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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TFP

Maxi_roj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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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 - 1

우림 저

작품 소개

게임 속 악역 보스로 빙의했다.

튜토리얼에서 죽는 보스.

아무 능력도 없었지만 얘, 하루만 더 살았다면 세계관 최강이 되었을 재능이었다.

제1화

- 내 목숨은 하루 남았습니다

* * *

[난 아카데미 수석이다! 평민 따위에게 질 것 같은가?]

[신이시여-. 오늘도 더러운 피를 바닥에 흩뿌릴지니, 성스러운 피를 자라게 하는 거름이 되게 하소서.]

<얘는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지.>

모니터 안에서 인상을 찌푸린 남성에게서 나오는 텍스트.

수려한 미모와 일그러진 인상, 그러나 곧 죽어야 하는 인물.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악역이자, 엑스트라.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지만, 놀라운 점이 많았다.

1학년 수석이자 2학년으로 올라가는 이놈의 별명은 '폭군'.

공작가의 차남이자 멋들어진 이름을 가진 캐릭터.

파벌의 온상이자 악역의 대명사...는 아니고 그냥 엑스트라.

고작 튜토리얼에서 어처구니없게 사망하는 캐릭터.

-카이사르 마누스.

<참, 누가 만들었는지, 개연성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네.>

DLC 발매 기념으로 정주행하기 위해 처음부터 시작한 게임.

서로 다른 마법을 배우고, 두 개 이상의 마법을 조합해 새로운 마법을 창조한다.

해당 게임의 모토이며 콘셉트.

"아니, 근데 이게 무슨 일이야-."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남자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남자가 살고 있는 조국에서 게임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남자 역시 해당 게임을 팠다.

남자가 항상 입에 달고 살았던 이야기는 '카이사르 마누스가 문제야. 개연성을 다 말아먹잖아.'였다.

<이딴 걸 누가 수석이라고 생각하겠어. 수석이면 실력도 짱짱해야 하는데.>

수석이라는 놈이 주인공의 재능 개화나 도와주는 캐릭터라니.

게다가 옥상에서 떨어져 죽어버리기까지 한다.

사인은 추락사.

멍청하게도 '옥상으로 따라와'를 시전하다가 된통 당한 녀석이었다.

그 후는 어떻게 됐냐고?

공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일언반구도 없어, 주인공 캐릭터는 그저 '사고'였다는 이유만으로 처벌도 제대로 받지 않는다.

남자가 생각하기에 수작으로 꼽히는 게임의 유일한 흠이었다.

"근데 그게 나네?"

남자가 서 있었다.

삐뚜름, 웃음을 지어 보니 단 하나의 일러스트로 표현되던 녀석의 얼굴이 재현되었다.

카이사르 공작가의 차남이자, 아카데미 수석 입학, 1학년 때까지 줄곧 수석.

하지만 능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이상한 캐릭터.

왜일까.

남자, 카이사르 마누스는 생각했다.

왜 수석 입학을 하였으며, 주인공에게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당해야만 했는지.

오늘은 3월 2일.

원래 게임의 주인공이 전학을 와, 기숙사에서 쉬고 있을 날이었다.

내일이면 새로운 학기가 시작될 거다.

"...기숙산데 자취방보다 좋긴 하면 뭐 하냐-."

마른세수를 했다.

고생 한 번 안 해 본 것 같은 부드러운 손바닥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원래 본인의 거칠고, 꺼끌꺼끌한 손바닥과는 완벽하게 다른 감촉이었다.

그래서 더욱 꿈처럼 느껴지는지도.

남자, 이제 마누스가 된 자가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DLC라 이거지. 끝나면 집에 다시 갈 수 있나?"

공허한 물음에 답해 주는 이는 없었다.

5성급 호텔 부럽지 않은 기숙사를 둘러봤다.

황금빛, 은은한 조명을 비추고 있는 샹들리에.

어쩐지 좋은 냄새가 나는 탁자와 책장.

본래 깔끔한 성격인지, 누군가 정리해 놓은 것인지 모르는 전체적인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여기서 공부하는 과목은 모두 알고 있으나, 관련 내용까진 알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또 한숨.

터벅터벅 걸어가, 제일 위에 있는 서적을 살펴봤다.

『원소 마법의 이해』

파라락-.

솔솔 올라오는 종이 내음을 맡으며 아무 페이지나 펼쳐 봤다.

글씨는 이해할 수 있었으나 내용은 별개였다.

"뭐라는 거야."

『화염계 원소는 마찰, 집약, 타오름의 형상을 찾아야 한다. 술식의 구축은-.』

텁.

차라리 흉기로 쓰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은 서적이, 답답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봐도 뭔 소린지 모르겠다.

마누스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마법?

그는 과학이 판치던 세상에서 살았고, 논리로 돌아가는 세상을 살았다.

초인과적 현상을 일으키는 마법 따위, 알 게 뭐냐.

가스레인지, 라이터, 성냥....

불을 일으키는 도구는 많고 많았는데.

똑똑-.

한참 난감한 현실에 빠져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대답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숨을까? 자는 척할까? 하는 고민이 슈퍼카처럼 지나갔다.

돌풍을 일으키며 촤르륵 지나간 고민의 끝은 얌전히 일어나서 문을 열어 주자는 쪽이었다.

"베로니카입니다."

"-나간다."

저도 모르게 무뚝뚝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본래 남자의 말투와는 동떨어졌지만,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빙의의 영향인 듯 싶었다.

기억을 떠올렸다.

베로니카.

마누스도 아는 캐릭터다.

분홍색 머리칼이 특이한 캐릭터였지.

달칵, 문을 열자, 하얀색 앞치마가 보였다.

전형적인 메이드 복장인 그녀는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마누스는 멀뚱히 서,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감히 위대한 자 앞에서 고개를 들지 않는 신하처럼, 그녀의 눈동자는 마누스의 발치를 향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천 소리와 함께 고운 손이 내밀어졌다.

"편지입니다."

"고마워."

그의 말을 들은 베로니카가 살짝, 찰나의 시간동안 마누스와 눈이 마주쳤다.

이내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곧 찾아올 격통에 슬며시 눈을 감았지만, 기다리던 건 없었다.

<쓰레기같은 년이 어딜 눈을 마주치나.>

그 시리던 목소리 대신, 들려오는 건 정적이었다.

복도를 울리던 천박한 소리 대신, 부드럽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

다시 눈을 들어 보니, 문이 닫혀 있었다.

베로니카는 잠시 자칭 위대한 가문의 위대한 도련님이 들어간 방을 바라봤다.

그녀는 얼얼하지도 않은 뺨을 매만졌다.

"신기하군요."

위대하신 자가 천것에게 손찌검도 하지 않다니.

거기다 '고마워'라고?

누가 들으면 영혼이 바뀌었다고 할 정도의 사안이었다.

농담, 혹은 꿈이라고 치부될 정도의 사건.

그래, 사건이었다.

* * *

"후.... 일단 볼까."

마누스는 편지를 꺼냈다.

총 두 장이었는데, 한 장은 카이사르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지만, 이상하게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장의 편지.

그건, 이 세계에 있어선 안 되는 문양이 찍혀 있었다.

마누스는 조심스럽게 해당 편지부터 개봉했다.

『안녕하십니까.

당신은 DLC 캐릭터에 당첨되셨습니다.

마누스의 비틀린 운명을 바로잡는 것이 당신의 목표입니다.

본편 이후의 사건을 두 눈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생존하세요. 그리고 주위 사람들을 도와, 진정한 끝에 다다르세요.

그 이후, 당신은 거대한 힘과 함께 자신만의 결말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무운을 빕니다.』

『P.S : 주변 인물에 대해 간섭하면, 굉장한 영향력을 얻을 겁니다. 명심하세요.

다 같이 강해져야 이야기의 끝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누군지 모를 농간 때문에 이 세계로 떨어졌다, 이건가.

마누스는 차분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징징댄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

평소에도 주변을 차분히 둘러보던 남자였다.

거기다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나니 그저 체념할 뿐이었다.

게임 속으로 들어왔으니, 멈춰 있으면 안 된다.

살아갈 방향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다 문득, 대한민국에서의 처지와 이곳의 처지를 비교해 보았다.

'오히려 이곳이 상황은 더 나을지도. 그나저나....'

-사락.

마누스는 다른 한 장의 편지를 펼쳤다.

종이가 펴지는 소리는 저 깊이, 항상 품어 왔던 궁금증을 걷어 내는 소리 같았다.

과연 가문에선 무어라 보냈을까.

『아들아.

너를 위대한 자로 만들기 위해 쓴 공로가 작지 않다. 언제나 그랬듯, 너는 조용히 있으면 된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 티도 내지 말거라. 그리하면 아카데미 수석 자리는 항상 네 것이 될 것이다.

지난 1년은 네가 아카데미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나날이었지.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그저 가만히 있거라.

미토스 아카데미에서 카이사르는 단지 굉장히 가치 있는 명패일 뿐, 해결해 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들아.

위대한 자로 남기 위해선 정녕 아무것도 하면 안 된다.

그림자가 널 대신해 모든 걸 해 줄 테니....

잘 지내거라.

생일 축하한다.』

편지의 내용은 마누스의 상황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이 녀석, 부정 입학에 성적까지 조작한 거였나?

그러면 앞뒤가 잘 들어맞네.

"그냥 관심이 없던 애였구만."

배경 설명에서 카이사르 공작 가문은 위대한 마법의 가문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주인공마저 우러러볼 정도로 대단한 가문이란 설정.

한 가문의 힘으로 능히 재앙을 이겨 낼 수 있는 곳.

마법사 가문 중, 위대한 가문으로 칭송받는 곳이자 대륙 전체를 호령하는 곳이 바로 마누스의 가문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카이사르'라고 정했다지.

'그런데 이런 반푼이가 태어났으니..., 그래도 무언가 조치를 취했다던 이야기가 없는 걸 보니, 그냥 가문에서도 버려졌나 보네.'

빙의한 캐릭터의 설정은 대충 이해했다.

혹여 기억나는 것이 있나 뒤져 봤지만, 머릿속은 본래 살던 세계에 대한 기억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마누스라는 놈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수석으로 입학할 수 있었는지, 대인 관계는 어땠는지 등등.

전반적인 지식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다.

침대에 벌러덩 누운 마누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편지가 아니었다면, 이 녀석의 상태도 알지 못했을 거다.

그건 그렇고, 그 무시무시한 메이드 암살자를 실제로 보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림자 암살자 베로니카.'

13개의 보스, 그리고 자잘한 미니 보스와 이벤트 보스.

'탑'에 출몰하는 보스와 갈등으로 인한 보스.

이 게임은 틈만 나면 보스를 던져 주고 싸우게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보스 중 하나인 '베로니카'였으니.

'아무것도 안 하길 원한다고? 나도 그러고 싶지만 걸리는게 있단 말이죠. 새로운 아버지.'

원작대로라면 내일 죽을 운명이었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이상 쉽게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냥 조용히 살다가 원작 스토리나 잘 끝나도록 빌어 주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여기까진 빙의를 당한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겠지.

사실 조건도 나쁘지 않았다.

수석이라잖아.

장학금도 빵빵하고, 이 호화로운 기숙사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거 아니야?

"하지만 이 편지-."

마누스는 편지에 쓰여 있는 내용을 곱씹었다.

해석하자면, 스토리에 적절히 개입해야 한다는 거다.

자신은 무얼 할 수 있을까?

이 캐릭터가 가진, 혹은 자신이 가진 재능은 무엇일까?

조언?

아니면....

'모르겠다. 일단 날 건드는 놈은 없겠지.'

이 게임에서 '공작가'라는 것의 파괴력은 어마어마했다.

작은 나라를 운영할 수 있는 재정력을 지닌 세력.

작은 나라의 정규군과도 붙어 볼 수 있는 무력을 가진 세력.

단신의 무력으로 일천의 기사를 대체할 수 있는 '초인'이 있는 곳.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곳이 바로 공작가였다.

내일 하루만 잘 넘기자고 생각하며, 마누스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폭신폭신한 침대에 있으니 더더욱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내일도 부디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기를.

"이게 바로 돈 많은 백수의 기분인가."

