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반지와 건틀릿
'이런 표정도 있군.'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드리안나는 보통 무표정이었다. 뭔가 일이 있어도 눈썹 정도만 움직였다. 심지어 눈썹이 움직이는 것도 상당히 미세했다.
갈라하드도 정면에서 봐야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아드리안나가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일명 도끼눈이었다.
그 아드리안나가 도끼눈까지 했을 정도면, 상당히 화난 게 분명했다.
원인은-.
"다른 이의 선물 아닙니까. 이걸 다른 이에게 준다니-. 나쁜 짓입니다."
아드리안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화를 내는 이유가 다른 이의 선물을 무시했다는 이유라니-. 참으로 아드리안나다웠다.
역시 정론이었다.
다만-.
"준다고 한 적은 없네만."
"······!!"
아드리안나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도끼눈이 풀렸다.
"자네, 자의식이 상당하군."
갈라하드가 혀를 차자, 아드리안나의 움직임이 멈췄다.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대로 굳은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말을 덧붙였다.
"결투에 쓰라는 걸세."
그제야 아드리안나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다시 눈썹이 움직였다. 눈썹 안쪽이 아래로 바깥쪽이 위로- 도끼눈은 아니었다.
"결투는 신성한 것입니다. 오로지 검으로 겨뤄야 하는 결투에 다른 요소가 개입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또 다시 정론이었다.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예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다만, 볼이 좀 붉었다.
"결투에 반지를 끼지 말라는 규칙이 있나?"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옳지 않다는 거지?"
아드리안나가 입을 벙끗거렸다. 이내 눈썹을 작게 구겼다.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상대의 진심을 이용하여 심기를 건드리는 것 아닙니까. 이는···."
"이는?"
"규칙에 어긋나지 않지만···."
"않지만?"
"······."
아드리안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 푸른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황녀도 끼고 있을 걸세. 그 반지에는 다양한 축복이 걸려 있지. 그런 반지를 황녀가 꼈는데, 자네가 안 끼는 건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나?"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거칠게 흔들렸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 리가 있습니다."
"근데 왜 거부하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아드리안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이번 결투에 내가 걸려 있네. 자네가 지게 되면 나는 꼼짝없이 그 황녀에게 잡혀갈 걸세."
"사이가 좋아 보였습니다만."
"질투하는 건가?"
"······예?"
"황녀는 끔찍한 상사일세. 황녀를 따라가면, 나는 높은 확률로 죽을 걸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조금 과장했을 뿐, 거짓은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대답 대신 연초를 물었다. 아드리안나는 재촉하지 않았다.
잠시 뒤에 아드리안나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건틀릿을 벗었다.
"사용할 일은 없을 겁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가득했다. 아드리안나는 새끼손가락에 반지를 꼈다. 그 크기가 살짝 헐렁했다.
"크기가 안 맞는데, 약지에 끼게나."
"싫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또 나온 도끼눈에 갈라하드는 작게 헛기침했다.
"반지를 사용할 일은 없을 겁니다."
아드리안나가 예의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아드리안나의 의지와 상관 없었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황녀님이 찾으십니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걸음을 옮겼다.
아드리안나는 잠시 멍하니 제 손을 내려봤다.
왜 자신이 황녀가 갈라하드에게 준 반지를 끼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상황이 다소 이상해졌지만-.
어차피 건틀릿을 낄 것이니, 반지를 보여줄 일은 없을 것이다.
아드리안나는 이유 모를 답답함에 검을 고쳐 잡았다.
****
"북부는 전부 똥 같지만, 술은 제법이구나."
황녀는 소파에 기울여 앉아 있었다.
투박한 북부의 방인데, 황녀의 화려한 외모 때문에 수도의 연회장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황녀 주변으로 빈 병이 잔뜩 굴러다녔다. 방에 독한 술 냄새가 가득했다.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가득한 술 냄새가 바람에 휘날려 사라졌다.
황녀가 다리를 길게 뻗었다. 화려한 드레스의 옆 부분이 길게 찢어져 있었다. 불편하다고 뜯은 게 분명했다.
"왜 오셨습니까."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지 않았느냐."
황녀의 태평한 대답에 갈라하드의 눈이 구겨졌다.
쓸데없는 여유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니 향긋한 레몬 향이 가득 퍼졌다.
"급하구나."
황녀가 연초를 보며 작게 투덜거렸다.
갈라하드는 신경 쓰지 않고 연초를 깊게 빨았다.
그제야 황녀가 제대로 앉았다.
"대공에게 결투라니, 머저리 같은 선택입니다."
"덕분에 너를 볼 수 있었으니 성공이다."
그 목소리에 진심이 가득했다.
황녀는 정말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랄맞게도 황녀는 갈라하드를 잘 알았다.
손가락을 준 순간부터, 황녀는 살릴 수밖에 없는 카드였다.
다만, 일을 너무 크게 벌였다.
"이번 건은 수습하기 어려울 겁니다."
"내 삶이 쉬운 적 있었느냐?"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레몬 향이 퍼졌다.
황족인 황녀가 대공에게 친선이지만, 결투를 청했다.
패배하면 감히 지엄한 황족에 생채기를 냈다는 핑계로 황녀를 처리할 것이다.
행여 이긴다면 그것도 문제였다.
갈라하드는 북부를 벗어날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를 해결할 수는······.
"바튼 왕국의 왕자와 결혼하십쇼."
갈라하드의 말에 황녀가 눈썹을 구겼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다만, 갈라하드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손가락이 없어졌으니, 3 황자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터-. 황녀님이 바튼 왕국의 왕자와 결혼하면 파훼할 수 있습니다."
"타당하구나. 역시 똑똑하다."
황녀가 입꼬리를 올렸다.
거짓 웃음이었다.
미친 황녀는 화가 날 때 웃었다.
기쁠 때 울고-.
"그래, 알겠다. 대신 조건이 있다."
"거절합니다."
갈라하드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들을 필요도 없었다.
"아직 듣지도 않았는데?"
"정부가 되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맞다. 내 정부가 되거라."
황녀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갈라하드를 가리켰다.
황녀는 자신의 가치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화려한 외모와 황녀라는 직위, 그 장점을 가장 비싸게 쓰는 방법은 혼담이었다.
그런 황녀가 정부를 제안하는 건, 다시 말해 자신을 가장 비싼 값에 주겠다는 이야기였다.
애석하게도 정부 제안은 황녀가 할 수 있는 가장 낭만적인 말이었다.
"싫습니다, 저는 결혼할 여인이 있습니다."
"나도 결혼할 사내가 있다. 동등하군."
꽤 타당한 논리에 갈라하드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때, 연초의 끝부분이 톡- 떨어졌다. 황녀가 작게 탄식했다.
"제 대답은 전과 같습니다."
"참 고집스러운 놈이다."
황녀가 잔을 들고 흔들었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옆의 술통에서 술이 올라와서 황녀의 잔으로 움직였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잔을 비운 황녀가 웃었다.
"딱 좋은 서늘함이다. 역시 네가 따라주는 술이 최고다."
갈라하드는 다 핀 연초를 비벼 껐다. 황녀의 얼굴에 아쉬움이 올라왔다.
연초를 버린 갈라하드는 주저 없이 뒤돌았다.
그 차가운 등을 보며 황녀는 입을 열었다.
"또 그날이 와도 나는 널 선택할 것이다."
나가기 직전, 갈라하드가 잠시 멈췄다.
"말은 바로 하십쇼. 그건 저를 선택한 게 아니라, 저를 못 믿은 거니까."
갈라하드는 그대로 방을 나섰다.
황녀는 대꾸할 시간도 주지 않고 사라진 갈라하드에 혀를 찼다.
갈라하드의 말은 옳았다.
그날 황녀는 갈라하드를 믿지 못했다.
"좀 억울하군."
황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갈라하드가 유능한 건 황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아무리 너라도 반란하겠다는 걸 어찌 보겠느냐."
황녀는 혼자 소리 내어 웃었다.
****
'3 황자와 손가락, 황녀-.'
"건방진 후배, 여기서 보는군."
뾰족한 목소리에 갈라하드의 상념이 깨졌다.
그 앞에 흰 망토를 뒤집어쓴 사내가 있었다. 흰 망토는 흰색 마탑의 상징이었고, 망토 위에 수 놓인 금색 자실은 상위 마법사라는 증거였다,
갈라하드의 결투 상대인 마법사가 분명했다.
"후배? 우리가 만난 적 있나?"
갈라하드의 물음에 상대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하, 모르는 척을 하는군."
"미안하지만, 나는 쓸데없는 건 기억하지 않네. 후배라 그랬으니 제국 아카데미 출신이겠군. 그러면···."
갈라하드는 놈의 얼굴을 살폈다. 놈의 숱 없는 눈썹이 꽤 낯익었다.
'아, 황태자의 수하였군.'
오랜만에 아카데미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갈라하드가 입학할 때, 황태자는 졸업반이었다. 황태자와는 스치듯 본 게 전부였다.
황태자는 자기 기록을 깨고 최연소로 입학한 갈라하드를 고깝게 봤다.
물론, 직접 건드리지는 않았다.
황태자는 고귀한 황족이었으니까.
그저 갈라하드가 조금 거슬린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에 황태자의 수하들은 갈라하드를 못살게 굴었다.
놈은 그중 하나였다.
"아, 황태자를 쫓아다니던 놈이군. 이름이······ 침팬지였나?"
"번치다! 이놈! 괜히 모르는 척 하는군."
번치가 번들거리며 웃었다. 마법사보다는 불량배에 가까운 행실이었다.
"아, 번치. 그런 이름이었지. 침팬지가 더 어감이 좋네만-. 만나서 반갑네."
갈라하드는 익숙하게 손을 내밀었다. 번치라는 놈이 눈을 찡그리며 손을 잡지 않았다.
경계심이 제법인 놈이었다.
번치는 지팡이를 흔들며 웃었다.
"하, 네놈 참 운명이 기구하군. 황태자 전하에게 미움을 받은 것으로도 부족해서, 황녀님한테도 찍히다니-."
번치가 코를 킁킁거리며 웃었다. 갈라하드를 긁으려고 한 말 같았지만, 맞는 말이었다.
갈라하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네. 참 피곤한 인생일세."
"버릇이 상당히 나빠졌군. 아카데미 시절에는 귀여운 맛이 있었는데 말이야."
"미안하지만, 그때도 키는 내가 더 컸네. 자네는 그때도 땅딸막했지 않았나."
번치가 지팡이를 부들부들 떨었다. 갈라하드는 번치를 다시 살폈다.
'흰색 마탑의 상위 마법사라-,'
흰색 마탑은 사대 마탑으로 꼽힐 정도로 명망 높은 마탑이었다.
흰색 마탑은 실력이 좋다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혈연도 중요했다.
그러니 번치는 가문도 좋고 실력도 좋은 마법사라는 이야기였다.
'황태자 옆에 붙어 있을 정도니까.'
그다지 좋은 인성은 아니었지만, 황태자는 제왕의 자리에 걸맞은 인물이었다.
황태자는 인재를 아끼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그 주변의 경쟁률이 상당했다. 그런 황태자 옆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실력이 증명된 것과 다름없었다.
물론, 자기 기록을 깬 갈라하드는 고깝게 봤지만, 그건 황태자뿐만이 아니었다.
마법사들 대부분 갈라하드를 고깝게 보고 시샘했다.
그건 천재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
아무튼, 그런 황태자 옆에 있었을 정도면 놈의 실력은 보장된 것과 다름없었다.
꽤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분명 황태자를 따르던 놈인데, 왜 여기 있다는 말인가.
"아하, 황녀에게 붙은 걸 보면, 황태자와 연이 끊어졌나 보군?"
"뭐?! 이 개 같은 놈이······."
정중하게 물었는데 화내는 번치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자네는 여전히 교양이 없군."
그때, 익숙한 음악 소리가 들렸다. 시끄럽던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음악이 점점 고조될 때, 붉은 여인이 천천히 올라왔다.
드레스 차림의 황녀였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닿지 않는 듯, 황녀의 걸음걸이는 시원했다.
황녀가 나타나자 번치가 슬쩍 물러났다.
"이따 버릇을 고쳐주마. 아카데미 시절을 떠올리게 해주지."
"자네는 마법처럼 협박도 창의성이 없군."
"이익······!"
갈라하드에게 향한 황녀의 시선에 번치가 슬쩍 물러났다.
황녀는 자연스럽게 제일 높은 곳으로 향했다. 거대한 의자에 기대듯 앉아서 손짓했다. 기사가 잔을 가져다줬다.
이어서 뿔피리가 거칠게 울렸다. 기사들은 환호 대신 발을 굴렀다.
쿵! 발 구르기 사이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대공이었다.
대공이 나타나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두가 대공의 눈치를 살폈다.
이내 대공이 황녀의 반대쪽으로 올라갔다.
그때, 갈라하드의 옆으로 아드리안나가 다가왔다. 이마에 땀이 가득한 걸 보니, 방금까지 검을 잡은 듯했다.
참된 기사였다.
"아시는 분이십니까?"
아드리안나가 저 멀리 간 번치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문일세."
"아, 그렇군요-."
"반지는?"
갈라하드의 물음에 아드리안나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끄덕였다.
"어느 손이지?"
"예? 오른손에 꼈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오른손을 흔들었다. 건틀릿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위쪽에서 내려보는 황녀가 보였다.
황녀의 시선은 갈라하드에게 꽂혀 있었다.
그 큼지막한 붉은 눈동자에 갈라하드는-.
"손 좀 주게."
"······예?"
"아, 건틀릿은 벗지 말고. 급하네."
갈라하드의 재촉에 아드리안나는 손을 내밀었다.
건틀릿을 꼈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건틀릿의 서늘함 사이로 옅은 열기가 느껴졌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아드리안나가 다급하게 손을 빼려고 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작게 다그쳤다.
"가만히 좀 있게. 필요한 일이니까."
아드리안나는 그대로 굳었다.
마치 고장 난 것처럼.
갈라하드는 슬쩍 황녀를 확인했다.
황녀는-.
아주 짙게 웃고 있었다.
'됐군.'
갈라하드는 서늘한 목을 매만졌다.
그때,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그에 고개를 돌린 갈라하드는 작게 놀랐다.
고위 마물이 갈라하드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대공이었다.
대공이 갈라하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갈라하드도 대공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손을 놓지는 않았다.
필요한 일이었기에-.
두근.
'하급 알, 가만히 좀 있게.'
고통의 알이 몸을 떨며 항변했다.
*
'왜 내가 진행을-.'
결투의 진행을 맡게 된 테오도르는 텁텁한 목을 매만졌다.
'순서가··· 리암, 갈라하드, 아드리안나 순인가.'
원래는 갈라하드, 리암, 아드리안나 순이었는데, 선두로 옮겨달라는 리암의 요청이 있었다.
자신이 먼저 나가서 승기를 올리겠다는 주장이었다.
리암의 요청대로 승부의 순서를 바꿨다.
아드리안나의 상대는 황녀였다. 되도록 아드리안나의 승부까지 안 가는 게 좋았다.
'리암, 갈라하드로 깔끔하게 끝내는 게 좋겠지.'
리암의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갈라하드가 불안했지만, 마족까지 잡았던 걸 보면 질 리가 없었다.
둘이 이기면, 아드리안나까지 승부가 안 갈 것이다. 황족인 황녀와 얽혀봤자 좋을 게 없었다.
테오도르는 신호를 받기 위해 대공을 쳐다봤다.
대공의 시선은 다른 곳에 꽂혀 있었다.
그에 고개를 돌린 테오도르는 작게 경악했다. 갈라하드와 아드리안나가 대놓고 손을 잡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드리안나가 붙잡힌 모양새였다.
갈라하드는 여유롭게 앉아 있었고-.
'강단이 정말 대단하군.'
건틀릿을 꼈어도 대공 앞에서 아드리안나와 손을 잡다니-. 그 미친 용기에 테오도르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대공의 어깨가 조금씩 뒤틀렸다.
가만히 있으면, 대공이 갈라하드의 머리를 뽑을 게 분명했다.
