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DIOSDEMONIOANTIINTELECTUAL / Chapter 2 - 10-20

Chapter 2 - 10-20

10화. 요거-토소스

창을 닫자마자 차원문이 열리고 신의 파편이 배송되었다.

신의 파편은 인간의 체조직이 말라붙은 듯한 모습이었는데, 지층을 잘라놓은 것 같기도 하고 마른 고목을 겹겹이 쌓은 것 같기도 하였다.

나는 신성력을 통해 자세히 살펴보았다.

「옛 신의 파편: 강력한 〈신비〉를 머금은 옛 신의 파편이다. 〈전설적 창조물〉을 만드는데 사용할 수 있다. 〈전설적 창조물〉을 만드는 데는 최소 1,556점 이상의 〈생명〉, 〈신비〉, 〈신앙〉이 필요하다. 지불한 점수만큼 강한 〈전설적 창조물〉을 만들 수 있다.

신의 파편이 가진 권능: 『마법의 종주』」

『마법의 종주: 마법 계열의 신비를 사용하고 개발하는데 능합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신규 마법 계열을 개방할 수 있습니다.』

마법사 타입이다. 뭐 이러니까 이름을 요거-토소스로 하려고 한 거지. 물리형이었으면 슈크-리무라스(shuc-rimmurath)로 했을 거다.

"인벤토리 같은 건 없는 거지?"

"네. 세계에 둬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건 일단 테이몽 강과 넥타르 오아시스 사이의 평야에 둔다.

이 평야는 원래는 사막이었을 텐데, 유기물이 넘쳐나는 호수의 물이 계속 공급되고 범람하면서 아주 생명체가 자라기 쉬운 옥토가 되었다.

"옥토는 농사짓기 좋은 땅에 쓰는 표현이에요. 그리고 농사라는 건 문명의 상징이구요."

일부 개미도 농사는 지어.

그리고 농사지으려고 습지를 메꾸는 건 생태학적으로는 미친 짓이다. 습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습지보다 생태계 다양성이 풍부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의도적으로 세계의 지형을 편집해 강과 호수가 고리처럼 감싸는 '섬'을 만들었고, 그곳에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구매한 물풀과 포유류, 파충류, 조류, 양서류, 어류.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벌레들을 풀었다.

그러면 이제 내 생태계에는 크게 봐서 세 가지 지형이 있다.

일반적인 생물들이 살아가는 테이몽 습지와 강. 테이몽 문명의 잔해도 있다.

희석된 넥타르와 대수층의 순수한 물이 유입되는 담수호.(지금도 연결되어 있지만 언젠가는 넥타르 오아시스와 완전히 합쳐질 것)

압호주스가 있는 넥타르 오아시스.

여기서 넥타르 오아시스가 내 독자적인 생태계의 핵심축이고, 테이몽 습지는 보다 '보편적인' 생태계를 구축하는 지형. 그리고 디저트 군단과 그에 적응한 보편적인 생명체가 둘 다 존재하는 담수호가 바로 그 중간 지형이다.

최종적으로는 내 생태계의 모든 생명체를 디저트 군단의 일원으로 만드는 걸 목표로 한다.

"저들을 모조리 디저트 군단에 합류시킬 만큼 진화시키는 건 꽤 힘들지 않나요?"

"힘들지. 그래서 변이를 가능한 많이 일으키고, 습지에서 담수호로 건너가는 놈들 위주로 진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아예 디저트 군단과 상호작용하지 않는 별도의 생태계를 만들어도 괜찮아."

"어? 그래요?"

"당연하지. 디저트 군단은 지금 상황만 보면 일조량이 풍부한 사막과 넥타르 오아시스 주변 외에서는 아예 살아갈 수조차 없어. 방어적으로는 훌륭해도, 공격적으로는 대단히 취약한 생명체라고. 아마 이번 세계 충돌에서 상대는 침입해오는 젤리들을 아무 대비를 하지 않아도 처리할지도 모르지."

"흐음."

"그렇기 때문에, 저런 '자연적'인 생명체를 디저트 군단의 일부로 편입, 강화시키는 게 중요하다. 평범한 고기와 풀을 먹으면서, 정작 자신들은 디저트 군단의 일원인 새로운 생명체 말이야."

"그 '디저트 군단'의 정의가 구체적으로 뭐예요? 젤리 생명체?"

아니. 이미 평범한 물고기와 개구리에서 진화한 젤리먹치와 젤리먹구리도 디저트 군단이다.

평범한 유기물인 그들도 디저트 군단의 일부가 된 점에서 디저트 군단에게는 '젤리 생명체'보다 더 나은 정의가 필요하다.

디저트 군단의 최우선적인 조건은 '광물질 신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넥타르젤리는 광물질 신체가 없는 것 같은데요?"

게네는 원시적인 디저트 군단이니까. 원래 '원시적'이라는 말만 붙으면 다 예외가 되는 법이다. 그리고 광물질 구조를 가진 넥타르젤리도 있어.

아무튼 디저트 군단의 일원으로 불리려면 광물질 신체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젤리와 푸딩들은 이미 모래를 이용해서 유리질, 혹은 석영질의 껍데기, 치아, 가시, 비늘 등을 가지고 있고, 젤리먹치와 젤리먹구리도 젤리들을 먹음으로써 그런 유기체와 혼합된 광물질로 피부, 치아 등을 단단하게 덮는다.

이렇게 광물질 신체를 가지게 된 디저트 군단은, 다른 유기체는 정상적으로 먹을 수 있으면서 다른 유기체는 디저트 군단을 섭취할 수 없다는 끔찍한 비대칭 우위를 지니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다른 플레이어들에게서 사온 생명체들도 궁극적으로는 다 광물질 신체를 가지도록 덮어버리겠다?"

그래. 단백질과 광물질이 결합된 조직을 가진 디저트 군단의 침공은 대단히 대처하기 어렵다.

요컨대 지금 내가 들여온 생물 중에는 '악어'와 유사한 대형 파충류도 있는데. 이놈의 비늘이 광물질, 유리질로 변한 것만으로 끔찍하게 처치하기 어려워지겠지.

"멋진 발상이긴 한데요. 그런 신체구조를 생명체가 유지할 수 있나요?"

"지구에선 불가능하지. 판타지 세계니까 돼. 여긴 마법이 있잖아."

"그러니까 마법이 아니라 신비라니까요. 마법은 신비의 일부분에 불과해요."

마. 법.

내겐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건 다 마법이다.

아무튼 마력과 신성력이라는 에너지를 통하면 이 생물학적으로 말도 안 되는 생명체들이 대충 된다······.

물론, 얼핏 봐도 디저트 군단으로 개조된 생명체들은 무지막지한 에너지 소모량과 더불어서 가공할 정도의 자연적 마력 소모량을 지닌다.

자연적인 생물로서 활동하기 힘든 신체구조라는 거겠지.

"방향성은 좀 다르지만, 〈기술〉과 〈신비〉 레벨이 올라가면 연구할 수 있는 '인조생물'과 비슷하군요. 사실 그건 레벨이 15는 넘어야 가능한 거지만."

"내 〈생명〉 레벨은 5다. 곧 있으면 6이 넘겠군."

"그러고 보니, 계속 미루신 특성 카드도 선택해주시겠어요? 커뮤니티를 보는 사이 올라간 레벨이 꽤 되어서요."

〈군사〉 〈산업〉 〈신비〉 〈신앙〉 레벨이 각각 2씩 올랐다. 신앙 빼고 특성을 6개나 택하게 됐군.

〈군사〉 특성으론 『격투 전문가』와 『신비기관 활용』을 택했다. 신체를 이용한 전투술과 자체적으로 보유한 마법이 강해지는 특성이다.

〈산업〉 특성으론 『쾌적한 주거공간』과 『튼튼한 구조물』을 택했다. 집에서 살기 좋아지는 특성, 구조물이 단단해지는 특성이다.

〈신비〉 특성으론, 그냥 『빛 신비 특화』와 『불 신비 특화』를 택했다. 넥타르합성의 효율을 올리기 위해서다.

"그런데, 전설적 창조물을 구매하시고는 정작 사용하지는 않으시네요?"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첫째는 곧 있으면 세계 충돌이 시작될 텐데 과도하게 생명 점수를 깎고 싶지 않아.

둘째는, 일단 레벨을 올리고 택하고 싶으니까."

「세계의 〈생명〉 점수가 4085점을 넘어 레벨이 6으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세계 충돌을 2번밖에 겪지 않았는데 세계 전체가 생물로 득실득실해서 벌써 레벨 6이다.

군사력도 순전히 물량빨로만 레벨 3(441이상)이고. 강력한 신비를 갖추었으며, 진화를 통해 수입한 악어와 거대 메기, 거대 개구리 등도 강력한 포식자로 탈바꿈했다.

어지간하면 이기겠지만, 여기서 한 가지만 더하고 싶다. 상대가 어지간히 미친놈처럼 문명을 개발시켰어도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을 만큼의 요소.

6레벨 특성이 그러한 것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난 천사에게 특성 카드 달라고 눈치를 줬다. 5레벨 넘었으니 이제 '일반' 등급이 아니라 '우수'등급 특성이 나올 거다.

"······."

그런데 아무 말도 없다. 뭐야. 이 녀석.

"어서 특성 카드 보여줘. 뭐하는 거야."

하지만 재차 추궁한 천사의 표정은 싫증이라기보단 당혹감에 가까웠다.

그것도 내 세계가 문명도 없이 크게 성공했다거나, 혹은 벌써 생명 레벨이 6이라든가, 그런 것들과는 조금 다른 방향성의 당혹감.

"죄송합니다. 비인 플레이어님."

"?"

"그게······. 상부에 지금 사안에 대해 전달해봤는데, 지금 추천해 드릴 수 있는 특성이 없습니다."

"뭔 개소리야. 게임 내에서도 잘만 추천해 주었던 특성을 왜 갑자기 현실이 되니까 추천을 못 해주는 건데."

그러자 천사는 의외의 소리를 했다.

"그게, 다릅니다. 천사를 비롯하여 게임의 주최측은 플레이어에게 해가 되거나 도움이 안 되는 특성을 줄 수 없고, 그렇다고 플레이어를 특별히 편애할 수도 없습니다."

"넌 자꾸 나한테 문명 특성을 추천해 주잖아."

"그건 게임의 기본 규칙이 문명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플레이어가 원하는 방향성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어쨌든 플레이어의 세계에 부족한 요소를 추가해주는 것이니까요."

그건 따지자면 그렇군.

"그렇지만 지금의 〈생명〉건은 좀 다릅니다. 원래 〈생명 점수〉는 게임 내의 생명체의 다양성, 그 생태계의 탄탄함, 그리고 각 생명의 우수함 등과 그 규모를 기준으로 점수를 측정했습니다."

"알고 있다만."

"예예. 그런데 게임이었을 당시에서는 만들 수 있는 생명체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플레이어에게 제안할 수 있는 특성도 한정되어 있었고, 올리신 레벨에 따라서 적절한 특성을 추천해 드릴 수 있었던 겁니다. 설령 추천할 특성이 없어도 목록 자체를 갑자기 추가할 수는 없으니, 그냥 '꽝 특성'이라도 추천하게끔 프로그래밍되어 있었고요."

아. 그런 경우 좀 있었지. 극단적 〈생명〉빌드를 하다보면 전혀 도움도 안 되는 게 중반에 나오곤 했다.

"그런데 지금 비인 님의 경우 신의 권능을 최대로 발휘해 모든 우주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사실 존재할 수 없었던 생명체를 만들어서 그러한 생물체로만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저희 주최측은 무슨 특성을 추천해야 비인 님의 생태계에 6레벨 어치의 이로운 영향을 줄 수 있을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한마디로 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뭘 줘야 할지 짐작도 안 가서 못 주겠다?

"예. 그렇습니다. 물론 플레이어끼리 완벽히 밸런스가 맞는 공평한 경쟁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공정하게는 만들어야죠.

저희는 지금 비인 플레이어님의 플레이가 주최측의 의도와는 완전히 벗어난 것과는 별개로, 대단히 흥미롭고 주시할 만한 빌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빌드에 저희가 손을 대는 게 오히려 빌드를 망치거나, 다른 플레이어들과의 공정한 경쟁을 해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특성을 안 줄 수는 없잖아."

"예······."

난 이 초유의 상황에 잠깐 고민했다.

"게임의 규칙을 수정할 수는 없나."

"오로지 비인님만을 위해서 수정하는 건 무리가······."

"그러니까, 모든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수정할 수는 없나? 결함이 생겼으니 말하자면 패치노트를 작성하는 거지."

요컨대 내가 지금 받아야 할 이득을 못 받고 있으니, 나에게 이른바 '보상'을 준다.

내가 얻고 싶은 보상은 내가 받을 특성 딱 한 번만 내 맘대로 정하기······. 그리고 내가 이번에 받고 싶은 특성은 당연히 하나밖에 없다.

전설적 창조물을 특성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

"내 기억으론 〈생명〉 점수로는 기존에 생물체들의 기본 스펙만 강화시킬 수 있었지, 그게 생명체일지라도 전설적 창조물이나, 요정, 강한 영웅 등등 뭐든 특별한 놈들을 강화시킬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 그게 가능하게 해주면 안 되나?

요컨대, 나는 이제부터 〈생명〉 레벨이 오를 때마다 내 [압호주스]를 강화시키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생명체를 강화시키거나 창조하겠다. 이걸 이번에 받을 내 특성으로 하겠어."

"······."

"그렇지만 다른 플레이어들도 그럴 수 있게 해줘. 특권을 얻고 싶다는 게 아니라, 해결책을 제시하고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을 받아 가고 싶을 뿐이야. 안 되나?"

"상부와 소통하고 오겠습니다."

천사는 잠시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갑자기 메시지가 하나 떴다.

「전체 플레이어에게 공지. 본 게임에 있어서 운영상의 결함이 발생되었기에 세계 충돌로 예정된 시간을 연장하겠습니다. 그 사이 세계에 대한 조작은 계속할 수 있습니다.」

「예정되지 않은 공지로 인해 모든 플레이어에게 〈신앙〉 점수 210점을 드리겠습니다.」

이 게임사 운영 잘하네. 사료도 막 퍼주고.

난 늘어난 신앙에 힘입어 느긋하게 생물들을 조작했다. 잠시 뒤, 상부와의 소통을 마치고 온 천사가 답했다.

"비인 플레이어님이 하신 두 가지 제안. 패치노트로 인한 룰 변경. 그리고 〈생명〉레벨을 올리는 것으로 전설적 창조물을 비롯한 고유 개체의 능력치를 영구적으로 향상시키거나 새로이 획득할 수 있게 하는 것. 둘 다 통과되었습니다."

"오."

"대신 다른 모든 플레이어에게, 갑작스런 룰 변경으로 인한 보상으로 〈생명〉 레벨에 비례한 〈고유 창조물〉 생성 권한을 한 번씩 드리려고 하는데, 상관 없습니까?"

그거야. 아무 상관없지.

왜냐면 내가 만들 놈이 분명히 몇 배는 더 셀 테니까.

천사가 반짝이는 '우수' 등급 특성 카드를 건넸다. 나는 당당히 『(1회성)전설적 창조물 생성시 3268점 추가』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내 신성력과 생태계에 존재하는 마력, 생명체들을 미친 듯이 신의 파편에 욱여 넣었다.

꿈틀─!

일어나라. 옛 신의 파편에 깃든 마법의 종주여. 내 부름에 응하라.

꿈틀─! 꿈틀─! 꿈틀─!

지금이 바로 그대의 전설을 써낼 때다! 나타나거라! 요거-토소스! 디저트 군단의 제1군단장이여! 지금 모습을 드러내라!!!

"분명 엄청나게 막강한 창조물을 소환하는 거고, 심취하셨는데 끼어들기가 좀 그렇긴 한데, 이름이 이름인지라 하나도 위압감이 없네요······."

11화. 세계충돌 -세 번째-

전설적 창조물을 만들 때는 원래 제물을 바쳐야 한다. 특성이 그 제물의 상당수를 마련해줬지만, 추가로 더 바칠 수도 있을 것이다.

"특성으로 얻은 추가 점수 3,268점에 더해 내 생태계의 생명 절반을 고르게 바치겠다."

"예. 그러면 절반인 2,042점이 전설적 창조물에게 더해지는 대신, 561점이 추가로 소모되는데 괜찮죠?"

"상관없다."

압호주스를 만들었을 때와 같이 옛 신의 파편에게서 가공할 소용돌이가 생성된다.

오로지 생명체만을 빨아들이는 듯한 그 소용돌이는 절반보다 살짝 더 많은 생명체를 끝없이 집어삼켰다. 담수에 존재하는 풀, 물고기, 파충류, 벌레, 개구리, 젤리, 겔, 푸딩. 압호주스를 제외한 모든 디저트 군단의 생명체를 탐욕스럽게, 그리고 게걸스럽게 흡입한다.

꿈틀─! 꿈틀─! 꿈틀─!

옛 신의 파편이 부풀어 오른다. 젤라틴질과 유리질, 세라믹질 피부로 덮어씌워진 옛 신의 파편이 계속해서 거품처럼 부풀어오르고,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마치 풍선과도 같은데, 풍선에 거품이 일듯이 계속해서 둥그런 구체들이 안에 부착되었다.

쑤우우욱.

"맙소사. 저거 어떻게 나는 거죠?"

체내에 가벼운 기체를 넣었고, 절반은 마법이다. 저것은 체내에 가벼운 〈바람〉 속성 마력을 넣어서 부유한다.

거품과 고깃덩어리, 바위가 섞인 듯한 그것의 몸체에서 조작을 위한 촉수가 자란다. 마법을 쓰는데 필요한 수인을 맺는 촉수. 그리고 그 자체로 다른 물체를 건드리고 파괴할 수 있는 흉악한 촉수들이다.

부릅─!

그리고 그것이 눈을 떴다. 전방에 두 개. 상층부에 두 개. 하층부에 두 개. 그리고 후방에 두 개. 거품 사이의 수정질 안구가 여럿 달린 그것은 촉수를 뻗으며, 짙은 요거트색 피로 몸의 살을 가득 채웠다.

[위대한 나의 창조주여. 그대가 빚으신 요거-토소스. 이 세계에 강림했나이다.]

생태계. 유입.

[이 생태계에 유입됐나이다.]

멋지군. 주인의 말을 척하면 척하고 알아듣는 아주 높은 지능을 지니고 있다.

「세계의 〈군사〉 점수가 926점을 넘어 레벨이 4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신비〉 점수가 926점을 넘어 레벨이 4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요거-토소스를 하나의 능력 때문에 〈군사〉와 〈신비〉 점수까지 2배로 폭증했다. 혼자서 생태계 전체의 레벨 자체를 높일 수 있을 정도로 저놈은 괴물인 거다.

