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메인 디쉬
"후후······."
"아까부터 왜 자꾸 음흉하게 웃습니까?"
펌킨은 퍼스트에 질린 얼굴로 물었다.
퍼스트는 아까부터 줄곧 저 상태였다. 성벽 위에 서서 괴상한 웃음을 흘리며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저건 갈라하드 요원을 볼 때 느낌인데.'
펌킨은 눈을 가늘게 뜨고 퍼스트가 보는 곳을 살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펌킨은 더 눈을 가늘게 떴지만, 역시나 보이는 게 없었다.
그에 펌킨은 퍼스트를 쿡쿡 찔렀다. 반응이 없었기에 슬쩍 뒤통수를 한 대 때렸다. 그제야 퍼스트가 돌아봤다.
"음? 벌레가 앉았나."
꽤 진심으로 때렸는데, 벌레가 앉았다니-. 괴물은 괴물이었다.
펌킨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질문했다.
"뭐가 있습니까? 왜 자꾸 음흉한 웃음을 흘립니까."
"아, 자네에겐 안 보이겠군. 후후."
"뭐 말입니까."
"놈은 나를 시험할 생각이군. 감히-."
'감히'라고 말하면서 히죽 웃는 퍼스트에 펌킨은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머리가 뚫린 걸 보면 갈라하드일 게 분명했다. 근데 시험이라니?
"제법 힘든 시험일 게 분명하군."
펌킨은 오러를 가벼이 일으켰다. 그제야 저 멀리 점처럼 뭔가 보였다.
그건-.
'······흑마법사?'
당장 쳐들어올 것처럼 열심히 준비 중인 흑마법사들이었다.
흑마법사의 습격이야 그리 문제 될 거 없었다.
애초에 흑마법학회라는 놈들에게 습격 당했던 곳 아닌가.
놈들 사이에 있는 사내가 문제였다.
'···갈라하드가 왜 저기에?'
갈라하드를 본 펌킨의 눈이 와락- 구겨졌다.
적에 갈라하드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가장 적으로 두기 싫은 이를 꼽으라면, 당연히 갈라하드였다.
그 무력도 무력이지만, 갈라하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갈라하드의 여유로우면서도 서늘한 집착은 광기를 넘어선 무언가였다.
제일 얽히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런 시발. 갈라하드가 왜 저기 있습니까."
"나를 시험하기 위함이지."
"그니까 무슨 시험."
"역시 자네는 모르는군."
입꼬리를 가득 올리는 퍼스트에 펌킨은 작게 '시발!'이라고 중얼거렸다.
퍼스트가 손가락으로 갈라하드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습격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정체를 숨기기에는 또 거리가 가깝다. 이건 공격 의지가 없음을 나타내는 걸세. 애초에 공격할 생각이었으면, 진작에 움직였지. 기다리고 있을 이가 아닐세."
퍼스트가 뜨거운 숨을 뱉어냈다. 펌킨은 질색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런데 왜 내 시야에 걸리는 곳에 있을까. 내 뛰어난 시력을 갈라하드가 모를 리가 없으니, 나한테 뭔가 말하고 싶은 거겠지."
퍼스트의 근육이 뿌드득- 소리를 냈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펌킨은 한 발짝 더 물러났다.
"오직 나만이 갈라하드를 이해할 수 있으니까."
"······지랄."
펌킨이 대놓고 욕했지만, 퍼스트의 귀에는 안 들어갔다.
"흑마법사들이 여기를 노리는 이유는 역시 마경이겠지. 그렇다면-."
퍼스트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아아, 그렇군. 경쟁자여, 네 의지 알았다."
퍼스트의 얼굴이 굳었다. 퍼스트가 그 두꺼운 목을 무겁게 끄덕였다.
'뭐라는 거야. 진짜.'
펌킨은 질색하며 한 발짝 더 물러섰다.
그때, 퍼스트가 가벼이 뛰어내렸다.
쿵, 성벽의 높이가 상당한데도 작은 소리가 전부였다.
퍼스트는 경계 서는 병사들 사이에 정확히 떨어졌다.
"어? 뭐-."
병사가 고개를 돌린 순간, 퍼스트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뚝, 병사의 고개가 가벼이 돌아갔다. 퍼스트는 쓰러지는 병사를 가벼이 받아 옆에 세웠다. 바로 이어서 움직였다.
퍼스트가 병사 넷을 쓰러뜨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숨 한 번 내쉬는 정도였다.
병사들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한 듯 편한 얼굴이었다.
'빨라졌다.'
펌킨의 눈이 커졌다. 퍼스트와 내내 붙어 다닌 펌킨이었기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펌킨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검을 챙겨서 뛰어내렸다.
퍼스트가 머리에 구멍 뚫린 놈 같아도 일을 그르치는 법은 없었다.
내려가니 퍼스트는 병사들이 쐬는 불 더미에 장작을 더 넣어주고 있었다.
펌킨은 굳이 뭐하냐고 묻지 않았다. 퍼스트도 설명하지 않고 움직였다.
퍼스트는 이내 성문으로 향했다. 북부답게 7대대의 성문은 거대했다. 마물의 거친 흔적이 여기저기 새겨져 있는 성문에서는 녹슨 냄새가 가득 풍겼다.
"건너편에 도르래가 있습니다. 제가 넘어가겠습니다."
"됐다."
짧게 대답한 퍼스트가 성문에 손을 올렸다.
그 등이 다른 사람보다 두 배는 거대했다.
짧게 숨을 내쉰 퍼스트가 힘을 주기 시작했다.
그 아래의 눈이 깊게 팼다.
뿌드득, 퍼스트의 널찍한 등에서 근육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등에 오러가 가득 일렁였다.
펌킨은 그 무식한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때-.
쿠구국.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성문이 밀리기 시작했다.
'미친.'
소 두 마리가 붙어야 여는 성문을 그냥 힘으로 열다니-.
압도적인 무식함에 펌킨은 투박한 감탄을 뱉었다.
이내 성문이 활짝 열렸다. 자고 있던 소 두 마리가 깜짝 놀라 일어났다. 소들이 퍼스트를 보며 낮게 울었다.
퍼스트는 손을 털며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오거라. 경쟁자여."
퍼스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펌킨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임무 까먹은 거 아니야?'
아무리 퍼스트라도 마음대로 갈라하드에게 갈 수 없었다.
이 행보가 가능한 건 임무 때문이었다.
걱정이 들었지만, 펌킨은 고개를 저었다.
퍼스트가 임무를 잊을 리가 없었다.
****
"무··· 문이 열렸습니다."
흑마법사가 더듬거리며 보고했다.
그에 헬카르튼이 경악한 얼굴로 갈라하드를 돌아봤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얼굴이었다.
'퍼스트군.'
갈라하드는 활짝 열린 성문을 보며 연초를 입에 물었다.
편지 한 통 보내지 않았는데, 퍼스트는 갈라하드의 의도를 완벽히 이해했다.
역시 쓸만한 놈이었다.
'학회장이라.'
이번에 학회장을 반드시 잡아야 했다.
여명으로 이을 끈부터, 흑마법학회의 온전한 소유권까지-.
학회장에게 달린 보상이 제법 많았다.
다만, 학회장은 제 수하도 버리고 도망칠 정도로 잽싼 놈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나타나지 않고 못 참을 것이다.
무너져 가는 상황에서 제 심복이 반란을 일으킨 상황이었다.
조심스러운 놈이라면 제 눈으로 확인할 게 분명했다.
'적당한 곳에 숨어서 말이지.'
그에 마나를 뿌렸지만, 잡히는 게 없었다.
생각보다 더 조심스러운 놈이었다.
그런 놈을 어떻게 잡을까.
답은 간단했다.
놓칠 수 없는 미끼를 내밀어야 했다.
그 미끼는 역시 놈들이 성역이라 부르는 마경이었다.
헬카르튼이 7대대를 가볍게 통과하는 모습과 그 너머에 존재하는 마경을 보면 학회장은 어떻게 생각할까.
'처음부터 꾸며진 배신이라 생각하겠지.'
7대대의 실패를 거짓 보고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컸다.
학회장은 자리에서 보고를 들은 게 전부였으니까.
무엇보다 저 뚜렷한 마경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올 것이다.'
갈라하드는 확신했다.
그 중심은 역시-.
'헬카르튼이지.'
갈라하드는 헬카르튼을 응시했다.
헬카르튼의 눈이 전보다 더 음험했다. 그 눈에 경악이 가득 서려 있었다.
"말하지 않았나. 7대대는 걱정하지 말라고. 자, 다들 준비하게! 성역으로 갈 것이네. 아, 다들 선택은 받았나?"
"예, 저희 자문위원회는 선택에 지팡이까지 있습니다."
갈라하드의 물음에 헬카르튼이 단단하게 대답했다.
흑마법사들이 팔목을 보여줬다. 거기에는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러면 학회장. 먼저 가시게."
갈라하드의 지목에 헬카르튼이 입꼬리를 올렸다.
고개를 깊게 끄덕인 헬카르튼이 돌아섰다.
성문으로 향하는 뒷모습에서 숭고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갈라하드는 슬쩍 흑마법사들 사이에 섞였다.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주변에 병사들도 없었다. 마치 환영한다는 듯-.
헬카르튼은 작게 혀를 내두르며 걸음을 서둘렀다.
성문 안쪽도 조용했다. 저번 피해를 복구하지 못했는지, 여기저기 무너진 건물이 있었다.
헬카르튼의 시선은 저 멀리 있는 성역에 꽂혀 있었다. 어두운 밤에도 존재감이 줄어들지 않는 어둠은 분명 성역이었다.
흑마법사들의 걸음이 빨라졌다. 두려움보다 들뜸과 기대가 떠올랐다.
다른 건 아무래도-.
"어?"
그때, 순찰하던 병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 얼굴이 상당히 험악했다.
헬카르튼과 수하들은 재빨리 지팡이를 잡고 전투에 대비했다.
긴장이 가득 올라왔다.
그때-.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
병사가 힘차게 경례를 올렸다. 그 경례가 어찌나 힘찬지 순간 깜짝 놀랐다.
그 경례의 대상은 사내였다.
"고생이 많군."
사내가 자연스럽게 경례를 받았다.
'성문을 열어준 걸로도 모자라서 경례까지 올린다고?'
헬카르튼은 이 괴상한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흑마법학회도 7대대의 중대장들을 회유했었다.
실제로 마경을 열었던 근거도 그 장악력에 있었고-.
거기에 든 자금과 노력이 상당했지만, 저 정도의 충성을 보이지는 않았다.
북부 놈들의 충성은 단순히 거래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라니······.
'역시 여명이군.'
헬카르튼의 눈이 번들거렸다.
"멈추지 말게. 밤은 짧네."
사내의 속삭임에 헬카르튼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내 성역 앞에 도착했다.
'성역-.'
성역의 압도적인 모습에 헬카르튼은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가본 적 있나?"
"예."
사내의 물음에 헬카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헬카르튼은 조심성 넘치는 학회장을 대신하여 여명의 초대를 받은 적 있었다.
여명의 초대를 따라 도착한 곳에는 여기처럼 성역이 있었다.
"······오히려 이곳보다 짙게. 음?"
헬카르튼은 자신이 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찡그렸다.
"이런 자네, 피곤한가 보군. 빨리 성역에 들어가야겠네."
사내가 어깨를 두드렸다. 그에 헬카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역으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렸다. 그 사이로 느끼하게 생긴 덩치 기사와 엄청난 미인이 있었다.
헬카르튼의 시선은 성역에 꽂혀 있었다.
"자, 다들 마음껏 즐기게나."
다들 멍한 얼굴로 성역으로 향했다.
마치 불에 돌진하는 불나방처럼-.
마지막 놈까지 들어간 걸 확인한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공을 만들어 세운다. 재밌군."
어느새 다가온 퍼스트가 낮게 읊조렸다.
"아, 다치게 하면 안 되네. 하나하나가 소중한 인력일세."
"인력? 저런 버러지 같은 놈들이?"
퍼스트의 이죽거림에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대답했다.
"설마 어렵나?"
"전혀."
퍼스트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퍼스트의 근육이 뿌드득- 소리를 냈다. 그 명쾌한 단순함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아, 메인 디쉬는 내 걸세."
갈라하드의 말에 퍼스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남의 공을 가로채는 파렴치한 취미는 없네."
시원하게 웃은 퍼스트가 흑마법사들의 뒤로 붙었다.
갈라하드는 뒤쪽을 보며 연초를 톡톡 털었다.
슬슬 미끼를 물 때가 됐군.
****
'음.'
학회장, 노인은 저 멀리 있는 7대대를 보며 상황을 다시금 되짚었다.
'전투 없이 입성했다.'
성문이 저절로 열렸고, 자문위원회를 위시한 헬카르튼이 당당히 입성했다.
그게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애초에 실패하지 않았군.'
노인의 눈이 번들거렸다.
성역을 열기 위한 작전은 실패하지 않았다.
노인에게 거짓 보고를 올린 게 분명했다.
'애초에 성역이 그대로 열려 있다는 것부터 이상했지.'
정녕 그 아드리안나가 나타나서 실패했다면, 성역을 가만히 두고 갈 리가 없었다.
그러면 왜 지금 성역을 수복한다고 보고했을까.
답은 뻔했다.
'나를 끌어내기 위함이군.'
노인의 주름이 깊어졌다.
놈들은 학회장 자리까지 탐하는 게 분명했다.
'이거 우습게 보였군.'
노인의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하여튼 마법사 놈들이 이래서 문제였다.
탐욕을 버리지 못했다.
다만, 놈들이 생각하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
노인은 애초에 놈들을 믿은 적 없었다.
'우습군. 우스워-.'
노인은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거대한 고목으로 만든 지팡이였다.
그냥 봐도 범상치 않은 지팡이의 끝에 검붉은 게 붙어 있었다.
그건 보석처럼 반들거렸지만 마석이 아니었다.
고위 마족의 알이었다.
여명에게 받은 지팡이였다.
고위 마족의 알이라니-.
고위 마족이 어떤 존재인가. 하급 마족도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고위 마족은 그들에게 신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정말 고위 마족의 알이라면, 그런 귀한 걸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의심은 지팡이를 잡는 순간 깨졌다.
노인이 원래 쓰던 지팡이도 최고급 지팡이였다.
그런데 여명에서 준 지팡이는 아예 궤를 달리했다.
이건 진보였고 혁신이었다.
마법이 아닌 권능이었다.
'피를 먹이면 힘이 강해진다.'
처음 피를 먹였을 때, 보인 그 위력은 경외심까지 들 정도였다.
알은 피를 먹일 때마다 점점 커졌고, 지금은 노인의 얼굴만 해졌다.
거기에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진의 원본이 있었다.
'멍청한 놈들.'
노인은 상황을 신중하게 살폈다.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 병력도 안 보였다.
"가자."
노인은 그를 확인하고 걸음을 옮겼다.
노인의 기운에 눌려있던 이들이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눈에 공포와 경외심이 가득했다.
'건방진 놈.'
이 기회에 싹 갈아야겠어.
건방진 놈들의 피를 전부 먹이면, 알이 한 차례 더 커질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여명도 두렵지 않지.'
노인 입가의 주름이 한층 더 깊어졌다.
성은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노인은 올라오는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걸었다.
성역 앞에 도착했지만, 병력은 없었다.
초기 계획대로였다.
7대대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고, 성역 안에서 병력을 키우는 계획-.
역시 성공한 게 분명했다.
'감히 내게 거짓을-.'
거센 충동이 올라왔다.
노인은 눈을 찡그리면서 손을 살폈다.
지팡이에서 뻗은 줄기들이 노인의 손에 박혀 있었다.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지팡이를 타고, 심장 박동처럼 거센 충동이 연달아 올라왔다.
