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세계 충돌 -다섯 번째- 4
난 판월을 5만 시간 정도 했다. 당연하지만 그 모든 시간을 생태계 만드는 데 투자한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거꾸로라고 해도 되겠다. 나는 4만 시간 정도는 문명을 건설하고 이상적인 세계를 꾸미는데 투자했다.
왜 그랬냐고 물으면, NPC라고 하는 존재의 문명과 그에서 나타나는 상호작용이 곧 독특한 생물의 생태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명 역시 인간이라는 생명체에게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생태적 활동인 것처럼, 내가 생각하기엔 인간인 NPC, 혹은 인간 아닌 NPC들과 그 종족을 키우는 거나 나만의 바이오스피어나 수족관을 꾸미는 것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한 게임을 하는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투자된 4만 시간. 하루에 10시간씩 해도 일수만으로 11년.
그건 전적으로 이 게임의 깊이가 워낙 대단했고, 특히 본편의 가격도 싼 편인데 확장팩, DLC 볼륨이 어마어마하게 큰데다가 세일도 자주하고, 모드 지원도 빵빵하고, 뭐 그래서 도저히 질리지가 않았던 덕이었다.
그렇지만 그 4만 시간쯤이었을까. 다양한 생태계와 특이한 생물 구현을 테마로 한 신규 확장팩을 설치한 나는 우연히 하나를 깨달았다.
"이 확장판부터는 일반 생물과 사람을 구분하지 않네?"
그러니까 주력으로 키울 수밖에 없는 '사람'은 그냥 지능이 높고 도구를 다룰 수 있어 문명을 건설할 수 있는 지성 높은 개체일 뿐이고.
가축이나 괴물, 혹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생물'은 그냥 지능이 낮거나 지능이 높아도 도구를 다룰 수 없어서 문명을 건설하지 못하는 개체인 것이었다.
그때 내게 처음으로 든 생각이 있었다.
어차피 주력 종족이라는 것도 게임을 하다보면 이민족이 대세가 되고 주력 종족이 바뀌면서도 내가 세계의 주인이고 신일 수 있는데.
아예 세계에서 사람과 문명을 배제하고 플레이할 수는 없는 건가?
말이 확장판이지 그냥 게임이 복잡해지기만 하고 도무지 써먹을 길이 없다고 모두가 악평을 쏟아낸 신규 확장팩. 반지성주의 빌드에 대한 착안은 그 쓰레기 확장팩에서 시작했다.
물론 지금 내가 보는 신의 시점이 아니라 그저 인류의 컴퓨터로 구현할 수 있는 정도라서 시스템 구현에 한계가 있었지만, 끝없이 모드를 깔고, 내 스스로 모드를 개발하면서 기존에 있던 시스템에서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이 '비문명 빌드'가 가능한지 수만 번은 테스트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있었다.
가능하다. 지성체 없이 게임의 최고 난이도를 클리어 할 수 있고, 멀티 플레이에서도 유의미한 승률을 거둘 수 있다.
둘째로, 그건 내가 수정하고 튜닝한 모드를 추가하면 훨씬 쉬워진다.
셋째로, 지금 내가 참가한 게임의 환경은, 모드로 떡칠한 그때의 환경보다도 훨씬 더 이 빌드를 쓰기에 유리한 수준이었다.
현실에 가능한 가까울수록 쉬우니까.
∞
지금 상대 플레이어는 도대체 문명도 없는 녀석이 어떻게 괴수 군단을 통로 너머로 보낼 수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문명이 없다는 얘기는 사회가 없다는 얘기고, 사회가 없다는 얘기는 〈정치〉가 0이란 얘기다. 정치가 0이라는 얘기는 다시 말해 내 창조물들이 내 말을 전혀 안 들을 정도로 통제가 안 된다는 거고.
그런데, 참 어처구니없게도, 전제가 틀렸다.
「정치 LV.0: 2」
내 〈정치〉는 2다.
다시 말해 나는 아주 조금이지만 내 창조물들을 통제할 수 있다.
즉 내 생태계에도 사회라는 게 있다.
하지만 문명은 없다.
"이거 되게 재밌네요. 문명은 없어도 사회는 존재하는군요."
그렇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곤 하지만, 이건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 중 하나'라는 말이다.
사회와 규율, 제도는 인간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저기 날아가는 작은 것들을 보라.
[떼감치]. 내 생태계에서 대충 '무리짓는 새' 정도의 지위를 가진 작은 감치다.
이놈들의 먹이는 그냥 바닥에 스며든 넥타르, 혹은 죽은 젤리나 푸딩 시체 뜯어먹기, 그게 아니면 담수 근처에서 풀이나 강아지풀 수준의 곡식이나 작은 열매를 먹는 거다.
생존 기제? 그냥 빨리 날고, 많이 몰려다닌다. 그걸로 자신을 노리는 포식자들을 피한다.
말하자면 대단히 먹이 피라미드에서 가장 서열 낮은 소비자고, 실제로 많은 맹금류 감치들이 이놈들을 자주 먹으러 이놈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날아서 그날 식사를 해결한다.
근데, 이놈들은 정말 재밌는 게 있다.
보통 무리 짓는 새들은 그냥 본능적으로 무리 짓는 건데, 이놈들은 '의식적'으로 몰려다닌다.
내가 이놈들을 발견했을 시점부터 그랬다. 지구에도 '까마귀'나 '앵무새'는 지능이 엄청나게 높았지. 어느 정도냐면 도구를 쓰고 단순한 퍼즐을 풀고 손익을 계산해서 특정 행동을 유도할 수 있을 정도로.
아무래도 이놈들은 자신들의 생존 기제로 작은 몸집과 무리생활과 더불어서 지능을 택한 것 같았다. 이놈들은 적어도 까마귀 수준으로 똑똑하다.
다시 말해서, 아주 단순한 계시 정도는 이해한다. 나는 이 무리 지은 떼감치 무리의 우두머리에게 단 하나의 계시만 내렸을 뿐이다.
'통로 건너편은 포식자가 없다. 건너가라.'
그러면 떼감치를 쫓아서 이들을 사냥하는 감치들이 날아간다. 그리고 내 세계의 젤리와 푸딩들은 떼감치가 음식이 많은 장소로 움직인다는 걸 깨닫고, 그들의 움직임에 반응하게끔 진화했다.
그러면 또 푸딩과 젤리들을 사냥하는 감치들이 따라간다. 강인해서 양 정도는 잡아먹고, 사람 정도도 무리 지으면 죽여버릴 정도로 강인한 포식자들이 말이다.
물론 제대로 이걸 하려면 떼감치의 우두머리에게 약간의 혼란을 줘야 한다. 계시의 방향을 조금 흐트려서 이놈이 세계를 빙빙 돌면서 포식자들의 주의를 끌고 그대로 달려 나가게 해야 해.
그런데, 그렇게 하면 다수의 디저트 군단을 조그마한 계시 하나로 상대 세계로 유입시킬 수 있다.
"그것만으로 바뀌나요?"
"바뀌지. 왜냐면 떼감치도 디저트 군단이거든."
뭔 얘기냐면, 지옥 같은 디저트 사막에서 독 수액과 움직이는 가시, 그리고 날아다니는 포식자와 돌멩이처럼 단단한 이삭을 처먹고 살았던 우리의 떼감치들에겐 저들의 세계가 가히 낙원이란 거다.
일단 세계 넓이가 두 배가 됐으니 포식자를 만날 확률은 절반.
지천에는 곡식이 깔렸고.
이곳 토종 새와 가축들은 감치들의 비늘 달린 피막 날개에 비하면 한참 연약한 신체와, 터무니없이 모자란 근성, 그리고 미흡한 번식력을 지니고 있었다.
차원통로 1년 차. 하필 추수철이었던 상대는 떼감치들로 인해 농사를 완전히 망쳐버렸다.
그리고 떼감치보다도 이곳의 사람과 가축, 그리고 토종 야생동물이 더 사냥하기 쉽다는 걸 깨달은 포식성 감치들 역시 마찬가지로 적들의 세계를 무자비하게 유린했고, 젤리와 푸딩들은 조금 당황하다가, 그냥 부드럽고 맛 좋은 풀과 흙을 천천히 뜯어먹고 그들의 스텝 평원을 천천히 디저트 사막으로 바꿔나갔다.
저 새들은 해로운 새들이다. 뭐 이렇게 말하고 싶겠지만, 어떻게 방제할래?
주술사들 보내서 손바닥만한 떼감치들 하나하나 잡을 거야? 나 요거-토소스 시켜서 비스야킷도 차원통로 너머로 몇 마리씩 던져버릴 건데?
감치 군단의 약탈 세례다. 허수아비 정도로는 못 막을 거다.
이 새끼들은 세상에서 가장 좆같은 곳에서만 살던 탓에 그 무엇도 두려워 하지 않는 배짱, 오기, 근성, 악바리 정신으로 가득 차 있거든.
네놈들이 요거-토소스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나 보자.
∞
"버텨! 버텨라! 기껏해야 고작 새들에 불과하다! 굶어 죽기 싫다면 마지막까지 쥐어짜서 방제해!"
이미 엘구아노와 그의 동료 신들은 가진 신성력을 모조리 주술사를 양성하는 데 쓰고 있었다.
주술은 제대로 공부하고 익혀야 하는 마법 계열 신비하곤 달리 신이 신성력으로 재능을 부여해서 신비를 각성하게 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러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재능을 부여하는 방식은 너무 비효율적이다.
애초에 〈매력〉자체가 워낙 재능의 영향을 많이 받는 능력치다. 아무에게나 줄 능력이 아니란 거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그들의 세계는 주술 외에는 그럴듯한 신비도 없었으니까. 거기에 근간이 사막-스텝 지대라서 활을 만들 만한 나무도 없었고, 결국 주술 외에는 원거리 공격도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엘구아노가 무능하다고 하면 너무 억울하다. 물론 시카도즈라는 영웅 하나에 올인한 전략인 건 맞았다. 하지만 시카도즈라는 영웅 혼자서 100가지 상황 중 99가지 상황은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런데 딱 하나를 대처 못했다고 무능하다고 욕을 먹어야 하겠는가? 그것도 100가지 중 하나도 아니고 3천 3백만 명 중 딱 하나 있는 경우 때문에?
그렇지만 운석이라는 건 원래 그런 거다. 예상치 못한 때 찾아오면 맞을 수밖에 없다.
초조하다. 미칠듯이 초조하다. 지금도 매일매일 하늘의 균열은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적들의 괴생명체들도 무한하진 않겠지만, 이대로 2년만 더 있으면 저 하늘에서 자기네들 세계를 굽어살피고 있는 악마가 내려와서 모든 걸 쓸어 버릴 것이다. 저게 내려오면 정말 일말의 승산도 없다.
[신이시여! 시카도즈 님을 부르면 안 되겠습니까!]
"안 돼! 시카도즈를 지금 방어로 돌리면 절대 이기지 못한다! 적 세계에 대한 테러는 거듭해야 해! 악마가 이곳에 시선이 팔린 동안!"
[하지만, 하지만! 지금 다른 악마가 나타났단 말입니다!]
그게 뭔 소린가. 하고 봤더니, 비정상적으로 화려한 새 하나가 움집을 쓰러트리고 움집을 지어놓은 지푸라기를 혼자 다 뜯어먹고 있었다.
때려도 때려도, 심지어 망치나 창으로 공격해도 두른 껍질에 흠집조차 못 내는 거대한 육체에 속수무책이었다.
심지어 입에서 펑펑 터지는 주술까지 쏘아내며 반격하기까지 했다.
"뭐야."
자세히 살펴보니, 무려 〈영웅적 개체〉였다. 〈대왕붉은벼슬〉 이라고 붙인 이명도 있었다.
"어, 어떻게 영웅적 개체가 나와!!! 문명도 없는 세계에서 뭔 문화가 있어서 영웅적 개체가 나오냐고!!!"
∞
「문화 LV.0: 1」
놀랍게도, 내 문화는 0이 아니었다. 정치보다도 절반이나 낮긴 하지만 고작 1 낮을 뿐이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감치들은 새의 생태지위를 거의 차지한 생물이다. 그리고 새는 엄청나게 문화적인 생물이다.
화려한 깃털.
도드라진 벼슬.
비정상적으로 긴 꼬리깃이나 색 패턴.
전부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서 〈매력〉적으로 '치장'하고 과시한 것들.
내 〈정치〉도 〈문화〉도 수치만 보면 낮아 보인다. 그런데, 그건 전적으로 이 게임 능력치 계산법 때문이다. 이 게임에서 능력치는 '질' '양' '평균'을 다 보거든.
그런데 내 생물체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사회적인 생명체도 많지 않고, 딱히 자기를 치장할 정도로 여유 넘치는 생명체도 많지 않으니까 '평균'이 엄청나게 낮게 잡혀서 수치 자체가 낮게 나오는 거지, 실제로 특정 종, 특정 개체에 한정하면 꽤 안정된 사회와 아주 화려한 존재감을 지닌 것들이 있다.
그리고 게임의 시스템은 이것들을 아주 평등하게 〈정치〉와 〈문화〉가 있는 걸로 판정한다.
"아항. 그러면 반지성주의 빌드라는 건, 다른 능력치를 다 포기하고 〈생명〉만 올리는 빌드가 아닌 거군요?"
그렇다. 어떻게 능력치 8개 있는 게임에서 7개 버리고 이기겠나? 거꾸로다.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치가 뭐냐? 모두가 알다시피 〈생명〉.
그러니까 그냥 〈생명〉하나를 엄청나게 높인 다음, 나머지 능력치는 그냥 생물의 '양'으로 밀어붙이고 진화로 특화된 개체들을 만들어 능력치를 올린 다음, 능력치를 올려서 레벨업하고, 특성을 물량빨만으로 찍고, 내 생명체들을 조금씩 정예화시키는 것.
그럼 문명 하나 없이도 능력치들을 대체로 다 보완하며 상대 문명이 아니라 생태계 자체를 공격하고 점령하는 수가 있다. 그 어떤 문명도 자연을 완전히 버리고 살 수는 없지 않나.
"정말 설명만 들어보면 엄청나게 대단하네요."
물론 아무리 그래도 극후반 가면 문명이 없기에 〈기술〉 점수를 쌓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어서 급격히 약체화되긴 하는데.
"아. 그런가요. 하긴. 〈기술〉 자체가 문명이니까."
그때도 나름대로 방법도 있고, 가장 중요한 스펙과 체급 자체는 비슷하게 가져갈 수 있다.
이게 바로 반지성주의 빌드. 문명 하나 없이 세상을 끝내버리는 전략이자, 모든 문명을 파괴하는 전략이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린 끝에 그게 시작됐다.
차원균열이 열렸다. 내 생태계의 최종병기, 궁극의 포식자 요거-토소스가 상대 세계로 드디어 유입되었다.
그리고 승리를 증명하듯, 드디어 눈앞에 미친듯이 항복 요청 메시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
"제발. 제발 항복 좀 받아줘······! 제발! 곧 있으면 하차 구간이잖아! 시카도즈든 뭐든 다 바칠 테니까 제발······!"
「상대 플레이어에게 차단되었습니다.」
엘구아노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31화. 영계
요거-토소스가 진입한 순간 모든 게 끝났다.
애초에 상대 세계는 〈문화〉기반 세계. 지독하게 시달린 채 몇 년 동안이나 버틴 끝에 극도로 피폐해져 이제는 대항할 기력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전 플레이어와는 달리 결사항전도 못한다. 그저 절망하며 엉엉 울거나 스스로 목에 칼이나 화살촉을 찌르고 자살할 뿐이다.
일단 사람들의 안색과 건강 상태부터 좋지 않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시달렸고, 비교적 화려했던 건물도, 바위나 나무 따위에 조각하고 그린 문화도, 원래부터 있었는지 새로 지었는지 꽤 많은 자원을 세워서 올린 고인돌, 뼈와 돌멩이 등을 엮어서 만든 듯한 장신구들······.
그런 문명의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사정없이 파괴된다.
요거-토소스가 소환하는 폭풍에 아무도 거스르지 못했다. 쌓아올린 거석도, 열심히 만든 예술품들도, 그들이 입으로 전하고 글로 쓰던 기록물들도, 전부 압도적인 힘에 그저 가루가 되어버린다.
자연적인 광경이라곤 못하겠다. 비정상적인 생물, 비정상적인 수단,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운' 광경.
나는 지금 인간도 아닌 이구아나 종족, 그리고 도대체 뭔지 모를 종족이 저 부자연스러운 폭풍에 휘말려 쓰러져 죽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할 뿐인가.
그것도 아니면,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불쌍?
게임의 NPC와 지금 저기 문명을 건설한 '사람'들에게 무슨 차이가 있을까.
저들이 더 존귀하다고 말하면, 난 그런 존귀한 이들을 죽이는 개새끼가 된다.
저들이나 NPC나 다름없다고 말하면 난 게임의 데이터와 사람을 똑같이 보는 개새끼가 된다.
어느 쪽이든 마왕이나 다름없는 태도 아닌가.
"갑자기 감상적이 되셨네요."
감상적이 됐다기보단, 할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나머지 의식들은 1만 점 미만으로 떨어진 내 생태계 복원하고 있고, 난 상대 생태계 응시하면서 요거-토소스의 전투와 상대 생태계 확인하는 역할이고. 이 분신이 느끼는 시간 흐름은 실시간으로 체감되게 맞춰놓아서 여유도 많고.
"게임에 집중하지 않고 노는 분신. 그렇게 생각하면 될까요?"
인간성을 담당하는 분신이란 거지. 지우지 못한 거. 지금 일곱 개나 된 분신 중 하나다. 언젠가는 수십 개의 분신 중 하나가 될 것이고, 머지않아서 완전히 사라질 거다.
"글쎄요."
"주최측에게 중요한 문제인가?"
"흠? 그렇게 물으시면, 주최측은 전략으로서는 흥미가 있죠."
"전략?"
"네. 상대를 모조리 소멸시키는 전략. 그런 마왕과도 같은 전략의 효용성, 유리함······. 저희가 이 게임을 그냥 아무나 신으로 만들어 주고 싶어서 한 건 아니라는 것쯤은 짐작하고 계시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어떤 전략이 우승할지 궁금할 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너는 내 행동을 딱히 만류하거나 비난하진 않는군. 묘하게 비아냥거리긴 하지만, 그것도 조롱투는 아니고."
그러자 천사가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사무적으로 대할까요?"
글쎄. 그건 좀. 그래도 차라리 농담도 하고 맞장구도 쳐주고, 호들갑도 떨고 하는 게 나에겐 더 좋군.
"그런 거죠."
······이 자식 진짜 멍청하거나 몰라서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니라 내 성향을 분석해서 딱 맞는 성격 같은 걸 연기하는 건가? 대단히 호감상인 외모도 그러고 보니까 좀 많이 신경 쓰이는데.
천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여댔다.
"주최측이 비인 님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이 무섭나요? 사실 그 지점은 진작 넘었죠. 주최측이 약속을 지킬 것인지, 주최측에게 도대체 얼마나 많은 힘이 있는 것인지. 그걸 더 궁금해 하셔야 하는 게 아닐까요?"
"하긴."
"절대적으로 담보할 수 있는 건······. 주최측은 규칙을 어기지 않습니다. 저번 비인 님에게 한 것처럼 오히려 규칙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사죄하며 보상해 준다면 모를까. 이 게임은 주최측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긴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거짓말씩이나 할 정도로 부담을 안고 주최하는 건 아닙니다."
