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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 - 50-57

50화 믿음

갈라하드는 입에 고기를 쑤셔 넣는 데미안을 보면서 손가락을 톡톡 튕겼다.

처음 만났을 때 데미안은 해진 옷을 입고 허름한 움막에 앉아서 눈이나 받아먹고 있었다.

그에 비해 지금은 얼굴이 말끔했다. 꾀죄죄할 때도 숨길 수 없던 귀티가 잔뜩 올라와서, 고위 귀족의 자제처럼 보였다. 그웬과 톰의 보살핌 덕분이었다.

신기한 건 그렇게 먹는데도 여전히 삐쩍 말랐다는 것이었다.

데미안은 특이했다. 검을 역수로 쥘 정도로 배운 게 없는데, 그 실력은 진짜였다.

검에 주저함이 아주 조금도 없었다.

데미안은 타고난 맹수였다. 이상하다면 이상했지만, 애초에 사람이 불덩이를 던지고 검에 오러를 담는 곳이었다.

그 정도의 괴리는 이해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정보국에 데미안과 비슷한 요원이 있었고.

문제는-.

'잿빛 오러라.'

데미안의 오러였다.

그건 단순히 넘길만한 일이 아니었다.

"데미안, 꿈이 뭔가?"

"꿈이요?"

"커서 되고 싶은 게 있나?"

데미안이 잠시 입을 우물거렸다. 그 빵빵한 볼이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많이도 먹는군.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딱히 없는대요."

"그러면 오러는 어떻게 했나?"

명확한 꿈이 없는데, 오러를 일으켰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손으로 똥을 쌌어요."

"길버튼 경이 알려줬나?"

"네."

아무리 그래도 오러인데, 손으로 똥을 싼다니-.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그래, 똥을 싸면서 무슨 생각을 했나?"

"똥을 싼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군, 지금 한 번 보여줄 수 있나?"

"여기서는 똥이 안 마려워요."

"음-."

갈라하드의 말문이 다시금 막혔다. 그러다 고기를 손으로 집어 먹는 데미안에 갈라하드는 포크와 나이프를 건네줬다.

"손이 더 편해요."

"원래 처음이 불편한 법일세."

갈라하드는 친절히 고기를 썰어줬다. 데미안은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아버지가 몇이라 그랬지?"

"넷이요. 슈뢰딩거."

"그래, 슈뢰딩거. 길버튼 경보다 기억력이 좋군."

첫 만남에 말했던 슈뢰딩거를 아직 기억하는 데미안에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아버지 넷의 정체를 알고 있나?"

"두 명은요."

"나머지 둘은?"

"외부 손님이었대요. 하나는 아예 모르는 이였고."

"어머니께서 인기가 많으셨군."

"네, 예전에는요."

"자네의 멋진 외모는 어머니의 것이 분명하군. 자, 이렇게 찍어 먹는 걸세."

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갈라하드는 포크를 다시 내밀었다. 데미안이 포크로 고기를 푹찍었다. 그리고 입에 넣고 씹었다.

'넷 중 둘이라.'

갈라하드는 데미안의 대답을 중얼거렸다.

잿빛 오러에는 분명 데미안의 출생도 관련이 되어 있을 것이다.

가장 의심스러운 건 역시 마족과의 연관이었다.

"어머니가 아예 모르는 이에 관해서 해준 말씀이 있나?"

"엄청 작았대요."

갈라하드는 거칠게 기침했다. 데미안은 포크로 고기를 다섯 개 집어서 입에 넣었다.

연신 기침하는 갈라하드에게 톰이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가져다 줬다.

"아, 고맙네 톰."

톰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갈라하드는 입가를 닦으며 데미안을 응시했다. 데미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기를 집어 먹는 중이었다.

"그래, 소탈한 분이셨군, 다른 이야기는 없으셨나?"

"값을 처음 지불하는 사람처럼 돈을 뭉텅이로 줬대요."

"그렇군."

"네, 다음날 도박에 전부 꼴았지만."

"어머니가 승부사시군."

"매번 지기만 한걸요."

"원래 마지막에 이기면 되는 법일세."

"마지막에도 졌어요."

갈라하드는 습관적으로 연초를 입에 물었다가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아쉽게 됐군."

"그러게요."

데미안은 연신 고기를 입에 넣었다. 생전 고기를 처음 먹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먹었다.

'아비가 마족인가.'

데미안의 마나는 특이할 게 없었다. 오히려 마나가 보통보다 적은 편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데미안이 몸담았던 소대 이야기였는데-.

'마족에게 당했다고 했나.'

그건 이미 길버튼이 조사를 끝낸 상황이었다. 묻는 것에 솔직히 답하는 데미안이었다. 뭔가 나올 게 있었으면, 심문에서 나왔을 것이다.

정보가 더 필요한데-.

'아, 퍼스트가 있었군.'

정보국은 갈라하드의 행보에 관심이 많을 게 분명했다.

갈라하드의 부대원인 데미안에 관한 정보도 모아뒀겠지.

퍼스트는 그걸 받아 왔을 것이다.

'달라고 해야겠군.'

퍼스트는 언뜻 멍청해 보였지만, 명료할 뿐 멍청한 이가 아니었다.

상황을 모를 리가 없었다.

놈에게서 정보를 받기 위해서는 적절한 거래가 필요했다.

적절한-.

'아, 그게 있었군.'

계산을 끝낸 갈라하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훈련장 사용료?"

갈라하드의 뜬금없는 요구에 퍼스트의 얼굴이 굳었다.

"그렇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마경 훈련소의 효과는 상당하지 않나?"

갈라하드의 말은 사실이었다.

여기 마경 훈련소의 효과는 퍼스트가 수도에서 많은 돈을 들여 만들었던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다만.

"이거 흑마법학회 놈들이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갈라하드에게 가기 전에 펌킨과 상황 파악을 끝낸 퍼스트였다.

그들이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이 마경은 흑마법학회가 7대대를 노리고 연 것이었다.

그런데 사용료를 내라니? 퍼스트는 눈을 찡그렸다.

"맞는 말일세. 흑마법학회가 만들었지. 다만, 그걸 부수지 말고 훈련소로 쓰자고 한 건 나일세."

"저걸 부술 수 있나?"

"당연하지. 자네는 못 부수나?"

"...부술 수 있지!"

퍼스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갈라하드가 할 수 있으면 퍼스트도 할 수 있었다.

그건 시기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때,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갈라하드의 손가락 사이로 화려하게 번쩍이는 스파크에 퍼스트는 눈을 부릅떴다.

그렇게 튀던 스파크는 이내 꽃 형상을 취했다.

마경에서 저 정도로 정교한 마법이라니-.

정보국에 있을 때, 갈라하드와의 격차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마법은 경지가 높아질수록 성장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에는 갈라하드가 이제 눈에 잡힐 정도였다.

'방금 그건-.'

갈라하드가 가벼이 보여준 한 수였지만, 퍼스트는 그에 담긴 실력을 온전히 체감할 수 있었다.

격차가 전보다 더 벌어졌다.

더 아득하게-.

다시 그 경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원인은-.

'북부겠군.'

마나 농도가 짙은 북부에서 성장한 게 분명했다.

전보다 더욱 아득하게 벌어진 격차에 퍼스트는 절망하지 않았다.

'이래야 내 경쟁자 갈라하드지.'

퍼스트는 경쟁자의 상승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자, 원래 부서졌어야 할 마경을 내가 훈련소로 만들었네. 심지어 대공이 관리자로 나를 지정했지."

갈라하드가 번개 꽃을 흐트러뜨리며 말했다.

갈라하드의 설명에는 허점이 있었다.

갈라하드는 거의 휴직과 다름없지만, 그래도 정보국 소속이었다.

그런 갈라하드가 임무 중에 얻은 건 모두 정보국을 통해 제국에 귀속된다.

그건 북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퍼스트는 그를 지적하지 않았다.

마경 훈련소는 갈라하드가 얻어낸 열매였다.

그걸 대가 없이 얻는 건 공정한 경쟁이 아니었다.

"그렇군."

퍼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사용료를 원하나, 돈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고."

"정보일세."

"정보? 아, 그렇군. 자네 정보 권한이 없나?"

퍼스트의 물음에 갈라하드가 연초를 털었다.

"아무래도 대공이 엮었으니까."

이어진 설명에 퍼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처사였다. 갈라하드를 대공의 데릴사위로 보냈으니까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하여 정보 권한을 박탈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요원에게 정보 접근 권한을 박탈하다니-.

'버렸군.'

북부로 민 것도 모자라서 권한까지 박탈한 건 명백한 버림이었다.

갈라하드가 정보국에서 이룬 업적이 얼만데, 이런 대접을-.

퍼스트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버지가 또 괜한 짓을 했군. 사과하겠네."

"그건 아닐걸세. 국장 선에서 내릴 수 있는 인사가 아니었으니까."

그냥 받지 않고 지적하는 갈라하드에 퍼스트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아버지의 영향이 아예 없진 않겠지."

"그것도 그렇군."

갈라하드의 수긍이 생각보다 빨랐지만, 퍼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국에서 정보 유출은 중죄였다. 나중에 혹여 갈라하드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묶여서 같이 처벌받을 수도 있었다.

다만, 그건 퍼스트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갈라하드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졌다면, 퍼스트는 누가 믿지 않아도 놈을 향해 뛰어내릴 거니까.

놈을 따라 북부로 온 것처럼.

"그래, 거래를 받겠다."

퍼스트는 수첩 하나를 꺼냈다. 작은 수첩이었지만, 열쇠를 가져다 대면 내부에 압축된 정보가 나오는 마도구였다.

"고맙군."

"이번에는 오래 걸리지 않을 걸세."

수첩을 받은 갈라하드에 퍼스트는 사납게 웃었다.

완벽한 훈련 장소인 마경이 있었다.

이번에는 기필코 놈을 잡을 것이다.

"그래, 행운을 빌지."

갈라하드는 가벼이 대답했다.

갈라하드의 시선은 이미 수첩에 꽂혀 있었다. 열쇠를 주지도 않았는데, 수첩은 열려 있었다.

"음, 그렇군."

수첩을 읽은 갈라하드가 작게 탄식했다. 그를 이미 전부 외운 퍼스트는 갈라하드가 어디를 읽는지 알았다.

"데미안이라 했나. 그 소년이 지냈던 소대를 확실히 이상하더군. 소대 네 개가 마족에게 당할 동안 정작 그 소년은 멀쩡했다니?"

북부에서 마족에게 소대가 공격당하는 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소년이 아니라도 홀로 생존하는 경우도 제법 있었고-.

다만, 네 번 연속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확인해보니 어떤 증거도 없더군. 심문에서 나온 것도 없고-."

북부의 정보는 그 질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단순히 정보국이 북부에 투자를 적게 한 것과 별개로, 애초에 북부는 정보를 정확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나마 저것도 소년의 소대가 네 개나 사라진 탓에 남은 정보였다.

전부 읽어봤는데, 대부분 쓸모없는 정보들이었다.

다만, 갈라하드가 그를 주의 깊게 보니 퍼스트는 괜히 궁금해졌다.

갈라하드의 정보 분석력은 상당히 뛰어났으니까.

"뭐가 있나?"

"기간이 비슷하군."

"기간은 안 적혀 있을 텐데?"

퍼스트는 눈을 찡그렸다. 데미안에 관한 정보에는 기간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몇 번째 임무에서 일이 발생했는지 같은 것들이 전부였다. 그것조차 추정이었다. 어디에도 기간과 관련된 건 없었다.

"소대원 수가 적혀 있지 않나. 당시 대대의 중대와 소대 수를 바탕으로 임무 계획표를 짜면 대략적인 근무 일정이 계산된다네."

퍼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그렇게까지 파고들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틀린 방식은 아니었다.

갈라하드의 말대로 대략적인 계산이었다.

다만.

"오차가 있는데?"

"최단기간이 중요한 걸세. 일정 기간 이후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나? 가령 첫 번째 임무에서 소대가 습격당한 건 없네. 그렇다는 건-."

퍼스트의 반문에 갈라하드가 수첩을 두드렸다.

"오차는 마지막 임무를 나가기 전 대대 기지에 있던 기간이겠군. 대대 기지를 건들 정도는 아니라는 건가."

갈라하드의 이어진 말에 퍼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얼추 비슷하군. 시기가 비슷하다니, 꼭 마족이 관찰하다가 습격한 것 같군. 잠깐. 특무대에 들어온 기간과 흡사한데?"

퍼스트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수첩을 닫았다.

그때, 어디선가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갈라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일이 생겼네. 어디를 좀 다녀와야겠군. 자네가 쓰는 훈련소니까. 잘 관리하게나."

계산으로 나온 시기가 데미안이 특무대에 들어온 기간과 비슷했다.

그런데 다녀오겠다는 건-.

"유인할 생각이군."

갈라하드는 대답하지 않고 사라졌다.

퍼스트는 잠시 그를 보다가 다시 검을 잡았다.

"다들 일어나게! 충분히 쉬었네!"

쓰러진 병사들이 허우적거렸다.

"아니, 도대체 저놈은 뭔데...."

길버튼보다 더한 놈에 하인스는 작게 울먹거렸다.

****

"자, 준비하게, 바로 떠날 걸세."

갈라하드의 명령에 연주 중이었던 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미 준비해뒀습니다!"

톰의 시원한 대답에 갈라하드는 의문이 들었다.

톰이 잡일은 기가 막히게 하는 건 알았다. 그래도 방금 말했는데, 어떻게 준비를 마쳤단 말인가.

"아, 항상 준비해두고 있었습니다! 떠날 시기가 된 것 같기도 했고!"

"그렇군. 좋네! 바로 마차에 싣게나."

"예! 그럼 길버튼 경도 불러오겠습니다!"

톰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갈라하드는 멍하니 있는 데미안의 반대편에 앉아서 생각을 정리했다.

때마침 팔호에게서 연락이 왔다. 학회장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지만, 놈 바로 아래에 있는 굵직한 간부가 5대대 지부로 왔다는 소식이었다.

일단 그쪽으로 갈 생각이었다.

열심히 엉덩이를 흔들면서-.

"안 가면 안 될까요."

"왜 그런가?"

"그냥요."

이미 네 번이나 일을 겪은 데미안이었다. 본능적으로 시기가 다가왔음을 느껴 불안해진 듯했다.

"그렇군. 미안하지만, 안 되네."

데미안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면서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내려갔던 데미안의 시선이 다시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특무대 생활이 마음에 드나?"

"네, 무척."

그렇게 대답하는 데미안의 눈이 드물게 또렷했다.

잿빛 오러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데미안의 신념이 어떤 종류인지도 아직 알 수 없었다.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까봐야 아는 법이었다.

어떻게 하면 높은 수를 뽑을지 고민해야지, 지는 게 두려워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 것만큼 멍청한 게 없었다.

"직접 지키게. 나도 최선을 다할 테니, 자네, 열심히 훈련하지 않았나."

"...맞아요."

대답과 달리 데미안은 여전히 시무룩했다. 갈라하드는 독촉하지 않았다.

본래 알은 스스로 깨야 더 가치 있는 법이었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리며 길버튼이 들어왔다. 그 옆구리에는 까맣게 칠해진 그웬이 있었다.

그웬은 대공이 주고 간 중급 마물을 담당 중이었다.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이 새겨 놓은 중급 마물을 고통의 알과 소통할 수 있는 그웬에게 맡긴 상태였다. 길버튼이 그를 보호했고.

"그웬, 마물은 좀 어떤가."

"얌전했어요! 길버튼 경이 낑깡이를 두드려 패기 전까지는!"

"이런 이름도 있군. 길버튼 경, 깡깡이를 두드려 패면 어떻게 하나."

"낑깡이요!"

"그래, 낑깡이."

"아니, 마물 아닙니까. 그런데 갑자기 어디를 간다는 겁니까?"

길버튼의 얼굴에 묘한 다급함이 보였다. 퍼스트가 병사들을 훈련 시키며 입지가 좁아진 탓이었다.

"5대대로 돌아갈 것이네. 특무대 본부가 완공되었다니, 가서 봐 줘야지."