머릿속에서 삐- 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어느새 성역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 뒤를 수하들이 필사적으로 따라 붙었다.
'고향이다.'
성역에 들어오고 나서야 노인의 정신이 돌아왔다.
검붉은 알이 작게 진동했다.
지팡이를 타고 묵직한 힘이 넘어왔다.
'이게 고위 마족의 힘-.'
지팡이에서 나온 뿌리들이 노인의 주름진 손과 팔을 타고 올라왔다.
그때-.
"다 들어왔군."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성문 주변에 느끼하게 생긴 거대한 기사가 있었다.
쾅!
기사는 마치 방문을 닫듯 거대한 성문을 닫았다.
그 거력에 노인의 수하들이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노인은 눈을 찡그렸다.
기사 주변에 먼저 들어간 놈들이 잔뜩 쓰러져 있었다.
분명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다 제압했다니-.
'제법이군.'
그때, 기사가 오러를 가득 일으켰다. 오러 위에 바른 것처럼 이글거리는 불은 분명 고위 마법이었다.
그 향긋한 냄새에 노인은 입꼬리를 올렸다.
당장 놈을 뜯어먹고 싶었다.
"좋은 눈일세. 다만, 메인 디쉬는 예약이 되어 있어서 말이지."
기사가 괴상한 소리를 하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감히 누가 나를-.'
고개를 돌린 노인은 우뚝 멈췄다.
노인의 뒤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사내 주변의 재가 옅었다. 재가 마치 사내를 피하는 것처럼-.
혹은 두려워하거나.
입에 문 연초의 불이 사내의 얼굴을 밝혔다.
고급스럽게 생긴 사내였다.
머리를 깔끔히 넘긴 것에서 성격이 보이는 듯했다.
사내의 눈이 노인에게 정확히 꽂혀 있었다.
그 눈이 차갑게 번들거렸다.
마치 맛있는 음식을 보는 것처럼-.
순간 움츠릴 정도로 서늘한 눈이었다.
'우습군.'
그때, 사내에게서 정말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당장 먹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향기로운 냄새였다.
거센 충동에 노인의 몸이 달달 떨렸다.
노인의 팔에 박힌 뿌리들이 크게 울렁였다.
그 뒤로 재들이 휩싸이며 형체를 갖췄다.
마치 거대한 날개 같았다.
기운을 가득 일으킨 노인을 보며.
갈라하드는-.
"훌륭한 달걀 요리군."
정말 만족스럽게 웃었다.
58화 싸구려
'어···.'
학회장을 따라 성역에 들어온 흑마법사 크롬웰은 거친 숨을 헐떡였다.
학회장이 미친 것처럼 달려간 탓에, 학회장과는 거리가 있었다.
크롬웰은 학회장으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성문을 닫은 기사가 그들을 내려보고 있었기에-.
기사가 검을 뽑으며 말했다.
"그대들은 내 몫일세."
크롬웰은 본능적으로 기사가 그들의 상대라는 걸 깨달았다.
"공격해!"
크롬웰은 재빨리 주문을 외웠다.
"좋구나!"
기사가 호탕하게 웃으며 검을 뽑았다.
기사의 검을 타고 오러가 거칠게 타올랐다. 그건 오러보다는 불에 가까운 형태였다.
그에 크롬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쪽은 흑마법사 서른 명이었다.
상대가 아무리 기사라고 한들, 이길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다만, 성문을 닫던 그 모습이 너무 위협적이기에 방심하지 않았다.
"마··· 마나가 안 모인다!"
몇 명이 비명을 질렀다. 선택받지 못한 놈들이었다.
'쓸모없는 놈들-.'
크롬웰은 작게 혀를 차며 주문을 뱉었다.
"타오르는 창!"
불타는 창이 기사에게 쏘아졌다. 그를 신호탄처럼 마법들이 따라붙었다.
순식간에 기사를 향해 다양한 마법들이 쏘아졌다. 기사를 가득 뒤덮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크롬웰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기사라면 마법이 시전되기 전에 움직였을 텐데-.
저 기사는 검을 고쳐 잡을뿐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기다리는 것처럼-.
"오거라! 내 양분이 될 고통이여!"
기사가 괴상한 소리를 내뱉으며 검을 내밀었다.
타오르는 오러 위에 불이 덮어졌다. 마법이었다. 마법이 뒤섞이자 오러가 더욱 크게 타올랐다.
검이 거대한 불처럼 보일 정도였다.
'저게 무슨-.'
기사가 검을 길게 휘둘렀다.
오러가 마치 마법처럼 검을 벗어나 움직였다.
마치 쏘아진 것처럼-.
'오러를 날린다고? 이게 무슨···.'
처음 보는 상황에 눈을 찡그렸다.
불길을 머금은 오러가 공중을 길게 갈랐다.
그 거대하고 거센 오러는 쏟아지는 마법들을 삼켰다.
아니, 찢어발겼다.
하늘로 떠오른 불길이 거세게 퍼졌다.
그 말도 안 되는 위용에 다들 입을 쩍- 벌렸다.
거센 불길이 갈라지며 기사가 다가왔다.
"하하하! 좋구나!"
웃으며 달려오는 기사가 크롬웰은 정말로 두려웠다.
****
두근!
갈라하드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아니, 심장 옆에 붙은 고통의 알이 격하게 진동했다.
고통의 알이 어느 때보다도 격한 탐욕을 드러냈다.
그 주체가 혼동될 정도였다.
'쯧-.'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정신을 붙잡았다.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마나를 마구 뿜었다.
좀처럼 주체가 안 되는 고통의 알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고통의 알이 저리 날뛰는 이유는 하나였다.
'알이라.'
학회장으로 보이는 노인의 지팡이 끝에 달린 거대한 알 때문이었다.
사실 고통의 알이 그렇게 귀한 물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코르튼의 손에 있던 물건이었다. 중요한 물건이었다면, 코르튼 손에 있었을 리가 없었다.
'여명에서 뿌리는 건가.'
코르튼도 여명에서 받은 것이니, 그럴 가능성이 컸다.
무엇이 됐건-.
'보상이 늘었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노인을 살폈다.
지팡이에서 뻗어진 뿌리들이 노인의 앙상한 팔에 박혀 있었다. 그 뿌리들이 심장 박동처럼 꿀렁거렸다.
노인의 피를 마시는 것 같았다.
노인은 피처럼 붉은 눈으로 갈라하드를 보며 연신 몸을 움찔거렸다.
마치 먹을 걸 앞에 둔 개처럼-.
알의 충동을 필사적으로 자제하는 듯했다.
'마법사가 도구에 끌려다니다니.'
갈라하드는 혀를 차면서 수통을 열었다.
노인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순간 고약한 냄새가 풍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맛있겠군."
"칭찬 고맙네."
노인의 눈이 살짝 찌푸려진 순간,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노인의 앞에서 뭔가 터졌다. 갈라하드가 뿌린 얼음송곳이었다.
"얕은 수를-."
"인사라고 생각하게."
원래라면, 노인의 몸에 박혔어야 할 얼음송곳이었다.
갈라하드는 방금 본 걸 되새겼다. 분명 노인의 반응은 느렸다. 그런데 막히다니-.
'노인이 반응한 게 아니군. 알인가?'
그럴 가능성이 컸다. 아무래도 이쪽 알보다 기능이 더 많은 듯했다.
고통의 알이 쿵쿵거렸다.
그때, 노인의 배에서 붉은 빛이 떠올랐다. 그 형상이 제법 익숙했다.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진이었다.
다른 놈들에게 새겨진 것보다 더 정교하고 그 크기가 컸다.
'저게 진짜군. 어쩐지 조금 엉성하더라니-.'
딱히 관심은 없었다. 갈라하드가 새긴 마법진이 더 효과적일 게 분명했기에.
"짓이기는 발톱."
그때, 노인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짓이기는 발톱이라. 어이가 없군.'
그 멍청한 선택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짓이기는 발톱의 장점은 형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재가 가득한 마경에서 짓이기는 발톱을 쓰다니-.
"멍청하군."
갈라하드는 대놓고 혀를 찼다.
재들이 밀리며 거대한 발톱의 형태로 보였다. 그 발톱이 갈라하드에게 달려들었다.
"속도 좋고."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두꺼운 방벽이 앞에 떠올랐다.
쿵. 발톱을 막은 방벽이 크게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음-.'
갈라하드의 눈이 반짝였다. 갈라하드는 옆으로 몸을 틀었다. 갈라하드를 스친 마법이 바닥을 가득 긁었다.
끼기긱-.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땅에 흉터가 길게 새겨졌다.
"위력도 좋군."
갈라하드는 그 길이를 눈여겨보며 끄덕였다.
"건방진 놈-."
노인의 얼굴이 구겨졌다. 주름이 깊어졌다. 그 눈이 더욱 붉어졌다.
노인이 지팡이를 찍었다.
쿵. 작은 충격이 주변으로 퍼졌다.
순간 재들이 짙어졌다.
다시금 발톱이 날아왔다.
'내놓게.'
철이라도 들었는지 고통의 알이 고분고분하게 생명력을 꺼냈다. 갈라하드의 팔목에 새겨진 마법진이 영롱하게 빛났다.
압축된 마나로 방벽을 세웠다.
발톱이 방벽을 두드렸다. 방벽이 금방 허물어졌다.
마나를 꽤 압축했는데, 이렇게 손쉽게 밀리다니.
'이건 의외군.'
피하지 못한 마법이 갈라하드의 허리를 긁었다.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노인이 꼭 피 냄새 맡는 늑대처럼 코를 킁킁거렸다. 그 몰골이 상당히 보기 좋지 않았다.
"자네, 웃는 건가, 우는 건가. 주름이 많아서 헷갈리는군. 아, 이제 알겠네. 웃는 거였군."
갈라하드는 방금 본 걸 되새기면서 끄덕였다.
"말이 많구나."
노인이 거의 손이나 다름없게 된 지팡이를 휘둘렀다.
다시 쏘아지는 무형의 발톱-.
갈라하드는 손을 비틀었다. 팔목에 새겨진 마법진이 빛을 뿜어냈다. 고통의 알이 생명력을 뱉어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마나를 조금 더 압축했다.
이번에는 방벽이 아닌 똑같은 발톱을 날렸다.
공중에서 두 발톱이 격돌했다.
갈라하드의 발톱이 바스라졌다.
소리는 없었다.
노인의 발톱이 갈라하드의 어깨를 길게 그었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눈을 구겼다.
'이상하군.'
노인과 갈라하드가 갖춘 건 비슷했다.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진을 새겼고, 고위 마족의 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차이라니-.
'나보다 마법에 능하다? 그럴 리가.'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노인의 얼굴에 주름이 많아도, 갈라하드보다 마법에 능통할 리가 없었다.
그랬다면 노인은 마탑주 상층에 있거나 마탑주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북부로 쫓겨난 흑마법학회의 학회장 따위를 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원인은 갈라하드가 아니었다.
남은 변수는 하나였다.
'자네였군.'
갈라하드는 심장 어림을 누르며 중얼거렸다.
연신 발광하던 고통의 알이 뚝- 멈췄다.
침묵은 긍정이었다.
갈라하드는 상황을 정리했다.
'알에도 등급이 있다.'
갈라하드의 고통의 알보다 노인의 지팡이 끝에 매달린 알이 더 높은 듯했다.
코르튼이 가지고 있던 것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피를 먹여야 했나.'
갈라하드는 수통을 입에 물며 눈을 찡그렸다.
노인의 뿌리는 노인의 피를 마시고 있었다. 마법사라도 그 피에 함유된 마나가 마족보다 클 수 없었다.
그런데 실시간으로 마족의 피를 소모하는 갈라하드보다 오히려 노인의 마법이 짙었다.
두 알 사이의 간극이 생각보다 더 큰 듯했다.
'자네, 싸구려였군.'
고통의 알이 심장을 작게 깨물었다.
정답인 듯했다.
어쩐지 알 크기 차이가 상당하더니-.
"이제 웃지 못하는군?"
노인이 이죽거렸다. 노인의 눈이 꼭 불에 타는 것처럼 붉었다. 제법 살벌한 모습이었다.
확실히 각자 지닌 걸 다시 비교해보니, 갈라하드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노인에게는 더 크고 선명한 최초의 마법사 마법진과 갈라하드보다 더 좋은 알도 있었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놈의 출력이 더 높은 상황이었다.
그것도 꽤-.
마법에서 출력은 상당히 중요한 요소였다.
확실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만, 갈라하드는 어려운 문제를 좋아했다.
갈라하드는 침착하게 방법을 가늠했다.
이미 노인과 마법을 네 번 겨뤘다.
네 번은 갈라하드에게 견적을 내리기 충분한 수였다.
견적은 금방 나왔다.
갈라하드가 늘 하던 일이기에-.
*
노인은 놈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분명 확실한 차이를 느꼈을텐데, 놈은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재밌다는 듯-.
"차이를 못 느낄 정도로 멍청한 놈이었군."
지팡이를 통해 느껴지는 흥분에 노인의 정신이 거칠게 흔들렸다.
당장 놈의 심장을 뜯어 먹고 싶었다.
노인은 다시금 지팡이를 찍었다.
"짓이기는 발톱-."
주문을 읊을 때, 묘한 서늘함이 느껴졌다.
노인이 알아채기도 전에 주문이 끊기며, 지팡이가 움직였다.
무형의 방벽이 노인을 둘렀다.
톡, 작은 충격이 넘어왔다.
그 형태는 분명 기본적인 마법인 마나 화살이었다.
그런데 마나 화살의 위력이 아니었다.
흔들리는 방벽에 노인은 눈을 찡그렸다.
"차이야 당연히 느꼈네. 내가 길버튼 경인줄 아나?"
놈이 괴상한 소리를 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서늘함이 또 느껴졌다.
툭, 이번에도 마나 화살이었다.
방벽이 작게 흔들렸다.
"그래, 자네의 출력이 나보다 높네. 인정하지."
놈이 뜻 모를 소리를 하며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또 흔들리는 방벽-.
놈의 마나 화살은 꽤 위협적이지만, 그래봤자 방벽을 뚫지 못했다.
그런데 어째서 웃지?
탁, 다시금 두드리는 마나 화살-.
전보다 간격이 짧았다.
그제야 노인은 이상함을 느꼈다.
'마법이 왜 이렇게 빠르지?'
아무리 기본적인 마법이라고 해도, 마나 화살도 마법이었다.
수식과 주문이 필수인데, 놈은 계속해서 날리고 있었다.
그저 손가락을 튕기는 것으로-.
놈은 노인이 마법 쓸 틈을 주지 않고 마나 화살을 계속해서 쏠 생각이었다.
'확실히 마법사의 전투에 능통한 놈이군.'
다만,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방벽은 지팡이가 두른 마법이었다.
노인이 의식하지 않아도 방벽은 존재했다.
그 때문에 마나 운용이 힘들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즉 이쪽은 방벽을 두른 상태로 마법을 쓸 수 있었다.
'멍청한 놈-.'
노인은 입꼬리를 올리며 계산을 끝냈다.
'놈도 마법 사이에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노인은 눈에 힘을 주며 한계까지 집중했다.
마나 화살이 방벽을 두드리는 순간-.
"짓이기는 발톱."
노인은 주문을 읊으며 지팡이를 내리쳤다.
짓이기는 발톱은 노인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마법이었다.
그때, 놈의 마나 화살이 노인을 두드렸다. 방벽이 살짝 흔들렸지만, 노인의 집중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짓이기는 발톱!"
발톱이 놈에게 쏘아졌다.
