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화르르르르―
나는 불타는 산자락.
그곳에 쓰러져 있는 홍수령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피 칠갑인 것을 빼면 눈에 띄는 외상은 없었다.
"좋…구나…."
하지만, 자신의 수명을 모조리 끌어 쓴 홍수령은 죽어 가고 있었다.
9백 세에 가까운 그녀의 머리가 하얗게 세고 있었고, 그녀의 탱탱했던 피부는 쪼그라들고 있었다.
"서…은현…."
홍수령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검은, 봐 줄만, 했나…?"
생기가 빠져나가, 빛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홍수령은 나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최고였다."
"후, 후후…."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지 않으려 눈을 감으며 웃었다.
"하늘이 아니라, 당신에게 죽을 수 있어…."
생명력이 다 빠져나갔지만.
늙어 버려 언뜻 추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
내 눈에 지금 그녀의 모습은, 향화나 연이에게 못지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여자의 감인 것인지.
그도 아니면 자신보다 훌륭한 검수에 대한 존경인지.
그녀는 마지막에는 내게 존댓말을 쓰며, 그렇게 잠들었다.
"나도…."
영원히.
"너를, 좋아했다…."
이미 한참 뒤늦었지만.
나는 죽은 그녀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정을 주지 않겠노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정이란 계획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너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쌓여, 그렇게 다시 보니 어느새 태산이 되어 있는 것.
그것이 사람의 정이 아니던가.
세상 사람들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기에 생사를 가름하느냐(問世間 情爲何物 直敎生死相許 ― 안구사雁丘詞).
정이란 결국 세월이다.
켜켜이 쌓여 온 세월이 커지고 높아져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 정이었다.
나는 홍수령에게 그런 정을 가졌고, 금신천뢰문에게, 유화에게, 규백에게, 규련에게, 창호자에게, 오현석에게, 창천개벽문에게, 김연에게, 북향화에게….
여태껏 나와 함께 세월을 쌓아 온 모든 이에게 정을 주었고, 또 정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내게 정을 주고 가 버린 홍수령의 사체를 자리에 눕혔다.
주변은 나와 그녀의 전투의 여파에 화마(火魔)로 이글거렸고.
하늘에서는 천벌의 신(神)이 강림하고 있었으며.
금신천뢰문은 신을 직시함에 미쳐 가고 있었다.
이 미쳐 버린 세계에서, 나는 한 걸음을 디뎠다.
사라락….
백란(白蘭)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새하얀 백란은 홍수령을 뒤덮었다.
그리고 사방으로 퍼져 나간 그 흰 꽃은 화마를 잠재우고, 대지 곳곳을 밝혔다.
―운명을 이길 수 없다면, 하물며 운명의 안에서라도 선택을 하면 안 되는 거란 말이냐.
홍수령의 말이 뇌리를 울렸다.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멸신겁천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양수진, 당신은 이 세상 전체를 일컬어 비인간이라 했지.'
돌이 나무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도 찾아오는 것이 깨달음이라 한다.
나에게는 도려(道侶)가 생명을 불태우며 의지를 부딪쳐 주었다.
그 덕에,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양수진의 비인간론에는 근본적으로 모순되는 문제가 있다는 걸.
'운명의 노예이기에 삼라만상 모든 존재가 노예이며. 심족 역시 종명자에 의해서만 생겨 나는 이들이라면, 그래. 종명자가 운명을 바꿔 주어도 종명자에 의해서만이 운명을 바꿀 수 있으니 세상 모든 것은 노예이며 비인간이다. 하지만….'
저벅, 저벅, 저벅….
나는 뇌운봉으로 향했다.
저 멀리 뇌운봉 저편에서, 전명훈이 보였다.
뇌운봉에 모여 있는 무수한 장로와 원로들을 밑에 두고, 그는 하늘을 날아올라 천뢰번에게 뭔가를 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천겁이 내리쳐 모두가 튀겨졌어야 했건만, 천인기까지 성장한 전명훈이 뭔가를 하고 있었다.
'운명이 절대적이라면, [운명을 다하지 못하는] 약자는 무엇이란 말인가.'
운명이 완벽하며 전능한 것이었다면.
모든 존재에게 부여된 운명은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필연이었다.
하지만, 어떤 약자들은 운명을 다 살지 못하고 그 이전에 죽기도 한다.
나 역시도 본격적으로 수선을 하기 전.
수명이 정해져 있었기에 매번 같은 날에 죽었으나, 내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적도 많았다.
이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괴군에게 들었던 운명에 대한 설명에서도, 내가 봐 왔던 무수한 이들도.
모두 운명을 다하지 못한 이들이 무수히 많았다.
물론 이들은 운명조차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약자였다.
하지만 오히려 약자이기에 선택할 수 있었다.
운명을 극복할 수 없을지언정.
홍수령처럼, 운명이 찾아오기 전에 내게 죽음을 맞이하며 가장 바라던 것을 하고 죽었던 것처럼.
운명 안에서 바라는 것을 선택할 수는 있었다.
운명은 극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영원히 운명의 노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그 안에서 선택을 하고, '바라는' 것은 명백한 존재의 '자유'였다.
"비인간이, 아니다!"
애당초 양수진의 논리라면.
오히려 종명자야말로 가장 끔찍한 비인간이 아니던가?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명(命)에 따라 끊임없이 갈려 나가야 하지 않던가?
그렇기에 양수진조차도 운명을 부정하고자 했으면서도 운명을 행복한 것으로 바꾸려 하지 않았는가?
모든 것이 이미 운명에 의해 결정되어 있어 어떤 자유도 없기에, 혹자는 운명의 노예를 비인간이라 한다.
하지만, 운명에 의해 결정된 것이 있고 그것을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운명 외에 것을 바라고, 자신이 그를 선택하며 꿈꾸는 것만은 존재에게 부여된 자유이다.
'운명을 다하지 못하는 약자'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그 증명이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비인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홍수령은 월도입천에는 끝내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녀에게서 보았던 기개를 보아 그녀가 나를 만나러 오지 않고 조금만 더 깨달음을 갈무리했다면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경지를 가다듬는 것보다는 나와 만나서 붙는 것을, 그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였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지금 그 자리에서 움직이는 것을 자신이 선택한 것이었다.
저벅―
'그러니, 나도 선택하겠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등 뒤쪽으로, 홍수령과 전투를 벌였던 구역 전체가 백란축성문에 휩싸여 있었다.
"멸신(滅神)."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양 손을 뻗었다.
'내 가족들을, 구해 낸다!'
"겁천(劫天)."
등 뒤의 백란축성문으로 가득한 지역을 넘어, 그 주변으로는 시커먼 음혼귀주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음혼귀주문은 저주문의 바다를 이루며, 금신천뢰문의 영역 전체를 덮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내가 백란축성문으로 덮은 지역이 점처럼 보일 만큼 거대한 지역이 덮였다.
그 모습은 마치, 태음(太陰)의 안쪽에 소양(小陽)의 형상이 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촤라라라락!
검은 저주문들이 금신천뢰문 곳곳을 뒤덮으며 무수히 세워져 있는 깃발(幡)들을 흑색귀주번처럼 시커멓게 물들였다.
일대를 나의 저주문으로 장악하였다.
[흐아아아아!]
저 멀리서, 전명훈이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천뢰번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완전히 강림하지 못하고 있던 천벌의 주인이 이 세계에 완전히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느껴졌다.
쿠구구구구!
이제 이곳은 나의 제단이자, 저주의 성역.
지금부터.
"제의(祭儀)를 시작한다."
겁천(劫天) (2)
막아야 한다.
처음 전명훈이 [그것]을 목격했을 때 느낀 것은 그것이었다.
적뢰천겁공이, 번개의 목소리가, 그의 영혼 밑바닥에서부터 육신의 끄트머리까지.
전명훈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구성이 미친 듯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막아내지못하면죽는다.'
"흐아아아아!"
전명훈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금벽호에게 달려들어 그의 손에 들린 천뢰번을 빼앗아, 반쯤 실성한 듯이 '힘'을 불어넣었다.
기(氣), 혼(魂), 명(命).
세 계위의 단위의 본능이 전명훈을 이끌며, 적뢰천겁공의 힘을, 천상금뢰지체의 극한의 권능을 다루는 법을 강제로 그의 뇌리에 새겼다.
그는 거의 본능에 가깝게 천뢰번에 걸린 [봉인]을 강화함과 동시에, 천뢰의 힘으로 계위를 자극하며 차원 장벽을 뜯어 냈다.
번개의 목소리가 그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저 존재]는 이곳에 완전히 올 수 없노라고.
그저 천뢰번을 좌표로 시선을 드러낸 것이라고.
그러니, 천뢰번을 차원 바깥으로 쫓아내면 [저 존재]는 이곳에 올 수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말해 주었다.
전명훈은 눈이 뒤집힌 채로 거품을 물며 천뢰번의 봉인을 쥔 채 차원 장벽을 뜯고, 그 안으로 천뢰번을 밀어 넣으려 했다.
하지만, 천뢰번은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전명훈의 귓가에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하하하하하… 명훈아, 명훈아. 나의 고마운 명훈아.]
사락….
섬섬옥수를 지닌 백발의 여인이, 어느새 전명훈의 앞에서 그의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금신천뢰문을 멸해야 한단다. 주인께서는 너를 보아야 한단다. 위대하신 천벌(天罰)의 신(神)께오서는 금신자가 남긴 운명의 자락을 거머쥐시어, 그의 흔적을 지우셔야 한단다. 그러니 사랑스러운 명훈아, 그만두어라.]
"크으으으윽!"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는, 백발의 여인을 보자 전명훈은 뇌리 속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오는 걸 느꼈다.
그것은 '기억'이었다.
예전 봉뢰당에 들어가, 이 여인의 [이름]을 들었던 기억!
'왜, 왜 그동안 이 기억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던 거지?'
전명훈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그때 그 날.
서은현은 그에게 천뢰번에 대한 불길한 경고를 해 주지 않았던가.
설령 진실은 아닐지라도, 여태껏 전명훈은 그녀의 [이름]을 제외한 그때 그 순간의 기억 자체를 거의 잊다시피하고 살아왔었다.
