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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 26-33

26화 초대장

"하하하-."

마크는 화를 내지 않고 웃음을 터뜨렸다.

갈라하드도 같이 웃었다.

이내 웃음이 뚝 그쳤다. 갈라하드는 조금 더 웃었다.

"특무대 아래로 들어오라는 말인가?"

마크의 말이 짧아졌다. 신경질적인 말투였다.

그와 반대로 갈라하드는 여유롭게 웃었다.

"그냥 들어오라고 하겠나. 조건이 있지."

"말해봐."

"흑마법학회는 전선을 무너뜨리려고 하네."

"왜-."

단말마 같은 의문이 터졌다.

합리적인 의문이었다. 대대에 붙어서 마족의 피를 받고, 마석을 캐면서 부를 쌓는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전선을 무너뜨리고 싶어 할 거라고 어떻게 예상하나.

다만, 마법사란 족속들은 늘 예상하기 힘든 쪽으로 움직였다.

"마물 조련사의 흔적도 나왔다네."

이어진 말에 마크가 숨을 잠시 멈췄다. 이내 표정이 돌아온 마크가 계속해보라는 듯 까닥거렸다.

"그 부분을 내가 맡겠네."

"그 부분?"

"마석장과 흑마법학회. 어차피 마석장 포기 못 하지 않나?"

마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묘한 긴장감에 갈라하드는 연초를 깊게 들이마셨다. 마나가 빠르게 돌아갔다.

"어떻게 맡겠다는 거지?"

"내가 코르튼과 동문이지 않나."

"그렇게 친해 보이지 않던데."

갈라하드는 대답 대신 웃었다.

"아카데미 동문은 제법 끈끈하다네. 서로 부탁을 주고받았지. 그쪽은 당분간 말썽을 안 부릴 거야. 내 부탁이거든."

갈라하드는 챙겨둔 마석을 꺼냈다. 코르튼에게 선물 받은 것 중에서도 제일 품질이 좋은 마석이었다.

그를 본 마크가 침음성을 흘렸다.

"사실이군."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네."

"코르튼이 그 쪽에게 한 부탁은 뭐지?"

"······비밀일세."

갈라하드는 작게 기침하며 대답했다.

마크의 눈에 의심이 짙어졌지만, 부탁의 정체를 밝힐 수 없었다.

"첩자를 자청하겠다는 건가?"

"비슷하네."

"원하는 건?"

"말하지 않았나. 내 아래로 들어오라고."

"농담 아니었나?"

"나는 유머 감각이 뛰어난 편일세. 농담이었다면, 자네가 알았을 거야."

툭, 마크의 손가락이 멈췄다. 마크의 어깨가 아주 살짝 움직였다. 테이블이 길게 늘어졌다-.

갈라하드는 바로 양쪽 손가락을 튕겼다. 갈라하드의 앞쪽으로 반투명한 방어막이 떠올랐다.

어느새 마크의 손에 창이 들려 있었다. 화려한 장식이 새겨진 뾰족한 창이었다.

마크의 창이 갈라하드의 방어막을 가벼이 찢었다. 좋은 창이었다.

"북부는 대뜸 무기부터 들이미는 게 전통인가."

갈라하드는 바로 앞에 멈춘 창을 보며 혀를 찼다.

"이런 마법은 처음 보는군."

마크가 제 목에 겨눠진 뾰족한 얼음송곳을 보며 감탄했다.

둘의 결과가 같았지만, 마크의 창이 조금 더 빨랐다.

갈라하드가 왼쪽으로 얼음송곳을, 오른손으로 방어막을 동시에 주문했기에 그나마 이 정도였다.

'거리를 좀 더 둬야겠군.'

마크가 찌르지 않을 걸 확신했기에 내준 거리였다.

다만, 마크의 실력이 진짜였다.

그 무기가 창이라는 것도 예상 밖이었다.

'대장이라-.'

재밌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당장이라도 놈들을 전부 죽일 수 있습니다."

마크의 말투가 다시 격식을 차렸다. 갈라하드는 작게 웃으며 끄덕였다.

"다만, 놈들이 제법 잘 숨었네. 자네가 다 죽이기 전에 도망치겠지."

"그러겠죠. 벌레 같은 놈들."

마크의 창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귀신같은 솜씨였다. 갈라하드는 굳이 제 실력을 보여준 마크에 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덕분에 이제 마크의 창이 갈라하드를 위협할 상황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좋군요. 다만, 밑으로 들어간다는 건 맞지 않습니다. 규모의 차이가 너무 크니 오히려 이상하게 볼 겁니다."

"합리적이군."

"동맹 관계로 하시죠."

여우 같은 놈이군. 갈라하드는 혀를 내둘렀다.

동맹으로 가자는 건, 자신과 묶자는 뜻이었다. 배신하지 못하도록-.

나쁠 게 없었다.

애초에 갈라하드가 노린 것도 동맹이었다.

놈의 문제가 갈라하드의 것이 되듯, 갈라하드의 문제가 놈의 것이 되는 법이었다.

마크는 모르겠지만, 갈라하드의 문제는 마크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컸다.

이득 보는 장사였다.

"언젠가 들어올 텐데, 빨리 들어오는 게 낫지 않나? 지금 들어오면 개시 손님이니 더 대접해주겠네."

"괜찮습니다."

마크가 딱 잘라 거절하며 손을 내밀었다.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굳은살 가득한 손이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맞잡았다.

"손이 거치시군요. 검을 쓰셨습니까?"

"이것저것 많이 했지."

마나를 넣어봤지만, 딱히 소용없었다.

오러는 마나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다급하게 들어온 루미안이 손을 맞잡은 둘에 멈췄다.

맞잡은 손을 풀었다. 갈라하드는 손을 코트에 비벼 닦고 연초를 물었다.

"무슨 일인가."

마크의 물음에 루미안이 갈라하드를 곁눈질했다. 갈라하드는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줬다.

"걱정하지 말게. 동맹이니까."

"······동맹이요?"

"괜찮으니 말해."

마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주저하던 루미안이 입을 열었다.

"4중대가 사라졌습니다."

중대가 사라졌다-. 습격을 당한 것도 아니고 사라졌다?

"자세히 말해보게."

갈라하드가 묻자, 루미안이 뭐냐는 듯한 눈빛으로 마크를 쳐다봤다.

"말해주게."

"경계 업무를 끝내고 복귀하던 중에 연락이 끊겼습니다."

'지부장이 없었지-.'

사라진 중대와 자리에 없던 지부장이 연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최소 인원만 제외하고 전부 수색으로 돌려. 부대장은?"

"아래에 대기 중입니다. 아, 훈련을 핑계로 샜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건 찾고 나서 문책할 일이고, 일단 찾아. 부대장한테 직접 인솔하라고 해."

마크가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갈라하드가 손을 들었다.

"우리도 도와주겠네. 동맹 좋다는 게 뭔가."

"······루미안, 부대장한테 이야기해두게."

루미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크를 쳐다봤다.

마크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자리는 비워두게. 바로 쓸 수 있도록."

갈라하드가 나가자, 루미안이 마크를 보면서 물었다.

"자리를 비우라니-. 저건 무슨 소리입니까?"

"아, 3층을 특무대에 주기로 했네."

"······네? 혹시 술 드셨습니까?"

"술은 진작에 끊었네."

"그러면 왜 그런 미친 짓을 하셨습니까?"

루미안의 거친 물음에 마크는 작게 혀를 찼다.

갈라하드의 제안은 합리적이었지만, 그렇다고 꼭 필요한 제안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마크는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제안을 받은 이유는-.

"웃고 있더군."

창이 목을 겨누고 있는데도 갈라하드는 웃었다.

마크의 창을 앞에 두고 웃은 이는 한 명밖에 없었다.

[대공의 목에 창을 겨누다니. 재밌구나.]

"생각해보니 대공의 사위였군. 밑으로 들어갈 걸 그랬나. 대우 잘해주겠다던데-."

"마크 대장!"

****

길버튼은 데미안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검을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피가 덕지덕지 묻은 검을 검집에도 넣지 않고 땅에 질질 끌고 다니다니-. 기사인 길버튼에게는 악몽과 다름없었다.

그에 답답해진 길버튼은 먼저 닦아주겠다고 말했다.

"검을 닦아요? 왜요?"

"검의 날이 무뎌지면 예리함이 떨어진다. 검은 애인이나 다름없는데, 더러운 애인이 좋나?"

"형은 길버튼 아저씨가 더럽다고 했는데요."

길버튼은 작게 기침했다. 그 인간, 애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

"잘 보거라, 알려줄 테니."

길버튼은 데미안의 검을 천천히 닦았다. 피가 잔뜩 늘어 붙어서 쉽지 않았다.

"그웬, 불 좀 주겠나."

"네에! 불, 불, 불!"

그웬의 불로 검을 지지자 불순물들이 떨어졌다. 길버튼은 검을 숫돌에 천천히 갈았다.

"검을 갈 때는 한 번에 다 갈려고 하지 말고 천천히 부위를 나눠서 갈아야 한다. 균형 있고 느긋하게-."

더러운 것들이 떨어지면서 날이 점차 모습을 드러냈다. 길버튼의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볼 때마다 거슬렸던 그 더러운 것들이 떨어져 나가니 속이 다 시원했다.

'좋은 검이군.'

투박한 생김새였지만, 검날이 굉장히 예리했다.

이렇게 관리를 안 했는데도 상태가 좋았다. 병사가 들기에 지나치게 좋은 검이었다.

"좋은 검이군. 어디서 얻었지?"

"주웠어요. 줄까요?"

준다니-. 저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검은 네 애인이라고 하지 않았나. 남한테 주거나 빌려주는 건 절대 안 된다."

"애인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있어요?"

길버튼은 다시 묵묵하게 검을 갈았다.

이내 손질이 끝난 검은 맹수의 발톱처럼 예리했다.

또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닐 게 분명했기에 길버튼은 천으로 검을 돌돌 말아줬다.

"착하시네요."

"검이 이런 대접받는 꼴을 못 볼 뿐이다. 네놈을 위해서 해준 게 아니야."

길버튼은 단호하게 말했다.

땡땡땡땡-.

그때, 요란한 소리가 들리면서 소란스러워졌다.

막사 천을 걷으니 어두운 밤을 뛰어다니는 횃불이 많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길버튼은 검을 뽑기 좋은 위치로 돌렸다.

"무슨 일입니까?"

어느새 무장한 톰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달이 일어난 것 같군. 습격은 아닌 것 같고-."

길버튼은 아직 갈라하드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대장은?"

"아직 안 오셨습니다만-."

톰이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어딘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갈라하드가 사라지고 갑자기 경보가 울린다니-.

"설마 5대대 대장을 번개에 튀겼나?"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길버튼은 진지했다. 헤르문 이후로 갈라하드는 상대가 조금 건방지면, 번개를 떨구겠다고 말했다.

갈라하드는 상대가 대장이라고 주눅들 사내가 아니었다.

길버튼은 병사들이 갈라하드의 이름을 외치는지 확인했다.

땡땡땡땡!

요란한 종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그때, 갈라하드가 멀리서 보였다.

갈라하드는 평소처럼 여유로웠다. 입에 연초를 물고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걸었다.

"오, 일어나 있었군."

"튀겼습니까?"

"튀기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러면 저건 뭡니까."

길버튼은 소란스러운 밖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중대가 실종되었다더군. 마침 잘 됐어, 바로 출발하지."

"어디 말입니까?"

갈라하드가 연초를 털면서 뒤쪽을 가리켰다.

"동맹 부대의 중대가 사라졌다는데, 당연히 도와야 하지 않겠나?"

"동맹 부대라니? 우리한테 동맹이 있었습니까?"

"아, 5대대와 동맹을 맺었네."

길버튼은 눈을 구기고 문장을 작게 중얼거렸다.

5대대와 동맹? 5대대는 어떤 파벌에도 들어가지 않는 대대였다. 그런 5대대가 다섯 명인 특무대랑 동맹이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

북부에서 동맹은 그리 간단한 관계가 아니었다.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게 동맹이었다.

다만, 길버튼이 본 갈라하드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갑자기 왜 동맹을-. 번개에 튀기겠다고 협박했습니까?"

"뭘 자꾸 튀겼다는 건가. 그냥 얼음송곳만 겨눴네. 준비하게. 자세한 건 가면서 말해주겠네."

갈라하드의 목소리는 친절했지만, 틈이 없었다.

짐을 챙긴 톰과 데미안을 챙긴 그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송곳이면 협박한 거 아닌가?'

아무튼, 결과가 좋아서 다행인 듯했다.

****

북부의 밤은 유난히 어두웠다. 그 아래에 눈까지 자욱하게 깔린 터라,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더불어 얼마나 추운지 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몸이 살짝 어는 기분이었다. 그나마 톰이 짜준 코트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몸을 데우는데 마나를 상당히 썼을 듯했다,

'실종이라-.'

갈라하드는 앞쪽에 있는 병사들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자리에 없는 지부장과 근처에서 발생한 중대의 실종, 둘 사이에 연관이 있을 듯한 예감이 들었다.

그때, 병사들 사이에서 기사로 보이는 인물이 다가왔다. 갑옷 위에 코트까지 걸치니 거의 오크처럼 거대했다.

사내는 큼지막한 도끼를 허리춤에 두 개 메고 있었다. 도끼를 쓰는 듯했다.

"7중대 중대장 헨리입니다."

자신을 헨리라 소개한 사내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조금 건방진 태도였지만, 갈라하드가 북부에서 받은 인사 중에서 제일 신사적이었다.

"길버튼 경!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길버튼을 발견한 헨리가 목청을 높이며 손을 내밀었다. 연예인이라도 만난 태도였다. 이후로도 병사들과 기사들이 길버튼을 찾았다.

길버튼은 제법 인기가 많았다.

"저 1대대 출신입니다."

"그래, 알고 있네."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정면을 살폈다.

야밤에 눈밭이었지만, 추격 속도는 상당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뭔가 와요."

데미안이 검에 둘둘 말린 천을 풀며 말했다.

갈라하드는 하늘을 가리키며 손가락을 튕겼다.

환한 불빛이 폭죽처럼 올라가서 터졌다. 화려한 불빛이 주변을 가득 밝혔다.

빼곡한 나무 사이로 눈이 붉은 늑대들이 보였다. 덩치는 전보다 작았다. 마물과 맹수 그 사이 어디쯤 있는 놈들인 듯했다.

"원래 이렇게 마물이 자주 나오나?"

"이게 자주 나오는 겁니까?"

길버튼의 되물음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북부는 도대체 어떤 곳일까.

그때, 빛 하나가 더 떠올랐다.

그웬이었다.

"이제 말하지 않아도 잘하는군."

"헤헤-."

정수리에 빛무리를 올린 그웬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수가 많아서 제법 위협적이었다.

"저녁은 늑대 고기다!"

헨리가 양손에 든 도끼를 번쩍 올리며 호탕하게 소리쳤다. 그 수염 가득한 입가로 입김이 길게 뿜어졌다.

헨리는 소리를 지르면서 대뜸 앞으로 뛰어갔다. 쿵쿵! 걸음마다 눈발이 거칠게 튀었다. 헨리가 땅을 박찼다.

쿠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덩치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활시위처럼 허리가 휘어지며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도끼가 늑대의 머리에 그대로 박혔다. 붉은 피가 가득 뿌려졌다. 헨리는 입을 벌리며 뿌려지는 피를 마셨다.

"만찬이다-!"

다른 병사들도 무기를 뽑고 환호하며 달려갔다.

사냥인지, 전투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거친 싸움이 시작됐다.

검을 뽑은 길버튼이 합세했다. 길버튼의 검에 찬란한 오러가 가득했다.

길버튼의 검이 늑대를 가벼이 갈랐다. 그 가죽 사이로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하얀 눈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북부의 병사들은 정말 무식하게 잘 싸웠다.

마물의 등에 타서 목을 잡고 조르는 놈도 있었고, 도끼질하겠다고 주둥이에 어깨까지 집어넣는 놈도 있었다.

일 검에 늑대를 베었다며 웃는 놈까지-. 아, 저건 길버튼이군.

"길버튼 경이 신난 것 같군."

"저도 싸워요?"

데미안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전황을 살폈다.

"역시 길버튼 경입니다!"

"내 뒤를 따르게."

길버튼은 북부 야만인 사이에 완벽하게 녹아들어 있었다.

도움은 필요 없는 듯했다.

"괜찮네, 우리 몫까지 길버튼 경이 해줄 것 같군."

데미안이 천으로 검을 감았다. 그 엉성한 모습에 그웬이 해주겠다며, 팔을 걷어부쳤다. 더 못했다.

결국, 톰이 검을 감았다.

갈라하드는 톰이 만들어둔 육포를 뜯었다.

