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스.
전설로만 내려오던 신이 자신의 권세를 떨치는 날.
모든 세계가 뒤집히고, 모르스는 '희생양'을 고른다.
99.99%의 인간은 아무런 이상 없이 하루를 보내겠지.
'선택받은 자와 희생양은....'
죽음의 신은 희생양을 찾아 하수인을 보내게 되고, 그건 상상할 수 없는 가혹함으로 다가온다.
희생양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끌려온다.
석 달에 한 번.
죽음의 신에게 내려진 유일한 수확제였으니.
아무리 강해도 해당 사건 자체에 개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치.
그와 주인공이 능동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만든 장치이기도 하다.
아무도 도와주는 이가 없고, 아무도 조언해 줄 수 없는 환경.
오직 그들만의 힘으로 이 모든 난관을 헤쳐나가야 하는 험난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주인공의 활약을 두 눈으로 보겠는걸.'
오늘, 주인공인 케일은 뛰어난 활약을 펼친다.
주인공 보정이 내려진, 압도적인 재능.
그 뛰어난 마법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첫 보스를 무찌르게 될 거다.
동시에 비일상으로의 첫 발을 내딛게 되겠지.
'카덴차의 본격적인 활용 시기이기도 하고.'
제법 기대되는 일 아닌가.
마법의 합성.
아득한 체급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사기적인 패시브.
본격적인 위력을 본 플레이어들의 열광을 끌어냈던 이벤트가 임박했다.
마누스의 기숙사는 가장 꼭대기.
아카데미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오늘은 이곳 로열층에서 느긋하게 이벤트를 감상할 생각이었다.
사실 마누스를 제외한 진짜 튜토리얼 보스라 보면 되는데, 카덴차의 사용 설명과 더불어 기본적인 전투를 학습하는 이벤트.
이면 세계에서 느껴졌던 불길한 마나가 하늘을 뒤덮었다.
그 마나가 아카데미의 탑에 닿는 순간-.
"-시작이군."
두 개의 붉은 달이 완벽하게 원을 그린 밤.
구름 한 점 흘러가지 않는, 완벽하게 멈춘 세계.
죽음의 신이 두 눈을 부릅뜨고, 먹잇감을 찾는 시간이 도래했다.
그리고-.
[으으으으으음―――――――――!!]
녀석이 나타났다.
마법사 - 에이스.
마법사 아르카나의 정점이 바로 이곳에 강림했다.
마법사답지 않게, 검을 들고 있는 녀석.
네 개의 검을 들고, 로브를 뒤집어쓴 괴인이 등장했다.
마치 중세 시대에 나오는 의사처럼 길죽한 가면을 쓰고 있는 자.
붉은 안광이 지정된 희생양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였다.
'두 눈으로 보니 알겠어. 녀석들은 확실히....'
마치 죽음의 신이 내려다보는 듯 환한 두 보름달의 빛을 받으며, 그가 누군가를 바라봤다.
보이는 모든 것을 도륙하는 칼날의 표적은 죽음의 날, 겁 없이 밖에 돌아다녔던 어린 소녀였다.
"어-."
소녀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고, 경험했다.
시작은 아주 작은 내기에서부터 출발했다.
죽음이 드리운 밤.
-두 명씩 짝을 지어 시작된 담력 테스트 대결.
치기 어린 학생들의 도전은 곧 재앙을 불러일으켰다.
소심한 그녀는 친구의 소매를 꼬옥 붙잡고 불이 모두 꺼진 기숙사까지 걸어갔다.
콩닥콩닥 떨리는 심장.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
눈에 너무 힘을 줘, 관자놀이가 뻑뻑했다.
"이, 이게 뭐야-."
갈색 눈동자가 하염없이 떨렸다.
그녀와 함께 교정을 거닐었던 친구는 어느샌가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보이는 건, 섬뜩한 칼날을 가진 가면의 괴인.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숨이 가빠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이게 무슨 일이냐고-!
"어어-!"
반사적으로 이끌어낸 마나는 요지부동이었다.
먹잇감.
데몬과 데모니움이 사냥감으로 점찍은 이들이 겪는 현상에, 그녀는 무력한 일반인이 되어 버렸다.
눈앞이 흐려졌다.
납득 가지 않는 상황에,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음음-!]
담력 테스트가 아니라, 진짜 담력이 필요한 때가 왔다.
하지만 칼을 갈며 다가오는 재앙에, 그녀는 버티지 못했다.
죽음의 공포가 그녀를 덮쳤고, 그녀는 결국 정신을 놓아 버렸다.
공포감을 느끼느니, 편하게 죽겠다는 감정이었을까.
[음-!]
마법사 가면 특유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 죄악의 팔들이 먹잇감을 겨눴다.
칼을 휘두르고 피를 흘리게 만든다.
가면의 목적의식은 그것뿐이었다.
그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태어난 이유.
죽이고, 피를 취해 주인께 진상한다.
그 본능에 이끌려, 모르스의 하수인이 움직였다.
단순한 행동에 사람 목숨 하나가 날아가려고 할 때, 달을 가리는 태양이 나타났다.
[이그니]
콰아앙-!
태양처럼 뜨거운 화염이 희생을 막아냈다.
"-당장 그만둬, 이 괴물 자식아."
붉은 달빛을 받아 더욱 선명해진 적발이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제8화
- 카덴차, 그 위대한 협주곡
* * *
아나이스는 기숙사 친구, 케일과 함께 보름달이 뜬 밤을 즐기는 중이었다.
오늘은 기숙사 밖으로 외출이 금지되는 날임과 동시에, 기숙사 안에서라면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날이기도 했으니까.
케일이 연신 속이 안 좋다고, 엎어져 있는 것만 빼면 완벽한 분위기였다.
멍하니 보름달이 떠오르는 광경을 보고 있다, 이상함을 느꼈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기묘한 마나가 퍼졌다.
"-케일, 얘, 일어나 봐."
"으응? 왜?"
거북했다.
아나이스는 인상을 슬쩍 찌푸리고 친구에게 물었다.
"왜 계속 속이 울렁거리지, 넌 안 그래?"
"...죽겠어."
역시, 케일도 이상함을 느끼고 있구나.
아나이스는 심호흡으로 울렁거리는 속을 달랜 뒤, 홀린 듯 붉은 보름달을 바라봤다.
그런데, 조금 분위기가 이상한 걸?
고개를 처박고 있던 케일도 슬그머니 얼굴을 들었다.
이상하다.
본래 학교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아나이스는 휙휙,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밖이 내다보이는 창문에 바싹 붙었다.
케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왜 그래?"
"-저거 봐."
"응? 이거 강화 유리라고...."
아니, 그런게 아니야.
아나이스가 손가락을 뻗어, 숲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숲과 기숙사 사이의 공터.
이상하게 생긴 무언가가 벌벌 떨고 있는 소녀에게 다가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저, 저거 칼 아니야?"
"팔도 네 개야."
"-구해야 해."
케일이 중얼거린 뒤, 본능적으로 밑을 향해 뛰었다.
사람을 구하는 일이다.
아카데미의 룰을 어기더라도 한 번쯤은 봐 주겠지.
아나이스 역시 허겁지겁 그녀를 따라갔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건데-!
"야, 야-! 케일! 같이 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이건, 그녀가 평소 알고 지내던 밤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서둘러 로브를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아직 1학년.
그리 높지 않은 층고였기에, 1층까지 빠르게 향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
의문점을 가질 새도 없이,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복도를 미친 듯이 질주했다.
아카데미 안에서 날뛰는 괴생명체라니.
들어 보지 못했다.
이런 건 전혀 들어 보지 못했어.
밖으로 뛰어나가니, 기절해 있는 여성과 칼을 들고 있는 이상한 몬스터가 있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마법을 펼쳐, 가면을 향해 던졌다.
[이그니]
"-그만해 이 괴물 자식아."
가장 기초적인 마법으로 시선을 끌고, 마나를 끌어모았다.
허나, 거대한 가면의 몬스터는 마나를 모을 틈 따위, 주지 않았다.
단단한 다리로 지면을 박차, 두 자루의 칼을 동시에 휘둘렀다.
'위험-.'
[엣지]
카아앙-!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렸다.
1클래스 마법 : 엣지.
유적들이 부르는 또 다른 이름 : 실드.
한 장의 꽃잎이 찔러 오는 칼날을 막았다.
손을 뻗고 있는 케일에게서 나온 마법.
실로 훌륭하고 깔끔한 전개였다.
속도는 어떤가.
현 1학년 중에서도 단연 이 정도 마법을 이만한 속도로 펼칠 수 있는 자는 없을 거다.
허나-.
[으음-!]
"끼약-!"
꽃잎은 으레 그렇듯, 허무하게 떨어지는 법.
데모니움이 가진 칼은 파괴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날카로운 날붙이에 직격당하지 않았지만, 엣지가 깨지며 마나 파편이 아나이스를 덮쳤다.
[아우라]
케일의 마법이 다시 발현됐다.
세찬 돌풍이 칼날이 되어 마나 파편과 함께 괴기스러운 팔을 베어 냈다.
스걱-!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은 팔이 떨어져 나갔다.
"으윽... 그래도 칼이.... 어-?"
"다시... 생기고 있어."
꿀럭꿀럭 재생하는 팔.
푹, 하고 박혀 있었던 검을 빼내는 모습은 그들에게도 공포감을 전염시켰다.
케일도 아나이스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저걸 어떻게 이겨-!'
"약점, 약점이 있을 거야."
아나이스의 주특기는 불꽃.
애석하게도 마법사 아르카나는 불꽃 마법 반감이다.
케일은 모든 속성 마법을 배울 수 있지만, 현재 배운 거라곤 바람과 불 마법, 그리고 공통 마법 뿐.
바람은 평범하게 딜이 들어가지만, 지금 케일의 능력치론 어림없는 공격이다.
[으으음-!]
거대한 재앙이 서서히 다가왔다.
저런 걸 이길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 * *
무언가 잘못되었다.
마누스는 팔짱을 풀고 두 사람의 전투를 바라봤다.
처절했다.
현실은 게임 따위와 비교되지 않는다는 듯, 두 사람은 몸을 뒹굴며 싸워 가고 있었다.
"왜 쓰지 않는.... 설마."
아-.
자신의 존재가 이리도 큰 나비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사망 플래그만 슬쩍 회피하면 되는 줄 알았다.
마누스는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게임 극초반 튜토리얼.
모든 이가 '스킵'하는 그 장면.
마누스가 되기 전의 남성도 수없이 스킵을 눌러 신경 쓰지 않았던 사실.
으득-.
그가 서둘러 로브를 챙겼다.
이대로 가다간, 저 두 사람은 죽는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전 세계 많은 게이머가 눌렀던 그 스킵 버튼.
그걸 떠올렸어야 했다.
초반, 주인공이 능력을 각성하는 촉매는 다름 아닌 마누스 본인.
그가 했던 말.
그가 했던 행동 때문에 카덴차라는, 희대의 사기 패시브를 각성하게 되는 것.
너무 오래 게임을 하다 보면 초반부는 아무 생각 없이 플레이하기 마련이다.
적어도 마누스는 그러했다.
그게 저들을 죽음의 절벽으로 내모는 중이었다.
'본래 내가 해야 할 역할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마누스 본인이 해야겠지.
그가 뛰었다.
무척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조금만 버텨라."
그의 뇌까림이 복도에 울렸다.
그 시각, 아나이스는 마나가 고갈됨을 느끼며 현기증과도 싸우는 중이었다.
아무리 공격을 날려도 통하지 않음을 안 그녀는 방어에 치중했다.
공통 마법 몇 개는 알고 있었으니까.
케일도 이제 지쳤는지, 호흡이 가빴다.
절망적이다.
괜한 객기가 화를 불렀다.
고작 1학년 수준의 마나론, 이런 괴물 같은 몬스터를 당해 낼 수 없었던 거다.
'이렇게 소란을 피워 대며 싸웠는데 오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그게 더 이상해!'
아나이스는 헉헉대는 몸뚱이를 겨우 이끌어, 공격을 피했다.
마나를 소비하는 것보다 풀밭에서 나뒹구는 게 훨씬 낫다.
푹푹 박히는 칼이 섬뜩하게 진동했다.
[으음-!]
가면 녀석은 불쾌한 듯 거칠게 칼을 뽑고 다시 달려들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발이 꼬이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으음!]
끼리릭, 마치 고장 난 인형처럼 움직인 가면이 정확히 아나이스를 바라봤다.
마나 고갈 부작용.
아나이스는 순간적으로 몸의 제어권을 찾지 못하고 휘청였다.
그 틈을 놓칠 데모니움이 아니다.
'안 돼-!'
케일 역시 미스 캐스팅.
다급한 마음은 마법을 발현시키지 못한다.
진짜 마법사는 언제나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필요한 법.
모르스의 하수인 : 데모니움은 마법사들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한 방이라도 잘못 맞으면 사지가 날아갈 것 같은 날카로운 칼날이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죽음의 신이 두 사람의 목숨을 거둬 가려는 걸까.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고? 나는 플로이스 가문인데-?'
[음-?]
허나 괴인은 두 사람에게 다가오려는 행동을 멈췄다.
소복-.
잔디 밟는 소리가 들렸다.
새하얀 얼음꽃이 피어났다.
가면은 새롭게 등장한 인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 그쪽이 더 위험인물이라 생각했으리라.
아나이스는 팔에 오소소 돋아난 소름을 손으로 가렸다.
가면이 바라본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새하얀 얼음의 여왕이 서 있었다.
까드득-!
얼음 마법 특유의 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글라치에]
글라치의 상위 마법 : 글라치에.
2클래스 얼음 마법이 가면을 향해 철퇴를 날렸다.
데모니움은 검을 휘둘러 막았지만, 그 팔은 쿵 소리를 내며 땅에 처박혔다.
[글라치에 - 텔룸]
허공에 얼음의 창이 돋아나 주인의 명령을 기다렸다.
달빛을 받아 더욱 시리게 빛나는 은발의 주인은 우아하게 손짓했다.
