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OSDEMONIOANTIINTELECTU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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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 - 1-10

1화. 인간은 쓰레기다

먼 옛날. 아프리카 숲에서 꼬리 없는 유인원들이 살았다.

그 유인원들 중 가장 자원이 많고 풍부한 곳에 산 유인원들은 보노보라는 종으로 진화했다. 모든 갈등과 다툼을 폭력보다는 '사랑'으로 해결하는 무슨 판타지스럽지만 실존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자원이 적은 숲에 산 유인원들은 몇 안 되는 자원을 가지고 싸우면서 점차 폭력적으로 변했다. 전쟁, 살육, 고문과 약자에 대한 핍박을 즐기게 됐다. 이들이 침팬지다.

그리고 그 침팬지의 핍박을 견디다 못한 약한 유인원들은 고통스러운 숲에서 빠져나와 나무도 없는 초원으로 나왔다.

그놈들은 오래 걸어야 하다보니 열을 식히려고 자꾸 몸에서 털이 빠졌다.

두 발로 걷는 게 에너지 효율이 좋아서 두 발로 걷게 됐다.

그리고 손이 자유롭다보니 도구를 만들고 불을 붙이고 문명을 건설했다.

그게 인간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인간은 태생적으로 침팬지에게도 졌던 폐급 종족인 것이다.

태어나길 얻어맞고 살기 좋은 숲에서 쫓겨난 걸로 시작한 이 종족은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자에게는 음습해지고, 가진 것이 많으면 으스대며 남들을 깔아뭉개길 주저하지 않는다.

선악을 따질 것 없다. 그냥 생물학적으로 설계 자체가 이렇게 되어 먹었다는 얘기다.

인간은 쓰레기다. 철학적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그렇다.

고작 2만 년 만에 자기가 사는 생태계를 완전히 조져버리는 대멸종을 일으키고도, 반성할 줄 모르고 그냥 미래 세계가 알아서 책임지라고 아직도 실시간으로 지구를 조지고 있는 생물.

부모가 버리고 간 고아로 태어나서, 모진 핍박과 모멸을 겪으며 성장하면서 난 내가 겪는 고통의 원인을 나 자신이나, 세상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 돌리기로 했다.

나도 인간이지만, 아마도 보다 지성이 낮은 존재로 태어났으면 이런 고통과 고뇌에서는 해방되어 지극히 단순하고 동물적인 욕망만을 추구하며 살았을 것이다. 앞서 말한 보노보로 태어나는 것도 좋았겠지.

인간을 혐오하기 위해 인간을 분석하다가 인간의 광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코인을 적절히 이용해 수백억을 벌게 됐을 때 주위 모든 사람이, 심지어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 자기가 친부모니 돈 빌려달라고 했을 때 인간에 대한 혐오는 가히 극에 달했다.

맘 같아서는 다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문명이 만든 법이라는 한계가 있는 고로, 그저 별볼일없던 직장을 그만두고 시골에서 은둔했다.

어차피 이 시대에서 생존에 필요한 물자는 인터넷 배송으로 전부 구할 수 있었고, 내 취미라고 해봤자 게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는 게임은 [더 판타지 월드 크리에이터]. 흔하다고 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마법 있는 판타지 세계에서 생명체랑 문명 만들고 노는 게임. 다른 플레이어들하고 싸울 수도 있고, 그냥 자신의 완벽한 세계를 만들면서 놀 수도 있다.

수백억이나 있으면서 세일 안 해도 30만원. 세일하면 3만원에 살 수 있는 이런 게임이나 하냐고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뭐 어찌하면 좋은가.

지구에서 실제로 시행된 [바이오스피어 2]라는 프로젝트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미국 애리조나 사막에서 폐쇄된 환경에 내부의 자원만으로 순환하는 인공 생태계를 조성하려던 프로젝트였다.(참고로 이 프로젝트는 생물학 박사들이 콘크리트의 석회 성분이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흡수한다는 걸 몰라서 100년을 염두에 뒀던 게 2년 만에 망했다)

만약 내게 수백억 원이 아니라 수백억 달러가 있었다면 이런 걸 했을 것이다. 아니면 국립공원 넓이만큼의 땅을 어디 아프리카 같은 데서 사서 동물들을 관찰하고 다녔을지도 모르지. 혹은 나만을 위한 아쿠아리움을 짓든가.

하지만 없는 고로, 난 이런 게임으로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오늘도 하나의 생태계를 인간 없이 완벽한 평형 상태를 이루게 만든 날이었다. 총 게임 플레이 타임만 따지면 한 5만 시간이 넘겼을 때였나.

갑자기 컴퓨터 화면이 번쩍! 하더니 거기서 정체불명의 휘광을 품은 인간형 여성체가 나왔다.

그 은은한 휘광을 품은 생명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래요."

"네?"

"어, 착각했다면 죄송합니다만, 게임을 많이 했다고 게임 속 이세계 신으로 빙의시켜주는 거 아닌가요?"

"맞긴 한데, 전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아요."

"죄송합니다. 그냥 이런 일이 있을 때를 항상 대비하고 있었던 터라 마음이 좀 급했네요······. 아무튼 이세계 신의 자격을 정치가도 기업가도 생태학 박사도 아니고 굳이 게임 폐인에게 선사하는 이세계 신이시여. 제가 당신의 자리를 이어받아도 되겠습니까?"

"살짝 오해를 정정하자면 전 일단 신이 아니고 천사인데요. 아무튼 이 정도로 긍정적이고 침착한 플레이어는 오랜만이군요. 일단 설명을 하는 게 규정이니까 설명을 들어주세요."

난 잠자코 천사 나으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당신은 이제부터 이 지구와는 다른 이세계. [더 판타지 월드 크리에이터]의 신이 됩니다.

플레이어로서 누렸던 모든 권능과 기능, 인터페이스를 그대로 가져가게 되며, 심지어 더 자유도 높고 과감한 권능도 마음껏 부릴 수 있습니다.

게임 내에서 존재했던 모든 메커니즘은 전부 그대로 적용되나, 실제 현실이 된 것이기에 일부 달라지는 상호작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단일한 환경만 가진 작은 세계에서 시작하며, 다른 세계의 플레이어들과 싸워서 이김으로써, 그들의 세계와 문명을 흡수하고 점차 더 큰 세계를 구축하게 됩니다.

최종적으로 모든 경쟁자를 쓰러트리고 승리하여 거대한 세계를 완성시키면, 이제 그 세계의 신으로 영구히 군림할 수 있습니다.

도중에 패배하면 영혼이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이 제안을 승낙······."

"할래요."

천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플레이어는 진짜 처음 보네요. 죽으면 영혼이 소멸되는데 괜찮아요?"

"이기면 신이 되는 거고, 지면 세상에서 인간 하나 사라지는 거니까 상관없어요."

"경이롭군요. 좋습니다. 플레이어 닉네임 [비인] 이제부터 당신은 저희 세상의 신입니다."

천사의 손이 내 몸 안으로 들어오더니, 내 육체는 그대로 두고 영혼만 모니터 속 이세계로 끌고 갔다.

아직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던 내 영혼이 고개를 돌리자, 인간의 육체가 모니터에서 쓰러져 바닥에 뒹구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것을 뒤로하고, 이제부터 시작될 신의 삶을 기대하며 천사를 따라 나아갔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거대한 태양과 수많은 세계들로 가득한 우주 공간이었다.

우주 공간에 존재하는 세계들은 거대한 태양의 궤도를 따라 돌고 있었는데, 행성을 연상케 하는 각각의 크기는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동그란 형태가 아니라 넓적하거나 혹은 평야에 높은 산이 솟은 듯한 모습인 듯, 세계를 쪼개놓은 것 같은 형태였다.

그러한 행성, 아니 세계들이 태양 주위를 수억 개 이상 다른 궤도로 돌고 있었다.

"환영합니다. 이곳이 바로 당신이 싸워야 할 우주입니다."

게임의 인터페이스하고 똑같군.

"그렇습니다."

어라. 나 아무 말도 안 했, 아. 그렇군. 이제 육체가 없으니까······.

"예. 이제 당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속마음까지는 못 읽지만. 어쨌든 플레이어께서는 이 우주에서 하나의 세계를 맡아서 관리하게 됩니다. 세계가 서로 교차하며 만나는 순간, 두 세계의 충돌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충돌한 상대 세계와 자신의 세계 간의 종족과 문명끼리 서로 싸운 뒤 세계의 주도권을 잡아서 이기면 됩니다······. 게임 규칙과 똑같으니 간단하죠? 마지막에 살아남은 하나의 세계의 주인이 되면 승리합니다!"

흐음.

"지금 정확히 1,073,741,824개의 세계가 있습니다. 많아 보이지만, 매번 절반씩 탈락자가 나오니 30번의 경기가 벌어지고 나면 '끝'입니다."

플레이어도 그만큼이나 있는 건가. 10억 명을 어디서 데려온 거야?

"당신의 세계뿐만 아니라 전 차원에서 데려온 이들입니다."

그렇군······. 범차원적 국제전인가. 게임 만드느라 고생했겠는데.

"후후. 어느 세계든 조성된 환경이 다릅니다만 '밸런스'는 맞게 되어 있습니다. 받는 세계는 무작위인데. 괜찮으시죠?"

상관없어. 밸런스가 맞다면. 아니 이거 존댓말로 생각을 못하겠네.

"뭐 그런 지엽적인 문제를 걱정하십니까? 이제부터는 신이신데. 일개 천사에게 하는 말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계속 게임을 관전하며 궁금하신 부분에 대해 답변과 조언을 드릴테니 마음대로 하길 바랍니다.

그럼. 지금부터 당신이 관리할 세계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의식의 눈깜빡임. 그러한 것을 거치고 나자 나는 내가 받은 세계 전체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어느 하나를 집중해서 보는 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동시에 집중하며 보다니 말이다. 인간의 눈으로는 불가능한, 그야말로 신의 시선이었다.

세계 크기는 표면적은 약 10제곱킬로미터 정도. 다시 말해 가로세로 루트 10, 3.16킬로미터 되는 정도의 땅이다. 만약 세계 끝으로 가면 반대편으로 나오게 된다.

그런 세계의 표면은 얼핏 보기엔 가히 절망이나 다름없었다.

세계 전체가 모조리 암갈색 바위. 물이 없다. 풀도 없다. 나무도, 벌레도, 흙도.

그런 주제에 표면 온도는 끔찍하게 높았다. 하루의 절반은 50도 이상의 낮이고, 나머지 절반은 얼어 죽을 수도 있는 밤이다.

한마디로, 사막이었다.

「비인의 세계

생명 LV.0: 0

군사 LV.0: 0

산업 LV.0: 0

기술 LV.0: 0

문화 LV.0: 0

정치 LV.0: 0

신비 LV.0: 20

신앙 LV.0: 0

세계 총점 LV.0: 20」

그런 세계 점수는 20점. 생명이 하나도 없지만 기이하게도 〈신비〉점수가 있었다. 그럼 뭔가가 있긴 하단 소리다.

뒤져보니 사막 표면에 뭔가 유리거울 같은 것이 하나 있었다. 가까이 주목해보니 지름이 50미터, 역원뿔로 점점 좁아지는 깊이는 5미터는 정도 되는 작은 샘이었다.

확인하자 게임처럼 설명이 나왔다.

〈넥타르: 생명의 에너지를 담은 순수한 정수. 어떠한 생명체도 섭취할 수 있고, 어떠한 생명체에게도 최고 효율의 자원으로 기능한다.〉

"넥타르 샘 LV.0: 넥타르를 생산하는 지형입니다.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여 지속적으로 넥타르를 정제합니다."

샘 주변은 넥타르가 내뿜는 생명의 에너지 탓인지 온도도 습도도 적절했다. 어떤 생물이든 이곳에서는 성공적으로 자랄 수 있으리라.

"재밌는 세계로군요. 대부분은 생명이 살 수 없는 사막이면서, 저 샘 주변은 그 어떤 세계보다도 살기 풍족하니."

넥타르는 게임 내에서도 거의 따라올 수 있는 게 몇 없는 초고효율 자원이었다.

그런 최고급 자원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대신 그 어떤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그런 기형적인 세계가 내가 시작하는 세계였다.

"그러면 첫 생명체를 창조한 시점부터 게임이 시작됩니다. 이미 풍부한 경험을 가진 게이머시겠지만, 이런 세계에서 상식적인 전략은 넥타르 샘 주변에 생태계부터 먼저 구축한 다음, 거점한 곳에서부터 마력 중심의 문명을 세우는 것이겠지요. 넥타르 샘은 마력만 있으면 계속해서 크기를 키울 수 있으니."

보통은 그렇다. 나도 아무 생각 없이 플레이어=신의 능력인 〈창조〉로 식물부터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잠시, 나를 이 세계로 끌어들일 때 천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잠시만. 천사."

"호오. 직접적으로 질문하시는군요? 뭐든 물어보세요."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 되면서 자유도가 더 높아졌다는 식으로 설명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얼마나 높아진 거지? 원래 게임에서는 식물, 동물, 마물. 세 가지밖에 못 만들었는데 지금 나는 어떤 생물이건 창조할 수 있나? 요컨대 그 세 부류로 정의되지 않는 생물이라도 가능한가?"

천사는 짓궂은 표정을 짓더니, 한 번 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강력한 생명체를 만드시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세계의 물리법칙이 허용하는 한 어떤 생명체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군. 그럼 처음 창조할 생명체를 정하겠다. 처음 창조하는 생명체에는 〈특성〉이 하나 추가로 붙는 것도 여전하지?"

"물론."

천사가 마치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그 시선을 읽을 수 있다.

자유도 높아졌다고 새로운 전략 시도하다가 망하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거겠지. 게임 내에서는 당연히 효율적이고 상식적인 선택지만 주었을 테니까.

하지만 난 원래부터 이 게임이 모드를 수십 개는 깔아도 내가 원하는 생태계를 구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도가 낮다고 생각했다. 생명체를 만든다면 이런 생명체부터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집중하자 우주를 구성하는 물리법칙이 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나는 이 우주의 물리법칙에 내가 만들고자 하는 생물이 어긋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하나의 생명체를 창조한다.

"크기는 3~10마이크로미터. 〈빛〉과 〈열〉 〈광물〉 그리고 〈넥타르〉를 소비해서 생장하고 번식하며, 대신 〈물〉과 〈마력〉을 부산물로 만들어내는 생명체를 창조하겠다."

"응?"

천사의 당혹감과 함께, 〈신성〉이 응어리지며 넥타르 샘에서 내 최초의 생명체가 창조되었다.

2화. 생산자

생태계를 구성하는데 가장 먼저 만들어야 하는 생명체는 확실하다.

'생산자'다. 에너지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생물. 지구에서는 남세균이라고 하는 생물이 최초로 광합성을 시작하면서 '생산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번쩍!

최초의 생명체가 아마 이렇게 신성한 빛으로 창조된 건 아니겠지. 실제로 최초의 생명체는 의외로 '생산자'가 아니기도 했다.

아무튼 먹이 피라미드의 최하층, 생태계의 가장 근간이 되는 생명체를 만들었다. 말캉말캉한 작은 생물이다.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름을 뭘로 할까요?」

"넥타르젤리."

「[넥타르젤리]를 창조했습니다.」

「최초의 생명체에게는 어떤 특성이든 자유롭게 붙일 수 있습니다.」

"왕성한 신진대사."

『왕성한 신진대사: 생명체의 생명활동이 빨라집니다. 에너지 소모량은 상승합니다.』

왕성한 신진대사. 넥타르 샘이 있으니 에너지는 넘쳐나므로 이게 좋다.

"저기 지금 뭘 하시는 건가요······? 기왕 첫 창조 특전이 있는데 최초의 지성체나, 아니면 식물부터 만들어야 하지 않나요?"

아니, 식물을 만들 필요는 없다. '생산자'를 만들어야 한다.

요컨대 심해 밑바닥에는 열수구에서 나오는 열과 황 화합물을 통해 황합성을 해서 에너지를 생산하는 관벌레라는 생물체가 존재한다.

동물인데, 생산자이면서, 또 광합성이란 메커니즘을 이용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나도 굳이 물, 이산화탄소, 빛을 통해 포도당과 산소를 만드는 식물이라는 메커니즘을 이용할 것도 없다.

「보호 기간이 시작됐습니다. 보호 기간동안 플레이어는 다른 플레이어의 세계와 접촉하지 않습니다. 보호기간이 끝난 이후 다른 세계와 충돌하게 됩니다.」

보호 기간 내에 내 생태계를 완벽하게 만든다. 전략은 이미 다 있다. 성공하면 좋고, 실패하면 그냥 인간이 하나 사라질 뿐.

