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세계 충돌 -네 번째- 2
네 번째 충돌을 겪는다는 건 상위 12.5%라는 이야기다.
실력 있는 사람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구조, 정말로 무능하다면 세 번째 단계에서 하차했을 터이니, 네 번째 충돌에 남아 있는 자들은 어느 정도는 유능함이 담보되어 있다.
그리고 소온의 세계는 '하차자'의 세계에 도전하지 않았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첫째로 하차자들 수가 생각보다도 훨씬 적었다. 남은 플레이어 6천 7백만에서 1/3정도는 하차할 줄 알았더니만, 의외로 하차자는 10만밖에 안 됐다.
10만의 하차 세계 중 매력적인 곳이 있다면 모를까. 거의 전쟁을 거듭하며 인구가 거의 없는 빈약한 세계뿐. 왜 하차했는지 알 법한 망가진 세계밖에 없는데다가 지형도 잘 안 어울렸다.
그래서, 하차자의 세계에 도전하는 대신 다른 플레이어와 마주하기로 했다. '상식적으로' 자신들의 세계와 협력할 그런 플레이어 말이다. 상대가 선하든 악하든 약하든 강하든 일단 '협력'. 그렇게 정해두었다.
그렇지만, '전투를 좋아하는 비상식적인 플레이어'가 게임에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비상식적인 플레이어를 만나는 것도 '상식적인 상황' 내에 있었다.
따라서, '상식적인 대처' 역시 준비되어 있었다. 높은 〈정치〉를 이용한 창조물들의 통제. 그리고 적당히 높여놓은 〈기술〉 그리고 인구에서 나오는 〈산업〉을 통해 축조한 목책과 토성 등의 구조물을 이용,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일단 약자들을 안에 대피시키고 전사 계층이 나와서 체계적으로 적에 맞서기로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이 거주하는 부락은 사실상 요새화되어 있었고, 전문 전투훈련을 받은 계층까지 존재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요새화가 되어 있고 정예 전투병이 있다면 실질 전투력 차가 서너 배 되어도 이길 수 있다. 이곳은 그들의 영역이니까.
여기까지 설명만 쭉 봐도 소온 및 그의 세계의 대처가 얼마나 체계적이고 우수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온 및, 사실상 그의 부하나 다름없는 일곱 명의 동맹 신들 역시 이 대처법과 완성된 체제가 실로 합리적이라고 판단하며, 소온이 자기가 그들의 리더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오히려 인정하며 그가 마음껏 자기 정치력을 발휘하게 내버려두었다.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대비한 소온조차도.
이렇게까지 '비상식적인 적'에 대한 대처는 전혀 상정하지 못했다.
"적 발견!"
훈련한 정찰병이 소리친다. 여덟 부족 중에서 눈이 좋고 발이 빨라서 척후 담당을 하게 된 이족보행 토끼 같은 종족이다.
정예한 정찰병이다. 상대의 생김새를 보고 놀라지 않는다. 상대 〈매력〉이 사실상 0에 가까워 대단히 방심하기 쉽지만, 저 정신 나간 가시 달린 동글이들은 사람을 벌써 몇 명이나 꿰뚫어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 가시 달린 동글이. 창조주는 낙타먹는사탕이라고 이름 붙인 육식성 디저트가 토끼 척후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다리 같은 것이 여러 개 달린 듯했는데, 생각보다 좀 빠르긴 했다.
'그래도 저 정도 속도면 못 피할 정도는 아니······.'
라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사탕이 달리던 속도의 2.5배 가까이 가속했다.
그 속도는 무려 시속 70km. 물론 그렇게까지 빠르진 않다. 충분한 반사신경만 있다면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저것의 직경은 30cm다. 거의 사람 머리통만하다. 스치기만 해도 살점을 찢고 가르는 가시와 뿔은 돌진하는 순간 오히려 공기 저항을 받는 걸 감수하며 펼쳐진다.
그런데도 시속 70km이다.
콰직!!!
반쯤 가슴에 직격으로 박혔다. 사탕의 무게는 고작 4kg. 하지만 형태와 속도를 감안하면 그 충격은 4kg짜리 대검이나 아령, 무게추 같은 것을 시속 70km로 던진 것과 별 차이도 없다······!
이렇게 귀한 정예병이 하나 죽었다.
"또 온다!"
그리고 한 열 마리 정도 되는 사탕들이 그대로 돌진했다. 토끼들은 도약력을 활용해서 구르고 피하며, 정예다운 대처를 취했다.
그들이 한 번 공격을 피하고 다시 태세를 잡았을 때, 그들은 경악스러운 사실을 알아냈다.
"뭐야······?"
돌격한 놈들이 다 죽었다. 아니, 정확히는 살아 있는 것 같긴 한데. 입 부분만 오물오물 거리거나, 근육에 힘이 다 빠진 듯 그대로 축 늘어졌다.
정예들은 간단히 추론할 수 있었다.
"이 자식들, 한 번 돌진하고 나면 끝인 건가?"
"그런 것 같은데?"
"한 번 돌진으로 적을 죽이는 것만 생각한단 말인가. 끔찍한 생물이네."
그럼 대처는 꽤 쉽다. 공격을 유인해서 피하기만 하면 된다.
이 대처법은 빠르게 공유되었고, 그들은 처음 차원문을 열고 나온 약 50마리 정도의 사탕들을 최소한의 희생만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정예 몇이 실수로 다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다음날. 차원문이 또 열리고 50마리의 사탕이 다시 투입됐다. 가축이 죽었다. 그래도 전부 제거했다.
다음날. 차원문이 또 열리고 50마리의 사탕이 다시 투입됐다. 이놈들은 아무데나 튀어 다니다가, 아무도 죽이지 못했다.
다만, 시신은 찾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다음날. 차원문이 열린 지 나흘 째. 처음으로 차원문을 열고 나온 사탕들이, 먹이를 먹고 분열해서 번식에 성공, 성체가 되었을 때쯤.
그들은 차원문을 열고 나온 50마리의 사탕과 더불어 물과 풀, 바위를 뜯어먹으며 자체 번식한 200마리의 사탕을 맞이해야 했다.
"어······?"
필사적으로 그들의 돌진을 피하고 때려죽인 다음 다음날, 그들은 350마리의 사탕이 세계 내에 돌아다니는 걸 봤다.
가축들이 떼거지로 몰살당했다. 필사적으로 사탕들을 때려죽였으나 사탕의 유생들은 태어나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폴짝폴짝 뛰며 사라졌고, 시신, 분뇨 더미, 심지어는 요새화된 민가 안으로 숨어들어서 고기 등을 조금씩 뜯어 먹고, 심지어는 목책조차도 조금씩 뜯어먹는 등 모든 유기물을 뜯어먹으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나흘 째. 그들의 모든 정예는 이제 사탕들을 잡는데만 동원되고 있었다. 그리고 추정컨대 세계에는 약 2,300여마리의 사탕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게 뭐야!!!"
돌진을 물리적으로 피할 수 있는 것도 사탕이 한 대여섯 마리 몰려다닐 때나 가능한 거지, 한 30마리씩 모여서 존재하는 모든 각도로 폭발하듯이 몸통 박치기를 시도하는데 이건 유도해서 피할 수가 없다.
그저 부리나케 달아나면서 저 미친 사탕들의 돌진을 피할 뿐이다.
"다들 방패 들어!"
"맞아! 피하는 대신 체격 있는 부족이 갑옷 입고 받아내야 해! 맞아도 죽진 않아!"
그렇지만 그것도 수가 2,300마리쯤 되면 이제 주체할 수가 없다.
100마리를 피해서 반대쪽으로 도망치면 100마리가 반대편에서 몰려온다.
바위, 식물, 동물, 시체, 배설물까지 못 먹는 게 없고 물속에서도 살 수 있는 정신 나간 생명체들이 일단 돌진하고 나면 아무거나 뜯어먹으며 새끼부터 까고, 새끼들은 일단 숨었다가, 성체가 되면 나타나서 바로 보이는 모든 것에 자폭 돌격을 시도하는 미친 사탕들에게 속수무책이었다.
"주술사들을 불러라!"
주술사들은 가진 신비 주문을 이용해서 적들을 방제해보려고 했다. 꽤 효과가 있었다. 마법 피해에 극도로 약한 듯, 번개로 지지자 순식간에 익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술사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공격 주문을 가진 모든 주술사가 나서서 사탕을 방역하지만, 이 세계 수준으로는 수백 마리 사탕의 돌격을 막을 수는 없다.
"종족별로 편제를 재편한다! 신의 계시다!"
그래도 저항은 거듭된다. 크기별, 병과별, 종족별로 새로 전사를 차출하고, 임시로 나무 방패라도, 그리고 사탕이 보이면 일단 돌진을 유도했다가 아무데나 구르고, 그놈이 새끼를 까기 전에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전략이 구상되었다.
꽤 효율적이었지만, 희생자는 계속 나왔다.
"미, 민간인들도 건장한 자들은 나와 싸워라!"
다행히 높은 〈정치〉덕에 이 조치에도 많은 이들을 징발할 수 있었다. 죽는 자들이 늘어났지만, 그래도 사탕들은 빠른 속도로 줄어갔다.
하지만, 매일매일, 저놈은 매일매일 50마리의 사탕들을 계속 투하했다. 사탕들은 굳이 사람을 잡아먹을 필요도 없었기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체에 몸통 박치기를 거듭했다.
유일하게 살 수 있었던 건 비행능력이 있는 이곳의 피막조라고 불리는 박쥐와 새를 융합한 듯한 생명체 뿐이었다. 그나마 날 수 있고, 가볍기 때문에 사탕들의 돌진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의 여덟 종족 중 비행 능력이 있는 종은 한 종도 없었고, 심지어 가축들 역시 무참하게 도륙. 그들의 시체를 파먹었다.
이 디저트 아포칼립스 상태는 10일이나 계속됐다.
이쯤 되면, 생존보다는 다른 것이 고민된다.
"저, 저기 나으리들? 우리 올해 농사는 어떻게 합니까? 저 미친 동글이들이 돌아다니는데?"
"······."
"신이시여? 응답해주십시오! 우리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여덟 신들이 온갖 방책을 강구했다. 신성력을 써서 재능 없는 이에게 신비 능력을 부여하고, 부상당한 자를 치료하고, 또 강자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보호 기간과는 달리 세계 충돌 단계에서는 시간이 대단히 느리게 흐른다. 따라서 신성력도 느리게 차오른다.
그에 비해서 차원문 단계 때 차원문은 매일매일 정기적으로 잘도 열린다. 이쪽은 공격은커녕 방어에만 급급한데. 적은 차원문 여는데 자신의 모든 신성력을 다 소모하는 듯하다.
그리고 드디어 비극이 시작됐다.
"마을에 미친 동글이들이 들어왔다!"
어쩌다가 잡지 못한 게 마을 내 음식물 쓰레기 같은 것을 먹고 번식한 모양이었다. 미친듯이 불어난 것들이 도시 내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한다.
그래도 목책은 못 넘어가니까 이것만 다 잡으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다음에 투입된 직경 20cm의 작은 사탕들은 무려 도약을 2미터 가까이 할 수 있었고, 위력은 더 낮아도 더 빠른 돌진으로 사람의 배를 쑤셔버릴 수 있었다.
"튼튼한 병사로 맞서!"
그리고 다음에 투입된 직경 50센티의 사탕들은 더 육중해서 돌진해봤자 시속 50km밖에 안 되는 주제에, 몸무게는 무려 8kg에 달했다. 육중한 공격에 방패를 진 덩치 큰 종족들조차도 몸이 마구잡이로 부서져 나갔다.
"신이시여! 이걸 대체 어떻게 합니까!"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우리는 당신들이 시키는 대로 전부 따르겠나이다!"
그렇지만, 방법이 없다.
지금 훈련된 병사, 훈련되지 않은 민간인,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빠른 몸놀림을 이용해서 젤리들의 돌진을 최대한 막아내고, 시체를 죄다 불태우며, 신비를 마구잡이로 부여하며 권능을 낭비하는데.
고작 30일만에 그들의 세계는 사탕 천지였다. 어딜 가도 미친 사탕들이 나타나서 돌진을 해대고, 올해 농사는 무조건 망쳤다.
그리고 그들은 이듬해는커녕 내일을 맞이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군사를 동원해도 다 잡을 수 없어. 신비로도 못 잡아. 한 마리라도 놓친 순간 수십 배로 불어나. 농사도 못하고, 방어벽도 의미가 없어. 2미터 3미터씩 훌쩍훌쩍 담을 뛰어넘으니까. 민간인을 다 동원해도 민간인의 전투력이 모자라서 한계가 올 뿐. 이대로면 쌓아둔 식량도 다 소모되고 기근이 일어날 거야. 아니 하루아침에 저 녀석들을 다 죽여도, 이제 황폐화된 땅에선 올해를 버틸 수 없어.'
소온은 뒤이어 생각했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그걸 견딘다고 한들, 지금 고작 차원문 단계야. 차원균열 단계가 시작되면 〈그게〉 올 거야. 그 악마! 하늘을 둥둥 떠다니던 그 거품에 촉수 달린 악마! 그놈이 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럼 대체 어쩌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소온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21화. 세계 충돌 -네 번째- 3
요거-토소스는 강하다. 문제는 너무 강하단 거다.
지금 요거-토소스는 차원문은커녕, 차원통로도 넘어갈 수가 없다. 오로지 서로 넘어가는데 제약이 사라지는 차원균열. 그 시점이 유일하게 요거-토소스를 상대 세계로 전진시킬 수 있는 타이밍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내가 만날 상대가 누구든 희망이라는 게 있었다. 왜냐면 차원균열이 열리는 시점은 적어도 중반 넘어서거든.
그러니까 요거-토소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최대한 군대를 양성하고, 나타났을 때 요거-토소스를 '어떻게든' 죽여서, 그다음 내 생태계로 들어와 싸그리싹싹 방제작업을 하고 압호주스도 때려잡고 넥타르 샘을 손에 넣으면 '승리'다.
네 번째 게임부터는 어느 정도 군사력으로 몇 년 동안 노력하면 넥타르 샘의 젤리들을 다 걷어내는 그 미친 방제 작업을 할 수 있다. 적의 점수도 낮지 않아 보였다. 대단한 문명을 구축했군.
문제는, 나는 그 단계까지 갈 생각이 없었다.
차원문 단계. 이 단계에서 난 상대 문명을 초토화시킬 생각이었다.
차원문을 열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끝없이 낙타먹는사탕과 사냥감의 크기에 따라서 다르게 진화한 아종들을 투입했다. 적 세계에 투입된 사탕들이 내게 적 생태계의 구성과 정보를 보내준다.
이번 상대의 생태계 구성은 여전히 사막이었다. 하지만 강과 오아시스가 몇 개 있다. 신성을 통해서 좀 발달시킨 듯 80제곱킬로미터쯤 되는 사막은 꽤 풍요로워보였다.
순수한 마법 생명체는 없지만, 마법 수준은 꽤 됨. 농사를 잘 짓는 듯하군. 세계에 '산'도 있다. 강은 그 산에서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테이몽 강과 합칠 수도 있을까? 모르겠다. 중요한 건 산, 평야, 강, 범람원, 오아시스 등등. 말이 사막이지 물 걱정 하나 없는 습지 문명이었다는 것.
그리고 정말 유감스럽게도 상대 세계는 〈정치〉가 엄청나게 높았다.
이게 왜 문제냐면, 보통 〈정치〉가 높은 세계는 '계급'이 나뉘고, '계급'이 나뉘면 '군대'와 '민간인'이 딱딱 구분되어 있거든.
한마디로 전투능력이 아주 높은 병사 계층과 전투 능력 대신 생산능력이 높은 민간인. 이렇게 구분되어 있다는 거지.
이게 보통은 아무 문제도 없긴 하다. 근데, 딱 하나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뭐냐면 국경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성이나 울타리 내부에서 외부와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내부로 침입자가 쳐들어온, 사실상 시가전 상태에서는 전투력 부족한 민간인들이 학살당한다는 거지.
지금처럼.
"끄아아아악!"
"살려줘요! 살려줘요!"
적 세계의 부족들은 여덟 종류나 됐다. 내게 지금 미친듯이 〈대화〉 신청을 거는 플레이어가 여덟 명이니까 여태까지 한 번도 싸우지 않고 동맹만으로 올라왔나보다.
그리고 그 중에 마법으로 된 애들이 없이 전부 살덩이, 혹은 곤충의 케라틴질, 이런 식으로 되어 있으니 그야말로 '도륙' 당한다.
내가 차원문 열고 투하한 수십 마리 사탕들은 이미 적의 정찰병을 다져버렸고, 이어서 뜯어먹고 번식, 숲으로, 오아시스로, 습지로 숨어들어서 온갖 생명체들을 사냥하고 밭에서 농사 짓던 농민들을 몸통 박치기로 하나씩 끝장냈다.
차원문이라는 건 플레이어가 〈신성〉을 소비하면 특정 지역에서 열리지 못하게 해서 나름대로 전선이라는 게 형성되게 할 수 있지만, 거꾸로 신성력을 많이 투입하면 차원문을 엄청나게 많이 열 수도 있고, 상대가 열리지 못하게 한 지역을 억지로 뚫고 들어갈 수도 있다.
나는 그냥 상대가 방어하지 않은 지역에 미친듯이 사탕들을 부어 넣었다. 적의 생태계를 파악하고, 적 생물종에 가장 적합한 사탕들을 떨구는 것만으로도 그냥 적 문명은 붕괴됐다.
적 세계의 민간인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나 들어볼까?
"아이고! 나으리들! 저놈들이 바깥에 돌아다니는데 농사는 어떻게 짓습니까?!"
"진정해라! 지금 주술사들과 전사들이 저들을 격퇴하려고 하고 있으니······."
"저놈들은 수백 마리 씩 몰려다니면서 모든 고기와 풀을 다 뜯어먹고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어떤 전사들이 저놈들 수백 마리를 당해냅니까!"
높은 〈정치〉가 무색하게 내분이 일어났군. 지금 사태에 완전한 패닉 상태다.
아니, 오히려 패닉 상태를 통제하고 있으니 더 대단한 건가. 부족도 8종류인데 딱히 종족 갈등도 없는 것 같아. 도대체 〈정치〉가 얼마나 높은 거야?
하지만 아무리 행정력과 군사력을 100% 효율로 발휘할 수 있어도, 문명 전체의 군사력을 압도하는 수의 포식자들은 방법이 없는 법이다.
적의 군사들은 그래도 바보가 아닌지 사탕들이 돌진하면 방패로 막고, 철퇴로 내리쳐서 그대로 죽이는 효율적인 전략을 개발했다. 정예들의 편제를 재편하고, 민간인까지 징발하면서 모두가 사탕 사냥에 애쓰고 있다.
그리고 마법도 병행하면서 열심히 사탕 방제에 힘쓰고 있군. 근데 어쩌냐. 이미 내가 투입한 사탕들은 번식을 시작했어.
이 육식성 사탕들은 정말 극단적인 자살특공대인데, 수명도 별로 안 길고, 딱 한 번 몸통박치기 하면 그 이후에 대부분의 근육이 다 찢어져서 다음에 두 번째 몸통 박치기는커녕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다.
대신 죽인 사냥감을 뜯어먹고, 출아법으로 번식한다. 근육이 다 끊어진 사탕에서 나온 아기 사탕들은 부모와 부모가 죽인 사냥감을 뜯어먹고 성장한다.
그리고 식물과 모래를 먹으며 성장하다가, 3일 뒤 성체가 된 이후 육상에서 진동과 후각으로 거대한 생물이라는 생각이 들면 바로 인생 최후의 몸통 박치기를 시도. 적을 죽이고 번식하기를 반복한다.
낙타 상대로 사냥 성공률 5%. 100마리가 낙타에게 들이박으면 95마리는 고기 한 점 뜯어먹지 못하고 죽고, 사냥 성공한 5마리는 105마리로 불어난다.
딱 5마리만 불어나면 된다. 다음에는 105마리가 들이받고, 그다음에는 또 110마리가. 그리고 다음에는 115마리가. 계속계속 불어나다 보면 어느 순간 사막에 존재하는 모든 유기물은 사탕들에게 다 뜯어먹혀 있을 거다.
그러니까, 이 사탕들을 상대하는 생태계는 '무조건' 사탕의 사냥 성공률을 5% 미만으로 낮춰야 한다. 5%가 넘는 이상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내 사탕들의 사냥 성공률은 지금 이 생태계에서 민간인 상대로 45%에 육박했다. 심지어 전사 계층 상대로도 15%는 됐다.
