것을 확인한 마누스가 미소 지었다.
그녀는 옛날에 무슨 일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저 눈동자에 들어 있는 추억은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
"어디 가거나 하는 건 아니다. 이젠 홀로 나아가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뿐이지."
"-그런 거지? 그렇게 믿고 있으면 되는 거지?"
"그래."
알라노의 손이 떨어졌다.
다시 힘을 찾은 그녀의 발걸음이 계단을 디뎠다.
홀로 나아가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말.
-그 말이 알라노의 가슴에 작은 불을 지폈다.
두 사람은 파죽지세로 20층부터 24층을 공략했다.
과연 그녀의 레벨은 몇일까?
구체적인 스테이터스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게임과 달리, 여긴 그런 친절한 장치는 주어지지 않았다.
마누스는 두 눈에 보이는 장면과 피부로 느끼는 감각만으로 그녀의 성장을 잡아내야만 했다.
예상컨대, 알라노의 현재 레벨은 약 20 초반.
이 정도라면, 충분히 서포트받을 수 있다.
'레벨이 오르면 스킬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질이 주어지지. 아쉽지만 큰 서포트는 바라지 못하겠어.'
예상보다 더욱 빠른 성장 속도에, 계산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간 날 때 버프 마법이나 공격 마법 몇 개를 더 익히라고 독촉했을 텐데.
아카데미물을 표방하고 있는 만큼, 스킬은 직접 공부해서 배워야 한다는 설정.
때문에 공략에 맞춰 마법을 공부하고, 연습하고, 실전에 써먹을 수 있을 정도까지 수련해야 한다.
"준비됐지?"
"이럴 줄 알았으면 마법 몇 개 더 익히고 올 걸 그랬어-."
알라노 역시 마누스와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작은 푸념을 늘어놨다.
괜찮다.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었으니까.
되도록 탑에서 주인공이 되는 건 피하려고 했지만-.
운명에 간섭하기 위해선, 때로 주인공보다 더 튀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거대한 석상이 두 사람을 내려다봤다.
"간다."
"-그래."
2학년 최강자들의 콤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치러지는 합동 시험이 시작되었다.
[25층 파수꾼과의 결투 시작!]
『절제 - 2 : 고귀한 석상』
<알라노의 재능이 일부 개화되었다.>
<알라노는 3클래스 마법 중 일부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알라노의 레벨이 올랐다.>
<알라노 : 22>
제34화
- 진짜 주인공처럼
* * *
25층.
뉴비 분쇄기 중 하나인 '고귀한 석상'.
단단한 방어력과 초반에 배울 수 없는 속성을 약점으로 가지고 있는 녀석.
두 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으며, 회색의 딱딱한 눈은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2.5m 정도의 크기는, 무기질적인 질감과 맞물려 은은한 공포를 선사했다.
주로 바람 계열 마법을 사용하며, 처음으로 '광역 공격'을 사용하는 보스였다.
파티원의 피가 한꺼번에 팍팍 줄어드는 모습은, 처음 보스를 마주한 자들에게 절망을 선사했다.
오죽하면 이 보스를 공략하기 전에 충분한 노가다를 통한 레벨 업을 권장하고 있을까.
'그렇지만 뭐-.'
마누스는 긴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알라노를 바라봤다.
공략 권장 레벨은 15 이상.
공격력 하나만큼은 1티어인 알라노의 레벨을 꽤 올려 두었으니, 화력은 충분하다.
그리고 마누스 자신 역시, 레벨 20 이상의 화력을 뿜어낼 수 있었다.
오히려 잔챙이들을 데려오는 것이 손해일 정도로 악랄한 보스가 눈을 떴다.
선공은 마누스가 가져갔다.
"약점은 빛 속성 마법이다. 신성 마법은 한두 가지 정도 꼭 익혀 두도록."
"-신성 마법?"
흑마법에 반대되는 속성의 신성 마법.
극소수의 신관만이 익힐 수 있다고 들었는데?
알라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마누스는 마법진을 형성시키며 말했다.
"마법사는 속성에 구애받지 않는다. 법칙이 달라, 익히기 까다로울 뿐이지."
알라노는 찬연하게 빛나는 구체를 바라봤다.
저 마법은 그녀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마법이었다.
빛의 광선.
망자가 들끓던 밤에 빛났던 그 광선이 다시 한번 작렬했다.
빠지직-!
석상에 쩍쩍 금이 갔다.
"화염 마법 준비해라."
"-응."
화르르르륵-!
알라노의 두 손에 이글거리는 불덩이가 솟아올랐다.
거기에, [알투스] 마법이 겹쳤다.
콰르르르르-!
공기를 때리는 소리가 제법 살벌했다.
열기를 느끼며, 마누스는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아라디아티오]
두 가지 마법이 합쳐져, 고열을 머금은 빛의 마법이 작렬했다.
채찍 형태가 아닌, 직선 형태의 광선이었다.
게임에선 어느 정도 일정한 형태를 취했는데, 현실로 넘어오면서 그런 제약은 사라져 버렸다.
[구오오오오-!]
녀석이 움직였다.
나왔다.
악랄한 패턴.
동공이 없는 회색 눈에서, 푸른 안광이 빛났다.
쩍쩍 갈라진 날개와 몸뚱이를 만든 이들에게 보복이라도 하듯, 기세는 강맹하고 섬뜩했다.
마누스는 두 개의 마법을 동시에 준비했다.
'초반 최강의 방어 마법.'
[구욱!]
[구우우욱-!]
석상의 부름을 받고, 어둠 속에서 작은 석상들이 등장했다.
웃는 모양의 아기 천사들.
데몬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성스러운 모습이었지만, 그들의 모습은 기만책일 뿐.
"지금-."
"응-!"
[이그니라]
2클래스 마법이지만, 3클래스에 버금가는 화염 마법이 작렬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화염 속으로 사라진 두 석상.
그사이, 석상과 마누스가 동시에 마법을 전개했다.
[구오오오오오-!]
작은 석상을 소환해, 딜 분산을 유도하고 곧바로 광역 마법을 쏘아 방어할 틈을 주지 않는 패턴.
광풍이 몰아쳤다.
알라노가 미처 대비하지 못할 속도였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고, 두 팔로 얼굴과 급소를 보호했다.
콰아아아아-!
광풍이 몰아치는 사이, 마누스의 두 마법 역시 새로운 형태로 빚어졌다.
[글라치에] - [에지스]
[더블 스프레드]
시리도록 눈부신 다섯 장의 꽃잎이 거대한 벽을 형성했다.
공격을 흘려내는 꽃잎이 아닌, 적의 공격을 원천 차단하는 방벽.
초중반, 최고의 방어 마법이 마누스의 손끝에서 펼쳐졌다.
[크리스털 아제르]
얼음으로 된 성벽은 광풍을 막았다.
이 스킬의 최대 장점은 모든 아군에게 방어 효과를 적용할 수 있다는 것.
알라노는 자신보다 뛰어난 얼음 마법에 감탄했다.
후욱-.
거친 숨이 폐부로 들어찼다.
호흡은 회복력이 되어, 막대한 손실이 있었던 마나를 회복했다.
아직 2클래스 마법의 조합은 다소 무리가 있었다.
"앞으로 두 번이다."
"-알았어."
알라노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빛 속성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해선 그 술식을 모른다는 게 정설이겠지.
궁금한 것이 무척 많아졌다.
마누스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어떤 지식을 습득해 온 걸까.
'아니,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녀의 머릿속 어딘가에 있던 술식 하나가 떠올랐다.
4클래스.
인간의 끝이라고 여겨지는 경지의 마법 술식 하나였다.
지금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
네가 수비를, 내가 공격을.
해리슨의 이름을 달고 있는 이상, 자신 옆에 있는 이가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
두 번.
저 무지막지한 공격을 막아 낼 수 있는 횟수겠지.
[간섭이 시작됩니다.]
[히든 피스 발동 : 알라노의 재능]
[모든 스킬의 잔여 습득 시간이 1일로 조정됩니다.]
마누스의 눈이 빛났다.
그간의 행동이, 말들이, 거대한 폭풍이 되어 알라노에게 불어닥쳤다.
원작에 없었던 인물로 인해 받은 자극이 지금, 이곳에서 그녀의 재능을 꽃피우게 했다.
알라노의 코에서 주르륵, 피가 흘렀다.
두 눈은 충혈되었고, 마나가 요동쳤다.
주인공 케일이 다재다능한 올라운더라면, 알라노는 극한의 공격력을 가진 딜러다.
보스전에서 빠지지 않고 출격했던 기억이, 화려한 스킬들을 퍼부었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그대로 그려졌다.
"내가 막고 있겠다."
얼음 방벽을 깔고, 화염 마법을 준비했다.
더블 캐스팅을 넘은, 극한의 영역.
마누스의 마나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하이 레스티오]
후욱-.
부족한 마나는 호흡으로 채운다.
쿵쿵-!
방벽이 세워졌고, 다시 술식을 짜 올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나가 부족하면 일어나는 현상이 어떤 것인지, 텍스트가 아닌 몸으로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카이사르니까-.'
[구오오오오오-!]
석상이 울부짖었다.
마누스의 마법진이 빛을 발했다.
알라노의 머리 위에, 찬란한 빛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일정 체력 이하로 떨어지면 발동하는 패턴이 여과 없이 튀어나왔다.
아기 석상과 광풍.
검은 공간에서 아기 석상이 튀어나오자마자, 마누스가 화염의 창을 내질렀다.
"다 됐어-!"
광풍이 얼음벽을 때렸다.
마누스는 일부러 마나를 흩어, 시야를 잔뜩 막고 있는 얼음벽을 산산이 부숴 놨다.
동시에, 알라노를 돌아봤다.
그녀의 재능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왜 유저들이 그녀에게 열광했는지, 후반에서도 1순위로 그녀를 기용했는지.
"-보여 줘라. 알라노."
"가라아아아아-!"
그녀의 주특기인 얼음 마법.
그것도 4클래스의, 절대적인 위력을 뿜어내는 마법이 쏘아졌다.
마나를 있는 대로 때려 부어, 그 위력부터 남달랐다.
주변이 얼어붙고, 시린 입김이 새어 나왔다.
[트판타-히예모] - [알투스]
수많은 선분에 마나를 짜 넣어, 4클래스를 완성하고도 위력을 증폭시켰다.
마누스는 몸을 낮춰, 밀려들 폭풍에 대비했다.
냉기로 이뤄진 광선이 석상을 강타했다.
[구오오오오옥-!]
석상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새롭게 생성된 얼음의 송곳이 모든 것을 파괴했다.
마치 얼음으로 된 비가 내리는 풍경.
보스였던 고귀한 석상은 잘게 잘게 쪼개져, 가루가 되어 버렸다.
실로 무시무시한 위력.
방 전체가 한기로 가득 찰 정도였다.
"허억-. 허억-. 나도... 이제 지킬 수 있다고."
"...고생했다."
힘이 전부 빠져 주저앉아 있던 알라노가 풀썩, 뒤로 누웠다.
힘없는, 그러나 뿌듯한 미소를 머금고서.
보스를 격퇴했으니, 전리품을 챙길 시간이었다.
마누스는 거대한 마석 결정 두 개를 집어 들었다.
거기다 쓸 만한 아티팩트까지 얻었다.
[마석 결정 L]
[석상이 흘린 눈물]
'마석 결정 L'은 무려 3클래스 마법을 세 번 더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마력량을 올려 주는 것이었고, '석상이 흘린 눈물'은 꼭 필요한 퀘스트 아이템이었다.
절그럭-.
오르카의 목걸이가 반응했다.
'이걸로 마법사, 악마, 절제, 전차, 법황인가.'
열세 개 중, 벌써 다섯 아르카나를 모았다.
제법 좋은 페이스로 영혼이 모이고 있었다.
목걸이를 회수한 마누스는 몸을 돌려 널브러져 있는 알라노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몸이 잘게 경련했다.
"몸이... 조금 이상한데."
"그러게,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냐."
마누스가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지킨다는 마음 자체는 좋은데, 너무 무리했다.
처음 시전한 마법, 그리고 누군가를 지키겠다는 마음이 겹쳐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
이대로 둔다면, 영구적으로 마나 손실이 있을 정도였다.
무리하게 마나를 운용해, 그릇이 작아지는 것을 의미하는 마나 손실.
게임 속 페널티로, 실제 최대 마나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었다.
"이걸 흡수해라. 도와주마."
마누스는 마석 결정을 그녀의 심장 위에 올려 두고,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운용했다.
보상은 간섭을 받은 걸로 충분하다.
그녀가 더욱 강해져야, 자신도 강해질 수 있었다.
'모든 스킬의 잔여 시간이 하루로 줄어들었다라-.'
미쳤다.
이건 미친 보상이었다.
앞으로 그의 마법은 한 단계 진화하겠지.
마석 하나 값으론 터무니없이 비쌌다.
"후우우-."
"끝났다."
잘게 떨리는 몸이 멈춘 것은 물론, 눈에 띄게 마나양이 증폭되었다.
알라노는 희미하게 웃으며 마누스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넌 다른 이들을 이끌어야 한다. 여기서 죽으면 안 되지."
"여전하구나."
이내, 마누스 역시 마석 결정을 흡수했다.