일단 한번 지켜봐라. 눈이 번쩍 뜨이게 해줄 테니까.

천사랑 대화하는 사이 이미 내가 만든 넥타르젤리는 넥타르 샘에서 벌써 엄청난 속도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는 게 더 신기할 것이다. 이 황량한 사막에는 〈빛〉 〈열〉 〈광물〉 〈넥타르〉가 너무나도 많으니까.

그것을 모조리 소비하면서 이 생태계에서 가장 부족한 〈물〉과, "넥타르 샘" 성장에 필요한 〈마력〉을 생산한다.

〈넥타르〉자체가 게임 내에서 가장 효율 좋은 자원이고, 이 사막의 일조량 하나만큼은 진짜 끝내주는 수준이기 때문에 넥타르젤리는 곧 샘을 가득 채웠다.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로 수가 늘어난 넥타르젤리는 계속해서 물과 마력을 토해내고, 그로 인해서 기껏해야 지름 50미터, 깊이 5미터였던 넥타르 샘은 점차 물에 희석되어서 넘쳐 흐르게 된다.

나는 플레이어가 능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이자 전능한 자원. 〈신성〉을 소모해서 이 번식 속도과 생장 속도를 가속시켰다. 게임과 인터페이스가 비슷해서 사용은 간단했다.

「"넥타르 샘"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이 과정이 반복되자 0레벨이었던 샘이 1레벨이 된다.

레벨이 오른 넥타르 샘은 지름 100미터, 깊이 7미터 정도의 오아시스가 됐다. 물론 전부 넥타르는 아니고, 대다수는 물이라서 희석된 상태지만 그걸 감안해도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 넥타르 자체가 대폭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 1레벨이 한계인 듯했다. 넥타르젤리는 넥타르를 먹고 물과 마력을 뱉는다. 그리고 내 생태계에는 아직 '물'을 소비하는 생명체가 없다.

번식에 〈빛〉과 〈열〉이 필요한 넥타르젤리들은 햇빛이 내리쬐는 호수표면에 다닥다닥 붙는다. 빛도 열도 흡수한 탓에 넥타르 오아시스의 표면은 넥타르젤리들로 다 차버려 전체가 젤리 호수 같다.

깊어진 수심, 희석된 넥타르, 그리고 훨씬 더 부족해진 광물질들로 인해서 번식이 둔화되고 결국 환경은 평형을 이룬다.

"좋은 빌드업입니다. 이런 척박하고 좁은 환경에서 생물의 힘만으로 넥타르 샘의 레벨을 올리다니. 확실히 눈이 번쩍 뜨일 전략이에요. 게임 시절을 생각하고 다짜고짜 식물부터 심었다면 이렇겐 안 됐겠죠."

이 천사도 이해했군. 맞다. 빌드업이다.

전략 시뮬레이션에서 다짜고짜 전투 유닛 뽑으면 어떡하나? 일단 자원을 채취하고, 멀티를 세워서 자원 수급량 부터 늘린 다음 더 큰 군대를 꾸릴 걸 생각해야지.

선내정. 후전투. 기본이다.

"그럼 이제 물도 늘어났겠다. 진짜로 식물을 창조하고 문명을 건설할 건가요?"

아니. 보호 기간은 아직 한참 남았으니 빌드업을 할 거면 한계까지 해야지.

넥타르젤리는 넥타르를 먹고, 물과 마력을 뱉는다.

수십억 년 있으면 알아서 훌륭한 생태계로 변모하겠지만, 내가 신인데 굳이 그럴 것까지 있을까.

나는 〈신성〉을 통해 그 진화를 인위적으로 가속시켜 새롭게 생물을 탄생시킨다.

「[넥타르젤리]가 [바위젤리]로 진화했습니다.」

바위젤리는 넥타르젤리보다 훨씬 큰 생물이다. 세균에 가까웠던 넥타르젤리와는 달리 이놈들은 〈물〉과 〈넥타르〉를 통해 대충 해파리 같은 육체를 만들었다.

바위젤리는 또 인간의 위액보다도 조금 못한 수준의 산성 용액을 분비해서 이 생태계에서 역시 넘치는 자원인 바위를 직접적으로 녹여 먹을 수 있다.

그렇게 광물질 성분을 빨려 먹힌 바위는 돌들로 쪼개진다.

주변 암반을 쪼개면서 넥타르 오아시스는 더 넓어지고, 바위젤리는 생장하면서 물을 엄청나게 소비하기 때문에 넥타르 오아시스의 물이 줄어든다. 

그러면 호수는 수심은 별 변화가 없는데 호반을 깎아나가며 넓어지게 되고, 결국 더 많은 넥타르젤리가 표면에서 증식한다. 그러면 물이 늘어난다.

그러면 다시 바위젤리의 수가 늘어나고, 바위젤리도 근간이 넥타르젤리라서 바위와 햇빛을 통해 마력을 생산하기 때문에, 그리고 사실 넥타르젤리보다도 많이 생산하기 때문에 넥타르 샘에는 충분한 마력이 끊임없이 공급된다.

이 작업은 다시 생태계가 평형 상태가 될 때까지 무한히 반복된다.

「"넥타르 샘"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넥타르 샘은 이 결과로 엄청나게 넓어져서 깊이는 10미터, 지름은 300미터에 가까운 거대한 오아시스가 되었다.

"굉장하네요! 넥타르 샘이 벌써 2레벨이 됐어요! 2레벨이면 무려 다른 세계와 2번은 충돌해서 이겨야 도달 가능한 수준이라고요!"

알아. 그리고 지금은 넥타르 샘의 성장보다 더 중요한 결과가 있었다.

「세계의 〈생명〉 점수가 100점을 넘어 레벨이 1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생명〉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내 생태계의 생명이 워낙 번성한 탓에 새로운 특성이 개방된 것이다. 이제 내 생명체들은 더욱 강력해진다.

다만 원하는 특성을 고를 수 있었던 초기의 특성과는 달리 이번에는 무작위다. 다만 내 생명체들에게 가장 적합할 것으로 보이는 특성들 중 하나를 골라 선택하는 구조다.

천사가 빛을 내는 마법으로 카드를 세 장 만들더니, 내 앞에 둥둥 띄워주었다.

"자. 여기 필요해 보이는 특성 세 가지에요. 아시겠지만 (선택)은 어떤 종 하나를 지정해야 하고, (신성 능력)은 게임이 끝날 때까지 영구적으로 적용돼요."

『(선택)진화속도 증대: 자연적인 돌연변이가 빈번해집니다.』

『(선택)에너지 효율 증대: 생명체가 적게 먹고도 비슷하게 활동하게 됩니다.』

『(신성 능력)인위적 진화: 직접적으로 〈진화〉시킬 때 〈신성〉 효율이 150%이 됩니다.』

"인위적 진화."

딱 좋은 특성이 있다. 새로 창조할 것 없이 이 젤리들만 만져대면서 빌드업을 더 해도 되겠다.

"좋습니다. 이제 진짜 한계인 것 같은데 이제 문명을 건설할 거죠? 식물은 필요없이 젤리들을 먹고 사는 생명체를 만들어도 되겠네요."

아니. 기왕 환경이 조성된 이상 끝까지 간다.

"예?"

바위젤리는 큰 바위를 쪼개는데 능하고 광물질을 섭취하지만, 마인크래프트도 광물질을 하나로 구분하지 않는다.

당연히 바위젤리가 섭취하지 못한 광물질, 바위의 찌꺼기들이 있다. 이것을 섭취할 수 있는 다른 생물들을 바위젤리에서부터 진화시킨다.

「[바위젤리]가 [자갈젤리]로 진화했습니다.」

「[자갈젤리]가 [흙젤리]로 진화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바위젤리도 검은바위젤리, 회색바위젤리 등 다양한 광물질을 섭취하는 것으로 분화한다.

내 빌어먹을 사막 생태계는 땅을 아무리 파헤쳐도 보석도 귀금속도 하다못해 일반 금속도 없는 바위덩어리였지만 돌 종류만큼은 다양했다. 바위는 자갈이, 자갈은 흙이 되어서 최종적으로 모래가 되어 나온다.

「"넥타르 샘"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이제 넥타르 샘은 레벨이 무려 3. 넥타르 호수는 거의 지름이 800m에 가까워졌고, 희석된 넥타르들은 쪼개진 암반으로 인해 흘러들어가 강을 형성하고 물렁물렁해진 대지에 스며들어 늪이 된다.

넥타르젤리가 물을 만들면 바위젤리가 성장하고 바위젤리가 바위를 먹고 남긴 자갈을 자갈젤리가 다가와서 자갈을 토막토막 해체해서 흙으로 만들고, 흙젤리가 그걸 먹고 마지막으로 모래를 뱉는다.

넥타르 샘과 바위밖에 없던 지형이었는데, 이제는 거대한 오아시스, 모래, 흙, 자갈, 그리고 아직 젤리들이 도달하지 못한 바위 암반이 있는 지형으로 바뀌었다. 저 바위 지형은 넥타르 오아시스가 더 커져야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감동적일 정도의 생태계가 완성되었다. 완벽해지려면 아직 몇 가지 과정이 더 필요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생명〉 점수가 210점을 넘어 레벨이 2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더더욱 감동적이게도 또 새 특성이다. 그야 다른 성장을 다 포기하고 생명 생산에만 전부 투자하고 있으니 특성이 쏟아지는 것도 당연하지.

게임 내 시스템에서는 균형잡힌 발전을 중요시하라지만 아예 하나에 몰아넣으면 이렇게 달라지는 거다.

천사는 이번에도 세 가지 특성을 추천해 주었다.

『(신성 능력)진화 능숙: 직접적으로 〈진화〉시킬 때 피조물의 신체가 보다 목적에 가깝게 변합니다.』

『(선택)에너지 효율 증대: 생명체가 적게 먹고도 비슷하게 활동하게 됩니다.』

『(선택)넥타르 의존: 넥타르에서 얻는 에너지가 2배가 됩니다. 넥타르밖에 섭취할 수 없게 됩니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진화 능숙"

진화는 앞으로도 꾸준히 해야 하며 작업할 텐데 이 정도는 해야지.

"저기. 이제 진짜 문명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젤리와 넥타르가 흐르는 멋진 땅이 됐는데 이것들을 먹고 사는 문명이면 정말로 엄청나게 강력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을걸요?"

앵무새처럼 계속 문명. 문명. 하는데. 미안하지만 난 문명을 건설할 생각이 없다.

"네?"

문명은 쓰레기다. 아니, 구체적으로 말하면 생물학적으로 지능을 높이는 생존 전략 자체가 쓰레기다.

멍청한 공룡들은 수억 년동안 번성을 이어가다가 운석 억까에 전부 뒤졌지만, 가장 머리 좋다는 호모 사피엔스는 문명을 건설하고 1만 년 만에 자기네들이 사는 별을 조져버렸다.

진정 영원히 군림하는 신이 되려면 지성체 따위는 키우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저, 실례지만 이 게임이 자기 세계에 문명을 건설해서 이종족들끼리 서로 싸우는 게임인 건 아시죠? 플레이어셨으니까."

아니, 이 게임은 판타지 생태계를 구축하는 게임이었다. 적어도 나한텐 그랬다.

나도 게임을 하면서 문명건설 플레이를 완전히 배제했던 건 아니지만, 이제는 다른 플레이 방식이 더 익숙하다.

그러니까 석기시대부터 시작하는 판타지는 다른 놈들이나 해라. 나는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을 거다.

그 어떤 문명과 종족이라도, 아무리 지능이 높은 지성체라도 도저히 살아남는 게 불가능한 궁극의 야생. 판타지 세계이기에 가능한 문명을 능가하는 완벽한 생태계 말이다.

"무슨 괴물들을 부리는 마왕이라도 되시려는 거예요?"

오. 그거 좋은 말이군.

다른 플레이어들이 신이라면, 난 마왕이다. 내가 만든 생명체들은 저들의 문명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3화. 소비자

보호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곧 다른 세계랑 충돌할 텐데'하며 안절부절못하는 천사와는 달리 난 평온했다. 내가 만들어낸 생명체들이 절대 다른 세계의 생명체들에게 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어쨌든 넥타르 샘-넥타르젤리-바위젤리-자갈젤리-흙젤리로 이어지는 내 생태계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문명이 없단 거요?"

아니. 뭐냐면 이 생태계는 최종적으로 흙젤리가 모래를 뱉는 걸로 끝나는데, 바위의 수는 한계가 있으니 머지않아 모래로 가득 차버린다는 거다.

사막 세계가 넥타르 바다와 젤리들이 뽈뽈대는 한여름의 백사장 같은 곳이 될 수도 있는데, 그 때는 이미 내 젤리들은 다 굶어 죽어 있을 거다. 세계를 끝까지 다 파먹는다면 가운데에 모래와 넥타르 바다로만 가득한 생태계가 될 수도 있겠지.

"그 전에 게임에서 탈락하실걸요."

탈락 안 해. 그리고 이기면 상대 세계를 흡수해서 세계 크기가 커지잖아.

하지만 상대 세계가 내 세계처럼 바위로 가득한 생태계는 아니겠지. 그러니까 난 미래를 대비해서 내 생태계를 더 완벽히 구축해야 한다.

지금 '생산자'는 젤리들이고, '소비자'는 말하자면 마력을 흡수해서 넥타르를 생산하는 넥타르 샘인데. 여기서 좀 더 제대로 된 소비자를 추가시키는 게 좋겠다.

「[바위젤리]가 [젤리먹는푸딩]으로 진화했습니다.」

젤리보다 조금 탄탄한 몸을 가진 이 육식성 생물들에겐 푸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운동성이 심히 미약하고 기어다니는 젤리들을 향해 조금 더 빠른 움직임으로 기어가거나 굴러갈 수 있고, 젤리들을 잡아먹어서 영양분을 습득한다.

"그러면 모래의 생산이 늦춰지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안 되잖아요?"

「[젤리먹는푸딩]이 [자갈젤리먹는푸딩]으로 진화했습니다.」

「[자갈젤리먹는푸딩]이 [흙젤리먹는푸딩]으로 진화했습니다.」

"아. 네. 마음대로 만들어 보세요."

아무런 외부 위협 없이 젤리들이 넥타르를 빨며 살던 평화로운 사막에 난데없이 사악한 푸딩들이 나타났다.

이 포악한 젤리식성 생명체들은 비교적 단단한 몸과 턱으로 젤리들을 처묵처묵하며 번거롭게 넥타르합성 같은 걸 하는 대신 남이 만든 영양분을 손쉽게 갈취한다.

푸딩들의 등장으로 인해 이대로 가면 젤리들은 대폭 수가 줄고, 그러면 푸딩들도 수가 줄어들고, 다시 젤리들의 수가 늘어나며 결국 어느 순간 서로의 수가 평형을 이룰 것이다.

난 그 평형이 오래 가는 걸 바라지 않았다. 나는 인위적으로, 아주 빠르게 젤리들을 진화시킨다.

"지성을 갖추고 문명을 이룩하게 하나요?"

아. 니.

포식자에게 맞서는 젤리들의 전략은 다음과 같다.

첫째. 덩치를 키우기. 자연계에서는 체급이 깡패다. 덩치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포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가장 많은 무기물을 분해하는 바위젤리가 커지고, 자갈, 흙 순서대로 커진다.

하지만 이건 당연히 포식자들의 덩치도 키우는 꼴이 된다. 푸딩들은 커다란 젤리들을 잡기 위해 더 커진다.

둘째. 도망치기. 운동능력을 높이기 시작한다. 사막에서 햇볕 쬐며 놀던 시대는 끝났다. 젤리들은 이제 불가사리의 관족 같은 기관을 만들거나, 혹은 조개처럼 팔을 만들거나, 달팽이처럼 기어다니는 운동법 등을 독자적으로 개발해 도망다니기 시작한다. 푸딩들은 당연히 더 날렵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른 도망법도 있다. 바로 적이 들어올 수 없는 곳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하지만 젤리들은 햇빛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에 땅이 아니라 햇볕이 들어올 수 있는 물로 들어가서 수생생활을 하게 된다.

몸이 무거운 푸딩들은 호수로 못 들어오지만, 난 굳이 그놈들도 진화시켜서 물속을 헤엄치며 표면에서 젤리를 먹는 푸딩들을 탄생시켰다.

셋째. 독 만들기. 넥타르의 유기물 성분을 잘 조합해서 독을 만든다. 넥타르합성 과정에서 발생된 〈마력〉을 온전히 발산하는 대신, 마력을 일부 활용해 통해 열기와 냉기를 품는 놈도 있고, 푸딩들은 젤리들을 먹을 때 죽거나 입천장이 터지는 등의 피해를 받게 된다. 

