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하차 구간 -두 번째-(+2권 후기)
나는 커뮤니티 담당 인격. 농땡이와 인간성 담당 인격이라고 해도 되겠다. 커뮤니티는 떠들썩한 초반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보통 게임 커뮤니티는 무가치한 똥글이 99.99%는 차지하지만, 게임 자체가 원래 영혼 소멸도 걸려 있는 데다가 몇 명을 직접 '죽여버린' 플레이어도 꽤 되거든. 진지하게 신을 노리는 자들도 상당수고.
흔한 커뮤니티처럼 아무 정보값 없는 꾸준글이나 눈살 찌푸리게 하는 쓰레기 글이 올라올 수가 없는 환경이다.
듣자하니 그저 불쾌하기만 한 글을 올리려고 하면 천사 측에서 애초에 차단하니까 깨끗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한다.
약간 아쉽군.
"대체 비인 님은 뭘 하고 싶으신 거예요."
"다른 모든 플레이어의 불쾌지수 상승 및 집중력 저하."
"안 됩니다······."
결과적으로 게임 커뮤니티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진지하고 건설적인 분위기의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대부분은 전략 연구 및 정보 교환 요청, 혹은 거래. 그것도 아니면 동맹을 구하는 등의 철저하게 '이기기 위한' 글들.
그런 것들은 나도 유심히 들여다봤다. 당연히 남에게 베풀어주는 '공략글' 같은 걸 쓰는 놈은 없었지만 주제로 나누는 것들을 보면 대략적인 경향성은 보인다. 어느 빌드를 짰을지, 그리고 어떠한 것을 목적으로 했을지 등등.
그렇지만 그렇다고 플레이어들끼리 아무 정보값 없는 얘기를 안 하는 건 아니었는데, 이런 주제의 토론은 대단히 흔했다.
「제목: 이 게임의 주최 의도가 대체 뭐지?
내용: 이 게임 개최에 드는 자원이 상식적으로 적진 않을 거야. 그런데 도대체 주최 측이 이 게임에서 뭘 의도하는 건지 모르겠어. 진정한 신을 뽑는다고는 말하지만, 아무리 봐도 주최 측의 전능함이 그 진정한 신의 능력을 아득히 압도한다고.
도대체 진정한 신을 이런 복잡한 방법으로 뽑을 이유가 뭐지? 그냥 주최 측이 자기가 아는 누구 하나를 그냥 진정한 신으로 만들어 줘도 될 텐데 굳이 외부 인원을 데려와서 만드는 이유 말이야.
댓글 1: 신의 파편이라고 하는 게 수상해. 도대체 옛 신의 조각을 합쳐서 뭘 하려는 걸까.
댓글 2: 이 게임 전체가 하나의 의식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
댓글 3: 플레이어 중 몇몇은 성공한 정치가나 학자도 아니라 게임하다 온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면 더 심하지.」
대체로 신의 파편을 중심으로 헛다리를 짚고 있었다. 나는 미훈이라고 하는 자를 만났으니 그런 식으로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주최 측의 의도가 궁금해지는 건 사실이다.
「제목: 주최 측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 게임 의미 있나?
내용: 어떤 전략이 이길지 궁금하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치자. 하지만 결국 구성 자체는 토너먼트잖아. 물론 상대를 지정할 수도 있고 협력하는 수도 있고, 여러 전략이 충돌할 수 있는 건 알겠는데 한마디로 최종 2위쯤 할 수 있는 전략이 운 나쁘게 초반에 1위 전략을 만나서 지는 사례가 빈번하지 않겠냔 거지.
그럼 이 게임의 의미가 있나? 적어도 룰이 달라야 하는 것 아니야?
댓글 1: 무적의 전략은 없고 전략마다 상성이 있으니까 괜찮은 거 아닌가?
댓글 2: 상성이 있다는 논리를 들이밀면 더 이상하지 않음? 진짜로 이 게임 자체가 의미 없잖아? 어떤 전략이든 가능성이 있고, 어떤 전략이든 확실한 카운터가 있으니까.
댓글 3: 확실히 토너먼트는 이상하다고 느껴진다. 리그전으로 했어야지. 한 명이 나머지 10억 명과 차례로 싸워서 많이 이긴 세계가 1위가 되는 리그전. 지금 토너먼트보다 경기 수는 물론 훨씬 많겠다만, 그러면 그냥 10억 명이 아니라 100만 명이나 10만 명 정도로 후보를 추리기만 해도 되는 일이야.
댓글 4: 10만 명 리그전은 미쳤냐? 지금 30번 경기도 더럽게 많은데 10만 번 하라고? 플레이어의 부담을 생각해야지.
댓글 5: 플레이어에겐 중요한 문제지만 전능한 주최 측은 그런 걸 생각할 이유가 없잖아.」
그때쯤 봤을까. 천사가 그때 넌지시 말을 걸었다.
"비인 님. 두 가지 공지할 게 있습니다."
"음?"
"하차 가능 기간이 끝났습니다. 이제 새로 등장할 세계는 없습니다."
아. 벌써 그렇게 됐나.
6번째 라운드는 하차 구간, 나는 전진했지만 다른 이들은 하차했다. 이제 원한다면 수많은 세계 중에서 하나를 골라서 7번째 충돌에 주인 없는 세계와 충돌할 수 있다.
"하차자 수는 몇이지?"
"300만 정도군요."
적군? 남은 플레이어는 약 1600만 명, 저번 구간 때 거의 하차하지 않은 걸 생각하면 한 절반 이상은 하차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버텨보겠다는 것이겠죠. 다음 하차 구간은 9라운드. 다시 말해 '재난 구간'보다 이릅니다."
"즉, 살아남은 플레이어들끼리 협력하면 으쌰으쌰해서 전진할 수 있단 거군."
"그렇습니다."
탐욕스럽구만. 하긴 지금 하차해봤자 남은 포인트로는 '많이 건강한 부자' 정도밖에 안 된다. '불로불사의 강력한 초능력자' 정도가 되려면 9라운드나 12라운드쯤에 하차해야 한다.
300만······. 그 중 매력적인 세계가 없을 것 같진 않지만, 나는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아 규칙을 되물었다.
"세계 충돌이 끝난 뒤에 점수에 따라 득점하게 되는데, 세계를 구매했을 경우엔 어떻게 되나?"
"그 경우 당연히 상대가 없으니 즉시 정산합니다. 다만, 상대 세계의 점수는 계산하지 않습니다."
"세계 구매 시 지불해야 하는 '최소 점수'가 있나?"
"없습니다."
"'없다'라는 건, 0이어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경쟁을 유발할 정도로 훌륭한 세계를 만들지 못한 플레이어의 잘못입니다. 굳이 말하면 '최소 점수'는 후불제라고 해도 되겠군요."
아. 그렇군. 세계 충돌했을 때 상대 세계 점수를 정산하지 않으니······.
메인 빌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보완하려면 더 많은 것들을 내 생태계에 포함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공짜 세계와 충돌하는 것도 충분한 가능성인가······.
난 나온 하차 매물들을 둘러봤다.
그리고 인상을 팍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거······."
모든 세계가 이미 입찰자가 있었다. 그것도 포인트도 적지 않게 투자한 상태로 말이다.
"충돌 한 번을 공짜로 통과하고 싶은 플레이어가 꽤 되나 보군요. 말이 충돌 한 번을 넘기는 거지 실제로는 보호 기간도 넉넉하게 받을 뿐더러 세계가 고난 없이 성장하게 되니 그 이상이니까요."
안 해. 그럼. 지금 당장 몇만 포인트 써서 좋은 세계 얻는 것보다 나는 포인트 아껴서 8라운드 끝나고 신화급 특성 사는 게 더 나아.
애초에 하차도 안 하고 세계를 구매하지도 않으면 하차 구간은 아무 이벤트가 없는 구간과 별 차이도 없다.
"두 번째 공지는 뭐야?"
"'엘카이더' 플레이어가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음?
"영계를 준 그 플레이어 말입니다. 비인 님이 자비를 베푸신 분이요."
그 정도는 기억해. 대화도 아니고 메시지라니 뭐야.
난 불쾌할 수 있을 걸 각오하고 천사가 준 메시지를 열어봤다.
그런데.
[엘카이더: 고맙다. 비인. 덕분에 이번 라운드에 하차할 수 있게 됐다. 어찌됐건 내가 이 라운드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네 컨설팅 덕분이었어. 도박 중독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이렇게 감사를 전한다.]
다른 말이 없었다. 요컨대 '다음 충돌 때 내 세계를 사주면 고맙겠다.'라든가 하는 식의 구걸 같은 것.
그냥 순수한 감사. 그것만 있었다.
"마왕이 받기엔 대단히 어울리지 않는 편지로군요."
"그렇군."
"그래도 기분은 좋으신 것 같아요."
그러게나 말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직도 나는 인간성을 버리지 못했다.
"버려야 하나요?"
"버리고 싶어."
"왜요?"
그 대답은 입 밖으로는 못 내겠다.
하지만 속으로는 생각한다. 그렇기에 천사는 내가 감추고 싶은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인간에 완전히 실망해서, 인간을 혐오하고, 인간을 증오한다.
내가 인간이니까.
하지만 인간에 기대하면서, 인간을 찬미하면서, 인간을 사랑하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내가 인간이니까.
돌고래나, 코끼리나, 유인원 같은 것을 그들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듯이 인간을 사랑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난 도저히 인간의 단점을 사랑할 수가 없다.
"불쌍하네요."
"한심한 거지."
"불쌍한 거예요."
"차라리 비난해 주면 안 되냐?"
"글쎄요······. '대적한 상대를 사정은 듣지도 않고 무조건 영혼 소멸시키는 마왕인 주제에 스스로의 인간성에 고뇌하고 괴로워하는 꼴이 몹시 꼴사납고 추하고 역겹다.' 정도로 비난해줬으면 하는 거죠?"
뭐어. 그런 거지.
"비인 님."
"?"
천사는 싱긋, 하고 아주 깔끔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웃었다.
"그런 좀스러운 악행 가지고 일일이 트집잡을 정도로 주최 측이 쩨쩨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섬뜩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천사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이것은 주최 측을 대표해서 하는 발언입니다. 어차피 후반 가면 수백만의 신을 한 번의 승리로 소멸시킬 수도 있을 텐데 고작 몇 제거한 것 가지고 그렇게 고통받으시면 하차하시라는 말밖에 할 수 없지요.
무자비한 영혼 소멸 역시 전략적인 선택인 이상 무엇을 해도 됩니다. 저희는 비인 님의 플레이가 아주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네. 물론이죠. 그리고 두 번째로, 천사로서 말하면, 천사는 플레이어를 특정한 방향으로 부추길 수 없습니다."
"아직도 문명을 만들라고 하는 네가 할 말은 아닐 텐데."
"그거야 게임의 근간이니까 그렇습니다. 천사는 그저 플레이어의 속마음을 반사할 뿐입니다. 하지만 비인 님은 이미 자신을 완벽히 파악하고 계시니, 천사의 그런 조언이 필요 없습니다. 직접 고민하시기만 해도 됩니다."
실망스러울 정도로 건조한 답변이지만, 옳은 답변이었다.
안 말릴 테니 너 할 거 해라.
너는 이미 네가 원하는 걸 알고 있다.
나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다. 주최 측에게라도 부정 받길 바랐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천사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저'로서 말하면, 앞서 말했듯이 그저 불쌍할 뿐입니다."
"음?"
"말 그대로 비인 님이 불쌍해요."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너' 인격이 있냐?"
"조금 상처받는 표현인데, 당연히 있죠! 그럼, 그저 플레이어가 원하는 말만 해주는 로봇 같은 건줄 알았어요? 천사마다 다른 인격이 있답니다."
······.
난 문득, '천사'라는 존재가 왜 있나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까 '게임'이라는 측면에서 천사는 정말 완벽하게 필요 없지 않나? 그냥 시스템 창으로만 존재해도 되고, 룰을 알려주고 싶으면 두꺼운 규칙서만 줘도 된다.
굳이 그 상태창과 규칙서에게 인격을 부여해서 플레이어와 대화하는 형식으로 만들 필요가 없단 거다.
그런데 심지어 천사마다 다른 인격이 있다면, 천사 역시 이 게임의 '참가자'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아니, 적어도 게임의 승패에 관여하는 중대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일단 특성 카드는 전부 천사가 세 개를 골라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지 않은가.
이게 시스템적으로 아무거나 주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천사의 의지가 관여하는 건 내가 이미 몇 번 경험했다.
그런데 그러면 플레이어의 전략이라는 건 결국 천사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는 건데······.
그러면 주최 측은 진짜로 무슨 이유로 게임을 주최한 거지? 플레이어의 전략 중 뭐가 가장 우수한지 알아보고 싶다는 그 목적 자체가 천사의 존재로 희미해지잖아.
내 생각을 읽고 있을 천사는 그저 아름답게 웃을 뿐이었다. 주최 측을 대변하는, 아무 정보값 없는 웃음이었다.
작가의말
2권(26~50화) 후기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담-
편집자: 작가님! 드디어 재밌는 글을 쓰셨군요!
본인: ······.
그 외에도 댓글로 '이번에는 작정하고 재밌게 쓰셨다'라느니, '이번 작품은 이전 것들하곤 달리 되게 재밌었다'라고 하시는 분들······. 전부 감상 잘 읽었습니다.
인원수가 충분히 모이면 빙의자를 투입한 새로운 신의 게임을 시작할 테니 작중에서 편집적으로 적어둔 설정을 잘 읽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다들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그 개연성이니 설정이니 무료분에서만 트집 잡는 독자들이 유료화만 시작하면 귀신같이 다 사라지잖습니까?
그 독자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그때 가면 전부 아시게 될 겁니다.
아무튼, 집필 도중에 장염 걸려서 대단히 고역이었던 반마세 2권······. 아 네. 아무도 그 약자로 안 부르더군요. 에라 모르겠다. 반지성마왕 2권 후기 시작하겠습니다.
-질문&답변-
질답 말인데, 여태까지 작품하곤 달리 달린 댓글 수가 좀 많아서 작중 내에서 설명되거나 나중에 설명되거나 하는 것들은 답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날도 오는군요.
대신 헷갈리는 것들은 설명할게요. 읽을 필요는 없지만 신경 쓰이는 설정만 답변하겠습니다.
질문 1. 레벨의 최대치는 몇인가요? 레벨은 어떻게 측정되나요?
답변: 레벨은 능력치에만 비례합니다. 최대치는 없지만, 세계 넓이에 한계가 있으니 일정 이상 올라가긴 힘들 겁니다. 등급과도 별개의 요소입니다. 요거-토소스는 전설급이지만 5레벨이죠.
질문 2. 왜 자꾸 걔네를 게네로 쓰시나요?
답변: 놀라운데 게네도 맞춤법에 맞습니다. 이거 요상하게 자주 지적 들어오더라고요.
질문 3. 특성 인간사냥꾼에서 인간의 기준이 뭐죠? 나온 생명체가 다 수인 계열이라서 잘 모르겠어요.
답변: Headhunter의 번역어라는 설정입니다. 문명을 지닌 지성체를 사냥하는데 이점을 얻는 특성입니다.
질문 4. 요거-토소스에게 기생한 생물체는 없나요?
답변: 있었는데, 체온과 마력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일종의 강력한 면역계가 있는 셈이군요.
질문 5. 슈크-리무라스가 정확히 뭘 하는 건가요?
답변: 세계 내의 땅, 다시 말해 신의 파편을 크림과 시럽강으로 전부 잇습니다. 영계인 크림랜드도 같이 잇습니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를 체내에 수집하고, 그것을 섞어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듭니다. 그래서 [빵]도 더 공격적으로 변한 겁니다.
-강한 적 만들기-
웹소설에서 강력한 적을 만드는 건 대단히 힘듭니다. 쉽게 쓰러지면 강한 적처럼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고 어렵게 이기면 답답하죠. 그렇다고 서사와 비중을 많이 주면 그것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고, 호감형으로 만들자니 죽이기도 어렵습니다.
다섯 번째 상대인 엘구아노와 그 부하 시카도즈는 그런 점에서 꽤 잘 만든 것 같습니다. 사실 너무 잘 만들어져서 이후 나올 적들의 완성도가 작가 입장에서 걱정될 정도로 잘 만들어졌습니다.
기본적으론 원툴 전략인데, 원툴 하나로 대부분의 상황을 돌파 가능, 약점 역시 자체적인 특성으로 극복 가능, 자체적인 내정도 탄탄. 그렇다고 공격보다는 협력을 선호하며 그에 따른 이점도 강함, 등등.
엘구아노의 전략은 진짜로 시카도즈 하나만 믿고도 15라운드까지는 갈 만한 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운석을 맞아버렸고, 주인공 역시 심각한 타격을 입는 계기가 됩니다. 이후의 적들도 이 정도의 완성도로 보여드릴 수 있으면 좋겠네요.
-설정의 벽-
편집자: 31~35화 설정설명만 너무 많은데 좀 연참 좀 하죠?
그래서 연참했습니다. 두 화를 하나로 합친 것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원래는 영류계 설명을 한 화 정도 더 들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독자는 강하게 키워야 하는 법······. 이 정도의 설명도 못 견디는 독자는 어차피 내 글을 읽지 못한다······.
사실 의도한 건 아니고 언제나 설정 조절을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되네요. 그냥 설정 짜는 걸 엄청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런가봐요. 설정 설명 많은 파트는 내용적으로라도 분량을 늘려 한 화 내내 설정설명만 하는 경우는 없애볼게요.
-공룡 선협-
사실 미훈은 원래 후반에 나올 강력한 적으로 만든 캐릭터였습니다. 그런데 완성도가 너무 괜찮아서 그냥 주역으로 만들고 성격도 더 유쾌하게 바꿨습니다.
: :이 말 투: : 는 현 시점에서 국산 선협 중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작품의 패러디입니다. 사실 티라노 신선 자체도 그 작품의 Q&A에서 언급된 건데 해당 작품에서 안 나올 것 같아서 제가 먼저 썼습니다.
되게 실험적인 요소인데 티라노+선협은 멋진 것+멋진 것=더 멋진 것의 시너지가 나서 그런지 다들 좋아하시더라고요.
좋았어. 다들 이렇게 좋아한다면 차기작은 공룡수선전이다. '세계를 향해 다가오는 흉성. 대멸종이란 천명에 맞서는 방법은 수선뿐이다.'
······생각보다 괜찮아보이는데. 일단은 이 작품에 집중해야죠.
-후기후기-
2권도 마무리됐습니다. 작가 인생에서 이만큼 성적이 나온 글을 쓴 적이 없는데 만족스럽습니다. 어차피 앞으로도 마이너 힙스터겠지만······.
사실 2권은 시작점이지 결승점이 아니니까요. 항상 마무리까지 좋은 글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3권 후기에서 뵙겠습니다!
51화. 하늘과 물
시점을 바꿔서 여섯 번째 충돌 직후, 나는 천사가 내민 세 장의 카드를 보고 몹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 다양성: 다른 〈문화〉를 가진 개체끼리 잘 대립하지 않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사막 제의: "사막" 지형에서 펼치는 의식의 결과가 많이 좋아집니다.』
『창공 생활권: 창조물들이 "대창공", 혹은 그와 인접한 지역에서 생활하는데 보다 익숙해집니다.』
여섯 번째 충돌 보상으로 받은 우수 특성 카드 세 장이 다 구려.
"구리다니요. 전부 성능은 나쁘진 않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지금 나한테 필요가 없는 것들이잖아."
그렇게 말하니 천사가 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좀 곤란한 게, 원래 대부분의 특성은 문명의 발전을 지원합니다. 하지만 문명을 아예 배제하고 플레이하시니 대부분의 특성이 쓸모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도 네 재량껏 좋은 특성으로만 줄 수는 없는 거냐."