하지만 이 순간.
전명훈은 정려를 보며 알 수 있었다.
"명훈아, 무얼 하는 것이냐!"
"왜 갑자기 천뢰번을 빼앗는 것이야!"
"네놈도 설마 서은현처럼 본문을 배신한 것이냐!"
그리고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눈이 돌아가, 천뢰번을 쥔 전명훈에게 고함치는 종문의 어른들을 보며 알 수 있었다.
적뢰천겁공이, 번개의 목소리가 말해 주고 있었다.
지금껏.
전명훈을 비롯한 금신천뢰문 전원은 이 요물(妖物)에게 단체로 홀려 있었다는 것을.
전명훈은 떠올렸다.
지금까지, 번개의 목소리는 [두 종류]였었다.
서은현이 배신하기 전, 적뢰천겁공을 알려 주었던 어딘가 끈적하고 요사한 목소리.
그리고 서은현이 천뢰번을 들고 도주한 이후, 요사한 목소리보다는 훨씬 약하고 작았지만, 부드럽고 깨끗한 목소리.
그는 오늘에서야 첫 번째 목소리의 주인이 눈앞의 존재임을 깨달았다.
"전명훈! 사문의 존장의 말이 들리지 않느냐!?"
[하늘]에 떠오른 저 존재가 보이지 않기라도 하는듯.
명백하게 모습을 드러낸 정려가 눈에 보이지 않기라도 하는 듯.
금벽호는 눈이 뒤집어져 전명훈에게 공격을 가했다.
콰르르르릉!
금벽호의 뇌전이 전명훈에게 떨어졌다.
뇌전은 곧바로 흡수되었지만, 전명훈은 천뢰번을 밀어 넣던 집중력이 분산됨을 느꼈다.
"네 이놈! 당장! 당장 천뢰번에서 손을 떼라!"
"서은현이라도 될 셈이냐, 배은망덕한 놈!"
"네놈!!!"
전명훈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가족들이, 그를 힐난하고 있었다.
그들의 본의가 아닌, 눈앞의 이 귀물에 의해서!
오직 적뢰천겁공과, 깨끗한 번개의 목소리만이 그를 정려의 마수에서 지켜 주고 있었다.
하지만.
[명훈아.]
다시금 정려가 전명훈의 이름을 부르자, 전명훈은 그 자신도 점차 팔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정려에게 이름을 불리자, 모든 것을 정려에게 맡기고 싶었다.
바치고 싶었다.
그녀에게 귀의하고 싶었다.
"아, 안 돼…."
전명훈은 하늘에 드러난 [저 존재]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저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금소해를 바라보았다.
"내, 내 가족이야…!"
[명훈아.]
그녀가 다시 한번 전명훈의 이름을 부르자, 전명훈은 공포스러운 감각에 휩싸였다.
그의 기억 속 깊은 곳.
갑자기, 그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는 유치원 시절을 떠올렸다.
그 당시 유치원 선생님이었던 정려가 전명훈의 전신을 쓰다듬으며 속삭인다.
―명훈아, 내 말을 잘 들어야 해.
'아, 아냐. 너 같은 선생은 없었어!'
초등학생 시절.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담임 선생님들이 떠올랐다.
전명훈의 담임 선생은 모두 긴 백발의 여인이었다.
'아냐,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마!'
중학교 때, 전명훈은 그의 짝이었던 백발의 소녀를 떠올렸다.
그리고 중학교 때의 담임도 3년 내내 백발의 여성이었었다.
'아, 아냐….'
고등학교 당시.
전명훈은 반에서 유행했던 머리를 떠올렸다.
그 당시 여자아이들은 모두 긴 백발의 머리를 하고서 학교에 왔었다.
잘 생각해 보면, 그의 학교 선생님들 중 여자 선생님들도 모두 백발에, 외모가 똑같았던 것 같았다.
'흐, 흐아….'
대학교 당시.
전명훈은 외톨이었었다.
왜냐하면 전명훈을 제외한 대학의 모든 존재가 백발의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명훈아.]
섬섬옥수로 전명훈의 뺨을 쓰다듬으며, 백발의 여인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전명훈의 눈이 바싹 졸아들기 시작했다.
그가 알고 있던 인물들의 얼굴이 전부 백발의 여인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는 SJD 컴퍼니에서의 동료들을 떠올렸다.
백발의 여성인 부장과 차장은 둘 다 등산을 좋아했다.
전명훈의 입사 동기인 백발의 여성 둘은 둘 다 전명훈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새로 들어온 신입 역시 백발의 여성이었다.
'아, 안 돼!'
전명훈은 계속해서 기억을 뒤졌다.
점차, 금신천뢰문의 인물들도 떠올랐다.
"그만! 내 머리에 들어오지 마!"
[명훈아….]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
소해의 얼굴이….
그리고 마침내.
전명훈은 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질렀고, 정려를 차원 균열에 밀어 넣는 것을 포기했다.
[흐아아아아!]
영기를 담아서까지 거대하게 비명을 지르며, 그는 황급히 금소해에게 달려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백발이 아닌 그대로의 금소해였다.
"전명훈…? 무슨 일이야?"
"소, 소소…소해…."
그리고.
찌이잉!
전명훈은 문득.
그에게 조언하던 '번개의 목소리'가 뭔가 달라짐을 느꼈다.
정려의 목소리같이 어딘가 음침하고 요사하지 않은, 약하지만 맑고 깨끗한 번개의 목소리.
그 번개의 목소리는 언제나 전명훈을 옳은 길로 인도해 주었다.
정려의 목소리는 늘 어딘가 거부감을 느꼈지만, 이 번개의 목소리만은 정말로 진실된 번개의 소리라 믿어 왔고, 그 자신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의지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전명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귀의할지어다….
약했지만 맑고 깨끗했던 번개의 목소리가, 갑자기 넋이 나간 것처럼 이상한 소리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귀의하라….
―귀의하라….
―귀의하라….
갑자기, '현상'에 불과한 번개가 미쳐 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악!"
"아아아아!"
"흐아아아아아!"
[저 존재]가 천뢰번의 인도에 의해 완전히 강림하자, [저 존재]를 보고도 천뢰번의 최면에 인지하지 못했던 금신천뢰문의 장로와 원로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
전명훈 역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비명을 질렀다.
'저게뭐야저게뭐야저게뭐야저게뭐야저게뭐야저게뭐야저게뭐야저게뭐야저게뭐야….'
위대한 존재가 시선을 두는 자리에, 천지영기가 급격하게 폭증하기 시작했다.
콰직, 콰지지지직!
그와 동시에, 천지영기를 흡입한 원로들의 전신이 하나둘 폭사(爆死)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육신이 폭발했을지언정, 원영만은 남아 후일을 도모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 중 어떤 이들의 원영도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원영기 장로들도, 천인기 원로들도, 터진 이들의 원영은 그 자리에 계속 붙박여, 공손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앉아 양손을 깍지 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어딘가 기괴한 그 모습에, 전명훈은 어느덧 금신천뢰문 전체가 시커먼 저주문으로 뒤덮였다는 것조차 알 수 없었다.
* * *
찌이이잉!
[아아, 나의 주(主)이시여….]
저 멀리, 정려가 하늘로 떠오른다.
나는 멸신겁천을 통해 겨우겨우 하늘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고작해야 눈 한짝일 뿐이며, 거기에다 양수진의 의지인 멸신겁천까지 발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이라도 정신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아마 같은 멸신겁천을 익혔더라도 다른 사람이라면 진즉 정신이 나가 귀의를 외쳤을 터였다.
'이제 시작된다.'
나는 무너지려는 정신을 겨우겨우 다잡으며, 덜덜 떨리는 몸을 통제해 제의를 발동시키려 노력했다.
'움직여라, 몸아! 제발 움직여!'
내가 공황 상태에 빠진 채로 몸을 억지로 움직일 때였다.
찌이이잉!
무언가 찌릿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나는 어떠한 [의지]를 전해 듣게 되었다.
이것은, 이것은…!!!
―광드한디의어체이내를에찾있았었으는니가지대금천부벌터의금정신화의여흔다적시을본삼선천에세게계귀에의서할지지울어지라니.
"흐으아아아아아!!!"
나는 칠규(七竅)에서 피가 줄줄이 뿜어져 나오는 걸 느꼈다.
들린다!
들린다!
위대하신 분의 [의지]가 들린다!
"귀, 귀, 귀의…귀…."
나는 피와 함께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렇게 엉엉 울어 젖히며 양손을 마주 잡으려 했다.
너무나도 잘 들린다.
지난 생에도 금벽호가 저분의 옥음(玉音)을 들었지만, 나는 못 듣지 않았던가?
어째서인가?
당연하다.
그때의 금벽호는 뇌도(雷道)라는 위대한 길을 걷고 있었으며, 나는 뇌도공법의 뇌 자도 모르는 비루한 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제는 나도 멸신겁천이라는 뇌도공법을 익혔으니 저분의 옥음을 들으며 귀의할 수 있는….
'멸신겁천!!!'
찌이이이잉!
나는 '멸신겁천'에 생각이 이르자마자 제정신이 드는 것을 느끼며, 저절로 움직여 기도하려는 자세를 취하려는 손을 막았다.
"후, 후후…."
식은땀이 흐른다.
저분, 아니, [저 존재]는 딱히 나를 조종하려거나 악의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냥 평범하게 정려에게 거대한 [의지]를 전했을 뿐이고, 뇌도공법을 익힌 내가 어쩌다가 [의지]를 엿듣게 되었을 뿐이었다.
심지어 [의지]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은 것조차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런 악의도 없는 [의지]를 엿듣기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각오와 결의가 한순간에 무너져 폐인이 될 뻔했다.
'이게, 나와 어선의 격차….'
나는 떨리는 전신을 간신히 일으키며 하늘을 계속 바라보았다.
푸콱!
양 눈알이 터져 버렸다.
상관은 없었다.
빠르게 눈알을 재생시키며 멸신겁천의 기운으로 눈이 터지는 걸 방지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제의를 시작했다.
우우웅!