당연히 포식자들인 푸딩들은 더 강력한 내장과 튼튼한 입을 만든다.

"마법을 만들었네요? 원시적인 형태긴 하지만요."

"지능을 쓰지 않는 신비한 메커니즘은 나도 좋아해. 판타지 세계니까 가능한 게 좀 있어서."

"결국 지능은 안 올릴 거군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 단단해지기. 젤리들은 외골격을 만든다. 단단해져서 먹기 힘들어지면 당연히 먹지 않게 된다.

젤리들은 젤리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겉표면이 코팅이라도 한 것처럼 단단해지고, 일부는 부드러운 몸에 단단한 껍질을 뒤집어쓰는 조개와 달팽이 전략으로 나간다. 그 외에도 비늘이 달리는 놈들, 성게처럼 가시가 달리는 놈들. 가지각색이다.

당연히 포식자들인 푸딩은 더 힘세지고, 더 단단해진다.

자. 그리고 단단해지는데 공짜로 단단해질 수는 없다. 젤리와 푸딩들은 몸을 단단하게 만드는 재료로 무기물 중 염류 성분을 다 뽑아내고 뽑아내어서 이제 단단하고 쓸모없는 찌꺼기밖에 없는 모래를 이용한다.

"오. 이건 좀 대단한데요."

석기시대는 돌이 부족해서 끝난 게 아니라고 했던가. 그렇지만 내 생태계의 사막화는 모래가 부족해져서 끝났다.

젤리들의 전략 중 가장 성공적이고 인기를 끈 건 껍데기 만들기 전략이었다. 왜냐면 푸딩들도 부드러운 턱밖에 없는데 단단한 유리질 껍데기가 그것을 방어해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푸딩들은 자기들도 단단한 껍데기 부수는 기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단단한 턱, 치아, 그리고 가시, 근육질 촉수. 가히 캄브리아기 대폭발을 연상케 하는 속도로 진화하며, 난 인위적으로 그 움직임을 가속시켰다.

결과적으로 그 많던 모래들이 전부 사라지고, 젤리와 푸딩들은 껍데기들이 생겼으며, 호수에 들어간 생물들은 물속까지 따라온 포식자들을 피해 단단한 비늘과 뛰어난 꼬리와 지느러미들이 생기는 등, 진짜로 수렴진화해서 진짜로 캄브리아기 대폭발 시대의 생명체들 같이 진화한 젤리와 푸딩들이 마구 생겨난다.

"그래서요?"

최초의 젤리인 넥타르젤리도 진화를 멈출 수 없다. 넥타르젤리는 두 가지 방향으로 진화한다.

하나는 여전히 호수 표면을 다닥다닥 채우며 햇볕과 열을 흡수하는 방향이고, 다른 방향은 조금 아래로, 아래로, 결국 호수 바닥까지 내려가 미약한 빛으로 넥타르합성을 시작하고, 일부 푸딩들은 그렇게 바닥에 가득해진 수초형 젤리들을 먹기 위해 진화한다. 

넥타르 샘. 그 순수한 생명력 에너지의 원천을 생산해내는 곳은 곧 생명으로 넘치는 호수가 되었다.

표면에는 수많은 젤리들이 부레옥잠처럼 마구 번식했다. 가장 번식이 빠르고, 가장 빨리 죽는다. 이놈들은 수표면에 계속 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가볍고 번식력이 빠르게, 그리고 그들을 잡아먹는 생명체도 많이 먹고 많이 번식하게끔 진화했다.

표면 아래 부유형 젤리들은 이동능력이 점차 발달해 물고기나 해파리처럼 진화하거나, 아니면 번식력을 대폭 늘려서 천 마리를 낳고 999마리가 죽어도 1마리 살면 다시 천 배로 불어나는 분열형 미생물의 삶을 이어간다.

가장 성공한 생명체는 아노말로카리스와 같이 '눈'을 가지고 지느러미 여러 개로 헤엄치며 조개고 달팽이고 껍데기를 부수고 그대로 으깨 먹는 아노말로카리푸딩이다.

바닥에는 바다나리와 불가사리, 조개, 달팽이 등을 연상케 하는 수많은 생물들이 서식하며, 서로 끝없는 방어 전략과 공격 전략의 투쟁을 이어나간다.

가장 성공한 생명체는 불가사리형 푸딩이다. 성게와 달팽이, 조개처럼 단단한 껍데기를 갖춘 젤리들을 힘으로 쪼개고 내용물을 먹는다.

소비자도 생산자도 수가 어마어마하게 다양해졌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세 번째 유형의 생명체를 창조한다.

「[겔]을 창조했습니다.」

젤리보다도 물렁물렁한 생명체다. 이놈들은 덩치가 커질 수가 없다. 그저 작은 크기의 세균인데, 하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죽은 생물의 시체를 뜯어먹는 것이다.

이놈들은 젤리와 푸딩들의 시체를 분해해 영양분을 얻고 원초적인 마력으로 바꾸며, 또 겔을 먹는 다른 생물들에게 잡아먹힌다.

변화는 이어진다. 푸딩들 중 덩치가 큰 것들은 이제 잡기가 너무 힘들어진 젤리들 대신 다른 푸딩들을 노리기 시작한다. 2차 소비자가 된 것이다.

육상의 젤리들은 빨리 이동하는 것과 느리게 이동하는 것으로 나뉘었고, 느리게 이동하는 것은 이제 식물과도 같이 변해서 외골격을 단단히 형성하고 마치 잎사귀와 가지처럼 넓게 모래를 분해해서 만든 유리가지와 이파리를 뻗어 햇볕을 섭취하고, 본체는 지하로 파고들어 식물과도 같이 가만히 머무르는 생물로 변한다.

빠르게 이동하는 젤리들은 점차 지면을 파고 바위와 돌 등을 찾아먹는, 일종의 초식동물, 아니 암식동물(巖食動物)과도 같이 진화했다. 그리고 그들을 먹는 젤리식성 푸딩들은 더욱 커지고 빨라지고 포악해진다.

이것으로 생산자, 소비자, 분해자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다. 완벽한 생태계다.

"솔직히 멋지긴 한데요······."

그래. 이 멋진 생태계의 이름을 디저트 사막(Dessert desert)이라고 불러야겠다. 끝내주는 이름이군. 다음에 창조할 생명체들도 그런 느낌으로 만들어봐야겠어.

「세계의 〈생명〉 점수가 441점을 넘어 레벨이 3으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도 날 축복해 주는군. 그러면 세 번째 특성을 정해볼까.

천사를 바라보고 어서 특성 카드를 보여달라고 손짓했는데, 천사가 잠시 머뭇거렸다.

뭐지. 렉인가. 버그 걸렸나. 로딩중인가. 왜 이래.

"저기. 실례지만, 곧 있으면 보호 시간이 끝난다는 걸 인지하고 계신가요?"

"인지하고 있다만."

"그러면 묻겠는데. 이 젤리들로 도대체 어떻게 이길 생각이죠? 물론 알아요. 넥타르 샘도 커졌고, 그에 따르는 생명체들도 엄청나게 늘었어요. 첫 보호 단계 때 무슨 분야든 3레벨을 달성한 경우는 저도 극히 드문 것으로 알아요."

그렇지. 원래 레벨 올리기 더럽게 힘든 게임이니까.

0레벨을 시작점으로 해서, 세계가 서로 충돌할 때마다 레벨 1단계씩 오르는 게 기본이고, 그것도 모든 분야를 올리진 못해서 어느 하나가 앞서면 어느 하나는 크게 뒤떨어지는 세계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면 난 이렇게 질문하겠다.

"그렇다면 내 점수는 지금 몹시 부족하겠군?"

"당연하죠. 자. 보세요. 평균 모든 플레이어 평균 점수가 300점인데, 비인님은 지금 생명 점수만 따져서 441점이니까 상위권으로 보이지만요. 사실상 생명 점수밖에 없으니······."

하고 말을 이으려고 하던 천사는, 내 생태계의 상태창을 보고 완전히 굳어버린 듯했다.

"뭐야. 이거. 어떻게 이 수치가 나와."

「비인의 세계

생명 LV.3: 441

군사 LV.0: 62

산업 LV.0: 25

기술 LV.0: 0

문화 LV.0: 0

정치 LV.0: 0

신비 LV.0: 40

신앙 LV.0: 0

세계 총점 LV.0: 568」

"진짜로 어떻게 이 점수가 나와! 문명도 없는데 군사 산업 신비 점수가 어떻게 나오냐고!"

군사점수는 내 생태계의 포식자들의 전투력 총합일 거고.

산업은 바위를 모래로 만드는 일련의 과정 때문일 거고.

신비는 그냥 원시적 마법을 계속 발달시킨 젤리들과 넥타르 샘 때문에 나왔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 0이다. 지성체가 없으니까.

"아니, 잠시만. 이거 좀 다르네요. 사실 군사력이 62로 보이지만 모든 생명체의 전투력을 총합한 거니까. 실제로 군사력 강한 세계와 싸우면 사냥감밖에 안 돼요. 신비와 산업도 말이 신비와 산업이지 대단한 마법을 익힌 게 아니라 원시적 마법을 익힌 생물들이 그냥 엄청나게 많아서 이 수치고."

맞다.

"그리고 정치도 0. 신앙도 0이니까 생명체들을 플레이어님 의지대로 컨트롤하는 것도 불가능해요. 그런데 다른 세계와의 충돌에서 어떻게 이기죠?"

천사는 걱정하는 건지 항의하는 건지 모를 말투였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봐. 천사. 방금 네가 나한테 '도대체 어떻게 이길 생각이냐.'라고 했으니, 질문을 바꿔보지."

"?"

"이 게임은 상대 세계와 충돌한 이후 완전한 협업, 혹은 완벽한 점령을 이룩하면 이긴다."

"그렇죠. 이 젤리들론 불가능하잖아요."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은 이거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질 수 있지?'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

천사는 이놈이 대체 뭐라는 건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소스라치며 기겁하고 말았다.

깨달았군. 천사가 바보는 아닌데, 상상력이 모자라.

「곧 세계 충돌이 시작됩니다. 살아남은 플레이어만이 다음 라운드로 진출합니다.」

그러니까 3레벨 특성 카드나 보여줘라. 난 지금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다.

4화. 세계 충돌 -첫 번째-

세계 충돌은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첫째는 차원문이다. 서로 세계를 오갈 수 있는 게이트가 열려서 '일방적'으로 공격 부대와 방어 부대를 보낸다.

공격과 방어라고 설명했지만······. 교류를 원할 겸 사신을 보내도 되고, 정찰병을 보내도 되고, 아무튼 서로 교류가 한 번 생긴 다음 차원문 발생 빈도가 빈번해진다.

둘째로 차원통로다. 아예 상대 세계로 영구적으로, 쌍방향으로 오갈 수 있는 통로가 생긴다. 이 통로는 점점 많아지고, 또 넓어진다.

셋째로 차원균열이다. 두 세계의 표면이 서로 접붙으며, 지역 전체에서 서로 넘어갈 수 있게 된다.

넷째가 차원융합. 이제는 상대 세계와의 완전한 공존, 혹은 영원한 전쟁 외에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다. 이 단계에서 어느 세계의 총합 점수가 다른 세계의 총점의 두 배 이상 되면 자동적으로 승리한다.

나는 이 '차원문' 단계 때 그저 흙젤리 몇 마리를 개조해서 적 세계에 던져넣었을 뿐이다. 3레벨 특성으로 넥타르가 아니라 다른 평범한 유기물도 섭취할 수 있게 바꾼 흙젤리들 말이다.

저쪽에 들어간 내 창조물들도 재밌겠지만, 그보다 내 생태계를 공격해 올 놈의 반응이 궁금하군.

도대체 내 생태계에 들어오고 무슨 생각을 할까?

생각해 보면 대단히 운이 좋았다. 지구 출신 플레이어 오스왈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평소 폐인처럼 즐기던 게임에서 신이 될 수 있다고 자신을 게임 속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 아닌가. 현세에 미련도 없었고 진짜 신이 될 수 있다는 말에 혹해서 들어갔다.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자신은 꽤 [더 판타지 월드 크리에이터]를 잘하는 편이었다. 최고 난이도도 손쉽게 깰 수 있었고, 온갖 변태적인 플레이와 전략, 불리한 환경에서도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더 운이 좋았던 것은 처음 받은 세계의 환경이었다. 맵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깨끗하고 넓은 오아시스와 적절한 평야. 산이나 언덕 같은 지형이 없어서 방어는 불리해도 농사짓고 물고기 낚으며 인구 불려서 문명 건설하기 전략이 최고로 잘 먹히는 공간이었다.

오스왈드는 가장 먼저 자신과 비슷한 인간형 생명체들을 창조한 뒤 식물과 나무, 가축을 주고 농사지으며 먹고 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들은 인구가 증가하면서 사회를 이루고, 자원을 캐고, 기술을 발전시키고, 문화를 이루며 신비를 깨달아 마법을 만들었다.

그런 오스왈드의 세계는 대충 이런 상태였다.

「생명 LV.0: 56

군사 LV.1: 114

산업 LV.0: 35

기술 LV.0: 50

문화 LV.0: 28

정치 LV.0: 64

신비 LV.0: 18

신앙 LV.0: 25

세계 총점 LV.0: 390」

천사의 말에 따르면 390점이면 평균은 넘는다. 명색이 신을 가리는 게임이니 형편없이 못하는 플레이어가 끼어 있진 않을 테고, 아마도 크게 차이나진 않겠지만······. 그래도 어느 세력을 만나든 한 번 해볼 만했다.

특히 군사력을 100 이상 찍어서 레벨업을 한 게 주요할 것이다. 초창기에는 다들 내정 빌드에 신경 쓰니까. 군사 특성을 하나 찍은 자기 군대는 적 군대를 충분히 박살 내리라. 그리고 상대 종족을 노예로 삼아서 나머지 내정 분야를 충당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오스왈드는 자신을 믿는 신도들 중 뛰어난 전사들을 가려 뽑은 다음 상대 세계로 파견했다.

공격에 앞서 상대 세계를 먼저 〈정찰〉하는 게 기본이니까. 처음엔 비슷한 세계만 걸리는 규칙이니 이렇게 잔뜩 보내도 된다.

"어?"

그리고 자신의 전사들을 통해 상대의 세계를 본 오스왈드는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뭐야."

세계에 문명이 없다.

어딜 봐도 끈적한 젤리와 그것이 변형한 듯한 기괴한 생명체들. 그리고 모래와 부스러진 돌멩이뿐.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그 어떤 것도 없는 황량한 세계에는 먹을 수도 없는 젤리들만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며, 끔찍할 정도의 햇빛만 내리쬐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이 세계 뭐야?!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 전부 밸런스가 맞는 땅이라고 들었는데 상대 플레이어는 도대체 어떤 땅을 받은 거지?"

믿을 수가 없어서, 경악하는 자기 전사들을 전진시키며 환경을 둘러봤다.

그리고 머지않아 거대한 호수를 발견했다. 그 역시 미칠듯한 젤리들로 뒤덮여 있었는데. 역시 문명은 없이 젤리들만 가득했다.

"3레벨 넥타르 샘. 잠시만, 미친. 3레벨 넥타르 샘? 도대체 어떻게 세계 충돌 한 번도 없이 넥타르 샘을 3레벨까지 올리지? 아니, 잠시만.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

호수에 다가가서 그곳의 '물'을 떠봐서 맛본 전사는 퉤퉤거리며 그 점액질의 물을 내뱉곤, 공포에 질려선 하늘에 기도했다.

'신이시여······. 이건 말씀하신 넥타르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손에서는 물컹물컹하면서도 딱딱한 젤리들이 꿈틀거리더니 이내 호수로 떨어졌다.

이 세계에 넥타르는 없다.

아니······. 정확히는 마력을 흡수해서 넥타르를 생산하는 샘 자체는 여전히 호수 밑바닥에서 끝없이 넥타르를 생산하고 있지만, 정작 넥타르는 없다.

생산되는 넥타르 '전부' 쓰고 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젤리들이 모조리 소비하고 있다.

호수에는 분명 미량의 넥타르가 존재하지만, 그와 동시에 대부분이 광물질로 이뤄져 먹을 수도 없는 젤리들로 가득 차 있다.

'신이시여. 여기서 뭐랑 싸워서 어떻게 이기란 말입니까······? 신이시여! 응답해주십시오!'

오스왈드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내 생태계를 침공한 전사들은 전원 젤리를 섭취하지 못하고 아사했다. 나약한 놈들. 〈생명〉레벨을 올려서 내장을 강화하는 정도의 대비는 했어야지.