세상이 멸망할 위기에 처한 것 빼곤, 정말 완벽한 빙의였다.

* * *

오늘도 교정은 시끄러웠다.

열다섯.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 나이인 학생들이 조잘조잘 떠들며 거대한 건물로 향했다.

미토스 아카데미.

대륙 중앙에 위치한 종합 교육 시설.

여덟 개의 왕국과 두 개의 제국.

세 개의 공국이 있는 록스 대륙의 유일한 중립 지대.

모든 나라, 모든 재능을 지닌 이들이 들어오는 곳이 바로 미토스 아카데미였다.

"더럽게 크네."

게임 내에서는 빠른 이동 기능을 이용할 수 있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마누스는 천천히 아카데미 전체를 훑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상하게도 그에게 접근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며, 수군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일국의 왕자나 되어야 말 한 번 걸어 볼까 하는 존재.

일정한 보폭은 우아함을 더했고, 광이 나는 구두는 성격을 보여 주었다.

싸늘하게 주변을 훑는 눈빛은 마치-.

"야, 야, 눈 깔아."

"눈 마주치지 마. 절대."

-먹잇감을 찾는 듯한 눈빛이었으므로.

'카이사르'란 성은 그런 무게를 지녔다.

걸음걸이, 동작, 눈빛만으로 주변을 압도하게 만드는 단어였다.

뚜벅-.

마누스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신감으로 다져진 카펫이 깔리는 것 같았다.

'이거 참, 적응 안 되는군.'

살풋, 인상을 찌푸리자 '히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평범한 삶을 살았던 마누스는 순식간에 공포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마치 학창 시절, 학교 짱이라고 하던 녀석이 지나갈 때랑 비슷한 분위기랄까.

-사실 별반 다를 것도 없었지만.

그가 가는 길에는 장애물이 없어야 했고, 여태까지 그래 왔다.

어느 한 여자가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보이기 전까진.

마누스는 똑바로 걸었고, 여자는 그에게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저, 저거 전학생 아니야?"

"미친- 빨리 끌어내야...."

"야, 야! 빨리 나와!"

약간 멍한 구석이 있는 여인.

푸른 머리칼에, 훤칠한 키.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 세계의 주인공.

짙은 마력의 소유자가 멍하니 학교 건물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마치 홀로 다른 세상에 있는 느낌이랄까.

'녀석이다.'

케일.

세계의 구원자이자 이 게임의 주인공.

본래 성별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여기선 여자인 모양이었다.

마누스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거기서 이미 주변의 시선이 이상하게 변했다.

낮게 깔린 탄성이 마치 연극 무대에 선 느낌을 주었다.

"멋지지 않은가."

낮고 중후한 음성이었다.

케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로 옆에 선 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왜일까.

본래 모르는 사람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삼가는 그녀였지만, 저도 모르게 입술이 열렸다.

"-네."

케일의 대답은 짧았다.

마누스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우뚝 선 두 개의 탑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마누스는 아무런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거야.'

태연하게.

아무 일 없이.

그녀와의 만남은 그게 끝이었다.

본래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는 이유만으로 옥상으로 불려 갔어야 할 여인은, 평화로운 하루를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몰랐다.

그 안전한 하루가, 세상을 뒤흔들 재능을 개화시킬 줄은.

지금껏 그 누구도 관심받지 않았던 아이의 운명이, 곧 새로운 날짜에 도달하고 있었음을.

컴컴했던 오랜 밤이 지나, 여명을 맞이하는 운명이, 세계를 뒤흔들 빛이 되리라곤....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제2화

-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 * *

두 개의 탑은 각각 검과 마법을 상징한다.

원형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울타리는 방패를.

미토스 아카데미의 전체적인 모양이자, 기사, 마법사, 수호자를 양성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초창기 창립자 셋은, 각각의 상징물을 본떠 반을 만들었다.

검은 독수리.

푸른 사슴.

황금 뱀.

독수리는 맹렬하게 공격하는 검을 상징하고, 사슴은 부드럽게 자연을 지키는 수호자를. 뱀은 기민하고 유연하게 사고하는 마법사를 그린다.

'처음엔 황금 뱀 F반에서 시작하겠지.'

마누스는 무수히 많은 시선을 받으며 게임 초반부를 생각했다.

천천히, 발신자가 누군지 모를 편지를 곱씹으며.

으레 그렇듯,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은 홀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다회 차 플레이어만 해도 그렇지.

홀로 주인공 캐릭터를 이용해, 모든 변수에 대비하고 아이템을 독식한다.

그리고 버스 기사로 운용하지.

'그러지 말고 원작 캐릭터들을 키우라는 걸까.'

뭐, 그렇다면 자신이야 좋다.

게임 후반부는 이 세계관에 있어서 그야말로 지옥이거든.

그런 상황에서 잘 키운 캐릭터에게 맡긴다면, 능력 없는 마누스로선 환영할 일 아닌가.

아직 수업까진 시간이 좀 남았다.

마누스는 문득, 1학년 F반이 보여 걸음을 멈췄다.

멍하니 앉아 있는 푸른 머리칼의 케일.

마누스 역시 잠시 그녀의 모습을 바라봤다.

또한 원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들도 찾아봤다.

'저기 보이는군.'

그녀 곁으로 다가오는 이들 역시 보였다.

실물로 한 번쯤은 꼭 보고 싶었던 인물들.

스토리의 시작, 인연의 첫 단추를 채우는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케일은 불쑥 찾아온 남학생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전학생에게 다가온 남자가 쾌활하게 입을 열었다.

"여-, 전학생?"

"...어."

"반가워. 피터손 피어슨이라고 한다."

"케일."

멍한 눈빛에 비치는 활발한 소년.

아무렇게나 풀어 헤친 넥타이는 문자 그대로, 불량하다는 이미지를 풍겨 댔다.

건들거리는 몸동작이 다소 경박스럽긴 했지만, 또한 자유로웠다.

아침에 봤던 그 남자와 전혀 반대되는 이미지.

케일은 다양한 사람을 만나 보라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렸다.

이런 이도 좋겠지.

피터손 피어슨이라고 하는 이 친구는 연신 입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어제 전학 왔지? 오늘 간 큰 전학생이 있다고 하던데, 엄청나잖아? 원래 그렇게 조용한 성격인 거야? 아니면 콘셉트? 가끔은 신비주의 콘셉트도 좋긴 하지-."

"...."

케일은 멍하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 정말 말이 많은 친구구나-라고 생각하며.

"내가 말이야, 어렸을 때 용병단에서 일했거든?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그래그래, 내가 다섯 살 때, 집에서 나와서- 어?"

연신 떠들던 피어슨이 앞을 바라봤을 땐, 있어야 할 소녀가 사라지고 없었다.

자신이 하는 말을 무시하고 저만치 걸어가는 조그마한 등.

피어슨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라가며 입을 놀렸다.

계속해서-.

"...시끄러워."

"야! 피어슨! 너 또 처음 보는 애 괴롭히고 있냐?"

뾰족한 목소리였다.

피어슨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사람은 몇 없었는데, 그 몇몇 중 하나인 여성이 등장했다.

허리께에 손을 얹은 모습은 당당함을 상징한다고 그랬던가.

타오를 듯한 붉은 머리칼이 이미지를 부각시켜 주는 여인.

자신과는 달리, 강렬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소녀였다.

그녀를 발견한 피어슨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또 내 작업을 방해하러 온 거면, 비켜 줄래? 너는 어렸을 때랑 하나도 안 변했- 악!"

"닥쳐 이 파멸의 조동아리야. 귀족이면 귀족답게 품위를 지키라고 몇 번을 말하니?"

"보자마자 정강이를 까는 것도 귀족답지 않은.... 으악!"

괜히 한 소리 더 했다가 반대편 정강이까지 까인 피어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일이 풉, 미소를 터뜨렸다.

두 사람은 그녀의 웃음소리 덕에 휴전 상태에 들어갔다.

붉은 머리가 찰랑이며 푸른 머리의 케일 앞에 섰다.

"반가워, 전학생. 이름이 뭐니?"

"케일이야. 평민인가 봐. 성이 없는 걸 보며으억."

"너한테 안 물어봤거든?"

한 손으로 피어슨을 밀어낸 그녀가 친절하게 손을 내밀었다.

타오르는 화염을 닮은 눈동자.

우아하면서도 거침없는 몸동작.

케일은 단번에 그녀가 자신과 반대되는 성향을 지녔다는 걸 깨달았다.

"난 플로이스 아나이스. 플로이스 가문의 장녀야."

"케일이야. 반가워."

좋은 친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케일의 말이 조금 길어졌다.

그것만으로 족했는지, 아나이스는 붉게 피어오르는 꽃처럼 웃음을 지었다.

케일은 부드럽게 손을 맞잡으며 그녀의 표정을 따라 하려 했다.

어색한 웃음을 본 아나이스는 케일의 작은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확실히, 케일 본인이 알고 있던 귀족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게 어색하게 안 대해도 돼. 여기는 모두가 평등하니까.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나도 마찬가지다! 잘 부탁한다고."

"...응."

케일은 이번엔 조금 더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친구.

그리운 울림이었다.

친구는 딱히 만들지 않았다.

그녀가 살던 곳에 있던 이들은 모두 죽거나 다쳤으니까.

그때의 감정을 다시 느끼기 싫어, 그녀는 친구를 만들지 않았다.

찢어지는 듯한 마음의 고통은 다시 느끼기 싫을 만큼 절망적이었으니.

하지만 이곳, 미토스 아카데미라면 다를지도.

이곳은 평화로웠다.

도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고, 누군가 목숨을 노리는 일도 없겠지.

적어도 그녀가 생활하던 곳보단 훨씬 나은 환경이었다.

그래-.

'이곳이라면-.'

좋은 인연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케일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 * *

오늘 하루, 수업이랄 것도 없었다.

그저 간단히 앞으로의 일정과 지루한 자기소개가 이어졌을 뿐.

특히 1학년은 학교에 적응할 시간을 따로 준다.

2학년 역시 마찬가지.

간단한 수업의 개요만 설명했을 뿐, 수업 자체는 일찍 끝났다.

그것이 미토스 아카데미 나름의 배려였다.

마누스는 거대한 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거대한 탑 중간에 있는 테라스에서 맞는 바람은 상쾌하고 부드러웠다.

3월.

봄바람이 솔솔 부는 계절이었다.

저 멀리 푸른 머리칼과 붉은 머리칼이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좋은 친구들이지.'

셋이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 정말 익숙한 장면들이었는데.

가운데 있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었고, 셋은 게임 시나리오 끝까지 함께하게 된다.

마누스라는 변수가 빠져도 스토리는 진행되는 것인지, 아주 잘만 뭉쳐 다녔다.

흐뭇한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던 마누스가 이내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매를 좁혔다.

일련의 무리가 정확히 세 사람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으니.

-운명이 실현된다는 말.

아주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직 주인공을 가로막는 이들이 나설 때는 아니었다.

"...흠. 이렇게 흘러가는 것도 나쁘진 않으려나."

마누스가 몸을 돌려 걸음을 빨리했다.

지금의 자신은 아무도 '가짜'인 것을 모를 테니, 아주 조금 긍정적인 인연을 틀 수 있을 테지.

그 정도가 좋았다.

어쩌면, 이것도 [간섭]의 일종일지도-.

"야! 네가 이번에 온 평민이냐?"

"평민인데 왜 귀족들이랑 놀고 있어? 걔네들이 얼마나 널 괴롭힐까?"

"나중에 노리개로 이용당할걸? 귀족 중에 더러운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키득키득 웃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나선, 무례한 말을 내뱉었다.

마누스가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사이, 케일 일행 앞을 가로막은 이들.

덩치가 컸으며, 한쪽 허리엔 장검을 매고 있는 이들이었다.

독수리가 그려진 망토는 그들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알려 주는 증거가 되었다.

"너희들 뭐니? 응?"

"뭐야, 아나이스냐? 귀족은 빠져. 이건 우리 평민끼리의 일이니까."

"뭐라는 걸까?"

화륵-.

그녀의 손끝에서 작은 화염이 피어났다.

플로이스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마나의 성질.

그것은 찬란하게 피어나, 잔혹하게 적을 태우는 성스러운 불꽃이었다.