멸신겁천을 발동하자, 천기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쿠릉, 쿠르르릉….
그와 동시에, 굉장히 익숙한 녀석들이 고개를 디밀기 시작했다.
먹장구름.
항상 내 수도를 방해했던 녀석.
연기기 시절, 얼마나 저 먹장구름에 절망했는가.
쿠구구구구!
일반적인 천기 현상이 아니었다.
멸신겁천으로 불러일으킨 저 먹장구름은, 내가 연기기 시절 천거를 일으켰던 [그] 먹장구름과 완전히 똑같은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저것은 운명으로 이뤄진 구름이었다.
정확히는, 재액(災厄)으로 이뤄진 구름이었다.
천벌의 주인의 시선이 잠시 먹장구름에 가려졌고, 주인과의 소통이 끊기자 하늘을 올려다보던 정려가, 내 쪽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재액이 모이고 모여, 하늘의 운명을 뒤틀 정도로 강력한 힘이 된다.
결코 상서롭지 아니한 제의.
그렇기에, 이 제의를 무사히 마치려면 희생 제물이 필요하다.
"바친다."
제의의 제물은 '금신천뢰'의 힘을 지닌 자로 한정된다.
그리고, 금신천뢰문에서 파문당했다는 것은 단순히 종문에서 쫓겨났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금신천뢰문과 '분리'되며,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금신천뢰문'이라는 의미가 되었다.
이는 내가 헌위에게 나 자신을 또 다른 금신천뢰문으로 인정해 달라고 한 근거이기도 한 것이었다.
금신천뢰문으로서 또 다른 금신천뢰의 힘을 지닌 제물들을 바치는 것.
그것이 멸신겁천.
하지만 그 말은, '자기 자신' 역시 제물의 범위에 포함된다는 뜻이었다.
나는 멸신겁천의 구결 중 일부를 역전(逆轉) 시켰다.
츠파아아앗!
저주와 축복의 본질은 마음의 유무에 불과했듯이.
어쩌면 마공과 선공의 차이 역시 마음이 흐르는 방식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양수진이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의도대로, 멸신겁천이 완전히 다른 형태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츠츳!
나는 의해은산으로 멸신겁천의 힘을 내 원영의 안쪽에서 음혼귀주문과 합일시켰다.
동시에, 나는 발동시킨 음혼귀주문과 백란축성문을 반전(反轉)시켰다.
파아아아앗!
그와 동시에, 거대한 태음(太陰)의 형태로 금신천뢰문을 뒤덮던 저주문들이 일제히 축문으로 반전되었고,
소양(小陽)의 형태로 태음의 중심을 잡던 축문은 소음(小陰)의 형태로 태양의 중심이 되었다.
음양이 반전되며, 동시에 그와 합일한 멸신겁천 역시 반전한다!
파츠츠츠츳!
곳곳에서 피어난 백란과 함께, 나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본래는 모든 것을 희생시켜 자기 자신을 완성하는 제의.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양수진의 유지는 개박살이 났다.
자기 자신을 희생시켜 모든 것을 지키는, 어떤 미치광이가 그의 유지를 잇게 되었으니 말이었다.
쿠구구구구!
하늘에 낀 재액의 먹장구름이, 나를 향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희생제로 바치나니, 운명이여. 부디!"
콰릉, 콰르르르릉!
먹장구름 곳곳에서 서슬 퍼런 청뢰(靑雷)가 번뜩이면서 금신천뢰문 전체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멸망의 운명을 비끼게 해 주십시오!"
콰르르르르릉!
사방으로 청뢰가 불어닥쳤다.
푸른 번개는 내 수행을 막아서며 나를 죽이려고만 했었지만, 지금 이 순간 내리친 청뢰는 죽지 않을 정도로 금신천뢰문의 모두에게 내리치며 그들에게 부여된 천기를 변화시켰다.
쿠구구구구구!
나는 먹장구름이 모조리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비릿한 식은땀을 흘렸다.
내 천기가 변화하고 있었다.
단순한 대흉이 아니다.
이런 흉액(凶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먹장구름이 내게 들어오며 다시금 하늘이 보이기 시작하자.
나는 천벌의 주인의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아….'
알 수 있었다.
천벌의 주인이, 격노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아까부터 나를 바라보던 정려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서은현.]
"…!"
[서은현.]
난 긴장을 끌어 올린 채 정려를 주시했다.
[서은현.]
정려가, 내 이름을 연이어 세 번 불렀다.
겁천(劫天) (3)
나는 마치 얼음굴에 빠진 기분이었다.
도대체, 천벌의 주인 앞에서 왜 내 이름을 세 번 부른 것일까.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
[….]
"…."
[….]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내가 의아한 기색으로 그녀를 볼 때였다.
그녀는 내게서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허공에서 천벌의 주인을 향해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리고.
콰르르르릉!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며, 정려에게 내리쳤다.
철컹!
그와 함께, 나는 정려를 묶고 있던 보이지 않는 사슬이 끊어진 듯한 느낌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주(主)를 대리하여, 나 대천벌의 정화가 금신의 후예들을 심판하나니….]
뿌득….
나는 이를 악물었다.
[멸망하여라.]
번쩍!
하늘이 밝게 빛나며, 금빛의 천뢰가 떨어져 내린다.
"…!"
그러나, 이전과는 달랐다.
이전에 뇌령도에 꽂힌 금뢰가, 저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무시무시한 금뢰였다면.
지금 떨어지는 금뢰는 확연히 그 크기가 작았고 기운이 약한 것이 느껴졌다.
벼락 한 줄기 한 줄기가 합체기 수사의 전력을 다한 일격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권능!
"크윽…!"
그 권능의 빛은, 뇌운봉 위쪽에서 휘황찬란하게 빛나며 스스로를 뽐내고 있었다.
쿠릉, 쿠르르릉!
하늘이 진동하며, 점차 끓어올랐다.
나는 내가 멸신겁천으로 무엇을 해 냈는지 알 수 있었다.
내 자신을 희생하여, 한 번에 멸망할 금신천뢰문을 천벌의 주인과 가까이 있는 순서대로, 차례대로 이전보다 훨씬 천천히 멸망하게 바꾼 것이었다.
"크윽…!"
우르릉!
하늘에 먹장구름이 다시 끼기 시작하며, 아래로 떨어지려는 금뢰를 잡아 두기 시작했다.
금뢰는 아래로 떨어져 내리려 했으나, 먹장구름에 잡혀 더 이상 떨어지지 못했다.
그렇게 수많은 금뢰들이 먹장구름에 잡혔으나, 결국 모든 금뢰를 잡아 둘 수는 없었는지
그중 한 개의 금뢰는 결국 뇌운봉으로 떨어져 내렸다.
"…!"
나는 이를 악물었다.
* * *
콰르르르릉!
빛이 천지사방을 뒤덮는다.
전명훈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금빛 속에서, 그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재가 되고 있었다.
"명…훈…."
금소해도, 그가 껴안고 있던 금소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보호해도, 아무리 껴안아도 금소해는 불타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천인기의 힘으로 천겁을 자신이 흡수하려 해도, 불가능했다.
이 압도적인 힘은 하늘에서 무한하기라도 한 듯이 끝도 없이 쏟아졌으며, 전명훈이 흡수하는 속도보다 그의 방어를 뚫고 금소해에게 내리꽂히는 속도가 더 빨랐다.
"아, 아아, 아아아아아! 안 돼! 소해! 소해!!!"
"명…훈…."
"흐, 으아아아! 가, 가지마! 제발! 안 돼! 소해, 조금만 버텨, 조금만! 이제 곧 끝날 거야! 조금만 있으면 돼. 제발 조금만 더 버텨 줘…!"
그러나 그것은 오직 전명훈의 바람이었을 뿐.
금소해는 천천히 재가 되어 갔다.
잿더미로 스러져 가며, 금소해는 전명훈에게 말했다.
"사랑해…. 부디, 가족들을… 지켜…줘…."
그 말을 끝으로, 전명훈의 눈앞에서 금소해는 사라졌다.
잿더미가 된 것이었다.
하지만 전명훈은 죽지 못했다.
천겁의 힘은 전명훈에게 밑도 끝도 없이 흘러오며, 그를 성장시키고 있었다.
원하지도 않았건만.
그의 가족들이 죽을 때, 전명훈 혼자만이 살아남아 강해지고 있었다.
"아, 아아아…."
전명훈은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울부짖었다.
"아아아아! 아아아아아! 으어아아아아아!"
말하는 법을 잊기라도 한 듯, 그는 발광했다.
"으어아아아아아!!!"
그리고, 미쳐 발광하는 전명훈의 뇌리로 거대한 [의지]가 흘러들었다.
―가본엾선고이어그린대종의명성자장여을그즐대거가이받지은켜기보적겠을다탓그하대라는본때선가은되그면대본로선인을하알여현해할방지될어지라니.
"끄아아아아아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의지]가 전명훈의 뇌리에 폭력적으로 쑤셔박혔다.
그는 비명을 질렀다.
너무나 공포스러운 것은, 저 [의지]에 의해 천기가 실시간으로 변화하며, [의지]가 움직이며
운명을 재설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해도 못 할 저 [의지]의 언(言)에 따라, [의지]가 짜 놓는 운명을 위해 움직이게 될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운명에 휘말리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전명훈을 공포스럽게 하였다.
얼마 후.
지옥과도 같았던 천겁이 그쳤다.
우릉, 우르르릉….
전명훈은 망연자실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직도 하늘 곳곳에선 금뢰와, 금뢰를 묶고 있는 먹장구름이 보였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더욱 위쪽.
그곳에서는 맨발의 정려가 황홀한 탄성을 내지르며 [저 존재]에게 빨려 가고 있었다.
파지지직!
정려는 한 줄기 벼락이 되어 거대한 [눈]에 빨려 들어갔다.
꿈뻑.
뒤이어,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눈]이 감겼다.
"…."
그 무시무시한 압박은 사라졌으나, 전명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잿더미였다.
모두가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금벽호, 금린, 금진찬, 진휘….
그리고.
투욱….
전명훈은, 자신의 손 안에 있던 것이 재 위로 떨어지자 화들짝 놀랐다.