"예? 그러면 여기는 어떻게 합니까?"

"적당한 이에게 맡겼네."

"...적당한 이?"

길버튼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퍼스트는 정보국에서 갈라하드의 바로 밑에 있던 요원이었다.

그 차이가 제법 컸지만, 정보국 요원 중에서 갈라하드 바로 다음인 건 사실이었다.

거기에 7대대 대장까지 있었으니, 이쪽은 그리 걱정할 필요 없었다.

'연구 결과를 뽑기에도 좋고.'

마경은 퍼스트의 기존 훈련 방법의 연장선이었다.

더불어 스스로 몸이 터질 위기를 견디는 놈 아닌가. 놈에게 맡겨 두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게 분명했다.

그러니 갈라하드는 굳이 여기 있을 필요가 없었다.

"준비 끝났습니다!"

밖에서 톰의 외침이 들렸다. 그에 갈라하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미안, 뭐 좀 먹었어?! 볼이 홀쭉해!"

그웬에게 볼이 붙잡힌 데미안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었다.

"스스로 지키게."

갈라하드는 마차로 향했다.

톰의 말처럼 준비는 끝난 상태였다.

갈라하드는 마부석으로 향했다. 조금 얼떨떨한 얼굴의 길버튼이 고삐를 잡았다.

"이렇게 바로 떠납니까?"

"그러면 작별용 연회라도 열 텐가? 자네, 참 방탕하군."

"아니- 그게 아니라."

"다 탔습니다!"

"자, 출발일세."

갈라하드의 가벼운 명령에 길버튼은 자신도 모르게 고삐를 당겼다.

말이 천천히 움직였다.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

여기저기서 경례가 쏟아졌다.

경례는 올 때와 달리 갈라하드에게 향해 있었다.

병사들의 얼굴에 서린 광기 어린 존경에 길버튼은 떨떠름한 침을 삼켰다.

"내 인기가 제법이군."

올 때 했던 농담이었지만, 그때와 달리 길버튼은 딴지를 걸 수 없었다.

진짜였기에-.

열띤 환호 속에서 마차는 7대대를 벗어났다.

"근데 신기하군요. 아드리안나님이 마경을 그냥 두고 가셨다는 게."

길버튼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대답했다.

"나를 믿는다더군."

"그렇군요."

아드리안나님이 남을 믿고 떠나다니-. 아드리안나를 꽤 오래 보좌한 길버튼에게는 생소한 일이었다.

'하긴 대장이니까.'

그리 중얼거리던 길버튼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그러니까-.

"아드리안나님이 대장을 믿고 마경 훈련소를 떠난 게 오늘 아침인데, 당장 저녁에 7대대를 내팽개치고 나온 겁니까?"

"내팽개치다니. 적절한 인선을 둔 걸세. 나를 믿는 건 내 판단까지 믿는 거니까."

갈라하드의 여유로운 대답에 길버튼은 눈을 찡그렸다.

아드리안나는 갈라하드가 7대대를 잘 지킬 것이라고 믿은 거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렇군요."

길버튼은 그냥 고삐나 잡았다.

갈라하드를 이해하려 해 봤자 이쪽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51화 인질

마차에 매달린 주황색 램프가 북부의 밤이 내려준 무거운 어둠을 힘겹게 밀어내며 흔들렸다.

소복하게 쌓인 눈을 밟는 말발굽 소리와 바퀴가 힘겹게 돌아가는 소리, 그웬의 코 고는 소리가 제법 잘 어우러졌다.

갈라하드는 연초 연기를 깊게 내뱉었다.

레몬 향이 가득 풍겼다.

"왜 밤에 움직입니까? 위험한데."

길버튼이 고삐를 당기며 물었다. 불만이 아닌 단순한 의문이었다.

"밤이 으슥하고 좋지 않나."

"...예?"

갈라하드는 길버튼의 반문을 무시하며 연초를 털었다.

'데미안을 노리는 마족이 있다.'

그 다음은 '왜?'였다.

데미안을 노리는 마족이 있다면, 놈은 왜 데미안은 그대로 둔 것 일까.

데리고 가지도, 죽이지도 않고 굳이 멀쩡하게 두고 갔다-.

그리고 데미안이 새 소대에 들어가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또 습격하고.

'왜?'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의도는 반드시 존재했다.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결과를 분석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데미안은 뛰어난 실력을 지녔는데도 병사들에게 배척받았다.

입 벌리고 눈이나 받아먹는 신세였다. 갈라하드가 데려오지 않았다면, 굶어 죽거나 맞아 죽었을 것이다.

'그걸 원했나?'

"이러다가 마물이라도 나타나면 어떻게 합니까."

길버튼의 물음에 상념이 깨졌다.

"나타나면 다행이지."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데미안 말일세."

"예, 그 꼬맹이."

"마족에게 소대가 네 개나 사라지지 않았나."

"그랬었죠?"

"만약 어떤 마족이 데미안을 노린 거라면?"

"마족이 그 꼬맹이를 왜 노립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나?"

갈라하드의 혀 차는 소리에 길버튼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작아졌다.

"상관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처음 데려올 때 말입니다."

"그랬었지."

"그런데 지금은 왜 신경 쓰십니까?"

길버튼과 어울리지 않는 예리한 질문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맞는 말이었다. 소대를 네 번 말아먹었다고 한들 딱히 상관없었다. 조사에서 아무것도 안 나왔으니까.

그 생각이 변한 건 잿빛 오러였다.

"이제 더 소중해졌으니 하는 말일세."

"...그런 말도 하십니까?"

길버튼의 경악 어린 눈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뭐, 마족이 데미안의 소대만 죽이고 다시 돌려보낸 거라면-."

길버튼이 잠시 말끝을 흐렸다. 안그래도 찢어진 눈이 더 가늘어 졌다.

"악질이네."

"...악질?"

"예, 일부러 더 고통받으라고 돌려보낸 거 아닙니까."

"고통 말인가?"

"그때도 보셨다시피 부대로 못 가고 그냥 앉아있지 않았습니까? 그거 다른 소대가 다 거부해서 그런 겁니다. 불길하다고. 실제로 폭력도 있었고."

"그렇군."

"빌어먹을 놈들!"

길버튼이 투박한 욕을 하며 고삐를 거칠게 잡았다.

날 것의 의견이었지만,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데미안의 의지를 죽일 생각이었던 건가?'

실제로 갈라하드가 특무대 영입을 말했을 때, 데미안은 거절했다. 자신과 엮이면 다 죽는다면서.

그렇다면 기간을 두고 습격한 건-.

'정이 붙을 시간을 준 건가?'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하면, 소대가 전멸하는 게 네 번이나 반복 되었다.

아무리 자의식이 높은 사람이라도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심지어 성장기의 소년이라면 더더욱-.

'그게 잿빛 오러의 원인인가?'

갈라하드는 연초를 톡톡 털었다.

만약 그런 의도를 지닌 존재가 있다면-.

'지금쯤 몸이 많이 달아올랐겠군.'

장담할 수 있었다. 데미안의 인생에 그웬만큼 친절하고 따스한 이는 없었을 것이다.

그웬은 자기 먹을 것까지 데미안에게 줄 정도로 데미안을 지극정성으로 챙겼다. 그웬의 아이가 아닐까 궁금할 정도였다.

거기에 톰과 퉁명스러운 길버튼도 있었고.

데미안을 무너뜨릴 정도의 절망을 주기에 지금처럼 적기가 없었다.

"감히 꼬맹이한테-. 망할 놈들 가만두지 않겠다."

그때, 길버튼이 이를 까드득- 깨물었다. 그 얼굴에 분노가 가득 했다. 참으로 단순한 이였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습관적으로 마나를 뿌렸다.

이윽고-.

"이런, 아무래도 자네의 말에 화가 난 것 같군."

"뭐가 말입니까?"

"망할 놈들 말일세."

갈라하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바람이 갈라하드의 머리를 거칠게 휘날렸다. 갈라하드는 마차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쾅쾅!

"다들 일어나게! 손님이 왔네!"

마차 문이 열리며 톰이 나왔다.

"또 마물입니까!"

아직 잠이 안 했는지 톰의 눈이 조금 멍청했다. 그 입가에 침자국도 있었다. 손에는 쇠뇌를 듣고 있었다.

"이번에는-."

갈라하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손가락을 튕겼다.

밝은 불이 폭죽처럼 위쪽으로 올라갔다. 높이 올라간 불이 작은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터졌다.

밝은 빛에 짙은 어둠이 물러갔다.

그러자 보이는 건.

"마족이군. 옷을 아주 멋지게 입은."

귀족처럼 차려입은 창백한 놈들이었다.

불빛에 놀랄 만도 한데, 놈들의 얼굴은 무심했다. 감정이 없는 것 처럼.

"이런-!"

길버튼이 고삐를 거칠게 당겼다. 말들이 투레질하며 몸을 틀었다. 그 아래의 눈이 사납게 튀었다.

순간 휘청거린 마차가 위태롭게 멈췄다. 놀라운 솜씨였다.

"기사- 길버튼-!"

챙! 길버튼이 검을 뽑았다. 푸른 오러가 아낌없이 뿜어졌다. 어둠이 도망치듯 물러났다. 길버튼의 일그러진 얼굴이 푸른 빛에 비쳤다.

그를 본 마족들이 눈을 찡그렸다. 무식한 이를 마주한 귀족 같았다.

귀족 흉내를 내는 마족이라-.

"이거 흥미롭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중얼거렸다.

"마족이 여덟인데! 흥미롭다고 말할 때입니까!"

"귀족 흉내를 내는 마족인데, 자네는 흥미롭지 않나?"

길버튼의 얼굴에 떨떠름이 가득 올라왔다.

그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마족들이 정장까지 입고 고풍스럽게 기다리는데, 어찌 흥미롭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마족이 여덟입니다. 하급이라도 위험합니다."

"길버튼 경, 자네는 뻔한 소리를 뭔가 대단한 것처럼 말하는 버릇이 있네."

갈라하드는 길버튼을 지적하면서 마족들을 둘러봤다.

흑마법학회 놈들은 아니었다. 지금 흑마법학회는 갈라하드를 건들 여유가 없을 테니까.

마경이 아닌 곳에서 저런 잘 차려입은 마족과 우연히 마주칠 가능성은 적었다. 놈들이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게 분명했다.

갈라하드를 노린 걸 수도 있었다. 북부에 온 이후로 시끄럽게 다녔으니까.

다만, 놈들은 바로 공격하지 않았다.

갈라하드를 노린 거라면, 마차를 공격하는 편이 더 효율이 좋았다.

굳이 암습하지 않고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데미안 때문이겠군.'

아무래도 놈들은 데미안을 상당히 아끼는 듯했다.

'마족이 연관된 건 정답이었군.'

톡톡,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때, 마차 문이 열리려고 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문을 힘줘서 닫았다.

"악!"

뭔가 부딪친 소리와 그웬의 짤막한 비명이 들렸다.

"아악! 머리 부딪쳤어요!"

"그렇군, 데미안은 괜찮나?"

"네? 아, 푹 잠들었어요."

"그렇군, 아직 나오지 말게."

갈라하드는 문을 다시금 밀었다.

쿵, 문이 꽉 닫혔다.

"저거 뭐 하는 겁니까?"

길버튼의 물음에 고개를 돌리니, 검을 돌리며 혼자 나서는 마족이 보였다.

기다랗고 뾰족한 칼과 깔끔한 정복, 전형적인 중앙 기사의 모습이었다.

"어설프게 배운 수도 기사의 예법이군."

"수도 놈들은 검을 저렇게 요란하게 뽑습니까?"

"수도에서는 저게 멋일세."

"참으로 쓸모없는 멋이군요."

"원래 있는 자들에겐 쓸모없고 귀찮은 게 고급으로 여겨지는 법 일세. 오, 길버튼 경, 저 마족이 자네와 검을 섞고 싶은가 본데?"

자신을 가리키는 놈의 검에 길버튼이 눈을 가득 구겼다.

"감히 기사 흉내를 내는 마족을 혼내주게!"

감히 마족이 기사 흉내를 내다니.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갈라하드의 종용에 길버튼은 마차에서 내렸다. 소복하게 쌓인 눈이 군화를 적셨다.

마족은 정말 기사처럼 중앙에 서서 길버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역겨운 모습에 길버튼은 침을 퉤 뱉으며 검을 고쳐 잡았다.

"프록셀 가문의 벨 앙트아다."

"염병하네-."

자세를 잡으며 자신을 소개하는 마족에 길버튼은 눈을 가득 구겼다.

"이쪽은 갈라하드 가문의 길버튼 경일세!"

"제가 왜 갈라하드 가문입니까!"

버럭 소리를 지른 길버튼이 검을 고쳐 잡았다.

갈라하드는 길버튼과 검을 겨눈 마족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귀족 같군. 마족에도 귀족이 있나?'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하긴 마족의 왕도 있으니, 귀족도 있겠군.'

그때, 마족이 검을 비스듬히 들며 고개를 숙였다.

우습게도 놈은 수도 기사의 예법을 제법 잘 흉내 내는 중이었다.

그에 길버튼은 오러 가득한 검을 대뜸 휘둘렀다.

'역시 무식하군."

갈라하드는 작게 감탄했다.

상대 마족이 얼굴을 작게 구기며 검을 받아냈다.

길버튼의 검과 마족의 검이 부딪쳤다.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대는 하급 마족이었다.

갈라하드는 길버튼이 단번에 이길 걸 예상했다.

하지만-.

갈라하드의 예상이 오랜만에 틀렸다.

마족이 검으로 길버튼의 오러를 받았다.

오러 없는 검으로 오러를 받아내면 잘려야 마땅한데, 마족은 버텼다.

'오러를 받아낼 정도의 명검은 아닌 것 같은데-.'

그때, 마족의 검 주변으로 일렁임이 보였다.

'권능이군.'

그를 확인해도 의문은 여전했다.

상대는 하급 마족이었다. 아무리 권능이라도 하급 마족이 길버튼의 오러를 저리 쉽게 받아낼 리가 없었다.

경합이 이어졌다. 갈라하드는 놈과 뒤의 마족을 관찰했다.

검이 부딪칠 때-.

뒤쪽에 있는 마족의 눈썹이 구겨졌다.

'오, 그렇군.'

갈라하드는 작게 감탄하며 손을 휘저었다.

그물처럼 넓게 뿌린 마나가 마족들과 검을 든 마족 사이를 훑었다.

마족 사이에 짙은 농도의 마나가 흐르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것처럼-.

'힘을 몰아주는 건가?'

다른 마족들의 힘을 받는다면, 저 하급 마족이 길버튼을 상대할 수 있는 게 설명이 됐다.

정정당당한 일대일 대결처럼 꾸미고, 뒷공작을 펼치다니.

'진짜 귀족 같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제야 마족이 여덟이나 나타난 게 이해가 됐다.

놈들은 특무대를 나름 조사한 듯했다. 저건 길버튼을 상대하기 위한 전략일 것이다.

아무래도 길버튼을 처리하면, 나머지는 마법사와 톰이니까 처리 할 수 있다는 계산이겠지.

'여전히 오만하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그때, 길버튼의 검이 뒤쪽으로 튕겼다. 길버튼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길버튼은 오히려 자신의 검이 밀리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듯 했다.

다만, 놈들이 놓친 게 하나 있었다.

검은 단순히 오러가 전부는 아니었다.

지금처럼-.

길버튼의 검이 미끄러지듯 상대의 검을 타고 흘렀다. 그에 상대의 중심이 순간 흔들렸다.

아주 찰나의 틈이었지만, 길버튼은 놓치지 않았다.

마족의 얼굴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길버튼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검을 회수했다.

'놀라운 검술이군.'

갈라하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역시 길버튼은 훌륭한 기사였다.

마족들의 시선이 떠오른 마족의 머리에 따라붙었다. 이내 마족의 머리가 바닥을 뒹굴었다. 하얀 눈이 붉게 물들었다.

길버튼은 검을 고쳐 잡으며 마족들을 경계했다.

