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땅강아지
숲은 빛 하나 안 들어올 정도로 어두웠다. 그 사이로 떨어지는 눈이 하얀색이 아닌 회색으로 보일 정도였다. 꼭 재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마물이 있을 만한 분위기군."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연초를 입에 물었다.
"아, 여기 횃불 챙겨왔습니다. 하나씩 받으십쇼."
톰이 횃불을 하나씩 나눠줬다. 기름 타는 냄새가 짙게 풍겼다.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길버튼이 검을 뽑고 앞으로 나섰다.
"괜찮네, 걸리적거리니 뒤로 비키게."
"예."
"자네, 포기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
길버튼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갈라하드는 피식 웃으며 양 손바닥을 펼쳤다. 마나를 압축하고 풀고, 압축하고 풀었다. 준비동작이었다.
손가락을 튕기자, 자그마한 마나 화살이 손가락 위로 떠올랐다.
꿀꺽-.
"침 닦게, 그웬."
화들짝 놀란 그웬이 입을 닦았다. 점점 마법에 대한 충동이 심해지는 듯했다. 바람직한 현상이었다.
갈라하드는 마나 화살의 크기를 확인하며 걸었다.
마나는 늘 농도가 약한 곳에서 짙은 쪽으로 흘렀다.
마나 화살이 살짝이라도 작아진다는 건, 주변의 농도가 전보다 짙어진다는 뜻이었다.
그 크기를 가늠하며 방향을 잡고 나아갔다.
"꺄아아악!"
그웬이 구덩이에 빠져 있었다.
"저 발견했어요!"
흙투성이가 된 그웬이 해맑게 웃었다.
"이거 땅강아지 마물입니다."
톰이 이마 가득한 땀을 닦으며 말했다.
"땅강아지 마물?"
"예, 굴을 파고 다니는 놈들인데, 저런 식으로 구덩이가 남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아, 전선에서 살아남으려면 기본적으로 외워야 합니다. 땅강아지는 한 번 나타나면 그 주변을 포기할 정도로 골치 아픈 마물입니다."
"땅강아지 마물에 대해서 더 아는 거 있나?"
"그- 굴을 파고 다녀서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땅속에 숨어있다가 튀어나와서 인간을 물고 가는 탓에 상당히 골칫거리입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구덩이에 뛰어들었다.
"구하러 오셨군요!"
그웬이 내민 손을 옆으로 밀어내고 사방을 콕콕 찔렀다. 전부 막혀 있었다.
'딱히 단서는 없군.'
작게 혀를 차고 다시 위로 올라왔다.
"저는요!? 너무해!"
그웬이 톰의 손을 잡고 올라왔다.
"길버튼, 자네는 뭐 아는 거 없나?"
길버튼이 진지한 표정으로 구덩이를 내려봤다. 그래도 전선에서 잔뼈가 굵은 기사였다. 뭐라도 알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 마물은 땅을 파는군요."
"됐네, 자네한테 물어본 게 잘못이군."
"아, 땅강아지는 소리에 굉장히 민감합니다."
톰이 어색하게 덧붙였다. 길버튼이 슬쩍 톰을 째려봤다. 잔뜩 긴장한 탓에 톰은 못 본 듯했다.
"소리라-."
갈라하드는 그웬을 쳐다봤다. 몸에 묻은 흙을 털던 그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귀요?"
"아니, 노래 좀 불러보게."
"아! 노래요?! 큼큼!"
그웬은 빼지 않고 바로 노래를 시작했다.
그웬이 노래를 못하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지나치게 최선을 다했다는 점이었다. 헤비메탈 감성이었다.
"아!름다운 동산에! 멋진 왕자! 지르만 저하와! 아름! 다운!"
금세 몰입한 그웬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데미안이 눈을 찡그렸다.
갈라하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나에 집중하며 길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웬의 노래 속 왕자와 공주가 결혼하여, 그 딸이 이웃집 왕의 멱을 따서 왕위를 계승할 때쯤-.
"오는군."
"옵니다."
반응이 왔다. 길버튼이 앞으로 나섰다.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 으아아악!"
톰이 방패를 들고 그웬을 챙겼다.
땅이 갈라지며 흙이 거칠게 튀었다. 짙은 갈색의 갑각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캬르르륵!"
붉은 눈의 거대한 갑각류였다. 그 날개 뒤로 모래가 가득 뿌려졌다.
"땅강아지는 밝은 빛에 약합니다!"
그웬을 뒤로 숨긴 톰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빛이라-.'
그때, 길버튼이 검을 비스듬히 휘둘렀다. 검에 담긴 푸른 오러가 마물의 가슴을 베었다. 피가 거칠게 뿌려졌지만, 갑각이 두꺼운지 마물이 쓰러지지 않았다.
마물이 거대한 덩치에 걸맞지 않은 앙증맞은 앞다리를 길버튼에게 휘둘렀다. 길버튼이 검으로 그를 받았다. 쿠웅! 묵직한 충격음이 들리며 길버튼이 뒤로 밀렸다.
갈라하드는 왼손을 뻗으며 마나를 터뜨렸다. 빛에 집중한 마나가 강렬하게 터졌다.
강렬한 빛이 터지자, 그 붉은 눈동자가 크게 끔벅였다. 빛에 약한 게 사실인지, 마물의 동작이 뚝- 멈췄다.
그때, 입에 검을 문 데미안이 사족보행으로 마물을 타고 올라갔다. 벌레 같은 모양새였다.
머리에 도착한 데미안이 녹슨 검을 번쩍 들었다.
캬르르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단검 뭉치처럼 뾰족한 주둥이가 떨렸다.
데미안이 검을 박아 넣었다. 분명 무딘 검인데, 갑각을 가벼이 갈랐다. 자세히 보니 갑각 사이의 미세한 부분을 노린 듯했다.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그때, 길버튼의 검이 앞발을 갈랐다. 잘린 발이 공중으로 뜨더니 갈라하드 앞에 떨어졌다.
덩어리에서 뿌려진 뜨거운 피가 발을 적셨다. 아래에 작은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갈라하드는 웅덩이에 손을 듬뿍 담갔다.
'마물은 그다지 마나 농도가 높지 않군.'
일반 마법사와 비교하면 높지만, 마족보다는 훨씬 약했다.
저 정도 농도의 마물이라면, 마물의 피 없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다만, 갈라하드는 굳이 마물의 피를 이용했다.
그편이 더 효율적이고, 재밌으니까.
순간 갈라하드의 손에서 불이 일어났다.
'마물의 피는 좀 더 거칠군.'
마족보다 덜 다듬어진 마나였다. 그런 탓에 수식에 작은 오차가 생겼다.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콧잔등에 맺혀 떨어졌다.
손이 터질 뻔했는데도, 갈라하드의 입꼬리는 잔뜩 올라가 있었다.
'역시 재밌어.'
긴장감이 정신을 바짝 세웠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갈라하드의 손에서 큼지막한 반월형 불이 날아갔다.
불길이 길버튼이 새겨둔 상처를 노렸다.
마물이 피하려고 했지만, 그 아래를 길버튼이 막았다.
불길이 마물 가슴의 상처를 깊게 메꿨다.
캬르르륵! 마물이 금세 노릇노릇해졌다.
"행복하게 살았어요오!"
그웬의 노래에 맞춰 마물이 앞으로 쓰러졌다. 그웬의 뒤로 불이 일렁였다. 화려한 엔딩이었다. 본인은 모르는 듯했지만-.
짝짝짝짝!
"워-! 땅강아지를 이렇게 가벼이 상대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톰이 열성적으로 박수쳤다. 길버튼이 괜히 검을 털며 자세를 잡았다. 칭찬에 약한 듯했다. 그웬이 쑥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톰, 남는 수통 좀 있나?"
"네! 어떤 크기로 드릴까요?"
"크기 별로 있나?"
"예, 혹시 모르니까요."
톰이 수통을 네 개나 내밀었다. 갈라하드는 제일 큰 걸 골랐다.
"마물의 피는 왜 담습니까?"
길버튼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미미한 반감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마물의 피를 챙기는 게,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대장장이한테 두들겨 맞은 소년이 있었네."
"예?"
"대장장이한테 두들겨 맞은 소년은 대장장이가 없는 틈을 타서 검을 훔쳤다네. 그리고 그 검으로 대장장이를 찔렀지. 푸욱- 아주 깊이."
길버튼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이해 못 했군. 그때, 그웬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웬, 말해보게."
"아! 대장장이가 마족이고 소년이 대장님이에요! 검이 마법이고!"
"정답일세. 그웬은 맞췄는데, 자네는 이해 못 했군."
길버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해 못 한 게 아니라-."
"괜찮아요! 제가 운이 좋았던 거죠!"
그웬의 위로에 길버튼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 이쪽에 좀 와보시겠습니까? 여기 이상한 게 있습니다!"
마물 시체를 살피던 톰이 불렀다. 톰은 땅강아지 마물의 배를 가리켰다.
"이거 아까 대장님이 마차에 한 거랑 비슷한 거 아닙니까?"
마물의 배에 있지 말아야 할 게 있었다.
마법진이었다.
마물에 새겨진 마법진-.
그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그건 마법사가 마족의 오물 취급을 받게 된 이유 중 하나였기에.
***
"이건-."
길버튼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칼자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놈 것은 아니네. 그놈은 공식적으로 죽지 않았나."
"그건 모르는 거 아닙니까."
길버튼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입김이 길게 뿜어졌다.
갈라하드는 확실히 대답할 수 없었다.
정보국에는 놈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기록되어 있었지만-.
'이제 그것도 확신할 수 없군.'
정보국 안가에 마족이 있던 상황이었다. 어디서 혼선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쩐지 북부에 대한 정보만 유달리 부족하더니-.'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어쩌면 정보국 본부에도 마족이 있을 수도 있었다. 또 어쩌면 황실에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자신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라면-. 갈라하드의 입이 바짝 말랐다.
어쩐지 마족을 지나치게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놈이 누굽니까?"
톰의 물음에 상념이 깨졌다.
"예전 마족이 북부를 넘어서 제국을 위협했을 때, 배신하고 마족의 편에 선 이들이 있었네. 마법사의 시초가 된 이들이지."
"인간 중에서 말입니까?"
"그래, 인간이었다네. 그중 마물을 다루는 마법사가 있었는데, 놈이 다루는 마물에는 이런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더군."
"그러면!"
톰이 마물에게서 펄쩍 뛰어 멀어졌다. 요란스러운 반응에 갈라하드는 쓰게 웃었다.
"마족이 썼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길버튼이 꾹꾹 누른 목소리로 물었다.
"마족은 마법진이나 주문을 쓰지 않네. 못 쓰고, 안 쓰지."
"그게 무슨···."
"제국민이 굳이 생각하여 제국어를 쓰지 않듯, 마족은 굳이 마법진이나 마법을 쓰지 않네. 그들의 숨과 손짓이 마법의 원류니까."
갈라하드는 작게 기침했다.
"하지만 인간이 마족의 힘을 따라 하려면 술식과 주문이 필요하네. 번역- 그래, 번역처럼. 그 후로 세월이 너무 흐른 터라 이제 마법과 마족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지만-."
멍청한 눈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러니까 마족을 돕는 인간 마법사가 있다는 겁니까?"
"그렇지! 톰, 이해가 빠르군."
손가락을 튕기며 톰을 가리키자 톰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웬이 '거의 다 맞췄는데!'라며 아쉬워했다.
"그래서 놈의 것입니까? 이건 심각한 일입니다."
"재촉하지 말게. 지금부터 알아볼 테니까."
갈라하드는 양손을 걷고 마물 시체 앞에 쭈그려 앉았다.
"이건-."
마법진을 살피던 갈라하드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마법진이 너무 조잡했다.
"형편없군. 마물의 피에 담긴 마나를 사용했지만, 정확히 그게 무슨 역할을 하는지 모르고 있네. 그냥 보고 베낀 것이군. 그것도 제대로 된 마법진을 베낀 게 아니라-."
톰이 더 잘 보이도록 횃불을 가까이했다.
"아, 고맙네 톰. 상위 마물의 피와 인간의 피를 섞어 쓴 거군. 이런 쓰레기에 병사들을 사용한 건가? 애도를 표하겠네."
"제국어로 말해주십쇼."
"여태껏 제국어로 말했네. 그러니까 놈의 것이 아니네. 정확히 말하자면, 놈의 마법진을 베낀 마법진을 또 베꼈다- 정도일 것 같군."
길버튼이 눈을 찡그렸다.
"더 단순하게 안 됩니까?"
"음, 생각보다 우리의 첫 임무가 커질 것 같네. 공이 더 커진다는 소리니 기뻐하는 게 맞겠지. 다들 박수를 치게나,"
그웬과 톰, 데미안이 박수를 쳤다. 길버튼은 치지 않았다.
'이 정도 마법진이라면, 주변에서 보고 있겠군.'
계산을 마친 갈라하드는 작게 목을 풀었다.
"이런 쓰레기 같은 마법진이라니-. 이걸 그린 놈은 따라 그리는 것조차 못하는 마법 병신일세. 어떻게 마법사가 됐는지 궁금하구-."
중얼거리던 갈라하드의 고개가 훽- 돌아갔다.
어둠으로 점철된 곳, 그 너머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너, 거기 있었군."
갈라하드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무리 쓰레기 마법사라도 제 마법을 욕하면 발끈하는 법이었다.
"누··· 누구보고 병신이래! 가라! 물어뜯어!"
어눌한 외침 뒤에 땅이 흔들렸다. 갈라하드는 손을 흔들어 마나를 뿌렸다.
마족이나 마물에게 농도 낮은 마력이 통하지 않는 걸 이용한 방법이었다. 공간을 훑고 다시 돌아온 마나에 빈자리가 생겼다.
그 자리에 마물이 있을 것이다.
그 수는-.
"세 마리일세. 길버튼 경, 데미안 할 수 있겠나?"
"네, 형."
"······어디 가십니까?"
"자네, 오늘따라 집착이 심하군. 나는 결혼할 여인이 있는 몸일세."
길버튼이 얼굴을 가득 구겼다. 그 표정이 전처럼 돌아와 있었다.
"나는 대장장이를 잡아야지. 아, 이 경우에는 대장장이 조수의 조수 정도겠군."
그때, 땅이 갈라지며 전보다 더 큰 마물들이 튀어나왔다.
"예, 알겠습니다. 길을 열겠습니다. 놈을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길버튼이 검을 세우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이건 내 전문 분야니까."
****
"칼! 칼! 칼!"
베른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필사적으로 뛰었다. 발이 무거웠고 숨이 턱 끝까지 찼지만 멈출 수 없었다.
자신의 마법을 쓰레기라고 욕하는 모습에 베른은 참지 못하고 나섰다.
괴상한 논리로 자신의 마법을 욕하는데 참을 마법사가 어딨겠나.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러자 놈이 그 거리에서 어둠을 뚫고 베른을 쳐다봤다.
올라간 입꼬리에 베른은 놈에게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얼마나 뛰었을까-. 베른은 슬쩍 주변을 살폈다. 어두운 숲이 전부였다.
'그래, 땅강아지를 세 마리나 보냈는데, 멀쩡할 리가 없지.'
베른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잔뜩 차오른 숨을 뱉었다. 그러다가 차오른 구역질을 토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멍청한 놈! 누구보고 쓰레기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멈추지? 여기가 아닌 거 같은데. 아, 혹시 지친 건가? 기다려주겠네. 편히 쉬게나."
단조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고개를 든 베른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사내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입에 연초를 물고 손을 흔들었다.
땅강아지들은-.
"마물을 어떻게 따돌렸냐는 듯한 눈빛이군. 마법진에 새겨뒀던데, 마법사는 공격하지 말라고. 자네들을 공격할 걸 대비한 모양이지?"
"그··· 그걸 어떻게······."
"마법진에 다 적혀 있더군."
마법진이라고 다 같은 마법진이 아니었다. 본다고 알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본다고 다 알 수 있다면, 누가 마법진을 쓰겠나.
심지어 땅강아지에 사용한 마법진은 마물에 관한 마법진이었다.
마물을 모르는 놈이라면 알 수 없는-.
"너··· 너···! 마물을 연구했구나!"
"정확히는 마족을 연구했지. 최근에 시작했다네."
"그러면 우리는 같은 편이다! 나도 마족을 연구했어! 우리는 친구야! 친구!"
"그래? 자네도 대장장이를 찌를 생각인가?"
"대장장이? 그게 무슨-."
그때, 사내와 눈이 마주친 베른은 작게 입술을 떨었다.
마족 같은 눈이었다.
어딘가 결여된-.
말이 통하는 놈이 아니었다.
"비우소서, 갈증, 뼈, 아이, 비명-."
베른은 황급히 주문을 외웠다. 마법사의 전투에서는 먼저 주문을 외우는 게 중요했다.