방벽으로 인해 발톱에 들어간 마나가 전보다 적었지만, 놈은 방금 마나 화살을 쓴 상황이었다.
차이는 명백했다.
'내 승리다-.'
노인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때-.
"짓이기는 발톱."
놈이 여유롭게 주문을 외웠다.
'마법 속도는 확실히 괴물이군.'
노인은 상황도 잊고 감탄했다.
다만, 그래 봤자였다.
놈은 방금까지 마나 화살을 쓰고 있었다.
더불어 아까의 격돌에서 둘의 차이는 명백했다.
출력은 이쪽이 압도했다.
승부는 정해진 것과 다름 없었다.
그때, 놈의 발톱과 노인의 발톱이 부딪혔다.
놈의 발톱이 전보다 더 버티다가 사라졌다.
노인의 발톱이 아주 미세하게 틀어졌다.
발톱이 놈의 바로 옆을 길게 그었다.
놈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방향을 틀었어?'
결과를 봤음에도 믿기 힘들었다.
노인의 출력은 놈보다 높았다.
방벽을 유지하느라 위력이 전보다 약하겠지만, 놈도 방금까지 마나 화살을 썼다.
놈이 더 여유가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출력의 차이가 줄었다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집중하여 마나를 압축했다면, 마법의 출력을 높일 수 있으니까.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집중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 노인의 방벽이 흔들렸다. 그에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노인은 이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마나 화살이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군.'
그사이에 마나 압축까지 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놈도 알을 쓰고 있군.'
노인의 알이 방벽을 사용하는 것처럼, 놈의 알은 마나 화살을 쓰는 게 분명했다.
그게 가능한 건가-.
의문이 들었지만, 그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았다.
이중 주문이라는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장난으로 할 법한 이야기였다.
알을 쓰는 게 분명했다.
'그래 봤자-.'
노인은 자신의 알이 더 강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놈의 마나 화살은 노인의 방벽을 뚫지 못했다.
놈의 발톱도 방향을 트는 게 전부였고.
끝으로 가면 노인이 이길 싸움이었다.
그저 발악일 뿐이었다.
그에 노인은 혀를 차며 다시금 시기를 쟀다.
마나 화살이 두드리면-.
그때,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지금쯤 마나 화살이 두드려야 했는데···.
"짓이기는 발톱."
그때, 놈의 주문이 들렸다.
고작 생각해낸 게 선공이라니-.
노인은 작게 혀를 차며 주문을 외웠다.
이미 준비해둔 상태였기에, 주문은 빨랐다.
"짓이기는 발톱-."
두 발톱이 중앙에서 격돌했다.
그때, 노인은 깨달았다.
마나 화살이 없음을-.
알은 조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당장 노인이 방벽에 들어가는 마나를 조절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런데 마나 화살을 멈추다니-.
'무슨······.'
노인의 왼손이 바닥을 뒹굴었다.
그때, 놈과 눈이 마주쳤다.
놈의 눈은 차분했다.
마치 사냥꾼처럼-.
"마법사가 도구에 끌려가면 쓰겠나."
노인의 발톱이 밀렸다-.
그게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이중 주문이었다고?'
그때, 뒤늦게 올라온 통증에 노인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자, 다시 해보게."
놈의 차분한 목소리에는 들뜬 웃음기가 가득했다.
*
"고작 이게 전부인가?"
갈라하드는 노인을 내려보며 혀를 찼다.
노인은 피눈물을 흘리며 갈라하드를 올려봤다. 노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안 그래도 말랐던 몸이 더 바싹 말라 미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지팡이는 기운을 잃은 것처럼 바닥에 박혔다. 그 지팡이 끝의 알이 연신 꿀렁였다. 노인의 피를 마시는 듯했다.
자기 피를 빨리는데도 노인은 지팡이를 놓지 못했다.
마법사였기에-.
물론, 이미 지팡이에게 잡혀서 놓고 싶어도 놓지 못하겠지만.
"으으으······."
노인의 입가로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조금 더 할 수 있지 않나?"
갈라하드의 물음에 노인이 몸을 격하게 떨었다.
확실히 노인이 지닌 알은 갈라하드의 알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건 곧 출력으로 이어졌다.
마법에서 출력은 꽤 비중이 컸지만-.
"전부는 아니지."
갈라하드는 노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노인은 사람보다 마물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알의 부작용인가.'
갈라하드는 노인을 흥미롭게 살폈다.
고통의 알이 격하게 뛰었다. 당장 지팡이에 있는 걸 꺼내서 먹자고 종용했다.
'최하급 알은 조용히 해주게.'
갈라하드의 신랄한 말에 고통의 알이 작게 진동했다. 가슴이 꿀렁였다. 고통의 알이 돌아 앉은 것 같았다.
"여명에 대해서 말해보게."
갈라하드는 노인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속삭였다.
잔뜩 흥분한 노인에게 정신 간섭은 상당히 쉬운 일이었다.
"여명은-."
노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빠진 이빨이 붉은 피에 뒤섞여 후드득- 떨어졌다.
노인의 입이 알아서 움직였다. 갈라하드는 노인의 말에 집중했다. 잠시 뒤 바짝 마른 노인의 고개가 꺾였다.
'마족이라.'
학회장치고 여명에 대해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여명에서 나온 놈이 강한 마족이었다는 것과 놈에게서 증표로 알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주기적으로 여명에서 나온다는 것.'
가장 필요한 부분이었다.
흑마법학회를 굴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원래도 마석장의 보람찬 일꾼으로 돌릴 생각이었다.
주기에 맞춰 기다리면 여명에서 나온 놈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두근!
다시금 두근거리는 고통의 알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고 지팡이를 잡았다.
지팡이가 거칠게 진동했다. 그 박동이 느껴졌다. 놈이 속삭였다.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고통의 알이 다급하게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고통의 알이 심장을 꾹꾹 눌렀다. 마치 안마하듯-.
'좋군. 더 해보게.'
고통의 알이 열심히 꾹꾹 눌렀다. 그에 갈라하드는 작게 웃으며 알을 잡았다.
"미안하지만, 자네는 너무 커서 말일세."
갈라하드는 주머니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꺼냈다.
59화 답신
'이런-.'
노인의 숨이 멈추자, 지팡이에서 알이 뚝- 떨어졌다.
거대한 게 갈라하드에게 굴러왔다.
갈라하드는 놈을 가만히 응시했다.
'위험하군.'
그건 단순한 감이었지만, 갈라하드는 자신의 감을 믿었다.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당장 저걸 먹자고 종용했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알을 살폈다.
마나를 슬쩍 뿌려봤는데, 아예 사라졌다.
절로 감탄이 나왔다. 숙주를 잃은 알이지만, 여전히 고통의 알보다 등급이 높은 듯했다.
고통의 알은 놈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으니, 그냥 섭취하는 건 위험했다.
둥둥, 고통의 알이 격하게 흔들렸다.
이번에는 진짜 다르다고 자기가 할 수 있다는 듯했다.
갈라하드는 싸구려의 말 따위 믿지 않았다.
가만히 상황을 계산했다.
노인이 피를 많이 빨렸지만, 그게 죽음의 이유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숙주 의식은 있군.'
먹으면 위험할 수도 있지만, 죽지는 않을 듯했다.
다만, 이쪽이 싸구려였기에 그래도 좀 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갈라하드는 나이프를 움직였다.
알은 단단하지 않았다. 젤리처럼 가벼이 잘렸다. 잘린 부분이 재로 변해 휘날렸다.
버리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본래 과한 건 부족함보다 못한 법이었다.
꽤 많이 잘라냈지만, 중심이 알맹이인지 여전히 밀도가 높은 느낌이었다.
갈라하드는 포크로 그를 찍었다.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연신 뛰었다.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음-.'
갈라하드는 나지막한 침음성을 흘렸다.
형용하기 힘든 무언가가 넘어왔다.
그건 마나도 생명력도 아니었다. 정신이 흔들릴 정도로 격렬한 감각이 엄습했다.
고통의 알이 반색하며 놈에게 달려들었다.
둘이 부딪히자 내부가 진탕이 됐다. 안에서 폭발하는 느낌이었다.
갈라하드는 입술을 질끈 다물었다.
피가 입가를 타고 흘렀다.
콰앙! 콰앙!
고통에 익숙한 갈라하드였지만, 이런 고통은 새로웠다.
고통의 알이 거칠게 달려들어 놈을 뜯었다. 고통의 알과 놈이 뒹굴었다.
놈이 입을 쩍 벌리자 고통의 알이 슬쩍 피했다. 그에 날카로운 격통이 엄습했다.
'똑바로 못하나?'
갈라하드의 핀잔에 고통의 알이 황급히 놈을 잡았다.
의지가 사라진 놈인데도 고전하다니-.
최하급이 분명했다.
'이런, 내 목숨이 최하급 알에 맡겨졌다니.'
갈라하드가 작게 혀를 차자, 알이 크게 진동했다.
고통의 알이 놈에게 밀렸다. 먹으라고 넣어줬더니 오히려 놈에게 물렸다.
부르르-! 비명처럼 고통의 알이 크게 떨었다.
의기양양하게 달려들더니, 지게 생겼다.
떠 먹여주는 것조차 못 먹는다니-.
'어이가 없군.'
고통의 알이 다급하게 진동했다. 도움! 도움! 외치는 듯했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면서 수통을 열었다.
수통을 입에 대자, 차갑고 역겨운 감각이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밀리던 고통의 알이 반색했다. 상대는 마족의 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고통의 알이 마족의 피를 흡수했다.
그에 의기양양해진 고통의 알이 반격을 시작했다.
고통의 알이 놈을 구석으로 몰더니 쥐어뜯었다. 거기서 흘러나온 것들이 주변으로 퍼졌다.
"음-."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흩어진 것들이 갈라하드의 내부에 퍼졌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다툼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갈라하드의 정신이 흐릿해질 때쯤 돼서야, 고통의 알이 놈을 먹기 시작했다.
게걸스럽게 뜯어먹을 때마다, 가슴 부분에 무게가 더해졌다.
그때, 고통의 알이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전과 달리 그 떨림이 비정상적이었다.
마치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네, 정신 차리게.'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갈라하드는 다급히 고통의 알을 불렀다.
'농담이었네. 자네는 싸구려 알이 아닐세. 적당한 알일세.'
고통의 알은 대답하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그때, 고통의 알이 뚝- 멈췄다.
순간 시야가 점철됐다.
지독한 고요가 갈라하드를 삼켰다.
손가락을 튕기려 했지만, 손가락이 없었다.
그에 주문을 외울 때-.
거대한 존재의 시선을 느꼈다.
거대한 존재가 물었다.
너는 누구냐고.
그에 대답했다.
갈라하드일세-.
*
꾹.
묵직한 감각에 갈라하드는 정신을 차렸다.
고통의 알이 열심히 심장을 누르고 있었다.
'이런.'
갈라하드는 작게 기침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고통의 알이 분위기를 잡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내가 정신을 잃다니.'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묘하게 찝찝했다.
그때, 고통의 알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느낌이 전보다 컸다.
고통의 알이 꺼드럭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네, 그거 하나 못 먹어 이 사달을 벌이나?'
갈라하드의 핀잔에 고통의 알이 심장을 꾹- 잡았다.
그 힘이 전보다 더 강했다. 정말 심장이 잡힌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물론, 진심으로 쥔 건 아니었다.
갈라하드가 죽으면 놈도 끝이니까.
그래도 버릇은 잡을 필요가 있었다.
'아드리안나에게 가슴 좀 만져달라 해야겠군.'
화들짝 놀란 고통의 알이 진동했다. 원래 안마해줄 생각이었다는 듯, 고통의 알이 심장을 꾹꾹 눌렀다.
그 솜씨가 제법이었다. 더불어 힘이 강해진 덕분에 상당히 시원했다.
더 활력이 넘치는 느낌이었다. 고통의 알에 축적된 생명력이 작용하는 듯했다.
꾹꾹-.
고통의 알이 황급히 끄덕였다.
'장수하겠군.'
갈라하드는 농담을 중얼거리며 연초를 입에 물었다.
그때, 고통의 알이 열심히 흔들었다. 꼭 춤추는 것처럼 느껴졌다.
'뭐 좀 늘어난 것 같나?'
고통의 알이 잘 보라는 듯 작게 두 번 흔들었다.
고통의 알에서 마나가 나왔는데, 전보다 그 양이 많았다.
대충-.
'두 배 정도 좋아졌군.'
가령 한 통을 마시면, 두 통 분량의 마나를 뱉는다는 이야기였다.
상당한 효율 증진이었다.
그래봤자 노인이 지니고 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부족했다.
앙. 뻐끈한 심장에 작게 혀를 찼다.
'그만 좀 깨물게.'
손가락을 튕겨 연초에 불을 붙였다.
달콤한 레몬 향이 퍼지며, 무거웠던 정신을 일깨웠다.
갈라하드는 미묘한 감각을 느꼈다.
'마경인데, 전보다 마법이 편하다.'
진짜 마경보다는 다소 부족하지만, 이곳도 마경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마나 농도가 짙었다.
원래 마법을 쓰는 게 까다로웠는데, 지금은 마법이 가볍게 나왔다.
농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체질이 바뀐 것 같군.'
조금 더 마나에 가까워졌다-.
갈라하드는 다시금 손가락을 튕겼다.
주변에 있던 재가 가득 뒤로 밀려났다.
'확실히 쉬워졌다.'
짐작 가는 바는 하나였다. 고통의 알이 놈을 해체할 때, 흩어졌던 것들이 흡수된 것. 그 영향일 가능성이 컸다.
고통의 알이 거만하게 까닥거렸다.
처음으로 고통의 알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마경에서 마나를 움직이기 쉬워졌다.'
갈라하드는 가득 밀어낸 재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고위 마족의 초대에 어떻게 응할지 고민이었는데, 방법을 찾아낸 듯했다.
'알을 더 찾아야겠군.'
고통의 알이 격하게 끄덕였다. 알과 의사 소통이 좀 더 쉬워진 느낌이었다.
"끝났나?"
옆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퍼스트였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학회를 운용할 생각인가?"
퍼스트가 뒤쪽에 진열된 흑마법사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펌킨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갈라하드는 순순히 끄덕였다. 어차피 퍼스트도 형식적으로 묻는 거였다.
"여명이란 놈들을 아는가?"
이번에는 갈라하드가 물었다.
퍼스트는 작은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숨이 거칠어지지도, 눈을 깜박이지도 않았다.
"그건 기밀일세."
"나도 아직 요원이네만."
퍼스트는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렸다. 더 물어봤자 캐낼 수 없었다.
다만, 정보국에서도 여명을 인식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자네들 결혼은 언제 하나?"
"예에?!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펌킨이 경기를 일으켰다. 그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펌킨이 부끄럼이 좀 많네. 자네보다 일찍 결혼할 걸세."
"아, 제발 지랄 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이내 펌킨과 퍼스트가 멀어졌다.
갈라하드는 그를 잠시 보다가 연초를 털었다.
"팔호."
"예."
팔호가 갈라하드 앞에 부복했다.
갈라하드는 잠시 팔호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네. 이제부터 자네가 학회장일세."
팔호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길게 말하지 않겠네. 잘하게나."
그리 말하며 학회장의 시체를 뒤적거리는 갈라하드에 팔호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진심이었다.
****
헬카르튼은 깨질듯한 두통에 정신을 차렸다.
기억이 흐릿했다.
분명 성역에 들어서고-.
'괴물 같은 기사!'
마법을 다루는 괴물이 습격했다-. 헬카르튼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헬카르튼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성스러운 재가 가득한 공간이었다. 아직 성역인 듯했다.
성역의 압도적인 분위기에 헬카르튼은 작게 탄식했다.