짝짝! 마족들이 가벼운 박수를 쳤다.

그들의 계획이 막힌 것인데, 저런 여유로운 태도라니.

갈라하드는 습관적으로 마나를 뿌렸다.

그 돌아온 결과에 갈라하드의 얼굴이 굳었다.

'오만한 게 아니었군.'

갈라하드는 쯧-하고 혀를 찼다.

****

"길버튼 경."

길버튼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갈라하드에게 돌아갔다.

'분명 하급이었는데, 어찌 이런 힘이-.'

길버튼은 저린 손을 쥐었다가 폈다.

상대는 분명 하급 마족이었다. 그런데 검이 무거웠다. 놈의 검술이 조금 더 예리했다면, 길버튼이 밀릴 뻔했다.

갈라하드에게 돌아간 길버튼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원래라면 '길버튼 경, 고작 하급 마족에게 고전하면 되겠나?'라며 놀렸을 갈라하드가 조용했다.

갈라하드로 시선을 돌린 길버튼은 눈을 찡그렸다.

늘 여유롭던 갈라하드였는데, 지금은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그 갈라하드가 긴장했다니, 길버튼의 털이 쭈뼛 섰다.

"무슨 일입니까?"

길버튼은 검을 고쳐 잡으며 물었다.

그때, 마족들 사이에서 키가 큰 마족이 앞으로 나섰다. 콧수염까지 기른 중년 사내의 모습을 한 마족이었다.

"이거 우리가 생각보다 많이 유명해진 모양일세."

"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톰, 데미안 좀 주겠나?"

갈라하드가 마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 뜻 모를 명령에 길버튼은 눈을 찡그렸다.

"도대체 뭡니까?"

"포위됐네."

"일곱 남았는데."

그때, 옆의 나무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 사이로 고급스러운 복장의 놈들이 나왔다.

옷과 무기가 제각각이었다. 살을 훤히 드러낸 이도 있었다.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였다.

허리춤에 포크와 나이프가 있다는 것.

저놈들도 다 마족인가? 길버튼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마족은 아닐세. 쯧, 이놈들도 여기 있었군."

"...아는 놈들입니까?"

"자기들을 미식가라 칭하는 아주 역겨운 놈들일세."

미식가, 그 불쾌한 어감에 길버튼은 눈을 찡그렸다.

갈라하드가 미식가라 칭한 놈들은 잘 관리된 무기를 하나씩 쥐고 있었다. 길버튼은 놈들이 쉽지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사방이 막힌 완벽한 포위였다.

수가 많아졌지만, 정적은 여전했다.

놈들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풀면서 무기를 고쳐잡았다.

마족 여덟도 충분히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데 저놈들까지 합세하다니.

길버튼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다들 과묵하군. 아, 한쪽은 데미안 빼고 치울 생각이고, 미식가들은 원래 고기와는 말하지 않았지. 음, 그렇군."

혼자 중얼거린 갈라하드가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예의 여유로움이 다시 보였다.

그를 본 길버튼은 마음이 놓이면서 동시에 더 불안해졌다.

"자, 좋은 계획이 떠올랐네."

갈라하드가 대뜸 마차 위로 올라갔다.

사방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꽂혔다.

갈라하드는 마치 그 시선들을 즐기듯 여유롭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일세, 만나서 반갑네-. 이런 다들 과묵하군."

돌아오는 대답이 없는데도, 갈라하드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내가 제법 유명해졌나 보군, 어설프게 귀족을 따라 하는 마족들과 역겨운 미식가들이 뭉칠 정도로 말이지."

오히려 도발하는 갈라하드에 길버튼은 식은땀이 흘렀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콧수염 마족이 앞으로 나섰다. 놈은 다른 마족들보다 기세가 더 뾰족했다. 길버튼의 손에 땀이 찼다.

저 정도로 반응이 없으면 기가 죽을 만도 한데, 갈라하드는 오히려 목청을 높였다.

"자, 귀족을 흉내 내는 그대들은 특무대가 무서웠나 보군. 저런 역겨운 미식가들에게 거래를 요청할 정도로 말일세. 거래 내용은 데미안을 빼고 전부 먹어도 된다- 정도겠군. 맞나? 오, 고맙네. 저 쪽 미식가가 고개를 끄덕여줬네."

지목당한 사내가 황급히 고개를 두 번 저었다.

그때, 갈라하드가 마차를 발로 두들겼다.

톰이 데미안을 마차 밖으로 꺼냈다. 갈라하드가 그를 보며 손짓 했다.

'.....데미안은 왜?'

톰은 일단 갈라하드에게 데미안을 내밀었다.

"톰, 고맙네."

갈라하드가 데미안의 멱살을 잡아서 들었다. 마치 물건을 챙기듯 거친 손길이었다.

"아, 검도 좀 빌려주겠나? 고맙네."

정중한 부탁에 톰은 멍하니 검을 건넸다.

"좋군."

한 손에는 데미안, 반대 손에는 검을 든 갈라하드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길버튼과 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몸풀기가 끝난 건지 미식가들이라는 놈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콧수염 마족이 검을 뽑았다. 전보다 더 싸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길버튼의 털이 쭈뼛- 설 정도였다.

선명한 위기에 길버튼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갈라하드를 곁눈질했다.

갈라하드라면.

그때, 갈라하드가 데미안을 번쩍 들었다.

저 마른 몸에서 어찌 저런 힘이 나왔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갈라하드가 데미안을 자랑하듯 사방으로 흔들었다.

멱살이 붙잡힌 데미안이 대롱대롱 위태롭게 흔들렸다.

뜬금없는 행동에 다가오던 놈들의 걸음이 멈췄다.

갈라하드는 데미안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자, 움직이면 이 불쌍한 소년의 목에 구멍이 생길 걸세."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거기에-.

"아... 안 돼요! 우리 아이는 제발! 뭐든 할 테니! 데미안은 살려 주세요! 안 돼!! 차... 차라리 저를-! 우리 아이만은!"

질겁한 그웬이 엉엉 울면서 매달리자-.

마족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52화 인질 2

"꼼짝 말게! 움직이면 찌를 걸세!"

길쭉하고 깔끔하게 생긴 사내가 자그마한 아이의 목에 서늘한 검을 가져다 대며 외쳤다.

얼마나 못 먹었는지 삐쩍 마른 아이가 그 거친 손길에 위태롭게 흔들렸다.

뜬금없는 상황에 모두가 멈췄다.

'...?'

1급 미식가 해럴드는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니까 지금-.

'자기 동료를 인질로 협박하는 건가?'

상황을 뒤늦게 이해한 해럴드는 눈을 찡그렸다.

연기로 보기에는 사내의 다리에 매달린 여인의 오열이 너무 사무쳤다.

여인이 펑펑 눈물을 흘리며 사내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저건 연기일 수가 없었다.

거기에 삐쩍 마른 아이의 목에 칼을 댄 놈의 깔끔한 미소까지-.

단순한 연기 같지는 않았다.

그에 의문이 들었다.

'근데 왜 동료로 협박을?'

자기 동료로 협박하는 멍청한 놈에 해럴드는 혀를 찼다.

"멈춰라."

마족이 나지막한 명령을 내렸다.

마족의 얼굴이 작게 일그러져 있었다.

"멈추라니?"

해럴드는 검을 고쳐 잡으며 되물었다.

"그래, 멈추게! 이 소년의 목에 구멍이 생기는 걸 막고 싶다면 말일세!"

사내가 소년을 흔들며 소리쳤다. 그에 해럴드의 미간이 구겨졌다.

"아이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마족이 실제로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모든 마족의 표정이 똑같았다. 하나로 묶인 것처럼.

"좋은 생각일세! 나는 아주 무자비하다네!"

사내가 신나서 소년을 흔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서로 입장이 뒤바뀐 듯한 상황에 해럴드는 눈을 가득 구겼다.

'이래서 마족들은...'

마족은 그 계산이 명확했다. 거기에는 한 치의 빈틈도 고민도, 타협의 여지도 없었다.

미식가들이 저 마족들의 의뢰로 온 건 사실이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이들의 목표는 저 갈라하드라는 놈이었다.

갈라하드라는 놈이 북부로 온 뒤부터, 북부가 어지러워졌다.

그에 놈의 처리를 바라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미식가들도 그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여명의 의뢰인데.'

해럴드의 입이 바짝 말랐다. 의뢰를 여러 개 받은 게 문제였다.

갑자기 마족들이 물러난다고 할 줄이야.

'계속한다고 하면-.'

해럴드는 마족을 살폈다.

여전히 감정 없는 모습이었다.

마족들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놈들의 우선순위가 저 소년이라면.

'마족과도 싸워야겠군.'

분명 빠져나갈 수 없는 완벽한 함정이었다.

그를 단 한 수로 망가뜨리다니-.

'대단한 놈이군.'

소년에게 칼을 대며 웃는 놈에 해럴드는 작게 감탄했다.

다만-.

"저놈이 진짜 찌를 것 같나? 인간은 마족과 다르다. 동료인 어린 소년을 함부로 찌를 수 있겠나?"

해럴드는 놈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에 마족의 고개가 돌아갔다.

시선을 받은 놈이 입꼬리를 올렸다.

"어떨 것 같나?"

놈이 검을 빙글 돌렸다.

검이 유려한 선을 그렸다.

본래라면 당연히 소년의 목을 못 찌를 게 분명했다. 자기 동료인 어리고 마른 소년이었으니까.

다만.

"아아! 안 돼요! 제발!"

옆에서 애원하는 여인과 비통한 표정으로 그 여인을 잡는 사내, 그리고 못 보겠다는 듯 고개를 돌린 기사까지-.

'...왜 찌를 것 같지?'

"아이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위험을 무릅쓸 생각은 없다."

마족이 단호하게 말했다.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해럴드는 잠시 입술을 씹다가 끄덕였다.

일이 복잡해지겠지만.

'일단, 마족을 치우자.'

굳이 마족까지 상대할 필요 없었다.

해럴드가 미식가들에게 손짓했다. 미식가들의 얼굴에 짜증이 차 올랐다. 고기를 앞에 두고 물러서는 것만큼 치욕적인 게 없었다.

그때.

"어? 저들의 표정이 상당히 불순하네! 이거 걸리적거리는 마족들을 치우고 적당한 기회를 봐서 기습하자! 라는 얼굴일세. 의뢰를 망쳤으니 소년도 손봐주지! 라는 군!"

놈이 괴상한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식가들은 한 번 점찍은 사냥감은 절대 포기하지 않지. 그렇지 않나?"

놈이 마치 미식가들을 아는 것처럼 말했다.

그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운 목소리에 해럴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족들의 고개가 해럴드 쪽으로 돌아갔다.

"...그렇지 않네."

"음, 저 눈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게나. 인간은 거짓을 말할 때면 눈가가 떨리지. 자네, 거짓을 말하고 있군."

이어진 놈의 종용에 콧수염을 기른 마족이 검을 뽑았다.

마족의 검은 놈이 아닌 미식가 쪽을 겨눴다.

"이 개새끼가-."

해럴드는 짜증스럽게 욕을 뱉었다.

이제 물러설 수 없었다.

마족과 미식가들이 뒤엉켰다.

****

'.....?'

톰은 좀처럼 상황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습격에 나오니, 마족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심지어 괴상한 이들까지 나타났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갈라하드가 갑자기 데미안의 목에 칼을 댔고-.

포위한 놈들이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저놈, 검술이 상당합니다."

"그렇군, 수도의 유망한 기사에게 배운 것 같네만."

그를 보며 길버튼과 갈라하드가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고 있었다.

"데미안! 데미안!"

"그웬, 정신 차리게. 자네도 이제 마법사인데, 정신 간섭에 그리 쉽게 당하면 쓰나."

"에? 아앗?!"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웬이 눈을 꿈벅였다. 그 눈가로 줄줄 흐르던 눈물이 멈췄다. 이내 온순한 기색이 올라왔다.

데미안을 받을 때 갈라하드가 슬쩍 그웬의 머리를 만졌는데, 그 때 뭔가를 한 듯했다.

사방에서 고함과 비명이 터졌다. 미식가들이라는 놈들이 각기 다른 무기로 마족들을 상대했다.

"잘 싸우는군."

갈라하드가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러? 놈들 기사였습니까?"

미식가들이라 불린 이들이 각기 다른 오러를 뿜어내고 있었다. 길버튼이 그를 가리키며 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사 실패작들일세."

"...실패작?"

"수도에서는 기사를 찍어낸다네. 그 과정에 불량이 발생하지. 저렇게."

갈라하드의 태평한 대답에 길버튼의 미간이 구겨졌다. 기사를 찍어낸다는 것에 모욕감을 느낀 듯했다.

"기사가 찍어낼 수 있는 겁니까?"

"양식 기사일세. 성공해도 자연산 기사보다는 약하고 더는 성장 할 수도 없네. 그래도 병사보다는 강하지."

"도대체 저런 걸 어디에 씁니까?"

"여기저기 쓴다네."

그때, 비명이 길게 터졌다. 예의 콧수염 마족이었다.

콧수염 마족은 마치 양 떼 속의 늑대처럼 거칠게 움직였다. 그러나 미식가들도 그냥 당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마치 맹수를 사냥하듯 사방에서 콧수염 마족을 압박했다. 공방이 연속으로 이어졌다.

무력은 마족이 더 강했지만, 미식가들의 수가 더 많았다. 그로 인한 균형이 제법 적절했다.

"다들 준비하게."

"예? 뭐를 말입니까?"

"곧 눈치챌 걸세."

"뭐를요."

"내가 그렇게 모질지 않다는 거 말일세."

갈라하드가 눈을 찡그렸다.

톰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풀었다. 그웬은 입을 오물거리며 주문을 외웠다. 길버튼은 길게 숨을 내뱉으며 검을 고쳐 잡았다.

그때-.

쐬에에에엑.

"이런."

날카로운 소리에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퉁! 데미안을 노린 뾰족한 화살이 뭔가에 막혀 떨어졌다.

"저것 봐라! 화살을 막아주는 놈이 무슨 인질!!"

미식가 중 하나가 쇠뇌를 흔들며 소리쳤다.

그에 전투가 멈췄다.

모두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꽂혔다.

"네놈, 우리를 속였군."

콧수염 마족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이런, 들켰군. 자, 받게. 그웬,"

데미안을 슬쩍 뒤로 던졌다. 검에 가려졌던 데미안의 목은 깨끗했다. 상처 하나도 없었다.

"같잖은 장난을-."

콧수염 마족이 눈을 찡그리며 검을 겨눴다.

"나를 타박하지 말게. 협박범과 타협하려는 그대들이 멍청한 걸세."

갈라하드는 주저 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소리 없이 날아간 무언가에 미식가 하나가 쓰러졌다.

"이 마법은.... 너...!"

미식가 중 제일 큰 사내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거기, 대머리 미식가는 잘 있나? 혀가 뽑혀서 맛을 더 느끼지 못 할 텐데 말일세."

갈라하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연초를 물었다.

"자, 다 같이 힘을 합쳐서 데미안을 지키는 걸세."

갈라하드의 담담한 말에.

"폭발화구-!"

그웬이 어느 때보다 크게 외쳤다.

평소보다 거대한 불덩이가 빠르게 날아갔다. 삐쩍 마른 미식가가 오러 담긴 검으로 불덩이를 자르려 했다.

불덩이가 거칠게 터졌다. 거센 화염이 주변을 순식간에 잡아먹었다.

"끄아아악!"

거친 비명이 신호탄이었다.

"잘 썼네, 좋은 검이군."

갈라하드가 웃으며 검을 부드럽게 건넸다.

"자네는 데미안을 지키게."

톰은 검을 잡으며 굳게 끄덕였다.

****

'의외로 빨리 눈치챘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꺼내며 혀를 찼다.

예상만큼은 아니지만, 놈들끼리 싸우면서 그 수가 좀 줄었다.

갈라하드는 다시금 계획을 짜고 계산을 돌렸다.

빠르게 계산을 마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길버튼 경, 저 멋들어진 콧수염 마족 사로잡게. 내가 시간을 벌 테니."