핑-!
은색 선이 가면을 향해 쏘아졌다.
허나 목적은 이루지 못했다.
대신, 창은 놈의 팔 두 개를 앗아 갔다.
[음음-!]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는 가면.
전투 양상에 여유를 되찾았다.
"-다들 괜찮니?"
"알라노... 선배님?"
"내 뒤로 오렴."
비척비척 일어선 둘이 알라노의 뒤쪽으로 향했다.
2학년 학생회장 알라노.
마누스를 제외하면 2학년 중, 최강이라 불리는 마법사.
다른 이도 아니고 그녀가 지원군이라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래도 한 명 정도 더 있으면 좋겠는데....
아나이스가 팔자 좋은 생각을 하는 순간-.
"저런 걸 가지고 쩔쩔매고 있나."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갑자기 꽂히는 비판에 세 사람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은은하게 광택이 나는 구두의 소리가 데모니움이 내뱉는 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푸른 시선은 정확히 케일을 향하고 있었다.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는 현재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간섭을 확인합니다.]
[DLC 캐릭터 특전이 발동됩니다.]
[카덴차 스킬 소요 시간이 999시간 감소합니다.]
[스킬 : 카덴차 습득]
[다음 스킬을 선택해 주세요 - 슬롯 1개]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지식이 주입되었다.
마법 술식의 분해, 재구축.
합성.
또 다른 마법의 발현.
지끈거리는 머리와 몽롱한 정신이 마누스를 괴롭혔다.
누군가 강제로 영화를 100번쯤 초고속으로 재생시키는 기분이 들었다.
-매우 불쾌하고 거슬리는 기분이었다.
"특별한 힘을 지녔더군. 너무 한심해서 잠깐 들렀다."
"...."
케일은 멍하니 마누스를 바라봤다.
찡그린 눈동자.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마나의 잔재.
마치 기분이 매우 나빠, 그르렁거리는 늑대처럼 말하는 마누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가 양 손을 뻗었다.
[이그니]
한 손엔 찬란한 불꽃을-.
[아우라]
다른 한 손엔 날카로운 바람을 만든다.
서로 다른 두 원소는 본래 하나가 될 수 없다.
이는 마법의 상식이며, 근본이기도 하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
"특별함을 이용해라."
천재.
불가능을 해내는 자들을 부르는 말이기도 하며,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자들을 일컫기도 하는 말.
혹은 재능이 출중한 이를 뜻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모든 사항에 해당하는 자는 대체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같은 단어로는 절대 범접할 수 없는 위대한 재능과 천재성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입 안에서 단어를 굴려 봐도, 그런 단어는 생각나지 않았다.
알라노, 아나이스, 케일.
세 사람은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목격했다.
카덴차.
그 위대한 협주곡이 마누스의 손에서 발현되었다.
'생각보다 복잡한 구조로 이뤄져 있어. 이런 걸 일일이 연산하는 건, 확실히 힘들군.'
아니, 보통은 불가능하겠지.
마법의 법칙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일이었으니.
마법의 술식은 '선'으로 이뤄져 있다.
그걸 축약해서 그린 것이 바로 '성'이다.
오망성.
육망성.
십망성.
백망성....
1클래스 마법은 평균 32망성.
32개의 선.
그 선이 각각 다른 손에 그려져, 두 개의 마법을 완성하면 더블 캐스팅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카덴차는 무엇인가.
선들은 쪼개진다.
마나를 담은 선분으로 조각조각 낸 마법 술식을, 새로운 방법으로 이어 붙인다.
[레시피 저장]
[이그니] - [아우라]
<더블 스프레드>
파지지직-!
마법진 간의 충돌 현상.
마법과 마법이 충돌하면 일어나는 거대한 폭발의 전조였다.
"안 돼-! 미쳤어?!"
눈썰미가 좋은 알라노는 당장 마누스를 말리려 했다.
저건 미친 짓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케일은 멍하니 마법의 구조를 분석했다.
쪼개고, 합친다.
그렇게 새로운 마법을 창조한다.
어떠한 진리가,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콰우우-.
공기가 울었다.
1클래스 마법 두 개를 합쳤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도 커다란 소음이었다.
[결과물 : 아타블루스]
스프레드가 짜였다.
새로운 마법이 구축되었고, 전혀 새로운 결과물을 낳았다.
아-.
알라노는 멍하니 마누스를 바라봤다.
아나이스도, 케일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네 마법-."
지중해로 부는 모래 섞인 열풍을 뜻하는 단어, 아타블루스.
동지 때 불어오면 모든 것을 말려 죽인다는 뜻의 어원대로, 입이 바싹 마르고 주변의 수분을 빼앗는 기이한 불꽃이었다.
1클래스 마법 두 개라 위력은 적었지만, 학생들 수준엔 그게 아니었다.
역사상 어느 누구도 마누스의 나이 때, 이런 마법을 선보이지 못했다.
현재 대마도사라고 칭송받는 카이사르의 주인 역시!
"부수고 합쳐, 새로운 걸 만드는 능력이다."
"――――아."
케일의 마나가 요동쳤다.
그와 동시에 마누스가 손을 뻗었다.
쿠아아아아아아아-!
회오리처럼 뻗어 나간 열풍이 가면을 집어삼켰다.
[으으으으음-!!]
비명을 참는 것 같은 목소리에, 마누스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이 일격으로 죽진 않을 거다.
나머지는 각성하고 있는 저 여자가 해 주겠지.
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마나가 모자랐지만,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알릴 순 없었다.
"어, 어디 가?"
"뒤처리는 맡기지. 미적지근한 음료는 마시기 싫거든."
"...."
알라노는 황망한 눈길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나이스 역시 입을 살짝 벌리는 것으로 리액션을 취했다.
"할 수 있어-."
그 순간, 케일이 눈을 떴다.
진정한 주인공으로의 각성이었다.
제9화
- 함께 올라가자
* * *
케일의 눈이 마나로 번뜩였다.
마법사, 기사, 수호자.
그들은 각기 다른 무기를 쓰고, 전투 양상도 다르다.
하지만 공통된 점이 아예 없는 건 또 아니었다.
마나를 사용해 능력을 발휘한다는 점.
깨달음이란 것이 존재해, 심득을 얻으면 마나양이 급증한다는 점이다.
지금 케일은 그 깨달음을 얻은 상태였다.
그녀의 잠재능력이 강제로 개방되어, 1클래스 마법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무수히 많은 지식이 휘몰아쳤다.
'할 수 있어-.'
나도, 그 남자처럼.
케일의 두 손이 활짝 펴졌다.
32개의 선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동시에 두 개-.
더블 캐스팅, 그리고 지금 배워서는 안 될 속성 마법까지.
[아우라]
바람과-.
[글라치]
얼음꽃이 피었다.
카덴차.
그녀만의 마법이 완성되기 시작했다.
[아우라] - [글라치]
<더블 스프레드>
[결과물 : 겔루]
북풍이 불었다.
한껏 말라비틀어져 있던 잔디가 꽁꽁 얼어붙었다.
글라치 계열 마법이 얼음으로 만든 망치, 혹은 철퇴라면 케일의 겔루 얼음으로 만든 만천화우였다.
암기처럼 갈라진 얼음 덩어리가 바람의 힘을 받아 데모니움을 향해 쏟아졌다.
퍽퍽퍽-!
거대한 체구에 쏟아지는 얼음 송곳은 상상 이상의 파괴력으로 적을 분쇄했다.
클래스를 뛰어 넘는 마법.
거기다 약점을 찌르는 속성까지 더해, 데모니움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으으으으으으음-!]
쩌적-.
가면에 금이 갔다.
검었던 팔들이 스르륵 흩어졌다.
잔디에 푹푹 박히는 검들이, 전투의 종료를 알렸다.
"허억-. 허억-."
케일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무릎 꿇었다.
두 가지의 마법을 합성하려면, 엄청난 집중력이 있어야 했고 마나도 많이 들었다.
기력을 조금 회복한 아나이스가 헐레벌떡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케일, 괜찮아? 얘-."
"으응-, 괜찮아. 머리가 좀 아픈 거 빼곤."
"하아... 다행이다. 그나저나 방금 그거-."
아나이스도 케일도 기숙사 방향을 바라봤다.
마누스.
폭군이 도움을 주다니, 정말 별일이었다.
반대로 그 든든하던 모습은 뇌리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이 현상은 대체 무엇일까.
이 소란이 벌어졌는데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 학교.
모든 것이 생소했다.
그들이 있는 곳이 진짜 아카데미는 맞는 걸까?
두 사람이 멍하니 탈진한 몸을 추스르고 있을 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케일, 그리고 아나이스 맞지?"
"아- 네. 회장님."
아나이스도 들은 바 있다.
카이사르와 견줄 수 있는 마법 가문 해리슨.
세 개의 공국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세력.
자신과 같은 지방 귀족과는 차원이 다른 핏줄이었다.
딱딱하게 답했으나 돌아오는 건 부드러운 말이었다.
해리슨답다고 해야 할까.
자애로운 가문의 여식은 포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알라노라고 부르렴. 그나저나... 왜 마누스가 그렇게 얘기하는지 알겠네."
그녀는 주변을 돌아봤다.
빛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세계.
자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다른 시공간에 대해 이해할 길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지-.
서운한 마음을 감추며, 그녀가 두 사람을 눈에 담았다.
'그가 말한 전력....'
이상 현상에도 버틸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눈앞에 있었다.
"알라노 선배는 괜찮으세요?"
"나는 한 게 없는걸. 고생했어. 둘 다."
"감사합니다아-."
아나이스는 체면도 잊고 풀썩 주저앉았다.
오늘 일은 평생 못 잊을 것 같았다.
뒤집힌 세계, 전혀 알 수 없는 몬스터, 아무도 없는 적막감-.
단 하루 만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라노는 그들을 다독여 주며 기숙사로 돌려보냈다.
그녀는 사건을 발견하고 내려오기 전, 아무 기숙사 방을 열어 보았다.
"역시, 아무도 없네. 이런 곳을 마누스는 혼자 다녔을까?"
꽤 오래전이었을 거다.
마누스가 이런 현상을 겪은 것도, 그래서 탑을 조사하려는 것도.
'너는, 항상 나를 바보로 만드는구나.'
알라노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멈췄던 구름이 조금씩 흘러갈 기미가 보였다.
죽음의 신이 강제로 붙들었던 시간이 원래대로 흘러갔다.
오늘 사냥은 실패했지만, 그가 다시 눈을 뜨는 날은 어떨까.
알라노는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는 보름달을 떨리는 눈동자로 바라봤다.
그들에겐, 정말 긴 밤이었다.
[전투 종료]
『마법사 - A : 케르톤』
<케일은 카덴차를 배웠다.>
<아나이스, 케일, 알라노의 레벨이 올랐다.>
<케일 : 3>
<아나이스 : 2>
<알라노 : 7>
* * *
푹신한 침대가 마누스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이사장은 이 광경을 봤겠지.
아마 내일쯤 동아리에 당사자들을 소집할 것이다.
그나저나-.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이론상 몇백 년이 걸리는 스킬도 어느 정도 당겨서 익힐 수 있다는 건데-.'
새로운 정보가 나왔다.
간섭과 스킬의 상관관계.
제대로 된 간섭을 하면 익히고 있는 스킬의 습득 기간이 줄어든다는 것.
아득하게 바라봤던 그 스킬들이 아른거렸다.
DLC 캐릭터든 뭐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이곳에서 살아가야 할 한 생명이었고, 시간은 현실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듯 쉬지 않고 흘러갔으니까.
다만-.
'-내가 끼어들 요소는 충분히 있다 이거지.'
새로운 루트라고 해석하면 될 일인가.
과하게 끼어들면 그가 알고 있던 스토리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갈 터다.
그걸 조율해, 원작대로 주인공 일행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한다.
어떤 적이 와도 분쇄할 수 있다면, 마음대로 해도 괜찮겠지만 지금 그는 세계관에서 철저히 약자였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아직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나약한 이들도 충분히 강해질 필요가 있다.
잡생각이 많아졌다.
이럴 땐, 다른 고민을 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는 걸 체득하고 있었다.
그는 고민 없이 스킬 창을 열었다.
새로운 고민으로 고민을 덮는 것.
그가 본래 세계에 있을 때의 습관이기도 했다.
새로운 스킬을 익힐 시간이다.
생각해 둔 스킬은 있었다.
이번에도 패시브.
"검색, 하이 레스티오."
[검색 결과 : 1건]
[하이 레스티오 : 4일]
하이 레스티오.
본래 턴이 지나면 일정량의 체력과 마나를 회복하는 패시브다.
이 스킬이 있느냐 마느냐는 후반 전투에서 해당 캐릭터가 멤버가 되느냐 마느냐로 결정될 정도.
보스의 체력이 많아지고, 공격도 아파지는 후반 전투에선 꼭 필요한 스킬이었다.
대부분 캐릭터가 해당 스킬을 가지고 있으니, 자신도 하나 가져야겠다.
"배운다."
[하이 레스티오 스킬 습득을 시작합니다.]
오늘로부터 4일.
4일 후면 장기 전투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원작대로라면 탑 탐사는 하루 쉬고 다음 날.
5층 보스를 클리어하면, 더 위층까지 올라갈 수 있는 권한이 생긴다.
당분간은 그곳에서 성장하며 목걸이에 필요한 영혼을 모으는 작업을 할 예정이었다.
"알라노가 생각보다 일찍 합류했으니, 탐색도 쉬워지겠지."
이미 다 마셔 버린 음료 잔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다시 흘러갔고,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베로니카입니다."
"...나가지."
문이 열리고, 아까 주문해 두었던 얼음을 가지고 온 베로니카가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걸 확인했다.
마누스는 얼음이 들어 있는 컵을 받으며 말했다.
"다음부터 청소는 내 허락을 받고 하도록."
생글생글 웃고 있던 베로니카의 얼굴이 굳었다.
마누스는 그 모습을 보지도 않고 달칵, 문을 닫았다.