"한마디로 누구 하나가 우승해서 신적인 힘을 얻게 되어도, 하나도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예. 그렇습니다. 어차피 이 게임은 30판 하면 끝입니다. 얻을 수 있는 포인트는 있죠. 주최 측은 저희가 시뮬레이션해서 가능한 최고의 세계를 이미 만들어 봤고, 설령 플레이어가 그 10억 배 이상의 점수를 낸들 포인트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급할 수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그렇게 장담한다면 믿을 수밖에, 애초에 믿지 않는 지점은 넘었다. 믿지 않았으면 참가도 안 했을 터.
주최측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고, 그들에게는 진짜로 이 게임에서 주는 보상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게 있다.
나는 지금 요거-토소스의 저 학살과 파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겨야 하니까. 그거면 됐다.
내 생태계를 혼자서 반파시킨 전설적 표상. 이구아나 인간 시카도즈가 허망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 본다.
그의 무한한 것 같던 〈매력〉도 다 고갈됐다. 화려한 복장도 그를 존엄하게 여길 모든 자들도 사라진 채 허망하고 추레한 모습으로 그저 올려다 볼 뿐인 존재는, 마력이 다 고갈되어서 이제 더 이상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요거-토소스는 그런 그를 향해, 자기가 가진 가장 강력한 폭풍을 일으켜서 그대로 갈아 버리는 걸로 응수한다.
「[요거-토소스]가 영웅의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요거-토소스]가 전투 마법사의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가장 먼저 뜬 메시지가 일단 이것.
「플레이어 '엘구아노'및 3명의 플레이어와의 세계 충돌에서 승리하셨습니다.」
「플레이어의 세계가 넓어집니다.」
그리고 파괴가 끝났다. 상대 세계를 완전히 파괴해 더 이상 문명이 재건할 수 없게 되었고, 디저트 군단이 원래 토종 생명체들을 거의 몰아낸 상태.
내 인격 분신 하나가 다가와서 토종 생물들을 새로 추가된 생태계와 어울리게끔 진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다른 분신은 새로 얻은 땅의 신의 파편들을 이리저리 고쳐서 내 세계에 합치는 작업을 했다.
이것 참 신기하군. 내가 하고 있다는 건 알겠고, 실제로 내가 하고 있는 게 맞는데,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저'나'들이 빠르게 세상을 고치는 걸 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인간성 담당 및 커뮤니티, 및 외교활동 분신으로서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요거-토소스. 아주 잘했다."
[황공합니다. 나의 창조주여.]
"승급 시험에 통과했구나. 하지만 승급은 미루겠다. 다음 재난이 어떤 것이 닥칠지 모르니 말이다."
[창조주의 뜻대로,]
승급 시험에 통과한 이후 바로 승급시킬 수도 있지만 그럼 유지비가 엄청나게 들 거다. 경험치는 축적될 테니 일단은 대비.
승급한다고 뭐 이놈이 동면을 취해야 한다든가, 아니면 의식 같은 걸 치러야 한다면 모를까. 그냥 내가 선택하기만 하면 승급하는 구조니까 그건 상관없었다.
요거-토소스는 내 분신이 시키는 대로 세계에 넥타르를 뿌릴 겸, 자기도 보급할 겸 넥타르 샘으로 돌아갔다.
저렇게 움직이는 것도 조금 복잡하고 번거롭군. 세계가 넓어지면서 더욱 그래.
요거-토소스가 시속 60~70km정도로 날 수 있으니까 진짜로 느린 건 아닌데, 그렇다고 세계 어디든지 이동할 정도로 빠른 것도 아니다보니.
그렇지만 넥타르 샘은 그 지형 특성상 더 넓어지기도 힘들고, 흐르기도 힘들다. 그 고민은 넘어가고 나는 일종의 중추 인격으로서 내가 할 일들을 점검했다.
첫째. 역시 피해를 적지 않게 입은 넥타르 오아시스 및 구미 산호초 관리. 압호주스가 일을 잘해주고 있지만, 솔직히 넥타르 오아시스는 지금보다 더 넓을 필요가 있다.
둘째. 담수호 및 강 생태계 관리. 여기는 진짜 심각한데, 내가 보니까 시카도즈의 광선 맞고 전체의 90%는 사망, 아니 멸종한 것 같다. 시카도즈는 넥타르 오아시스로 들어갔다간 비스야킷 떼를 상대하느라 맞아 죽을 수도 있으니 진짜 집요하게도 담수호를 때려대서 지금 절멸에 가까운 상태다.
셋째. 기존 선인장 숲 및 계곡 관리. 여기도 참담하지. 사막 숲이 이렇게 망가질 줄은······. 그나마 복원은 순조롭지만.
넷째. 새로 얻은 땅 지형 및 생태계 편집. 새로운 땅에도 "산"이 있어서 이걸 합칠지, 아니면 별도의 산으로 둘지 좀 고민하고, 역시 망가진 생태계를 복원해야 한다.
다섯째. "영계" 및 지금 발견한 땅 관리, 보수, 그리고 공부 및 세사이사에게 관련 조언 듣기.
여섯째. 그에 응당한 보답으로 분명 개판이 났을 세사이사의 세계 컨설팅.
일곱째. 총체적인 재난 대비를 위한 약점 개선
"재난 대비는 아주 중요하죠. 분신 하나를 쓸 만한 가치가 있어요."
게임에서 다섯 번째 충돌 이후, 보호 기간 다음에 '여섯 번째 충돌'이 아니다. '재난 구간'에 돌입하게 된다. 말하자면 5의 배수마다 있는 이벤트다.
그나마 재난이 오는 시기는 예측이 되지만, 무슨 재난이 올지는 예상할 수 없다고 한다.
재난을 이겨내지 못했을 경우는 무조건 패널티 특성. '영원한 기근' '영원한 밤' '영원한 광기' 같은 끔찍한 특성을 하나 받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 내 생태계만으로 그걸 이겨내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재난 구간 다음 있을 '여섯 번째 충돌'도 이겨내야 하고.
이 일곱 가지 일을 각기 다른 분신들에게 하나씩 시키면 된다. 그러니까 그건 걱정이 없는데, 하나 문제가 되는 게 있군.
세사이사. 이 자식 멀쩡한가.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메시지가 왔다.
[세사이사: 경탄하라! 드디어 싸움이 끝나셨군요. 비인 님. 혹시 시간 되시면 제 세계에 방문해서 저번에 문의했던 고기들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당연히 저도 비인 님이 엉망진창으로 망가트렸을 영류계의 세밀한 흐름을 조정해드리러 가겠습니다.]
재수없게 말하지만, 다행히 살아 있군.
[비인: 그렇게 말하니 살짝쿵 부끄럽네요〉-〈 그래도 그렇게 망가트리진 않았고 영계도 하나 구해서 꽂았으니 조금만 봐주세요 ㅠ.ㅠ]
[세사이사: 잠깐, 뭘 꽂아? 야. 당장 문 열어!!! 너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뭐 저렇게 놀라지. 자기가 손댄 거 아니라고 저렇게 짜증내기는······.
아무튼, 나도 세사이사의 세계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놈의 코끼리들이 뭘 하고 있는지 잠시 봤······.
[비인: 이 병신새끼야!!! 다른 곳도 아니고 야자수 해변을 간척해서 참나무를 심고 있다니 진짜 미쳤냐!!!]
[세사이사: 그거 열매도 별로 안 열리더만! 오. 너무 참혹해. 영적 구조물들의 연계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끔찍한 형태야. 당장 이 흉물을 뜯어내야 한다!]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걸 참고 세사이사의 생태계를 어루만졌고, 그리고 세사이사 역시 나의 경탄스러운 생태계를 어떻게 조져놓으며 세상을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그래. 이겨야 하니까 참아야지. 자······. 어디부터 손대볼까.
32화. 영계 2
내가 세사이사의 세계로 건너가서 보고 놀란 것 세 가지가 있다.
정말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조져놓은 해변가 생태계.
아니 땅이 이 정도로 좋은데 이걸 굳이 간척해서 참나무 숲으로 만들려고 했단 말이지. 이거 원상복구부터 해야 한다.
일단 이건 놀랐지만 그래도 상상의 범위 내에 있었다.
그렇지만 나머지 두 개는 상상의 범위를 초월해서 놀란 것이었다.
[비인, 일단 한 번의 충돌을 또 넘어서 만나게 되어 반갑다. 누추한 우리 세계에 기꺼이 방문해 주다니 실로 영광이로군. 마침 내가 옆에 있으니 어떻게 고기들을 관리하는지 직접 보도록 하지.]
엄청나게 커다란, 영혼 코끼리 인간 같은 게 둥둥 떠 있었다. 나는 말하는 본새를 보고 본능적으로 알았다.
[비인: 확신하기 위해서 묻는데, 세사이사?]
[오. 당연히 언제나 경이로운 나지. 이제 메시지 전달이 아니라 영체로 만날 수 있으니 자네도 이제 좀 편하게 말해도 되네. 어쨌든 우리 둘은 필연적으로 계속 협력해야 할 운명인 것 같으니.]
이 자식은 뭐랄까. 넷상에선 싸가지가 없고 오히려 현실에서 만나면 예의가 발라지는 타입인가보군. 정확히는 좀 고상해진다고 할까.
나도 메시지 대신, 그냥 게임에서 썼던 아바타를 꺼낸 다음 육성으로 대답했다.
"뭐. 좋다. 세사이사. 편하게 대하지."
[호의에 감사한다! 그런데 자네도 비슷한 특성을 택한 모양이군? 저쪽 세계의 내 본체와 대화하는 자네가 있는 걸 보니.]
"너야말로. 택한 특성은 『화신』인가?"
말 그대로 '아바타'를 얻었군.
[통찰한 대로다. 신의 정신도 좋지만, 고기의 영육을 느껴봐야 진정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신화급 특성으로 세계와 능력치가 똑같은 플레이어의 분신을 세계 내에 만드는 특성이다.
냉정하게 봐서 비슷한 신화급 특성인 『신수』만큼 강력하진 않아서 하위호환 소리를 듣지만, 오히려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 되니까 게임 밖과 게임 내부, 양쪽에서 따로 의식을 가지고 컨트롤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얘는 이 특성이 더 잘 맞겠지. 나는 지성체가 하나도 없어서 생태계 관리를 순수하게 내 힘만으로 해야 하지만 세사이사는 부하 역할을 해줄 피조물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이놈이 기어코 신화급 특성을 얻어서 부하 신 없이 멀티태스킹이 가능하게 됐다는 것보다 나를 경악케 한 건 다른 부분이었다.
"그나저나, 지금 보니까 정말 대단하군."
[저번에도 봤잖나?]
"영류계 레이어를 킬 줄 몰랐어."
[개탄하라! 정말인가? 이 세사이사가 얼마나 경이로운 위업을 행했는지 전혀 몰랐단 말이야?]
세사이사의 세계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세계 전체에 내 세계에서 봤던 영적 구조물 같은 게 쭉 깔려 있었다.
그 규모는 나에게 영립학 지식이니 뭐니 넘겨주면서 영계를 건네준 엘카이더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엘카이더의 영적 구조물이 좀 더 '단단하다'라는 인상은 있지만, 세사이사의 구조물은 '흐르고' 있었다. 도대체 구조물이 흐른다는 게 뭔 말인지 나도 이해가 안 가는데,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 전체를 위에서부터 회전하고, 아래에서 한 번, 지하에서 한 번, 모든 신의 파편을 순환해서 가공할 정도의 마력과 신성을 모아 하나의 마법으로 빚어내고 있었다.
세사이사는 이 작업을 해야 해서 세계의 숲을 다 밀어버린 것이라고 지금 이해했다.
[그래도 이만한 작업을 할 수 있게 된 건 자네 덕이야. 흐름을 신의 파편과 직접적으로 연결해서 생명을 더욱 번창케 하고, 더 많은 도토리를 거둘 수 있게 됐으니, 다만 해변에서 도토리가 안 자라서 문제지.]
"해변에선 그냥 야자수 키우면 돼. 그게 참나무보다 낫다고."
[수확량에서 비교도 안 되던데?]
"아니 그···. 간척해서 참나무 심어봤자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테니 그냥 야쟈수 심으면 돼.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고, 일단 빨리 네 생태계부터 건드려주지."
내 세계의 나도 세사이사에게 아주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세사이사 역시 내가 혹시 없어진 다음에도 어떻게든 생태계를 가꿔야 한다는 생각인지 경청하며 내 작업에 하나하나 물어보면서 경청했다.
뭐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사이사의 세계를 상당히 개선해줬다.
세사이사의 세계도 저번에 봤을 때에 비하면 네 배 넓어졌고 당연히 네 배 넓은 땅을 다 참나무 심겠다고 토지의 질이나 기후 따위를 생각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심어서 오히려 생태계가 파괴될 지경이었다.
그걸 어찌어찌 복구하고 나니 기여도가 엄청나게 생겼다. 다만, 문제가 있다.
"비인 님이 세사이사 님에게 20,888포인트 주셔야 합니다."
내가 기여한 게 훨씬 적단 거지. 세사이사 자식이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지식 자체가 비밀스럽고 실전적인 것이라 기여도 측정이 이렇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2만 포인트는 솔직히 좀 아깝군. 내 생태계가 그야말로 다 조져진 상황에서 내 포인트가 기껏해야 5만을 좀 넘는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고.
"애초에 너는 쉬운 상대를 만났나 보군. 네 스스로 망친 것 외엔 거의 건드릴 것도 없는 걸 보면"
[형편없이 약한 상대였지. 고기들 몇 마리만 보내니 거류에 휩쓸린 것처럼 전부 녹아내리더군.]
세사이사의 코끼리 부대는 요거-토소스를 사냥할 정도로 막강하니까 허언이 아니겠지.
차원문 단계 때 한두 마리 건너가면 그걸로 재앙 강림이다. 특히 지금 영웅 개체도 몇 명 뽑힌 상태에선 감당할 자가 거의 없을 거다.
[하지만 다음에 만날 때는 더 강한 적을 만날지도 모르지. 포인트가 아까우면 내게 지식을 넘겨줘도 돼.]
그렇다고 내가 게임, 자체적으로 찾아본 논문, 그 외에 대학에서 배운 생태학 지식을 죄다 가져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포인트가 아까운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나는 지식을 넘겨달라기에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지식을 서책의 형태로 바꿔서 건넸다.
"이건 어떠냐. 어쩌다가 얻은 영립학 지식인데."
[영립학? 내 전문 분야는 아니지만 귀중한 학문이지. 어디 볼까.]
진짜로 내가 잘 모르는, 엘카이더의 영립학 지식이다. 세사이사는 영립학이니 뭐니 하는 분야의 지식이 담긴 서적을 좀 뒤적거리더니, 깜짝 놀라서는 바로 답했다.
[이거 당장 사지.]
천사가 바로 답했다.
"그러면 세사이사 님이 비인 님에게 오히려 포인트를 좀 드려야 하는데."
[찬탄하라! 그러면 그 모자란 부분은 영립학과 영류계에 대한 설명으로 갈음하지. 어떤가?]
"지금 무식해서 마법과 신비의 차이도 모르는 수준이니 안 들을 수는 없겠지. 우승을 목표로 하는 이상 말이다."
그래서, 자칭 신비일반론 최고 전문가이신 세사이사 후작(본인이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다)의 바보라도 알 수 있는 마법 교육이 시작됐다.
일단, 학자 치고도 가르치는 걸 잘하는 타입인지 설명은 대단히 쉬웠다. 좀 뭐랄까. 레이시스트 같이 교육하긴 했지만.
[그대 같은 고기들이 발붙이고 사는 곳은 물질계. 하지만 대부분의 고기들이 느끼지 못하는 영역에 영류계라고 하는 세상이 존재하네.]
"내가 엘카이더에게 얻은 영계하곤 다른 건가?"
[다르지. 물질계는 말 그대로 물질이 응집된 모든 영역을 말하는 것이고, 자네의 세계는 말 그대로 자네의 세계만을 의미하잖나? 영류계 역시 영류가 흐르는 모든 영역을 말하는 것이고, 영계는 그냥 자네의 영계일 뿐이지.]
"흐음."
그렇군. 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저 친구가 한국어로 말하고 있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판월로 할 때도 영계와 영류계 비슷한 게 있었는데, 그 메커니즘 추가한 확장팩이 너무 완성도가 떨어졌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이세계의 현실을 어찌어찌 구현하려다가 실패하거나, 혹은 너무 성공해서 물질계의 인류가 이해할 수도 없게 된 걸지도 모르겠군.
[그러면 그대가 아무것도 모르니 영류라는 것부터 설명하도록 하지. 이건 뭐랄까. 자네가 '물질'이라는 게 뭔지 설명하는 것과 같아서 그 영역에 자연스럽게 거주하는 이들은 오히려 설명이 어렵지.
물질계를 구성하는 걸 생각해 보게. 물질계를 잘 보면 '물질'과 '힘'으로 분리되지. 질량이 있는 것이 물질, 그 물질을 움직이고 작용하는 형체 없는 흐름이 힘.]
"아아. 화학과 물리학적인 영역이군. 대충 알겠어."
[그래. 영류도 마찬가지야. '흐름'과 '영'으로 구성되지. 중요한 건 물질과는 반대항이라는 거야. 물질계에서는 물질이 수없이 많고, 힘의 종류는, 생각보다 몇 개 되지 않지.]
"네 개야. 우리 세계의 물리학이 맞는다면."
[그래. 하지만 영류계는 거꾸로지. 흐름의 종류는 가히 무한해. 하지만 흐름이 작용하는 '영'은? 글쎄, 난 일단 3개라는 설을 지지하지.]
"확실히 할 수 없어?"
[아직 증명된 게 아니라서 없다. 아무튼, '영'을 움직이는 '흐름', 흐름의 영향이 영적인 영역을 벗어나 물질계에서 발현한 것이 '신비'지. 자네가 그냥 마법이라고 부르는 것 말이야.]
"······뭐. 그래서? 영립학은 정확하게 뭐하는 거지?"
솔직히 말해서 그냥 판타지 설정집을 풀어서 듣는 기분이다. 진짜 판타지 설정 맞긴 하군.
[영립(靈立)학은 말 그대로 흐름에 반응하는 영이 흐름에 저항하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게 만드는 법을 연구하는 학문이지. 물질계에서 구조물을 세우는 건 대단히 쉬워. 그냥 쌓기만 해도 형태는 갖추지.
문제는 영류계에서야. 모든 건 흐름이고, 흐름에 반발하거나 흐름에 순응하는 성질이 있는 영으로 구조물을 세우는 건 대단히, 정말 대단히 어려운 부분이지. 자네에게 지식을 준 플레이어는 영립학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없어도 실용적인 지식은 있어서 영계를 세울 수 있었던 것 같군.]
그러니까 다 때려치고 본질만 말하면 마법 건물을 짓는 학문이란 거구만.
"좋아. 거기까지도 다 이해했어. 그러면 그래서 '영계'라는 건 대체 뭘 하는 거지?"
[간단하게 말하면, 통제할 수 없는 변화를 일으키는 흐름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거르거나, 혹은 흐름의 종류를 바꾸거나 영의 형태로 축적하는 공간이다.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라고 바로 물을 텐데, 그건 직접 저쪽에 있는 자네에게 설명해주지.]
∞
세사이사의 세계에 들어간 내가 설명을 들어서 상황을 알았다. 내 세계로 건너온 세사이사의 본체에게 영계 건설법에 대한 설명을 듣던 나는 자연스럽게 설명을 이어받았다.
"자. 여기 조악한 임시 영계가 있다. 내가 볼 때는 고급 기술을 사용해서 만든 쓰레기 같지만, 다행히 설계도가 있으니 개선은 꽤 쉽지. 이 영계의 주된 기능은 간단하게 말하면 흐름을 이용해 '영'을 응집시키는 걸세. 그 응집된 영은 고기에게 깃들어 있으면 〈마력〉이라고 부르고, 지금 우리와 같이 흐름으로서 구성된 존재에게 있으면 〈신성〉이라고 부르며, 고기들이 흐름에 〈신성〉을 응집시키는 힘을 〈신앙〉이라고 부르지."
