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축하연이 끝났고, 나는 금뢰전에서 원로진들과 대담회를 가졌다.
"…그래, 앞으로 본문의 미래가 된 금은현 장로. 축하한다."
금벽호는 자신의 태좌에 앉으며 말했다.
이제는 나 역시 원로 취급을 받으며, 금뢰전에 지정된 원로석을 하나 배정받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태상장문."
"그래, 본래라면 축하연이 끝난 후라면 편히 가서 쉴 수 있게 해 주었겠지만… 한 가지 말할 것이 있어 불렀다."
무슨 얘기가 오갈지는 능히 짐작이 되었다.
"…합체기 태수, 건곤성주 헌원(巚元)의 딸인 헌위 선자. 그녀와의 혼례에 대한 것이다."
"예. 말씀하시지요."
"일단… 원로진들 중 헌위 선자에 대한 자료를 가진 자가 있는가?"
"예, 제가 빠르게 조사해 보았습니다."
원로석에서 금진찬이 일어서 말했다.
"그녀는 건곤성주의 17명의 자식 중 한 명이며, 일곱째라고 합니다. 나이는 3120세. 다만 자질은 꽤 둔재인지라 아직까지도 천인기 중기에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 수행이 성과를 보이고는 있어 곧 있으면 천인기 후기에 도달할 것 같다고 하는군요."
"3천 살이 넘는다고?"
그 말에 금벽호의 미간이 씰룩거렸다.
"…많군. 하계에서 비승한 이들 중에서도 해룡왕이나 성붕왕 정도가 아니라면 인족 중에서는 그 아가씨를 넘을 자가 없겠어."
용족이라서 기본 수명 자체가 긴 서휼은 4천5백 살이 조금 넘었고, 붕족인 성붕왕도 3천6백 살이 넘었다.
그러나 인족들의 수명은 천인기에 도달해 봤자 2천5백 살에 간신히 도달할 정도였으니, 3천1백 살을 조금 넘는 헌위의 나이는 하계에서 비승한 이들에 비하면 꽤 먹은 것이었다.
"예, 광한계에는 수명을 늘려 주는 장생과, 혹은 불로초 등의 영약이 많으니 그를 통해 계속 수명을 연명해 온 듯합니다."
"그렇군. 최근 수련에 고비가 와서 본문의 인재인 금은현 장로를 데려다가 쌍수공법으로 고비를 넘으려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흐음… 헌 선자가 속한 봉래궁에 대해서는 다들 알고 있는가?"
인족 총연맹에서는 현재 총 여섯 개의 수도선파가 주류였다.
첫째, 흑룡왕 현음을 뒷배로 둔 흑린어령문.
둘째, 합체기 태수 개진을 뒷배로 둔 개진문.
셋째, 합체기 태수 응연을 뒷배로 둔 연천궁.
넷째, 합체기 태수 헌원을 뒷배로 둔 봉래궁.
다섯째, 태수는 없지만 제자의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고, 각 천공도 곳곳에 지부를 두었으며 명귀계와도 연락망이 있는 흑색귀골곡.
여섯째, 흑색귀골곡과 경쟁 관계이자, 똑같이 마도 계열 문파인 음혼귀시문.
이 여섯 수도선파야말로 인족 총연맹을 이끄는 강력한 주류 수도선파로, '인족 육대종문'이라고 불렸다.
"뇌운각을 흡수했다고는 하나, 본문은 아직도 한참 약세인 신흥 문파에 불과하오. 만약 봉래궁의 지원을 받고, 금은현 장로와… 천상금뢰지체… 를 지닌 전명훈의 성장을 기대하면 언젠가는 우리 금신천뢰문이 인족제일종문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금벽호의 눈이 나, 그리고 홍수령에게 향했다.
"중요한 건 금 장로와 홍 원로, 두 사람의 의사겠지. 일단 홍 원로는 어떻소?"
"말할 게 무에 있겠습니까."
홍수령은 그 말에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덜떨어지게 생겨서, 아직까지도 이 자원 풍부한 광한계에서 천인기 후기에 닿을락 말락 하는 그 할망구에게 제 쌍수도려를 내줄 생각은 없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8)
"험험…."
홍수령의 적나라한 발언에 금벽호는 헛기침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금은현 장로는 어찌 생각하는가?"
"…조금 당황스럽기는 하군요. 다만 그녀와 혼인은 하지 않더라도 친분을 쌓는 것은 나빠 보이지 않습니다. 홍 원로님의 감정도 있을뿐더러, 저 역시 헌 선자가 무슨 의도로 청혼을 했는지 모르니 일단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흐음… 알겠다."
금벽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금은현 장로와 홍수령 원로의 관계를 생각하고, 그리고 헌위 선자가 어떤 의도로 갑자기 청혼을 한 것인지 모르니, 혼례는 정중히 거절하는 것으로 하지. 오늘의 회의는 끝이다."
그 말을 끝으로 금벽호가 축객령을 내렸고, 금뢰전 안의 원로진들은 저마다 비둔술을 써서 각자의 동부로 돌아갔다.
그리고 금뢰전 안에는 나와 홍수령, 그리고 금벽호만이 남게 되었다.
"홍 원로와 금 장로는 할 말이 남았는가?"
금벽호의 질문에 홍수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일단, 금은현 장로의 혼인 외에도, 제가 본 헌위라는 이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말해보게. 홍 원로의 눈은 믿을 만하니."
홍수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
"헌위 선자는, 금은현 장로를 순수한 물건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금은현 장로뿐이 아닌, 본문까지도 말이지요."
그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홍수령이 헌위에게 이를 드러내고 시비를 건 것은 단순한 질투심 같은 게 아니었다.
의념을 볼 수 있는 나와 그녀의 눈에는 분명하게 그녀의 감정이 보였다.
'완전히 나를 물건과 수단으로 생각하는 의념. 그리고….'
나는 그녀의 심상을 떠올리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서휼만큼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삭막한 심상을 지니고 있었다.
굉장히 계산적인 성격에, 본래 모습을 감추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오늘 우리가 본 그 '말괄량이 기질'은 모조리 연기였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서휼에 비하면 새끼 도마뱀 정도로 귀여운 수준이긴 하다만….'
그런 심상이라면 언제든 뒤통수를 맞을 수 있을 듯싶은 심상이었다.
홍수령 역시 그녀의 의념에 대한 것을 금벽호에게 고하며 말했다.
"만약 그녀와 금신천뢰문 간에 친분을 맺더라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의념을 지닌 자는 절대 믿을 수 없는 이들뿐입니다."
"흠, 알겠네. 참고하지."
금벽호는 홍수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홍수령은 나를 보며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지."
"아, 홍 원로님 먼저 돌아가시지요. 저는 태상장문께 한 가지 더 전할 말이 있습니다."
"흠, 그러냐. 나도 오늘 시험해 볼 게 있으니, 태상장문과 일을 다 보면 내 동부로 오거라."
"알겠습니다."
홍수령은 공간을 열고 자신의 동부로 돌아가 버렸다.
"그래, 할 말이란 게 무엇인가, 금 장로."
"예, 태상장문님. 태상장문께선, 제가 저 혼자의 힘으로 비승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래, 분명 그랬지."
천뢰번은 결국 금신천뢰문에서 떼어 놓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금신천뢰문의 차차기 장문인이며 원영기 대원만의 인재이자 동시에 금신천뢰문의 모든 공법을 익혀 낸 천재였다.
"제가 비승하게 된 것은, 사실 시조이신 금신자 님의 도움이었습니다."
"…!"
물론 엄밀히 말하면 비승할 수 '있었던 것'은 내 답천의 무형검과 봉명인의 축복, 그리고 원유 덕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비승하게 된 것'은 양수진이 승천문에 남겨놓은 안배 때문이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말은 빼놓고 말하니, 내가 비승할 수 있었던 것이 마치 금신자 때문이라는 것처럼 들렸는지, 금벽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금신자 님께서 승천문 입구에 남겨 두셨던 비석을 아시는지요? 그곳에 그분의 안배가 있었습니다. 그 덕에 제가 광한계로 오게 되었지요."
"…!"
"제가 금신천뢰문을 선택한 것 역시, 금신자 님의 안배를 받았기에 그분의 후예인 금신천뢰문에 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금벽호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탄성을 질렀다.
"그랬군. 그랬던 거였구나…!"
금벽호는 이제야 이해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네 자질을 검사했을 땐 오영근이었는데, 어째서 비승한 후에는 뇌성체였는지… 그렇군! 시조님께서 네게 뇌성체를 부여한 것이었구나!"
'오….'
금벽호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까지 완벽히 소설을 짜 맞춰 주었다.
"뭐, 어떻게 보면 그런 셈이지요."
"그래, 금은현. 그래서 내게 전달할 말이 무엇이냐?"
"그것은…."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천뢰번은 떼어 놓아야 하지만, 사실 가장 좋은 것은 금신천뢰문의 인물들이 직접 천뢰번을 수계에 가져다 놓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일전 내 동료들이 서휼과 괴군의 품에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등선향 초입에서 힘을 쓴 적이 있었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운명이 강제로 움직여, '어떤 방식으로든' 동료들은 각자 '정해진' 인물들에게 잡혀갔다.
나는 양수진의 말을 떠올렸다.
이 세상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전명훈이 금신천뢰문에 온 것도 정해진 운명이며, 금신천뢰문이 진선에 의해 멸망할 것 역시 정해진 운명이었다.
'…내가 정해진 운명을 바꾸려 할 때마다, 언제나 운명이 꼬이며 다시금 복원력에 의해 정해진 결과로 바뀌게 되었다.'
이번에도 그럴까?
전명훈이 진선에게 금신천뢰문을 잃고, 정신이 나가 버려 낙뢰자가 되는 것 역시 '정해진' 운명이라면 내가 바꾸려 해 봤자 의미가 없을 수 있었다.
'의미가 있을까?'
"뭘 말하려는 거냐?"
내가 뜸을 들이자, 금벽호는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운명이 정해져 있기에, 자유 의지가 없는 비인간….'
그것이 양수진의 의견이었고, 나는 그의 의견에 좋든 싫든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운명이 흘러가며 '어떻게든' 정해진 결과로 변하는 것을 몇 번이나 봐 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비인간에게 아무리 설명해 봤자 의미가 있는가?
내가 그를 설득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말하기로 했다.
"…저는, 시조님의 안배에 따라, 그 비석에 적혀진 '진짜' 내용을 보았습니다."
"비석의 진짜 내용? 그건 본문에도 전해져 내려오는 내용으로…."
"그 내용은 거짓입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는 흑색성에서 본 비석의 윗부분의 내용을, '양수진의 안배'로 보았다며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상이, 비석의 원래 내용입니다."
"…선보는 진선과 이어져 있다. 그러니 가지고 올라가면 아니 된다라…."
내 말에, 금벽호는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먹힌 건가.'
고작해야 결단기 수준이었던 이전과는 달랐다.
오기조원으로 일반적인 수도자들보다 조금 큰 의식을 가지고 있는 데에다, 기묘성심전으로 의식을 단련해 원영기 대원만이지만 천인기에 달하는 의식을 지닌 나였다.
거기에 원영기의 극한에 10년 만에 이르고, 금신천뢰문의 모든 공법을 익히는 데에 성공했으며 금신천뢰문 차차기 장문인에 내정된 존재.
그것이 나였다.
한 마디로, 내가 금벽호에게 지니는 비중은 과거와는 차원이 달랐다.
또한 그런 내가 '양수진의 안배'를 내세우며 설득했기에 금벽호 역시 쉽사리 부정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네 입장은 결국 천뢰번을 다시 수계에 가져다 봉인해야 한다는 것이더냐?"
"그렇습니다."
"흐음…."
금벽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
"…."
금뢰전에 침묵이 맴돌았다.
그리고 얼마나 침묵만이 자리를 지배했을까, 금벽호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 시조님의 성씨인 '양' 씨가 아닌 '금'씨가 본문의 장문에게 내려오는지 아느냐?"
"그건 모릅니다."
"네 스승인 진휘가 설명해 주었을 거다. 본문의 모든 공법은, 결국 '천상금뢰지체를 모방'한 공법이다. 한 마디로, 천상금뢰지체가 사용할 수 있었던 권능을 공법으로 열화해서 재현한 것이 본문의 공법들인 셈이지. 하지만… 천상금뢰지체는 단순히 혈통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체질이 아니다. 말 그대로 하늘의 선택을 받은 이가 천기를 받아 가지고 태어나는 체질이지. 여타의 체질도 마찬가지다. 네 뇌성체나, 홍령체 등도 대부분 비슷하지."
금벽호의 설명이 이어졌다.
"너도 알다시피 본문의 모든 공법을 합치면 나오는 멸신겁천은 일종의 제례 의식이다. 그리고, 역대 장문인들에게만 내려오는 사실이 하나가 있지. 그건 바로 금신천뢰문 자체가, 시조님께서 안배하신 일종의 '제의'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
"그리고 시조님께서 역대 장문에게 내리라고 지시한 '금'씨의 성 역시, 일종의 제의의 준비물이라고 한다. 어떤 제의인지는 모른다만, 이름에는 운명이 깃들어 있고, 이름을 개명함으로써 이뤄지는 제의이니 운명과 관련된 제의겠거니 했지."