그녀는 웃는 낯으로 한참 동안이나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앞으로 더 조심하겠습니다."
그녀는 숙였던 고개의 각도를 조금 더 내린 후, 꼿꼿하게 일어섰다.
그녀의 표정이 무섭도록 굳어져 있었다.
쪼르르 따르는 무알콜 와인은 붉은 달을 닮았다.
이 록스 대륙에서 성인으로 인정받는 나이는 15세.
마누스는 생일이 지났으니 16세였다.
"맛있네."
알콜은 없지만, 알싸한 향이 나는 와인.
보통의 와인과 다르게, 시리도록 차갑게 먹어야 맛있는~ '엑스스타시스'.
어떤 맛인지 궁금했는데, 얼음과 함께 먹으니 독특하면서도 향이 진했다.
모든 근심 걱정을 씻어 내는 향이랄까.
마누스는 항상 입을 댄 쪽을 반대편으로 돌려놓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오른손잡이였고, 와인 잔의 불그스름한 부분은 언제나 창 쪽을 향해 있었다.
아까 전과 달리, 붉은 달빛은 와인빛과 어울려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제 카이사르가 움직이기 시작하려나?'
그를 맴돌던 그림자가 사라진 걸 보면, 아마 곧 보고가 들어갈 것이다.
그들이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필욘 없으나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지금으로선 카이사르 공작이 돌아오라면 돌아와야 하는 처지니까.
"어쨌든, 무사히 궤도에 올려놓는 덴 성공했네."
오랜만에 따듯한 욕조에서 목욕이 하고 싶어졌다.
마누스와 남자가 같은 인격이 되기 전, 유일하게 같은 취미라고 할 수 있겠다.
곤란한 일이 해결되거나 푹 쉬고 싶을 때, 남자는 언제나 목욕탕을 찾았다.
따듯한 물속에서 눈을 감고 있노라면, 포근한 감각과 함께 그간 있었던 일들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랄까.
따듯하면서도 보송보송한 느낌을 즐기는 것이 그의 힐링 방법이었다.
마법을 이용한 욕실은 현대와 다르지 않았다.
솨아아-.
물이 흘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밤을 보냈다.
내일부터 있을 일상을 위해, 오늘 밤을 털어 내야 했으니까.
* * *
피곤했나-.
케일은 멍하니 일어나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어젯밤 그렇게 잔디밭을 굴렀더니, 온몸이 다 쑤셨다.
몸살기도 살짝 있는 것 같은데, 치료 마법을 부탁해야 하나?
교복을 입으며 창밖을 내다보니, 어젯밤 있었던 격전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채였다.
참,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말 다른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온 걸까?
똑똑-.
오늘도 어김없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늦지 않기 위해 준비를 마쳤던 케일이 문을 열었다.
그곳엔, 퀭-한 얼굴의 아나이스가 서 있었다.
"후암... 잘 잤니?"
"응... 피곤해."
"나도-. 진짜 선배한테 치료 마법이라도 걸어 달라고 할걸."
두 사람은 폐인처럼 어기적거리며 기어 나왔다.
여자 기숙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피어슨이 두 사람을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반갑게 맞이해 주었을 텐데, 두 사람은 그저 터덜터덜 걸어가 바로 앞에서 손을 슬쩍 올리는 것이 다였다.
"...너네 어제 싸웠냐? 상태가 왜 이래?"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어우, 죽겠네."
팔다리, 어깨... 안 뭉친 곳이 없었다.
아나이스는 아무런 말 없이 터덜터덜 걸었다.
케일 역시 연신 새어 나오는 하품을 막지 못했다.
오늘은 공부고 뭐고, 일단 푹 쉬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양호실에 가서 피로 회복에 좋은 포션이라도 마시면 어떨까-.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을 때, 그들을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잘 잤니?"
"아- 선배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나이스와 대변되는 은발의 여인.
그녀는 둘의 상태보다 양호해 보였다.
하긴, 그녀는 전투 막바지에 도착했으니까.
"어-? 어-?"
"뭐 하고 있어! 빨리 선배한테 인사 안 드리고!"
아나이스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피어슨의 뒤통수를 꾹 눌렀다.
물론 두 사람도 꾸벅 고개를 숙인 채였다.
알라노는 호호 웃으며 세 사람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대하렴. 아 그리고 두 사람. 오전 수업 끝나면 나랑 같이 갈 곳이 있단다."
"갈 곳이요?"
"응. 동아리 관련된 사항이니까 꼭 오렴. 어제 일과도 관련이 있으니까."
어제 일이라고 말하자마자 두 사람의 얼굴이 굳었다.
옆에서 멀뚱멀뚱 서 있는 피어슨만 대화에 끼지 못하고 눈동자만 굴리는 중이었다.
케일이 고개를 끄덕였고, 아나이스가 피어슨을 잠깐 쳐다보다가 답했다.
"네. 꼭 갈게요. 어디로 가면 되나요?"
"2학년 뱀 A반으로 찾아오렴."
"알겠습니다."
알라노는 할 말을 전달하고 교정 안으로 사라졌다.
중요한 이야기라는 것이 뭘까?
아주 중요한 이야기라는 건 알겠으니, 두 사람은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무슨 이야긴데? 나만 빼고 늬들, 뭐 한 건데?"
피어슨만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제10화
- 우리밖에 못하는 일
* * *
오전 수업은 별 탈 없이 지나갔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학교는 평화로웠다.
이분법적인 세계.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 같은 세계에 적응하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케일은 온종일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F반.
재능을 개화하기 위해 실습 위주로 진행되는 수업에서, 케일은 이변을 느꼈다.
화르륵-.
"오, 이만큼의 위력이라니. 재능이 상당하군요. 케일 학생."
"...감사합니다."
어젯밤 전투 이후,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고, 할 수 없었던 기예를 익힌 것 같았다.
일렁이는 화염 마법 안에서 비치는 32개의 마나 줄기가 또렷하게 보였다.
'그거뿐만이 아니야.'
마나가 흐르는 통로인 선을 가닥가닥 끊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어젯밤, 마누스가 보여 준 기예가 바로 그것이었지.
다른 이들에겐 보여 주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퍼엉-!
잡념을 끊어 내듯 화염 마법을 던졌다.
마법으로 만든 허수아비가 활활 타올랐다.
담당 교수가 눈을 치켜떴다.
실로 대단한 위력이다.
어쩌면, 이 아이는 위대한 가문 중 하나의 핏줄을 타고난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이거, 다음 주에 있을 능력 평가가 기대되는군요. 못해도 B반까진 올라가겠어요."
"...."
케일은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몇몇 시선이 그녀에게 날아와 꽂혔다.
그녀가 눈을 돌려 그들을 쳐다보자, 시선은 더욱 거칠어졌다.
'-뭐지?'
순진한 케일은 그저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녀는 인간관계에 얽힌 다양한 감정들을 겪지 못했다.
사소한 행동, 심지어 물려받은 것조차 시기하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렇게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케일은 자리에서 일어서, 약속한 장소로 가려 했다.
"거기, 잠깐-."
"점심 먹으러 가니? 우리랑 같이 먹지 않을래?"
케일은 그들의 얼굴을 응시했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왜 갑자기 친하게 구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와 그들은 아무런 접점도 없었으니까.
"선약-."
"에이, 그러지 말고 가자."
"맞아, 너 평민이라 돈 없지 않아? 우리가 사 줄게."
"...장학금."
"...."
그들의 웃음에 금이 갔다.
놀랍게도, 케일은 전액 장학금에 보조금까지 나오는 상태였다.
그녀가 아무런 티도 안 내서 그렇지, 굶고 다닐 정도로 돈이 없진 않았다.
물론, 여유롭지도 않았지만.
"진짜 너, 싸가지가 없구나?"
"그러게- 왜 사람 호의를 받았는데 예의를 밥 말아 먹었니?"
"학교생활 그렇게 하다간 진짜 피곤해질걸-?"
조롱이었다.
자작, 남작 가문의 자제들이 평민을 두고 하는 조롱.
케일은 아나이스와 이들을 비교했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전에 만났던 평민들도 있었다.
'이상하네.'
이해할 수 없는 것들투성이였다.
마법사와 기사의 영역은 다르다.
기사는 오로지 몸으로 경쟁하지만, 마법사의 경쟁 요소 중엔 자금력도 있었으니까.
마법사의 물품은 아주 비쌌고, 특별하게 유통되는 물건도 있었다.
오직 귀족에게만 파는 상인도 있을 정도이니, 말 다 했지.
수호자와 기사반과 달리, 유독 마법사반은 귀족들의 세력이 강했다.
평민은 돈이 없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설명하기엔 너무 많은 것이 얽혀 있었다.
"좋은 말 할 때 따라와,"
위협적으로 그들이 다가왔을 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케이이일-! 어디 있니이이이-!"
"히익-."
귀족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쩌렁쩌렁한 음성.
케일을 위협하기 위해 한 발자국 다가왔던 귀족이 화들짝 놀랐다.
이 목소리.
아카데미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발랄한 귀족의 목소리였다.
"어머, 여기 있었네? 알라노 회장님이 얼른 오래. 너희는 뭐니?"
"아, 아니야-."
"아, 선약이 아나이스 너였구나, 데, 데려가, 데려가."
아나이스가 케일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그리고 다시 확인시키듯 입을 열었다.
"알라노 선배도 도착했어. 얼른 가자."
"-응."
알라노?
그 학생회장 알라노?!
학생들의 입이 벌어졌다.
왜?
'우리가 들은 거 맞아?'
'알라노 선배가 쟤를 불렀다고? 왜?'
'몰라, 괜히 눈 밖에 난 거 아니야?'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왜-?
그 단순한 의문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순식간에 케일의 위치가 격상되었다.
아나이스 가문은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싸움개 가문이었다.
기사, 수호자, 마법사 할 것 없이 배출한 가문이기도 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가문과 엮여, 그을림 하나 생기지 않은 곳이 없다.
자작, 남작 가문 자제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두 사람이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번 폭풍이 몰아쳤다.
"거기-."
"네- 누구.... 흐업!"
누군가의 새된 비명이 흘렀다.
아나이스 가문의 출현보다 훨씬 격한 반응이었다.
당연히 F반 학생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정적-.
갑자기 들이닥친 거대한 존재감 앞에, 모두가 짓눌렸다.
검은 머리, 푸른 눈동자.
훤칠한 키로 인해, 지그시 내려다보는 시선.
그 모든 것이 F반 전체를 압도했다.
"-케일이라는 학생, 어디 있지?"
"아, 바, 방금 나, 나갔... 나갔는-데요."
"어디로 갔는지."
"회, 회장님께서.... 엇."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폭풍은 올 때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마법사들에게 있어, 검은 머리는 반쯤 우상화되어 있었다.
그런 가문의 직계가 말을 걸어 줬다는 것 하나만으로 신입생은 다리가 풀렸다.
"우와-. 다리 풀린 거 보여?"
"영광인 줄 알아 인마-."
마누스.
그가 케일을 찾았다.
새로운 가십거리가 늘어 가고 있었다.
케일.
그녀를 찾는 이가 왜 이렇게 많은지.
케일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폭풍의 전학생이 되어 가고 있었다.
* * *
알라노는 새로운 둥지인 동아리실을 바라봤다.
가장 작고, 구석에 있는 곳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안락한 느낌을 자아냈다.
후릅-.
오늘따라 차 맛이 혀를 강렬하게 자극했다.
향 역시 더욱 진했다.
감각이 예민해서일까, 아니면 긴장해서일까.
달칵, 찻잔 놓는 소리마저 크게 들렸다.
아카데미에서 이런 기분을 느끼는 자리는, 교수진과 회의할 때 빼곤 느낄 수 없었는데.
그녀는 작은 한숨과 함께 빠르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선배! 저희 왔어요!"
문 너머에서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알라노가 손을 까딱이자, 문이 열렸다.
들어온 것은 파릇파릇한 신입생 둘.
하지만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잠재력을 지닌 이들이기도 했다.
그녀가 일어섰고, 두 사람은 동아리실에 들어오자마자 우뚝 굳었다.
"어서 오세요. 여러분이 어제 전투를 해결한 학생들이군요."
"이사장님입니다. 인사드리세요."
알라노의 부드러운 말이 두 사람을 움직이게 했다.
"아, 안녕하세요. 플로이스 아나이스입니다."
"-케일입니다."
이사장, 맥퍼슨 닉스는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풋풋한 학생의 모습을 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아직 때 묻지 않은 학생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기에.
그는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한 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러면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문제는....'
비일상에 발을 들일 동기를 만들어 줘야겠지.
아이들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뒷짐 지고 구경만 하는 주제에, 재능 있는 샛별들을 사지로 밀어 넣는 꼴이었으니까.
"이 미토스 아카데미에는, 한 가지 비밀이 존재합니다."
"비밀이라면... 어제 그 사건을 얘기하는 건가요?"
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지구라트, 이면 세계, 그곳의 주민들....
이야기를 하나하나 듣고 있던 학생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사장이 이곳에 온 목적은 동아리 설립을 허가해 줌과 동시에 케일과 아나이스에게 권유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동아리를 설립했고, 거대한 학원의 비밀을 파헤칠 시기라고 판단했습니다. 여러분에게 강요하고 싶진 않습니다만...."
"그런데-, 왜 저희일까요?"
아나이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비밀은 꽤 오랜 시간 유지되어 온 듯싶었다.
지금까지는 잠잠했다는 이야기인데, 왜 하필?
이곳에 마누스가 있었다면 '게임 스토리니까'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잔혹한 이야기지만, 이들은 고작 오락으로 소비되는 캐릭터였으니까.
이사장은 세 사람의 얼굴을 차근차근 뜯어봤다.
더불어 이 자리에 오지 않은 한 학생의 얼굴도 떠올렸다.
비밀이 생겨난 이래, 선택받은 자는 세 명 이상 생겨나지 않았다.
그마저도 운이 정말 나쁘면 탑에 잡아먹혀 버리기 일쑤였다.
이사장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답을 해 줄 차례였다.