확실히 든든한 느낌이었다.
자잘한 마석 여러 개를 흡수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
어쨌든, 오늘 목표는 끝났다.
두둑한 보상도 얻었고, 알라노를 훌륭한 버스 기사로 키워 냈다.
그 잔인한 밤에서, 그녀는 더욱 찬란하게 빛나겠지.
"돌아가자."
"-그래. 힘들다."
비척비척 일어선 알라노가 힘껏 기지개를 켰다.
몽롱하지만 개운한 기분.
무언가 이뤘다는 성취감이 한가득 몰려왔다.
공부도 좋고,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실전에서 적용시키는 것만큼 뿌듯한 일이 있으랴.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는 전송 장치가 활성화되었다.
-저건 무슨 원리일까?
"나중에 하나 뜯어가서 연구해 보고 싶은걸."
"아서라."
7클래스, 8클래스 마법으로 전투한 후에도 멀쩡했던 장치다.
그래야만 하는 장치였고. 안 그러면 정말 큰일 나는 장치였으니까.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런 엉뚱한 점이 또 매력이지.
거리가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그건 알라노도 마찬가지였는지, 살랑거리는 걸음걸이와 함께 웃음꽃이 피어났다.
"옛날 모습이 돌아온 것 같아 좋네."
"잘 기억나진 않지만-."
"아주 착하고 똘망똘망한 아이였어. 카이사르보단 해리슨이 더 어울리는 친구였는데-."
알라노는 지난 1년을 생각하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아니, 그녀와 떨어져 있었던 그 시간들이 궁금했다.
"지금은 카이사르가 되었지."
"언젠가 왜 그랬는지 알려 줘. 꼭 듣고 싶으니까."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궁금했다.
시간이 난다면, 가족 관계를 꼭 정리하고 싶었다.
제35화
- 고독한 암살자
* * *
마누스는 안락한 침대에 누워, 오늘 있었던 성과를 되짚어 보았다.
[마법사의 마음가짐]
중첩해서 마법을 사용할 때 추가 공격력이 붙는 스킬.
거기다 [공격의 소양].
모든 공격력 +30%라는, 아주 심플하고 사기적인 스킬.
꽤 걸릴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기회가 빠르게 찾아왔다.
내일 이 시간이면 스킬이 완성되어 있을 테니, 느긋하게 다음 스킬을 살펴봤다.
'오늘 있었던 전투, 마나가 상당히 모자랐지. 방벽의 내구도 역시 생각보다 부족했다.'
숨이 가빠 오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경험은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체력, 그리고 유지력.
하이 레스티오만 믿고 싸우기엔, 제법 힘들다는 결론이 나왔다.
사기캐가 되어야 한다.
카이사르로서 살아남기 위해선 말이지.
홀로 네임드를 격파할 수 있을 때까지, 내실을 다지고 싶었다.
'내실 하면 패시브지.'
5클래스 마법까진 공통으로 배우는 마법이다.
그 이후로 올라가면 고유 마법이 등장할 테고, 그때 가서야 액티브 스킬을 습득하면 된다.
지금은 더 편안하고 강력하게 마법을 펼칠 수 있는 것만 생각할 때였다.
'이걸로 결정하자.'
마누스는 두 가지 스킬을 고른 후에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그는 더욱 괴물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 * *
어두운 밀실.
하녀장의 임무는 밤이 늦도록 끝나지 않았다.
기숙사를 체크하고, 빨래는 잘되었는지, 혹시 세탁물이 섞이진 않았는지 확인해야 한다.
다음 날 아침을 위한 식재료는 잘 있는지, 혹 방비가 비는 곳이 없는지, 아픈 인원은 없는지도 체크해야 했다.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는 경비들이 꾸벅 인사했다.
베로니카는 웃는 얼굴로 그들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발소리를 내지 않으며, 그녀는 경비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체크했다.
변수는 없어야 한다.
이곳은 대륙 전역에서 온 귀족가의 자제들이 머무는 곳.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 책임은 온전히 자신이 져야 할 테니.
'오늘도 이상 없군요.'
사뿐거리는 발걸음이 기분 좋게 떨어졌다.
킁킁-.
방으로 돌아가던 와중, 익숙하면서도 역겨운 향을 맡았다.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벌써 그날....'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불현듯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각하게 해 주는 향이었다.
더없이 행복한 나날은 환상이라고 세뇌하듯, 일정한 시간마다 찾아온 현실이기도 했다.
본래 방으로 향해야 할 발걸음이 틀어졌다.
그녀가 향한 곳은 아카데미 내에서도 아는 자가 극히 드문 곳이었다.
규모가 거대하면 으슥한 곳은 생기기 마련.
자연스레 발걸음이 뜸해지는 곳이었다.
"황궁에서의 칙령입니다."
"받았습니다. 가 보세요."
작은 종이 하나를 받았을 뿐인데, 그 손이 무척 무거워진 것은 착각일까.
멀거니 서서, 종이를 확인했다.
황실의 인장이 찍혀 있는, 그저 단편적인 명령만 적혀 있는 쪽지였다.
『축제의 밤.
제거 대상.
....
....
카이사르 마누스.
....』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황실에선 전쟁을 바라고 있는 걸까?
아니면, 라베스 공작이 황제에게 큰 불경이라도 저지른 걸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이유라도 물어보고 싶건만.'
파스슥-.
머릿속에 정보를 입력한 뒤, 종이를 바스러뜨렸다.
복잡했다.
모든 것이 다.
차라리 학생들을 돌보며 사는 삶을 택하고 싶었다.
설령 기억과 실력을 모두 잃어버린다고 해도, 그편이 좋았다.
어울리지도 않는 메이드복을 입었던 이유 역시 그 때문이었으니.
'아-. 먹고살기 힘들다.'
그녀는 사뿐사뿐 움직였다.
고민해야만 한다.
티 나지 않게, 그리고 확실하게 없앨 수 있는 방법을.
<하녀장을 함부로 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의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자신은 이미 불량품이었다.
암살자로 키워진 주제에,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고 있었으니.
하지만, 자신이 베로니카로 있을 수 있는 이유 역시 이런 감정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군가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
어떻게 하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끝낼 수 있느냐고.
하지만, 그녀 곁에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항상 밝은 얼굴로, 모든 학생들과 마주하는 자리였지만-.
정작 그녀 곁에서 힘을 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베로니카를 발견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광란의 밤까지, 이제 고작 일주일 남았다.
* * *
3학년 수업을 마친 마누스는 곧바로 전공 수업을 듣기 위해 자리를 옮기는 중이었다.
오늘부터 탐사가 재개된다.
케일, 아나이스, 피어슨, 멜라니.
초반 4인 파티는 꽤 안정적으로 돌아갈 터다.
알라노에게 일러두었다.
그들을 따라가며, 그녀가 배웠던 것들을 가르쳐 주라고.
'잘해 내겠지.'
오늘부터 일주일.
준비해야 할 것이 산더미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직 간섭 중이려나.'
보통 어떤 인물에 대한 간섭이 끝나면, 일정한 보상이 들어온다.
정말 게임 같은 시스템이었다.
요 며칠 전, 그런 메시지가 떴었다.
간섭이 시작되었다고.
누구에 대한 간섭인지, 어떤 간섭인지 알 수 없었다.
안면을 트고 있는 인물, 혹은 게임 내 등장한 인물 중 하나겠지.
-좋지 않은데.
"선배! 안녕하세요!"
"오늘 방과 후에 사슴반이랑 모의 대련 하기로 했는데, 봐주실 수 있나요?"
이건 본래 주인공에게 일어나야 할 이벤트인데-.
아나이스가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자신에게 말했다.
그녀의 옆에는 언제나 붙어 다니는 일행들이 있었다.
수호자들과의 모의 대련이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지금 이들의 실력을 파악하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였다.
마누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와아-! 진짜요? 이거 소문내도 되죠?!"
"경거망동하지 마라."
마누스는 그렇게 말하고 그들을 지나쳤다.
사슴반.
누군가를 지키는 수호자의 제안으로 시작되는 막간 이벤트.
이곳에서 어느 선택지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후에 영입할 동료가 결정된다.
수호자는 멜라니처럼 정령의 힘을 빌린 탱커가 아닌, 순수하게 방어만을 위해 교육받는 이들이었다.
지키기 위해 훈련하고, 지키기 위해 수업받는 이들.
현대로 따지면 보디가드였다.
'슬슬 그놈이 나타날 때가 되었지.'
수호자 중에서도 탑에 진입할 이들은 나온다.
미토스 아카데미는 마법사 양성 아카데미가 아니었으니까.
그중에서도 꽤 쓸 만한 녀석이 이번 이벤트를 통해 등장하지.
눈도장이라도 찍어 둘 겸, 참관하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였다.
훗날을 위해서라도 조언 몇 마디 정도는 괜찮으리라.
아직 수업이 끝나려면 시간이 있었다.
'서브 퀘스트를 위한 녀석들도 키워야 하긴 하겠지.'
탑 공략조가 아닌,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처리하는 자들.
그들 역시 공략에 꼭 필요한 이들이었다.
간섭할 이가 많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강해진다는 뜻이다.
2군도 꼭 필요하다.
게임에서는 1군을 돋보이게 만들어 주는 이들이었지만, 현실에선 어떨까.
그들 역시 감정이 있는 이들이니, 많은 것을 느낄 터다.
'복잡하네-.'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되겠지.
일단 지금은 지식을 탐닉하고 싶었다.
더불어, 슬슬 체력 단련도 시작해야 한다.
마법사이지만, 앞으로 싸울 데몬과 빌런들은 그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 테니까.
그리고 체력 단련실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인물도 존재하고.
이래저래 생각할 것들을 정리하며 걷다 보니, 익숙한 인물과 마주했다.
멜라니와는 전혀 다른 결의 분홍 머리칼.
-베로니카였다.
'좀 이상한데.'
저 멀리서부터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야 할 베로니카다.
그녀는 그렇게 설정되어 있는 캐릭터니까.
하지만, 그녀는 마치 감정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곧 화려한 꽃이 필 시기였다.
매달마다 다양한 꽃이 피는, 마법에 걸린 나무.
그녀는, 거대한 나무를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베로니카."
"-아, 마누스 공자. 안녕하세요."
슬쩍 놀라고, 살풋 웃는 모습이 조금 어색했다.
이건 마치-.
"컨디션이 안 좋은가 보군. 무언가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개인적인 일이라서요. 어찌 공자님께 제 사사로운 감정을 밝히겠습니까."
잠깐 찔러본 것치곤 꽤 격렬한 반응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한 발자국 떼어 낸 걸음이 더욱 가벼워졌다.
마누스는 게임 내 내용을 기억했다.
<베로니카는 멀거니 큰 나무를 구경하곤 한다.>
<누군가를 죽여야 할 때면, 으레 하는 행동이었다.>
<저 나무는, 아카데미에서 죽은 영혼을 먹는다는 전설이 있는 나무.>
<그녀가 아카데미에 내에 있는 이들을 죽일 때면, 그달에는 유달리 화려하고 예쁜 꽃이 피었다.>
누군가의 명령.
아카데미 내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사고.
그걸 묵인하는 자들.
빌런이, 몬스터가 들어올 때마다 죽어 나가던 이들.
그 모든 것엔, 베로니카가 관련되어 있었다.
황궁은 미토스 아카데미를 단순히 교육의 장으로 보지 않는다는 걸, 유저들은 그곳에서 알게 된다.
실로 잔혹한 이야기였다.
'어차피 이번에 그녀와는 부딪쳐야 한다.'
그렇기에 준비할 것들이 많았다.
순수한 실력으론 베로니카를 이길 수 없었다.
부드러운 미소와 순해 보이는 얼굴 뒤엔, 마스터라는 칭호를 달고 있는 여인이었으니까.
그러니, 사냥해야 한다.
대결이 아닌, 사냥.
그녀를 제압하고, 운명에 간섭하기 위해선 너무 많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
"밤이 기대되는군."
"-예?"
"아무것도 아니다."
마누스는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 베로니카에게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다시 나무로 향해 있었다.
"베로니카."
"-예, 공자님."
"그간 미안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도록."
"―아닙니다."
그녀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이내, 베로니카는 더없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처연해 보이는 그 모습을 보며, 마누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떠한 일이든, 한 가지는 꼭 도와주도록 하겠다."
"...."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있을 뿐.
마누스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멀어져 가는 소리에, 베로니카가 잘게 떨리는 숨을 토했다.
-어찌 저라고 그러고 싶지 않겠습니까.
감정을 가진 암살자라는 건, 생각보다 고달프답니다.
그러지 마시지요.
제게 온정을 베풀면 안 됩니다.
꾸욱-.
치맛단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는, 당신을 죽여야 합니다. 공자님.'
그러니, 계속 폭군으로 남아 주십시오.
저에게 그랬던 것처럼, 계속해서 폭정과 핍박을 일삼아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저도 암살자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을 테니.
-망설임 없이 죽인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더군다나 아무도 없는 자신에게 슬쩍 손을 내민 자라면 더욱.
그녀의 시선이 사라진 마누스의 등을 좇았다.
그토록 싫었던 그의 모습이, 이젠 조금씩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최악의 기분이었다.
제36화
- 높은 곳에 있는 자는, 언제나 적을 만든다
* * *
방과 후.
