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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0 - 20

* * *

쿠구구구구!

서은현과 전명훈.

그리고 연위의 일행이 잡은 [흐름]은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연위는 흐름을 잡은 상태로, 빠르게 [아래]로 향하며 위를 바라보았다.

위쪽에서는 서은현이 끝없이 검무를 추며 더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도대체 저게 뭐지?'

연위는 서은현이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계속 강해지고 힘이 증폭되는 효과에 흠칫 놀랐다.

'저대로 무한히 강해지는 건가? 도대체가… 몸이 버틸 순 있나? 앞으로 최소 사흘간은 이 계면 사이에서 하계로 가며, 괴물들의 습격을 피할 기운을 끌어모

야 하는데….'

그때였다.

흠칫!

연위는 긴장을 끌어 올렸다.

'이 기세는, 최소 사축기?'

차원과 차원 사이. 비승할 때 수사들이 보게 되는 공간.

공허간(空虛間).

이 공허간이라는 장소에는, 간혹 지성이 없는 괴물들이 산다.

흔히들 '차원 틈새의 괴물들'이라고도 사는 괴물들이었다.

이 괴물들은 아무런 지성이 없었고, 간혹 굉장히 괴악한 능력을 뽐내며 비승하는 수도자를 잡아먹곤 하였기에, 비승하는 수도자들 사이에서는 요주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연위는 저 [밑]에서 무언가 무시무시한 존재가 이쪽으로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것은, 황금빛의 거대한 붕조(鵬鳥)였다.

연위가 붕조를 보며 눈을 찌푸리고 대비를 하려 할 때였다.

파앗!

붕조는 그대로 연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뭐지? 언제?'

그러나 문제는, 연위는 그 붕조가 지나간 것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인지하지 못했는데 어느새 지나갔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붕조는 그들을 사냥하지 않았고, 그저 서은현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저 [위]로 올라갔을 뿐이었다.

'뭐지, 저건?'

연위가 이상함을 느꼈을 때였다.

파아아앗!

그녀는 이상하게도 그녀가 잡은 [흐름]이 빨라짐을 느꼈다.

'뭣? 인력이 강해졌어? 수계다, 수계에서, 뭔가가 우리 일행 중 한 명을 강하게 운명으로 부르고 있어!'

그녀는 희색을 드러냈다.

"꼬맹이들, 기뻐해라. 운이 좋았다!!!"

쿠구구구구!

동시에, 삼인방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공허간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원래는 사흘 정도 예상했다만… 앞으로 삼십 초 남았다! 모두들 차원 장벽의 충격에 대비해라!!!"

다음 순간.

꽈아아아앙!

세 사람은, 그대로 어떠한 거대한 '벽' 같은 것에 얻어맞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세 사람은 그대로 '벽'을 통과하여 '벽' 안쪽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파아아아앗!

푸르른 빛살이 그들을 맞았다.

전명훈은 한없이 희박한 영기에 눈을 찌푸렸으나, 어딘지 친숙한 기운에 표정을 풀었다.

연위 역시 그립다는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서은현은 위쪽에서 내려오던 천겁을 막던 중, 드디어 검무를 멈췄다.

드디어, 끝없이 내리치던 천겁이 그들을 쫓아오지 못해 그쳤다.

서은현의 눈이, 저 아래로 향했다.

"쇄천(碎天)…봉…?"

그들이 떨어진 곳은, 금신천뢰문이 원래 자리했던 수계 서쪽 끝에 있는 쇄천봉 끝자락.

원래 천뢰번이 보관되었던 자리였다.

* * *

투웅, 퉁―

수계의 동쪽 끝.

답천사막 동쪽에 있는 부족 국가들보다도 훨씬 동쪽에 있는 바다 건너, 세계순력이 보호하는 '세계의 끝'.

그곳에서, 흑의를 입고, 허리춤엔 낡아빠진 도(刀)를 한 자루만 찬 흑립의 사내가, 주먹으로 세계의 끝을 두들겨 보던 중.

문득 서쪽을 바라보았다.

겁천(劫天) (6)

"드디어…."

"수계군…."

나와 연위는 거의 동시에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사락, 사락….

쇄천봉 정상.

우리는 그곳에서, 오랜만에 밟은 수계의 땅을 만지작거렸다.

내게도 그리운 곳이었지만, 연위에게는 아예 태어난 고향인 탓인지 아무래도 기분이 더더욱 생경한 모양이었다.

"내 생전에 이곳 땅을 다시 밟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거늘…. 후후, 실감이 안 날 정도군."

"그렇습니까…."

"이곳이… 수계."

전명훈은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전명훈에게 있어 수계에서의 기억은 등선향에서의 며칠이 끝이었을 테니 어색할 만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눈에는 일말의 기대감도 깃들어 있었다.

우리 셋은 그렇게.

잠시 동안만이라도 자리에 앉아, 미약한 희망을 곱씹었다.

툭툭―

나는 몸을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일어나시지요. 아직 안 끝났단 거 알잖습니까."

"…매정한 놈."

"빌어처먹을."

연위와 전명훈이 각각 씹어뱉듯이 뇌까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기가 일러 주고 있었다,

천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랬다.

천벌의 주인이 내리고 간 천겁은, 수계에까지도 따라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와 연위는 애써 웃을 수 있었다.

수계는 확실히 특별한 곳인 탓인지.

예정된 천겁의 숫자와 힘이, 크게 줄어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원래의 천겁이 가진 위력은, 능히 쇄성기 수사의 일격조차 넘보았다면.

이번 천겁의 힘은 전부 합쳐 봤자 합체기 대원만 수준의 힘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거기에, 천겁이 수계로 쫓아오는 데에 시간이 걸리기에 3시진 후에야 내리치기 시작할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3시진 정도의 시간을 벌었다는 뜻이었다.

"연위 님. 보시듯이, 저희에겐 3시진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남아 있는 천겁의 힘은 전부 합해 합체기 대원만 수준…. 저 정도의 천겁이 수계에 직격한다면, 수계 전체가 박살 날 겁니다."

나는 확신을 담아 말하며 그녀를 보았다.

"뭔가 방법이 없으십니까?"

"…실낱같은, 가능성을 지닌 것이 하나 있지."

"무엇입니까!?"

"위뢰제(慰雷祭)."

"예?"

나는 의아해져서 되물었다.

"위뢰제는, 성제국 범인들에게 내려오는 전통 축제… 아닙니까?"

"흠, 위뢰제도 4만 년 전에 전승이 끊겼나? 그걸 범인들이 맥을 잇고 있고? 가지가지 하는군."

연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일단 범인들한테는 위뢰제가 어찌 전승되느냐?"

"성제국에서 일 년에 한 번, 번개가 심하게 치는 날에 치르는, '천둥 번개를 위로하는 제의'라고 합니다."

"그래, 그거다."

"예?"

"범인들이야 뜻도 모르고 제를 지내 왔겠지만, 거기에 주술력을 담으면, 달라지지. 위뢰제는 본디 정말로 번개를 위로하는 데에 쓰였던 제의다. 천겁을 위로하여 천겁의 힘을 약화시켜 경지 상승을 돕는 데에 쏠쏠하게 쓰였지."

연위가 설명을 이었다.

"위뢰제는, 한 마디로 '천겁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지녔다. 그러니까, 합체기 대원만 수준의 저 힘 역시 산산이 흩어서 약화시킨 다음 너희가 막을 수도 있단 거지."

그녀가 전명훈을 보며 말했다.

"일단 금신천뢰문의 제자들을 꺼내라. 하뢰 제자들이라 해도 뇌도공법을 익힌 수도자들이고. 본디 제의란 사람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

전명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을 모았다.

콰지지직!

그가 손을 모으자, 그의 손 가운데에 번개가 튀기며.

번갯불 가운데에 뇌전의 전각이 나타났다.

전명훈은 전각을 소환하여 허공으로 띄워 올렸고, 허공에 띄워진 전각이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거대해진 전각의 안쪽에서, 금신천뢰문의 하뢰 제자들이 빠져나와 수계의 공기를 맡으며 다들 찜찜한 표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영기의 밀도가 압도적으로 높은 광한계를 버리고 이곳에 온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마음을 추스를 틈도 없이.

연위가 명령을 이어 나갔다.

"너희 모두, 위뢰제를 알고 있나?"

본디 연위는 원유의 몸을 입고 있느라, 금신천뢰문의 금포가 아닌 혈포를 입고 있었고.

거기에 제자들 역시 그녀를 처음 보기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연위가 찡그리며 발을 굴렀다.

쿠르르릉!

하늘에 거대한 태극의 형상이 휘몰아치며 곳곳에 뇌성벽력이 울렸다.

"알고 있느냐 물었다!"

그 말에, 가장 배분이 높아 보이는 제자 중 한 명이 말했다.

"예, 예! 제가 수도자가 되기 이전에는 범인들과 어울리며 위뢰제를 함께했습니다."

"그래, 여기에 위뢰제를 아는 놈은 얼마나 있나?"

그 말에, 광한계 본토 출신의 금신천뢰문 제자를 제외한, 수계 출신의 금신천뢰문 제자들이 모두 손을 들었다.

그 수는 대략 3만 명 정도 되는 듯했다.

연위는 그들 중 몇몇에게 위뢰제를 직접 해 보라고 명하며, 그들이 위뢰제를 진행하는 모습을 한 번씩 지켜보았다.

그 모습을 본 연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두, 지금부터 하늘에 위뢰제를 지낼 것이다, 알겠느냐?"

"예, 예?"

"너희는 지금부터, 내가 정해 주는 곳으로 가 방위를 잡고 그곳에서 평소 하던 것처럼 똑같이 위뢰제를 행하라!"

"예!"

이내 연위의 명령에 모두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위뢰제의 위치로 갔다.

그녀는 쇄천봉 바닥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삼재(三才)였다.

천(天), 지(地), 인(人)

"신호하면 너희 둘이 각각 이 진 위로 올라가라."

"이건 무슨 진입니까?"

"서은현, 넌 앞으로 지(地)다."

"예?"

"전명훈, 넌 앞으로 천(天)이다. 나는 인(人)의 자리에서 너희 천지를 섞으며 위뢰제의 기운을 보조할 것이다."

그녀는 말을 하며 끊임없이 손을 움직여, 천지영기를 움직이며 진법을 짜고 있었다.

진법의 맥(脈)이 그녀가 위뢰제를 지내라고 보낸 제자들의 방향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며, 위뢰제를 하나의 거대한 진법 속에 가두는 것이 보인다.

'대단한 진법 실력이군….'

과연 4만 년이나 살아온 노괴답게 다재다능한 모양이었다.

연위는 진법을 계속 설치하며 말해 주었다.

"일단, 이 태극의 진은 너희 둘의 힘을 교류하게 만들어, 너희가 단숨에 힘을 합쳐 더더욱 강한 힘을 끌어낼 수 있게 돕는 진이다. 일단 서은현, 너는 빨리 

명훈과 나를 희생제의 제물로 포함시켜라."

"예?"

"뭘 모른 척하느냐, 전명훈의 천상금뢰지체는 뭔가 뇌겁을 흡수할 수 있다고 전승된다. 나도 한때 장문 후보까지 갔었는데 그런 걸 모르겠느냐?"

"아, 전명훈은 알겠습니다만 연위 님은 왜…."

"잘 들어라, 이제부터, 우리는 전명훈이 법력화시킨 번개, 즉 전명훈의 법력을 이 태극의 진으로부터 흡수해 내 유도에 따라 네 몸에 적공시킬 것이다. 알겠나

, 서은현?"

"그게 가능합니까?"

나는 그 말에 놀라며 되물었다.

그녀는 대수롭잖다는 듯 말했다.

이어지는 이유는 광오했으나, 듬직했다.

"가능하다. 나니까, 가능하다."

나는 혹시나 싶어 그녀에게 물었다.

"만약 그게 된다면, 혹시 저도 천인기에….""아니, 불가능하다."

"…."

"태극의 진은 효율이 너무 안 좋다. 전명훈의 부담을 덜어 주고 천겁을 최대한 분산하기 위해 너를 지의 자리에 놓았을 뿐. 본래 서로의 힘을 흡수하는 게 본의인 진법이 아니라서 어쩔 수 없다."

"예, 뭐… 알겠습니다."

듣자 하니, 아무래도 법력 전수는 거의 천분지 일 단위로 효율이 떨어진다고 했다.

다만 효과가 떨어지더라도 그 정도의 법력만으로도 상당히 도움이 될 터였기에,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럼 진을 짜지요."

"오냐, 일단 둘이 마주 보고 서라."

나는 전명훈과 눈을 마주 보고 섰다.

그녀가 우리 발밑에 추가로 진법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진에 너와 전명훈을 연결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를 싫어했지만, 서로와 함께 성장하다가 드디어 이해한 기묘한 사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녀석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려오는 듯했다.

서로, 각자가 맡은 바를 최선을 다 해내자고.

그렇게, 서로를 보며 그렇게 다짐했을 때였다.

"흠, 그런가. 뭐 도와줄 건 없소, 소저?"

"진법에 대한 애매한 이해로는 날 도울 수… 흐아아악!"

그리고.

찰나.

나는 눈을 비볐다.

어느덧.

저 멀리 동쪽에서부터 여기까지 이어진 구름이, 반으로 쪼개져 있고.

흑의 무복을 입은 젊은 남성이,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연위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가 금빛이 맴도는 갈색 눈동자를 빛내며, 연위에게서 손을 떼고 말했다.

나는 그 오랜만에 보는 반가움에 절로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영훈 형님!!!"

"아, 서 대리. 전 과장. 다들 오랜만이군."

"…엥?"

나는 흥분했으나, 김영훈은 우리를 직급으로 불렀다.

그제야 내 기억 속에서, 그는 나와 이번 생에서 일면식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걸 찾아낼 수 있었다.

'아… 그런가.'

나는 반가운 영훈 형님이었으나, 동시에 그는 나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약간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전명훈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뒤룩거렸다.

"무슨 소리냐, 서은현. 이 남자가 김영훈 부장…이라고?"

"오, 전명훈이. 그동안 잘 지냈나?"

"…."

전명훈은 김영훈의 말투를 들으며, 그가 아침 인사로 늘 김영훈 부장에게 듣던 말투였다는 걸 기억해 낸 모양인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아니…. 김 부장… 님이 어떻게…."

"흐하하,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잘들 지냈냐니깐?"

나는 껄껄 웃으며 우리를 보고 반가워하는 김영훈을 바라보았다.

나는 김영훈을 보며 옅게 웃었다.

'잘 지냈냐'라.

나는, 그동안 잘 지냈는가.

무수한 회차의 기억이 지나갔다.

정말 쉬지 않고 달려온 회차들….

한 번 한 번의 삶이 극악한 난이도였지만, 그 어느 것도 허투루 보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분명.

"…예, 잘 지냈습니다."

잘 지냈던 것이리라.

김영훈은 씨익 웃으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좋군. 그럼, 자네들도 여기에 와서 다들 어찌어찌 잘들 강해진 것 같은데. 사내가 마주했으면 역시 칼로 대화를 해 봐야겠지?"

전명훈은 그렇게까지 변한 김영훈을 이해 못 하는 모양이었다.

다만 나는 그의 호승심을 이해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죄송합니다만, 형님. 그렇게는 안 되겠습니다."

당연히 나도 미친 듯이 근질거린다.

다음 생에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온단 말인가?

나는 김영훈이 자르고 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름 줄기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동쪽에서부터 끝도 없이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그뿐이 아닌, 영기의 흐름마저도 잘려 있었고, 그 흔적은 내 의식 영역을 넘어, 머나먼 동쪽에서부터 쭉 이어져 있었다.

한 마디로 김영훈은 수십 리에 달하는 내 의식 영역 밖에서부터, 나는 물론 사축기의 의식을 지닌 연위마저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이곳에 도달했

는 의미였다.

얼마나 성장한 건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고, 당장이라도 그와 겨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나는 김영훈에게 우리가 처한 상황을 대강 설명하였다.

"흠… 그러냐."

얼마 후.

김영훈은 내 얘기를 들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천겁이란 번개가 하늘에서 내리친단 말이지? 그동안 수도자 놈팽이 놈들 때리면서 그런 것도 있다 듣긴 했는데…. 그것도 그 정도의 기세를 지닌 너 정도도 두려워할 만큼 강력한 번개란 말이지?"

"예."

"…좋다. 그럼 나도 도와주지."

김영훈은 흔쾌히 우리를 도와주겠다 말하며, 칼집에 손을 얹고 근처에 걸터앉았다.

"그럼 그게 내려올 때 말하려무나."

말을 마친 김영훈은 눈을 감았다.

난 그런 김영훈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연위는 김영훈을 보며, 뭔가를 알아챘다는 듯이 공포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최대한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어쨌든 우리를 도와주니 협력은 하지만, 김영훈과 함께 있고 싶은 눈치가 아니었다.

"참 그리고, 그 무슨 희생 제의? 그런 거."

김영훈은 내가 연위와 전명훈에게 희생제를 나누는 것을 보며 말했다.

"나도 같이 나누겠다. 내게도 걸어라."

"예?"

나는 흠칫 놀라 말했다.

"이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영훈 형님은 금신천뢰문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 말에, 김영훈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금신…뭐 문과는 관계가 없다. 하지만, 나는 너희 직장 동료가 아니냐?"

"…."

"…."

"다 같이 열심히 비누 만들던 사이. 이왕 다시 만났으니, 동료들끼리는 삶도 죽음도 같이 하는 게다!"

김영훈은 전명훈을 돌아보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전명훈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나는 정말로 오랜만에 만난 '김영훈'이 내가 알던 '김영훈'들과 여전히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웃었다.

"…예. 그러지요."

이윽고.

우리는 하늘을 보며 때를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 3시진이 전부 지났다.

마침내.

쿠릉, 쿠르르릉!