"천사의 규칙 때문에 안 됩니다. 천사는 특정한 방향성으로 플레이어를 유도할 수 없고, 오히려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해야 합니다. 물론 완전히 쓸 수 없는 비효율적인 특성, 요컨대 "숲" 지형에서 이점을 얻는 특성 같은 건 드리지 않지만, 그래도 플레이어가 하고 싶은 특성만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니 나도 할 말이 없어졌다.
하긴, 게임 자체가 다양한 환경과 상대를 만나서 싸우게끔 되어 있는데, 한 가지에만 특화해서 주는 건 말이 안 된다. 만약 오로지 〈생명〉관련한 것만 줬다면 내 쪽에서 다른 것도 좀 달라고 따졌을 수도 있지.
그럼 대체 뭘 택하느냐의 결론이 남았다. 충돌 보상으로 얻는 세계 특성은 능력치를 올려서 얻는 전문 특성보다 훨씬 성능도 좋고 범용성도 높으니 택할 거면 지금 고르는 게 낫다.
하지만 이 중에서 고른다고 생각하니, 『창공 생활권』 말고 고를 게 없었다.
어차피 내 생태계의 〈문화〉는 개체의 외모와 구애활동이 전부다. 문화가 다른 개체끼리 대립하지 않는다.
사막에서 의식할 때 보너스 받는 특성도 마찬가지. 지성체가 없으니 제사는 지내고 싶어도 못 지낸다. 물론 요거-토소스에게 시킬 수도 있다만, 굳이?
그런 걸 생각하면 차라리 하늘에서 사는데 이점을 얻는 특성은 어쨌든 감치들에게도 좋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요거-토소스나 요거트들한테도 좋은 것이다.
그렇게 카드를 뽑자, 세계가 바로 요동치며 변하···진 않았다.
사실 이 특성이 어떻게 세계를 바꾸는지 잘 모르겠다. 원리가 뭐지? 아니 그 전에 '특성'이라는 건 또 뭐지? 잠깐 고민하고 있으니, 요거-토소스가 내게 말했다.
[창조주여. 갑자기 하늘의 흐름이 평온해졌나이다.]
"느끼겠나?"
[예. 본래는 하늘이 발하는 흐름을 제대로 이용해야 비행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하늘이 발하는 흐름에 몸을 싣는 걸로 부유할 수 있습니다.]
하더니, 요거-토소스는 평소보다 30%쯤 빠르게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말이 30%지 시속 70km로 움직이던 놈이 시속 90km로 움직이니 말도 안 되게 빨라진 거다.
"발업······."
"아마도 아니에요······."
내 생태계에서 하늘하고 접한 지점은 산맥, 그리고 구름섬. 그곳에 있던 생명체들도 훨씬 살기 편해진 듯 생명활동이 활발해졌고, 더 나아가서 그저 공중의 영계를 떠돌아 다니던 요거트들도 갑자기 빨리 움직이면서 마력 흐름을 더 많이 먹고 거대해지거나 더 빨라지거나 하는 등의 진화가 일어났다.
생각보다 훨씬 좋군. 순수한 하늘 생태계는 지구에 없으니까 낯선데 좀 괜찮은 것 같기도.
[창조주여.]
"왜 그러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런 것이 아니라, 혹시 구름섬과 산을 제 영지(領地)로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좀 더 훌륭한 생명체들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뭐야. 그냥 땅 욕심을 내는 건가.
하지만 딱히 거부할 명분이 생각나지 않았다. 잘 모르는 내가 만지느니 차라리 머리도 좋고 의욕도 있는 요거-토소스가 직접 관리하는 게 낫다.
그렇다고 그냥 넙죽 줄 수는 없는 일이니 튕겨볼까
"요거-토소스. 이 세계에서 땅이라 함은 곧 신의 파편. 그것을 하사하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다. 가볍게 하사한다는 것은 가볍게 뺏을 수도 있는 것. 그래서야 네 영지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겠지."
[즉, 영지로 하사한다는 것은 영구히 소유권을 넘긴다는······?]
의외로 그 사실에 흥분한 것 같군. 하긴 언제든 뺏길 수 있다는 생각도 했을 테니까.
"네가 어마어마한 대실책을 저지른다면 뺏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설마 너 정도나 되는 존재가 그럴 리는 없을 테니 그것과 별 차이는 없겠지."
[그건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네가 하늘을 다스릴 수 있는 적임자라고 치자. 하지만 그러면 네게 이후에 세계의 얼마를 넘겨줘야 한단 말이냐?"
[······.]
대충 이렇게 운을 떼고······.
"그러니 그 훌륭한 생명체들에 대한 계획을 들어보지. 내가 해도 더 잘할 수 있다면 넘겨줄 이유가 없다. 설마 구름에서 사는 가벼운 생명체 같은 것 만들고 생색낼 생각은 아니겠지?"
왜냐면 내가 딱 그 정도 선에서 멈추려고 했거든.
[당연히 그런 한심한 발상일 리가 있겠습니까.]
"······과연 그렇군."
[하늘은 흐름과 맞닿아 있는 지점, 세사이사에게 배운 지식을 통해 산을 기점으로 발하는 강대한 흐름을 구름과 기후와 엮어서······.]
응~ 그렇게 말해도 사실 잘 몰라~ 난 마법에 대해선 완전히 까막눈이야.
[······그리하여 세계 전체의 기후를 통제하고 그 기후 자체로서 살아가는 생명체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어, 잠깐. 뭐?
"그 얘기는, 생물의 힘으로 기후를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미 크림과 요거트가 있습니다. 기후 자체를 조작하고 기후로서 살아가는 생명체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일일이 마법을 써서 사막에 넥타르를 뿌리는 것도 좀스럽고 한계가 있으니.]
기후 자체가 생명체가 된다는 말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기후 조작이 되면 상대 생태계에 무한히 비를 쏟거나, 혹은 영원히 가뭄 상태로 만들거나 할 수 있다는 거야······?
어? 난 그냥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는 생명체 따위나 만들 줄 알았더니만, 생각보다 더 엄청난 발상이 나왔는데? 흠.
"기대 이상이군. 요거-토소스."
[그 말씀은······!]
"단순히 하사하는 걸 넘어서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 다만, 생태계의 자원을 대거 끌어다 쓰는 만큼 절대 실패해선 안 된다."
[오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산과 구름 지형 등을 하사했다. 내 지형 중에는 "별자리"도 있는데 그건 필요가 없단다. 그건 우주랑 닿은 지형이지 하늘이랑 닿은 지형이 아니라고.
시공경계에 더해서 새로운 영토를 하사받은 요거-토소스는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나는 요거-토소스가 설명도 길게 늘어놓고 꽤 자신만만하게 만들어서 솔직히 바로 만들어 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으으으음! 저기, 몇 가지 생물을 창조해 주실 수 있겠사옵니까? 하늘에 사는 [토핑] 비슷한 생명체가 필요한데.]
쉽지 않은 것 같군······. 물론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저 새끼 혹시 그냥 거창한 아이디어로 투자부터 받는 벤처사업가 같은 짓을 한 거 아닌가 모르겠네.
아무튼, 요거-토소스의 작업에는 분신 하나를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어서 내가 직접 가서 보기로 했다.
───그리고 내 시점은 넥타르 호수로 옮겨간다.
넥타르 호수의 레벨은 세사이사의 컨설팅을 지금 병행하고 있어서 하나 더 올랐다. 이제 넥타르 호수는 지름이 16km. 면적은 200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내 생태계의 1/3이나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커지니까 문제가 생겼다. 뭐냐면 압호주스는 이만큼 거대해질 수 없었거든······. 거기에 정작 넥타르 자체는 호수 가장자리에서밖에 먹지 못하니까 효율이 오히려 떨어졌다. 시럽강을 통해서 넥타르를 바깥으로 빼내고 있다고 쳐도 넥타르가 엄청나게 많은 것에 비해서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넥타르 샘 자체에 존재하는 생명체는 이기는데 별로 쓸모가 없으니까.
"난제에 봉착하셨군요. 이제 어쩌실 거죠?"
"음, 이건 내 생각엔 생태학적인 방법이 아니라 게임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상대 생태계에서 얻고, 내 생태계에도 원래 존재했던 지형, 원래는 햄스터 종족이 살던 "골짜기"를 신성력으로 그대로 끌어와 넥타르 호수 중간쯤에 대충 꽂아 넣었다.
"오호."
그리고 바위사막, 모래사막, 사막 숲의 일부도 가져와서 넥타르 호수 안에 집어넣었다. 지형이 너무 크니까 다른 지형, 다시 말하자면 신의 파편을 꽂아넣을 수 있게 된 거다.
그렇게 되니 넥타르 호수 안에 섬이 네 개 생겼다.
원래 골짜기였던 섬은 골짜기 안쪽으로 넥타르를 흡입하더니 그대로 그것을 지하로 흘려보내서 일종의 동굴 지형이 되었고, 사막 숲은 더욱 울창하게 변해서 다른 감치들이 서식할 수 있는 근원이 되어줬으며, 바위사막과 모래사막 등 그저 마력만 높은 지형에는 젤리들이 기어 올라와 구미 숲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니까 먹이가 없어서 굶고 있었던 젤리들이 섬에 달라붙어서 뜯어먹기 시작하는데, 이것도 신의 파편이라서 마력만 공급하면 오히려 섬이 알아서 커지거든? 그러니까 영원히 줄어들지 않는 광맥이 된 셈이다.
이것도 세사이사를 통해서 기존에 존재하던 크림랜드랑 이어버리고, 또 넥타르 호수와도 인위적으로 시럽강으로 이어서 레벨을 더 끌어올렸다.
"멋진 발상입니다. 한 지형이 커지면 다른 지형을 오히려 품을 수 있게 되니까요."
"간만에 순수한 칭찬이군."
"잘한 건 잘했다고 해야 하니까요?"
아무튼 그렇게 해서 넥타르 호수에 섬이 네 개나 생기자 거기서 젤리들이 기어가고 감치들이 집터를 잡으며 훨씬 건강해졌다.
압호주스도 관리해야하는 면적이 줄어들어서 남은 자리를 훨씬 관리하기 편해졌다. 대신 지형 편집 과정에서 무지막지한 생태계 파괴가 일어났지만 이건 알아서 잘 해결해야겠지.
그러면 세계 충돌은 많이 남았지만, 세계 내 생물들이 이미 충분히 늘어났으니 한 번 정리할까?
"그 말씀은?"
미뤄놨던 작업을 수행한다.
「[구미산호초]가 〈전설적 고유 구조물|고유 개체〉로 승격합니다.」
"넥타르 샘 안에 존재하는 생명체 90%. 그리고 인근 유역에 존재하는 생명체 70%를 골고루 바친다."
세계 면적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방대한 생명체를 전부 바치는 거다. 〈생명〉이자 〈산업〉이고 〈문화〉니까 생명체 하나 바칠 때마다 떨어지는 수치만큼 거꾸로 올라간다.
그러니 생각보다 적은 생명체를 죽여도 됐지만, 그래도 가능한 만들 거면 크게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8만 점 정도 되는 생명체를 통째로 바치고, 최종 점수는 한 26만점 넘는 괴물 산호초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야이야아아아아아! 창조주여! 더 많은 힘을!]
압호주스도 기뻐하며 미친듯이 힘을 처넣는군. 세사이사도 도와서 막대한 량의 마력과 〈신앙〉을 이대로 산호초에 바쳤다.
꿈틀─!
이놈은 디저트 군단장이 아니다. 심지어는 지성체도 되지 않을 거다. 근본이 산호초, 구조물이니까.
하지만 이 산호초는 곧 이제부터 압호주스의 궁전이 될 터. 그렇다면 그에 마땅한 이름을 지어줘야 한다.
어디보자, 흠······.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산호초 이름은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Great Barrier Reef)거든?"
"네? 네."
"그리고 그냥 지나가듯이 언급되는 장소긴 하지만 그레이 배리어 피크(Grey Barrier Peaks)라는 곳이 있어."
"어디서 언급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발음이 비슷하긴 하네요."
그럼 됐군.
"이제부터 여기는 구레미 베어 리프다.(Guremmy Bear Reafs)"
"우와아아아아아."
그렇게 이름을 짓자. 산호들의 모습이 조금씩 변해서 동그란 귀 두 개를 가진 귀여운 곰 형상으로 변해갔다.
「[구미산호초]가 [구레미 베어 리프]로 승격했습니다.」
「구레미 베어 리프 〈전설적 고유 구조물|고유 개체〉
능력치(펼치기▼)
설명: 디저트 군단의 일원, 구미산호들이 모여 만들어진 거대한 산호초입니다. 생명체이자 구조물로 취급됩니다. 넥타르 샘의 생태계를 더 풍요롭게 만들며 넥타르 샘에 서식하는 많은 생명체들이 구레미 베어 리프 인근에서 서식하고 있습니다. 마치 지구의 곰을 연상케 하듯이 자라난 형형색색의 구미산호가 특징적입니다. 이들은 침입자를 물리적으로 격퇴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구레미 베어 리프는 창작물을 만들려는 자에게 많은 영감을 주며, 그것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아름답게 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강인한 생명체입니다. 세계 내의 〈문화〉를 대폭 늘리며, 넥타르 샘에서 영웅적 개체가 탄생할 확률을 더욱 높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구레미 베어 리프는 [압호주스]를 지키며 넥타르 샘 바깥으로까지 뻗어나가 집과도 같은 거대한 구조물들을 건설합니다.
전설적 특성-『신성한 구미 정원: 레벨에 비례해 [구미] 계열 생명이 더욱 번성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구미] 계열 생명체들이 훨씬 〈아름답고〉 〈매력〉 높게 되며, [구미]로 지은 구조물과 장비품 등도 더없이 〈매력〉적으로 변합니다. [구미]로 만든 구조물 내지 작품이 〈권능〉과 〈마력〉을 보유하게 되며, [구미]는 더없이 높은 물리 및 신비 저항력을 가지게 됩니다.』」
호수가 범람하며 넥타르와 함께 구미 산호들이 지면까지 기어오른다. 호수 내부에 있는 섬을 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서 넥타르 샘 아래쪽이 전부 구미 산호초로 차버린 듯한 착각도 주었다.
그리고 그 가장 심연, 압호주스가 뻗은 촉수의 행사를 방해하지 않고 빛나며, 또 내부에서 흐름을 만들며 수많은 생명체들을 번성케 하는 것이 저것이 압호주스, 요거-토소스, 슈크-리무라스와 동격의 존재임을 명확하게 했다.
그리고, 넥타르 샘의 레벨은 1 더 올랐다. 무려 23km에 달하는 직경, 내부에 있는 섬들도 크기가 커지며 생명체들은 더없이 크게 번성한다.
무엇보다도, 비스야킷들이 번성했다. 비스야킷의 수는 대폭 늘었고, 비스야킷끼리도 종분화가 일어나서 더 거대한 비스야킷, 작은(그래도 큼)비스야킷. 부리의 형태가 바뀌는 비스야킷 등등 다양한 것들이 생겨났다.
「곧 세계 충돌이 시작됩니다. 살아남은 플레이어만이 다음 라운드로 진출합니다.」
"낙승을 예상합니다."
나도 그래.
52화. 세계 충돌 -일곱 번째-
「비인의 세계
생명 LV.11: 240,698 신규 정예 특성 1개
군사 LV.10: 158,786 신규 우수 특성 1개
산업 LV.8: 35,895 신규 우수 특성 1개
기술 LV.6: 5,671
문화 LV.7: 11,993 신규 우수 특성 1개
정치 LV.0: 89
신비 LV.9: 59,168 신규 우수 특성 1개
신앙 LV.9: 80,396
총점 LV.9: 592,696」
생명=『(식물)억센 생명력: 생존을 위협하는 모든 요소에 강력한 저항력을 가집니다. 잘 죽지 않고 어디에서나 잘 성장합니다.』
군사=『체급 우위: 자기보다 능력치가 낮은 개체를 상대할 때 훨씬 우위를 점할 수 있습니다.』
산업=『슈크-리무라스 영축가 전직: 슈크-리무라스가 경험치를 얻을 때 영축가에 특화된 능력치 분배를 따르게 되고 관력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선행조건으로 『영축가 전직』 특성이 필요합니다.』
문화=『종족의 대표: 종족별로 영웅 승격에 필요한 〈문화〉가 줄어듭니다.』
신비=『영축가 전직: 영립가의 상위직. 영축가 전직을 해금합니다.』
음. 막강하군.
〈생명〉은 자연스럽게 올랐고, 〈군사〉도 그에 비례해서 증가.
〈산업〉의 경우는 슈크-리무라스의 무지막지한 영적 구조물 건축 능력 덕분이다. 그래서 아예 그거 하라고 전직도 시켜줬다.
〈문화〉는 산호초를 업그레이드하니 자연스럽게 〈문화〉가 폭증했고, 나는 어지간한 다종족 세계와 비교해도 종족이 어마어마하게 많으므로 당연히 다양한 종족에서 영웅이 늘어나는 특성을 채택. 진짜로 카라멜 낙타 중에 영웅 개체도 나와서 [달고낙타]로 이름도 붙여줬다.
〈기술〉과 〈신비〉의 상승은 좀 적다. 내 세계의 넓이에 비해서 〈기술〉을 쓸 놈들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요거-토소스가 알아서 개발하고 있지. 그나마 6레벨이라도 되는 게 기적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영계 새로 짜맞추면서 〈신비〉와 〈신앙〉 점수도 폭등. 그 결과가 6번째 충돌 직후 무려 9레벨에 달해 10레벨에 근접한 괴물 생태계다.
"내가 얼마나 높은 거야?"
"전체 16,777,216개의 세계 중, 비인 님보다 점수가 높은 세계는 130개가 채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130개는 된단 말이냐?"
오히려 그게 더 놀라운데.
"비인 님도 세사이사 님과 미훈 님이라는 강력한 조력자를 얻어 그야말로 최상위권 중에서도 가히 정점에 인접하지만, 비슷하게 무리를 꾸려서 강력한 시너지를 내고, 훨씬 효율적으로 세계를 운영하시는 분들이 없는 건 아니죠."
흐음.
"그렇다 해도 압도적으로 강한 건 아닙니다. 아니, 사실 그 130개의 세계 중 군사력으로 정면충돌하면 비인 님 상대로 버티는 것만으로도 잘 싸웠다고 해줄 세계밖에 없습니다."
"그럼 내가 지금 이 게임에서 가장 강력한 플레이어인가."
천사는 그러자 고개를 저었다.
"〈군사〉 수치를 묻는 거라면, 지금 이 시점에서 군사력 22만 점 플레이어가 있습니다. 그분이 1위입니다."
뭐?
"대체 뭐하면 군사력이 22만 점이 나와? 나도 생명이 25만점이나 되니까 군사력이 15만점인데, 그놈 생명이 아무리 높아도 10만은 안 넘을 거 아니냐. 미훈도 군사 점수가 그렇게 높진 않더만."
"으음,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만, 두 번째 충돌 때 군사력 1,400의 플레이어가 있다고 한 걸 기억하십니까? 그분입니다."
그놈도 운석급이군. 마주치면 그야말로 사생결단이 나겠는데.
아, 그러고 보니.
"혹시 랭킹 1위는 몇 점인지 알 수 있을까?"
"흠, 랭킹의 변동이 심하지만, 현재 1위는 63만 점 정도 되는군요."
나보다 4만 점이나 더 높단 건가. 말이 4만 점이지 한 7% 정도 더 높은 거니까. 의미 있는 수치로 높군.
그럼 이제 충돌을 준비해 볼까. 이번에도 쉬웠으면 하는 마음과, 이번에는 좀 강력한 상대가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 공존하는군.
너무 쉬운 상대만 만나면 분명 방심할 테니까······. 설마 160만 명 중 130명 있다는 극최상위권이 걸리진 않을 테고, 어느 정도의 상대를 만나려나?
∞
여섯 번의 세계 충돌을 겪고서, 만약 동료 신이 한 명도 없이 하위 신들만 있다면 1/64의 플레이어라는 의미다.