〈군사〉 특성으론 『마법 전투』를 택했다. 그냥 마법을 써서 싸울 때 잘 싸우게 되는 특성이다. 

"이번에 드리는 특성은 재밌는 게 있어요."

"재밌는 거?"

『요거-토소스 지식 획득: 요거-토소스가 926포인트 만큼의 마법적 지식을 얻습니다.』

『물 신비 특화: 물 속성 신비에 더욱 능해집니다.』

『마법 계시: 〈신성〉을 소모해서 창조물의 〈마법〉 수행 속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오. 그러니까 〈신비〉쪽에도 요거-토소스를 직접적으로 강화시키는 특성이 생겼군.

"예. 문명 전체를 강화시키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강력한 전설적 창조물의 능력치를 더 올릴 수 있죠."

그러면 그걸로 하겠다. 다른 특성보단 그게 더 낫겠군.

[나의 창조주시여. 감사하나이다.]

「세계의 〈기술〉 점수가 100점을 넘어 레벨이 1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

"아. 마법적 지식. 그러니까 기술을 얻은 걸로 취급되어서 100점을 넘겼나보군요."

"그렇군······."

〈기술〉점수는 도달한 기술적 수준과 더불어 그런 기술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이들의 총합 수치던가.

과학적 지식 말고 마법적 지식도 기술 점수를 올려주긴 했다. 요거-토소스는 혼자 알고 있는 마법적 지식만으로 레벨이 올라갈 정도인 건가. 진짜 뭐하는 놈이지.

〈기술〉 특성으론 『마법 개발』을 택했다. 직관적으로 마법 개발이 좀 빨라지는 특성이다. 이것도 사실상 요거-토소스 전용이군.

어디. 그럼 이놈 능력치 좀 보자. 

「요거-토소스 〈전설적 고유 창조물〉

체력 LV.4: 1,379

전투 LV.3: 879

솜씨 LV.2: 340

지능 LV.3: 694

매력 LV.2: 279

정신 LV.3: 560

권능 LV.4: 1,205

마력 LV.3: 900

개체 총점 LV.3: 6,236」

미친놈이군.

"그 이상의 평가가 불가능한데요. 지금 고작 세 번째 충돌을 준비하는데, 가장 낮은 매력조차 2레벨에 279점. 최고로 높은 체력과 권능은 4레벨에 1,000점이 넘었고. 종합 능력치는 6,236점으로 3레벨. 거기에 익힌 권능을 비롯한 마법도 어마어마해서 이건 네 번째 충돌에서도 단신으로 문명 전체를 상대할 정도의 대괴수가 지금 떴어요."

천사. 칭찬만 하지 말고 단점도 말해봐.

"예? 아······. 굳이 말하자면 에너지 소모량일까요. 에너지 소모량이 너무 심해서 〈생명〉 4레벨 정도는 되어야 감당할 정도. 하지만 문자 그대로 지금 비인 님 세계의 생명 레벨이 6레벨이니까 아무 의미가 없는 단점이에요."

그렇군. 천사가 보기에도 그런가.

그러면 저놈이 최강이려나. 어떤 세계도 내 요거-토소스를 쓰러트리진 못하겠지.

"10,779개. 지금 세계 자체의 역량으로 요거-토소스를 사냥할 가능성이 있는 세계의 수입니다."

뭐지. 왜 그렇게 많지.

"아뇨. 엄청나게 적은 겁니다······. 남은 플레이어가 2억 5천만이 넘으니까요. 언급한 세계조차 어디까지나 '가능성'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되겠습니다.

10,779개 중 9천 개 이상은 요거-토소스를 사냥하는 것으로 문명의 모든 역량을 소모해버리거나 공멸, 혹은 그조차 실패할 것이고, 50% 이상의 역량 상실 없이 요거-토소스를 사냥할 수 있는 문명은 아예 존재치 않습니다.

한마디로 현재 게임에 참가한 모든 플레이어는 요거-토소스를 상대하는 것만으로 전체 문명 점수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질 겁니다."

"문명이 아니라 생태계를 기준으로 하면?"

"현재 남은 플레이어 중 문명이 없으신 플레이어는 비인님 혼자입니다······. 당연하잖아요."

그렇군.

그렇지만 사냥할 수 있는 세력이 있다······. 라는 것만으로 조금 걱정되는군. 전설적 창조물은 불멸이라서 파괴되어도 다시 만들 수 있지만, 되살리는데 또 막대한 자원이 들어가니까.

어차피 처음 차원문 열렸을 때부터 다짜고짜 요거-토소스를 투입할 수는 없을 테니. 약간 간을 보고 천천히 상대하는 식으로 해볼까.

「비인의 세계

생명 LV.6: 1,482

군사 LV.4: 1,722

산업 LV.3: 505

기술 LV.1: 112

문화 LV.0: 0

정치 LV.0: 0

신비 LV.4: 1,539

신앙 LV.3: 871

총점 LV.4: 6,231」

"세계 전체의 점수가 요거-토소스 능력치보다도 낮군."

"개체와 세계의 능력치가 1:1로 대응하지 않기도 하지만, 전체 생명체의 절반 이상을 요거-토소스에게 먹이로 줬으니까요. 그리고 솔직히 문화와 정치가 0점이면서 능력치 총합이 높길 바라는 건 양심이 진짜 없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지금 상태로도 내 세계 능력치 총합이 엄청나게 높을 것 같다만?"

"그건 사실이죠."

다음 상대가 불쌍해지는군.

플레이어 에웅이 처음 받은 지형은 사막이었다. 원래 순수한 원소로 된 몸체를 지닌 에웅이었기에 오히려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웅은 '상식적으로' 매번 플레이어의 절반씩 탈락해서 10억 중 딱 1명 남는 지금의 구조에서 자신이 이길 가능성은 대단히 낮을 거라고 생각했다.

"천사. 무조건 항복 말고, 조건 있는 동맹도 가능하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원소형 몸체를 지닌 에웅의 천사는 그렇게 말해주었기에, 에웅의 전략은 일찌감치 정해졌다.

먼저, 첫 번째 세계 충돌이 있자마자 바로 〈동맹〉을 신청했다. 차원문이 열려서 첫 침입자들이 자기 문명을 해치기도 전에 말이다.

"이봐. 첫 승부부터 괜히 싸우고 기운 뺄 것 있겠어? 일단 우리 둘이 서로 완벽히 협력하는 거야. 그러면 다음 승부는 서로 싸우지 않고 협력하는 만큼 두 배의 체급으로 유리하게 시작할 수 있겠지."

상대는 다행히도 대화가 통했다.

"그러면 그렇게 게임 끝날 때까지 가자고?"

"설마. 우리는 서로 협력하면서도, 서로의 종족을 누르기 위한 암투 싸움은 계속하자. 하지만 그렇게 세계의 주도권 싸움에서 이긴다고 할지라도 상대를 '소멸'시키지는 않고 상대 부하가 되는 거야. 부하가 되도 나중에 다시 힘을 기르면 반역할 수도 있고."

"흠······."

"두 번째 상대를 만나도 바로 협력을 요청하자고. 두 번째 상대는 어지간히 게임을 잘하지 않는 이상 아마 상대와 전투한 다음 만신창이 상태일 걸?

그러면 실제로는 삼파전, 어쩌면 상대도 부하나 동맹이 있어서 사파전일지도 모르지만······. 처음부터 쭉 협력한 우리들보다는 약할 거야. 상대가 거부해도 손쉽게 쓰러트릴 수 있겠지."

"그걸 내가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고 바로 제안하는 건가?"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니까 바로 제안하는 거다. 그러니까 오히려 믿을 수 있겠지."

한마디로, 에웅은 '협력 전략'을 택했다.

상대와 싸우는 대신 협력. 그리고 세계 내의 일원으로써 내정과 암투로 승리하는 전략.

에웅은 그런 정치와 모략이 직접적인 전투보다 자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아.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순수한 원소 생명체를 만들어낸 에웅과 달리 상대의 종족은 물을 엄청나게 적게 먹는 쥐 같은 종족이었다.

서로의 종족을 보고 놀랐지만, 거꾸로 서로의 종족이 원하는 것이 겹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동맹은 쉬워졌다.

에웅의 종족은 마력 지대와 원소가 넘쳐나는 지역을 차지하고 신비를 단련했고, 상대의 쥐 종족은 골짜기에 도시를 짓고 사막의 빗물을 받아 식물들을 심고 기술을 개발하게 되었다.

두 번째 승부. 상대는 협력 제안을 거절했지만 이미 완벽한 한 짝이 된 원소&쥐 연합에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항복은 받아주어 노예로 삼았다.

이제 에웅의 세계에는 세 명의 신과, 두 개의 주류 종족. 한 개의 노예 종족이 있었다. 쥐 플레이어도 어지간히 정치에 능한지 에웅과의 주도권 싸움을 쉽게 넘겨주지 않았지만. 세 번째 충돌이 있은 직후에도 과연 이 구도가 유지될지는 알 수 없었다.

에웅은 '협력'이라는 최선의 전략을 거부하는 플레이어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계속 협력을 제안하고, 점점 큰 세계를 다스리는 자신들의 전략이 최고라고 확신했다.

설령 지더라도 상대의 신하, 부하, 하다못해 노예로라도 생명을 이어가면 길게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에웅은 그 정도로 정치와 모략, 암투에 자신감이 있었다.

세 번째 충돌 시작 전에 뜬금없이 패치가 있더니, 〈신앙〉점수와 고유 창조물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퍼줘서 깜짝 놀라는 해프닝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뿐. 에웅은 자신의 세계에서 강력한 마력과 매력으로 문화와 신비 양면에 이점을 주는 창조물을 만들었고, 동료 플레이어는 강력한 전쟁 지휘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시작된 세 번째 세계 충돌. 에웅과 동료 신은 자연스럽게 상대 플레이어 '비인'에게 대화를 요청했고······.

「상대 플레이어가 〈대화〉를 거절했습니다.」

"뭐. 이놈은 성정이 과격한 모양이군."

"그러게나 말이야."

에웅의 세계의 총합 점수는 무려 6,000이 넘었다. 쥐 종족과 완전히 협업해서 나오는 점수긴 하지만, 서로 완전히 협업한 덕에 분업화가 이루어져 모든 방면에서 아무런 단점이 없었다.

그리고 상대 세계로 들어간 원소 종족과 쥐 종족. 물리, 마법, 원거리, 근접, 집단, 모든 부분에서 단점 없는 그들의 첨병은 상대의 세계로 들어가서.

하늘에.

떠 있는.

그것을.

보았다.

신성력으로 확인한 결과, 두 종족이 협업해서 만든 세계의 총점조차 능가하는 개체 능력치를 지닌 그 정체불명의 거품 덩어리를 말이다.

에웅과 동료 신은, 그걸 보자마자 미친듯이 〈대화〉 〈동맹〉 〈협상〉 〈항복〉 요청을 넣었다.

「상대 플레이어에게 차단되었습니다.」

에웅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동료 신이라고 사정이 달라 보이진 않았다.

12화. 세계 충돌- 세 번째- 2

요거-토소스를 본 순간 〈대화〉와 〈항복〉연타를 시도한 걸로 봐서 그들 스스로 생각해도 이길 견적이 도무지 안 나오나보다. 난 이번 게임을 이미 이겼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내가 항복을 받아주지 않자 상대 플레이어들은 차선책을 시도했다.

"어차피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이기는 상황에서 차선책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나요?"

있다. 뭐냐면, 항복을 받아주게끔 하는 것이다.

자기네들의 전력을 최대로 끌어모아, 내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힌다. 어차피 이기진 못하지만, 나에게 적어도 협박은 할 수 있다.

너 다음번 게임도 있잖아? 우리한테 세게 얻어맞고 이길 수 있겠어?

라는 협박 말이다.

"일리 있는 전략이네요. 하지만 그러면 의문이 있습니다만, 왜 항복을 받아주시지 않는 거죠?"

글쎄. 필요 이상으로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이상한 생각을 하시네요. 영혼 소멸보다 나쁜 짓이 없는데."

있지. 소멸 안 시킬 거라고 약속하곤 소멸시키기.

"아."

어차피 없앨 건데 항복 받아준 다음 없애면 사기 아닌가.

"시스템적으로도 사실 금지되어 있습니다. 태업, 반역, 혹은 극도의 무능의 경우에만 소멸이 가능합니다. 정말 인격적으로 마음에 안 들면 해당 신의 기여도만큼의 〈신앙〉을 지불하는 것으로만 축출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신이 계속 일을 잘하면 진짜로 마음에 안 드는 놈이라도 축출할 수가 없잖아?"

"으음. 보통은 계속 일을 잘한다면 마음에 안 들어도 계속 쓸 것 같지만······. 진짜로 너무 마음에 안 든다면 '아무 일도 안 시키기'를 선택하면 되죠. 점수는 매 게임 폭증하는 구조니까, 어느 순간 그 신의 기여도가 미미해질 것이고, 그때 축출하면 됩니다."

그렇군.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난 항복을 받아주지 않는다. 이 세상에 지성체는 최대한 적은 편이 좋기 때문이다.

적의 선발대는 신비를 통해 물풀과 물고기, 지면과 대기 중의 마력을 뜯어먹으며 최대한 버텨봤지만 결과적으로는 육식푸딩들의 공세를 못 이기고 전멸했다.

그리고 내가 보낸 육식푸딩과 젤리들이 문제인데. 상대 땅에 '물'이 없었다. 진짜 땡사막 지형이다.

내 푸딩과 젤리들은 일단은 상대에게 수원이 있을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전멸하고 말았다.

"호오. 신기하네요······. 어떻게 물이 하나도 없지?"

적의 세계를 정찰해보니, 움직이는 모래와 돌멩이 같은 놈들은 '정령' 계열 생명체였다. 단백질이 아니라 마법으로 살아서 움직이는 놈들. 육체도 단백질 대신 마법으로 되어 있다.

"그냥 다 같은 마법이 아니라, 하."

몸이 마법으로 구성되어 있고, 햇볕, 모래, 그리고 대기 중의 마력과 원소에서 힘을 얻으니 이쪽은 물이 없어도 살 수 있었다. 대신 상대 세계의 마법 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종족은 햄스터를 모방한 듯한 작은 생명체였다. 대신 덩치는 좀 있고, 팔과 손이 발달되어 도구를 만들고 쓸 수 있으니 사실상 작은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햄스터 중에 사막에 사는 종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상한 건 아니다. 사막에 사는 쥐 중에서 극단적인 경우는 몇 달 가까이 물 한 방울 안 마셔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저들의 세계에 바위 언덕이나 골짜기 같은 게 있는 걸로 보아 낮에는 굴에 숨고 밤에 움직이는 게 아닐까. 아마도 극도로 수분 소모를 줄이는 생태를 가지고 있을 터.

보아하니 상대 사막에 무성하다고 표현할 정도의 선인장 숲도 있고, 관목이나 덤불도 있고.

식물이 이 정도로 있다면 비가 그럭저럭 오는 모양이다. 아마도 물을 먹되 극도로 물 소비를 줄이는 전략을 세운 듯하군.

그리고 햄스터 종족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혹'이 있다. 물? 지방? 아마도 에너지를 저장하는 기관이 있는 듯하군. 지구에서는 설치류에는 없고 낙타에게나 존재하는 기관이다.

햄스터들의 식량은 벌레, 선인장, 선인장 열매, 선인장 수액, 그리고 골짜기 아래에 조성한 밭 같은 것······. 그리고 가축으로 낙타에 가까워보이는 거대한 초식동물들.

돌을 쪼개서 만든 건물과 도구들도 보이는군. 골짜기 아래의 햄스터 도시와 선인장 숲, 그 옆의 사막 정령 구역. 이렇게 구분한 걸까.

"우와. 햄스터에 대한 분석만 기괴할 정도로 자세해."

어떡하냐. 내가 마법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는데. 저기 돌덩어리 정령들도 뭔가 마을 같은 것을 만든 것 같은데 쟤들은 그냥 마법을 먹고 마법으로 마을 만들겠지 뭐.

"모든 정령형 종족들에게 사과하세요."

자 그러면 적 세계에 보낸 내 젤리와 푸딩들도 전부 죽고, 더 이상 적 세계를 들여다볼 수가 없게 됐다.

그럼 이제 전략을 고민한다.

사실 그렇게 깊은 고민은 필요가 없었다. 내 전략적 선택은 지금 하나밖에 없었다.

요거-토소스를 적측으로 보내든가.

아니면 요거-토소스로 들어오는 병력을 요격하든가.

"단순하네요."

그야 뭐. 어쩔 수 없다. 디저트 군단 중 순수 사막 지형에서 살 수 있는 놈들이 없는데 어떡하나?

"어라? 그러면 궁금한 게 생기는데, 만약 첫 상대나 두 번째 상대가 저런 지형이었으면 대체 어떻게 상대하려고 하셨어요?"

그렇다면 저쪽도 물 근처에선 살지 못할 테니 그냥 닥치고 내 생태계에서 생명 번식만 시켜서 점수로 누르려고 했다. 아니면 그냥 다음 번 세계 충돌이 있을 때까지 공존하거나.

"우와······. 그럼 전략은 그냥 운에 맡기는 거였어요?"

원래 생태계 전략은 다 이런 식이다. 적을 공격할 수 있으면 그냥 공격해서 말려 죽이고, 적을 공격할 수 없으면 적도 날 공격 못하니 그냥 버틴다.

"그거 흔히 날먹 빌드라고 하는 건 알고 계시죠?"

통하면 전략인 법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었다면 나도 내 생명체들을 물에 별로 의존하지 않게끔 진화시켰겠지.

[창조주여. 어찌하면 좋겠나이까. 저들 생태계에 제가 유입되어도 괜찮을까요?]

흠. 요거-토소스야. 굳이 내 의견을 묻는 게 기특하구나.

솔직히 널 내보내면 그냥 다 쓸어버리고 간단하게 이길 것 같지만, 나는 일단 저들의 수를 보고 천천히 대응하고 싶으니 너는 마법 개발을 하면서 적이 쓸 법한 수에 대응책을 만드는 것에 골몰해라.

[알겠습니다. 창조주여.]

요거-토소스는 그러자 넥타르 호수로 가서 압호주스의 촉수를 물고 쪽쪽 빨면서 무지막지한 넥타르를 흡입했다.

[이야이야아아아아 빨려나간다아아아아아아아]

빨아먹는 양이 너무 많아 생태계 전체의 성장을 둔화시킬 정도지만 어쩔 수 없지. 이번 승부에서 이겨서 더 많은 자원을 쓸 수 있게 되고, 압호주스도 더 성장해준다면 아마 충분히 감당 가능할 거다.