'제의 때문에 안 된다는 건가?'
그 역시 문제는 없었다.
양수진 본인이 실패했다고 여기는 제의이니, 이것도 말해 주면 되리라.
"중요한 것은, 이 '제의'가 '금'씨의 성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조께서는 천뢰번을 제의에 쓰는 깃발로써, 천뢰번에 운명을 연결해 놓았다는 것이야."
"…?"
나는 어쩐지 이어지는 금벽호의 말에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천상금뢰지체나 뇌성체, 혹은 일반적인 체질은 혈통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천기로 이어진다. 물론 기문법재 같은 예외도 있긴 하지만… 대다수의 진기한 자질은 그런 식이지. 하지만, 소해가 가지고 태어난 '벽력체' 등은 다르다."
금벽호의 말이 이어졌다.
"금씨를 지닌 이들은 그 혈통들이 '벽력체'를 타고나게 된다. 그 성씨 자체에 운명과 천기가 깃들어 있어 혈통에게 체질을 부여하는 식이지. 그리고 후손이 이어지다 천기가 약해지면 그때부터 벽력체의 체질이 끊기고, 벽력체를 부여받지 못하는 후손부터는 '금'씨의 성을 더 이상 잇지 못한다. 아마 본래라면 소해의 자식부터는 벽력체를 잇지 못하고 다른 성씨를 가져야 하겠지. 뭐, 만약 전명훈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가진다면 어떨지 모르겠다만…."
그는 한숨을 쉬었다.
"여하튼,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한 가지다. 그런 '벽력체'라는 체질을 부여해 주는 운명의 인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아느냐?"
나는 금벽호의 말의 본의를 알아채고 얼굴을 굳혔다.
"…천뢰번이군요."
"그래. 본문에 있는 금씨들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역대 장문들이 계속해서 후손을 남기고, 그 후손들이 또 후손을 남겼기 때문이다. 본문의 제자 중 1할 2푼 정도가 금씨 성을 지녔지. 한 마디로, 천뢰번을 하계에 둬야 한다면, 그 많은 제자들을 전부 다시 하계에 데려다 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들 대다수가 벽력체에 의지해 수행을 쌓았기에, 천뢰번이 하계로 돌아가면 벽력체가 소멸되고 쌓은 수행 자체가 모조리 무너질 수 있다!"
"…허."
"본문의 원로와 장로들 중에서 금씨 성을 지닌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고 있겠지. 문파 전체로 보면 1할 정도지만, 장로와 원로진 중에서는 오히려 7, 8할 넘는 비중을 지닌 것이 금씨들이다…. 한 마디로, 천뢰번을 하계에 봉인한다는 것은 본문의 주요 전력의 7, 8할을 다시 하계에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말을 금치 못했다.
천뢰번을 하계에 가져다 놓는 건 그럴 수 있다.
하나, 그렇게 되면 당장 문파의 전력이 어마어마하게 깎여 버린다.
그러나, 나는 금벽호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잠깐, 그렇다면 여태껏 금신천뢰문은 비승을 어찌했습니까?"
"음?"
"뇌운각에 들어갔던 배신자에 대한 얘기는 들었습니다. '금위'라고 하셨었지요. 이전에도 금씨 성을 지닌 이들이 비승했다는 것일진대, 그들도 비승한다면 수행을 잃어버리는 게 아닙니까?"
금벽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본문에는 시조령이라는 게 있지."
우웅!
금벽호는 품에서 금빛이 도는 옥패를 하나 꺼냈다.
옥패에는 시조령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시조령은 백 년에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물건이다. 본문의 중요한 일을 처리하거나, 혹은 문파의 대역죄인을 파문할 때에 쓰이는 법보이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 문파의 천인기 원로는 대다수가 '금뢰' 혁대를 받으나, 극소수는 '천뢰'의 백색 혁대를 받는다. 그리고 그 '천뢰'의 혁대는 시조령의 힘을 써서 천뢰번의 힘을 빌려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래, 천뢰의 혁대를 받은 이는 비승할 수 있을 만큼 자질이 뛰어난 이들로만 선별되어 천뢰의 혁대를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천뢰의 혁대를 받은 이들은 천뢰번과 떨어져 다른 계로 가게 된다 해도 혁대의 힘이 금씨의 성을 유지시켜 주지."
"…."
"시조령의 힘을 써 천뢰 혁대를 모두에게 줄 만큼 많이 만들려면 수만 년은 걸린다."
"…그렇습니까."
나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금벽호는 내 안색을 보며 말했다.
"시조님의 말대로 진선이 본문을 노릴 것 같아 두려운 것이냐?"
"…예."
"걱정하지 말아라. 아주 까마득한 예전부터, 광한, 진마, 고력, 명귀, 자금의 계는 진선들이 잘 찾아오지 않는 폐쇄된 계면이라고 전해진다. 흑색귀골곡에서 예전에 본 자료다만, 진선들이 이곳을 찾아오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전해진다 하더구나. 아무리 부족해도 천 년은 시간이 있을 터이니, 그 안에 전명훈을 키워 낸다면 천상금뢰지체의 힘으로 천뢰번에서 시조령 없이도 힘을 뽑아낼 수 있을 테니, 그 후에 천뢰번을 네가 말하는 대로 수계에 봉인하면 될 터다."
"…."
금벽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내게 다가와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이 역시 운명인가.'
마치 내가 정해진 운명을 비트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세계 자체가 내 행보를 막는 느낌이었다.
'고작해야 백 년 안에 천벌의 주인이 찾아온다고 하면….'
그건 믿지 않을 것이다.
나는 금벽호의 의념을 읽어내렸다.
안 그래도 내가 지금 천뢰번을 수계에 봉인하자고 한 얘기를 꺼낸 순간부터 걱정과 불안 등이 그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한순간에 문파의 주요 전력을 모조리 잃을 수 있다는 걱정인 듯했다.
안 그래도 신경이 예민한데, 내가 문파의 전력을 잃게 되더라도 백 년 안에 진선이 쫓아오니 극단적인 처방을 해야 한다고 하면 분노할 터였다.
거기다가 흑색귀골곡에서 봤다고 했을 때, 걱정의 의념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 나름 천 년이란 시간에 근거와 자신감이 있는 듯했다.
그렇다고 내가 천벌의 주인은 '어선'이니 천 년이란 시간은 의미 없다고 할 수도 없었다.
내가 '어선'들의 존재를 안 것만으로 몸이 촛농처럼 녹아내렸고, 양수진의 보호 덕택에 겨우 살아났는데 금벽호에게 그런 것을 알려 주면 금벽호 역시 어찌 될지 몰랐다.
'…결국 어쩔 수 없는가.'
나는 금벽호에게 인사를 한 후 일단 금뢰전을 나왔다.
'…천뢰번을 훔쳐야 하는가.'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이제 두 개였다.
첫째, 원래 계획을 강행해서 문파의 전력 대다수가 수행을 모조리 잃든 말든 천뢰번을 수계에 가져가 봉인한다.
둘째, 전명훈을 원래 역사보다 강력하게 키워서 천상금뢰지체의 힘으로 금벽호가 말한 방식을 써 부작용을 없앤 후 봉인한다.
"일단, 두 번째로 가야겠군."
나는 전명훈의 동부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단순히 내가 천인기에 드는 걸 목적으로 하지 말고, 전명훈도 어떻게든 천인기에 들게 만든다.
전명훈의 동부로 귀를 기울였다.
요수공법을 익힌 내 청력은 전명훈의 동부에서 나는 쌍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저런 흘러빠진 방식으로 수련해서는, 전명훈은 천벌의 주인이 오기 직전까지 결단기다.'
조금 더 강압적인 방식으로 수련할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 내가 직접 대창천개벽문의 방식으로 녀석을 훈련시킨다.'
천벌의 주인이 오기 전까지.
전명훈의 몸을 가루로 만들었다가 재조합하더라도 녀석의 수행을 증진시켜야 한다.
나는 전명훈의 수행 증진을 단기 목표로 삼기로 하며 동부로 걸음을 옮겼다.
"…아, 참."
그러다 문득, 홍수령이 나를 불렀던 것이 기억났다.
'시험할 게 있으니 동부로 오라고 했지.'
우웅!
나는 계위 너머로 손을 뻗으며 공간을 갈랐다.
그리고 바로 홍수령이 있는 그녀의 동부 앞으로 공간을 넘어갔다.
"어쩐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보통은 그녀가 내 동부로 찾아와서 얘기를 나누거나 깨달음을 나눴지, 나를 자신의 실험실로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나는 의아해졌다.
"아, 들어와라."
동부 안쪽에서 홍수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촤르르륵!
동부의 입구 쪽에 있던 진법이 해제되고, 내가 들어갈 수 있게 길이 터졌다.
내가 동부 안쪽으로 들어서자, 뒤쪽에서 진법 금제가 작동하며 다시 동부의 안팎이 차단되었다.
"어쩐 일로 저를…."
내가 홍수령의 동부 깊은 곳까지 들어갔을 때였다.
"무슨 일로 불렀긴."
"…어?"
그녀는 십(十)자의 형틀과, 푹신한 침상 사이에 서서 팔짱을 끼고, 십자 형틀을 바라보며 말했다.
"금신천뢰문의 숨겨진 공법을 익혀 뇌성체가 없어졌다고 들었다. 네 몸을 실험해 보려고 불렀다."
"…뭐, 실험하고 싶으시면…."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녀는 형틀에서 침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쌍수 목적도 있다."
"…예?"
"쌍수를 먼저 할 거냐, 실험을 먼저 당할 거냐. 선택해라."
인간은 무엇인가 (9)
"예…?"
"못 알아들은 척하지 마라."
"…."
나는 조금 당황했다.
"…실험은 이해할 수 있어도, 저는 이제 뇌성체가 사라져서 쌍수는 의미가 없을 텐데 어째서 쌍수까지 준비하신 겁니까?"
"숨겨진 공법과 일반적인 뇌도공법이 영향을 주고받으면 어찌 되는지도 알아보고 싶어서 말이지."
"흠…."
"자, 빨리 선택해라."
나는 의아해져서 물었다.
"뭘 먼저 하든 상관은 없는 것 아닙니까?"
"음? 상관있지. 어느 쪽을 먼저 하든, 굉장히 알아봐야 할 게 많기 때문에 다른 한쪽은 자연히 다른 날로 밀릴 확률이 높다."
"아, 그렇군요."
"빨리 선택해라. 당장이라도 네 몸을 조사하고 싶어 근질근질거리는구나."
'거절할까.'
솔직히 지금으로선 머리가 복잡했기에 둘 다 별로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내 기색을 읽은 것인지 홍수령이 먼저 선수를 쳤다.
"만약 어느 쪽으로든 나를 도와준다면, 천인기에 오를 수 있는 단서를 주마."
"에?"
"너도 이제 원영기 대원만이니, 곧 천인기에 오를 준비도 해야겠지. 천인기에 오를 때 헷갈리지 않게 내 깨달음을 나눠 주겠다는 거다."
"흐음, 그냥 제 스승님께 물어봐도 되긴 합니다만."
"흐흐, 진 원로는 깨달음을 말로 설명해 줄 수는 있어도 직접 체험시켜 주기는 어렵지. 하지만 네가 어느 쪽이든 오늘 나를 돕는다면, 천인기에 오를 때의 깨달음을 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홍수령의 과격한 방식이라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어.'
어차피 이제 원영기 대원만에 올라왔으니, 밑천은 다 털렸다.
앞으로는 전명훈의 훈련과 더불어 내가 천인기에 오르기 위한 수련도 필요했으니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거기에, 그녀가 말한 대로 천인기에 오르는 깨달음을 몸으로 미리 체험할 수 있다면 상당한 도움이 될 터였다.
"…좋습니다. 도와드리지요."
"후후, 그럴 줄 알았다. 그럼, 자. 인체 실험이냐, 쌍수냐. 선택해라."
나는 형틀과 침상을 번갈아 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입을 열었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음… 꽤 뻐근하군요."
나는 홍수령의 동부에서 나오며 말했다.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뒤따라 나와 아침 햇살을 맞으며 웃었다.
"후후, 굉장히 만족스럽더군. 네 몸은 충분히 알아볼 가치가 있었다."
"저 역시 어제는 감사했습니다."
나는 어젯밤 홍수령이 체험시켜 준, 천인기의 등극에 필요한 깨달음을 되새기며 말했다.
"아마 진휘도 말로는 설명해 줄 수 있었어도 나처럼은 체험시켜 줄 수 없었을 게다. 오직 본문에서 나만이 체험시켜 줄 수 있는 방법이니 고마워하도록."
"예, 확실히 그런 방법이긴 하더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본명공법인 멸뢰내천궁과 비검의 흐름을 내게 체험시켜 주며 알려 준 것이었기에 분명 그럴 만도 했다.
어쨌든, 이것으로 천인기에 오를 때에 필요한 경험은, 조금 과격한 방식이었으나 어찌어찌 얻었다.
'이래서 거대 종문이 좋긴 하구나.'
하계에서 산수로 떠돌아다니며 있었을 때는 얻기 힘든 경험이었다.