평생 물밖에 있던 물고기가 물에 들어오면 이런 느낌일까-.
헬카르튼은 그저 멍하니 뻐끔거렸다. 마나를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주변에서 탄식이 이어졌다. 다른 흑마법사들도 하나둘씩 일어나는 듯했다.
"다들 일어나게."
그때,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예의 그 사내가 있었다.
여명에서 나온 사내였다.
사내의 몰골이 좋지 않았다. 허리와 어깨에 기다란 자상이 있었고,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특유의 여유로움은 그대로였다.
"자, 다들 이게 누군지 알 걸세."
사내가 물건을 꺼내듯 뭔가를 흔들었다.
사내의 손에 들린 건 삐쩍 마른 학회장이었다.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순간 조용해졌다.
학회장이 어떤 인물인가. 흑마법학회의 주인이자 그들에게는 절대자로 군림하던 인물이었다.
그런 학회장을 저렇게 만들다니-.
"자, 보이는 것처럼 학회장은 죽었네. 새로운 학회장을 뽑아야겠지."
사내의 말에 헬카르튼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드디어 내가 학회장을-.'
헬카르튼은 황급히 표정 관리를 했다.
"흑마법학회가 이렇게 된 건 물이 고인 탓이라고 보네. 학회장이 바뀌지 않았고, 결국 고여서 썩은 것이지."
맞는 말이었다.
흑마법학회는 한 번도 학회장이 바뀐 적 없었다.
"나는 그를 방지하고자 하네. 단순히 강한 놈이 학회장이 되는 게 아니라, 흑마법학회를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이가 학회장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호응이 거세게 일어났다.
과한 호응이었지만,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흑마법학회에 대한 그대들의 충성심을 보이게! 땀으로 증명하게! 그렇다면 누구라도 학회장에 오를 수 있을 걸세!"
사내가 빠르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 강한 힘이 있었다.
그에 매료된 이들이 거칠게 호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학회장이 될 수 있다니-.
모두에게 기회를 준다는 이야기 아닌가.
"아, 그래도 학회장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는 없으니, 임시 학회장은 정해뒀네. 자, 나오게."
사내가 헬카르튼을 가리켰다.
헬카르튼은 냅다 달려 나갔다. 흑마법사들의 선망 어린 시선이 꽂혔다. 그 눈이 뜨거웠다.
"그대를 보좌할 이도 뽑아뒀네. 대충 부학회장이라고 하지."
까마귀 가면을 쓴 놈이 나왔다.
부학회장이라는 직위는 원래 없었지만, 그런 사소한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성역을 확보한 흑마법학회의 학회장이 되었다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는 그대들을 아주 높게 평가한다네. 중앙에서 모종의 단체에 쫓겨났지만, 포기하지 않는 그 열정!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나. 그런 어려움을 딛고 기어이 성역을 연 그대들은 선구자일세!"
몇몇이 울컥거리며 입을 가렸다.
그간의 어려움이 스쳐간 듯했다.
"아까도 말했듯 이제 학회장은 실적제일세. 분기별로 실적이 가장 좋은 학회원이 학회장이 되는 걸세."
다들 소리 내어 탄식했다.
기회의 문이 열려있다니-. 모두의 눈이 반짝였다.
단 한 명만 제외하고.
헬카르튼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분기마다 학회장을 바꾸다니-. 학회장은 그렇게 가벼운 자리가 아닙니다."
"자네, 내가 방금 고인 물 이야기를 할 때 끄덕이지 않았나. 아, 막상 자네가 학회장이 되니 마음이 변한 것인가?"
사내의 노골적인 지적에 헬카르튼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만, 물러설 수 없었다.
그에 반론하려는 순간-.
크뤠레레레렉!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에 고개를 돌린 헬카르튼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끔찍하게 생긴 거대한 마물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저건 중급 마물 쏘뱅이였다.
성역에서 중급 마물이라니-.
마족보다는 낫지만 마물도 마법사의 천적이었다.
모두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고 할 때-.
"이런 잘 묶어두라니까. 그웬이군."
사내가 혀를 차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사내의 손가락 사이로 작은 스파크가 튀기듯 움직였다.
한 번 튀길 때마다 세밀해지면서 크기를 부풀리는 스파크에 헬카르튼은 작게 경악했다.
말도 안 되는 마나 조종이었다.
금세 꽃 모양이 된 번개가 마물을 향해 날아갔다.
거기에 걸린 시간은 찰나였다-.
다만, 마물을 향해 쏘아지는 번개에 헬카르튼은 눈을 찡그렸다.
'마물한테 마법을 쓰다니. 멍청하군.'
마물에게는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 그건 상식 중에서도 상식이었다.
아무리 학회장을 잡았다고 해도-.
그때.
······!!
번개에 휩싸인 마물이 끔찍한 비명을 터뜨렸다.
듣는 이가 오싹할 정도로 절절한 비명이었다.
거멓게 탄 마물이 그대로 쓰러졌다.
쿵-.
덩치가 큰 탓에 그 소리가 묵직했다.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때, 사내의 시선이 헬카르튼에게 향했다.
그 눈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그저 조금의 피로감이 전부였다.
"음, 뭐라 그랬나?"
무미건조한 물음에 헬카르튼은 재빨리 대답했다.
"실적의 세부 사항이 궁금합니다!"
"아, 역시 임시 학회장일세. 열의가 대단하군."
헬카르튼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실적은 다양한 방면에서 채점되겠지만, 가장 큰 부분은 마석 획득량일세. 자네들도 알다시피 성역의 주요 연료는 마석 아닌가-."
이어진 사내의 설명에 흑마법사들이 환호했다.
마석을 캐는 것쯤은 말단 마법사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마석을 많이 캐면 학회장을 할 수 있다니, 얼마나 파격적인 공약인가.
"성실히 일하는 이들에게 성역을 열어줄 걸세. 다만, 성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석이 필요하지 않나. 성역을 더 넓혀야지! 보다 많은 마석이 필요하네!"
사내의 차분한 설명이 이어지자, 환호가 점점 커졌다.
그와 반대로 헬카르튼은 눈을 찡그렸다.
마석을 많이 캐는 놈을 학회장 시키면, 학회장이 돼도 마석만 캐야 한다는 거 아닌가?
"임시 학회장 표정이 안 좋군."
"아닙니다!"
사내의 물음에 헬카르튼은 필사적으로 웃었다.
그때, 혼자 필사적으로 달려가는 놈이 있었다.
"다음 학회장은 나다!"
코르튼이었다.
놈을 시작으로 다른 이들도 달렸다.
헬카르튼도 달릴 수밖에 없었다.
****
테오도르는 대공을 살폈다.
대공은 늘 그렇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안쪽에 앉은 이부터 보고를 시작했다.
"6대대가 마물 무리에 습격당해, 망루 세 곳을 뺏겼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3대대의 영역에서 마족이 나타나, 마을 하나가 사라졌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평소처럼 답답한 보고의 연속이었다.
그때-.
"5대대에서 추가적으로 세금을 올렸습니다. 5대대 마크 대장이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 덕분이라고 보고를 올렸습니다."
돈을 줄이는 게 아니라 더 늘렸다니-.
'갈라하드'라는 이름에 테오도르는 작게 감탄했다.
요즘 들어 자주 올라오는 이름이었다.
갈라하드가 거론되면 늘 결과가 좋았다.
직접적으로 말은 안해도 참모진이 가장 좋아하는 이름이었다.
"1대대 접경지역에 숨어 있던 중급 마족을 찾아내어 제거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아드리안나 대장은 갈라하드 대장이 알려준 마나 탐지 방법을 이용한 덕분이라고 보고했습니다."
또 갈라하드였다.
대공의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다음 보고가 이어졌다.
"흑마법학회가 7대대를 습격했지만, 막아냈다는 보고입니다."
7대대라면 마경이 열려있는 곳이었다. 마경이 열린 곳이 탈취당했다면, 7대대 자체가 적의 소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를 막아냈다는 건 큰일이었다.
다만-.
"갈라하드 대장이 막아냈다는 보고입니다."
또 갈라하드였다.
5대대와 1대대를 이어서 7대대까지. 연속으로 이어진 보고에 테오도르는 눈을 찡그렸다.
아무리 북부라도 일이 저렇게 많지 않았다.
'무슨 공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그럴 리가 있나-. 테오도르는 고개를 저었다.
정적 속에서 다들 대공의 눈치를 살폈다.
"쓸만한 놈이군."
대공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때, 밖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전령입니다-!"
'또 왔군.'
대공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다.
대공에게 향하는 전령에 테오도르가 나섰다.
"황녀님이오?"
"예, 그렇습니다."
"저쪽에 두고 가시오."
"이건 황실의 전언······."
테오도르가 가리킨 곳에는 황실의 문장이 그려진 편지가 묶음으로 있었다. 그를 본 전령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그래도 황실의 전언이오!"
전령이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대공 전하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다니-.
'단단히 미쳤군.'
그때, 대공이 일어났다.
테오도르는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전령은 어느새 부복한 상태였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무거운 정적이 잠시 이어졌다.
이내 대공의 입이 열렸다.
"답신을 보내도록."
테오도르는 황급히 종이를 펼쳤다.
펜을 잉크에 푹 담그고 고개를 숙였다.
잠깐의 정적 뒤에-.
대공이 입꼬리를 사납게 올렸다.
"결투를 받아들이겠다고."
60화 선물
"어디 갔다 오십니까?"
길버튼이 살짝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두꺼운 갑옷을 뚫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이제 해가 뜨는 새벽이었는데, 저렇게 열심히 훈련하다니. 역시 훌륭한 기사였다.
"밤 산책 다녀왔네."
"무슨 산책을 밤새 하십니까?"
"자네, 나한테 관심이 많군. 나는 결혼할 여인이 있는 몸일세. 그게 아니더라도 남자는 질색일세."
갈라하드가 단호하게 말하자, 길버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멍청한 표정의 길버튼을 두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5대대 대장이 당연하다는 듯 앉아 있었다. 갈라하드는 그 맞은 편에 앉아 대략적인 상황 설명을 했다.
대충 뭉뚱그려서 흑마법학회가 마석장 광부 모임으로 변화했다고 설명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마석장 쪽에 병력을 더 투입하겠습니다."
마크는 북부 놈답지 않게 두뇌 회전이 빨랐다.
그때, 밖에서 거친 비명이 들렸다. 이어서 문이 거칠게 열리며 길버튼이 들어왔다.
"젠장!"
길버튼의 거친 등장에 마크의 눈이 동그래졌다. 길버튼은 마크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다시금 갈라하드에게 말했다.
"저 여자 좋아합니다!"
"이런 호색한이었군."
"······예?"
"마크 대장, 길버튼 경이 여인을 무척 좋아한다는군."
"길버튼 경, 루미안은 어떤가? 요즘 신경질이 더욱 늘었어."
"오, 좋군. 우리 동맹을 혈맹으로 잇는 걸세. 길버튼 경."
"그··· 루미안은 좀······."
"이런, 못생긴 주제에 가리는 것도 많군."
가득 구겨진 길버튼의 얼굴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연초를 입에 물었다.
"저 안 못생겼습니다."
"아니, 자네는 확실히 못생겼네. 호감상이라 그나마 다행이지만, 못생겼어."
"동의합니다."
"과반수로 자네의 못생김은 공증됐네."
"예? 공증이 뭡니까?"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었고, 마크는 서류를 정리했다. 잠시 뒤, 길버튼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러니까 루미안은 성질이 너무 날카롭지 않습니까. 또 주근깨도······."
길버튼이 루미안이 싫은 이유를 주절주절 떠들었다.
"길버튼 경."
"또 있습니다. 그리고 또 눈이 어찌나 사나운지···."
"길버튼 경?"
"왜 자꾸 부르십니까. 아직 더 남았습니다."
당당하게 대답하는 길버튼에 갈라하드는 혀를 작게 찼다.
"대장인 마크가 앉아 있으면, 보통 보좌관인 루미안도 근처에 있다네."
"예?"
길버튼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길버튼의 묘사보다 더 도끼눈이 된 루미안이 있었다. 길버튼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저도 길버튼 경 싫습니다. 못생겼습니다."
"이런 넷 중 셋이 동의했군."
길버튼이 변명하려 했지만, 루미안이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그에 길버튼이 입을 꾹- 다물었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지?"
"그렇군요. 루미안이 욕을 안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길버튼 경 죄 많은 사내였군."
마크와 대화를 주고받으며 길버튼을 콕콕 찌르자-.
길버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입니까?"
"자네는 기사가 천직이군."
갈라하드의 말에 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쯤 어디선가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로 올라가자, 솥을 열심히 휘젓는 톰이 보였다. 그 옆에는 그웬이 땀을 뻘뻘 흘리며 불을 내뿜고 있었다.
"아, 오셨습니까. 거의 다 끝나갑니다."
"부우우우울!"
"그웬, 한 번 주문을 외우면 그 이후로는 안 외워도 되네."
"이래야 집중이 더 잘 돼요!"
그웬의 대답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의 길은 그 마법사마다 달랐다. 수만 가지 길이 있었다.
갈라하드는 자신의 방법이 정론이라 확신했지만, 굳이 그를 지적하지 않았다.
저런 고집은 마법사가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였기에.
잠시 뒤 톰이 다 만든 스튜 냄비를 꺼내서 그릇에 담았다.
"두 개 더 담지. 아래에 부지런한 이들이 있어서 말일세."
"아, 준비해뒀습니다."
갈라하드는 길버튼에게 스튜를 아래에 가져다주라고 명령했다.
슬쩍 머리를 매만진 길버튼이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그릇을 챙겨 내려갔다.
배분을 끝낸 톰이 남은 냄비를 내려놨다. 그러자 데미안이 냅다 냄비에 머리를 박았다.
갈라하드가 혀를 차자, 데미안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숟가락을 써야지."
"불편해요."
"어허."
데미안이 숟가락으로 냄비를 떠먹었다.
스튜의 맛은 늘 그렇듯 끝내줬다.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갈라하드의 코트가 찢어진 걸 본 톰이 코트를 새로 만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일 적게 먹고 자면서, 제일 많이 일하는 톰에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자기도 배고프다는데요?"
"누가 말인가."
"거기-."
그웬이 갈라하드의 가슴을 가리켰다.
"전보다 말이 유창해졌네요?!"
"그런가? 뭐라는가."
"그게······. 뭐? 비밀이라고? 비밀이래요!"
화들짝 놀라며 제 입을 막는 그웬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명령일세."
"며··· 명령!"
"명령 불복종은 사형과 감봉일세."
"······감봉! 말할게요!"
그웬이 표정을 굳혔다. 진지한 얼굴이 된 그웬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후후······. 이 정도의 힘이라니, 나도 두렵군."
두근! 두근! 두근!
이제 하급이 된 알이 하기에는 상당히 거창한 말이었다.
두근! 두근!
말이 통하는 그웬을 만났기 때문인지, 놈이 줄기차게 두근거렸다.
"우리는 무적이다. 함께라면-."
"됐네, 그만해도 되네."
"아! 네! 섭섭하다는 대요!"
"조용히 하라고 전해주게."
"조용히 해!"
식사가 끝날 때쯤 톰이 돌아왔다. 톰이 들고 온 건 검은색 미끈한 코트였다.
저번 것보다 그 질과 형태가 좋았다. 7대대에서 잡은 거대한 마물의 가죽으로 만든 듯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가죽을 챙기다니-. 갈라하드는 작게 감탄했다.
"방열에 효과가 안 좋은 터라, 안쪽에 땅강아지의 가죽을 덧댔습니다."
"좋군."
갈라하드는 걸레짝이 된 코트를 벗었다. 톰이 재단사처럼 코트를 입혀줬다.
