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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 43-50

43화 빈 잔

'후-.'

아드리안나는 가쁜 숨을 터뜨렸다.

얼마나 검을 휘두른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갑자기 마경이 생기다니-.'

마경은 마족의 본진이나 다름없다. 거기서 마족은 더욱 강해지고, 인간은 나약해졌다.

어떤 원리인지 알 수 없지만, 마경은 마나를 태우는 아드리안나에게 특히 더 부담을 줬다.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씹으며 검을 휘둘렀다.

가득 일어난 창연한 백색 오러가 거대한 촉수를 갈랐다. 그 거대한 촉수의 끝부분이 잘리며 재가 휘날렸다.

그러나 치명상을 줄 순 없었다. 검을 쓰는 아드리안나와 거대한 마물은 상성이 좋지 않았다.

차라리 최상급 마족이었다면 더 쉬웠을 것이다.

다만, 아드리안나는 불평하지 않았다.

'여기서 막아야 한다.'

그저 오러를 더욱 일으키며 전진했다.

그때-.

"고생이 많군."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가로운 날 나들이라도 나온 듯한 여유로운 목소리-.

갈라하드가 어느새 아드리안나의 옆에 있었다.

"마법사들을 처리하고 오느라 좀 늦었네."

끄덕.

"아, 말해도 되네."

"예, 상황은 어떻습니까?"

"좋다고 볼 수 있지, 이것만 남았으니까."

갈라하드가 앞쪽을 가리켰다. 성 위쪽에 거대한 촉수 네 개가 꿀렁이고 있었다.

'이것만····?'

가볍게 말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상대였다. 그런데 갈라하드가 여유롭게 말하니 정말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자, 작전을 설명해주겠네. 아까 보니까 저 놈 중심에 핵 같은 게 있는 것 같더군."

"핵 말입니까?"

"아, 음-, 머리라고 생각하게. 그 부분을 해치워야 할 것 같네."

"그렇군요"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휘둘렀다. 날아오던 촉수가 잘리며 재로 화했다. 한결 짧아진 촉수가 위로 올라갔다.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촉수의 마나 농도가 옅어지네. 자네가 어려움을 겪은 것도 그 이유일 걸세. 자네는 상대의 마나 농도가 강할 수록 더 강해지니까."

갈라하드가 수통을 흔들었다. 아드리안나는 일단 끄덕였다.

"하지만 마법사인 나는 마나 농도가 옅은 상대에게 강하지. 우리의 궁합이 상당히 좋다는 말일세."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자, 여기는 내가 맡겠네. 내 뒤로 오게나."

"······네?"

"뒤에 서라는 말일세."

갈라하드가 수통의 뚜껑을 열며 앞으로 나섰다.

"그-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의외로 널찍한 등에 잠시 멍하니 있던 아드리안나가 다급히 말했다.

"음, 방금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나?"

갈라하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갈라하드가 길버튼을 얼마나 놀리는지 떠올린 아드리안나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그래, 자네가 길버튼 경도 아니고 말이지."

아드리안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잘 따라오게나. 빠르게 갈 걸세."

그리 말한 갈라하드가 오른손을 올렸다. 그 팔뚝에 붉은 피로 이루어진 그림이 붉게 타올랐다. 마치 재를 일으키는 불꽃처럼-.

"네."

아드리안나는 정말 오랜만에 타인의 등을 따랐다.

거대한 촉수가 떨어졌다. 그 앞에 선 갈라하드는 위태로워 보였다.

아드리안나는 습관적으로 검을 잡았다. 앞으로 나서려고 할 때.

"지옥불."

갈라하드의 손에서 자그마한 불이 쏘아졌다.

거대한 촉수와 비교하면 손톱만 한 크기였지만, 아드리안나는 묘한 서늘함을 느꼈다.

자그맣게 출발한 물이 주변을 가득 채운 재를 잡아먹으며 크기를 부풀렸다.

촉수가 순식간에 타올랐다. 메스꺼운 냄새가 가득 퍼졌다.

거대한 촉수가 불에 타는 모습은 꽤나 장관이었다.

"저기 보이나? 저기가 경계일세."

갈라하드가 그 촉수의 끝부분을 가리켰다. 촉수를 태우던 불이 어느 순간 막히더니 사라졌다.

"저기까지는 내가 앞장서겠네. 그 뒤에는 자네가 날 지켜주게."

그리 말하는 갈라하드의 눈이 상당히 진지했다.

"예."

아드리안나는 굳게 끄덕였다.

"약속한 걸세."

갈라하드가 드물게 다시 물었다.

그에 묘한 위화감이 들었지만,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자네만 믿겠네."

"······예."

그 목소리가 묘하게 간지러워 아드리안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 탓에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올라간 건 보지 못했다.

갈라하드는 계속 수통을 들이키면서 불이나 번개를 쏘아냈다.

그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지만, 갈라하드에게는 망설임이 없었다.

얼마나 갔을까-.

"나는 여기까지네."

그렇게 말하며 주저 없이 자신의 뒤로 숨는 갈라하드의 능청스러운 모습에, 아드리안나는 상황도 잊고 작게 웃었다.

"자네, 지금 웃은 건가?"

"안 웃었습니다."

"그런가?"

갈라하드가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그에 아드리안나는 작게 기침하며 검을 고쳐 잡았다.

잠깐 숨을 돌린 덕분에 상태가 훨씬 나아졌다.

하얀 오러가 다시 거칠게 타올랐다.

"자네는 웃는 게 더 이쁘군."

뒤에서 들린 말은 못 들은 척했다.

"음, 못 들었나? 자네는 웃는 게 더 이쁘네."

"······알았습니다!"

"자네, 지금 짜증낸 건가?"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기침이 나올 것 같았다.

****

'음····, 여기까진가.'

갈라하드는 오른팔을 털며 입꼬리를 올렸다.

오른팔이 불에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나를 너무 많이 돌린 까닭이었다.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진에는 여러 기능이 담겨 있었다.

그중에는 마물에게 인식되지 않는 기능도 있었다.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과 연관된 듯했다.

다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실제로, 마물의 핵 가까이 다가가자 갈라하드에게도 촉수를 휘둘렀다.

우습게도 성역이라 불리는 마경은 갈라하드에게 도움이 됐다.

마법사인 갈라하드에게 고통의 알과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진까지 더해지니 마경은 오히려 갈라하드에게 효과적이었다.

아니, 효과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마경은 물이었다.

갈라하드는 물고기였고.

'최상급이라-.'

갈라하드는 정면에 있는 거대한 촉수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최상급이라도 저 거대한 덩치를 전부 고농도의 마나로 채울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확인해보니 제일 끝부분은 하급 마족 정도의 마력밖에 없었다. 마나의 농도는 안쪽으로 갈수록 짙어졌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촉수의 뿌리 부분을 갈랐다. 그 태양처럼 찬란한 금발이 거칠게 휘날렸다.

"괜찮습니까?"

두근-.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고통의 알이 슬슬 또 까부는 듯했다.

'손이나 한 번 더 잡아야겠군.'

고통의 알이 꿈틀거렸다. 괜히 아닌 척 항변하는 듯했다. 뻔뻔한 놈-.

"마물이 이쪽에 집중을 못 하는 느낌입니다."

"집중을 못한다?"

···············!!

간헐적으로 울리는 마물의 괴성에 아드리안나의 말이 잠시 끊겼다.

"····지금처럼 비명이 계속 터지는 것도, 저희 말고 다른 이도 있는 듯합니다."

아드리안나의 진지한 말에 갈라하드는 서늘한 목을 매만졌다.

'대공이 벌써 여기까지 온 건가?'

갈라하드는 일부러 대공의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마물의 핵을 중심으로 두고 서로 반대편에 있는 상황이었다. 아드리안나의 말 대로라면, 대공은 벌써 핵에 도달한 듯했다.

"길버튼 경이나 벨로그라임은 아닙니다. 적일 수도 있습니다. 상당한 강자입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상당한 강자라니-,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적은 아닐세. 자네가 지켜줄 거라 믿네."

"······적이 아닌데 지켜준다니요?"

"그런 게 있네. 지켜줄 건가?"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작게 굳어졌다.

"예."

그 단호한 대답에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자네만 믿겠네."

그들은 다시 전진했다.

아무리 촉수를 자르고 태워도, 그 뿌리를 뽑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가까이 갈수록 그 수가 늘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드리안나는 상대가 강해질수록 더 강해졌다.

아드리안나는 검을 멈추지 않았다. 그 하얀 오러가 세상을 칠할 것처럼 타올랐다.

가까이 갈수록 촉수가 마구잡이로 쏘아졌다.

그리고 그 앞을 아드리안나가 막았다.

그 뒷모습이 실로 듬직했다.

다만, 그것도 한계에 달한 듯했다.

검을 잡은 아드리안나의 손이 달달 떨렸다.

이곳은 마경이었다.

마경 덕분에 마법사인 갈라하드나 마족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지만, 그와 반대로 기사들은 악영향을 받는 듯했다.

"위험합니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무표정하던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얼굴에 땀이 가득했다. 그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무언가를 참는 듯 보였다.

"한계인가?"

"······더는 조절이 힘듭니다."

아드리안나가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절이 어렵다니.'

아드리안나의 오러는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정녕 한계일까.

'그럴 리가 없지.'

그녀는 마족의 왕과 싸울 영웅이었다.

그 한계가 고작 최상급 마물일 리가 없었다.

아드리안나는 더 나아갈 수 있었다.

단지 계기가 필요할 뿐이었다.

계기라-.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나쁘지 않군.'

계산은 금방 끝났다.

"자네는 할 수 있네."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고 웃었다.

아드리안나는 이런 상황에서 웃는 갈라하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다음 행동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갈라하드는 주저 없이 앞으로 걸었다.

오러를 억누르기에도 힘이 벅찬 아드리안나는 갈라하드를 막을 수 없었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지나쳐서 촉수 앞에 섰다.

그리고 아드리안나를 돌아보며.

"나를 구해주게."

양팔을 펼쳤다.

그런 갈라하드를 노리고 거대한 촉수가 쏘아졌다.

핵까지 거리가 가까운 터라, 촉수의 기세가 날카로웠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보며 웃었다.

"아-."

그 미친 모습에 아드리안나는 작은 단말마를 뱉었다.

본능적인 불안감에 억지로 누르고 있던 오러를 터뜨렸다.

통제할 수 없다고 여겼던 오러 역시 아드리안나의 것이었다.

아-.

거칠게 타오르던 오러가 아드리안나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조절할 수 없다고 여겼던 오러가 길게 뿌려졌다.

흰 선이 길게 그어졌다.

쿵-.

잘린 촉수가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갈라하드는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환부 부근만 재가 되었던 전과 달리 이번에는 그 뿌리까지 재로 화했다.

"오, 됐군."

'오-됐군?'

코트에 묻은 먼지를 털며 웃는 갈라하드에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욕을 하고 싶었지만, 할 줄 아는 욕이 없었다.

"····머리가 고장 났습니까?"

"미안하지만, 멀쩡하네. 오히려 너무 뛰어나서 문제지."

"그런데 왜 그런-."

"자네를 믿었을 뿐일세."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구겨졌다.

"제가 못했으면 어떻게 하려고."

"하지 않았나?"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어째서 목숨을 걸 정도로 저런 확고한 믿음을 주는 건지-.

아드리안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대도 미망인이 되기 싫지 않나."

"아직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오- '아직'이군?"

말을 섞을수록 손해인 사내였다. 아드리안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자, 그러면 멋지게 해치워주게."

"원래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쪽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자네, 목소리가 뾰족해졌네. 삐졌나?"

"······안 삐졌습니다."

오러가 전보다 더 거칠게 타오르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갈라하드 덕분이었다.

'정신 나간 인간.'

이해할 수 없었다.

···············!!

그때, 마물이 괴성을 질렀다.

전과 달리 고통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소리였다.

이윽고 촉수가 힘을 잃더니 툭- 쓰러졌다.

'무슨-'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마물을 잡은 게 분명했다.

그때-.

갈라하드가 픽-쓰러졌다.

"다리에 힘이 풀렸네."

"······."

아드리안나는 건틀릿을 확인했다. 안에 가죽까지 덧댄 상태였다. 거기에 필사적으로 힘을 줄였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그렇게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 갈라하드를 아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부인이 기사니 이런 게 좋군."

실실 웃는 모습이 상당히 얄미웠다.

그때-.

"음."

대공이 나타났다.

붉은 피에 잔뜩 범벅이 된 손에 굵직한 살점이 들려 있었다. 아마 마물의 핵인 듯했다.

대공은 갈라하드를 보며 살점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제야 아드리안나에게 안겨있다는 걸 깨달은 갈라하드는 다급하게 말했다.

"나 좀 내려주게."

아드리안나는 오히려 더 꽉 안았다.

"아드리안나?"

갈라하드의 간절한 속삭임에 아드리안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잠시 버티다 내려준 아드리안나가 대공에게 다가갔다.

"대공 전하가 왜 여기 계십니까?"

"자칭 사위라는 놈이 초대했다. 마족의 마당에서 마족의 연회가 열렸다고."

아드리안나가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대공은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하하, 안녕하십니까. 대공 전하."

갈라하드는 정성껏 예의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저렇게 강할 줄은 몰랐군.'

대공의 손에 들린 살점 덩어리는 최상급 마물의 핵이 분명했다.

저걸 직접 손으로 뽑아오다니. 심지어 그 몸에 상처 하나도 안 보였다. 그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감도 안 왔다.

무엇보다-.

'대공이 도끼를 썼나?'

누군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수첩에 적어뒀던 주요 인물 중 하나. 그도 분명 도끼를 썼다.

"왜 장인어른이라 안 부르지?"

대공이 상어처럼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

만약 눈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갈라하드는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갈라하드는 슬쩍 아드리안나 뒤로 숨었다.

"그렇다고 자리를 비우면 어떻게 하십니까."

아드리안나가 다시금 타박했다. 그에 대공의 시선이 돌아갔다.

아드리안나의 뒤에 있으니 그 살벌한 기세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걸 어떻게 받아내지?'

갈라하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대공의 손에 들린 저 살점 덩어리, 저기서 뚝뚝 흐르는 피가 너무 영롱했다.

고통의 알도 연신 쿵쿵거렸다. 당장이라도 저걸 달라고 조르는 듯했다.

다만, 그 상대가 대공이었다.

살점에 지긋이 새겨진 잇자국을 보니 진짜 마족을 뜯어 먹는 듯 했다.

'마족을 굽지도 않고 생으로 먹다니, 지독한 야만인이군.'

괜히 북부의 지배자가 아닌 듯했다. 갈라하드는 혀를 내둘렀다.

"비키거라."

그때, 대공이 한 발짝 다가왔다.

아드리안나가 그를 막아섰다.

"이번에 갈라하드 대장이 아니었다면, 큰 피해를 입을 뻔했습니다. 7대대 전체를 잃고, 북부에서 마경이 열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뻔했습니다."

대공의 걸음이 멈췄다. 아드리안나는 말을 이었다.

"이건 헤아릴 수 없는 공입니다. 공부터 치하하는 게 맞습니다."

이어진 아드리안나의 말에 대공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갈라하드는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 흉악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도대체 저 얼굴에서 아드리안나가 어떻게 나온 건지 궁금했다.

"공이라-."