청문세가에서 스승님에게 선각후통에 대한 해설을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머릿속이 밝아지는 듯한 느낌.
나는 내 동부로 돌아오며 어제 느꼈던 것을 정리했다.
'광기. 광기가 필요하다.'
내 원영을 관조하자, 이전과 달리 음양신이 딱딱 나뉘어져 있지 않고 음양오행의 칠색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칠채의 원영이 금단 안쪽에 잠들어 있었다.
원영기 대원만에 이르며, 나는 일월오악도의 제좌에, 내 의식을 완전히 융합시킴으로써 원영을 완성시켰다.
나는 어젯밤 들었던 홍수령의 말을 기억했다.
―수도자들은 수선을 이어 갈수록 무정해진다고들 하지. 어째서인지 아느냐?
―바로 천지자연을 체내에 받아들이고, 천지자연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너도 대원만에 이르며 확실히 느꼈겠지. 천지자연의 음양오행으로 일월오악도를 만들어, 네 의식과 완전히 합일시켰다. 네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너는 점차 무정해지며 종래에는 완전히 인간성을 잃고 식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인격이 지워질 것이다.
나는 어젯밤 홍수령에게 당했던 짓을 생각하며, 뻐근한 몸 곳곳을 주물렀다.
―천인기는 천인합일의 경지라고도 불리지. 그 경지부터 진정으로 체내에 만든 소우주와 체외의 소우주가 연결되며 천지영력을 부릴 수 있으니까.
―체내의 소우주가 열려 '진짜' 천지자연과 접하면 어찌 되겠느냐. 그대로 네 알량한 인격은 대자연에 휩쓸려, 식물 인간이 되어 버릴 테지.
―그렇다면 그를 방지하기 위해서 어찌해야 하는가. 광기다. 광기, 광기가 필요하다. 인간의 광기를 모아 천지에 맞설 수 있게 만들어라. 광기로써 너 자신을 지켜라.
―그렇기 때문에 천인기 수사들부터는 대부분 제정신이 아니게 되지. 누구나 최소한 한 가지에는 미쳐야 한다.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나는 홍수령이 보여 준 광기를 떠올렸다.
어젯밤, 그녀도, 그녀에게 영향을 받은 나도 둘 다 광기에 휩싸였었다.
'무엇에 미칠지를 선택해야 하는 건가.'
미쳐 버릴 것을 찾는 것.
그것이 천인기에 오르는 첫 단추다.
'내가 가장 바라는 것….'
내가 가장 바라는 것에 광기를 집중시키면 되는가?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나는, 동부에서 나와 전명훈을 찾아갔다.
일단 녀석의 훈련을 시작해야 했다.
* * *
"…뭐라고?"
전명훈은 얼굴을 꿈틀거렸다.
"앞으로, 오늘부터 내가 네 공법수련을 도울 것이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그는 서은현, 아니.
'금은현'으로 개명한 사내를 쳐다보며 물었다.
"내 스승님은 금진찬 님이…십니다."
"그래, 네 스승님께도 허락받고 왔다."
"아니, 그게 무슨…."
"잘 들어라, 전명훈."
금은현은 전명훈을 바라보았다.
"태상장문이신 금벽호 님께서도 허락하신 일이다. 앞으로, 강력한 위협이 금신천뢰문을 노릴 것이다."
"뭐?"
"그리고 그 위협을 막을 수 있는 건, 전명훈 너밖에 없다."
"그 위협이 뭐냐, 아니, 뭡니까."
"그건 네 수준이 너무 낮아서 알려 줄 수 없다. 잘못하면 네 정신에 해가 될 수 있으니까. 최소한 원영기에 들어서면 알려 주마."
빠직.
전명훈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이 자식, 나를 아주 대놓고 무시하는군.'
"뭐, 좋아. 아니, 좋습니다. 그럼 일단 어떤 방식으로 저를 가르치시려는 겁니까?"
전명훈은 자신의 정순지력을 뿜어내며 말했다.
"보다시피, 이미 영성도 6개나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축기 4수까지 가는 데에 얼마 남지도 않았지요. 쌍수공법은 어마어마한 효율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서 더 효율 좋게 경지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
"호오, 얼마나 대단하신 방법입니까?"
빈정거리는 듯한 전명훈의 말에, 금은현은 잠자코 저물도에서 몽둥이를 하나 꺼내 들었다.
"바로 이거다."
"…예?"
그리고, 전명훈이 반응할 새도 없이 금은현이 든 몽둥이가 전명훈을 후려쳤다.
빠악!
"…! 끄아아아아아… 어?"
몽둥이에 맞고 날아간 전명훈은 어깨를 잡고 비명을 질렀으나, 이내 어깨에서 손을 뜨고 어리둥절한 듯이 어깨를 바라보았다.
'뭐지, 어깨를 맞았는데?'
맞을 때는 아팠는데, 어째 상처도 없고 더 이상 통증도 없었다.
그가 의아한듯이 금은현을 바라보자, 금은현은 나무 몽둥이를 들어 보였다.
우우웅!
나무 몽둥이에서는 녹빛의 영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치유의 효과를 지닌 목(木) 속성의 영기다. 목(木)은 팔괘의 진(震)에 해당하니 뇌전을 상징하기도 하지. 나는 앞으로 목 속성 영기가 담긴 이 몽둥이로 너를 쫓아다니며 끊임없이 두들길 것이다."
"…."
"그리고 네가 한 대 맞을 때마다, 네 뇌리로 내 의식공법을 통해 선각후통의 구결을 통해 뇌도공법에 대한 이해를 돕게 해 주마. 나는 금신천뢰문의 모든 공법을 전부 익히는 데에 성공했으니, 뇌도공법의 이해도 면에서 충분히 너를 가르칠 만한 소양이 있다."
"…."
"물론, 너는 내게 반격을 해도 좋다. 내게 반격을 하며 내 공격을 떨쳐 내고, 내가 몽둥이 찜질과 함께 네 머릿속에 박아 넣는 선각후통의 지식들을 체화하는 것이, 이 수련의 중점이다. 나는 축기기 급의 힘만 써서 널 가르칠 것이니, 충분히 네가 내게 반격할 수 있을 것이다."
"…."
"궁금한 게 있나?"
"…장로님, 생각해 보니 제가 지구에서 잘못했던 게 많은 것 같습니다. 부디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그런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다."
뻐억!
그와 함께, 금은현은 전명훈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 * *
전명훈을 상대로 수련을 시작한지 약 한 달째.
퍽, 퍽, 퍽!
"크아아아!!!"
나는 전명훈을 실컷 두들기며 녀석의 몸 곳곳에 목 속성 영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동시에 뇌도공법의 구결을 녀석의 뇌리에 불어넣어 주고, 집어넣은 목 속성 경기를 뇌전 속성으로 변화시켜 강제로 공법을 운용하게 하며 강제로 뇌도공법을 몸 곳곳에 체화시켰다.
녀석의 뇌도공법은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특히나 내가 계속 전명훈을 두드리면, 전명훈의 분노가 폭발하는 시점이 있었다.
"이 개자식아아아아!!!"
콰지지지직!
붉은 번개가 사방으로 넘실거렸다.
'또 성장했군.'
기이하게도 전명훈은 화가 나면 공법이 반응하며 더더욱 성장이 빨라졌다.
'천상금뢰지체는 화가 많을수록 성장이 빨라지는 건가.'
분노 조절 장애인을 위한 체질이 있다면 아마 천상금뢰지체이리라.
콰르르르릉!
나는 내게 붉은 벼락이 쏘아져 오기 전, 의념을 읽어 벼락을 피한 후 전명훈의 왼쪽 아래로 들어가 몽둥이를 올려쳤다.
뻐억!
"크아아아악!"
한 대도 피하지 못하고 계속 두들겨 맞자, 녀석은 눈이 뒤집혀서 번개를 뿜어냈다.
나는 몽둥이를 휘둘러 벼락 줄기를 모조리 쳐 냈다.
우웅!
몽둥이에 두른 강기가 찌릿거렸다.
'뇌전의 힘이 더 강해졌군.'
공법의 성장은 순조롭다.
내가 녀석만 붙잡고 목 속성 영기와 선각후통의 깨달음을 끝없이 불어넣자 전명훈은 눈에 보일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한 달 만에 축기 2수에 접어들었을 정도로.
그러나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 녀석, 도대체 왜….'
붉은 벼락이 뿜어진다.
나는 녀석의 틈을 파고들어 목 속성 영기로 전명훈이 익히고 있는 '칠뢰진경'의 다음 단계로 놈을 이끌었다.
그러나 전명훈은 격노한 상태로 붉은 벼락만을 뿜을 뿐이었다.
붉다, 붉다, 붉다.
'왜… 도대체 왜 칠뢰진경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를 못하는 거지.'
전명훈은, 아무리 두들겨도 칠뢰진경의 첫 단계인 '적뢰진경'의 단계를 넘어서질 못하고 있었다.
이쯤이면 슬슬 적뢰진경의 다음 단계인 주뢰진경으로 넘어갈 때가 되었다.
주뢰진경의 구결도 넣어 주었다.
'원래대로라면, 녀석이 축기 2수에 접어드는 순간 주뢰진경에 그대로 들어갔어야 맞다.'
하지만, 전명훈은 벌써 10개의 영성을 생성하고도 주뢰진경을 사용하지 못했다.
오성의 문제인 것이었다.
'아예 체화를 못 하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내가 무식하게 두들겨 패면서 가르치는 것도 아니었다.
저녁시간에는 전명훈을 치료해 주고, 오늘 하루 집어넣었던 선각후통의 구결들을 이해가 될 때까지 풀이해 줬다.
전명훈도 개념을 이해했고, 공법의 이해도가 높아졌다.
하지만, 이해도가 높아져도 자신의 몸으로 운용하는 체화 자체가 더뎠다.
'자기 몸으로 주뢰진경을 운용하지 못해서 주뢰진경으로 못 나아가고 있어.'
그래, 여기까지라면 이해했다.
둔재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의아한 것은 이것이었다.
'…그런데, 주뢰진경을 운용 못하는 건데 어떻게 축기 2수에서 계속 나아가는 거지.'
적뢰진경과 주뢰진경은 축기기 때에 익히는 공법이다.
그 중에서도 적뢰진경은 축기 1수 때에만 익히고, 그다음에는 주뢰진경으로 넘어가야지만 축기기 극성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전명훈은 어떻게 한 건지, 적뢰진경만 가지고서 윗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퍼억!
"크악! 젠장할!"
콰르르릉!
전명훈이 내게 손을 뻗어 벼락을 쏘았다.
부웅!
나는 몽둥이를 휘둘러 벼락을 베어 버렸다.
'또 위력이 올랐다.'
이제는 점차 본인 경지보다 위력이 높은 공격을 쓰기 시작했다.
축기 후기 급의 공격이었다.
'…저 녀석… 분노하면서 적뢰진경을 진화시키고 있어.'
나는 붉은 벼락으로 휩싸인 전명훈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공법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니까 자기가 묶인 구간 자체를 아예 다른 공법으로 진화시키는 건가….'
이건 도대체 무슨 재능인 건가 싶다.
꽈릉!
다음 순간, 찰나 붉은 벼락 그 자체처럼 변한 전명훈이 내게 달려들었고, 나는 가볍게 피한 후 놈의 뒤통수를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퍼억!
"크아아악!"
전명훈은 그대로 나가떨어져 굴렀다.
녀석이 운용하던 적뢰진경 역시 그대로 흩어졌다.
하지만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공법이 흩어졌는데, 왜 느껴지는 법력이 더 늘어난 거지?"
"…이… 서은현 개 같은 새끼가…."
"미쳤군…. 도대체 어떻게 하면 화를 내는 것만으로 법력이 늘어나는 거냐?"
"닥쳐!!!"
콰르르릉!
나는 점차 빨라져 가는 전명훈을 보며 씨익 웃었고, 그대로 녀석을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좋아, 계속 성장해라!'
전명훈은, 내 지도 아래 지난 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중이었다.
* * *
"후우…."
밤이 되었다.
밤이 되면 전명훈은 조금의 휴식과 함께 자기 동부로 돌아가 금소해와 수련을 시작한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수련을 한 후, 새벽에 조금 잠을 잔 후 다시 수련을 시작한다.
그게 최근 전명훈의 수련 일정이었다.
'뭐, 축기기쯤 되면 정순지력 덕택에 잠을 거의 안 자도 문제없지만.'
연기기 시절이라면 녀석의 체력을 생각해서 조금 더 쉬게 해 줬겠지만, 어차피 축기기라면 이 정도는 대부분 버텨 내니 강행하는 중이었다.
나는 내 동부로 돌아와 원영을 관조했다.
'천인기에 들어가려면, 광기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내게 필요한 광기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에 미칠 수 있는가.
"…."
원래라면 굉장히 쉬운 답이었다.
만상인연도가 증명해 주었으니까.
내가 맺어 온 인연들, 그 소중함을 지키는 데에 미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양수진의 말을 들은 후부터 불편함이 느껴졌다.
―요는 '자유'다. 오직 '자유'를 지닌 존재, 혹은 '자유'를 획득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만이 [인간]이며, 세계 인권 선언의 권리를 향유할 자격이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오직 우리 종명자만이 [인간]이며, 이 세계에 존재하는, 진선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비인간]이다!