"글쎄요,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개교 이래 탑에 올라갈 수 있는 학생이 이렇게 많이 나온 건 올해가 처음입니다. 제대로 된 전력도 구축할 수 없었죠. 그리고...."
어젯밤 등장했다던 거대 괴물.
데몬이라 불리는 이들보다 훨씬 더 큰 존재가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사장도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탑에서만 존재했던 데몬들과 달리, 그들은 현생에서 학생과 교사를 해칠 존재였으니까.
하루빨리 이 사태를 해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임시로 그들에게 데모니움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데몬보단 훨씬 큰 존재니까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야, 어떻게 붙이든 상관 없었다.
알라노가 줄곧 궁금해 했던 내용을 입에 담았다.
"어젯밤 그 학생은 어떻게 됐나요?"
"혼절해서 당시 상황을 잘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일단 절대 안정을 취하도록 해 두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다행이다아-.
아나이스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신들이 원인이 아니라곤 하나, 잘못되었다면 마음이 아주 불편했을 거다.
이사장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착한 이들이라고 생각했다.
순수하게 피해자를 걱정해 주다니, 이 또래 학생이 아니면 제법 보기 힘든 진심이겠지.
닉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때 묻지 않은 이들을 탑으로 올려 보내야 한다니-.'
그가 전투 능력만 출중했다면 직접 올라갔으리라.
이럴 땐 돈밖에 없는 자신이 퍽 원망스러웠다.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여러분이 탑을 조사해 주십시오. 이건... 여러분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밖에 할 수 없다니...."
"-난 할래."
걱정 투성이인 아나이스와 달리, 케일은 번쩍 손을 들었다.
얘가 왜 이래?
아나이스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어서 더 설명해보라는 눈초리로 케일을 마구 찔러댔다.
케일이 쭈뼛쭈뼛, 그러나 확실하게 의사를 표현했다.
"나는 계속 혼자였으니까.... 이렇게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하고 싶어."
"...너-."
"어머...."
아나이스와 알라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이사장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녀는 특별한 이유로 이곳에 오게 되었지요."
"그랬구나-."
"설마 그런 줄은 몰랐는데...."
심지어 알라노의 눈망울엔 그렁그렁, 눈물까지 맺히기 시작했다.
역시 누군가를 지켜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 다웠다.
"이 동아리에 있다 보면, 혼자가 아니어도 될 것 같아서 하고 싶어요."
어쩌면, 부모님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이유가 이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은 곧 끊어졌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한 남자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늦었습니다."
"오, 앉으세요. 마누스 군."
등장만으로 주변 공기를 착 가라앉게 만드는 남자였다.
케일과 아나이스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던진 뒤, 이사장을 똑바로 바라봤다.
케일은 묘한 두근거림을 느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머리칼.
마나의 불꽃이 일렁이듯 또렷한 눈동자는 그녀의 머리칼 색을 닮았으니까.
"이야기는 잘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협력해 주기로 했거든요."
마누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엑? 저도요? 난-."
"아나이스, 같이 가자."
케일의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아나이스를 자극했다.
으윽-.
잠시 인상을 찌푸렸던 그녀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으으 알겠어! 같이 하면 되잖아!"
마누스는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미소 지었다.
역시 아나이스, 플로이스 가문답게 의리에 약한 타입이었다.
직후, 가만히 앉아 있던 알라노가 마누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마누스, 너도 함께하는 건가?"
"서, 선배랑 함께라면 걱정할 건 없겠는데요-."
아나이스도 조심스럽게 거들었다.
허나 기대했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마누스는 찻잔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따로 움직인다."
"혼자?"
"그래. 알아볼 것이 있다."
기대했던 부분이었는데, 막상 도움을 받을 수 없다니 분위기가 약간 죽었다.
마누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들이 정상적으로 합류한 걸 확인한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괜히 끼어들어 잡생각을 만드는 것보단, 이들끼리의 유대감을 만들어 주는 편이 낫다.
너무 본인을 의지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원작 캐릭터들이 살아 숨 쉬는 광경을, 그들이 성장하는 광경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함께 감정을 공유한다는 건, 무척이나 큰 유대감으로 성장한다.
이 게임의 팬이었던 마누스가 왜 그걸 바라지 않겠는가.
'하지만, 때로는 멀리서 지켜봐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
그는 때를 알았다.
지금은 그들끼리 단단하게 성장할 때다.
마누스가 세 사람을 보며 말했다.
"이번엔 기대하마."
그의 눈은 케일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제11화
- 함께 오르면 된다
* * *.
마누스에게 학교 수업이란, 새로운 유흥이자 취미가 되었다.
천재는 다 이런 느낌이었을까?
귓가에 박혀도 머릿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랴.
다른 인격이었을 때, 그는 그렇게 살아왔던 거다.
이해력이 다르다.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간 그림을 그려 낼 수 있다.
이론으로부터 파생된 다른 이론.
응용.
다른 이론과의 접합, 또 그것을 실현했을 때의 문제.
가지가 무성한 고목이 그러하듯, 그의 지식도 쭉쭉 뻗어 나갔다.
'생각하면 할수록 사기 가문이네.'
[카이사르의 마음가짐]
왜 이들이 세계관 최고의 가문인지 알 수 있었다.
마누스는 필기조차 하지 않았다.
칠판 자체가 머릿속에 턱턱 찍히는데 무슨 필긴가.
녹음기를 재생한 것처럼 교사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데 애써 손을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두렵기까지 했다.
이런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널린 곳이 바로 카이사르 가문이었으니까.
'궁금하긴 하네.'
"-여기까지가 오늘 배운 내용입니다. 시범을 보일 사람이 필요한데... 마누스 군?"
"...."
마누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배운 내용은 원소 마법의 위력을 증폭시키는 [알투스] 마법에 대한 이론/실습이었다.
원리는 간단했다.
망성을 그리고 그 위에 알투스 마법진을 덧씌우면 끝.
제대로 성공하기만 한다면 1클래스 마법으로 3, 4클래스 마법의 위력을 낼 수 있는 마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난도는 더블 캐스팅에 버금간다.
그냥 고위력기 한 방이면 될 일을, 굳이 배우는 이유는 간단했다.
"알투스 마법은 더 위로 올라갈 재능이 없는 자들의 빛입니다. 냉정한 현실이지만, 여러분도 꼭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5클래스 이상의 마법은 하늘이 주신 영역이라고들 한다.
대륙에서 손꼽히는 이들만이 배울 수 있는, 무려 500개가 넘어가는 선분에 마나를 집어넣어야 하는 작업이 필요한 마법들이었으니까.
화륵-.
마누스는 어렵지 않게 이그니 마법을 펼쳤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마법진 위에, 탑을 쌓듯 알투스 마법진을 욱여넣었다.
그냥 된다.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만으로.
이 느낌이 낯설고 생소해, 조소가 흘러나왔다.
콰르르륵-!
불길이 거세졌다.
모든 이의 눈길이 조금 커졌다.
"느껴지는 술식은 1클래스의 그것이지만, 위력은 3클래스 마법인 [이그니오]와 맞먹습니다. 알투스는 전략적인 술식으로도 많이 알려졌지요."
교사는 설명 끝에 마누스를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이론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마법사였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마누스 군. 이제 들어가도 좋아요."
마누스는 눈인사와 함께 착석했다.
오늘 처음 배운 마법을 능숙하게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재능이었다.
이게 가능한 학생은 A반에서도 몇 없으리라.
알라노, 그리고 삼석인 디아즈 가문의 프랭크 정도일까.
하지만 그 누구도 마누스만큼 빠른 속도와 위력으로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부러운 재능이네.'
누군가의 생각으로 수업은 끝났다.
마누스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누구도 건들지 않는, 아주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마누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알라노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푸른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오늘 탑에 본격적으로 올라갈 거야. 같은 동아리니까... 함께 움직이진 않더라도 모일 수 있겠어?"
"그 정도라면."
알라노가 생긋 웃었다.
"너무 위험하게 다니지 말고."
"-괜찮다."
그녀의 자상함은 실력의 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누가 보면 오지랖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것이 해리슨이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그녀만의 정체성이기도 했고.
마누스는 그녀의 따듯한 감정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오르카의 목걸이 개안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바쁘게 돌아다녀야 할 터다.
수업이 끝나고 마누스는 탑에 오를 준비를 마쳤다.
마법 물품점에서 회복 포션 두 개를 샀다.
사실 준비는 그게 끝이었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나태해지게 만들었다.
'첫 보스, 파수꾼을 잡고 귀환하려나. 페이스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
주의 사항 정도만 알려 주면, 나머진 잘하겠지.
평균 몬스터 레벨이 1~3 정도인 구간이었다.
사실 주인공 캐릭터 하나만 들고 가도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는 구간이었다.
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건... 내가 사용하는 게 낫겠고.'
오갈 곳 없는 물건은 자신이 취하는 것이 맞겠지.
운명이라는 걸 믿지 않았지만, 이걸 발견한 사람이 빌런인 것은 막아야 했다.
본래 주인공이 가져가야 할 물품이지만, 인게임에서는 퍼즐을 푸는 용도로만 쓰일 뿐이었으니.
그 시간이 오기까지 빌런의 손에 있는 것보단 나으리라.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이들이 이면 세계의 문 앞에 섰다.
"여기가...,"
"응, 일반 사람들은 보이지 않나 봐.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걸 봤거든."
"어, 어서 들어가죠."
"한 번에 통과해야 한다."
마누스의 통솔 아래, 모든 인원이 죽음의 세계로 발을 들였다.
오늘부터 이들의 하루는 남들보다 아주 길어질 터다.
* * *
탑 로비.
알라노의 안내로 도착한 이곳은, 여전히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케일, 아나이스.
두 사람은 멍하니 탑 로비를 둘러봤다.
기묘한 기운이 두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
산 자가 머물 수 있는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째깍째깍 소리를 내는 금빛 시계가 적막을 톡톡 두들겼다.
"건물은 아카데미 본관인데... 내부는 완전히 달라졌네요."
"와아... 엄청 답답하고 으스스하고 그래요."
저마다의 감상을 내뱉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자신들뿐이라는 말.
아무런 보상도 없었지만, 순수한 학생은 용기와 우정으로 이 탑에 발을 들였다.
"이 위에... 몬스터가 있다는 거죠?"
"데몬. 죽음의 공간에 서식하는 주민들이다."
"나오지 못하게 숫자를 줄여야 한다니, 관리하는 사람 같네요."
아나이스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지.
부정한 것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
어찌 보면 여기 서 있는 자들은 오물을 치우는 사람들이나 다름없었다.
"보상은 제법 짭짤할 거다. 지금부터 설명해 주지."
밤과 잘 어울리는 검은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가 차분하게 빛을 발했다.
탑은 위험한 곳이다.
각 아르카나와 트럼프에 맞는 데몬이 나오니, 약점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한 층에 오래 머물면 [순찰자]와의 전투를 해야만 한다.
중간중간,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난다.
이 공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
보스를 클리어하면, 1층으로 돌아올 수 있는 중간 저장 지점이 활성화된다.
"-탐사 목표는 중간 지점까지. 최대한 올라갈 수 있는 만큼 올라가도 될 거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아나이스가 작게 손을 들고 물었다.
마누스가 입을 다물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선배는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계세요? 아아- 그,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홀로 5층까진 올라갔다 왔다."
"...역시."
"그 외에는 너희가 알아가야 할 거다. 나도 모든 정보를 알고 있진 않으니."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마누스는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했다.
"여긴 시련의 장소이자, 너희가 강해질 수 있는 곳이다."
"-알았어요."
모두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설명은 끝.
나머진 이들이 5층까지 무사히 올라갈 수 있도록 빌어주는 것 뿐이었다.
고작 이런 곳에서 죽진 않을 터다.
이들에겐, 이 세계가 점지해 준 끈끈한 우정과 우월한 재능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한 마디 거드는 건 나쁘지 않겠지.
"함께 올라가면 된다. 너희들은 그럴 테지."
"힘 나는 말이네."
알라노가 살풋 웃으며 문을 바라봤다.
가자-.
그녀가 말했다.
그들의 첫 번째 탐사가 시작되었다.
* * *
탑에 오른 세 사람을 뒤로하고, 마누스는 목걸이를 들어 보였다.
목걸이에 영혼을 채워 넣기 전, 만나야 할 NPC가 하나 있었다.
마누스도 이 캐릭터를 만나는 건, 조금 꺼려졌다.
게임에서야 플레이어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진행하지만-.
이곳은 현실이었으니까.
상식이 통하지 않는 그자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벌써 걱정되었다.
그래도 필요하다면 만나야겠지.
본래 악한 인물은 아니니, 말은 통할 것이다.
[아페리오]
굳게 닫혀 있는 문.
다른 구조물 속에 파묻혀 있어, 그냥 지나치기 일쑤인 문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히든 피스이면서, 플레이어들이 게임 후반까지 쭉 이용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철컥-.
문이 열렸다.
안쪽은 온통 푸른색으로 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문 안쪽에서 몸을 돌리고, 정면에서 문을 닫았다.
다시 몸을 돌리니 보이는 인영.
남자, 그리고 여자.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남녀가 나란히 포커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까 봐-."
"훗, 플러시입니다."
"하... 이 새끼 또 사기 쳤지!"
우당탕-!
여자 쪽이 테이블을 엎었고, 남자는 여유롭게 덮쳐 오는 나무 덩어리를 피했다.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인지 여자는 온갖 쌍욕을 쏟아부었는데, 그 자막이 꽤 웃겼더랬지.
"이런 ―――――― 같은 새끼야! 너 같은 ―――는 ――해서 ―――해 버린 다음 ――해야 돼! 맨날 사기만 치고 이런 ――――!!"
아주 난리가 났다.
큼-.
마누스가 작게 헛기침하자, 두 사람의 시선이 이쪽으로 돌아갔다.
붉은 눈동자에 새하얀 머리.
머리에 달린 두 개의 검은 뿔.