"하하,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눈을 피하지 않는 놈의 모습에 대공은 입꼬리를 올렸다.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에게 잔을 내리겠다."

대공은 품에서 녹슨 금잔을 꺼냈다. 투박하게 생긴 잔이었다.

잔을 내린다는 건, 대공의 인정을 공식적으로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북부의 지배자인 대공의 인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아드리안나에게도 인정을 내리지 않았던 대공이었다.

아니, 안 내렸다.

북부의 잔은-.

마족의 피로 가득 채우는 것이기에.

대공은 잔에 대고 살점을 쭉- 짰다. 붉은 피가 가득 쏟아져 잔을 넘쳐 바닥으로 흘렀다.

그를 본 놈이 크게 움찔거렸다.

"북부의 잔이다."

대공은 마족의 피로 가득 채운 잔을 놈에게 내밀었다.

"아버지······."

"조용."

아드리안나가 입술을 꾹 다물고 물러났다.

대공은 잔을 놈에게 내밀었다.

놈이 견디면, 대공의 인정을 받은 유일한 북부의 전사가 될 것이다.

견디지 못하면 놈의 그릇이 그 정도일 뿐이었다.

그는, 늘 그렇듯 기회를 줄 뿐이었다.

백에 아흔아홉은 죽는 기회라지만, 대공의 인정을 받는 건 본디 그런 것이었다.

대공의 인정을 받은 전사란-.

백에 하나.

아니, 북부 전체에 하나뿐인 자리였다.

"두렵다면 거절해도 된다."

대공은 가만히 놈을 응시했다.

잔을 두고 도망친 이도 있었다.

마셨다가 미친 이도 있었다.

네놈은 어찌할 것이냐.

대공의 물음에-.

놈은.

"감사합니다."

환히 웃으며 잔을 단번에 들이켰다.

숨도 쉬지 않고 연신 꿀꺽였다.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더 없습니까? 장인어른-."

빈 잔을 내밀며 입맛을 다시는 놈에.

"미친놈이군."

대공의 사나운 입꼬리가 올라갔다.

44화 훈련소

'음-.'

갈라하드는 터지려는 신음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대공에게 가벼이 대답하고 물러났지만, 갈라하드의 상태는 사실 그리 좋지 않았다.

최상급 마족의 피는 지금까지 마셨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다른 마족의 피를 마실 때는 물을 삼키는 것 같았다면.

이건-.

'용암을 삼킨 것 같군.'

모든 게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잔에 닿은 입술부터, 입과 식도까지-.

이건 맹독이었다. 마나에 대해 무지한 놈이 마셔도 백에 아흔아홉은 죽는 그런 맹독-.

무지한 놈이 마셔도 그 정도인데, 마나에 민감한 마법사에게는 오죽하겠는가.

모든 마나가 들끓었다.

마나가 갈라하드의 의지를 벗어났다. 경배하듯 마족의 피를 맞이 했다.

압박에 당장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때, 고통의 알이 움직였다. 최상급 마족의 피가 당연히 자기 것이라는 것처럼, 침을 줄줄 흘리며 다가갔다.

그에 갈라하드는-.

'기다리게나.'

마족의 피에 달려드는 고통의 알을 막았다.

고통의 알이 작게 진동했다. 속이 끓다 못해 녹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고통의 알이 강하게 주장했다.

저거 당장 처리 안 하면 네 속이 녹을 것이라고.

맞는 말이었다.

저 정도 농도의 마나라면 갈라하드는 반드시 녹아내릴 것이다.

실제로 지금 갈라하드가 지녔던 마나조차 지배를 벗어나서 날뛰는 중이었다.

이대로는 파멸이 예정되어 있었다.

다만-.

'이 정도로는 안 죽네.'

무지한 놈에게나 맹독이지, 독을 다루는 이에게 맹독은 보물이었다.

그처럼 이 최상급 마족의 피도 갈라하드에게는 보물이었다.

절대 쉽게 구할 수 없는 보물-.

그런 보물을 놈에게 바로 줄 수 있겠는가.

확실히 위험했다. 위험했지만, 그렇다고 바로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주 조금 핥아볼 시간은 있었다.

아주 조금만······.

고통의 알이 몸을 크게 떨었다. 왜 굳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냐고 묻는 듯했다.

자신에게 먹이면 어차피 나올 텐데-.

맞는 말이었다. 압축할 필요 없이 고통의 알에게 넘기면 농도 짙고 순수한 마나를 줄 것이다.

다만-.

'그건 맛이 없잖나.'

처음 접하는 짙은 농도의 마나였다.

이렇게 영통한 농도의 마나를 손대지 않고 넘기는 건 마법사로서 용납할 수 없었다.

고통의 알이 웅웅 거렸다. 꼭 치를 떠는 듯했다.

갈라하드의 신경은 전부 마족의 피에 쏠려 있었다.

속을 태우다 못해, 녹이는 지독한 맹독을 툭툭 건드렸다.

고급 요리를 음미하듯 그 표면을 살살 긁었다.

그러자 살짝 새어 나왔는데, 정말 황홀한 맛이었다.

혼자 먹다 혼자 죽어도 모를 정도로-.

'어떻게 먹을까.'

아-, 갈라하드는 지긋이 눈을 찡그렸다.

'압축이다.'

마나를 다루는 것의 꽃은 압축이었다.

압축만 할 수 있다면, 마나를 온전히 다뤘다는 뜻이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고통의 알이 격하게 떨었다. 위험하다고 계속 소리쳤다. 네가 죽으면 자신도 끝이라고- 걱정하는 듯했다.

'닥치게.'

고통의 알이 꾹- 멈췄다. 고통의 알을 조용히 시킨 갈라하드는 입술을 핥았다.

마나의 농도가 지극하게 높았지만, 압축되지 않은 순수하게 농도 짙은 마나였다.

이론적으로 압축할 수 있었다.

계산은 짧았다.

갈라하드는 그 굳건한 마나를 억지로 눌렀다.

마나의 농도가 얼마나 깊은지 산처럼 단단했다.

산 정상에서 손바닥으로 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감히-.'

갈라하드의 몸에 들어 온 마나였다.

이론적으로 갈라하드에게 고삐가 있었다.

아무리 농도가 짙어도 마법사가 마나에게 끌려가는 게 말이 되나.

그러니-.

'조아려라.'

그 확고한 확신에-.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버티던 마나가 움직였다.

물론, 아주 살짝이었지만-.

중요한 건 움직였다는 사실이었다.

'아-'

계산에서 이어진 결과지만, 추측과 확신은 달랐다.

그리고 산을 눌러본 경험은 사소하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누르는 힘이 더 강화되었음을 느꼈다.

압축한 마나가 담기지 못하자 뒤틀렸다. 본래 대기로 흩어져야 했을 마나가 갑자기 사라졌다.

마치 흡수된 것처럼-.

처음 보는 현상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그때, 통증이 다시 올라왔다.

누르지 못한 마나가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먹어.'

꿈틀거리며 참던 고통의 알이 마족의 피에게 달려들었다. 이번 건 놈에게도 버거웠는지, 놈은 안쪽에서 마족의 피와 엎치락뒤치락 했다.

고통의 알이 마족의 피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꿀렁거리며 농의 크기가 점차 커졌다. 심장에서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리며 제 심장을 꾹- 눌렀다.

고통의 알이 환호하듯 진동했다. 안 그래도 상태가 안 좋은 갈라하드는 거칠게 흔들렸다.

아주 맛있는 것을 먹은 탓인지 놈은 이성이 없는 듯했다. 연신 꿀렁였다. 그 존재감이 갈라하드를 계속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알이 아닌가.

'부화라도 하는 건가?'

놈은 심장 바로 옆에 있었다.

저 위치에서 부화하면, 상당히 난감했다.

당황하여 몇 번이나 불렀지만, 놈은 이성이 없는지 연신 흔들었다.

잔뜩 신나서 안 들리는 듯했다.

지금 보니까 제 나름의 춤인 듯했다.

당장 부화하는 건 아닌 듯했다.

다만, 갈라하드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저 괴상한 춤도 지금 갈라하드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잔뜩 신나서 말을 들어 먹지 않으니.

갈라하드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역시 이럴 때는-.

'부인!'

아드리안나였다.

****

'대공의 인정을 받았다-.'

7대대 대장 벨로그라임은 마른침을 삼켰다.

대공은 북부의 지배자였다.

그건 단순히 공작이라 지배자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대공은 그의 혈육, 적, 마족의 피로 길을 만들어 자리에 오른 이였다.

[누구든 내 목을 자르면 이 자리를 주겠다.]

그가 대공에 오른 뒤에 처음으로 했던 말이다.

안 그래도 피가 끓는 북부 놈들에게 불을 던져준 격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도전했고-.

전부 대공 앞에 무릎 꿇었다.

대공은 그중 아주 가끔 잔을 내렸다.

천명이 도전하면 한 번 내리는 꼴이었다.

잔을 받은 이들은 대부분 잔을 피했다.

대공의 잔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지극한 영광이었으니까.

그런데 놈은 잔을 받은 걸로 멈추지 않았다.

잔을 한 번에 삼켰다. 그걸로도 부족하여 더 달라고 청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앞으로 다시 없을 일이었고.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군.'

벨로그라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한 올도 빠짐없이 깔끔하게 넘긴 머리, 단단함이 느껴지지만 길쭉하고 마른 몸, 단정한 옷매무새까지-. 북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내였다.

심지어 마법사였다.

북부와 정반대인 사내였다.

그런 이가 대공의 인정을 받다니.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군.'

그때, 놈이 눈을 떴다.

놈에게서 짙은 기운이 느껴졌다.

벨로그라임이 잊을 수 없는 기운이었다.

'······고위 마족?'

벨로그라임은 본능적으로 봉을 잡았다. 털이 쭈뼛 섰다.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때, 놈이 눈을 감았다 떴다. 방금 느꼈던 그 불길한 기운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예의 놈이었다.

차분하면서도 어딘지 광기가 느껴지는 눈.

'······잘못 본 건가?'

벨로그라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살폈지만, 여전히 놈이었다.

'나도 늙었군.'

그리 중얼거리던 벨로그라임은 자기 손에 땀이 흥건하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긴장했다니.

놈이 대화를 나누는 대공과 아드리안나에게로 향했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게 어디 아픈 놈 같았다.

'역시 무리였나.'

마족의 피를 마신 탓이 분명했다.

듣기로는 마족의 피가 마법사들에게 더 치명적이라던데, 벨로그라임은 그 주름만큼 아는 게 많았다.

대부분 잡지식이었지만, 잡지식도 지식이었다.

"불가하다."

"7대대를 수복하는 게 먼저입니다."

"이미 열린 곳이다."

"그렇다고 마경을 그냥 둘 수는 없습니다."

대공의 눈이 미묘하게 온건했다. 다른 이에게는 안 보이겠지만, 대공을 전장에서 보좌했던 벨로그라임은 알 수 있었다.

대공의 딸 사랑은 유명했다. 죽은 아내에 대한 사랑만큼.

갈라하드가 다가오자 대공과 아드리안나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그때-.

'······?'

놈이 대뜸 아드리안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떤 말도 없었다. 그저 손만 내밀었다.

아드리안나가 작게 탄식하더니 건틀릿을 벗고 그 손을 맞잡았다.

그 일련의 흐름이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이미 몇 번이나 한 것처럼 심지어 깍지까지 꼈다.

'제법 잘 어울리는군.'

그리 중얼거리던 벨로그라임은 문득 느껴지는 살벌한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대공의 눈썹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대공의 굵직하고 흉한 등 근육이 비명이라도 지르듯 거칠게 꿈틀 거렸다.

"하하, 손이 좀 추워서."

대공에게 그리 말하며 웃는 갈라하드에-.

'진짜 미친놈이군.'

벨로그라임은 진지하게 감탄했다.

이상한 놈들을 제법 많이 봤지만, 그중에서 저놈이 제일이었다.

****

'죽을 수도 있겠군.'

대공의 구겨진 눈에 갈라하드는 황급히 아드리안나의 뒤에 섰다.

고통의 알이 너무 날뛰었던 터라 어쩔 수 없었다.

고통의 알은 아드리안나의 손을 잡으니 귀신처럼 조용해졌다. 조금 진정이 된 느낌이었다. 고통의 알이 아쉽다는 듯 심장을 깨물었다.

'다스리지 못하는 힘은 소용없다.'

갈라하드의 질책에 고통의 알이 꿍- 다물었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마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거 말이군."

갈라하드는 손을 휘저었다. 주변에 뿌려진 재가 손을 따라 흩날렸다.

"예, 이대로 두면 마족과 마물에게 영향을 줄 겁니다. 문제가 될 여지가 다분한데, 경비를 어떻게 둘지 논의 중이었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경은 마족과 마물, 마법사에게는 좋다는 말로 부족할 정도로 적합한 환경이었지만, 그와 반대로 기사에게는 최악의 환경이었다.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시야부터, 심리적인 공포까지-.

기사가 그 정도인데, 병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단순히 들어온 것 만으로도 공황에 빠질 게 분명했다.

"방도가 있나?"

대공이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동굴 깊숙이 있는 맹수 같군. 그것도 변성기 때 담배를 많이 핀-.'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언뜻 시비를 거는 것처럼 들렸지만, 대공이 직접 물어봤다는 건 의미가 컸다. 의견을 들어보겠다는 뜻이었다.

'이게 인정인가.'

인정과 별개로 대공의 시선은 마주 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탈 것처럼 따가웠다.

"예."

대책이야 당연히 있었다.

"···정말입니까?"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아드리안나가 대공을 쳐다봤다. 대공의 눈썹이 내려갔다.

"나는 농을 싫어한다."

"저는 좋아하지만, 때와 장소를 가립니다."

"······그런가?"

대공의 나지막한 물음에 갈라하드는 하하- 웃었다. 아무도 따라 웃지 않았다.

'유머를 모르는 부녀로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끄덕였다.

아까 봤던 것들이 있었다. 마석 파편들과 부서진 마법진이었다. 둘 사이의 관계를 유추하는 건 쉬웠다.

"예, 마석을 가득 모아두고 마족을 매개체로 그를 한 번에 터뜨려서 압축된 마나를 구축했을 겁니다. 한 번 압축된 마나가 주변의 마나를 끌어모으며 이 지경이 된 거죠. 물론, 일정 영역이 넘어가면 마나 역치 때문에 더 모이지는 않겠지만-."

더 설명하려던 갈라하드는 둘의 내려간 눈썹에 끝을 흐렸다.

"어떻게 알지?"

"제가 뛰어난 마법사라서 말입니다."

갈라하드가 머리를 두들기면서 대답하니 대공이 눈을 찡그렸다.

"그러면 없앨 방법도 있습니까?"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있지 않나."

"······예?"

"마경이라고 해 봤자, 결국 마나의 농도가 유별나게 짙은 것일 뿐이네. 그리고 이건 진짜 마경도 아니지."

"쉽게 말해라."

큼-. 갈라하드는 입 끝까지 올라 온 '충분히 쉽게 말했습니다.'를 억지로 삼켰다. 이들은 북부인이었다.

"밖에서 계속 들어오는 마나를 내가 막고, 안쪽에서 지우면 됩니다."

"지운다?"

"예."

"무엇으로?"

대공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쳐다봤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가요? 저는 마법을 모릅니다."

