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REGRINFINT / Chapter 22 - 22

Chapter 22 - 22

* * *

치이이이이―

나는 전신에서 흐르는 연기를 식히며 미소지었다.

"후우…."

헌원에게 쫓기며 기운을 잔뜩 소진한 상태에서 벌인 일전이었다.

그 덕에 녀석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우공이산을 써야 했었다.

"흐음, 좋군…."

이제는 우공이산을 통해 사용하는 자멸기의 파괴력보다 육신의 불사성(不死性)이 강해져 버려 우공이산을 잠깐 사용한 것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물론 우공이산은 이론상 무한히 강해지는 기술이기에 장기간 사용하면 정말로 죽긴 할 터였다.

그러나 필멸(必滅)의 기술이었던 이전과는 달리 지금은 단기전 한정으로 사용이 가능한 것이었다.

'조금 위험하긴 했어.'

헌원에게서 잔뜩 힘을 빼고 싸운 것 때문인지, 장기전으로 갔으면 조금 위험할 뻔했다.

아마 모두가 처음부터 목숨을 걸고 합공해 왔다면 얄짤없이 패배해서 19회차를 시작해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다들 목숨을 굉장히 사렸지.'

죽어도 부활할 수 있음에도 목숨을 사린다.

아니, 어쩌면 그만큼 목숨을 사리기에 죽어도 부활할 수 있는 사축기에 죽기 살기로 오른 걸지도 몰랐다.

사축기 수사쯤 되면 자신의 생명에 대한 집착이 상상을 초월하는 모양새였고, 그 덕에 하나같이 결정적인 부분에서 뒤로 빼는 덕에 각개격

할 수 있었다.

본인들은 나를 합공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사실 한두 명 빼고 제대로 합공하는 녀석들은 거의 없다시피 했던 게 내 승리의 이유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축기 15명…."

나는 히죽 웃었다.

"이겼다…!"

목숨에 대한 집착이 상상 이상이라 목숨을 걸어야 할 부분에서 멈칫했던 녀석들이었지만, 그래도 사축기 15인이다.

그중에서는 사축기 대원만 수사조차 있었다.

그것도 헌원에게서 잔뜩 도망치며 기운을 뺀 후에야 상대해 승리한 것이었다.

즉, 기운을 빼지 않고 처음부터 전력으로 붙었다면 저놈들은 목숨을 걸어도 내게 못 이긴다.

헌원이 천지쌍수 공법을 익혀 합체 초기 주제에 합체기 후기 급의 괴물이란 걸 감안하면….

꾸드드득―

나는 드디어 내가 어느 정도의 경지에 도달했는지를 실감하며, 삼태극의 힘을 주먹에 모았다.

"태수(太修)…!"

나는, 엄연한 합체기의 영역에 도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제 도망친 사축기 녀석들은 물론이고, 부활할 나머지 사축기 수사들도 저마다 천족에 내 정보를 알리겠지.'

내 예상컨대, 합체기 태수들이라 해도 천벌의 주인을 봐서 입는 피해는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그들 역시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을 터였고, 아마 그 부상을 치유하기 위해 이제껏 전멸에 가깝게 잠적했던 것일 터였다.

그런 그들에게 새로운 합체기 급의 인족이 탄생했다는 소식이 들어간다면 헌원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그건 더 이상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는 천족에게서 귀중한 전력으로 보호받을 터였으니 말이었다.

"자. 그럼, 이제 나와라."

난 손을 털며 도원도를 펼쳤다.

그 안에서는 전명훈과 홍범이 튀어나왔다.

전명훈은 휘파람을 불며 웃었다.

"도원도 안에서 대충 봤다. 무지막지하더군. 그럼 이제…."

"나오라고 했다."

내 말에 전명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전부 다 나왔는…."

나는 전명훈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까부터 우리를 훔쳐보던 기분 나쁘고 끈적한 의도의 주인을 보며 서슬 퍼런 눈빛으로 말했다.

"마지막 경고다. 나오지 않으면 죽인다."

그리고, 공간이 휘어지는 듯싶더니 기축 장막으로 만들어진 [작은 영역]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역이라기보단, 아공간이라고 해야 할 그것은 물방울처럼 공간 위에 둥둥 떠 있었다.

그리고, 그 물방울 형태의 기축 장막이 거두어지며, 별로 보기 싫은 얼굴이 나왔다.

"하하, 오랜만입니다, 서 도우."

서휼이었다.

은자(隱者)

나는 싸늘한 표정으로 홍범과 전명훈에게 눈짓을 주었다.

내 눈짓을 알아본 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빠르게 움직여 서휼의 퇴로를 막았다.

각기 삼 방위에서 그를 막게 된 우리를 보며 서휼이 웃었다.

"긴장 푸시지요, 도우들. 사실 도우들에 대해서는 전부 조사하고 왔습니다."

서휼의 시선이 전명훈에게 갔다.

"금신자의 본명공법을 이어받아 70여 년 만에 천인기에 오른 전 도우."

그는 전명훈에게서 홍범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보다도 훨씬 빠른 기간 내에 원영기에 오른 홍 도우. 비록 아직 천인기에는 못 올랐지만 그 천재성에 대한 소문은 곳곳에서 들린다 하더군요."

그는 홍범에게서 나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법을 배운 지 하루 만에 연기기 6성에 다다르고,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원영기에 오른 후… 금신천뢰문의 멸문에 기여하고 굳이 잔당들을 데리고 수계로 내려갔다 오신 서 도우."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세 분 모두… 보통 분들이 아니리라 사료됩니다. 그렇지요?"

"…."

난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닫고만 있었다.

'안 읽히는군.'

이미 이 시점에서 심족의 눈에 대항하는 법기를 만든 듯했다.

'흐릿하게 보이긴 한다만….'

그 너머로는 잘 보기 힘들었다.

겁천에 이르고 나서 흐릿하게 보이니, 어쩌면 김영훈이라면 서휼의 법기를 뚫고 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뭐냐."

내 질문에 서휼은 반갑다는 듯이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세 분이 보시기에 변변찮겠지만, 저도 세 분의 계획에 동참할 수 있을지를 여쭙고자 합니다."

"흠?"

"홍 도우와 전 도우의 진체(眞體)는… 대강 짐작이 갑니다. 후후, 그들밖에 존재하지 않겠지요. 물론… 서 도우는 도저히 제가 아는 분 중엔 없습니다만."

그는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없다면 [두 곳] 중 하나겠지요. 명계 소속이시거나, 혹은… 그쪽 소속이실 테니까요. 다만 지난번 흑색귀골곡의 백골귀마가 보였던 반응으로 보아, 높은 확률로 명계의 귀인(貴人)이시겠지요?"

서휼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명계 분… 그리고 전 도우와 홍 도우의 진체…. 세 분의 목표라면 짐작이 갑니다. 그런 분들이 이 천역에 오셨다는 건 한 가지 목표 외에는 생각할 게 없으니까요."

"…."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저놈?'

일단 뭐, 헛소리를 들어 둬서 나쁠 건 없었으니 그냥 들어 두기로 했다.

"뇌성해(雷聖海)로 가셔서 금신자의 유품을 회수하시려는 것이겠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는 자신의 추측이 맞다 확신하는지, 부드러우나 확신에 찬 얼굴로 우리를 둘러보며 물었다.

나는 전명훈과 홍범의 표정에 나사가 풀려 버렸단 걸 깨닫고, 혹여나 서휼이 그들의 표정을 보지 않도록 이쪽으로 일단 주의를 끌었다.

"…틀리진 않다만, 굳이 네게 말해야 할 필요성은 못 느끼겠군."

나는 말을 하며, 동시에 홍범과 전명훈에게 심어(心語)를 보냈다.

심어의 경우에는 아무런 전조가 없기 때문에 서휼은 알아채지 못했다.

내 의지를 전해 들은 둘은 빠르게 자신의 감각을 차단했다.

나는 옆에서 어어거리고 있던 연진 역시 다시 도원도 안쪽으로 걷어차 넣어 버린 후 서휼에게 말했다.

"우리와 협력하고 싶다고 했나? 그럼 네놈은 누구였으며,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경위. 네놈의 목적을 읊어 봐라."

이왕 녀석이 착각하고 있는 것.

아예 녀석의 밑천을 털어먹자는 생각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서휼의 대답은 간결했다.

"저는 혈음(血陰)입니다. 대답이 되었겠지요?"

"…."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그리고 또한, 서휼의 의도에서 불순함이 느껴졌다.

심족의 시야로 인해 녀석의 의념과 속내는 알기 힘들었지만, 의도를 읽는 감각에는 서휼이 내게 가지는 불순한 의도가 뻔히 보였다.

'거짓말이군.'

혈음이 뭔지도 모르겠거니와, 일단 녀석은 혈음조차 아니다.

'혈음이라….'

나는 양수진의 말을 떠올리며, 녀석이 '혈음'이란 존재가 맞는지 한번 떠보기로 했다.

"네가 혈음이면, 이미 인과 연은 찾았겠군. 그렇지 않나?"

"…."

내 질문에, 처음으로 여유만만하던 서휼의 입이 다물어졌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나는 흐릿하게나마 읽히는 녀석의 의념과 심상이 심상찮게 진동하는 걸 읽어냈다.

흐릿하게밖에 읽을 수 없었지만, 흐릿하게 읽은 것만으로도 녀석의 심상은 상당히 요동치고 있었다.

"…광한이 거대하니, 어찌 쉬이 찾겠습니까."

그는 내 말에 모른 척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그냥 찾지 못했다는 식으로 넘겼다.

나는 씨익 웃었다.

'승기를 잡았다.'

정보 격차의 차이로, 처음으로 서휼과의 말싸움에서 승기를 잡은 것이었다.

'일단 녀석은 혈음이란 놈이 아니다. 그를 사칭하고 있을 뿐이야.'

"솔직히 못 믿겠군. 인과 연의 소재지조차 모르는 네가 혈음이라고?"

"…후후, 뭐… 어찌 생각하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분명한 건 제가 혈음과 깊이 관계된 이라는 겁니다. 어찌 되었든 세 분이 원하시는 걸 드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 줄 알고?"

"무엇이든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씨익 웃었다.

"나는… 네가 말한 양수진의 선보도 그렇다만, 그와는 별개로 소금산의 주인이 남긴 흔적도 찾고 있다."

"소금산의 주인?"

내 말에 서휼은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웃었다.

"아, 그렇군요. 왜 헌원이 당신을 미친 듯이 쫓아왔나 했는데… 당신은 설마 태산열제공을 노리시는 겁니까?"

"뭐, 그런 셈이지."

'태산열제공과 소금산의 주인에 대한 것도 알고 있다니….'

과연 보통 녀석은 아닌 것 같았다.

"어선(御仙)의 흔적을 찾아서 무얼 하시렵니까? 그 오래된 신(神)을 찾는 것이 천존(天尊)의 명이십니까?"

"…!"

나는 갑작스럽게 어선이라는 말을 꺼내는 서휼의 말에 정신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한순간에 몸이 녹아내렸던 그때처럼 고통스럽진 않았다.

마치 내성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간신히 '어선'이란 단어에 담긴 충격을 견뎌 내며 내색하지 않고 마주 웃었다.

'이 자식… 나를 시험해 보려 했다.'

나뿐이 아닌 전명훈과 홍범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다행히 그들은 내 요청대로 감각을 차단한 탓인지 영향이 없었다.

아마 전명훈 역시 어선을 직시한 덕에 내성이 생기긴 했겠지만, 홍범은 어찌 될지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았다.

"가장 오래된 분께서 산(山)의 신의 흔적을 원하신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명계의 주인에 대해 은유하며 서휼에게 말했다.

그러자 서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알겠습니다."

어선이라는 단어의 충격을 받고도 멀쩡히 견디며 도리어 다른 지식을 꺼내는 나에 대해서 인정한 모양이었다.

"태산열제공을 노리신다면 그 역시 도와드리겠습니다."

"네가 어떻게?"

"헌원에겐 자식들이 많잖습니까."

그는 빙긋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한둘 납치해서 세뇌하면 되지요."

"…."

마치 소풍이라도 다녀온다는 듯이 말하는 그의 어투에, 나는 조금 어이없음을 느꼈다.

"그나저나…."

"음?"

나는 은근슬쩍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서휼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그는 굉장히 친근하게 다가오며 뭔가 말을 하려 했다.

"이 정도 성의라면, 제가 도우들과 조금 함께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아직 나는 납치한다고 한 적이 없는데?"

"저런, 납치 세뇌가 싫으시다면 그냥 헌원의 자식들과 '친구'가 되어서 알아내도록 해 보겠습니다."

이놈의 반응을 보아, 틀림없이 규련 때처럼 사람의 마음을 제멋대로 주물럭거리며 토해 내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 정도면 어찌… 괜찮으신지…?"

그는 살갑게 내 어깨로 손을 뻗어 오며 물었다.

그리고.

콰아악!

나는, 녀석의 팔을 붙잡았다.

"어깨를."

"…?"

"내 어깨를… 만지지 마라."

나는 이를 빠득 갈며 놈을 노려보았다.

"죽여 버린다."

"…."

서휼은 조금 당황한 듯 하하 웃더니 손을 뺐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서 도우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나 보군요."

"잘 아는군. 뭐… 네가 우리를 돕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조금 해 보마. 나중에 결정하기로 하지. 필요할 때 연락할 테니 꺼져라."