테오도르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자, 첫 번째 결투는-."
"내가 하겠다."
어디선가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자리에서 일어난 황녀가 보였다.
황녀의 분위기가 아까와 달랐다. 그 붉은 머리가 마치 갈퀴처럼 사방으로 뻗쳐 있었고, 눈이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엄청난 눈웃음이었지만, 동시에 묘하게 서늘했다.
황녀는 어느새 중앙에 서 있었다. 제국측 기사가 다급하게 올라와 검을 건넸다.
화려하게 치장된 레이피어였다.
"나오거라."
황녀가 레이피어로 아드리안나를 가리켰다.
그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지목 당한 아드리안나는-.
여전히 굳어 있었다.
"아드리안나, 나오라는군."
갈라하드가 손을 놓자, 아드리안나가 눈을 끔벅였다.
이내 정신을 차린 아드리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중앙으로 향했다.
황녀와 마주 선 아드리안나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아드리안나가 예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중무장한 아드리안나와 달리 황녀는 드레스 차림이었다.
"갑옷 안 입으십니까."
아드리안나의 물음에 황녀가 입꼬리를 올렸다,
"필요 없다. 네 검이 내게 닿을 일은 없으니."
"그렇다면 결투를 진행할 수 없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말하자, 황녀의 눈이 더욱 휘어졌다.
"귀찮게 하는구나."
황녀가 드레스의 목덜미 부분을 잡고, 그대로 뜯었다.
그 파격적인 행동에 테오도르는 깜짝 놀랐다.
찢긴 드레스 안에 갑옷이 있었다. 윤기가 줄줄 흐르는 붉은 갑옷이었다.
몸에 딱 붙은 그 갑옷은 마치 파충류의 피부 같았다.
'이러면 진행이······.'
갑자기 꼬인 순서에 테오도르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미 둘이 올라온 상황이었다.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테오도르는 옆에 손짓했다.
뿔피리를 문 병사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뿔피리 소리가 거칠게 울리며, 결투의 시작을 알렸다.
그와 동시에 황녀가 움직였다.
아니, 사라졌다.
챙,
뒤늦게 날카로운 소리가 터졌다.
어느새 둘의 검이 교차해 있었다.
"좌측, 1점."
건틀릿에 새겨진 기다란 자국과-.
더욱 짙어진 황녀의 웃음에-.
아드리안나는 다급해졌다.
65화 묻고 더블
"좌측, 1점."
아드리안나는 오른쪽 건틀릿을 내려봤다.
두꺼운 건틀릿에 선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황녀가 정확히 아드리안나의 오른쪽 건틀릿을 노렸다.
문제는 오른손에 황녀가 준 반지를 꼈다는 것이었다.
황녀가 갈라하드에게 준 반지였다.
그걸 아드리안나가 낀 걸 보여줬다가는-.
'절대 안 돼.'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황녀와 눈이 마주쳤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에는 서늘한 기색이 만연했다.
'기억 못 하시는 건가.'
아드리안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드리안나는 어린 시절에 황녀와 반나절 정도 어울렸던 적 있었다.
아드리안나의 기억 속 황녀는 화사하고 따뜻하며, 품위 있고 여유로웠다.
황녀가 온다는 소식이 반가울 정도였다.
근데 다시 마주한 황녀는 예전과 달랐다.
황녀는 더 화사해졌지만, 더는 따듯하지 않았다.
'결투에 집중하자-.'
고개를 가벼이 저었다.
지금은 결투 중이었다.
다른 곳에 신경을 쏟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아드리안나는 검을 고쳐 잡으며 황녀의 움직임을 되새겼다.
황녀는 오러를 사용하지 않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그렇다고 놓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오러를 쓸 수 없다는 점이었다.
단순히 쓸 수 없는 수준이 아니라, 오러를 억지로 눌러야 했다.
그런 탓에 아드리안나의 반응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마치 오러 쓰는 기사를 오러 없이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그때, 황녀가 다시 자세를 잡았다.
왼발을 앞으로 살짝 내밀고 몸을 기울이는 자세였다.
그에 아드리안나도 자세를 잡았다,
후우-.
숨을 내쉬자 잡생각이 사라졌다.
황녀가 땅을 박찼다. 그 움직임이 얼마나 빠른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일직선으로 쏘아지는 황녀의 레이피어는 점이었다.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씹으며 검을 올려 쳤다.
아드리안나의 검이 레이피어의 중간을 쳤다.
퉁-. 묵직한 소리와 함께 레이피어가 휘어졌다.
그 순간 황녀의 손목이 움직였다.
마치 아드리안나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휘어진 황녀의 레이피어가 그대로 아드리안나의 검을 긁었다.
처음 봤다면 당황했을 만한 검술이었지만, 이미 갈라하드가 보여준 검이었다.
아드리안나는 검을 당기며 어깨를 틀었다.
무게 중심이 움직이며, 레이피어를 잡아당겼다.
다만, 황녀의 검이 갈라하드의 것보다 빨랐다.
그것도 상당히-.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굳었다.
오른쪽 건틀릿에 선이 하나 더 새져겨 있었다.
방금의 것과 거의 비슷한 위치였다.
황녀는 노골적으로 오른손을 노리고 있었다.
마치 자르려는 것처럼.
"좌측, 1점!"
황녀의 입꼬리가 더욱 깊게 올라갔다.
아드리안나는 방금의 경합을 복기하며 오른손을 털었다.
수준 이상의 기사는 검을 나누면 상대를 알 수 있었다.
검을 나누는 건 대화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대화는 거짓으로 꾸밀 수 있지만, 검은 꾸밀 수 없으니까.
황녀의 검은-.
'······지독해.'
독이 가득 있는 통에 오랜 시간 가둔 독사처럼 지독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때, 황녀가 레이피어로 아드리안나를 가리키며 활짝 웃었다.
같은 여인이 보기에도 울렁거릴 정도로 화사한 눈웃음이었다.
[황녀의 검은 나보다 빠를 걸세.]
갈라하드와의 훈련은 상당한 도움이 됐다.
실제로 황녀의 검은 갈라하드가 보여준 것과 상당히 흡사했다.
그것도 아주-.
검을 그 정도로 흉내 낼 수 있다는 건 하루 이틀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사이였길래.'
아드리안나는 검을 고쳐 잡으며 상념을 털었다.
지금은 집중할 때였다.
*
"좌측, 1점!"
또다시 황녀의 득점이었다.
"황녀가 소드 마스터였습니까?"
"그게 무슨 길버튼 경이 할 법한 소리인가."
"예?"
"아, 길버튼 경이었군."
"그게 무슨-. 아니, 무슨 검술이 저렇게 뛰어납니까?"
"지고한 황족이니까."
"······황족은 다 저럽니까?"
"살아남은 황족은 다 저렇지. 그리고 저 정도면 약한 편일세."
길버튼의 얼굴에 심각함이 떠올랐다. 이제야 와닿는 듯했다.
황녀가 여유롭게 자리로 돌아갔다.
아드리안나가 오른손을 짧게 털었다. 건틀릿의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두 번 정도인가.'
조금만 더 두드리면 건틀릿이 부서질 듯했다.
아무리 아드리안나가 천재여도, 결투는 황녀의 영역이었다.
아드리안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황녀도 천재 소리를 듣던 여인이었다.
"아무리 봐도 움직임이 너무 빠릅니다. 몰래 오러 쓰는 거 아닙니까?"
"말하지 않았나. 황족이라고."
"황족이랑 움직임이 빠른 게 무슨 상관입니까?"
"황족은 아주 지고하니까."
길버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해 못 하는 길버튼에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설명을 덧붙였다.
"황족은 지고해야 하네. 그를 위해 어릴 때부터 몸에 좋은 것들을 먹지. 아주 많이. 황녀에 들어간 돈이면, 북부에서 대대 하나를 만들 수 있을 걸세."
"에이, 거짓말하지 마십쇼."
"미안하지만,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네."
길버튼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저러다 지는 거 아닙니까?"
길버튼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길버튼이 저런 소리를 할 정도였으니, 다른 이들은 어떻겠나.
연속으로 이어진 패배에 주변 분위기는 이미 초상집이었다.
북부 측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 시끄럽던 놈들이 응원조차 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황녀가 3점을 내는 동안 아드리안나는 1점도 못 냈으니까.
5점을 먼저 내는 쪽이 승리였으니, 압도적인 승부라고 해도 무방했다.
다만-.
"이길 걸세."
승부는 5점까지 안 갈 것이다.
"말씀하신 대로 아드리안나님 쪽에 전부 걸었습니다."
"잘했네, 톰."
"뭘 전부 겁니까?"
"특무대 공금. 아, 길버튼 경, 자네 봉급도 걸었네."
"······예?!"
"왜 소리치나 길버튼 경. 설마 아드리안나를 못 믿는 건가?"
"그건 아니지만-. 아니, 황녀님이랑 아드리안나님의 승부에 내기를 여는 미친놈이 어딨습니까?"
"저깄네."
"어떤 미친-."
거칠게 일어나던 길버튼이 우뚝 멈췄다. 이어서 뚝뚝 끊기듯 고개를 다시 돌렸다.
고위 마물··· 아니, 대공이 노려보고 있었기에.
갈라하드는 슬쩍 길버튼 뒤로 얼굴을 숨겼다.
"대공 전하께서 여셨네."
"그러면 대공 전하는 황녀한테 거셨다는 겁니까?"
"참으로 매정한 아버지더군."
길버튼이 나지막한 침음성을 흘렸다.
"아니, 대공 전하가 황녀 쪽에 거셨다면, 큰일 난 거 아닙니까?"
"진정하게. 나는 승부에서 져본 적이 몇 번 없네. 승부사라고 할 수 있지."
갈라하드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길버튼은 작게 안도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그건 져본 적 있다는 소리 아닙니까-."
그때, 경기가 재개됐다.
황녀가 땅을 박찼다.
그에 아드리안나가 검을 움직였다.
검이 다시 얽혔다.
날카로운 칼붙이 소리가 연신 터졌다.
아드리안나가 하나씩 황녀의 검을 쳐냈다.
아드리안나의 검은 정직했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에 반해 황녀의 검은 화려했다. 살아있는 뱀처럼 아드리안나를 노렸다.
둘의 검이 계속해서 얽혔다.
아드리안나는 황녀의 검을 하나씩 천천히 쳐냈다.
불똥이 연달아 튀었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처음으로 전진했다.
황녀의 검을 쳐내는 대신 아래로 눌렀다.
그리고-.
챙. 아드리안나의 검이 황녀의 팔뚝을 긁었다.
붉은 갑주에 작은 흠집이 새겨졌다.
"우측, 1점!"
북부 측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어어···? 톰! 제대로 걸었나?!"
길버튼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길버튼의 물음에 톰이 자신있게 끄덕였다.
겨우 1점을 딴 거지만, 아드리안나에 대한 믿음이 올라오는 듯했다.
하긴 북부의 영웅으로 취급 받는 아드리안나였으니까.
"역시 아드리안나님이시다!"
여기저기서 환호가 쏟아졌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아드리안나를 살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내려가 있었다.
방금 점수를 낸 이의 반응으로 적절하지 않았다.
아드리안나도 느꼈을 것이다.
황녀가 일부러 내줬다는 걸.
화가 잔뜩 난 황녀는 이기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음미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그때, 황녀가 레이피어를 흔들었다.
마치 한 번 덤벼보라는 듯-.
패배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농락까지 당한 셈이었지만, 아드리안나는 정중히 예를 표했다.
이번에는 아드리안나가 땅을 박찼다.
"우측, 1점."
환호가 다시금 터졌다.
*
"우측, 1점!"
"3 대 3! 다 따라잡았다! 젠장!"
길버튼이 투박한 욕설을 퍼부으며 환호했다.
갑자기 따라잡은 점수에 모두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모두가 환호했지만, 역전의 주인공인 아드리안나의 얼굴은 어두웠다.
황녀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때, 황녀가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황녀의 붉은 눈동자가 꼭 속삭이는 듯했다.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로 대놓고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부인, 거의 다 왔네! 힘내게!"
목청 높여 소리쳤다.
아드리안나는 한껏 집중했는지, 그저 검을 고쳐 잡았다.
황녀의 기세가 날카로워졌다.
멀리 있는 갈라하드도 느껴질 정도로-.
그때, 병사가 승부의 재개를 알렸다.
황녀가 전과 달리 땅을 두 번 박찼다.
그 틈이 살짝 어긋나는 발동작에 황녀의 신형이 흔들렸다.
아드리안나에게 알려주지 않은 기술이 하나 있었다.
그 이유는 두 개였다.
어차피 알아도 못 막고, 막을 필요도 없었다.
그때, 아드리안나의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오-.'
아드리안나는 느려진 레이피어를 막지 않고 오히려 검을 찔렀다.
이는 계산에서 나온 게 아닌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오러를 전보다 더 잘 다루는군.'
그 사이에 실력이 더 늘었다니. 역시 천재였다.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다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황녀는 오히려 레이피어를 깊게 밀며, 가드 부분으로 아드리안나의 검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쳐올렸다.
예상하기 힘든 동작이었다.
그에 아드리안나의 중앙이 훤히 열렸다.
심장 부근에 상처를 내면 2점이었다.
승부의 끝을 낼 수 있는 순간이었다.
다만, 황녀는 심장이 아닌 아드리안나의 오른쪽 건틀릿을 노렸다.
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건틀릿 파편이 위로 튀었다.
건틀릿의 이음새가 바닥을 뒹굴었다.
한 박자 늦게 건틀릿이 부서지듯 쪼개졌다.
쿵, 건틀릿이 떨어지며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뚝-.
하얀 아드리안나의 손목에서 떨어진 붉은 피가 건틀릿을 적셨다.
그때, 황녀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입꼬리가 마구 흔들렸다. 마치 웃음을 참기 힘든 사람처럼.
이내 황녀의 붉은 입술이 크게 찢어졌다.
그 사이로-.
"하하하하!"
격렬한 웃음이 터졌다.
웃음소리가 어찌나 시원하고 까랑까랑한지 구경하던 이들이 흠칫 놀랐다.
예상보다 더 격한 반응이었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다급하게 손을 뒤로 숨겼다. 반지의 위치를 보고 깨달았다.
'약지에 꼈군.'
갈라하드는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하하!"
황녀가 거칠게 웃으며 검을 돌렸다.
검에서 순식간에 오러가 타올랐다.
황녀의 오러는-.
"······저거 분홍색입니까?"
길버튼의 물음이 끝나기 전에, 황녀가 움직였다.
분홍색 점이 아드리안나를 노렸다.
'끝났군.'
결투에서 오러는 금지였다.
오러를 꺼내면 점수와 상관없이 패배였다.
다만, 갈라하드가 황녀의 패배를 확신한 건 단순히 규칙 때문이 아니었다.
그때, 아드리안나의 검에서 오러가 가득 일어났다.
순백의 오러였다.
단 한 방울의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순백의 오러는 붉음과 흰색이 섞인 분홍색을 가벼이 눌렀다.
황실에서 만든 오러와 전선에서 평생 담금질한 오러-. 둘 중 무엇이 더 단단한 신념인지는 명백했다.
결투가 황녀의 영역이라면, 오러는 아드리안나의 영역이었다.
승부는 순식간이었다.
아드리안나의 검이 황녀의 심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
아드리안나가 입을 벙끗거렸다.
그 무심한 얼굴이 깨지며, 당황이 떠올랐다.
정신을 차린 아드리안나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내 패배다."
황녀가 검을 놓고 물러났다.
아드리안나는 그 등에 대고-.
"가르침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였다.
'순수 악이군.'
아드리안나는 진심이겠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효과적인 도발이었다.
*
"두 번째 경기는 2대대 대장 리암과······."
"멋진 승부였네. 아니, 왜 또 도끼눈인가?"
"이건 옳지 않습니다."
아드리안나의 질책에 갈라하드는 쓰게 웃었다.
"소중한 선물을 이용하여, 상대의 흥분을 유발하다니-. 결투에 걸맞지 않은 행동이었습니다."