"괜찮네,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밖에서 들어오는 마나는 내가 말을 테니, 자네는 오러를 잔뜩 끌어올리고 뛰어다니면 되네."

"······예?"

갈라하드는 이것보다 어떻게 더 쉽게 설명해줘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아, 이해했습니다. 다만, 그렇게 쉽게 해결되는 문제입니까?"

"진짜 마경은 아니니까. 범위도 성 하나 정도고, 대신 상급 이상의 마족이 매개체로 필요합니다. 다만-."

"다만?"

대공이 나지막하게 되물었다. 그 거대한 승모근이 움찔거리는게 꼭 당장이라도 잡아 올 듯한 분위기였다.

갈라하드는 대공의 그 거친 눈을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이걸 꼭 지워야 합니까?"

대공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구겨졌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은 내려갔다.

'부녀가 닮은 게 하나는 있군.'

둘 다 눈썹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무슨 소리지?"

대공이 물었다. 아드리안나는 입을 다물었다.

"물론, 이런 게 있으면 주변 마물과 마족이 쏠릴 겁니다. 그런데 쏠리면 안 됩니까?"

대공의 눈썹이 더 구겨졌다. 꼭 맹수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괜히 목이 간지럽고 등에 땀이 났다.

갈라하드는 슬쩍 아드리안나 뒤로 붙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때 보니까 1대대의 기사들도 마경에 익숙한 것 같지 않더군."

"예."

"이런 일은 이번이 시작일 걸세. 앞으로도 일어나겠지. 주의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닐세."

갈라하드는 대공을 보며 말했다. 대공은 대답 없이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니까 훈련을 시키는 걸세."

"······훈련 말입니까?"

꽤 충격적인 말이었는지 아드리안나가 입을 벙끗거렸다.

"자네, 마경이 어떤 곳인 줄 아는가?"

이번에는 7대대 대장이 물었다. 그 눈에 경악이 서려 있었다.

'마경에 요란이군.'

그럴 수밖에 없나?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작게 튕겼다.

"예, 오기 전에 들렀다 왔습니다."

"들렀다 왔다? 어디 술집에 들른 것처럼 말하는군."

그때, 대공이 입을 열었다.

"마경에서 훈련이라- 흥미롭군."

"예, 관리만 잘하면 마경 대비 훈련소로 운용할 수 있을 겁니다."

"위험합니다."

"위험은 극복하면 기회가 되는 법일세."

갈라하드는 가만히 대공을 쳐다봤다.

"좋군."

예상한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훈련소 관리자가 필요하겠군."

그리 묻는 대공의 입꼬리가 사납게 올라가 있었다.

'음,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갈라하드는 대공의 눈을 마주 보며 머리가 빠르게 굴렸다.

마경 훈련소를 관리하라-.

'나쁘지 않은데?'

계산을 끝낸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마경 소리를 듣자, 시무룩하게 있던 고통의 알이 방방 뛰었다.

'산책 이야기를 들은 강아지 같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

'반발이 제법 있군.'

테오도르는 올라온 보고서를 보며 눈을 찡그렸다.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대장들이 은연중에 반발을 표시하고 있었다.

구멍을 완벽하게 막지 않으면, 네놈들의 척수로 구멍을 막겠다는 대공 전하의 명령 때문이었다.

대장들 나름의 노고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 넓은 전선을 어떻게 꼼꼼히 막겠는가.

더불어 대공 전하가 오랜만에 명령을 내린 것도 한몫 했다.

그중 가장 큰 원인은 대공 전하가 한창 전장에 있을 때, 인물들이 대부분 물갈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대공 전하 무서운 줄을 모르는군.'

테오도르는 작게 혀를 찼다.

구멍이 있으면 네놈의 척수를 뽑아서 메꾸겠다는 편지는 상당히 친절한 편지였다.

척수를 씹겠다고 하지 않았고, 더불어 기간도 주지 않았나.

예전의 대공 전하였다면 일단 머리부터 뽑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정도면 상당히 친절해진 거였다.

그때, 문이 급하게 열리며 사내가 뛰어왔다. 그 손에 들린 붉은 편지는 대공 전하의 상징이었다.

이제야 소식이 들어오는구나-.

테오도르는 황급히 무릎 꿇고 그를 받았다. 이내 조심스럽게 펼치자 맹수의 발톱 자국처럼 굵직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마경 훈련소? 특무대 대장?'

분명 간결한 문장인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몇 번이나 그를 반복해서 읽고 나서야 완벽히 이해했다.

'아, 7대대에 마경이 열렸는데, 그걸 이용해서 마경 훈련장을 만든다고. 그 마경 훈련장을 특무대 대장이 관리한다는 거구나. 다른 대대 병력이 마경에서 훈련하도록 하고-.'

음······.

이게 무슨 개소리지?

45화 마물 조련사

'마경이라······.'

갈라하드는 재로 가려진 성을 보며 중얼거렸다.

7대대에 열린 마경은 내성과 외성 사이의 크기였다. 그 크기가 더 커지거나 작아지지 않았다.

마나는 농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흘렀다. 그렇기에 마경은 주변의 마나를 당겼다.

농도가 낮은 마나는 유입되면, 농도가 높은 마나와 섞였다. 자연적으로 농도가 낮아지는 원리였다.

농도 차이가 일정 수치 아래로 떨어지면 그 흐름이 멈추면서 지역마다 차이가 발생하는 거였고.

그게 마나의 흐름이었다.

그런데 마경은 주변 마나를 끌어들이면서도 높은 마나 농도를 유지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거지?'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고 그를 살폈지만, 도통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갈라하드가 마경 훈련소를 제안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마족의 왕은 마경 깊숙한 곳에 있을 것이다. 그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마경의 비밀을 풀어야 했다.

그런데 마경 훈련소 담당까지 맡았다.

갈라하드는 훈련소를 굉장히 험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훗날 진짜 마경에 들어가도 당황하지 않고 기량을 뽐낼 수 있도록-.

물론, 대장들이 순순히 따르지 않겠지만, 회유는 갈라하드의 전문이었다.

그리고 갈라하드는 대공의 인정을 받은 상태였다.

'음, 인원이 부족한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마경을 연구하고, 마경 훈련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력이 더 필요했다.

갈라하드가 말하는 인력은 마법사나 그에 준하는 지능을 지닌 이였다.

여기는 대부분 길버튼 경 같은 이들밖에 없었고, 그들은 인력이 아니었다. 그냥 력이었다.

'5대대 흑마법학회 지부의 애들을 불러야 하나-.'

여명을 잡기 위해 이제 흑마법학회 지부를 본격적으로 운용할 계획이었다.

다만, 흑마법사를 마경 주변에 두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어디 머리 잘 돌아가는 놈 나올 곳 없나-.

'아, 정보국.'

갈라하드는 아직 정보국 신분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높았다. 안가에서 몇 명 데려와서 쓸 수 있었다.

물론, 정보국의 귀에 들어가겠지만.

'그건 잘 타이르면 되고-.'

회유는 갈라하드의 장기였다.

그때, 병사가 옆으로 다가왔다.

"이건 어디에 둡니까?"

"아, 이쪽에 두게나."

병사가 짐을 내려놓고 힘찬 경례를 올렸다. 길버튼이 받았던 것보다 더 각진 경례였다.

'이게 대공의 인정이군.'

갈라하드는 슬쩍 손을 저었다. 다른 병사들이 또 경례를 올렸다. 슬슬 귀찮아졌다.

"정말 마경을 관리할 생각이십니까?"

아드리안나가 특유의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네."

"위험할 겁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마경을 전선 안쪽에 놔두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더 훈련해야지. 언제까지 막기만 할 건가. 전쟁은 막는 걸로는 끝나지 않네."

"확신하시는군요."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수첩에 적힌 내용이 아니더라도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났을 때, 대처해야 하지 않나?"

갈라하드의 물음에 아드리안나가 잠시 고민하다가 끄덕였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도 마경을 유지하는 건 위험합니다. 1대대에서 인원을 차출하겠습니다."

"고맙네."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길버튼이 다가왔다.

"어? 아드리안나님 언제 오셨습니까?"

길버튼의 물음에 아드리안나가 작게 기침했다. 갈라하드가 대신 대답했다.

"대공 전하랑 같이 왔다네."

"아, 그렇습니까."

길버튼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왜 다른 부대원들이 안 보입니까? 대대에는 말씀 안 하고 오셨습니까?"

길버튼의 물음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에 갈라하드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내가 대신 편지 두고 왔네."

아드리안나가 작게 안도했다. 그러다가 문득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뭐라고 쓰셨습니까?"

"음, 비밀일세."

아드리안나는 불안해졌다.

"근데 막내 못 보셨습니까? 도통 안 보입니다. 대장이랑 같이 갔다고 하던데."

길버튼이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아, 노아드 경 말인가."

"예, 안 보입니다. 얼빵한 놈이라 어디서 길 잃은 거 아닙니까?"

"자네는 진짜 길버튼 경이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닐세. 내가 심부름 좀 시켰네."

"예? 혼자 보낸 겁니까?"

길버튼이 한숨을 푹- 내쉬었는데, 그 한숨이 상당히 깊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살짝 내려갔다.

"막내, 걔 검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릅니다. 고삐도 못 잡고 불도 못 붙이고. 그런 애한테 심부름이라니, 진짜 큰일 납니다."

"······그 정도는 아닐 텐데요?"

"예? 아드리안나님이 저희 막내를 아십니까?"

아드리안나가 입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하아, 애가 열심히는 합니다. 그냥 배운 적이 없는 거지, 알려주면 그래도 싹싹하게 외웁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다만, 멍청할 뿐-."

바로 내려갔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뾰족해졌다. 길버튼은 그 시선을 눈치 못 채고 막내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 근데 막내 7대대에서 제법 유명해졌습니다."

"유명해졌다?"

"예, 멍청해도-."

아드리안나가 작게 기침했다.

"괜찮으십니까? 아, 이야기로 돌아가서 막내가 멍청해도 검을 잘 쓰는지, 병사랑 기사들을 오러 없이 이겼답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더 내려갔다.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길버튼의 긁는 실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근데 상당히 거칠답니다. 말도 나누지 않고 일단 검부터 휘두르는 상남자 중의 상남자랍니다. 그 녀석."

"상남자?"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연속으로 두 번.

"상황이 급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드리안나가 다급히 말했다.

"맞습니다. 대장이 혼자 할 테니, 최대한 빨리 오게나! 라고 했으니까요. 근데 그 녀석······."

길버튼이 뒷말을 흐렸다.

"뭔가?"

"상대의 귀를 뜯어서 잘근잘근 씹어 먹는답니다. 크흐-! 그 정도로 상남자일 줄이야!"

아드리안나의 얼굴에 미세한 당황이 떠올랐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빠르게 세 번 저었다.

전선의 흔한 과장이었다.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막내 녀석, 분명히 수염도 수북할 겁니다."

"······길버튼 경!"

"예? 아드리안나님?"

"대련합시다."

기사 길버튼은 좋다고 웃었다.

그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

톰은 특무대에 나름 적응을 했다고 생각했다.

가령 번개를 두르고 손에서 불을 뿜으면서 하녀라고 주장하는 그웬이나-.

연신 먹다가도 녹슨 검 한 자루로 마물을 잡는 소년인 데미안과 그냥 길버튼 경까지. 이제 슬슬 적응되고 있었다.

속을 모르겠는 대장 갈라하드만 빼고-.

그 구성원 하나하나가 톰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지만, 그들도 사람인지 부족한 면이 있었다.

그들은 전투 외의 부분에서 아주 무지했다.

톰은 거기서 자신의 쓸모를 찾았다. 지극히 평범한 자신이 이 괴물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나름의 쓸모였다.

톰은 쓸모가 없다는 게 얼마나 비참한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했다.

어떻게든 일을 찾아냈다. 자신의 필요성을 필사적으로 만들었다.

그 덕분에 이제 특무대에 제법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아드리안나가 괴상한 투구를 쓰고 막내라며 우기기 전까지는-.

뚱뚱한 갑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길쭉한 다리와 가려지지 않는 고귀함은 누가 봐도 아드리안나였다.

애초에 갈라하드가 1대대에서 데리고 올 기사가 또 있겠는가.

이상한 점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톰은 길버튼이 멍청한 막내라며 갈굴 때마다 비명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길버튼이 막내가 할 일을 가르쳐주라며 톰에게 아드리안나를 맡긴 적도 있었다.

아드리안나가 어떤 인물인가.

북부의 떠오르는 찬란한 영웅이오, 대공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차기 대공이 될 지고한 인물이었다.

톰에게 그런 아드리안나를 교육하라니-. 심지어 아드리안나는 불평 한 번 하지 않고 성심성의껏 배웠다.

다행히 바로 7대대에 투입되며, 그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정말 위기였지만, 어떻게든 넘길 수 있었다.

그렇게 가장 큰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했다.

방금까지는-.

"놈은 어딨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굵직한 목소리였기에.

'에? 어째서?'

왜 대공 전하가 앞에 있을까.

대공이 마물의 머리를 가볍게 뽑는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거대한 절망이라고 느꼈던 그 끔찍한 마물조차도 대공에게는 그저 고깃덩어리였다.

아니, 지금도.

'······들고 있잖아! 마물!!'

케레레레레렉!!

대공에게 붙잡혀 발버둥 치는 마물에 톰은 터지려는 비명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저건 쏘뱅이였다. 다른 마물에 비해서 덩치가 작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위험한 마물이었다.

병사가 아닌 기사가 상대해야 하는 중급 마물이었다.

그런 쏘뱅이를 무슨 물건처럼 듣고 있다니.

입을 쩍- 벌리는 쏘뱅이에 톰은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

"꺄아아아악!"

톰의 비명에 갈라하드는 자리를 정리하고 내려갔다.

거품을 물고 기절한 톰 앞에 대공이 괴상하게 생긴 마물을 들고 있었다.

'마물을 무슨-.'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며 상황을 살폈다.

대충 봐도 하급 마물은 아니었다. 최소 중급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런 마물을 저리 장터에서 가져온 닭처럼 들고 있다니.

'진짜 괴물이군.'

갈라하드는 혀를 내둘렀다.

"주웠다."

대공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중급 마물을 도대체 어디서 주울 수 있냐는 의문이 입 끝까지 올라왔지만, 갈라하드는 애써 삼켰다.

키레레레레레렉!!

마물이 격하게 몸을 뒤틀었다. 살펴보니 마물의 몸에 상처조차 없었다.

'마물을 두들겨 패서 가져온 건가?'

갈라하드는 마른침을 삼켰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건 중급 마물 아닙니까?"

아드리안나의 강력한 주장으로 하급 마물로 채우기로 결정된 상황이었다. 마경인 터라, 하급 마물도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공이 대뜸 중급 마물을 들고 왔다.

하급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긴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중급 마물을 주워 왔다니.

"문제 있나?"

대공의 눈썹이 살짝 내려갔다.

"전혀 없습니다. 애초에 중급 마물도 못 이겨내는 놈이 대장 자리에 앉아 있다면 그게 더 문제지요."

대공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자세히 보니 흉터였다. 그 사이로 누런 송곳니가 보일 정도로 깊은 흉터-.

'나쁘지 않지.'

마침 갈라하드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갈라하드는 소매를 걷고 마물에게 다가갔다.

마물이 주둥이를 쩍 벌리며 거칠게 짖었다.

