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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 40-50

40화. 재난 구간 -첫 번째- 5

감치들은 원래부터 유성생식을 했다. 새와 박쥐, 익룡을 섞은 놈들답게 꽤 자식 키우는데 정성들이는 편이고, 이성의 관심을 끌기 위한 온갖 신체구조물, 노래, 춤 등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아무래도 하나가 더 추가된 것 같다.

'집'이다.

"재밌네요. 둥지를 혼수 삼아서 이성을 유혹하는 건가요?"

 둥지를 꾸미는데 쓰는 건 당연히 젤리계 생명체들의 촉수와 패각, 구미산호의 껍질. 가시. 뭐 그런 것들이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찍은 내 특성을 살펴보면 『확장형 건축』 『쾌적한 주거공간』 『튼튼한 구조물』 『산호 산업』 『패각 산업』 『건축 예술』······. 대놓고 산호랑 조개껍질 가져다가 집 지으라고 밀어주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감치들은 둥지를 엄청나게 크고, 쾌적하고, 튼튼하면서, 산호와 패각으로 장식해 꽤 단단하고 아름답게 지어냈다.

"저것만으로 얻는 문화 점수가 상당하겠는데요?"

실제로 그런 것 같다. 그리고 내 생태계에서 보통 크고 강력한 놈들이 더 화려하고 강력한 구조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크고 단단한 껍질로 둥지를 지었다는 것만으로 '강함'이라든가 '유능함'이 증명되는 듯하다.

일종의 전투력 과시 용도도 한다고 할까?

그러니까 어느 순간 감치들이 집짓기 고수가 되어버렸다.

어느 정도냐면 몸에 신체구조물을 만드는 것보다 집을 짓는 게 더 인상적인 모양인지, 몸체는 꽤 깔끔한 기능미만 남았는데 집만 어마어마하게 화려하게 변해버렸다. 아직도 신체구조물을 만들거나 노래를 부르는 놈들도 있는데 그런 놈들도 집은 멋지게 짓는다.

"결국 결혼하려면 집이 있어야 하는 걸까요."

굳이 이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만 그러는 것 같진 않고, 그냥 자기 자식들을 안전하게 키울 튼튼한 집을 부부가 같이 만드는 경우도 있군.

떼감치들은 집을 안 만들고 여전히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철새 생활을 하고.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집짓기'가 감치들에게서 가장 유행하고 있었다.

넥타르 샘 인근에 서식하는 젤리계 생명체들을 사냥해서 사막이나 선인장 숲, 더 넘어서 있는 담수호, 혹은 더 멀리 있는 초원이나 산 등에 집을 짓는다.

이거 생각보다 미친짓인데, 양쪽 거리가 몇 킬로미터는 되는데 왕복해가며 집을 짓는 놈들도 있었다.

비스야킷의 경우 오로지 집을 짓기 위해서 산호초를 뜯어다가 지상 넥타르 숲에 크고 견고한 둥지를 짓는다. 아마도 내가 이 정도로 강한 존재라는 걸 과시하는 거겠지?

집 지을 때마다 문화 점수가 쑥쑥 오르는군. 문명은 없어도 부동산은 있다······.

그리고 남이 지은 집을 허물고 건축 자재를 뺏어가는 쓰레기들도 있고, 자기가 짓는 대신 남이 지은 집을 강탈하는 개자식도 있고, 남이 지은 집을 그냥 처먹는 젤리계 생명체들도 있어서 세계 전체가 패각과 산호로 넘쳐나진 않을 것 같았다.

"재밌고 인상적인 변화군요. 아마도 재난의 영향으로 〈문화〉와 〈매력〉에 생명체들이 집착하는 것도 영향이 있겠죠."

우선순위는 낮지만, 영웅 개체들이 좀 많이 태어날지도 모르지. 나에게는 차라리 〈정치〉가 높은 게 낫지만, 〈문화〉가 당장 높아도 그럭저럭 괜찮을지도.

"반지성주의 빌드에서는 〈문화〉 중요도가 낮나요?"

"낮지. 〈정치〉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생물들은 꽤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어. 하지만 〈문화〉 빌드의 꽃은 결국 종교와 주술, 국민 행복인데······. 나는 종교도 주술도 잘 못 써먹잖아? 자연적인 생명이 마법을 터득하기 힘들고, 종교는 지성체만을 위한 거니까."

"그렇긴 하죠."

그러니까 뭐······. 문화적인 기능은 가끔 영웅 개체가 나오는 선에서 만족하련다. 아니면 산호초처럼 고유 구조물이 나올 수도 있겠지. 그것도 좋은 일이고.

감치들의 문화적 발전은 꽤 긍정적이다.

그렇지만 감치의 문제는 기생충이다.

정확히는 감치한테만 문제지. 사실 내 생태계의 전반에서 기생충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안 됐다.

그게······. 젤리류에 기생한 놈들이 있긴 했는데, 그냥 생존경쟁에서 밀려서 져버렸어.

"졌군요. 5레벨 재난이."

어. 나도 물론 내 디저트 군단이 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꽤 허무하게 졌다. 특히 [시럽]을 통한 면역계 형성이 독특했다.

"응?"

"그러니까 겔+토핑=시럽이잖아? 지금 시럽으로 크림랜드와 넥타르 호수도 잇고 영계도 만들고 도우와 요거트도 만들고 온갖 짓을 다 하고 있는데, 얘들이 알아서 젤리계 생명체에게 기생하더라."

"흐음."

양갱이 대표적이지만, 양갱이 아니더라도 체내에 시럽을 품은 젤리, 푸딩, 구미, 사탕. 너무 많다.

그런데 이 시럽들이 기생충으로 진화한 게 아니라, 오히려 체내의 생체구조랑 합일해서 일종의 '장기'가 됐다고 할까?

단순한 구조의 젤리들의 면역계를 대신해서 체내를 돌아다니며 오히려 체내에 들어온 기생충을 잡아먹더라. 아마 좀 더 개량하면 세균성 질병 등도 이길 것 같다.

"그건 재밌네요. 물론 재난이 해당 세계에 너무 쉬운 것이 닥치는 경우는 흔한 일이긴 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게 감치들하고는 호환이 잘 안되는지 오히려 시럽도 감치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감치들 자체 면역계로 시럽과 기생충 양측에 대항하기가 약간 힘든가보다.

"그럼 어떻게 하실 거죠?"

음. 좀 고민해 봤는데, 기생충을 진화시켜야겠다.

"엥."

"할 수 있지 않나? 재난이지만 내 생태계에 들어온 명백한 생명체들이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생각해보니 감치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 특히 비인 님은 신성력은 거의 무한하다 싶을 정도로 많으니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겠군요."

그렇다. 나는 일종의 기생충과 감치의 공진화를 모색한다.

기생충도 애초에 치사율이 높을 수 없다. 기생충이 너무 강해지면 숙주를 죽이고, 그러면 번식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니까 두 가지 방향의 진화를 기생충에게 담으려고 한다.

첫째는, 바로 시럽과 공생하는 거다. 감치+시럽은 조합이 안 되지만, 감치+(기생충+시럽)의 형태로 만들어서 기생충들이 시럽과 공생해서 흐름을 받아들이고, 감치에게 더욱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뽑아내며, 동시에 일종의 면역계 기능을 수행하는 역을 남긴다.

"이미 기생충으로 체내에 들어왔는데 뭘 면역하는데요?"

"마법. 시럽들이 자체적으로 흐름을 품어서 그런지 체내에 흐르면 마법 저항력을 높여주더라. 감치나 젤리류나 쓰레기 같은 마법 저항력을 지니고 있으니 시럽으로 높여봐야겠어."

"오······. 언제나 그랬지만 그런 게임 같은 방향성으로는 머리가 팽팽 돌아가시네요."

그리고 둘째 방향성은 에너지 공급이 충분하면 숙주를 크게 자극하지 않는 것이다. 마침 내 생태계는 넥타르라는 사기적인 물질이 있기 때문에 사실 식량 공급은 진짜 끝내주게 잘 된다.

그렇지만, 에너지 공급이 불충분할 경우. 그 경우 기생충들은 발광하기 시작한다.

"숙주를 공격하나요?"

"설마. 거꾸로지."

기생충과 결합한 시럽이 에너지를 먹지 못해서 마력을 방출하기 시작하는 거다. 그 마력 방출, 그 흐름은 바로 기생한 감치의 정신을 극도로 자극한다.

그 결과, 에너지 공급이 모자라다고 느낀 감치는 극도로 포악해진다. 그뿐만 아니라 기생충이 발산하는 마력으로 인해 신체능력이 대폭 상승하고 고통도 잘 느끼지 못하게 되지.

이걸 비스야킷들에게 감염시켰다.

"우와······."

이제 비스야킷은 원래도 넥타르에 미쳐 살았는데, 넥타르를 제대로 섭취하지 못한 순간 발광하면서 어떻게든 그 순수한 생명의 정수를 입에 처넣으려고 한다.

그런데 만약 넥타르가 없는 상대 세계에 이 비스야킷을 넣는다면?

"진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끔찍하겠는데요."

바로 그거지. 비스야킷들은 그야말로 입에 넣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입에 넣고, 그래도 굶주려서 발작할 거다. 광분한 이 대형 포식자를 막을 수 있는지 없는지 다음 충돌 때 보자.

「부가적 재난이 해결되었습니다.」

「기생충들은 이제 디저트 사막의 생명체들과 공존하며, 또한 그들을 공격하는 대신 상생하며 오히려 더 널리 퍼져나가게끔 진화했습니다.」

이제 두 개의 재난을 다 해결했다. 이제 〈문화〉만 6레벨로 올리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이다.

나도 아직 인간 시절의 감각이 남아 있어서 헷갈리는데, 나는 지금 여러 분신을 동시에 조작하고 있다.

근데 이게 시간적으로는 '동시'라는 걸 이해하는데, 뭐라고 할까. '순서'가 정해진 것 같다고 할까? 실제로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라도 영화든 글로든 볼 때는 순서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분명 '동시'에 넥타르 샘을 관찰하면서 감치들의 기생충 문제를 해결해주고, 동시에 요거-토소스를 확인하고 있는데···. 체감으로는 이게 '순서'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음. 실제로 머릿속 중요도에 따라서 배치되는 것 같은데.

나는 어쨌든 요거-토소스를 찾아왔다.

"요거-토소스. 재난은 해결되었다. 산호초가 〈아름다움〉의 조건을 충족했어."

[?!]

당황하는 게 느껴진다. 자기는 아직 마법도 제대로 연구하지 못했다는 거겠지.

뭐 당연하지. 나는 천사 도움받아서 특성도 찍을 수 있고, 여러 분신으로 동시 작업도 가능한데 얘는 지 능력으로 혼자 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얘가 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더라도 스트레스를 안 받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속도'라는 측면에서 내가 앞섰을 뿐. 재난을 극복한다는 최소 조건을 충족했으니, 이제는 진정한 신으로서 완성도와 질을 높이는데 주목해야 하는 것이지."

[그 얘기는?]

"나는 산호초를 〈아름답게〉 만들어 〈문화〉를 높였다. 그렇지만 여기서 만족할 수 없어. 네가 만약 산호초에 뒤지지 않거나, 한참 앞서는 성과를 낸다면 마땅히 보상하겠다. 물론 나는 실패하고 너는 성공한 것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는 보상이겠지만, 영지 하나 정도는 하사할 수도 있지."

[오오···]

"이제 굳이 〈아름다움〉에 집착할 것도 없다. 〈문화〉를 높인다면 어떤 식의 마법이라도 상관없으니 마음대로 연구하도록."

[알겠나이다. 창조주여. 그렇다면 한계를 벗어난 마법의 극의를······.]

뭐. 이 정도면 되겠지. 요거-토소스가 실망해서 연구를 포기하거나 자존심에 상처 입으면 좀 그러니까.

나 역시 산호초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요거-토소스도 그 정도는 해주길 바랄 뿐이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라. 결국은 디저트 사막의 번성을 위한 것······. 너는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렇다면 영계를 일부 편집할 권한이 필요합니다.]

"마음대로."

그렇게 해서 권한을 받은 요거-토소스는 뭔가 한참동안 마법을 연구하더니, 만족스러운 지점까지 단련한 듯했다.

[됐습니다. 지금 펼쳐보겠나이다.]

"좋다. 해봐라."

그리고, 요거-토소스가 마법을 펼친 순간.

그의 촉수와 거품형 몸체에서 수백, 수천, 수만 개의 거대한 거품들이 폭발하듯 발산했다.

그것은 전부 기이한 색조를 띄고 있었으며, 또한 빛을 내었다. 빛나는 거품들의 춤사위는 일종의 춤 같기도 했고, 영류계의 흐름에서 지은 건축물 같기도 했다.

내가 선택한 특성들의 보너스를 최대한 받기 위해 노력한 듯한 요거-토소스의 마법은 사방의 하늘, 그리고 영계를 가득 메울 정도로 광대한 영역에 펼쳐졌다.

그리고 그 색채와 빛이 자아내는 감정은. 〈아름다움〉과 〈위압〉이 섞인 것.

〈경외〉라고 하는 것. 그러한 경외감을 사방에 펼쳐내어 생태계 일각을 통째로 그를 숭배하게끔 몰아갔다.

대단한 공연이군.

"진짜 대단하네요. 일시적으로 영계를 창조해서 보는 이들의 정신 자체를 뒤흔드는 마법이에요."

개조하면 공격용으로도 쓸만하겠지만, 일단 저것 자체가 세계 전체에 엄청나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 같은데. 지금 〈문화〉 수치가 미친듯이 오르고 있어.

그리고 드디어 도달했다.

「세계의 〈문화〉 점수가 4,085점을 넘어 레벨이 6으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문화〉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부가적 재난이 해결되었습니다.」

「외계에서 온 영감은 디저트 사막의 창조물을 강렬하게 자극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모습에 충분히 만족하며, 남들을 상대로 자신들이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성공 보너스-『괴생물: 개체들이 〈매력〉에 비례해 〈기괴〉하게 되며, 본 상대를 〈공포〉와 〈위압〉의 감정에 빠트립니다.』」

어. 잠깐만. 이 특성을 얻으면.

"끼에에에에에엑!"

"까아아아아아악!"

내 생태계에서 가장 매력이 높은, 지금 매력 점수가 거의 시카도즈를 넘어서 5천 점에 육박하는 요거-토소스는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 지상의 생명체들을 두렵게 하여 생태계 일각을 광기에 빠트렸다.

내 다른 생명체들도 어지간한 기괴함에는 내성이 있지만 요거-토소스의 압도적인 〈매력〉에는 당해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요거-토소스. 훌륭하다. 너의 성과가 참으로 위대하니 보상으로 "시공경계"를 네 영지로 하사하겠다."

[오오. 감사합니다. 나의 창조주여.]

그렇게 해서 해피엔딩. 그런데 천사가 묘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저기, 어차피 "시공경계"는 요거-토소스 담당 아니었나요?"

그게 지금 중요해?

'실로 훌륭하다. 네 덕분에 재난을 이겨냈으니 보상으로 "시공경계"를 네 영지로 하사하겠다.' 

'기대치에는 못 미치지만 노력이 가상하구나 .보상으로 "시공경계"를 네 영지로 하사하겠다.' 

'참으로 형편없구나. 너에게 줄 영지 따위는 없으니 벌로 "시공경계"를 관리하는 책임을 묻겠다.'

어차피 뭘 해내든 줄 건 똑같았지만 받는 놈이 모르면 그냥 보상처럼 느껴지는 거라고. 아는지 모르겠지만 TRPG 마스터링이 대충 이런 느낌으로 굴러간다.

"우와······."

「모든 재난을 해결했습니다. 남은 재난 구간은 전부 보호 기간으로 변합니다.」

모든 재난을 이겨냈군. 하긴, 5레벨 재난 4개라곤 하지만 내 점수가 정작 8레벨 21만점이었다. 쉽게 못 이겨내면 그게 이상하겠지.

[나의 영지가 생겼도다! 이것으로 그 하찮은 시카도즈 놈을 능가하는 궁극의 시공간 마법을 완성하고 말리라!]

"다음 상대가 진짜 미칠듯이 불쌍해지네요. 도대체 이걸 어떻게 감당할지······."

알게 뭐냐. 내가 주는 재난은 알아서 적응하라고 해라.

흠······. 남은 2차 보호 기간이 꽤 긴 만큼 내 생태계를 좀 더 정비해볼까. 방심하지 않는 게 승리의 첫걸음이겠지.

맞다. 그러고 보니, [빵]과 [요거트]. 재난 닥치기 전에 열심히 만들었던 이놈들이 지금 영 부진한 것 같은데······. 확인해 볼까.

41화. 최강의 플레이어

재난 구간을 성공적으로 돌파한 나는 먼저 문화 6레벨, 우수 등급 특성을 살폈다.

『승격 지원: 고유 개체 승격에만 쓰일 수 있는 〈문화〉점수 4,085점을 제공합니다.』

『주제-사랑: 사랑을 주제로 한 〈문화〉에 큰 이점을 얻습니다.』

『종교(요거-토소스): 창조물 [요거-토소스]를 믿는 종교를 탄생시킵니다.』

다 애매하군.

"어쩔 수 없어요. 〈문화〉는 있는데 〈문명〉은 없다보니······."

그렇지만 너무 실망스럽다. 구미산호초 승급에 필요한 점수가 6만 3천 아닌가. 그런데 4천 점? 내 점수가 21만점까지도 올랐으니 생태계를 복원하고 조금 바치는 것만으로 충분히 충당할 수 있다.

사랑을 주제로 한 문화도 그렇다. 이제 짝짓기와 교미에 자원 좀 그만 쓰지? 나 〈문화〉 높아도 별 이득이 없어.

그리고 종교는 뭐야. 왜 쟤를 믿는 종교를 만들어야 하는데, 문명이 없는데 종교가 어떻게 있어.

"그럼 이제부터 문명을 만들면 되죠."

아 집어치워.

"이거 특성 새로 받으려면 게임과 같나?"

"쩝. 예. 만약 7레벨까지 신규 특성을 선택하지 않으면 6레벨 특성을 교체할 수 있습니다."

그럼 잠시 보류할까······.

그리고 난 커뮤니티를 열었다.(사실 동시에 한 거지만, 어우 헷갈려.) 재난 구간 당시에는 커뮤니티 기능이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재난 구간을 일찍 클리어한 플레이어가 많은지 어림잡아서 백만 명은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듯했다.(현재 전체 인원은 33,554,432명이다.)

최상위권이라서 쉽게 돌파한 경우도 있고, 그게 아니면 우연히 쉬운 재난이 걸린 경우도 있고, 나와 달리 추가 재난을 하나도 안 받아서 쉽게 클리어한 경우도 있고······. 가지각색.

"음? 세사이사는 아직인가?"

메시지를 보내려고 했는데 아직 재난 구간이라서 못 보낸단다. 그놈도 아마 재난을 추가로 3개 받았을 텐데 나보다 더 까다로운 게 걸린 모양이군.

나는 다른 분신으로 시점을 옮겼다. 그 분신은 줄곧 노천 광산 지역에서 빵과 요거트, 크림랜드를 관리하고 있는 분신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나는 꽤나 난처해하는 중이었다. '동시'에 느낀 것이지만, 정리를 위해 기억을 되짚어볼까.

나는 [빵]과 [요거트]담당 분신. 이놈들에게도 유성 생식을 가르쳐주고 〈문화〉 발전에 기울이는 역이다.

다른 분신들이 바쁜 것에 비하면 나는 이 새로운 생태계를 관리하는 무난한 업무를 받은 터라. 오히려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확인했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간단하다.

이 [빵]들은 디저트 군단에 들기엔 자격 미달이다.

"심한 평가네요."

일단······. [요거트]들은 사실 크게 문제가 없다. 요거-토소스 옆에 붙어 다니면서 마법 배우고 날아다니고 그러더라. 충분히 전투원으로 쓸 수 있어.

근데 문제는 [빵]이다. 이 생물들은 지금 내가 전혀 바라지 않는 방향성으로 진화했다.

처음부터 되짚자면, 이렇다.

[빵]은 [도우]라고 명명한 금속 먹는 젤리와, [우유]라고 명명한 원시적인 정령. 그리고 [시럽]이라는 영류와 물질을 이어주는 매개체의 결합이다.

그런데, 이놈들의 주된 에너지원이 뭐냐? 노천 광산의 귀금속과 보석은 영양가가 크게 없으니, 연결된 크림랜드에서 쏟아지는 크림을 먹고 있다.

일단 첫째 문제는, 크림이 너무 많단 거다······.