검은 슈트 바지 뒤에서 찰랑이는 꼬리는, 그들이 인간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어-? 인간?"
"인간이 여긴 어떻게.... 어라?"
남자 : 블랙은 주근깨 가득한 얼굴을 모로 돌렸고, 여자 : 화이트는 붉은 눈동자를 부라렸다.
마누스가 인간이 아닌, 두 존재를 보며 말했다.
"오르카를 찾으러 왔습니다만-."
"오,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인데, 일단 앉으시지요."
블랙은 욕쟁이 여자에게서 벗어날 구실을 찾았는지, 얼른 마나를 일으켜 마누스의 몸을 강제로 이동시켰다.
화이트는 그런 파트너를 한 번 째려보고는 난장판이 된 곳을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두 악마 모두 세계관 최강자급의 실력자다.
게다가 DLC의 추가 정보에서, 두 존재랑 한판 붙어 볼 수 있는 기회까지 주어진다고 했다.
진짜 이곳이 DLC의 세계라면, 그것도 가능하겠지.
"오르카의 목걸이를 가지고 왔구나. 그거 어디서 났어?"
"주웠습니다."
"...구라가 아닌 거 보니까 진짜인 모양인데, 그거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알고 있냐?"
화이트는 톡톡 쏘아 내듯 물었다.
마누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고말고.
"강력한 아르카나의 혼을 사냥해야겠죠."
"오-. 잘 아네. 그렇다면 여기에 온 목적도 그거 때문이겠네?"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악마] 아르카나의 영혼을 집어넣을 수 있는 장소였으니까.
화이트가 킬킬 웃었다.
세계관의 설정상, 화이트는 싸움을 무척 좋아하는 캐릭터다.
물론 그 싸움을 구경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
그녀의 웃음은 진짜 악마처럼 보였다.
"애송이치고는 강단이 제법 있네. 블랙, 그거 아직 살아 있지?"
"물론이지요. 조금 버거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충분합니다."
마누스가 희게 웃었다.
두 존재는 그의 웃음을 보고 잠시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이윽고 깔깔 웃는 화이트.
그녀는 마치 자신의 옛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두 존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우리들과의 인연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 정도는 해 줘야겠지. 탑 위로 올라갈 생각이지? 이번 싸움만 잘한다면, 우리가 도와줄게."
"좋습니다. 이번에 들어온 손님은 제법 기대가 되는군요."
두 존재가 그를 이끈 곳은, 거대한 투기장이었다.
마누스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들은 탑에 대해 어떤 비밀을 알고 있을까.
[그르르륵-.]
일단, 그건 이 상황부터 해결하고 물어보는 것이 낫겠지.
마누스가 비뚜름하게 웃으며 투기장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제12화
- 히든 보스
* * *
인간은 거대한 무언가를 보면, 압도당한다.
흔히 '기가 죽는다'라는 말을 쓰지.
감히 덤빌 엄두도 나지 않는 무언가가 자신을 보고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근육질.
한 손엔 도끼를 들고 있었고, 거대한 두 뿔은 단단한 돌도 부숴 버릴 정도로 강고해 보였다.
아르카나 '악마'
온통 검은색인 얼굴에 숫자 '5'가 쓰여 있었다.
제법 강한 놈이란 거지.
[그르륵-.]
소가 우는 것 같은 목소리엔, 진득한 마나가 배어 있었다.
이놈은 보상이 아주 좋은 놈이다.
본래 플레이어 레벨 20 전후로 잡을 수 있는 놈이지만... 마누스는 지금도 무리 없이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단 두 개의 스킬만 가지고 있는 마누스.
사실 카이사르의 마음가짐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사기적인 패시브가 있다는 것이, 그토록 자랑스러울 일인가.
"잘해 보라고-!"
"아주 재밌겠군요. 저자, 인간 중에서 최상급 재능을 지녔어요."
"정말?"
블랙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부정한 것을 끌어안은 그의 눈은 상대방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그의 눈에, 저 인간은 인간 중에서도 유례없는 재능의 소유자였다.
어쩌면, 자신들보다도 더-.
"몇 년만 지나면 이 탑을 모조리 부숴 버릴 수도 있겠는데요?"
"...대개 그런 놈들은 일찍 죽지 않냐?"
"모를 일이죠."
블랙이 어깨를 으쓱하는 것을 끝으로 대화는 끊겼다.
화이트는 노닥거리는 것보다 싸움을 관람하는 쪽을 택했다.
그거야 직접 보면 알 일이지.
그녀가 입맛을 다셨다.
"자알 키워서 나랑 한판 뜨면 좋겠는데."
키득거리는 그녀를 뒤로하고, 블랙은 조용히 마누스를 바라봤다.
이곳에 갇힌 지 얼마나 되었더라?
어쩌면, 진정한 구원자가 나타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르륵-!]
아르카나 : 악마는 씩씩거리며 마누스를 노렸다.
그건 마치 검은 미노타우루스처럼 생긴 모습이었다.
마누스는 여유롭게 영창을 시작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패턴이 그대로 나온다면, 이번 적은 아주 쉬울 것이다.
문제는 마누스 본인의 육체 능력.
실제인 만큼, 한 대만 맞아도 치명상일 터.
그 공격을 잘 피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라피두스]
[알투스]
빠르기를 증가시키는 주문에, 알투스를 더했다.
몸이 가벼워지고, 흘러가는 모든 것이 살짝 느리게 보였다.
소비된 마나는 꽤 컸지만,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르르륵-!]
준비가 끝나자마자 근육 덩어리가 달려들었다.
마치 거대한 RV 차량이 풀 액셀을 밟으며 돌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태연하게 반응했다.
살짝 뛰어, 옆으로 몸을 날렸다.
최소한의 힘만 가지고 공격을 피했다.
휘잉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살벌했다.
그래도, 그는 침착하게 술식을 완성시켰다.
파지직-.
그의 손이 푸르게 빛나며 전격의 채찍을 완성시켰다.
[폴게]
전격계 최하위 클래스 마법인 폴게.
푸르게 빛나는 채찍은 마치 거대한 황소를 조련하는 투우사를 연상케 했다.
땅을 후려치자, 푸른 전광이 번뜩였다.
마누스의 마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희대의 사기 패시브, 카덴차의 위력을 제대로 확인할 순간이었다.
[록스]
빛의 마법은 특별했다.
세계관 내에서, 신성 마법이라고 불리는 종류.
위력이 강하고 판정도 좋지만, 다른 마법보다 배로 들어가는 마나와 익히는 데 걸리는 시간이 매우 제한적인 마법.
신관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마법은, 일반 마법사가 익히기 아주 까다롭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하지만- 위대한 혈통에게 그런 것은 그저 누군가가 정립해 놓은 이론일 뿐.
그에겐 그저 다 똑같은 속성 마법이었다.
[폴게] - [록스]
[더블 스프레드]
새로운 레시피가 완성되었다.
마누스는 채찍을 가볍게 휘둘렀다.
채찍의 궤도대로 쏘아지는 푸른빛 광선.
그 술식의 이름은-.
[아라디아티오]
[그르르르륵-!]
빠르고 뜨겁다.
거기에 전격 디버프까지 걸려 있는 마법이다.
주머니 괴물 게임처럼, 아르카나별로 약점과 강점이 존재하는 시스템.
악마는 말 그대로 빛, 전격이 약점이었으니, 아주 효과가 뛰어났다.
실제로 마누스가 게임에서 애용하던 마법 중 하나이기도 했었지.
그 마법을 두 손으로 펼치는 마법은 짜릿하고 스릴 있었다.
등짝이 모두 타들어 간 악마가 비명을 질렀다.
[그르르륵-!]
분한 것인지, 못생긴 녀석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돌진 패턴 다음은 도끼를 던져, 스턴을 먹이는 패턴.
마누스는 침착하게 패턴을 기다렸다.
이곳에선 맞고 때리는 선택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걸 시험해 보고 싶었다.
집중력을 높이자,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거대한 악마는 양날 도끼를 두 손으로 잡고, 마누스의 머리를 향해 힘껏 내던졌다.
살벌한 소리가 귓가를 웅웅 울렸다.
시계가 느려지고, 도끼의 날이 그리는 궤적이 정확하게 보였다.
'-잡아라.'
유연하게 팔을 휘두르자, 빛과 전기의 채찍이 뱀처럼 움직였다.
도끼의 손잡이를 정확히 감싼 채찍은 추처럼 움직였다.
빠지직-.
철에 통하는 전격이 그 위력을 더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도끼는 이제 악마의 무기가 아닌, 마누스의 무기가 되었다.
몸을 빙글 돌려, 그대로 팔을 강하게 휘둘렀다.
지지지직-!
전격 마법이 인기가 있었던 이유 중 하나.
멋들어진 효과음이 마법을 쓸 때의 즐거움을 더해 주었기 때문이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통쾌한 소리가 울렸다.
뻐억-!
정확한 타격은 지켜보고 있던 두 존재가 감탄사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마누스는 다시 술식을 짜 올렸다.
녀석은 충격이 상당했는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로기에 걸린 것이겠지.
좋다.
마누스는 진한 미소와 함께 마법을 무참히 휘둘렀다.
'다시 맞아라.'
마나가 쭉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뭉텅뭉텅 잘려 나가는 마나.
그래도 마누스는 멈추지 않았다.
콰직-!
[그르르르륵-!]
채찍의 끝이 도끼를 때렸다.
머리통에 박혀 있던 도끼가 쑤욱 들어갔다.
검은 핏방울이 튀었다.
그 끔찍한 중상에도,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데몬이 괴성을 지르며 움직였다.
[그르륵-!]
악마는 마지막 패턴을 선보였다.
땅을 찍어, 모든 파티원에게 대미지를 주는 광역 공격.
피격 시 스턴.
한 턴을 더 맞아야 하는, 악랄한 패턴이었다.
-하지만 이미 파훼법을 알고 있으면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마나가 순식간에 32개의 선분으로 바뀌었다.
그가 원하는 모양으로 짜인 술식은 마누스를 철저하게 보호했다.
[엣지]
[알투스]
한 장의 꽃잎.
거기에 증폭 마법을 더해 크기와 내구도를 키웠다.
콰앙-!
마나의 충격파가 온 땅을 뒤덮었다.
하지만 거대한 충격도 얇은 꽃잎을 찢어 놓진 못했다.
날카로운 송곳이 아니라면, 제아무리 얇은 꽃잎이라도 찢을 수 없었으니-.
'이제 마지막-.'
찌직찌직-.
마치 여러 마리의 새가 우는 것 같은 소리를 뿜어내며, 채찍이 휘둘러졌다.
약점을 계속 때리는 건, 이 게임 공략의 핵심이다.
현실이 된 상황에서도 별반 다를 건 없었다.
[그르르르르르-!]
쩍 갈라진 두개골은 이제 생명력을 붙들고 있을 수 없었다.
퍽 싱거운 전투였다.
하긴, 스토리 초반에 이벤트로 거쳐 가는 곳이니 당연하겠지.
짝짝짝-!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악마가 완벽하게 소멸하는 것을 확인한 마누스는 목걸이를 꺼내, 쪼개진 머리통에 가져다 댔다.
목걸이 체인 부분이 빛나며, 악마의 형상이 새겨졌다.
"하나 모았고."
12개 남았다.
첫 번째 구역에서는 절대 나오지 않는 악마 아르카나.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얻기 까다로운 녀석이었다.
원래 목걸이의 주인도 악마, 탑의 아르카나는 얻기 힘들다고 했으니-.
"워후~ 짜식 잘하는데? 그런 마법은 처음 본다 야."
"...."
화이트는 환호성을 보냈고, 블랙은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마누스는 투기장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이제 탑으로 올라갈 차례였다.
"잠깐-. 그 마법, 누구에게서 배운 겁니까?"
블랙이 그를 붙잡았다.
그가 보여 준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서로 다른 두 원소를 합치는 마법이라니.
마치 신이나 할 법한 마법 아닌가.
그의 눈은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니, 그 원리를 대번에 알아챘다.
알고 있다고 해서 따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스승이 누군지 정말 궁금했다.
허나, 들려온 말은 더욱 충격적인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배운 적 없습니다."
"정말, 누구에게도 배운 적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허어-."
블랙이 나직하게 탄식을 내뱉었다.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나?
이게... 인간의 머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도 안 된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그대라면, 이 탑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겠군요."
"-그럴 생각입니다."
"좋아요. 화이트와 함께 미력하나마 도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두 NPC의 역할은 아주 간단했다.
금단의 마법이라고 하는, 흑마법을 배울 수 있는 장소.
그리고 뭐든지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블랙의 능력을 이용하는 곳.
아이템 분해, 합성을 위한 곳이기도 했다.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별거 없고, 그냥 마법 몇 개 알려 주는 거 정도?"
"저는 쓸모없는 물건을 분해하고 새로운 물건으로 조합할 수 있습니다."
두 NPC는 게임 후반까지 요긴하게 쓰이는 중요 인물들.
미리 인연을 터 두는 건,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그들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마법도 아주 많았다.
카덴차에 필요한 필수적인 레시피 재료 몇 개가 들어가기도 했다.
"-이따금 들르겠습니다."
"나중에 커서, 우리랑 한판 붙자."
화이트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누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탑.
세 명의 마법사는 파죽지세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5층에 도착했다.
"강력한 마나 반응이야. 앞에 강적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할래요?"
"저기, 저 문으로 잠깐 들어가 보자."
알라노가 가리킨 곳엔 멀쩡한 문이 있었다.
휴식처.
탑으로 올라가는 동안, 지친 몸을 쉴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는 아무리 오래 머물러도 순찰자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것도 설명해 준 기억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양호실의 모습이 등장했다.
"어...."
"공간 전체에 회복 마법이 걸려 있네. 조금 쉬다가 가자."
"네. 이런 곳도 있었다니... 진짜 무슨 일이람."
아나이스는 온몸으로 느껴지는 활력을 바탕으로 이리저리 쏘다니기 시작했다.
혹시 양호 선생님이 이곳에서 주무시고 계신다거나 하는 건 아닐까란 생각 때문에.