하늘에, 어마어마한 기운이 몰리기 시작했다.

저것이, 전부 내가 몰고 온 흉운(凶運)이자 재액.

이 세계를 파멸시킬 수도 있을 만큼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그리고, 연위가 입을 열며 외쳤다.

[금신천뢰문의 제자 전원!]

그녀의 영언이, 사방 곳곳에 울려 퍼졌다.

[위뢰제를 시작해라!]

금신천뢰문 쇄천봉 곳곳.

그 바깥의 대산맥 곳곳에서, 위뢰제의 제의가 시작되었다.

쿠구구구!

그와 동시에, 위뢰제의 제의가 시작되는 곳곳에 진법을 깔아 놓은 연위가 진법을 발동시켰다.

위뢰제의 기운에 영력이 서리고, 그 영력들이 다시 쇄천봉 정상으로 몰려든다.

쿠구구구구구!!!

정상으로 몰려든 위뢰제의 기운은 천(天)의 자리에 있는 전명훈을 거쳐, 지(地)의 자리에 있는 내게로.

나를 거쳐 인(人)의 자리에 있는 연위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하늘께 고하오니, 예로부터 저희 인간들은 나약하기가 짝이 없어 늘 하늘의 자비를 바라 왔습니다. 저희는 폭풍에 휩쓸리고, 산불에 비명 지르며, 해일에 

기고, 폭설에 함묵하며, 천벌을 두려워했습니다. 지금 하늘 아래 선 이 미천한 몸들도 마찬가지옵니다. 저희는 마땅히 하늘을 두려워하고 존숭하며, 약자인 인간입니다.

부디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자리에서, 이 미천한 인간이 고하오니. 어린 인간들을 위해 노를 푸시어 자비를 베푸소서!]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연위는 끌어모은 위뢰제의 기운을 하늘로 올려보냈다.

파아아앗!

하늘로 올라간 무형의 기운이, 천뢰에 닿자마자 신기하게도 천뢰의 기세가 조금 줄어든 것이 느껴졌다.

"됐다. 위뢰제가 지속되는 동안 계속해서 천뢰의 기세가 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막는 것뿐이다!"

번뜩!

하늘에서, 빛의 기둥이 떨어져 내렸다.

콰르르릉!

다음 순간.

김영훈이 앞으로 나와 도를 뽑아 들며 나를 바라보았다.

"직접 대결하면서 보여 주고 싶었다만… 뭐, 미리 보여 주도록 하마."

처억!

그가 자세를 잡았다.

"답천(踏天) 너머의 경지를!"

나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보여 주십시오."

당신은, 그것에 어떤 이름을 붙이셨습니까?

다음 순간.

나는 김영훈이 어떤 이름을 붙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월도(越道)."

츠츠츠츳!

김영훈의 전신이 황금빛으로 뒤덮였다.

김영훈은 일순간, 황금빛 그 자체가 된 듯했다.

그 자신의 무(武)와 하나 된 답천.

그리고 자신의 무에 마음을 불어넣는 그 너머.

김영훈은, 그 경지에 이미 도달해 있었다.

하늘을 향해 쇄천봉을 박차고 날아오르며, 김영훈이 외쳤다.

"쇄천(碎天)!"

찰나마저 지워 버리고 하늘로 날아간 그가, 천겁의 자락을 베어 내며 내지른 이름.

월도쇄천(越道碎天).

그것이, 그가 정의 내린 답천 너머.

그만의 구현 3단계이리라.

[나는 쇄천봉에서 이 경지에 도달했기에, 이를 쇄천이라 이름 붙였다.]

김영훈의 은은한 심어가 뇌리에서 울려 퍼졌다.

'그렇습니까.'

[너도 보아하니 쇄천에 올랐구나.]

김영훈이 기쁜 듯이 말했다.

[올라와서, 같이 대련하진 못해도 같이 천겁을 베어 보며 깨달음을 확인해 보자.]

나는 옅게 웃으며 심어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다만 저는….]

척!

나는 자세를 잡으며 무형검을 끌어올렸다.

[월도쇄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음?]

쿠릉, 쿠르르릉!

뇌성벽력 소리가, 분명히 뇌도공법을 전부 잃었을 내 몸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무형검은 그대로 선수의 힘과 합쳐진다.

그리고 선수의 힘은 천족으로서의 내 힘과 연결되어 있다.

천지심이 오밀조밀하게 엮여 간다.

김영훈의 월도쇄천은 순수한 무(武)의 경지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순수한 무공만은 아니니.

마땅히 다른 이름이 붙어야 한다.

츠츠츠츳!

나는 무형검에 마음을 불어넣으며, 마침내 월도(越道)로 시작하는 마지막 경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월도겁천(越道劫天)."

타앗!

쩌어엉!

내 일 검이, 김영훈보다도 높이 날아올라 천겁을 살라 버린다.

이전에는 김영훈의 발끝을 쫓아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무형검을 얻은 순간부터 나와 그의 길은 갈라졌다.

그러니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도 다르리라.

그는 쇄천을, 나는 겁천을 휘두르며, 그렇게 우리는 천겁 속에서 서로를 등지고 멸망을 막을 춤을 추기 시작했다.

겁천(劫天) (8)

천인기의 경지 구결은 다음과 같다.

천인 초기, 지선이립(志仙而立).

천인 중기, 불혹천명(不惑天命).

천인 후기, 천순종심(天順從心).

천인 대원만, 천원(天圓).

원영(元靈)이 아기의 형태로 세상에 처음 난 형태를 가진다면, 천인기에서부터는 원영이 천지영기와 합일되기 시작한다.

그는 즉, 천지영기를 통하여 세계의 풍파를 직접 겪는 경지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천인기에서부터는 원영의 형태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다.

가장 순수한 형태였던 아기 형태의 영력이 변화하며, 생명체의 생사입멸의 과정에 따라 '성장'하는 것이다.

천인 초기는 지선이립이라고 하지만, 사실 과도기인 '지선'과 제대로 된 초기인 '이립'의 단계로 나뉘는 것이 맞다.

지선(志仙)에서는 수도자로서 태어나 수선(修仙)에 뜻을 두는 단계.

원영의 형상이 유아의 형상에서 소년으로 성장한다.

이립(而立)부터는 원영이 체외로 나와서 활동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단단해지고 커지며, 원영이 소년에서 청년의 형상으로 성장한다.

이는 생사입멸에서 시작의 단계를 상징하니, 생(生)을 계절이라 한다면 춘(春)이다.

천인 중기 역시 '불혹'과 '지천명'의 단계로 나뉜다.

불혹(不惑)에서는 원영의 형상이 완전히 수도자의 본신과 일치하게 된다. 수도자 본인의 생명력이 절정에 달하는 때이다.

지천명(知天命)에서는 수도자 본인의 생명력은 전 단계보다 조금 줄지만 대신 천기(天機)를 뚫어보는 능력이 극대화되며 단기 예지가 가능해진다. 또한 원영의 형상이 청년에서 장년이 된다.

이는 생사입멸에서 과도기를 상징하니 생을 계절이라 한다면 하(夏)이다.

천인 후기.

천순(天順)은 하늘의 소리에 귀가 트이게 된다. 귀가 트인다는 표현은 그저 표현일 뿐이고, 실제로는 천기를 읽는 '감각' 자체가 한 단계 더 개화하게 된다. 원영의 형상은 노년이 되며,

이는 생이란 계절에서 그동안 수확한 결실을 확인하는 추(秋)이다.

종심(從心)은 그동안 모아 온 천인기의 '마음'.

즉 광기가 극의에 달하며, 천기에 미력하게나마 영향을 미칠 정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의지력 그 자체만으로도 천지 현상을 비틀 수 있는 천재지변 그 자체가 되며, 원영의 형상은 '죽기 직전'이 되며 이는 계절의 끝인 동(冬)이다.

그리하여 천인 초기, 중기, 후기 동안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사계(四季)를 완성하면, 사계는 끝없이 순환한다.

연기기에서 수선의 기초를 닦고.

축기기에서 별을 만들고,

결단기에서 하늘을 그리며,

원영기에서 밤과 낮을 만들어 '하루'를 만들었다면.

천인기에서는 사계를 만들어 '하루'가 끝없이 흘러 '순환'함을 형상화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순환의 기초가 완성된다면 마지막.

천인기 대원만인 천원(天圓)에 이르러 소경계.

즉, [하늘을 체내에 담아내는] 경지에 도달해 내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수도자로서의 천(天)을 완성해 내는 것이 바로 천인기.

그렇기에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 하여 천인기(天人期)라고도 불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천인합일로 이뤄 낸 천원(天圓)에 이어.

사축기에서는 네 개의 축을 쌓아 사신사방(四神四方)을 만들어, 지(地)의 방위(方位)를 만들어 낸다.

하늘의 원.

땅의 방위.

천원지방(天圓地方).

이렇게 천인기와 사축기를 통해 천원지방을 만들어, 자기 자신을 하나의 '작은 세계'로 만든 후.

천원과 지방을 완전히 합치는 천지합일(天地合一)의 과정을 통하면 합체기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천지영기가 체내와 체외를 잇는다.

동시에, 나는 내 의지에 의해 주변의 천지영력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걸 깨달았다.

'간다.'

수많은 천인기 수사들은 천인기에서 발목을 잡힌다.

단순히 단약만 많이 먹고 앉아서 천지영기만 무식하게 끌어모은다고 해결되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천인기 수사들도 천인 중기까지는 꽤 쉽게 도달한다.

왜냐하면 그 자신들의 전성기를 원영으로 재현하는 것이 바로 천인 중기였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분을.

죽기 직전에 이르러 주마등을 보는 기분을.

오히려 너무나도 기나긴 시간을 사는 천인기이기에, 인생의 가을과 겨울에 대해서는 수명이 거의 다한 천인기 노괴가 아닌 이상 잘 모르는 이들이 허다했다.

연위는 단순히 내 광기의 크기만을 보고 천인기 대원만이라고 했겠지만, 잘못되었다.

'알고 있다….'

어렸을 적의 그 기억들은 물론.

삶의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도.

삶의 후반에 이르러 생을 되돌아보았을 때도.

죽기 직전에 이르러 내 인생의 겨울을 맞이했을 때도.

비참하게 지구에서 온 문명인 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추운 겨울날 감기에 걸려 죽어 가는 나였기에, 오히려 그런 나였기에 알 수 있다.

재밌게도, 사람의 삶의 처음과 끝은 매우 닮아 있다.

죽을 때가 되면 마치 아기 때처럼 몸이 작아지고, 아기와도 같이 정신이 어려진다.

단지 다른 점은 아기는 인간 어머니의 품에서 나왔지만, 노인은 대지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것뿐.

하지만 결국 본질을 떠올린다면 같다.

모든 생명체는 생명의 품에서 나와 생명의 원천인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이 세상은 영원히 순환(巡還)하는 것이다.

우우우웅!

내 안에서 원(圓)이 만들어졌다.

동시에 내 원영은 어린 상태에서 소년 상태, 청년 상태, 장년 상태, 노년 상태, 사망 상태로 끝없이 형태를 바꾸다, 마지막에는 다시 최초의 원영.

아기 형태로 되돌아갔다.

순환한다.

이것은, 천원(天圓).

우우우우웅!

범인(凡人)으로서의 기억이 천인(天人)의 극의에 도달한 핵심 깨달음이라니, 나는 기이한 아이러니함을 느끼며 원(圓)의 힘을 끌어올렸다.

내 머리 뒤쪽에서, 천지영기가 순환하며 원 형태의 후광을 만들어 냈다.

그와 동시에 저 하늘 위쪽의 천겁이 변화하며, 그 안쪽에서 천인기 수준의 천겁이 또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원영기에서 천인기로 올라가는 천겁은 천겁 다섯 개다.

그리고 천인 초기에서 중기로 올라가는 천겁은 10개.

중기에서 후기로 올라가는 천겁은 15개.

후기에서 대원만으로 올라가는 천겁은 총 20개다.

그리고 나는 한 번에 천인기 대원만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내게 떨어질 천겁은 몇 개인가.

"…어마어마하군."

쿠르르르릉!

총 50줄기.

거기에 청색과 금색 천겁이 나뉘어 있으니….

"…100개? 흐하하…."

나는 히죽 웃으며 더더욱 기운을 끌어올렸다.

방금 전에는 천족의 공법으로 천인기에 도달한 것이니.

이제는 지족 공법의 차례.

창령성광오채대법이 마구 울기 시작했다.

지족 공법도 핵심 이치 자체는 천족 쪽과 비슷했다.

다만, 지족 공법은 천인기부터는 수도자의 세포 하나하나에서 폭발을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꾸과과과광!

전신이 폭발한다.

그렇게 세포 하나하나를 폭발시키며, 세포의 생명력을 원영과 공명해 세포의 노화를 원영에 각인한다.

그렇게 세포에 각인된 생명의 형태, 생로병사를 전부 원영에 각인시키면 천족과 마찬가지로 천원의 경지에 도달하며 천인기 대원만이 된다.

지족의 경우에는 더 쉬웠다.

범인 시절, '늙었'던 시절의 기억이 내 뇌리에 또렷하다.

이 영혼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손에 가득했던 기억이 너무나도 또렷했다.

촤라라라락!

나는 천겁 속에서 성장하고, 장년이 되며, 노년이 되었고, 죽기 직전의 형상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또다시 원래의 형상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다시 한번 지족 공법으로도 원영을 보충하였다.

즈우우우웅―

머리 뒤쪽의 원 형태 후광에, 요기가 깃들었다.

천(天), 지(地), 심(心).

삼재(三才)가 천인(天人)에 달했다.

콰르르르릉!

나는 나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100줄기의 천겁을 보며, 그대로 손을 뻗었다.

쩌어어엉!

100줄기의 천겁이 일제히 터져 나갔다.

더 이상 천겁 따위는 두렵지조차 않다.

왠지 모를 끝 모를 자신감이, 끝 모를 힘이 솟아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퍼엉, 퍼버버벙!

나는 하늘을 향해 무색유리검을 찔렀다.

한 번의 찌르기를 할 때마다, 정확히 하나의 천겁 줄기가 터져 나갔다.

퍼엉, 퍼엉, 퍼엉!

계속, 계속, 계속.

찌르고 찌르고 찌르며.

퍼버버버벙!

나는 그렇게, 일백 줄기의 천겁을 전부 터트렸다.

'이제….'

나는 완전한 천인기다.

그리 생각할 때였다.

'잠깐….'

키이이잉―

뭔가 이상한 느낌이 뇌리를 엄습했다.

동시에, 나는 아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얼기설기 엮여 있던 천, 지, 심의 기운들이 '완전히' 하나로 엮이는 걸 느꼈다.

'이게 뭐지!?'

내 머리 뒤로 떠오른 천인기 대원만의 상징.

후광의 원 안쪽으로, 법력, 요력, 그리고 무형검의 기운이 흘러 들어간다.

그와 동시에 천지심의 삼재(三才)가 원 안에서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삼태극(三太極)을 그렸다!

철컹!

"…아아…."

느껴진다.

지금 이 순간.

천인기 안쪽에서, 삼재가 완전한 조화를 이뤘다는 것을.

동시에, 나는 삼태극을 얻음과 동시에, 수선이라는 과정 자체에 상관없이.

얼마나, 어떤 힘을 얻었는지 상관없이.

내가 '나'로서 완성되어 가는 듯한 느낌을 얻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콰르르르릉!

나는 마치 활화산 같은 기력이 전신에서 터져 나옴을 느꼈다.

"그렇군."

나는 하늘을 향해 공격하던 것을 멈췄다.

콰지지지지직!

김영훈의 몸에서 떠오른 [금신천뢰]의 글자가 금신천뢰문의 문도들을 강화시켰고, 그들이 행하는 위뢰제를 강화시키며, 현재 천겁의 힘은 합체기 대원만에서 합체기 초기 수준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러나 합체기 초기 수준일지언정 전명훈과 김영훈이 감당할 수준은 넘어섰고, 내가 대항을 멈추자 점차 천겁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서, 서은현! 뭐 하는 거…."

"…!"

전명훈은 나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고, 김영훈은 나를 보며 뭔가를 느꼈는지 흠칫 놀라는 느낌이었다.

나는 기수식을 잡았다.

'지금까지는, 단악검법의 새로운 초식을 무식하게 만들기만 해 왔지.'

하지만 오늘, 나는 단악검법의 새로운 완성형을 잡았다.

앞으로 만들어갈 단악검법은 총 36초를 끝으로 완성될 것이다.

단악검법(斷岳劍法).

제이십구초(第二十九招).

"대천도피안(大千道彼岸)."

일멸도차안의 초식이 내 검에 원영을 담고 '폭발'시키는 자멸기라면, 대천도피안은 천인기의 공능으로 천지영기를 검에 담고 1초에 1천 번 이상을 폭발시키며 그 안쪽에서 의해은산으로 내 힘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초식.

동시에 내 원영과 천지영기의 폭발이 이어져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며 천지영기의 폭발을 외부로 방출시키지 않으면 내 원영이 폭발의 기운에 박살 나 버리는, 목숨을 건 기술이었다.

생명력 외에 전신의 기(氣)를 모조리 탕진하기 전에는 절대 멈출 수 없는 검무!

'앞으로 일곱 초식.'

대천도피안을 만들었으니, 앞으로 일곱 조각을 더 채우면 단악검법의 검류가 완결될 터.

나는 그때를 기대하며, 삼태극에서부터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기운을 모조리 검에 집어넣었다.

전신의 기를 모조리 쉴 새도 없이 쥐어짜야 하는 이런 위험한 기술을 만든 이유는 하나.

"쉬고 있으시지요, 둘 다."

삼태극에서 뿜어지는 활화산 같은 힘에, 전신이 그대로 폭발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부웅!

나는 22초 단악을 통해, 끊임없이 검무를 추었다.