그야 세계 전체의 모든 영계가 이 크림랜드로 모여서 크림을 짜내고 있으니 당연한가? 너무나도 크림이 많아서 얘네들이 공격적으로 먹이를 얻기 위해 다툴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공격성이 거의 거세되어 버렸다.

둘째 문제는, 이놈들이 넘치는 에너지로 그냥 체급을 끝없이 키우기만 했단 거다.

그야 작으면 감치들이 와서 잡아먹거든. 그러니까 이놈들은 체급을 거의 하마, 코뿔소 이런 대형 초식동물 라인까지 키웠다. 아직 '코끼리'급은 없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거의 사냥 불가능이다.

비스야킷도 사냥할 수 있을까 말까······. 심지어 이놈들 피부는 철갑이고 몸은 광물질이다. 잡아도 별로 먹을 것도 없단 거다.

맛까지 없으니 이 생명체들을 공격할 이유는 더 사라진다.

노천광산에 뭐 먹을 게 있는 것도 아니고 크림밖에 없는데, 이놈들이 다 처묵처묵하고 있고, 이놈들을 이기고 크림을 빼앗느니 그냥 습지나 넥타르 호수 근처로 가는 게 훨씬 효율이 좋다.

심지어 생활권이 좀 겹치는 낙타도 크림먹으려고 습지를 넘어가서 경쟁하느니 그냥 선인장 뜯어먹는다.

셋째 문제는, 이놈들이 동성과의 경쟁도 거의 포기했다.

원래 이런 초식생물이라도 영역본능은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동성 간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호전성 정도는 있기 마련이다. 오히려 육식동물보다도 심하지. 소들이 목장에서 풀어놓으면 얼마나 살벌하게 싸우는데.

애초에 동성을 누르기 위한 강력한 근육, 뿔과 가시 같은 강력하고 거추장스러운 신체 구조물, 그게 아니면 체력을 과시하는 이유 없는 에너지 낭비와 위협하는 몸동작, 죽일 정도로 격렬한 싸움, 힘찬 레이스 후 패자를 백댄서로 두고 펼치는 위닝 라이브.

전부 자신이 동성의 경쟁자들에 비해 이토록 건강하다고, 성적 매력을 과시하는 것.

"마지막에 든 예시는 뭐예요?"

그렇지만, 이놈들은 지금 에너지가 넘쳐나는데다가 번식욕도 별로 없고, 덩치가 커지니 수명도 길게 잡고, 위협하는 포식자도 없고······.

그러다 보니 번식에 대한 열정도 없고, 어쩌다가 생겨도 그냥 경쟁할 것 없이 번식할 수 있고, 그보다 번식에 에너지 쓰느니 느릿하게 움직이며 먹을 것 많이 처먹는 게 더 유리해졌다.

이런 식의 진화는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지만 대처법이 난감하다는 게 문제다.

"이전부터 반지성주의 빌드를 시험하셨는데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가 뭐가 있나요?"

음. 생태계의 전략에서 거북이, 나무늘보, 아르마딜로 이런 것처럼 '방어적'인 전략을 짜는 생명체가 나오면, 반지성주의 전략에서는 그놈들과 공생하는 생명체를 내보내는 것으로 대응했다.

"오호."

그게 아니면 방어적, 절약적인 전략을 짜는 놈들이 나름대로 적 생태계 파괴를 할 수 있게끔 하든가. 아니면 그놈들의 존재로 생존하게 하는 생명체들을 또 만들어서 생태계를 더 건강하게 하든가.

지금은 다 힘들다.

근본적으로 내가 [빵]을 만든 것 자체가 노천 광산에서 살 수 있는 생명체가 없으니 억지로라도 만들어본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다른 생명체를 만들어서 이 상황을 돌파하는 것 자체가 억지스럽지. 지금 도우와 빵도 겨우 만든 거니까.

"천사의 시점에서 평가하자면, 사실 [빵]은 생명체조차 아닙니다."

"응?"

"저건 [골렘]입니다. 인공적으로 만든 육체에, 인공적인 정신을 깃들게 만든 병기요. 다른 차원에도 저런 식으로 만드는 것이 있죠."

"······."

"한마디로 번식욕이 없다든가, 비정상적으로 느긋하다든가. 경쟁 자체를 포기한다든가. 전부 생명체가 아니라 명령을 입력받지 못한 골렘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저것은 생물학적인 메커니즘으로 만들어졌을 뿐인 골렘입니다."

이런 젠장. 진짜로?

"비슷한 것을 집어내자면 언데드가 그것과 가장 비슷합니다."

"허? 뭐, 스켈레톤이나 좀비?"

"예. 죽은 자의 육체에 영이 깃들어서 흐름으로만 움직이는 존재. 번식도 욕망도 없지만, 에너지는 섭취해야 하죠. 저것은 신체의 모든 부분이 살아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언데드와 그 움직임이 다를 바 없습니다."

"······."

결국, 나는 [빵]을 그나마 〈생명〉 점수라도 올려주라는 의미에서 덩치를 키우고 수를 늘리는 것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수가 늘면 지들끼리 영역다툼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이 빌어먹을 생명체들은 진짜 공격성이 거세라도 된 건지 그냥 번식을 안 하고 느긋하게 지내는 걸로 환경에 적응하더라.

아무래도 생명체로서 방어력이 너무 높아서 싸우는 게 에너지 소모량이 너무 높다 보니까 성격도 유해진 것 같은데, 금속으로 된 강인한 디저트 군단을 만들고 싶었던 입장에선 안타깝다고밖에 못하겠다.

그렇군. 그런 일이 있었다.

난 아직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커뮤니티가 열리고 여유 자원이 있는 지금, 어느 정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골렘이나 언데드 등, 인공생물의 전문가를 찾으면 답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냥 빵에게 명령을 내려줄 지성체를 만들어서······."

자. 커뮤니티를 둘러보자.

"이제 제 말은 듣는 척도 안 하시는군요."

"문명 관련해선."

커뮤니티에서는 교류가 아직 활발했다. 하긴 그렇다. 다섯 번 싸웠으니, 내 남은 상대는 25명인데, 지금 남은 플레이어가 3천3백만. 굳이 적대할 것 없이 교류와 협력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일단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제목: ★급구★ 인공생물 전문가 찾아요 ㅠㅠ 서비스로 생명점수 랭킹 1위의 생태계 컨설팅 제공 가능!!!

내용: 마법을 좀 주물럭거리다가 골렘인지 언데드인지 모를 뭔가를 만든 것 같은데 얘들이 가만히 앉아서 밥만 먹고 일을 안 해요 ㅠ.ㅠ 얘들 일하게 만드는 법 알려주실 분 있을까요?」

댓글은 의외로 빨리 달렸다.

「댓글 1: 그런 걸 만들었으면 그냥 세계에 있는 신비학자들에게 연구시키면 되는 거 아닌가?

댓글 2: 정확히 뭘 만드신 건지 뭔지 모르겠는데, 혹시 관련 개체의 자료를 공유해주시면 봐드리겠습니다.

댓글 3: 그 화제가 됐던 생명 점수 3만 점의 플레이어시군요? 당장 생태계 컨설팅 받을 수 있습니까? 인공생물은 잘 모릅니다만.

댓글 4: 그런 문제면 그냥 지성 부여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걸로 이미 있는 지성을 더 높일 수도 있으니까.」

반응은 뭔가 밍숭맹숭했다. 적극적인 협력도 아니고 그렇다고 배척도 아닌 미묘한 대상.

"비인 님이 생명 점수 3만 점으로 너무 이목을 끄신 것 같습니다. 최상위권에게 더 도움을 주기 미묘한 거죠."

하긴. 그렇겠군.

게시글을 올려두고 반응을 확인하면서 관련 전문가가 없나 뒤져보니, 잠시 뒤 게시글에 댓글이 달림과 동시에 내게 메시지가 하나 날아왔다.

「댓글 35(미훈): 혹여 지성 부여 등의 권능을 활용할 수 없는 문제라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미훈' 플레이어가 〈대화〉를 신청했습니다.」

대화를 먼저 신청할 정도로 적극적인 플레이어가 없었던 걸 생각하면 과감하고 좋군.

어디. 받아볼까.

「'미훈' 플레이어의 〈대화〉를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그가 부르는 대로 채팅방으로 의식을 옮기려고 하는데, 천사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진중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비인 님."

"음?"

"이게 몇 안 되는 게임 규칙의 예외기 때문에 말하는 겁니다만, '미훈' 플레이어는 게임에서 패배해도 영혼이 소멸하지 않습니다."

······.

"뭐? 야. 잠깐. 왜? 게임의 근본 조건이 무너졌잖아."

"그렇기 때문에 지금 비인 님이 물어보지 않아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대신 미훈 플레이어께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놓기로 했기에, 그리고 게임의 진행에서는 그 플레이어의 협력이 필수불가결했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넘어갈 정도의 사안이 아니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잠깐! 그게 뭐야! 다들 목숨 걸고 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 목숨보다 심한 영혼 소멸 걸고 하는 거 아니었냐? 그런데 뭐 돈이 많아서든 주최측의 후원자든 영혼 소멸이 안 되는 플레이어가 있다고?! 그럼 나는 이 게임 왜 목숨 걸고 하고 있나! 그 플레이어 혼자 아무 리스크 없이 참가해선 처절하게 싸우는 다른 모든 플레이어를 기만하는 거잖아!"

그러자 천사가 당황하며 변명을 쏟아냈다.

"그, 그게. 저도 표면상의 사실만으론 그걸 납득하시지 못할 것을 알아서 미훈 님과 접촉한 시점에서야 말씀드리는 겁니다.

하, 하지만 진짜로 어쩔 수 없습니다. 해명 한마디면 아마 비인 님을 포함한 모든 플레이어가 왜 미훈 님은 영혼 소멸을 시킬 수 없는 것인지 납득할 것이고, 또한 미훈 님이 지불한 그 대가가 완벽하게 합당하다고 인정하실 겁니다."

"그런 마법의 해명이 있어???"

그리고 차원문이 열리고, 내 분신의 의지가 그대로 다른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공개 대화방으로 끌려 들어가는 평소의 감각이 아닌, 항거할 수 없는 거력에 그대로 매달려 가는 듯했다.

천사가 숨죽여 입을 열었다.

"······미훈 님께서는, 지금 플레이하고 있는 게임의 무대를 제공한 분. 다시 말하자면 모든 지형에 박혀 있는 신의 파편의 원주인, 다시 말해 신이라 불렸던 존재, 본인입니다."

"?!"

42화. 최강의 플레이어 2

어쨌든 채팅방으로 의식을 옮긴 나는 내 아바타를 꺼내서 채팅방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상대의 아바타가 이 채팅용 아공간에 들어오는 그 순간 있지도 않은 하늘이 열리며 우주 공간 삼라만상 모든 흐름이 그에게 끌려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쾅!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것은 마치 지구의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를 닮은 형상의 생물체. 그것이 들어오자마자 사방으로 포효한다.

세계 만물이 일제히 제 주인을 만나서 기쁘다는 듯 진동하며 시스템 창조차 그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티없이 맑은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기깔나게 상쾌한 미소를 내게 지어주었다.

"본선(本仙) 미훈 이곳에 강림했도다."

난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그놈을 쳐다봤다. 그러니 그놈이 알아서 지껄였다.

"오호. 거기 있는 준선(準仙)이 바로 비인인가? 흩뿌린 모든 조각 중에서 가장 풍요롭다는 그대의 세계가 궁금하지만, 이리 만난 것이 인연이니 먼저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뒤늦게 참새를 닮은 그의 천사가 문을 따라 들어왔다.

"아앗~ 미훈 님. 그러니까 그렇게 허용된 것 이상의 권능을 발동하시면 안 된다니까요······!"

"걱정하지 마라. 그저 겉보기만 화려할 뿐인 장난일 뿐, 본질적인 오락의 규칙을 어길 생각은 없으니."

"그래도 그렇게 자기가 특별하다는 티를 내실 것 까진 없으신데······."

나는 티라노답지 않게 우람한 팔이 달린 데다가 심지어 그 팔 한쪽에 부채를 쥐고 있는 그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전 차원 규모에서 벌어지는 게임이고, 판타지 세계와도 엮였다고 하니까 별의 별 이상한 놈들이 나올 것도 예상하긴 했다.

하지만 저놈은 설정이 좀 과다하지 않냐?

"본선의 존재에 몹시 당황한 기색이구나. 준선 비인이여."

"당연히 놀랐지······. 조각난 신의 파편을 다루면서 게임하고 있는데, 그 조각난 신이라는 당사자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그럴 법도 하지. 그대는 이 오락에 참가하기 전에 일개 범인(凡人)에 불과했던 것 같으니."

"······."

티라노 신선? 도사? 선인(仙人)?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데, 미훈이라는 자는 어쨌든 수각류 공룡 비슷한 종족으로 보였고, 더 나아가서 설명을 듣자니 사실 지금 보이는 아바타는 그저 범인 시절의 육신을 모방한 것일뿐 자신은 이 육체의 모습을 하지 않은 지도 몇십만 년은 지난, 뭔가 인간을 초월한 고등한 존재라고 한다.

그런데 신은 아니라고.

"신이라! 분명 본선의 권능이 너희들이 그렇게 부르는 자들의 권능과 맞닿아 있긴 하지만 진짜 신은 아니도다. 오히려 본선은 진선(眞仙)에서 신선(神仙)이라 불리는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수행하고 있나니. 이 오락의 주최 측에 본선의 육신을 제공한 것도 그 일환이었느니라."

나는 일단 천사한테 따졌다.

"신이라 불렸던 존재의 파편이라며?"

"직접적으로 신이라고 하진 않았습니다."

"아니 너 분명히 신이라고도 말했어."

"그렇게 표현하는 게 일반적인 사람에겐 이해가 쉬우니까요. 실제로 미훈 님이 지구인 기준으론 신이라 불릴 정도의 권능을 가지신 분도 맞습니다. 일단 시간조작을 이용한 역사개찬과 미래개변은 당연히 할 줄 아시고 은하 규모의 파괴가 가능한 힘, 그 외의 각종 비상식적인 권능을 행사하실 수 있으시거든요."

"음! 단지 그런 것으로는 진선은 될 수 있어도 신선이라 불릴 수는 없는 것이지."

진선이니 신선이니 하는 건 이놈들이 한자와 중국어로 말하고 있는 건 아닐 테니까 뭔가 다른 개념이겠지.

내가 서브컬쳐로 선협 소설이란 장르를 알고 있으니까 대충 그쪽 표현을 써서 비슷하게 번역되는 거겠고······.

"그렇습니다. 정확하게 이해하셨습니다."

대단히 당혹스럽긴 했지만 첫 감상만 말하자면.

"아무튼 그러면, 주최측의 목적이 흩어진 신의 파편을 전부 끼워 맞춰서 신을 부활시키는 것은 아닌 거로군."

"하하! 당연히 아니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나? 어떻게 끼워 맞춘들 내가 벗어던진 허물이 다시 내가 될 수는 없지."

"그렇게 비웃곤 있지만, 참가자 중 지형이 곧 신의 파편이라는 걸 알아낸 절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했을 걸. 솔직히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 의문에 대해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한사코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그 증명을 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좋다. 그러면 주최 측의 말이나 저놈의 말이나 전부 사실이라고 믿으면 다음 의문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

"당신, 사실상 우승 내정자 아니야?"

"전혀 그렇지 아니하다. 본선의 능력과 이해는 일개 범인이 볼 때는 전능해 보일 수도 있으나 분명한 한계가 있나니. 본선의 순위는 천사의 설명에 따르면 최상위권이지만, 그래도 상위 1리(0.1%)에 겨우 들 정도라고 하는군. 만약 든든한 조력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더 떨어졌겠지."

조력자? 부하 신 말인가? 커뮤니티 활용을 꺼리지 않는 듯하니 다른 동맹을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군.

"신이라 불릴 정도로 강하면서 모르는 것도 있나?"

"후후. 그대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을 아는 학자가 있던가? 아니면 모든 운동과 무예에 통달한 무도가는? 없겠지. 본선은 그저 강할 뿐이다. 오히려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모르는 것을 깨치려 이 오락에 참가했다고 보아야 마땅하겠지. 많은 것을 배워가는 중이다."

말이 안 되는 설명은 아니다만······.

"가장 해명이 필요한 부분이 이거다. 당신이 지면, 요컨대 영혼 소멸을 당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되나?"

"어느 지점에서 탈락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충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탈락한다면 처음에 참가한 수만큼의 명(命)을 잃게 되겠지."

"명(命)?"

"알기 쉽게 말하면 10억 명 가량의 인생, 그 정도 분량으로 쌓은 적공을 잃는다고 할까. 물론 승점(포인트)를 많이 따면 비교적 적게 잃겠지만 말일세."

"고작 그걸로 끝인가?"

"하! 역시 범인 출신이라 웃길 줄 아는군. 그대는 고작 영혼 하나. 그 삶조차 그리 길지 않은 것 같군. 나는 10억 개 가까이 되는 명을 걸고 있는데 어찌 가볍다고 하는가."

"그렇게 귀한 걸 왜 굳이 판돈으로 걸고 게임에 참가했나?"

"진선이라고 한들 불멸의 존재는 아니니까. 나는 이 오락에 참가하기 전에 이미 내 본질적인 명에 한계를 맞이하고 있어 우주의 섭리에 따라 소멸할 운명이었네. 내게 주어진 명을 극복하려면 승급 의식에 도전하는 수밖에 없었고, 이 오락의 주최 측과 협의해서 이러한 형태로 승급 의식을 치르게 됐지. 설명은 이걸로 됐나?"

음······. 솔직히 말해서, 지구 살던 평범한 인간 입장에선 저쪽이 무슨 사실상 신이니 시간을 조작하고 은하를 부숴버릴 수 있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어도 별 감흥이 없긴 하다.

그게 진짜인지 당장 증명은 못하니까. 주최 측에서 뿌려놓은 일종의 사기꾼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사기꾼이라는 증거도 없고, 주최 측에서 굳이 이렇게 복잡한 사기를 칠 이유도 없다. 그러면 단순한 논리에 따라서 그냥 사실이라고 믿는 게 낫겠지.

"전부 믿겠어. 솔직히 말하면 진심으로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인지 거짓인지 내 알 바가 아닌 것 같군."

"오호."

"다만 마지막으로 이것 하나만 물어보지. 그 뭐랄까. 그렇게 위대한 존재가 우리 같은 미물들이랑 어울려 게임해도 괜찮은가? 말마따나, 나뿐만 아니라 무엄하게 구는 이들이 많을 것 같은데."

그러자, 미훈은 조소를 머금고 키득댔다.

"물론, 무엄한 자들이 많지. 편법으로 준선이란 격을 얻은 주제에 감히 진선인 나 미훈의 역량도 알아보지 못하는 미천한 것들. 그런 벌레만도 못한 미물들이 나에게 대드는 꼴을 보고 있으면 참을 수가 없어······."

"······."

"크큭. 정말로, 후욱. 참을 수가 없단 말이지······! 우후후······. 마지막으로 멸시라는 걸 받아본 게 언제였던가, 후후. 쿠훅. 쿠후후훅······!"

침 질질······.

"지금인 것 같군."

"응? 무엇이 말인가?"

알아듣지 못했으면 됐어······. 그래. 요상하게 얽히긴 했지만, 결국 따지자면 나랑 동등한 플레이어란 거 아니야.

그러면 당장 내가 바라는 건 하나밖에 없다.

"너무 놀란 나머지 이래저래 귀찮게 해서 미안하군. 미훈. 내 생태계의 산 것 같지도 않은 생물들에게 지성 없이 확고한 경쟁욕구를 전달할 수 있나?"

"그대가 공고에서 거짓을 섞지 않았다면 가능할 것 같네."

"좋아. 만약 그것을 도와준다면······. 그래. 다른 이들에게 해줬던 것처럼 기여도 1당 4포인트 받는 생태계 컨설팅을 해주지. 그쪽이 어떤 세계를 가지고 있든 나보단 생태계에 대해선 비전문가일 테니까."

"물론. 나도 그걸 바라고 연락했으니."

우리는 서로 불가침 조약을 맺고 각자의 세계로 건너갔다. 나는 분신을 하나 보냈고, 저쪽은 신성력으로 분체를 만들어서 보냈다(특성도 없이 해냈기 때문에 『신계일체』는 뭐가 되나 싶은데, 듣자하니 완벽한 자아와 동일한 감각을 지닌 내 것과는 달리 제한적인 기능만 있는 거고, 누구나 익숙해지면 할 수 있다고 한다.)

[미훈: 와. 이 세계는 정말 놀라운데요? 어떠한 문명도 지성체도 만들지 않았다니, 이러한 전략으로 이토록 번성할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건너간 미훈의 분신이 뭐라 메시지를 보냈다. 저놈은 또 메시지로 말할 때 정상이 되나. 요상한 컨셉질을 하는구만.