그것은 [손]이었다.
번갯불에 의해 바싹 튀겨진, 금소해의 손이었다.
"아, 아아아, 아아아아아…!"
전명훈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흐으아아아아아!"
오로지 전명훈이 손으로 완벽히, 틈 없이 덮었던 금소해의 손만이 잿더미가 되지 않고, 전기에 튀겨지는 정도로만 남아 있었다.
"으아아아아! 아아아! 아아아아!"
뚝, 뚝뚝….
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전명훈은 울부짖었다.
"아아…아아아아…."
피눈물을 흘리던 전명훈은, 주변에서 울리던 속삭임을 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귀의를 부르짖던 '번개의 목소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번개의 목소리들이 그에게 지식을 알려 주고 있었다.
방금 전 [그 존재]를 직시한 탓인지, 더더욱 번개의 목소리들이 전하는 지식을 쉽게 받아들
일 수 있었다.
"…위대하신…."
전명훈은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서 웃었다.
[그]가, [그]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
[그 존재]가!!!
머릿속에서 그 [눈]이 떠나지 않았다!!!
전명훈은 눈을 뒤집으며, '번개의 목소리'가 들려 주는 지식을 외쳤다.
아니, 그것은 광기에 함몰되어 악을 쓰는 것에 가까웠다.
"위대하신 천벌의 신(神)께서는 멀고도 머나먼 천역에 거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 우주의 중심에 있는 궐 위에 앉아계시며, 빛에 의해 유폐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나를 부르십니다. 그분이 부릅니다. 그분이 나를… 그분이…!"
콰아앙!
얼마간 발광하던 전명훈은 갑자기 주먹으로 땅을 치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콰앙!
천인경의 수도자가 영기를 담아 내리치는 위력에, 대지가 울렸고, 뇌운봉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전명훈은 뇌운봉과 함께 무너져 땅으로 처박혔다.
"…그분께서, 그분께서, 그분께서그분께서그분께서나를… 나를… 내 가족을… 다 빼앗아 갔어…!"
그는 비명을 지르듯이 하늘을 보며 뇌까렸다.
"그 개자식이, 내 모든 걸… 내 모든 걸…! 아아, 으아아아아아!"
그리고 어느 순간이었다.
광기에 물들어 있던 전명훈의 눈동자가, 분노로 가득 차올랐고 마침내 그의 눈동자에서 모든 광기가 사라졌다.
동시에 전명훈은 뇌리에 남아 있는 그 [시선]이 없어지는 걸 깨달았다.
"아… 그렇군."
빠드득….
이빨을 갈며, 전명훈은 눈이 뒤집힌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내 명(命)이구나…."
뚝, 뚝….
핏물과 함께, 눈물도 같이 줄줄 흘리며 우는 전명훈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 분노를… 해갈해야만 해…."
스스로의 명(命)을 깨달음과 동시에, '시선'의 영향력을 없애 버린 전명훈은 이를 빠드득 갈며 말했다.
"모조리… 앞을 막는 걸 모조리… 죽여서라도…."
빠드드득….
"복수할 것이다…!!!"
튀겨진 금소해의 왼손을 집어 들며, 전명훈은 복수를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의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해야 할 건 복수가 아니다."
"…!"
전명훈이, 뒤를 돌아보았다.
서은현이었다.
* * *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눈이 뒤집힌 전명훈에게 다가갔다.
"너…."
잠시 나를 바라보던 전명훈이, 붉은 벼락을 뿜기 시작했다.
"너…!!!"
나는 녀석을 담담히 바라보며 말했다.
"진정해라. 할 말이 있다."
"네가, 네가, 네가 제대로 말만…."
"분노에 미쳐 말이 안 통하겠군."
지금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찰나, 나는 녀석에게 다가가 놈의 머리통을 꽈악 움켜쥐었다.
'멸신겁천으로 천겁을 제한했기에, 도리어 천겁의 힘에 대한 증폭률은 높지 않군.'
기껏해야 지난 생보다 조금 더 강해진 정도였다.
"자, 정신차려라. 전명훈."
나는 녀석의 머리에 시꺼먼 저주문을 잔뜩 불어넣었다.
녀석에게 불어넣은 저주는, 서휼을 상대로 펼쳤던 6만 배의 감각을 재현한 고통.
그 서휼조차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해체해야 했을 정도로 막대한 고통이, 녀석의 정신을 해집었다.
"―――――!"
전명훈은 정신조차 차리지 못하고 마구 발버둥쳤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녀석의 의념이 붉은빛이 아니라, 순수한 '고통'을 상징하는 의념으로 변할 때까지.
너무 고통스러워서 분노조차 잊어버릴 때까지, 녀석의 뇌리에 저주문을 퍼부었다.
얼마 후.
마침내 전명훈은 고통에 머리가 하얗게 새어 버렸고, 그제야 녀석은 분노마저 잊어버릴 지경이 되었다.
"반전."
츠츠츠츳!
나는 녀석에게 불어넣었던 저주문을 모조리 백란축성문으로 반전시키며, 전명훈의 정신을 도야시켰다.
얼마 후.
"…정신이 드나."
나는 점차 맑은 빛이 돌아오는 전명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으…."
그리고, 정신이 돌아오자 기억도 돌아오는 것인지.
녀석의 눈에 다시 분노가 서서히 들어차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이 다시 분노에 미쳐 버리기 전, 중요한 사실을 꺼냈다.
"잘 들어라, 전명훈. 방금의 천겁으로 인해 금신천뢰문의 문도 중 6만 명 이상이 죽었다. 뇌운봉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내가 막지 못한 뇌겁이 몇몇 개 떨어졌지. 하지만 말이다…."
이어진 내 말에, 전명훈의 얼굴이 굳었다.
"몇몇 결단기 제자와 축기기 제자…. 그리고 절대다수의 하뢰 제자들은, 대다수 생존했다!!!"
"…뭐?"
기이하게도 천겁은 경지가 높은 이들에게 더더욱 많이 떨어졌다.
그런 탓에 멸신겁천을 사용했음에도 금신천뢰문의 주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은 대다수가 죽었다.
하지만, 주 전력이 아닌 이들.
천겁조차도 별 관심이 없는 이들.
하뢰 제자들, 혹은 현 시점에서 뇌령도 내부에 없었던 이들은, 아직 죽지 않았다.
물론, '아직' 죽지 않았을 뿐.
나는 천기를 읽었다.
'20년…. 금신천뢰문의 모든 제자는, 앞으로 20년 안에 천겁을 맞아 모두 죽게 될 운명이 고정되었다.'
하지만, 지난 생처럼은 아니었다.
지난 생에서는 20년이라고 말은 해도 전부 다 수개월 안에 천겁을 맞아 소멸해 버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멸신겁천이, 천기를 뒤로 미루는 데에 성공했다!
'적어도 1, 2년의 시간은 있다.'
쿠르릉….
나는 먹장구름에 잡혀 있는 금뢰들과 먹장구름이 점차 투명해지더니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기의 계위에 있던 현상이 명의 계위로 이동하면서 보이는 현상이었다.
내가 잡아 둔 '금뢰'는 명의 계위에서 계속해서 남은 금신천뢰문의 제자들을 죽이려 울부짖을 터였다.
하지만, 멸신겁천의 재액을 전부 이 한 몸으로 받았다.
"잘 들어라, 전명훈.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네 기분은 이해한다. 아니, 사실 이해 못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네 마음에 대해서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전명훈."
나는 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역시 내 쌍수도려였던 홍수령을 잃었어. 그럼에도 해야할 일은 해야 한다."
"…."
"지금부터, 금신천뢰문의 제자들을 데리고 천겁으로부터 피난을 갈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다. 천겁이 쫓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갈 것이야."
"천겁이 쫓아올 수 없는 곳?"
나는 정려의 말을 떠올렸다.
천벌의 주인을 위협했던 고명한 존재, 혹은 그와 친했던 벗조차 죽었던 흉험한 세계.
"천벌의 주인조차 쫓아올 수 없는 곳이 있다."
수계(首界).
"지금부터, 남아 있는 금신천뢰문의 생존자들을 쓸어 담아서 수계로 간다!"
* * *
모든 것의 경계가 몽롱하고, 무수한 빛들이 넘나드는 몽환적인 세계.
그 세계의 어느 구역.
그곳에서, 새하얀 맨발을 가진 백발의 여인이, 거대한 벽(壁)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 벽은 오로지 천둥과 벼락으로 이뤄진 끝없는 벽이었다.
그것은 차라리 옆으로 서 있는 천둥벼락의 바다라고 해도 될 정도의 크기였다.
백발의 여인, 정려가 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그것의 이름을 알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제게 직접 이름을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
무언가 형이상학적인 의지가 그녀에게 전달되었다.
정려는 그 의지를 받아들며 말을 이었다.
[하나, 주께서도 보셨다시피 그것은 주의 권세를 등에 업은 제 목소리조차 통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세 번이나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요. 저는 그것의 곁에서 그것을 관찰하며 한 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정려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경계가 몽롱한 대지에 늘어뜨렸다.
[그것의 명은 죽음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죽은 존재입니다. 망자(亡者) 주제에 이승을 거닐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존재에게 산 자의 이름을 불렀으니 통할 리가 없지요. 그것의 이름은 이미 저승의 천존께서 소유하고 계실 터입니다.]
――――――!
뇌전의 벽이 순간 일렁거렸다.
[예, 명계의 신(神)께서 그것을 통해 무언가 역사하시려는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그것이 아예 그분의 선보(仙寶) 후보일지도 모릅니다.]
―――――….
[예? 종명자는 또 무엇입니까?]
―――――――.
[미천한 것이 주제넘었나이다. 어찌 되었든, 그것은 분명 소름 끼치는 존재였습니다. 굉장히 불쾌하고 무시무시했기에 본래라면 그 역시 힘을 되찾은 직후 직접 멸하려 하였습니다. 하나, 저승의 천존께 생각이 닿고 나니 만에 하나 그것이 천존께오서 역사하시려는, 그분의 졸(卒)이라면 함부로 건드려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
[감사합니다. 이상이 제가 그것을 함부로 공격하지 말아 달라고 청한 이유이옵니다. 그리고… 주께서도 제가 돌아왔으니 염려를 놓으소서. 제아무리 명계의 신께서 세계를 다시금 휘어잡으려 한다 하셔도, 제가 온 이상 주께서도 다시 옥(獄) 밖으로 권능을 뻗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
[아아, 주여. 감사하나이다….]