"육포 맛이 상당하군."

"······저 이렇게 맛있는 육포 처음 먹어봐요."

"더 줘요."

"데미안, 적당히 먹게. 일하고 있지 않나."

데미안이 입맛을 다셨다. 그웬이 자신의 몫 육포를 슬쩍 데미안에게 줬다. 데미안은 거절하지 않고 한 번에 삼켰다.

전투는 압도적이었다. 사냥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 정도였다.

그중 발군은 길버튼이었다.

짐승이면 도망갈 텐데, 마물이라 그런지 끝까지 도망가지 않고 뒤엉켰다.

길버튼이 사체 하나를 끌고 왔다. 피범벅이 된 길버튼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길버튼은 갈라하드 앞에 사체를 놓았다.

예상대로 마물의 배에 뭔가 새겨져 있었다.

다만, 그 내용이 갈라하드의 예상과 달랐다.

'재밌군.'

마법진의 형상이었지만, 마법진은 아니었다.

"마물 조련사 마법진입니까?"

"이건 편지일세. 나한테 보내는 편지."

"편지?"

말도 안 된다는 듯 길버튼이 찡그린 눈으로 살폈다.

"내용이 뭡니까?"

"중대를 살리고 싶으면, 나 혼자 오라는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었다. 그웬이 냉큼 불을 붙여줬다. 레몬 향이 풍겼다. 머리가 명료해졌다.

그때, 뒤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병사들의 환호가 터졌다. 피범벅인 북부의 상남자들이었다.

협박한다고 순순히 따라갈 놈들이 아니었다. 그런 놈들을 꾀어내다니-. 도대체 어떻게 한 걸까. 마법인가? 그런 마법이 있나? 짙은 궁금증이 올라왔다.

무엇보다-.

'나를 노리고 벌인 짓이군.'

편지는 정확히 갈라하드를 지목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정보국 안가의 마족이 떠올랐다. 그 마족은 정보국의 갈라하드를 알고 있었다.

갈라하드의 이름은 북부의 안가에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볍지 않았다. 정보국의 본청에서 갈라하드의 정보를 넘긴 게 분명했다.

그를 벌일만한 놈은···.

'많군.'

일을 잘했기에, 적이 많았다.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갈라하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초대장을 받았으니, 가야 하지 않겠나."

"···초대장? 함정입니다."

"자네는 당연한 걸 진지하게 말하는군."

갈라하드의 타박에 길버튼은 눈을 찡그렸다.

"함정인 걸 알면서 왜 갑니까."

갈라하드는 연초를 깊게 마시며 대답했다.

"함정이니까."

길버튼은 그 짧은 대답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자 갈라하드가 말을 덧붙였다.

"사냥꾼은 늘 함정 주변에 있는 법일세."

뜻을 이해한 길버튼의 눈이 구겨졌다.

"사냥꾼을 잡겠다고 직접 함정에 걸리겠다는 말입니까?"

갈라하드가 정답이라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미쳤군."

"자네, 말이 짧아졌네."

"같이 가겠습니다."

길버튼은 검을 고쳐 잡으며 말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자네는 길버튼 아닌가. 혼자 오랬는데, 자네를 끼고 가면 도망치지."

갈라하드는 지나칠 정도로 합리적이었다.

자기 목숨이 걸리면 움츠러들거나 위축되기 마련인데, 갈라하드는 늘 그렇듯 여유롭게 냉철했다.

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러면 혼자 가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데미안과 갈 생각일세. 데미안은 소년으로 보이니까 봐주겠지. 데미안, 도와주겠나?"

"네, 형."

데미안이 검을 삐딱하게 들며 일어났다.

"제가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괜찮네, 길버튼 경은 여기서 회포나 풀고 있게. 아까 보니 사이가 좋더군."

갈라하드의 가라앉은 눈에 길버튼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검은 내가 들겠네."

"애인이라고 주지 말래요."

"그건 길버튼 경의 개인적인 취향일세."

도란도란 대화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둘의 모습에-.

길버튼은 이유 모를 섭섭함을 느꼈다.

27화 마을 잔치

눈길 사이로 굵은 발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아주 가시적인 초대장이었다.

'발자국이 하나인데.'

중대가 사라졌는데, 하나밖에 없는 발자국이라니-.

갈라하드는 쪼그려 앉아서 자세하게 살폈다. 발자국에 작은 굴곡이 있었다.

'겹친 발자국이군.'

여러 명이 놀이라도 하듯 일렬로, 똑같은 보폭으로 걸은 흔적이었다.

겹친 자국에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다섯 명은 넘었다.

'중대가 서로 발걸음을 맞춰서 일렬로 걸었다고?'

어떤 협박을 해야 중대가 전부 일렬로 발을 맞춰서 걸을까.

그 방식을 가늠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협박은 아니었다.

연초를 깊게 마셨다. 레몬 향이 퍼지며 몽롱한 정신을 깨웠다.

'일자로 보폭까지 맞춰서 실종이라-.'

협박이 아니라면 다음 가능성은 마법이었다.

인간의 마법은 기본적으로 속성을 더 했다. 그렇지 않으면 위력이 안 나오기 때문이었다.

속성 없는 마나 화살이 괜히 1위계로 분류되는 게 아니었다.

번개를 내리쳐 인간을 튀기거나, 불로 굽는 건 쉬워도 그 정신을 건드리는 건 난도가 꽤 높았다.

속성 없이 밀도 높은 마나로 상대의 두뇌를 건드리면, 순간적으로 착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갈라하드가 애용하는 회유 방법이었다.

다만, 중대 전체에 정신 마법을 거는 건 불가능했다.

이건 마법보다는-.

'아, 마족이겠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신에 관여하는 마족이라니-. 갈라하드는 안쪽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데미안이 든 횃불이 어둠을 밀어냈다.

'그게 여기쯤······. 아, 있군.'

[대장 하나가 이유 모를 돌격 명령을 내려, 전선의 축이 무너졌다.]

만약 정신을 움직이는 마족이 있다면, 이 부분이 설명될 수 있었다.

"정신을 건드리는 마족일 것 같군."

갈라하드는 수첩을 다시 넣으며 말했다.

"정신이요?"

데미안의 덤덤한 물음에 끄덕였다.

"협박으로 둘에서 셋까지는 되겠지만, 이런 기차놀이는 불가능하지. 정신을 건드리는 마족인 것 같네. 흥미롭군."

"그렇군요."

"괜찮겠나?"

"아니요, 배고파요."

"괜찮군."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정신계 마법을 파훼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정신을 아예 단순화하는 거였다. 정신은 투박하고 단순할수록 건드리기 어려웠다. 단순할수록 그 근간이 두껍기 때문이었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이런저런 말로 꼬시기 쉽지만, 배고프다는 생각이 전부인 놈은 밥을 주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다른 하나는-.

"이제부터 떨어지지 말게. 떨어지면 의심하는 걸세."

"네, 배고파요."

"조금만 참게."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언제든 꺼낼 수 있도록 연초를 더 편하게 위치시켰다.

"데미안. 신호를 주면, 내게 검 좀 박아주게."

"네."

"더럽게 아프지만, 치명적이지 않은 곳으로."

주저 없이 끄덕이는 데미안이 참으로 믿음직했다.

준비를 마친 갈라하드는 발자국을 따라서 걸었다.

"자네는 꿈이 뭔가?"

"없어요."

"꿈은 이정표일세. 꿈이 없으면 길을 잃기 쉬운 법이지."

"있어요?"

"있지. 평안한 노년을 보내는 걸세. 따뜻하고 깨끗한 중부에서 여유롭게 마법서를 읽으면서."

"저는 늙어서도 고기를 배불리 먹을 거예요."

"그건 너무 단순하지 않나."

"빵도 먹을 거예요."

"한결 복잡해졌군. 좋은 신호일세."

갈라하드는 데미안과의 대화를 계속 이어갔다. 정신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대답이 짧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데미안은 꽤 좋은 대화 상대였다. 물론, 대답의 대부분은 '배고프다'였지만-.

한참을 걷자 목책을 두른 마을이 나타났다.

발자국은 마을로 이어져 있었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에서 동떨어진 느낌이 드는 마을이었다.

목책 위의 횃불이 등대처럼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발자국을 따라서 도착한 곳이 마을이라-.

'중대의 발자국이 아니었나?'

무엇이 됐건 초대장은 마을로 이어져 있었다.

"시끌벅적한 걸 보니 잔치라도 벌이고 있나 보군."

"그래요?"

데미안의 대답에 작게 웃으며 마을로 향했다.

마을에 가까워지자 왁자지껄 떠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배경 음악처럼 깔렸다.

앞에 도착할 때까지 어떤 제재도 없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목을 가다듬었다.

"이보시오!"

소리를 지르고 조금 지나자, 목책 위로 얼굴이 나왔다. 군인처럼 무장한 중년의 애꾸 사내였다. 술이라도 마셨는지 얼굴이 붉었다.

"누구시오?"

목책 위에 선 중년의 사내가 큼지막한 쇠뇌로 갈라하드를 겨눴다.

"5대대에서 나왔소."

"······5대대?"

중년의 사내가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여기 지나간 중대 없나?"

"중대? 군인들 몇이 지나가긴 했소. 상태가 조금 이상해서 안 받아줬지!"

그 대답에 갈라하드는 아래쪽을 살폈다. 발자국이 너무 많았다. 그중 멀어진 발자국도 있었다.

'잘못 온 건가?'

갈라하드의 눈이 구겨졌다. 연초를 깊게 마셨다.

발자국이 많았다. 다른 곳으로 샜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게 더 가능성 높나?

고개를 들어 목책 위의 사내를 응시했다.

"그렇군, 날이 늦었는데 쉬고 가도 되겠소?"

"음, 기다리게. 촌장님을 불러오겠네."

잠시 뒤에 목책 위로 노인이 올라왔다. 인상 좋은 노인이었다.

"누구신가?"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일세."

"특무대? 그게 뭐야?"

노인이 옆을 보며 물었다.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더니, 다들 고개를 저었다.

"옆에는?"

"내 시종일세."

소년을 시종으로 쓰는 못된 놈이라고 작게 욕이 들렸다.

"손님을 보낼 수는 없지. 열어라!"

인심이 좋은 노인 덕분에 목책은 금방 열렸다.

안은 시끌벅적했다. 웃음소리와 악기 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여우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 정수리 부분에 자리한 여우 얼굴이 퍽 귀여웠다.

"반갑네, 촌장 해드릭이네. 가라하드라고 했나?"

"갈라하드일세. 반갑군."

갈라하드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노인은 그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과 악수하지 않네."

"왜지?"

"전해 내려오는 괴담이 있거든. 사람을 홀리는 마족-."

"사람을 홀린다?"

갈라하드는 짙은 흥미를 느꼈다. 그에 노인이 기침하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괜히 손바닥을 보이는 의도가 투명했다.

"이건 오늘 숙박과 음식값일세."

은화 하나를 튕겨 건넸다.

"이거 통이 크시군."

"아이가 좀 많이 먹어서."

"아이가 먹어봤자 얼마나 먹겠는가."

노인의 말에 갈라하드는 소리 내어 웃었다. 노인이 못마땅하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사람을 홀리는 마족 이야기를 마저 해주겠나."

"여기 숲에는 사람을 홀리는 마족이 있네. 아주 옛날부터 전해지는 이야기지. 그 마족은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접근하여, 홀려서 숲으로 데려가지. 중대를 찾는다 그랬나?"

"그랬지."

"아마 그 마족이 데려갔을 것이야."

횃불의 주황빛이 노인의 얼굴에 음영을 더했다. 자글자글한 주름에 그림자가 깊게 생겼다.

'헛다리인가.'

갈라하드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 마족 어디 있는지 아나?"

"자네, 마족 무서운 줄 모르는군."

"무서운가?"

갈라하드의 물음에 노인의 입이 멈췄다. 이내 피식 웃은 노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당연히 무섭지. 마족 위치를 우리가 알겠나? 알았으면, 진작 부대에 연락을 넣었을 걸세."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초대장이 다른 곳으로 이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근데 자네, 우리 마을을 모르다니.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군?"

노인이 입을 씰룩거렸다.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 난 얼굴이었다.

"5대대 대장이 우리 마을 출신이거든. 더불어 4대대에도 우리 마을 사람들이 제법 들어갔지. 그 덕분에 두 대대 사이에 있는 우리 마을이 평화로운 거지."

노인의 말은 제법 타당했다. 갈라하드는 끄덕였다. 그렇게 된 거군.

"그런 걸출한 청년들을 배출한 마을이다- 이거야. 우리 마을을 모르다니. 쯧쯧."

갈라하드는 슬쩍 뒤를 확인했다. 애꾸 중년 사내가 쇠뇌를 매만지고 있었다.

"군인 출신인가?"

"북부에 군인 출신 아닌 이는 없소만."

투박한 대답이었다.

"자네, 운이 좋군. 잔치하는 날 오다니."

노인이 활짝 웃으며 뒤를 가리켰다. 마을 중심의 공터였다. 장작이 가득 쌓여 있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이와 그 옆에서 춤을 추는 여인들, 모락모락 연기가 나는 고기들까지-. 마을 잔치였다.

"오늘은 내 딸 생일이라네."

노인의 얼굴에 푸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내 노인이 갈라하드를 보며 눈을 찡그렸다.

"조심하게! 우리 딸아이는 아주 미인이니까. 괜히 껄떡대면 국물도 없을 거야."

"아, 걱정하지 말게. 나는 약혼자가 있으니."

"그래도! 우리 딸아이를 보려고 마을을 찾아오는 이들이 줄을 설 정도라네!"

이어진 노인의 경고에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장담하건대 내 약혼자가 더 아름다울 걸세, 걱정하지 말게. 내 약혼자보다 아름다운 건 불가능하니까."

"······거참 대단한 사랑이군?"

"사랑이 아니라 지극한 사실일세."

노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휘저었다.

"아내가 굉장히 이쁜 청년, 가만히 있지 말고 좀 돕게."

노인의 타박에 갈라하드는 쌓인 장작으로 향했다.

꼬맹이 하나가 횃불로 불을 붙이려 노력하고 있었다.

"내가 도와줘도 되겠나?"

"어려울 텐데!"

꼬맹이가 당돌하게 쏘아붙였다.

갈라하드는 일단 지켜봤다. 꼬맹이는 제 머리보다 큰 횃불을 장작더미에 밀어 넣었다.

장작이 눈에 젖었는지 불이 좀처럼 붙지 않았다. 꼬맹이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한참이나 끙끙거리던 꼬맹이가 갈라하드에게 횃불을 건넸다.

"해보고 싶은 것 같아서 주는 거야!"

"고맙네, 정말 재밌어 보여서 꼭 하고 싶었거든."

꼬맹이가 까랑까랑하게 웃었다.

갈라하드는 횃불을 장작에 넣고 손가락을 튕겼다. 횃불의 불이 순식간에 커졌다.

"와아아아-!"

꼬맹이가 탄성을 터뜨렸다. 이윽고 장작에 불이 붙었다. 작게 시작한 불이 순식간에 거칠게 타올랐다.

"어떻게 했어?!"

"비밀일세."

"에에에에?! 치사해!"

꼬맹이가 눈을 가득 구겼다.

"세상은 원래 차가운 걸세. 비밀을 알고 싶으면, 자네도 하나를 건네야지. 바로 비밀 거래일세."

"······비밀 거래?"

꼬맹이의 눈이 반짝였다. '비밀'과 '거래' 둘 다 꼬맹이에게 치명적인 단어였다.

잠시 주변 눈치를 보던 꼬맹이가 입을 열었다.

"우리 누나 곧 결혼해요!"

"음, 그건 비밀이 아닌데."

"비밀이에요! 아주 멋진 결혼식이 될 테니까!"

갈라하드는 꼬맹이의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빨리 알려줘요."

"마법일세."

"마-법-!"

꼬맹이가 찢어지듯 비명을 질렀다. 그에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장작을 더 가져오던 중년의 외팔이 사내도, 거대한 냄비를 휘젓던 여인도, 뭔가 준비하듯 지시하던 노인도-.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반갑네, 마법사일세."

갈라하드는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줬다.

"마법사라는 말은 없었잖소!"

노인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목청을 높였다.

"안 물어보지 않았나."

"젠장! 마법사를 들이다니!"

노인이 격한 반응을 터뜨렸다. 중년 사내의 쇠뇌가 다시 갈라하드를 겨눴다. 갈라하드는 양손을 들었다.

"왜 이렇게 야단법석인가."

"마족의 하수인 아닌가! 마족이 쳐들어올 것이다!"

진정시키려 했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노인의 외침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흉흉해졌다. 중년 사내의 손가락이 쇠뇌의 방아쇠로 들어갔다.

