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파아앗!
"왔느냐?"
홍수령이 나를 맞아 주었다.
금신천뢰문 뇌도봉(雷導峰).
이곳은 천겁을 맞을 때가 된 경지의 요인들이 와서 천겁을 맞는 장소였다.
나는 홍수령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곳곳에서 금신천뢰문의 제자들이 나와 있었다.
"와 주셨군요, 주인님."
그리고, 나는 어느새 마디마디가 3층 집만큼 커진, 이젠 숫제 작은 산만큼 거대해진 지네 요수.
홍범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 결단기 대원만에 이른 홍범이 원영기에 이르며, 화형(化形)을 시도할 것이었다.
다면(多面) (3)
요족들의 원영기는, 인간의 모습으로 화형을 할 수 있다 하여 원영기 대신 화형기(化形期)라고 불리기도 했다.
"어느덧 네가 벌써 화형기라니…."
나는 홍범이 새끼 지네였던 당시 꼬물거리며 내 발에 달라붙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 작은 새끼 지네가 벌써 원영을 형성할 수 있는 경지까지 도달한 것이었다.
"전부 주인님께서 잘 가르쳐 주신 덕입니다."
"아니다. 전부 네 재능이지. 네 재능이야말로 정말로 말이 안 되는 재능이다. 오히려 나보다도 뛰어나지."
영훈 형님 같은 경우라면 종명자겠거니 하며 납득되겠으나, 간혹 이런 식으로 납득되지 않는 무지막지한 재능을 가진 이들이 있다.
괴군 조연과, 홍범이 바로 이런 이들이었다.
홍범은 내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쩌면, 주인님을 따라가려면 이 정도는 되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르지요. 제 명(命)은 주인님께 붙어 있는 것. 이 일천한 재능은 고작해야 주인님에게 따라붙기 위한 재능일지도 모릅니다. 주인님께서도 오히려 1년도 안 되셔서 원영기에 도달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흠흠. 뭐, 내 재능에 대한 얘기는 됐고…. 언제쯤 시작할 게냐? 슬슬 시운이 되어 간다."
연기기 7성 때에 시운을 맞춰 칠성제를 지내야 했던 것과 같이, 그 이후로 경지를 오를 때에도 시운의 중요성이 필요했다.
다만 연기기 7성에서는 시운이 9할 9푼의 비중을 차지한다면, 이후로 갈수록 시운의 중요성이 점차 낮아지는 구조였다.
결단기에 오를 때는 시운의 중요성이 4할 정도라면, 원영기에 오를 때는 시운의 중요성이 2할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정도였다.
물론 일반적인 지족 공법을 익히는 요족들에게는 시운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천족들에 비하면 시운의 중요성은 할 단위가 아니라 푼의 단위로 떨어져, 홍범에게 시운은 3, 4푼 정도의 비중만을 차지할 터였다.
하지만 홍범은 기본적인 자질만으로 원영기를 뚫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가능성도 놓치지 않으려 그에게 가장 잘 맞는 시운을 찾았다.
"주인님께서 조금 도와주십시오. 저는 직접적으로 천기를 볼 수 없어 헷갈립니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녀석에게 천기를 알려 주었다.
"두수성(斗宿星), 우수성(牛宿星), 위수성(危宿星), 실수성(室宿星), 벽수성(壁宿星)의 기운이 얽히며 네 운기(運氣)와 거의 일치했다. 한 일다경 후면 네 운기가 완벽히 맞아떨어지니, 그 시점에서는 네가 원영기에 오를 확률이 더 높아지겠지."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몸이니, 지족일지라도 하늘의 시운을 빌려서 올라야 하는 이 미천한 몸을 용서하십시오."
"…자꾸 일천하다느니 미천하다느니 하는 건 그냥 기만에 불과하다지 않았느냐."
나는 겸손을 떠는 홍범을 보며 피식 웃었다.
홍범은 두(斗), 우(牛), 위(危), 실(室), 벽(壁)의 다섯 별자리의 기운이 가장 그와 잘 맞는 별자리였다.
그중에서도 두수성, 우수성, 위수성. 이 세 별자리가 홍범의 기운을 끌어올리는 데에 가장 잘 맞는 별자리였으니, 그 별들의 기운이 얽힐 때가 홍범의 시운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기다리기를 약 일다경 후. 홍범이 금신천뢰문에서 사귄 몇몇 친우들과 나, 전명훈, 금소해, 홍수령 등의 인사들이 홍범을 보며 호법을 서 주었다.
"그럼, 주인님…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이제."
나는 천기를 읽으며 별들의 힘을 알려 주었다.
"두수, 우수, 위수의 기운이 가득 찼다. 지금 시작해라."
[예.]
그의 목소리에 영력이 깃들며 영언이 된다.
그리고, 홍범의 기운이 끌어 올려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
홍범의 요력이 치솟았다.
그리고 그의 의식이 머리 부분에서부터 변형되며 홍범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변모하는 게 보였다.
척, 척, 척!
홍수령이 수결을 맺으며, 홍범을 중심으로 팔방에 뇌전 속성 깃발을 꽂았다.
"멸뢰, 외천!"
깃발들이 빛난다.
여덟 개의 깃발 위로 팔괘의 형상이 떠올랐고, 깃발들 각각이 또다시 팔괘의 힘을 뿜어내며 내괘와 외괘, 둘을 더해 16개의 괘상이 만들어진다.
16개의 괘상이 회전하며 64개의 변화를 만들었고, 그 변화 속에서 뇌전이 몰아쳤다.
홍수령이 진도를 깔아 공간을 장악하며 홍범을 둘러싼 결계를 만들었다.
이는 홍범이 외부로부터 다치지 않게 해 주는 장치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의 호법을 서 주는 우리를 보호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뭉글뭉글….
홍범으로부터 시커먼 독기(毒氣)가 뿜어져 나와 주변으로 퍼져 나가려 했으나, 홍수령이 친 진도에 갇혀 홍범을 중심으로 원통형을 그리며 허공에 고이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이―
녀석의 주변에 있던 돌과 바위들이, 그 독기에 녹아 가기 시작했다.
결단기 요수가 펼치는 어마어마한 독공에, 진도 안쪽은 순식간에 그야말로 생명체가 살 수 없는 불모지로 변해 버렸다.
'이제 시작된다.'
그와 동시에, 홍범의 의식이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홍범과 같은 형태로 녀석의 몸을 뒤덮던 의식이 놈의 몸 안쪽으로 쭉 압축된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홍범의 변화를 알아챈 것인지, 천기가 변화하며 먹장구름을 내뿜었다.
우우우웅!
홍범은 두수, 우수, 위수의 시운을 받으며, 마침내 녀석의 몸 가장 안쪽, 홍범의 요단 안쪽에 자신의 의식을 전부 압축하는 데에 성공했다!
파아앗!
그리고, 녀석의 수명이 변화하며 하늘이 힘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쿠릉, 쿠르르릉!
금빛 천겁이 하늘에서 울린다.
이제 저것만 극복하면 녀석은 명실상부 원영기 요수가 될 터.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음…?"
나는 눈을 찌푸렸다.
이상했다.
이상하리만치,
"…홍 원로님. 원래 원영기에 이를 때 저런 게… 정상입니까?"
"…아니, 절대 아니다."
금빛 뇌전의 양이, 너무나 많았다.
콰르르릉!
금빛의 기둥이 하늘에서부터 내리꽂혀, 홍범이 원영을 응결하고 있는 독기의 중심으로 떨어졌다.
말 그대로 금빛의 기둥이었다.
낙뢰 따위가 아니었다.
벼락이 모이고, 모이고, 모여서.
차라리 천인기 수사의 진심을 다항 일격이라고 착각해도 무방할 만큼 거대한 벼락의 군집이, 마치 기둥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이런 미친…! 저게 뭐야!"
나는 화들짝 놀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 쌍색 천겁을 합친 위력의….'
최소 일곱 배는 될 정도로 거대한 힘이었다.
나나 전명훈처럼 쌍색 천겁이 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원영기 때에 맞는 순수한 금빛 뇌전인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힘이었다.
"홍범! 원영을 흩어라! 아직 준비가 부족했다, 이 정도 힘은 네가 감당할 수 없어!"
나는 홍범에게 내리꽂히는 정신 나간 규모의 천겁을 보며 기겁해서 홍범에게 외쳤다.
하늘이 원영의 응결을 감지하고 역천을 시도하는 수도자를 벌하기 위해 내리는 진노.
천겁.
하늘이 내리는 뇌겁이, 홍범에게 쏟아진다.
'원영을 감지하고 내리치는 것이 뇌겁이기에, 원영을 흩으면 천뢰가 끊긴다!'
"홍범!!!"
내가 식겁하며 그를 향해 소리쳤을 때였다.
"헛…!"
그러나, 나는 빛의 기둥 안쪽에서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은 홍범의 그림자였다.
녀석은 춤을 추고 있었다.
내가 가르쳐준 투괴암기술을 이용하며 기다란 몸을 가지고,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빛의 기둥 안쪽에서 천뢰의 '가장 약한 부분'으로 몸을 이동시키고 있었다.
'저건… 예뢰안?'
나는 순간 천족의 시야를 써서 뇌겁의 위치를 알아채는 예뢰안의 법술이 떠올랐다.
그게 아니고서야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아니, 아니야….'
홍범은 천족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뢰안과 같은 움직임을 보이는 것일까.
나는 너무나 간단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납득되지 않는 한 가지의 경우의 수를 떠올렸다.
'설마… 천족의 시야를 통한 예뢰안이 아니라 그냥 본인의 감각으로만 뇌전의 틈을 모조리 때려 맞혀서 저 속에서 뇌전의 약점을 파고들어 버티는 거라고?'
도대체 무슨 재능을 가지고 있어야 그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 * *
전명훈은 멍한 눈으로 빛의 기둥을 바라보았다.
저 무시무시한 금빛의 천겁!
그 속에서 뱀처럼 움직이는 한 마리의 지네.
그는 그 천겁을 보며, 뇌리 속으로 어떠한 목소리가 울리는 것을 느꼈다.
―천벌의….
―정화를… 찾으러… 가라….
―대천벌의 정화….
문득, 전명훈은 천겁의 안쪽에서 어떤 여자의 형상이 스쳐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뇌전으로 이뤄진 궁장을 입고, 새하얀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새하얀 맨발로 하늘을 거니는,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는 선녀(仙女)의 형상이었다.
"아름다워…."
그는 거대한 천뢰 속에서 얼핏 비친 환영을 향해 무심코 손을 뻗었다.
어쩐지 피가 아래쪽으로 쏠리는 가분이었다.
하지만, 손을 뻗기가 무섭게 그 환영은 신기루라도 되었던 듯 이내 금세 스러져 버렸다.
"헛!"
전명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지? 잘못 본 건가?'
다른 이들은 그저 천겁 안쪽의 홍범만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집게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최근 번개의 목소리가 더 커진 거 같단 말이지. 더 또렷해진 것도 같고…. 방금 그 환영도 번개의 목소리 때문에 보인 건가?'
* * *
"강력한 선수의 혈통을 타고난 이들 중에서는 간혹 저렇게 무지막지한 천겁을 맞는 이들이 있다고 하던데…."
홍수령은 나지막이 감탄하며 말했다.
"선수 혈통이 저렇게 천겁을 강하게 맞는단 말입니까?"
정작 선수 진혈을 받아들였던 나는 금시초문인지라 의아해져서 물어보았다.
"음, 그래. 듣기로는 선수의 직계(直系)라면 끔찍하게 강한 힘과 권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대신, 천겁 역시 진선의 후손에 걸맞은 무지막지한 천겁을 맞아야 한다는군."
"허…."
그 말은 홍범이 선수의 직계라도 된다는 건가?
'그런데 충족에 선수가 있다는 말은 정말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나는 의아해져서 홍범을 바라보았다.
홍범에게도 어쩌면,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있을지도 몰랐다.
"음?"
나는 홍범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와중, 문득 이상한 의념의 흐름이 보여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름다워…."
"…."
전명훈이었다.
'저 미친놈, 뭘 하는 거지?'
녀석은 홍범의 천겁을 바라보며 황홀하다는 듯, 정욕의 의념을 드러내며 홍범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이제는 쌍수를 하다 하다 홍범 같은 벌레마저 노리는 건가….'
나는 혀를 차며 어떻게 해야 전명훈이 정신을 차릴까 고민하며 계속 홍범에게 주의를 집중했다.
쿠릉, 쿠르르릉!
홍범은 계속해서 빛의 기둥 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내가 홍범에게 가르친 투괴암기술은, 단순히 암기를 던지는 법이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지네의 짧은 팔다리로 암기를 던질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홍범에게 가르친 투괴암기술은 암기술이라기보단, 홍범의 몸으로 은밀히 쏘아져 나가서 독을 흩뿌리는, 일종의 '육탄 돌격' 같은 모양새로 변화했다.
거기에 나는 규백에게 가르쳤던 용형비호조에서, '규련의 움직임'의 묘리를 투괴암기술에 집어넣어, 홍범은 마치 황룡이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춤추는 것이었다.
이제 녀석이 사용하는 것은 투괴암기술이라기보단 완전히 다른 새로운 무공에 가까웠다.
'뭐, 화형을 하면 이제 제대로 투괴암기술이나 기타 무공을 가르칠 수 있겠군.'
이제 영원할 것만 같았던 천뢰의 세례도 거의 끝나가는 중이었다.
과연 홍범은 어떤 모습으로 화형을 할까.
쿠르르릉….
천겁의 기운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음?"
그리고, 나는 문득 어느새 주변으로 몰린 수많은 금신천뢰문의 원로진들을 바라보았다.
"허허, 저게 금 장로가 키우는 요수라 하였지요?"
"과연 대단하외다."
"역시 금 장로는 키우는 애완 요수조차 범상치 않군."
홍범의 천겁이 하도 상식 외여서인지, 어느덧 종문의 원로들 역시 대다수가 이쪽으로 몰려서 녀석의 화형을 목도하고 있었다.
우르릉!
금벽호 역시 홍범의 천겁을 보러 와 혀를 내두르는 중이었다.
"어마어마한 천겁이로구나. 금은현 장로, 너의 요수는 혹여 어떤 선수의 혈통을 타고난 요수인 건가?"
"흠…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하계 등선향에서 비승하기 직전에 제게 붙었던 녀석인지라…."
"등선향…. 하긴, 등선향에는 온갖 잠재력을 지닌 진기한 요수들이 상당히 많긴 하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빛의 기둥 속에서 홍범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이제 한참 약해진 빛의 기둥은 일반적인 천겁 수준으로 약해졌고, 홍범은 그 정도는 딱히 뭘 안 해도 맨몸으로 버틸 수 있는지 춤을 추는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앉아,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빛 속에서 거대한 지네의 그림자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그 모습은, 마치 한 마리 이무기가 고개를 쳐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음?"