이 시점에서 끝난 거다. 적이 압도적인 〈정치〉로, 그리고 인구를 다 동원해서 급하게 전사로, 마법사로 만든 민간인을 통해 문명이 전력으로 사탕을 방제해도 이미 문명의 밭도 오아시스도 숲도 산도 모조리 사탕 천지.
존재하는 모든 가축과 작물이 다 뜯어먹혔다. 범람원도 쓰레기 같은 모래로 변하고 있었다.
가장 악랄하고 지독한 포식자 앞에, 그러한 포식자를 키운 전략에 패배하고 만 거다.
「상대 플레이어 '소온'이 〈항복〉을 요청합니다.」
「상대 플레이어 '소온'이 〈항복〉을 요청합니다.」
「상대 플레이어 '소온'이 〈항복〉을 요청합니다···.」
차단.
일곱 명이 연달아서 〈항복〉 요청을 연타했지만 받아줄 생각 없다. 전부 사탕의 먹잇감이 되어라.
"되게 이상한 말 같네요. 사탕의 먹잇감이 되라니."
다만 싸움은 생각보다 오래 끌렸다. 항복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니까 결국 결사항전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높은 〈정치〉의 힘인지 꽤 오랫동안 저항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게 사탕들의 번식과 생태계 테라포밍할 시간을 좀 느긋하게 벌어준 것과 뭐가 차이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적들은 온갖 전략, 마법, 단결력과 고유 개체, 〈문화〉의 힘으로 발생한 영웅 개체 등을 이용해서 내 사탕들에게 저항했다.
하지만 사냥 성공률을 5% 미만으로 낮추진 못했다.
사실 어떤 전략을 찾아내어 낮춰도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사탕들과 추가 투입한 젤리들이 이미 적 생태계에 수천 마리는 득실거리는 상황에서 말이다.
결국 적의 마지막 부락이 밀려드는 사탕들의 육탄돌격에 무너지고, 그들은 장렬하게 전사했다.
「플레이어 '소온' 및 7명의 플레이어와의 세계 충돌에서 승리하셨습니다.」
「플레이어의 세계가 넓어집니다.」
적 생태계는 약간 안정적인데······ 사탕들을 잡아먹는 대형 포식자들을 들여보내고, 낙타들이 살 수 있게 해볼까. 딱히 건들기보단 안정적으로 육식사탕과 담수성 디저트 군단을 배양하는 사냥터로 삼고 싶다.
"차원통로가 막 열렸을 시점에 적 세계를 전멸시키다니, 원래도 승리가 빨랐지만 어마어마하게 빠르군요."
"적들이 너무 안일했어. 군사력이 2배였다면 대충 비빌 수는 있었을 거야."
"그래도 요거-토소스에게 짓밟히지 않았을까요?"
"아······. 그건 좀 다른 문제야."
솔직히 말해서 지금 요거-토소스는 한 게 없다.
이거 생각보다 되게 치명적인 문제인데······. 한 게 없다는 말이 뭐냐면, 경험치를 못 얻었다는 얘기다. 성장을 안 해.
하지만 요거-토소스는 밥은 그대로 처먹는다. 내 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한 넥타르를 조오오오오온나 많이 처먹는다.
심지어 얘는 마력 자체도 먹는다. 한마디로 유지비는 많이 드는데 쓸 일도 없고 그렇다고 없앨 수도 없는 애물단지란 말이지.
보통 이런 기관은 자연계에서 퇴화한다. 그 에너지 낭비 그만두고 다른 생명체나 키우라고 말이다.
"우와. 냉혹해."
뭐 냉정한 평가지. 다행히 전설적 창조물은 퇴화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아쉬운 건 사실이다.
"왜요?"
"난 이 게임이 1:1 승부라고 생각하고 요거-토소스를 빠르게 2,000포인트를 써서 만든 거거든. 그런데 애초에 이런 환경이라는 걸 알았다면 진짜로 악독한 사탕들만 잔뜩 만들고 요거-토소스 같이 당장 필요없는 생명체는 만들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
"흐음."
"요거-토소스는 다행히 마법을 통한 인위적인 기후 및 토지 변화로 생태계 조절에도 도움이 되니까 진짜로 아무 밥값도 못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어쨌든 최종병기라는 느낌이니까. 정작 그 최종병기를 못 쓰면 유감이지."
그렇게 말하곤, 나는 천사를 바라봤다. 승리 보상 달라는 의미다.
그런데 천사가 웃었다.
"대멸종의 주인님."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거야. 비인으로 불러."
"아니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어서요. 비인 님. 지금 비인 님은 네 번째 충돌에서 승리했습니다."
"아 잠깐만. 또 뭐 이벤트가 있어?"
"네."
"무슨 매번 이벤트야?"
"진짜로 매번 이벤트가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모든 이벤트는 고정적이니 전부 말씀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젠장. 좀 있다가 한번에 설명 듣고. 일단 네 번째 승리에 따라오는 이벤트부터 말해봐."
천사는 활짝 웃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네 번째 충돌마다, 상점 구간입니다. 세 가지 추천 특성 중 하나를 골라 가져가는 대신 포인트를 내고 원하는 특성을 사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게 나왔다.
"너 처음에는 특성 구매 없다고 설명했잖아?"
"그건 커뮤니티 기능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아. 그래. 뭐. 좋아.
"원하신다면 당장이라도 전부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만."
"천천히 듣자. 그래서 상점 구간은 뭐야."
"4번째 마다 있는 상점 구간에선 일반-우수-정예-영웅-서사-전설-신화로 이어지는 일곱 등급의 특성 중 아무거나 포인트를 지불하고 사실 수 있습니다. 무조건 하나만 사야 하고, 또 무조건 사야 합니다. 사지 못하면 '패널티' 특성을 사야만 합니다."
"잠시만······. 그럼 뭐야. 내가 만약 포인트만 지불하면 신화급 특성을 바로 얻을 수도 있단 말이야?"
"네!"
지금 내 포인트가 몇이지? 54,345. 엄청나게 많다! 거의 피해를 안 본데다가 원래부터 포인트 자체도 많았고, 세사이사에게서 받은 포인트도 있어.
그럼 여기서 신화급 특성을 장만해야······.
"참고로 특성의 가격은 일반을 –2레벨로 취급. 우수는 –1레벨. 정예는 +0레벨. 이런 식으로 해서 현재 기준 레벨에 가감한 후 세계 점수 최소치만큼입니다."
"기준 레벨?"
"세계가 충돌한 횟수만큼이 기준 레벨입니다."
"······아. 그러니까 지금 4번째 충돌 이후니까. 만약 내가 신화급 특성을 사고 싶다면 +4레벨. 다시 말해 8레벨 세계 점수의 최소치만큼을 지불해야 한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금 신화급 특성을 구매하고 싶으시다면, 144,093포인트를 지불하시면 되겠습니다."
야, 이. 장난치냐?
내 세계도 거의 6레벨에 가까운 5레벨이라서 겨우 5만 4천이다. 그런데 14만 포인트는 사실상 사지 말란 거잖아.
"맞습니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자면 +2레벨 등급인 '서사' 등급 특성은 당장이라도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32,675포인트밖에 하지 않으니까요. 통상적인 플레이어는 전재산을 다 털어서 겨우 '정예' 등급 특성을 구매할 테니 이것만으로도 큰 이득이죠."
게임 내에서 고등급의 특성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알고 있다.
일단 요거-토소스부터가 '전설'급 창조물 아닌가. 물론 저걸 소환하는데 무지막지한 자원을 소모하긴 했어도 얘가 약하거나 쓸모없다고 말하는 놈 아무도 없을 거다.
"퇴화해야 정상이라느니 말했으면서."
그건 중요하지 않다. 아무튼 '서사'급도 강력하지만, 가능하면 '전설'이나 '신화'급 특성을 얻고 싶다.
"그럼 세계에 존재하는 생물이나 문화, 기술을 팔면 되겠죠. 그러라고 있는 커뮤니티 기능이니까요."
"아. 당장 구매할 필요는 없나?"
"그렇습니다. 세계 충돌 직전까지만 구매하시면 됩니다. 참고로 아무것도 사지 않으면 '패널티' 특성을 무작위로 얻게 되니 적어도 예비용 특성 정도는 생각해 두셔야 할 겁니다."
그렇다고 한들 내 세계에서 뭘 팔라고. 내 세계의 전략은 남들에게 들키는 순간 대응법 생겨서 망한다.
"그건 비인 님의 개인적인 문제인지라."
젠장. 포인트를 대거 벌어올 방법 뭐 없을까?
"요거-토소스를 파시던가요."
"헛소리 말고."
「세사이사: 비인 님! 지금 바쁘지 않으시면 잠시 제 세계 좀 봐주실 수 있습니까? 저 방금 이겼는데 비인 님께서 심어주신 참나무들이 소금물은 못 마시는 것 같은데 이거 어떻게 해야 하죠? 저번처럼 포인트 드릴 테니까 자문 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 병신은 참나무를 해변가에 심으려고 했던 건가. 진짜 생물학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새······.
어? 잠시만. 자문?
"또 흉참한 생각을 떠올리셨군요."
이 시점부터 생태계 컨설팅 사업을 시작하겠다.
"그나마 정상적인 발상이긴 하네요······."
22화. 감치
생태계 컨설팅 사업. 다시 말해 세사이사에게 한 것처럼 다른 플레이어에게 조언하고 포인트를 받아오는 사업.
기여도 1점당 4포인트로 남의 생태계 점수를 22,437점만 올려주면 된다. 세사이사의 경우 워낙 바닥이어서 올리기 쉽긴 했어도, 내가 무려 세사이사의 점수를 1만 점 올려줬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세계 크기가 2배로 넓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딱 한 놈한테서 2만 점=8만 포인트를 뜯어내거나, 2명에게서 4만 포인트, 4명에게서 2만 포인트. 8명에서 1만 포인트 정도를 뜯어내면 된다.
"애초에 기여도 1점당 4포인트는 현재 고정 시세니까 부당한 것도 아니고, 받는 사람들도 확실하게 점수가 올라갈 수 있다면 그렇게 큰 문제도 아니군요."
그렇지. 문제는 내가 그렇게 올릴 수 있느냐. 이거고, 둘째는 내가 신용을 살 수 있느냐, 이거고, 셋째는 남들이 그래서 나한테 선뜻 일을 맡기겠느냐 하는 것.
첫째는 자신 있다. 둘째 역시 주최측을 통한 계약은 절대적인 것 같으니 상관없지. 셋째가 문제다.
나는 커뮤니티를 키고 잠시 둘러보았다.
특성 상점 이벤트에 상황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일단, 어떻게든 점수를 벌려는 사람.
「제목: 노예 종족 팝니다.
내용: 지난 전쟁에서 얻은 노예 종족 2,500명 전부 팝니다. 생명 점수 약 700점. 2000점에 인구를 대폭 늘려보세요.」
「플레이어: 단우중
물품명: 법학서
가격: 5,000포인트(협상 가능)
설명: 단우중이 직접 저술한 법학서다. 그의 세계에서 최고 수준이었던 법학 전문가의 서적인 만큼, 법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실질 적용법 등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플레이어 비인이 읽을 경우 〈정치〉에 대한 이해가 대폭 오를 것으로 보인다.」
거꾸로 점수를 팔려는 사람
「제목: 점수 3,000점 팔려고 하는데 지식 공유할 사람이 있는지요?
내용: 〈문화〉 전문가가 계신가요? 〈문화〉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서 그런지 도통 안 오르네요. 제시 바랍니다.」
「제목: 포인트 팝니다.
내용: 기여도 1당 4포인트. 전란에 피폐해진 제 세계 좀 구제해 주십쇼.」
이것도 내가 전쟁이 비교적 일찍 끝난 편이라 몇 개 안 보이는 거지. 아마 조금만 지나도 수백만 개는 쏟아지겠지.
현재 '일반' 등급 특성은 1,680점. 이것도 못 사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사람 구실을 하고 싶다면 '정예'등급 특성인 7,409점을 지불하거나, 혹은 '영웅'등급 특성인 15,559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그 중간쯤 있는 10,000점 플레이어는 자기가 가진 3,000점을 남에게 줘도 어차피 '정예'는 구할 수 있다. 혹은 5,000점을 어떻게든 구하면 '영웅' 등급 특성이 생긴다.
'어차피 포인트는 충돌 끝났을 때만 얻고 더 안 오른다'라는 점과. '현재 남아 있는 플레이어 중 협력 중시로 올라와 포인트가 엄청나게 높은 플레이어가 좀 있다.' 라는 것. 그리고 '나'와 '세사이사'가 거의 교류를 안 했음에도 최상위권 수준의 플레이어라는 걸 생각하면······.
대충 지금 사람당 1만 5천 점에서 2만 점을 이번 충돌에서 얻었을 거고, 한 플레이어가 그 이전에 얻은 포인트 합계가 그 정도 되려나?
좀 애매하군. 한 사람에게서 2만 점 뜯어내는 게 거의 불가능해······. 그 사람도 3만 점 어치의 특성을 사고 싶을 테니까.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4만 포인트를 가진 플레이어에게선 1만 포인트 정도를 뜯어낼 수는 있다. 어차피 현 시점에서 '서사'급 특성이 3만 2천, 그리고 '전설'이 6만 8천, 신화가 14만 4천.
그렇군. 그러면 4~5만점을 가진 플레이어에게서 1만 포인트나 2만 포인트를 뜯어내는 걸 목표로 해보지.
현재 남은 플레이어가 6천 7백만이다. 조건에 맞는 플레이어 10명을 못 찾겠나?
그렇게 생각하며 난 내 신용부터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단 생명 점수를 더 올려야겠군.
"왜 신용=생명의 등식이 나오는 거죠? 지금도 이미 표준 점수인 926점도 아득히 넘어서 12,328점. 6천 7백만 명 중 단연 1위인데요?"
어차피 내가 충돌을 너무 일찍 마쳐서 지금 올려봤자 의미가 없어. 사람들이 그럭저럭 모였을 때 내 실력에 공신력을 올려줄 겸 최대한 올린 수치를 공개해야지.
아. 그런데 그러기 전에. 답변 먼저 해야지.
[비인: 세사이사니뮤ㅠ 저 포인트 좀 벌어야 해서 님 세계 봐줄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꾸벅)]
[세사이사: 아 그렇습니까? 저도 그렇긴 한데.]
[비인: 웅. 저도 님한테 자문을 좀 받고 싶어서 ㅋㅋ 근데 서로 봐주는 동안에 남들이 다 포인트 다 가져갈 수 있으니까요 ㅎㅎ 그래서 말인데 그냥 이번 단계에선 서로 특성 상점 이벤트에만 전념하면 어떨까요.]
[세사이사: 개탄한다! 하지만 좋습니다. 이곳의 고기 플레이어들은 신비에 대한 이해가 워낙 떨어지는 듯하니, 저도 그 부분에서 제 능력을 팔아보면 좋겠지요. 그러고 보니, 어느 정도 등급을 노리십니까?]
[비인: 신화급이요 ㅋㅋㅋ 아 넘 목푤 높게 잡았나 ㅋㅋ]
[세사이사: 저도 그 정도. 우승을 목표로 하니까. 자 그럼 나중에 봅시다.]
대화 종료.
세사이사하고는 오래도록 교류가 필요하다. 그래도 저놈도 다음 충돌에서 죽진 않겠지.
일단 나를 어필하기 위한 작업이 필요하다. 내 세계를 대대적으로 튜닝하고 생태계를 발전시킬 작업.
새로 얻은 땅을 디저트 군단의 일원으로 확고하게 만들 겸, 더 나아가서 더 나아가서 기존 지형의 대대적인 편집이 필요하다.
"선택 자체는 이성적이군요. 그러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가장 먼저, 넥타르 샘과 합쳐져 버린 담수층 오아시스를 치워버린다.
세사이사의 세계를 돌봐주는 동안 충돌이 다가와서 못했던 건데, 신의 파편이 계속해서 담수를 생산하면 좀 문제다.
이 담수층도 마력을 같이 나눠먹고 레벨을 올리는데다가, 레벨이 올라간 만큼 더 많은 담수를 저장해서 넥타르 샘을 희석시키기 때문이다.
근데, 바로 그렇기 때문일까. 그 담수층 세사이사가 이미 옮겨뒀다. 아마도 넥타르 샘의 밀도가 올라간 건 이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좀 멀리 두긴 했는데, 오히려 그게 세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았다.
역시 신의 파편이나 마법에 대한 이해는 세사이사가 나보다 훨씬, 아니 훨씬이라는 말도 모자라다. 아득히 높은 거군.
아마 자기 딴에는 가장 마법을 강화시키기 위한 적절한 위치였겠지.
그렇지만, 난 생태계가 더 중요하다. 풍수지리를 통한 마법은 엿이나 처먹으라 그래.
"우와. 너무해······."
일단, 새로 얻은 세계에도 오아시스가 있었다. 그것도 꽤 큰 오아시스가. 다시 말해 담수층이 있었기 때문에 그쪽에 내 기존 담수층을 합쳤다.
「"담수층"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좋군. 그런데 담수층이 워낙 커져서 그런지 새로 얻은 세계의 절반 정도가 거의 수몰됐다고 할지, 문명이 있던 영역을 대거 잠식, 함몰해버렸다.
무지막지하게 넓어져서 넘쳐 흐르는 물. 원래 상대 세계는 개간을 잘 해두었는지 오아시스와 강을 합쳐서 넓은 밭과 논을 만들어 뒀는데 그게 다 잠겼다.
잘 된 거다. 원래 밭이든 논이든······. 농사라는 건 생태계에 악영향만 준다. 농사를 좀 풀어서 설명하면 '한 생태계에서 특정 종을 제외한 모든 종을 제거하고 그 종은 오로지 인간의 손길이 없으면 그대로 죽게끔 비정상적으로 개량한다.'라는 거다.
건강할 리가 없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있었던 어마어마한 평야와 풍요로운 숲. 습지는 몇천 년 동안 인간이 농사짓다보니 완전히 조져져서 사막 지방이 되고 말았다.
이건 그 당시 농업 기술의 한계라든가, 어쩔 수 없는 환경의 문제라든가 하는 변명이 가능하긴 한데, 근본적으로 보면 인간이 손 안 댔으면 멀쩡했다.
더 근본적으로 보면 인간이라는 건 농업까지 해가면서 그리 인구를 늘릴 필요도 없었다.
번식과 인구 증식에 미쳐서 농업이니 사냥이니 자연환경을 다 조지더니, 문명 다 건설하고는 또 저출산으로 갑자기 인구 낳기 싫다고 해서 다시 문명 세상조차 조져버리는······.
"저기. 어디까지 하실 거예요. 그만두세요."
아무튼, 사실 소온의 세계의 환경을 가장 많이 조진 건 내 사람잡는사탕들이다.
"문명 도대체 왜 깠어요."
원래 외래종 들어오면 이렇게 되는 거야. 하지만 이제 내 땅이 됐으니 조금 수정해야겠군.
일단 상대도 생명 점수가 그렇게 낮진 않았다. 대부분 농업과 인구에서 온 점수였지만, 야생동물이나 가축도 꽤 많았다.
무엇보다 적의 땅에는 '산'과 '언덕' 지형이 붙어 있고, 또 사막이면서 쌩모래, 쌩자갈이 아닌 그럭저럭 풀들이 자란 '평원' 지형도 붙어 있었다. 그리고 순수하게 마법에만 특화된 지형도 한 개 정도.
이제 어쩌면 다음 상대는 사막이 아니라 평원 지대에서 만나는 유목민 같은 걸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새? 가 엄청나게 많았다. 저거 새 맞아? 깃털보다는 피막이 달렸으니 박쥐나 익룡 같기도 하군. 이세계의 생물일까. 어쨌든 자체적인 비행능력을 지녔고 새의 생태지위를 차지했으니 그냥 박쥐새라고 부르겠다.
"저 게임의 플레이어들이 붙인 이름은 따로 있습니다. 저들 세계의 생태계에서는 꽤 번성한 생물인데······."
박. 쥐. 새.
내가 멸종한 애들이 붙인 이름까지 신경 써야 해? 본래 학계에선 원주민이 부르던 이름이 아니라 학명을 붙인 새끼가 공식인 법이다.
"아. 네."
생태 지위라는 건 생태계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저 박쥐새들은 풍요로운 환경에 넘쳐나는 곡물, 그리고 벌레를 먹으면서, 일부는 가축이고, 일부는 일종의 사냥매 같은 역할도 수행하는 등 다양하게 번식했다.