그때, 한쪽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진정하세요. 좋은 날이잖아요."

꼭 사탕처럼 달콤하고 낮잠처럼 나른한 목소리였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수수한 옷을 입은 여인이 다가왔다.

비정상적으로 아름다운 외모였다.

물론, 아드리안나 정도는 아니었지만, 시선을 잡아끄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보는 순간 갈라하드의 가슴이 울렁였다.

"아, 그래. 좋은 날이지! 아만다!"

저 노인에게서 저런 여인이 나올 수 있다니, 갈라하드는 감탄했다.

"잔치가 끝나면 바로 떠나시오. 돈을 돌려줄 테니까."

"야박하군."

"정체를 숨긴 그쪽이 자초한 일이오."

이윽고 잔치가 시작되었다. 거칠게 타오르는 불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이 둘러서서 떠들고 노래를 불렀다.

화기애애한 웃음이 터졌다. 그 중심에 아만다라는 여인이 있었다. 아만다는 자애롭게 웃으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웃었다.

왜 생일에 잔치까지 벌이는지 알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아만다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데미안은 가만히 갈라하드를 올려보고 있었다.

그때, 눈이 하나밖에 없는 사내가 기타처럼 생긴 악기를 연주했다. 뚱땅거리는 소리에 열기가 점점 더 해졌다.

아만다가 양손을 위로 들어 박수를 치며 빙글빙글 돌았다. 그 춤 솜씨가 제법이었다.

아만다의 춤이 뚝- 멈췄다. 아만다가 갈라하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춤에는 쥐약이라."

갈라하드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만다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람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고자라는 이야기가 퍼졌다.

아만다가 다시 춤을 추고 나서야 소란이 잦아들었다.

아만다의 춤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춤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몇 번이나 발이 멋대로 나갈 뻔했다.

이윽고 마을 사람들이 뒤엉켜서 춤을 추자, 아만다가 슬쩍 빠져나왔다.

갈라하드와 눈이 마주친 아만다가 붉은 입꼬리를 올렸다.

아만다가 춤을 추는 것처럼 통통 튀듯 다가왔다.

"마법사라고 들었어요."

"아주 뛰어난 마법사지."

"어머, 보여줄 수 있어요?"

아만다의 눈이 반달로 휘었다. 치명적인 눈웃음이었다.

아만다가 슬쩍 다가왔다. 아만다의 묘한 분위기가 갈라하드를 강하게 흔들었다.

'인기가 많으면 피곤하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검지에서 시작된 스파크가 중지를 타고 넘어가면서 형체를 갖췄다. 이내 꽃 모양의 번개가 갈라하드의 손바닥 위에 떠올랐다.

"와 진짜 이쁘다-."

갈라하드는 이어서 마법들을 펼쳤다. 이쁜 마법이야 갈라하드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그렇게 얼마나 마법을 돌렸을까-.

갈라하드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마을이 지나치게 평화로웠지만, 의심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실제로 그 근거도 제법 타당했다.

마을은 4대대와 5대대 사이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뭔가 부족했다.

갈라하드는 곰곰이 생각했다.

"우리 마을에는 전통이 있어요."

어느새 바로 옆까지 다가온 아만다가 속삭였다. 귀가 녹을 것 같았다.

[북부에서 불륜은 사형입니다.]

길버튼의 잔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애석하게도 길버튼은 여기 없었다.

"전통? 어떤 전통인가."

"성인이 되는 날에 짝을 선택해서 하룻밤을 보내는 거예요."

아만다의 붉은 입술이 보기 좋은 호선을 그렸다. 꼭 산딸기를 한 움큼 먹은 색이었다.

뒤에서 사람들의 웃음이 들렸다. 악기가 점점 더 빨라졌다.

땅땅땅땅-.

"참 화끈한 전통이군."

갈라하드는 텁텁한 목을 매만졌다.

뭐가 부족하지-.

땅땅땅땅-.

아만다가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춤이었다.

아만다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오늘은 제 생일이에요."

속삭임이 귀가 녹을 것처럼 달콤했다.

들뜬 숨과 옅은 향기-.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이거 데미안에게 보여주기 민망하군.'

땅땅땅땅-.

"아, 그렇군."

그제야 뭐가 부족한지 떠올랐다.

데미안이 갈라하드를 빤히 올려보고 있었다.

"부탁하네."

데미안이 주저 없이 갈라하드의 어깻죽지를 검으로 찔렀다.

기다린 것처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

어깨에서 화끈한 격통이 느껴졌다. 꽉 막혀 있던 피가 도는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마나가 돌았다. 마나의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다니-. 굉장하군.

갈라하드는 감탄하며 눈을 감았다 떴다.

시야가 점멸하듯 뒤바뀌었다.

거대한 장작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스라이 타오르는 불길이 비추는 풍경이 전과 달랐다.

누가 머리를 한 입씩 깨문 것처럼 윗부분이 열린 이들이 붉은 눈으로 갈라하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에 그들의 끔찍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사라진 중대를 찾았군.'

애석하게도 중대의 생환은 힘들 듯했다.

"어떻게 알았지?"

아만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 눈에서 짙은 흥미가 보였다.

확실히 그럴듯한 마을 설정이었다.

두 부대의 경계에 있는 것도, 각 출신에 얽힌 것도-. 의심할 구석이 없는 설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홀린 갈라하드가 짠 설정이었으니까.

거기에 부족한 게 하나 있었다.

"데미안이 배고프다고 하지 않더군."

"배고프다고 안 해서 칼에 찔렸다? 틀렸으면?"

"아니면 메꾸면 되지. 어깨는 하나 더 있네. 자네, 쪼잔하군."

"...쪼잔?"

갈라하드는 어깨에 뚫린 구멍에 손가락을 대며 대답했다. 표면만 막으면 문제없는 상처였다.

손가락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노릇노릇한 냄새가 풍겼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깔끔한 솜씨군. 잘했네, 데미안."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재밌네."

아만다의 붉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입꼬리의 끝에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나도 제법 재밌었네. 이 정도의 정신 간섭이라니-. 대단하군. 두개골은 왜 열어둔 거지? 그게 더 쉽나?"

아만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꼭 박쥐 같은 웃음소리였다.

"재밌어! 역시 그분이 찾을만해."

"그분?"

"미리 말하면 재미없지."

"그것도 그렇군."

"너, 인간 맞아?"

갈라하드는 대답 대신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건 열어보면 알겠지."

아만다가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머리가 열린 병사들이 다가왔다. 눈에 분노와 울분이 가득했다. 머리에서 흐른 피가 눈가를 타고 흘러 꼭 피눈물처럼 보였다.

그 발걸음 소리가 무거웠다.

"망할 마족 놈들! 감히 우리 어머니를 죽이다니!"

"죽이겠다! 내 목숨이 다하더라도!"

그들에게는 갈라하드가 마족으로 보이는 듯했다.

"우리 누나의 결혼식을 망치다니!!"

유난히 작은 병사가 뾰족하게 소리쳤다.

사무친 분노가 뚝뚝 흘러넘쳤다.

뾰족한 적의에 피부가 따가웠다.

조금 억울했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다.

이런 대접은 익숙했다.

"자, 데미안. 일할 시간일세."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입꼬리를 올렸다.

"네, 형."

데미안이 꺼억- 트림하며 검을 뽑았다.

잔뜩 신난 얼굴이었다.

28화 아만다

마족은 마법사의 천적이었다.

마족만으로도 힘든데, 정신 간섭까지 일으키다니-.

마법은 고도의 수식을 계산하는 아주 까다롭고 예민한 작업이었다.

그런데 정신 간섭을 일으키는 마족이라니-.

'최악이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깊게 빨았다. 몽롱한 정신이 일어났다. 흐릿했던 시야가 다시 돌아왔다.

웃고 춤추는 사람들이 예의 뚜껑 열린 병사로 변했다.

'범위인가.'

목책을 떠올리면, 범위는 대충 마을 전체일 듯했다.

그게 심해진 건, 아만다가 가까이 왔을 때였다.

순간 마법의 존재도 잊을 정도였다.

'접촉이군.'

아만다가 비비면서 기시감이 심해졌다.

'길버튼 경의 말을 들을 걸 그랬군.'

갈라하드는 농담을 중얼거리며 상황을 살폈다.

'뚜껑을 열면 제어하기 더 좋은 건가.'

뚜껑이 없으면 정신에 간섭하기 더 쉬운 듯했다.

분노를 토해내는 병사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잘 훈련된 병사들인데, 처절한 분노를 더하니 기세가 사나웠다.

"즐겁게 해줘."

그때, 아만다가 뒤로 물러나며 속삭였다.

시야가 흐려졌다. 즐거운 축제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따스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다시금 연초를 깊게 마셨다. 뚜껑 열린 놈들이 입에 담기 힘든 저주를 퍼부으며, 득달같이 달려왔다.

갈라하드는 안쪽의 수통을 꺼내 입에 물었다.

이제는 꽤 익숙해진 맛이 안쪽을 가득 불태웠다.

아니, 불태우려 했다.

중간에 있는 괴상한 놈이 움직이기 전까지는-.

'고통의 알?'

놈이 게걸스럽게 마족의 피를 잡아먹었다. 갈라하드가 막을 틈도 없었다. 마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놈이 더 달라는 듯 으르렁거렸다. 전보다 그 기세가 살짝 커졌다.

'···이건 예상 밖이군.'

고통의 알이 마족의 피를 대신 마셨다.

상당히 흥미로웠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변수였다.

마족 피 없이 마족을 상대하라니-. 무기까지 뺏긴 셈이었다.

그때, 병사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왈!"

고개를 돌리니 입가가 벌건 강아지가 있었다.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데미안이었다.

"데미안, 시간 좀 벌어주겠나?"

"네."

데미안이 땅을 박찼다.

연초를 깊게 빨았다. 뚜껑 열린 병사들 사이에서 구르는 데미안이 보였다.

데미안이 검을 비스듬히 피해내며 역수로 잡은 검을 휘둘렀다. 묘기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그 사이를 검이 노리고 찔렀다.

데미안은 몸을 비틀어 그를 피해냈다. 자신을 찌른 검의 등을 받침 삼아 움직였다.

이쪽으로 향하는 병사에 데미안이 급히 검을 내질렀다. 그로 발생한 틈에 데미안의 등이 베였다.

데미안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 얼굴도 여전히 평온했다.

'정신 간섭은 기본적으로 뇌에 관여하는 마법이다.'

접촉한 순간 아만다가 뭔가 심은 게 분명했다.

갈라하드는 왼손을 관자놀이에 댔다.

마나를 응축했다. 아니, 시도했다. 마나가 말을 듣지 않았다.

애초에 마나가 뭐지?

'지랄맞군.'

갈라하드는 어깨의 흉터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불로 지진 상처가 터지며 격통이 올라왔다.

정신이 돌아왔다. 손가락을 뽑지 않고 마나를 응축했다.

그제야 마나가 압축됐다.

다행히 고통의 알은 갈라하드의 마나를 노리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가진 패를 되새겼다.

"뭐 하려고?"

그때, 아만다가 속삭였다,

바로 옆에 아만다가 있었다. 헐벗은 몸이 갈라하드의 시선을 끌었다. 환상이 분명했다.

"영점 조절이라는 걸세."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압축한 마나를 관자놀이로 옮겼다.

농도 높은 마나로 가상의 뚜껑을 만들면, 정신 간섭을 약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마족이라도 이 인원을 다스리려면, 힘이 분산 될 수밖에 없었다.

"실수하면 터질텐데?"

"실수를 안 하면 되겠군."

머리는 섬세했다. 작은 실수로 어딘가 잘못될 수도 있었다.

다만, 무언가를 얻으려면 무언가를 걸어야 했다.

마나를 압축한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자 주변이 똑바로 보였다.

불타는 마을, 저주의 말을 퍼부으며 달려드는 뚜껑 없는 병사들 사이에서 뒹구는 데미안-.

갈라하드는 슬쩍 손가락을 뗐다.

순간 시야가 뒤틀렸다.

'오, 이런 식이군.'

갈라하드는 작게 감탄했다.

"와아-, 너 정말 대단하구나?"

"지겨운 칭찬일세."

아만다에 대고 반대쪽 손가락을 튕겼다.

마법은 다른 방향으로 쏘아졌다.

"마법사인 네가 주인인 나를 거스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아만다가 박쥐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신 간섭을 인식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응축한 마나를 머리에 둘렀는데도 정신 간섭을 막을 수 없었다.

저건 단순히 정신 간섭이 아닌 한 차원 높은 무언가였다. 단서를 추적했다.

데미안이 아니었다면, 마을의 구성은 완벽했다. 갈라하드의 무의식이 짰기에-.

"무의식을 자극하는 거군."

아만다의 웃음이 뚝- 멈췄다.

"알면 뭐가 달라져? 너 자신이 방해하는 건데?"

"오- 정답이었군. 고맙네."

"가식적인 여유구나."

무의식이 상대라는 건, 즉 자신과 싸워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상대가 나 자신이라.

'재밌군.'

갈라하드는 아만다를 노려보며, 손가락은 다른 곳을 겨눴다.

쏘아진 마법이 아만다를 정확히 노렸다.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만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틀린 수식을 용납할 수 없네."

아무리 무의식이라도 갈라하드였다. 아니, 오히려 더 갈라하드였다,

올바른 수식을 일부러 뒤틀 수는 있어도, 수식이 틀린 꼴은 절대 못 보는 게 갈라하드였다.

우습게도 무의식이 도와주는 꼴이었다.

"너 정말 재밌네."

"동감일세."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두통이 올라왔다.

다시금 시야가 뒤틀렸다. 뭔가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설마 본인한테 실험하는 거야?"

아만다가 조금 질린 얼굴로 물었다.

멍청한 질문이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그게 가장 효율적일세."

흑마법학회에서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무슨 실험이든, 본인한테 하는 게 가장 효율이 좋았다. 타인에게 하는 건 그다음 교차 검증 단계였다.

"재밌네."

아만다가 입꼬리를 삐쭉 올렸다.

순간 시야가 점멸했다.

병사 몇 명이 줄 끊긴 연처럼 쓰러졌다. 갈라하드에게 힘을 집중한 듯했다.

"네 하등함을 만끽해."

아만다의 속삭임이 귀를 간지럽혔다.

아만다를 뚫고 익숙한 사내가 다가왔다.

깔끔한 정복을 입은 사내였다. 입에 연초를 물고 있었다.

[다 가르쳐줬더니, 내 뒤통수를 쳐?]

투박한 욕이 터졌다.

사내의 심장 부근에 작은 구멍이 있었다. 누가 했는지 아주 깔끔한 솜씨였다.

[깔끔? 미친놈.]

사내의 얼굴이 귀신처럼 구겨졌다.

이런 곳에서 마주치다니-.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선배가 잘못하지 않았습니까."

[조금 잘못했다고 뒤에서 심장을 터뜨려? 막내 때부터 애지중지 키워줬건만-.]

"무고한 열 명을 태워 죽인 걸 작은 잘못이라고 하지 않습니다만."

[내가 구해낸 생명이 몇인데, 고작 열 명으로 지랄이야. 이 새끼야. 너도 그 덕분에 마법 강해진 거 아니야.]

"그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

갈라하드는 주저 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사내의 구멍이 한결 더 커졌다.

[이 호로- 새끼.]

사내는 피가 흐르는 눈으로 갈라하드를 노려보며 쓰러졌다. 갈라하드는 그 시선을 외면하지 않았다.

아만다가 박쥐처럼 웃고 있었다.

"내 죄의식을 자극할 생각인가? 미리 충고하자면, 쓸데없는 짓일세."

"과연 그럴까?"

"장담하지."

[선배, 저랑 결혼한다고 했잖아요.]

불안한 듯 떨리는 눈과 달달 흔들리는 팔, 그 손에 들린 거대한 도끼-. 갈라하드의 첫 후배였다.

"미안하지만, 그런 약속한 적 없네. 그리고 자네는 죽지 않았나."

[선배가 죽였잖아요!]

"그러니까 죽은 건 맞지 않나. 질척거리지 말고 다시 죽게."

가슴에 있는 구멍이 한결 더 커졌다. 후배가 저주와 원망의 말을 쏟아냈지만, 갈라하드는 멈추지 않았다.

후배의 형상이 사라지자, 아만다가 보였다. 전과 달리 입꼬리가 굳어 있었다.

"말하지 않았나. 쓸데없는 짓이라고."

"너 인간 맞아?"

"지극히 인간일세."

그때, 갈라하드의 아래로 뭔가 굴러왔다. 피투성이가 된 데미안이었다. 입이 우물거리고 있었다. 볼이 빵빵했다.

"자네, 뭘 먹고 있는 건가?"