스르르릉!

검을 한 번 휘두르자, 파천황과도 같은 기운이 하늘을 자를 듯 나아갔다.

콰과과과광!

검기는 그대로 하늘을 갈라 버릴 듯 천겁과 맞부딪친다.

내리치던 천겁의 절대다수가 이 일격에 막혀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끊임없이 검무를 추었다.

콰앙, 콰앙, 쩌어어엉!

빛이 번뜩이며, 천겁이, 점차 소멸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아아아아아!]

지금 이 순간.

나는 활화산(活火山)이었다.

힘이 무한(無限)한 듯 끝없이 분출된다.

삼태극을 등에 업은 채로, 끝없이 단악을 펼친다.

콰르르르릉!

거대한 검기가 날아가며, 하늘에 수십 개씩 공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한 번 펼치는 검격에 하늘이 문자 그대로 쪼개지며 천겁이 산산이 박살 나고 있었다.

월악, 입산, 등맥, 유릉….

첩첩산중, 산중호걸….

산외산부진, 우공이산, 의해은산, 일멸도차안, 도잠, 금강 일만이천, 대천도피안….

무수한 검초가 이어진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합쳐진, 일격.

단악(斷岳)!

번쩍!

검 끝이 허공을 사르며, 모든 초식을 일거에 전부 쏟아낸다.

그와 동시에, 검격은 빛살이 되어 천겁보다도 더더욱 거대한 검풍(劍風)이 되어 천겁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천겁이 산산이 부서져 가는 모습이 마치 비현실 같다.

"후우…."

아직도 기운이 넘친다.

천겁은 분명 사라진 것만 같이 보였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천벌의 주인이 남긴 악의(惡意)는 결코 이런 것 따위로 끝나지 않는다.

'아직도 남았군.'

하늘에, 아직도 천기가 비틀려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천기가, 저 천명이 남아 있는 한.

계속해서 천겁이 우리를 노릴 터.

쿠릉, 쿠르르릉!

내 생각이 맞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내가 천겁을 걷어 낸 하늘에서 다시금 천기가 일렁이며 천겁을 생산해 내고 있었다.

"전명훈, 영훈 형님. 제가 마지막 일격을 넣겠습니다."

나는 안광을 불태우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것으로, 천기를 어떻게 해 볼 터이니 저 천겁만 조금 막아 주시지요."

"…."

"하하, 뭐. 해 보도록 하마."

전명훈은 내 전신에서 느껴지는 활화산 같은 힘에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했고, 김영훈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닷!

두 사람은 하늘을 향해 뛰어올라, 다시금 떨어지려는 천겁을 향해 각자 일격을 날렸다.

쿠르르릉!

그와 동시에 천겁이 쪼개진다.

'…음?'

하지만 나는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천겁이 이상했다.

마치… 살아 있는 듯이 움직이며 전명훈과 김영훈을 피하는 것 같다.

'저건…!'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랬다.

비록 수계에까지 쫓아오지는 못했지만, 느껴진다.

천벌의 주인….

아니.

정려!

저것은 분명 정려의 악의였다.

저 오밀조밀한 뇌력의 움직임은 정려가 뇌 속의 전기를 다루는 것과 굉장히 닮아 있었으니, 틀림없었다.

그랬다.

정려의 악의가 천겁에 녹아들며, '강한' 우리가 아닌 '비교적 약한' 다른 금신천뢰문의 제자들에게 비켜서 떨어지려는 것이었다.

전명훈이 당황했으나, 이미 천겁은 아래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내가 마지막 일격을 포기하고 다시 한번 주변을 쓸어버리려 할 때였다.

우우웅!

하늘에서, 거대한 음양의 형상이 떠오르더니 사방으로 떨어지던 정려의 악의를 막아 냈다.

쿠구구구구!

그와 함께, 연위의 혼이 튕겨 나갔던 방향에서 그녀가 떠올랐다.

"흐아아아아!"

그녀는 연진의 몸을 입고서 칠규에서 피를 흘리며 사방으로 분산된 천겁을 막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천겁은 또다시 살아 있는 듯 움직이며 이번에는 연위에게 집중되었다.

그녀가 소환한 태극의 형상이 바스러지며, 그녀가 천겁에 노출되었다.

파지직!

번쩍!

내 양옆으로 붉은 뇌전과 황금빛 도광이 번뜩이더니, 김영훈과 전명훈이 내 옆에 다시 도착했다.

전명훈이 말했다.

"서은현, 제발! 준비 다 되었다고 말해라!"

"…전명훈."

나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김영훈을 바라보았다.

"영훈 형님."

씨익.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일단, 저 녀석까지만 구한 다음에 마지막 일격을 날려 보지요."

내게서 심어로 계획을 전해 들은 김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습니다. 그럼 갑시다!"

다음 순간, 내 의도를 전해 받은 김영훈은 빛살이 되어 나와 전명훈의 뒷덜미를 잡았다.

파아앗!

김영훈은 빛이 되었다.

마치 시간이 잘려 나간 듯한 느낌과 함께, 나와 전명훈은 어느새 김영훈에게 잡혀 천겁의 안쪽에 진입해 있었다.

"가라!"

김영훈은 그 안에서 나와 전명훈의 몸에 능광도에 기운을 실어 저 위쪽.

연진의 몸이 있는 곳으로 던졌다.

하지만 천겁은 위에서 내리치고, 우리는 올라가야 하는 상황.

제아무리 능광도를 둘렀어도 우리는 어느 순간 멈춰 서기 시작했다.

[전명훈.]

나는 영언으로 말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가라.]

나는 그 자리에서 양손을 깍지 꼈고, 내 의도를 알아차린 전명훈이 눈을 빛냈다.

[…고맙다.]

파직!

전명훈은 내 깍지 위에 발을 디뎠고, 나는 전명훈의 몸에 무형검을 씌워 준 후, 그대로 깍지 낀 손을 위로 떨쳐 올렸다.

나는 그 반동으로 빠르게 아래로 떨어져 내려, 김영훈보다도 밑에 떨어졌다.

그는 검을 전신에 입은 채 하늘로 올라가, 그대로 연위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죽게 두지 않는다…!]

그의 눈에는 핏발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절대로! 그 누구도!]

전명훈은 연위를 꼭 껴안은 채 광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내 가족을 손대게 두지 않아!]

콰지지지직!

그와 함께 전명훈의 전신에서 피어오른 붉은 뇌전이, 여섯 개의 손이 되어 연위와 전명훈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천겁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콰지지지직!

천겁이 모조리 전명훈에게 흡수된다.

만천했던 천겁 줄기가 오로지 전명훈에게 먹히는 기이한 광경.

하지만 내가 한 번 없애 버렸던 천겁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조금 기운이 약해진 상황이었었고.

이제 천겁의 기운이 다시금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대지 아래에서 그동안 준비해 왔던 기운을 끌어올렸다.

우공이산을 끝없이 펼치며 축적해 놓았던 파멸의 힘이, 시커먼 죽음의 기운을 뿜는다.

그 죽음의 기운이 음혼귀주문과 공명한다.

"후우우…."

홍범은 내 저주를 저주독이라 표현했다.

그리고 정려는 정신을 명의 계위로 올리면 저주가 통하지 않는다 했다.

그 말은 즉 명의 계위로 올린 저주는 통한다는 뜻이었고, 멸신겁천의 재액(災厄)은 일종의 명의 계위의 저주였다.

그리고, 이는 운명에 작용하는 독(毒)이었다.

독(毒)은 무엇인가.

독이란, '과함'이다.

이 세상엔, 사실 '독'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과함'과 '덜함'만이 존재할 뿐.

그리고, 모든 '과한' 것은 독이 된다.

일반적인 독도, 균도, 약도, 설탕도, 소금도, 심지어 산소마저도.

과한 것은 독이 된다.

그것은 기(氣)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생명체 이상으로 천지영기를 끌어모으는 수도자란 존재는, 하늘의 입장에서 강력한 독이기에 정화 작용으로 천겁을 내리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는가.

하늘에게 우리는 독이지만.

우리에게 하늘이 독일 수도 있다는 생각.

강력한 힘이 모인 것이 독이기에 정화하려는 것이 천겁이라면.

운명이라는 더없이 강한 힘을, 우리는 왜 정화하지 못하는가.

하늘은 우리에게 천겁을 내린다면, 우리는 왜 하늘에게 겁을 내릴 수 없는가.

"하늘이여."

쿠구구구구―

"내가."

나는 멸신겁천(滅神劫天)을 발동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원래의 멸신겁천과는 달랐다.

본래의 멸신겁천이 희생 제물을 써서 천기를 움직여 하늘의 재액을 불러왔다면.

이번의 멸신겁천은, '하늘을' 희생 제물로써, '내가' 하늘을 향한 재액이 되는 것이었다.

"너의 겁(劫)이 되겠다!"

물론 이건 그저 상징적인 것밖에는 될 수 없다.

하늘을 희생 제물로 삼고, 내가 재액이라고 선언하든 말든 결국 나는 하늘을 어찌할 힘이 없다.

나는 하늘 앞에서 벌레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면 되었다.

제의의 결과로, 지금 이 순간.

명(命)의 계위가, 열렸다.

단 한 순간!

[받아라!]

단 한 순간!

월도겁천(越道劫天)!

무형검(無形劍)은 계위를 넘어, 이 단 한순간에 명의 계위에 도달한다!

나는 그대로 하늘로 날아오르며, 김영훈을 지나, 연진을 껴안은 전명훈을 지나, 천겁을 사르며 겁천(劫天)이 되어 공간을 찢고 나갔다.

전신에 가득했던 활화산 같은 기운이, 이 일격에 모조리 소진되는 것이 느껴졌다.

"―――――!"

가히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전신에 가득했다.

'제발, 제발!'

도박에 가까운 일격!

과연, 제아무리 모든 것을 바친다 한들 필멸자의 몸으로 명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때였다.

콰직, 콰지지지직!

문득, 나는 칠색의 번개에 둘러싸인 채.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림자가, 쇄천봉 너머에서 나를 향해 손을 떠미는 듯한 환영을 보았다.

다음 순간, 나는 무언가가 등을 떠밀어 주는 느낌과 함께, 어딘가로 '진입'하였다.

쿠구구구구구!

나는 그렇게 전신이 터져 나가면서도 위로 올라갔다.

우공이산으로 끌어모은 충격력을, 저주를 모조리 쏟아부으며, 나 자신이 독이 되어 하늘에 겁을 내리겠다는 의지를 날카롭게 벼리며!

그리고 마침내, 나는 감히필설로형용할수없는거대하고거대한세상에도달하여그것을보았다마침내그것에도착한나는천겁의근원을향해….

휘둘렀다!

번쩍!

"…!"

휘이이이이―

나는 정신을 차리자, 내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단 걸 깨달았다.

전신에 있는 힘을 단 한 올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상태에서 떨어지며 하늘을 보며, 나는 씨익 웃었다.

"운명(運命)을…."

보이는가, 하늘이여.

이 비천한 내가.

"베었다…."

휘이이이―

너를 이겨 냈다.

물론 전신의 힘을 쥐어 짜낸 지금.

이대로 떨어지면 그대로 죽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비참하게 추락사하리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서은현!"

"서은현!"

김영훈과 전명훈이, 동시에 내게 날아와 떨어지는 나를 받쳐서 쇄천봉으로 내려와 주었다.

"…끝났군."

나는 피 칠갑을 한 채, 하늘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내 검격으로 인해 사방이 쪼개지고 공간 균열로 가득해진 하늘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천기는 어느덧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하늘을 볼 때.

전명훈의 옆구리에 끼워져 있던 연위가 꿈틀거렸다.

"어, 어… 여긴? 전… 아니, 금명훈 사형?"

그러나 연위는 다시 잠들었는지, 깨어난 것은 연진이었다.

연진은 전명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으, 사형. 죄송한데 좀 내려 주시면 안 될까요?"

"…."

전명훈은 문득 연진을 내려다보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는 연진을 내려놓더니, 갑자기 연진을 껴안았다.

"끄아아아아아!"

절규와 원한, 그리고 안도.

여러 감정이 섞인 비명 소리가, 전명훈의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흐아아아아! 아아아아! 아아아아아!!!"

"흐, 흐아! 사, 사형?"

연진은 당황하는 듯하면서도 전명훈을 어찌어찌 위로했고, 전명훈은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내게 외쳤다.

"서은현!!!"

"…뭐…냐."

"…미안하다."

뚝, 뚝뚝뚝뚝….

다시 한번 문파가 망문한 것을 실감한다는 듯.

전명훈은 눈물을 끝없이 흘리며 외쳤다.

"미안하다, 서은현.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리고…."

저 미안하다는, 단순히 내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죽어버린, 지키지 못한 그의 가족들에게 바치는 '미안하다'.

동시에 나를 믿지 못했음을 자책하는 '미안하다'였다.

얼마간 녀석은 그대로 얼굴을 연진의 가슴에 파묻은 채, 그렇게 끅끅거렸다.

'아직도… 해갈되지 못한 감정이 많이 남았는가.'

나는 얼마간 전명훈의 의념을 바라보다가 숨을 골랐다.

하늘의 벌은 끝났음에도, 인간의 감정은 남아 있었다.

"…전명훈."

녀석의 의념은 암울했다.

검붉은색, 붉은색, 검푸른 색 등….

부정적인 의념들이 전부 섞여 있는 끔찍한 심연의 소용돌이.

아마 다른 이라면 저 심연을 본다고 해도 감히 위로할 엄두를 못 낼 것이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잠잠하게 입을 열었다.

"네 탓이, 아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나는 원립에게 모든 것을 잃었던 때를 떠올리며, 그때의 나와 같은 심연으로 접어들려는 전명훈을 보았다.

아마 녀석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어쩌면 이 자리에는 나뿐인지도 모른다.

"네 탓이… 아니야."

나는 피를 한 움큼 뱉어 내며 피식 웃었다.

"그냥… 세상이 지랄맞은… 거겠지. 그러니…."

나는 전명훈의 의념을 보며 말을 이었다.

"용서해라. 전명훈… 너 자신을."

사람이 분노에 미치면, 광기와 고통에 미치면.

얼마나 불행해지는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기에, 감히 할 수 있는 위로.

그리고, 전명훈의 의념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녀석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느릿하게.

그리고, 고요하게, 대답했다.

"…너도, 내 기분은 이해 못 한다."

"알아."

사람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가까워도 아무리 같은 일을 겪었어도.

타인이기에 자신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녀석은, 눈물을 쏟아내며 머리를 들었다.

"…고맙다."

꽈아악….

그는 연진을 더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정말… 고맙다!"

연진이 숨쉬기 힘든지 켁켁거렸지만 전명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끌어안았고, 김영훈은 그를 보며 껄껄 웃었다.

저 고맙다는 무슨 의미일까.

내게 고맙다는 의미, 내가, 연진이, 금신천뢰문의 모두가 살아 줘서 고맙다는 의미.

자기 자신의 상황에 고맙다는 의미….

'여러 가지가 있겠다만… 뭐 무슨 상관이냐.'

"…오냐."

나는 녀석에게 대답을 해 준 후.

피 칠갑을 한 채, 그렇게 미소지으며 눈을 감았다.

우리는 그렇게.

천벌의 주인이 내린 운명을, 극복하였다.

'그거면… 되었다.'

"서, 서은현? 죽지 마라!"

"잠깐, 서 대리?"

이것이, 나의 열여덟 번째 회귀….

"서은현!!! 죽지 마라!!!"

"안 돼!!! 잠깐!"

…인 줄 알았다.

왈칵!

나는 입에서 피를 토해 내며 말했다.

"…나, 아직… 안, 죽었…."

쿨럭, 쿨럭….

아무래도, 이번 생은 상당히 긴 생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그런 예감과 함께 미소를 지으며, 내 상태를 보러 화들짝 놀라 달려오는 둘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었다.

* * *

쿠릉, 쿠르릉….

[이곳은 명을 깨닫지 못한 종명자가 기적 같은 확률을 통해 도달하는 곳….]

나는 눈을 떴다.

칠색의 번개로 채워진 공간.

그곳에서, 나는 익숙한 잔영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양수진."

천인기(天人期)

나는 칠색의 번개로 채워진 공간.

그 중심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쇄천이라고 외쳤었나?'

생각해 보면 쇄천봉 위에서 일을 벌이고 있느니만큼 입에 담았었던 것 같기도 했다.

정신없는 틈바구니에서 워낙 김영훈과 전명훈에게 악을 쓰며 빠르게 말했으니 말이었다.

'뭐, 그건 둘째 치고….'

나는 내가 마지막으로 멸신겁천을 사용했을 때를 떠올렸다.

분명, 양수진의 잔영이 보였고, 그가 손을 뻗음과 동시에, 나는 '떠밀리는' 느낌과 함께 운명을 벨 수 있었다.

"당신이 도와준 거요?"

[…그래.]

"…나는 저승의 밑바닥에서 당신이 남겨 놓은 분체와 대면하여 멸신겁천을 전수받고 왔소."

[…그런가.]

나는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한 가지 말해 두겠소. 나는, 당신의 '비인간'론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며, 동의하지 않소. 애당초 당신의 말대로라면 명을 따라가는 종명자라는 존재들 또한 비인간과 다를 바 없지 않소?"

[…그렇지.]

"…?"

나는 묘하게 달관한 듯한 그의 말투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뚝, 뚝….

그리고, 그림자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피눈물이 점차 굵어지기 시작했다.

[네가 만난 분체는, 내가 ■■과 대면하기 이전에 만든 분체…. 그는 자신감도 넘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졌을 당시의 나이다.]

"…."

나는, 양수진의 잔영에게서 느껴지는 암울하기 짝이 없는 절망감에 흠칫 몸을 떨었다.

