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명중
꿀꺽. 꿀꺽.
놈은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고개를 보니 다들 어느 정도 눈치챈 분위기였다.
원체 눈치가 없는 아드리안나만 제외하고. 마족을 제외하면 관심을 두지 않는 아드리안나의 성정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바로 뒤에서 저렇게 대놓고 마시는데 모르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린 로버트는 갈라하드와 눈이 마주쳤다.
"북부에서는 마족의 피를 마시는 전통이 있다고 들었네. 북부에서는 북부의 전통을 따라야 하지 않겠나?"
갈라하드가 입을 슬쩍 닦으며 말했다. 이상하게도 입술이 아까보다 붉었다.
마족의 피를 마시는 전통-. 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 이야기가 나온 건 대공 때문이었다.
아드리안나가 태어나면서 활동을 멈췄지만, 대공은 북부에서 역사상 최강으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오러를 사용하지 않고 일신의 무력만으로 마족의 머리를 뽑았다는 대공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내려왔다.
인간보다는 마물에 가까운 대공의 강함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가설이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게 식마였다.
대공은 마족과 마물의 살점으로 배를 채우고 그 피로 목을 축였다. 그로 인해 더 강해졌다는 이야기였다.
그로 인해 최고의 전사가 되기 위해서는 마족을 오히려 잡아먹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았었다.
북부의 1대대는 정예였다. 최고의 전사에 가장 가까운 이들이라는 뜻이었다.
1대대에는 신참에게 마족의 피를 마시게 하는 신고식이 있었다. 그 때문에 로버트도 마족의 피를 마셔본 적있었다.
마족의 피는 진짜 더럽게 맛이 없었다. 맛이 없는 수준을 넘어선 무언가였다.
생고기를 먹고 자란 로버트조차 마족의 피를 마시고 며칠 동안 뭔가를 먹지 못했을 정도였다.
문제는 맛뿐만이 아니었다.
마족의 피를 마시면 몸 내부가 불타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그건 버텨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로 인해 이제는 사장된 전통이었다.
자신이 진정한 북부의 전사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가끔 마족의 피를 마시는 놈들이 있었다.
그런 놈들조차 한 모금이나 두 모금 마시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꿀꺽- 꿀꺽-.
옆에서 줄기차게 들리는 서늘한 소리에 로버트는 작게 떨었다.
"듣기로 최고의 전사가 되기 위함이라지? 그것참 훌륭한 전통이군."
갈라하드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로버트는 고개를 돌렸다.
그래, 전통이 있었다.
북부에서 진정한 전사가 되려면 마족의 피를 마셔야 한다는 전통-.
근데-.
'당신 북부 출신 아니잖아.'
아니, 심지어 전사도 아니었다. 로버트는 입 끝까지 올라온 말을 애써 삼켰다.
마족만 잘 잡는다면 뭐든 상관없었다.
'대공 전하가 좋아하시겠군.'
왠지 놈에게서 대공 전하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갈라하드가 가리킨 방향으로 향하자 마족들이 뭉쳐 있었다.
"중급 마족입니다. 다들 긴장하세요."
마족의 영역에서는 마족이 더 강해졌다. 그런 탓에 중급 마족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긴장이 가득 올라왔다.
건틀릿 속에 땀이 찼다.
"오, 중급이라."
입맛을 다시는 소리는 애써 못 들은 척했다.
중급 마족이 있는데도 전투는 이상할 정도로 수월했다.
역시나 원인은 갈라하드였다.
갈라하드가 걷어준 연기 덕분에 마족은 기습을 하지 못했다.
훤히 보이는 정면에서 중급 마족은 아드리안나를 당해낼 수 없었다.
전투는 긴장한 게 무색할 정도로 쉽게 끝났다.
"아까 채우시지 않았습니까?"
수통을 채우는 갈라하드를 보며 아드리안나가 물었다. 역시 피를 마시고 있다는 걸 눈치 못 챈 듯했다.
"아, 마법에 사용했네."
"도와드리겠습니다."
나란히 앉아서 마족의 피를 채우는 갈라하드와 아드리안나를 보고 있으니, 마족과 싸우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출출한데, 밥 좀 먹고 가는 게 어떤가."
"알겠습니다."
심지어 밥도 먹었다.
마족의 영역에서 점심을 먹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면, '미쳤군. 여기 놀러 왔나?'라는 반발이 나오기 마련이었지만-.
지금은 다들 조용했다.
이미 평소보다 마족을 더 많이 잡은 뒤였다.
그런데 부상자는 없었다.
돌아가서 말하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욕이 돌아올 게 분명했다.
그 원인은 분명했다.
갈라하드였다. 놈, 단 한 명이 판도를 바꿨다.
긴장 속에서 습격을 막는 것에서 찾아다니는 사냥으로-. 그건 절대로 사소한 차이가 아니었다.
그런 갈라하드가 쉬겠다는데,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나.
"정말 맛있네요."
"그렇지? 우리 톰이 요리를 제법 잘하더군. 길버튼 경, 저리 빠지게. 단란하게 데이트하는 거 안 보이나."
"데이트 아니에요."
"알았네. 그래도 길버튼 경은 좀 빠지게. 눈치가 없군."
"저도 배고픕니다."
"아까는 무슨 음식을 싸가냐면서 뭐라고 하더니, 양심이 없군."
처음이었다. 마족의 영역에서 쉬는 건-.
다들 어색하게 앉아서 시선을 교환했다.
'이게 맞나-.'
그들은 묘한 찝찝함을 느끼며 휴식을 취했다.
****
'끊임없이 먹는군.'
갈라하드는 무게감이 느껴지는 가슴 주변을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들어가는지 궁금해서 마족의 피를 계속 넣었는데, 고통의 알은 끊임없이 먹었다.
심지어 더 달라고 아우성쳤다.
뿜어내는 마나의 질도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마족의 피를 마시며, 놈도 성장하는 듯했다.
마법사가 저장할 수 있는 마나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고통의 알이 주는 더 짙은 농도의 마나를 저장하기 위해서 마나를 계속 뿌리고 있었다.
체내에 저장할 수 있는 마나는 한계가 있고, 그를 채우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마법사가 지팡이를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지팡이에 달린 마석만 갈아 끼우면 바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값이 어마어마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갈라하드는 마법을 시작한 뒤부터 매일 마나를 다 썼기에 회복 속도가 빠르지만, 그래도 시간이 걸리긴 했다.
그런데 고통의 알 덕분에 그 과정이 거의 없었다.
"음, 맛이 더 진하군."
"······예?"
"아, 마족이 밖보다 더 강한 것 같다는 소리네."
"예, 마족의 영역에서 마족과 마물은 한 단계 더 강해집니다."
"마나의 농도 때문인가?"
"농도? 처음 듣는 단어입니다."
길버튼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뭐라 설명하려던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있네."
"······왜 포기하십니까?"
갈라하드는 그를 무시하고 상념을 이어갔다.
마나의 농도가 짙어지면 마족이 더 강해진다-.
이런 짙은 농도에서 마법을 쓰기는 어렵지만, 쓸 수만 있다면 그 위력이 강해지는 원리와 비슷할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는데, 왠지 굉장히 찝찝했다.
'그래서 마족이 제마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건가?'
중부의 마나 농도는 여기와 비교하면 정말 형편없었다.
정말 마나 농도와 마족의 힘에 상관관계가 있다면, 중부에서는 마족의 힘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질 게 분명했다.
제법 합당한 가설이었다.
'그러면 마족의 왕이 그를 뒤집을 능력이 있다는 건가.'
가령 마나 농도를 올리는 능력이라든지-.
마나를 불태우는 아드리안나의 성질을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눈이 마주친 아드리안나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똑같은 무표정이었지만, 묘하게 당당함이 느껴졌다.
"뭐를 말인가?"
"농도 말입니다. 안개가 짙으면 농도가 높은 것이고, 옅으면 농도가 낮다-. 아닙니까?"
자신감 넘치는 아드리안나의 대답에 갈라하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변 기사들이 박수치며 아드리안나의 명석함을 칭송했다. 문무를 겸비했다며 칭송했다.
아드리안나는 별것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 눈썹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진짜 별 게 아니잖아.'
갈라하드는 애써 고개를 젓고 마나 실을 뿌렸다.
이는 마나 화살을 응용한 마법이었다. 마나 화살을 실처럼 가늘게 뿌리는 것인데, 마족이나 마물에 닿으면 농도 낮은 마나가 사라지는 원리를 이용한 거였다.
급조한 마법이었지만, 의외로 효과가 좋았다. 상대가 낮은 농도의 마법이 통하지 않는 마족이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그때, 신호가 왔다. 그것도 여러 개-.
그 수가 전보다 많았다.
"음."
갈라하드는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왜 그러십니까?"
"마족들이 뭉쳐 있군. 꽤 많네."
오면서 만났던 마족은 많아도 여섯이었다. 거기에 마물 같은 게 곁들어져 있었을 뿐.
그런데 방금 찾은 놈들은 최소 열이 넘었다.
"몇 정도입니까?"
"최소 열일세. 많이 잡아서 겁이라도 먹은 건가?"
갈라하드의 물음에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저었다.
"마족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군. 아무튼, 지금까지와 달리 그 수가 많네."
그때, 주변의 분위기가 뜨거워졌다. 기사들이 검을 고쳐잡으며 뜨거운 숨을 뱉어냈다. 열기가 잔뜩 오른 모습이었다.
"더러운 마족 놈들이 모여있다면 잘 된 거 아닙니까?"
"한 번에 처리할 수 있겠군."
놈들은 이상하게도 반기는 눈치였다.
'무식한 놈들.'
의기를 불태우는 북부 놈들에 갈라하드는 혀를 찼다.
방향을 잡고 전진했다.
마나를 일부러라도 써야 할 판이었기에, 갈라하드는 한 손으로 계속해서 거친 바람을 일으켰다. 슬슬 거친 바람이 손에 익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 뭉친 마족들이 보였다.
"상대가 많습니다. 긴장을 놓지 마세요."
아드리안나가 예의 백색 오러를 일으키며 뛰어나갔다.
그때, 겹친 마족 사이로 범상치 않아 보이는 마족이 나타났다. 순식간에 수가 늘어났다. 이어서 아드리안나 아래의 땅이 갈라지며 거대한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함정이었나.'
하긴 마족의 영역에 들어온 뒤부터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 오히려 눈치 못 채는 게 더 이상했다.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었다. 마족의 천적, 아드리안나가 있었기에.
"제가 먼저 진입합니다. 다들 대기하세요."
아드리안나는 주저 없이 마물들 사이로 떨어졌다.
백색 오러가 가득 타올랐다. 거대한 마물이 그대로 재가 되어 휘날렸다.
마족들이 맹렬한 적의를 드러내며 아드리안나에게 달려들었다.
다시금 뿌려지는 재-. 그 사이로 아드리안나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른 기사들이 펼쳐지듯 움직였다. 그 움직임이 상당히 부드러웠다. 제법 익숙한 상황인 듯했다.
마족과 마물이 전부 아드리안나에게 몰린 모양새였다.
마나를 불태우는 아드리안나였다. 저 정도의 마족에게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저대로 두면 아드리안나가 전부 재로 만들게 생겼다.
즉 남는 게 없다는 소리였다.
"이건 위험하군."
갈라하드는 다급하게 마나를 압축했다.
아드리안나가 전부 재로 만들기 전에 몇 개라도 건져야만 했다.
백색 오러가 올라오며 마물 하나가 재로 변했다. 그 사이로 아드리안나가 보였다. 조바심과 동시에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고통의 알이었다. 마족의 피를 많이 먹인 탓인지 고통의 알이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냈다.
놈의 종용이 전보다 더 강렬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흔들릴 정도였다. 심장이 더욱 거칠게 뜀박질했다.
'이런 부작용이 있군.'
마족의 피를 너무 먹인 탓에 고통의 알이 너무 강해진 느낌이었다.
마나의 농도가 점점 짙어질 때부터 뭔가 이상하더니-.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는지, 고통의 알이 제 존재감을 가득 드러냈다.
'영악한 놈이다.'
필사적으로 정신을 유지하는 게 전부였다.
고통의 알은 자기가 먹은 걸 토해내면서까지, 아드리안나의 죽음을 강요했다.
더는 거부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때, 시선에 아드리안나가 잡혔다. 마물과 마족에게 둘러싸여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니, 고통의 알이 더 강하게 흔들었다.
당장 그녀를 죽이라고-.
'아니, 아드리안나를 어떻게-.'
입술을 씹던 갈라하드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존재감이 올라온 고통의 알을 억제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그를 억제하지 않고 오히려 이용한다면-?
'그래, 죽이겠다.'
짧게 대답하자 고통의 알이 뚝- 멈췄다.
어지럽던 머리가 순식간에 명료해졌다. 갈라하드는 다시금 계산했다. 같은 결론이 도출됐다.
고통의 알과 아드리안나, 마족까지-.
셋을 한 번에 처리하는 천재적인 방법이었다.
'좋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마나를 움직였다.
계속해서 먹인 까닭에 농도 높은 마나가 가득했다.
고통의 알이 뱉어낸 마나는 갈라하드의 마나보다 오히려 더 수월하게 움직였다. 마치 정수기를 한 번 거친 마나 같았다.
이미 농도가 높은 마나를 한 차례 더 압축했다.
순식간에 심장이 뻐근해졌다. 과부하라도 온 듯 몸이 달달 떨렸다.
꾹 참고 마나를 눌렀다. 뿌드득, 뼈가 어긋났는지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괜찮다. 뼈는 다시 맞추면 되니까.
포기하지 않고 마나를 다시 눌렀다.
갈라하드의 손가락에서 스파크가 톡톡 튀었다.
"괜찮으실 겁니다."
그때, 길버튼이 아드리안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뭔 개소리인가 싶어서 쳐다보니, 길버튼이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이런 곳에서 위험에 빠지실 분이 아니시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길버튼이 갑자기 진지한 충고를 했다.
잠시 고민하던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동감일세."
****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길버튼은 실핏줄이 터진 갈라하드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마족과 마물에 둘러싸인 아드리안나는 위험해 보이지만, 그녀가 헤쳐온 위기에 비하면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를 알기에 직속 부대나 길버튼이 조급하지 않게 행동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늘 여유롭던 갈라하드가 오히려 초조한 모습을 보였다.
갈라하드는 눈에 핏줄을 가득 세우고, 몸도 바들바들 떨며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는데도 갈라하드답게 전혀 들어먹질 않았다.
조금 색다른 모습이었다. 갈라하드가 저런 초조한 모습을 보이다니-.
'설마······.'
길버튼은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다.
위기에 빠진 아드리안나를 보자마자, 필사적으로 주문을 외우는 갈라하드-.
목에 핏대를 세우고, 실핏줄이 터진 붉은 눈으로 집중하는 모습에서는 절실함까지 느껴졌다.
그게 뜻하는 건-.
'역시 아드리안나님을 마음에 두고 있나?'
하긴 그 아드리안나였다. 좋아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 갈라하드가? 정황만 보면 확실하잖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 갈라하드가?'
길버튼이 고뇌에 빠져있을 때-, 갈라하드의 입이 열렸다.
"연쇄 전격."
갈라하드의 손가락에서 쏘아진 작은 스파크가 하늘로 올라갔다.
헤르문에게 썼던 마법과 흡사했지만, 그때와 중압감이 달랐다.
그때, 먹구름이 가득하여 빛 하나 없던 하늘이 거칠게 찢어졌다.
그 틈으로 강렬한 번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보다 굵은 번개였다.
'저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길버튼은 마른 침을 삼켰다.
"아드리안나! 조심하게!"
그때, 갈라하드가 소리쳤다.
'저게 조심하라고 조심할 수 있는 거야?'
갈라하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번개가 쏘아졌다.
그런데 그 위치가 다소 이상했다.
아니-, 많이 이상했다.
'왜 아드리안나한테-?'
번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드리안나에게 꽂혔다.
콰앙-!
번개가 연속으로 아드리안나 주변을 강타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드리안나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아드리안나에게 떨어진 번개는 백색 오러에 흐트러졌다.
그러자 굵직한 번개에서 튕기듯 조각들이 뿜어졌는데, 그것들이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직격당한 마물과 마족이 휩쓸리듯 터졌다.
아드리안나가 마나를 태우는 건 길버튼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마법에 영향을 안 받을 것이다.
다만, 그걸 알고 있어도-.
'아무리 그래도 자기 약혼자한테······?'
전장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마족이 아닌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한층 깊어진 경악 어린 시선들 속에서-.
"후, 명중이군."
갈라하드는 흐트러진 머리를 넘겼다.
아주 상쾌한 얼굴이었다.
34화 마경
'음, 조용해졌군.'
갈라하드는 한결 잠잠해진 고통의 알에 작게 중얼거렸다.
온 힘을 다했는데도 아드리안나에게 타격을 주지 못하자 고통의 알이 조용해졌다.
놈의 기를 한 번 죽일 생각이었지만, 너무 조용해지자 갈라하드는 괜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마족의 피를 정수해주는 고통의 알은 갈라하드의 큰 전력이었다. 이대로 놈이 무력함을 느끼고 포기하게 되는 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번은 그녀가 만전일 때라 그렇지. 마나의 농도를 키우고, 그녀가 방심할 때를 노리면 또 모른다. 포기하지 마라.'
고통의 알이 여전히 잠잠했다.
'할 수 있다니까. 물론 힘들겠지만, 우리가 함께 노력하면 불가능은 아닐세.'
갈라하드는 고통의 알을 격려했다. 제마전쟁의 잔재라면서, 고작 한 번의 실패로 이렇게 의기소침해지다니-. 어이가 없었다.
'우리에게는 마족의 피가 있지 않나. 우리는 더욱 나아갈 수 있어. 주저앉기에 아직 너무 이르네.'
이어진 격려에 고통의 알이 작게 떨었다.
갈라하드는 수통을 입에 물었다. 고통의 알이 피를 슬쩍 가져갔다.
그러면서 작게 진동하는 게 꼭 묻는 듯했다. 정말 저 괴물을 해치울 수 있냐고-.
'이 세상에 불가능은 없네.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대신 자네가 나를 더욱 믿어줘야 하지. 이번처럼 괜히 난동을 부렸다가 실패하면 그녀의 경계심만 돋우는 거니까. 아주 큰 방해야. 마법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냉철일세.'
갈라하드는 몇 번이나 '믿음'을 강조했다. 고통의 알이 조금 더 크게 진동했다.
의기가 다시 올라오는 듯했다. 갈라하드는 수통을 한 번에 들이켰다. 고통의 알이 전보다 더 씩씩하게 피를 가져갔다.
'우리는 할 수 있네. 나는 자네를 믿을 테니, 자네는 나를 믿게.'
고통의 알이 호응하듯 마나를 길게 뿜어댔다. 전보다 더 농도가 짙고 양도 많았다.
다만-.
'아까 보니까 양이 더 많던데, 아직도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건가.'
고통의 알이 격하게 진동했다. 항변하는 듯했다. 그에 갈라하드가 대답하지 않자, 마나가 찔끔 더 나왔다.
고통의 알이 살짝 떨었다. 이것까지 가져가야 하냐고 타박하는 듯했다.
'신뢰라는 걸세. 우리는 이제 말 그대로 한 몸 아닌가.'
고통의 알이 뚝- 멈췄다. 잠시 조용하다가 살짝 끄덕였다.
성공적인 회유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정리를 끝낸 아드리안나가 다가왔다.
"저를 매개체로 마족과 마물을 소탕하다니-. 훌륭한 전술이었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아주 살짝 내려가 있었다.
"자네를 믿기에 가능한 전술이었네."
"걱정하지 말고, 얼마든지 퍼부으셔도 됩니다."
작은 흉터도 없는 아드리안나에 고통의 알이 조용해졌다.
갈라하드는 속으로 고통의 알을 다독였다. 자네는 할 수 있다네-. 고통의 알이 힘차게 진동했다. 은근히 손이 많이 가는 놈이었다.
"아, 수통 다시 채워야겠군."
"벌써 다 쓰셨습니까?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목보다는 손목이 더 받기 쉬우실 겁니다."
"오, 그렇군. 고맙네."
"별말씀을."
"이러고 있으니 정말 데이트 같군."
"데이트 아닙니다."
마족이 많았던 탓에 가지고 있는 수통을 다 채워도 피가 남았다.
"왜 그러십니까?"
"수통이 부족하군."
"아, 제 수통 빌려드립니까?"
아드리안나가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고급스럽게 생긴 수통이었다. 정면에 뭔가 정체 모를 그림이 양각되어 있었다.
그를 자세히 살펴봤지만, 좀처럼 정체를 알기가 힘들었다.
"고양이입니다."
"발이 여덟 개인데?"
"두 마리입니다."
설명을 듣고 자세히 보니 고양이의 형체가 아주 미묘하게 있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끔찍한 실력이군."
"······."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살짝 내려갔다.
"자네가 양각한 건가?"
"······어릴 때 한 겁니다."
"아하, 그렇군."
갈라하드는 수통을 슬쩍 흔들었다. 안에 우유가 담겨 있었다. 버리기 아쉬우니 그를 마시고 피를 받았다.
어느새 아드리안나는 저 멀리에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마족의 피는 왜 자꾸 마십니까."
"자네도 마셔보게 몸에 좋네."
"진짜입니까?"
갈라하드는 수통을 건넸다. 입을 대고 마시다니-. 교양이란 게 전혀 없는 모습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으웨에에엑-! 맛 더럽게 없네!"
"원래 몸에 좋은 건 맛이 없네. 맛이 좋은데 몸에 좋으면 진작에 다 없어졌지."
"······어, 그거 아드리안나님의 수통 아닙니까? 그 수통 얼마 안 된 건데."
어릴 때 양각했다는 아드리안나의 진술은 거짓인 듯했다.
'다른 재주는 없나 보군.'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리며 수통을 채웠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다른 기사들이 다가왔다. 그 손에 각자의 수통이 들려 있었다.
"오, 고맙네. 이쪽을 누르면 피가 잘 나오니 잘 부탁하네."
기사들이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저기서 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비위가 약하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한 번 더 도전한 길버튼은 먹은 걸 다 게워냈다.
****
아드리안나에게 꺾인 탓인지, 전보다 피를 더 많이 저장해도 고통의 알은 반항하지 않았다.
아드리안나를 볼 때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는 정도에서 그쳤다.
덕분에 농도는 비슷해도 한결 더 순해진 마나를 저장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빨랐던 갈라하드의 마법 시전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이거 노다지군.'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마족의 영역에 감탄 중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걸었을까-.
갈라하드의 마법에 가벼이 밀리던 연기가 저항했다.
조금 떨어진 곳의 연기가 빼곡했다. 연기로 이루어진 벽처럼-.
여기부터는 다른 영역이라도 선을 그어놓은 모습이었다.
"여기는 뭐지?"