갑자기, 홍범의 형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빛 속에서 보였던 그림자가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그 모습에 나는 순간 대경하여 달려 나갈까 했다.
그러나 아직 홍범의 의념과 기운이 멀쩡한 것을 보며 일단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얼마 후.
쿠르릉….
마침내, 기나긴 천겁의 시간이 끝났다.
쉬이이―
나는 천겁이 스러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홍범의 '껍질'들이 수북이 쌓여 무너져 있었다.
'그렇군, 홍범의 형상이 무너진 건 녀석의 껍질이 무너졌던 건가?'
원영기에 오르면서 탈피를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홍범의 껍질 밑을 바라보았다.
홍범이, 완전히 화형에 성공한 것이었다.
들썩, 들썩!
껍질 중 한 곳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안쪽에서 뭔가 작은 것이 나오기 시작했다.
"홍범…?"
나는 천천히 그것에게 다가갔다.
홍수령과 몇몇 원로들 역시 은근 홍범의 화형 모습이 궁금한지 이쪽으로 다가왔고, 금벽호 역시 이쪽으로 시선을 집중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들썩거리던 껍질 밑에서, 홍범이 완전히 나왔다.
"홍범…!"
"아… 주인님…?"
나는 홍범의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과연, 네게 어울리는 모습이구나."
"으음… 이게, 제 화형 모습인 겁니까?"
홍범은 요족어가 아닌 '육성으로' 말을 하는 중이었다.
그는 인간의 목소리가 어색하다는 듯이 목을 매만졌다.
홍범은 새하얀 머리칼을 지닌 노인의 모습이었다.
거의 백 살은 넘었을 듯한 쪼글쪼글한 노인의 모습을 한 그는, 새카만 흑의(黑衣)를 입은 채, 지네의 더듬이 같은 눈썹을 지녔고, 두 뼘 정도 되는 턱수염을 지녔다.
말 그대로 녀석의 노인네 같은 말투와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기에, 나는 상당히 잘 어울린다 생각했다.
"흐흠… 너무 늙은 모습이 아닌지…. 주인님께오선 괜찮으십니까?"
그러나 홍범은 자글자글하게 늙은 모습으로 화형한 본인의 모습이 당황스러운지 내게 물었다.
"괜찮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생각한다."
"주인님께서 괜찮다 하시면…."
홍범은 내가 괜찮다 하자 그것만으로 만족스러운지, 자연스럽게 품에서 요선죽을 꺼내 불을 붙이고 장죽을 물었다.
"후우…."
늙은 모습으로 요선죽을 빨고 담뱃불을 내뱉는 그의 모습은 굉장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흐음, 신기하군."
그런 홍범의 앞으로 홍수령이 나와 말했다.
"요수가 처음 화형을 하면, 개개의 외형에 차이는 있어도 대다수가 젊은 모습, 혹은 어린 모습이라고들 하는데 어찌 이 녀석은 스무 살밖에 안 되었을 창창한 놈이 이리 늙은 모습이지?"
그녀의 말에, 금벽호가 내려와 말했다.
"허곽 그 친구에게 예전에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군. 흑색귀골곡의 고서에서 본 내용인데, 요수가 화형을 하면 대다수가 젊은 모습이나… 아주 오래된 영혼을 지닌 경우 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오래된 영혼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난 의아함에 물었다.
"말 그대로다. 세상에는 육도윤회가 있고, 혼백은 사망하면 명계로 가 다음 생으로 윤회 환생한다. 그리고 그러한 영혼들이 환생을 할 때엔 이전 생의 기억을 잊고 다음 생으로 태어난다고 하지. 하나 간혹, 이전 생의 기억이 흐릿하게나마 영혼에 남아 있는 영혼이 있다. 이런 영혼들은 전생의 기억까지도 가지고 있는 '오래된 영혼'이라고 한다고 허곽이 설명해 주었었다."
"흐음…."
'전생이라….'
그렇다면, 홍범이 지닌 재능의 원천은 어쩌면 그의 전생(前生)에서 기이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뭐, 여하튼, 화형을 축하한다. 홍범."
"감사합니다, 주인님…."
"혹 태상장문의 말씀대로 전생이 느껴진다거나 하는 게 있느냐?"
"음… 그런 건 잘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거짓말은 아닌 것이, 홍범은 전생의 기억보단 전생의 자질이나 무의식 등을 타고난 모양이었다.
"알겠다. 일단 축하 기념으로…."
나는 홍범과 함께 동부로 가려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그런데 태상장문님."
"무슨 일이지?"
"혹시 여기 있던 전명훈 못 보셨습니까?"
나는 어느새 나와 함께 홍범의 화형을 구경하러 왔던 전명훈이 사라진 것을 보며 의아해했다.
'어디로 간 건가?'
그 말에 금소해가 나서서 답해 주었다.
"뭘 찾을 게 있다면서 동부로 간 거 같습니다."
'동부로?'
나는 봉뢰당 옆쪽에 있는 전명훈의 동부를 바라보았다.
다면(多面) (4)
전명훈은 달뜬 숨결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후우…."
기분이 좋다.
연인이 그의 몸 곳곳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전명훈은 그의 뇌리 곳곳을 쓰다듬는 듯한 번개의 목소리를 들으며 멍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향해 나아갔다.
소곤소곤소곤소곤….
요사스러운 목소리가 그를 이끌었다.
'이 안쪽으로… 안쪽으로….'
그는 멍청한 눈빛으로 봉뢰당의 문을 열어젖혔다.
봉뢰당을 지키는 장로는 현재 금신천뢰문의 수호진법을 펼치는 데에 도움을 주러 잠시 지원을 간 상태였다.
홍범의 천겁은 그 여파로 문파 곳곳의 금제가 폭주하지 않도록 금신천뢰문의 수호진법을 발동시켜야 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 덕택에 전명훈은 봉뢰당으로 들어가는 데에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파직, 지지직….
그는 봉뢰당 안쪽의 넓은 공간으로 들어가, 거침없이 나아갔다.
무수한 금제들이 전명훈을 막아서는가 했으나, 전명훈이 멍한 눈으로 손을 휘젓자, 뇌전으로 이뤄진 대다수의 금제들은 그대로 전명훈에게 흡수당해 뻥 뚫려 버렸다.
'헛… 봉뢰당의 장로님이신 건가.'
벼락으로 이뤄진 궁장을 입고, 새하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새하얀 발을 드러낸 여인.
그녀는 얼굴을 자세히 드러내지 않은 채 전명훈을 향해 물었다.
"얘야, 여기는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란다. 장로들이 경고해 주지 않든?"
그제야 전명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흠…."
'뭐지? 봉뢰당? 내가 어쩌다가 천뢰번을 봉해 두는….'
그는 눈앞의 여인을 향해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죄송합니다. 불초 제자가 길을 헷갈려서…."
"흐흠… 여기가 헷갈린다고 들어올 수 있는 곳으로 보이는 거니?"
"죄송합니다!"
전명훈의 사죄에, 그녀는 낭랑한 목소리로 웃었다.
황량한 봉뢰당 안쪽.
전명훈은 그 안쪽에서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정말로 신비롭다고 느껴졌다.
"죄송하다면 다인 거니? 여기가 어디지?"
"보, 봉뢰당입니다."
"무얼 하는 곳이지?"
"선보 천뢰번을 봉해 두는 곳입니다!"
백발의 여인은 한 번 질문을 할 때마다 맨발로 천천히, 전명훈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고 있었다.
"남뢰 제자들도 오고 싶다고 올 수 없고, 자뢰 장로들도 금제를 손볼 때에만 들어오며, 금뢰와 천뢰의 원로진들도 선택받은 이들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란다. 그런데 고작 청뢰 제자에 불과한 네가 이곳에 들어오다니… 마땅히 죄를 청해야 할 일…."
사라락….
그녀의 발만큼이나 새하얀 섬섬옥수가 전명훈의 뺨을 쓰다듬었다.
"혼을 내 주어야겠구나."
스르륵….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이 전명훈의 옷자락을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우나, 자연스러운 그 손놀림에 전명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어느새 앞섬이 풀어 헤쳐졌다.
"이름이 무어냐."
"저, 저는 전명훈…입니다!"
그쯤에서라면, 본래 전명훈이라면 눈치를 챘어야 했다.
아무리 한 구석에 처박혀 폐관만 하는 원로나 장로라고 해도 천상금뢰지체인 그를 모른다는 건 어불성설이었으니까.
하지만 전명훈은 이상함을 느끼기는커녕 저항할 수조차 없었다.
"그래… 그렇군…."
섬섬옥수가 전명훈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아, 아아…."
전명훈은 멍한 눈으로 그 손가락을 느끼며 말을 더듬었다.
"더, 더… 조, 조금 더…."
그때였다.
툭―
섬섬옥수가 그 자리에 멈추었다.
전명훈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전명훈은 저 새하얀 머리칼 속, 그 얼굴의 주인이 굉장히 요사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느꼈다.
"아, 아앗…."
그러나 전명훈은 분명 요이하고 사특해야 할 그 미소가, 어쩐지 너무나도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그 '미소'를 인지하자마자 머리가 새하얗게 불타며 쾌락으로 덮여 오는 듯했다.
하지만, 전명훈은 쾌락의 절정에 이를 수 없었다.
절정에 도달하기 전.
무언가가 그의 절정을 틀어막고 있었다.
흰 머리의 그녀가 웃었다.
"내 이름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니?"
"아, 아아…. 구, 궁금…."
"물어봐 주렴."
"당, 당신의 이름은… 무엇…."
"내 이름은 정려(政勵)."
정려가 요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 이름을 불러 다오. 그리하면 다음 단계의 쾌락을 선사…."
그때였다.
치지직―
전명훈의 목 위로, 시커먼 저주문이 떠올랐다.
치이이이익!
"…! 끄아아아아악!"
그와 동시에, 저주문이 전명훈의 목을 둘러싸며 마치 목에 저주문으로 이뤄진 끈이 생겨난 것처럼 그의 목을 옭아매었다.
"흐아아악! 꺼어어억! 끄어어억!"
전명훈은 목을 움켜쥔 채 고통에 울부짖었다.
다음 순간.
츠츠츠츳!
그의 목에 생겨난 저주문이 새하얗게 반전되며, 전명훈의 정신을 인도하였다.
"헛!"
전명훈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뭘 하는 거냐, 전명훈."
"…!"
그리고, 그의 뒤쪽에서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나는 정신을 차린 전명훈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전명훈에게 대창천개벽문의 방식대로 수련을 시키며, 녀석의 핏방울을 늘 소지하고 다녔다.
저주술사로서, 상대의 신체 일부가 내 손에 있다면 저주문을 써 상대의 위치와 상태를 알 수 있었기에 녀석이 납치라도 당할 시를 대비해 놓은 조치였다.
그리고, 방금 전 저주문으로 녀석의 상태를 확인했을 때.
전명훈은 강력한 세뇌에 빠져 있었다.
나는 한쪽으로 고개를 돌려, 봉뢰당의 제단에 봉해져 있는 천뢰번을 바라보았다.
멸신겁천도 어쨌든 뇌도공법의 집합이기 때문인지, 이전 생과 달리 천뢰번은 내 눈에도 충분히 보였다.
'저것이다….'
나는 아직도 제정신이 아닌지, 살짝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전명훈을 보았다.
'뇌 속의 전류가 명백히 이상하게 흘렀어.'
전명훈이 함부로 뭔가를 하기 전에 달려와 봤다만, 아무래도 천뢰번의 영향을 받아 뭔가를 하려고 했던 모양.
그렇다면 다행히도 제때에 온 것 같았다.
"정신차려라, 전명훈."
나는 다시 한번 백란축성문을 써 전명훈의 정신을 맑게 도야시켰다.
"헛!"
그제야 녀석은 완전히 정신이 돌아온 것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그 분은…."
"그 분?"
"서, 서은현? 언제 여기 온 거지…? 그리고 봉뢰당을 지키시는 장로님은 어디에 간 거냐?"
나는 눈을 찌푸렸다.
"없더군. 현재 본문의 수호진법을 발동하시러 잠시만 자리를 비우신 상태다."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분 말이다. 백발의…."
"그만!"
콰악!
나는 전명훈에게 달려가 녀석의 입을 그대로 틀어막았다.
"으, 으읍…."
"함부로 이름을 입에 담지 마라. 입 닥치고, 지금부터 '그래'는 눈을 한 번 깜빡여서, '아니'는 눈을 두 번 깜빡여서 대답해라."
나는 혹시나 녀석이 상황 파악을 못 할까 싶어, 일부러 살기까지 흩뿌리며 말했다.
"…!"
내 살기를 받은 전명훈은 몸이 단단히 굳어서 그 자리에 뻣뻣하게 서 있었다.
"방금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나?"
깜빡.
"누군가를 만났나?"
깜빡.
"그 누군가가… 네게 자신의…."
나는 천뢰번이 내게 지난 생에 자신의 이름을 불러 달라고 했던 것을 떠올리며 물었다.
"이름을 알려 주었나?"
깜빡.
"…."
나는 눈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절로 식은땀이 등을 주르륵 타고 흘렀다.
자칫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 18회차로 그냥 넘어갈 뻔했다.
"잘 들어라, 전명훈. 현재 봉뢰당을 지키는 장로님은 예기치 못한 홍범의 천겁 때문에 잠시 자리를 뜨셨다. 그리고 지금 이 봉뢰당에는 너와 나 이외에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네가 봤다는 백발의 '장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야. 알겠나?"
깜빡, 깜빡, 깜빡.
미친 듯이 눈을 깜빡인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다는 뜻 같았다.
"한 마디로, 네가 본 건 본문의 장로 같은 게 아니라, 봉뢰당에 사는 어떤 요사스러운 존재라는 거다. 알겠나?"
깜빡.
"너는 그 요사스러운 존재에게 순간 홀렸던 것뿐이다. 또한…."
나는 전명훈에게 강력한 주의를 주었다.
"절대로, 절대로 그 요사한 존재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말아라."
또다시 녀석이 이해하지 못했단 눈짓을 보냈다.
"그 존재가 네게 알려 준 이름은… 금신천뢰문에 재앙을 부르는 무시무시한 주문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알겠나?"
"…."
어쩐지 납득하지 못했다는 눈빛.
'이렇게 끝나면 안 된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지금 당장 전명훈을 죽이거나 봉인하는 것이다.
물론 내가 서휼이나 괴군도 아니고 그럴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설득을 해야 하는데….