"목 부분과 소매 마감만 신경 쓰면 더 좋겠군."
"아, 그렇습니까-. 또 불편하신 곳 있으십니까?"
오히려 더 묻는 톰에 갈라하드는 고칠 부분을 알려줬다. 톰은 꼼꼼하게 적었다.
뒤늦게 돌아온 길버튼이 마시듯 스튜를 비웠다.
길버튼까지 식사를 끝내자, 갈라하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준비하게. 다음은 6대대일세. 대공 전하에게 받은 전선의 구멍 점검을 이어갈 걸세."
"예! 준비 끝냈습니다!"
늘 그렇듯 톰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방금 들어오시지 않으셨습니까?"
길버튼이 묘한 눈으로 갈라하드를 보며 물었다.
"그랬지."
"주무셔야 하지 않습니까?"
"괜찮네, 원래 잠이 없는 편일세."
갈라하드의 대답에 길버튼이 눈을 찡그렸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갈라하드는 해야 할 것들을 생각했다.
프록셀 가문부터 시작하여 고위 마족, 여명, 아드리안나까지-. 잔뜩 쌓여 있었다.
그때, 길버튼의 입이 열렸다.
"대장은 꼭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습니다."
길버튼이 투박하게 말했다.
그 익숙한 물음에 다양한 목소리들이 떠올랐다.
[마족의 왕은 없다니까.]
[왜 이렇게 급하십니까?]
[괴상한 집착이다.]
자주 들은 이야기였다.
갈라하드가 어떻게 말해도, 마족의 왕을 이해하는 이가 없었다.
모두가 마족의 왕을 부정했다.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멍청하게 떠들었다.
다만. 모두가 부정한다고 진실이 거짓이 되는 건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자신이 옳음을 확신했다.
"쫓기다니-. 쫓는 중일세. 멍청한 소리군."
갈라하드는 길버튼의 씰룩한 얼굴에 작게 혀를 찼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뾰족하게 나왔다.
다만,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에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때마침 톰이 나왔다.
"출발하지."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말했다.
그때, 창문이 거칠게 깨졌다. 길버튼이 다급히 검을 뽑았다.
들어온 건 붉은 매였다.
아니, 마물인가.
"대공 전하의 매입니다."
길버튼의 설명이 없어도 대공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대공이 아니라면 저 마물과 다름없는 매를 누가 기른다는 말인가.
매가 던지듯 종이를 두고 바로 사라졌다.
데미안이 그를 집어 갈라하드에게 내밀었다.
"고맙네, 데미안."
갈라하드는 가만히 종이를 살폈다.
"음."
갈라하드가 작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때-.
길버튼은 갈라하드의 미소 없는 얼굴을 처음 봤다.
그 얼굴은 참으로 서늘했다.
****
'마족의 피는 왜······.'
아드리안나의 보좌관 루나비른은 가득 쌓인 수통을 보면서 눈을 찡그렸다.
마족의 피는 인간의 피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냄새가 지독했다.
수통에 넣고 밀봉하면 조금 괜찮지만, 그래도 마족의 피를 모으는 건 이해되지 않았다.
아드리안나의 명령이었다.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의 요청이라니-.'
마족의 피를 마신다는 이야기에 루나비른은 작게 혀를 내둘렀다.
마법사란 족속은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금방 사라질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놈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공을 세웠다.
1대대 안에서도 놈에 대해 좋은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이제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거기에-,
'아드리안나님이 묘하게 밝아지셨다.'
루나비른은 수통의 개수를 확인하는 아드리안나를 곁눈질했다.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아드리안나를 오랫동안 모신 루나비른은 그 변화를 알 수 있었다.
전에는 오직 마족에게만 열중하며 다른 것에는 관심 두지 않던 아드리안나였다.
아드리안나가 아주 조금이라도 다른 것에 관심을 둔다는 건 아주 큰 변화였다.
변화가 늘 좋은 건 아니었다.
루나비른은 갈라하드를 떠올렸다.
누가 봐도 귀족인 사내였다. 그 행동에 늘 자신감과 여유가 가득한 잘생긴 사내는 딱 봐도 경험이 많아 보였다.
아드리안나는 북부의 영웅이지만, 연애 쪽으로는 순백이었다. 마나를 태우는 성질 탓에 연애는커녕, 타인과의 관계도 서투른 게 아드리안나였다.
순진한 아드리안나가 놈에게 당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때, 흰 매가 날아와서 아드리안나의 어깨에 앉았다. 아드리안나가 매의 다리에 걸린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아드리안나는 무심히 편지를 살폈다. 루나비른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왠지 모르겠지만, 읽는 시간이 제법 길었다.
한참을 종이를 보던 아드리안나가 루나비른을 쳐다봤다.
평소 루나비른을 볼 때면, 아드리안나의 얼굴은 아주 조금이지만 풀어졌다. 루나비른의 가장 큰 자랑이었다.
그런데 지금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더없이 진지했다.
무슨 큰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2대대가 맡은 전선이 무너진 건가? 아니면 제국놈들이 밀고 올라오나? 다양한 걱정이 루나비른을 스쳤다.
그때, 아드리안나의 입이 열렸다.
"내가 귀여운가?"
아드리안나의 진지한 물음에 루나비른의 사고가 정지했다.
진지한 얼굴로 자신이 귀엽냐고 묻는 아드리안나라니-.
차라리 제국에서 쳐들어오는 게 더 현실성 넘치는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진지하게 묻는 아드리안나가 조금이지만 귀엽게 느껴졌다.
다만, 감히 귀엽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전혀 귀엽지 않습니다. 아드리안나님은 고귀하고 화려하시며 아름다우십니다."
"역시 농담이겠군. 이런-."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위아래로 작게 흔들렸다.
그때, 거대한 붉은 새가 날아왔다. 새보다는 마물에 가까운 덩치였다. 대공의 매였다.
붉은 새가 아드리안나의 반대편 어깨에 앉았다. 매들이 서로를 보며 울었다.
아드리안나는 붉은 매의 다리에 있는 굵직한 종이를 펼쳤다.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전보다 더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일입니까?"
"제국의 황녀가 친목 교류 결투를 요청했다. 그를 대공 전하께서 받으셨다."
······친목 교류?
오래전에는 결투로 친목을 다졌지만, 이제는 사장된 전통이었다.
제국과의 연조차 한참 전에 끊어졌다.
그런 사장된 전통을 갑자기 지금 꺼내다니-.
"대공 전하께서 나와 2대대 대장, 특무대 대장을 지명하셨다. 바로 출발하겠다."
그 결투의 인원이 다소 이상했다.
아드리안나와 2대대 대장은 이해할 수 있었다.
둘은 북부의 실력자였으니까.
그런데-.
'···특무대 대장은 왜?'
"먼저 7대대로 갑니다. 갈라하드 대장과 합류하도록 하죠."
"특무대 대장은 왜···. 아, 대공 전하의 명령입니까?"
아드리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황녀? 갑자기 황녀라니-.'
너무 뜬금없는 이름이었다.
****
황녀 루시엔느는 영민한 인물이었다.
살아남는 것도 불가능했던 상황에서 루시엔느는 단순히 살아남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승계 서열까지 올라갔다.
그녀의 기사인 데반은 그녀가 살아남은 이유가 단순히 영민해서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갈라하드-.'
데반이 본 여인 중 루시엔느가 가장 아름답다면, 가장 유능한 이는 갈라하드였다.
그는 유능했다. 그 외에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그는 하루에도 몇 명씩 소리 없이 죽어 나가는 황실에서 벼랑 끝에 매달린 루시엔느를 훌륭히 지켰다.
그것으로 부족해서 승계 서열까지 올렸다.
그와 함께라면 뭐든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갈라하드는 처음 왔을 때처럼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다음에 들린 이야기가 '북부 대공의 딸과 결혼'이었다.
데반도, 황녀도 믿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와 결혼할 여유가 있는 이가 아니었다.
황녀의 유혹도 거절했던 갈라하드였다. 데반은 그가 고자일 것이라 확신했다.
아무튼, 갑자기 그런 소문이 들렸다.
처음에는 당연히 임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소문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황녀는 갈라하드와 만날 구실을 만들었다.
다만, 황녀의 약혼자 왕국 연합의 왕자가 최근에 죽었고, 독살이라는 소문이 도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실을 비우는 건 상당히 어렵고 치명적인 일이었다.
그에 황녀는 기막힌 핑계를 생각해냈다.
대공과 친목 교류 결투였다.
맙소사-.
데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대공과의 친목은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그 방식이 결투라는 거였다.
황녀는 세 번의 승부를 제안했다. 패자와 승자가 나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위태로운 황녀였다. 만약 결투에서 패한다면, 뜯길 거리를 주는 거였다.
설령 승리해도 문제였다. 제국에 대한 대공의 반감은 유명했다.
승리한 그들을 살려 보내지 않을 게 분명했다.
승리하든, 패배하든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제안이었다.
황녀가 그런 수를 둔 이유는 하나였다.
'갈라하드를 믿었겠지.'
갈라하드가 북부에 간 것도 자신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황녀였다.
데반의 생각은 조금 달랐지만, 그는 참모가 아니라 기사였다.
그때, 휘장이 걷혔다. 황녀가 나왔다.
피처럼 붉고 큰 눈동자는 장인이 정성을 들여 깎은 보석 같았고, 허리를 넘는 긴 머리는 고급 비단보다 부드러워 보였다.
황실에서 살아남은 이유가 가장 아름다운 꽃이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준비는 끝났어?"
그녀가 붉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화사한 꽃이 만개한 듯한 미소였다.
품행과 미소, 행동, 어디에도 오점이 없었다.
다만, 데반은 알고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장미에는 가장 날카로운 가시가 있음을-.
"예, 예상하셨던 대로 폴 베리안 경이 제안을 받았습니다. 다만, 황혼의 마탑주가 거절 의사를 밝혔습니다. 연구가 안 끝났다는 이유입니다."
"그래?"
꿀꺽-. 데반은 마른침을 삼켰다.
"대신 흰색 마탑의 상위 마법사 번치가 참여 의사를 표했습니다. 갈라하드의 아카데미 선배인데, 갈라하드가 자신에게 배웠다며 승리를 자부했습니다."
"그래. 어차피 갈라하드니까-."
루시엔느가 작게 '갈라하드'를 입에서 굴렸다.
마치 사탕을 먹는 것처럼-.
잠시 뒤 루시엔느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데반 경."
"예."
"나 어때?"
루시엔느가 화사히 웃으며 물었다.
황녀의 질문-. 황실에서 유명한 이야기였다.
눈이 먼 게 아니라면, 그녀의 물음에 당연히 이쁘다고 대답할 것이다.
다만, 늘 그렇듯 미친놈들이 존재했다.
그녀의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한 이가 셋 있었다.
셋 다 죽었다.
물론, 아니라고 대답한 이가 하나 더 있고. 그는 멀쩡히 살아있지만 그건 비사였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우십니다."
데반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그녀보다 아름다운 이가 존재할 리가 없었다.
황녀가 화사하게 웃었다.
순간 꽃 향기가 풍기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다행이네. 잠을 설쳐서 걱정했는데."
그 속삭임에 데반은 그저 고개를 숙였다.
"아, 선물은 잘 챙겼어요?"
갑작스러운 존댓말에 데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열어봐요."
데반이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자그마한 상자 안에 들어있는 건 깨끗하게 닦인 손가락이었다.
왕국 연합에서 찾는 왕자의 손가락이었다
그 손가락에 큼지막한 반지가 껴 있었다.
"그이가 좋아하겠죠?"
황녀의 물음에 데반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황녀는 정말 화사하게 웃었다.
전과 달리 꾸미지 않은 순수한 미소였다.
61화 협의 결렬
톰은 맞은편에 앉은 갈라하드를 곁눈질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톰이 아는 갈라하드는 늘 여유로움을 잊지 않는 사내였다.
마족을 앞에 두고도 농담을 던지는 게 갈라하드였다.
그런데 오늘은 그 분위기가 묘했다.
여유로움이 가득한 옅은 미소와 곧은 자세는 평소와 같았지만, 그 느낌이 묘하게 뾰족했다.
오늘의 갈라하드는 어딘지 날카로웠다.
대공 전하의 편지를 받은 뒤부터였다.
'황녀가 제안한 결투-.'
애초에 갈라하드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사내였다. 결투 목록에 뽑혔다고 까칠해질 것 같지는 않았다.
황녀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황녀라니-.'
너무 거대한 단어에 톰은 작게 혀를 내둘렀다.
그때, 포도주를 입에 털어 넣은 길버튼이 끄윽- 했다. 데미안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라면, 그때 말씀하신 미친년 아닙니까?"
길버튼의 거친 물음에 톰은 작게 경악했다. 그런데 갈라하드의 대답이 평소와 같았다.
"자네, 그거 황실 모독죄라네."
"예? 대장이 말한 거 아닙니까."
"나는 미친 여자라고 했지."
길버튼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황녀를 만난 적 있어요? 완전 미인이시라는데요!"
이번에는 그웬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미인이라-."
갈라하드가 눈을 살짝 찡그렸다. 이내 다시 여유로운 미소를 찾았다.
"맞네, 엄청난 미인이시지."
"와아-! 진짜요?"
그웬이 작게 감탄했다. 아무렇지 않게 갈라하드를 대하는 대원들에 톰은 작게 경악했다.
"아드리안나님과 비교하면 누가 더 아름답습니까?"
길버튼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 적나라한 질문에 톰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웬이 다시 눈을 반짝였다. 데미안은 말린 고기를 뜯었다.
"누가 더 아름다운지를 겨누다니-. 호색한 길버튼 경답군. 세상 모든 이는 각자의 매력이 있는 법일세. 그걸 비교하는 것만큼 멍청한 게 없지."
갈라하드의 대답은 늘 그렇듯 유려했다.
"아니, 모든 이에게 각자의 매력이 있다면서 저한테는 왜-."
"길버튼 경, 자네에게는 못생긴 매력이 있네."
"이런 빌어먹을-."
반발하는 길버튼에 끌끌- 웃는 갈라하드는 평소의 모습과 같았다.
다만, 톰은 그런 갈라하드에게서 묘하게 불편함을 느꼈다.
"아니, 그래서 누가 이쁩니까?"
길버튼은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 그웬도 다시 눈을 빛냈다. 갈라하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소리 그만하고 준비나 하게."
갈라하드의 단호한 명령에 길버튼이 눈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다 먹었으니 나갑시다."
"어딜 말인가. 아드리안나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나."
"북부 대표로 결투에 나가는 거 아닙니까? 다른 건 몰라도 제국에게 지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훈련합시다."
길버튼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 눈에 열정이 가득했다.
갈라하드가 대놓고 혀를 찼다.
"내 상대는 마법사일세. 자네와 훈련하는 건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걸세. 그리고 내가 마법사 전투에서 질 일은 없네."
갈라하드의 단호한 대답에 길버튼이 어정쩡하게 멈췄다.
"먹었으니 훈련이다."
"왜 나한테 그래요."
"시끄럽다 꼬맹이."
길버튼이 데미안의 뒷덜미를 잡아 데리고 나갔다. 화들짝 놀란 그웬이 그를 따라갔다.
갈라하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연초를 입에 물었다. 연초의 불이 갈라하드의 얼굴을 밝혔다.
그 얼굴이 굉장히 복잡했기에, 톰은 조용히 자리를 비켰다.
나서기 위해 문을 연 톰은 금발의 여인과 마주쳤다.
푸른 눈은 꼭 맑은 하늘 같았고, 그 피부는 눈보다 하얬다.
북부의 영웅, 아드리안나였다.