그 어떤 철도 태양의 열을 막아 낼 수 없나니, 플로이스 가문이 '태양의 가문'이라고 불리는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리들은 아직 반딧불에 불과한 아나이스의 불꽃에 겁먹지 않았다.

아직 그녀의 태양은 강철을 녹일 정도로 찬란하지 않았으니까.

"그따위 마법으로 우릴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우리가 여기 있는 이상, 가문도 소용없는 거 알지?"

"우리는 그 계집에게만 볼일이 있을 뿐이니까, 너희하고는 상관없잖아?"

힘없는 평민들은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카데미 안에선 가문의 영향력이 희미하게 미치는 것을 안 평민들.

그들은 한데 뭉쳐 파벌을 만들었다.

뛰어난 평민을 포섭하거나 만만한 귀족을 괴롭히면서.

평민은 절대 귀족을 건들 수 없다?

이건 이 게임 세계관에서 통용되지 않는 말이었다.

귀족의 힘은 가문이, 능력이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법.

아카데미에 다니는 햇병아리들은 귀족의 힘을 드러내기엔 다소 부족했다.

-단 몇 명을 제외하곤.

"평민끼리 뭉쳐 힘없는 사람들이나 괴롭히고, 평민이라 눈에 뵈는 게 없는 건가?"

"웃기는 소리. 너희 귀족들이 하도 우릴 괴롭히고 핍박하니까 그런 거지."

"우리도 나름대로 살길을 찾은 거야. 그쪽 여자애, 평민이라며?"

"...."

케일은 아무런 말 없이 다소 어색한 상황을 바라봤다.

그녀가 들었던 귀족은 오만하고, 포악하고, 평민을 핍박하는 이들이었다.

거의 악마가 인간의 모습으로 환생하면 이러지 않을까- 하는 인물들.

평민이 생각하는 귀족이었다.

'이상하네.'

헌데 이자들은 대체 뭐지?

자신을 괴롭히려고 하는 자들은 오히려 평민이었고, 지키려 하는 자들은 귀족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괴리감이 느껴져, 이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 귀족과 평민의 설전은 계속되었다.

아나이스, 피어슨은 당당하게 케일을 보호했다.

"전학생은 못 넘겨준다. 얘는 우리 친구가 됐거든."

"하-."

"웃기는군. 귀족이 평민을 친구로 들여?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퐈륵-!

아나이스의 감정에 반응한 불꽃이 세차게 튀었다.

점점 더 거세지는 그녀의 불꽃을 잠재운 건, 피어슨이었다.

아카데미 내에서, '다 보는 앞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건 명백한 교칙 위반이었다.

아나이스의 불꽃은 다분히 위협적이었다.

"일단 진정하고, 그 불꽃은 넣어 둬."

"휴-. 너흰 아카데미 밖에서 만나면 보자~ 응?"

그녀도 교칙을 의식한 건지, 타오르던 불꽃을 거둬들였다.

더욱 기고만장해진 학생들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저들도 함부로 학생의 신분을 구금하진 못한다.

하지만, 같은 평민이라는 동질감을 이끌어 내겠지.

아나이스는 저들의 행태를 알고 있었다.

자신들을 저항군이라는 뜻의 '레벨리-밀리토'라고 부르는 자들.

이제는 또 하나의 기득권층으로 변해 버린 세력일 뿐.

저들과 악질 귀족은 다를 바 없었다.

아나이스, 피어슨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었다.

그래, 같은 평민이라면 명분은 저쪽에 있는 것이-.

"-그쯤 해 두지."

중후한 음성이 울린 건, 케일의 부담감이 최고조로 치솟고 있을 때였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를 때.

구원자처럼 등장한 목소리는, 기이한 힘을 가졌다.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했고, 뒤이어 모두가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보기에 안 좋군."

"...."

말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퍼지는 위압감.

죽음의 신처럼 짙은 검은색 머리는 밝은 교정과 정확히 대비되는 색이었다.

마나가 일렁이는 것 같은 푸른 눈동자는 모든 것을 아래로 두는 하늘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평등해졌다.

카이사르라는 이름 아래, 모두가 똑같이 하등하게 보였으니까.

카이사르란 그런 존재였다.

검은 머리는 그 무엇도 섞이지 않은 순수 혈통을 의미했다.

"그, 그게-."

"야, 야, 가자."

"너! 나중에 우리 꼭 찾아와, 알겠어?"

그들은 그런 말을 남기고 독수리가 그려진 망토를 휘날리며 사라졌다.

꼬리를 말고 꽁무니를 빼는 꼴이란-.

진짜 귀족 앞에서, 그들은 여전히 평민일 뿐이었다.

케일은 멍하니 넓은 등을 바라봤다.

"-친구였던가."

"에?"

잔잔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폭군처럼 군림한다고 소문났던 그 카이사르였다.

지난 1년간, 얼마나 참혹한 짓을 저질렀던가.

"저들, 네 친구였는가?"

"-아뇨. 고맙습니다."

케일은 그렇게 답했다.

마누스는 작게 미소를 짓고 걸음을 옮겼다.

모두가 멍하니 아카데미의 폭군을 바라봤다.

'딱 이 정도가 적당하겠지.'

마누스는 절대 주변을 돌아보지 않겠노라 되뇌며 걸음을 옮겼다.

계속해서 걸음을 옮겨야 할 그의 두 발이 우뚝 멈춘 건, 갑작스럽게 눈앞에 뜬 메시지 때문이었다.

[간섭 확인]

[간섭으로 인해 스킬 : 각성의 습득 시간이 99999일 줄어듭니다.]

[각성이 완료되었습니다.]

[소요 시간 : ??년.]

[다음 스킬을 선택해 주세요.]

[슬롯은 한 개입니다.]

카이사르에 걸맞은 재능.

그가 반푼이였던 이유.

죽어서 개화하지 못한, 세계관 최강의 재능.

아무것도 안 했기에 주어진 진짜 능력이, 지금 마누스 앞에 펼쳐졌다.

[고유 마법 : 미티어 오펜시오 - 150년]

[고유 마법 : 베아투스 이그니스 - 254년]

[고유 마법 : 언령 - 999년]

....

....

....

'미친-.'

게임에 나와 있는 모든 스킬이 눈앞에 있었다.

모든 패시브, 모든 액티브, 모든 고유 특성, 심지어 더미 데이터에서나 발견했던 스킬들까지.

마누스는 잠시 서서 조용히 스킬들을 지켜봤다.

'진짜 재능이 방치형이었다니.'

가만히 있으면 반만 간다?

아니, 그는 가만히 있으면 최강이 될 거다.

제3화

- 이젠 홀로 서리라

* * *

마누스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이 능력은 대체 뭐지?

일단 주변에 있는 이들이 신경 쓰여,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대체 자신에게 뭐가 볼 게 남았는지,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카이사르라는 성이 이렇게까지 관심을 끌 일인가.'

관심받는 거에 익숙하지 않았던 삶.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여 리엑션을 보내 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잰걸음으로 기숙사에 도착한 마누스는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하루.

고작 하루였다.

그 차이가 이런 엄청난 가능성을 열 줄이야.

모든 스킬, 모든 능력, 모든 패시브.

그 외 모든 캐릭터의 히든 스탯까지.

'이게 얘의 능력이라고? 그냥 사기 수준이 아닌데?'

세계관 최종 보스가 쓰는 스킬은 배우는 데 1천 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말이 1천 년이지.

원작은 고작 몇 년 동안 일어나는 일.

천 년이나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이런 거창한 기술까진 필요 없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아카데미 수석 자리를 지키는 것.

남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고, 무난하게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것이다.

'간섭이 힌트일 수도. 원작 스토리에 충실하려면 어느 정도 강해져야 해.'

일단 카이사르 가문에서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사람 구실은 해야겠지.

학생이면 학생답게 성적 유지도 해야 할 테고-.

분명 어딘가에서 '성적 유지를 위해 자신 대신 움직이는' 자도 있을 거다.

-눈치 보면서 사는 건, 취업과 결혼의 압박만으로 충분했다.

반투명하게 떠 있는 목록을 천천히 살펴봤다.

이거, 너무 많잖아?

"검색 기능은?"

[키워드를 입력해 주십시오.]

"패시브."

[패시브 스킬 검색 결과, 총 1,302건입니다.]

"뭐가 이렇게 많은 거야, 이거.... 몬스터랑 보스, NPC 스킬도 있네. 다 배울 수 있는 거 맞지?"

답은 없었지만, 이미 알고 있을지도.

마누스는 천천히 목록을 살펴봤다.

[모든 속성 저항 : 50년]

[아드리안의 마음가짐 : 100년]

[플로이스의 마음가짐 : 30년]

[카이사르의 마음가짐 : 0시간]

[메시아의 마음가짐 : 450년]

....

....

"이래선 답도 없겠네. 잠깐, 이건 뭐야?"

검색 범위를 줄일 필요성이 있다고 느끼던 중 발견한 것.

[카이사르의 마음가짐 : 0시간]

'마음가짐'이라는 스킬은 뭘까.

마누스는 궁금증에 스킬을 눌러 보았다.

주르륵 나열되는 설명.

-반푼이라고 해도 카이사르의 핏줄이라는 것일까.

왜 스킬이 '0시간'이라고 나와 있는지,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흠-."

[카이사르의 마음가짐]

[대륙의 중심. 그 찬란한 빛이 내리쬐는 하늘 아래엔 짙은 안개와 흉포한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어둠을 숭상하는 집단을 벌하고 대륙 전역에 있던 안개를 거뒀던 사람들을 일컬어, 정복자들이라고 불렀으니.]

[정복자는 자신만의 터를 가지고 모든 악을 멸하기 위해 가문을 만들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세상에 드러내고, 세상의 수호자가 되길 원했다.]

[카이사르. 그 위대한 이름은 세상을 지키는 자들의 증표였다.]

스킬의 간단한 설명.

밑엔 마음가짐을 얻으면 나타나는 효과가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몬스터에 대한 추가 피해 +100%]

[모든 마법적 이론 이해 가능]

[몬스터에 대한 추가 방어력 +100%]

[마나 재생률 +100%]

[최대 마나 보유량 +100%]

[은신 / 정신 계열 스킬 무효화]

"원작 내에서... 카이사르라는 성은 스토리에 개입하지 않았지. 왜 그랬냐면...."

마누스는 커뮤니티에 떠돌던 내용을 떠올렸다.

카이사르 가문이 직접 개입하면 스토리가 너무 막장으로 흘러가거나 쉬워진다고.

초반 스토리는 볼륨이 작을 수밖에 없다.

헌데 저런 가문이 스토리에 개입한다면?

게임의 세계관은 넓었지만, 초반 아카데미 안쪽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다소 한정적이었으니.

'가문으로서는 신경 쓸 일도 아니었단 건가.'

공국을 운영하는 가문으로선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일이겠지.

일단 학교 수석이다.

그러니 성적을 유지하는 건 필수 요소겠지.

-카이사르의 이름은 무겁다. 마누스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무게를 절감했던 사람이었고.

"배우자."

밑져야 본전이다.

다 떠나서 능력 자체가 사기다.

이런 스킬을 안 배울 이유는 없지.

[카이사르의 마음가짐 : 0시간]

[습득하시겠습니까?]

"그래."

[카이사르의 마음가짐을 습득하셨습니다.]

[스킬 슬롯이 하나 남았습니다.]

[습득할 스킬을 선택해 주세요.]

단 몇 줄.

스킬이 생겼다는 메시지와 함께 몸이 변했다.

느껴지는 감각이, 보이는 시야가, 이해하는 모든 것들이 뒤바뀌었다.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인지가 뒤틀렸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핑글핑글 도는 어두운 시야에, 마누스는 가까스로 정신을 유지했다.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지식이 상당했다.

[마나를 다루는 법... 육체를, 마나를 다루려면, 마나란, 몸을 쉴 새 없이 움직여, 마법을 육체에 머무르게 하는, 영약의 종류는, 원소 마법의 기초는, 화염, 바람, 냉기, 전격, 어둠, 빛, 마나는 심장에 머무르게-.]

"죽겠네."

코가 찡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고, 정수리가 타는 듯이 아팠다.