"맞네, 상당히 치졸했지."
갈라하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드리안나의 눈이 조금 커졌다.
"다만, 그게 아니었다면 자네는 졌을 걸세."
"그건 제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패배는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매번 승리만 할 수 없습니다."
정론이었다.
북부의 영웅에게는 패배가 조금 무거울 텐데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니-.
괜히 오러가 순백인 게 아니었다.
"제국식 결투에는 흥분을 유발하는 것도 포함이라네. 수도에서는 더한 것도 하지. 상대의 흥분을 유도하기 위해 부모 욕을 하는 기사도 있네. 아주 끝내주게 하더군."
"다른 이들이 그릇된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릇된 행동이 정당화되는 건 아닙니다."
귀찮을 정도로 정직한 이였다.
그렇기에 마족의 왕을 찌를 검일 것이다.
반지 선물로 흔드는 건 제국식 결투에서 반칙이 아니었지만, 굳이 더 긁을 필요가 없었다.
"알았네, 미안하네."
순순히 사과하자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저었다.
"사과할 대상은 제가 아닙니다."
그 시선은 황녀를 향해 있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손을 흔들었다.
황녀는 가만히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깜박이지 않아 잔뜩 충혈된 눈으로-.
"정식으로 사과하겠네."
"알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 옆에 앉았다. 도끼눈은 풀렸지만, 눈썹이 여전히 내려가 있었다.
"그리고 결투에 내가 걸리지 않았나. 어떻게든 이기고 싶었네. 행여라도 지면, 자네 손을 못 잡지 않나. 나도 절박했네."
진심을 담아 말하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자네 없는 수도보다는 차라리 자네가 있는 척박하고 추우면서 야만적인 북부가 낫네."
"······그만하셔도 됩니다. 이해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제 잘못도 있으니까요."
작게 한숨을 쉰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갈라하드의 눈이 빛났다.
"맞는 말이군."
"···예?"
"생각해보니 제안은 내가 했지만, 시행한 건 자네 아닌가?"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흔들렸다.
"아니-."
"심지어 약지에 꼈지. 자네, 그렇게 안 봤는데 심계가 아주 깊군."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아마 누군가 점수를 딴 듯했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쳐다봤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아주 제대로 농락했어. 이렇게 약지를 삐쭉- 내밀면서."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목소리를 높이는 걸 보니, 켕기나 보군."
"아니-."
이내 아드리안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뭘 원하십니까."
"이런 누가 들으면, 내가 뭘 원해서 말한 줄 알겠군."
아드리안나가 눈을 잠시 가늘게 떴다.
"다만, 자네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지. 잠깐 손 좀 줘보게. 아까 상처 난 것 같던데."
"곧 결투하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필요한 걸세."
결투에 필요해서 손을 잡겠다니-.
아드리안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올라간 입꼬리를 보니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듯했다.
"손."
아드리안나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었다.
*
"자, 마지막 경기는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와 번치입니다."
"그럼 다녀오겠네."
아드리안나는 비틀거리면서 경기장으로 올라가는 갈라하드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갈라하드가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손이 얼얼했다.
'왜?'
아드리안나는 붉게 변한 손을 보며 중얼거렸다.
갈라하드는 똑똑한 자였다. 그런 갈라하드가 결투를 앞두고 아드리안나의 손을 잡았다.
그것도 평소보다 오랫동안-.
그건 전력을 까먹는 행위였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아드리안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때, 길버튼이 다가왔다.
길버튼의 얼굴이 평소보다 훨씬 좋았다.
꼭 물어봐달라는 얼굴이었기에, 아드리안나는 입을 열었다.
"좋은 일이라도 있나?"
"아, 크게 땄습니다."
"땄다?"
"대장이 아드리안나님 경기에 돈을 걸었지 뭡니까."
길버튼이 음흉하게 흐흐- 웃었다.
대공은 내기하는 걸 좋아했으니, 대공이 열었을 것이다.
"대장이 제 봉급까지 더 해서 전 재산을 걸었을 때는 조금 놀랐지만-."
길버튼이 음흉하게 웃었다.
웃는 걸 보니 딴 게 분명했다.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에게 전 재산을 걸었다는 이야기였으니, 대공은 황녀에게 걸었다는 뜻이었다.
대공이 황녀에게 걸었다는 것에, 아드리안나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런데 갈라하드는 전 재산을 걸었다니-.
답답하면서 묘하게 간지러웠다.
'전재산-.'
아드리안나는 작게 기침했다.
그때, 길버튼이 딴 돈을 전부 갈라하드에게 다시 걸었다고 자랑했다.
그에 아드리안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갈라하드가 이길 생각이었으면, 굳이 아드리안나의 손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게 분명했다.
아마도 그건-.
"흐흐. 나는 이제 부자다."
아드리안나는 길버튼을 외면했다.
66화 벽
"흐흐······."
옆에서 계속 웃음을 흘리는 길버튼에 톰은 슬쩍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무슨 좋은 일 있으십니까?"
"아, 전부 걸었다."
"전부 말씀이십니까?"
"그래, 흐흐-. 나는 이제 부자다."
길버튼이 낮은 웃음을 다시금 흘렸다.
잔뜩 신난 길버튼의 모습에 톰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주 이쁘고 잘 빠진 검을 살 거다."
"······혹시 어디에 거셨습니까?"
"멍청한 질문을 하는군, 당연히 대장한테 걸었지."
길버튼이 혀를 차며 대답했다.
"마족도 불태우는 대장인데, 그 상대가 마법사라면 질 리가 없지. 배당이 낮은 건 좀 아쉽지만, 대신 판돈을 가득 걸었으니까."
길버튼이 어울리지 않게 논리적으로 말했다.
그에 톰은 더 불안했다.
톰도 당연히 갈라하드의 승리를 확신했다. 애초에 갈라하드가 지는 건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때, 갈라하드가 경기장에 올라갔다. 갈라하드는 톰이 만들어준 코트를 벗고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마물 코트는 왜 안 입었지? 그거 마법 안 통한다며."
"아, 제국식 마법 결투는 조건이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복식이 정해져 있는데, 거기에 마물 코트가 없어서 일 겁니다."
"그걸 톰 네가 어떻게 알지?"
"대장님의 결투라서 좀 알아봤습니다."
"그렇군, 근데 규칙이 많다니. 역시 마법사는 참 귀찮은 놈들이군. 검을 들면 걍 강한 놈이 이기는 건데 말이야."
길버튼의 중얼거림에 톰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 옆에 있던 기사가 길버튼에게 경례를 올렸다.
길버튼은 차가운 얼굴로 경례를 받았다.
그건 톰이 소문으로 듣던 전선의 길버튼이었다.
"크흠, 그래서 대장이 이번에도 걸었나?"
물론, 금세 특무대의 길버튼으로 돌아왔다.
"그게 좀 이상합니다. 이번에는 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경기 두 번을 연달아 맞춘 갈라하드였다. 그런데 자신의 경기에는 걸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래?"
길버튼의 얼굴이 묘해졌다.
이제 뭔가 잘못된 걸 느끼는 건가-.
"흐흐, 혼자만 먹을 생각이었군. 내 눈은 못 속이지!"
음흉하게 웃는 길버튼에 톰은 슬쩍 고개를 저었다.
때마침 흰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경기장에 올라왔다.
****
'더 따가워졌군.'
갈라하드는 저릿한 손을 털며 중얼거렸다.
고통의 알이 격렬하게 끄덕였다. 고통의 알이 바짝 쫄아 있었다.
아드리안나의 마나를 불태우는 성질은 상대가 강할수록 더 강해졌다.
고통의 알 등급이 하나 올라가자, 전과 비교도 하기 힘든 고통이 찾아왔다.
갈라하드가 비명을 지를 뻔했을 정도였다.
말도 안되는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금만 더 잡았다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대신, 그 대가인지 아드리안나의 성질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상성이라.'
갈라하드는 텁텁한 단어를 중얼거렸다.
아드리안나의 성질에 대해 슬슬 알 것 같았다.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격렬하게 항변했다. 왜 그런 미친 짓을 했냐고 따지는 듯했다.
'필요하니까.'
갈라하드는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겼다. 시선을 돌려 왼쪽 위를 쳐다봤다.
그곳에 황녀가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황녀의 눈은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결투에서 지면 황녀가 순순히 물러날까? 그럴 리가 없었다.
황녀는 지독하게 미친 여인이었다.
그런 황녀가 결투에서 곱게 물러난 이유는 하나였다.
'내 손에 맡기겠다는 거겠지.'
갈라하드의 판단을 기다리는 것이다.
참으로 악독한 여인이었다.
여기서 갈라하드가 이기면-.
'그건 돌이킬 수 없다.'
끔찍한 결과가 벌어질 게 분명했다.
황녀를 물려도 끝이 아니었다. 제국은 그를 빌미로 황녀를 끌어내릴 것이고, 동시에 북부도 압박할 게 분명했다.
황녀는 황실과 연관된 카드였다.
버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질 수도 없었다.
대공이 시퍼런 눈으로 갈라하드를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대공과 황녀가 목을 겨누고 있는 듯했다.
둘 중 뭐를 선택해도 최악이었다.
갈라하드는 서늘한 목을 매만졌다.
"지팡이도 없나?"
뾰족한 목소리에 갈라하드의 상념이 깨졌다. 번치의 얼굴에 경멸이 가득했다.
애초에 상대도 흰색 마탑의 상위 마법사였다. 수도에서 꽤 이름을 알린 실력자였다.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놈이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아직 두 발이 멀쩡해서 말일세. 지팡이는 필요 없네."
"뭐라-. 이 멍청한 놈이 여전히 뻗대는구나."
번치의 뾰족한 반문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귀족이란 놈들은 참 유치했다.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린놈이 아카데미에 들어왔다고 수준 낮은 괴롭힘을 할 정도로-.
그때, 옆에서 병사가 뿔피리를 불었다.
"버릇을 고쳐 주마! 불의 대지!"
번치의 지팡이 끝에서 거대한 불이 뿜어졌다. 그 불은 마치 대지를 좀먹듯 사방으로 퍼졌다.
'아, 불 계열이었군.'
갈라하드는 번치의 특성을 떠올렸다.
번치는 불에 특화된 마법사였다.
'불의 대지라. 주문을 미리 외우고 있었나.'
불의 대지는 주변을 불로 채우는 영역 마법이었다.
불의 대지를 깔면, 불 마법을 펼치기 한결 쉽고 그 위력도 강화되었다. 보조 성격이 강한 마법이었다.
'제법이군.'
흥분하여 공격하는 게 아니라, 토대부터 구축하다니, 마법사 결투에 제법 익숙한 놈이 분명했다.
불의 대지는 놈의 마법이었으니, 같은 불 마법은 오히려 간섭 받기 쉬웠다.
그리고-.
'최대한 화려해야 하니까.'
역시 불에는 얼음이 정석이었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튕겼다.
"얼어붙은 대지."
오랜만에 마나가 성큼 빠졌다. 갈라하드의 주변으로 서늘한 한기가 퍼졌다.
거칠게 타오르는 불이 한기에 밀려났다.
갈라하드는 그 속도를 가늠했다.
번치가 지팡이로 갈라하드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불타는 뱀-."
지팡이 끝에서 굵은 불줄기가 솟구쳤다. 용암을 주물러 만든 듯한 끈적이는 불이 나오자, 주변에 깔린 불이 빨리듯 들러붙었다.
뱀의 크기가 순식간에 부풀었다. 뱀보다 용에 가까운 불의 형상이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불타는 뱀이라.'
갈라하드는 묘한 흥미를 느끼며 손가락을 튕겼다.
"얼어붙은 뱀."
서릿발이 뭉치면서 크기를 부풀렸다.
어느새 얼음을 깎아 만든 뱀이 갈라하드의 뒤에 서 있었다.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그때, 관중석 사이에서 그웬이 보였다. 그웬은 멍한 눈으로 마법을 보며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웬의 눈이 몽롱했다.
"좋은 기회일세. 잘 보게나."
불로 된 큼지막한 뱀이 갈라하드를 향해 짓쳐 들었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불과 얼음이 중간에서 부딪혔다. 불이 크게 일렁이며 순식간에 크기를 부풀렸다. 얼음 뒤로 조각들이 튀며 서늘한 기운이 퍼졌다.
콰앙! 묵직한 소리가 터졌다.
'이런-.'
불용의 형태가 흐트러졌다.
예상보다 수준이 낮았다.
아니-.
'내 수준이 지나치게 높아졌군.'
계산의 착오였다. 갈라하드의 눈이 구겨졌다.
황급히 마법을 밀어 넣었다. 얼음용이 불용을 밀며 전진했다.
불용이 불의 대지까지 밀리자 기세가 일변했다. 얼음용은 불의 대지에서 힘이 약해졌고, 불용은 크기를 키웠다.
갈라하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마법을 살폈다. 들어가는 마나의 양을 비교했다.
'차이가 크군.'
마나를 적극적으로 소모할 필요가 있었다.
"폭발화구-!"
"얼음창."
이번에는 마법의 속도를 더 올렸다. 불의 대지에서 두 마법이 충돌했다.
폭발화구가 흩어졌다. 얼음창이 그를 뚫고 전진하다가 녹아내렸다.
아직도 넘쳤다. 갈라하드는 정밀하게 마나를 조정했다. 농도를 낮추고 양을 늘렸다. 일부러 크기를 부풀렸다.
그때, 번치와 눈이 마주쳤다.
놈의 얼굴이 가득 구겨져 있었다.
'눈치가 빠른 편이군.'
다만, 놈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미 계산은 끝난 뒤였기에.
갈라하드의 계산은 정확했다.
****
'미친-.'
번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처음에는 멍청한 놈이라 생각했다.
번치가 불의 대지를 시전하자, 놈은 따라서 얼어붙은 대지를 시전했다. 이는 가장 멍청한 대처였다.
번치는 불 특화 마법사였다. 흰색 마탑에도 불 마법으로 들어갔고, 평생을 불 계열에 매진한 마법사였다.
그런 번치에게 상성으로 덤비다니-.
최악의 수였다.
그런데 놈의 얼어붙은 대지가 불의 대지를 밀어냈다.
경합을 이어갈수록 이상함은 더욱 커졌다.
놈은 가만히 번치를 응시했다.
마치-.
'내 마법을 기다리는군.'
번치는 이를 악물며 연달아 마법을 시전했다.
그럴 때마다 놈은 똑같은 위계의 얼음 속성으로 받아쳤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경합 부분이 점점 놈에게 가까워졌다.
번치는 놈을 밀어낸다고 생각했다.
다만, 주문을 더 외우고 마나를 더 쏟아도 마법이 소멸하는 곳은 바뀌지 않았다.
영역이 겹치는 부분, 그곳에서 마법이 정확히 소멸했다.
그제야 번치는 깨달았다.
놈이 자신의 마법에 정확히 맞추고 있음을.
"젠장! 마법이란 거 끝내주는군!"
"와-. 둘 수준이 같나 보군! 이런 멋진 승부라니-."
연달아 터지는 마법에 사방에서 환호가 쏟아졌다.
계속해서 마법이 얽히며 터져나갔다.
그들에게는 팽팽한 싸움으로 보일 것이다.
번치는 그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아니, 느끼고 있었다.
마법끼리 부딪쳤을 때, 반응은 크게 세 가지였다.
잡아먹거나, 잡아 먹히거나, 상충 되어 사라지던가-.
대부분 잡아먹거나 잡아먹혔다.
그도 그럴 게 상충 되기 위해서는 두 마법에 들어간 마나가 같아야 했다.
그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계속 상충 되어 사라졌다.
단순히 둘의 마나가 같기 때문일까.
'아니, 놈이 정확히 내 마나에 맞추고 있다.'
번치는 고개를 털어서 괴상한 의문을 접었다.
'지랄하지 마라-. 나는 흰색 마탑의 번치다!'
이를 악물며 마나를 쏟아 넣었다.
다만, 결과는 똑같았다.
정확하게 영역 사이에서 부서지는 둘의 마법-.
왜 이런 짓을 벌인다는 말인가.