나는 지금까지는 잘 버티고 있었지만, 계속 이놈과 말을 하다 보면 놈이 뭔가 빈틈을 찾아낼까 두려웠기에 일단 서휼을 눈앞에서 치워 버리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차후에 뵙도록 하지요. 그리고 소금산의 주인과 그 후계가 남긴 공법에 대해서는 저 역시 힘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대로."

"또한 뇌성해에 대해서는 4만 년 전 부서진 금신자의 사당을 연구해 보시면 뇌성해 입구 공략이 조금 빨라집니다. 이 정보는 귀인의 기분을 나쁘게 한 대가로 그냥 드리지요."

"흐음…."

좋은 정보였다.

그가 말하는 뇌성해라는 지역은 아마 현재 쇄성기 존자들이 찾고 있다는 양수진의 부해계라는 곳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일 테니까.

하지만 문제는 정보의 제공자가 서휼이라는 것.

이 녀석이 누구에게 얼마나 어떻게 거짓을 말하는지는 서휼 본인밖에 모른다.

이 말이 어디서부터 믿을 수 있는 정보인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이 정보에서 느껴지는 의도 자체는 불순하진 않다. 그냥 나에게 호감을 사려는 것 정도?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나를 떠보려는 의도도 조금 있긴 하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역으로 서휼을 떠보았다.

"그나저나, 4만 년 전. 그때 네게 있어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뭐였었지? 난 헌원이 산의 신에게 관심을 받았던 일이 가장 재밌었다만?"

"하하, 특이하시군요."

서휼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4만 년 전의 가장 큰 사건은 등극(登極)이 아닙니까? 그분이 좌(座)를 손에 넣은 사건 때문에 모든 삼천세계와 천역이 진동했고, 천존들께서도 축하하셨던 그 사건. 그 때문에 사실상 삼천세계의 모든 사건이 영향을 받은 게 아닙니까. 금신자의 후예들이 박해받은 것 역시 그 여파 중

하나일 뿐이고…. 그런 대사건 외에, 헌원 따위와 관련된 그런 소소한 사건을 손에 꼽으시다니…."

나는 내가 모르는 정보를 내뱉으며 나를 바라보는 서휼과 눈을 마주쳤다.

"…어쩌면, 태산의 주인과 연관된 일이라 한다면 저조차 모르는 내막이 있었겠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잠시 나와 눈을 마주치던 서휼은 눈꼬리를 초승달처럼 휘며 웃었다.

"태산의 주인과 관련된 흔적을 찾고자 하는 듯하니…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한 가지 더 알려 드리겠습니다."

"말해 봐라."

서휼은 씩 웃으며 내게서 등을 돌렸다.

"헌원이 감찰안(監察眼)을 얻은 것은, 저희가 비승한 직후입니다. 괴군이 날뛸 때 틀어박혀 있던 것 역시 갑자기 그 당시에 새로운 신통을 얻어서였다 하더군요."

"…!"

"그리고… 헌원은 그러한 신통을 수련한 적이 이제껏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희가 비승한 그 시기에 딱 맞춰서 그러한 신통을 얻었다…. 이게 뭘 뜻하시는지는 알고 계시겠지요?"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나는 조금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가… 그에게 지금 눈을 [빌려] 주고 있다는 겁니다. 후후후…."

두근, 두근, 두근….

나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서휼의 말 뜻이 바로 이해가 갔다.

헌원이 괴군이 날뛸 때 그를 잡지 않았던 건, 그 순간 그가 '어떤 존재'에 의해 영안 신통을 대여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안 신통을 부여해 준 존재는 우리가 비승한 직후에 굳이 헌원에게 그 신통을 대여해 주었다.

그리고 그 존재는 태산열제공과 연관된, 서휼의 표현에 의하면 '태산의 주인'과 관계된 존재일 확률이 높았다.

이 모든 사실들은 한 가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태산의 주인은, 어쩌면 종명자들이 비승하자마자 헌원의 눈을 통해서 우리를 감시해 왔다.'

오싹, 오싹!

나는 헌원의 눈에 떠올랐던 감(監) 자가 유난히 뇌리에 남았던 이유가 짐작됐다.

그 시선은 어쩌면 헌원의 시선이었지만 헌원의 시선이 아니었던 것이리라.

"…좋은 정보를 알려 줘서 고맙다, 서휼."

"별말씀을. 그럼 차후에 뵙겠습니다."

서휼은 빙긋 웃으며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리고 나 역시 빙긋 웃으며 입에서 다시 한번 무색유리검을 꺼냈다.

"그럼 잘 가라."

부웅, 푸콱!

내 일검에, 서휼은 그대로 반으로 갈라져 죽었다.

서휼의 원영이 그대로 흩어져 쪼개지는 게 보였다.

녀석의 천원지방(天圓地方)이 흩어져 버렸다.

서휼은 그렇게 죽었다.

나의 이름은(1)

파아아앗!

검이 난무한다.

아니, 무색유리검은 차라리 광선과도 같았다.

수천 개의 광선이, 서휼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이전의 사축기 수사 15명을 해치웠던 것보다도 더더욱 심혈을 기울여 검을 움직였다.

'이 자리에서 죽인다.'

원래라면, 서휼의 말을 조금 들어 보고 녀석을 이용해서 어느 정도 합작까지도 생각을 해 봤다.

하지만, 나는 내 심상이 녀석과 말을 하던 도중 제멋대로 변해 가기 시작하는 걸 인지했다.

서휼이 어느새 나를 세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녀석은, 상종 자체가 불가능한 놈이야.'

쿠과과과과!

내 검격의 여파에 대지가 진동했다.

'티끌 하나 남겨놓지 않고 지워 버린다!'

파아아아앗!

일 검에서 뿜어지는 수천수만의 광선이, 서휼에게 몰아치며 놈의 세포 하나하나를 분해해 버린다!

[서, 서 도우, 왜 그러시는….]

사축기 수사를 죽이려면, 그의 안쪽에 있는 천원지방을 갈라야 한다.

[서 도우, 잠깐….]

내 의식은 더더욱 정밀해졌다.

서휼의 금단이 박살 난다.

녀석의 원영이 붕괴된다.

그의 안쪽에 있는 둥근 천원과, 사축을 쌓아 갈 지방의 기초가 보였다.

슈슈슈슉!

도합 네 번의 검격.

네 번의 검격이 일차적으로 천원지방을 분해해 버렸다.

이어서, 나는 놈의 천원지방을 갈갈이 찢어 분해해 버리기 시작했다.

번뜩!

[아니, 잠깐 내 말을….]

놈이 뭐라 지껄이는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만나자마자 상대를 세뇌하려 하는 놈 따위에게 신뢰란 없다.

차라리 만났을 때 완전히 소멸시켜 버려 후환을 없애는 게 좋다.

파아아앗!

놈이 기축 장막을 드러내려 했으나, 그조차도 전부 내 무색유리검에 갈려 나갔다.

녀석의 기축 장막은 순식간에 소멸했고, 이제 눈앞에 남은 것은 가루가 되어 버린 놈의 육신이었다.

'이제 육(肉)은 전부 죽였다.'

하지만 사축기 수사는 부활한다.

본인의 신체에서 부활할 수도 있지만, 많은 사축기 수사들은 자신들이 지정해 놓은 곳에다가 몸을 부활시킨다.

그 꼴은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부활하려는 사축기 수사를 죽여 버리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간단하다.

우우우웅!

무형검이 명동(鳴動)한다.

동시에 무형검의 계위가 높아지며, 혼의 계위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자, 잠깐….]

"너는 부활할 수 없다."

계위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무형검이 서휼의 혼을 향해 입맛을 다신다.

―벤다!

무형검의 감각이 나와 이어지며, 내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사축기 수사들이 부활하기 위해 지나가는 혼의 통로가!

일반적인 사축기 수사라면 상대가 부활한다는 걸 알아도 저 혼의 통로에 손을 댈 수 없다.

합체기조차도 합체기 후기 이상이 아니라면 마찬가지였다.

너무 계위가 높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부우우우웅!

무형검은 어느새 혼의 통로가 있는 계위로 올라가, 서휼과, 그 통로의 연결을.

그대로 끊어 버렸다.

파앗!

[아, 안….]

"죽어라, 서휼."

파바바바바밧!

어마어마한 광류가 몰아치며 서휼의 혼을 그대로 분해해 버렸다.

그는 일말의 단말마와 함께 빛의 폭풍 안에서 사그라들었다.

그것이, 서휼의 끝이었다.

"후우…."

나는 서휼의 혼이 흩어진 걸 확인하자마자 검을 멈추었다.

그리고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신체는 그 말도 안 되는 생명력에 힘입어, 가루가 되었음에도 다시 붙어 얼굴이 재생되다가 혼이 흩어져 버리자 재생이 멈춘 상태였다.

얼굴만 남은 서휼의 시체.

그 서휼의 시체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상냥하게, 죽음의 공포 따윈 느끼지조차 못했다는 듯이.

"…."

서휼을 죽였다.

천원지방을 갈라서, 부활조차 못 하도록 철저하게.

혼백마저 흩어 버렸다.

그런데 도대체 뭘까.

나는 웃고 있는 채 죽은 서휼의 얼굴을 보자니, 도저히 이 녀석이 제대로 죽은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굉장히 찜찜하군….'

혹여나 분신체인 건 아닐까?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은 분명히 기축 장막을 사용했고, 체내에 천원지방이 있었다.'

내가 죽인 게 분신체라는 말은, 서휼의 분신이 사축기라는 말이었다.

놈이 괴군도 아니고, 사축기 분신을 고작 이런 곳에다가 낭비할 이유는 없었다.

'거기다가 흐릿하게 보이긴 했지만, 놈의 심상… 그리고 녀석이 죽을 때 보였던 의념들…. 그건 진짜였어.'

즉, 이놈은 서휼 본체다.

"…죽었냐."

툭툭―

나는 서휼의 얼굴 조각을 툭툭 건드려 보았다.

갑자기 살아나거나 하진 않았다.

나는 혹시 몰라 서휼의 얼굴 조각을 들어, 저물도 중 하나를 비워 놓은 후 그 저물도 안에 서휼의 얼굴을 봉인해 놓았다.

찜찜해서 봉인한 거긴 했지만, 만약 정말로 놈이 죽었다면… 인피면구로라도 써먹으면 되니 손해는 아닐 터였다.

"흠… 어쨌든 정말로 죽은 거 같군."

해치웠나 같은 소리는 필요 없다.

녀석은 틀림없이 죽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굉장히 상쾌해지고 마음속에 얹힌 듯 자리하던 무거운 감정이 스러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알게 모르게 서휼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음부터는 보이는 족족 죽여 없애야겠군.'

나는 앞으로 서휼을 어찌 대할지에 대해 그렇게 결정하며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홍범과 전명훈에게도 심어를 보내 그들의 감각 차단을 풀게 했다.

겁천에 든 후, 심족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도 심어를 보내는 능력이 훨씬 강화되었다.

본래라면 심족이 아닌 이들은 심어를 받아도 인지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심어 자체에 담긴 의지를 더더욱 명료하게 강화시켜 심어를 보내 뜻을 전달하기가 쉬워진 느낌이었다.

"그래, 그래서 뭔 일이었냐. 방금 그 용 새끼는… 예전에 등선향에서 본 놈 같은데?"

"맞아. 상당히 음흉하고 교활한 놈이었다. 감히 나를 세뇌하려고 하기에 죽여 버렸다."

나는 전명훈의 질문에 답해 주었고, 내 답에 홍범이 껄껄 웃었다.

"하하, 잘 하셨습니다. 주인님. 주인님을 탐하려는 놈들은 전부 죽어 마땅하지요."

"서휼은 확실히 그런 놈이긴 하지."

서휼에 대해서만은 아무리 죽여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그럼 이제부터 어찌할 거냐, 서은현?"

"뻔하지. 인족 총연맹으로 들어가, 태수로 인정을 받을 거다. 태수가 안 된다면 최소한 그에 준하는 전력으로 인정을 받을 예정이다."

"흠, 녀석들이 널 인정해 줄까? 넌 수배까지 받은 몸이고, 듣자 하니 그 심족 기술? 그런 건 천족에서 배척당하는 그런 거라고 하지 않았나?"

"맞아. 다만… 천벌을 내린 존재. 그 존재를 그 자리에서 우리만 보고 있던 건 아닐 거야."

"뭐?"

"그날, 전 천족의 합체기 태수들이 전부 뇌령도를 주시했을 거란 소리다."

나는 일의 전말을 알려 주었다.

"그러니까… 지금 천족 중에는 헌원 같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전부 뇌령도를 주시해서, 그날 천벌의 주인을 본 탓에 모조리 치명상을 입었단 거냐?"

"그래."

"그래서 그 천족의 빈 전력을 메우기 위해 네가 들어가면 너를 받아 줄 거고?"

"그렇지."

"흐음… 뭐, 나쁘지 않군."

전명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나는 다시금 광한계에, 차후에 금신천뢰문의 후인들이 비승하면 터를 잡을 수 있게 준비를 해 둬야겠어."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 그럼 일단… 인족 총연맹. 천인도로 가 볼까?"

파아아앗!

그때였다.

찌이이잉!

나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신호'에 몸을 흠칫했다.

전명훈과 함께 비둔술을 써 인족 총연맹 방향으로 날아가며, 나는 그 신호를 잡고 신호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이윽고, 나는 그 신호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 수 있었다.