베른은 지팡이를 양손으로 잡고 내밀었다. 마나가 빠르게 모였다.
"맙소사-, 지팡이라니! 자네, 진심인가? 미치겠군."
사내가 괴상한 분통을 터뜨렸다. 지팡이가 왜? 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진 베른은 황급히 집중했다.
"마나는 영혼의 힘이자 지식의 무게일세. 그런데 물질인 지팡이에 의존하다니! 그러고도 자네가 마법사인가?"
사내는 뭐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 계속해서 화를 냈다.
베른은 입꼬리를 올렸다.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 마법사의 승부에서 주문을 먼저 외우게 하다니-.
승부는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고통, 성욕!"
"오- 맙소사! 거기서 성욕을 왜 넣나! 그러니까 집중이 깨지지! 고통을 외쳤으면 이어서 화상이나 두통 같은 걸 넣어야 연상이 쉽지!"
"······두통! 화상!"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아니, 마나가 줄줄 흐르고 있지 않나. 집중하게!"
베른은 순간 좋은 놈 아닐까 잠시 고민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불타는 이빨-."
"진심인가? 그렇게 길게 준비해놓고 고작 불타는 이빨이라고? 하-."
한숨 쉬는 사내에 베른은 낄낄 웃었다. 미친놈이 분명했다. 3위계에 속한 불타는 이빨을 보고 한심하다니-.
완성된 불타는 이빨이 사내에게 쏘아졌다. 그 속도가 활보다 빨랐다.
사내 앞에 도달한 불덩어리가 마물의 주둥이처럼 쩍 벌어졌다.
사내가 연초를 털며 왼쪽 손가락을 튕겼다. 그 손짓에 묘한 힘이 있어 절로 시선이 끌렸다.
순간 사내의 손가락에서 큼지막한 얼음이 쏘아졌다.
'어떻게 저리 빠른-.'
마법의 정체를 깨달은 베른은 경악했다.
얼음송곳-. 그것은 불타는 이빨과 마찬가지로 3위계 마법이었다.
'무슨-.'
손가락을 튕긴 것으로 3위계 마법을 사용한다고-? 들어본 적도 없는 기예였다.
불타는 이빨과 얼음송곳이 정면으로 충돌하자, 불타는 이빨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믿기지 않는 상황에 베른이 눈을 끔벅였다.
"내가 자네였다면 불타는 이빨이 아니라, 굵직한 뿌리와 얼음 화살을 사용했을 것이네. 주문도 짧고 대응하기도 쉽지. 그런데 자네는 자네가 아는 마법 중에서 가장 큰 걸 썼네. 마법사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마법사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라네."
사내가 혀를 차며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해하네, 실수할 수도 있지. 실수는 인간의 덕목 아닌가. 중요한 건 같은 실수를 또 하지 않는 것이지. 자, 그럼 다시 처음부터 해보겠네."
사내가 여유롭게 손가락을 튕겼다. 더 해보라는 듯했다.
"이··· 이익! 나를 우습게 봤어?!"
베른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무시당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굵직한 뿌리를 쓰면 어떻게 하나. 그건 첫수에 했어야지."
베른의 다리에 얼음 꼬챙이가 꽂혔다. 집중하게! 사내가 소리쳤다. 베른은 비명을 누르며 주문을 이어갔다.
"허어, 그렇다고 불 화살을 날려? 이 거리에서? 자네, 진심인가?"
반대쪽 다리에 하나 더 꽂혔다. 집중하라니까! 베른은 공포에 비명을 질렀다.
사내의 재촉에 베른은 눈물을 흘리며 주문을 읊었다.
"최소한 주문을 빨리 말하려는 노력이라도 해보게! 더 빨리! 자네한테 죽은 병사들이 불쌍해지는군!"
이것보다 도대체 어떻게 더 빨리-.
베른의 무릎이 천천히 꿇렸다.
허벅지에 얼음 꼬챙이가 박혔지만, 치명적이지 않았고, 아직 마나도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무릎이 굽혀진 건-, 항거할 의지가 꺾였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베른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어째서-.
"마족의 피도 마셨는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냐는 눈빛이군."
앞에 쭈그려 앉은 사내가 말했다. 베른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답은 간단하네. 나는 세 살 때부터 매일 마나를 다 썼네. 하루도 빠짐없이. 그 간격이 고작 마족의 피 좀 마셨다고 채워지겠나? 그를 기대했다면 자네는 양심이 없는 걸세. 이런, 기대했군? 자네 정말 파렴치한 인간이구만."
왜 그런 짓을-.
사내는 간단하게 말했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나를 다 쓴다는 건, 기사가 매일 탈진할 때까지 훈련했다는 것과 비슷··· 아니, 더 힘들었다. 마법은 정신력을 소모하니까.
"왜냐고? 나는 자네가 이해가 안 되는군. 마법이 재밌지 않나? 쓰고 싶어서 근질거리지 않나?"
미친놈.
베른의 욕에 사내가 피식 웃었다.
"칭찬 고맙군. 자,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네. 저 마법진을 어디서 구했지? 또 같이 온 마법사가 있나? 혹은 마족?"
베른은 입술을 씹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할 수 없었다.
"오, 지금 고개를 저은 건가? 뭔가 착각하고 있군. 자네는 선택지가 없네."
사내가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정보국 마법사가 가장 잘하는 마법이 뭔지 알고 있나? 정답은-."
회유일세.
연기 사이로 사내의 올라간 입꼬리가 보였다.
17화 지독한 놈
"그래, 북부 출신이 아니라고?"
"예, 중부 동쪽에 있는 도시 출신입니다. 어떤 마법사한테 배웠습니다."
"역시 마법에 기초가 없더니-. 계속하게."
"예, 마법을 배워서······."
"미안하지만, 여기로 온 이유로 넘어가지. 자네의 인생은 내 취향이 아니거든."
"예, 그래서 중부 위쪽에 있는 성에서 귀족의 전속 마법사로 지내는데, 어느 날 가면 쓴 사내들이 찾아왔습니다."
"가면?"
"예, 까마귀처럼 생긴 가면이었습니다."
까마귀 가면-.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는 놈들이었다. 한때 내 일거리였고.
"흑마법학회인가?"
"예, 알고 계시는군요. 놈들이 마석을 가지고 싶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수법을 바꿨군. 그래서 북부로 왔다?"
"예."
"그래, 땅강아지 마물을 데리고 가서 땅 파라는 명령을 받았다? 안쪽에 칼이란 마법사와 정체 모를 놈이 하나 있고? 땅강아지 열둘?"
"예, 다 말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제발-."
"음, 처음부터 다시 말해보지."
"아까도 했잖아! 벌써 네 번째라고! 시발!"
"어허, 아직 회유가 덜 됐군. 자네, 외모와 다르게 고집이 무척 강하군."
"아아악!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다시 말할게요-!"
"그래, 이번에는 조금 더 빨리 말해주겠나?"
****
'흑마법학회라-.'
갈라하드는 마나 연초를 입에 물고 작게 중얼거렸다.
흑마법이라는 건 따로 없었다. 마법은 마법일 뿐이었다. 그런데 흑마법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 놈들의 방식이 일반 마법사와 다르기 때문이었다.
흑마법사들은 마족이 마법의 원류라며 그들을 칭송하고 그들의 방법대로 인간을 잡아먹었다. 더불어 제국을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 놈들이었다.
정보국에서 특별히 신경 쓰는 단체이자, 동시에 자주 쓰는 카드였다.
가령 세금을 몰래 빼돌린 귀족이 있으면, 슬쩍 처리하고 흑마법사 놈들의 잘못으로 돌려서 공포를 주는 식이었다.
그들의 존재가 마족의 왕을 막는 것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 갈라하드는 놈들을 전부 처리할 생각이었지만, 본체는 끝내 잡지 못했다.
어디에 숨었나 했더니만-.
'북부에 있었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었다. 그 아래로 회색 재가 떨어졌다.
'그러면 마물 조련사가 흑마법학회에 들어간 건가? 아니면 그쪽에서 마물 조련사의 유물을 찾은 건가?'
제법 중요한 문제였다.
이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저 땅굴 파는 놈들을 잡아야 했다.
'이놈보다 강한 마법사 하나랑 정체 모를 놈 하나, 그리고 땅강아지 열두 마리. 더 있을 수도 있겠군.'
베른이라는 놈이 건넨 정보였다. 몇 번이나 확인했기에 거짓말일 경우는 없었다.
다만, 베른이라는 놈의 지위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다. 놈이 알지 못하는 병력이 있을 수 있었다.
베른의 선임이라는 칼은 문제 되지 않았다.
이놈보다 강해도 결국 마법사니까 갈라하드의 상대는 아니었다. 갈라하드가 위협을 느낄만한 마법사는 저기 황혼의 마탑에 박혀 있었다.
땅강아지 열두 마리는 대원들을 굴리면 어떻게 해결될 것이고-.
'정체 모를 놈이 문제군.'
꽤 큰 변수였다.
안전한 건 아드리안나를 기다리는 거였지만-.
이미 하나를 처리한 상태였다. 그쪽에서 눈치채고 도망갈 가능성도 있었다.
마물의 배에 새겨진 마법진-. 관련된 놈들은 하나도 놓칠 수 없었다.
북부에 도착한 뒤부터··· 아니, 정보국을 나선 날부터 바람 잘 날이 하루도 없는 듯했다.
'좋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계산을 세우고 점검했다. 그리고 다시 세우고 있을 때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둔탁하면서도 일정한 보폭-. 길버튼이었다.
마물에 새겨진 마법진이 역린인지, 그 발걸음이 평소보다 배는 빨랐다.
"어떻게 됐습니까?"
길버튼의 검에 붉은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얼마나 급하게 왔으면, 검을 그렇게 열심히 닦는 길버튼이 피조차 안 털었다.
그 뒤로 데미안과 톰, 그웬이 차례대로 나타났다. 다 몰골이 엉망이었다. 특히 데미안은 전체가 붉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
"···아무래도 상대가 마물이라서 말입니다. 1대대가 상대하는 건 주로 마족입니다. 마물은 일반 병사나, 큰 무기를 든 기사가 상대합니다."
대충 인간 쪽에 더 강하다는 듯했다.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실제로 검은 괴물을 상대하기에 짧았으니까.
"그럴듯한 핑계군."
문제가 그것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데미안과 길버튼은 그 성향이 극으로 달랐다. 데미안은 타고난 맹수였고, 길버튼은 정직한 기사였다. 더불어 뒤에 보릿자루처럼 방치된 그웬과 톰까지-.
'가는 길에 합 좀 맞춰야겠군.'
원래 합은 실전에서 맞추는 게 가장 빠른 법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길버튼이 다시금 물었다.
"땅강아지로 땅을 파는 중이라더군. 그 뒤에는 마법사 하나와 정체 모를 놈이 있고. 더 있을 수도 있네."
"땅굴 말입니까?"
갈라하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길버튼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졌다.
"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나?"
"마물은 보통 성벽을 부수거나 넘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이런 굴이 발견됩니다. 성벽 내부에 마물이나 마족이 끊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가능성이 하나 더 있네. 마석장일 수도 있지."
"······마석장?"
"마석은 수도에서 인기가 많거든."
길버튼이 눈을 찡그렸다.
"아무튼, 마족에게 마법진을 새긴 놈은 잡아야 하지 않겠나? 저 음흉한 땅굴도 막아야 하고."
"무조건 잡아야 합니다."
"지원을 부르면 좋겠지만, 그동안 도망칠 가능성이 높네. 마법사 하나와 땅강아지 넷을 잡았으니까. 눈치를 금방 채겠지."
"그건 안 됩니다!"
'반응이 격렬하군.'
지금까지 본 길버튼은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내였다. 그런 길버튼의 얼굴에 감정이 떠올랐다.
감정은 균열이었다. 약점이고-. 동시에 움직일 동기였다.
'마물에 새겨진 마법진이 북부의 기사에게는 좀 더 큰 의미인가 보군.'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어서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놓아줄 생각 없었다. 첫 임무의 공이었고, 동시에 쥐새끼 같던 흑마법사학회에 닿는 끈이었으며, 마물 조련사에 대한 실마리였으니까.
혼자라도 들어갈 생각이었다.
충분히 자신 있었다.
"자, 북부를 위기에서 구해야겠지? 다들 영웅이 될 준비 됐나?"
그웬은 울 것 같은 표정이었고, 톰은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길버튼은 꼭 칼에 찔린 표정이었다.
삐익-. 길버튼이 입에 손가락을 넣고 피리 소리를 냈다. 새의 울음이 들리더니, 큼지막한 매가 내려왔다. 머리가 하얀 멋진 매였다.
매가 자연스레 날아와서 길버튼의 어깨에 앉았다. 만져도 되냐고 물었다가 거절당한 그웬이 의기소침해졌다.
'전서응이라니-. 북부답군.'
길버튼은 매의 다리에 있는 통을 열어 종이를 꺼냈다. 이어서 뭐라 적고 다시 넣었다. 매가 다시 날아서 사라졌다.
"아드리안나님에게 연락을 넣어뒀습니다."
"잘했군. 자, 그러면 바로 움직이지."
갈라하드는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앞장섰다.
그때, 길버튼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아까 그놈은 어떻게 됐습니까?"
갈라하드는 대답 대신 지팡이를 흔들었다.
길버튼은 더 묻지 않았다.
****
놈이 말한 장소에 도착하자, 거대한 동굴이 맞이했다.
주변의 마나 농도가 꽤 짙었다.
'돌을 판 건가? 마물은 마물이군.'
거대한 구멍에 갈라하드는 혀를 내둘렀다. 그때, 입구에서 뭔가 느껴졌다.
"잠깐, 멈추게나."
앞장서던 길버튼이 뚝- 하고 멈췄다. 갈라하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마나를 여기저기 뿌렸다.
"경보 마법이 설치되어 있군. 치밀한 놈일세."
"빨리 해제해주십쇼."
"자네, 너무 쉽게 말하는군. 경보 마법이 그렇게 쉽게 해체할 수 있으면 경보 마법이겠는가? 어서옵쇼 마법이겠지."
"해체 못 하는 겁니까?"
"아니, 이미 했다네."
"그러면 왜······."
"괜히 나 때문에 눈이 높아지면, 다른 마법사가 억울할 수도 있지 않나. 그를 방지하는 걸세."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이십니까."
"진심일세."
갈라하드는 한쪽에 가리듯 새겨진 마법진을 살폈다. 그 중앙에 투박한 돌이 박혀 있었다.
"마석이군."
"이게 그 마석입니까? 그냥 돌 같은데-."
"잘 보면, 은은하게 빛이 나온다네."
갈라하드는 조심스럽게 마석을 꺼냈다. 마석은 그 서린 빛의 양으로 가치를 판단하는데, 이건 최하급 품이었다.
마법을 제거하고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갈라하드는 동굴의 폭을 가늠했다. 이 정도라면-.
"최대 땅강아지 세 마리겠군. 딱 적당한 크기야."
"뭐가 적당합니까?"
갈라하드는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렸다.
"자, 길버튼과 데미안이 앞에 서게나. 내가 후위를 맡지. 톰은 방패를 들게."
"···저는요?!"
갈라하드는 가만히 그웬을 살폈다. 효율적으로 마법을 전달하려면, 그웬이 먼저 매달려야 했다.
지독한 무력함을 느껴 악마의 손을 잡는다는 심정으로 마법을 갈구해야 더 효율적이었다. 아직은 부족했다.
다만, 그렇다고 아예 쓸 데가 없는 건 아니었다.
가져온 지팡이에서 마석 부분을 파냈다. 윗부분이 큼지막해서 크기가 적당했다. 지팡이에 새겨진 마법진을 잠시 보다가 몇 군데를 적당히 긁어냈다.
그리고 그웬에게 내밀었다.
"여기 끝을 잡게."
"······네?"
그웬이 잠시 갸웃거리다 지팡이 끝을 잡았다.
"아얏! 뭐야 이거 느낌 이상해요!"
"원래 다 그런걸세."
마석의 마나를 끌어오는 마법진을 고치자, 보릿자루 그웬을 훌륭하게 쓸 수 있었다.
'크고 걸어 다니고 자동으로 채워지는 마석이군. 조금 시끄러운 게 단점이지만.'
갈라하드는 만족스러운 눈으로 그웬을 쳐다봤다.
뒤에 정체 모를 놈이 있으니, 마족의 피는 최대한 아껴둘 생각이었다.
"북부에서 불륜은 사형입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집중하게나."
길버튼이 혀를 차며 앞으로 나섰다.
"자, 첫 임무이자, 첫 훈련일세."
****
'도대체 내가 왜 여기에···.'
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상대는 땅강아지였다. 땅강아지!
한 마리만 나와도 소대가 엎어졌고, 두 마리가 나오면 소대가 사라지는 땅강아지였다. 땅에서 튀어나와 사람을 물고 가는 터라, 땅귀신이라고도 불리는 놈이었다.