"본격적인 마족의 영역, 마경입니다. 여기부터는 상급 마족도 나옵니다. 상급부터는 군체를 이룹니다."
아드리안나가 대답했다. 여전히 무심한 눈이었지만, 묘하게 일렁이는 느낌이 들었다.
"군체?"
"마족은 기본적으로 뭉쳐 다니지 않습니다. 많아도 열입니다. 하지만 상급 마족은 제 아래 마족들을 하수인으로 둡니다. 그를 군체라 부릅니다."
대충 상급부터는 집단을 이룬다는 듯했다.
"군체를 이룬 마족을 상급이라 부릅니다."
"그 위도 있나?"
"예, 상급을 아래에 두는 마족을 고위 마족이라 부릅니다. 고위 마족 사이에서도 강함은 천차만별이지만, 등급을 따로 나누지 않습니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의 설명을 되새겼다. 그러니까 마족은 각 점조직의 형태이고, 그 등급이 올라갈수록 조직의 규모가 커진다는 건가.
"그러면 왕도 있나?"
갈라하드는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던졌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굳었다. 아주 찰나였고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갈라하드는 놓치지 않았다.
"왕은 없습니다. 고위 마족은 서로 반목합니다."
"그렇군."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경은 본래 직속 부대원 스물이 있어야 들어가는 곳입니다. 다만, 갈라하드 대장이 있으니 충분할 것 같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응시하며 말했다.
"안 됩니다. 인원이 부족합니다. 그 일을 기억하십쇼."
반발은 길버튼에게서 나왔다. 아드리안나의 말에 반박하는 길버튼이라니. 갈라하드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길버튼을 쳐다봤다.
"그일?"
"마경에 무리하게 진입했다가 아드리안나님이 고립된 적이 있습니다."
길버튼이 눈을 구기며 대답했다.
"오히려 다른 때보다 지금이 더 안전하다. 가장 위협적인 게 시야를 가리는 연기인데, 갈라하드 대장이 그를 걷어주지 않나. 마경 초입에는 상급, 고위 마족이 나오지 않는다. 초입까지만 들어가서 갈라하드 대장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만 할 것이다."
타당한 근거였지만,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드물게 높았다.
'흥분했군.'
그에 다른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경 초입에는 상급 이상의 마족이 안 나오지만-."
길버튼이 한발 물러섰다. 아드리안나가 억지를 부리는 건 아닌 듯했다.
"위험한 건 사실입니다.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아드리안나의 시선이 다시금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그 눈에 묘한 열망이 가득했다.
여태껏 눈썹만 위아래로 움직였던 걸 생각하면, 상당히 흥분한 게 분명했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흔들었다. 바람이 연기로 이루어진 벽을 두드렸지만, 좀처럼 밀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있던 연기보다 더 무거웠다.
마나를 압축해서 뿌리니 그제야 연기가 밀려났다.
'쉽지 않겠군.'
연기로 이루어진 벽을 보고 있으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위험이 아닌-.
'왠지 고향에 온 것 같군.'
갈라하드는 텁텁한 중얼거림을 삼켰다.
그를 애써 억누르며 천천히 상황을 계산했다.
'연기가 무겁지만, 밀어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굳이 조급할 필요도 없어.'
마경이라도 급할 필요는 없었다.
갈라하드는 이미 능력을 보인 뒤였다. 아드리안나도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갈라하드가 원한다면 언제든 마족의 영역에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마족이 함정도 판다. 돌아갔다가 다시 오는 것보다는 바로 진입하는 게 더 안전하기는 해.'
마족은 마냥 당해주는 놈들이 아니었다. 다음에 들어왔을 때는 어떤 방비를 해뒀을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쪽 상태가 좋았다. 부상자도 없었다.
갈라하드는 들어오기 전보다 오히려 더 좋았다.
돌아간다고 마경에 관한 정보를 더 얻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적들이 준비되지 않았고, 이쪽은 상태가 좋고.
그를 고려하면 지금이 가장 적기였다.
상급 마족이 안 나오는 초입만 돈다는 게 조금 아쉽지만-.
"들어가는 게 좋겠군."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우리 사이에 감사는 뭘."
"우리가 무슨 사이입니까?"
"결혼할 사이 아닌가. 자네 참 짓궂군."
"······아닙니다."
전과 달리 아드리안나의 대답이 짧았다. 그 시선은 이미 마경에 꽂혀 있었다.
"마경은 위험합니다. 순간 까닥하면 숙련된 기사도 사라집니다. 초입을 넘어서면 안 됩니다."
길버튼이 바짝 옆으로 붙었다.
"떨어지게 남자는 질색일세."
"저라고 좋아서 이러겠습니까?"
"어차피 다 보이지 않나."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그때, 아드리안나가 뒤를 돌아봤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대가 있는데, 뭐가 걱정인가."
살짝 놀란 얼굴이 된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입하겠습니다."
이제껏 무표정하던 아드리안나의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다. 다른 기사들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농도가 더 짙어졌군.'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숨을 쉴 때마다 고통의 알이 두근거렸다. 고통의 알이 환희를 표출했다.
이 정도의 마나라니-.
밖과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사방에 마나가 넘쳤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반가움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꼭 어미 배에 들어온 것 같은 포근함이 느껴졌다.
갈라하드는 뻐근함을 밀어내며 손을 풀었다. 바람이 손가락을 타고 휘날렸다. 이내 주변 가득했던 연기가 천천히 뒤로 밀려났다.
"연기가 무겁군, 이게 최선이네."
일곱 걸음 정도 되는 거리가 갈라하드의 최선이었다.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대단하십니다."
아드리안나가 검을 고쳐 잡으며 말했다. 주위 기사들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 어딘지 부담스러운 눈이었다.
"갈라하드 대장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둔다. 혹시라도 마족이 나타나면 내가 처리할 것이니, 갈라하드 옆을 비우지 말도록."
아드리안나가 굳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걸음 가까워진 기사들이 꽤 불편했다.
"마경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갈라하드의 물음에 길버튼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드리안나는 살짝 더 앞에서 걷고 있었다. 정면 경계에 집중한 모습이었다.
"전임 1대대 대장이 마경에서 실종됐습니다. 아드리안나님이 부모처럼 따르던 이였다더군요."
"이미 죽지 않았나?"
"시체라도 찾으려는 걸 겁니다."
"꽤 감성적인 부분이 있군."
"아무튼, 마경은 초입도 위험합니다."
길버튼의 얼굴에 긴장이 가득했다. 그 감지 않아 기름기 가득한 머리카락을 타고 땀방울이 흘렀다.
"위험하지 않은 곳은 없네."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그러면 능력 확인을-."
그때,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스쳤다.
'이건-.'
그대로 눈이 감겼다.
****
'흥분하면 안 돼. 조금 만이야. 조금만-.'
아드리안나는 중얼거리며 검을 털었다.
흥분이 차올랐지만, 아드리안나는 필사적으로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단순히 흥분하여 마경에 들어온 게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갈라하드였다. 덕분에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시야만 확보되면, 아드리안나가 마족에게 패배할 일은 없었다.
거기에 마경 초입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러니 마경 초입에서 갈라하드의 능력이 마경에서도 통하는지 확인만 할 생각이었다.
정면에만 집중하고 있던 아드리안나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예? 제 여자 취향이 왜 궁금하십니까. 소개해주실 겁니까?"
"아, 저는 로버트라고 합니다!"
뒤의 대화가 중구난방이었다. 기사들의 대답이 계속 이어지는 중이었다. 그에 고개를 돌린 아드리안나는 그대로 굳었다.
갈라하드가 있어야 할 곳에 눈이 붉은 마족이 깔깔- 웃고 있었다.
주변 기사들이 그 마족을 갈라하드처럼 대하듯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마족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아드리안나와 눈이 마주친 마족이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눈은 웃지 않고 입만 웃은 마족이-.
"들켰네."
자기 목을 잡고 그대로 뽑았다.
뿌드득-.
척수가 달랑거렸다. 쏟아진 붉은 피가 바로 옆에 있던 길버튼을 적셨다.
그 순간까지도 마족의 입꼬리는 가득 올라가 있었다.
스스로 목을 뽑은 마족에 아드리안나의 검이 목표를 잃고 멈췄다.
"아-."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익숙한 연초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어디에도 갈라하드는 없었다.
****
"음."
갈라하드는 주변을 둘러보며 작게 탄식했다.
눈을 감았다 뜨니, 백 년은 방치한 듯한 귀족의 연회장이었다. 곳곳에 먼지가 가득했고 물건은 낡다 못해 스러져 있었다.
갈라하드는 마경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이건 꼭 인간의 흔적 같지 않은가.
그때-.
"반갑습니다."
갑자기 앞에 여인이 생겼다. 아니, 원래 있었던 걸까.
'정신계군. 이런-.'
갈라하드는 다급히 마나를 움직였다. 앞머리를 넘기듯 자연스레 마나를 머리에 넣었다.
"아, 권능은 이미 지웠습니다."
여인이 점잖게 말했다. 갈라하드는 믿지 않고 마나를 한 차례 돌렸다. 여인의 말처럼 흔적도 없었다.
정신계를 쓰면서, 지금까지 봤던 마족보다 강한 듯한 느낌-.
"그래, 네가 그분인가?"
"역시 아만다를 만나셨군요. 아, 그분은 아닙니다. 그분은 여기까지 나오실 수 없어서요. 어머-."
여인이 실수했다는 듯 입을 가렸다. 그 가증스러운 동작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여기까지 나올 수 없다-.'
거짓일까. 진실일까. 갈라하드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원래라면 권능으로 그냥 데려가겠지만, 그러면 다들 망가지더라고요? 망가지면 안 되니까."
여인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과장된 동작이었다. 마치 계산한 것처럼-.
여인의 목소리는 꼭 귀를 간질이는 것처럼 달콤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손가락을 주머니에 넣었다.
"어, 이상한 짓 하지 말아요?"
"안 되나?"
갈라하드는 슬쩍 연초를 흔들었다. 여인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입에 연초를 물고 불을 붙이자, 레몬 향이 깊게 풍겼다.
마족은 갈라하드를 죽이지 않고 앉혀뒀다. 갈라하드는 여인이 뭔가를 제안할 것이라 예상했다.
머리가 온전해야 하는 일이겠지. 놈들은 정보국의 갈라하드를 알고 있었으니, 그와 관계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저는 마를리예요. 이렇게 데려올 생각은 없었는데, 그 미친년이 있어서요. 어쩔 수 없었어요."
"미친년이라."
아드리안나를 지칭하는 게 분명했다. 미친년이라니-. 아드리안나에게 상당히 안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아무튼! 정보국의 갈라하드 맞죠? 요원명은-."
"거기까지. 미안하지만, 버린 이름이네."
요원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건 정보국 심층부에 관련자가 있다는 소리였다. 마족이거나 배신자거나-. 가정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갈라하드의 눈이 가라앉았다.
"아무튼, 이제 제안을 하나 할 건데, 화내지 말고 끝까지 들어줘요. 인간은 툭하면 화내니까."
여인이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여인이 잠시 입술을 오물거렸다. 단어를 고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면 인간들의 그런 태도를 흉내내는 것이거나.
"황제를 좀 죽여줄래요? 아, 그 쪽에게는 은퇴겠죠. 걔 좀 은퇴시켜줘요."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갈라하드는 낮게 웃었다.
"아, 잠시만요. 자세히 설명해줄게요. 일단, 그쪽은 마법사잖아요? 결국 우리 쪽이라는 말이죠. 아무리 정보국에서 오래 일했어도-."
굳은 얼굴로 연기를 길게 뱉는 갈라하드에 마족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인간이란-.
마법사인데도 여전히 인간의 편에 서려 하다니. 이보다 우둔한 게 또 있을까.
"미리 말하는데, 화내지 말아요. 죽일 수도 있으니까."
마족은 진지하게 경고했다.
그때, 갈라하드의 입이 열렸다.
"황제를 죽여달라-."
마족은 슬쩍 권능을 준비했다.
놈이 화를 내면 당장 그 입을 막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보상은?"
놈이 입꼬리를 가득 올리며 말을 이었다.
마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저놈이 뭐라 그런 거야?
"대가로 무얼 줄 수 있냐고 물었네."
잠시 눈을 끔벅이던 마족이 환히 웃었다.
"당신, 마족처럼 말하네요?"
35화 음흉한
'이런-.'
목을 뽑은 마족이 쓰러지며, 그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길버튼은 다급히 오러를 일으켜 피를 막았다.
피가 닿은 철갑옷이 급하게 부식되었다. 갑옷의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렸다.
'톰한테 한 소리 듣겠군.'
길버튼은 욕을 중얼거리며 상황을 파악했다.
방금까지 갈라하드라 생각하고 대화했던 이가 마족이었다.
아드리안나에게 정체를 들킨 마족은 자기 머리를 뽑아 피를 뿌렸다. 신속하게 대처하지 않았다면, 큰 피해를 입을 뻔했다.
길버튼과 기사를 전부 속일 정도면 최소 상급 마족이었다.
'왜 초입에서 상급 마족이-?'
마족은 등급이 높을수록 만나보기 힘들었다. 마경 안쪽에서 안 나오는 습성이 있어서다. 상급 마족은 고작 마경 초입에서 만날 상대가 아니다.
그런데 들어서자마자 상급 마족이 나타났다. 그것도 가장 까다롭다는 정신계 마족이-.
'심지어 대장을 노렸다.'
더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족이 노린 게 아드리안나가 아닌 갈라하드라는 것이었다.
마족은 항상 아드리안나를 노렸다.
아드리안나가 늘 선두에 서는 이유였다.
마족이 아드리안나를 노리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갈라하드 대장을 노린 겁니다."
"아-."
아드리안나의 늘 무표정하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균열이 점점 커졌다.
'이건 위험한데-.'
멀어졌던 연기가 다시금 그들을 덮쳤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연기에 숨 쉬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그래, 이게 마경이었다. 갈라하드의 덕분에 잊고 있던 지독하고 끔찍한 느낌이 다시 그들을 간질였다.
아드리안나가 백색의 오러가 가득 일으켰다. 오러가 날개처럼 길게 뻗어지며, 주변의 연기를 걷어냈다.
세 걸음 정도의 범위였다. 그것도 대단한 거지만, 갈라하드 때문일까 작게 느껴졌다.
"아드리안나님, 진정하셔야 합니다."
"······."
아드리안나는 죄책감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술이 터져 붉은 피가 흘렀다.
"흔적을 찾아보세요."
명령을 내린 아드리안나가 오러를 더욱 크게 일으켰다. 그 몸이 달달 떨렸다. 무리하는 게 분명했다.
"지금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우리 대장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닙니다."
길버튼은 초조함을 애써 누르며 말했다.
"대장을 죽인 게 아니라 데려갔습니다. 다른 의도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다른 의도?"
아드리안나의 질문에 길버튼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쪽에 뭔가 있습니다!"
기사 하나가 소리쳤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땅에 흩뿌려진 재가 조금 뭉쳐있었다.
길버튼은 납작 엎드려 확인했다. 마족의 피를 떨어뜨린 듯했다.
"마족의 피를 흘린 것 같습니다. 갈라하드 대장입니다."
상급 마족을 상대로 이런 수를 부리다니-. 역시 쉽게 당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바로 추격합니다. 붙으세요."
아드리안나가 백색으로 가득한 오러를 거칠게 휘둘렀다. 백색의 선이 공간을 가득 그었다.
가까워지던 연기가 흩어졌다. 말도 안 되는 무위였다. 그 아래로 이어진 흔적이 보였다.
아드리안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길버튼이 오러를 가득 꺼내며 바로 뒤에 붙었고, 다른 기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때, 연기 사이로 마물 하나가 튀어나왔다. 아드리안나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거대한 마물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흩어졌다.
마물을 처리하면서도 아드리안나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어떤 놈인지 큰일 났군.'
화난 듯한 아드리안나의 모습에 길버튼은 작게 중얼거렸다.
다만, 길버튼도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아무리 갈라하드여도 이곳은 마경이었다. 심지어 상급 마족에게 납치된 상황이었다.
위험할 게 분명했다.
'조금만 버텨보십쇼. 지금 가니까.'
길버튼은 오러를 더욱 일으켰다.
얼마나 달렸을까-.
"핏자국이 끊겼습니다."
흔적이 끊겨있었다.
수통에 담긴 피를 다 쓴 게 분명했다.
"잠깐만 기다리십쇼!"
길버튼은 다급히 움직이려는 아드리안나를 붙잡았다.
아드리안나가 길버튼을 돌아봤다. 그 눈이 상당히 격양되어 있었다. 이 정도의 반응이라니-. 길버튼은 떫은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대장이라면 반드시 신호를 보낼 겁니다."
"······상대는 상급 마족입니다. 심지어 정신계라면, 아무리 갈라하드 대장이라도 위험합니다."
아드리안나의 대답은 정석이었다.
다만, 길버튼은 왠지 갈라하드가 그냥 당할 것 같지 않았다.
"대장은 반드시 신호를 줄 겁니다."
길버튼은 아드리안나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
"마실 것 좀 없나?"
뜬금없는 요구에 마족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실 거요?"
"여기 먼지가 너무 많아서 목이 칼칼하네. 마실 것 좀 없나?"
갈라하드는 자연스럽게 허리춤의 수통을 확인했다.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이상함을 느끼자마자 구멍을 뚫은 수통이었다. 그 안에 있던 양과 구멍의 크기를 계산해 봤을 때-.
'조금 멀리 왔군.'
그 이음새를 매만졌다. 조금 굳어 있었다. 마족의 피는 인간 것과 달리 굳는 속도가 조금 느렸다.
정확한 계산은 어렵지만, 대략적인 계산이 섰다.
'이 정도라면-.'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리며 안쪽에서 새로운 수통을 꺼냈다. 아드리안나가 준 수통이었다.
마족이 코를 킁킁거렸다.
"마족의 피네요?"
"그렇네. 좀 마시겠나?"
"아니요. 하등한 걸 마시면 입맛만 버려요."
같은 마족의 피를 마시는데도 별 상관하지 않는 태도였다. 어딘가 결여된 느낌이었다.
"저는 주로 인간을 먹어요. 그중에서도 덜 자란 남자 인간을 선호하죠. 고급 취향이죠?"
마족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고급 취향이라는 말에 자부심이 느껴졌다.
살벌한 이야기였지만, 갈라하드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마족이 인간을 먹는 건 유명했다. 제마전쟁때 사상자가 많았지만, 시체가 적었던 이유였다.
마족들이 전부 먹어 치운 까닭이었다.
마족과 인간은 양립할 수 없었다.
'그분이라-.'
갈라하드는 상황이 왜 이렇게 됐는지 깨달았다.
계획은 문제없었다.
아드리안나가 조금 흥분한 모습을 보였지만, 마경 초입에서 갈라하드의 능력만 확인하자는 계획은 그럴듯했다.
보통 마경의 초입에서는 중급 마족이 나온다는 건 사실일 것이다.
문제는 그분이라는 놈이 상급 마족을 대기시켰다는 점이었다.
'의외로 정보력이 좋군.'
갈라하드가 슬쩍 마나를 압축하려는 순간-.
"어, 하지 말아요."
마족이 슬쩍 위를 쳐다보고 갈라하드를 가리켰다.
갈라하드의 오른쪽 손가락 다섯 개가 그대로 뒤로 꺾였다. 우드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격통이 가득 올라왔다. 신음이 절로 터졌다.
입이 벌어지며 마시던 피가 쏟아졌다. 그 사이로 갈라하드의 것도 있었다. 마나를 압축하는 순간 뒤틀린 탓에 속이 진탕 꼬였다.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며 상황을 파악했다.
'마나를 압축하는 순간 꺾였다-.'
마나에 민감한 마족이라 알아본 듯했다.
이곳은 마나 농도가 짙었다. 고통의 알이 준 농도 짙은 마나도 한 번 압축해야 마법을 쓸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마족이 마나에 예민하면, 마나를 압축할 수가 없었다.
즉 마법을 못 쓴다는 이야기였다.
갈라하드의 손이 묶인 것과 다름없었다.
상대는 강한 마족이었다. 길버튼을 포함한 기사들 사이에서 갈라하드를 무사히 빼내 올 정도로-.
'이건 좋지 않군.'
갈라하드는 달랑거리는 오른손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아까는 반응하지 않았는데?'
처음 연초에 불을 붙일 때는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반응했다.
둘 사이의 차이는-.
'아, 마나 농도에 따라서 반응하는 거군.'
슬쩍 마나를 작게 압축하니 놈이 반응하지 않았다.
마나 농도가 놈에게 위해를 끼칠 정도로 짙을 때,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듯했다.
'불을 피울 정도의 마나라-.'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놈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건, 그 마법이 놈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다만, 마법의 용도는 공격 뿐만이 아니었다.
대신 놈이 신경 쓰지 않을 그 미세한 농도가 필요했다.
갈라하드는 속으로 시간을 세기 시작했다. 아직 좀 더 남았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그때, 마족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었다. 뻔뻔한 놈-.
"보상을 이야기하고 있었네."
갈라하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고 대답했다.
그때, 놈의 눈이 위쪽을 향했다가 내려왔다. 찰나였다.
"아, 보상-. 그분을 뵐 수 있을 거예요."
마족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반응을 보니 그분을 만난다는 게 놈에게는 상당한 보상인 듯했다.
"자꾸 그분그분하는데, 그분이 도대체 누구지?"
갈라하드는 고통을 애써 누르며 물었다.
"음, 아. 모르시는구나?"
마족이 고개를 까닥까닥거렸다. 꼭 약 올리는 모양새였다.
"아주 높으신 분이에요. 감히 하등한 인간이 만날 수 없을 정도로."
마족이 표정을 지우고 말했다.
'높으신 분이라.'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 게 조금 이상했지만, 고위 마족 중 하나인 건 분명했다.
'아주 높으신 분-.'
그 말처럼 아주 높은 마족이라면, 평범한 고위 마족은 아닐 것이다.
마족의 왕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에 적합한 상대였다. 혹은 놈이 마족의 왕일 수도 있었다.
처음으로 얻은 마족의 왕에 관한 줄이었다.
반드시 잡아야 했다.
문제는 그 조건이었다.
'황제의 암살이라-.'
황제의 죽음을 의뢰받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놈이 자신을 찾아왔음을 떠올렸다. 두 번이나 찾아왔다. 그것도 마족치고는 꽤 정중하게-. 바로 받을 필요는 없었다.
"황제는 왜 죽이려고 하는 건가? 딱히 하는 것도 없는 노인일 텐데."
"하는 게 없으니까요."
마족이 한쪽 눈만 구겼다. 어딘지 괴리감이 느껴지는 감정 표현이었다.
더 묻고 싶었지만, 놈의 손가락이 갈라하드를 향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라는 듯했다.
'하는 게 없으니까 죽이려고 한다-.'
묘한 문장이었다. 하는 게 없는 게 오히려 마족에게는 방해가 된다는 걸까? 놈들은 황제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는 거지?