침대에 풀썩 누운 그가 머릿속에 쑤셔 박힌 지식들을 상기했다.

-모든 마법적 이론의 이해라니.

성적 유지에 꽤 도움이 되겠지.

"...검색,"

[키워드를 입력해 주십시오.]

"카덴차."

[검색 결과 총 '1건'입니다.]

[카덴차 : 3일]

[카덴차]

[두 가지 이상 상반된 마법을 조합해, 새로운 마법을 창조한다. 각 마법은 서로 다른 두 속성이어야 하며, 등급이 다른 마법은 조합할 수 없다.]

[마나 소비량은 합성에 사용된 마법을 합친 것의 80%]

[한번 조합에 성공한 마법은 레시피에 등록된다.]

망설이지 않았다.

마누스는 이 세계에서 살아갈 방법을 알고 있다.

무엇이 가장 필요하고, 어떤 스킬의 조합이 가장 효율적인지 전부.

커뮤니티에 올라온 공략 글만 수천 개가 넘었고, 그들이 집단 지성으로 밝혀낸 팁만 수만 개에 달했다.

'-이 재능이라면, 주인공보다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Cadenza.

악곡이 끝나기 직전에 독주자가 즉흥적이고 자유롭게 연주하는 행위를 뜻하는 단어.

'자유롭다'라는 것에 착안해 만들어진 스킬이며, 주인공의 주력 패시브였다.

게임을 이루는 근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스킬.

"그리고 내가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스킬이기도 하고."

엄청난 숫자의 레시피가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이 정도라면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손색이 없겠지.

"카덴차, 배울게."

[스킬 습득을 시작합니다.]

[72:00:00]

"아직도 믿기지가 않네."

하루.

딱 하루 차이가 이토록 큰 나비효과를 불러올 줄이야.

원작에 있던 마누스가 정말 불쌍했다.

* * *

늦은 밤이었다.

기숙사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또 다음 날 학업에 지장이 없다면 자유로운 학생들.

그들에겐 해가 져 어둠이 드리워도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도깨비불처럼 떠도는 등불들이 학교를 밝혀 주었다.

인적이 드문 곳을 걷는 도중, 마누스는 멈춰서서 입을 열었다.

"...나오지."

"...."

깊게 마나가 일렁이는 곳이 보였다.

그는 일렁이는 곳을 정확히 바라보며 말했다.

강하고 어두운 마나가 느껴졌다.

마나를 감지하지 못했던 몸이라 이것조차 생소해서 속이 다 울렁거렸지만, 꾹 참았다.

어느새 그의 마음엔 제왕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으니, 이 정도 마나를 감내하는 것으론 티를 내지 않았다.

"이제 나 대신 무언가를 할 필욘 없다."

"...."

대답은 없었다.

일렁이는 마나는 한참 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마누스는 작게 한숨을 쉬고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겼음에도 마나는 그곳에 못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그는, 문득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스킬을 가진 것만으로 이렇게 변화할 줄이야.

『원소 마법의 이해』

스쳐 지나갔던 책의 내용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지식을 어떻게 휘둘러야 하는지도.

마법이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까지.

한 줌의 마나밖에 없지만, 그거라도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역시, 그곳으로 가야겠지.'

시험해 보기에 딱 적당한 장소가 있었다.

그의 걸음이 바빠졌다.

* * *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긴가?"

중후한 음성.

기품 있는 걸음걸이.

1급 암살자를 단숨에 알아보는 눈썰미.

아니, 그게 눈썰미만으로 되는 일이었던가?

'그는, 분명 귀족이었다.'

가문에 있으면서 얼마나 무시를 받았던가.

기본적인 예절 교육을 모두 이수했지만, 평가는 박했다.

몸동작은 어색했고 말투는 경박스러웠다.

행동은 굼떴고 느렸다.

귀족적인 여유?

아니, 게으른 자의 굼뜬 행동일 뿐이었지.

그런 자였다.

마누스라는 사람은, 절대 카이사르의 혈통 같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보고해야 하는가."

변신술에 능했고, 마법적 지식이 뛰어난 자.

교수의 이목을 속일 수 있고, 대상의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를 흉내 낼 수 있는 자.

카이사르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움브라'중 하나였다.

지난 1년간, 그는 마누스를 대신해 움직였다.

그가 지닌 변신술은 그런 것이었으니.

능히 홀로 기사단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자는 방금, 진짜 귀족을 보았다.

하마터면 무릎을 꿇고 대답할 뻔했다.

그 기개에 눌려 정말 카이사르처럼 대할 뻔했다.

카이사르의 주인이 언제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못난 내 아들을 위해 헌신한다면, 그대를 위해 작은 상을 주겠다.>

'평소 누구에게 무언가를 내거실 분이 아니었다. 그 뜻은 무엇이었을까.'

도련님의 속내를 짐작하셨던 것일까, 아니면 그만큼 힘든 일이라는 걸 알고 계셨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보고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변화가 생겼다.

이 작은 바람이 어디까지 커질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머, 이곳에 외부인이 계셨군요."

"...."

그리고 또 한 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오늘은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 날이었다.

나름 은신에 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 지금은 조금 당황했기 때문일까.

고개를 돌려 보니, 웬 메이드가 소복소복 걸어오는 중이었다.

"이곳은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랍니다. 면회는 절차를 거쳐서 해 주십시오."

"...."

"이상한 손님이로군요."

그는 몸을 날려 담장을 넘었다.

그래, 오늘은 충격적인 일이 있어서 그런 거야-.

합리화했지만, 그래도 움브라의 자존심에 금이 간 것은 마찬가지였다.

카이사르의 그림자는 그 어떤 것보다 은밀해야 했고, 그 어떤 것보다 침착함을 유지해야 했다.

오늘은 그림자로서 실패한 날이었다.

'적진이었다면 죽었겠지.'

아니면 꼬투리를 잡혔거나.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도련님은 분명 조금 미숙하신 분이지만, 카이사르의 직계 혈통이었으니까.

한편, 그림자를 보낸 마누스는 거대한 탑을 바라봤다.

곧 자정이었다.

'미리 올라가서 얻어 둘 것이 있거든.'

게임의 근간이 되는 곳이 오늘부터 열린다.

그 이유는 바로....

"마누스?"

그의 상념을 끊는 소리에 옆을 바라봤다.

은발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고양이처럼 치켜 올라간 눈꼬리는 도도함을 더해 주었고, 단정한 옷차림은 그녀가 얼마나 기품 있는 태도로 사는지 증명했다.

"알라노."

"의외로군. 이 시간에 널 볼 수 있을 줄이야."

"들를 곳이 있어서."

"이 시간에?"

학생회장 완장이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마누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리슨 알라노.

해리슨 가문의 장녀이자, 게임 속 동료 중에서도 가장 성능이 좋다고 소문난 빙결 마법사.

그녀는 물끄러미, 가느다란 눈초리로 마누스를 바라봤다.

친구도 없이, 홀로 1년을 지낸 아카데미의 폭군.

왜일까.

미움보단 측은한 마음이 드는 건.

1년 동안 그를 지켜봐 왔다.

몇 번이고 먼저 다가갔지만, 그는 그녀를 멀리할 뿐이었다.

이렇게 대화하는 것도 까마득할 정도로.

'어렸을 때 너는, 이렇지 않았는데.'

해리슨과 카이사르는 꽤 예전부터 교류를 이어 왔다.

그와 그녀는 키가 무척 작았을 때, 서로를 본 적이 있었다.

어렸을 때 기억하던 것과 달라서 매우 놀랐던 그때가 떠올랐다.

자기중심적이고 항상 사냥감을 찾아다니던 마물 같은 사내.

허나, 지금은 어떤가.

"위험한 곳이니까 돌아가. 아직 너희가 올 곳은 아니다."

"-그게 무슨...."

아카데미 내엔 위험한 곳이 없잖아.

"돌아가. 넌 아직 여기 올 시기가 되지 않았어."

"...여전하구나, 넌."

여전히, 나를 밀어내는구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옆을 돌아보지 않았다.

"나 말고, 더 좋은 사람들이랑 가라."

마누스는 알라노를 두고 앞으로 걸어갔다.

등이 밝히고 있는 곳 너머, 어디론가 향한 마누스.

그를 바라보는 알라노의 시선엔, 여전히 애매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 옛날, 서로 웃으며 대화하던 때였는지도 모르겠다.

#4

"여긴가-."

거대한 탑.

쌍둥이 탑 중, 왼쪽에 위치한 곳.

학교 본관이 있는 곳이었지만, 특정한 곳에 발을 들이면 '이면 세계'가 기다린다.

그가 살아가는 빛의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또 다른 세계가 보였다.

밖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위협이 있는 곳.

게임의 본격적인 스테이지이자, 3년 동안 주인공이 수련하고, 강해지는 곳.

모든 일의 원흉이자 세계를 멸망으로 빠뜨릴 위협이 있는 곳.

"지구라트."

거짓된 신이 쌓아 올린 오만의 탑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4화

- 저 높은 오만의 탑

* * *

미토스 아카데미의 탑은 신이 빚어낸 자연을 밀어내겠다는 오만함의 상징이었다.

마법, 검, 그리고 방패를 든 인간들이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다는 오만함.

그 행태에 분노한 죽음의 신이 저주를 내밀어 만든 지구라트는 높고 험준했다.

이곳에서 '데몬'들이 나오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게임이 진행된다.

이 세계에서 두 개의 달은 죽음의 신이 뜬 눈을 상징한다고 한다.

마치 늑대인간 설화처럼, 룩스 대륙의 달도 기이한 힘을 가진 채였다.

'확실히, 공기가 달라.'

마누스는 완전히 다른 세상 속에서 탑을 올려다 보았다.

세계의 이면.

마치 그림자의 세계처럼,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오물통.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 모여 단단한 기반을 만들었고, 그곳에 죽음이 내려앉았다.

"음...."

입구로 들어서자,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거대한 로비가 그를 반겼다.

중앙에 떡하니 자리잡은 황금빛 시계.

숫자가 여섯 개밖에 없는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게임의 초창기, 이면 세계를 탐색할 수 있는 시간은 단 여섯 시간.

'벌써 시간이 돌아가기 시작했나.'

창밖을 바라보니, 흘러가던 구름도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도 모두 멈춰 있었다.

오직 짙은 마나와 죽음의 기운만이 도사리고 있는 공간.

마누스는 이 괴기하고 공포스러운 공간에서도 거침없이 발을 옮겼다.

보통 사람이라면 공포에 질려 아무것도 못할 분위기 속에서도 그는 이상하리만치 침착했다.

역시, '카이사르의 마음가짐' 덕분이겠지.

'5층까지의 길은 완벽하게 외워놨으니-.'

5층.

완벽한 튜토리얼 구간이며, 미니 보스가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더불어 이후 재앙을 막아낼 히든피스 하나를 얻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가 볼까."

중앙에 있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죽음의 신은 삭막한 세계에 나름대로의 생명을 내렸다.

각 구역에 자신의 분신을 배치하고 무수히 많이 쌓인 부정적 에너지로 주민들을 쌓아 올린 것.

첫 번째 구역은-.

"-악몽의 미궁."

그 주민들의 이름은 데몬.

빛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증오하는, 이 게임의 주적이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데몬은 플레이어의 뒤를 노렸고, 구불구불한 미로는 저주를 불러일으켰다.

고전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타임 어택 시스템도 아주 잘 갖춘, 아주 쫄깃한 게임.

미로는 완전히 랜덤이었지만, 처음 5층까지는 고정된 루트가 존재했다.

물론 마누스는 그 모든 길을 외우고 있었고.

'실제로 보니 더 으스스하네.'

공포 장르가 포함되어있는 만큼, 악몽의 미궁 내부는 어두컴컴했다.

저벅-.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데몬들이 낄낄거리며 웃는 모습이 상상됐다.

마누스는 침착하게 마나를 점검하고,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을 확인했다.

마법은 클래스별로 구분되는데, 딱 1클래스 마법만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사대 속성인 화염, 바람, 전격, 얼음.

흑마법과 신성 마법으로 명명된 어둠, 빛.

단순히 마나를 이용해 물리적 충격을 주는 물리계 마법.