그런 땅강아지가 열두 마리나 있는 곳으로 제 발로 들어가고 있었다.
데미안과 길버튼이 있었지만, 아까 그들도 땅강아지 세 마리를 마주하자 고전했다.
더불어 톰은 그들과 달리 일반 병사였다.
"자, 슬슬 눈치챘나 보군! 다들 준비하게!"
그때, 동굴이 시끄럽게 흔들렸다.
저 멀리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땅강아지들이 보였다. 땅속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밖에서 달려오는 걸 보니 그 위압감이 상당했다.
"데미안, 그대는 타고난 짐승이네. 아예 깊이 들어가게나. 자네만 생각하게."
"네- 형."
데미안과 갈라하드의 대화가 참으로 태평했다.
"그리고 길버튼 경, 뒤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길버튼은 대답 대신 눈썹을 구겼다. 그 검을 잡은 손에 푸른 기운이 격하게 차올랐다.
"톰, 자네는 내가 부르면 뛰어나가서 방패로 막게나. 그냥 몸을 던진다고 생각하게."
방패 들고 가서 몸을 던지라니-. 톰은 입 끝까지 올라온 반문을 꾹 삼켰다.
그때, 동굴이 땅강아지들로 가득 찼다. 그 특유의 날카로운 이빨이 파르르- 떨렸다.
"자, 다들 집중하게나. 데미안!"
데미안이 뛰쳐나갔다. 언제봐도 놀라운 몸놀림이었다.
길버튼 혼자 땅강아지 셋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까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았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불꽃 춤."
"······끄윽!"
뒤에서 뭔가 거대한 것이 날아갔다.
동굴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큼지막한 불줄기였다.
어찌 사람이 저런 마법을 쓴다는 말인가-. 톰은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캬르르르륵-! 불에 붙은 땅강아지들이 발버둥 쳤다. 어두웠던 동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땅강아지들의 끔찍한 자태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녹는 갑각 사이로 흐르는 진액-. 꿈에 볼까 두려운 모습이었다.
데미안이 미끄러지듯 불 아래로 파고들어 사라졌다. 흡사 불에 몸을 던진 모습이었다.
길버튼의 검에서 푸른 빛이 솟구쳤다. 땅강아지의 머리를 가벼이 조각냈다. 그 옆에 있던 땅강아지가 길버튼을 누르려 했다.
길버튼이 뒤로 물러나며 침착하게 검을 횡으로 베었다. 무조건 전진하던 아까와 달랐다.
뿌드득-. 오러가 가벼이 발을 갈랐다. 땅강아지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길버튼의 검이 부드러이 움직였다. 땅강아지는 그대로 전진했다.
길버튼의 검은 날카로웠지만, 땅강아지에 비해 크기가 작았다.
"지금일세! 톰!"
톰은 일단 뛰쳐나갔다.
아래가 갈라지면서 땅강아지의 발이 올라왔다. 쿠웅! 톰은 방패에서 묵직한 충격에 뒤로 데굴데굴 굴렀다.
필사적으로 정신을 잡고 일어나니, 길버튼이 땅강아지를 베어 넘기고 있었다.
땅강아지 셋을 상대한 건데, 아까보다 더 부드러웠다.
달라진 건 하나밖에 없었다-.
"좋군! 길버튼 경, 방금 봤지? 톰도 한 번은 막을 수 있다네."
갈라하드가 합류했을 뿐이었다.
갈라하드의 마법은 위협적이었지만, 그게 지금 상황의 이유는 아니었다.
주요한 건 갈라하드의 배분이었다.
데미안을 오히려 깊이 파고들게 만들어, 길버튼과 꼬이는 걸 막고, 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길버튼의 발을 풀어줬다.
그제야 톰은 길버튼이 자기들 때문에 묶여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톰, 괜찮나?"
"네! 괜찮습니다!"
길버튼의 무거운 목소리에, 톰은 입에 고인 피를 뱉고 방패를 들었다.
길버튼 너머로 불에 탄 끔찍한 땅강아지들이 보였다.
분노에 찬 울부짖음이 동굴을 가득 채웠다. 위압감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등에 절로 땀이 찼다. 여기가 지옥 아닐까.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나는 일반 병사인데-.
"빛을 한 번씩 뿌릴 걸세. 절대 뒤돌지 말게나."
저 무덤덤한 명령이 상황을 사소하게 만들었다.
공격은커녕 한 번 맞고 뒤로 구르는 게 전부였지만, 그거라도 할 수 있는 게 어디인가.
"빛이라네!"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환한 빛이 뒤에서 쏟아졌다.
톰은 방패의 끈을 꽉 조였다.
****
'이게 무슨·········.'
칼은 입술을 곱씹었다.
분명 계획은 완벽했다. 북부의 눈을 돌렸고, 땅강아지 마물도 받아왔다.
망루 사이의 순찰 없는 구역을 알아내어, 그곳에 장소를 잡았다.
그런데 왜-.
"땅강아지가 밀리는군. 흐음, 실패인가.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옆에서 들린 단조로운 목소리에 칼은 냅다 무릎을 꿇었다.
"아닙니다!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매달린 칼의 손을 상대가 지그시 밟았다. 고통스러웠지만, 칼은 필사적으로 참았다. 이 손을 놓치면 죽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는 탓에, 그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저기 선두에 선 인물이 누구인지 아는가? 기사 길버튼일세. 우리 측에 제법 많은 피해를 준 인물이지. 덕분에 현상금도 많이 붙었어. 아드리안나와 붙어 있어 처리할 수 없었지만-. 자네, 운이 좋은 거야. 길버튼이 아니었다면, 내가 나설 이유가 없었으니."
까마귀 가면이 중성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마석 몇 개 남았지?"
칼은 황급히 챙겨둔 마석을 전부 꺼내 내밀었다.
어차피 실패하면 먹지 못할 마석이었다. 이제 와서 아낄 필요 없었다.
"······그분을 깨울까요?"
칼의 물음에 까마귀 가면이 시선을 내렸다.
"그분을 부르자고? 너 죽고 싶은 거냐?"
"하··· 하지만······."
"겁이 많은 아이구나. 걱정하지 말도록. 이렇게 많은 마석이 내 손에 있는데, 길버튼이 대수겠느냐?"
까마귀 가면이 음흉하게 웃었다.
"하지만 길버튼 말고 다른 인물이-."
"다른 인물? 아, 뒤에 있는 떨거지들이 있었군. 길버튼의 병사 정도겠지. 뭐 볼 게 있다고······."
그리 말하던 까마귀가 갑자기 멈췄다.
까마귀가 고개를 쭉 내밀었다. 저 멀리에 있는 걸 확인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던 까마귀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뿌드득-.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
"뭐하느냐?"
"······네?"
"당장 가서 깨워!"
까마귀의 고함에 칼은 벌떡 일어났다.
아까는 깨우지 말라고 지랄하더니 왜 갑자기······.
"여기까지 쫓아온 거냐? 지독한 놈!"
까마귀가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시선에는 깔끔한 사내가 있었다.
"빨리 깨우라고! 깨워! 동굴 그냥 열어! 뭐해! 이 병신 새끼야! 뒤지고 싶어?! 저저- 지독한 새끼! 기어코 여기까지 왔구나!"
까마귀의 고함에 칼은 헐레벌떡 뛰었다.
도대체 저 사내가 누구길래-.
18화 마족물
'······저놈이 여기까지!!'
까마귀는 입술을 까드득- 씹었다.
지독한 놈이라는 건 알았지만-.
'북부 전선까지 따라왔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중부에서 활동하던 놈이 북부의 전선까지 쫓아 온다는 말인가.
마법은 한 번 손을 대면 그 보이지 않는 끝을 갈망하는 성질을 지녔다. 그를 위해서라면, 제 인생까지 바치는 게 마법사였다.
흑마법학회는 그런 본성과 가장 잘 어울렸다. 상승을 숭상하는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마법을 탐닉하고 더 큰 마나를 지닐 수만 있다면 악마와도 계약하겠다는 게 흑마법학회의 신념이었다.
그 덕분에 흑마법학회는 빠르고 은밀하게 성장했다.
놈을 만나기 전까지-.
[카른텔 성 지부가 파괴되었답니다.]
처음은 가벼운 소식이었다.
지부가 느닷없이 파괴되었다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흑마법학회여도 어찌 계속 잘 나가겠는가.
그런데 그럴 수도 있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헤르메니안 도시 지부가-.]
[바르마 지부가-.]
정보국에서 움직인 게 분명했다.
대륙의 굵직한 일, 그 뒤에는 정보국이 있다는 출처 없는 소문이 아니었다면, 존재조차 알려지지도 않았을 정도로 정보국의 보안은 철저했다.
그에 흑마법학회는 방책을 세웠다. 아무리 정보국이라도 무방비하게 당할 흑마법학회가 아니었다. 지부를 압축하고 경비를 더 늘렸다.
그에 돌아온 결과는-.
[헤르메니아 지부장이 칼리튼 시장을 죽였다는데요?]
[헤르메니아 지부는 진작에 없어졌다며.]
[그러니까요. 참 이상하죠?]
정보국은 오히려 그들을 우롱하듯, 그들의 이름으로 제 눈엣가시인 이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저들이 저렇게 나오니, 흑마법학회는 속수무책이었다. 회원들이 지레 겁먹고 도망쳤고, 세력이 나날로 줄어들었다.
그래도 정도를 지킬 거라 생각했다. 그들은 흑마법학회라는 이름을 제법 유용하게 사용했으니까.
그러다 놈을 마주쳤다.
[음, 이것도 마법이라고 쓰는 건가? 흑마법사라 칭하길래 기대했건만, 그저 마나통만 큰 쓰레기군.]
살면서 그런 무력감은 느껴본 적 없었다.
단신으로 지부에 침입한 놈은 마법 하나하나를 파훼하며 지적하고 화를 냈다.
이딴 쓰레기를 마법이라고 쓰는 거냐며-.
그제야 까마귀는 깨달았다.
흑마법학회를 줄곧 괴롭혔던 게 정보국이 아니라, 놈이었다는 걸.
까마귀는 납작 몸을 엎드렸다.
까마귀가 살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입이 가벼웠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놈과의 악연이 시작됐다.
[이게 전부라고? 자네, 참 쓸모없군. 회유가 부족했나.]
까마귀는 평생 그때만큼 열심히 일했던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기회를 엿봐 북부로 도망쳤다.
그런데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지독한 놈! 개 같은 놈!'
까마귀는 분통을 터뜨렸다.
놈을 떨쳐내기 위해서 버린 게 얼마인가! 팔을 자르는 심정으로 자르고 왔는데, 그걸 기어코 쫓아왔단 말인가! 더 이상 빼먹을 게 어디 있다고!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열심히 일했잖아! 줄 거 다 줬잖아! 흑마법학회의 빈자리를 차지한 그놈들이나 잡지! 진짜 빌어먹을 개새끼네!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분노가 차올랐다.
"그··· 일단 깨우기는 했습니다."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까마귀는 눈을 찡그렸다.
'아니야. 이번에는 진짜 다르다. 마족이 있잖아.'
마족이 누군가. 마법사의 천적이며, 마법사를 먹는 포식자였다. 놈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 마법사였다.
마석장을 통째로 먹인 탓에, 이지가 없지만, 그 무력은 진짜였다.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준비한 마족이었으니-.
'더불어 마석도 있다.'
지금 까마귀에게는 방금 캔 순도 높은 마석도 가득 있었다.
질 리가 없었다.
단순히 놈의 얼굴을 봐서 두려웠던 것뿐이었다.
'그때의 내가 아니야.'
더는 놈의 그늘에 있을 수 없었다.
까마귀는 굽은 등을 폈다.
까마귀는 마음을 다잡고 마석을 전부 꺼내서 풀었다.
일반 마석이 아니었다. 최소 상품의 마석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까마귀는 망토를 펼쳤다. 그 망토의 이면에 빼곡하게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흑마법학회는 오직 상승을 숭상했다.
그 과정에 어떤 제한도 두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른 마법사와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강해졌다.
까마귀는 그때의 까마귀가 아니었다.
뒤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발소리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대지가 떨렸다.
까마귀는 앞쪽으로 마석을 던지고 슬쩍 뒤쪽으로 붙었다.
저 마족은 지금 마족도 잡아먹을 정도로 굶주렸기에-.
'아마 마법사부터 먹으려 하겠지.'
까마귀는 음흉하게 웃었다.
****
'마법사가 둘이었군.'
갈라하드는 볼을 긁적였다.
그때, 안쪽에서 짙은 마나가 느껴졌다. 대지가 공포에 떠는 것처럼 흔들렸다.
'이건 좋지 않은데.'
갈라하드는 품에서 수통을 꺼냈다. 그를 흔드니 약간 굳어있던 피가 금세 찰랑였다.
"길버튼 경."
"······평범한 놈은 아닐 겁니다."
길버튼이 검을 고쳐 잡았다. 그 이마에 땀이 가득 흐르고 있었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길버튼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데미안은 도착하자마자 대자로 누워있었고, 그웬은 볼이 움푹 들어가고 창백했다. 톰은 어떻게든 서 있었지만, 몸을 비틀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 둘이 해야겠네. 대장전이라 생각하게나."
"······충분합니다."
길버튼이 입꼬리를 올렸다. 다만, 그 눈은 여전히 저 너머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꽂혀 있었다.
"그래, 고작 땅강아지 잡다가 지치면 그게 기사인가. 마부지."
"땅강아지도 제법 까다로운 마물입니다만."
"그랬나?"
"됐습니다."
"자네, 삐졌나?"
길버튼은 대답 대신 검을 빙글- 돌렸다. 삐졌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상대는 마족 하나와 마법사 둘이었다.
이쪽은 지친 멍청한 기사와 천재 마법사였고-.
할만하군.
"내가 마법사 둘을 처리할 테니, 자네가 마족을 붙들고 있게. 최대한 빨리 해치우고 도와주겠네."
"마법사 둘을 혼자 상대하는 게 가능합니까?"
"충분하네."
"그러면 마족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자신 있나?"
"마족이라면- 제 전문 분야입니다."
갈라하드는 소리 내어 웃었다. 검을 잡은 손에 핏줄이 가득 올라와 있었다.
"그래, 누가 더 빨리 처리하는지 내기하겠나."
"좋습니다. 회식으로."
"조심해야 할 걸세. 아까 데미안이 배고프다고 하더군."
길버튼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졌다.
그때-.
콰아아아앙! 격렬한 소리와 함께 동굴의 벽이 그대로 부서졌다.
거기서 튀어나온 건 벌거벗은 거대한 사내의 형태였다. 대공보다 반 배는 더 큰 크기였다. 그 사지에 달린 굵직한 근육이 숨 쉬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주변의 마나가 놈의 눈치를 보듯, 팽창했다가 붙었다.
'쉽지 않겠군.'
마족이라기에는 거대했고, 마물이라기에는 작았다.
적당히 말하면-.
"마족물정도 되려나. 말하고 나니 발음이 좀 그렇군."
미묘하게 굳어진 길버튼의 얼굴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자네, 표정이 왜 그러나. 후회되나?"
"엄밀히 따지면, 저건 마족이 아닙니다."
그게 분노를 토하듯 땅을 마구잡이로 두드렸다. 그 거대한 주먹이 한 번 부딪칠 때마다 굉음이 터기며 땅이 움푹 파였다.
저번에 봤던 마족이 무형의 기운을 날렸다면, 저 마족은 그를 순전히 힘으로 쓰는 듯했다.
"저 정도면 상급 마족입니다. 평소라면 가벼이 상대할 수 있지만-."
"그래서 자신이 없다?"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대장님 도와주세요! 라고 소리치게나. 자네는 내 하나뿐인 부대장 아닌가."
"일 없습니다."
길버튼의 얼굴이 똥 씹은 것처럼 구겨졌다.
"불태우소서! 부수소서! 짓이기소서!"
주문과 함께 공동의 끝에서 거대한 불덩어리들이 떠올랐다. 그 수가 꽤 많았다.
일반 마법사가 보일 수 없는 수였다.
"마석이군. 그것도 상품,"
마석과 마법사는 궁합이 상당히 좋았다. 괜히 수도의 마법사들이 그 비싼 마석 꽂은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마법은 몸속에 있는 마나를 이용하여, 대기 중의 마나를 모아 수식화하여 기적을 행하는 행위였다.
마석은 그중 몸속에 있는 마나를 이용하여 대기 중의 마나를 모으는 과정을 대신해줬다.
즉, 마석을 지닌 마법사는 수식화만 하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주문을 빨리 읊기 위해, 빨리 말하기를 연습하는 마법사도 있는 곳이었다. 마석은 마법사 간의 전투에서 꽤 치명적이었다.
마족의 피와 마석은 성질이 좀 달랐다. 마족의 피는 농도 깊은 마나를 지닌 물질이었다. 그 농도 깊은 마나를 쓰려면, 꽤 높은 수준의 마나 억제력을 지녀야 했다.