"밥이요."

"그건 먹는 게 아닐세. 뱉게."

데미안이 빤히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그 눈에 입가가 붉은 갈라하드가 보였다.

"나는 먹은 게 아니라 마신 거네."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떨어져 있던 썩은 음식들이 쏟아졌다.

"고생했네, 여기부터는 내가 할 테니 쉬고 있게."

데미안의 고개가 푹- 꺾였다. 금세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참으로 태평하군.'

그때, 앞쪽이 시끄러워졌다.

[마법사라니-. 그런 하등한 직업을 하겠다는 거냐?]

[아침에 먹은 수프에서 독이 나왔다고? 동생아, 설마 나를 의심하는 건가?]

[내 정부가 되거라. 영광으로 알도록.]

[따라 하도록! 제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익숙한 이들이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며 다가왔다.

'음, 이상하군.'

가장 중요한 하나가 없었다.

'아껴두는 건가?'

아끼는 게 분명했다.

중요한 순간에 꺼내겠지-.

될까? 알 수 없었다.

늘 그렇듯 가능성이 높은 수를 선택할 뿐이었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손가락을 튕겼다.

****

한스는 사남오녀 중 네 번째였다. 첫째 형은 감기로 죽었고, 둘째 형은 성인이 되기 전에 입대했다. 한스도 마찬가지였다.

한스는 북부 사내답게 용맹했다. 마물의 주둥이에 몸을 밀어 넣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한스는 동료들과 사선을 넘나들었다. 마물들을 매일 패 죽였다.

동료가 마물에 먹힌 날에는 코가 삐뚤어질 정도로 술을 퍼마셨다. 울지는 않았다. 눈물은 진작에 얼었다.

평범한 날이었다. 경계 근무 끝내고 돌아가던 길에서 어떤 여인을 마주쳤다.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보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그 예외 없던 중대장조차 걸음을 멈출 정도였다. 여인은 전통을 이을 남자를 찾는다며 손을 내밀었다.

손이 닿았을 때 느낌이 올 거라면서-.

그들은 앞다퉈서 손을 내밀었다. 한스도 그중 하나였다.

5대대는 시체투성이였다. 어디에도 생기가 없었다. 그런 끔찍한 참상을 만든 마족이 앞에 있었다.

중대장이 명령했다.

"죽더라도 놈을 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끝이다!"

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불태워야 하는 때를 피하는 사내는 북부에 없었다.

앞의 전우가 비명을 지르며 엎어졌다. 다음 걸음을 위한 계단이었다. 전우의 목숨을 바탕으로 전진했다.

이내 마주한 마족에 한스는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마족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한스를 보고 있었다. 한 손은 제 관자놀이에 대고 웃었다.

이 상황에서 웃다니, 정말 끔찍한 마족이었다.

한스는 입술을 씹으며 무기를 고쳐 잡았다. 물러설 수 없었다. 저 악독한 마족을-.

어?

순간 시야가 뒤틀렸다.

끔찍한 마족이 멀끔한 사내로 변했다.

이윽고 격통이 올라왔다. 이마가 뜨거웠다.

"되는군. 정신이 드는가?"

깔끔한 인상의 사내가 피곤함이 가득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때와 어울리지 않는 정중한 물음에 한스는 입을 벙끗거렸다.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끔찍한 몰골이 된 부대원들이 저주의 말을 퍼부으면서 사내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뒤에서 그 여인이 웃고 있었다.

그들은 마족이 아닌 엉뚱한 사내에게 저주의 말을 퍼부으며 공격하고 있었다.

사내는 불평하지 않고 하나씩 처리했다. 장례를 치르는 이처럼 엄숙했다.

한스는 깨달았다. 마족에 놀아난 거구나-.

사내가 한스를 보며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한···스."

"그래, 한스. 애석하게도 자네는 곧 죽네. 저 악독한 마족이 자네의 머리를 열어뒀거든. 어, 만지지 말게. 따가울 거야. 잠시 머리 좀 빌려도 되겠나? 그를 응용하여 수작을 부릴 생각일세. 대신, 마족의 목을 비틀면서 자네의 이름을 불러주겠네."

한스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게. 고통은 없을 것이니."

그리 말하는 사내의 얼굴에 피곤이 가득했다.

"고맙군, 한스."

갈라하드는 손에 묻은 피를 털지 않고 연초를 물었다.

다섯 남은 병사들 사이로 아만다가 보였다.

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좋군.'

흉터를 쑤실 필요는 없었다.

****

'흥미로워.'

아만다는 기분 좋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분이 직접 명령하길래 혹시 했는데 역시였다.

놈과 놈의 짐승, 둘 다 흥미로웠다.

특히 놈의 짐승에게는 권능이 통하지 않았다.

'다른 놈의 냄새가 나는데.'

아만다는 눈을 찡그렸다. 짐승에게서 다른 마족의 냄새가 풍겼다.

아주 짙은 냄새-.

아만다보다 아득히 높은 마족의 냄새였다.

대놓고 건드리지 말라는 영역 표시였다. 그것 때문에 일이 복잡해졌다.

사납게 날뛰는 짐승을 죽이지 말고 치워야 한다니-.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고위 마족이랑 얽히면 아만다만 손해였다.

그 때문에 일이 좀 끌렸다.

물론, 결과는 같았다.

마법사 하나와 짐승 하나가 준비된 아만다를 이길 수 없었다.

놈들이 병사의 수를 줄일수록 오히려 아만다의 힘은 강해졌다.

제 머리에 마나를 넣으면서 분투하는 놈은 조금 서늘했지만, 그래봤자 마법사였다.

병사 셋이 남았을 때, 놈이 쓰러졌다.

아만다는 검을 꽂으려는 병사를 멈췄다.

"그분이 살려서 데려오라고 하셨어."

아만다는 혼잣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대단해. 이렇게 힘들 거라고 예상 못 했는데. 내 권능을 버티면서 싸우다니-. 믿기지 않네."

진심이 담긴 감탄이었다.

아만다는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는 한없이 약했지만, 약한 자에게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놈은 마법사인데도 제법 잘 버텼다.

결국 쓰러졌지만, 저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괜히 그분이 직접 명령한 게 아니었다.

"고마워, 정말 재밌었어. 이렇게 재밌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아만다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분이 굉장히 좋아하시겠어. 상을 내리시겠지? 아, 행복해."

"그분?"

"어, 아직도 정신이 있어? 독하네. 정말."

엎어진 놈이 아만다를 올려봤다.

포기하지 않고 손가락을 튕기는 우둔함에 아만다는 조소를 터뜨렸다.

"응, 그분. 너도 좋을 거야. 함부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거든. 그분이 인간한테 관심을 가지시길래 혹시나 했는데-. 역시 최고야."

"그분의 이름이 뭐지?"

"이름? 그분의 이름을 물어? 너 그러다 진짜 죽어."

아만다는 진심으로 충고했다.

그분의 이름을 묻다니-. 확실히 이상한 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런 상황?'

아주 작은 기시감이 들었다.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시감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이런 들켰군."

평온한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렸다.

놈이 아만다의 목에 손가락을 겨누고 있었다.

어깨에 있는 구멍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곳곳에 흉터가 가득했지만, 그 가라앉은 눈은 여전히 또렷했다.

"어떻···. 너 나한테 권능을 부린 거야?"

아만다는 충격에 말을 더듬었다. 마법사가 자신을 속였다니?

"권능이라 부르는군. 미안하지만, 이건 마법일세. 의심조차 하지 않으면 오히려 더 쉽게 당하는 법일세. 자네도 알겠지."

태평한 대답이었다.

권능에 대한 아만다의 자신감을 노리다니-.

아니, 그건 자신감이 아니었다.

마법사인 놈이 자신의 권능을 마법으로 구현할 거라고 어떻게 예상하겠나.

다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만다는 놈에게 당했다.

"음, 이거 재미없네."

아만다는 놈에게 권능을 집중했다.

"베아트리스?"

눈이 멍해진 놈의 입에서 단말마 같은 중얼거림이 터졌다.

권능을 최대로 썼으니, 놈이 절대 죽일 수 없는 상대일 것이다.

무리한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깟 마법사한테 고전하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깔끔하게 처리할걸.

재미 보려다가, 괜히 힘만 쓴 꼴이었다.

"솔직히 마주 보니 좋군. 미련한 놈이라고 하지 말게."

그때, 놈이 텁텁한 중얼거림을 뱉었다. 그 목소리가 전과 달리 흔들렸다.

어깨에 검이 박혔을 때도 단단하던 놈의 목소리가 흔들린다니-. 아만다는 조소를 머금었다.

"그래, 약속을 했지."

놈이 입꼬리를 올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 손가락 사이로 스파크가 튀었다.

스파크가 손가락 사이를 튕기면서 크기를 부풀렸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만다는 멍하니 응시했다.

손가락 사이에서 튕기던 스파크가 형상을 갖췄다.

그건 꼭 신이 번개를 깎아 만든 꽃 같았다.

만개한-.

그게 아만다의 마지막이었다.

****

"참 좆같은 마족이군."

갈라하드는 바짝 탄 마족을 옆으로 밀며 중얼거렸다.

베아트리스의 이름이 안 나올 때부터 예상은 했다.

마지막 순간에 그녀를 꺼낼 것이라고-.

오히려 그걸 이용했다.

다시 마주하면 아주 멋진 번개 꽃을 선물하기로 약속했으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타격을 주지 못 했을 것이다.

그녀를 꺼낸 게, 마족의 패착이었다.

예상된 흐름이었지만, 뒷맛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지금쯤 내 소식을 들었겠군.'

눈을 찡그리며 연초를 입에 물었다.

"아, 이건 한스 몫일세."

갈라하드는 바짝 탄 머리를 밟아 재로 만들었다.

그 위에 대고 연초를 털었다.

29화 갈라하드

"후읍-."

갈라하드는 지끈한 두통에 정신을 차렸다.

누가 도끼로 내려친 것처럼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기침하듯 숨을 내쉬니, 역겨운 냄새가 가득 풍겼다.

고기 썩는 냄새, 오물 냄새, 타다만 재 냄새까지-.

갈라하드는 욕을 중얼거리며 연초를 입에 물었다,

탁, 탁, 손가락을 두 번 정도 튕기니 마나가 돌았다. 레몬 향이 가득 풍겼다.

[레몬 냄새가 난다고? 그거 욕이지? 이 씨발럼아.]

거친 욕설에 기침하듯 웃었다. 입에 문 연초가 틱- 하고 떨어졌다. 눈이 지긋하게 녹았다.

데미안이 그를 집어 다시 입에 물려줬다. 데미안은 꼼꼼하게 피투성이였다.

"죽여줘요?"

"괜찮네. 할 일이 많아서."

"예,"

곱게 대답한 데미안이 갈라하드 옆에 쪼그려 앉았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연초를 뻐끔거렸다.

우습게도 아직 남은 장작더미가 열기를 나눠주고 있었다.

그 옆으로 길게 늘어선 시체들과 잿더미들-. 끔찍하게 조용했다.

'이거 몸이 남아나질 않는군.'

갈라하드는 온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눈을 구겼다.

'정보국에서 구를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쯧,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침을 뱉었다. 붉고 묽은 침이었다.

"아, 배고프다-."

데미안의 무덤덤한 칭얼거림에 갈라하드는 쓰게 웃었다.

"아까 많이 먹지 않았나."

"그만큼 움직인걸요."

"그것도 그렇군."

갈라하드는 대답하며 데미안을 살폈다.

데미안은 하늘을 보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른한 밤이라 재처럼 보이는 눈송이들이 벌어진 입에 내려앉았다.

'데미안에게는 정신 간섭이 아예 안 통했다.'

아만다의 정신 간섭은 단계가 높았다. 갈라하드가 뇌를 터뜨릴 각오까지 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데미안에게는 단 한 번도 통하지 않았다.

생각이 단순하다는 걸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네, 정체가 뭔가?"

"데미안이요."

"그렇군."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데미안이 갈라하드를 빤히 쳐다봤다. 그 볼이 우물거렸다.

"뱉게."

데미안의 입에서 썩다 못해 문드러진 빵이 떨어졌다. 언제 먹은 건지-.

"이거 먹게, 톰이 구워준 육포일세."

데미안이 입을 쩍 벌렸다. 던진 육포가 쏙- 들어갔다.

"톰은 최고인 거 같아요."

"동감일세."

데미안의 순수한 감탄에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면 바로 회식부터 하지. 길버튼 경이 사기로 했으니 마음껏 먹게."

"진짜 배고파요."

데미안이 드물게 눈을 끔벅였다.

"이런 길버튼 경은 큰일 났군."

둘은 거칠게 타오르는 장작더미를 가만히 구경했다.

갈라하드는 아만다의 말을 되새겼다.

'그분이라-.'

마족이 극존칭을 쓸 정도의 상대라면, 더 높은 상대일 게 분명했다.

아만다가 살려서 데려오라고 했으니. 단순히 갈라하드를 처리하려는 건 아니었다.

여유가 없던 탓에 아만다를 회유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여명 쪽인가? 아니면 그냥 마족?'

자신을 노리는 고위 마족이라니-.

'팔호에게 따로 연락을 넣어야겠군.'

그게 아니더라도 그쪽에서 움직임을 보일 게 분명했다.

그때, 고통의 알이 부르르- 떨었다.

'고통의 알이 마족의 피를 마셨지.'

고통의 알이 몸부림치듯 진동했다.

잠깐 진동한 고통의 알에서 익숙한 게 나왔다.

'······마나?'

그건 분명 마나였다. 농도가 짙은-.

갈라하드는 제 감각을 의심했다. 마족의 피를 뺏어 먹은 고통의 알이 마나를 토해내다니?

황급히 그 농도를 가늠했다.

'일반 마나보다 농도가 높지만, 마족의 피를 그냥 마셨을 때보다는 농도가 낮아.'

다만, 마족의 피를 마셨을 때처럼, 혈관이 타는 고통은 없었다.

마족의 피를 마시고 마나를 뱉어내다니. 꼭 고통의 알이 대신 소화해준 느낌 아닌가.

그 사이에서 조금 많이 뜯어가는 것 같지만-.

'신기하군.'

갈라하드는 탄성을 터뜨리며 마나를 움직였다.

마족의 피로 얻은 마나는 거칠었다. 순간 집중력을 놓치면 잡아먹힐 정도였다.

그에 반해 고통의 알이 뱉어낸 마나는 순순히 갈라하드의 의도대로 움직였다.

'이게 무슨-.'

갈라하드는 고통도 잊고 정체 모를 마나에 집중했다.

마나를 움직여 마나 화살을 만들었다. 농도가 짙은 탓에 마나를 얼마 쓰지 않고도 마나 화살이 만들어졌다.

이 정도라면-.

갈라하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족의 피를 마셔 단발성으로 쓴 적은 있었지만, 마족의 피에서 나온 마나를 저장한 적은 없었다.

특성이 너무 심하게 거칠기 때문이었다. 괜히 저장했다가 갈라하드의 마나가 오히려 잡아먹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마나라면-.'

고민은 짧았다. 마나를 심장 아래쪽에 밀어 넣었다. 대기 중의 마나를 저장할 때처럼 아무 저항 없이 담겼다.

"되는군!"

갈라하드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이 마나가 저장이 된다는 건, 마족의 피를 단발성으로 쓰지 않고, 쌓아둘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효율이 마족의 피를 직접 마시는 것에 비하면 떨어지겠지만, 그를 감안해도 놀라운 능력이었다.

부족한 건 더 마시면 되는 문제였다.

'일단, 확인 먼저.'

갈라하드는 필사적으로 냉정을 유지했다.

마법사에게 흥분은 독이었다.

넣은 마나를 쓸 수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갈라하드는 하늘을 올려봤다.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좋은 날씨는 아니지만, 마나 농도가 높다면-.

"길버튼 경을 불러야겠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

"길버튼 경."

톰은 심기가 잔뜩 불편해 보이는 길버튼을 불렀다.

길버튼은 대장이 데미안을 데리고 사라진 뒤로 줄곧 저 상태였다. 둘을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대장님은 괜찮으실 겁니다."

"걱정?"

길버튼의 뾰족한 반문에 톰은 찔끔 놀랐다. 걱정하는 게 아니라면 왜 꽁하단 말인가.

"왜 내가 아닌 데미안을 데려간 거지?"

자신이 아닌 데미안을 데려간 게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어쩔 수 없으셨을 겁니다. 길버튼 경은 너무 유명하시지 않으십니까. 길버튼 경이 같이 가면, 적이 두려움에 떨며 도망칠 것으로 생각하셨을 겁니다."

톰의 말에 길버튼의 눈이 슬쩍 풀렸다.