왜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하냐면, 쟤들은 사람잡는사탕의 대공세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저쪽 세계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야 날 수 있으니까······. 사람잡는사탕의 필살기이자 사냥법은 인생 최후의 몸통 박치기인데 쟤들은 크기도 작고 위로 뛰면 되서 명중률이 작은 것들 상대로 시원찮은 사람잡는사탕들은 저것들을 사냥하지 못했다.
그리고 저것들은 나름대로 마지막 저항 수단으로 진화를 시킨 건지 사탕들을 먹을 수 있었다.
아. 잠시만 그건 아니군. 사탕들이 광물질 성분을 모조리 껍데기에 몰아넣게끔 진화해서 그런가. 젤리근육질 육체는 평범하게 소화시킬 수 있는 듯했다.
그러니까 껍데기만 남기고 조개살을 파먹는 황새 같다고 할까. 심지어 새들 중 일부는 주의를 끌어서 사탕이 자신에게 돌진하게 한 다음, 근육이 다 끊어진 사탕을 뜯어먹는 식으로 학습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 사냥법을 다른 동족들에게 전수하기도 해서, 새들은 사탕들을 빠른 속도로 줄였다. 아직 성장하지 못한 작은 사탕들은 새들이 잡아먹었다.
"재밌네요. 적이 만약 조금만 더 버티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신성력을 발휘해 진화시켰다면, 어쩌면······."
"요거-토소스가 나서야 했을 수도 있겠지."
"아 뭐. 그렇긴 하죠. 그게 있었지."
이것으로 두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첫째는, 이미 적 세계의 생물 다양성도 늘어가면서 내 생태계에 대한 대응책을 자체적으로 찾아내기 시작했단 것.
둘째로, 적어도 박쥐새들은 문명을 이루지 못하면서도 높은 지능으로 디저트 군단을 사냥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것.
박쥐새들을 디저트 군단의 일원으로 만들 수 있을까? 저 박쥐새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제공권을 장악하고 요거-토소스를 보좌할 비행 군단을 만들 수 있다면······.
"아."
"왜 그러세요?"
더 재밌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저 자식들, 디저트 군단의. 박쥐도 새도 아닌 저것들에겐 별로 좋지 않은 이름이군.
"뻔뻔하다."
너희들은 이제 감치(甘齒:Sweet Tooth)다. 디저트를 먹어 치우는, 이 디저트 군단의 숙적.
그 천적으로 만들어 버리자.
"엥?"
저것들은 박쥐새가 아니다리고 더 나아가 이번 시대 최강의 진화압이 되줄 것이다.
23화. 감치 2
감치들의 생태적 지위는 거의 새나 박쥐와 동일하다. 사실 새나 박쥐나 애초에 날 수 있는 생물로서 생태지위가 비슷하기도 하지만.
새와 박쥐가 얼마나 번성한 생물인지를 생각하면 저것들의 잠재력은 아주 특출한 편이다. 이미 이 세계에만 적어도 22종······. 아니, 22과(科)에 해당하는 감치들이 사는 것으로 보인다.
먹이와 크기, 습성, 지능, 형태 등등에 따라서 완전히 독립적으로 구성된 22과의 감치다. 속과 종 단위에서는 좀 더 분화할 여지가 있다.
과 단위에서 다르니 형상만 대충 비슷하지 비슷한 생태를 가진 생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야 당연하지. 과 단위에서 다르다는 얘기는 개와 곰, 족제비 수준으로 다른 거다.(셋 다 개아목에 속하고 과 단위에서 다른 생물이다)
저번 상대가 얘네들만 이렇게 번성시킨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생태경쟁에서 창조한 몇 개의 생명이 압도적으로 이겨 버리거나, 혹은 기존의 생물을 비슷하게 진화시키거나, 생태경쟁에서 새로운 종을 진화시키는 대신 그냥 그 위치의 생태적 지위가 있는 감치들을 창조하는 걸로 대체한 게 아닐까.
이놈들은 지금 푸딩들을 먹는 일부 종과, 푸딩들이 미처 갉아먹지 못한 곡식, 혹은 나무의 열매 등을 먹는 놈들만 남고 나머지 한 10종은 멸종할 것 같은데. 난 저놈들도 살리기로 결정했다.
「[이름을 모르는 피막조]가 [수초젤리먹는감치]로 진화합니다.」
「[이름을 모르는 피막조]가 [푸딩먹는감치]로 진화합니다···.」
피막조? 원래 플레이어가 붙인 이름이야? 박쥐새랑 별 차이도 없군.
아무튼 대규모의 신성을 활용. 모든 종의 개체를 동시에 진화시킨다.
일부는 과일뿐만 아니라 수초젤리도 먹을 수 있게 됐고, 푸딩, 젤리, 그 외의 다양한 디저트 군단을 먹고 사냥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선인장도 먹을 수 있게 한다. 그러고 보니 지금 선인장과 낙타들도 슬슬 디저트 군단화를 시켜야 할 것 같군.
완성도가 워낙 높은 생물들이라 정말 엄청난 신성력을 투자해야할 것 같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난 세사이사의 생태계를 봐주느라 미처 개조하지 못했던 내 생태계, 그리고 각 생물에 대해 아낌없이 신성력을 쓰면서 디저트 군단의 일원이 되게끔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감치다. 그리고 생태계의 다양성을 위해 식물이나 시체 뜯어먹는 감치, 혹은 이삭을 뜯어먹는 감치보다 직접적으로 젤리들을 사냥하는 감치들이 더 중요하다.
젤리들의 생태로 돌아가 보자. 젤리들의 생태에서 필요한 건 다음과 같다.
넥타르.
물.
바위.
햇볕.
이렇게 네 개다. 여기서 각 요소가 얼마나 필요하느냐는 종에 따라 다른데, 앞서 봤듯이 이동하는 종도 있었지만 느리고 단단하게, 오히려 뿌리 박고 식물처럼 된 종도 있다고 설명했다.
넥타르합성을 하는 이 젤리나무들은 말이 젤리지, 겉표면은 미친듯이 단단한 광물질로 되어 있고 내부 역시 광물질에 가까운 껍데기로 되어서 토양의 무기물과 유기물 전부를 빨아들이고, 잎사귀 비슷한 렌즈로 높은 곳에 있는 햇빛을 대거 빨아들이게끔 진화했다. 말하자면 '식물'의 생태적 지위를 차지한 젤리다.
근데, 이놈들의 '잎사귀'말인데. 이거 순수한 젤리질이다. 당연하다. 유리질, 광물질 껍데기를 둘렀다간 열과 빛을 잘 못 받게 되니까.
이래도 됐다. 어차피 푸딩들 중 나무젤리들을 기어오르는 종은 극히 드물고, 대부분은 바닥을 굴러다니거나 물속으로 잠수하거나 하거든. 그러니까 '높이'를 만드는 전략은 나무젤리들의 전략 중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데 여기서 날아다니는 포식자가 등장한다. 그냥 높이 날아서 가지에 앉고, 높은 나무 위에 먹기도 좋게 펼쳐진 젤리들을 무자비하게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땅바닥을 기는 느린 젤리들 역시 길거나 튼튼한 부리로 껍질을 깨먹는 감치들에게 속수무책. 특히 푸딩들도 문제다. 푸딩들의 구르고 달리는 방식의 이동은 위에서 급강하해서 쪼아 먹는 감치들에 전혀 대처하지 못했다.
본래 디저트 군단의 생명체들은 몹시 당황한다.(말이 그렇단 거다) 새로운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
나는 신성력을 계속 발휘하며 이들의 생태계를 조절했다.
첫 번째 전략은, 반격이었다. 젤리나무들은 가시나 독 등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에 적응하는 감치들도 당연히 나타나 가시를 무시하고 먹거나, 아니면 독을 소화시키거나, 심지어는 마법을 써서 반격하는 젤리들을 신체 스펙만으로 뚫는 감치들도 생겼다.
두 번째 전략은, 체급 증가였다. 덩치가 커지고, 더 높아지면 된다. 커진 젤리들을 상대하기 위해 감치들도 커진다.
세 번째 전략은, 내구도 증가였다. 껍질 크기를 복잡하게 만들고 젤리들을 넥타르합성의 효율을 낮추더라도 단단하게 코팅한다. 하지만 당연히 힘센 감치들이 나타난다.
나는 시간을 계속 가속하며 신성력으로 다양한 전략의 씨앗을 뿌렸고, 그것들이 의식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끔 무한히 반복하며 생장시켰다.
감치들의 유일한 단점이 있다면 이놈들 성장 속도 단위가 몇 년이라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젤리들은 가장 오래 사는 놈이 5년이다.
많이 먹고 빨리 성장하고 많이 번식하는 게 유리한 지금의 체제에서 수명이 짧아지는 대신 진화 속도와 번식력이 엄청나게 늘어난 거다.
결과적으로 감치들의 진화 속도만 난 조정해 주면 됐다. 22개 과로 구분된 감치들은, 여전히 22개의 과가 그대로 남아 있지만 종 수는 560종으로 늘었다.
"우와. 역시 이 분야는 대단하시네요."
이제 내버려두기만 해도 감치들은 알아서 젤리들을 먹고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다.
"뭐죠?"
특성 내놔.
「세계의 〈생명〉 점수가 18,016점을 넘어 레벨이 8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레벨 8. 레벨 8?! 아니 진짜 도대체 어떻게 충돌을 4번 겪은 세계의 능력치가 1만 8천이 넘어요?! 다른 사람들 지금 1천도 못 넘겨서 허덕대고 있는데!"
포식자가 등장해서 그렇다.
내가 이 게임 해보니까 아무 포식자도 없는 생태계보다는 차라리 포식자가 엄청 많은 환경이 더 생명 점수가 높더라.
아마도 생태계의 다양성과 안정성은 상호작용하는 개체가 많을수록 높기 때문이겠지.
천사는 〈우수〉 특성 카드를 보여주었다.
『(선택)진화 가속: 해당 종류에 속하는 생물들의 진화가 대폭 빨라집니다. 진화 속도는 대상으로 지정한 생물종 수에 반비례합니다』
『식물 성장: 〈식물〉에 속하는 생명체들의 에너지 효율과 성장이 증가합니다.』
『(푸딩)사냥꾼: [푸딩]에 속하는 종의 사냥 성공률이 늘어납니다』
"진화 가속. 분류는 '감치'들 전부로."
감치들의 진화는 더 빨라진다. 나무를 먹고, 젤리를 먹고, 푸딩을 먹고, 크고 거대한 젤리, 작고 빠른 젤리. 온갖 것들을 상대한다.
그러는 한편, 얌체도 생겼다. 넥타르 샘으로 직접 찾아가서 넥타르를 먹으려는 놈들이 나타난 것이다. 사실 이게 정상이겠지. 괜한 사냥보다는 순수한 생명 에너지인 넥타르를 먹는 게 정상일 거다.
근데, 거긴 지옥이다.
[이야이야아아아아아아!]
압호주스가 하늘로 향해 뻗은 촉수들을 끈적하게 만들어서 떼거지로 모인 감치들을 잡고 그대로 끈끈이주걱처럼 산채로 소화시킨다.
압호주스 역시 넥타르 샘과 넥타르젤리, 산호구미들을 관리하는 입장에서 넥타르를 빨아먹는 감치들이 몰려오는 걸 얌전히 내버려 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요거-토소스가 빨아먹는 것도 힘들 텐데 당연하겠지.
감치들은 압호주스의 둔감한 감각을 피해서 야금야금 넥타르를 마시거나, 혹은 수표면의 넥타르젤리를 사냥하거나, 아니면 안에 있는 해파리 등을 잠수해서 잡아먹는 등, 아예 수생형으로 진화한 감치들도 나타났다. 펭귄 비슷하군. 나는 아예 그런 성장을 가속화시켜줬다.
"근데 이렇게 감치들이 세지면 곤란하지 않아요?"
"그렇진 않지. 왜냐면 디저트들도 따라서 진화하니까."
특히 내가 극단적으로 진화시킨 사람잡는사탕들의 진화가 극적이었다.
날아다니고, 빠르고, 가벼운 감치들을 사냥하기 위해 여러 번 도약할 수 있게 안정성을 높이고, 더 길쭉하고 날렵해지고, 가시와 뿔은 하나로 압축하는 등의 모습이 나타났다.
내가 최초에 만든 낙타먹는사탕과 사람잡는사탕은 극단적인 생태에 이내 도태되었다. 대신 더 안정성 있고 다양한 사탕들이 나타나서 그 생태적 지위를 대체했다.
여전히 먹을 것 많은 낙타를 목표로 일생 최후의 돌진만 극한으로 연마하는 사탕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감치들 같은 날렵한 포식자를 사냥하기 위해서 높이 뛰고, 빠르게 뛰고, 빠르게 지치고, 그리고 철저하게 육식성으로 골수에 뼛조각까지 다 잡아먹는 사탕들이 주류가 되었다.
이 사탕들은 참고로 '눈'이 없다. 대신 발달한 촉각, 진동 감각. 후각이 있어서 대충 날아오르는 감치를 향해서 대충 뛰어오르고, 적을 덮치기 직전에 넓게 몸을 펼쳐서 그대로 잡아서 그대로 찢어먹는다. 그래도 조만간에 눈이 생길 것 같군.
이 과정이 거듭되자, 생태계 전체에 뚜렷한 변화가 있었다.
요컨대, 감치들 중 일부가 철새가 되었다. 새끼들은 '안전한' 담수호 근처에서 키우고, 먹이 자체는 넥타르 오아시스 주변에서 젤리들을 사냥하면서 구하는 거다.
그리고 감치든 낙타든 넥타르 샘에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넥타르 샘의 생산력 때문에 미칠듯이 강력한 생명체들이 튀어나오니까, 넥타르 샘이 최고로 강력하고 위험한 지역이 되었고, 그 주위를 둘러싸는 테이몽 강(이제 넥타르 샘과 연결되지 않고 산의 강과 연결해서 세계를 약간 구불구불하게 한바퀴 돈 다음 담수호에 들어가게 했다.)이 그나마 넥타르가 약간씩은 유입되어서 중간쯤 하는 지역.
그리고 강 건너 있는 안전한 담수호 구역에는 철새들 및 넥타르 샘에서의 경쟁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친 습지 파충류와 개구리, 물고기 등이 범람하는 강이나 요거-토소스가 빨아들였다가 내뿜는 물 등에 의해서 계속 따라붙어서 세계 전체가 풍요로워졌다.
선인장 숲은 '울창해졌다'라는 표현을 써야할 것 같다. 낙타들 구역인데, '나무'의 지위를 차지한 선인장을 먹고, 비가 뿌려질 때마다 미친듯이 자라는 꽃과 풀들을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빨리 성장해서 정신 나간 낙타잡이사탕에게서 도망치는 악종 같은 식물들과 낙타들만 남았다.
낙타들 역시 괴수로 성장하며 종분화가 일어났다. 그놈들은 체급이 무지막지하게 커졌고, 어울리지 않는 껍데기 대신 광물질 강모로 피부를 뒤덮었다.
이놈들도 사실 넥타르 샘 근처에 와서 넥타르를 먹고 싶은데, 그러면 테이몽 강과 넥타르 샘 사이에서만 서식할 수 있는 낙타먹는사탕들에게 찢기거든.
그러면서도 넥타르를 먹는 욕구를 전혀 참지 못하지. 중독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너무 에너지원으로서 훌륭하니까. 그러니까 낙타도 체급이 커지거나, 빨라지거나, 아니면 갑각을 두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어코 나타나고 말았다.
가장 거대하고 막강한, 넥타르 오아시스의 거대 젤리들이 아니라, 넥타르 오아시스의 주인인 압호주스의 촉수를 찢어발기고 그 체액을 빨아먹기 위해서 성장한 놈들.
순수한 생명의 물질 넥타르를 육체의 힘만으로 쟁취할 수 있는 최강의 감치, 전신의 피막에 비늘과도 같은 갑각이 찰갑처럼 붙어 있고, 윙스팬은 무려 15미터, 몸길이는 4미터에 가까우며 강인한 발톱이 달린 다리에 톱니형 부리.
소 정도는 그냥 잡아먹고, 요거-토소스조차도 상대하려면 마법을 써야 하는 내 생태계 최강, 최흉의 포식자.
압호주스라는 호수의 막강한 수호자조차 패고 그 촉수를 잘라 솟구치는 피와 넥타르, 혹은 샘에서 젤리들과 함께 넥타르를 게걸스레 섭취하는 것으로 모든 영양분을 섭취하는 이 꿀빨러 감치들에게는 아예 새로운 이름을 붙여줘야겠다.
「[초거대감치]가 [비스야킷(Bisyakheet)]으로 명명됩니다.」
"어원을 알기 힘드네요."
"아는 놈들만 알아보면 됐지 뭐."
이 막강한 비행성 비스킷을 더 손보고 싶지만, 시간을 너무 썼다.
보호 기간 때는 신성력을 통한 시간 가속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이제 대부분 '차원균열'단계에 돌입했을 타이밍이고, 이제 커뮤니티가 활발할 때다.
「〈생명〉: 29,131」
음. 3만은 못 찍나.
"양심이 없네요."
그리고 〈군사〉도 12,000 가까이 되어서 특성을 하나 더 찍을 수 있게 됐군. 이건 『공중전』을 택했다.
자 그러면 어디 커뮤니티에 홍보글을 올려볼까.
생태계 컨설팅 사업. 얼마나 잘 될지 보자.
[비인: 세사이사님 혹시 ㅋㅋ 제가 홍보글 올리면 얼마나 제 자문이 좋은지 홍보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세사이사: 저도 해주시면 좋습니다. 저도 고기들 대상으로 신비 컨설팅 사업을 좀 하려고 해서.]
홍보글을 작성하는 도중 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익명으로 추천글 같은 걸 올릴 수도 있나?"
"아뇨. 아니 그런데 무슨 벌써부터 뒷광고를 생각하세요. 홍보를 제대로 하면 무조건 뜰 것 같은데."
"잘 들어라. 난 여기에서 성공하려고 왔다. 내 성공률을 1%라도 높이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진 다음에 '아 시발 뒷광고라도 할 걸' 이 생각이 머릿속에 지나가느니 차라리 뒷광고가 들킬 위험성이 있더라도 최대한 노출되는 게 낫다."
"진짜 양심이 터졌군요······."
마왕의 길은 그토록 추하고 힘든 법이다.
"아무튼 익명은 안 돼요. 커뮤니티는 전부 공개입니다.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세요."
정정당당해. 뒷광고가 들키고 욕을 먹느냐, 아니면 뒷광고가 안 들키고 홍보에 성공하느냐. 라는 정정당당한 승부다.
"인간이 쓰레기라는 명제에 좀 동의할 것 같군요. 아무튼, 올리신 글에 벌써 댓글이 달렸는데, 한번 보실래요?"
어디. 볼까.
「댓글 1: 미친새낀가.」
극찬이군. 조짐이 좋다.
24화. 내 생명 점수 29,131 점
겨우 네 번째 세계 충돌. 거기서 아슬아슬한 승리를 겨우 거둔 플레이어 아우텐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구가 아닌 곳에서 [더 판타지 월드 크리에이터]라는 게임의 형태로 이 게임에 참가한 플레이어였다.
게임을 많이 했다고 설마 신이 될 기회를 줄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게임의 고수이자 꽤 머리 좋은 플레이어로 이번 게임에서 적어도 5번째 하차 구간까지는 버텨볼 생각이었다.
"하필 미친놈을 만나서, 젠장."
그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충돌은 교섭 및 협력으로 올라왔다. 그들도 대화가 통해서 서로 군사력은 어느 정도 갖추되, 네 종족의 연합으로 거대해졌다.
문제는 세 번째. 그들은 꽤 높은 군사력을 지닌 두 명의 연합이었고, 군사 종족이 패배한 종족을 노예로 부리는 형태였다. 아마도 전투에서 이기고 '항복'을 받아낸 듯했다.
플레이어 수는 4:2. 총합 점수는 아우텐틀의 세계가 높았다. 문제는 군사력에서 크게 밀렸다.
다행히 아우텐틀의 세계에 [영웅적 개체]가 좀 있어서 버텼지, 만약 영웅이 없었다면 어떻게 버텼을지. 게임 초창기에 〈고유 창조물〉 생성 권한을 운영측에서 어떤 이유인지 전부 뿌려서 다행이었다.
네 번째 충돌 시점에 전원이 영웅까지 승급시키는데 성공해서 네 명이나 되는 영웅 개체가 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의 항복이라고 할지, 굴욕적 동맹 형태로 적을 받아들여서 군사 담당으로 써먹고, 여섯 명의 연합은 네 번째 충돌 상대인 강한 하나와 약한 둘이 대충 견제하며 주도권을 잡는 세계와 충돌했고, 처절한 혈전을 벌였다.