"가만히 안 있으면 중성화도 할 걸세."

가벼이 농담했지만, 대공은 웃지 않았다. 마물이 더 크게 짖었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톰의 가방에서 마석을 꺼냈다.

"뭐 하는 거지?"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을 새길 생각입니다."

마물 조련사-?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두근-.

중급 마물을 마주하니 고통의 알이 요동쳤다.

당장 달라는 듯 흔들었다.

'안 되네. 이건 먹는 게 아닐세.'

고통의 알이 조용해졌다. 시무룩한 듯했다.

대공은 마물에게 손을 뻗는 갈라하드를 빤히 쳐다봤다.

중급 마족을 들이밀었는데, 놈은 당황하기는커녕 웃고 있었다.

마침 잘 됐다는 것처럼.

"아, 혹시 더 없습니까?"

대공 입가의 흉터가 깊어졌다.

****

"······너무 힘듭니다."

정보국의 자밋은 대뜸 쏟아진 한탄에 눈을 찡그렸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제임스··· 아니, 갈라하드 요원이 앉아 있었다.

정보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반짝이던 제임스의 눈은 피로로 덮였고, 윤기가 흐르던 금발은 잔뜩 기름져 있었다.

정보국에 들어온 흔한 신입의 모습이었다.

"다들 마법사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법을 시전 하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고 계속해서 갈굽니다. 아니, 마법이니까 당연히 오래 걸리는 거 아닙니까? 마나 농도도 계산해야 하고, 주문도 외워야 하는데! 그러면서 지팡이는 못 쓰게 하고-."

제임스가 죽은 소리를 계속해서 이어갔다.

"그래서 설명하면 갈라하드는 하던데? 이럽니다. 갈라하드! 갈라하드으으!! 으아아악! 세기의 천재여!"

제임스가 벌떡 일어나서 갈라하드의 이름을 외치며 발작했다.

흔한 정보국 신입 마법사의 반응이었다.

"과장님은 '갈라하드'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벌떡벌떡 일어납니다. 그리고 저한테 화풀이하죠. 맨날 지원 보냈다고! 이러면서!"

자밋은 넋두리하는 제임스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 아이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저 아이가 두려워하는 작전 과장도 자밋에게는 한 수 접어줬다. 그런 자밋한테 와서 하소연하다니, 자밋은 작게 혀를 찼다.

갈라하드가 나가면서 저 당근같이 생긴 놈이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봐주지 않았을 것이다.

"저를 왜 세기의 천재인 분과 비교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예 다른 인물인데······."

제임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 짓궂었나.'

자밋은 작게 혀를 찼다.

물론, 제임스의 말처럼 갈라하드는 천재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동시에 천재라는 단어로 설명하기에 부족한 인물이기도 했다.

"갈라하드가 어떻게 주문도 없이 마법을 시전하는지 알아?"

"······천재니까요?"

"반만 맞았어. 그러는 너도 아카데미 수석이잖아?"

"······그분보다 여섯 살은 많은 나이에 졸업했지만요."

제임스가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끄덕였다.

"궁금해서 물어본 적 있거든. 마법을 어떻게 그리 조용하고 빨리 쓰냐고."

자밋은 잠시 뜸을 들였다.

제임스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기울였다.

"그렇게 될 때까지 썼대."

톡 자밋은 찻잔을 흔들었다.

"······예?"

"기사가 갑자기 날아온 검에 반응할 때까지 훈련하는 것처럼, 눈 감고 생각 안 하고도 나갈 때까지 마법을 썼대."

자밋의 설명에 제임스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말도 안 됩니다. 마법을 쓸 때, 마나만 드는 게 아닙니다. 정신력도 소모되는데 그런 무식한 방법으로 했다가는 반드시 미칠 겁니다."

제임스의 단호한 말에 자밋은 잠시 생각했다.

갈라하드가 미쳤었나?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믿든 안 믿든 네 자유야. 그 이름의 무게를 견디는 것도 네 자유고, 원하면 말해, 바꿔줄 테니까."

자밋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요원 이름을 바꿔주는 경우는 적었지만, 그렇다고 없는 건 아니었다.

요원 이름이 노출되거나, 작전을 위해서 바꾸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제임스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짙은 피곤함 사이로 고뇌가 떠 올랐다.

자밋은 가만히 차를 홀짝였다.

제임스의 입이 열린 건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괜찮습니다."

그 푸른 눈이 전보다 더 또렷했다. 나름의 결심을 내린 듯했다.

"이름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듣기로는 갈라하드와 스치듯 이야기를 했던 게 전부라는데, 저 정도의 선망이라니.

"그래, 기대할게."

절대 안 되겠지만-. 자밋은 뒷말을 삼켰다.

놈이 시원하게 웃었다. 여전히 애송이 티가 가득했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신경질적으로 생긴 놈이 들어왔다.

"자밋! 갈라하드가 북부로 파견됐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놈이 들어오자마자 뾰족하게 소리쳤다.

'아, 이놈이 있었지.'

자밋은 옅은 피곤을 느꼈다.

요원 퍼스트였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갈라하드에게 밀려 줄곧 2등을 하던 놈이었다. 이후 어떻게 알아냈는지 갈라하드를 따라 정보국에 들어왔고.

'정보국에서도 줄곧 갈라하드에게 밀려서 2등 했지.'

그것도 대단했다. 갈라하드 바로 밑이었다는 거니까.

다만, 그 차이가 등수 한 개 차이치고 너무 컸을 뿐=.

"이번에야말로 내가 놈을 이겼을 텐데!"

"진정해, 나한테 따져봐야 아무 소용 없으니까."

"젠장! 감히 누가 내 영혼의 경쟁자 갈라하드를 보낸 거지? 용서 할 수 없-."

"황명이야."

퍼스트가 입을 멈췄다. 그 눈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젠장! 나도 못 받은 황명을 먼저 받다니!"

질투하듯 분통을 터뜨리는 퍼스트에 자밋은 눈을 구겼다. 그 부분에서 화를 내는 게 맞니?

"아니, 경쟁을 끝내기 전까지 나한테서 도망칠 수 없다! 자밋! 나도 북부로 가겠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해? 너희 아버지한테 직접 말하지?"

"그래야겠군."

퍼스트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갈라하드에 대한 퍼스트의 집착은 굉장히 유명했다.

퍼스트는 국장의 아들이었다. 우습게도 갈라하드와의 '공정한' 경쟁이라며, 국장의 힘을 빌린 적은 없었다. 말 그대로 멍청한 놈이었다.

최근 북부 안가에 빈자리가 생겼으니, 어떻게든 그 자리로 갈 것이다.

부국장과 지원 계획을 세우던 자밋에게는 생각지 못한 복병이었다.

"갈라하드! 나한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나! 기다려라! 그곳이 북부의 끝이라도 따라가겠다! 못다 한 승부를 위하여-! 음? 신입인가?"

소리치던 퍼스트가 제임스를 보며 물었다.

"······예!"

"그래, 요원 명이 뭐지?"

퍼스트의 물음에.

"······제임스입니다."

제임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자밋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갈라하드가 퍼스트를 기억할까?

음-

.

······기억 못 할 텐데?

46화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

까마귀는 가만히 부복했다.

앞에는 갈라하드가 가만히 서서 연초를 피우고 있었다.

까마귀는 먼저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이내 생각이 끝난 듯 갈라하드가 입을 열었다.

"여명과 연락할 수 있나?"

"여명은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연락을 보냅니다. 이쪽에서 먼저 연락을 넣을 수 없습니다."

"음-."

사내의 침음성에 까마귀는 마른침을 삼켰다.

"학회장이라면?"

"...아마 여명과 끈이 있을 겁니다. 다만, 학회장은 앞으로 나서지 않을 겁니다."

"그렇군, 5대대에 있는 지부로 가게, 거기에 코르튼에게 내 이름을 대면 될 걸세."

"예."

일단 고개를 끄덕인 까마귀는 순간 의문이 들었다.

'5대대 지부의 부지부장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아니, 말하는 걸 보니 단순히 아는 수준이 아닌 듯했다. 꼭 아래에 둔 느낌이었다.

북부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까마귀는 입 끝까지 올라온 의문을 꾹 삼켰다.

"이건 내가 개정한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일세. 자네들이 쓰는 것보다 더 효과적일 걸세."

갈라하드가 뭔가를 내밀었다. 마법진이 세세하게 그려진 양피지였다. 심지어 그 옆에 주석과 설명까지 달려 있었다.

'아니,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이 왜...'

다시 의문이 들었지만, 까마귀는 꾹 삼켰다.

이 사내 앞에서 말은 적게 할수록 좋았다.

"예."

"그걸 위쪽에 올리면 연락이 올 걸세. 아마 학회장도 똥줄이 탈 테니까. 안 그러나?"

까마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흑마법학회에서 7대대에 투자한 건 적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많았다.

그런데 허무하게 막혔으니, 흑마법학회도 비틀거릴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마경을 포기할 수 없겠지."

갈라하드의 말에 까마귀는 작게 탄식했다.

'그래서 마경을 놔뒀군.'

갈라하드가 왜 굳이 마경을 놔둔 건지 의문이었는데, 이제야 풀렸다.

마경을 닫는 게 오히려 여는 것보다 어렵겠지만, 갈라하드가 못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근데 왜 안 닫았는지 의문이었는데.

'학회장을 낚을 미끼였군.'

마경이 완전히 닫혔다면, 학회장은 숨었을 것이다.

조심스러운 사내니까 더 깊숙하게 들어갔겠지.

계획은 실패했지만 마경은 남아있었다. 계획이 반쯤은 성공한 상태였다.

이 정도면 학회장도 여명에 연락을 넣어서 어떻게든-,

'여명을 노린 거였군.'

생각해보니 갈라하드는 처음부터 여명을 이야기했었다.

대공과 아드리안나가 움직인 이 사달조차도 이 사내에게는 계단이었다는 건가.

까마귀는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연락이 오면 내게 알리게, 혹여 이번에도 늦거나 부족하면 정말 실망할 수도 있네."

"예."

까마귀는 황급히 대답했다. 사내의 목소리는 여전히 여유롭고 태평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두려웠다.

"열심히 일했으니 자네도 출세할 때 됐지."

뜬금없는 말이었다.

까마귀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5대대 지부를 먹은 상태인데, 나한테 거기로 가라고 했다. 노리는 건 여명-, 여명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학회장이-. 그런데 출세라니?'

아.

까마귀는 작게 탄식했다.

'흑마법학회를 아예 먹을 생각이구나.'

단순히 흑마법학회가 목적이 아니었다. 여명으로 가기 위한 수단 일 뿐-.

갈라하드는 까마귀를 학회장으로 세워, 여명을 잡을 생각이었다.

'도대체 마경 하나로 이득을 얼마나 볼 생각인 거지?'

그러다 문득 갈라하드의 말이 생각났다.

출세라면-.

'그러면 내가 학회장을...?'

까마귀는 고개를 더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진심이었다.

"그러면 가보겠네, 회의에 늦었군."

방금 흑마법학회를 먹겠다는 계획을 말한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마치, 이것도 그에게는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열심히 하자!'

까마귀는 몸을 떨면서 다짐했다.

****

'내가 왜 이런 거물 사이에-.'

7대대의 중대장 하인스는 무거운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이번에 중대장 자리가 공석이 되며 중대장 자리에 오른 하인스였다. 간밤의 난리에 따른 인사였다.

다른 중대장들도 하인스처럼 불편한 기색이 만연했다.

그도 그럴 것이 회의장에 있는 이들의 이름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었다.

길버튼 경부터 시작해서 벨로그라임, 거기에 아드리안나까지-.

방금까지 소대장이었던 하인스가 같이 자리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모여 있는 회의인데, 그 시작이 되지 않았다. 다들 누군가를 기다리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도대체 누구지?'

빈 상석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깔끔한 사내가 들어왔다. 북부보다는 귀족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내였다.

"아, 다들 모여 있었군."

가벼이 말한 사내는 자연스럽게 상석에 가서 앉았다.

"...소집한 분이 가장 늦으면 어떻게 하십니까."

길버튼 경이 사내의 뒤에 서며 작게 타박했다.

'저 사내가 특무대 대장이군.'

이미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

하인스는 작게 전율했다. 대공의 인정은 북부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화였다.

북부에서 영웅으로 불리는 이들은 전부 대공의 잔을 한 번씩 받은 이였다.

다만, 그중에는 잔을 마신 이가 없었다.

아니, 마시고 살아남은 이가 없었다.

그런데 저 사내는 그 잔을 마셨다.

대공의 인정을 받았다.

그건 굉장한 의미였다.

더불어-.

'대공의 인정을 받고, 아드리안나와 결혼하는 자!'

하인스의 눈이 반짝였다.

다른 이들이 기다릴만한 인물이었다.

"7대대가 입은 피해가 어느 정도인가?"

"중대장은 두 명을 제외하고 전부 교체됐고, 병사는 팔 할이 남았습니다."

벨로그라임이 자연스럽게 보고를 올렸다.

"그렇군, 전선의 경비를 유지할 수준은 되나?"

"예, 하지만 내성 부분에 피해가 큰 터라 물자 보급에 차질이 생길 겁니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5대대 대장한테 말해뒀으니까. 곧 지원이 을 걸세."

사내는 마치 5대대가 자기 것인 것처럼 대답했다.

그에 하인스는 의문이 들었지만-.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

더욱 위대하게 보였다.

"그러면 전선 유지는 되나?"

"예, 조금 힘들겠지만, 돌아가기는 할 겁니다. 대공 전하가 보셨으니, 곧 추가 병력이 올 겁니다."

"그렇군, 그러면 이제 마경 훈련소로 넘어가서-."

마경 훈련소라는 단어에 다들 침을 꿀꺽 삼켰다.

안 그래도 최근 7대대에서 가장 화제인 이야기였다.

내성이 있어야 할 곳에 괴상한 재가 자리했다.

지옥처럼 불쾌한 그것을 마경이라 불렀다.

마족들이 있는 곳. 그런데 그걸로 훈련소를 만들겠다니.

역시 그 그릇이 남들과 달랐다. 중대장들이 참지 못하고 감탄했다. 다들 눈이 반짝였다.

"마경에 들어갈 마물은 준비가 되었네. 그 방비도 슬슬 마무리 되어 가는 단계일세."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의 눈길에 다들 고개를 굳게 끄덕였다.

"나는 마경이 열린 이런 중대한 사태에서 살아남은 그대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네. 평소 7대대가 얼마나 훈련을 열심히 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의 박수-!

하인스는 눈물이 핑- 돌았다.

"진심일세. 전선에 있는 1대대와 달리 마경을 접할 기회도 없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대처를 하다니. 나는 실로 감탄했다네."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의 인정이라니!

하인스는 입술을 꾹- 씹었다. 그렇지 않으면 환호가 터질 것 같았다.

"그대들에게서 가능성을 봤다네. 내가 마경 훈련소를 추진한 이유지. 여기 마경에서도 마물을 상대로 살아남은 전사들이 있으니까! 자, 박수치게 길버튼 경,"

길버튼이 뒤늦게 손뼉을 쳤다. 짝짝짝.

그때, 아드리안나까지 합세했다.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도 모자라서, 북부의 영웅 아드리안나에게도 박수를 받다니.

넘치는 감격에 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이런-.

'....우리 대단하군?'

하인스는 이내 깨달았다.