저쪽은 내 분신이 알아서 할 거고, 나는 미훈의 세계를 쓱 둘러봤다. 미훈과 닮은 공룡인간들이 나름대로 문명을 일구고 살아가고 있었다.

특이한 건 이종족이 많았단 걸까. 동맹 신들이 의외로 있나? 싶어서 봤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동맹 신은 한 명도 없었다. 나와 세사이사처럼 모든 상대를 다 소멸시켜 버리고 올라온 것이다.

그럼 그냥 점령한 상대 종족을 포용하는 플레이를 한 것일 터. 나는 일단 미훈의 세계를 훑었다.

전반적으로 산악 지형. 산이 꽤 높다. 얼마나 높냐면 구름이 걸쳐져 있고. 구름에 떠 있는 땅······. 같은 것도 있군.

게임 내에서도 존재했지. 판타지 세계라고 하늘섬? 천공섬? 정식 명칭이 생각 안 나는데 공중에 있는 지형이 있었다.

그렇게 보면 꽤 험악한 지형일 것 같은데 분지도 많고, 강우량도 적절. 그리고 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지면까지 이어지는 지형도 있어서 히말라야 같은 척박하고 높은 산보단, 동아시아 지역의 울창한 숲과 강이 끼어 있는 명산 같은 것이 떠올랐다.

주 산업은 농업이고, 지형 레벨······뭐야. 지형 레벨이 왜 이렇게 높지? 나도 지형 몇 개는 써먹을 줄 몰라서 버렸는데 이놈은 지형 10레벨이 1개. 9레벨이 3개에, 가장 낮은 지형도 4레벨이네?

신체의 원주인이라서 그런가? 지형 레벨을 엄청나게 올린 플레이 같은 걸 했나······.

그리고 세계를 마저 훑어본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응?"

어. 뭐야. 이 세계.

처음에는 그냥 인구밀도가 많이 낮고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다······. 정도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지형 레벨이 전부 높은 이유를 알겠다.

지형을 그냥 거의 훼손하지 않았다.

농업 비슷한 거라도 하는 게 기적일 정도라고. 〈기술〉이 얼마나 낮은 거지?

거의 신석기 원시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은데, 지금 충돌 5번째 이후란 말이다. 적어도 청동기, 부족국가를 이룰 정도로는 개간하고 인구가 늘어 있어야지······.

심지어 '군대'가 없다. 그런데 〈군사〉점수는 또 6만 점이 넘어. 도대체 뭐야?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많은 군사 점수를 만들어 낸······.

하고 둘러보던 나는, 경악스러운 걸 발견했다.

산속 동굴에서 홀로 참선하면서 명상하는 공룡인간이었는데. 아니 중요한 건 이놈의 행동이 아니고.

「연단우 〈전설적 고유 승천자〉

체력 LV.7: 8,034

전투 LV.8: 29,645

솜씨 LV.7: 17,486

지능 LV.7: 12,304

매력 LV.8: 18,294

정신 LV.8: 22,063

권능 LV.9: 32,946

마력 LV.7: 8,152

개체 총점 LV.8: 148,924」

뭐야. 이놈은.

지금 내 생태계의 최종보스인 요거-토소스가 겨우 6레벨 넘겼다. 그렇게 열심히 단련했는데 겨우 6만점 근처란 말이다. 아니 겨우도 아니지. 이 시점에서도 대부분의 세계는 단독으로 처부술 수 있을 테니.

근데······. 뭐? 이 단계 때 8레벨? 능력치 총합은 약 15만점? 장난치냐? 저놈 혼자서 요거-토소스 2.5명을 혼자 상대할 수 있잖나.

둘러보니 연단우란 놈이 독보적이었지만 비슷하게 5레벨은 된 서사급 개체가 4명은 더 있었다. 그놈들이 키우는 제자인지 자식인지 하는 놈들도 전부 비정상적으로 강한 영웅 개체에, 〈승천자〉가 달려 있었다.

승천자는 개인이 뭔가 강력한 기술로 개체의 한계를 넘은 것, 표상과는 달리 종족의 한계 자체가 아예 없는 자들을 말한다. 뭐 그렇다고 우월하거나 강하다는 건 아니고 일장일단이 있지만······.

나는 왜 이 녀석의 칭호와 어투가 무슨 중국 서브컬쳐 대표인 선협소설의 그것처럼 번역되는지 지금 이해했다.

이 녀석, 말 그대로 자기 세계를 선협 세계처럼 키웠다.

소수의 극도로 강력한 초인이 모든 자원을 독점하고, 일개 범인들은 그저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가축으로나 존재하는 세계.

군대고 사회고 문명이고 필요없다. 그냥 반만년 동안 수행한, 1:백만도 할 수 있는 최강 유닛으로 적의 군대도 혼자 휩쓸고, 성도 때려 부수고, 도시도 날려버린다.

판타지 세상이니까 가능한 기예.

하지만 이론상으로나 존재할 뿐 실현할 엄두는 도저히 안 나는 말도 안 되는 빌드를 고작 지금 시점에서 실현시킨 미친놈이 있었다.

그의 본체가 나를 보고 웃었다.

"어떤가? 내 세계는?"

"많이 놀랍군."

"그렇다고 하더군. 내 든든한 조력자도 그렇게 평했어. 이기기 대단히 어려울 것 같다고. 자네 생각엔?"

음······. 좀 어려울 것 같지만······.

"내 생태계가 질 것 같진 않군."

"크크큭······. 대단한 자신감이군. 정말."

"그리고 이렇게 좋은 땅을 두고 놀려두고 있다니 한심할 정도다."

"오호. 그럼 자네는 이토록 훌륭하게 가꿔진 본선의 파편을 더 높은 경지로 발전시킬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나는 계속 말하지만 극렬환경보호주의자가 아니다. 이 녀석이 지형과 영웅을 위시로 한 극단적 영웅 빌드라면, 그에 맞춰서 세계를 튜닝해주면 되는 법.

잠시만 기다려봐라. 눈이 번쩍 뜨일 테니까.

43화. 빵과 명

반지성주의 빌드를 제대로 완성하기 전 내게는 몇 개의 과도기가 있었다.

가장 오랜 시간 기울인 건 마법과 융합해서 요괴나 괴물 같은 것을 만들고, 그런 강력한 괴수들로 적의 세계를 점령하는 빌드였다.

지금은 완전히 포기한 빌드지만, 지성체 대신 강력한 괴물, 문명 대신 강력한 마법과 특별한 고유 창조물들로 압박하는 전략은 꽤 쓸만했다. 중후반까진 말이지.

극후반으로 가니까 그냥 〈기술〉과 〈산업〉의 힘으로 어마어마한 수를 무장시키고, 핵폭탄 같은 걸 만들어서 뻥뻥 쏘아대니 무력하더라. 〈생명〉과 〈신비〉의 조합. 그 고점은 〈기술〉과 〈산업〉의 조화보다 명백히 낮았던 거다.

그리고 최상위권 플레이어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기술〉 〈신비〉 〈산업〉을 다 섞어서 행성 표면을 싹 쓸어버리는 마법 핵폭탄 같은 거 만들어서 던져대더라.

상대가 되냐고. 생물이 아무리 강해도 생물이다.

적의 〈기술〉레벨이 대충 23을 넘는 시점부터 그 어떤 생명체도 발달된 문명의 공격을 견디지 못한다. 아예 전부 괴수 능력으로 다 몰아 넣어도 26레벨?

그나마 동급으로 레벨을 올려둔 고유 창조물들은 그 시점에서도 좀 버티지만 그뿐이다. 고유 창조물은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 문명을 갈아엎지 못한다.

물론 극후반에나 일어나는 일이지. 하지만 나는 최종전까지 갈 건데 당연히 23레벨 이후 쓸모없어지는 빌드를 써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방식의 빌드로 틀었다.

그렇지만 그때의 경험은 남아 있다.

'비정상적으로 강한 괴물 만들기'를 게임의 형태로나마 수천 번은 경험해봤다. 당연히 판타지에 가까운 생태계도 많이 만들어봤다. 괴물과 문명의 조화, 혹은 생물을 이용한 판타지 문명도 여러 번 시험해보았고.

이놈들의 세계가 선협이라면 난 선협에 맞춘 세계를 만들 뿐이다.

"네 세계에 풍요보다는 고난을 가져올 것 같은데 상관없나?"

"호오? 고난이라."

"단순한 재난이 아닌 너의 영웅들을 더 강하게 단련시켜줄 수 있는 고난이다."

"그렇다면 상관없으니, 마음껏 해보거라."

좋다. 그러면 방향성에 대해 허가도 받았고.

일단 상대의 세계를 더 살핀다. 이곳은 내 세계가 아니라 『신계일체』가 통하지 않는 만큼 직접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이 미훈이란 공룡 신선의 빌드를 세계를 보고 역으로 추론한다.

게임 내에서 핵심이 되는 건 역시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강한 몇 개의 상위 개체, 선협풍이니 수도자라고 할까?

아마 이 시점에서 모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웅이 이 세계의 [연단우]라는 공룡 수도자다.

요거-토소스의 2.5배 되는 능력치. 요거-토소스도 문명 하나를 일소한다. 이 정도 괴물이 있다면 방어고 공격이고 대적할 자가 없을 터.

그리고 연단우가 홀로 수행하는 '지극히 평범한 수도자'에 가깝다면, 서사급의 5레벨 수도자들은 문파를 만들어서 제자들인지 자식들을 키워서 서로 경쟁하고 있다. 얘들이 신석기 수준 기술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생각하면 어이가 없군.

하지만 의외로 집 자체는 제대로 지어져 있는 것들이 좀 있었다.

'제대로'라는 건 짜임새가 있는 구조를 말한다. 그것을 짓고 있는 것은 뭔가 거대한 소라게 같은 종족이었는데, 짐승이 아니라 지성이 있는 인간이었다.

"저 종족 말인데, 다른 이들과는 대우가 다른 것 같군."

"눈치챘나? 내 조력자의 종족이라네. 공법을 몇 개 넘겨주는 것으로 그곳에서 일꾼을 데려와 고용했지."

그런가. 그 조력자라는 놈은 〈산업〉과 〈기술〉에 다소 일가견이 있나보군.

어쨌든, 저 수도자들이 배운 마법은 무려 〈체력〉 〈솜씨〉 〈지능〉 〈매력〉 〈정신〉 〈마력〉을 전부 필요로 하는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다.

보통은 마법이라고 해도 한두 개 능력치만 필요한데 모든 능력치가 다 필요한, 터무니없을 정도로 익히기 어렵고, 대신 그만큼 강력한 마법.

이 문명이 빈약한 세계에서 저런 강력한 영웅들의 유지비를 대주는 것은 고레벨의 지형이다. 정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에 박힌 지형들의 레벨이 높았다.

"확인하고 싶은데, 특성으로 지형을 강화했나?"

"알아보나? 상점 구간 때 신화급 특성을 구매했다. 그렇다고 한들 본선의 원래 신체 능력을 발휘하기에는 한참 모자란 수준이었으나, 꽤 도움이 되었지."

『무위자연: 지형의 성장이 다른 지형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으며, 어떤 지형이라도 서로 겹칠 수 있습니다. 세계 내의 모든 지형은 개간되지 않은 정도에 따라 추가 레벨 +5의 이점을 얻고, 최대 레벨 보너스를 받는 곳은 언제나 풍요로우며 재난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아. 이거. 이른바 야생-자연보호 플레이할 때 쓰는 특성이지. 나도 가능하면 얻고 싶었는데 얘가 가져갔네?

한마디로 세상을 거의 개간하지 않아서 미칠듯한 레벨 보너스를 받고 있는 거다. 그나마 개간하는 장소는 최소한의 농업만 하고.

어떤 의미로는 시작점 자체는 나랑 비슷하기도 하다. 일단 지형 레벨을 올리고, 그다음 그곳을 기반으로 최대한 강력한 생명체를 키운다. 다만 많이, 다양하게 키우는 거랑 몇 명만 집중해서 키우는 식으로 방향성이 다를 뿐이다.

이렇게 지형 레벨이 무지막지하게, 그리고 전체적으로 높으면 지형 자체에서 뽑아내는 마력이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것으로 수도자들을 성장시키면서 또한 고레벨 수도자들이 먹어치울 막대한 마력, 유지비를 감당하는 건가. 진짜로 빌드 자체는 나랑 비슷하네.

"영계는 안 만들었군?"

"그대는 다리가 멀쩡한데 목발을 쓰나?"

세사이사 자식은 멀쩡한 다리도 자르고 사이보그로 개조하는 느낌인데 말이지.

빌드 자체는 이해했으니 이 산악 지형의 생물종들을 살핀다.

아예 개간을 안 한 만큼 자연 자체는 건강하지만, 생태계는 건강하지 않다.

신의 파편(이제는 이 말도 좀 우습지만)은 고작 10제곱킬로미터의 땅만 제공하는 만큼 다양한 생물종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곳에 서식하는 생물종을 150배 이상 늘린다. 그것부터 한다.

일단 이곳에서 가장 눈여겨볼 지형이라고 하면······.

"영험한 동굴 LV.9: "대지저"로 내려갈 수 있는 통로입니다. 주변 지형의 흐름을 빨아들여 순수한 마력의 정수인 [공청석유]로 만듭니다."

몇 번이나 생각하지만, 공청석유는 번역을 잘한 건지 못한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무협 세계관에서 나올 법한 영험한 동굴이다. 이 세계의 최강 개체인 안연우도 여기서 수행중.

넥타르 샘과는 달리 영양가 없지만 캐릭터의 능력치를 대폭 상승시켜주는 영약을 만드는 이곳을 중점으로 쓴다.

나는 먼저 벌레들을 창조했다. 이 세계에 거의 없었던, 쓸모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살 수 있어서 살아 있는 벌레들이다.

이 벌레들은 지형 레벨 7~10 사이에 포진한 이 풍요로운 산맥의 자원을, 말하자면 산이라고 하는 생태계의 마력을 빨아먹는다.

천공섬에 있는 것들은 단단한 구름에 파고들기도 하고 바닥에 있는 것은 밭에서 곡식의 양분을 빨아먹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굴에서 공청석유의 이슬을 아주 조금씩 빨아먹고 일종의 마법 생물로 자라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이놈들이 빨아먹되, 지형이 제대로 응집하지 못하는 여분의 마력만 빨게 하는 것이다. 지형의 본업을 해쳐서야 본말전도다.

그리고 대량으로 진화시킨다. 서로 다른 종 15개. 그리고 그 종 15개를 최소 20개의 종으로 분화시켜서 300개종의 벌레들을 만든다.

이러면 특정 종이 압도적인 우점종이 되는 대신 기반이 튼튼해져서 귀중한 영약의 소모량을 최소화하면서도 뽑아낼 건 다 뽑아낼 수 있다.

"으, 음? 이런 미물을 만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기다려봐. 아직 시작도 안 했어.

그다음 식물종도 늘린다. 이것도 평범한 잡초가 아니다.

땅의 힘 자체를 빨아먹고 체내에 마력을 품는 생물들이다. 역시 대지의 자양분을 과도하게 뽑아내지 않도록, 하지만 뽑기는 뽑아내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

"그대, 지금 인공적으로 영초를 만드나? 그 시도는 가상한데 그렇게 해봤자 별 의미가 없······."

아. 좀. 기다려보라고.

영초라고 불렀으니 그렇게 부르자. 체내에 마법을 품은 식물들, 혹은 약초와도 같은 성질을 지닌 것들이다.

보통은 이런 생물을 만들어봤자 자연계의 생존경쟁에서 그저 밀려날 뿐이다.

체내에 마법을 품는다고 얘가 불을 쏘거나 뭐 그럴 수는 없으니까. 오히려 불필요하게 마력을 저장하는 기이한 생물이 될 뿐이지.

그러니까 앞서 말한 벌레들이 필요한 거다. 벌레들은 영초의 마력을 갉아먹으며 주변에 마법을 행사한다.

벌레들은 스스로 마력을 합성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영초의 마력에 의존하는데, 여기서 진화를 과감하게 해서 벌레들이 본능적으로 영초를 관리하는 농부가 되게끔 한다.

부자연스럽지 않다. 아카시아 나무 중 일부는 체내에 개미를 먹여 살리는 기능이 있다. 왜냐면 그렇게 하면 개미들이 알아서 주변 잡초들 싹 제거해주고 다른 해충도 잡아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개미 중 일부는 버섯 농사도 짓는다. 진짜 농사다. 개미굴 내의 온도와 습도를 본능적으로 조절해서 버섯이 자라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고 그 버섯을 먹는다.

얘네들이 영초상대로 그러한 농사를 하게 한다. 벌레들은 미약한 의지력을 가지고 마법을 부릴 수 있고, 강한 마법으로 구애, 생존, 사냥. 모든 것을 한다.

결과적으로 연약한 영초들은 벌레들에게 적응해서 점차 그들을 위해 마력을 많이 품게 되고, 벌레들은 미친듯이 진화해서(나도 진화를 가속시키고) 결과적으로 고귀한 영초와 영초를 지키는 벌레 군단이 생성된다.

당연히 그 영초들이 직접적으로 자라나는 곳은 "영험한 동굴"이다.

이곳의 영초는 공청석유를 먹어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마력을 품게 되었을 뿐더러, 공청석유를 만드는 흐름 자체를 뿌리로 끌어들여 생산되는 공청석유의 총량 자체도 늘렸다.

"호오! 이럴 수가! 이런 식으로 영초를 재배할 수가 있던가?"

그리고 이렇게 영초를 먹고 마법을 품은 벌레들은 새롭게 창조한 중간 포식자, 도마뱀이나 박쥐 등에게 먹힌다. 일종의 마법 벌레들을 먹고 중간 포식자들도 마법 짐승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중간 포식자들은 다시 더 큰 포식자들에게 먹힌다. 박쥐를 잡아먹는 새, 도마뱀 먹는 여우 등. 그들 역시 더 질 높은 마법을 품는다.

이 과정을 반복한다. 하나의 산, 산맥이라곤 하지만, 실제로 오갈 수 있는 거리는 한계가 있다. 각 산의 특정 지역마다 고유한 영초가 자라며 그곳마다 다른 생태계가 형성된다.

굳이 영초일 필요도 없다. 광물도 있고, 특별한 짐승도 있다.

지형에서 창출하는 높은 〈마력〉. 그것을 생물들이 먹고 재생산하면 중간 과정이 늘어나니까 에너지 전환 효율은 계속 낮아지는데, 에너지의 생산량과 총량 자체는 늘어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

이게 생명의 효과다.

이걸 또 반복한다.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중요한 건 균형이 깨지지 않는 거다. 만약 여기서 균형이 깨지면 목표로 하던 영초와 영약이 그대로 다 다른 생명에게 먹혀버릴 것이다.

마무리되었을 쯤에는 세계의 온갖 명산, 중요한 명소에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을 품은 영초들과, 그리고 그를 호위하는 벌레, 그 벌레들을 잡아먹는 생물들과 더불어 영초를 수호하는 온갖 고유하고도 강력한 상위 개체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이 상위 개체들만으로도 세계를 지키는 일종의 방어선이 형성될 정도. 어중간한 세계는 들어오지도 못할 거다.

마법 쓰는 호랑이, 마법 쓰는 박쥐, 거대 악어, 그 외의 온갖 요괴들 및 기화요초로 가득찬 세상이다. 세상의 주인이 사람이 아니라 요괴들로 보일 정도니 정상적인 세계라면 그저 문명을 위협할 뿐이다.

하지만 괜찮다. 이 세계의 영웅 개체. 다시 말해 수도자들이 저것들을 때려잡을 거다. 저 세계의 범인이라도 어쩌다가 쓰러트리고 영약을 얻으면 수선에 입문할 수도 있을 것이고.

말하자면, 사람밖에 없어서 심심해보이는 세계라 좀 더 선협 세계 같이 만들어 봤다. 요괴와 영약이 넘치는 세계. 이 세계 〈문화〉랑 지형 레벨이 워낙 높다보니 쑥쑥 생기는군.

그 결과, 세계의 〈생명〉과 〈신비〉 점수가 무려 각각 2만 점 가까이 올랐고, 지형 레벨이 총합 7이나 올라서 〈신앙〉 레벨도 올라갔다. 〈군사〉도 대폭 상승했고.

"이제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저 고유하고도 강력한 개체들을 쓰러트리면 영약이 생긴다. 그 영약을 먹으면 영웅들의 수행에 대단한 도움이 될 거다. 영초를 직접 캐기 위해 가장 위험한 산의 장소로 가는 것도 일종의 수행이겠지."