길버튼이 크흠- 헛기침하며 칼자루를 두드렸다. 톰은 작게 안도했다.

그때, 7중대장 헨리가 도끼를 돌리며 다가왔다.

"저쪽에 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헨리 중대장이 가리키는 곳에는 눈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폭설로 인한 산사태였다. 사라진 4중대가 산사태에 조난당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길버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쪽이다. 대장이 단서를 찾았어."

그에 헨리 중대장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마법사의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당장 파내지 않으면, 병사들은 얼어 죽을 겁니다."

헨리 중대장의 주장은 제법 타당했다.

하필 중대의 경로에 산사태가 일어난 터라, 그쪽을 의심하는 게 마땅했다.

그를 꺾으려면 이쪽이 마족에게 편지를 받았다는 걸 말해야 했는데, 그러면 상황이 난감해졌다.

톰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

하늘에서 수백 갈래로 나뉜 굵직한 벼락이 떨어졌다. 톰은 하늘을 수놓은 번개에 입을 쩍- 벌렸다.

그 번개에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일단 저기로 갔다 오지. 눈 속에 좀 있는다고 죽기야 하겠나?"

"알겠습니다! 다들 움직여!"

확실한 증거에 설득이 금방 끝났다.

****

'되는군.'

갈라하드는 아릿한 손가락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마나가 성공적으로 저장됐다. 꺼내 쓰는 것에 문제도 없었다.

오히려 원래 마나보다 깔끔했다.

마족의 피를 그냥 마시는 것보다는 농도가 옅지만, 저장할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마족의 피를 이용하여 마법을 부리는 것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았다. 애초에 단발성이었고.

이런 식으로 저장할 수 있으면, 농도가 낮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 많이 마시면 되니까.

물론, 아드리안나를 죽이지 않으면 심장이 먹힌다는 사소한 조건이 있지만, 그거야 따로 해결할 방법이 있었다.

코르튼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고위 마족의 부산물이라 그랬나-. 부산물의 능력이 이 정도라면, 고위 마족은 아예 다른 개체겠군.'

부산물이 이 정도 효과를 보이는데, 고위 마족은 뭘 줄지 감도 오지 않았다. 침이 절로 고였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만다랑도 목숨을 걸고 싸워 이긴 상황이었다. 그런 아만다가 존칭하는 고위 마족과 지금 마주치는 건 좋지 않았다.

아득! 심장 주변에서 고통이 올라왔다. 어서 맹세를 이행하라는 거친 재촉이었다.

'사소한 부작용이 있군.'

갈라하드는 입맛을 다셨다.

그때, 한쪽이 시끄러워졌다.

저 멀리 길버튼과 대원들 그리고 북부 놈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기세가 상당히 흉흉했다.

"더러운 마족을 쳐 죽여라! 그 목을 뽑고 피를 마시리라!"

헨리라는 놈이 도끼를 번쩍 들며 거칠게 소리쳤다. 그 뒤로 북부 놈들이 괴상한 함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걸음마다 눈이 거칠게 튀었다.

전쟁이라도 나가는 기세였다.

'음. 이미 끝났는데.'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 선두에 길버튼이 있었다. 그들에게 동화된 건지 길버튼이 괴상한 함성을 터뜨렸다.

"기사- 길버튼!"

길버튼이 검을 높이 들었다. 검에서 뿜어지는 창연한 오러가 일렁이는 것이 제법 화려했다.

원래 저런 놈이었나?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그들의 함성은 마을에 입성하며 절정에 이르렀다.

"더러운 마족 놈들! 두려움에 숨었구나!"

길버튼을 선두로 세운 이들은 광장까지 그대로 질주했다.

이윽고 광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갈라하드를 발견한 길버튼이 빠르게 달려왔다.

"···마족은 어딨습니까?"

"저기 있네."

갈라하드는 뭉친 잿더미를 가리켰다.

길버튼이 눈을 찡그렸다.

"어떻게 된 겁니까?"

"보면 모르겠나."

갈라하드의 대답에 길버튼이 광장을 살폈다.

여기저기 뿌려진 끔찍한 시체들과 잿더미-.

누가 봐도 끝난 상황이었다.

작게 헛기침한 길버튼이 검을 검집에 넣었다. 상당히 멋쩍은 얼굴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보이나?"

"사지 다 붙어있는 걸 보니 괜찮군요."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드시겠습니까? 고통에 최고입니다."

길버튼이 수통을 내밀었다. 풍기는 냄새가 제법이었다.

그 많은 봉급을 어디다 쓰나 했더니, 좋은 술 마시는데 쓰는 듯했다.

"됐네."

"예, 뭐."

길버튼은 슬쩍 수통을 자기 입에 가져다 댔다.

"자네는 뭘 한 게 있다고 마시나?"

"열심히 뛰어왔습니다만."

"데미아아아안-!"

작은 비명이 터졌다. 그웬이 피투성이가 된 데미안을 부둥켜안고 꺼이꺼이 울고 있었다. 자는 줄 모르는 듯했다.

"이건 뜸바귀 약초 진액인데, 바르면 회복에 도움이 되실 겁니다."

"오, 고맙군."

갈라하드에게 약초 빻은 걸 건넨 톰이 데미안에게 향했다.

육포를 꺼내자,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던 데미안이 벌떡 일어났다. 울던 그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때, 헨리라는 놈이 다가왔다.

놈의 얼굴이 악귀처럼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뒤에 있는 북부 놈들도 비슷한 얼굴이었다.

당장 누구 하나 패 죽이고 싶은 얼굴이었다.

길버튼이 헨리를 막아섰다.

"······어떻게 된 겁니까."

헨리가 꾹꾹 누른 목소리로 물었다. 도끼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증거들이 사방에 뻔히 널려 있었다. 그걸 보고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을 것이다.

실종된 중대가 마족의 수하가 되어, 구하러 온 이를 오히려 공격했다. 이보다 끔찍한 불명예가 있을까.

헨리라는 놈도 눈치챘을 것이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대답했다.

"마족에게 당했더군. 내가 마법으로 마족의 수작을 풀어줬고, 우리는 같이 용맹하게 싸웠네."

"······그렇군요."

헨리가 꾹꾹 누른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끄덕였다.

속은 이가 없는 우둔한 거짓말이었다.

"은혜는 뼈에 새기겠습니다."

'뼈에 새기다니-.'

북부 놈다운 살벌한 표현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명예로운 전사로 기억될 겁니다. 그들의 가족은 몇 푼이라도 받겠죠."

"자네는 뻔한 말을 되게 그럴 듯하게 하는군?"

갈라하드의 지적에 길버튼이 눈썹을 구겼다.

그때, 북부 놈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웃으면서 시체를 모았다. 우중충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몇 놈은 주변의 나무를 가져왔다. 당연한 일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아까보다 더 큰 장작더미가 만들어졌다. 마치 축제인 것처럼 시끌벅적했다.

거대한 불길이 타올랐다. 다들 수통을 입에 물고 춤을 추며 그들의 무용을 떠들었다.

아까보다 더한 축제였다.

그때, 헨리가 다시 다가왔다.

"춤춥시다."

"됐네, 춤은 질색이라서."

털이 가득 난 사내의 춤 신청이라니-. 질색하며 거절하자 헨리가 배에 칼 맞은 것처럼 웃었다.

짙은 술 냄새가 가득 풍겼다. 놈의 초점은 또렷했다.

"원하시면 제 아내라도 내어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네. 이미 약혼한 몸일세."

"아! 그러셨죠!"

놈이 다시금 배에 구멍 뚫린 것처럼 웃었다. 험상궂은 외모와 어울리는 웃음소리였다.

"불러주시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헨리가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술기운이 올라 얼굴이 벌건 놈들이 의미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그런데 자네 결혼은 했나?"

"아직 안 했습니다."

"그렇군."

켈켈- 거리며 웃은 헨리가 장작더미로 돌아갔다.

갈라하드는 연초나 뻐끔거렸다.

북부 놈들은 울지 않았다. 오히려 시끄럽게 떠들며 웃고 춤췄다.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울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웬이었다.

"자네는 왜 우나?"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물었다. 얼굴도 모르는 이가 죽었는데, 왜 우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사··· 사람이 죽었잖아요."

그웬의 대답에 갈라하드는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그렇군, 그럴듯한 이유였다.

다만, 눈물은 큰 의미가 없었다.

"내가 더 강했다면, 저들도 살 수 있었을 걸세."

"······네?"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웬이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더 크게 울었다.

"대장님 잘못이 아니에요! 마족이 나쁜 거지!"

"음, 무슨 소리인가. 내 잘못은 당연히 아닐세."

갈라하드는 달라붙는 그웬을 억지로 떼어내며 말했다.

그웬의 얼굴이 잠시 멍해졌다. 그 눈동자에 비친 갈라하드는 무표정이었다.

"힘이 부족하면 벌어지는 일을 말하는 걸세. 저기 누워있는 게 데미안일 수도 있었네."

데미안이 다시금 끄덕였다. 그웬의 울음이 뚝- 멈췄다. 얼굴에 주먹이라도 꽂힌 표정이었다.

병사들은 시끄럽게 떠들며 춤췄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피며 그를 구경했다. 길버튼은 수통을 계속 홀짝였고, 톰은 그웬을 다독였다.

"돌아가면 회식할 걸세. 물론, 자네가 사는 거지."

"예, 뭐."

길버튼이 떨떠름하게 끄덕였다.

그때, 데미안이 제 배를 붙잡으며 말했다.

"너무 배고파요."

길버튼의 얼굴에 처음으로 공포가 떠올랐다.

****

'후우-.'

제임스는 나지막한 숨을 터뜨렸다.

오늘은 제임스의 첫 부서 배치 날이었다.

'작전과라니!'

이름부터 멋진 곳으로 배치됐다. 심지어 요원 이름도 제임스가 선망하던 '갈라하드'였다.

이제 모든 게 잘 풀릴 것 같았다.

문을 연 제임스는 바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오늘부터 작전과에서 일하게 된 제··· 아니, 갈라하드입니다!"

"어, 네가 그 신입이구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제임스를 반겼다. 그에 고개를 드니 인자한 얼굴이 여인이 있었다.

"나는 헤넷트라고 해. 네 선임이야."

"아! 반갑습니다! 갈라하드입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갔구나? 괜찮아. 작전과는 일이 많지만, 분위기는 좋거든. 큰 문제만 안 저지르면 돼."

헤넷트라 자신을 소개한 여인의 부드러운 설명에 제임스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그 뒤로 책상에 앉은 이들이 보였다. 어두운 공간에서 마나 램프에만 의지한 채 뭔가를 읽거나 쓰고 있었다.

이쪽에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아니, 고개를 들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제임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다들 자기 일하기 바쁘거든. 자, 일단 이쪽으로 와. 작전과장님한테 인사드리자."

"네! 알겠습니다!"

뾰족한 시선들이 꽂혔다. 퀭한 눈이 제임스를 콕콕 찔렀다.

"쉿, 여기서 목소리 높이는 건 금기야."

"네- 알겠습니다-."

"잘하네, 너는 잘 적응할 거야. 내가 사람 잘 보거든."

부드러운 미소에 제임스는 헤헤- 웃었다.

이렇게 좋은 선임을 만나다니, 정보국 생활이 잘 풀릴 게 확실했다.

헤넷트는 제일 안쪽으로 제임스를 안내했다. 창문이 전부 꽁꽁 싸매진 문이었다.

"작전과장님은 예민하신 분이지만, 작전과의 핵심이라고 불리시는 분이야. 일 처리만 깔끔하면 건드리시지도 않으시지. 그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헤넷트의 목소리에 존경심이 가득했다.

작전과장이 대단한 인물인 게 분명했다.

"문을 두드리고 요원명을 말해. 신입이라고."

"네-."

제임스는 복장을 점검하고 목을 풀었다.

'자, 정보국 생활 시작이다. 제임스-.'

중얼거린 제임스는 문을 힘차게 두드렸다.

쿵쿵!

"누구야."

안쪽에서 권태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헤넷트가 작게 '요원명을 말해-'라고 속삭였다.

그에 제임스는 힘차게 외쳤다.

"갈라하드입니다! 신입-."

갈라하드를 입에 담으니, 제임스는 괜히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깔아버렸다.

그래도 꽤 잘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갈라하드?! 갈라하드가 여기 있을 리 없잖아! 거짓말하지 마!"

닫힌 문 너머에서 뾰족한 비명이 터졌다. 사내가 갈라하드의 이름을 거칠게 부정했다.

"시발! 왜 나야! 개새끼야! 은퇴라니!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시발!"

이내 잔뜩 분노하여 소리쳤다. 쾅! 뭔가 문에 부딪히며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갈라하드! 나도 도우려고 했다! 특수팀도 꾸리고 있었다고! 진짜야! 내··· 내가 최대한 맞출게! 도와준다고!"

갑자기 목소리가 사근사근해졌다. 마치 거래를 제안하는 상인 같은 목소리였다.

"아아! 갈라하드! 나 진짜 열심히 일한 거 알잖아-. 제발, 여기서 은퇴라니."

이제는 잔뜩 울먹였다. 눈물이 뚝뚝 흐르는 목소리였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저··· 뭔가 이상···."

고개를 돌린 제임스는 눈을 의심했다. 헤넷트는 저 멀리 도망가고 있었다.

그때, 안쪽이 조용해졌다.

"그래, 갈라하드. 네가 왔으니, 은퇴는 피할 수 없겠지. 너한테 은퇴당한다니 영광이군."

방금까지 울먹이던 목소리가 담담했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눈 밑이 퀭한 사내였다. 휘황찬란한 정복과 왼쪽 가슴에 있는 훈장들이 사내의 대단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에 제임스는 직감했다.

"너 뭐냐? 갈라하드는?"

정보국 생활이 시작부터 존나게- 꼬였다는 걸.

30화 악수 곤란

'음···.'

5대대 본부의 문을 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5대대 본부 건물을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책상이 있었는데, 거기에 5대대 대장 마크가 앉아 있었다.

보좌관 루미안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3층을 비우랬다고 시위하는 건가?'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마크에게 향했다.

"왜 여기 있나?"

"옮기려고 보니, 여기가 제일 효율적이라서 말입니다. 보고도 바로 받을 수 있고, 정문과 가깝고."

마크의 대답에 갈라하드는 잠시 눈을 찡그렸다.

정문 앞에 있으니 최단 거리는 맞았다. 그래, 맞는 말이었다.

다만-.

'대장이 정문 열자마자 있는 건 이상하지 않나?'

물론, 3층을 쓰는 갈라하드에겐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대장이 정문을 지켜준다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렇군."

"보고는 들었습니다. 4중대는 마족의 술수에 넘어갔지만, 갈라하드 대장의 기지 덕분에 가까스로 깨어나서 마족과 전투를 펼쳤다."

마크의 덤덤한 목소리에 갈라하드는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대로 보고 올리겠습니다. 감사의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갈라하드 대장이 아니었다면, 시체조차 건지지 못했을 겁니다,"

"동맹에 대한 답례라고 하지."

"기억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마크는 종이를 넘겼다.

"마물의 등장은 흔한 일이지만, 최근 들어 마족의 출현 빈도가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전선에 이상이 발생한 게 분명합니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끄덕였다.

"대공 전하가 계시지만, 이제 거의 나서지 않으시니-. 현재 각 대대는 별개의 조직이나 다름없습니다. 파벌 지···."

마크가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입 끝까지 나온 욕을 삼킨 듯했다.

"제가 전선을 점검해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해도 들어먹지 않을 겁니다. 대공 전하가 나서는 게 제일이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다음으로는-."

"아드리안나겠군."

"예, 맞습니다. 대공 전하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전선의 영웅인 그녀의 말이라면, 다른 대장들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아드리안나한테 부탁하면 되지 않나?"

마크가 고개를 저었다.

"아드리안나는 훌륭한 영웅이지만, 남을 이끄는 자는 아닙니다."

"이끄는 자는 아니다-."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모든 대장을 존중합니다. 제가 요청하면 대대의 통솔권은 각 대장에게 있다며 거절할 겁니다."

"그래서 나보고 그녀를 설득해달라는 건가?"

"예."

단호한 대답에 갈라하드는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말도 안 듣는데, 내 말은 듣겠나?"

"약혼자시니까요. 그리고-."

마크가 뒷말을 삼켰다. 잠시 머뭇거리던 마크가 꼭 못마땅한 말을 하듯 눈썹을 구기며 말했다.

"그쪽이라면 어떻게든 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만."

"어떻게든이라-."

갈라하드는 오랜만에 들어보는 구호에 작게 웃었다.

"그래, '어떻게든'은 내 전문이지. 대신 조건이 있네."

"어떤 조건 말입니까?"

"특무대 본부를 멋지게 꾸며주게."