[명을 발설했기에 ■■과의 결전에서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 명을 바꾸고자 했다. 물론 불가능하단 걸 알았지만, 그래도 내가 천벌의 권역을 손에 넣으면 승산이 있을 줄 알았지…. 하지만 틀렸다….]

양수진의 잔영의 눈에서 흐르는 피눈물이 점차 많아져, 시커먼 그의 몸을 점차 붉게 물들여갔다.

[네 말이 맞다. 내 비인간론에는 심대한 모순이 있지.]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우리 또한 비인간에 불과할 뿐이다. 먼지보다도 못한 장난감들일 뿐이야…. 우리가 쌓아 온 모든 것은… 전부 의미가 없다….]

스르르….

완전히 붉게 변한 양수진의 잔영이 점차 흩어지기 시작했다.

[후대여… 네가 받은 명을 조심해라. 네가 일으킬 수 있는 기적에 대해 함구해라. 세계로부터 받은 선물을 숨겨라. 어선(御仙) 중에서 믿을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다.]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양수진의 잔영은 점차 흩어지며, 종래에는 완전히 허공으로 녹아 버렸다.

[함부로 명과 관련한 것들을 발설하면 티끌만 한 희망조차 짓밟히리니…. 너는 나의 전철을 밟지 말아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양수진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눈을 감았다.

* * *

깜빡―

눈을 뜨자, 모르는 천장이었다.

'여기는….'

동굴 같았다.

그리고 예상외로 수계답지 않게 상당한 천지영기가 대기에 분포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나자, 부드러운 이불이 몸에서 흘러내렸다.

보아하니 동굴 같은 곳에다가 침구류를 준비해 놓고 나를 눕힌 모양.

그뿐이 아니라, 동굴 곳곳에 영초와 영액들이 즐비해 있었고, 침상 아래쪽으로는 생명력을 북돋는 진법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는…."

나는 묘하게 익숙함이 느껴지는 동굴을 보며 의식을 일으켰다.

우우우웅!

상단전의 안쪽에서 광대한 의식 영역이 뿜어져 나왔다.

쿠구구구구!

천인(天人)의 의(意)는 그 자체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내가 의식 영역을 펼친 것만으로 천지가 흔들리며 천지영기가 움틀거리기 시작했다.

"후우우…."

반경 이백.

직경 사백 리(理)가 손 안에 들어온 것처럼 훤히 잡힌다.

이것이, 천인기 대원만에 달한 의식 영역의 크기였다.

그리고 나는 의식 영역을 펼치자마자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등선향…!?"

그것도, 나와 회사 동료들이 처음 머물렀던 그 동굴이었다.

아무래도 수계에서는 등선향이 가장 천지영기가 진한 곳이기에 이곳으로 데려온 듯싶었다.

우우웅!

"음?"

내가 침상에서 일어나자, 생명력을 북돋던 진법이 웅웅거리며 어딘가로 신호를 보내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전명훈이나 기타 금신천뢰문의 제자들이 이렇게 해 준 듯싶었다.

'뭐, 기다려 보면 알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바깥으로 나갔다.

"후우…."

정말, 오랜만이다.

나는 동굴의 앞에서 3명의 천인기 수사들을 처음 만났던 그때를 떠올렸다.

지금의 나는, 그 당시 천인기 수사들과 같은 경지에 도달하는 데에 성공했다.

만약 지금 그때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내가 그들에게 으름장을 놓으며 내 동료들을 내 제자랍시고 내가 데려간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스륵―

나는 가만히 하늘을 향해 한쪽 손을 올렸다.

그대로 손가락으로 하늘을 짚은 나는, 그대로 하늘을 향해 선을 그었다.

쿠구구구구구!

그와 동시에, 천지영력이 진동하며 내 의지에 의해 천기현상이 바뀌었다.

우우우웅!

금벽호가 진노하자 벼락이 떨어져 내린 것처럼.

내가 원하자, 저 하늘에 내가 손가락을 그은 모양대로 먹장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이것이 천인합일의 경지.

바라는 것만으로 비가 내리고, 자연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

콰악!

주먹을 쥐자, 하늘을 메운 먹장구름이 크기를 불리더니 이내 등선향 전체로 퍼져 나가며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삽시간에 등선향 곳곳에 비가 내리고 우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스르륵….

내가 손을 펴고 팔을 내리자, 이내 비는 진눈깨비가 되더니 그대로 새하얀 눈이 되어 등선향을 물들였다.

나는 눈보라를 맞으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결단기에서의 비행은 금단을 중심으로 전신의 천지영기를 가볍게 하는, 일종의 '법술'이었다.

하지만 천인기에서부터는 의지가 일자 동시에 천지영기가 알아서 나를 띄워 놓는 느낌이 들었다.

법력이 소모되지 않는다.

나는 하늘로 날아올라, 먹장구름 위쪽에 도달했다.

쿠구구구구!

점차 눈보라가 거세지더니, 이내 용오름이 되어 등선향 곳곳을 헤집는다.

우우웅―

내 머리 뒤로 원형의 후광이 나타났다.

삼태극은 떠오르지 않고, 그저 순수한 천족 천인기의 힘일 뿐이었지만, 그 힘은 막강했다.

쿠구구구구―

내가 손을 휘젓자, 특별한 결인을 맺은 게 아님에도 회오리가 수십 개로 분화되며 등선향 곳곳으로 퍼졌다.

내가 양팔을 벌리자, 회오리는 곳곳으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그러나 하늘이 들끓으며 곳곳에서 천뢰(天雷)가 우르릉거렸다.

하늘이 번개의 바다로 뒤덮인다!

뒤이어 우박이 내리고, 해일이 일어 등선향 아래로 물이 떨어졌다.

나는 등선향의 위쪽에서 팔을 휘두르며 천지 현상을 마음껏 지휘하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퍼엉!

내가 주먹을 쥐자, 돌풍이 불며 천지 현상을 모조리 등선향 바깥으로 떠밀어 없애 버렸다.

"이것이… 천인경."

의지에 의해 천지 현상을 감응하는 경지.

천지영기와 의식이 합일하였기에 의식의 크기가 곧 힘 그 자체가 되는 경지였다.

천인기에서부터는 자신이 익혀 온 공법의 속성을 천지 현상으로 일으킬 수 있게 된다.

지 속성 공법을 익힌 수사는 지진해일을.

수 속성 공법을 익힌 수사는 우천과 폭설을.

화 속성 공법을 익힌 수사는 가뭄과 산불을.

목 속성 공법을 익힌 수사는 천뢰와 숲의 생장을.

금 속성 공법을 익힌 수사는 폭풍과 자력(磁力)의 제어를.

그러한 천지 현상을 천인기 수사가 원하는 대로 부릴 수 있고, 그런 천지 현상을 '끌어올' 수가 있게 된다.

천인기 수사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천기의 조작을 [천기유도]라고 불렀다.

괴군이 예전 수천 리 바깥에 있던 원립의 목을 졸라 죽이려 했던 것도 같은 원리로, 저주를 하나의 천지 현상으로 만들어 원립에게 유도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속성별 유도는 원영 후기에서 어떤 속성을 중심으로 쌓았느냐가 중점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오월입도결과 오행장원전의 효과로 인해 오행 속성을 전부 천기유도시킬 수 있었다.

'일반적인 요족들도 기본적으로 오행을 전부 천기유도시킬 수는 있다만….'

천족 수도자들에 비해 특화되지 않았다.

선수 혈통을 타고난 몇몇 요수들만이 오행 중에서 선수 혈통이 관장하는 영역의 속성에 특화되긴 했다만, 선수 혈통을 타고나지 않은 요수

은 그냥 자신의 육신을 천기유도를 통해서 무한하게 강화시키는 쪽을 택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천족 공법의 방식으로 오행을 전부 익혔기에, 오행 전부가 천족 수도자만큼 특화되어 있으면서도 지족 수도자처럼 전부를 다룰 수 있다.

이 자체만으로도 나와 일반적인 천인기 수사들은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데, 겁천의 힘까지 섞여 삼태극을 그리면, 그리고 거기에 괴뢰의 회로까지 사용하면 나는 도대체 어느 정도로 강해지는 것인가.

난 나 자신조차 내 힘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앞으로 차차 알아가야겠군.'

나는 몸 상태를 확인해 보며, 뒤를 돌아보았다.

파직, 파지직….

"…일어났냐."

"다 회복됐군."

어느새, 김영훈과 전명훈이 날아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 잤습니다."

"뒈져 버리는 줄 알고 놀랐다. 금신천뢰문의 제자들을 닦달해서 인근 수도가문들을 약탈시켜 원기 회복에 쓰이는 영초들로 약을 만들어 네놈 입에 쑤셔 넣느라 힘들었다."

"…네가 쑤셔 넣은 거냐?"

"아니, 연진 시켜서 했지."

"…."

그럼 왜 본인이 생색을 내는 걸까.

나는 전명훈을 보며 혀를 차고는 김영훈을 바라보았다.

"몸은 좀 괜찮아진 것 같군."

김영훈은 씨익 웃으며 칼집에 손을 가져갔다.

"뭐, 솔직히 이런저런 말 할 것 없겠지?"

"…."

물론이다.

당장이라도 무형검을 뽑아 김영훈에게 휘둘러 보고 싶은 충동 때문에 손이 근질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욕망을 꾹 눌러 참으며 물었다.

"한 가지, 확인해 둬야 할 게 있습니다."

"뭐냐?"

"영훈 형님은 지난번, 월도쇄천이라는 경지를 입에 담으셨습니다. 맞습니까?"

"그래."

"하지만, 그때 연위의 반응. 그리고… 지금 제 눈으로 보니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당신은… 월도쇄천이 아니지요?"

"…."

김영훈은 잠시 침묵하는 듯하더니, 작게 미소지었다.

긍정의 의미였다.

오싹, 오싹….

나는 피부 위로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내가 알던 '김영훈'이 아닐까.

그 당시 연위가 김영훈을 보며 기겁했던 이유.

그리고 내가 지금 그에게서 느끼는 기이한 위화감.

그리고 하계로 적강 도중 봤던 '황금빛 붕조'.

모든 것을 조합하면, 한 가지 결론이 나왔다.

"영훈 형님. 당신은, 쇄천 너머… 제가 아는 한 존재가 '어전 일 보'라고 부르는 경지에 이른 것이고, 지금의 당신은, 그러니까 우리와 함께 천겁을 극복했던 쇄천경의 당신은 분신이 아닙니까?"

"엥?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전명훈은 이해를 못 했는지 나와 김영훈을 번갈아 보았다.

느껴진다.

함천존자 장익이, 하계에 있을 때 머나먼 시공간을 격해 유화를 통해 자신의 '분신'을 파견했던 것.

지금의 김영훈은, 장익이 만들었던 것과 똑같은 어전 일 보에 도달한 김영훈의 '분신'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계로 적강하며 보았던 황금빛 붕조가 그 당시 비승하던 김영훈 본체였던 것이었다.

나는 전신에 짜릿짜릿한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히죽 웃었다.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 경지에 도달한 겁니까?"

그리고, 김영훈은 히죽 웃었다.

금빛이 은은히 도는 그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쳐 있었다.

내 모습은, 어쩐지 잔뜩 흥분한 모습이었다.

그래, 지금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김영훈과 비슷한 표정이다.

"알고 싶나?"

철컥!

그가 자신의 도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나는 입에서 무색유리검을 꺼내며 말했다.

"당연하지요."

"말이 필요한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김영훈이 희열에 찬 표정으로 도를 잡으며 말했다.

"알려 주마."

다음 순간, 능광도와 무색유리검이 찰나를 찢고 부딪혔다.

기둥 (1)

나와 그가 동시에 일 보를 내디뎠다.

동시에 우리는 정지된 세계로 들어갔다.

나는 봐줄 생각 따윈 없이 전력을 개방했다.

'장익의 분신을 떠올리면, 긴장을 놓으면 안 된다.'

일반적인 천, 지족 수도자의 경우.

분체나 신외화신을 만든다 해도 무조건 본체보다는 경지가 떨어지고, 낼 수 있는 힘 역시 한참은 달리게 된다.

하지만 심족의 경우는 달랐다.

'오로지 힘의 크기만 차이가 있을 뿐, 쓸 수 있는 기술과 경지는 본체와 다를 바가 없다.'

아마 다른 게 있다면 힘의 크기 차이와, 육신의 유무로 인한 유지력의 차이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지금 눈앞의 김영훈은 단기전 한정 본체 김영훈과 다를 바가 없다.

'단기전이면 충분하지.'

나는 히죽 웃으며 검을 잡고 의식을 가속했다.

반경 2백 리에 달하는 의식의 크기가, 무형검에 의해 끝없이 가속된다.

동시에 겁천에 달하며 기본적으로 뇌속(雷速)을 얻었다.

거기에 방대한 의식을 가속시킨다.

천겁을 닮은 겁천의 순수 속도만 해도 뇌속에 근접하기에 전명훈을 따라갈 수 있을 정도였다.

거기에 의식의 가속까지 더해지자, 나는 전명훈은 따위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빨라진 것을 느꼈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정지된 세계에 진입하며 서로를 향해 검과 도를 뻗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파밧!

"…???"

나는 어느새 내 전신에 여덟 번의 참격이 꽂혀 있음을 눈치챘다.

순식간에 급소가 여덟 군데 베였다.

나는 의식을 끝없이 가속시켰다.

뇌가 과열된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어느새 내 위쪽에서 도를 들고 나를 향해 내리꽂으려는 김영훈을 인지할 수 있었다.

파밧!

나는 극순의 세계에서 몸을 움직이며 검을 찔러 들어갔다.

파앙!

하지만 김영훈은 또다시 순식간에 피해 버렸다.

'미쳤군.'

세계가 정지에 가까워질 정도로 정신을 가속시키고 겁천으로 뇌속에 가까운 속도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육감에 의지해 따라가는 게 전부였다.

눈으로 좇을 수조차 없다!

내 무형검이 천변만화하며 그를 잡아 보려고 했지만, 속도 자체가 너무 차이가 나니 아예 뭘 해 볼 가능성 자체가 전부 막히는 느낌이었다.

'빠르다.'

우리가 제대로 싸우면 등선향이 부서질 수 있었기에, 나와 그는 현재 힘을 최대 결단기 수준으로 제하고 싸우는 중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결단기 급의 힘으로 힘을 제한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둘은 절대로 결단기 따위가 따라올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번쩍!

어느새 내 앞쪽에서 검격을 날리는가 했던 김영훈이 내 오른쪽에 나타나서 능광도를 전신에 두른 채 뇌속을 초월한 속도로 발차기를 날렸다.

슈콱!

옆구리가 베이는가 싶더니, 나는 어느새 인지도 못 할 속도로 저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파아앗!

정지된 세계에서 정신조차 차리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날아간 나는 문득 저 아래가 허전해짐을 느꼈다.

'미쳤군.'

발차기 한 번에 등선향의 중심부에서 답천사막까지 밀려난 것이었다.

번뜩!

그리고 뭔가를 생각하기도 전, 김영훈이 어느새 내 위쪽에서 나타나 능광도를 수직으로 내리치려 하고 있었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역시 나는 순수한 무(武)로는 그의 발끝조차 좇기가 힘들다.

그렇다면.

[갑니다.]

나는 심어를 보내며, 요수공법의 힘을 끌어올렸다.

쿠구구국!

천지영기가 육신을 강화한다.

생명력이 끓어오르며, 육신의 잠재력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올라갔다.

동시에 내 상중하단전 역시 생명력이 가득 차오르며 강화되기 시작했다.

한계까지 과열되었던 상단전이 강화로 인해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나는 요수공법의 힘을 더한 상태에서 계속해서 머리를 더더욱 가속시키기 시작했다.

한계까지, 한계까지 가열한다!

시간이 더더욱 쪼개진 듯한 느낌이 든다.

그와 함께, 나는 황금빛에 둘러싸인 김영훈이 정지된 세계 속에서 움직이는 속도를, 점차 '쫓아가기' 시작했다.

[흠.]

김영훈은 정지된 세계에서 조금 놀랍단 듯이 미소를 지었다.

기분 탓일까.

아니면 정지된 세계에 너무나도 깊숙이 진입한 탓일까.

주변이 어두워지는 느낌이었다.

이 세상에 색채가 있는 건 오직 나와 김영훈뿐이었다.

[따라오는 건가.]

파앗!

우리는 검격을 주고받았다.

마치 광선과 광선 같다.

서로의 팔이 수천 개로 분화하는 듯하더니, 무색의 광선과 금빛의 광선이 정지의 어둠 속에서 마구 부딪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됐다!'

나는 희열에 찬 미소를 지었다.

'따라가고 있다!'

어느덧 나와 그는 벌써 수만 합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쿠구구구!

극순의 세계에서 주고받는 일격 일격에, 충격파가 사방으로 휘날리며 답천사막 곳곳에서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폭풍의 중심에선 나와 그가 빛을 연상시키는 속도로 맞붙고 있었다.

나와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모래가 녹아 유리가 된다.

우리의 전투지 인근은 순식간에 흘러서 녹아내리는 유리의 바다가 되어 있었다.

나는 시뻘겋게 달아오르다 못해 물처럼 녹아 있는 유리의 바다를 수상비로 밟으며 김영훈과 눈이 마주쳤다.

[이대로 가면 제가 이깁니다.]

이대로 하루 정도만 끌면 김영훈을 이길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정도만 있다면 김영훈의 분체에 있는 기운을 모조리 소진시킬 자신이 있었으니까.

물론 조금 큰 기술을 쓰면 더더욱 그를 밀어붙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좋군.]

김영훈은 정지의 어둠 속에서 황금빛에 휩싸여 미소지었다.

꾸웅!

그가 내 일격을 맞고 날아가 유리의 바다 한 곳에 처박혔다.

그는 날아가는 도중에 자세를 바꾸며 기수식을 잡았고, 다음 순간.

그가 심어를 보내 왔다.