그리고 상대 플레이어의 생태계. 사막이지만 거대한 오아시스를 지녀서 농사도 지을 수 있고 문명도 발전할 수 있는 그 땅에 던져넣은 흙젤리들은 오아시스와 그 주변의 비옥한 흙을 모조리 영양가 하나 없는 모래로 만들어버렸고, 그들의 호수는 젤리들로 가득찼다.

그들은 다음 추수철을 견디지 못하고 아사할 것이다.

「상대 플레이어 '오스왈드'가 〈항복〉을 요청합니다.」

"항복? 그런 시스템이 있었나?"

"새로 추가된 기능입니다. 상대 신의 종이 되는 대신 영혼의 소멸을 막습니다."

"항복을 받아들였을 때 이점은?"

"완벽히 복종하는 노예를 얻죠. 세계가 넓어지면 대신 세세한 부분을 관리하게 할 수도 있고요. 상대 세계의 모든 것도 평화롭게 흡수할 수 있습니다."

"거부하면 어떻게 되지?"

"어. 뭐······. 그냥 상대 영혼이 소멸하죠."

"다른 이점이나 손해는 뭐 없나?"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항복을 받아들이라고 만든 시스템이라서요."

그렇군. 그럼 거부한다.

이 우주에 지성체는 적을수록 좋다.

내 젤리들은 생태계 파괴를 속행했다.

「상대 플레이어 '오스왈드'가 〈대화〉를 요청합니다.」

「상대 플레이어 '오스왈드'가 〈대화〉를 요청합니다.」

「상대 플레이어 '오스왈드'가 〈항복〉을 요청합니다.」

「상대 플레이어 '오스왈드'가 〈항복〉을 요청합니다.」

「상대 플레이어 '오스왈드'가 〈항복〉을 요청합니다···.」

집요하군. 항복 안 받아줄 건데.

"메시지 차단 못하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럼 해줘."

「플레이어 '오스왈드'를 차단했습니다.」

결국, 세계의 시간 흐름으로 1년 뒤. 기분 나쁘게도 인간을 닮은 상대 플레이어의 종족은 모조리 아사했고, 그들의 사막과 호수는 넥타르를 먹지 않는 담수성 젤리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플레이어 '오스왈드'와의 세계 충돌에서 승리하셨습니다.」

「플레이어의 세계가 넓어집니다.」

두 세계가 이어 붙여지고 내 사막은 두 배로 넓어졌다. 하나는 녹아내린 바위와 젤리로 가득한 넥타르 샘이 있는 디저트 사막이고 다른 하나는 담수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물풀 등의 습지와 파괴된 문명의 잔해가 남은 오스왈드 사막이다. 두 면적은 비슷하다.

"이겼네요. 이 젤리들 데리고."

"질 수가 없었으니까."

문자 그대로 질 수가 없었다. 내가 지려면 적들은 생태계의 근간이 되는 넥타르 오아시스. 그 최초의 생산자인 넥타르젤리를 모조리 절멸시켜야 한다.

그걸 어떻게 하냐? 계속된 확장으로 넥타르 샘의 지름은 1km가 훌쩍 넘는다. 그곳의 표면부터 수심 15미터까지 넥타르젤리로 꽉꽉 차 있다.

뭐, 적들이 광역 마법 같은 걸 퍼붓거나, 아니면 대략으로 독액을 만들어서 뿌리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어부들이 그물로 몇 년 동안 내내 방제 작업을 하거나. 여러 방법이 있다.

그런데 높아봤자 1레벨의 문명 수준을 지녔을 세계의 역량으로는 '절대' 할 수 없다. 인력도 기술도 모자라다.

그리고 적의 호수는 내 젤리들의 훌륭한 서식처가 되어주었고 말이다. 보통 이 단계에서 다른 플레이어들은 호수에 물풀이나 물고기 정도나 만들지 무슨 유기물이든 섭취할 수 있는 강력한 포식자 같은 건 안 만들거든.

"그러면 이제부턴 어떻게 하시죠? 보통은 상대 문명을 빼앗고 상대 종족을 노예로 삼는데 너무 전략이 특이해서 뭘 하실지 전혀 짐작이 안 가네요."

"지금은 내 시작점이 사막이라 상대가 사막 지형으로 잡혔지만, 두세 번만 지나도 상대 지형에서 사막이 아닌 다른 지형이 나오겠지. 그때를 대비해, 넥타르 대신 물풀과 담수를 기반으로 서식하는 젤리들을 진화시킨다. 푸딩들 역시 육식성으로 바꿔서 상대의 생태계에 완전히 침투해서 파괴하는 극악의 외래종으로 진화시킨다."

"오스왈드 사막에 존재하는 식물이나 동물은 어쩔 거예요?"

"식물은 절멸시킨다. 식물을 먹는 동물은 개조해서 젤리들을 먹게끔 한다. 문명이 이용할 만한 것을 파괴하고 오로지 내 디저트 군단이 다른 모든 생태계를 압도할 수 있게끔 한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끝까지 문명은 안 만드시는 거죠?"

어. 안 만든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생명〉발전 하나에 모든 것을 몰아넣어서 완벽한 생태계로 어쭙잖게 기술이나 마법 같은 거 배운 문명을 파괴한다.

「승리 보상으로 신규 세계 특성을 획득합니다. 세계 특성은 스스로 창조한 모든 창조물 및 외부에서 유입된 모든 창조물에게 제공됩니다.」

"그렇다면, 비인 님의 세계에 다음과 같은 특성을 제안하지요."

천사는 내 눈앞에 세 가지 특성 카드를 띄웠다.

『공사 전문가: 창조물이 토목 공사에 능숙해집니다. 〈산업〉 발전에 유리해집니다.』

『기술 영감: 창조물에 강력한 기술적 영감이 깃들어 〈기술〉 발전에 유리해집니다.』

『고지능: 창조물의 지능이 대폭 상승합니다. 지능이 높은 종족은 〈정치〉와 〈기술〉 발전에 유리해집니다.』

이 천사가 지금 나한테 시비거나?

"아닙니다. 그저 가장 플레이어님의 '문명'에 도움이 되는 선택지를 꼽았을 뿐입니다."

그런 거 안 키울 거라니까. 도대체 왜 내 완벽한 생태계에 불결한 지성체들을 끼워넣으려는 거지?

나는 선택지를 좀 보다가, 하나 궁금한 게 생겨서 물었다.

"공사라는 건 어디까지 해당되는 거지?"

"당연히, 외부의 자재를 이용해 구조물을 만들거나,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지형지물을 지성체의 목적에 따라 다른 형태로 바꾸거나 제거, 생성하는 행위가 공사입니다."

그 정의를 듣고 난 재차 물었다.

"비버의 댐 건설은 공사에 해당되나?"

"네? 어······. 네. 지능은 낮지만, 명백한 토목 공사입니다."

"그럼 지성이 없는 산호들이 군집을 이뤄서 거대한 산호초를 만드는 건 공사에 해당되나? 외부의 영양분이라는 자재를 이용해, 자신의 신체라는 구조물을 발달시켜서 다른 생명체들이 거주할 수 있는 새로운 지형지물을 만드는 행위인데."

"······."

"······."

"잠시 상부에 연락 좀 해보겠습니다."

내 시야에서 사라진 천사는, 잠시 뒤 나타나 조금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완벽히 생물학적인 메커니즘이지만, 토목 공사에 해당한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그럼 『공사 전문가』 특성을 택하도록 하지."

특성을 얻은 나는 이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했다.

「[해면푸딩]이 [산호구미]로 진화했습니다.」

넥타르 오아시스는 너무 빈약해. 목표는 넥타르 바다다.

넥타르 바다에 수많은 젤리들과 푸딩들, 그리고 아름답고도 웅장할 구미 대보초가 존재할 것을 생각하니 절로 흥분되는 것 같다.

5화. 산호구미

「보호 기간이 시작됐습니다. 보호 기간동안 플레이어는 다른 플레이어의 세계와 접촉하지 않습니다. 보호기간이 끝난 이후 다른 세계와 충돌하게 됩니다.」

1년 만에 승리면 빠르게 승리를 거둔 편이기 때문에 내 남은 보호기간은 상당히 길었다. 만약 싸움이 질질 끌리면 싸우던 도중에 다른 세계랑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그 경우는 당장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일어나면 알아보고. 지금은 내 생태계를 더 완벽하게 만들 때다.

"생태계라는 표현을 고집하는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열받네요."

알게 뭐냐. 난 내 일을 한다.

새롭게 진화시킨 생명체, [산호구미]는 [해면푸딩]에서 진화한 생물이다. 지구 생물학 계보를 안 따라가는데, 그냥 내가 그렇게 이름붙였으니 그런 걸로 알아둬라.

해면푸딩은 말 그대로 해면 같은 생활을 하는 푸딩이었다. 해면이 뭐냐면. 네모바지 입은 그 노란 스펀지가 해면이다.

아니, 그냥 스펀지 자체가 해면의 번역어다. 바닥에 붙박여서 물을 빨아들이고, 거기 함유된 미생물들을 먹고, 깨끗하게 여과해서 내보낸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동물이다.

그리고 산호구미도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구미라는 이름처럼 좀 더 단단하다는 거다. 그리고 모래를 통한 신체 구조물도 더욱 튼튼하게 지어서 마치 동물이 아니라 식물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동물이다.

그렇지만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젤리 사냥이 아니라 넥타르합성으로 영양분을 획득하지.

이게 뭐하는 건가 싶을 텐데, 원래 산호도 동물인데 내부에 공생조류들 키우면서 광합성한다. 이놈들도 비슷하다.

이놈들은 움직이지 못하는 대신 다른 포식자들이 뜯어먹지 못하는 튼튼한 광물질 구조물을 키워서 넥타르젤리들을 몸에 보관한다.

그리고 그 넥타르젤리들은 대신 영양분을 만들어주고 산호구미가 만든 튼튼한 광물질 구조물 내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아니 그럼 그냥 단단한 구조물을 가진 넥타르젤리를 만들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것도 가능하고, 그런 생명체도 이미 있어. 하지만 분업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쉽다. 요컨대 넥타르합성도 하고 단단한 구조물도 만드는 생명체는 넥타르합성도 잘 못하고 단단하지도 않아."

"아하. 하지만 약한 애가 넥타르합성을 하고, 단단한 애는 그걸 지켜주기만 하면 오히려 효율이 올라간다는 거군요."

"그런 거지. 그리고 애초에 그런 질문을 하려면 먼저 할 질문이 있지 않나? 왜 '푸딩'들은 넥타르를 직접 먹는 게 아니라 젤리들을 잡아먹는가?"

참고로 그 해답은 넥타르에는 푸딩들의 생장활동에 꼭 필요한 광물질이 없고, 푸딩들은 광물질을 대량으로 요구하는 신체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광물질을 직접적으로 섭취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넥타르는 오로지 생명 에너지만을 제공하고 무기물은 제공하지 않으니까.

『공사 전문가』 특성에 힘입어 산호구미들은 엄청난 속도로 넥타르 오아시스 바닥에 불어나기 시작했다. 이놈들은 신체 구조물을 만드는데 광물질을 소모하기 때문에 내 세계의 암반은 빠른 속도로 깎여나가기 시작했다.

잠깐만. 암반을 깎아내······?

"궁금한 게 있는데, 게임에서야 자원이 무한했지만 지금은 어떻지? 이 세계는 앞으로 쭉 가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게 되어 있는데, 내가 만약 땅을 계속 파서 바닥 끝까지 가면 하늘 위로 떨어지나?"

"아닙니다. 세계는 편의상 평면으로 보이는 것이지 사실 '모든 방향에서 구형'이라서, 바닥을 쭉 파면 세계의 좌표에서 반대 지점으로 거꾸로 땅을 파고 올라가게 됩니다."

"즉 '땅'이라는 자원도 한계가 있다는 거군?"

"어지간해선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테지만······. 그렇습니다. 참고로 하늘의 끝까지 가도 마찬가지로 '하늘'의 반대편에서 나옵니다."

모든 방향에서 구형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러면 걱정할 것 없이 땅을 파고 들어간다.

호수는 넓이의 확장에 이어서 이제는 깊이의 확장이 시작된다. 수심이 깊은 자리를 산호구미들이 채우고, 산호구미들 사이에 각종 생물들이 안전을 좇아 들어온다.

지구에서 산호초의 면적은 전 바다의 1%밖에 안 되면서 바다의 모든 생명체의 25%나 사는 공간이었다. 나도 그러한 환경을 목표로 한다.

기본적으로 넥타르라는 게 바닥에 있는 샘에서부터 만들어져서 위에서 넥타르젤리들이 만들어내는 물로 희석되고, 그걸 수표면과 지상의 젤리들이 나눠 먹는 구조기 때문에 호수 밑바닥에 있는 산호들이 가장 순수한 넥타르를 먹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이점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산호구미의 성장은 둔했다.

"생각보다 잘 안 자라는데요."

"수심이 너무 깊은 거다. 이곳 사막의 일조량은 가공할 정도지만 그 수많은 열과 빛을 상층부의 생물들이 죄다 써버리고 있다. 그 탓에 호수 바닥 넥타르 샘 근처는 오히려 물이 차가울 정도군."

물론 이것도 넥타르젤리들의 진화로 인해서 어느 정도 균형이 맞긴 했다.

요컨대 호수표면에 있는 넥타르젤리는 빛과 열을 직접적으로 받는 대신, 가장 희석된 넥타르를 마시게 된다.

상층부에 있는 놈은 빛과 열을 많이 받지만, 많이 희석된 넥타르.

중층부에 잇는 놈은 빛과 열을 적당히 받고, 적당히 희석된 넥타르.

하층부에 있는 놈은 빛과 열을 적게 받고, 적당히 농후한 넥타르.

바닥에 있는 놈은 빛과 열을 아주 조금 받고, 농후한 넥타르를 마시게 되어 있는 구조다.

"이미 내 넥타르 오아시스의 생태계는 수심에 따라서 5단계로 나뉘었어. 진화를 계속 가속한 끝에 각기 다른 방향으로 진화한 게 보이지. 요컨대 상층부 놈은 물을 거의 배출하지 않고 마력을 다량으로 배출해, 하지만 하층부에 있는 놈은 물을 많이 배출하고 마력을 거의 배출하지 않아."

그리고 수심뿐만 아니라 호수 중심에 있는 넥타르 샘의 거리와 비교해서도 생태계가 다르게 구축됐다.

요컨대 가장 중심부에는 넥타르가 그래도 좀 올라오다 보니 다닥다닥 모여 있는 젤리 군집이 있는데, 가장자리로 갈수록 희석도가 더 높아지다 보니 물과 바위를 많이 섭취하고 마력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바위젤리 계열의 생물들이 살고 있다.

아마 넥타르 샘의 크기가 커질수록 생태계는 더욱 다양해질 것이다.

사실 원래라면 이 정도 크기의 호수에서는 이 정도 생태계 다양성이 나타나면 안 되는 걸 내 〈신성〉을 발휘해서 억지로 변이와 다양성을 늘렸으니 다소 억지를 부린 거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어떡하죠?"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한다."

"지성체는 아니죠?"

"그래."

또 미생물이다. 다만, 이 미생물은 무려 마법을 쓸 줄 안다.

"신비 점수를 늘려주겠네요."

그렇다. 분류상으로는 〈마물〉이다. 마력을 섭취하고 살아가는 생물이지. 마력을 소모하는 만큼 넥타르 샘의 성장은 둔화되겠지만, 생태계 전체로 보면 오히려 이득을 가져다주는 생물이다.

〈신성〉을 소모하자 새로운 마물-미생물이 등장한다. 작은 크기에 약간 넓적한 원반 같은 생물로, 체내에 마력을 소비해서 살아가는 가장 원시적인 타입의 생물이다.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름을 뭘로 할까요?」

"토핑."

「[토핑]을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토핑을 진화시켜서 다른 생물들을 만든다. 마력을 소모해서 에너지를 얻는 '마합성'을 하는 이 생물에게 새로운 기능을 부여한다.

「[토핑]이 [썬토핑]으로 진화했습니다.」

기호화된 태양처럼 여러 섬모가 달려서 운동능력을 지닌 이 생물은, 이 호수에 말 그대로 넘쳐흐르는 순수한 마력과 〈물〉을 섭취해서 에너지를 얻고, 〈흙〉으로 몸을 구성하며, 〈바람〉으로 운동능력을 얻고 여과물로 〈불〉 속성 마력과 〈빛〉 속성 마력을 방출한다.

한마디로, 넘쳐나는 잉여자원인 〈물〉과 〈마력〉을 마셔서 고인 호수 내에 해류와도 같은 흐름을 만들고, 광물질을 보충하며. 가장 필요한 빛, 열을 만드는 생물이다.