자신이 대단했음을.

"그대들을 믿기에 마경 훈련소를 연 것이라네. 잘 생각해보게나. 우리는 이제껏 막기만 하지 않았나. 마물도! 마족도! 늘 묵묵히 지켜왔지!"

예! 어느새 그들은 일어나 있었다. 다 같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지켜서는 전쟁을 끝낼 수 없네. 언젠가 벽을 넘어서 나아가야지. 그리고 마경 훈련소는 그 반전의 서막이 될 걸세. 내 장담하지."

반전의 서막! 뭔가 멋진 단어에 하인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제까지 소대장이던 자신이 저런 거창한 소리를 들어도 되는 걸까!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의 인정을 받아도 되는 걸까!

"타 대대의 중대장, 대장들까지 와서 자네들에게 훈련 받을 걸세. 7대대가 북부의 중심이 되는 걸세! 모퉁이가 아닌 중심!"

중심! 늘 변두리 취급을 당하던 7대대에게는 참으로 짜릿한 단어였다.

"그대들은 이제 일개 병사가 아닐세. 전쟁을 끝낼 용사들이지."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가 좌중을 둘러봤다.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답게 그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다들 숨을 참으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 용사들이여, 준비됐나?"

용사라니. 묘하게 가려운 단어였다.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가 용사라고 불러주다니.

중대장들이 벌떡 일어났다.

예!!

"자, 용사들이여 따라오게!"

갈라하드는 북부 놈들이 생각보다 더 쉽다는 걸 또 깨달았다.

****

"...마경에 저렇게 쑤셔 넣어도 되는 겁니까?"

길버튼은 고함을 지르며 마경으로 돌진하는 병사들에 눈을 찡그렸다.

물론, 안에 마물 같은 게 없지만, 마경은 마경 자체로 위험했다.

숨쉬기 힘든 환경과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본능적인 공포를 자아 냈다.

거기에 검 한 자루만 듣고 들어가는 건-.

'기사 양성 과정과 흡사하지.'

갈라하드는 연초를 툭툭 털었다.

"북부에서는 기사가 어떻게 되나?"

"예? 실전을 겪다가 신념을 깨달으면 기사가 됩니다."

참으로 무식한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기사의 질이 중부보다 높은 거겠지만-.

"몇 번 담갔다 빼면 괜찮을 걸세. 다들 용감하지 않나?"

갈라하드가 연초를 털며 대답했다.

방금까지 마경 앞에서 병사들을 토닥이던 그 열기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북부 사내는 참 다루기 쉽군."

"...다 그런 건 아닙니다."

갈라하드의 중얼거림에 길버튼은 뾰족하게 대답했다.

"그런가? 하긴 자네가 있군."

"예."

"아, 그거 아는가. 마경에서 검을 수련하면 효과가 더 좋다는걸. 짙은 마나 농도는 육체에 영향을 준다네."

"그걸 왜 지금 말씀하십니까!"

길버튼이 검을 빼 들고 마경으로 달려갔다.

"들어가! 용사들이여! 북부의 미래가 네놈에게 달렸다!"

"악!!"

악에 받친 고함과 기합이 연신 들렸다.

갈라하드가 손댈 것도 없었다. 판만 깔아주니 자기들끼리 알아서 훈련을 시작했다.

'이처럼 좋은 훈련 환경이 또 있을까.'

마경은 그 농도가 다른 곳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짙은 곳이었다.

그곳에 넣었다 뺐다 하는데, 효과가 없을 리가 없었다.

물론, 꽤 고통스럽겠지만, 원래 정답은 늘 힘든 길에 있는 법이었다.

'그러고 보니 놈이 했던 방법이군.'

갈라하드는 문득 떠오른 놈에 눈을 찡그렸다.

갈라하드만 보면 귀찮게 하던 괴상한 놈이 있었다.

원래는 기사였던 놈이었다. 그런데 대뜸 갈라하드를 보고는 마법을 배우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실제로 마법을 배워왔다.

갈라하드에게는 못 미치지만, 다른 마법사들보다 쓸만했다.

놈이 떠들던 게 저거였다.

높은 마나 농도에서 훈련을 하니 더 빠르게 강해졌다-.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놈을 보니 효과는 확실한 듯했다.

그런데.

'그놈 이름이 뭐였더라.'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기에,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었다.

****

대공의 성에 있는 정보국 안가의 핸섬은 먼지 가득한 손을 탁탁- 털었다.

이제야 새로운 안가 정리가 끝난 상황이었다.

'슬슬 보충 인원이 올 때가 됐는데-.'

핸섬은 갈라하드의 조언대로 로즈가 마족에게 죽었다고 보고를 올렸다.

핸섬이 살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그래야 로즈의 명예가 지켜졌기 때문이었다.

로즈를 본 적은 없지만, 제국의 끝인 북부에서 안가를 지키던 이였다.

서늘한 쓸쓸함 속에서 죽은 그녀의 명예가 지켜졌으면 했다.

그때, 안가의 문이 거칠게 흔들렸다.

핸섬은 칼자루를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옆에 있는 장치로 밖을 확인했다. 느끼하게 생긴 덩치 사내와 차가운 인상의 여인이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문이 열렸다는 건, 정보국에서 보낸 인사라는 뜻이었다. 다만, 당한 게 있는 핸섬은 칼자루를 놓지 않았다.

느끼하게 생긴 사내가 먼저 들어왔다. 그 노란 눈썹이 꼭 송충이 같았다.

"오- 자네가 핸섬이겠군."

"신분을 밝히시오."

핸섬의 검은 어느새 사내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사내가 눈을 슬쩍 내렸다. 그 순간-.

팅!

핸섬의 검이 거칠게 튕겼다. 사내의 손에 물이 일렁였다. 마법이었다. 아니-.

"퍼스트라네. 안가 보충 인원이지."

'...오러?'

핸섬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분명 마법이었는데, 오러가 보였다.

그제야 사내의 정체를 깨달았다.

"마기사 퍼스트-!"

핸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퍼스트라면 정보국에서 유명한 요원이었다. 이런 북부의 안가로 차출당할 인물은 아니었다.

"음음, 맞네. 내가 그 마기사라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시죠. 퍼스트."

사내 뒤에 있던 차가운 인상의 여인이 뾰족하게 말했다. 그에 사내가 허허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핸섬은 슬쩍 옆으로 비켰다.

사내는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그 덩치에 의자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사내가 입에 굵은 연초를 물었다.

이어서 손가락에 불을 피우고 연초에 붙였다. 물에 젖은 나무 냄새가 퍼졌다.

'묘하게 갈라하드 같군.'

핸섬은 갈라하드를 떠올렸다. 어딘지 둘의 행동이 비슷했다.

갈라하드는 자연스러웠다. 그에 비해 사내는 어딘지 꾸민 듯한 느낌이었다.

'갈라하드를 따라 하는 건가?'

사내가 연기를 길게 내뿜자, 여인이 눈을 찡그리며 자기 코를 붙잡았다.

"갈라하드의 정보를 전부 가져오게."

사내가 핸섬을 보며 말했다. 그에 핸섬은 작게 입술을 씹었다.

갈라하드가 자신의 정보를 숨기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다만, 갈라하드는 은인이었다. 은인의 정보를-.

"가져오게. 내 말 안 들리나?"

사내가 핸섬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긴장감이 가득 올라왔다. 핸섬은 칼자루를 톡톡 두드렸다.

그때-.

"자네, 어깨가 굳었어."

번개가 스쳤다.

아니, 번개가 서린 검이었다.

"음, 화려하게 다녔군, 역시 갈라하드야."

퍼스트는 손에 들린 보고서를 보면서 끄덕였다.

"처리할까요?"

여인이 핸섬의 목에 검을 겨누며 물었다.

"의리 있는 기사를 칭찬해주지 못할망정 처리라니-, 펌킨, 자네가 그러니까 아직 결혼을 못 한 걸세."

"처리할까요?"

"농담일세."

퍼스트는 손에 들린 보고서로 시선을 내렸다.

"여기도 쓰여있군."

"뭐가 말입니까?"

"갈라하드가 대공의 딸과 결혼한다는 거 말이야."

퍼스트는 보고서를 흔들었다.

"그 사실을 알면 난리가 날 텐데요? 황녀도, 그녀도-."

"다들 나처럼 생각하겠지. 임무거나, 놈이 가끔 하는 괴행 정도로. 진실도 그럴 것이고."

퍼스트는 연초를 털며 눈을 찡그렸다.

그 아래에 갈라하드의 행보가 적혀 있었다. 갈라하드를 누구보다 잘 아는 퍼스트였다.

퍼스트는 그를 읽으며 놈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갈라하드는-.

"이런."

퍼스트의 중얼거림에 펌킨은 눈을 찡그렸다. 저건 퍼스트가 지랄하기 전에 보이는 행동이었다.

퍼스트는 다른 때라면 정말 괜찮은 상사이자, 사람이었다.

그런데 갈라하드만 관련되면 애가 머리 뚫린 놈이 됐다.

지금처럼.

"...뭡니까."

"갈라하드! 놈은 대공의 딸과 결혼할 생각이다!"

그 목소리가 지금까지와 달리 진지했다. 지랄 시작이군. 펌킨은 작게 한숨 쉬었다.

"다른 이들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인다! 갈라하드! 북부에 숨어서 결정적인 수를 준비했군!"

"시발, 머리가 뚫렸군요."

아마 갈라하드가 결혼을 먼저 하면 패배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괴상한 논리였지만, 갈라하드만 연관되면 저 지랄이 났다.

"이대로면 패배! 비상일세!"

퍼스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펌킨을 본 퍼스트가 작게 탄식했다.

저 뜨거운 눈빛-.

펌킨은 무슨 지랄이 나올지 두려웠다.

잠깐의 정적.

"펌킨- 자네, 미혼이지?"

"시발! 진짜!"

청혼하듯 무릎을 꿇는 퍼스트에 펌킨은 참지 못하고 욕을 터뜨렸다.

47화 퍼스트

'주... 죽는다...'

하인스는 눈을 꿈벅였다.

눈이 매웠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비비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더 끔찍한 통증이 올라올 것이다.

숨이 턱- 막혔다. 숨을 쉴 때마다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여기가 지옥-. 그래, 지옥이었다.

"하나에 앉고, 둘에 일어난다."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렸다. 길버튼 경이었다. 아니, 길버튼 새끼였다.

"중대장이라는 놈들이 마경도 못 견디는 게 말이 되나? 하나."

중대장 어제 됐어, 이 개새끼야. 하인스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앉았다.

마경은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고통이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고, 눈이 따가워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마물과 싸운다는 말인가. 괴물들이었다. 괴물-.

"둘."

일어나려고 다리에 힘을 줬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인스는 비틀거리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나약한 놈."

이걸 견디는 그쪽이 괴물인 거라고-. 하인스는 입을 뻐끔거렸다. 눕는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여전히 눈에서는 눈물이 질질 나왔고 입에서는 침이 흘렀다.

이대로 정말 끝인가 싶을 때-.

"자네, 괜찮나?"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갈라하드가 있었다.

"대... 대공의... 인정을 받은....."

"그래, 말하지 말게."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가 하인스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러자 지독한 재가 멀어졌다.

'역시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

이 역겨운 재도 절로 물러나게 만들다니!

"불편한 데는 없나? 가령 근육이 무겁다든지. 같은 거 말일세."

처음 듣는 따뜻한 걱정에 하인스는 눈물이 핑 돌았다.

"괜찮습니다!!"

"그래, 자네는 더할 수 있어. 아직 마나가 남았는데, 조금 더 써보게. 그래야 반응을 알 수 있으니까."

알 수 없는 말이 쏟아졌다.

이해할 수 없지만, 대공의 인정을 받는 자가 하인스를 믿는 건 알 수 있었다.

안에서 뜨거운 힘이 올라왔다. 하인스는 땅을 짚고 일어났다.

"역시 그래야 용사지, 좀 더 힘을 내게, 하인스,"

"제... 제 이름을 어찌!"

"내가 표본 이름도 못 외우겠나."

"감사합니다!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

하인스는 입술을 꾹 씹으며 일어났다.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의 믿음을 저버릴 수 없었다.

"거기 뛰어!"

악독한 길버튼 경의 호출에 하인스는 다리에 힘을 줬다.

****

"길버튼 경, 훈련이 너무 쉬운 거 아닌가?"

손을 털며 묻는 갈라하드에 길버튼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 이미 구를 대로 구르고 있습니다만. 저기 거품 문 놈 안 보이십니까?"

"저거 연기일세. 내가 마나를 확인해 봤더니 아직 여유가 있더군."

"정말입니까?"

갈라하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길버튼의 얼굴이 구겨졌다.

"다들 기상!"

길버튼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갈라하드는 슬쩍 물러나서 상황을 지켜봤다.

버티던 병사들이 길버튼의 발길질에 휘적거리며 일어났다.

갈라하드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길버튼의 훈련이 조금 많이 험했지만, 그렇다고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마경이라는 극한의 환경에 눌렸을 뿐이었다.

마경을 극복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익숙해질 때까지 겪는 것이지.'

험한 북부에서도 살아남은 사내들 아닌가. 마경에서 굴리면 저절로 익숙해질 게 분명했다.

마경에서 훈련은 확실히 도움이 됐다. 그 체력이나 근력의 증진이 눈에 띌 정도였다.

그저 힘들 뿐이었다.

'힘든 건 순간이지. 마경에서 훈련의 효과가...'

갈라하드는 방금 얻은 정보를 정리했다. 병사들이 워낙 열심히 훈련하는 덕분에 데이터가 쏠쏠하게 뽑히고 있었다.

그때, 노인이 다가왔다. 7대대 대장 벨로그라임이었다.

'마경에 익숙하군.'

벨로그라임의 태연한 모습은 마경에 한두 번 들어와 본 이의 태도가 아니었다.

"정말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7대대가 어떤 꼴이 되었을지 상상이 안 되는군. 마족의 꼬임에 넘어가다니 멍청한 놈들-."

"원래 배고프면 밥 주는 놈을 따르는 법이죠."

"본능에 따라 움직이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지."

맞는 말이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을 지키겠네. 나 벨로그라임은 대공 전하 다음으로 그대를 따르겠네."

'약속?'

갈라하드는 약속한 적 없었으니, 아마 까마귀일 것이다. 까마귀가 벨로그라임을 먼저 방문했었으니.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들어 온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심지어 7대대였으니까 더더욱-.

"알겠네."

바로 하대하는 갈라하드에 벨로그라임은 껄껄 웃었다. 벨로그라임의 주름진 눈이 반짝였다.

"눈을 보니 약속 때문만은 아닌 듯하군."

"노쇠한 눈은 좀 더 멀리 볼 수 있지, 북부의 흐름이 자네에게 향하고 있네. 아주 강하게-."

벨로그라임이 주름진 손가락으로 갈라하드를 가리켰다.

"그건 길버튼 경도 알고 있을 걸세."

"하하. 그런가?"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초를 입에 물었다.

'7대대까지 들어왔으니, 제법 수가 모였군.'

사실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7대대에 세워진 마경 훈련소를 갈라하드가 담당했으니, 7대대도 갈라하드의 입김이 셀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분명 그걸 벨로그라임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먼저 밑으로 들어온다고 한 거겠지.

'응큼한 늙은이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익숙한 마나가 움직이며 손가락에 불이 붙었다.