이길 거라면 그냥 깔끔하게 이기면 될 것을-.
굳이 이런 치욕을 주다니.
그때, 번치는 심장 어림에서 뻐근함을 느꼈다.
마나가 바닥나고 있다는 신호였다.
'설마-.'
"얼어붙은 창."
얼음으로 된 창이 번치를 노렸다.
정확히 머리였다.
주문이 아닌 다른 말을 뱉었다가는 미간이 꿰뚫릴 게 분명했다.
번치는 다급하게 주문을 외웠다.
마법은 정확히 영역의 경계에서 부서졌다.
잠시 숨 돌릴 시간 뒤에 다시 쏘아지는 얼음 창-.
놈은 번치의 마법 시전까지 고려해주고 있었다.
마치 수준에 맞춰서 대결해주는 선생처럼-.
'감히 나를 상대로! 어림도 없다.'
번치는 지팡이를 세게 쥐었다.
그때, 이번에는 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얼어붙은 창일세."
자신의 마법을 알려주는 것처럼 친절하게 주문을 읊었다.
굵직한 얼음 창이 번치를 노렸다. 번치는 주문을 읊을 수밖에 없었다.
두 마법이 다시금 부딪혔고, 멋들어지게 사라졌다.
보는 이들이 감탄을 숨길 수 없을 정도였다.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으음, 얼어붙은 대포가 좋겠군."
"얼어붙은 화살. 열 개."
"얼음벽으로 잠깐 숨 좀 돌려야겠군."
놈이 주문에 사족을 붙이기 시작했다.
혼잣말 같지만, 그건 번치에게 하는 말이었다.
수를 알려줄 테니 놓치지 말고 잘 따라오라고-.
아주 친절한 선생님처럼 하나하나 알려줬다.
그제야 번치는 놈의 의도를 파악했다.
놈은 번치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아카데미 시절의 복수를 하려는 게 분명했다.
'감히! 감히!!'
아카데미 시절에는 자기와 눈도 못 마주치던 꼬맹이였다.
그런 꼬맹이가 자신을 가지고 놀다니-.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나는 흰색 마탑의 번치다!'
번치는 이를 악물었다.
다만, 흥분은 마법사에게 저주였다.
번치는 냉정을 유지하며 한 수를 준비했다.
'감히 오만을 떨다니.'
자신의 마나를 예상하여 그에 맞춘다면, 깨부수면 될 일이었다.
번치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었다.
번치는 지팡이를 고쳐 잡고 주문을 외웠다.
놈에게 들리지 않게 아주 조용히-.
그리고 지팡이에서는 아주 기본적인 마법 불덩이를 뿌렸다.
불덩이로 놈의 주의를 끌고, 회심의 일격을 가할 생각이었다.
'이중 주문은 예상 못 했겠지-.'
이중 주문은 번치가 숨긴 비수였다.
'네 오만이 네 목을 쥔 거다.'
놈이 불덩이를 향해 얼음 화살을 날릴 때, 번치의 입이 열렸다.
"모든 걸 녹이는 불-."
번치의 지팡이에서 거대한 불줄기가 쏘아졌다.
번치가 가진 마법 중에서 가장 빠르면서도 위력이 준수한 마법이었다.
불덩이에 주의가 끌린 놈이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웃어?'
놈의 올라간 입꼬리에 번치는 묘한 서늘함을 느꼈다.
그때-.
"모든 걸 얼리는 꽃."
놈이 손가락을 튕겼다.
놈에게서 피어난 얼음꽃은 불덩이를 먹고, 불줄기와 부딪혔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불줄기와 꽃은 동시에 사라졌다.
그 찰나에 불덩이와 불줄기의 마나를 계산하여, 둘을 합한 마나로 마법을 구성했다는 뜻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다만, 놈의 올라간 입꼬리가 그를 증명했다.
"재밌군. 자, 이번에는 얼음 화살일세."
번치는 항거할 수 없는 지독한 벽을 느꼈다.
****
'설마-.'
황녀의 기사 데반은 눈을 부릅떴다.
마법이 쏘아지고 부서지고 또 쏘아지고 또 부서졌다.
경기장은 이미 형태를 잃어버렸다.
불이 한가득 피어올랐으며, 반대로 서릿발이 몰아쳤다.
불로 된 용이 일어났으며, 그에 얼음으로 된 용이 입을 쩍- 벌렸다.
그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결투에 미친 듯한 환호가 쏟아졌다.
한 치의 물러남도 없는 팽팽한 승부가 이어졌다.
번치는 흰색 마탑의 상위 마법사였지만, 그 상대가 갈라하드였다. 마법사인 이상 갈라하드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이런 치열한 결투라니-.
데반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번치가 그 정도로 강자였나?'
실제로 보이는 위력도 강력했다.
그때, 황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아아······."
황녀의 입에서 뜨거운 울음이 터졌다. 그 눈가로 눈물이 길게 흘렀다.
'왜?'
갈라하드가 고전하는 상황에 저리 기뻐하시다니-.
그때-.
"감히-!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번치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 지팡이를 타고 자그마한 불덩어리가 떠올랐다.
그건 전의 것들보다 훨씬 작은 크기였지만, 그 존재감이 달랐다.
주변에 남아있던 불길이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아귀불."
거대한 불이 번치의 지팡이에 자리했다. 그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아래의 땅이 녹아내릴 정도였다.
그에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수정처럼 깨끗한 얼음이 떠올랐다.
주변의 서릿발이 빨려 들어갔다. 이내 큼지막한 크기의 얼음이 자리했다.
"지랄하지 마라!"
번치가 거친 욕설을 하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두 거대한 마법이 중앙에서 부딪혔다.
콰아아앙!
굉음이 조금 뒤에 터졌다. 경기장이 거칠게 흔들렸다. 부서진 얼음 파편이 사방으로 튀겼고, 불길이 거칠게 흩날렸다.
데반이 놀라서 황녀 앞을 막을 정도로 거대한 폭발이었다. 그에 병사 몇이 뒤로 날아갔다.
이내 경기장에 자욱한 연기가 깔렸다.
무거운 정적이 자리했다. 환호는 없었다.
"쯧."
대공이 거대한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바람이 안개를 밀어냈다.
안개 사이로 보이는 모습은 처참했다.
난장판이 된 경기장에 번치가 지팡이에 기대어 서 있었다.
번치의 얼굴에 핏줄이 가득 올라와 있었다. 실핏줄이 전부 터졌는지 눈이 붉었다. 눈가로 피가 뚝뚝 흘렀다.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마나 탈진-.'
마법사의 사형 선고라고 불리는 증상이었다. 그 고통이 지옥에 떨어진 것과 버금가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면 갈라하드는-.'
갈라하드의 상태도 똑같았다. 붉은 눈동자에 가득 올라온 실핏줄, 고통에 못 이겨서 달달 떨리는 몸-. 의연하게 서 있었지만, 마나 탈진이 분명했다.
그때, 번치와 갈라하드가 쓰러졌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였다.
쿵.
전의 굉음들과 비교하기 힘든 쇠약한 소리가 끝을 알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네가 정녕 나를 미치게 하는구나."
황녀의 울음기 섞인 중얼거림에 데반은 상황을 깨달았다.
'무승부를 만들었어?'
기사의 결투와 달리 마법사의 결투에는 무승부가 존재했다.
둘 다 마나 탈진 상태에 빠지면 무승부였다.
다만, 애초에 마나 양이 같을 수도 없고, 같다고 한들 각 마법에 배분한 마나가 달랐다.
더불어 마나 탈진은 그 악명이 높았다. 마나 탈진을 겪을 바에는 차라리 기권하겠다는 게 정론일 정도였다.
그런 탓에 무승부는 천 번의 결투에서 한 번 나오기 힘들었다.
그런데 무승부를 만들었다니-.
그 악명 높은 마나 탈진을 기꺼이 뒤집어썼다는 이야기였다.
"무··· 무승부입니다."
심판이 뒤늦게 결과를 발표했다.
그때, 황녀가 의자를 박찼다.
어느새 황녀는 경기장에 올라가 있었다.
그 바로 앞에 아드리안나가 있었다.
갈라하드를 두고 아드리안나와 황녀가 마주 섰다.
아드리안나가 먼저 도착했지만, 손을 뻗지 못했다.
건틀릿이 없었기에, 만질 수 없었다.
그런 아드리안나를 보며 황녀는 갈라하드를 양손으로 안았다.
그리고 자랑하듯 갈라하드를 더욱 깊게 품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거칠게 올라갔다.
믿을 수 없는 결과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숨도 조심하면서 눈치를 살필 때-.
누군가 큰 소리로 절규했다.
"으아아아악! 나는 망했다!"
길버튼이었다.
67화 부축
"바른대로 말해!"
"히··· 히익······! 왜 저한테 그러세요!"
기사의 호통에 흰색 마탑 마법사 번치의 조수인 프렌은 지레 놀라 움츠러들었다.
"길버튼 경, 내가 맡겠다."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금발의 여인이 기사를 말렸다. 길버튼이라 불린 기사가 뒤로 물러났다.
"나는 1대대의 대장 아드리안나다."
프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의 이름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부모의 이름을 잊으면 잊었지, 어찌 저런 미인의 이름을 잊겠는가.
"이번 승부에 관해서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예! 뭐든 대답하겠습니다!"
프렌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먼저 마법사 결투에 무승부가 존재하는가?"
"네! 아주 극히 드문 경우지만, 마법사 둘이 동시에 마나 탈진이 일어나면 무승부로 결정됩니다."
"······마나 탈진이라는 건?"
"마나를 남김없이 쓰는 겁니다! 마법과 상관없이 생존에 필요한 마나가 존재하는데, 그것까지 사용하는 걸 마나 탈진이라고 합니다!"
프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이런 미인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았다.
"마나 탈진은 자주 일어나는가?"
"아닙니다! 마나 탈진은 마법사의 사형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주 끔찍한 통증을 동반합니다! 마나 탈진은 겪을 바에야 죽겠다는 의견이 지배적일 정도라서 다들 조심하는 탓에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드리안나는 잠시 프렌을 응시했다.
대공과 황녀의 결투였다. 그 승부를 조작했다면, 둘의 명예를 동시에 짓밟은 것과 다름없었다.
중죄였다.
아드리안나는 애써 숨을 삼키며 질문을 이어갔다.
"무승부를 의도했을 가능성이 있나?"
"······네? 그게 무슨-. 아, 북부였지. 마법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군요."
아드리안나는 순순히 끄덕였다. 아드리안나는 마법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무승부는 천 번 중 한 번 나오는 정도입니다. 거의 안 나온다고 보면 되죠."
단언하는 프렌에 아드리안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음, 만약 무승부를 만든다고 가정하면?"
"무승부를 하려면, 상대 마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겠죠? 더불어 각 마법에 들어가는 마나 양도 알아야 하고, 그에 맞춰서 마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뛰어난 마나 민감도도 지녀야 하니까요."
프렌이 침음성을 흘렸다. 아드리안나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물론, 상대가 아주 하급 마법사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번치님은 흰색 마탑의 상위 마법사라고요."
"대단한 건가?"
"네에?! 진심이세요? 흰색 마탑은 사대 마탑이라고요!"
프렌의 반문에 아드리안나는 자신이 마법에 심하게 무지하다는 걸 깨달았다.
"절대 불가능해요."
프렌은 단호하게 말했다.
"만약 그렇게 무승부를 낸다면, 그건 완벽한 패배겠죠.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완벽한 패배-.
아드리안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게 가능해도, 굳이 마나 탈진을 겪을 미친놈이 어딨겠어요? 마나 탈진의 악명을 모르는 마법사는 없어요. 그건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라고요."
프렌은 마나 탈진이 얼마나 끔찍한지 한참이나 설명했다.
'확실히-.'
갈라하드가 자신의 승리에 돈을 꽤 많이 건 게 밝혀졌다. 심지어 그 심복인 길버튼은 전 재산을 걸었다.
더불어 마법사의 증언까지-.
아드리안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서류에 '혐의없음'이라고 적었다.
"그나저나 다행이네요. 무승부라서."
프렌이 요란하게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다행이다?"
"예, 대공님의 명예도 살렸고, 황녀님의 명예도 같이 살렸으니까요. 친선 교류의 목적에 맞는 최선의 결과 아닐까요?"
'최선-.'
아드리안나는 그 텁텁한 단어를 중얼거렸다.
누가 의도한 것처럼, 결과가 최선이었다.
그때, 추가적인 심문을 위해 프렌이 끌려갔다.
그 옆에 있던 길버튼은 마른침을 삼켰다. 길버튼은 프렌이 했던 말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굳이 마나 탈진을 겪을 미친놈이 어딨겠어요-.]
'미친놈'이라는 이야기-. 갈라하드에게 그만큼 어울리는 단어가 또 있을까.
길버튼은 허전한 주머니를 툭툭 건드렸다.
이제 남은 건 검 한 자루밖에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
특무대의 봉급은 세니까. 다시 벌면 그만이었다.
"갈라하드 대장은 어딨습니까?"
아드리안나의 물음에 길버튼은 상념이 깨졌다.
"황녀님이 데려가셨습니다."
"그렇군요."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이번 결투에 갈라하드가 걸려 있었다.
황녀가 이기면 갈라하드를 데려가고, 패배하면 대금을 지불하고 물러나는 내기였다.
그런데 무승부가 되었다면-.
"우리 대장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길버튼의 물음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갈라하드 대장에게 달렸다."
아드리안나의 대답에 길버튼은 묘하게 불안해졌다.
갈라하드는 알 수 없는 사내였다. 갑자기 황녀를 따라서 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갈라하드 대장이 간다면, 특무대는 어떻게 됩니까?"
"사라지겠지. 그가 만든 부대니까."
"아······ 안 돼."
길버튼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빨리 가셔야 하는 거 아니십니까."
"어디를 말인가."
"약혼자가 외간 여자- 아니, 황녀님과 있는데,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음-."
"넘어가면, 북부의 전력 손실입니다."
"전력 손실이라-. 일리가 있군."
아드리안나의 고집은 상당했다. 그런 아드리안나가 생각보다 쉽게 넘어온 것에 길버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만, 이럴 때가 아니었다.
"세 배··· 아니, 대장한테 갑시다."
****
[크··· 크에에엑!]
소년은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하인을 멍하니 바라봤다.
피를 토하는 하인의 손에서 떨어진 그릇에 담겨 있던 건 소년의 아침이었다.
저 독의 목표는 소년이었다는 이야기였다.
어쩐지 하인이 안 먹으려고 발악하더니만-.
소년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되새겼다.
책을 읽다 걸린 게 그들의 경계심을 자극한 듯했다.
주머니를 뚫는 송곳은 망치질 당하는 법이었으니까.
그들에게 소년은 빌어먹을 경쟁자요, 그릇을 탐하는 걸인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집을 나설 수도 없었다.
이제 다섯 살이었다.
다섯 살인데 밥에 독이 들었음을 걱정해야 한다니-.
참으로 야박한 세상이군.
소년은 볼에 묻은 피를 다시 닦고 새로운 하인을 불렀다.
하인은 많았다.
소년의 형제가 많은 것처럼.
그때, 문이 열리고 어떤 꼬맹이가 들어왔다.
소년보다 어린 흑발의 소녀였는데, 그 미래가 상당히 기대되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이 어딘지 익숙했다.
이름이······.
소녀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순식간에 줄어든 거리에 소년은 방어 자세를 취했다. 살아남기 위한 습관이었다.
소녀가 대뜸 소년의 가슴을 꾹꾹- 눌렀다.
마치 일어나라는 것처럼-.
'너···.'
그제야 갈라하드는 소녀의 정체를 깨달았다.
싸구려 알이었다.
왜 아드리안나의 모습을···. 머리는 왜 검은색···.
그때,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눈을 뜨니 황녀가 보였다.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지 뜨거운 숨결이 피부를 간질일 정도였다.
"축축합니다. 옆으로 가서 우시죠."
"일어났구나. 다행이다."
지랄맞군.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리며 몸부터 살폈다.