케일은 폭신한 소파에 앉아, 작게 한숨을 쉬었다.
'힘들다.'
탑을 오르는 일은 무척이나 고되고 힘들었다.
말을 들어 보니, 마누스 선배는 이미 5층까지 혼자 다녀온 모양.
이 힘든 일을 혼자 했을 생각에, 괜히 가슴이 미어졌다.
양호실은 텅 비어 있었다.
말 그대로 회복만 할 수 있는 곳이 된 셈.
체력과 마나를 모두 회복한 그들은 다시 일어섰다.
"가자."
"네."
"할 수 있어! 힘내자-!"
아나이스의 말에 힘입어, 세 사람은 거대한 마나의 근원 앞에 섰다.
데모니움보단 아니지만, 제법 강력한 기운을 가졌다.
거기다, 녀석들은 특이하게도 개의 머리 위에 붉은 가면을 뒤집어 쓴 모양새였다.
마치, 개조를 받은 프랑켄슈타인처럼 기괴한 모습이었다.
[크르르르-]
섬뜩한 울음소리가 울리며 세 마리의 개가 동시에 그들을 쳐다봤다.
몸집은 웬만한 늑대만했고, 전신에 불길한 마나가 가득했다.
마누스는 그래... 이들을 이렇게 불렀지.
<5층에 도착하면 파수꾼이 있을 거다. 그들은 일반적인 데몬과 다르니 각별히 주의하도록.>
이거-.
이길 수 있는 거 맞겠지?
[큼?]
[큼!]
[큼큼!]
세 마리의 개가 그들을 바라보며 적의를 드러냈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 현황]
『전차 - 2 : 세베루스』
<아나이스, 케일, 알라노의 레벨이 올랐다.>
<케일 : 5>
<아나이스 : 4>
<알라노 : 8>
제13화
- 버팀목
* * *
세 명의 마법사는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공격의 케일.
방어의 아나이스.
밸런스의 알라노.
[크음-!]
버프를 걸고, 세베루스의 속도를 따라잡았다.
부족한 공격력을 메우기 위해 알투스 마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개들은 빠르고 강력했다.
"녀석들, 내구력이 장난 아닌데요?"
"직선 공격밖에 없지만 단단하네. 위력을 조금 더 높여야겠어."
"...시간을 끌어 주세요."
아나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끄는 거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불꽃처럼 화려한 것이 곧 플로이스 가문이었으니!
화르르륵-!
화려한 마법이 아나이스의 손에서 펼쳐졌다.
그녀의 눈이 시뻘겋게 변했다.
코피가 흐를 정도로 두통이 심했지만, 괜찮았다.
'나도-!'
자신도 할 수 있다.
뒤처지지 않으려면, 짐 덩어리가 되지 않으려면 올라서야 한다.
아나이스는 이를 악물고 캐스팅을 완료했다.
[이그니라]
2클래스 마법.
아직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술식이었다.
아나이스는 찬란한 불꽃처럼 타올랐다.
희열.
쾌감.
고통-.
그 모든 것이 범벅이 되어 거대한 화염구를 완성했다.
"가라아아아-!"
콰르르르-!
아나이스의 외침과 동시에 세 마리의 파수견이 고개를 돌렸다.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던 층 내부를 환하게 밝히는 화염구.
[큼!]
지능이 낮은 파수견은 그대로 화염구를 뒤집어썼다.
매캐한 냄새가 공간을 뒤덮었다.
녀석들은 모두 배를 까뒤집고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이때다.
케일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두 개의 마법을 합쳤다.
이전에도 써먹었던 마법.
그 거대한 가면을 쪼개 버렸을 때 썼던 마법을 다시 연성했다.
건조한 탑에 시린 북풍이 불었다.
날카로운 얼음 송곳이 세 마리의 개를 덮쳤다.
[켈루]
쩌저정-!
전보다 확연히 위력이 늘었다.
파수견은 시린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크으으음-]
"...일어났어?"
"빙결계 마법은 소용없는 것 같아."
전차 아르카나의 약점은 보통 '전격'과 '어둠'이다.
어둠의 마법은 흑마법을 배워야 하니, 열외.
대체 어떤 마법을 퍼부어야 할지, 세 사람은 감을 잡지 못했다.
'빙결은 통하지 않아. 화염도. 그렇다면-.'
케일은 자신이 알고 있는 마법을 하나씩 동원하기로 했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서로 다른 마법을 준비했다.
"반응이 있는 거로 준비하자."
"예-!"
"아나이스는 무리하지 말고."
"저도... 할 수 있어요."
그녀가 눈물을 슥 훔치며 말했다.
할 수 있다.
묘한 승부욕이 가슴을 자극했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한두 번 정도라면 큰 마법을 날릴 수 있을 거다.
[폴게트]
빠지지직-.
알라노의 머릿속에 있던 속성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누스의 것이 기다란 채찍이었다면, 그녀는 거대한 창 모양으로 변했다.
같은 마법이어도 발현하는 모습이 제각기 다르다.
각 캐릭터의 성격을 드러낸다며 호평받았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녀는 꼼꼼한 성격이었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단 한 번에 약점을 찌르기 위한 창이 준비되었다.
"일단 하나-."
마법사가 피지컬이 안 좋다는 말은 모두 낭설이다.
적어도 이 게임에선 그러하다.
쿵-.
한 손으로 전격의 창을 붙잡고, 온 체중을 실었다.
"흐으읍-!"
뱃심을 꽉 쥐고, 눈은 정확히 표적을 노린다.
찌지지지지직-!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마치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크으으으으으-!]
가면 하나가 통째로 증발했다.
빠직, 빠직, 전격의 잔향이 남아 주변을 따끔하게 만들었다.
이제 2학년.
도저히 또래라고 볼 수 없는 위력의 마법이었다.
아나이스와 케일은 멍하니 알라노의 작품을 바라봤다.
전격 속성이 정답이었던 건지, 무식한 위력이 정답이었던 건지-.
어쨌든, 하나는 죽였다.
"...너무 심했나?"
"아뇨! 심하다뇨! 우리가 죽었을 텐데-!"
"그렇지? 그럼 한 발 더 가야겠네."
알라노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그녀의 손에서 다시 전격의 창이 빛났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케일이 손을 활짝 폈다.
[폴게]
빠지직-!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거대한 화살.
이전, 알라노가 쏘아 낸 얼음 창이 뇌리에 깊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리라.
둘의 모습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쉰 아나이스 역시 이를 악물고 마법을 완성했다.
[이그니라]
전격 마법은 소양에 맞지 않아, 익히지 못했다.
그래도 화력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던 만큼,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돌아가면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해야겠지-.
"한꺼번에 간다!"
알라노의 우렁찬 외침과 동시에 화려한 폭발이 이어졌다.
두 개의 전격과 하나의 화염은 앞에 보이는 걸 모조리 태워 버렸다.
"...후우-."
"이제 없는 거, 맞죠?"
"그런 것 같네. 이건... 뭐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파수견.
그것들이 있던 자리에 쏟아진 보석, 액세서리들.
은은한 마나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들이 널브러졌다.
-이건 또 뭐야.
세 사람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옹기종기 모였다.
알라노가 조심스럽게 감정 마법을 펼쳤다.
다행이 위험한 건 없는 모양.
"이거-. 마법 물품 같지?"
"네. 그리고 이 결정엔 마나가 들어 있어요. 케일, 아까부터 모으고 있었지?"
아나이스가 말하는 건 아마도 마석 이야기겠지.
케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떨어진 건, 이전 것보다 훨씬 정순한 마나를 내포하고 있었다.
아나이스가 큰 돌, 마석을 살펴보며 말했다.
"-그래, 이 정도 보상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진짜 힘들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첫 전투였다.
너무 무리하는 것도 좋지 않겠지.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위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 꼼꼼하게 준비해서 가는 것이 좋겠지.
"그럼 밑으로 내려가자. 아나이스, 일어날 수 있겠어?"
"-네. 충분해요."
"물건은 내일 이사장님께 보여 드리고,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해 보자. 이 돌도."
알라노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두 사람도 선선히 동의했다.
미리 챙겨 온 주머니에 들어가는 아이템.
세 사람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만 돌아가자."
"네에-."
파수꾼과의 싸움은 정말 힘들었다.
세 사람은 힘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탑은 도저히 홀로 도전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마누스는 어떻게 이런 곳을 홀로 오간 거지.
세 사람의 머리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쯤 마누스는 무얼 하고 있을까?
'다음엔 같이 와 보고 싶어.'
누군가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 * *
일행이 포털을 타고 1층으로 내려올 무렵, 마누스는 이제 막 5층의 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불쾌한 마나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보스를 무사히 클리어한 건가-.
'알라노가 합류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빠른데. 그리고-.'
본래 알라노는 훗날 있을 이벤트 후에 합류하게 된다.
초기 스테이터스가 높게 잡혀 있었고,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종류도 폭넓었다.
지금으로선 어마어마한 전력일 터다.
"마법사의 영혼인가."
마누스는 오르카의 목걸이를 꺼냈다.
카이사르의 마음가짐 덕분일까.
죽음의 굴레에서 해방된 마법사의 아르카나가 보였다.
슈르르륵-.
목걸이는 게걸스럽게 영혼을 먹어 치웠고, 마법사를 뜻하는 로마자에 불이 들어왔다.
'나는 먼저 위로 올라가 볼까.'
위로 올라갔든, 아니면 여기서 그만두었든 상관없다.
마누스가 해야 할 일은 항상 같았으니까.
계단이 열렸다.
거침없이 올라간 마누스의 뒷모습은 어느새 탑의 어둠에 감싸여 사라졌다.
"흠-."
6층.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되는 곳.
느껴지는 분위기는 점점 더 으스스해졌고, 공기를 떠돌고 있는 마나의 농도도 짙어졌다.
여기부터는 완벽하게 랜덤.
마누스 본인도 일일이 길을 찾아 헤매야 했다.
다음 보스는 12층에 있으니, 거기까지만 올라가면 되겠지.
'내일 수업은 빼먹어야 하나.'
6시간이 지나면, 이곳의 시간은 멈춘다.
그리고 강제로 시간의 흐름이 빨라져, 다음 날이 되어 버린다.
이 안쪽에 있는 사람은 24시간을 통째로 날려 먹게 되는 구조.
12층까지 빠르게 올라가지 못한다면 24시간을 통째로 날리게 되는 거다.
하지만 뭐-.
수업 하루쯤 안 듣는다고 졸업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수석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도 아니고.
"할 수 있을 때 바싹 움직여야겠지."
이 게임은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게임이다.
정해진 시간 안에 전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대로 세계 멸망.
학업도 중요하지만, 멸망을 막는 게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죽으면 다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간다거나 하는 헛된 희망은 품지 않았다.
돌아가 봤자, 다시 평범한 남자 '1'로 돌아갈 뿐.
마누스는 이 세상이 좋았다.
-그러니까, 더욱 전력을 다해 멸망을 막을 생각이었다.
'지금 모은 영혼은 두 가지.'
마법사, 그리고 악마.
6층부터 12층까진 '전차'와 '절제' 아르카나가 추가된다.
이제 다시 가면을 수집할 차례였다.
* * *
다음 날.
알라노는 간만에 단잠을 자고 일어났다.
케일과 아나이스도 마찬가지였는지, 세 사람은 한결 밝은 얼굴로 교정에 들어섰다.
"좋은 아침이에요! 선배!"
"너희도 잘 잤니?"
"네. 아주 기절하듯이 잤죠."
단 하루의 원정이었지만, 세 사람은 부쩍 친해졌다.
묘한 동질감.
소속감.
그 밖에 다른 감정들을 서로 공유하게 되면서 생긴 친밀감이었다.
"오늘은 푹 쉬고, 주말에 다시 올라가자."
"네."
"학업도 게을리하면 안 되니까. 이곳 아카데미에서 잘 배워야 활약할 수 있을 거야."
세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거대한 탑이 보이는 교정 안으로 들어섰다.
귀족 둘에 평민 하나.
거기다 한 명은 그 위대한 가문 중 하나인 해리슨 가문의 장녀.
시선이 모두 쏠리는 것도 당연했다.
'저 세 사람, 언제 친해졌어?'
'회장님 아니야? 저렇게 웃는 모습 처음 봐!'
'대박 대박, 이거 소설로 써 볼까? 요즘 인기 많잖아~.'
아카데미 학생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나이스는 그 엄청난 관심을 받으며 조용히 말했다.
"선배 인기가 상당하네요."
"인기?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
이 여자-.
자신의 위치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알라노는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참 신기했다.
자기는 참 바보처럼 챙기면서, 정작 주변 시선에는 민감하지 않다니.
아나이스는 슬쩍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 사이를 거니는 것이 이토록 부담스러울 줄이야.
'얘는 왜 이렇게 태평한 거람-.'
멍하니 앞만 보는 눈동자가 참 부러웠다.
어휴-.
결국 그녀는 무수히 많은 시선을 받으며 교실로 들어갔다.
"이따 보자, 밥 같이 먹을 거지?"
"-응. 이따 봐."
케일이 희미하게 웃었다.
알라노는 두 사람을 배웅하고 이사장실에 들렀다.
남는 시간에 어제 얻었던 아티팩트를 보여 줄 생각이었다.
학생회장은 바쁘니까, 바쁘게 움직여야겠지.
그녀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똑똑-.
좋은 재질의 문은 오늘도 좋은 울림을 지녔다.
문이 열리고 이사장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왠지, 익숙한 얼굴이 하나 더 보였다.
"-그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혹여 잘못된 것이 아닐지...."
"내 사람을 보내 찾아보겠네. 이만 가 보게."
"-예."
무슨 일일까.
분홍 머리의 메이드가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언제 봐도 절도 있는 행동이었다.
그녀가 문 근처에 서 있는 알라노를 보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알라노. 마침 잘 왔네."
"무슨 일인가요?"
그녀가 물었다.
"-마누스 군이 사라졌네."