"예."

길버튼의 짤막한 대답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얼음송곳이 빠르게 쏘아졌다.

어두운 밤이라 제대로 보이지 않을 텐데도, 미식가 하나가 검을 틀어 그를 막았다. 실력이 제법이었다.

파삭! 얼음송곳을 벤 미식가가 입꼬리를 올렸다. 선명한 비웃음이었다. 그에 갈라하드도 따라 웃었다.

그때 미식가의 목에 뭔가 박혔다. 컥-.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미식가가 뒤로 엎어졌다. 얼음송곳이었다.

어째서-. 미식가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손은 두 개라네-. 갈라하드는 왼쪽 손을 흔들며 웃었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깊게 빨며 주변을 둘러봤다.

방금까지 싸우던 놈들이 언제 화해했는지, 자연스럽게 뒤섞여서 다가오고 있었다.

"참으로 지조 없는 놈들일세."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면서 다시금 손가락을 튕겼다.

또다시 쏘아지는 얼음송곳-.

이번 놈은 오러 두른 도끼를 짧게 휘둘렀다. 두 번째 얼음송곳을 경계하는 듯했다. 확실히 습득이 빠른 놈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오러 두른 도끼가 얼음송곳을 내려쳤다. 다만, 두 번째 얼음송곳을 경계한 터라 실린 힘이 적었다.

애석하게도 이번에는 얼음송곳 하나였다.

대신 그만큼 두꺼웠다. 실린 힘도 두 배였고.

도끼가 그대로 밀리며 놈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오러 섞인 도끼를 밀어낸 얼음송곳이 놈의 배에 박혔다.

크윽-. 나지막한 비명이 전부였다.

칼바람이 갈라하드의 머리칼을 흩날렸다.

고통의 알이 격하게 뛰었다.

그때, 미식가들이 대형을 이뤘다. 하나가 선두에 서고 그 뒤에 둘, 그다음은 셋인 대형이었다.

선두에 선 이가 먼저 쳐내면 뒤에 선 이들이 교대하며 마법을 막아내는 방법이었다.

원래는 마법사 무리를 상대하기 위한 대형이었다.

갈라하드의 마법이 빠른 걸 상정한 듯했다.

'확실히 제법이란 말이지.'

괜히 마법사 사냥꾼으로 불리는 게 아니었다.

확실히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갈라하드는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니었다.

'재밌겠군.'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손가락 사이로 스파크가 연속으로 튀었다.

타닥, 타닥-, 경쾌한 소리와 함께 스파크가 크기를 순식간에 키웠다.

찰나였다. 멋들어진 번개 꽃이 피어올랐다.

"어디 번개도 갈라보게."

갈라하드는 농을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멋들어진 번개 꽃이 갈라하드의 손가락을 타고 만개했다.

어두운 밤을 타고 자라듯 스파크가 뻗쳤다. 꽃의 가지처럼-.

다가오는 번개 꽃을 보고도 미식가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선두에 선 놈이 오러를 일으키며 용맹하게 검을 휘둘렀다.

만개한 번개에 놈들의 얼굴이 노랗게 보였다. 그 얼굴에 깃든 건 자신감이었다.

자신감의 근거는 그들의 검에 서린 오러였다.

본래 오러는 마법을 갈랐다.

신념이 못 베는 건 없었으니까.

다만, 지금은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 놈들은 자연산 기사가 아닌 양식 기사였다. 그들의 신념은 주입된 것이었다.

주입된 신념의 뿌리가 깊을 리 없었다.

두 번째, 아까도 말했듯 갈라하드는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니었다.

두근!

'알았으니 좀 진정하게나.'

독촉하는 고통의 알에 혀를 찼다.

그때, 오러 섞인 검이 번개를 정확히 갈랐다. 놈의 얼굴에 희열이 떠올랐다.

우습게도.

"만개."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갈라진 번개가 거친 줄기로 뿌려졌다.

번개 꽃의 가지가 수백 개로 갈라지며 펼쳐졌다.

화려하게 만개한 번개는 절망이었다.

기운차게 달려오던 미식가 뭉치가 우뚝 멈췄다. 그들의 뒤로 해소되지 않은 번개가 거칠게 휘날렸다.

놈들을 타고 뿌려진 번개 조각들이 사방을 밝혔다.

미식가들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정적 속에서-.

"후- 시원하군."

갈라하드는 상쾌하게 머리를 넘겼다.

갈라하드의 눈은 길버튼을 쫓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콧수염 마족.'

길버튼과 검을 나누는 콧수염 마족을 살폈다.

****

'무슨-'

콧수염 마족, 벨 우르탕은 눈을 찡그렸다.

아드리안나의 측근이었던 길버튼이었다. 실력이 뛰어난 기사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가솔을 일곱이나 준비했다.

가솔 일곱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계산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며, 가솔이 다섯 남았다.

사실 다섯으로도 충분했다.

애초에 일곱이나 준비한 건, 갈라하드라는 인물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안 되는 거지?'

벨 우르탕은 검을 당기며 중얼거렸다.

분명 지금도 벨 우르탕의 힘이 놈의 오러보다 강했다.

그런데 어째서.

"기사 길버튼!!"

자신이 밀리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벨 우르탕의 권능은 놈의 오러보다 강력했다. 더불어 벨 우르탕의 검술은 정통 검술이었다.

당연히 벨 우르탕이 이겨야 하는 승부였다.

그런데 놈이 좀처럼 쓰러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검이 나보다 빠르군.'

길버튼의 검이 미묘하게 더 빨랐다. 벨 우르탕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놈의 검이 나보다 빠를 수 있다는 말인가.

공방이 빠르게 이어졌다.

이윽고.

벨 우르탕의 오른팔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피가 길게 뿌려졌다. 검이 바닥을 뒹굴었다.

"싱겁군."

길버튼의 검이 우르탕의 목을 겨눴다. 길버튼의 몰골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무식하게 들이민 탓에 여기저기 갑옷이 잘려있었다.

그에 반해 눈은 여전히 형형했다.

"어째서 네 검이 더 빠른 것이지?"

우르탕의 물음에 길버튼이 검을 비스듬하게 틀었다.

"너는 똑똑한 기사다. 그래서 검이 느리지."

똑똑해서 검이 느리다?

그렇다면 길버튼의 검이 빠른 이유는.....

"네가 멍청해서 검이 빠르다는 건가?"

"뭐? 이 망할 놈이."

버럭 화를 내는 길버튼에 벨 우르탕은 눈을 찡그렸다.

방금 본인이 한 말 아닌가?

그때, 거친 폭발이 일어났다. 뜨거운 열기가 우르탕의 볼을 간질였다.

고개를 돌리니 미식가들이 뒤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그 사이로 꼴이 엉망인 갈라하드가 달려왔다. 곱게 넘겼던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길버튼 경, 그것 좀 잠시 빌려주겠나? 긴히 쓸 데가 있네."

갈라하드가 머리를 넘기며 말했다. 그 뒤로 달려오는 미식가들과 가솔들이 보였다. 제법 줄인 듯했지만, 여전히 이쪽의 수가 많았다.

승기는 우르탕 쪽에 있었다.

"예, 여기 있습니다."

길버튼이 우르탕을 건넸다. 꼭 물건처럼 다뤄진 우르탕은 눈을 찡그렸다.

그때, 갈라하드가 우르탕의 목을 거칠게 잡았다.

힘이 어찌나 강한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갈라하드가 우르탕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자, 한 번 해봤으니 금방 이해할 거라 믿네. 자! 움직이면 이자의 머리가 터질 걸세."

예의 정중한 협박을 이어갔다.

목을 잡혀 흔들리는 우르탕에 다가오던 이들이 우뚝 멈췄다.

그중에 몇이 눈을 구겼다. 어떤 이들은 무기를 고쳐 잡았다.

"아까도 했던 지랄이다! 멈추지마!"

"아, 그래."

누군가의 외침에 갈라하드가 작게 속삭이며 우르탕의 왼쪽 어깨를 잡았다.

손가락으로 어깨를 툭- 두드리자-.

우르탕의 왼쪽 어깨에서 거친 불길이 타올랐다.

어둠을 밀어낼 정도로 거친 불길과 노릇노릇한 냄새에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순식간에 바짝 탄 우르탕의 왼쪽 팔이 그대로 떨어졌다.

무거운 정적 속에서-.

"아, 이번에는 진짜일세."

갈라하드가 여유롭게 말을 덧붙였다.

'이게 무슨.'

우르탕은 눈을 찡그렸다.

그때, 갈라하드가 우르탕을 가까이 당겼다.

마치 관찰하듯, 우르탕을 바로 앞까지 당긴 갈라하드가-.

가라앉은 눈으로 우르탕을 보며 물었다.

"그래, 지금도 장난 같나?"

그 목소리에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

53화 편지

"지금 협박하는 건가?"

콧수염 마족의 평온한 물음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협박이라니, 회유일세. 자, 이름이 뭔가?"

"프록셀 가문의 벨 우르탕이다."

"재밌는 이름이군."

갈라하드는 나지막하게 웃으며 손에 힘을 더했다.

"소용없을 것이다."

벨 우르탕이 이죽거렸다.

팔 하나는 잘렸고, 다른 팔은 새까맣게 탔다. 거기에 목까지 잡혔는데도 벨 우르탕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역시 마족이었다.

"일리가 있네. 확실히 자네 하나 잡았다고 저들이 멈추지 않겠지."

"그러면 왜 나를 잡았지?"

"자네가 멈추라고 하면 멈추지 않겠나?"

벨 우르탕이 소리 내어 웃었다.

"내게 목숨은 의미가 없다."

"그건 알고 있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면서 말을 덧붙였다.

"자, 보게나. 마족은 자네를 제외하고 셋 남았네. 자네는 양팔이 없으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 자네, 미식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기가 뭔지 아는가?"

벨 우르탕이 눈을 찡그렸다.

"마법사의 고기일세. 저들은 마법사의 심장을 먹으면 힘을 얻는다고 생각하거든-. 실제로 효과도 있고. 그다음으로 좋아하는 고기가 바로 어린아이의 고기지."

갈라하드는 벨 우르탕의 턱을 잡아 시선을 돌려줬다. 갈라하드가 마족들을 처리한 터라, 미식가들의 수가 더 많았다.

"나는 이제부터 마족만 잡을 것이네. 내가 조금 지쳤지만, 그래도 셋 정도는 데리고 가겠지. 저들이 막을 것 같나? 음, 인간은 그렇게 의리가 있지 않네."

갈라하드는 벨 우르탕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벨 우르탕이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자, 그러면 문제를 내겠네. 양팔이 없어진 자네만 남은 상황에서 놈들이 고기를 포기할 것 같나? 아까 주저 없이 검을 찌르던 걸 보면 그럴 것 같지는 않네만-."

벨 우르탕의 눈이 작게 구겨졌다. 그 감정 없는 눈을 보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어떨 것 같나?"

갈라하드의 물음에 벨 우르탕이 큭- 하고 웃었다.

"너, 마족이었군."

"풋, 미안하지만 마족은 아닐세. 그저 유능한 마법사일 뿐이지."

"아직 모르는군."

비웃듯 입꼬리를 올린 벨 우르탕에 갈라하드는 미간을 찡그렸다.

"내가 본래 여유로워 독촉하지 않네만, 지금은 빨리 결정해야 할 걸세."

갈라하드는 번개 꽃을 피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무심한 얼굴의 마족이 있었다.

벨 우르탕이 고개를 끄덕였다.

"멈춰라."

벨 우르탕의 나지막한 명령에 마족들이 우뚝 멈췄다.

'연결되어 있군.'

갈라하드는 그를 흥미롭게 살폈다.

마족들이 멈추자 미식가들도 멈췄다. 다시금 묘한 긴장감이 내려 앉았다.

피 냄새, 땀 냄새, 지린내까지 섞인 끔찍한 냄새가 가득 풍겼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연초를 입에 물었다.

그때-.

"미식가들을 죽여라."

벨 우르탕이 짧게 명령했다.

마족들은 고민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 옆에 있던 미식가들의 목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마족들이 이어서 검을 움직였다.

그 마족스러운 반응에 미식가들이 다시금 당했다.

"이런-! 멍청한 마족 새끼들! 이놈들부터 죽여!"

큼지막한 모자를 쓴 미식가가 거칠게 명령하자, 미식가와 마족이 다시금 뒤엉켰다.

피 냄새가 짙어졌다.

"됐나?"

벨 우르탕이 갈라하드를 보며 물었다.

갈라하드가 요구한 건 공격을 멈추라는 거였다.

물론, 그 뒤에 전투를 종용할 생각이었지만.

그런데 벨 우르탕은 바로 공격을 명했다.

계산이 빨랐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족과 말이 잘 통하는군.'

"이해가 빨라서 좋군."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벨 우르탕의 흉부에서 흐르는 피가 보였다.

아깝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허리춤의 수통을 꺼내서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벨 우르탕의 흉부에 수통을 가져다 대고 말했다.

"힘 좀 줘보게."

벨 우르탕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힘 좀 주라니까. 흐르지 않나."

갈라하드는 혀를 차면서 수통을 더 들이밀었다. 벨 우르탕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줬는지 피가 수통에 곱게 들어갔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말했다.

"자, 그러면 몇 가지 묻겠네."

벨 우르탕이 갈라하드를 올려봤다. 그 눈은 여전히 평온했다.

"자네는 누구인가."

"프록셀 가문의 벨 우르탕이다."

벨 우르탕의 대답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가문을 중시하는군.'

갈라하드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다음은 데미안이었다.

놈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오느냐에 따라서.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날아간 번개 꽃이 미식가 하나를 그대로 감쌌다. 타다다닥-. 옥수수 튀기는 소리가 나며 놈이 그대로 쓰러졌다.

"대단한 권능이군."

"마법일세."

"인간들은 그렇게 부르지."

갈라하드는 작게 손을 털었다.

"자, 그러면 다음 질문일세. 데미안은 무슨 존재인가?"

"대답하지 않겠다."

벨 우르탕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 작은 여지도 없었다.

팔을 태워 떨어뜨릴 때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던 놈이었다.

일반적인 회유는 통하지 않았다.

마침, 새로운 회유를 써보고 싶던 참이었다.

"그렇군."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벨 우르탕의 머리를 잡았다.

연초를 입에 물고, 왼손으로 수통을 열었다.

역겨운 피 냄새가 가득 풍겼다.

쯧,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수통의 피를 마셨다.

방금 담은 피라 뜨끈하여 기분이 더 더러웠다.

벨 우르탕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고통의 알이 연신 거칠게 뛰었다. 격한 반응이었다. 맛이 끝내준다고 소리치는 듯했다.

'이게 귀족이라는 건가.'

고통의 알이 끄덕였다. 흥분한 고통의 알이 농도 짙은 마나를 연신 뿌려댔다.

'조금 더 내놓게.'

갈라하드는 팔뚝을 걷으며 말했다. 마법진이 천천히 빛나기 시작했다. 고통의 알이 잠시 저항하다가 생명력을 꺼냈다.

생명력을 주입한 마법진이 빛을 뿜어냈다. 갈라하드는 안 그래도 짙은 마나를 마법진으로 압축했다.

최상급 마족의 마나를 압축해본 경험과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진이 더해지자, 농도 짙은 마나인데도 압축할 만했다.

갈라하드는 벨 우르탕의 눈을 마주 봤다. 놈의 눈이 떨렸다.

그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주문을 읊었다.

"진실이 자네를 자유롭게 해줄 걸세. 실토-."

벨 우르탕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 초점이 가득 흔들렸다.

'저항이 상당하군.'

갈라하드는 저항에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마나를 이어갔다.

정신계 마족들을 겪으며 더 예리해진 정신 마법이 벨 우르탕의 머리를 헤집었다.

이내 벨 우르탕의 초점이 탁 풀렸다.

"데미안에 대해서 말해보게."

갈라하드는 집중을 잃지 않으며 물었다.

그에 벨 우르탕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데미안은-."

그때, 놈의 초점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마치 누군가 잡고 흔드는 것처럼 몸을 가득 떨었다.