"갈라하드 대장은 안에 계십니까?"
"예!"
뒤늦게 정신을 차린 톰은 황급히 옆으로 비켰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톰은 닫힌 문을 보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드리안나보다 이쁠 수가 있나?'
상상조차 힘들었다.
*
"앉아도 되겠습니까?"
정중한 물음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아드리안나가 있었다.
"안되네."
"아-."
"장난일세. 앉게나."
아드리안나가 숨을 내쉬며 앉았다. 곧게 앉은 아드리안나가 검을 옆으로 돌렸다. 검을 뽑기 좋게 돌리는 기사의 습관이었다.
"황녀님이 오신다고 들었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라하드 대장을 찾아온 겁니까?"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빤히 보며 물었다. 그 푸른 눈동자가 참으로 맑았다.
아드리안나의 직설적인 질문에 갈라하드는 잠시 고민했다.
황녀는 현재 갈라하드의 머리를 가장 괴롭히는 존재였다.
현재 황녀의 상황이 눈에 보이듯 그려졌다.
약혼자인 왕국 연합 왕자의 죽음-.
갈라하드는 그게 황녀의 짓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황녀는 미친 자였지만, 어리석은 자는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준 선물을 해칠 리가 없지.'
갈라하드는 황녀의 성정을 고려하여, 왕자를 선물이라 표현했다.
실제로도 그녀에게 준 마지막 안배였고-.
황녀가 갈라하드가 준 선물을 망가뜨렸을 리가 없었다.
무언가 황실에서 벌어진 게 분명했다.
갈라하드는 작게 이를 씹었다.
그때, 아드리안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드리안나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갈라하드를 보고 있었다.
"내가 잘생긴 건 알지만, 너무 그렇게 보면 닳네."
"······예?! 그게 아니라-."
"맞네, 그녀는 나를 찾아온 걸세."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아드리안나가 가만히 갈라하드를 쳐다보다가 끄덕였다.
"그렇군요. 갈라하드 대장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내 생각 말인가?"
"예."
사실 예민한 문제였다.
아드리안나에게 갈라하드는 제국에서 멋대로 정한 약혼자였다.
황녀가 갈라하드를 보러 온다는 건 굉장한 무례이자 실례였다.
그런데 아드리안나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갈라하드의 의견을 물었다.
'황녀랑 정반대군.'
갈라하드는 슬쩍 연초를 입에 물었다.
아드리안나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쳐다봤다.
상당히 껄끄러운 여인이었다.
"내 생각을 묻는 거라면, 솔직히 귀찮고 짜증나네."
"······귀찮고 짜증 말입니까?"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멀리까지 전임 상사가 찾아온다고 상상해보게나."
갈라하드의 말에 아드리안나가 눈을 잠시 내리깔았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했다. 그 속눈썹이 얼마나 긴지 눈송이가 올라가 있었다.
"고맙지 않겠습니까? 저를 생각해서 이 멀리까지 와주는 것이니까요."
아드리안나의 대답에 갈라하드는 작게 기침했다.
'그걸 그런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군.'
근간을 따지고 보면 아드리안나의 말이 맞기는 했다.
단지 그 위를 덮은 것들이 삐뚤어졌을 뿐.
"그렇군."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정적이 자리했다. 갈라하드는 분주하게 황녀의 의도를 가늠했다.
다만, 그 상대가 황녀였기에 좀처럼 예상이 안 됐다.
"그러면 황녀가 결혼을 무를 수도 있겠군요."
아드리안나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 눈썹이 정위치에 있었다.
"그건 아닐 걸세. 그녀보다 윗급에서 정한 일이니까."
애초에 그녀가 막을 수 있었다면, 진작에 막혔을 일이었다.
그녀는 황녀였지만, 동시에 겨우 황녀였다.
"아-. 그렇군요."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내려갔다. 내려간 눈썹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결혼을 무르지 못해서 아쉬운 눈치군."
갈라하드의 물음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작게 커졌다.
이내 예의 무표정으로 돌아간 아드리안나가 입을 달싹였다. 말을 신중하게 고르는 듯했다.
연초가 끝을 보일 때쯤, 아드리안나가 입을 열었다.
"저는 그대와 혼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목소리는 단단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오히려 더 단호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벌떡 일어나 아드리안나에게 얼굴을 기울였다.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 아드리안나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이건 너무 가깝지 않나-.
그때, 갈라하드가 입을 열었다.
"내가 못생겼나?"
그리 묻는 갈라하드의 목소리는 무심했다.
어찌 저런 질문을-.
"대답하게."
단호한 재촉에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잘 생기셨습니다."
"키가 작나?"
"크십니다."
"그렇다면 성격이 못났나?"
"아닙니다."
연달아 쏟아지는 직설적인 질문에 아드리안나는 짙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저런 질문들을 어찌 저리 당당하고 뻔뻔하게 할 수 있는지-.
그때, 갈라하드가 몸을 더욱 기울였다.
성큼 다가온 차가운 눈동자에 아드리안나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뒤로 뺐다.
그러자 갈라하드가 그만큼 더 다가왔다.
애석하게도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러면 왜 고민인지 모르겠군. 원만한 협의를 이룰 수 있도록 합당한 근거를 제시해보게."
갈라하드의 눈이 아드리안나를 직시했다.
'······원만한 협의? 합당한 근거?'
놀라운 단어 선택에 아드리안나의 머리가 멍해졌다.
결혼하지 못할 근거를 제시하라니-.
상상도 못 한 요구에 아드리안나는 입을 벙끗거렸다.
"없는 거군. 그렇다면-."
갈라하드의 무심한 목소리에 아드리안나는 벌떡 일어났다.
갈라하드는 태연히 고개만 들어 아드리안나를 올려봤다.
그 얼굴이 무척 얄미웠다.
진심으로-.
"그대는 유능한 마법사고, 저는 마를 불태우는 자입니다. 그 끝은 명백합니다."
아드리안나의 입에서 말이 터지듯 나왔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갈라하드는 그가 자신하는 것처럼 유능한 마법사였다.
아드리안나는 마를 불태우는 성질을 지닌 이였고-.
둘 사이의 끝은 명백했다.
물고기가 불에 들어가겠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다.
또 그게 아니더라도-. 아드리안나는 터지려는 말을 필사적으로 삼켰다.
언성을 높였음을 깨달은 아드리안나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정작 갈라하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불안했다.
저 얄미운 입에서 또 어떤 말이 나올지-.
뭐라 말하려는 순간, 갈라하드의 입이 열렸다.
"아, 그게 문제였나? 자네, 역시 음흉한 면이 있군. 하긴 스킨십은 중요한 부분이지."
"···예?"
충격적인 말에 순간 아드리안나의 사고가 멈췄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의 성질을 해석하여, 그에 대한 방책을 세울 거니까. 입맞춤도 할 수 있을 걸세."
"예?! 그런 게 아닙니다!"
"설마 그 이상을 말하는 건가? 음. 노력해보겠네."
"아! 아닙니다!"
진지하게 끄덕이는 갈라하드에 아드리안나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아드리안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벗어났다.
고장 난 것처럼 삐꺽거리며 사라지는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볼을 긁적였다.
*
잠시 뒤 준비가 끝났다.
특무대는 아드리안나의 직속 부대와 함께 움직였다.
아드리안나는 늘 그렇듯 마차에 타지 않고 선두에서 이끌었다.
평소와 달리 아드리안나는 두꺼운 투구를 쓰고 있었다. 위에 뿔이 네 개 달려 상당히 험악한 투구였다.
"이상합니다."
"뭐가 말인가."
"아드리안나님에게서 막내의 느낌이 납니다."
"오-."
갈라하드는 작게 감탄했다. 길버튼에게도 눈썰미라는 게 존재하기는 한 건가.
"참 신기합니다. 근데 막내 이놈은 언제 돌아옵니까?"
"언젠가 올 걸세."
"어리숙한 놈인데-. 아, 결투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길버튼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결투는 총 세 번이었다.
2대대 대장, 갈라하드, 아드리안나 이렇게 세 번이었다.
황녀가 제안했다면, 그 결과는 아마-.
"북부가 질 걸세."
"······예? 저희가 진다고요?"
길버튼의 경악 어린 반문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는 걸 끔찍이 싫어하는 황녀였다.
지는 승부를 걸어올 리가 없었다.
"이긴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당연히 이기지."
"그러면 대장들이 진다는 이야기입니까?"
"길버튼 경, 목소리가 크네."
주변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중에는 아드리안나도 있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손을 흔들었다.
아드리안나가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북부를 모르시나 봅니다."
길버튼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순순히 끄덕였다.
"맞는 말일세. 내가 아직 북부를 제대로 모를 수도 있지. 다만, 북부와 수도는 환경이 다르네."
갈라하드는 연초를 깊게 빨았다. 레몬 향이 풍겼다.
확실히 북부의 기사는 뛰어났다. 그 배경에는 마족과의 전쟁이 있었다.
무수한 실전을 통해 강해진 기사들이었다. 제국의 기사들보다 전체적인 질은 뛰어났다.
다만, 상위로 올라가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제국의 기사들은 만들어진 이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명망 높은 기사의 교육을 받고, 값비싼 지원을 받아 만든 병기가 제국 기사였다.
물론, 기사가 그런 걸로 비교가 되는 존재는 아니었다. 북부 기사도 제국 기사 못지않게 험하게 컸으니까.
문제는-.
"결투 아닌가. 아마 제국식이곘지."
마족 사냥이라면 모를까. 제국식 결투는 그들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아드리안나님이 계십니다만."
길버튼이 떨떠름하게 반문했다.
확실히 아드리안나는 뛰어난 실력자였다.
종장에는 가장 날카로운 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다만-.
"황녀가 있지 않나."
황족은 신의 선택을 받은 존재들로 여겨지는 세상이었다.
그 고결성을 증명하기 위해, 황족은 모든 것에 뛰어나야 했다.
제국 기사가 만들어진 존재라면, 황족은 억만금을 투자하여 정성스레 빚은 보물이었다.
종장에는 아드리안나가 이기겠지만, 지금은 시기가 일렀다.
황녀는 이미 활짝 개화한 꽃이었다.
아드리안나는 아직 이길 수 없었다.
그 방식이 결투라면 더더욱-.
그때, 저 멀리 대공의 성이 보였다.
눈으로 뒤덮인 굵고 높은 성벽과 무장한 병사들-.
투박하면서도 거대한 성문은 마치 대공의 이름이라도 적어둔 기분이었다.
'꽤 오랜만에 오는군.'
저번에 올 때는 납치되듯 끌려왔는데 말이지-. 갈라하드는 묘한 회한을 느꼈다.
그때-.
뿌우우우우! 뿔나팔이 길게 울렸다. 성벽 위로 병사들이 길게 늘어섰다.
성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 아래의 눈이 거칠게 튀었다. 열린 성문에서 병사들이 급하게 뛰어나왔다.
긴장한 얼굴의 병사들이 멋들어지게 일렬로 섰다.
순식간에 성문으로 향하는 길이 병사로 세워졌다.
이어서 병사들이 격한 경례를 올렸다.
땅이 울릴 정도로 거칠었다.
"거한 환영식이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그러다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당연히 아드리안나를 향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경례의 방향이 다소 이상했다.
'나를 향한 것이군.'
이게 대공의 인정인가.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경례를 받았다.
딱히 쓸모는 없었다. 기분이 좋아지지도 않았고.
과한 환영을 받으며 대공의 성으로 향했다.
깔끔하게 생긴 사내가 다가왔다. 기사가 보좌하는 것과 깔끔한 복장을 보니 위치가 제법 높은 사내인 듯했다.
"대공 전하를 모시는 테오도르라고 합니다.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그렇군, 가겠나?"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에게 물었다. 여전히 투구를 벗지 않은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테오도르라는 사내가 난색을 표했다.
"그게··· 전하께서 갈라하드 대장 혼자 오라고 하셨습니다."
"혼자?"
"예, 혼자."
테오도르가 '혼자'를 강조했다.
'혼자'라는 단어가 묘하게 서늘했다.
대공과 독대라니-.
"아드리안나!"
갈라하드는 다급히 아드리안나를 불렀다.
****
가르세튼 성은 때아닌 난리를 한바탕 겪고 있었다.
수십의 인원이 따라붙은 휘황찬란한 금색 마차 때문이었다.
'황녀라니-. 이게 갑자기 무슨······.'
성주인 치르타는 두통에 얼마 없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가르세튼 성은 딱히 자랑할 게 없는 성이었다. 왜 황녀가 방문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에 치르타는 황급히 뛰어나갔다.
때마침 성에 들어서는 황녀에 치르타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건 단순히 아름답다는 표현으로 부족했다.
치명적인 아름다움이었다.
황녀 뒤에 있는 기사의 살벌한 눈빛만 아니었다면, 얼굴만 계속 볼 뻔했다.
"그이가 여기 방문했다고 들었어요."
"······예?"
느닷없는 이야기에 치르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이라니?
"아, 갈라하드님이요."
갈라하드-!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치르타가 성주가 된 이유였기 때문이었다.
치르타는 본래 성주가 아니었다.
원래 성주였던 다니엘이 그의 딸 엠마를 위한다며, 야밤에 갈라하드를 습격했다.
심지어 엠마의 치마를 입은 상태였다. 거기에 마족과 결탁한 사실까지 드러났다.
연관된 이들이 전부 처리되며, 엉겁결에 성주가 된 치르타였다.
그렇기에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갈라하드는 왜?'
의문이 들었지만, 치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죠?"
"아, 위쪽입니다. 그런데 청소를 안 해서-."
치르타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마족이 된 성주와 갈라하드가 전투한 방이었다. 가기 두려워 치우지 못했는데, 황녀가 가겠다니-. 식은땀이 가득 흘렀다.
"안내해."
"···예? 아니, 피랑 찢어진 천이 가득합니다. 빠르게 치우고···."
"좋네요."
황녀와 눈이 마주친 치르타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어디죠?"
뜨거운 숨이 섞인 황녀의 물음에 치르타는 위쪽을 가리켰다.
황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위로 올라갔다.
기사로 보이는 이가 계단을 막아섰다.
"모두 나가도록."
기사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마치 보여서 안 될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감히 저항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62화 언박싱
"갈라하드! 오시오!"
염소수염 사내의 부름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전에는 끝까지 '제국놈!'이라 불렀던 염소수염 사내였다. 그런데 이제는 갈라하드라고 불렀다.
우습게도 경례보다 와 닿는 변화였다.
"이거 입으시오! 머리 넘기시고!"
염소수염이 내민 옷은 붉은색 일변도의 정장이었다. 품질이 꽤 좋아 보이는 옷이었지만, 그 색이 너무 쨍하게 붉었다.
"나는 모든 색이 다 잘 어울리지만, 검은색이 좋네."
"입으시오! 대공 전하의 명이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갈라하드는 순순히 옷을 갈아입었다.
"근데 왜 붉은 옷이지?"
갈라하드의 물음에 염소수염이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대답했다.
"피가 묻어도 티가 안 나니까!"
"음, 잠깐 아드리안나 좀 불러주겠소?"
애석하게도 아드리안나는 갈라하드의 청을 거절했다.
대공이 독대를 명령했다는 이유였다.
정론의 아드리안나는 어떻게 바꿀 수가 없었다.
'음-. 정말 티가 안 나겠군.'
갈라하드는 붉은 옷을 내려보며 나지막한 침음성을 흘렸다.
왠지 그럴듯한 이유 같았다.
"가시오!"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서니, 예의 테오도르라는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잘 어울리십니다."
"내가 원래 옷을 잘 받네."
갈라하드는 목덜미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그에 테오도르가 살짝 질색한 얼굴을 했다.