갈라하드의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그때, 마족의 손가락이 갈라하드의 목을 가리켰다. 그 얼굴에 옅은 짜증이 보였다.
"안 할 거예요?"
명백한 협박이었다. 낌새 없이 갈라하드의 손을 꺾은 놈이었다. 그런 놈이 목을 겨누고 있으니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다만-.
"허세 부리지 말게. 자네는 나 못 죽이지 않나."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연초를 다시 입에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정답이었군. 마족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그분이 내게 관심이 있지 않나. 죽일 거라면, 처음부터 죽였겠지. 이렇게 힘들게 나섰겠나?"
마족이란 놈들에 대해서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 역시 소문처럼 똑똑하네요."
"늘 듣는 소리일세."
"맞아요. 당신한테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왜지? 단순히 내가 유능해서?"
마족의 눈동자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아까와 같은 행동이었다.
'습관인가? 아니, 뭔가 대답하기 애매할 때 올라간다. 그렇다면-.'
반복되는 행동은 단서였다.
갈라하드는 그를 놓치지 않았다.
'이건 꽤 재밌군.'
갈라하드는 슬쩍 위를 쳐다봤다.
재가 가득하여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천장이었다.
두께가 얼마일지-. 갈라하드는 슬쩍 왼손을 튕겼다. 마나 화살이 올라갔다. 퉁-. 묵직한 소리. 다시 튕겼다. 퉁-.
두께가 대충 짐작됐다.
'이건 되겠군.'
갈라하드는 작게 기침하며 손을 튕겼다.
이번에는 스파크였다.
마족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니면 신경 쓰지 않거나-.
'멍청한 놈.'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이유야, 알 거 없잖아요?"
"그래, 황제라-. 알았네."
"진짜요?"
마족의 눈이 커졌다. 갈라하드가 진짜 받을 줄 예상 못한 듯했다. 놈이 손가락을 치웠다.
"그런데 황제는 광적일 정도로 조심스러운 사내일세. 황실 기사단부터 시작해서 최신 마도구들까지-. 그 보안에 들어가는 예산이 정보국 전체보다 클 정도지."
"잘 아시네요. 황제를 죽이려고 했어요?"
"비슷한 일이 있었네. 아무튼,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세."
예리한 마족이었다. 갈라하드는 작게 기침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하, 그렇군요. 그래서 못 해요? 소문과 다르네요. 소문에서는 황제도 죽일 수 있다던데."
"소문이야 부풀려지기 마련이지. 다만, 정보국에 있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지 않나? 정보를 얻어낼 구석도, 지원도 없다는 이야기지."
"아, 지원-."
마족의 눈이 다시 위쪽을 향했다.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상상도 못 한 지원이 있을 거랍니다."
"내 상상력을 너무 우습게 보는군."
마족은 대답 대신 입꼬리만 올렸다.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모습이 꽤 기괴했다. 꾸민 듯한 얼굴이었다.
"정확히 알려줘야 내가 계획을 짤 수가 있네. 황제가 뉘집 개새끼인가?"
"뉘집-. 예?"
"지원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말해달라는 걸세. 참 주먹구구식이군."
놈의 눈동자가 다시 위로-. 이제 확신이었다.
그분과 손을 잡아야 하지만, 아직 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로 짤 생각이었다.
"이··· 일단, 인장부터 받으실래요?"
"인장?"
"예, 인장이요."
놈이 제 손바닥을 보여줬다. 거기에는 불로 지진 것 같은 흉터가 있었다. 큼지막한 눈이었다. 처음 보는 그림이었다.
"좋지."
고통의 알이 작게 떨었다.
'진정하게. 일단 뭔지 보기만 할 생각이니까.'
고통의 알이 더 격하게 흔들었다. 자기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듯했다. 심지어 심장까지 깨물었다.
'나를 조금만 더 믿어주게.'
고통의 알이 살짝 멈췄다.
그때, 마족이 가까이 다가왔다. 마족은 우습게도 인간처럼 입고 있었다. 평범한 시골 여인처럼 펑퍼짐한 옷이었다.
다만, 그 얼굴이 비현실적이었다.
보기 힘든 미인이었지만, 눈을 끔벅이지 않았기에 서늘한 기괴함이 느껴졌다.
"조금 아플 거예요."
여인이 손을 갈라하드의 이마에 가져다 대려고 했다.
"이마에 인장을 박으면 어떻게 돌아다니나?"
"그러면요?"
"가슴에 해주게."
갈라하드는 셔츠를 풀었다.
"흉터가 많네요?"
"나이테일세."
"······?"
"빨리 좀 하게."
갈라하드의 재촉에 마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장을 달라고 재촉하는 인간이라니-.
마족의 손이 가슴에 닿았다. 그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시체 같은 서늘함이 가득했다.
그때, 가슴에서 따가운 통증이 올라왔다. 칼에 가슴이 찍힌 것과 비슷한 통증이었다.
"다··· 당신······. 뭐야?!"
마족의 손이 위로 튕겼다. 손에 있는 인장이 붉었다. 마족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떠올랐다. 경악이었다.
"어째서-."
여인이 경악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두 개는 안 되는 건가."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그 내포된 뜻에 여인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됐네. 아무튼, 알았다고 전해주게. 긍정적으로 검토할 생각이지만, 조건이 영 부실하군. 지원도 두루뭉실하게 말하고-."
갈라하드의 가라앉은 눈에 여인이 입술을 씹었다.
"지금 네 상황을 모르나 본데-."
"입 좀 닫아 주겠나. 아직 내 말 안 끝났네. 아니, 전해주는 게 아니겠군."
갈라하드가 위쪽을 가리키며 손가락을 튕겼다.
여인은 눈을 찡그렸다. 지금 고작 저걸 쓰겠다고 여유를 부리는 건가?
"그분이라고 했나. 자의식이 상당하군. 아무튼, 다음에는 자세한 조건을 제시해주게. 자네도 알다시피 이미 하나가 있거든."
건방진-. 구겨졌던 여인의 얼굴이 펴졌다. 표정이 사라졌다. 마치 인형처럼.
"어떻게 알았지?"
"대답하기 어려울 때마다 눈동자를 올리는데, 어떻게 모르겠나? 그랬다면···. 아, 왔군."
여인이 이죽거리며 권능을 꺼내려고 할 때-.
옆의 벽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그 사이로 등장한 건-.
백색의 여신이었다.
마족의 목이 그대로 떠올랐다.
상급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가벼운 최후였다.
그만큼 아드리안나가 괴물이라는 거겠지.
갈라하드는 공중으로 떠오른 머리를 붙잡았다.
"다음에는 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오게나."
그리 속삭이자-.
여인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잔뜩 구겨진 아드리안나가 보였다. 그 얼굴에 떠오른 건 선명한 죄책감이었다.
아드리안나의 실수는 명백히 아니었다. 갈라하드의 인기가 많았을 뿐.
그때, 손을 내밀던 아드리안나가 뚝- 하고 멈췄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더욱 커졌다. 그 큰 눈망울이 진동했다.
그에 고개를 내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셔츠가 훤히 열려 있었다. 흉터가 빼꼭하게 새겨진 몸은 남에게 보여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쓰게 웃으며 셔츠를 여몄다.
"자네, 음흉한 면이 있군."
아드리안나의 눈이 한 번 더 커졌다.
36화 연초
아드리안나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이러다 닳겠군."
뭐라 벙끗거리려던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거칠게 숙였다.
"······그런 거 아닙니다."
아드리안나가 드물게 말을 더듬었다. 그 얼굴에 억울함이 가득했다.
"자네, 볼이 붉군."
"이건 급하게 달려와서-."
"이런 급했나?"
"······예?"
다시 동그래진 눈에 갈라하드는 작게 웃으며 손을 털었다. 재가 가득 휘날렸다.
'텄군. 맛있어 보였는데.'
상급 마족이라기에 그 피를 기대했건만, 아드리안나에게 그대로 재가 되었다.
갈라하드의 생각보다 더 거칠게 난입한 터라 말릴 순간도 없었다.
벽이 부서지는가 싶더니 마족의 머리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만약 저 검이 갈라하드를 향했다면, 막을 수 있었을까.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손에 남은 재를 마저 털었다.
얻은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정신계라-.'
정신계라서 그런 건지 '그분'이라는 놈은 마족 안에서 갈라하드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육체를 직접 움직였다. 말뿐이었지만.'
그 부분에서 갈라하드는 진한 흥미를 느꼈다.
그건 단순히 정신계라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었다. 마나도, 거리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위 마족은 군체를 형성한다는 아드리안나의 설명이 떠올랐다. 군체라서 가능한 건가?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상급 마족을 몇 더 잡아봐야 알 것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고개를 드니 길버튼이 있었다. 그 얼굴이 땀 범벅이었다. 길버튼의 뒤로 기사들이 들어왔다. 전부 꼴이 엉망이었다.
'놈에게 흥미가 생겼다.'
그분이라 부르는 놈. 단순히 마족의 왕에 관한 끈을 넘어서 그 능력이 궁금했다.
지금까지 본 마족들의 각 능력은 마법의 원류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마나를 그저 덩어리로 무식하게 휘두르는 것부터 정신계까지-. 그건 마법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놈이 마지막에 보여준 육체 장악은 갈라하드가 처음 보는 종류였다. 짙은 호기심이 올라왔다.
'다시 연락하겠지.'
놈은 이미 두 번이나 갈라하드에게 접촉했다. 마지막 놈의 반응을 보니 또 접근할 것이 분명했다.
좀 더 안달 나겠지. 그러라고 일부러 판을 엎은 거였다.
'황제라-.'
갈라하드는 하도 씹어서 단맛 없이 텁텁하기만 한 단어를 중얼거렸다.
"다치셨습니까?"
아드리안나의 물음에 상념이 깨졌다. 갈라하드의 구겨진 손에 시선이 닿아 있었다.
"조금 긁혔네."
그때, 마물의 울음이 지축을 흔들었다.
갈라하드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자욱하게 깔린 안개 너머로 괴상한 소리가 연신 들렸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손에 마나를 흘렸다. 뿌드득, 경쾌한 소리와 함께 손이 형체를 맞췄다.
회복한 건 아니었다. 뼈는 여전히 부러진 상태로 그저 형체만 맞춘 것이다. 회복하려면 며칠은 더 있어야 했다.
"이런 우리 인기가 제법 많은 것 같네. 서둘러야겠군."
"선두에 서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검을 크게 휘둘렀다.
벽이 단숨에 허물어졌다. 그 너머에서 끔찍한 비명이 작게 터졌다.
"혹시라도 아까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걸 방지해야 합니다."
"괜찮을 걸세."
"안 됩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강경했다. 표정이 조금 다채로워진 것 같군.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백색의 오러가 다시금 타올랐다. 전보다 더 거친 오러는 꼭 날개 같았다.
아드리안나는 알까. 갈라하드에게는 저 오러가 상급 마족보다 위험하다는 걸-.
갈라하드는 쓰게 웃으며 한 발짝 물러났다.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입니까."
아드리안나가 검을 고쳐 잡으며 물었다.
'대화라-. 제법 똑똑한 방법이군.'
전과 같은 상황을 대비하는 듯했다. 마족이 말하는 권능이든 마법이든 아드리안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에 아드리안나는 대화를 이어 나가며 목소리로 상태를 확인할 생각인 듯했다.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왼쪽 손을 휘저었다. 자신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싶은 걸까. 고통의 알이 힘차게 마나를 뿌려댔다. 마나가 거칠게 타올랐다.
바람이 거칠게 휘몰아치며 주변의 연기를 밀어냈다. 연기 밖에 있던 끔찍하게 생긴 마물들이 순간 멈칫거렸다.
벌써 많이도 모였군-. 이게 마경인가.
"적당히 익은 고기와 냄새나지 않는 치즈일세. 그대는?"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대답했다.
아드리안나의 검이 선을 길게 그었다. 달려들던 마물 둘이 동시에 재로 변했다.
"달콤한 음식을 좋아합니다."
아드리안나는 멈추지 않고 전진했다. 백색 오러가 날개처럼 연신 펄럭였다.
그때, 깔끔하게 생긴 사내가 웃으면서 다가왔다. 사내의 손짓에 아드리안나의 주변이 깊게 파였다. 아드리안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휘둘렀다.
마족이 재로 휘날렸다.
그 사이로 마물과 마족이 뛰쳐나왔다. 위협적인 모습이었지만-.
"술은 좀 하십니까?"
아드리안나는 차분히 말하며 검을 이어갔다. 다시금 재가 터졌다. 참으로 믿음직한 뒷모습이었다.
"안 마시네. 자네는?"
갈라하드의 왼손을 타고 바람이 거칠게 휘날렸다.
연기가 뒤로 밀려났다. 경계에 있던 마족이 입꼬리를 올렸다. 영악한 놈이었다.
"못 마십니다."
마족이 아드리안나의 검에 쓰러졌다.
아드리안나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갈라하드는 왼손을 흔들어줬다. 아드리안나가 다시 정면을 쳐다봤다.
"아카데미 생활은 어떠셨습니까?"
아드리안나의 숨이 살짝 거칠었다.
옆에서 마물이 튀어나왔다. 길버튼이 '기사- 길버튼!'이라 외치며 검을 휘둘렀다. 그 오러에 마물이 허물어졌다. 바로 옆에 있던 기사가 마물의 목을 쳤다.
"재미없었네. 공부만 했거든."
마물의 공격이 아드리안나의 갑주를 두드렸다. 아드리안나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아드리안나는 아무렇지 않게 검을 이어갔다. 마물 하나가 더 재로 변했다.
바람이 일었다. 연기가 뒤로 밀려났다.
"최연소로 수석 졸업했다고 들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호랑이처럼 생긴 거대한 마물이 입을 쩍- 벌렸다. 아드리안나는 멈추지 않고 전진했다. 마물이 당연하다는 듯 재로 흩어졌다.
"최연소로 들어갔으니 최연소로 졸업해야지. 그대도 젊은 나이에 소드 마스터 칭호를 얻었다고 들었네. 가장 아름다우면서 가장 강한 기사로 아주 유명하더군."
"가장 강한 기사는 아닙니다. 아직 겨루지 못한 이들이-."
"가장 아름답다는 건 부정하지 않는군."
아드리안나의 검이 살짝 멈췄다가 이어졌다. 갈라하드는 수통을 입에 털어 넣었다. 고통의 알이 열심히 마나를 뿜어냈다. 고통의 알의 존재감이 점점 더 커졌다.
"고양이를 좋아하나?"
"예, 귀엽지 않습니까?"
"건방지지 않나. 주인도 못 알아보고. 나는 개가 좋네."
마족의 목을 벤 길버튼이 작게 기침했다. 갈라하드가 눈을 찡그렸다.
"아까 그 흉·········."
"벗어났군."
주변의 연기가 옅었다. 더는 공격이 없었다.
예의 검게 썩은 대지였다.
"······예, 마경을 벗어났습니다."
아드리안나의 이마에 땀이 가득했다. 머리도 엉망이었다. 눈에 치진 기색이 보였다. 무리한 듯했다.
갈라하드는 주변을 살폈다. 마경의 경계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다만, 마경 자체가 깊은 곳에 있었던 탓에 대대까지 돌아가려면 한참이었다.
기사들은 전부 곧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길버튼이 그나마 상태가 좋았지만, 길버튼도 땀범벅이었다.
선두에 선 아드리안나가 오히려 제일 멀쩡했다.
쯧- 작게 혀를 찬 갈라하드는 다시 바람을 뿌렸다. 마법을 너무 많이 사용한 탓에 순간 머리가 핑- 하고 돌았다. 이를 악물고 버텼다.
먼지가 뒤로 밀려났다. 예의 쾌적한 마족의 영역이었다.
계속해서 뭐가 튀어나오는 마경에 있다가 오니, 마족의 영역이 왠지 정겹게 느껴졌다.
"숨 좀 돌리고 가지."
갈라하드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순순해졌다.
갈라하드는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다가 눈을 찡그렸다. 오른손이 박살 나서 왼쪽 주머니에 있는 연초를 꺼내기 힘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음, 안쪽 주머니에서 연초 좀 꺼내주겠나."
"······도전해보겠습니다."
"그렇게 결심한 눈빛을 할 정도의 일은 아닐세."
결심한 얼굴이 된 아드리안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아드리안나의 손이 다가오자, 고통의 알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심지어 뒤로 숨었다. 이 정도 포부로 뭘 하겠다고-.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아드리안나는 마족과 싸울 때보다 더 진지한 얼굴로 연초를 꺼냈다.
고작 주머니에서 연초 꺼내주는 것조차 저렇게 조심해야 하는 능력이라니-.
"고생이 많았겠군."
갈라하드의 입에 연초를 물려주던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굳었다. 아드리안나의 입술이 오므려졌다. 아드리안나가 급하게 시선을 피했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손가락을 털어 불을 붙였다.
레몬 향이 깊게 풍겼다.
눈을 잠시 떨던 아드리안나가 작게 숨을 뱉었다.
"레몬 좋아하십니까."
"혐오하네. 습관일 뿐이지."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다음부터는 양쪽에 넣어둬야겠군.'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
"도대체 어떤 인물입니까?"
수통을 홀짝이던 길버튼은 옆에서 들린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직속 부대의 로버트가 묘한 표정으로 갈라하드를 가리켰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의 입에 연초를 물려주고 있었다.
사내의 입에 연초를 물려주는 아드리안나라니-.
혹시라도 전해 들었다면, 거짓말하지 말라고 엉덩이를 차줬을 광경이었다.
다만, 그 상대가 갈라하드니 딱히 뭐라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다른 기사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어떤 인물이라-.'
출발하기 전에도 직속 부대 놈들이 했던 질문이었다. 똑같은 질문이었지만, 그 말투가 정반대였다.
길버튼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모르겠는데."
길버튼의 대답에 로버트가 인상을 구겼다. 자신이 생각해도 성의 없는 대답이었지만, 길버튼은 진심이었다.
알면 알수록 더 알 수 없는 사내였다. 처음 봤을 때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어려웠다.
길버튼은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오른손이 너덜너덜한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하고 있었다. 보통 정신력이 아니었다.
"다시 깜깜하게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까마득하군."
"내일도 같이 가시겠지. 아드리안나님의 약혼자인데."
"크흠, 그렇겠지?"
옆에서 들리는 대화에 길버튼은 작게 웃었다.
온건한 이들로 꾸렸어도 직속 부대 기사들이었다. 갈라하드에 대한 반감은 당연했다. 그저 마르디안에 비하면 온건할 뿐이었다.
그저 단 한 번 같이 나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인식을 바꿔버렸다.
갈라하드가 짐이 될까 걱정했던 이들이 이제 갈라하드가 같이 가지 않을 때를 걱정하고 있었다.
"1대대도 마법사를 고용해야 하자고 건의드려야겠군."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길버튼은 피식 웃었다.
'이래서 매번 자기가 뛰어나다고 말했던 거군.'
왜 갈라하드가 말버릇처럼 '자기가 뛰어난 것이지, 다른 마법사는 절대 이렇게 못 한다.'라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흠, 멍청한 놈들.'
어떤 마법사를 데려와도 갈라하드처럼 할 수 없을 것이다. 길버튼은 조소를 머금었다.
"길버튼 경, 지금 상당히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네."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왔네. 슬슬 돌아가지."
크흠-. 길버튼은 작게 기침하면서 끄덕였다.
"선두에 서겠습니다."
늘 그렇듯 아드리안나가 앞장섰다.
****
1대대 정문 주변에 날카로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그러니까 제국놈 빼고 가야 한다고 했잖아! 그 새끼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해!"
마족의 영역으로 향한 아드리안나의 귀환이 늦어지자, 마르디안이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제국놈이자 마법사인 놈을 끼는 게 아니었다.
전장에서 멍청한 아군 하나가 얼마나 치명적인데, 심지어 마족의 영역으로 향했다니-.
"문 열어라! 당장 출발하겠다!"
마르디안이 호통쳤다. 비키지 않으면 당장 엎을 것처럼 기세가 흉흉했다.
마르디안의 성미를 아는 다른 기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불가하오."
문지기 기사 에르달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족의 영역은 해가 뜰 때와 해가 저물 때만 열린다. 그게 규칙이오."
에르달의 목소리에는 작은 여지조차 없었다. 마르디안이 제 꼬챙이를 꺼냈다.
별명이 '미친' 마르디안이었다. 마르디안에 대한 소문을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그런 마르디안이 무기를 빼 들었는데도 에르달은 담담했다.
"너 책임질 수 있어?"
마르디안이 꼬챙이를 들이대며 물었다. 다른 기사들의 분위기도 비슷했다.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살짝이라도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아드리안나가 관련된 일이라면 눈이 도는 직속 부대였다.
해가 끄트머리에 걸렸는데, 아직도 아드리안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문 주변의 기사들이 한 발짝씩 물러섰다. 그 상대가 직속 부대기 때문이었다.
괜히 여기서 뻗대다가는 목이 날아갈 수 있었다.
다만, 에르달은 문지기 기사였다.
"문지기가 문을 지키는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면 지겠소."
"이게-."
"잠깐만 내가 이야기해볼게."
루나비른이 앞으로 나섰다. 마르디안이 눈에 힘을 주며 한 발짝 물러섰다.
"아드리안나님의 귀환이 늦어지고 있어요. 아드리안나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실 텐데요. 문 좀 열어주실래요?"
"불가하오."
에르달은 문지기에 걸맞은 사내였다. 우직하고 또 우둔했다. 모든 기사가 에르달을 보며 이를 간다고 문을 열어주면, 그건 문지기가 아니었다.
"아, 저도 있습니다. 부대장입니다."
그때, 기사들 사이로 금발 머리의 사내가 나왔다.
정직하게 생긴 미남이었다. 1대대 부대장 필릭스였다. 원래 필릭스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마르디안이었지만, 지금은 필릭스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문을 열 권한은 대공 전하와 아드리안나 대장에게만 있소."
"대장의 부재 시에는 부대장이 권한을 받습니다만."
"문에 대한 권한은 예외라오."
에르달의 막힘 없는 대답에 필릭스가 미간을 구겼다.
당장 문제가 터질듯한 분위기였다.
모두가 에르달에게 멍청하다며 분노를 표했지만, 에르달은 개의치 않았다.
문지기는 문을 지킬 뿐이었다.
그때-.
뿌우우우우우-!
뿔피리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아드리안나가 돌아왔다는 신호였다.
"열어!"
에르달은 주저 없이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이 채찍질을 시작했다. 쇠창살이 거칠게 올라갔다.
"당신, 상당히 건방지네요."
필릭스가 나지막하게 이죽거렸다. 에르달은 신경 쓰지 않았다.
쇠창살이 연달아 올라가고 두꺼운 문이 보였다.
에르달이 그 이음새에 두꺼운 열쇠를 넣고 돌렸다. 문이 덜컹거리자 다른 병사들이 잡고 당겼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그 사이로 연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에르달의 두꺼운 눈썹이 깊어졌다.