말을 마친 정려는 황홀한 기색으로 천둥 번개의 벽을 향해 양팔을 뻗으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쑤욱!
얼마 후, 벽이 움직이며, 벽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녀를 집어삼켰다.
얼마간 뇌전의 벽이 꿈틀거렸다.
겁천(劫天) (4)
"…그게 사실이냐, 서은현."
전명훈이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전명훈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의 전말을 대강 설명해 주었다.
전명훈이 천벌의 주인을 직시하고도 상당히 멀쩡한 것 같았기에 사실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정말로 다행히도 녀석은 녹아내리거나 죽지 않고 어찌어찌 천벌의 주인에 대한 얘기를 해도 미치지 않았다.
'아까 이 녀석… 자기 명을 알 거 같다고 중얼거렸지.'
아무래도 그것과 관련이 있는 듯싶었다.
"…이상이 지금까지 내가 천뢰번을 훔치려 했던 이유다."
"…그런가."
"…그래. 어떻게 이런 정보들을 미리 알고 있었냐는 건, 말하기는 힘들다. 다만 네가 천상금뢰지체를 타고 났듯이 나도 그런 비슷한 걸 가지고 있다고 말해
지."
"…."
전명훈은 한참을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흐, 흐하… 그래. 이해했다. 서은현."
그는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며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우리는, 머저리 같은 놈들이었다는 걸. 네 말을 들었다면… 흐, 흐흐… 제길. 흐하하하! 으아아아아!"
"…."
나는 착잡한 표정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수 없겠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상황을 파악했으면 일어나라."
"…알겠다."
전명훈은 절망과 암울함에 빠졌으나, 광기에는 빠지지 않은 얼굴로 일어났다.
그는 금신천뢰문의 상공으로 떠올라 외쳤다.
[본문의 생존자들은 전부 이곳으로 오라!]
쿠구구구!
전명훈이 뿜어내는 뇌기를 보고, 얼마 후 수많은 하뢰 제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들어라, 본 금신천뢰문은 진선 이상의 존재에게 멸문당하였다!]
술렁술렁….
[그리고 너희 모두 천기를 읽어 봤겠지만, 다들 수명이 20년 안팎으로 줄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모든 제자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그 사실은 틀렸다! 20년이 아닌, 너희 모두 길어야 3년 안에 천겁이 내려올 것이다!]
술렁술렁….
"그, 금 원로님. 그렇다면 저희는 어찌해야 합니까? 저희는 천겁을 맞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저희가 감당 못 할 수준이라고 알고 있습
다!"
[그래, 맞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태상장문과 문파의 어른들이 모조리 사라진 이 상황에서 나 원로 금명훈이 명하겠다!]
쿠웅!
그가 발을 구르자, 뇌전이 모이며 전명훈의 뒤편.
뇌전으로 이뤄진 어마어마하게 큰 전각이 나타났다.
멸뢰내천궁의 수법 중 일부였고, 전명훈이 익힌 적뢰천겁공의 공능이었다.
[너희 대다수가 수계에서 광한계로 올 때 비승을 겪었다고 안다. 맞는가?]
"그렇습니다!"
[그때와 똑같이, 너희가 이 안으로 들어가 진법을 펼치고, 내가 너희를 보호하며 다시 수계로 내려갈 것이다!]
그 말에 좌중이 또다시 술렁였다.
"원로님, 그렇다면 광한계의 이 풍부한 자원을 버리고 다시 수계로 가야 한단 말입니까?"
[그렇다. 너희도 보이지 않느냐? 너희의 수명이 촉박하다!]
"하, 하지만 수계에 간다고 해서 반드시 산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여기 남게 되면, '무조건' 죽는다. 하지만 수계로 돌아가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너희는 살 수 있다! 어찌할 거냐!]
전명훈의 서슬 퍼런 질문에, 하뢰 제자들은 다들 공포에 질린 얼굴로 서로서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수, 수계로 가겠습니다!"
[좋아, 잘 선택했다. 모두 이 안으로 들어가라! 비승해 올 때와 같이 진법을 짜라! 비승할 때에 없었고 비교적 최근에 입문한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에게 배우거라!]
그의 일사불란한 지휘 아래, 금신천뢰문의 제자들은 전부 그가 소환한 뇌전의 전각 안쪽으로 들어갔다.
전명훈은 금신천뢰문의 남은 잔재들을 챙겼다.
그리고 뇌전의 전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쿠구구구구!
뇌전의 전각이 압축되며 전명훈의 손 크기에 딱 맞게 들어왔다.
그가 소매를 펄럭이자, 전각은 그의 소매 안쪽으로 들어왔다.
녀석이 금신천뢰문 문 내에 있는 제자들을 수습하는 사이, 나는 내가 봉인되었던 봉령당으로 갔다.
내 봉인되었던 봉인석 옆에는 홍범의 봉인석이 있었다.
나는 일단 홍범이 봉인된 옥구슬을 챙겼다.
녀석의 봉인을 풀어주려면 시간이 필요했으나,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전명훈, 그나저나 지금 뇌령도 바깥으로 떠나 임무를 맡고 있는 제자들도 있다. 그들은…."
"알고 있다. 녀석들도 전부 데리고 갈 것이다. 다만…."
그는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태상장문께서 명귀계로 임무를 보낸 몇몇은, 지금 데리고 올 수 없다."
"…알겠다."
"하지만."
그가 말했다.
"진마계로 파견 간 몇몇은 지금 그들의 뇌도공법과 감응이 된다. 그들은… 어쩌면 데리고 갈 수 있을지도 몰라!"
"…!"
"일단 가자!"
"알겠다."
나는 전명훈과 함께 움직였다.
파아아앗!
우리는 비둔술을 펼치며, 뇌령도 바깥으로 나가 타지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제자들을 데리고 왔다.
간혹 나를 알아보고 기겁하며 도망치려는 제자들도 있었다.
그런 녀석들은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부족했기에, 일단 잡아서 오행혈주번을 박아 넣어 금제를 하고 잡아 왔다.
그렇게, 인족 총연맹의 천공도 곳곳으로 파견을 나간 금신천뢰문의 제자는 전원을 회수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천벌의 주인이 나타났던 곳과 멀면 멀수록 천겁이 떨어질 시일이 훨씬 많이 남았기 때문에 외부에 있던 제자들에 대해서는 훨씬 안심할 수가
있었다.
"그럼 전명훈, 이제 남은 제자는 몇이지?"
"진마계에 파견 나간 제자 13명. 그리고 추가로 1명을 포함해서 14명 남았다."
"추가 1명은 뭘 말하는 거냐?"
전명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청뢰 제자 연진. 그 녀석도 진마계에 있지 않나."
"…그 녀석은…."
"문파의 배신자라는 거냐?"
전명훈은 고개를 저었다.
"그 선조는 배신자가 맞지만, 그 후손인 녀석은 분명한 금신천뢰문의 제자다! 그러니, 연진까지도 전부 구해내서 우리와 함께 간다!"
"…알겠다."
나는 전명훈의 각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파아아아앗!
나와 그는 잔마계를 향해 날아갔다.
진마계를 향해 날아갈 때였다.
쿠릉, 쿠르르릉!
번쩍!
먹장구름이 하늘에서 일렁이는 듯하더니, 어느새 거대한 금뢰가 나를 향해 떨어졌다.
"…!"
콰르르릉!!
나는 황급히 산외산부진의 초식을 쓰며 금뢰를 막았지만, 어마어마한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고, 정말로 생명의 위기를 느꼈다.
"뭐냐, 방금 건?"
"…."
"서은현?"
나는 말없이 하늘을 노려보았다.
'시작되었다.'
멸신겁천으로 운명을 조금 비틀어 놓은 결과.
그 대가로 얻은, 무수한 재액(災厄)이.
쿠구구구구!
전신을 누르는 압박감이 더 강해졌다.
멸신겁천의 재액은 다음과 같이 찾아온다.
멸신겁천으로 뒤바꾼 운명의 뒤틀림이 모조리 재액의 형태로 찾아온다.
그리고 그 재액을 견디기 위해 희생 제물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지금의 희생 제물은 나 자신.
그러므로, 멸신겁천으로 뒤튼 운명의 뒤틀림을 받아 내야 하는 것도 나였다.
그렇다면, 천겁을 뒤튼 재액은 어떤 식으로 찾아오는가.
당연하게도 천겁을 뒤튼 재액은 천겁으로 찾아왔다.
한 마디로.
나는 내 자신에게 금신천뢰문 전체에 쏟아질 천겁을 전부 몰아넣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은현,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잖나."
전명훈의 으르렁거림에, 나는 어찌 된 상황인지를 말해 줬다.
그 말을 들은 전명훈이 말했다.
"혹시 그 멸신겁천이란 공법. 나와 연결할 순 없나."
"뭐?"
"나 역시 그 희생 제물이란 것으로 등록할 수 없느냔 말이다."
"흐음…."
"나는 천겁 따윈 상관없다. 전부 법력화시켜 버리면 끝이니까."
"가능하긴 하다. 다만,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려."
"그럼 됐다. 일단 수계에 가는 것부터 생각하지."
"그래."
우리는 계속해서 진마계로 날아갔다.
나와 전명훈은 진마계 입구를 지키는 사축기 수사들을 바로 쓰러뜨리고 진입할 준비를 했다.
"그럼 빨리 가지."
"잠깐. 기다려라, 전명훈."
"음?"
나는 그 자리에서 기묘성심전을 공명시켜 김연과 연결되었다.
지난 몇 년.
내가 금신천뢰문에 쫓길 당시, 김연과 연결되어 그녀를 통해 기묘성채의 방향성을 조절했다.
그를 통해 나는 지족 진룡맹 쪽을 습격하고, 그 덕에 현재 규련도 역시 살아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김연에게 한 가지를 더 부탁했다.