그리고 히든피스로 배울 수 있는 고대 마법.

마누스의 머릿속에, 이전 몸뚱이의 주인이 쌓아왔던 지식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 지식들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 역시 확인했다.

[음?]

[음음?]

"여기다."

탑의 주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각 구역은 타로를, 데몬은 트럼프를 형상화해 제작되었다.

각 구역에 있는 데몬은 구역에 깃든 아르카나에 영향을 받는다.

[악몽의 미궁]은 마법사, 전차, 절제, 법황의 구역.

직관적이로 개성 있는 몬스터라며 호평을 받았었지.

[음!]

[음음음!]

<마법사 - 10>

[특기 : 네 개의 팔을 이용한 근접전]

[속성 : 불]

[약점 : 냉기]

게임에서는 턴제로 진행되지만, 이곳에선 실시간으로 전투가 벌어진다.

마누스는 그 괴리감을 채우기 위해 긴장감을 더했다.

멍하니 패드만 누르면 되는 게임이 아니다.

이곳은, 진짜 몸을 움직여야 하는 현실이었다.

주문이 떠올랐다.

얼음 속성 1클래스 마법.

[글라치]

까드득-.

손안에서 하얀 꽃이 피어났다.

마력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이질적이어서, 속이 다 메스꺼웠다.

허나 멈추지 않는다.

그는 카이사르.

위대한 정복자의 핏줄이었다.

[음음-!]

[음!]

마법사 주제에 이상한 소리나 내뱉는 것이 소름 끼쳤다.

처음 겪는 전투는 제아무리 고인 물이라도 떨렸다.

들뜬 마음과 달리, 몸은 차분하게 움직였다.

시리게 핀 꽃은 적의 가면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바람에 흩날리듯, 그가 내민 꽃도 그렇게 졌다.

쩌억-.

데몬의 얼굴이 갈라졌다.

"이건... 이거대로 좋군."

가장 기본적인 마법에 제일 약한 데몬이라지만, 주인공도 두 턴 정도를 소비해야 죽는 녀석이었다.

소량의 마나를 소비해서 만든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운 상태였다.

이 정도라면, 주인공 레벨 10 정도에서 시작하는 거나 다름없으려나?

그만큼 패시브가 사기적인 스킬이라는 거지.

데몬 안에 있던 마나가 결정이 되어 흩뿌려졌다.

마석.

성장의 원동력이며 주인공의 레벨을 올리는 데 필요한 녀석.

한창 유행하던 소울류 게임의 시스템을 채용했다.

[마석 결정 S]

신기하게도 아이템 이름이 반투명한 상태로 떠 있었다.

이건 또 게임이랑 똑같네.

마누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게임과 현실.

어떤 걸 진짜로 받아들여야 할지-.

'현실이면 이런 거 다 없애 주든가.'

현실이지만 게임 같은 곳.

그래서 더욱 거침없이 행동하게 되는지도.

마누스는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어차피 이 미궁, 하루가 지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다.

주인공이 먹을 경험치 강탈이라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마누스는 계속해서 마법을 사용했다.

마나가 빠져나가는 감각, 마법이 손끝에서 피어나는 감각.

적을 죽이는 감각.

'이 세계에 익숙해지려면, 뭐든지 많이 경험해야지.'

카이사르의 마음가짐.

정복자의 그릇은 크고 거대했다.

그 큰 그릇을 채우려면 막대한 경험과 지식, 힘이 필요하겠지.

마누스는 거침없이 움직였다.

"벌써 1층이 끝인가."

주머니가 두둑했다.

시간은 이제 막 20여 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너무 사긴데?

압도적인 주파 속도를 상기하며,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원작 캐릭터와의 간섭만 아니라면, 느긋하게 스킬이나 익히며 살아도 좋았겠지.

이 세계가, 그리고 그 편지가 자신을 편하게 놔둘 것 같진 않았지만-.

언젠가 올 평화를 기다리며, 그는 계단을 올랐다.

* * *

알라노는 거대한 로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곳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순식간.

세계가 뒤바뀌고, 흘러가던 공기가 멈췄다.

홀린 듯 따라온 곳은 그녀가 아는 세상이 아니었다.

혼란스러움도 잠시, 알라노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왜 이런 곳이... 여긴 내가 알던 세계가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런 세계가 미토스 아카데미에 있는지, 위험 요소는 없는지 알아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다.

그녀는 2학년 학생회장이었다.

아카데미 내부에서 벌어진 이상현상이라면, 그 존재를 보고해야 하지 않을까?

'어째서 마누스는 이곳을 알고 있었던 걸까.'

"설마... 카이사르에서 알고?"

아니야, 그럴 리가.

마누스도 그녀와 같은 학생이었다.

암암리에 실력자를 파견했겠지, 아직 학생인 마누스를 이곳으로 파견할 리가-.

마나의 농도가 짙어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의 공간.

이런 위험한 곳에 직계를 홀로 던져 놓는 것은 전력을 깎아먹는 것과 같았다.

알라노는 마치 심연의 입구처럼 쩍 벌어져 있는 계단 위의 공간을 바라봤다.

지옥의 문이 열린다면 저런 느낌이겠지.

로비에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누스는 홀로 들어갔을까.

불안감과 궁금증이 확 몰려왔다.

'지원을 불러야 하나?'

홀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 홀로 이곳에 들어가는 건, 미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그녀는 주춤주춤 걸음을 옮기며 뒤를 계속 돌아봤다.

지난 1년.

마누스는 폭군이 되었다.

경외, 두려움, 존경심... 그런 감정들을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눈빛의 밑엔 짙은 슬픔이 깔려 있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의 기억과 재회한 마누스와의 차이가 너무 커, 섣불리 다가설 수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만 같아, 조금은 무서웠을지도.

마누스는 이상하리만치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려 했다.

그 모습들을 마누스 본인도 알고 있는 듯, 언제나 홀로 교정을 거닐었었다.

왜-?

지금에서야 생각하는 거지만, 그는 홀로 이런 곳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을 마다하고... 그런 사정이라면 일부러 혼자가 되려는 것도 이해가 가.'

알라노는 오래, 그리고 멀찌감치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학년 차석, 그리고 학생회장으로서 동기들은 소중한 존재였으니까.

또한 궁금했으니까.

어렸을 때와 다르게, 왜 이렇게 변해 버렸는지-.

이 공간에서 곰곰이 생각하니, 그의 행동이 어렴풋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런 이들이 있다.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지고 걸어가는 자.

고독하고 힘듦에도, 우직하게 자신의 짐을 짊어지려는 자.

혹시, 마누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역시, 도와주는 편이 낫겠지."

그런 이들의 곁엔 사람이 없다.

사랑과 관심을 마다하는 존재 옆에 남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결국, 인간은 보답을 받고 싶어 한다는 거다.

"소꿉친구잖아? 혼자 둘 순 없어."

그녀는 카이사르와 비견되는 가문의 장녀다.

마법의 재능은 누구보다 뛰어났고, 어떠한 마물이라도 해치울 수 있는 수업을 받았다.

꿀꺽-.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무저갱으로 발을 들이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마누스는 태연하게 이곳을 걸어갔겠지.

"해리슨 가문의 장녀잖아. 절대 이런 곳에서 겁먹을 필요 없어."

다짐하듯 뇌까린 그녀는 성큼성큼 지구라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심연이 그녀를 빨아들였다.

* * *

5층.

마누스는 마석들을 흡수하며 여기까지 도달했다.

본래 첫 보스를 마주하는 구간이지만, 오늘 목표는 보스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방향을 틀어, 본래 학교였던 공간을 찾아 들어갈 수 있었다.

일명 '휴식 공간'.

오만과 저주에 물들지 않은, 멀쩡한 학교의 공간이 남아 있었다.

완전한 랜덤이라 어디가 당첨될지 모르는 것이 운빨 요소라면 요소였다.

다용도실, 세탁실, 식당, 주방, 침실, 연구실, 교사실.

"흠... 이번엔 다용도실인가."

일곱 가지 방은 특색 있는 버프를 제공했다.

다용도실은 간이 상점.

세탁실은 갑옷과 무기의 내구도 수리.

식당은 체력 회복, 주방은 공격력, 방어력 버프, 침실은 마나 회복, 연구실은 아이템 합성, 교사실은 멤버 교체.

'딱 맞게 걸렸어.'

끼익-.

열린 문 안으로 보이는 것은 긴 탁자와 각종 아이템이었다.

마석을 집어넣으면, 잠김이 풀린다.

하지만, 오늘은 이걸 얻으러 온 것이 아니니 패스-.

"여긴가."

다용도실의 안쪽.

퀴퀴한 먼지가 쌓인 곳을 뒤적거리자 작은 쇠줄이 잡혔다.

가느다랗고 차가운 감촉.

훗날 누군가가 이걸 발견해, 아주 강력한 물건으로 각성시킨다.

"그걸 친절하게 설명해 준단 말이야. 게임이 제법 친절했지."

빌런이 멍청한 건지 친절한 건지 모르겠지만-.

모든 것을 떠벌리고 죽는 것은 국룰인가 보다.

오랜 기간 방치되어 있던 작은 펜던트.

누군가의 한이 서려 있는, 고대의 아이템.

[오르카의 목걸이]

[낡은 목걸이다. 알 수 없는 문양이 그려져 있다.]

설명은 심플.

알 수 없는 문양이라는 건, 타로의 21가지 그림 중 13개를 상징한다.

오르카의 목걸이의 비밀은, 그 13가지 타로에 있었다.

타로에 속해 있는 네임드 이상의 데몬을 죽이면, 그 영혼을 수확할 수 있는 펜던트.

'이거라면 가능성을 비틀 수 있겠지.'

마누스는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

이 행동으로 변수의 톱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할 거다.

그 톱니바퀴를 통해 달려갈 시곗바늘이 어디서 멈출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

허나 본래의 비극적인 사건을 막을 수 있다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은 얼마든지 감내할 생각이었다.

마누스 본인은 엑스트라.

주연이 활약하지 않는 곳에서 세계를 만들어 가는 자다.

그렇다면, 그 역할에 맞는 일을 해야겠지.

"잘하는 거겠지."

다용도실을 나서며 뇌까린다.

아무도 들어 주지 않았고, 답도 내려 주지 않았다.

물은 답을 찾는 자는 오롯이 자신이어야 할 터다.

마누스는 조용히 지구라트를 빠져나왔다.

몰랐다.

이미 자신으로 인해 나비들은 날아가고 있었음을.

단 하루.

24시간이 만들어 낸 거대한 태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

저 아래에서 소리가 들렸다.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

역시, 그녀는 말을 듣지 않고 그를 따라온 것이다.

마누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제5화

- 우리는 불청객일 뿐이다

* * *

알라노는 미로를 헤맸다.

괴상하게 생긴 괴물이 시시각각 그녀를 압박했다.

어둠.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어둠이 사방에서 조여왔다.

까드드득-.

3클래스.

나이에 비해 결코 낮지 않은 성취임에도, 온 몸이 바짝 얼었다.

후우-.

역시, 이런 압박감에는 마법을 펼치기 힘들구나.

실전과 이론은 전혀 다르다는 걸, 절절히 깨달았다.

'할 수 있어. 난 할 수 있어.'

싸우는 것이 싫다.

해리슨 가문은 그런 곳이었다.

멍청하고, 유순하고, 부드러운-.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나약한 심성을 타고난 이들은, 빼앗기는 것을 죽는 것보다 싫어했으니까.

무언가를 잃었을 때의 상실감은 가문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빼앗지 않고 지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힘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넘어설 힘이야말로 우리의 것을 빼앗기지 않고 지킬 힘이리라,>

카이사르가 정복자의 가문이라면, 해리슨은 수호의 가문이었다.

알라노 역시 가문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았다.

착하고 남을 배려하기 좋아하는 곳.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들은 카이사르보다 강해질 수 있는 가문이었다.

물론, 지키는 것엔 자기 자신의 목숨도 포함되어 있었고.

모든 것은 자신에게서 나온다.

자기부터 지킬 줄 알아야 남도 지킬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법이니까.

[음!]

"대체 길이 어디 있는 거람."

[글라치]

그녀가 피워 낸 꽃에는 가시가 잔뜩 돋아나 있었다.