이미 64강 토너먼트의 승리자인 셈이다. 물질계와 영류계가 대충 반반쯤 섞인 문명에서 무려 4년 임기 지방관을 오로지 '실적'만으로 5선이나 했던 무기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무기테는 첫 3라운드를 협력으로 넘겼다.
다만 게임 규칙 상 대등한 동맹이라도 점수 차이가 2배 나면 상대 세계에게 패배한 취급, 하위 신이 되어버린다.
딱히 평화롭지 않았던 세계에서 5선 지방관을 한 노련한 솜씨로 무기테는 동맹 신들을 군사 행동도 없이 평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제압, 세계의 유일한 상위신이 되는데 성공했다.
패배자에게 딱히 가혹하게 대할 맘은 없었다. 어쨌든 자신을 대신해서 세계를 열심히 관리해줄 자들. 그들 역시 패배했지만 기여도 자체는 그대로 올라가고, 무기테가 자기보다 훨씬 뛰어난 플레이어인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별다른 불만 없이 하위 신 처지를 받아들였다.(사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규칙이기도 하고)
그리고 네 번째 상대와는 전투했으나 무난히 승리. 하늘섬 지형이었던 무기테의 세계는 산악 지형을 거쳐 지상으로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
다섯 번째 상대와는 협력. 산악 지형에서 쭉 내려가니 사막이 나왔다. 무기테는 재난 구간에서 놀라운 수완을 발휘. 상대 신들에게 죄다 재난을 떠넘기고 다시 세계의 주도권을 찾아오는 노련함을 보였다.
그리고 여섯 번째 상대. 무기테는 정말 기묘한 상대를 만났다.
산악 지형에서 내려오니 사막, 무려 사막과 바위산에 문명을 건설한 상대였는데, 무기테는 도대체 어떻게 사막에 문명을 건설할 수 있나 싶었다.
그런데 보니까 방법이 있더라.
말이 사막이지 영류계 시점에서 보면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신비를 깨닫지 못하면 이상할 정도로 흐름이 안정적인데다가 밀도도 높고 그 다양성도 높았다.
천사에게 듣자니 사막 지형은 대체로 그렇다고 한다. 생명을 키우기 어려운 대신 〈신비〉와 〈신앙〉쪽은 정말 끝장나게 우수하다고.
여기서 정말 운이 좋았던 건, 상대가 순수 정령 문명이었단 거다.
"뭐야. 이 바보는."
순수 정령. 다시 말해 순수한 흐름. 뭐 바위에 깃들지도 않고 물에 깃든 것도 아니요. 그냥 영계만 엄청나게 잘 건설해놓고 신비만으로 제압하려고 한 것 같았다.
"이러면 당장 신비는 잘 다뤄도 정령으로서 안정성이 처참한데 설마 모르나?"
몰랐던 모양이다. 무기테의 생명과 신비가 조화된 종족은 상대의 불안정한 세계를 손쉽게 제압했다.
항복을 받아내고 물어보니 '순수 정령이면 물리 공격이 안 통하니 무적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하는, 물질밖에 없는 세계에서 온 플레이어였다.
아마도 다섯 라운드 내내 순수 정령을 통한 무적 빌드로 이긴 듯한데, 그것도 상대 보고 하는 거다. 제압당하다 못해 아예 상대 정령 종족은 노예가 되어버렸다.
"아니지. 이 노예가 된 종족을 이용하면 기존의 생물들을 손쉽게 강화하겠군."
상대의 서사급 창조물도 죽이지 않고 제압해서 일원으로 합류한 상태였다.
오히려 육체를 마련해주고, 지원해서 전설급으로 상승시키고, 상대가 무려 8레벨까지 올려둔 "신기루" 지형 및 "초고마력지대", 특수한 신비가 맺히는 광산 등을 이용해서 급격히 세계를 발전시켰다.
그렇게 만들고 보니 능력치 자체는 좀 적어도 전설급 창조물이 하나. 서사급 창조물이 넷. 전반적인 능력치들이 각각 2만 가까이 되는 꽤 탄탄하고 안정적인 세계가 완성됐다.
즉 세계 능력치 총합은 16만 쯤 됐다.
"대충 평균은 넘는군."
듣자하니 기준 점수는 3만 2천~6만 8천 사이지만 살아남은 플레이어 중 하위권은 하차를 많이 하고, 상위권은 더 쉽게 몸집을 불리는 양극화가 진행되어서 무려 8레벨인 16만점도 고작 평균을 넘는 정도라고 한다. 기준 점수에 아슬아슬하게 맞추는 플레이어는 오히려 하위권이라고.
"이렇게 노력해도 이 정도라는 건, 다들 나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거겠군. 9번째 라운드에서 하차할까······."
어쨌든, 무기테는 자신의 세계와 문명이 꽤 마음에 들었다. 설령 최상위권을 만나도 자신의 정치력을 발휘하면 손쉽게 부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설마 상대와 협상 비슷한 것도 안 하고 다짜고짜 절멸 전쟁만 하려고 드는 미친놈이 있을 리도 없고."
"맞습니다. 무기테 님."
그의 20명도 넘는 하위 신도 동의했다. 상식적으로 이 정도로 잘 관리된 세계면 50만점이 훌쩍 넘는다는 그 괴물 같은 상위 세계들도 전쟁하기보단 무난히 협상하고 부하로 삼으려 들 거라고. 동등한 점수라면 말할 것도 없다고.
그리고 지금 하위권은 손쉽게 제압할 거라고.
5선이나 한 노련한 정치인 답게 그는 철저하게 상식과 합리에 기반한 추론을 했고, 어느 하나 치우치지 않는 안정적인 운영을 했다.
특히 '평균점'을 넘게끔 모든 분야에서 탄탄한 점수를 가져 약점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는 게 주효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세계 능력치와는 별도로 훌륭한 영웅도 많이 보유하고 있고.
그리고 찾아온 일곱 번째 충돌.
상대 플레이어는 커뮤니티에서도 꽤 이름이 알려진 '비인'이었다.
사근사근하다 못해 귀여워 보이는 게시글의 어투와는 달리 동료 신이 단 한 명도 없는 미치광이인 것을, 무기테는 그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외교 사절로 보낸 자들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고, 미친듯이 열리는 차원문과 쏟아지는 괴물들에선 상대의 의도가 너무나도 명확하게 드러났다.
∞
"상대 세계는 평범한 수준의 발전도군."
대단히 건실한 세계였다. 대충 둘러보니 얼핏 봐도 약점이라고 할 만한 게 눈에 안 띄었다.
그 얘기는 강점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는 거고, 현재는 내 핵심 전략인 괴물 부대도 못 막고, 장기전으로 끌고 갔을 때 메인 플랜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거다.
"그렇지만 쉽게 무너질 세계는 아닙니다. 능력치가 대단히 높은 고유 개체가 많군요. 가장 강한 건 무려 7레벨이에요."
요거-토소스는 8레벨이다. 저쪽 세계 점수를 다 합한 것보다 능력치가 높을 가능성도 있다.
"뭐. 그건 그렇죠."
그리고 지금, 요거-토소스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가 있게 됐다.
"요거-토소스. 너의 위엄을 보여줘라."
[그 명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요거-토소스는 "시공경계"를 영지로 받아 계속 연구에 몰두했다. 그곳은 〈시공간〉 마법을 익힐 수 있는 지형.
그리고 〈시공간〉 마법이라고 하면 거창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소소한 것도 많다.
주변 시간 흐름을 살짝 빠르게 해서 빠르게 움직인다든가, 자기가 작게 보인다든가. 그냥 마법의 분류지 무슨 최상위 마법 같은 게 아닌 셈이다.
뭐, 그렇다고 『마법의 종주』 특성도 있는 요거-토소스가 그런 사소한 마법을 배우려고 연구한 건 아니고······.
세계 충돌 자체가 〈시공간〉 마법과도 비슷한 현상이다. 다시 말해, 〈시공간〉 계열 마법은 세계 충돌에 직접적으로 간섭, 차원문을 열 수 있다.
아주 잠시 동안, 요거-토소스가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큰 차원문을 말이다.
쩌저저저저적!
요거-토소스가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을 소모하며 적 세계의 공간을 말 그대로 찢어버리며 차원문을 연다.
사실 일시적이다. 얼마나 일시적이냐면, 요거-토소스가 상대 세계로 건너가는 것조차 못한다. 그 등급 마법을 배우려면 더 레벨이 높아야 한다.
[무릎 꿇으라!!!]
하지만, 잠시나마, 상대 세계에 마법을 펼칠 수는 있다.
화아아아아아아악!
지난 재난 구간 때 요거-토소스가 펼쳤던 공연용 마법, 〈아름다움〉 〈기괴함〉 〈공포〉 〈위압〉 〈패기〉 〈강인함〉 그 모든 것을 담은 화려하고도 웅장한 『요거-토소스의 위엄』이 상대 세계 하늘, 변두리에서 펼쳐졌다.(도시 한복판에서 차원문을 열 수 있었다면 공격 마법을 썼다)
그렇지만 변두리에서 펼쳐졌지만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인공적으로 영계를 만들어 주위 흐름을 모조리 끌어당기는 초거대 마법이다. 공격 마법은 아니라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과감하게 펼칠 수 있다.
어느 정도냐면 상대 세계의 모든 생물이 그 마법을 똑똑히 인식할 정도로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상대 세계를 정확히 보지는 못하지만, 상대 〈정치〉점수가 꽤 볼만할 것 같군.
∞
"저거 뭐야."
이미 도시에 들어와서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괴조(비스야킷)도 그렇고 사방팔방 뛰어다니면서 사람을 사냥하는 정신 나간 동글이(사람잡는사탕)만으로도 미쳐버릴 것 같았던 무기테는 사막 한복판, 그냥 적당히 농사나 짓는 빈 땅으로 쓰는 지역에 갑자기 공간이 찢어지는 걸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릎 꿇으라!!!]
그리고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말도 안 되는 능력치의 악마. 그것이 마법을 펼치자 건실하게 설치해두었던 세계 내의 영계와 영적 흐름이 죄다 망가지더니, 가공할 흐름이 그대로 민가와 도시를 덮쳤다.
관련 대비책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도시 주민들은 일제히 패닉 상태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히에에에엑!"
"뭐, 뭐야?! 저거 뭐냐고?!"
"신이시여!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2만 점에 달하던 〈정치〉 수치가 방금 마법 한 방으로 7천이 떨어졌다. 1/3이나 되는 〈정치〉 점수가 그냥 상대가 펼친 마법 한 방에 날아갔단 말이다.
전력차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걸 지금도 모르면 바보다.
다급히 대화 요청, 협상 요청, 결국 항복 요청까지 순차적으로 넣어봤지만 돌아온 건 차단당했다는 메시지뿐이었다.
"어, 어떻게 하죠?"
"이, 일단 우리도 공격해서 상대가 적어도 항복을 받아주게끔 압박을 넣어야······."
부하 신들조차도 패닉. 전력차가 이 정도로 나는 데다가 항복도 안 받아주는 무자비한 상대를 만날 줄은 몰랐던 탓이다.
무기테는 시야가 점차 흐려지는 걸 느꼈다.
53화. 세계 충돌 -일곱 번째- 2
승패는 세계의 능력치로만 갈리진 않는다.
라곤 하지만, 비인의 세계는 능력치가 59만점이고 무기테의 세계는 능력치가 16만점이니 대충 4배 차이가 난다.
4배 차이가 나더라도 서로의 능력치가 편중됐다면 모른다. 총점은 낮더라도 〈군사〉가 비등하거나 오히려 앞선다면 해볼 만한 싸움일 터.
그렇지만, 사실 의도적으로 능력치를 공평하게 맞춰서 전부 2만 점 언저리인 무기테와는 달리, 비인은 〈생명〉 점수도 24만 점, 〈군사〉 점수도 16만점에 가깝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단순 전투만으론 절대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술〉은 오히려 무기테가 비인의 4배, 〈문화〉도 2배, 〈정치〉는 100도 못 찍는 비인의 세계를 생각하면 200배도 훨씬 넘게 차이난다.
그 〈정치〉가 마법 한 방에 1/3이 훅 날아갔지만, 그래도 비인보다야 훨씬 안정된 체계에, 문화. 그리고 높은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기테도 무력하게 지는 것보단 좀 더 나은 승부를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빈틈을 노리면 '좀 괜찮게 지거나' '상대를 위협하는 것'이 가능했다.
어쨌든 냉정하게 보면 무기테에게 승산은 없었지만, 이후로도 계속 이겨야 하는 비인의 측면에서 보면 상대가 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치더라도 상대가 어떻게 지고, 자신의 생명체들에 어떻게 대처하는가가 더 중요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모든 능력치를 고르게 맞춰둔 무기테의 세계는 대단히 좋은 샘플이었다.
∞
차원문 단계. 비인의 전략은 일단 항상 비스야킷과 수리감치. 사탕 몇 마리를 적 세계에 던져놓는 걸로 시작한다.
뿌려둔 사탕들은 외곽에서부터 적 생태계의 사람이든 가축이든 야생동물이든 필살의 몸통 박치기로 죽여 버리고, 자신도 죽는 대신 적들을 먹어 치우며 증식해 나가기 시작한다.
통상의 생명체보다 좀 강력하단 점을 제외하면 정상적인 생물인 수리감치는 비행하며 지상을 내려다 보며 적 세계를 정찰한다. 이 정찰병은 대단히 유능하며, 통상적으로 제공권을 확보한 세계가 드물다는 점에서 안정성도 높다.
그리고 기선제압용으로 투입하는 비스야킷은 사실 눈이 나빠서 막상 상대 세계에 던지면 좀 헤맨다. 사실 넥타르 호수 근처에서만 서식하는 이상 진화적으로 시력이 좋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각으로 적을 찾는다. 비스야킷의 후각은 〈신비〉도 감지하는데, 보통은 사람이나 신비를 품은 강력한 개체다.
증식한 사탕은 어느 시점에서 떼거지로 불어나 적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 몸통 박치기를 시도하고, 수리감치는 가축과 야생동물을 잡아먹으며 가끔은 사람 상대로도 공격을 시도하며, 비스야킷은 그냥 도시로 들어가 가장 강력하고 주력이 되어주어야 할 강력한 개체들을 잡아먹는다.
말하자면 이게 1단계다. 이 1단계를 못 막고 지는 플레이어는 그냥 최하위권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다시 말해 최하위권이 아니면 1단계 정도는 넘길 수 있다.
무기테의 세계는 아무리 그래도 1단계에서 무너질 정도로 허약하진 않았다.
일단, 의외로 사탕이 가장 쉽게 처리되었다.
"다들 장대와 미끼들고 흔들어!"
사탕들은 시각에 의존하지 않는다. 대신 생명체의 진동과 움직임에 반응한다. 젤리질 몸체는 대단히 민감한 진동 감각을 지닌 것이다.
그러니까 상대는 정말 너무 단순하게, 장대에 미끼나 징, 혹은 악기로 만들어둔 북 같은 것을 울리며 사탕들의 조준을 흐트러트렸다.
이건 비인도 생각 못 한 단점이었는데, 상대가 〈기술〉이 높을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종족의 〈지능〉과 〈솜씨〉 전부 높은 원숭이 비슷한 종족이 주류였기 때문이다.(꼬리가 있어서 유인원은 아니다.)
원숭이 인간이라고 할지, 그렇게 불려야 할 이들은 기민하게 움직이며 소리로 주의를 끌고 장대를 흔들며 사탕들의 미친 폭주에 효과적으로 대응했다.
기술력이 받쳐줘서 그런지 꽤 튼튼한 방패도 있었고, 훈련도도 높은 군대 덕에 사탕들은 손쉽게 방제, 그리고 감각도 나쁘지 않은지, 아니면 마법 덕인지 흩어진 사탕의 유생들 역시 차근차근 노력을 기울여 방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비스야킷의 경우는 정공법으로 대응했다.
"영웅들이여! 저 괴물새를 처단하라!"
[예!]
높은 〈문화〉의 존재는 영웅 개체들의 존재를 암시한다.
비스야킷이 정말 무식하게 강한 괴물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냥 강력한 생물에 불과하다. 특별한 특성에 강력한 신비를 보유한 영웅 개체를 쓰러트리기엔 명백히 기본 능력치가 부족하다.
그리고 무기테의 세계에는 무려 '영웅 부대'가 있었다.
무려 13명이나 되는 고유한 영웅 개체. 그리고 그를 이끄는 건 단순한 〈영웅적 개체〉를 넘어서 종족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서사급 〈표상〉.
영웅 한 명이 비스야킷 하나를 간단히 압도할 수 있으며, 서사급 표상은 육성 전반을 전투력에만 끌어모은 전사형 개체라 비스야킷 서너 마리가 덤벼도 주먹과 꼬리, 발차기로 말 그대로 찢어발길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마법 공격 담당, 정치 담당, 종교 담당. 해서 3명의 서사급 개체가 더 있었고 전부 막강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1단계는 무난하게 체제를 정비해서 넘길 수 있었다.
"해냈다! 영웅들의 승리야!"
영웅들의 저력으로 악몽 같은 수준의 비스야킷을 때려잡을 수 있다는 게 밝혀진 이상, 전체적으로 사기가 올랐다.
결과적으로 무식하게 달려드는 것 외에 전략을 모르는 비스야킷은 적 세계의 강력한 개체에게 그대로 찢어발겨지고 말았다.
"하지만 정말 막강하고 강인한 괴수다. 상대 세계는 도대체 이 괴조를 얼마나 키우고 있는 거지?"
넥타르 호수에서 키우고 있는 건 수백 마리는 된다. 생태계의 조절도 있으니 한 번에 전부 풀 수는 없지만 말이다. 달마다 지속적으로 10마리 이상은 지속적으로 보낼 수 있다.
그리고 정찰병인 수리감치 역시 가축들을 공격하려 하다가 활을 든 궁수들, 혹은 슬링의 명수들에게 사냥당했다.
무기테의 세계에는 괴물은 없지만 전근대라는 특성상 가축을 노리는 도둑이 좀 있는데, 그들을 상대로 연습한 궁술과 투석술이 꽤 쓸만한 성과를 보인 것이다.
무기테는 자신의 군사를 전부 지방 곳곳에 풀어 세 종류의 악종들에 의한 인명, 재산상의 피해를 방지했다. 아직 그의 종족들은 신을 전적으로 신임한다.
악몽 같은 괴수들이 날뛴다고 한들, 어차피 세계 충돌에서 적의 군사들이 쳐들어 오는 것은 당연한 일······. 동요도 잠깐이고 〈정치〉 수치도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요거-토소스가 차원을 찢고 모두를 두렵게 만들었던 그 위엄 넘치는 공연을 다시 펼쳤다.
하지만 첫 공연은 충격적이었을지 몰라도 두 번이나 똑같은 공연을 펼치면 먹힐 리가 없는 것이다.
당연히 대항할 방법도 마련해 두었다.
[꿀벌과 꽃밭의 가호가 우리에게 함께하나니!]
무기테 세계 최강의 창조물. 7레벨 꽃 정령 '타데모이라'다. 육체는 마치 조경사가 깎은 듯한 꽃과 식물줄기로 되어 있으며, 그 외모는 주류인 원숭이 종족보다는 얼굴 없는 식물형으로 되어 있어 초월자의 풍모가 풍긴다.
최초의 땅이었던 드넓은 공중화원에서 태어난 타데모이라는 싱그러운 봄풀 향기와 꽃내음을 머금고 그저 산들산들 밭과 도시를 거니는 것만으로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
한마디로, 이 세계 농업과 원예, 문화의 수호신이다. 정령을 키우던 사막 플레이어의 창조물과 원래 있었던 창조물을 합쳐서 전설급으로 승격시키고 세계 전체를 가호하게끔 했다.
저번에는 요거-토소스가 기습적으로 주문을 펼쳐서 못 막았지만, 타데모이라는 요거-토소스보다 싸움은 못해도 〈권능〉과 〈마력〉 수준은 밀리지 않는다.
타데모이라가 펼친 대규모의 신비는 요거-토소스의 압도적인 정신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네 이놈! 감히 이 위대한 요거-토소스의 행사를 방해하다니!]