"…본문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을 해방하게 되면 끔찍한 재앙이 닥쳐온다. 이 봉뢰당에 봉인된 천뢰번은 단순한 신물이 아니야. 네게 이름을 알려 준 그 존재는 아마 저 천뢰번에… 깃든 원혼일 것이다."
"…?"
나는 적당히 전명훈이 납득할 만한 소설을 써주기 시작했다.
천벌의 주인이니, 그의 선보인 정려니, 양수진이니 하는 것들을 직접적으로 말해 주면 전명훈이 버티지 못할 수도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본문의 역사는 12만 년에 달한다. 그동안 금신천뢰문에는 무수한 적들이 있었고, 그 적들의 원한과 망념이 뭉쳐 저 천뢰번 속에 깃들었다. 네가 들었던 것은 그 망념의 덩어리의 이름이다."
"…!"
"그 이름을 부르면 망념과 원한이 천뢰번에서 풀려나와 본문이 쑥대밭이 될 수 있다. 자그마치 12만 년 어치의 원념이다, 감당할 수가 없다!"
전명훈의 눈에 문득 의아함이 깃들었다.
나는 녀석의 의념을 읽어 대강 무슨 의미인지 알아채며 말해 주었다.
"나는 그런 걸 알고 있는데 왜 너는 모르냐고?"
깜빡.
"당연하다면 당연하지 않냐. 나는 차차기 문주인데."
"…."
"어쨌든, 앞으로도 그 존재의 이름을 절대로 부르면 안 된다. 알겠지?"
깜빡.
나는 전명훈의 입을 쥐었던 손을 놓았다.
"하, 젠장. 손아귀 힘 더럽게 세네."
전명훈은 턱을 만지며 짜증을 냈다.
나는 녀석이 툴툴거리는 새, 혹시나 또 몰라 녀석의 뒤 목에 저주문 하나를 슬쩍 새겨 놓았다.
전명훈이 혹여라도 천뢰번의 진명을 말하려 하면 방금 전처럼 그의 목소리를 봉하고 천뢰번의 환상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용도였다.
"그럼 나가지."
나는 툴툴거리는 전명훈의 등을 떠밀어서 봉뢰당 바깥으로 내쫓으며 나갔다.
그리고 봉뢰당을 나가기 직전.
나는 슬쩍 뒤쪽을 바라보았다.
"…."
'뭐지, 저놈….'
지난 생.
천뢰번은 분명 전명훈을 공포스러워했다.
하지만 이번 생의 천뢰번은 전명훈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기뻐하기까지 하는 중이었다.
'…뭐, 아직 녀석이 덜 성장해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전명훈은 지난 생에는 결단기 후기 이상이었지만 지금은 고작해야 결단 초기일 뿐이었으니, 녀석이 아직 무서워할 시기가 아닐지도 몰랐다.
나는 전명훈의 수련 강도를 더 높이자고 생각하며 봉뢰당의 문을 닫고 나갔다.
* * *
봉뢰당 안쪽.
새하얀 머리칼을 치렁치렁 흐트러트린 여인이, 제단 위쪽에 앉아 양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아하하…."
그녀는 요사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전명훈….
전명훈….
전명훈….
천겁체(天劫體)가 내게 직접 자신의 이름을 전달했어…. 전명훈….]
그녀는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금신자의 후예가 내 봉인을 한 겹 풀어 주었고, 천겁체(天劫體)의 주인이 내게 이름을 전달했으니….]
새하얀 섬섬옥수가 허공을 어루만졌다.
[천겁체와 거래를 할 수 있다….]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그것은 노래이자, 제의였다.
[천겁체여… 내가 네 재능을 끌어올려 금신자의 권능을 얻게 해 주리니… 너는 천겁체의 권능을 내게 대여해 다오…. 내가 네게 방금 쾌락을 주었으니, 너도 나에게 네 권능을 다오…. 쾌락은 이미 준 것이오, 돌려받을 수가 없나니… 나 역시 내게 돌려받을 수 없는 권한을 다오…. 나는 쾌락을 돌려받지 못하겠지만, 그대가 내게 준 것은 친절히도 돌려주리니….]
파지직!
콰악!
그녀가 허공에서 손을 움켜쥐자, 허공에서 붉은 번개가 꿈틀거리머 전명훈이 나간 방향으로 쏘아져 나갔다.
다음 순간, 붉은 번개가 쏘아진 방향에서 무언가가 돌아왔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무언가를 손에 넣는 데에 성공했다.
[이것으로….]
그녀는 투명한 무언가를 자신의 주변에 내려쳤다.
철컹!
그와 동시에, 그녀를 묶고 있던 투명한 사슬 중 하나가 그 자리에서 풀려 나갔다.
[한 겹….]
츠츠츳!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에 있던 투명한 무언가가 다시 전명훈이 나간 방향으로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어둠 속에서, 대천벌의 정화.
정려는 요사하게 웃었다.
[방해자가 있어 이번에는 내 이름을 알리지 못했지만… 네게 적뢰천겁의 길을 알려 주겠다…. 천겁체의 주인이여. 하지만 너는 내게 대가로 금신의 봉인을 풀 힘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츠츠츳….
다음 순간 정려가 있던 자리에는 다시 천뢰번만이 남아 제단 위에 놓여 있었다.
봉뢰당 안쪽.
천뢰번은 요사하게 웃으며 어둠 속에서 잠겨 갔다.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대가를 받았으면 이자까지 쳐서 갚아야 하리니….]
그는 멍청한 표정으로 봉뢰당의 끝자락으로 갔다.
그리고, 전명훈은 헛숨을 들이켰다.
"청뢰 제자가 봉뢰당에는 무슨 일이지…?"
그 여성이었다.
그가 홍범의 천겁 속에서 보았던 환영과 정확히 똑같은 환영.
다면(多面) (5)
우우우웅!
용맥이 몰려든다.
그리고 몰려든 용맥은 한데 뭉쳐 거대한 영력의 덩어리를 만들었다.
"혈령(血靈)."
나는 초창기 지족의 원영을 생성할 때 뇌령도 곳곳에 흩어서 뿌려 놓았던 원영의 조각을 가져와 영력의 덩어리에 집어넣었다.
"기괴고의 령(靈)."
그런 후, 그 덩어리에 기괴고를 집어넣어 의식을 만든다.
우우웅―
시야가 둘로 분할되었다.
나는 내 눈앞에 떠오른, 은은한 붉은 기가 맴도는 원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원영의 시점에서도 '내'가 보였다.
혈영의 술과 기괴고의 술 등을 합쳐 만든 제2의 원영이었다.
앞으로 이 제2의 원영이 살아 있는 이상, 나는 원영이 터져도 제2의 원영을 소모해 한 번은 구사일생을 노릴 수 있다.
스르륵….
난 제2의 원영을 원유의 몸에 집어넣었다.
쿠구구구구!
원유의 몸에서 기운이 치솟으며, 결단기 대원만이었던 원유가, 원영기가 되었다.
원유는 일종의 내 도구였기 때문인지 원영기 수준이 되어도 천겁은 없었다.
이것으로 이제 당장 내게 원영기 수준의 전력만 최소 둘이었다.
홍범과 원유.
치지직….
나는 원유의 체내에 내 저주문을 잔뜩 불어넣어, 원유를 유사시 언제든 저주인형으로 쓸 수 있도록 개조했다.
원유가 바퀴벌레 급으로 질긴 그 생명력을 이용해 내 저주인형으로 나를 보조한다면 내 힘은 한 단계 올라갈 터였다.
"경하드립니다, 주인님."
홍범이 옆에서 구부정한 허리로 뒷짐을 지며 말했다.
"아니다. 고작해야 쓸 만한 저주인형 정도일 뿐이니…."
나는 홍범을 보며 말했다.
"오히려 이 녀석보단 홍범, 네가 더욱 기대되는구나."
"허허, 과대평가이십니다."
"과대평가는 무슨…."
나는 홍범에게서 느껴지는 따끔따끔한 기운을 보며 피식 웃었다.
지독할 정도의 독기(毒氣).
독(毒)은 겉보기에는 약해 보일 수 있지만, 쓰기에 따라서는 어떤 병기보다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더군다나 배합만 잘 한다면 경지에 상관없이 치명상을 입히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기에 홍범의 경지 자체는 원영 초기일지라도, 녀석이 독을 사용해서 치명상을 줄 수 있는 대상은 몇 단계 위의 수도자도 포함이 될 터였다.
'거기에 홍범이 익힌 독공(毒功)….'
수도자의 독공과, 무림인의 독공은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무림인의 독공은 주머니 같은 곳에 독을 숨겨 놓았다가 유사시 무기에 독을 발라 상대를 중독시키거나, 가루 형태로 뿌리거나, 혹은 음식에 타거나, 바람에 흩뿌리거나, 물에 푸는 형태로 하독(下毒)하여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이 일반적인 무림인들이 익히는 '독공'이었다.
그러나 수도자의 '독공'은 달랐다.
그들은 체내에 독기(毒氣)를 축적하여, 독을 축적하고 배합할 수 있는 독단(毒丹)을 배양하여 그 안에 독을 보관했다가 체내에서 발출한다.
독공을 익히는 수사의 경우, 강한 독기를 지닌 독약을 찾아 먹고, 그를 통해 수행을 증진시키고는 했다.
그런 독수는 대다수가 자신의 독단에 보관한 독에 대해서는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고, 독과 독을 배합하여 끝없이 많은 무한한 독을 만들어 싸우는 것이 그들의 특기였다.
그리고 홍범의 경우, 초창기.
그러니까 축기기 시절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독공에 대한 지식을 조금 알려 주었으나, 그 이후부터는 자신이 독공을 독학하여 듣도 보도 못한 독약을 배합하고, 독공을 스스로 발전시켜 나가, 독에 한해서는 이미 나조차도 한참 전에 뛰어넘은 상태였다.
"네 독은 나라고 해도 쉽게 해독할 수 없으니, 앞으로 네가 내 큰 힘이 될 터다. 유의하고 있어라."
"허허… 제 독이야 별 것 아닙니다. 이런 물질적인 독들이야 시간만 조금 들이면 해독이 가능한 평범한 독이지요. 진정한 독중독은 주인님의 저주독(詛呪毒)이니, 그 앞에서는 제가 어떤 독을 개발했더라도 감히 댈 수가 없습니다."
"뭐, 저주는 술법이니 독이라고 할 수야 없다만… 여하튼."
나는 홍범을 쳐다보았다.
홍범이 화형을 해내고, 원유도 원영기에 올랐다.
원유야 사실 유사시 쓸 예비 목숨 및 저주인형 정도의 용도를 가지고 있다지만, 어쨌든 나는 이로써 전성기의 모든 전력을 되찾은 것이었다.
"이제부터 네 역할이 막중하다."
"예, 새기겠습니다."
나는 며칠 전 전명훈이 천뢰번에게 홀렸던 것을 떠올렸다.
진선과 관련된 존재들을 상대로는, 절대로 방심하면 안 된다.
천기를 보고 안심하며 정려를 불렀다가 뇌령도가 증발했던 기억.
서휼과 신경전을 벌였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로선, 진선과 관련된 이들의 계교가 얼마나 음흉하고 음험한지 알 수 있었다.
'전명훈이 정려를 부르기 전에 구출하긴 했다만… 그때 정려는 전명훈의 상단전의 뇌기를 움직여서 녀석에게 분명 무슨 짓을 했다.'
그걸 알아낸 이상 방심할 수 없다.
차라리 과잉 대응이라 할 정도로 준비를 해야 했다.
'지금 당장 금신천뢰문 위쪽에 천벌의 주인이 나타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어.'
나는 홍범과 원유를 보고, 그들의 저 뒤쪽에 있는 금신천뢰문의 본관을 바라보았다.
나는 현재 원유를 원영기로 승급시키기 위해 금신천뢰문에서 조금 떨어진 계곡에 나온 상태였다.
"그나저나 올 때가 됐는데…."
내가 하늘을 바라볼 때, 저 멀리서 금빛이 번뜩이며 헌위가 날아왔다.
그녀는 이전과 달리, 시종으로 보이는 천인기 수사를 전혀 숨기지 않고 대동하고 왔다.
그리고 내 앞에 도달한 그녀의 시선이 원유와 홍범에게 향했다.
"흐음, 네 애완 요수가 화형했다는 얘기는 들었다만… 옆에 그건 또 뭐냐?"
"제 전력 중 하나입니다. 제 부하라고 생각해 주시지요."
"뭐,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겠지…. 오히려 네 전력이 상승한다면 나야 좋다."
헌위는 씨익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준비는 잘 되어 가느냐?"
"예. 차근차근 세력을 불리려 합니다. 안 그래도 최근 본문에 제 추종자가 많이 생기고 있어 거사를 벌일 때 일이 쉬울 겁니다."
"후후, 아주 좋군. 그래서 오늘 나를 부른 이유는?"
"이전에 했던 밀약의 내용을 수정하고 함입니다."
"호오?"
나는 몇 년 전.
금신천뢰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자 하는 헌위와 밀약을 맺었다.
밀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봉래궁 호법 헌위와 금신천뢰문 차차기 문주 금은현은 다음과 같은 밀약을 맺는다.
1. 만약 금신천뢰문이 불의의 사고로 인해 정통성을 잃게 되었을 때, 봉래궁의 호법은 금신천뢰문의 후인을 도와 금신천뢰문을 새로 재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2. 위 과정에서 봉래궁의 호법은 새로 재건할 금신천뢰문의 정통성을 지지해 주며,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한 재건 금신천뢰문 수뇌부의 결정을 무조건 지지해 준다.
3. 정통성의 지지에 재건할 금신천뢰문이 본래 규모의 최소 2할 이상을 복원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금신천뢰문은 봉래궁을 대표하는 일인을 금신천뢰문의 명예 원로로 임명하여 준다.
4. 재건 금신천뢰문은 차후 임명될 명예 원로를 통하여, 봉래궁과 금신천뢰문 간의 자매 결연을 약조한다.
5. 재건 금신천뢰문은 차후 사당을 세워, 옛 금신천뢰문의 선조들을 기리며 금신천뢰문과 결연을 맺은 문파의 인원들이 참배를 할 수 있도록 한다.
이상이 헌위와 내가 맺은 밀약의 내용이었다.
우선 밀약의 1항에 나오는 '불의의 사고로 금신천뢰문이 정통성을 잃는 일'이란.
내가 차후에 천뢰번을 훔칠 때를 대비한 일이었다.
전명훈을 키워도 도저히 답이 없으면 유사시 천뢰번을 훔쳐서 수계에 봉인해야 하니 맺은 밀약.