아름답지만 치명적인 꽃은 무자비하게 악마의 심장을 후벼 팠다.

까드득-!

데몬의 전신이 얼어서 바스라졌다.

알라노는 숨을 삼키며 마나를 갈무리했다.

"대체 이곳은.... 이런 곳을 홀로 돌아다닌다니-."

[음!]

저 멀리서 데몬의 소리가 들렸다.

이쪽으로 오는 걸까?

알라노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눈앞에 보이는 길을 따라 걸었다.

이 어두컴컴한 미로에서 홀로 헤매고 있을 마누스는 어떤 심정으로 걷고 있을까.

어렸을 적 기억이 희미하게 피어나, 그녀의 가슴을 다급하게 만들었다.

카이사르.

정복자 가문에서, 마누스는 정말 약한 아이였다.

순했고, 얌전했다.

오히려 해리슨이라는 성이 더욱 어울리는 아이였지.

'기다려. 조금만.'

해리슨은 결코 인연을 먼저 끊지 않는다.

알라노는 벽을 따라 이동했다.

앞을 막는 장애물들을 모조리 얼려 버리며 소꿉친구를 찾았다.

[킥-?]

그렇게 얼마나 정처 없이 돌아다녔을까.

오소소 떨리는 한기가 올라왔다.

알라노는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뒤를 돌아봤다.

섬뜩한 소리가 차랍게 몰아쳤다.

[킥킥킥-!]

아무것도 없지만,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한 무언가가 돌아다니며, 이 탑을 순찰하고 있다는 걸.

-위험하다.

알라노는 본능적으로 걸음을 빨리 했다.

이곳에 얼마나 있었더라?

탑 내부를 돌아다니는 무언가가, 자신을 인지했다면?

만약, 그 끝에서 마주한 것이 압도적인 강함을 자랑하는 주민이라면?

'위험해.'

쿠웅-.

소리가 들렸다.

절그럭-.

마치, 침입자를 교수형에 처할 것 같은 쇠사슬 소리가 전신을 떨리게 만들었다.

도망갈 수 있을까?

[킥킥-!]

소리는 점점 커졌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조여 오는 죽음의 압박.

'...아니-'

죽지 않는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

해리슨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발휘되었다.

그녀는 공포를 떨치기 위해 잠재되어 있던 힘을 해방했다.

――――――――!!

콰아아아아-.

쩌렁쩌렁한 마나의 울림이 주변에 있던 데몬들의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것보다 더 큰 위험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으니.

알라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발걸음을 멈추는 순간, 자신의 목숨은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끊어지리라는 걸.

명석한 두뇌가 상황을 판단하고, 생존을 위한 길을 개척했다.

지나온 곳에서 왔으니,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글라치에 부스트]

마나를 끌어 올려 술식을 짜 올린다.

그녀의 다리가 얼음꽃이 되어, 앞으로 쭉쭉 나아간다.

글라치에 부스트.

얼음으로 사용자의 다리를 감싸 앞으로 나아가는 마법.

퀴퀴한 바람이 스치며 속도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하지만, 반작용으로 수많은 데몬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알라노는 이를 악물었다.

우글거리는 데몬이 옷자락을 잡기 위해 팔을 뻗어왔다.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감촉에, 등줄기가 서늘하게 변했다.

저들을 떨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도와주러 왔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나뒹구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런 민폐를 끼칠 순 없어."

그녀는 계속해서 달렸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술래잡기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

* * *

마누스는 망토를 휘날리며 뛰었다.

그러니까 오지 말라고 했는데-.

'소리가 들린 건 꽤 아래쪽이었어.'

1층, 혹은 2층일 거다.

1층은 구조가 복잡하지 않다.

미로의 규모도 작았고.

하지만 2층부턴 랜덤 요소만 빠졌을 뿐, 스테이지 전체를 관통하는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적용된다.

옛 게임, 보글보글에서 나오는 유령을 아는가.

주구장창 잠수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등장하는 강력한 보스를 아는가.

이 게임에도 그런 것이 적용되어 있었다.

빠르게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지 않으면 생기는 패널티.

약점도 없고, 게임의 후반이 아니면 죽이지도 못하는 히든 보스.

알라노는 이곳이 처음이었을 테니, 위로 올라오는 계단을 찾지 못했겠지.

'다행히 튜토리얼에서 나오는 녀석은 느리고 약하다.'

그런다 해도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절대 잡을 수 없는 놈이다.

이런 놈이 있으니, 빨리 미로를 통과해서 올라가라- 정도의 메시지일 뿐.

5층까지, 히든 보스는 일정 구간만을 돌아다니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었다.

즉, 그만큼 따돌리기도 쉽다는 뜻.

카이사르의 본능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감각이 넓어지고,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한 마음이 움직였다.

해리슨 알라노.

아직 꽃피지 못한 채 사신에게 빼앗길쏘냐.

알라노는 주인공의 동료 캐릭터 중에서도 당당히 1티어를 차지하고 있는 자.

특유의 엄청난 공격력과 디버프는 전 세계 모든 유저들이 뽑는 파티 멤버 1순위였다.

아직 원작이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다.

나비가 바람을 일으키게 놔둘 순 없다.

그것이 태풍이 되어, 무고한 이들의 생명을 앗아 가는 일은 더욱 없어야 할 것이다.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마누스!"

"-숙여라."

스케이팅을 타는 것처럼 질주하던 알라노.

카이사르의 마음가짐이 다시 한번 마누스를 부추겼다.

만약 게임이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이그니]

화르륵-!

뻗은 손에서 화염이 질주했다.

1클래스.

가장 기본적인 마법이지만, 카이사르의 1클래스는 다르다.

격이 다르다.

[으으음-!]

꾸역꾸역 쫓아오던 데몬들이 화염에 휩싸였다.

고작해야 이런 놈들이었다.

숫자만 많을 뿐, 길을 뚫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글라치]

얼음으로 만든 창이 어둠의 주민들을 꿰뚫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넓은 길이 생기며 어두컴컴한 탑 내부가 보였다.

"반대쪽으로 달려."

"에? 괘, 괜찮은- 꺄악!"

마누스가 거칠게 그녀의 어깨를 잡아, 방향을 선회시켰다.

그리고 그녀의 등을 떠민다.

"다른 층으로 가면 사라진다."

마누스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괴리감이 그를 괴롭혔다.

엄청난 패시브와 반대되는 나약한 육체.

수석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선 적어도 이 괴리감만큼은 없애야겠지.

식은땀이 흐르고 다리에 감각이 없어지려 했지만, 달렸다.

길은 모두 외우고 있다.

곧, 정신을 차린 데몬들이 두 사람을 쫓아오기 시작했다.

킥킥거리는 소리는 없어진지 오래.

녀석은 이미 다른 구역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기, 길은 알고 있는 거야?"

"물론."

마누스는 짧게 답했고, 거침없이 길을 짚었다.

모퉁이를 돌고, 직진하고-.

그렇게 두 사람은 정신없이 이전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인세에서 지옥으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 같았지만, 오히려 지옥이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니.

"계, 계속 쫓아오는데!?"

"로비까지 달려라."

1층에서 로비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슬아슬하게 로비로 통하는 계단으로 사라졌다.

우글거리는 데몬들이 계단 앞에서 우뚝 멈췄다.

그렇게 괴기스럽게 쫓아왔던 가면의 괴인은, 인생의 목적을 잃은 듯 우두커니 섰다.

[으으음-.]

아쉽다는 소리일까.

아니면 안도의 표현일까.

그들은 한 줄기 음성을 남기고 스르륵 사라졌다.

언제고 다시 올 불청객을 맞이하기 위해,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죽음의 신이 만들어 둔 탑에, 산 자는 필요 없다.

빛의 세상 속에서 사는 이들 중에 탑에 오를 수 있는 자들은 영혼이라는 통행료를 지불한 자들 뿐이었다.

* * *

"괜찮은가."

"...응, 어떻게든 살았어."

"-참. 너도 제멋대로군."

알라노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을 듣지 않고 탑에 올라온 것은 명백한 잘못이었으니.

송골송골 맺혀 있는 땀을 바라봤다.

이 남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둠 속을 홀로 질주했을 거다.

폭군이라 불렸던 남자는 사실 누구보다 외로웠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을 떨쳐 내고, 홀로 위험 속으로 뛰어들기 위해 1년 동안 준비했던 걸까.

"-너는."

"음?"

알라노가 똑바로 서서 물었다.

푸른 눈동자가 희미한 빛을 받아 반짝였다.

"너는 괜찮아? 나보다 더 먼저 들어갔을 텐데."

"보다시피."

마누스는 덤덤히 답했다.

그의 허리는 꼿꼿했고, 얼굴은 평온했다.

땀은 어느샌가 증발하여, 매끈한 얼굴을 그대로 드러냈다.

귀족.

그 모습을 본 자들이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저런 모습을 1년 동안 보여 왔을 걸 생각하니, 알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이곳에 홀로 오지 마라. 교사들에게도 알릴 필요 없고."

"교사들에게 알리지 말라니?"

"그들에게 말해도 모를 거다. 알려고 하지도 않을 테지. 내가 왜 홀로 여기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하지만-."

마누스는 말을 듣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할 말은 끝냈다.

더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몸이 버티질 못할 것 같았다.

'나도 어서 성장해야겠어.'

대답도 듣지 않고 휑하니 사라진 마누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긴장이 풀려, 다리가 후들거렸다.

실전이란 이렇게 무서운 거였구나.

'마누스.'

너는 대체-.

마누스가 나선 길을 그대로 따라 나섰다.

마치 거울을 통과하듯,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니 상쾌한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구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바람도 다시 불었고, 암녹색의 하늘도 없어졌다.

기이한 마나가 감도는 장소는 없었고, 불이 모두 꺼진 학교 로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어딘가 이 현상에 대해 알고 있을 사람은 있을 거야."

이 현상은 위험해.

알라노는 필사적으로 도망쳐야 했던 데몬들을 떠올렸다.

만약에 그런 이들이 밖으로 나와서 날뛰기라도 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인명 피해를 낳겠지.

미토스 아카데미 역시 그 명맥을 이어 갈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중대한 문제를 그냥 두고 볼 나라들이 아니었으니까.

알라노는 오늘의 기억을 잊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기숙사로 돌아갔다.

모두가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각.

누군가는 세계의 진실에 한 발자국 다가가는 시각이었다.

기숙사로 돌아온 마누스는 씻지도 않고 풀썩 주저앉았다.

아직도 손끝에 마법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 욱신거렸다.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세상에서, 오직 인간만이 모든 걸 해낼 수 있는 세상으로 떨어졌다.

'마법...이구나.'

그 짜릿했던 감각을 잊을 수 없다.

게임에서 패드를 누르고, 모니터로 화려한 이펙트를 보는 것과 전혀!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살아 있다는 게 이런 거구나.

[간섭을 확인했습니다.]

[운명이 변질됩니다.]

[알라노의 성장 속도에 영향을 미칩니다.]

[마누스의 성장 속도에 영향을 미칩니다.]

"조금 불안하긴 한데-."

오히려 좋지 않을까.

알라노는 소중한 경험을 얻었고, 케일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줄 거다.

나비가 일으킨 바람이 정 반대편으로 날아간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좋은 일일 테지.

제6화

- 도움은 미리 구하는 게 낫다

* * *

날이 밝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 달빛은 어땠더라?

케일은 밤새 시달린 악몽에 퀭-한 몰골이 되어 버렸다.

더 자고 싶다.

케일은 흐암- 하고 하품하며 샤워실로 향했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수업에 돌입하니, 준비 단단히 해야지.

그녀는 멍하니 물을 맞으며 부모님을 떠올렸다.

알고 있었다.

사실 케일 본인은 평민이 아니라는 거.

그리고 그분들의 안배로 이곳, 미토스 아카데미에 오게 되었다는 것도.

'....'

허나 케일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흘러가는 대로.

결국, 누군가가 정해 놓은 궁극적인 결과에 다다를 테니까.

똑똑-.

"-케일! 아직 안 나왔니?"

"나갈게-."

듣기만 해도 힘이 나는 목소리가 그녀를 상념에서 끄집어냈다.