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동자가 바삐 움직이는 걸 보니, 계산하는 듯했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일어났다.

"대회의때, 제가 왜 갈라하드 대장을 찾아갔는지 아십니까?"

갈라하드는 연초에 불을 붙이며 고개를 저었다.

"본래 대장은 전부 맡은 대대에 묶입니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벗어날 수 없죠. 좋든 싫든 거기가 무덤입니다."

마크가 탁- 하고 책상을 두드렸다.

"그런데 이제 예외가 생겼습니다."

마크의 또렷한 눈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뭔가 강렬히 바라는 눈이었다.

"이제 밑으로 들어올 마음이 생겼나?"

갈라하드의 물음에 마크가 작게 웃었다.

갈라하드가 사라지자 루미안이 마크를 째려봤다.

"뭘 그렇게까지 맞춰줘요?"

"맞춰주다니?"

"대장이라도 대원이 네 명뿐이잖아요. 예외니- 뭐니-."

멍청한 질문에 마크는 눈을 찡그렸다.

"정말 마족에게 넘어간 병사들이 일어나서 갈라하드를 도와서 싸웠다고 생각하나? 마족은 그리 순진하지 않아."

"······그러면요?"

"보고에 따르면 중대장이 길버튼과 현장에 도착했을 때 상황이 끝나 있었다더군. 갈라하드 혼자 잡았다는 소리지-. 마족과 그 마족에 홀린 사십이 넘는 병사를 혼자서-."

루미안이 입을 쩍- 벌렸다.

"···비약이에요. 왜 굳이 자기 공을 줄이는 거짓말을 해요?"

루미안의 물음에 마크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가서 특무대 본부나 꾸며주게. 이번에 마석값 조정 덕분에 예산이 제법 많지?"

"그걸 다 써요?"

"잘 보여야지."

마크의 단호한 목소리에 루미안이 떨떠름하게 끄덕였다.

"지금이라도 밑에 들어갈 걸 그랬나? 아니, 좀 더 두고 보자."

"들어갈 거면 빨리 들어가야죠. 늦게 가면 국물도 없으니까요!"

반격하듯 소리친 루미안은 고민하는 마크에 황급히 손을 저었다.

"농담이에요! 농담!"

****

덜컹-.

"길버튼 경, 즐거워 보이는군."

"아, 제대로 사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고삐를 잡고 히죽 웃는 길버튼에 갈라하드는 혀를 찼다. 마차 아래로 눈이 거칠게 튀었다.

"1대대라면 더 근사한 술집이 있겠지."

"단골 술집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1대대로 갑니까?"

"약혼자가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네."

"······."

"방금 그 표정 하극상일세."

길버튼이 낄낄 웃었다. 마차가 거칠게 흔들렸다.

"마크 대장은 아드리안나가 각 대장에게 전선 확인에 관한 공문을 보내주기를 원하네."

"다른 대장에게 공문이라니-. 안 하실 텐데요."

"정 안되면 인장만 잠깐 빌리면 되니까."

"······예? 농담도 참."

길버튼이 갈라하드를 파악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갈라하드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안 됩니다."

"잠깐만 쓰고 줄 걸세."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분명 화내실 겁니다."

"아드리안나가 화를 내다니. 궁금하군."

"진짜 무섭습니다."

"본 적 있나?"

길버튼은 대답 대신 고삐를 튕겼다. 말들이 길게 투레질했다. 입김이 길게 뿜어졌다.

"아무튼 절대 안 됩니다."

"그러면 북부로 끌려온 불쌍한 약혼자를 위해서 공문 좀 보내달라고 해야겠군."

"그건·········."

길버튼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큼지막해졌다.

"너무 짜치지 않습니까?"

"그런가?"

"예, 자고로 남자라면 확- 해서 휙- 하는 게 있어야 합니다."

"자네, 애인 없잖나."

"······입 가벼운 꼬맹이 놈."

길버튼이 괜히 애꿎은 고삐를 틀었다.

"저 인기 많습니다."

"근데 왜 애인이 없었나."

"언제 죽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걸 아는 사람도 있나? 핑계일세."

길버튼은 대답하지 못했다. 갈라하드는 굳이 묻지 않고 연초를 입에 물었다.

1대대로 가까이 갈수록 날은 더 추워졌다. 숨을 쉴 때마다 콧구멍이 어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는 건지-. 갈라하드는 작게 투덜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저기입니다."

길버튼이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민둥산의 중간에 1대대 성이 있었다. 1대대의 성은 화려하지 않고 단단하고 거대했다. 꼭 방어만을 위해 만들어진 성 같았다.

'저걸 어떻게 뚫을까.'

갈라하드는 습관적으로 성을 뚫을 방법을 상상했다.

성문 앞에 길게 늘어선 보급 마차를 확인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병사들이 마차에 창을 꼼꼼히 찔렀다. 마차에 숨는 건 힘들 듯했다.

성벽을 타기도 까다로운 게, 성벽 곳곳에 뾰족한 철이 박혀 있었다. 심지어 그 위에 병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병사 복장과 신분패를 훔쳐서 들어가는 방법도-.

'어렵겠군.'

성문을 들어서는 병사들도 하나씩 확인했다.

상당히 까다로운 성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길버튼을 마주한 병사들이 목청 높여 경례했다. 마치 연예인이라도 보는 듯한 반응입니다.

"저 길버튼입니다."

길버튼이 재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

성문에 도착하자 젊은 기사가 경례했다.

"길버튼 경 오랜만입니다."

"반달. 오랜만이군."

"소식은 들었습니다."

기사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나는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일세."

"아, 특무대-!"

기사가 작게 탄식했다. 꼭 특무대를 아는 듯한 반응이었다. 생소한 반응에 갈라하드는 오히려 되물었다.

"특무대를 아는가?"

"예, 중급 마족과 땅강아지 수십 마리를 잡았다고 들었습니다. 마족을 불태우는 마법사시라고-."

기사의 눈에 열기가 가득했다. 그 뜨거운 눈빛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무대의 위명이 점점 퍼지는군."

"아, 제 선임 캐럿이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런가?"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목숨을 건 결투를 하고 싶습니다."

뜬금없는 살인 예고에 갈라하드는 길버튼을 쳐다봤다.

"1대대는 강자를 만나면 저럽니다. 전통입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고맙군. 아드리안나를 만나러 왔는데, 안에 있나?"

"아드리안나님은 전선 밖에 계십니다."

"전선 밖?"

대답은 길버튼에게서 나왔다.

"아드리안나님은 해가 뜨기 전 전선을 넘어 마족의 영역으로 가십니다. 해가 질 때쯤 돌아오시죠. 마족을 하나라도 더 잡고 전쟁을 끝낼 방도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전선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마족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공격하다니-.

마나를 불태우는 속성이 있다고 한들 상당히 무모한 짓이었다.

"훌륭하군."

기사와 길버튼이 묘한 표정으로 갈라하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그러나?"

"아드리안나님이 마족의 영역으로 가시는 건 1대대에서도 반대가 상당합니다. 굉장히 위험하다고-."

"여기 있으면 안 위험한가?"

갈라하드의 물음에 길버튼은 입을 닫았다. 기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반달입니다."

"그래, 반달 경. 반갑네."

"그러면 결투는-."

"날이 좀 따뜻할 때 하도록 하지."

반달은 조금 더 따라오며 구체적인 일정을 물었다. 갈라하드는 슬쩍 손을 휘저었다.

1대대 기지 내부는 밖과 비슷했다. 투박한 건물들이 빼곡했는데, 그 사이로 무장한 병사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곧 오겠군."

갈라하드는 성벽에 걸친 태양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마차 문이 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악! 왜 물어! 데미안! 나는 고기가 아니야!"

"대장님, 데미안에게 뭐 좀 먹여야 할 것 같습니다."

톰의 다급한 보고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데미안이 뜯어먹기 전에, 저들을 술집에 내려줘야겠군. 그리고 아드리안나를 마중 나가지."

길버튼이 익숙하게 고삐를 돌렸다.

****

전선은 1대대 기지의 정문을 나와 한참이나 더 가야 했다.

경계가 얼마나 삼엄한지 가는 동안 검문을 세 번이나 더 당했을 정도였다.

마주한 성벽에 갈라하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북부에 처음 왔을 때 봤던 벽보다 거대한 벽이 세워져 있었다. 높이가 얼마나 까마득한지 위를 보려면 고개를 들어야 할 정도였다.

"다른 부대도 전선과 맞닿았는데, 여기를 최전선이라 부르는 이유는 뭔가?"

"마족과 마물의 습격이 주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마족 놈들은 주로 이쪽 성문을 노립니다. 그래서 성문 이름이 마족 구덩이입니다."

"그렇군."

그때, 성벽 위에서 뿔피리 소리가 길게 들렸다.

"오십니다."

길버튼이 짤막하게 말했다.

'아드리안나군.'

기사로 보이는 이들이 검을 들고 성문 주변에 섰다. 푸른 오러가 검에 가득 서렸다.

중대장으로 보이는 이가 크게 소리쳤다. 병사들이 거대한 쇠뇌를 성문 쪽으로 돌렸다. 몇 명은 방패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긴장감이 짙게 풍겼다.

뿌우우우-. 뿔피리가 다시금 울렸다.

"올려!"

기사가 소리쳤다.

병사가 채찍으로 도르래에 묶인 소의 등을 때렸다. 소가 길게 울면서 움직였다. 쇠 긁는 소리가 나며 가까운 쇠창살이 올라갔다.

뿌우우-. 다시 뿔피리 소리,

소가 울며, 다음 도르래가 돌아갔다. 두 번째 쇠창살이 올라갔다.

뿌우우- 다시 뿔피리-. 세 번째 쇠창살이 올라가고 나서야, 성문이 보였다.

보는 것만으로 단단함이 느껴지는 검은색 성문이었다.

만철이 분명했다. 그 비싼 걸 저렇게 무식한 방식으로 쓰다니-. 갈라하드는 혀를 내둘렀다.

둥둥, 묵직한 북소리가 시작됐다. 그 큼지막한 리듬에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윽고 두꺼운 성문이 천천히 열렸다.

'마족의 영역이라.'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풀며 집중했다.

성문은 속이 터질 정도로 느릿하게 열렸다. 철이 바닥을 긁으면서 기괴한 소리를 터뜨렸다.

열린 성문 틈으로 자욱한 연기가 손을 뻗듯 스멀스멀 들어왔다. 뒤늦게 풍긴 매캐한 냄새가 그게 재라는 걸 알렸다.

성문 너머는 온통 회색이었다. 눈이 아닌 재가 가득 휘날리고 있었다. 재 사이로 언뜻 보이는 땅은 탄 것처럼 검었다.

'지옥-.'

검게 썩은 대지와 휘날리는 재-. 갈라하드는 자연스레 지옥을 떠올렸다.

북부의 지랄 맞은 눈 대신 재가 휘날렸지만, 오히려 더 서늘했다.

·········!

정체 모를 비명이 멀리서 터졌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끔찍한 소리가 땅을 뒤흔들었다.

그때, 재로 이루어진 안개가 밀리듯 흩어졌다. 아니, 자세히 보니 재가 그대로 사라지고 있었다.

사라진 연기 사이로 등장한 건 아드리안나였다.

검붉은 피로 잔뜩 칠해진 갑옷과 그 사이사이에 박힌 괴상한 살점과 갑각-. 당장 지옥에서 건져 올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뒤로 연기로 이루어진 길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풍경이 꽤 적나라했다.

황량한 잿더미 위에 깔끔하게 잘린 마족과 마물의 사체가 가득했다. 흐른 피가 재를 뭉쳐 잿더미를 만들 정도였다.

그냥 보기에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 사체들과 그사이에 흐르는 피-.

'아깝군.'

갈라하드는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지옥을 걷는데도 아드리안나는 여느 때처럼 무표정이었다.

아드리안나의 뒤로 기사들이 나타났다. 지옥에 갔다 온 것처럼 몰골이 엉망이었지만, 그 기세가 상당히 날카로웠다.

평범한 기사는 아니었다.

"아드리안나님의 직속 부대입니다. 1대대 중에서도 가장 강한 이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북부의 정예라고 볼 수 있죠."

길버튼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 표정을 보니 원래 저기 소속인 듯했다.

"아드리안나님에게 충성심이 유난한 놈들입니다. 괜히 긁었다가는 문제가 발생할 겁니다."

길버튼이 진지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진심입니다. 위험한 놈들입니다."

길버튼이 몇 번이나 강조했다.

"괜한 걱정일세. 내가 언제 문제를 일으켰다고 그러나?"

길버튼의 찢어진 눈이 큼지막해졌다. 길버튼이 뭐라 말하려는 순간-.

아드리안나가 성문으로 들어섰다. 사방에서 격렬한 환호가 쏟아졌다. 모두가 아드리안나의 이름을 연호했다.

황제도 받을 수 없는 극한의 환대였지만, 아드리안나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 사이로 언뜻 피곤함이 보였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갈라하드는 슬쩍 손을 흔들었다.

굳어있던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에게 다가왔다. 그 걸음이 묘하게 빨랐다.

"아드리안나님?!"

아드리안나를 따르던 기사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날카로운 걸 넘어서 피부가 따가울 정도였다.

"아."

갈라하드 앞에 도착한 아드리안나가 피가 덕지덕지 묻은 건틀릿을 벗었다. 그리고 화사한 손수건으로 자기 손을 정성스레 닦았다.

악수를 준비하는 듯한 아드리안나의 모습에 갈라하드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때, 안에서 강한 충동이 올라왔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누군가 쥔 것처럼 가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고통의 알이 아드리안나의 죽음을 종용했다. 상당히 따가웠다.

'멍청한 놈. 지금 네 행동은 오히려 맹세를 방해하는 것이다. 지금 아드리안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나?'

갈라하드는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아드리안나가 무방비해도 지금 당장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몇 번이나 반복해도 실패라는 결과만 나왔다. 이는 갈라하드가 가장 잘하는 부분이었다.

고통의 알이 진동했다. 갈라하드는 다시금 계산했다. 또다시 실패가 도출되자 고통의 알이 잠잠해졌다.

'통하는군.'

물론, 임시방편이었다.

해결책은 따로 준비할 계획이었다.

'그래도 손잡는 건 조금 그렇군.'

아드리안나의 성질도 중요했지만, 당장 무력을 늘릴 수 있는 수단은 고통의 알이었다.

손을 잡았다가 괜히 고통의 알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원리를 알아내거나, 다른 방법을 생각해낼 때까지는 조심하는 게 좋았다.

계산을 끝낸 갈라하드는 손을 회수했다.

문제는-.

"·········?"

아드리안나의 손은 신경 쓰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아드리안나는 허공에 덩그러니 놓인 자기 손을 가만히 쳐다봤다.

생전 처음 겪는 상황이라, 아드리안나는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왜 자기 손이 혼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건지-.

"·········?"

아드리안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드리안나는 고장 난 것처럼 손을 내민 상태 그대로 굳었다.

"맙소사."

길버튼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31화 친애하는

'우리 대장 귀엽네.'

캐럿은 손을 내민 상태로 삐꺽거리는 아드리안나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껏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무표정만 짓던 아드리안나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그것과 별개로-.

'미친 인간이군.'

캐럿은 상황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드리안나의 직속 부대는 그 드높은 명성만큼 악명도 높았다.

아드리안나의 성향 때문이었다.

전장에서의 아드리안나는 그야말로 불세출의 영웅이었지만, 전장을 벗어나면 의외로 손이 많이 가는 여인이었다.

아드리안나가 마족이 아닌 것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드리안나의 직속 부대는 오로지 아드리안나만 보고 들어오는 곳이었다. 타 대대 대장보다 더 뛰어난 이도 있을 정도였다.

과도한 충성심과 의외로 손이 많이 가는 아드리안나의 성향이 더해지며 보호가 점점 격해졌다.

대공의 명이 아니었으면, 황태자도 이들이 찢어버렸을 것이다.

그런 직속 부대 앞에서 아드리안나에게 장난을 치다니-. 그것도 마치 아이들이나 할법한 유치한 장난이었다.

직속 부대의 반응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방에서 검 뽑는 소리와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위기가 터질 것처럼 팽팽해졌지만-.

"아, 오늘은 괜찮네."

갈라하드는 오히려 여유로웠다. 주변의 분위기가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처럼 태연했다.

"아-. 아. 네."

아드리안나가 삐꺽거리듯 대답했다.

"그런데 자네 수하들이 나를 노려보는군.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갈라하드가 대뜸 뒤를 가리켰다. 그에 아드리안나가 돌아봤다.

이를 갈던 이들이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숙였지만,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그를 본 아드리안나의 눈이 엄해졌다.