그때, 문 사이로 아드리안나가 보였다. 그런데 그 행색이 엉망이었다.
늘 곱게 뻗어있던 긴 머리는 잔뜩 엉켜 있었고, 갑옷에는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가득했다. 평소와 달리 엉망인 모습이었다.
"아드리안나님!"
에르달은 수신호를 보냈다.
둥둥!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병사와 기사들이 경례를 올렸다.
그때-.
"이거 환영식이 거하군."
조곤조곤하지만 귀에 쏙 박히는 목소리였다.
제국에서 온 마법사, 아드리안나의 약혼자,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라는 사내였다.
갈라하드의 행색은 아드리안나보다 더 엉망이었다.
먼지투성이에 여기저기 찢긴 옷, 너덜거리는 손까지-. 밖에서 잔뜩 구르고 온 몰골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에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제국놈! 너 때문이겠지!!"
눈이 뒤집힌 마르디안이 거칠게 달려들었다. 그 뒤의 기사들도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냈다.
그때-.
"멈추시오. 마르디안."
같이 나갔던 직속 부대 기사들이 마르디안을 막았다. 사내를 지키는 모양새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직속 부대가 막아서다니-. 마르디안의 얼굴에 당황이 떠올랐다.
기사들은 대답 대신 검을 고쳐 잡았다. 당장 전투도 불사할 기세였다.
"마르디안."
아드리안나가 가만히 마르디안을 불렀다.
아드리안나의 싸늘한 목소리에 마르디안은 그대로 굳었다.
"이번이 마지막 경고입니다."
마르디안은 제 귀를 의심했다.
마지막 경고라니-.
그게 무슨···.
마르디안의 눈이 거칠게 떨렸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사내가 마르디안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음, 아드리안나."
감히 아드리안나를 건방지게 부르는 모습에 화를 내고 싶었지만, 마지막 경고가 마르디안을 묶었다.
사내의 부름에 아드리안나가 사내의 코트로 손을 조심스럽게 넣었다.
이어서 아드리안나가 연초를 사내의 입에 물려줄 때는 화내는 것도 잊고 멍하니 쳐다봤다.
1대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저런 짓을 하다니-.
너무도 아득하여 경악도 못 했다.
그 무거운 정적 속에서-.
"이제야 조용하군."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연초에 불을 붙였다.
****
적막함이 무겁게 내려앉은 어두운 신전.
지긋한 노인이 가만히 앉아서 아래를 내려봤다.
그 아래에는 검은 후드를 눌러쓴 이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수가 얼마나 많은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실로 신전에 걸맞은 위용이었다.
노인이 무거운 입을 천천히 열었다. 주름진 입술 사이로 비명과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북부의 물을 흐리는 놈이 있다."
대답은 없었다. 다들 고개를 더 깊이 숙일 뿐이었다.
노인의 위치는 그 정도로 지고했다.
"갈라하드라는 놈이다. 처리하도록."
노인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모두가 길게 읍- 하며 납작 엎드렸다.
그때-.
"딸꾹!"
구석에 있던 놈이 몸을 크게 떨었다.
까마귀 가면을 쓴 놈이었다.
37화 엄마
"즐거운 데이트였네."
"······데이트 아닙니다."
단호하게 대답한 아드리안나가 뒤로 돌았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흰 코트가 거칠게 휘날렸다.
"마경에서 이상 현상이 발견됐습니다. 회의를 열겠습니다."
짧게 명령을 내린 아드리안나가 자리를 떠났다. 갈라하드에게 뜨거운 눈빛을 보내던 1대대 놈들이 황급히 아드리안나에게 따라붙었다.
아닌 척해도 제법 세심한 여인이었다.
"도대체 왜 자꾸 도발하는 겁니까?"
길버튼이 질겁한 얼굴로 물었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면서 대답했다.
"내가 언제 도발했나."
"거기서 아드리안나님에게 연초를 꺼내게 하다니-."
"아, 그건 도발이 아닐세. 관계 정립이지."
"······예?"
"그리고 손이 이 상태라서 어쩔 수 없었네. 자네가 꺼내줄 건가?"
"싫습니다."
"동감일세. 상상만 해도 연초 맛이 뚝 떨어지는군."
그때, 같이 나갔던 기사들이 다가왔다. 나갈 때는 그렇게 째려보던 놈들이 세상 순한 눈이었다.
"죄송합니다."
놈들이 대뜸 고개를 숙였다. 뜬금없는 사과였다.
"뭐가 말인가."
"마법사라고 짐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이쪽이 짐이었는데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놈들이 다시금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애초에 갈라하드는 놈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놈들처럼 대놓고 시비를 건 것도 아니었다.
어물쩍 넘어가도 충분한 일인데, 기사들이 고개까지 숙여 사과한다니-.
수도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여기는 아직 기사가 남았나.'
갈라하드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죄할 정도는 아니었네. 실제로 제국에서 온 마법사가 마족의 영역에서 짐이 되지 않을 확률은 극히 저조하니까 말이야."
"······예?"
"내가 뛰어난 마법사였을 뿐일세."
기사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뜨거운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질색하는 기색이 있었다.
"···그냥 대충 좀 받으십쇼."
"내가 함부로 받았다가 괜히 멀쩡한 마법사가 억울한 일에 처할 수도 있네. 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네. 다른 마법사를 데려다 놓으면 마법을 쓸 수조차 없을 것일세."
갈라하드는 정확한 사실을 지적했다. 혹시 모를 피해를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아, 예. 그···. 예. 천재적인 마법사시라-. 예,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만족한 갈라하드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마침 잘 됐군, 고생했으니 배에 기름칠도 해야지. 특무대 회식을 할 생각인데, 자네들도 오게. 길버튼 경이 사는 걸세."
길버튼이 얼굴을 가득 찡그렸다. 다만, 길버튼은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회의 끝나고 시간이 된다면 가겠습니다."
"아드리안나에게도 전해주게."
"예."
기사들이 멀어졌다. 그들은 먼저 가던 다른 이들과 섞이지 않고 따로 떨어져서 사라졌다.
"아드리안나님은 안 오실 겁니다."
"그거야 모르지."
갈라하드는 바쁜 걸음을 옮겼다. 길버튼이 따라붙었다.
갈라하드의 머릿속은 발만큼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고통의 알-.'
현재 가장 의문인 건 고통의 알이었다. 마족의 피를 제법 먹인 뒤부터 놈에게 자아가 생긴 느낌이었다.
그래 봤자 아드리안나를 보며 의지를 불태우거나, 가까이 온 아드리안나를 두려워하는 정도였지만-.
'제마전쟁의 잔재라고 그랬지. 고위 마족의 알이라고.'
코르튼의 말을 떠올렸다. 여명 쪽에서 흘러나온 물건이었다. 놈들은 맹세의 도구 정도로 쓰고 있었다.
실제로 아드리안나를 본 순간 정신이 흔들릴 정도의 압박을 줬었다.
그런데 마족의 피를 먹이면서 고통의 알이 바뀌었다.
마족의 피에서 농도 짙은 마나만 뽑아서 주는 고통의 알은 현재 갈라하드에게 아주 중요했다.
다만 몸, 그것도 심장 바로 옆에 심어둔 터라 정체를 확실히 해둘 필요성이 있었다.
'자네, 정체가 뭔가.'
고통의 알은 잠잠했다. 아드리안나가 주변에 없으면 그렇다 할 반응은 안 보이는 듯했다.
그때쯤 대원들을 맡긴 술집에 도착했다.
술집에는 톰밖에 없었다. 톰은 술집 중앙에 위치한 높은 의자에 앉아서 기타처럼 생긴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 솜씨가 제법이었다.
"아, 오셨습니까."
"연주 실력이 상당하군."
"마침 술집에 있길래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다른 이들은?"
"데미안은 뒤에서 뛰어다니는 중이고, 그웬은 1대대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톰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길버튼이 뒷문으로 향했다. 아닌 척해도 그 눈에 묘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데미안과 경쟁하다니-.'
어쩔 수 없는 기사였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자리에 앉았다.
"식사하셨습니까?"
"아직 안 했네. 출출하군."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톰이 일어나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가 옮겨준 연초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레몬 향이 깊게 풍겼다.
잠시 뒤에 화려한 음식이 줄줄이 나왔다. 중부에서 고급 요리만 먹었던 갈라하드에게도 맛있었다.
톰은 높은 의자에 앉아서 다시 악기를 치기 시작했다.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데미안과 길버튼이 돌아온 건 시간이 제법 지난 뒤였다.
'늦었군.'
갈라하드가 예상한 시간보다 더 길었다.
둘 중 하나였다.
길버튼이 대련을 더 길게 가져가려 봐줬거나, 데미안의 실력이 늘었거나.
구겨진 길버튼의 얼굴을 보니 후자인 듯했다.
데미안은 냅다 음식으로 달려들었다. 접시에 바로 얼굴을 박으면서 쾅! 소리가 났다. 길버튼이 다급하게 음식 하나를 챙겼다.
"그런데 주인은 어디 가고 왜 톰이 요리합니까?"
"아, 헤트릭 씨가 오늘 몸이 좀 안 좋으셔서 제가 대신하는 중입니다."
"······헤트릭은 의심이 많아서 아무나 안 쓸 텐데?"
톰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악기를 튕겼다. 퉁! 제법 듣기 좋은 소리였다.
미심쩍게 고개를 끄덕인 길버튼이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데미안, 이 녀석 실력이 늘었습니다."
"그런가? 데미안, 열심히 했군. 장하네."
"네."
데미안의 가벼운 대답에 길버튼이 눈을 찡그렸다.
"먹고 뛰어다니는 게 전부인데, 왜 강해지는 건지 정말 의문입니다. 말이 되나?"
길버튼이 복잡미묘한 눈으로 데미안을 응시했다. 데미안은 신경 쓰지 않고 식사 중이었다. 언제나처럼 게걸스러웠다.
"원래 맹수는 잘 먹이고 재우면 강해지네. 그리고 자네가 상대해주고 있잖나."
"아무리 그래도···."
작게 중얼거리던 길버튼이 떨떠름하게 끄덕였다.
뒤늦게 그웬이 돌아왔다. 밖에서 뭘 하다 왔는지 얼굴이 새까맸다.
"돌아오셨네요! 고생하셨어요!"
"얼굴만 보면, 자네가 더 고생한 것 같군. 뭐 하고 다니는 건가?"
"폭발화구 연습할 겸 여기 분들을 도와드리고 왔어요."
그웬의 얼굴에 뿌듯함이 떠올랐다. 톰이 천으로 그웬의 얼굴을 닦아줬다.
"킁하세요."
"킁!"
그웬이 예의 뽀송뽀송한 얼굴로 돌아왔다.
"폭발화구는 좀 익숙해졌나?"
"네! 이제 좀 익었어요. 폭발화구."
주문을 외우니 그웬의 손에 큼지막한 불덩어리가 떠올랐다. 그 크기가 상당했다. 마나통이 무식하게 큰 탓인 듯했다.
"완벽하군."
"아아! 감사해요!"
"내 마법을 보고 따라 한 것이니 완벽할 수밖에 없겠군."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라하드의 마법을 보고 따라 했으니, 완벽할 수밖에 없었다.
감사를 표하던 그웬이 입을 씰룩였다.
그때, 그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시선이 갈라하드의 왼쪽 가슴에 꽂혀 있었다.
"·········예?! 못 들었어요. 뭐라고요?"
그웬이 대뜸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네."
"아니, 방금 무슨 말을······. 지금! 말했잖아요!"
그웬이 가리키는 방향에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웬은 정확히 갈라하드의 왼쪽 가슴을 가리키고 있었다.
고통의 알이 있는 곳이었다.
"무슨 말을 했지?"
"어···."
"어?"
"어어······."
"어?"
그웬이 눈을 찡그렸다.
"뭐라 그랬나?"
갈라하드는 다급히 재촉했다. 그웬의 눈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듯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젓고 그웬을 쳐다봤다.
"다른 건 무시하고 자네를 믿게. 집중하게나. 아직도 들리나?"
"···네?! 그-."
"솔직하게 말하게. 거짓은 입을 무겁게 만드니까."
갈라하드는 테이블을 짚고 상체를 숙였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갈라하드에 그웬은 깜짝 놀랐다.
"무슨 일···."
"길버튼 경, 입 좀 닫아주게. 자, 그웬. 아직도 목소리가 들리는가?"
갈라하드의 가라앉은 눈-. 검은색 눈동자인데, 옅은 푸른색이 보였다.
그를 마주 보고 있으니 그웬은 목을 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끄덕였다.
어······ 어마···.
그웬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저보고 엄마라는데요? 나 엄마 아니야!"
"엄마?"
갈라하드는 다급히 셔츠의 윗부분을 풀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끔찍한 흉터에 그웬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불을 지진 곳에 뭔가를 긁은 듯한 끔찍한 흉터였다. 깔끔한 갈라하드의 외모와 전혀 안 어울리는 흉터였다.
얼마나 아팠을까. 그웬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웬, 눈물은 이따 흘리고. 자, 집중하게. 지금도 들리나?"
어눌한 목소리가 더 커졌다. 목소리가 머리를 뒤흔들었다.
충동이 순간 강해졌다. 그웬의 동공이 풀렸다.
그웬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음-."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고통의 알이 거칠게 뛰었다.
아드리안나를 봤을 때보다 더 거칠었다. 그웬이 들뜬 탄성을 내뱉었다. 그 풀어지는 동공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그웬, 집중하게. 끌려가지 말고."
"···네? 네!"
"놈이 뭐라고 하지?"
그웬이 고개를 푹- 숙였다.
"엄마가 되어 달라고-. 나 엄마 아니야!"
그웬이 갈라하드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그 눈에 억울함이 가득했다.
"받게."
"···네?! 저는 결혼도 안 했는데요!"
"어차피 고아들을 키우지 않나. 따지고 보면 얘도 고아일세. 자네한테 위험한 일은 아닐 것이야. 정 위험하면 해치울 방법도 있으니-."
고통의 알이 거칠게 진동했다. 그웬의 얼굴에 연민이 스쳤다. 이내 그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의 알이 크게 꿀렁였다. 고통의 알에서 뭔가 그웬에게 움직였다. 마나는 아니었다. 정체 모를 무언가였다.
갈라하드는 짙은 흥미를 느꼈다.
그웬이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저기 대장-."
"길버튼 경, 잠깐만 조용히 해주게."
뿌드득. 경쾌한 소리와 함께 그웬의 오른쪽 팔이 아주 살짝 두꺼워졌다. 근육이 팽창한 것처럼 굵어졌다가 금세 사라졌다.
아주 찰나였지만, 정면에 있던 갈라하드는 놓치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제 눈을 의심했다.
방금 그웬이 한 건-.
'마족의 것이다.'
그때, 팔호를 만났을 때 동굴에서 봤던 마족이 보였던 것과 흡사했다.
마나의 원류에 가까운 걸로 육체를 강화하는 능력이었다. 마족이 권능이라 부르는 그것을 펼쳤다.
고통의 알이 뜀박질을 멈췄다. 그웬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숨이 상당히 뜨거웠다.
'마법을 따라 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마족의 것이 마법의 원류라?'
갈라하드의 머릿속이 다시금 복잡해졌다. 그웬에게 비밀이 있는 건가? 아니면 여자 마법사라면 되는 건가?
"대장."
길버튼이 다시금 갈라하드를 불렀다.
그에 고개를 돌리자-.
"······아, 대공 전하의 편지를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서 있었다. 예의 무표정이었다. 그 뒤에 있는 기사들이 질겁한 표정을 지었다.
갈라하드는 그제야 상황을 살폈다.
그웬이 갈라하드의 가슴에 손을 넣은 상태였다. 심지어 입에서 침까지 질질 흘렸다.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렇군. 그웬, 손 좀 빼주겠나?"
"네? 아아앗! 네!"
그웬이 요란하게 손을 뺐다. 갈라하드는 셔츠를 여몄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 바로 앞에 봉투를 내밀었다. 코에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거리감이 이상하군-.
"고맙네."
"······."
갈라하드는 주저 없이 봉투를 뜯었다.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는 대대를 돌며, 전선에 있는 구멍을 책임지고 확인하도록.]
짤막한 문장이었다. 주먹으로 쓴 것처럼 굵은 필체는 볼 것도 없이 대공의 것이었다.
'책임지라니-.'
네놈이 꺼낸 이야기를 책임지라는 뜻이었다. 덩치에 걸맞지 않은 쪼잔한 부분이 있었다.
다만-.
'좋군. 상인가?'
편지 아래에 찍힌 대공의 인장은 꽤 좋은 상이었다.
'책임지고 대대의 구멍을 살펴라-.'
투박한 문장이지만, 대공이 갈라하드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다. 갈라하드가 다른 대대에 간섭할 권한을 준 거였다.
그렇다고 대대의 대장들이 넙죽 열어줄 리는 없었지만, 갈라하드에게 딱 필요한 명분이었다.
여명이란 놈을 찾아낼 기회였다.
"좋군."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편지를 챙겼다.
"대공 전하가 모든 대대에 전선을 다시 확인하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마경에서도 이상 증후가 발견되었으니-. 1대대는 당분간 문을 잠그고 내부를 점검할 생각입니다."
아드리안나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네. 나는 다음 데이트를 기대하면서, 내부로 들어온 벌레들을 잡겠네."
"······데이트 아닙니다."
아드리안나가 눈썹에 힘을 줬다. 한 번을 넘어가지 않는 아드리안나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농담을 던졌다.
"왜 그렇게 반응하나. 설마 첫 데이트였나?"
아드리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썹이 그대로 굳었다.
정적이 잠시 이어졌다.
갈라하드는 작게 기침했다.
"음······, 다시 생각해보니 데이트가 아니었네. 그래, 그게 어떻게 데이트인가."
아드리안나의 눈썹 끝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바빴습니다. 전선을 막아야 하니까요."
"알겠네."
"잠깐만 방심해도 마족이 넘어오니까. 그리고 저는 1대대 대장입니다. 북부의 첫 번째 방패-."
"알았다니까."
아드리안나는 계속해서 주장했다.
****
"간부가 직접 왔다더군."
"간부가 움직였다고? 놈이 그렇게 대단한가?"
시끄러운 대화에 노인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물비린내와 오물 냄새가 뒤섞인 감옥, 쇠창살 너머로 흐릿한 불빛이 보였다.
'우라지게 시끄러운 놈들.'
노인은 투덜거렸다. 흑마법 어쩌고라는 마법사 놈들인데, 입을 잠시도 쉬지 않았다.
노인은 퉤- 하고 침을 뱉었다. 가래와 피가 섞여 진득한 침이었다. 잘그락, 노인의 팔에 묶인 수갑이 소리를 냈다.
"사업장도 그렇고, 여명이 관계되어 있으니까-."
"그렇군."
그때-.
"엇! 오셨습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편히 대화하십쇼!"
놈들이 다급하게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 드십니까?"
묘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인 같기도, 소년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노인이 반응이 없자, 놈이 쇠창살을 통통 두드렸다.
쇠창살 건너편에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횃불이 뒤에 있어서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7대대 대장··· 아니지, 대장이었던 벨로그라임 맞습니까?"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늙으면 이게 문제였다 자꾸 깜박깜박했다.
"맞군요. 몇 가지 좀 물어보겠습니다. 들어올 만한 비밀통로가 있는지, 아니면 ······."
놈은 계속해서 조잘거렸다. 노인도 딱히 말 상대가 없었기에 대답해줬다.
그때,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아, 마지막으로 여기서 구해주면 줄 만한 게 있는지?"
놈의 괴상한 질문에 노인은 끌끌 웃었다.
"구하다니-. 밖에 있는 놈들이 몇인 줄 알고 하는 말이냐?"
"예, 그쪽보다 잘 알 걸요. 바쁘니까 빨리 대답해주시죠."
놈의 당돌한 재촉에 노인은 끌끌 웃었다.
"그래, 구해준다면 발이라도 핥아주지."
"아으··· 그건 좀 징그러운데요. 아, 제가 구할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구해진다면, 다른 대장의 수하도 될 수 있다?"
시답잖은 이야기였군. 노인은 가벼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중에 말 바꾸시면 안 됩니다? 아주 무서워요. 그 사람."
"그런데 네놈 여자냐? 남자냐?"
"그건 기밀입니다."
그때, 발소리가 옆까지 다가왔다.
가까워진 횃불이 놈의 모습을 보였다.
'까마귀 가면이었군.'
노인은 작게 혀를 찼다.
"쉿-."
검지를 입에 댄 까마귀가 사라졌다.
38화 새로운 막내
'으으으음·········.'
까마귀는 제 앞에 놓인 양피지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석장으로 인한 사업과 여명에서 알려준 정보들 덕분에 흑마법학회는 전에 없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예전에 있던 아픈 기억 때문인지, 흑마법학회는 이번 공격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상대가 고작 다섯 명인 부대인데도 전혀 방심하지 않았다.
'으으으음········· 이건 아무리 놈이라도······. 으음··· 하지만 그놈인데? 으으음······.'
까마귀는 당연히 갈라하드의 죽음을 바랬다.
이미 놈에게 목줄이 잡힌 까마귀였다. 이 목줄은 까마귀가 죽거나 놈이 죽거나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풀릴 것이다.
북부에서 전성기를 맞이한 흑마법학회와 그에 넘어간 7대대-. 그것과 비교하면 다섯 명인 특무대는 너무 초라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전자에 거는 게 맞았다.
다만···.
'갈라하드인데?'
놈의 존재가 까마귀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흑마법학회에 걸었는데, 만약 놈이 살아남는다면-.
'으으으으·········.'
까마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차라리 죽지 또다시 '회유'를 당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 죽기는 싫었다. 그러면······.
"준비가 끝났다는군."
"준비?"
그때, 옆에서 대화가 들렸다. 까마귀와 같이 파견된 간부들이었다.
"성역이 설치된다."
"······성역!"
성역-. 까마귀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성역은 마족의 영역, 그중에서도 특수한 공간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성역이 여기 설치된다니-.
"놈이 아무리 대단해도 성역에서는 마법을 쓸 수 없겠지. 거기에 상급 마족까지 있으니 실패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후후후···. 놈을 죽임으로 본격적인 시작을 알릴 셈이군."
둘의 음흉한 웃음에 까마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우리도 마법을 못 쓰잖아?"
까마귀의 물음에 덩치가 큰 놈이 광소를 터뜨렸다. 까마귀는 슬쩍 귀를 막았다.
"너는 아직 선택을 안 받았나 보군."
"선택?"
놈이 이죽거리며 소매를 걷었다. 그곳에 마법진 같은 게 새겨져 있었다.
몸에 마법진을 새기다니-. 까마귀는 문득 오랜 전설을 떠올렸다.
"설마···."
"그래, 인간 최초의 마법사-. 그의 것이지."