미훈은 진실로 감탄한 듯했다. 그자가 부채를 활짝 피고 껄껄 웃었다.

"이건 실로 대단하군! 혹시 대지의 지기를 빨아먹어서 영초를 생산해놓곤 '영약을 만들어줬다.'라고 생색냈다면 본선을 능멸한 죄를 물었을 텐데."

그래봤자 다음 경기 때 나 지목하는 거 말고 더 할 수 있는 거 있냐? 나 쉽게 안 진다.

"그런데 대지의 지기에는 일절 상처를 입히지 않고, 아니 오히려 대지의 지기를 더 늘린 채로 영약의 수만 늘릴 줄이야! 이는 기예를 넘어서 실로 하나의 선술(仙術)이로다!"

"생산량을 늘리는 메커니즘 자체는 간단하다만, 생태계의 평형을 맞추는 건 쉬운 기술이 아니라 뭔가 꼬일 수도 있을 거다. 그때마다 불러라."

미훈은 몹시 흡족한 듯 부채를 솔솔 부치면서 느긋하게 말을 건넸다.

"후후. 생태계 자문이 이토록 훌륭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군. 그대의 세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으로 오히려 빚을 지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역으로 뒤집어 쓰게 생겼어."

뭐, 그럴 수도 있는 법이지.

그런데 미훈이 묘하게 의문을 표했다.

"그런 의미로 묻노니, 그대의 세계를 분체로 파악하며 느낀 것이 있는데, 왜 본선의 파편을 향상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 세계의 그 누구에게도 지도공법(地道功法)을 가르치지 않은 건가?"

"지능 낮고 정신력도 떨어지는 내 생태계에서 마법은 무리지. 매력 기반 마법은 받는 스트레스가 워낙 심해서 못하고."

"아니아니, 마법이나 주술이 아니라 지도공법 말이야. 아. 이제보니 넥타르 샘의 수호신이 있으니 아예 쓸 줄 모르는 건 아니군. 하지만 그것은 땅에 매인 수호신이기에 당연한 거고······. 세계에 영지도 있고 지맥도 온전히 연결되어 있는데, 뭔가 다른 걸 하고 싶은 게 있는 건가?"

"?"

이게 뭔 소리야······. 하고 우두커니 바라보니, 갑자기 미훈이 그 티라노의 얼굴로 기깔나게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지성이 없는 짐승이라도 요수공법은 배울 수 있고, 천기를 읽지 못해도 지리를 깨달으면 지도공법은 배울 수 있지. 어디, 혹시 배워 그대의 세계에 가르칠 생각이 있나?"

······혹시 괴물 빌드가 23레벨보다 조금 더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44화. 빵과 명 2

내 분신이 열심히 상대 세계를 컨설팅하고 있을 동안, 나는 미훈이라는 놈이 내 세계를 돌아보는 걸 리얼타임으로 구경해야 했다.

리얼타임이라는 건 이 세계의 1초가 내 체감 시간 1초와 맞먹는 시간이라는 의미다.

몇백 년 치 시간을 압축, 가속시켜서 생명체들을 진화시키는 플레이를 중점으로 하는 나에게는 진짜 더럽게 지루한데 이놈은 굳이 그 시간 감각으로 봐야 한다고 한다.

"네 세계에서도 이렇게 하나?"

"물론이니라. 본선은 부하를 거느리지 않으니."

"······잠시만. 그러면 보호 기간이 수십, 수백 년은 되는데 그 시간을 전부 리얼타임으로 보내고 있단 말인가?"

"범인과 선인의 시간 감각은 다른 법······. 그대들은 그걸 '지겹다'라거나 '괴롭다'라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본선의 세계에 살고 있는 모두의 명(命)을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선인이라 불리는 자의 의무이자 즐거움인 것이지."

미친놈 아니야. 이거.

그럼 충돌과 충돌 사이, 체감시간 1:1인 리얼타임으로 수백 년씩 보내면서 혼자 세계를 관리한다고?

아니 뭐. 그래도 되긴 하고 그게 분명히 세계 육성에는 더 효율적이긴 할 텐데, 세사이사와 나도 부하가 없으니까 신화급 특성 사가지고 분신 만들고 아바타 만들고 한 걸 얜 그딴 무식한 방법으로 해결한단 말인가.

그렇게 진짜 한참을 지켜보며 이놈이 내 세계를 유랑하는 걸 꿋꿋하게 지켜보고 나니, 그놈의 본체가 정보를 보내 분신에게 뭔가를 전했다.

"오호. 오호······. 오호라! 그렇군. 그대의 이해가 이렇게 높았구나. 그렇다면 이제 더 돌아볼 필요가 없을 것 같으니, 그대가 문제를 겪는 곳으로 가서 요결을 전수하겠느니라."

의식을 순식간에 순간이동시키고, 우리 둘은 동시에 노천 광산에 있었다.

노천 광산은 넘쳐나는 크림들을 빵들이 우걱우걱 처먹기만 하고, 그저 바닥에 널브러져 가끔 땅을 깔짝이는 정도에서 멈춰 있었다.

"그대가 내게 지기를 상하게 하지 않고 영약을 생산할 수 있는 원리를 설명해 주었으니 나 역시 원리를 차근차근 설명하면서 그대의 피조물들을 더 높은 격으로 거듭나게 하겠느니라."

"마음대로."

미훈이 내 널브러진 빵들을 부채로 가리켰다.

"먼저 묻겠노니, 그대의 문제는 저곳에 존재하는 [빵]들이 명(命)을 갖지 못하고 그저 무의미한 삶을 이어가는 것이 맞나?"

"그래. 저놈들이 내 세계에 좀 도움이 되거나 하다못해 상대 세계를 공격하게끔 하고 싶어. 그리고 그러면서도 지성은 낮게 유지하고."

미훈은 그 말에 즉답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지성을 높여봤자 이 상황엔 하등 쓸모없으니.

지성이란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저곳에 있는 [빵]이란 미물들이 지성을 얻어봤자 무슨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겠는가?

기껏해야 '더 힘을 비축하자.' '번식하는 대신 가능한 절약하자.' 같은 생각이나 할 터."

그건 그렇다.

"저것들은 생명으로 된 기관장치, 살아 있을 뿐인 시(尸)나 다름없으니, 문제를 해결하려면 본격적으로 저것들에게 욕망을 깃들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

"크림의 공급량을 줄이거나 영토를 줄여보고 경쟁을 유발하는 시도는 이미 해봤어. 그냥 더 절약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더군."

그러자 미훈은 혀를 차며 날 꾸짖었다.

"쯧쯧. 그건 욕망이 아니라 본능에 의한 것이다. 본능대로 살면 저것은 당연히 나태해지겠지. 모든 생물이 그러한 법이니까."

"?"

미훈은 설명을 이어갔다.

"갑작스럽지만 그대. 〈매력〉과 〈문화〉가 뭐라고 생각하나? 왜 그것이 미물들의 격을 높여주는 것일까?"

그렇게 물으면 그냥 게임 능력치니까 그런 기능이 있다고만 생각했지 별생각이 없었네.

하지만 뭔가 중대한 이유가 있단 건가.

"〈매력〉이라는 것은 많은 이들이 '발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사실은 달라. 〈매력〉은 사실 '수렴'한다."

"우리가 '눈빛'이라는 표현을 쓰곤 하지만, 실제론 눈은 빛을 발산해서 물체를 확인하는 게 아니라 반사되는 빛을 흡수하는 것처럼?"

"재밌는 비유군. 그렇도다. 〈매력〉이 성립하려면 타인의 존재가 필수적이지. 말하자면 〈매력〉이란 다른 것들이 지닌 흐름을 자신에게로 흘러들게 하는 힘을 말한다."

그렇군. 그래서?

"그렇다면 그 〈매력〉은 무엇으로 올리는가?"

"〈문화〉"

"맞다. 그럼 〈문화〉는 뭐지? 〈문화〉의 본질이 바로 명(命)이다. 명이란 '의미'를 말한다. 무엇이든 좋다. 그것이 추구하는 의미. 그것이 태어나야만 했던 의미. 그리고 그것을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의미.

단순한 음악에도 상대를 즐겁게 하고자 하는 의미, 연주자의 의미, 그리고 음악 자체의 의미가 있지. 그 전부가 명(命)이다.

이러한 명(命)을 갖지 못하면 그저 생(生)에 불과할 뿐. 살아있기만 할 뿐인 송장이지. 수선(修仙)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일개 생명의 명(命)을 거역하는 것이기에 세계의 원리에게 배척받는······"

"아,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아. 그래서 내 빵들에게 어떻게 명을 부여할 거지?"

: :틀 렸 다: :

지금의 내 의식을 구성하는 신성 자체가 뒤흔들리는 듯한 외침에 난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뭐야. 뭘 한 거야.

우리 둘을 그저 잠자코 지켜보고 있떤 미훈의 천사가 다급히 다가와 재잘대었다.

"아앗. 미훈님······! 고작 대화에 권능을 담아 말씀하시지 마세요······!"

"질문 자체가 한심하니 참을 수가 있어야지. 여봐라 비인. 그대의 질문은 '어떻게' 명(命)을 부여하는가여선 안 돼.

애초에 일개 피조물에게 명을 새기는 것 자체는 쉬운 일이야. 그대는 이미 준선이잖나. 그냥 권능 써서 적당히 명을 부여하면 돼. 하지만 우리는 그런 수준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잖나?"

부채를 촥! 펴곤 미훈은 내게 정론을 퍼부었다.

"중요한 건 '어떤' 명을 부여하냐는 거다. 원래 명(命)이라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 〈문화〉라는 것 또한 비효율적이기 그지없는 것, 〈매력〉 또한 비이성적인 것.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생명이란 그런 광기에 끌리고 말지. 생명이란 본디 의미를 찾기 때문이야.

그런데 요컨대 그대가 저것들에게 적의 세계를 파괴하는 살육병기가 될 명을 부여한다고 하자. 저것들이 이제부터 살육을 즐기고 그것이 곧 삶의 목적이 된다고 치자고.

그게 얼마나 갈까? 저것들의 본질은 그저 자네가 만든 음식물을 먹으면서 바닥에 뒹굴거리는 것이야. 오래 못 가. 본질하고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지."

본질에 맞는 것을 해야 한다.

어쩐지, 나는 저 초월적인 미훈이라는 플레이어가 내 생태계의 잉여스러운 빵이 아니라 나 비인에게 말하고 있다고 들었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싶은가?

반지성주의 빌드를 연구하면서도 사실 알았다. 이게 세계 최고의 빌드가 아니라는 거. 더 정상적이고 효율 높은 빌드가 있다는 거.

그런데 난 왜 거기에 매달렸나? 왜 그 많은 게임 중 상당한 시간을 그것에 투자했을까?

증명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

인간이라는 존재는, 지성체는, 문명은, 사실 이 세상에 아무런 필요가 없는 존재라고, 그런 것 없이도 세상은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간다고.

문명의 발전과 성공은 그저 수많은 우연이 겹쳐서 생긴 결과에 불과하지, 그것이 딱히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즉, 인간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한다. 내가 진다면 그것은 그저 내가 틀렸을 뿐이다.

내 눈이 번쩍 뜨였다.

나는 무심코, 게임에서 승리를 위해 본질을 까먹은 게 아닐까.

말하자면 자신에게 유리한 품종개량을 시도하는 인간 같이 내 생태계를 대했던 것 아닐까.

내 생태계의 포악한 괴물들은 그러한 인위적인 품종개량으로 키워진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런 괴물을 창조할 생각도 없었다.

내 생태계의 가장 끔찍하고 강력한 괴물들은 '어쩌다 보니' 포악해야 생존에 유리하기에 그렇게 진화한 것이다. 나는 그 방향을 거들어 주었을 뿐, 지극히 '자연'스러운 진화의 방향이다.

하지만 가장 포악한 비스야킷도 〈문화〉를 안다. 구애를 알고 아름다운 집을 지으며 과시할 줄 안다.

내 최종병기 요거-토소스조차도 내 명을 추종하기만 하는 존재에서 오만하여 남들을 부리고 지배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됐다.

처음 게임을 할 때, 인간이 싫어서 인간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혹은 내가 틀렸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효율이 좋지 않은 걸 아는데도' 굳이 상대의 항복을 받지도 않고, 모든 문명을 제거하고 이겨보려는 나. 그런 나를 잠시 잊어버린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할 것은 저 빵을 내 입맛에 맞게 개조하는 게 아니지 않을까.

오히려······.

"방법을 찾았군."

"오호. 그런가?"

"방향성은 알겠는데, 이것을 실현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거들어 줄 수 있겠나?"

"물론. 본선은 일개 공법 따위의 이치는 통달하여, 모자란 것은 선술의 이치밖에 없나니. 그대 수준의 행사가 무엇이 어렵겠는가."

나는 내가 생각한 구상을 말해보았다. 미훈은 그것이 된다. 안 된다. 말하면서 내가 가는 방향성을 제대로 짚어주는 것으로 내가 그의 생태계를 컨설팅한 것에 대해 값을 치렀다.

"좋다. 필요한 구결은 전부 알려주었으니 해보거라."

나는 먼저, 넥타르 호수에서 넥타르를 들이마시고 있던 양갱 하나를 주목했다.

일찍이 천사가 언급한 적 있었던 영웅적 개체로 승격한 양갱이다.

더없이 강대한 신체, 튼튼하고 효율 좋은 내장, 화려한 장식물, 그리고 체내에 흐르는 막대한 시럽으로 강력한 전투력과 면역계, 그리고 투쟁욕과 더불어 대단히 높은 지능과 정신력, 주변을 압도하는 매력. 그리고 유일하게 [사탕]의 유전자도 접합된 개체기도 하다.

이놈을 소재로 한다.

나는 이놈에게 계시를 내려서 넥타르 호수에서 시럽강을 따라 노천 광산까지 쭉 따라오게 시켰다.

그놈은 흐름을 따라서, 그리고 자신에게 내려진 계시. 그 스스로 바라는 본능을 타고 그대로 노천 광산까지 기어 올라갔다.

"개개개개······."

그것이 노천 광산에 널브러져 크림을 먹고 있는 [빵]들에게 다가간다. 하는 것은 식사? 아니면 전투?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양갱의 본능대로 그것들과 유전자를 교환하며 자식을 낳으려 시도했다.

빵들은 당혹스럽다······. 이것이 자신들에게 왜 이러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도 육체만큼은 유전적으로 젤리계 생명체들과 가깝기 때문에 짝짓기는, 그리고 더 나아간 과정은 손쉽게 이행되었고, 양갱은 빵들을 먹어치우며, 빵들을 강간하며, 빵들의 신체를 몸에 얼기설기 얽으며 점차 커졌다.

 「[이름없는 양갱]이 "노천 광산"과 "크림랜드"의 영향을 받아 〈서사적 고유 개체〉로 승격할 수 있습니다. 해당 시도에는 합계 16,489점의 〈생명〉 〈산업〉 〈문화〉 〈신비〉 〈신앙〉이 소모됩니다.」

미뤄뒀던 문화 6레벨 특성 지금 채택.

『승격 지원: 고유 개체 승격에만 쓰일 수 있는 〈문화〉점수 4,085점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빵들과 크림을 대거 소비해서 모자란 자원을 충당한다.

「[이름없는 양갱]이 서사급 개체로 승격하였습니다.」

다섯 종류의 생명의 혼혈이었던 특별한 양갱의 몸에 빵의 유전자가 접합되었다. 이제 이것은 양갱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새로운 생물, 젤리+푸딩+구미+사탕+겔+토핑+도우+우유의 조합으로, 내가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창조한 모든 생명체가 다 들어 있는 유전자의 요람인 셈이다.

그것은 지금 아주 뚜렷하고 명확한 목적의식을 갖고 있었다.

'더 많이 짝짓기하고 싶다.'

'더 많이 자식을 낳고 싶다.'

'더 커지고 싶다.'

'더 먹고 싶다.'

'더!'

속물적이면서도 강력한 욕망이다. 생물에 대한 가장 강력한 본능. 자기 자신을 늘리고자 하는 것.

내가 만든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를 전부 품은 탓인지. 아니면 그것을 그 경지까지 승화시킨 강력한 서사=명 때문인지, 그것은 탐욕스럽게 몸을 키우고 빵들을 잡아먹으며, 크림을 먹어치우며 점차 거대하게 변했다.

그저 체급만 키웠을 뿐인 빵들은 무력하게 학살당한다. 그것에게 먹히고, 신체의 일부가 되거나, 혹은 강제로 교미당하고 그것과 비슷한 자식을 낳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거듭되며 이내 노천 광산을 가득 채운다. 완전히 새로운 종이 노천 광산을 전부 점령해버린 것이다.

'더 원해!'

그것은 크림랜드의 막대한 크림을 전부 먹어치우고, 자식들도 먹어치우고, 노천 광산에 있는 금속과 광물질을 전부 먹어 치우면서도 계속 부족함을 느끼는 듯하다.

"언덕만큼 거대해졌군."

"계속 먹고 붙은 탓이지."

'더!'

그것은 이윽고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냥 크림이 나오는 곳에 입을 대고 있으면 되겠구나.

하고, 그것은 크림랜드에서 크림이 쏟아지는 곳에 주둥이를 들이민다.

그리고 시럽강이 넘쳐흘러 크림랜드로 향하는 곳에도 두 번째 주둥이를 들이밀고, 넥타르 호수에서부터 흘러들어오는 막대한 넥타르를 그대로 빨아들인다.

더 나아가 나머지 신체로는 땅을 파먹으며, 이 노천 광산의 광맥을 전부 고갈시킬 듯 커진다.

 「[이름없는 존재]가 "노천 광산"과 "크림랜드"의 영향을 받아 〈전설적 고유 개체〉로 승격할 수 있습니다. 해당 시도에는 합계 25,004점의 〈생명〉 〈산업〉 〈문화〉 〈신비〉 〈신앙〉이 소모됩니다.」

""노천 광산"에 깃든 신의 파편과 그곳과 연결된 "크림랜드"의 전부를 뜯어내어 충당하겠다."

난 그리고 미친듯이 내 신성력과 넥타르 샘과 크림랜드를 통해 이어지는 마력, 그리고 노천 광산에 존재하는 거대한 젤리 덩어리와 넥타르 샘에 있는 수많은 생명체 폐기물, 패각과 산호들에 허공에 떠다니는 요거트들, 우유라고 불리는 정령에 아직 합쳐지지 않은 도우들까지 모조리 이것과, 이것에게 흡착한 파편에 욱여넣었다.

꿈틀─!

"박동하기 시작했구나. 저열하면서도 훌륭한 명(命)이로다."

일어나라. 바닥의 미물에서부터 창조되어, 이 세상 모두를 몸에 품은 만물의 어머니여. 내 부름에 응하라.

꿈틀─! 꿈틀─! 꿈틀─!

그대는 풍요와 다산의 여신! 요거-토소스가 하늘이라면 그대는 이 세계를 지탱하는 땅의 주인이다.

오너라! 디저트 군단의 제2군단장!

천 마리 새끼 빵을 거느리는 슈크-리무라스여! 그대에게 주어진 명에 따라 지금 모습을 드러내라!!!

45화. 슈크-리무라스

슈크-리무라스. 원래 차후 만들 군단장으로 내정된 이름이었다.

그걸 지금 쓴다. 꽤 어울리는 이름이니까.

크림랜드, 노천 광산, 수많은 빵들과 영웅적 개체, 특성 하나, 그리고 신의 파편과 더불어 지금 당장 내가 가진 자원의 상당수를 퍼부어서 만들어낸 창조물.

「고유 창조물의 레벨이 너무 높습니다.」

상관없어. 강행한다.

「승급 시험을 생략한 패널티로 해당 창조물에게 짙은 고난이 닥칩니다.」

"천겁이 밀어닥치는군. 막거라."

말 하지 않아도 안다. 신이 행사할 수 있는 힘. 신성력 하나는 끝내주게 많으니 세계가 억지로 창조물을 공격하는 것을 막대한 힘을 써서 모조리 틀어막았다.

그리하여 탄생했다.

[~~~~~~~~!]

괴성과 함께 쑤셔 넣은 모든 것들이 하나의 육체로 거듭나며, 수십 개의 다리와 거대한 몸뚱이, 그리고 비정상적으로 부푼 배와 화려한 구조물들로 장식된 그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몸체는 압축되어서 직경 15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점차 성장하며 커지겠지.

[이야이야아아아아아!]

그것은 괴성을 지르며 천천히 "노천 광산"에서 빠져나온다. 사실 이제 "노천 광산"조차 아니다. 그곳에 있던 신의 파편을 바로 슈크-리무라스를 만드는 데 써버렸으니.