"갈라하드님은 대장입니다. 예의를 갖추시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아드리안나의 타박에 방금까지 이를 갈던 놈들이 고개를 숙였다.

만족스럽게 웃는 갈라하드에 캐럿은 슬쩍 웃음을 흐렸다.

'대단한 사내군.'

직속 부대 앞에서 저렇게 느긋하다니-.

둘 중 하나였다.

담이 말도 안 되게 크거나, 제대로 미쳤거나. 왠지 후자 같았다.

다만, 그 직속 부대였다. 아드리안나의 명이라도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래도 전과 달리 막무가내로 나서지 않았다. 헤르문이 당했다는 것과 마족을 잡은 마법사라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묘한 긴장감을 깬 건 미친 마르디안이었다.

"특무대 대장에게! 결투를 제안하겠다!"

아드리안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눈이 뒤집히는 마르디안이 기다란 꼬챙이를 들고 뛰쳐나왔다.

그 미친 마르디안이 꼬챙이부터 안 찌르고, 결투를 생각해냈다는 것부터 나름의 인내심을 발휘한 거였다.

1대대에서 결투는 당연한 권리였기에 아드리안나도 그를 막지 않았다.

'어떻게 할 거지?'

아드리안나도 나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결투를 함부로 거절하면 명예가 땅에 떨어질 것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묘한 기대감을 안고 구경했다.

중급 마족을 불태우고, 헤르문을 한 번에 이긴 마법사였다. 그 실력을 구경하고 싶은 기대도 있었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기대를 하는 듯했다.

다만, 갈라하드의 대처는 캐럿의 예상 밖이었다.

"미안하네, 이미 결투 약속이 잡혀 있어서."

갈라하드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결투 약속이 잡혀 있다니! 그게 무슨-."

"반달 경과 약속이 잡혀 있네. 미안하군."

반달이라면 성문을 지키는 막내 기사였다. 그런 반달과 결투 약속이 잡혀 있다니-. 웃기지만 제법 그럴듯한 핑계였다.

"순서라는 게 있지 않나. 아, 혹시 1대대에는 없나?"

"마르디안, 순서를 지키세요."

"하지만······!"

"마르디안."

마르디안이 뒤로 물러났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마르디안이 정말 화났다는 신호였다.

갈라하드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이 두려움이 아닌 귀찮음이라는 걸 깨달은 캐럿은 작게 감탄했다.

그것과 별개로-.

'반달은 이제 좆됐군.'

****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드리안나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 보러 왔지, 왜 왔겠나."

갈라하드의 대답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아. 시간 좀 되나? 할 이야기가 있네."

"예. 괜찮습니다."

"정비하고 와도 되네."

"아닙니다. 잠시만-."

한걸음 물러선 아드리안나가 갑자기 오러를 일으켰다.

백색에 가까운 창연한 오러가 순식간에 가득 타올랐다.

그 백색 오러에 갈라하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닿는 순간 타서 재로 될 것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건 마나를 지닌 이의 악몽이었다. 짙은 거부감이 가득 올라왔다.

방금까지 종용하던 고통의 알조차 잠잠했다. 격의 차이를 느낀 것처럼 입을 꾹 닫았다.

'닿으면 무슨 느낌일까. 다 탈까?'

갈라하드는 무의식적으로 나가던 손을 애써 참았다. 저건 정말 닿는 순간 끝이었다. 그래도 살짝만-.

고민하던 갈라하드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갑자기 오러를-.'

거칠게 타오르는 오러에 아드리안나의 긴 머리가 휘날렸다. 동시에 아드리안나에게 묻어있던 피와 살점이 순식간에 재가 되어 흩날렸다.

'설마-.'

순식간에 뽀송뽀송해진 아드리안나의 모습에 깨달았다.

방금 그 살벌한 오러가 아드리안나에게는 가벼운 정비였음을-.

'괴물이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가시죠."

예의 무표정이지만, 묘하게 산뜻해 보이는 아드리안나가 말했다.

"오러로 마족의 잔재를 털어내다니 대단하군."

"그냥 잔재주입니다."

아드리안나의 대답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검을 잡은 이가 꿈에 그리는 경지가 오러였다. 그 오러를 이용해서 샤워하는 게, 별것 아닐 리가 없었다.

"그것참 편리하겠군."

"편리합니다. 마족의 피는 워낙 독해서 갑옷을 금방 상하게 하는데, 오러를 이용해서 갑옷을 관리하면 부식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대답이 긴 걸 보니 상당히 편리한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오러로 샤워라니-.

'괜히 밉보이면 큰일 나겠군.'

갈라하드는 괜히 목을 매만지다가 칭찬을 던졌다.

"자네, 아름답다고 내가 말했던가?"

"예? 아마 하셨을 겁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답다는 말은 아드리안나에게는 인사처럼 당연한 듯했다.

갈라하드는 기침하듯 작게 웃었다.

"북부는 지낼 만하십니까?"

이번에는 아드리안나가 질문했다.

"아니, 너무 춥더군."

작게 투덜거리자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위아래로 살폈다.

"춥게 입고 다니시니 추울 수밖에 없습니다."

"옷이 이것밖에 없네."

아드리안나가 자기 코트를 벗어 내밀었다. 하얀 털로 만들어진 딱 봐도 굉장히 고급스러운 코트였다.

"이거라도 입으시겠습니까?"

"됐네, 자네도 춥지 않나."

"······예? 아, 네. 알겠습니다."

묘한 표정이 된 아드리안나가 다시 코트를 입었다.

'두 번은 안 물어보는군.'

갈라하드는 작게 투덜거렸다.

****

"이게 자네의 성이라고-."

안쪽에 보이지 않던 내성이 있었다. 그 규모가 내성이라기에는 작아 물어보니, 아드리안나가 머무는 곳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마족의 습격이 잦아서요."

"그렇군."

아드리안나는 본부 건물로 안내했다. 본부 건물은 5대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돌아다니는 병사들조차 기세가 남달랐다. 무장하지 않은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당장 전투할 수 있는 만반의 자세였다.

날카로운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꽂혔다.

몇몇은 불순한 눈이었고, 또 몇몇은 재는 듯한 눈이었다. 그중에는 아주 드물게 반짝이는 눈도 있었다. 반달처럼-.

아드리안나의 사무실은 넓었지만, 물건은 몇 개 없었다. 정확히 필요한 것들밖에 없었다.

아드리안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정자세로 앉아서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아름답군.'

그 완벽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아마 고통의 알 때문일 것이다. 아드리안나의 오러 샤워에 조용해지더니, 이제 슬슬 다시 속삭이는 듯했다.

아드리안나의 보좌관 루나비른이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갈라하드와 아드리안나 앞에 놔줬다.

"최근 제마전쟁의 잔재를 뿌리는 불온한 세력이 있네."

"제마전쟁의 잔재를요?"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했다.

"저번에 마물 조련사의 흔적이 나오지 않았나."

"예, 그에 대해서는 따로 조사단을 꾸려뒀습니다."

"잘했군, 그런데 최근 5대대 주변에서 정신계 마족이 하나 나타났네. 중대 하나가 사라졌지."

"중대 하나를 다룰 정신계 마족이라면 중급에서도 까다로운 마족입니다."

갈라하드는 가슴을 꾹꾹 누르며 끄덕였다.

"그 마족 뒤에 제마전쟁의 잔재를 뿌리는 단체가 있다는 걸 알아냈네."

아드리안나가 고풍스럽게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아니, 그냥 입에 가져다 댄 건데 그 비현실적인 외모 때문에 고풍스러워 보이는 것 같았다.

"여명이란 놈들이더군."

아드리안나의 움직임이 살짝 멈췄다. 줄곧 부드러운 미소를 짓던 루나비른의 입꼬리가 굳었다. 고통의 알이 다시금 종용했다.

"아는 이름인가."

이번에는 대답이 살짝 느렸다.

"예. 저를 공격했던 단체 중 하나입니다."

아드리안나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단체 중 하나라-.'

아드리안나를 노리는 게, 여명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음, 갈라하드는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여명이 제마 전쟁의 잔재를 뿌리면서 불온한 세력이 북부로 모이고 있네."

"불온한 세력-."

아드리안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에 호응하듯 마족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지. 그런데 마족이 아래에서 올라오겠는가?"

여전히 단단한 아드리안나의 무표정에 갈라하드는 쉽지 않을 것임을 예상했다.

"전선에 구멍이 뚫린 게 분명하네. 점검할 필요가 있어."

"맞는 말씀이십니다. 1대대가 맡은 구역을 다시 점검해보겠습니다."

"다른 대대에도 경고 해줘야 하지 않나?"

"보고를 대공 전하에게 올리고, 그에 대공 전하가 명령을 내리시는 게 원칙입니다."

표정이 강경했다. 마크의 예상대로였다. 다만, 그 무표정 아래에 묘한 느낌이 있었다.

'다른 대장에게 관여하는 걸 꺼리는군.'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아드리안나는 다른 대장에게 관여하는 걸 피하는 듯했다.

밀어붙이면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만, 아드리안나와의 관계가 틀어질 수 있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계획은 하나 더 있었다.

"그렇군. 대공 전하께 보고를 올리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나?"

"예, 제 매를 빌려드리겠습니다."

"고맙군. 아, 종이랑 펜도 부탁하네."

"이쪽에 있습니다."

아드리안나가 뒤쪽을 가리켰다. 그에 갈라하드는 일어나서 책상으로 향했다.

종이에는 1대대의 인장이 박혀 있었다.

갈라하드는 잠시 고민했다. 평범하게 쓰면 소용없을 것이다.

'어차피 나빠질 사이도 없으니-.'

고개를 끄덕인 갈라하드는 펜을 휘갈겼다.

종이를 말아 아드리안나의 봉인을 찍었다.

삐익-.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에 하얀 매가 날아들었다. 거의 아이만 한 거대한 크기였다. 매는 아드리안나에게 얼굴을 비볐다.

갈라하드는 봉인한 편지를 루나비른에게 건넸다.

"뭐라고 쓰셨습니까?"

"비밀일세."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아드리안나가 편지를 병에 담아 매의 다리에 묶었다. 이어서 아드리안나가 뭐라고 속삭이자, 매가 길게 울고는 창문으로 사라졌다.

아드리안나는 가만히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을 쳐다봤다. 갈라하드는 그를 구경하다가 다음 목적을 생각해냈다.

"아, 자네 내일도 마족의 영역에 들어가는가?"

"예, 그렇습니다."

"나도 같이 가지."

의외였는지 아드리안나의 대답이 느렸다.

"위험합니다."

"괜찮네, 나는 명줄이 기니까."

잠시 고민하던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첫 데이트인가?"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가 미세하게 구겨졌다.

"마족의 영역은 그리 가볍게 말할 곳이 아닙니다."

갈라하드는 다시금 깨달았다. 아드리안나는 농담이 통하지 않는 여인이라는 걸-.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일어났다.

"그럼, 식사라도 하고 가시겠습니까?"

"아 괜찮네, 선약이 있어서."

깔끔하게 거절하고 미련 없이 방을 나서는 갈라하드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

방금은 데이트라도 기대하는 것처럼 얘기하더니-.

······좀처럼 따라가기 힘든 사내였다.

아드리안나는 식은 찻잔을 한참이나 매만졌다.

****

"갈라하드 대장이 흑마법사 둘과 중급에서 상급 사이의 마족 하나, 땅강아지 열여섯 마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만약 그대로 뒀다면 7대대 때와 마찬가지로 큰 피해가 벌어졌을 거라 예측됩니다."

"4대대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발견됐습니다. 마석장을 연 걸 보니,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듯합니다."

"5대대 대장 마크가 특무대와 동맹을 공언했습니다."

"정신계 마족으로 인해 5대대에 중대 하나가 손실되었다고 합니다. 갈라하드 대장이 그를 해결했습니다."

대공이 정세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달랐다.

대공은 무식한 맹수가 아닌 노련한 사냥꾼이었다. 노련하기에 맹수를 연기할 뿐이었다.

북부에 있는 모든 일은 대공의 귀에 들어갔다.

"음-."

대공이 나지막한 침음성을 흘렸다. 보고를 올리던 테오도르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갈라하드-.'

최근 보고에 가장 많이 올라오는 이름이었다.

제국에서 보낸 조롱, 더러운 마법사, 아드리안나의 약혼자-. 정말 다양한 수식어를 지닌 이였다.

제국은 대공이 놈을 죽일 것이라 예상했을 것이다.

대공은 오히려 놈에게 특무대를 신설하여 맡겼다.

놈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능력을 보이고 살아남든지, 혹은 비루하게 죽든지.

북부는 걸음마다 위험이 자리한 곳이었다. 제국에서 갓 올라온 놈, 그것도 마법사가 고작 네 명인 부대로 살아남기에는 가혹한 곳이었다.

그건 어찌 보면 지하 감옥에 가두는 것보다 더한 처사였다.

금방 죽을 거라는 가신들의 예상과 달리 갈라하드는 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공을 세웠다.

놈이 위험을 마주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갈라하드가 마주한 마족들은 그들이 상정한 것보다 더 위험했다.

단지 놈이 전부 이겨내고 살아남았을 뿐이었다.

"재밌군."

대공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평범한 놈은 아니라 이건가."

대공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에 테오도르의 머리가 바빠졌다.

만약 제국에서 단순히 빌미를 위한 제물로 갈라하드를 보낸 게 아니었다면-.

'그럴 리가.'

테오도르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공은 인정해야겠지. 어떤 걸 내려야 할까."

대공의 중얼거림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북부 내부에서 발생한 마족을 두 번이나 막은 건 큰 공이었다.

대공이 어떤 상을 내릴지 테오도르도 궁금했다.

그때, 창문에서 거대한 매가 날아들었다. 하얗고 거대한 매를 본 대공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대공의 방으로 직접 날아드는 매는 하나밖에 없었다. 대공의 유일한 혈육 아드리안나의 것이었다.

저번 방문 때, 아드리안나가 얼굴도 안 보고 돌아간 뒤로 줄곧 구겨져 있던 대공의 얼굴이 오랜만에 활짝 피었다.

대공의 무거운 입꼬리가 잔뜩 올라갔다. 대공이 조심스럽게 매의 발에 묶인 병을 풀었다.

종이를 펼쳐 읽은 대공이 뚝- 하고 굳었다.

그 깊은 눈동자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편지를 몇 번이나 읽었다.

그리고는-.

"허허."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꾹꾹 눌러 담은 웃음에 테오도르의 털이 바짝 섰다.

'아드리안나의 편지를 받았는데 도대체 왜-.'

테오도르는 머리를 땅에 바짝 댔다.

대공이 손가락을 살짝 휘둘렀다. 살짝 접힌 종이가 화살처럼 날아가서 테오도르의 앞에 박혔다. 종이를 돌에 박다니-. 말도 안 되는 괴력이었다.

"읽어보거라."

대공의 명령에 테오도르는 편지를 펼쳤다.

글씨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화려했다. 이런 글씨체가 있다니-. 보는 것만으로 절로 감탄이 나오는 굉장한 글씨체였다.

잠깐 홀렸던 테오도르는 황급히 읽어 내려갔다.

편지는 짧았다.

[친애하고 존경하는 장인어른께.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입니다. 따로 매가 없어 아드리안나의 매를 빌렸습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선에 구멍이 뚫린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이곳이 북부인지, 마족의 마당인지 헷갈렸지 말입니다. 하하. 북부의 벽이 높고 단단하다고 들었는데, 뭐 소문이란 게 다 그렇겠지요. 그래도 처가의 땅이니 제가 잘해보겠습니다. 1대대에 도착한 걸 보고드립니다.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 올림.]

'···미친놈인가?'

테오도르는 편지를 그대로 떨어뜨렸다.

감히 황제도 대공을 저리 대하지는 못할 것인데, 무슨-. 죽고 싶은 건가? 미쳐도 이건 보통 미친 게 아니었다.

"마족의 마당이라."

대공의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에 테오도르는 황급히 고개를 처박았다.

"각 대장에게 전령을 보내도록. 해가 일곱 번 떠오른 뒤에 전령을 다시 보낼 건데."

"그때, 구멍이 발견되면-."

"목을 뽑아 그 척수로 구멍을 메꾸겠다고."

가신들은 그저 읍- 했다.

32화 유능해

"······어디를 간다고?"

"말이 짧아졌네, 길버튼 경,"

크흠, 길버튼은 작게 헛기침했다.

"어디를 간다고 하신 겁니까?"

"마족의 영역일세."

"미친. 거기가 어떤 곳인지는 아십니까?"

"내가 자네인 줄 아나? 마족의 영역이니, 마족이 사는 곳이겠지."

길버튼은 터지려는 욕을 꾹 참았다.

마족의 영역은 위험하다는 설명으로 부족한 곳이었다.