차원문을 열고 몇 번 더 공격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나도 상대도 전혀 생명체들을 내보내지 않았다. 아마 보내봤자 그냥 죽어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게임 내 시간으로 몇 년이 흘러서 '차원통로' 단계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요거-토소스는 혼자서 마법 연마만 했고, 내 생태계는 원래의 생태계를 한 80%까지 회복했으며, 적들은 가끔 내 세계로 정찰병만 몇 마리 보낼 뿐이었다.

난 정찰병 안 보내냐고? 못 보낸다. 차원문은 내가 원하는 생명체를 선정해서 보낼 수 있는데, '차원통로' 단계부터는 직접 명령해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근데 난 창조물들의 통제와 충성도를 나타내는 〈정치〉 점수가 0이다. 그리고 내 디저트 군단의 지능은 바닥이고. 무슨 말이냐면, 〈신성〉 같은 걸로 계시를 내려봤자 내 생명체들이 '전혀' 따르지 않는다. 그냥 멍청해서.

그러니 나도 남는 신성력으로 생명체들이나 열심히 튜닝했다. 물이 많은 환경에서, 물이 없는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열심히 푸딩들을 진화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할지, 역시나라고 할지. 적측에서 군대를 보냈다.

세계 내 시간으로 십몇 년 동안 양성한 군대다. 그야말로 모든 자원이란 자원은 다 끌어모은 듯, 그리고 공중에 뜬 요거-토소스에게 피해를 입히려는 목적만 가지고 온 듯 절반 이상은 원거리 마법사 전력으로만 구성된 병력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무지막지한 숫자의 햄스터 패거리들이었고.

재밌는 건, 못 보던 종족이 하나 끼어 있었다. 손으로 도구를 만질 수 있는 곤충 같은 종족이었는데 적들의 주력이라기보단, 약간 급이 낮아 보였다. 진 플레이어의 종족이려나.

곤충 종족은 마법 능력이 있는 듯했다. 정령 종족과 같이 힘을 합쳐서 요거-토소스에게 마법을 쏠 준비를 했는데. 그때 내게 메시지가 하나 떴다.

「상대 플레이어 '산산'이 〈대화〉를 요청합니다.」

차단하지 못한 플레이어로군. 당연히 거절한다. 나는 요거-토소스를 움직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적의 세계와 디저트 군단의 대결이 시작됐다. 사실 시작됐다고 하면 좀 뭐한데, 내 푸딩들은 한참 전에 이곳에 들어온 고기의 냄새를 맡고(후각이 유일한 감각기관이다) 미친 듯이 그들을 향해서 뛰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햄스터 장군이라고 할지, 좀 특별해 보이는 개체가 햄스터들을 선인장 가시와 덤불을 가공해서 만든 장비로 무려 방진을 짜며 푸딩들의 육탄 공세를 받아낸다.

햄스터들이 물리 공격 담당이야? 끝내주네. 수가 많고 방진이 아주 철저한 덕에 푸딩들은 적의 주력인 마법사 병력을 치지 못했다.

[창조주여. 어떻게 처리할까요.]

공격 대신 적이 너를 공격하는 걸 방어해 봐.

[당신의 뜻대로······.]

이윽고 적의 마법사 병력이 일제히 마법을 터트렸다. 요거-토소스가 촉수를 움직이며 허공에서 마법으로 받아쳤다.

요거-토소스의 마법이 마법해서 정령과 곤충의 마법을 마법적으로 막아냈다.

"아니 좀!!! 원시적 마법에 대항하여 전설적 창조물이 빚어낸 수준 높은 마법 방어막에 대한 감상이 그거예요?!"

아니 내 세계엔 마법이 없어서 볼 줄 모르는 걸 대체 어떡하라고······. 무슨 총을 총이라고 부르면 총기 이름을 대면서 그냥 같은 총이 아니라고 화내는 밀리터리 오타쿠처럼 성내네.

아무튼, 요거-토소스의 마법 실력은 대단하긴 한 것 같았다. 마력은 대폭 썼지만, 저쪽이 나름 필사적으로 모은 군대의 공격을 아무 피해도 없이 막아냈으니.

"요거-토소스. 적들을 무자비하게 유린할 능력도 있겠지?"

[물론입니다. 원하신다면 당장이라도 섬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지 마. 가능한 마력을 아끼면서, 적들을 우리 디저트 군단이 먹어 치울 수 있을 만큼 천천히 요리할 수 있겠나?"

[시간이 오래 걸리셔도 괜찮으시다면······.]

이후에는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다.

요거-토소스의 주력 마법은 바람 마법이었다. 바람으로 모래와 물, 돌멩이를 섞은 토네이도로 적진을 유린했다.

몸집이 가벼운 햄스터들은 그냥 폭풍에 휩쓸려서 나뒹굴었고, 좀 몸이 튼튼해 보이는 곤충과 정령들조차 물과 돌이 섞인 폭풍 세례에 그대로 몸이 박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살난 잔해를 향해 디저트 군단이 몰려가서 마음껏 포식하기 시작한다. 하필 정령 몸도 돌이라서 바위젤리들이 녹여 먹을 수 있는 게 치명적이었다.

"이게 좋아. 네가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쓰러트릴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상대가 아닌 이상, 가능하면 디저트 군단과 협업하면서 적들을 제압하는데 힘쓸 것."

[저희 생태계의 자원을 늘리기 위해서군요. 이해했습니다. 모든 것은 디저트 군단의 번영을 위해.]

번성.

[모든 것은 디저트 군단의 번성을 위해.]

바로 그거야.

"아마도 아니에요······."

이렇게, 상대 세계는 모든 군사력을 상실했고. 물 마법을 뿌리며 전진한 요거-토소스 덕에 디저트 군단은 세 번째 세계를 손에 넣었다.

이제 무려 내 세계의 넓이는 80제곱킬로미터다. 또 두 배로 넓어진, 하지만 물이라곤 없는 이 생태계에서 디저트 군단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13화. 하차 구간-첫 번째-

저 사막을 두고 어떤 생태계를 만들지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간이 멈췄다.

농담이 아니다. 진짜로 시간이 멈췄다. 모든 생명체의 움직임이 그대로 정지했다. 공기도, 마력도, 꿈틀대던 촉수도 물도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뭐지. 버그인가.

"버그가 아닙니다."

"혹시 문명 건설 안 했다고 패널티 주는 거냐?"

천사는 당황하며 부정했다.

"설마요. 말씀했듯이 비인 님의 빌드는 지금 저희도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지금 시간이 멈춘 건 본래 예정된 일입니다."

"?"

"첫 번째와 두 번째 충돌은 말하자면 쭉정이들을 걸러내는 튜토리얼. 튜토리얼을 통과했으니 커뮤니티 기능을 해방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충돌에서 살아남은 플레이어들의 경우는 선택권이 주어집니다."

선택권······?

"더 나아가느냐, 아니면 물러나느냐."

"나아갈래."

"아니 그럴 것 같긴 했는데 설명을 일단 들어주십시오."

"······뭐 그래."

천사의 설명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왜냐면 하차가 '포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매 세 번째 충돌 직후가 '하차 구간'입니다. 모든 플레이어에게는 '하차'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전진하기로 하면, 이후 게임에 계속 참여합니다.

하차하면, 여태까지 얻은 점수 및 획득한 포인트를 '신성력'으로 환산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신성력?"

"주최 측에서 시간을 멈춘 것만 봐도 알겠지만, 저희는 시간의 흐름을 원하는 대로 조정할 수 있습니다.

게임에 참가한 시간대로 돌아가, 본래 육체에서 일어나고 대신 지금 행하실 수 있는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을 자유롭게 조작하는 신성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뭐?

"물론, 세 번째 게임 정도로 빌 수 있는 소원은 제한적입니다. 예로 들면, 1만 포인트로는 한 '100만 달러' 정도의 현물 자산, 혹은 그에 준하는 서비스일까요."

"인류 멸종에는 턱없이 부족하군."

"예. 그렇습니다. 물론 포인트를 많이 모으면 진짜로 지구의 신처럼 군림할 수도 있겠지요. 목표가 진정한 신이 아니라면 말이에요."

"그럼 만약 내가 최종전을 승리하면."

"당연히, 여태까지 벌어둔 세계 점수, 그리고 이후로 운영하시는 세계의 점수가 모조리 신성력으로 환산됩니다. 우주의 다른 별로 뻗어나가셔도 되고, 저희 주최측의 일원이 되셔도 됩니다. 다른 세계 여럿을 경영하고 싶다면 그 역시 허락합니다."

"그렇게 중요한 요소를 지금 설명하나?"

"사실 처음 만났을 때도 물어보셨으면 대답해 드릴 수 있었는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승낙부터 하셨잖아요."

뭐. 그렇군. 내 잘못이군. 그건.

생각해보면 그렇다. 10억 분의 1로 '신' 그 외에 영혼 소멸이면 누가 참가하나? 전 차원에서 모은다고 해서 그냥 어렴풋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중도 하차 시스템이 있었던 거다.

"그럼 지금 질문하지. 만약 '하차자'가 나온다면, 그들의 세계는 어떻게 되지?"

"신이 없어진 세계는 독립적인 발전을 이어갑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세계 충돌의 대상은 될 수 있습니다."

"그 세계와 충돌하는 플레이어는 상대 플레이어가 없는 셈이니 공짜로 세계를 먹는 셈인데······. 아닌가?"

"맞습니다! 그래서 '하차'는 지정된 보호 기간의 절반까지만 신청 가능합니다."

그것만으론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는 것 같은데?

"설명이 다 안 끝났습니다. 잔류한 사람들은 남은 세계들을 두고 '경매'를 시작합니다! 각 세계당 [포인트]를 가장 높게 지불한 사람이, 다음번에 해당 세계와 충돌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원하는 세계를 살 수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만약 하차자의 세계 중 매력적인 세계를 발견했다면 아낌없이 [포인트]를 써서 다음번 충돌의 대상으로 고르시면 됩니다. 신이 없는 세계니 그 세계의 모든 것이 비인 님 마음대로! 그곳의 창조물들은 비인 님을 대신 숭배할 것입니다. 신이 사라진 문명에 당신이 새로운 신이 되어주세요."

"원래 세계 주인이 가지고 있던 '특성' 같은 건 어떻게 되지?"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특성은 각 플레이어의 고유한 영역입니다."

"그러면 내가 지불한 포인트는 누가 갖게 되는 건가?"

"당연히 세계의 본래 주인이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해 매력적인 세계를 만들고 하차할수록 하차 시 획득하는 포인트가 많겠지요. 적절한 시점에 하차하는 것도 전략입니다."

흐음······. 그러면 한 천만 포인트 쯤 모아서 지구로 돌아가 모든 인간을 멸종시키고 지구상의 문명이 건축한 모든 구조물을 파괴하고 자연을 복구시키며 내가 원하는 대로 생태계를 조작하면서 현실 지구에서 [더 리얼 월드 크리에이터]를 즐길 수도 있는 건가?

"글쎄요. 천만으로는 좀 부족할 것 같은데. 3억 정도면 충분히 가능하지요. 불로불사의 생명을 얻는 게 생각보다 포인트가 싸다는 사실을 알려드릴 수 있겠군요."

잠시만. 근데 설명을 듣다 보니 게임이 이상해졌어.

"그러니까 '하차 구간'외에는 하차가 불가능한 거지?"

"네. 거기에 더해서 추가로 설명하면, 하차 후 누가 비인 님의 세계를 사지 않아도 하차는 성공적으로 이뤄집니다. 대신 추가 포인트를 받지 못할 뿐입니다.

그리고 하차 세계들은 '우선적으로' 다른 하차 세계와 충돌하게 됩니다.

이후 그 세계도 경매의 대상이 되죠. 그리고 당연하지만 남은 하차 세계가 홀수일 경우 필연적으로 다른 주인이 있는 세계와 충돌하는데, 이건 그냥 운입니다."

"흐음······."

"그리고······. 하차 세계와 충돌해서 자기 세계의 주민이 '패배'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안심하세요. 어차피 하차 세계와 충돌한 이상, 둘 다 비인 님의 세계입니다. 그저 주력으로 키우던 종족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렇게 여기시면 되겠습니다."

"그게 흔한 일인가?"

"흠······. 해당 세계의 〈정치〉 점수가 높다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본래 신이 책임감 없다고도 할 수 있겠군요. 해당 세계를 완벽히 통제하고는 버린 셈이니까."

이미 여기까지만 설명을 들었을 뿐인데도 나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잠시만. 그럼 항복한 플레이어는 어떻게 되지?"

"상위 신이 하차할 경우, 하위 신 전원 동시 하차입니다. 원한다고 할지라도 세계를 물려받을 수 없습니다. 포인트는 세계에 기여한 만큼 받습니다."

"그럼 만약, 하차 구간 때 한 세계에 두 명 이상의 플레이어가 있는 경우는? 전쟁이 길게 끌리면 가능하잖아."

"그 경우 하차가 가능한 시점 직전에 평화협상을 맺어야 합니다. 그때는 하차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신이 하차한 게 아니라면, 세계 경매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당연히 세계에 다른 플레이어가 남은 하차자는 자신이 가진 포인트만 받고 하차하며, 세계 경매에 의한 포인트는 받을 수 없습니다."

어라?

이른바 '하차자'라는 요소 때문에 갑자기 게임의 본질이 바뀌었다.

이 게임은 최후의 신이라는 한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게임이 아니었다.

자신이 가능한 데까지 최대한 버티다가, 도중에 적정선에서 '털고' 나가는 게임이었다.

"아. 그래서 다들 항복을 받아달라고 애원했던 건가?"

"그런 거죠."

"그럼 영혼을 소멸시킨 건 잘한 거군. 만약 내가 불가피하게 하차하게 됐을 때 하위 신들이 있다면 그놈들이 내 점수를 뺏어먹었을 테니."

"아뇨? 하위 신들은 그냥 기여도만큼 받아가고, 상위 신은 총점으로 받아가는 구조라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항복을 받으라고 만든 메커니즘이에요."

"흠."

시간이 멈춘 세계. 난 진짜로 생각이 많아졌다.

첫째로 든 생각은, 생각보다 이기기 쉽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진지하게 신 자리를 두고 벌이는 경쟁자는 10억이 아니라 한 1만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10억 대 1이라면 말도 안 되는 싸움이지만, 1만 대 1이면 뭐······. 올림픽 인기 종목에서 금메달 따는 정도이려나?

둘째는, 그런 진지한 경쟁자들은 필연적으로 나중에 만날 것이라는 점이다. 그야 점수에 여유가 많은 이들이니, 다들 마음에 드는 세계를 골라서 낼름 집어삼키고 천천히 확장할 테니까. 아마도 직접 만나는 시점은 10라운드 정도일까.

하차 구간이 세 번 나오고, 남은 세계가 1,048,576개, 다시 말해 백만 개 정도로 줄었을 때.

그때 남은 세계의 신들이 내가 지금까지 세 번 만난 '이기면 좋고 져도 항복하면 그만'이라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닌 '진짜배기'들.

그리고, 천사가 지나가듯이 언급한, 요거-토소스를 자력으로 잡을 가능성이 있는 1만, 그리고 잡고 난 후에도 공멸하지 않아 나를 상대로 승리를 노려볼 수 있는 10%.

실질적으로, 그 1천 명 정도가 이 10억 명의 플레이어 중 진짜 상대.

"재밌는 관점이네요. 하긴 비인 님은 객관적으로 최상위권의 역량을 지니셨으니 그 정도가 아니면 경쟁자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거기까지 생각한 다음이었다.

"아?"

"뭐죠. 또 흉참한 생각을 한 것 같은데."

잠시만, 잠시만······.

아냐! 그냥 '게임이 이기기 쉬워졌다.'로 끝나는 얘기가 아니다!

"천사. 네가 말한 게임의 룰을 모든 플레이어가 인지하고 있었다고 봐도 되나?"

"거의 절대다수가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고, 인지하지 않았더라도 지금은 인지했겠죠."

"그렇군······! 그러면, 모든 플레이어가 이 게임의 '환경'을 이해하고 있었던 거로군?"

"어, 뭐. 그렇죠."

맙소사.

난 이 게임이 10억 명 중 딱 한 명을 가리는 토너먼트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1에서 무조건 이기는 방법만 연구했고 말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두 번 이기니 커뮤니티 기능이 열렸다.

세 번째 이기니 하차 구간의 존재가 있다. 이후로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 이 게임은 항복한 사람이 승자의 세력에 편입되고, 이후 승자의 세력에서 열심히 일하면 하차했을 때, 혹은 우승했을 때 동등하게 포인트를 얻어 퇴장하는 구조다.

아니다! 토너먼트가 아니다! 이 게임의 모든 룰이 토너먼트 서바이벌이 아니라 다른 게임임을 제시하고 있다.

여러 주체가 모여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여, 최선의 이득을 거두려는 환경.

학술적 용어로 이걸 게임 상황(Game situation)이라고 부른다.

그 순간 내 눈이 번쩍 뜨였다!

'왜' 하필 정치가도 기업가도 학자도 아니고 굳이 '게이머'가 신을 결정하는 대회의 참가권을 얻었는가?

'왜' 굳이 10억 명이나 되는 참가자가 있는가?

'왜' 항복했을 때 사실상 아무 패널티도 없고 항복을 받아주지 않을 때 아무 이득도 없는가?

왜냐면, 그래야 다수의 표본과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대결 환경이 펼쳐져, '게임 이론'이 적용되는 환경이 형성되니까!

그러자, 천사가 웃었다.

"오. 아무 힌트도 없이 자력으로 여기까지 도달하시다니. 비인 님께서는 정말 유능한 플레이어시군요. 거기까지 도달한 것만으로도 상위 1%에는 듭니다."

그리고 게임 이론, 게임 상황이 벌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환경이 있다.

생태계!

각기 다르게 진화한 생명체들이 각자 다른 전략으로 승부에 나서, 가장 성공적인 전략만 살아남고 나머지가 도태되는 환경!

내가 게임을 시작했을 때부터 문명을 포기하고 구축해 왔던 환경!

"사실 게임 상황이라는 건 생태계 말고도 문명과 국가 간의 전략, 외교 등도 포함되는 건데 말이죠······. 저희 의도도 그거고요."

10억 개의 생명체(세계)가 서로 경쟁해서 가장 많은 이득을 얻으려 노력하는 전략 대 전략의 경쟁이 바로 이 게임의 본질이었다!

그러면 나도 전략을 다르게 잡아야 한다. 토너먼트에서 상대를 꺾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패배 후 퇴장'이 게임의 최고 전략인 이상.