비인간.
운명에 의해 설정된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들.
나는 서휼의 말이 떠올랐다.
―이 세상은 운명의 아래에서 이뤄지는 연극이고, 우리는 연극 안에서 연기하는 연기자들일 뿐입니다. 연기자가 연기를 하는 것이, 어째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서휼의 말.
그리고 감정을 극한으로 증명해서 경지에 오르는 심족조차, 운명의 노예라는 양수진의 말.
'…뭐가, 뭐지.'
감정이 존재하지 않고, 내가 맺어 온 인연들이 사실 그저 운명 아래에서 춤추는 연극에 불과했다면 그동안 내가 해 왔던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최근 전명훈을 창천개벽문의 방식으로 수련시키는 중, 굳이 몽둥이로 전명훈을 때리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창천개벽문의 방식이라면 두 주먹만 있어도 충분하지만 굳이 내가 몽둥이를 드는 이유.
몽둥이로 단악검법의 기초를 되짚어 가며, 머리를 비우고 답천 너머로 도약하기 위해서였다.
답천 너머로 도약한다면, 양수진의 말에, 서휼의 말에 반박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단단한 심마(心魔)에 걸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웅, 붕, 붕!
나는 무색유리검을 잡고서 단악검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펼쳤다.
무(武)를 펼치고 있으면 고민이 조금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단악검법을 1초부터 26초까지 계속 펼치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내가 검법을 펼치는 것을 멈췄을 때였다.
―[비인간]이다!
양수진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듯했다.
나는 무색유리검을 쳐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젠장… 개소리하지 마!"
양수진을 만난 이후로,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인연들이 인간이 아니라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면….'
나는 무색유리검을 으스러지게 움켜쥐며 투명한 검신을 쳐다보았다.
'나는 누구와 사랑을 했다는 거지?'
내가 쌓아 왔던 인연들은 대체 뭐였다는 거지?
그저 양수진 개인의 극단적인 사상이라고 하기에는, 양수진은 진선의 극점에 올라 세계의 진실을 보았을 확률이 높은 대선(大仙)이었다.
또한 굉장히 높은 존재가 영락했을 것이라 추정되는 서휼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
'그럼 도대체 내가 해 온 건 뭐란 말이냐.'
양수진의 말이, 서휼의 목소리가 뇌리를 맴돈다.
천인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광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뭔가에 미치지 않으면 정신이 천지영기로 흩어져 버린다는 경지가 천인기.
하지만, 내가 미칠 수 있는 것은 내가 쌓아 온 인연이었다.
그러나 위대한 존재들이 내가 쌓아 온 인연을 거짓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툭….
나는 무색유리검을 잡고 땅에 닿도록 늘어뜨렸다.
검을 휘두를 힘이 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심마가 심해지는군.'
나는 멍한 표정으로 동부 바깥으로 나와 달을 바라보았다.
'난 뭘 어떻게 해야….'
그렇게, 멍하니 번뇌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찌이잉―
"…어?"
나는, 저 멀리 어디선가.
뭔가가 내 의식을 자극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
츠츠츠츳!
나는 내 의식이 어딘가로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이건…!'
* * *
알록달록한 색채가 감도는 공간.
나는 그 공간 안에서 눈을 떴다.
'이곳은….'
누군가의 꿈속이다.
그리고, 나는 그 누군가가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우우웅!
나는 기묘성심전을 운용하며 내 의식을 꿈의 파장에 맞게 변화시켰다.
이 꿈속에서, 내 기묘성심전으로 인해 일렁거리던 주변이 안정된 공간으로 변했다.
나는 나를 '부른' 존재를 향해 말했다.
"드디어, 성공했구나."
그리고, 하얀빛 속에서 누군가가 이곳을 향해 걸어왔다.
연분홍빛 궁장을 입은 그녀.
"연아."
김연이었다.
그녀가, 마침내 기묘성심전을 대성하여, 그녀에게 연결해 놓은 기괴고를 통해 나를 꿈속으로 불러들인 것이었다.
인간은 무엇인가 (10)
"아… 대리님이다."
김연은 살짝 멍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것을 보며 그녀가 어떻게 나를 불렀는지 이해했다.
'본인이 자력으로 부른 게 아니었군.'
넘치는 의식공법의 재능으로 기묘성심전을 운용하다, 기묘성심전이 가진 힘을 일순간 강하게 이끌어 냈을 뿐이었다.
'의식공법에 대한 재능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수준이라 어떻게 대성은 했다만… 본인이 대성했는지조차 모르고 있어.'
뭐, 그래도 괜찮다.
자의든 우연이든, 한 번 '연결'되었으니 앞으로도 요령만 머리에 새기면 계속 연결될 수 있다.
"연아, 김연!"
나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에헤헤, 대리님. 보고 싶으니까 꿈속에서도 나오…."
툭―
나는 그녀의 이마에 내 이마를 가져다 대며 기묘성심전을 강하게 운용했다.
"…어?"
그녀는 뭔가 기시감을 느꼈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와 동시에 일순간 꿈의 세계가 크게 흔들렸다.
'꿈에서 깨지는 않게, 자각몽으로 명확히 유도한다.'
나는 기묘성심전으로 그녀의 의식을 표상으로 끌어올렸다.
츠츠츳!
순간 꿈의 세계가 흔들리며 무수한 꿈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중 대부분은 어째선지 비슷한 꿈이었다.
나와 그녀가 식물원 안쪽의 길을 걷고 있는 장면.
식물원 안쪽, 그곳의 꽃나무 밑에서 완전히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는 김연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그리고 그 장면들이 사라지고, 마침내 김연의 눈동자가 맑아졌다.
"어, 어어? 꿈이…."
그녀는 내가 눈앞에 있는 게 믿기지 않는 듯 자신의 볼을 꼬집으려 했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서 머리를 떼며 손을 막았다.
"잠깐, 아직 큰 자극을 주면 안 돼. 기묘성심전을 더 운용할 줄 알면 몰라도, 지금은 꿈에서 바로 깰 수 있어."
"어… 네."
그녀는 멍하니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아직도 조금 꿈 같은 모양이었다.
"자, 그럼, 일단 내가 하라는 대로 따라서 기묘성심전을 운용해 봐, 연아. 알겠지?"
"네에…."
그리고 얼마 후, 기묘성심전을 운용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맑아졌다.
나는 그녀의 의식을 인도하며 그녀가 기묘성심전을 더더욱 장악할 수 있도록 도왔다.
어차피 지난 10년간 기묘성심전을 알아서 대성해 놓고, 본인이 대성했는지도 모르는 상태가 바로 현재의 김연의 상태였다.
그런 만큼 의식을 인도하는 법만 조금 가르치면 바로 기묘성심전을 대성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얼마 후.
"…어? 어어?"
마침내 기묘성심전을 완전히 장악한 김연의 눈동자가 전부 맑아지고, 자신의 꿈을 완전히 장악한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붕, 붕!
그녀가 나를 향해 손을 휘저어 보였다.
내가 그녀의 꿈속 부속품이라면, 기묘성심전을 완전히 장악한 그녀의 의식에 의해 그대로 흩어졌어야 정상.
하지만 나 역시 기묘성심전을 운용하며 꿈속에 계속 남아서 그녀의 의식을 버텨 냈다.
"으, 은현… 대리님…?"
"그래, 나야."
"대, 대리님…!"
김연은 울먹거리며, 내게 달려와 안겼다.
나는 자그마한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지, 지난 10년간… 10년간…."
"그래, 알아. 괴군이 미친 인간인 거."
"흑, 흐윽… 끄으윽…."
김연은 울먹이며 그동안의 일을 천천히 얘기했다.
나는 기묘성심전과 등봉조극의 무리를 합쳐 그녀의 꿈을 가속시키며 꿈과 현실의 시간 배율을 다르게 바꿨다.
우리는 천천히 그동안 못 나눴던 대화를 나누었다.
"…여기는 그런 세상이군요."
"그래. 나는 지금 인족 영역에 있어. 당장 널 데리러 갈 순 없지만, 꼭 찾아갈게."
"…고마워요."
"앞으로는 매일같이 꿈속에서 만나자. 기묘성심전, 그리고 괴군의 괴뢰와 기묘성채에서 느껴지는 광증이 있으면 내가 해결해 줄게. 그리고…."
나는 김연을 보며 말했다.
"앞으로, 꿈속에서 한 가지를 너한테 가르칠 거야."
"어떤걸요?"
"잠시 꿈을 빌릴게."
나는 기묘성심전을 운용해, 꿈속 환경을 바꿨다.
기이한 빛무리가 일렁이며, 나와 그녀가 있던 공간이 순식간에 거대한 연무장으로 변했다.
"앞으로…."
지난 생, 지지난 생에서는 그녀를 제대로 신경 써 줄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정신 차리고 신경 써 준다.
"네게 무공을 가르칠 거야."
김연에게 무공을 가르쳐, 그녀를 최소한 월도입천.
그게 안 되면 등봉조극에라도 올려 놓는다.
'등봉조극만 되어도 의식을 가속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의식의 가속 효율은 의식의 크기에 정비례한다.
천인기에 달한 지금의 나는 등봉조극의 가속 효과만으로도 입천 초기에 달한 김영훈과 비슷한 속도를 낼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면, 사축기 급의 의식 영역을 지닌 김연이 월도입천에 도달하면.
아니, 최소한 등봉조극에라도 도달하면.
'김연은 그 순간, 괴군에게서 탈출할 최소한의 힘을 얻을 수 있다.'
시간은 충분하다.
김연의 꿈속에서 기묘성심전과 등봉조극의 구결을 운용하면 꿈속의 시간 배율을 3배 정도로 늘릴 수 있으니까.
'내 꿈속이 아니라서 이 정도가 한계라는 게 아쉽지만, 그래도 충분해.'
그녀를 가르치는 건 문제없었다.
아무리 김연의 자질이 쓰레기 같아도, 절정 고수가 되는 데에 일생을 다 쏟아부은 나보다 더 쓰레기 같겠는가.
"무공이요…?"
"그래. 내가 네게 딱 맞는 무공을 만들어 줄게."
무공을 익힌다면, 그녀의 거대한 의식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터다.
나는 그렇게, 아침에는 전명훈.
밤에는 김연을 가르치게 되었다.
* * *
1년이 지났다.
"좋아, 그거다!"
"닥쳐!"
콰르르릉!
붉은 벼락이 내가 있던 곳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제 점차 축기기 수준의 힘만으론 전명훈의 힘을 이기기가 어려워졌다.
전명훈은 1년 만에 축기기 4수.
28개의 영성을 전부 형성했다.
그리고, 전명훈은 놀랍게도 아직도 주뢰진경을 익히지 못했다.
'그런데 주뢰진경 없이 적뢰진경을 진화시켜서 어떻게 자기가 축기기 대원만까지 간 것도 신기하단 말이지.'
그래도 이 성장 속도라면, 10, 20년 안에 충분히 결단기 대원만에 도달할 수 있을 터였다.
결단기 대원만에 도달한 후부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명훈을 전명훈 빈대떡으로 만들어서라도 원영기에 집어넣을 것이니 문제는 없었다.
'빨리 성장해라, 전명훈.'
콰르르릉!
나는 전명훈이 내쏘는 붉은 벼락을 유유히 피하며 녀석의 품으로 파고들어 가 몽둥이를 올려쳤다.
"크악! 제길…."
"일어서라."
"씨발… 서은현 이 새끼…."
"말로만 욕하지 말고 빨리 결단기에, 원영기에, 천인기에 이르러서 나를 두들겨 패 봐라.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
"흐아아아아!"
'꽤 악이랑 깡이 있어.'
아니, 그냥 내가 너무 두들겨 패서 생긴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쨌든 전명훈은 독기를 품고 상대에게 덤벼들 줄 알게 되었다.
나는 전명훈의 공격을 유유히 피하며 녀석에게 계속 선각후통의 구결을 담은 몽둥이 찜질을 퍼부었다.
지난 1년간, 전명훈은 상당히 성장했다.
김연 역시 1년 동안 내게 배우며 가파르게 무공이 성장해 어느덧 이류 무인 수준이 되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군.'
물론 내가 아무리 김연에게 최적화된 무공을 만들어 줬다고는 했으나, 그걸 감안해도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하긴, 수천만 개의 꼭두각시를 동시에 다루는 것보다는 자기 몸 하나 움직이는 게 더 쉽기야 하겠지.'
아무래도 기묘성채의 꼭두각시들 수천만 개를 조작해 본 경험이 꽤 도움이 되는 듯했다.
'문제는 나인가….'
그러나 가파르게 성장하는 김연과 전명훈과는 달리, 나는 아직도 심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김연과 전명훈은 양수진의 말대로 인간이라고 친다면.
다른 이들은 도대체 어떤가.
'이 세계는, 이 세계에서 맺은 인연은… 대체 뭐지?'
차라리 양수진이 보잘것없는 길가 양아치였다면 그냥 흘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필이면 진선의 극점에 도달했다는 양수진의 말이었다.
도저히 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인간은…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고민을 품은 채 전명훈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파아아앗!