'원유!'

원유가, 광한계 안쪽으로 진입했다.

* * *

우웅, 우우웅!

나는 원유의 정신에 접속했다.

녀석에게 심어 둔 기괴고가 발동하며, 녀석의 원영 안쪽에서 작동하여 녀석과 내 시야.

그리고 감각들이 하나둘 연결되기 시작했다.

'여기는….'

내가 원유의 몸으로 가까스로 눈을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였다.

"흐음, 놀랍군. 비선대를 설치하자마자 비승자를 얻은 것도 좋은데… 그 비승자가 고작해야 원영 중기 수준이라니."

"…!"

나는 눈앞에 다가온 검은 장포를 입은 자의 말에 황급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도 나를 내려다보았다.

진득한 귀기가 그에게서 풍겨오고 있었다.

"보아하니 마공을 익힌 마도 수련자인가? 차원 압력을 이겨 낼 정도로 재생력이 꽤 괜찮은 마공을 익혔나 보군. 오히려 원영기 때 비승하면 시(尸)를 만나는 빈도가 확 떨어지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도 있겠어."

"여기는… 어디입니까?"

나는 알고는 있었지만 원유의 입을 통해 다시 한번 재확인했다.

"이곳은 광한계, 흑색귀골곡의 문내 비선대다."

"명귀계가… 아닌 겁니까?"

"호오, 명귀계를 노리고 비승했느냐?"

"일단 그렇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섭명함의 인력이 가리키는 곳이라 명귀계일 줄 알았건만, 단순히 흑색귀골곡 내부였을 줄은….

그러던 중.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잠깐, 비선대? 흑색귀골곡 내부?'

나는 내가 디딘 땅을 보았다.

건곤성에 있는 것과 똑같은 비선대였다.

그리고 비선대 안쪽에서는 공령지의 힘이 느껴졌다.

'하, 이런… 흑색귀골곡 이 치들…. 문파 내에 공령지가 있음에도 인족에 신고를 하지 않고 자기들이 비선대를 제작해서 꿀꺽한 건가? 하계에서 오는 인재들을 전부 자기네 문파가 흡수하려고?'

난 눈앞의 흑포 수사.

'허곽'을 보며 말했다.

"혹 어째서 명귀계를 노리고 비승한 제가 광한계로 오게 된 건지를… 알 수 있겠습니까?"

"간단하다. 그야 이 비선대에는 귀기를 잔뜩 먹여서 명귀계의 비선대와 굉장히 비슷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지."

"…!"

"명귀계도 좋지만, 우리 광한계의 흑색귀골곡 역시 나쁘지 않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명귀계보다도 좋지. 명귀계에 있는 흑색귀골곡 본종(

宗)에 비하면 조금 달리지만, 이곳에도 인족 오대종문의 명예를 누리며 상당히 대우받는다. 거기에 가진바 공법서도 본종의 것에 비해 조금 떨어질 뿐 대다수의 공법을 공유하고 있다."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우리 흑색귀골곡이라면, 명귀계에서 수련하는 것과 다름없는 효과를 보장해 줄 수 있다. 우리는 홀로 비승한 너 같은 인재를 아주 좋아하지. 거기다가 이미 받아들인 인재에 대한 대우도 아주 좋다. 어떠냐, 본문에 들어오지 않겠나?"

"…."

나는 원유의 몸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허곽의 의념이 내 눈에 바로 들어왔다.

서휼처럼 심족의 시야를 방어하는 법기도 끼지 않았으므로 그가 무슨 의도를 가졌는지도 대강 알 것 같았다.

'거절하면, 죽일 생각이다.'

애당초 자기 종문 내에 비선대를 만들어 뒀다는 건, 그런 의미다.

공령지는 본래 원칙상 특정 집단이 소유하면 아니 된다.

그런데 그렇게 몰래 얻은 공령지로 만든 비선대.

그 비선대에서 나온 수사가 자신들의 종문에 입문하지 않는다 하면 어찌 되는가?

당연하다.

살인멸구로 입을 막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흑색귀골곡은 귀혼을 다루는 귀도공법을 주로 다루니, 어쩌면 제안을 거절하는 이들은 싹 죽여서 귀혼으로 제련하면 그만일 터였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양질의 제자.

혹은 양질의 귀도공법 재료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 비선대이니 나쁠 일은 없으리라.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 말했다.

"영광입니다. 대흑색귀골곡에 들어갈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허곽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따스하게 등을 두드려 주었다.

"흑색귀골곡의 제자가 된 걸 축하한다. 이름이 뭐지?"

얼마간 고민하던 나는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서립입니다."

나의 이름은 (2)

'젠장, 서립이 뭐냐.'

허곽이 묻자 당황해서 말하긴 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니 이만큼 끔찍한 이름이 또 없는 것 같았다.

원유라고 답하면 허곽이 혹시 원립을 알까 봐 원씨는 배제했다.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말했는데, 최악의 이름이었다.

'빌어먹을.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고.'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허곽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서립! 서씨들은 모두 인재밖에 없지. 예전에도 서씨 한 명을 본 곡에 입곡시키려 했는데 실패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인재 그 자체였는데 말이야."

"하하… 그렇습니까?"

나는 그가 말하는 인물이 누군지 알 것 같아 어색하게 웃었다.

"뭐, 어쨌든 흑색귀골곡은 이번에 설치한 비선대로 인해서 계속 인재 수급을 더더욱 늘려 나갈 테니 문제는 없겠지. 일단… 너는 이 아이를 따라가거라."

우우우우우―

허곽이 소매를 휘두르자, 그의 소매 안쪽에서 시커먼 귀신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여기 이 녀석을 입곡소로 데려가거라."

우우우―

귀신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딘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럼 차후에 보자꾸나. 녀석을 따라가라."

"예, 어르신."

나는 허곽을 배웅한 후, 그가 뿜어낸 귀신을 따라갔다.

'이곳이 흑색귀골곡의 곡내인가….'

흑색귀골곡은 처음 왔기 때문에 신기한 기분이었다.

거대한 계곡.

그 안쪽에 좁은 길이 수십 수백 수천 개는 있었고, 귀신은 그 좁다란 길을 어찌어찌 잘 찾아서 나를 안내했다.

얼마간 귀신을 따라갔을까.

"흠?"

나는 '입곡소'라고 쓰인 작은 전각 앞쪽에 도착했다.

귀신은 따라오라는 듯이 우우거렸고, 나는 귀신을 따라 입곡소 안으로 들어갔다.

"헛!"

그리고 안쪽으로 들어간 나는 기묘한 광경에 화들짝 놀랐다.

입곡소 전각 안쪽에는 흑목으로 된 탁자 앞에, 새하얀 해골이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영기 대원만.

아니, 원영기 대원만에서 조금 더 나가 천인기에도 반 발짝 걸치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해골이었다.

조금 놀랐으나, 나는 송진을 처음 봤을 때를 기억하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

그러나 내가 말을 꺼낼 필요도 없이, 나를 안내해 준 귀신이 해골의 두개골 옆으로 날아가더니, 그에게 뭔가를 속삭이는 듯했다.

그들이 쓰는 언어는 요족어도 아니었고, 광한계 천족 공용어도 아니었다.

애당초 성대를 사용하지조차 않았기에, 나는 그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얼마간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받던 둘은 이내 나를 쳐다보았다.

해골이 나에게 손짓을 했다.

얼마 후 그에게서 익숙한 천족 공용어가 튀어나왔다.

"그래, 이번에 13번 비선대를 통해 올라왔다고?"

"예, 그렇습니다."

"13번 비선대는 이번에 처음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직 개발이 다 이뤄지지 않은 점이 많네. 원래는 비선대에 비승자가 올라오면 바로 인력을 추적해 비승자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낸다만, 13번 비선대는 아직 그런 기능이 추가되지 않았지. 해서 이렇게 직접 물어봐야 한다네."

해골은 눈두덩이 안쪽에서 귀화를 피워 올리며 내게 질문했다.

"자네는 어느 하계에서 왔는가?"

난 그의 귀화를 보며, 저 공법이 일종의 의식공법의 일종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기묘성심전과 비슷한 부류다.'

의념의 색을 볼 수 있는 공법인 것이다.

'별 공법이 다 있군.'

난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의념을 통제했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그에게 대답했다.

"성계(星界)라고 부르던가요…. 그곳에 있는 작은 별입니다."

"별 이름은 뭐지?"

"지구라고 불렀습니다."

"너도 지구 출신이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에 뭔가를 기록했고, 난 그의 말에 강민희를 떠올리며 물었다.

"저 말고도 지구 출신이 있습니까?"

그러나 내 질문에 해골은 낄낄 웃으며 말했다.

"아마 성계 비승자들에게 어디 출신이냐 물으면 열에 일곱은 지구 출신이라 대답할 거다. '둥근 땅(地球)'을 자기 별 이름으로 짓는 놈들이 한둘이어야지. 성계에 지구가 한둘일 거 같으냐?"

"아…."

생각해 보지도 못한 문제였기에 나는 순간 벙쪘다.

"어쨌든 사실인 거 같으니 넘어가고. 다시 한번, 네 이름은 뭐지?"

"서립… 입니다."

"그래, 서립. 성별은?"

"저는…."

* * *

파아아아앗!

나는 전명훈과 홍범과 함께 몇 날 며칠을 날아들어 인족 영역에 도착했다.

"이대로 천인도로 가는 거냐?"

전명훈의 질문에 난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간다만, 너희는 안 된다. 너는 일단 홍범, 연진과 함께 뇌령도로 가서… 금신천뢰문의 잔해 중 수습할 게 있다면 수습해라."

"너 혼자 간다는 거냐?"

"그래. 나 혼자 가야 혹여라도 도망칠 때 더 편하다."

전명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그럼 나중에 만나지. 만약 도망친다면 나중에 어디서 만나지?"

"한령족 영역 광령지로 와라. 그곳에서 보지."

우리는 약속을 잡은 후 헤어졌다.

나는 빠르게 날아가며 천인도에 도착했다.

천인도는 인족 총연맹의 총본산인 탓인지, 그 어떤 천공도보다도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었으며, 지금은 합체기 태수들이 치명상을 입은 탓인지 평시보다도 결계가 강화되어 있었다.

거기에 평소에는 없던 검문까지도 생겨나 있었다.

"거기 지나가는 천인기 도우! 천인도에 들어가려면 통행증과 진입 사유를…."

나는 검문소에 있는 천인기 대원만 수사를 흘긋 보고는 반응하지 않고 무색유리검을 들고 등 뒤에 삼태극을 띄웠다.

부웅!

콰아아아앙!

결계 한쪽에 그대로 바람구멍이 났다.

나는 어버버하는 천인기 대원만 수사를 지나쳐 천인도의 한 곳으로 향했다.

천인도 천부산.

평소 인족 합체기 태수 7인이 머무는 곳이었다.

'인족 편의 합체기 태수는 9인.'

인족과 동맹을 맺고 있는 흑룡족의 합체기 대원만 흑룡왕 현음.

봉래궁주이자 건곤성주인 합체 초기 헌원.

인족 총연맹의 맹주인 합체기 대원만 준제.

인족 전체를 감찰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합체 초기 위령선.

개진문의 주인인 합체 중기 개진.

연천궁의 주인인 합체 중기 응연.

인족 총연맹의 총군사인 합체 초기 위수.

산수 출신 합체 후기 수사 골맥.

비밀에 싸인 합체기 수사 태열전.

이상이 인족 총연맹을 지탱하는 9인의 수사인 것이었다.

다만 합체기 수사라고만 알려진 태열전은 태수회에 거의 참석을 안 하고, 흑룡왕은 애당초 흑룡족이기에 동맹으로만 대우할 뿐 실질적인 인족 회의엔 끼지 않았다.

그렇기에 인족 총연맹은 사실상 맹주인 준제, 군사인 위수, 감찰사인 위령선을 주축으로 헌원, 골맥, 응연, 개진 일곱이서 운영하고 있다고 하는 게 맞을 터였다.

나는 천부산 방향으로 날아가며 그들을 만나기 위해 더더욱 속도를 높였다.

저 멀리, 새하얗게 영기가 몰려있는 천부산이 눈에 들어왔다.

합체기 수사들이 거하는 자리.

그러나 내가 천부산으로 진입하려 했을 때였다.

'…?'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날아가도 천부산과 내 거리가 가까워지지 않았다.

'이거….'

나는 아까 지나쳤던 곳을 또 지나쳤다는 걸 인지했다.

'같은 곳을 뱅뱅 돌고 있다?'

방향 감각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니었다.

내 감각은 멀쩡하다.

그렇다면 하나다.

'공간이 휘어져 있다.'

공간이 휘어진 채 결계처럼 어중이떠중이들의 진입을 막는 것이었다.

이런 공간을 건너가는 방법은 간단했다.

사축기 수사 이상만이 쓸 수 있는 축지법으로 공간을 접어서 이동해 버리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가진 힘은 합체기 급이었지만 정작 사용할 수 있는 공능은 천인기 급이 전부였다.

내 공능으로는 휘어진 공간을 바로잡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가진 게 힘밖에 없으면, 힘을 사용하면 되지.'

간단한 이치였다.

꾸구국….

나는 무색유리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대로 무색유리검을 들어 올린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검을 내리쳤다.