케일과 아나이스, 피어슨, 멜라니는 대련장으로 향했다.
수호자들의 반인 사슴반에서 예약해 놨다던데-.
아나이스가 손가락 하나를 펴며 케일에게 물었다.
"케일, 너는 대련장 한 번도 안 가 봤지?"
"-응."
"크으, 대련장 하면 또 미토스 아카데미 아니겠어? 많은 가문이 실제로 미토스 아카데미에 있는 대련장을 따라 했지-."
피어슨의 말이 또 시작됐다.
생생한 그의 말에 빠져들기 시작하는 멜라니와 케일.
대련장은 미토스 아카데미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시험을 치르거나 수업을 치르는 곳과 달리, 철저히 학생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기도 했다.
감지 마법이 항상 걸려 있었고, 아카데미 출신 마법사들이 고안한 특수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치명상에 가깝거나, 목숨이 위험한 일격이 감지되면 대련장 바깥으로 전송되는 마법이었다.
"-덕분에 아주 마음껏 실력을 뽐낼 수 있다고. 지금까지 마법이 실패한 적은 단 한 번도! 한 번도 없어!"
"-그래."
케일은 장황한 설명을 듣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멜라니 역시 수줍게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피어슨은 두 사람의 반응을 보더니,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너희같이 재미없는 캐릭터도 드물다. 뭐라고 반응 좀 해 줄래?"
"와-, 신기하다."
"으아아악-! 그래, 내가 잘못했다! 그런 리엑션은 차라리 하지 마!"
아나이스가 피식 웃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이들끼리 모여 있는데도 이렇게 잘 어울리다니.
이 인연이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졸업을 하고 뿔뿔이 흩어지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잠시 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평민이랑 귀족이 같이 다니다니, 진짜 진풍경이잖아?"
독수리 망토가 펄럭였다.
달가운 이들은 아니었다.
일행들의 얼굴이 모두 찌푸려졌다.
그들 중 몇몇은 멜라니 역시 아는 얼굴이었다.
"뭐야, 갈 길 가라?"
아나이스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제법 날카로웠으나,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거기 평민. 쟤네들이랑 같이 안 다니는 것이 좋을걸? 언젠가 널 이용하기만 할걸?"
"맞아. 하긴, 마법사 사회에서 귀족들에게 잘못 보이면 어렵긴 하지-."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아주 가관이었다.
케일은 그저 멀뚱히 그들을 바라보다 뒤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구두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 존재를 발견한 독수리반 학생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케일이 키득 웃었다.
"-어?"
"버러지들이 입도 놀리는군."
"카, 카이사르...."
검은 머리칼이 오늘따라 유독 짙어 보였다.
푸른 눈동자는 독수리 망토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러곤, 칼이 담긴 단어들을 던져 댔다.
"요즘 독수리반은 할 일도 없나 보지. 검 대신 입을 쓰는 방법을 배우는 건가."
"-야야, 가자."
"거기-."
마누스의 말엔 중압감이라도 실려 있는지, 가자고 한 인물이 우뚝 멈췄다.
염동력이라도 쓴 듯, 굉장한 마성이었다.
끼긱-.
고장 난 나무 인형처럼 고개를 돌리는 독수리반 학생.
마누스는 그의 앞에 다가가, 압도적인 키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기사 지망생은 육체 단련을 주로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덩치가 컸다.
-허나 마누스는 그런 이를 내려다볼 수 있는 키를 가지고 있었다.
-폭군의 입이 열렸다.
"내 후배들을 건들면, 뱀반 앞에서 하루 종일 고개를 땅에 처박게 해 주지. 알겠나."
"...."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괜히 시비를 걸었다, 어마어마한 존재에게 걸렸다.
폭군은 괜히 폭군이 아니었다.
그 존재감이, 그 압도적인 마나가, 풍기는 분위기가 일반 학생과 전혀 달랐다.
진짜 귀족이었고, 진짜 마법사를 보는 느낌이었다.
"-대답."
"아, 알겠습니다."
"알았으면 꺼져라."
결국, 독수리반 아이들은 본전도 못 찾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마누스가 작게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아보니,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이 보였다.
아직은 탑의 풍파를 덜 맞아서 그런지, 순둥순둥한 모습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것들과 함께 탑을 오르고, 세계를 구해야 한단 말이지.
그래서 한마디를 툭 내던졌다.
"얼간이들이 따로 없군."
"서, 선배-!"
망토를 휘날리며 걷는 모습은, 그야말로 동화 속에 나오는 인물 같았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이 대련장까지 이어졌다.
네 명의 사람들은 마누스를 졸졸 쫓아가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물론 마누스가 안 들리게,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역시 선배는 멋있다니까?"
"그러게. 폭군이니 뭐니 해도 결국 우리들을 위해서 나서 주셨잖냐. 실제론 부끄러움을 엄청 느끼는 거 아니야? 막 그러니까-."
"시끄러, 피어슨."
나불거리는 피어슨을 침묵시킨 것은, 살풋 인상을 찌푸린 케일이었다.
그녀는 유독 마누스에 관한 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정확히는 그를 나쁘게 말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덕분에 피어슨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다섯 사람은 무사히 대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작은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거대한 날갯짓이 되어 돌아올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지금은 마누스의 뒷모습에 취할 뿐이었다.
* * *
대련장.
금발의 사내가 몸을 풀고 있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태어난 건, 해리슨 가문만이 아니었다.
사내 역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탄생한 가문의 자제였다.
"애들 왔다."
"-음."
마침 적당히 열이 올라, 몸이 충분히 풀렸다.
금발의 사내, 버클리 기예르모가 대련장으로 나섰다.
뚜렷한 턱과 굵은 눈썹, 굵고 높은 코를 지닌 그의 인상은 우직함이었다.
아카데미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남학생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저놈이 온다는 소리는 없었는데."
"그, 그러게. 그래도 싸우면 안 된다?"
기예르모는 잔뜩 굳은 얼굴로 다섯 명의 마법사들을 바라봤다.
저들이 이번 1학년 중 가장 뛰어나다고 하는 이들.
그는 그들의 면모를 자세히 살폈다.
그중 가장 독보적인 존재.
-그가 이 아카데미에서 가장 싫어하는 존재 역시 눈에 담았다.
카이사르 마누스.
버클리 가문에 씻을 수 없는 수치를 만들어 낸 장본인.
벌써 꽤 오래전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치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기예르모 선배.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희."
아나이스가 대표로 인사했다.
평소 무뚝뚝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기예르모였다.
허나 이렇게 가시를 드러내진 않는다고 들었는데-.
반응이 영 이상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마누스와는 무슨 사이지? 그가 괴롭히나?"
"네?"
네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마누스가 괴롭히다니.
방금 전까지 든든하게 지켜 주었는데.
"아니요? 그럴 리가요. 얼마나 든든한 선배인데요. 저희가 참관 부탁드려서 시간 내주신 거예요."
"-그렇군. 알겠다."
기예르모는 순진무구한 학생들의 얼굴을 보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후배들을 불렀다.
"준비해라-!"
"-예!"
사슴반.
수호자들의 행동은 마치 군대를 연상케 했다.
후배는 선배의 말을 마치 상관의 명령처럼 따랐다.
악습이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이건 수호자의 특성 때문이기도 했다.
수호자들은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자.
때문에 단독 행동을 해선 안 되는 자들이다.
그들은 죽으라면 죽어야 하고, 불구덩이 속에 뛰어들라면 그래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준비 끝났습니다!"
"오늘 모의 대련은 마법사의 공격을 피해 접근하는 것이 목표다. 뱀반 친구들도 협조해 주었으면 좋겠군."
"-좋아요."
기예르모는 대련의 룰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마법사들은 거리를 벌리며 공격.
수호자들은 거리를 좁히며 공격.
들고 있는 방패를 놓치거나 마법에 직격당하면 수호자들의 패배.
방패가 몸에 닿거나 더 물러날 곳이 없다면 마법사들의 패배.
"연습이지만, 실전처럼 하길 바란다."
"저기-. 저는 붙어서 싸우는데, 어떡하죠?"
설명이 끝나고, 멜라니가 수줍게 손을 들었다.
기예르모뿐만 아니라 모든 수호자들이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진짜 그랬다는 게 아니라, 그런 표정이 되었다는 거다.
멜라니가 슥, 마누스를 돌아봤다.
이 능력,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줘도 될까- 하는 고민이겠지.
마누스는 그녀와 눈을 마주친 후,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재능이다."
나비가 고치를 벗어나, 날갯짓하는 데에, 누군가의 허락을 받았던가.
"감사합니다."
그녀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주변에 떠도는 정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 역시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는지, 여간 시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어. 이제 활약할 시간이니까.'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화르륵-.
분홍 머리가 붉게 물들었다.
여리여리했던 체형에 걸맞지 않은, 패도적인 기운이 몰아쳤다.
다섯 명의 마법사 외에, 모두가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렸다.
약해 보였던 마법사는 없었다.
"저는 근접해서 싸우는 마법사라-."
"-놀랍군."
기예르모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들어 본 적 있었다.
마법의 힘을 담은 생명체의 힘을 받아 싸우는 이들.
일반인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힘을 빌린다지.
그런 이들을 일컬어 이렇게 불렀다.
"정령사였다니."
"이, 이거 어떻게 합니까? 선배?"
수호자 한 명이 기예르모에게 물었다.
그는 기사와 수호자의 대결을 생각했다.
이런 변수에도 대처할 수 있어야 할 실력이 있어야 한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기예르모가 방패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간단하지. 둘 중 하나가 나가떨어질 때까지 싸우면 된다."
"-알겠습니다."
"그쪽도 괜찮지?"
수호자가 방패 위로 빼꼼, 고개를 내밀며 멜라니에게 물었다.
멜라니 역시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에르모는 본래 감독을 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바라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그가 들고 있던 방패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너. 너는 나와 싸우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그가 가리킨 곳엔, 마누스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현재 마누스는 기예르모의 캐릭터 프로필과 설정을 떠올리던 중이었다.
언뜻 스쳐 지나갔던 텍스트.
그가 누군가에게 굉장한 증오를 가지고 있었고, 그 증오의 대상이 사라져 잠시 의욕을 잃었다는 내용.
설마 그 대상이, 어처구니없게 죽어 버린 원작의 마누스였을 줄은 몰랐다.
원작에선 그런 내용 자체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또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녔던 거냐.'
무슨 잘못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지구에 있었던 그는 모든 걸 알고 있는 신이 아니었다.
고작 튜토리얼에서 희생된 개망나니 공자의 삶 따위, 게임에선 다뤄 주지도 않았으니까.
허나 탑 공략에 필수적인 탱커를 이렇게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기예르모가 한 발자국 나서 말했다.
"왜, 또 가문 뒤로 숨을 거냐? 그 잘난 폭군이란 이명 뒤에 숨을 거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평소 어떤 일이 있어도 침착하게 대응하는 기예르모였다.
그런 이가 이토록 흥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마누스 본인도 궁금했다.
-그래서, 바보 같은 짓임을 알면서도 물었다.
"말해 봐라."
"-뭐?"
"내가 너에게, 또 너희 가문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
기예르모의 두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제37화
- 남자들의 원한 갚기
* * *
기예르모는 그 옛날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다지 오래되지도 않았던 이야기였다.
이곳,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한두 해 전이었으니까.
상식적으로, 그런 일을 잊어버리는 것 자체가 문제잖아.
버클리 가문과 카이사르 가문의 만남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
카이사르 가문은 유능한 수호자가 필요했다.
-그들 역시 유능한 경호원이 필요했으니까.
<공격도 못하는 머저리들이 꼭 필요합니까?>
그는 대놓고 말했다.
그건 수호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었다.
지금처럼 진중한 표정도, 가라앉은 눈동자도 아닌 마누스가 그렇게 말했다.
<수호자는 명예로운 존재들이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웃기고 있네. 뒈지면 그게 다 무슨 명예냐. 방패 녹여서 파는 값이 더 나가겠다.>
<이 개새끼가-.>
가족의 실수였다.
분을 이기지 못한 그의 가족은, 정의감이 투철했던 남매는, 무려 공국의 공자님에게 손찌검을 했으니까.
씩씩거리며 결투하자고, 제대로 붙어 보자고 성화를 내던 기예르모의 누이.
허나 그 당시의 마누스는 그저 입만 놀릴 뿐이었다.
가문의 이름을 들먹이며, 제 아버지에게 상처를 그대로 보여 줄 뿐이었다.
카이사르의 분노는 고작 버클리 가문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
<못났다고 하나, 내 아들이네. 공국의 위신을 짊어진 아이란 말이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죄송합니다. 가주.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뼈를 깎는 심정으로 이제 막 재능을 개화하고 있던 누이에게 벌을 내렸다.
그 후로 그녀는, 아직도 볕을 보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불과 몇 년 전의 이야기였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아버지, 울상을 짓고 있던 가신들, 씩씩거리던 누이와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던 자신.
치욕과 울음을 삼키고, 제 누이를 벌하겠다 말하는 아버지의 떨리는 음성.
"내 누이와 우리 가문에게 한 말을 잊었나. 그때 그 광경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단 말이지."
"그래."