'정신 방벽이군.'

정신 방벽은 정신계 마법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가장 귀찮은 게 저 정신 방벽이었다. 주로 뒤가 더러운 놈들이 입 막음 수단으로 넣어두는 것인데, 마족에게 있다니.

예기치 못한 상황에 갈라하드는 눈을 가득 찡그렸다.

마족에게 정신 방벽이 왜 있다는 말인가.

'정신계 마족을 막기 위함인가.'

이 귀족 흉내를 내는 놈들과 정신계 마족의 사이가 안 좋나? 마족들의 상황을 모르기에 뭐라 단정할 수 없었기에, 단서로 기억했다.

'권능으로 두른 거군.'

갈라하드는 마나를 움직여 상황을 파악했다.

힘을 공유하는 놈들의 권능과 연관된 기능인 듯했다.

'흥미롭군.'

또 새로운 권능이라니-!

흥미가 가득 올라왔다. 숨이 절로 뜨거워졌다.

정체를 알 수 없기에 조금 거친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좀 아플 걸세."

짧게 경고하고 바로 마나를 움직였다.

놈의 머리를 타고 마나가 사냥개처럼 거칠게 움직였다.

이내 권능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

이렇게 깊은 위치에 박아두다니-.

'잔인하군.'

갈라하드는 잠시 입맛을 다셨다.

이 정도 깊이를 잡으려면-.

"아, 잠깐 실례하겠네."

양해를 구한 갈라하드는 손가락에 힘을 줘서 관자놀이에 박았다. 손가락이 관자놀이를 파고들었다.

마나가 격하게 날뛰었다. 고통의 알이 환희에 가득 차서 떨었다. 벨 우르탕의 초점이 거칠게 흔들렸다.

"끄윽-."

"오, 뇌를 건드리면 마족도 고통을 느끼는군."

새로 얻은 사실에 갈라하드는 작게 감탄했다.

벨 우르탕이 발작하듯 몸을 거칠게 흔들었다.

"이런-, 엄살이 심하군. 가만히 좀 있게."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벨 우르탕을 굳게 잡았다.

이내 권능이 마나에 붙잡혔다. 갈라하드는 주저 없이 그를 터뜨렸다. 뿌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벨 우르탕의 머리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크윽!"

우르탕의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 눈에서 피눈물이 길게 흘렀다. 입에서 부서진 이빨 조각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자, 다시 말해보게, 데미안은 어떤 존재지?"

갈라하드는 허물어지는 벨 우르탕을 잡아주며 친절하게 물었다.

갈라하드를 보는 우르탕의 눈이 흔들렸다.

잠시 주저하던 벨 우르탕이 입을 천천히 벌렸다.

"사생아다."

짤막한 대답이었다.

"사생아라. 왜 사생아에 집착하지?"

"그야-."

갈라하드의 이어진 물음에 우르탕이 입을 벙끗거렸다.

그때, 우르탕의 눈이 돌아왔다. 정신 방벽을 깨뜨리면서 실토가 풀린 듯했다.

우르탕의 눈이 흔들렸다. 그 눈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이내 결심이 깃들었다.

"프록셀을 위하여-."

단단하게 읊조린 벨 우르탕의 입가로 피가 길게 터져 흘렀다.

정신 방벽은 이미 지웠다.

놈은 스스로 심장을 터뜨린 거였다.

지독하군-.

갈라하드는 놈의 입에 손을 쑤셔 넣었다.

컥-. 놈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격하게 떨리는 눈을 보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어딜 마음대로 가나."

어차피 죽을 놈이었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거칠게 움직였다.

놈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이윽고 놈의 숨소리가 고루 평탄해 졌다.

"하던 말은 끝내야지."

갈라하드는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놈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사이로 미약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유일하기에-."

그를 끝으로 놈의 고개가 꺾였다.

'죽었군.'

갈라하드는 피 묻은 손을 털며 중얼거렸다.

'유일한 사생아라.'

그때, 뾰족한 비명이 터졌다. 고개를 돌리니 미식가가 마족의 검에 찔려 쓰러졌다.

상황이 정리된 느낌이었다. 사방에 펼쳐진 시체 사이에 위태롭게 선 마족 하나가 전부였다.

'미식가가 이길 줄 알았는데?'

미식가의 수가 더 많았다. 갈라하드의 계산은 원래 미식가가 아슬아슬하게 이기는 거였다.

그런데 마족이 이겼다니-.

그 이유는 금방 드러났다.

"기사-! 길버튼-!"

길버튼이 오러가 가득 깃든 검으로 마족의 머리를 날렸다.

마족의 머리가 공중에 붕- 떠올랐다가 떨어졌다. 이어서 바닥을 통통- 굴렀다.

"승리했다!"

길버튼 때문이었다.

기사 실패작이 저 훌륭한 기사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제가 받아두겠습니다."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톰이 보따리에서 수통을 꺼내고 있었다.

"아, 세 개밖에 못 채웠습니다. 워낙 난전인 터라."

톰이 수통을 흔들며 말했다. 맑은소리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하네, 고맙군, 톰."

겸손하게 고개를 저은 톰이 쭈그려 앉아서 벨 우르탕의 피를 챙겼다.

'유일한 사생아라-. 프록셀 가문?'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고 방금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때, 마차 문이 열렸다. 데미안이 넘어지듯 다급하게 나왔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던 데미안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데미안이 처음 보인 격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때, 갈라하드와 눈이 마주쳤다. 데미안의 구겨진 눈에 갈라하드는 자신의 몰골이 그다지 좋지 않음을 깨달았다.

데미안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얼마나 급하게 뛰는지 오다가 넘어 질 정도였다.

갈라하드는 얼마 못핀 연초를 발로 비벼 껐다.

바로 앞에 선 데미안이 갈라하드를 올려봤다.

그 눈동자에 비친 갈라하드의 몰골이 참으로 엉망이었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겼다.

손이 피투성인 터라, 오히려 더 엉망이 됐다.

갈라하드는 쯧-하고 혀를 찼다.

그때,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요. 저랑 있으면 위험하다고."

평소 무미건조하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가면이 깨진 것처럼, 줄곧 무심하던 데미안의 얼굴에 언뜻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에 갈라하드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말하지 않았나. 내 명줄은 길다고."

데미안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먹구름 가득한 눈동자 사이로 나이에 걸맞은 맑음이 보였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갈라하드는 작게 기침하며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뒤로 넘기고 옷을 가다듬었다.

데미안과 눈이 마주쳤다. 데미안은 조금이지만 반짝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눈에 드리운 감정은 선망이었다.

데미안이 눈을 깜박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마법사 할래요."

그 목소리에 미세한 생기가 있었다.

아무래도 소년에게는 마법사가 멋있어 보인 듯했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미안하지만, 자네는 마법의 재능이 없네. 자네는 너무 단순하지 않나."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렇군요."

데미안은 바로 이해했다.

"기사-! 길버튼!"

길버튼의 외침에 데미안의 시선이 돌아갔다.

길버튼은 마족의 머리를 들고 전투의 열기를 가득 뿜어대고 있었다.

훌륭한 기사의 모습이었다.

데미안이 연신 외치는 길버튼과 갈라하드를 번갈아왔다.

이내 데미안의 얼굴에 다급함이 떠올랐다.

"마법사 할래요."

그에 갈라하드는-.

"미안하지만, 자네는 마법에 재능이 없네."

다시금 거절했다.

"기사-! 길버튼-!"

데미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갈라하드는 소리 내어 웃었다.

"데미안! 괜찮아?! 다친 곳 없어?!"

꼴이 엉망인 그웬이 데미안을 살폈다. 데미안이 갈라하드를 보며 묻었다.

"그웬도 마법사잖아요."

그 내포된 뜻에 갈라하드는 기침하듯 웃었다. 그웬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데미안을 살폈다.

"이런 젠장 맞을-. 이놈들 뭡니까?"

길버튼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그 손에 미식가의 가방이 들려있었다. 열린 가방 사이로 해골이 보였다.

"사람을 잡아먹는 혐오스러운 놈들일세."

"그런 놈들이 왜 여기서 나옵니까? 요즘 북부가 이상합니다. 마족이나 마물은 원래도 나왔지만, 저런 건 없었습니다."

길버튼의 뾰족한 중얼거림에 갈라하드는 나지막한 침음성을 흘렸다.

흑마법학회나 미식가들이나 원래 중부에서 암약하던 놈들이었다.

정보국은 놈들을 처리하는 것보다는 다루는 걸 좋아했다. 그 때문에 갈라하드는 놈들의 뿌리를 뽑을 수 없었다.

갑자기 사라지더니-.

'북부로 왔군.'

갈라하드가 정보국 시절에 열심히 쫓아낸 것들이 북부로 몰린 셈이었다.

"꼭 누가 일부러 북부에 밀어 넣은 것 같습니다."

길버튼의 중얼거림에 갈라하드는 작게 기침했다.

"밀어 넣다니-. 그럴 리가 있나. 몰랐겠지."

"이게 밀어 넣은 게 아니면 뭡니까. 어떤 새끼인지...."

"어허, 길버튼 경, 상대도 사연이 있을 걸세."

"예?"

"이런 해가 벌써 떴군, 다들 마차에 타게! 본부로 돌아갈 시간일 세! 5대대 대장이 아주 멋지게 지었다는 군!"

서두르듯 마차에 오르는 갈라하드에 길버튼은 묘한 찝찝함을 느꼈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찝찝함이었다.

아무리 갈라하드라도-.

'에이, 설마 아니겠지.'

길버튼은 고개를 젓고 고삐를 잡았다.

옆에 꼬맹이 데미안이 앉았다. 데미안이 길버튼을 올려보며 말했다.

"죄송해요."

"네가 왜 죄송하냐?"

"네?"

"네가 왜 죄송하냐고."

"아. 감사해요."

"아니, 왜 죄송하냐니까?"

길버튼의 멍청한 물음에 데미안은 입을 달싹이다가 풋하고 웃었다.

"아니, 뭐가 미안하냐니까?"

길버튼의 재촉에 데미안이 다시금 웃었다.

길버튼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

아드리안나는 앞에 놓인 종이를 노려봤다.

종이에 글이 길게 쓰여 있었다.

[아드리아나입니다. 저는 무사히 1대대에 도착했습니다. 1대대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를 믿고 맡긴 마경 훈련소의 진행 상황이 궁금합니다.]

한참 노려보던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젓고 종이를 구겼다.

그 옆으로 구겨진 종이가 가득 굴러다녔다.

"후-."

작게 심호흡한 아드리안나는 빳빳한 새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펜을 움직였다.

[1대대 대장 아드리아나입니다. 1대대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를 믿고 맡긴 마경 훈련소의 진행 상황이 궁금합니다.]

아드리안나는 편지를 다시 읽으며 끄덕였다.

"아-."

작게 탄식한 아드리안나는 편지의 뒷부분에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마경 훈련소는 대공께서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에게 맡긴 곳입니다. 1대대 대장인 제게 관여할 권한이 없습니다. 믿지 않는 게 아니라, 혹시나 도움이 필요하실까 보내는 편지입니다. 1대대 대장 아드리안나-.]

아드리안나는 한참이나 종이를 노려봤다.

몇 번이나 검토한 후에 끄덕였다.

훌륭한 편지였다.

편지를 매에 묶었다.

매가 넓게 열린 창문을 타고 저 멀리 날아갔다.

아드리안나는 드넓은 하늘을 자유로이 나는 매의 눈부신 모습을 한참이나 구경했다.

그때, 차가운 바람에 뭔가 덜그럭거렸다.

엉성한 갑옷과 투구였다.

당장 버려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다.

아드리안나는 그를 잠시 노려보다가.

구석에 있는 나무 상자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물론, 또 쓸 일은 없겠지만.

왠지 버리기 싫었다.

[특무대 막내, 노아드일세.]

아드리안나는 작게 기침했다.

바람이 서늘한 탓이었다.

54화 사중 보안문

"그러니까 여기가 특무대 본부라는 겁니까?"

길버튼이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쓰여 있지 않나. 자네, 글 못 읽나?"

갈라하드가 가리키는 곳에 큼지막하게 특무대 본부라고 적혀 있었다.

그에 길버튼은 두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첫째는-.

"여기 원래 5대대 본부 아닙니까?"

"그랬었지."

"근데 왜 특무대 본부가 됐습니까?"

"옆을 보게나."

큼지막하게 적힌 '특무대 본부' 옆에 '5대대'라고 적혀 있었다. 자세히 안 보면 '특무대 본부 5대대'라고 보였다.

"그러니까 왜 같이 있습니까?"

"공간이 남아서 같이 쓰기로 했네. 우리야 좋지, 관리할 필요가 없으니 말일세."

"...?"

길버튼은 잠시 눈을 찡그리다가 이내 두 번째 의문을 떠올렸다.

"어디 본부가 이렇게 이름을 적어 둡니까? 공격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래야 알아보기 좋지 않나. 그리고 애초에 여기까지 침입할 적이 우리 본부 위치도 안 알아봤겠는가?"

갈라하드의 대답에 길버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좀 그렇지 않습니까?"

"보안은 문제없으니 걱정하지 말게."

갈라하드의 단언에 길버튼은 볼을 긁적였다.

큼지막하게 본부라고 썼는데, 문제 될 게 없다니.

그 의문은 본부의 문을 여는 순간 바로 풀렸다.

본부 문을 열자 거대한 책상이 보였다. 그 위 잔뜩 쌓인 서류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조금 신경질적인 인상에 갑옷이 아닌 정복을 입고 있는 사내는 분명 5대대 대장이었다.

'...5대대 대장이 왜 여기 앉아 있어?'

경비병처럼 본부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5대대 대장에 길버튼은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보안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갈라하드의 평온한 대답에 길버튼은 잠시 눈을 찡그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문 앞에 대장이 앉아서 업무를 보고 있다면, 보안은 걱정 할 게 없었다.

길버튼은 왜 대장이 대문 앞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지 굳이 이해 하려하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증설은 끝났습니다."

"그래? 좋군."

갈라하드가 자연스레 5대대 대장 맞은편에 앉았다.

"먼저 올라가 있게, 대장과 이야기하고 갈 테니."

"아, 루미안, 자네가 안내해주게."

대장의 손짓에 조금 날카로운 인상의 여인이 다가왔다. 길버튼은 작게 헛기침하며 여인을 따랐다.

"본래는 3층을 사용하시기로 했는데, 저희 대장님이 필요없다고 2층부터 주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의 묘하게 뾰족한 목소리에 길버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잘 모르겠지만, 층을 한 개 더 준다는 거 아닌가?

"좋군."

길버튼은 여인의 날카로운 눈총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2층에 오르자 화려한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대대 본부보다 귀족의 성 같은 느낌이었다.

'5대대는 돈이 많군.'

길버튼은 속으로 감탄했다.

본래 속내는 숨길수록 좋은 거였다.

"와아! 이게 저희 본부예요?!"

입까지 벌리며 감탄하는 그웬에 루미안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면 저는 식사부터 준비하겠습니다."

벌써 짐을 푼 톰이 중앙에 있는 벽난로로 향했다.

톰은 어느새 요리 준비 중이었다.

데미안은 톰 뒤에 붙어서 침을 흘렸고, 그웬이 그 침을 닦아줬다.

넓은 층을 받았는데도 벽난로 앞에 모여있는 모습에 길버튼은 작게 혀를 찼다.

"3층은 알아서 살피겠다."

"예,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길버튼은 루미안을 보며 말했다. 그에 루미안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너무 넓군.'

길버튼은 시끌벅적한 셋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내가 도와줄게!"

"그웬님 아까 보니까 안쪽 방에 청소가 덜 되어 있던데 보셨습니까?"

"그래?"

"예, 제가 청소는 아직 어려워서...."

"이것 참! 어쩔 수 없지!"

기세등등하게 빗자루를 드는 그웬을 슬쩍 보다가 검을 꺼냈다.

깨끗한 검을 보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검을 보고 있으니, 미소가 절로 나왔다. 달콤한 냄새에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잠시 검을 감상하던 길버튼은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검을 닦았다.