재탕 공연이 실패한 요거-토소스가 분노하지만 방법은 없다. 지금 단계에서 차원문을 크게 여는 것만으로 대부분의 자원을 소모했으니.
결국 지금은 그저 물러날 수밖에 없다. 무기테의 세계는 환호성을 질렀지만 정작 무기테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타데모이라. 힘든가?"
[허억. 허억. 아닙니다.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인데, 이 정도야.]
격의 차이가 너무 난다. 일단 막기야 막았지만 요거-토소스는 명백히 쓸 수 있는 수단의 하나가 그것이었을 뿐인데, 타데모이라는 자신이 전력을 다한 방어로 겨우 막아낸 정도.
정면 승부로는 승산이 없다. 애초에 타데모이라는 농업 지원형 창조물이지 전투형 창조물도 아니었으니. 무기테는 재빨리 자원을 모아서 군대를 양성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렇게 설명하면 비인의 압박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1단계에서 펼칠 수 있는 모든 게 다 막혔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함정이 하나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치고 들어가지······?"
영웅, 군사, 체제의 힘을 총동원해서 1단계를 완전히 제압했다는 것은, 뒤집어 얘기하면, 역공에 쓸 자원이 전혀 없다는 것.
한마디로 그냥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을 뿐이다.
이래서야 '좋은 패배'를 할 수 없다. 적어도 상대를 역으로 압박하든가, 그게 아니면 상대가 자원을 좀 더 쓰게끔 더 성공적인 방어를 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 세계 상대로 견적을 재본 비인은 몇 주 뒤 자연스럽게 2단계에 진입했다.
"차원문이 또 열린다!"
"다들 대비!"
지상 병력으로는 그 끔찍한 [사탕]이 나온다.
그렇게 생각하고 원거리 병력을 대동하고 차원문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기테의 군단은, 그곳에서 튀어나온 것이 뭔가 동그란 원통에 다리를 여럿 단 듯한 조악한 형상의 생명체라는 것에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 원통형 몸체의 앞에는 기괴한 네 개의 눈과 거대한 턱만 있었다. 그들은 몰랐지만 저것은 비인이 이름붙이길 [육식빵]이라고 하는 생명체다.
"어, 어쨌든 공격!"
[빵]계열 생명체들은 몸이 죄다 금속으로 되어 있다. 화살은 아무 타격을 못 주고, 슬링을 이용한 투석은 그나마 위협을 끼쳤지만 그 정도로 쓰러질 정도로 약하지 않다.
"어? 어? 막아!"
그리고 육식빵의 달리기 속도는 무려 시속 45km에 달한다. 일단 호모 사피엔스는 못 도망친다.
원숭이를 닮은 그들의 종족도 다르진 않았다. 화살비와 돌세례를 뚫고 그들의 궁수에게 달려들어 팔다리를 물어뜯기 시작하자, 그들은 근접병사를 불렀다.
"검을 가져와!"
운이 없었다. 하필 무기를 얇고 날카로운 검 형태로 만들다니. 망치를 만들었다면 나았을 것이다.
검을 가죽에 휘둘렀는데, 깡! 하는 소리가 나더니 칼이 부러진다. 도대체 몸이 강철로 되어 있는 생물은 들어본 적도 없는데, 이 빌어먹을 육식빵들은 끈질기게 달려들어 궁수들의 팔다리를 죄다 아작냈다.
그리고 이런 육식빵과 더불어, 칼과 화살에 상처를 입을 수 있지만 무려 시속 55km로 질주하며 등반과 2미터 이상의 도약을 하며 촉수로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육식푸딩이 등장해서 민가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물론, 비스야킷과 사탕, 수리감치 등의 전력은 여전히 계속 투입되는 상태였다.
"으아아아악!"
무기테는 비명을 질렀다. 군대가 괴생명체의 돌격에 다치고 있는 건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민간인 피해다. 타데모이라가 자신의 신비로 민간인을 치유하고 보호하면서 버티곤 있지만, 이미 마을 내부로 침투해서 민간인들을 무참하게 도륙 내기 시작하니 〈정치〉 점수가 팍팍 떨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민심이 떨어지면 결국 총체적인 사회 붕괴가 일어날 터. 무기테는 급하게 예비 전력과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까지 다 꺼내서 마을에 파고든 괴물들을 처벌해야만 했다.
참혹한 상황. 고작 두 번의 차원문으로 민간인 피해가 상당하다. 생명 점수가 300 이상 떨어졌을 정도.
더 처참한 건, 며칠 뒤에 또 차원문이 열렸다.
며칠 뒤에 또.
며칠 뒤에 또.
또 며칠 뒤에 또······!
차원문 여는데 일정 주기로 열어야 하고, 그 갯수도 지정되어 있다. 그것을 초과해서 투하하려면 신성력이 드는 것 아니었나?
이 '비인'이라는 미친놈은 신성력이 무한대라도 되는 듯 그야말로 끝도 없이 악종들을 부어대었다.
"이걸 어떻게 막아."
그야말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상황. 솔직히 비인도 무기테도 여기서 더 버티지 못하고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응? 잠시만, 내 젤리들이 왜 저래?"
"음? 저 악종들이 왜 저러나?"
어느 순간, 차원문을 넘어간 젤리류 생명체들이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감치들조차도 제대로 활동을 못하는지 헥헥거리다가 그대로 비행하지 못하고 쓰러져 죽었다.
"뭐야?!"
"어?"
그리고 무기테 세계 최강의 창조물, 꽃의 정령 타데모이라가 어마어마한 희소식을 전해왔다.
[나의 창조주여! 성공했습니다! 저 악종들의 생명활동과 흐름을 망가트리는 꽃가루를 살포하는 식물을 만들어냈습니다!]
"뭐라고······?"
망해가는 나라에도 명장이 하나는 있는 법이라고 한다.
농업과 문화를 지원하는 비전투 창조물인 타데모이라는, 〈지능〉 수치가 어마어마하게 높았다.
딱히 신이 명령을 내린 건 아니었지만 적들 세계의 생명체들이 특정한 종에서 진화한 것을 알고, 금속질 체질의 유전자가 전부 똑같다는 걸 간파, 그 종류 전체에 치명적인 분진을 뿌리는 식물을 만드는 것 정도는, 『화훼와 원예의 성령』이란 전설급 특성을 보유한 타데모이라에게 그렇게 어렵지도 않은 것이었다.
"아니 어떻게 쉬운 상대가 한 명도 없냐?! 왜 그 수많은 세계 중 하필 육종 전문가가 전설급 창조물로 있는 세계가 걸리는데?!"
"기적이다! 기적······! 당장 이 식물들 차원문 너머로 보내!"
타데모이라가 만들어낸 식물들의 꽃가루가, 씨앗이 차원문을 통해 오히려 미친듯이 비인의 생태계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세계에 가득한 넥타르, 크림, 시럽 등을 빨아먹고 발아, 순식간에 성장해 꽃가루를 퍼트리자 젤리류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설마 식물로 망치는 전략을 설마 상대가 쓸 줄은 몰랐네요. 비인 님. 그래서 다음 전략은?"
"진짜 운도 더럽게 없지······!"
이미 64강 토너먼트를 뚫고 올라온 정예다. 능력치가 낮다곤 하지만 상대도 호락호락하게 당해주진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게임 아직 안 끝났다.
54화. 세계 충돌 -일곱 번째- 3
역시 전설급 창조물은 격이 다르다. 비인은 그것을 처절하게 체감했다.
식물들은 각종 기이한 화학물질을 만든다. 사실 생물이라는 것 자체가 화학물질 공장이나 다름없지만 식물은 움직이지 못하므로 좀 더 그러한 방향성에 특화되어 있다.
기본적으로는 제 몸을 지키기 위함이지만, 식물이 만들 수 있는 화학물질의 다양성은 가히 무한대다. 일부는 독이 되고, 약이 되고, 온갖 유용성을 지닌 물질로 변화한다.
그리고 전설급 창조물 타데모이라는 그러한 식물들을 키우고 재배하기 위해서만 태어난 『화훼와 원예의 성령』.
능력이 식물 전체가 아니라 화훼와 원예라는 계열로 한정되어 있어서 곡물 농업이나 삼림 회복 같은 건 못하지만, 대신 한정된 분야에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화시키고, 재배하고, 또 유용한 식물들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만들었다. 다른 종끼리 서로 교접이 될 정도로 가깝고, 또한 감치에게도 이식한 특정 유전자에 격렬히 반응하는 치명적인 화학물질, 그것을 꽃가루라는 분진 형태로 사방에 살포하는 식물.
하필 무기테의 세계에서 최초의 땅이었으며, 더없이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공중정원"에서 재배되는 그 꽃들은 하늘에서부터 지상으로 한없이 방제의 은총을 내렸다.
"타데모이라 님을 찬양하라!"
"진짜 사랑한다! 타데모이라! 진짜 전설급은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비인이 느끼기에는 악마의 똥가루였다.
"망할."
타데모이라가 만든 꽃의 꽃가루는 디저트 군단, 젤리계 생명체와 감치 양측에 들어가 단백질 육체와 광물질 육체 간의 결합을 파괴하고 끊는 화학물질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모든 젤리는 꽃가루만 닿아도 몸이 녹아내리고 감치는 단단한 체조직과 근육 조직이 비틀려서 제대로 날지도 못하고 시름시름 앓게 된다.
따지자면 극악의 꽃가루 알레르기다. 디저트 군단에겐 가히 '죽음'이나 다름없는 식물.
이걸 게임 내 시간으로 몇 달도 안 되는 시간에 개발해냈다는 점에서 전설급 창조물의 경이로운 능력을 알 수 있다.
뭔가 대처법을 생각하지 않으면 오히려 생태계로 유입되는 꽃가루들과 자라나는 식물에 비인의 생태계가 초토화될 가능성도 있었다.
"요거-토소스로 밀어붙이면 되지 않을까요?"
"쉽지 않아······. 적 세계가 저기 꽃 정령에게 얼마나 감동한 건지, 미칠듯이 신앙을 바치고 경험치를 몰아주고 있어. 어쩌면 8레벨로 올라갈지도 모르겠군."
"아······."
정찰병만큼은 꾸준히 보내서 살펴보니 더 심각했다. 꽃가루와 수액을 섞으니 디저트 군단의 먹을 수 없는 육체가 젤리와 광물질로 분리되어서 딱딱한 광물질은 가라앉고, 위쪽에 있는 젤리만 걷어내면 적 세계의 주민들이 그럭저럭 먹을 수 있었던 거다.
이러면 차원문 3단계 투입. [다크 림], [카라멜 낙타] [양갱] [요거트] 등을 위시한 정예 개체 공격도 크게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1단계와 2단계 때 투입되는 대부분의 생명체들이 그냥 꽃향기 맡고 다 죽어버릴 것이고, 비스야킷도 사냥하는 영웅 전력으로 손쉽게 최정예 전력도 사냥하겠지. 그건 전부 적 세계의 뱃속으로 들어갈 거고.
"그래도 끝까지 가면 이기지 않을까요?"
"이기긴 하겠지. 군사력이라고 할지, 체급 차이가 많이 나니까. 저쪽도 이길 마음은 없을 걸, 지금 나에게 항복 요청을 보내는 걸 보면 말이야."
요컨대 적 세계가 요거-토소스와 슈크-리무라스의 돌진 두 개를 동시에 막을 수 있을까? 난 아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차원균열 단계까지 버티다가 그 두 개의 생물로 밀어붙이면 승리. 이렇게 되고, 상대도 짐작하고 있으니 대화도 협상도 아니라 항복 요청을 날리는 거다. 이기기보다는 '좋은 패배'를 할 생각.
"하지만 너무 비효율적이야. 특히 지금 오히려 적측에서 차원문 타고 건너와서 내 생태계에 꽃 심고 안전지대 만들면서 야영지 차리고 있군. 디저트 군단의 젤리들을 직접 죽일 생각인 것 같은데."
물론 그건 『신계일체』를 가지고 있는 나에게 바로 들켜서 요거-토소스가 직접 가서 갈아버렸다. 어쨌든 적 세계가 나를 위협할 방법은 아직까진 없는 거다.
하지만, 차원 균열이 열릴 때까지 저놈들이 정말 아무 수단도 안 쓸까?
적어도 꽃 마법사들을 마구 늘려서 젤리들과 감치들을 대거 학살해 버리진 않으려나?
그걸 맞아가면서 이기면 무슨 소용이야. 말 그대로 폐허가 된 세계 두 개만 있을 텐데. 그러면 다음 라운드를 바라보기 너무 힘겹다.
그렇다면 메인 플랜을 시도해야 한다. 차원균열 구간에 돌입해서 굳이 요거-토소스의 힘을 빌리기 전에 적 세계의 농업을 망쳐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차원균열 때 적은 꽃가루를 내 세계에 무한대로 뿌리며 아예 공멸하자고 할 거다.
문제는, 그것도 쉽지 않았다. 적이 땅 하나는 끝내주게 받았군.
∞
"공중정원 LV.8: "대창공"과 인접한 천공섬입니다. 창공의 흐름과 원소 마력을 응집해 식물이 자라나기 좋은 최적의 환경을 만듭니다."
이게 무기테가 처음에 받았던 땅이었다. 천공섬 중에서도 식물 재배에 특화된 땅.
그리고 세 번의 충돌 동안 천공섬, 혹은 그에 준하는 하늘 세계만 나왔다. 네 번째 세계도 천공섬과 이어지는 산악 지형이었다.
그러한 하늘섬 지형들을 합치고 인공 영계를 만들어서 이것저것 시도하다보니, 무기테의 세계는 지상의 땅은 좀 좁지만 산 꼭대기에서 올라갈 수 있는 공중정원은 정말 어마어마한 넓이의 농경지가 되었다.
무기테의 세계는 다섯 번째 충돌, 여섯 번째 충돌로 얻은 산악 지형 아래쪽의 평지는 죄다 사막에 볼품없는 초원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식량은 전부 공중정원에서만 충당하고 있었다. 그래도 됐다. 기존의 땅이 워낙 좋으니까.
인공적인 영계와, 자연적인 영계, 그리고 성장시킨 공중정원의 아름다운 조화로 농사는 언제나 풍년. 그곳에서 농사지으면 산을 통해서 아래쪽의 주민들에게 식량을 전달한다.
아래에서 위로 올리는 게 힘들지, 위에서 아래로 식량을 전달하는 거야 꽤 쉬운데다가, 산 정상에서 아래로 강도 흐르기 때문에 적절히 배에 실어서 내리기만 해도 손쉽게 세계 전체에 식량을 공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구조는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이다. 당연히 완벽히 의도하고 이런 구조로 지었다.
한마디로 농경지가 '지상'이 아니라 사막을 건너서 산을 오른 다음 산에 지어둔 도시를 뚫고 구름다리를 넘어서 도달하는 천공섬에 있으니, 통상의 문명은 불가능한 '도시에서 농성하면서 식량은 정상적으로 공급받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왜냐면 밭이 도시 바깥이 아니라 산에 건설한 도시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기테의 세계는 일단 산 주위에 건설한 도시, 산채, 마을 등을 중점으로 성벽과 목책만 잘 쌓아두면 꽤 강력한 세계 상대로도 '버티기'는 됐다.
공중정원을 공격하면 되지 않냐고? 불가능하다. 그곳이 가장 레벨이 높은 땅, 사실상 이 세계의 본거지다.
그리고 고작 7번째 충돌인 현시점에서 그 어떤 〈시공간〉 신비의 달인이라도 신이 거주하는 상대의 본거지에 차원문을 열고 괴물들을 쏟아내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당연히 비인도 불가능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모든 플레이어가 〈시공간〉 마법만 익혀서 충돌 시작하자마자 상대 수도에 정예 군단을 투하하고 게임을 끝내지 않겠나.
육로로 뚫는 건 사실상 불가능. 사막 지방에 차원문을 열고 가봤자 사막에 키운 드넓은 꽃밭이 반겨준다. 디저트 군단의 생명체를 죄다 녹여 버리는 악마 같은 꽃밭 말이다.
그리고 그 꽃밭을 뚫고 가면 요새화된 도시와 산채로 가득한 원숭이들의 산. 강인한 궁수와 투석병들이 위에서 아래로 화살과 돌멩이를 쏟아낸다.
그 도시조차 뚫고 올라가면 방어적 영립 구조물을 통해 철저하게 침입자를 방어하는 구름길이 나오고, 그 구름길을 넘어야 겨우 상대 농경지인 공중정원이 나온다.
그리고 이걸 뚫을 수 있으면 이미 상대 종족을 다 죽여서 결국 최후의 방어선까지 밀었다는 얘기다. 이미 이겼단 얘기.
"진짜 너무하다. 어떻게 최심부에 농경지가 있냐?"
비인이 투덜대는 이유가 있었다. 메인 플랜이 성공적으로 먹히는 이유 중 하나에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농경지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자가 없기 때문도 있었다.
보통 농경지는 밖에 두고 농작물을 도시 안에 보관해두고 농성하면서 싸운다.
그런데 도시 '위'에 농경지가 있는 구조의 땅······. 실로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정공법으론 공략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차원문 구간의 몇 년. 소강 상태가 이어졌다.
무기테의 세계는 상대가 자기 세계를 공격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좀 더 의기양양해져서 그 몇 년 동안 전력을 더 크게 키웠다.
타데모이라의 신비를 직접적으로 나눠받고, 꽃 정령술과 식물을 부리는 신비 등을 연마하며, 대단히 방어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신비사들을 키웠다.
"저쪽 신성력이 아무리 많아도 자기 생태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의 유전자를 다 바꾸는 건 불가능해! 단기간에 진화시키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지! 버텨서 이긴다!"
그렇지만 비인은 그런 방어적인 전략을 취하지 않았다. 일단 상대에게 압박이라도 주려는 듯 비스야킷을 비롯한 다양한 감치, 그리고 조금 커다란 푸딩과 사탕을 던져대며 성가시게 했다.
하지만 상대는 〈문화〉만 올려놓은 엘구아노 같은 플레이어가 아니다.
무기테의 세계는 모든 능력치가 고르게 높다. 〈정치〉 또한 그러했다. 그들의 군사는 쏟아지는 감치들, 젤리계 생명체들을 악착같이 방어하면서 지쳤을지언정 오히려 해낼 수 있다는 사기로 충만해졌다.
그리고, 드디어 차원 통로 구간이 시작되었다.
"이제 우리도 역으로 공격을······."
그렇게 무기테의 세계에서 군단을 꾸려서 적 세계로 침투하려고 했을 때, 기겁할 일이 일어났다.
산등성이 중턱, 하늘에 차원통로가 열리더니 그곳에서 요거-토소스의 끔찍한 눈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
"겁먹지 마라! 타데모이라! 방어를 준비해라!"
요거-토소스는 열린 차원 통로를 크게 넓히더니 그곳에 자신이 펼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파괴적인 공격 마법을 쏟아내었다.
시공간 마법과 바람, 기후 마법의 조화. 시공간 균열에서 발생하는 흐름 폭풍에 더해 기후를 죄다 망가트리는 물리적 벼락, 폭풍, 폭우, 그리고 끌어모은 돌덩이까지 죄다 쏟아내는 마법이다.
[봄바람의 가호여!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여라!]
그리고 놀랍게도 세계의 모든 자원을 끌어모아 강해진 타데모이라는 그걸 자신의 신비로 막아냈다.
분노한 요거-토소스가 전력을 발휘하며 마력 폭풍을 끝없이 쏟아냈지만 자기 세계의 그 누구도 상처입히지 않겠다는 듯 필사적으로 신비를 발휘해 밀어내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차원통로도 넓히고 마법도 써야 하는 요거-토소스보단, 자기 세계의 힘도 끌어다가 쓸 수 있는 타데모이라가 훨씬 유리했다. 한마디로 요거-토소스의 마법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이놈들! 아직도, 아직도 이 요거-토소스에게 무릎 꿇지 않는 것이냐!]