"용케도 그런 걸 생각했네요. 신비에 대한 이해가 낮은 세계에서 오셨는데."

이 썬토핑이 불어나자 넥타르 호수의 수위가 낮아졌다. 하지만 호수 내부는 찬란하게 빛이 나기 시작했고,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호수 아래까지 내려간 빛과 열. 그것을 빨아들이고 넥타르젤리들이 폭발적으로 증식한다. 젤리들이 증식하니 젤리들이 몸담은 산호구미의 덩치도 커지고, 미친듯이 구조물이 생성된다.

그들은 바위젤리가 먹을 수 없었던 호수의 깊은 암반을 파먹으며 호수의 수심을 몇 배로 늘린다. 부피도 커진다. 부피가 커지면 더 많은 넥타르젤리들이 물과 마력을 쏟고, 그중 일부는 썬토핑이 섭취하지만 대다수는 호수 내로 들어가 호수는 몇 배로 불어난다.

「"넥타르 샘"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이제 넥타르 샘의 레벨은 무려 4다. 지름은 거의 2km에 가까운데 수심도 50미터에 달한다.

내 생태계의 표면적이 다른 세계를 집어삼켰어도 고작 20제곱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걸 생각하면, 이 넥타르 샘이 무려 전체의 15%에 달하는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샘이 넘쳐 흘러서 습지가 되어버린 면적까지 치면 전체의 40% 가량은 넥타르 샘의 영향력에 있다.

참고로 오스왈드 오아시스도 꽤 큰 편인데. 그곳은 전체의 2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넥타르도 안 나오는 맹물이긴 하지만, 내 생태계가 이것만 보면 사막이 아니라 습지 같군······.

뭐 원래 사막에도 강과 오아시스 주변에 습지가 생기고 그곳에서 풍요로운 생태계가 퍼지는 법이니 정상이지만.

"사실 그런 풍요로운 사막의 습지에선 문명의 싹이 트는 게 더 정상적인 것 아닌가요?"

어쨌거나, 넥타르 오아시스에서 뿜어나오는 무지막지한 생명들은 지상에 있는 생명체들에게 더 많은 젤리들을 공급하고, 푸딩들은 그런 젤리들을 먹고, 푸딩을 먹는 푸딩에게 먹히고, 그런 푸딩도 살다가 죽어서 겔에게 뜯어먹히고, 겔은 겔 먹는 푸딩과 젤리들에게 잡아 먹힌다.

「세계의 〈생명〉 점수가 926점을 넘어 레벨이 4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느새. 생명 점수가 다음 레벨이 될 수 있게 되었다. 고작 세계를 하나 먹어치웠을 뿐인데 가공할 성장력이었다.

"흐아······. 이게 대체 뭐야······. 어떻게 벌써 레벨이 4야."

특성으로 『육식』을 획득했다. 이제 푸딩 중 가장 공격적이고 빠르고 강력한 종은 [고기먹는푸딩]으로 진화했고, 지금껏 이어온 젤리-암석식성과 더불어서 고기도 뜯어먹을 수 있다.

저번 세계의 플레이어, 오스왈드가 자신들의 종족을 위해 만들어 놓은 닭 닮은 생명체와 돼지와 소를 닮은 생명체들은 이제 푸딩들의 공격을 피해 좁은 초원을 열심히 도망 다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세계의 플레이어는 내가 보내는 육식성 푸딩들을 막아내야 할 것이고, 이 비효율적인 생명체인 고기먹는푸딩을 손쉽게 다 죽인 이후에 사실 그놈들은 미끼였고 본대는 담수에서부터 번식하며 농토를 사막으로 만들고 담수를 더러운 젤리 덩어리로 만드는 흙젤리와 자갈젤리라는 걸 깨닫게 되겠지.

「세계의 〈군사〉 점수가 100점을 넘어 레벨이 1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산업〉 점수가 100점을 넘어 레벨이 1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군사 특성으론 『호전성』. 산업 특성으론 『확장형 건축』을 택했다. 『호전성』은 적이 강해도 별로 겁을 먹지 않게 되는 특성이고, 확장형 건축은 그냥 건물을 크게 지을 수 있게 되는 특성이다.

비문명 빌드를 택할 경우 나오는 특성도 생물 쪽을 강화시키는 것밖에 안 나와서 좋지. 아예 택할 수도 없는 특성은 등장하지 않으니까.

"비문명 빌드보단, '무지성' 빌드라고 해주시겠어요?"

"무지성 빌드보단 반지성주의 빌드라고 하고 싶군."

"반지성주의는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데요."

"무지성도 마찬가지지."

이름이야 마음대로 부르라지.

자 그러면 다음 세계 플레이어가 무슨 문명을 구축했든, 젤리와 푸딩 공세에 알아서 지옥을 구경하게 될 테니. 일단 오스왈드 오아시스 쪽 생태계도 확인해볼까.

어쨌든 디저트 사막의 공격력은 육식푸딩이 아니라 적의 토지를 사막화시키고 물을 쓰레기로 만드는 담수젤리들에게서 나오니까 말이다. 

6화. 샘의 근원

디저트 사막엔 넥타르 샘이 있는 대신 바위밖에 없다면(그것도 지금 젤리 생명체들에겐 나쁘진 않았지만) 오스왈드 사막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오아시스였다.

오아시스 주변의 생태계는 대단히 풍족했다. 지금은 젤리들 천지지만 넓이는 무려 5제곱킬로미터 정도? 사막이라면서 거의 절반을 오아시스가 덮고 있었던 거다.

오스왈드는 그 축복받은 지형에 힘입어 농사짓고 낚시하고 가축 키우고 하면서 그럭저럭 강력한 군대를 키울 수 있었던 거고.

"이 오아시스 근처에 자생하는 식물들, 오스왈드가 창조한 게 아니지?"

"예. 게임 시작부터 있던 생물입니다. 물고기를 비롯한 오아시스 내 생태계도 플레이어가 조금만 건드렸지 크게 차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다 젤리들에게 집어삼켜졌지만."

즉, 바위 사막밖에 없는 내 세계의 특권이 넥타르 샘이라면, 오스왈드가 받은 사막 세계의 특권은 이 풍요로운 오아시스 자체였던 거다.

나는 슬쩍 오아시스를 확인해봤다. 내 젤리들이 호수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죽여버린 건 아닌 듯, 원래부터 존재하던 물고기들과 개구리, 수초, 물풀 등은 여전히 젤리 틈에서 살아남아 있었다.

정작 오스왈드가 만든 종족이 못 먹는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오스왈드는 왜 이런 좋은 세계를 가지고 물풀을 먹고 오아시스에서 사는 수생 종족이 아니라 인간 같은 종족을 만든 거지?

이해가 잘 안 되는군. 나라면 당장 개구리 인간이나 하마를 만들어서 호수의 지배자가 되었을 텐데.

나는 이 생태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신성〉을 발휘했다.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어류]가 [젤리먹치]로 진화합니다.〉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양서류]가 [젤리먹구리]로 진화합니다.〉

"이곳의 물고기와 개구리도 진화시키는 건가요?"

"담수 젤리들은 지금 천적이 전혀 없는 상태야. 심지어 모래로 자신을 보호하는 기능조차 없는, 가장 원시적인 흙젤리와 자갈젤리지. 젤리들의 수를 조절하고 생태계의 다양성을 늘려줄 포식자들은 꼭 필요해."

이후의 진화는 그저 내버려두었다. 일부 젤리들은 모래들을 이용해서 점점 단단해질 것이고, 젤리먹치는 점점 단단한 치아와 튼튼한 비늘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젤리먹구리는 단단한 놈이 아니라 부드럽고 빠른 젤리를 먹게끔 진화해서 엄청난 헤엄 속도와 소화력을 갖추게 될 것이고 말이다.

앞서 천사에게 설명한 것처럼 여기 있는 물풀은 도태시키는 게 낫다. 순수한 식물에 원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순수한 식물은 다른 플레이어들이 손쉽게 적응할 것이다. 오리지널 생명체인 젤리들만 살리는 게 가장 적절하다.

〈신성〉으로 넥타르 오아시스에서 사는 〈수초젤리〉들을 담수에 적응할 수 있게끔 '식물'의 광합성 유전자를 넣었다. 이제 이놈들은 〈진짜수초젤리〉다.

"원래 수초젤리는 그럼 가짜였어요?"

"생물 작명은 다 이런식이야. 수초젤리는 그냥 수초 같은 생태를 지닌 젤리들이고, 이 진짜수초젤리들은 젤리의 생태에 더해서 엽록소를 통한 광합성을 하지. 식물이면서 젤리라고 할까······."

진짜수초젤리는 햇볕을 받고, 물을 먹고, 이산화탄소와 마력을 뱉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햇볕을 받고, 이산화탄소와 물을 먹고, 산소를 뱉는다.

결과적으로 물을 엄청나게 먹고, 마력과 산소를 뱉는 생물이 탄생한다. 이놈들이 늘려주는 물속 산소량은 물풀이 없어진 생태계에서 물고기와 개구리가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당장 먹을 게 없는 [고기먹는푸딩] 같은 육식성 푸딩들은 이런 물고기와 개구리를 잡아먹을 것이고, 물고기와 개구리, 푸딩은 서로 진화를 가속하면서 점차 커지고, 빨라지고, 공격적으로 변하면서 궁극적으론 어떤 물가에 존재하는 생명체도 다 거꾸러트리는 수중 생태계 파괴자가 될 것이다.

"이 게임이 원래 생물들도 맘껏 진화시켜서 노는 게임이긴 한데, 외래종 침투를 이렇게 적극적으로 전략으로 사용하는 플레이어는 처음 보네요."

"극단적인 〈생명〉 빌드에선 이것말고는 초반에 할 게 없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이것도 한계가 있어."

그러자 천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날 쳐다봤다.

"이게 한계가 있는 빌드라고요?"

"어느 지점을 넘어가면 〈기술〉이나 〈신비〉를 통한 문명의 발달이 〈생명〉의 성장률을 능가한다. 생명 중심 빌드는 딱 하나에 특화해서 성장하면 정말 강하고 효율적이지만, 기본적으로 종들을 진화시켜서 더 강력한 종으로 만드는 것이 전제되기 때문에 즉각적인 방향 전환이 대단히 어려워. 나 역시 〈신앙〉이 하나도 없어서 진화시키고 싶은 생명체들이 많은데도 지금 상당수는 방치하고 있는 형국이고."

결국 언젠가는 내가 뿌린 젤리 군단도 문명의 자체적인 역량으로 파괴할 수 있는 시점이 온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다음 세계, 어쩌면 다다음 세계까지는 젤리 군단 투하로 상대 생태계를 다 박살내고 이기겠지.

하지만 네 번째부터는 약간 힘들고, 다섯 번째부터는 아슬아슬하며, 여섯 번째부터는 거의 확실하게 그 세계의 문명이 자체 역량만으로 젤리 군단의 침입을 막을 수 있을 거다.

일곱 번째 충돌, 그러니까 대충 평균 레벨 7에 높은 레벨은 8~9. 낮은 것도 5는 되는 그 시점에서는 그 어떤 문명, 세계라도 젤리 투하로 인한 생태계 파괴에 대응하기 어렵지 않다.

인력을 투입해 노동력으로 다 밀어버리든.

마법을 사용해서 제거하든.

기술의 발달로 젤리들의 구조를 해석하거나, 혹은 제거할 방법을 찾든.

하다못해 신성력으로 젤리의 천적을 진화시켜서 대응하는 방법도 있다.

"그럼 멋지게 생태계를 구축한 다음 7번째 싸움에서 화려하게 지겠다는 소리는 아닐 거고. 문명을 드디어 세우나요?"

아. 니.

문명 건설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생태계 파괴로 승리하는 것만 전략이 아니다. 그때는 또 다른 전략이 있어.

아무튼, 난 담수 생태계 조성에 꽤 공을 들였다. 물풀들을 제거하고 수초젤리들을 투입하면서 기존 생명체들이 떼죽음 당하지 않게 조절하는 게 꽤 번거로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넥타르 오아시스 상태도 확인해야 하고, 그곳의 생태계가 서로 교류하면서 악영향을 끼치면 또 안 되고, 기존에 물풀 먹던 가축들 제거하고, 오스왈드 사막에 원래 자생하던 동물이나 새들 조금 개조해서 젤리 먹을 수 있게 해주고······.

그렇게 젤리 제거 작업을 하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기.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다만. 이 오스왈드 오아시스는 물이 어디서 들어오는 거지? 이렇게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데 말라붙어야 정상 아니야? 마법인가?"

"일단 확실히 하자면 공식적으로 '마법'이 아니라 '신비'라는 용어를 쓰고 있고요."

마. 법.

"아무튼, 그 해답을 드리자면······. 신의 시점을 조절하셔서 지하를 확인해 보시면 답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점을 내려서 지하를 봤다. 그리고 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원래 오아시스라는 건 사막에서 수만 년 동안 비가 내려서 누적된 지면의 지하수가 사막 위로 솟아오르는 거다. 규모는 다르지만 '샘'이나 '온천'하고 메커니즘에 별 차이는 없다.

오스왈드의 세계에는 그런 거대한 지하수층이 있었다.

"대수층 LV.1: "지하"에서 〈물〉 자원을 저장하는 지형입니다. 세계 전체에서 쏟아지는 비, 혹은 〈물〉 속성 마력을 저장합니다. 세계가 넓어질수록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많이 퍼내면 줄어들기도 합니다."

허어. 오스왈드, 정말 지형 하나는 끝내주게 받았군. 게임 끝날 때까지 물 걱정은 없었을 거다.

"정작 그 게임 한 판만에 끝내셨잖아요."

그건 중요하지 않다. 물이 이렇게 많이 있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넥타르 오아시스와 이 오스왈드 호수를 합치는 것도 좋겠는데.

그러면 거대한 습지가 생기고, 습지의 한쪽은 담수에 극도로 희석된 넥타르. 그리고 다른 쪽은 그나마 농후한 넥타르로 가득한 생태계가 형성될 거다.

그러면 어디보자. 바위젤리 계열의 생명체들을 이용해서 둘 사이에 존재하는 사막이란 물리적 장벽을 뚫어볼까. 운하를 건설하는 거지.

"문명을 키우면 금방 할 수 있는데······."

아. 이런, 그런데 이거 안 되겠군. 나는 지금 〈신앙〉도 〈정치〉도 없어서 생명체에게 명령을 내릴 수가 없다. 그냥 자연적인 확장으로 두 고립된 생태계가 합쳐치는 걸 기다릴 수밖에 없겠군.

"그냥 신앙심 투철하고 사회성 지닌 종족 창조하시면 안 되나요?"

괜찮은 소득을 얻었다. 나는 이 사실에 만족하며 나의 좁은 생태계를 둘러보았다. 아직 세계 충돌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으니 조금만 더 관리하면 될 텐데······.

그런데 문득, 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오스왈드의 오아시스는 사실 지하에 대수층이 있어서 위로 물이 솟아오른 거였다.

그러면 "넥타르 샘"은 무슨 원리로 넥타르를 생산하는 거지?

게임에서야 자연스럽게 레벨업하기 때문에 그냥 그런 존재가 있나보다 싶어서 넘어갔고 아무 신경 안 썼지만 생각해보면 되게 부자연스러운 지형이잖아.

나는 지하를 투시하는 기능으로 넥타르 샘을 생산하는 근원을 살폈다.

"넥타르 샘 LV4: 넥타르를 생산하는 지형입니다.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여 지속적으로 넥타르를 정제합니다."

이렇게 피상적인 설명 말고, 아예 이 지형이 넥타르라는 고밀도 에너지원을 생산하는 원리를 알고 싶다. 게임과는 달리 원리가 존재한다면 어쩌면 활용할 수 있을지도?

〈신성〉을 응집해서 원리를 살핀다. 그리고 알아낸 원리는 경악스러웠다.

"넥타르 샘 LV4: 넥타르를 생산하는 지형입니다.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여 지속적으로 넥타르를 정제합니다.

세부 설명: 생명의 에너지를 담은 순수한 정수. 넥타르를 생산하는 지형입니다. 〈마력〉이라고 하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에너지를 〈생명〉이라는 에너지로 전환한다. 신이라고 불렸던 존재의 파편으로, 그 신체가 조각난 지금도 신의 육체에 공급될 에너지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이거 진짜냐."

천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했다.

"예. 신의 파편입니다. 넥타르 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신비와 신성이 그렇지요. 플레이어가 지닌 〈신성〉 권능은 전부 그 진정한 신의 모방에 불과합니다."