이사장의 말은 전혀 상상할 수 없던 내용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14화
- 실종됐다
* * *
뭐라고-?
알라노가 우뚝 굳어 멍하니 있었다.
그녀는 어제 탑에 들어갔다.
마누스가 홀로 움직인 것도 알고 있었고.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탑에서 돌아오지 않았나 보군. 혹시 어제 함께 있지 않았나?"
"아뇨, 셋만 따로 올라가고 혼자 움직일 거라고 했습니다. 설마 탑에 갇힌 걸까요?"
이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몇몇 사례가 있었다.
"아마 그랬겠지. 문제는 그가 자의로 나오지 않은 건지, 타의로 갇힌 건지 분간이 안 된다는 걸세."
"...그라면."
-그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알라노는 치솟아 오르는 걱정을 꾹 억누르고 생각했다.
그는 무언가를 급하게 하려는 눈치였다.
굳이 홀로 움직였다면, 이유가 있었겠지.
그러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을 거야.
-그래도 걱정되는걸.
이런저런 생각이 휘몰아쳤다.
이 마음, 저 마음이 서로 싸우며 갈등을 일으켰다.
"-오늘까지 기다려 보고, 수색을 해 보자고. 음?"
"그게 좋겠습니다. 교수님들께는...."
"가문과 관련된 일이라고 해 두겠네."
알라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소식을 후배들에게 알리는 것이 좋을까?
"후배들에게도 알려 주게. 수업엔 지장이 없도록 말이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그보다 이걸 봐 주십시오."
그녀는 품에서 어제 얻은 전리품을 꺼냈다.
반지 하나.
목걸이 하나.
그리고 푸른색 보석.
이사장은 눈을 빛내며 전리품을 바라봤다.
"탑에서 나온 물건입니다. 마나가 깃들어 있는 물건인데... 어떻게 할까요?"
"이건... 자세한 건 감정을 해 봐야 알겠지만, 효과는 있겠군. 그리고 이 돌은 마석일 걸세."
"마석이라면...."
말 그대로 마나를 품고 있는 돌이었다.
이사장은 옛 기억을 떠올리며 사용 방법을 말해 주었다.
"누군가는 이 마석에 깃든 마나를 흡수하더군."
"인공적으로 마나를 늘릴 수 있는 겁니까?"
"아마 그럴 겁니다. 탑에 오를 수 있는 인재에 한해서겠지만-."
알라노는 눈을 빛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웬만한 비약보다 훨씬 가치 있는 물건이 아닌가.
획기적이다.
하지만 그만큼 제한적이고 위험한 물건이리라.
"마석에 관한 일은 비밀로 해 두게. 자칫 잘못하다간 큰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예. 그건 저희만을 위해 쓰겠습니다."
"이 아티팩트는 처리가 좀 힘들 것 같은데...지금 감정을 맡길 순 없으니 현금화를 해서 돌려주겠네. 어떤가요."
알라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은 아무나 할 수 없었고, 지금 아카데미에 감정 할 수 있는 이도 없었으니.
하나의 짐을 덜었고, 더 큰 짐을 떠안았다.
마음의 짐이었다.
-마누스.
그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알라노의 수심이 깊어졌다.
또 수업에 집중하지 못할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거니.'
호응 없는 독백 속에, 그녀가 바삐 걸음을 옮겼다.
생각을 깊게 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 퍽 원망스러웠다.
많은 걸 생각하기에 깊게 생각할 수 없음이 한탄스러웠다.
* * *
탑 - 12층.
마누스는 탑 내부를 제집처럼 누볐다.
고인물에게 저층 몬스터는 평타로도 죽일 수 있는 놈들뿐이었다.
그는 마석을 잔뜩 쓸어 담아, 그걸 모조리 흡수하는 중이었다.
흔히 고인물들이 다회 차 플레이를 할 때, 편하게 진행하기 위해 뺑뺑이를 돌리는 방법이었다.
캐릭터 홀로 탑에 진입시켜, 혼자 모든 층의 모든 몬스터를 잡아 죽이는 것.
주로 주인공 캐릭터가 그 주인공이었는데, 그때부터 주인공은 압도적인 레벨로 적을 찍어 누르는 버스 기사가 되는 것이다.
'내가 그럴 생각은 없지만-.'
처음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로 결정했을 때처럼, 그는 최소한의 개입만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원작 주인공이 모든 것을 다 해 줄 거다.
그는 너무 심한 위협을 쳐 내고, 그녀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시련을 던져 줄 뿐.
그건 그렇고-.
게임에서 단 몇 줄의 텍스트로 처리된 것을 해 봤는데 이렇게 쉽게 될 줄은 몰랐다.
<마석의 섭취는 간단했다. 먹으면 되는 것.>
<입 안에 넣을 때는 딱딱했지만, 온기가 닿자 그것은 액체로 변했다.>
<뭔가 끓어오른다! 얼른 제어를 해야->
게임 텍스트에서 처리된 내용이 그대로 실현됐다.
배부를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정순한 마나가 가득 찬 느낌은,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정신적 배부름이랄까-.
"...이만하면 됐어."
전차, 절제, 마법사, 악마.
네 개의 아르카나를 모았으니 큰 진전이 있었다.
이제 슬슬 내려가야 하겠는데-.
-밖으로 내려가면 시간이 변해 있을까?
궁금해졌다.
이 정도라면 3클래스 마법까진 무리 없이 펼칠 수 있는 수준이겠지.
카이사르의 본능이 그렇게 말했다.
-이 상태로 계속 성장한다면, 얼마나 더 괴물이 될까?
문득 궁금해졌다.
카이사르 마누스라는 캐릭터가, 과연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을지.
-그는 웃으며 탑을 내려갔다.
* ♟ *
"...그게 정말이에요?"
"맞아. 베로니카가 얘기했으니 맞을 거야."
"베로니카라면...."
분홍 머리를 한 메이드는 아주 유명했다.
그나저나, 그 마누스 선배가 사라졌다니.
"-그렇게 안 보였는데...."
"아마 무슨 이유 때문이겠지. 일단 알려만 주는 거란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네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케일과 아나이스의 눈망울이 작게 흔들렸다.
그 마누스다.
하지만 그도 사람이잖아.
셋이서도 겨우 올라갔는데, 아무리 강해도 혼자는 좀-.
"케일."
"-응."
한 박자 느린 반응이 들려왔다.
아나이스는 멀어져 가는 알라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었다.
그 마누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준다면, 친밀감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아나이스는 케일과 작당 모의를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허전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모로 돌렸다.
"왠지 허전한 것 같지 않아?"
"-피어슨."
"...아."
피터손 피어슨.
그 수다쟁이가 없다.
어쩐지, 귓가에 들리는 데시벨이 허전하다 했는데 그가 없었구나.
아나이스가 물었다.
"기숙사에서 나올 때부터 없었지?"
"응. 아픈가?"
걔가?
아픈 걸 모르는 애였다.
어렸을 때부터 풀밭에서 뒹굴고, 진흙탕에 빠져도 다음 날 쌩쌩하게 돌아다녔던 친구다.
체력 하나만큼은 그 누구보다 뛰어난 친구였다.
-걔가 아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일단 오늘 밤, 알겠지?"
"-응."
처음 사귄 친구.
또래와 교제한다는 것.
생각보다 재밌고, 새로웠다.
내 옆에 있는 누군가가 사라지는 건, 이제 원치 않았다.
<넌... 항상 홀로 남는구나.>
누군가의 말이 귓가를 스쳤다.
뇌리에 떠오른 말이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털어 버렸다.
곁에 앉아 있던 아나이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얘, 괜찮아?"
"아- 응. 별거 아니야."
"표정 되게 심각했는데.... 피곤하면 무리하지 마. 1~2층 정도라면 홀로 가 볼 수 있으니까."
케일은 고개를 저었다.
친구를 홀로 보내는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반으로 흩어졌다.
결국, 그날 피어슨은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4
시야는 어두컴컴했다.
시차가 틀어져 있는 만큼, 탑 안에서의 피로도는 상당히 빨리 쌓였다.
그런데도 마누스는 거침없이 탑을 역주행했다.
그냥 역주행도 아니고, 구석구석 샅샅이 뒤지면서.
"흠-. 정확히 몇 층인지 안 나와 있으니, 좀 피곤하긴 하네."
몇 시간째인지 몰랐다.
아마 하루가 더 넘어가지 않았을까?
그래도 작업은 멈출 수 없었다.
이맘때쯤, 새로 합류하는 파티원이 있었으니까.
탑에 남은 이유 중 하나는 그를 찾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다른 이에게는 밝히지 않았지만, 우연을 가장하면 좋겠지.
-으아아아아아아아!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탑 안에서 저렇게 소리를 지르다니.
파티원일 때는 몰랐는데, 수다쟁이 캐릭터가 어디 가진 않는구나.
마누스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간섭을 시작합니다.]
그의 앞에 반투명한 메시지가 떴다.
간섭이라.
본래 스토리에선 아나이스와 케일이 구하러 오지.
굳이 필요 없는 초반 장면이었다.
그 둘이 아니라 어느 누가 했어도 상관없었던 이벤트.
그렇다면 겸사겸사 해 주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재능도 개화해 주면 좋고.'
피어슨.
인기가 절망적일 정도로 낮은 남자 캐릭터.
하지만 파티 멤버에는 거의 고정적으로 들어가는 녀석이다.
왜냐고?
-대체할 수 없는 성능을 가진 녀석이었으니까.
피어슨의 재능은 공격 마법 같은, 야만적인 것(유저들의 말에 따르면)이 아니었다.
그의 진짜 재능은-.
"-여기 있었군."
"으헝어ㅓ어엉...어어?"
눈물 콧물이 범벅된 채, 구석에 쭈그려 있는 브라운 머리칼.
이 지질해 보이는 녀석이, 후반까지 꼭 쓰이는 주인공 친구 포지션이라니.
마누스의 차가운 눈빛이 그의 흉한 얼굴에 닿았다.
"마, 마누스 선배?"
"일어나라."
"여, 여긴 어디죠? 아니 어젯밤에 잠깐 이쪽으로 들어왔는데, 글쎄 갑자기 공간이 어그러지면서-."
역시 말이 많았다.
마누스도, 본래 세계에 있었던 남자도 이런 부류는 딱 질색이었다.
텍스트로 읽는 것과 실제로 듣는 건, 정말 차이가 컸다.
꾸욱-.
마누스의 손이 움직여, 그의 정수리를 눌렀다.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다시 말했다.
"-일어나."
"...네."
타고난 입담꾼인 피어슨도 카이사르의 위용 앞에선 저절로 입을 다물었다.
마누스가 손가락을 휘젓자, 피어슨의 흉한 이물질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피어슨은 정신이 없어, 하늘 같은 선배가 무얼 했는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내려간다."
"그... 설명해 주실 거죠?"
"...."
마누스는 말하지 않았다.
피어슨도 딱히 기대하지 않았는지, 긴장감을 끌어 올리며 그를 따라갔다.
그의 등이 유난히 커 보였다.
묘한 안도감이 그에게서 번져 나갔다.
정말 다행이었다.
이따금 달려드는 괴생명체는 모두 마누스의 마법으로 처리했다.
정말이지, 가공할 정도의 위력과 속도였다.
'이게 천재라는 거구나.'
피어슨은 뒤에 선 자신이 확실하게 보호받는다는 느낌과 초라해지는 느낌을 동시에 받았다.
미토스 아카데미에 온 이들은 모두 출세를 꿈꾼다.
배우기만 해선 지식들을 써먹을 수 없었으니.
록스 대륙에는 인류를 위협하는 수많은 존재가 살았다.
그들을 향해 아카데미에서 배운 지식들을 풀어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적어도 3년.
길면 10년 동안에도 그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굉장하네요."
"너도 곧 굉장해질 테지."
"예? 제가요? 에이... 저는 딱히 마법에 재능이 없는 것 같아요."
계단 앞을 막는 괴물 하나를 마법 하나로 지워 버린 마누스.
두 사람은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가며 말을 나눴다.
제대로 된 첫 대화였다.
피어슨은 주눅이 잔뜩 들어 있었는데, 같은 남자가 봐도 좀 안쓰러울 정도였다.
마누스에겐 그 안쓰러움이 한심함으로 느껴졌지만.
그래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법의 종류는 많다."
"그, 그렇죠. 속성도 많고, 술식의 수도 많고...."
그 말이 아니다.
주저리 떠들고 있는 놈에게 주입식 교육을 실시할 차례였다.
마누스가 그의 말을 끊었다.
"공격 마법만이 해결책은 아니란 소리다."
"-아."
"흔한 것 말고, 너만의 것을 찾아라."
피어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한 가닥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재능이 없는 게 아니라, 어쩌면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서고 있진 않았을까.
그의 생각이 처음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제15화
- 너의 재능은
* * *
탑에서 내려오는 길.
마누스와 피어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허나 두 사람의 호흡은 제법 잘 맞고 있었다.
피어슨은 공격 마법을 아예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방해만 될 뿐이니까.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계속 전투를 치르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피어슨이 알고 있는 마법은 많았지만, 능숙하게 쓸 수 있는 마법은 딱 두 가지였다.
[플루스]
[라비오]
둘 다, 버프 계열의 마법이었다.
[알투스]가 마법에 위력을 더하는 버프라면, 이 두 마법은 마법사 본체에 영향을 주는 마법이다.
신체의 강화와 마나의 순환을 강제로 돕는 [플루스].
디버프와 다양한 저하 효과를 없애 주는 [라비오].
이 두 마법의 중요성을 몰랐었다.
그런데 마누스의 뒤에서 싸워 보니 알겠다.
이 두 마법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체감이 팍팍 된다.
'속도 자체가 다르네.'
마누스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마법의 힘일까.
두 사람은 10층이 넘는 층을 매우 빠르게 주파했다.
그렇게 도달한 1층.
"아카데미가 어떻게 이렇게 변한 겁니까? 저는 그냥 물건 하나만 찾으러 왔을 뿐인데-."
"탑을 오르다 보면 알게 되겠지."