요거-토소스는 분노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요거-토소스도 자기 마력을 죄다 써버려서 더 이상 쓸 주문이 없었다.
타데모이라에게는 안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쪽도 기력을 죄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거-토소스는 사실 미끼였다. 타데모이라가 방어 마법을 쓰고 탈진하게 할 미끼.
비인은 자신의 신성력으로 넓어진 차원통로가 좁아지는 걸 틀어막았다.
[어?]
"어?"
창조물과 신이 동시에 당혹스러워한다. 설마 저것보다 더 강한 생물이 있나? 아니, 그럴 리는 없을 터. 그럼 도대체 뭐가 나오나?
비인은 자기 생태계의 생명체에게 계시를 내렸다.
잘 번식하라고 천적들도 계속 상대 세계로 던져놓아서 정리해버린 탓에 과도하게 불어난 생명체들, 그걸 넥타르를 먹이며 억지로 생태계가 감당 못할 규모까지 키워내었다.
"저게 뭐야."
9만 8천 마리 떼감치 무리가 그대로 차원 통로를 통과해 하늘을 뒤덮으며 적의 공중정원으로 날아갔다.
저 참새처럼 작은 감치들이 하루에 이삭 하나만 먹어도 사흘이면 농경지에 풀 한 포기 남지 않을 것이다.
그 미래를 짐작한 타데모이라가 절규했다.
[꺄아아아아아악!!!]
"저, 전군 당장 공중정원으로 올라가라! 저 새들을 막아!!!"
그리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지상에서는 통로를 넘어서 달고낙타를 위시한 낙타 부대와 양갱들, 다크 림 등 원래 준비하고 있었던 최정예 보병 전력이 튀어나와 지상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물론 공중정원도 아예 방비가 안 되어 있던 것은 아니라 자체적인 신비를 발동하며 몰려든 감치 중 5만 마리 정도는 자체 방어능력만으로 죽였다.
문제는 4만 마리는 못 죽였다. 그 작은 감치들은 어떻게 꽃가루에 저항력이 있는지 그 꽃조차도 먹어치우며 정원에 존재하는 모든 식물을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아. 안 돼!"
그리고 쏟아지는 괴생명체들을 전부 정리한 소강 상태.
공중정원은 완전히 초토화됐다. 군사력 중 태반은 사막을 달리며 도시로 밀려드는 미친 괴생명체들을 상대하느라 부상 입고 죽었다.
"맙소사."
[창조주시여.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제가 기필코 이 정원을 복구시키겠나이다.]
"그래. 타데모이라. 너만 믿는다."
자신만만하게 황폐화된 정원에 다시 씨앗을 뿌리고 영양분을 공급하며 식물들을 키우던 타데모이라.
감치들의 배설물과 피막에 붙은 씨앗을 통해 전혀 보이지 않던 풀들 몇 종이 정원에서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리 전설급 창조물이라도 넓은 정원에 새로 유입된 풀 한두 포기를 찾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55화. 세계 충돌 -일곱 번째- 4
내 생태계에 지독한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꽃가루는 대단한 아이디어였다.
실제로 내 신성력이 아무리 많아도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세계 충돌 기간에 신성력을 퍼부어서 모든 생명체를 진화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진화시켜도 그리고 분명 새로운 꽃가루를 퍼트리는 식물을 재배할 것이고.
그러니까 아예 방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격으로 돌린다. 내 생태계에서 가장 높은 사회성을 가진 [떼감치]. 이놈들은 작고 디저트군단화도 사실 잘 되지 않아서 꽃가루에 대한 저항력도 좀 있다. 이놈들만 진화시키고, 진화시킨 종을 극도로 번식시킨다.
세계에 존재하는 떼감치의 천적을 상대 세계로 던져서 제거하는 것만으로 어마어마한 속도로 불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상 증식한 떼감치는 상대 세계가 알아서 죽여주겠지.
그리하여 9만 8천마리나 되는 어마어마한 수의 떼감치를 만들었다. 압호주스에게 공격하지 말라고 명령해서 그놈들이 넥타르 호수를 미친듯이 빨아먹고 시럽강도 빨아먹고 하는 것도 다 봐줬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떼감치의 우두머리들에게 명령을 내려서 저쪽 세계, 하늘에 떠 있는 공중정원에 가서 음식을 먹으라고 계시를 내렸다.
물론 방비는 되어 있겠지만, 전부 죽이진 못할 거다. 애초에 지리적인 요인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 그 정도로 철저한 방어가 되어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방비가 되어 있으면 그냥 요거-토소스 불러다가 밀어버려야지 뭐 별 수 있나.
난 그런 무식하고 비효율적인 방법 쓰고 싶지 않으니까 이러는 거다.
요거-토소스 이 자식 분명 세계 점령하면 저기 하늘섬 달라고 징징댈 거라고.
아무튼, 중요한 건 그 9만 8천마리의 떼감치가 아니다. 그놈들이 주로 먹는 열매, 혹은 풀떼기 씨앗. 그리고 피막과 털 등에 붙어서 적 세계로 넘어가는 잡초들의 씨앗이다.
적 세계의 능력, 그리고 많은 영웅 개체로 볼 때 그럴듯한 전투력도 없는 감치는 아무리 많아도 순식간에 정리당할 거다.
하지만 잡초는? 아마 눈치채기 힘들 거다. 그리고 눈치채더라도 제거하기는 더 힘들겠지. 폐허가 되고 시체와 선혈이 낭자한 그 공중정원에서 어떻게 작은 씨앗들을 일일이 다 골라내나?
그리고 바람에 실어서 나도 풀의 씨앗을 잔뜩 던져주었다. 요거-토소스가 임팩트가 있어서 그렇지. 내 전략은 이런 소소한 부분을 제압해서 이기는 전략이다.
그보다, 지금 시점에선 탐나는 게 있군.
저 타데모이라, 화훼와 원예의 전문가인데다가 금세 새로운 품종을 육성해서 대응하는 등 지능도 엄청 높은데, 내 생태계로 유입시킬 방법 없나?
∞
무기테의 세계는 세계의 형태부터 농성전에 특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식량을 비축해 두었고 그럴 만한 기술도 있었다.
그래서 1년 정도 농사를 망치고 정원이 박살난 것 정도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상대도 꽤 야심찬 공격이었는지 이후에 뜸해진 괴물 공세도 버틸 만했고, 오히려 자기 세계에서 역으로 건너가서 적 세계로 꽃밭을 키워서 진출하기도 했다. 괴물들이 꽃가루에 버티지 못하는 게 참 우습기도 하면서도 다행이다 싶었다.
문제는 한 3개월 쯤 지났을 때였다.
이 세계에도 계절은 있다. 지금은 여름. 곡식들이 영글고 꽃들도 아름답게 피어날 시간이다.
그냥 꽃이 아니라 지금은 최중요 전략 자원이기도 하기에 곡물과 꽃, 두 작물의 성장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 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신이시여! 대흉년이 예상됩니다! 혹여 적의 신이 술수를 부린 것 아닙니까?!]
"뭐?!"
최고의 원예가 타데모이라가 있는데 농사를 망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들은 다급히 밭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폈다.
그리고 밭을 살피던 일꾼들이 발견했다.
"어느새 못 보던 풀들이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잡초다. 그것도 지독하게 영양분을 빨아먹는 악종이야. 도대체 어떤 세계에서 살았기에.]
타데모이라가 그 잡초에서 느껴지는 생명력, 신성을 확인했다. '특성'이니 뭐니 하는 걸로 강화된 생물이다.
[신이시여. 잡초를 전부 뽑아야 합니다.]
"그래. 전사 인력은 부족하니 전사가 아닌 노인들과 아이들을 동원해서 잡초를 다 뽑자고."
무기테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타데모이라는 벌레를 조종할 수 있는 권능도 있었기에 잡초들을 먹어치우는 벌레도 만들어 내었고, 농작물의 수급이 만약 떨어지면 그대로 굶어 죽으니 이 일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집중했다.
그리고 무기테의 세계가 잡초의 존재를 알아낸 순간, 요거-토소스가 기습적으로 차원문을 열고 다시 마법을 퍼부었다.
[이 더러운 악종! 우리들의 세계에서 꺼져라!]
[아직도! 아직도 내 앞에 꿇지 않는 것이냐! 두려움에 떨어라!]
요거-토소스 대 타데모이라의 대결은 강렬했고, 요거-토소스가 명백히 우위를 점했지만 타데모이라 측이 에너지 효율면이나 보급 면이나 더 우위를 점했기 때문에 방어 자체는 지속해서 성공했다.
문제는, 이 전투 자체였다.
"흐아. 이러다가 죽는 거 아니야······."
"잡소리 말고 잡초나 뽑아."
"그, 그래야지. 잡초나 뽑아야지······."
주민들의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있다. 계속되는 요거-토소스의 테러에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너무 큰 압박을 받아서 잡초 뽑기에 열정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정치〉 수치가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정치〉 수치가 떨어진 건 치명타였다.
그해 가을, 수확량은 최소 필요한 식량의 1/5도 되지 않았다.
[아아아······!]
타데모이라가 비실거리는 작물과 시든 꽃을 보고 절망했다. 무기테의 심정도 다르지 않았고, 주민들의 심정도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좋게 봐도 내년 봄부턴 식량이 없다.
원래는 이것저것 식량 공급 수단이 더 있었다. 산등성이에 계단식 밭도 있고, 사막 지방에도 범람원이 있어서 소소하게나마 농사 짓고 가축 길렀다.
그렇지만 지금 산을 중심으로 농성하고 있는 상황, 상대가 뿌려둔 악종들이 꽃가루를 견뎌내고 평지 지역을 중심으로 돌아다니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그곳을 지키고 식량을 확보한단 말인가.
밥을 적게 먹고 힘도 적게 낸다는 말은 터무니없다. 그렇다고 주민들을 죽여서 잡아먹자는 제안을 했다간 〈정치〉와 〈신앙〉 수치가 그야말로 파탄 날 것이다.
무기테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
차원균열 단계까지 갈 것 없이 끝났다. 정상적인 인간 문명이면 식량이 없는 게 뻔히 보이면 멀리 달아나기라도 할 텐데 게임 특성상 세계에 있는 자원이 전부기 때문이다.
마지막 단계때 상대는 이판사판으로 내 생태계로 건너와서 넥타르라도 채취해 보려고 했는데 친히 슈크-리무라스가 몰려든 인원을 모조리 다져주었다.
그렇게 여름. 타데모이라도 더 이상 마법으로 식물을 만들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 세계의 주민들은 그들의 신이 아닌 나에게 자비를 구걸하며 굶주린 끝에 서로를 잡아먹다가······ 끝났다.
「플레이어 '무기테'와의 세계 충돌에서 승리하셨습니다.」
「플레이어의 세계가 넓어집니다.」
승리 메시지를 보고 난 살짝 당황했다.
"아직 상대 세계의 종족이 좀 남아 있는데? 명백히 공동체를 이루고 있잖아."
"그것과 무관하게 상대 신이 자기 종족의 장악력을 완전히 상실, 상대의 모든 영토를 비인 님 뜻대로 하실 수 있으니 '점령' 취급이 되어서 승리하신 겁니다."
아 그렇군. 생각해보니 원래 게임에서도 상대를 반쯤 말려 죽여도 결판이 나곤 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슈크-리무라스가 상대 세계로 건너갔고, 요거-토소스 역시 상대 세계로 건너갔다. 남은 몇 안 되는 인원은 전부 공중정원에서 타데모이라가 설치한 방어벽 주변에 조촐하게 텃밭을 가꾸며 살고 있었는데, 저 백 명도 안 되는 공동체가 그 식량을 먹고 사는 건 가능해 보여도 문명의 복원은 아예 불가능해 보였다.
끝난 거다.
[이 하등한 존재야. 이제 네 분수를 알았느냐.]
요거-토소스는 진짜 극도로 분노한 모습이었다. 거품과 촉수를 꿈틀대는데, 하긴 그럴 만하다 싶다.
왜냐면 쟤 이번에 결정적인 활약을 못했거든. 결국 어그로 끌고 상대에게 겁만 주는 역할이었지. 사실 요거-토소스가 없어도 어떻게든 이기긴 했을 거다.
그걸 자기도 아니까 분노한 거다. 보아하니 당장 타데모이라와 몇 안 되는 적 세계의 민간인들, 그리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적의 서사적 개체 4명과 영웅적 개체 13명을 전부 다져 버리고 싶어하는 것 같군.
그리고 적 세계의 마지막 생존자들은 자기네들 나름대로 죽기 전에 요거-토소스라도 죽이고 가고 싶어하는 것 같다.
요거-토소스가 죽진 않겠지만, 크게 상처입는 정도는 하겠지? 타데모이라도 그 귀중한 능력을 안 쓰기는 아깝고.
흠······.
"요거-토소스. 그만둬라. 거기 타데모이라와 무기테의 영웅들도."
[창조주여! 이 잡스런 것들을 살려놓으실 생각입니까?]
"굳이 죽일 이유가 없는 것에 가깝겠지. 여태까지 나는 너에게 멸절을 명하지 않았다. 남은 이들은 알아서 디저트 사막에서 굶어 죽었어."
[······.]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네 활약이 적지 않으니, 세계의 일부, 영계와 영지를 떼어다 주지. 저놈들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맡기진 않겠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것들이 나와 맞먹고자 한다면 마땅한 자격을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뭐, 이 오만한 놈은 이렇게 정리됐고······.
문제는 이거군. 타데모이라와 그 휘하 종족들, 부하들.
"타데모이라. 꽤 재밌는 술수를 쓰더군. 솔직히 말해서 아찔했다."
[아찔했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타데모이라는 여성형이라고 할지 남성형이라고 할지 모를 모습이었지만, 일단 앙칼진 어투로 답했다.
"아무렇지도 않진 않았어. 원래는 더 풍요로운 세계였지."
[풍요가 아니라 끔찍하고 잔혹한 세계겠지.]
"같은 말이다. 이런 끔찍하고 잔혹한 곳일수록 생명이 더 살아나는 법이지."
타데모이라는 결연해 보이는 듯 하지만 몹시 걱정이 많은 눈치였다.
[살려만 준다면 네 세계를 위해 헌신하겠다. 내 신의 종족을 살려줘.]
"그건 거래 대상이 되지 않아."
[큭, 우리도 너에게 협조할 수밖에 없단 건 알아. 하지만 무의미하게 사라진다면 차라리 전부 동반 자살하고······]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이미 너희들을 살려주는 건 결정났어. 방금 저놈에게 하는 말을 들었을 텐데?"
[······!]
타데모이라는 좀 놀란 것 같았다. 천사도 좀 놀란 것 같다.
[어째서?]
"어째서냐고? 난 적자생존의 원칙을 좋아하지. 네 생태계와 네 신들은 내 생태계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죽었어. 너희들은? 너희들은 그런데도 그냥 살아남았지. 이미 이겼으니 굳이 악의적으로 죽이지 않아."
[자비에는 감사하지만, 그럼 우리에게 어떤 명령을······.]
"내가 왜?"
타데모이라는 몹시 당황한 듯했다. 천사도.
"비인 님?"
기다려봐.
[그럼 우리가 너를 돕지 않아도 된다고?]
"도와도 돕지 않아도 상관없는 거야. 심지어는 날 방해해도 상관없어."
[어째서지?]
"왜나고? 나는 문명과 지성체를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게임에서 이기는 게 문명을 없애는 것보다 우선이야. 이미 이긴 상황에서 의식적이고도 악의적인 방법으로 네 문명과 세계를 파괴할 이유는 없지."
타데모이라는 뭐라 못할 표정을 지었다.
"난 너희들이 아무런 악의적인 개입 없이도 내 생태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길 바란다."
[잔혹해! 차라리 우리가 적극적으로 협조할 테니까 부디 우리에게 살아갈 권리를!]
"아아. 살아갈 권리야 주지. 말했듯이 죽일 거였으면 당장 죽였어. 그 공중정원. 네가 살아도 좋아. 또 지독한 꽃가루를 만들든 말든, 그것도 상관없어. 텃밭 가꾸면서 거기서만 먹고 살든, 산 타고 내려와서 내 생태계의 일부가 되든, 맘대로 해."
타데모이라와의 대화는 그걸로 끝났다. 그들의 종족은 살아남았다.
"정말 의외네요. 함정이 있나요?"
천사의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까?
"일단은 자신감이지. 저놈들이 내 생태계에서 못 버틸 거라는 자신감."
"아하."
"그렇지만 다른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어. 아무튼 이건 여기서 종료."
──의식이 전환되고, 나는 천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천사가 웃으면서 날 마주봤다.
시간이 멈췄다.
"그럼 비인 님. 7번째 라운드를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7은 5보다 큰 첫 번째 소수죠."
그래.
"그리고 놀랍게도 최종 라운드인 30라운드까지 7,11,13,17,19,23,29라는 7개의 소수가 있으며, 놀랍게도 이전 소수와 2-4-2-4-2-4의 간격을 세 번 반복한 뒤 나오는 다음 소수는 마지막 라운드 직전이기도 합니다. 소수는 대단히 의미 있는 숫자인 것이죠."
그래그래. 이미 다 들었어. 알고 있다고.
"그럼 소수 라운드마다 펼쳐지는 이벤트인 '확장 구간'의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빌어먹을 예고의 예고.
56화. 확장 구간 -대자연-
30라운드로 구성된 게임.
3라운드마다 하차 구간.
4라운드마다 상점 구간.
5라운드마다 재난 구간.
그리고, 3의 배수도 4의 배수도 5의 배수도 아닌 소수(素數) 라운드는 '확장 구간'.
간단하게 정리하면 내 생태계가 더 넓어지는 이벤트가 발생한다.
"그럼. 확장 구간의 규칙을 설명하겠습니다."
이미 다 듣긴 했지만.
"그래도 들어주세요. 혹시라도 오해가 있으면 안 되므로, 설명하겠습니다. 소수 라운드마다 확장 구간입니다. 신의 파편이 존재하는 약 10제곱킬로미터의 이 세계, 고작 이 정도 넓이만으로도 문명 하나를 지탱할 수 있도록 어떤 식으로든 풍요로운 공간입니다.
그렇지만 신의 파편이 존재하지 않는 "무주지"가 세계에 있기 마련이죠. 확장 구간은 바로 그러한 "무주지"로 세계를 확장합니다."
"무주지"라고 해도 진짜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는 아니다. 좀 방향성이 다르다.
""물질계"의 "무주지"로는 세 개의 세계.
드넓은 망망대해가 펼쳐진 "대해양".
바닥이 보이지 않는 땅속 세계인 "대지저".
문명이 살아갈 수 없는 광활한 세계인 "대자연"."
바다, 지하, 자연. 내 세계에도 "대지저"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있지. 안 쓰지만···.
""영류계"의 "무주지"로는 역시 세 개의 세계.
드넓은 하늘이 펼쳐진 "대창공".
죽은 자들의 의념과 의식으로 가득찬 "대경계"
끝없는 환상과 꿈의 공간인 "대환몽"."
"대창공"은 이미 그곳과 맞닿은 지역을 좀 가지고 있고 잘 쓰고 있다. 하늘섬, 공중정원, 구름 공간 같은 것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질도 영류도 거의 없으나 강력한 물질과 흐름이 존재하는 "대우주". 이렇게 일곱 개의 "무주지"를 일곱 개의 소수 라운드에서 엮습니다.
플레이어님이 그저 신의 파편만 존재하는 세계를 벗어나 바다, 지하, 자연, 하늘, 저승, 환상. 그리고 우주까지 전부 엮는 것으로 드디어 하나의 세계가 완성되고, 그곳을 다스리는 진정한 신으로 거듭나게 되시는 것이죠."
설정상으로는 되게 거창하고 좋아 보이긴 하는데.
"어차피 신의 파편은 미훈의 육체와 정신이라며? 결국 그 허물을 다 이을 뿐인 작업 아닌가?"