그나마 동맹으로 써먹은 군사 전문가들이 제 역할을 해주고, 영웅 개체들이 잘 싸워서 망정이지······.
덕분에 하나는 서사적 개체로 올라가기까지 했다. 이 시점에 서사적 개체가 나오다니 정말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상황.
하지만 양측 세계는 황폐해졌다. 160제곱킬로미터 정도 되는 영역. 숲과 계곡, 산, 초원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좋은 땅이지만 화공에 맹수에 도시도 다 부서지고, 논밭도 망가져서 〈생명〉 점수는 고작 3레벨로 600정도······.
위험하다. 인구가 곧 절대적인 지표기 때문이다. 총합 점수가 전쟁으로 인해 13,000점 언저리로 떨어졌으니 진짜로 빨리 올려야 했다.
'인구를 빨리 늘려야 해.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 다른 사람들 〈생명〉 점수가 어느 정도나 될까?'
보통 〈생명〉 점수는 인구 점수라고 생각된다. '가축'이나 '군용 짐승' 혹은 '숲' '밭' 등에도 〈생명〉 점수는 붙지만, 보통은 주력 종족의 인구가 몇 명이나 되느냐가 생명 점수를 가른다.
'〈생명〉 점수는 보통 충돌 횟수랑 동등하게 높게 가져가지. 지금이 4번 충돌이니 아마 최소로 잡아도 926~1,944 사이. 다시 말하자면 1,400점 정도가 최소치. 높은 사람은 아마도 5레벨이나 6레벨쯤 되어서 2,000이 넘든가, 아니면 4,000이 조금 넘으려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여섯 신들에게는 인구 증가의 전문가가 없었다. 사실 식량 생산을 어떻게 더 높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이 상점 구간이니까 아마 포인트를 사려는 계층과 포인트를 팔려는 계층으로 나뉠 터. 그리고 좋은 특성과 점수 중 뭐가 좋냐고 물으면······. 당연히 단기적으로는 점수다. 좋은 특성은 강한 놈이 가질 때 더 세. 차라리 빈약한 상태에서는 일반 특성을 구매하더라도 점수를 대폭 끌어올리는 게 낫다.'
커뮤니티를 둘러보았다. 어쩌면 〈생명〉의 최고 전문가가 자신의 능력을 팔고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래서 천사에게 부탁해서 검색한 순간.
「제목: ★생명점수 랭킹 1위★ 무려 29,131점 〉〈 최강 생명 육성 플레이어의 본격 생태계 컨설팅 서비스♥♥♥ 많은 상담 부탁드려요!!!@@@」
라는, 말도 안 되는 글이 커뮤니티 최고 인기글로 떠오른 상태였다.
'응······?'
순간 뇌정지가 왔다.
일단 게시글에 들어가서 확인했다.
〈생명〉 점수 29,131점. LV.8 인증이 대놓고 박혀 있었다. 그리고 뒤에 갱신한 듯, 지금은 3만 점이 넘은 상태였다.
'으, 으으으응······? 생명 점수가 3만 점? 우리 세계 총합 점수가 13,000점인데 〈생명〉 점수 하나가 3만 점?'
일단 처음 느껴지는 건 공포 그 자체였다.
'미, 미친. 〈생명〉이 세계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지표잖아? 인구가 많아야 뭔가를 할 수 있으니까. 근데 〈생명〉이 3만 점이면 대체 다른 점수는 몇 점이라는 거야? 진짜 냉정하게 잡아서 1/10. 3천 점이라고 쳐도 총합 점수가 지금 5만 점이 넘는단 말이야? 이 단계에?'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명이 3만인 사람이 다른 점수가 죄다 3천일 리는 없으니,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이 나온다. 저놈은 최소 다른 능력치 평균은 1만 점씩은 될 것이고. 총합 점수는 약 10만 점 정도로 추산된다는 결론이다.
사실 플레이어 '비인'은 생명만 3만이고 나머지는 죄다 바닥이거나 그냥저냥 높은 정도라서 총합 점수는 아슬아슬하게 6만 점밖에 안 됐다.
하지만 6만이나 10만이나, 정작 아우텐틀의 세계 점수가 1만 3천이니 감흥 자체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커뮤니티에 〈군사〉 15,000인증이라든가 2만 점 인증이라든가. 하는 것도 돌아다니긴 했지만······. 군사력은 정말 가혹하게 백성들을 굴려야 나오는 거고 방어가 공격보다 더 유리하니까 그건 그렇게 의미가 없다.
하지만 〈생명〉이 3만 점이라면 얘기가 완전히 다르다. 도대체 어떤 미치광이인가.
"자, 잠시만 천사. 지금 저 사람이 〈생명〉 점수 랭킹 1위는 맞아?"
천사는 공개된 정보밖에 못 답하고, 그리고 특정성 있는 정보는 답할 수 없었다.
"네. 저 '비인' 플레이어가 전 플레이어 중 생명 점수 1위입니다. 부연하면 2위는······. 11,356이군요."
"2위하고 3배 차이가 난다고?!"
"네."
"저 사람이 랭킹 1위야?"
"그건 답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지금 랭킹 1위는 몇 점이지?"
"음······. 현재 랭킹 1위는 지금 90,108점입니다. 부연하면 1위부터 100위까지는 대충 8~9만 점 언저리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럼 아마 저 '비인'이 아마도 랭킹 100위권 안의 누군가다. 미친놈이 있었다. 자기가 물론 상위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역대급 미친놈이 있었다.
안에 황급히 들어가보니까 첫 댓글이 바로 베스트 댓글이었는데, 내용도 짤막했다.
「댓글 1: 미친새낀가.」
그냥 어이가 싹 날라가지만, 동의하고 싶은 표현이었다. 그 아래 달린 댓글도 대동소이했다.
「댓글 2: 뭐지. 나 생명 5천 점 찍고 엄청나게 뿌듯해하고 있었는데.
댓글 3: 아니 5천 점도 미쳤네. 6레벨이라는 거잖아. 근데 그 여섯 배 되는 3만...
댓글 4: 저기, 주최측? 저 사람 뭐 부정행위 저지른 거 아닙니까?
ㄴ(주최): 아닙니다. 게임에서 허용되는 정상적인 플레이로 도달했습니다.
댓글 5: 아니 무슨 호수에는 넥타르가 고여 있고 나무는 고기로 되어 있고 바닥엔 풀과 벌레 대신 사탕과 푸딩이 자라나??? 도대체 뭔 땅을 받으면 생명 점수가 3만이 나오지?
(작성자)비인: 저 사막에서 시작했어요ㅎㅎ(진실 인증)
댓글 6: 진짜 미친새끼임?!?!?!?!?」
사막 스타팅이라는 말을 듣곤 아우텐틀도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주최 측에서 단 (진실 인증)이 있으니 속이는 것도 아니다.
'사막 스타팅······? 숲도 아니고, 해변가도 정글도 아니고, 모든 지형 중에서 가장 〈생명〉 점수 올리기 가장 힘들고 대신 〈신비〉와 〈신앙〉 빨로 버텨야 되는 사막······? 그 사막에서 3만 점?'
미. 친. 놈. 그냥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우텐틀은 내부 상황을 들여다보았다.
「이 게임 최고의 생태계 전문가가 여러분의 〈생명〉점수를 올려드립니다 〉〈 지불 〈신성력〉 지정 가능. 지불 최소치 있음. 기여도 1당 4포인트. 오직 포인트만 받음(중요!!!)
사용자 후기: 찬미하라! 비인 님의 자문으로 저의 생명 점수가 3번째 충돌 직후 2,000점 상승했고, 총합 점수는 1만 점 이상 상승했습니다. 소모 신성력은 다음과 같습니다(차트 첨부) 충분히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진실 인증)」
해야 한다. 이건 해야 한다. 이 플레이어에게 컨설팅만 받으면 답도 없이 망가진 자신의 세계가 구제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아우텐틀은 다른 동료들과 협의해서 다급히 컨설팅 자문을 받아보자고 요청했다. 다들 조금은 고민했지만, 이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신청했다.
「대기자: 38,968명. 소모 신성력 제한을 해제할수록 상위 자리 차지 가능.」
"아아아아악!"
늦었다. 너무 늦었다. 감탄하는 대신 보자마자 신청했어야 했다.
아우텐틀은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신성력 한계를 무턱대고 해제할 수도 없었다. 만약 그랬다가 저쪽이 기여도를 미친듯이 올리면 포인트가 그대로 빚이 되어서 끝장이 나버리니까.
그런데. 기회를 놓쳐버린 것과는 별개로 이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세계기에 〈생명〉 점수가 3만이 나올 수 있지······?'
사막이라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첫 스타팅이 사막이라는 거니까 사실 뭔가, 서술 트릭 같은 걸 수도 있지 않은가.
이후에 받은 맵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든가. 아니면 넥타르가 나온다든가. 사막은 넥타르가 나오는 몇 안 되는 지형 중 하나다.
그래도 너무 과하다. 지금은 점수가 600이었지만 한 때는 2,000이었다. 80제곱킬로미터의 땅에 사람과 가축과 식물, 밭 등을 알뜰살뜰하게 채워서 2,000.
그런데 그 두 배라고 해도, 자기 세계는 아마 높아봤자 5,000? 그것도 사람과 밭과 숲과 가축을 꽉꽉 채워야 5,000일 거다.
'이 동일 넓이에서 여섯 배를 도대체 어떻게 만들 수 있지······? 말 그대로 생물들로 미어터질 텐데······? 인구 밀도가 너무 높아서 살 수가 없을 거라고.
그, 혹시 엄청나게 높은 숲과 빽빽한 정글 같은 거라서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다 나무로 덮여 있고 생존할 수 있다면······.
아냐. 그래도 문명을 지으려면 당연히 나무를 베고 공간을 넓혀야 한다고. 야만인으로 살 거 아니면 어떻게 여섯 배가 나오겠어. 사실 야만인으로 살아도 이 넓이에 3만 점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내······.'
말도 안 된다. 아무리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말이 안 된다.
아우텐틀은 어쩔 수 없이 커뮤니티의 다른 곳을 둘러보며 자원을 찾았다. 어떻게 노예나 가축이라도 새로 들여올 수 있나 싶어서 말이다.
∞
한편 그때, 그 어떤 플레이어보다 놀란 사람이 있었다.
"생명 점수가······. 3만이 넘어요? 제가 뭘 잘못 들었나요?"
현재 랭킹 1위. 그리고 생명 점수는 랭킹 2위. 11,356점의 플레이어 '테라시온'은 지금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과, 천사의 말을 대조해보며 믿을 수가 없었다.
잘생긴 인간, 구체적으로는 호모 사피엔스의 형상을 띈 천사가 답했다.
"네. 〈생명〉 랭킹 1위인 '비인' 플레이어의 점수는 3만이 넘습니다."
"······대체 어떻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면 바로 이런 땅일 것이리라. 문명과 환경이 완벽히 조화되어 모든 생명체가 배불리 먹고, 또한 무한히 번성하는 가히 낙원이나 다름없는 세계.
두 번째 충돌에서 2,800점이었고, 세계를 받고 처음 충돌한 이래 내내 종합 점수 랭킹 1위를 놓친 적 없는 테라시온,
그 비싸다는 신화급 특성을 활발한 교역과 승리로 쌓아온 포인트만으로 자력 구매할 수 있었던 랭킹 1위는 그냥 허망하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여기서 세 배를 도대체 어떻게 내요??? 이것보다 10% 낫게 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 같은데???"
∞
컨설팅을 대충 하나 마치고 다음 플레이어를 물색하는데, 천사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 그런데. 비인 님. 다른 플레이어에게는 '기업비밀이에용 ㅎㅎ' 이라고 하면서 안 가르쳐주는 걸 이해하겠는데, 정작 저도 이해를 못하겠거든요. 비인 님 세계는 〈생명〉 점수가 왜 이렇게 높아요?"
"응? 아 그거. 내 세계가 존나 살기 힘드니까 그래."
"예?"
"생명의 진화와 생태계의 평형은 모두가 경쟁을 안 하는 낙원이 아니라 모두가 죽을 둥 말 둥 발버둥치면서 악착같이 살아야 이뤄지는 거거든. 내 생태계의 모든 생명체는 1시간 뒤에 먹잇감이 될 수도 있고, 당장 잤을 때 내일 태양을 볼지 전혀 모르는 끔찍한 세계에서 살고 있지. 그러면서 점차 악독한 전략을 발전시키면서 강인해지는 거야."
"뭐 고독(蠱毒)이라도 만드세요?"
뭐 그렇게 생각하든가. 마왕이면 고독 정도는 만들어야지.
일부는 문명 사회는 야만스러운 정글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사실 개소리다. 심지어 내전 중인 나라조차 진짜 야생보단 살기 좋다.
'진짜 야생'은 그 어떤 곳보다도 좆같은 곳이다. 그런 좆같은 곳에서 완성된 내 생명체들의 강인함과 생태계의 안정성, 그 역동성이 그 누구보다 높은 건 당연한 것이다.
자 그럼. 다음 플레이어 컨설팅으로 신화 특성 구매에 필요한 점수는 완성되려나. 얼른 한 명 잡아보지.
25화. 양심이 없게 진화하다(+1권 후기)
생명체 컨설팅 산업은 순항중이었다. 고작 네 명에게 간단한 조치를 취했을 뿐인데 그들에게서 8만 점은 긁어낼 수 있었다.
[가온 쿠루안: 저기. 생각보다 너무 많이 올려주셔서 제가 드릴 포인트가 좀 모자란데 제 세계의 물건들로 대신 지불할 수 없을까요?]
[비인: 앗;; 안 돼요 ㅠㅠ]
[가온 쿠루안: 저, 저 진짜 안 될까요? 그 정도의 신성력으로 이 정도의 기여도를 창출하실 줄은 제가 진짜 생각하질 못해서요. 저 이대로 가면 일반 특성도 구매 못해서.]
[비인: 앗;; 안 돼요 ㅠㅠ]
[가온 쿠루안: 아니 제가 그러면 제 세계의 물건을 절반 가격으로 넘겨드릴 테니까.]
[비인: 앗;; 안 돼요 ㅠㅠ]
[가온 쿠루안: ······알겠습니다.]
이런 놈도 있었다. 지가 포인트 높고 신성력 많이 써도 된다고 해서 내게 지불하는 포인트가 많아진 건데 뭔 개수작이지.
"아.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만약 포인트가 음수가 되면 어떻게 되지? 내가 받을 포인트도 못 받나?"
"아뇨. 포인트는 정상적으로 받고, 음수가 양수가 될 때까지 무작위 패널티 특성을 받습니다."
패널티 특성이라는 게 무서운데. 어마어마한 악영향을 끼치는 주제에 게임 내에서 '절대' 지울 수 없다고 한다. 그냥 얻는 순간 하차하거나 우승할 때까지 가지고 가야 한다고.
더 심각한 건 이 패널티 특성을 가진 사람을 만약 '동맹'이나 '항복'을 통해 부하로 받아들이면, 이 사람의 영혼이 소멸될 때까지 세계 내에서 계속 악영향을 끼친다.
"그런 구조군. 한마디로 무한히 뜯어낼 수 있단 건가."
"그렇죠. 패널티 특성을 받을 수는 없으니 저쪽은 죽어라 자기 세계의 물건을 팔아치우겠네요······."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우리가 계약한 조건은 공개 조건이었다. 내가 이 정도로 일을 잘할 줄 몰랐던 건 저놈 문제지.
지금 얻은 포인트는 원래 있던 것과 합쳐서 13만 점 하고도 조금 넘는다. 앞으로 누구든 가장 좋은 조건을 골라서 생태계 점수를 올려주기만 하면 신화급 특성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신청자는 무려 기여도 1당 4포인트에 신성력 무제한을 신청한 사람이었다. 내가 이 조건에서 설마 기여도 3,600 정도를 못 내겠나. 조금만 튜닝하면 얼마든지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건너간 상대의 세계는 조금 처참했다.
아니 좀 많이 처참했다. 생태계가 완전히 파괴됐는데, 마법과 기술은 그나마 높긴 하다.
그렇지만 세계의 총점이 고작 3,000이 넘는다.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 개체는 기껏해야 250명 정도다. 그나마 영웅이 끼어 있어서 아예 망한 건 아닌 정도.
[비인: 어라? 잠시만. 포인트 있어요?]
[엘카이더: 있어. 3만 정도. 내가 가진 지식을 팔아서 마련했다.]
[비인: 이거 세계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나요?]
[엘카이더: 난 원래 초고신비세계에서 와서 물질계의 생리에 익숙하지 않아. 그래도 원래 있던 종족이 익힌 신비를 잘 개발해서 어떻게든 승부를 보려고 했는데······. 하필 네 번 연속으로 끔찍한 전쟁광들만 걸렸다.]
그렇군. 자기는 협력하고 싶어도 협력할 수가 없으면 그냥 죽을 때까지 맞서 싸우는 수밖에.
그리고 마지막 싸움에서 기어코 생태계의 자원도 다 고갈시키고, 인구도 고작 250명밖에 남지 않은 이런 끔찍한 상태로 전락······. 뭐 그런 건가.
그런데 그러면 이상한 게 있다.
[비인: 왜 하차 단계 때 하차 안 하셨어요 ㅇㅇ?]
[엘카이더: ······할 수 없었어.]
[비인: 웅?]
[엘카이더: 그 시점 내 점수로는 나를 고치는 게 불가능했어.]
음?
[엘카이더: 난 도박에 미친 사람이다. 그렇지만 포인트를 이용하면 그런 사람의 부정적인 면도 절제할 수 있다는군. 새 인생을 찾고 싶어. 빚도 전부 갚고, 어쩌면 내게 천재적인 투자 재능 같은 것도 주고, 그게 안 된다면 적어도 돈이 필요해.
내 노름벽을 고치는데 2만 포인트. 최소 조건이 그거고 2번째 하차 쯤에선 그 정도는 무조건 있을 테니 지금부터 딱 2만 점 정도 번다면 난 나를 고치는 데 그걸 전부 쓰고 남은 포인트를 전부 돈으로 바꿔서 무조건 하차할 거다.
그러니까 당장 포인트니 고급 특성이니 전혀 의미가 없어. 난 무조건 다음 하차 단계까지 살아남아야 해.]
문득 난, 하차한 사람들이 10만 명밖에 안 됐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10만 명. 많아 보이지만 전체 6천7백만 중 10만이다. 너무 적다. 상식적으로 싸우고 지거나, 못하거나, 전략에 실패하거나, 그냥 운이 더럽게 없었던 자들은 전체의 1/3은 돼야 했었다.
그런데 10만 명. 전체의 0.14%. 세 번째 충돌이 끝난 시점에서는 만신창이였을 테니까. 만약 순위가 낮은 하위권이었다면 1,000점도 안 됐을 수도 있었다.
그때 천사가 말한 '1만 포인트면 100만 달러'라는 얘기는, 뒤집어 얘기하면 1천 포인트면 10만 달러.
영혼까지 건 숫자 치고는 너무 적다. 심지어 돈을 기준으로 해서 그렇지 '서비스'를 기준으로 하면 더 목표로 하는 게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첫 구간 때 아무도 하차를 못한 거다. 딱 3번만 운이 좋아서 자기보다 약한 애들만 만나서 협력하거나, 혹은 잡아먹고 버티면 이론상 9배 이상 폭증한다.
사람 한 명의 중독 등을 없애거나 개선하는 게 2만 점이라면, 거꾸로 자기 자신의 수명을 늘리거나, 젊게 하거나, 건강을 되찾거나 하는 것도 2만 점 정도는 될 것.
천사는 불로불사가 생각보다 싸다는 언급도 했었다.
즉, 실제로 하차했어야 했을 1/3은 어차피 그냥 있어도 죽으니까 참가했거나 죽는 거나 다름없어서 참여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아니면 그냥 욕망에 절어 있는 멍청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부터가 조금 그런 편이었으니까. 주최측은 게임이 하차자가 무더기로 나오는 걸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야 게임이 되지 않으니 어느 정도 선정의 과정을 거쳤을 터.
요컨대 이미 참가자들은 영혼이 소멸할 지도 모르는 게임에 각오하고 참가한 자들이다. 그러니까 이미 위험한 다리는 한 번 건넜다.
그래서, 이성적이든 비이성적이든 '탈락해야 확실하게 안전한데도' 일부러 위험한 다리를 건넌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지 않을까.
[엘카이더: 그러니까 내 세계 점수를 최대한 끌어 올려주길 바라.]
음. 뭐 그렇군.