옆에 있던 놈이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까마귀도 흥분했다.
최초의 마법사라니-. 그 마법진이라면 성역에서도 마법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이거라면 확실히······.
그렇게 중얼거리던 까마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놈이 성역에서 마법을 쓴다면? 오히려 놈을 도와주는 꼴이 되지 않나? 마나 농도만 올려주는 셈인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놈이 아무리 대단해도 성역에서 마법을 쓰겠는가!
지가 최초의 마법사도 아니고-.
그때, 불현듯 마족을 불태우며 환하게 웃던 놈이 떠올랐다.
저 마법진을 보고 선물 받은 것처럼 웃는 놈이 상상됐다.
'······일단 보고는 올릴까? 다는 말고 적당하게-.'
까마귀는 과거의 전설보다 현재의 갈라하드가 더 무서웠다.
****
'고통의 알과 의사소통이 된다-.'
갈라하드는 어딘지 찔린 얼굴의 그웬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고통의 알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큰 단서였다.
문제는-.
"그래, 엄마다. 내가 네 엄마야."
하는 말이 엄마가 전부였다는 거였다.
"정체가 뭐냐고 전해주게."
"모른대요! 얘 아기 같은데요?"
그웬의 중얼거림에 갈라하드는 헛웃음을 흘렸다.
고위 마족의 것인데, 아기라니-. 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인가.
"조금 전에 그웬한테 준 건 뭐였지?"
정체 모를 뭔가를 먹자 그웬이 갑자기 마족의 권능을 사용했다.
"그······ 밥? 밥이래요."
도통 알아듣기 어려운 대답이었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밥이래요. 밥."
"알겠네. 그래, 밥을 줬군. 그렇다면 내게 주는 마나는 뭔가."
"······."
고통이 알이 작게 진동했다. 그웬이 대답하지 않고 눈을 뒤룩- 굴렸다.
"말하게."
"그··· 제가 하는 말이 아니에요. 얘가 하는 거예요."
"알았으니, 빨리 말하게나."
"똥이래요."
갈라하드의 미간이 그대로 구겨졌다. 고통의 알이 쿵쿵- 진동했다. 웃는 듯한 느낌이었다.
"근데 아마 의미가 다를 거예요! 얘는 아직 아기라서 잘 모르니까!"
"됐네, 위로하지 말게. 마법은 마족의 오물이라는 건 유명한 이야기니까."
쿵쿵, 고통의 알이 다시금 진동했다. 그웬이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웃음을 참는 모습이었다.
갈라하드는 사고를 이어갔다.
'마족의 피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놈이 밥이라 부르는 부분이고 다른 쪽은 마나다.'
그중 밥이라 부르는 걸 이용하면 마족이 말하는 권능을 쓸 수 있다-.
"밥이라는 걸 나한테도 넘겨보게나."
갈라하드는 가슴을 꾹 누르며 말했다.
"그··· 어차피 못 쓸 거래요."
"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일세."
"얘가 싫다는데-."
"이런 갑자기 아드리안나가 보고 싶군."
"응? 갑자기? 알았대요!"
꾸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심장 부근에서 뭔가 새어 나왔다. 그건-.
끔찍한 고통이었다.
갈라하드는 심장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헐떡였다.
마족의 피를 마셨을 때, 올라왔던 고통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 사이로 전보다 고농도의 마나가 느껴졌다.
갈라하드는 숨을 애써 다스리며 호흡했다.
"그웬은 왜 멀쩡했지?"
"멍청해서래요."
'멍청해서라-.'
그 문장을 짧게 중얼거렸다. 멍청하다는 건, 동시에 순수하다는 뜻이었다.
뭔가를 받아들이는데 저항감이 없다는 것이고-.
'내가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오히려 역효과라는 건가.'
그럴듯한 말이었다.
'재밌는 추론이군.'
다만, 멍청하고 성급한 일반화였다.
갈라하드라고 처음부터 지식이 쌓여 있던 건 아니었다.
마법을 혐오하는 가문이라 마법을 누구한테 배울 수 없었다. 그에 어쩔 수 없이 머리를 박으면서 배웠던 갈라하드였다. 수식이 빠른 게 그 증거였다.
머리 박기는 갈라하드의 전문이었다.
'일단 감으로 해보고, 계산은 나중에 하는 걸로 해야겠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갈라하드는 애써 끄덕였다.
"다시 내놓으라고 전해주게."
"···위험하다는데요?"
"이런 아드리안나에게 가야겠군."
잠시 주저하던 고통의 알이 뭔가를 쏟아냈다.
갈라하드는 정체를 파악하려고 하지 않았다. 마나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냥 감각이 이끄는 그대로 움직였다.
"이런 느낌이군."
갈라하드의 오른팔이 터질 것처럼 두꺼워졌다.
고통의 알이 작게 진동했다.
"지··· 지독한 인간이라고···."
"말조심하라고 전해주게."
갈라하드는 손을 털었다.
고통의 알이 경악한 것과 달리 갈라하드는 탐탁지 않았다.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힘이라니-.
오히려 불쾌했다.
끔찍한 통증이 뒤늦게 올라왔다. 힘을 의식한 탓이었다. 참으로 찝찝한 힘이었다.
'이러다 마족 흉내를 내겠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고 혀를 찼다.
'아무래도 더 키워야겠어.'
마족의 피를 먹이고 나서부터 말을 시작했으니, 마족의 피를 더 먹일 필요가 있었다. 갈라하드는 수통을 매만졌다.
이번에 나가서 마족의 피를 꽤 많이 모아왔다. 옆에 있는 보따리에 수통이 여덟 개나 더 있었다.
다만, 질 낮은 마족의 피로는 성장이 안 되는 느낌이었다.
'적어도 상급 마족은 잡아야 할 것 같은데.'
"맞대요!"
그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나가 1대대의 문을 잠그고 그 내실을 다진다고 했으니, 당장 마경으로 갈 수가 없었다.
'어디서 상급 마족 하나 안 떨어지나-.'
툭.
그때 누군가 지나가면서 양피지를 떨어뜨렸다. 사내는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가서 주문했다. 톰이 받았다.
갈라하드는 양피지를 매만졌다. 양피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마나를 돌리자 글자가 떠올랐다.
- 흑마법학회가 담당자님을 노리는 중. 흑마법학회의 사업을 막았다는 이유. 7대대 대장이 흑마법학회에 잡혀 있음. 7대대가 넘어간 상태. 상급 마족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음.
간략한 보고였지만, 그 내용이 범상치 않았다.
그중 갈라하드의 시선을 잡아끈 건 상급 마족 부분이었다.
'상급 마족이라-.'
갈라하드는 마경에서 만났던 놈을 떠올렸다.
아드리안나에게 일 검에 죽었지만,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더불어 7대대도 넘어갔다니 확실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좋군.'
본디 어려 울수록 보상이 큰 법이었다.
'흑마법학회라. 마석도 주고 상급 마족도 주고-.'
참 아낌없이 주는 놈들이군.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양피지를 챙겼다.
"대장."
길버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표정이 뭔가 진지했다. 그 뒤에 처음 보는 병사가 있었다. 가벼운 갑옷에 가죽 장화를 신은 병사였다.
1대대의 병사들에 비해 예리함이 다소 부족했다. 여기 놈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7대대군."
"······어떻게 알았습니까?"
길버튼의 눈이 동그래졌다. 요즘 반응이 조금 줄고 있어서 아쉬웠는데, 이번 반응은 뚜렷했다.
'함정이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정직하게 초대장을 보낼 줄이야.
"7대대로 와서 구멍이 있는지 봐달라는 이야기인가?"
"······예언자입니까?"
"아니, 마법사네."
갈라하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코트를 여몄다.
"잠시만 실례하겠네."
"예?"
갈라하드는 병사의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마나를 흘려 넣었다. 병사의 동공이 순간 풀렸다. 정신계 마족에게 배운 마법이었다.
"누가 보냈나?"
"글라이록 경이-."
"글라이록 경이 누구지?"
"아, 7대대의 중대장입니다."
길버튼이 대답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끄덕이며 다시금 질문을 이어갔다.
"7대대의 상황은?"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어떻게 안 좋지?"
"대장이 사라져서-."
그때 병사가 '윽-!'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과부하가 왔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손을 뗐다.
"7대대 대장이 사라지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대회의 이후에 종적을 감추셨습니다. 여기저기 찾고 있지만······."
길버튼의 독촉에 병사의 목소리가 가득 떨렸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으며 손을 저었다.
"더 추궁해봤자 나올 게 없을 것이네."
"대장이 사라졌는데, 숨기고 있었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길버튼의 얼굴에 화가 가득했다. 역시 기사였다.
'7대대에서 초대가 왔다.'
이게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7대대가 흑마법학회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였다.
'대장을 살려둔 걸 보면 전체를 다 먹지는 못한 것 같군.'
까마귀는 양피지에서 흑마법학회가 7대대 대장을 잡고 있다고 했다. 만약 완벽히 장악했다면, 굳이 대장을 살려둘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장악하지 못했으니,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대장을 살려뒀겠지-.
계산이 빠르게 끝났다.
"7대대로 가야겠네. 자, 바로 출발하지."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말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톰이 손을 천에 닦으며 말했다. 그 등에 악기가 매달려 있었다.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길버튼 경, 함정을 파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 줄 아는가?"
갈라하드의 물음에 길버튼이 눈을 찡그렸다.
"밟는 걸세. 아주 세게."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혹시 모르니 지원을 요청해야겠군."
"······지원 말입니까? 대대는 원칙적으로 맡은 지역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공 전하의 명이 아니라면."
"알고 있네."
가득 올라간 갈라하드의 입꼬리에 길버튼은 굉장히 불안해졌다.
****
방문을 나서던 아드리안나는 그대로 멈췄다.
"좋은 아침일세."
연초를 입에 물고 있는 사내 때문이었다. 갈라하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흔들었다.
'어떻게?'
아드리안나를 노렸던 마족이 워낙 많았던 탓에, 아드리안나가 기거하는 성은 그 보안이 철저했다.
갈라하드라도 들여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갈라하드는 여유롭게 서 있었다.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왜 저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일까. 아드리안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안 들여보내 주더군.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네. 약혼자를 보기 위해서 성에 잠입하다니-. 낭만적이지 않은가?"
낭만적-? 아드리안나는 그게 맞는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여인의 성에 잠입하는 건 보통 음흉하다고 합니다."
"잠입하는 사내가 잘생기면 낭만이 되는 걸세."
"외모로 행동을 평가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잘 생겼다는 건 인정하는군?"
아드리안나는 작게 기침했다. 이 사내와 이야기하면 자꾸 이야기가 이상한 곳으로 샜다.
"그렇군요. 떠나실 겁니까."
"7대대로 갈 생각일세."
최근 마족에 큰 피해를 입었던 7대대였다. 확실히 구멍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드리안나는 끄덕였다.
"같이 가겠는가?"
뜬금없는 물음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잠시 커졌다.
"음흉한 놈들이 가득할 거라는 정보가 있었네. 아주 신나는 데이트가 될 걸세."
갈라하드가 연회장에 가자는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아드리안나는 가만히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입술을 달싹였다.
"저는 1대대의 대장입니다."
완곡한 거절이었다.
대공의 명령이 아니라면, 아드리안나는 1대대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게 규율이었다.
"그렇군."
갈라하드의 가벼운 끄덕임에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갈라하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어쩌면 예상한 것 같았다.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닫았다.
"편지 좀 쓸 수 있겠는가? 아무래도 보고를 올려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예, 얼마든지요."
아드리안나는 뒤에 있는 종이를 내밀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펜을 움직였다. 그 놀림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갈라하드다웠다.
'···장인어른······ 마족이 연회를······ 혼자 쓸쓸······ 참석······.'
자신이 훔쳐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아드리안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갈라하드가 종이를 돌돌 말아 내밀었다.
"편지 좀 부탁하네. 아직 매가 없어서."
"예. 아, 잠시만-."
아드리안나는 매를 갈라하드에게 내밀었다. 아드리안나의 매는 몹시 까다로웠다. 그 상대가 어디 있어도 찾아내서 편지를 전달하는 영리한 매였지만, 동시에 선택이 까다로웠다.
잠시 주춤거리던 매가 이내 갈라하드의 어깨에 부리를 비볐다.
"신기하군요. 화이튼이 이렇게 좋아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내가 원래 인기가 좀 많네."
뻔뻔한 대답에 아드리안나는 잠시 숨을 참았다. 다시 숨을 내쉰 아드리안나가 차분히 설명했다.
"주기적으로 매를 보내겠습니다. 혹시 이상 현상이 발견되면 연락해주세요."
"알겠네."
매가 금세 창문을 통해 날아갔다. 아드리안나는 그 자유로운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아, 손 좀 주겠나?"
"······예?"
"손 말일세."
당연하다는 듯 손을 내미는 갈라하드에 아드리안나는 잠시 눈을 끔벅였다.
"바로 출발하시는 거 아닙니까?"
"대공의 답을 듣고 움직일 생각일세."
자기 것을 내놓으라는 듯한 당당한 요구였다.
아드리안나는 두꺼운 가죽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갈라하드의 반응이 전과 달랐다.
핏발이 서고, 힘줄이 올라왔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의 손을 붙잡고 가만히 서 있었다.
겨우 버티는 것 같았지만, 애초에 버티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아드리안나는 멍하니 쳐다봤다.
그때, 갈라하드가 먼저 손을 뺐다.
처음이었다.
갈라하드가 먼저 손을 뺀 건-.
"음, 이제 좀 알 것 같군."
평온한 목소리와 달리 입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실핏줄이 전부 터진 눈이 붉었지만, 갈라하드는 아무렇지 않게 옷매무새를 여몄다.
"추운데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게."
갈라하드는 미련 없이 뒤돌아서 사라졌다.
정말 제멋대로 나타났다가 제멋대로 사라지는 사내였다.
'알 것 같다-.'
아드리안나는 그 묘한 문장을 중얼거렸다.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의 성질에 관심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손을 잡는 건 그 일환일 뿐이었고.
만약 다 알게 된다면-.
아드리안나는 얼얼한 손을 한참이나 내려봤다.
방이 워낙 서늘한 탓에 온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
"같이 안 간다고 하지 않았나?"
갈라하드의 직설적인 물음에 아드리안나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대공 전하의 명입니다."
"솔직히 말하게. 같이 가고 싶었군?"
"대공 전하의 명입니다."
"이런 솔직하지 못하군. 그런데 미안하지만 이렇게는 같이 갈 수가 없네."
"예?"
아드리안나의 눈이 조금 커졌다. 같이 가자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같이 갈 수 없다니?
"자네는 너무 유명하지 않은가. 그 아름다운 외모는 이목을 너무 끈다네. 이대로 가면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다 도망갈 걸세."
"······일리가 있습니다."
아드리안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갈라하드의 속삭임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지금 저한테 특무대 막내를 하라는 겁니까?"
아드리안나의 눈이 처음으로 크게 구겨졌다.
39화 노아드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아드리안나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 상대는 흑마법학회일세. 마물 조련사의 흔적을 가지고 있으며, 여명으로 이어지는 끈이지. 반드시 잡아야 하는 놈들일세."
"······."
"놈들은 도망치는 걸 주저하지 않네. 그런데 북부의 영웅, 자네가 나타나면 어떻겠나? 바로 도망치겠지."
"놈들에 대해 잘 아십니까?"
아드리안나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누구도 자네를 아드리안나라고 생각하지 않을 걸세."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위아래로 살폈다. 아드리안나는 여인치고는 꽤 큰 키였다.
그런 아드리안나에 보급소에서 집어 온 갑옷을 입혀두니 살짝 왜소한 어설픈 기사의 모습이었다. 멍청하게 생긴 투구까지 씌워 놓으니 완전 감쪽같았다.
아드리안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원들에게도 비밀일세."
"······예?"
"자네인 걸 알면 길버튼 경이 가만히 있을 것 같나?"
갈라하드의 물음에 아드리안나가 침음성을 흘렸다.
"아주 난리를 치겠지. 원래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하는 법일세."
"······일리가 있습니다."
"최대한 힘을 숨기게나. 오러를 쓰지 않는 걸로 하지. 자네는 결정적인 순간에 나서는 걸세."
갈라하드는 다시금 당부했다. 놈들이 아드리안나의 존재를 눈치채면 도망칠 게 분명했다.
아드리안나는 비장의 한수였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서야 했다.
"······알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멍청한 투구를 붙잡고 끄덕였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턱끈을 꽉 조여줬다.
"자네가 정체를 숨기는 게 관건일세. 나는 자네를 믿네."
한 번 더 당부한 갈라하드는 마차로 향했다.
출발 준비는 끝나 있었다.
"뭐 하느라 이렇게 늦게 오십니까?"
툴툴거리는 길버튼에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새로운 대원을 받아왔네. 이름은 노아드일세. 특이한 점은 말을 못 하고, 끔찍한 화상 때문에 투구를 벗지 못하는 걸세. 투구는 절대 건들지 말게. 다들 따뜻하게 반겨주게나. 자, 박수-."
그웬이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아드리안나를 쳐다봤다.
"예? 새로운 대원 말입니까?"
길버튼이 구겨진 눈으로 아드리안나를 위아래로 살폈다. 안 그래도 찢어진 눈이 좀 더 가늘어졌다. 불퉁한 기색이 가득했다.
"기사?"
바로 무례를 범하는 길버튼에 갈라하드는 작게 감탄했다. 역시 길버튼이었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멍청한 투구를 씌워 놓은 탓에 어딘지 멍청하게 보였다.
갈라하드가 작게 끄덕이자,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1대대?"
끄덕끄덕.
"이런 놈은 없었는데. 신입?"
끄···덕.
"쯧, 얼빵한 놈이 들어왔군."
길버튼이 대놓고 혀를 찼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멍청한 투구 너머로 다급함이 느껴졌다. 갈라하드는 작게 기침하며 고개를 저었다.
"내 밑에서 배우다니-. 운 좋은 줄 알도록. 1대대 기사 출신이라니까 특별히 알려주는 거야."
처음으로 들어온 기사 후배라서 그런 걸까. 길버튼이 챙겨준다는 말까지 했다.
"그··· 길버튼님?"
"톰, 준비는 끝났나."
갈라하드는 톰의 말을 잘랐다. 톰이 안쓰러운 눈으로 길버튼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끝내뒀습니다!"
"그러면 바로 출발하지. 7대대와는 거리가 제법 있으니 말일세."
갈라하드는 두꺼운 성벽을 올려봤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어두웠다.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려면 부지런히 달려야 했다.
"제가 책임지고 교육하겠습니다."
"그래, 길버튼 경 자네만 믿겠네."
갈라하드는 멍청한 투구 너머로 느껴지는 간절한 시선을 외면하고 마차에 탔다. 데미안은 그웬의 무릎을 베고 침까지 흘리며 자고 있었다.
"···저렇게 둬도 되는 겁니까?"
톰이 잔뜩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고삐를 그렇게 쥐는 게 아니라, 하- 참 답답하군."
밖에서 들리는 길버튼의 타박에 갈라하드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놔두게. 언제 눈치채는지 궁금하군."
"······눈치 못 챌 거 같은데 말입니다."
갈라하드는 잠시 고민했다. 아무리 길버튼이라도 눈치를 못 챌까-.
'그럴지도.'
갈라하드가 당부했으니 아드리안나가 먼저 밝힐 일은 없을 것이다.
길버튼이 먼저 눈치를 채는 방법밖에 없는데-.
'눈치 못 챌 수도 있겠군.'
갈라하드는 진지하게 끄덕였다. 워낙 눈치 없는 길버튼이었다. 끝까지 모를 가능성도 있었다.
"뭐 새로운 경험 아니겠나."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톰은 걱정스럽게 앞쪽을 쳐다봤다.
길버튼은 늘 툴툴거리지만 사람이 좋았다. 거기에 검술도 대단했지만-.
눈치가 더럽게 없었다.
"하! 진짜 답답한 놈이네! 이거!"
진짜로-.
****
"기사란 놈이 고삐 쥐는 법도 몰라?"
길버튼은 답답함에 혀를 찼다.
"말로 해-. 아, 말 못 한다고 했지."
길버튼은 놈의 손짓에 집중했다. 대충 뜻이-.
"마차 고삐를 쥐어본 적 없다?"
끄덕.
"하, 귀하게 자랐다고 자랑하는 거야?"
아드리안나의 고개가 뚝- 하고 굳었다. 길버튼은 대놓고 혀를 찼다.
구박을 얼마나 당했는지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다만, 길버튼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아드리안나는 그 충고들을 흘리지 않고 기억했다.
"쯧- 그래, 뭐 궁금한 거 있어?"
길버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드리안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짓했다.
"특무대는 어떠냐고?"
끄덕.
"음······."
길버튼이 침음성을 길게 흘렸다. 아드리안나는 고삐를 당기며 기다렸다.
"엉망이지. 아주."
길버튼이 투박하게 대답했다.
"처음으로 데려온 대원이 하녀였지. 그다음은 짐승 같은 소년병이고. 이렇게 근본이 없을 수가 있나. 그나마 톰이 있어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진작에 무너졌을 거다."
내용과 달리 길버튼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직속 부대에 있을 때는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또 운은 얼마나 더럽게 없는지, 마족과 싸우고, 마물과 싸우고 심지어 마경까지 갔다 왔다니까."
길버튼이 소리 내어 웃었다. 생소한 모습이었다. 아드리안나는 가만히 쳐다봤다.
"또 대장이라는 놈은 얼마나 긁는지 내 머리가 한 움큼 빠졌다고."
확실히 아드리안나의 밑에 있을 때보다 머리숱이 적어진 것 같았다. 아드리안나는 진지하게 끄덕였다.
"음, 대장이 어떤 사내냐고?"
끄덕.
길버튼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미간이 심하게 구겨졌다.
"······유능한 미친놈?"
길버튼이 진지하게 끄덕였다.
"맞네, 유능한 미친놈. 처음에는 고집이 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대장은 확고한 믿음이 있는 거야."
믿음-. 아드리안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슬쩍 뒤를 돌아본 길버튼이 말을 이었다.
"자기가 맞고 나머지가 틀렸다는 믿음. 장담하지. 세상 모든 놈이 대장에게 틀렸다고 손가락질해도 대장은 이렇게 말할걸?"
길버튼이 잠시 뜸을 들였다.
"미안하지만, 내가 맞고 자네들이 틀렸다네-."
길버튼은 갈라하드의 목소리를 제법 잘 흉내 냈다.
길버튼이 소리 내어 낄낄 웃었다. 그 모습이 무척 즐거워 보였다. 아드리안나는 뭐라 말하기 힘든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마차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갈라하드가 마차의 천장을 붙잡고 몸을 내밀었다.
"습격일세! 이것 참 화려한 환영식이군!"
갈라하드의 손에서 불이 뿜어졌다. 어두운 숲이 밝아지며 거대한 마물이 보였다. 불덩이가 마물을 강타했다. 마물 하나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자, 특무대의 무서움을 보여줄 시간이네! 데미안!"