"조금 다르죠? 영육의 재정립이라고 하면 좋겠군요. 부서지기 전의 세계와 부서진 세계, 합쳐진 세계는 전부 다릅니다. 미훈 님 역시 그렇게 새로이 거듭나는 자신의 신체를 가지는 것으로 진선에서 벗어나 신선으로 등선할 수 있는 것이니."
흐음.
"그래서 확장 구간의 규칙 말인데, 앞서 말했듯이 소수 라운드는 2-4-2-4-2-4 이렇게 세 개의 구간과, 홀로 떨어진 29라운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간격이 '2'인 [7], [13], [19], 그리고 간격이 '4'인 [11], [17], [23]. 이것이 각각 한 세트입니다. "물질계"와 "영류계"중 어느 쪽을 먼저 고를지 선택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29라운드는 무조건 "대우주"와의 연결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 얘기를 뒤집어 말하면, 연속으로 물질계 "무주지"를 고를 순 없는 거지?"
"그렇습니다. 영류계도 마찬가지. 번갈아 가며 골라야 합니다."
설명이야 미리 들었지만,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에 괜히 질문해서 김칫국부터 마시진 않았기 때문에 지금 물었다.
"먼저 고르는 "무주지"에 따라 이득이나 손해가 있나?"
"이득인지 손해인지는 불명확하지만, 차이는 있습니다. 골라둔 세계는 이후 세계 충돌에서 승리할 때마다 일정 넓이가 늘어나게 됩니다. 말하자면 가장 먼저 고른 만큼 비인 님의 세계와 더 밀접하다고 정하신 것이니까요."
"흠."
"그래도 후에 고른 "무주지"의 영역도 충분히 많이 주어집니다. 물론 맨 처음 고른 것보다는 훨씬 못하겠지만······. 실질적으로 마지막으로 정하는 23번째 라운드의 "무주지"조차 마지막 라운드 시점에서는 어마어마하게 넓을 것입니다."
그렇군.
"그리고 마지막 세계 충돌 직전, 29번째 라운드에 고르는 "무주지"가 바로 "대우주". 최후의 상대 역시 당연히 "대우주"외의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우주 공간을 사이에 두고 세계 충돌이 일어나며, 그 충돌에서 승리해 완전한 융합을 거두면 드디어 진정한 신으로 거듭나고 우승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들으니까 정말 어마어마하게 스케일이 큰 싸움이다.
"첫 번째 무주지로 "물질계"를 고르실 건지, "영류계"를 고르실 건지 말씀해 주시면 해당 세계 세 종에 해당하는 특성 카드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고른 카드가 바로 이제부터 비인 님의 세계가 접한 "무주지"가 됩니다."
이건 고민의 여지가 없다.
""물질계"로."
"그럴 줄 알았습니다! 〈생명〉 기반 빌드를 꾸리는 만큼 "물질계"를 고르시게 되겠지요. 자. 그러면 여기 세 장의 특성 카드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소금바람: "대해양"으로 확장합니다. 바다에서 부는 바람과 소금기가 〈생명〉에 이점을 줍니다.』
『던전 탐험: "대지저"로 확장합니다. "대지저"및 인접한 세계에서의 모험에 이점을 얻습니다.』
『습지의 힘: "대자연"으로 확장합니다. 해당 무주지에서 "습지" 지형이 더 많이 나오게 됩니다. 해당 지형에서 서식하는 "생명"이 훨씬 강인하게 됩니다.』
사실, 셋 다 나한테 이점이 있다.
"대해양"을 통하면 강력한 해양 생명체들을 만들고 더 나아가 바다 너머의 섬 등을 개척할 수 있지.
"대지저"는 나와 직접적으로 인접한 지형이다. 지하는 물질계에 속했으면서도 마법도 있고 그럴듯한 생태계도 있다. 이곳으로 파고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
"대자연"은 가장 무난한 선택지다. 다양한 생물종이 나오게 되고, 문명 대신 생태계를 키우는 나에게 가장 적합하다.
뭘 골라도 좋다. 특히 "대해양"을 고르면 기후가 안정되는 게 좋지.
하지만, 따지자면 첫 번째 고르는 세계가 이후 4라운드 내내 마주할 지형이라는 걸 생각하면······.
나는 "대자연"으로 확장하기로 결정했다. 돌고 돌아서 정석 선택을 고른 느낌이군.
"훌륭한 선택입니다. 의외성보다는 건실함이 승리에 다가가는 길이죠."
"그럴듯한 말을 하는군."
"예. 그러니 제발 건실하게 문명을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데요······."
아직도 포기 안 했냐. 이제 좀 접어라.
∞
확장 구간에서 어느 세계로 확장할지 정하고 나면, 세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무주지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 지역. 신의 섭리가 작동하지 않는 지역. 그렇기에 가장 지형 레벨이 낮은 신의 파편 주위로부터 확장하며, '모든 방향에서 구' 형태를 띄고 있었던 세계를 왜곡시킨다.
요컨대 "대해양"은 세계의 '밖'을 만든다. 다시 말해 "대해양"을 택한 순간부터 세계는 둥글지 않고 평면으로 뻗어 나가게 된다.
기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하늘 뿐만 아니라 바다기도 하기에, 신의 파편만이 영향을 주었던 세계의 기후를 안정화 시키는 역할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로 붙어 있던 세계가 바다를 두고 갈라져 섬으로 바뀔 수도 있다.
"대지저"는 세계에 '깊이'를 가져온다. 원래는 구형이었던 세계의 지하가 끝없이 내려가며 지하 세계라고 하는 영역을 탐험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대자연"은 '안'을 만든다. 넓어지는 정도는 "대해양"보다 못하고, 그렇다고 높낮이의 변화도 "대지저"보다 훨씬 못하다.
하지만 내부에 다양한 생물들이 살아가는 지형이 생긴다. "대해양"도 "대지저"도 기본적으로 생물이 있긴 하지만 황량한 곳이다. 한편 "대자연"은 그곳의 '질' 자체가 매우 높다. 다양한 생물종과 그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환경은 변화무쌍하다
이후에 "대해양"이나 "대지저"를 택했을 시, "대자연"을 택하지 않으면 그 넓은 바다와 깊은 땅에 아무런 생명체도 없을 가능성도 있다.(뒤집어 말하자면 "무주지"는 동시에 두 가지 속성을 가질 수 있다.)
"대자연"을 택한 비인의 생태계. 사막과 습지, 산악 지형 등등에서 균열이 일며 그 사이에 새로운 땅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넥타르 샘 근처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 넥타르 샘이 모조리 삼켜버린 사막 지형도 마찬가지.
하지만 거대한 사막과 산, 그리고 그 위에 뜬 공중정원으로 이뤄진 무기테의 세계와 비인의 세계 사이에는 융합과 동시에 수많은 황무지와 산악 지방, 골짜기, 강과 습지. 그리고 크고 작은 언덕들이 생기며 그곳에 야생 생명체들이 생겨났다.
"공중정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자연"이라는 지형은 하늘에도 존재할 수 있다. "대창공"이자 "대자연"이 되는 것이다.
하늘에 뜬 구름섬들과, 부유하는 풍선이나 기구 같은 생명체들, 혹은 동양의 용 같은 것들이 하늘을 오가며 공중정원이 있는 무기테 산과 비인이 가꾸고 요거-토소스에게 하사한 요거트 산 사이에 새로운 구름 등 지형과 생명체들을 만들어 내었다.
단순히 들짐승과 날짐승만 있는 게 아니다. 식물과 병균, 기생충 등도 존재한다. 굳이 플레이어가 만들지 않을 '문명에 도움이 안 되는 생명체'들. 그저 살아가야 하니까 살아가는 생명체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살아가야 하는 생태계는 잘 건설된 문명만 있는 세계가 아니다.
이미 "대자연" 그 자체였던 디저트 사막은 사막과 초원 지형에 붙어나가는 수많은 황무지와 초원, 그리고 습지 지형의 수많은 야생들을 간단하게 집어삼키고, 생존 경쟁에서 승리했다.
사실 생존 경쟁에서 지더라도 상관없었다. 비인이 세심하게 진화시키며 새로 유입된 생명체들도, 기존에 있던 생명체도 서로 보존하면서 그 경쟁이 가능한 오래도록, 치열하게 가게끔 하고 있었으니.
젤리류 생명체들은 절멸 직전에 몰렸다가 이제 꽃가루에 적응했다. 디저트 사막에 아예 없었던 벌레들 역시 넥타르와 구미나무의 수액 등을 빨아먹으며 성장하게끔 진화했다.
습지에 서식하는 생명체들은 넥타르 호수만큼이나 생명의 은혜를 받는다. 그런 생명체들은 기존 디저트 사막의 생명체를 이기기도 하였다.
지구에는 존재하지 않는, 뭐라 말 못 할 수서형 생명체들. 공룡인지 포유류인지 거대 양서류인지 알지 못할 기묘한 생명체들이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진화하며 디저트 사막의 생명체를 몰아내기도 하고, 역으로 구축당하기도 하면서 모두 디저트 군단으로 통합되었다.
어마어마하게 넓어진 황무지는 슈크-리무라스가 돌아다니며 생명체들을 잡아먹고, 새로 생명을 낳기도 하며 사방에 젤리와 크림, 시럽을 뿌려대었다.
무주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좁아서' 레벨을 올리지 못한 각지의 지형들이 무주지를 잠식해가며 신의 파편의 영역에 그것들을 넣어간다.
이러한 격정적인 생태계 변화에서 가장 타격이 없는 곳은 넥타르 호수 쪽일까.
가장 지형 레벨이 높기도 할뿐더러, 완벽히 디저트 군단과 감치들의 영역이 되어버린 그곳은 언제나 그렇듯이 지옥 같으면서도, 이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고 다채로운 공간이었다.
요거-토소스는 '"대자연"이 아니라 "대창공"을 받았다면 작업이 더욱 수월했을 텐데.'라며 투덜대지만, 그래도 꽤 큰 기여도를 인정받아 산 인근, 그리고 하늘섬에서 넓어진 무주지 역시 자신의 영지로 삼으며 요거트 산맥에서 행복하게 연구중이었다. 다음에는 타데모이라 같은 강력한 개체에게 당하지 않으리라고 스스로를 단련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런 세계의 변화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
"우리들은 이제 뭘 해야 할까요."
"타데모이라 님······."
멸망한 세계의 패잔병들이다.
새로운 주인에게 쓸모를 인정받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불필요하다고 제거당한 것도 아니고.
그저 살아갈 기회만을 얻었을 뿐인 자들.
그들은 이제 이 끔찍한 디저트 사막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그들의 새로운 신은 그들이 이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죽기를 바란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은 그게 틀렸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이곳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했다.
57화. 확장 구간 -대자연- 2 (여기까지 무료입니다)
창조물에게도 인격이 있다.
사실 너무 당연하다. 플레이어가 신이라면, 창조물들은 인간(대체로).
신성으로 빚어져 초월적인 권능을 보유하고 있는 고유 창조물들은 물론이고 평범한 사람들까지 전부 생각을 할 줄 알고, 감정이 있고, 인격과 자아가 있다.
그러니까 신의 명령과 지침을 따르지 않고 범죄를 저지르는 불량 개체도 있고(정치 수치가 꽤 높아도 나타난다), 불충한 창조물도 있다.(물론 창조물이 직접적으로 배신할 정도면 신이 뭔가 엄청난 실수를 했겠지만)
이러한 것도 문명의 규모가 신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면 꽤 중요한 갈등이다. 애초에 모조리 적자생존 야생인 비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스템이지만.
그래서, 패배자인 무기테의 창조물이었던 타데모이라와 그 휘하의 4명의 서사급 개체, 13명의 영웅급 개체. 그리고 70명이 좀 안 되는 원숭이 같은 종족의 민간인들은 지금 절망해야 하는 건지 희망을 품어야 하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타데모이라 님.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타데모이라는 조금 어이가 없어져서 반문했다.
"비디바 경. 정치는 경의 역할 아니었던가요?"
사실 원래 〈정치〉 및 통치자 역할의 영웅 개체였던 비디바는 우물쭈물했다.
그것은 원래 세계에서야 그랬던 것이지만, 실제로 타데모이라가 자기보다 훨씬 강하고, 권위도 높고, 등급도 높고······. 아무튼 중요한 사람 아닌가.
"죄송합니다. 저도 실언했네요······."
타데모이라의 지금 심정을 표현하라면, 정신적으로 한 번 붕괴된 다음 재건됐지만 덜 수리되어 반쯤만 기능한 상태였다.
자신을 만들어준 창조주가 죽었다. 이건 알겠다.
창조주가 죽었어도 자신은 이들과 함께 살아 남았다. 이것도 알겠다.
그런데 상대 신이라고 할지, 이제는 그들의 신이 된 자가 그들을 딱히 원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일부러 죽이지는 않는다. 살고 싶으면 맘대로 살라고 한다. 방해해도 된다고 한다.
다만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죽기를 바란다고 한다.
이것을 모르겠다. 타데모이라와 네 명의 서사적 개체, 13명의 영웅적 개체, 70명의 민간인.
어떻게 보면 처음 세계를 만들었을 때만큼의 인원이 이렇게 모였다. 약한 자들 먼저 죽여서 남녀 고르게 있는 집단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그런 거겠죠······?"
"상대 세계가 쳐들어오면?"
"이 악랄한 세계가 지면, 상대 신은 분명 신을 소멸시킬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배신할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이 막강한 세계가 질까요? 어쩌면 우리들의 배신과 항복을 기만 전술로 여길지도······."
"차라리 이 세계의 신에게 편승하자고요? 그건 진짜 싫은데, 그자는 우리의 신들을 대화도 하지 않고 죽였어요."
고민. 사색, 궁리······.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살아가야 했다.
특히 민간인은 몰라도 상위 개체들은 더더욱 그리했다. 영웅적 이상 등급부터는 늙지 않기 때문이다.
영웅적 개체는 외적인 이유로 사망하지 않는 한 계속 살아 있다. (혹은 후대에게 자신의 능력을 완벽하게 이어줄 수 있다)
서사적 개체는 죽어도 자신의 '서사'를 이어받은 자가 나타나면 능력을 계승해줄 수 있다. 조건은 다소 까다롭지만.
전설적 개체는 죽는다고 한들 자원만 충분히 투자하면 부활 가능하다.
여기에는 없지만 신화적 개체. 게임 내 최강의 등급 개체의 경우 세계 충돌 과정에서 죽어도 보호 기간만 되면 아무 자원 소모 없이 그냥 부활한다.
이것도 분류에 따라 여러 제약이 있는데, 그래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무기테의 창조물들은 짐작하는 게 있었다.
영웅급이고 서사급이고 죽으면 끝이다.
상대 세계는 서사급 개체를 부활시킬 의향도 없고 부활시킬 능력도 없다. 도대체 이 끔찍한 세계의 어떤 존재가 정치나 종교의 서사를 이어받겠나.
전설급 개체인 타데모이라는 다를 수도 있다. 타데모이라는 종족이 멸망하면 부활할 수 없었던 [표상]인 시카도즈와는 달리 부활할 수 있는 창조물이다.
하지만 굳이 죽은 다음 부활시키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극적인 협력자로 남지 않는 한 왜 자원을 들여서 부활시킨단 말인가.
"······."
타데모이라는 침울해졌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무기테의 창조물이었고, 무기테가 키운 이 종족을 바르게 키워야 할 의무가 있었다.(사실 무기테의 첫 종족은 멸종했고 지금 종족은 다른 플레이어의 것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럼. 일단 농사부터 지을까요?"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
게임 내의 시간 흐름은 조금 복잡하다.
일단 '절대 시간'이 있다. 세계 충돌, 보호 기간, 그 외의 각종 이벤트가 일어나는 절대적인 시간의 흐름이다.
천사가 멈추는 것 역시 이 '절대 시간'이며, 절대 시간은 모든 플레이어에게 같은 기간이 주어지게끔 되어 있다.
그리고 '세계 시간'이 있다. 말 그대로 세계 내에서 흐르는 시간이다.
이건 신성력으로 가속할 수도 있고 감속할 수도 있다. 이 가속과 감속은 '절대 시간'과 비교한 수치다.
다시 말해 절대 시간이 100년이라면 세계 내에서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르게도 할 수 있고, 몇 년 안 되는 시간만 흐르게도 할 수 있다. 신성력만 많다면 말이다.
다만 세계 시간의 가속과 감속은 세계의 넓이에 비례한다. 무주지가 더해진 지금은 〈신앙〉점수가 썩어 넘치지 않는 한, 혹은 비인처럼 특성이 있어서 신성력이 많거나 〈시공간〉 계열의 신비를 익힌 개체가 있지 않는 한 가속과 감속은 점차 힘들어질 것이다.
또 '체감 시간'이 있다. 비인의 경우는 몇 년을 며칠이나 몇 주쯤으로 느끼게끔 체감 시간을 가속하고 있다. 안 그러면 진화라는 점진적인 작용을 파악하기 힘드니까.
미훈 같이 체감 시간을 세계 시간과 1:1 대응시켜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관리하는 미치광이 플레이어가 아닌 이상 보통은 체감시간을 좀 빠르게 할 것이다. 아니면 수백 년의 시간이 신적인 정신이 있다고 한들 너무 지루하니까.
이 체감 시간은 신뿐만 아니라 창조물에게도 적용되는데, 요컨대 창조물들에게는 체감 시간이 세계 시간과 무조건 1:1 대응되게 되어 있다.
한마디로 창조물들은 세계 시간 내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당연히 불멸의 존재인 상위 개체는 체감 시간이 수백 년이든 수천 년이든 '전혀' 지루함도 안 느끼고 정신병도 안 걸린다. 창조물이 오래 살았더니 미쳐버리는 일이 일어났다간 플레이어 입장에서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렇지만, 다른 이유로는 충분히 정신적 충격을 받을 수 있고, 그 정도가 심하면 정신병에도 걸릴 수 있다.
"제발 우리 밭에서 나가!"
끼룩끼룩.
"대자연"을 택해서 세계에 유입된 새로운 종류의 생명체들이 "공중정원"에 모여들었다.
기존의 생명체들인 감치들은 대체로 디저트 군단을 먹게끔 진화되어 있어서 박쥐와 새 같은 "대자연"의 생명체들이 주로 정상적인 작물이 재배되는 "공중정원"에 방문한 것이다.
그들의 100여명 되는 인원이 먹고 살려면 타데모이라의 권능으로는 한계가 있다. 타데모이라는 벌레와 식물을 조종할 수 있지만 저런 개체들은 조작할 수 없으므로.
해충 피해는 입지 않는다지만 과일박쥐들은 과일을 먹고, 새들은 모여들어서 채소와 이삭을 뜯어먹는다.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그나마 그것은 잡아먹을 수도 있었다지만, 머지않아서 커다란 새가 날아오더니 원숭이를 잡아먹기도 했다. 어린아이가 잡혀갔을 때는 그야말로 끔찍했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하면 좋아······."
마법 담당이 있지만, 그가 하루종일 넓은 밭에서 공격 마법을 매일매일 써댈 수는 없다. 마법이 그렇게 편한 힘이 아니다.
격렬한 운동을 하루에 딱 2시간만 해도 다음날 근육통에 일어나지도 못할 수 있는 것처럼, 신비 역시 많이 쓰면 지치거나, 혹은 흐름이 불안정해져서 잘 안 나오거나 한다.
"신이시여!"
종교 담당이었던 서사적 개체가 절규했다. 신을 잃어버려서 가장 비참한 서사급 개체였다. 이 세계에는 종교가 없으니.
[불렀나.]
"?!"
그런데, 부름에 응할 줄은 몰랐다. 그들의 신은 아니지만, 아니 이젠 그들의 신이 맞지만 별로 섬기지는 않는 '비인'이 그의 아바타로 강림했다.
"어, 어?"
[뭐냐. 왜 그렇게 놀라지. 마치 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짓는군.]
"아, 아니. 올 줄은 몰랐··· 습니다."