아니. 그걸 두고 한 말이 아닌데. 진정한 신이고 그 파편이고 자시고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거 생물학적인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기관이라는 거 아니야.

나는 넥타르 샘을 향해 써볼 생각도 못했던 기술을 사용했다.

"어? 잠깐만. 플레이어님? 지금 뭐 하세요?"

〈진화〉.

빛이 뿜어졌다. 내가 가진 신성력이 모조리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탐욕스럽게 신성을 빨아들인 넥타르 샘은, 이윽고 내가 넣은 빛보다 더 많은 빛을 내었다.

번쩍! 하더니.

「〈진화〉를 쓰기에 적절한 대상이 아닙니다.」

신성이 돌아왔다. 난 조금 실망했다. 천사가 뒤에서 '상식'아니냐는 듯 지껄였다.

"당연히 못하죠. 본체에서 분리된 장기를 진화시켜서 새로운 생물로 만들진 못하잖아요?"

"식물은 꺾꽂이가 되는데."

"이건 안 돼요."

나는 많이 실망했다. 대단한 사기 빌드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바에 차라리 지성체나 창조하셔서······."

"아? 잠시만."

"뭐죠. 갑자기 또 뭔가 흉참한 생각을 하신 것 같은데."

흉참이 뭐야. 흉참이.

나는 게임 내내 아마 쓸 이유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기능을 떠올렸다.

생물학적 메커니즘 말고도 판타지에서 존재하는 이상한 개체들을 설명할 수 있었던 기능이다.

이 기술의 조건은 대상이 〈신비〉를 보유했거나, 혹은 〈생명〉, 그에 준하는 것일 것.

나는 다시 〈신성〉을 대량으로 소모해서 기술을 사용했다.

「"넥타르 샘"에 〈지성 부여〉를 사용합니다.」

"엥?"

천사의 당혹감과 함께 내가 가진 신성력이 다시금 모조리 빨려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꿈틀─!

넥타르 샘이 신성력에 반응하며 박동하기 시작했다.

7화. 세계 충돌 -두 번째-

탐욕스럽게 신성력을 빨아들이던 넥타르 샘은, 얼마 뒤 저절로 박동이 꺼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번엔 사용한 신성은 돌아오지 않았다.

「"넥타르 샘"에 사용한 〈지성 부여〉가 실패했습니다. 더 많은 신성을 부여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안 되나.

"당연히 안 되죠. 신의 파편에 지성을 부여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지성이 부여되면 생명체가 되고, 그러면 넥타르를 더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생명체로 진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럼 〈신앙〉 능력치를 올리세요. 물론 숭배해줄 지성체가 한 명도 없는데 〈신앙〉을 도대체 어떻게 모으는지는 둘째치고······. 진짜 용케 신앙 0으로도 생명체 진화하고 계시네요."

그야, 생명체의 근본적인 기능을 건드리는 방향이 아니라 충분히 가능한 기관만 만들어서 효율적으로 진화시키고 있으니까.

기본 신성력 자체도 꽤 높기도 하고, 진화 자체가 의외로 신앙이 많이 소모되는 기능도 아니고······. 관련 특성도 찍어뒀고.

「곧 세계 충돌이 시작됩니다. 살아남은 플레이어만이 다음 라운드로 진출합니다.」

벌써 이렇게 됐나?

"그렇군요. 솔직히 말해서, 낙승을 예상합니다. 지금 평균 점수가 첫 충돌로 절반이나 걸러서 한 1,100점 정도인데요."

「비인의 세계

생명 LV.4: 1,567

군사 LV.1: 132

산업 LV.1: 175

기술 LV.0: 0

문화 LV.0: 0

정치 LV.0: 0

신비 LV.0: 86

신앙 LV.0: 0

총점 LV.2: 1,960」

대략 2배. 어지간하면 안 질 것이다.

천사가 부연했다.

"사실, 비인 플레이어님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세계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

"네. 가장 군사력이 높은 세계는 군사력이 무려 1,400이 넘죠. 총점이 2,800점이 넘는 세계도 있고요."

그건 그것대로 신기하군. 도대체 어떻게 운영하면 그렇게 높은 거야?

"그렇지만, 그 플레이어들도 비인 님처럼 '비정상적 플레이'를 하고 계십니다. 전 우주에서 모아온 10억 이상의 플레이어 중에서는 그런 기이한 자들이 있을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제가 장담컨대 그 어떤 세계도 비인 님의 세계와 1:1로 붙어서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나마 '지지는 않았다.'정도가 최선이 아닐까······."

"한마디로, 난 지금 절대 지지 않는다?"

"네. 이 게임에 존재하는 그 어떤 세계도 '절대' 이 디저트 사막의 생명들을 자력으로 몰아낼 수 없습니다. 확신합니다."

그런 법이지.

하지만 내가 생명 하나에 몰빵한 동안, 다른 세력들은 각 분야의 시너지를 통해 폭발적인 수치 상승을 얻을 텐데, 나는 생명 하나를 아무리 붙잡아도 한계가 있다. 이기려면 다른 수단을 궁구해야 하는 법이다.

요컨대 총점 2,800점은 좀 신경 쓰이는군. 어떤 괴물이지······? 단순 계산해도 평균 350점이 넘는다는 거잖아. 난 게임에서 군사력이 높아봤자 400 넘으면 높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군사력이 350이면서 다른 모든 점수가 350점······.

혹은, 군사력이 이미 1,400점인 괴물. 작정하고 힘으로 내 생태계를 다 박살 낼 정도의 가공할 전투력.

어떤 세계인지 사전에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유감이지만, 그런 문제는 다음 경기를 이긴 다음 얻을 특성 카드를 보고 생각해볼까.

아무래도 망했다. 지구가 아닌 이세계. 메이야 왕국이라고 불린 곳을 통치했던 여왕 테이몽은 그렇게 생각했다.

여왕으로 그녀는 성군이었다. 그녀의 치세 동안 나라는 부강해졌고, 전 세계를 호령했으며 모든 국민이 행복했다.

그렇기에 늙어 죽어가던 몸. 천사가 찾아와 혹시 '신'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냐고 물었을 때 당연히 수락했다. 자신의 능력이라면 문제없이 신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잘못 생각했던 부분은, 자기가 세계 제일의 성군이라면 상대도 당연히 그쪽 세계 제일의 성군이라는 것이었다.

준비 기간 동안 신비, 신앙. 그리고 문화와 군사를 고르게 발전시킨 그녀의 첫 부족. 고작 200명도 안 되는 부족이 상대로 만난 것은 거의 비슷하게 발전한 국가였다.

테이몽의 부족은 신체능력이 약한 대신 신비에 능했고.

상대 플레이어의 부족은 신체능력이 압도적인 대신 신비 능력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로 처절하기 짝이 없는 혈전이 벌어졌다. 결국 승리를 거둔 건 내치로도 업적을 쌓았지만 직접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의 경험도 있었던 테이몽이었지만, 부족의 인구는 한 때 130점도 넘었는데 절반으로 줄었고, 양쪽 국토는 황폐해졌다.

그나마 빠르게 결판이 난 덕에 보호 기간은 많이 남아서 인구를 재건하고, 또 군사력을 비롯한 각종 인프라를 확충한 테이몽이었지만 점수는 유감스럽게도 평균 미만이었다.

「테이몽의 세계

생명 LV.1: 69

군사 LV.1: 147

산업 LV.0: 35

기술 LV.0: 67

문화 LV.0: 98

정치 LV.2: 233

신비 LV.1: 186

신앙 LV.1: 200

세계 총점 LV.1: 1,035」

평균이 1,100이라고 하니 조금 모자란다. 그리고 평균이 1,100이라는 소리는, 다시 말해 누군가는 1,100보다 밑돌고, 누군가는 1,100보다 한참 앞설 수도 있다는 것.

어쩌면 다들 아직도 고만고만해서 1,100 언저리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테이몽 세계의 가장 큰 약점은 인구였다. 정치와 신앙이 안정적이라 통제력은 완벽하고, 군사력도 높은 신비를 통해 단단하지만, 한 명 한 명 죽는 게 너무 치명적이다. 인구가 1레벨도 못 넘는다. 거기에 산업과 기술은 더 비참하다.

일단 협력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다. 〈항복〉말고도 〈동맹〉 기능도 있었으니. 동맹을 통해 일단 안정적으로 성장한다.

만약 거절한다면 비인도적인 방법은 싫어하지만······. 어떻게든 다음 전투에서 이겨야 했다. 그리고 상대 종족을 노예로 삼는다.

그리고 노예로 삼아서 산업과 기술, 인구를 확보하고, 나중에 천천히 노예에서 풀어준다.

지금은 그 방법뿐이다. 제발 상대가 자신과 우호적인 접촉을 하길 기도하며 테이몽은 상대 세계로 사절 격의 인재를 파견했다.

유능한 인재를 한 명 잃을 가능성이 있는 것만으로도 손해지만. 일단 정찰을 최우선으로 해야······.

그리고 테이몽은 상대 세계를 보고 오줌을 지릴 뻔했다. 육체가 있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히, 히이이이이익?!"

젤리. 젤리. 젤리밖에 없다.

"어? 뭐야? 저런 종족도 있어? 아니 전 차원에서 모아왔다지만 적어도 나와 비슷한 종족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테이몽도 대충 인간형이었기 때문에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파견한 정찰병보고 알아서 대처하라고 한 게 무색하게 그녀의 세계에도 젤리들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이, 일단 저 젤리들을 막아라!"

정식 명칭은 고기먹는푸딩이다. 젤리가 아니다.

그리고 고기먹는푸딩들은 유감스럽게도 끔찍하게 약했다.

테이몽이 지닌 우월한 신비는 간단히 원거리 마력 투사만으로 푸딩들을 가루로 만들 수 있었다.

"다행이다. 상대는 그렇게 강하지 않구나······."

그녀의 세계를 지탱하는 젖줄이자 핵심. 세계를 그대로 횡단해서 기이하게도 처음 흐른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꼬리를 문 뱀 같은 강이 며칠 안 가 젤리 범벅이 되고, 비옥한 범람원 농토가 모래로 뒤덮이기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된 시점은 아직 세계 사이의 '통로'가 열리기도 전이었다.

테이몽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상대 플레이어 '테이몽'이 〈항복〉을 요청합니다.」

「상대 플레이어 '테이몽'이 〈항복〉을 요청합니다.」

「상대 플레이어 '테이몽'이 〈항복〉을 요청합니다.」

「상대 플레이어 '테이몽'이 〈항복〉을 요청합니다.」

「상대 플레이어 '테이몽'이 〈항복〉을 요청합니다.」

차단해야겠다. 도대체 얼마나 항복 버튼을 연타하고 있는 거야.

"굳이 말하자면 항복이라고 외치고 있는 거겠지만요."

「플레이어 '테이몽'을 차단했습니다.」

테이몽의 세계도 1년을 못 버텼다. 사실 추수철까지 기다릴 것도 없었다.

육식성푸딩들을 한 수백 마리 투하하니 인구가 적은 상대 세계는 전투력이 고갈되어서 얼마 뒤에 푸딩 상대로 생존 서바이벌을 찍어야 했거든.

「플레이어 '테이몽'과의 세계 충돌에서 승리하셨습니다.」

「플레이어의 세계가 넓어집니다.」

두 세계가 이어 붙는다. 기괴하게도 상대 세계는 강이 시작점과 끝이 구분이 없었다. 아니 그럼 도대체 어떤 원리로 강이 흐르는 거야? 

신성력을 발휘하면 세계 지형을 조금 편집할 수 있었다. 나는 그 기이한 강을 잘 조작해서 오스왈드 오아시스로 물이 흘러 들어가게 했다.

그러자 물이 오스왈드 오아시스에서 나와서 한바퀴 돌아 오아시스로 돌아가는 기이한 구조가 되고, 내 세계는 넓이가 2배가 되어서 표면적이 40제곱킬로미터 정도가 됐다.

아직도 상대로 사막만 나오는군. 40제곱킬로미터면 사실 사막 기준으론 너무 좁긴 하지. 그래도 저쪽은 좀 개간을 해서 그런지 사막보다는 초원이라는 느낌이다만.

"낙승이었군요."

"상대가 약했어."

"그것도 맞아요. 아무래도 지난번 싸움에서 너무 고생한 모양인데요. 테이몽 플레이어가 상대의 항복을 받아내서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면 어쩌면."

어쩌면?

"그래도 비인님의 세계에 좀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그렇지. 하지만 현실은 짓밟히는 거다.

첫 승리는 실력. 둘째 승리는 운이 좋았다곤 하지만 약간 운이 나빴어도 승리하긴 했을 거다.

그럼 운이 좋았다느니 나빴다느니 하는 말은 할 필요가 없다.

당장 다음 상대가 어쩌면 나조차 능가하거나, 혹은 내 생태계를 완벽히 카운터치는 세계일 수도 있지. 유감스럽지만 그러면 그것도 운명이라고 받아들일 뿐이다.

어쨌든 승리 보상을 받으려고 특성을 내려달라고 하려 했는데, 천사가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비인님. 두 번째 승리를 거두었으니 공지할 것이 있습니다."

음?

"지금부터는 다른 플레이어와의 교류기능이 해금됩니다."

"교류 기능?"

"예. 단순히 생각해도 매번 절반씩 탈락하는 게임에서 2번 승리했다는 이야기는, 상위 25%라는 이야기. 쭉정이들을 걸러낸 다음이니. 다른 플레이어들과 교류할 자격이 있습니다."

쭉정이라니 말이 심하구만.

"교류라고 해도······. 어차피 마지막 남은 한 명이 될 때까지 싸우는 건데 교류란 건 뭘 하는 거지?"

"게임이라는 형태로 해보셨으니 커뮤니티 활동······이라고 생각하면 쉬울까요. 단순하게 따져서 어차피 절대다수의 플레이어들과는 절대 만날 수 없으니까 단순히 친분 활동을 나눌 수도 있고요.

그게 아니면 사전에 동맹을 맺기로 하고 다음 세계 충돌 때 해당 세계와 충돌하기로 사전에 약속하거나, 혹은 마음에 들지 않는 플레이어, 혹은 탐나는 영토를 가진 플레이어를 공격할 수도 있죠."

팀플레이, 아니 더 악질적으로 표현하면 티밍인가.

어느 쪽이든 별로 안 끌리는데. 그보다 왜 불결한 지성체들과 대화를 나눠야 하지.

"그게 아니면 세계에서 서로 만들거나 산출된 창조물, 요컨대 기술이나 문화, 생명체 등을 공유할 수도 있습니다. 단순 공유가 아니라 판매의 형태입니다."

"판매라면 화폐로는 뭘 쓰지?"

"'점수'입니다. 실제로 점수를 쓰는 건 아니고요. 매 충돌이 끝날 때마다 '점수'만큼의 화폐. 문자 그대로 [포인트]가 생깁니다. 즉, 점수 총점이 높으면 많은 것을 살 수 있고, 점수 총점이 낮더라도 훌륭한 기술이나 창조물을 보유하고 있다면 그런 것을 팔아치워서 더 큰 이득을 얻는 게 가능합니다."

"쓰지 않은 포인트는?"

"다음 게임에 이월됩니다."

"포인트로는 또 뭘 할 수 있지? 요컨대 상점에서 신규 특성이나 내 세계에 없는 자원을 중립 상점에서 사는 게 가능한가?"

"특성 구매는 불가능합니다. 자원이나 창조물은 오로지 다른 플레이어에게서 교환하거나 구매하는 방법 뿐입니다. 서로의 세계 간에 차원문이 열리는 형태로 물자를 교환하면 됩니다."

"교환밖에 안 되는 용도의 화폐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으니 애초에 교환이 일어나지 않을 텐데?"

"아. 당연히 다른 기능이 있죠. 3라운드 이후 게임 하차 시 포인트가 많으면 좋습니다. 자세히 설명해드릴까요?"

아니 됐다. 뭔가 영혼 소멸을 방지하거나 하는 기능이라도 있는 거겠지.

아무튼 그 메커니즘이라면, 사실상 강제참여 아닌가?

요컨대 쓰지 않은 포인트가 이월되더라도 '저축'이라는 개념이 불가능하다. 매 게임마다 점수가 폭증하는 구조니까.

나만 해도 첫 충돌 때는 568점이었는데 두 번째 충돌에서는 1,960이었다. 인플레이션이 심하다. 다시 말해 그날 받은 화폐를 다음 충돌까지 다 쓰지 못하면 헐값이 될 것.

그 전에 다음 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걸 생각하면 서로간의 교류를 확대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상업과 교역의 이치에 따라서 교류를 많이 한 쪽이 무조건 더 강해지겠지.