1대대에서도 아드리안나의 직속 부대에게만 허락된 곳이 마족의 영역이었다.

마족의 영역은 들어가는 순간부터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런 위험한 곳을 마법사가 따라간다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비록 갈라하드가 마족을 두 번이나 잡았다고 해도-.

'생각해보니 마족 잘 잡잖아?'

갈라하드는 웬만한 기사보다 마족을 잘 잡았다.

"괜찮겠군요."

길버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아드리안나님이 허락하셨습니까? 마족의 영역에 대해서는 칼 같은 분이신데."

"좋다더군. 첫 데이트일세."

갈라하드의 농담에 길버튼은 피식 웃었다.

마족의 영역에 대고 데이트라니. 아무리 갈라하드라도 그런 말을 할 리가-.

"······진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부끄러운지 아니라고 우기더군. 톰한테 먹을 것 좀 싸달라 부탁했네."

한마디 하려고 입을 연 길버튼은 입을 꾹 닫았다. 애초에 말한다고 들을 인간이 아니었다.

"어차피 거기서 못 먹을 겁니다. 재가 가득해서."

"재? 어제 보니까 아드리안나가 치우던데."

"그렇긴 합니다만···. 대장, 아드리안나님을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대답하지 마십쇼."

길버튼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괜히 불경스러운 말을 들으면 길버튼 손해였다.

"그러면 출발하지."

길버튼은 군말 없이 검을 챙겼다. 갈라하드는 톰이 만들어준 보따리를 챙겼다.

해가 뜨기 전이라 가장 어두울 때였다.

도착한 곳에는 이미 준비가 끝나 있었다. 해 뜨는 시간에 출발한다고 하여 맞춰 왔는데, 괜히 지각한 느낌이었다.

"길버튼 경이 늦게 일어났네."

"그게 무슨-."

"괜찮습니다. 준비를 좀 일찍 했을 뿐입니다."

아드리안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 뒤에 있는 놈들의 분위기는 여전했다.

"그건 뭡니까?"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의 손에 든 보따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점심일세."

"안에서 뭔가를 먹기는 힘들 겁니다. 재가 많아서."

"자네한테 꼭 붙어서 먹을 것이니 괜찮네."

"······예, 알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손짓했다. 준비는 금방 끝났다.

다른 이들이 옆으로 물러났다.

"아드리안나님이 대장을 생각해서 공격적이지 않은 이들로 구성한 것 같습니다."

길버튼이 남은 놈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확실히 마르디안이라는 여인에 비하면 눈이 부드럽긴 했다. 그래봤자 여전히 불온한 기색이 만연했지만-.

총인원은 갈라하드 쪽까지 포함하여 열 명이었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았는데, 병사들과 기사들이 나와서 열을 맞춰 있었다.

뿌우우-. 뿔피리 소리가 어둠을 밀어냈다. 둥둥, 북소리가 땅을 울렸다. 병사들이 힘찬 경례를 올렸다.

"출발하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선두에 섰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 바로 뒤였다. 나머지 기사들이 그를 호위하듯 둥그렇게 섰다. 길버튼은 그들 사이에 익숙하게 스며들었다.

뿌우우우-!! 뿔피리 소리가 다시금 깊게 울렸다. 깊게 내려앉았던 어둠이 차차 밀렸다. 둥둥. 북소리가 꼭 심장박동처럼 울렸다.

"올려!"

기사 하나가 소리쳤다. 병사들이 채찍질했고, 소가 길게 울었다. 도르래가 비명을 지르며 돌아갔다. 쇠창살이 하나씩 올라갔다.

이내 성문이 나타났다. 성문이 바닥을 거칠게 긁으며 열렸다.

열린 성문 사이로 재로 이루어진 연기가 손처럼 뻗쳐 나왔다.

그를 앞에서 마주하니 감회가 색달랐다.

"떨리는군."

"지금이라도 돌아가셔도 됩니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주변에 있는 기사들이 작게 비웃었다.

기사들의 얼굴에 새겨진 조소를 보니, 갈라하드가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두려워한다-.'

마법사를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마족의 피에는 농축된 마나가 담겨있었다. 마족이 다루는 괴상한 힘은 마법의 원류로 보이는 것들이었다.

마법이 마족의 오물이라는 소리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마법사가 마족의 영역을 들어간다는 건, 성직자가 성지를 방문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이 떨림은 두려움에 기이한 것이 아니었다.

"기대돼서 떨리는 거라네."

갈라하드의 대답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우리의 첫 데이트 아닌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냉정한 부정에 갈라하드는 낄낄 웃었다.

역시 농담이 안 통하는 여인이었다.

둥둥-! 북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졌다.

성문이 활짝 열렸다.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검게 썩은 대지까지-. 꼭 지옥으로 가는 문 같았다.

"뒤에 계십쇼."

"자네만 믿겠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전진했다.

자욱하게 깔린 재가 아드리안나를 두려워하듯 밀려났다. 검게 썩은 대지가 발을 붙잡았다. 계란 썩은 냄새가 가득 풍겼다.

본격적으로 마족의 영역에 들어갔다.

방금까지 갈라하드를 노려보던 기사들이 경계에 집중했다. 긴장이 가득 느껴졌다. 길버튼도 진지한 얼굴이었다.

'이곳이 마족의 영역.'

갈라하드는 긴장 대신 짙은 흥미를 느꼈다.

역시 가장 궁금한 건 이곳의 농도였다. 북부도 마나 농도가 높았는데, 마족이 머무는 이곳은 어떨까-.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지만, 마나 화살이 생기지도 않았다. 마나가 중간에 흩어진 까닭이었다.

'이거 마나 농도가 말도 안 되는군.'

갈라하드는 작게 감탄했다.

그저 벽 하나 지났을 뿐인데, 농도가 급격하게 짙어졌다.

'이게 마족의 영역-.'

마법을 발현하기 위해서는 주변 마나보다 시전자의 마나 농도가 짙어야 했다.

마나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이었다. 행여 마나 농도가 주변보다 낮으면 마나가 흐트러져 마법 자체가 무산된다. 방금처럼.

이 정도의 마나 농도에서 마법을 쓰려면, 평범한 마나 압축으로는 불가능했다.

웬만한 마법사는 여기서 마법을 쓸 엄두조차 못 낼 게 분명했다.

그 정도로 마나 농도가 짙었다.

다만, 갈라하드는 웬만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더불어 고통의 알이 준 높은 농도의 마나도 있었다.

농도를 조절하여 손가락을 튕기자 마나 화살이 떠올랐다. 짙은 농도 덕분에 마나 화살인데도 그 존재감이 상당했다.

'좋군. 오길 잘했어.'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괜찮으십니까?"

"아주 좋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드리안나가 잠시 눈을 찡그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세는-."

기사 하나가 이죽거렸지만, 갈라하드는 기분이 아주 좋았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 어디선가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옵니다."

아드리안나가 검을 빼 들었다.

흰색의 창연한 오러가 가득 올라오며 주변의 재를 단번에 밀어냈다. 엄청난 위압이었다.

'오-.'

저건 진짜 닿는 순간 녹겠군.

본능적인 꺼림에 갈라하드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연기가 갈라지면서 거대한 발톱이 튀어나왔다. 발톱이 얼마나 크고 예리한지, 발톱 하나하나가 예리한 장검 같았다.

발톱의 기세가 대단했다. 그런 위협적인 공격이 안 보이는 곳에서 날라왔는데, 아드리안나는 아무렇지 않게 검으로 받았다.

마물의 발이 길게 잘렸다. 흰색 오러가 서린 아드리안나의 검이 그 거대한 발을 두부처럼 쉽게 잘라냈다.

웬만한 사내의 상체만 한 거대한 발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잘린 부위에서 피가 뿌려지지 않았다.

마치 고온의 불에 닿은 종이처럼 순식간에 재로 흩어졌다.

거대한 발을 가벼이 자른 아드리안나의 검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마물의 모습이 드러났다. 얼굴은 벌레인데 몸은 곰인 흉측한 놈이었다. 아드리안나의 검이 놈의 가슴을 길게 그었다.

단 한 번이었다.

아드리안나는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검을 털었다.

마물의 움직임이 멈췄다. 놈의 가슴에 깔끔한 줄이 그어졌다. 마른 풀에 불을 붙인 것처럼 흉터가 급격하게 벌어졌다.

마물이 끔찍한 비명을 터뜨렸다. 괜히 털이 쭈뼛 설 정도로 고통스러운 비명이었다.

마물이 거칠게 몸을 뒤틀었다. 벌어진 흉터에서 재가 연신 뿌려졌다. 영혼이 타오르는 것처럼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마물이 고통스러워하다니?'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내 마물이 쓰러졌다. 형체가 재로 스러졌다.

"괜찮으십니까?"

아드리안나는 오히려 갈라하드를 챙겼다. 흐트러지지 않은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애써 끄덕였다.

'이거 잘못 걸리면 진짜 큰일 나겠군.'

갈라하드는 괜히 목을 매만졌다.

그러다가 문득 문제를 발견했다.

'피가 남지 않는군.'

아드리안나의 검은 마물을 불태워서 재로 만들었다. 피 한 방울 남지 않았다.

마족의 영역에 따라온 건 다양한 궁금증도 있었지만, 주된 목표는 마족의 피였다.

고통의 알이 있으니, 이번 기회에 마족의 피를 최대한 많이 마셔둘 생각이었다.

그를 위해서 톰에게 수통들도 빌려왔는데, 아드리안나가 전부 재로 만들어버리게 생겼다.

큰 목적 하나가 사라지는 셈이었다.

공칠 위기에 갈라하드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마나의 농도가 짙으니 조금 힘들긴 하지만, 그를 응용해서-.'

마족을 찾아낼 방법을 떠올렸다.

'내가 잡아야겠군.'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

'단단히 겁먹었군.'

아드리안나 직속 부대 로버트는 심각한 얼굴이 된 갈라하드에 작게 이죽거렸다.

마족의 영역에 있는 마족·마물은 아래의 마물·마족과 차원이 달랐다. 괜히 마족의 영역이라 부르는 게 아니었다.

마족과 마물은 제 영역에서 괴상할 정도로 강해졌다.

아래에서 마물과 마족 좀 잡았다고 꺼드럭거리더니, 영역에서 마물을 만나보고 겁먹은 게 분명했다.

'그러면 그렇지-.'

허세가 분명했다. 로버트는 기사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다들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때, 놈이 아드리안나를 보며 물었다.

"일부러 이렇게 다니는 건가?"

"뭐 말씀이십니까?"

"재 때문에 불편하지 않나? 치워도 되나?"

한동안 조용하던 놈이 또 허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드리안나 덕분에 한결 옅어진 재였다. 고작 이 정도가 불편하다니-. 로버트는 작게 혀를 찼다.

"예, 치워주시면 저희는 좋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풀, 산들바람, 거친 바람, 태풍."

놈이 괴상한 말을 중얼거렸다. 놈에게 느껴지는 묘한 중압감에 로버트는 자신도 모르게 집중했다.

놈이 손을 휘저었다. 거창한 동작과 달리 그저 작은 바람이었다.

'역시···.'

로버트가 작게 이죽거릴 때-.

"와아-."

아드리안나가 감탄했다. 감정표현이 좀처럼 없는 아드리안나였다, 그 입에서 감탄이 나오는 건 굉장한 표현이었다.

'뭐지?'

고개를 돌린 로버트는 입을 쩍 벌렸다.

거친 태풍이 휘몰아친 것처럼 주변 연기가 밀려나고 있었다.

그에 시야가 트였다.

'이··· 이게 마법?'

재로 인한 연기는 마족의 영역에서 가장 큰 위험이었다.

독한 냄새가 나는 연기는 마시는 것만으로도 신경을 긁었다. 더불어 언제 어디서 마족이 공격할지 모르기에 긴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피로가 금방 쌓였다.

마족의 영역에서 가장 큰 걸림돌인 연기를 손짓 한 번에 치워 버리다니-.

"다른 마법사도 이런 걸 할 수 있습니까?"

아드리안나가 놈을 보며 물었다.

"아니, 나만 할 수 있네. 아, 마탑주 정도면 가능하겠군."

"그렇군요. 대단하십니다."

"내가 원래 대단한 마법사네."

갈라하드의 거만한 말에 로버트는 눈을 찡그렸다.

마법을 이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니-. 이제껏 생각지 못한 방법이었다.

아니, 애초에 마법사를 데려온 적 없었다.

"마물이 옵니다."

아드리안나가 검을 고쳐잡으며 말했다.

다가오는 마물이 훤하게 보였다. 그 끔찍한 형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오히려 긴장이 풀렸다.

보이는 건 막을 수 있었다. 무서운 건 보이지 않는 발톱이었다.

로버트는 검을 고쳐 잡았다. 오러가 가득 타올랐다.

아드리안나를 필두로 전투가 시작됐다.

아드리안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들 또한 정예였다. 로버트의 경우에는 타 대대 부대장 자리도 거절한 인재였다.

전투는 심각할 정도로 순조로웠다.

원인은 하나밖에 없었다.

'놈이 시야를 확보해준 덕분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야가 확보되니 전보다 전투가 훨씬 수월했다.

마물은 안개에서 공격하는 음흉한 놈들인데, 그 안개를 걷어버리니 전보다 쉬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아드리안나의 움직임이 자유로웠다.

조금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직 초입이라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거-.'

로버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비슷한 표정이었다.

이거 뭔가··· 뭔가··· 이상했다.

연기를 걷어낸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갈라하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저쪽에 뭔가 있는 것 같군."

갈라하드가 뜬금없이 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마나 화살을 응용하여 마나를 뿌렸는데, 저쪽에서 반응이 안 돌아왔네. 마나 농도가 높은 마족이라 가능한 방법이지."

괴상한 소리로 방향을 제시했다.

놈이 보여준 게 있었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착한 곳에는-.

"드디어 마족이군."

진짜 마족들이 있었다.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마물과 달리, 마족은 기회를 노리는 음흉한 놈들이었다.

그런 탓에 마족을 찾아내는 건 상당히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그런 마족을 찾아내다니-.

"대단하시군요."

아드리안나의 감탄에 로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을 잡기 위해서는 꽤 돌아다녀야 했다. 그런데 놈은 정확히 마족을 찾아내고 안개까지 걷어줬다.

이건 그냥-.

'떠 먹여주는 거잖아.'

표현이 과격했지만, 이것만큼 적절한 표현이 없었다.

로버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때, 놈이 연초를 입에 물며 웃었다.

"자네가 아름다운 것처럼 나도 대단하다네."

재수 없는 대답이었지만, 부인할 수 없었다.

놈은 대단했다.

"준비하도록."

하급 마족이었지만, 그 수가 제법 많았다.

마족은 등급에 상관없이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아드리안나를 필두로 전투가 시작됐다.

전에는 습격당하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습격하는 입장이었다.

전투에서 선공은 상당히 중요했다.

그 상대가 마족이라면 더더욱-.

전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사들은 올라온 열기를 식히며, 서로를 쳐다봤다.

표정이 다 복잡미묘했다.

갈라하드는 제국의 마법사였다. 북부의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놈이었다.

그런 놈이 마족의 영역에 따라온다고 했을 때,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죽고 싶어서 안달 난 놈이구나. 놈 때문에 오늘 하루 고달프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놈은 제국의 마법사였으니까.

무조건 걸림돌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왜-.

'······유능하지?'

로버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유능하다는 단어로 부족했다.

놈이 합류하면서 구도 자체가 바뀌었다.

이제까지는 돌아다니면서 마족과 마물의 습격을 막아내면서 잡아냈다면, 지금은 오히려 그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마치 사냥하는 것처럼-.

'그니까 왜?'

어째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족의 피는 왜 챙기십니까?"

그에 고개를 돌린 로버트는 그대로 굳었다.

놈이 목 잘린 마족에 수통을 대고 마족의 시체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마치, 열매의 즙을 짜는 것처럼-.

'도대체 무슨······.'

왜 마족의 피를 모으고 있지? 그것도 미소를 머금고?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 마법을 위한 걸세. 이게 큰 도움이 되거든."

"아- 그렇군요. 도와드릴까요?"

"오- 그래주겠나?"

"예."

수통을 받은 아드리안나가 다른 마족의 사체에서 흐르는 피를 받았다.

기괴한 장면에 어울리지 않는 단란함에 로버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뒤에 다시 움직였다.

꿀꺽, 꿀꺽-.

시원하게 마시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로버트는 그대로 굳었다.

갈라하드가 수통을 입에 대고 있었다.

그 입가에 흐르는 붉은색에 로버트는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그제야 보였다.

모두의 고개가 이상할 정도로 밖을 향해 있음을-.

"음, 좋군."

고개가 좀 더 돌아갔다.

33화 명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