"네, 형."
갈라하드의 옆으로 데미안이 뛰쳐나왔다. 데미안이 검을 붙잡고 데구르르- 굴렀다. 통! 데미안이 튕기는 순간 마물의 발이 잘렸다.
"다음은 자네일세! 그웬!"
"으··· 으아아아!"
갈라하드가 안에서 물건 꺼내듯 그웬을 꺼냈다. 목덜미가 잡힌 채 데롱데롱 매달린 그웬이 비명을 길게 질렀다.
"으아아아아-!"
"자, 그웬. 그동안 연습한 걸 보여주게!"
갈라하드가 그웬을 잡고 흔들었다. 비명을 지르던 그웬이 큼지막한 불덩이를 날렸다.
"으아아아! 포··· 폭발화구!!"
불덩이가 마물에 명중했다. 폭발이 일어나며 마물이 뒤로 밀렸지만, 유의미한 타격은 아니었다.
그때, 데미안이 밀린 마물에게 들러붙었다. 데미안의 검이 마물의 주둥이를 길게 찢었다.
"그웬! 훌륭하네! 다시 해보게!"
"으··· 으아아···."
갈라하드는 그웬을 흔들며 칭찬했다. 그에 그웬이 다시금 불덩이를 쏘았다.
"잘 봐라. 기사가 뭔지."
길버튼은 오러를 길게 뿜어내며 검을 휘둘렀다. 다가오던 마물이 그대로 갈라졌다.
떠오른 마물의 사체, 그 배에 익숙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대장! 마물 조련사의 흔적입니다!"
"이런! 아무래도 7대대에서 연회가 크게 열릴 모양일세!"
갈라하드가 손을 휘저었다. 마물을 강타한 스파크가 거칠게 옆으로 뻗어나갔다. 마물 하나가 불에 타올랐다.
"막내는 고삐나 잡아!"
아드리안나가 칼자루를 잡는 순간 길버튼이 소리쳤다.
"하하! 길버튼 경이 고삐나 잡으라는군!"
짓궂은 미소를 머금은 갈라하드에 아드리안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삐를 굳게 잡았다.
아드리안나는 정말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
마물이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하자 그 뒤로는 습격이 없었다.
'상당히 조심스러워졌군.'
예전의 흑마법학회였다면, 계속 들이박았을 것이다.
그런 놈들이 이번에는 타격을 주지 못하자 더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저 전력을 확인해볼 속셈이었던 것처럼-.
전보다 더 용의주도해진 모습이었다.
'무슨 준비를 해뒀을까.'
갈라하드는 수통을 작게 흔들며 중얼거렸다.
'상급 마족을 믿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상급 마족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다만, 여기는 마족의 영역이 아니었다.
'더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군.'
팔호는 영악한 놈이었다. 줄여서 보고했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상급 마족보다 더한 게 준비되어 있다는 쪽으로 생각하는 게 옳았다.
물론, 뭐가 준비되어 있어도 상관없었다.
이쪽에는 아드리안나가 있었다.
"하, 신입 노아드인가. 손이 너무 많이 갑니다. 무슨 기사가 할 줄 아는 게 없습니까?"
길버튼이 대놓고 투덜거렸다. 갈라하드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그때, 저 멀리에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7대대였다.
해가 진 탓인지 아니면 먹구름이 낀 건지 7대대는 어둠에 가득 가려져 있었다. 사방 가득하게 날아다니는 까마귀들이 연신 울어댔다.
성 자체가 거대한 마물 같았다. 성벽 중간에 박힌 횃불이 마물의 붉은 눈동자 같았다.
'제대로 찾았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중얼거렸다.
마차가 성에 천천히 다가갔다. 거대한 성벽 규모와 달리 지나다니는 이들이 전혀 없었다. 휑한 길에 이쪽뿐이었다.
성에 다가가니 따가운 시선들이 꽂혔다. 성벽 위쪽에 검은 후드를 눌러쓴 이들이 보였다. 그들은 마치 경계를 서듯 이쪽을 보고 있었다.
갈라하드는 여유롭게 연초를 흔들어줬다. 놈들의 신형이 살짝 흔들렸다.
성벽에 가까이 가자 기사로 보이는 인물과 병사들이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것처럼 칼자루에 손을 올린 상태였다.
성벽 위쪽의 쇠뇌가 이쪽을 겨눴다. 성벽 위와 성문 주변에 병력이 잔뜩 있었다.
기사부터 병사들까지-. 당장 이쪽과 전쟁이라도 벌일 듯한 분위기였다. 꼭 성 하나와 공성전을 벌이는 기분이 들었다. 압박감이 상당했다.
"이거 환영식이 거하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깊게 마셨다. 레몬 향이 가득 풍겼다.
당장 놈들이 공격성을 드러낼까?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올 때 공격했겠지.
놈들은 안쪽에 함정을 파뒀을 것이다. 이쪽이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은 함정을-.
"7대대의 3중대 중대장 셰르파입니다. 부대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부대장도 아닌 중대장이 맞이하다니-. 놈 뒤에 있는 이들의 흉흉한 분위기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일세."
"아, 마차에서 내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최근 불미스러운 일이 있던 터라-."
셰르파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차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온 건 그웬과 데미안, 톰, 멍청한 투구였다.
그를 보자 셰르파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이분은 누구십니까? 특무대는 총 다섯이라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새로 들어온 신입일세. 얼굴에 화상이 가득해서 투구를 씌워뒀지. 벗기지는 말게나. 밥맛이 뚝 떨어지니까."
"들어오시지요. 부대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냥 물어본 거였는지 셰르파가 웃음을 가득 지으며 안쪽을 안내했다. 자신감이 돋보이는 놈이었다.
아드리안나를 들키지 않고 넣는다-. 계획의 가장 큰 부분이 성공했다.
"아, 가기 전에 좀 씻을 수 있나?"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만."
"찝찝해서 말이지. 그리고 씻고 가는 게 예의 아니겠나."
잠시 고민하던 셰르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손을 저었다.
"아, 나는 대공 전하의 명령을 받아서 왔네. 급한 일이니 중요 인물은 전부 모아주겠나?"
갈라하드는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대공의 문장이 박힌 편지였다.
그를 본 셰르파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었다. 대공은 무서운 듯했다.
"전부 말입니까?"
"급한 일이라서 말이지. 고맙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따가운 느낌에 고개를 돌리니 멍청한 투구가 갈라하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
'병력이 많군.'
갈라하드는 오면서 봤던 경로를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곳곳에 존재하는 불순한 마나의 움직임과 무장한 병사들-.
'쉽지 않겠어.'
손끝이 저릿할 정도의 긴장감이 올라왔다.
"어디 가십니까?"
길버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일하러 가지. 자네는 여기서 시선을 좀 끌어주게."
"······무슨 일 말입니까?"
"7대대 대장이 감옥에 갇혀있다는군."
"어디인지 아십니까?"
"그건 이제부터 찾아야지."
길버튼이 멍청하게 눈을 끔벅였다. 갈라하드는 셔츠 소매에 있는 줄을 당겼다. 그러자 셔츠가 몸에 바짝 붙었다.
"방금 회의를 소집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덕분에 병력이 비겠지."
"주변에 병사 가득 깔린 것 못 보셨습니까? 한가득입니다. 한가득-."
길버튼의 말대로 건물 주변에 병사가 가득 깔려 있었다.
셰르파는 혹시 모를 불미스러운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지만, 병사들은 밖이 아닌 이쪽을 보고 있었다. 중요한 건 그 병사들 뒤에 있는 음흉한 놈들이었다.
"괜찮네. 이런 건 내 전문일세."
"아니-."
"쉿, 자네 목소리가 너무 크네."
"아니···. 오면서 못 보셨습니까? 7대대 병력이 상당합니다. 그중에 용병이나 마법사로 보이는 놈들도 있었고요."
"매번 말하지만. 길버튼 경, 자네는 당연한 이야기를 거창하게 하는 버릇이 있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손에 기름을 발라 머리를 뒤로 바짝 넘겼다. 훤칠하군-. 거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찾으러 올 겁니다. 그 사이 어디에 갇힌 지도 모르는 7대대 대장을 구출하겠다는 겁니까?"
"정답일세. 길버튼 경, 똑똑해졌군."
바로 앞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길버튼이 입을 꾹 다물었다.
"길버튼 경, 사람이 언제 가장 방심하는 줄 아는가?"
갈라하드는 마나를 돌렸다. 고통의 알이 쿵쿵- 거렸다. 준비됐다는 듯했다. 확실히 그웬이 달래준 뒤로 조금 얌전해진 느낌이었다. 보모가 생긴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방심 말입니까?"
"그래, 방심. 가장 방심할 때는 상대가 함정에 완벽하게 빠졌다고 생각할 때라네."
준비를 끝낸 갈라하드는 위쪽을 확인했다. 겨우 나무로 된 허름한 천장이었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그러니까 대공 전하의 인장을 보여주며 전부 소집하고, 씻겠다면서 번 시간 동안 밖에 있는 병력을 뚫고 7대대 대장을 구출하겠다는 겁니까?"
"오, 정확하군."
갈라하드는 손을 풀면서 끄덕였다.
음-. 작게 침음성을 흘린 길버튼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말린다고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성미가 급한 놈들입니다. 목욕이라고 해 봤자 달이 기울 정도의 시간밖에 안 줄 겁니다."
달이 기울 정도의 시간이라-.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충분하군. 아, 이 기회에 자네도 한 번 씻어보게나."
가벼이 인사한 갈라하드가 그대로 없어졌다.
그를 잠시 보던 길버튼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갈라하드를 이해하려고 할 필요 없었다.
"그래, 목욕이란 걸 한 번 해보자."
길버튼은 갑옷을 마저 벗었다.
****
"······대공 전하가 사라지셨다고?"
대공의 가신 테오도르는 자기 입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비명을 못 참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 언제 사라지셨는가?"
"그······ 아드리안나님의 편지를 받은 이후에 사라지셨습니다."
테오도르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대공의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공이 성을 나서면-.
'황제와의 협약이······.'
테오도르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대공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오히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움직였다는 건-.
'이제 때가 왔다는 건가.'
테오도르는 작게 탄식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편지 내용이 뭐였길래 대공 전하가 움직였다는 말인가.
'······또 그놈이?'
테오도르는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설마 그 정도로 미치진 않았을 것이다.
40화 유령
'······진짜 여섯이 왔다고?'
까마귀는 가면을 톡톡 두드렸다.
설마설마했는데, 놈은 특무대만 끌고 왔다. 까마귀는 직접 확인했다.
놈이 들어간 건물을 둘러싼 7대대의 기사와 병사가 몇 겹이었다. 더불어 흑마법학회의 간부까지 있었다.
'이거 아무리 놈이라도 안 되겠는데.'
저울의 추가 흑마법학회 쪽으로 기우는 순간이었다.
그때-.
"자네, 실력이 녹슨 거 같더군."
뒤쪽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운 성과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까마귀는 제 귀를 의심했다.
저기서 어떻게 나왔지? 아니, 까마귀는 '어떻게'라는 단어를 지웠다. 상대는 놈이었다.
"담당자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까마귀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익숙한 검은 구두가 까마귀 앞에 멈췄다.
"보고가 별로더군. 설마 자네 녹슬었나?"
놈의 목소리에 어떤 감정도 없었다. 그저 무미건조했다. 그렇기에 더 두려웠다. 녹슨 도구를 버리듯 아무렇지 않게 까마귀를 갈아치울 것 같았다.
"하하, 그게 아니라-. 흑마법학회 이놈들이 워낙 비밀스러워져서···."
"그런가?"
바로 앞에 멈춘 구두에 까마귀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놈은 가만히 까마귀의 가면을 잡았다. 놈 앞에서 가면을 벗지 않는 건 맹세였다. 맨얼굴을 보인다는 건 끝을 고하는 거였다.
"지··· 진짜입니다! 7대대 대장 위치랑 그 경로까지 전부 알아내느라 시간이 걸린 겁니다! 그리고 또··· 놈들이 성역이라는 것까지!"
까마귀의 가면이 살짝 들렸다. 그 사이로 들어오는 한기가 까마귀의 얼굴을 얼렸다. 차가운 공기가 칼처럼 서늘했다.
톡톡, 놈이 가면을 두드렸다.
"성역이라 그랬나?"
"···예!"
"오, 흥미롭군."
아주 작은 관심에 까마귀는 익사하기 직전의 사람이 숨을 들이켜듯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그렇군. 안내하게."
놈이 한 발짝 멀어졌다. 까마귀는 진심으로 놈에게 감사를 표했다.
특무대에 있던 놈의 모습에 속아 이 서늘함을 잊고 있었다. 이게 놈의 본 모습이었다.
멍청한-. 까마귀는 입술을 씹었다.
"7대대 대장은 흑마법학회 지부의 건물 지하에 있습니다. 가는 길에 마법진이 새겨진 관문이 총 두 개, 그 사이를 지키는 마법사가 열셋입니다. 전부 고급 지팡이로 무장한 상태입니다."
까마귀는 빠르게 보고를 올렸다. 말도 안 되는 병력이었다. 그에 비하면 갈라하드는 단신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미친 짓이었지만-.
"그렇군."
놈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성은 조용했다. 소리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했다. 횃불이 한쪽으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까마귀가 향하는 방향은 그 정반대였다.
'이목을 전부 끌어뒀어.'
성의 이목이 전부 놈이 씻겠다고 들어간 건물과 내성 안쪽에 쏠려 있었다.
그에 흑마법학회의 건물은 오히려 비어 있었다.
오자마자 놈이 7대대 대장을 구하러 움직일 것이라는 걸 누가 예상할 수 있겠나.
"정문 경비로 병사 둘이-."
까마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병사들이 쓰러졌다.
목에 구멍이 하나씩 뚫려 있었다. 정교한 얼음송곳이었다. 시간이 지나 얼음송곳이 녹으면 흔적조차 안 남을 것이다,
마치 유령처럼-.
"바쁘니 멈추지 말고 계속 걷게."
놈이 속삭였다. 방금 둘을 죽였는데도 그 목소리에 작은 감정도 없었다.
"예."
까마귀는 스산한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었다. 역겨운 피 냄새가 까마귀의 코를 간질였다.
"···음? 간부님이 이 시간에는 무슨-."
쿵. 말하던 놈이 그대로 쓰러졌다. 눈조차 감지 못했다. 목에 생긴 구멍으로 붉은 피가 번지듯 흘렀다.
탁,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전부였다. 지팡이도 없이 손가락 튕기는 것만으로 마법사를 죽이다니-.
'저런 괴물에게 수작을 부리려고 한 거야? 시발. 내가 미쳤지.'
까마귀는 입술을 씹으며 걸음을 옮겼다.
"엇, 오셨습-."
까마귀를 알아본 이가 입을 연다. 쓰러진다. 뜨거운 피가 까마귀의 발을 적셨다. 단순한 작업처럼 반복이었다. 감흥 없는-.
'···미친 시발.'
발이 무겁지만 내디뎌야 했다. 멈추는 순간 괴물이 까마귀를 가리킬 것이다.
놈의 계획은 간단했다. 까마귀를 먼저 들여보내고 반응하는 놈들의 목을 뚫어버리는 거였다.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전부였다.
까마귀의 걸음이 멈춘 건 마법 보안이 걸린 문 앞에서였다.
"이··· 이건 저한테 권한이 없습니다! 원래 7대대 지부를 관리했던 놈이 안 줬습니다!"
까마귀는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놈의 걸음이 가까워졌다. 분명 딱딱한 지하를 걷는데도 놈의 구두에 소리가 없었다. 마치 유령처럼-.
놈은 말없이 문에 손을 올렸다. 까마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북부로 도망친 흑마법학회가 심혈을 기울인 보안 도구였다. 아무리 놈이라도-.
딸깍.
까마귀의 독백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놈이 마법사를 기가 막히게 잘 잡는 건 알고 있었다. 그 괴상할 정도로 빠른 마법과 주저 없는 판단력 때문이었다.
다만, 이 문은 이야기가 달랐다.
문에 걸린 마법 보안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는 까마귀도 알고 있었다.
그런 문을 놈은 툭툭 두드리는 것만으로 열었다.
마치 잘 아는 것처럼-.
"안 걷나?"
놈의 물음에 까마귀는 화들짝 놀라서 걸었다.
목뒤에서 서늘한 숨결이 느껴졌다.
꼭-.
"여기는 출입금······."
등 뒤에 사신이 있는 것 같았다.
꿀꺽.
까마귀는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
"대장, 황제가 우리를 속인 겁니다. 북부를 마족과 전쟁하게 만들어서 제 속을 불릴 생각이라고-. 진짜 적은 마족이 아니라 황제야."
7대대 대장인 노인은 지긋한 눈을 끔벅였다. 중대장 중 하나인 놈이 괴상한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자신이 노망이 나서 헛것이 들리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컸다. 아무리 그래도 북부의 전사가 마족이랑 손을 잡았을 리가 있나.
암, 그렇고말고.
"멍청한 노인네, 본인이 속는 줄도 모르는군. 이런 노인을 대장으로 두고 있으니, 발전이 없는 거였지. 늘 굶주리고 춥고-. 다 네 탓이다."
노인은 참지 못하고 대답했다.
"원래 북부는 춥다. 이놈아."
"아니, 더는 춥지 않다. 우리는-."
놈이 팔뚝을 걷었다. 거기에 처음 보는 복잡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선택을 받았다."
노인은 눈을 가득 찡그렸다.
"머리가 녹았군. 여전히 깨우치지 못할 줄이야. 제국은 우리를 이간질하며 자기 배를 불릴 뿐이다. 이건 만들어진 원한이다-."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꼴과 전보다 번듯한 무장, 그리고 기름기 가득한 얼굴까지-.
그에 노인은 허허- 웃었다.
"미안하지만, 마족은 자네들의 적이 맞네."
그때,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몸에 딱 붙는 옷을 입고 머리를 바짝 넘긴 놈이었다. 귀족-? 북부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깔끔한 모습이었다.
"누구냐."
"보면 모르겠나. 침입자일세."
"······침입자?"
"그래, 잘 생겨서 헷갈리겠지만, 지금은 침입자일세."
"이놈이 장난을-."
기사가 눈을 가득 구겼다. 거칠게 일어나며 검을 뽑았다. 검에서 오러가 가득 일어났는데, 그 색이-.
"오, 잿빛이군. 잿빛 오러라-. 마족에게 받은 힘인가?"
"멍청한 놈, 무기도 없이 내려와? 무슨 수를 쓴 건지 모르겠지만, 여기까지다."
"음, 아쉽군.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말이지."
사내가 혀를 차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기사가 움직였다. 그 움직임이 굉장히 빨랐다. 중대장인 놈의 속도가 아니었다.
빠른 움직임과 거칠게 일어난 오러-.
그건 언뜻 위협적으로 보였다.
"멍청하군."
노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내가 자신이 할 말을 대신했다.
"오러는 신념의 힘일세. 그런 탓에 깨닫기도 힘들고 쉽게 늘지도 않지."
기사가 검을 거칠게 휘둘렀다. 잿빛 오러가 일렁이는 게 꼭 마물이 입을 쩍- 벌린 것처럼 보였다.
사내는 그를 정면에서 마주하는데도 꿈적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러는 마물의 두꺼운 가죽을 베고 마법을 부수지. 그런데-."
탁, 사내가 손을 튕겼다.
기사의 검이 사내의 목 바로 앞에 있었지만, 사내는 눈도 꿈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검을 보며 혀를 찼다.
"자네는 이런 간단한 방어막조차 뚫지 못하지 않나."
기사의 잿빛 가득한 검이 반투명한 벽에 막혔다. 기사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기사가 필사적으로 애를 썼지만, 검은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오러가 마법을 베지 못한다니-.
그제야 뭔가 잘못됨을 느꼈는지, 기사의 얼굴에 다급함이 떠올랐다.
"고귀한 신념에 스스로 색을 칠하다니-. 덕분에 자네의 신념은 빛을 잃었네."
기사가 기울어졌다. 기사의 가슴이 가로로 갈라졌다. 둘로 나뉜 기사가 허무하게 무너졌다.
노인은 작게 감탄했다. 사내의 말이 맞았다. 오러는 신념의 힘이었다. 그렇기에 뭐든 벨 수 있었다.
그런데 저 멍청한 놈은 그 신념에 이물질을 더했다.
신념에 중요한 건 크기가 아니었다. 그 뿌리였지.
그래도 당장 강해진 건 분명했다.
그런 놈을 단 한 수에 처리하다니-.
"대단하군."
"똑똑한 기사는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닙니다."
"똑똑한 기사라···. 맞는 말이군."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는 멍청해야 한다.
'멍청한 신념이 가장 단단한 법이니까.'
그때, 사내가 쇠창살에 손을 올렸다. 굵은 쇠창살이 소리도 내지 않고 허물어졌다.
"구하러 왔습니다. 가시지요."
사내는 허리의 수통을 꺼내 입에 물었다. 익숙한 피 냄새가 가득 퍼졌다. 인간의 것은 아니었다.
"마족의 피를 마시는 건가?"
"의외로 맛이 좋습니다."
사내의 대답에 노인은 끌끌 웃었다. 마족의 피가 맛있다니,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놈이 이길 수 없는 상대였군. 마족의 힘을 받은 놈이 마족을 잡아먹는 사냥꾼을 어떻게 이기겠어."
노인은 거칠게 기침했다. 마족의 피를 마시는 마법사라니-.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사내가 노인 앞에 섰다. 옷차림은 말끔하고, 그 머리도 깔끔하게 넘긴 상태였지만,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했다.
노인은 작게 감탄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눈, 저건 자신을 믿는 자만이 지닐 수 있는 눈이었다.
대공처럼-.
'아니, 조금 다른가.'
"안 일어나십니까?"
사내가 노인을 보며 물었다.
어느새 구속구가 전부 풀려 있었지만, 노인의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
여기를 나서면 해야 하는 일들이 떠올랐다. 마족과 결탁한 놈들을 전부 쳐 죽여야 했다. 꽤 오랜 세월을 같이한 놈들이었다.
그런 일을 하기에 노인은 노쇠했다.
다만, 어쩌겠나.
이 또한 노인 잘못이었다.
노인은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무기는 어디 있습니까?"
사내의 물음에 노인은 끌끌 웃으며 구석에 세워진 봉을 잡았다.
"노인에게는 지팡이가 최고라네."
오랜만에 봉이 착- 감겼다.
****
쾅쾅!!
누군가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톰이 문을 열자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부대장님과 중대장님들이 전부 모여서 대기 중이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속셈이지?"
험상궂게 생긴 기사가 거칠게 물었다. 그 뒤로 병사들이 길게 있었다.
쏟아지는 날카로운 기세에 톰의 등이 축축해졌다. 손바닥에서 땀이 가득 흘렀다. 톰은 필사적으로 웃었다.