그러면 당초의 목적인 금속 생명체 생성은 포기한 거냐고? 아니.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이것으로 이루어졌다.

「슈크-리무라스 〈전설적 고유 창조물〉

체력 LV.8: 27,003

전투 LV.6: 6,489

솜씨 LV.2: 282

지능 LV.5: 2,217

매력 LV.7: 10,014

정신 LV.6: 4,808

권능 LV.7: 12,677

마력 LV.6: 6,748

개체 총점 LV.7: 70,238」

지금은 요거-토소스의 능력치보다도 높은가? 다만 싸움은 체급을 생각하면 더럽게 못하는 편이다. 〈체력〉만 어마어마하게 높고 싸움 자체는 몸통박치기와 물어뜯기 이상의 공격을 못할 거다. 물론 덩치가 크니까 그것도 위협적이겠지만.

하지만 이놈은 애초에 전투용으로 만든 게 아니다.

[더! 더 원해!]

그 탐욕스러운 슈크림이 마구 날뛴다. 마음껏 하라고 해라. 이미 제작 시에 공법이고 뭐고 다 전수했다.

그것은 황폐화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만들었을 때 쓰였던 크림랜드의 흐름과 시럽강은 아직도 그것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저쪽 세계의 내가 들은 미훈의 가르침을 되새겨본다.

"지도공법이란. 물질계에서 시작해서 영류계로 나아가는 공법을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체를 '영지'로 만드는 공법이라고 할까.

반대항인 천도공법은 영류계에 있는 정신에서 시작해서 물질계로 간섭하는 공법을 말하고 인도공법은······."

"넘어가고 지도공법만 설명해줘."

"쯧. 알겠노라. 앞서 말했듯이 〈매력〉이 수렴하는 힘이라고 설명했도다. 하지만 강력한 〈매력〉으로 흐름을 끌어들여도 그 흐름은 사라지지 않아. 흐름은 흘러야 하는 것이니, 오히려 내가 끌어들인 만큼 흐름을 내주어야 하지. 이것 때문에 매력이 마치 발산하는 힘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끌어들인만큼 내주면 의미가 없지 않나?"

"아니지. 수렴과 반사의 과정에서 흐름 자체의 성질이 변하지. 누군가가 다른 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자가 언제나 사랑으로 돌려주던가? 어쩌면 무시, 멸시, 분노, 짜증, 혐오일 수도 있겠지."

"아. 그런 거군."

"그래. 그리고 이것은 "대지"도 마찬가지다. 대지의 수준(레벨)은 그대도 이미 알 거야. 그것은 대지에 깃든 흐름, 대지가 창출하는 흐름의 수준을 말하지."

그런 거였나.

"즉, "대지" 역시 〈매력〉과 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 지도공법은 대지에 영기(마력)의 흐름을 전달해 새로운 흐름을 창출하든가, 혹은 대지에 존재하는 흐름을 뽑아 자신을 통해 세상에 현현시키는 것이지."

"······뭐어. 그래서?"

"진선이 공법을 설명하는 건 어디 가서도 못 얻을 기회일 텐데 좀 주의 깊게 들어라. 에잉.

지도공법은 결국 자신을 하나의 명을 지닌 땅으로 만들어 어떤 지형에서나 자유롭게 지도공법을 사용하면 대성하는 것인데, 다시 말하자면 본선의 파편 중 '영지'에 속하는 파편을 매개로 만들어진 창조물은 이미 지도공법에서 이미 경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지. 그대의 세계의 압호주스라든가.

혹은 본선의 파편 자체를 생물로 거듭나게 하든가. 그런 것들은 지도공법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

"예를 들면?"

"다른 영지와 자기 자신을 잇는 것이지."

슈크-리무라스는 그대로 세계를 이동하며 보이는 모든 유기물과 먹을 수 있는 무기물 모두를 먹어 치운다. 하늘을 나는 감치도 안개처럼 뿜어나온 팔과 입에 저항하지 못하고 깨물려 빨려 들어간다.

그렇게 먹어 치워서 자원을 섭취한 슈크-리무라스는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자식들을 흩뿌리기 시작한다.

젤리류와 감치류, 전부 자신이 삼킨 유전자에서 비롯된 것들. 젤리와 감치가 섞이진 않지만, 포식과 소화보다는 짝짓기와 출산에 가까운 행위를 하고 있었다.

[더!]

그리고 가는 길마다 시럽을 흩뿌리고, 시럽을 타고 자신에게 흐르는 흐름과 대지에 깃든 흐름을 동시에 이으며 아직 완전하게 융합되지 않은 세계 전체를 하나로 잇고 저절로 지형 레벨을 높여버린다.

"실로 경이롭군. 대지와 연결되어 오직 낳기만 하는 요물인가."

"그래. 말하자면 내 생태계의 치유사다."

지난 번 시카도즈에게 엉망진창으로 두들겨 맞아서 황폐해진 생태계를 보고 생각했다. 이제 전쟁마다 이걸 다 복구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슈크-리무라스가 있으면 괜찮다. 생태계에 존재하는 동물의 모든 유전자를 보관하며, 모든 종류의 동물을 낳을 수 있고 이후 늘어날 동물들의 유전자도 기억한다.

식물, 젤리, 감치, 동물,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유전자의 평행이동으로 두 생물이 결합된 정체불명의 괴생명체도 낳는다. 그것도 못 써먹을 돌연변이가 아니라 충분히 강한 악종으로 말이다.

그뿐만 아니다. 알려준 지도공법을 통해 대지와 자신의 흐름을 교환. 대지에 잔뜩 깐 시럽을 통해 생태계 전체의 흐름을 하나로 일체화시키고, 그곳에서 넥타르를 공급하며 수많은 생명체들이 서식할 수 있도록 훌륭한 환경을 조성한다.

빵과 크림의 군주. 슈크-리무라스 다운 권능이다. 내 디저트 사막에 뿌리는 것들은 그야말로 크림이 아니라 마치 크립(Creep). 생명체를 배양하고 대지 전체를 잇는 초유기체다.

"저기 그런 의미를 담아서 쓰는 크립은 어떤 게임 내에서만 쓰이는 고유명사인데······."

천사 이 녀석은 왜 뜬금없이 지적질이야? 넘어가. 한국인이면 그래도 돼.

슈크-리무라스가 한 번 지나가면 시럽강이 생기고, 시럽강에는 저절로 영계와 영지와의 연결이 생겨 크림랜드와의 접점이 생겨서 크림이 솟아나고, 뒤이어 넥타르가 흐르고, 슈크-리무라스가 뿌리는 수많은 생명들이 그 자리를 가득 채워 먹고 훼손하고 복구하며, 또 태어난다.

그리고 그렇게 낳은 것들은 다른 것들에게 잡아먹히며, 또 이미 지어진 것들을 슈크-리무라스가 부수기에 계속해서 세계는 새롭게 만들고 적응해야만 한다.

오로지 낳고 먹고 성장하기만을 바라는 후방의 군단장. 그게 바로 슈크-리무라스다.

[더!]

슈크-리무라스는 계속 세계를 헤집다가 이윽고 넥타르 호수까지 갔다.

그곳의 터줏대감들인 비스야킷이 공격하지만 끄덕도 없다. 그리고는 호수에 얼굴을 파묻고 구미산호초와 몇 톤이나 되는 양의 넥타르를 그대로 먹어 치운다.

[안돼애애애애애애애!]

압호주스의 비명. 하지만 괜찮다. 이것도 자연의 섭리다. 압호주스도 지도공법을 가르쳤으니 더 효율적으로 넥타르를 생산할 거다.

[아. 충분해.]

슈크-리무라스는 충분히 에너지를 보급받고는 이번엔 더 '세심하게' '강력한' 생명체들을 낳기 시작한다. 슈크-리무라스의 직계혈통이다.

흠. 이름을 뭔가······

"천사. 크림(Cream)과 램(lamb) 사이에 말장난이 성립할까?"

"아니, 그. 저한테 묻지 마세요. 기껏 주최 측의 천사를 불러서 묻는다는 게 말장난 운율 질문인가요?"

기껏 주최 측의 천사가 와서 하는 게 저작권 지적이면서 뭘.

아. 모르겠다. 아무튼 생성된 '다크 림'들은 슈크-리무라스보다는 양갱을 닮았다.

여러 유전자의 혼종이라는 점이 그렇고, 엄청나게 강하다는 점도 그렇고, 또 크림과 시럽을 흩뿌리면서 유전자들을 마구 교환하는 점도 그렇고.

그리고 세계 내에 존재하는 강력한 포식자들에게 그것들은 잡아먹힌다. 원래 그런 법이다. 하지만 슈크-리무라스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온갖 생명체들을 만들어낼 뿐이다.

[더!]

낳을수록 배고파진다. 그것은 배고프면 다른 것을 먹는다. 그리고 낳는다.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갈증,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욕망.

하지만 그렇기에 그것은 배부를 때 감사한다. 배고플 때 괴로워한다. 그러한 강력한 삶의 의지가 주변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슈크-리무라스의 〈매력〉은 무려 1만 점. 영향을 끼치지 않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수치다.

내 생태계의 『괴생물』 특성 덕에 주위에 어마어마한 압박을 주는 슈크-리무라스.

하지만 〈공포〉와 〈위압〉에 버티지 못하는 나약한 생명체는 이미 다 죽었다. 다른 생명체들은 그 압도적인 〈매력〉에 오히려 그 흐름의 일부가 되기로 한다.

슈크-리무라스는 딱히 공격적이지 않다. 파괴는 그저 포식활동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재생과 창조하는 어머니다.

슈크-리무라스와 다크 림들이 움직이는 그 광란의 행렬을 따라가면 먹을 것이 생긴다는 걸 안 생명체들이 그 무서움과, 자칫 잘못하면 붙잡혀 잡아먹힐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따라다니며 노래 부르고, 교미하며, 또 그것이 낳는 것을 먹어 치운다.

워낙 들인 비용이 많아서 아직 세계 레벨이 오르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기만 하면 슈크-리무라스가 내 세계를 죄다 크림으로 엮을 것이다.

그러면 지형 전체가 이어지게 되고, 그것은 또 마력을 폭증시키고 지형과 연결된 크림랜드라는 영계의 성장도 이루어내겠지.

만약 상대 세계로 가는 차원 균열이 열리면 기대해라. 슈크-리무라스가 상대 세계로 전진하면서 보이는 모든 걸 잡아먹고 디저트 사막으로 그곳을 테라포밍할 테니까.

이놈은 금속도 먹고 광물도 먹고 식물 동물 가리지 않고 다 처먹는다. 체력 2만 7천짜리 괴물을 저지할 수 있는 세계는 아마 이 시점엔 거의 없겠지.

나는 나름 잘 만들었고, 좋은 결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했는데 뜬금없는 항의가 있었다.

[창조주여! 왜 이 요거-토소스가 있는데 저런 것을 만들었나이까!]

"자신을 가다듬어라. 요거-토소스. 슈크-리무라스는 그저 자신의 명을 따르고 있을 뿐이니. 저것은 너의 힘에 비하면 전혀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요거-토소스도 영지를 아직 하나밖에 가지지 못했는데!]

뭐냐. 그러니까 슈크-리무라스가 세계를 맘대로 돌아다니는 게 그렇게 짜증나는 거냐? 어처구니가 없네.

"저것에게 주어진 영역이 땅이라면, 네게 주어진 영역은 드넓은 창공과 우주, 시공간 전역인데 뭐가 그리 아까운 거냐. 셈을 못하는 건가?"

[······전부 주는 겁니까?]

응? 아. 잠시만. 게임하다보면 그 지역으로도 갈 수 있었지? 음······.

"언젠가, 세계 전체를 우리가 전부 차지하고 나면 너는 마땅히 가장 큰 영역을 누리게 될 것이다. 땅을 기는 것들은 닿지 못하는 그 높은 영역을 말이다."

[오오!]

뭐. 이걸로 대충 정산은 끝난 것 같군.

게임 시간으로 몇 년만 있으면 세계 충돌이 일어날 것 같다. 생태계 관점에선 순식간이다.

나는 내 세계의 풍경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던 미훈을 돌아봤다.

"그럼 우리 사이의 셈을 치를 때가 된 것 같군."

"그렇구나. 여봐라. 서로의 기여도를 셈해보거라."

나는 미훈의 세계를 극도로 발전시켜줬다면, 미훈은 내게 지도공법과 요수공법에 대한 지식을 주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지도공법과 요수공법 몇 개를 알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지도공법은 몰라도 요수공법은 아직 써먹지 않았다. 언젠가 써먹겠지만······. 글쎄. 지금은 가르칠 시간이 부족하다.

천사들이 잠시 계산하더니 말했다.

"비인 님이 미훈 님에게 14,424포인트 가량 주셔야 합니다."

이런. 내가 내나······. 하긴, 슈크-리무라스를 만드는 발상 자체를 이놈이 아니었으면 못했을 테니. 그 외에도 지식은 셈하는데 높게 친다고 한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더 가치가 높아진다고.

그렇지만 그렇게 부담되는 량도 아니다. 한 게임마다 이제 몇십만씩 벌 텐데, 이 정도 포인트는 그냥 넘겨줄 수 있지.

그런데 의외로 미훈 쪽에서 제안을 내밀었다.

"잠시만. 그대. 승점 말고 다른 것으로 받아가도 되겠는가?"

"뭐가 필요하냐에 따라 다르지."

"저기 호수의 비스야킷이라고 했던가? 그 강인한 생명체를 암수로 세 쌍 가져가고 싶구나."

"······뭐어. 포인트 가치를 셈하면 그렇게 어렵진 않지만. 솔직히 말해서 저놈들은 거의 통제가 불가능할 텐데?"

"괜찮도다. 그것은 본선이 감당할 바이니."

마음대로. 솔직히 생태계를 제대로 관리할 줄도 모르는데 저놈들 관리는 어떻게 하겠어. 포인트보다는 훨씬 싸게 먹히니 맘대로 가져가라.

그렇게 다른 세계와의 접촉이 끝난 뒤, 미훈의 세계에 피에 굶주린 여섯 마리 괴조가 들어왔다.

"뭐냐! 이 괴물은!"

"돌창도 술법도 안 먹힌다!"

"신체가 어찌나 단단한지 연체공법을 익힌 자들조차 당해내지 못해!"

"자, 장문인을 불러라! 장문인이 아니면 저자들을 상대할 수 없다!"

명색이 2~3레벨 수도자라는 것이 일개 자연계에서 태어난 생물을 당해내지 못한다.

4레벨의 대제자가 두 마리 비스야킷의 연계에 그야말로 갈가리 찢겨나간 걸 봤을 때는 수도자들도 범인들도 그야말로 눈앞이 까마득해진 듯했다.

하지만 진짜 미쳐버릴 것 같은 건 비스야킷들이었다.

이 세계엔 넥타르가 없다.

그 끝없는 생명의 액체! 무한한 힘을 가져다주는 그 액체!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다. 그 끔찍한 촉수에게 얻어맞으면서도 도저히 먹는 것을 참지 못하는 그 달콤한 액체!

그런데 없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배고프다. 배고파서 미칠 것 같다. 이 세계의 연약한 축생들로는 배를 채울 수 없다. 강한 것들을 찾아서 먹어 봤지만 아직도 모자르다.

비스야킷들은 흐름을 탐지하는 육감으로 가장 강력한 마력을 찾아 떠났다.

마침 그 "영험한 동굴"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수도자는 요지경으로 변해버린 세상을 둘러보고 온갖 생물의 내단을 시험하느라 자리를 비우고 있었으니, 비스야킷들은 가장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을 찾아 요괴들로 가득 찬 동굴을 뚫고 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찾았다. 그곳의 작은 호수. 잔뜩 고여 있는 공청석유라고 하는 액체를.

왠지 고향의 것이 생각나서 허겁지겁 들이키기 시작했다. 영양분은 없는 것 같지만 짙은 마력이, 강대한 흐름이 몸에 들어차니까 좀 나은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 :들 으 라: :

하늘에서 들리는 정체불명의 계시. 비스야킷들은 그것에 차마 항거할 수 없는 의지를 느꼈다.

: :나 진선 미훈이 구결을 읊노니 따라 외거라: :

비스야킷들은 영문도 모르고 그것이 알려주는 대로 자신 체내의 흐름을 운용했다.

또한 미훈이 주입하는 막대한 신성력을 받아들이며 점차 몸을 변화시켰다.

: :거 듭 나 라: :

비스야킷'이었던' 것들이 말한다.

"오오······."

"이것은······!"

화형(化形). 미훈이 조언해준 상대 신은 딱히 배워가진 않았지만, 요수공법이 경지에 이르면 그저 짐승에 불과한 것이 사람의 영성을 얻어 모습을 바꾸고 지성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은 지금 본래의 형상과 더불어 우람한 팔과 굵은 꼬리, 튼튼한 다리에 날개를 전부 가진 기묘한 종족으로 화형했다. 미훈과 비스야킷을 반쯤 섞은 모습이었다.

훗날, 세계 최강의 고수인 연단우조차도 경계하게 되는 태생적으로 우월한 요족. 비사족의 첫 탄생이었다.

진선 미훈이 기깔나게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 정도 잠재력은 있을 줄 알았도다!"

46화. 세계 충돌 -여섯 번째-

「비인의 세계

생명 LV.10: 100,832

군사 LV.9: 77,382 

산업 LV.7: 18,006 

기술 LV.6: 4,513

문화 LV.6: 4,378

정치 LV.0: 8

신비 LV.8: 33,829

신앙 LV.8: 27,688

총점 LV.8: 266,636」

신규 〈생명〉 우수 특성 『슈크-리무라스 〈체력〉강화: 슈크-리무라스의 〈체력〉을 79,451 상승시킵니다.』

슈크-리무라스는 내 생태계의 복원 담당이므로 절대 죽으면 안 된다. 물론 죽지 않아야 하는 놈들 천지지만 얘는 진짜 죽으면 안 된다.

그래서 10레벨 특성으로 아예 슈크-리무라스의 체력을 4배 가까이 올려버리는 무식한 전법을 취했다. 공격력 하나 없이 생명력만 뒤지게 올라서 아마 어지간한 세계의 전력으론 하루종일 때려도 안 죽을 거다.

그 외에 내 생태계에 주목할 만한 변화는 없었다. 산업은 사실 조금만 더 오르면 8레벨이라서 신규 특성 찍을 수 있는데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니까. 나머지 〈기술〉이니 〈신비〉니 하는 것들, 〈신앙〉이니 하는 것들 전부 성장이 둔화됐다.

아니, 오히려 성장하고나 있으니 다행인 걸까?

슈크-리무라스가 크림랜드라는 영계와 시럽강을 이끌고 돌아다니면서 내 세계의 흐름을 엉망진창으로 꼬고 있다.

저거 저러면 안 될 것 같은데······. 세사이사가 엄청 화낼 것 같아.

그렇지만, 세사이사도 지금 엄청 바쁜 모양이었다.

[세사이사: 탄식하라! 비인. 미안하지만 난 재난이 너무 끔찍한 걸로 닥쳤어. 네가 자랑하는 생태계 관련 재난도 아니라서 도움도 못 받겠고, 도저히 네가 처참하게 망가트렸을 세계의 영계를 봐줄 시간이 없군.]

[비인: ㅠㅠ 어쩔 수 없네요. 힘내세요! 파이팅!]

그렇다는데 뭐 어쩌겠나. 그냥 이대로 곧 다가올 여섯 번째 충돌을 기다릴 뿐이다.

다행히 대결에서 이길 만한 기반은 충분하다.

강력한 생물들, 그리고 적의 생태계를 파괴하기 위해 충분히 배양한 담수성 생물체들, 농경지를 파괴할 악랄한 감치들, 거기에 최강급의 개체인 요거-토소스와 슈크-리무라스.

이 정도면 어지간하면 이기거나, 혹은 질 것 같아도 협박에 가까운 짓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저기. 비인 님."

"뭐냐. 천사. 또 뭔가 이상한 공지사항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겠지?"

"아뇨. 그건 아닌데. 저······그냥 주최 측으로서의 의문입니다만."

왜 지성체를 안 만드냐에 대해서 질문하진 않을 테고. 뭐지.

"지금까지 하시는 게 좀 모순적인 것 같아서요."

"모순?"

"그러니까, 괴수 빌드는 한계가 있다, 지성체가 싫다. 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지능 높은 개체들에게 승리 플랜을 의존하는 듯한 모습이 보여서요? 요거-토소스나 슈크-리무라스가 자연적인 생명체라고 하진 않겠죠. 슈크-리무라스도 행동이 단순해서 그렇지 지능 자체는 꽤 높은 편이고."

아. 그걸 지적하는 건가.

하지만 그건 환경의 문제다.