'만약 전명훈이 답이 없다면 천뢰번을 훔쳐, 내가 새로운 금신천뢰문을 천명하고, 금신천뢰문의 본관을 다시 수계로 이관한다.'
그리고 2항의 '재건 금신천뢰문의 정통성을 지지해 준다'는 내용은 금벽호 및 원로진들의 반대가 있어도 봉래궁의 호법인 헌위가 이를 지지해 준다는 뜻이었다.
또한 금신천뢰문의 '정통성'이라 할 수 있는 금신천뢰문의 신물 천뢰번.
그러한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한 재건 금신천뢰문 수뇌부의 결정을 무조건 지지'한다는 말은, 내가 수계에 천뢰번을 봉인하러 간다는 것을 도와주고 지지해 준다는 의미였다.
1, 2항이 내가 새로운 금신천뢰문을 통해 천뢰번을 봉인할 수 있게 원조한다는 조항이라면, 3, 4, 5항은 헌위를 위한 조항이었다.
3, 4항으로 인해 금신천뢰문과 봉래궁은 밀접한 관계가 되고, 5항으로 인해 금신천뢰문의 선조들을 기린 사당에 헌위의 아버지인 헌원이 참배를 갈 수 있게 해 주기 위한 내용들이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아버지인 합체기 태수 헌원은 아직까지도 자신의 정인을 그리워하는 모양이니, 나와 헌위가 굳이 혼인을 하지 않아도 이런 방식이라면 충분히 서로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나는 천뢰번을 봉인할 수 있고, 금신천뢰문은 멸망을 피하고, 헌위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헌원은 딸을 통해 정인의 흔적을 느낄 수 있으니 일석사조인 조약이었었다.
본래대로라면 나 역시 이 정도에서 만족하려 했다.
하지만 며칠 전 전명훈이 천뢰번에게 무슨 짓을 당한 것을 생각하자,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원래는 저를 추종하는 추종 세력을 문파 내에서 많이 만들어, 천뢰번을 가지고 나가 따로 문파를 천명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정통성이 증명이 되겠지."
"하지만 만약 제가 유사시 금신천뢰문의 세력 일부뿐이 아닌 천뢰번 하나만을 가지고 나와도, 저 개인을 금신천뢰문이라고 인정해 주는 조항을 추가했으면 합니다."
"…?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헌위는 눈을 찌푸렸다.
"내가 네놈과 손을 잡기로 한 건, 아버님께서 '금신천뢰문'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제자가 하나도 없이, 천뢰번과 너 개인만을 '금신천뢰문'이라고 인정한다면 아버님께서는 결코 너를 '금신천뢰문'이라고 인정치 않으실 거다."
"저는 금신천뢰문의 장문인 자격을 뜻하는 금씨를 하사받았으며, 또한 금신천뢰문의 모든 공법을 익히고 있습니다. 거기에 금신천뢰문의 정통성을 뜻하는 천뢰번만 있다면 장문인 자격으로 새 제자들을 받아들여 금신천뢰문을 또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닙니다."
"흐음… 별로 설득되지 않는군."
난 헌위의 의념을 읽었다.
'설득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드는 조건을 내놓으라는 거로군.'
"뭘 원하십니까?"
나는 그녀가 무언가 이권을 원한다고 파악하고 질문했다.
어차피 그녀가 원하는 건 금신천뢰문과의 관계로 인해 자신의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니 금신천뢰문과 그녀의 관계를 상징할 수 있는 명예직이야 얼마든지 만들어 줄 요량이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헌위의 말은 내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나와 도려나 쌍수는 안 맺겠다 했지?"
"예, 그렇습니다만…."
"그럼 네가 내 양자로 들어와라."
"…??"
"문파의 소속은 혈연에 상관없으니 네가 내 양자가 되더라도 금신천뢰문을 재건하는 데에 배분상의 문제는 없겠지. 사실 나이 차를 생각하면 원래부터 이쪽이 맞았겠지. 나 역시 그 쪽이 아버님에게 할 말이 더 많으니, 서로 좋은 조건이 아니냐?"
"…."
'별로 나이 차도 안 나는 게, 이 무슨….'
나는 어이가 없어 잠시 벙찐 상태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의외로 진심인 듯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집게손가락으로 누르며 말했다.
"…양자…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군요."
"흠, 그럼 나도 밀약을 수정하기 힘들 거 같은데…."
"대신, 저를 보좌할 부문주를 양자로 삼으시는 건 어떠십니까? 장문인이야 상징적인 것을 많이 맡는 자리라서, 제가 헌위 님의 양자가 된다면 금씨 성을 당신에게도 부여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문주라면 굳이 금씨가 아니어도 되며, 도리어 실권에 있어서는 장문인보다 많은 권한을 가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흐음…."
어차피 부문주는 원유로 둘 생각이어서 상관이 없었다.
"뭐, 좋다."
다행히 내 설득이 먹힌 모양인지 헌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 나도 조건이 있다."
"무엇입니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너 하나를 금신천뢰문으로 인정하고 지지하라는 건 솔직히 말이 안 된다. 그러니 유사시 네가 천뢰번을 수득해 금신천뢰문을 따로 세우더라도, 금신천뢰문 내에서 너를 따르는 인물이 '최소 셋'은 있어야 한다. 알겠느냐?"
"저까지 포함 총 네 명이어도 된다는 겁니까?"
"그래. 머릿수를 맞출 수 있느냐?"
나는 머리를 굴렸다.
'일단 천뢰번을 봉인한다고 하면 연위는 무조건 찬성할 테니, 연위의 후손인 연진은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일단 한 명.
'진휘, 금벽호 등은 아무리 그래도 내가 천뢰번을 탈취하겠다고 하면 눈이 뒤집히겠지. 전명훈은… 설득하려면 진실을 말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놈이 미쳐 버릴 수도 있으니 절대 안 되고, 전명훈과 한 몸인 금소해도 마찬가지….'
나는 금신천뢰문의 요인들, 그리고 또 나를 추종하는 제자들을 떠올렸다.
'나를 추종한다는 녀석들도 금신천뢰문 체제에 속한 나를 추종하는 거지, 다들 금신천뢰문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서 절대 내가 하는 짓을 받아들일 리 없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설득할 수 있을 만한 이를 추려내기 시작했고, 이윽고 한 명의 후보가 더 나왔다.
'홍수령. 홍수령이라면 내가 유사시 설득할 수 있을 수도 있겠어.'
이것으로 두 명.
'그리고 마지막은… 원유가 태극진뢰신을 익혔으니 원유 역시 금신천뢰문의 제자라고 우기면 된다. 이렇게 하면 사람 수는 맞춰진다.'
이렇게 세 명.
나까지 포함해 전부 네 명의 인원이 맞춰진다.
"예, 인원은 맞출 수 있습니다."
"좋아, 그럼 밀약을 수정해 주지."
우리는 밀약에 특약을 추가했다.
대강, 불의의 사건으로 인해, 내가 천뢰번만을 훔쳐서 도주하게 되면, 내가 3인의 금신천뢰문 소속 제자를 받았을 시 그녀는 우리 넷을 '정통성을 갖춘 새로운 금신천뢰문'으로 인정하고 지지하겠다는 내용의 특약이었다.
'이것으로, 조건은 갖춰졌다.'
만약 전명훈이 내 예상에 미치지 못해 빨리 성장하지 못한다고 하면, 나는 천뢰번을 훔쳐서 내 추종 세력과 함께 '새로운 금신천뢰문'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천뢰번을 들고 도망칠 계획이었다.
그러나, 만약의 경우.
전명훈과 천뢰번 사이에 어떤 사건이 터져서 내가 급히 천뢰번을 훔쳐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내가 바로 천뢰번을 훔쳐 도망쳐도 3명의 지지자만 있다면 나는 헌위와 봉래궁에게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만약 내가 천뢰번을 훔쳐서 도망쳐도, 금신천뢰문만 추격해 온다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금신천뢰문이 인족 총연맹에 '배신자 서은현'을 수배하는 것이었다.
금신천뢰문 문파 한 개의 전력은 감당할 수 있었지만, 인족 총연맹의 실력자들이 쫓아온다면 버티기 힘들 수도 있었기 때문.
하지만 헌위와 이런 밀약을 맺었으니, 유사시 인족 6대 종문 중 하나인 봉래궁이 나를 지지해 줄 것이고, 수배서가 나돌 일도 없을 터였다.
헌위는 밀약을 수정한 다음 돌아갔고, 나 역시 금신천뢰문으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만약의 일이 일어나기 전 홍수령을 설득해야겠지.'
나는 홍수령의 동부를 찾아갔다.
'과연… 홍수령은 이런 얘기를 한다면 받아들여 줄까?'
금신천뢰문의 멸망을 막기 위한 일이었지만, 진선과 엮인 이상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었고, 내가 하려는 짓은 배신이었다.
'내가 이런 제안을 한다고 해도 폐쇄적인 그녀의 성격에 장문인에게 말하기는 않겠지만….'
아무리 나랑 명목상 쌍수 상대라고는 했지만, 이런 '배신'을 받아들여 줄지는 의문이었다.
'그녀가 수락할지 하지 않을지는 모르겠군.'
그녀의 성격상 내가 이런 얘기를 한다고 다른 누구에게 발설할 일은 없었기에 문제는 없었으나, 정말 문제는 그녀가 나와의 동행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동부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러마."
"…예?"
나는 너무나도 시원하게 수락해 버리는 그녀를 보며 벙찐 표정을 지었다.
"뭐, 나야 연구랑 수련만 제대로 하게 해 주면 문제없다. 거기에 너도 사실상 본문의 모든 뇌도공법을 익혔고, 금씨 성도 지녔고, 뭐, 네 말마따나 천뢰번까지 전부 획득하면 정통성으론 크게 문제없겠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나는 너무나도 시원하게 수락한 그녀를 보며 얼떨떨하게 물었다.
"이건 사실상 현 장문인과 태상장문에 대한 배반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쉽게 수락하셔도 되는 겁니까?"
"안 될 게 무어냐. 원래 금신천뢰문의 역대 장문인들, 지도자들은 대대로 금신천뢰문을 위해 몸을 바쳐 왔다. 나는 말은 안 하지만 그들을 늘 존경해 왔지. 그리고…."
홍수령은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역시, 내 눈을 피할 생각하지 마라. '오직 금신천뢰문을 위해서'라는 의념을 줄줄 흘리면서 배신이니 뭐니 내숭 떨어 봤자 나한테는 안 통한다."
그녀가 웃었다.
"네가 뭘 하려 해도, 너는 본문에 해가 되는 일을 하려 하는 게 아니지 않으냐?"
"…."
나는 말없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홍수령은 말이 없는 나를 보며 말했다.
"이것 하나만 약속해 다오."
"…무엇입니까?"
"만약 네가 말한 일이 일어나고, 네가 천뢰번을 수득해서 어떻게 할 일이 생기면, 아마 본문의 장로와 원로들이 총동원되어 너를 잡으러 갈 것이다."
"그렇겠지요."
"네가 실력을 숨기고 있단 건 이미 알고 있다. 나와 대련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내가 전력을 다한다 해도 네게는 안 되겠지. 너와 잠시나마 대등해지려면 내가 생명과 모든 수행을 격발해야지만 가능할 터…. 네 본 실력은 아마 태상장문과 비등, 그 이상이겠지."
나는 흠칫 놀랐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의념도 잘 다스렸다.
"만약 네가 원로진과 장로진들을 상대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손속에 자비를 두어, 그들이 죽지 않게 해 다오."
"…한 명도 죽지 않게 하겠다고 약조하겠습니다."
"좋아. 그 정도면 되었다."
나는 시원하게 수락한 홍수령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헌데, 원영기 장로인 제가 왜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녀와의 대련에서 진심이 된 적은 없었다만, 나는 최선을 다해서 그녀가 내 본 실력을 가늠할 수 없게 해 왔다.
그런데 너무나 뜻밖에도 홍수령은 내 본 실력에 대해서 감을 잡고 있는 것이었다.
내 질문에, 홍수령은 찡긋 웃었다.
"여자의 감이다."
"…."
그 모습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내가 할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 * *
쿠릉, 쿠르르릉!
"죽어라, 서은현!"
나는 전명훈의 번개를 피하며 여전히 녀석을 두들기고 있었다.
'점점 실력이 좋아지는군. 아니….'
홍범이 원영기가 되어도, 일상은 다름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전명훈을 가르쳤고, 창천개벽문의 방식으로 녀석의 수행을 끌어올리는 데에 열중했다.
그리고, 그건 꽤 성과가 있었는지 최근 전명훈의 수행과 실력은 전체적으로 빠르게 오르고 있었다.
콰지지직!
붉은 번개가 살아 있는 듯이 움직이며 예상치 못한 각도에서 나를 향해 쏘아졌다.
피싯!
번개가 순간 예리한 검날처럼 변하며 내 뺨에 작은 상처를 내었다.
"…놀랍군."
나는 순수하게 경탄하며 전명훈을 바라보았다.
'적뢰진경도 이제는 완전히 다른 공법이라고 할 정도로 진화했다.'
"앞으로 한 백 년만 있으면 내 뺨에 상처 두어 개 정도는 더 만들 수 있을 거다."
나는 일부러 전명훈을 자극하는 듯한 말을 하며 전명훈을 두들겼다.
전명훈의 의념은 내 말에 자극받아 더욱 붉어졌고, 그럴 때마다 녀석의 번개도 더더욱 강렬해졌다.
전명훈의 분노를 북돋는 것 역시 수련의 일환이었다.
전명훈은 금신천뢰문에서 오냐오냐 받고 있었기에, 내가 녀석의 분노를 자극하며 수행을 끌어올리는 것이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빌어먹을!"
콰지지지직!
전명훈은 모든 뇌전을 내게 뿜어내고, 방전되어서 바닥에 드러누웠다.
나는 쓰러진 전명훈에게 말했다.
"오늘도 수고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성장하면 된다."
녀석은 숨을 몰아쉬며 분노를 다독였고, 나는 그렇게 오늘치 수련을 마친 후 내 동부로 돌아갔다.
'빨리 성장해라, 전명훈.'
천뢰번을 훔칠 계획은 세워 놓았지만, 그건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보험이었다.
가장 좋은 건 전명훈이 자신의 능력을 각성해서 천뢰번을 자신의 손으로 봉인하는 것.
금신천뢰문의 멸문을 피하기 위해서는, 전명훈을 하루빨리 키울 필요가 있었다.
* * *
"…빌어먹을, 빌어먹을!"
전명훈은 자신의 동부로 간 서은현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아직도 안 되잖아!"
그는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발을 굴렀다.
'더, 더 필요해…!'
서은현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면, 전명훈의 붉은 의념은 분노뿐이 아닌 '열등감'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근 전명훈의 열등감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더, 더…!'