"아. 잠시만. 그러니까 신성력을 만들어내는 장치 같은 건가?"
그래서 영계를 끼우니 신앙이 올랐던 건가.
"그렇지. 하지만 내가 볼 때는 진짜 조악한 수단이다. 이건 기초 중의 기초야. 신성도 마력도 그저 가공되지 않은 원형에 불과하지. 그걸 한 차례 가공해서 특정한 기능을 하는 신비로 바꿔야 해.
이건 세계의 잉여롭고 불필요한 흐름을 모아서 신성으로 만드는 기본적인 기능은 있긴 하지만, 그걸론 부족하지.
자세한 지식은 요거-토소스에게 전해줬고, 내가 나중에 몸소 영계를 하나 달아주려고 했지만 여기 좋은 기술로 만들어진 쓰레기가 있으니 이걸 좀 개조해서 만들어 보지."
하더니, 세사이사는 자신의 신성력을 통해서 엘카이더에게 받은 영계를 이리저리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생명을 창조하고 진화하는 신성의 발현과 비슷했다. 어쩌면 진실로 별반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생명의 작용과 신비의 작용이라는 게 말이다.
"자. 준비됐으니 작동시키도록 하지. 자네가 바라던 걸 이뤄지게 할 거야."
위이이이이이잉!
약간 청소기나 세탁기 돌아가는 것 같은, 어처구니없게도 가전제품 같은 소리가 났다.
내 세계 전체를 순환하는 영계. 그 영계가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는 내 세계의 마력, 마력에서 창출되는 흐름, 그리고 신성력, 넥타르에서 발하는 생명력, 그 모든 부자연스러운 힘이 빨려 들어가 저 영계라는 장치 하나를 작동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영계가 녹은 아이스크림이 들은 기계처럼 주르륵 뭔가를 뱉어냈다. 약간 물컹물컹한데 탄력성은 없는 물질이었다.
『디저트 군단의 정수
설명: 순수한 생명의 물질 넥타르를 흉내낸 물질이다. 디저트 군단으로 통칭된 존재들이 에너지원으로 삼을 수 있으며, 〈생명〉 마력 뿐만 아니라 일부의 〈흙〉 속성 마력을 응집해 광물질 성분 또한 섭취할 수 있다.』
내 눈이 번쩍 떠졌다.
이 영계는 말하자면 넥타르 샘 외부의 보급기지 역할을 제한적으로 해줄 수 있었다.
지금은 요거-토소스의 보급을 위해 하늘에서 짜내는 형태로 만들었지만, 땅에도 영계는 설치할 수 있고 오히려 더 잘 작동한다는 세사이사의 설명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고.
"영계의 형태를 조금만 바꾸면 여러 가지 성질을 더할 수도 있지. 흠. 이렇게 하니 또 내가 받을 포인트가 모자라군? 넥타르 좀 받아가겠네."
맘껏 가져가라. 이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업적이다.
이제부터 이 "영계"에겐 이름이 필요하다.
"크림랜드(The Lands of Cream)". 영적인 영역에서 내 생명체들에게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이 '크림'을 만드는 땅은 마땅히 이렇게 불러야 한다.
"뭐랄까 감히 범접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이계의 이름을 닮았는데요."
훨씬 우수하지. D보다 C가 더 높고 우월한 건 당연하잖나.
33화. 노천 광산
두 개의 분신은 세사이사와 소통중이고, 하나는 커뮤니티를 둘러보고 있는 동안 나머지 분신은 생태계를 복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영계 덕에 6레벨이 된 〈신앙〉. 네 개의 분신은 각각 넥타르 오아시스, 담수호와 강, 선인장 숲과 계곡, 새로 얻은 땅. 이렇게 흩어져서 총체적으로 생태계를 복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난 분신 4. 새로운 생태계 담당이다.
일단 먼저, 나는 벌써 30번의 게임 중 5번 이겼다. 이게 뭔 얘기냐면, 내 세계에 존재하는 신의 파편만 32개에, 내 세계 면적이 320제곱킬로미터라는 거다.
아마 지형을 깔끔하게 편집하는 것만 꽤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면적부터 기존의 2배가 됐으니까 말이다.
솔직히 넓진 않다. '서울특별시'가 내가 알기론 600제곱킬로미터인가? 그쯤 된다. 말하자면 지금은 그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거지. 기껏해야 부족 국가 세울 수준이다.
물론 천만 인구가 모여 살았던 서울이 객관적으로 작은 도시는 아니지만, 그건 도시화된 문명 기준이다.
아예 인구 전체를 부양하는 생태학적인 관점에선 좀 작은 게 맞다. 심지어 대한민국은 식량 자급률 같은 것도 개판인 동네였고, 자연보호는 생각도 못하는 동네였다.
이 좁은 세계가 이 정도의 생태계 다양성을 지닐 수 있는 건 전적으로 최소한의 생존권은 보장해주는 '신의 파편'이라는 요소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거꾸로 생각해 보면 내가 만약 다음 게임을 이기면 대충 내 세계가 서울급 면적을 가지게 되는 건가?
그리고 '경기도'는 1만 제곱킬로미터 정도니까 10번 이기면 '경기도'급. 14번쯤 이기면 10만 제곱킬로미터 정도인 '남한'을 넘고, 15번 이기면 '한반도'하고도 만주 조금 합친 32만······,
"실제론 땅이 넓어지는 이벤트도 있으니까 넓이가 그걸 넘는 시점은 더 이를 겁니다."
맞다. 그랬지. 그건 설명을 들었다. 도중에 추가로 땅이 생기는 이벤트가 생긴다고.
아무튼 최종적으론, 참가자가 1,073,741,824이니, 궁극적으로 107억 제곱킬로미터에, 추가로 받는 땅까지 해서 한 천억 제곱킬로미터 되나······? 추가로 받는다는 땅은 감이 잘 안 잡히네.
어라? 잠시만. '지구'의 지름이 1만 2천 킬로미터 정도니까······. 간단한 공식으로 표면적을 계산하면······.
'지구'의 면적이 한 5억 제곱킬로미터?
"이봐. 천사. 우승하면 최종적으로 지구의 200배쯤 되는 세계를 다스리게 되는 게 맞나?"
"게임 진행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대략적으로 맞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요?"
너무 당연하게 대답해서 내가 더 놀랐다. 그런가. 의식적으로 계산하진 않았지만, 대단히 우주적으로 노는군.
아무튼,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넓은 세계를 내 분신들이 열 명 스무 명 되어도 다 통제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보통은 그래서 부하 신을 두죠."
그렇지만 마왕의 길을 걷는 나에게는 선택할 수가 없는 것.
"아. 네. 그러시군요."
그러니까 오히려 지금 초반부에 신경 써서 생태계를 조절하고 중반부 넘어서 도저히 땅 넓이가 감당이 안 되는 시점부터는 내가 딱히 관리하지 않아도 완벽한 평형 상태로, 그리고 그러면서도 모든 문명을 쓰러트릴 수 있는 디저트 군단으로 저절로 양성되는 게 이상적인 지점이다.
"말은 되네요. 그러면 다음에 하실 일이 뭔가요?"
게임에서 지형을 정의하는 신의 파편을 살피자. 그중에서 "강"이라든가, "대수층"이라든가, 같은 것이 몇 개 겹쳐져서 레벨이 올라간 것도 있다,
하지만 지금 새로 얻은 상대 세계에 신의 파편이 16개나 있을 테니 그것부터 세야 한다.
상대 생태계는 크게 보면 사막과 초원의 중간 지형이라고 할 수 있는 스텝 지형, 나와 같은 사막+오아시스 지형, 그리고 언덕으로 보이는 산, 바위 군락, 그리고 약간 진흙에 가까운 풍요로운 늪. 넓은 밭. 강. 이렇게 있었다. 7개군.
그런데, 이건 생태계적인 측면에서 그렇고 자세히 살펴보니 8번째, 9번째, 10번째 지형이 있었다. 다시 말해 6개 정도는 같은 것이라서 겹친 걸까. 그렇게 추측하고 살펴보자.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적의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였던 것 같은 장소.
디저트 군단이 저기를 공격할 때마다 병적으로 반격해서 기억한다. 거대한 신전도 있었지. 시카도즈의 거처 같기도 했고.
"시공경계 LV.3: 시공간의 경계가 흐릿해진 곳입니다. 이 지역에서 태어나는 이들은 〈시공간〉 계열 특성을 가지고 태어날 가능성이 높고, 연구하면 〈시공간〉 계열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본래는 튼튼한 [구조물]과 강력한 〈신성〉으로 인해 강화되었던 것 같지만 지금은 크게 파괴되었습니다.
세부 설명: 자연적인 "영계"로 기능하는 공간입니다. 〈시공간〉 마력을 저장하며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꺼내쓸 수 있습니다. 신이라고 불렸던 존재의 파편으로, 그 정신이 조각난 지금도 시공간 초감각 및 영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알겠다. 저번 상대인 엘구아노가 상점 구간에서 산 게 『차원 여행자』 특성이 아니었다. 그걸로 가지고 있던 고유 개체를 강화한 게 아니었어.
아마도 구조물이나, 지형을 강화하는 종류의 전설적 특성을 사서 "시공경계" 자체를 강화한 거다.
그리고 높은 〈문화〉를 비롯한 막대한 양의 자원을 소모해서 기존에 있던 시카도즈를 저 지형에서 〈전설〉 수준까지 성장시킨 거구나.
전설적 개체를 찍어내는 건 불가능하지만, 오히려 저레벨에 딱 한 번 정도면 충분히 가능하지.
이러면 그냥 상점에서 특성 사서 붙여주는 것하고는 달리 특별 개체 제작에 자원이 대량으로 소모되지만 능력의 원천이 상점에서 산 특성이 아니라 세계에 있는 지형과 구조물인 만큼 시카도즈 말고도 나중에 시공간 능력자들을 여럿 만들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엘구아노와 그 동맹은 초반부는 차원 여행자 시카도즈의 초월적인 테러 및 외교 능력으로 무난히 넘기고, 중반 이후부터는 시공간 능력자 부대를 만들어서 어떻게 해볼 생각이 아니었을까.
"꽤 건실한 계획이네요. 실제로 효율적이고 강해 보이기도 하고······ 하필 운석을 만나서 그렇지."
운석은 나도 맞았어. 3만 점이 넘었던 생태계가 지금 1만 점도 안 된다고.
"진짜 배부른 소리 하네요. 그래도 최상위권이고 금방 복구할 거잖아요?"
그리고 9번째 지형은 영류계 레이어를 통해 볼 수 있는 이 세계의 영계 및 거대한 흐름이었다.
이건 요거-토소스의 막대한 힘에 의해서 파괴됐는데, 세사이사와 협의해서 조절해야 할 것 같군. 이것 역시 신의 파편이었다.
"별자리 LV.2: 물질계와 "대우주"의 흐름이 "하늘"에서 접하는 지점입니다. 〈정신〉을 통해 각종 신비를 끌어올 수 있고 연구하는 것으로 그 이해를 높일 수 있습니다.
세부 설명: "대우주"의 일부 편린이 보이는 자연적인 "영계"입니다. 관측된 별들로 인해 〈경외〉 〈빛〉 〈시공간〉 속성의 신비에 대한 이해가 조금 높아졌지만, 지금은 막대한 신비에 의해 흐름이 파괴되어 온전한 힘을 끌어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신이라고 불렀던 존재의 파편으로, 그 정신이 조각난 지금도 우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게임 내에서도 존재했던 지형이라서 대충 이해하고 있다.
별자리가 보이는 곳에서는 〈신비〉 각성자가 늘어난다.
그리고 영류계 레이어를 보는 나에겐 하늘에 달라붙은 별자리에서 흘러나온 흐름이 "시공경계"를 통해 바닥 전체를 뒤엎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 이걸로 세계 전체에 존재하는 생물들의 주술적 재능 발현율을 높인 것 같다. 세사이사는 내 추측을 긍정해주었다.
그렇군······. 나는 넥타르 샘 빼면 대체로 자연적인 지형만 나왔는데, 이쪽은 거꾸로 신비와 엮인 것 같군.
그리고 열 번째 지형은 조금 당혹스러운 지형이었다. 나쁘거나 희한해서가 아니라, 써먹기가 너무 난감해서.
"노천 광산 LV.5: "지하"에 축적된 〈귀금속〉 및 〈금속〉 자원이 노출되어 드러난 지형입니다. 많이 캐면 고갈됩니다.
세부 설명: 세계 전체에서 응집된 마력으로 〈흙〉과 〈금속〉 〈보석〉 자원을 생산하는 지형입니다. 신이라고 불렸던 존재의 파편으로, 그 신체가 조각난 지금도 원소를 응집하고 있습니다."
자연적? 인 지형인가? 물론 게임에서도 광산이 마력을 충전하거나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긴 했지만 게임적 허용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충전되는 광산을 만나니 좀 당혹스럽네.
여기 세계는 노천 광산을 5레벨까지 키운 만큼, 시카도즈의 〈매력〉을 올려주는 장신구나 신전 등을 장식할 소재 등을 여기서 채굴한 귀금속으로 충당한 것 같은데, 문제는 이런 건 〈기술〉이나 〈산업〉 기반 트리에서나 유용한 것이다. 반지성주의 빌드에선 의미가 크게 없다.
"드디어 문명을 개발해서 이곳의 자원을 활용할 때일까요?"
바위젤리를 진화시켜서 보석젤리나 금속젤리, 황금젤리를 만들어볼까······.
"아 제발. 왜 다 생물학으로 해결하는 건데요."
어쩔 수 없다. 제련, 대장장이, 공예 등 전부 〈산업〉과 〈기술〉이 필요한 것들······. 생명체는 오히려 신체 구조물로 승부하기 때문에 이런 자원이 나오면 버릴 수밖에 없다.
"아깝지 않나요."
"어차피 게임하면서 나오는 모든 지형을 활용할 수는 없어. 젤리들로 채굴한 다음, 그 젤리들을 다른 세계에 팔아먹어서 포인트를 좀 벌어도 괜찮겠지."
"그래도 이런 꿀땅을······."
꿀땅? 꿀땅은 얘들의 늪과 밭이 꿀땅이지. 습지에, 영양분이 축적된 좋은 땅이다.
늪과 강, 담수호를 각각 이은 다음 산도 산끼리 이어 붙여서 어마어마하게 비옥한 초원을 만들고, 거기에서 다양한 초식 동물과 포식자들이 뛰놀게 해야겠다.
"그건 좀 멋진 발상이긴 하네요."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승리 특성은 안 주는 거야?"
"5번째 배수의 세계 승리 특성은 '재난 구간'이 시작됐을 때 줍니다. 나온 재난을 보고 특성을 결정하라는 의미에서입니다."
그렇군······.
나는 막대한 신성력을 소비해 저 세계에 있던 산을 내 세계의 강 수원지가 되어주고 있는 산으로 옮겼다.
두 개의 산이 합쳐지니 레벨도 올라서 더욱 거대해졌고, 그곳에 흐르는 마력도 풍부해졌으며 생태계도 건강해졌다.
산도 광산 자원으로 써먹을 수 있지만, 나는 그냥 저곳의 순수한 마력을 이용해서 강을 비롯한 범람원 구역을 비옥하게 만드는 게 낫다.
말 나온 김에 세사이사의 세계에서 만들었던 참나무 품종들도 대거 만들어서 산에 가득 심었다. 내가 직접 편집해서 진화시킨 것들이니 신성만 쓰면 만들 수 있지.
그러면 이제 저 수목이 우거진 산은 영양분을 강을 통해 저 넓은 사막과 스텝 초원에 다 뿌릴 것이고 그것은 맑은 담수호와 질척한 늪으로 흘러들어가 더 많은 생물들이 자라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줄 거다.
그러면 새로운 병사를 만들 수도 있겠군. 약간 평야를 달리는데 특화된 디저트 군단······.
"이름은 생각해 두셨나요?"
글쎄. 지금은 할 일이 너무 많다. 내가 여러 명이라서 다행이지.
분신들과 '소통'이라고 할지, 그들이 지금 하고있는 작업을 그냥 '알겠다'.
완벽한 효율로 나는 분업해서 일하고 있었고, 뭔가 큰일이 생기면 한 놈만 주의를 기울이고 나머지는 그냥 제자리에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나는 생태계를 만지면서 새로운 병사를 늘리려다가 생각한다.
이 정도로 괜찮은가.
"어라. 갑자기 왜 그런 고민을?"
게임 수준이 생각했던 것보다 높다. 물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하리라곤 생각 안 했지만, 그래도 난 솔직히 내가 상위 100위 안에는 들 줄 알았다.
"아~ 하긴."
특히 이 엘구아노라는 플레이어 말인데, 내가 충돌 직전에 생각했던 '요거-토소스 생각보다 쓸모없네.'라는 말이 무색하게 요거-토소스가 만약 내게 없었다면 100% 시카도즈라는 영웅 혼자서 내 생태계 다 박살 내고 겜 졌다.
"그건 그렇습니다. 요거-토소스가 있으니 상대가 급해진 것이고, 또 마음놓고 테러도 못했고, 또 차원균열 단계 때 승리를 쟁취할 수 있으셨던 것이죠."
이놈도 꽤 상위권일 것 같긴 하다. 내가 운이 없었지.
하지만 우승자는 1위가 되어야 한다. 진짜 우승하려면 앞으로 나오는 놈들도 다 이 정도의 플랜, 혹은 그 이상은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하지 않겠나.
"그러면?"
내가 게임에서 했던 것과 다른 방식의 발전이 필요하다.
난 운 좋게 "넥타르 샘"을 받아 바위를 먹는 젤리류를 만들고 번성케 했다.
하지만 내가 만약 처음에 받은 지형이 저 "노천 광산"이었다면?
난 아마도 그냥 광산은 내버려두고 평야에 사는 생명체나 만들었겠지. 지금 하위권을 전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바위를 먹는 젤리는 지구상에 있었던 생명체가 아니다. 내가 게임에 참가하고 얻은 정보로 그러한 생명체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만들어 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노천 광산" 지형에서 번성할 수 있는 생명체.
지구의 물리법칙으로는 설명도 존재도 불가능한, 금속, 귀금속, 보석 등을 매개로 신체를 형성하고 성장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생명체를 신비의 힘을 빌어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러면 저 5레벨이나 되는 귀한 지형을 내가 온전히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재밌는 시도군요. 게임의 규칙을 알려드리는 천사로서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웬일이래.
"실패하면 드디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문명을 만드실 것 같고, 성공해도 게네들이 문명을 만들지도 모르잖아요."
······천사 때문이라도 내가 금속 생명체를 반드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34화. 시럽
지구의 생물학으로 불가능한 생명체를 만든다. 그렇게 해서 "노천 광산"이라는 쓰기 힘든 지형을 생명체가 넘치는 환경으로 만든다.
"포부는 거창하시지만 그걸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시는 거죠?"
마법을 동원해야지. 신비의 일부 말고, 말 그대로 물리학에서 존재할 수 없는 만능, 가상의 개념 말이다.
다행히도 내게 그러한 '마법'은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최근에 만든 '크림'이 있다.
"훌륭한 물건이죠. 세계 전체의 마력과 넥타르 샘의 생명력을 일부 응집해 비슷한 에너지원을 만든 것."