"이쪽으로-."
갈라하드는 테오도르의 안내를 따라 움직였다.
"저는 갈라하드 대장의 행보를 아주 높게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무사히 다녀오시기를-."
이내 테오도르가 두꺼운 문 앞에서 물러섰다.
아드리안나는 보이지 않았다. 작게 혀를 찬 갈라하드는 대공의 방에 혼자 들어섰다.
전에 방문했을 때처럼, 대공의 방은 여전히 끔찍했다.
사방에 마물이나 마족이 빈틈없이 빼꼭하게 박제되어 있었다.
두 번째로 오니 전에 봤을 때는 미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직접 뜯었군.'
박제된 것들의 테두리가 전부 투박하다는 것이었다. 마치 손으로 뜯긴 것처럼-.
전에 봤을 때는 사납게 울부짖는 것처럼 보였던 마물들이 다르게 보였다. 괴물에게 겁먹어서 짖는 것처럼 보였다.
박제된 마물들은 안쪽으로 갈수록 더욱 크고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 대공이 있었다.
대공을 본 갈라하드는 나지막한 침음성을 흘렸다.
북부인데도 드러낸 대공의 상체는 인간보다 마물에 가까웠다. 그 거대한 근육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연신 꿀렁거렸다.
오러 없이 도끼로 마물을 찢는 대공이었다.
이미 인간의 영역은 벗어나 있었다.
대공이 거대한 도끼의 자루를 매만졌다.
"북부의 지배자를 뵙습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황녀가 편지를 보냈다."
대공이 던지듯 말을 뱉었다.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삼켰다.
"네놈을 찾더군."
"제가 워낙 출중한 터라. 이곳저곳 찾는 데가 많습니다."
갈라하드는 최대한 여유롭게 대답했다.
대공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보통 입꼬리를 올리면 인상이 유해지기 마련인데, 대공은 그 반대였다. 오히려 더 인상이 사나워졌다.
먹잇감의 목덜미를 뜯기 전의 맹수처럼 보였다.
어떻게 저 마물에서 아드리안나가 나왔을까. 부인이 상당히 뛰어난 미인이었을 게 분명했다.
"그래, 능력 때문이라고?"
대공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꼭 심문 같은 물음에 갈라하드의 머리가 바삐 움직였다.
황녀가 대놓고 개짓거리했을까? 상대는 대공이었다. 그녀가 보낸 전령은 황실을 나갈 때, 검사받을 게 분명했다.
사적인 내용은 없었을 것이다.
계산을 끝낸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다 제가 능력 좋고 잘생긴 탓이지요."
대공의 입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터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분위기는 더 날카로워졌다.
등이 괜히 간지럽고 목이 칼칼했다. 꼭 맹수의 아가리에 얼굴을 넣은 느낌이었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자연스럽게 둘렀다. 혹시 모를 상황을 가늠했다.
혹시 모를 경우에 대한 준비를 끝낸 갈라하드는 가만히 대공을 올려봤다.
"그렇군."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의 층고가 상당히 높은데도, 대공이 일어나니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실로 거대했다.
대공이 갈라하드에게 다가왔다. 그 걸음마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돌렸다. 입꼬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이내 대공이 가까이에 섰다. 정확히 대공이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모골이 송연해졌지만, 갈라하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아래로 내렸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대공이 가만히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그 눈이 뜨거워 꼭 눈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갈라하드는 피하지 않았다.
죽일 수 있을까-.
직업병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힘들겠군.'
도출된 결과에 갈라하드가 계산을 바꿀 때쯤, 대공의 입이 열렸다.
"불륜은 사형이다."
대공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공의 눈이 옆을 가리켰다.
용처럼 생긴 마물의 머리와 곰처럼 생긴 마물의 머리가 진열된 곳 사이에 빈자리가 하나 있었다.
바깥부터 안쪽으로 갈수록 그 비중이 커지는 진열 방식이었다.
그러니 대공의 바로 옆인 저 자리는 아주 중요한 위치가 분명했다.
그런 중요한 위치가 비어있다니-.
'저번에 왔을 때는 분명 채워져 있었는데.'
갈라하드의 기억이 틀렸을 리가 없었으니, 새로 만든 자리일 게 분명했다.
왜 굳이 빈 자리를 만들고, 그걸 가리킬까.
의도는 명백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갈라하드는 괜히 서늘한 목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대공의 입꼬리가 다시금 사납게 올라갔다.
"황녀는 네가 맡도록."
나지막하게 말한 대공이 자리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은 대공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마무리되는 분위기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문으로 향했다.
방문 앞에서 갈라하드는 슬쩍 입을 열었다.
"근데 아직 결혼식도 약혼식도 안 하지 않았습니까?"
"뭐-."
대공의 부릅뜬 눈에 갈라하드는 황급히 문을 닫았다.
다행히 문이 다시 열리지는 않았다.
갈라하드는 참았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대공이 딸 생각을 많이 하는군.'
아드리안나가 유일한 자식이니 당연한 이야기지만, 대공은 자기 형제와 혈육의 피로 자리에 앉은 인물이었다.
실제로도 아드리안나에 대해 이렇다 할 행동을 취하지 않았으니, 아드리안나를 아끼는 건 미지수였다.
아드리안나가 자기 실력으로 올라온 것일 뿐, 사실상 방치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대공이 갈라하드를 불러 경고했다.
'아드리안나가 대공의 약점이군.'
어쩔 수 없는 직업병이었다.
갈라하드는 쓰게 중얼거리며 연초를 입에 물었다.
황녀를 갈라하드에게 맡긴 건, 알아서 정리하라는 뜻이었다.
'정리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때, 뒤쪽에서 일정한 발소리가 들렸다. 철이 부딪치는 소리였지만, 정제되고 가벼웠다. 수준 높은 기사라는 뜻이었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은색 두꺼운 갑주를 입은 번듯한 기사가 있었다.
2대대 대장, 리암이었다.
'대장 중의 실세라 그랬나.'
갈라하드는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대공은 성에서 나오지 않았고, 아드리안나는 접경 지역에서 마족만 잡았다.
그런 탓에 실질적으로 세력이 가장 강대하다고 꼽히는 2대대 대장이었다.
갈라하드와 엮인 5대대와 7대대, 1대대를 제외하면 전부 2대대 아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 실력도 아드리안나 못지않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갈라하드가 오기 전까지 아드리안나의 유력한 남편 후보로 꼽혔던 리암이었다.
그런 인물이었기에, 갈라하드는 당연히 리암이 시비를 걸 것이라 예상했다.
예상과 반대로 리암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반갑다. 갈라하드 대장."
리암은 아무렇지도 않게 건틀릿을 벗고 손을 내밀었다.
그 눈이 또렷했다.
기사의 눈이었다.
"반갑네. 리암."
손을 마주 잡았는데, 그 손이 단단했다. 굳은살이 가득 있었다. 길버튼 못지않은 거친 손이었다.
갈라하드는 습관적으로 마나를 흘렸다. 마나는 지극히 평범했다.
"손이 여인처럼 부드럽군."
"마물처럼 손이 거칠군."
"북부의 손이지."
힘겨루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리암은 의외로 손을 곱게 놓았다.
"최근 이룬 일들을 들었다. 북부에 크게 해가 될만한 위기를 막았더군. 대단하다."
이어서 나온 말도 예상과 달리 투박한 칭찬이었다.
"할 일을 했을 뿐일세."
"그렇군. 제국과의 결투에 나간다고 들었다."
"맞네."
"그대도 북부의 대장이다, 제국에게 지는 건 치욕이니 최선을 다하도록."
"걱정은 고맙네만, 그대 걱정이나 하는 게 좋을 걸세. 제국의 기사는 만만치 않으니까."
"좋은 자신감이다."
리암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갈라하드를 보며 끄덕였다.
"다만, 북부의 대장인 내가 제국놈에게 질 일은 없다."
리암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건투를."
짧게 말한 리암이 갈라하드를 지나쳤다.
갈라하드는 잠시 방금의 대화를 되새겼다.
또렷한 눈과 넘치는 자신감, 그 짧은 대화 속에서 '북부'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나왔다.
'북부에 미친 놈이었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손을 털었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황녀였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를 살폈다.
'깔끔하게 치워야 하나.'
갈라하드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
황녀의 도착 소식에 대공의 성은 난리가 났다.
심지어 그 빌미가 결투인 탓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공은 늘 그렇듯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다만, 그렇다고 황녀를 그냥 맞이할 수 없었다.
북부의 건재함을 보이기 위해 다들 알아서 움직였다.
이내 대공의 성에 긴장감이 가득 차올랐다.
해가 가장 높이 떴을 때, 어디선가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건 음악 소리였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 황금 마차가 보였다.
금으로 만들어 화려하게 반짝이는 마차는 태양이 녹은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 앞으로 금색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갑주의 품질은 말할 것도 없었고, 말은 윤기가 넘쳤다.
그때, 음악 소리가 더 커졌다. 그 소리는 마차 뒤에서 들렸다. 금색 마차 뒤에 뚜껑 없는 마차가 있었다.
그 마차에 다양한 악사들이 있었다. 각기 다른 악기를 쥔 악사들이 손을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듣기 좋은 음율이 가득 퍼졌다.
황량한 북부에서 금색 갑주를 입은 기사들과 음악까지 대동한 마차라니-. 병사들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여전하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행렬의 면면을 살폈다.
대부분 제국 기사였지만, 그중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르고, 등에 기다란 깃발을 여러 개 꽂은 사내였다.
그 정체를 아는 갈라하드는 나지막한 침음성을 흘렸다.
"아는 기사입니까?"
길버튼이 기사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폴 베리안 경일세, 결투로 상대의 깃발을 뺏는 게 취미인 결투 전문가지."
"강합니까?"
"뒤에 있는 깃발을 세어보게."
갈라하드의 물음에 길버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열 개밖에 없습니다만."
"제일 낮은 게 백작 가문일세."
길버튼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눈에 호승심이 가득 타올랐다.
'폴 베리안이라-.'
갈라하드는 익숙한 깃발을 보며 중얼거렸다.
황녀가 제대로 준비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더 까다로운 놈이 나왔다.
북부의 기사를 미끼로 불렀을 게 분명했다. 호승심으로 움직이는 기사였으니까. 다만, 폴 베리안은 주인이 따로 있었다.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설마-.'
그때, 마차가 다가오며 음악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음악이 빨라지며 고조됐다.
악사들의 얼굴에 땀이 가득했다. 그들은 미친 듯 악기를 뜯고 두드렸다. 연주를 멈추면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기괴한 절실함이 음율을 타고 가득 퍼졌다.
묘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한껏 고조된 연주가 뚝 멈추는 순간-.
마차가 섰다.
꿀꺽-. 길버튼의 침 삼키는 소리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익숙한 기사가 마차에 다가왔다.
'데반.'
황녀의 기사 데반이었다. 데반은 꽤 좋은 기사였다. 데반이 문을 정중하게 열었다.
마차에서 하얗고 길쭉한 다리가 나왔다.
곳곳에서 감탄이 터졌다.
이내 붉은 머리의 여인이 천천히 내렸다. 그저 마차에서 내리는 것인데, 기품의 화신처럼 우아하고 고고했다. 작은 틈도 보이지 않는 행동이었다.
마차에서 황녀가 내리자 곳곳에서 감탄이 터졌다.
황녀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여유롭게 받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뭔가를 찾는 듯한 모습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그때, 황녀가 정확히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잠깐의 틈도 없이 찾는 모습에 갈라하드는 괜히 목이 까슬거렸다.
갈라하드를 본 황녀가 입꼬리를 올렸다.
다시금 환호가 터졌다. 오기 전까지는 제국을 죽일 놈 대하듯 하던 놈들이 그저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길버튼 경, 입 좀 닫게."
"······아?"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앞으로 나섰다.
황녀는 이미 갈라하드를 향해 걷고 있었다. 황녀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순간이었다.
아닌 척하지만 대공도 보고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바로 옆에 아드리안나도 있었다.
여기서 사고를 쳤다가는 일이 상당히 번거로워질 것이다.
다만, 황녀는 그런 걸 신경 쓰는 인물이 아니었다.
지엄한 황족이었기에-.
이내 앞에 선 황녀가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그녀의 미소는 만개였다. 지독한 꽃향기가 가득 풍겼다.
황녀의 피처럼 붉은 입술이 벌어지기 전에 갈라하드는 먼저 손가락을 튕겼다.
가벼운 막이 주변을 둘렀다.
문제는 아드리안나였다.
"북부에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안내를 맡은 갈라하드입니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황녀님. 아드리안나입니다."
아드리안나가 인사했지만, 황녀의 눈은 갈라하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황녀의 눈동자가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갈라하드를 본 순간부터 눈을 한 번도 깜박이지 않은 탓이었다.
그때, 황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 첫마디는-.
"보고 싶었다."
어울리지 않게 투박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거세게 흔들렸다.
아드리안나는 자신도 모르게 갈라하드로 시선을 돌렸다.
갈라하드의 얼굴은 평소의 여유 대신 옅게 구겨져 있었다.
"저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짜증 어린 목소리에 아드리안나는 화들짝 놀랐다.
상대는 제국의 황녀였다. 어찌 저런 거친 언사를-.
"그대로군. 다행이다."
황녀는 오히려 더 깊이 웃었다.
"황녀님도 그대로시군요. 지랄맞게도."
갈라하드와 어울리지 않는 거친 언사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황녀가 입으로 소리 내어 웃었지만, 그 눈은 웃지 않았다.
"친선 목적의 결투라니. 드디어 죽을 자리를 찾으신 겁니까?"
"말하지 않았느냐. 너는 나와 같이 묻힐 거라고."
"분명히 거절했습니다만."
"거절은 불허한다고 했다."
뾰족한 대화가 이어졌다.
아드리안나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선물을 가져오거라."
황녀의 명령에 기사가 움직였다.
이내 기사가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냈다.
붉은 선으로 화려하게 포장된 상자였다.
"선물? 필요 없습니다만."
"좋아할 거면서."
갈라하드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황녀가 선물을 건넸다. 갈라하드가 신경질적으로 상자를 뜯었다.
옆에 있던 아드리안나는 자신도 모르게 상자를 훔쳐봤다.
그 안에 담긴 건, 사내의 것으로 보이는 손가락이었다.
반지를 낀-.
그를 본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그때, 갈라하드가-.
"이런."
활짝 웃었다.
마주 보는 둘에 아드리안나는 묘한 거리감을 느꼈다.
'반지······?'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내려갔다.
63화 반지 선물
'이런······.'
갈라하드는 상자를 매만졌다.
황녀의 선물은 잘린 손가락이었다.
갈라하드는 상자에 잘린 손가락이 있다고 놀라지 않았다. 잘린 손가락 정도면 황녀가 준 것 중에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문제는 그 손가락의 주인이었다.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는 왕국 연합의 왕자가 갈라하드에게 자랑했던 반지였다.
[축복이 담긴 왕국의 보물입니다.]
왕자는 꽤 좋은 놈이었다.
왕자를 만난 건 임무 때문이었다. 강대해지는 왕국 연합을 흔들기 위한 세작 작전이었다.
갈라하드는 제일 작은 왕국을 선택했다.
단순히 가장 열악해서 선택한 건 아니었다.
그건 조사에 따른 철저한 계산이었다.
실제로 성공했고 그에 대한 공으로 황실 쪽 임무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황녀와 엮였다.
갈라하드는 상자를 톡톡 두드렸다.
황녀의 선물은 반지가 아니었다.
그 아래에 있는 손가락이었지.
거무튀튀하게 부푼 손가락은 독살의 흔적이었다.
다만, 상대는 어미가 독으로 죽은 왕자였다.