그리고, 전명훈은 자리에 앉아 공법을 운용하며 뇌기를 끌어모았고, 그 뇌기 안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우우웅!
소곤소곤소곤….
기이한 목소리가, 적뢰진경보다 훨씬 진화한 구결을 알려 주었다.
더더욱 번개를 다스리는 데에 적합한 구결이었다.
츠츠츳!
전명훈은 목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몸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목소리의 말을 따라 법력을 인도하면, 더더욱 강한 힘을 얻었으니까.
'목소리'에 집중할수록 어째선지 열등감과 분노가 이상할 정도로 더 심해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원래부터 열등감은 있었으니까.
'반드시… 번개의 인도를 따라 서은현을… 뛰어넘는다!'
서은현을 뛰어넘기 위한 의지에 따라, 전명훈은 차근차근히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천겁 (1)
사락, 사락, 사락….
나는 가만히 앉아 김연이 비익무를 추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뿐사뿐 한 치도 틀림없이 초식을 펼치고 있었다.
얼마나 그녀를 멍하니 보고 있었을까.
"은현 오빠? 시킨 비익무 1만 번 전부 다 했어요!"
그녀가 땀을 훔치며 내게 다가왔다.
"은현 오빠?"
그리고, 그녀가 나를 흔들었을 때쯤에야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미안. 잠시 넋이 나가 있었네."
"흐음…."
그녀는 내 말에 잠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걱정스러운 듯이 내 이마를 짚어 주었다.
"은현 오빠, 최근에 자주 그런 거 알아요?"
"음? 아아…."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주의할게."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너무 무리하시지 말라는 거에요."
"…."
"저도 기묘성심전을 한계까지 운용해 봐서 알아요. 은현 오빠, 지금 틀림없이 의식을 극한까지 움직여서 탈력한 거잖아요?"
"…그래."
난 쓴웃음을 지었다.
숨기려고 했다만, 아무래도 바로 알아차리는 모양이었다.
전명훈과 김연을 가르치고, 화형한 홍범에게도 무공을 가르치며 독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기를 벌써 몇 달이 지났다.
나는 최근 들어, 점차 이렇게 멍하니 있는 상태가 많아졌고, 그녀의 말마따나 이는 의식을 극한으로 사용함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였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연아. 그럼 한번 비익무를 펼쳐 볼까?"
"네."
그녀의 비익무를 봐 준 후, 그녀의 공력 운용에 대해 짚어 준 후 그날의 수련을 마쳤다.
"그럼 내일 보자, 연아."
"네, 그리고 말씀드렸듯이… 무리하시지 마세요!"
"…그래."
스스스….
나는 눈을 뜨며 일어났다.
"후우…."
몸에는 땀이 흥건했다.
기묘성심전으로 꿈을 꾸며, 육체는 계속 동부 속에서 잠을 자는 동안에도 검을 움직이도록 설정해 두었기에 밤새도록 검을 수련한 것이었다.
이제 곧 있으면 해가 뜰 시간.
하지만, 나는 해가 뜨게 놔두지 않았다.
'가속….'
츠츠츳….
의식이 가속되며 점차 시간이 느려진다.
'가속, 가속, 가속….'
등봉조극 때에는 의식을 가속시켜 봤자 10배 정도의 가속을 얻는 것이 다였다.
'가속, 가속, 가속…!'
그러나 답천에 이른 후부터.
10배의 가속은 '기본치'가 되었고, 10배 이상으로 현 상태에 따라 얼마든지 많이 가속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정신을 극한으로 압축해서 가속했을까.
나는 떠오르려던 아침 해가 지극히 느린 상태로 지평선 어귀에 걸쳐 있는 것을 보았다.
바람의 흐름이 느려져서, 허공을 떠다니는 먼지의 흐름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느려진 것을 보았다.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굳어 있는 것을 보았다.
아침 이슬이 떨어지다 말고 허공에 멈춘 것을 보았다.
정확히는 멈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멈춰진 것처럼 보일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는 것.
아니, 정확히는 내 의식이 그만큼 빠르게 가속하는 것뿐이었다.
내가 의식을 가속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의식을 가속시켰다.
등봉조극, 입천, 답천.
그리고 기묘성심전과 천인기에 달하는 거대한 의식 영역까지.
모든 의식의 힘을 총동원해서 아득할 정도로 시간을 압축해 정지에 가까운 세계에 진입하는 데에 성공했다.
치지지….
머리가 불타 버리는 것 같다.
당장이라도 이 미친 세계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상단전이 과부하를 버티지 못해 터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치지지직….
이 상태는 본래 맨정신으로 그리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버텨 냈다.
이 정신 나간 극정(極停)의 세계에서 억지로 억지로 버텨 내며 정지에 한없이 가까운 시간을 강제로 체험했다.
그리고, 나는 그 상태로 내가 익혀 온 무공.
만들어 온 무공.
사용해 왔던 무공들을 전부 검에 담아 펼치기 시작했다.
단악검법이 펼쳐졌다.
단악검법의 안쪽으로, 단맥도법의 무리가, 투괴암기술의 묘리가, 투괴무흔권의 무리가.
용형비호조의 무리가, 비익창과 비익무의 무리가 얽혀든다.
내 검은 계위 너머를 움직였기에, 무지막지한 속도로 휘둘러지고 있음에도 충격파가 비산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어두운 새벽.
동부에서 일어나,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단악검법 4만 2천 번을 순식간에 펼쳤다.
"후우…."
벌써 식은땀이 뻘뻘 흐른다.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육체 자체는 힘들지 않았지만, 이 극정의 세계에서 강제로 버티고 있다는 것은 버티는 것 자체로 뇌를 불태우는 듯한 고통을 동반했다.
"흐…."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대신, 나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시간이… 부족하다."
그랬다.
부족했다.
너무나도 부족했다!
당장이라도 그 공포스러운 진선이 하늘을 뚜껑처럼 열어젖히고 나타나 이쪽을 들여다볼 것만 같다.
그런데도 내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해야 50년 안팎이다.
고작 50년을 가지고서, 둔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쥐어 짜내야 한다.
내 뇌를 곤죽이 되도록 쥐어 짜내서,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최대한 더 나아가야 한다.
주어진 시간 안에 반드시 답천 그 이상에 도달해야 한다!
파앙!
마지막으로 단악검법을 펼치며, 계위를 넘어드는 감각을 조종하지 못해 충격파가 허공을 훌려 퍼졌다.
정지나 다름없는 세계에서 울려 퍼진 충격파에, 내 동부에 설치된 수호진법들이 발동했다.
쿠구구구!
본래라면 산이 뒤흔들려야 할 충격이었으나, 다행히도 수호진법이 충격을 흡수해 주어서 동부 안쪽의 공기만이 휘몰아치고 끝났다.
"후우… 후우…."
나는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뇌리를 옥죄었던 고통이 잠시나마 흩어졌다.
하지만 그게 끝.
나는 숨을 몰아쉬며 잠시 얻었던 휴식을 바로 포기한 채, 바로 다시금 단악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치이이―
머리에서 김이 나는 느낌이었다.
의식은 물론이고, 원영 그 자체가 쥐어짜이며 혹사당하는 느낌이었다.
이대로라면 분명 원영에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우우우웅!
저 한구석에 처박혀서 법력을 모으는 중인 원유에게, 원영에 가해진 부하가 저주로 전부 몰아넣어진다.
원유의 혈영 안쪽으로 내 원영에 가해진 부하가 들어갔다.
푸쾅!
원유의 머리통이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그러고도 그치지 않았는지, 원유의 목 위쪽은 한동안 부글부글 끓어오른 후에야 제대로 재생되기 시작했으며, 원유의 혈영에 강력한 손상이 생겼다.
그만큼 내가 원유에게 떠넘긴 부하는 과중했다.
둔재에게 허락된 시간을 늘리기 위해 발악한 결과물이다.
결코 평범한 수준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음 단계에는 오를 수 없었다.
여전히 점수(漸修)가 부족한 탓.
'더, 더, 더…!'
아직도 부족하다면, 더 채워넣으면 된다!
나는 이를 악물고 해가 떠오를 때까지 의식을 극한으로 가속시킨 상태로 그렇게 단악검법을 휘둘렀다.
* * *
원래라면 헌위와 한 밀약을 지키기 위해, 금신천뢰문 내부의 내 추종자들을 끌어모아야 한다.
하지만, 최근 나를 추종하던 금신천뢰문의 어린 제자들은 나만 보면 슬금슬금 나를 피해 다니고는 했다.
파지지직….
그나마 꾸준히 수련을 시켜 주고 있는 전명훈만이 어김없이 내게 번개 세례로 아침 인사를 대신해 줄 뿐이었다.
부웅!
나는 몽둥이를 휘둘러 전명훈의 번개를 그대로 걷어 내었다.
최근에는 몽둥이를 부러지거나 망가지지 않도록 하는 것 외에, 딱히 기를 불어넣어 추가로 강화하거나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딱 연기기 초기 수준의 기운만을 불어넣은 채.
나는 전명훈을 향해 몽둥이를 들고 계속해서 연습했던 단악검법을 펼쳤다.
가속한다, 가속한다, 가속한다!
파아앙!
충격파가 내 몸 앞쪽으로 생겨난다.
공기의 흐름 하나하나가 내 몸에 부딪혀 일방적으로 튕겨 나가는 기분을 만끽하며, 나는 전명훈과 극정의 세계 안쪽에서 눈을 마주쳤다.
녀석의 눈동자 안쪽으로 언뜻 내가 비춰 보였다.
수염을 정리하지 않아 수염이 삐죽삐죽 난 채로, 산발이 된 머리를 하고 눈에는 핏발이 잔뜩 선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정상이 아닌, 미치광이인 듯한 모습!
'…저러니까 날 추종한답시고 따라다니던 녀석들도 전부 사라졌지.'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잠시 웃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몸을 단장할 시간 따위는 없다.
말을 거는 녀석들에게 친절하게 대답해 줄 시간 따위는 없다.
인사를 할 시간도 없다.
웃어 줄 시간도 없다.
남에게 쓸 시간 따위도 없다.
나는 미친 듯이 전명훈의 수련을 봐줌과 동시에, 내 수련도 끊임없이 반복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의식을 가속시킨 채로 하루 종일 생활하며, 원유에게 나눠 놓은 혈영은 하루 종일 수련과 법력 회복, 원영의 회복을 시킨다.
그리고 그런 원유에게 계속해서 부하를 떠넘기며 끝없이 무(武)에 대해 궁구하고 또 궁구한다.
무(武)를 궁구하며, 육신의 생명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반복하여 지족의 수행도 끝없이 천인기에 가깝게 만든다.
또한 천족의 수행 역시 천인기에 오를 수 있도록, 진휘와 홍수령에게 전해 들은 천인기의 깨달음과 가르침을 끊임없이 뇌리 한편에서 선각후통으로 분석하고 또 참오한다.
무(武)를 수련한다고는 했지만, 이제 무공은 내 일부나 다름없었고, 앉아서 법력을 수련하나 무공을 펼치며 법력을 수련하나 똑같은 경지가 되었기에 최근에는 굳이 좌선을 고집하지 않아도 법력이 운행되어서 천족의 수행도 같이 하기에 무리는 없었다.
천지족의 수행, 그리고 무공을 병행하여 수련하며, 나는 끊임없이 다음 단계를 갈구했다.
부웅!
어느덧 내 손에 들린 몽둥이는 그 자체로 검이 되었다.
얼마나 단악검법의 초식을 많이 펼쳤을까, 몽둥이 자체가 풍압에 풍화되어 단악검법을 펼치기 가장 적당한 목검의 형태로 바뀌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몽둥이가 목검이 될 정도로 휘둘러 대며 갈구하는 답천의 너머는 무엇일까.
답천 너머, 구현의 3단계는 다음과 같았다.
자신의 이상을 세계에 강요하는 경지.
그렇다면 이는 정확히 뭘 말하는 걸까?
이상을 세계에 강요한다는 건 대체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인 걸까?
요는 대강 이러했다.
―완벽(完璧)은 무엇인가.
나는 장익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완벽하다'라는 말. 혹은 '완전하다'라는 말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말이다. 왜 그런지 아느냐?
―…어째서입니까?
―가로 베기, 세로 베기, 찌르기를 완벽하게 해 봐라.
난 장익의 앞에서 그가 시키는 것을 해냈다.
―네가 한 기술이 완벽한 기술인가?
―…예, 그렇습니다만.
―그래, 맞다. 하지만 동시에 틀리기도 했다. 만약 너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전장에서도 방금과 정확히 같은 기술을 쓸 건가?
―아닙니다.
―그럼 반대로, 용암이 이글거리는 화산 안쪽에서, 너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전장에서와 같은 기술을 쓸 건가?
―절대 아닙니다.
―그럼 만약 네 양팔이 잘렸고, 다시는 재생할 수 없다고 하자. 네가 입으로만 칼을 물고 방금과 같은 기술을 펼친다고 할 때, 앞선 것과 같은 것을 펼칠 건가?
―불가능합니다.
―그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완벽한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장익의 말을 떠올리며 단악검법을 휘둘렀다.
―네 검법도 같은 법칙 하에 만들어졌고, 너는 그 법칙 하에서 검을 휘두른다지만 그 법칙이란 네가 검을 휘두르는 대상에 따라, 장소에 따라 항상 변화한다. 즉, 너는 그 검법을 배운 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같은 검법을 휘두른 적이 없다'는 거다.
―...
부웅, 부웅, 부웅!
목검의 끝으로 장익의 조언이 따라붙는 듯한 기분이었다.
―1초 전과 1초 후의 공간은 미세한 공기의 흐름이 전부 바뀌어 버린다. 공기뿐이 아니라 기(氣)의 흐름. 상대의 심리. 너 자신의 심리 등이 1초 전과는 다르게 변화한다. 그러므로 1초 전의 네가 펼친 검법과 1초 후의 네가 펼친 검법은 '다른' 검법일 수밖에 없다.
―…하면, 어찌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같은 무공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너도 이 경지까지 왔다면, 네가 펼친 투혼이 단순한 전투 기술이 아니란 걸 알고 있겠지. 네 투혼에는 네 삶이 녹아있고, 네가 주장해 왔던 것들이 녹아 있다.
붕, 부웅, 부웅!
단악검법을 펼친다.
꽈아아앙!
폭음이 울려 퍼지며, 분명 연기기 급도 안 될 수준의 기력을 품은 내 검이, 결단기 대원만 수준의 전명훈의 뇌전을 그대로 떨쳐 내며 오히려 녀석에게 충격파를 쏟아부어 튕겨 내 버렸다.