혈관에 바늘이라도 박힌 것처럼 따끔거리는 통증이 있었다. 더불어 안쪽에서 느껴지는 허함은 뭐라 칭하기도 어려웠다.
'마나 탈진은 오랜만이군.'
주먹구구식으로 마법을 배울 때, 꽤 많이 겪었던 마나 탈진이었다.
이 고통은 매번 새로웠다. 아드리안나의 손을 잡는 것과 버금갈 정도였다.
다만, 상태가 생각보다 좋았다.
원래 마나 탈진에 걸리면 일주일은 마나를 쓸 수가 없었다. 그 악명이 괜히 높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고통도 전보다 덜했고, 마나도 미약하게 느껴졌다.
꾸욱- 꾸욱-. 고통의 알이 제 존재를 열심히 드러냈다. 고통의 알이 뭔가를 한 듯했다.
'뭔가 기분 나쁜 게 있었는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며 황녀의 얼굴을 손으로 밀었다. 힘이 얼마나 센지 꿈쩍도 안 했다.
인상을 쓰자 황녀가 슬쩍 밀려났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다."
"이게 최선이었습니다. 누가 사고를 치는 바람에."
갈라하드는 풀어있는 옷에 눈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자고 가거라. 푹신하다."
"됐습니다."
"안 건드릴 테니까."
"참 믿음직하십니다."
갈라하드는 잔뜩 풀어진 셔츠를 가리켰다.
"포션을 쓰기 위해서 열었을 뿐이다."
황녀의 입에서 나온 '포션'이라는 단어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포션은 교단에서 만드는 아주 고급스러운 약이었다. 부으면 흉터도 안 남길 정도로 효과가 좋았지만, 그 값이 상당했다.
"포션은 마나 탈진에 효과 없습니다만."
"알고 있다."
"그러면 왜 포션을 쓰셨습니까."
"피부에 좋다."
황녀의 당당한 대답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보석보다 비싼 게 포션이었다. 그런 포션을 피부에 좋다고 쓰다니 괜히 황족이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상황을 정리했다.
황녀는 아드리안나와의 승부에서 패배했다.
다만, 그 상대가 최연소 소드 마스터인 아드리안나라는 것과 오러를 꺼냄으로 인한 실격패였으니 참작될 게 분명했다.
결투에 해박한 기사도 가끔 오러를 꺼내는 실수를 했다. 수도에서는 오러로 인한 패배면 재경기할 정도였다. 그 정도는 무마할 수 있는 흠이었다.
전체 승부도 무승부로 결정 났으니, 나름의 성과로 볼 여지도 있었다.
"나름대로 깔끔하게 했으니, 돌아가셔도 무사하실 겁니다."
계산을 점검한 갈라하드는 황녀를 보며 말했다.
황녀의 눈이 보기 좋은 호선을 그렸다.
"같이 안 갈 생각인가?"
"북부에서 할 일이 있습니다."
"그 계집 때문이냐?"
"계집이 아니라 아드리안나입니다."
황녀가 작게 웃었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황녀를 응시했다. 황녀가 제 붉은 입술을 핥았다.
"흐음, 대공과 혼인을 할까. 보니까 아내가 없는 것 같던데. 좋지 않으냐? 북부에 관한 관심도 늘어나는 상황이니까."
황녀의 웃음기 섞인 물음에 갈라하드는 다시금 계산했다.
확실히 대공과의 혼인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갈라하드의 운신도 한결 편해질 것이고-.
다만, 문제가 있었다.
"대공이 거절할 겁니다."
대공의 일생에 여자는 한 명뿐이었다.
북부가 예전의 영광을 잃었다고 해도, 대공은 대공이었다. 대공에게 줄을 대려던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정보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애석하게도 대공은 한 번도 넘어간 적이 없었다.
"아쉽구나."
"바튼 왕국의 왕자가 최선입니다."
"그래, 대신 조건이 있다."
"거절합니다."
"안 듣지 않았느냐?"
"또 정부 이야기 아닙니까."
황녀가 고개를 저었다.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며 연초를 입에 물었다.
레몬 향이 깊게 퍼졌다. 황녀는 눈썹을 찡그렸다.
잠시 뒤, 황녀가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달에 한 번, 아니-. 분기에 한 번이라도 수도에 와서 얼굴을 보여다오. 정말 숨이 막히니까."
황녀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늘 당찼던 여인의 진지한 고백이었다.
다른 이가 듣기에는 참으로 간절한 부탁이었지만-.
갈라하드는 얼굴을 가득 구겼다.
어떻게든 참으려 했는데, 이제 한계였다.
"지랄도 정도껏 하지."
거친 욕설에 황녀의 눈꼬리가 내려갔다.
"자기 살겠다고 나를 내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지고지순한 척이라니."
"내친 적 없다. 너를 살리려 했을 뿐이다."
황녀의 대답에 갈라하드가 눈을 찡그렸다.
"살리려고 친위대에 역모죄로 넘겼다고?"
갈라하드는 잠그던 셔츠를 풀었다. 그 사이로 올록볼록하고 빽빽한 흉터가 선명히 드러났다.
그중 삼분지 일은 친위대의 싸인이었다.
"덕분에 살아남지 않았느냐."
황녀의 대답에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나만 살았지."
"그래, 그대는 살았다. 그게 중요한 것이다."
그 뻔뻔한 말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하마터면 손가락을 튕길 뻔했다.
정보국의 요원은 보통 둘씩 움직였다.
임무의 중요성과 요원의 성질에 따라 인원수가 바뀌는데, 황실 임무는 최상급 임무였다.
총 여섯 명이 움직였다.
갈라하드가 처음으로 꾸린 팀이었다.
마지막 팀이었고.
"그건 당신을 위해서 한 행동이었어요."
"존댓말 한 번만 더 하면 입 찢어버린다고 했을 텐데."
"아-."
황녀가 입을 쩍 벌렸다. 그에 갈라하드는 간신히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미친 여자였다. 말다툼해도 얻을 게 없었다.
그때, 무표정으로 돌아온 황녀가 말을 덧붙였다.
"마족의 왕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이가 그렇게 말하는데, 이제 고집 그만 부리고-."
갈라하드는 참지 못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뾰족한 얼음송곳이 황녀의 목울대를 가리켰다.
황녀의 하얗고 가는 목에서 피가 한 방울 흘렀다.
황녀가 작게 탄식했다.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마족의 왕은 존재한다. 멍청한 네놈들은 모르겠지만."
갈라하드는 흥분을 누르며 손가락을 틀었다.
얼음송곳이 벽을 길게 그었다. 두꺼운 천이 잘리며 휘날렸다.
"정말 황소고집이구나."
황녀가 제 목을 매만졌다.
그 손가락에 붉은 피가 꽃처럼 그려졌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깊게 마셨다.
상큼한 레몬 향이 정신을 억눌렀다.
저 목을 비틀면, 친위대가 갈라하드를 찾아올 것이다.
친위대는 아직 대적할 수 없는 상대였다.
더불어 황녀는 필요한 카드였다.
득과 실을 계산하면, 살려두는 게 명백한 이득이었다.
'냉정해야 한다-.'
감정으로 일을 그르칠 수 없었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한 발짝 물러났다.
"다음에는 제가 수도로 가겠습니다. 원하신 대로 얼굴을 보여드리러."
황녀가 아쉬운 얼굴로 끄덕였다.
얼마나 고장 난 여인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래, 그거면 됐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아드리안나입니다. 갈라하드 대장을 확인하러 왔습니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헝클어진 앞머리를 넘겼다.
옷을 정리하고 문을 열자, 중무장한 아드리안나가 있었다.
아드리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괜찮으십니까?"
"보이는 것과 같네. 멀쩡하지."
"아-."
아드리안나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그 눈동자에 비친 갈라하드는 좀 피곤해 보였다.
"멀쩡하기는-. 손이 얼마나 많이 갔는데."
그때, 뒤에서 달콤한 목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비스듬히 걸친 황녀였다.
'악취미군.'
의도가 뻔한 수였다.
다만, 상대가 아드리안나였다.
"확실히-. 마나 탈진이 위험하다고 들었습니다. 부축하겠습니다."
"부축할 정도는 아니네만."
"괜찮습니다. 부축하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한 얼굴로 성큼 다가왔다. 아드리안나는 건틀릿을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갈라하드를 부축했다.
거리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갑옷의 서늘한 촉감이 갈라하드를 간질였다.
아드리안나의 의도는 부축이겠지만, 키 차이에 품에 안긴 것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황녀의 눈이 보기 좋은 호선을 그렸다.
아드리안나는 그런 황녀를 보며-.
"저희 갈라하드 대장을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희?"
황녀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부축하여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을 때, 안쪽에서 뾰족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좋은 일 있으신가 봅니다."
아드리안나의 중얼거림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자네, 제법 잘 먹이는군."
"······예? 뭘 먹입니까?"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그만 좀 만지게. 이러다 닳겠군."
"예? 부축입니다."
"이런, 벌써 조금 닳았군."
"닳았다니 그게 무슨······."
당황한 아드리안나가 부축을 풀었다.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옷을 정리했다.
"아, 대공 전하가 갈라하드 대장을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승부에 관해 여쭐게-."
"어지럽군. 마나 탈진의 부작용인가."
"예? 방금은 멀쩡하시다고-."
"이런 정신을 잃고, 쓰러지겠군. 부축이 필요하네."
갈라하드가 슬쩍 다가왔다.
방금까지 괜찮다고 하더니-.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내였다.
더불어-.
"······이건 부축이 아니라 팔짱 아닙니까?"
"생각하기에 달렸지. 부축이나 팔짱이나 무게를 나누는 건 매한가지일세. 나는 이게 좀 더 편하네."
왠지 그럴듯하고 당당한 논리였다.
"싫은가?"
담담한 물음에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됐군."
아드리안나는 처음으로 자신의 걸음을 신경 썼다.
왠지 걸음이 이상한 것 같았다.
68화 닿을 뻔
갈라하드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아드리안나가 있을 때, 대공은 아주 미세하지만 부드러워졌다.
아드리안나를 옆에 두면, 대공에게 목이 뽑힐 일은 없을 듯했다.
갈라하드는 작게 안도하며 주변을 살폈다.
얼마나 긴지 스무 명도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식탁에 덜렁 셋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대공의 덩치가 상당히 큰 터라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식탁에 식사가 가득 차려져 있었다.
대공이 손으로 고기를 뜯었다. 아예 굽지 않았는지, 고기에서 붉은 피가 길게 튀었다. 살 뜯기는 살벌한 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대공보다 야만인 족장에 가까운 식습관이었다.
"이것 좀 드세요. 맛있습니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음식을 챙겨줬다. 대공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갈라하드를 노려보며 고기를 뜯는 대공에 괜히 목이 따끔거렸다.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자네 식사하게."
"저는 식사를 하고 왔습니다."
몇 번이나 말렸지만, 아드리안나는 계속해서 갈라하드의 접시에 먹을 걸 올려줬다.
"이거랑 이렇게 섞어 먹어야 맛있습니다."
갈라하드에게 북부의 식사법을 알려주고 싶은 듯했다.
마음은 기특했지만, 애초에 북부의 식사는 대개 혐오 식품이었다.
향긋한 허브를 올렸다고 한들, 육즙이 넘치다 못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가 맛있게 보일 리가 없었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챙길 때마다, 대공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웃을수록 인상이 사나워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대공의 손에 목이 뽑힌 마족이 괜히 떠올랐다. 갈라하드는 목이 간질거렸다.
"이것도 드셔 보십쇼."
'···복수하는 건가?'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배가 터질 것 같네."
"예? 이 정도로 말입니까?"
아드리안나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접시를 다섯 번이나 비웠다. 그런데 이 정도라니-. 어이가 없었다.
그때, 대공이 뼈만 남은 고기를 내려놨다.
"재밌는 짓을 했더군."
대공의 사나운 눈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갈라하드는 빠르게 상황을 되짚었다. 일부러 딴 돈의 반을 자신의 승리에 걸었다.
더불어 마나 탈진은 진짜였다.
흠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계산이었다.
'걸릴 요소는 없다.'
그에 갈라하드는 당당히 대공을 올려보며 되물었다.
"어떤 짓 말씀이십니까?"
대공이 낮게 웃었다. 식탁이 작게 떨렸다. 웃는 다고 이 거대한 식탁이 흔들리다니-. 갈라하드는 혀를 내둘렀다.
"무승부라고."
대공의 입에서 본론이 나왔다.
대답은 아드리안나가 했다.
"명령하신 대로 승부에 관해서 조사를 끝냈습니다. 정황 증거와 마법적 해석을 더 해서 분석한 결과, 혐의없음입니다."
아드리안나가 대공 옆에 있는 서류 뭉치를 가리켰다.
서류가 두꺼운 걸 보니, 분주하게 돌아다닌 듯했다.
대공은 서류 대신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 눈이 꼭 속을 파헤치는 듯했다.
"마법사에게 조사한 결과, 무승부는 꾸며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확답을 받았습니다. 더불어 갈라하드 대장이 자신의 승리에 거금을 건 것도 확인이 됐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그렇군."
대공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갈라하드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역시 아드리안나에게 약하군.'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잠시 정적이 이어진 뒤에 대공이 입을 열었다.
이어진 대공의 말은 상당히 예상 밖이었다.
"약혼식을 하겠다."
아드리안나가 건네주던 고기가 뚝- 하고 떨어졌다.
음-.
갈라하드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아드리안나가 벌떡 일어났다.
그 눈썹이 가득 구겨져 있었다.
"싫습니다."
짤막하게 거절한 아드리안나가 방을 나섰다.
졸지에 대공과 둘이 남게 된 갈라하드는 작게 헛기침했다.
대공의 입꼬리가 여전히 올라가 있었다.
'일부러 그랬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대공이 맹수의 울부짖음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석 달 뒤에 약혼식을 진행할 것이다. 아드리안나가 거부한다면-."
대공이 전시된 마물과 마족 중 빈자리를 가리켰다.
"장례식이라도 해야겠지."
살벌한 말에 갈라하드는 작게 기침했다.
약혼식과 장례식이라니-.
실로 고약한 농담이었다.
다만, 대공의 얼굴에는 작은 웃음기도 없었다.
'음, 농담이 아니었군.'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대공은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갈라하드도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석 달이라니. 너무 늦는 거 아닙니까?"
대공의 입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
"죄송합니다. 당황해서 그만-."
목이 제대로 달려 있는지 확인하며 대공의 방을 나서자, 아드리안나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갈라하드를 발견한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깊게 내려가 있었다.
"괜찮네, 나도 당황했네."
갈라하드의 대답에 아드리안나가 작은 숨을 내쉬었다.
"아. 그러셨습니까. 언질도 주지 않고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내다니-. 제가 전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묘하게 빨랐다.
그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석 달이나 뒤라니. 결혼식도 아니고, 약혼식을 너무 넉넉하게 하는 거 아닌가?"
"······예?"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에 갈라하드는 의문이 들었다.
"왜 당황하나?"
"저는 약혼식을 할 생각이-."
"누가 결혼하자고 했나? 결혼도 언젠가 하겠지만, 이건 그냥 약혼식일세."
"그냥 약혼···식?"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아래로 내려갔다. 슬슬 도끼눈이 되려는 기색이 보였다.
"우리는 이미 공식적으로 약혼한 사이일세. 거기에 약혼식을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휙- 눈썹이 올라가며 도끼눈이 됐다.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가. 근거를 제시하게."
"······다릅니다. 약혼식까지 갈 생각 없습니다."
아드리안나의 굳은 대답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약혼식이 아니면 장례식이 될 처지였다. 아드리안나에게 이야기하면 그녀가 해결해줄 수도 있었다.
다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공 전하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드리안나가 말한다고 대공이 들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입이 가볍다며, 목과 입을 같이 뽑을 가능성이 컸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만 믿겠네."
"예."
아드리안나의 짧은 대답에 갈라하드는 쓰게 웃었다.
"같이 산책 좀 하겠나? 밥을 먹고 나니 더부룩하군."
"예?"
"나는 환자일세. 부축이 필요하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흔들렸다.