그와 반대로 마석은 농도가 평범한 그저 마나 덩어리였다. 말 그대로 조용한 그웬이었다. 웬만한 마법사라면 다룰 수 있었다.
그래도 저 정도 수의 마법이라면, 한두 번 마석을 쓴 놈이 아니었다. 마석 전문가라 해도 무방했다.
"후달리십니까?"
"아니, 오히려 좋네. 그게 아니면 너무 시시하니까."
길버튼이 작게 혀를 찼다.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마족의 고개가 이쪽으로 향했다.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큼지막한 눈이었다. 그 파리 같은 붉은 눈이 깜박였다.
갈라하드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 위화감의 정체는-.
"마족물이 날 노려보고 있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마족한테 인기가 제법 많으신가 봅니다."
마족이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거리가 줄어들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빠르기였다.
길버튼이 검을 비스듬하게 틀며 막았다.
콰아앙! 검과 주먹이 부딪치며, 큰 굉음이 터졌다. 길버튼의 푸른 오러가 거칠게 흔들렸다. 길버튼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좋지 않군.'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는 붉은 눈동자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마족이 갈라하드에게 손을 뻗었다. 길버튼이 검을 휘둘러 그를 막으려 했지만, 팔이 워낙 굵은 탓에 쉽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누가 내 몸에 손대는 걸 싫어한다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손을 튕겼다. 마족의 굵직한 손가락이 위쪽으로 꺾였다. 그 아래에 얼음 창이 꽂혀 있었다.
꽤 마나를 모았건만, 그 깊이가 형편없었다.
'좋지 않아-.'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끄워어어어-! 마족이 울음을 터뜨렸다. 길버튼이 검을 이어서 휘둘렀지만, 시선은 여전히 갈라하드에 꽂혀 있었다.
"데미안, 내가 위험에 빠졌네! 자네, 또다시 실수할 건가?"
"아니요."
"그렇지. 그러면 톰과 올라가서, 마법사를 잡아주겠나. 그중 까마귀 쓴 놈은 죽이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둘의 상태가 안 좋았지만, 어차피 마법은 이쪽에 쏠려 있었다. 마족의 관심도 그렇고.
"역시 나는 인기가 많군."
"······지금 농담할 때입니까?"
"유머는 인생의 기름일세. 힘든 상황도 부드러이 만들어주지."
길버튼이 대답 대신 침을 뱉었다. 붉은 피가 섞인 침이었다.
오는 과정에서 피해가 누적된 탓에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갈라하드의 상태도 비슷했다.
다만, 그렇다고 낮잠 자고 와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상일이란 게 응당 그랬다.
갈라하드는 수통을 열었다. 역겨운 피 냄새가 가득 올라왔다. 살짝 흔드니 응고된 피가 금세 찰랑였다. 마나 덕분인 듯했다.
"자네는 나를 지키게. 그러면 내가 어떻게든 해보겠네."
"어떻게든이라니···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닙니까?"
그때, 마족의 주먹이 다시금 갈라하드를 향해 날아왔다.
갈라하드는 그를 보지 않고 수통을 입에 가져다 댔다. 저번보다 더 맛이 없었다.
머리가 핑- 돌았다. 목을 타고 넘어간 마나가 순식간에 퍼졌다. 몸이 뜨거운 걸 넘어서 타오르고 있었다. 마나 통로가 팽창했다. 격통에 신음이 절로 나왔다.
콰아앙! 또다시 굉음이 터졌다. 길버튼이 어깨를 비틀어 검으로 주먹을 막았다. 그 입에서 침음성이 터졌다.
본래 그냥 전투보다 누군가를 지키는 전투가 배는 힘들었다.
심지어 상대가 부상을 도외시하고, 지켜야 할 대상이 가만히 서 있다면 더더욱-.
다만, 길버튼은 불평하지 않고 검을 고쳐잡았다.
어느새 화염구들이 바로 위까지 와 있었다. 화염구들이 속삭이는 듯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는 순간 죽는다고-.
사선의 짜릿함이 갈라하드의 목을 간질였다.
그래, 이런 맛이지-.
갈라하드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지 않았다.
손가락을 튕기자, 검지 주변으로 마나 화살이 떠올랐다. 갈라하드는 그를 기준으로 농도를 확인했다.
그건 계산이 아닌 숙달된 감각의 영역이었다. 거기에 걸린 시간은 찰나였다.
다음 손가락을 튕기자 스파크가 튀었다. 피아노 연주하듯 손가락을 움직이니, 스파크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불을 끄는 건 역시-.
'번개지.'
손가락 사이에 스파크가 가득 감돌았다. 하나하나에 실린 마나가 짙었다.
그 많은 화염구가 갈라하드를 노리고 쏟아지니, 꼭 세상이 온통 불바다가 된 느낌이었다.
'질과 양의 싸움이군.'
스파크가 가득 서린 손을 흔들자, 스파크들이 순식간에 쏘아졌다.
하나하나가 거대한 화염구에 비해 스파크는 그냥 작은 화살 정도로 크기가 작았다.
단순히 보면 스파크가 가벼이 스러질 것 같았지만-.
마법은 양보다 질이었다.
놈들이 마석으로 마법을 퍼붓는다고 해도, 그 근본적인 실력으로는 질을 높일 수는 없었다.
스파크는 화염구를 가벼이 두드렸다. 화염구는 꼭 허상처럼 허무히 중간을 내줬다. 그를 파고들며 스파크의 모습이 사라졌다.
툭. 작은 소리가 전부였다. 화염구가 믹서기에 들어간 것처럼 갈렸다. 허물어졌다. 작은 조각들로 나뉘었다.
화염구의 파편이 갈라하드를 두드렸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쏟아지는 마법을 막으면서, 마물까지 상대해야만 했다.
데미안을 보냈지만, 그 거리가 멀었다.
콰아아앙! 길버튼과 마물의 충돌에 발생한 바람이 갈라하드의 머리를 휘날렸다.
꽤 마나를 들인 얼음 창으로 그 껍질 하나 뚫은 게 전부였다. 저 마족에게 마법으로 피해를 입히려면, 마족의 피를 마시고 또 압축까지 해야 했다.
그런데 마족이 갈라하드를 노리고 있었다. 거기에 마법까지 쏟아지는 상황-.
길버튼은 폭주하는 마족을 막는 것만으로도 벅찰 것이다.
둘 중 하나라도 놓치는 순간 치명적이었다.
머리가 두 개 달리지 않은 이상 마법 두 개를 동시에-.
'못하나?'
갈라하드는 문득 의문을 품었다.
이중 주문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이중 주문은 신입 마법사가 장기자랑에 나가서 쓰는 용도였다.
양손으로 세모와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과 흡사했다. 쉬운 마법일 때는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준 높은 마법을 쓰려면, 그 난이도가 급격하게 올라갔다.
왼쪽 손으로는 초상화를, 오른쪽 손으로는 풍경화를 동시에 그리는 것보다 어려웠다.
다만-.
'그리면 되잖아?'
왼쪽 손으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마법을 쓰고, 오른손으로 마나 압축을 한다면-.
'될 거 같은데.'
짙은 흥미가 올라왔다.
이중 주문은 상당히 예민한 작업이었다.
애초에 마법이란 게 늘 위험부담을 가지고 있지만, 이중 주문은 실패하는 순간 내부 충돌로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터질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실수를 안 하면 되는군.'
간단한 결론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건 보다 높은 마나 농도였다. 신경 쓰지 않고 날린 마법이 놈들의 마법보다 농도가 월등히 높도록-.
"좋은 생각이 났네. 길버튼 경, 조금만 버텨보게나."
"······예, 알겠습니다."
말과 달리 길버튼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위태로워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게 가장 승률 높은 선택지였다.
갈라하드는 수통에 남은 피를 전부 털어 넣었다.
목이 타는 것 같았다. 불을 삼킨 기분이었다. 그것도 덩실덩실 춤추는 불-.
안 그래도 넘치던 마나가 갈 곳을 잃은 것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갈라하드는 그를 억지로 눌렀다.
반발력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폭탄이라도 삼킨 기분이었다. 살짝이라도 실수하면 몸 자체가 소멸할 것 같았다.
짜릿했다.
콰아아아앙! 앞에서 뭔가 터졌다. 뜨거운 피가 얼굴을 칠했다. 갈라하드는 눈을 뜨지 않고 집중했다.
그때, 멀리서 주문이 들렸다. 갈라하드는 슬쩍 눈을 떴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른손에 압축하는 마나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왼손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이는 숙련된 기사가 의식하지 않고 반격하는 것과 흡사했다. 갈라하드가 오랜 시간 반복하여 무의식에 쌓아둔 마법의 발현이었다.
'되네.'
갈라하드는 결과를 보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자신이 못 맞출 리가 없기에-.
콰아아앙! 멀리서 충격음이 들렸다. 비처럼 내린 돌조각이 갈라하드를 두드렸다.
길버튼의 고통에 찬 신음이 들렸다. 딱딱한 게 코를 긁었다. 놈의 주먹이 바로 앞까지 다가온 듯했다.
갈라하드는 계속 집중했다. 마나를 누르고 또 눌렀다. 몸에서 뿌드득- 소리가 났다. 과부하가 왔다는 신호였다.
몸이 경고했다. 조금만 더 하면 터진다고-. 멈추지 않고 더 압축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폐활량이 뛰어나니 괜찮았다.
멀리서 주문이 들렸다. 눈을 떴다. 시야가 온통 붉었다. 괜찮다. 보이긴 했으니까. 다시 눈을 감고 집중했다.
마나를 더 눌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대장!"
그때, 길버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조금만 더 있으면 될 거 같은데-.
길버튼의 신음이 멀어졌다. 길버튼이 밀린 듯했다.
그제야 느껴지는 원초적인 적의-.
갈라하드는 눈을 떴다.
붉은 시야로 거대한 주먹을 갈기는 마족이 보였다.
피하기 쉽지 않았고, 피한다고 해도 주문이 꼬이면 터져 죽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 사선에서 갈라하드가 느낀 건-.
짙은 아쉬움이었다.
'아주 조금만 있으면······.'
그때였다.
"비이이이이잋!"
뒤에서 환한 빛이 뿜어졌다. 역광인데도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빛-. 그웬이 분명했다.
마족의 움직임이 아주 잠시 멈췄다.
그리고 그건 갈라하드가 원하던 아주 작고 미세한 틈이었다.
"지옥불."
갈라하드의 오른손이 비틀렸다. 뭔가를 꺼내는 것처럼-.
이윽고 주변의 공간이 녹아내렸다. 녹아내린 공간 사이로 자그마한 불이 쏘아졌다.
그건 화염구보다 훨씬 작은 크기였다. 그런데 그 경로에 있는 모든 것들이 녹아내렸다. 돌부터 시작해서 공기, 심지어 마나까지-.
모든 게 지옥불 앞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줄곧 전진하던 마족이 처음으로 몸을 뒤틀었다. 놈도 위험을 느낀 듯했다.
피하려는 듯했지만-.
"어딜!"
여기저기 구겨진 길버튼이 검으로 막았다.
마족의 가슴에 지옥불이 정확히 박혔다.
작은 불이 순식간에 타올랐다. 마족이 마른 장작인 것처럼 놈을 잡아먹으며 순식간에 크기를 키웠다.
마나는 농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른다.
그건 마족보다 높은 농도라면, 놈 자체가 연료가 된다는 소리였다.
끄워어어어어-!
마족의 고통에 찬 비명이 공동을 가득 울렸다.
"죽을 뻔했군."
그리 말하는 갈라하드의 입꼬리는 가득 올라가 있었다.
그때, 위쪽에 있던 화염구들이 사라졌다. 마법사 쪽도 처리한 듯했다.
줄곧 무표정하던 길버튼이 경악을 가득 떠올린 얼굴로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묻고 싶은 게 많은 듯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아주 뛰어난 마법사라고 하지 않았나."
헝클어진 머리를 넘기며 웃었다.
아, 한 마디 덧붙였다.
"내기는 자네가 진 걸세."
길버튼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19화 팔호
'살아남았다.'
톰은 얼얼한 손을 털며 기쁨을 표했다.
마물과 마족을 마주하고도 살아남다니-. 이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주변의 반응이 묘했다.
데미안은 그저 누워서 배고프다고 중얼거렸고, 그웬은 주저앉아서 멍하니 있었다.
그 표정에 죄책감이 가득했다. 꼭 처음 살인을 저지른 병사 같은 모양새였다.
아무래도 마법을 사용한 것때문인 듯했다. 마법에 관한 그웬의 반감이야 톰도 알고 있었다.
톰은 작게 혀를 차며, 제일 상태가 안 좋은 그웬부터 챙겼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웬 선임님 아니었으면, 전부 그 괴물에 죽을 뻔했습니다."
"······나 잘한 거야?"
"예,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웬 선임님 마법이 아니었으면 전부 끝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법을 사용한 걸-."
그리 말하는 그웬의 목소리가 꾹 눌려 있었다. 아무래도 마법의 무게가 다른 듯했다.
이해할 수 있었다. 북부에서 마법사는 저주받은 마족의 오물이었으니까. 나무에 걸려 불 타죽은 마법사도 제법 있었다.
다만-,
"아까 맞히지 않으셨습니까. 대장장이랑 칼, 소년."
"하지만 내가 마법사라면, 아이들이-."
그웬의 자그마한 중얼거림에 톰은 문제를 파악했다.
그웬은 자신이 보살피는 고아들이 얼마나 귀엽고 착한지 곧잘 떠들었다. 그웬이 돈에 약한 것도 고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함이었다.
그웬은 자신이 마법사라는 소문이 퍼지면, 아이들이 괴롭힘당할 걸 걱정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고아라서 더 취약할 테니까-.
그에 대한 해결책은 명확했다.
"그웬 선임이 더 강해지면 됩니다."
그웬이 눈을 끔벅였다.
북부에서 당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힘이 부족해서 당하는 겁니다. 대장님을 보십쇼. 마법사지만, 강하니까 오히려-."
톰은 뒷말을 삼켰다.
설명이 와닿았는지 그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챙겨야 할 대원은 그웬 하나만이 아니었다.
"배고파-."
데미안이 누워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식량이야 두둑하게 챙겨왔지만, 저 배고픈 데미안을 먹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그러던 중 뒤쪽에 있는 땅강아지 사체가 눈에 들어왔다. 땅강아지 사체는 맛이 끔찍했지만, 데미안은 맛을 가리지 않았다.
'향신료를 챙겨오길 잘했군.'
"나도··· 나도 도와줄게!"
"아닙니다. 그냥 거기 계시는 게 도와주시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톰은 그웬의 도움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언제 오시려나.'
톰은 갈라하드가 까마귀를 쓴 마법사를 데리고 들어간 안쪽을 곁눈질했다.
****
'······맙소사.'
큰 충격에 까마귀는 주문을 외우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놈은 그때보다 더 강해졌다.
그게 말이 되나?
놈이 흑마법사라면 이해하겠지만, 놈은 정보국 요원이었다.
놈은 인간으로 마나를 증진시키는 걸 정말 끔찍할 정도로 싫어했다. 정작 본인은 인간 마법사의 머리에 구멍은 뻥뻥 뚫으면서-.
그 때문에 까마귀가 인간이 아닌 마석으로 활로를 찾은 거 아닌가.
그런데 더 강해졌다니-.
놈이 펼친 그건 분명······.
'지옥불은 멸망한 마탑의 마법 아니었나?'
손이 저절로 떨렸다. 억울함이 올라왔다. 모든 걸 버리고 왔는데, 결국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그와 동시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어떻게 해야 놈한테 살 수 있을까. 답은 하나였다.
'흑마법학회의 지부 위치가···. 마족의 형세가······.'
까마귀는 알고 있는 정보 중에서 놈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필사적으로 골랐다.
이 정도면 살려주지 않을까-.
그때, 익숙한 레몬 향이 풍겼다.
까마귀는 터지려는 비명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놈은 늘 그렇듯 무심한 눈으로 까마귀를 내려보고 있었다.
"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놈이 눈을 찡그렸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분명했다.
아차! 이런 실수를-.
까마귀는 냉큼 망토를 뒤집어 가진 것들을 탈탈 털었다. 주머니부터 그 안에 있는 작은 마석들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내밀었다.
"아, 팔호였군."
대답이 묘했지만, 공포에 절은 까마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까마귀는 냅다 고개를 박았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형님!"
****
'팔호였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뭡니까?"
"전에 쓰던 정보원일세."
길버튼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마법은 정신을 엇나가게 했기에, 툭하면 괴상한 놈들이 튀어나왔다.
그런 불순한 조직들을 관리하기 위해, 정보원을 두는 건 기본이었다. 갈라하드는 기본에 아주 충실했다.