아차, 얼른 준비해야지.

케일은 손을 휘저어 마법으로 물기를 털어 내고, 옷을 입었다.

수업 첫날부터 지각하면 더욱 눈에 띄게 되겠지.

그것만큼은 사양하고 싶었다.

자신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은걸.

달칵-.

문을 열자, 여전히 불꽃처럼 찬란한 미소를 짓는 아나이스가 마중 나와 있었다.

"가자!"

"-응."

"요 앞에 피어슨도 와 있을 거야."

"둘이 어렸을 때부터 친했어?"

"그렇지. 영지가 붙어 있고 북쪽에 오크 부락이 크게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협력하는 사이야."

케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크 부락이라.

호전적인 전사의 종족은 항상 인간에게 시비를 걸곤 했다.

뛰어난 육체 능력을 바탕으로 무리를 지어 다니며 행상인이나 소규모 용병 집단을 공격하는 도적들.

때로는 마을까지 공격하는 그 녀석들 때문에 케일이 살던 마을도 몇 번인가 위기를 맞이했다.

"요-! 좋은 아침!"

"이런 애랑 같이 엮이는 게 쪽팔리긴 하지만-."

기숙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피어슨이 밝게 인사했다.

전쟁터에서도 분위기를 띄울 놈이라고 중얼거리던 아나이스는 여지없는 반격을 들어야만 했다.

"야-! 내가 있으니까 네가 빛을 보는 거라고, 응? 우리 기억나냐? 열 살 때 같이 행상인 무리에 숨어들었다가 기사들한테 걸려서- 으악!"

"남의 흑역사 떠벌리지 말고 갈 길이나 가자? 으응-?"

풉-.

케일이 작게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 두 사람, 꽤 오랜 기간 친분을 쌓아 오면서 서로에게 익숙해진 걸지도.

아마 둘 중 한 명이라도 잘못됐다간 목숨을 걸고 지켜 줄 사이 같았다.

"야, 야-. 저기 봐라."

"응? 왜?"

"폭군 지나간다."

피어슨의 말에, 나머지 두 사람 모두 한쪽을 쳐다봤다.

-거기엔 다소 의아한 광경이 펼쳐지는 중이었다.

"저 선배, 2학년 전체 학생회장 아니야?"

"그러게. 둘이 친했나?"

어둠이 내려앉은 검은 머리.

오직 앞만 보고 당당하게 내딛는 걸음걸이.

꼿꼿이 펴진, 옷의 주름마저 패션으로 승화시키는 마누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누군가가 말했다.

두려움을 주는 대상은,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찍어 누를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저 모습을 보라.

그저 정면을 보고 걷는 것뿐인데도 절대자의 면모가 물씬 풍기지 않는가.

"멋있다-."

아나이스의 작은 감탄이 나왔고.

"그러게, 누구누구와는 다른걸.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피어슨의 푸념이 이어졌다.

케일 역시 아무런 말 없이 두 사람을 바라봤다.

사실 눈길이 가는 건 마누스 쪽이 아니었다.

새하얀 눈처럼 화사한 머리칼의 주인공.

학생회장- 알라노였다.

'멋있다.'

케일이 처음 그녀를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아카데미 대소사에 한 발 걸치고 있는 학생회장이었으니까.

이사회, 교수들과 직접적인 교류를 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니기도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세계에서 '연'이란 무척 중요하게 작용했다.

케일도 느꼈다.

좋은 인연이 있으면 눈길이라도 받는다는 걸.

친해질 수 있을까?

기회가 닿는다면 대화 정도는 나누고 싶었다.

어쩐지, 그녀에게선 익숙한 모습이 비쳤으니까.

* * *

"정말 말도 안 하고 넘어가겠다고? 그 큰 사건을?"

알라노는 답답한 듯,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어젯밤, 그 끔찍했던 일은 아직도 생생했다.

악몽을 꿀까 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는데-.

-정작 유일하게 도움이 될 만한 친구는 이렇게 무관심하다니!

이대로라면 아카데미는 큰 위험에 처하겠지.

그래서 재차 물었다.

"이런 현상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말이 안 되잖아, 안 그래?"

"-그만."

"홀로 모든 걸 하려고 하지 마. 나도 해리슨이야. 널 도와줄 수 있어."

알라노의 말에, 마누스는 푸른 눈동자로 알라노를 똑바로 바라봤다.

안 그래도 아카데미에서 가장 주목을 많이 받는 두 사람이 함께 다녀, 과할 정도로 시선이 쏠린 상태였다.

언성까지 커지니, 쓸데없는 관심도 높아진 상황.

불편했다.

그는 시선을 받는 것 자체가 언짢았다.

알라노는 그가 아니라, 저기 있는 케일 옆에 있어야 할 자다.

마누스는 안타깝지만, 지금은 그녀를 밀어내기로 했다.

"아직, 네가 나설 때가 아니다."

"...너-."

알라노의 두 눈에 마나가 일렁였다.

일방적으로 밀어내는 것에 대한 실망감이 눈빛에서 보였다.

누군가를 지키겠다는 마음이 방관하고 있는 마누스와 부딪쳤다.

이기적이다-.

카이사르는 항상 그러했지.

오롯하게 자신만 서야 한다는 그 오만함.

그것이 카이사르였다.

마누스, 너 역시 카이사르였구나.

해리슨의 의지가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고, 입술을 달싹인 순간-.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이야기도, 이야기를 해야 할 대상도 잘못되었다. 알라노."

"그게 무슨.... 설마, 정말 아무도 모른다고?"

마누스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알라노는 멀거니 그를 바라봤다.

대체 그는 어디까지 알고 있기에- 저렇게 위험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지?

궁금증이 일었다.

이번엔 다른 내용 때문이었다.

'이야기할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건, 들어 줄 사람이 있긴 있다는 거야.'

마누스.

그가 비수처럼 내뱉은 말은 결정적인 힌트였다.

그녀의 목적이 바뀌었다.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해선 안 되는 사항이었다.

왜 그걸 망각하고 있었을까.

우두커니 서서, 알라노는 마누스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하."

그녀가 할 일이라곤, 부끄러운 얼굴을 조금 숙이고 걸음을 빨리하는 것뿐이었다.

마나를 이용해 목소리가 새어 나가는 걸 방지했지만, 그래도 너무 위험한 이야기를 함부로 꺼냈다.

왜 이렇게 화끈거리는지, 오늘따라 그녀의 하얀 피부에 홍조가 보였다.

같은 시각, 마누스는 태연한 척 걸었지만,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알라노.

정의감 넘치는 소녀인 건 알았지만-.

'오늘이던가. 어차피 알라노도 알게 되겠지.'

오늘, 원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두 개의 보름달은 죽음의 신이 강림하는 날을 뜻한다.

죽음의 신 : 모르스의 기운이 가장 강해지는 때가 바로 이 날이기 때문.

밖에 서식하는 몬스터와 얌전했던 수인족의 흉포함이 폭발하는 날.

그래서 대륙 전체가 석 달에 한 번씩 숨을 죽인다.

이곳, 록스 대륙에서 보는 달은 거대했고, 또 괴기스러웠다.

'푸르게 떠, 붉게 변하게 되는 달이라니.'

그 괴기스러운 슈퍼문을 오늘 두 눈으로 보게 되겠지.

아카데미에 있는 지구라트.

그것에 이끌려 본격적으로 악의 세력이 준동할 것이다.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고자 하는 이들이 강림하겠지.

데몬.

그들을 넘어선 존재 : 데모니움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

첫 번째 마법사부터, 열세 번째 사신까지.

그 거대한 적들을 무찌르면서 주인공은 탑에 대한 비밀에 접근하게 된다는 스토리.

"음-. 간섭이라.... 발판을 만들어 주는 것 정도면 되겠지."

무엇보다 이사장의 도움을 받기 위해선, 미리 움직여 둘 필요가 있었다.

아카데미 내에서 유일하게 지구라트의 존재를 알고 있는 자.

앞으로 주인공이 제대로 활약하기 위해선, 그의 조력이 필요했으니.

학교에 소문이 떠도는 건 순식간이었고, 마누스와 알라노에 대한 이야기는 알게 모르게 퍼졌다.

둘이 약혼한 사이였다, 가문에서 서로 보낸 암살자다 등등.

"그게 정말일까?"

"우리가 무슨 상관이냐. 수업이나 잘 듣고 점수나 신경 쓰면 되지."

"왜~ 궁금하잖아. 폭군과 여왕의 그런 그림이라니! 안 그래, 케일?"

케일은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녀가 버릇처럼 말했다.

"...아무래도 좋아."

"정말, 태평한 건지 세상에 관심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마누스.

그 대단하신 가문 차남의 소문이 안 좋은 건 여기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제오늘 보인 그의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노선이었다.

그가 다른 이들과 교류하는 모습은 지난 1년간, 절대 볼 수 없었으니까.

애초에 격이 다르다고 평가받는 학생이었다.

학생회장 자리도 귀찮다며 마다한 그가 누군가와 교류를 나눈다니.

아나이스는 물끄러미 케일을 바라봤다.

"혹시, 케일 너한테 관심 있는 건 아니겠지?"

"에이-.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갔다. 꼴랑 말 두 마디 한 거 가지고? 야, 내가 이렇게 수십 마디를 해도 아무도 안 듣는데?"

"그거랑 이거랑은 좀... 격이 다르지 않니?"

"격?! 겨어어억?!"

발끈하는 피어슨의 머리를 억눌러 침묵시킨 아나이스가 지잉- 하고 울리는 회중시계를 바라봤다.

"수업 시작하겠다. 케일, 내일 능력 평가지? 어느 반으로 올지 궁금하다. 수업 잘 받고, 이따 보자!"

각자의 반으로 흩어진 이들.

케일은 오늘따라 울렁이는 속을 부여잡으며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능력 평가.

입학시험을 거쳐 반 배정을 받은 이들과 달리, 전학생, 혹은 아직 재능을 개화하지 못한 F반 학생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능력 평가를 받는다.

이는 다른 반도 예외가 아니었다.

A반으로 입학해도 일주일 만에 B반으로 곤두박질칠 수 있는 곳이 바로 미토스 아카데미였다.

그 평가에서 합당한 재능과 능력을 인정받으면 다른 반으로 월반하는 방식.

누구는 그곳이 지옥이라고 하지만, 누구는 기회의 땅이라고 한다.

실제로 F반이었다가 학년 수석으로 졸업한 자들도 종종 보이곤 했으니까.

케일은 눈을 감고 자신이 할 줄 아는 것들을 떠올렸다.

마법.

그녀의 전부이자, 얼굴도 모르는 부모가 남겨 준 유일한 재산.

'잘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사람처럼, 당당하게 걸음걸이를 유지했으면 좋겠다.

주눅 들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녀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자의 머리는 밤을 닮은 검은색이었다.

* * *

오늘 수업은 평이했다.

마누스는 교수가 하는 말 전체를 통째로 이해하는 것도 모자라, 그 뒷부분의 응용까지 모두 가능하다는 걸 확인했다.

이런 사기적인 가문에서 이런 반푼이가 태어났으니, 본가 입장에선 어떻게 할 수도 없었겠지.

그래서 그림자를 붙여 놓은 것이리라.

보고는 했으려나?

마누스는 걸음을 옮기며 쓸데없는 생각을 이어 갔다.

'저긴가.'

모든 수업이 끝나고 그가 도착한 곳은 이사장실이었다.

이사장이라-.

그래 이런 곳도 돈이 있어야 돌아가는 법이지.

똑똑-.

문을 두들기자 안쪽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부드러운 목재 냄새가 풍기는 방이었다.

고풍스러움.

앤티크한 멋이 무엇인지 잘 보여 주는 가구.

다크 브라운 색상에 은은하게 비추는 노란 톤의 불빛은 절로 편안한 마음까지 들게 했다.

흰색과 검은색, 그리고 갈색이 조합된 카펫이 그 고급스러움에 정점을 찍었고.

그 가운데 앉아 있는 사내는 이 분위기가 퍽 어울리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이사장 : 맥퍼슨 닉스.

부드러운 인상의 그가 마누스를 바라봤다.