"그러면 부탁 좀 하겠네."
"아-."
"윽, 마나 탈진-."
갈라하드는 슬쩍 팔짱을 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진동했다.
아드리안나는 팔을 빼지 않았다.
대공의 성은 산책하기에 좋지 않았다. 어디를 가도 병사나 기사가 있었고, 시선이 쏟아졌다.
그를 피해 사람이 없는 쪽으로 걸었다. 아드리안나는 고장 난 것처럼 뚝딱거렸다.
"자네, 걷는 게 좀 이상하군."
"······."
아드리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성의 꼭대기였다.
큼지막한 종의 탁한 철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뼛속을 아리는 칼바람이 사방에서 몰아쳤다.
"아-."
아드리안나가 작게 탄식했다. 아드리안나의 기다란 금발이 거칠게 휘날렸다.
아드리안나는 예의 무표정이었지만, 묘하게 생기가 느껴졌다.
'높은 곳을 좋아하는군.'
갈라하드는 그를 기억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아드리안나가 조금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주변을 둘러봤다. 새하얀 눈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사방이 눈으로 뒤덮인 풍경은 아주 멋진 그림 같았다. 확실히 아름다웠다.
가치를 따지는 갈라하드에게는 그저 척박하고 춥기만 한 땅이었지만-.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답군."
바람에 아드리안나의 머리가 거칠게 휘날렸다. 그 사이로 아드리안나가 작게 웃었다.
아드리안나의 미소는 살짝 어색했다. 웃어본 적이 별로 없는 것처럼-. 다만, 아름다웠다.
"그때 하신 말씀 말입니다."
"그대가 아름답다는 말?"
"예? 아, 그거 말고-."
아드리안나가 잠시 입을 달싹였다. 그 얼굴에 옅은 고민이 떠올랐다.
갈라하드는 재촉하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연초를 꺼내려던 손을 털었다.
연초를 두 번 정도 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아드리안나의 입이 열렸다.
"마족에게 왕이 있냐는 물음말입니다-."
아드리안나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갈라하드의 눈이 커졌다.
마족의 왕. 그 단어에 심장이 거칠게 두근거렸다. 머리에 피가 핑- 하고 돌았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흔들릴 정도로 피가 격하게 돌았다.
갈라하드는 오래전부터 마족의 왕을 찾았다.
그를 대비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말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늘 부정적이었다.
논리로 설명해도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갈라하드를 신봉하던 후임도, 퍼스트도 마족의 왕을 이야기하면 혀를 찼다.
괴상한 목표를 쫓는다고 힐난했다.
귀를 기울였던 이가 한 명 있었지만, 그녀조차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아드리안나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너무 가깝습니다."
"미안하네, 그대가 너무 아름다워서."
"예, 그래도 가깝습니다."
갈라하드는 한 발짝 물러섰다.
작게 기침한 아드리안나가 입을 열었다.
"갈라하드 대장에게 질문을 받은 이후로 진지하게 고려했습니다. 귀족 행세하는 마족이 있으니 왕이라 칭하는 마족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귀족이 있으면 응당 왕도 있는 법이지! 말이 통하는군! 드디어!"
평소에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갈라하드의 흥분에 아드리안나는 작게 당황했다.
그때, 갈라하드가 성큼 다가왔다.
"마족의 왕은 존재하네. 그리고 언젠가 대륙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걸세."
"너무 가깝습···."
"멍청한 놈들은 내가 아무리 말해도 듣지를 않더군. 얼마나 답답하던지."
"가깝···."
"그런데 자네는 이해하는군! 드디어 찾았-."
"······위험합니다!"
아드리안나는 다급하게 밀어냈다.
갈라하드가 그대로 넘어졌다. 헝클어진 머리 사이로 보이는 갈라하드의 눈은 지나치게 또렷했다.
"아, 죄송합니다."
아드리안나는 황급히 사과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서늘한 바람에 갈라하드는 평정을 되찾았다.
고개를 드니, 아드리안나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아드리안나가 마족의 왕을 언급했다.'
갈라하드는 그 문장을 사탕처럼 입에서 굴렸다.
'드디어-.'
마족의 왕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였다.
무시와 비웃음-.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돌아오는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그렇기에 갈라하드는 마족의 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분명 그랬을 것인데-.'
아드리안나가 먼저 '마족의 왕'을 입에 담았다.
심지어 긍정적인 반응도 보였다.
처음 보는 반응이었다.
'왜 아드리안나만?'
모든 것에는 원인과 이유가 있었다.
갈라하드는 그간 있었던 반응을 되짚었다.
마족의 왕을 이해하지는 않더라도 듣는 시늉은 할 수 있는데, 다들 일단 부정했다.
마치 세뇌라도 당한 것처럼-.
'세뇌? 그러면 아드리안나는?'
아드리안나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둘 사이의 차이점은 명백했다.
'아드리안나의 마나를 불태우는 성질! 오, 그거였군.'
아드리안나의 성질이 작용한 게 분명했다.
마나를 불태우는 성질이 막은 거라면, 그 상대는 마나 혹은 권능일 게 분명했다.
'마법으로는 불가능하다. 애초에 마족의 왕에 관한 것이니 마족의 힘, 권능이겠군.'
갈라하드의 상념이 빠르게 이어졌다.
'마족의 왕에 관한 생각을 막는 건가? 대륙 전체로 막을 수 있다고? 아무리 고위 마족이라도 그게 가능한 건가?'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이었다.
그냥 고위 마족이 아닐 게 분명했다.
그게 가능하다면, 권능이 분명헀다.
아무튼, 중요한 건-.
'마족의 왕은 존재한다. 그리고······.'
갈라하드는 헝클어진 머리를 넘겼다.
그 눈이 가득 웃고 있었다.
****
"괜찮으십니까?"
톰은 길버튼을 걱정스레 살폈다.
갈라하드를 따라 두 번 연속 내기에 봉급을 걸었던 길버튼은 정말 큰돈을 만졌다.
내기의 맛을 본 길버튼은 전 재산을 내기에 걸었다.
그리고 전부 잃었다.
그를 아는 톰은 길버튼을 걱정했지만, 의외로 길버튼은 담담했다.
"기사는 검 한 자루면 충분한 법이다."
너무 담담해서 더 걱정될 정도였다.
"검이 더 가벼워졌다. 내 손을 느리게 하는 게 갑옷이 아니었던 거지."
길버튼이 시원하게 웃으며 검을 두들겼다.
길버튼은 보여주겠다며 검을 뽑았다.
"잘 보도록."
진지하게 말한 길버튼이 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톰이 생각하기에, 길버튼은 머리가 좀 투박했지만, 그 실력은 진짜였다.
길버튼은 말단 병사인 톰도 알 정도로 유명한 기사였다.
길버튼의 검이 묵직하게 움직였다. 잘 모르는 톰이 보기에도 깔끔한 검술이었다.
'진짜 빨라진 것 같기도-.'
이내 검을 멈춘 길버튼에 톰은 열심히 박수를 쳤다.
"확실히 검이 빨라지셨습니다! 전보다 더 예리하고! 역시 길버튼 경입니다!"
"기사는 검이 전부인 걸 잊고 있었다."
길버튼이 그렇게 말하니 톰으로서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돈을 잃은 게 아니다. 값진 깨달음을 산 것이지."
길버튼의 얼굴이 상당히 진지했다.
'잃은 거 아닌가?'
의문이 들었지만, 톰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웬이 돌아왔다.
길버튼과 반대로 그웬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웬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아, 으흠!"
그웬이 손에 든 주머니를 흔들었다. 짤랑이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봉급을 보살피는 아이들에게 보내는 그웬에게 어울리지 않는 묵직한 주머니였다.
"저쪽에서 내기하고 있길래! 나도 했어!"
"네? 무승부에 걸었습니까?"
"응! 가장 많이 준다고 해서!"
"네?"
"배당이 높은 곳에 걸어야, 많이 받지! 당연한 거잖아?"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한 반응에 톰은 떨떠름하게 끄덕였다.
무승부의 배당이 가장 컸으니, 가장 큰돈을 버는 게 당연했다.
다만, 배당은 곧 위험성이었다.
'배당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서 무승부에 걸다니-.'
그웬의 승부사 기질에 톰은 감탄했다.
끄윽-.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길버튼이 부릅뜬 눈으로 그웬을 보고 있었다.
톰은 황급히 끼어들었다.
"그러면 이제 부자가 되셨군요!"
"맞아! 이제 애들 안 굶어도 돼! 후후-."
그웬이 웃으며 주머니를 매만졌다. 그웬이 고아들을 보살피는 건 이미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웬의 투명한 기쁨에 길버튼이 작게 기침했다. 어딘지 겸연쩍은 얼굴이었다.
"아이들끼리 돈을 가지고 있으면 위험하다. 믿을 수 있는 이를 소개해주겠다."
상당히 수상한 제안이었다, 톰은 다급히 길버튼을 쳐다봤다.
"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요?"
"버트만이라고 여기 병사인데, 사정을 말하면 받아줄 것이다. 아이를 좋아하는 놈이니, 수수료도 안 받겠지."
"와아! 좋아요!"
톰은 작게 안도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웬의 주머니가 생각보다 작았다.
"금액이 생각보다 적군요. 걸린 돈이 제법 많았는데."
"대공 전하도 무승부에 거셨대! 엄청 많이!"
대공 전하가 무승부에 걸었다니-. 이를 예측했다는 건가? 톰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 그웬이 주머니를 길버튼에게 건넸다. 주머니를 받은 길버튼이 잠시 입술을 씹었다.
그리고 슬쩍 입을 열었다.
"흠흠, 내기에는 개평이라는 게 있는데."
"네? 개요? 귀여워요!"
"아니, 개평-. ···됐다."
길버튼이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에 톰은 소리 죽여 웃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슬쩍 주변을 돌아본 톰은 다급하게 물었다.
"데미안은 어딨습니까?"
데미안이 보이지 않았다-.
69화 감수성이 풍부한 그웬
"데미안이 사라졌습니다-."
길버튼의 다급한 보고에 갈라하드는 주머니에 챙겨둔 나이프를 매만졌다.
"아직 멀리 가지 않았네."
"···예?"
"귀족을 흉내 내는 마족 놈들이 데미안을 노리는데, 아무런 방책도 안 해뒀을 것 같나?"
길버튼의 얼굴에 안도가 떠올랐다.
갈라하드는 나이프를 잡고 마나를 움직였다. 마나 탈진을 겪었는데도 마나는 순순히 움직여줬다.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자신의 공을 주장했다.
추적 마법은 요원의 기본이었다. 다만, 추적 마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미리 마법진을 새겨둔 매개체가 두 개 필요했다.
하나는 대상의 것, 하나는 시전자의 것이었다.
대상의 매개체는 상대가 떼어놓지 않을 듯한 물건이어야 했다. 가령 데미안의 포크처럼-.
'조금 멀어졌군. 움직이고 있나.'
갈라하드는 나이프를 톡톡 두드렸다.
프록셀이라는 마족 놈들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았다.
놈들이 움직일 건 예상했지만, 대공의 성에서 일을 벌일 정도로 담이 큰 건 예상하지 못했다.
'이건 크게 쓸 수 있겠군.'
대공에게 비싸게 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당장 중요한 건 데미안이었다.
"언제 사라졌나?"
"그웬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라졌답니다."
"밥은 제대로 먹였나?"
"예, 확실히 먹여뒀습니다. 데미안은-."
"진정하게, 데미안이 위험할 일은 없네."
프록셀이라는 놈들은 데미안을 아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지만, 데미안이 당장 위험할 일은 없었다.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게 둘 생각이었다.
벌레를 잡을 때는 그 집을 찾아내야 했으니까-.
다만, 미식가들과 같이 움직일 정도로 조심성 있는 놈들이었다.
무슨 함정을 뒀을지 모르니, 확실한 대처 방법이 필요했다.
"이거 위기 상황이군."
"예?"
길버튼의 떨떠름한 반문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막내가 필요하겠어."
길버튼이 눈을 가득 구겼다.
"그 녀석 돌아왔습니까?"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길버튼을 살폈다.
길버튼은 전형적인 북부의 기사였다. 멍청한 만큼 신념이 단단했다. 투박한 박도 같은 사내였다.
훌륭한 기사인 길버튼이라면-. 갈라하드는 흥분을 꾹- 눌렀다.
"자네, 마족의 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순간 길버튼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예? 그게 무슨 개소리십니까. 마족에게 왕이 어딨습니까."
길버튼의 목소리에는 묘한 불쾌함까지 담겨 있었다.
"그렇군."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초를 입에 물었다.
변한 건 없었다.
"근데 이 녀석 이렇게 오래 걸리다니-. 이거 막내가 너무 빠진 거 아닙니까?"
길버튼의 표정이 다시 바뀌었다.
"맞네, 자네가 기강 좀 단단히 잡게."
"맡겨만 주십쇼."
"그래, 자네만 믿네."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
'아-, 실수했다.'
아드리안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너무 가까이 온 갈라하드에 당황하여 밀어버렸다.
[으아아아악! 저주 받을 년!]
머릿속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맞는 말이었다.
아드리안나의 성질은 저주였다.
닿는 이에게 끔찍한 고통을 선사하고, 죽음까지 이르게 만드는 아주 지독한 저주.
할 수 있는 건, 저주의 방향을 마족으로 트는 것뿐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그 사내는 도대체 왜-.'
아드리안나는 눈을 찡그렸다.
갈라하드는 이제껏 아드리안나가 마주한 사람들과 달랐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게 잡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내였다.
아드리안나는 당황스러웠다.
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사내인 건 알았지만, 이번에는 너무 가까웠다.
진심으로-.
그에 놀라 힘을 써버렸다.
어색한 열기가 가라앉고, 곰곰이 생각한 아드리안나는 자신의 반응이 과했음을 깨달았다.
'사과해야 한다.'
아드리안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옆의 바구니를 살폈다. 마족의 피를 담은 수통이 여섯 개 있었다.
'이걸 주면서 사과하자.'
아드리안나는 다시금 숨을 뱉었다.
갈라하드에게 사과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석 달 뒤에 약혼식을 하겠다는 말이 떠올랐다.
갈라하드는 그를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아드리안나에게 약혼식은 가볍지 않았다. 아니, 어울리지 않았다.
아드리안나가 있을 곳은 전선이었다.
그녀가 닿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는 마족이었고-.
'또 휘말리면 안 돼.'
아드리안나의 눈이 가라앉았다.
'계획을 세우자.'
어디 튈지 모르는 갈라하드에게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단단한 계획이 필요했다.
'먼저 갈라하드 대장은 외성에서 머무니까. 그쪽으로-. 수통을 주면서 거리감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드리안나는 진지하게 사과할 계획을 세웠다. 몇 번이나 점검했다.
'됐다.'
휘말릴 여지가 없는 완벽한 사과 계획이었다.
아드리안나는 수통을 챙겨서 문으로 향했다.
수통을 건네주면서 사과하고, 짧게 인사하고 돌아선다-.
계획을 점검한 아드리안나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연 자세 그대로 굳었다.
"아, 마침 나왔군. 자, 바로 입게. 바쁘다네."
문 바로 앞에서 갈라하드가 투박한 갑옷을 내밀고 있는 상황은 가정에 없었기에-.
"···예?"
또 멍청한 대답이 나와버렸다.
"우리 대원이 납치되었는데, 상대가 마족인 것 같네. 프록셀 가문이라는 놈들인데, 귀족의 흉내를 내는 놈들이지.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어서 입게."
"아니-."
"아, 대공 전하에게 지원을 요청하면 되지 않냐고? 이미 했네. 자네와 같이 가라더군."
"언제-."
"아까 식사 자리에서 자네의 운용권을 요구했네. 명분은 석 달 뒤의 약혼식을 위함이었네."
"근데 왜 갑옷-."
"아, 이건 보급소에서 구한 걸세. 왜 막내를 해야 하냐고? 자네는 너무 유명하니 같이 움직이면 다 도망갈 걸세. 자, 문제가 남았나?"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얄밉게도 지적할 부분이 없었다.