금세 몰입하여 잡생각이 사라졌다. 검만 보였다. 길버튼은 이마에 땀까지 흘리며 검을 닦았다.

그때,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데미안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데미안의 눈동자가 길버튼을 빤히 쳐다봤다. 여전히 속이 보이지 않는 꼬맹이였지만, 묘하게 어려 보였다.

또 더러워진 데미안의 검에 길버튼은 작게 혀를 찼다.

"검을 이렇게 잡아라."

"네."

길버튼은 검 관리하는 법을 천천히 알려줬다. 데미안이 서툴지만, 곧잘 따라 했다.

둘은 묵묵하게 검을 닦았다.

****

"정말 해내셨더군요."

5대대 대장 마크가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해가 일곱 번 뜬 후에 다시 전령을 보낼 것인데, 구멍이 발견되면 척수를 뽑아서 그 구멍을 메꾸겠다.]

'척수를 뽑아서 그 구멍을 메우겠다니-.'

참으로 대공과 어울리는 문장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대공 전하가 직접 명령을 내리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마크가 드물게 감정을 드러내며 칭찬했다.

"어떻게 하기는, 편지 한 통 썼네."

"편지 말입니까?"

마크가 못 믿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끄덕였다.

"내가 명필일세."

"명필 말입니까?"

마크의 반문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병사 하나가 대문을 급하게 열고 들어왔다.

"대공 전하의 서신입니다!"

병사의 얼굴에 다급함이 가득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마크가 묘한 눈으로 갈라하드를 보며 서신을 받았다.

날카로운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편지가 짧았는지, 마크의 눈은 금세 다시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마크는 표정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는 게 전부였다.

그런 마크의 눈에 숨길 수 없는 경악이 격하게 떠올라 있었다.

'내가 대공의 인정을 받았다는 이야기겠군.'

마크의 반응에 갈라하드는 편지의 내용을 대충 짐작했다.

대공의 인정을 받았다는 게, 꽤 의미가 큰 듯했다.

"정말 대공 전하의 인정을 받으셨습니까?"

"사실일세."

"그렇군요."

마크가 찡그린 눈으로 편지와 갈라하드를 번갈아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말씀드렸습니까? 2층과 3층을 개조하는데, 돈이 꽤 많이 들었다고."

"고맙네."

"동맹이니까요."

마크가 '동맹' 부분을 강조했다.

"최근 5대대에 들어온 흑마법학회 인물들이 제법 많습니다. 동맹인 갈라하드님이 담당하기로 했기에 손을 대지 않았지만, 마석장에 따로 투입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마크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최근 들어온 흑마법학회 인물은 까마귀가 말한 학회장 쪽 인물일 듯했다.

'인물들이라-.'

"마석장은 어떻지?"

"아, 수가 좀 부족합니다."

"그렇군, 내가 처리하겠네."

갈라하드의 가벼운 대답에 마크는 고개를 저었다.

"놈들의 보안이 전보다 더 철저해졌습니다. 이를 확인하는 것도 힘들 정도입니다."

"보안은 걱정하지 말게. 내게 좋은 친구가 있으니."

좋은 친구? 마크는 그 묘한 단어를 중얼거렸다.

잠시 뒤에 갈라하드가 일어나려 했다.

그에 마크는 붙잡듯 말을 이었다.

"대공의 인정을 받았다는 건 엄청난 명예입니다. 다만, 북부의 명예는 무겁습니다."

"무겁다?"

"예, 대공 전하에게도 도전하는 곳이 북부입니다. 물론, 그렇게 담이 큰 인물은 많지 않지만... 그러나 북부에서 온 제국 마법사가 대공 전하의 인정을 받았다면-."

"여기저기서 귀찮게 할 것이다?"

마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표현을 정정했다.

"대공의 인정을 받았다는 건, 지금까지 농담처럼 넘겼던 아드리안나의 혼인 가능성이 올라갔다는 뜻이니까요."

마크의 눈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이런저런 계산을 하는 듯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갈라하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북부 놈들이었다.

그 정도야 이미 예상했다.

"여기저기서 결투 신청이 쏟아질 겁니다.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를 이겼다는 건 아주 높은 명예니까요."

마크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군."

갈라하드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자 마크가 테이블을 톡- 두드렸다.

"대장급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때, 마크의 어깨가 살짝 움직였다.

소리도 안 들릴 정도로 날렵한 행동이었지만-.

이미 저번에 본 창이었다.

갈라하드는 두 번 당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하여튼, 북부 놈들은-.'

대장급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려는 거겠지.

다만, 경고랍시고 창부터 들이미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날카로운 창이 빠르게 갈라하드에게 쏘아졌다.

그 속도가 저번과 같았다.

'더 빠르게 할 수 있군.'

힘을 숨기는 듯했다.

갈라하드는 그를 눈여겨보며 상황을 계산했다.

'참 빠르군.'

눈으로 쫓지 못할 정도로 빠른 창이었다.

고통의 알이 작게 뜀박질했고, 팔목의 마법진이 불을 뿜었다.

찰나였다.

팡! 작은 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마크의 목 주변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몸이 뒤흔들릴 정도의 충격인데도 창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폭발은 한 번이 아니었다.

창 중간 부분에서 터진 폭발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창대가 거칠게 흔들렸다.

'오러 방벽이라.'

갈라하드는 빗겨나간 창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오러 방벽은 오러로 몸을 감싸 방벽처럼 쓰는 방법이었다.

검에 오러를 씌울 수 있는 기사는 제법 많아도, 그중에서 오러 방벽을 쓸 수 있는 인물은 많지 않았다.

오러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나야 하기 때문이었다.

뭐든지 벨 수 있는 게 오러였다. 그런 오러를 방벽으로 쓰면, 웬만한 마법으로 뚫을 수 없었다.

'훌륭하군.'

마크의 굳은 얼굴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마크는 갈라하드의 예상보다 더 실력자였다.

굳이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한가?"

갈라하드는 목 옆을 겨눈 창을 슬쩍 밀며 물었다.

"예."

마크는 굳은 얼굴로 끄덕이며 창을 치웠다.

"일부터 처리해야겠군."

갈라하드는 코트를 털며 일어났다.

그 걸음이 향한 방향은 위층이 아닌 문이었다.

"아, 늦는다고 전해주게."

가벼이 말한 갈라하드가 돌아섰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들어온 찬 바람이 마크의 얼굴을 간질였다.

마크는 칼바람에 밀린 것처럼 자리에 앉았다.

방금의 공방을 떠올리며 목을 매만졌다.

따끔했다.

'따끔이라-.'

분명 오러 방벽을 둘렀는데, 목에 자그마한 흉터가 있었다.

목은 급소였기에, 오러 방벽이 가장 강한 부분이었다.

갈라하드는 그를 뚫고 상처를 낸 것이다.

심지어 마법은 하나가 아니었다.

창대 중간에서 터진 폭발은 마크의 창끝을 흔들 정도로 강했다.

만약 그 폭발이 목에서 일어났다면, 따끔한 수준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거 아래로 들어갈 걸 그랬군.'

마크는 작게 중얼거리며 문을 응시했다.

문 사이로 깜깜한 밤을 거침없이 전진하는 갈라하드가 보였다.

그 걸음에 작은 고민도 없었다.

***

까마귀는 묘한 냄새에 코를 킁킁거렸다.

어디선가 레몬 냄새가 풍겼다.

악몽도 모자라서 냄새까지 맡다니-.

'...레몬 향기?'

까마귀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방의 한편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길쭉한 다리와 곧은 자세-.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그 정체를 알수 있었다.

탁, 그때 연초 불이 조금 커졌다. 그 주황색 불이 놈의 얼굴을 비췄다.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얼굴, 갈라하드였다.

까마귀는 터지려는 비명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들어왔지-. 라는 의문은 품지 않았다.

그 상대가 갈라하드였기에.

까마귀는 가면을 고쳐 쓰며 부복했다.

"잘 때도 쓰고 자는군."

"...예, 이게 편해서."

"좋은 습관일세."

갈라하드의 차분한 목소리에 까마귀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자다가 눈치채지 못한 채로 죽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등이 서늘했다.

다만, 상대는 갈라하드였다. 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명령하신 대로 코르튼을 통해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을 학회장에게 보냈습니다. 그에 학회장이 헬카르튼을 보냈습니다."

"헬카르튼?"

"예, 학회장의 심복인 놈인데, 차기 학회장으로 뽑힐 정도로 실력이 상당합니다."

"그렇군."

까마귀는 심각하게 말했지만, 갈라하드의 대답은 간단했다.

정적이 잠시 이어졌다. 까마귀는 땅에 얼굴을 박고 조용히 기다렸다.

"헬카르튼은 학회장의 위치를 알고 있겠군."

"예, 알고 있을 겁니다. 다만, 송장 같은 놈이라-."

"걱정하지 말게. 회유는 내 장기니까."

갈라하드의 대답에 까마귀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갈라하드의 회유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까마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헬카르튼은 어딘지 이상한 놈이었다.

꼭 무덤에서 갓 꺼낸 시체처럼 창백하고 더러운 냄새가 풀풀 풍기는 놈이었다. 놈은 까마귀가 보기에 진짜 흑마법사였다.

상승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 미친놈-.

그런 놈에게서 어떻게 정보를 얻겠다는 건가.

다만, 의문을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놈이 자문위원회를 데리고 왔습니다."

"자문위원회?"

"예, 간부급의 실력으로 구성된 병력입니다. 더불어 상급 이상의 지팡이와 선택까지 받은 터라. 꽤 위험한 놈들입니다."

까마귀는 진지하게 말했다.

갈라하드가 마법사를 잘 잡는 건 알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만만치 않았다.

심지어 놈들은 전과 달리 방심하지 않았다.

연이어 일어난 실패에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그를 설명했지만-.

"음, 마침 일손이 부족하다던데 잘 됐군."

"...예?"

뜬금없는 말에 까마귀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실력 있는 놈들이면 마석도 잘 캐겠지. 그렇지 않나?"

까마귀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에 있지?"

갈라하드가 다 핀 연초를 비벼 끄면서 가벼이 물었다.

마치 당장 잡으러 갈 것처럼.

"...예?"

"헬카르튼과 자문위원회 말일세."

갈라하드의 침착한 목소리에 까마귀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바로 이렇게 잡으러 가겠다는 건가?

당장?

그에 고개를 든 까마귀는 갈라하드의 눈에 깨달았다.

그에게는 별것 아닌 일이라는 걸.

"예, 하지만 최근 흑마법학회가 피해를 연달아 입은 터라 경계가 삼엄합니다. 간부인 저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래?"

갈라하드의 눈빛에 까마귀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저도 최선을 다했지만, 그 코르튼이라는 새끼가 갑자기 배신해서-."

까마귀는 답답함을 토로했다.

코르튼이라는 놈의 머리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코르튼의 배신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일어났다.

단순히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에 대한 공을 더 먹기 위함이었다.

그런 단순한 이유로 밑도 끝도 없이 배신할 줄 몰랐던 까마귀는 대응할 수 없었다.

그 대가로 코르튼은 헬카르튼의 신임을 온전히 얻었지만, 까마귀는 이렇게 지부에도 못 들어가는 신세가 된 거였다.

그에 마경 훈련소로 학회장을 불러들이겠다는 계획까지 틀어졌다.

"그래? 역시 코르튼이군."

묘한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갈라하드는 웃고 있었다.

****

"진짜였군."

헬카르튼은 손에 든 마물 조련사 마법진을 보며 감탄했다.

7대대 지부가 무너진 건 흑마법학회에도 큰 문제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성지가 열렸다는 것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아드리안나는 성지를 남겨두고 떠났다.

지금 성지 주변에 있는 건 7대대가 유일했다. 그것도 중대장급이 전부 치워진 7대대-.

아직 가능성이 있었다.

'진짜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이다.'

이 마법진만 있다면, 7대대를 다시 수복하는 것도 일이 아니었다.

조심성 많은 학회장이 괜히 헬카르튼을 보낸 게 아니었다.

이건 함정인 걸 알아도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다른 때였다면 몸을 사렸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여명의 산하 조직들이 빠르게 늘고 있었다.

잇따른 실패에 수위를 다루던 흑마법학회가 뒤로 밀린 상황이었다.

그 지독한 단체를 피해서 북부까지 도망친 흑마법학회였다.

이제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여기서 승부를 봐야만 했다.

그래도 최대한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에 5대대 지부는 적절한 곳이었다.

마석 생산량이 가장 뛰어난 것부터 시작해서, 흑마법학회의 자부심이자 보안의 정수인 사중 보안문도 있었다.

'사중 보안문-.'

누가 열어주는 게 아니라면 절대 못 들어오는 문이었다.

여기라면 안전하게 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헬카르튼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놈 어디 갔어?"

"누구 말씀이십니까?"

"얼빠진 놈, 코르튼이라고 했나?"

"아, 찾아보겠습니다."

헬카르튼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됐다. 어디서 또 공이나 가져올 궁리 중이겠지. 임무에 집중해."

어떻게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을 가져왔는지 신기할 정도로 하등 쓸모없는 놈이었다.

그런 놈에게 신경 쓸 시간도 아까웠다.

****

"쯧, 자네들 나 아니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나? 이거 사중 보안문이 얼마나 까다로운 물건인지 아는가? 자네들 내가 아니었으면, 못 들어왔을 거야."

코르튼은 작게 혀를 차며 문을 활짝 열었다.

"매번 고맙군, 역시 동기일세."

갈라하드의 진심 어린 감사에 코르튼의 턱이 높아졌다.

활짝 열린 사중 보안문에 까마귀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55화 유능한 코르튼

"운 좋은 줄 알아. 나 아니었으면 못 들어왔을걸? 요즘 보안이 얼마나 철저한데 말이야."

코르튼은 갈라하드를 보며 잔뜩 으스댔다.

코르튼의 말은 사실이었다.

오는 길에 마주한 경계가 전보다 엄했다. 사증 보안문 역시 까다로웠고.

그렇다고 못 뚫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괜히 일을 키우는 건 좋지 않았다.

그러다가 괜히 놓치면, 계획이 엉클어졌다.

무엇보다 알아서 열어주는 걸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군, 역시 내가 동문 하나는 잘 뒀네."

"흠, 그나저나 일은 어떻게 됐지?"

코르튼이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아드리안나 말인가? 아, 진행 중일세."

"그래, 최대한 빨리 진행하는 게 좋을 거야."

코르튼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갈라하드를 보며 끄덕였다. 그 시선이 갈라하드의 가슴을 향해 있었다.

고통의 알이 거칠게 뛰었다.

'맹세한 대상에게 영향력이 있나?'

갈라하드는 날뛰는 고통의 알에 작게 중얼거렸다.

코르튼을 마주한 갈라하드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놈에게 정신 간섭을 사용하는 걸로 이 맹세를 무를 수 없음을-.

애초에 정신 간섭으로 해결할 생각이 아니었기에, 딱히 큰 문제는 아니었다.

"새로운 인원이 왔다던데?"

갈라하드는 슬쩍 말을 돌렸다.

코르튼이 도끼눈으로 팔호를 쳐다봤다.

"기밀이라고 했는데, 그새 일러바쳤나? 자네 같은 이들 때문에 늘 보안에 문제가 생기는 거야."

"저 폐급 새끼-."

팔호가 갈라하드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뭐, 학회장이 보냈다는데-. 나를 본회의로 데려가겠다는군."

"본회의?"

"학회장님이 주관하는 회의지, 간부도 그냥 갈 수 없는 아주 중요한 회의다."

코르튼이 잔뜩 꺼드럭거렸다.

"그러면 그 학회장도 볼 수 있는 건가?"

"잘 모르겠군. 여기 일이 끝나야 간다는데.... 일이 도무지 끝날 기미가 안 보여. 그래서 말인데-."

코르튼이 슬쩍 말끝을 흐렸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아카데미 때 마법진 해석 일등이지 않았나?"

"마법진뿐만 아니라, 전부 일등이었지."