그런 탓에 왕자는 먹기 전에 반드시 다른 사람을 시켜 반응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살폈다. 그 거무튀튀한 부분 끝에 뾰족한 가시처럼 뻗친 흔적이 있었다.
'뿔사귀 풀의 독이군.'
뿔사귀 풀은 사막에 존재하는데, 상당히 지독한 독을 지니고 있었다.
뿔사귀 풀은 사막의 열기처럼 뜨거워야 독으로 변했다.
마법 덕분에 황실은 늘 기분 좋은 서늘함을 유지했다.
독을 일으키기에 체온은 부족했다. 더불어 손가락의 중간 부분이 진하게 검었다.
'화상이 옅다.'
화상과 독을 일으킬 수 있는 그 사이 온도의 불을 이용한 게 분명했다.
'전문가군. 악수인가?'
온도를 조절할 정도로 화염 마법에 정통한 마법사면서 이런 쪽에 전문가인 놈은 흔치 않았다. 적어도 황녀 주변에는 없었다.
'3 황자군.'
3 황자다운 치밀한 수였다.
왕자가 죽어도 황녀가 용의자로 몰릴 게 분명했기에, 3 황자가 손해 볼 가능성은 현저히 적었다.
애초에 황실이 인정할 리도 없었고-.
중요한 건 동기였다.
왜 굳이 왕국 연합의 왕자를 죽였을까.
둘 중 하나였다. 왕국 연합의 다른 끈이 3 황자에게 닿았거나, 왕국 연합과의 관계가 아예 틀어지기를 원하던가.
3 황자는 피로 공을 세우는 걸 즐겨하는 놈이었다.
전장에서 득을 보는 놈이었으니 후자일 것이다.
'그때 못 죽인 게 크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네가 원하던 것이다."
황녀가 만개한 미소를 입에 머금으며 말했다.
그건 물음이 아닌 확신이었다.
애석하게도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갈라하드가 성공하지 못한 일들이 몇 개 있었다.
3 황자는 그중 하나였다.
황녀가 준 이 손가락은 그 3 황자를 찌를 수 있는 검이었다.
선물이라는 표현이 상당히 적절했다.
이 손가락의 용도는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었다.
황녀가 왕자의 사라진 손가락을 직접 줬으니, 이건 황녀를 쥘 수 있는 목줄이었다.
황녀는 제 목줄을 갈라하드에게 넘긴 것이다.
아주 꽉 조인 목줄-.
'이러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황녀의 가능성이 다소 올라왔다.
더불어 3 황자를 잘라낼 수 있다면-.
확실히 그럴듯했다.
다만, 아드리안나가 있었다.
슬쩍 아드리안나를 살피던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내려가 있었다. 그 시선이 선물 상자에 꽂혀 있었다.
'왕국 연합의 보물이라고 했었나.'
왕국의 보물에 걸맞은 아주 화려한 반지였다.
끼고 있으면 늙지 않는 축복이 서려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갈라하드는 믿지 않았지만, 황녀의 반들반들한 피부를 보면 효과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눈이 마주친 황녀가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렸다.
"대공에게 안내해라.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저는 안 돌아갈 겁니다만."
"꽁한 게 오래 가는구나."
"볼 일 없습니다. 가시죠."
"손잡고 싶다."
"입 좀 닫아 주십쇼."
연신 떠드는 둘에 아드리안나는 말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
'이런-.'
갈라하드는 텁텁한 목을 매만졌다.
갈라하드를 중심에 두고 양쪽에 대공과 황녀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대공은 상당히 거친 외모였다. 그 끔찍한 근육을 드러내는 것도 그렇고, 상남자보다 마물에 가까운 외모였다.
그런 대공을 상대로 황녀는 여유로웠다.
황녀는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여 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덜 익었다."
눈을 찡그리며 불평하는 황녀에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북부식이다."
"야만적이군."
대공의 입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맛없다."
혀를 찬 황녀가 옆에 놓인 잔을 잡았다.
대공과 갈라하드 앞에 있는 것과 같은 잔인데, 그 크기가 황녀 얼굴보다 컸다.
그 거대한 잔에 냄새만 맡아도 눈이 찌푸려질 정도로 독한 술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황녀는 잔을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단번에 들이켰다.
꿀꺽- 꿀꺽-.
황녀의 가느다란 목이 연신 꿀렁였다.
황녀는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잔을 비웠다.
'여전하군.'
갈라하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좋은 술이군. 더 없나?"
잔을 흔들며 묻는 황녀에 대공이 낮게 웃었다.
"귀하신 황족이 북부까지 무슨 일이지?"
"내 것을 되찾으러 왔다."
"내 것?"
대공의 반문에 황녀가 갈라하드를 가리켰다.
갈라하드는 최대한 무해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만."
"갈라하드는 내 것이다."
황녀가 들리지도 않는 듯 말했다.
"웃기는군. 누구 손에 들어갈 놈은 아닌데 말이지."
대공이 갈라하드를 보며 말했다.
"역시 대공 전하, 정확하십니다."
"내가 고귀한 황족이라."
"고귀하면 피를 안 흘리나?"
대공이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갈라하드의 등이 서늘해질 정도로 사나운 분위기였지만, 황녀는 코웃음쳤다.
"협약을 알고 있으니, 그런 유치한 협박은 하지 말도록."
'······협약?'
황녀 입에서 나온 말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협약은 오로지 황족만이다. 그 겁쟁이가 말 안 해줬나?"
겁쟁이라는 건 아마 황태자일 것이다. 전에 아드리안나를 보러 왔다던-.
그에 갈라하드는 대공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황태자가 혼자 말을 타고 갔다는 이야기-.
황족인 황녀를 제외한 모두를 죽이겠다는 협박이었다.
대공의 협박은 갈라하드도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사나웠지만, 애석하게도 그 상대는 황녀였다.
"갈라하드가 말을 잘 모니 상관은 없다. 아니, 오붓하겠군."
황녀가 끄덕였다.
저건 진심이었다. 데리고 온 이를 전부 죽여도 황녀는 눈 하나 꿈적하지 않을 것이다.
"아, 내기는 어떤가. 자네와 나, 누가 더 많이 죽이는지. 나도 꽤 자신 있다."
황녀가 나이프를 슬쩍 돌리며,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황녀는 진심으로 내기가 재밌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하! 대공이 소리 내어 웃었다.
대공의 웃음에 갈라하드는 작게 놀랐다.
"전에 온 황태자라는 놈보다 낫군."
대공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가 사나웠지만, 투박했다.
'미친 자들끼리 통하는군.'
갈라하드는 슬쩍 의자에 등을 기댔다.
"갈라하드를 주면 돌아가겠다. 승부? 그대가 가지도록. 그에 따른 값도 지급하겠다."
황녀의 제안에 갈라하드는 문득 불안해졌다.
대공은 갈라하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갈라하드는 제국에서 멋대로 정한 혼사였으니까.
최근에 대공에게 인정받고 열심히 공도 세웠지만, 대공이 자신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치울 수 있다면 치우고자 할 것이다.
실제로 아드리안나도 황녀가 온다는 이야기에, 결혼 취소를 언급했었으니까.
대공이 제안을 받을 가능성이 상당히 컸다.
"잠깐."
갈라하드가 입을 열려고 하자, 대공이 검지로 기다란 식탁을 두드렸다.
쿵! 무슨 몽둥이로 두드린 것처럼 굉음이 들렸다.
"내 손에 들어온 게 나갈 방법은 하나 뿐이다."
대공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 눈동자가 지나치게 사나웠다.
대공이 태풍이 깃든 것 같은 거친 눈으로 갈라하드를 보며-.
입을 열었다.
"죽었을 때."
갈라하드는 마른 침을 삼켰다.
"기왕이면 살아있는 게 좋은데. 난처하군."
황녀가 눈을 구기며 투덜거렸다.
대공이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이대로 뒀다가는 뭔 일이 벌어질 듯했다.
대공이 황녀가 데리고 온 병사와 기사들을 전부 죽이면, 황녀는 웃으며 대공의 성을 헤집을 것이다.
그건 최악의 선택지였다.
갈라하드는 빠르게 방법을 강구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갈라하드가 손을 들자, 대공과 황녀의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그 사나운 시선을 받으며 갈라하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친선 목적이지만 그래도 결투인데, 상품이 없으면 심심하지 않습니까?"
둘의 눈이 동시에 가늘어졌다.
그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각자 결투에 상품을 하나 겁시다."
****
"지금 결투에 갈라하드 대장을 걸겠다는 이야기입니까?"
아드리안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대상인 테오도르가 난감함을 표했다.
"갈라하드 대장은 물건이 아닙니다. 어찌 사람을 결투의 상품으로 겁니까!"
아드리안나의 언성이 드물게 올라갔다. 그에 테오도르는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에는 여유롭게 연초를 피는 갈라하드가 있었다.
테오도르의 눈짓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아, 그거 내가 걸었네."
"······예?"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빠르게 진동했다.
이해하지 못한 듯하여, 갈라하드는 추가로 설명했다.
"상품 말일세, 내가 직접 걸었네. 그게 아니면 진정이 안 될 것 같아서 말이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갈라하드 대장이 물건 취급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대공 전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걸었다는데, 자네가 왜 난리인가."
아드리안나의 입이 달싹였다.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다가 입이 꾹 닫혔다.
그때, 아드리안나의 눈썹 안쪽이 내려가고 끝 쪽이 올라갔다.
처음 보는 눈썹 형태였다.
'화난 눈썹인가?'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가만히 두면 뭔가 일을 벌일 기세였다.
"어차피 이길 것 아닌가."
아드리안나의 시선이 다시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갈라하드는 그 푸른 눈을 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자네를 믿네."
아드리안나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그 눈썹이 위로 쭉- 올라갔다.
안 그래도 컸던 아드리안나의 눈이 더욱 커졌다.
갈라하드는 사람 눈이 이렇게 클 수 있다는 것에 작게 놀랐다.
"내 취급에 관한 논의는 승부가 끝난 뒤에 하지. 지금은 바쁘니까 말일세."
"바쁘다면-."
아드리안나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그 푸른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눈동자에는 작은 티끌도 없었다.
황녀가 선물한 손가락은 상당히 유용하게 쓸 수 있지만-.
결국 갈라하드가 가진 패 중 하나일 뿐이었다.
언젠가 마족의 왕을 찌를 검은-.
아드리안나였다.
"황녀를 이길 방법을 알려주겠네."
****
'······?'
아드리안나는 정면의 갈라하드를 보며 눈을 찡그렸다.
갈라하드가 레이피어를 들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상당히 안정되어 있었다.
숙련된 기사처럼.
"검을 배우셨습니까?"
"예전에 취미였네."
갈라하드의 대답에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국의 결투 방법은 알고 있나?"
"예, 오러 금지에 부위 별로 점수를 매기는 형태라고 들었습니다."
"정확하네. 오러 금지가 핵심이지. 더불어 점수를 낸 상태라면, 그 이후의 타격은 무효일세."
"그렇군요."
"그래서 자네들이 이길 수 없다고 한 걸세. 저들은 놀이처럼 하는 게 검술 대결이니까."
아드리안나는 뛰어난 기사였다. 그에 반해 갈라하드는 마법사였다.
마법사가 기사 앞에서 검에 대해 떠드는 건, 상당히 우스운 일이었다.
실제로 갈라하드의 제안에 2대대 대장은 모욕이라며 거칠게 거절했다.
정작 북부의 가장 뛰어난 기사인 아드리안나는 진지하게 경청했다.
"일단, 먼저 보여주겠네."
갈라하드가 검을 내밀었다. 그에 아드리안나는 마주 자세를 취했다.
갈라하드는 마법사였다. 괜히 무리하면, 다칠 가능성도 있었다.
아드리안나는 평소보다 더 신중히 칼자루를 잡았다.
그때, 갈라하드가 땅을 찼다. 마치 춤추는 것처럼 신기한 발동작이었다.
순식간에 거리가 가까워졌다.
기사는 보통 검이 아닌 상대의 어깨를 봤다.
어깨가 검보다 먼저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그에 어깨를 봤는데-.
"이게 결투가 어려운 점일세."
아드리안나는 제 건틀릿을 스친 레이피어를 보며 작게 탄식했다.
갈라하드는 어깨가 아닌 허리부터 움직였다.
허를 찌르는 동작이었다.
반응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뛰어나게 반응해서 문제였다.
아드리안나는 마족과의 전선에서 검을 닦은 이였다.
전선에서는 반응이 조금만 느려도 마족에게 당했다.
그런 탓에 몸보다 오러가 먼저 반응했다.
갈라하드가 공격하자 의식하기도 전에 오러가 올라왔다.
오러를 억누르는 탓에 시간이 끌렸다.
그리고 갈라하드의 검이 아드리안나의 예상보다 더 빨랐다.
그 결과 갈라하드의 검이 먼저 아드리안나의 손등을 스쳤다.
실전이었으면 상관 없었다. 저 정도 타격은 오러로 막을 수 있었으니까.
다만, 결투에서는 점수였다.
"기사셨습니까?"
"말하지 않았나. 취미였다고."
'취미-?'
이건 단순히 취미로 나올 수 있는 동작과 속도가 아니었다.
의문이 입 끝까지 올라왔지만, 아드리안나는 애써 삼켰다.
상대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더 묻지 않는 게 예의였다.
누구든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는 법이었다.
그건 아드리안나가 가장 잘 알았다.
"방금도 봤던 것처럼 상대를 속이기 쉬운 게 레이피어일세. 어깨가 아닌 허리부터 움직이면서 찌르면, 마지막에 폭발적으로 속도를 올릴 수 있지."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면 당하기 쉬운 기술들이지. 물론, 오러를 일으킨다면 그것조차 반응하겠지만, 결투에서 오러는 금지일세."
"예, 이해했습니다."
갈라하드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실전의 습관이었다. 그 습관적인 오러를 자제하는 것에 시간이 많이 들어갈 게 분명했다.
아드리안나를 보며, 갈라하드는 다시 발을 튕겼다.
전처럼 아드리안나의 움직임이 살짝 굼떴다.
오러를 억누르기 위해 신경이 분산된 탓이었다.
갈라하드는 찌르기가 아닌 베기를 시도했다.
레이피어로 베는 건 쓸모없는 짓이었지만, 제국식 결투에서는 그것 또한 점수였다.
그때, 아드리안나의 검이 움직였다.
이번에도 다소 늦었지만, 전보다 빠른 속도였다.
갈라하드의 검을 쳐낼 정도로-.
"아, 베기로도 쓸 수 있겠군요. 확실히 점수는 나오니까."
아드리안나는 건틀릿에 새겨진 줄을 보며 진지하게 끄덕였다.
'천재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다시 하지."
"예,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이내 갈라하드의 검이 아드리안나에게 향하지조차 못했을 때, 갈라하드는 검을 놓았다.
'아슬아슬하군.'
아드리안나의 재능이 갈라하드의 상상 이상이었다.
최연소 소드 마스터니까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실제로 경험하니 또 달랐다.
다만, 이것도 부족했다.
"황녀의 검은 나보다 빠를 걸세."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하네."
"감사합니다-."
마법사인 갈라하드의 칭찬인데도, 아드리안나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물론, 준비한 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황녀를 이기려면 한 가지가 더 필요했다.
"손 좀 내밀어보겠나."
"곧 결투에 나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아, 잡을 건 아닐세."
아드리안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아드리안나는 제 손바닥에 올려진 걸 보며 눈을 끔벅였다.
그건 아주 화려한 반지였다.
황녀가 준-.
"끼고 나가게. 효과적일 걸세."
늘 무표정이었던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처음으로 깨졌다.
64화 반지와 건틀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