나는 이제부터 상대 세계와의 1:1 승부에서 이기는 걸 목표로 삼지 않는다.

"오. 그러면 이제부터 비인 님도 잘 지는 것을 목표로 삼나요?"

아. 니.

게임에서 '승리'가 아니라 '좋은 패배' 전략을 세운 플레이어들을 등쳐먹는 가장 악랄하고 지독한 포식자가 되어, 대적하는 모든 자들의 영혼을 분쇄하고 그들의 세계를 파멸시키며 내 디저트 군단이 온누리를 제패하게끔 만들겠다.

"솔직히 그럴 줄 알았어요."

14화. 가장 악랄하고 지독한 포식자

멈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난 다급히 말했다.

"세계 충돌 승리 보상부터 줘."

"참고로 하차 구간에서 하차 대신 전진한 플레이어들을 위해, 하차 구간 직후에는 포인트가 2배가 됩니다. 재밌죠?"

천사는 세 장의 특성 카드를 보여주었다. 내 세계에 꼭 필요한 세 장의 카드였다.

『상위종: 일반적인 창조물이 6레벨이 아니라 5레벨에 〈우수〉 등급 특성을 택할 수 있습니다.』

『넥타르 샘 강화: 넥타르 샘이 대폭 성장합니다.』

『전투 숙련: 창조물들이 〈전투〉분야의 경험치를 더 얻습니다.』

"상위종을 택하지."

다른 것도 너무나도 매력적이었지만, 내 생태계에서 기본 스펙 자체가 올라가는 것보다 좋은 건 없다.

우수한 특성을 1레벨이라도 당기는 걸로 생태계에서 경쟁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난 재빨리 사막의 환경을 정비했다. 새로 얻은 사막보다는 지금 디저트 사막의 생명체, 특히 육식푸딩들을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

"뭘 하는 거예요?"

"앞서 말한 게임 이론의 응용을 위한 준비. 원래는 충돌을 한두 번은 더 겪은 다음 천천히 준비하려고 했는데 환경이 이렇다면 지금 당장 준비해야해."

게임 이론은 게임을 잘하는 법에 대한 이론이 아니다.

수학, 과학, 사회학, 생물학, 정치학, 경제학. 상호 의존적이고 이성적인 의사결정으로 이득과 손해를 볼 수 있는 모든 환경에 대해 적용할 수 있는 논리 총체를 말한다.

한마디로 어떠한 환경이 있고, 내가 어떠한 선택지를 고를 수 있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이득이 될 것인가?

이것을 설명한 게 게임 이론이다. 환경마다 게임의 조건, 룰, 이득과 손해의 균형이 전부 다르기 때문에, 주어진 환경에 따라 다른 이론을 구축해야 한다.

난 여태까지 그저 1:1 서바이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내가 너무 성급하게 받아들인 탓에 조건을 몰라서 생긴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조건을 알았다. 나를 제외한 모든 플레이어는 사실 이 게임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이성적인 판단을 할 것이다.

난 이제부터 그 이성적인 판단을 악독하게 착취하는 가장 악랄하고 지독한 포식자가 된다.

"그걸 어떻게 하는데요?"

일단 '포식자'라는 게 뭔지 보자.

내 디저트 사막을 예로 들어볼까.

최초에는 포식자가 전혀 없었다. 그저 햇볕과 광물, 넥타르를 먹기만 하는 젤리들의 천국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최고의 전략은 '많이 먹고 빨리 성장하고 많이 번식하기'다.

그러니까 포식자가 없는 환경에서 젤리들은 미친듯이 번성하며 넥타르 샘을 레벨 업 시켰지.

그리고 젤리들은 남들이 안 먹는 광물질을 섭취하면서 생태계의 빈자리를 채웠고, 그때도 여전히 최고 전략은 많먹빨성많번이었다.

내가 푸딩들을 등장시키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얘기다.

푸딩은 젤리를 먹는 포식자. 많이 먹고 빨리 성장하고 많이 번식하는 전략은 여전히 유효했지만, 더 많이 잡아먹히는 고로 젤리들은 다른 전략을 발달시켜야만 했다. 커지기, 도망치기, 파고들기, 껍질, 독 등등······.

상대의 전략을 카운터치면서 일방적인 이득을 취하고, '다른 전략'을 강요하는 존재가 말하자면 '포식자'다.

생태계는 그런 전략들의 대결의 무한한 반복이다. 어떤 놈이 빨라지면 포식자는 더 빨라진다. 어떤 놈이 단단해지면 포식자는 더 힘세진다. 어떤 놈이 독을 품으면 포식자는 내장을 튼튼하게 만든다.

그러다 보면 포식자는 특정 먹이를 사냥하는데만 특화되고, 피식자는 어떤 포식자를 방어하는데만 특화된다. 다른 포식자가 나와서 또 카운터치고. 그러면 또 다른 전략을 짜야 한다.

대응하지 못하면 멸종하고, 대응하는데 성공하면 번성한다.

"그래서요?"

그렇지만 생태계와 게임 상황은 대단히 다른 게 있다.

뭐냐면, 생태계는 생물 본인조차도 자기가 어떤 돌연변이가 생겨서 어떤 전략을 만들지 모르지만, 게임 상황에서는 플레이어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완벽히, 혹은 일부는 알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이번 게임에서는 나 빼고는 아마도 거의 다 이 조건을 알고 있었을 거다.

거기서부터 추론한다.

승자는 단 한 명이고, 절대다수는 도중에 탈락하는 이 게임의 최고의 전략이 뭘까?

"앞서 말했듯이, '좋은 패배'겠죠."

"정답. 그럼 좋은 패배는 뭐냐?"

내 세 번째 상대가 정말 전형적으로 '좋은 패배'를 노리는 상대였다.

아마 이 게임의 절대다수는 세 번째 플레이어들과 성향이 비슷할 거다. 일단 서로 협력하고, 나중에 서로 배신하든가, 아니면 끝까지 협력해서 도중에 만족하는 시점에서 하차하든가.

정 상대가 강경하면 항복하거나 협상해서 부하로 들어가는 전략.

이게 이 게임 최고의 전략이다.

"호오······."

그런 점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상대는 어떤 의미에선 조금 이레귤러였다.

그놈들은 '좋은 패배'를 노리는 상대를 카운터치는 전략을 준비해온 녀석들이었지. 왜냐면 그 둘은 지금 생각해 보면 '군사력'이 좀 강했다. 세 번째 플레이어들이 군사력이 생각보다도 많이 부족했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특이한 거다.

왜냐? '좋은 패배'를 거두려면 상대에게 자기가 매력적으로 보여야 한다.

매력적이려면? 군사력을 키우면 안 된다. 군사력이 높은 놈은 너무 위험해보여.

서로 군사력이 높으면 싸워서 공멸하고 군사력이 둘 다 낮아야 사이좋게 협력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군사력은 대충 상대를 막을 수 있을 정도로만 키우고 내정이나 하면서 〈문화〉 〈산업〉 〈기술〉 점수나 올리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면 서로를 완벽하게 끝장낼 정도의 전력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협력하게 된다.

"그럴듯하네요."

그렇지만 첫 번째 플레이어인 오스 뭐시기는 그 틈을 노려서 아예 작정하고 군사력을 키웠다. 어쭙잖게 내정하는 놈이 있었다면 박살났겠지.

두 번째 플레이어인 테이몽은 좀 다르다. 그 녀석도 아마 오스 뭐시기랑 비슷한 전략을 준비했을 거다.

근데? 하필 테이몽의 첫 상대도 똑같았던 거지. 그래서 서로 싸우다가 겨우 이겼고, 비실비실한 상태로 내 디저트 군단을 맞이해야 했다.

그래서 나도 좀 헷갈렸다. 저 전략이 정상인 줄 알았어. 사실상 직간접적으로 세 번 연속으로 1:1에 목숨 건 플레이어를 만났으니까······.

하지만, 사실은 협력 전략이 이 게임에선 대체로 우수하다. 상대를 파멸시켜서 쥐어짜겠다는 전략은 약간 미묘하지. 서로 군사 전략이면 공멸해버리니까.

"지구에선 유명한 게임 이론이죠?"

그렇지. 그게 가장 유명하지.

둘 다 협력하면 3점씩 얻는다.

한 쪽이 협력, 한 쪽이 배신하면 배신한 쪽만 5점 얻는다.

둘 다 배신하면 둘 다 –1점씩 얻는다.

이 환경에서 게임을 반복적으로 수백 판 정도 한다고 했을 때 위의 상황에서 가장 이상적인 전략은 팃포탯(Tit-for-Tat).

처음에 협력. 그리고 이후에는 상대가 이전 차례에 했던 행동을 무한히 반복할 뿐인 전략.

양측이 무한히 협력하면 무한히 득점하고, 상대가 때리면 보복을, 상대가 화해의 손길을 내밀면 다시 화해할 수 있는 전략.

그런 점에서 나는 아예 '상대가 배신하든 협력하든 관계없이 5점을 얻는다'같은 전략을 들고 온 거다.

말하자면 포식자도 피식자도 사이좋게 잡아먹는 최상위 포식자가 된 거지.

상대가 어쭙잖게 내정했으면 내 디저트 군단이 적의 농토를 초토화시켰을 거고, 아예 서로 공격할 수 없는 데면데면한 관계였으면 상대도 날 공격 못하니 거기서 거기.

상대가 적극적인 공격이면 오히려 말라 죽는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 환경에서 가장 이상적인 전략을 갖고 온 거네요."

그렇지. 그리고 난 사실 이걸 기반으로 좀 더 천천히, 안정적으로 승부하려고 했다. 왜냐면 난 1:1 서바이벌인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환경이 패배자에게 대단히 너그러운, 다시 말해 플레이어들이 '전혀' 탈락을 상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대에게 가혹하게 대하면 괜히 졌을 때 영혼 소멸당할까 봐 사리는 비공격적인 환경이라는 걸 알았으니······.

그걸 노린다.

"구체적으로는요?"

그걸 시도하려면 지금 내 생태계를 확실히 파악해야 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전략 중 실제로 가능한 게 무엇인지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생태계는 지금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넥타르 오아시스. 담수와 넥타르 층이 구분되어 있고, 모든 생명의 근원이자 내 생태계의 힘 그 자체다.

늘어난 생물들 덕에 표면이나 안이나 반짝반짝 유리질로 반사되는 것이 매우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지성체가 없어서 문화 점수는 올라가지 않는다.

"하아."

넥타르 오아시스 내부에서 서식하는 생물들은 넥타르젤리, 토핑. 그리고 그것에 기반한 수초들과 산호초. 물고기. 그 외에 온갖 종류의 저서생물과 수중생물로 진화한 젤리들.

몇 개는 도태됐고 몇 개는 발전했다. 한 때 오아시스를 제패했던 아노말로카리푸딩은 기묘하게도 그의 성공을 가져다준 눈이 퇴화해버렸다.

"어라. 어째서 눈이 퇴화하죠?"

"간단해. 지금 수중의 토핑들이 너무나도 많은 빛을 내고 있기 때문이지."

"아!"

원시적인 눈은 명암밖에 구분하지 못한다.

아니 뭐. 그 정도도 엄청나긴 하다. 명암밖에 구분하지 못하는 눈조차도 있으면 일단 좋다. 먹이를 쉽게 찾을 수 있으니까.

그 정도의 눈은 심지어 지구의 불가사리조차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이 불가사리 다리라고 생각하는 다섯 갈래 가지 끝에 그런 원시적인 눈, 안점이 있을 정도로 명암을 파악하는 기능은 꽤 중요하다.

그런데, 호수 안이 물과 마력을 먹고 빛과 열을 내뱉는 토핑들 때문에 그냥 항상 밝은 거다······.

그러면 명암을 구분하는 기능이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러니까 명암 정도만 구분하는 연약한 눈이 더 발전하는 대신 그냥 퇴화해버린 거다. 예상치 못한 일이군.

하지만 대신에 거꾸로 눈이 생겨버린 생명체도 있었다.

"저거 해파리인가요?"

이름이 붙여지지 않고 스스로 진화한 생명체지만, 아마 해파리라고 불러야겠지. 여과섭식을 하는 젤리질 생명체니까.

그놈은 나름대로 헤엄을 칠 줄 알았고, 해파리랑은 달리 입도 있었다. 항문을 대신해서 몸에 구멍에 여러 개 있었는데, 입을 크게 벌린 다음 닫고, 입을 조여서 뒤에 있는 구멍으로 물을 내뿜으며 호흡하고 유기물을 걸러 먹으며 동시에 물을 분사해서 헤엄친다.

이놈은 오히려 빛을 내뿜는 토핑들을 먹이로 삼다보니 빛을 쫓아다니게 됐다. 그러니까 명암을 구분하는 눈이 생겨버렸다. 썬토핑들은 이 해파리에게 먹혀서 저절로 빛나니 해파리들은 죄다 빛나는 모습이었다.

넥타르 오아시스는 지금 대단히 역동적이면서 안정적이다.

역동적이라는 건 생존경쟁이 무한히 붙고 있다는 점에서 역동적이고, 안정적이라는 건 그러면서도 생태계 전체를 다 뒤엎어버리는 미친 전략이 나오진 않았다는 점에서 안정적이다.

압호주스가 관리를 잘해주고 있으니 이곳은 됐고. 담수 지역을 좀 볼까.

담수 지역은 흔히 생각하는 지구의 습지와 비슷했다.

테이몽 강과 오스왈드 오아시스 사이의 습지는 젤리들에 의해 점차 파먹혀서 언젠가 움직임이 가속되면 강과 호수가 하나로 합쳐질 지경으로 보였는데, 그 또한 기묘한 일이다.

그 사이 공간에 습지 생물이 워낙 많이 산다는 걸 생각하면 수몰로 인한 멸종 사태를 유발할 것만 같군······.

그러고 보니, 갑자기 또 이런 의문이 든다.

저 테이몽 강······. 도대체 어떻게 흐르는 거지? 만약 호수와 강이 합쳐져버리면 그때도 '흐름'은 남아 있나? 그러면 물리법칙을 어기고 저절로 흐르는 거잖아.

"조사해보시면 바로 답이 나올 거예요."

그래서 조사해봤다.

"강 LV.2: "지상"에서 〈물〉 자원의 〈흐름〉을 생성하는 지형입니다. 세계가 넓어질수록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많이 퍼내면 줄어들기도 합니다."

?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강 LV.2: "지상"에서 〈물〉 자원의 〈흐름〉을 생성하는 지형입니다. 세계가 넓어질수록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많이 퍼내면 줄어들기도 합니다.

세부 설명: "지상"에서 〈물〉 자원의 흐름을 생성하는 지형입니다. 신이라고 불렸던 존재의 파편으로, 그 신체가 조각난 지금도 체액의 흐름을 이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

난 이전에 봤던 "대수층"을 다시 살폈다.

"대수층 LV.3: "지하"에서 〈물〉 자원을 저장하는 지형입니다. 세계 전체에서 쏟아지는 비, 혹은 〈물〉 속성 마력을 저장합니다. 세계가 넓어질수록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많이 퍼내면 줄어들기도 합니다.

세부 설명: "지하"에서 〈물〉 자원을 저장하는 지형입니다. 세계 전체에서 쏟아지는 비, 혹은 〈물〉 속성 마력을 저장합니다. 신이라고 불렸던 존재의 파편으로, 그 신체가 조각난 지금도 수분을 저장하고 있습니다."

이게 뭐야.

"뭐긴요. 10억 개의 세계의 정체죠. 전부 신이라고 불렸던 존재의 신체 일부에요. 지구에서도 세상을 만든 거인 신화 같은 거 있잖아요?"

"그러면 특정 지형을 가진 상대끼리 매칭이 되는 건······."

"본래 신의 육체의 일부끼리 달라붙는 거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최종 승자가 세계를 다 합친다고 그 신이 부활하거나 하는 경우 같은 건 없으니까."

······.

"아니아니, 속였다는 듯한 표정 짓지 마세요. 애초에 넥타르 샘 말고도 강이나 호수에 [요정]이 깃들 수 있는 것도 다 그런 이유니까요. 뭐, 한마디로, 이 세계의 모든 건 신의 파편 내지 신의 힘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뭐. 그렇군······. 따지고 보면 판타지 세계니 그렇게 이상한 것까진 아니야. 오히려 그다음을 생각해야겠군.

이러한 사실을 내 생태계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15화. 가장 악랄하고 지독한 포식자 2

좋아. 이해했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내가 받은 지형, 다시 말해 신의 파편은 "넥타르 샘"이다.

내가 어떤 식으로 훼손하든 마찬가지다. 요컨대 누군가가 넥타르 샘을 콘크리트 같은 걸로 메워도 넥타르 샘이다. 단지 0레벨일 뿐.

그러니까 일조량이 줄어들지 않는다. 밤이 되면 추워진다.

아니 애초에 낮과 밤이 딱딱 맞는 이유도 그거다.

이곳 지형과 하늘, 지하에 이곳은 이런 곳이라고 우주적 법칙이든 마법적 법칙으로든 박혀 있는 거다.

설령 잔해도 안 남게 부숴도 하늘도 그대로고 대지 전체를 파헤칠 수도 없으니 이곳은 바위가 있든 없든 위가 습지든 호수든 넥타르 샘이다.

자 그러면 여기서 "강"의 경우를 예시로 들어보자. 요컨대 내가 젤리들을 동원해서 강을 호수랑 완전히 합쳐버렸다.

그래도 그곳은 "강"이다. 왜? "강"이라고 신의 파편이 박혀 있으니까.

그러니까 호수랑 완전히 합쳐져 있어도 "강"에 존재하는 물을 흐르게 만드는 힘은 여전히 남아 있을 거다. 아니, 어쩌면 0레벨 미만이 되어서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겠군.

"표기상으론 0레벨일 것이고, 작동합니다. 아주 미약한 힘이겠지만."

친절한 설명 고맙다. 그러면 여기서 더 나아가자.

나는 "강"에 신성력을 투입해서 강의 흐름을 뒤틀거나 구불구불하게 하거나, 심지어는 호수랑 연결할 수도 있었다.

왜냐? 신성력이 "강"에 있는 신의 파편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거대한 신성력을 투입한다면 강을 더 빠르게 흐르게 하거나, 넓이를 넓히거나 하는 식으로 조정도 가능하겠지. 그러면 "강"의 레벨이 올라갈 거다.

"정확히 이해하셨습니다."

거꾸로 나는 내 젤리들을 완벽히 조작해서 세계를 한 바퀴 도는 운하를 건설한다고 한들, 그곳은 절대 흐르지 않는다.

왜? 그곳에는 신의 파편이 없으니까. 나는 신성력으로 신의 파편을 만들 수는 없다. 내가 넥타르 샘을 2개째 만들지 못하는 것처럼. 갑자기 이곳에 초원을 생성할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지형을 조정하거나 비틀 수는 있는 것이다.