"자, 빨리 입게. 이건 검일세. 자네의 검보다 조금 무겁지만, 크기는 일치하지."
쾅.
'······?'
아드리안나는 닫힌 문과 어느새 손에 들린 멍청하게 생긴 투구와 갑옷을 번갈아 쳐다봤다.
또 당했다-.
****
"대장이 데미안은 괜찮을 거라던데. 으음······."
길버튼의 중얼거림에 톰은 작게 안도했다.
데미안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웬이 울면서 뛰쳐나갔고, 길버튼도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톰은 남아서 짐을 챙겼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했다.
그래도 걱정은 줄지 않았지만, 갈라하드가 괜찮다고 말했으니 작게 안도했다.
톰은 마차의 짐을 확인했다. 새로 보급받은 마차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멀끔하고 큼지막했다. 묶인 말의 상태도 끝내줬다.
특무대가 인정받은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톰은 물자를 다시 확인하고, 말에게 여물을 먹였다.
조금 뒤에 그웬이 돌아왔다. 눈에 눈물이 가득한 상태였다. 평소의 그웬과 비슷했다. 그웬은 눈물이 많으니까.
문제는-.
'왜 불을 몸에···? 아니, 얼음도-.'
그웬의 왼쪽 어깨에 불이 타올랐고, 오른쪽 어깨에 얼음이 우수수- 떨어졌다. 화려하다는 말로 부족할 정도였다.
문제는 도대체 왜 저러고 울고 있냐는 것이었다.
최근 좀 잠잠하다 싶었는데, 데미안이 사라진 게 큰 영향을 끼친 듯했다.
'그웬은 유독 아이들을 좋아하니까.'
톰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조금 뒤에 돌아온 갈라하드의 옆에 익숙한 인물이 있었다.
'······아드리안나님?'
투구와 갑옷이 전과 달랐지만, 크고 큼지막한 느낌이 비슷했다. 묘하게 어리숙하고 멍청한 분위기였다.
다만, 그 고귀함은 갑옷으로도 숨겨지지 않았다.
'안 돼-.'
톰은 다급히 길버튼을 쳐다봤다. 길버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애석하게도 길버튼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막내! 도대체 뭐 하다가 지금 온 거야! 손이 얼마나 느린 거야? 참 막막하다-."
길버튼은 곧바로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길버튼 나름대로 투박한 환영이었지만, 그 상대가 북부의 영웅 아드리안나였다.
도대체 어쩌려고 저런 끔찍한 언사를-.
"준비는 끝났나?"
그때, 갈라하드가 톰에게 물었다.
갈라하드는 묘하게 기뻐 보였다.
"예, 바로 출발하시면 됩니다."
"좋군, 역시 톰일세. 바로 가지."
"데··· 데미안이···!"
그때, 그웬이 끼어들었다. 그웬의 화려한 양쪽 어깨를 본 갈라하드는 작게 감탄했다.
"이런 그웬-. 훌륭하군."
"데미안이 사라졌어요! 제 잘못이에요! 제가 내기에 한 눈이 팔려서!"
"맞네, 자네 잘못일세."
갈라하드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웬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렀다. 불이 더 강해졌다. 얼음이 우수수- 떨어졌다.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실수는 누구나 하네."
갈라하드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웬의 어깨를 털었다. 갈라하드의 손에 닿자 이글거리던 불과 얼음이 사라졌다.
그웬이 갈라하드를 올려봤다. 그웬의 키가 작고, 갈라하드의 키가 큰 터라 목이 꺾일 정도였다.
갈라하드는 그웬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중요한 건 실수를 바로잡고, 반복하지 않는 걸세."
갈라하드의 목소리가 더없이 진지했다.
"···데미안 찾을 수 있어요?"
"물론일세. 자네의 도움이 조금 필요하겠지만."
"할게요!"
"좋군, 자, 그러면 출발하지."
갈라하드의 명령에 톰은 황급히 마차에 탔다.
아니, 타려고 했다.
마차에 타려는 톰을 갈라하드가 막았다.
"그웬만 마차에 타게."
갈라하드는 그웬만 데리고 마차에 탔다.
톰은 졸지에 길버튼과 아드리안나 사이에 앉게 됐다. 아드리안나와 나란히 앉았다니-. 숨이 턱 끝까지 막혔다.
"막내야,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길래. 이렇게 오래 걸렸냐? 그리고 움직일 거면 나한테 인사라도 하고 가야지-."
길버튼이 한마디 할 때마다 톰은 수명이 움푹 깎이는 것 같았다.
그때, 마차의 벽이 작게 부서졌다. 톰은 놀라서 작게 비명을 질렀다.
마차 벽을 부수고 나온 건, 식사할 때 쓰는 나이프였다.
나이프가 작게 휘어져 있었다.
마치 방향을 알려주는 것처럼-.
"이게 방향입니까?"
"방금 질문은 길버튼 경이겠군."
"그냥 맞다고 하면 되지-."
길버튼이 작게 투덜거렸다.
****
"그웬, 자네는 마나통이 크네. 아주 유별나게 크지. 내가 괜히 처음에 자네를 마법사라고 생각한 게 아닐세."
"에?"
갈라하드의 뜬금없는 칭찬에 그웬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해 못 하는데도 마법을 따라 할 수 있는 재능을 지녔지. 그건 재능보다는 권능에 가깝네. 아, 뒷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게나."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이번 결투에서 확신이 들었네. 자네는 화려한 마법에 약하네. 자네는 아름다운 마법을 보면, 위계에 상관없이 마법을 복사하지. 물론, 그를 의식적으로 펼치려면 굉장한 노력을 기울여야겠지만-."
갈라하드는 울먹이는 그웬을 살폈다.
방금 그웬은 갈라하드의 마법과 번치의 마법을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둘 다 상위 위계의 마법이었다. 그 둘을 동시에 사용하는 건, 평소 그웬보다 뛰어난 능력이었다.
갈라하드는 그 원인을 생각했다.
'데미안이겠군.'
데미안이 사라진 게 그웬에게 영향을 끼친 게 분명했다.
그웬이 마법을 따라하는 것도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기 때문이었다.
둘 다 감정에 근간을 둔 행동이었다.
'그웬은 감정에 영향을 받는군.'
본래 마법사는 감정과 거리가 멀어야 했다.
마법사는 냉정해야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감정으로 마법을 쓰는 마법사라니-.
'흥미롭군.'
감정이 마법에 영향을 준다면, 감정을 자극해보면 될 일이었다.
갈라하드는 나이프를 슬쩍 두들겼다.
"데미안의 포크에 추적 마법을 걸어뒀네. 거리가 범위보다 멀어지지만 않으면 그 방향을 어림짐작할 수 있지."
"진짜요?! 와, 다행이에요!"
"그런데 마나 탈진을 겪어서 내 마나가 불안하군."
"네?"
"평소보다 거리가 줄었어. 생각보다 놈들의 속도가 빠르고-. 으음, 이거 곤란하군."
거짓은 아니었다. 실제로 상대의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마차가 아닌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게 분명했다.
꽤 곤란한 상황이었다. 추적 마법의 위력은 마나 농도가 아닌 마나 양에 영향을 받았다.
갈라하드보다는 그웬에 적합했다. 그를 위해 나머지를 마부석으로 보냈다.
"어··· 어떻게 해요?!"
"자네가 이 마법을 펼쳐야 하네. 자네의 마나통은 유난히 크니까. 가능할 걸세."
"하지만 안 보이는걸요!"
맞는 말이었다.
추적 마법은 지극히 실용적인 마법이었다. 은밀하고 형태가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추적 마법이 화려하면 그게 추적 마법이겠나.
그웬이 절대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없는 마법이었다.
'그러면 화려하게 해주면 되겠군.'
그러게 되면 마법이 상당히 복잡해지겠지만, 어차피 그웬이었다.
갈라하드는 눈을 지그시 감고 마법을 검토했다.
추적 마법을 뜯고 그 원리의 알짜배기를 꺼낸 다음에 멋들어진 수식을 더 했다.
추적 마법은 요원의 기본이었기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잘 보게나."
갈라하드가 그웬의 눈앞에 검지를 댔다. 길쭉한 검지에 그웬의 양 눈이 모였다.
검지에서 시작된 스파크가 손가락 사이를 튕기며 크기를 부풀렸다.
이내 자그맣지만 멋들어진 번개 꽃이 피어올랐다. 번개 꽃이 나이프를 타고 밖으로 사라졌다.
"아악! 따가워!"
그웬이 소리 내어 감탄했다.
"해보게."
눈이 풀린 그웬이 멍하니 손을 들었다. 그웬의 손바닥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갈라하드의 것보다 투박했지만, 번개 꽃이 피어올랐다.
나름 훌륭했다.
문제는-.
'나이프에 못 넣었군.'
가장 중요한 방출이 되지 않았다.
조금 더 자극이 필요했다.
갈라하드는 그웬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방금 보여준 마법으로 데미안을 추격할 수 있네. 음, 손에 힘이 빠지는군."
그러면서 슬쩍 마나를 줄이자, 나이프 주변의 스파크가 눈에 띄게 약해졌다.
그웬의 얼굴에 절박함이 떠올랐다.
"안 돼요!"
"나는 여기까지군. 이제 자네가 해줘야 하네. 나이프를 잡게."
갈라하드는 그웬에게 나이프를 넘겼다.
그웬이 나이프를 어설프게 잡았다.
"모··· 못 해요! 한 번밖에 안 보여주셨잖아요!"
갈라하드는 그웬의 둥근 머리를 꽉 잡았다. 머리가 작은 탓에 한 손으로 잡혔다.
"자네는 할 수 있네. 방금도 하지 않았나? 그걸 그대로 하면 되는 걸세."
"하지만-."
갈라하드는 그웬의 머리를 꾹 눌렀다. 그웬이 입이 닫혔다.
"자네는 할 수 있네. 만약 자네가 못하면, 데미안은-. 음, 그 좋아하는 고기를 더는 못 먹겠군."
그웬이 크게 훌쩍였다. 갈라하드는 그 귀에 대고 데미안이 얼마나 불쌍한지 속삭였다. 다른 손으로는 데미안의 추적을 이어갔다.
잠시 뒤에 입술을 질끈 깨문 그웬이 나이프를 굳게 잡았다.
그웬에게서 뿜어지는 마나가 심상치 않았다.
'정말 감정이 작용하는군.'
그웬의 사용법을 슬슬 알 것 같았다.
*
"아니, 어디로 가라는 거야?"
길버튼은 나이프를 보며 눈을 찡그렸다.
나이프를 보고 고삐를 잡는 것도 이상한데, 그 나이프도 갑자기 멈췄다.
"어디로 갑니까! 이러다 놓칩니다!"
길버튼이 마차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나이프가 작게 움직였다. 급한 대로 길버튼은 고삐를 잡았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다시 나이프를 확인하는데, 전과 달리 나이프가 거칠게 흔들렸다.
'어디로 가라는 거야?'
그때, 나이프 주변으로 금색 스파크가 튀었다.
처음에는 작았던 스파크가 굵어지더니, 이내 마구잡이로 튀기 시작했다.
"뭐야?"
길버튼은 눈을 찡그리며 코트를 슬쩍 들었다. 마물 가죽으로 만든 코트였다.
이윽고-.
한껏 굵어진 스파크들이 나이프를 넘어서 타올랐다.
그건 마치 번개 같았다.
땅에서 하늘을 향해 거꾸로 내려치는 번개-.
나이프에서 뿌려진 금색 줄기에 톰은 비명을 질렀다. 길버튼은 혀를 차면서 톰을 당겼다.
"데미안이 기다리고 있네!"
그때, 갈라하드의 괴상한 외침이 들렸다.
그러자 뻗어진 번개가 천천히 수그러들었다. 이내 굵직한 줄기로 변했다.
번개를 꾹꾹 누른 듯한 금색 선이 정면을 향해 길게 뻗었다.
마치 방향을 알려주는 것처럼-.
"이게 뭐야?"
길버튼의 중얼거림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막내! 고삐 제대로 잡아!"
아드리안나를 갈구는 길버튼에 톰은 정신을 차렸다.
톰은 서둘러 지도를 꺼냈다.
만약 저 방향대로 간다면-.
'헬오브잖아?'
마족과의 오랜 전쟁으로 대대의 수가 줄었지만, 원래 북부에는 대대가 더 많았다.
헬오브는 그중 지금은 사라진 15대대가 담당했던 도시였다.
한때 북부에서 제일 큰 도시였지만, 마족들의 습격으로 멸망한 곳이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이제는 괴담 정도로 내려오는 곳일 텐데, 왜 그곳으로 가는 건지-.
다만, 진짜 괴담은 따로 있었다.
"막내야, 심심한데 노래 좀 불러보거라."
톰은 그 어떤 괴담보다 지금이 더 무서웠다.
70화 마족 도시
헬오브는 이제 괴담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였다.
어두운 밤에 신참을 앉혀두고 마족이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그런 용도의 괴담이었다.
괴담의 내용은 간단했다.
거대했던 도시가 마족에게 단 하룻밤 만에 멸망했고, 이후 마족을 몰아냈지만, 생존자는 없었다-.
그 과정에서 거대했던 도시는 터만 남았고 더는 아무도 찾지 않았다.
혹시라도 주변을 지나가면, 비명과 웃음소리가 들린다는 괴담이었다.
거기에 산사태까지 덮치며 완전히 사라진 도시였다.
문제는-.
"어이- 막내, 노래 좀 해보라니까."
헬오브보다 끔찍한 괴담이 바로 옆에서 펼쳐지는 중이라는 거였다.
아드리안나의 투구가 톰을 향했다. 그 투구에서 뭔가 다급함이 느껴졌다.
톰의 털이 쭈뼛- 섰다.
"그··· 막내는 말 못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랬지. 그냥 과묵한 놈인 줄 알았는데."
길버튼의 끄덕임에 톰은 혀를 내둘렀다.
데미안이나 그웬은 건드리지 않는 길버튼이지만, 기사 후임이라 그런지 아드리안나는 계속 건드렸다.
"제가 대신 노래하겠습니다!"
톰은 다급하게 악기를 꺼냈다.
'배우길 잘했어.'
톰은 작게 중얼거리며 악기를 튕겼다. 꽤 노력한 탓에 악기 소리가 제법 좋았다.
길버튼이 막내에게서 톰으로 신경을 돌릴 정도로-.
톰은 필사적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조금 잠잠해진 걸 보니, 길버튼이 만족한 듯했다.
그에 더욱 열창하던 톰은 자신이 길버튼은 얕봤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맞선임인 톰이 노래하는데, 막내가 춤이라도 춰야지. 눈치가 없군."
길버튼의 혀 차는 소리에 톰은 참지 못하고 비명을 길게 질렀다.
"끝내주는 고음이군."
길버튼이 박수치며 감탄했다.
덕분에 길버튼의 관심이 다시 톰으로 향했다.
톰은 길버튼의 관심을 붙잡기 위해, 악기를 치며 노래를 부르면서 엉덩이도 흔들었다.
길버튼 평생 최고의 공연이었다.
이쪽은 버려진 지대나 다름없는 곳이었기에 길을 잃기 쉬웠지만, 길버튼은 헷갈리지 않았다.
나이프에서 뻗어진 금색 선 덕분이었다.
그 굵직한 선은 마치 길을 표시하는 것처럼 길게 뻗어져 있었다.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가 없었다.
"북부의 영웅은 두꺼운 투구- 두꺼운 갑옷으로도 가려지지 않지!"
더불어 톰이 노래하며 연주도 하니, 고삐 잡을 맛이 났다.
길버튼은 흐흐- 웃으며 고삐를 잡았다.
그때, 금색 선이 갑자기 흔들렸다.
그 크기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순간 주변이 다시 어두워졌다.
금색 선이 없을 때는 몰랐는데, 있다가 사라지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때, 마차에서 그웬의 비명이 터졌다.
"아··· 안 돼요! 더는 못 해요!"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데미안에게 인사하게! 바이바이! 데미안!"
"안 돼요! 바이바이- 아니야! 안 돼!"