마누스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예르모는 어느새, 저도 모르게 마나를 풀풀 피워 대고 있었다.
극도로 분노한 주인의 의지에 반응하듯, 사납게 일렁이는 마나였다.
마누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잠시 눈을 감고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마음속으로 단어들을 솎아 냈다.
상대방은 분노하고 있었다.
가문의 일에 사사로운 감정을 엮는 걸 금지하는 아카데미였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이던가.
모두가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 그가 다시 눈을 떴다.
"-철없던 시절이었겠지. 입에 담지 말아야 할 단어들을 올렸을 터다."
"...."
"이곳은 아카데미다."
으득-.
기예르모는 방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또, 또 너는 이름 뒤에 숨는구나.
비겁하고 영악한 새끼.
어쩔 수 없는 원리를 들먹이며 또 회피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가문의 일이 아닌, 단순한 대련이라면 피할 이유가 없지. 덤벼라."
이번에 그는 피하지 않았다.
기예르모의 눈빛이 흉흉하게 빛났다.
"-좋다."
"룰을 하나 더 추가하지."
마누스는 무표정하게 앞으로 나섰다.
그는 조용히 대련장 밖으로 나가고 있는 네 명의 후배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난 단 세 번의 마법만 사용하겠다. 너희도 잘 보도록. 수호자들 중엔, 명예를 저버린 자들도 있으니까."
언제고 그들이 방패를 세워, 너희들 앞에 설 때가 오겠지.
그때를 대비해, 녀석들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수호자를 상대하는 법.
데몬이 아닌, 몬스터가 아닌, 사람을 상대하는 방법.
어쩌면 데몬보다 무서운 이들이 사람이 아닐까.
적어도 게임 스토리를 썼던 인간은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오만하군."
기예르모는 지금 이 순간까지 모욕당하는 것 같아,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내, 아버지의 가르침을 상기하며 날뛰는 마나를 가다듬었다.
<흥분과 분노는 지켜야 할 대상을 지키지 못하게 한다.>
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색만 다를 뿐, 두 남자의 눈빛은 비슷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일류에 들어선 자들의 눈빛.
모두가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을 바라봤다.
딱 세 번.
주어진 기회는 그뿐이었다.
마누스는 마나를 끌어 올렸다.
마침 잘되었다.
아직 스킬이 완성되진 않았지만, 마나는 부쩍 늘었다.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폭군의 위명도 오늘로 끝이로군."
마누스는 구태여 설전을 벌이지 않았다.
쿠웅-.
방패를 앞세우고, 몸을 웅크려 자세를 잡은 기예르모.
전장에서, 잘 훈련된 수호자들은 탱크였다.
기예르모는 그 누구보다 훌륭한 수호자가 될 재목이다.
그 기세는 만만치 않겠지.
"간다-."
빠지직-.
마누스는 첫 마법으로 전격 마법을 택했다.
카이사르의 축복을 듬뿍 받은 그가 사용하지 못할 속성은 없었다.
전격이 날뛰기 시작하며, 땅거죽을 뒤집어 놓기 시작했다.
기예르모 역시 땅을 박찼다.
거대한 버팔로가 돌진하는 것처럼, 그는 모든 것을 분쇄할 기세로 돌격했다.
기본적인 기술이자, 수호자 클래스의 트레이드마크.
[악투스]
단순히 방패를 내세워 돌격하는 기술이었지만, 카운터 판정과 1회성 방어 판정이 들어가 있다.
그 판정이 현실에선 어떻게 구현될지 궁금했다.
마누스는 초장부터 괴물 같은 마법을 꺼내 들었다.
[풀게트라]
무려 3클래스에 달하는 전격 마법.
기예르모는 속으로 마누스의 선택을 비웃었다.
수호자에게, 정면에서의 공격은 소용이 없다.
그걸 모르는 자는, 꼼짝없이 당하는 수밖에.
하지만, 마누스는 이미 기예르모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
수호자의 강점은 정면에서 오는 공격을 막는 것이다.
하지만, 약점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직 멀었군."
삐이이익-!
전격이 공기를 가르며 귓가를 찌르는 음색을 토해 냈다.
광선처럼 뻗어 나간 전격이 때린 곳은, 기예르모가 막 발을 디딜 땅이었다.
콰아앙-!
대련장의 바닥이 박살 나며 작은 구덩이가 생겼다.
'-이런!'
흙먼지.
비틀거리는 중심.
마나로 보호했음에도 저릿한 신체.
놀라웠다.
-가문 뒤에만 숨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1:1로 붙으면 자신이 이길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중심을 잡았다.
쿠웅-!
강하게 지면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컥?"
"수호자는, 발이 약점이지. 그리고 뒤를 보지 않아."
팽팽한 무언가가 기예르모의 목덜미와 두 발을 붙들었다.
어찌나 억센지, 순간 몸을 보호하고 있던 마나가 풀릴 뻔했다.
어느새 두 번째 캐스팅.
1클래스 공통 마법이자, 적을 속박하는 마법.
[넥토]
기초적인 마법이었지만, 누가 쓰느냐에 따라 그 위력은 천차만별.
실제 5클래스를 자유자재로 사용했던 마도사는 [넥토]만으로 드레이크를 생포했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하다지.
뿌드득-.
아무리 힘을 줘 움직이려 해 봐도, 마나로 이뤄진 끈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가 오만하다는 건지 모르겠군."
마나가 뭉쳤다.
솔직히, 그가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상대해 온 어떤 존재보다 빨랐으니까.
그 위력은 어떤가.
'맞았으면 내가 졌겠지.'
허나, 그건 그때의 이야기다.
기예르모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으아아아아아아-!"
마나가 타오르며 속박을 풀어내려 했지만, 역부족.
마누스의 마법은 그저 기합만 가지고 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둘 사이에는 압도적인 역량의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 마법이 완성됐다.
방패는 무엇이든 막을 수 있지만, 충격은 고스란히 받아야 한다.
수호자들의 카운터가 바로 '물리' 계열 마법이었으니까.
[콘테로]
3클래스.
거대한 무언가가 기예르모의 방패를 정면으로 때렸다.
콰아아아앙-!
그 어마어마한 충격에, 금발의 수호자가 바닥 위를 굴렀다.
숨이 턱 막히고 온몸에서 힘이 풀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를 정도로 거센 충격이었다.
격통이 전신에 달렸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대련장 밖으로 튕겨 나온 후였다.
"-젠장."
"고작 그따위 실력으로 날 끌어내리려고 했나."
어느새 그의 앞으로 다가온 마누스가 그를 내려다봤다.
몸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마누스는 차가운 눈동자로 내려다보며, 다시 말을 골라냈다.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
잘잘못은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으니까.
그래서 물었다.
"네 누이가 볕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그래."
기예르모의 눈빛은 아직 죽지 않았다.
마누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시 끌어내야겠군."
"-뭐?"
"나는 성장했다. 네 누이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내 손으로 넣었으니, 내가 꺼내 주겠다."
기예르모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마누스.
그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는 걸까.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 걸까.
마누스는 다시 말했다.
"과거의 내 잘못은, 아카데미 밖에서 속죄하겠다."
"...하."
기예르모는 목에 힘을 빼고 차가운 바닥에 뒤통수를 기댔다.
이게 뭐라고 힘이 빠지는지.
별것 아닌 말에 괜히 울컥했다.
"누이의 이름이 뭐지?"
"클라리나. 버클리 클라리나다."
"이번엔 기억하지. 방학 때가 좋겠군."
기예르모의 누이는 정의감이 투철하고 명랑했으며, 언제나 찬란하게 빛나는 이였다.
그 어둠을 몰고 온 것이 바로 카이사르였으니, 그 어둠을 거둬 주는 것도 그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언젠가 꼭 카이사르 공국에 찾아가 그 말을 내뱉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빠르겠어."
볕이 드는 날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를지도 모르겠다.
마누스는 멀거니 자신들을 보고 있는 후배들에게 말했다.
"뭣들 하고 있나. 연습한다며."
"-아, 넵!"
"그럼요! 해야죠! 연습!"
그의 말에는 역시 마성이 깃들어 있었다.
기예르모는 누워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모양.
마누스는 굳이 방해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간섭이 시작되었습니다.]
무엇에, 혹은 누구에게 간섭하게 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저-기 뻗어 있는 수호자이거나.
아니면 아직 볕을 보지 못한 수호자 지망생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이 주변에 있는 인물 중 하나겠지.
어느 것이든 상관없었다.
지난날, 마누스라는 인물이 잘못 들었던 길을 바로잡는 것도 자신의 몫일 터다.
본래 오점을 남기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지구에 살았을 때도, 남에게는 폐를 끼치던 성격이 아니었다.
'나도 마누스가 다 됐군.'
이젠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이 삶은 축복일까?
지금까지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 대가로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여기저기 고개를 숙이는 것 정도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회사원, 그것도 말단의 자존심이 얼마나 높겠는가.
항상 겸손해야 했고, 항상 누군가를 위해 맞춰 살아가는 삶이었지.
'지금은, 그것보다는 훨씬 낫지.'
지금 보이는 비현실적인 광경이, 이젠 그에게 오감을 자극하는 현실이 되었다.
기예르모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모습에, 마누스는 팔짱을 꼈다.
더럽고 치사한 삶이었을 거다.
저 높은 곳에 있는 이들은 밑에 있는 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란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겠지.
그런 건 마누스도 질색이었다.
정당하게 살아야 한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배웠다.
"당분간 바빠지겠군."
그의 뇌까림이 폭음에 묻혀 흩어졌다.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기예르모의 표정이 마누스의 부담감을 줄여 주었다.
자신 덕분에 일행에 합류하지 못한다면, 일정에 큰 차질이 생길 테니까.
수련은 계속되었다.
제38화
- 평화의 끝자락에서
* * *
하루.
베로니카는 기숙사 내부를 돌아다니며, 목표의 동선을 파악했다.
이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교수들에게 배부된 명부를 바꿔치기했다.
사흘.
황실에서 추가 정보를 받았다.
꽤 도움 되는 정보들이었다.
나흘.
그녀는 누군가와 접촉했다.
살벌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복귀했다.
닷새.
아카데미 내부에 있는 감시 체계 중 일부를 마비시켰다.
효과는 이틀 정도 지속될 것이다.
엿새째 아침.
뜬눈으로 지새운 탓에, 이부자리는 정돈할 필요가 없었다.
마스터쯤 된다면, 하루 반나절 정도야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았으니.
"후우-."
그녀는 작은 한숨을 쉬며 교정으로 등교하는 이들을 바라봤다.
본래라면, 그들이 기숙사를 비운 사이 일하는 하녀들을 감독하고 관리해야 하지만-.
오늘 베로니카의 복장은 사뭇 남달랐다.
딱 붙는 타이즈 위로 덕지덕지 붙은 갑옷 조각들.
코까지 오는 복면에, 그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머리칼은 검게 쏟아 내리고 있었다.
질끈 묶은 머리칼을 정리하며, 그녀는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마누스. 제일 먼저 없애야 할-.'
다른 이들의 동선은 모두 파악했다.
황실에서 압박을 받고 있는 교수들 몇몇이 있는 이상, 자신이 일하기 편하게 조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단 한 명.
카이사르 마누스를 제외하곤.
<오늘, 아카데미의 상당수가 죽어 나갈 것이오.>
<그대는 위기에 빠진 이들을 구하지 않으면 되오. 혹여 눈치챈 다른 이가 있다면, 그들만 처리해 주시오.>
황실은 무얼 믿고 이런 일을 꾸미는 걸까.
그저 계약직인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며칠 전에 보니, 마누스가 버클리 가문의 장남과 화해했던 것 같던데-.
한숨이 깊어져만 갔다.
황실은 말했다.
몇 가지 일만 더 이행해 준다면, 자신이 온전히 하녀장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조치해 주겠다고.
'-믿을 수밖에 없잖아요.'
유일한 희망이었다.
피로 얼룩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떠나간 영혼들에게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녀는 그림자를 타고 흘러가, 누군가를 시선에 담았다.
카이사르 마누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수업을 듣는 중이었다.
2학년이면서 가장 악랄한 원소학, 그것도 3학년 수업을 듣는 검은 머리가 보였다.
오늘은 하루, 그의 곁에 있으면서 기회를 노려야 했다.
수업 시간은,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트레일 교수는 수업이 끝나기 전, 한마디를 덧붙였다.
"오늘 밤에 전달받은 사항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겁니다. 여러분 역시 아카데미의 전력이자, 망자를 상대하는 마법사임을 잊지 마십시오."
"-네."
"각자 부여받은 임무를 숙지하시기 바랍니다."
미토스 아카데미는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안정적인 마법진 아래, 안정적인 지휘 아래 싸우게 될 것이다.
기사와 수호자는 마법사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마법만 쏘면 되니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교재를 정리하며, 마누스는 오늘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기회는 오늘 해가 질 때까지.
그는 서둘러 1학년 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에피소드는 자신만 살아남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게임이 아닌 현실이었기에 더욱 노력하고 싶었다.
한 명이라도 살리기 위해선, 지금 뒤에서 일렁이는 그림자도 묶어 두어야겠지.
역시, 그의 생각대로 베로니카가 움직였다.
'그런데 왜 나지?'
본래 그녀는 이름 없는 엑스트라에게 숨어든다는 텍스트가 나온다.