"그 역시 정확합니다. 사실 넥타르 샘의 정상적인 성장은 마력을 대량으로 공급하는 것 말고도 신성력을 대량으로 투입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야 게임을 해봤으니까 알고 있지. 생물학적인 방법으로 가능하니까 안 했을 뿐.

그러면 보자. 나는 넥타르 오아시스를 넓혀서 언젠가 바다로 만들면 자연스럽게 담수가 나오는 대수층은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설령 땅을 다 깎아내어서 대수층이라는 지형 자체가 있었는지 모르게 만들어도 거기는 담수가 나올 거다. 땅을 다 덮어도 넥타르 샘이 넥타르를 생산할 것처럼 말이다.

"정확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방금 이긴 플레이어들의 지형은, 대체 어떤 신의 파편이 깃들어 있을까?

그리고 또 하나.

〈생명〉이라는 건 뭘까? 신성력으로 생명을 창조하는 것, 생각보다 자원이 대단히 적게 들어가는데.

"그 둘에 대한 답변 모두 상대 지형을 살피는 것으로 설명해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래서 확인해 보았다. 일단 햄스터들이 대거 살면서 문명을 건설했던 선인장 숲부터다.

"사막 숲 LV.4: 선인장과 덤불 등이 자라는 "사막" 지형. 생명의 보고로 지하에 미약하게 〈물〉을 저장하고 있습니다.

세부 설명: 수많은 벌레, 설치류, 파충류, 그 외의 다양한 생물들이 이곳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신이라 불리웠던 존재의 파편이 깃든 곳으로 플레이어 '다린 에우'에 의해 서식하는 생물들에 〈진화〉가 이루어져 다소 독립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군. '원래부터 있던 생물' 같은 경우에는 〈생명〉과 "지형" 둘 다 신의 파편에 대응되는 존재인가?

"그렇습니다. 플레이어가 직접 창조한 생물, 요컨대 비인 님이 만들어낸 것은 신성력으로 창조했기 때문에 일부 관련은 있습니다."

진화가 엄청나게 빠른 것도, 어느 세계든 대충 생명체가 숨 쉴 수 있는 공기와 적절한 압력이 있고 아예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른 생물이 없는 것 역시 난 마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신성력의 영향일지도 모르겠군.

그럼 일단 '통상적인 생물학 원리를 완전히 벗어난 독자적 생물' 같은 건 불가능할 거라고 추론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나는 젤리들을 소화하기 어렵게 만들 수는 있지만 소화할 수 없게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맞습니다. 이곳은 다른 물리법칙이 작동하긴 해도, 단일한 법칙이 존재하죠. 생물의 형태는 '그렇게까지'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나마 유기물과 무기물을 조합해서 만든 디저트 군단은 허용 범위 내지만, 아예 물과 고기를 먹고 신체를 절대 섭취할 수 없는 구조의 유기물로 만드는 등은 불가능합니다."

좀 아쉽군. 노력해서 그런 생명체를 만들어볼까 생각도 했는데. 결국 언젠가는 디저트 군단을 먹을 수 있는 생명체를 적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건 좀 나중에 생각하고, 이 발상을 좀 더 추진해보면, 〈생명〉이라는 것의 형태가 어느 정도 신의 파편에 기록되어 있다는 거다.

그러면 요컨대 내가 저기 "사막 숲"에 신성력을 투입하면 사막의 식물들을 대거 자라게 할 수도 있는 건가?

"어느 정도는요. 하지만 식물의 생장에 필요한 자원은 따로 준비하셔야 합니다."

흐음. 그렇군. 그러면 그럴 필요는 없겠어.

"네?"

사막 숲의 진화, 다시 말해 레벨 업은 생물학적인 메커니즘과 마법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니까.

"하긴. 그 분야는 전문가시죠. 기대합니다. 어떤 환경으로 만드실 거죠?"

일단 다른 환경을 둘러보자. 상대도 2번째 게임을 겪었기 때문에 꽤 여러 환경이 존재하고 있다.

간단히 생각해도 신의 파편이 4개는 있을 것이다.(나의 경우는 테이몽 강이 2레벨인 걸로 보아 테이몽의 상대의 신의 파편도 강이었나보다)

"골짜기"와 "모래 사막" "자갈 사막". 방금 본 "사막 숲"에 더해서 이렇게 네 개인가.

골짜기와 사막 숲은 햄스터들의 영역이었다. 그곳에는 문명의 흔적이 다분했고, 선인장들과 버섯 등을 재배하는 것이 느껴졌다.

지하는 축축하군. 골짜기 밑에 물이 흐르나보다. 아마도 골짜기 자체가, 옛날에는 물이 흘렀다가 말라버린 지형 아닐까······. 이곳은 물을 들여놓으면 다른 호수를 만들 수도 있겠군.

그리고 두 개의 사막은, 좀 골때리지만 진짜로 땡사막이었다. 문명의 흔적이 남아 있긴 한데, 돌밖에 없다.

뭔가 싶어서 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여기 마력 농도, 다시 말해 마력압이 엄청 높다고 한다. 특정 원소도 많이 모이고. 그래서 마물들과 정령 생명체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너무 마음에 안 들어. 이런 마법만 존재하는 생태계는 아마추어 생태학도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불가해하고 납득하기 힘든 곳이다.

"그니까 다 같은 마법이 아니라······. 정령과 자연 마력과의 관계는······."

됐어······. 어차피 들어도 이해도 못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설정노트를 열심히 짠 오타쿠의 노력은 가상하지만, 그걸 누가 읽냐고.

"아, 아니 오타쿠의 설정노트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는 명백히 작동하는 현실입니다."

알겠어······. 그들에겐 미안하지만 너희들은 내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공간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하지만 그래도 나도 아는 건 있다. 마력도 자원이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꽤 인상적인 자원이지. 못하는 게 없는, 그냥 사기적인 자원.

나는 아직 내 세계와 융합하지 않은 상대 세계를 잘 편집해서 넥타르 오아시스 '옆'에 마력 사막이 붙어 있게끔 조정했다.

이게 세계가 모든 공간이 구니까 가능한 거다. 분명히 저번 게임 전까지만 해도 내 넥타르 오아시스 옆에는 테이몽 강과 사막이 감싸고 있었지만, 그곳의 공간을 찢어서? 혹은 뜯어서? 새로 생긴 세계를 이어붙일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세계를 완전히 갈기갈기 찢는 편집이 불가능한 것도 세계의 단위가 '신의 파편'이기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그렇군. 이해했어. 아무튼 그래서 계속 확장하다가 강과 맞닿을 것 같았던 내 넥타르 오아시스는 강과 오아시스 사이에 사막과 선인장 숲 지대가 생겼다.

저 모래 사막은 마력과 모래, 자갈을 파먹은 넥타르 오아시스에게 먹힐 것이고, 골짜기는 구형의 세계 구조를 볼 때 잘 편집하면 강물이 안에 들어갈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힘내세요."

그래서 서로 접히지 않는 정사각형 같은 세계를 어떻게 잘 비틀고 하다보니 다시 완벽한 평면으로 편집하는데 성공했다. 사실은 구지만, 인간에게는 너무 힘든 공간적 이해로군.

"신성력이 더 높아지면 플레이어의 능력치 자체도 상승해서 아마 그 공간을 이해하기 쉬워질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러면 이제 다음 문제인데, 이제 이곳의 생태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문제다.

일단 사막과 골짜기는 언젠가는 넥타르 호수에 잠겨버릴 테니까 넘어간다.

문제는 선인장 숲이다. 어떻게 하면 이 선인장 숲을 내 디저트 군단과 조화되게 할 수 있을까?

상대 세계에서 노예 종족이었던 개미 종족이 이 숲의 원주민이었던 것 같다. 문명의 흔적이 농후한데, 선인장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물도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농사를 지었냐는 거다. 아무리 판타지라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잖아. 선인장이 틀림없이 물 먹고 사는 생물인데.

그 해답은 잠시 뒤에 선인장 숲에 구름이 생기더니 비가 내리면서 알 수 있었다.

비가 내리자 사막에서 엄청난 속도로 못 보던 식물의 싹이 트더니 열매를 맺고 씨앗을 뿌리고 잠시 뒤 다 죽어버린 거다.

그리고 그렇게 죽은 꽃과 풀들을 원래부터 자생하던 이곳의 초식동물들이 와서 먹고, 열매를 먹고 움직이며 근처에서 똥을 싸고, 배설물에는 씨앗이 뿜어져 나와서 넓게 퍼진다······.

판타지 요소가 들어 있다고 너무 어렵게 생각했군. 전형적인 사막 식물의 생태다. 사막이라고 해도 비가 아예 안 오는 건 아니다.

대신 아주 가끔 비가 내린다. 그때 재빨리 물을 들이마시고 성장하고 씨앗을 뿌려서 번식한다. 씨앗은 비가 올 때까지 몇 년이고 버틸 수 있게 되어 있다.

"재밌군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디저트 군단과 융합시키죠?"

들닭을 가축화했던 것처럼 한다.

"닭?"

원래 닭이라는 건 동남아 원산의 새로, 정글에서 살던 새였다. 원래 1년에 한 번 정도 정글에서 뭐였더라. 아무튼 열매가 잔뜩 열리면 그때 잔뜩 먹고 알을 왕창 낳던 새였지.

그런데 인간이 이런 생각을 한 거다. '이 새는 먹을 게 많이 있으면 알을 낳는구나. 그러면 매일매일 엄청나게 많이 먹이면 어떻게 될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닭의 생체 리듬은 먹이가 풍족한 환경에서 계속해서 알을 낳게 됐고, 오늘날 매일 알을 한 개씩 낳는 생체기계로 개량되었지.

"오우. 좀 잔인한 것 같기도."

저 사막의 풀들도 마찬가지로 한다. 저놈들이 비가 올 때 빠르게 왕창 번식하고 죽어버리는 생태를 가지고 있다면, 저놈들이 씨앗을 뿌리고 버틸 때 바로 물을 뿌린다. 그리고 초식동물들을 먹이고, 다시 씨앗을 뿌리면 또 물을 뿌린다.

계속해서 수분이 공급되면 저놈들은 미친듯이 사막의 양분을 빨아들이면서 증식할 것이고, 이곳에 원래 자생하는 저 낙타 비슷한 거대한 초식동물들은 배터지게 먹고 성장할 거다.

"흠······. 좋은 발상이긴 한데 어떻게 물을 뿌리는데요?"

"요거-토소스의 마법은 장식이냐. 그놈을 이 때 안 쓰면 언제 써먹는데. 넥타르 샘에서 물 퍼다가 뿌리면 돼."

"아. 그냥 마법이군요······. 이럴 때는 잘만 활용하시네요."

그러면 충분히 수가 불어났을 때 사막에 적응하게끔 개조한 육식푸딩들을 투입한다.

육식푸딩들은 과잉 번성한 초식동물들을 사냥해서 그 고기를 먹을 거고, 사막에서 살다가 죽으면 다시 자라날 식물의 양분이 될 거다. 이 과정을 반복한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푸딩들이 계속 선인장 숲 지대에 가서 죽어주니까 숲 전체의 영양분이 넘쳐나게 되지.

젤리들은 그곳의 광물질을 먹으면서 모래들을 치워줄 거고, 대신 씨앗은 남길 거다. 애초에 여기 씨앗이 꽤 튼튼해서 이건 별도의 진화가 필요 없겠군.

"그러면 초식동물들은 계속 죽을 거 아니에요?"

"그것도 푸딩들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게 계속 진화시켜야지. 아마 인위적인 조작이 필요할 거다. 큰 덩치의 생물은 세대교체가 느려.

그리고 저 큰 덩치는 사막의 더위와 추위, 그리고 식물이 적은 환경을 견디기 위해 에너지 효율을 높이려고 갖추게 된 거니까 좀 더 작게 만들 필요도 있겠군.

대부분의 생명체들은 저렇게 크지 않은 것 같으니."

"뭐. 발상은 알겠는데요. 우리 처음 얘기로 돌아가 볼까요? 어떻게 평화스럽게 성장하는 문명인들을 약탈하는 가장 악랄하고 지독한 포식자가 될 수 있죠?"

간단하다. 저기 선인장 숲의 환경을 깨달았으니, 저곳을 사냥터로 삼아서 그냥 가장 악랄하고 지독한 포식자를 만든다.

"?"

한번 지켜봐라. 진화의 기적에 눈이 번쩍 뜨이게 될 테니까.

일단, 낙타먹는푸딩으로 진화시킬 후보를 물색해볼까?

그놈이 더 나아가 사람잡는푸딩이 될 것이다.

16화. 가장 악랄하고 지독한 포식자 3

푸딩. 내 생태계에 존재하는 포식자들을 일컫는다.

느리고 큰 젤리를 잡아먹는 거대한 푸딩, 그리고 작고 단단한 껍질을 지닌 젤리를 잡아먹는 힘 세고 턱 튼튼한 푸딩.

이런 놈들이 주류지만, 난 의도적으로 생존에 별로 유리하지 않은 세 번째 종류의 푸딩을 키웠다.

기동형 푸딩. 몸을 둥글게 말아서 통통 튀고 구르거나, 아니면 탄력 있는 다리로 빠르게 달려서 빠른 젤리나 다른 푸딩을 포획, 잡아먹는 육식성 푸딩류다.

이놈들은 고기먹는푸딩을 비롯한 육식성 푸딩들 중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크기는 대체로 직경 60센티 이상이며, 몸무게는 15kg. 비늘도 없이 빠르게(시속 12km) 달리는 데 특화된 놈이랑, 비늘이 있고 조금 느리게 구르는 놈. 이렇게 두 종류가 있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그렇게 강한 생명체는 아니다. 지구의 평균적인 성인 남성이면 몽둥이는커녕 발차기만으로도 죽일 수 있다.

가시가 난 놈들은 몽둥이로 패면 된다. 무슨 판타지 슬라임처럼 으깨져도 재생하는 재생력 같은 거 없거든.

그렇지만, 이놈들은 내 생태계에서 그나마 존재하는 빠른 포식자다. 이놈들은 디저트 군단화 시킨 외부의 파충류나 조류도 잡아먹을 정도로 민첩하고, 큰 초식성 포유류나 가축들을 찢어발길 정도로 강인하다.

아직 사회성이라는 개념은 모르지만, 일단 무리지어 다니면서 우르르 몰려가 고기를 왕창 뜯는 정도로는 진화했다.

이놈들을 이용한다.

선인장 숲에는 선인장과 빠르게 자라나는 풀을 뜯어먹는 거대한 낙타류와, 조금 더 작지만, 그래도 호모 사피엔스보다는 큰 작은 낙타가 있다.

"아니 왜 그렇게 복잡하게 말해요. 낙타들이 있다고 해요."

"둘이 명백히 다른 종이잖아!"

"아 네······. 그래도 그냥 낙타류니까 낙타라고 부르세요."

원래는 햄스터와 개미도 있었던 것 같지만 그 두 문명 종족이 사라진 지금 살판났다. 요거-토소스의 마법으로 끊임없이 쏟아지는 넥타르 비.

그리고 선인장 숲에 가까이 붙은 테이몽 강과 습지에 있는 식물들을 처먹으면서 어마어마하게 번성하고 있다.

문제는, 저놈들 체급이 꽤 크고 날래서 기존의 육식성 푸딩으론 잡을 수가 없다.

디저트 군단화 시킨 젤리먹악어는 물고기를 잡아먹는데 특화된 놈들이라서 저 거대한 초식동물들을 잡아먹을 수 없지. 

그러니 여기서 육식푸딩들을 투입해서 상황을 지켜보자.

"좋아요. 어떻게 될까요?"

관측 결과 1. 낙타는 육식푸딩들의 맹렬한 돌진(시속 12km)를 유유히 걸어서 따돌렸다. 지금 육식푸딩들은 절대 낙타의 포식자가 되지 못한다.

육식푸딩들에게 더 막강한 근육을 주고 광물질 성분을 줄여서 속도를 빠르게 해봤다.

관측 결과 2. 낙타들은 육식푸딩들의 맹렬한 돌진(시속 45km)를 간단히 걷어차는 걸로 으깨버렸다. 육식푸딩은 낙타를 사냥하지 못했다.

육식푸딩들에게 광물질 갑각을 돌려주고 더 크기를 줄여보았다.

관측 결과 3. 육식푸딩들은 빠르게 이동했지만, 에너지 소모가 너무 심해 낙타들을 쫓다가 에너지 고갈로 퍼졌다.

육식푸딩들에게 조금 다른 방향의 개선이 필요할 것 같군······.

"어떻게 하나요?"

방치해본다.

"엥?"

이 정도로 개량된 육식푸딩들은 이미 통통 튀면서 보이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들이받고 고기를 뜯어먹는 포식자가 됐다.

이놈들에게 살아남기 위해서 피식자들에게도 진화가 이뤄지겠지. 신성력으로 시간을 가속해서 이 생명체들의 생존 경쟁이 어떻게 되나 지켜본다.

그래서 커뮤니티에서 좀 발 빠른 생물도 사왔다. 습지에서 살 수 있는 설치류······. 다시 말해 카피바라나 비버 비슷한, 크고 빠르고 헤엄칠 줄도 아는 생물들이다.

내버려두니 육식푸딩들은 비정상적으로 빠른 카비바라들에게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그 설치류들은 디저트 군단화시킨 악어들이나 심지어 거대 개구리가 의외로 잘 잡아먹었다.

푸딩들은 현 시점에서 카피바라 같이 빠른 생명체나, 아니면 낙타 같은 거대한 생명체에게 전혀 대응하지 못한다.

결국 이놈들은 체급을 높여서 물속으로 들어갔고, 젤리들, 물고기, 아니면 악어와 개구리를 잡아먹는 식으로 수생형 포식자로 거듭났다. 푸딩들은 체격을 키우거나 줄이는 등의 진화는 아주 쉽게 가능한 것 같다.

아마도 신체 구조가 단순하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신체 크기에 따른 내장 기관의 확장과 축소가 비교적 자유롭게 이뤄지는 탓일까.

난 계속 지켜보았다. 육상에 남은 육식푸딩들은 경쟁에서 점차 밀려났지만, 가끔 사냥에 성공해서 번식에 성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놈들은 생존해서 자기 유전자를 뿌린다. 그러자 푸딩들의 진화 경향성은 꽤 명백해졌다.

나는 낙타를 사냥하려면 직경 60센티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놈들은 오히려 작아지기 시작했다. 50센티. 45센티. 40센티. 그리고 35센티. 20센티까지 내려갔다가 최종적으로 30센티. 체중과 속도를 양립할 수 있는 최고 육체다.