팔호는 갈라하드의 흑마법학회 정보원이었다.
정보를 잘 물어오던 놈인데, 어느 순간 사라졌다.
'북부에 있었군. 이러니 못 찾았지.'
연락 끊어진 정보원들이 다 북부로 도망친 건가?
그럴 가능성이 제법 있었다. 다른 곳에 숨었다면, 진작 정보국에게 잡혔을 테니까.
"···정보원한테 돈을 뜯습니까?"
"증거품일세."
갈라하드는 팔호가 건넨 물품들을 살폈다. 상급 마석 두 개와 푼돈, 그리고 양피지와 잡다한 물품들이었다.
'내가 여기까지 쫓아왔다고 생각하겠군.'
그리 생각하니, 놈이 바들바들 떠는 게 어느 정도 이해됐다.
북부 전선 깊숙한 동굴까지 쫓아왔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무섭겠는가.
상황이 공교로웠지만, 굳이 해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놔두면 다시는 배신 안 할 게 분명했다.
북부의 끝까지 도망쳤는데도 잡혔다.
어디로 도망치겠나.
계산을 마친 갈라하드는 부드럽게 웃었다.
"팔호, 나는 자네가 죽은 줄 알고 걱정했다네. 그런데 이런! 살아있었군."
"하하···! 하! 사연이 있었습니다. 저를 의심스럽게 본 조직이 북부로 보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감시꾼까지 붙어둔 터라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팔호가 납작 엎드렸다. 당장 가면이 없었으면 신발이라도 핥을 기세였다. 갈라하드는 슬쩍 발을 뒤로 치웠다.
"하긴 그럴 리가 없지. 팔호, 자네는 그래도 머리가 있지 않았나. 설마 나한테서 도망칠 수 있다는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겠나."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십니까! 아이고 걱정시킨 듯하여 죄송합니다! 망할 흑마법사 놈들!"
까마귀가 연신 분통을 터뜨렸다. 갈라하드는 차오른 피를 애써 삼키며 웃었다. 속이 엉망이었지만, 여유는 무기였다.
"그래, 나는 자네를 믿었다네. 우리 제법 좋지 않았나."
"···예에! 영광입니다!"
발에 붙으려는 팔호를 슬쩍 밀어냈다.
"아까 보니 땅강아지 마물 배에 마물 조련사의 것으로 보이는 마법진이 있던데, 아는 게 있나?"
"아, 그거 말입니까!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걸 따지자면, 먼저 여명 놈들에 대해서 말해야 합니다."
갈라하드는 뒤늦게 팔호가 말이 많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짧게 말해주겠나. 자세한 건 보고서로 주게."
"예, 요점만 말하자면 세력을 급격하게 키운 여명이 뿌렸습니다!"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을 뿌렸다고?"
원본은 아니고 열화판을 뿌린 듯했지만, 팔호는 모르는 듯했다.
"예, 여명이 산하 조직에 뿌렸습니다."
"잠깐 흑마법학회가 여명의 산하로 들어갔다고?"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본래 여명은 그리 큰 조직이 아니었다. 그런데 흑마법학회를 산하로 넣었다니-.
아무리 갈라하드가 흑마법학회를 들쑤셨지만, 여명 아래로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팔호가 거짓말할 이유는 없었다.
그 사실을 갈라하드가 몰랐다는 건, 셋 중 하나였다.
정보국의 눈을 가릴 정도로 여명이 뛰어나거나. 아니면 갈라하드에게만 정보가 내려오지 않았거나-.
갈라하드가 들었으면, 뿌리까지 뽑았을 테니까.
정보국에서 여명을 이용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여명에 마물 조련사가 있나?"
"그건 모릅니다. 다만, 여명에서 제마전쟁의 잔재들을 흘리고 있습니다. 마물 조련사뿐만이 아닙니다."
제마전쟁은 예전 마족들이 제국과 벌였던 전쟁을 칭하는 이름이었다.
갈라하드는 품에서 가죽 수첩을 꺼내서 그 내용을 살폈다. 제마전쟁의 잔재를 뿌리는 단체라면 적혀 있을 만했다.
'···없다.'
기억 못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기록한 거라고 해 봤자 굵직한 정보들이었으니까. 다만, 갈라하드는 왠지 상황이 비틀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희소식이군.'
굴렀던 세월이 의미 있다는 신호였다.
"그래, 여기서 뭐 하고 있었지?"
"마석 캐고 있었습니다. 마석을 저 마족에게 먹여 전선에 균열을 일으킬 계획이었습니다."
"마석을 마족에게 먹인다니?"
"마족은 배가 고프면, 마석을 먹습니다. 그를 먹을수록 더 강해지지만, 그만큼 이성을 잃습니다."
"여명에서 나온 정보인가?"
"예, 맞습니다!"
아는 게 많군. 이상할 정도로 말이지-.
"여명의 목표가 뭐지?"
"제2의 제마전쟁일 겁니다. 내부를 흔들어 전선을 무너뜨릴 계획이었습니다. 놈들은 성벽이 무너져야 진정한 세계가 열린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때, 길버튼이 소리 내어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팔호의 고개가 돌아갔다.
"너는 담당자님만 없었어도 뒤진 목숨이다. 건방진 기사야."
"아, 성벽을 무너뜨린다니 너무 우스워서 말이지."
웃음과 달리 길버튼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너는 벽 너머를 못 봤군."
길버튼의 물음에 팔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튼 형님. 제가 또 뭘 알고 있냐면-."
아니,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갈라하드는 길버튼을 내보내고 팔호와 잠시 회유의 시간을 가졌다.
한결 더 순해진 팔호는 순순히 가진 정보를 전부 뱉어냈다.
오히려 묻지 않은 것도 먼저 꺼냈다.
"그래, 자네는 제법 똑똑하니까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네! 당연하죠! 돌아가서 정보를 주기적으로 보내라! 특히 여명 중심으로!"
가면 사이로 팔호의 눈이 흔들렸다.
'북부의 끝까지 쫓아왔다는 착각이 한몫했군.'
이 정도면 다시는 도망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북부 끝에서도 잡혔는데, 어디로 도망치겠는가.
팔호는 영리하고 꾀가 많지만, 멍청한 놈은 아니었다.
"피해가 얼마나 큰지 아는가? 팔호,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부드럽게 대하지 않았을 걸세. 마석 손해가 얼마인가. 이 정도면 성을 하나 샀을 정도라네."
"······마석 손해요? 마석을 쓰셨습니까?"
팔호가 멍청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갈라하드는 슬쩍 옆을 가리켰다. 빛을 잃은 마석 찌꺼기가 떨어져 있었다.
마족에게 먹인 마석의 잔재였다.
"······."
가면 사이로 까마귀의 붉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가 커졌다. 개샊-. 자그맣게 욕설이 들렸다.
"하하. 그렇습죠! 원래 드리려고 모아뒀는데! 멍청한 마족 놈이 다 처먹어버렸네! 이런! 시발! 개새끼! 마족!"
"그렇지? 오해할 뻔하지 않았나. 자네가 약속을 어기고 횡령하는 줄 알고. 자네는 내 소유품이니, 자네가 얻는 모든 건 내 것이라네."
"기···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하!"
"그렇지? 자네니까 특별히 이자는 받지 않겠네."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붉은 눈동자에 눈물이 뚝뚝 흘렀다. 갈라하드는 어깨를 두드려줬다.
"아, 봐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네."
작은 속삭임에 팔호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리고 가면 똑바로 쓰게나."
팔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면을 고쳐 썼다.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 놈을 살려주며 걸었던 조건 중 하나였다.
손을 저으니, 팔호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갈라하드는 그제야 억눌렀던 숨을 터뜨렸다. 입가로 검은 피가 길게 흘렀다.
'마족의 피는 많이 마시면 건강에 안 좋군.'
입가의 피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속이 엉망이었다. 마나 통로가 전부 뒤틀린 상태였다.
마나에 짓눌렸던 근육들이 비명을 질렀다. 갈라하드는 벽에 등을 기대고 연초를 물었다.
'한 톨 남았군.'
몸이 아니라 영혼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미끄러지듯 앉았다.
'조금만 자야겠군.'
무거운 눈꺼풀이 막을 수 없이 내려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갈라하드는 거센 기침을 하면서 눈을 떴다.
잔뜩 구겨진 갑옷을 입은 길버튼이 앉아 있었다.
"자네, 꼴이 엉망이군."
"저를 지적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것도 그렇군."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오랜만에 꽤 오래 잔 기분이었다. 마나가 조금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한 톨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연초를 털어 입에 물었다. 손가락을 흔들었지만, 불이 일어나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짜증스레 손가락을 털었다. 자그마한 불이 타올랐다.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불빛 너머로 사뭇 진지한 얼굴의 길버튼이 보였다. 그 얼굴에 긴장이 가득했다.
'정체라···.'
갈라하드는 잠시 그 웃긴 단어를 중얼거렸다.
"버림받은 사냥개라네. 잡아 먹히지 않은 게 다행인-."
레몬 향이 깊게 풍겼다. 흐릿한 정신이 그제야 조금씩 일어났다. 억지로 마나를 돌렸다. 곳곳이 불에 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쪽을 잡아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합니까?"
"자네, 도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경악 어린 목소리에 갈라하드는 기침하듯 웃었다.
"마법으로 마족을 죽이는 마법사라니-. 들은 적 없습니다."
"말하지 않았나. 나는 선구자 체질이라고."
그때, 밖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갈라하드는 풀린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길버튼이 무의식적으로 내민 손을 거절했다.
"나는 누가 내 몸에 손대는 걸 싫어한다네. 사내는 특히."
"······저도 딱히 좋아서 하는 건 아닙니다만."
갈라하드는 낄낄 웃으며 무거운 발을 옮겼다.
노릇노릇한 냄새가 가득 풍겼다. 큼지막한 고기들을 한가득 쌓여 있었다.
거대한 불 앞에서 톰이 열심히 고기를 굽고 있었고, 그 옆에 데미안과 그웬이 있었다. 캠프 파이어 분위기였다.
"어, 대장님 오셨습니까. 금방 준비해드리겠습니다."
톰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그 손에 들린 팬이 요란하게 돌아갔다. 일류 요리사 같은 폼이었다.
"이건 회식이 아니네."
"···알고 있습니다."
길버튼이 뾰족하게 대답하며 거적때기가 된 코트를 바닥에 깔았다.
갈라하드는 거절하지 않고 그 위에 앉았다.
길버튼의 구겨진 얼굴을 보니, 갈라하드를 위해 깐 건 아닌 듯했다.
그때, 톰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고기가 담긴 쇠그릇을 내밀었다.
"아, 고맙네. 이것 좀 들고 있게."
갈라하드는 피던 연초를 길버튼에게 내밀고 그릇을 집었다. 고기는 노린내가 가득 풍겼다. 좆같은 맛이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면서 꼭꼭 씹었다.
'사라진 정보원이 몇 명이었더라-.'
갈라하드는 수를 잠시 헤아렸다. 그중 대부분 왠지 북부에 있을 것 같았다,
'대충 여덟 정도 되겠군.'
거기에 팔호에게서 얻은 정보들까지-.
할 일이 점점 늘고 있었다.
정보국에 있을 때보다 더 바쁜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아드리안나가 떠올랐다.
"그래서 지원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건가?"
"아마 곧 도착할 겁니다."
"느리군."
갈라하드는 작게 투덜거렸다.
****
"서둘러 움직인다. 다들 마차를 버리도록."
아드리안나의 명령에 하트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늘 평온하던 아드리안나가 저리 다급하게 말하다니,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하트나는 고삐를 잡고 슬쩍 선임인 캐럿 옆으로 붙었다.
"무슨 일이랍니까?"
"길버튼 쪽에서 뭔가 나왔다는데, 그 흔적이 7대대가 당했던 것과 비슷하다네."
"아, 최근에 7대대 마족 습격 말입니까?"
"그래, 근데 길버튼 쪽에서 그게 나왔다는군. 좆된 거지. 거기에 그놈이 있잖아. 제국놈. 놈이 죽으면 제국한테 명분을 주는 거니까-. 아, 좆나게 꼬였네 진짜."
캐럿의 거친 욕설에 하트나는 작게 숨을 뱉었다.
제국에 대해 북부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뉘었다.
'좆같은 제국 놈들 더는 못 참겠다 쓸어버리자'의 강경파.
'참자. 그래도 마족을 두고 어떻게 인간끼리 싸우냐'의 온건파.
'마족이랑 제국 둘 다 쓸어버리자'의 급강경파-.
이렇게 세 개로 나뉘었다.
원래는 온건파가 제일 많았지만, 아드리안나와 황태자 사건 이후로 강경파가 커진 상태였다.
만약 놈이 죽은 걸 빌미로 제국이 압박을 한다면, 강경파가 득세할 게 분명했다.
물론, 결론은 대공이 내리겠지만, 대공은 피를 마시는 자였지 피하는 자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중요한 자였군요?"
"그러면 너는 시발 뭐라고 생각한 거야?"
아니, 왜 나한테 욕을-. 하트나는 꾹 참았다.
"근데 상황 끝난 거 아닙니까? 7대대 습격했던 마족보다 강하고 땅강아지 열두 마리라면··· 아무리 길버튼이라도···."
"그래, 이미 뒤졌겠지. 시체라도 챙기러 가자는 거 아니야."
호통에 하트나는 고삐를 잡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급하게 짐을 꾸리고 있었다.
다급한 반응이 있었지만, 누구도 그쪽의 전멸을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버티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첫 임무부터 중급 마족이라니 특공대는 재수 옴 붙었군."
하트나가 슬쩍 입을 달싹였다.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또 뭐 새끼야 말해."
"그······ 특공대가 아니라 특무대인데···."
"아이- 시발! 진짜!"
하트나는 황급히 고삐를 당겼다.
20화 각방
"니미랄-."
1대대의 캐럿은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고삐를 틀어잡았다. 말이 거칠게 땅을 박차며, 눈이 길게 뿌려졌다.
선두에 아드리안나가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늘 차분하던 아드리안나가 저리 급하게 움직이다니-. 사태의 심각성이 여실히 느껴졌다.
다른 1대대 대원들도 별다른 말 없이 고삐만 잡고 있었다. 적막한 설산에 말발굽 소리만 연신 퍼졌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아드리안나가 말을 미끄러지듯 멈췄다. 그 빠른 속도에서 저리 깔끔하게 멈추다니-. 과연 명마였다.
'도착인가.'
캐럿은 말 옆에 멘 창을 뽑았다. 다른 대원들도 말없이 무기를 뽑았다. 팽배한 긴장감이 차올랐다.
그때-.
"데미안, 그만 좀 먹게나."
"맛없어요."
"그런데 왜 계속 먹는 건가."
"배고파서요."
어디선가 두런두런 대화가 들렸다.
평화로운 대화에 1대대의 걸음이 뚝 멈췄다.
'대기했군!'
캐럿은 속으로 작게 환호했다. 그래, 차라리 놓치는 게 낫지-.
다만, 아드리안나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예상과 달랐다.
불을 가운데에 핀 이들이 옆에 앉아서 두런두런 떠들고 있었다. 병사로 보이는 이가 계속해서 고기를 구웠고. 다들 그 옆에 앉아 있었다.
손에 든 무기가 무색해질 정도로 평화로운 분위기에 다들 움직임을 멈췄다.
"아, 드디어 왔군."
그때, 특무대 대장이 일어나서 손을 흔들었다. 전과 달라진 게 하나 없는 깔끔한 복장이었다.
"무사하십니까."
"보다시피."
"마족은 어딨습니까?"
아드리안나의 물음에 특무대 대장이 한쪽을 가리켰다. 그에 아드리안나가 검을 뽑고 동굴로 향했다.
"다 잡았-. 말을 끝까지 듣지 않는군."
특무대 대장이 다급하게 말했지만, 아드리안나는 이미 동굴에 들어간 뒤였다.
캐럿도 아드리안나를 따라 동굴로 향했다.
동굴은 엉망이었다. 사방에 살점과 피가 붙어 있었고, 마물 특유의 더러운 노린내가 가득했다.
'땅강아지는 거짓이 아니었네.'
캐럿은 문득 사체에서 이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불? 마법인가-.'
땅강아지가 그냥 불에 탔을 리 없으니, 마법의 흔적일 것이다. 마법사는 말 많은 허세꾼이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동굴에 땅강아지의 사체가 가득했다. 적게 잡아도 최소 열이었다.
동굴의 끝에 거대한 사체가 있었다.
불에 말끔하게 타서 늘어 붙은 살점이 전부였지만, 캐럿은 최소 중급 마족의 사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불에 타서 죽었다. 마족에게 마법을 쓴다고-?'
마법은 마족의 오물이었다. 오물이 어찌 그 주인을 해치겠는가.
"마법으로 마족을 잡았군."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증거를 앞에 두고도 부인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말이 되나?"
"이미 증거가 앞에 있잖아."