[…이걸 해 줄 수 있겠어?]
[네, 은현 오빠. 당연하죠. 지난 8년 동안 은현 오빠가 말을 걸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말… 정말 좋네요.]
[미안해, 연아. 어쩌면… 이번에 또 몇 년 동안 연락을 못 할 수도 있어.]
[…그런가요.]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네요. 하지만… 반드시 돌아오실 거죠?]
[응.]
[그럼 됐어요. 비익무를 연습하면서 지낼게요. 안 그래도, 은현 오빠가 알려 준 방법으로 삼화취정에도 막 접어들었어요. 삼화취정에서 오기조원에 도달하는
법은 기묘성심전의 구결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오기조원도 큰 문제 없이 시간을 들이면 도달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의식을 가속시키며 그녀와 잠시 담소를 나눴다.
마음 같아서는 훨씬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8년간 못 나눈 대화가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녀에게는 미안했지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 연아. 나중에 다시 만나자.]
[네, 오빠!]
츠츠츳!
나는 꿈 밖으로 나와 전명훈을 쳐다보았다.
"됐다. 이제 가지."
"그래."
말을 하며 하늘을 보니, 어느덧 다시금 내게 천겁이 쏟아지기 직전이었다.
'내가 천겁을 견디지 못하고 죽으면, 그대로 멸신겁천이 해지되고, 운명을 피했던 이들 역시 바로 천겁을 맞아야 할 거야.'
나는 최대한 오래 버티기로 마음먹으며, 이번에 내리친 천겁을 맞았다.
쿠르르릉!
"끝났나?"
"그래."
"가지."
우리는 그대로 진마계의 차원문에 돌진했다.
다행히 금신천뢰문의 제자 13명은 빠르게 찾을 수 있었다.
대다수가 인족 1, 2차 점령지 인근에서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연진 뿐이었다.
'연진을 어떻게 찾지….'
역시 기괴고라도 박아 두었어야 했나.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전명훈이 어느 한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연진은 저쪽 방향에 있다."
"음? 뭐?"
"저쪽 방향으로 쭉 가면 있다고 했다."
"허어… 그게 네 능력인가?"
"뭐, 번개들이…. 아니, 됐다. 설명해 줘도 이해는 못 하겠지."
전명훈은 설명을 더 하려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는 인족 점령지를 떠나, 연진을 찾으러 가기 전.
금신천뢰문의 작은 사당을 인족 점령지 안에 하나 지어 놓고, 그 안에서 무수한 선조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나 역시 내 스승인 진휘에게 절을 올렸고, 전명훈 역시 그리했다.
파아아앗!
절을 올린 우리는, 곧바로 인족의 점령지에서 나왔다.
진득한 진마계의 마기가 우리를 반겼으며, 전명훈은 연진이 있다는 곳을 향해 무작정 날아갔고 나는 그 뒤를 쫓아갔다.
번개의 목소리라는 것이 그를 계속 인도하는 모양.
나는 다시 한번 하늘을 보았다.
'점점 천겁이 거세지고 있어.'
아까까지만 해도 사축기 후기 급의 일격이었는데, 이제 느껴지는 천겁의 힘은 슬슬 사축기 대원만에 수렴하고 있었다.
'빨리 수계로 가야 해. 아니면… 내가 죽고 멸신겁천이 풀릴 수도 있다.'
연진을 찾으면, 더 이상 지체할 시간 따윈 없었다.
'바로, 공령지를 통해 하계로 내려간다!'
오늘에야말로.
예전에 준비해 뒀던 공령지와 장생진, 원유를 이용할 때였다.
겁천(劫天) (5)
쿠르르릉―
나는 저 위쪽에서 울리는 천둥소리를 들으며 날아갔다.
왈칵―
문득, 입에서 피가 한 움큼 터져 나왔다.
'벌써 한계인가….'
번쩍!
콰르르릉!
빛의 기둥이 내게 꽂혀 온다.
전명훈조차 반응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내리꽂힌 천벌은, 내 전신을 산산이 부숴 놓으며 나를 짓눌렀다.
꾸득, 꾸드드드득―
[그아아아아아!]
나는 천벌 속에서 전신을 무형검으로 감싼 채, 요족의 생명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하늘을 향해 일 검을 내지른다.
[그하아아아!!!]
마침내, 하늘을 향해 무형의 검이 번개를 사른다.
"후우, 후우우…."
다시 한번 천겁을 극복해 냈다.
옆에서 전명훈이 이를 악물고 지켜보고 있었다.
"서은현, 그 희생제에 나를 포함시켜라. 그러지 않고서는, 네놈이 못 버텨!"
"못… 버텨?"
나는 문득 내 팔을 바라보았다.
새카맣다.
정말로 새카맣다.
'몇 번째 천겁이더라.'
연진을 향해 가며, 더 이상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원유를 시켜 놈의 마공으로 진마계의 마기를 흡수시키며 녀석의 재생력을 북돈곤, 시간이 날 때마다 누적된 피해를 원유에게 떠넘기고 있음에도 어느덧 이
지경이었다.
이제는 천겁의 위력을 계산할 머리조차 안 남았다.
그냥 얼얼할 뿐이었다.
"…가자, 전명훈."
"…."
전명훈은 나를 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입을 다물고 다시 날아가기 시작했다.
녀석은 의외로 나를 상당히 걱정하고 있었다.
아니, 저건 걱정이 아니었다.
자책이었다.
전명훈의 의념에서, 문파를 구하지 못했다는 절망이.
나를 믿지 못했다는 후회가, 천벌을 향한 증오가 켜켜이 쌓인 것이 느껴졌다.
아마 내가 죽을 지경이 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내 천겁을 자신이 들이마시려 하겠지.
물론, 저것은 '내' 천겁으로 바뀌었기에.
저 천겁을 전명훈이 먹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천겁은 절대 끝나지 않는다.
그걸 알고 있기에 전명훈도 가만히 있었던 것.
"전명훈."
"…뭐냐."
"앞만 보고 가라."
"당연히 그럴…."
나는 앞서가는 전명훈을 보며 말했다.
번쩍!
그러나 전명훈이 대답을 채 꺼내기도 전.
다시 한번의 금뢰가 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우르르릉!
나는 이번에는 예뢰안을 사용해 더더욱 선제적으로 금뢰에 반격하며, 금뢰를 몰아냈다.
꽈지지지직!
그 과정에서 또다시 금뢰가 전신을 쓸고 지나갔지만.
어쨌든 천겁을 또 한 번 몰아내는 데엔 성공했다.
"너…."
"전명훈."
나는 뒤를 돌아보는 전명훈을 보며 말했다.
"앞을, 봐라."
"…."
"연진까지 모두 구하기 전엔, 절대 죽지 않는다."
"…그래."
전명훈은 이를 악무는 듯하더니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반쯤 녹아서 흘러내린 얼굴로 전명훈을 바라보다, 그를 뒤따라갔다.
더 이상 육체 재생은 없었다.
그럴 시간에 조금이라도 기를 모아서 천겁에 대항할 준비를 해야 한다.
'죽을 준비를 하자.'
죽을 전명훈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나는 답천의 무형검을 몸에 두른 상태에서,
지금 계속해서 우공이산을 사용하는 상태였다.
천겁을 맞을 때마다.
천겁을 받아칠 때마다.
번개를 사를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내 유리검 안에, 천겁과 부딪히며 쌓인 [힘]들이 날뛰고 있었다.
요수공법과 답천을 얻으며.
우공이산을 사용할 수 있는 효율이 크게 늘었고, 원유를 가진 덕에 목숨이 경각에 달할 정도로 경맥에 힘이 밀집되면 저주공법으로 원유에게 충격을 몰아
을 수 있다.
이미 더 이상 사는 것은 포기했다.
하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시간을 가속시키며 미친 듯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답천의 가속 효과론 부족해서, 기묘성심전까지 함께 운용하며 가속을 극대화시켜야 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돈오로 방향을 다잡았고.
그동안 세계를 변혁시킬 정도로 나의 무(武)를 세계에 각인시키며 점수(漸修)를 쌓아 왔다.
'조금만 더.'
내가 미친 듯이 쌓아온 무학의 끝은, 어느새 정상을 보이고 있었다.
저 멀리.
고지가 보이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더.'
나는 전명훈을 뒤따라가며.
더더욱 몸의, 영혼의 긴장감을 일깨우며 다음 단계를 더듬었다.
내가 답천에서 그 너머에 도달하려 해 왔던 것은,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장님이 코끼리의 생김새를 완전히 알아차려야 한다.
나는 돈오로 코끼리가 있는 '방향'을 깨달았고, 점수로 그 방향의 코끼리를 더듬어 가며 지금껏 계속해서 코끼리의 형상을 각인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답천 너머에 이른다는 것은.
장님인 내가 코끼리의 형상을 더듬어 만져 본 후, 내 스스로 그 코끼리와 똑같은 코끼리를 그려 내는 것과 같다.
당연하게도, 그 진실이 어떻든 장님이 그려 내는 코끼리는 원본과 똑같을 수 없다.
그렇기에 장님들은 저마다 제각각의 특이한 형상을 그려 내고, 그것에 저마다 다른 이름을 붙이며 이를 '코끼리'라 칭한다.
이것이 심족들의 구현이었다.
부웅!
나는 완전히 녹아서,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는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며 무색유리검을 휘둘렀다.
때마침 내게 떨어지던 뇌겁이, 그대로 베여 나가는 게 어렴풋이 검끝으로 느껴진다.
전명훈은 당부대로 앞만 보고 가고 있었다.
'느껴진다.'
점차 천겁이 치는 속도가 빨라지고, 천겁에 담긴 힘의 크기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하지만, 천겁에 비례해서 내 깨달음 또한 점차 정립을 완성하고 있었다.
빙글, 빙글.
천겁이 내리치자, 찰나에 멈춰 그 자리에서 원을 그리며 보법을 밟았다.
그와 동시에 아주 자연스럽게 검에 힘을 실은 채 들어 올려 번개를 향해 가져간다.
파앙!