"생각하신 대로입니다. 기본적으로 플레이어 간의 교류를 강제하려고 만든 시스템이니까요."

실망스럽군. 싱글 플레이어에게 좀 가혹하다.

"낯가림이 심하실 것 같긴 했습니다. 다른 플레이어의 항복을 받아줬다면 대신 교류, 교역을 하게끔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글쎄."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점수를 쓸 방법은 그거 말고도 있으니까요."

그럼 좋아. 별로 기대하는 방법은 아닐 것 같지만.

「승리 보상으로 신규 세계 특성을 획득합니다.」

일단 이것부터 받고 생각하지. 나는 내 세계를 만들어야 하니까.

"자. 제가 비인님의 '문명'에 가장 도움 될 세 가지를 꼽아보았습니다."

집요하군.

『뛰어난 손재주: 창조물이 도구를 제작하는데 능해집니다 〈산업〉발전에 유리해집니다.』

『요정화: 세계에 존재하는 지형, 구조물, 저지능 생명체, 혹은 신비를 지닌 개체를 불멸의 요정으로 만듭니다. 요정은 플레이어의 세계와 문명, 창조물을 위해 절대적으로 헌신하는 지성체입니다.』

『고지능: 창조물의 지능이 대폭 상승합니다. 지능이 높은 종족은 〈정치〉와 〈기술〉 발전에 유리해집니다.』

아주 작정하고 문명을 만들라고 밀어주는군. 이 쓰레기들 중 대체 뭘 골라야······.

잠시만, 이거 하나 설명이 묘한데.

'지형'과 '구조물' '신비를 지닌 개체'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요정화』로 할게."

"흐음. 강과 호수, 혹은 산호초의 요정을 만드시려는 선택을······아. 아아아악!"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한 천사의 비명이고 자시고, 난 『요정화』 카드를 뽑아서 즉각 그 권능을 사용했다.

「[넥타르 샘]에 『요정화』를 사용합니다.」

꿈틀─! 꿈틀─! 꿈틀─!

넥타르 샘, 그 신의 파편이라는 것이 박동하며 내 생태계에선 감히 존재할 수 없었던 불경한 지성이 깃들기 시작했다.

8화. 압호주스

특성이 뭘까? 신성은 뭘까? 게임에서야 그냥 게임 내 수식과 데이터를 조작하는 일종의 코드였겠지만, 현실이 되어버린 지금 특성과 신성이 도대체 어떤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지 난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도 특성이나 신성이나 둘다 비슷하지 않을까. 일종의 초월적인, 원리를 모르겠으나 결과를 도출하는 기이한 힘.

그렇다면 획득 즉시 영구적으로 세계 전체에 이점을 주는 특성은 어떤 의미로는 무한대의 신성력을 지닌 존재라 할 수 있지도 않을까.

「『요정화』를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넥타르 샘"의 레벨이 너무 높습니다.」

아니었다. 무한대의 신성력은 개뿔.

레벨이라는 게 그럼 대체 뭔지도 궁금해진다. '점수'도.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산출하는 걸까.

「[넥타르 샘의 요정]을 만드는 대가로 "넥타르 샘"의 레벨이 떨어집니다.」

어? 안 돼. 그럼 생태계 다 망가져. 생태계가 다 망가질 바에는······.

"내 생태계에 존재하는 생물들을 바치는 걸로 그 대가를 대신할 수 없나?"

중요한 일이라는 건 아는지 천사가 다급히 답했다.

"〈생명〉 점수 926만큼의 생명체를 바치는 조건이라면 가능합니다."

점수가 지금 1,600에 가까우니 대충 세계의 75% 정도인가? 4레벨에 오르는데 필요한 만큼의 생명 점수군.

"아무 생명체나 무작위로 바치는 대신 모든 지역, 모든 종의 개체가 고르게 죽게 할 수도 있나?"

"그건 현재 가진 〈신성〉 전부와 〈생명〉 점수 233점을 더 소모하는 조건이라면 가능합니다."

"좋아. 그렇게 해줘."

쩌어억.

넥타르 샘에 입이 생긴 듯 가장 깊은 곳이 갈라진다. 

이윽고 마치 흡입하듯 넥타르 오아시스에 존재하는 물과 젤리, 푸딩, 그리고 구미와 겔, 토핑을 모조리 삼키고, 그걸로도 모자라 가공할 흡입력으로 물고기와 개구리, 바위젤리들과 조금 전 흡수한 상대 세계에 존재했던 가축과 생명체, 벌레까지 모조리 생태계 중심에 있는 넥타르 샘의 아가리에 들어간다.

꿈틀─! 꿈틀─! 꿈틀─!

탐욕스럽게 생명체들을 빨아들이고 육체를 생성한다. 신의 파편이라는 것이 허언은 아닌지 잠시 정체모를 신의 형상이 떠올랐다가, 이내 내가 생각하는 요정의 형태로 빚어진다.

부릅!

그것이 커다란 한 개의 젤리질 수정체로 된 눈을 뜨고, 크게 입을 벌렸다. 이윽고 하늘을 향해 촉수들과 섬모들을 뻗었다.

모조리 젤리, 푸딩, 겔 등의 한천질로 된, 안과 밖이라는 형체가 구분되지 않는 부정형의 개체였다.

「[넥타르 샘의 요정]이 창조되었습니다.」

그것은 막대한 생명을 먹어치운 만큼 박동하는 생명력, 넥타르 샘의 요정은 미칠듯이 주변 마력과 물, 생명체들을 자기 촉수와 입으로 게걸스럽게 삼키더니, 이내 짙은 넥타르를 바깥으로 뱉었다.

이윽고 내가 들을 수 있는 언어로 소리쳤다.

[이야아아아아아! 나를 빚으신 창조주를 찬양하나이다아아아아아!]

무한히 생명을 만들고 무한히 생명의 정수를 낳는 저 위엄 넘치는 모습······.

「[넥타르 샘의 요정]의 이름을 뭘로 할까요?」

"압호주스(Abhojuth)."

내 세계의 요정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지.

"요정이 아니라 뒤틀린 고대의 존재에게 붙어야 적절한 이름 같은데요."

천사 같지도 않은 것에게 그 소리를 들으니 참신하군.

「[압호주스]를 창조했습니다.」

「압호주스 〈넥타르 샘의 요정〉

체력 LV.2: 350

전투 LV.0: 27

솜씨 LV.0: 27

지능 LV.0: 17

매력 LV.0: 68

정신 LV.0: 46

권능 LV.3: 514

마력 LV.1: 110

개체 총점 LV.1: 1,159」

내 세계도 그렇지만, 이놈도 정말 극단적인 능력치였다.

게임 내에서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능력치 평균이 100이었다.

뭐, 판타지 세계라서 계속 강해질 수 있기도 하고, 지능이라는 게 워낙 포괄적인 수치라서 지능이 200이라고 평범한 인간보다 2배 똑똑한 게 아니지만······.

어쨌든 이놈은 사람 3.5명분의 체중.

기껏해야 소형견 정도의 전투력

닭보다 못한 솜씨.

똥개보다는 낫고 보더 콜리보단 못한 지능.

좀 못생긴 인간 정도의 매력(이거 흉측한 외모로 상대를 공포스럽게 하거나 카리스마, 패기 같은 것도 포함하는 개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취약한 정신.

그리고 압도적인 권능을 지니고 있다.

당연히 그 압도적인 권능은 뻔하다.

"압호주스. 넥타르를 생산해라."

[이야이야아아아아아 알겠습니다아아아 나의 신이시여어어어어어!]

이 자식 좀 시끄럽다고 할까. 목소리가 많이 떨리고 기괴하군.

압호주스는 눈과 입을 크게 뜨더니 마력을 있는 대로 흡입하고는, 체내의 촉수들로 넥타르를 마구 뿜어내었다.

이제 호수 바닥이 아니라 바닥에서부터 뻗은 촉수를 통해서 상부에도 직접적으로 넥타르를 공급할 수 있었다.

바닥에 심하게 고여 있어서 희석된 넥타르밖에 먹지 못했던 상층부의 젤리들에겐 대단한 희소식이다.

하지만 저 촉수의 기능은 그뿐만이 아니다. 수면 바깥으로 뻗은 촉수로 공기와 물, 열과 빛을 빨아들여 눈을 통해 바닥에서 발산하고, 촉수들을 호수 내에서 규칙적으로 휘저어주어 해류 비슷한 것을 만든다.

다시 말해 호수 내 물, 공기, 넥타르, 빛, 열을 전부 섞어준다. 그 덕에 상층부, 중층부, 하층부, 바닥까지 전부 살기 힘들었던 넥타르 오아시스 내 환경이 균일해져, 오아시스의 생명체들은 각자 자기가 가장 필요한 요소를 얻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압호주스는 바닥 아래로 뻗은 촉수를 통해 바닥에 쌓여 있는 모래도 퍼내고, 산호 등의 위치도 적절히 바꿔가며 더욱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마치 어항을 관리하는 조경사처럼 압호주스는 넥타르 오아시스의 내의 생태계를 아름답고 균형 잡히게 관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니, 당연히 오아시스 내 생명이 미칠듯이 폭증했다.

폭증한 생명체들은 더 많은 물을, 마력을 내뱉고 압호주스는 마력을 마시고 더 많은 넥타르를 생산, 고마력으로 인해 과도 증식한 썬토핑으로 인해 호수는 찬란하게 빛을 내뿜으며 끓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요소가 충족된 젤리들은 암반을 미친듯이 파고 들어갔고, 압호주스는 더 많은 촉수를 뻗어 계속 변하는 넥타르 오아시스의 환경을 끊임없이 조절한다.

「[넥타르 샘]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이제 5레벨이 된 넥타르 샘은 지름은 3km 정도에 가장 깊은 곳 수심은 60미터. 하지만 평균 수심이 훨씬 깊어졌으니 지름만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넓어졌다. 

넥타르 샘이 워낙 넓어져서 처음 내가 받은 바위 사막은 거의 파먹어버렸고, 이제 조금만 더 넓어지면 오스왈드 사막의 담수호도 그대로 꿀꺽 삼켜버린다.

그럼 그냥 삼키게 두자. 넥타르가 무슨 오염 물질도 아니고, 담수호의 생물들도 희석된 넥타르를 먹을 수 있으면 좋지.

「[넥타르 샘]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6레벨이 되어서 2배로 커진 넥타르 오아시스는 이제 원래 담수층과 연결되어 있었던 구역과 압호주스가 관리하는 짙은 넥타르 구역으로 나뉘었다.

오스왈드 사막과 내 사막도 그 사이에 존재하던 바위와 모래 등등이 전부 파괴되어서 하나로 연결됐고, 그렇게 파괴된 바위와 모래는 모조리 다른 생명체들의 껍질, 혹은 그런 껍질의 잔해로 바뀌었다.

이제 오스왈드 사막도 오스왈드 오아시스도 없다. 그저 디저트 사막과 그 위에 있는 넥타르 습지 단 하나만 있을 뿐이다.

"이름도 남기지 못하게 된 오스왈드가 불쌍해요."

"처음 죽는 놈은 그런 법이지."

이곳은 지켜보기만 해도 알아서 〈생명〉점수가 뿜어져 나올 것이다. 대량의 생명체들을 압호주스를 만드는데 소모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생태계는 더욱 건강해졌다.

담수에 살았던 물고기와 개구리들도 넥타르라는 초고영양물질의 유입과 새롭게 유입된 젤리와 푸딩들과 생존경쟁을 하면서 커지거나, 오히려 작고 빨라지거나 하면서 진화를 거듭했다.

내가 손댈 것도 없이, 정확히는 손댔다가는 오히려 균형이 망가질 듯이 빠르게 말이다.

[나의 신이시여어어어어어! 제가 잘 하고 있습니까아아아아아아!]

"아주 훌륭해. 너 진짜로 잘하고 있어."

[감사하나이다아아아아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유능한 관리자였다. 일단 난 지성체의 개입 없이 무너지는 생태계보다는 알아서 유지되는 생태계를 더 좋아하지만.

"취향 진짜 확고하시네요. 압호주스도 지성체인데 그건 괜찮아요?"

"돌고래 수준까진 상관없어. 문명을 이루고 갈등을 만드는 지성체가 싫은 거라서."

"허어."

"요컨대 난 개미들의 문명은 꽤 좋아하지."

"돌고래 중 일부는 경계선 지능의 인간보다 똑똑한 걸 생각하면, 그냥 인간이 싫은 거군요."

그런 거지. 착하고 선량한 고지능 유기체가 건설한 문명은 좋아할지도.

「세계의 〈신비〉 점수가 100점을 넘어 레벨이 1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신앙〉 점수가 100점을 넘어 레벨이 1로 상승했습니다.」

아. 압호주스 때문에 이 두 점수도 상승했구나.

일단은 지성체고, 또 내 세계에 귀속된 요정이기 때문에 흡수한 마력 중 일부를 순수한 넥타르가 아닌 〈신비〉와 〈신앙〉 자원으로 생산해서 내게 제공한 모양이다.

〈신비〉 특성으론 『마력압 증가』를 택했다. 세계 전체의 마력이 증가하는 소소한 특성이다. 상대가 마법을 쓰는 경우에도 이득이 되지만, 어차피 내 세계의 마력은 모조리 압호주스가 집어삼키고 있으니 뭐.

〈신앙〉은 선택할 수 있는 특성이 없다. 게임을 할 때부터 그랬다.

다만 신앙 레벨과 점수가 높으면 플레이어가 사용할 수 있는 신성력의 총량과 회복력, 위력 등등이 높아졌다.

다시 말해 저 압호주스 하나로 내 생태계에 더 적극적이고 과감한 개입을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요정 좋네. 생태계에 하나쯤은 둬도 좋겠다.

"아냐······. 이건 내가 바라던 문명을 가호하는 요정이 아니라고······."

천사가 뭔가 아니라는 듯 연거푸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이놈은 그냥 게임을 할 줄 모른다.

압호주스를 만드느라 대규모로 소진된 내 생명들을 관리할 겸, 지금도 계속 상승하고 있는 신성력을 활용할 겸 난 아주 열심히 세계 내 시간을 가속시키고, 생태계에 꼭 필요한데 멸종하려는 놈들을 개선시키고, 생태계에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은데 늘어난 놈들을 잡아먹는 천적과 포식자들을 등장시켰다.

얼마나 열중했을까. 감동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세계의 〈생명〉 점수가 1,945점을 넘어 레벨이 5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대량으로 생명체를 소모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보다도 능가한 것이다. 나는 특성 카드 보여달라는 의미로 천사를 쳐다봤다.

천사는 미묘한 표정으로 세 장의 특성 카드를 꺼냈다.

"으음······. 지금 상황이라면 추천해드릴 수 있는 건 이 정도일까요."

『(선택)지성체화: 종 하나의 지능이 문명을 이룰 만큼 높아집니다. 이미 지능이 높은 생명체라면 지능이 추가로 증가합니다.』

『(선택)근력 향상: 종 하나의 근력이 강해집니다.』

『(넥타르젤리)왕성한 신진대사 2: 생명체의 생명활동이 더욱 빨라집니다. 에너지 소모량은 상승합니다.』

"왕성한 신진대사 2로."

"고민이 없으시네요."

"고민이 없다기보단, 선택지가 없었지."

"네?"

천사의 반문에 나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했다.

"지성체화는 지금 해봤자 의미가 없어. 세계의 모든 자원을 생태계의 조화를 이루는데 쓰고 있는데 머리 좋아져서 뭐해? 어차피 지금은 지성체가 생겨도 문명 못 세워. 그 단계는 넘었어.

근력 향상도 마찬가지. 어떤 종의 근력이 강해진다는 건, 뒤집어 말하면 다른 모든 종의 근력이 약해지는 거랑 똑같거든. 내가 종 하나만 중점적으로 키우는 플레이어라면 모를까, 생태계의 조화 자체를 중점에 두고 플레이하는 이상 고를 수 없는 선택지였지."

그러니까 넥타르젤리의 신진대사를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선택지가 없었던 거다.

뭐, 극단적 생태계 빌드를 하다보면 자주 있는 일이라 불만은 없다.

"으음. 그렇군요. 확실히 그러면 특성을 주는 것 자체가 좀 문제가. 으음."

지금 내 세계는 압호주스가 알아서 관리할 테니 이제 커뮤니티인가 하는 거나 좀 볼까? 테이몽 강과 담수 구역에 살아갈 물고기 종류를 더 추가하고 싶군.

그렇게 마음먹자마자, 바로 내 앞에 인터넷 화면 같은 것이 떠올랐다.

난 자연스럽게 있지도 않은 마우스와 키보드로 잡듯이 그 화면을 조작했다.