"보니까 검흔이 많아. 이건 길버튼 경의 검인데."
"검흔은 전부 얕다. 직접적인 원인은 마법사가 분명해."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그 화두는 역시 마법이었다.
마법사가 마족의 끝을 냈다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없었다.
"남은 대원들은 땅강아지 사체를 수습한다."
아드리안나의 명령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캐럿은 아드리안나의 뒤를 따라 동굴을 벗어났다.
그들은 여전히 불 주변에 앉아서 도란도란 떠들고 있었다.
'대단하군-.'
캐럿은 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길버튼에게 향했다.
"어이, 길버튼. 아주 화려하게 했던데. 땅강아지 열여섯 마리랑 마법사 둘, 거기에 중급 마족이라니-. 못 본 사이에 더 강해졌나 봐?"
캐럿의 말에 길버튼이 쓴 웃음을 지었다.
"제가 잡은 거 아닙니다. 대장이 잡았습니다."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지만, 직접 듣는 건 또 달랐다.
"특무대 대장이?"
"예, 저는 그냥 시간을 끈 게 다입니다."
"마법사잖아?"
"아주 능력 있는 마법사더군요."
"니미-. 진짜 마법사가 마족을 잡았다고?"
"예."
캐럿은 문득 스치듯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당연히 거짓말이라 생각했던 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특무대 대장이 헤르문을 이겼다는 소문도 사실인가?""예, 한 방에 이겼습니다."
"시발, 진짜?"
길버튼의 끄덕임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긴 그 새끼 깝친다고 코트도 안 입고 다니는 변태 새끼니까-."
하긴 마법사라고 다 약할 리는 없겠지-. 캐럿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가 보군."
"예, 강합니다."
진지한 길버튼의 대답에 캐럿은 눈을 찡그렸다. 그 자존심 강한 길버튼이 저리 말하다니-. 도대체 뭘 봤길래.
'길버튼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
캐럿은 이어서 적었다. 거친 말투와 달리 글씨가 수려했다. 대충 보고서를 완성한 캐럿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다섯으로 구성된 특무대가 최소 중급인 마족 하나와 땅강아지 열여섯, 마법사 둘을 잡았다. 심지어 마족은 제국에서 온 마법사가 잡았다고-. 시발, 이걸 누가 믿을까."
캐럿은 보고서를 길버튼에게 내밀며 충고했다.
"차라리 네 공으로 돌리는 게 나을 거야. 마법사라면 눈에 불을 켜고 깎아내리는 개새끼들이 많으니까."
"일 없습니다. 얼마나 놀림당하라고-."
길버튼의 단호한 대답에 캐럿이 피식 웃었다.
"그래, 능력 있는 마법사라면 금방 두각을 드러내겠지. 지금이야 어떻게 훼방 놓아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겠냐. 오히려 나중에 명분으로 쓸 수 있을 거다."
"저희 대장님이랑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사내와 비교하다니, 숙녀에게 실례다."
"숙녀십니까?"
"길버튼, 너 말투가 상당히 띠꺼워졌구나."
길버튼이 입을 씰룩였다. 캐럿은 그 모습이 얄미워 한 대 쥐어팰까 고민하다가 참았다.
길버튼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아드리안나와 이야기하는 특무대 대장이 있었다.
아드리안나가 무표정이라 그 속내를 알 수 없다면, 사내는 여유로운 미소로 가린 느낌이었다.
'의외로 잘 어울리는군.'
캐럿은 아래에 사견을 추가했다.
****
"몸은 괜찮으십니까?"
아드리안나의 무심한 질문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럭저럭 괜찮네."
"지원을 기다리셔도 됐을 겁니다."
"개시 손님인데 어찌 그러나."
아드리안나가 눈썹을 아주 살짝 구겼다. 자세히 보니 고민하는 듯했다.
"······아, 첫 임무를 개시로 비유하신 거군요. 훌륭한 비유였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 여인에게는 농담하면 안 되겠군.'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면 동굴은 어떻게 발견하신 겁니까?"
"마나의 농도가 유난히 짙더군. 그를 따라가 보니-."
따란. 갈라하드는 뒤의 동굴을 가리켰다.
"마나의 농도가 짙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취조보다는 자문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마법사니까. 마법사라면 알 수 있네."
"아, 마법사라서-."
"실망한 눈치군."
"최근 북부에서 마법사와 연관된 마족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를 알 수 있다면, 좀 더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그대는 알 수 있을 텐데?"
"아, 저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농담인가? 싶었지만, 진지한 아드리안나의 얼굴을 보니 농담은 아닌 듯했다.
"마나를 불태우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농도에 따라서 느낌이 다를 텐데."
"느낌 말입니까?"
"마나를 불태울 때, 그 정도가 있지 않나. 그걸로 파악해보게."
아드리안나가 눈썹을 살짝 구겼다.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갈라하드도 이론적으로 던진 말이었다.
마나를 불태우는 성질은 아드리안나에게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거였다. 그러니 숨 쉬는 사람에게 공기의 농도를 확인하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당장 활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활용법을 알려주는 정도였다.
"아, 이거군요. 음-."
그때, 아드리안나가 손을 흔들었다.
"알 것 같습니다. 이런 응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했습니다. 대단하시군요."
아드리안나가 순수한 칭찬을 건넸지만, 갈라하드는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단번에 했다고?'
작은 단초를 던지는 느낌으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걸 단번에 해내다니-.
'역시 아드리안나군.'
갈라하드는 작게 감탄했다.
"굉장히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아드리안나가 깊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진심이 절로 묻어나오는 인사였다.
'···이건 꽤 크겠는데.'
갈라하드만큼은 탐지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저 습득력이면 그 실력이 금방 늘어날 게 분명했다.
마나 농도를 탐지하면, 웬만한 마법사의 수작은 막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나중에 갚게나."
"어떤 걸 원하십니까?"
"농담일세."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농담은 하면 안 되겠군. 갈라하드는 다시금 다짐했다.
"바로 복귀하시겠습니까?"
"복귀라니?"
"저와 함께 1대대로 가실 거 아닙니까?"
아드리안나가 확신에 가까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 내가 자신을 따라갈 것이라 생각했군.'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어쩌면 사령부를 나올 때부터 아드리안나는 그를 상정했을 수도 있었다.
갈라하드가 마나를 불태우는 성질 때문에 아드리안나를 따라다닌 게 사실이었으니까.
아드리안나는 북부의 영웅이었다. 그녀의 곁에 있으면 공을 세우기 한결 편하고 안전할 것이다. 설령 최전선이라도 아드리안나의 무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더 안전할 게 분명했다.
그녀에게 붙는 게 당연하고 합리적인 선택지였다.
다만-.
'대공이 아드리안나 옆에서 쌓은 공을 인정 안 해줄 거라는 게 문제지.'
더불어 북부에 날파리들이 많았다. 그리고 여명이라는 놈들까지-.
그를 가만히 둔다면 제마전쟁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멸망을 막는 거였다.
아드리안나나 대공은 그 수단일 뿐이었다.
물론, 그녀의 성질을 연구하는 게 문제였지만-.
'그건 중간중간 들리면 되니까.'
계산을 마친 갈라하드는 고장 난 것처럼 멈춘 아드리안나를 보며 끄덕였다.
"내가 자네를 따라다닐 거라고 생각했군. 미안하지만, 나는 따로 할 일이 있네."
"아-."
아드리안나가 비명 같은 단말마를 흘렸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그 볼이 살짝 붉어졌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네. 나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 이런 일이 또 발생하면 위험하니까 드린 말씀입니다. 그대의 목숨은 무겁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이래 봬도 제법 잘 싸운다네. 보지 않았나."
갈라하드는 슬쩍 동굴을 가리켰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흔들어 금세 예의 평온한 얼굴 돌아왔다.
"당분간 일이 좀 생겨서 말이지."
"예, 알겠습니다. 병력의 운용은 각 부대의 대장이 맡는 거니까요."
아드리안나가 곱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아드리안나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겉면이 까슬한 자그마한 알이었다.
"저주를 내리는 매의 알입니다. 그 알을 깨면 어디에 있든 제가 갈 수 있습니다. 혹시나 위험하면, 그걸 깨시면 제가 가겠습니다."
"살벌한 이름이군. 그런데 알을 깨면 어디든지 올 수 있다고?"
"예, 어미가 알을 깬 이를 죽을 때까지 쫓아갑니다."
"신기하군. 어떻게 작용하는 거지?"
"······꼭 필요할 때 깨셔야 합니다. 하나밖에 없습니다."
"에이, 설마 원리가 궁금하다고 알을 깨겠는가."
갈라하드는 알을 누르던 손가락을 슬쩍 뒤로 숨기며 웃었다.
"저는 가보겠습니다. 접경 지역을 오래 비운 터라-."
"아, 손은 잡고 가야지."
"···상태가 안 좋으신 것 같습니다만."
"괜찮네. 자네랑 손잡는 것만 기다렸는데, 그냥 가면 섭섭하지."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마족의 피를 과다 복용한 탓에 내부가 엉망이었다.
마족의 피로 인한 찌꺼기 같은 게 안에 남아 있었다. 오히려 그를 태우는 편이 회복에 좋을 게 분명했다.
거기에 궁금한 것도 있었다. 마족의 피 찌꺼기가 타는 건 어떤 느낌일까. 어떻게 작용할까-. 지독하게 궁금했다.
"알겠습니다."
잠시 주저하던 아드리안나가 손을 맞잡았다.
세 번째인데도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이 가득 올라왔다.
타오르고 찢어지고 또 타올랐다. 그래도 이제 세 번째라고 추하게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안쪽에 있던 찌꺼기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마나가 조각나는 순간, 갈라하드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농도가 높을수록 더 빨리 탄다.'
그건 즉 상대가 강한 마족일수록 아드리안나의 힘이 커진다는 뜻이었다.
이 얼마나 사기적인 능력인가. 반드시 잡아야 했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손을 뺐다. 갈라하드는 어느새 중심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붙잡으려 손을 내밀던 아드리안나가 뒤로 물러섰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들어 아드리안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보게나. 저번보다 상태가 좋지? 엎어졌지만, 기절은 안 했네."
아드리안나가 작게 숨을 뱉었다.
"자네, 지금 웃은 건가?"
아드리안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숙이고 물러났다.
"그러면 강녕하시길."
그를 끝으로 아드리안나가 1대대를 끌고 사라졌다.
저번보다 속도가 빠른 듯했다,
"괜찮습니까?"
"보이는 것보다 괜찮네."
"일으켜드립니까?"
"됐네, 혼자 일어날 수 있네."
갈라하드는 혀를 차고 몸을 일으켰다.
'깔끔하군.'
갈라하드는 손을 쥐었다 피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오히려 아드리안나와 손을 잡아 상태가 좋아졌다.
물론, 마나가 전부 불탄 건 똑같았지만, 마족의 피로 인한 부작용이 사라졌기에 오히려 좋았다.
'마족의 피를 과복용하면 아드리안나한테 가면 되는군. 그러면 많이 마셔도 되나?'
이런저런 궁금증이 올라왔다. 아드리안나는 늘 짜릿했다.
그때, 길버튼이 작게 기침했다. 뭔가 할 말 있는 얼굴이었다.
"뭔가?"
"왜 1대대로 안 가셨습니까? 능력을 보였으니 1대대로 갔으면 쉽게 공을 쌓으실 수 있었을 겁니다."
길버튼이 묘한 목소리로 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그녀를 따라가면 제법 쉽게 공을 쌓고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갈라하드의 목표는 아드리안나가 아니었다.
끔찍한 엔딩을 막는 게 갈라하드의 목표였다. 대공이나 아드리안나는 그 수단일 뿐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마족을 상대로는 아드리안나만큼의 효율을 낼 수 없었다. 아드리안나의 옆에 붙어 있는 건 비효율적이었다.
굳이 남의 전장으로 갈 필요 없었다.
갈라하드의 전장은 따로 있었다.
"옳은 길은 대부분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이라네."
갈라하드는 손에 들린 양피지를 탁탁- 쳤다.
팔호에게서 받은 정보들이었다. 양피지에는 상당히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거기에 북부로 들어온 불순한 세력들의 정보도 적혀 있었다.
이걸 하나씩 잡으면, 여명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양피지가 갈라하드의 전장이었다.
'이게 외조인가.'
갈라하드는 작게 농담하며 옷에 묻은 눈을 털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길버튼이 뒤쪽을 보며 물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각오를 한 것처럼 진지한 얼굴의 그웬과 배를 두드리는 데미안, 짐을 정리하는 톰까지-.
특무대의 방향을 묻는 듯했다.
"북부가 최근 들어 시끄럽지 않았나."
"······예, 몇 년 전부터 북부에 괴상한 놈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척박한 땅에 먹을 게 뭐가 있다고 그리 몰려드는지 모르겠습니다."
길버튼의 짜증 섞인 대답에 갈라하드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우리는 그놈들을 잡을 거라네."
양피지의 한쪽에 적힌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5대대에 흑마법학회 지부를 세우는데, 그쪽 세력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는 중. 다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고 예상된다.]
사령부에서 마주친 5대대 대장의 '마법에 관심이 있으니 꼭 방문해달라.'라는 귓속말이 떠올랐다.
거기에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5대대면 각 대대의 사이에 있으니까-. 본부를 세우기 좋겠군.'
돌아올 곳은 중요한 법이었다.
"5대대로 갈 것이네. 다들 준비하게."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말했다.
"준비 끝났습니다!"
톰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눈치가 상당한 톰이었다.
21화 학연
"저 결심했어요!"
대뜸 소리치는 그웬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일병! 톰!"
"아무것도 아니네, 다시 자게나."
"네! 알겠습니다!"
톰이 다시 곯아떨어졌다. 그웬이 톰을 붙잡고 사과했다. 잠을 깨워서 미안하다며 흔들었다.
'······악질인데?'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도대체 무슨 결심을 했나."
"저 굉장히 강한 마법사가 될 거예요."
그웬이 마법을 배운다는 건 호재였다. 특무대에 그웬을 넣은 것도 그 이유였고.
다만-.
"굉장히 강한 마법사라는 건 상당히 추상적인 목표일세. 목표는 확실한 편이 좋지."
"······어? 그래요?"
"먼저 정확한 목표를 세워보게,"
눈을 끔벅이던 그웬이 대뜸 손가락질했다.
갈라하드는 자신을 가리키는 굳은살 박인 손가락에 눈을 찡그렸다.
"내가 되고 싶다는 건가?"
"네! 갈라하드님처럼 강력한 마법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웬의 대답이 우렁찼다. 톰이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그건 불가능하네."
"왜요!"
"심성의 차이일세. 나는 빠르고 효율적인 방식을 선호하지. 머리를 터뜨리거나, 심장에 구멍을 뚫는 깔끔한 방식 말일세."
"깔-끔한 방식이요?"
그웬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그러기엔 자네의 심성이 너무 곱네."
"감···사합니다?"
"칭찬이 아닐세. 나처럼 효율적인 마법사가 될 수 없다는 거지. 머리에 구멍을 뚫을 수 있겠나?"
"아니요오!"
"그럴 줄 알았네. 마음이 약한 자네는 거대한 마법으로 상대의 형체가 안 남도록 아예 소멸시켜야 하네."
"······네에에?! 소멸이요?!"
톰은 잠을 포기했는지, 옆에 둔 가죽을 끌어왔다. 이어 굵은 실로 가죽을 꿰매기 시작했다. 코트를 만드는 듯했다.
"누군가를 지키려면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게나."
갈라하드는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톰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트의 형태가 잡히고 있었다.
그때, 데미안이 일어났다. 톰은 옆에 챙겨둔 고기를 내밀었다. 데미안은 다시 먹기 시작했다.
"······저도 알아요."
그웬이 고개를 푹 숙였다. 갈라하드는 굳이 재촉하지 않았다.
옆에 있는 창구를 슬쩍 열었다. 톰의 제안으로 만든 연초 피우기용 구멍이었다. 수분을 살짝 머금은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돌았다.
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여전했다. 바짝 마른 기다란 나무들과 그 사이의 하얀 눈들-. 따분해서 못 살겠군. 갈라하드는 작게 투덜거렸다.
"······그러면! 나쁜 놈들만 곤죽을 내는 마법사가 될 거예요!"
"곤죽이라니. 자네 순진한 외모와 달리 잔인한 구석이 있군."
"네에?! 아니-."
"그래서 마법을 배우고 싶다는 건가?"
"네!"
그웬이 기사 옆에 있는 종자 같은 얼굴로 끄덕였다.
"자네는 마법사로서 재능이 굉장히 좋다네. 그 거대한 마나통과 뛰어난 마나 민감도는 가히 천재라 불러도 될 정도지."
"헤헤."
그웬이 뒷머리를 긁으며 수줍게 웃었다. 칭찬에 약한 듯했다.