또 한 번, 나비의 날갯짓이 무언가를 이끌어 낸 모양.
오히려 잘됐다.
굳이 힘들게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으니.
그는 짐짓 모른 척,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1학년들 역시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선배."
"오늘 준비할 물품을 알려 주마."
A반.
그리고 B반에서 나오는 멜라니까지.
바우어 가문의 리비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어디론가 급히 향했다.
쪽지를 들고 있는 걸 보아, 멜라니에게 어떤 지령을 받은 모양.
그림자, 그리고 마누스는 리비에게 슬쩍 눈길을 준 후 다시 1학년들에게 집중했다.
마누스는 쪽지를 나누어 주었다.
"이걸 준비해서, 해가 질 때까지 동아리실로 오도록."
"-알겠습니다."
케일이 슬쩍 손을 들었다.
쪽지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무슨 일이지?
마누스가 눈빛으로 물었다.
"도, 돈이 없어요."
"여기 있다."
"-아."
일단 급한 대로, 마누스는 금화 몇 개를 쥐여 주었다.
케일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그래, 지금 케일은 평민 신분이었고, 당연히 돈이 별로 없었다.
보조금이 나오지만, 그건 딱 식비와 생활이 가능할 정도였다.
멜라니가 서브 퀘스트를 물어 오기 전까지, 그녀는 수전노로 살아가야 했다.
아티팩트는 정식 절차를 거쳐서 팔아야 하기에 입금까진 시간이 걸리는 상황.
옆에 있던 아나이스와 멜라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일, 우리한테 말하지 그랬어."
"맞아. 우리가 도와줄 수 있었는데-."
케일은 배시시 웃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아나이스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친구 좋다는 게 뭔가.
"아쉬운 소리 하지 말고, 언제든지 우리한테 말해. 알겠지? 꼭-!"
"-응."
"우, 우리는 물품도, 아티팩트도 많이 필요해. 그, 그러니까 도와줄게."
정 뭐하면 나중에 갚으면 되지.
친구들은 스스럼없이 절대 부담스러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고마워."
"뭘. 우리 친구잖아. 같은 친구끼리는 서로 돕는 거야. 나중에 대마법사 돼서 갚으면 되지."
"응."
참 훈훈하고 순수한 친구들이었다.
마누스는 그 달달한 모습을 못 견디고 걸음을 옮겼다.
보고 있노라면, 그러지 못했던 자신의 학창 시절이 생각났으니까.
도구점에서 무언가를 사고, 또 기숙사에 들러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챙겼다.
지금 죽일까?
아니야.
기숙사에서 죽인다면, 문제는 커진다.
최대한 망자들의 손에 죽은 것처럼 위장해야 할 터다.
'그나저나, 이런 시기에도 공부라니-. 역시 뒤에서 노력하고 계셨군요.'
보면 볼수록 아까웠다.
그는 장차, 엄청난 인물이 될 인재였다.
그림자 속에서 염탐하는 자신보다 훨씬 더.
어쩌면, 지금 가장 위대한 마법사라 칭송받는 라베스마저 뛰어넘을 인재.
황실은 미리 그의 재능을 알아본 것일 수도.
베로니카는 그림자 속에서, 개화하는 재능을 바라봤다.
그의 뒷모습은 거대해 보였고, 또 마성이 깃들었다.
단 한 순간도, 한 걸음, 한 호흡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후-."
무언가를 잔뜩 적어, 품에 넣는 마누스.
책장에 있던 두툼한 책 한 권을 꺼내며 기숙사를 나섰다.
벌써 창밖은 붉게 물들었다.
해가 진다.
동시에 평화도 함께 질 것이다.
"다 됐군."
짙은 마나의 향이 그림자 속에서도 느껴졌다.
그의 발걸음은 초조한 듯 보였다.
완전히 해가 질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 * *
동아리실.
1학년 친구들은 미리 도착해, 사 온 물품들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마누스가 나누어 준 쪽지에는 각자 다른 물품이 적혀 있었다.
보조 마법이 특기인 피어슨은, 일회용 사역마를 소환할 수 있는 스크롤,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는 보조 마법 아티팩트.
그리고 성수.
광역 마법이 특기이자, 마나 소모가 심한 아나이스는 마나 포션, 방어 마법 스크롤, 일회용 마법 보석을 추천했다.
멜라니는 정신을 맑게 해 주는 포션, 피부 자체를 단단하게 만드는 마법 갑옷, 주변 적들을 밀쳐 낼 수 있는 아티팩트를 사 왔다.
"그러고 보니, 케일. 너는 뭐 사 왔어?"
"-난 이거."
병 부딪치는 소리가 잔뜩 났다.
달그락거리며 쏟아지는 병.
이것도 병.
저것도 병.
병병병-.
"이, 이게 뭐야. 다 포션이잖아?"
"그러네. 이거 돈 꽤 나갔겠는데?"
"왜, 왜 너한테만 포션을...."
케일은 멜라니의 물음에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왜 이렇게 사 오라고 했을까.
그건 케일도 제대로 생각해 본 바가 없었다.
달칵-.
문이 열리고, 새하얀 머리칼이 불쑥 들어왔다.
광란의 밤을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알라노가 등장했다.
"어머, 다들 모여 있었구나. 근데... 이게 다 뭐니?"
"아, 선배. 이건-."
타고난 입담이 특기인 피어슨이 잽싸게 나서서 설명했다.
모든 설명은 빠르고 장황하게 늘어졌다.
중간에 아나이스가 피어슨의 입을 막지 않았다면,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설명이 끊어지지 않았으리라.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알라노가 작게 감탄했다.
마누스.
그는 자신보다도 더, 이 후배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거다.
아니, 어쩌면 그 비상하고도 괴랄한 머리가 이런 걸 가능케 했을지도.
솔직히, 감격스러웠다.
"정말 놀라운데. 마누스는 아직 안 왔구나. 사실 나도 마누스에게 부탁받은 것이 있단다."
알라노가 창밖을 내다봤다.
해가 지고, 붉었던 하늘이 검푸른 색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공기마저 텁텁한 느낌으로 변해 갔다.
"케일."
"-네."
"지금 이걸 익힐 수 있겠니?"
그녀가 내민 것은 3클래스가 적혀 있는 술식집이었다.
-갑자기 여기서?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케일이 유독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조금 전, 마누스는 학생회실을 찾아왔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이 책을 건네주며 부탁했다.
<후배들을 부탁하지. 이번엔 나도 노력하겠다.>
<죽음에 대해 민감한 건, 너뿐만이 아니니.>
그의 말이, 눈빛이, 표정이, 자신들만 믿으라며 호언장담한 교수들보다 믿음직스러웠다.
절친한 친구의 부탁이다.
죽을힘을 다해 도울 생각이었다.
책을 받아 든 케일은 책과 널브러진 포션들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사락-.
책을 펼치자, 작은 종이가 들어 있었다.
유려한 필체가 돋보였다.
『빛 속성 신성 마법 한 가지 / 각 속성 중에 자신 있는 마법 두 가지를 익혀라. 추천하는 마법은 페이지에 표기해 두었다.』
무뚝뚝하지만 세심한 손길들이 엿보였다.
쪽지는 더 이어졌다.
케일의 눈동자가 글자들을 훑었다.
『네 역할은 최대한 많이 죽이는 거다. 숨겨 왔던 실력을 아낌없이 드러내야 할 거다.』
그 뒤로 점 몇 개가 찍혀 있는 걸 발견했다.
무언가 쓰려는 듯, 하지만 쓰지 않은 흔적이었다.
그는 무어라 말하려고 했을까.
어느새 케일은 그의 생각을 좇아, 자신도 비슷하게 생각하려는 버릇이 생겼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위명을 들어 왔던 카이사르를 존경했으니까.
마누스가 고민했다는 건, 분명-.
"케일. 너는 웬만큼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면 합류하도록 해. 우리가 그동안 열심히 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괜찮아. 그저, 그저 성벽 위에서 막기만 하면 되잖아?"
"최대한 빨리 갈게요."
파라락-.
말을 마친 그녀가 미세하게 끝을 잘라 낸 페이지를 폈다.
3클래스.
복잡하고 기하학적인 선분이 페이지를 가득 메웠다.
집중을 시작하자, 그녀의 주위에서 푸른 마나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본 알라노가 1학년 후배들을 이끌고 동아리실 밖으로 나섰다.
성벽으로 향하는 그들의 모습이 사뭇 비장했다.
'마누스.'
알라노는 마누스를 생각했다.
그가 이곳에 오지 않은 이유.
알라노는 품속에서 작은 쪽지를 꺼냈다.
『그림자가 날 노리고 있다.』
그는 홀로 볼일이 있다고 하며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흐르는 강물을 등지고 있어, 망자들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는 곳.
그곳으로 갈 것이다.
감히 누가 카이사르를 노리는 걸까.
친구가 걱정되었지만, 그녀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자신을 믿어 준 친우에게, 실망감을 안겨 줄 수 없는 노릇.
밖은 부산스러웠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평화의 끝자락을 놓자, 기다렸다는 듯 광란이 찾아왔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죽은 자들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제39화
- 그림자 사냥
* * *
[DLC 스토리가 시작되었습니다.]
[운명을 개척하세요.]
[S1 - 그림자 사냥꾼]
[보상 : 영구적으로 익히는 스킬의 등급이 강화됩니다.]
[키워드 : 황실 / 나그네 / 에레시스 / 베로니카 / 알라노]
[건투를 빕니다.]
짙은 밤이었다.
저 멀리, 죽은 자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21년.
모든 아르카나가 깨어나는 시간이기도 했다.
록스 대륙은 하루에 수백, 수천의 생명이 스러져 간다.
그건 몬스터고 사람이고 이종족이고 가릴 것이 없었다.
죽음이라는 종착역은, 그 대단하신 드래곤족도 피해 갈 수 없었던 운명이었으니.
그리고 지금.
마누스 역시 그 갈림길에 서 있었다.
'아무도 없어. 역시 베로니카는 철저하군.'
기회이자 위기였다.
그림자 암살자를 보스로 만났을 때, 권장 클리어 레벨은 80 이상.
그것도 파티원의 평균 레벨로 계산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최종 보스의 레벨이 99인 이 세상에서, 80이면 상당한 강자로 통한다.
주변을 둘러보자, 높고 단단한 성벽과 푸르른 잔디만이 보였다.
은은하게 흐르는 강물의 소리가 성벽을 넘어왔다.
높은 망루 위에, 도깨비불처럼 매달린 마법 등이 마누스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이제 나오지."
"...."
반응은 없었다.
마누스는 작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내 그림자 속이 그렇게 안락하던가. 암살자."
"...."
검은 인영이 소리 없이 튀어나왔다.
분명 사박거리는 잔디밭일진대, 내려앉은 소리는 더없이 조용했다.
고양이처럼 사뿐히 선 암살자.
황금빛 눈동자가 마누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저 눈빛을 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보았던 눈동자였으니.
고작 텍스트와 일러스트로 바라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현실감이 다가왔다.
-그 떨림과 슬픔이 오감을 너무도 짙게 자극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언제까지 개의 그림자로 살아갈 건지-."
마누스는 품에서 저주받은 못을 꺼내, 마나를 주입했다.
팍팍-.
잔디는 물렀고, 그의 초인적인 손끝의 감각은 원하는 위치에 못을 박게 해 주었다.
[저주받은 못]
[사용자와 지정 대상 외에,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결계를 생성한다.]
[지속 시간은 5턴(5분)이다.]
빠지직-.
투명한 막이 충분한 공간을 감쌌다.
이로써 둘만의 무대가 만들어졌다.
아무도 간섭할 수 없다.
설령 최종 보스라도, 아이템 보정은 막을 수 없으니.
본래 못의 사용처는 광역 공격을 하거나 정신계 마법을 난사하는 적을 묶는 용도였다.
탱커, 혹은 힐러와 던져 넣으면 다른 몬스터를 잡을 때까지 그 영향이 미치지 않았으니.
"...!"
변화를 감지했는지, 암살자의 눈동자가 휙휙 돌아갔다.
때는 늦었다.
그 발동은 찰나보다도 더 짧은 시간이었으니.
뒤이어, 그는 병 하나를 따, 자신의 머리에 부었다.
치이이이익-!
비릿한 냄새가 이는 것도 잠시, 마누스의 몸 안으로 모두 스며들었다.
[오만의 기름]
[대상 하나를 지정하여, 2턴(2분) 동안 능력치를 보정한다.]
[이후 1턴 동안 능력치가 절반으로 깎인다.]
쿠우우우우우-.
마누스로 살아오며 느껴 보지 못했던 압도적인 마나가 공간을 지배했다.
감각이 확장되고, 할 수 없었던 것들을 가능케 하는 힘이 생겼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시계가 느려지고, 정보가 물밀 듯이 몰려왔다.
진짜 고수, 진짜 대마법사가 느끼는 감각이란 이런 거구나.
암살자가 위험을 느꼈는지, 공세를 취했다.
'보인다.'
[카이사르의 마음가짐].
은신, 정신 계열은 무용지물이다.
뽕-.
마지막 하나.
블랙과 화이트에게 제조를 부탁했던 영원의 성수 한 병이 공기를 갈랐다.