[비인: 그럼 다시 조건을 확실히 할게요ㅎㅎ 서로 불가침 조약을 끝까지 유지하고 받은 서비스의 내용은 올라간 점수 빼고 전부 비공개. 전 절대 엘카이더님 정보를 공개 안 하는 걸로! 기여도 1당 4포인트. 신성력 사용은 무제한이니까 그냥 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할게요.]
[엘카이더: 그래. 상관없어.]
그럼 계약 조건도 완성됐고. 소모 신성력 제한 무한대니까 마음껏 써볼까.
일단 저쪽은 세사이사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이해를 지닌 것 같으니, 일단 식물을 비롯한 생산자 생태계부터 고친다.
식물들을 창조하고 지형에 맞게 개조한다.
그리고 벌레들을 만든다. 특히 지렁이 같이 땅을 비옥하게 해주는 애들을 만들어야 한다. 얘네들을 늘리고, 대신 얘네들을 잡아 먹어주고 가축이 되어줄 닭 같은 훌륭한 가축도 만든다.
가축 사냥하는 야생짐승을 막아줄 머리 좋은 '개' 같은 생물. 그리고 그 개를 좀 튜닝해서 가축을 지키고 몰이할 수도 있게 만든다. 식물들과 작물을 늘리고. 쉽게 따먹을 수 있고 관리가 편한 대신 영양가가 없는 생물을 다량으로. 지금은 인구가 너무 적으니까.
그리고······. 그리고······.
난 시간을 가속시켜가며 이들 종족을 위한 문명을 압도적으로 발전시켰다. 어차피 이쪽이 기술과 산업, 신비 쪽은 좀 많이 해줘서 생물 자원만 끝없이 공급하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됐다.
[엘카이더: 자, 잠시만.]
끝없이 한다. 무한히. 신성력 제한이 무제한이라는 건 도중에 끊을 수 없다는 거다. 나는 내가 생각할 때 가장 이상적인 생태 문명을 만들었고, 그걸 위해서 이 엘카이더의 신성력도 끌어다 썼다.
번성하는 종족들이 무한히 경배를 바치는 터라 신성력은 미친듯이 차올랐다.
그리고 개조가 끝났을 때. 엘카이더의 세계는 6,422점이 올라가 있었다. 워낙 기본 베이스가 바닥이지만, 그래도 세계에 위협 요소가 없고 기반 기술이 그나마 평균적인 수준이라 세사이사 때보다 꽤 편했다. 땅도 넓고.
[비인: 기여도 얼마죠?]
천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15,311점입니다."
기여도는 장기적인 영향도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해준 것보다 더 많이 올라갈 수 있었다. 특히 생태계를 건드리는 건 더 그런 경향이 강하지.
그렇군. 그러면 61,244점 받으면 되겠군. 일단 남는 장사고. 완전 대박이야. 대박······.
음.
하고, 잠시 기다렸는데 아무 답도 없었다.
[비인: 엘카이더 님. 그럼 수고 많으셨습니다 ㅎㅎ]
[엘카이더: 아, 자자자자자잠시만!!! 조금만 받을 포인트를 깎아줄 수 없을까!!!]
[비인: 앗;; 안 돼요 ㅠㅠ]
심정은 이해한다. 왜냐면 패널티 특성은 끔찍하거든. 『영원한 기근』 같은 거 있다. 이름부터가 끔찍하지.
〈기준 레벨〉에 따른 포인트 당 패널티 특성 1개씩이다.
다시 말하면, 저쪽이 모자란 3만 포인트 정도면, 지금 4번 충돌했으니까 기준 점수 7,409. 약 4개에서 5개 되는 패널티 특성을 받아야 한다.
다음 충돌에서 절대 이길 수 없고.
지면 그 누구도 항복을 받아주지 않는다.
사실상 공개 처형이다. 그것과 별 차이가 없다.
[엘카이더: 부탁이야! 조금만 탕감해줘! 나, 난 이 정도로 많은 기여도를 설마 올릴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단 말이야!]
[비인: 앗;; 안 돼요 ㅠㅠ]
[엘카이더: 같은 말만 반복하지 말고 제발!]
[비인: 앗;; 안 돼요 ㅠㅠ]
멍청이에게는 유감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내가 여기서 널 살려주면 도대체 나한테 소멸한 다른 플레이어는 뭐가 되냐? 게네들은 사정이 없을 것 같아?
난 지성체가 싫어. 메시지로는 ㅎㅎ ㅋㅋ ㅠㅠ 하지만 난 실제론 조금도 웃지도 눈물 흘리지도 않고 있단 말이야. 다른 이들과 대화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야. 존나 싫다고.
인간은, 지성체는 뻔뻔해. 그래야 이득을 얻을 수 있으니까. 양심이라는 게 있지만, 양심을 무시하는 게 이득일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진화했다.
원래부터 폐인 인생이었잖아. 그냥 죽어.
[엘카이더: 빚만 갚을 수 있으면 뭐든지 할게!]
그럼 죽어.
[엘카이더: 나, 나는 진짜로 새 사람이 되고 싶어! 한 번만 기회를 줘!]
모든 사람에겐 기회가 한 번이다. 그리고 넌 이미 그걸 무모한 도박에 써버렸고. 이 노름꾼아.
[엘카이더: 부디······. 제발······. 뭐든지 할 테니까······.]
······제발 좀.
하······.
[비인: 깎아줄 순 없고. 뭐 대신해서 팔 수 있는 거라도 있어요?]
"응?"
줄곧 입을 다물고 있었던 내 천사가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알 게 뭐냐. 일단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니 봐야지. 진짜로 그냥 대책없이 나 불쌍하니까 봐달라는 거면 말도 안 되고.
[비인: 모자란 포인트를 지불해서 대신 팔 수 있는 게 있다면 받을게요. 뭐 있어요? 마법 잘 아는 세계에서 왔다고 하는데, 뭔 일 했어요?]
[엘카이더: 나, 난 공무원이었는데.]
[비인: 혹시 교사?]
[엘카이더: ······아니. 토목과.]
그런 아무 의미도 없군. 교사라면 어쩌면 바보라도 배울 수 있는 마법 교과서 같은 거라도 받을 수 있나 했더니.
[엘카이더: 대, 대신. 잠시만. 그래. 이게 있다. 이걸 팔게! 어때?]
?
[비인: ?]
[엘카이더: 응? 이거 말이야.]
[비인: 장난치나?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엘카이더: ······? 아. 혹시 그건가. 영류계 시점으로 바꿔봐.]
엥. 그게 뭐야.
"물질계가 아니라 신비를 볼 수 있는 시점으로 바꾸라는 거예요."
아. 그거. 그거 게임에도 있었지. 그거 신경 쓰면서 하기 복잡하니까 많이 신경은 안 썼는데······.
그래서 그렇게 바꿔보니까. 세계에 말도 안 되는 게 있었다.
마법으로 지어진 거대한 건축물이 하늘에 둥둥 떠 있었다. 아니, 저게 마법인지도, 건축물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마력의 흐름이 소용돌이치면서 지상의 마력을 빨아들이고, 또 다른 마력을 아래로 내뱉고 있었다.
[비인: 뭐임?]
[엘카이더: 내가 전쟁에서 계속 손해보면서도 끝까지 건설한 거야. 딱 6번 버틸 정도의 임시 영계지. 그, 영압과 흐름에 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저걸 이용해서 뭔가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저걸 가져가면 안 되나? 아직은 파손되기도 했고 미완성이지만 대충 기능은 해······! 증축, 개조할 수 있도록 설계도도 줄게. 아니 설계도 말고도 다 줄게! 내가 아는 모든 영립학적 지식을 전부 다!]
난 천사를 바라봤다.
천사들이 기여도를 측정하려는 듯 셈을 하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답했다.
"지식의 값과 저기 존재하는 영계를 기여도로 취급하면, 약 8,566점 정도? 오히려 비인 님이 2,000포인트 정도 더 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비인: 아 그럼 안 받을래요^^;;]
[엘카이더: 깎아줄게!!!]
[비인: 얼마나?]
[엘카이더: ···3,000포인트.]
[비인: ···를 더 주는 거죠 ㅇㅇ?]
[엘카이더: ······그래.]
그럼 그런 걸로.
엘카이더는 이제 빚진 3,000포인트를 벌기 위해 죽어라 뛰어다녀야 할 거고, 나는 뭐······. 이 정체불명의 지식과 마법 구조물을 가져갈까.
뭐 나중에 적당히 팔아버려도 되겠지만. 일단 전문가인 세사이사에게 물어봐도 될 거고······. 뭐 그게 아니더라도 대단해 보이는 건 맞는 것 같으니까······.
난 내 세계로 돌아갔다. 여전히 지옥 같은 곳에서 끝없는 투쟁이 반복되고 있었다. 난 천사에게 신화적 특성을 구매하겠다고 하려고 했는데, 천사가 날 보고 바로 질문부터 갈겼다.
"왜 그랬어요?"
뭐가.
"아니 당연히 무자비하게 죽여 버릴 줄 알았는데. 말은 더 큰 이득을 얻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생각해 보면 이득을 챙기려고 일부러 뜸들인 것 같지도 않고, 도중에 마음이 바뀐 것 같아서요.
마치 보이지도 않는 상대는 버튼 눌러서 죽일 수 있지만, 눈앞에 있으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할까."
······.
"천사."
"예?"
"내 인간성을 다 지우는 데는 몇 포인트가 들까?"
요컨대, 날 버리고 '태어나게 한 은혜'를 운운한 어머니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은 걸로 평생 양심이 찔릴 정도로 연약한 내 마음 같은 것 말이다.
다 지우는데 얼마나 드나?
"그거······허. 음. 많이 들지는 않습니다만······."
"그래? 그렇게 말할 정도면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난 평생 고생하는군."
"으음. 뭐어."
난 인간이 싫다.
나는 인간이다.
따라서 나는 내가 싫다.
우승하면 인간을 벗어난 신이 되고, 지면 인간이 하나 사라질 뿐이다.
그러니까 게임에 망설임 없이 참여한 것이다.
됐다. 지금은 마왕. 그런 마음가짐으로 상대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어서 상점에서 신화급 특성 보여줘. 하나 좋은 걸로 골라 보지."
작가의말
1권(1~25화) 후기입니다. 보통 웹소설은 후기를 쓰지 않지만 전 항상 넣고 있습니다. 읽지 않으셔도 내용 이해에는 지장이 없으니 안 읽으셔도 됩니다.
-집필 계기-
(이 작가를 무려 4년 동안 케어한)편집자: 작가님. 지난 번 석기시대 때 하고 싶은 거 다 하셨죠? 이제 진짜 양판소를 쓰실 때입니다.
본인: 양판소라. 소드마스터가 나오는 것 말이군요.
편집자: 네!
본인: 혹은 대마법사 나오고.
편집자: 네!!
본인: 아니면 막 나 혼자만 뭔가를 하면서 모조리 독식하는 그런 천재가 나오는 그런 것······!
편집자: 네!!!
본인: 그럼 인간혐오하는 주인공이 문명 게임에서 혼자 바이오스피어 만드는 소설 쓸게요.
편집자: 어째서.
의외로 흥했으니 그냥 쭉 썼습니다. 편집자가 4년 동안 양판소 제발 써달라고 말한 걸 꿋꿋이 무시하면서 제가 쓸 수 있는 소설만 쓴 보람이 있군요.
아무튼. 1권 후기 시작합니다.
-질문&답변-
질문 1. 요거-토소스는 내온성인가요 외온성인가요.
답변: 첫 번째 질문 수준부터 남다르군요. 거체에 마력을 통한 발열, 거기에 사막 지형이라는 특이성 때문에 체온을 낮추는 메커니즘이 주로 있습니다. 말하자면 항온성 변온동물입니다.
질문 2. 상점 구간 때 동맹이 한 사람에게 포인트를 몰아주면 신화급 특성도 쉽게 구할 수 있지 않나요?
답변: 세 가지 이유로 불가능합니다. 첫째로 세계에 동맹이 있으면 동맹이 각각 세계 전체의 총점만큼 얻는 게 아니라 세계 총점에서 자기가 가진 지분 만큼 총점을 나누어 가집니다.
둘째로, '기준 레벨'의 20배 가까이 되는 량이 신화급 특성 가격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절대다수는 세계의 총점을 다 긁어모아도 그 열 배에서 스무 배 가까이는 더 포인트가 필요합니다. 주인공도 엄청나게 성공한 축인데 별도로 영업을 뛰어야 했을 정도로 어렵습니다.
셋째로, 특성은 세계가 아니라 신에게 귀속되는 구조라서 공유가 안 됩니다. 동맹 관계라면 다른 사람에게 내 포인트를 나눠줘서 신화급 특성을 줄 이유가 없습니다.
질문 3. 압호주스도 진화대상임? 번식하나요?
답변: 아뇨. 분류상 요정(님프)인데, 지형에 매인 존재라서 진화도 못하고 번식도 안 합니다. 그래도 하수인(페어리)들을 만들 수는 있겠네요.
-SF임-
전작······이라고 할지. 지금 후기를 쓰는 시점에서는 동시연재중인 석기시대부터 시작하는 판타지를 감수해주신 SF 작가님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그냥 SF"라고 합니다.
뭐 그렇죠? 스페이스 오페라 말고, 과학과 문명을 소재로 다룬 SF의 문법을 쓰고 있습니다. 목표는 SF문학상 웹소설 부문 수상이다.
전 원래 판타지에서만 나올 수 있는 생물, 그것도 말이 되는 생물들을 만드는 게 꽤 좋았어요. 많이 시도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런 점에서 생물학적인 고증 등에서 지적도 좀 들어왔습니다. 1권 시점에선 딱히 수정하진 않았는데요.
왜냐면 솔직히 말해서 소설이다보니 표현 자체를 좀 과격하게 하거나 아니면 주인공의 관점으로 서술한, 대놓고 편향적인 서술을 의도했거나 한 게 있거든요. 그냥 제 문장력이 부족했거나, 혹은 제가 아예 잘못 알았거나, 어쩌면 지금은 맞는데 후에 볼 때는 학문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게 나올지도 모르고요.
기본적으로 그럴듯한 지식만 편의적으로 사용하는 웹소설이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플러 바키 시리즈처럼 말이죠.
-주인공-
닉네임 '비인'은 말 그대로 비인(非人)입니다. 주인공은 자기가 사람이 아니길 바라는 거죠.
그래서 주인공이 엄청나게 추하고, 악하고, 또 지도 지성체면서 지성체 혐오하고, 지성체 싫다면서 지성체인 세사이사하고 친목질하고, 커뮤니티도 적극 활용하고, 홍보 시 뒷광고부터 생각하는 등 온갖 추한 면모는 다 붙었습니다. 100% 의도한 겁니다. 앞으로 항상 이런 면모만 나오진 않겠지만.
전 원래 주인공을 무조건적인 호감상으로 절대 안 만든다는 지론이 있거든요. 아니 그보단 어떤 작품을 쓰든 주인공은 결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캐릭터적 완성도에 결함 말고, 캐릭터성으로서 존재하는 결함.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어쩌다보니 주인공이 멍청하거나 이상한 판단을 하는 상황이 나타나는 것보단, 차라리 진짜로 결점을 만들어두고 그 결점을 중심으로 사고를 일으키면 캐릭터에 일관성이라는 게 좀 쉽게 생기더라고요.
-크툴루-
본 작품의 생물들 이름은 디저트와 크툴루 신화의 생물들에서 따왔습니다. 무슨 유희왕 카드군 같은 작명이 됐군요.
원래는 그냥 크툴루 신화의 생물들 이름을 쓰려고 했는데 여자친구가 "왜 디저트 군단인데 디저트가 이름이 아님?"해서 부랴부랴 더한 요소죠.
압호주스: 압호스+주스 입니다. 압호스+애플주스 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던데, 어··· 그냥 그런 걸로 할게요.
요거-토소스: 요그-소토스+요거트 소스 입니다. 이름 생각하고 기가 막힌 발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스야킷: 비야키+비스킷 입니다. 크툴루 신화에서 꿀물을 먹는 비야키와 설정이 비슷해져서 재밌네요.
감치: Sweet tooth의 직역입니다. 단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죠.
-반지성주의-
사실 반지성주의는 지성체를 때려잡고 배척하는 사상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무식함을 숭상하고 학문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사상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주인공의 사상은 반지성주의가 아니죠. 오히려 인간이 해로우니 인간은 자발적으로 멸종해야 한다는 극렬 환경주의 같은 건데요(진짜 활동하는 단체고 대한민국은 지금 이미 실천중입니다). 솔직히 '친환경주의 마왕의 세계침략'이라고 하면 뭔가 좀 아닌 것 같아서 반지성주의 마왕이 됐습니다.
마왕의 무지성 세계침략 같은 제목도 생각했고, 뭐 웹소설 제목으론 여러가지 생각했는데. 공식 약칭으로는 '반마세'를 밀고 있습니다.
-후기후기-
이 작품은 끝이 명확합니다. 도중에 제 실수로 독자가 대거 이탈하든, 아니면 너무나도 흥행해서 더 연재하고 싶든······. 어쩌든 간에 주인공이 지거나, 하차하거나, 혹은 마지막 남은 플레이어가 되어서 우승하면 끝입니다. 이론상으론 다음 하차 단계 때 주인공 빼고 전원이 하차하면 우승이죠.
언제나 작품을 쓸 때 '끝'은 생각해두고 쓰기 때문에 주인공 마지막 게임의 결과와 작품의 결말 역시 이 후기를 쓰는 시점에서 이미 머릿속에 있는 상태입니다.
냉정하게 봐서 대결-보호-대결이라는 단조로운 구조기 때문에, 타파하기 위해서 여러 변수를 넣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커뮤니티라든가 이벤트 등의 요소도 그 일환이고요.
지금까지 봐주고 응원해 준 독자분들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추하고 못난 작가지만, 언제나 저밖에 못 쓰는 글을 쓰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면 다음 권 후기에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6화. 신계일체
일반-우수-정예-영웅-서사-전설-신화
게임 내에서 등급은 이렇게 7개로 나뉘었다. 뭐, 까놓고 말해서 그냥 높은 등급이 좋다. 일반 등급 특성인 『강인함』과 신화급 특성인 『불멸자』는 그냥 이름만 봐도 급 차이가 엄청나다.
그렇지만 전설급 특성의 '상위호환'이 신화급 특성이라곤 할 수가 없다.
왜냐면 영웅 등급부터는 특성에 〈고유〉가 붙을 수 있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특성이라는 거다.
영웅 등급 고유 특성인 『완벽 호흡: 호흡만 해도 생존 가능함』과 신화급 고유 특성인 『시공간 절대 독립체: 모든 시공간 계열 공격에 면역이 되며 시공간 계열 권능을 제한 없이 획득 가능』을. 비교해보자.
당장 내 디저트 군단에 뭐가 있으면 좋겠냐고······. 이 초반에 누가 시공간 계열 공격을 쓰는데. 물론 극후반에 가면 시공간 절대 독립체가 더 좋겠지. 근데 당장 밥부터 먹여야 하는 단계 때 그걸 택할 수는 없다.
그러면 신화급 특성을 뭘 고르냐. 하고 봤더니 종류도 많지 않은 신화급 특성의 일부는 이미 다른 플레이어가 보유중이라는 말이 붙어 있었다.
"음?"
"다른 상위권 플레이어분께서 사가셨습니다."
"다른 플레이어가 사가면 못 사나?"
"보통 특성은 아니지만, 〈전설〉급 이상은 전부 〈고유〉할 뿐더러 〈유일〉한 특성이기 때문에 플레이어 중 누가 가지고 있으면 택할 수 없지요."
그렇군. 멀티 플레이에 그러고 보니 그런 룰이 있었던 것 같다.
『신수: 세계 그 자체의 현신인 신화급 창조물을 생성합니다. 능력치 총합은 충돌 시점 현재 문명의 능력치와 같습니다.(타 플레이어가 보유중)』
『최초의 성지: 게임에서 맨 처음 받은 땅이 최초의 성지로 선포됩니다. 최초의 성지가 점령당하지 않는 한, 모든 창조물의 능력치가 대폭 상승하며 상위 개체가 나올 확률이 높아지고 최초의 성지 "지형" 레벨이 4 상승합니다(타 플레이어가 보유중)』
『신화적 불가사의: 스스로 지은 구조물이 신화적인 영역에 이르렀습니다. 이미 지은 구조물 하나를 지정하거나 자원을 소비해 생성합니다. 해당 구조물은 신화적인 기능 하나를 즉시 가지며 한계 없이 성장, 증축하며 스스로 보수할 수 있습니다.(타 플레이어가 보유중)』
직관적으로 좋아 보이는 것들은 다 가져갔군. 내가 써먹으면 꽤 좋은 것들인데.