그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천겁이 갈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더 이상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눈이 녹고, 피부가 녹아서 오감 중 둘이 사라졌다.
아마 곧 있으면 얼굴 전체가 녹아 들리는 것도 냄새를 맡는 것도 허용되지 않을 것 같다.
쿠르릉!
아니나 다를까.
두 번째 천겁이 곧이어 내리치며 나를 후려쳤다.
마침내 얼굴이 완전히 녹아, 내 얼굴은 사라져 버렸고, 나는 미약한 청각을 제하면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오감(五感)이 완전히 사라진 세계.
무(無)의 공간.
나는 육체를 재생시키는 기운을 모조리 검 끝에 담아 휘두르며, 그렇게.
도화지 앞에 앉아, 내가 그동안 더듬어 온 코끼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부웅, 부웅.
내 검은 붓이었다.
한 번의 천겁이 내리칠 때마다, 그림의 한 획이 그어지며 도화지에 코끼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 * *
전명훈은 문득, 앞만 보고 가라던 서은현의 말이 떠올랐다.
'도대체, 뭐지?'
그의 말은 너무나도 결의에 차 있었기에,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전명훈은 앞만 보고 날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절로 전명훈으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고 싶게 만들었다.
'너, 뒤쪽에서 뭘 하고 있는 거냐!'
피잉, 피잉, 피잉!
무언가 얇은 실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
아니, 그보다 더더욱 맑은, 마치 한 방울의 물방울이 잔잔한 호수에 떨어지는 소리를 얇게 다져 낸 소리.
그런 기묘한 소리가, 그의 뒤쪽에서 끊임없이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명훈이 진정으로 공포스러운 건 따로 있었다.
전명훈은 정려의 목소리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번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가지게 된 이 감각은 '모든 종류의 번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감각일 터였다.
정려 역시 일종의 번개였기에 그동안 목소리를 들어 왔던 것일 테고.
그리고, 그런 전명훈의 귓가에 기이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뭐냐, 도대체 뭐냐고…!'
전명훈은 차마 뒤를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등 뒤쪽에서는 말 그대로 '수많은 사람이 북적대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서은현이 내고 있는 저 맑은 소리 뒤쪽으로, 무수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번개의 목소리'의 형태로 전명훈의 귓전을 때리고 있었다.
마치 서은현의 전신에 수억 개의 입이라도 돋아나서 떠드는 듯한 기이한 느낌에, 전명훈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서은현의 당부대로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무언가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동안 믿어 주지 않아 이 꼴이 났다면, 지금부터라도 믿어야 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전명훈은 연진이 있는 곳을 향해 속도를 북돋웠다.
* * *
점차 서은현과 전명훈을 쫓는 천겁의 속도와 간격이 빨라졌다.
이제 천겁은 거의 한 호흡을 주기로 서은현에게 내리꽂히고 있었다.
거기에 천겁이 머금은 힘의 크기도 더 이상 상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커진 상태였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서은현은 너무나도 쉽게 천겁을 베어 내고 있었다.
최소한의 힘만으로 최대한의 위력을 내며, 그는 그렇게 검무를 추면서도 일직선으로 쭉 날아가는 전명훈에게 따라붙고 있었다.
그리고, 서은현도 전명훈도 몰랐지만.
서은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유백색의 희뿌연 안개.
선수 서은현의 가능성이, 서은현의 전신을 뒤덮은 무형검과 점차 올올이 뒤섞이고 있었다.
지족으로서의 서은현과, 심족으로서의 서은현이, 하늘의 겁 아래에서 자신도 모르게 하나가 되는 중이었다.
그리고 서은현의 몸에서는 점차 천겁과 비슷한 천둥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어쩌면 전명훈이 들었던 수많은 목소리의 정체는 그것일지도 몰랐다.
천겁과 비슷해진 서은현의 무형검이, 그의 지(地)의 힘과 섞이고.
서은현의 선수의 힘은 서은현의 만상인연도와 연결되었으니 말이었다.
서은현이 각인시키려는 세계는 서은현의 진심.
그리고, 진심은 서은현의 모든 것이었다.
그랬다.
서은현은 애당초 자신의 그 모든 것을 세계에 각인시키고자 했던 것이었다.
부웅, 부웅, 부웅!
쩌엉, 쩌엉, 쩌엉!
점차 서은현의 검무가 빨라졌다.
천겁의 속도와 위력이 강해졌지만, 어느 순간부터 서은현의 속도가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여기다, 서은현!!!"
전명훈이, 연진이 있는 곳을 찾아냈다.
"이곳은…."
전명훈은 착잡한 표정이 되었다.
이제는 봉래궁의 땅이 된 곳.
한때 서은현이 장악하고 무언가 일을 꾸몄던 땅.
저 아래 어딘가에, 연진이 숨어 있었다.
"무슨 일이오?"
봉래궁의 땅에서, 봉래궁의 호법 중 한 명이 전명훈에게 말했다.
전명훈이 말했다.
"이 안에, 본문의 제자가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한 명만 데리고 나오면 되니 얼른 들어갔다 나오면 아니 되겠습니까?"
"실례지만, 귀하는 어느 문파의 사람이시오?"
"금신천뢰문의 원로입니다."
"흠, 최근 상부에서 신경 써 준다는 그 신흥 문파?"
전명훈의 소속을 알자마자 호법의 말투가 변했다.
"내가 왜 네놈들을 들여보내 주어야 하지? 선약이 되어 있나?"
"그런 건 없습니다."
그 말에 봉래궁의 호법이 짐짓 불쾌한 듯이 말했다.
"네 이놈, 웬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대봉래궁의 땅이다. 네놈 문파가 최근 상부에서 조금 신경 쓰고 있다곤 해도, 우리 대봉래궁은 엄연한 상문(上門)
며, 네놈들 따위가 왈가왈부할 수 있…."
"닥쳐. 그럼 죽어."
콰르르릉!
전명훈은 뭐라 떠들려는 봉래궁의 천인기 호법을 향해 출수했다.
붉은 벼락의 창에, 천인기 호법의 금단이 일격에 박살 나며 그의 몸 전체가 터져 나갔다.
천인기 호법의 원영은 혼비백산하며 달아나 버렸고, 전명훈은 이를 짓씹으며 외쳤다.
"예의 차리며 실랑이하는 건 시간 낭비임을 깨달았으니, 지금부터 내 앞을 막는 놈은 다 죽인다. 보고 있는 놈들도 다 꺼져라."
전명훈이 살기를 내뿜자, 곳곳에서 봉래궁의 문도들이 나타나 그를 에워쌌다.
"네 이놈! 감히 아무리 상부에서 최근 어여삐 여기는 종문이라지만 네놈이 대봉래궁의 제자, 그것도 호법을 죽이고도…."
푸콱!
"이, 이놈! 무슨 짓이야!? 또 천인기를 죽여!? 감히 대봉래궁의 핏값은 너희 금신천뢰문에 톡톡히…."
퍼엉!
"흐, 흐아악! 모두 공격해!"
전명훈은 문답무용으로 봉래궁의 천인기 수사들을 쳐 죽이기 시작했다.
40명이 넘는 천인기 수사들이 일제히 전명훈에게 결인을 맺으며 공격을 퍼부었다.
전명훈은 얼굴에 힘줄을 돋우며 이를 갈았다.
[이 주제도 모르는 놈들이… 길을 막으면….]
그가 손을 뻗자, 그의 왼손에 붉은 벼락의 창이 잡혔다.
전명훈은 벼락의 창을 잡고, 그대로 휘둘렀다.
적뢰천겁(赤雷天劫).
[모조리 죽인다고, 말했다.]
콰르르르릉!
벼락의 창에서부터 쏘아진 번개가, 그대로 해일이 되어 전방을 휩쓸었다.
40인의 천인기 수사들이 일제히 뒤로 나가떨어졌고, 그들의 뒤쪽에 있던 산맥이 그대로 뻥 뚫리며 길을 만들어 냈다.
전명훈은 짜증스런 얼굴로 씹어뱉었다.
"내 뒤에서 천겁 맞으면서 칼춤 추는 놈이 안 보였냐. 머저리 같은 놈들."
혀를 찬 전명훈은 산맥 너머 분지 안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분지에 도착한 그의 시선이 어느 한쪽을 향했다.
지하 깊은 곳.
전명훈은 그곳에서 번개의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을 들었다.
"다 왔다."
콰르르릉!
그의 손에 번개의 창이 다시 잡혔다.
전명훈은 뇌창을 그대로 내리꽂았다.
쿠르르르릉!
번개로 이뤄진 빛의 기둥이 사방을 밝혔다.
그 모습은, 마치 시커먼 마기로 가득한 마계의 하늘에 붉은 기둥이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 후, 전명훈의 전방에는 지하로 이어지는 거대한 통로가 생겨났고, 전명훈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통로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파아아앗!
전명훈이 도착한 곳은, 거대한 수정 동굴.
그리고 수정 동굴을 뒤덮은 수천, 수만, 수억 겹에 달하는 '진법'이었다.
"이건…."
전명훈이 수정 동굴 앞에서 당황할 때.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전명훈? 아니, 뒤쪽에 서은현까지 있군. 아니… 전명훈 네 품속에 그건 금신천뢰문? 안쪽의 기운은 하뢰 제자들로 보이는데…."
진법결계의 안쪽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머리가 흑백으로 물든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전명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찌 된 거냐, 전명훈."
전명훈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상대는 그가 아는 연진이 아니었다.
번개의 목소리가 말하고 있었다.
상대는 연진의 몸에 붙어 있는, 4만 년 전의 금신천뢰문의 배신자.
금위라고.
"당신…."
하지만 전명훈은 눈앞의 배신자를 처단하기보단, 딱딱하게 본래의 의도를 말할 뿐이었다.
"연진을 꺼내라. 지금부터 연진과 함께 수계로 내려갈 예정이다."
"흐음, 이 어린놈이 사문의 존장에게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한 번만 더 말 돌리면 죽인다."