그리고 이놈들의 갑각은 더 단단해지고, 몸체는 더 탄력있게 변했다. 마력 소모량은 줄고, 광물질보다는 초식성 젤리나 암식성젤리를 섭취하는 모습을 보였다.

본래 가지고 있던 갑각이 가시로 진화했다. 불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놈들 중 몇몇이 강인한 근육을 발달시키더니, 몸통 박치기로 일격에 악어를 가시에 꽂아 죽여 버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나는 이 결과에 고무되었고. 이들의 가시를 더욱 흉악하게, 그런데 그렇게 되니까 탈피가 힘들어져서 좀 더 효율적인 형태로 바꿔가면서 직접적으로 개입했다.

진화는 거듭된다.

「세계의 〈군사〉 점수가 1,945점을 넘어 레벨이 5으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특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특성으로 『협동전』을 택했다. 무리지어 싸울 때 보너스를 받는 특성이다.

나는 환희의 미소를 지었다.

"됐다."

"아. 이 특성 카드로 뭔가 됐나요?"

난 신규 특성으로 강화된 푸딩을 조금 더 시험해 본 다음, 결론을 내렸다.

아니, 이제 푸딩의 형상도 남지 않은 이 생명체들을 푸딩이라고 부르기 좀 그렇군.

[사탕]이다. 딱딱하고, 한 번 돌진하고 터지고 녹아버리는, 이 디저트 군단에서 날렵함과 강인함을 핵심으로 삼는 육식성 디저트지.

"드디어 완성된 [낙타먹는사탕]이다. 낙타 상대로 사냥 성공률이 무려 5%나 되지."

"······낮은 거 아니에요?"

"육식동물들 사냥 성공률은 원래 다 병신같이 낮다. 딱 번식에 성공할 정도로만 성공하면 돼."

자 보라. 약 직경 30센티미터 되는 이 육식성 포식자는 이제 이전의 둔한 달팽이나 탱탱볼 같은 움직임에서 벗어나, 수십 개의 관족에 탄력 있는 몸체, 강인한 근육을 이용해서 약 1미터 이상 모든 각도로 도약할 수 있다.

관족을 이용한 달리기 속도는 평균 속도는 시속 30km라서 인간이 전속력으로 뛰면 겨우 도망칠까말까한 정도에, 낙타는 여유롭게 따돌리지만, 순간적으로 몸을 튕기면서 가속하면 시속 70km 이상으로 한 번 정도 30미터 가량을 돌진할 수 있지.

체중 4kg 정도에 유리질, 광물질 갑각으로 덮인 딱딱한 덩어리가 돌진해서 뿔로 진화한 가시를 몸에 들이받으면, 호모 사피엔스는 그냥 그 즉시 뼈가 부러지거나 어디 내장이 꿰뚫려서 사망한다. 낙타 역시 넘어지거나 다리에 맞으면 상처를 입고 말지.

그리고 이놈들은 사회적 지능은 전혀 없지만, 대충 페로몬을 분비, 무리를 지어서 떼거지로 달려들고 적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줄 안다.

그런 이놈이 성체로 성장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3일. 수명은 성체로 성장한 이후 단 3시간.

출아법을 통한 번식으로 인해 음식을 충분히 먹은 상태라면 사망과 함께 100마리에 가까운 새끼를 즉시 낳는다.

100마리의 새끼는 딱 10분 굶으면 죽는다는 단점이 있는 대신 보이는 유기물과 암석을 닥치는 대로 소화하며 직경 15mm에서 직경 30센티까지 완전히 성장할 때까지 먹고 싸기만 하지.

"어······. 그야말로 괴수를 만들었군요."

종 자체의 스펙을 지금 생태계에서 공존하는 선에서 끌어올리느라 어마어마한 신성력을 썼다. 아마 생명 레벨이 좀 더 오르면 더 과감한 튜닝이 가능하겠지.

"그래서요?"

이미 사막에 낙타는 과도하게 번식했다. 그놈들을 이 낙타먹는사탕들을 이용해서 무자비하게 사냥하고, 한 수만 마리 쯤 키운다.

"그리고?"

다음 번 세계가 열리자마자 이 낙타먹는사탕을 차원문 열고 한계치까지 투여한다.

다음 차원문도, 그다음 차원문도, 계속 사탕만 처넣는다. 차원통로가 열리면 이놈들은 동족의 시체 냄새를 맡고 자연스럽게 뛰어들 거다.

다음번 종족이 고깃덩어리나 혹은 풀로 이루어진 유기체면 그대로 다져질 거다. 얘들은 낙타도 잘 먹지만 호모 사피엔스 같은 더 무르고 작은 사냥감은 더 잘 먹고, 초식과 암식도 가능하거든.

"만약 신비로 이뤄진 정령형 종족이면요. 아. 그건 상관없나? 어차피 경매로 다른 세계를 선택해서 들어갈 거면······."

"아니. 그렇게 안 할 거다. 그냥 자연스럽게 다른 세계와 충돌할 거야."

"예? 하지만 그러면 신비에 의존하는 종족을 상대론 아무 의미 없어지잖아요."

"그래서 한참 전부터 내내 커뮤니티 뒤지면서 비지성체에게 마법 능력 부여할 수 있는 방법 찾는 중이야. 토핑과 융합하면 되려나? 난 마법에 대한 지식이 모자라니 요거-토소스의 군단을 형성할 마법 생물인 '요거트'들도 창조해서 대거 투하하면 되겠지."

위 두 생물을 조합하면 아마 어쭙잖은 세력은 박살 날 거다.

이게 바로 가장 악랄하고 지독한 포식자.

괜히 생태계 파괴니 뭐니 느린 전략을 시도할 것도 없다.

사실 원래는 조금 더 생태계 파괴 중심의 전략으로 가려고 했는데 상대가 군사력보다는 어차피 협력하고 내정하는 '좋은 패배' 지향 플레이어일 확률이 높다면 전. 혀. 그럴 이유가 없어.

일단 속전속결로 적 인구를 줄이고 디저트 아포칼립스 상태로 만들면 이긴다.

사탕을 통한 기선제압이 안 통하면, 균열이 열린 직후 요거-토소스를 투입해서 유린한다.

사탕과 요거트 군단을 막아서느라 모든 자원이 고갈된 상대는 요거-토소스를 이기는 게 거의 불가능할 거다.

"잠깐. 잠시만요. 그······. 좀 전략이 말도 안 되는 것 같아요. 만약 상대가 왜 속전속결 전략에 당해줄 거라고 확신하는 건데요? 무리 없이 사탕과 요거트를 상대하고 요거-토소스도···뭐. 대단히 힘들지만 그냥 잡을 수도 있잖아요?"

확신 안 하는데.

"엥???"

천사는 반문했지만, 나야말로 반문하고 싶었다.

생태계에 '확실한 전략'이 어디 있어? 공룡이 전략을 잘못 세워서 멸종했냐? 전략은 훌륭했는데 난데없이 운석이 나타나서 생태계를 초토화해서 멸종했지.

다만 가능성이 최대한 높은 전략을 고를 뿐이다.

"가능성이 높다는 건 어떻게 알아요?"

소거법이다.

만약 중위권 이상의 플레이어라고 치자. 그럼 하차하진 않을 거다. 고작 3번째 라운드니까.

그리고 이 단계에서 중위권 이상이면 아마 협력 중심의 빌드로 치고 올라왔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왜냐면 그게 '최선의 전략'이니까.

그리고 하위권 플레이어라고 치자. 하위권 플레이어는 지금 확실하게 상위권 세력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하차자들의 세계를 사는 거다. 그러면 버틸 수 있다. 어쩌면 충돌 단계 때 문명을 복구할 시간도 벌거나, 아예 중위권 이상으로 도약할 수도 있지.

그리고 이 단계에서 하차하는 최하위권 플레이어라면 아마 문명이 상대 문명을 만나서 거의 공멸, 혹은 궤멸 상태니까 어쩔 수 없이 하차할 수밖에 없는 자들일 거다.

다시 말해 이 단계에서 하차한 모든 세계는 전부 형편없이 점수가 낮을 거다. 다시 말해 중위권 이상의 플레이어들에게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세계들밖에 없겠지.

그리고 문명이 공멸, 궤멸 상태라는 얘기는 필연적으로 '포식자'끼리 맞서 싸우다가 전력이 고갈, 소진됐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면 지금 굳이 세계 경매를 하지 않았을 때 게임 내에서 가장 많은 플레이어가 뭐겠나? 논리적으로 생각해봐라.

"군사력에 별로 투자 안 한 협력형 플레이어?"

정답.

나는 디저트 군단을 잘 가다듬어서 그 애매한 중위권~상위권 세력을 친다.

"만약 요거-토소스도 쓰러트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최상위권을 만나면요?"

한마디로 운석을 만나면 어쩌냐는 얘기군.

그 경우는 협박한다.

내가 못 이기는 세력이 있을지언정, 내가 망가트릴 수 없는 세력은 없다.

어떤 문명이든 문명 점수를 혼자서도 절반은 날려버릴 수 있는 요거-토소스가 있는 디저트 군단 상대로 제깟 놈이 협상을 안 받아들일 수 있나 보자.

"일단 말해두겠는데, 전략 잘 수립해서 열심히 살아가던 공룡들에게 떨어진 운석 포지션이 비인 님이십니다."

그럼 이제부터 날 대멸종의 주인이라 부르든가.

"······."

17화. 거래

"대멸종의 주인님. 결과가 신통치 않은 모양이시군요."

유감스럽게도 천사의 말대로였다. 커뮤니티 장터에는 내가 원하는 생물체도, 마법 기술도 잘 올라오지 않았다.

"생명체의 능력만으로 신비를 발휘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생명체는 강력하고, 또 제작하기도 어렵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스스로 창조한 것도 남들에게 내보내고 싶지 않을 거예요."

젠장. 포인트는 썩어 넘쳐날 정도로 있는데.

마법을 쓸 수 있는 지능 낮은 생명체 생성 말고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요거-토소스의 마법을 이용해서 새로 얻은 사막 지역에 비를 많이 내리게 하고, 그곳을 사막보다는 평원에 가깝게 젤리들로 테라포밍하기.

둘째는 사막 숲 및 그곳 생태계의 복합적인 개선

셋째는 사탕들의 공격성 향상 및, 육식사탕의 사냥감이 되는 '일반적 생명체' 진화.

이건 커뮤니티 거래로 사막에서 살 수 있는 생명체들, 혹은 그렇게 진화할 수 있는 생명체들을 사가지고 써먹고 있다. 낙타먹는사탕들은 작아지고 커지고 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육상 생물들을 사냥할 수 있게 변했다.

넷째는 전반적인 생태계의 건전함 관리. 압호주스가 넥타르 오아시스는 관리해주지만 전반적인 생태계는 내가 알아서 다 관리해야 한다.

부하가 없으니 이런 거다.

"부하를 두시면 되잖아요."

내게 질 정도의 부하는 필요 없다.

"대멸종의 주인님을 이기는 플레이어가 대체 왜 부하가 되겠어요?"

마왕의 자리는 그래서 고독한 법인 것이다.

"아. 예. 그러시군요."

커뮤니티를 아무리 뒤져도 마법과 마법 생명체는 좀 중대 정보인지 꽁꽁 감추고 있었다.

아니 대체 왜 이래? 지구에서는 특허 내면서 모든 기술을 공유하고 다녔다고.

"죄송한데. 지구에서도 안 그랬어요."

돈만 내면 못 구하는 정보가 없었단 말이야.

"그건 맞아요."

아무래도 신비라는 게 다른 이들 입장에선 중대 기업 비밀 비슷한 것 같았다.

나는 신비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물리법칙 Only 세상에서 온 것을 한탄했다.

"사실 그것도 아닙니다."

?

"으흥~?"

어, 뭐 적어도 세상의 일반인들은 그런 줄 알았어. 넘어가.

아무튼 게임 내에서는 마법, 마력은 너무 흔하고 종류도 많았다.

좀 보편적인 마법을 구하려고 봐도 [테르타이브가오코슈슈의 삼차다류신비학 개론]과 [에이에이오의 포웅가 구룬 입문서] 중에서 뭐가 더 대단한지도 모르겠고 솔직히 말해서 둘이 뭐가 다른 건지, 뭐가 다르기는 한 건지 난 분간할 능력이 없다. 포웅가 구룬이 뭐야?

"아 포웅가 구룬 말이시구나. 그거 테운차 라고 불리는 세계의 신비를 부르는 고유명사인데 대충 비인 님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번역하면."

마. 법.

"그런 걸로 치죠······."

뭔가 기가 막힌 사람 없나? 마법의 최고 전문가. 내게 마법에 관한 걸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려줄 누군가 말이다.

커뮤니티를 돌아봐도 다들 마법을 너무 당연시하거나, 마법이 적은 세계에서 왔거나, 아예 마법을 모르는 대신 내가 모르는 괴과학, 괴생물에 대한 지식이 있는 식으로 차별화되어서 끼리끼리 뭉칠 뿐. 아예 처음 보는 플레이어에게 뭔가를 가르쳐줄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굳이 말하자면, 비인 님께서도 괴과학, 괴생물 지식이 풍부한 쪽입니다. 저쪽 입장에서 보면요."

그렇군. 아무튼 따로 방법이 없다면 나 혼자 진화하고 헤딩하면서 요거트라고 명명한 가상의 마법 생명체를 만들어야······.

「'세사이사' 플레이어가 〈대화〉를 신청했습니다.」

음? 뭐야. 굳이 날 찝어서 대화를? 어째서? 왜? 어떻게?

세사이사. 왠지 이름이 낯익다. 거의 기억 너머로 잊어버린 이름 같은데. 음. 누구지.

"넥타르를 296포인트에 사가신 플레이어네요."

아. 그 친구군······.

음······

「'세사이사' 플레이어의 〈대화〉를 받아들였습니다.」

"엥."

"뭐가 엥? 이야. 이기려면 뭐든 해야지. 그게 설령 지성체와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행위라도······."

"지성체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이봐. 우선순위라는 것도 몰라? 내가 이 게임에 지성체랑 얘기하기 싫어서 왔어? 게임을 이기려고 왔잖아?

일단 게임을 이겨야 전 우주의 지성체들을 다 없애버리든가 말거나 할 텐데 당장 대화가 불편하다고 소통을 아예 포기하고, 커뮤니티를 적극 활용해야 이길 수 있는 이 게임에서 그냥 스스로 탈락해야 할까?"

그러자 천사는 반박할 수 없는 듯 잠시 입을 다물더니 한마디 했다.

"······다른 사람하고의 대화가 불편하시군요."

말이 심하군.

사실이라도 말이야.

말이 심해.

아무튼 대화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더니 채팅방 같은 형태로 나타났다. 상대가 먼저 말했다.

[세사이사: 안녕.]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텍스트다. 저쪽은 자기네들 말로 하고 있겠지?

나도 아무 감정도 없는 텍스트로 답해준다.

[비인: 웅웅. 안녕안녕 ㅎㅎ]

[세사이사: 비인.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게. 너, 넥타르 샘 가지고 있지?]

[비인: 좀 많이 티나지ㅠㅠ 웅. 있어ㅋㅋ]

[세사이사: 넥타르, 저번보다 같은 량에 2배, 아니 3배로 살게······. 얼마나 팔 수 있어?]

[비인: 그때는 급전이 필요해서 판 거라서 ㅠㅠ 지금은 포인트 말고 마법이 필요해!]

그러자 답변이 바로 돌아왔다.

[세사이사: 마법? 어떤 마법? 원소 계열? 음양오행 계열? 영령 계열? 신비 생명 계열? 선악이나 개념 관련 마법이 아니면 내가 정보를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미끼를 물었군.

[비인: 나 여기 세상 마법? 같은 거 다 잘 몰라 ㅠㅠ 그렇게 말해도 뭐가 필요한지도 잘 모르겠어.]

[세사이사: 아하. 그러니까 저신비 세계에서 온 거군.]

[비인: 웅웅. 맞아맞아. 신비랑 마법도 차이 잘 몰라.]

[세사이사: 아 찬미하라!!! 나는 여기 기준으로 초고신비 세계에서 신비일반론을 전공한 학자였다!!! 넥타르만 팔아주면 원하는 지식에 대해서 답해주지.]

운이 좋군. 세계가 혹시 나보고 신이 되라고 하는 걸까?

[비인: 웅웅. 그러면 넥타르는 저번에 준 량의······. 한 20배 정도까지는 팔아줄 수 있을 것 같아! 꺄~~~!]

[세사이사: 미쳤구만! 좋아. 뭘 원하지? 나 진짜 급해!!!]

[비인: ㅋㅋ 알써알써. 잠시만 기달.]

나는 천사를 돌아봤다. 천사는 뭔가 못 볼 걸 본 듯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난 무덤덤하게 물었다.

"궁금한 게 있다만."

"지금 제가 궁금한 것보다 많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럼 그 질문 평생 담아두고 있어. 여기 상대 플레이어가 '거짓말'이나 '속임수' '협잡질'을 하지 않을 거라고 내가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천사는 어쨌든 자기 임무에 성실히 답했다.

"음, 뭐. 공식적인 거래로 하면 됩니다. 포인트, 현물, 지식, 무엇이든 공식적이라는 단서만 걸면 세사이사 플레이어 본인이 뭘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약속한 대가를 주어야 합니다. 당연히 대멸종의 주인님께서도 넥타르에 뭔 수작질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건네주어야 하고요."

그렇군. 그러면 공정한 거래로 이 친구랑 거래를 좀 해볼까.

[비인: 그럼 마법 쓰는 생명체를 만들 수 있을까? ㅋㅋㅋ]

[세사이사: 고기는 내 전공이 아니라서 그건 잘 모르겠다만.]

[비인: ㅋㅋㅋㅋ 내가 전공이니 괜찮! 어? 근데 생명이 전공 아니면 넥타르는 왜 그렇게 많이 필요해?]

[세사이사: 아. 그게. 받은 세계 종족이 고기인데 어떻게 할 지 몰라서 그냥 지성 주고 마법 가르쳐주는 사이 다 이상하게 변해버려서 어느새 내 고기 종족이 먹을 게 없더라고.]

······.

[세사이사: 아무거나 주면 안 먹지만 그래도 넥타르는 좀 잘 먹어서······. 그거 순수한 생명 에너지니까 그렇겠지? 그래서 나 가능하면 넥타르 샘이 좀 필요······.]

[비인: 야이 병신새꺄. 생태계를 뭐 어떻게 관리하면 마법 가르치는 동안 생태계가 다 알아서 망해버리냐?]

[세사이사:???]

나는 천사를 노려봤다.