내 감각에 굽어진 공간이 잡힌다.

계위가 마구 어그러져 있다.

꾸과과과광!

그대로 공간이 찢겨 나가며, 휘어진 공간이 길을 열었다.

나는 태연하게 천부산의 용맥이 흐르는 곳 안쪽으로 진입해 천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천부산의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파바바밧!

은은한 투영체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총 6인의 투영들.

비밀에 싸인 태수, 태열전.

건곤성에 거하는 태수, 헌원을 제외한 모든 태수들이 투영을 보낸 것이었다.

익숙한 얼굴이 내게 입을 열었다.

위령선이었다.

"어찌 감히 인족 총연맹의 성지인 천부산에 함부로 발을 들이느냐."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천부산에 동부를 하나 받고 싶어 천부산의 태수님들께 허락을 받고자 합니다."

내 말에 그들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천부산의 동부를 받는 조건은 알고 있겠지?"

"예. 합체기 태수이거나. 혹은 인족 육대종문 급의 초대형 세력의 이름으로 동부를 대여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알고 있습니다."

"잘 아는군. 너는 태수가 아니라, 그저 천인기 수사일 뿐이다."

"흐흠…."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저는 태수의 자격으로 동부를 받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뭐지?"

"초대형 세력은 세력 단위로 동부를 하나 받아갈 수 있지 않습니까?"

"…네가 지금 인족 오대종문 급의 세력을 등에 업었단 거냐?"

"아닙니다."

"그럼?"

"저 개인이, 인족 육대종문과 동일하다는 소리입니다."

내 광오한 발언에 태수들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위령선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교만하군."

"그렇습니까."

"너는 네게 헌원이 수배를 다시 건 걸 알고 있느냐? 봉래궁 단위에서 많은 현상금을 걸었고, 네 죄목도 일목요연하다. 비선대에서 함부로 도망친 죄목이지."

"글쎄요. 저는 이미 예전에 금신천뢰문과 함께 시운도 명적에 이름을 등록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비선대에 얽매여야 합니까?"

"그게 절차다. 다시 하계로 내려갔다 와서 비승해도 절차는 필요해. 그리고 너는 하계로 내려갈 때 총연맹에 통보조차 하지 않고 멋대로 적강했다. 그것으로도 죄에 해당하며, 심지어 진마계에 있는 공령지를 수년간 숨기며 진마계 정벌을 방해하기까지 했다. 이는 엄청난 죄다."

"그렇습니까."

"거기에 오늘 태수회가 있는 천부산에 멋대로 들어온 것까지… 네 죄목이 너무 많다. 이렇게 너와 대화를 나눠 주는 것조차 자비임을 알라."

나는 나를 위협하는 듯한 위령선의 말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겁천에 든 후.

단순한 투영임에도 의념을 어느 정도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위령선 말고 다른 태수들의 의념을 읽으며 그들이 왜 내게 이런 태도를 가지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군.'

난 그들의 의념에 더더욱 자신감을 가지며 위령선에게 말했다.

"그럼 자비는 더 안 베푸셔도 되니, 죗값을 치르게 해 보시지요."

"뭐…?"

"죗값, 치르게 해 보란 말입니다."

내 말에 위령선은 나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리고 얼마간 우리의 대치가 이어졌다.

그들 중 누구도 나에게 먼저 덤비지 않았다.

'다들 천벌의 주인에게 입은 피해가 만만찮나 보군.'

아마 원래라면 이렇게 투영체로 위협을 하는 게 아닌, 본체가 내려왔어야 정상이었다.

그때였다.

인족 총연맹 맹주이자 태수회의 우두머리.

합체기 대원만으로 알려져 있는 태수 준제가 앞으로 나서 말했다.

"감찰사 위령선, 너는 서은현을 체포하라. 서은현이 잡히면 즉석 재판을 해 서은현의 죗값을 치르게 할 것이다."

그 말에 위령선은 굳은 얼굴로 갑자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호오….'

위령선의 투영이 사라지고 얼마 후.

공간이 갈라지며, 입만을 내놓은 백색의 무면탈을 쓴 남성이 공간 너머에서 걸어 나왔다.

'위령선, 본체!'

쿠구구구구!

어마어마한 압박이 나를 짓누른다.

동시에, 나머지 다섯 태수의 투영은 허공으로 날아오르더니 각자 어딘가로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공간이 갑작스레 '넓어지기' 시작했다.

나와 위령선이 한판 벌일 판이 깔렸다.

무면탈 너머에서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위령선을 도발할 목적으로 말했다.

"느껴지는 기세가 사축기 수준입니다. 많이 아프신가 봅니다? 관절이 쑤시지는 않으신지요?"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던 위령선은 씨익 웃었다.

"확실히, 나는 지난번 뇌령도에 강림한 분을 직시한 후 치명상을 입었다. 지금도 상태가 말이 아니지."

'순순히 인정해?'

내가 조금 놀라자, 위령선은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굳이 내가 나선 이유를 알겠느냐?"

"어디 한번 가르쳐 주시지요."

내 말에, 위령선이 하늘로 손을 뻗었다.

동시에, 나는 하늘 저 건너편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쿠구구구구구!

저 멀리.

아주 먼 곳에서부터, 어마어마한 기운이 이쪽으로 뿜어져 전송되고 있었다.

파아아아앗!

하늘에서부터 수백 개의 광선이 내리꽂혔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서 쏘아져 온 광선의 위치를 역추적해 광선이 어디서 오는 건지를 알아냈다.

'위령선의 분신!'

태수 위령선은 인족 영역 곳곳에 자신의 분신을 파견하여 인족 전체의 동향을 주시한다.

그리고, 그 중 천인도는 크기가 넓기에 위령선 본체 말고도 세 명 정도의 분신이 파견되어 있었다.

그 세 명의 분신은 현재 천인도의 용맥에 녹아들어, 천인도 용맥의 힘을 위령선 본체에게로 전송 중이었다.

다른 광선의 정체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천공도에 파견된 위령선의 분신들이 천공도들의 용맥을 녹여 내 그에게로 전송 중일 터였다.

쿠구구구구구!

나는 전 인족 천공도의 용맥의 힘을 전송받는 위령선을 보며 탄성을 흘렸다.

고작해야 사축기 수준에 불과했던 그의 기세가 급격히 올라가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단기전 한정. 전성기 수준에 도달한다.]

다음 순간.

부웅!

비둔술에 휩싸인 그가 한 손에 칠색의 우선을 들고 돌진해 왔다.

[네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마.]

콰르르르르르!

불꽃이 만천한다.

사방으로 칠색의 불이 비산하며 순식간에 넓혀진 공간 일대가 불바다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삼태극을 띄웠다.

[좋은 상대가 되겠군.]

다음 순간.

콰아아앙!

내 무색유리검은 어느새 위령선의 입을 꿰뚫고 있었다.

[…!]

그는 인지하지 못했는지 화들짝 놀란 모습이었다.

나는 끝없이 기력을 충전하는 그를 보며 안광을 빛냈다.

[전력을 다해라.]

[아, 아각… 아그극…!]

꽈아아앙!

그를 옆으로 후려치듯 떨쳐 낸 나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실수로 죽일 수도 있으니까.]

[너, 너…! 그 힘…!]

콰아앙!

허공을 박차며, 정지된 세계에서 위령선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합체기 태수라는 자리를 도박으로 오른 건 아닌지.

그는 비둔술을 써 기민하게 정지된 세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느렸다.

부웅!

번쩍!

무형검을 덧씌운 무색유리검으로 그의 상반신을 베어 가른 나는, 자세를 잡고 다시 그를 향해 백여섯 번의 참격을 꽂아 넣었다.

그러나 그는 반응조차 하지 못한다.

[이, 이거… 네놈, 심족의 힘…!]

천, 지, 심, 괴.

네 개의 힘의 축이 내게 활화산 같은 힘을 공급했다.

나는 전신에 씌운 서 장군의 회로를 통해 힘을 증폭시키며 그를 몰아붙였다.

[크윽…!]

이내 말을 할 여유조차 잃어버렸는지, 위령선은 내 공격을 눈으로 좇는 것에 집중하며 한참을 나와 합을 주고받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파아아앗!

기운을 끌어모은 위령선이 순간 비둔술을 더더욱 빠르게 시전하더니 어느새 내 앞에서 저 앞으로 이동했다.

순식간에 2천 리를 멀어진 그를 향해 무형검을 뻗쳤다.

무형검은 뇌전처럼 빠르게 쇄도했으나, 거리가 멀어서인지 힘의 전도율이 조금 떨어진다.

그리고, 내 일격을 견뎌 낸 위령선이 수결을 맺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군.'

[이 빌어먹을 심족 첩자 놈! 죽어라!!!]

동시에, 위령선의 그림자에서부터 무수한 분신들이 튀어나왔다.

하나하나가 천인기 급인 분신체들로 인해 그의 주변이 빼곡해졌다.

'허, 아무리 술법의 일종이고, 단기전용이라지만….'

얼마 못 가 사라질 불안정한 분신들이다.

하지만, 천인기 급 분신체들이 3억을 넘어간 순간.

나는 헛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쿠구구구구구!

분신체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수결을 맺었다.

'진법을 펼치려나 보군.'

단악검법.

첩첩산중.

쿠구구구구!

무형검이 천지사방으로 뻗쳐 나가며 세상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가시덤불이 되었다.

하나하나가 산맥을 가를, 말 그대로 첩첩산중을 갈아 버릴 거력이었다.

무형검의 폭주에 위령선의 분신들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나는 3천 개의 무색유리검을 전부 꺼내 허공에 펼쳤다.

무색유리검에 무형검이 깃든다.

위령선의 분신들이 또다시 분신들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분신들이 또다시 분신을 만든다.

그리고 분신들이 모여 각자 진법을 짜기 시작했다.

진법에서 놈들의 힘이 증폭된다.

단악검법.

삼천광일출봉.

쿠구구구구구!

3천 개의 무색유리검.

그 무색유리검에 덧씌워진 무형검에서부터, 각각 3천 개의 무형검기가 뻗쳐 나왔다.

9백만 개의 검기가 전방을 휩쓸었다.

검기에 맞은 분신체들은 일거에 터져 나갔다.

단악검법.

괴암.

사방으로 흩어진 9백만 개의 검기들이 일제히 몸을 떨며 덩어리져 마구 사방으로 몰아쳤다.

곳곳에서 검기의 폭풍이 일어나 위령선의 분신들을 휩쓸었다.

파아아아앗!

녀석의 분신 중 한 녀석이 내게 날아오며 손을 뻗었다.

나는 간단하게 분신을 터트려 버리려 검기를 날렸다.

그때였다.

파밧!

[…!]

분신과 위령선 본체가 위치를 바꾸었다.

위령선 본체는 손에 든 칠색의 부채를 내게 휘둘렀다.

콰르르르르!

용암보다도 뜨거운 불꽃이 대지를 녹여 버리며 내게 쇄도한다.

나는 빠르게 그에게 달려들어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어느새 위령선은 다시 분신과 위치를 바꿔치기한 상태였다.

'귀찮군.'

이대로라면 계속 술래잡기를 해야 할 상황.

'다 쓸어버린다.'

단악검법.

단악!

쿠구구구구구!

3천 개의 무색유리검이 내 뜻에 의해 각각 무형검이 깃들어 단악을 펼치기 시작했다.

3천 개의 단악이 천지사방을 메우며 몰아쳤다.

빛이 점멸하며, 위령선의 분신들이 일거에 소멸해 간다.

그때였다.

쿠우우우우우!

나는 위령선이 분신들로 만든 진법으로 증폭한 기운들이 한 점으로 몰리는 걸 발견했다.

[거기냐!]

저곳이 본체가 있는 곳!

그리고, 내가 그쪽으로 공격을 쏟아부을 때였다.

쿠우우우우우!

그쪽에서, 위령선이 영역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

빠르게 녀석의 영역이 나를 뒤덮었고, 나는 어느새 알록달록한 가면들로 가득한 세계에 진입해 있었다.

번쩍!

어느새 내 옆에 있던 가면이 위령선으로 변해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쿠구구구구!

그가 들고 있던 칠색의 부채가 시뻘게지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노랗게, 하얗게, 파랗게 변했다.

새파란 불꽃이 나를 덮쳐 왔다.

이전의 불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불꽃이 나를 덮어 온다.

그리고, 나는 이를 드러내며 손을 뻗었다.

콰악!

불꽃을 뚫고 위령선에게 다가가 놈을 잡아채자 녀석이 놀라는 기색이 느껴졌다.

[영역을 언제 펼치나… 기다리고 있었다.]

[뭐…?]

[사축기 수사들은 천원지방을 쪼개야 죽지만… 너희 태수들은 천원지방이 합쳐져 태어난 '영역' 자체를 파괴해야 죽잖나. 그러니….]

나는 당황하는 위령선을 향해 검을 날렸다.

그는 분신과 위치를 바꿨지만 내 검은 녀석의 분신을 터트리고 녀석의 영역을 파고들었다.

꽈아아아아앙!

수계의 차원 장막이 내 일 검에 우그러졌듯이, 위령선의 영역이 일 검에 우그러졌다.

'사축기 수사의 기축 장막은 물을 베는 것 같이 물렁거렸는데….'

합체기의 영역은 확실히 달랐다.

그 자체로 하나의 차원 장막!

[대단하군.]