"그래도 신화적 특성은 다 좋아요."
"그야 그렇지. 나한테, 지금 당장,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쓸모가 있어야지."
게임 내의 '최상위권'은 듣자하니 죄다 9만 점이 넘는다고 한다.
미친놈들. 나처럼 노동으로 포인트를 긁어모아서 신화급 특성을 구매하려는 플레이어도 한 1천 명은 된다고 생각하고, 다른 놈들이 먼저 가져갈 수도 있으니 빠르게 골라야 한다.
"천사. 네가 볼 때는 어떤 특성이 좋아 보이냐?"
"이거 어때요?"
『바이오펑크: 생명과 과학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방향성을 찾아내었습니다. 〈생명〉 능력치와 〈기술〉 능력치가 통합되어 둘을 합친 수치가 곧 현재 수치가 됩니다, 창조물들이 〈체력〉 만큼 타 능력치를 얻습니다. 이제 양측 수치 무엇을 올리든 같이 올라가며, 떨어질 때도 같이 떨어집니다.』
"이것만 있으면 디저트 군단은 당장 이 게임 최고 수준의 과학 문명으로 재탄생할 수 있어요! 초생물학적 문명으로 거듭난 디저트 제국이 위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거예요!"
"기각."
"아니 왜요! 진짜 객관적으로 이것보다 좋은 거 없는데!"
"내 철학하고 맞지 않아."
"이기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마다하지 않는 마왕은 대체 어디로 갔어요!"
반지성주의 철학하고도 맞지 않기도 하고, 그거 고르면 이제부터 〈산업〉도 〈정치〉도 〈문화〉도 다 올려야 하잖아.
지금 이미 바닥인 상태에서 그거 고르면 아마 〈생명〉 수치는 충돌 4번 할 때까지 정체되어 있을 거고, 나는 그 사이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세계를 계속 관리해야 할 걸. 그래도 이길 수는 있겠지만······. 그런 플레이는 익숙하지 않아.
"좋아요. 그럼 이건 어떤가요."
『초통합군체의식: 세계 내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의 의식이 연결됩니다. 세계의 〈정치〉 수치가 곧 개체의 〈정신〉 수치가 되며, 모든 개체는 이제부터 완벽하게 신의 의지에 부응하고 또한 모든 개체가 완벽히 효율적으로 움직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디저트 군단은 그야말로 하나의 생물! 압호주스와 요거-토소스 역시 하나로 융합되어서 그야말로 무적의 생체군단 그 자체가 될 거예요!"
"기각."
"아니 이건 또 왜요?!"
"내 생태계는 서로 먹고 먹히는 격렬한 투쟁에서 진화를 가속하는 걸 핵심 빌드로 삼는데 그걸 택하면 그게 안 돼. 옛날에 게임 때 그거 고르고 〈진화〉가 막혀버린 걸 봤어."
그리고 철학적으로도 그게 뭐가 반지성주의 빌드인가 싶기도 하고.
"끄응. 신화적 특성은 워낙 독특한 게 많다보니깐······. 그러면 이건 어때요?"
『초월종: 이제부터 모든 일반 창조물의 레벨 및 특성 제한이 사라지며 모두가 고유한 것처럼 성장, 승급 시험 없이 끝없이 성장합니다. 모든 창조물이 모든 종류의 에너지를 섭취할 수 있으며 에너지 효율이 극한에 이를 정도로 늘어납니다.』
"이거면 디저트 군단이 상상을 초월할 괴수가 될 거예요."
"이건 택할 만하지. 그렇지만 지금 택할 건지는 좀 생각해보지."
"어? 왜요?"
"괴수 군단 빌드는 한계가 있어."
천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네?"
"그러니까 괴수들을 아무리 강력하게 키워봤자 30라운드까지 못 간다고. 전설적, 신화적 생물이나 괴수들을 통한 '괴수 아포칼립스' 전략은 한계가 있어······. 이 게임의 수준으로 볼 때 한 20라운드에서 막힐 거고, 어쩌면 조금 일찍 막히거나 늦게 막힐지도."
"전 당연히 게임 끝날 때까지 괴수 아포칼립스 전략으로 가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요."
아니, 안 된다.
간단하게 말하면, 생물이 진화와 성장으로 올릴 수 있는 능력치보다 문명이 기술, 마법, 정치와 문화로 단합된 사회와 인구와 산업의 결합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시너지로 산출되는 능력치가 명백하게 더 높기 때문이다.
강한 괴물을 잔뜩 만들어서 문명을 점령한다······? 말도 안 되지. 그건 고대 시대는커녕 선사 시대때나 일어나는 일이다. 말하자면 '호랑이들이 너무 많아서 나라가 망했다.' 수준의 일 아닌가.
이 게임은 판타지라서 어느 정도는 그 전략이 먹히긴 한다. 그래도 20라운드 넘어가면 안 통한다.
먹을 수 없는 젤리들만 내보내서 아사시키는 전략이 몇 라운드밖에 먹히지 않은 것처럼, 그 시점에서는 다른 전략이 필요하게 된다.
"나는 지금 전투력보다는 안정성을 높이는 플랜이 더 필요해."
"지금 전투력은 충분하니까?"
"그래. 요거-토소스를 활용하기도 전에 적을 끝내버릴 정도로 강력한 공격력에, 요거-토소스라는 비장의 카드. 지금은 네 말마따나 '괴수 아포칼립스' 상태를 일으켜서 거의 대부분의 문명을 밀어버릴 수 있어."
"확실히 그렇군요."
"그러니까 난 말하자면 당장 엄청나게 유리해지기보단, 장기적으로 볼 때 엄청나게 도움이 될 특성이 필요해. 적어도 20라운드 이상은 적극적인 활용이 가능하고 어쩌면 30라운드까지도 그 위력이 전혀 줄지 않을 신화적 특성 말이다. 생물 중심 빌드가 후반에 성장력에서 밀리는 이상, 초반보다는 후반을 보완하는 게 낫겠지."
"그러면 이건 어떠신가요?"
하고 천사는 바로 다음 특성을 추천했다. 이번에도 별 기대감 없이 봤다.
『신계일체: 신과 세계를 완전히 일체화시킵니다. 세계의 모든 창조물과 지점에 동시에 자신의 의지를 내려보낼 수 있으며, 의식을 〈신앙〉 레벨만큼 분할 할 수 있고, 신성력 총량과 회복 속도에 (〈신앙〉 레벨+1)만큼을 곱합니다.』
그런데, 이 특성은 여태 보여준 것과는 달리 꽤 마음에 들었다.
"호오. 처음 보는 건데."
"게임 시점에서는 없었으니까요."
"다시 말하자면, '나'의 분신을 만드는 특성인가?"
"그것 이상입니다. 세계의 모든 부분에 감각이 생기고, 의식을 그만큼 분할해서 집중할 수 있으니, 말하자면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부하가 〈신앙〉 레벨만큼 늘어나고 신성력 역시 그만큼 늘어나는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부하가 없으신 비인 님께 아주 적합한 특성으로 여겨집니다."
대단하군. 정말로 좋아.
나는 혹시라도 누구에게 뺏길까봐 바로 이 특성을 택했다. 다른 특성을 고려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게임 내내 부하가 없을 거고, 게임 내내 모든 시점에서 생태계를 지켜보면서 생태계 튜닝을 해야할 텐데 날 위해서 만들어진 것 같은 수준의 특성이었다.
「『신계일체』를 144,092 포인트를 써서 구매합니다.」
특성 카드를 내 몸에 품은 순간, 감각이 달라졌다.
원래도 육체를 벗어나서 세계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신의 시점을 지닌 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예 세계의 모든 부분을 '보는'걸 넘어서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겠는데, 체내의 모든 세포가 다 세계의 일부인 것 같고, 그 모든 감각을 다 느끼면서도 전혀 불쾌하지도 않고, 뇌가 터져버리지도 않고, 그냥 동시에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면 의식 분리.
내 신성 레벨은 지금 5였다. 다시 말해 의식을 다섯 개로 분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분신이 다섯 개가 나왔다. 뭐야. 그럼 여섯 명······. 아, 아니군. 분할을 5번 할 수 있는 거니까 여섯 명이 맞군. 약간 헷갈렸다. 국어 게임이군.
나는 나를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는 나를 바라봤다. 모든 의식이 나였다.
곤충이나 문어 등, 뇌 말고 별도의 신경절을 신체에 지닌 생명체가 느끼는 감각이 이런 것일까. 마치 뇌가 여러 개면서, 그 뇌가 전부 연결된 듯한 감각.
아니 그 이상이다. 어떤 딜레이도 없이 완벽히 연결되어 있었으니.
"하필 곤충이나 문어로 비유하나요······?"
문득, 난 엄청난 생각이 떠올랐다.
"잠시만, 분할된 내 정신마다 별도의 커뮤니티 닉네임과 아이디를 혹시 부여할 수······."
"안 됩니다."
젠장. 의식을 여섯 개로 분할해도 커뮤니티 계정은 하나를 쓴단 말인가······. 신화급이면서 개쓰레기로군······.
하지만 뒤집어 말하자면 이런 얘기다. 나는 이제부터 커뮤니티 활동으로 다른 플레이어들의 정보를 정탐하면서, 혹은 다른 플레이어의 생태계를 컨설팅 해주면서, 동시에 내 생태계를 완벽히 관리할 수 있었다.
〈신앙〉 레벨을 늘릴수록 훨씬 편해질 것이다. 갑자기 〈신앙〉 중요도가 엄청나게 높아져 버렸군······.
하지만, 그만한 가치는 있다. 몸과 의식이 여섯 개. 다시 말해 시간이 여섯 배로 느리게 흐르는 것과 다름없다. 신성력도 여섯 배로 늘어났으니 크게 차이도 없어.
난 여섯 개의 의식에 각각 할 일을 정했다.
하나. 커뮤니티 활동과 교류를 통한 정보 수집 및 타 플레이어 생태계 컨설팅을 통한 포인트 확보.
둘에서 넷. 기존 생태계 관리. 구역별로 관리할 것.
다섯. 신규 생태계 관리.
여섯. 공부.
"공부요?"
둘부터 여섯까지의 의식이 각기 움직이고, 나는 커뮤니티 활동 겸 천사와 소통하는 의식체로서 답했다.
"방금 엘카이더에게 받은 "영계"와 '영립학 지식'이 뭔지 잘 모르겠어. 머릿속에 엘카이더가 알고 있던 영립학에 대한 정보는 죄다 들어왔지만 나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던 학문이라서 내용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교과서를 통째로 암기한 학생이 된 기분이야. 그걸 정리하려고."
"호오. 드디어 신비에 대한 이해에 발을 들여놨군요. 엘카이더 플레이어의 지식은 객관적으로 대단한 수준이었습니다. 도박에 미쳐 살았다곤 하지만, 아무래도 공무원으로서는 꽤 유능했던 사람 같군요."
그런가. 그렇게 말해도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
세사이사라면 정확히 평가할 수 있겠지만, 거꾸로 그 녀석도 모르는 지식이라면 나눠줘도 될지 모르겠군.
일단, 공부를 위해서 여섯 번째 의식은 내 세계의 "영류계" 레이어를 열었다. 한 번도 열지 않았으니 뭔가 다른 기능이 있는가 하고 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눈앞에 보인 건.
"어?"
여섯 번째 의식체가 느낀 걸 모두가 공유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엘카이더에게 받은 초라한 "영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영적 구조물과,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가공할 흐름이 내 기존 세계를 그대로 순환하며 강과 사막, 담수호 인근을 따라 흐르더니 흡수한 모든 마력을 일제히 넥타르 오아시스로 퍼붓고 있었다.
"이건······."
"세사이사 플레이어님이 해놓으신 겁니다. 생태계를 과격하게 고치는 과정에서 엉망진창으로 꼬여 있던 영압과 흐름을 세밀하게 조정해서 넥타르 샘에 모든 마력이 응집되게 만든 것이죠."
이 자식. 이런 걸 했던 건가.
영류계는 보지도 않아서 몰랐다. 그리고 이곳의 영적 구조물이 얼마나 정교하고 세밀하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보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난 세사이사가 뭐 한 것도 없는데 마력압을 2배 높이는 어처구니없는 재주가 있는 줄 알았더니, 그냥 미칠듯이 정교한 공사로 내 세계를 다져놓은 것이었다.
여섯 번째 의식체는 그리고 지식의 편린을 뒤져가며, 세사이사가 나중에 영계를 설치해두려고 한 듯, 비워놓은 자리에 엘카이더에게서 받아들은 영계를 천천히 꽂아 넣었다.
세사이사의 수정에 비하면 누더기 땜질 수준이지만, 난 신성력으로 영적 구조물들의 형태를 비틀고 엮어서 대충 영계를 그곳에 얽히게 만들었다.
그 순간.
「세계의 〈신비〉 점수가 8,579점을 넘어 레벨이 7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신앙〉 점수가 4,085점을 넘어 레벨이 6으로 상승했습니다.」
영계가 미친듯이 세계의 흐름과 마력을 흡입하고 내뿜으며, 사실상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데 〈신비〉와 〈신앙〉 레벨을 한 단계씩 올려주었다.
도대체 뭐지 저거. 엘카이더는 저런 걸 나한테 넘겨준 거야?
"솔직히 지금 와서 말하는 거지만, 엘카이더 님에게서 "영계"를 뺏어가고도 3,000포인트를 더 뜯어간 건 진짜 너무한 처사긴 했어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아무튼. 미친듯이 성장했군. 다음 게임은 낙승이겠어.
「곧 세계 충돌이 시작됩니다. 살아남은 플레이어만이 다음 라운드로 진출합니다.」
무릎 꿇고 빌던 이에게 자비를 베풀던 마음 약한 인간은 이제 끝. '대멸종의 주인'으로 돌아갈 때다.
"진짜 사람 아니야······."
27화. 세계 충돌 -다섯 번째-
내 현재 세계 상태에 몇 가지 인상적인 지표가 있다.
「총점 LV.7: 71,567」
첫째로, 총점이 7레벨이다. 세계 충돌을 4번 겪었는데 7레벨이면 거의 최상위권이라고 봐야겠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진짜 100위권 안에는 9만점 이상들이 있다고 하지만 약간 함정이 있다.
그놈들 아마 신화급 특성 못 샀을 거다. 9만점이면 대부분은 전쟁 없이 협력으로 올라왔을 텐데, 그러면 9만 점을 2명만 되어도 반으로 쪼개야 하니까.
신화급 특성을 살 수 있었던 플레이어는 난 최대 천 명 정도로 추정했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적어서 136명이었던가? 커뮤니티 닫히기 전까지 예의주시했으니 확실하다.
아마도 쟤들은 상위 100이 아니라 단독으로 열심히 영업을 뛰어서 산 애들이 다수일 거라고 생각한다. 포인트 팔고 싶어서 안달난 애들이 좀 많았거든. 협력으로 올라온 애들은 대신 서사~전설급 특성을 2~8명 정도가 여럿 구매했으니 대충 밸런스가 맞을 것이다.
「생명 LV.8: 31,692」
둘째로, 생명은 이미 공식 인증으로 1위다. 1위가 아니면 억울할 거다.
「군사 LV.7: 13,742」
셋째로, 군사력도 7레벨로 군사력이 좀 많은 세계라고 해봤자 5~6레벨일 거고. 2,000~8,000이라는 걸 생각하면 거의 압살 수준이다.
〈신비〉와 〈신앙〉은 "영계"를 설치하니 뜬금없이 1레벨씩 올라서 당혹스럽지만, 나쁜 건 아니지. 원래 6만 점 대였는데 7만 점 대로 올랐으니.
[창조주여. 제 성장에 한계가 온 것 같습니다.]
"아. 벌써?"
하긴, 넥타르를 그렇게 처먹고 세사이사가 가르쳐준 마법 배우면서 알아서 훈련하고 능력치 올리는데 한계치에 도달할 만도 하지. 말 그대로 내 세계의 모든 자원을 혼자 다 처먹고 있으니 말이다.
판월이란 게임에서 '고유 창조물'은 5레벨마다 '승급 시험'을 거쳐야 했다. 예를 들자면 5레벨 능력치의 한계점은 32,674인데. 이것보다 능력치를 더 높게 올리고 싶으면 그 개체의 등급과 관계없이 시험을 치러야 했다.
아무리 수련하면 검으로 산도 가르고 마법으로 바다도 불태울 수 있는 판타지 세계라도 강력한 유닛 혼자서 문명을 때려 부수면 곤란하잖나.
그래서 5레벨 단위로 승급 시험을 치러야 하는 거다. '요정' 같은 일부 창조물은 또 예외라서 압호주스는 승급 시험 없이 넥타르 샘과 똑같은 8레벨이고 일반 개체가 레벨을 올려서 강해진 상위 개체는 또 승급 시험이 아니라 다른 걸 하지만, 아무튼.
내가 요거-토소스의 성장을 인지한 순간, 천사가 나에게 세 개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요거-토소스의 승급 시험으론 다음과 같은 것을 준비했습니다."
「영웅의 시험: 6레벨 이상의 위업을 달성하거나, 그 위업에 기여도 4,086점 이상을 달성한다.」
「전투 마법사의 시험: 전투로 적의 점수를 총합 4,086점 이상을 떨어트린다.」
「현자의 시험: 문명에 〈기술〉과 〈신비〉에 총합 기여도 4,086점 이상을 달성한다.」
뭘 먼저 달성해도 상관없다. 달성해 놓고 바로 승급하지 않아도 된다. 통과한 승급 시험에 따라서 요거-토소스의 성장 방향이 정해지는 방식이다.
"다음 충돌에서 달성할 수 있으려나?"
"못할 것 같습니다. 6레벨 이상의 위업을 다섯 번째 단계 때 하기도 대단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적을 쓰러트리기 전에 어지간하면 디저트 군단이 적을 박살 내겠죠."
"역시 그렇겠지."
"달성해도 좋은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상대가 6레벨 이상으로 강하다는 거니까요."
뭐, 요거-토소스가 더 강해질 이유가 없기도 하다. 솔직히 지금도 자원을 너무 많이 소비하고 있으니까.
이것만으로도 이미 다음 충돌은 안 지겠군. 그냥 사탕 및 비스야킷 투하로 인한 괴수 메타로 압살할 것 같다. 정 상대의 저항이 격렬하면 요거-토소스 불러서 때려잡지 뭐.
"단순무식해."
원래 전략의 묘리는 힘이 세면 단순해지는 법이다.
다만, 내 상태창의 다른 지표를 보면 좀 복잡하다.
"어? 이거 능력치가 왜 이래요? 이러면 안 되지 않아요?"
이렇게 능력치가 오르는 게 당연한 건데 도대체 내 천사는 주최 측이면서 왜 게임 룰도 모르지.
"플레이어면서 게임 룰을 모르는 사람보다야. 지금 상태창 상황에 대해서 답해주시죠. 저는 어디까지나 주최 측의 말단 대리인. 룰을 알 뿐이니 실제로 어떠한 전략과 상호작용이 있는지는 비인 님게서 대신 설명해 주셔야 합니다."
어처구니가 없군.
하지만 뭐. 틀린 말은 아닐지도. 난 설명하는 걸 좋아한다. 이 천사를 놀라게 하는 것도 꽤 마음에 든다.
어차피 내 나머지 의식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 천사한테 반지성주의 빌드에 대해서 이번 기회에 설명할 겸. 내 스스로 정리해 볼까.
∞
이 게임, 아니 더 나아가 세계를 다스리는 신으로서 가장 중요한 능력치가 뭘까?
모든 플레이어에게 1순위가 뭐냐고 물으면 10억 명의 플레이어 중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똑같이 대답할 것이다.
"〈생명〉이 가장 중요한 능력치다."
그야 〈생명〉이 0이라는 얘기는 전멸했다는 얘기다. 가장 명확한 형태로 패배 조건이 달성된 상태······. 당연히 1순위는 〈생명〉.
비정상적일 정도의 〈생명〉 빌드를 가고 있는 비인이 아니더라도 모든 플레이어가 동의하는 명제다.
그러니까 비인의 생명이 2위의 3배나 되는 걸 보고 기겁한 것이고.
그러면 2순위가 뭐냐? 라고 물으면 역시 모든 플레이어의 답이 같다.
"2순위는 〈군사〉다."
이 역시 당연하다. 〈군사〉, 다시 말해 전투력 없이는 〈생명〉을 보호할 수가 없다. 인구보다도 군사력을 더 높이 사는 일도 있다.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군사력을 키우는 게 아니라 군사를 키우기 위해서 사람을 키우는 것이다. 그래도 국가가 돌아가고, 세계가 움직인다. 기형적인 형태긴 하지만.