"환경의 문제?"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내 스타팅 지역은 사막이었어. 넥타르라는 사기적인 자원이 나와도 그곳이 사막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심지어 겨우 나온 다른 지형은 바위산이랑 마른 초원이었다. 생물종이 많을 수가 없는 지형이야."

"그건 그렇습니다."

"마법적인 지형이나 노천 광산 같은 건 내가 어찌어찌 활용법을 알아내서 써먹는다곤 하지만, 근본적으로 나는 내가 구현하고 싶은 빌드를 하기엔 너무 안 좋은 지형을 받았다.

그러니까 일종의 서브 플랜인 괴수 플랜, 그중에서도 강력한 상위 개체에 의존하는 플랜이 아예 메인으로 올라가 버린 거지.

어쨌든 괴수 전략이 초반엔 나쁘지 않거든, 사실 초반만 따지면 게임 내의 모든 빌드를 다 따져도 우수한 축이야. 초반에 〈기술〉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생명〉이 깡패니까."

"그러면 중후반에는 빌드를 바꾸는 건가요?"

"10라운드 이전에 메인 플랜을 시도하지 못하면 그냥 게임을 졌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메인 빌드도 자리 잡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거든.

다행인 건 6라운드 끝나면 하차 구간이라 원하는 지형을 손에 넣을 수 있단 거야. 하차자의 세계에서 적당한 걸 주워서 개조할 수 있으면 좋겠지."

처음에 내가 지형을 받았을 때 얼마나 당혹했는지 모를 거다. 그나마 넥타르 샘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지 땡사막 지형이었으면 지옥을 구경했겠지.

"그리고 난 인간과 문명이 싫은 거야······. 인간이 아닌 지성체, 요컨대 코끼리, 돌고래, 유인원 같은 건 꽤 좋아해. 요거-토소스는 강력하고, 머리도 좋고, 스스로 마법도 개발하지만 문명을 이룩할 수는 없지. 번식 불가능한 단일 개체에 불과하니까."

애초에 '지성체'를 전부 혐오하면 나는 세균 말고는 내보낼 수 있는 게 없다. 식물이나 해삼 레벨의 생명체도 학습이라는 걸 할 수 있단 말이다.

내가 그리고 설마 재밌으려고 하는 게임에서 세균 배양이나 했겠냐고. 문명을 이루지 않는 선에서 온갖 괴상한 걸 다 해봤지.

그냥 인간이 싫다. 언제나 그랬다.

"그렇지만, 실제로 코끼리 돌고래 유인원 등의 생명체들도 충분히 잔혹한 짓을 하지 않나요?"

"내가 설마 모를까? 코끼리는 폭력적이고 돌고래는 잔인하고, 유인원은 전쟁하지."

"그런데 굳이 인간에게만 그렇게 적의를 보일 것 있나요? 돌고래와 유인원들은 명백히 '재미'로 남을 괴롭히는 짓 같은 걸 하는데요. 인간은 더 나쁘다고 말하지 마세요. 인간들은 지성 낮은 생물들보다 훨씬 고결할 수 있어요."

······.

"어이 천사."

"네?"

"난 말이지. 인간과 문명이 나타내는 대부분의 문제가 생물학적인 요인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해. 그럼 문명이라는 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가 뭐라고 생각해?"

"예? 글쎄요?"

"생물학적으로 볼 때 문명의 문제는 말이지. 문명이라는 시스템은 각 구성원의 지능이 높아야 발전하는데, 정작 문명이란 건 지능이 낮은 개체가 많을수록 안정적이라는 거야."

"······."

"더 쉽게 말하면 멍청이들이 많을수록 망해버리는 체제가, 멍청이들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다고."

인간 중에서는 사실 똑똑한 고릴라보다도 지능 낮은 사람들이 존재하지. 지적 장애, 혹은 경계선 지능이라고 불리는 자들. 그런데 이거, 진화적으로 왜 존재하는 걸까?

사회적으로 볼 때 필요 이상으로 똑똑한 놈은 사실 체제 유지에 도움이 안 되거든.

노동자가 '어 왜 일하는 건 우리인데 왕/사장/지주가 더 많이 버는 거지.'라고 의문을 품는 순간. 그 숫자가 일정 숫자를 넘어간 순간 모든 체제는 붕괴한다.

더 웃긴 건, 그렇다고 노동자들과 관리자가 똑같은 임금을 받는 평등한 체제면 이 똑똑한 놈들은 '그럼 열심히 일 안 해도 되겠네.'하고 또 체제를 망가트린다.

근데, '그런 게 중요해? 일단 밥을 주잖아?'라고 그냥 대충 떠드는 놈을 몽둥이로 때려서 입 닥치게 하고 체제에 잠자코 순응하는 멍청이들이 많으면 체제는 놀라울 정도로 잘 유지된다.

이러한 구조에서 가장 이상적인 건 착한 소수의 똑똑이가 악한 다수의 멍청이들을 돌보는 거지. 근데 상식적으로 항상 그렇게 안 되잖아?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들 이야기 들어보라고. 그 인간들이 얼마나 미신을 신봉하는지, 투표로 뽑은 지도자가 그렇게 현명한지. 누가 봐도 멍청한 사기에 걸려들지는 않는지.

놀랍게도 어떤 생물이 문명을 만드는 데 필요한 지능은, 문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지능보다 낮다.

내가 수만 시간 게임을 하면서 게임에서 '이긴' 다음 굳이 이긴 게임을 나가지 않고 아무 조작도 하지 않은 채로 지켜봤을 때, 모든 문명이 절망적인 파국으로 끝나버렸다. 게임이면서도 염증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플레이어'라는 형태로 신이 존재하는 이 게임의 문명은 그나마 바람직하지. 직접적으로 개입하며 멍청이들을 축출하고 문명을 유지시키는 존재가 있으니. 내 세계는 이런 신이 없었던 것 같지만, 이런 신이 꾸준한 관심을 두고 봐주면 문명이 있어도 되겠지.

하지만 이건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야. 나는 아무도 보지 않아도 영원히 지속되는, 항구적인 자연을 원한다. 어쩌다가 지능이 있는 개체가 나타나도 도저히 문명을 일굴 수 없는 자연 말이야."

천사가 내 말에 당황한 듯 반문했다.

"하지만, 그 논리대로면 신으로서 관리하실 수 있는 이상 굳이 반지성주의 빌드를 하실 필요는 없지 않나요? 실제로 비효율적이라고까지 말씀하셨는데."

"아······. 그거. 내가 최고 효율의 빌드가 있는 걸 알면서도 이 세계에서 반지성주의 빌드를 하는 건 다른 이유야."

"예? 뭐죠?"

이어질 말은 육성으로는 못하겠다.

하지만 나는 생각할 수 있었고, 천사는 내 생각을 읽을 수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전해졌다.

불쌍하잖아.

삶은 원래 쓰레기 같다. 야생은 원래 거지 같다.

그것까지는 동의하고, 나도 내 디저트 사막을 좆 같은 곳으로 만드는 데엔 전혀 죄책감이 없다.

모두가 그저 처절하게 살아갈 뿐이다. 자신을 남기기 위해서 말이다. 이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명을 세울 정도로 뚜렷한 자아와 지성을 가진 지성체가 신의 뜻이라는 명목으로 병사로 키워지고, 조종당하고, 싸워서 죽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신을 진정한 신이니 뭐니 하는 자리로 올려놓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건······불쌍하잖나.

게임 NPC라면 모를까 실제로 처절하게 살아가며 삶의 의미를 찾고 있을 지성체들한테 할 일이 아니다.

"어, 뭐랄까. 되게 의외네요······."

"위선적이라서?"

"아뇨. 그건 아니죠. 비인 님은 위선적이지 않습니다."

이 녀석, 날 위로해 주는 건가.

"냉정하게 말해서 비인 님은 그냥 나쁜 사람이죠······. 위선적이려면 일단 착한 짓을 해야 하는데 비인 님은 착한 마음이 좀 있어도 결과적으로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고 다 죽이지 않습니까."

마왕의 길이란 본래 그런 법.

"우와······."

「곧 세계 충돌이 시작됩니다. 살아남은 플레이어만이 다음 라운드로 진출합니다.」

아무튼, 준비는 끝났다.

이제 무슨 일이 있든 물러설 곳은 없다. 자. 이 대멸종의 주인에 맞설 상대, 대체 누구냐. 와라!!!

망했다. 우안초는 생각했다.

『반전 의식: 군대의 사기와 기강이 언제나 바닥을 유지합니다.』

재난 구간, 그들의 세계는 재난을 못 이겼다. 어쩔 수가 없었나. 일단 협력이라곤 하지만 10명이나 되는 신이 서로 내전 상태나 다름없었으니.

모두가 힘을 합쳐야 이길 수 있는 재난 구간에서 '누가 먼저 희생하는가'에서 그들은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심지어 어차피 하위권인 놈들은 추가로 재난을 더 받기로 투표하고는 그 모든 책임을 상위권에게 떠넘겼다.

그리고 그 결과가 패널티 특성을 달고 있는 세계에 해결되지 못한 세 개의 재난이 있는 지금의 상황.

패널티로 얻은 특성은 가히 최악에 가깝다. 군대 자체가 무력화되는 특성이라니, 다시 말해 전쟁에서 절대 못 이긴다는 거 아닌가.

"이 쓰레기들······."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하나뿐이었다. 상대 세계도 패널티 특성을 받은 경우다.

그러면 서로 협력해서 두 세계를 하나로 합친다. 그리고 전원이 바로 하차 구간 때 하차한다. 이것 외에 살아남을 방법은 없었다.

다행히 거기까지는 모두가 동의하는 상황. 사실 동의 안 하면 어쩔 건가. 하차 권한은 각자에게 있는데.

"제발. 다음 상대가 패널티를 받았기를······. 제발······. 하차하면 그래도 1만 포인트 정도는 건진다."

상대 플레이어는 '비인'이었다.

우안초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플레이어 '우안초'및 다수의 플레이어와의 세계 충돌에서 승리하셨습니다.」

「플레이어의 세계가 넓어집니다.」

"손쉽게 이기셨네요. 축하드려요."

뭐지. 왜 이렇게 허무하지.

그토록 열심히 세계를 가꾸고 내가 가능한 최대한으로 대비했는데 상대가 너무 약해서 무의미한 대비가 되었을 줄은······. 설마 비스야킷 스무 마리를 한 번에 보냈다고 문명이 그대로 붕괴할 줄이야.

"지금 단계에선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쁜 건 아니죠?"

그건 그렇다. 왜냐면 어쨌든 손실을 최소화하고 보상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상대는 항복했지만 솔직히 이건 내가 아니더라도 받을 수가 없었는데, 패널티 특성을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복을 받아들이면 내가 패널티를 떠안고, 이후에 그놈들이 전부 하차해도 내게 패널티는 남는다. 다 죽여야만 전진할 수 있었다.

"3의 배수가 끝날 때마다 하차 구간입니다. 여섯 번째 라운드에는 그뿐입니다. 전진하십니까. 하차하십니까?"

"전진."

"그러면 승리로 얻은 포인트가 2배가 됩니다. 축하드립니다. 어마어마한 이득을 보셨군요."

전투가 너무 일찍 끝나서 세사이사도 미훈도 아직 대화하기엔 멀었다. 그놈들이 어떤 세계와 맞서 싸우고 있을지 조금 궁금해지는군···.

그건 그거고. 난 자연스럽게 분신들을 보내 이제 무려 32개 가까이 되는 신의 파편이 박혀 있을 상대 세계를 쭉 살펴보았다.

적 세계 근간은 아직도 사막이었다. 사막과 산, 언덕, 그리고 담수 지역, 초원, 그리고 마법 지형······. 망할. 사실상 디저트 없는 디저트 사막 2인가.

"그래도 하차 구간이니 다행이지요. 하차한 세계들 중에서 메인 플랜을 실현시킬 만한 세계를 찾으시면."

"어!"

"깜짝이야. 왜 그러세요?"

찾았다. 메인 플랜으로 진화시킬 씨앗이 적 세계에 있어.

다른 것보다도 오히려 이게 훨씬 운이 좋은 일이군.

47화. 세계 충돌 -여섯 번째- 2

비인은 지지리도 운이 없다가 5번째 대결에서 드디어 쉬운 상대를 만났지만 모두가 그런 법은 아니다.

현 시점에선 객관적으로 강한 상대보단 약한 상대가 많았지만, 냉정하게 봐서 꽤 그럴듯한 전략을 가진 상대도 대단히 많았다.

플레이어 베리벤은 그런 '설득력 있는 전략'이 있는 플레이어 중 하나였다. 베리벤은 게임 룰 설명을 듣고 기막힌 발상을 하나 떠올렸다.

"이거 초반에 협력하자고 손 내미는 놈들 박살 내고 부하로 만들면 쉽게 득점하고 다음 라운드로 전진하겠는걸?"

물론,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그 이치는 알고 있다. 그걸 알면서도 협력 전략을 하는 자들이 대부분, 그리고 그 빈틈을 노리고 전쟁을 준비하는 플레이어가 또 다수.

그러니까 중요한 건 '어떻게 압도적인 승리를 하느냐'였다. 단순히 훌륭한 병력을 모아다가 전쟁하는 게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상대도 훌륭한 병력을 모아다가 전쟁하면 어쩌나?

"비대칭 전력. 상대가 범접할 수 없는 비대칭 전력을 모으면 된다. 그리고 초반에 비대칭 전력이라면······."

베리벤은 원래 중력이 대단히 강한 세계 출신이라 '높이'에 약했다. 그의 세계에서는 1미터에서 떨어져도 추락사를 할 수 있었으니.

하지만 이 세계는 중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초반부부터 '공중전'이 가능하다는 것. 베리벤의 세계에서는 아주 후대에서나 나오는 개념이었다.

베리벤은 우연히 처음 받은 지형에 '비행'이 가능한 새들이 있었다. 그 새들에게 지성을 부여하고, 또 잘 키워서 문명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첫 충돌 당시, 비행 부대는 손에 짱돌을 하나씩 쥐고 공중에서 아래로 급강하하며 돌멩이를 적의 군사에게 집어던져서 대가리를 터트리는 전략으로 승리했다.

상대 플레이어는 날아다니며 한 명씩 병사를 죽이는 베리벤의 투석 부대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인정했고,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베리벤은 마왕이 아니었기에 당연히 항복을 받아주었다.

"문명에서도 활이니 투석기니 하는 대공 병기를 만들긴 하겠지. 그러니까 모든 자원을 대공병기가 유행하기 전에 공중전에 쏟고, 대공병기가 유행하면 그때 하차한다."

한마디로 베리벤은 6라운드, 고작 2번째 하차 단계 때 하차하는 극단적인 단기형 빌드를 짠 것이다.

그리고 무려 4라운드 내내 공중 투석으로만 이겼다. 항복받은 종족들은 다 노예.

"문명은 너희들이 알아서 발전시켜! 나는 공중 날먹으로만 먹고살 거다!"

"하, 하지만 베리벤 님. 그럼 후반 못 갈 텐데요?"

"상관없어! 후반은 갈 생각도 없다! 2번째나 3번째 하차 단계 때 손 털고 나간다!"

"?!"

상점 단계 때도 비싸고 장기적인 것 대신 이런 단기형 빌드에 최적화된 일반 특성을 샀다.

6라운드 끝났을 때까지 포인트를 잘 저축하고 잘 이기면 최소 10만은 가져갈 거다.

역시 공중 투석+공중 화살비라는 원툴 전략으로 5라운드도 승리로 이끌고 찾아온 재난 구간.

당연히 재난은 필수적인 딱 1개만 받았다. 극단적인 단기형 빌드를 짠 베리벤은 수중에 16만 포인트가 있었다. 적지 않다. 다음 게임에서 이기면 아마 약 20만 포인트.

자기 대신 문명을 발전시키느라 쥐꼬리만한 포인트를 받고 퇴장할 부하 신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전반적으로 게임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 아마 자기는 9라운드까지 못 갈 것 같았다.

"최상위권은 20만점이 훌쩍 넘는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의 세계 점수는 그 1/5밖에 되지 않았다.

즉, 합리적인 전략은 6라운드의 상대를 만나면 무조건 협력을 요청, 이후 협력을 받아들이면 즉시 자기는 하차 선언, 협력을 안 받아들이면 협력을 받을 때까지 무차별적 테러를 거듭한다.

"20만 포인트여도 충분해. 그 정도면 불로불사의 생명과 함께 뛰어난 지성,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재산에 강인한 육체 가지고 물러날 수 있다고. 초능력을 못 사는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리고 베리벤은 세계 충돌 직후 즉시 상대 플레이어인 '세사이사'에게 협력 요청을 보냈다.

거절당했다. 당연히 협력하는 게 유리한데 왜 바로 거절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어쩔 수 없나. 그러면 비행 부대 출격이다."

그리고 양측 차원문이 열리고 각자의 '비행 부대'를 건너편으로 보낸 순간······.

"항복! 항복!! 항복!!!"

각 보고 손절하는 솜씨는 기가 막히게 빨랐던 베리벤이었으나 상대 플레이어에게 바로 차단당했다.

그리고 하늘의 구름을 점성 있게 만들어서 비행부대를 격추시키고, 돌멩이 한둘 떨어트리는 걸론 끄덕하지 않는데다가 하나하나가 이 시대 대마도사 급인 코끼리 부대가 출격해 그야말로 세계를 갈아버리기 시작하자······.

베리벤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플레이어 안단트라어는 어떤 의미에서는 비인과 비슷한 빌드를 꾸민 사람이었다.

첫 라운드에 안단트라어는 문명을 만드는 대신 괴물들을 만들었다. 바로 문명을 꾸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괴물 부대는 첫 라운드에 상대 문명을 박살냈고, 안단트라어는 그 다음에야 그 괴물들에게 지성을 부여해서 인간으로 만들었다.

"육체를 단련하는 신비가 흔해서 다행이군. 그걸 기반으로 괴물 기반 문명을 만들어보자."

꽤 성공적이었다. 게임 내의 최종 포식자가 바로 주류 종족. 노예 종족들이 문명을 일구게 하고, 주류 종족은 강함 단련에 치중한다.

강함을 과시하는 것이 곧 문화가 되고, 상위 포식자가 하위 피식자를 지배하는 철저한 정치 체제로 완성되었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을 아예 미덕으로 만들자. 강자에겐 권리를, 대신 약자에겐 관용과 자비를······. 괜히 사이코패스들의 문명을 키우고 싶진 않으니까."

노예 종족이라는 말보다는 하위 종족이 괜찮아 보였다. 그렇게 해서 상위 종족이 하위 종족을 보살피는 체제를 완성하니 생각보다 훨씬 잘 굴러갔다.

실제로 레벨도 8레벨, 점수가 15만 점이 넘었으니 꽤 상위권 문명이었던 셈이다. 안단트라어는 강력한 종족을 기반으로 체제를, 문화를, 종교를, 더 나아가 문명을 짜고 완성시켰다.

"그럼 다음 상대는, '미훈'인가. 과격한 놈이군. 동료 신이 하나도 없어."

"저기. 안단트라어 님."

"천사. 왜?"

"이게 게임에서 몇 안 되는 예외라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저 '미훈' 플레이어는 패배해도 영혼 소멸이 되지 않습니다."

"뭐?"

설명을 마저 듣기도 전에 세계 건너편으로 넘어간 그들의 영웅들이 마주한 것은 자기 세계와 능력치 총합이 비슷한 미치광이 공룡.

[본좌는 몹시 기대하고 있노라. 너희들 중에서 가장 강한 자는 어느 정도인가? 본좌를 더 높은 경지로 올릴 수 있을 만한 상대가 있는가······?]

연단우라고 하는 미친놈이 팔을 휘두르자 그대로 군대가 갈려 나갔다. 세계 안으로 들어온 비사족인지 뭔지 하는 악마들은 완력만으로 집을 부수고 돌로 쌓은 담벼락을 집어다 던지는 괴물이었다.

안단트라어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한편, 쭉 랭킹 1위였던 플레이어 테라시온은 하필 지난 재난 구간 때 지옥을 맛봤다.

"세상에나. 천사님. 이거 그냥 운으로 나온 거죠?"

"물론입니다. 완전한 무작위입니다."

걸린 재난이 [수질 오염]+[전염병]+[체외 기생충]에 필수 재난은 재난 종료 시점까지 하늘을 향해 일정 규모 이상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다.

무려 재난이 전부 인구를 줄이려고 작정한 듯한 것이라 당장 바빠 죽겠는데 무슨 제단을 건설하고 제사를 지내나? 생물학 재난 3종 세트에 인구가 무려 1/20으로 초토화됐다.