난 위령선의 차원 장막을 찢어 버리며 웃었다.

녀석의 영역 안쪽에 의념이 둥둥 떠다니며 감정을 드러냈다.

영역에는 고통의 의념이 가득했다.

[네놈!!!]

위령선의 분신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영역 밖에서는 천인기 급이던 것들이 이 안에서는 하나하나가 사축기 초기 급이었지만, 하나하나가 합체기 급의 비둔술을 쓰며 달려드는 중이었다.

하지만…!

[느리다.]

콰앙, 꽈아아앙!

일 검에 위령선의 영역이 우그러진다.

[김영훈에 비하면….]

콰아아아앙!

이 검에 영역이 찢겨 나간다.

[헌원에 비하면….]

쩌어어엉!

삼 검에 무수한 분신들이 폭발하며, 차원 장막이나 다름없는 영역에 바람구멍이 뚫렸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참격을 세계 자체에 가하며.

나는 무수한 분신들을 헤치고 점차 위령선 본체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는 분신들과 위치를 바꾸며 영역 안에서 저 멀리 도망쳤다.

그리고 멀리서 내게 푸른 불꽃을 날렸지만, 나는 점차 녀석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단악검법.

우공이산!

꽈아아아아앙!

참격이 크게 폭발하며 내게 달려들던 위령선의 분신들이 일제히 박살 나 날아갔고, 그의 영역 곳곳이 너덜거렸다.

나는 일순간 극속에 도달하며 위령선을 향해 쇄도했다.

그는 분신과 또다시 위치를 바꿨다.

영역 안쪽이기에 의념을 읽는 건 헷갈렸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심족의 시야로만 보면 못 알아볼 터였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 얻은 김영훈의 지각을 통해 그가 '바꾸려는' 위치를 알아냈다.

파아아앗!

그가 분신과 교체를 시작하자마자 나는 교체한 곳으로 방향을 꺾어 위령선의 앞쪽에 도착했다.

검을 내리친다.

콰아아앙!

폭음이 비산하며 위령선의 영역 전체가 흔들렸다.

그는 반쯤 박살 난 무면탈 안쪽에서,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극, 그극, 그그그그극!

그는 칠색의 우선을 들고 내 무색유리검을 간신히 막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내 검은 그의 법보를 파고들고 있었다.

[자, 그럼.]

나는 등 뒤쪽에서 7쌍의 날개를 뻗었다.

[잘 가라.]

창익천쇄의 기운이 무색유리검에 담기며, 그의 법보와 위령선 본체를 동강 내려던 찰나.

파아아아앗!

"그쯤 하지."

누군가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합체기 대원만.

인족 총연맹주 준제였다.

"…!"

난 살에 닿는 감촉을 느끼며 놀랐다.

인족 총연맹주가, 본체를 끌고 왔다.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가 식은땀을 흘릴 때, 그가 손뼉을 쳤다.

짝짝!

그 손뼉 소리에 위령선은 즉시 영역을 거두고는 법보를 입으로 다시 회수했다.

"그래. 축하하네. 자네는 자격을 증명했어."

나 역시 무색유리검을 입안으로 다시 회수하며 한 걸음을 물러났다.

"…다음부터는 어깨는 좀 조심해 주시지요."

"하하, 알겠네. 어쨌든 다들 서은현의 실력에 의심이 있는 이가 있나?"

어느새 합체기 태수들은 투영체가 아닌 본체를 끌고 와 주변에서 구경 중이었다.

"없습니다."

"만족합니다."

"인족의 미래가 밝군요."

"심족 기술도 그만치 익히다니, 심도공법 연구에 아주 좋겠습니다."

모두가 내게 긍정적인 평가를 주고 있었다.

나는 아까 읽었던 의념이 맞았음을 깨닫고 싱긋 웃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나를 시험하려는 것뿐이었다.

준제는 위령선을 보며 물었다.

"태수 위령선, 자네는 어찌 생각하지?"

위령선은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며 말했다.

"아주 훌륭합니다. 이 아이라면 인족의 새로운 미래가 될 겁니다."

준제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축하한다. 이 자리에 없는 헌원과 태열전을 제외한 인족 총연맹 태수회가, 과반 이상으로 너를 인정하는구나."

이어진 그의 말에, 나는 드디어 내가 저들에게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시험을 무사히 치른 걸 축하한다. 지금까지 수고 많았다. 앞으로 좋은 일만이 널 기다릴 게다."

나는 얌전히 예를 취했다.

"이제부터 잘 부탁하네. 서 태수(太修)."

나의 이름은 (3)

우우웅!

'음, 본체가 태수가 되었군.'

나는 흑색귀골곡 입곡소 옆.

대귀동이라는 곳에 앉아 좌선을 하며 본체의 신호를 받았다.

사실 본체라는 말도 이상한 게.

본체와 나는 현재 시각과 청각 등 감각과 모든 생각 및 감정을 공유 중이었기에, 사실 둘 사이에 구분 따윈 없었다.

'아니, 이름이 다르긴 하지.'

서립이라니.

생각나는 대로 짓긴 했다만 이만큼 끔찍한 이름이 어디 있단 말인가.

새삼 몇 번을 생각해도 끔찍하고 자괴감 드는 이름이었다.

"이, 이곳에서 기다리면 됩니까?"

"그래. 대귀동에서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알겠습니다!"

입곡소를 지키는 백골 원영기 수사.

백진에 의해, 대귀동으로 남포를 입은 사내가 들어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내 옆에 앉았다.

느껴지는 기운은 원영 초기 수준이었다.

"아, 선배님. 선배님도 흑색귀골곡에 입곡하시려는 분이십니까?"

백진에게 듣기로, 일반적으로 천인기 수준의 비승자라면 충성 맹세를 하게 한 후 바로 흑색귀골곡 장로직을 내 준다 했다.

장로직에서 신뢰가 쌓이면 원로가 되는 것이었고.

하지만 '서립'은 아직 원영 중기 수준이었기에 바로 장로직을 줄 수는 없고, 대신 시험을 쳐서 흑색귀골곡 음혼(陰魂) 제자가 될 수 있게 해 주겠다 하였다.

흑색귀골곡의 위계는 다섯 단계로 나뉜다 하였다.

연기기 수준 제자는 문령(門靈).

축기기 수준 제자는 시령(屍靈).

축기기에서 재능이 보이는 제자는 시혼(屍魂).

결단기 수준 제자는 귀혼(鬼魂).

원영기 수준 제자는 음혼(陰魂).

이상이 흑색귀골곡의 제자 위계였다.

그리고 원영기 대원만 제자 및 천인기에 오를 가능성이 높은 원영기 음혼은 호법(護法).

천인기는 장로(長老).

천인기 중에서 신뢰가 높거나 높은 충심을 보인 이, 혹은 문파 내에서 공적이 높은 이.

그리고 사축기에 오를 가능성이 높은 이들은 원로(元老)의 직위를 받는다.

여기에서 중경계부터는 색(色)으로 위계를 정하며.

사축기는 흑색(黑色) 원로.

합체기는 남색(藍色) 원로.

쇄성기는 청색(靑色) 원로로 불린다.

듣기로, 청색 급 원로는 광한계에는 존재치 않으며, 귀골곡 본종이 있는 명귀계에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아마 내가 지난 생에 들었던 장익의 말대로라면, 지금은 명귀계에도 청색 원로는 없을 터였다.

아마 양수진의 부해계를 찾으러 가는 존자들의 원정대에 파견되었을 테니 말이었다.

'흑색귀골곡도 역사와 근간이 깊기는 하군.'

창천개벽문이나 금신천뢰문에는 잘 해 봤자 사축기까지의 위계밖에 없었는데, 흑색귀골곡은 어찌 되었든 쇄성기까지의 위계가 있으니 말이었다.

그리고, 현재 나는 흑색귀골곡의 입곡 시험을 치르면 바로 '음혼' 제자로 받아 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듣기로는 본래 외부인은 아무리 원영기 대원만이라도 능력을 증명하지 않으면 음혼이 아닌 귀혼 제자 시험을 치르고 들어와야 한다고 했다.

다만 내가 원영 중기 수준으로 비승한 시점에서 흑색귀골곡에 능력은 증명된 것이었으니 음혼 수준에서 볼 수 있는 시험을 내 주겠다는 것이었다.

다만 이 방식에는 한 가지 귀찮은 점이 있었다.

"하하, 서 수사. 그래서 이 허남권이 그 귀물을 때려잡을 때 말입니다…."

음혼 시험을 치르려면 최소 5인의 인원이 모여야 했는데, 최소 아직까지는 허남권이라는 말많은 놈과 나 말고는 아무도 음혼 시험을 치를 준비가 안 됐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본체가 태수 칭호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동안 계속해서 이 음습하고 썩은 내 나는 대귀동에서 허남권의 헛소리를 들으며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다.

'흑색 원로 허령의 방계 후손이라 했던가.'

듣기로는 수계 청문세가처럼 본가에서 신경도 안 쓰는 방계 일족이라 했다.

하지만 그 방계 일족 중에서 어찌어찌 두각을 드러내 원영 초기에 도달하는 데 성공하여 특채로 음혼 시험을 보는 것이라 했다.

"하하, 사실 인족 육대종문 중에서 흑색귀골곡과 음혼귀시문 중 어디를 들어갈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귀 아프게 떠드는 허남권을 슬쩍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녀석의 의념은 연분홍빛이었다.

'이놈, 내 성별을 뭐로 아는 거지.'

아무래도 원유의 미모 때문에 나를 어찌해 보려는 거 같긴 했다.

"아무리 귀마께서 먼 선조 중 한 분이시라지만, 거의 30대 위쪽의 선조 분이시기에…. 사실 요새 음혼귀시문이 흑색귀골곡과의 경쟁에서 이겨

나가는 중이었잖습니까. 때문에 흑색귀골곡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하하, 그렇게 갑자기 흑색귀골곡이 음혼귀시문을 압도하고 병합해 버려 인족 육대종문이 인족 오대종문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인족 오대종문이라….'

그랬다.

흑색귀골곡은 우리가 뇌령도에서 천겁을 맞을 시기 즈음, 하계에서 끌고 올라온 섭명함을 이용해 음혼귀시문을 흑색귀골곡에 병합해 버리는 데에 성공했다.

그 사실을 몰랐던 나는 인족 육대종문이라고만 알고 있었지만, 실상은 인족 오대종문으로 변해 버렸던 것이었다.

'뭐, 듣자 하니 애당초 음혼귀시문부터가 예전 흑색귀골곡의 분파에서 갈라져 나온 마도 계열 문파라 하니….'

애당초 하나였으니 병합하는 데에 큰 문제는 없었다 한다.

"험흠. 그나저나 선자…?"

난 허남권의 추근거림에 짜증이 나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별로 친해지지도 않았는데 무슨 선자요. 그리고 난 내가 여자라고 한 적도 없소."

"아, 아니…!"

그 말에 허남권은 큰 충격을 받은 듯 동공이 풀려 내게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 그 얼굴에 여자가 아니라고…?"

"…."

'원유의 얼굴에 대해서는 신경 쓴 적 자체가 없었다만… 굉장히 불편하군.'

난 어찌할까 고민하다, 잠시 얼굴을 쓸었다.

우우웅!

그러자 혈마진해광의 마기가 내 얼굴을 덮으며, 원립이 쓰고 다녔던 것과 같은 흑색의 안개 같은 무면탈이 얼굴을 덮었다.

'제길, 이러니까 진짜 원립이라도 된 느낌이군.'

아니, 사실상 10회차 당시 원유의 몸으로 갈아탔을 때의 원립과 다를 바도 없었다.

난 그 사실에 못내 기분이 더러워졌다.

'흑마면(黑魔面)의 술법은 역겨워서 못 써먹겠어. 그냥 탈을 하나 사서 쓰고 다니든지 해야겠다.'

내가 아예 검은 가면을 써 버리자 허남권은 자기와 대화할 여지가 아예 사라졌다고 느낀 듯 쭈그러들어 대귀동 구석에 처박혔다.

그렇게 얼마나 대귀동에서 대기했을까.

사흘이 지났다.

저벅, 저벅….

백진이 세 명의 인원들을 이끌고 대귀동에 들어왔다.

"자, 이제 어느 정도 인원은 갖춰졌군. 이제 5인이 모였으니 입곡 시험을 보겠나? 아니면 다른 이들이 더 모일 때까지 기다리겠나. 5인은 최소 인원일 뿐이니 기다려도 되고, 당장 봐도 되네. 단, 이번에 떨어지면 자네들은 음혼이 아니라 귀혼 시험으로밖에 입곡할 수 없어."

대머리에 문신을 한 근육질 사내와, 마치 시체 같은 흑포 사내.

그리고 하얀 소복을 입은 처녀 귀신 같은 여인.

대머리 문신은 원영 후기였고, 시체 사내와 처녀 귀신 여인은 각각 원영기 대원만이었다.

대머리 문신은 나와 허남권을 번갈아 보더니 혀를 차며 말했다.

"원영 중기? 얼씨구, 저건 또 초기로군. 저런 빈약한 것들이랑 시험을 볼 바에야 두 명을 더 기다리는 게 낫다고 본다만?"

그 말에 시체 사내는 아무 말이 없었고, 처녀 귀신 여인은 미친 것처럼 히죽히죽 웃을 뿐이었다.

'가짜 광기군.'