레몬 향이 깊게 퍼졌다.

'음.'

갈라하드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무의식적으로 펼친 불이었지만, 그 마나 농도가 이상했다. 그제야 갈라하드는 고통의 알이 거칠게 뛰고 있음을 눈치챘다.

분명 방금까지 길버튼의 고함과 병사들의 악에 받친 비명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사방이 조용했다.

모든 소리가 죽은 것처럼-.

가장 그럴듯한 추론은-.

'정신계 마족인가.'

갈라하드는 바로 마나를 돌렸다. 고통의 알이 거칠게 뛰며 마나를 뿜어냈다. 오른팔의 마법진이 빛을 흘렸다.

정신 간섭을 막기 위해 머리 쪽으로 마나를 올렸다.

순간.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갈라하드는 화려한 동산에 서 있었다. 새가 짹짹거리며 날아다니고, 푸른 나무가 인사하듯 흔들리는 아주 평화로운 숲이었다.

입에 문 연초가 어느새 없었다.

'분명히 머리에 마나를 둘렀다.'

마법진과 고통의 알을 통한 고농도의 마나였다.

정신계를 두 번 겪으며 상대법을 알아냈다고 생각했는데, 허무하게 무너졌다.

'성에 남은 마족이 있었나?'

갈라하드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내성에 마족이 숨어있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다만, 이 정신 간섭은 진짜 마경에서 만났던 상급 마족보다 강했다.

그렇다는 건-.

'그분이라는 놈이 직접 온 건가.'

마경에서 만났던 상급 마족을 조종하던 그분이라는 놈일 가능성이 컸다.

정적을 뚫고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회색이 점차 퍼져나갔다. 고통의 알이었다. 갈라하드는 재빨리 허리의 수통을 찾았다. 없었다.

정면의 수풀이 갈라지며 여인이 나왔다.

사슴처럼 다리가 네 개 달린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 다리가 사슴의 것이 아닌 길쭉하고 흰 여인의 것이었다.

기괴함보다는 우아함과 성스러움이 느껴졌다.

여인은 사뿐사뿐 갈라하드에게 다가왔다.

고통의 알이 으르렁거리듯 거칠게 뛰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시끄럽다.]

여인의 목소리는 들리는 게 아니라 보였다. 신묘함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고통의 알은 기죽지 않고 더욱 열심히 뛰었다. 갈라하드는 놈에게서 나온 마나를 머리에 둘렀다. 정신계를 깰 생각이었다.

[헛되다.]

여인의 이어진 말에 마나가 사라졌다. 고통의 알만 열심히 뛰었다.

'···마나가 사라졌다?'

갈라하드는 나지막한 침음성을 흘렸다.

바로 앞까지 온 여인이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그 눈이 꼭 뱀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그를 마주 보니 갈라하드의 존재가 얼마나 작은지 체감됐다.

"네가 그분이군."

갈라하드의 말에 여인이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고개가 높구나.]

갈라하드의 정신이 끝없이 추락했다.

눈을 뜨니 까마득한 산의 꼭대기였다. 사방에 어두운 구름이 가득했다. 그 구름들이 으르렁 대는 것이 사뭇 불안했다.

불안은 금방 현실이 됐다. 거센 벼락들이 갈라하드를 마구 두드렸다.

'따갑군.'

갈라하드는 작게 투덜거렸다.

다시 풍경이 변했다. 이번에는 용암을 토해내는 활화산이었다. 용암이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뻐끔거렸다.

갈라하드는 그 성난 화산의 중앙에 그대로 던져졌다.

'뜨겁군.'

갈라하드는 용암 속으로 가라앉으며 중얼거렸다.

다시 여인의 앞이었다.

여인은 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그 다리가 갈라하드의 두 배만 했다.

주변의 푸르름은 더욱 싱그러웠다. 갈라하드는 제 손을 내려봤다.

멀쩡했다. 고통의 알이 정신 차리라는 듯 거칠게 뛰었다.

갈라하드는 그에 집중했다. 고통의 알은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같은 고위 마족이라는 건가?

"재밌군. 더 할 건가?"

갈라하드는 여인을 보며 물었다.

여인이 입꼬리를 올렸다. 갈라하드는 그제야 자기 손이 떨린다는 걸 깨닫고 혀를 찼다.

여인의 정체는 아마 마경에서 만났던 상급 마족 너머에 있던 '그 분'이라는 고위 마족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정도의 정신 간섭은 말이 되지 않았다.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아도 통증이 느껴지다니. 갈라하드는 짙은 흥미를 느꼈다.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네."

[직접?]

여인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 뜻은 명백했다.

"직접 오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의 정신 간섭이라니, 정말 대단하군."

갈라하드는 소리 내어 감탄했다.

'내게 뭔가를 심었나? 마경끼리 연결되는 건가?'

둘 다 가능성이 있었다. 그때, 갈라하드의 말문이 막혔다.

입을 뻐끔거려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 신기하군. 갈라하드는 제 입에 손가락을 넣었다. 혀는 움직이는데-.

[재밌는 아이구나.]

여인의 목소리가 뇌리에 박혔다. 사방에서 벼락이 치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동감일세.

여인의 기다란 손가락이 갈라하드를 가리켰다. 그 손가락은 나뭇 가지였다.

갈라하드의 정신이 다시금 끌려갔다.

이번에는 썩은 흙 속이었다. 사방에서 수많은 벌레가 갈라하드를 파먹었다.

끔찍함이 선명했다. 이빨이 수십 개인 벌레가 눈을 파먹으려고 할 때.

다시 풀숲으로 돌아왔다.

갈라하드는 거칠게 기침하며 비틀거렸다. 안에 있는 벌레를 토해내기 위해 토악질했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쏟아져나왔다.

오, 신기하군.

여인은 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이제 여인은 웬만한 성만 했다.

[아직도 재밌느냐?]

여인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헝클어진 머리를 넘겼다.

무척-.

이번에는 수장이었다.

숨을 쉬지 못하는 끔찍한 상황-.

갈라하드는 심장 박동에 집중했다.

두근-. 두근-.

아득히 멀리 있는 것처럼 심장 박동 소리가 작았다. 그래도 거칠었다.

'여기였군.'

갈라하드는 제 심장에 손을 박아넣었다. 손은 의외로 부드럽게 들어갔다.

물이 사라지고 다시 숲이었다. 여인은 처음 봤을 때의 크기로 앞에 서 있었다.

고통의 알이 요동치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갈라하드는 손을 가벼이 털었다.

[대단하구나.]

여인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세 번이나 보여줬는데,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는 게 멍청한 걸세."

갈라하드는 혀를 차면서 대답했다. 대답과 달리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정신계를 깨기 위해서는 단서가 중요했다.

저번에는 배고프다고 하지 않는 데미안이었다.

이번에는 고통의 알이었다. 고통의 알이 거칠게 뛰는 것에 집중 하는 것으로 깰 수 있었다.

'꽤 힘들었지만.'

갈라하드는 손을 털며 주변을 살폈다. 여전히 푸른 숲이었다.

다만.

새 소리가 없어졌군.

전보다 세밀함이 약해졌다. 여인도 힘을 소비한다는 증거였다.

"힘을 더 뺄 생각인가? 나는 상관없네만."

여인의 손가락이 내려갔다. 여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재밌구나.]

"나도 재밌었다네. 아. 드디어 찾았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었다.

불이 붙었다. 레몬 향이 풍겼다.

주변의 푸르름이 살짝 흐릿해졌다.

여인이 뒤를 보면서 한 발짝 물러섰다.

[마경으로 오거라. 혼자.]

여인이 작게 속삭였다.

"그 위험한 곳을 내가 혼자 왜 가겠나."

갈라하드의 물음에 여인은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렸다.

올 걸 알고 있다는 듯-.

숲이 사라지고, 푸른 눈동자가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괜찮으십니까?"

아드리안나가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드리안나의 푸른 눈동자에 비친 갈라하드는 웃고 있었다.

아주 깊게-.

이곳은 마경과 먼 곳이었다.

그 거리를 넘어서 이 정도의 정신 간섭이라니.

이건.

'갈 수밖에 없겠군.'

애석하게도 여인의 예상은 적중했다.

여인은 갈라하드의 흥미를 제대로 자극했다.

****

"여기군."

퍼스트의 들뜬 목소리에 펌킨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수도에서 북부까지 왔는데, 안가에서 짐도 풀지 않고 곧장 움직이다니.

"좀 쉬었다가 가도 되지 않습니까? 놈이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소리, 놈은 지금도 나를 앞서나갈 궁리만 하고 있을 텐데, 쉴 수가 있나."

퍼스트의 대답은 단호했다. 진짜 개 같은 집착이었다.

펌킨은 짙은 짜증을 애써 눌렀다. 퍼스트에게 화내봤자 펌킨 손해였다.

"펌킨, 자네만 믿겠네."

퍼스트의 굳은 목소리에 펌킨은 터지려는 욕을 꾹 참았다.

"진짜 그걸 할 생각입니까?"

"아까 약속하지 않았나."

"그거야, 무릎 꿇고 부탁하니까-."

"나는 진지하네."

"하아... 시발. 알겠습니다."

둘은 7대대로 향했다. 7대대에 가까워질수록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났다.

안에서 누가 자꾸 소리를 질렀다. 한둘이 아니었다. 묘하게 뜨거운 분위기에 펌킨은 눈을 찡그렸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퍼스트도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검문하는 병사에게 펌킨이 나섰다. 그들의 품에는 대공의 인장이 그려진 임명서가 있었다. 그 대상은 특무대였다.

이 정도 위조야 그들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병사가 대뜸 소리를 버럭 질렀다. 펌킨은 깜짝 놀라서 검을 뽑을 뻔했다.

"특무대!!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의 부대!!"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졌다.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를 연호했다.

이상한 분위기에 펌킨은 퍼스트를 쳐다봤다. 퍼스트의 표정도 오묘했다.

"갈라하드는...."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 말인가!"

다시금 고함이 터졌다. 다들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라면서 부르짖었다. 열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

'...여기 왜 이래?'

도대체 여기서 뭔 짓을 했길래, 이름만 나와도 저런 반응이.....

부르르-, 몸을 격렬하게 떨기 시작하는 퍼스트에 펌킨은 다급히 나섰다.

"그래,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는 어디에 계시는가?"

"이쪽이다!"

실핏줄이 터졌는지 눈이 붉은 병사가 거칠게 안내했다.

여기저기서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를 떠들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후욱!"

퍼스트가 뜨거운 숨을 뱉어냈다. 그 주변으로 기운이 일렁였다.

잔뜩 흥분한 게 분명했다.

"세기의 경쟁자이자, 영혼의 숙적인 나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 지 참 궁금하군, 나를 피해 북부로 도망쳤지만, 그럴 수 없지."

퍼스트가 들뜬 목소리로 괴상하게 떠들었다.

'또 지랄 시작이구나.'

그때, 저 멀리 갈라하드가 보였다.

갈라하드를 발견한 퍼스트가 표정을 바꿨다. 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평소의 퍼스트처럼 시원한 미소를 머금은 모습이었다.

혼자 잔뜩 들뜨다가도 막상 갈라하드를 마주할 때면 퍼스트는 저렇게 연기했다.

마치, 갈라하드를 신경 안 쓰는 것처럼. 쿨한 모습을 연기했다. 참으로 애잔한 연기였다.

그때, 퍼스트가 팔을 내밀었다. 펌킨은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 왔다. 퍼스트가 작게 '제발-.'이라 속삭였다.

펌킨은 입술을 씹으며 퍼스트와 팔짱을 꼈다. 결혼을 안 해줄 거라면, 다정한 커플이라도 연기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때, 갈라하드가 이쪽을 쳐다봤다.

"오, 갈라하드 여기서 보는군."

퍼스트가 정말 우연히 마주쳤다는 듯 가벼이 인사했다.

'...뭐? 북부에서 우연히 마주쳐?'

들은 펌킨이 창피할 정도로 멍청한 핑계였다.

"아."

그때, 갈라하드가 작게 끄덕였다.

퍼스트를 알아본 듯했다.

그에 퍼스트가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최대한 쿨한 척 연기하는 듯했지만, 흥분한 기색이 흘러넘쳤다.

'경쟁자 맞아?'

펌킨은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퍼스트가 숨을 훅- 참았다.

갈라하드의 말을 기다리는 듯했다.

근데 갈라하드의 시선이-.

"펌킨, 오랜만이군."

펌킨에게 향해 있었다.

"옆에는 애인인가? 잘 어울리는군."

그 완벽한 무시에 펌킨은 황급히 퍼스트를 살폈다.

퍼스트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48화 두렵군

'기어코 왔군.'

갈라하드는 펌킨 옆에 앉은 놈을 보면서 눈을 찡그렸다.

놈은 아카데미 때부터 갈라하드를 귀찮게 했던 놈이었다.

놈의 아버지는 정보국에 낙하산으로 꽂힌 국장이었다.

그런 국장의 아들이라면 응당 시건방지거나 뒷공작을 해야 했는데, 놈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할 뿐 승부에 의외로 깔끔하게 승복했다.

놈은 오히려 국장의 도움을 거절했다.

갈라하드와의 '공정한 대결'을 위함이었다.

심지어 마법을 몰라서 갈라하드에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자, 기어코 마법까지 배운 놈이었다.

기사가 마법을 배우다니-.

말도 안 되는 개짓거리였지만, 놈은 마법을 훌륭히 해냈다.

실제로 마지막에는 갈라하드에게도 까다로울 정도였다.

'기어코 여기까지 따라왔군.'

갈라하드에 관한 놈의 집착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북부까지 따라 올 줄은 몰랐다.

갈라하드를 보는 놈의 눈이 상당히 뜨거웠다.

평소였다면 적당히 치웠겠지만.

'이건 나쁘지 않은데.'

인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원래는 정보국 안가에 가서 적당한 놈을 데려올 생각이었는데, 놈이 먼저 찾아왔다.

놈은 갈라하드만큼은 아니지만, 쓸만한 마법사이자 쓸만한 요원이었다.

정보국 안가에서 데려오는 것보다 훨씬 좋은 인선이었다.

뜻하지 않게 가장 좋은 패가 뽑힌 셈이었다.

근데-.

'...요원 이름이 뭐였더라.'

갈라하드는 놈을 위아래로 살피며 중얼거렸다.

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농담은 그만하지."

"미안하지만, 나는 농담을 잘한다네. 만약 농담이었다면, 자네도 알았을 걸세."

펌킨이 작게 기침했다. 퍼스트! 퍼스트!

"아, 허스트였지. 너무 변해서 못 알아봤네. 자네, 키가 좀 컸나?"

"허스트가 아니라 퍼스트일세."

"아,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기억 못한 척은 그만하지? 누구보다 기억력이 뛰어나면서."

"내 기억력은 상당히 뛰어나지만, 그렇다고 무한대는 아닐세. 그에 나는 중요도로 분류하여 기억한다네."

"아, 확실히 효과적이겠군요."

펌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퍼스트의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

"그러니까 내 요원 이름이 안 중요하다는 건가? 하, 어설픈 견제군."

"아, 원래 이럽니다."

펌킨의 설명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원래 저런 놈이었다.

"하하, 느닷없이 북부 대공의 딸과 결혼이라니요.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분위기를 풀 속셈인지 펌킨이 주제를 돌렸다.