랭킹 1위라고 해서 과감하게 재난 3개 받았다가 3종류가 다 겹쳐버리니 진짜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그래도 워낙 기본 스펙이 높다보니 이 악물고 제사 지내고 전염병도 이겨내어서 호모 사피엔스를 닮은 테라시온의 주류 종족은 훨씬 강인해졌다.

그리고 파탄 난 세계를 어찌어찌 복구하며(당연히 랭킹 1위에서 한참 굴러떨어졌다고 하지만 그것엔 집착하지 않았다) 맞이한 여섯 번째 세계.

"일단 상대랑 협력을······."

상대는 무려 세계의 모든 주류 종족과 가축, 기르는 식물에 독을 달아놓은 미친 작자였다.

"아."

심지어 신비론 〈독〉 〈질병〉 〈저주〉 계열의 주문만 악착같이 배운 듯. 상대가 〈생물〉 기반의 종족이 아닐 경우 그냥 망할 텐데 야수의 심장을 지니고 꿋꿋하게 '나는 생명체만 죽여' 트리 올인을 한 미치광이······.

그래도 상대와 협상이 되지 않을까 해서 대화를 해보니 '협력은 없다. 네가 항복하지 않으면 난 죽을 때까지 싸우다가 질 것 같으면 네 세계 모두에 독을 뿌리고 장렬하게 산화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진짜 미치광이 중의 미치광이 플레이어가 걸렸다.

"이, 이, 이······어떻게 이렇게 운이 없을 수가······!"

랭킹 1위 테라시온, 이전 날 생명 점수 비인에 이은 2위. 주요 빌드는 〈생명〉을 기반으로 한 자연조화+생태학 컨셉.

한때 3만 점을 바라봤던 생명 점수는 네 개의 재난과 여섯 번째 충돌로 인해 고작 1,300점으로 떨어진데다가, 적의 무한한 독테러와 유입된 생물종으로 생태계가 거의 회복 불가한 수준으로 망가지고 말았으니.

"아······."

"참담하군요."

"빌드를 바꿔야겠네요······. 인구가 너무 줄었으니 차라리 〈기술〉과 〈신비〉 중심으로 발전시킬 수밖에······."

〈생명〉 기반으로 한 농업 빌드가 최고라는 건 알고 있다. 원래 게이머였으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작물이 썩어 들어가고 독에 저항하느라고 신체가 대단히 비효율적으로 변한 테라시온의 세계는 더 이상 그런 이상적인 빌드를 추구할 수가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테라시온 뿐만 아니라 이 게임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큰 분기점이었을, 그런 것이었다.

다른 분신들은 상대 생태계를 편집하고 내 생태계와의 조화를 달성하기 위해 흩어졌고, 나는 메인 플랜으로 가기 위한 품종개량을 맡았다.

천사도 각 분신에게 흩어졌지만, 내 옆에 있는 분신이 호기심 어린 듯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러면 이제 그 '메인 플랜'이 뭔지 설명을 들어볼까요? 뭘 찾으신 거예요?"

일단 정리하면, '메인 플랜'은 목적지고 '메인 빌드'는 플랜을 달성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전략을 말한다.

하나의 전략만 시도해서 실패하면 지는 '원툴' 전략이 아니다.

메인 빌드에는 여러 무기가 있다. 내가 지금 찾아낸 것도 그저 메인 플랜을 구성하는 한 축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그 다양한 축 중 하나를 지금 단계에 발견해 세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진짜로 뭔가요?"

나는 이 세계의 습지 지형에서 찾은 풀들을 보여주었다.

한두 종류가 아니다. 대여섯 종류 되는, 완전히 다른 풀들이다. 아마도 '재난 구간' 때 적 생태계에 유입된 걸로 추정한다.

"어. 그러니까. 이게 메인 플랜인가요? 그냥 풀로만 보이는데."

그냥 풀 맞다.

"엥? 맞아요? 풀은 원래 있었잖아요?"

풀이라도 다 같은 풀이 아니다. 내 생태계는 사막에 자라는 풀과 초원의 건조한 공기에서 악착같이 사는 풀은 있어도 이렇게 습지를 비롯해 평원, 초원, 산악 등 다양한 지형에서 대량으로 번식하는 풀은 없었단 말이다.

"······?"

알겠나? 핵심은 '대량으로 번식한다.'라는 거다. 이 서로 다른 풀들의 생존전략은 그냥 그거다.

엄청나게 번식하는 것. 습지, 늪지, 밭, 논, 초원, 산악 지방, 심지어 구름 위 섬까지. 이런 잡초들이 이 생태계에는 쫙 깔려 있다.

"어······그렇군요. 그래서요?"

"뭐가 '그래서요?' 야. 이게 끝이야. 이걸로 이긴다."

"에, 에엥······?"

왜 이해 못 해? 첫 충돌처럼 차근차근 얘기해줄까?

"이봐 천사. 문명이라는 개념을 성립하게 하는 제1조건이 뭐야."

"예? 기술 아닌가요?"

"그 이전에."

"그 이전에요? 지능? 아니면 사회?"

"맞아. 사회. 그럼 사회를 구축하는 제1조건은?"

"제1조건이요······? 뭐 공통된 의식이나 체제······."

진짜 최초의 필수 조건은 그게 아니지.

"최초의 조건은 많은 인구야. 일단 사회를 이루려면 인구가 많아야 한다고. 세 명으로 사회와 문명이라곤 안 하잖아."

"그건 그렇죠."

"그러면 그 많은 인구를 어떻게 부양하나?"

천사는 즉답했다.

"농업."

그리고 이내 비명을 질렀다.

"헉······! 아, 아니 잠깐. 그러니까."

첫 충돌 시점의 전략과 메인 플랜은 근본적으론 다르지 않다.

굶겨 죽이는 거다······! 상대 농지를 100% 파괴할 필요도 없어. 그냥 효율만 낮춰도 된다. 요컨대 이런 제거하기 힘들고 논밭에 기생해서 영양분 빨아먹고 대량으로 번식하는 '잡초'들로 말이지.

한 해 식량 생산량이 10%만 감소해도 기근이 닥친다. 30%면 아사자가 생긴다. 50%가 넘어가면 아포칼립스가 도래한다.

백이면 백 모든 문명이 그렇다······! 생명체가 필요한 식량의 양은 고정되어 있는데 인구라는 건 맘대로 줄일 수 없으니까 식량만 줄이면 〈군사〉 〈산업〉 〈정치〉 〈신앙〉 모든 게 그야말로 초토화된다.

"아, 아니. 그게 돼요? 성립하는 전략이에요?"

돼. 내가 게임을 해봤는데 말이지. 정말 초고레벨, 요컨대 30레벨 넘어서까지 갔는데도, 그 어떤 문명도, 어떤 사회도, 마법으로 세우건 초과학 문명을 세우건······.

'문명'이라는 이름을 달고 농사를 안 짓는 곳은 없었다. 예외는 없었다. 농사 안 짓는 문명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세사이사 님······?"

······.

"······."

그래서 내가 걔한테 농업의 개념을 이식시켜 준 거다.

"우와······."

검을 쓰든 마법을 쓰든 총을 쏘든 초인이 홀로 성벽을 무너트리든, 수단이야 어찌 됐든 보병으로 상대 수도 점령하면 전쟁 이기는 것처럼, 문명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려면 상대 농업 생산량을 딱 50% 깎은 다음 상대 비축 식량을 다 고갈시키면 된다.

목표는 하나지만 그걸 성립시키는 방법은 수십 개는 된다. 잡초를 동원하든 괴물로 땅을 점령하든 전염병으로 인구를 대거 학살하든, 어쨌든 식량 생산량을 떨어트리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비축된 식량은 쥐, 바퀴벌레, 세균 등등 온갖 수단으로 부패, 소진시킨다.

그걸 위한 생명체만을 배양하고, 이렇게 상대를 굶겨 죽이는 것이 반지성주의 빌드의 '메인 플랜'이다.

"우, 우와아아아······."

그래서 어쨌든 괴물은 키워야 한다. 문명을 직접적으로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놈들은 탱커, 다시 말해 미끼다.

상대가 도심에 쳐들어와서 민간인을 쳐죽이는 인상적이고 공포스러운 괴물에 신경 쓸 동안 상대 논밭을, 숲을, 호수를, 바다를, 죄다 먹지도 못하고 쓸모도 없지만 '생존'만큼은 극한에 달한 잡스러운 디저트들로 채워 버린다.

괴물이 학살을 시작한 순간이 아니라, 괴물에 정신 팔리느라 그해 수확량과 비축한 미곡 수를 헤아리지 못한 순간부터 디저트 아포칼립스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름만 들어선 절대 굶지 않을 것 같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네요······."

잠깐, 아포가토립스라고 부르는 게 더 나을까?

"이름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48화. 메인 플랜, 서브 플랜

승리해서 얻은 상대 생태계는 내 것과 비슷해서 그냥 내 생태계를 2배 정도 키운 듯 적당히 짜맞추기만 하면 됐다.

세계를 구형으로 쳤을 때, 천장쪽 극지방에 넥타르 호수 구역.

그 구역을 둘러싸고 있는 북반구의 사막 구역.

사막 구역 아래에 존재하는 적도 지방의 습지와 산악 구역.

산악 구역 아래에 남반구 지역은 초원과 광산 구역.

그리고 넥타르 호수 반대편 극지방, 바닥에는 마법 구역.

천장에서 흘러나온 넥타르와 시럽이 바닥까지 닿으며 세계 전체를 잇는 구조다.

지형의 구조는 생태계를 이루는 핵심이다만, 솔직히 '서울특별시' 만한 넓이밖에 안 되는 지형이 뭐가 그리 대단하겠나.

내 생태계의 산도 높이가 1킬로미터도 안 되고, 강도 폭이 좁다. 진짜 생태계 중의 생태계인 시베리아나 아프리카, 호주, 남미 정글 정도의 넓이는 되어야 좀 멋지게 깎을 수 있지.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넓이가 되니까 독특한 측면이 여럿 생겼다.

가장 큰 차이는 기후다. 아직도 디저트 사막이라고 부를 정도는 되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일조량과 강수량 등에 유의미한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다만 이 좁은 세계에서 기후가 지역마다 차이나는 건 좀 이해하기 힘들군. 자연적인 구조가 아니다.

"7번째 라운드 이후부터는 아마 기후가 안정화될 겁니다."

'소수(素數) 라운드'에서 일어나는 이벤트 때문이겠지.

어쨌든 적 생태계와 내 생태계가 겹치는 지형이 많아서 그것들을 다 합치고 나니까 특별한 지형이 몇 개 안 남았다.

내 세계에 아예 없었던 것을 몇 개 꼽자면 요컨대 "구름 섬" 이라는 지형이 있다. 미훈의 세계에서 봤던 산 위에서 갈 수 있는 둥둥 뜬 지형이다.

구름은 수증기가 아니라 마법적인 거라서 그 위를 걸어 다닐 수도 있고, 마법사가 있으면 기후를 조작하는데 도움도 주며, 또 이곳에서만 서식하는 기묘한 생명체들이 존재한다.

또 "골짜기"와 합칠 수 있는 지하 통로가 있다. 골짜기는 극초반에 얻어서 써먹을 방법이 없었는데, "대지저"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생겼다고 한다.

일종의 사냥터라고 할지, 괴물이 조금 나와서 이전 플레이어는 영웅 유닛들을 그곳에서 수련시켰던 것 같지만······잘 모르겠군.

그 외의 마법 지형은 상대 세계도 딱히 키우지 않은 곳이었는데 늪인데 특별한 물질이 나오거나, 광산에서 지구에 없는 특이한 광물이 나오거나, 아니면 원소 정령이 저절로 생기거나 하는 고마력지대거나 했다. 나는 잘 활용할 줄 몰라서 슈크-리무라스 불러서 그냥 크림으로 죄다 덮고 이어버렸다.

저런 곳에서도 생명체는 알아서 번식하고 살아나갈 것이다.

특히 금속 생명체인 [빵]들이 슈크-리무라스의 영향으로 더 공격적이고 활발하게 변한 게 마음에 드는군.

요거-토소스는 활약이 전혀 없어 새로운 영지를 받지 못했지만 대신 "시공경계"라고 하는 지형을 몇 레벨 더 올려서 〈시공간〉 계열 마법을 좀 익혔다는 게 고무적이다.

지금까지는 대충 해결했지만 다음에 이기면 64개의 지형이 새로 생기는데 다 관리 되나? 물론 상대도 64개를 어느 정도 합쳐서 정리해 놓았겠지만······.

생태계 편집은 끝났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의식은 메인 빌드 담당 인격으로 옮겨간다.

분신들을 다루다가 익힌 테크닉이다. 전부를 동등하게 하는 대신 하나를 중심 인격으로 잡고 나머지를 부하처럼 부리면(결국 내가 다 수동으로 하는 거지만) 효율도 좋아지고 헷갈리지 않더라.

현재 메인 플랜에서 가장 중요한 지형은 초원과 습지대다.

적 생태계를 공격할 잡초들을 배양하는 것이니까. 저런 잡초들의 유전자를 사막에 존재하는 물만 있으면 엄청나게 자라는 식물의 유전자와 조합한다.

그리고 상대 생태계에 존재하는 가축, 야생동물, 벌레 등을 조절해서 잡초들의 천적으로 만드는 일도 해야 한다. 잡초들도 번식력을 자연스럽게 늘리려면, 적어도 자기를 위협하는 생명체들이 있어야 하니까.

근간이 사막이고, 감치보다도 못한 야생동물밖에 없었지만······. '소' 비슷한 대형 초식동물도, '사슴' 비슷한 중형 초식동물도 있었다. '토끼'같은 소형 초식동물이 없는 게 아쉽군.

아무튼 이놈들도 내 생태계에서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낙타처럼 강인한 디저트 군단으로 개조하고 잡초들을 악착같이 뜯어먹게 한다.

늪지대에 사는 '하마'도 만들어야지. 늪에 존재하는 모든 걸 찢어 죽이면서 식물도 잘 먹는 이 생명체는 꽤 큰 도움이 될 거다.

아직 생태계의 다양성이 부족해 잡초의 종류도 적지만, 어차피 상대도 아직까지는 바위산, 스텝 초원, 사막, 습지대, 이런 선에서 나오겠지.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정도 잡초만 있어도 된다.

메인 플랜은 순조롭다. 그저 꾸준히 작업하기만 하면 된다.

──의식은 군사 작전 담당 분신으로 옮겨간다.

6번째 충돌 이후는 하차 구간. 지금도 하차하는 플레이어들의 목록이 꾸준히 갱신되고 있다.

재난 구간을 버티지 못한 플레이어가 대다수로 보였다. 말하자면 최하위권만 하차를 선언 중이다. 지금 시점에서 하차해봤자 얻은 포인트로 인생을 못 바꾼다는 거겠지.

다시 말해 패널티 특성만 없을 뿐인 하위권들은 아직 협력 전략을 궁리하는 듯하다.

패널티가 없으면 항복을 안 받아줄 이유가 없으니, 상대가 약하면 협력하고, 강하면 항복해서 상위권에게 빌붙으려고 하는 것이겠지.

전략적으로 의미 있는 선택이고, 실제로 상위권이라고 해도 하위권이 작정하고 군사력 키워서 테러해대면 큰 손해를 보니 가진 자원을 군사력에 다수 투자하여 만약의 사태를 막고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경향이 보였다(지금 열심히 영업 뛰면서 포인트 벌어오는 컨설팅 분신이 물어온 정보들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까지는 악랄하고 지독한 포식자 전략이 유효하다.

아직까지는 군사력에 직접적으로 투자하기보단 내정 위주로 키우면서 협력 빌드를 하고 싶은 이들이 다수기 때문이다.

특히 네 번째 충돌에서 상대 세계를 단독으로 멸망시켜버린 [사탕]은 아직 잠재력이 남아 있다.

사실 근본적으로 보면 내 군사력이 이미 9레벨이다. 사실 메인 플랜은 중후반에 힘 떨어지는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지, 당장은 군사력만으로 굶겨죽이기 전에 대부분의 상대 세계를 때려죽일 수 있다.

그러니 내 병사들을 점검한다.

[사람잡는사탕]. 네 번째 충돌에서 승리를 가져다준 장본인이다. 형태는 그 당시의 다리 달린 동글이들과 대동소이. 다섯 번째 세계에서는 상대 세계의 마법사 부대에게 맥없이 당했지만, 이젠 다르다.

체내에서 완전한 공존을 이룩한 [시럽]과 [기생충], 그리고 자연적으로 발달한 [독].

일단 마법 저항력이 대폭 늘어나서 마법에 맥없이 쓰러지는 경우가 없어졌고, 사냥에 실패해도 병균과 기생충이 퍼져 적 생태계를 조금씩 약화, 그것이 아니더라도 상대 세계에 [시럽]을 뿌려서 디저트 군단의 후속 침입이 쉬워지게 한다.

어쭙잖게 군사력이 약한 세계라면 사탕만 뿌려도 죽을 것이다.

[육식빵] 금속질 신체를 가진 [빵] 중에서 중형육식동물 수준의 포식자로 진화한 개체다. 형태는 다리 여섯 개 달린 애벌레 비슷한데, 다리는 얇지 않고 근육질에 머리에는 가시 달린 뿔과 턱. 등에는 금속질 껍데기가 있다. 금속질 육체가 덩치가 커지기 쉽지 않아 대부분이 들개 수준의 크기다.

이놈들의 '공격력'도 고작 지구의 들개 수준일 것이다. 선사시대 수준으로도 막을 수 있고, 호모 사피엔스가 그저 자기 근력만으로 떨치는 게 크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핵심은 '방어력'이다. 피부는 금속질이다. 체내에는 시럽이 흘러서 마법 저항력이 대단히 높다. 내부 구조가 단순해서 팔다리를 쪼개도 움직이고 머리나 배가 반으로 잘려도 신경절이 따로 있어서 사냥을 이어간다.

이 미친놈들을 죽이려면 적어도 육중한 망치 같은 걸로 몸의 절반 정도는 으깨버려야 하는데, 대단히 어렵다.

[육식푸딩] 다리와 턱만 있는 [육식빵]과는 달리 이놈들은 팔 역할을 하는 촉수가 있으며 덩치는 들개 크기에서부터 사자나 곰 크기까지 다양하다.

가시나 뿔 달린 촉수는 인간의 몸 정도는 간단히 뚫어버리며, 촉수를 내지르는 순간적인 속도는 반사신경으로 포착이 불가능하다.

방어력 자체는 낮아서 멀리서 '투창' 정도로도 죽일 수 있다만, 핵심은 기동성이다. 이놈들은 쥐나 토끼도 달려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빠르고, 벽도 기어오르고,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경우 3미터 높이에서 떨어져도 멀쩡하다.

[수리감치] 말 그대로 수리(Eagle) 비슷한 감치들이다. 디저트 사막의 푸딩과 젤리를 사냥한 만큼 사람도 사냥해서 먹을 수 있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속도가 무지막지하게 빨라서 활로 잡는 게 대단히 힘들다. 그리고 성깔이 더러워서 길들이는 건 불가능하다.

[요거트] 요거-토소스의 직속 부하들. [우유]라고 하는 정령에 [시럽]을 넣어서 날아다니면서 마법을 쓸 수 있게끔 한 병력이다. 지성은 대단히 높지만 본능이 강하고 도구를 쓴다는 발상이 없어서 문명을 이룩할 수 없다.

이놈들은 무려 상대 영계를 공격하고 파괴하며 자신들과 같은 요거트를 생성하게끔 구조를 바꿔버린다. 영계가 부서지면 〈신비〉와 〈신성〉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되니 필수적인 전력이다. 

얘들이 내 세계의 일반병들. 초반 차원문 단계 때 기선제압을 위해 중점적으로 키우고 있는 녀석들이다. 민간인은 찢어 죽일 거고, 숙련된 사냥꾼이나 영웅 개체라도 수백 마리가 몰려가면 죽일 수 있다.

한편 아예 적 세계의 영웅 개체를 상대하라고 만든 정예병들은 좀 다르다.

[다크 림] 슈크-리무라스의 직계 혈통. 가장 강하고, 포악하고, 거대하다. 보이는 모든 것을 뜯어먹으며 식물, 동물, 사람, 지형, 심지어 영계까지 뜯어먹고 그 주위를 크림과 시럽으로 뒤덮어 버린다.

본격적인 전투력이 강한 것이 아니라 다른 디저트 군단의 전진을 쉽게 해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비스야킷] 최강의 감치. 공격력, 방어력, 기동성, 포악함 전부 최강. 지금 전투력은 가히 양산되는 영웅 개체라 할 수 있다. 무지막지한 유지비가 들지만, 그 유지비는 상대가 감당해야 한다.