―네 투혼에 녹아 있는 네 주장을 극한까지 갈고닦아라. 나는 '파괴'라는 주장을 갈고닦았다! 유화는 '안식'이라는 주장을 갈고닦았지. 네가 가진 주장은 무엇이지?
'내가 가진 주장….'
―겉으로 펼치는 투혼은 얼마든지 변화하며, 계속해서 다른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변하지 않는 마음을 네 투혼에 불어넣어라! 그리하면 외향이 어떻게 변화하든, 네 검이 어떻게 변화하든 절대로 불변하는 그 마음만은 남아서 이 세계에 법칙으로 새겨질 터이니.
그렇다.
쉽게 말하자면 자신의 무공의 특질을 일깨워서,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을 기준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기준'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절대로' 변하지 않을 수준으로 만든다면 그것은 아예 이 세계에 법칙으로 새겨지는 것이다.
천겁(天劫)은 역천을 행하는 수도자들에게 순천(順天)의 법칙을 집행하기 위하여 하늘이 행하는 것.
그렇다면 구현 3단계의 심족들이 행하는 천겁과도 같은 힘은, 어쩌면 자기 자신의 법칙을 집행하기 위하기에 하늘과 닮아 있는지도 몰랐다.
꽈아앙!
나는 다시 한번, 이번에는 고작해야 검기 한 번을 쓸 정도의 힘만을 목검에 불어넣은 채로 한 바퀴를 돌아 뇌신(雷神)처럼 변화한 전명훈을 그대로 튕겨 내 버렸다.
하지만 튕겨 내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전명훈이 튕겨 나가는 것조차, 의식을 정지의 세계에 근접할 만큼 가속시키는 내게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속도였다.
발을 굴러 앞으로 쏘아져 나가, 전명훈이 착지할 곳에 미리 도착한 나는 이제야 느릿느릿 튕겨져 오는 전명훈을 향해 다시 한번 목검을 내리쳤다.
전명훈은 느릿느릿 반응하려는 듯했지만, 제대로 막아 내지조차 못하고 목검에 머리가 반으로 갈려 버렸다.
내가 무공에 불어넣은 마음.
내가 주장하고 싶었던 바.
콰앙, 콰앙, 콰앙!
고작해야 검강 하나를 유지할 정도의 기(氣)를 두르고 휘두르는 목검에, 충격파가 몇 번이나 울려 퍼지며 전명훈을 수련시키는 훈련장은 물론이고, 인근의 산이 마구 박살 나기 시작했다.
피떡이 된 전명훈은 잠시 후 일어나서 핏발이 잔뜩 선 눈알을 부라리며 내게 달려든다.
그리고 계속해서 아까와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전명훈도 진화하며 정말 개미 발자국만큼 앞으로 나아가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내 입장에서는 느렸다.
"서은현!!!"
전명훈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나를 죽이겠답시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수련이 끝나면 금소해와 함께 자기 동부로 돌아간다.
나는 금소해에게 업혀 동부로 돌아가며, 금소해에게 나에 대한 불만과 욕지거리를 털어놓는 전명훈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전명훈의 수련 이후 내 동부로 돌아가며, 나를 은근슬쩍 피하고 저들끼리 왁자지껄 떠드는 금신천뢰문의 제자들을 보았다.
곳곳에서 들리는 쌍수의 소리와, 장로진, 원로진들이 지나가며 간혹 내게 인사하는 광경을 보았다.
나는 내 동부로 들어가기 전, 금신천뢰문의 절경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이곳은 금신천뢰문.
양수진이 만든 실패작이자, 비인간들의 군집이었다.
"…아냐."
나는 금신천뢰문을 내려다보며, 문득 내가 최근 왜 이렇게 정신이 나가 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저 멀리서 홍수령이 싱싱한 신입 제자들을 납치하는 장면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나는 저능아로군."
새삼스럽지만 다시 한번 깨달았다.
본문의 제자들에게, 홍수령에게, 연진에게, 진휘에게, 금벽호에게, 금소해에게… 금신천뢰문 자체에.
나는 멸망할 문파였기에 거리를 두려 했다.
홍수령에게도 정을 주지 않겠다고 머저리 같은 맹세를 했다.
하지만 보라.
벌써 이렇게, 나는 어느덧 이 금신천뢰문의 풍광을 보며 내 집 같다는 감정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이곳은 금신천뢰문.
나의 사문(師門)이자, 나의 식구들이 있는 곳이었다.
"…들리시오, 양수진?"
나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나는 둔재에다 저능아, 병신이라서, 비인간이니 뭐니 잘 모르겠소. 운명이니 자유니 노예니. 솔직히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딴 걸 매번 생각하면서 살아온 적도 없소. 그러니…."
물론, 양수진의 논리는 아직도 완전히 반박하진 못했다.
하지만, 나는 반박하진 못해도 부정(不定)할 수는 있었다.
나는 선인이 아니다.
나는 이기심도 많다.
나는 욕심도 많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만큼 능력이 뛰어나지도 않다.
그렇다고 성인군자 같은 도량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눈앞에, 나와 연이 닿은 내 식구들만큼은.
"지킬 거요."
멸망하게 두지 않겠다.
내 무공에 깃들어 있는 마음의 이름은, 진심(盡心).
삶을 선인처럼, 성인군자처럼 살아오지는 못했다.
그런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비인외도들이 많은 세상이었으니, 나 역시 지구에 있을 때를 기준으로 많이 잔혹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매 사에 진심을 다해 왔다.
매 인연에, 매 순간에 진심을 다해 왔으니.
지금 이 순간 나와 연을 맺은 식구들이, 죽지 않도록.
"하늘이여."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반드시.
반드시 가족들의 운명을 바꾸리라 맹세했다.
"이번에도, 바꿔 보이겠습니다."
그리고, 세월은 흐르고 흘러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전명훈이 마침내, 원영기를 앞두게 되었다.
천겁 (2)
콰르르르릉!
붉은빛의 기둥이 나를 향해 내리꽂혔다.
나는 경쾌하게 보법을 밟으며 목검으로 빛의 기둥을 후려쳤다.
꽈과과광!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그 여파에 번개가 그대로 뒤쪽으로 밀려나는 듯한 착각까지 보였다.
명백한 원영기 급의 일격.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 일격을 펼치는 이는 원영기가 아닌 결단기 대원만이라는 것이었다.
꽈르르릉!
전명훈의 주변으로 칠색의 번개가 뿜어져 나와 여섯 개의 깃발로 변화했다.
쿠구구구구!
여섯 개의 깃발을 손에 쥔 육비의 거신이 나타나 나를 향해 주먹을 내뻗는다.
하지만 나는 순간, 천지를 부수는 거신의 틈새를 포착해 냈다.
천지가 부서지는 순간에도 내가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이 보인다.
파앙!
나는 정지된 세계로 진입하여 일 보를 디뎠다.
쿠과과광!
거신이 내리친 벼락의 채찍이 대지를 파헤쳤다.
이 보.
나는 부서진 돌조각을 향해 뛰어올라, 돌조각 위에서 다시 자세를 잡았다.
거신의 머리가 둘로 쪼개지며, 그의 등 뒤로 거대한 태극의 형상이 떠올랐다.
삼 보.
나는 그대로 거신의 머리를 향해 뛰어올라, 거신의 쪼개진 머리 틈으로 들어가 허공을 밟고 춤을 추었다.
필요 없는 힘은 쓸 필요 없다.
필요한 힘만을 최적의 순간에, 극한으로 압축해서 최고의 속도로 내지른다.
단악검법(斷岳劍法).
제이십칠초(第二十七招).
도잠(導岑).
지난 세월 간.
정지된 세계에서 반쯤 미친 채로 지내며 개화해 낸 단악검법의 새로운 가지.
피이이잇!
검기가 마치 실처럼 검 끝에 맺힌다.
기(氣)는 압축하면 어찌 되는가.
순수한 기(氣)의 덩어리는 결국에는 생명력으로 화한다.
생명력으로 화하기 직전의 단계가 검강.
그리고 그 검강에 의식을 쪼개 넣어, 준 생명체나 다름없이 만드는 단계가 검환이다.
그렇다면, 검강에서 의식을 불어넣지 않고 더더욱 검강을 압축하면 어떻게 될까?
꾸드드드득!
순수한 생명의 정화(精華)가 검에 맺혔다.
이렇게 만들어진 생명의 정수는 상대를 공격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렇게 만들어진 생명력은 상대를 치료했으면 치료했지, 상처를 입히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상대를 상처입히지 못한다는 뜻은 상대가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는 뜻이었고, 그는 상대가 알아차리기 힘들다는 뜻이었다.
슈칵!
도잠으로 만들어진 기의 실이 뇌신의 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대로 녀석의 목 위쪽에서 날아오르며 손을 뻗었다.
츠츠츠츠츳!
그와 동시에, 녀석의 두 개의 목 위로 실선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녀석에게 붙은 도잠은 그대로 녀석의 기운을 빨아들이며 빛나더니 일순간 폭발해 버렸다.
콰과과광!
전명훈의 목이 날아가 버렸다.
상대에게 압축한 검기를 생명력으로 속여, 알아차리지 못하게 밀어 넣어 시간을 두고 체내에서 상대의 생명력을 흡수해서 죽음으로 이끄는 기술.
그것이 도잠(導岑)이었다.
[으오오오오오!]
그리고, 목이 없어진 거신이 비명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적색의 번개를 근간으로, 무수한 색상의 번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금신천뢰문에 현존하는 '모든 공법'들의 법술들이 녀석의 주변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랬다.
녀석은 이제 금신천뢰문에 존재하는 모든 공법의 법술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전명훈은 금신천뢰문의 공법 중 단 하나.
적뢰진경밖에 익히지 않았다.
한 마디로, 전명훈이 보여 주는 저 금신천뢰문의 모든 공법은, 전명훈이 적뢰진경을 진화시켜서 만들어 낸 새로운 공법의 일환이었다.
'저게 아마, 양수진이 말한 적뢰천겁공이겠지.'
아마 적뢰천겁공의 경우, 세계 인권 선언 같은 복잡한 경로가 아닌 그저 자신의 명을 지닌 종명자가 금신천뢰문의 기본공인 적뢰진경을 익히기 시작하면 그를 통해 익힐 수 있는 구조인 듯싶었다.
전명훈의 주변으로 수천에 달하는 법술들이 떠오른다.
무수한 주술문자와 뇌전의 화살, 벼락의 창과 뇌룡의 머리들이 나타나 기운을 끌어모은다.
그리고, 일시에 수천 개의 법술들이 나를 향해 발사되었다.
도저히 피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목검에 두른 검기 이상의 기운을 끌어낼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저 법술들을 파훼해야 하는가.
나는 정신을 가라앉혔다.
마치 맑은 수면처럼 정신이 착 가라앉는다.
그와 동시에, 나는 어떠한 '감각'을 느끼는 데에 성공했다.
최근 들어, 나는 어떤 감각을 느끼기 시작했다.
의념은 아니었다.
천족의 시야도 아니었고, 지족의 영기도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제4의 감각.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처럼 맑게 만들어, 그 상태로 상대를 비춘다.
맑게 비춘 수면 위로, 전명훈이 날려 보낸 수천 개의 법술들이 비춰 왔다.
보인다.
저 법술들에 깃든 '의도'가.
아니, 법술에 깃든 '마음'이 느껴진다.
'심족 구현 3단계의 감각인 건가…?'
단순히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뭔가 심족의 그것과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아주 미묘하게, 정말로 미세하게 결이 달랐다.
여하튼 나는 새로 생겨난 그 감각에 집중했다.
전명훈이 날려 보낸 법술들의 의도를 보며, 나는 어쩐지 저 '의도'들을 역순으로 풀어헤쳐 술법 그 자체를 파해(破解)해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부웅, 부웅, 부웅!
나는 무형검을 쓰지 않고도, 법술들의 가장 약한 점에 검을 가져다 대며 전명훈이 날려 대는 법술의 술식을 역순으로 전부 파해해 버리며 녀석이 쏘아 내는 무궁무진한 폭격을 뚫고 날아갔다.
다음 순간.
빙글!
나는 거신화한 전명훈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어 다시 한번 도잠의 초식을 사용했다.
촤아아악!
잠시 후.
거대한 거신이 쓰러지고, 전명훈이 그 안쪽에서 나왔다.
"…원영기에 이를 때까지 결국 한 번도 못 이겼군."
"이만하면 충분히 선전한 셈이다."
"괴물 같은 놈. 아무리 그래도 법술들의 법력 흐름을 전부 역으로 되짚어 파해하다니…."
딱딱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전명훈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나 역시 뇌도공법은 전부 익혀 봤으니 가능한 거다. 아마 다른 속성의 법술이었다면 불가능했겠지."
말 그대로, 내가 전명훈의 뇌도법술을 파훼할 수 있었던 비결은 내가 뇌도공법 자체에 엄청난 이해도를 지니고 있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녀석에게도 비밀이긴 했지만 이 '감각'이 차후에 더 개화하면 뇌도공법이 아닌 다른 것들도 어떻게든 파해할 수는 있을 것 같긴 했다.
'다만 거기까지 가려면 최소 천 년 단위로 수련을 해야겠지만….'
전명훈은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씨익 웃었다.
"원영기에 오르면, 네놈도 각오해야 할 거다. 서은현!"
"하하, 기대하지."
나는 선선히 웃으며 전명훈을 응원해 주었다.
"그럼 본문에서 준비도 전부 끝내 놓았을 테니 가 보도록 하자."
"흥!"
전명훈은 나를 바라보고는 짜증 난다는 듯이 먼저 뇌도봉으로 출발했다.
뇌도봉에는 무수한 천인기 원로들, 원영기 장로들이 천상금뢰지체의 원영기 등극을 지켜보기 위해 모여 있었다.
그리고 홍수령이 뇌도봉의 정상에 불상사를 대비한 진법을 깔고 있는 중이었다.
"왔느냐. 이쪽에 와서 서 있어라, 전명훈."
홍수령은 진도에 주술문자를 하나 새긴 후 전명훈을 진도의 중심으로 불렀다.
지난 20년간, 홍수령도 경지를 탈피하여 천인 후기에서 어느덧 천인기 대원만의 자격을 갖게 되었다.
이제 그녀는 진휘, 금진찬 등의 최고 원로와 함께 사축기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수성, 귀수성, 유수성의 기운이 조금 있으면 차오를 게다. 원영기에 오를 준비를 해라."
홍수령은 천기를 바라봐 시운을 읽고는 말했다.
전명훈에게 가장 잘 맞는 별자리는 정수, 귀수, 유수였으므로 녀석은 그 때에 원영기에 오르는 것이 가장 적합했다.