"사람 일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나. 자네들이 연인이 됐듯이 말일세."

"연인 아닙니다."

"펌킨!"

"아, 연인입니다. 어깨에 손은 두르지 마십쇼. 진짜-."

"하하, 펌킨이 아직 부끄러움이 많아서 말일세."

"부끄럼보다 혐오에 가까운 것 같네만."

이내 펌킨이 기침하는 척 퍼스트의 팔을 쳐냈다.

그러자 퍼스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분이 알게 되면 문제가 발생할 텐데?"

"그분?"

그분이라는 지칭에 갈라하드는 괜히 목을 긁적였다. 설마 그게 알려졌나? 그랬을 리가-.

"황녀님 말입니다."

'아, 그게 있었지.'

이어진 펌킨의 설명에 갈라하드는 안도했다.

다만, 황녀도 그다지 반가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황녀는 일로 엮인 사이일 뿐일세."

"승계 후보에 언급은커녕 곧 죽을 상황이었던 그분을 유력 후보까지 올린 게 너 아닌가? 그 때문에 그분이 너를 지독히 아끼는 건 이미 유명하니 발뺌하지 말게."

퍼스트의 추궁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그다지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마족의 왕을 막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했다.

황녀는 그 노력 중 하나였다.

실제로 효과가 제법 있었다.

[네가 위험해. 이게 우리의 최선이다.]

그녀가 멍청한 선택을 하기 전까지는-.

그녀의 선택으로 끝난 사이였다.

"그건 내가 유능하기 때문일 뿐, 다른 건 없었네. 그리고 그녀는 이제 곧 결혼한 몸 아닌가? 불경한 말 하지 말게."

갈라하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와 제법 많이 얽혔지만, 그건 과거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감히 나를 떠나겠다는 말이냐?]

마지막이 좀 지저분했지만, 끝이란 게 원래 다 그런 법이었다.

"아."

펌킨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퍼스트가 큭- 거리며 얄밉게 웃었다.

묘한 분위기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자네 못 들었군."

"뭐를 말인가?"

"음-."

퍼스트가 시가를 입에 물었다. 물에 젖은 나무 냄새가 가득 풍겼다.

"그녀의 결혼 상대였던 왕자 말일세."

시가를 문 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적이 잠시 이어졌다.

그리고.

"죽었네."

퍼스트가 입꼬리를 가득 올리며 말했다.

"죽다니? 건장한 이였는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그녀의 결혼 상대였던 타국의 왕자가 얼마나 건강한지 갈라하드가 가장 잘 알았다. 그 결혼 목록을 구해준 게 갈라하드였기에.

그런데 그 왕자가 죽다니?

"급사했다더군, 황실에서도 쉬쉬하는 중일세."

"급사?"

"예, 최근 저희가 맡았던 임무라 잘 알고 있습니다."

펌킨이 말을 덧붙였다. 이들이 맡았던 임무라면, 확실한 사실이었다. 순간 갈라하드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때, 퍼스트가 얼른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데 아주 재밌는 소문이 있네."

"재밌는 소문이라면-."

"독살이라고."

말을 끝낸 퍼스트가 음미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독살?'

불길한 단어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설마-.'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결혼 상대는 왕국 연합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왕국의 적자였다.

그녀는 미쳤지만, 그래도 명석한 여인이었다. 그걸 죽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내 잘못을 바로 잡겠다. 조금만 기다려다오.]

그녀의 속삭임이 떠올랐다.

갈라하드의 입이 바짝 말랐다.

'아닐 것이다.'

저건 잘못을 바로잡는 게 아니라, 잘못을 찢어발겨 소금을 뿌리는 격이었다.

그녀가 미친 건 알지만-.

'아무리 미쳤어도 그 정도로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불안함이 올라왔다.

만약 그녀가 그런 멍청하고 미친 짓을 했다면-?

톡톡,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계산을 빠르게 다시 했다. 결과는 똑같았다.

그녀가 악수를 둔 순간부터, 그녀가 황제에 오를 가능성은 없었다.

재고할 필요가 없는 선택지였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갈라하드는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물었다.

그에 펌킨이 눈을 가득 구겼고, 퍼스트가 히죽 웃었다.

"역시 그래야 갈라하드지. 아, 그렇다면 그녀는-."

"거기까지만 하게. 그녀는 정보국의 금기일세. 자네를 죽이고 싶지 않네만."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톡톡 풀며 경고했다.

그에 퍼스트의 웃음이 사라졌다.

펌킨은 굳은 퍼스트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쫄았네.

****

'더 강해졌군.'

퍼스트는 갈라하드의 수준이 더 높아졌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원래도 괴물이었던 갈라하드였다.

그런데 거기서 더 강해졌다니.

'이래야 내 경쟁자답지.'

퍼스트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경쟁자를 존중하는 퍼스트는 주제를 돌렸다.

"그래서 북부로 왜 왔지?"

"왜라니. 까랬으니 깐 걸세."

갈라하드의 차분한 대답에 퍼스트는 콜록거리며 웃었다. 그 입가에 연기가 끊어지듯 뿌려졌다.

자밋의 말대로라면, 갈라하드를 북부로 보낸 건 황명이었다.

다만, 황제는 아닐 것이다. 황제가 잠에서 깼다는 이야기는 없었으니까.

아마 그에 준하는 인물이 내린 명일 것이다. 그게 황명으로 포장 된 것이고-.

그렇다고 한들 황명은 황명이었다.

피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갈라하드는 황명이라고 수그리는 이가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강제로 움직일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선택지가 싫었다면, 죽음을 꾸며서라도 피했을 사내였다.

그런 갈라하드가 북부로 온 건,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가장 가능성이 큰 건 역시-.

"아직도 마족의 왕을 찾나?"

연초를 털던 갈라하드의 손가락이 우뚝 멈췄다.

'정답이군.'

갈라하드가 예전에 입버릇처럼 말한 '마족의 왕'이었다.

사실 지금 제국에게 마족은 큰 위협이 아니었다.

애초에 마족은 중앙에서 잘 나타나지 않았고, 나타나도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임무의 목표가 마족일 경우에 '꿀'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현재 제국은 마족보다 오히려 왕국 연합 쪽이 더 거슬렸다.

그런 상황에서 마족의 왕이 나타난다고 경고해도 들어먹을 리가 없었다.

정보국은 기본적으로 제국의 이해와 타산으로 굴러가는 조직이 었다.

"다시 말하지만, 마족의 왕은 필연적인 존재일세, 그를 대비하지 않으면 마족의 왕이 언젠가 대륙을 전부 잿더미로 만들걸세."

갈라하드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처음 말했을 때처럼,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더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정보국의 모든 이들이 마족의 왕을 부정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찌 더 확신을 가질 수 있지?

퍼스트가 입을 열려고 할 때, 갈라하드가 손을 들었다. 갈라하드 는 말을 끊기는 걸 싫어했다. 퍼스트는 입을 닫았다. 펌킨은 그런 퍼스트를 보며 작게 혀를 찼다.

"자네, 북부에 관한 정보를 받아왔나?"

갈라하드의 물음에 퍼스트의 얼굴이 굳었다.

퍼스트는 갈라하드에게 오기 전 북부의 정보를 받았다. 임무에 관한 정보를 얻는 건 요원의 기본이었다.

"받았지."

"어떻든가?"

"쓰레기더군."

퍼스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동감일세. 북부에 정보국의 영향이 적다고 한들, 너무한 수준이지. 나도 처음에는 보고 놀랐네. 북부의 흔한 정보도 없지."

"흔한 정보?"

갈라하드의 가라앉은 눈동자가 퍼스트를 응시했다.

"마족은 마나 농도에 따라서 힘이 바뀌네. 마법처럼-."

이어진 말에 퍼스트는 침음성을 흘렸다.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북부의 마나 농도는 수도보다 몇배는 짙었다.

즉 마족이 마나 농도에 영향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수도의 마족은 여기보다 몇 배는 더 약한 상태라는 건가?"

"그리고 강한 마족은 자기 영역을 안 벗어나더군."

중앙에서 마주쳤던 마족들은 전부 조무래기라는 이야기였다.

사실 그게 진실이라도 수도의 마나 농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크게 위협적이지 않았다.

"최근 이곳에서 흑마법사들이 마경이란 걸 열었네. 마족의 영역인 곳이지."

갈라하드가 그런 퍼스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을 덧붙였다.

"...마경?"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기사로 보이는 사내가 들어왔다.

"대장, 이상한 놈들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놈들입니까!"

순간 갈라하드의 표정이 변했다. 아주 미세했지만,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마침 잘 왔군. 길버튼 경, 임시로 뽑은 신입들인데, 데리고 가서 마경 구경 좀 시켜주게."

"저희 사람이 몇이라고 임시로 뽑습니까?"

"그냥 좀 갔다 오게나."

"예, 어이! 뭘 멀뚱히 있어! 빨리 와!"

길버튼이라는 사내의 호통에 퍼스트와 펌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어느새 신입처럼 얼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보국 요원인 그들에게 위장은 가장 기본이었기에-.

갈라하드는 길버튼에게 끌려 사라지는 둘을 잠시 쳐다봤다.

그때, 열린 문으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

눈썹이 살짝 낮아진 아드리안나였다.

"왔으면 노크를 하지 그랬나."

갈라하드의 타박에 아드리안나가 입을 벙끗거리다가 이내 닫았다.

****

'...시발, 무슨 훈련이 이렇게 험해!'

펌킨은 터지려는 욕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마경이랑 괴상한 환경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도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갈라하드나 퍼스트에 비교될 정도는 아니지만, 펌킨도 유능한 요원이었으니까.

다만, 길버튼의 무식한 훈련이 문제였다.

가만히 있어도 숨찬 마경에 무식한 훈련이 더해지니, 펌킨도 버티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쓰러질 수는 없었다.

"고작 이 정도 훈련도 못 버텨?!"

길버튼이라는 놈이 거품을 물면서 쓰러진 병사를 걷어차는 걸 봤기에-.

"진짜였군."

퍼스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얼굴에 힘듦이 가득했지만, 펌킨은 저게 연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정말 힘들다면, 저런 고른 목소리가 나올 수 없었다.

"뭐...뭐가...."

"마나의 농도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높다는 것과 마족은 마나의 농도에 비례해서 강해진다는 것 말일세."

퍼스트가 흔들리는 펌킨을 잡아주며 말했다. 펌킨은 그 손에 기대어 숨을 돌렸다.

"정보국의 주요 대상은 왕국 연합과 고위 관료들, 그리고 반제국주의자 놈들 아닙니까. 애초에 정보국은 북부에 관심이 없습니다."

"맞는 말일세. 다만, 안가에는 조금 부족해도 정보가 제법 있었네. 그런데 정보국 본부에는 북부의 정보가 부족했지."

"본부에 북부 정보를 흔드는 놈이 있다는 겁니까?"

"아직 모르지."

"거기 똑바로 안 해!"

길버튼의 호통에 퍼스트가 손을 놓았다. 펌킨은 이를 악물고 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갈라하드가 맡았던 임무 중 세작 작전이 있었네. 강대해지는 왕국 연합을 흔드는 일이었지. 갈라하드가 어떻게 했는지 아나?"

퍼스트의 질문에 펌킨은 눈을 구겼다. 쓸데없이 남이 맡은 임무는 왜 외우고 있어? 숨이 차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보통은 가장 강한 왕국에 세작으로 들어가지. 가장 강한 쪽을 흔들면 나머지도 흔들리는 법이니까."

펌킨의 속을 모르는 퍼스트는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펌킨은 욕을 뱉으려다가 침이 나왔다.

"그런데 갈라하드는 가장 약한 왕국을 선택했어. 그리고 그걸 키우기 시작했네. 남들과 정반대의 방식이지."

관심 없-. 펌킨은 들뜬 숨을 토해냈다.

"그 결과 가장 규모가 작았던 왕국의 덩치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커졌네. 힘의 균형이 틀어지면서 왕국 연합이 흔들렸지. 나는 그에게 물었네. 왜 굳이 그런 힘든 길을 선택했냐고. 그가 뭐라고 대답한 줄 아는가?"

몰라 시발-. 펌킨은 몰헥! 소리밖에 못 냈다.

"그래야 보상이 큰 법일세. 라고 대답하더군. 웃기지 않나? 다들 임무 성공을 생각할 때, 그는 성공 뒤에 있을 보상의 크기를 고려했네."

어쩌라고! 펌킨은 켁- 소리를 냈다. 숨이 턱에 막혔다. 퍼스트가 등을 두드려줬다. 그제야 숨이 트였다.

"나는 그의 이번 행보도 그때와 같다고 생각하네."

"...뭐가요."

"그는-."

퍼스트의 눈이 형형했다. 이제 머리 뚫린 소리가 나오겠군. 펌킨은 퉤-하고 침을 뱉었다.

"이번에 북부를 선택한 걸세."

'북부를 선택하다니-. 그러면 그 상대가 제국이고?'

참으로 광오한 문장에 펌킨은 눈을 찡그렸다.

갈라하드가 요원 중에서 제일인 건 펌킨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래봤자 한 명 아닙니까."

펌킨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갈라하드가 대단하다고 한들 그는 혼자였다.

그가 북부를 선택한들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맞는 말일세. 그는 혼자지."

퍼스트의 코가 들썩였다.

지랄이 나올 타이밍이었다.

펌킨은 미리 욕을 중얼거렸다.

"아직은-."

퍼스트는 심지어 픔까지 들였다.

잠시 입을 달싹거린 퍼스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갈라하드의 영원한 숙적이자 경쟁자, 나 퍼스트가 함께 한다면? 후-."

퍼스트가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두렵군."

펌킨도 진심으로 두려웠다.

****

"그러니까 갈라하드가 보냈다는 겁니까?"

까마귀는 자신을 올려보는 놈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번들거리는 눈과 굽신거리는 등은 전형적으로 능력 없는 기회주의자의 표본이었다.

까마귀가 가장 혐오하는 인간상이었다.

그분은 도대체 왜 이런 놈과 엮인 건지-.

"그렇다. 네가 코르튼이냐?"

"예이! 맞습니다! 아이고! 간부님이 오셨는데 제가 미처 준비를 못 했군요!! 죄송합니다!"

굽실거리는 모습에 까마귀는 올라오는 토악질을 애써 참았다.

"위쪽에 서신을 넣어라. 내가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을 가져왔다고."

"위쪽 말입니까? 예! 알겠습니다!"

되묻다가 화들짝 놀란 놈에 까마귀는 혀를 찼다.

까마귀는 놈이 싫었다.

다만, 저런 놈의 보고라면 학회장도 믿을 게 분명했다.

학회장은 무능한 이를 가장 좋아했으니까.

49화 잿빛 오러

"아, 이야기 중이셔서 기다렸습니다."

눈썹이 살짝 내려간 아드리안나가 예의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화를 들었나?'

습관적으로 방음 마법을 둘렀지만, 상대는 아드리안나였다.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모로 알기 어려운 여인이군.'

마법이 통하지 않다니-.

작게 혀를 찬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보며 직설적으로 물었다.

"들었나?"

"...예? 아닙니다. 타인의 대화를 엿듣는 건 대단히 실례되는 행동입니다."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빨랐다. 그에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처음에는 대화하고 계신 줄 몰라서 실수로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작게 숙이면서 실토했다.