[그럼, 서은현.]

철컥!

그리고 나는, 천인기에 오른 천기안의 단기 예지에.

요수공법의 단기 예지에.

그리고 심족으로서의 의념을 보는 육감에.

내가 죽기 직전까지 썰리는 미래를 볼 수 있었다.

[이제부터, 가속을 시작하겠다.]

'뭐?'

그럼 지금 저게.

가속을 하지 않은, 순수한 능광도만의 공능이란 말인가?

다음 순간.

푸콱!

나는 내가 무심코 벌린 입안으로, 금색의 칼이 들어와 있음을 느꼈다.

능광도는 그대로 멈추지 않고 내 입안으로 계속 들어와 척추를 끊고 머리통 뒤쪽으로 튀어나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전신 곳곳에 황금빛 참격이 박히기 시작했다.

'반, 반격해야….'

나는 전신이 무처럼 썰려 서은현 무채가 되는 걸 각오하면서 무색유리검을 든 채 그에게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찰나.

번쩍!

"…!???"

내가 뭔가를 인지하기도 전.

김영훈의 억센 손아귀가 내 얼굴을 붙잡고 어딘가로 날아와 있었다.

그의 손아귀 뒤쪽으로, 황금빛의 흔적이 일직선으로 쭉 이어져 남아 있었다.

다음 순간.

꽈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난 [어딘가]에 부딪혔다.

왈칵!

나는 전신이 폭발할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몸 곳곳에서 피를 분수처럼 뿜어냈다.

'이, 이건…. 여긴…!'

서쪽 끝!

쇄천봉 너머, 내가 한때 북향화와 와서 봤던 [세계의 끝].

'미친….'

나는 내가 어느새 답천사막의 중심부에서, 인식도 못 한 사이에 세계의 끝자락에 도달해 처박혔다는 걸 알고는 기가 막혀서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

소리조차 김영훈의 도격을 쫓아오지 못한다.

무수한 금광이 세계의 끝에 몰린 내 전신을 난도질하는 게 느껴진다.

분명 나도 정지된 세계에 진입하고,

요수공법으로 육신의 잠재력을 늘린 채, 거기에 머리가 터지기 직전까지 천인기의 의식을 가속시켰다.

일반적인 천인기 수사의 의식 영역은 직경 1백 리.

나는 '반경'이 2백 리였다.

오기조원과 기묘성심전, 천족, 지족의 의식이 전부 겹쳐지며 동급 수사보다도 의식의 크기 자체가 말이 안 될 수준으로 벌어져 있는 내가, 

식이 뜨거워질 정도로 가속시켰음에도 김영훈의 발끝조차 쫓기가 힘든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못 쫓아간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요수공법까지는 육체의 힘인지라 무공 느낌이 났다만, 안타깝게도 법술까지 써야 하는가.'

나는, 천족의 힘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 * *

―――――!

김영훈은 황금빛 안광을 빛내며, 어둠 속에서 서은현을 향해 수천 번 이상의 참격을 날렸다.

'청문령만 해도 결단기 시절에 몇 번을 썰어도 안 죽었다만, 천인기라는 서은현이라면 얼마나 썰어야 할지 감조차 안 잡히는군.'

재생력이 둔해지면 참격을 멈추려고 했다.

하지만, 마치 불사신이라도 되는 듯 주변의 천지영기가 알아서 서은현의 몸으로 흘러 들어가며 생명력을 보충해 주고 있었다.

이곳에 천지영기가 존재하는 이상, 눈앞의 녀석은 불사신(不死身)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불사신을 죽일 수 있는가.

김영훈이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인근의 천지영기, 한 올 한 올 모조리 내 참격의 여파에 쓸려 나가 버릴 때까지. 끝없이 참격을 쏟아부으면 될 뿐!'

――――!

그가 한 번 능광도를 휘두를 때마다 뒤늦게 충격파가 터지고 천재지변이 일어나며 천지영기가 불타고 있었다.

서은현이 재생에 사용할 천지영기가 한 올도 남지 않게 된다면, 그때는 분명 김영훈의 승리였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파아아아앗!

서은현의 몸 전체를 새하얀 빛이 뒤덮었다.

'이건, 비둔술?'

김영훈은 피식 웃었다.

결단기 수도자들이 장거리를 이동할 때.

혹은 전투에서 속도를 높여 움직여야 할 일이 있을 때 쓰곤 하는 법술이었다.

금단에 각인해 둔 영력 흐름을 끌어올리는 것이 주가 되기에, 사실 법술보다는 결단기 수도자들의 고유 공능이라 해야 할 법술.

그것이 비둔술이었다.

하지만 김영훈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어설프다. 결단기 수도자들의 비둔술은 절대 나를 못 따라온다. 아무리 천인기 수도자의 비둔술이라 할지라도….'

김영훈은 징지된 어둠 속에서 능광도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그리고 찰나.

우우웅!

능광도 끝자락을 통해, 서은현의 겁천.

무형검의 의지가 들려왔다.

―벤다.

방금 전이라면 무시했을 목소리.

하지만, 김영훈은 문득 등 뒤로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건, 위험하다.'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한 걸음의 뒷걸음질에, 그와 능광도는 정지된 어둠 속에서 순식간에 8백 리를 멀어졌다.

그러나, 김영훈의 황금빛 동공은 다음 순간 바싹 졸아들었다.

"뭣!?"

서은현이 쫓아왔다.

비둔술과 요수공법, 그리고 겁천.

모든 것을 사용하며 극한까지 가속된 서은현은, 백색의 빛이 되어 황금빛의 김영훈에게 검을 휘둘렀다.

김영훈은 히죽 웃으며 그에게 날아드는 서은현의 검격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직격하면 분체가 소멸한다!'

김영훈의 분체는 단기전이라면 본체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한 마디로, 지금의 서은현은 본체 김영훈과도 대등한 공방을 나눌 수준이 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아직도 나에 비해선 조금 느리다.'

김영훈은 서은현에 검에 능광도를 마주 대며, 그의 검에 실린 힘을 분산시키고 흘려냈다.

'피해도 소멸한다. 흘려서 기운을 무화시켜야 해.'

담긴 힘만 봐도 느껴진다.

충격파만 맞아도 전신이 얼얼해질 수준이 분명….

"커헉!!! 커허허…."

다음 순간, 김영훈은 헛웃음과 함께 황금빛 빛무리를 칠규에서 한 움큼 토해 냈다.

김영훈이 찰나에 서은현을 서쪽 끝에 메어꽂았던 것처럼.

서은현의 일격에, 김영훈은 북쪽 대초원.

그 너머에 있는 북쪽 끝에 메어꽂힌 것이었다.

'방금, 분체가 소멸할 뻔했군.'

김영훈은 기운을 모아, 박살 날 뻔한 분체를 수습하며 능광도를 들었다.

서은현은 김영훈만큼 빠르지는 못했기에 본인이 김영훈을 날려 놓고도 아직 그를 다 쫓아오진 못했다.

'하지만 제대로 맞으면 뒈져 버리겠어.'

김영훈은 식은땀을 흘리며 웃었다.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기쁘다.

기뻐서 미쳐 버릴 것만 같다!

'바둑이 이후로 이 정도로 설렜던 건 원영기에 달한 광인(狂人) 청문령과, 북향함대를 단신으로 상대했을 때 정도였나?'

"흐하…."

사람이 심심하면 미쳐 버린다는 말을 아는가.

지금의 김영훈이 딱 그 상태였다.

파아아앗!

어느새 새하얀 빛이 북쪽의 끝으로 쫓아왔다.

부웅!

새하얀 빛무리 속에서 무형(無形)의 참격이 길쭉하게 뻗어 나오며 김영훈을 노렸다.

김영훈은 빠르게 그의 검격을 피했다.

꽈아아아앙!!!

그가 서 있던 곳.

세계의 북쪽 끝에 있던 세계순력이 움푹 우그러지며, 그대로 차원 장막의 일부가 찢겨 나갔다.

'본체가 전력을 다해 북향함대랑 힘을 합쳐서 찢어 내야 했던 게 차원 장막이었는데….'

김영훈은 머리 뒤에 삼태극(三太極)을 두른 채 찢어진 차원 장막을 뒤로하고 그를 쳐다보는 서은현과 눈을 마주쳤다.

"하, 하하… 본체의 전력이…."

김영훈은 식은땀이 흐르며, 동시에 오싹오싹한 황홀한 희열에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네게는… '그냥' 일격(一擊)인 거냐?"

서은현은 말없이 양손을 펼쳤다.

그의 주변으로 3천 개의 무색유리검이 떠올랐고, 무형검이 무색유리검들을 이었다.

파앗!

그는 서은현이 반응할 틈새를 주지 않으려 능광도를 휘둘렀다.

무형검을 전신에 두른 서은현이 손을 휘두르자, 능광도의 참격은 그대로 튕겨 나가 버렸고, 김영훈이 있던 자리로 3천 자루의 무색유리검이

일제히 쏟아졌다.

피이이잉―

서은현이 검진(劍陣)을 열었다.

검진 속에서 검기가 증폭되며, 절로 소름 끼치는 흉험한 의념을 흘리기 시작했다.

꾸구구구구!

세계의 복원력에 의해 절로 복원되는 차원 장막을 뒤로한 채.

서은현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김영훈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광인이었다.

'그래도 내가 세 수는 앞선다.'

김영훈은 씨익 웃었다.

아직도 서은현은 김영훈의 속도에 완전히 대응을 못 한다.

아직도 그가 서은현을 상대로, 속도 하나는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정도면 충분하지.'

김영훈은 능광도를 잡으며 웃었다.

그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서은현의 움직임을 분석했다.

그의 의(意)를 읽었다.

상황과 상황을 이어 가며, 이 순간에 맞는 무공을 조합하기 시작했다.

* * *

'아….'

왜일까.

나는 김영훈과 마주 보며, 그가 지금 무공을 '만들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어떻게 이걸 안 거지?'

아무리 의념을 읽어도, 심상을 읽어도.

상대의 '상태'와 '배경'에 대해 짐작을 할 수 있을 뿐.

상대의 모든 걸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 당장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째선지 김영훈이 '무공'을 창조하고 있고.

그가 '어떤' 무공을 창조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아아….'

파앙!

나는 검진 속에서 무형검을 실처럼 압축시켜 도잠의 초식을 김영훈에게 휘둘렀다.

김영훈은 그 초식을 보고 흠칫하는 듯하더니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세 번의 참격으로 도잠을 끊고는 기수식을 잡았다.

'아아아…!'

나는 김영훈의 '의도'를 읽으며 계속해서 그와 합을 주고받았다.

느껴진다.

그가 '무슨' 무공을 만들려는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떤' 무공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 것 같다!

나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를 깨달았다.

최근 느끼기 시작한 제4의 감각.

심족의 시야와는 약간 결이 달랐던, 그러나 굉장히 유사하며, 심족의 시야와 상호 보완을 하는 어떠한 감각.

그 감각이, 내게 알려 주고 있었다.

퍼벙!

뇌리에서 불꽃이 튀긴다.

내 머릿속에서, 김영훈이 만들려는 무공이 '예측'되기 시작했다.

나는 김영훈이 만드는 걸 '예측'하며, 그가 무공을 펼치기 전 그 무공에 맞는 완벽한 파훼법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다음엔 김영훈을 향해 의념으로 찔러 주는 듯하다가 그가 실제로 그 무공을 써 오면 그 무공을 파훼한다.

그러면 김영훈은 파해식의 역 파해식을 즉석에서 만들어서 다시 내게 반격했다.

내 감각으로도 그가 역 파해식을 또 만들어서 내게 반격하는 것까진 다 쫓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퍼벙, 퍼버벙!

나는 머릿속에서 불똥이 튀기는 느낌과 함께, 뭔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아…."

그리고 나는 내가 뭘 깨달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동시에, 나는 지금껏 내가 느껴 왔던 제4의 감각에 대한 정체도 알 수 있었다.

김영훈을 향해 가로 베기를 행하며, 동시에 보법을 바꿔 우하에서 좌상으로 올려 벤 후.

그의 능광도와 무색유리검을 마주 대며, 나는 그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래.

이것은 [대화]였다.

동시에 기(棋)였다.

나의 '의도'와 김영훈의 '의도'가 서로 얽히며 서로가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렇군….'

지금까지, 김영훈은 이런 세상에서 살아왔던 거구나.

나는 어느 순간, 완전히 김영훈과 합을 맞추며 순수한 무(武)의 기예로 그가 만들어 내는 무공의 파해, 파해의 역 파해.

그 역 파해에 대한 대응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파아앙!

우리는 정지된 세계에서, 서로에게 퍼부을 최종 일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김영훈의 능광도는 가속했고, 내 검은 가속하지 못했다.

파앙!

마침내, 정지된 세계가 풀렸다.

나와 그의 대련이, 끝난 것이었다.

"…아아…."

김영훈의 능광도가 내 목덜미에 닿아 있었고, 내 무형검은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었다.

하지만, 김영훈은 소리 없이 웃었다.

츠츠츳….

그의 낡은 도에 흐르던 황금빛 기운이 흩어졌다.

"…내가 졌다."

김영훈은 자신의 입으로 패배를 시인했다.

"마지막에, 네가 검을 휘둘렀다면 네 목은 날아갔겠지만 내 몸은 터져서 곤죽이 됐겠지. 너는 머리통을 재생하면 끝이지만 나는 몸이 터지면 그대로 끝이니, 내 패배다."

"…후후."

나는 무색유리검을 다시 금단에 집어넣으며 손을 들었다.

그리고 눈을 닦았다.

김영훈은 나를 보며 웃었다.

"훌륭하다. 너도, 나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듣고 있구나!"

"…그렇군요. 당신은… 이런 세계에서 살고 계셨던 거군요."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김영훈에게 검을 휘두르지 않았던 건 배려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배려한답시고 검을 멈췄다면 김영훈은 오히려 화를 냈을 터였다.

내가 검을 휘두를 수 없었던 건, 북돋아지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였다.

나는 오늘, 제4의 감각의 정체를 깨달았다.

내가 최근 각성하기 시작한 이 감각은,

'김영훈과 같은' 감각.

'김영훈의 재능'과 동일한 범주에 있는 지각(知覺)이었다!

벌써 열일곱 번을 죽었다.

2,500년을 살아오며, 일류 이후로는 한 번도 검을 몸에서 떼 놓은 적 없다.

무(武)는 어느새 내 삶이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김영훈이 가지고 있던 재능을.

후천적으로 개화(開花)하게 된 것이었다.

아직은 김영훈과 비교하면 그의 발가락에 떼만도 못한 수준이었다.

김영훈의 감각이 하늘 너머.

'어딘가'와 이어져 '어딘가'에서 직접적으로 창조성을 내려받고 있다는 것이 정말로 여실히 느껴진다면, 내 재능은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떨어뜨려.

물방울로 쌓아 올린 석순(石筍)이었다.

그조차 새끼손톱만큼도 되지 않는 크기였기에, 그처럼 하늘 너머에 닿으려면 천 년은커녕 천억 년은 필요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던 땅에서 개화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은 그저 의도를 알아채는 게 고작이지만.

이 감각이 하늘에 닿는다면, 김영훈처럼 의도를 조합하고 분해해 실시간으로 무공을 창조하는 창조성을 손에 넣을 수 있을 터였다.

무는 내 삶이었다.

그리고, 내가 노력해 왔던 무는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기둥 (2)

"어… 음…."

전명훈은 멍청하게 허공을 바라보았다.

빠르다.

엄청 빠르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슉, 슈슉, 슈슈슉, 슉!

그는 멍하니 그의 눈앞에서 빠르게 부딪치다가 갑자기 답천사막 방향으로 가서 사라진 서은현과 김영훈이 있을 곳을 바라보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아 머리를 긁적였다.

대충, 서은현과 김영훈이 갑자기 서로 칼을 꺼내더니,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미친 듯이 웃고는 칼을 들고 달려들어서 미친 듯이 부딪치기 시작한 것.

그것이 방금의 일을 전명훈의 시선에서 본 것이었다.

'김 부장… 회사에서부터 등산 같은 걸 좋아하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다만…. 서은현 그놈도 그 정도로 미쳐 있을 줄은….'

전명훈은 둘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끌끌 혀를 찼다.

한 1, 2분쯤 지났을까.

파밧!

김영훈과 서은현이 돌아왔다.

"돌아오셨습니까?"

전명훈은 두 사람을 보았다.

서은현은 의복의 술법으로 옷을 단정히 정리했지만, 김영훈의 옷은 곳곳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어, 그래! 재밌게 놀았다!"

"…뭐, 부장님이 재밌으셨으면 됐겠죠."

전명훈은 그러려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보다, 부장님. 이제 가시죠."

"음? 가? 어디로?"

"어디로라니요. 원래 여기에 온 게 서은현이랑 칼부림하려고 온 겁니까?"

"난 그러려고 온 건데?"

"…."

전명훈은 김영훈을 이해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뭐, 일단 서은현. 어차피 너한테 할 말이었으니까 부장님은 상관없겠지. 따라와라."

전명훈은 그렇게 말하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 * *

'나한테 할 말?'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전명훈의 말에 의아해하다가, 곧이어 그의 의념을 보며 기분이 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 김영훈과 겨루며 내 무의 수준을 확인했을 때의 기쁨과 흥분이 싹 날아간 것 같았다.

파직!

전명훈은 한 줄기 적뢰가 되어 허공을 날아 서쪽으로 갔다.

나는 역시 그의 뒤를 따라왔고, 김영훈도 나를 쫓아왔다.

쿠릉, 쿠르릉!

나는 전명훈을 뒤쫓아 가며, 결인을 맺었다.

착, 착, 착!

수결을 맺자, 주변의 영기가 움직이며 의복의 술법이 발동되었다.

의복의 술법.