"자, 간단한 것부터 시작하지. 이건 그냥 불일세. 1 위계에 속하는 아주 간단한 마법이지. 따라 하게."
그웬의 눈이 살짝 몽롱해졌다. 그러더니 그웬의 손가락에 불이 그대로 떠올랐다.
'대단하군.'
갈라하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보는 것만으로 따라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역시 천재야.'
황혼의 마탑에 있는 놈을 제외하면 갈라하드가 처음으로 인정한 천재였다.
"자, 다음은 그 불에 집중하는 걸세. 누른다고 생각하면서 마나를 압축해보게나."
"압축이요?"
"꾹 누른다고 생각하게."
그웬이 눈을 부릅떴다.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집중했지만, 놀랍게도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잘 모르겠는데요?"
"꾹 누른다고 생각해보게. 보이지 않는 근육이 있는데, 그걸 당긴다고 생각하면 되네."
"보이지 않는 근육이 없어서 모르겠는데요!"
"···정 안되면 일단 손가락을 굽혀보게."
육체로 압축하는 걸 극도로 혐오하는 갈라하드였지만, 아예 감을 못 잡으니 어쩔 수 없었다.
문제는 그래도 소용이 없다는 거였다.
마법을 일으키면 마나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나를 느끼면, 대부분 압축의 원리는 금방 깨우쳤다.
그 기본적인 걸 못 하다니-.
'아.'
순진한 눈망울에 갈라하드는 작게 탄식했다.
"문제가 하나 있네."
"문제요?"
"자네는 멍청해."
"······네?"
"자네는 멍청하네."
"알아요!"
그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이 빨랐다.
"그래서 문제가 있나요?"
멍청한 게 무슨 문제냐는 질문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렇군, 자네가 굳이 마법의 진리를 추구할 필요는 없지. 그냥 내 마법을 보고 따라 하게."
"아! 네! 다행이네요!"
갈라하드는 다시금 불을 피웠다. 그웬의 손가락에 불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혼자 해보게."
그웬이 자기 손가락을 내려봤다. 집중하는 듯 눈썹을 구겼지만, 애석하게도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마족 때는 혼자 잘 하지 않았나?"
"그때는 급해서-.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원인이 뭔지 짐작됐다. 무의식에 자리한 마법에 대한 거부감이 문제인 듯했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반복된 학습이었다.
그걸로 해결 안 되는 문제는 없었다.
"자, 집중하게."
갈라하드의 손가락에 불이 타올랐다. 그웬의 손가락에도 불이 자리했다. 그 크기가 작아졌다. 따라서 작아졌다.
"자, 잘했네. 그러면 다시-."
불이 켜졌다. 작아졌다가 커졌다. 꺼졌다.
"이번에도 잘했네. 자, 그러면 다시-."
"다시-."
"다시."
꽤 많이 반복했는데도, 그웬은 불평하지 않고 곧잘 따라왔다.
얼마나 반복했을까.
톰이 코트를 완성하고, 데미안이 배를 두드리며 다시 눈을 감을 때쯤-.
"타올라라! 불! 돼··· 됐다!! 됐어요!"
그웬의 손가락에 불이 타올랐다.
'마흔 번은 반복해야 탑재되는군.'
마나를 배워서 마법의 원리와 주문식을 외우고 농도 분석까지 해서 마법을 배워서 쓰는 시간이랑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빠르다.'
비교할 수 없는 빠름이었다.
"좋군."
그웬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도박쟁이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부모의 도박에 일생을 고통받았는데, 자신에게 도박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얼굴 같았다.
"괜찮네, 부모의 것까지 따면 되니까."
"······네?"
"자, 다음은 4 위계 마법 폭발화구일세."
"방금은 1 위계였잖아요! 갑자기 너무 올라간 거 아니에요?!"
"괜찮네, 어차피 원리를 이해 못 하지 않나. 차라리 높은 위계의 마법을 배우는 게 더 이득일세."
잠시 고민하던 그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버튼은 마부석으로 온 데미안을 쳐다봤다.
둘은 말없이 한참을 갔다.
****
"북부 전선의 대대는 각자 기지가 있습니다."
길버튼이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병사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불을 쬐고 있었다. 검문소 같았다.
"귀족 같군."
"예, 비슷합니다. 권력은 귀족보다 강할 겁니다. 아무래도 군대니까 말입니다."
"공국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군."
어깨에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북부라고 이렇게 눈이 많이 올 줄이야-.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리며 어깨를 털었다.
"정지!"
병사 하나가 이쪽을 보며 소리쳤다. 그들이 분분히 창을 빼 들었다.
"5대대 대장은 대장들 사이에서 약간 붕 뜬 상황입니다."
"배척당하는 건가?"
"예, 원래도 행보가 달랐지만, 최근 마법사를 키운다는 소문까지 돌면서 배척당하는 중입니다."
그때, 병사들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병사들이 든 창은 그 끝부분이 상당히 큼지막했다. 고래 잡는 작살처럼 생긴 모양새였다.
"소속을 밝히십쇼."
병사가 그 창을 마치 마이크처럼 갈라하드에게 가져다 댔다.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라고 하네."
병사가 두꺼운 눈썹을 찡그렸다.
"특무대? 들어본 적 있어?"
"아니, 처음 들어보는데."
병사들의 대화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신분패를 보여주십쇼."
병사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길버튼을 쳐다봤다. 신분패 같은 거 받은 적 없는데?
"신분패는 마물의 뼈를 이용하는 터라 제작에 시간이 걸립니다."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수도도 일 처리가 느린 세상이었다. 북부는 오죽하겠는가.
"일단 자네 신분패부터 보여주게나. 1대대 신분패가 아직 있는 거 아닌가?"
"없습니다."
"왜 없나? 얼마 전까지 1대대였지 않은가."
"1대대가 아니니까요."
"생각보다 정직하군. 검문당하면 어쩌려고 그랬나?"
"1대대는 원래 검문 안 당합니다."
"지금은 1대대가 아니지 않나."
"신분패!"
병사가 소리쳤다. 그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안쪽 주머니를 뒤졌다.
"자, 여기 대공 전하의 임명서일세."
갈라하드는 예의 임명서를 꺼냈다. 대장들의 회의에서도 통했던 문서였다.
문제는-.
"나는 글을 몰라!"
"나도 몰라!"
"글을 보여주다니 수상하군!"
병사들이 까막눈이라는 점이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흉흉해졌다. 글을 보여줬다는 이유였다. 신분패는 도대체 어떻게 읽는 거지?
길버튼이 칼자루를 잡았다.
"적당히 패고 들어가도 될 겁니다. 어차피 대장과 약속된 거 아닙니까?"
길버튼이 북부식 협상을 제안할 때,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아, 제가 혹시 몰라서 임시 신분패를 만들어뒀습니다."
톰이 투박한 나무패를 내밀었다. 그를 확인한 병사들이 통과시켜줬다. 신분패의 문양만 확인하는 듯했다.
"톰, 자네 정말 유능하군."
"하하,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톰이 어색하게 웃으며 나무패를 챙겼다. 그 겸손한 모습에 갈라하드는 길버튼을 응시했다.
"왜 쳐다보십니까?"
"······아닐세."
불퉁한 길버튼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5대대 기지는 생각보다 규모가 있었다. 굵은 나무로 된 목책이 길게 세워져 있었는데, 그 사이의 길에 뾰족한 나무 바리게이트가 곳곳에 있었다.
바리게이트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썩은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 위에 눈이 소복하게 쌓여 제법 운치가 있었다.
목책은 멀리서 본 것보다 더 두껍고 높았다. 성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 사이사이에 쇠뇌도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꿉꿉한 냄새가 반겼다.
'진짜 군대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었다. 레몬 향이 꿉꿉한 냄새를 밀어냈다.
"부대가 생각보다 좋습니다."
"저게 좋은 건가?"
"예, 병사들의 건강 상태도 괜찮고, 그 무장 정도도 좋습니다. 5대대의 재정이 생각보다 좋나 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돌아보니 사령부와 미세하게 달랐다. 병사들이 깨끗했다. 물론 북부 기준이었다.
더불어 제국의 복식을 한 이들이 제법 많았다. 그중에는 상인으로 보이는 이들도 있었고, 수레를 챙기는 병사도 있었다.
'제국과 북부의 국경선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군.'
어떤 의미에서는 사령부보다 활발했다. 곳곳에서 마법의 냄새가 났다.
그때, 젊은 여인이 갈라하드를 반겼다. 회의장에서 본 적 있는 여인이었다.
"5대대 대장 마크님의 보좌관 루미안이라고 합니다."
여인이 갈라하드를 데려간 건물은 막사 사이에 있는 큼지막한 건물이었다. 경비가 삼엄했다.
갈라하드는 습관적으로 그 구조와 인원 배치를 눈여겨봤다. 직업병이었다.
똑똑똑.
"들어오게."
루미안이 문을 열며 옆으로 비켰다.
5대대 대장 마크는 피곤한 기색이 만연한 사내였다. 갈라하드를 본 마크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생각보다도 더 일찍 오셨군요. 뭔가 발견한 겁니까?"
짧게 인사를 건넨 마크가 곧장 물음을 제기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아드리안나는 원칙주의자입니다. 아마 망루를 전부 돌고 나서야 끝을 낼 텐데,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가령 뭔가를 발견하고 그를 잡아 사건을 종결지은 게 아니라면 이렇게 빨리 오실 리가 없습니다."
머리 회전이 생각보다 빠른 사내였다. 그 때문인지 말도 빨랐다.
"맞네, 오는 길에 중급 마족 하나와 마법사 둘, 땅강아지 열여섯을 잡고 왔지. 아드리안나가 늦게 오는 바람에 늦어졌다네."
마크가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했다.
"거짓말할 이유가 없으시니 진실이시겠군요."
마크는 의외로 빠르게 믿었다.
"대공 전하가 부대를 맡긴 이유가 있군요. 음-."
마크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쳤다.
"제 대대 기지에 본부를 세우실 생각이십니까?"
또 주제가 바뀌었다.
"아드리안나가 있는 1대대와 사령부 중심에 있으니, 위치상 적합할 테니까요. 이렇게 바로 방문한 것도 그 이유때문 아닙니까? 물론, 다소 비약이 섞였지만-."
갈라하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장소를 내어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문제가 몇 개 있습니다."
똑똑.
두드림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로브를 쓴 인물이었다. 염소수염인 사내였다.
무기가 없었다. 병사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마침 잘 됐습니다. 이쪽은 저희 부대의 외부 자문 코르튼입니다."
마크가 입꼬리를 올리며 인사했다.
코르튼이라는 염소수염이 장사치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네."
갈라하드는 손을 맞잡으며 습관적으로 마나를 흘려 넣었다.
'마나가 상당한데-,'
흑마법사협회의 전형적인 증거였다. 놈들은 마나를 늘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았기에 마나 양이 많았다.
"손님 계시면 다음에 와도 되는데 말입니다."
"아닐세, 자네가 궁금해했던 갈라하드 대장님일세."
코르튼은 마크와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일이 재밌게 흘러가는군.'
흑마법사를 잡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거주지를 파악하여 머리에 구멍을 뚫고 보고를 올리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갈라하드는 이번에도 그렇게 해결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사건이 다른 양상으로 흘렀다.
"코르튼은 5대대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해주시는 아주 고마운 분입니다."
마크가 대머리 사내를 소개하는데, 그 목소리가 제법 따뜻했다.
'마크가 말한 문제가 저거인가 보군.'
둘의 사이가 제법 좋아 보였다.
아마 마법사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서 또 받아들이기에 곤란하다는 거겠지.
"혹시 그 갈라하드십니까?"
코르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 얼굴에 기분 나쁜 홍조가 떠올랐다.
'그 갈라하드라니-.'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었다.
"그 갈라하드가 맞네."
"그 갈라하드라니?"
"아, 수도 아카데미를 최연소 수석으로 졸업하여 마법사 사이에서는 유명하신 분입니다."
코르튼이 진심을 꾹꾹 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마크의 눈이 살짝 더 커졌다.
"아카데미 출신인가?"
"예, 실은 아카데미에서 본 적 있습니다."
"그래?"
놈의 반응이 살짝 미묘했다. 뭔가 기분 나쁜 듯한 느낌이었다.
"예, 제가 졸업반일 때 들어오셔서, 저보다 빨리 졸업하셨습니다."
"자네, 졸업반에서 4년이나 있었나?"
갈라하드는 아카데미 입학부터 졸업까지 정확히 3년이 걸렸다. 그러면 저 사내는 졸업반에서 최소 4년을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놈의 구겨진 얼굴에 갈라하드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보통 다 그 정도 있습니다."
놈의 눈이 불온하게 변했다.
'열등감이군.'
갈라하드에게는 익숙한 눈빛이었다.
아카데미를 최연소로 들어갔을 때부터 줄곧 따라다닌 눈이었다.
저런 눈빛을 한 놈들은 긁으면 뭔가 나왔다.
"나는 졸업반에 반년밖에 안 있었던 터라 그런 건 모르네. 미안하군."
놈의 눈이 가늘어졌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아, 혹시 4년보다 더 걸렸나?"
그게 역린인 듯, 놈의 얼굴이 벌겋게 됐다.
"갈라하드님이 그렇게 유명하신 분인 줄 몰랐습니다. 제국에서 갈라하드님을 보낸 이유가 있군요."
마크가 묘한 눈빛으로 거들었다. 마크의 눈은 뭔가를 계산하는 듯했다.
누가 더 자기에게 이득인지-. 영리한 사내였다.
마크가 칭찬하자 반응이 바로 터졌다.
"언제 졸업했냐가 뭐가 중요하겠소. 졸업한 뒤에 뭘 했는지가 중요하지. 그 갈라하드가 졸업 후에 아무런 이야기도 안 돌더군. 도대체 뭐 하셨습니까?"
아무런 이야기가 안 들렸다는 건, 갈라하드가 얼마나 뛰어난 요원인지에 대한 증거였다.
면전에서 칭찬이라니-. 갈라하드는 괜히 볼을 긁으며 대답했다.
"이런저런 일로 바쁘게 살았지."
"오호, 바쁘셨군요."
마크가 다시금 거들었다. 그러자 코르튼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아, 소식은 들었네. 용케 살아남으셨군요."
백작의 세 번째 아들을 대공의 장녀에게 장가보낸다는 소문을 들으면, 응당 저런 반응이 나올 것이다.
명분을 위해 죽으라고 보낸다고 생각하겠지.
본래 대공도 갈라하드를 지하감옥에 넣어둘 생각이었으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코르튼, 왜 그러나."
"아카데미 동기를 여기서 보니, 반가워서 그럽니다."
마크의 중재에 놈이 히죽 웃었다. 마크는 말리는 시누이역을 맡은 듯했다.
"이 먼 북부에서 동기를 보다니 나도 반갑네."
의미가 담긴 갈라하드의 대답에 놈이 이를 갈았다.
"자네와 달리 나는 사업 때문에 온 것이네. 오히려 내게 북부는 기회의 땅이지."
"오, 마법의 불모지인 북부에서 사업이라니-. 대단하군."
갈라하드의 목소리에 놈의 눈썹이 더 구겨졌다.
"하! 최근 발견한 마석장만 세 곳이네. 그 값어치는 자네도 알겠지."
아주 살짝 눌렀을 뿐인데, 열등감에 못 이긴 놈이 떠벌렸다.
흑마법학회까지 들어간 놈이었다. 마법사 중에서도 삐뚤어진 놈이니 저리 격한 반응도 이상하지 않았다.
"마크 대장과 함께하는 사업이지. 자네도 함께하면 좋겠지만-. 워낙 유능한 분 아니신가? 나 같은 열등생 밑에서 일할 수 없겠지. 이거 안타깝군!"
놈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열등생이라.'
했던 말 같기도 했다. 아카데미 시절에는 제법 예민했다.
"아카데미를 최연소로 졸업한, 아카데미의 자랑, 우리의 잘나신 갈라하드님이 열등생인 내 밑에서 일할 리가 없지. 안 그렇나?"
놈이 그리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갈라하드가 제안을 수락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눈치였다.
저건 놈이 보내는 명백한 조롱이었다.
마크와 눈이 마주쳤다. 그 지독히 계산적인 눈이 묻는 듯했다. 둘 중 누가 더 자신에게 이득이 될 건가-.
갈라하드는 히죽 웃었다.
"좋군, 이게 동문이지."
냉큼 손을 잡자, 놈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마크는 재밌는 것을 본 것처럼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뒤늦게 코르튼이 손을 빼려고 했지만, 갈라하드는 놓아주지 않았다.
마석장 세 개라-. 하나만 있어도 웬만한 성의 영주만큼 버는 게 마석장이었다.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석이 많이 있으면, 그웬을 가르치는 것도 더 수월해졌다. 마나가 부족하면 마석을 쓰면 되니까.