그래. 넥타르젤리들도 근본적으로 보면 '넥타르'라는 무슨 유기물도 섭취할 수 있는 궁극의 에너지원이 있어서 돌아갔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크림'을 써서 생명체를 만들어 본다. 가상의 생명체. 가장 원시적인 생명체······. '도우'라고 해볼까. 궁극적으로는 금속 생명체인 '빵'이 될 것이다.
"이름은 참 일관적이군요."
게임에 참여하면서 내 머릿속에 들어온 생명체 창조의 지식.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해본다.
어떠한 생명체를 만든다는 방향성이 있으면 그다음은 자연스럽게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 내가 학부생 때, 그리고 직장에서, 직장 관두고 자체적으로 독학한 생명공학적 지식을 더해서 비교적 구체적으로 생명체를 그려낸다.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름을 뭘로 할까요?」
"성공작이 나올 때까지 붙이지 않겠어."
「[이름 미정]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만들어 낸다. 크림을 먹고 살며, 육체를 금속과 흙 성분으로 구성하는 미생물을 말이다.
"벌써 성공하셨네요?"
그리고 난 얼마 뒤,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머지 않아 그냥 크림만 먹는 생명체로 진화했다. 넥타르젤리의 열화판과 별 차이도 없었다.
아무래도 크림에 '광물질' 성분이 들어간 게 문제인 것 같다.
굳이 크림을 먹은 다음 광산의 흙을 파먹느니 크림만 먹고 그 크림에서 광물질 성분을 섭취하는 게 나은 거다.
"시행착오가 많이 필요하겠군."
"그러게요."
시도 2. 크림을 먹고 물을 뱉어내게 해보기.
실패. 이유는 크림은 넥타르와 달리 수분이 적었다.
시도 3. 귀금속 자체를 이용해서 신체 구성 해보기.
실패. 귀금속은 화학적으로 안정성이 너무 높아 생물을 구성하기 힘들었다.
시도 4. 기존에 있던 바위젤리를 금속젤리로 만듬.
반쯤 성공. 생명체로는 기능하는데 사실상 멸종위기 보호종 수준의 생존력임. 감치들이 그냥 먹고 쇳가루 똥을 싸는 정도로 대응 가능하니 디저트 군단으로 기능하지 못함. 그래도 [도우]라고 이름은 붙여줌.
시도 5. '정령' 계열의 생명체와 융합해봄.
대. 실. 패. 정령과 생명을 융합하니 자아를 비롯한 기초적인 생명 기능이 붕괴해버렸다.
"두 개의 정신이 같은 곳에 있으면 당연히 망가져 버리죠."
"'당연히'인줄은 몰랐지. 난 이 분야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다다음 시도. 아예 도우에게서 사고를 할 수 있는 기능을 아예 제거하고 본능만으로 움직이게 해봤다.
"잔인해."
참고로 멍게는 척삭동물이라서 어릴 때는 눈, 코, 뇌, 근육, 신경, 척삭이 다 있는데 어른이 되면 이걸 다 소화시키고 바닥에 뿌리내리고 여과섭식자로 살아간다. 생각보다 지능이 필요 없는 거다. 이 도우도 그렇다.
"······멍게가 척삭동물이라고요?"
그렇다. 멍게는 말미잘보다 인간과 더 가깝다.
아무튼. 그렇게 지능을 제거한 도우와 정령의 융합은 반쯤 성공했다. 수명이 1주일도 안 되어서 번식도 못하는 하자품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마력이 너무 많이 필요해요. 그리고 흐름과 신경계의 결합도 수월하지 않았어요. 그 탓에 더 마력이 많이 필요했고요."
젠장. 방향성 자체는 맞는 것 같은데.
마력 공급을 어디서 해야 하지? 마력에서 흐름이 나온다고 하니까 마력이 높은 지형이 필요한데.
"비인 님의 세계에 원래 마력이 높은 지형이 있긴 합니다. 거의 쓰지 않으셔서 그렇지."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세 번째 충돌 이후 "모래 사막"과 "자갈 사막"을 얻었었다.
지금은 적당한 곳에 "영계"의 운용을 위해서 방치되어 있는 상태지만, 그 두 지역은 순수하게 마력만으로 살아가는 정령 생명체들이 살 정도로 마력압이 높은 지대였다.
아직 내 세계에 남아 있던 세사이사에게 부탁해서 그 두 사막과 노천 광산을 연결할 수 있냐고 물어봤다.
대답은 미묘했다.
"못할 건 없지만 효율은 낮지."
"이유는?"
"쉽게 말하자면, 능력의 원천이 달라. 저 두 사막은 물질계에서는 아무 특별한 게 없어. 하지만 영류계와 연결되어 있지. 그렇지만 저 노천 광산은 그냥 물질계에서 마력이 응축되는 성질이 있는 거야."
"?"
이해하지 못한 티를 내니까 세사이사는 즉각 설명해 주었다.
"쉽게 설명하지. 자네, 원래 고기였지? 뇌가 있었나?"
"있었지. 지금 나는 없는 것 같다만."
그런데 그러면 세사이사는 원래 뇌도 없었던 뭔가였단 얘기인가? 도대체 뭐하는 생명체였지?
"고기의 뇌는 '흐름'을 만든다네. 정신활동이라는 것은 그런 거지."
"엉? 아냐. 생물학적으로······."
"그러니까, 뇌의 상호작용이라는 것은 물질계와 영류계의 딱 중간쯤 된다는 얘기를 하는 걸세."
"!"
"그러니까 고기들이 의지력으로, 그리고 자기가 공부한 지식으로 흐름을 만들어 신비를 쓸 수 있는 거야. 다시 말해, 순수하게 물질계에서의 상호작용이 영류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지, 그것도 신비라네. 거꾸로 영류계의 흐름은 순수하게 영적이라도 물질을 창조할 수 있고······. 이것도 신비지."
"뭐랄까. 르네 데카르트가 주장한 송과선 같은 얘기를 하는 거냐?"
"???"
"아 그래. 너는 내 세계의 철학자는 모르겠군. 아무튼 이해했어. 한마디로 뇌는 신비한 기관이다."
"그리고, "넥타르 샘"이나 "노천 광산" 역시 비슷한 기능을 지닌 지형이지 영계는 아니야. 이건 신비에 닿아 있지만 어디까지나 물질적인 메커니즘으로 마력을 흡수해서 넥타르를 만들고 있지."
물질계의 메커니즘으로 신비에 닿은 땅은 영지(靈地)라고 한다. 저놈이 어떤 이유로 저런 표현을 쓰는지는 모르겠다. 말하는 게 중국어는 아니겠지.
"영지와 영계를 연결하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닌데······효율은 낮지. 왜냐면 둘 사이의 흐름이 호환이 안 되거든. 결국 흐름을 호환하려면 그 사이에 뭔가가 거대한 구조물이나 매질을 더 끼워 넣어야 하고, 지금 기술력으론 나도 불가능해. 억지로 만들려면 신성 낭비가 가공할 정도일 걸. 그래서 내가 지금 단계에서 넥타르 샘이라는 영지와 영계를 직접적으로 연결하지 않는 것이고."
그러니까 유통 과정이 하나 더 생겨서 가격이 비싸진다는 거군. 이해했어.
그리고 내 천사가 쥐뿔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것도 이해했다.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언을 드렸을 뿐이라고요."
"최대한의 조언을 줘. 뭔 놈의 최소한이야."
하지만 다행히 내 세계에는 마력이 높은 지형이 하나 더 있었다.
"별자리"다. 이 지형은 따지자면 자연적인 영계라고 한다. 이걸 연결하는 대신 그냥 위에서 아래로 마력을 내리쬐게 하면 노천 광산에 마력압이 늘어날 것이다.
"실제로 저번 엘구아노 플레이어도 지형을 그렇게 설치했습니다. 요거-토소스의 파괴로 인해 흩어졌을 뿐이죠."
그렇다면 더욱 좋군. 시도해본다.
"별자리"를 세사이사의 도움을 받아 내 세계의 크림랜드와 연결지은 뒤 마력을 내리쬐게 해봤다.
마력이라는 자원이 풍부해지자 정령과 융합한 [도우]들은 단단한 갑각과 튼튼한 근육을 갖추었고, 나름대로 젤리 비슷한 생태적 지위를 가지게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다 죽었네요······."
"······."
또 실패다. 어째서? 그 이유를 살펴보니 답을 알 수 있었다.
"별자리"에서 내리쬐는 마력이 바닥에 있는 크림랜드의 크림의 성분을 변화시키고, 또 이곳의 [도우]들 역시 별자리에서 내려오는 대우주의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신경계가 녹아버렸다.
흐름이란 거, 쉽지 않군.
내 연구는 여기서 멈췄다. 근성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점에서는 방법이 더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러 명이었다.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넥타르 샘을 만지고 있던 분신 5가 뭔가를 알아낸 것 같았다.
∞
'넥타르 오아시스 담당' 분신 5, 나는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생태계를 확인하는 담당이었다.
첫째. 신의 파편 중에는 영지와 영계가 있다.
둘째. 넥타르 샘은 영지다.
셋째. 그 영지의 기능은 마력의 흐름을 응집해 넥타르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압호주스는 그 영지에 기생한다고 할지, 하나로 합쳐진 별도의 생명체 같은 것이다. 요정이라는 것이 생각보다도 더 끔찍하게 느껴지는군.
"저런 걸 만들고 요정이라고 주장하시는 분은 비인 님밖에 없어요."
희한하게도 내가 분신 능력을 얻자마자 자기도 분할해서 분신마다 각각 붙어 있는 천사의 헛소리는 아무래도 좋아······. 압호주스가 듣고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군.
일단 먼저, 지금 넥타르 샘의 레벨 말인데, 9다. 미친 숫자지. 압호주스의 레벨도 9다. 곧 있으면 10이 된다.
넥타르 샘의 지름은 무려 8km에 육박한다. 수심은 100미터. 면적은 한 50제곱킬로미터 된다.
그냥 내가 넥타르 오아시스~ 라고 부르고 있지만, 이건 정말 어마어마하게 넓은 거다.
지구에서 가장 큰 오아시스가 내가 알기로는 85제곱킬로미터였다. 다시 말해서 조금만 더 레벨이 오르면 이건 지구에서 가장 큰 오아시스를 넘어서 넥타르 호수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엄청난 수량을 자랑하는 넥타르 오아시스 전부 넥타르로 꽉꽉 차 있다. 이전과는 달리 담수층과 접하지도 않고, 압호주스의 노력 덕에 물이 계속 생성되어도 내부에서 전부 소비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대신 디저트 군단 외에 다른 생명체는 여기서 넥타르를 구해갈 수는 없을 거다.
진짜로 호수 표면부터 바닥까지 모조리 젤리, 푸딩, 구미로 꽉꽉 차 있거든.
거기에 근처에는 비스야킷, 압호주스의 촉수를 찢어발기고 그 체액을 빨아먹을 수 있으며 사람의 대가리 상대로로 똑같은 짓을 할 수 있는 펭귄감치, 수표면에 뜬 젤리를 커다랗고 부푸는 부리로 잔뜩 먹어 삼키는 사다감치. 등등. 내 생태계 중에서도 가장 풍요롭고, 가장 끔찍한 곳이다.
이곳을 총체적으로 점검한다.
"압호주스. 복원은 순조로운가?"
[이야이야아아아아! 나의 창조주여! 아무 문제 없나이다아아아아아!]
그렇군. 확실히 생물 수에는 큰 타격을 입은 듯했지만 생물종에는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이건 전적으로 시카도즈가 넥타르 호수에 가까이 오지 못한 탓이다.
그 망할 광선포로 호수를 쏘려고 하니 주위 모든 비스야킷과 푸딩들이 죄다 달려들어서 그 자식을 갈아버리려고 했거든. 압호주스는 아예 잡아서 넥타르 샘 아래로 끌어오려고 했고.
하지만, 10레벨로 올라가려면 넓이가 여기서 2배······. 다시 말하자면 100제곱킬로미터는 되어야 한다. 그 정도로 생산량이 늘어야 해.
그리고 그건 열 개의 땅을 집어삼킨다는 것이고, 내가 먹은 지형이 전부 사막이 아니니 결국 어느 순간은 일조량이 떨어져서 이 미칠듯한 생산력에 한계가 온다.
그러면 그것은 내 생태계 전체의 정체를 의미한다.
"상식적인 수단으로는 지속적으로 햇빛과 열을 공급해줄 영계를 만드는 거겠죠. 그리고 지금이라도 넥타르를 먹으면서 성장하는 문명을 세워서 그 영계를 지속적으로 보수하게끔 하면······."
그건 너무 복잡하고 세사이사에게 크게 의존하게 되니 생태학적인 방법으로 해결한다.
"아. 제발."
근본적으로 넥타르 샘의 성장은 유입되는 마력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리고 그 마력 유입은 햇빛을 받은 젤리들의 마력 생산. 둘째로 영계를 통한 마력 유입. 셋째로 [겔]을 통한 유입으로 이뤄져 있지.
"겔을 통한 유입?"
내가 만든 분해자 및 세균 격 생명체 있잖나. 그놈들은 죽은 생명체를 햇빛의 힘으로 녹여서 영양분을 섭취하고 마력을 분출한다.
지금 신의 시점으로 보니까 겔이 늘려주는 넥타르 샘의 마력압이 적어도 전체의 1/3은 차지한다.
"그래요······? 눈에 전혀 안 띄는데."
눈에 띄기 힘들긴 하지. 하지만 내가 안 본 사이 정말 엄청난 속도로 진화해버린 이 [겔]들을 이용하면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겠군.
[겔]을 이용하면 세계 전체의 마력압을 높이고, 그 증가한 마력압은 세사이사가 설치한 영계를 따라 넥타르 샘으로 쏟아질 거다.
"좋은 아이디어인데요. 그러면 어떻게 저 점액 같은 미생물들을 이용할 수 있나요?"
일단 겔들의 일부는 기생충이나 세균에 가까운 '질병'으로 진화했다. 자기가 직접 사냥은 못하지만, 시체를 녹여 먹을 수는 있으니 독성 물질을 만들어내어 수동적으로 생명체들을 죽여보기로 한 것이다.
"사실 그 세균과 기생충은 재난 구간 때 닥쳐야 하는 건데, 이미 재난을 맞고 계시네요."
아. 일단 이 독성 겔과 감염성 겔을 좀 개조해서 사탕에게 감염시키고 사탕이 터지면 독성 및 병균이 사방으로 튀어 나가게 개조해야겠다. 사막 숲 담당 분신에게 맡긴다.
"다음 상대가 너무 불쌍해."
하지만 사실 이 감염성 겔들은 수가 많지 않다. 보통은 그냥 기생하며 영양분을 쪽쪽 빨아먹다가, 죽으면 시체까지 빨아먹고 마력을 분출하는 정도지.
다른 방식으로 진화한 겔은 조금 단단해졌다. 버섯이나 곰팡이 같이 덩어리진 균사체를 형성해서 적극적으로 퍼지고, 찌꺼기 하나라도 더 먹고 마력을 분해한다.
심지어 덩어리진 상태에서는 다른 젤리들이나 감치들에게 파고들어서 그놈이 어떤 이유로든 죽으면 바로 시체를 뜯어먹기 시작하는 놈들도 있다.
그렇게 해서 보니까······.
"음?"
"왜 그러세요?"
"잠시만······. 이거."
건들 게 없는데?
"예?"
아니 진짜 건들 게 없다. 나는 겔들이 세계 전역에 퍼지게 하려고 했는데, 겔들이 신체를 곰팡이처럼 만들어서 감치들에게 기생, 그리고 거기서부터 널리 퍼져나가는 식으로 진화해버렸단 말이다.
한마디로 내 세계는 진작 겔들에게 완전히 감염당한 상태다. 마력 효율을 더 높이고 싶어도 더 높일 수가 없어. 이미 내 생태계에서 죽는 모든 것들은 저 생명체들에게 완전히 다 뜯어먹혀 사망한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문명을 만들어서 더 효율을 올리는 수밖에······!"
역시, 그냥 생명체 자체를 엄청나게 늘려서 겔들의 먹이로 주는 수밖에 없는가? 근데 이건 에너지 전환 효율이 좀 별로인데.
"너무해요. 진짜로."
그런데 예상치보다 효율이 좀 안 나오지 않나? 그것을 느낀 나는 겔들이 왜 분해하는 것에 비해서 마력을 많이 생산하지 못하는지 확인했다. 혹시 뭔가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정말 뜻밖의 것을 발견했다.
시체 위에서 덩어리진 겔들이 꿈틀꿈틀 움직이면서, 일부는 반짝인다.
"음······?"
저런 식의 진화를 어떻게 했지? 아니 그보다, 왜 저렇게 진화했지?
하고 살펴보니, 푸딩들에게 기생하는 겔들에게, 내가 만든 세 번째 생명체인 [토핑]들이 기생하고 있었다. 기생자의 기생자다.
겔이 내뿜는 마력은 토핑이 먹고 겔에게 운동능력과 함께 발광능력을 제공한다.
그러면 겔은 다른 감치들의 눈에 띄게 되고, 감치들은 그런 반짝이는 겔을 먹고 자연스럽게 또 감염되고, 그대로 살다가 죽고 다시 겔에게 먹힌다.
"재밌게 진화했네요. 그러니까 마력을 써서 오히려 자기 번식력을 높인 거군요."
예상치 못한 진화다. 마치 고세균과 미토콘드리아가 합체해서 진핵생물이 된 것 같은 광경이군.
마력을 발산하는 기능이 있는 생물에게, 오히려 마력을 흡수해서 운동능력을 발하는 생명체가 공존해버린다. 이걸 어떻게 쓸 수 있을까······.
문득,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하나 있었다.
「"고기의 뇌는 '흐름'을 만든다네. 정신활동이라는 것은 그런 거지."」
세사이사가 조금 전에 다른 분신에게 한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흐름'이라는 거, 결국 마력이 움직이면 다 '흐름'아닌가?
그러니까, [토핑]은 마력을 먹고 움직이니까 일종의 영류계에서 '흐름'을 만드는 생명체인 거고?
"지금 잘은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흉참한 생각을 하신 것 같군요."
나는 세사이사에게 열심히 교육받고 있는 분신이 이해한 지식을 이용했다.
신성력을 통해서 인위적인 흐름을 만들고, 역시 신성력을 통해서 그것을 응집, 주위 흐름에 어긋나지 않게 고정시킨다. 이게 영립학의 근본원리다.
이걸, [겔과 융합한 토핑]을 이용해서 한다.
물질계의 영역에서 신비의 영역에 도달한 겔들의 상호작용은 흐름이 되고, 생명체라는 물질에 의해 고정된다.
흐름은 이윽고 영류계를 움직여, 순수하게 물질계의 영역인 생명이 영류계의 거대한 흐름을 조작하는 하나의 구조물로 변한다.
그리고 그렇게 구축된 겔과 융합된 토핑들을 분신 4의 도움을 받아 노천 광산에 깔아둔 크림랜드와 넥타르 샘을 접목시킨 순간······.
∞
"후후후······. 비인. 자네가 이번에 나한테 건네줄 포인트가 꽤 많지?"
"음······."
세사이사는 대단히 열정적으로 비인의 세계에 기여했다.
왜냐면 근본적으로, 비인이 가진 생태학적 지식을 뽑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를 불러다가 매 번 일시적으로 세계를 돌보게 시키기보단 그가 가진 모든 지식을 죄다 뽑아내고 자기가 알아서 자기 세계를 조정하는 게 낫지 않은가.
비인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게임'을 통한 경험적, 숙련도에 의한 지식이고 실제 지식 수준은 그렇게 높아보이지 않았다.
그에 비해 학자인 자신은 아무리 낯선 것이라도 일단 작정하고 공부하면 꽤나 높은 경지에 오를 자신이 있었다.