싱싱한 놈들을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

9화. 커뮤니티

화면은 지구의 커뮤니티 사이트를 모방한 듯한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었다. 이건 뭐 나에게 맞춰준 거겠지.

각 게시글에는 수많은 태그가 달려 있었고, 그 태그를 따로 모아볼 수 있는 게시판이 있었다.

나랑 가장 가까운 태그를 몇 개 꼽아보자면. [사막] [생명 점수] [생물] [신비] [오염] 정도려나.

그러자 역시 남은 플레이어가 2억이 넘어서 그런지 게시글이 어마어마하게 떴다. 난 아무거나 클릭해봤다.

「제목: 아무리 그래도 사막 세계는 너무하지 않냐???

내용: 첫 스타팅 지점이 모래와 선인장밖에 없는 땡사막이라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그나마 마력압은 미칠듯이 높은 덕에 정령 기반 생명체와 문명 만들어서 겨우 두 번 이겼네. 근데 걔들도 다 사막임 ㅋㅋㅋ」

"이 초성체로 달린 'ㅋㅋㅋ'는."

"의역입니다. 저 플레이어는 다른 차원에서 건너온 규소 기반 유기체네요."

댓글이 의외로 좀 달렸는데, 댓글이 더 가관이었다.

「댓글 1: 니 사막엔 선인장이 있어??? 나는 그것도 없는 쌩자갈인데?

댓글 2: 제발 내 세계랑 바꿔줘라. 난 마력압 낮아서 정령 문명도 못 만들었음.

댓글 3: 두 번째 상대 땅에는 그나마 풀이라도 있었다. 다음 상대 제발 초원초원초원초원초원」

난 잠깐 궁금해져서 물었다.

"얘들은 대체 뭔 땅을 받은 거야?"

천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다들 괜히 약한 소리 하는 거예요. 예를 들자면 게시글 올린 플레이어는 선인장에서 모든 영양분을 얻을 수 있고요. 첫 번째 댓글 달린 플레이어의 세계에는 신의 잔해와 유적으로 가득합니다.

두 번째 댓글 달린 플레이어는 대신 초원이 붙어 있어서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고요.

세 번째 플레이어의 세계는 마력압이 미칠듯이 높아서 마도문명을 구축 가능합니다."

그래도 사막 유저들의 고통은 대충 다 비슷했다. '비가 1년에 1번 내린다.' '정령 문명을 키우고 싶은데 불과 빛 정령밖에 못 키운다.' '〈기술〉 점수를 올릴 방법이 없다.' '아니 니들 사막은 모래냐? 난 눈도 내리지 않는 극지방이다.' 등등. 

그렇지만, 나처럼 불모지인 대신 신의 파편을 얻거나, 강력한 신비가 깃들든가, 아니면 사막에서 살 수 있는 생명체, 혹은 이미 문명을 가진 등, 다양한 보너스를 얻은 것 같았다.

잠시 다른 플레이어도 봤다. 내 생각에 가장 살기 좋은 지형······. 초원인가?

초원 플레이어 역시 징징거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제목: 제발 언덕 하나만 주세요

내용: 지금 두 번 이겼는데 세계에 굴곡이 단 하나도 없어요······. 언덕은커녕 흙더미도 없는 이 땅에서 도대체 어떻게 산업과 기술을 발전시키란 말입니까······.

댓글 1: 저기 보니까 드넓은 벌판에 양만 키워도 천 명은 배터지게 먹고 사시겠는데요? 님 양심이?

댓글 2: 저랑 협업하시는 거 어떠십니까? 저 언덕과 양은 있는데 초원이 없거든요? 두 세계를 합치면 진짜 끝내주는 땅이 될 것 같지 않으십니까? 관심 있으면 연락 좀······.」

"역시 인간은 쓰레기군."

"왜 결론이 그렇게 나오죠. 인간이 아닌 사람들이 더 많을 텐데."

"그럼 지성체는 쓰레기라고 하지."

다들 징징이였다. 다들 자기가 받은 땅이 세상에서 가장 나쁘다는 듯 온갖 불만을 토해냈다.

물론 실제로 불만을 가진 것도 사실이겠지만, 조금만 지나도 절반, 또 절반 계속 쳐내지면서 세계들이 합쳐지고 다양한 지형, 다양한 생태계가 나타나겠지.

그때 되면 저놈들은 또 다른 식으로 징징댈 것이 뻔했다..

커뮤니티는 만약 빠져들면 아마 내 세계 관리하는 것도 잊고 온종일 커뮤니티만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에. 난 이 게시판은 여기서 아예 시선을 떼기로 했다.

중요한 건 내 생태계를 풍요롭게 만들어줄 다른 플레이어들의 생명체들을 구매하는 거다.

[여분 포인트: 2,012]

세계 충돌이 있기 전에는 1,960이었는데 오히려 충돌 이후 늘었다. 딱 승리한 시점을 기준으로 포인트를 정산하는지 2,012점. 아마도 꽤 상위권일 테니까 원하는 생물은 아무거나 살 수 있지 않으려나.

"다른 세계의 요소를 구매하는 것은 대단히 권장하는 플레이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제대로 커뮤니티 활동을 하신다고 할 수 있죠."

[더 판타지 월드 크리에이터], 줄여서 판월은 문명 시뮬레이션이 아닌 세계 시뮬레이션.

유명한 문명 시뮬레이션 게임과는 달리 세계의 마법과 신비, 과학기술, 그리고 생태계 전체를 구축할 수 있는 게임이었다.

"그래도 확실히 말하는데 근간은 문명 시뮬레이션 게임이었습니다. 게임 내의 모든 요소는 지성체가 문명을 이루고 발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천사는 저렇게 주장하지만, 지질학적인 단위로 보면 문명이라는 건 아주 짧은 시기만 존재했다.

진정 세계 시뮬레이션이라면 판타지 세계이기에 가능한 마력-생태학이라는 환경에 주목하는 게 마땅하다.

"저기 주최측이 그 게임의 개발자들이라는 건 인지하고 계시죠?"

게임 개발자는 의외로 게임을 못한다는 사실만 말할 수밖에 없겠군. 게임의 진정한 의도를 제작자보다 플레이어가 더 잘 파악하는 경우가 있는 법이지.

어쨌든, 그런 점에서 판월은 게임 내에 존재하는 생명체를 단순한 '자원'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로 설명했다.

요컨대 풀, 풀을 먹는 소, 소를 먹는 인간. 이 셋만 만든다고 치자.

여기서 '소'는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다. '풀' 역시 소에게 먹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지. 실제로 신이 그럴 의도로 창조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게임 내에서는 돌연변이와 진화가 엄청나게 빨랐다.(생각해보니 지금도 그렇긴 하다. 마력이라는 신비한 힘 탓인가.)

소가 풀을 먹기 시작한다면, 풀은 독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그럼 소는 체격을 줄이고 튼튼한 내장을 만든다.

그러면 인간은? 소 크기가 작아졌고 소가 독을 축적하기 시작하니 또 신체 구조를 바꿔야 한다.

그 과정이 거듭되면 지독한 독초, 독초를 먹는 소, 그리고 그런 소를 먹는 독 먹는 난쟁이 인간.

이렇게 거듭되고. 그 과정이 더 가속되면 인간은 이제 문명을 이루는 것조차 포기할 정도로 지능이 낮아지고 독극물 체액으로 가득찬 소를 사냥하는데 특화된 육식성 포식자로 진화해 버린다.

게임을 잘 못하는 초보자들이 흔히 겪는 경우지. 자기 문명을 위해서 작위적으로 기능이 붙어 있는 동물이나 노예 종족 같은 걸 만들었다가, 그 노예 종족이나 창조된 동물이 마력으로 인해 돌연변이가 거듭되더니 결국 써먹지도 못하는 괴생명체가 되는 꼴을 봐야 했다.

이걸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좀 전의 예시로 설명하자면 풀의 종류를 늘려야 한다. 그리고 풀을 먹는 생물종도 늘리고, 거꾸로 풀의 번식을 도와주는 공생관계 생물도 늘려야 한다.

그리고 그 생물들을 잡아먹는 생물도 만들고, 그 생물들을 잡아먹는 생물도 만들고······. 그 과정을 거듭해야 겨우 생태계가 건강해진다.

여러 종류의 풀을 먹기에 굳이 독 말고도 다른 생존전략을 만들기 시작하는 다양한 풀들.

여러 종류의 풀을 먹어야 하니까 큰 체격에 튼튼한 내장을 지닌 소.

그런 소를 기르는 인간. 소가 안 먹는 풀들을 먹는 소형 초식동물, 벌레. 벌레 잡아먹는 새. 그런 새들을 잡아먹는 인간. 뭐 이런 식으로 생태계 균형이 맞는 것이다.

게임 실력은 거기서도 갈렸다. 괜히 〈생명〉 점수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인구' 점수가 아니라 〈생명〉점수다. 생태계 전체의 건강함. 그 규모와 질을 측정하는 지표.

내 생태계는 지금 엄밀히 말하면 점수만 높지 건강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 우주의 플레이어들이 만들어낸 자작 생명체들을 내 세계에 들여놓고 조금 개조해서 써먹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어라? 지금 비인 님의 생태계가 건강한 편이 아닌가요? 솔직히 지금 남은 2억 명 넘은 플레이어 중 단연 〈생명〉 점수는 1등이신데 건강하지 않다면 대체 어떤 세계가 건강한 것인지······?"

일단 내 세계 자체가 너무 좁다는 얘기를 하고 싶군.

"그거야 아직 2번밖에 못 이겼으니까요."

그래도 40제곱킬로미터면 그럭저럭 넓은 편이지. 특히 내 생태계는 사실상 수생 생태계라서 넓이보다는 '부피'로 측정해야 온전한 생태계가 측정되기도 하고.

요컨대 내가 직접 창조한 디저트 군단의 결함으로 예를 들어볼까.

"디저트 군단이 결국 정식 명칭이 되어버렸군요."

디저트 군단은 얼핏 보기에 평범한 유기체가 섭취할 수 없는 생명체인 주제에, 자기네들은 다른 유기체를 섭취할 수 있으니 무적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디저트 군단에겐 지금 진짜 끔찍한 단점이 하나 있다. 화학적 방어기제에 심각한 결함이 있단 것이다.

"······?"

"간단하게 보자면, 지금 내 습지에서 담수호 구역을 봐라. 저 담수호에 지금 젤리들이나 푸딩이 자주 보이나?"

"그러고 보니 담수 지역에 젤리나 푸딩들이 잘 안 가네요?"

"저거, 내가 살펴보니까 물이 탁해서 안 가는 거다."

"예? 지금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은데요?"

맞다. 지구의 기준으로 치면 1급수지. 인간이 바로 식수로 써도 되는 정도.

그런데 1급수라고 오염이 안 된 상태인 건 아니다. 미생물도 살고, 여러 유기물이 섞여 있다.

한마디로, 물고기와 개구리가 싸는 오줌과 똥 같은 것, 강에서 흘러들어오는 때 같은 것 때문에 디저트 군단은 지금 담수호에서 못 살고 있어.

"세상에."

그나마 버티는 건 고기먹는푸딩 같은 종.

『육식』 특성 덕에 그런 유기물에 대한 저항력이 생겼다.

대신 점점 오염되는 생태계에 적응하느라 고기먹는푸딩도 '평범한' 생명체로 진화하고 있다.

다른 유기체가 잡아먹을 수 없는 디저트 군단의 일원이 아니라 말이지.

물론, 아무리 그래도 디저트 군단이 고작 물고기 똥 같은 거에 죽을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호수로 진입을 꺼리는 정도는 된다.

그러면 만약 상대가 아예 작정하고 자기 생명체들을 죄다 독으로 튜닝해버리면 어떨까?

비상식적인 얘기도 아니다. 실제로 게임하면서 그런 짓을 하는 놈들을 자주 만났단 말이다.

생태계 전체의 에너지 효율이 떨어지는 걸 감수하고 그냥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게 독을 달아버린 플레이어 말이다.

"확실히 그건 좀 문제네요. 생태계 파괴가 주 전략인데 오히려 자기 생태계가 파괴되게 생겼으니."

그러니 이걸 극복하기 위해서 외부 생물체를 유입시켜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 외부 생명체가 내 생태계를 파괴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신성력을 통한 진화로 극복할 수 있다.

난 그렇게 속으로 천사의 질문에 답하며, 커뮤니티의 '플레이어 창조물 교류 공간'을 계속 둘러봤다

혹시라도 내 세계에 적용할 만한 것이 있나 싶어서 말이다.

그리고 이내 실망을 금치 못했다. 〈생명〉 관련 쪽은 별로 대단한 게 없었다.

과학이나 마법 계열 분야의 지식은 꽤 비싸게 팔리는데, 애초에 〈생명〉은 특정 지형에 묶인 경우가 많다보니 다른 사람에게 꼭 필요한 생명체를 찾는 것 자체가 대단히 힘들었다.

"사실 생태계를 초반부터 신경 쓰는 플레이어는 드물긴 하죠. 끝까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그것대로 없겠지만."

그래도 플레이어가 2억 명이나 되기 때문인가. 꽤 그럴듯한 생명체를 여럿 찾을 수 있었다.

나는 20, 30포인트씩을 쓰면서 담수형 수생생물들을 대거 구매했다. 영원(양서류의 일종)이나 물고기, 물방개 등 수생 곤충들과 그들이 살 만한 물풀 등 디저트 군단의 약점을 보완하고, 또 그들과 어울릴 수 있는 것들로 말이다.

그렇게 구매하고 나니 한 1,704포인트 남았다. 너무 많이 남았군.

"그야 벌레나 물고기 등은 내놓은 사람도 팔리라고 내놓은 건 아니었을 걸요? 그냥 혹시나 해서 내놓아본 거지."

그럴지도. 필요도 없는 걸 구매하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점수를 남기고 싶진 않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문명 키트를 구매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제가 딱 포인트에 맞춰서 비인 님의 생태계에 공존할 수 있는 종족과 기술, 신비 등등을 다 알아봤는데."

결국 비효율적일지언정 저축하는 수밖에 없나······.

"제발, 문명 게임하다 빙의하셨으면 문명을 만들어주세요."

그러던 나는, 비싼 물건들을 둘러보다가 말도 안 되는 걸 발견했다.

「플레이어: 에이'크라은

물품명: 옛 신의 파편

가격: 2,000포인트(협상 가능)

설명: 강력한 〈신비〉를 머금은 옛 신의 파편이다. 〈전설적 창조물〉을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물건이 매물로 나왔네요. 아마도 자기 세계의 역량으로 옛 신의 파편을 깨울 수 없었나보죠? 비인 님에게 딱 필요한 물건이고, 아마 지금이 가장 쌀 때일 거예요. 다음 승부에서는 다른 플레이어가 홀라당 먹어버릴지도 모르고요."

"일찍 봤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

"네? 그냥 세계의 물건을 팔면 되잖아요. 넥타르는 누구라도 탐낼 자원일 텐데."

그 설명을 듣고 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이번 판매에서 얻은 포인트를 바로 쓸 수 있다고?"

"네.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셨죠?"

"왜 그러냐니······. 그야 그 말대로면 양측이 협의할 경우 세계 내의 물건을 무제한적으로 교환할 수 있잖아."

"맞습니다."

"수수료라도 있어?"

"없습니다."

"그럼 포인트는 서로의 세계를 순환하면서 영원히 누적될 텐데."

"맞습니다. 교역을 권장하기 위한 기능이니까요."

뭐어······. 비정상적으로 교역에 관대한 것 같지만 됐어. 일단은 팔고 싶은 물건도 없고, 당장은 포인트를 오히려 쓸 때니까.

나는 내 세계에서 압호주스에게 부탁해 순수한 넥타르를 우물 하나 분량만큼 퍼냈다.

순수한 생명의 정수. 넥타르 덩어리는 296포인트에 올린지 '세사이사' 라는 플레이어에게 3초만에 팔렸다.

「'에이'크라은'의 [옛 신의 파편]을 구매했습니다.」

"이런 귀중한 물건을 살 수 있을 줄은 몰랐군.

"상대 플레이어도 이게 팔릴 줄은 몰랐을 거예요. 어쨌든 상대도 2,000포인트 어치만큼 이득을 봤으니 손해보지는 않았겠네요."

새로운 전설적 창조물의 이름은 이미 생각해 두었다.

[요거-토소스(Yogur-tosoth)]다. 디저트 군단의 장군에게 어울리는 멋진 이름이지.

"그러니까 뒤틀린 고대의 외신 같은 이름을 창조물에게 붙이지 마시라니까요?"

10화. 요거-토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