거기에 마석만 있으면 특무대 본부를 건설할 때, 이런저런 옵션도 추가할 수 있었다.
즉-.
"그래, 어디로 출근하면 되겠나?"
노다지였다.
마석장을 세 개나 준다니-.
학연이 이렇게 중요했다.
22화 동문사랑
"어떻게 된 겁니까? 갈라하드와 코르튼이 같이 나가던데-."
보좌관 루미안의 물음에 5대대 대장 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은 마크의 예상과 다른 쪽으로 흘렀다.
"내가 갈라하드를 왜 부른지 아나?"
"마법사인 갈라하드를 불러서 코르튼을 견제할 계획 아니었습니까? 마석의 가격도 알아볼 생각이셨고요."
"맞네, 코르튼의 성장이 너무 빨랐어. 어딘지 찜찜한 냄새도 났고. 그를 견제할 생각으로 갈라하드를 불렀지. 자리 잡지 못한 그는 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테니까."
톡톡, 마크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들겼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중급 마족과 땅강아지 열여섯 마리, 마법사 둘을 잡고 왔다더군. 아드리안나 없이."
루미안의 말이 잠시 멈췄다. 이내 루미안이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허세 부리는 거 아닐까요?"
"아니, 그런 눈빛이 아니었어. 자랑하는 게 아니라, 그냥 오는 길에 처리한 일을 말하는 느낌이었어. 병사들이 '아, 오늘 여우 한 마리가 나왔더군. 잡았지-.'처럼 아주 단조로웠네."
대화가 잠시 멈췄다. 탁탁, 마크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실력이 좋으면 더 좋은 거 아닙니까?"
"좋은 정도가 아니니까 문제지. 그들의 구성을 알지 않나. 그중 쓸모 있는 건 길버튼 경이 유일하네. 길버튼 경이라도 그를 전부 처리할 정도는 아니지. 만약 그가 마족을 잡은 거라면-."
"비약이 심하십니다."
루미안의 지적에 마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마크는 종종 비약이 심한 사고를 했다. 그를 잡아주는 게 루미안의 역할이었다.
"코르튼과 갈라하드가 서로 아는 사이였네.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라나. 갈라하드가 제법 유명했다던데-. 졸업 후에 소식이 없었다더군."
루미안은 가만히 있었다. 대답을 구하는 물음이 아니었다. 그저 혼자 정리하기 위한 자문자답이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아무 소식이 없다가 갑자기 아드리안나의 남편으로 보내졌다-. 백작의 삼남이? 그게 뭘 뜻하는 걸까. 황실과 관련 있는 곳에서 일했다는 거지."
톡, 마크의 손가락이 우뚝 멈췄다.
"코르튼이 속한 조직이 어딘지 정확히 모르지만, 제법 정보가 많아 보였어. 그런 코르튼도 거취를 모른다면 둘 중 하나지."
"뭔가요?"
"무직이었거나, 아주 은밀한 집단에 있었던가. 전자일 리는 없으니, 후자겠군. 황실을 위해 일하면서 아주 은밀한 집단이라면-."
말을 멈춘 마크에 루미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눈을 찡그린 마크가 작은 숨을 내뱉었다.
"모르겠군."
루미안은 눈썹을 작게 구겼다. 뭔가 알아낸 척하더니, 결국 모르겠다니-. 어이가 없었다.
"이거 여우를 누르겠다고 호랑이를 들인 느낌인데."
"비약이 심하십니다."
"이게 비약이라니-. 대공이 제국에서 보낸 마법사에게 부대를 하나 창설해준 것부터 이상했어. 헤르문을 한 번에 이겼다는 소문··· 아니, 소문이 아니겠군. 거기에 첫 임무에서 중급 마족과 마물 열여섯 기를 잡았는데, 이게 어떻게 비약인가?"
그 물음에 루미안은 입을 꾹 닫았다. 확실히 나열하니 굉장한 행보였다. 루미안도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음, 내가 갈라하드에게 건방지게 말했는지 걱정되는군."
"아마 건방지게 말했을 겁니다. 대장님 평소 말투를 생각하면요."
"비약이 심하군."
마크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
'당황했군.'
갈라하드는 코르튼의 굳은 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들은 적막한 방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사방에 책이 꽂혀있는 방이었는데, 창문은 없었다. 곳곳에 놓인 마나 램프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마나 램프 특유의 코를 찌르는 냄새에 꼭 정보국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방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사방의 책장이 의심스러웠다. 그 사이로 보이는 면적보다 책장이 가까웠다.
책장 뒤에 뭘 숨겨뒀을까-.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리며 연초를 입에 물었다. 펴도 되는지 묻지 않고 불을 붙였다.
상큼한 레몬 향이 깊게 풍겼다. 그를 음미하며 손을 휘저었다.
"먼지가 너무 많군."
자연스럽게 바람이 불었다. 마나 연초의 연기가 그를 따라 넓게 퍼졌다. 마나 연초이기에 그 연기가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사방에 놓인 책장의 중간을 연기가 두드렸다. 그 사이로 흩어지는 연기를 눈여겨봤다.
'셋이군.'
왼쪽 책장에 둘, 오른쪽 책장에 하나가 숨어 있었다.
'뒤쪽인가.'
정면으로 들어왔는데, 후방의 책장에는 아무도 없으니 뒤쪽에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최악을 가정했다.
왼쪽에 둘, 오른쪽에 하나, 정면에 있는 코르튼까지-. 마법사 넷과 싸우기에 좋은 공간이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허벅지를 두드리는 척 손을 풀었다.
책상이 움직이나? 슬쩍 밀어봤지만 고정되어 있었다. 이 좁은 공간에서 범위가 큰 공격을 쓰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앞의 놈을 먼저 잡고 당겨서 방패로 쓰면서 오른쪽부터 처리해야겠군. 그다음에 왼쪽을-.'
"뭐 하는 거지?"
코르튼의 물음에 상념이 깨졌다. 코르튼은 여전히 뭔가 찝찝한 얼굴이었다.
자네의 머리에 구멍을 뚫어 방패로 쓰면서 나머지 마법사 셋을 잡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네-. 라고 대답하기 조금 그랬으니 적당하게 둘러댔다.
"···하, 제안을 덜컥 받다니, 많이 급한가 보군."
놈이 대놓고 이죽거렸다. 가시가 잔뜩 돋친 목소리였다. 너무 순순하면 오히려 경계할 것이다. 그에 갈라하드는 일부러 뾰족하게 대답했다.
"급하다니-. 동문의 호의를 거절하기 힘들었을 뿐이네. 그런데 여기가 직장인가? 생각보다 좁군. 마석장도 없는데, 책장 뒤에 있나?"
놈이 작게 움찔거렸다. 아주 찰나의 반응이었지만, 갈라하드는 놓치지 않았다.
'뒤쪽 책장 뒤가 맞군.'
"되지도 않는 도발을 하는군. 네 녀석이 질 떨어지는 놈이면, 내 얼굴에 먹칠하는 거니까 조심스러울 뿐이다."
놈의 꺼드럭거리는 대답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확실히 전과 다르네.'
예전 흑마법학회는 무서울 게 없었다. 놈들은 잘나가는 마법사라면 다 접근했다.
그런 놈들이 이제는 갈라하드를 마주해도 조심스러운 자세를 유지했다.
뒤의 책장도 그렇고-. 확실히 전보다 보안에 신경 쓰는 듯했다.
다만, 지금 갈라하드의 앞에는 졸업에 4년이나 걸린 멍청한 놈이 하나 있었다.
본래 전쟁에서 가장 무서운 건 유능한 적이 아니라 멍청한 아군이었다.
'어떤 미끼를 줘야 할까.'
갈라하드는 자신이 가진 패를 되짚었다.
흑마법학회인 놈에게 줄 만한 게-.
'많네.'
중요한 건, 갈라하드가 줬다는 걸 놈이 눈치채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본래 마법사는 자신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를 살살 긁으면서 열등감을 살짝 더해주면-.
'완벽하군.'
계산을 마친 갈라하드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웃었다.
찬란했던 때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거들먹거리는 놈처럼-.
"내 능력이야 자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나?"
거만하게 웃었다.
코르튼의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다.
아주 좋은 시작이었다.
****
코르튼은 갈라하드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줄 몰랐다.
애초에 그건 제안이 아니었다. 갈라하드를 향한 조롱이었다.
그런데 갈라하드는 기다렸다는 듯 제안을 덥석 받았다.
그 모습에서 갈라하드가 얼마나 급한지 보였다. 기억도 안 나는 동기의 조롱 섞인 제안을 냉큼 잡을 정도로 급한 게 분명했다.
조금 의문스럽기는 했다. 아카데미 시절 그렇게 천재 소리를 듣던 갈라하드가 왜 저렇게 된 건지-.
"능력이라니? 자네에게 능력이 있었나?"
"나는 그 아드리안나의 약혼자라네. 대공의 후계자가 될 몸이지."
대공의 후계자라니-. 코르튼은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갈라하드는 제국이 대공에게 죽음을 가정하고 보낸 명분이었다. 아드리안나와 결혼할 일도, 대공의 후계자가 될 일도 없었다.
"무슨···. 아드리안나와 만나긴 했나?"
"손도 잡는 사이일세."
갈라하드의 허세에 웃던 코르튼은 문득 갈라하드의 신분을 떠올렸다.
'그래, 놈은 아드리안나의 약혼자다.'
약혼자라는 건, 그나마 아드리안나한테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런 놈을 받으면 아드리안나를 처리할 기회가 올 수 있었다.
여명에서 아드리안나에게 건 현상금이 얼마인가. 단순히 현상금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드리안나를 처리한다면, 당장 흑마법학회의 지부장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너머를 볼 수 있었다.
여명에 올라갈 수 있었다. 심지어 높은 지위를 받겠지-.
코르튼은 자신의 명석한 두뇌에 작게 감탄했다.
"그리고 나는 대장 아닌가! 대장! 특무대의 대장일세."
그때, 갈라하드가 다시금 떠벌렸다.
이번에는 대장 소리였다. 그에 코르튼은 눈을 찡그렸다. 대원이 고작 4명이라, 이름만 있는 부대가 뭐가 자랑이라고 저리 떠드는지-.
'아니다. 이름만이라도 대장은 대장이야.'
5대대의 대장 마크와 거래를 튼 코르튼이었지만, 최근 들어 그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마크는 좀처럼 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름뿐이라도 대장인 갈라하드는 꼭 필요했다.
아니, 오히려 이름뿐이기에 더 유용했다. 대장인 갈라하드를 앞에 두고 뒤에서 운용한다면, 마석장을 더 편하게 돌릴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심지어 놈은 그 갈라하드였다. 졸업 후 시간이 오래 흐르는 동안 소식이 없어 잊힌 갈라하드였지만, 아카데미 출신에게는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지금 놈이 어떤 상태건, 갈라하드라는 이름은 상당히 유용했다.
'내가 명석해서 다행이지. 다른 멍청한 놈이었으면 놓쳤겠군!'
코르튼은 작게 안도했다.
자신이 그 활용법을 알아내서 망정이었지, 다른 멍청한 놈이었다면 갈라하드의 가치를 모르고 놓칠 뻔했다.
다만, 아카데미 졸업 후의 행적이 마음에 걸렸다.
"아카데미 졸업 후에 뭐 했냐고? 아까 대답하지 않았나. 이것저것 했다고."
퉁명스럽고 건성인 대답이었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갈라하드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면, 저리 두루뭉술하게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자세하게 짠 이야기들을 했겠지.
아마 그간의 행적이 별 볼 일 없어 말하기 창피해서, 괜히 말 돌리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미심쩍음이 있더라도 딱히 상관없었다.
놈은 마법사였다.
마법사라면 흑마법학회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마법은 더디고 뭉툭한 학문이었다. 경지가 올라가는 만큼 그 상승이 점점 더 느려졌다. 나중에는 벽과 마주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흑마법은 오직 상승을 숭상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승을 도모했다.
그런 흑마법을 맛보는 순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원래였다면 위쪽에 보고를 넣고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면 다른 놈이 공을 가로챌 가능성이 있었다. 그 꼴을 볼 수 없었다.
"이런 권한 밖의 일이었나? 괜찮네, 오랜만에 동문을 만나면 좀 부풀릴 수도 있지."
더불어 갈라하드의 거만한 태도가 슬슬 심기를 긁었다.
'이건 되는 카드야. 승부를 던질 순간이다.'
결단을 내린 코르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라."
코르튼은 놈 뒤의 책장으로 향했다. 일련의 책들을 꺼내자 벽이 갈라졌다.
안쪽으로 내려가는 지하 계단이 나타났다. 지하 특유의 텁텁한 공기가 반겼다.
"내 걸음을 정확히 따라와라. 다른 거 밟으면 큰일 나니까."
코르튼은 계단에 집중하며 걸었다. 그 걸음마다 조심스러움이 가득했다.
계단을 내려가자 막다른 길이었다. 검은 후드를 둘러쓴 덩치 하나가 거기에 있었다.
"불은."
"차갑다."
암구호를 주고받자 놈이 숨겨져 있던 레버를 당겼다. 벽이 거칠게 갈라졌다. 그 아래에는 또 지하 계단이 있었다.
그를 따라 내려가자 이번에는 쇠창살이 나타났다. 코르튼은 열쇠를 꺼내 구멍에 넣고 돌렸다. 쇠창살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다시 계단이었다.
이번에는 후드를 눌러쓴 이가 두 명 있었다. 그 후드 사이로 맹수처럼 뾰족한 이빨이 보였다.
"음, 가는 과정이 상당히 번거롭군."
갈라하드가 대놓고 불평했다.
번거롭다는 건 사실이었다. 코르튼도 가끔 헷갈릴 정도로 과정이 까다로웠다.
코르튼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 정도는 비밀도 아니었다. 오히려 흑마법학회에서 매번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제국에 있을 때, 흑마법학회는 한창 잘 나갔었네. 귀족 중에 연이 닿지 않은 이가 없었고, 황실에도 끈이 있을 정도였지. 그러던 중 갑자기 모종의 단체가 습격을 시작했네. 방비를 철저히 했지만, 어찌나 지독한 단체인지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더군"
품에서 마석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다음 문을 열기 위한 장치였다.
"모종의 단체라."
놈이 작게 중얼거리며 기침했다. 웃은 건가? 슬쩍 보니 기침이었다.
"그 굶주린 늑대보다 지독한 습격에 한창 잘 나가던 흑마법학회는 그대로 꼬꾸라졌네. 그를 피하려고 북부로 옮겼는데, 도망치듯 향한 북부가 오히려 기회의 땅이었지. 전보다 더 호황기를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니까. 실제로 나를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코르튼은 자신을 위아래로 가리켰다. 거대한 마석이 박힌 지팡이와 마족의 가죽으로 된 코트까지-. 아주 막대한 돈이 들어간 복장이었다.
"비싸겠군."
놈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비싸지. 그런데 모종의 단체에 습격당한 게 꽤 충격이었는지, 흑마법학회는 보안에 막대한 금액을 투자했지. 지부 간에 서로 위치를 모르고 그 지부마다 보안 체계도 다를 정도니까."
코르튼은 다음 열쇠를 꺼내며 대답했다.
그때, 마지막 문이 나왔다. 철과 마법진으로 삼중 보안이 된 문이었다.
마석장 사업으로 돈을 긁어모은 흑마법학회는 극복 못한 두려움에 막대한 돈과 자본을 보안에 쏟아부었다.
여기 있는 문이 그 결정체였다.
"오, 마석을 세 개나 쓰는 보안 장치라니. 마법진의 연계까지 절묘해. 이런 보안은 마탑에도 없을 텐데, 대단해. 단순한 마도구가 아닌 예술품이군."
갈라하드가 문을 여기저기 확인하며 계속 탄성을 터뜨렸다.
그에 코르튼은 괜히 우쭐해졌다.
"높은 분들은 모종의 단체가 북부까지 쫓아올 것을 걱정하거든. 그래서 보안 쪽에 돈을 퍼부었지. 어떤 놈도 접근하지 못하게 말이야."
코르튼은 문 위쪽에 적힌 문구를 두드렸다. 거기에는 '보안이 생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갈라하드를 허락 없이 데려온 게 살짝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모종의 단체의 수장이 오더라도 이 문은 절대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이걸 만든 이가 누구도 열지 못할 거라 장담했지. 멍청하게 스스로 열어주는 게 아니라면 절대 못 연다고-."
코르튼은 자신 있게 문을 두드렸다. 실제로 문 하나에만 들어간 마석이 세 개였다.
뒤에서 들린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갈라하드가 입을 가리고 기침하고 있었다.
'실없는 놈이군.'
코르튼은 혀를 차며 문을 밀었다.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하는 삼중 마석 잠금 중첩 마법문이-.
활짝 열렸다.
"고맙네."
갈라하드의 감사에는 진심이 듬뿍 담겨 있었다.
23화 유능한 폐급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