역시, 마누스의 대답은 모호한 것이 많다며 피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관은 고요했다.
문은 닫혀 있었다.
피어슨은 현관문으로 달려가, 문을 열기 위해 힘을 줬다.
덜컥-.
아무리 힘을 줘도 열리지 않았다.
피어슨의 손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덜컥덜컥-.
미친 듯이 문을 당겨 봐도,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기다려라."
초조한 피어슨과 달리, 마누스는 침착했다.
피어슨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의 눈은 공포와 절망이 범벅되어, 동공이 흐릿했다.
"기다리라고요? 지금 우리 갇혔다고요! 어딘지도 모르는 공간에서, 밥도 없고! 물도 없고!"
언제 올지 모르는 구조를 기다려야 한다고?
그러다가 죽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벽을 긁으며 죽어 갈 수도 있지 않은가!
이성을 잃고 눈을 부라렸다.
왜 자신을 말리려고만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소리쳤다.
하아-.
마누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다혈질에 주변 환경에 잘 휩쓸리는 성격은, 그의 오점이었다.
원작에서는 그것 때문에 주인공과의 트러블도 종종 있었다.
그에게는 확실히 답답해 보였겠지.
-그래도.
"나불대지 말고 닥쳐라."
"...."
"네 어리광을 받아 줄 정도로 우리가 친하던가."
피어슨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미지에 대한 공포에서, 눈앞에 있는 거대한 힘에 대한 공포로 바뀌는 과정이 보였다.
피어슨의 눈이 떨렸다.
잠깐 정신이 나가 잊고 있었다.
상대는 폭군이라고 불리는 카이사르 마누스다.
지난 1년간, 그가 낳은 소문은 정말 많았다.
그는 그런 무지막지한 사람에게 버럭 소리 지른 것이다.
"그, 그게-."
"닥치고 가만히 있어라. 말로 하는 건 이번뿐이니."
"...."
피어슨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마누스는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이제 조금 있으면 문이 열릴 것이다.
그는 황금색 시계를 바라봤다.
저 시계가 움직이는 순간, 문이 열릴 것이다.
하루와 하루 사이엔 문이 열리지 않으니.
"가만히 있어라. 곧 네 친구들이 올 거다."
마누스는 몸을 돌려 악마들이 살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얻어야 할 것이 있었다.
다시 한번 주의하라고 하여, 피어슨이 쓸데없는 짓을 하지 못하게 막은 마누스가 문을 열었다.
스윽 하고 사라진 그의 뒷모습을 보던 피어슨이 헐레벌떡 그가 있던 자리로 뛰어갔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이 상황은 대체 뭐야아아-!
그가 절규했지만, 아무도 들어 주는 이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구석에 쪼그려 앉아 하염없이 한숨을 쉬는 일뿐이었다.
* * *
존재들은 찾아온 손님을 맞이했다.
매일 두던 포커도 이제 질리던 참이었다.
새로운 얼굴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오-. 오늘도 한바탕하러 왔나?"
"아이템을 제작하러 왔습니다."
12층까지 올라가며 파밍한 재료들이 제법 있었다.
블랙이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거대한 테이블이 나타났다.
검은 일색에 광택이 은은하게 흐르는 테이블.
은은하게 빛나는 마나의 광체.
공작가에 있는 고급 테이블도 이 정도 감성을 뿜어내진 못하겠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마누스는 품에서 재료들을 늘어놨다.
다음 보스전에서 꼭 필요한 녀석들이다.
파티원의 성장을 방해하는 도구가 아니라, 무고한 생명을 구하는 아이템이었다.
본격적인 비극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너무도 많은 이들이 죽었으니까.
이 게임은 그랬다.
'의미 없는 엑스트라는 그저 도구일 뿐이지.'
현실이다.
게임에선 '비극적이구나.'라고 넘어갈 일이지만, 여기는 아니다.
그들의 비명, 절규, 공포, 죽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곳이다.
"뭘 제작하고 싶은데? 아 제작하는 데 마석도 필요하거든?"
마누스는 마석도 늘어놨다.
필요한 것이 많아, 보이는 데몬을 모조리 때려잡으며 탑을 올랐다.
마석의 양을 보더니 두 존재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 정도의 마석을 모아 올 정도라면, 얼마나 올라갔다 온 거야?
데몬은 얼마나 또 잡은 거고?
가지고 있는 마나도 부쩍 늘었다.
이건 또 어떻게 설명할 텐가.
"제, 제법인데-. 인간 중에서는 최고 수준이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네?"
"제가 말했잖습니까, 화이트. 이분은 조만간 우리 앞에 설 겁니다. 대적자로서."
그녀가 눈을 빛내며 혀로 입술을 훑었다.
뱀 같은 눈동자에 소름이 돋을 법도 하건만, 마누스는 평온했다.
그는 덤덤하게 주문할 품목을 읊었다.
"영원의 성수, 오만의 기름, 저주받은 못."
"어디 구조 활동이라도 가니?"
"최대한 많이. 부탁드립니다."
화이트의 눈썹이 꿈틀댔다.
심기가 조금은 불편한 모양.
마누스는 평온한 표정을 풀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리고 또-."
"또?"
"흑마법. [프렉스]와 [이냐부스]를 배우고 싶습니다."
그것도 일정한 마석을 주어야 배울 수 있다.
당연히 이 정도 값은 치를 수 있을 만큼 가져왔다.
그 고생을 하면서 괜히 마석을 모은 것이 아니었다.
'초반엔 그 효율이 조금 떨어지거든.'
초반엔 정말 효율이 안 나오지만,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데몬이 주는 마석의 가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설렁설렁 잡아도 노가다가 필요 없을 지경이라, 난이도 조절에 실패했다고 말이 나오기도 했지.
그래도 초반에 고생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이벤트에서 분기가 갈릴 정도다.
루트 자체가 달라지니, 초반 노가다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흑마법은 너희 세계에서 위험한 마법으로 분류되는 거 알지? 그래도 배울 거야?"
"-예."
마누스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화이트가 눈웃음을 드리웠다.
마법, 특히 흑마법에 관한 지식은 그 누구도 그녀를 따라올 수 없었다.
천재.
그녀도 그런 존재였다.
모든 흑마법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이 정도 마석이면 못 가르칠 것도 없지. 전부 우리에게 주는 거지?"
"원하시는 대로."
"후후, 화끈해서 마음에 드네. 좋아. 가르쳐 줄게. 따라 해 봐."
그녀가 손을 폈다.
기이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흑마법과 일반 마법은 구조만 다를 뿐, 본질은 똑같았다.
상대방의 모든 방어력을 떨어뜨리는 마법 [프렉스].
그 기이하게 생긴 별이 영롱하게 떠올랐다.
화이트는 마법의 천재다웠다.
술식의 발동 직전에 멈춰, 술식의 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따라 할 수 있겠어?"
"...."
마누스의 푸른 눈이 마법진을 잠시 바라봤다.
블랙은 그녀의 교육 방식에 굉장히 불만이 많았지만, 별말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가 탑에 오르는 자들의 교육을 맡기로 했으니까.
문제는, 저렇게 키운 제자가 꽤 된다는 거다.
그리고 그 제자들이 존재들 사이에서 이름을 날리는 자들이라는 것도 신기했다.
아, 생각해 보니 그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었다.
"이렇게 하는 거군요."
천재라는 거.
그들에겐 가르치는 방식 따위, 의미가 없다는 거.
천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방대한 지식이다.
방법보단 결과를 중요시하고 더 많은,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자들.
오직 그런 자들만이 화이트에게서 마법을 배웠다.
-지금 이 청년도 마찬가지.
그가 펼친 마법을 보라.
완벽한 마법이었다.
"우와-. 너... 천재구나?"
흑마법.
일반적인 마법과 정반대로 그려지는 술식은 복잡함을 더했다.
사람은 익숙함을 찾는다.
몸은 기억하는 습관을 잊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누스는 그런 습관 따위,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았다.
이해하고, 따라 한다.
그건 마누스에게 숨 쉬듯,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었으니까.
"프렉스는 이제 됐습니다. 이냐부스도 배우고 가겠습니다."
"좋아. 이냐부스는 조금 더 어려워. 이렇게-."
32개의 선 위로 또 하나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조금 더 복잡한 수준이었으나, 역시 마누스는 한 번에 해냈다.
"...참 내. 교육의 현장이 이렇게 처참할 줄은 몰랐군요."
"왜~. 재밌잖아. 그러는 너는 그 구라 눈깔 달고 있으면서."
"...이건 조절할 수 있는 거라고요."
화이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분명, 뭔가 건든 것이겠지.
빠직- 하고 그녀의 혈관이 툭 튀어나오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녀의 가슴이 부풀었다.
마누스는 한 발자국 멀어져, 두 손으로 곱게 귀를 막았다.
"-이 쌍놈에 ―――――!! 너 맨날 포커 칠 때 사기 치려고 구라 눈깔 뜬 거였지 이 개 같은 ―――――――!!"
"전 가 보겠습니다."
당황하는 블랙.
쌍욕을 무참히 퍼붓는 화이트.
그 지옥도를 뒤로하고, 그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 * *
탑 로비.
피어슨은 갑작스럽게 열린 문과 들이닥친 두 사람을 보고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토록 보고 싶은 사람들이었는데, 이렇게 마주하니 눈물을 참을 수 없었겠지.
"흐어어어-. 진짜 너희들만 믿고 있었다고! 마누스 선배는 진짜 너무 무서웠어-. 어떻게 둘이 있는데 혼자만 어디론가 가 버리냐고! 이건 진짜-."
"좀 조용히 해. 더러운 거 묻히지 말고!"
아나이스가 달라붙는 피어슨을 떼어 냈다.
눈물 콧물을 쏟으며 엉엉 우는 모습이, 꼭 어렸을 때 던전에 잘못 들어갔다가 구조된 때와 비슷했다.
얘는 아직도 그대로구나-.
아나이스가 머리를 밀어내고 있을 때, 함께 왔던 케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피어슨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찾았다.
아직 그가 보이지 않았다.
"-선배는?"
"먼저 나갔겠지! 그런 극악무도한 선배 따위-."
"-도착했군."
마누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탑 구석에서 나오고 있는 마누스의 모습은 선명하고 또렷했다.
분명 그렇게 보였다.
케일이 깊은 미소를 지었다.
"무사하셨네요."
"얼간이 하나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
그 얼간이가 누굴 뜻하고 있는지 알았던 피어슨은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해, 할 말이 없었다.
모든 것이 다 착각이었다.
마누스가 저렇게 말해도, 그를 구해 준 것은 사실이었고.
-더불어 재능까지 찾아 주지 않았던가.
마누스는 피어슨을 보며 얘기했다.
"마법사는 본래 후열에서 싸우는 존재다. 그 싸우는 방식은 참으로 다양하지. 다음엔 얼간이가 아니었으면 좋겠군."
그 말을 남기고, 마누스는 열린 문으로 나섰다.
남은 세 사람은 멀뚱히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나이스가 눈을 돌려 피어슨을 바라봤다.
"너, 또 무슨 민폐 끼쳤니?"
"아, 아니라고-."
억울한 변명이 로비를 맴돌았다.
제16화
- 내가 키워 보고 싶네
* * *
한바탕 소동이 있고 난 다음 날.
마누스는 아침부터 알라노에게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기숙사 앞에 찾아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물론 그녀의 심정을 이해했으나, 마누스는 굳이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것보다 행동으로 보여 줘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것이 마누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알라노는 달랐던 모양이다.
"애기 정도는 해 줬으면 좋겠는데. 걱정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내가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는 건, 네가 더 잘 알잖나."
"정말 태평하게 말하는구나. 내가 겪어 본 바로도 탑은 정말 위험한 곳이었어. 네가 아무리 천재라도 불가피한 일은 일어날 거야."
마누스는 그녀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이 간질거렸다.
전의 삶에서도, 마누스의 삶에서도, 자신을 위해 걱정해 준 사람들은 이들이 전부였다.
그는 언제나 혼자였으니까.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다."
"-응?"
마누스가 알라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깊은 호수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안에는 무엇이 살고 있을까.
해리슨 가문에서 사랑받으며 커 왔던 알라노는 차마 숨을 참지 못했다.
저 깊은 감정 아래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한 번쯤은 이를 악물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걱정을 받는 것. 나에겐 익숙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해리슨이야. 지난 1년간은 널 지켜봐 왔지만, 이젠 아니야."
"고맙군. 앞으론 보고하지. 친구."
마누스의 표정이 바뀌었다.
평소 무표정이 아닌, 은은한 미소를 짓는 얼굴이 되었다.
살살 부는 봄바람과 겹쳐, 알라노의 심장에 직격타를 맞혔다.
"-어, 앞으로는 꼭."
"말하겠다. 교실에서 보자."
마누스는 먼저 몸을 돌렸다.
알라노는 한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무척 치명적인 얼굴이었다.
그녀의 온도가 훅 상승했다.
"그, 그럼 나는 갈게."
"조심해서 가라."
알라노는 살짝 붉어진 얼굴을 감추며 걸음을 옮겼다.
마누스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서 교정으로 오고 있는 세 사람을 바라봤다.
오늘은 능력 평가가 있는 날이었던가.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마누스는 걸음을 옮겨, 능력 평가가 잘 보이는 자리로 향했다.
어디, 얼마나 성장했는지 볼까?
'수업은... 조금 있다가 들어갈까.'
2학년 수업은 이제 너무 쉬웠다.
카이사르의 재능으로는 배울 것이 없으니, 조금 늦게 들어가는 것 정도야 뭐-.
그의 눈이 세 사람을 무심히 바라봤다.
"전부 A반에 들 수 있을까?"
몇 가지 조언만으로도 충분할 거다.
저들은 그런 캐릭터니까.
* * *
"아직 원인은 모르는 거고?"
"그렇다니까. 이제야 겨우 탐사를 시작했는걸."
"진짜 죽을 뻔했구나."
오늘도 세 사람은 나란히 교정을 거닐었다.
피어슨은 어젯밤부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