"야. 이 새끼 생태계 내가 볼 수 있는 방법 없어?"

"허락을 받으면 가능하지만, 플레이어가 다른 플레이어의 세계를 보는 건 신성력이 꽤 많이 소모됩니다만."

"상관없어. 저 병신새끼가 얼마나 쓰레기 같이 자기 생태계를 조져놨는지 봐야겠어."

천사를 통해서 신청을 넣었다. 그러자 그쪽도 내 세계를 보고 싶다는 듯 세계를 보여줬다.

그리고. 야. 이.

「세사이사의 세계

생명 LV.2: 233

군사 LV.5: 3,889

산업 LV.0: 79

기술 LV.5: 3,566

문화 LV.2: 233 

정치 LV.1: 177

신비 LV.6: 5,003

신앙 LV.5: 2,911

총점 LV.5: 16,091」

나는 이 참담한 세계에 그냥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작정하고 해도 하기 힘들 텐데 생물이란 생물은 거의 다 말라 죽었다.

그러면 먹을 걸 어디서 구하고 있나해서 봤더니 그냥 참선하고 수양하면서 마법 수련을 하는 종족들이 기도할 때마다 신앙으로 생명을 창조해줘서 해결한 모양이다. 아니면 포인트로 생명을 사가지고 오거나.

그리고 신이 그냥 물건을 내려주니까 산업도 쓰레기고. 기술은 그나마 마법 점수가 높아서 높게 찍힌 듯한데.

한마디로 이 세계의 생명체들은 그냥 신에게 기도하고 마법공부하는 것만으로 모든 식량을 다 충당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런 병신새끼가 있나.

심지어 이 새끼 종족은 존나 큰 코끼리 같은 놈들이다. 난 진짜 답답해 미치는 줄 알았다. 아니 이러면 당연히 체격이라도 줄여서 에너지 소모를 줄여야 하는 거 아니냐???

심지어 여기 원래 숲 지형인데 이 새끼들 자기 생태계의 나무를 다 뽑아먹어서 토양도 유실되고 풀뿌리 하나도 남지 않는 황야로 만들어버렸네?

[비인: 이 병신새끼야. 너는 생산자-소비자-분해자로 이뤄지는 지극히 단순한 생태계 개념도 모르냐?]

그렇게 전하자, 내 아름다운 생태계를 보고 온 세사이사는 거의 가래침을 뱉듯이 내게 메시지를 날렸다.

[세사이사: 기가 막혀서, 내가 그걸 전설적 창조물을 만들곤 스스로 똥 만드는 법이나 가르치는 너한테 들어야 되겠냐?]

[비인: 뭐? 내 디저트 군단의 중추인 요거-토소스가 도대체 어때서···.]

[세사이사: 저 지능! 저 마력! 저 권능! 저렇게 강인한 지성을 두고 혼자서 마법을 개발하게 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넥타르 생산은 왜 저렇게 비효율적으로 해! 적어도 기본 원소의 상호작용과 마력압과 영적 세계의 흐름 간의 상관관계를 아예 모르는 천치가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는·········]

[비인: ?]

[세사이사: ?]

"비인님의 천사님. 되게 고생이 많으실 것 같네요. 우리 플레이어는 순수한 영적인 세계에서 살다 오신 분이라 식물이든 동물이든 다 고기라고 불러요."

"세사이사님의 천사님도 정말 고생이 많으실 것 같네요. 저희 플레이어는 모든 신비를 마법이라고 하거든요."

"다 그런 법이죠."

"왜 하필 이 둘이 만났을까요. 진짜 이번 게임은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운도 더럽게 없지."

얘기를 하다보니, 아무래도 이 세사이사라는 친구······.

[비인: 세사이사 님 ㅎㅎ 잘은 모르겠지만 생태계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대신 마법에 대해서 되게 박식하신가봐요 〉〈]

[세사이사: 하하. 저도 불합리를 참지 못하는 학자의 마음이 좀 앞선 나머지 비인 님의 고기들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꿰뚫지 못한 것 같습니다. 실례지만 잠시 신앙과 신비 없이 자체적으로 돌아가는 고기들의 생존법에 대한 고견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비인: 웅웅. 저도 생태계에 접목할 수 있는 마법에 대해 대단히 관심이 많은데 ㅋㅋㅋ 혹시 생명활동만으로 마법을 쓸 수 있는 생명체 가능할까요ㅠㅠ]

[세사이사: 이미 고기의 정신으로 부릴 수 있는 마법이 한정되었을지언정 불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느 고기에서 신비를 부리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나와 세사이사는 동시에 천사에게 질문했다. '상대 세계를 조작해도 되느냐?'라는 것.

"어······. 서로 포인트를 교환한 만큼만 변화를 허용하면 되죠. 그리고 세계에 기여한 만큼 상대의 포인트를 받는 조건이라면? 그리고 상대에게 악의를 품고 조작하거나 함정 파는 건 금지. 그렇게 약속하기만 하면 돼요."

"그래도 완전히 동맹을 맺는 게 아닌 이상 권한에 한계가 있는데 동맹은 안 맺으시죠?"

어. 안 맺어.

그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저 세사이사. 부하 신이 단 한 명도 없어. 동맹도 안 보이고.

분명 세계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을 텐데도 만난 모든 플레이어를 다 죽인 거야.

"마치 대멸종의 주인님처럼 말이군요."

그리고 상대 세계의 점수는 16,091. 극단적인 신비 중심이지만, 거의 나에 육박한다. 

「비인의 세계

생명 LV.6: 8,300

군사 LV.5: 3,999

산업 LV.3: 833

기술 LV.1: 160

문화 LV.0: 0

정치 LV.0: 0

신비 LV.4: 1,866

신앙 LV.4: 1,771

총점 LV.5: 16,929」

한마디로, 저놈은 아마도 내 요거-토소스를 죽일 수 있는 1천 명 중 한 명에 속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고작 세 번의 세계 충돌에서 16,000점 가까이 긁어모은, 극도로 기형적이면서도 효율적인, 독자적 빌드를 만들어 낸 플레이어.

나와 같은 부류의 괴물이다. 언젠가 싸워야 할 거야.

"참고로 저쪽도 대멸종의 주인님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렇겠지.

「플레이어 '세사이사'가 자기 세계의 조작 권한을 '비인' 플레이어에게 일시적으로 양도했습니다.」

「플레이어 '세사이사'에게 플레이어의 세계 조작 권한을 일시적으로 양도합니다.」

[세사이사: 비인. 이 허접스레기 같은 세계에서 유일한 빛인 요거-토소스에게 내가 진정한 마도란 게 뭔지 가르쳐 주도록 하마.]

나야말로 눈이 번쩍 뜨이게 해주지. 네놈의 병신 같은 생태계를 내가 낙원으로 고쳐주마.

다음번 세계 충돌까지 좀 많이 바쁘겠군.

18화. 거래 2

[비인: 세사이사님. 여기 생태계 고칠 텐데 제가 여기 1점 올릴 때마다 4포인트 주세요.]

[세사이사: 나도 같은 조건. 기여도 1당 4포인트.]

[비인: 약간의 손실은 이해하지만 〈생명〉 점수 300점 이상 손실 나면 바로 그만두세요^^]

[세사이사: 나도 동의. 〈신비〉랑 〈기술〉 점수 합쳐서 300점 이상 손실나면 안 돼.]

상대 생태계 조작에는 상대 신성력 대신 내 신성력을 사용한다. 내가 쓴 만큼 상대도 쓸 수 있어서, 서로 어느 정도 쓸 최초의 용량을 협의했다.

이 정도의 신성력이면 대충 좋아. 그럼 어디 생태계 개조를 시작해볼까.

일단 첫째! 저 생태계에 존재하는 생명은 코끼리인간밖에 없다. 유일한 종족이자, 거대한 두뇌, 막강한 근력, 그리고 무지막지한 신비를 지닌 생명체지.

세사이사의 코끼리 종족은 아마도 원래 자생하던 생명체를 개조한 듯 진짜로 코끼리와 비슷한 생태를 지니고 있었다.

코끼리의 생태가 뭐냐? 자연계에서 코끼리의 역할은 '나무'를 먹는 거다.

그래서 아프리카 사바나 평원에는 나무가 그렇게도 적은 거다.

코끼리 떼가 몰려다니면서 다 때려 부수고 씹어 먹으니까. 아프리카 사바나 평원이 너무 넓다보니 코끼리들이 움직이는 동안 나무가 다시 자라 숲을 이루는 거지.

참고로 북아메리카의 울창한 대수림은 인간이 코끼리의 생태적 지위를 차지한 땅늘보 같은 놈들을 다 죽여버려서 생긴 거다.

"아. 네. 그렇군요."

한마디로 이놈들은 초식성이다. 그것도 나무를 먹고 커다란 위장으로 천천히 소화하는 초식성. 식물은 소화가 힘들지만 소화만 할 수 있으면 목재만 먹고도 그렇게 살이 찔 수 있지.

근데 세사이사는 대책없이 이 종족의 숫자를 늘렸고, 자연계의 균형이 망가져서 숲을 말 그대로 분쇄해버린 거다.

그래서 먹을 게 없어지니까 저 생물학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세사이사는 멋대로 이 코끼리 인간들을 진화시켜서 벌레나 고기도 먹을 수 있게 내장을 개조했는데, 오히려 그게 더 끔찍하게 에너지 효율을 나쁘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숲을 전부 뜯어먹고, 덤불과 바닥의 풀도 다 뜯어먹고, 벌레 짐승 다 먹어치운 다음에 신에게 기도하며 음식 달라고 사정하는 수밖에 없었던 거지.

일단 환경부터 개조한다.

나는 이곳에 남은 씨앗과 신의 파편을 보고, 그 유전자를 복원해 원래 숲에 있었던 참나무를 되살렸다.

아무래도 거대하게 크면서 도토리를 엄청나게 많이 맺는 생물이었던 것 같군.

저 코끼리들은 과도하게 커지는 숲을 제거하는 역할이고, 그 외에 숲에 남은 뼈들을 보면 무지막지하게 많은 도토리를 먹는 설치류, 초식성 포유류, 파충류? 이건 생물종이 지구에 없는 것 같군. 또 조류? 그리고 그놈들을 먹는 중대형 이상의 육식동물.

이렇게 좋은 생태계를 잡고도 조져버릴 수 있다는 사실에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끔찍한 고통을 느꼈지만, 나는 할 일을 한다.

일단 복원한 참나무를 신성력으로 개조했다. 신성력을 과도하게 부여해 더 거대하고 울창하게, 일단 15제곱킬로미터 정도 되는 영역은 죄다 참나무로만 덮어버린다.

[세사이사: 아니 이 멍청아! 신성력 써서 식물 만드는 건 누가 못해?]

[비인: 아오 일단 숲을 복원하지 않으면 어떻게 생태계가 돌아가냐? 잠시만, 너 뭐해?! 내 넥타르 오아시스에 있는 물들! 도대체 어디다 뒀어!]

[세사이사: 그거 넥타르 희석시키는 것 같아서 그냥 근처 골짜기에 버렸는데. 그런 구조로 어떻게 마력을 받아들이냐.]

[비인: 이 개씨발병신새끼야!!!]

난 다급히 내 세계로 돌아가서 골짜기에 들어찬 물과 젤리들 조절했고, 세사이사는 내가 기껏 키운 참나무 숲을 다 자기 코끼리들에게 처먹이려고 해서 내가 미친듯이 뜯어말렸다.

[비인: 그럼 일단 코끼리들 크기를 줄인다.]

[세사이사: 어? 안 돼!!! 그러면 뇌가 약해지고 정신력도 신비도 약해져!]

[비인: 수를 늘리면 되잖냐.]

[세사이사: 안! 돼! 절대 크기는 줄일 수 없어!]

아 그래? 덩치가 커야하는 이유가 뭐 있나? 하긴 뇌 쪽이랑 신경계,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영혼 등에 뭔가 많이 조작한 것 같긴 하더라.

그러면 방법을 좀 바꿔보지.

서로 해선 안 되는 것에 대한 사항과 조건이 더 붙고, 나는 생태계 튜닝을 이어갔다.

일단 참나무라는 건 도토리를 맺는 나무의 총칭이다. 이세계 작물이라도 이런 방식으로 수렴진화한 생물이 있을 수밖에 없지.

그리고 도토리라는 건, 나무열매다. 도토리만 먹고도 살 수 있을 정도로 영양가가 풍부하다. 다만 맛이 더럽게 없다는 단점이 있지.

인간 기준으로는 못 먹을 정도고 다람쥐조차도 땅콩이 있으면 땅콩을 먹지 도토리를 먹진 않는다.

그렇지만, 도토리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이 열린다. 참나무 숲에서 가을만 되면 그야말로 지천에 수백만 개의 도토리가 떨어진다. 그것만으로 생태계 전체를 지탱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코끼리들의 식성을 순수 목재와 이것저것 잡식에서 도토리 취향으로 바꾸는 개조를 했다. 인구가 적으니까 개조는 쉽군.

그리고 도구를 집고 마법에 쓰이는 손동작은 할 수 있지만 대단히 비효율적인 구조의 짤뚱한 손과 팔을 엄청나게 길게 늘리고 다리도 길고 두껍게, 대신 내장이 들어가는 복부도 가늘게 만들었다. 목재 위주의 식생활을 안 할 거면 거대한 위장은 필요 없으니까.

두개골은 크기를 유지하고 뇌 기능을 유지하되 조금 무르게 하자. '코끼리' 인간에서 코끼리 '인간' 같은 형태가 됐다. 코도 조작한다. 코도 삽 같은 형태로 바꾸고 코에 주머니볼 같이 비강 내에 물건을 많이 담을 수 있게 하는 구조를 만들어 이놈들이 도토리를 코로 퍼먹고 손으로는 도구를 잡고 나무를 손아귀 힘으로 뜯어버릴 수 있게끔 만들었다.

도토리먹는코끼리들은 미친듯이 번성했다. 1년에 한 번 나는 도토리 수확철이 이놈들의 번식철이다.

그때 미친듯이 도토리를 먹고 지방을 불린 다음 새끼를 낳는다. 그리고 그 외의 철에는 나뭇잎과 낙옆, 나뭇가지를 긴 손가락과 팔로 퍼먹거나 꺾어먹는다.

대부분의 활동은 마법 연구? 마법 연마? 명상? 뭐 그런 거에 쓰고 있던데. 난 마법 쓸 줄 아는 그놈들 시켜서 숲 더 넓히는데 일조했다.

다른 생명체들도 복원하고, 다람쥐와 다람쥐 먹는 새와 여우들 복원이 최우선.

그리고 참나무들의 뿌리를 더 깊게, 크게, 그리고 열매를 진짜 무지막지하게 많이 열리게 해야 한다. 1년 내내 도토리만 퍼먹어도 될 정도로.

그러자 이놈들은 1년에 딱 한 번 열리는 도토리를 저장하는 법을 익혔고, 나무들로 집을 짓고, 도구를 만들면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문화〉와 〈기술〉 〈산업〉 점수가 의도한 건 아닌데 엄청나게 올라갔다.

[비인: 목표로 한 신성력 다 썼고. 특성 좀 골라라 〈생명〉은 926점 넘어서 2개. 문화 정치 산업 다 2단계씩 올라갔다.]

[세사이사: 뭣?! 그거 죽어도 안 오르던데?! 아 그리고 나도 넥타르 샘을 1레벨 더 올려줬고 압호주스 레벨도 2단계 올렸다.]

뭐? 넥타르 샘을 1레벨 더 올렸다고?

서로 세계를 보고 기겁했다.

이 미친놈 도대체 뭘 한 거야. 넥타르 샘은 레벨이 7레벨이 됐다. 심지어 오아시스의 넓이는 똑같다. 똑같은데······. 마력 농도만 딱 2배 됐어. 뭐 자원 쓴 것도 신성력밖에 없는데 뭐 어떻게 한 거야?

[세사이사: 너, 너 도대체 뭘 한거냐? 그 신성력으로 도대체 생명 점수를 어떻게 이렇게 높여?! 다른 점수는 뭐 어쩌다가 오른 거야?]

[비인: 아니 제가 묻고 싶은데 도대체 어케해요?!?!]

난 상식적인 수단만 해서 올렸는데, 근데 세사이사도 뭔가 상식적인 수단만 썼다고 한다.

주변 신의 파편과 영적 구조물의 흐름이 밑의 생태계 만든다고 엉망진창이라서 그걸 복원하고 세계 전체의 마력이 단순한 마력 원리에 따라서 넥타르 오아시스에 응집되게 했다고. 요거-토소스의 힘으로 못할 거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게 뭐야. 그걸 뭐 어떻게 한 건데.

[세사이사: 〈생명〉점수 더 올릴 수 있나?]

[비인: 지금 기초 작업만 한 건데 원한다면 이 3배 4배라도?]

[세사이사: 나도 기초 작업만 했거든? 잠시만. 내가 이 요거-토소스에게 마도 지식 몇 개만 가르쳐주면 전투력이 2배로 오를 거야······. 기다려봐.]

쓸 수 있는 자원이 두 배가 된 난 이어서 생태계 개조 작업에 들어갔다.

모든 땅이 참나무 숲일 필요는 없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땅은 도토리를 생산하는 참나무 숲이 어울리지만, 그 근처에 있는 호숫가, 그리고 골짜기, 언덕 등에는 또 다른 생물들을 심을 수 있다.

나는 대책없이 생태계의 조화만 부르짖는 환경론자가 아니다. 내 플레이에는 그게 가장 적합하기 때문에 그랬을 뿐이지, 세사이사의 세계는 오로지 코끼리들을 위한 코끼리의 세계여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니 모든 세계를 참나무 숲과 그 문명을 위한 형태로 개조한다. 생태문명화 작업이다.

"우와······. 대멸종의 주인님께선 그런 플레이를 할 줄 알면서 반지성주의 플레이를 하시는 거예요?"

"세사이사 님은, 하······. 말도 마세요. 신비에 대한 지식으로 있던 숲도 그냥 밀어버리는 사람이에요."

천사들이 뭐라 지껄이건, 나와 세사이사는 서로의 세계를 번갈아가며 계속해서 세계 상태를 확인하고, 저쪽이 수작질이나 실수하지 않는지 체크할 겸, 거기에 더해서 서로의 생태계와 마법 환경을 계속 발전시켰다.

이제 참나무 숲은 코끼리들이 아니라 훈련된 다람쥐들이 관리한다.

다람쥐들은 거의 뿌리듯이 도토리를 곳곳에 묻어놓고, 새들 역시 도토리를 먹고 그 씨앗은 배설물로 더 넓은 영역에 도토리를 뿌릴 수 있게 한다.