자 그러면 여기서 다음 질문을 해보자.
여덟 개 능력치 중 세 번째로 중요한 능력치가 뭐냐?
여기서는 10억 명의 답이 여섯 개로 갈라진다.
〈산업〉 〈기술〉 〈문화〉 〈정치〉 〈신비〉 〈신앙〉.
여섯 개 다 너무 중요하고, 문명을 이루는데 빼놓을 수 없는 축이다.
각기 다른 축을 중심으로 국가와 세계를 구성할 수 있고 그 우열은 아무래도 없어 보인다.
[더 판타지 월드 크리에이터]라는 게임의 형태로도 그랬다. 마치 초월적인 존재가 만든 듯 별다른 패치를 하지 않고도 비정상적일 정도로 밸런스가 잘 맞는 데다가 그 전략성의 깊이는 무한한 듯 보였던 그 시뮬레이션 게임은 어떤 능력치를 중심으로 빌드를 하든, 거의 엇비슷한 최고점을 내놓을 수 있었고, 상대 세계와 붙을 때도 능력치의 우열보다는 능력치의 조화와 전략의 우열이 승부를 가렸다.
그래서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항상 논쟁이었다. '어떤 능력치를 중점으로 삼아서 세계를 운영하는 것이 가장 우월한 문명을 건설할 수 있는가?'
대충 받은 세계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가 정답이긴 하지만, 그래도 말이다.
그리고 지구가 아닌 세계 출신 플레이어, '게임'의 형태로 접한 엘구아노는 그 질문에 〈문화〉를 주축으로 문명을 세워야 한다고 답하는 사람이었다.
"내 생각엔, 이 게임은 〈문화〉만 올리면 대충 중간은 가는 문명을 건설하는 것 같다."
〈기술〉중심 빌드를 하면 최고점이 높고, 〈산업〉중심 빌드를 하면 최저점이 높다. 이것까지는 상식이다.
하지만 모든 상황에서 안정적인 성장을 거두는 건 역시 〈문화〉였다.
중간은 간다.
이 점이 중요했다. 엘구아노는 아무리 생각해도 10억 명 중에서 자신이 우승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간쯤 가는 게 중요했다.
그러면 〈문화〉가 무슨 능력치냐? 모든 능력치가 다양한 영향을 끼치지만, 〈문화〉의 핵심 기능은 역시 일반 개체를 〈상위 개체〉로 승급시켜주는 거였다.
혹은 일반 개체가 〈고유 개체〉로 승급하기도 했고, 선천적으로 〈고유 개체〉 등이 태어날 가능성도 높아졌다.
게임에서의 설명으론 〈문화〉란 〈매력〉의 발현과 흐름을 뜻하는 것으로, 〈매력〉이 높다는 것은 그 개체가 우월하다는 뜻이다. 〈문화〉가 높은 문명에서는 〈매력〉이 높은 개체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고유한 개체나 유일한 개체, 상위 개체가 나올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거였다.
철학인지 뭔지 게임적인 설명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문화=매력=강력한 영웅 이라는 공식은 확실했다.
"현실이든 게임이든, 소수의 엘리트가 결국 나라와 문명을 이끌어 가는 법이라고. 어중간한 떨거지들 수천수만 명 양성해서 뭐해? 결국 최고의 능력치를 가진 엘리트 몇 명만 잘 키워서, 그 엘리트들이 멍청이들을 이끌게 하면 적어도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다고."
판타지 게임이니까 잘 키운 영웅이 말 그대로 백만 대군을 상대하는 것도 가능했다. 한 사람이 천 명 분의 행정업무를 감당하는 것도 판타지 게임이라서 그런지 가능했다.
그러니까. 영웅만 잘 키우면 된다. 그런 전략을 세운 엘구아노는 네 번째 충돌까지 협력, 배신, 대결, 다시 협력을 겪으면서 행운까지 연달아 겹치고, 상점 구간에서 전설급 특성까지 구매해 목표로 하던 영웅을 키우는데 성공했다.
"돼, 됐다! 고작 다섯 번째 단계 때 전설급 개체를 만들었어!"
게임 초반에 어떤 이유에서인지 '고유 창조물'을 하나 공짜로 창조할 수 있게 해준 이벤트 덕이 컸다. 괜히 에너지 소모량 심한 강력한 괴물을 만드는 대신, '종족'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표상〉을 선택했다.
그리고 자기 세계의 모든 자원을 처넣고 가능한 최대로 발전시킨 문화, 상점 구간 때 구매한 전설급 특성에 힘입어 완성했다.
「시카도즈 〈전설급 표상〉
체력 LV.3: 622
전투 LV.5: 3,520
솜씨 LV.5: 2,645
지능 LV.4: 987
매력 LV.5: 4,558
정신 LV.3: 771
권능 LV.4: 1,856
마력 LV.5: 1,977
개체 총점 LV.5: 15,936」
체력은 좀 모자라지만, 그 외에는 다방면으로 유능하다. 특히 가장 큰 장점은 전설급 특성 『차원 여행자』에 힘입어 상대 세계로 차원문 단계부터 건너갈 수 있다는 것.
높은 매력을 통해서 상대 문명의 지도층과 민중을 손쉽게 매료하는 외교관으로도 유능하고.
가공할 전투력 덕에 정 수틀리면 상대 문명을 단독으로 테러하고 빠져나올 수도 있는데다가.
다방면으로 유능한 권능과 높은 마력 덕에 높은 생존력을 지녀서 단독으로 건너갔다가 잡혀 죽을 위험도 없다.
세계 충돌 시작하자마자 상대 세계로 던지면 알아서 해줄 정도로 지능이 높기도 하다.
엘구아노는 자신의 동맹 및 하위 신들에게 과감히 전설적 창조물을 첫 차원문으로 적 세계로 던지는 행위를 제안했고, 모두가 찬성했다. 이건 절대 실패할 수가 없는 전략이라고 말이다.
"하하하! 시카도즈 하나만으로 15라운드까진 갈 겁니다!"
"암! 얘만 잘 키운 다음에 키워나가는 후속 영웅들을 계속 투입하면 그 정도까진 아무것도 아니지!"
그래서 다섯 번째 세계 충돌. 만난 상대 플레이어는 '비인'. 부하도 동맹도 한 명도 없는 단독 플레이어인 걸로 보아 엄청나게 과격하든가 엄청나게 운이 없는 놈이든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자 그럼. 가라. 시카도즈! 너의 힘을 보여줘!"
[예. 나의 신이시여. 당신이 내린 임무를 완성하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문명의 모든 자원을 다 몰아먹고 성장한 시카도즈라는 이름의 '필승 전략'은 과감히 상대 세계로 건너갔고······.
"그런데 엘구아노. 비인이라는 이름 나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커뮤니티에서 되게 유명했던 것 같은데 뭐였더라······."
그리고 건너간 그들의 영웅 시카도즈는 바위 나무? 와 젤리들로 가득한 기이한 점액질 습지에 떨어졌다.
"?"
"뭐냐······? 어딜 봐도 문명의 흔적이라곤 보이지 않는······."
그리고 시카도즈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넥타르 오아시스, 그 정상에 있는 정체불명의 요거트 색 거품을 보았다.
「요거-토소스 〈전설적 고유 창조물〉
체력 LV.5: 3,561
전투 LV.7: 8,270
솜씨 LV.3: 773
지능 LV.4: 1,803
매력 LV.3: 729
정신 LV.4: 1,468
권능 LV.7: 9,522
마력 LV.6: 6,548
개체 총점 LV.5: 32,674」
"?"
[?]
시카도즈와 엘구아노는 둘 다 동시에 눈을 비비적거리고 다시 그것을 살폈다.
「개체 총점 LV.5: 32,674」
아무리 봐도, 5레벨 능력치의 한계에 도달해서 승급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악마가 있었다.
그때, 동료 신이 입을 열었다.
"아. 생각났다. 그 생명 점수 3만 점 찍은 미친놈이 '비인'이었다."
순간, 그의 세계에 있는 총 세 명의 동맹과 여섯 명의 하위 신들이 일제히 기분이 싸늘해졌다.
"시카도즈!!! 당장 돌아와라!!! 그 악마에게서 당장 떨어져!!!"
차원 여행자 시카도즈가 자신의 권능만으로 돌아가는 차원문을 열고 다급히 몸을 던졌을 때.
그가 있던 자리에 요거-토소스가 소환한 폭풍이 작렬. 오아시스의 일부를 그대로 증발시켰다.
28화. 세계 충돌 -다섯 번째- 2
차원문에 몸을 던진 순간 공간에 얽힌 보호막 덕에 이구아나를 닮은 영웅은 폭풍을 뒤로하고 재빨리 반대편으로 넘어온다. 반대편 차원문 너머로 증발해버린 오아시스의 일각을 보고 그는 침을 꿀꺽 삼킨다.
[시카도즈. 귀환했나이다.]
"사, 살았다."
엘구아노와 동료 신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카도즈라는 그들의 최종병기가 겨우 목숨을 건졌기 때문이다.
동료 신이라곤 하지만 엘구아노가 〈문화〉의 영향력으로 다른 플레이어의 문명과 종족을 잠식해서 사실상 하차 권한만 있는 하위 신이나 다름없는 상태.
그래도 엘구아노가 운영 자체를 잘하는데다가 딱히 우승하고 싶은 욕망도 없는 이들이라서 끈끈한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편이었다.
"엘구아노! 적들이 보낸 괴생명체가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있어!"
"일단 시카도즈를 보내서 방제에 힘쓰자. 그동안 전략회의!"
그들의 기본 전략이 초반부터 일그러지게 됐다. 설마 전설급 창조물인 시카도즈보다 2배 이상, 아니 어쩌면 그 이상 강력할지도 모르는 '괴물'이 상대편에 있을 줄이야······.
"젠장. 상대가 날 차단했어."
"대화를 안 받겠다는 거군. 빌어먹을, 초반에는 저 돌진하는 괴물들로 깔짝대다가 균열이 열리면 그때 봤던 악마를 투입해서 갈아버리겠단 거겠지."
"······어쩌지. 우리 세계 군사력으로 그 악마를 상대할 수 있나?"
"힘들지······. 우리 세계는 시카도즈 키우는데 대부분의 자원을 쓰고 있었잖아. 뭐 그에 못 미치는 영웅 개체도 많지만, 솔직히 저 정도의 괴물 상대로는 좀······."
엘구아노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고민했다.
"잠시만, 그건 상대도 똑같은 거 아닌가?"
"음?"
"그러니까 저놈도 저 악마를 키우는데 세계 내의 거의 모든 자원을 다 소모하는 상태 아니냐고. '괴물형' 창조물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먹잖아."
그 말에 동료 신들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가며 그나마 논리라는 게 짜이기 시작했다.
"그러게. 일리 있어."
"생명 점수 3만인 이유도 알 것 같아. 문명의 흔적이 당장 보이지 않았잖아? 우리는 강력한 개체를 위해서 문화에 집중 투자했다면, 저놈은 강력한 괴물을 위해서 문명의 규모를 최소화하고(설마 0이라곤 상상 못하고 있었음) 나머지 세계를 전부 저 괴물을 먹일 식량 양식장으로 삼은 거야."
사실, 따지자면 선후관계가 잘못되었다.
강력한 창조물이 있어서 세계의 문명을 갈아엎고 생명 양식장으로 만든 게 아니다.
그 어떤 세계보다도 튼튼한 생태계를 만들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강력한 창조물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근거의 오류와는 관계없이 판단 자체는 올바르게 나왔다.
"시카도즈를 이용해서 적들 세계를 테러하자."
"테러?"
"말하자면 저놈이 먹을 식량을 다 없애버리잔 거야. 좀 이상한 환경이긴 했지만 어쨌든 저놈도 밥은 먹겠지. 그것도 엄청나게."
요컨대 시카도즈는 전설적 창조물이지만, '표상'으로 분류된다. 뭐냐면 기존 종족에서 나온 극도로 특출난 천재 같은 거라서 유지비 자체는 평범한 동족처럼 든다.
물론 그래도 전설적 영웅이니만큼 관리비가 적진 않지만······. 혼자서 천 명 분의 일을 하니까 백 명 분 자원이 뭐가 아까울까?
그에 비해 명백히 고유한 괴물형 창조물인 요거-토소스는 에너지 소모량이 미칠듯이 높았다. 비인의 생태계 전체를 지탱하는 넥타르를 혼자서 생태계에 악영향을 줄 정도로 빨아먹는다.
이건 비인의 판단이 약간 틀린 것이기도 했다. 게임을 막 시작했을 당시엔 무조건 1:1에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부러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능력치를 올린 것이다.
하지만 정작 게임의 본질이 밝혀지니까 유지비만 많이 들고 정작 출전을 못하는 애물단지가 됐다.
바로 저번 세계 충돌 때 여실히 드러난 사실이다.
"『차원 여행자』가 없는 이상, 차원문 단계와 차원통로 단계 때까지 저 괴물이 우리 세계를 쳐들어올 가능성은 없어."
"저놈들이 쏟아내는 괴생명체들은 어쩌지?"
"우리 군사력이 시카도즈 빼고도 아주 나쁘진 않아. 방어는 돼. 최대한 방제해 봐야지."
엘구아노는 즉각 자신의 창조물에게 지시를 내렸다.
시카도즈는 그리고 자신의 창조주의 지시를 확실하게 이해했다.
지금은 일단 들어온 적을 방제했지만, 이제부터는 『차원 여행자』로서 적의 세계와 고향 세계를 왕복하며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다 죽인다. 강력한 신비가 있으니 그건 어렵지 않다.
'그 악마'가 오면 바로 차원문 열고 도망간다. 혹은, 『차원 여행자』의 응용을 통해 같은 차원 내 다른 공간으로 이동한다.
그것을 반복하면, 적의 세계가 지닌 '악마'는 몇 년 안에 굶어 죽을 것이다. 이 전략은 대단히 타당해보였고, 전설적 개체의 위력 덕에 엘구아노는 처음으로 비인의 세계에 유의미한 타격을 입힌 플레이어가 될 수 있었다.
∞
초반 게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은 세 가지.
협력형 플레이어와 협력형 플레이어가 만난다. 이 경우 둘 다 협력한다.
협력형 플레이어와 침략형 플레이어가 만난다. 이 경우 침략형이 협력형을 착취하거나, 협력형이 공격을 견뎌내고 침략의 문명을 집어삼킨다.
침략형 플레이어와 침략형 플레이어가 만난다. 서로 죽을 때까지 싸우고 공멸하거나, 효율 떨어지는 동맹을 건설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비인은 대단히 대진운이 없는 편이었다.
첫 상대인 오스왈드. 군사력으로 상대를 죽이려던 전쟁광이었다.
둘째 상대인 테이몽. 역시 동일.
셋째 상대인 에웅. 협력이 완벽히 이루어져서 강한 데다가 군사력 역시 높았던 기회주의형 침략자.
넷째 상대인 소온. 역시 군사력 높고 상대에게 협력이란 형태로 굴복을 강요하는 독재자.
다섯째 상대인 엘구아노. 전설급 창조물 및 완벽히 협업하는 신들로 이뤄진 안정된 공동체를 보유한 관대한 침략자.
초반에 2연속으로 전투력이 높은 침략형 플레이어를 두 번이나 만난 데다가,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완벽하게 협력을 달성하고 군사력도 전혀 밀리지 않는 중상위권 플레이어, 지금 만난 다섯 번째는 그냥 빼도박도 못할 상위권이다.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 요컨대 비인이 마지막으로 컨설팅해준 엘카이더만 봐도, 무려 4연속으로 침략형 플레이어를 만났지만 전부 상대하고 전쟁하느라 기운이 다 빠지거나 혹은 하차 단계 때 하차하지 못하고 억지로 강행해서 자신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처참한 내정 상태의 플레이어를 만났다.
이런 플레이어들이 많아서 의외로 하위권들이 지금 버텨주는 것이다.
랭킹 1위인 테라시온으로 예로 들면 초반에 협력형, 두 번째 침략형, 세 번째 강력한 침략형, 네 번째 형편없는 침략형.
이렇게 네 번 만났고. 세 번째 상대가 좀 버겁긴 했지만 대충 평균적인 수준의 운으로 상식적인 상대만 만났다.
그런데 비인은 가장 중요한 초반에 2연속 침략형, 이후 3연속 에웅, 소온, 엘구아노라는 상위권이 걸려버린 것이다. 운이 없어도 너무 없다.
그렇지만······.
아무리 비인이 대진운이 없다고 한들 '대멸종의 주인'을 만난 상대보다 대진운이 없진 않았다.
∞
나는 상대 플레이어가 내 세계에 떨군 생명체를 보고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이 단계 때 5레벨 전설급 창조물이 있어?
"그러게나 말이에요. 요거-토소스의 주인이신 비인 님. 도대체 어떻게 이 단계 때 있죠?"
이거 무슨 매칭 조작 있는 거 아니야? 어떻게 5연속으로 쉬운 세계가 한 번도 안 나올 수가 있나? 한 번쯤은 엘카이더의 세계처럼 잉여스럽고 쓰레기 같은 세계가 나올 수도 있잖아?
"그 쉽지 않은 세계를 다 압도적으로 이기신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셔도······."
내 경악은 길지 않았다. 요거-토소스보고 처리하라고 한 즉시, 그놈이 차원문을 스스로 열더니 돌아갔기 때문이다.
아. 저거. 그거군. 『차원 여행자』. 하필 차원 여행자야? 순간이동에 무적귀환에 초반부 차원 이동까지 마음대로 하는 개사기 특성이잖아? 저번 상점 구간 때 구매한 건가?
"근거 있는 추측이로군요. 대단히 까다로운 상대가 나왔어요."
바로 그 까다로운 활용법을 보여주겠다는 듯, 그 이구아나를 닮은 개체는 며칠 뒤 내 세계 담수호 지역에 나타나서 강력한 빛덩어리로 호수를 폭발시켜서 생명체들을 떼 몰살시켰다.
요거-토소스가 그것을 보고 다급히 이동하지만, 네 번 이겨서 면적 160제곱킬로미터가 된 내 세계는 이미 너무 넓다. 가로세로 13킬로미터 정도. 요거-토소스가 시속 60km로 전속력으로 날아가도 반대편으로 가는데 몇 분은 걸린다.
요거-토소스가 충분히 가까워졌다 싶자, 그놈은 순간이동해선 선인장 숲에 나타나 다시 광선을 쏘아대며 선인장 숲에 폭격을 시작했다.
"아아아악!"
그리고 선인장 숲에 있던 낙타들도 닥치는 대로 학살하고, 낙타를 쫓아다니다가 이구아나 인간을 보고 맹렬히 돌진하는 사탕들을 유유히 광선으로 다 녹여버린 다음 다시 순간이동해서 이번엔 산에 나타났다.
산에서 내가 열심히 키우던 감치들과 새로운 종으로 진화할 것 같던 젤리와 푸딩들이 다시 무자비하게 학살당했다.
요거-토소스는 거대한 바람 마법을 일으켜 먼거리에서 폭풍을 날려봤지만, 그놈은 자신의 마법으로 어설픈 요거-토소스의 폭풍을 소멸시켰다.
젠장. 약점이 들켰군. 순간이동 대처를 못하는 거야 뭐······. 현 시점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요거-토소스는 전설적 창조물로서 결점이 있었다.
요거-토소스는 〈솜씨〉가 가진 힘에 비해 낮다. 기술의 정밀도가 떨어진다는 얘기다. 대규모 학살이나 파괴는 잘하는데 엄청나게 강한 한 명을 상대로 싸우는, 말하자면 '결투'는 못한다.
모든 점에서 유능할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단점이다. 상대가 순간이동만 아니었으면 괴생물을 통한 인해전술로 밀어붙일 수 있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순간이동하면서 테러하는 미치광이가 나오면 좀 곤란하다.
요거-토소스의 약점을 깨달았는지 상대 이구아나 인간은 맘껏 빛을 뿜다가 요거-토소스의 사정거리가 다가오자마자 차원문을 열고 고향 세계로 돌아갔다.
그래. 하루에 세 번 테러. 그게 네놈 한계군. 차원 여행자라도 아무 제약 없이 순간이동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차원문을 열고 공간을 이동하는데는 막대한 마력이 든다. 거기에 파괴하는데 드는 마력까지 생각하면 하루에 세 번 테러하면 모든 마력이 고갈되는 것이리라.