[너 원래 종교 담당이었지? 부르는 목소리가 크게 들리더라. 절절해서 와봤다. 무슨 일이냐.]
모두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부탁은.
"살려주십시오!"
[살려주고 있어.]
"아, 아니 그러니까, 부디 삶의 질을 더 올려 주십시오!"
[어떻게?]
"어떻게라니, 그 신의 권능으로..."
[아니 그러니까, 그 신성력으로 뭘 해달라는 건데? 소원은 구체적이어야 할 것 아닌가. 내 철학에 반대되지 않고, 내 세계에 이로운 일로 이어진다면 기꺼이 기도를 들어줄 수도 있다.]
민간인들도 상위 개체들도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모두의 시선이 타데모이라에게 모였고, 타데모이라가 그들을 대표해서 말했다.
"저 새들과 박쥐에 작물들을 뺏겨 저희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부디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옵소서."
[어떻게?]
"예? 아. 그러니까 요컨대 새와 박쥐들을 다 죽여서···."
[새랑 박쥐도 내 생태계의 일원인데? 내가 너희들을 굳이 더 어여쁘게 여길 이유가 있나?]
타데모이라는 사람과 동물을 동일선상에 놓는 비인의 태도에 몹시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이놈은 문명을 아예 키우지 않는 미치광이였다. 사람과 동물을 동일선상에 놓을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을 빌어야할까. 타데모이라는 궁리했다.
"저희에게 더 많은 마력을 허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걸로 새랑 박쥐들을 죽일 것 아닌가. 안 돼.]
"그, 그럼 새와 박쥐들을 쫓아내주실 수는."
[게네들은 그럼 뭘 먹고 살란 거지? 내 생각에는 이 새와 박쥐들은 이곳에서 채소와 과일들을 먹으면 딱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만.]
"그, 그것을 진화로 어떻게······."
[쟤들 전체를 바꾸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굳이 너희들의 편의성을 봐줄 이유가 전혀 없잖아.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생명체들 상대로.]
그럼 뭐 어쩌라는 거냐.
그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지금 우리를 놀리러 왔나?
그렇지만 타데모이라는 비인의 논리를 뚫을 수 없었다. 그들을 살려준 것처럼 새와 박쥐 등도 살려주는 것.
채소들이 새와 박쥐에게 쉽게 잡아먹히는 건 원래 채소라는 게 인위적으로 품종개량하면 연약해지기 때문.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재난은 스스로 자초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못 먹으면 도대체 뭘 먹고 살란 말인가.
그들의 종족은 육식은 거의 필요 없이, 혹은 벌레 정도만 먹고 대체로 채식만 해도 먹고 살 수는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곳에 넘치는 잡초 같은 풀을 뜯어먹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사실상 굶어 죽으라는 말······.
'음?'
타데모이라는 뭔가 다른 발상이 떠올랐다.
"우, 우리 종족이 풀을 뜯어먹고 살 수 있게 할 수는 있습니까?"
[너희들을 진화시켜 달라는 건가? 식성을 바꾸고 싶다면, 한 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된다.]
"무엇입니까?"
[뭐긴, 너 말고 저기 무기테의 종족이 그걸 원해야지. 아무리 그래도 지성체의 몸을 멋대로 건드릴 수는 없잖나.]
타데모이라는 그들의 종족을 바라봤다. 그들 종족은 '진화'라는 걸 신의 은총을 받아 체질이 변하는 걸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변하는 신체는 일부 기괴해 보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더 나아지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죽는 것보단 나았다.
"네! 저는 차라리 풀을 뜯어먹고 살고 싶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새와 박쥐도 잡아먹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습니까······!"
[요구사항을 정리해보지. 둘 다 양립하는 건 대단히 힘들다. 초식성과 수렵형 육식. 이렇게 둘로 나뉠 것 같은데 괜찮나?]
"네!"
[초식성의 경우, 너희들의 장이 이미 길긴 하지만 아예 질긴 잡초를 소화시킬 정도면 장이 더 길어야 한다. 창자가 훨씬 길어지니까 배가 불룩 나올 거고, 턱이 커지고 이빨이 좀 많아질 거다. 신진대사가 느려지니까 아마도 근육도 적어지고 움직임도 느려질 텐데, 괜찮나? 미적인 기준도 조절해 주긴 하겠다만.]
"주, 죽는 것보단 낫지요! 그리고 미적인 기준도 바꿔주신다면야."
[그렇다면 좋다.]
비인은 그래서 그렇게 진화시켜주었다. 무기테의 원숭이 같은 종족은 지구의 초식성 유인원, 고릴라와 초식성 포유류인 나무늘보를 합친 것처럼 변했다. 긴 꼬리가 있지만.
다소 둔하지만 진짜로 풀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좀 멍청해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지적 능력'에는 실제로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와! 진짜 풀이 맛있게 느껴져!"
"오!"
다들 앞다투어 초식형 진화를 받아들였다. 일부는 사냥이 더 좋다고 몸이 작은 대신, 원숭이의 날렵함을 살려서 더 높이, 빠르게, 그리고 작은 크기지만 더 활발하게 변하는 진화의 은총을 받아들였다.
영웅적 개체와 서사적 개체는 유감스럽게도 받을 수 없었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원래 창조물과 주류 종족의 외모가 다른 건 흔한 일이다.
"감사합니다!"
[바라는 게 있다면 다음에도 기도해라. 합당한 선에서 들어주지.]
타데모이라는 이 신이 아주 대화가 안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며 감격했다.
그리고 불멸자의 감각으로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신비와 흐름의 영향으로 엄청나게 빠른 진화 속도를 지닌 이 게임의 세계.
알아서 식량이라 할 수 있는 잡초들이 자라고, 딱히 위협할 만한 천적도 없는데다가 굳이 지능을 쓸 만한 일도 마땅치 않아진 초식성 영장류들의 지능은 전부 많이 똑똑한 고릴라 수준으로 퇴화했다.
그저 동물적 본능만으로 움직이며, 그나마 남은 지적인 편린으로 어눌한 언어로 대화하면서 그저 느긋하게 풀을 뜯어먹고, 수컷들은 야만스럽게 서로 싸우며 서열을 가리는 모습만 대충 남았다.
"아아······."
그들을 위해 진화를 제안했던 타데모이라는 더없이 비참해졌다.
58화. 확장 구간 -대자연- 3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원한 변화 그대로, 약속을 지켰으니 책임질 것도 없지.(진실 인증)]
타데모이라는 신의 말이 완벽한 진실임을 알 수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 하지만 이런 변화를 바란 건 아니었어요. 동물로 전락했잖아요."
[그게 나쁜가?]
타데모이라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우리 종족이 동물로 남게 해달라는 건 아니었어요."
[나도 너희 종족을 동물로 만들지 않았다. 난 그저 풀을 뜯어먹기만 해도 살아남을 수 있게 했을 뿐이야.]
"궤변이에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지 않았나요?"
이 세계의 신은 잔혹하게 말했다.
[자연적인 진화의 방향성을 쉽게 예측할 수 있긴 했지.]
"!"
[당연하잖아. 초식을 위한 창자와 턱 크기의 향상은 거꾸로 자원이 많이 들어가는 다른 기관, 요컨대 뇌의 기능 감소를 유발한다. 천적도 없는 환경이다. 거기에 문명을 위한 도구를 개발할 동기도 별로 없지. 지능은 대단히 쓸모 있는 메커니즘인 만큼 형편없이 낮아지진 않겠지만 저 정도만 되어도 생존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거다.]
"왜 그걸 말해주지 않았죠?"
[말해봤자 체감할 수 없었을 테니까. 지금 지능이 좀 낮아졌다. 자, 이제 다시 묻겠다. 네 종족을 어떻게 진화시켰으면 좋겠지? 이대로 대형 초식동물의 삶을 이어가게 해도 되겠지.]
타데모이라는 고민했다.
무기테의 종족은 두 종류로 분화했다. 하나는 풀을 뜯어먹는 둔한 초식성 영장류. 다른 하나는 새와 박쥐, 그리고 자신이 키운 채소를먹는 날렵한 잡식성 영장류.
여기서 동물로 전락한 건 초식성 영장류뿐이었다. 새와 박쥐를 사냥하는 날렵한 영장류는 아직 높은 지능과 문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영웅 개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대단히 높은 지능과 문화 수준, 그리고 강력한 의지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저들의 지능이 더 높게 됐으면 해요."
[어떻게?]
"어, 어떻게? 그러니까. 어."
타데모이라가 화훼와 원예의 전문가라곤 하지만 짐승의 전문가는 아니다. 일행의 상위 개체를 바라보자 그들이 몹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마법을 다룰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오.]
"다른 신비가 아니라 '마법'입니다. 배워서 사용하는 신비요. 마법을 배우고 익히고, 개발하여 사용할 수 있게끔 제 종족에게 신비의 재능을 내려주십시오."
[안 돼.]
"어, 어째서?"
돌아온 대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왜냐니, 내가 모르는 걸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진실 인증)]
타데모이라는 기가 막혔다.
"저기 요거-토소스는 마법을 쓰잖아요!"
[그건 요거-토소스가 관련 특성이 있어서 그렇다. 쟤가 알아서 배운 거지 나는 몰라.]
"이곳의 영계는 놀라울 정도의 완성도인데 거짓말하지 마세요!"
[다른 신에게 컨설팅받았어. 영계에 대해서는 알지만 마법에 대해서는 몰라.(진실 인증)]
"그럼 요거-토소스에게 마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이번 요구에는 대답이 좀 늦었다.
[요거-토소스가 싫다는군.(진실 인증)]
타데모이라는 절망했다.
꽃 정령인 그의 신비는 <매력>기반의 신비였다. 한마디로 재능 없으면 못 배운다. 그리고 그 재능을 저자가 부여해줄 것 같진 않았고, 더 나아가 <지능>기반의 신비도 아니었다.
결국 자기 종족의 서사급 마법사에게 맡겨야 하는데, 문제는 이놈이 쓰는 마법은 특성과 능력치에 영향을 대단히 크게 받는 종류다. 뭔 얘기냐면, 이놈은 멍청이에게 마법을 가르칠 줄 모른다.
"아,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마법 연구에 대한 지원을 받고 싶습니다."
[그냥 줄 수는 없어. 당연한 얘기지만.]
물론 타데모이라도 그냥 달라고 해서 들어줄 사람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대가를 지불하겠습니다."
[무슨 대가?]
"이 세계에...."
[생태계.]
"...이 생태계에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분명히 있을 터, 명령을 내려주시면 따르겠습니다."
이 세계의 신은 그러자 눈을 번쩍 빛냈다.
[그런 제안을 한다면 내가 할 건 하나뿐이다. 이 공중정원에 포식자들을 풀어도 되겠나.]
"?!"
[포식자가 있어야 지능이 높아지기도 하고, 또 그래야 내 디저트 군단이 조금 더 강해질 거다. 감치 말고도 새와 박쥐 같은 생명체들의 종 다양성이 필요하거든. 디저트 군단이 아닌 순수한 생명체 말이지.]
"그, 포식자라면 어느 정도 수준?"
[생태계가 파괴되지 않는 선까지 계속 늘려야겠지.]
타데모이라는 떨떠름하게 자신을 믿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몹시 고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 신의 제안을 따라야 하나?
지금 상태여도 사실 아주 최악은 아니다. 그들의 종족은 먹고 살 수는 있었고, 저 신은 여태까지 약속을 어기진 않았다.
악당이어도 적어도 완전히 거짓말을 늘어놓고 기만하는 악당이 아니라 계약서를 까다롭게 쓰는 악당이다.
결국 의견이 모아졌다.
"좋습니다. 마력 지원이 있다면 마법을 익히기 쉬워질 터, 그러면 저희 문명의 재건도 가능할 테니 거래를 받아주십시오."
[좋다. 포식자는 점진적으로, 또한 장기적으로 늘리도록 하지. 그만큼 지원하는 마력량도 늘리겠다. 마음껏 살아봐라.]
∞
지능이라는 게 뭘까?
지구의 호모 사피엔스들은 대단히 머리가 좋다. 유일하게 문명을 의식적으로 건설하는데 성공한 그 머리 좋은 호모 사피엔스는 당연히 자기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머리 좋은 생물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그 말은 맞긴 하다. 종합적으로 볼 때 호모 사피엔스의 지능은 지구에 존재하는 그 어떤 생물보다 높다. 최고점도 높고, 평균점도 높다. 지능이 많이 낮으면 그건 '장애'다.
그 뛰어난 호모 사피엔스는 한 때는 지구상의 모든 동물은 인간보다 하등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마음껏 죽이고 사냥하고 다녔다.
그런데 머리가 너무 좋아서 이것저것 연구하다보니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코끼리, 고래, 유인원. 대단히 지능 높은 생명체들이 지구상에 더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연구하다가 더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평균적으로' 침팬지는 '평균적인' 인간보다 '순간 기억력'이 월등하다.
무슨 얘기냐면, 다수의 카드를 쫙 펼쳐서 아주 잠깐 동안 보여주고 다시 가렸을 때, 침팬지가 방금 봤던 순서대로 카드를 나열하는 적중률이 인간이 나열하는 적중률보다 훨씬 높다.
물론 인간이 훈련하면 더 뛰어나긴 하다. 그런데 침팬지도 훈련할 수 있다. 그리고 훈련한 침팬지는 명백히 인간보다도 더 뛰어나다.
그때 지구의 연구자들은 결론을 내렸다.
'지능이라는 건 여러 종류가 있다.'
침팬지는 숲속에서 살아서 순간적으로 본 것을 확실하게 보고 기억해야 하니까, 본래 탁 트인 초원에 살았던 호모 사피엔스보다 순간 기억력이 월등한 것이다.
다시 말해 지능의 방향성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이건 다시 말하자면 이런 얘기가 된다.
충분히 지능이 높은 생명체라도, 문명을 구축하지 못할 수 있다.
문명을 구축하려면 지능이 높은 게 아니라 특정한 지능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도구를 만드는 도구'를 만드는 지능.
단순히 도구의 형태인 뗀석기를 넘어서, 뗀석기를 만들 때 쓰는 몸돌을 가지고 다니며, 그것을 가공할 수 있는 지능.
옷을 만들기 위해 바늘을 만들 수 있는 지능, 검을 만들기 위해 철을 캐고 용광로를 데우고 담금질을 해야 한다는 걸 아는 지능.
그러한 연역적인 사고력이 없으면 문명은 구축할 수 없다. 대단히 지능이 높더라도 말이다.
요컨대, 많은 영장류들이 인간이 만든 도구를 그 본래 쓰임새대로 쓸 수 있으며, 그 중에는 스마트폰 등의 첨단 도구도 존재한다.
이 스마트폰이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그 원리 따위는 몰라도 일단 쓰긴 쓴다. 사실 인간도 스마트폰 어떻게 만드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 거의 없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왜...?"
타데모이라가 어떻게든 발전시켜보려던 무기테의 종족은 전부 많이 똑똑한 동물 수준으로 전락해 버렸다.
초식형 원숭이는 마법을 배우고 익힐 수는 있었다. 신비와 흐름도 효율 높게 다루며, 실제로 퇴화하던 지능이 꽤 높게 올라왔다.
하지만, 그저 외우는 것만 잘하게 됐다. 마법이라는 학문으로 치면 가장 최하, 최악에 위치하는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외워서 마법을 쓰는' 얼뜨기 마법사가 된 것이다.
외우고 마법 쓰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지만 그 이상을 전혀 바라지도 않고, 사실 더 바랄 수도 없는 듯 그들은 풀 뜯어먹다가 외부의 침입자가 오면 마법으로 격퇴하고, 다시 느긋한 삶을 이어갔다.
그나마 높은 지능으로서 인간성을 유지하던 수렵형 원숭이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지능도 상당한 수준으로 퇴화했다.
정확히는, 지능은 여전히 높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은밀하게 날아드는 독충, 혹은 거대 새, 빠르게 돌진하는 박쥐 등등에 저항하려다 보니 이들의 감각기관이 놀라울 정도로 예민해졌다.
그리고 단순히 '시력'이 좋아지고, '청력'이 좋아지는 것하고는 다른 방식으로 이들의 감각은 발달했다.
요컨대 이런 것이다.
갯가재는 12가지 색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나? 사실 인간은 빨강, 초록, 파랑 세 가지 색밖에 못 보고, 대부분의 생물들은 적록색맹이라서 2가지 색밖에 못 보는데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 인간은 수만 가지 색을 본다. 왜냐면 뇌의 성능이 너무 좋아서 여러 색상의 조합을 다른 색으로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갯가재는 뇌의 성능이 나쁘니까 12개의 색을 각각 보는 것으로 시각을 발달시킨 것이고.
한마디로, 영장류들은 '색'을 분간할 수 있는 것도 많고(적록색맹인 동물이 엄청나게 많다) 물체에 대한 인지능력도 대단히 높다.(뱀을 빠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다.)
이건 눈이 좋은 게 아니라 뇌가 좋은 거다. 감각능력을 무작정 높이는 대신, 감각에 대한 처리능력을 엄청나게 높여서 해결하는 방식.
수렵형 원숭이들은 그렇게 진화했다.
이놈들은 매일같이 주변에 득실대는 온갖 독충과 포식자들에게 저항하기 위해 무슨 소리, 무슨 모양, 무슨 빛, 무슨 진동만 있으면 그것이 무엇인지 순식간에 분석해 낸다.
그래서 머리도 크다. 그리고 신경계도 어마어마하게 발달해서 반사신경은 가공할 정도, 어느 정도냐면 30미터 정도면 권총 방아쇠를 당기는 걸 '보고' 몸을 틀어서 총알을 피할 수도 있다. 당연히 인간의 주먹질 정도는 슬로우 모션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억력도 좋고 모방할 수 있는 신체능력의 정밀도도 뛰어나다. 다시 말해 무술도 익히고, 신비도 나름대로 쓸 수 있다.
그런데, 이 능력을 챙기느라 연역적 추리능력이 완전히 고갈되고 말았다.
이들은 자극을 듣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반사'한다.
당장,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가혹한 환경이 '이다음 어떻게 될까?'보다는 '지금 느껴지는 게 뭘까?'에 집중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무기테의 원숭이들은 둘 다 아주아주 똑똑한 원숭이, 원숭이를 초월한 초월숭이가 됐지만, 문명을 일굴 능력이 거세되어 버렸다.
"타데모이라. 울지 마."
"울면 가슴 아파."
말도 할 줄 안다. 지능도 높고, 지구의 영장류들과는 달리 후두가 낮아서 발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어눌하게 몇 안 되는 어휘로만 말한다. 고릴라가 수화하는 것과 차이가 없다.
"어흐흑.... 미안해요.... 무기테.... 나의 창조주여...."
타데모이라는 흐느꼈다. 그 주위의 영웅이니 서사급 개체니 하는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전투, 종교, 정치, 마법. 다 전문가지만 생태학 전문가는 없었던 게 한계였다.
"으흑...."
"뭐냐. 천사. 왜 너도 울어."
"기껏 얻은 지능 높은 인간조차도 동물로 전락시켜버리는 무자비한 행태에 절로 눈물이...."
아 잡소리 집어쳐.
아무튼 원숭이 종족은 꽤 번성했다. 초식형은 마법형으로, 수렵형은 무술형으로.
그리고 그들은 이제 공중정원을 벗어나 내려가려고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선 포식자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존중한다. 산악 지방에서도 살아보고, 더 아래에서도 살아봐라. 종분화가 그래야 팍팍 된다.
원숭이 말고 이름도 지어줘야겠다. 흠. 먹기 위해서 사는 듯 보이는 걸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먹보, 뚱보들이고 특히 단 것을 좋아하니....
"너희들은 이제 당괴(糖塊:Sugar lump)다."
마법당괴와 무술당괴라고 불러야겠다. 저 두 종족을 기반으로 이것저것 시도해봐야지.
"그 시도하는 이것저것에 문명이 없다는 점에서 그냥 눈물만 나오는군요."
천사의 말은 귀담아 듣지 않으련다.