괴군의 광증을 알고 있는 나로선 처녀 귀신 여인이 보여 주는 약한 광기가 굉장히 어설퍼 보였다.

"뭐, 뭐야. 왜 다들 아무 말도 없어?"

대머리에 말에 대답한 건 오히려 허남권이었다.

"어이, 네놈이 얼마나 잘났는지는 모르겠…."

콰아앙!

그리고, 대머리는 허남권에게 순식간에 달려들어 그의 머리통을 터트려 버렸다.

"…!"

허남권은 머리통을 재생시키며 고통에 몸을 마구 버둥거렸고, 대머리는 낄낄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 고통도 못 참고 발버둥 치기는. 거기 네놈은 어떠냐. 너도 두 명을 더 기다리는 것엔 이견이 없겠지?"

나에게 주먹을 들어 올리며 말을 거는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대귀동에 가장 먼저 와서, 상당히 오래 기다렸단 말이지. 더 기다리기는 싫은데…."

"인내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지."

부웅!

그는 땅을 박차며 내게 달려들었다.

'연체술을 익혔군.'

육신이 썩 튼튼한 게 보였다.

그러나 나는 당황하지 않고 팔을 뻗어 그대로 화경을 써 녀석의 주먹을 흘려 버렸다.

"어, 어어?"

놈이 당황하는 새, 나는 금나수를 펼쳐 그대로 놈의 팔을 뒤로 꺾어 제압했다.

뿌드드득!

"끄아아아악!"

"머리통 박살 정도로 고통을 못 이기네, 어쩌네 했던 것 치곤 엄살이 심하군. 내가 아는 녀석들이면 그대로 팔을 뽑거나 잘라서 탈출했을 텐데. 그 정도 깡도 없나."

아마 수계 출신 수도자들이라면 이렇게 신체 일부가 잡힌 순간 아예 그 일부를 잘라 버리고 탈출했을 터였다.

아마 고환을 잡히지 않는 이상 절대다수의 수계 출신 원영기 수사라면 전부 도마뱀처럼 신체를 포기했을 터.

하지만 녀석은 광한계 출신인지 그 정도는 못 되는 모양이었다.

"너… 이 새끼…!"

쿠드드드드득!

녀석의 몸에서 강력한 시기(屍氣)가 뿜어지며 나를 밀어내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혈마진해광의 마기를 놈의 체내에 밀어 넣으며 도리어 놈의 영맥을 틀어막아 버렸다.

찐득거리는 혈마진해광의 핏빛 마력이 영맥을 틀어막자, 대머리 문신은 기운을 끌어올리지 못하고 그대로 내게 제압당했다.

"얌전히 있어라."

"너…!"

나는 고개를 숙여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흑마면 안쪽에서 내 안광이 번뜩였다.

아마 녀석이 마주치는 건 검은 흑마면 안쪽에서 붉게 번득이는 원유의 눈동자일 것이다.

"죽여 버리기 전에."

"…!"

놈은 내 살기를 마주하자 그대로 얼어 버렸다.

일반적인 천인기 수사조차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많고, 또 많은 전투를 치러 왔다.

내 서립이 내 분신이라곤 하지만, 그 살기는 이제 원영기 수사 따위가 감당할 수준은 아니었다.

"…."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내 눈을 피했고, 나는 고개를 돌려 이쪽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원영기 대원만들을 보았다.

살기를 잠재우지 않은 나와, 시체 같은 사내 그리고 소복을 입은 여인의 눈이 마주쳤다.

"두 분은 지금 인원으로 시험을 보는 데에 이의 있습니까?"

시체 같은 사내는 내 안광을 마주하며 어색하게 웃어 시체 같은 인상을 억지로 지웠고, 소복을 입은 여인은 광증이 치료된 건지 예의 바르게 허리를 세우고 웃었다.

"이의 없습니다."

"저, 저도요…."

나는 허남권을 바라보았다.

녀석 역시 내 살기를 느낀 듯 안색이 새하얘져 시체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저, 저도… 너무 만족스럽습니다."

나는 만장일치된 의견을 수렴하여 백진에게 전달했다.

"다들 시험을 얼른 치르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흑색귀골곡 입곡 시험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따라와라."

그는 뒷짐을 지고 어딘가로 우리를 안내했고, 귀골곡의 계곡 안쪽을 따라간 우리는 어느새 가시넝쿨이 가득한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가시넝쿨의 정체를 눈치채고 안광을 빛냈다.

어느덧 우리의 앞에서 우리를 안내하던 백진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아무래도 진법에 진입한 듯했다.

[시험 내용은 간단하다.]

백진의 목소리가 가시넝쿨이 가득한 공간을 채웠다.

[눈앞의 가시넝쿨은 특수하게 제작한 저주의 일종이다. 너희 다섯이 힘을 합쳐 그 저주 공간을 빠져나오면 시험은 합격….]

콰악!

나는 백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 가시넝쿨 줄기 하나를 잡았다.

"저주 반전."

나의 이름은 (4)

드드드드드!

공간 전체가 떨려 온다.

나는 내가 쥐고 있는 넝쿨의 저주가, 이 공간에 펼쳐진 진법과 이어져 있다는 걸 알아챘다.

저주가 반전되며, 저주에 알맞게 짜 맞춰져 있던 진법이 통째로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말라 비틀어진 가시넝쿨들은 이내 마구 꿈틀거리더니, 가시 곳곳에서 새순이 돋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새순 안쪽에서부터 눈부신 백색의 꽃이 피어 올랐다.

그리고 어느 순간.

퍼어어엉!

휘황찬란한 빛무리가 사방으로 몰아치며, 곳곳에 백색의 꽃잎이 흩날리고 가시넝쿨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와 함께, 공간에 자리 잡았던 진법 역시 점차 해체되는 듯하더니, 어느새 우리는 반경 3장은 될 정도로 작은 동공 안에 들어와 있었다.

우리의 앞쪽에는 백진이 무릎을 꿇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크헉! 커헉, 이런 빌어먹을… 항마(降魔)의 속성을 가진 극정(極正) 계열 공법…!? 네놈, 어떻게 그런 공법을 가지고 있으면서 마공을 함께 익히고 있는 게냐!? 아니, 애당초 항마법술을 익혔다 해도 그 진은 저주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절대 풀 수 없을 텐데…?"

아무래도 그 진법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듯.

백진은 입에서 새하얀 기운을 울컥울컥 흘리며 비틀거리는 중이었다.

난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극마(極魔)에 이르면 탈마(脫魔)의 길이 보이기도 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크, 크흐흐흐… 방금 그게 극정 계열의 공법이 아니었다는 건가? 뭐… 알겠다. 다만 한 가지 알아 둬라."

그가 눈두덩이에서 귀화를 피워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흑색귀골곡 내에서는 마공을 수련한 이들이 절대다수이니, 그런 항마 계통의 법술을 함부로 쓰는 것을 금(禁)하고 있다. 이번이 처음이고, 따로 말해 주지도 않았으니 넘어가겠다만… 주의해 두거라."

"알겠습니다. 하면 혹시 저희는 방금 그 공법을 쓴 것 때문에 탈락인 겁니까?"

"흐흐흐, 그야 당연히 아니지. 너희는… 최고점으로 통과했다…."

부스스스!

"…!"

나는 흠칫 놀랐다.

백진의 몸이 점차 새하얀 가루로 부스러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점차 그의 목소리가 영언으로 변하며 공간을 울렸다.

[시험관을 죽이는 데에 성공했으니… 너희는 전부 이제부터 음혼(陰魂) 제자이다. 어처구니없게 죽어 버렸으니… 이후 절차는… 이 녀석이 안내해 줄… 것이다….]

파사삭!

그 말을 남긴 백진은 소매를 휘둘러 한 마리 귀신을 꺼낸 후, 그대로 부스러져 죽어 버렸다.

나는 당황해서 얼떨떨하게 자리에 서 있었다.

'아니, 죽었다고?'

너무 태연해서 죽는다는 게 아니라 무슨 피곤해서 자고 온다는 줄 알았다.

그러나 당황하는 나와 달리 나머지 수사들은 나를 존경의 눈으로 쳐다보는 중이었다.

"대단하시군요, 수사. 시험관을 죽이다니…."

"흑색귀골곡의 입곡 시험관들은 하나같이 동 경지보다 강하기로 유명한데, 천인기의 문턱을 밟은 시험관을 한 번에 죽이다니…."

"아까는 내가 무례했소. 사과하도록 하지."

나와는 어딘가 근간부터 다른 이들의 말투에, 나는 아득해짐을 느꼈다.

그때였다.

[다섯 분 모두 따라오십시오. 음혼 제자 패를 나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백진의 소매에서 나온 귀신 한 마리가 시커먼 귀기를 뿜으며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일단 다들 신분 패를 받도록 하지요."

나는 당황을 감추고 귀신을 따라갔다.

귀신은 우리를 왔던 길을 되돌아서 가게 했다.

'입곡소로 다시 가는 건가…?'

나는 귀신을 따라가며, 조심스레 귀신에게 질문했다.

"혹, 내가 흑색귀골곡의 호법을 죽여서 뭔가 벌을 받는 건가?"

[아닙니다. 백진 대인께서 수련이 충분치 못하셨으니 죽은 것뿐입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 문파의 전력이 줄어든 게 아닌가?"

[아… 서립 대인께선 비승하셨다고 하셨지요. 하면 흑색귀골곡의 사정을 모르실 법합니다.]

귀신의 말에 나머지 넷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비, 비승자셨다고?"

"어떻게 원영기의 몸으로 공간 압력을 뚫고…."

"공허간에는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수두룩하다고 들었는데…?"

"여, 역시 대단하십니다. 도대체 어떻게 비승하신 겁니까? 비승 당시의 경험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지금까지 입문했던 문파들에서는 광한계 출신 제자들과 직접적으로 대면할 일이 많지 않았고, 애당초 문파 자체가 단체 비승을 한 문파였기에 비승자에 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었다.

하지만 '개인 비승'에 대해서는 광한계에서 상당히 높이 쳐 주는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원유처럼 원영기의 몸으로 비승한 경우에는 더더욱.

난 그들에게 무어라 대답할까 하다가, 설명이 길어질 것 같아 짧게 답해 주었다.

"차후에 얘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그렇게 말한 후, 나는 귀신의 답변을 기다렸다.

내가 백진을 죽인 것에 도대체 왜 이렇게 태연하단 말인가?

그리고, 이어진 귀신의 말에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흑색귀골곡의 귀혼(鬼魂) 제자들부터는 곡 내에서 자체적으로 두 번에 한하여 부활(復活) 기회를 드리고 있습니다. 섭명함을 사용하거나 귀골곡의 특수한 대진(大陣)을 사용하면 어렵지 않지요. 물론 경지가 높을수록 부활에 자원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흑색 원로 이상부터는 알아서 부활해야 합니다만…."

"…!!!"

'부활 기회를 제공해 준다고?'

심지어 굉장히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는 귀신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짐을 느꼈다.

'그보다, 섭명함의 기능 중에 부활까지 있었다면….'

나는 그제야 어째서 괴군이 섭명함에 꼬라박아 섭명함 동력 장치를 훔쳤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동력 장치가 있는 섭명함은, 그 자체로 부활 기능을 갖춘 신물(神物)인 것이었다.

'다만, [그녀]의 상태가 그런 걸 보면 제한이 있나 보군.'

내가 당황하자, 대머리 문신 사내가 친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모르셨습니까, 수사? 비승하셨다면 그럴 수 있겠지요. 인족 오대종문은 흑색귀골곡을 제외하고 전부 합체기 태수님들, 혹은 용왕님이 뒤를 봐주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합체기 태수를 보유치 않은 흑색귀골곡이 인족 오대종문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극단적인 불사성(不死性)입니다."

"불사성이야… 마공을 익힌 마수들은 대부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오?"

"강한 재생력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흑색귀골곡 마수들은 그 특유의 질기디질긴 명줄로 유명하지요. 우선 흑색귀골곡에서는 소경계 수도자들에게 귀골곡 부활 대진으로 한 번, 섭명함으로 한 번. 각각 두 번의 자체적인 부활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흑색귀골곡의 특수한 공법을 몇 개 더 익히면 부활 기회가 떨어져도 시(屍)의 형태로 부활할 수 있으며, 거기에서 죽으면 또 상대의 육체를 강탈하거나 할 수 있는 공법으로 부활이 가능합니다. 거기에 그런 식으로 계속 부활하다가 마침내 더 부활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섭명함 내부에 있는 사당에 귀왕(鬼王)의 형태로 봉해져서 현세에 남아 삶을 이어 갈 수 있지요. 귀왕 형태에서는 죽이기가 더더욱 어려워지고, 만약 죽이는 데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잔혼(盞魂)의 형태로 현세에 남는 비술도 있으니 죽는 것 자체가 더 힘듭니다."

"…."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원립이 선녀였군.'

대머리 문신은 분명 외부에서 흑색귀골곡으로 들어오려 하는 자였다.

한 마디로 외부인마저 알 정도로 알려진 부활 횟수가 원립에 비견될 정도라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장로나 원로들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여벌용 목숨까지 생각할 경우, 일곱 번이 아니라 열네 번도 더 부활할 수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한 가지 무서운 진실을 발견했다.

'아니, 그럼, 괴군이 흑색귀골곡의 삼분지 일을 궤멸시켰단 소리는….'