"…!"
저 멀리서 익숙한 둔광이 날아왔다.
황금빛의 비둔술.
"여어, 금은현 장로!"
헌위였다.
그녀는 당찬 얼굴로 내 옆에 내려오며 말했다.
"이번 달 구혼 자금이다."
부웅!
그녀가 나를 향해 저물도 하나를 던졌다.
나는 말없이 저물도를 받아들었다.
역시나, 이 저물도에도 지난번에 받았던 것과 같은 양의 영석이 들어 있었다.
헌위는 지난 1년간, 한 달에 한 번씩 나를 찾아와 '구혼 자금'이랍시고 어마어마한 영석을 내게 퍼부어 주었다.
금신천뢰문의 영역에 이렇게 자주, 멋대로 들어오는 건 분명 문제의 소지가 있었으나 금벽호는 헌위에게 영석을 받은 이후로는 불편해하는 듯하면서도 일단 그녀의 통행을 허가해 주고 있었다.
'이제는 아예 대놓고 자기 사람까지 데리고 다니는군….'
나는 약 30리 밖에서 헌위를 따라온 누군가를 보았다.
그는 은신을 한답시고 하는 것 같았지만, 그가 내는 의념이 여실히 보였기에 내 눈을 피할수가 없었다.
'호위 무사인가?'
나는 헌위를 따라온 누군가에게도 의식을 집중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나와 결혼할 생각이 없는 거냐?"
"송구하오나, 아직도 그렇습니다."
"흐흠… 안타깝구만. 정 그렇다면 나와 쌍수라도 맺지 않겠느냐? 도려가 아니라 그냥 기운을 교류하는 쌍수라도 맺어 준다면 정말 고맙겠는데 말이지…."
"…."
나는 그녀를 보며 되물었다.
"중계 영석 천억 개라면… 헌 선자께서도 충분히 선통후각으로 천인 후기를 뚫으실 수 있을 만한 양입니다만. 도대체 왜 저 같은 것과 쌍수를 하자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말했잖느냐. 한눈에 반했다고."
"흐흠…."
나는 헌위의 의념을 읽으며 머리를 식혔다.
동시에 나는 그녀가 겉으로는 나와 대화를 나누며 뒤로는 천지영기를 조작해 뭔가를 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은근히 금신천뢰문에 진법을 깔고 있군….'
정확히는, 그녀 자신은 자신의 기분에 따라 주변 천지영기를 조금씩 움직이며 내 집중을 흐트러트렸고, 30리 밖에서 그녀를 따라온 호위가 은근슬쩍 금신천뢰문에 수작을 부리는 것이었다.
내가 모르리라고 생각하고 천지영기를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정작 청문령의 문하에서 진도를 까는 법을 극한까지 파고들었던 나로서는 한 눈에 보였다.
'토 속성 영력을 한 번에 압박하는 진법이다.'
사실 누구에게도 알리지는 않았지만, 금신천뢰문의 곳곳에는 내가 괴군의 회로를 누구도 모르게 깔아 놓았다.
말도 안 되는 피해망상일 수 있었으나, 서휼이나 혹은 위령선의 분체가 나를 감시하고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에 늘 긴장을 놓지 않고자 깔아 놓은 회로였다.
그 회로를 통해서 그녀가 깔아 놓는 진도가 내 머릿속으로 전송된다.
'진도의 기운이, 헌위의 몸에 흐르는 공법의 기운과 완벽히 역행한다.'
유사시, 저 진법을 발동시키면 그녀를 완벽히 제압할 수 있는 진법이었다.
왜 금신천뢰문에 들어와서 자기 자신을 제압할 수 있는 진법을 까는 걸까.
나는 내 옆에서 내게 달려드는 전명훈을 멀리 쳐 낸 후 빙긋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정말 말씀은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제게는 엄연한 쌍수 상대가 있고, 함부로 타인과 쌍수를 하는 것 역시 그녀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합니다."
툭툭―
난 헌위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어깨를 두들겨 주며, 월수궁무록으로 기척을 감춘 기괴고의 술을 그녀도 모르게 기생시켰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건지 모르니 일단 감시해 놔야겠어.'
인간은 무엇인가 (11)
아무래도 나를 얻으려 해도 내가 계속 버티니까 뭔가 수작을 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부리는 수작은 서휼이 부렸던 수작에 비하면 정말로 귀여울 정도였다.
"그러니 헌 선자에겐 안타깝지만 혼인 문제는 이제 그만 넣어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하, 내가 포기할 줄 알고? 네가 나를 허락할 때까지 계속 찾아올 것이다!"
헌위는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비둔술을 써 날아가 버렸다.
'…어처구니없는 진법이군.'
용맥을 유도해서 펼치는 진법이다.
괴군의 회로를 곳곳에 깔아 두고, 내가 용맥의 흐름에 민감한 규토장성공을 익혔으며, 청문령에게 진도에 대한 지식을 배우지 않았다면 알아챌 수 없었을 터였다.
'제대로 발동하면 천인기 수사 하나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는 진법이다. 그것도 토 속성의 천인기 수사라면 아예 일순간 범인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강력한 진법이야. 그리고….'
저 진법의 흐름은 말 그대로 헌위 자기 자신을 제약하기 위해 만든 흐름이었다.
'왜 이런 진법을 짰을까.'
나는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녀는 나를 얻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나를 얻고 싶어 계속 영석을 주며 호감이 있다는 것을 주변에 알린다. 그러면서 유사시 자기 자신을 제압할 수 있는 진법을 깔아 놓는다.'
왜 저런 진법을 만들었을까.
당연히 사용하려 만들었을 것이다.
누구한테 사용하려 했을까.
그녀의 입장에서 나는 뇌도공법을 익힌 뇌도공법의 천재다.
나를 제압하기 위해 굳이 토 속성을 억압하는 진법을 짜놓을 이유가 없다.
'같은 봉래궁의 사람을 제압할 확률이 높다.'
그녀가 익힌 공법을 완벽히 역행하는 진법이다.
그러면 왜 굳이 그런 진법을 여기다가 깔았을까.
'봉래궁의 사람을 이곳으로 몰고 와 여기서 진법을 사용하면….'
봉래궁의 사람은 일순간 저항할 수가 없어진다.
'봉래궁 내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파벌을 제압해서 책임을 금신천뢰문에게 떠넘기려고? 아니야. 그녀는 나를 정말로 가지고 싶어 했다. 사랑은 일 푼도 없지만 욕심은 진짜야.'
그렇다면 저 진법의 용도는….
'…자기 자신에게 쓰려는 것일 수도 있겠어.'
나와 단둘이 있는 틈을 노린다.
그리고 그사이에 진법을 발동시켜 자기 자신을 무력화시킨다.
그런 다음 시간을 잘 맞춰 봉래궁의 다른 인물이 그 광경을 보게 한다면, 어쩌면 내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려 했다고 오해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합체기 태수의 딸에게 무슨 짓을 하려 한 죄로 금신천뢰문의 명망은 바닥에 처박히고… 용서를 빌기 위해서 그녀와 혼인을 강제로 해야 할 수도 있겠군.'
꽤 음험한 한 수였다.
'하지만 이건 그냥 함정이고 이 뒤에 이, 삼중으로 함정을 더 쳐 놓았을 수도 있어.'
어쩌면 이 진법은 그냥 내 능력을 알아보려는 시험일 수도 있었다.
'뭐, 여기서부터는 기괴고를 써야겠군.'
나는 바로 기괴고를 사용해 그녀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 * *
"미약은 준비해 놨나?"
차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예, 주인님. 음혼귀시문에서 제작한 특급 미약을 공수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천인기 후기 수도자조차 들이쉬면 순간 이성을 잃을 정도로 강한 미약입니다.]
그리고 영언이 울려 퍼지는 소리도 들렸다.
"원영기 대원만 정도에게 쓰면 이성을 잃고 달려들겠군."
[물론입니다.]
"다음 달에서 다다음 달 정도에 금은현과 단둘이 있을 자리를 만들 거다. 그 틈에 네가 그에게 먼 곳에서 미약이 담긴 침을 쏴서 맞출 수 있나?"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의 의식 영역은 어느 정도입니까?]
"반경 이십 리가 그의 의식 영역이다."
[원영기 대원만인데 천인기 초중기 수준의 의식 영역이군요…. 그래도 50리 밖에서 충분히 목표물을 맞출 수 있으니 걱정 마시지요.]
"훌륭하군. 일말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녀석이 나를 덮치려 할 때에 기록부를 지참하고 그 자리에 나타나야 해."
[여부가 있겠습니까.]
"태수의 혈통을 겁간하려 한 이상, 주도권은 내게 들어오게 되어 있다. 반드시… 금신천뢰문을 손에 넣을 것이야!"
* * *
"…이게 끝인가."
나는 기괴고를 통해 그녀와 그녀의 호위를 감시하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서휼이라면 10할 확률로 저 진법 뒤에 무언가 수작을 더 부려 놨을 터였다.
하지만 너무 눈에 띄는 수작만 부리고 가는 그녀를 보니, 귀여울 정도였다.
'아니지, 나니까 수작을 뚫어본 거였지, 일반적인 원영기 대원만이면 보통 못 뚫어 보겠지.'
그녀는 최선을 다해 수작을 부렸다.
하지만 내 눈이 너무 높아진 게 문제인 듯싶었다.
'뭐, 그럼 적당히 저런 수작쯤이야 흘려보내 주면 될 테고….'
내가 저 수작질을 어떻게 돌려쳐 줄지 고민할 때였다.
콰르르릉!
"넌 아직 멀었…."
퍼억!
"…!?"
전명훈의 주먹이, 뇌성과 함께 내 간격을 뚫고 내 얼굴을 타격했다.
"드디어!"
"…허?"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볼을 매만졌다.
"…어떻게 한 거냐?"
이 녀석의 수준이라면 절대로 내게 닿을 수가 없어야 한다.
금벽호나 창호자조차 법보가 없이 싸운다면 꽤 순조롭게 이길 자신이 있는 나였다.
차라리 기적이 있지 않은 한, 전명훈은 절대 내게 닿는 게 불가능하다.
그런데, 닿았다.
'어떻게?'
나는 짜증이 난다거나 하기보다는 경이로운 느낌이 들어 전명훈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 수법… 네가 주로 하던 공격이 아니었는데? 누구한테 배운 거지?"
방금 내가 어처구니없이 얻어맞은 공격은, 수도공법이라기보단 차라리 무공의 묘리에 가까웠다.
"홍수령인가?"
전명훈은 붉은 뇌전을 끌어올리며 씨익 웃었다.
"남자가 그렇게 입이 가벼울 것 같냐? 안 말해 준다, 빌어먹을 놈."
"오호…."
'녀석도 성장해 가고 있군.'
나는 신기한 기분을 느끼며 몽둥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일다경 후.
"크아아악! 크아악! 말할게! 말한다고!"
"…남자는 입이 가볍고 어쩌고 하지 않았나?"
"그냥 여자 하련다, 젠장."
"…."
나는 혀를 차며 물었다.
"그래서, 누구냐. 홍수령이겠지?"
금신천뢰문에서 무공 비슷한 걸 가르칠 만한 사람은, 홍수령 외에는 없으니 아마 십중팔구 그녀일 터.
'최근 홍수령과 무학에 대해서도 꽤 깨달음을 주고받긴 했지….'
그사이에 벌써 전명훈에게 이런 걸 가르칠 정도로 성장했단 말인가?
내가 의아해할 때였다.
"홍범."
"응?"
"홍범한테 배웠다. 선선히 네 약점과 습관, 그리고 습관을 찌를 수 있는 틈을 말해 주더군."
"…뭐?"
나는 순간 어이가 없어져서 되물었다.
"홍범한테 방금 움직임을 배웠다고?"
"그래."
"…."
홍범한테는, 무공 같은 걸 가르친 적이 없었다.
'물론 홍범 앞에서 무공 연습을 많이 하긴 했다만….'
전명훈이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 홍범이 내가 앞에서 무공을 펼치는 걸 보기만 하고 무학의 묘리를 이해해서 그걸 전명훈한테 가르쳤다고?'
도대체 뭐지, 이 녀석은?
"네놈을 이기기 위해, 벌레에게도 무릎 꿇었다! 지금은 개처럼 처맞지만… 반드시, 반드시 널 뛰어넘을 거다!"
콰지지지직!
전명훈은 내 밑에 깔린 채 적뢰를 내뿜었다.
"…아."
나는, 전명훈을 밟았던 발을 치웠다.
그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하하, 하하하하…."
"…? 뭐야, 처돌았냐, 서은현?"
"하하… 고맙다. 전명훈."
"뭐?"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그리고, 나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심마가 일순간 걷혀 나간 느낌이었다.
'전명훈은 홍범에게서조차 배움을 찾았다.'
그렇다면.
설령 양수진의 말대로, 이 세계 전체가 벌레보다 못한 비인간에 불과하더라도.
내가 맺어 왔던 인연들이 쓰레기에 불과하더라도.
'그들은 내게 가르침을 주었다.'
티끌에 불과한 먼지에 불과할지라도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
"정말 고맙다."
나는 입을 벌려 무색유리검을 꺼냈다.