그렇지만 그 세 번의 테러로 내 생명 점수는 거의 300점에 육박하는 피해를 입었다. 1%의 생명 손실은 엄청나게 많은 거다.
내 점수가 3만 점이니 딱 100번 맞으면 완전 초토화된다. 생태계는 회복력이 있다고? 저쪽은 머저리가 아니다.
가장 집요하게 생태계 핵심종만 파괴하면 어떤 생태계든 순식간에 아작난다.
요컨대 넥타르 샘에서 압호주스에게만 매일매일 저 광선을 퍼붓는다든가.
그렇다고 요거-토소스를 넥타르 샘 근처에만 두면 저놈은 다른 곳을 하나씩 박살 낼 테니 요거-토소스를 움직여서 저놈을 쫓지 않을 수도 없고.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네요."
그렇지. 저쪽은 그냥 매일, 혹은 한 일주일에 한 번? 차원문 열고 건너와서 마력 쏟아붓고, 다시 돌아가고, 다시 마력 쏟아붓고 반복만 해도 내 생태계에 끔찍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여유만 주면 기어코 차원문 단계 때 생태계 전체를 다 갈아버리겠지.
"좋아요. 그럼 저 엄청나게 졸렬하고도 효과적인 수단에 대처법 있나요?"
없다.
"엥. 없어요?"
"당연히 없지······. 아마 절대다수의 플레이어가 저걸 이 시점에서 대처할 순 없을걸. 까놓고 말해서 5레벨 영웅이 광선 쏘면서 다 부수고 테러하고 순간이동하고 수틀리면 자기 고향 세계로 튀는데 저걸 어떻게 막냐?"
초반에 전설급 개체는 대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같은 전설급 개체인 요거-토소스가 정면 승부와 파괴에서 대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처럼, 상대 세계도 이 '대처할 수 없는 전력'. 다시 말해 '비대칭 전력'을 만들기 위해 아마도 자기 세계의 모든 자원을 다 끌어모았을 것.
실제로 상대 세계는 〈문화〉는 어마어마하게 높아 보였는데 그 외의 다른 능력치는 고만고만했다.(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높았지만) 다수의 군대 대신 소수의 영웅 개체나 창조물. 혹은 지형에 있는 강력한 신비를 통해 싸우는 전략을 취한 듯했다.
"그렇지만 패배를 인정한 것 같진 않으시군요. 이젠 어쩌실 생각이죠?"
간단하다. 이건 생태학적이라기보다는 게임적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
내가 저번 상점 구간에서 얻은 『신계일체』는 내 의식을 세계와 하나로 만들어서 습격당한 지점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 그리고 나의 의식을 분산해서 파괴된 생태계를 빠르게 복구할 수 있게 하는 것 말고도 다른 효과가 있다.
내 〈신앙〉 레벨에 비례해서 신성력을 몇 배씩 폭증시켜 주는 효과다.
신성력은 내 세계에만 적용되는 힘이라 적 영웅 유닛을 하늘에서 내리는 천벌 같은 걸로 죽이는 건 못하고, 지금의 신성력으로도 당장 차원균열을 열어서 요거-토소스를 적 세계에 던진다든가 하는 행동도 못하지만······. 완전히 다른 방식의 행위는 가능하지.
그냥 차원문을 많이 열어서 미친 듯이 생물을 쑤셔 넣는 거다.
"단순무식해. 하지만······. 효과적이군요."
내 세계의 모든 장소, 가장 포악, 흉악, 극악하게 진화한 디저트 군단 최강의 포식자들과 토지의 영양분을 빨아먹는데 특화된 담수성 젤리들 앞에 차원문이 열렸다.
그놈들은 저항할 수 없이, 혹은 본능에 따라 차원문 너머로 그대로 빨려 들어가 상대 세계로 던져졌다.
네놈이 한 번에 내 생태계를 300씩 날려? 강하네. 그렇지만 내 〈생명〉 점수가 3만 점이다. 네 공격에 백 번은 맞아주마.
대신 나도 백 번은 처넣어 주마. 매일매일 끝없이 생태계에 유입될 외래종 300점 어치 분량을 모조리 방제할 수 있는지 없는지 보자.
누가 먼저 맞고 쓰러지나 해보자고.
"그야말로 자기 살점을 깎아내서 던지는 플레이군요. 솔직히 누가 이길지 모르겠는데, 어디 상대의 대처를 보죠."
29화. 세계 충돌 -다섯 번째- 3
판월에서 〈문화〉 능력치의 주된 기능은 상위 개체로의 승급 지원 및 우수하고 특별한 개체의 탄생 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주된 기능이라는 말에서 떠올릴 수 있듯이 다른 기능도 존재한다.
두 번째 기능은 자기 종족의 만족감을 높이고, 다른 민족에게 호감을 사는 것이다.
한마디로 〈문화〉가 높으면 행복해지고, 게임을 하면서 얻는 이종족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기도 쉬워진다. 이른바 '협력 플레이'에서는 〈군사〉보다도 〈문화〉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세 번째 기능은 종교의 발전이다. 〈문화〉와 종교는 밀접한 관계가 있고, 따라서 신=플레이어가 직접 써야 하는 〈신앙〉과 신성력이라는 수동적인 능력치를 각 개체가 알아서 쓰는 능동적인 능력치로 전환한다.
그리고 네 번째 기능. 어떤 의미로는 이것 때문에 문화가 중간은 가는 건데.
오로지 〈문화〉만 올려도 〈신비〉는 다룰 수 있어서 전투력에 아무 문제가 없다.
한마디로, 생각보다 엘구아노의 세계는 꽤 효과적으로 디저트 군단의 맹공을 방어하고 있었다.
"전원 사격! 저 미친 악종들은 주술에 맥을 못 춘다!"
영웅적 개체. 지휘관으로 양성된 이구아나 인간이 소리지르자 각기 다른 형태의 빛을 쏘며 몰려드는 사탕 대군을 그대로 증발시킨다. 이걸로 기력이 전부 빠졌지만, 정신 나간 수백 마리 사탕들을 방제하는 데 성공했다.
"이놈들은 한 놈만 있어도 수백 마리로 불어난다! 모든 주술사는 오늘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나서서 악종들을 방제해야만 해!"
신비 종류야 워낙 많아, 비인이 했던 [더 판타지 크리에이터]에서는 게임으로서 성립하기 위해 몇 종류로 압축한 버전으로 플레이하고도 10개도 넘는 신비가 있었고, 전 차원으로 범위를 넓히면 일일히 구분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늘어나지만······.
한마디로, 〈매력〉만으로 쓸 수 있는 〈신비〉가 있다.
대표적인 게 주술이다. 주술은 〈매력〉으로 사용한다. 〈매력〉이라는 것이 그냥 외모의 잘생김이 아니라 그것이 가진 존재감, 패기, 아우라 등을 총합해서 나타낸 수치라서 가능하다.
장점은 일단 각성하면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자유롭게 쓰고 단련할 수 있어 당장 실전 투입 가능한 전력이 되는 것.
단점은 그 각성이라는 걸 원하거나 노력한다고 할 수 없고 100% 재능에 의존하는 것.
하지만 높은 〈문화〉는 태어나는 개체들의 〈매력〉을 높여주고, 〈신비〉와 병행해서 올려서 특성을 택하면 태어나는 모든 아이가 잠재적 주술 재능을 타고나는 것도 가능하다.
엘구아노의 세계는 당연히 그 정도까진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대단히 높은 빈도로 주술 재능을 지닌 애들이 태어났고, 주술이라는 게 워낙 지칭하는 범위가 넓다 보니 몸으로 싸우는 전사도 주술사고, 멀리서 활 쏘는 궁수도 주술사고, 진짜로 마력 써서 번개 쏘는 마법사 같은 것들도 주술사 카테고리에 들어갈 수 있다. 일단 〈매력〉을 써서 주문을 쓰면 주술사다.
결과적으로, 마법 저항력은 거의 없다시피한 푸딩들은 멀리서 쏘는 마력 파동만 맞고도 죄다 픽픽 쓰러져 나갔다.
"돼, 됐다. 해치웠어. 이번 차원문 역시 등장한 악종들 전부 박멸에 성공했다!"
주술의 장점 중 또 다른 것으로는 갓 각성해도 꽤 위력이 좋다는 점도 있다.
그들의 전설적 개체, 시카도즈가 차원을 넘나들며 상대 차원을 강력한 주술로 초토화시킬 때, 남은 자들은 매일같이 차원문과 쏟아지는 악종(사람잡는사탕)들을 처리하며 괴로워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방어전을 펼쳤다.
적이 악종의 종류를 다르게 해서 내보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걷어차는 걸로 사람 몸을 터트려버리는 거대한 낙타, 미친 몸통 박치기는 못해도 적을 끈질기게 쫓아서 찢어 죽이는 늑대사탕, 물가에 들어와서 흙을 모래로 바꾸는 젤리, 초원의 풀들을 제거하는 거대한 푸딩. 그 어처구니없는 악종들을 상대로 게임 시간으로 1년을 넘어 2년차에 접어들 때까지 꾸준히 방어전을 펼쳤다.
가끔 방어전이 불가능한 것도 있었지만 말이다.
"아, 악마새다! 악마새가 나타났다!"
"신이시여! 얼른 시카도즈님에게 귀환 지시를!"
여기서 엘구아노 세계의 주민들이 말하는 악마새는 최강의 감치, 비스야킷을 말한다.
그리고 이 비스야킷은 그야말로 악마 같은 전투력을 자랑했다.
비스야킷은 원래 비인의 생태계에서 넥타르 샘의 요정 압호주스의 촉수 채찍을 견뎌내면서 넥타르를 마시던 대괴수다.
어린 시절에는 넥타르 오아시스 근처에 존재하는 수많은 거대 젤리와 푸딩들을 사냥하고, 이제 천적이 없어지는 성체가 되면 눈에 보이는 게 없어서 압호주스의 촉수를 찢고 그 살점과 넥타르 오아시스 위의 넥타르 젤리들을 마음껏 먹어 치우며 살아가다가 요거-토소스에게 죽어서 개체수가 조절된다.
그리고 비인은 이제 생태계 최고 포식자의 개체수 조절을 포기했다. 차원문을 열고 넘쳐나는 비스야킷을 그냥 상대 세계로 던지는 것이다.
압호주스는 맞지 않아서 행복해졌고, 요거-토소스도 괜히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지 않아서 행복해졌고, 비스야킷은 요거-토소스나 압호주스 같은 괴물 같은 생명체와 싸우는 대신 연약한 엘구아노의 주민들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해졌다.
그 대신 모든 사람이 불행해졌지만 플레이어 비인은 사람이 아니라 마왕이다.
원래부터 비스야킷은 최종 포식자 치고는 생태계의 균형을 해칠 정도로 좀 과도하게 개체수가 늘어나게끔 튜닝해놔서, 이 최종 포식자를 거의 한 달에 세 마리 정도씩 적 세계에 안정적으로 유입시킬 수 있었다.
이 괴수가 상대 세계에 던져지면, 일단 넥타르를 찾는다.
근데 상대 세계에 넥타르가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어떻게 되냐면, 이놈은 어린 시절의 습성을 되살린다. 그냥 움직이고 덩치 큰 모든 생명체를 먹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엘구아노의 세계에선 보통은 사람이거나 대형 가축이다. 마력을 많이 품고 매력도 높아서 먹음직스러운 주술사들도 맘껏 먹는다.
비스야킷이 진짜로 무슨 영웅 유닛도 때려잡는 괴수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연적인 생명이니까.
그렇지만 현재 엘구아노의 세계 수준으로는 대단히 사냥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전설급 개체인 시카도즈가 나가서 상대해야 한다.
문제는 그 얘기는 상대 세계로 들어간 시카도즈가 다시 차원문을 열고 돌아와야 한단 것이다.
그러면 다시 상대 세계로 건너갈 마력이 없다.
아니면 건너가서 테러 저지를 마력이 없던가.
혹은 건너가서 테러 저지른 다음 다시 돌아올 마력이 없든가.
그 점에 착안해서, 비인은 시카도즈가 건너온 순간 비스야킷을 상대 세계에 던졌다. 신화급 특성 『신계일체』덕에 적이 건너온 순간을 완벽히 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 운이 좋으면 요거-토소스 앞에 시카도즈가 떨어져 시카도즈는 들어오자마자 바로 차원문을 열고 돌아가야 하는 대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싸움 자체는 지지부진했다.
엘구아노도 꽤 상위권 플레이어다. 주술사는 많았다. 그리고 시카도즈라는 차원 여행자를 요거-토소스는 도저히 잡을 수가 없어, 무의미하게 쫓느라 에너지만 낭비될 뿐이었다. 그렇다고 안 쫓으면 저놈이 제자리에서 계속 부술 테니 무의미하다는 걸 알아도 쫓을 수밖에 없었고.
비스야킷은 지금 넥타르 오아시스 생산량으론 한 달에 세 마리 이상 보내는 게 불가능했다.
그리고 시카도즈는 비인의 세계를 상세히 조사하고, 선인장 숲에서는 낙타 대신 선인장을 마구잡이로 태우고, 넥타르 샘에서 가득 뜬 넥타르 젤리를 공격하고, 담수호를 끓게 만드는 등 과격한 주문을 마구 펼치며 효과적으로 생태계를 파괴했다.
그리고 곧 있으면 차원통로가 열리는 3년 차.
드디어 엘구아노의 세계에서도 편도가 아니라 왕복으로 원정군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지났을 때 한계가 왔다.
드디어 '항명자'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저, 저기. 신이시여······. 이 싸움 언제쯤 끝납니까?"
물어보는 피조물들도 답은 알고 있다. 차원균열이 열리고, 적 세계에 있는 '거품촉수악마'가 이 세계로 침입해서 모든 걸 쓸어버리기 전에 시카도즈가 적 세계를 박살 내버리면 끝난다.
그들도 그건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물어보는 건 끝나는 '조건'이 아니다.
끝나는 '시기'다.
자기네들이 단기간 내에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그들에겐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엘구아노와 그의 동료 신들은 도저히 일찍 끝난다고 답할 수가 없었다.
저 문명도 없는 미친놈은(시카도즈가 아무리 둘러봐도 지성체를 찾을 수 없어서 확신할 수 있었다) 신성력이 무한하기라도 한 건지 그야말로 끝없이 차원문을 열고 괴생명체들을 투하해댔다. 매일매일, 쉬지 않고 말이다.
그리고 그 쉬지 않고 쏟아져 내려오는 괴물들에 주술사들은 드디어 탈진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아직 본 싸움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단순히 많이 싸우다 보니 지쳤다. 정도로 끝나는 말이 아니다. 그냥 체력적인 문제보다 더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건, 엘구아노가 중점으로 둔 〈문화〉 기반 빌드 및, 〈매력〉 계열 신비의 최대 단점이었다.
〈문화〉도 〈매력〉도 얻어맞는 상황에서는 도통 힘을 못 쓴다.
그야 당연하다. 전쟁이 일어난 상황에서 어떻게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겠나.
전쟁, 아니 그보다 더한 대괴수들이 쏟아지는 극한상황에서 무한한 스트레스가 누적될 텐데, 도대체 어떻게 매력을, 패기를, 기세와 존재감을 유지할 수 있겠나.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정치〉가 높아야 한다.
하지만 엘구아노는 〈정치〉는 거의 올려두지 않았다.
왜냐면 앞서 말한 〈문화〉의 장점. '주민들의 행복도가 높아진다.'라는 기능 덕에 〈정치〉가 별로 안 높아도 자기 신민들 통제가 쉬웠기 때문이다. 종교를 통한 주민 통제도 그것을 대신할 수 있었고.
그렇지만 그 모든 빌드의 근간인 문화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주술사들은 쇠락했고, 3년 내내 지속된 최고 긴장 상태에 도저히 이성을 유지할 수도 없었고, 주민들은 불안해서 살 수가 없었다.
엘구아노는 다급해졌다.
"이, 이럴 수가. 이건 전혀 상정하지 못한 상황인데."
원래라면······. 엘구아노 측도 상대를 동요시킬 수 있었다. 그것도 지금 자신들이 겪는 것보다 더 심하게 말이다.
그야 매일같이 열리는 차원문과 쏟아지는 괴물도 위협적이지만, 혼자서 마을을 파괴할 수 있는 전설급 개체가 그냥 차원문 열고 상대 진영 한복판에 나타나더니 광선을 쏘아대며 살육을 시작하면 미쳐버리지 않는 문명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상대는 미리 자기 세계에서 문명을 축출해 버렸다.
디저트 사막의 부드럽고 달콤한 생명체들은 매일 차원문 열고 나타나 광선 쏘아대고 도망가는 정체불명의 테러리스트를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음. 원래 이 디저트 사막은 이렇게 좆같은 곳이었지.'하면서 넘겨 버리는 것이다.
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놈들은 진작에 다 죽고 적응한 놈들만 번식에 성공한다. 이게 대자연의 이치였다.
"도대체 뭐 이런······."
〈문화〉 중심 빌드가 장기전에 취약하다는 걸 알아서 오히려 초반에 끝내려고 시카도즈를 『차원 여행자』로 만든 것인데, 상대가 설마 본진도 없고 민간인도 없고 문명도 없는 쌩야생일 거라곤 털끝만큼도 생각 못 했다.
사실 생각할 수 있다면 그놈이 미친놈이다.
그래도 엘구아노는 이대로 질 수는 없으니 필사적으로 종교의 힘으로 주술사들을 다독이고, 비스야킷을 잡을 수 있을 만한 정예병을 훈련시키면서 버텼다.
어쨌든 비인의 생태계도 시카도즈의 테러를 입고 만만찮은 타격을 입었다. 이대로 질질 끌면 이길 수도 있다.
그리고 드디어 돌입한 차원통로 구간.
"이제부터 정예병으로 적들 세계로 건너가서 마구잡이로 학살을 저지르고 다시 돌아온다. 이제 편도가 아니라 왕복이 됐고, 저놈은 아무래도 자기 창조물들을 통제할 수 있는 법이 없는 것 같으니 충분히 할 수 있······."
그리고 세계에 생성된 차원통로를 통해 건너가려던 엘구아노는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하늘에도 통로가 열렸다. 그야 상대에게 공중전을 할 수 있는 개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거품촉수악마, 창조주가 이름 붙이길 요거-토소스는 하늘에 열린 작은 통로에 그 커다란 눈과 촉수 몇 개를 내밀어 하늘에서 꿈틀대며 이게 끝까지 넓어지는 순간 바로 너희들 도시의 주민들을 딸기맛 요거트로 다져버리겠다는 듯 세계 건너편을 한없이 응시했다.
"개새끼야!"
꼬우면 하늘로 날아가 요거-토소스를 때려잡고 지나가면 된다. 사실 그냥 무시해도 된다. 저 높이, 저 좁은 통로에서 뭔가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다만 세계 한가운데 허공에 열린 통로는 이제부터 매일 같이 넓어질 거고, 주민들은 매일 넓어지며 찢어지기 시작하는 차원의 균열과, 그 너머의 점차 커지는 요거-토소스의 형상과 응시하는 눈빛을 매일매일 받아야 할 뿐이다.
이미 세계 어디에도 〈문화〉 따위를 즐길 여유는 없었다. 엘구아노는 결국 특단의 대책을 내렸다.
"체제를 바꿔야겠다. 종교의 역할을 늘린 뒤 〈정치〉 중심으로 체제를 재편해서 병력을 모아 전쟁을 준비하는 수밖에 없군."
잘 돌아가던 빌드를 갑작스럽게 바꾸는 셈인데다가, 여태까지 행복하게 잘 살던 주민들을 강제로 군인과 노역수로 만드는 꼴이라 〈신앙〉이 바
닥을 칠 게 눈에 선하지만, 그 어떤 상황이라도 지는 것보단 나았다.
어쨌든 상위 6.25%인 다섯 번째 상대쯤 되면 상대도 무력하게 패배하는 바보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체제를 바꾸고 반년~1년 쯤 준비해서 돌격해야겠다고 생각한 엘구아노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사태가 일어났다.
자기들이 들어가야 했던 차원 통로에서 갑자기 괴물들의 대군이 몰려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어? 뭐야? 쟤들 세계 문명도 지성체도 없잖아?"
그건 그러니까······.
"〈정치〉 점수가 아예 0일 텐데 어떻게 생물들을 조종해?!"
이해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미친듯이 쏟아져 나오는 디저트 군단의 공세에 체제를 변경하고 자시고, 지치고 사기 떨어진 주술사들과 시카도즈를 불러서 어떻게든 막는 수밖에.
엘구아노는 시야가 점차 흐려지는 걸 느꼈다.
30화. 세계 충돌 -다섯 번째-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