그는 진법으로 들어가기 전, 주변을 둘러보더니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금소해였다.
파직!
일순간 번갯불이 되어 금소해에게 날아간 전명훈은, 그대로 금소해를 껴안았다.
"…그동안 모자란 나랑 함께하느라 고생 많았어, 소해. 앞으로는, 조금 더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 줄게."
"…아냐, 지금까지도 충분히 훌륭한 모습이었어. 너도 그동안 고생 많았어."
원로진들은 두 청춘을 보며 껄껄 웃었고, 금벽호 역시 예전보다는 훨씬 풀어진 눈으로 전명훈을 바라보았다.
나는 전명훈을 보며, 어느덧 전명훈 역시 금신천뢰문과 가족이,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파지직!
다시 진법의 중앙으로 돌아온 전명훈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시운이 맞춰졌다.
우우우웅!
전명훈은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금단에 기운을 끌어모았다.
파지지지직!
녀석이, 기(氣)의 계위에서 기운을 끌어모아, 더더욱 높은 계위를 향해 오르기 시작한다.
의식과 기운이 혼합되며, 녀석이 원영을 응결하기 시작한다.
깨달음은 문제가 없다.
금신천뢰문의 원로와 장로들이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해 주기도 했거니와, 내가 창천개벽문의 방식으로 녀석에게 음양이기를 두들겨 패서 주입시키기를 수십 번 해 보았기에 원영에 대해 싫더라도 감을 잡을 수밖에 없을 터였으니.
우우우웅!
천지간의 영성이 전명훈에게 일순간 몰리는 듯싶더니, 녀석의 단전에서 새하얀 빛무리가 터져 나왔다.
천족 수도자가 원영을 맺을 때 일어나는 현상!
그와 동시에, 하늘이 울리며 천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나는 전명훈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아랫배에 아기 형태의 영체가 응결되는 게 보인다.
저 말인즉, 전명훈은 지금 시점에서 주마등을 한 번 겪어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녀석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 깃들었다.
그리고.
파아아아앗!
마침내, 전명훈이 원영을 전부 응결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제 남은 고비는 천겁의 고비뿐.
하지만, 금신천뢰문의 그 누구도, 전명훈이 천겁을 겪으며 난항을 치를 것이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천상금뢰지체였으니까.
콰르르릉!
쌍색의 천겁이 내리쳤다.
하지만, 쌍색의 천겁은 전명훈에게 닿기가 무섭게 그대로 그에게 빨려들어 갔다.
그와 동시에 전명훈의 수행이 원영 초기에서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원영 초기에 이르러서 10년은 내리 수행해야 할 수준의 법력이 전명훈의 원영에 쌓인다!
파칙, 파지직….
그는 눈을 뜨며 기분 좋다는 듯이 앉은 채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지막지한 천겁을 맞았음에도, 괴롭다거나 고통스럽다는 기색은 없었고 도리어 시원한 안마를 받은 듯이 개운하다는 표정!
쿠릉, 쿠르르릉!
계속해서 천겁이 내리치며 전명훈의 힘을 증가시켜 주고 있었다.
전명훈에게 천겁은 단약인 동시에 법보였다.
받아들여 법력으로 전환시켜도 되고, 체내에 저장했다가 금단에서 배양시켜 진짜 법보처럼 휘두르고 다녀도 되는 것이 전명훈에게 있어 천겁인 셈.
그리고 나는 녀석이 원영기에 들어가기 전, 천겁을 법보화시키는 게 아닌 바로 흡수해서 법력화하라고 조언을 해 주었고, 녀석은 착실하게 내 조언을 따라서 벼락을 법력으로 치환시키는 중이었다.
'아마 저대로만 가면, 원영 중기도 잘하면 반년 안에 도달할 수 있겠어.'
빈말이 아닌, 원영 초기에 막 들어서자마자 저런 무지막지한 '영약'을 계속해서 퍼먹고 있으니, 원영 중기에 도달하는 데에 반년도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원영기부터는 경지 내에서 한 단계를 올라가려 해도 천겁이 내려치니, 전명훈은 원영 중기에서도 이런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즉, 원영기에 들어선 순간부터 전명훈은 어마어마하게 빠르게 수련할 수 있는 기반이 갖춰진 셈이었다.
'원영기까지 오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렸지만, 이후부터는 탄탄대로일 터다.'
나는 씨익 웃으며 전명훈을 바라보았다.
전명훈의 성장이 순조롭다.
그 말인즉슨, 내가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계획했던, 천뢰번 탈취 계획을 시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으니 말이었다.
'문파를 배신하지 않고, 전명훈을 내세워 천뢰번을 봉인하자. 그래, 그게 가장 알맞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전명훈이 원영기의 금색 천뢰를 흡수하며 붉은 벼락으로 전환시키기 전까지는 말이었다.
찌릿!
최근 생겨난 제4의 감각에, 이상한 무언가가 잡히기 전까지는 말이었다.
'뭐지? 전명훈, 뭔가가 이상하다….'
나는 눈을 찌푸리며 그 감각에 집중했다.
잘은 느껴지지 않았다.
희뿌연 느낌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무엇인가가 전명훈에게 '이어진'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이건….'
그랬다.
전명훈에게, 어떠한 [의도]가 붙어서 쭈욱 실선처럼 어딘가와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감각은 짧았고, 다시금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뭐지?'
전명훈이 적뢰진경.
아니, 적뢰천겁공이라 생각되는 공법을 운용하며 원영기 천겁을 흡수했을 때 잠시 틈이 보이며 느껴졌던 감각이었다.
나는 천천히, [의도]가 이어져 있던 곳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감각은 사라졌지만, 감각이 가리켰던 곳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곳은,
"…설마."
봉뢰당이었다.
불길한 느낌은 조금도 없었고, 천기도 맑았다.
하지만 나는 긴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후.
모두가 전명훈을 축복하는 틈을 타 봉뢰당으로 날아갔다.
* * *
파아아앗!
봉뢰당의 정문은 현재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았다.
모두가 시조 양수진의 육신을 타고난 천상금뢰지체 전명훈의 원영기 도전을 보러 갔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는 손쉽게 봉뢰당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나는 흠칫 놀라 봉뢰당 안쪽으로 들어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여긴 어쩐 일이니, 얘야?]
봉뢰당 깊은 곳.
그곳의 제단 위쪽.
뽀얀 발을 드러낸 백색 장발의 여인이,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가린 채 내게 묻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갑자기 정욕이 들끓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들어 덮치고 싶다.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녀를 안고 싶다!
뿌드득….
나는 이를 악물며 그 자리에 멈춰서 기묘성심전으로 의식을 맑게 했다.
그리고 나는 정려를 쳐다보며 눈에 핏발을 세웠다.
"선배님께서는 후배를 그만 희롱하시기 바랍니다."
우우웅!
멸신겁천(滅神劫天)!
체내에서 투명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그와 동시에 정려의 고혹적인 미소가 일순간 뇌리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정려가 나를 향해 팔을 벌렸다.
[아아, 금신자가 사용했던 희생제(犧牲祭)로구나. 아하하, 희생 제물도 준비해 놓지 않았으면서 인간의 몸으로 그 흉한 제의의 재액을 어찌 감당하려고 내 앞에서 자랑질을 하는 게냐?]
찌이잉!
"크으윽!"
[제물이 없어 아직 미완성인 그 선술(仙術)은 기껏해야 특이한 뇌도공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삼천세계 삼라만상 천겁(天劫)의 도(道)를 걸으며 뇌도공법을 익힌 이들은 결코 내게서 벗어날 수 없나니….]
얼굴이 시뻘게졌다.
잠시 잦아드는가 했던 정욕이 다시금 미칠 듯이 끓어올랐다.
'원래, 천뢰번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분명했다.
무언가 수작을 부려, 그간 어찌어찌 제약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일 터.
원래는 간혹가다 천뢰번의 음성을 들어도 그냥 일반인의 음성을 듣는 것과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의 음성 하나하나가 내 뇌를 휘어잡고, 하복부에 피를 부글부글 끓게 하는 것 같았다.
'뇌, 뇌가… 이상해…!'
뇌 속의 뇌전이 이상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도저히 통제가 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아무런 저항도 없이 정려에게 달려들어 당장이라도 그녀를 덮쳐 버릴 것 같았다.
[내게 오렴. 내게 안기렴. 내 발에 입을 맞추렴. 네게 지고의 쾌락을 선사할 터이니… 한 가지만 약조해 다오, 아이야….]
"끄으으으윽!"
얼굴에 핏줄이 줄기줄기 돋아났다.
코에서 피가 터져 나와 봉뢰당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내 이름을 불러 줄 수 있겠느냐?]
"흐아아아아아!"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이 절로 움직여 그녀에게로 향한다.
뇌리로, 지난 생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말 한마디에 무고한 사람들이 일거에 천벌의 주인에게 귀의했던 그 장면.
내 어리석은 한마디 말로 인해 학살당했던 금신천뢰문.
[이리 온, 얘야….]
쿵, 쿵, 쿵, 쿵!
욕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심장 소리가 미친 듯이 크게 울렸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그녀의 새하얀 발이 너무나도 탐스럽게 보였다.
그 발에 가까이 갈 때마다 너무나 큰 기대감과 행복감이 뇌를 지배한다!
쿵!
그녀에게 도달하기 전.
약 다섯 보를 남겨 두고, 나는 가까스로 다리를 제어해 걸음을 멈추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잠시간의 유예일 뿐.
나는 곧이어 내가 달려들 듯이 그녀에게 다가가리란 것을 예감했다.
"그만… 하시지요."
[내 이름을 불러 주겠느냐?]
"그것은 아니 될 것 같습니다…."
[저런, 쾌락이 부족했나 보구나.]
그녀가 나를 가리켰다.
"…!"
어느새 내 상의가 벗겨져 있었다.
다시 그녀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마치 그 섬섬옥수로 나를 어루만지는 듯한 손놀림.
그저 허공을 쓰다듬는 것이었으나, 나는 어느새 알몸이 되어 있었다.
'무슨…!'
그녀가 벗긴 것이 아니었다.
내 몸을 시켜 벗게 한 것이었다.
나는 전신을 가릴 수가 없게 된 상황에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이를 악물었다.
[자, 준비가 되었다면 이리 온….]
"그만…."
전신이 내 말을 듣지 않으려 한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다!
당장이라도!
나는 머릿속으로 천벌의 주인에게 폐허가 되었던 천인도를 떠올렸다.
그리고, 김연을 떠올렸고, 북향화와 무색유리검을 떠올렸으며 홍수령을 떠올렸다.
"그만… 하라고…."
쿵!
다리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한 발을 더 디뎠다.
그리고, 나는 팔을 움직였다.
그 상태로, 고환을 잡은 나는.
뿌득… 뿌드드드득…!
"그하아아아아아!!!!!!!"
고환을, 뽑아 버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아!!!"
투욱!
[….]
"흐아아아아! 끄아아! 흐, 흐하하, 그아하하!"
입에서 침이 질질 흐른다.
아프다!
정말 살면서 느껴온 수많은 고통 중에서 순위권에 들 정도로 극심한 격통이 내 머리를 징징 울렸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내 정욕이 모조리 쓸려 나가고, 팔다리가 자유를 찾았음을 인지했다.
"하…하하하… 내가…."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피눈물이 절로 나온다.
나는 피눈물을 뚝뚝 흘리며, 뽑아낸 고환을 손아귀에서 터트려 버렸다.
"그만하라고… 했다…."
저벅.
이번에는, 내 의지로 그녀에게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의복의 술법을 펼쳐 다시 옷을 입은 나는 고통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정려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사랑해 준 사람들이 있다. 나를 모욕하지 마라."
고통 속에서 그녀의 지배를 벗어난 나를 보며, 내 기세에 압도당한 것인지 정려는 처음으로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미쳤군.]
저벅.
나는 한 걸음을 더 디뎠다.
그녀는 제단 위에서, 나와 최대한 멀어지려는 듯 슬금슬금 뒤로 가기 시작했다.
이미 내 기백에 완전히 압도당해 있었다.
[어찌 사바세계의 필멸자가 오욕(五慾)의 기관 중 하나를 그리 망설임 없이 떼어 낼 수 있단 말이냐…! 너는 누구냐. 나는 필멸자 출신 중에서 너 같은 존재를 본 적이 없다…!]
"나는…."
콰악!
나는 정려의 목을 잡아챈 채로 그녀를 들어 올렸다.
정려는 내 손아귀에서 발버둥을 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익숙한 깃발로 변해 버렸다.
"…서은현이다."
난 깃발을 향해 서슬 퍼런 눈빛으로 물었다.
"대답해라. 그동안 뭘 꾸민 거지?"
천겁 (3)
"말해라."
치직, 치지직…!
고통 때문에 감정이 격해진 것일까.
츠츠츳!
내 주변으로 하나둘.
시꺼먼 저주문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말해라…!"
츠아아아!
이윽고 저주문들은 내 주변으로 마치 강물처럼 흐르며 넘쳐나기 시작했다.
"말해!"
쿠구구구!
저주문의 폭포가 나를 중심으로 뽑혀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머금은 저주문을 정려에게로 잔뜩 불어넣었다.
선보라서 인간과는 정신 구조가 다른 탓인지, 인간만큼 확실하게 고통이 불어넣어지진 않았다.
일반적인 생명체에게 저주문 하나가 100의 고통을 준다면, 선보에게는 0.01 정도의 고통만이 들어간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저주문을 1만 개 정도만 쓰면 충분히 선보에게도 고통을 전가할 수 있는 것이다.
콰과과과!
천뢰번의 안쪽으로, 무수한 저주문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갔다.
[…!]
천뢰번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말해라, 너는 뭘 하려 한 것이지?"
얼마간 고통에 겨워하던 정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궁금한가…?]
천뢰번 안쪽에서 어딘가 나를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와 함께, 나는 또다시 정려의 '의도'로 된 실 같은 것이 저 멀리로 이어지는 것이 보였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냔 말이다!!!"
쏴아아아―
저주문으로 된 비가 봉뢰당 전체에 내렸다.
시커먼 저주문에, 봉뢰당의 바닥이 썩어들어가고 부식되기 시작했다.
[광인(狂人)아… 내 잠시 놀라긴 했지만… 어리석구나. 차라리 내게 안겨 쾌락을 느끼고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면 평안하게 주께 귀의할 수 있었을 것을….]
그와 동시에, 그녀의 '의도'가 이어진 곳으로부터 무언가가 날아왔다.
콰르릉!
봉뢰당 바깥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폭증하기 시작했다.
찌릿, 찌릿!
대기에 정전기가 흘렀다.