갈라하드가 말을 정정하자, 코르튼의 눈썹이 작게 구겨졌다가 펴졌다.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을 구했는데. 여기 놈들이 해석을 좀처럼 못하는 것 아닌가? 아주 헛똑똑이들이야."

자기가 구했다는 코르튼에 까마귀가 작게 욕했다.

갈라하드에게 나쁜 상황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코르튼은 지나칠 정도로 폐급이었다. 아무리 조심해도 이런 폐급까지 경계할 수 없었다.

"그렇지."

"자네, 마법진을 보면 해석할 수 있나? 근데 이게 제마전쟁 때의 마법진이라서 말이지-."

코르튼의 꺼드럭거리는 목소리에 갈라하드는 코르튼이 자신을 반긴 이유를 깨달았다.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을 해석할 공도 챙길 생각이었군.'

욕심이 넘치는 정도가 아니었다.

저 정도면 욕심에 먹혔다고 봐도 무방했다.

갈라하드에게는 좋은 선택지였다.

역시 코르튼이었다.

"음, 내가 해석하지 못하는 마법진은 없네. 만약 있다면 그린 놈이 잘못 그린 것이지."

갈라하드의 단언에 코르튼이 살짝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해석한 걸 나에게 먼저 말해줄 수 있나? 여기 놈들은 죄다 도둑놈투성이라서 말일세. 아마 공을 가로채려고 할 테니까. 자네는 나만 믿게. 우리 동문 아닌가. 동문-."

코르튼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얼마든지."

그러자 코르튼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참으로 투명한 놈이군.

갈라하드는 웃으며 손을 풀었다.

코르튼의 기대는 얼마 못 가서 깨졌다.

삐이이익!

갈라하드를 발견한 흑마법사 하나가 대뜸 호루라기를 분 탓이었다.

코르튼의 얼굴을 알 텐데, 그에 작은 망설임도 없었다. 코로튼의 취급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처리하려는 순간, 코르튼이 자기가 맡겠다며 나섰다.

이내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사방에서 흑마법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기세가 날카로웠다.

그 수가 제법 많았다.

'음. 좋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석장이 안 굴러간다더니, 다 여기서 놀고 있었군.

저번과 목적이 달랐다. 그들 하나하나가 소중한 인력이었다. 평화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그때, 안쪽 문이 열리며 길쭉한 사내가 나왔다.

몇 가닥 없는 머리와 빼빼 마른 몸, 창백한 피부와 곳곳에 핀검 버섯까지-. 정말 송장 같은 사내였다.

"외부인을 들이다니. 미쳤군."

갈라하드를 발견한 송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장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갈라하드를 훑는 그 눈빛이 날카로웠다.

전투에 잔뼈가 굵은 놈이었다.

더불어 놈 주변에 있는 마법사들도 범상치 않았다.

확실히 이제껏 만났던 놈들보다 수준이 높았다.

'재밌겠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코르튼이 몸을 작게 떨었다. 그 목덜미에 땀이 가득 흘렀다.

이렇게 거친 반응이 나올 거라고 예상 못 한 듯했다.

코르튼의 살집 가득한 눈이 뒤룩- 굴렀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풀었다.

죽이는 것보다 생포가 힘들었다. 심지어 일을 시키려면 사지가 멀쩡해야 했다. 상당히 까다로웠다.

최대한 평화적으로 취업시키고 싶었지만-.

'어려울지도.'

몇 놈은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괜히 욕심냈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

'우두머리 처리하고, 굵직한 놈들 정도 치우면-.'

갈라하드는 최대한 피해가 덜한 부분으로 계산했다.

그때-.

"죽여라."

송장이 나지막한 명령을 내렸다.

팔호가 슬쩍 갈라하드 뒤로 숨었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손가락을 튕겼다.

놈들이 고급 지팡이로 무장했어도, 놈들의 마법이 갈라하드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마법에서 마나의 농도는 절대적이었다. 갈라하드도 하급 마족을 잡기 위해서 몸을 비틀어야 할 정도였다.

그처럼 저들의 마법은 갈라하드에게 통하지 않았다.

뒤처리가 귀찮아질 뿐이었다.

"잠깐!"

그때, 코르튼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그에 다들 멈추고 코르튼에 집중했다.

이어서 코르튼의 입에서 나온 말에 갈라하드는 감탄했다.

생각지도 못한 묘수였기에.

"이분은 여명에서 나오신 분이다!!"

코르튼이 갈라하드를 공손하게 두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파격적인 발언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던 마법들이 순간 사라졌다.

여기서 여명이라니-.

'그럴듯하군."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

'...여명에서?'

헬카르튼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코르튼은 부지부장을 어떻게 달았나 싶을 정도로 무능한 놈이었다.

아카데미 출신이라 다른 이들보다 이론에서 뛰어나지만, 그게 전부였다.

코르튼은 일머리가 끔찍할 정도로 없었다.

그런 주제에 욕심은 많았다.

자기 욕심에 잡아먹힐 놈이었다.

그런 놈이 흑마법학회가 여명에서 받은 것보다 개선된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을 올렸을 때 의심스럽기는 했다.

코르튼은 자신이 개선했다고 우겼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여명에서 받았다면-.

'말이 되는군.'

코르튼이 직접 알아냈다는 것보다 백 배는 더 믿음직했다.

애초에 여명이란 조직이 그랬다.

그들은 늘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났다. 이쪽에서 먼저 연락을 넣을 수도 없었다.

뭔가를 경계하는지, 극히 조심스러운 게 여명이었다.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더불어 여명이라 소개한 사내-.

'범상치 않군.'

기품이 느껴지는 외모와 올곧은 자세는 분명 거물의 것이었다.

그때,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사방이 둘러싸인 상황인데, 사내의 눈에는 작은 긴장조차 없었다.

오히려-.

'...흥미?'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저런 눈을 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였다.

자신이 있거나, 진짜 미쳤거나.

'학회장님한테 들은 게 없는데?'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문제를 크게 벌일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놈은 하나였으니까.

계산을 끝낸 헬카르튼은 고개를 숙였다.

"여명을 뵙습니다."

다른 흑마법사들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헬카르튼은 고개를 숙인 상태로 눈만 움직여 사내를 확인했다.

모두가 조아린 상황에서 사내는-.

헬카르튼을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어허! 다들 더 숙여야지!"

코르튼이 호통을 쳤다.

****

헬카르튼은 사내가 여명이라 완전히 믿지 않았다.

그럴 가능성이 있기에 조심할 뿐이었다.

괜히 여명에서 나온 인선을 건드렸다가, 흑마법학회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으니까.

더불어 학회장 자리를 노리는 헬카르튼에게 여명과의 끈은 절실했다.

그렇기에 일단 장단을 맞추는 거였다.

"이게 왜 어렵지?"

사내가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을 가리키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그 물음에 헬카르튼은 오히려 반문하고 싶었다.

마를 조련사의 마법진은 제마전쟁의 잔재였다.

도대체 어떻게 안 어렵다는 거지?

"그려진 대로 따라 그리면 되잖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사내의 타박에 코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세등등한 코르튼에 헬카르튼의 눈이 구겨졌다.

사내는 혀를 차며 손을 휘저었다.

"잘 듣게, 한 번만 설명해줄 테니까."

"예."

그 자신감 넘치는 행보에 헬카르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마법사로서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누구보다 그 본능에 충실하여 흑마법사까지 된 이들이었다.

궁금증은 숨길 수 없었다.

"마법진을 구성하는 건 크게 세 가지라는 걸 알고 있을 거라 믿네. 그것도 모르면서 마법사라고 떠벌리는 건 정말 끔찍하니까."

사내의 신랄한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진의 세 가지 요소는 입에 담는 게 의아할 정도로 아주 기본적인 개념이었다.

"먼저 마나를 끌어당기는 입력 부분일세. 연료와 같지. 흔히 마석을 사용하지, 두 번째는 수식 연산일세. 보통 마나의 흐름을 인도하는 역할이지. 세 번째는 출력일세. 이 정도는 알 거라고 믿네."

사내의 말에는 작은 멈춤도 없었다. 다만, 기본적인 부분이었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자, 마물을 조련하려면 당연히 정신계겠지. 기본적으로 마나 농도가 높은 마물의 피를 이용해서 마법진을 그리기 위해서는..."

뭐라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

묻고 싶었지만, 어디를 모르는지도 감이 안 왔다.

그래도 헬카르튼의 수하 중 제일 똘똘한 놈이 당차게 질문했다.

"모르겠다고? 아까도 설명하지 않았나. 자네, 마법사가 맞나? 이 정도도 모르면서 마법사라고, 지팡이 대신 검을 드는 걸 추천하겠네. 훌륭한 기사가 될 걸세. 이거 길버튼 경의 호적수가 나타났군."

기사로 전직하라는 괴상한 답변에 다시 조용해졌다.

사내의 막힘없는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니 마물 조련사는 열두 중첩의 수식을 응용하여 마물을 조련할 수 있는 마법진을 그린 것이지, 이는 제법 놀라운 방법이라네. 아, 시간이 부족하니 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네."

왜 생략....

'저거 그냥 되는대로 지껄이는 거 아니야?'

헬카르튼의 눈이 구겨졌다.

놈이 마물 조련사가 아니고서야, 저 마법진을 해석한다는 게 말이 되나?

'아니, 알고 있는 마법진이겠지.'

사내가 여명이라는 것에 추가 기울었다.

그때, 사내가 조금 살집 있는 놈에게 손짓했다.

"아, 거기 잠깐 와보겠나?"

지목당한 수하가 화들짝 놀라 헬카르튼을 쳐다봤다. 헬카르튼이 끄덕이자, 수하가 조심스럽게 나갔다.

"배 좀 까보게."

"...배 말입니까?"

"귀가 안 좋나?"

수하의 눈빛에 헬카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하가 찝찝한 얼굴로 로브를 들었다.

"이런 배가 생각보다 많이 나왔군. 자네, 수도에 가면 아주 훌륭한 대접을 받을걸세."

사내가 괴상한 농담을 하면서 마족의 피를 손에 듬뿍 묻혔다.

뚝뚝 떨어지는 붉은 피에 수하가 얼굴을 구겼다.

"걱정하지 말게.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을 새기는 것뿐이니까."

"...예에? 그걸 왜 저한테 새깁니까?"

"어허, 이렇게 담이 작아서야 흑마법사를 어떻게 하나."

수하의 시선에 헬카르튼은 앞으로 나섰다.

"실험체가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마법사에게 하는 게 더 효율이 좋네. 그나마 마물과 흡사하지 않나."

...효율?

지나치게 건조한 단어였다.

"자네를 인체 실험도 곧잘 하지 않나? 설마 자기 몸에 하는 건 두려운 건가?"

"그렇게 효율적이라면, 그쪽 몸에 하면 되지 않소?"

이론적으로 술자의 몸에 하는 게 가장 효과가 좋았다.

사내가 가벼이 고개를 저으며 슬쩍 셔츠를 들었다.

"미안하지만, 이쪽은 용지가 안 좋아서 말일세."

셔츠 아래로 드러난 사내의 맨살을 본 헬카르튼은 사내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지독한 흉터가 빈틈없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헬카르튼도 눈을 찡그릴 정도로 지독한 고문의 흔적이었다.

저렇게 울퉁불퉁한 곳에는 마법진을 새길 수 없었다.

무거운 정적 속에서 사내가 수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하지 말게. 내 마법진이 틀릴 위험은 없으니까. 뭐, 틀려봤자 터지기밖에 더 하겠나? 자네 배는 두둑하니 괜찮을 걸세."

"미... 미친..."

헬카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수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사내는 거침없이 손을 움직였다. 수하의 배에 붉은 마법진이 금세 새겨졌다.

대충 그린 것 같은데도 그 형태가 세밀했다.

"자,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넣게."

사내가 수하의 등을 두드렸다.

'저게 무슨....'

사내의 괴상한 행동에 헬카르튼은 눈을 찡그렸다.

그때.

수하가 갑자기 헬카르튼에게 냅다 달려왔다. 놈이 힘을 담아 주먹을 휘둘렀다.

물론, 그 전에 주변의 인물들에 제지당했다.

붙잡힌 수하가 헬카르튼을 보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수하의 눈과 코, 입에서 붉은 피가 터져 흘렀다. 울부짖는 소리와 뚝뚝 흐르는 피-. 제법 서늘한 광경이었다.

'이게 무슨....'

헬카르튼은 찡그린 눈으로 사내를 응시했다.

"자네, 평소 수하 관리를 제대로 안 했나 보군."

사내는 여유롭게 말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어서 연초를 입에 물더니-.

"아, 최근 여명에 마석이 부족하다는 건 들었나?"

헬카르튼을 위아래로 살피며 물었다.

그 눈이 묘하게 서늘했다.

****

대공은 언제 사라졌냐는 듯, 그 자리에 있었다.

'대공의 인정을 받았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대공이 갈라하드가 자신의 인정을 받았음을 공표했다.

대공의 인정, 그건 더할 나위 없는 명예였지만-.

'동시에 큰 위험이지.'

그로 인해 소문처럼 여겨졌던 아드리안나의 혼인도 본격적으로 입에 오를 테니, 이제껏 신경 쓰지 않던 대장들도 더는 무시할 수 없겠지.

대공은 늘 그렇듯 기회를 준 것이다.

험난하여 시련으로 보일 정도지만, 이겨내면 그에 걸맞은 보상이 있는 기회-.

'만약 이번에도 이겨낸다면....'

테오도르는 작게 전율했다.

그때, 뒤쪽이 소란스러워졌다. 고개를 돌리니 화려한 복장의 사내가 보였다.

'...황실의 전령?'

전령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당장 고개 숙이고 싶은 걸 애써 참는 눈치였다.

대공의 소문을 들은 듯했다.

'황실의 전령이라니-. 협약인가?'

테오도르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대공이 움직였지만, 그래도 북부 내에서 움직였다.

그 정도라면 당장 협약을 꺼내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황실의 전령이라니-.

'황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면 황태자?'

적막한 긴장감이 팽배했다.

모두의 눈이 바쁘게 움직일 때-.

대공이 가벼이 손짓했다.

마치 아무 상관 없다는 것처럼.

전령이 주춤거리며 대공 앞으로 향했다.

전령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굵직한 서신을 대공에게 건넸다.

대공은 서신을 거침없이 뜯었다. 그리고 그를 가만히 읽었다.

무거운 정적이 자리했다. 열에 달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잔뜩 긴장하여 대공의 눈치를 살폈다.

서신의 내용에 따라 판도가 바뀔 테니까.

그런데 대공의 반응이 테오도르의 예상과 달랐다.

대공은 서신을 보며.

"허허."

나지막하게 웃었다.

'대공 전하가 웃으셨다?'

그건 꼭 갈라하드의 미친 편지를 받았을 때와 비슷했지만, 그보다 더 서늘했다.

내용이 감도 안 왔다.

평소였으면 서신을 내렸을 대공이 서신을 그대로 구겼다.

그 순간 서신 제일 아래에 적힌 게 보였다.

그건-.

'...루시엔느?'

황녀의 이름이었다.

"방정맞은 놈이었군."

대공이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56화 역공

'여명이라.'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본래 정신 간섭으로 회유할 생각이었다.

마족에게도 통했던 정신 간섭이었다. 통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다만, 상황이 변했다.

상당히 좋은 쪽으로-.

"마석 말입니까? 수확량은 채웠습니다."

헬카르튼의 눈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수확량이라, 일정 지분을 바치고 있군.'

갈라하드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존 수확량은 채웠겠지. 하지만 최근 그대들이 일을 여러 번 망치지 않았나? 수확량이 당연히 늘어날 수밖에."

갈라하드는 대놓고 혀를 찼다.

헬카르튼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저희 물자를 소비했습니다만."

헬카르튼이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적절한 반발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알지. 다만, 그대들 것이 온전히 그대들 몫인가? 그대들의 실패로 좁아진 북부는? 이거 아주 뻔뻔하군."

"그건....."

"상관없다고 말할 건가?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걸세."