"걱정하지 말게! 산재 처리해줄 테니까! 퇴직금도 두둑할 걸세!"
"퇴직금···? 아··· 안 돼!"
금색 선이 다시 선명해졌다.
오히려 전보다 더 길어졌다.
'도대체 안에서 뭐 하는 거지?'
길버튼은 고삐나 잡았다.
****
"고생했네."
갈라하드는 뻗은 그웬을 두들겨주고 마차에서 내렸다.
서늘한 한기가 달궈진 갈라하드의 열기를 식혔다.
수분이 섞인 상쾌한 공기가 코를 간질였다.
'마족에게 지워진 도시라.'
갈라하드는 톰에게 들은 설명을 되새기며 주변을 둘러봤다.
설명처럼 그 잔재가 곳곳에 있었다. 부서진 기둥과 성벽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 토대만 보면 수도의 것보다 더 굵었는데, 세월을 이기지 못했는지 곳곳이 닳아 있었다.
그중 간간이 버티듯 남은 기둥들이 예전의 기세를 미약하게 증명했다.
쓰러지거나 토대만 남은 흔적들이었지만, 그것들이 길고 넓게 펼쳐져 있으니 실로 장엄했다.
그 위로 눈까지 소복하게 쌓여 있으니, 꽤 멋들어진 모습이었다.
'훌륭한 무덤이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었다.
'끊겼군.'
갈라하드는 나이프를 매만졌다. 나이프에 마나를 주입해도 반응이 없었다.
대상의 매개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이제 어디로 갑니까!"
길버튼이 높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연초에 불을 붙였다. 입김과 뒤섞인 연기가 선을 길게 그렸다.
"지금부터 찾아봐야지."
"예?"
갈라하드는 슬쩍 손을 흔들며 주변을 살폈다.
추적 마법이 갑자기 끊겼다.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갈라하드는 손을 흔들어 마나를 뿌렸다. 꽤 멀리까지 뿌렸는데, 그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내 추적 마법을 끊다니-.'
매개체와 매개체를 잇는 추적 마법은 상당히 예민한 마법이었다.
매개체에 이상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뒤틀리기 쉬웠다.
경험 있는 요원들은 그런 경우를 대비해 겹으로 마법을 걸어뒀다.
갈라하드의 추적 마법은 삼 중이었다.
'아예 반응이 없었다.'
그런 갈라하드의 추적 마법이 지워진 것처럼 사라졌다.
둘 중 하나였다. 상대의 마법 실력이 갈라하드보다 뛰어나거나, 마족의 권능이거나.
'후자겠군.'
"길버튼 경, 저기 좀 올라가 보겠나."
갈라하드는 무너진 폐허 사이에 우뚝 솟은 기둥을 가리켰다.
"예? 예."
길버튼은 이유를 묻지 않고 기둥으로 올라갔다. 갑옷을 입었는데도 그 행동이 상당히 날렵했다. 멀리서 보니 딱정벌레 같았다.
기둥 끝에 선 길버튼이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폐허입니다! 폐허!"
버려진 도시여도 순찰 범위였다. 육안으로 뭔가 보였으면, 순찰에 걸렸을 것이다.
길버튼을 올린 건 확인용이었다.
'여기서 끊고 움직인 건가? 아니, 그랬다면 매개체의 흔적이 있어야 해.'
갈라하드는 빠르게 상황을 되짚었다.
매개체의 흔적이 아예 없는 걸 보면, 아직 데미안이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추적할 수 없다니-.
"이상하군."
"뭐가 말입니까?"
어느새 돌아온 길버튼이 물었다. 길버튼의 이마에 땀이 가득했다.
"흔적이 아예 없어. 하늘로 올라갔나."
"에이, 하늘에는 없습니다. 제가 확인했습니다."
길버튼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그에 한마디 하려는 순간-.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확실히 하늘에는 없습니다. 땅으로 꺼졌으면 꺼졌지-."
'땅으로 꺼졌다-?'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의외로 그럴듯했다.
지하로 내려간 거라면, 흔적이 남지 않은 게 설명이 됐다.
"그렇군, 지하였어."
"예? 아니, 농담입니다."
"나는 진담일세."
길버튼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땅 팝니까?"
"아니, 숨겨둔 통로를 찾아야지."
"숨겨뒀는데, 어떻게 찾습니까?"
"오, 길버튼 경이 생각할 만한 걸, 내가 미처 몰랐군."
"······놀리시는 겁니까?"
"정답일세."
갈라하드는 손을 흔들어 길버튼의 말을 막았다.
"만약 마족이 지하에 있고, 내 추적 마법을 지우는 짓을 했다면, 그쪽의 마나 농도가 높을 걸세. 마족은 높은 마나를 좋아하니까."
"아하, 그렇군요."
"이해한 건가?"
"예, 뭐 대충-."
"길버튼 경, 자네는 거짓말할 때 코를 찡그리는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마나 화살이 떠올랐다. 그 크기를 슬쩍 기억했다.
마족들이 이용하는 통로가 따로 있고, 거기에 추적 마법을 없앨 정도의 무언가가 있다면, 마나 농도가 높을 게 분명했다.
"아니, 이걸로 어느 세월에 찾습니까."
길버튼이 작게 투덜거렸다. 웃기지만, 맞는 말이었다.
마나 화살을 통한 마나 농도 비교로 통로를 찾기에는 폐허의 영역이 너무 넓었다. 그에 반해 시간은 촉박했고-.
그때, 멍청한 투구가 눈에 보였다. 아드리안나였다.
아드리안나는 말의 여물을 먹이고 있었다. 건틀릿을 꼈는데도 말을 건드리는 손이 조심스러웠다.
'아, 아드리안나가 있었군.'
갈라하드는 예전에 아드리안나에게 마법 탐지를 알려준 걸 떠올렸다.
"길버튼 경, 내가 말한 적 있나?"
"뭐를 말입니까?"
"막내가 개코라고."
"예?"
"아주 개코일세."
*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멍청한 투구를 쓴 아드리안나가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 달리는 속도가 웬만한 말보다 빨랐다.
저런 속도로 뛰면서, 마나 농도를 확인할 수 있다니-.
갈라하드는 작게 감탄했다.
달그락.
이내 아드리안나가 멈췄다. 굵직한 기둥이 여기저기 뿌려져 있는 곳 중 가장 멀쩡한 기둥 앞이었다.
기둥을 중심으로 양옆이 무너진 형태였다. 문처럼 생긴 모양이었는데,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좀 신기하게 엎어졌네- 하고 지나갈 만한 모양이었지만, 갈라하드의 손가락에 있는 마나 화살이 전보다 아주 미세하게 작았다.
'진짜 찾았군.'
"잘했어, 막내."
달그락.
길버튼이 아드리안나의 견갑을 두드려줬다. 멍청한 투구가 다급하게 톰을 쳐다봤다. 톰이 슬쩍 길버튼을 옆으로 돌렸다.
갈라하드는 기둥 안쪽을 살폈다. 그림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다.
언뜻 보기에 낙서였지만, 신기하게도 마법진의 형태가 있었다.
'이건··· 대단하군.'
마법진의 원리는 이으면서, 그 형태가 그림처럼 보이게 그리다니-. 이건 단순한 마법진이 아닌 작품이었다.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과 비슷하군. 제마전쟁의 잔재인가?'
마물 조련사의 것과 형태가 비슷했지만, 그 바탕이 전혀 달랐다.
본 적 없는 새로운 마법진이었다. 흥미가 가득 올라왔다.
아무래도 이게 추적 마법의 끊긴 원인인 듯했다.
구시대의 마법진인데, 그를 그림 형태로 꾸며놓으니 더 난해했다.
갈라하드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다. 갈라하드는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을 해석한 경험을 이용하여 분석했다.
'마족의 피로 열리는 마법진이군.'
이 마법진은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보다 높은 농도의 피가 필요했다.
즉, 마족의 피를 요구했다.
'북부 놈들은 절대 못 들어가겠군.'
애초에 마법진이 뭔지도 모르는 북부였다.
갈라하드가 아니었다면, 절대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드리안나에게 받은 수통 하나를 열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역겨운 피 냄새가 풍겼다.
두근! 두근!
'아까 먹지 않았나.'
두근! 두근!
'자꾸 그러면 아드리안나가 이놈- 할 걸세.'
고통의 알을 조용히 시킨 갈라하드는 수통의 피를 마법진에 부었다.
마족의 피가 마법진을 붉게 칠했다. 이어서 마법진이 작게 진동했다.
갈라하드는 슬쩍 뒤로 물러났다. 그 앞을 아드리안나가 지켰다.
"든든하군."
달그락-.
이어서 기둥 사이의 공간이 밀렸다. 구구궁! 돌 긁히는 소리가 나면서 어두운 공간이 들어났다.
그건-.
"찾았군."
사내 넷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계단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계단은 마치 지옥으로 향하는 입구 같았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연초가 톡톡- 굴러가면서 어둠을 밝혔다.
한참이나 굴러간 연초가 사그라들었다.
"진짜 마족의 도시인가 보군."
갈라하드가 농담을 읊조렸지만, 누구도 웃지 못헀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면서 연초를 새로 꺼내 입에 물었다.
슬쩍 뒤를 돌아봤다.
경직된 대원들이 보였다.
"여기부터 나만 말하겠네. 이제 자네들은 전부 벙어리일세. 이런 길버튼 경, 벙어리라고 하지 않았나. 입 닫게."
조용해진 대원들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계단에 발을 올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마나를 모은 갈라하드는 주저 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탁, 작은 소리와 함께 낮은 신음이 들렸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뿌렸다. 그 형태를 파악하고 전진했다.
목에 얼음송곳이 꽂힌 마족이 쓰러져 있었다. 놈은 목이 뚫렸는데도, 무표정이었다.
'최하급 마족이군.'
갈라하드는 놈의 팔을 발로 누르면서 목덜미를 잡았다. 피가 울컥 쏟아졌다. 더러운 냄새가 가득 풍겼다.
마족이 갈라하드를 올려봤다. 그 눈에 작은 두려움도 없었다.
"마족-?"
공기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답일세."
갈라하드는 놈의 관자놀이에 손을 대고 정신계 마법을 펼쳤다. 마족의 눈이 몽롱해졌다.
"여기가 마족의 도시인가?"
"그-."
마족의 눈이 뒤틀렸다. 또 정신 방벽이었다.
'정신계에 대한 대비가 상당하군.'
다만, 전에 한 번 겪은 일이었다.
갈라하드는 주저 없이 놈의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쑤셔 박았다. 기분 나쁜 저항감이 느껴지며, 손가락 마디 하나가 들어갔다.
끄악-. 마족이 나지막한 신음을 터뜨렸다. 고통이 떠올랐다.
"마족의 도시인가?"
끄덕.
"안에 인간도 있나?"
끄덕.
"그렇군, 삐쩍 마른 소년을 데리고 간 무리를 본 적 있나?"
끄덕.
갈라하드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계산을 끝내고 마족의 목덜미를 당겼다.
마족의 눈을 바로 앞에 두고 물었다.
"내가 마족으로 보이는가?"
······끄덕.
놈이 코를 킁킁거리다가 끄덕였다.
그때, 마족의 머리가 부풀었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한 발짝 물러섰다.
갈라하드의 앞에 멍청하게 생긴 투구가 나타났다.
아드리안나였다.
팡! 경쾌한 소리와 함께 터진 살점이 뿌려졌다. 사이에 있던 아드리안나가 정통으로 맞았는데, 아드리안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거 상황이 재밌군."
갈라하드는 이마에 묻은 피를 닦았다.
'나를 마족이라 여기는군.'
고통의 알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코를 킁킁거린 걸 보면, 피를 마셨기 때문이거나-.
둘 중 무엇이든 충분히 이용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인간도 있다는 건-.
'마족이 인간을 데리고 들어갈 수 있군.'
그때, 멍청한 투구가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깊게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이 끝났다.
"이거 아무래도 진짜 마족의 도시에 온 모양일세."
향긋한 레몬 향이 풍겼다.
멍청한 투구가 달그락거렸다. 성품이 뚜렷한 아드리안나였기에 무슨 말을 하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돌아가서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는 건가?"
달그락-.
갈라하드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우직하게 검을 쥔 길버튼, 잔뜩 긴장하여 울먹이는 그웬과 방패를 든 톰-.
각기 다른 표정이었지만, 물러날 기색은 전혀 없었다.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는 아드리안나의 의견은 합당했다.
다만-.
"미안하지만, 지원을 기다릴 여유가 없네. 더불어 대공을 온전히 믿을 수 없고."
달그락?
멍청한 투구 너머로 당황이 느껴졌다.
"아, 정확히 말하자면 대공의 눈과 귀를 믿을 수 없다는 걸세. 아무리 마족이 조심한다고 한들, 마족의 도시는 다른 이야기지."
······.
멍청한 투구가 그대로 멈췄다.
조금 위험한 이야기였지만,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의 성품을 믿었다. 아니,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때, 길버튼이 손을 들었다. 뻐끔거리는 길버튼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끄덕였다.
"지금은 말해도 되네."
"여기부터 경비가 있는 걸 보면, 아래쪽은 더 삼엄할 겁니다."
길버튼과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마법진부터, 입구 앞에 세워진 마족까지-. 놈들은 침입을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다.
그를 뚫는 방법은-.
"방법이 있네."
"···예?"
"자, 다들 집중하게."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었다.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마족의 도시 목전일세. 아마 높은 확률로 위험하겠지. 돌아가고 싶은 이가 있다면 돌아가도 되네. 그래, 그웬. 말하게."
"데미안은 안에 있나요!"
"높은 확률로 그럴 걸세."
"나쁜 마족! 당장 가요!"
그웬의 호기로운 외침에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자, 다들 손목을 내밀게."
갈라하드는 대원들의 손목에 대고 수통을 기울였다.
"손목을 비빈 뒤에, 귀 아래에 가져다 문지르게."
피 냄새가 아주 짙게 퍼지도록-.
*
꿀꺽-.
톰은 주변을 둘러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 떨어진 곳에 거대한 마물이 으르렁- 거리며 지나갔다.
문제는 마물을 옆에 두고도 태연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마물 뿐만이 아니었다.
'이게 다 마족-?'
곳곳에 이쁘고 잘생긴 이들이 있었다. 다들 화려한 외관에 깔끔한 차림이었지만, 표정이 없었다. 마치 감정이 없는 것처럼-.
최대한 눈을 내리까는 게 톰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길버튼은 반쯤 검을 뽑은 상태였다. 그 아드리안나도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모두가 잔뜩 긴장했는데, 정작 선두의 갈라하드는 여유로웠다.
심지어 중간중간 마족과 인사까지 나눴다.
마물이 갈라하드를 피했다.
이윽고 거대한 문에 도착했다. 두꺼운 돌을 깎아 만든 문이었는데, 표면에 괴상한 문양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훔치고 싶군."
갈라하드의 진지한 혼잣말에 톰은 마른침을 삼켰다.
문 앞에 머리가 두 개 달린 거대한 마물이 있었는데, 마족이 먹이를 주듯 마물에게 뭔가를 던졌다.
살점이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아주 맛있게 뜯어먹는 마물에 톰은 차오르는 구역질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마물에게 살점을 주던 마족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귀족처럼 깔끔하게 입은 마족이었다. 그런데 그 허리에 두개골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마치 귀족이 보석을 자랑하는 것처럼-.
갈라하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족에게 다가갔다.
사방의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끝이다. 진짜 끝이야.'
톰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갈라하드와 마족이 마주 섰다.
마족의 옆에 있던 마물이 갈라하드에게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더니 슬쩍 뒤로 물러났다.
갈라하드는 마족을 보며 여유롭게 인사했다.
"고생이 많군."
마치 성문의 경비대원과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저게 계획?'
톰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방패를 굳게 쥐었다.
길버튼이 검을 슬쩍 뽑았다.
차오른 긴장감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때-.
"환영합니다."
마족이 고개를 숙이며 문을 열었다.
"고맙네."
갈라하드는 아무렇지 않게 문을 통과했다.
'······?'
71화 술집 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