"-헉!"
이제 막 그림자에서 튀어나오던 암살자는 성수를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치이이이이이-.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마누스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영원의 성수]
[사용 시 1턴간 대상의 방어력/저항력을 없앤다.]
그녀의 장기인 그림자 꿰뚫기.
빛을 등지고 늘어져 있던 그림자에서, 마나 꼬챙이가 쇄도했다.
텅텅텅-!
푸른 일곱 개의 꽃잎이 어느새 마누스의 주변을 맴돌았다.
[아이기스]
5클래스.
위대한 신의 방패가 마법사를 굳건하게 지켰다.
뿌득-.
인정해야 한다.
지금, 눈앞의 남자는 일개 학생이 아니다.
'어떤 수를 쓴 거죠?'
분명 기름 냄새가 확 풍겼다.
단순히 기름을 부어서, 저렇게 된다고?
아니, 그건 아닐 거다.
'내가 모르는 시약이 있다니, 그것도 이렇게 강력한-.'
위험하다.
그림자 암살자는 이를 악물고 덤벼들었다.
지지지직-.
돌아가는 방패 위로, 전격이 내리꽂혔다.
[폴게트라]
콰과과과과-!
땅거죽이 뒤집히고, 정면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방벽이 생겼다.
하지만, 그녀는 그림자 암살자.
[움브라 - 레티네오]
빛이 있는 곳엔 언제나 그림자가 있고, 그림자가 있는 곳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번개의 장막을 피해, 위대한 신의 방패 안쪽으로 들어가, 그녀는 마누스의 뒤를 잡았다.
이제 검만 휘두르면 된다.
그는 반응하지 못-.
"베로니카."
"-허억!"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꾸드드득-!
그녀의 신형이 허공에 붙들렸다.
미리 깔아 둔 마법이 그녀를 확실하게 옭아맸다.
수호자를 사용할 때도 써먹었던 마법.
[넥토]
[알투스]
보정을 받아, 마누스의 실력은 일시적으로 베로니카와 동급이 되었다.
5클래스를 가볍게 펼칠 수 있을 만한 역량의 마나가 한 곳에 모여 만든 족쇄다.
마누스는 아이기스도, 폴게트라에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그가 진짜 준비한 건 속박 마법이었다.
이제 곧 버프가 풀린다.
준비한 기름과 못은 많았지만, 성수는 모두 다른 이들에게 나눠 줬다.
"황실에서 보낸 명단. 그곳에 나도 있었나."
"...."
베로니카의 황금색 눈동자는 떨렸지만, 입을 열진 않았다.
마누스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훑었다.
사라락-.
검게 물들었던 그녀의 머리카락에 빛이 돌아왔다.
-하녀장 베로니카.
그녀가 떨리는 눈동자로 마누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대체, 왜-.
"-왜."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털썩-.
약속한 2분이 지나갔고, 마누스를 보호하고 있던 마법들이 사라졌다.
속박 마법 역시 마찬가지.
그녀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누스는 마나를 모조리 잃은 것도 모자라, 모든 능력치가 절반으로 떨어졌다.
여기서 그녀가 독한 마음을 먹는다면, 그는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목숨을 내줘야 할 것이다.
그러기 전에, 베로니카의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지금 이곳은 황제라 할지라도 엿보지 못한다."
"-처음부터 알고 계셨나요?"
"그래."
어떻게 해야 할까.
느껴지는 마나는 아주 미약했다.
굳이 무기를 들 필요도 없을 정도로 나약한 사내가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베로니카를 곧게 응시했다.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순간, 베로니카는 삶의 의지를 잃었다.
"그렇군요-."
처연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절벽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꽃잎 같았다.
그녀가 무장을 움켜쥐고, 천천히 움직였다.
질끈, 눈을 감고 움직이자 피가 튀었다.
-이윽고 눈을 뜬 그녀가 멍하니 피가 흐르는 곳을 바라봤다.
"-왜."
"아직 내 말 안 끝났다. 베로니카."
뚝뚝 떨어지는 피.
그 피가 흐르는 곳은, 마누스의 팔이었다.
날붙이가 피부를 파고들었음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왜 이렇게-."
"네가 편지를 건네준 그 날부터- 알고 있었다. 네가 그림자 암살자라는 걸."
"저는 죽어야 합니다. 임무에 실패한 암살자는-."
마누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마스터였지만, 그 누구보다 여렸다.
살인을 싫어했고, 피 묻히는 것을 끔찍하게도 싫어했다.
그럼에도 억지로 암살을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피를 묻히지 않는 삶을 위해서였다.
-제국의 손아귀에선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이건 그녀가 지금껏 살아오며 두 눈으로, 온몸으로 느낀 진리였다.
"그래, 암살자는 죽어야겠지. 하지만, 하녀장 베로니카까지 죽을 필욘 없다."
"그게 말이 되나요-?"
황제.
그리고 제국은 무서운 곳이었다.
아무리 카이사르가 대단하다고 해도, 황제의 힘 앞에선 한 수 접어야 한다.
그런 곳에서 자신을 빼내겠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마누스는 자각할 필요가 있었다.
아카데미 밖엔, 더없이 많은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공자님은 모릅니다. 저는 황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저는 그렇게 키워졌으니까-."
"그럴 줄 알고 준비했지."
마누스는 도구점에서 사 온 것들을 꺼냈다.
눈속임용 더미.
옷가지.
다양한 마도구들.
그것들의 공통점은-.
"...이런 눈속임이 통할 것 같나요?"
"알 게 뭔가."
"하아-."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었다.
마누스는 피식 웃으며 품속에서 가면 하나를 꺼냈다.
염색약은 덤이었다.
"새로운 하녀장이 되어라. 그리고 내 밑으로 들어와라."
"그러다 들키면요?"
"그땐 내가, 그리고 카이사르가 널 지켜 주마."
처절하게 울었던 그녀의 일러스트가 겹쳐 보였다.
황실에 대한 증오, 어쩔 수 없이 그림자 속에서 살아야 했던 비참함.
그 모든 것을 터뜨렸을 때, 그녀는 인간이되 신에 근접한 존재가 되었으니-.
반드시 그 참사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녀는 물끄러미 마누스를 올려다보았다.
못이 다시 땅에 박혔다.
아직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더 필요했다.
"저는, 또 누군가의 개가 되는 건가요?"
"아니, 가족이 되는 거지."
뭣도 없는 마누스의 말이었지만, 베로니카는 묘하게 그 말이 웅웅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잖은가."
"-아."
"그간 미안했다고. 그러니 무엇이든, 한 번은 도와주겠다고 했었지."
그래, 분명히 그랬었지.
그 말 역시, 자신을 위해 했던 말일 터다.
오늘 도구점에 갔던 일도 모두 자신을 위해 움직였던 거겠지.
참 신비로운 사람이었다.
한참을 바라봤지만, 그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 주었다.
-이제 결심이 섰다.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칼을 들어, 가볍게 휘둘렀다.
서걱-.
분홍 머리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리까지 내려왔던 장발에서, 이제 목을 덮는 단발이 되었다.
"믿어 보겠습니다."
"피를 묻히는 삶은 버릴 수 없다. 세계가 그렇게 변하고 있으니까."
"...."
베로니카는 천천히 일어서, 그의 말을 들었다.
마누스의 시선은 탑을 향해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
망자들의 소리가 들렸다.
이제 진정한 적이 모습을 드러낸다.
제국의 황실도, 데몬도, 데이몬도 아닌 자들.
허나 그 무엇보다 역겹고 끔찍한 자들.
"하지만 내 맹세하지."
"-예."
"이제 더는, 타인의 뜻에 따라 피를 묻힐 일은 없을 거다. 카이사르의 이름과 나, 마누스의 이름을 걸고 신께 맹세하겠다."
베로니카가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은 한 치의 거짓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으므로.
그 진심이 그녀의 뇌리와 가슴에 깊게 각인되었다.
"이젠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네 힘은, 네 뜻대로 써야지."
베로니카는 손을 뻗어, 잘게 떨리는 마누스의 손을 잡았다.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나 무리했었구나.
눈물이 차올랐지만, 꾹 참았다.
목이 메었지만, 애써 소리를 내었다.
"저 아덴은, 오직 당신만을 위한 그림자가 되겠습니다."
당신만을 위해 움직이고, 당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그림자.
카이사르 마누스의 안전을 위해 움직이는 그림자가 되겠다고 맹세했다.
그녀의 입술이 마누스의 손등에 닿았다.
암살자의 세계에서, 버림받을 이를 거둬 주는 건 자신의 목숨을 다해 적들과 맞서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 마누스는 무려 황실을 상대로 당당하게 맞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
"환영한다."
마누스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그와 동시에, 마누스 앞에 무수히 많은 창이 생성되었다.
보상을 받을 시간이었다.
제40화
- 그녀가 울게 하지 않기 위해서
* * *
보상.
간단하다면 간단한 전투였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전혀-.
일개 학생이 마스터를 상대로 버틴 전투다.
물론 베로니카가 평범한 암살자와 같았다면, 죽는 것은 여지없는 사실이었을 거다.
마누스는 천천히 메시지들을 읽어 나갔다.
중요한 분기 몇 가지가 포함되어 있었는지, 흥미로운 사실이 제법 있었다.
[S1 클리어]
[점수를 계산합니다.]
[베로니카 생존 / 베로니카 위장 / 5클래스 마법 사용 / 베로니카의 본명 확인]
[종합 : S+]
[보상 : 마석 결정 XXL]
[100일 이내 스킬 선택 습득권 1장]
[세계선의 방향이 변화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시련이 닥쳐올 것입니다. 자신만의 결말을 향해 정진하세요.]
'오히려 좋아.'
100일 이내 스킬을 골라서 선택해 습득할 수 있는 것.
또한, 마석 결정 XXL.
무려 6클래스 마법 1번.
5클래스 마법 10번 정도의 용량이다.
저걸 흡수한다면, 마나 때문에 스킬 사용을 못 하는 일은 없다고 봐야지.
저거다.
극후반부에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먼치킨을 찍는 이유.
마석 결정만 몇 개 흡수하면 사기급 스킬들을 남발할 수 있으니까.
"이제 저는 어떻게 할까요?"
"죽어야지."
무심코 답했다.
베로니카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깃들었다.
그래, 이제 베로니카는 죽는다.
그리고 아덴으로 다시 살아갈 것이다.
베로니카, 아니 아덴은 그렇게 결정했다.
"알겠습니다. 베로니카는 죽고, 아덴으로 다시 태어나겠습니다."
"나는 이제 성벽으로 간다."
"저는-."
"수습하고, 위장을 준비하도록. 이사장님께 알리면 될 거다."
아덴은 고개를 숙였다.
잔디를 밟는 소리가 멀어졌다.
마누스는 전장으로 향했다.
본인의 이야기를 끝냈으니, 남의 이야기에 간섭할 차례였다.
안배는 모두 마쳐 두었지만, 변수는 어디에서나 생겨난다.
그 변수를 차단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고, 그걸 위해 자신이 움직일 차례였다.
많은 이들이 죽을 거다.
대지에 흘릴 피는 악당들의 것이면 충분하다.
선한 자들의 피가 흩뿌려질 필욘 없다.
그리고 그걸 위해선, 그 무엇보다 압도적인 힘이 필요했다.
'바로 써야겠어.'
스킬 목록을 불러왔다.
필터를 거쳐 후보를 뽑았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마주하게 될 적을 생각했다.
수많은 망자들.
죽음의 신을 섬기는 자들.
악마와 계약한 자들과 탑에 서식하는 데몬-.
[계시록의 뜻]
[아아, 그렇게 말했다.]
[두 신이 격돌하는 날, 하늘에선 수많은 천사와 악마가 서로 뒤엉킬 것이다.]
[하늘에선 천상의 뿔피리 소리와 지옥의 송가가 끊임없이 퍼질 것이다.]
[각자의 뜻을 위해 파견하는 다섯 기사가 지상에 있는 이들을 덮쳐, 자신의 군대로 만들 것이며, 죄가 있는 이들은 모두 재가 되리라.]
[우리는 그 예언을 믿어야 하며, 항상 독실한 믿음으로 뜻을 받들리라.]
계시록.
신성한 마법을 쓰는 사제들이 읽는 경전의 본질이자 언젠가 이 세상의 끝이 오면 들이닥칠 광경에 대한 예언서.
지구에도 비슷한, 아니 이 계시록의 원류가 된 서적이 있다.
<요한계시록>
성서에 담겨 있는 서적은 진위 여부 따위, 알 수 없는 글이지만 이곳에선 다르다.
믿음은 곧 환한 빛으로 나타났고, 계시록의 뜻은 빛 속성 마법을 증폭시켜 주는 스킬이 되었다.
효과 역시 단순했다.
[빛 속성 마법 공격력 +30%]
언제나 마누스가 외치는 부분이 있다.
간단한 효과가 곧 가장 뛰어난 효과다.
마누스는 주저 없이 스킬을 습득했다.
[계시록의 뜻 습득]
[모든 빛 속성 마법에 추가 공격력 30%]
[해당 효과는 타 부스트 스킬과 중복 적용됩니다.]
패시브가 많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덕지덕지 발라 놓은 패시브는, 1클래스 마법을 5클래스급 마법으로 둔갑시키니까.