결단기 이하는 호신강기의 도움으로 의복도 잘 찢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원영기 이상의 수도자들은 한 번 전투를 치를 때마다 호신강기마저 뚫는 공격이 많아, 옷이 찢어지거나 불타 버리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기 때문에 의복을 수복할 술법을 필요로 했다.

그렇기에 만들어진 술법이 법력을 꼬아 옷을 만드는 법술이었다.

원영기 시절에는 한 가지 의복밖에 만들 수 없었다.

하지만 천인기가 되니, 인근의 천지영기가 몰리며 꽤 여러 가지 의복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츠츠츳!

내 새하얀 의복이 김영훈처럼 새카만 옷이 되었다.

전명훈도 나를 흘긋 뒤돌아보더니 그 역시 의복의 술법으로 검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파바밧!

각자 상복(喪服)으로 갈아입은 우리는, 마침내 서쪽.

금신천뢰문이 '다시' 자리를 잡은 쇄천봉에 도달했다.

수도자들답게, 벌써부터 토목 공사는 전부 끝나서 쇄천봉 곳곳에 전각이 솟아 있었다.

동시에 전각이 용맥을 제압하여 진법을 만들어, 문파의 결계대진을 이루고 있었다.

거기에 행정 체계 역시 거의 복구된 듯했으니, 사실상 수계에서 금신천뢰문은 명맥을 잇는 것에 성공한 것이었다.

나와 전명훈, 김영훈 등이 상공에 나타나자, 금신천뢰문 곳곳에서 하뢰 제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광한계 출신인 이들이 3만여 명, 현계 출신인 이들이 3만여 명.

총 6만여 명의 제자들.

그중에서 연기기는 오히려 더 적어 3천 명밖에 되지 않았고, 절대다수가 축기기였으며 결단기 수도자들도 1천 명이었다.

한 마디로, 현 금신천뢰문의 하뢰 제자들만 해도 수계 전체의 전력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수행이 높은 결단기 대원만의 제자.

금진찬의 후손인 금해민이 허공으로 떠올라 우리에게 예를 취했다.

"제자가, 천뢰(天雷) 원로님들을 뵙니다."

"그래. 장문인은 준비하라. 서 원로가 깨어났으니 이제 마땅히 위령제를 지낼 것이다."

그새 금해민을 새 장문인으로 임명한 듯, 전명훈의 말투는 자연스러웠다.

"…왜 네가 장문직을 맡지 않았지?"

나는 그에게 물었다.

전명훈은 자조 섞인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자격이 없다. 내가 동향(同鄕)인 너를 조금만 더 믿어 줬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

"나는 금씨(金氏)를 유지할 자격이 없다. 그래서 나는 장문직을 맡지 않는다."

"…그러냐."

"금해민도 칠뢰진경의 성취가 훌륭하여 원영기가 코앞인 녀석이니, 녀석 정도면 문제없겠지."

나는 말없이 전명훈을 따라갔다.

얼마 후, 나와 전명훈, 김영훈.

그리고 금해민은 쇄천봉 아래쪽.

무수한 깃발들이 꽂혀 있는 곳에 도달했다.

번(幡: 세로 깃발)이 아닌 기(旗: 일반적인 깃발)였다.

앞으로, 금신천뢰문에서는 번(幡) 형태의 깃발 법보는 금지될 예정이었다.

무덤 안에 시신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한 사람도 시신을 남기지 못했다.

홍수령 역시 내가 음혼귀주문을 써 흙으로 만들어 주었으니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전명훈은 시신이 없는 가묘(假墓) 하나하나를 돌아다녔다.

수만 개나 되는 그 모든 가묘를 전부 돌아다니며, 금해민에게 술병을 받은 그는 술병을 부어 주었다.

나는 전명훈을 뒤따랐다.

김영훈은 외부인이었기에 우리를 뒤따르지는 않았고, 그저 저 멀리서 가만히 조의를 표할 뿐이었다.

나와 전명훈.

그리고 금해민에 이어, 무수한 금신천뢰문의 제자들이 우리의 뒤를 따랐다.

수만 개나 되는 무덤에 일일이 술을 부어 주는 건 굉장히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우리는 약 이레가 걸려서야 대부분에 무덤에 술을 부어 줄 수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원로진들의 무덤만이 남았고, 나는 홍수령의 무덤에는 내가 직접 술을 부어 주었다.

금진찬과 금민의 무덤에는 후손인 금해민이 술을 부었다.

그리고, 금벽호와 금소해의 무덤 앞에 다다른 우리는 잠시 멈춰섰다.

그들의 무덤은 묘지의 끝자락에 있었다.

주르륵….

전명훈은 천천히 술을 부었다.

얼마 후, 술이 떨어지자 그는 금해민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레 동안 꼬박꼬박 술을 챙겨 들고 와 술이 떨어질 때마다 전명훈에게 들려 주던 금해민이 약간 의아한 눈으로 전명훈을 바라보았다.

나는 전명훈의 의념을 읽으며 금해민에게 눈짓을 주었다. 내 눈짓을 받은 그는 냉큼 술을 꺼내 주었다.

전명훈은 그 술병을 열어, 다시 금소해의 무덤에 전부 부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전명훈은 그렇게, 금소해의 무덤에만 스물한 병의 술을 부었다.

땅이 축축해지다 못해 걸쭉해질 정도였다.

주르륵….

그렇게, 전명훈의 손이 마침내 멈췄을 때.

나는 전명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는 걸 알아챘다.

"…오늘."

우우웅!

그가 입을 열자, 자연스럽게 천지영기가 진동하며 곳곳으로 전명훈의 말이 전달되었다.

[본 금신천뢰문은 옛 선우(仙友)들을 떠나보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많은 이들이, 먼 옛적부터 이어지던 요물(妖物)의 농간에, 거대한 뇌선(雷仙)에게 죽었다. 모두 그 날을 기억해라. 그 거대한 존재에게 죽었던

선우들을 기억해라. 본문의 선배들, 원로들, 무수한 벗들이 그날 명을 달리했다. 그들은 수계에서부터 함께해 온 이들도 있었고, 광한계에서 새로 만난 이들도 있었다. 경지를 높이던 이들도 있었으며, 막 수선을 시작하던 이들도 있었다. 남성도, 여성도 있었으며, 아직 어린 수도자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남녀가 쌍수하며 즐거움이 절정에 달한 수도자들도, 꿈이 있던 수도자들도, 열심히 노력하던 수도자들도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태껏 없었을 정도로 무거웠다.

동시에 나는 전명훈에게서 풍기는 의념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녀석의 노기는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생과는 달리, 이번에는 그 노기를 나눠 가질 이들이 있었다.

[기억해라, 금신천뢰문의 제자들이여. 오늘은 새로운 금신천뢰문이 탄생한 날로 기억되어야 한다. 오늘은 우리가 한 가지를 기억에 새기는 날이 되어야 한다.]

파직, 파치치직!

전명훈의 몸에서 붉은 전기가 튀기기 시작했다.

[이 분노(忿怒)를 기억해라! 이 노기를 이해해라! 제자들이여,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다. 나, 금신천뢰문의 천상금뢰지체를 타고난 전명훈은, 반드시! 반드시!]

그가,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진선경에 이르러, 우리를 짓밟은 거선(巨仙)에게 복수할 것이다!!!]

그 말에 곳곳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함께하게 해 주십시오!"

[그래, 너희 역시… 나와 갈 수 있는 곳까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그 말에 곳곳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그건 마치, 전사들이 전투에 나가기 전 지르는 함성과 같아 보였다.

아니, 그건 어쩌면 비명 같아 보이기도 했다.

가족을 잃은 이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내지르는 비명 같았다.

그리고, 전명훈 역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

나 역시, 그들과 한데 섞여 감정을 터트렸다.

"흐아아아아아아!!!"

우리는 한데 모여, 하늘을 향해 감정을 터트렸다.

콰르르르릉!

전명훈의 몸에서 튀기던 붉은 뇌전은, 점차 크기를 키워 가더니 하늘을 사르는 붉은 벼락이 되어 하늘에 꽂혔다.

쿠르릉!

[흐아아아아아아!!!]

전명훈은 빛의 기둥 안에서, 하늘을 향해 적뢰천겁을 내리치며, 그렇게 울었다.

콰릉, 콰르릉!

얼마간 비명을 질렀을까.

뇌전을 뿜어내던 그는 뇌전을 뿜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위령제의 나머지 진행을 맡았다.

위령제가 끝나고, 제자들은 다시 쇄천봉으로 돌아갔다.

다만 몇몇 제자 중에 이번 참극에서 지인이나 친지, 혈육을 잃은 제자들은 무덤 앞에서 한동안 슬픔을 삼켰다.

전명훈은 금소해와 금벽호의 무덤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나 역시 그의 옆에서 홍수령의 무덤 앞에서 조의를 표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쏴아아아아―

이제 무덤 앞에 서 있는 이들은 나와 전명훈밖에 없었다.

다른 제자들은 이만큼 무덤 앞에 서서 슬픔과 분노를 다스리고 있을 체력이 없었다.

문득, 전명훈이 비를 맞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서은현, 그걸 알고 있나?"

"뭐냐."

"이번에 깨달은 거다."

철퍽!

그는 빗물이 흐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금소해의 무덤 앞에 꿇어앉아 무덤을 쓸었다.

달각―

문득 그가, 품에서 작은 목함을 꺼냈다.

그 목함 안에는, 바싹 튀겨진 하나의 [손]이 들어 있었다.

나는 손의 크기와 형태를 보며, 저 손이 튀겨지기 전 원래 형태를 추측했다.

그리고 그 손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금소해….'

전명훈은, 튀겨진 손을 목함에서 꺼내서 소중하게 껴안았다.

뚝, 뚝뚝….

그의 얼굴에서,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떨어졌다.

녀석의 눈시울은 시뻘겠다.

"분노는, 어쩌면 이 세상에 꼭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녀석은 금소해의 손을 껴안은 채 말을 이었다.

"분노는, 순환(巡還)이다. 막힌 부분들을 뚫어 주고, 잘못된 부분에 저항하고, 삶의 동력(動力)이 되기도 한다. 모든 의지를 잃더라도, 억지로라도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는 거다. 마치… 천겁과도 비슷한 부분이 있겠지."

나는 전명훈의 의념을 보았다.

그의 의념은 대다수가 시뻘건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난 생만큼은 아니었으나, 나는 저 의념이 지금 당장 죽어 버리고 싶은 전명훈을 간신히 붙잡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녀석은 분노에 의해 살아가고 있었다.

"삶은… 곧 분노."

녀석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걸… 알게 되었다. 이건, 소해의 손이야. 그리고 나는… 천벌을 내린 진선. 그 존재를 죽이고, 천뢰번을 다시 내 손에 넣어 내 것으로 만들 것이다. 놈들에게 그렇게 복수를 해서, 금신천뢰문의 원(怨)을 풀은 그 후에야…."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금소해의 손을 들어 올렸다.

"소해를… 완전히 묻겠다."

완전히 미치진 않았고, 한 줄기 이성은 남은 그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삶은 분노로 점철될 예정이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전명훈의 분노를 인정(認定)하였다.

그의 고통을 이해하였다.

그리고.

"다만 전명훈."

"…뭐냐."

나는, 녀석에게 분노와 복수, 그 이후도 제시하였다.

"분노를 해갈한 다음에는, 꼭 금소해를… 이곳에 묻어 주기 바란다."

"…그래. 알겠다."

그렇게.

복수에 미친 낙뢰자는, 6만여 명의 생존자와 분노를 나누며, 복수 이후를 바라보는 전명훈이 되었다.

* * *

우리는 위령제를 전부 지냈다.

전명훈은 얼마간 금신천뢰문의 유이한 원로로서 금신천뢰문의 일들을 만기친람(萬機親覽)하겠다며 장문인인 금해민과 함께 정무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기본적인 업무를 도와준 후. 김영훈과 다시 만났다.

"지난번엔, 같은 문파도 아닌데 조의를 표해 주시어 감사했습니다."

"아니다. 사람이 그렇게 죽었다는데 조의를 표하는 게 맞지."

"…감사합니다."

난 '당연'하게 그런 말을 하는 김영훈에게 감사를 표했다.

얼마간 금신천뢰문을 나와 대산맥을 너머.

성제국에 도달해 근처 객점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럼 영훈 형님."

"왜 그러냐."

나는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그동안, 하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김영훈은 사축기 수준의 전력을 가지게 된 것일까.

여우 녀석은 어디 갔으며, 청문령이나 서란은 어느 수준이 됐을까.

그리고 향화는….

나는 궁금한 점이 산더미 같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김영훈의 표정을 보며 흠칫 놀랐다.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의념 역시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김영훈이 암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일단… 그래. 내가 이 경지에 오르게 될 수 있었던 경위. 그러니까…."

이어진 김영훈의 목소리에, 나는 경악해서 객점이 있는 성(城)을 날려 버릴 뻔했다.

"내… 아니, 우리 최대의 적수였던 광인 청문령을 죽이게 됐던 이야기부터 시작해 주마."

기둥 (3)

쿠구구구구―

문득, 성제국의 한 성.

대산맥과 가까운 성 중 하나인 도운성의 사람들은 갑자기 숨쉬기 힘들어진 것을 느꼈다.

"어, 어째 좀 답답해진 것 같지 않으이?"

"이거 공기가 좀 돌처럼 무거운 느낌인데… 몸이 허한가?"

"숨쉬기가 힘든데…."

일반인들은 이런 수준이었고, 무림인들은 조금 달랐다.

"끄으윽! 고, 공력이!"

"내공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었어!"

"호, 호흡을 해도 공력이 들어오지 않아! 수, 숨쉬기가 힘들어!!!"

공력이 굳어 움직이지 않는 수준.

그리고, 수도자들은 더더욱 심각했다.

끄륵, 끄르르륵!

성제국의 수도자 중 한 명이 바닥에 쓰러져 거품을 물었다.

끄륵, 끄르르륵!

전신의 영맥이 굳어 버렸다.

동시에 그들이 호흡하는 천지영기.

그 천지영기에 섞인 살기(殺氣)가 수도자들의 정신에 거대한 압박을 주고 있었다.

이 압박은 축기기 수도자들이 가장 심하게 받고 있었고, 그나마 결단기 수도자들부터는 금단의 힘을 끌어올려 비틀거리며 저항을 하는 정도였다.

그들 중 누구도 갑자기 왜 천지영기가 변화하며 이런 천재지변이 일어난 건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 * *

표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절로 얼굴이 굳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얼마 후.

나는 정신을 추스르며 살기를 거둬들이고는 의념을 통제했다.

"…죄송합니다. 청문세가는 광한계에도 있는데, 그들 중 청문령이라는 이를 아는 자가 있다고 해서 과민 반응했습니다."

나는 김영훈에게 사과를 했다.

김영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인의 지인이었나? 이해한다. 지인이 슬퍼할 걸 생각해도 분노가 치밀어 오를 수 있지. 하지만… 나로선 어쩔 수 없었었다. 정확히는, 그를 죽인 거라기보다는 가사 상태, 식물인간 상태로 만든 거라고 봐야겠지."

"…흠."

나는 '가사 상태'라는 말을 듣자 가까스로 의념의 통제에 성공했다.

'죽지는, 않았다는 건가.'

그렇다면 아직 여지는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방법이 없을지 몰라도 광한계에는 기진이보와 기화요초가 한두 가지가 아니니, 치료할 방도가 있을 것이다.

"청문령이 결단기에 도달하고 쌓은 위업(偉業)이, 이 세계의 역사의 변곡점이었다. 그래, 이것부터 설명하는 게 좋겠군. 우선…."

김영훈의 설명이 이어졌다.

* * *

내가 이 세계에 수많은 운명을 바꿔 놓은 결과의 나비 효과는 크게 작용했다.

우선, 청문세가의 주도로 서방 삼국 수도가문은 청우맹(淸友盟)이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각자의 영역은 존중하되, 그 이외의 영역에서 협력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이 단체는 수상할 정도로 재산이 많아진 청문세가와, 그 청문세가에 협력하는 흑색귀골곡의 잔당.

천인기 수사의 잔혼인 결단기 급 원령, 송진.

그리고 그의 제자인 인요 혼혈 서란의 도움에 힘입어, 봉명성에 드나들며 세력을 키워 갔다고 했다.

김영훈은 이전 생과는 달리 처음부터 수도자들과 맞닥뜨려야만 했다.

결단기 수준의 요수인 여우가 지키고 있는 무림인이었으니, 오히려 청우맹의 관심사가 된 것이었다.

김영훈은 초반에는 여우에게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으며, 그를 찾아오는 청우맹 수도자들과 대련을 하며 빠르게 실력을 키웠다.

그렇게 약 5년.

김영훈은 입천에 도달하여, 여우를 두들겨 팰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그때부터 본격적인 수도계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한다.

수도계는 청우맹의 주도로 대격변이었고, 그 중심에 있는 청문세가.

그리고 청문세가에서도 유난히 많은 수도자원을 받아 경지에 이른 청문령이 변화의 중심이 되었다.

마침,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청문세가 전체에서 정신 나간 수준의 영석을 지원받은 청문령은 그동안 그가 연구하고 예습해 왔던 축기 후기, 대원만, 그리고 결단 초기의 구결들을 선각후통으로 꿰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영석을 지원받자마자 선통후각과 선각후통의 방식을 병행하며 약한 체질을 이겨 내며 마침내 결단기 수도자가 되었다 했다.

김영훈의 첫 상대는 청문령이었다.

그리고, 결단 중기에 이른 여우조차 입천에서 두들겨 팼던 김영훈은, 결단기에 막 이른 청문령에게 죽기 직전까지 몰려야만 했다.

그때가, 김영훈이 '인간 수도자'에게 패배한 첫날이었다.

어쨌든 그날 이후 청문령과 김영훈은 기묘하게 맞는 구석이 있어 동고동락했다.