전명훈의 적나라한 말에, 연위는 조금 당황한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허… 이놈 참…. 뭐, 알았다. 마침 잘도 찾아왔구나. 일단 진 안으로 들어와라. 안 그래도 서은현이 네놈에게 잡혀간 후, 이곳에 숨어서 기운을 감춘 채 몇 년을
버티고 있었다만, 근래에 천기가 괴악하게 바뀌어서 사정이 궁금하던 참…."
번쩍!
그때.
전명훈의 등 뒤쪽에 따라온 서은현을 향해 천겁이 내리치며, 밝은 빛이 사방에 흩뿌려졌다.
콰르르르릉!
그와 함께, 거대한 빛의 기둥이 전명훈의 위쪽에서부터 아래로 내리꽂혔다.
빛의 기둥은 서은현에게 내리치며, 그대로 연위가 짜 놓은 진법결계들에 부딪혔다.
진법결계들은 말 그대로 수수깡처럼 부스러졌고, 연위는 기겁을 하며 뒤쪽으로 피했다.
쿠르릉….
천겁이 잦아든 후.
그곳에는 숯덩이가 된 한 인영이 남아 있었다.
"서은현!"
"무엇…!"
전명훈이 악을 쓰며 서은현을 불렀다.
그러나 숯덩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조차 전부 타 버려 형체조차 남지 않았기에.
연위는 그런 그를 보며 황급히 결인을 맺었다.
쿠구구구구!
그와 동시에, 사방에 펼쳐진 진법결계가 작동했다.
"그동안 네놈이 잡혀가고 나서, 봉래궁이 네 진법을 장악하고 분석한답시고 열심히 뛰더구나. 다행히 이 몸의 진법결계는 찾지 못해서 나를 발견하진 못했
만…. 여하튼 그러면서도 진법을 해체하진 않아, 그동안 생명력은 잔뜩 모았다!"
촤라라라락!
연위가 결인을 맺자, 서은현을 향해 황금빛 용맥의 힘이 흘러 들어갔다.
순식간에 숯이 된 서은현의 몸이 돌아왔다.
* * *
깜빡.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어쩐지 긴 꿈을 꾼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코끼리를 거의 완성했음을 인지하였다.
"이곳은…."
나는 주변을 보았다.
눈앞에는 연위가 서 있었고, 주변은 수정 빛이 가득한 수정 동굴이었다.
저 멀리, 투명하게 반대편이 비치는 호수가 보였다.
공령지였다.
"하아아…."
연위는 무언가 설명하려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어 설명을 막았다.
의념만 보고도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도망쳤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예상외로 끝까지 숨어 의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부웅!
나는 하늘로 뛰어올라, 다시금 내리치는 천겁을 향해 검을 뻗었다.
천겁이 잘려 나갔다.
타앗!
그대로 다시 지상에 착지한 나는, 심유한 눈빛으로 연위와 전명훈을 마주 보았다.
"서은현, 너…."
"괜찮다, 전명훈. 모든 것이 잘 되었지 않나."
"아니, 네놈 죽을 뻔했다!"
"괜찮아. 그것보다, 여기는 공령지가 아닌가?"
"그래."
연위가 대답하였다.
"전명훈에게 대강 들었다. 시간이 없는 것 같으니 짧게 묻지. 천뢰번, 있나 없나."
"없소."
"금신천뢰문은 망했나?"
"아직."
"그렇군. 그래도 수계로 내려갈 거냐?"
"물론."
내 눈을 본 연위는, 잠시 침묵하는가 싶더니 말했다.
"전명훈은 수계에서 천인기에 오른 게 아니니 수계를 찾기 힘들겠지. 네 혈체를 꺼내라. 지금부터, 수계로 안내하겠다."
나는 말없이 원유를 꺼내고, 다시 한번 내게 내리치는 천겁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스르릉―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나는 내 검과, 내 선수의 힘이 엮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선수의 힘은 만상인연도와 엮여 있었고, 만상인연도는 천족공법으로써 천족의 힘이었다.
나는 천, 지, 심이 모조리 한데 엮여 있다고 느꼈다.
이전에도 이것들을 병행해서 익히긴 했지만, 오늘만큼 완벽하게 일체된 느낌은 느낀 적이 없었다.
'뭐지, 이 느낌은…?'
연위가 눈앞에서, 연진의 몸에서 빠져나와 원유의 몸으로 들어갔다.
드드드드득―
동시에 그녀가 사축기 급 의식으로 원유의 몸속에서, 원유를 자신과 강제로 맞추기 시작했다.
전명훈은 빠르게 연진을 자신의 압축 공간에 집어넣었고, 연위는 원유의 몸속에서 원유의 수행을 강제로 증폭시키기 시작했다.
콰자지지지지직!
원유에게서 어마어마한 뇌력이 뿜어지며, 삽시간에 원유의 수행이 원영기에서 천인기로 치솟기 시작했다.
하지만 급격히 수행을 폭증시킨 대가인지.
원유의 몸이 붕괴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연위가 원유의 몸으로 결인을 맺자 장생진이 발동했다.
쿠구구구!
장생진의 힘이 원유의 몸으로 흘러 들어가며, 막대한 생명력이 붕괴해 가는 원유의 몸뚱어리를 지탱했다.
다시금 원유의 몸이 원상 복귀하자, 연위는 다시금 의식의 파장을 강제로 원유에게 맞췄다.
그리고 원유는 다시금 몸이 붕괴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을 몇 차례나 반복했을까.
그리고 나는 또 몇 차례나 천겁을 막아섰을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연위가 원유의 몸을 차지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쿠구구구구!
원유에게서 명백한 천인기 급의 힘이 느껴졌다.
빠직, 빠지지직!
그와 동시에, 지금껏 양성이 혼합되어 있던 원유의 몸이 완전한 여성의 몸이 되었다.
"역시, 나는 이런 확실한 게 편하다니까."
연위는 씨익 웃으며 나와 전명훈을 번갈아 보았다.
"그럼, 지금부터 수계로 간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위는 나와 전명훈의 손을 각각 잡고, 그대로 공령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와 전명훈은 각기 공간 압력에 대항하며 기운을 겹겹이 둘렀다.
다음 순간.
쿠우우우우!
우리는 거대한 어둠의 공간에 진압하였다.
'이곳이, 진마계의 외곽!'
그러나 그때였다.
쿠르르릉!
저 멀리서, 천겁이 진마계 안쪽에서 일어나는 듯하더니.
진마계 바깥까지 나를 쫓아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세계의 바깥인 탓인지, 천겁은 이전보다는 확연하게 느린 속도로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우우웅―
연위는 천겁을 신경 쓰지 않고 허공에 손을 뻗어, 어떠한 [흐름]을 움켜쥐었다.
그 흐름은 일종의 실이 되어 연위를 먼 곳과 이었다.
그녀는 그 실을 잡고, 등 뒤에서 두 개의 팔을 더 뽑아 나와 전명훈을 잡은 채 날아가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이윽고 거대한 천겁이 다시 내게 쏘아져 왔다.
촤락!
연위가 나를 잡은 손이, 내가 움직이기 편하도록 살점으로 된 포승줄이 되어 내 허리를 묶었다.
나는 눈짓으로 감사를 표한 후.
눈앞에서 달려드는 천겁을 바라보았다.
"후우우우―"
세계의 바깥에서, 세계의 안쪽에서 뻗어 나온 번개 자락이 나를 향해 손을 뻗는 이 장면은, 너무나도 특이한 장면이라 생각된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천겁을 마주 보았다.
나는 그 상태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번개의 속도에 맞추어 검을 내리쳤다.
부웅!
그리고, 내 검은 번개의 속도와 맞추어 번개를 향해 휘둘러졌다.
"아아…."
알 수 있었다.
느껴진다.
지금 이 순간.
장님이 그린 코끼리가 완성되었다.
몇억 번을 휘둘러 온 검형이 내 손안에, 이 세계 전체에 각인된 것이 느껴진다.
나는 내가 도화지에 그린 코끼리를 바라보았다.
코끼리의 이름은, 서은현이었다.
부웅!
다음 순간, 나는 어느새 천겁을 베어 내고 있었다.
뇌속(雷速).
콰르르릉!
내 전신에서, 내가 휘두르는 무형검에서 천둥과도 같은 울음이 울렸다.
세상이 정지한 것 같은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내가, 뇌속에 가깝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나는 무색의 번개를 전신에 두르고, 내가 내 무(武)에 관철해 왔던 마음을 끌어 올렸다.
마음의 이름은 진심(盡心).
동시에 진심(眞心).
내가 다해 온(盡) 진실(眞)이, 이 검 끝에 맺혔다.
동시에 내가 각인한 진심은, 또 다른 내가 되어 제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형검이, 생명을 얻었다.
콰르르르릉!
분명, '완성'하기 전이었으면 절대로 못 막았을 천겁이었다.
하지만 무형검은 아랑곳하지 않고 천겁을 베어 냈다.
하늘이 내리는 겁(劫)과, 인간이 내리는 겁(劫)이 세계의 바깥에서 연이어 부딪힌다.
하늘의 겁은 절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서, 나를 향해 끝없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점차 주기가 짧아지던 것이, 이제는 찰나조차 주기의 안쪽으로 들어왔다.
쿠구구구!
거대한 어둠을 사르며, 천겁이 끊임없이, 마치 비처럼 나를 향해 쇄도해 왔다.
'저걸 전부 막을 수 있을까.'
부우웅!
그러나, 무형검이 무색유리검에 깃들며 울었다.
―벤다.
그것 하나로 충분했다.
나는 무형검에 몸을 맡기고, 끝없이 검무를 추며 천겁들을 베어 나갔다.
천겁은 점차 강해지고, 점차 빨라졌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계속해서 천겁을 베어 갔다.
거기에, 우공이산은 아직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나 역시 계속 강해지고는 있지만, 점차 몸이 버티기 힘들어하고 있었다.
어찌해야 하는가.
―벤다.
이번에도 무형검의 답은 같았다.
나는 미소 지었다.
전신에 흐르는 난잡한 힘의 기류를 모조리 일 검에 끌어모은다.
그런 다음, 잡념도 망설임도 없이 그저.
벤다!
콰르르릉!
나는 또 한 번 번개를 베어 가며 웃었다.
외로이가 아닌, 무형검과 함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