나는 참나무들을 다 개조해서 세사이사의 생태계 모든 환경에서 적응할 수 있되, 도토리를 뿌리는 생물학적 기능만큼은 남겼다. 코끼리들이 아무리 번성해도 세상 어딜 가도 도토리와 참나무를 먹을 수 있게끔 말이다.

그리고 별식으로 과일과 풀도 좋아하는 것 같으니 그런 쪽 식물도 추가. 생태계 다양성을 대폭 늘리고 마물과 식물을 결합시켜서 마법 생명체들을 만들어 저들의 문화 기술 산업 모든 부분을 지원한다.

코끼리 인간들은 거대한 나무는 잘라서 나눠먹고 축제를 벌이고, 매 년, 모든 시기에 다르게 뿌려지게끔 설정한 도토리 덕에 세계를 그저 지정된 궤도로 순례하는 것만으로도 매일같이 도토리 축제를 벌일 수 있게 됐다.

그들은 뛰어난 지능으로 마을을 만들었고, 상업과 도구를 발달시키고, 참나무 농사를 직접 짓고 도토리와 각종 식물들을 통한 요리와 약재를 만들어내었다.

더 건드리고 싶은 건 많지만, 이 정도면 됐겠군.

[세사이사: 찬미하라. 이 위대한 신비를.]

갈채하라. 이 아름다운 생태계에.

「비인의 세계

생명 LV.7: 9,367(+1,067) 신규 우수 특성 1개 획득.

군사 LV.6: 6,632(+2,633)

산업 LV.4: 1,464(+631) 신규 일반 특성 1개 획득.

기술 LV.5: 2,021(+1,861) 신규 일반 특성 4개 획득.

문화 LV.0: 0

정치 LV.0: 0

신비 LV.6: 4,385(+2,519) 신규 일반 특성 1개 우수 특성 1개 획득.

신앙 LV.5: 3,098(+1,327)

총점 LV.5: 26,967(+10,038)」

「세사이사의 세계

생명 LV.5: 2,291(+2,058) 신규 일반 특성 3개 획득

군사 LV.6: 5,232(+1,343) 신규 우수 특성 1개 획득

산업 LV.4: 1,526(+1,447) 신규 일반 특성 4개 획득

기술 LV.5: 3,566(+347)

문화 LV.5: 3,236(+3,003) 신규 일반 특성 3개 획득

정치 LV.5: 2,676(+2,499) 신규 일반 특성 4개 획득

신비 LV.6: 5,459(+456)

신앙 LV.5: 3,244(+333)

총점 LV.5: 27,577(+11,486)」

[세사이사: 오 이 아름다운 세상이여!!!]

미쳤구만.

세사이사는 정말 심플하게 내 세계를 강화시켰다. 넥타르 샘 레벨을 높이고, 압호주스를 무려 7레벨로, 그리고 요거-토소스를 5레벨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세계 전체의 마력압을 미칠듯이 높였는데 그것을 다시 압호주스가 먹고 젤리들이 먹으니 전반적인 세계의 생명과 전투력이 미친듯이, 지금도 폭증하고 있었다.

그냥 이 말밖에 못하겠어.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이해가 안 되네.

[세사이사: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이 쓸모없는 고깃덩이들에게 문명이 생겼잖아! 고기들의 흐름도 완벽히 동작하고 있어!]

[비인: 우웅. 도대체 어떻게 하신 건지 모르겠는데 넥타르 샘도 요정도 전설적 창조물도 전부 레벨이 대폭 올라갔네요ㅋㅋㅋ 진짜 대박이다ㅠㅠㅠ]

"양쪽 포인트 정산하겠습니다."

맞다. 올린 점수는 기여도만 정산한다. 한마디로 저쪽이 손 안 댔어도 알아서 올라갔을 건 점수 못 받는다는 거지.

아 씨. 이거 곤란하네. 저쪽이 해준 게 너무 많아서 수만 포인트 뜯기는 거 아니야?

"세사이사 님이 비인 님에게 344포인트 주시면 되겠습니다."

와. 내가 오히려 포인트를 받네. 저쪽이 해준 게 더 많지 않나?

그래도 따지고 보면 근소한 차이였다.

[세사이사: 비인. 넌 진짜 고기들의 최고 전문가다.]

[비인: 넹넹. 세사이사 님도 진짜 마법 짱! 최고 고수!]

[세사이사: 잠시만, 이럴 게 아니지. 아직 내가 가르쳐줄 거 많거든? 어차피 너 다음 경기에서 이길 테니까 만약을 대비해서 이거 하나만 해두자.]

「플레이어 '세사이사'가 〈불가침 조약〉을 신청합니다. 불가침 조약이 유지되는 동안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세계 충돌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동맹 제안이 아니라 불가침 조약. 대놓고 후반에 승부를 가리자고 하는 거군. 그때까지는 내가 가르쳐주는 생태계 정보의 단물을 쪽 빨아먹겠단 얘기고.

하지만 나도 저쪽의 마법 정보가 필요했어······. 그래. 게임에서 배운 마법적 지식으론 부족해.

10억 명 중 최고가 되어야 한다면, 적어도 나도 마법에 대해서 속지 않을 정도론 알아둬야지. 아예 마법 있는 세계에서 온 최고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나는 세사이사의 제안을 수락했다. 다음 충돌. 세사이사는 아마도 이길 것이다. 나 역시 이길 가능성이 아주 높고.

「곧 세계 충돌이 시작됩니다. 살아남은 플레이어만이 다음 라운드로 진출합니다.」

대화는 그때 나눠도 늦지 않겠지.

"대멸종의 주인님을 상대하게 된 상대 플레이어와, 그에 준하는 마법 코끼리 군단을 상대하게 될 플레이어에게 묵념을······."

뭐, 원래 운석이라는 건 갑작스럽게 떨어지는 법이다.

19화. 세계 충돌 -네 번째-

「요거-토소스 〈전설적 고유 창조물〉

체력 LV.4: 1,943

전투 LV.6: 4,513

솜씨 LV.2: 422

지능 LV.4: 984

매력 LV.2: 398

정신 LV.3: 801

권능 LV.6: 5,196

마력 LV.5: 3,573

개체 총점 LV.5: 17,830」

사실 이 수치가 이번 전략의 모든 걸 설명하는 것 같다.

아니, 음. 뭐라고 할까. 이 자식 뭘 좀 잘못 먹었나?

원래도 객관적으로 요거-토소스는 높은 체력, 압도적인 마력, 권능, 그리고 전투력까지 다 갖춘 만능 전설 유닛이었다.

그런데 세사이사한테 특훈 한번 받았다고 전투력 수치가 문자 그대로 5배나 폭증했다.

원래도 낮았고 활용도도 찾기 힘들었던 솜씨, 매력, 정신은 찔끔 상승하고 가장 중요한 마력과 부릴 수 있는 마법의 종류와 위력을 의미하는 권능 수치만 미친듯이 올라가서 이 자식의 총점이 무슨 1만 7천점이다.

내 군사력 점수가 6,632점인데 그중 3천 점은 요거-토소스의 개인 전투력에서 올 거다. 개체 전투력과 세계 전투력이 1:1 대응될 리가 없는데, 이 미친놈은 객관적으로 내 생태계의 다른 생명체들을 다 합한 것보다 더 강력하다.

"천사. 네가 볼 때는 어떻게 판단하나?"

"3,310개입니다."

"요거-토소스를 잡을 '가능성'이라도 있는 세계?"

"예. 저번에 말한 것처럼 아예 잡고 공멸해버리는 세계를 제하면, 지금 남은 세계 중 실질적으로 요거-토소스를 확실하게 잡을 가능성이 있는 세계는 전체 1억 3천 개 세계 중에서 한 2,800개 정도?"

"저번처럼 90% 줄진 않았군?"

"오히려 요거-토소스가 너무 강해서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세계는 아예 요거-토소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공격을 막아내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일단 버틸 수 있고, 공격할 수도 있는 세계 중에서 추려내는 조건이니 아예 확실하게 잡을 수 있든가, 아니면 아예 못 잡거나 하는 경우밖에 없어서······."

"허어."

"요컨대 능력이 특정 마법 계열에 너무 치중되어서 카운터가 제대로 들어가든가, 혹은 상대적으로 빈약한 정신쪽을 어떻게 해볼 수 있든가······. 그런 경우고, 만약 여기에 육식사탕들을 추가로 투입하면 비인 님의 세계를 상대할 수 있는 세계는 100개도 안 됩니다."

초반의 극단적인 위력 증강이 이런 결과를 불러왔군.

"뭐어. 그렇습니다. 초반부에 문명의 총 저력보단 개인 스펙이 높은 단일 개체가 더 위협적이니까요. 그걸 어떻게 얻으셔서, 지금 부릴 수 있는 비인 님은 가히 무적의 권능을 손에 넣었군요."

그렇다. 세사이사가 튜닝한 내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음 게임에서 자세한 설명을 들어야 할 것 같지만, 어쨌든 지금 생태계는 대단히 안정적이다.

"못 찍은 특성 지금 한번에 다 찍어도 되나?"

"물론입니다."

〈생명〉 우수 특성 1개.

〈군사〉 우수 특성 1개.

〈산업〉 일반 특성 1개.

〈기술〉 일반 특성 4개.

〈신비〉 일반 특성 1개 우수 특성 1개.

생명=『인위적 진화 2: 신성을 통한 진화 효율이 200% 상승합니다.』

군사=『요거-토소스 전투 마법사 전직: 전설적 창조물 요거-토소스가 경험치를 얻을 때 전투 마법사에 특화된 능력치 분배를 따르게 되고 관련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선행조건으로 『전투 마법사 전직』 특성이 필요합니다.』

산업=『바위 산업: 〈바위〉를 가공하는 산업에 효율적이게 됩니다.』

신비=『마법사 전직: 각 개체가 마법사로 전직할 수 있게 됩니다. 마법사로 전직한 개체는 경험치 획득 시 능력치 분배가 달라집니다.』 『전투 마법사 전직: 마법사의 상위직. 전투 마법사 전직을 해금합니다.』

여기까지는 쉽게 택할 수 있었다. 사실 선택지도 딱히 없었고, 이게 그냥 최고로 효율적이었어.

문제는 〈기술〉 부분이었다.

"······."

"왜 그러세요?"

"아니, 그······. 선택할 수 있는 특성들의 우열을 전혀 모르겠는데?"

〈기술〉은 특성으로 기술 개발이 쉬워지거나, 혹은 기술 개발에 특화된 전직을 해금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새로운 기술을 그냥 준다.

문제는 내 기술이 100% 마법 쪽에 치중되었고 딱히 기술 개발직 같은 전직을 해금할 수도 없는 터라 모조리 마법 주문 같은 것만 나왔는데 뭐가 좋은지 전혀 모르겠다.

그냥 '공격 마법' '불덩이 마법'이러면 게이머의 감각으로 좀 이해하기 쉬운데, 이게 세사이사가 개입한 터라 아주 전문 용어로 범벅이 된 특성밖에 없어.

"하나하나 다 설명해드려요?"

"아니, 그래도 몰라······. 나는 게임을 5만 시간 하면서도 마법 쪽은 너무 어렵고 답답해서 그냥 수박 겉핥기 식으로만 익혔다고."

"어······. 커뮤니티도 곧 충돌 직전이라 닫혔고."

난 잠시 고민하다가, 갑자기 새로운 발상을 떠올렸다.

"야. 요거-토소스야. 물어볼 게 있는데."

[예. 창조주여. 하명하십시오.]

"내가 지금부터 네가 배울 수 있는 마법을 알려줄 테니까 뭘 배우면 좋을지 네가 스스로 말해봐라."

[아아. 저에게 선택권을 주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의도를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어떠한 쓸모를 가지면 좋겠나이까?]

"흠. 너는 지금 디저트 군단의 제1군단장으로 나 역시 너에게 많은 투자를 한 만큼, 너는 다방면에서 유능해야 한다. 하나를 엄청 잘하기보단 대부분의 문제를 네 힘으로 막았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크게 보면 '학살' '자체 생존' '생태계 조절' 세 가지를 잘하면 된다." 

[창조주의 뜻대로.]

세 가지 선택지를 말할 때마다 요거-토소스는 스스로 마법을 골랐다. 

그래서 네 가지의 마법을 요거-토소스가 익혔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러면 공격 생존 생태계 유지 모든 부분에서 유리하다고 하던가.

"그런데, 세사이사는 어땠나? 마법은 잘 가르쳐 주더냐?"

그러자 요거-토소스는 대단히 반색하는 듯. 세사이사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오. 나의 창조주시여. 그분의 지혜는 끝이 없는 듯했나이다. 그분의 무한한 지혜의 일부를 나눔받은 것만으로 이 미물의 권능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또 신비와 마력, 세계의 구조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깊어졌는지. 저의 지능으로도 이루 다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 신이 마법을 몰라서 미안하다.

그래도 그놈도 지금 비슷한 말을 듣고 있지 않으려나.

한편, 세사이사의 세계.

'비인 님께서는 언제 다시 오십니까? 그분께서 베풀어주신 풍요의 은총이 한 번만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내가 니들 창조주냐? 그놈이 너희들 창조주냐?"

'비인 님은 창조주가 아니지만, 풍요의 신입니다.'

'저희는 창조주를 섬기며 당신의 뜻대로 신비를 누리지만 이 육체에도 복록을 누리게 해준 그분을 그저 숭배할 뿐······!'

"······뭐 됐다. 그놈도 자기 창조물에게 이런 소리나 듣고 있겠지."

세사이사는 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충돌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인도 마찬가지였다.

머나먼 세계. 무한히 펼쳐진 우주가 아니라 좁은 이세계의 정치인이었던 소온은, 이 게임의 본질을 일찌감치 꿰뚫었다.

"이 게임은 최후의 한 사람을 남기는 경기가 아니다. 오로지 그 이전에 좋은 패배를 하고 적절한 시점에서 털고 나가는 것. 그리고 서로 경쟁보다는 협력을 중요시하는 게임이야."

이론상이지만, 만약 모든 플레이어가 충돌 시 대결을 포기하고 전부 동맹을 맺은 뒤 모두가 통일된 세계의 신이 될 수도 있었다. 순전히 이론상의 얘기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 이 게임은 어떻게 동맹을 이루고 그 동맹을 얼마나 크게 키워서 털고 나가느냐가 승패를 좌우하는 게임이다.

소온은 그렇기에 첫 충돌, 상대 플레이어와 바로 동맹을 맺었다. 두 번째 충돌. 상대도 두 명. 동맹을 맺었다. 세 번째 충돌. 상대는 4명의 플레이어가 있었고, 8명으로 된 운명 공동체가 탄생했다.

그리고 소온은 정치가.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 본질적으로 파악했다.

"이 게임의 본질은 정치다. 압도적인 정치력만이 여덟 부족 사이에서 우리 부족의 우위를, 그리고 우리 동맹 체제의 안정과 더 나아가 상대 플레이어와의 우위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게임과 게임 사이에 있는 보호기간. 소온은 정치가로서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그의 세계, 그의 종족이 가장 중점으로 둔 능력은 〈정치〉였다.

〈정치〉가 높으면 체제의 안정성이 높아지고, 효율적으로 자기 종족을 통제할 수 있으며, 지도자 아래에서 단합되어 효율적인 문명을 구축 가능하다.

소온의 종족은 문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어느 순간 여덟 부족 사이의 지배자 종족으로 우뚝 서 있었다.

다른 동맹 신들이 놀라서 다급히 개입하려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소온에게 직접 지시받는 그의 영웅은 그 정치력을 발휘해 다른 부족의 주요 인물들을 포섭하기 시작했고, 법을 제정하고, 완전히 다른 종족끼리 어울려 사는 체제를 완성했다.

그 체제를 깨트리는 것 자체가 게임에서 질 수 있게 된 상황. 소온의 부족은 지배자의 미덕, 다시 말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발휘하며 상층부에서 부, 그리고 게임 내의 점수를 독점했고, 다른 부족들은 각기 다른 분야에서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며 그들의 세계를 안정적으로 운영했다.

"다음 세계와도 협력하는 기조로 가자. 천사에게 듣기로는 '아직까지는' 협력을 방해할 요인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다. 천사에게 게임에 대한 룰은 자세히 들었다. 5번째마다 '재난'이 찾아온다고 했던가. 재난을 맞은 이후부터는 상대 플레이어와 무작정 협력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영혼 소멸'이라는 끔찍한 수단을 택해야 한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자면 4번째 게임까지는 전혀 영혼을 소멸시킬 이유가 없는 게 이 게임이었다.

공격적인 전략을 시도하는 건 하책. 4번째 게임까지 내정을 다지고 중간 이상의 군대를 가지되 수비 중점으로.

이게 아마도 정석. 그리고 소온은 이 정석 전략에 대한 논리적 확신이 있었다.

이건 필승 전략이다. 무조건 이기는 전략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가장 기대값이 높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우리 세계 총점은 21,221. 원래는 3레벨이어야 정상이고, 협동으로 5레벨에 이르렀다. 심지어 군사력은 4레벨을 조금 넘는 1,300점이나 돼. 설령 세 배나 네 배의 군사력을 적이 가지고 있어도 목책과 토성, 그리고 이 세계에 존재하는 〈신비〉를 이용하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어. 약간 문제가 되는 건 동맹 플레이어들이 내 지배력에서 벗어나려는 과정 때문에 여덟 부족의 연합체라는 장점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 걸까.'

그건 정치력으로 해결하면 된다. 그래서, 일어난 네 번째 세계 충돌,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이건 본 승부도 아니니까.

상대가 설마 2만 1천 점을 넘겠나.

설령 넘어도 군사력이 한 5천 점을 넘겠나.

그렇다 할지라도 동맹을 요구하지 않겠나.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에게는 '합리'와 '이치'라는 압도적인 무기가 있었다.

"다음 세계의 신은······'비인' 음? 왜 동맹 신이나 하위 신들 이름은 안 뜨지?"

"안 뜨는 게 아니라 해당 플레이어는 모든 상대를 다 소멸시키고 올라온 겁니다."

천사의 말에 순간 소온은 뇌가 정지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차원문이 열리고, 자기 부족이 차원문 너머로 보낸 사절이 하늘에 떠 있는 '그것'을 보고, 순식간에 찢겨 죽고, 그다음 차원문에서 뛰쳐나온 껍질 쓴 괴생명체들이 연약한 부족의 민간인들을 몸통 박치기로 짓이기며 그 고기를 뜯어먹기 시작했을 때.

"전원 전투 준비! 악마가 나타났다!!!"

소온은 의식의 끈을 놓아버리는 대신 다급히 최고 위기 경보를 울리며 세계 내 모든 방위군을 소집하기 시작했다.

20화. 세계 충돌 -네 번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