'전명훈이… 원영기에 오른 건가?'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단순히 녀석이 원영을 얻었다기에는, 주변에서 흐르는 기의 흐름이 너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뭔가가 일어난 건가?'
나는 천뢰번을 노려보았다.
[필멸자 수준에서 사용하는 저주문은 귀찮긴 하지만 정신을 명(命)의 계위로 올려서, 정신 구조를 변화시켜 버린다면 아무런 고통도 없지. 네 고문은 아무 소용이 없단다.]
"너…!"
[그리고….]
어느덧, 정려는 다시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였다.
그러자 내가 잡고 있었던 천뢰번의 깃대는 어느새 정려의 발목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명훈이 있던 방향에서 도착한 투명한 무언가를 쥐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쩌엉!
그녀가 허공을 향해 투명한 무언가를 내리쳤다.
나는 순간, 제4의 그 감각에 어떠한 '의도'가 보였다.
그 '의도'는 마치 쇠사슬처럼 얽혀서 금신천뢰문 곳곳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녀가 투명한 것을 내리치자 쇠사슬은 그대로 끊어져 버렸다.
파앙!
싸아아아―
그와 동시에 그녀에게서부터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요사한 기운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아하하, 이제 딱 한 겹만이 남았단다. 마지막 사슬은 양수진의 본체 급이 아니라면 풀 수가 없겠지만… 그래도 내 권능의 티끌만큼의 편린이라도 다시 사역하는 게 가능할지어니….]
따악!
그녀가 요사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아이야. 너는 나를 막을 수 없단다. 이미 너무 늦었어.]
그와 함께.
찌이이이잉!
그녀의 주변으로 기묘한 뇌전의 힘이 뿜어졌다.
쿠구구구구구!
'이게 무슨…!'
그 힘은 계속해서 범위를 키워 나가며, 이내 금신천뢰문 전체를 뒤덮고, 뒤이어 뇌령도 전체를 덮어 버릴 정도로 넓게 퍼졌다.
그와 동시에.
치지직!
"…!"
뇌내의 뇌전이 기이하게 움직이며 온갖 감정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너…!"
고환을 적출해 내며, 내 혼(魂)의 색욕을 관장하는 부분마저 일부 잘라 내어 적출했다.
물론 원영기에 이른 만큼 영혼 역시 상당한 기운을 품은 바, 혼 역시 시간이 지나면 재생이 될 터였다.
그리고 그랬기에 나는 정려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안쪽에서 천뢰번을 쥐고 싶다는 욕정이 끓어오르는 걸 쉬이 누그러뜨리기 힘들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런, 빌어먹을!"
색욕을 잠시간 적출해 버린 나조차 욕정이 끓어올랐다.
그렇다면, 나 정도의 정신력을 가지지 못한 다른 이들은 도대체 어떤 정도란 말인가?
쿠구구구구!
아니나 다를까.
콰앙!
봉뢰당의 문이 박살 나며, 금벽호와 다른 원로진들이 어딘가 들뜬 얼굴로 봉뢰당으로 들어왔다.
금벽호는 숨을 몰아쉬며, 어딘지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금은현 장로? 봉뢰당에 와서 천뢰번을 들고 있지? 장로가 천뢰번을 만지려면 최소 차기 장문인의 위는 달아야 한다만…?"
"…죄송합니다. 잠시 천뢰번을 보며 알아내야 할 게 있었습니다."
"오, 그런가? 뭐, 일단 알겠네. 나도 잠시 천뢰번을 들고 해 볼 것이 있으니 잠시 줘 보게나."
금벽호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금은현 장로?"
그리고,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태상장문. 잠시만 제게 시간을 더 주실 순 없으십니까?"
"…무슨 말을… 금은현 장로. 본문의 신물인 천뢰번은 본래 장문의 위를 가진 이만 만질 수 있게 된 신물일세! 아직 차차기 장문인 자네가 만져선 안 돼! 어서 내게 내놓아라!"
금벽호는 갑자기 분노를 터트리며 충혈된 눈으로 내게 일갈했다.
평소라면, 내가 천뢰번을 가졌다고 해도 절대로 저런 식으로 내게 소리를 지르진 않았을 것이다.
나를 천상금뢰지체보다도 더 뛰어난 완벽한 천재라고 알고 있었고, 나를 종문의 미래라고 생각해 왔기에.
내가 천뢰번을 만진다 하더라도 점잖게 타일렀다면 타일렀지, 저 정도로 노갈성을 지를 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런 금벽호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홀리셨군요. 이 요물(妖物)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한 번만 더 이상한 소리를 하며 항명하면 형뢰동(刑雷洞)에 가둬 10년간 면벽을 명하겠다! 마지막으로 명하니, 천뢰번을 내놓거라!"
치직, 치지지직!
뇌 속의 전기 신호가 꼬이며 천뢰번을 더더욱 가지고 싶은 욕망이 자극된다.
천뢰번을 품에 안고 싶다.
만지고 싶다.
핥고 싶고, 다루고 싶고, 휘둘러 낙뢰를 쳐 보고 싶다.
천뢰번의 힘을 휘두르고 싶다.
아마 지금 온 금벽호와 원로진들 역시 같은 생각일 터.
그러나 나는 천뢰번의 의념.
그리고 '의도'를 읽었다.
'금신천뢰문의 인물들을 홀리게 한 후,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줄 요량이겠지.'
하지만 나는 욕망을 지그시 눌러 버리며 천뢰번을 더더욱 꽈악 쥐었다.
그녀는 내 손아귀에 깃발의 형태로 되돌아와 얌전히 들려 주었다.
과연 네가 어떻게 버틸까, 한 번 지켜보겠다는 듯이.
진휘가 소리쳤다.
"금은현! 사문의 어른들이 명하지 않느냐! 일단 빨리 천뢰번을 우리에게 넘겨라!"
"잠깐, 그보다 이 시커먼 기운들은 또 무어야?"
금진찬은 내 저주문들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이건… 흑색귀골곡에서 예전에 본 것 같은데…?"
"금은현 네놈! 뭘 익힌 것이냐!?"
"금은현!!! 일단 빨리 천뢰번부터!"
원로진들이 왁자하게 나를 향해 소리쳐 댔고, 나는 그들을 향해 그 자리에서 한 번 절을 올렸다.
"…죄송합니다."
"그게 무슨…."
"지금부터."
그들에게 절을 한 상태에서, 나는 천천히 저주문을 끌어 올렸다.
언제나 진선과 엮이면, 일이 이렇게 힘들게 꼬여 버린다.
"불초 어리석은 제자가… 사문을, 배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쿠과과과과!
내게서 일어난 저주문의 폭풍이 원로진들을 향해 쏟아져 갔다.
"하, 이깟 저주문쯤. 천인기에 오른 우리를 뭘로 아는 것… 끄아아아아악!"
"아아아악!"
"커, 꺼어어억!"
내 저주문을 맨몸으로 버티려던 원로들은 대다수가 거품을 물고 눈을 뒤집은 채 그대로 졸도해 버렸다.
감각 6만 배 증폭 독약을 먹고 받은 고통의 천 분지 일도 안 되는 고통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천인기 원로들은 그대로 졸도해 버렸고, 금벽호조차 일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잔인하기도 하구나, 은현아. 네 사문을 배반할 셈이더냐?]
천뢰번이 나를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뇌도공법을 익히는 모든 이는 내 매혹을 피할 수 없나니… 너는 지금 뇌령도 전체와 싸우겠다는 것이더냐? 우후후… 네가 정말로 그럴 의지가 있다는 것이더냐? 은현아. 나를 놓아주렴. 나를 다른 이에게 넘겨주렴.]
그녀는 내 이름을 부르며 내게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다.
하지만, 나는 딱딱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했다.
"닥쳐라."
[….]
저벅, 저벅….
쓰러진 원로진들을 지나치자, 이번에는 눈이 반쯤 돌아간 장로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금은현 장로!"
"이게 뭐요!?"
"원로님들에게 그 무슨…. 아니, 그것보다 천뢰번을 일단 주시오! 당신이 들고 있으면 안 되는 신물이오!"
"아니, 천뢰번은 그렇다 치고 저 시커먼 저주문들은 대체…."
"흑색귀골곡의 공법이다! 예전에 봤어!"
장로들은 이내 경악에 물든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 저, 저! 결국 사문을 배반하고 흑색귀골곡을 선택했단 말인가!?"
"저 무슨 간악한…! 저 간적에게서 천뢰번을 뺏어라!"
"사문의 신물을 목숨 걸고 사수해라!"
다들 정려의 매혹 때문에 정상적인 논리 회로가 작동하지 않는 것인지.
내 말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들은 눈이 돌아가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그저 쓴웃음을 지으며,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쿠구구구구!
고환과 영혼 일부를 적출했기 때문일까.
그 고통이 아직도 생생했고, 나는 그 고통을 기반으로 저주문들을 생성해 냈다.
삽시간에 봉뢰당이 썩어 버릴 정도로 무수한 저주문들이 쏟아져 나왔고, 저주문의 안개가 뇌운봉 정상을 뒤덮었다.
"흐아아아아!"
"끄아아악! 끄, 끄아아악!"
"아, 아파! 너무 아파…!!!"
장로들 역시 내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대다수가 졸도해 버렸다.
딱히 외상은 없었고, 이들 역시 대다수가 한잠을 자고 나면 멀쩡히 일어날 터였다.
나는 씹어뱉듯이 정려를 쳐다보며 말했다.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것이다."
[아하하… 무섭구나.]
"…진짜 무서워하고 있군."
[….]
"똑똑히 기억해라. 내가, 내 손으로 사문을 배반하도록 하게 한 죄는 결코 쉬이 갚게 하지 않을 것이니…."
나는 내 광기 어린 시선을 피하려 애쓰는 정려를 한 번 쳐다봐 주고는, 뇌운봉을 내려갔다.
그와 동시에, 나는 저 멀리서 거대한 벽력 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꼈다.
쿠구구구구!
"허어…."
거대한 붉은 벼락이, 땅에서부터 하늘로 치솟으며 빛의 기둥을 만들고 있었다.
콰지지지직!
찌릿거리는 뇌기가 나를 건드렸다.
'저건 좀… 위험하겠는데.'
나는 저 무지막지한 뇌기를 느끼며 헛웃음을 흘렸다.
[내 도움에 힘입어 적뢰천겁(赤雷天劫)을 얻는 데에 성공하였구나.]
"뭐?"
나는 흠칫 놀라 정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내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붉은 뇌전의 기둥을 뿜어내는 전명훈을 향해 말했다.
[이리 오렴, 명훈아. 내 덕에 신(神)의 뇌전을 얻었으니 나를 도와다오.]
그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문을 배반한 악적이 있단다.
수십 년간 속내를 속인 채 사문에 숨어들어,
원로들과 태상장문을 공격하고,
사문의 신물을 훔쳐가려는 악적이….
어서 이리로 와 그 악적을 처단하고 금신천뢰문의 정의를 바로잡으렴….]
"너…!"
우르릉!
그녀의 음성이 전명훈에게 전해진다.
내가 막으려 했으나, 그녀의 '음성'은 무언가 형이상학적인 방법으로 전명훈에게 향했기 때문에 내가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빠르게 전음부 두 장을 꺼내 들었다.
전음부는 각각 연진과 홍수령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홍수령, 연위! 약조를 지켜 주십시오, 오늘이 제가 말한 그때입니다!"
이윽고 홍수령에게서는 조금 놀란 듯했으나 알겠다는 대답이.
연진 쪽에서도 알겠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 말이 끝난 직후.
콰르르릉!
붉은 벼락이 나를 향해 몰아쳐 왔다.
콰앙!
나는 붉은 벼락 속에서 나를 후려치는 전명훈의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얻어맞아 금신천뢰문의 봉우리 한쪽으로 날아갔다.
콰아앙!
봉우리 하나가 그대로 폭발했고, 나는 무너진 봉우리 아래쪽에서 몸을 일으키며, 나를 후려친 전명훈을 노려보았다.
"…꽤 성장했구나."
"서은현."
안쪽에서, 완전히 벼락의 정령처럼 변한 전명훈이 씹어뱉듯이 물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네게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해라."
"나를 잠시만 믿어 다오. 일단 내게서 조금만 떨어져 있어라. 천뢰번에게 가까이 오면…."
콰르릉!
순간 뇌전이 번뜩이며, 다음 순간 전명훈의 수도가 내 머리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파앙!
나는 목검을 꺼내 전명훈의 수도를 쳐 냈다.
"잠깐 내 얘기를…."
콰릉, 콰릉, 콰르릉!
"잠깐…."
콰르르릉!
"잠시…."
번쩍!
꽈아앙!
무수한 뇌전의 빛이 번뜩이며 전명훈이 나를 몰아쳐 왔다.
나는 녀석의 상태 역시 상당히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너… 전명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이상했다.
전명훈이 익힌 공법이, 정말로 적뢰천겁이라면 그건 양수진의 공법일 터.
그런데 전명훈은 양수진의 공법을 익히고도 마치 정려에게 아무런 저항이 없이 홀린 것 같았다.
'멸신겁천에는 최소한의 저항 기능이 있었는데, 적뢰천겁에는 그런 게 없단 건가?'
[궁금하니, 은현아?]
내가 의아해하자, 옆에서 정려가 요사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내가 녀석을 인도해서 알려 준 공법은 금신자 양수진이 익혔던 본명공법, 적뢰천겁공이란다.]
"…."
[그리고, 양수진의 본명공법은 양수진 그 배신자 놈이 소싯적 내 주(主)께 직접 사사받은 공법….]
"…!"
[내가 주의 대리인으로서, '제자'인 전명훈을 유도하는 것뿐이니, 네 동료를 그리 걱정하지 말려무나. 별일 없을 거란다. 그것보다도 네 자신을 걱정하렴. 은현아….]
정려는 요사스럽게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
나는 어느새 전명훈과 공방을 주고받으며 구름을 뚫고 하늘 위쪽까지 올라와 있었다.
'쉽지 않군.'
나는 내가 숨겨 둔 것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적뢰천겁은 천겁의 주인께서 직접 창시하신 뇌도공법의 극점…. 우후후, 원영 초기에 든 전명훈이라도 충분히 천인기 대원만을 끝장 낼 수 있는 위력을 지녔….]
다음 순간.
쿠구구구구!
푸확!
구름 아래에서, 시커먼 형체가 치솟아 오르며 전명훈을 막아섰다.
콰악!
날뛰는 전명훈을 잡은 그것은, 흉흉한 안광을 빛내며 입을 벌렸다.
"가라, 서 장군."
금신천뢰문에서 수십 년 동안 머무르며 꾸준히 제작해 왔던 사축기 진본 서 장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