"아하하, 저희 대장님이 정말 꼼꼼하게 씻으시는 분이라서 말입니다. 그게 예의라고 생각하십니다. 아무래도 7대대의 명성이 워낙 높은 탓에 더 예의를 차리시는 것 같습니다."
칭찬에 기사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크흠, 제국놈이라고 깔끔을 부리는군. 빨리 끝내라고 전하게."
"예예, 알겠습니다."
톰은 굽실거리면서 문을 닫았다.
문을 닫고 나서야 톰은 가득 찬 숨을 쉬었다. 등과 손에 땀이 가득했다. 수명이 한 움큼 깎이는 기분이었다.
"이제 얼마 못 버팁니다."
톰은 대원들을 보며 말했다.
이미 몇 차례나 돌려보낸 뒤였다. 그럴 때마다 놈들의 노크는 거칠어졌다.
"어쩔 수 없군."
길버튼이 검을 뽑았다.
"문이 열리면 기사의 목을 베겠다. 데미안이 그 사이로 뛰쳐나가고 그웬이 불을 던진다."
"폭발화구요?"
"그래, 불. 후위를 막내가 맡는다."
끄덕.
길버튼의 명령은 명료했다. 다들 끄덕이는 모습에 톰은 기겁했다.
"저걸 뚫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밖에 세워진 병사들만 수십이었다. 그 사이에 있는 쇠뇌까지-. 저걸 어떻게 뚫는단 말인가.
그때-.
쾅쾅쾅!
문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길버튼이 손짓했다. 아드리안나가 칼자루를 잡았다. 전투를 불사할 분위기였다.
"거기 안에서 뭐 해! 당장 나와!"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듯 전보다 더 거칠게 두드렸다. 문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제가 막아보겠습니다."
톰은 황급히 문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고 필사적으로 궁리했다. 갈라하드 대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이쪽은 대공 전하의 명령을 받고 왔소! 이렇게 무리하게 여는 건 대공 전하에 대한 반란이오!"
과격한 표현에 잠시 노크가 멈췄다.
다만, 그것도 잠시였다.
"개소리하지 말고 문 열어! 감히 대공의 이름을 팔아?!"
통하지 않았다.
길버튼이 손짓했다. 각자 준비를 끝냈다.
진짜 싸울 생각이다-. 톰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열어라! 더는 못 기다려!"
쾅! 문이 작게 쪼개졌다. 톰은 입술을 깨물었다.
목욕한다고 둘러댔으니, 그걸 확인시켜줘야 했다.
"다들 눈 좀 돌려주십쇼."
톰의 부탁에 다들 고개를 돌렸다.
톰은 주저 없이 갑옷을 벗었다. 빠짐없이-. 깨끗하게-.
톰이 문고리를 슬쩍 당겼다. 흔들리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너머로 수많은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톰은 꾸미지 않은 비명을 질렀다.
씩씩거리던 기사가 톰의 적나라한 나체에 당황했다.
"씻는다고 하지 않았소!"
"크흠, 마저 준비하시오.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소. 위에서 명령이 내려왔으니."
기사가 한 발짝 물러섰다.
톰은 이게 마지막이라는 걸 깨달았다.
갑옷을 빠르게 입은 톰은 방패를 고쳐잡고 문을 막았다. 길버튼이 옆에 섰다. 데미안이 튀어 나갈 준비를 했다.
"이놈들!!"
그때, 기사가 밀고 들어왔다. 톰은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기사를 당해낼 수 없었다. 걷어차인 톰이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길버튼이 숨을 들이켰다.
일촉즉발의 순간-.
"7대대는 참 성미가 급하군."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갈라하드가 머리를 여유롭게 넘기고 있었다. 단정한 옷매무새와 깔끔한 얼굴은 누가 봐도 씻고 나온 이의 얼굴이었다.
톰조차 헷갈릴 정도였다.
그에 기사가 당황한 듯 한 걸음 물러섰다.
"안내하게."
그리 말하는 갈라하드의 이마에는 땀 한 방울조차 없었다.
****
연회장에 무장한 이들과 검은 후드를 입은 이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식탁에 익지 않은 고기나 술이 가득했다. 그들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뜯어 먹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흑마법학회의 간부, 데블리안은 눈을 찡그렸다.
그 목소리에 담긴 건 불안이 아닌 짜증이었다.
이제 슬슬 배가 부르니 처음의 목적이 떠오른 것이었다.
"오기 전에 예의를 갖춘다고 목욕 중이랍니다."
옆에서 조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목욕이라니-."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다른 꿍꿍이를 가진 거 아닙니까?"
그때, 누군가 의문을 제기했다.
정적이 잠시 이어졌다가 웃음이 터졌다. 말한 놈이 제일 먼저 웃었다.
놈 주변에 배치한 병력만 백 이상이었다. 이상이 발생했으면 진작 보고가 올라왔을 것이다.
그걸 몰래 뚫는다고 하여도-.
"놈이 뭘 할 수 있겠소. 이미 우리의 영역인데."
데블리안은 끌끌 웃었다.
놈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의미 없는 발악일 뿐이었다.
그들이 재촉하지 않고 여유롭게 식사하는 이유였다.
"이제 곧 성역이 열릴 것이오."
데블리안의 선언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우리가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다."
부대장이 말을 받았다. 목소리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 속에서 붉은 눈동자들이 음험하게 빛났다.
'거의 다 왔다. 학회의 본격적인 출범이다.'
데블리안은 작게 중얼거렸다.
모든 상황이 완벽했다.
북부의 물을 흐리는 갈라하드를 7대대로 불렀다.
놈을 죽여 북부와 제국의 관계를 뒤틀 것이다.
그로써 문을 열고-.
'흑마법의 시대를 열 것이다.'
더는 숨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너무 늦는 거 아니오? 까마귀 가면을 쓴 간부도 안 보이고."
그때, 다른 간부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번번이 약한 소리를 하던 놈이었다.
쯧, 분위기 망치게-.
"성역이 열리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오."
데블리안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아드리안나? 그자가 직접 온대도 상관없소. 성역은 선택받지 못한 자들의 무덤이니까. 여기 선택받은 기사님들이 잔뜩 있지 않소? 아드리안나로는 부족하지!"
데블리안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쉿! 데블리안은 검지를 입에 댔다. 다들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대공 정도는 데리고 와야지!"
대공이라니-!
웃음이 전보다 더 커졌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수도에나 있을 법한 깔끔하고 잘생긴 귀족이 들어왔다.
"오, 다들 모여있었군. 늦어서 미안하네. 생각보다 일이 길어져서 말일세."
사내에게 따가운 시선이 가득 쏟아졌다.
사내는 그를 하나씩 마주했다.
뭔가를 살피듯 아주 꼼꼼하게-.
"역시 연회였군."
사내가 뜻 모를 소리를 하며 빈자리로 향했다.
중심이 순식간에 사내에게 끌려갔다.
사내가 연회의 주인공인 느낌이었다.
"음, 생고기라니. 취향이 참 야만스럽군."
혀를 찬 사내가 잔에 담긴 술을 바닥에 뿌렸다. 그리고 수통을 꺼내 잔에 따랐다.
붉은 액체가 잔에 가득 찼다. 풍기는 냄새가 굉장히 익숙했다. 비릿하면서도 저주 받은 끔찍한 냄새-.
마족의 피였다.
사내가 잔을 빙글- 돌렸다. 그 냄새가 가득 퍼졌다.
양옆의 기사가 질겁하며 물러났다. 다른 이들도 눈을 찡그렸다.
사내는 여유롭게 잔을 입에 댔다. 고급스러운 술을 마시듯 음미하며 잔을 비웠다.
'우리가 야만스럽다고-?'
잔을 내려놓은 사내가 천으로 입가를 닦았다.
"자, 시간도 늦었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네."
본론이라니-. 저쪽에서 찾았다는 듯한 당당함이었다.
'이게 무슨-.'
데블리안은 묘한 불쾌함에 눈을 찡그렸다.
그때, 사내가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꼭 식사를 준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어서-.
"자, 그래서 상급 마족은 어딨지?"
사내가 고급 요리를 기다리듯 입꼬리를 올렸다.
연회장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41화 화려한 언변
상급 마족이 어딨냐니-.
놈의 발언에 작게 술렁였다.
데블리안은 손을 저어 주변을 조용히 시켰다. 이어서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상급 마족이라니-.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지 모르겠군."
"아, 너무 급했나? 그러면······. 음, 그대들이 나를 기다린 건 역시 대공 전하의 편지 때문이겠지."
놈이 품에 손을 넣자, 양쪽에 있는 기사들이 검을 뽑았다. 챙-.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지만, 놈은 눈 하나 꿈적하지 않았다.
"대공 전하의 편지일세. 자네들 너무 날이 서 있군."
놈이 제 목을 겨눈 검을 보며 혀를 찼다.
놈의 말이 맞았다. 놈을 기다린 건 놈이 받았다는 대공의 명령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맞네. 대공의 명령을 받았다고 들었-."
"어허, 대공 전하일세. 어딜 감히 대공이라 칭하는가?"
같잖은 말꼬리 잡기에 데블리안은 눈을 찡그렸다. 부대장이 데블리안을 응시했다. 그 눈빛이 묻는 듯했다. 저걸 가만히 둘 거냐고-.
데블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연회장은 이쪽의 인원으로 가득했다. 선택받은 기사들과 마법사들, 준비는 완벽했다.
곧 죽을 놈이 까분다고 화를 낼 필요 없었다. 급할 이유도 없었고-.
"그래, 대공 전하."
"음, 그렇지. 이번만 봐주는 걸세. 다음부터는 조심하게나."
데블리안은 살짝 입술을 씹었다. 사람 신경 긁는 솜씨가 상당했다.
"자, 대공 전하의 명령을 전달하겠네! 다들 고개를 조아리게. 음, 안 조아리는군. 뭐 나도 그렇게 빡빡하진 않다네."
큼큼, 놈이 목을 가다듬었다.
"마족을 막으랬더니, 오히려 마족에 붙어먹은 빌어먹을 놈들아-! 아, '빌어먹을'에 강조 표시가 되어 있네."
놈이 검지와 중지를 굽혔다가 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진짜 미친놈이군.'
데블리안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용서받고 싶다면 혀를 빼물고 죽어라."
"이노옴-!"
"왜 나한테 화를 내는가. 나는 읽은 것뿐일세."
부대장이 벌떡 일어나자, 놈이 과장되게 양손을 올렸다. 부대장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곧 죽을 놈의 유치한 도발이니 진정하게. 좋은 날이잖나."
데블리안의 말에 부대장이 뜨거운 숨을 내쉬면서 다시 앉았다.
"궁금한 게 하나 있네."
데블리안은 사내를 보며 물었다. 사내가 물어보라는 듯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마법으로 마물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있더군."
데블리안은 궁금했던 걸 물었다.
다른 마법사들이 숨을 들이켰다. 마법으로 마물을 잡다니-. 그게 무슨 하극상이란 말인가.
"음, 어떤 마물을 말하는 건가?"
사내의 대답에 데블리안은 눈을 찡그렸다.
그건 잡은 마물이 한 마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쯧-. 허세인가.'
"마물은 그다지 어려운 놈들이 아니지. 문제는 마족일세. 자네 마족의 피가 농도 짙은 마나를 함유하고 있다는 걸 아는가?"
흑마법학회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괜히 마족을 축복받은 존재라 추앙하는 게 아니었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데블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마법사들도 몸을 살짝 기울였다.
"그래, 피에 짙은 농도의 마나가 흐르니 웬만한 마법은 통하지 않는다네. 마나는 농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니까."
마법사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의 목소리에는 집중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러니 마족에게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마나를 최대로 압축해야 하네. 확실히 마족은 마법사의 천적이더군."
"진짜 마족을 잡았다는 건가?"
어떤 마법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농도가 관건일세. 마나 압축을 해야지."
"마나 압축?"
"설마 마나 압축도 모르나?"
사내의 물음에 잠시 조용해졌다.
"오, 맙소사."
사내의 얼굴에 명백한 경멸이 떠올랐다. 그에 데블리안은 눈을 구기며 대답했다.
"마나를 왜 압축하나. 우리에게는 마석 지팡이가 있는데."
데블리안의 말에 다들 마법사들이 끄덕였다. 사내가 짙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그러니까 북부에 있겠지. 이해하네."
사내의 이죽거림에 마법사들의 얼굴이 구겨졌다.
데블리안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이놈이 봐주니까 주제를 넘는구나!"
데블리안의 지팡이가 사내를 겨눴다. 다른 마법사들도 지팡이를 잡았다. 기사들이 검을 뽑았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다.
사내는 전혀 기죽은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더 크게 혀를 찼다.
"마나 압축도 모르면서 마법사라고 뻗대는 게 더 주제를 모르는 걸세."
사내는 손가락으로 마법사들을 가리키며 힐난했다.
"마나 압축은 선택받지 못한 네놈에게나 필요하겠지."
그때, 놈과 가까이에 있는 마법사가 팔뚝을 걷었다.
선택의 증거,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사내가 마법사의 팔뚝을 잡았다. 제 목에 겨눠진 검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검이 살짝 물러났다.
"최초의 마법사가 남겼다는 마법진인가. 확실히 흥미롭군."
최초의 마법사를 알고 있군. 데블리안은 눈을 찡그렸다.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너 까마귀를 포섭했구나."
"비슷하네. 팔 좀 돌려주겠는가? 잘 안 보여서 말이지."
"그만! 회의장에 혼자 나타났을 때부터 이상했다. 그냥 미친놈이었군."
"음, 궁금한 게 하나 있네."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놈이 손을 들었다.
끝까지-.
'아니, 휘말리면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화를 내는 건 오히려 놈에게 말리는 거였다.
데블리안은 짜증을 애써 누르며 끄덕였다.
"뭐지?"
"보통 이렇게 혼자 와서 뻗대면 뭔가 있는지 의심하지 않나?"
놈의 물음에 데블리안은 끌끌 웃었다.
뭐가 있다니-.
여유를 보면 뭔가 꿍꿍이가 있을 수도 있었다.
다만-.
"네가 뭘 할 수 있지?"
데블리안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선택받은 기사가 열을 넘었고, 지팡이를 소지한 마법사가 여덟이었다.
여기서 놈이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음, 이렇게 화려한 말주변으로-."
화려한 말주변-?
괴상한 대답에 데블리안은 눈을 찡그렸다.
이내 기시감이 선명해졌다.
"자네들을 묶어둘 수 있지."
사내가 손가락을 튕겼다.
이제껏 들리지 않던 소음이 들어왔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누군가의 비명, 기합 소리-.
그때, 누군가 문을 거칠게 부수며 들어왔다.
"기사- 길버튼!"
꼴이 엉망이지만 눈은 또렷한 기사였다. 그 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갈라하드에 검을 겨누고 있던 기사들이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부서진 문 너머로 엉망인 복도가 보였다. 병사와 기사가 뒤섞여 검을 나누고 있었다.
검을 거꾸로 잡은 소년이 병사를 위에서 아래로 갈랐다. 비명이 터지며 붉은 피가 길게 뿌려졌다. 다른 병사가 소년에게 검을 찔렀다.
그때-.
"이 호로 새끼들."
봉이 병사의 머리를 박살 냈다. 노인이 붉은 봉을 돌리며 들어왔다.
흑마법학회의 지하에 가둬둔 7대대 대장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까마귀 이 새끼-.'
"데블리안! 대장을 처리했다고 하지 않았소!"
"이런 호로 새끼가-. 처리를 해?"
"젠장! 이건 약속과 다르잖소!"
부대장이 노인의 눈을 피하면서 소리쳤다.
순식간에 방이 엉망이 됐다.
놈의 뒤로 사람들이 섰다.
소년, 하녀 복을 입은 여인, 봉을 든 노인, 멍청한 투구를 쓴 기사, 방패를 든 병사, 기사까지. 어떻게 모았는지 궁금할 정도로 다양한 구성이었다.
'시간을 끌기 위해 혼자 와서 떠들었다-. 마나를 뿌려서 소음을 철저하게 막고? 가능한 일인가?'
데블리안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과감하다는 수준을 넘어선 행동이었다.
놈이 도착하고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다.
그사이에 7대대 대장을 구해내고 직접 들어와서 시간까지 끌었다. 기어코 상황을 이렇게 만들다니-.
어떻게 했는지 궁금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마아안-!"
데블리안의 고함에 모두가 멈췄다.
"훌륭하군."
"내가 원래 좀 훌륭하다네."
"그래, 대단해. 인정하지."
다만-.
"내가 까마귀를 믿었을 것 같나?"
데블리안은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고맙군, 우리의 일을 대신해줘서 말이야."
그들의 몸에 묻은 붉은 피를 보며 웃었다. 데블리안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웃었다.
기사들이 검을 뽑았다. 잿빛이 서서히 퍼졌다. 음산한 오러가 영역을 넓혔다. 일반 기사보다 더 강한 선택받은 기사의 수가 열을 넘었다.
데블리안을 포함하여 간부가 둘, 쓸만한 마법사가 여덟이었다. 전부 선택을 받은 이들이었다.
거기에-.
문득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팔목에 새긴 선택의 증거가 반응했다.
데블리안의 앞에 반투명한 방어막이 떠올랐다. 그에 막힌 얼음송곳이 흩어졌다. 차가운 파편이 볼을 간질였다.
"이런 비겁한······."
데블리안은 눈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아깝군."
입맛을 다시는 놈에 데블리안은 지팡이로 땅을 두드렸다.
콰아아아앙!!
천장이 거칠게 무너졌다.
천장을 부순 거대한 촉수가 놈들을 내려쳤다.
노인이 그를 오러가 담긴 봉으로 흘렸다. 촉수가 부딪치며 뒤에 있던 벽이 처참하게 부서졌다. 촉수는 멈추지 않고 다시 내려쳤다.
멍청한 투구를 쓴 기사가 나서려는 찰나, 길버튼이라는 놈이 나섰다.
놈들이 있던 곳이 촉수에 밀려 무너졌다.
무너진 틈으로 들어온 서늘한 밤공기가 데블리안의 얼굴을 훑었다.
"출범식에 고작 상급 마족 정도로 되겠는가?"
놈들이 있었던 곳이 허물어져 있었다.
데블리안은 그 끝에 서서 아래를 쳐다봤다.
그 건방진 놈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했다.
놈은 멍청한 투구를 쓴 기사에게 안겨서-.
위를 올려보며-.
'······웃어?'
웃고 있었다.
그 미소에 데블리안은 묘한 서늘함을 느꼈다.
****
"생각보다 준비를 많이 했군."
갈라하드는 위를 올려보며 혀를 찼다.
성 주변으로 거대한 촉수 여섯 개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 하나하나의 크기와 위력이 살벌했다.
그때, 멍청한 투구가 가까이 다가왔다. 너머로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갈라하드가 괜찮은지 확인하는 듯했다.
"괜찮네, 내려주겠나?"
끄덕.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부드럽게 내려놨다.
"그때랑 비슷합니다. 기본적으로 상급인 마물을 억지로 끌어올린 느낌입니다."
길버튼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팔호때 봤던 마족물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확실히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 저런 걸 풀어놓으면 놈들도 위험하지 않나?"
길버튼의 혼잣말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확실히 제어가 되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런데 촉수는 놈들이 아닌 이쪽을 향했다. 마치 놈들이 안 보이는 것처럼-.
'아, 선택이라고 부르는 그건가 보군.'
최초의 마법사란 놈의 마법진과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저 멀리에서 잿빛의 불덩이들이 날아왔다. 대충 봐도 열 개가 넘었는데,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지팡이에 의존하는 가짜 마법사가 뿌릴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이건-.'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며 손을 튕겼다. 스파크가 빠르게 쏘아졌다.
스파크가 불덩이의 중앙을 정확히 노렸지만, 오히려 스파크가 사라졌다.
'마나 농도가 높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압축해서 다시 튕겼다.
그제야 불덩이가 흩어졌는데, 그 속도가 느렸다. 흩어지는 속도로 농도를 역으로 계산했다.
'마나 농도가 상당히 높군. 거기에 시전 속도도 짧아. 어째서?'
갈라하드는 고민하며 손가락을 연속으로 튕겼다. 전과 달리 압축해야 하는 터라 시간이 부족했다.
"폭발화구!!"
그웬의 불덩이가 마지막 불덩이에 직격했다. 그웬의 마법은 불덩이를 없애지 못했지만, 방향을 바꿨다. 잿빛 불덩이가 뒤쪽에 떨어졌다.
재가 가득 퍼지며 대지가 흔들렸다.
'좋지 않군.'
갈라하드는 수통의 뚜껑을 열었다.
"이런 놈들이 내려오는군!"
그때, 노인이 소리쳤다. 잿빛을 머금은 기사들이 뛰어 내려오는데, 그 속도가 상당했다.
"기사- 길버튼-!"
길버튼이 자기소개를 하며 앞으로 나섰다. 노인이 봉을 휘두르며 그를 따랐다. 데미안이 움직였다.
'쉽지 않군.'
상급을 넘어선 마족물과 마족 기사들, 지팡이와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진으로 무장한 마법사까지-.
그 전력이 상당했다.
놈들이 여유를 부린 이유가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아드리안나가 제 투구를 두드렸다.
'이쪽에는 아드리안나가 있지.'
갈라하드는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촉수들이 음산하게 까닥거리고 있었다.
"저거 처리할 수 있나?"
끄덕.
"이곳이 마경이라면?"
아드리안나가 침묵했다.
"음, 지원군이 필요하겠군."
갈라하드는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이쯤이면 도착하지 않았을까.
멍청한 투구가 흔들거렸다.
"그런 게 있네. 자, 가지."
****
'도대체 뭐 하는 놈이지?'
데블리안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이쪽은 상급 마석이 박힌 지팡이에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진까지 사용 중이었다.
어떤 마법사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놈을 만나기 전까지는-.
놈은 그저 손가락을 까닥거리는 걸로 그들의 마법을 부수고 있었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괜히 학회장님이 경계한 게 아니었군.'
다만, 그래 봤자였다.
"성역을 펼치거라."
데블리안은 뒤쪽에 손짓했다. 학회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부서진 벽 너머로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심혈을 기울인 마법진이었다. 마법진 위에 마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제껏 흑마법학회가 모은 마석들이었다. 저 가치만 해도 얼마인가. 값을 매길 수도 없었다.
거대한 지팡이를 마법진에 꽂았다. 마법진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빛을 뿜어냈다.
그때-.
"으········· 으아아아악! 살려주십쇼!"
마법진 옆에 있던 놈이 피하지 못하고 빨려 들어갔다.
'멍청한 놈.'
데블리안은 욕을 중얼거리며 물러났다.
마석들이 재로 변했다. 더럽고 매캐한 냄새가 방을 가득 채우더니 이윽고 거칠게 퍼졌다.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유산이었다. 먼지로 변한 마석이 휘날리며 재처럼 뿌려졌다.