저 미친 부활 횟수들을 다 깎아 내고 기어이 섭명함을 박살 냈다는 소리다.

'이런 정신 나간….'

나는 잔혼의 형태로 남아 있는 송진을 떠올리며, 그가 그런 형태가 되기까지 괴군에게 몇 번이나 죽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맞습니다. 저희 흑색귀골곡은 전해지기로는 광한계보다 그 역사가 오래된 곳입니다. 광한계의 역사가 49만 년이 될까 말까 하니, 그 긴 시간 동안 쌓아 올린 역사와 힘, 긍지는 그야말로 위대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런 것 같군."

나는 귀신을 따라 입곡소에 가서, 귀신이 나눠 주는 검푸른빛 명패에 이름을 각인했다.

'서립'이라고 적힌 검푸른빛 옥패를 보며, 나는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따라오십시오. 다섯 분에게 동부를 배정해 드리고, 문파 소개를 해 드리겠습니다.]

귀신은 우리를 데리고 귀골곡의 깊은 곳으로 갔다.

귀골곡은 중심부로 갈수록 귀기가 더 짙어졌는데, 귀기가 진해질수록 우리를 안내하던 귀신은 형상이 더욱더 또렷해졌다.

그는 시커먼 두루마기를 입은 꼬마 도령이었다.

우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녀석이 말했다.

[참, 제 소개를 안 드렸군요. 저는 읍연입니다. 생전에는 흑색귀골곡의 연기기 시동 중 하나였습니다. 다만 백 년 전 음혼귀시문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고, 제 스승이셨던 백진 대인께서 저를 거두셔서, 현재는 귀혼의 형태로 입곡소에서 안내역을 맡고 있습니다.]

"…그렇군. 죽은 게… 괴롭진 않으냐?"

[죽을 때는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웠습니다만,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그리고 스승님께서도 잘 대해 주시니 문제는 없습니다.]

나는 흑색귀골곡의 특이한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기묘한 기분이었다.

'기이하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친숙히 여기는가….'

난 읍연을 따라가, 계곡의 깊은 곳에 있는 절벽에 도달했다.

"여기는…."

[흑색귀골곡의 자랑, 신물 섭명함을 정박해 두는 곳입니다!]

절벽의 아래를 보자, 그곳에는 거대한 귀기의 근원이 있었다.

두 척의 섭명함이 막대한 귀기를 내뿜으며, 시커먼 흑수(黑水) 위에 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저 흑수는 진짜 물이 아닌 어마어마하게 많은 혼령들이 모여 있는 응집체였다.

나는 그 응집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읍연처럼 평안한 상태가 아닌, 하나같이 괴로워하는 원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눈을 찡그릴 때, 읍연이 아래를 가리켰다.

[아래쪽에 동부가 있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우리는 읍연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고, 절벽에 나 있는 동부를 배정받았다.

"후후, 귀기가 음산한 게 마공을 익히기 최상의 환경이군."

"역시 대흑색귀골곡이야!"

"히히히…."

시체 같은 사내와 대머리 문신은 동부를 보며 감탄했고, 소복을 입은 여인은 다시 광증이 도지기 시작했는지 음산하게 웃어 댔다.

허남권 역시 너무 만족스럽다는 듯 주변의 귀기를 빨아들이며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서 대인의 동부는 이곳입니다.]

나 역시 섭명함과 가까운 곳에 귀기가 짙은 동부를 배정받았다.

[따라오십시오. 동부를 배정받았으니, 우선 문파의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합니다.]

우리는 읍연을 따라 섭명함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익숙한 섭명함 내부로 들어가며 예전을 떠올렸다.

쿠구구구구!

섭명함은 마치 살아 있는 듯이 귀기가 곳곳에서 흘렀다.

'차라리 하나의 용맥 같군.'

망가지지 않은 섭명함은 이 자체로 하나의 움직이는 등선향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얼마간 읍연을 따라갔을까, 우리는 섭명함의 깊숙한 사당에 들어왔다.

[제자 읍연이 어르신들을 뵙습니다.]

끼야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귀곡성이 사당 안쪽에서 마구 몰아쳤다.

그 막대한 귀곡성과 귀기에, 시체 사내는 바싹 얼어 버렸고, 대머리 문신은 예의 바른 얼굴로 자세를 잡았으며 소복 여인은 다시 정신병이 치료됐는지 화들짝 놀라 쭈그러들었다.

허남권은 내 뒤에 숨어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정작 헛웃음을 키며 가만히 있었다.

'다들 신나 하는데 이게 무슨 추태인 거냐.'

정작 사당 안쪽에 흐르는 의념은, 새로운 제자를 환영하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읍연은 사당 안쪽의 어르신들.

흑색귀골곡의 귀왕(鬼王)들이 우리를 반겨 주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귀곡성이 울리는 사당 앞에 서서 읍연의 안내에 따라 절을 올린 후, 귀골곡의 입곡식을 간소하게 마쳤다.

[이제 입곡식이 끝났습니다. 대인들께선 이제 흑색귀골곡의 당당한 음혼 제자이십니다.]

읍연은 박수를 치며 우리를 축하해 주었고, 대머리 문신은 머리에 흐르는 식은땀을 훔치며 물었다.

"그, 그런가. 고맙다."

아무래도 그는 빨리 이 사당 안쪽에서 나가고 싶은 듯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읍연은 미소를 지으며 뭔가를 말하려 했다.

그때였다.

"입곡식은 다 치렀나?"

우우웅!

공간이 쪼개지며, 백골귀마 허곽이 사당 안쪽으로 들어왔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는 외모를 한 그는 빙긋 웃으며 우리를 훑어보다, 허남권을 보고는 살짝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나에게 닿자 바로 환하게 펴졌다.

"뭐, 어쨌든 다들 잘 입곡한 것 같구나. 나에 대해서는 잘 알겠지? 흑색귀골곡 광한계 지부 원로원주, 흑색 원로 백골귀마 허곽이다."

우리는 그에게 읍을 하며 예를 취했다.

"본래 귀혼 미만의 제자들은 스승을 붙여 주는 게 관례다만, 원영기 음혼 제자들에게는 조금 특별한 방식을 쓰지. 너희는 지금, 이 자리에서 너희가 앞으로 봉양(奉養)할 귀왕(鬼王)을 고르거라."

"예…?"

안 그래도 귀왕들의 귀기에 질려 얼굴이 하얘진 대머리 문신이 더더욱 하얗게 질려 되물었다.

허곽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본래 흑색귀골곡에서는 최소 한 명씩 함께할 귀도도려를 고른다. 일반적인 도려와는 다르게, 음양 쌍수의 목적이 아닌 귀도공법의 수련이 목적인 도려이지. 그런 목적이기에 성별은 상관치 말고 다들 최소 한 명씩 귀혼(鬼魂)을 품고 다닌다. 다만 너희, 방금 입문한 원영기 음혼 제자들은 일반적인 귀혼으로는 혼(魂)이 귀도(鬼道)에 적합하게 물들지 않는다."

이어진 허곽의 말에 대머리 문신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니 너희는 귀도도려를 정하기 전까지는, 혼이 귀도에 적합해질 수 있도록 이 사당에 계신 귀왕 중 한 분을 원영에 품어 봉양하며 혼이 귀기에 익숙해지도록 하거라."

대머리 문신은 아득해진 표정으로 반쯤 혼이 나간 것 같이 되었다.

그러나 시체 같은 사내와 소복 여인은 오히려 좋다는 듯 표정이 밝아졌고, 허남권은 조금 귀찮다는 기색이었다.

"저, 어르신. 혹 저도 해야 합…."

허남권의 질문에 허곽은 짜증 난다는 듯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절차다. 너도 예외는 없다."

"예…."

"그럼 다들 사당에 있는 위패들 쪽으로 걸어가거라."

우리는 다 같이 사당에 끝없이 늘어져 있는 위패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파아아아앗!

갑자기 풍경이 뒤바뀌었다.

나는 어느새 일행과 떨어져 있었고, 주변은 시커먼 밤하늘 아래에 있는 무수한 공동묘지였다.

묘지는 하나같이 정갈한 묘비가 써 있었다.

곧이어 시커먼 하늘 아래.

허공에서 허곽의 목소리가 울렸다.

[너희가 진입한 곳은 섭명함 내부 사당을 통하거나, 혹은 특수한 방법으로만 진입할 수 있는 흑색귀골곡의 대묘역(大墓域)이다. 무수한 선조들의 귀혼이 귀왕이 되어 그곳에 계시지. 그곳을 돌아다니다 너희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귀왕께서 계시면 몸을 맡기거라. 이곳에서 너희를 택하는 귀왕에 따라 너희가 앞으로 익혀 나갈 귀도공법의 종류도 갈리니, 귀왕들께 잘 보여 보도록.]

그 말을 끝으로 허곽의 목소리는 끊겼고, 나는 잠시 기다리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흠…."

그러나 얼마나 주변을 둘러보아도 딱히 귀왕들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 계십니까?"

나는 대묘역을 돌아다니며 묘비들 사이를 뒤져 보았다.

그러나 귀왕은커녕 허접한 잡귀조차 보이지 않았다.

"…귀왕들이 어디 있다는 거지?"

***

흑색귀골곡 대묘역.

그곳에 있는 다른 공간.

허남권과 대머리 문신, 그리고 시체 같은 사내와 소복의 여인.

서립을 제외한 그들은 현재 전부 같은 풍경을 보고 있었다.

대묘역 전체에서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발광하는 귀왕들의 귀곡성에, 그들은 피를 토하며 바닥에 주저앉아야만 했다.

[끼야아아아아아!]

[끼아아아아!]

[끄아아아아아아!]

"대, 대체 무슨…."

허령의 후손으로, 원래부터 귀혼에 대한 친화도가 남달랐던 허남권은 피를 한 움큼 토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에는 그가 주변에 다가가면 친근하게 말을 걸어 주었던 귀혼들이, 하나같이 미친 듯이 발광하고 있었다.

[큰 귀신이다!!!!]

[큰 귀신이 대묘역에 들어왔다!!!]

[도망쳐! 도망쳐야 해! 잡아먹힐 거야아아!!!]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은 엉엉 울며 귀왕들을 피해 도망 다녔고, 시체 같은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에 혈색이 돌 정도로 뛰어다녔다.

대머리 문신은 심장을 부여잡고 귀신들의 귀곡성에 주저앉아 칠공에서 피를 토했다.

그리고, 사당 밖에서 뒷짐을 지고 있는 허곽은 턱을 쓰다듬었다.

덜걱, 덜걱, 덜걱….

"흐음, 위패들이 흔들리는군…."

대묘역과 연결된 사당의 위패들,

중경계 수사는 산 몸으로 진입할 수 없는 것이 대묘역이었다.

허곽으로서는 그저 안쪽에서 '어르신'들이 새 제자들을 놀려 주고 있나 보다 하며, 껄껄 웃었다.

"선조들께서 반응이 격하신 걸 보니, 이번 제자들은 재능이 다들 뛰어나신가 보군. 읍연! 나는 가 볼 테니, 음혼 제자들이 대묘역에서 선택을 마치고 나오면 공법 서고로 안내해 주거라."

[예, 대인.]

허곽은 덜걱거리는 위패들을 보며 다시 한번 웃고는 사당에서 나갔다.

나의 이름은 (5)

나는 한참 동안 대묘역을 걸어 다녔다.

대묘역에 있는 묘비는 정말 끝이 없었고, 아무리 걷고, 가끔 날아다녀도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았다.

'뭐, 그런 건 문제가 안 되지.'

진짜 문제는, 허곽이 말했던 '귀왕'들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귀왕이란 놈들을 만날 수 있는 거지?'

이곳을 나가든 말든 하는 건 일단, 귀왕이란 이들을 만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기이한 공간이군.'

나는 아무리 걸어도 끝나지 않는 묘비의 평원을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끝이 없을 수는 없다.

하다못해 광한계에 이 정도 크기의 평원이 있다곤 해도, 계속 이동한다면 뭔가 변화가 생기는 게 맞았다.

최소한 천지영기의 변화는 있어야 했건만, 이 기이한 공간은 그런 것조차 없이 끝없이 펼쳐지기만 했다.

'그리고, 뭔가 기시감이 드는데….'

난 이 대묘역을 보며 어딘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어째서인지 계속 보다 보니 예전에 와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흐음….'

난 잠시 걷던 도중 원영에 집중을 해 보았다.

그때였다.

"음?"

나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 이건…."

우우웅!

손가락을 펼치며 체내의 마기를 움직였다.

그러자 마기가 손끝에서 흘러나오며, 내 앞에 거울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거울을 본 나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어느 순간, 내 얼굴은 원유의 그것이 아닌, 본체 서은현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옷차림조차 원유의 혈색 장포가 아닌, 내가 평소 입고 다니는 도복으로 변해 있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도복의 색(色)이었다.

내 도복은 완전한 흑색(黑色)으로 변해 있었다.

'언제 내 모습이 변한 거지? 아니, 그보다, 이렇게 변하면 혹시 정체가 들키는 건가? 아니, 아니다….'

나는 내 상태를 관조하며 내가 왜 갑자기 원래 모습으로 변했는지를 깨달았다.

'그래. 이 대묘역이란 곳은, 저도 모르게 혼(魂)의 모습이 대묘역에 반영되는 거야. 서립이란 이름을 써도 나는 결국 서은현이니 내 원래 모습

으로 어느 순간 변한 거고.'