"고, 고맙다면서 왜 칼을…."
"네 덕에 큰 깨달음을 얻었어."
인간이면 어떻고 비인간이면 어떤가.
그 마음마저 모두 짜여 있는 각본에 불과하면 어떤가.
나는 그 각본에서 나 자신으로 완성되었고, 그 각본 속에서 의미를 얻어 왔다.
의미를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인간이 아닐까.
난 말없이 검무(劍舞)를 추기 시작했다.
'부족하다.'
이 검무로는 절대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
돈오는 방금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점수가 부족하다.
그러나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점수(漸修)만 채우면 [너머]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
붕, 붕, 붕!
순식간에 무아지경에 빠져든 나는, 머릿속으로 장익의 말을 떠올렸다.
―구현 3단계에 이르는 법을 알려 주마.
―심족의 힘은, 자신의 마음을,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理想)을 세상에 강요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내 투혼의 이상은 극한에 도달한 정밀도와 파괴였다. 나는 그 파괴의 힘을 세상에 강요함으로써 3단계를 거쳤지.
―네 무(武)의 이상은 무엇이지?
자기 자신의 이상을 세계에 강요하는 것.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자, 잠깐. 서은현, 뭐 하는 거냐!"
전명훈이 내게서 일어나는 기세를 보며 황급히 도망쳤다.
부웅, 붕, 붕!
쿠르르릉―
분명 뇌도공법을 잃었을 터인데, 내 주변으로 천둥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세계(世界)에… 자신의 이상을 강요한다.'
내 무(武)가 도달할 극점을 세계의 법칙으로 새겨 버린다는 뜻.
그렇다면 내 무의 극점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가.
내 무가 가진 의미는 무엇인가?
'아무 의미도 없다.'
왜냐하면, 의미란 부여하는 것이니까.
나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자신에게만 마음이 있는 게 아니었다.
무(武)에도 마음이 있었고, 의미가 있었다.
내가 평생을 관철해 온 의미가 내 무공에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무(武)에 자신이 평생을 관철해 온 의미를 일깨우는 것.
이것이 바로 답천 너머의 단계!
'진입한다!'
콰르르릉!
나는 무색유리검을 휘둘렀다.
무형검을 꺼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천둥소리와 함께 저 멀리 작은 산등성이가 그대로 베여 나갔다.
말도 안 되는 기세에 산천이 진동하며 거대한 울림이 세계를 진동시켰다.
구름이 찢어졌고, 저 멀리서 수련하던 천인기 원로들이 다급히 주변을 둘러본다.
"이, 이게 무슨 일인가!"
"습격인가!?"
"아니, 누가 뇌도공법을 수련하는 것 같은데?"
"아니, 천겁이다! 천겁의 기운이야!?"
여태껏 전명훈을 상대하던 수준에서도 힘을 더 빼고 연기기 급으로 힘을 휘둘렀음에도 나온 압도적인 위력!
쿠르르릉….
점차 내 주변에서 울리던 천둥소리가 줄어들었다.
'부족하군.'
다음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더 이상 깨달음이 부족하지는 않다.
필요한 것은 노력, 그리고 노력!
의지를 세계에 관철할 자신감!
이번 생에, 천인기에는 오르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하다.
답천 너머의 경지로는, 이제 정말로 한 걸음 남았다.
다면(多面) (1)
파아아앗!
수많은 시선이 이쪽을 향해 갑자기 쏠리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뇌령도의 총령.
위령선의 분체가 보내는 시선이었다.
우우우웅!
위령선의 분체가 술법을 집중하며 하늘 위로 시선을 집중함에 따라, 하늘이 갑자기 은은한 녹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딱히 숨지 않고 위령선의 시선과 눈을 마주쳤다.
쿠구구구구!
하늘이 갑자기 진동하며, 천지영기와 함께 위령선의 목소리가 울렸다.
[금신천뢰문 금은현 장로,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려 줄 수 있소?]
하늘에서 위령선의 의지가 들려왔다.
나는 뻔뻔하게 철면피를 깔고 말했다.
"공법 수련을 했습니다만, 뇌령도 총령께서는 어쩐 일로 일개 원영기 장로인 제게 관심을 가지시는지요?"
[천겁의 기운이 일기에, 누군가가 경지 상승을 시도하는가 하여 잠시 지켜보았소. 금 장로가 이번에도 또 경지 상승을 하면 이번에는 천인기 원로가 되니 다시 한번 축하를 해 주러 갈 필요가 있겠지….]
"하하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데, 방금 느꼈던 기운은 정말로 천겁의 기운과 흡사하더구려. 정말로 공법 수련 중에 일어난 현상이 맞소? 내 알기로 공법 수련 중에 천겁과 유사한 기운이 이는 것은 심족이란 족속들뿐인데….]
"그건 오해이십니다. 저희 금신천뢰문은 천겁을 연구하고, 뇌전을 부리는 것을 주로 익히고 파고드는 종문입니다. 그저 뇌도공법을 파고들다 보니 천겁과 비슷한 결과가 우연찮게 나온 게 아닐지요?"
[정말로 뇌도공법만으로 천겁과 그렇게 유사한 느낌을 주었단 거요?]
"흐음, 뇌도공법으로 천뢰의 힘을 구현하려는 게 많이 이상한 겁니까?"
그렇게 위령선의 시선에서 의심의 기색이 맴돌때였다.
쿠르르릉!
하늘에 금빛 번개가 우릉거리더니, 금벽호가 하늘로 날아가 위령선의 시선이 있는 곳을 향해 외쳤다.
"총령께 인사드립니다. 한데, 총령께서는 지금 무얼 하고 계십니까?"
[귀 종문의 금은현 장로의 동태를 보고 있었소.]
"금 장로가 무언가 잘못을 했습니까? 뇌령도에서 금지된 사이 악랄한 마공이라도 익힌 겁니까?"
[그런 건 아니지….]
"그럼 어째서 총령께서는 현재 금신천뢰문의 내부를 들여다보시며, 저희 종문 뇌도공법의 비밀을 함부로 캐 가시려 하시는 겁니까?"
금벽호의 말에 위령선은 잠시 주춤하는 듯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위령선은 분명 지금 금신천뢰문의 안쪽을 샅샅이 들여다보면서 장로 중 한 명의 공법을 취조심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었다.
"저희 금은현 장로의 공법은 금신천뢰문의 타 공법들에 비해서도 특이한 편인지라 여타 기이한 느낌을 받으신 듯합니다. 이 이상은 종문의 기밀이니 그만 물러가 주시지요."
[…알겠소. 내가 너무 과민 반응했군.]
말을 마친 위령선은 술법을 거두었고, 위령선의 시선으로 가득 찼던 하늘은 어느덧 다시 그의 의지가 흩어지며 녹빛으로 물들었던 하늘이 다시 원래 색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하늘에 서서 위령선의 의지를 막아서던 금벽호가 하늘에서 내려와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괜찮으냐, 금은현? 아니, 아니지. 그것보다…."
쿠구구구!
금벽호가 주먹을 쥐자, 하늘에 뇌운이 일어나며 하늘 너머에서 이곳을 관측하는 것을 차단해 버렸다.
주변의 천지영기가 변화하며 주변을 감시하지 못하게 하는 금제가 세워졌다.
"방금 강력한 천겁의 힘을 느꼈다. 멸신겁천으로 인해 분명 뇌도공법의 속성을 전부 잃었을 텐데 어찌!"
"아…."
나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가만히 있다, 일단 되는 대로 말해 보았다.
"한번 뇌도공법의 속성을 되살려 보기 위해 몇 가지 시도를 해 보던 중 우연찮게 천뢰의 힘을 구현했습니다."
"뭬야!"
내 말에 금벽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게 가능하단 말인 거냐!?"
"어… 일단 되더군요."
"허, 허어… 허허허허…."
그는 멍하니 있다가, 껄껄 웃기 시작했다.
"시조님이 선택하여 네가 뇌성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너였기에 시조님께서 안배를 주신 것이로구나."
금벽호는 장하다는 듯이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나는 움찔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역시 네가 본문의 미래다. 최근에는 전명훈을 봐주느라 네 수행할 시간도 거의 없다지? 쯧, 전명훈 녀석…. 그래도 놈도 천상금뢰지체인지라 빨리 자라고 있는 것 같으니, 녀석만 원영기에 도달하면 그 후부터는 너도 편안히 천인기에 도전할 여건이 될 것이다."
"…어찌 제가 먼저 천인기에 오르겠습니까. 같은 날에 금신천뢰문에 들어왔으니, 천인기도 같은 날에 드는 것이 아무래도…."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너라도 하루빨리 천인기에 들어야지! 네가 전명훈을 봐주느라 천인기에 오를 시간이 없지만, 시간만 조금 준다면 천인기에 오를 거라는 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시간을 주면 오르는 건 맞긴 하지.'
나는 금벽호의 어마어마한 오해의 벽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동문을 돕는 시간은 절대 아깝지 않습니다. 제가 천인기에 오르는 날이 조금 늦어지더라도 전명훈의 경지를 상승시키는 데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녀석…."
금벽호는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금벽호에게 감사를 표한 후 도망친 전명훈을 찾으러 갔다.
* * *
그날의 일과가 끝나고, 내 동부로 돌아온 나는 김연과 연락하기 전 내 동부 인근에서 수련을 하고 있을 녀석을 불렀다.
"홍범, 잠시 와 보거라."
촤르르륵!
그렇게 크게 부른 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시커먼 지네가 내 앞에 도착해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그래. 오늘 전명훈에게 들었다. 네가 전명훈을 가르쳤다지?"
"부족한 재주로 명훈 님에게 안 좋은 버릇을 들이게 한 건지 걱정됩니다."
"음, 아니다. 어차피 녀석은 무공이 주가 아니니까…. 그것보다, 순간 녀석의 움직임이 내게 닿았다. 전명훈은 네 지도를 받았다는데, 무슨 지도를 해 준 거냐?"
홍범은 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주제를 넘게도, 주인님께 닿고자 하신다면 주인님이 타인과 대화를 나누고, 대화를 끝마친 후 생각에 골몰할 때를 노리라고 조언했습니다. 주인님께서 생각에 골몰하실 때 뇌도공법으로 주의를 끌고, 그 틈새를 타, 가장 방어가 철통같이 느껴지는 부분으로 주먹을 뻗으면 닿을 수도 있다고 귀띔을 드렸습니다."
"흐음…."
전명훈의 움직임은 무학적인 것도 있었으나, 홍범이 나에 대한 것을 완전히 간파해서 습관과 버릇의 틈을 알려 준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는 전명훈이 내게 닿는 건 불가능한데. 녀석의 움직임은 한순간 보법의 성격을 띠었다. 그 보법도 네가 가르친 건가?"
"주인님이 사용하시는 보법을 전명훈 님께 맞게 조금 알려드렸습니다."
"…뭐? 그게 내 산군월악비였다고?"
나는 내가 사용하는 것과 완전히 달랐던 그 보법을 떠올리며 황당해했다.
내가 사용하는 무공을 개조해서 전명훈에게 가르쳤는데, 정작 내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르게 변질되어 버렸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주인님의 무공을 함부로 타인에게 알리지 않고, 저만 알고 있겠습니다."
"…아니, 아니다. 그나저나 홍범, 너…."
나는 홍범을 보며, 새삼 녀석이 굉장하다는 것을 느꼈다.
'한 5백 년 뒤면 내가 이 녀석을 주인님이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너… 무공을 배워 볼 생각이 없느냐?"
녀석에게 무학에 대한 재능도 넘쳐난다면, 무공을 안 익히게 하는 것도 엄청난 재능 낭비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홍범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쳐 주신다면 영광으로 여기고, 감사히 배우겠습니다."
"그래, 나야말로 너 같은 천재를 가르치게 되어 영광이다."
"천재라니요, 저는 천재가 아닙니다."
"네 그 말은 지금 수많은 둔재들을 기만하는 발언이다. 하하…. 자, 그럼, 앞으로 네게 가르칠 무공은 뭐가 좋을까…."
나는 홍범을 위한 무공을 어떻게 만들면 좋을까 고민했다.
그러던 중, 나는 문득 고민할 필요 없이, 내가 예전에 만들어 놓았던 무공 중에서 이미 녀석에게 최고로 잘 맞는 무공이 있단 걸 떠올렸다.
'그래, 홍범에게는 그게 최고로 잘 맞겠군.'
나는 저물도에서, 몇 개의 암기를 꺼냈다.
"네가 익힐 무공은 투괴암기술(鬪怪暗器術)이란 무공이다."
홍범은 지네 요수인 만큼 독을 제작하고 살포하는 것의 명사였고, 독과 함께 쓰는 무공으로는 투괴암기술만큼 적합한 것이 없었다.
나는 그날부터, 낮에는 전명훈을 몽둥이로 두들기며 내 단악검법을 수련했고, 저녁에는 홍범에게 투괴암기술을 가르쳤으며, 밤에는 김연을 찾아가 무공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렇게 약 두 달의 시간이 흘렀다.
휘이이이이―
그날은 유난히 먹구름이 많이 끼어 있었고, 사방이 어두컴컴했으며 강풍이 많이 휘몰아쳤다.
'춥군.'