헬카르튼의 얼굴이 붉어졌다. 입술을 질끈 깨물어 그 옆에 보조개가 됐다. 놈의 눈이 사나워졌다.

분위기가 험악해졌지만-.

"음, 자네 표정이 이상하군. 불만이라도 있나?"

일단, 이쪽은 여명이었다.

놈은 흑마법학회였고.

둘 사이의 갑을은 분명했다.

잠시 입을 씰룩이던 헬카르튼이 어색하게 웃었다.

"없습니다."

"그렇지? 에이, 난 또 설마 했잖는가, 북부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었으면서 또 양심은 없는 그런 호로 새끼인 줄 알았다네."

"호로... 하. 하하하."

"보통은 웃으면 얼굴이 피는데, 자네는 오히려 더 끔찍해지는군. 되도록 웃지 말게."

갈라하드는 헬카르튼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쯧, 내가 수확량을 그냥 늘리라고 하겠는가?"

갈라하드의 말에 놈의 눈이 작게 빛났다.

"성지 아직 열려 있지 않나."

"...하지만 7대대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헬카르튼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갈라하드는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본래 마법사들은 어딘가 이상한 놈들이었다. 마법의 매력 때문이었다. 마법은 어떤 것보다도 강력했다.

놈들은 마법사를 넘어서 흑마법학회까지 들어간 놈들이었다.

욕망이 작을 리가 없었다.

갈라하드는 놈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나는 학회장의 자격 미달이 걱정되네."

헬카르튼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자격 미달 말입니까?"

"그렇지 않나, 최근 연달아 실패했으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지. 안 그런가?"

놈의 탁한 눈동자에 열망이 번들거렸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놈의 어깨를 털어줬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이어진 물음에 놈이 잠시 침묵했다. 갈라하드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놈의 고개가 깊게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그렇군. 사실 나는 흑마법학회를 청소할 생각이었네."

"...청소?"

놈이 의문이 담긴 눈으로 갈라하드를 위아래로 살폈다. '너 혼자 왔잖아?'라고 묻는 듯했다.

갈라하드는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누워서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던 배불뚝이의 머리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주변에 있는 놈들이 작게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펑! 잔뜩 부분 놈의 머리가 터졌다. 그 주변에 있던 이들의 얼굴에 붉은 피가 튀었다.

미리 새겨둔 마법진 덕분이었지만, 애초에 마법진을 이해 못하는 멍청한 놈들이었다.

놈들에게는 그저 손가락을 튕겨, 머리를 터뜨린 걸로 보일 것이다.

"이런-!"

마법사들이 지팡이로 갈라하드를 겨눴다.

갈라하드는 그를 무시하고 가만히 헬카르튼을 응시했다.

"학회장을 대신할 적당한 이가 없을 거라 생각했네만-,"

수하의 머리가 터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헬카르튼의 눈동자에 떠오른 감정은 두려움이나 분노가 아니었다.

그건 환희와 열망이었다.

"적당한 인물이 있었군."

헬카르튼의 눈에 믿음이 번들거렸다.

손가락으로 사람 머리를 터뜨리는 무력과 마물 조련사 마법진 해석은 작은 근거일 뿐이었다.

믿음의 중심은 놈의 욕망이었다.

정신 간섭은 이럴 때, 더욱 효과적이었다. 기름이 있으면 불 마법의 위력이 강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렇지 않나?"

갈라하드는 놈의 어깨를 두드리며 마나를 흘려 넣었다.

헬카르튼의 눈이 더욱 번들거렸다.

얼마 남지 않았던 이성이 날아갔지만, 눈치조차 못 챈듯했다.

학회장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놈의 눈을 가렸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헬카르튼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내 놈의 입이 다시 열렸을 때, 갈라하드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학회장은 조심성이 많습니다. 심복인 저조차도 경계합니다. 더불어 방어 시설이 너무 많습니다. 본회의장으로 향하는 건 상당히 위험합니다. 그리고 조금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혼자 도망칠 게 분명합니다. 중앙에서도 그랬으니까-."

헬카르튼이 이를 갈며 말했다.

"중앙에서도?"

"예, 모종의 단체에 흑마법학회가 흔들릴 때, 혼자서 도망친 놈입니다. 도망칠 굴을 만들어 뒀을 게 분명 합니다."

흑마법학회의 도망 실력이야, 갈라하드도 잘 알고 있었다.

헬카르튼의 말대로라면 잡으러 가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지금도 학회가 흔들리는데, 직접 나서지 않고 저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반감이 좀 있군.'

씹어뱉듯 말하는 헬카르튼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그러면 끌어내야겠군."

"절대 안 나올 겁니다."

헬카르튼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절대라는 건 없다네."

이해 못한 헬카르튼이 눈을 찡그렸다.

"아, 학회장과 소통할 수단이 있나?"

"예-."

헬카르튼이 둥근 물건을 꺼냈다. 자그마한 돌을 보석함이 두른 듯한 물건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상당히 투박했지만, 갈라하드는 그 가치를 알았다.

아니, 알 수밖에 없었다.

"통신구군."

이걸 여기서 보다니. 갈라하드는 작게 탄식했다.

통신구는 그 가치가 상당한 마도구였다. 아니, 들어가는 재료 때문에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지니고 있다는 건-.

'돈이 많군.'

하긴, 코르튼조차 갈라하드에게 마석과 금화를 줬었다.

그러니 흑마법학회는 말할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놈들이 마석장 사업을 하는 게 중요했다.

부족한 게 상당히 많은 북부였지만, 그중 제일 부족한 건 역시 자금이었다.

마법을 도외시하는 무식한 놈들이었기에, 마석의 가치를 모르지만, 마석장은 북부의 가장 큰 가치였다.

마석장을 본격적으로 굴리고 유통할 수만 있어도, 북부의 재정은 몇 단계나 좋아질 게 분명했다.

흑마법학회는 북부에 재력의 기반이 되어줄 훌륭한 노동꾼들이었다.

'심지어 무료로 해주는-.'

갈라하드는 입맛을 다시며, 통신구를 만졌다.

"사용법은-."

"아, 알고 있네."

갈라하드의 대답에 헬카르튼은 눈을 찡그렸다.

통신구는 그 값이 비싼데, 사용법도 너무 까다로운 터라 쓰는 이가 거의 없는 물건이었다. 더불어 그 사용법도 통신구마다 달랐다.

그런 통신구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때, 갈라하드의 손에 들린 통신구가 작게 진동했다. 심지어 그 진동에 일정한 리듬까지 있었다.

헬카르튼조차 사용에 어려움을 느끼는 게 통신구였다.

그런데 그런 통신구를 저렇게 자유자재로 사용하다니.

'역시 여명이군.'

신뢰도가 조금 더 올라갔다.

****

어둑한 공동, 일명 대회의장에 학회장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코 주변에 드리운 주름만큼 학회장의 머리는 복잡했다.

최근 연달아 일어난 실패 탓이었다.

'멍청한 놈들-.'

그 쉬운 일 하나 제대로 못 한다니. 욕이 절로 나왔다.

하여튼 마음에 드는 놈들이 없었다.

쓸만한 놈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한동안 잠자코 있으라니.'

여명에서 내려온 명령이었다.

'...감히!'

노인의 얼굴에 가득한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본래 흑마법학회는 중앙에서 잘 나갔다.

그때는 있는 줄도 몰랐던 놈들이 명령을 내리다니-.

'그 모종의 놈들 때문에!!'

노인은 거칠게 기침했다. 그 입가로 피가 될 정도였다.

지독하게도 흑마법학회를 괴롭혔던 놈들 때문에 모든 게 무너졌고, 찬란한 세월을 뒤로 하고 황무지인 북부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하늘은 노인을 버리지 않았는지, 북부에서 마석장들을 발견하면서 다시 기세를 올렸다.

그때, 여명이란 곳에서 사내가 나왔다.

노인은 흑마법학회를 만든 인물이었다.

상승을 숭상하기에,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노인이었다.

그렇기에 노인은 강함에 자신이 있었다.

여명에서 나온 놈을 마주하기 전까지-.

[고작 이 정도?]

놈은 괴물이었다.

아니.

마족이었다.

노인이 경험해본 적 없는 압도적인 힘 차이였다.

여명의 일방적인 명령은 입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다.'

안 그래도 무거운 노인의 목이 더욱 무거워졌다.

그때, 앞쪽에 놓인 통신구 중에서 가장 가까운 게 반짝였다.

심복 중에서 그나마 쓸만한 헬카르튼이었다.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에 보낸 놈이었다.

맹수처럼 마물이 돌아다니는 북부에서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은 그 가치가 컸다.

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돌아오라고 해야겠군.'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여명의 명을 어길 수 없었다.

그때, 통신구가 톡톡거리면서 진동했다. 그 옆에 앉은 마법사가 진동을 번역했다.

"딸꾹!!"

한참 해석하던 놈이 거칠게 딸꾹질했다. 통신을 받아적던 놈의 얼굴이 새하얬다. 겁에 질린 것처럼.

좀처럼 드문 반응에 노인의 미간이 구겨졌다.

"뭐냐?"

"그... 그것이... 분명 제대로 적었는데...."

노인은 눈을 찡그리며 지팡이를 내리쳤다.

더듬던 놈의 눈에서 피눈물이 길게 흘렀다. 놈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픽 쓰러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놈이 벌벌 떨면서 그 자리에 앉았다. 통신 내용을 적은 종이를 본 놈이 우뚝- 멈췄다.

"가져오거라."

노인이 혀를 차자, 놈이 화들짝 놀라서 종이를 공손히 건넸다.

'무슨 내용이길래.....'

중얼거리며 종이를 읽던 노인이 그대로 굳었다.

그 내용이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탓이었다.

[나 헬카르튼이다. 이제 늙고 병든 학회장은 필요 없다. 오늘부터 젊은 피인 내가 학회장이다. 그를 증명하기 위해, 성지를 탈환하겠다.]

노인은 몇 번이나 종이를 다시 읽었다.

'이게 무슨.....'

그때, 통신구가 다시 진동했다.

한 번 보낸 걸로도 부족해서 또 보내는 것이었다.

그에 노인은 손을 흔들었다.

통신구가 가벼이 노인에게 날아왔다.

노인은 통신구의 진동을 신중하게 분석했다.

잠시 뒤-.

통신구가 박살 났다.

값비싼 물건이지만, 그를 아까워할 정신이 노인에게는 없었다.

아까보다 더한 내용이었기에-.

"놈, 죽고 싶은가 보군."

단순히 화나는 것의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서 일을 저질렀다가는 여명의 명을 어긴 게 됐으니, 생존의 문제였다.

노인은 정말 오랜만에 일어났다.

그에 다들 놀란 눈으로 노인을 올려봤다.

"성지로 간다."

노인은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노인의 지팡이에는 마석이 아닌 거대한 검붉은 알이 박혀 있었다.

***

'.....?'

까마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까마귀는 자기 이해력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특히 상황 파악 능력이 뛰어났다.

지부 사람들이 죽을 때, 까마귀가 갈라하드의 손에서 살아남은 이유였다.

까마귀는 상황을 잘 읽고 판단이 빨랐다.

분명 그랬는데-.

'...왜?'

지금은 도무지 상황을 따라갈 수 없었다.

갈라하드가 흑마법학회와 같이 7대대를 살피는 중이었다. 마치 당장 습격할 것처럼 만반의 준비까지 갖추고-.

'?'

까마귀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갈라하드는 분명 7대대를 지켰었다. 실제로 7대대에 세력도 꾸리지 않았나.

분명 그랬는데-.

지금 갈라하드는 흑마법학회의 편에 서서 7대대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어차피 새로 부임한 중대장들일세. 다른 놈들은 볼 것도 없고. 문제가 되는 건 7대대 대장 하나뿐일세."

아주 성심성의껏.

그 병력을 찍어주기까지 하면서-.

'...왜죠?'

까마귀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씨! 가만히 좀 있어! 정신 사납잖아!"

그때, 코르튼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 불퉁한 목소리에 까마귀의 미간이 구겨졌다.

까마귀는 멍청한 놈을 혐오했다.

욕심 많은 놈도 혐오했다.

코르튼은 멍청한데 욕심 많은 놈이었다.

까마귀가 코르튼을 혐오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당장 놈의 얼굴에 얼음송곳을 박아 넣고 싶지만, 까마귀는 필사적으로 참았다.

고작 감정으로 일을 그르칠 정도로 까마귀는 멍청하지 않았다.

"근데 말이야."

코르튼이 슬쩍 말을 걸었다. 그를 무시하자 코르튼은 목소리를 키웠다.

"근! 데! 말! 이! 야!"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주문이 입까지 올라왔다.

애써 참고 고개를 돌리니, 잔뜩 긴장한 얼굴의 코르튼이 보였다.

지팡이를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왜."

코르튼이 슬쩍 주변의 눈치를 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갈라하드가 정말 여명인가?"

"아악!"

까마귀는 참지 못하고 코르튼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마법을 쓰지 않은 게 까마귀의 마지막 인내심이었다.

"아아악!"

****

코르튼의 비명에 고개를 돌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팔호와 코르튼이 뒤엉켜서 주먹질하고 있었다.

'의외로 사이가 좋군.'

하긴 둘이 비슷한 면이 있었다.

둘 다 욕망에 눈이 멀었으니까.

'그건 마법사 특징이군.'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상황을 살폈다.

흑마법학회 놈들이 각자 준비하고 있었다. 어떤 놈들은 주문을 외웠고, 어떤 놈들은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얼굴에 비장함이 가득했다.

그 너머, 저 멀리에 7대대가 보였다.

전에 있었던 습격의 흔적을 온전히 지우지 못해서 허름하고 여기 저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언뜻 보기에 위태로웠지만, 그 안에는 놈이 있었다.

학회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진심으로 연기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소중한 광부를 잃을 수는 없었다.

서로 적절한 연기나 경계가 필요했다.

그를 위해서는 자세한 계획이 논의가 되어야 했지만.

갈라하드는 굳이 편지를 보내서 설명하지 않았다.

저 멀리 성벽 위에서 퍼스트가 이쪽을 보며 환히 웃고 있었기에-.

'좋아 죽는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그때, 익숙한 흰 매가 날아왔다.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번들거리는 털과 깊은 눈, 매인데도 잘생겼다는 말이 나올만한 놈이었다.

'아드리안나?'

매가 자연스럽게 갈라하드의 어깨에 앉았다.

갈라하드는 머리를 비비는 놈을 쓰다듬어주고 그 다리에 묶인 편지를 풀었다.

[1대대 대장 아드리안나입니다. 1대대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를 믿고 맡긴 마경 훈련소의 진행 상황이 궁금합니다. 물론, 마경 훈련소는 대공께서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에게 맡긴 곳입니다. 1대대 대장인 제게 관여할 권한이 없습니다. 믿지 않는 게 아니라, 혹시나 도움이 필요하실까 보내는 편지입 니다. 1대대 대장 아드리안나.]

글씨인데도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런데도 화려함이 느껴지는 게 참으로 아드리안나에게 어울렸다.

"아, 종이와 펜 좀 주겠나?"

"네!"

갈라하드는 지나가는 흑마법사에게 펜을 빌렸다.

흑마법사가 눈을 빛내며 종이와 펜을 건넸다.

"이건 붉지 않나."

"그게 피라서...."

"잉크 없나?"

갈라하드의 추궁에 흑마법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내 정상적인 잉크를 받을 수 있었다.

갈라하드는 잉크에 펜을 깊게 찍고 종이에 휘갈겼다.

[7대대는 내가 정말 훌륭하게 지키고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게. 내가 유능한 건 자네도, 장인어른도 알지 않나. 자네의 따듯한 손이 그리운 날일세. - 자네의 믿음직한 약혼자. 추신. 자네 글씨가 상당히 귀엽군.]

펜을 한 번도 멈추지 않고 편지를 쓴 갈라하드는 그를 매의 발에 묶었다.

매는 흑마법사들 위로 날아서 사라졌다.

"자, 다들 준비하게! 오늘 밤 성지는 우리 것이 되는 걸세!"

갈라하드의 외침에 흑마법사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57화 메인 디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