마누스의 푸른 눈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입이 열리고, 이사장을 퍽 놀라게 할 만한 말들이 조립되어 쏟아졌다.

제7화

- 결속엔 집단이 필요하다

* * *

이사장은 이제 막 2학년이 된 마누스를 바라봤다.

뭐랄까, 분위기가 달라졌다.

1학년 때의 그는 한없이 오만하고 주변을 돌볼 줄 모르는 자였다.

차분하지 못했으며, 약한 이들에겐 가차 없었다.

사용인들에게도 손찌검했지만, 오직 카이사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유야무야 넘어갔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은 무언가... 한층 더 진중해진 느낌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주변을 짓누르는 이가 있다.

흔히들 제왕의 자질이라고 부르는 기운.

오랜만에 보게 된 마누스는 진정, 카이사르의 핏줄이 도드라졌다.

"분위기가 많이 차분해졌군요. 그래, 무슨 일이죠?"

"도움이 필요합니다."

다짜고짜 도움이라니-.

그 성격은 여전한 것 같았다.

"마누스 학생 같은 사람이 도움이라니, 의외인데요? 무슨 일일까요?"

"동아리 하나를 만들고 싶습니다."

"동아리? 그래... 조금 있으면 동아리 시즌이긴 하군요. 정식으로 제출하면 될 텐데, 저에게 굳이 왔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겠죠?"

이사장은 똑똑한 사람이었다.

무표정한 마누스의 시선을 의연하게 받아넘기며, 그는 후후 웃었다.

그 작은 미소가 항상 꺼림칙했지만, 그는 훌륭한 조력자였다.

"이사장님이 들으시면 바로 승인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제가요?"

"이상현상을 발견했습니다. 다른 세계가 있더군요. 그 출입구는-."

"-그만."

그의 뱀 같은 눈동자가 뜨였다.

아무런 전투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사장, 닉스.

그가 손을 올려 말을 끊은 것만으로 공기가 변했다.

이사장은 뱀 같은 눈빛으로 마누스를 바라봤다.

폭군에 뒤지지 않는 포스가 스멀스멀 공기를 장악했다.

숨이 턱 막힐 위압감이었으나 카이사르는 태연했다.

마누스는 의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사장님은 알고 계실 겁니다."

"-그래요."

닉스 이사장은 순순히 인정했다.

후우우-.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들고 있던 펜으로 톡, 빈 종이를 두들겼다.

잠시 뜸을 들인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또 아는 사람은 누가 있죠?"

"알라노가 엮였습니다."

이사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빈 종이에 찍힌 점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구라트.

예부터 존재해 온 저주받은 탑이자, 아카데미가 방치한 유일한 비밀.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이미 오래 전에 맥이 끊겼을 줄 알았는데.

이면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선택받은 자'라고 불렸다.

탑은 항상 제물을 필요로 한다.

'선택받은 자'뿐만 아니라, 평범한 이들까지도.

선택받은 자들은, 탑의 제물이 된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기도 했다지.

'하필 카이사르인가. 분위기가 바뀐 것도 이것 때문이었던가?'

이사장은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을 이었다.

마누스는 아무런 말 없이 기다렸다.

이윽고, 고민을 마친 이사장이 눈을 떴다.

그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어디까지 올라가셨습니까?"

"-5층입니다."

"홀로 5층이라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탑은 저주만 가득한 곳이 아니었다.

희미한 기억 속에 남겨져 있는 정보.

그곳이 외부의 던전과 똑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이들은 둘 중 하나의 운명을 마주하게 된다.

탑에 먹히거나, 탑을 잡아먹거나.

'하지만-.'

그 누구도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재능 있는 이들은 거만했고, 재능 없는 자들은 탑에 삼켜졌다.

이사장은 그 과정 중 일부를 직접 목격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탑에 들어가는 걸 허락할 순 없습니다."

"만약, 탐사할 수 있는 전력이 갖춰진다면 허락하시겠습니까?"

"둘이서는 어림도 없을 겁니다."

마누스는 옅게 웃었다.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이 거슬린 걸까.

아니면 그 이유를 궁금해하는 걸까.

이사장의 한쪽 눈썹이 위아래로 꿈틀거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마누스가 쐐기를 박았다.

"오늘은 두 개의 보름달이 뜨는 날이군요."

"맞습니다. 바깥출입이 엄금이지요."

"이사장님은 이곳에서 계속 근무하십니까?"

마누스의 말은 확신에 차 있었고 거침이 없었다.

-마치, 미래를 알고 있는 것처럼.

닉스 이사장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지켜보시고, 최종 승낙을 해 주십시오."

"...좋습니다. 그렇다면 동아리 설립 원서, 친필 서명만 해 두세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모인 이들은 집단을 형성한다.

-협회, -조합, -회, -동아리 등등.

결속을 위해 집담을 형성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

본래 알라노가 설립하게 되는 동아리지만, 도움은 미리 구하는 것이 낫겠지.

'고생을 덜어줄 수도 있으니까.'

알라노는 그런 캐릭터다.

사람을 지키기 위해선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해도 뛰어드는 아이.

온갖 멸시와 무시, 이해하지 못하는 시선을 받아도 뛰어드는 아이.

그 끈끈한 정 때문에 욕도 많이 먹었지.

하지만, 그녀는 동아리의 정신적 지주로서 엄청난 활약을 펼친다.

"동아리장은 마누스 학생, 본인입니까?"

"해리슨 알라노. 그녀가 동아리장이 될 겁니다."

마누스가 말했다.

아니, 여기서는 임명이라고 봐야 하나.

그녀가 모르는 곳에서 그녀를 위한 동아리가 창설되는 중이었다.

* * *

하아-.

알라노는 한숨을 쉬었다.

수업 내내 집중이 되질 않아 혼났다.

오늘 배운 게 뭐였더라-.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며 아침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정말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으-. 이래서야, 학생회장의 체면이....'

"알라노."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마누스.

오전 오후 내내 그녀를 괴롭게 했던 장본인.

그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라노의 기다란 눈썹이 휘었다.

쟤는 또 왜 여기에 있는 거람.

그렇게 엮이기 싫어했으면서-.

"잠깐 얘기 좀 하지."

"후우...그래."

그녀는 작은 한숨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착해 빠졌다니까.

마누스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여긴 보는 눈이 너무 많으니.

두 사람은 조금의 거리를 두고 천천히 걸어, 쌍둥이 탑 중에 왼쪽으로 넘어갔다.

각종 시설이 있는 왼쪽 탑.

알라노는 어제 그 일이 생각나, 걸음을 멈췄다.

"여기까지 변하진 않겠지?"

"맞아."

"그래서, 용건이 뭐야?"

주변을 둘러본 그녀가 물었다.

마누스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녀의 눈동자가 종이에 쓰여 있는 글자를 빠르게 훑었다.

"동아리 설립?"

"그래."

아니, 안 그래도 학생회장 일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갑자기 웬 동아리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녀가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이 남자는 도통 생각을 알 수 없다니까.

그녀가 거절하려 입술을 달싹였지만, 마누스의 말이 한 박자 더 빨랐다.

"이상 현상에 관한 건 이사장님이 알고 계신다."

"무, 뭐?"

"이사장님의 나이가 몇인지 알고 있나?"

이제 주름이 조금씩 진해지기 시작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그분의 나이가 어떻게 되었더라?

누군가에게 '미토스 아카데미의 이사장'을 말하면 하나같이 '닉스'라는 이름을 떠올린다는 걸 상기했다.

심지어 그녀의 아버지조차.

"꽤 오랜 기간 지켜봐 왔겠지."

"그분이라면, 도움을 주실 수 있을까?"

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신청 서류를 내밀었다.

"여기, 서명해라."

"...문화 교류 동아리?"

이름 한 번....

그래, 그래도 비밀스러운 이름 보단 튀지 않는 편이 좋겠지.

알라노는 찬찬히 서류를 살피다 한 곳에서 멈춰 섰다.

"그런데... 왜 장 이름에 내가 있는 거지?"

"네가 그 자리에 어울리니까. 활동은 없다. 그저 단원을 모으고 전력을 확충하면 된다."

"전력이라... 우리같이 그쪽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생길까?"

마누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만으로 가능할까?

알라노는 어젯밤, 그 끔찍했던 미로와 온몸에 공포라는 감정을 새겨 준 괴생명체들이 생각났다.

고작 학생인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까.

그녀의 펜 끝이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할 수 있다. 너희라면."

[간섭이 시작됩니다.]

[간섭을 확인하였습니다.]

[보상 : 마석의 흡수율 상승]

마누스의 음성을 듣자, 마법같이 떨림이 멈췄다.

왜 우리가 아니고 너희일까.

알라노는 그 뜻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았다.

마냥 이끌어 줄 수 없다는 뜻이겠지.

마누스 역시 도움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홀로 그곳을 드나들었으니, 아마도 조사가 목적이겠지.

그녀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왜 굳이 그 위험한 곳을 가려는 걸까.'

"탑을 내버려 두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

원론적인 이야기.

왜 탑을 공략해야 하고, 그곳에 주기적으로 드나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날카롭고 정석적인 내용에, 마누스는 간단하게 답했다.

"모두가 죽는다."

"...."

탑은 희생자를 찾는다.

마누스는 지구에 있을 때 판타지 소설을 많이 읽었다.

그곳에서 심심하면 나오는 소재가 바로 '던전 브레이크'였다.

탑도 마찬가지.

탑의 주민들은 계속 늘어날 테고, 탑이, 세계가 가둘 수 없다면 밖으로 새어 나온다는 것.

그 밖에 여러 이야기가 숨겨져 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당장은 둘 뿐이네."

"전력은 늘어날 거다. 네가 잘 이끌어 줘라."

"응? 내가?"

진짜 강해져야 하는 건, 주인공인 너희들이니까.

과도하게 마누스 본인이 어든다면, 이들은 절박함을 느끼지 못할 거다.

진정으로 죽음과 맞서고 삶에 대해 고민해야 성장한다.

그게 이 게임의 캐릭터들이었으니까.

한정된 인원.

한정된 자원.

한정된 마법으로 탑을 올라가야 하는 게임.

그래서 더욱 재밌었고, 각 캐릭터의 성장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저 성적만을 위해 달려가던 학생들이, 자신만의 가치관을 찾아가는 과정.

-마누스는 그 성장을 빼앗을 권리가 없었다.

"너희가 강해져야 한다. 나 홀로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을 테니."

"...알았어. 네 마음."

마누스는 정말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모든 걸 알고 있었으나, 굳이 모든 걸 알려 줄 필욘 없다.

그들을 거대한 절망감에 휩싸이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의 미소는 즐거움이 아닌, 안타까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알라노는 그의 지식에 한 발자국 다가가고 싶었다.

언젠가, 빚을 갚을 날이 오겠지.

'역시, 그간 너는 이 모든 걸 조사하고 있었구나.'

알라노는 덤덤하게 바라보는 친구의 눈빛을 보고, 많은 것을 유추했다.

더불어, 어젯밤 들었던 의구심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역시, 마누스는 일부러 그랬던 거겠지.

이 제멋대로인 친구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무엇보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들밖에 없다고 하니-.

"좋아, 하겠어."

해리슨 알라노.

그녀의 이름이 수려한 필체로 적혔다.

완성됐다.

이 게임의 주요 조직 중 하나인 문화 교류 동아리.

'그 문화 교류가 데몬과의 교류인 게 문제지만.'

출발은 나름 순조로웠다.

다음은 알라노와 주인공 일행과의 접점을 만들어 주는 것만 하면 되겠지.

마누스는 걸음을 옮기기 전, 점잖게 말했다.

"오늘 밤은 밖에 있는 게 좋을 거다."

"-오늘?"

그녀도 보름달이 뜨는 밤의 전설 정도는 알고 있다.

오늘 밤에 나가는 것이 교칙 위반인 것도.

자신의 이미지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난 학생회장인데?"

마누스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던지고 사라졌다.

이렇게 뜬금없이 사라지지만 않으면 참 좋을 텐데.

폭군의 이미지가 조금씩 희석되기 시작했다.

* * *

해가 지고, 두 개의 보름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키듯, 두 개의 동그란 달이 지평선을 넘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마누스는 그 모습을 창밖을 통해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