두 사람은 붕우(朋友)가 되었으며, 김영훈은 청우맹에 가입하고 점차 청문령과 몇 번 붙으며 그를 이길 정도로 무공이 숙련되기 시작했다.

김영훈은 청문령, 여우와 붙으며 미친 듯이 무공 경험치를 쌓고, 그의 뇌리에서 떠도는 답천의 구결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얼마 정도는 평화로웠다.

송진이 청우맹에 한 가지 부탁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었다.

―남쪽 끝에 있는 해룡족의 천문관(天文官)에 진입하려 하는데, 그곳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섭명함의 기본적인 수리가 필요하오. 섭명함을 수리할 수 있는 법기 장인들을 불러모아 주시오.

송진의 요구에, 청우맹 곳곳에서 내로라 하는 법기 장인들이 벌떼처럼 모였다.

전설의 흑색귀골곡의 섭명함을 볼 수 있는 기회였으니 말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는 최근 벽라국에서 결단기가 되어 '축기기 3대 위인'의 위치에서 빠진 청문령을 대신해, 새로운 축기기 3대 위인인 '법기의 북향화'가 최고의 인재였다.

송진은 그녀의 실력에 감탄하며, 그녀와 실력 있는 법기 장인 100인을 뽑아 봉명성에서 학습할 기회도 주고, 그들에게 섭명함의 수리를 맡겼다.

그 과정에서 북향화는 청우맹의 핵심 인원인 청문령.

그리고 청문령의 붕우인 김영훈과도 면식이 트여 그들과도 친분을 맺게 되었다.

특히나 청문령은 그의 뒤를 이어 '3대 위인'의 자리에 오른 북향화를, 그녀의 노력과 재능을 늘 흡족하게 보았다고 한다.

그런 평화 속에서, 5년이 더 흘렀고 마침내 북향화의 주도로 섭명함의 기본적인 수리가 완료되었다.

송진은 크게 기뻐하며 북향화에게 포상을 내렸고, 섭명함을 타고 해룡궁의 천문관이라는 곳에 진입했다고 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김영훈의 눈빛이 착잡해졌다.

"송진이, 청문령에게 천문관에서 찾아낸 관측 기구들을 이용해 뭔가를 알아내 달라고 부탁했지. 기초법술은 무슨 수도계에서 통용되는 기초적인 언어고, 그 언어를 극한으로 익힌 청문령의 도움이 필요하다면서 말이지."

'천문 해석?'

하긴 애초에 청문령은 천문 관측과 별자리의 탐색에도 능했으니, 천문관의 기구들도 다룰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청문령은 송진과 함께 해룡궁의 천문관이라는 곳에 가서, 몇 년간 자료를 해석했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이른 지 14년째 되는 날, 나는 바둑이를 두들겨 패며 답천경에 이르렀고…."

"잠깐, 바둑이는 뭡니까?"

"아 그 여우 말이다. 어릴 적 키우던 똥개가 생각나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지."

"…어릴 적 키우던 개 이름을 붙이면… 동물 학대 아닙니까?"

"동물 학대는 무슨, 동물 학대는 말 못 하는 억울한 동물들한테 적용되는 거지, 내 사지를 뜯어서 씹어먹어 버리겠답시고 바락바락 대드는 그놈한테는 적용이 안 돼."

"…예, 뭐. 어쨌든. 그래서 어찌 되셨습니까?"

"뭐, 결단기 대원만에 달한 바둑이를 이기고 답천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는 내 붕우였던 청문령에게 자랑하기 위해 남쪽 끝을 찾아갔지. 나는 남쪽 끝 천문관이라는 곳에서… 미쳐 버린 청문령을 찾았다."

"…!?"

"그리고, 거기서부터 모든 재앙(災殃)이 시작되었다. 청문령은, 천문 관측 기구를 보며 무언가에 홀려 있었어. 그 천문 관측 자료들에 자신이 [해석]해 낸 것을 적고 있었는데, 나는 그 해석해 낸 자료 자체에 어떠한 '힘'이 깃드는 걸 느꼈다."

"…!"

"그리고, 내가 그의 상태가 걱정되어 그를 말리기 시작했지. 하지만 그는 듣지 않았어. 도리어 격노하며 나를 공격하더군. 죽일 기세로 공격하기에, 제압했다. 하지만… 그 순간. 청문령이 내 손을 벗어나 자기가 해석한 자료들을 '먹기' 시작했다."

"예?"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먹었단 말이다. 천문 자료들을 종이째로, 먹었다고."

"…."

"여하튼. 청문령은 그 종이쪼가리들을 먹고 나서 힘이 급격히 상승했다. 그리고 자신이 세계의 진리를 해석해 내는 데에 성공했다면서 나를 공격했지. 나는… 그 공격을 맞고 죽을 뻔했다."

"…!"

나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청문령의… 공격이, 당신에게 '적중'했단 겁니까?"

"그래."

어떻게 능광(凌光)의 깨달음을 담은 김영훈을 결단기 수준으로 '적중'시킨단 말인가?

'천인기 수사여도 답천의 김영훈을 적중시킨다는 보장이 없거늘….'

내가 경악할 때, 김영훈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상했다. 그건 적중이라기보단, 필중(必中)의 개념이었어. [피하는 게 불허]되었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죽기 살기로 청문령의 눈을 

해, 해룡궁의 밑바닥에 청문령의 눈을 피해 있던 송진과 함께 섭명함을 타고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지. 나와 같이 청문령을 찾아갔다가 똑같은 일을 당하고 죽기 직전까지 갔지만, 섭명함으로도 청문령의 눈을 피해 도망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더구나."

"…."

"탈출에 성공한 송진이 서란과 함께 주장했다. '청문령을 죽이지 않으면, 미치광이 원영기 수사 청문령'에게 전 세계가 몰살당할 것이라고 외쳤지. 그리고 나는… 송진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때 봤던 청문령은, 내가 알던 이가 아니었다."

김영훈은 침울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말을 듣는 내 얼굴도 점차 딱딱하게 굳어 갔다.

"…청문령에게서 탈출하며, 수리가 무색하게 박살이 났던 섭명함을, 3대 위인 북향화가 고치는 데에 성공했다. 다행히 송진이 해룡궁의 밑바닥에 숨어 있다가 해룡궁에 쌓여 있었다는 재보들을 긁어와서 그 재보들을 이용해 섭명함을 완벽에 가깝게 수리할 수 있었지.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양산형 섭명함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허…."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문양들이 네 개에서 완전히 세 개가 되었는데, 그 이후부터 양산형 섭명함들이 쏟아지게 되었지."

'기문법재. 삼문인가.'

기문법재는 칠문법재에서 일문법재까지 있다.

그리고 칠문에서 사문까지는 평범한 수재에서 천재 수준이다.

하지만, 삼문법재부터는 진정 악마적인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고 한다.

'그녀가 삼문법재가 된 건가?'

그나저나 섭명함 양산이라니.

나는 그 무시무시한 병기가 양산된다는 것에 당황했고, 의문이 들었다.

"섭명함은 어마어마한 동력원이 필요하다고 아는데, 그녀는 그 섭명함들의 동력원을 전부 어디서 구한 겁니까?"

"뭐, '처음'에는 그냥 수도자들을 무식하게 모아, 법력을 무식하게 짜 넣어 양산형 섭명함 함대, 통칭 '북향함대(北向艦隊)'를 운용했지."

"…북향함대라는 이름은 누가 지은 겁니까?"

"북향화 본인이 지었다 하더군."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그녀에게는 미안했지만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이름은 조금 못 짓는군.'

나였으면 조금 더 기막힌 이름을 지었을 거란 생각에 약간의 아쉬움이 맴돌았다.

"뭐, 어쨌든, 북향함대와 나, 그리고 청우맹의 결단기 수도자들의 '청문령 1차 토벌 원정'은 그렇게 꾸려졌다."

"…'1차' 토벌 원정이란 말은…."

"맞다. 대차게 실패했지. 북향함대가 궤멸에 가깝게 박살 나고, 결단기 수도자들 중 상당수가 치명상을 입고 돌아왔어. 한둘은 사망했고. 하지만 성과는 있었다."

김영훈의 눈이 빛났다.

"청문령의 배를 한 번 갈라서, 그의 배 안에서 '뭔가'를 끄집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예?"

나는 김영훈이 청문령의 배를 갈랐단 말에,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얼굴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무얼… 꺼냈단 말씀…입니까?"

"나중에 파악하기론, 청문령이 먹어치운 '천문 자료'들이었다. 천문 자료들은 기이하게도 그의 체내에서 녹은 후 돌처럼 굳어… 그의 체내에서 원영(元靈)의 역할을 일정 수준 해 주고 있었더군. 여하튼 우리는 그 괴석을 손에 넣은 후 퇴각했다. 그리고…."

그가 옅게 웃었다.

"송진이 말하기를, 그 괴석(怪石)에는 섭명함의 동력원만큼의 힘이 내재되어 있다 하더군. 그래서, 우리는 북향화의 손에 섭명함의 완전 수리를 맡겼다. 그리고… 그날, 흑색귀골곡이란 문파의 섭명함이 힘을 찾았지. 정말… 엄청나긴 하더군."

'섭명함이….'

나는 흑색귀골곡에 남은 두 척의 섭명함.

그 두 척에서 예전 느꼈던 기운을 떠올리며, 전신에 오한이 도는 걸 느꼈다.

'미쳤군. 그게 가능하다고?'

도대체 청문령이 해석해 낸 것이 무엇이기에, 그런 무지막지한 섭명함의 동력원이 될 정도로 정신 나간 물질을 체내에서 연성한 것일까.

"여하튼, 섭명함의 지원을 받아 청문령의 2차 토벌 원정이 또 시작되었지. 물론 그것도 실패했지만, 이후의 이야기는 짐작이 가지?"

"…예. 청문령에게서 어떻게든 그 괴석을 또 얻어 내…."

"그래. 계속해서 청문령의 체내에서 생성되는 그 기괴한 물질로 인해, 우리 측의 전력이 강해졌다. 북향함대는 날이 갈수록 말도 안 되는 위용을 보이기 시작했지. 그리고 그렇게,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청문령 원정을 해야만 했다!"

"…."

김영훈의 얼굴에는 괴로움이 서려 있었다.

"내가 이 세계에 오고 25년 차…. 나는 광인 청문령에게 죽기 직전까지 몰리기를 수 번…. 결국, 쇄천봉에서 깨달음을 얻어 쇄천을 얻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청문령은 점차 내가 알던 그가 아니게 되기 시작했다. 이제 청문령은 없었고, 점차 그는 '괴물'로 변이하기 시작했다."

"…."

나는 갈수록 참담해지는 이야기에 얼굴을 쓸었다.

"나는… 괴물이 되어 가는 그를… 죽여야만 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 벗을 살리고픈 마음도 너무나도 강했어. 그렇기에, 나는 미친 듯이 다음 경지를 갈구했다. 갈구하고, 갈구하고, 또 갈구했다. 내 수명까지 깎아 가며, 능광도로 가속한 시간 속에서 전신의 근육이 터져라 수련하며! 그렇게 나는, 오로지 청문령을 안식에 들게 하기 위해 '다음'에 이르렀다."

김영훈은 본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그렇게… 나는 결국 '다음'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너머'에 달한 기술을 써, 청문령의 혼(魂)을 봉인(封印)하는 데에 성공했지. 그렇게 청문령은… 천문관의 안쪽에 변이한 몸을 남기고 가사 상태에 빠졌다."

"…그렇습니까."

"그걸 아느냐?"

김영훈이 말했다.

"내가 청문령을 향해 마지막 도를 휘두르는 순간, 그는 마지막에는 정신을 차렸다."

"…."

"우리는 그를 괴물이라 생각했지만… 그때 알 수 있었다. 청문령은… 오히려 자신의 정신력으로 그의 체내에서 발아하려던 뭔가를 억제하고 있었던 거였다…. 우리는 그를 제거해서 세계를 구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실상은 청문령 혼자서 체내의 뭔가와 대적하며 세계를 구해 내고 있던 거였어."

"…."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느릿하게 물었다.

"그게… 도대체 뭡니까."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청문령은 뭘 해석한 것이고… 그는 무엇에 영향을 받은 겁니까?"

"나도 모른다. 청문령은 마지막에, 자신이 [하늘]을 일부 해석했다고 하더구나. 비유인지 뭔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천문관의 관측 기구를 통해, 그리고 그 자신의 법술 이해에 힘입어 뭔가를 목도한 것 같다더군. 그래, 그건 분명 그의 위업(偉業)이다. 그리고 그 위업으로 인해… 그는 그런 꼴이 되었다."

"…."

"너무나도 위대한 지성(智性)이었기에 위대한 지혜를 목도했지만, 그 지혜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런 꼴이 된 것인지…."

나는 전횡의 일지를 떠올렸다.

하늘을 직시하고 있으면 머리가 아파 온다는 말.

그리고 양수진의 말을 떠올렸다.

이 세계는 불길하다는 말.

정려의 말도 떠올랐다.

어선에 준하는 존재들이 이곳에서 수두룩하게 소멸했다는 말….

청문령은, 천문관에 진입하여 전횡 등 해룡족 천문관들이 발견한 자료에 힘입어, 그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의 법술의 이해로 자료를 해석한 것이 틀림없었다.

'애당초 [기초법술 법결]은 기(氣)의 본질에 대한 것.'

연기기는 기(氣)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며 자기 자신의 몸에 '하늘'을 담기 위한 기초 단계였다.

그리고 청문령은 수계의 하늘을 관측한 자료에, 그가 가진 기(氣)의 이해도를 바탕으로 관측 자료를 '해석'한 것이었고, 그 결과 김영훈의 말대로 그런 존재가 되었던 것이리라.

"청문령은 마지막에, 북향화에게 자신의 체내에서 나온 괴석들을 광기에 휩싸이지 않는 선에서 그 안의 지식을 '추출'하는 법을 알려 주고 잠들었다. 북향화는 그의 말대로 괴석들에 담긴 지식. 그 아주 일부를 얻어 북향함대를 다시 한번 강화시켰지. 그렇게 해서 청문령, 북향함대, 나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끝이 났다."

그는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내 경지가 이해되느냐. 벗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개척한 경지다. 하지만 벗을 안식시켰다곤 해도, 내 손으로 그를 벤 경지다. 벗을 벤 경지를 내가 이름 짓고 싶지 않아, 이 경지에 이름은 짓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경지에 이르고 나서는, 거의 미쳐 지냈다. 북향화의 강화된 북향함대와도 겨뤄 보고, 그조차 시시해지니 정말 미친 듯이 수련만 하고 살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청문령의 혼을 봉인했던 그 감각이 잊히지 않았거든. 하지만, 결국 무료해지니 계속해서 그 감각이 떠오르더군. 시시하고, 또 심심해서 정말로 '미쳐' 버리기 직전… 서란과 송진이 고문서를 찾아냈다."

나는 가만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는, 고력(古力)의 세계라는 곳에 어쩌면 청문령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회복시킬 수 있는 방도가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어. 그래서, 본래는 나나 그들이나 천 년 후 승천문이라는 게 열린 후에 비승하기로 했다만 계획을 바꿨다."

김영훈의 눈빛이 빛났다.

"나는 청문령을 구하기 위해, 북향화는 청문령의 체내에서 나온 괴석들의 힘을 더 강하게 봉인하기 위해, 서란과 송진은 무슨 서휼? 그런 놈에게 대항책을 찾기 위해, 각자가 다른 이유를 가지고 고력계로 비승하기로 했다."

"고력…계 말씀입니까?"

나는 고력계에 대해 떠올렸다.

자세히 아는 것은 많지 않았지만, 일단 광한계에서 왕복하는 데에만 천 년은 걸리고, 특수한 조건이 있어야만 진입할 수 있다고 들은 곳이었던 것 같다.

"그 고력계라는 곳으로만 비승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겁니까?"

나는 의아함에 물었다.

광한계로 비승하는 건 승천문이 있으니까 쉬웠다.

하지만 다른 중경계로 비승하는 건 순전히 본인이 익힌 공법에 따른 운이었다.

그런데 고력계라니?

김영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송진이 뭔가를 측정했는데, 우리 전부 고력계에 진입할 '자격'이 있고. 그 '자격'이 있는 자가 봉명인이란 것의 축복을 받고 비승하면 고력계로 올라갈 확률이 높다고 하더군."

"흐음…."

"그리고, 이 세계의 '하늘'의 위치에 따라 어떤 중경계와 조금 더 가까운지도 알려 주더구나. '고력'의 계는 금신천뢰문 위쪽, 쇄천봉의 하늘에서 가장 가깝다고 하더군. 그래서 나와 북향화가 힘을 합쳐, 다른 곳보다 유난히 차원 장막이 질긴 쇄천봉의 하늘을 뚫고, 이 세계에 청문령을 감시할 용도로 '나'를 남겨 놓고 비승했다. 이게… 내가 이 세계에서 겪은 일의 전모다."

"…."

"네게는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다. 네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분체인 나는 이 세계에서 서서히 미쳐 갔을 게야. 그리고 그건 본체에게도 영향을 줬겠지. 네가 나타나 주어 얼마나… 이 마음이 풀렸는지 모른다."

아무래도 김영훈이 나와 겨루며 희열에 찼던 것에는, 그런 이유 역시 포함되어 있었던 듯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완전히 뒤집혀 버린 수계의 운명에 기함했다.

얼마간 씁쓸하게 이야기를 듣던 나는, 그에게 한 가지를 질문했다.

"…저는 청문령이라는 사람의 지인…과 어느 정도 안면이 있습니다. 그 지인과는 아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이기에, 저는 청문령의 상태를 확인해야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인'은 나 자신이었다.

나는 김영훈을 보며 말했다.

"경지의 공능을 이용해 청문령의 혼을 봉인했다고 하셨지요?"

"그래."