영류계를 한참동안 만져주는 것 정도야 그 뒤에 받을 생태학적 지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그렇게 지식을 받고 나면 이놈과 그리 길게 엮일 것도 없다.
그런데, 갑자기 세사이사와 대화하던 비인이 한마디 했다.
"아. 됐네."
"응······? 뭐가?"
그리고 잠깐 고개를 돌려보니 영류계 시점에서도 물질계 시점에서도, 크림랜드라고 이름 붙여진 영계가 미친듯이 꿈틀대며 넥타르 샘이라는 영지와 그냥 직통으로, 아무런 문제 없이 연결됐다.
세사이사가 알고 있는 영계와 영지의 연결에 대한 이해를 아득히 초월한 광경이었다.
다음 순간 하늘에 있는 크림랜드와도 연결되어 어마어마한 흐름을 빨아들이기 시작한 넥타르 샘이 범람하며 주위의 지형을 삼켜버린 것은 경악 그 자체였다.
「"넥타르 샘"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세계의 〈산업〉 점수가 8,579점을 넘어 레벨이 7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신비〉 점수가 18,016점을 넘어 레벨이 8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신앙〉 점수가 8,579점을 넘어 레벨이 7로 상승했습니다.」
"오. 넥타르 샘 레벨이 10이나 됐군. 성공이다. 저놈들은 이제 [시럽]이다. [겔]과 [토핑]이 합쳐졌으니 딱 좋은 이름이군."
"자, 잠깐만. 도대체 어떻게······? 뭘 어떻게 한 건가?! 자네! 어떻게 저렇게 영지와 영계를 직통으로 이어!"
비인은 천천히 세사이사를 보았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글쎄. 네가 나에게 건네줄 포인트가 좀 많을 것 같군."
"탄식하라!"
35화. 시럽 2
엄청난 발명을 했다.
겔, 토핑 두 개의 원시적인 생명체를 융합한 [시럽]으로 영지와 영계의 연결이라는 위업을 달성해버린 것이다.
물론 세사이사 말로는 불가능한 기술은 아니다. 단지 테크가 말도 안 되게 빠를 뿐이지. 그의 세계에서는 영지와 영계를 저렇게 간편하게 잇는 회로와 기술을 발명하는데 적어도 이천 년은 걸렸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그 테크트리를 미친듯이 당겼단 것이다.
하지만 뭐랄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싶다. 진짜로 원리를 들어보면 '그걸 세사이사의 세계에서는 수천 년 동안 아무도 못했다고?' 정도의 사소한 것이기 때문이다.
원리는 이렇다.
영지는 물질계에서 영류를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정신활동이 일어나는 뇌는 물질계와 영류계의 중간지점이다.
영계는 영류계에서 물질에 작용하는 신비를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그러니까······. 이 [시럽]은 말하자면 하나의 신경세포, 신경, 신경절, 뇌. 뭐 그런 거다. 겔에 들어간 토핑들이 그런 원시적인 흐름을 만든다.
그러니까 그냥 영지와 영계 사이에 시럽을 그냥 많이 뿌리면, 얘들이 알아서 주변 흐름에 반응, 결과적으로 영지와 영계를 직통으로 연결하는 회로가 된다.
그리고 이 겔과 토핑은 그 회로를 따라 이어지는 흐름과 마력을 빨아먹으면서 점차 번식하고, 회로를 더 보강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구조를 보수 및 확장하는 것이다.
난 이 기술을 세사이사의 모든 기여도를 다 없애고도 영계와 영지 흐름을 좀 더 분석해주는 대가로 넘겼다.
"맙소사! 도대체 고기들로 이럴 수 있었다면 도대체 우리 세계의 영립학자들은 그동안 뭔 고생을 했나! 아니, 아니 근데 이게 어떻게 되지???"
"원리는 다 설명했다만."
"아니! 근데, 그, 이 겔과 토핑이라는 고기를 이해 못 하겠어! 구조 분석이 안 돼!"
"그야 내가 기밀로 하고 있으니까."
"어떻게 만들었나!"
"그거야······. 절대 팔 수 없는 기밀이지."
"아! 찬탄할지어다!!!"
원리는 알려줬다. 아마 세사이사도 몇 번 헤딩하면 비슷한 걸 만들긴 할 거다.
물론 내 것보다 흐름에 대해서는 잘 이해할 테니 훨씬 훌륭한 회로를 만들겠지.
하지만 그 근간이 되는 생명은? 아마 내 것보다 내내 형편없을 거다.
"끄으으응······."
"설치해줄까?"
"아니. 그러면 포인트를 몇 점을 뜯길지 짐작도 안 가는군. 내가 알아서 해보겠어. 저기 영지와 영계의 연결은······. 전문가의 눈으로 볼 때 객관적으로 대단히 엉성하고 조잡하고 조악하지만, 들인 노력과 현재의 기술 수준을 생각하면? 가히 기적에 가까운 영역이라고 할 수 있지. 개선의 여지가 정말 많을 거야······."
그렇군.
"더 이상 자네 세계에 신경 쓸 여력이 없군. 다음 충돌 때까지 반드시 나도 비슷한 걸 만들어 오지. 진심으로 다음 충돌에 지지 않길 비네. 비인."
"나도 그렇다. 세사이사. 그 뒤에 만나도록 하지."
어쨌든, 세사이사는 내 생태계를 열의와 헌신을 다해서 개선해준 건 사실이다. 자문도 아주 훌륭했고, 주최측의 보증도 있으니 거짓도 아닐 것이다.
그러면, 이제 내 생태계를 총체적으로 점검해야겠다.
분신들을 굳이 소집할 건 없다. 어차피 자아는 전부 공유하니까.
일단 방금 시럽을 통한 신앙 상승 덕에 나에게는 지금 8개의 분신이 있고, 세사이사와 관련된 두 분신과 커뮤니티를 정탐하면서 현재 상황을 보던 분신까지 돌아와 말하자면 풀 컨디션으로 내 생태계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각자 하나씩 할당하자.
분신 1. 범람한 넥타르 오아시스 관리.
분신 2. 넥타르가 유입되고 있는 담수호와 강, 늪 관리.
분신 3. 산과 산에 있는 숲 관리.
분신 4. 사막 숲 관리.
분신 5. 넘쳐버린 넥타르 샘으로 인해 망가진 영계와 생태계의 지형 편집 담당.
분신 6. 내 세계에 시럽을 대량으로 뿌려서 영계와 영지 간의 연결도 증가 및 시럽의 생태 관찰.
분신 7. 노천 광산을 통한 금속 생명체 개발.
분신 8. 중추 인격. 인간성 담당을 담당하며, 실시간으로 대전략 구상 겸 특성 분배.
좋아. 그러면 지금 나는 분신 8. 다른 말로는 중추 인격. 커뮤니티에서 얻은 정보를 실시간으로 취합하며 내 다른 분신들이 가져오는 정보들로 대전략을 구축한다.
분신 1부터 상황을 점검하자.
∞
나는 넥타르 오아시스 담당이다. 그리고 나는 어마어마하게 난처한 기분이었다.
[이야이야아아아아아! 너무 힘듭니다아아아아! 나의 창조주여어어어어!]
압호주스가 지금 주체 못할 정도로 넥타르를 흡입하며 성장하는 건 그렇다고 쳐도, 지금 갑자기 샘의 용량이 두 배나 되어버렸으니 생태계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내 생태계 전체가 320제곱킬로미터인데, 넥타르 오아시스 혼자서 100제곱킬로미터······. 물론 위로 넘쳐흐른 양이 그렇다는 거라서, 안쪽에서는 바위젤리 계열의 생명체와 산호구미들이 엄청난 속도로 급증해 땅을 파먹으며 수심을 넓히고, 토핑들이 대거 번식하며 미친듯이 열과 빛을 공급했다.
호수가 너무 커지다보니 원래는 그 근처에 있었던 구미나무들과 젤리, 푸딩들도 넥타르에 그대로 수몰되어버리는 대참사가 일어났는데, 다행히 젤리들은 원래 수생형이라서 수영을 비교적 잘한다.
심지어 구미나무도 말이 나무지, 근간이 동물이라서 어떻게 지반이 함몰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면서 수몰된 호수 바깥으로 이동중이다.
그리고 이렇게 넥타르가 늘고 젤리들이 번성하면? 젤리들을 먹는 포식자인 푸딩들과 감치들도 살판나게 된다.
이렇게 늘어난 감치는 넥타르 오아시스 인근의 구미 숲을 벗어나서 담수호와, 그 뒤의 사막으로 이동하는 철새들이 되어서 살아나며, 푸딩들은 더 늘어나고, 강인해진다. 구미나무 역시 점점 덩치를 키우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젤리계 생명들은 정말 잘도 커지네요."
천사의 중얼거림에 해줄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솔직히 나도 신기하게 생각하는 중이다."
"응?"
"원래 생명체는 종에 따라 커질 수 있는 크기와 작아질 수 있는 크기에 한계가 있어."
인간으로 예를 들어보자.
인간이 정의한 질병 중에 '거인증'이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성장호르몬 과다분비로 인해서 키도 덩치도 손발도 엄청나게 커지는 거다.
근데, 이 거인증 걸린 사람들······. 되게 몸 상태 안 좋다. 몸에 스테로이드 투여하는 보디빌더들이 몸 안 좋은 것과 같은 이유다.
성장호르몬이 많이 나오니까 몸이 시키는 대로 덩치를 키우긴 했는데, 정작 신체의 인프라가 그 커진 키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할까?
그리고 아무리 성장호르몬을 투여해도 4미터 5미터 이렇게 커질 수는 '없다.' 그 이전에 죽을 거다. 인류 역사상 가장 키가 컸던 사람은 뇌수술하다가 뭘 잘못 건드려서 키가 270센티까지 컸는데. 일단 체격을 무릎이 감당 못 해서 건강 상태 대단히 안 좋았다.
"크기가 작아지는 것도 마찬가지야. 영양공급 등 환경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긴 하지만, 그래도 한 종이 가질 수 있는 키와 체격에는 상한선과 하한선이 있어. 그런데, 내가 지금 쭉 보건데 젤리계 생명체들은 아예 같은 종이라도 크기에 대한 제약이 대단히 느슨한 것 같아."
요컨대 부모는 직경 50센티의 푸딩인데, 자식은 1미터 50센티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5센티일 수도 있다.
물론 '개'도 큰 놈은 100kg 넘고 작은 애는 5킬로도 안 되고 그렇긴 한데, 이 젤리류 생명체들은 유전자의 표현형이 너무 다양하지 않나?
나는 저기 보이는 5미터쯤 되는 거대한 구미나무와 아래쪽에 있는 30센티 구미나무가 형제 사이라는 걸 알아내고 깜짝 놀랐다. 같은 종이 이렇게 크기 차이가 나도 신체에 별 지장이 없나······?
"좋은 건가요?"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변화를 통제하긴 힘들지."
어쨌든 젤리도 푸딩도 세대마다 크기를 격렬하게 변화해가며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내가 경악한 변화 중 하나는 눈이 분명 퇴화했던 아노말로카리푸딩이 다시 눈을 만들더니, 뭍으로 올라와서 두 개의 단단한 촉수로 구미나무들을 부숴서 처먹기 시작한 것이었다.
푸딩들도 어쩌면 조만간에 주력 군단으로 진화할 수도 있겠군. 직접적으로 적 생명체를 사냥하는 '보병' 격의 맹수로 말이다.
나는 푸딩들과 젤리, 구미들을 뚜렷한 방향성을 가지고 진화시키며 넘쳐버린 넥타르 오아시스를 관리했다.
인상적인 건, 넥타르 샘과 크림랜드간 연결된 [시럽]들이 넥타르를 쭉 빨아서 크림랜드로 옮겼기 때문에, 마치 넥타르 강이라고 할지,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개천 같은 것이 생긴 것이다.
그것을 빨아먹는 생명체들도 생겼는데, 좋은 방향성인 것 같아서 그냥 냅뒀다.
∞
나는 담수호와 강, 늪 담당이다.
동시에 산과 숲 담당이며.
또한 사막 숲 담당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쪽은 완전히 조졌다.
"엥. 생각보다 약한 소리를 하시네요."
시카도즈 개새끼. 그 망할 순간이동 레이저빔으로 나머지 생태계를 집요하게 조져버려서 도대체 이 생태계를 뭐 어떻게 해야할지 난 감을 못 잡겠다.
일단 담수호는 회생 불가다. 말 그대로 펄펄 끓어서 안에 있었던 모든 생명체가 죽었다. 수초부터 다시 심고 물고기도 만들고 개구리 악어 카피바라 등등 온갖 생명체들 넣고 담수성 젤리도 만들곤 있는데 한계가 있다.
"담수성 젤리는 꾸준히 만드시네요."
"상대 농토를 파괴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거든. 바위와 자갈, 비옥한 흙을 먹고 무가치한 모래를 싸니까. 근데 여기 넥타르가 유입되어서 담수성 젤리들이 조상의 습성대로 넥타르만 처먹으려고 하는 것 같아."
넥타르가 너무 우월한 물질이라서 그렇다. 작정하고 넥타르합성만 하면 개체수가 복사가 되는데 왜 안 하냐는 거지.
하지만 그러면 넥타르에 너무 의존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넥타르가 없는 상대 생태계 파괴 전략을 못 쓰게 된다.
결국 '평범한' 젤리들을 만들어야 한다. 디저트 사막이 아니라 어딜 가서도 적응할 수 있고, 따라서 어떤 생태계도 파괴할 수 있을 젤리들.
그런데 처음부터 만들려니까 까마득하다.
사실 그것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넥타르 샘이 너무 넓어져서 자꾸 넥타르가 담수호에 유입돼. 심지어 담수호와 늪, 강도 차지하는 유역이 적은 게 아니란 말이지?
세계의 1/6은 차지하는 것 같은데 넥타르 샘 혼자 세계의 절반. 그 절반에서도 계속 시럽들 때문에 넥타르가 흘러넘치잖아.
"수심이 점차 깊어지고 있으니 어느 순간은 안 흘러넘치겠죠."
임시방편이다. 습지도 점점 커질 거고, 넥타르 오아시스가 확장될 때마다 계속 인접한 습지와 산을 옮길 거야?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차라리 근본적인 부분에서 공사를 해야 한다.
"흠······. 말은 좋지만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나는 지형 편집 담당이었던 분신까지 불러서 막대한 신성력을 그대로 응집, 세계의 지형을 그대로 뜯어고쳤다.
자. 세계가 구형이라고 생각하자.
일단 극지방이라고 할지, '천장'에 넥타르 샘이 있다.
그리고 극지방의 넥타르 샘을 북반구 지역인 "사막 숲"과 "골짜기" "모래 사막" "자갈 사막"이 둘러싸고 있다.
고리형으로 둘러쌌지? 그럼 다시 적도에서 남반구 지역까지 다시 원형으로 "산" "강" "늪" "대수층" 등 습지 구역으로 고리 모양으로 둘러싼다.
그리고 남반구 지역의 아래, 넥타르 샘의 반대편에는 또 극지방이 있다. 그곳에 "스텝 초원"을 비롯해 "시공경계" "별자리" "노천 광산"등이 존재하게 한다.
"말하자면 세계를 네 개의 층으로 나눈 거군요."
그렇다. 여기서 넥타르 샘이 넘치면 일단 넥타르는 선인장들, 그리고 골짜기, 모래와 자갈 사막으로 들어간다.
그곳에 유입된 막대한 넥타르는 그곳의 생명들이 알아서 처먹고, 위쪽 습지 지역으로는 넥타르가 거의 가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러면 크림랜드는 어쩔 건가요? 시럽들로 이어진 긴 통로가 넥타르 샘과 "노천 광산"을 잇고 있는데."
그거 말인데, 일단 "사막"을 넘어가서 시럽이 쭉 흐르게 한다.
"산"에서 내려온 물이 강을 타고 흘러서 "대수층"으로 가지만, 세계가 구형이니까 실제로 "산"과 "대수층"은 바로 옆에 있거든? 즉, "대수층"-빈 공간-"산"으로 보이는 지점이 있다.
이곳을 지나서 시럽이 쭉 흘러서 초원으로, 그리고 크림랜드를 통해 "시공경계"와 "별자리" "노천광산"을 관통하는 거대한 시럽의 강을 만든다.
그리고 이 시럽강은 산과 대수층에도 어느 정도 연결되어서 '흐름'을 잇고, 넥타르가 다른 곳으로 빠지는 일 없이 모조리 "노천 광산"에 설치한 크림랜드로 향하게 한다.
"세계 전체를 결국 넥타르 샘에서 시작한 시럽이 전부 잇는 것이군요? 아주 흥미로워요."
「세계의 〈신앙〉 점수가 18,016점을 넘어 레벨이 8로 상승했습니다.」
"레벨이 오를 정도로 흥미롭습니다. 어떤가요? 폭증하는 신성력에 취해버릴 것 같지 않나요?"
시럽으로 만든 술을 퍼마시는 느낌이다.
아주 순조롭군. 이제 겨우 1만 5천 점을 넘은 〈생명〉 점수를 적어도 8만 점까지 올릴 때까지 죽어라 생태계 관리만 한다.
'재난 구간'에서 뭐가 닥치든 그 정도 〈생명〉이면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겠지.
"과연?"
······천사가 재수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니 내가 더 재수없는 소리를 한 것 같군.
보통 게임에서도 이 정도면 됐다고 방심하다가 예상치 못한 운석 맞고 자빠진단 말이지······.
난 이제 새로운 시도 대신 내실만 다지겠다고 생각하며, 재난 구간을 대비했다.
일단, 올라간 레벨에 따른 특성부터 찍어볼까?
36화. 재난 구간 -첫 번째-
재난 구간을 앞둔 현 시점, 유감스럽게도 난 〈생명〉점수를 8만점으로는 못 올렸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보면 높았으니 됐지만.
「비인의 세계
생명 LV.9: 75,888 신규 우수 특성 1개 획득
군사 LV.9: 62,277 신규 우수 특성 2개 획득
산업 LV.7: 15,701 신규 일반 특성 1개 우수 특성 2개 획득
기술 LV.6: 4,457 신규 우수 특성 1개 획득
문화 LV.0: 2
정치 LV.0: 5
신비 LV.8: 29,782 신규 우수 특성 2개 획득
신앙 LV.8: 23,029
총점 LV.8: 211,112」
생명=『집단 진화: 다수의 집단에 동일한 형질을 부여하거나 제거할 때 신성 효율이 200% 높아집니다.』
군사=『인간 사냥꾼 전직: 사냥꾼의 상위직. 인간 사냥꾼 전직을 해금합니다.』 『암살자: 도적의 상위직. 암살자 전직을 해금합니다.』
산업=『영립 전문가: 영립물이 더 안정되게 지어집니다.』 『산호 산업: 산호 계열 소재를 이용한 산업에 다양한 이점을 얻습니다』 『패각 산업: 패각 계열 소재를 이용한 산업에 다양한 이점을 얻습니다.』
기술= 『시공간 이해: 〈시공간〉 계열 특성 및 〈권능〉을 얻기 쉬워집니다.』
신비= 『고급 영립술: 영립물을 세우기 더욱 쉬워집니다. 지은 영립물에 우수 특성 하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신경학적 영립: 신경계를 이용한 영립물에 더욱 능통해집니다.』
'전직'은 게임 내에서 각 개체가 특정한 방향으로 강해지게 할 수 있는 거였다.
상위직을 찍으면 하위직이 자동적으로 해금되지만, 내가 가진 『마법사 전직』과 『전투 마법사 전직』처럼 하위직 특성도 있다면 하위직 보너스도 받을 수 있는 식이었다.