아무튼 일부 마법당괴는 요거-토소스에게 가서 숭배하며 마법을 전수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요거-토소스는 자기 숭배자가 드디어 생겼다고 좋아하더라. 행복하니까 다행이다.
그리고 무술당괴들, 그들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전투형 서사급 개체는 뭔가 마음을 먹었는지 외쳤다.
[신이시여! 나도 내 동족과 같이 만들어주시오!]
그 말을 들은 그들의 동족이 따졌다.
"너 미쳤어?"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세상이야! 이 미친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내 동족을 부정하느니 차라리 저들의 일원이 되겠어! 신이시여! 나를 저 육체로! 내 기억을 그대로 지닌 채 저 강인한 육체를 지닌 존재로 거듭나게 해주시오!]
난 웃었다. 드디어 내 철학을 이해하는 자가 나타났군.
"바라는 대로."
압도적인 신성력을 투여하자 그의 몸이 변형되며, 원래도 싸움을 잘하던 육체가 무술당괴의 미칠듯한 반사신경과 감각처리능력을 지닌 것으로 바뀌었다.
<지능> 수치 자체는 낮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올라갔는데, 이 수치가 감각과 지적 능력을 다 포함한 것이라 그렇다.
"나. 이제 가족 만난다."
하지만 확실히 보통 말하는 '지능'은 떨어졌다. 그것을 보고 결심했는지, 그에게 무술을 배우던 대부분의 영웅적 개체, 그리고 심지어 정치를 담당하던 개체까지 원래는 검술을 비롯한 전투술도 익혔다며 무술당괴로 변했다.
그러자 마법사와 종교인도 마법당괴로 변하기로 마음먹었고....
"축하한다. 타데모이라. 네 창조주의 생명체는 내 생태계에서 그 생명을 영원히 이어갈 것이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꽃 정령 타데모이라만 지성을 다르게 바꿔버린 당괴들 사이에서 절규했다.
59화. 확장 구간 -대자연- 4
다시 말하지만 전설적 창조물에게도 인격이 있고 감정이 있다.
오로지 '시간'에 따른 지루함과 권태, 정신병은 없을 뿐 그 자신의 <정신> 능력치를 능가하는 스트레스가 있으면 무너지고 만다.
그 무너지는 방식은 인간적이라고 해도 좋겠다.
다만 모든 종족이 같은 성품과 습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걸 생각하면, 그리고 타데모이라는 그 무엇과도 닮지 않은 고유 창조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타데모이라는 타데모이라의 방식대로 무너졌다.
바로 자신이 가꾼 밭을 떠나 공중정원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다.
사실상 정신적으로 붕괴한 상태다. 화훼와 원예의 성령인 꽃 정령이면서 식물에 대한 관심을 꺼버리고 그대로 훌쩍 떠나버리다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그를 붙잡는 것이 있었다.
"타데모이라. 가지 마."
"가지 마. 슬퍼."
무기테의 종족이었던 것들. 이제는 지능이 퇴화라고 할지, 다른 방식으로 발달해버려 그저 짐승으로 전락해버린 '당괴'들.
그런 당괴들이 타데모이라를 붙잡고 가지 말라고 간청했다. 눈빛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 사랑이, 애틋함이, 슬픔이....
하지만 그런 한 편, 그것의 튀어나온 턱이, 그리고 커진 두상이, 부푼 배가, 본래의 종족과는 완전히 무관한 이 세계의 신의 창조물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었기에 타데모이라는 그들에게 사랑이 아니라 염증과 공포를 느꼈다.
"...."
타데모이라는 한 때 사랑했던 것들을 버리고 공중정원을 내려갔다. 뒤에서 마법당괴들이 발광하면서 발을 구르며 분노하고 애도하지만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마음이 아프다. 어째서 아픈지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드넓은 공중정원은 이제는 식재나 다름없는 잡초와 잡초에 적응하기 위해 작아지고 튼튼해진, 기형적인 채소와 꽃들로 가득했다.
망가져 버린 정원을 천천히 내려가면 가장 먼저 "구름다리"가 나온다.
이 역시 신의 파편이 있는 지형이다. 원래는 정령들과 "대창공"의 마물들이 살아가야 하는 이곳은 이 세계의 신이 만들어낸 요거트인가 하는 생명체로 가득했다.
그것은 하늘과 이어진 거대한 영계와 이것을 기형적으로 기워 넣으면서 끈적한 시럽으로 적셨다.
타데모이라는 그 구름다리를 서서히 내려갔다. 디딘 곳마다 구름에서 풀과 잔디가 자라나며 타데모이라가 가는 길의 융단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내려가면 정상의 샘에서 흐르는 강이 산을 빙글빙글 돌아 그대로 내려가는 계단식 밭과 마을들. 이곳은 타데모이라의 식물들이 남아 있었지만, 그보다는 디저트 군단이라고 하는 이곳의 악종들, 움직이는 젤리들과 구미들에 의해 파먹히며 역시 끈적한 시럽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당괴들도 많았다.
무술당괴들은 이곳에 자란 나무와 울퉁불퉁한 산맥을 잘도 돌아다니며 젤리들을 사냥해 먹고, 작게나마 자라난 과일들을 뜯어먹었다.
그리고 타데모이라를 보고 반가운 듯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기척에 대해 비정상적으로 빠른 반응속도가 신경 쓰였다.
타데모이라는 맥없이 그대로 산의 강을 따라, 그 계단형으로 닦아놓은 도로와 시럽으로 적셔진 강을 그대로 걸으며 가는 길마다 풀과 꽃으로 융단을 깔았다.
뒤에 벌레들이 따라오고 있지만 벌레도 풀도 그냥 꽃의 정령의 권능이 자연스럽게 발휘되는 것에 불과했다.
타데모이라에게 달라붙는 무술당괴들은 애정을 표현하는 것 같았지만, 타데모이라는 그들을 손으로 쳐내면서 간단히 뿌리쳤다.
그렇게 내려가면 사막 지형. 말이 사막이지, 반은 강이 흐르는 범람원 습지라 농사 짓기에도 좋고, 풀도 그럭저럭 자라서 가축 키우고 목축하기도 했다.
지금은 선인장들과 카라멜 낙타들만이 가득했지만 말이다.
타데모이라는 그런 강인한 생명체들이 자신도 뜯어먹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저 전설적 창조물의 격을 담아 노려봤다.
카라멜 낙타가 그것을 보고 당혹하며 그대로 물러났다. 타데모이라는 저런 지성 없는 것들에 자신의 신이 일궈냈던 문명이 망했다는 것이 비참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파괴는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창조와 번성, 치유밖에 할 수 없는 꽃의 정령이다.
타데모이라는 무기테의 영역이었던 곳을 쭉 둘러보고, 그곳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더!"
말도 안 되게 거대한 생명체였다. 뚱뚱하고, 다리가 많고 입이 커다랗다.
눈과 입으로 가득한 안개로 둘러쌓인 그것은 지나다니는 모든 것을 잡아먹고, 또 꽁무니와 몸체의 구멍에서 계속해서 낳고, 돌도 먹고 영계와 영지 등 영적인 구조물을 뜯어먹으며 또 재구축했다.
슈크-리무라스다. 그들의 영토를 시럽과 크림랜드로 다 끈적하게 이어버리며 남은 생물종들의 유전자를 수거하고 있었다. 사방에 빵과 젤리류 생명들을 뿌리면서 말이다.
타데모이라는 절망했다. 자기는 적어도 생명의 창조자라는 역할은 이 세계에서 가장 잘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밀렸다. 자신은 저것처럼 파괴적으로 먹고 생산할 수 없었다. 이제 타데모이라는 내세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슈크-리무라스가 내보내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구미들과 그것을 먹는 젤리들, 감치들은 너무나도 혐오스러웠다.
타데모이라가 걷는 곳마다 풀들이 융단처럼 깔리고 벌레들이 나오면 뭘 하나? 이곳의 잡초들조차도 못 이기고 주력 생명체들도 못 이기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자라는 젤리들과 감치들을 잡기 위해 진화, 몸체가 더 기괴하게 변형되기 시작한 각종 당괴들도. 너무나도 역겨웠다. 저것들이 자신에게 손 흔들며 인사하는 것도 그렇고.
'이딴 곳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타데모이라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정신병이 지독하게 걸린 것이다. 타데모이라는 무기테의 땅을 떠나 걸었다.
세계를 아무래도 원래 있던 초원 지역에 그대로 이어버렸는지. 세계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보인 건 드넓은 초원과 끔찍한 젤리들과 구미들의 숲.
또 요거-토소스와 그를 숭배하며 마법을 익히는 마법당괴들의 무리였다.
초원에서는 활발하게 달리는 낙타를 비롯하여 각종 생명체들이 무술당괴들에게 쫓기거나 감치에게 낚아채지거나, 아니면 거꾸로 거대한 푸딩이 무술당괴들을 하나씩 꿰어서 먹거나 했다.
어마어마한 반사신경을 지닌 무술당괴들도 푸딩들의 촉수질을 전부 피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요거-토소스를 보긴 싫었다. 그놈은 자신을 바로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멀리서 요거-토소스의 말에 반응하는 마법당괴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마법을 배우고, 또 자기네들끼리 나름의 문화와 조악한 사회를 이루는 걸 의도치 않아도 봐야만 했다.
그렇게 요거-토소스의 영역을 지나서 내려가면 습지대가 나온다. 타데모이라는 이곳에는 그나마 '평범한' 생명체가 많다는 것에 안심했다.
자신의 세계를 망친 지독한 잡초들, 그 악종들이 습지에서 배양되고 있었다.
습지의 풀들을 먹는 초식동물들은 하마를 닮아 더없이 강력했으며, 비인이 이번 차례에 고른 특성과 "대자연"의 영향으로 더없이 번성한 생태계가 되었다.
타데모이라는 괜히 심술이 나서 그곳에 있는 풀들을 잡초가 아니라 열매와 꽃이 아름답게 열리는 무해한 것들로 바꿨다. 금방 잡아먹혔지만, 오기가 생겨서 그곳의 풀들이 적어도 다른 지성체가 먹기 좋은 열매와 채소를 내게끔 조절했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타데모이라는 그대로 쭉 걸었다.
어마어마하게 두껍고 넓은 습지 지역을 몇 년이나 돌아다녔을까. 내려가니 사막과 선인장 숲이 나왔다.
사막은 끈적한 시럽과 크림으로 덮여 있어서 그걸 먹고 자라는 바위젤리들로 가득하고, 선인장 숲은 비가 올 때 미친듯이 빨리 자라는 풀들과 거대하다고밖에 말 못 할 선인장들이 자랐다.
그나마 타데모이라가 볼 때 정겨운 곳이었다. 다만 자신에게 달려드는 미친 사탕들이 조금 거슬렸다. 사탕들은 상대와 격이 다르다는 것도 모르는지 자기에게 계속 뛰어들었다.
그런 곳에도 당괴는 있었다. 사막에 사는 영장류로 진화했다.
뜨거운 햇볕을 견디기 좋게 체모가 두꺼워지고, 선인장 숲 사이에서 자라는 생명체나 선인장을 돌 같은 걸로 쳐서 쓰러트리고 그 안의 수액을 빨아먹거나 선인장과 풀을 뜯어먹는 감치들을 노려서 잡아먹는다.
"우호! 우호! 우호!"
"타데모이라!"
그것들이 자신을 알아보았다. 일부러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게 긴 시간을 걸쳐서 돌아갔는데 아직도 이들은 자신을 잊지 않았다.
세대도 한 번 바뀐 것 같은데 선조에게 전해다 들었을까? 그 정도 언어능력은 있는 듯하니.
타데모이라는 너무나도 이들 곁에서 있기가 싫어서 그대로 떠났다. 선인장 숲. 이제는 크림과 시럽도 흘러서 식물들이 항상 번성하는 이 지역에 타데모이라가 지나가는 것만으로 벌레와 다른 풀들, 꽃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그리고 타데모이라는 계속 내려가 드디어 그 정체불명의 달콤한 냄새가 느껴지는 지역으로 왔다.
넥타르 샘, 아니 넥타르 호수.
이 디저트 사막의 근원, 모든 악종들의 생명을 책임지는 생명의 원천.
얼핏 보기에도 달콤한 지옥이었다.
젤리들은 본래 투명하지만 태양열을 견디기 위해서 온갖 빛을 반사하게끔 유리질 몸체에 색을 입혔는데 그 때문에 형형색색 프리즘처럼 빛났고, 바닥은 색유리 파편 같은 젤리들의 껍질로 가득차 있었다.
그곳에는 젤리들과 구미들을 먹는 감치, 최강의 젤리인 양갱. 육식, 암식성 푸딩, 넥타르와 바위를 섭취하는 젤리들만 살고 있다.
식물이 없다. 식물도 넥타르는 빨 수 있지만 식물들이 살 수 있을 정도로 형편 좋은 곳이 아니다.
타데모이라는 그런 넥타르 샘 유역으로 걸어들어갔다.
제 아무리 젤리들이 강해도, 비스야킷과 감치 등 무식한 생명체들이 살아서 유리질 파편으로 집짓고 요새화를 하고 있어도 8레벨 창조물인 타데모이라를 막는 건 불가능했다.
타데모이라도 오기가 생겨서 걷는 곳마다 풀과 벌레들을 계속 만들며 더더욱 깊은 곳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보았다.
더없이 넓은 넥타르 호수. 그곳의 바닥부터 표면까지 득실거리는 젤리들과 그것을 먹어치우는 수많은 감치들, 그런 감치들을 먹어치우는 감치와, 자기 세계를 침범한 최악의 악종 비스야킷 등등.
안에 섬까지 네 개가 있고, 그 섬에 "대자연"지형까지 더해져 더없이 복잡한 환경을 띄고 있는 그 넥타르 샘까지 왔다.
타데모이라는 생각했다.
'여기서 빠져서 자살해 버릴까?'
그게 좋은 죽음일까? 모르겠다. 이 넥타르 샘에 빠져 죽으면 이 세계의 신에게 아무 쓸모가 없을지도.
첨벙!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바닥에서 거대한 촉수와 함께 괴성이 들렸다.
"이야이야아아아아아! 너 누구야아아아아아아아!"
타데모이라는 우울해졌다. 이 샘에도 괴물이 있나.
자기도 따지자면 비슷한 전설급 창조물이지만, 솔직히 저건 좀 너무하다. 호수의 요정을 어떻게 저런 형상으로 만드는지.
그는 한숨을 쉬었다.
"타데모이라. 저번에 패배한 신의 창조물이에요. 당신은?"
"압호주스!!! 그러면 여기는 왜 왔지이이이이이?"
"글쎄요. 내가 있을 곳을 찾아서 왔어요. 아무래도 이 세계에는 없는 것 같지만. 당신에게는 이 세계의 신이 자리를 마련해준 것 같지만요."
압호주스는 지능이 대단히 낮다. 어쩌면 당괴들보다도 낮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압호주스는 적어도 대화 비슷한 것을 할 지성이 있었다.
"밤까지 기다려줄래애애애애애?"
"?"
할 것도 없으니 기다려봤다. 넥타르 샘의 치열한 환경을 그저 지켜보면서, 어째서인지 자신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한 당괴들과, 주위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풀들을 방석 삼고 나비 같은 벌레들을 배경 삼아.
그리고 밤은 순식간에 되었다. 실제로 사막에서 해가 빠르게 지는 모양이었다.
해가 진 순간, 넥타르 샘에서 빛무리가 모였다.
"아?"
그리고 질척한 인상이었던 넥타르 샘 안쪽에서 마치 밤하늘의 별자리가 수놓아진 것처럼 어마어마한 빛들이 모여 춤추었다.
항상 발광하던 넥타르 샘의 토핑들, 그와 공생하던 젤리류들이 이제 해가 져서 일조량이 없을 때만 빛을 내게끔 진화한 것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넥타르 샘은 하늘 위쪽으로는 구름 한 점 없는데도 바닥에 우주가 맺힌 듯 반짝이는 것이 실로 장관이었다.
"어때애애애애애?"
"아름답네요. 이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이야이야! 디저트 사막은 충분히 멋진 곳이지이이이이! 너 덕분에 더 멋진 곳이 됐고!"
"나 때문에요?"
압호주스는 대답하는 대신 촉수를 들어서 주변을 가리켰다.
수많은 당괴들이 넥타르 샘의 빛을 보고 감동을 먹은 듯 눈을 크게 빛내고, 유리로 가득한 날카로운 발판 대신 풀들의 융단을 밟으며 춤추고 노래했다.
수많은 나비들과 풀들 역시 그러했다. 지능이 낮았어도, 문명 따위 없어도 이들은 충분히 감동받고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아...."
타데모이라는 자신이 온 길을 다급히 돌아갔다.
자신이 걸은 자리마다 자라난 풀들이, 벌레들이 이 세계의 악독한 생명에 지지 않고 강인하게 살아남아 그대로 넓게 퍼져, 일부는 잠식하기도 하고 일부는 기존 환경에 지기도 하며 악착같이 살아갔다.
당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지성을 일부 잃어버렸다. 하지만 대신 삶을 얻었다.
단순히 살아가기만 하는 가축 같은 삶이라고? 아니다. 그들에게는 자유가 있다.
그들은 지성을 잃어버린 지금도 웃고, 떠들며, 서로에게 장난치고, 자신을 보고 손을 흔들며 과거의 자신들을 기억한다.
타데모이라는 계속 거꾸로 달려갔다. 요거-토소스의 영역을 지나 산으로. 이제는 식물과 젤리 범벅이 되어 문명의 흔적조차 남지 않은 땅을 거쳐, 본래 자신의 땅이었던 공중정원으로 돌아갔다.
그곳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던 걸까. 공중정원은 "대자연"에 잠식당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살아남았다. 수많은 당괴들이, 감치들이, 새와 박쥐들, 그리고 이제는 형태가 변했을지언정 꽃과 채소들, 과일들은 꿋꿋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지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포기한 것도 아니다.
지성과 문명 대신, 얻었다.... 치열한 삶을, 그리고 힘을, 열정을, 감정을.
공중정원으로 돌아가자 자신이 아는 당괴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데모이라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타데모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들을 지켜준 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타데모이라는 하늘에 대고 외쳤다.
"신이시여! 이제 알았습니다! 진정 내가 무엇을 바라야 하는지, 무엇을 믿고 행해야 하는지!"
신의 분신이 앞에 나타났다. 타데모이라는 분신을 향해 외쳤다.
"내게 기회를 주십시오! 나를 이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끔! 내가 당신들의 생태계의 일원이 되게끔 해주시옵소서!"
신이 눈을 번쩍 떴다.
[이미 그렇게 되었다.]
"아아아아!"
꿈틀─!
[일어나라, 다른 이에게 창조된 자여, 꽃과 열매, 줄기와 뿌리 그리고 이파리의 어머니여. 내 부름에 응하라.]
꿈틀─! 꿈틀─! 꿈틀─!
타데모이라는 희열을 느꼈다. 자신의 신체가 신성으로 거듭나는 느낌. 새로운 형태로 이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생태계의 일원이 되는 감각을 느꼈다.
이것은 타락도, 광기도 아니다. 타데모이라는 완벽히 이성적으로 이들의 일원이 되어 번성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문명에 봉사하든 생태계에 봉사하든, 어차피 패자로서 승자를 돕는다면 그 형태가 무슨 상관인가? 옛 자기 신의 종족이 형태가 어떻게 되었건 자신을 기억하는데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대는 생명의 화신이다! 바닥을 기고 위로 뻗는 모든 것을 다루는 자! 나의 핵심적인 계획을 만드는 중추! 내 그대에게 옛 주인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주겠다!]
타데모이라는 신의 행사에 무한한 감동만을 느끼고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오너라! 디저트 군단의 제3군단장! 땅에서 나고 기는 모든 것들의 주인! 무한한 혼돈을 불러오는 지배자! 니알타르텝(Nyaltartep)이여! 그대에게 주어진 명이 있나니 지금 거듭나라!]
60화. 니알타르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