'그것도 배울 수 있는 캐릭터가 정해져 있지만.'
오직 주인공.
주인공 캐릭터만이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애지중지 키워야 할 것이다.
다른 이들 역시 그가 보지 못한 가능성이 잠들어 있을 수도 있겠지.
'역시, 난 이곳이 좋아.'
조금은 뒤틀린, 그러나 올곧은 욕망이었다.
* * *
망자의 밤.
그것은 누군가에겐 끔찍한 트라우마의 밤이었으며, 누군가에게는 멋진 수련의 장이었다.
마법사들은 성벽 위에 서, 스멀스멀 기어 오고 있는 망자들을 향해 마법을 퍼부었다.
으레 이런 식이었다.
미토스 아카데미 근처는 분쟁이 없는 지대.
주기적으로 교수들이 나서 몬스터 역시 청소해 두기 때문에 강력한 존재가 없었다.
누군가 끼어들어 판을 망치지 않는 이상, 그저 좋은 연습 무대일 뿐이란 거다.
"마나를 어떻게 분배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날려라!"
"무조건 강한 마법만 날린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전황을 읽고, 상황에 맞는 마법을 고르는 능력을 기르세요."
교수들은 학생들을 감독하며 마법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전황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었다.
학생에게 실전은 매우 귀한 경험이었다.
그건 현장에서 발로 뛸 기사, 수호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빨리빨리 움직여-! 보급 그따위로 하면 다 굶어 뒈진다!"
"가서 검부터 휘두를 생각이냐! 그딴 정신머리로 무슨 검을 휘두르냐!"
"마법사들 방해 안 되게 가려야지! 방패 각도 조절해!"
고성이 오갔다.
학생들은 갑옷을, 중갑을 입고 연신 뛰어다녔다.
혹여 날아오는 투사체는 수호자가 처리했다.
그것이 수호자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
보디가드를 모티브로 제작했다고 하는 수호자는 그 이름에 걸맞게 철통같은 방어력을 자랑했다.
형형색색의 마법이 대지에 떨어지는 일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 혼란 속에, 알라노는 목청을 높여 외쳤다.
"발사-!"
콰콰콰콰-.
언데드.
망자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마법인 화염 속성이 대지를 불태웠다.
그녀가 지휘하고 있는 곳은 북쪽 관문이었다.
황무지였고, 예전에 거대한 숲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일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조금 있으면 자정.'
마누스는 자정을 조심하라 일렀다.
그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뒤를 올려다봤다.
우뚝 솟아 있는 탑.
자정이 되면, 저 탑에서 무언가 쏟아지지 않을까.
저 높은 탑에서, 자신들을 향해 죽음이 쏟아져 내리진 않을까.
그녀는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켜야만 했다.
"선배. 이제 곧-."
"알고 있어. 다들 긴장해."
궁금했다.
지난 코르푸스의 밤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탑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전에도 분명 시간과 시간 사이의 간극이 존재했겠지.
-만약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 모든 광경이 멈춰야만 했다.
마누스는 어디까지나 자정을 조심하라고만 했지, 모든 것을 막아 내란 소린 하지 않았다.
그녀는 탑에 다녀온 직후, 항상 가지고 다니던 시계를 꺼냈다.
-이제 세계가 멈춘다.
"지금-."
찰칵.
시계가 멈췄고, 세상이 암녹색으로 변했다.
오늘은 유난히 붉은 달이 떠 있었다.
마치 죽음의 신이 그 눈동자를 떠, 망자들이 일어나는 밤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모두 멈췄어."
멈췄다.
망자의 군세, 흘러가는 바람, 냄새.
그 소란스럽던 소리까지.
모든 것이 멈췄다.
"...침식이 건물 전체에?"
"여기 봐! 이거 꼭-."
그들이 본 것은 거대한 공동묘지 같은 광경이었다.
붉은 공동묘지처럼 새빨간 관이 우수수 서 있었다.
마치 영혼을 관 속에 집어넣은 것 같달까.
보기만 해도 오싹한 광경이었다.
"이거... 만약에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누군가의 말에, 모두의 머릿속에 섬뜩하고 끔찍한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일단 모이자."
1학년 후배, 그리고 알라노가 모였다.
케일은 아직까지 동아리실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성벽 위에 늘어진 영혼의 관들을 바라봤다.
마치 수백, 수천의 드라큘라가 잠들어 있는 것같이 주르륵 놓인 관,
하나씩 볼 땐 실감이 안 나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시야를 가득 메우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피어슨이 긴 한숨을 흘리며 말했다.
"그래도,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입니다. 으아-. 보조 마법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는데."
"후우-. 그러게요. 아직 케일도 안 왔고.... 마누스 선배는 뭘 예견한 걸까요?"
"이사장님께 듣기론 카이사르 가문에서 무언가를 예견했다고 해. 그래서 마법진도 특별하게 손봤다고 하는데...."
모든 것이 멈춰 버린 지금에서야, 별 의미가 없었다.
1학년과 알라노.
그들은 탑을 바라봤다.
다행히 탑은 잠잠해 보였다.
궁금증이란 감정이 가라앉고, 안도감과 피곤함이 몰려올 때, 그들은 방심했다.
적당한 긴장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감당하기엔 너무도 큰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사건의 시작은 언제나 작은 방심에서부터 오는 법.
[아아아아아아아-!]
들려야 할 리 없는 망자의 소리가 들렸다.
모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저, 저게 뭐야."
"용족... 아니, 드레이큰가?"
드레이크.
과거, 수백만 년 동안 룩스 대륙을 통치했던, 그러나 저주를 받아 버린 존재.
지상 최강의 몬스터로 군림하고 있으며, 그 개체 역시 대륙 전체를 통틀어 일만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청렴한 구역에 드레이크라고?
일행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사실인지 묻고 싶었다.
잠시 사고가 정지되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신 차려! 그냥 드레이크는 아니야. 레서... 아마도 해츨링이겠지."
"움직이는 거라면, 누, 누군가의 소환수일까요?"
멜라니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게다가, 이 멈춰 있는 시간에 움직일 수 있는 건, 같은 선택받은 자들뿐.
알라노는 비상한 머리로 생각했다.
상황은 절로 맞아떨어졌다.
마누스가 왜 조심하라고 했는지, 또 케일에게 신성 마법을 익히라고 했는지.
-게다가 자신을 빛 속성 마법에 취약한 몬스터에게로 인도한 것까지.
"일단 막을 수 있는 건 우리뿐이야. 마법진도 작동되지 않는 것 같아."
"그럼, 저, 저걸 맨몸으로 막아요?! 드레이크잖아요! 4클래스 마법사도 못 비빌 놈이라구요 저건-!"
"그러면, 도망치고 나머지 다 죽일까?"
알라노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마치 마누스가 분노할 때의 그 눈동자를 보는 것 같아, 피어슨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수많은 관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알라노 본인이 생각하는 끔찍한 상상이, 현실로 이뤄지게 놔둘 순 없었다.
어쨌든, 저걸 막아야 한다.
웬만한 공성 병기만 한 저 괴물은, 곧바로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콰앙-! 콰앙-!
압도적인 덩치 위에, 로브를 뒤집어쓴 인영이 보였다.
마법사들 모두 마나를 사용해 저 멀리 있는 실루엣을 똑똑히 봤다.
회색 로브.
그들은 죽음의 신을 상징하는 엠블럼을 새겨 넣었다.
"모두 전투 준비해."
"-알겠습니다."
마법을 장전하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쿠웅-.
거대한 성벽은 제아무리 드레이크라고 해도, 쉽사리 뚫지 못할 정도로 견고했다.
지형의 이점을 살리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믿는 걸 넘어, 반드시 그런 결과를 만들어 내야 했다.
수많은 학생, 교사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다.
이건 연습이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드레이크가 멈췄다.
그 위에 있는 인영이 말을 걸어왔다.
마누스였다면, 그 말을 듣지도 않고 마법을 쐈겠지.
하지만 이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한 학생들이었다.
당황과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일단 보고 있었다.
드레이크 위에 있는 자가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죽음의 신을 섬기는 자. 그의 성소를 찾아 먼 길을 헤매고 있는 나그네입니다."
"여긴 그런 곳이 아닙니다. 그보다... 당신이 이 침식을 일으켰나요?"
히죽, 그는 대답 없이 웃었다.
그것으로도 답은 나왔다.
"오오, 이런 이런, 여러분은 아직 모르고 계시는군요. 이곳이야말로, 제가 오랜 기간 찾아오던 성소입니다."
보이십니까-!
저 우뚝 솟은 탑!
죽음의 기운이 가득 들어 있는, 저 탑이이-!
로브를 뒤집어쓴 자는 미친 듯이 웃으며 소리쳤다.
그들이 상상했던 미친놈이 실제로 나타난 것.
그가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니 비켜 주십시오. 저는 성소에 들어가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드레이크를 얌전히 돌려보내고, 정식 절차를 밟으면 들여보내 주겠습니다."
저 인간을 탑에 들여보내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시련이 닥쳐올 것 같았다.
알라노의 직감은 제법 정확한 편이었고, 그 직감이 경고 등을 매우 밝게 점등하는 중이었다.
로브를 뒤집어쓴 이가 다시 말했다.
"하-. 신성한 장소를 점거한 것도 모자라, 제 통행을 방해하겠다고요? 안 돼요. 안 되죠. 안 됩니다! 당신들은 이단이로군요. 파수꾼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어."
두 눈이 붉게 충혈되고, 불길한 마나가 솟구쳤다.
알라노는 지식이 많았고, 스멀스멀 피어나는 마나의 종류를 구분해 말했다.
"-흑마법사. 모두들 준비해. 드레이크는 빛 속성 마법과 화염 속성 마법이 약점이야."
"알겠습니다."
"고작 그런 힘으로는 절 막을 수 없습니다. 보여 줘야겠군요. 에레시스 신도의 힘을-."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새하얀 빛줄기가 하늘에서 내리꽂혔다.
콰우우우우-.
실로 대단한 위력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저 왔어요."
새하얀 마나를 몸에 두르고 있는 자가 성벽 위로 올라왔다.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자.
-실로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반나절 만에 3클래스 마법을 익힌 케일이었다.
제41화
- 에레시스, 그 반역의 이름
* * *
누군가 말한다.
이 세상은 무척 불공평하다고.
허나 누군가는 또 말한다.
모든 생명체에게 공평한 것이 하나 있다고.
-죽음.
만물에게 허락된 유일한 종착지.
영원이라고 믿을 만큼 오래 사는 생물은 있었지만,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을 살아가는 생명은 없다.
그들은 생각했다.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이상향이다.>
죽음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진리이며, 그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신이다.
모든 불공평 속에, 공평함을 내린 죽음의 신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누군가가 말한 이 말은, 세상 속 불공평함을 증오하던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었다.
세상을 향해 불합리함을 외치던 사람들이 음지에서 모여들었다.
죽음의 신을 찬양하고, 세상의 불공평함을 공평함으로 덮기 위해 모인 이들은 곧 거대한 단체가 되었다.
에레시스.
새로운 낙원을 꿈꾸는 이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불렀다.
부조리한 세상은 부패한 종교와 같다.
그러니, 자신들은 이 세상을 배신하고 이단아와 같은 삶을 살 것이라는 의지.
"-그대들은 부패한 세상에 순응했군요. 그렇다면 죽으십시오. 성소를 탈환하는 성전을 시작하겠습니다."
파직-.
순백의 스파크를 흘리고 있는 괴인.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분노에 찬 눈동자를 들어 학생들을 바라봤다.
탑을 막고 있는 거대한 장벽이 거슬렸다.
성소를 막고 있는 거대한 장벽은 시련일 게다.
그렇담 악의 무리에게서 성소를 탈환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이자 숙명.
나그네는 희열과 분노,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가서 부정한 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으어어어어어어-!
거대한 죽음의 외침에 따라, 드레이크가 울부짖었다.
쿠웅-!
드레이크가 웅크렸던 몸을 일으켰다.
케일의 신성 마법이 분노를 촉발했는지, 흉포한 기색이었다.
로브를 뒤집어쓴 나그네는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내비치며 팔짱을 꼈다.
이제 성소를 막고 있는 장벽은 파괴될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십쇼. 나의 신이여-.'
드레이크는 드래곤의 화신.
그 옛날, 이 세상을 지배했을 정도로 강력했던 존재들이었다.
제아무리 어린 드레이크라도 성벽 정도야, 가볍게 날려 버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쿠웅-!
회백색, 탁한 동공이 멍하니 성벽을 응시했다.
살아 있는 자의 명령에 따라, 작은 드레이크는 그 육중한 몸을 성벽에 들이받았다.
콰아아앙-!
"이, 이러다 무너지는 거 아니에요?!"
"모든 게 멈췄다고 해도, 방벽에 부여된 마법은 멈추지 않았어. 그러니 버틸 수 있어. 그동안 우리는 드레이크를 잡으면 돼."
"-죽일 수 있을까요?"
알라노는 이를 악물었다.
해내야지.
이 모든 사람들을 죽일 순 없었다.
한 사람이라도 구해야 한다.
"죽여야 해. 반드시."
그녀의 몸에서 마나가 요동쳤다.
미토스 아카데미는 수많은 사람들의 터전이다.