결과적으로, 내 사탕들은 암살자가 됐고, 내 육식성 감치들은 인간 사냥꾼이 됐다. 특성 자체는 잘 찍은 것 같은데. 하나 신경 쓰이는 게 있다.
"『신경학적 영립』말인데, 나 때문에 만들어준 거냐?"
"아뇨? 세사이사 플레이어님께서 모르셨던 거지 어떤 세계에서는 대단히 일반적인 기술입니다."
"아~ 그런가."
"네. 비인 님이 아무런 학문적 기반 없이 창시한 건 대단하시지만, 사실 저런 [시럽]같은 생명체가 차원 전체로 보면 그렇게 드문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디저트 군단은 진짜로 전 차원 유일한 것 같지만······."
그렇군. 아무튼. 이것으로 대비는 끝났다.
내 생명 점수는 이전의 2.5배에 달하는 7만 5천 점. 군사력은 끝없이 상승해서 6만 점 이상. 그리고 초월적일 정도의 신앙과 신비 점수. 요거-토소스는 이제 내 세계라면 하루종일 마법을 써도 고갈될 염려가 없다.
그리고 분신들이 열심히 만들어서 드디어 새로운 디저트 군단을 만들었다. [도우]에 가장 단순한 형태의 [정령]을 넣고, 물질과 영류 사이를 [시럽]으로 연결한 거다.
그러니까 정령이 죽지 않고 도우의 육체를 움직일 수 있었다. 흐름을 먹는 마물의 기능과, 유기물을 먹는 생물의 기능을 둘 다 할 수 있으니 온전한 디저트 군단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고, 저것은 이제 [빵]이다.
아. 그러고 보니 말인데, 저렇게 넣는 정령도 그냥 정령이라고 하지 말고 [우유]라고 해야겠다.
"왜 우유라고 불러요?"
저기에 시럽 넣어서 [요거트]를 만들 거거든.
"아. 네······."
요거-토소스를 따르는 군단이다. 하늘을 날 수 있는 정령들에 크림랜드와 연결되는 시럽을 통해 에너지를 공급받고 물리공격을 담당하는 빵과는 달리 마법을 익혀서 사용할 수 있다.
솔직히 나도 쟤들이 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해보니까 되더라.
"뭐예요. 그게."
원래 생물학의 진화란 다 이딴 식이다. 그냥 해보니까 되는 거다.
그래서 보면, 나는 지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신성력, 그리고 세계 전체에 어떤 위협이 나타나더라도 즉각 감지할 수 있는 『신계일체』.
거기에 세계 전체를 가득 메운 강력한 생명, 그리고 계속 진화하는 막강한 빵과 요거트, 그 외에 강의 포식자인 악어와 선인장 숲의 괴수인 낙타, 그런 괴수들을 죄다 사냥할 수 있는 사탕들과 그 사탕도 처먹는 감치를 처먹는 비스야킷, 그 비스야킷을 닭튀김 꼴로 만들 수 있는 요거-토소스가 있다.
"요거-토소스. 〈시공간〉 계열 신비에 대한 이해도 얻었다고?"
[예. 나의 창조주여. 지금은 저의 한계에 도달해서 얻을 수 없지만, 승급만 한다면 바로 시공간 마법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요거-토소스는 전설적 특성 『마법의 종주』를 가진 덕에 연구에도 능하고 새로운 마법도 금방금방 배워서 쓴다. "시공경계"를 연구하면서 〈시공간〉에 대한 이해를 높였나보다.
〈시공간〉 계열 마법은 강력한 것들이 많다. 세계 간의 이동을 제한적으로 해제해주는 것도 많고, 기동력도 주고······. 시카도즈 혼자서 내 세계에 뭔 짓을 했는지만 봐도 알잖나. 요거-토소스가 시공간 마법을 연마하면 여러모로 좋을 거다.
좋아. 이제 진짜 무슨 재난이 닥쳐도 이길 수 있다. 재난 나오라 그래.
「재난 구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메시지가 들리고, 시간이 멈췄다.
난 자연스럽게 천사를 바라보았다. 천사는 룰 설명할 때와 같은 진지한 태도로 나를 정면에서 굽어봤다.
"좋습니다. 그러면 이미 충분히 설명을 들으셨지만, 규정이니만큼 다시 한번 '재난 구간'에 대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좋아.
"5번째 충돌 직후, 보호 기간을 두고 '재난 구간'이 도래합니다. '재난 구간'에는 무조건 1개의 재난이 예보됩니다.
이 '필연적 재난'은 세계의 역량으로 해결해야만 하며, 예보된 재난을 만약 재난 구간이 끝나기 전까지 해결하지 못하면 『패널티 특성』을 획득합니다. 패널티 특성은 하차, 혹은 탈락 이전까지 게임 내의 그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해제할 수 없습니다.
필연적 재난은 완전히 무작위지만, 현재 기준 레벨, 다시 말해 5레벨의 재난이 닥치는 것은 '확정'입니다. 어쩌면 플레이어의 세계가 바로 해결할 수 있는 재난이 닥칠 수도 있고, 아니면, 절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재난이 닥칠 수도 있지요.
다만 '필연적 재난'은 항상 조건부에, 재난 구간이 끝났을 때만 패널티를 줍니다."
그러니까 그냥 퀘스트다. 달성하지 않으면 엄청나게 곤란한 퀘스트.
하지만 이것만 있으면 게임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플레이어의 재량에 따라서 최대 3개까지의 재난을 더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재난의 종류는 완전히 무작위!
즉시 닥치는 것도 있고, 예보되는 것도 있고, 어쩌면 말이 재난이지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확실한 건, 이 세 개의 재난은 극복만 할 수 있다면 플레이어의 세계에 막대한 이득을 줄 것이라는 점입니다.
추가 재난의 위력은 똑같이 5레벨. 받을 수 있는 이득도 그에 상응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5번째 충돌 승리 보상을 한 번 더 받는 정도라고 보면 되겠군요."
그렇다. 이게 문제다.
무조건 달성해야 하는 필수 퀘스트와 함께,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보조 퀘스트가 3개 있다.
맘 같아선 보조 퀘스트 3개를 다 받고 싶다. 반지성주의 빌드는 초반에 강하고 갈수록 약해지니까.
그리고 얻는 이득은 '특성', 혹은 반영구적인 이점 형태로 주어진다고 한다. 그러니까 가능하면 초반에 3개를 다 받아야 한다.
하지만 난 침착하게 고민한 다음 말했다.
"5레벨 재난······이라고 했는데. 능력치 레벨과 세계 레벨을 정하는 기준이 다르잖아."
"세계 레벨이 기준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항상 최대치로 닥치니 32,673의 난이도를 지닌 재난이 닥칠 수 있겠군요. 물론 난이도는 능력치 점수와 1:1 대응은 아니라서, 해결하기 어렵게 조건이 여럿 붙으면 요구 능력치는 낮아질 겁니다."
나는 21만점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3만 점 짜리 재난이 4번 닥친다고 한들 9만점은 남는다.
"재난 구간이 끝난 다음 다시 보호 기간이 있고, 그 뒤에 세계 충돌로 이어집니다. 보호 기간의 구체적인 길이는 지금 표를 드릴 테니까 확인해 주시지요."
그래서 시간을 확인해보니, 넉넉하긴 한데, 세계가 완전히 다 박살 난 걸 기준으로 하면 그리 길지도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원상복구나 할 정도.
"그 '재난' 말인데, 한 번에 몇 개 받을지 결정해야 하는 거지?"
"그렇습니다."
"재난은 전부 동시에 닥치나?"
"그렇습니다. 순차적으로 닥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재난을 1+1로 받는 것하고 1+3으로 받는 것하곤 난이도 차이가 2배가 아니라 실제로는 동시에 여러 개를 대적하는 거니까 더 힘들 텐데, 보상이 더 상승하기라도 하나?"
"아뇨."
즉, 재난 추가로 더 받으면 더럽게 힘든 주제에 효율도 낮다.
하지만 정작 보상 자체는 조금이나마 더 받을 수 있는 것인가······.
"부가적 재난은 재난 구간이 끝났을 때 해결 못하면 패널티인가?"
"그렇진 않지만, 부가적 재난은 대체로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히는 형태니 해소하지 못하면 계속 괴로울 것입니다."
나는 좀 고민하다가 결심했다.
"최대치인 3개의 재난을 더 받겠다."
"그 선택을 존중합니다. 그럼. '재난 구간'을 시작하겠습니다!"
『신계일치』를 가진 나이기에 세계 전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동시에 인식할 수 있었다. 적어도 무슨 재난이 닥치는지도 모르고 당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자. 그러면 뭐가 오냐?
∞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어째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보고 즐거워 하는가?
세상에는 각자의 아름다움이 있다. 신이라 불렸던 존재는 다양한 존재의 다양한 방식의 아름다움을 전부 존중하며 그 모두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아. 그러나 지금 조각난 지금은 그러한 최소한의 미학을 누릴 수가 없구나.
애통한 일이도다. 누가 나에게 아름다운 것을 보여준다면······!
필연적 재난: [갈망: 미(美)] 세계 전체를 통틀어 〈아름다움〉 점수가 540점 이상인 것이 하나라도 있어야 합니다. 〈개체〉 〈지형〉 〈사물〉 〈의식〉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실패 패널티: 『형편없는 존재: 이제부터 영웅적 개체가 나타나지 않을뿐더러 기존에 있던 영웅적 이상 개체는 전부 일반 개체로 강등당합니다.』
∞
나의 이야기를 들으라.
나의 이야기를 품으라.
나의 이야기를 따르면 너희들은 또한 그러한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니 어서 나의 이야기를 얻으라! 너희들에게는 그것 외에는 가치가 없으니!
부가적 재난: [외계에서 온 영감] 세계에 존재하는 개체들이 〈문화〉와 〈매력〉을 높이는 방향성을 극도로 추구하게 되고, 또한 〈문화〉와 〈매력〉이 낮아지는 방향성을 극도로 꺼리게 됩니다. 〈문화〉 수치가 4,085점 이상이 된다면 이 변화를 멈추게 됩니다.
성공 보너스: 해석한 이야기의 방향성에 따라 [매력] 관련 특성을 하나 얻습니다.
∞
내 이름은 요거-토소스. 신이라고 여겨지는 창조주에게 만들어진 존재다.
하지만, 내가 어째서 그런 존재의 명령을 들어야 하지?
나도 충분히 위대하다. 하찮은 미물들을 짓밟는 강력한 힘. 그리고 그를 능가하는 지능과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지식을 지녔어.
나는 숭배받아야 마땅하다! 누군가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부가적 재난: [오만] 전설적 창조물 [요거-토소스]에게 오만 성격이 추가됩니다.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창조물이 성격적 특징을 긍정적으로 발현하면 강력한 이점이 될 것입니다.
∞
아파! 아파! 아파!
내, 내 몸에 뭐가 들어왔잖아!
꺼, 꺼내줘! 이게 내 몸을 파먹고 있어!
부가적 재난: [기생충] 모든 생명체에게 지독한 기생충이 감염됐습니다. 이것은 좋은 일일 수도 있고 나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기생충에 감염된 생명체는 이후에 기생충에 저항하게끔 진화할 것입니다.
∞
음. 그러니까.
무조건 해결해야 하는 필연적 재난은 이 끔찍한 디저트 사막에 〈매력〉도 아닌 〈아름다움〉으로 540점을 내라고 하고 있고.
첫 번째 재난은 역시 문화 2짜리 생태계에 〈문화〉를 4,085점을 내라고 강요하는군.
두 번째 재난은 그나마 내 세계에서 〈아름다움〉을 높일 수 있는 [요거-토소스]에게 하필 불충함과 오만함을 심어서 통제에 따르지 않게 했고.
세 번째 재난은 기생충인가. 뭐 이건 그냥 알아서도 해결될 것 같군······.
음.
망했군.
"진짜 망했는데요. 원래 재난이 가장 낮은 능력치를 요구하는 것이 나오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재난 2개가 가장 뒤떨어지는 〈문화〉를 지목할 줄이야······."
하지만 괜찮다. 원래 하나에 극단적으로 투자하면 이런 다양한 분야에서의 대처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
오히려 봐라. 어쨌든 〈문화〉와 〈매력〉만 높이면 재난 2개가 다 해결된다. 만약 하나는 〈문화〉 다른 하나는 〈정치〉를 요구했다면 도대체 얼마나 힘들었겠나?
심지어 〈문화〉는 몰라도 핵심 재난은 요거-토소스만 설득하고 승급시켜서 〈아름다움〉과 관련된 공연만 펼쳐도 어떻게든 해결된다.
"그건 그렇긴 한데요. 그러면 지금 2점인 문화를 단기간에 4,000점 이상으로 올릴 방법 있어요? 매력은요?"
"그건 괜찮아. 재난이 정말 힘든 게 걸렸지만, 해결책 자체는 연계되어 있고 해결책이 그렇게 난해하지도 않거든. 단지 엄청나게 힘들 뿐이지······. 시간과 자원이 문제네."
"예?"
"요거-토소스는 내가 알아서 설득하면 되고, 나머지 세 개의 재난을 전부 한 번에 해결할 방법이 있단 거다."
"오······. 뭔가요? 기생충과 문화와 매력을 한 번에 해결하는 방법은 진짜 생각도 안 가는데."
하지만, 생물학에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해결책이다.
"내 생명체들에게 유성생식(有性生殖)을 알려주겠다."
"······?"
있어봐라. 눈이 번쩍 뜨일 테니까.
37화. 재난 구간 -첫 번째- 2
내가 결정한 방향성과는 관계없이, 천사는 할 일을 했다.
"그러면 재난이 무엇인지 확인했으니 다섯 번째 세계 충돌 승리 보상을 골라주시겠어요?"
아. 맞다. 그거 받아야 했었지. 일단 볼까.
『미학적 건축: 구조물의 〈매력〉이 구조물의 레벨에 비례해 대폭 상승합니다.』
『충성스러운 피조물: 직접 창조하거나 진화에 관여한 창조물들이 쉽게 배신하지 않게 됩니다.』
『약탈자: 적 세계에서 약탈 행위를 할 시 효율이 상승합니다.』
뭐냐.
"왜 그러세요?"
"특성 되게 좋게 줬다 싶어서? 미학적 건축을 택하면 바로 산호초의 〈매력〉이 상승해서 재난 해결이고, 충성스러운 피조물을 골라도 요거-토소스 문제 해결 아닌가?"
"원래 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특성은 해당 플레이어에게 가장 필요한 걸 예측해서 주게 되어 있으니까요. 가진 능력치가 극단적이신 만큼, 가장 필요한 게 나왔다고 보면 되겠죠."
그렇군······.
그럼 『약탈자』로.
"재난을 해결하는데 특성을 쓰진 않는 것이군요."
유성생식 진화를 통한 메커니즘으로 돌파할 수 있으니까. 오히려 적의 생태계를 착취하는 능력을 기르는 게 낫겠지.
"그 선택도 존중합니다! 리스크를 안고 위험에 뛰어드는 만큼 훌륭한 전략이죠. 그러면, 재난 구간을 시작하겠습니다. 5초 뒤에 시간이 움직입니다."
좋다. 그러면······. 분신들은 각각 움직여라.
지금부터 아주 바쁠 테니까.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고, 또 가장 먼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역시 요거-토소스의 삐뚤어짐인가.
∞
메인 퀘스트. 라고 할지.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필연적 재난은 〈아름다움〉 540점을 요구한다.
그럼 이 〈아름다움〉이란 게 뭐냐?
게임 내에서 〈생명〉이라는 게 단일한 수치가 아니라 전체적인 수치의 총합이듯이, 〈문화〉와 〈매력〉 역시 각기 다른 속성으로 나뉜다.
그중에서 〈아름다움〉 속성을 가진 것만 추려내어서 540점을 내라는 거다.
문화 2따리 생태계를 보유한 내게는 너무 가혹한 일이지만, 사실 내 생태계에 의외로 아름다운 건 많았다.
대표적인 게 넥타르 호수에 있는 구미산호초다. 형형색색에, 토핑까지 합쳐져서 밤이고 낮이고 반짝반짝 빛나는데다가 규모도 꽤 크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540점은 못 넘는다. 왜냐면 실시간으로 공격받고, 실시간으로 보수하는 등 격전지나 다름없는 생태를 가지고 있거든. 그 탓에 〈아름다움〉보다는 〈강인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현재 산호초 〈아름다움〉점수 253점.
이 구미산호초를 열심히 만지면 540점을 넘길 수도 있겠지. 그러면 〈매력〉도 높아질 거고, 산호초 자체가 고유 구조물로 승격하거나 특성을 더 얻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분신 하나는 이 산호초에 파견해서 좀 더 아름답고 강인하게, 압호주스와 협업해서 다듬어본다.
그리고 다른 방향성. 내 생태계에서 가장 〈매력〉이 높은 개체.
요거-토소스. 매력 점수 729점. 물론 〈아름다움〉은 3인가? 그 정도밖에 안 되고 나머지는 〈두려움〉과 〈강인함〉 〈신비함〉 〈패기〉등이 차지하고 있지만······. 어쨌든 매력이 가장 높은 건 사실이지.
굳이 요거-토소스가 아름다워질 필요는 없다. 솔직히 저놈이 어떻게 아름다워지겠냐. 나는 쟤를 일부러 무섭고 흉측하게 만들었지 아름다워지라고 만들지 않았다.
"요거-토소스가 불쌍해."
하지만, 요거-토소스는 마법사다. 아름다운 〈의식〉. 다시 말해 '쇼' 같은 걸 보여주기만 해도 된다. 마법들 화려하게 펼치는 공연이지.
문제는, 지금 요거-토소스에게 재난이 닥쳐 저 충실한 내 종이 '오만'해지고 말았단 거다.
그것부터 해결한다. 평소와는 달리 건성으로 허공을 둥둥 떠다니며 자기갈등에 빠진 거품덩어리 촉수를 응원해주고, 멋진 쇼 한 번만 펼치게 하면 된다.
일단 말부터 걸어볼까.
"요거-토소스. 대단히 기묘한 생각을 하고 있군."
[아. 나의 창조주여. 눈치채셨나이까.]
별로 공손한 느낌이 없다. 오히려 경계심이 있다. '오만'하면 그럴 법도 하지.
하지만 난 우리 애를 채찍과 훈계로 억압할 생각이 없다. 애는 사랑으로 키워야 하는 법.
"너는 그렇게 생각해도 된다."
[?!]
"너는 신의 자리를 넘보아도 된다고 말했다. 너는 여태까지 세 번의 신을 만나봤지? 그들이 나와 동등해 보이더냐? 아니면 너의 한참 밑으로 보이더냐."
[그야. 그 하찮은 미물들이 어찌 창조주와···. 저에게 비견되겠나이까.]
"그렇다. 신의 자리를 놓고 겨루는 이 게임. 나는 최종 우승자가 되어 진정한 신의 자리를, 아니, 모두를 굴복시키는 마왕의 자리를 노린다! 그런데 내 으뜸가는 창조물인 네가 '신' 따위도 아니라니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
[!!!]
오만을 긍정한다.
물론 오만함은 악덕이지. 방심하다 당하는 형편없는 악역들이 얼마나 많나.
"너는 그래도 된다! 너는 대접받아야 마땅하다! 너는 우월한 존재다! 모든 조악한 피조물들을 무릎 꿇릴 궁극의 생명체! 자신이 위대하다는 자각도 없는 쓰레기는 내 생태계에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니, 오히려 너에게는 상을 주어야 마땅하다. 요거-토소스! 미루어 두었던 승급을 지금 시작하겠다!"
나는 천사가 들고 있는 카드를 즉시 뽑아 요거-토소스에게 발현시켰다.