나는 금신천뢰문의 영역 외곽에 나와 있었다.
"언제 도착하려나?"
며칠 전, 헌위가 따로 단둘이 만나서 보자고 연락을 주었고, 나는 그녀의 말에 따라 잠시 이곳에 나와 있는 것이었다.
'오늘 쯤이면 이제 그녀와도 담판을 지을 때가 됐지.'
그녀 역시 오늘 나와 담판을 지어 나를 그녀의 노예로 만들려 하는 듯했으니, 오늘이 그녀와의 결전일인 셈이었다.
얼마 후, 저 멀리서 헌위가 비둔술과 함께 날아와 내 앞에 앉았다.
"오랜만이구나. 그래, 오늘은 생각이 안 바뀌었나?"
그녀는 짐짓 호탕하게 웃으며 팔짱을 낀 채 물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답해 주었다.
"송구스럽지만, 아무리 말씀하셔도 저는 지금으로 족합니다."
"흐흠…."
"만약 지금까지 제게 주신 영석들을 전부 돌려 달라고 하신다면 다시 돌려 드리겠습니다. 헌 선자도 이제 슬슬 마음을 접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돌려 줄 필요는 없다. 그냥 네놈 쓰라고 준 거니까. 그나저나, 정말로 나와 혼인하지 않겠느냐?"
"예."
"쌍수 관계조차도?"
"그렇습니다."
"흐흠… 내가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느냐?"
"헌 선자는 아름다우십니다. 다만…."
그때였다.
나는 그녀가 은근슬쩍 뒷짐을 진 채, 등 뒤에서 수결을 맺는 것을 감지했다.
"됐다. 됐다. 이제 그만 해라. 끝까지 구애해도 받아들이지 않으니, 너는 그냥…."
다음 순간.
그녀는 씨익 웃으며 수결을 전부 맺었다.
"저항할 수 없는 나를 덮치려 하는 파렴치한으로 만들어서라도 데려가마."
그와 함께 헌위는 수결을 맺은 상태에서 외쳤다.
"폐산진(廢山陣), 발동!"
"…."
"…."
"…."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 왜 발동이…."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진법이 발동하면 그걸 신호로 미약 침을 저 멀리서 날리기로 하셨는데, 첫 단추부터 꼬여서 당황스러우셨나 봅니다."
그 말에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 그걸 어찌…!"
그리고, 그녀에게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어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일을 어렵게 만드는구나."
"일을 어렵게 만든다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무슨… 헛!"
다음 순간,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쪽 팔을 들어, 저 멀리 어딘가에서 미약침을 준비하고 있을 그녀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녀의 시종과 나누는 수신호 중 하나로, '잠시 대기'란 의미였다.
"이, 이게 뭐냐! 나한테 뭘 한…."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자신의 발을 굴러 사방으로 흙벽을 세웠다.
순식간에 그녀의 영력으로 이뤄진 흙집 한 채가 우리를 둘러쌌다.
"자, 이제 조금 편하게 대화를 해 보도록 할까요?"
"…네놈."
동시에, 헌위의 얼굴에 있던 자신만만하던 미소가 싹 사라지고 싸늘한 표정만이 그녀의 얼굴에 남아 있었다.
"내게 무슨 짓을 했구나."
다면(多面) (2)
"앉으시지요. 무슨 큰 짓을 한 게 아닙니다."
나는 그녀의 몸에서 기괴고를 반쯤 뽑아내며 보여 주었다.
완전히 뽑히지는 않았기에 그녀의 행동은 여전히 제약이 있었다.
"그냥 제 술법으로 헌 선자를 두 달 정도만 감시했을 뿐입니다."
"…간이 크구나. 감히 합체기 태수인 내게 기생법술을 기생시키고 두 달 동안이나 나를 감시해? 네가 무사할 수 있을 성싶으냐?"
"흐음… 큰 위협은 아니군요."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애당초, 헌 선자의 형제자매분들, 봉래궁의 다른 이들 역시 헌 선자의 몸 곳곳에 덕지덕지 추적과 감시 법술을 붙이고 있지 않습니까."
"…."
"그중 몇 개는 정말로 못 알아차리셨지만, 그중 몇몇은 알고도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까? 평소에도 그런 걸 붙이고 다니시면서 제 법술이 하나가 더 붙었다고 해서 너무 과민 반응하시는 게 아니신지요?"
그녀는 계속 무표정을 유지하고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의념을 읽으며 그녀가 상당히 당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단… 제 술법으로 두 달간 선자를 감시했고, 몇몇 중요한 장면들은 따로 기록도 해 놓았지요."
내가 기괴고의 술을 조금 조작하자, 기괴고가 꿈틀거리며 허공에 영상을 띄웠다.
그녀가 자신의 시종과 나를 곤경에 빠뜨릴 음모를 모의하는 장면이었다.
"애당초 헌 선자부터 저를 이리 하려고 하셨으니, 상호간에 원망은 없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원하는 게 뭐냐?"
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싱긋 웃었다.
"제가 묻고 싶습니다. 헌 선자는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저를 손에 얻음으로써 뭘 얻고 싶으신 것이지요?"
그 말에, 그녀는 딱딱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 술법을 풀어 주면 말해 주지."
"그러지요."
"음?"
나는 그 말에 그녀의 몸에서 기괴고를 빼냈고, 헌위는 내가 너무 쉽게 기괴고를 빼내 주자 미심쩍은지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진짜 풀어 버린 거 맞다만….'
물론 나로서는 이제는 조금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었기에 정말로 기괴고를 뺀 것이었다.
"제가 약속을 지켰으니 말씀해 주시지요. 헌 선자께서는 왜 금신천뢰문에 접근하셨습니까?"
"…금신천뢰문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다."
"…흐음."
나는 그녀의 의념을 보며 조금 어리둥절했다.
거짓이 아니었다.
"본문의 '호의'가 목적인 겁니까?"
"정확히는 나와 이 문파 간의 밀접한 교류와 관계. 그 자체가 목적이다. 금신천뢰문에게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것, 그게 내 궁극적인 목적이었고, 그래서 차후 금신천뢰문의 주인이 될 너를 손에 넣으려고 했던 것이지."
"…."
기이했다.
금신천뢰문을 손에 넣는 것이 아닌, '사랑을 받는 것'이라는 목적.
하지만 놀랍게도 그건 사실이었다.
'도대체 왜지?'
나는 살짝 당혹스러워서 질문했다.
"본문의 사랑을 왜 받으려 했던 겁니까?"
"이제 내가 질문 좀 해도 되나?"
"…예, 그러시지요."
"너는 나한테 뭘 원하는 거지? 내게 이런 짓을 한 이유가 뭐냐."
"왜 이런 짓을 하냐니… 당신이 먼저 시종을 시켜 본문에 이상한 진을 까셨잖습니까."
"뭣…! 네 의식 영역 바깥에서 일을 치렀거늘…."
"저는 금신천뢰문의 차차기 장문인입니다. 곳곳에 제 눈이 있지요."
"…그렇군. 내가 먼저 실례를 했구나."
그녀의 태도에 나는 살짝 풀어져서 질문했다.
아무래도 금신천뢰문 자체를 어찌 하려는 류의 음험한 계획은 아닌 듯했다.
"본문과의 관계를 얻어 뭘 얻으려 하신 겁니까?"
"…뭐, 이리된 이상 그냥 말해 주는 게 좋겠지."
헌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봉래궁의 부궁주 자리를 얻으려 했다."
"부궁주 말입니까?"
"그래. 아버님을 제외하고 봉래궁의 지고한 위치이지. 현재 우리 남매 17명은 모두 부궁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어."
"그게 본문과 무슨 상관입니까?"
"지대한 상관이 있다. 우리 남매들은 모두 다 배다른 측실들의 소생이고, 아버님에게는 아직 정실이 없다. 왜인지 아느냐?"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그제야 그녀가 왜 금신천뢰문의 호의를 사려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님께서 진정으로 사랑하셔서 정실로 맞이하려고 했던 이는 본래 금신천뢰문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4만 년 전 전쟁에서 아버님이 사랑하셨던 금신천뢰문의 여제자는, 전쟁에 참여했던 머리 둘 달린 노괴에 의해 '잡아먹혔다'고 전해지더군."
"…."
"그 이후 아버님께서는 굉장히 삭막하게 살아오셨다. 내가 봐온 아버님께서도 늘 엄격하고 근엄하고 냉혹한 모습만 보이셨지. 하지만… 너희 금신천뢰문이 단체로 비승하고, 뇌운각의 배후에 있는 노괴를 밀어낸 후 뇌령제일종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아버님은… 4만 년 만에 처음으로 뛸 듯이 기뻐하셨다. 그분께서 그렇게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으셨지. 그걸 보고서 바로 깨달았다. 너희 금신천뢰문의 사랑을 받으면, 그것이 바로 아버님의 최측근이 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이건 개인적으로 궁금한 겁니다만."
나는 의문이 들어 물었다.
"태수 헌원께서는, 어째서 사랑하는 정인을 잡아먹은 노괴에게 복수하지 않으신 겁니까?"
그 노괴가 누군지는 나도 알 것 같았다.
금신천뢰문의 고문헌에는, 금위.
즉, 연위가 4만 년 전 동문들을 배반하고 잡아먹었다고 적혀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합체기 태수의 정인을 잡아먹은 연위는 어떻게 최근까지 뇌운각에서 살아 있을 수 있던 것일까.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그저… 4만 년 전의 일에는 너무나 복잡한 세력과 종문 간의 이해관계가 꼬여 있었다고만 들었으니까."
"그렇군요…."
"여하튼."
그녀가 나를 보며 물었다.
"여기까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혼인할 생각이 없느냐? 널 사랑하진 않는다. 반한 적도 없다. 그건 인정하지. 하지만 네가 나와 혼인하면 너는 정말로 아버님의 직계제자로 들어갈 수 있다. 아버님은 자신의 자식이라도 금신천뢰문과 이어진 것에 뛸 듯이 기뻐하실 테니 당연히 직계로 넣어 주시겠지. 또한 나는 아버님의 총애를 받고 봉래궁 부궁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
"아버님께서는 봉래궁의 궁주시지만 그와는 별개로 봉래궁 운영에 크게 손을 대지 않으신다. 한 마디로 부궁주가 실질적인 봉래궁의 우두머리라는 말이다. 금신천뢰문과 봉래궁은 하나가 되어 인족에서 우뚝 설 수 있단 말이다."
"…저는… 당신과 혼인할 수는 없습니다."
내 말에, 헌위는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대신…."
그러나 나는 그녀와 금신천뢰문 모두에 이익이 될 일을 제안하였다.
* * *
쿠구구구!
헌위는 흙집을 부수고 나와 나를 바라보았다.
"뭐, 나쁘지 않은 거래군."
"저희는 서로를 도울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어쩌면 결혼이라는 패를 쓰지 않고도 서로가 이득을 보니 더 이득일 수도 있겠어. 단."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약속은 지켜야 할 것이다. 봉래궁에 있는 내 다른 형제자매와는 손을 잡지 않아야 할 것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좋아, 그럼 난 이만… 더는 찾아오지 않으마."
파아앗!
나와 밀약을 맺은 헌위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시종이 있는 쪽을 향해 날아갔다.
'됐다…. 생각보다도 그녀에 관한 건 잘 풀렸어.'
앞으로 이 일로 조금 몇몇 사건이 생길 수는 있겠지만, 사소한 일들이리라.
'지금부터는 정말… 다른 귀찮은 걸 신경 쓸 필요 없이, 수련에 매진할 수 있겠군.'
나는 만족스럽게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 * *
또다시 그렇게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츠츠츳!
김연의 꿈속에서,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기다리는 김연을 바라보았다.
"최근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헤헤… 당연한 거 아닌가요?"
하긴, 생각해 보면 대화 상대라고는 자기 괴뢰에다가 입을 맞추는 미치광이 노인네밖에 없는 공장 안에 있다가, 꿈 안쪽에서나마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기분이 안 좋으면 그것도 이상한 일일 터였다.
따악!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내 기묘성심전과 등봉조극의 무리가 들어맞으며 그녀의 꿈속 시간 배율이 늘어났다.
"그럼, 오늘 교육을 시작하기 앞서, 어제 배운 걸 한번 펼쳐 볼까?"
"네!"
우웅!
꿈속인 탓인지, 김연이 상상을 하자 바로 그녀의 양손에 연분홍빛 부채가 쥐어졌다.
그녀는 두 개의 부채를 잡은 채, 그대로 선무(扇舞)를 추기 시작했다.
단순한 부채춤이 아닌, 그 자체로 하나의 무공이었다.
괴군의 그녀가 만들었다는 비익창은 쌍선무가 되어 내려왔고, 나는 쌍선무와 비익창을 합친 후, 거기에서 내 단악검법의 무리 몇몇을 덧붙여서 김연에게 딱 맞는 무공을 만들어 냈다.
비익무(比翼舞)가 그것이었다.
총 8초식으로 이뤄진 그녀의 비익무는, 쌍선무의 동작과도 어느 정도는 엇비슷했다. 동시에 유사시에는 쌍선무의 원조인 [그녀]의 비익창이 가진 공방 일체의 성격을 완전히 비틀어서 비익창을 무력화시킬 수 있도록 설계했다.