아마 대묘역을 나서면 바로 서립의 형태로 돌아갈 터였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군….'

나는 흑색으로 변한 도복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도복은 흑색이 된 거지?'

그리고 나는 어째서인지 내가 묻고는 스스로에게 답변할 수 있었다.

'죽음…. 이 대묘역에서 바뀐 내 모습은,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아마 백의가 아닌 다른 옷을 입고 온 이들도 전부 흑의로 옷의 형태가 바뀌었겠지….'

문득 나는 '죽음'이라는 단어에 어째선지 귀왕들을 볼 수 없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예전 서란과 섭명함을 찾았을 때… 섭명함 인근에 있던 귀무에 살던 잡귀들은 나를 큰 귀신이라고 불렀지….'

어쩌면, 나에게 쌓여 있는 '죽음'이 그때보다 더더욱 강해졌기 때문에 뭔가 일어난 걸지도 몰랐다.

'예를 들어, 귀왕들이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내 기운을 느끼고 다 어딘가로 도망쳤다거나….'

왠지 그쪽이 신빙성이 있는 듯했다.

"흐음…."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였다.

나는 가부좌를 틀고 자세를 잡은 채 숨을 들이쉬었다.

귀왕들이 내게서 도망치고 있는 중이라 그들을 볼 수 없는 것이라면….

'놈들이 도망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쫓아가 보면 되겠지.'

지금까지는 대묘역이랍시고, 뭔가 흑색귀골곡의 성지 같은 느낌의 공간이었기에 느릿느릿 걷거나 비둔술도 쓰지 않고 날아다녔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너무 예의를 차렸나 보다.

'이 빌어먹을 놈들, 손님이 왔으면 반갑게 맞아 주지는 못할망정….'

나는 체내의 정순지력을 이용해 주변으로 강환을 띄우기 시작했다.

'감히 접대조차 하지 않고 내뺀다고?'

하나, 둘, 셋, 넷….

일곱, 여덟, 아홉….

그리고.

열, 열하나, 열둘….

계속해서 내 주변의 강환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의념의 세계에서 내 주변의 분신들이 점차 늘어났다.

등봉조극 시절에는 9개가 강환의 최대한도였다.

입천 때에는 무형검에 녹아들어 강환이 사라졌고, 답천 때에는 내단과 하나 되어 최대 10개의 강환을 가지고 가속을 했었다.

물론 답천 때에는. 애당초 무형검으로 가속을 하는 것만으로 가속의 효율이 10배를 가볍게 뛰어넘어서 강환을 더 만들 필요를 못 느꼈다.

그리고 겁천에 이른 지금.

나는 내가 만들 수 있는 강환의 개수가 '제곱'되었다는 게 느껴졌다.

무형검에 '마음'이 깨어나게 되며, 무형검이 각각 10개.

나 자신이 각각 10개.

그리고 무형검과 내가 얽히게 되며, 정신이 증폭되며 10*10. 즉, 100개의 강환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주변으로 100명의 의념 분신이 나타난다.

"합(合)."

파바바바밧!

100개의 의념 분신들이 내게 날아들자, 세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원유의 몸은 길이 들지 않아서 무형검을 사용해도 10할의 위력을 낼 순 없다.

하지만 단순히 강환으로 가속시키는 정도라면, 문제가 없다.

번쩍!

나는 100배 가속한 상태에서 비둔술을 사용해, 어느 한 곳을 향해 미친 듯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

이 속도는 천인기를 훌쩍 뛰어넘어, 사축기 초기 수준의 속도에 달할 정도!

얼마간 그렇게 대묘역을 날았을까.

나는 저 멀리, 의념의 파동들이 넘실거리는 것을 확인하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 찾았다!'

역시나 귀왕들이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녀석들이 내 기운을 느끼고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점차 공포를 느끼는 의념들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나는 끔찍한 귀곡성이 울리는 걸 느꼈다.

[끼야아아아아아!]

[큰 귀신이 왔다아아!!!]

[피해! 피해에에에!]

"흐음…."

번쩍!

나는 빠르게 녀석 중 한 놈에게 쇄도했다.

대강 천인 중기쯤 되어 보이는 놈에게 쇄도해, 내 손의 계위를 높여 혼(魂)을 잡을 수 있도록 한 후 녀석을 붙잡자, 천인 중기의 귀왕이란 놈은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히야아아아아악! 흐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악! 히, 히야아아악!]

"…."

나는 공포에 벌벌 떨고 있는 이 놈을 보며 어찌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백란축성문이 정신을 도야시켜 주는 데엔 최고인데….'

공포에 질려 있는 이 녀석의 정신을 되돌리려면 백란축성문이 제격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백란축성문을 쓰면 이 귀왕이 그대로 녹아 버릴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조금만 써 볼까….'

우우우웅!

나는 손톱만 한 백란축성문을 띄워 녀석에게 불어넣었다.

그리고, 나는 여태까지보다도 더더욱 끔찍한 귀곡성을 들어야 했다.

[나 죽는다아아아!!! 끼야아아아악! 히야아아아악!]

"…."

아무래도 백란축성문은 항마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귀기로 가득한 귀왕에게 주입하면 치명상인 듯했다.

'이런 빌어먹을, 어찌해야 하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음혼귀주문을 일으켰다.

쿠구구구!

주변으로 진득한 저주문의 기운이 일어났다.

'이걸 놈에게 주입하면, 고통에 몸부림칠 텐데….'

단순히 항마 속성의 반대 기운을 가진 음혼귀주문이라고 멋대로 불어넣으면 안 되었다.

음혼귀주문의 본질은 '고통'이었고, 그 기질이 귀신과 맞든 안 맞든 이 녀석은 고통에 겨워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음혼귀주문을 법력화해, 음(陰)의 법력을 귀왕에게 불어넣어 주었다.

동시에 음의 법력을 백란축성문의 방식으로 운용하며 귀왕의 정신을 도야시키기 시작했다.

츠츠츠츳!

얼마 후,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르던 귀왕은 점차 비명 소리를 줄이더니 입맛을 다셨다.

[으…아….]

"괜찮으십니까?"

[어….]

"…상태가 이상한데."

아무래도 음의 법력으로 정신을 도야시키는 건 처음이다 보니 뭔가 이상한 상태가 된 모양이었다.

'정신을 도야시킨 게 아니라, 어째 최면을 건 느낌인데….'

"뭐라고 말 좀 해 주시겠습니까?"

[말.]

"…젠장."

내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자, 갑자기 귀왕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죄송, 죄송합니다. 귀인(貴人)께 무례를, 무례를 범해서, 범해서, 죄, 죄송….]

"그만, 그만 우십시오. 도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나는 뭔가 제대로 된 언어를 말하기 시작하는 귀왕을 보며 눈에 희색이 돌아 묻기 시작했다.

내 질문에 귀왕이 되물었다.

[귀, 귀인…. 어떤, 어떤 걸 여쭙는, 것입, 니까?]

"일단, 왜 나를 보고 다들 도망치는 겁니까?"

[그야, 귀인께서, 귀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저희, 저희를, 저희를 제발, 명계로 데려가지 마십시오.]

"…혹시 생전에도 그렇게 말씀을 더듬으셨습니까?"

나는 하도 이 귀왕이 덜덜 떨며 말하는 것이 답답해 물었다.

내 질문에 귀왕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 아닙니다. 귀인 같은, 대단한 귀신을 만나면, 그 아래의, 귀령들은, 대부분 이지(理智)를 잃습니다.]

"이지를 잃는다고요?"

[그렇, 습니다.]

내가 음의 법력을 더 넣어 주며 그의 혼 주변을 둘러싸자 그는 점차 안정되며 또박또박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귀도공법의, 핵심입니다. 강력한 귀기를 쌓을수록, 명계(冥界)를 확실히 인지할수록, 더더욱 강한 귀신이 됩니다. 그리고 강한 귀신일수록 

한 귀신을 쉽게 부릴 수 있습니다. 강한 귀신이 근접하면 약한 귀신은 지성이 낮아지고, 이지가 흐려지며, 오로지 본능만이 남아 강한 귀신께 복종하든가, 도망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흐음…."

나는 그제야 어째서 최소 원영기 이상의 귀왕들이 어째서 나를 보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완전히 정신이 나가 버려 도망쳤는지를 이해했다.

"…아니, 잠깐. 예전에 송진이라는 흑색귀골곡 원로의 잔혼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자는 저를 보고도 그렇게 정신에 문제가 생기진 않았습니다만…."

문득 말하고 보니, 송진을 만났을 당시의 나는 정작 지금만큼 죽지 않았을 당시의 나였다.

[흑색귀골곡 원로의 잔혼이, 귀인을 보고도 멀쩡했다면… 둘 중 하나입니다….]

이제 귀왕은 아예 최면에 빠져 버린 듯 몽롱한 목소리로 내게 답하기 시작했다.

어째 음혼귀주문을 녹인 법력에 취한 듯한 느낌이었다.

[잔혼이라고 했지만, 사실 잔혼이 아닌 살아 있는 자의 분체였거나… 혹은 섭명함과 연결되어 있었을 확률이 높지요.]

"섭명함 때문인가…."

섭명함에는 단순한 공간 전송 말고도 꽤 여러 가지 기능이 있는 듯싶었다.

나는 귀왕을 보며 질문했다.

"일단, 나를 보며 다들 도망치는 이유가… 내가 '큰 귀신'이기 때문인 겁니까?"

[맞습니다. 귀인께서는 혹… 명계의 나찰(羅刹)이나 야차(夜叉), 아니면 수라(修羅)나 염마(閻魔)가 아니십니까? 명부(冥府)의 사신(死神)께서 흑색귀골곡에 강림하신 겁니까?]

"아니… 난 그런 게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 귀왕(鬼王)들을 급 낮은 잡령이라고 너무 하찮게 여기지 마소서…. 비록 진정한 선좌(仙座)들만큼 죽음의 본질을 이해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수선의 길을 걸으며 명계(冥界)를 인지할 수 있게 된 혼령들이 저희 귀왕들입니다.]

아무래도 '귀왕'이란 경지에 상관없이 '명계'를 인지할 수 있는 귀혼을 뜻하는 단어인 듯했다.

"오해가 있으십니다. 저는 그저 흑색귀골곡에 방금 입곡한 제자이며, 생자(生者)이지 큰 귀신 같은 게 아닙니다."

[저승의 가장 밑바닥에서 명계의 신의 눈길을 받았던 분이 아니라면, 귀인만큼 위대한 죽음을 두르고 계실 수 없습니다. 귀인께서는 지금 생

의 몸으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농을 하고 계시는군요. 귀인께선 분명 명계의 신을 보필하셨던 급 높은 사신(死神) 중 하나이실 수밖에 없나이다….]

"엄…."

[부디 정해진 명에 따라 명계로 가지 않고, 아직도 구차하게 구천에 남아 있는 저희를 너무 책망치 마소서…. 저희는 그저 후손들을 위하여 대묘역을 짓고 방주(方舟)를 만들어 천역의 순환을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그는 완전히 음의 법력에 취한 상태에서도 내 기세에 질렸는지 묻지도 않았던 것까지 술술 말했다.

[비록 12만 년 전 그 망나니에게 광한계 지부의 섭명함 12척이 모조리 박살 났다지만, 수계에서 섭명함을 이끌고 올라왔기에 종말의 때에 중경계의 혼들을 수거하는 것쯤은 문제가 없습니다…. 명계의 대선들께오서도 저희를 그냥 두시는 게 편치 않으십니까…. 부디 흑색귀골곡을 멸하지 말아 주시옵소서….]

귀왕은 나에 대해, 명계에서 죽음을 거부하는 흑색귀골곡을 벌하러 온 사신쯤으로 착각한 건지, 꺼이꺼이 울며 제발 흑색귀골곡을 용서해 달라고 빌기 시작했다.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울어 대는 귀왕을 일단 풀어 주었다.

귀령은 높은 귀신을 만나면 이지를 잃는다는 게 정말이라는 듯.

내 음의 법력에서 벗어나자마자 방금 나눴던 대화를 다 잊어버린 듯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히야아아아악! 큰 귀신이다! 큰 귀신이야!!! 히야아아악!]

그렇게 말하던 녀석은 재빨리 대묘역 어딘가로 도망쳐 버렸고,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제길, 여기저기서 난리로군.'

나는 갑자기 본체 쪽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미간을 찌푸렸다.

* * *

"…이게 뭡니까?"

'나'는 천인도 천부산에 동부를 얻고, 전명훈에게 이쪽으로 오라는 전음을 보낸 후 내게 보내진 서한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내게 서한을 전달해 준 위령선은 혀를 차며 말했다.

"일단… 지족 진룡맹 관주사자라는 자가 보낸 서한이네."

"…그분이… 도대체 왜 저한테 이런 걸…."

"글쎄, 나야 모르지. 무슨 원한을 샀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나."

나는 내 앞으로 온 살해 협박 서신을 받으며 한숨을 쉬었다.

서신에는 용혈(龍血)로 원한이 가득한 살해 협박이 적혀져 있었는데, 필체만 봐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빌어먹을 서휼 놈.'

아무래도 자신이 누구에게 죽었는지를 규련에게 전달한 것 같았다.

―최대한 빨리 너를 죽이겠다. 기다려라.

"…미치겠군."

나는 규련에게서 온 서신에 머리를 부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