"아, 물론 바로 물러났습니다."

"그런가?"

"예."

아드리안나가 입을 달싹거렸다. 대놓고 뭔가 잘못함이 보이는 표정이었다.

'거짓말을 참 못하는군.'

갈라하드는 그런 아드리안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자 아드리안나가 실토하기 시작했다.

"...사실 바로는 아닙니다. 그게 황녀님의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던 터라 저도 모르게..."

"그렇군."

"황녀님이 갈라하드 대장을 많이 아끼셨다는 것과 모종의 일로 끝났다는 것 그리고...."

줄줄이 실토하는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많이도 들었군."

갈라하드의 지적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흔들렸다.

"죄송합니다. 황녀님의 이야기는 정말 오랜만에 들은 터라-."

"황녀와 아는 사이인가?"

"예, 어릴 때 잠시 어울렸습니다. 아주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그 미친 여자가 따뜻하다니-.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하긴 어릴 때라면 황녀가 그 일을 겪기 전이니까-. 제정신일 때 겠군.'

"황녀님은 잘 지내십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나?"

"아, 사이가 가까우신 듯하여-."

"아까도 말했지만, 일로 엮인 사이일 뿐일세."

"아, 그렇군요."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썹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갈라하드는 최근 연달아 일어나는 일에 머리가 복잡했다.

그중 제일은-.

'고위 마족이라.....'

갈라하드에게 혼자 마경으로 오라고 했던 고위 마족이었다.

먼 거리를 넘어 발휘한 놈의 정신 간섭은 갈라하드에게는 외면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

마족 놈들이 왜 자기들의 힘을 '권능'이라 칭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놈의 권능은 마법사에게 신과 다름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마경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멍청한 짓이지.'

놈의 권능이 아무리 매력적이라고 한들 마족을 믿고 혼자 마경으로 향하는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물론, 놈은 갈라하드에게 원하는 게 있으니, 위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아직은 아니다.'

놈에게 가려면, 마경에서 스스로 지킬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했다.

갈라하드는 들뜬 맘을 애써 억눌렀다.

"왜 황녀님과 끝이 안 좋았는지 물어도 됩니까?"

아드리안나의 질문에 갈라하드의 상념이 깨졌다.

고개를 드니,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살피고 있었다.

그 눈에 조심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녀가 나를 안 믿었네."

간단한 대답에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정적이 이어졌다.

묘한 얼굴이 된 아드리안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다시 1대대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마경 훈련소가 우려되지만, 1대대를 오래 비우는 것도 위험한 터라."

아드리안나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1대대로 돌아가려는 듯했다.

참으로 아드리안나다운 행보였다.

"그렇군. 가기 전에 손 좀 주겠나."

갈라하드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평소와 달리 아드리안나는 그 손을 조용히 응시했다.

"저번에 하신 말씀 말입니다."

"어떤 거 말인가."

"이제 알 것 같다는 말씀-."

"아, 그랬지."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입니까?"

"그대는 마족이 강할수록 더 강해지네. 그건 마나를 불태우는 성질과 연관이 있지. 자네에게 마나는 연료일세. 그 연료의 품질이 좋을수록 자네는 더 강하게 태운다네. 저번에는 그를 검증한 걸세. 마나의 농도를 오히려 낮춰봤네. 그러니 고통이 덜하더군."

갈라하드는 저번의 기억을 떠올렸다.

마나를 압축하는 경우는 있어도 농도를 낮추는 경우는 없었다. 농도 낮은 마나는 쓸모가 없기 때문이었다.

갈라하드는 자신의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서 마나의 농도를 낮췄다.

애초에 마나 농도가 짙은 북부에서 마나 농도 낮추는 건 꽤 힘든 작업이었지만, 고통의 알이 그를 가능케 했다.

마나 대부분을 고통의 알에 맡겨두고, 얼마 없는 마나를 최대한 운영하니 불순물이 섞이며 마나 농도가 낮아졌다.

그리고 아드리안나의 손을 잡자, 전보다 고통이 한결 덜 했다.

어쩌면 마나가 불타는 그 끔찍한 고통에 익숙해진 걸 수도 있었지만-.

입을 살짝 벌리고 눈만 꿈벅이는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쉽게 설명하자면, 그대의 손을 덜 아프게 잡는 법을 알았다는 걸세."

"아, 덜 아프게 잡는 법입니까."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빨리 잡으라는 독촉이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제국에서 갈라하드님을 북부로 보낸 것에 황녀님과의 관계도 영향이 있습니까?"

아드리안나의 뜬금없는 물음에 갈라하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끄덕였다.

워낙 찔리는 구석이 많아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것 또한 영향이 있을 것이다.

"있을 걸세."

"그렇다면 갈라하드님이 이 먼 북부로 온 게 제 탓만은 아니겠군요."

"일... 리가 있군?"

아드리안나의 침착한 의견 제시에 갈라하드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제가 손을 잡아주겠다고 약속한 건 갈라하드님이 저 때문에 북부로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오로지 저 때문이 아니라, 갈라하드님의 방만한 과거의 영향도 있다는 게 확인됐으니, 재고할 여지가 있습니다."

"...방만한?"

"계약을 이미 체결했지만, 그 조건이 달라졌으니 계약의 형태를 바꿀 필요성이 있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예상치 못한 저항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그녀의 주장이 제법 타당했다.

"형태를 바꾸겠다면-?"

"현재는 갈라하드님의 제안에 무조건 응해야 하지만, 이제는 저도 동의해야 잡는 것으로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상당히 진지했다.

갈라하드는 그 또렷한 푸른 눈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그대가 무작정 거절하면 문제가 되지 않겠나?"

"대신 적절한 근거를 제시하겠습니다. 가령 오늘은 아직 마경 훈련소가 안정되지 않았고, 제가 1대대로 돌아가니 위험도를 판단하여 손을 잡기에 좋지 않습니다."

"일리가 있군, 알겠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끄덕였다.

"다만, 이를 당장 바꾸는 건 갑작스러우실 테니, 오늘은 유예 기간으로 두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건틀릿을 벗고 손을 내밀었다. 당당한 말과 달리 손을 내민 모습이 상당히 어색했다.

갈라하드는 그를 가만히 지켜봤다. 그러자 아드리안나가 내민 손을 달싹거리며 손바닥을 안쪽으로 숨겼다.

"자네, 내가 당연히 잡을 거라고 생각하는군?"

그리 묻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손을 먼저 요청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는 적당한 근거에 따른 추론입니다. 원하지 않으신다면-."

"그냥 물어본 걸세."

갈라하드는 냉큼 아드리안나의 손을 잡았다. 굳은살이 가득하여 거친 손이지만, 꽤 따뜻했다.

"이런 느낌-."

그것도 잠시였다. 농도 낮은 마나가 전부 타서 없어지자, 안에 있던 마나가 강제로 꺼내졌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손을 뺐다.

갈라하드는 휘청이며 의자에 앉았다. 눈을 감고 방금의 감각을 떠올렸다.

'잡힐 것 같으면서도-.'

좀처럼 알 수 없군.

"아, 제가 1대대로 돌아가는 건, 갈라하드 대장이 마경 훈련소를 충분히 관리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매를 보내겠습니다. 진행 상황을 적어주시지요."

아드리안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갈라하드를 잠시 보다가 방을 나섰다.

복도에서 아드리안나와 마주친 길버튼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디 가십니까?"

"1대대로 복귀한다."

아드리안나는 그리 말하고 지나쳤다.

그를 본 길버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웃었어?'

잠시 눈을 찡그리던 길버튼은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그럴 리가 없었다.

길버튼은 잘못 본 것이라 확신하며 문을 두드렸다.

"뭔가?"

"그 임시로 뽑았다는 놈 있지 않습니까. 엄청 이쁜 여자 말고 거대한 놈-."

"아, 퍼스트. 무슨 일 있나?"

갈라하드의 가벼운 물음에 길버튼은 눈을 찡그렸다.

퍼스트인지-허스트인지-.

"그놈 뭡니까?"

잔뜩 일그러진 길버튼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

길버튼을 따라 퍼스트에게 향한 갈라하드는 펼쳐진 모습에 작게 혀를 찼다.

마경에 병사들이 전부 쓰러져 있었다. 그 중심에 퍼스트가 있었다.

길버튼의 훈련에 제법 마경에 익숙해진 병사들이었다. 그런 병사들이 쓰러져 있고, 퍼스트가 일어나 있다니.

"입이 아니라 코로 숨을 쉬는 걸세!"

퍼스트는 병사들을 일으키려 독촉하고 있었다.

"저 녀석 도대체 뭡니까?"

길버튼이 퍼스트를 가리키며 떨떠름하게 물었다.

"쓸만한 놈일세."

갈라하드는 짧게 대답하며 앞으로 나섰다.

갈라하드를 발견한 퍼스트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갈라하드, 자네 말이 사실이군. 마경이란 곳 상당히 흥미롭네."

그 옆에 땀범벅인 펌킨과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마나 농도가 얼마나 짙은 건지 감도 안 올 정도야."

"열 배 정도일세."

퍼스트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정확히 수치를 짚어줬다.

퍼스트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다만, 퍼스트는 갈라하드에게 그걸 어떻게 아냐고 멍청하게 묻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그런 인물이었다.

"마법을 쓰는 것조차 힘들더군."

퍼스트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웬만한 마법사는 엄두도 못 내겠지."

"갈라하드, 자네에게 웬만한 마법사라면 마탑의 상위층은 돼야 겠군."

퍼스트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 퍼스트는 입꼬리를 올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불-."

퍼스트는 시동어를 외우지 않은 것처럼,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퍼스트의 손가락에 불이 붙었다. 활활-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법은 마법이었다.

마경에서 마법을 쓰다니-.

퍼스트의 수준을 알기에 갈라하드는 작게 놀랐다.

"놀란 얼굴이군."

"어떻게 했나? 마경에서 마법을 쓸 정도의 실력은 안 될 텐데?"

"후, 나는 자네의 숙적 퍼스트일세."

퍼스트는 쓸만한 마법사였지만, 마경에서 마법을 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 대기의 마나를 일단 저장했군?"

갈라하드의 중얼거림에 퍼스트의 미소가 굳었다.

'정답이군.'

수도와 비교하면 열 배는 짙은 마나였다.

마나는 상당히 예민했다. 농도가 높다고 막무가내로 저장하면 마나 회로가 물에 타서 오히려 중심이 무너졌다.

갈라하드가 괜히 북부에 도착하자마자, 농도를 맞추려고 애를 쓴 게 아니었다.

실제로 효과도 있었고.

그런데 퍼스트는 마나의 농도를 계산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저장 했다.

'아니, 저건 저장보다는 흡수에 가깝군.'

퍼스트의 이마 가득한 땀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마법사처럼 호흡으로 마나를 정제하듯 계산하여 저장한 게 아니라, 일단 몸을 움직여 되는 대로 때려 넣은 듯했다.

참으로 무식한 방법이었다.

"내 몸은 단단하니까."

기사의 몸으로 견디면서 마나를 강제적으로 저장한다. 기사에 어울리는 무식한 방법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다만, 그렇게 저장하면 문제가 있었다.

"그러면 마법을 사용하기 힘들 텐데?"

저건 마나를 저장한 게 아니라 쑤셔 박은 거였다. 그를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기사의 비밀일세."

퍼스트가 턱을 치켜들며 대답했다.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갈라하드는 퍼스트를 살폈다. 그 신발에 재가 쌓여 있었다. 한 자리에서 오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더불어 손에 굳이 검을 쥐고 있었다.

"오러를 일으켜서 강제로 마나를 움직였군?"

퍼스트의 얼굴이 굳었다.

"아닐세, 마기사의 비밀이라 말할 수 없지만."

"그러다가 몸이 터질 수도 있네."

"하지만 안 터졌지! 나는 마기사니까! 물론, 방금 자네가 말한 게 마기사의 비밀이라는 건 아닐세!"

퍼스트가 뒤늦게 사족을 붙였다.

'기사의 오러로 버티면서 마나를 억지로 움직인다-.'

갈라하드는 퍼스트의 훈련이 어떤 원리인지 깨달았다.

"몸을 써서 강제로 높은 농도의 마나에 노출하는 거군. 그 과정에서 마나가 무의식적으로 배출되면서 순환되는 과부하를 이용하는 것이고."

꼭 마법사가 아니어도 마나는 모든 이에게 존재했다. 그를 의식적으로 쓰는 게 마법사였다.

보통 이들은 그를 의식하지 못하고 마나를 썼다. 육체를 움직일 때, 마나가 무의식적으로 같이 움직였다.

퍼스트는 그를 이용한 듯했다.

"정답일세. 역시 내 경쟁자군."

퍼스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고농도의 마나에 노출되면 육체의 질이 올라갈 것이다.

다만-.

"그래봤자 육체의 변화일텐데?"

갈라하드의 반문에 퍼스트가 히죽 웃었다.

"그건 오러가 없을 때의 이야기지, 잠재력을 폭발 시키는 오러가 있다면, 사소한 변화도 엄청난 효과를 보이는 법일세."

퍼스트의 검에 푸른 오러가 거칠게 일렁였다.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크기가 컸다.

오러와 마나는 관련이 없었다. 그건 이미 갈라하드가 확인한 사실이었다. 갈라하드가 오러에 미련이 없는 이유였다.

그런데 퍼스트가 그에 대한 반증을 들이밀었다.

'농도 짙은 마나는 오러와 연관이 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굳은 갈라하드의 얼굴에 퍼스트는 짙게 웃었다. 갈라하드가 저런 얼굴을 보이다니-.

다만, 퍼스트의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렇군, 그러면 이것 좀 마셔보겠나?"

"이게 뭐지?"

"마족의 피일세."

"...피를 왜?"

"마족의 피에는 고농도의 마나가 함유되어 있네."

"음-."

퍼스트가 슬쩍 뒤로 물러났다. 못 들은 척 펌킨에게 향하는 퍼스트에 갈라하드는 입맛을 다셨다.

그때, 엎어진 병사 사이에 익숙한 소년이 있었다.

데미안이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 표정이 밖에 있을 때보다 더 편해 보였다.

아니-.

'웃고 있군.'

묘한 느낌에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었다.

그러자 퍼스트가 다시 다가왔다. 퍼스트가 제 손가락에 있는 옅은 불을 흔들며 물었다.

"불이 필요한가?"

"아, 괜찮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활활 타오르는 물에 퍼스트의 입이 꾹 닫혔다.

그때, 데미안이 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그 순간 뭔가 일렁였다.

'오러?'

찰나였지만, 그건 분명 오러였다.

백 개가 넘는 오러를 봤던 갈라하드였다.

오러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오러를 쓴다는 건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문제는.

'잿빛이군.'

오러의 색이었다.

오러는 신념이었다.

그렇기에 오러는 각기 달라도 기본적으로 밝은 색이었다.

신념은 어두울 수 없기에.

그런데 데미안의 검에 일렁였던 오러는 잿빛이었다.

갈라하드도 본 적 없는 색이었다.

오러에서는 절대 나와서 안 되는 색이었고-.

'흥미롭군.'

갈라하드는 얼마 피지 못한 연초를 버리고 데미안에게 향했다.

환히 웃으며.

"데미안, 부모가 누구라 그랬지?"

"네? 창부요."

단호한 대답에 갈라하드의 말문이 처음으로 막혔다.

50화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