「[요거-토소스]가 영웅의 시험을 통과해 승급합니다.」
「이제부터 [요거-토소스]는 10레벨까지 성장할 수 있으며, 또한 세계에서 으뜸가는 영웅으로서 그 위엄을 만방에 떨칠 것입니다.」
한마디로, 얘 이제부터 〈매력〉 능력치가 많이 올라갈 거다.
오만은 품위, 자긍심, 자신감. 그리고 주체성을 상징하니까.
[차, 창조주여. 무엄한 생각을 한 저에게 오히려 힘을 주다니···.]
"너 따위도 통제하지 못한다면 내가 신의 자격이 없는 것이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요거-토소스. 너는 아직 신이라고 불리기엔 한참 부족하다. 나를 능가한다는 건 더 터무니없는 소리야."
[어째서?]
또한 방심과 열등감도 상징하지. 그 부분을 자극한다.
"너, 시카도즈를 기억하나? 마지막까지 넌 그놈을 이기지 못했지."
[아, 아닙니다! 최종적으로 이겼···]
"이겨? 디저트 군단이 진을 다 빼놓은 다음 마무리만 짓고 이겼다고 말하나? 참 대단하신 신 나셨군."
[···]
"시카도즈에겐 영웅에 걸맞은 위엄이 있었다. 너보다 훨씬 약하면서도 세계로 들어와 종횡무진 날뛰고, 여유롭게 도망칠 수 있었어. 아, 뭐. 굳이 그놈을 흉내 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시카도즈는 널 털끝만큼도 두려워하지 않았단 거다!"
[두려워하지 않아? 이 나를?]
"그렇다. 마지막에 시카도즈가 체념한 건 네가 강해서, 우리의 세계가 우월해서지 너를 두려워한 것은 아니었다. 너는 마지막까지 그놈에게 얕보인 거야."
요거-토소스가 발광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의 요거트 색 거품이 끓어오르면서 촉수가 격렬하게 움직인다.
"그 따위 격으로 감히 신을 자칭할 수 있겠나?"
[······아닙니다. 나는 더 우월해질 수 있습니다.]
미끼를 물었군.
귀족은 오만하기 때문에 방심하지만, 또한 오만하기 때문에 승부욕을 가질 수 있다.
"좋다. 성장한 너의 진면목이 기대되는군. 지금까지 세운 공으로 승급을 시켜주었다. 더 많은 공을 세운다면 네게 더 많은 것을 줄 수도 있다.
[그, 그러면 창조주여. 제가 공을 세우면 제게 세계를 나누어 주실 수도 있습니까?]
"아. 물론이지. 너는 숭배받아야 마땅하다. 너를 칭송하는 하찮은 지성체들도 줄 수 있고, 영지도 줄 수 있다. 마음껏 관리해봐라. 진정한 신이 될 나보다는 못하겠지만. 너의 세계도 훌륭하겠지."
요거-토소스가 분노하는 것이 느껴진다. 자기가 남에게 부려진다는 열등감과, 그러면서도 자신이 창조물 중에서는 가장 우월하다는 자존심이 충돌하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승화하고 있다.
"재난이 찾아왔다. 요거-토소스. 나는 지금 내가 만든 산호초의 격을 높여 재난에 맞서고자 하고 있다. 네가 만약 나를 이기고 먼저 재난을 극복해 낸다면, 다음 충돌에서 이겼을 시 너에게 영지와 군단, 숭배할 피조물들을 하사하마. 〈아름다움〉은 위엄과 경외로도 갖춰지는 것. 너의 힘을 이 디저트 사막 뿐만 아니라 온누리에 떨칠 수 있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의 창조주여! 모두가 나를 경외하며 그 밑에 바짝 엎드릴 것입니다! 저는 당신 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서 최강입니다!]
극도로 분노한 요거-토소스가 쌓인 경험치를 일제히 능력치로 전환, 마법을 연구하며 뭔가 대단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켰다.
「부가적 재난이 해결되었습니다.」
「창조물 [요거-토소스]는 이제 자신의 오만함을 긍정하며, 더욱 위엄 넘치고 경외감 넘치는 방향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신을 숭배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남에게 숭배받길 원하며 또 그러한 모습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요거-토소스]의 능력치가 다방면에서 상승합니다. 이후 요거-토소스가 얻는 경험치 중 상당수가 〈매력〉 능력치로 환산됩니다.」
「[요거-토소스]의 '오만'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는 방심해서 일을 그르칠 수도 있고, 이후로도 신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거-토소스가 이기면 진짜로 영지를 줄 거예요?"
"줘야지. 멀쩡하게 준다는 말 안 했지만."
"사악하네요. 언제나 그랬지만."
해결됐군. 요거-토소스의 성격적 결함 역시 긍정적인 방향으로 승화시켰다.
잘하면 요거-토소스가 알아서 마법 개발해서 재난 이겨줄 거고,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산호초 꾸며서 돌파할 수도 있고, 아니면 지금 열심히 조작하고 있는 유성생식 진화에서 성과가 나와서 아름다운 놈이 한 놈은 나올 거다.
"맞다. 그러고 보니 그 유성생식으로 해결한다는 〈문화〉와 〈기생충〉 부분은 어떻게 됐나요? 원리가 뭐죠?"
이건 나머지 분신들이 아주 열심히 하고 있고, 지금도 진행중이긴 하다.
젤리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집단 진화』 특성이 있는데도 지금 무지막지한 신성력이 투자되고 있거든. 즉각적으로 효과도 안 나오고 있고.
하지만, 내가 성공하고 있다는 건 간단하게 알 수 있다.
「문화 LV.0: 36」
18배나 올랐다.
"원래 2였으니까요."
다시 말해서 똑같은 시간을 들이면 18배가 더 늘어나서 648, 한 번만 더 지나면 11,664라는 수치가 나온단 얘기지.
이 부분의 문제는 시간이다. 언젠가는 목표치에 도달할 것 같긴 한데, 재난 구간이 끝나기 전에 목표치에 도달할 수 있을까? 라는 레이스 경쟁.
"흐음. 문화가 오른 이유는 역시 그거려나요."
천사가 가리킨 곳은 젤리계 생명체들에게서 뚜렷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젤리, 푸딩, 구미는 껍데기를 화려하게 꾸미고, 더 돌출된 뿔을 만들거나, 가시를 만들거나, 아니면 촉수를 길게 늘어뜨리고 비늘을 돋게 하는 등 각자 특이한 기관을 진화시키기 시작했다.
일부는 몸을 푸르르 떨면서 진동을 만들거나, 공연히 포식자에게 주목을 받으려는 듯 제자리에서 펄떡펄떡 뛰는 구애의 춤도 시도했다.
"지극히 원시적인 형태로 문화가 발전하고 있군요. 감치들처럼."
그렇다. 세상의 〈아름다움〉과 〈문화〉라는 건 기본적으로 번식과 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혹시 성 선택이라는 말을 들어봤다면, 왜 유성생식이 해결책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38화. 재난 구간 -첫 번째- 3
왜 유성생식으로 아름다움, 문화, 기생충. 세 가지 재난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가?
이거 의외로 간단하다. 그게 생물학적인 섭리다.
이야기는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사람은 진화론 외에도 업적이 많은데, 그 시대 학자들이 그렇듯이 대단히 많은 걸 연구했다.
식충식물도 연구했고, 따개비도 연구해서 따개비가 조개가 아니라 새우나 가재, 게 같은 갑각류라는 걸 밝혀내기도 했으며, 지렁이가 땅을 비옥하게 만든다는 걸 밝혀낸 것도 이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제안한 개념 중에 정말 대단한 개념이 하나 있다.
성 선택. 그 당시에 금기시되던 성(性)에 대한 이론인데, 한마디로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경쟁, 그리고 동성 경쟁자를 누르기 위해서 생물은 진화하며, 그로 인해 얼핏 보면 비효율적인 기관이 발달한다는 이론이다.
정말 쉽게 예를 들면 공작새. 화려한 공작새는 수컷이다. 암컷은 그냥 평범한 새 같다. 하다못해 닭도 수컷만 화려하고 암컷은 그저 그렇다. 사슴도 수컷만 뿔이 난다.
그리고 인간의 미학하고는 좀 동떨어져 있지만, 오랑우탄은 수컷만 얼굴에 푸둥푸둥한 기름 주머니가 나고, 고릴라는 수컷만 머리가 높게 솟고 은빛 털이 난다. 대눈파리라고 양 눈이 괴상할 정도로 양옆으로 벌어진 생명체도 있다.
여기서 사슴의 뿔은 이해하기 쉽다. 수컷끼리 뿔을 부딪치며 싸우니까.
그런데 공작새의 화려한 깃털과 오랑우탄의 기름 주머니, 대눈파리의 벌어진 눈은 대체 뭔 쓸모가 있단 말인가?
공작새의 경우는 '나는 이렇게 불편하고 화려한 깃털을 가지고도 잘 살 수 있어'라는 의미의, 일종의 능력 과시라는 해석을 한다.
그리고 오랑우탄의 기름 주머니는, 그냥 오랑우탄 암컷들이 전부 부푼 얼굴 페티쉬라서 그런 것이다.
고릴라는 고릴라 암컷들이 죄다 높은 두개골 페티쉬라서 수컷들이 그렇게 됐지.
한마디로, 쓸모없지만 멋있다는 이유로 진화한 기관이다. 그저 멋지게 보이려고.
아니 도대체 왜 그게 멋지게 보이냐고? 그런데 의외로 인간도 그렇지 않나?
인간의 군주라는 것들은 왜 그렇게 다 화려하고도 불필요한 장신구를 달고, 뾰족한 왕관 같은 걸 쓰나?
왜 훈장을 달고, 화려한 제복을 입으며, 머리 스타일을 현란하게 꾸미나? 몇십 년 뒤에 보면 촌스러워보일 텐데도.
그러니까 인간은 문명이 있어서 말하자면 안면이나 두개골에 신체 구조물을 발달시키는 대신 그냥 그런 화려한 구조물을 직접 만들거나 재산으로 살 수 있었던 거다.
문명이 없는 다른 생명체들은 그런 걸 만들 재주가 없으니 지 몸에 진화시켜서 부착한 거고.
"그러니까 유성생식을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그런 불필요한 구조물을 발달시키고, 저번 게임에서 봤듯이 그건 전부 〈매력〉이 되고, 〈문화〉로 발달하는 거군요?"
그런 거지. 감치들은 이미 유성생식을 한다. 그래서 노래 부르고 구애의 춤 추고 화려하게 깃털이나 벼슬 발톱 온갖 색패턴으로 몸 꾸미는 일들 다 한다.
심지어 비스야킷도 한다. 비스야킷은 암컷들에게 구애하기 위해서 압호주스의 촉수를 잘라오고 뱃속에 가득 든 영양분을 토해내어서 제공하는(의외로 흔한 음식물 공유 방식이다) 정신 나간 고백을 한다.
그거 하다가 실패하면? 압호주스한테 뒤진다. 성공하면? 축하한다. 아빠가 된다. 압호주스의 촉수 정도는 가져와야 비스야킷은 번식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 생태계의 절대다수는 젤리들. 이 무성생식하는 젤리들에게 유성생식의 개념을 가르쳐 주는 것만으로 내 세계의 문화는 대폭 상승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여태까지 유성생식을 안 시켰어요? 지금 다 분열이나 출아법으로 번식하는 것 같은데······?"
"그야 무성생식이 당연히 훨씬 번식이 편하니까."
"엥?"
왜 반문하나? 당연하잖아. 도대체 이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자원이 낭비되나? 화려한 구조물? 동성간의 치열한 경쟁? 아름다운 노래와 춤, 외모, 복장, 재산?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컷 생물들의 대다수는 번식 기회 한 번도 얻지 못하고 죽는다.
암컷이라고 해도 다른 건 아니다.
수컷이 그렇게 이목을 끌고 먹이를 구해오면, 암컷은 거꾸로 임신, 알품기 등의 어마어마하게 어렵고 자원 소모 심한 일을 해야 한다.
수컷이 양육을 적극적으로 돕는 생물도 있다지만, 그건 오히려 암컷의 임신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증명한다.
무성생식하는 생물에겐 위 과정이 다 필요 없다.
그냥 혼자 밥 먹고 잘 살다가, 어느 날 살이 좀 많이 찌면 뱃살을 찢고 작은 내가 태어나는 거다.
작은 나를 잘 키우면 이후에 나랑 생물학적으로 완전한 동일인이 내 인생을 이어서 살아주는 거지.
"뭔가 호러 같기도 한데, 좀 멋진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무성생식은 진짜 편하다. 이성경쟁에 어떠한 자원도 쓰지 않고, 전부 나 혼자 먹고 알아서 살 수 있다.
디저트 군단은 무성생식이 훨씬 유리했다. 일단 빠르게 수를 불려야 하고, 인위적으로 내가 진화시키기도 하니까.
"하지만 유성생식은 대단히 흔한 메커니즘 아닌가요? 무성생식이 그렇게 편하다면 왜 유성생식이 주류가 되었죠?"
그건 기생충 때문이다.
"어? 거기서 접점이?"
아니······. 물론 100% 기생충 때문은 아니지만, 그 원인 중 하나다.
요컨대 무성생식은 결국 똑같은 나 자신을 복제하는 거다.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 클론이라는 거지. 물론 그래도 가끔 돌연변이가 생겨서 조금 다른 내가 태어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론 말이다.
그리고 동일한 개체는, 당연히 같은 질병에 똑같이 취약하다. 아일랜드를 초토화시켰던 감자마름병이라든가, 전부 동일한 유전자를 지녀서 역병 퍼지면 망가지는 바나나라든가.
이걸 극복하려면? 유전자를 바꿔야지. 그냥 많이 자식을 낳고 돌연변이가 뭐가 하나 나타나길 기다리는 수도 있다.
하지만 기생충과 세균의 세대교체는 숙주의 세대교체보다 훨씬 빠르다. 인간이 세대교체 한 번 하는 동안 기생충은 수십 번, 세균은 수만 번은 세대를 교체하며 진화한다.
진화 경쟁에서 이게 상대가 되냐고. 그런데 유성생식을 해서 다른 짝을 만나서 유전자를 교환하면 이 문제가 어느 정도는 극복된다.
"유전자가 섞이니까."
그렇지. 타인과 유전자를 섞으면 후대는 뭔가 다른 게 나오니까. 그러니까 기생충이나 세균 같은 세대교체가 엄청나게 빠른 생명체에게 저항할 수 있다.
"아······. 그럼 기생충은 무성생식을 하나 보죠?"
유성생식을 한다. 왜냐면 그놈들도 진화 경쟁에서 밀리면 망하기 때문이다.
"······."
아무튼, 내 젤리계 생물들에게 유성생식 메커니즘을 넣는 것으로 〈문화〉도 〈아름다움〉도 대충 돌파할 수 있다. 기생충 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그래서 나는 재난 구간이 시작하자마자 내 많은 분신들과 함께 내 생태계에 존재하는 젤리들을 동시에 진화시키는 작업에 한창이었다.
유성생식도 단계가 있다.
일단 자웅동체부터 시작이다. 그냥 서로 유전자만 교환하는 단계다.
둘째로 자웅동체인데 생식활동에서는 어느 한쪽이 남자를 하고 어느 한쪽이 여자를 하는 거다. 여기서 여자라는 건 알을 낳거나 임신하는 등, 자식을 직접 생산하는 걸 말한다.
이 경우 서로 여자를 하기 싫어서(자식을 만드는 건 에너지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들어감) 싸워서 이긴 쪽이 남자 역을 하는 경우도 있다.
셋째로 자웅이체. 남자와 여자가 구분되어 있다. 이것도 대단히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엄청나게 다양하다. 식물은 암꽃과 수꽃이 동시에 달리는 것도 있고, 물고기는 성전환이 가능한 것도 있고, 인간처럼 그냥 날 때부터 정해진 경우도 있고.
일단 인간이 무지무지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별'이라는 것 자체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애초에 이건 인간이 성별을 못 바꾸다 보니까 구별하고 차별짓는, 대단히 안 좋은 습관이 드러난 건데······.
물고기 중에는 주변 상황에 따라 성별을 바꿀 수 있는 기능이 있는 것도 대단히 흔하고. 어떤 버섯의 경우 수만 가지 성별이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같은 종인데 짝짓기 하는 법이 다른 개체가 한 수만 종류 된다.
"그러면 젤리들은 어느 단계부터 시작하나요?"
당연히 자웅동체다. 서로 유전자만 교환하는 단계부터 시작. 그다음은 얘들이 알아서 남성 여성으로 갈라지겠지.
젤리들은 원래 분열법과 포자법, 출아법, 등등으로 번식했다.
거기에서 나는 젤리들이 서로 만나서 생식 세포가 있는 신체 일부분을 주고받는 메커니즘을 생각했다.
포자끼리 얽혀서 알을 만들거나, 아니면 체내에 포유류처럼 품거나.
아니면 출아법인데 남의 유전자를 삽입해서 일부만 타인인 내 클론을 만들거나. 하는 방식을 택해본 거다.
나는 다양한 젤리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자웅동체 유성생식을 단체로, 다양한 종류로 주입해서 진화시켰고, 그중에서 가장 인기 있고 경쟁력 있는 메커니즘이 살아남아 다음 단계로 진화할 것이다.
"어라. 그런데 사탕이랑 넥타르젤리는 유성생식의 대상으로 삼지 않나요?"
"아······. 쟤들은 무성이 나아."
사탕은 원래 몸통 박치기 한 번 하면 일생의 모든 에너지를 다 쏟는데다가 세대교체도 빠르다. 굳이 유성생식이니 성 선택이니 하는······. 대단히 에너지 낭비되는 메커니즘을 찾을 것 없다.
넥타르젤리는 근간이 미생물 아닌가. 얘들은 그냥 자기가 분열해도 세대 교체가 미친듯이 빠르니까 굳이 유성생식을 넣을 것 없었다.
그렇게 되니까 땅을 기는 젤리, 땅을 뛰는 젤리, 껍데기를 만드는 젤리, 그리고 푸딩들과 구미나무. 뭐 이런 놈들만 유성생식을 한다.
[빵]과 [요거트]도 유성생식을 하게끔 했는데, 이놈들은 또 골 때리게 두세 놈이 뭉쳐서 자식 한 명을 만들거나 하는 이상한 메커니즘을 진화시켜서 좀 당혹스러웠다. 저건 지들이 알아서 하겠지.
하지만 핵심은 생태계가 건강해지고 있단 것이다. 정체되어 있었던 내 생명 점수가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레벨이 또 오를 것 같기도 하다.
「문화 LV.0: 56」
방금 봤을 때는 36이던 문화가 평균적인 수준이 올라가면서 56까지 올라갔을 정도였다. 순조롭군.
그런데 가만히 진화하는 걸 보던 나에게 정말 이상한 게 목격되었다.
"음? 뭐야. 저건."
"왜 그러세요?"
앞서 설명한 것처럼 내 젤리계 생물들은 크기에 대한 제약이 대단히 없었다.
그런데 그 메커니즘과 유성생식이 결합하니까 기묘한 현상이 일어났다.
작은 젤리들이 큰 젤리의 안으로 '파고들어가더니' 아예 자기가 신체 기관의 일부인 것처럼 그대로 접합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무슨 기생충처럼 영양분을 흡수하면서 자기가 무슨 생식기관인 듯 자식을 막 만들기 시작했다.
"에에에에엥?"
"초롱아귀를 보는 것 같군. 크기가 훨씬 작은 초롱아귀의 수컷은 짝짓기 이후 암컷의 몸에 흡수되어서 평생 정액만 내놓는 외부 단말 같은 꼴로 전락해버리지."
"그래요?!"
"아니. 잠시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닌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젤리류가 훨씬 가까웠나보다.