만약 김연이 기묘성채에서 탈출할 일이 있을 때, 유사시 [그녀]를 제압하라고 만들어 준 무공이었다.
"연아, 보법을 밟을 때 기를 더 빨리 순환시켜."
나는 그녀의 비익무를 보며 부족한 부분을 짚어 주었다.
하지만 [그녀]를 제압하는 것 외에도, 내가 비익무에 신경 쓴 것은 바로 끊임없는 '힘의 순환'이었다.
단악검법의 산외산부진의 묘리를 집어넣어, 1초식에서 8초식을 펼치면 다시 8초식에서 다시 1초식으로 이어지게 하여 끝없이 춤을 출 수 있게 해 주는 묘리가 그것이었다.
산외산부진이 몸의 반동만 버틸 수 있으면 무한히 검법을 펼칠 수 있듯이, 비익무 역시 '기운이 떨어지지 않는 한' 끝없이 춤을 출 수 있는 무공이었다.
다만 산외산부진이 반동을 억지로 몸 안에 억눌렀던 것이라면, 비익무의 경우에는 반동을 몸 안에 머무르게 하지는 않는 대신 기운을 더 많이 소모시켜 계속 무공을 펼칠 수 있게 하는 것인지라 일장일단이 있었다.
'물론 제대로만 펼친다면, 장점은 확실하겠다만….'
비익무에서 중요한 것은 초식보다는 '심법'이었다.
연리지심(連理枝心)이라 이름 붙인 이 내공심법은, 가지가 서로 맞닿는다는 이름처럼 초식과 내공이 맞닿아 있어, 초식을 펼칠 때에 기운이 소모됨과 동시에 조금씩 조금씩 축기가 된다.
그리고 비익무와 연리지심을 동시에 펼치며 장기전에 들어갈 경우, 비익무의 8초식을 계속 회전시키면 한 번의 회전을 겪을 때마다 연리지심의 축기 속도가 조금씩 더 빨라진다.
그리고 비익무를 사용하다가 임계점을 넘으면, 어느 순간 비익무를 사용할 때 소모되는 내공보다 연리지심으로 축기가 되는 내공량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이론상' 무한(無限)의 힘을 다룰 수 있는 무공이 바로 그녀의 무공이었다.
'어디까지나 이론이지만.'
그 '임계점'을 넘으려면 아마 김연이 같은 자리에서 비익무를 약 70억 번 넘게 추어야 간신히 임계점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만 무한인 무공인 것이었다.
그리고 저런 식으로 임계점을 넘어 봤자 말이 무한의 힘이지, 결단기 수준의 공격력일 뿐이었다.
'아마 영훈 형님이면 이런 효율 나쁘고 멍청한 무공이 아니라, 훨씬 현실적이면서도 효율 좋은 무공을 만들겠지?'
물론 그래도 김연은 애당초 축기기에 다다른 후 체내에 흐르는 정순지력으로 무공을 펼치기 때문에, 비익무를 펼치며 내공 자체가 부족할 일은 절대 없을 터였다.
'저건 그냥 유사시 [그녀]를 제압할 용도임과 동시에, 연이에게 의념을 깨닫게 해 주고 오기조원과 등봉조극을 넘게 해 주기 위한 무공이지.'
그 외에는 딱히 의의가 없다.
나는 김연의 무공을 지도해 주고, 조금 부족한 점을 봐 주었다.
"음, 잘했어, 연아."
"헤헤…."
최근 그녀의 실력은 빠르게 일취월장해, 어느덧 일류 초기의 실력이었다.
아마 10년만 더 가르치면 일류 후기에 이르러 절정을 눈앞에 둘 터였다.
'절정 고수부터는 의념을 볼 수 있으니, 그녀의 기묘성심전이 큰 도움이 되겠지.'
아마 삼화취정과 오기조원에서는 기묘성심전이 큰 도움이 될 터였고, 등봉조극이 조금 걱정이긴 했으나 등봉조극도 극한에 이르면 그 다음 월도입천은 걱정이 없었다.
'기묘성심전의 극성에 달하면, 월도입천의 시야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시야를 통해, 그녀가 익힌 무공을 통해.
더더욱 빠르게 월도입천에 도달할 수 있을 터였다.
'연이가 애당초 의식 관련 재능을 각성해서 절정만 넘어서면 그 이후부터는 더 쉽겠어.'
오히려 동작을 가르치는 초반만 어려운 셈이었으니 나로서는 더 좋은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환한 얼굴로 비익무를 펼치는 걸 보며 살며시 웃었다.
고작 20년 차밖에 되지 않았다.
처음 광한계로 비승했을 당시, 괴군에게 잡혀갔을 당시.
그때의 20년 차 김연의 얼굴에는 항상 공포와 고통만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15회차 당시 서휼과 신경전을 벌일 때는 아예 연락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어서 연락을 못 했었고, 결국 그녀의 정신이 나가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었다.
결국 이제 와서야 나는 김연이 조금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꿈속에서 연결되어서나마, 너를 위로해 줄 수 있어 다행이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아, 벌써 끝났나요?"
"그래."
"내일도, 기다릴게요."
처음에는 나와 헤어지는 걸 두려워했으나, 날이 갈수록 그녀는 점차 성장하고 있었다.
어느덧 그녀는 내일을 기약할 줄 알게 되었다.
언제나 괴군에게 호되게 당해 정신이 망가져 있었던 과거의 김연들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스스스….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두근, 두근….
나는 무언가 간질간질한 느낌이 가슴 안쪽에서부터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근 10년간 김연을, 전명훈을, 홍범을 가르치며.
그들이 성장해 가는 것을 보며, 나는 점차 뭔가를 느끼게 되었다.
'…비인간….'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며 나는 양수진이 말한 비인간론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했다.
양수진의 심마는 10년 전 극복하고, 답천 너머에 대해서 확실한 방향성을 깨달았다.
하지만 양수진의 말이 만든 심마를 극복하긴 했으나,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운명의 노예이기 때문에 비인간이지만, 그렇더라도 내가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에는 의미가 있다.
그것이 내가 깨달았던 것.
하지만, 나는 저 '운명의 노예'라는 말 자체를 깨부숴야 한다는 것을 지난 10년간 알 수 있었다.
'비인간이… 아니야. 단순한 비인간이 아니었어.'
나는 북향화와 손을 잡고 춤을 췄던 그때를 기억한다.
청문령에게 수업을 받았던 그때를 기억한다.
창호자가 산화하며 우리를 지켜주며 죽었던 그때를 기억한다.
'그게 단순히 꼭두각시들의 각본이라고? 아니야….'
근본적으로, 양수진의 논리를 벗어날 뭔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어떻게 운명을 벗어날 수가 있지.'
운명은 절대적이다.
그 어떤 것도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아마 운명을 벗어날 수 있다면, 그건 창세신 정도는 되어야 하리라.
어떻게 해야 하늘 끝에 있는 운명을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파지직….
콰아아앙!
붉은 벼락의 폭포가, 동부 안에서 얌전히 수련하고 있던 내게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황급히 몽둥이를 꺼내 들어 벼락의 폭포를 반으로 갈라 버렸다.
다음 순간, 전명훈이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내게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몽둥이로 녀석의 사각을 파고들어 수십 대를 후려쳤다.
"크으으윽!"
쿠르릉!
전명훈은 적뢰에 휩싸인 채 뒤쪽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전명훈의 앞쪽으로 달려가 녀석의 머리를 향해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콰앙!
그대로 전명훈의 머리를 터트려 버렸다.
녀석의 뇌수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젠장!]
촤르르륵!
하지만 녀석의 머리에서부터 붉은 뇌전이 꿈틀거리더니, 다시 전명훈의 머리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랬다.
10년 동안, 전명훈은 어느덧 결단기가 되어 있었다.
[죽어라, 서은현!]
콰르르르릉!
전명훈은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라 나를 향해 벼락을 뿌렸다.
이제는 단순히 내가 전명훈을 두들겨 패는 것에서, 녀석이 나를 향해 주도적으로 공격을 하는 식이 되어 있었다.
번쩍!
붉은 뇌전의 기둥이 나를 내리찍었다.
나는 몽둥이에 강기 한 줌을 불어넣은 채, 결단기 수준의 공격을 막아 내며 틈을 노렸다.
하지만 전명훈은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내게 더더욱 강한 적뢰를 쏟아부었다.
[서은현 튀김으로 만들어 주마!]
파치지지지직!
일순간 뇌전이 폭발했다.
* * *
"드디어 죽었나?"
전명훈은 기대가 섞인 눈으로 먼지구름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부스스스….
전명훈은 먼지구름이 걷힌 곳에 서은현이 없고 타다 남은 재만이 있는 것을 보며 씨익 웃었다.
"드디어! 놈을 죽였다! 놈이 죽었…."
"안 죽었다."
퍼억!
하지만 전명훈의 바람과는 다르게 서은현은 허공에서 허깨비처럼 튀어나와 전명훈을 두들겼다.
얼마 후, 전명훈은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드러누웠고 그 위에서 서은현이 몽둥이를 든 채로 말했다.
"최근 점점 움직임이 좋아지는군. 거기에 축기기 공법인 적뢰진경도 벌써 결단기 초기 수준까지 진화시키고…."
그는 문득 어이없다는 듯이 전명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적뢰진경을 거기까지 진화시켰으면서, 왜 칠뢰진경은 못하는 거냐?"
"…몰라, 묻지 마라."
서은현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물었고, 전명훈은 대답을 회피했다.
하지만 전명훈은 속으로 생각했다.
'좋아. 잘 속여넘기고 있군.'
최근, 서은현이 칭찬했듯이 전명훈은 점차 서은현에게 꽤 의미 있는 움직임을 이끌어 낼 공격을 가하는 횟수가 늘기 시작했다.
그가 딱히 무(武)에 재능을 개화한 건 아니었다.
근래 전명훈은 점차 뭔가 새로운 감각을 개화하고 있었다.
서은현이 보는 의념의 시야도, 홍범이 보는 요족의 시야도 아니었다.
천족의 운명의 시야도 아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제 3의 감각이었다.
번개의 목소리.
전명훈은 그 감각을 그렇게 불렀다.
'속삭인다….'
그는 눈을 감고 번개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최근, 그가 수행을 높여 갈수록 '번개'들이 그에게 말을 거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전명훈은 번개의 목소리들을 따라가며 뇌도공법을 운용했고, 그는 적뢰진경에 무언가 숨겨진 비밀이 있음을 발견했다.
번개가 속삭이고 있었다.
적뢰진경의 진짜 이름은 이것이 아니라고.
자신들을 따라오면 더더욱 위대한 힘에 도달할 것이라고.
그는 점차 번개들의 목소리를 따라갔고, 최근 그 성과가 나오는 중이었다.
'서은현에게 의미 있는 공격을 하는 횟수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
서은현은 전명훈이 주뢰진경을 익히지 못하는 걸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전명훈이 주뢰진경을 못 익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익히는 공법은, 이미 적뢰진경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더 상위의 무언가였다.
'이 공법을 익히는 데에 성공하면, 말 그대로 적이 없어질 것 같은 느낌이다.'
그는 서은현을 올려다보았다.
지난 20년간.
그와 서은현은 두들겨 맞고, 반격하고, 공격하고를 반복하며 저들도 모르게 사이가 꽤 가까워져 있었다.
그를 두들겨 패는 서은현을 죽이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조차 임계점이 지나자 어느덧 친숙함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이고 싶었던 살의는 어느새 호승심과 경쟁심으로 바뀌었다.
'반드시 놈을 뛰어넘는다.'
파직, 파지직….
전명훈은 그의 체내에서 끓어오르는 붉은 번개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번개가 인도해 주는 새로운 공법을 익히면… 어쩌면 녀석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그는 서은현을 보며 호승심을 불태웠다.
'반드시 네놈을 뛰어넘어주마!'
전명훈이 서은현을 노려볼 때였다.
"금 장로님! 그리고 전명훈! 조금 이따가 시작한다고 해요!"
저 멀리서, 금소해가 비둔술을 쓰며 날아와 외쳤다.
그 말에 전명훈과 서은현의 눈이 금소해에게 향했다.
금소해는 전명훈의 옆에 내려앉아 그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며 일으켜 주었다.
"벌써 시간이 됐나?"
서은현은 다시 금은현이 되어, 금소해를 보며 물었다.
"네, 장로님. 홍범이 전부 준비되었으니, 봐 달라고만 하네요."
"…그래."
전명훈은 헛웃음을 흘렸다.
"빌어먹을. 결국 지네보다 늦게 생겼네."
"왜 홍범한테까지 호승심을 가지는 거야? 요수공법하고 인족공법은 완전히 다르잖아?"
그녀는 전명훈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쏘아붙였고, 전명훈은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순수한 경지도, 데리고 있는 애완 요수도… 모두 나를 압도하는군. 서은현….'
서은현이 비둔술을 써 어딘가로 향했고, 전명훈과 금소해는 그런 서은현을 뒤따라갔다.
'하지만 반드시, 널 뛰어넘는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직은 한참 그보다 더 멀리 날아가고 있는 서은현을 바라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