재가 순식간에 영역을 부풀렸다.
데블리안은 입과 코를 가렸다.
퍼지기 시작한 재는 피를 빨아 마시며 더욱 짙어졌다.
이내 사방이 재로 가득 찼다.
성역이었다.
···············!
마물이 거칠게 울부짖었다. 환희가 가득했다.
그 목소리에 담긴 힘에 데블리안은 몸을 떨었다.
분명 같은 쪽이라는 걸 알고 있어도 두려울 정도로 거대한 존재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상급인 마물이었다. 그런 마물이 성역에 들어왔으니 어떻겠나.
놈은 이제 멈출 수 없는 재앙이었다.
데블리안은 다급하게 팔뚝을 살폈다. 새겨둔 마법진이 붉게 물들어 타올랐다.
'제대로 작동하고 있군.'
잿빛이 강해졌다. 선택받은 기사들이 마물처럼 울부짖었다.
상대의 존재는 데블리안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성역이 발동한 이상 놈들이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설령 그 아드리안나가 오더라도-.
"이로써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데블리안은 뜨거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학회원들이 감회가 가득한 눈으로 데블리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데블리안은 그들 하나하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수가 정확히 맞았다.
'······분명 아까 하나 빨려 들어갔는데?'
데블리안은 다시 살폈다.
역시 수가 똑같았다.
'아닌가?'
그 제일 마지막에-.
"이런 들켰군."
놈이 환히 웃고 있었다.
굉장히 기쁜 일이 있는 것처럼 정말 환하게-.
"어떻게 왔냐는 눈빛이군."
놈이 입꼬리를 올리며 소매를 걷었다.
거기에-.
"나도 하나 장만했네."
선택의 인장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장만했다?'
데블리안의 사고가 멈췄다.
****
···············!!
끔찍한 비명에 톰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거대한 촉수가 환희를 나타내듯 거칠게 꿀렁였다.
자욱한 안개에 숨이 턱- 막혔다. 주체 못 할 공포가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손가락을 움직일 힘도 없었다.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저 거대한 절망이 울부짖고 있는데-.
자욱하게 깔린 재가 거대한 절망에 휩싸이며 흩날렸다.
성이 부서졌다. 땅이 엎어졌다. 대지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건 항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때-.
하얀 불빛이 번쩍였다.
짙은 재를 가르며 거대한 절망으로 나아가는 이가 있었다.
북부의 영웅 아드리안나였다.
'아-.'
어찌 저렇게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절그럭-. 불쾌한 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기사였던 것, 이제는 마물이 된 무언가가 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잿빛으로 가득한 적의를 드러내면서-.
톰은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물이 톰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그 사이로 기사의 얼굴이 보였다. 톰을 보며 침을 가득 흘리고 있었다.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마당이라-."
짐승이 울부짖는 것처럼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다가오던 놈이 갑자기 사라졌다.
뿌득, 작은 소리가 전부였다.
힘을 잃은 마물이 그대로 쓰러졌다.
"그놈 말처럼 만찬이겠군."
대공은 언제 뽑았는지 모를 촉수를 입에 넣고 씹으며 전진했다.
42화 준 적 없는 선물
'후우······.'
길버튼은 들뜬 숨을 내쉬면서 검을 고쳐 잡았다.
푸른 오러가 바람에 흔들리듯 일렁였다.
사방이 어두웠다. 캄캄했다. 좀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마경-.'
북부에서 마경이 발생하다니.
'이 망할 것들이······.'
길버튼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오러를 너무 많이 사용한 탓에 정신이 몽롱했다. 고개를 흔들고 검을 굳게 잡았다.
"거기 괜찮나?"
고개를 돌리니 7대대 대장, 노인 벨로그라임이 있었다.
"예, 멀쩡합니다."
"멀쩡하기는-, 자네 눈이 나갔다네."
벨로그라임의 지적에 길버튼은 주먹으로 자기 얼굴을 때렸다.
퍽! 시원한 소리와 함께 시야가 돌아왔다. 경악한 얼굴의 벨로그 라임이 또렷하게 보였다. 고쳐졌다.
"해결됐습니다."
"····자네는 좋은 기사가 되겠군."
"이미 기사입니다만."
길버튼의 대답에 벨로그라임이 끌끌- 웃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네."
"예."
길버튼은 숨을 고르면서 끄덕였다. 벨로그라임이 봉을 빙글- 돌렸다.
벨로그라임의 오러는 옅었다. 안개처럼 흐릿하여 언뜻 보면 약해 보였지만, 그건 숙성된 부드러움이었다.
뒤에서 나타난 마물이 봉에 휘말리듯 이끌렸다. 그에 마물의 자세가 바뀌며 허점이 온전히 드러났다.
벨로그라임의 봉이 훤히 열린 마물의 턱을 박살 냈다.
저런 노련함이라니. 길버튼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기사 어쩌고. 그거는 왜 하는 건가?"
벨로그라임이 봉을 털며 묻었다. 벨로그라임의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그건 감금 때문이었다. 전투에서 다친 건 없었다.
"기사 길버튼! 말입니까?"
"그래, 그거."
"아버지가 알려줬습니다. 말에는 힘이 있다고."
"힘?"
"예, 어릴 때부터 기사가 되고 싶어서 계속 '기사- 길버튼!'을 외치다가 습관이 됐습니다."
"그렇군."
"폭발화구-!!"
그때, 그웬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욱한 재로 어두웠던 공간이 순간 밝아졌다.
그 너머로 핏발 선 그웬이 보였다. 그 손에서 불덩이가 날아갔다.
콰아앙!
전보다 더 큰 소리가 터졌다. 그웬의 얼굴은 절박한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방향에 데미안이 있었다. 데미안은 팔 한쪽이 바깥으로 꺾여 달랑거리며 마물 사이에서 구르고 있었다. 표정은 웃고 있었다.
길버튼은 손바닥에 퉤- 하고 침을 뱉고 검을 굳게 잡았다.
"기사-!"
힘껏 외치니 오러가 다시금 일어났다. 물에 젖은 것처럼 무거운 몸이 다시 움직였다.
기사는 영광이자, 무거운 책임이었다.
"길버튼!"
오러가 더욱 크게 일어났다. 길버튼의 근육이 뿌득-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질렀다.
그대로 땅을 박찼다. 길버튼의 신형이 미끄러졌다.
데미안을 노리는 마물에 푸른 선이 그어졌다.
마물의 등이 갈라지며 뜨거운 피가 튀었다. 길버튼은 눈을 감지 않고 허리를 돌렸다. 검이 다시금 선을 그었다.
마물이 길게 비명을 질렀다. 그 아래에 있던 데미안이 검을 찔러 넣었다. 큰 비명이 터졌다.
다른 마물이 데미안에게 검을 찔렀다. 길버튼은 이를 질끈 깨물며 데미안의 멱살을 잡아서 당겼다.
뿌드득-, 근육이 어긋난 듯 비명을 질렀다.
마물의 검이 길버튼의 어깨를 길게 그었다. 길버튼의 손이 풀어 졌다. 길버튼은 그대로 머리를 박았다.
쿵!
마물이 흔들렸다. 데미안의 검이 마물의 목을 헤집었지만, 오러가 없어 그 흉터가 약했다.
데미안의 감정 없는 눈동자가 길버튼을 응시했다.
'재수 없는 꼬맹이-.'
길버튼은 나지막한 욕을 중얼거리며 앞으로 한 발 나섰다. 마물의 공격이 길버튼의 가슴에 직격했다.
길버튼은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마물의 머리에 검을 찔러넣었다.
피가 가득 뿌려졌다.
그제야 참았던 숨이 터졌다. 격양된 정신에 밀려있던 고통이 한 번에 올라왔다.
애써 호흡을 다스리는데, 데미안이 빤히 쳐다봤다.
"그거 어떻게 해요?"
"그거?"
데미안의 손가락은 길버튼의 오러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러?"
"네. 그거 좋아 보여요."
오러는 모든 검을 잡은 이의 이상이자, 기사의 상징이었다.
그런 오러가 고작 좋아 보인다니. 어이가 없었다.
"쯧, 오러는 말이다-."
설명하려던 길버튼은 말을 멈췄다. 막상 말로 하려니 설명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오러는 신념이다-.' 같은 진부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오러는 신념일세."
"신념이요?"
어느새 옆에 온 벨로그라임이 끄덕였다.
설명을 들은 데미안이 눈을 찡그렸다. 이해되지 않는 눈치였다.
길버튼은 풋하고 혀를 찼다. 그런 두루뭉술한 설명은 녀석에게 그다지 도움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오러는-"
입을 열자 자연스레 길버튼에게 시선이 쏠렸다.
길버튼은 입꼬리를 올리며 설명했다.
"안 마려운 똥을 손으로 싸는 느낌이다. 손으로 똥을 싸는 거지."
길버튼은 친절하게 손 모양까지 알려줬다. 그웬이 질겁했다. 데미안은 길버튼을 따라 손을 오므렸다가 폈다.
"물론 알려준다고 금방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오러는 모든 검사가 닿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길버튼은 검을 고쳐 잡으며 말했다.
그때, 데미안의 검이 잠깐 일렁였다.
'어···· 설마?!'
길버튼은 황급히 눈에 힘을 줬다. 데미안의 검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 그럴 리가 없지.'
잘못 본 모양이었다.
"아, 참. 막내는 어디 갔지? 이 멍청한 새끼 어디 가서 뒤진 거 아니야?"
길버튼은 노아드를 찾았다. 아까 어디로 사라지더니 안 보였다.
"대장이랑 같이 갔어요!"
"이런! 막내가 위험하게-."
길버튼은 혀를 차면서 검을 고쳐 잡았다.
"자네 어디 갈 셈인가."
벨로그라임의 물음에 길버튼은 정면을 가리켰다.
자욱한 연기 너머에서 번개가 번쩍였다. 그러자 연기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
전설에나 나올 법한 거대한 크기였다.
여기가 마경이 아닌 북부라니-.
"늦게 가면 대장이 구박할 겁니다."
"지금 저거와 싸우겠다는 건가?"
"예."
길버튼은 헐렁이는 오른쪽 어깨를 주먹으로 때려서 고쳤다.
아직 움직일 수 있었고, 손에 검이 있었다.
기사인 길버튼에게는 그거면 충분했다.
"젊음이 좋군."
벨로그라임이 혀를 끌끌 차면서 옆에 섰다.
그때, 거대한 촉수 하나가 길버튼 쪽으로 떨어졌다.
그 크기가 얼마나 거대한지 절로 손끝이 아렸다.
스치는 것만으로 성을 박살내는 촉수였다.
그에 반해 길버튼의 손에 들린 건 검 한 자루였고.
'충분하네.'
나약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길버튼은 그렇게 생각이 많지 않았다.
길버튼은 그저 기사답게.
"기사-! 길버튼!"
검을 고쳐 잡았다.
오러가 활활 타올랐다.
'벤다!'
이윽고 거대한 촉수를 향해 검을 휘두를 때-.
"비키도록."
바로 뒤에서 나지막한 명령이 들렸다.
동굴 깊숙이 숨은 맹수 같은 목소리-.
길버튼은 무의식적으로 비켜섰다.
마물처럼 거대한 덩치-. 살이 얼 정도로 추운 북부인데, 탈의한 상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근육 위에는 굵은 상처들이 즐비했다.
손에 든 건 그저 투박하고 큼지막한 도끼였다.
'······대공 전하?'
길버튼은 고개를 조아렸다.
대공은 큼지막한 도끼를 빙글 돌렸다.
오러는 없었다.
아니, 필요 없다는 게 더 적합한 표현이었다.
그 무식하게 거대한 도끼는 마물의 처형대였다.
대공이 도끼를 높이 들었다.
그 상처 가득한 근육들이 꿈틀거리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건 환희였다.
떨어지는 거대한 촉수에-.
대공은 온몸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대공이 도끼를 길게 휘둘렀다.
콰직.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그 결과는 단순하지 않았다.
쿠우웅!
반으로 잘린 촉수가 힘을 잃고 쓰러졌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땅이 거칠게 흔들렸다.
대공은 가볍게 도끼를 몇 번 더 휘둘렀다.
촉수가 적당한 크기로 잘렸다.
'······적당한 크기?'
대공은 그를 집어 그대로 입에 가져갔다.
우드득-.
살벌한 소리와 함께 대공의 목적이 크게 꿀렁였다.
"나쁘지 않군."
그리 말하며 웃는 대공에게서 왠지 모르게 갈라하드가 보였다.
"북부의 지배자를 뵙습니다."
벨로그라임이 극진한 예를 갖췄다.
길버튼은 대공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
'최초의 마법사라-.'
갈라하드는 제 팔뚝에 새긴 마법진을 응시했다.
급하게 새긴 터라 아직 피가 멎지 않았다.
최초의 마법사가 남겼다는 마법진은 확실히 다른 마법진과 궤를 달리했다.
마법진의 중첩된 방식이 상당히 투박하면서도 특이했다.
요즘 쓰이는 방식과 달랐다.
그중에서 제일 특이한 건-.
'마나를 심장으로 압축하는군.'
본래 마나는 심장 주변에 자리했다. 고통의 알이 심장 옆에 위치 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다만, 마나를 움직이는데 심장을 쓰지는 않았다.
애초에 마나는 무형의 것이었다.
거기에 심장이 관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놈들이 선택이라고 부르는 이 마법진은 그를 가능케 했다.
이건 꼭-.
'고통의 알 같지 않은가.'
갈라하드는 짙은 흥미를 느꼈다.
고통의 알과 흡사한 방식이었다.
이 마법진은 심장을 고통의 알처럼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다른 건 고통의 알은 마족의 피에서 알아서 추출하여 마나만 주고, 이 마법진은-.
'술자의 피를 쓰는군.'
고통의 알과 흡사한 방식이었다. 고통의 알이 원천인 고위 마족의 능력을 흉내 낸 것 같았다.
그저 흉내였다.
'술자의 피에 담긴 생명력으로 마나를 압축한다.'
마나라는 가상의 엔진이 있다면, 이 마법진은 생명력을 오일로 넣는 거였다.
보다 더 빨리 마나가 압축되도록-.
'아, 생명력이었군.'
갈라하드는 고통의 알이 마족의 피에서 꽁치던 게 생명력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부르르-, 고통의 알이 작게 떨었다. 정답이군.
마법에 생명력을 쓴다니-. 갈라하드에게는 다소 익숙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옛 세대의 마법인 탓이었다.
"그사이에 마법진을 새겼다는 거냐?"
경악에 찬 목소리가 갈라하드의 상념을 깼다.
그에 고개를 드니, 간부라는 놈이 경악 어린 얼굴로 갈라하드를 보고 있었다.
갈라하드는 놈의 의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법진을 새기는데, 오래 걸릴 이유가 있나?"
그냥 보고 따라 그리는 것이었다. 다소 따가웠지만, 고통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마법진이 너무 흥미로워서 고통도 안 느껴졌다.
"거짓말하지 마라! 이 마법진은 여덟 겹으로 구성된 마법진이다! 잠깐 봤다고 흉내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배신자 놈이 어디까지 알려준 거냐!"
간부가 입에서 침까지 튀겨가며 소리쳤다. 그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아, 정확히 말하자면 따라 한 게 아닐세, 예전 마법진이라 그런지 불필요한 부분이 좀 있더군. 꺼림직한 곳도 있고. 그에 나름 개정을 했다네."
갈라하드는 친절히 제 팔목을 보여줬다.
거기에는 놈의 것과 흡사한 마법진이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부분이 더 많았다.
확실히 매력적인 마법진이었지만, 구시대의 것이었다. 고통의 알이 있으니 굳이 심장을 쓸 필요가 없었기에, 갈라하드의 입맛대로 바꾼 마법진이었다.
"······개정? 닥쳐라!"
놈이 더욱 발작하듯 소리쳤다. 말이 안 통하는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주변에 뿌려진 자욱한 재는 분명 마경이었다. 마족의 영역도 아닌 마경을 재현하다니. 상당히 흥미로웠다.
"하나만 묻겠네. 마경을 펼치다니 어떻게 한 건가?"
"마경이 아니라 성역이다."
"그래, 성역 말일세."
갈라하드의 물음에 간부가 미소를 지었다. 억지로 올린 건지 입 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내가 알려줄 것 같나?"
간부가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간부의 팔목에 새겨진 마법진이 영롱한 빛을 뿜어냈다. 그 빛이 지팡이로 이어졌다.
마석 박은 지팡이가 마나를 공급하고, 팔목에 새겨진 마법진이 술자의 피를 이용하여 압축한다-.
술자인 놈이 하는 거라고는 마법의 목표를 정하는 것과 피를 제공하는 것밖에 없었다.
언뜻 보기에는 간편해 보였지만, 저걸 마법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저건 길버튼 경도 할 수 있겠군.'
갈라하드는 지독한 혐오를 느꼈다.
"퍼부어라!!"
지팡이를 든 놈들이 이쪽을 보며 마법 같지도 않은 걸 뿌리고 있었다.
'음-'
고통의 알이 거칠게 뛰었다. 놈은 당장이라도 뛰어나올 것처럼 뛰고 있었다. 그 뜀박질마다 환희가 넘실거렸다.
그때, 갈라하드의 팔목에 새겨진 마법진이 불타듯 빛을 뿜어냈다.
갈라하드는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진을 똑같이 그리지 않았다. 갈라하드에게는 심장을 대신할 고통의 알이 있었다.
술자의 피 대신 고통의 알이 마족의 피에서 꽁친 생명력을 쓸 생각이었다.
'고통의 알이 압축해둔 마나를 생명력으로 한 번 더 압축하는 거지.'
아마 최초의 마법사란 농도 이런 방식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고통의 알이 마법진과 공명하듯 진동했다. 고통의 알이 힘차게 흔들렸다. 따지는 듯했다. 기어코 이것까지 가져가야 하냐고.
'저걸 잡으면 더 맛있는 게 나올걸세.'
갈라하드는 놈들의 뒤쪽에 있는 거대한 존재감을 속삭였다.
'무릇 더 큰 거를 봐야지.'
그제야 고통의 알이 끄덕였다. 놈이 위협하듯 심장을 살짝 깨물었다. 거짓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했다.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네.'
고통의 알이 공명하듯 두근거렸다. 마법진의 색이 더욱 밝아졌다. 마나가 빠르게 흔들렸다.
잿빛 불덩이들이 떨어졌다.
"끔찍하군."
갈라하드는 짙은 짜증을 느끼며 손가락을 튕겼다.
****
'멍청한 놈-.'
데블리안은 불덩어리에 가려진 놈을 보며 이죽거렸다.
놈의 팔뚝에 선택의 증거가 있었지만, 그래 봤자 놈은 혼자였다.
그때, 작은 바람이 붙었다.
'······저게 무슨-.'
쏟아지던 불덩어리들이 순식간에 힘을 잃었다.
형체를 잃고 떨어져서 그저 불길처럼 일렁였다.
마나가 힘을 잃고 스러지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상대의 마나 농도가 더 짙을 경우.
'······나보다 마나가 짙다고?'
데블리안은 상급 마석이 박힌 지팡이에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선택의 증거까지 지닌 상태였다. 더불어 성역까지 열었다.
그런 데블리안보다 놈의 마나 농도가 짙을 수 있다고-?
말이 되지 않는 가정이었다.
그때.
불길 사이로 뭔가 날아왔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도 보이지 않았다. 작은 소리가 전부였다.
툭. 뭔가 쓰러지는 소리-.
마법사 하나가 뒤로 쓰러졌다. 목 중앙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다시 툭-.
다른 하나가 또 쓰러졌다. 목에 뚫린 구멍-. 정확히 같은 위치였다.
붉은 피가 경고하듯- 꿀렁였다.
"방어막을 시전해라!"
데블리안은 황급히 방어 주문을 외웠다.
마법사들 앞으로 순식간에 반투명한 방어막이 떠올랐다. 다른 마법사들이 한데 모여 방어막을 몇 겹으로 덮었다. 죽음의 공포에 말도 필요 없었다.
그때-.
다시금 마법사 하나가 쓰러졌다.
몇 겹으로 덮은 방어막이 가벼이 뚫려 있었다.
마치 종잇장처럼-.
툭-.
또한 놈이 쓰러졌다. 비명조차 없었다. 그저 숨 삼키는 소리가 전부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데블리안은 좀처럼 상황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때, 불길이 갈라지며 놈이 걸어 나왔다.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에 깔끔히 넘긴 머리-.
그 모습이 연회장에 들어올 때와 같았다.
놈이 손가락을 튕겼다.
툭-.
마지막 남은 마법사가 뒤로 쓰러졌다.
데블리안은 다리가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뜨거운 피가 데블리안을 가득 적셨다.
놈은 급하지도 느긋하지도 않은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내 바로 앞에 도착한 놈이 데블리안을 내려봤다.
놈과 눈을 마주한 데블리안은 공포에 가득 찬 비명을 내뱉었다.
"호········ 혹시 마족이십니까?"
"음, 미안하지만, 인간이라네."
놈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진득한 피 냄새와 어울리지 않게 깔끔했다.
"아, 선물은 고맙네."
선물이라니-.
놈이 제 팔뚝을 가리켰다.
팔뚝 위로 선택의 증거가 선명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데블리안이 새긴 것보다 더욱 밝게-.
"나는 준 적 없······."
데블리안의 목소리는 끝을 맺지 못했다.
****
"고맙네, 잘 쓰겠네."
갈라하드는 다시 감사를 표하고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촉수가 움직이며 열심히 성을 부수는 중이었다.
그 아래에 흰색 빛이 위태롭지만 고고하게 존재했다.
아드리안나는 혼자서 저 거대한 괴물을 상대하고 있었다.
충분히 경이로운 일이었지만.
'부족하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후에 마족의 왕을 상대해야 하는 아드리안나였다.
상급에서 억지로 끌어올려 최상급이 된 놈한테 고전하는 건 다소 부족했다.
'성장이 필요하겠어.'
실전만큼 성장하기 좋은 환경도 없었다.
그때-
···············!!
마물이 고통스럽다는 듯 울부짖었다.
저 거대한 마물이 고통을 느끼다니.
고통에 몸부림치는 촉수가 거칠게 움직이면서 재를 밀어냈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트였다.
저 멀리-.
촉수를 문어처럼 뜯어먹는 야만인이 있었다. 수염이 가득한 입가로 삐져나온 거대한 촉수가 살려달라는 듯 꿈틀거렸다.
붉은 피에 가득 물든 대공이 갈라하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득-.
살벌한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기분이었다.
'음, 이건 위험하겠는데.'
이내 재가 다시 주변을 가렸다.
갈라하드는 서늘한 목을 괜히 매만졌다.
"부인!"
갈라하드는 황급히 아드리안나에게 향했다.
본디 자식 이기는 부모 없었다.
대공도 부모였다.
43화 빈 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