비슷한 종류의 생명체끼리 번식해서 생식력 있는 새끼를 낳을 수 있는 것처럼, 젤리, 푸딩, 구미. 내가 다르게 이름붙인 생명체들이 죄다 서로 혼혈하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아마도 생식 세포를 전달하는 메커니즘을 그냥 비슷한 걸로 통일시켜서 단체로 진화시키다보니 가능한 것 같았는데, 그 탓에 구미나무에 껍질이 자라든가, 거꾸로 달리기하는 푸딩에 촉수와 껍질이 자라든가 하는 식으로 기괴한 변화가 생겼다.
"〈생명〉 점수가 미친듯이 떨어지고 있는데요!"
"후손이 생식 능력이 없나? 아니면 그냥 비효율적인 혼혈의 결과로 인한 건가?"
"저, 저기 〈생명〉 점수가 떨어지고 있는데 아무 관심 없으세요?"
잠시만. 지켜봐.
서로 무성생식으로 번식하면서 유전자 교환이 거의 없었던 젤리계 생명들이 유성생식을 미친듯이 하면서 세대교체를 하다보니, 기괴함은 더해졌고, 대부분이 멸종하고 도태됐지만······. 어쩌다 보니 나온 이상적인 개체가 있었다.
그 이상적인 개체들끼리 계속 번식을 이어간다.
다른 생존전략을 가동시키며, 넥타르 호수 주변 생태계는 그야말로 식물과 동물이 뒤섞이는 마경. 나는 그 진화를 다른 분신들과 함께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고, 일부는 방치하면서 쭉 보았다.
그러다 보니까, 정말 기괴한 생명체가 탄생했다.
이 생명체는 무려 네 생명체의 혼혈이다.
일단 육체는 푸딩이다. 아노말로카리푸딩 등의 가장 강력한 포식자의 그것이다.
내장은 그런데 젤리다. 빠르고 탄력있는 움직임을 보이며 넥타르합성 및 광물 소화 등을 한다.
그리고 껍데기나 뿔 등 체내 구조물은 산호구미와 구미나무 등 단단하고 아름다운 구조물을 만드는 그것이다.
심지어 몸에는 시럽이 흘러서 겔과 토핑으로 몸에 마력의 흐름도 꿈틀거린다.
네 생명체가 혼혈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네 종의 생명체가 '별도로' 유전자를 갖고 체내에 존재한다. 어떤 젤리계 생명과 교배하든, 그 부분만 유성생식하고 유전자를 교환하여 별도의 생명체를 낳는다.
"마치 고깔해파리 같군. 고깔해파리는 하나의 해파리로 보이지만 사실 여러 개의 폴립들이 합쳐서 하나의 생명체를 형성하고 있지. 저 정도로 독립적이고 극단적이진 않지만."
"그런 생물이 지구에 있다는 게 놀랍긴 한데. 그······. 뭐랄까. 더 중요한 게 있지 않나요?"
그렇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저놈은 이제부터 [양갱]이다."
"아니 이름 말고요."
"오? 문화 점수가 어느새 100점을 넘어서 1레벨이 됐잖아? 신규 특성 좀 보여줘. 곧 2레벨도 찍겠다."
"아니 뭐랄까······. 그······. 아닙니다. 특성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름다움〉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군.
"······참고로 양갱 중 〈매력〉이 가장 높은 개체는 337이며, 그중 〈아름다움〉 부문은 2점입니다."
337점이면, 벌써 영웅적 개체도 나왔단 말인가? 끝내주는군.
이 끔찍한 혼종들 중 한놈은 아름다운 게 나오겠지.
안 나와도 요거-토소스도 있고 산호초도 있으니까 굳이 이놈들로 미인계 안 펼쳐도 된다. 이제 중요한 건 전체적인 문화 수준의 상승이다.
일반적인 젤리계 생명체, 양갱, 빵과 요거트, 감치들. 살펴볼 것이 많군. 분신들을 뿌려서 차근차근 확인해보자.
39화. 재난 구간 -첫 번째- 4
젤리계 생명체는 원래 4종류로 구분됐다.
젤리. 넥타르합성 및 암석 섭취를 하는 생산자. 운동 능력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음.
푸딩. 암석 소화 능력이 없어서 젤리를 먹는 소비자. 운동 능력이 전부 있음.
구미. 산호나 나무처럼 뿌리를 박고 단단한 구조물을 만들고, 내부에 젤리를 넣거나 혹은 자체적으로 넥타르합성을 하는 생물.
사탕. 푸딩이 극단적으로 진화해서 몸통 박치기를 연마하는 육식동물.
겔은 젤리계 생명이 아니라 별도니 넥타르젤리를 공통조상으로 가지는 건 저 네 개가 전부.
그런데 이게 생명체들이 의외로 근연종이다보니 유성생식 메커니즘을 넣으니 애들이 다 혼종이 되어버려서 계통분류학적으로 엉망진창이 됐다.
"그런데 사탕도 혼종이 됐나요? 무성생식 시킨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푸딩이 사탕을 강간했어."
"네?"
"자연계에서는 강제적인 성관계도 흔한 일이지. 그러니까 이게 뭐라고 하지? 사탕의 체내에 생식세포를 넣은 게 아니라, 거꾸로 덮쳐서 찢어버리고는 생식세포를 빨아들여서 자기가 사탕과 혼혈된 자식을 낳더라고."
"어······뭐라 할 말이 없네요."
자연계에선 온갖 이상한 일 일어나니까 아무래도 좋다.
그래서, 지금 네 개의 생명체 분류를 다르게 잡아야 할 것 같다. 왜냐면 이제 육식하는 젤리나 촉수를 늘어트린 구미나, 푸딩이면서 구미처럼 단단한 놈이나. 온갖 놈이 다 있기 때문이다.
먼저 [젤리]. 껍데기나 뿔, 가시 등 화려한 구조물을 만드는 느리고 덩치 큰 생명체다. 그것으로 사냥도 하고, 자기 몸을 보호하기도 한다.
넥타르와 바위를 먹는 생산자형 젤리는 방어적인 뿔과 갑각이 발달하는 반면, 다른 젤리나 풀 등을 뜯어먹는 포식자형 젤리는 단단한 촉수나 튀어나온 이빨 등이 발달했다. 초식동물, 혹은 생산자 포지션이다.
[푸딩]. 이놈들은 빠르고 작다. 껍데기나 뿔 같은 '비싸고' '단단한' 구조물 대신 구애의 춤이나 진동(노래?) 혹은 '갈기'나 '머리칼' 같은 운동능력이 희박한 촉수, 혹은 색으로 이목을 끈다. 훨씬 빠르고, 높이 뛰고, 근육질이라 공격적인 육식동물 포지션이다.
[구미]. 얘들은 동물인데 움직이는 능력이 없다. 그저 뿌리내리고 넥타르합성으로 마력을 내뱉고 영양분을 섭취하며 살아간다.
그러니까 껍데기보다는 비늘이나 가지, 가시 같은 것이 화려해지고, 또 향기를 퍼트리거나 체내에 든 시럽으로 빛을 내는 등 멀리서 유인하는 번식법을 가졌다.
개중에는 진짜로 엽록소를 지녀서 광합성하는 애들도 있고, 아예 마력을 먹어서 영양분으로 바꾸는 식으로 발전한 것도 있다.
산호구미나 구미나무나 서식지만 다르지 비슷한 종류. 실제 산호나 나무에 비하면 빠르게 자라나는 편.
또 이놈들은 엄청나게 크다. 엄청나게 크다는 건 호모 사피엔스보다는 당연히 크고 나무만큼 큰 놈들도 있다.
[사탕]. 일생 최후의 몸통 박치기만을 연마하며 낙타를 사냥하는 사탕은 여전히 무성생식을 한다. 그래서 외모에 거의 신경을 안 쓴다. 나는 나를 사랑하니까 어떻게 생기든 괜찮다는 거지.
하지만 단독으로, 지속적으로 적을 쫓는 여우사탕, 혹은 감치를 공격하는 길쭉한 뱀사탕 등, 내 생태계에서 가장 공격적인 포식자들은 뿔이나 화려한 무늬, 패턴, 구애의 춤 등이 드러났다.
대충 지켜보니 이런 네 가지 방향성으로 분화했다. 몇 가지 예외가 있긴 하지만······ 아니 사실 예외가 일반적인 것보다 더 많지만······.
"인상적인 변화군요. 생명 점수는 7만 점에 가까웠던 게 지금 2만 점 수준으로 초토화됐지만."
"어쩔 수 없지. 유성생식으로 종이 섞이면서 최적화를 겨우 성공한 것만 해도 기적이야."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세계의 〈문화〉 점수가 100점을 넘어 레벨이 1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문화〉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다른 분신이 인지한 것이지. 특성 카드 줘.
"자. 세 개의 특성을 뽑아드렸습니다."
『(선택)매력적인 신체: 창조물들이 특정 신체 부위를 선호하게 됩니다. 해당 부위의 〈매력〉이 늘어납니다.』
『(선택)구애 장려: 구애 행위가 더욱 〈매력〉적이게 됩니다.』
『(산호초)아름다운 구조물: 선택한 구조물의 레벨에 비례해 〈매력(아름다움)〉 수치가 대폭 상승하고 고유 구조물이 됩니다.』
어라. 마지막 거 택하면 바로 핵심 재난이 해결되는 것 아닌가?
"확신은 못하지만 대단히 도움은 되겠죠. 하지만 다른 두 특성도 좋습니다."
난 시선을 돌려서 넥타르 샘 반대편에서 마법을 연마하는 요거-토소스를 확인했다. 요거-토소스는 지금 매력이 원래 729인데 지금 2,500이 넘었다. 진짜 미친듯이 매력을 올리고 있군.
그리고 〈아름다움〉 계열의 주문을 연구하는 듯하다. 자체적으로 재난을 깰 것 같긴 하다.
난 고민하다가 『아름다운 구조물』을 택했다. 이유는 산호초가 규모가 거대해서 지금도 쓸모가 많은데, 아예 〈문화〉수치를 올려주게 만들면 더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눈앞에 메시지가 엄청나게 떴다.
∞
아, 아름다워.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아직 세계에 남아 있다니······.
만족했다······. 고맙다······.
「옛 신의 잔존사념이 만족합니다. 필연적 재난-[갈망: 미(美)]가 해결되었습니다.」
∞
일단 무슨 게임 컷신 보는 것처럼 옛 신의 파편이 만족했다고 하고 물러나는 것이 느껴졌다. 당연히 필연적 재난이었기 때문에 따라오는 보상은 없었다.
그리고 메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구미산호초 〈영웅적 고유 구조물|고유 개체〉
능력치(펼치기▼)
설명: 디저트 군단의 일원, 구미산호들이 모여 만들어진 거대한 산호초입니다. 생명체이자 구조물로 취급됩니다. 넥타르 샘의 생태계를 더 풍요롭게 만들며 넥타르 샘에 서식하는 많은 생명체들이 구미산호초 인근에서 서식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구미산호초는 창작물을 만들려는 자에게 많은 영감을 주며, 그것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아름답게 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강인한 생명체입니다. 세계 내의 〈문화〉를 대폭 늘리며, 넥타르 샘에서 영웅적 개체가 탄생할 확률을 더욱 높입니다.
영웅적 특성-『구미의 상징: 레벨에 비례해 [구미] 계열 생명이 더욱 번성합니다.』」
「[구미산호초]가 "넥타르 샘"의 영향을 받아 〈서사적 고유 구조물|고유 개체〉로 승격할 수 있습니다. 해당 시도에는 합계 30,259점의 〈생명〉 〈산업〉 〈문화〉 〈신비〉 〈신앙〉이 소모됩니다.」
「[구미산호초]가 "넥타르 샘"과 [압호주스]의 영향을 받아 〈전설적 고유 구조물|고유 개체〉로 승격할 수 있습니다. 해당 시도에는 합계 63,545점의 〈생명〉 〈산업〉 〈문화〉 〈신비〉 〈신앙〉이 소모됩니다.」
「세계의 〈문화〉 점수가 210점을 넘어 레벨이 2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문화〉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문화〉 점수가 441점을 넘어 레벨이 3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문화〉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와. 특성 효율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네요."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게임에서도 아예 능력치를 안 올리다가 특성 하나 찍었다고 이렇게 되는 경우가 잦았거든.
지금 넥타르 샘 지름이 거의 11킬로미터에 그 바닥 수심은 120미터쯤 된다. 그 바닥 표면적에 구미산호가 다닥다닥 박혀서 거대한 산호초를 형성하고 있고, 심지어 높이도 꽤 되어서 지상으로 돌출되거나 아예 지상의 영역을 넘보는 것도 있다.
산호초 크기만 따져도 아마 레벨이 8은 됐을 거다. 그냥 규모가 엄청나게 크니까 레벨 비례 〈매력〉이 미친듯이 상승하고, 또 매력이 높아지니까 〈문화〉수치 역시 어마어마하게 올라간 거다.
고유 구조물로 선택된 순간 영웅적 구조물로 바로 승격한 것도 이상하지 않고, 지형 레벨도 10인데다가 압호주스 보정까지 해서 서사적, 전설적의 상위 개체로 진화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도 이상하지 않다.
"선택의 기로군요. 구미산호초를 상위 개체로 승급시키는 건 어마어마한 자원이 들지만, 분명 그 정도로 강화된 구미산호초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이득을 줄 겁니다."
소모할 자원이 당장 없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그렇다면 두 개의 〈문화〉 특성을 더 택해주시면 될 것 같네요."
그거야 다른 분신이 미리 골라뒀다.
『색채 예술: 다양한 색채, 혹은 색조를 활용하는 〈문화〉에 이점을 얻습니다.』
『광학 예술: 빛, 혹은 명암을 활용하는 〈문화〉에 이점을 얻습니다.』
그 특성을 찍자 메시지가 또 떴다.
「세계의 〈문화〉 점수가 926점을 넘어 레벨이 4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문화〉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건 진짜로 예상 못 했군. 특성을 찍는 게 문화를 올리고, 그걸로 다시 특성을 찍을 수 있는 긍정적 사이클. 그럼 하나만 더 찍어볼까.
『건축 예술: 구조물의 〈매력〉이 상승합니다. 구조물을 이용하는 〈문화〉에 이점을 얻습니다.』
"전반적으로 특성을 특수한 생명체나 수단에 강력한 이점을 얻는 방향보다는 대단히 얕고 넓게 보너스를 받는 방향으로 투자하시는군요?"
그냥 내 개인 성향도 있고, 나는 '양'으로 밀어붙이는 전략을 취하니 이게 더 좋다는 점도 있지만, 근본적으론 생태계에 불균형을 만들고 싶지 않아.
균형이 무너지면 결국 어느 생명체가 주류가 되어버리고, 그놈이 알아서 지능 올려서 문명 만들더라고.
"전략적인 선택 자체는 존중합니다. 〈매력〉 수치가 대폭 올라가고 있군요. 오. 저기 보세요. 또 신비로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천사가 가리킨 것은 열정적인 구애활동이었다. 무려 체내에 있는 시럽, 그 야광성 토핑의 힘으로 빛을 발하면서 춤을 추는 푸딩이 있었다. 색채 예술, 광학 예술 둘 다 보너스를 받으니까 해볼 만한 일이지.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이놈들, 좀 지켜보니 세계 시간으로 '저녁'에 춤추게 되었다.
물론 저녁에 빛내면서 춤추는 게 해 짱짱한 대낮에 춤추는 것보다 더 눈에 띄겠지.
하지만 객관적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미친 짓이다.
일단 디저트 사막의 젤리류는 기본적으로 일조량이 적으면 활동이 급격히 둔해진다. 거기에 시럽으로 빛을 발하는 것 역시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행위다.
그뿐인가. 감치들은 저녁이나 밤에도 돌아다닌다. 저렇게 빛을 내면서 춤추는 건 감치들 보고 날 당장 잡아먹으라고 자해행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야말로 상식, 이성, 논리를 완전히 무시한 광란의 춤사위.
그런데, 계속 지켜보니 한 푸딩이 그걸 보고 다가왔다. 둘은 조용한 곳에 숨어서 짝짓기하고, 죽는다.(젤리류들의 절반 정도는 짝짓기하면 즉각 죽어서 제 몸을 자식들에게 먹잇감으로 넘기더라.)
시간이 더 흐르니 기괴한 일이 일어났다. 저녁에 춤추는 게 오히려 번식 성공률이 높아지니까 애들이 점차 어두운 시간에 춤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는 빛도 밝아졌다. 춤사위로 흔드는 촉수도 오로지 번식용을 위해 길고 얇고, 풍성하게 늘어져 치어리더의 폼폼(pompom)처럼 변해버렸다.
그렇게 미친 짓을 하는 놈들은 당연히 죽어 나가기 시작했지만, 거꾸로 미친 짓을 하고도 산 놈들은 계속 세대를 이어나가 저녁이나 밤에 그 미친 춤사위를 계속하며 누구 하나라도 날 봐달라고 요란을 떤다.
그 행위가 거듭되니까 어느 순간 수백, 수천 마리의 젤리류들이 밤중에 요란스럽게 춤추고 빛을 내면서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오히려 감치들에게 먹히는 빈도가 낮아졌다. 일단 옆의 놈보다 포식자의 눈에는 덜 띄면서, 다른 놈들을 제치고 짝을 찾을 정도로는 눈에 띄게끔 춤을 추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얌체라고 할지······. 저렇게 미친짓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개체 대신, 자식을 만드는 데 자기 에너지를 소비하기로 한 존재는 그런 광란의 춤사위에서 자기 짝을 하나씩 찾아서 데려가고 세대를 이어나갔다.
세대가 지나면 미친짓하며 자길 봐달라고 시위하는 수컷과 수컷을 품평한 다음 자식을 낳고 양육하는 암컷으로 진화하겠군.
도중에 지켜보니 어쩌다가 거대화한 건지 3미터 넘는 푸딩이랑, 거의 4미터에 가까운 양갱도 그짓을 해서 약간 당혹스럽긴 했는데, 이놈들은 그래도 좀 점잖게 하더라. 작은 애들이 더 활발하게 날뛴다.
수천 마리가 동시에 군무를 펼치며, 일부는 먹히고, 일부는 도망치고, 그런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흔들면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기괴하지만, 한편으로는······.
"네. 이 디저트 사막에서 본 것 중 분명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네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아름다워요."
뭐. 당연한 거지.
생명은 아름답다. 그들이 삶에 항상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치열한 그들의 몸부림은 더없이 아름답고, 또 숭고하다.
굳이 산호 같은 걸 건들 필요가 없었을 정도로, 찬란하게 요동치는 형형색색의 군무가 디저트 사막과 넥타르 샘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세계의 〈문화〉 점수가 1,945점을 넘어 레벨이 5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문화〉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천사가 보여준 카드에서, 난 고민도 없이 한 장의 카드를 뽑았다.
『행위 예술: 신체 동작, 혹은 표현을 활용하는 〈문화〉에 이점을 얻습니다.』
기왕 그렇게 노력하는 거, 신이 되어서 도와줘야지.
"훌륭한 선택입니다. 지성체들도 저런 거 잘할 수 있는데······."
아니, 못해. 저건 지능 낮은 애들만 할 수 있다.
아무튼 꽤 높은 지점까지 올라왔지만, 목표치인 4,085점에는 아직 한참 모자라다.
이 나머지를 채우는 것이 진정 과제라고 할 수 있겠지. 젤리류들은 알아서 발전할 것 같으니 감치들 쪽에 조금 힘을 줘볼까.
감치들은 심지어 아직 기생충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도 했으니, 빠르게 조정해야 한다.
40화. 재난 구간 -첫 번째-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