미래로 향해 나아가는 발판을 무너뜨릴 순 없었다.
까드드득-!
시리도록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
그녀도 할 수 있었다.
다만, 언제고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를 대비해서 꺼내지 않았을 뿐.
'아직 마누스만큼 능숙하게 처리할 순 없지만-.'
과부하가 걸릴 듯, 두통이 일었다.
콰르르륵-!
반대편 손에서 시뻘건 화염이 이글거렸다.
더블 캐스팅.
천재의 증표이자, 영광스러운 마법사의 상징.
두 가지 마법이 대지를 향해 나아갔다.
[이그니라]
[글라치에]
2클래스 마법의 더블 캐스팅.
얼음의 꽃은 바닥을 얼려, 기동성을 빼앗았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가 빙하 지대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아아아-!]
꾸드득-!
거체를 묶는 건 찰나였지만, 마법이 도달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다.
드레이크가 화염에 휩싸였다.
알라노의 지휘는 1학년 후배들의 힘을 단결시킬 수 있었다.
아나이스 역시 2클래스 마법을 날렸다.
멜라니는 화염 정령 : 샐러맨더의 힘을 빌렸다.
피어슨과 케일은?
"케일! 한 방 크게 날려 달라고!"
"-준비됐어!"
케일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
보여 줘라.
우리의 에이스.
마누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마법사.
[더블 스프레드]
[도니움] - [이그니라]
2클래스 빛 속성 마법 : [도니움].
2클래스 화염 속성 마법 : [이그니라].
이전, 마누스가 만들었던 태양 같은 불꽃이 아니었다.
망자들을 태워 버릴, 신의 징벌이었다.
은은함 따위는 사치일 뿐.
화끈한 일격이 완성되었다.
거기다 피어슨의 보조 마법이 그 위력을 증폭.
그녀가 목표로 했던 그자를 따라잡기 위해,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마법을 뿌렸다.
[루멘 포이나]
시뻘건 광선이 레일건처럼 쏘아졌고, 그 충격으로 케일이 튕겨 나갔다.
겨우 자세를 잡고 결과를 확인하자, 실로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드, 드레이크가 뚫렸어?"
"굉장해! 이걸로-!"
[아아아아아아-!]
회백색 동공을 가진 괴물은 기상천외한 일을 벌였다.
콰직-!
죽어서도 쉬지 못한 망자 하나를 우적우적 씹었다.
매캐한 연기가 나는 썩은 살덩어리가 추적추적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게...."
"후후, 죽음의 은총을 받은 제 귀여운 아이입니다. 마법은 실로 훌륭했습니다만, 그 정도에 무너질 제 애완동물이 아니지요. 후후후후-."
"저 드레이크, 더 커졌는데요?"
"...어떻게 해야-."
알라노는 침착함을 잃지 않고 생각했다.
쿠우웅-!
어느새 회복한 드레이크가 성벽을 두들겼다.
훨씬 더 거대해진 몸뚱어리는 충차에 버금가는 질량으로 성벽을 쿵쿵 때려 대기 시작했다.
알라노의 눈빛이 황무지를 훑었다.
적의 양분이 되는 망자들.
그 속에 우뚝 서 있는 드레이크.
'녀석은 회복한다. 드레이크의 본체는 성벽을 공격하고-. 저 이상하게 생긴 남자는 상당한 내구도를 가지고 있어.'
녀석은 전투에 직접 끼어들지 않고 있었다.
왜?
그녀의 눈망울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상황을 파악했다.
"아나이스, 케일, 일단 화염 마법으로 주변에 있는 망자들만 죽여."
"-네."
"피어슨. 성벽에다 보조 마법을 걸어."
"서, 성벽에다요?"
다소 황당한 주문.
성벽에다 보조 마법을 걸라니.
애초에 사물에게 보조 마법을 걸 수 있는 거야?
"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성벽도 마법이 걸려 있잖아. 거기다 덧씌우면 그만이란다."
"-해 볼게요."
못하면 학교 전체가 위험하다.
이럴 때 마누스가 있었다면 척척 해냈겠지만, 천년만년 그가 보모처럼 붙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공격 마법도, 방어 마법도 젬병이지만, A반에 들어간 이유를 보여 주겠어.
피어슨은 해 보기로 했다.
그녀의 요구는, 기존에 있던 선입견 하나를 또 없앴다.
피어슨은 자유로운 영혼.
그의 마법 역시, 틀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좋았어-."
눈을 감고 땅을 짚었다,
성벽의 차가운 질감이 전해졌다.
그 속, 저 본질에 새겨져 있는 마법진을 읽었다.
어떻게 하면 이 마법들을 강화할 수 있는지.
술식을 어떻게 짜 넣어야, 더욱 단단한 구성이 되는지.
으윽-.
너무 많은 심력을 쏟아부은 탓인지, 순간 의식이 흐려졌다.
'대단해. 대단한 마법이야. 술식의 구조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촘촘하고... 대단해. 복잡하다.'
마법을 직접 건드는 건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마법진이 다치면 안 되니까 말이야. 이 몸이 지켜 주겠어."
[두라맨]
마나가 성벽을 타고 흘렀다.
기이이이잉-!
성벽을 이루고 있는 벽돌 사이사이가 빛났다.
"어라-?"
나그네는 그 광경을 보고,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쿠우웅-!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던 성벽이 오히려 단단해졌다.
한층 거대해진 드레이크가 몸으로 들이받아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성공-! 어떻습니까! 저도 지원 하나는 기가 막힌다구요!"
"잘했어!"
화르르르르-!
황무지는 망자들의 화장터가 되어 가고 있었다.
어찌나 절묘한 불 조절인지, 약한 망자들은 줄줄이 타들어 갔고, 드레이크는 멀쩡했다.
나그네는 은발을 휘날리고 있는 여인, 알라노를 바라봤다.
"성녀처럼 보이나, 그 악행이 도를 넘어서는군요. 당신을 꼭 요주 인물로 넣어야겠습니다."
그 지휘 능력이 실로 탁월했다.
눈을 감고, 드레이크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작은 종은 충실히 명령을 이행하고 있지만, 어딘가 부족했다.
조금 더 공격적이고, 성벽을 뒤흔들 수 있어야 한다.
'비장의 공격을 준비하세요. 나의 종이여.'
물리력으로 안 된다면, 더 큰 무언가를 준비하면 된다.
회백색 동공에 빛이 깃들었다.
살아생전, 대지를 지배했던 때의 기억이 몸을 지배했다.
침입자.
적대적 존재.
자신의 영역을 위협하는 자들.
그들을 멸하는 건, 그의 숙명이자 운명이었다.
[크어어어어어어-!]
"으악!"
"이, 이거 뭐야?!"
응집하려던 마나가 흩어졌다.
성벽 위에 있던 이들이 소스라치게 놀란 것도 당연했다.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하는 건 알라노뿐이었다.
"피어야. 다시 술식을 짜 올려야 해. 침착하게 대응해."
"치사한 기술을 가지고 있네 진짜!"
후우웅-.
세찬 바람이 불었다.
드레이크가 고이 접어 두었던 날개를 펴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저 고도가 조금 상승한 것뿐이었지만, 바라보고 있는 자 입장에선 상당한 위압감을 느껴야만 했다.
드레이크가 입을 쩍 벌리고 대기 중에 있는 마나를 잔뜩 끌어모았다.
압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고밀도로 쌓여 가는 마나.
일행은, 그게 뭘 뜻하는지 대번에 알아챘다.
"브레스잖아-!"
"쏴-!"
순식간에 형형색색의 마법이 날았다.
거체를 가릴 정도로 큰 폭발이 일어났지만, 타격은 미지수.
후웅-!
드레이크가 날갯짓을 한 번 하자, 그 자세 그대로 마나를 모으고 있는 장면이 포착됐다.
절망적인 상황.
알라노의 두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도저히, 도저히 자신들의 힘으론 막을 수 없었다.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지식을 탐구했다고 느꼈는데도 역부족이었다.
순식간에 무능력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은 기분.
그것이 그녀를 절망 속으로 빠뜨리려고 했다.
"-잘 버텼다."
부드럽고 강한, 그 단단한 손이 절망 속으로 빠지려는 그녀의 손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어깨를 잡고, 그녀 앞에 선 검은 머리칼의 사내.
스멀스멀 피어나는 마나가 심상치 않았다.
"사역마를 상대하는 법은 간단한데, 드레이크라고 해서 겁먹을 필요 없다."
"브레스야. 성벽은 물론이고 이 뒤까지 날아갈 거라고."
마누스는 피식 웃으며 간단한 마법을 날렸다.
속도가 가장 빠른 전격 마법.
목표는 드레이크 뒤에 있는 나그네였다.
빠르게 나아간 빛살을 보고 흠칫한 나그네가 자리를 떴다.
쿠아앙-!
실로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크윽-. 이렇게 빠르고 강한 마법이라니. 새로운 강적이군요."
[우오오오오-]
쿠웅-!
드레이크가 마나 모으는 행위를 멈추고, 땅으로 내려섰다.
비밀이 드러났다.
전멸기를 막을 수 있는 기믹은 언제나 존재하는 법.
나그네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마누스를 올려다보았다.
이내 픽, 웃음을 흘렸다.
사역마와 소환사.
망자 역시 똑같은 관계였다.
"몇 클래스 마법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제법이군요. 이 정도 파괴력이라니."
"더러운 것 뒤에 숨어서 나불거리는 것만큼 눈깔도 썩었군."
"-말씀이 심하시군요."
나그네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이내, 들려온 말은 그의 이성을 원래대로 돌려놓기 충분했다.
마누스의 오만한 눈동자가 그를 내려다봤다.
"1클래스 마법이다. 에레시스."
나그네가 움푹 파인 흔적과 마누스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1클래스 마법으로, 이런 흔적을 만들어 내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이던가?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
푸른 눈동자.
그 모습을 알아본 나그네가 오싹함에 몸을 떨었다.
제42화
- 징벌은 신이 하는 게 아니다
* * *
징벌은 누가 내리는가.
누군가는 하늘이 벌을 내릴 거라 말한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누군가에게 벌을 내릴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누스는 안 좋은 일을 겪으며, 뼈저리게 느꼈다.
개인적인 힘이 있다면, 절대 신을 찾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힘이 부족하기에 사람은, 누군가를 찾는다.
돈을 빌리고, 힘을 부르짖고, 누군가가 대신 징벌하길 원한다.
"너는 내가 직접 벌해 주지."
마누스는, 더 이상 약자가 아니었다.
치이이익-.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성수가 황무지를 적셨다.
그가 대기하고 있던 이들에게도 말했다.
본래 그들이 재량껏 사용하길 바랐지만, 아무래도 경험이 부족한 이들인 만큼 역부족이었던 모양.
그가 미증유의 마나를 뿜어내며 입을 열었다.
"기름은 대상과의 힘을 평준화시켜 준다. 성수는 방어력을 상실시키지. 도구를 쓰는 것 역시 반드시 익혀야 할 기술이다."
"그러고 보니...."
도구를 준비하라고 했으나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건, 마누스의 불찰이었다.
이들은 게임에서 조작하는 캐릭터가 아니다.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일일이 조작하는 것처럼, 이들 역시 지식을 주입해 주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상황이 급박하면 눈앞에 있는 일만 해결하려는 성질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
이는 나중에 차차 개선해 나가면 된다.
이들이 완숙한 마법사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할 일일 것이다.
"도구를 사용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마라. 물론, 마법 하나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정도라면 다르겠지만."
"아, 알겠어요."
"맞아,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잔뜩 있잖아."
그때서야 주섬주섬 도구를 꺼내 드는 이들.
알라노 역시 얼굴을 붉혔다.
자신은 아직 멀었구나.
마법사로서, 아직 그들은 미숙했다.
'웬만한 성인보다 낫다고 하는 것도, 다 우물 안 개구리를 예뻐하는 거였어.'
콰르르르륵-!
마누스가 기름으로 강화한 능력치는 바로 드레이크.
대지의 제왕이었던 자의 능력치가 고스란히 깃들었다.
'어차피 저 녀석은 여기서 살아가겠지.'
지금 급한 것은 녀석을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밤은 길었다.
처리해야 할 망자는 아직도 많았으며, 대응도 못하는 이들을 깨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도망치는 걸 허락하마. 버러지."
마누스의 눈동자가 마나로 일렁였다.
그의 손끝에서,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4클래스.
그 힘들다던 빛 속성 마법.
헌데, 그 규모가 심상치 않았다.
대기가 울었다.
천둥 번개가 눈앞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이런 위력이라니.'
"징벌은 신이 아니라, 내가 내린다."
[파툼] - [알투스]
중첩 마법이 들어갔다.
동시에 그가 가지고 있는 패시브가 발동됐다.
중첩 마법 보정, 위력 증가.
5클래스에 버금가는 신성 마법이 완성됐다.
암녹색의 밤이 환하게 빛났다.
마누스의 뒤로, 거대한 천사의 형상이 나타났다.
나그네와는 반대로, 하얀 로브가 인상적인 천사.
"이, 이건 조금 곤란하군요. 드레이크!"
[우어어어-!]
육중한 몸이 움직였다.
동시에 천사가 손을 뻗어, 빛의 광선을 내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