[양갱] 네 젤리류의 혼종. 양갱들의 덩치는 점차 커지는 경향성을 띠어 지금은 코뿔소 급은 되는 것 같은데, 그냥 보이는 모든 것에게 달려들어서 들이받고 촉수로 가르며 뜯어먹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한 껍질을 지녀 때려죽이려면 적어도 투석기 수준의 충격력이 필요하다.

대충 차원문 단계 때 이 생명체들을 상대 생태계에 뿌려놓으면 알아서 문명과 인간을 조져놓을 정도로 막강한 전력이다.

지금은 차원문 단계 때 기선제압하는 게 중요하다.

상대 농경지를 천천히 파괴하는 메인 플랜이 성립하려면 상대가 내 생태계에서 '괴물'이 최고 위협이라고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스펙을 더 올린다. 내가 기존에 알던 생물학적인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이젠 새로운 방법이 있지.

각종 진화가 거듭되며 점차 강화되고 서로 시너지를 내는 디저트 군단에 비해, 생물적인 특성상 계속 생존경쟁에서 밀려서 선인장 숲에서 근근히 선인장이나 씹어먹고 사는 낙타.

물론 지금도 강한 생명체지만 옛날에는 넥타르 호수 근처까지 가서 넥타르도 먹고 했던 것에 비하면 대단히 개체수가 줄어들고 생존경쟁에서 밀려난 게 느껴졌다.

이놈들에게 새로운 수법을 전수한다. 이른바 '요수공법'이다.

이걸 알려준 진선 미훈은 이렇게 말했다.

"요수공법이란, 평범한 생물을 요수로 만드는 공법, 혹은 요수가 더욱 강하게 만드는 공법을 말한다. 요수가 뭐냐고? 영기(마력)의 흐름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사용할 줄 아는 생물이 요수다. 생물의 형상을 유지한 채로 강해지기만 하는 것이야.

본선이 구결을 알려줄 테니. 이에 따라서 원하는 생물의 흐름을 뒤틀거라. 그러면 그것에게 영근이 생겨 혈통을 통해 후대로 공법을 자연스럽게 전수할 것이니."

나는 '마법 유전자'를 이식하는 마법이라고 인식했다. 요수공법을 가르치면 이제부터 강력한 마법 생물이 되고, 그 형질을 후대로 이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진선 미훈이 일러준 대로, 신성력을 퍼부어 낙타 하나에게 요수공법을 가르쳤다.

체내에 강력한 흐름이 깃들자 낙타의 근육과 뼈가 꿈틀거리며, 자신의 〈매력〉을 기반으로 축, 미훈이 부르기를 영근을 형성하더니 주위의 흐름을, 마력을 끌어당긴다.

그리고 본래도 덩치가 컸던 낙타가 훨씬 키가 커지며 색이 변한다. 본래도 갈색이었던 피부와 털이 짙은 고동색으로 변모하며 치아와 근육 모든 것이 질적으로 달라진다.

요수공법으로 인한 극적인 외모 변화가 마치 설탕을 졸이는 카라멜라이즈(Caramelize)를 연상케 하는군······.

헛.

"너희들은 이제부터 카라멜 낙타(Caramel camel)다."

"우, 우와아아아아아."

"영웅 개체가 생기면 달고낙타라고 지어야겠다. 약간 페어리/땅 타입일 것 같은 이름이군."

"아, 아니 이름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천사가 뭐라고 하건, 카라멜라이즈로 강화된 낙타는 이제 강해졌다. 얼마나 강해졌냐면 이제 낙타잡는사탕 따위에 쥐뿔도 신경 안 쓴다.

한때 몸을 무자비하게 꿰뚫었던 필사의 몸통 박치기는 무력하게 튕겨나갈 뿐.

사탕들의 체급으로 잡기에는 카라멜 낙타는 너무나도 강인한 생명체가 됐다.

그것은 선인장 숲에서 찌끄레기처럼 살던 과거는 잊고, 넥타르 호수로 당당하게 걸어가 딱딱하지만 영양가 많은 구미나무도 먹고, 가만히 있던 양갱에게 시비 걸어서 그놈들 신체를 뜯어먹기도 하고, 아예 넥타르 호수까지 가서 넥타르도 마시는 등의 과감한 행보를 보였다.

물론 넥타르 호수의 패자 비스야킷이 공격하니까 죽긴 하지만, 꽤 힘들게 죽였다.

이 카라멜 낙타는 그저 체급만으로도 끔찍한 위협이 될 것이다.

원래 초식동물도 육식을 못하는 게 아니긴 한데, 보니까 꽤 적극적으로 육식하네.

원래 낙타가 체급이 작은 생물이 아닌데 카라멜라이즈 이후 덩치가 기린처럼 거대해져서 기다란 목으로 나뭇가지에 앉은 감치를 덮쳐 씹어먹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디저트 사막의 괴생물에게 너무 시달려서 그런지 근처에 뭐가 있으면 달려가서 밟고, 심지어 발굽 끝에 태양빛? 같은 걸 응축해서 그대로 내리찍으며 터트리는 마법 같은 것도 쓰더라.

정말 훌륭하군. 생존경쟁에서 밀려난 몇 마리 생물을 더 골라서 카라멜라이즈해야겠다. 그러면 더욱 강해질 거다.

"요수공법을 가르치는 걸 그렇게 부르는 분은 비인 님밖에 없을 거예요."

이것 처리만 하면 이곳은 마무리되겠군.

──내 의식은 세사이사 컨설팅 담당 분신으로 옮겨간다.

이놈이 생태계를 조져놓은 건 당연하지만, 나도 영계를 조져놨으니 거기서 거기라고 쳐.

"어떤가. 비인. 그대의 [시럽]을 흉내내서 나도 고기들로 흐름을 이어봤다네."

하지만 도대체 생명체들의 뇌와 신경을 잘라다가 덩어리지게 만들고 지면과 공중에 이어놓은 이 악취미스러운 영적 회로는 뭐라고 평가해야 할지 모르겠다.

49화. 메인 플랜, 서브 플랜 2

그 잘나신 세사이사 후작께서는 아주 자랑스러우신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후후. 비인. 자네의 발상은 아주 멋졌어. 고기가 창출하는 흐름으로 영계와 영지를 잇는다니 말이야.]

"어. 음."

[하지만 그러면 굳이 미개하고, 약하고, 작고 하등한 고기들의 흐름으로 이을 건 없지! 그렇다고 내가 키우는 고기들을 죽일 순 없었으니, 쓰러트린 상대 종족을 진화시켜서 두뇌를 비대화하고 그 뇌와 신경을 이어가는 회로를 만들어 보았다네.]

"그런 형태로 만들면 살아 있지 않을 텐데."

[탄식하라! 그런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 그렇지만 다행히 상대방에게 죽은 고기들을 일으켜 세우는 신비가 있지 뭔가? 그리고 자네가 보여준 그 놀라운 고기 조작술을 좀 응용하니까 스스로 증식하고 또 포식하며 연장되는 거대한 회로를 만들어 낼 수 있었지!]

이 자식 원래 생명체가 아니라서 그런지 정말 발상이 맛이 갔군. 나도 뇌가 효율이 좋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설마 살아 있는 것을 키워서 뇌와 신경을 배양하고 사령술로 잇는다는 발상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자네 것에 비하면 효율과 유지비는 낮지만 영계와 영지를 연결하는 성능은 몇 배로 좋아. 그 점에서 자네의 그것은 정말 대단한 기술이군. 역시 고기들에 대해선 명불허전이라고 할까.]

"칭찬해주니 고맙긴 하군. 내가 따라할 수 없는 기술이다만."

[감사한다! 자. 그러면, 언제나 그렇듯이 컨설팅 부탁하네. 자네 세계로 건너간 내 본체도 참 고생이 많군. 자네가 영립 구조물을 저렇게 망가트릴 줄이야. 그래도 [슈크-리무라스]라고 하는 존재는 멋져.]

이건 아무래도 좋다. 내 할 일 해야지.

세사이사의 세계는 언제나 그렇듯이 쓰레기 같은 생태계였다.

나는 생태계라는 측면에서 보지만 이놈은 언제나 '흐름'이니 '영류계'니 하는 측면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지형의 구조에 진짜 쥐뿔만큼도 신경을 안 쓰고, 자연적인 마법 지형 같은 것만 열심히 이어놨는데, 그것 때문에 생태계 효율이 지랄맞게 안 나온다.

"지형 좀 편집한다."

[영계를 건드리지 말게.]

"아 망할. 영계랑 지형이라는 게 연동되어 있단 말이다."

[그래도 안 돼. 이 세사이사의 이상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기묘한 표현이군.

"장대한 계획이라도 있나?"

[물론. 승리 플랜은 다들 있지 않나? 유감이다! 자네가 신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최종적으로 꿈꾸는 계획에 대해서 공유해줄 수는 없군. 혹시 그대가 나와 완전히 협력하겠다면 다르겠지만.]

"응? 뭐냐. 나랑 협력 생각하고 있어?"

세사이사는 그 거대한 코끼리 아바타 모습으로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되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자네와 협력은 계속 이어가고 싶지? 지금까지야 계속 이겼지만 다음 승부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줄 어떻게 아나.]

"그건 그렇지."

[그런 점에서 내가 못하는 부분을 완벽히 충족해주는 자네와의 협력은 꽤 인상적인 결과를 가져오겠지. 다만, 당장 세계를 합치는 건 불가능해.]

그야 그렇다. 디저트 군단은 다른 생태계와 호환이 안 된다.

내가 어떻게 다른 세계와 협력하고 싶어도 내가 내 생명체들을 전부 컨트롤 못하니 사실 난 하고 싶어도 항복도 못 받아주고, 항복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세사이사의 세계와 당장 협력하고 싶어도 디저트 군단과 저놈의 코끼리들이 도저히 융합할 수 없으니 전혀 효율이 나오지 않을 것.

[그런데, 말하는 걸 보니 자네는 협력할 생각이 없는 것 같군.]

"개인적으로 홀로 우승하고 싶어서."

[흠. 이유는?]

어? 이유?

잠시 대답을 멈추니 세사이사는 자기가 뭔 이상한 질문이라도 했냐는 듯 잠시 답변을 기다리다가 이어 말했다.

[요컨대 나 세사이사에겐 꿈이 있어. 이 세사이사는 진정한 신이 되지 못한다면 이곳에서 얻은 지식으로 내 고향에서 황제가 되고 싶지.]

"네 고향은 신분제인가?"

[신분제라니 그게 뭔, 잠시만, 그럼 자네 세계는 계급이 없었단 말인가? 계급이 있는 제도를 굳이 따로 이름붙일 정도로?]

"아~ 뭐 암묵적인 건 있어도 제도적으론."

[경악하라! 놀랍군. 어떻게 급이 갈리지 않을 수 있지?]

"내 세계에는 마법이 없으니까. 아무리 강한 사람도 권력을 가진 사람보다 못하지. 마법이 있다면 다를지도 모르겠다만. 어쨌든 우리 세계는 원칙적으론 누구나 권력과 재산만 있으면 높은 신분이었어."

그러니 세사이사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글쎄? 내 세계에도 고기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권력의 크기에 따라 신분은 나뉘었네.]

······응?

"생명체가 없는 것과 그것과 뭔 상관이야."

[응?]

세사이사야말로 뭔 말을 하는 건가 날 쳐다보다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설명해줬다.

[아. 그렇군. 자네 세계에는 신비가 '전혀' 없었나?]

"그래. 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랬어."

[경탄하라! 그러니까 고기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아는 건가? 흠. 어차피 대단한 지식도 아니니 설명해주자면, 강력한 흐름이 깃들기 위해선 고기가 필요하네.]

"엉?"

그러니까. 생명체가 아니면 강력한 마법을 못 쓴다고?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저번에 뭐라고 설명했나? '영류계의 흐름은 유동적이라 고정되기 쉽지 않다.'라고 했잖나. 흐름으로만 이뤄진 정령도 마찬가지고, 돌이나 물 같은 매질에 깃든 건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여전히 형편없네.

그렇지만 고기는 뇌 같은 기관으로 물질계와 영류계의 중간쯤 되는 지점을 만들지. 결과적으로 물질의 형태로 안정되고 명확한 형태의 흐름을 만들 수 있단 거야.]

"허."

[이 세사이사의 세계는 진짜로 고기가 너무 적어서, 흐름만으로 된 대부분의 존재들은 평생 작은 고기의 육체도 못 얻었지, 이 세사이사는 그래도 후작이라도 되었으니 꽤 그럴듯한 고기의 몸을 썼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세계에서 가장 하찮은 고기보다도 더 하찮은 것밖에 가지지 못했다네. 나는 내 종족이 그래서 마음에 들어. 크고, 강한 고기지.]

뭐야. 그럼 고기라는 말이 딱히 비하어도 아니었던 건가. 그냥 진짜로 얘들 세계에선 고기로 된 생명체 자체가 귀하니까 그렇게 부르는 거라고?

그렇게 말하니까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게임 당시, 메인 플랜이 먹히지 않는 문명은 없었다.

요컨대 극후반 가면 마법과학우주전함 끌고 다니면서 차원이동하는 놈들도, 결국 농장은 있었다.

농경지의 효율을 엄청나게 올리거나 완전 자동화, 마법과의 융합을 통한 대단히 효율 좋은 작물 같은 걸 만들었지만 어쨌든 농장은 있었다.

이거야 뭐, 상식선의 이야기다. 분명 지구에서도 공장에서 식량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었지만 생물의 효율을 공장의 효율이 따라가기 힘든 거다.

정밀한 움직임을 펼칠 수 있는 로봇과 초고속연산 능력을 가진 컴퓨터는 분명 인간보다 성능은 좋지만, 정작 인간보다 생산 및 유지 비용은 훨씬 높지, 그러니까 결국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농경지에서 작물 재배하는 거다. 적어도 30레벨 내에선?

그런데, 내가 게임했을 당시에 생각했던 의문은 '완벽한 마법 문명'이 왜 없냐는 거다. 난 처음엔 밸런스 때문인줄 알았다. 밥을 안 먹는 순수 정령 문명 같은 거 있으면 생물 문명하고 싸움이 안 되니까.

그런데 내가 해보니 초반에 순수한 마법생물, 요컨대 정령 문명으로 시작해도 중반 넘어가서 오히려 애들이 생물학적인 육체를 갖더라? 원소로 시작했어도 심지어 궁극적으론 생명체가 됐다.

생각해 보면 생명도 다른 건 아니었다. 〈신비〉를 가진 생명체가 그냥 생명체보다 우월하다. 궁극적으로는 생명체는 마법을 쓰게 되어 있다.

이것도 그냥 판타지 게임의 컨셉인 줄 알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물질과 흐름, 양 극단에 있는 존재가 중간 지점을 향해 서로 반대편에서 전진하고 있었던 거다.

"아. 잠깐. 세사이사."

[음?]

"내가 지금 깨달은 걸 너에게 공유할 테니까 혹시 생각나는 아이디어 있으면 말해봐라."

그래서 방금 떠올린 생명과 마법의 반대항, 상관관계에 대한 가설을 얘기하니. 세사이사는 흥분했다.

[오호! 그렇군!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군. 그런가, 고기도 신비와 흐름이 없이는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없나?]

"아마도."

[최고의 고기 전문가인 자네와, 최고의 신비 전문가인 이 세사이사가 협력하면 꽤 대단한 걸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요컨대 생명체에게 영구적으로 흐름을 부여하는 방법이라든가.]

"응?"

[왜 그러나?]

왜냐니. 그 말을 듣자마자 유전되는 마법인 카라멜라이즈(요수공법)를 알려준 공룡 신선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으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 미훈 그 자식은 생명과 마법의 완벽한 중간지점을 만들 수 있는 재주가 있는 건가? 대신 생태계나 영류계에 대한 지식은 부족하고.

"생태계와 영류계에 대한 지식이 없는데 그걸 할 수 있는 플레이어 알고 있어서 그래."

[찬탄하라! 소개시켜 줄 수 있나?]

"글쎄. 네가 너무 강해지면 좀 그런데, 적당한 대가가 있으면 가능할지도······."

[적당한 대가라. 이 세사이사는 일반신비학 전반, 영계와 영지, 그 외의 흐름의 외적 구조와 마법 계열 신비 전반에 전부 능통한 대학자지. 뭔가 필요한 게 있나?]

미훈하곤 방향성이 다른 것 같긴 하다. 미훈은 땅의 레벨을 자연스럽게 올렸고, 세사이사는 영계라는 보조 구조물을 통해 〈신앙〉과 〈신비〉수치를 올리는 타입이니까.

"아. 그렇군. 세사이사."

[뭐지?]

"내게 있어선 꽤 중요한 문제인 것 같은데, 그런 '순수한 흐름으로 된 정령'은 뭘 먹고 사는지 알 수 있나?"

[당연히 흐름이지. 라고 말해도, 정확히 '어떤' 흐름을 먹고 어떤 원리로 섭취하느냐에 따른 질문이겠지?]

그래. 원래 게임 했을 때도 약점이었던, 정령에 가까운 문명도 굶겨 죽이기 위해선 그런 '마법 생태계'에 대해서도 알아둬야 하니 말이다.

[좋아. 대단한 지식도 아니니 오히려 세세하게 설명해주지. 흐름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난 더럽게 어려운 설명을 차근차근 새겨 들었다. 메인 플랜의 완전한 구축. 진정한 의미에서 모든 상대를 말려 죽이기 위한 방법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정령은 적어도 일곱 종류로 나뉘며······.]

진짜 더럽게 설명 많고 복잡하네, 그렇지만 듣는다. 이 악물고 듣는다.

그렇게 생태계를 편집하면서 열심히 배우고, 슬슬 생태계 쪽을 벗어나 세사이사의 코끼리들이 세운 도시 부분을 정리할 때가 됐다. 도시와 마을에서도 가축 등을 키울 수는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있어선 안 되는 게 있었다.

"어이. 세사이사. 저것들, 네가 이기고 노예로 부리고 있는 종족인가?"

[아아, 아니야. 그게 지난 재난 구간 때 너무 고생해서 커뮤니티에서 자네와 비슷하게 컨설팅 사업을 하고 있는 자를 찾았지. 그자는 자네와 비슷한 수준으로 영계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 지식을 교환한 것일세. 고기들의 도시도 저들이 지어줬어.]

나는 코끼리들의 집을 짓고 있는 '소라게' 종족을 보고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저거 미훈의 세계에서도 봤던 것 같은데. 분명 조력자의 종족이니 뭐니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산업〉과 도시계획의 전문가인가? 그곳에서도 이곳에서도 집 짓고 도구 만들고 하고 있네. 소라게 모습을 한 종족이 너무 특징적이라서 바로 알았다.

흠······. 뭐 그렇지만 나와는 엮일 일이 없겠지. 내가 도시 지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저렇게 대규모의 공장을 운용할 것도 아니니.

"내 세계의 영계도 거의 완성된 것 같군. 이번 컨설팅은 여기서 종료다. 소개는 바로 시켜주지."

[언제나 그렇듯이 좋은 거래였다. 비인. 그 대단한 전문가가 궁금하군.]

"좀 독특한 사람이지만······ 뭐어."

거래에서 속이는 건 불가능. 난 미훈에 대한 정보를 넘겨준다.

세사이사가 원래 생태계의 내 분신에게 알려주고 있는 지식은 차근차근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세사이사의 도움이 전혀 없어도 대충이나마 영계를 수선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그건 세사이사도 마찬가지다. 전반적으로 조져놓는 건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생태계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

결국 상대의 핵심적인 지식은 뽑아오지 못할 것이고, 어느 순간 우리는 완전히 협력하든가, 아니면 전쟁하게 되겠지. 최종적으론 말이다.

······.

"비인 님. 세사이사 님을 죽이기 싫은가요?"

"저놈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친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동업자라고 생각하지. 저놈도 나도 서로 벗겨먹을 생각만 한다.

'좋은 지성체'와 '나쁜 지성체' 같은 걸 구분할 생각 없이, '지성체' 전체가 싫다. 세사이사도 그래서 싫어. 저놈도 결국 생명체만 아닐 뿐 지성체의 나쁜 점을 가지고 있지.

"그렇지만?"

나도 다르지 않다. 그냥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어영부영 화제를 넘어갔지만, 난 왜 내가 홀로 게임을 이겨야 하는지 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도중 하차하면 무엇을 할건지도 말이다. 모든 지성체를 다 죽여버린 세계 위에서 홀로 남은 나는 무엇을 할까.

──그리고 내 의식은 본래 내 생태계로 옮겨간다. 이제 중대 분기점이 되는 '소수 라운드' 일곱 번째 충돌을 준비할 때다.

50화. 하차 구간 -두 번째-(+2권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