"저를… 청문령에게 안내해 주십시오."

"…."

김영훈은 착잡한 표정이 되었다.

얼마 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라."

기둥 (4)

투두두두두―

나와 김영훈은 수상비를 펼치며 남해를 가로질렀다.

'느리게 가는군.'

김영훈과 내 속도라면 해룡궁까지는 순식간에 갈 수 있었기에, 이런 식으로 느리게 가는 건 분명히 이유가 있었다.

아마, 김영훈 자신도 청문령의 상태를 보러 가는 것이 마음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김영훈의 뒤를 쫓아가며, 점차 남해의 곳곳이 뒤바뀐 것을 알아챘다.

'원래… 곳곳에 작은 섬들이 있었는데….'

섬 같은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전의 전투에 의해 모조리 섬들이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나는 천천히 앞서 가는 김영훈에게 물었다.

"한 가지 여쭐 게 있습니다."

"뭐냐."

나는 청문력의 체내에서 나왔다는 괴석에 대해 질문했다.

"그 괴석은… 북향화, 그녀가 계속 사용했어도 문제가 없는 것이었습니까?"

"아니. 나중에 알아보니, 괴석에서도 광기가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게 발견되었기에, 북향함대의 선원들을 모조리 괴뢰로 교체해야 했지. 다만 어째선지 북향화만큼은 광기에 침식되지 않았다. 고작 축기기 후기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음…?"

'어떻게 된 거지?'

그녀의 정신력은 나도 믿고 있었지만, 어떻게 한 것이란 말인가?

"잘은 모르지만, 그녀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노리개가 하나 있다. 그녀는 노리개가 자신을 보호해 준다고 굳게 믿고 있더구나. 진짜인지는 모르겠다만…."

"…."

"아, 그리고, 청문령이 알려 준 괴석에서의 지식 추출법을 사용해서 그녀가 괴석의 지식을 일부 추출한 후, 그녀는 괴석을 한데 모아 봉인했다. 재밌는 건 말이지… 그 노리개다."

"…예?"

나는 예상외의 말에 흠칫 놀랐다.

"그녀가 말하기를, 이 세상에 괴석을 봉인할 수 있는 물질은 그 노리개밖에 없다고 하더군. 도대체 무슨 물질로 만들었는지 참… 나도 묻고 싶더구나."

"…?"

나는 그 말에 이상함을 느꼈다.

'그 노리개는 답천사막에서 발견되는 취령옥으로 만든 건데….'

굉장히 흔한 법기 제작 재료였다.

그런데 그 노리개가 괴석을 봉인할 유일한 물질이라고?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어지는 김영훈의 말이었다.

"그 노리개에 괴석을 전부 봉인한 후, 노리개를 북향함대 주함(主艦)의 동력로에 놓고, 주함에서 다른 북향함대로 힘이 이어지게 만들어 더더욱 북향함대의 통제를 강화하더군. 내가 볼 때, 그녀의 재능 역시 청문령에 못지않은…."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노리개에 괴석을 [봉인]했다고?'

봉인이라는 건, 안에 공간이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노리개는 내 단화로 내가 제련한 법보였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노리개 안에 공간 따위는 없었다.

혹시나 회귀로 인해 법보들이 겹쳐지는 특성으로 노리개가 변이된 건가 싶었지만, 정작 무색유리검을 뜯어 봐도 물질이 변형되거나 공간 같은 게 생기는 낌새는 없었다.

'도대체, 뭐지?'

노리개의 기능은 상호 간의 '통신'뿐이었다.

그 이상의 기능은 없었다.

'북향화가 뭔가 했나? 감이 안 잡히는군.'

지금으로선 일단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어쩌면 괴석에서 추출했다는 지식이 뭔가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김영훈을 따라 달렸다.

김영훈은 능광도의 공능이나 가속은 쓰지 않고 순수한 본인의 무공 실력만으로도 바다를 건너는 수상비를 펼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따라가다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현 3단계에서는, 수명이 대략 3백 년 더 늘어나는군.'

정확히는 343년 정도였다.

'이건 뭐, 축기기도 아니고.'

천인기에 버금가는 경지에 올랐건만, 수명이 올라가는 수준은 고작 축기기였기에, 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짐을 느꼈다.

그리고, 또한 궁금증이 들었다.

"영훈 형님."

"뭐냐."

"형님 본체는 현재 쇄천 너머인 겁니까?"

"그렇다만?"

"그럼, 혹시 수명이 얼마나 늘어났는지는 아십니까?"

그러나 나도 수명을 묻고 나서 아차 싶었다.

'김영훈은 본인 수명을 알 수가 없겠군.'

아예 칠성제를 안 지냈는데 수명을 어찌 안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어진 김영훈의 말에 나는 흠칫 놀랐다.

"음… 아마, 최소 만 년은 넘지 싶구나."

"…예?"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다. 다만 그렇게 느껴진다."

'만 년? 아니, 그것보다….'

나는 어마어마한 시간 단위에 놀랐으나, 정작 사축기, 합체기는 수십만 년 단위로 수명이 늘어나니 이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더 놀란 건, 김영훈이 '자신의 수명을' 알았다는 것이었다.

천족, 지족, 심족은 저마다의 특유의 기질이 있었다.

그렇기에 심족이 힘을 드러내면 천지족이 알아채고, 지족 측에서 힘을 쓰면 천족 측에서 요기라고 하여 알아채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런 기질은 천인기가 된 내 눈에는 더더욱 잘 보였다.

'김영훈은 천족 공법을 익히지 않았다.'

여실히 느껴졌다.

그는 천기를 보는 건 불가능했다.

"어떻게… 수명을 아신 겁니까?"

내 질문에 그는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뭔가… 이전과는 달리, 내 혼(魂)이 도달할 종착지를 알게 된 느낌이다. 이 경지에 달하니, 혼이 더 높은 곳에서 바라는 방향대로, 인력에 의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게 느껴진다."

"음…."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김영훈이 수명을 읽은 이유를 알아챘다.

'지족과 같은 방식의 수명 읽기인가.'

기, 혼, 명의 계위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서로 서로가 연결되어 있기에, 서로 서로의 변화에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렇기에, 기의 계위에서 수행을 쌓는 요족들 역시, 천지간을 흐르는 거대한 영기의 흐름을 읽어 운명 비슷한 것을 읽는다거나, 본인들의 수명에 대해 어림짐작을 할 수 있었다.

같은 논리로, 심족의 경지 또한 일정 이상이 되면 천, 지족의 감각이 아니더라도 본인의 수명을 읽는 게 가능한 모양이었다.

'새로운 걸 알았군.'

그렇게 서로에 대해서 궁금한 것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얼마나 달렸을까.

우리는 마침내 수계의 남쪽 끝자락.

해룡궁이 있는 해역의 위쪽에 도착했다.

'천문관이 있는 곳으론 생각해 보니 처음 가 보는군.'

이전에도 해룡궁에 왔었지만, 특별히 천문을 관측한다는 공간은 들어간 적이 없었다.

서휼이 하도 수작을 부려 놓은 것도 있지만, 해룡궁 내부에서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나는 해룡궁 바깥 어딘가에 적당히 있으려니 하며, 신경을 꺼 왔었다.

'생각해보면 천문관도 와 봤어야 했는데 말이지.'

어쩌면 전횡이 알게 된 무시무시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도 있지 않은가.

"천문관이란 곳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김영훈에게 묻자, 김영훈은 하늘을 가리켰다.

"저곳에 있다."

"…예?"

"따라와라."

파앗!

김영훈은 허공을 밟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바다 아래 있는 게 아니었었나?'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그를 따라 날아올랐다.

세계의 남쪽 끝에 있는 세계순력 너머로 천문을 관측하는 줄 알았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천문관은 저 위쪽에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천문을 관측하는 곳이면 높은 곳에 있을 확률이 높겠지.'

얼마간 김영훈을 따라 허공으로 올라갔을까, 내 의식 영역에 결계에 뒤덮여 육안으론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나타났다.

'저건….'

거의 해룡궁에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어떤 건물이었다.

그 건물은 마치 등선향처럼 허공에 떠 있는 천공도에 지어져 있었다.

천공도의 크기는 작았고, 아무래도 인위적으로 만든 티가 많이 났다.

'그리고 고도(高度)도 등선향에 비해 조금 낮군.'

나는 그렇게 느끼며, 천문관으로 진입하려 했다.

그러나.

콰아아아앙!

나는 강력한 척력(斥力)과 함께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가 버렸다.

"크윽, 이건?"

"조심해라. 원래도 섭명함이 뚫고 들어가기 힘든 수준의 결계대진이 펼쳐져 있었다만, 청문령이 이전 안쪽에서 진법을 강화한 후로 더더욱

강력한 결계가 되어 버렸다."

"…원래는 어떻게 뚫었습니까?"

"섭명함의 주포를 쏟아부어서 뚫고는 했지."

"흐음…."

나는 성가심을 느끼며 무색유리검을 한 자루 꺼내 들었다.

우우웅!

머리 뒤쪽으로 삼태극이 떠오른다.

나는 삼태극의 힘을 빌어, 그대로 검을 내리쳤다.

꽈아아앙!

어마어마한 폭음이 울리며, 결계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쿠구구구구―

"…차원 장벽을 우그러뜨릴 때도 그랬지만, 새삼 네가 괴물이 다 됐다는 게 느껴지는구나."

김영훈은 질린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걸 한 번 깨부술 때마다 얼마나 성가셨는데…."

"예? 차원 장벽보다 한참은 강도가 약합니다만…."

"그야 그렇지만, 한 번에 부수는 걸 실패하면 더더욱 강한 반탄력이 생겨서 굉장히 까다로운 결계였다. 그런데, 별로 힘도 안 들이고 한 방에 박살 내다니…."

김영훈은 혀를 내두르며 나와 함께 무너진 결계 너머로 넘어갔다.

내가 막 천문각에 발을 디뎠을 때였다.

우우웅!

나는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을 느꼈다.

'이건….'

또였다.

서휼 특유의, '정신이 맑아지는 주술'이 천문각 전체에 걸려 있는 게 느껴졌다.

'이 녀석은 도대체 무슨 용도로 이런 주술을 자기가 짓는 건물마다 깔아 놓는 거지?'

심지어 정신 건강에 좋으라고 깔아 놓는 것도 아니다.

전부 나중에는 본인이 세뇌해 버리면서, 굳이 이런 주술을 깔아 놓는 저의가 궁금해졌다.

심지어, 어쩐지 천문각에 걸린 주술은 해룡궁에 걸린 주술보다 훨씬 강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번, 서휼 녀석이 수작을 부려 놓은 곳들을 다 한 번씩 다녀 봐야겠어.'

나는 서휼의 말을 기억했다.

'해룡궁, 봉명성, 흑색성, 등선향에서 기축을 쌓았다고 했었다.'

어쩌면 기축을 쌓는 것과 뭔가 정신이 관련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일까.

어찌 되었든, 녀석의 속셈을 더 알아볼 수 있고 서휼의 정법(正法) 기축을 쌓은 방법에 대해 알아볼 수도 있을 테니 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영훈 형님?"

나는 문득, 김영훈이 해룡궁에 들어온 이후로, 말을 하지 않고 멈춰 있다는 걸 알아챘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사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김영훈은 지금 자신의 손으로 베어 낸 청문령이 있는 곳에 오기가 껄끄러웠던 것이리라.

"…아니다. 가자."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앞장섰다.

나 역시 이를 악물고 그를 따라나섰다.

'청문령… 어떻게 되신 겁니까.'

얼마간 천문각의 안쪽으로 진입했을까.

나는 천문각 곳곳에 글자가 패여 있는 걸 발견했다.

'저건…?'

천문각 자체는 자동 수복 법술이 걸려있는 탓인지.

분명 김영훈과 청문령이 한바탕 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멀쩡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원이 안 된 채로 패여 있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 부분들이 삐뚤삐뚤하게 쓴 '글자'라는 걸 깨달았다.

"영훈 형님, 저것들은…."

"청문령이 남겨 놓은 글자다. 우리도 정확히 저게 뭘 뜻하는 건지는 모른다."

"그렇습니까…."

나는 청문령이 남겨 놓은 글자들을 하나하나 읽어 갔다.

산(山)….

정상(頂上)….

삼십삼(三十三)….

"…?"

하나같이 알다가도 모를 단어들뿐이었다.

얼마 후, 나는 김영훈과 함께 천문각의 중앙에 들어섰다.

"…저건…."

"봐라."

김영훈은, 천문각의 중앙에 있는 '것'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게, 내가 봉인한 청문령이다. 끝내… 저렇게 변이해 버렸지."

"…아아…."

나는 김영훈의 말에, 아연한 표정을 지으며 '청문령'을 바라보았다.

청문령은, 거대한 [소금 기둥]으로 변해 천문각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소금 기둥의 아래쪽에는 또 한 개의 단어가 적혀 있었다.

나는 삐뚤빼뚤 적힌 그 단어를 천천히 읽어내렸다.

"…알현실(謁見室)."

봤다(1)

산, 정상, 삼십삼, 알현실….

네 개의 이해할 수 없는 단어.

나는 그 단어들 너머, 그 뒤에 있는 것으로 시선을 올렸다.

그렇게 난 얼마 동안 하염없이 눈앞의 소금 기둥.

'청문령'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째서….'

꾸욱….

문득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늘 그랬다.

내가 회귀 초에 동료들의 운명을 바꿔 보려 했을때도.

금신천뢰문을 구해 보려 했을때도.

어떻게 해도 마찬가지.

항상 내 시도는 운명에 의해 어떻게든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청문령이 이 세계에 남긴 흔적을 보며 한 가지를 연상할 수 있었다.

'원립에 의한 답천사막 대학살이… 청문령에 의한 청문령 원정으로 바뀌었다.'

[원영기 급 존재에 의해 수계에 남은 이들이 환란을 겪는다]는 운명 자체는, 완전히 틀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제길….'

나는 이를 악물었다.

김영훈은 소금 기둥이 된 청문령을 보기가 괴로운지 고개를 돌렸다.

저벅, 저벅.

나는 소금 기둥으로 다가갔다.

"만지지 말아라. 그걸 만지면…."

김영훈이 내게 주의를 줬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청문령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내 손이 소금 기둥에 닿았을 때였다.

빠드드드득!

츠츠츠!

내 손끝이 점차 새하얗게 변하며, 몸이 염(鹽)화되기 시작했다.

"…!"

나는 잠시 놀랐지만 잠시 손을 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파사삭!

나는 완전히 소금으로 변해 소금 기둥에 붙어 버린 팔을 떼어 내 버렸다.

소금 기둥과 떨어지자 몸이 염화되는 현상은 멈췄다.

촤락, 촤라락!

내가 힘을 집중시키자 팔은 다시 재생됐고, 그 사이 팔의 형상으로 소금 기둥에 붙어 버린 부위는 무너져 내려 소금 기둥 아래쪽에 쌓였다.

"…예전 원정에 온 축기기 수사 중 몇몇이 경지를 올리겠답시고 청문령을 먹어 본다며 소금 기둥에 혀를 가져다 대었다 얼굴째로 염화되어서 소금 기둥에 흡수되었지…. 북향화도 소금 기둥을 조사하려다 손가락을 잃고 재생해야 했었다."

"그렇습니까…."

나는 저걸 먹을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워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는 의지를 일으켜 천지영기를 조작해 청문령의 몸에서 소금을 채취해 보려 할 때였다.

"…!"

의식으로 소금 기둥을 건드렸을 때였다.

"끄으으으읍!!!"

나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바닥에 꿇어앉았다.

"커헉! 끄으윽! 크아아아아아악!"

[뇌]가!

[뇌의 일부]가 염화되었다!!!

치지지지직!

나는 두피로 소금 결정을 배출해 버리며 뇌를 재생시켰다.

"…의식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의식과 관련된 부분의 뇌가 소금이 된다니…."

저래서야 법술도 안 통한다.

도구를 쓴다면 아마 도구 자체도 소금으로 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금 기둥 주변으로, 계속해서 소금이 조금씩 조금씩 쌓이고 있다.'

아마 소금 기둥에 닿는 공기조차도 느릿하게 소금이 되어 가는 것일 터였다.

나는 다시 천지영기를 뻗어, 이번에는 소금 기둥에 닿아 소금으로 흩어졌던 내 팔을 끌어 왔다.

부스스―

이번에는 그대로 소금 덩어리가 끌려왔다.

'소금 기둥에 직접적으로 닿은 것들은 소금이 되고, 그렇게 변한 소금들은 만져도 되는 건가.'

하지만 정작 변이한 소금들은 그냥 평범한 소금이었고, 아무런 특이점이 없었다.

내가 소금 기둥을 뚫어지게 쳐다볼 때였다.

"다 좋다만, 청문령을 옮기려고 하진 말거라."

"이유가 있습니까?"

"그래."

김영훈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를 옮기려고 했던 이들은, 예외 없이 그 자리에서 청문령과 같은 소금 기둥으로 변해서 즉사했다. 손에 소금을 두르고 해도, 바닥째로 들어 올리려 해도 전부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도' 자체가… 어쩌면 불경(不敬)으로 취급되는지도 모르지."

"그렇습니까…."

나는 '의도'란 단어에 힘을 주며 말하는 그에 말에, 뭔가를 깨달았다.

소금으로 변해서 죽는 것은 명확한 기준이 있다.

그리고 그 기준에는 김영훈이 말한 '의도'.

즉, 우리가 느끼는 지각 역시 일부 포함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의 감각은 굉장히 아득한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다. 즉, 그 말은… 이 소금 기둥 역시 그런 아득한 곳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

나는 한숨을 쉬었다.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거군요."

"…그렇지."

침음성을 흘리며, 나는 김영훈에게 말했다.

"하지만…."

"안다. 그래, 청문령은…."

나와 그의 시선이, 동시에 소금 기둥으로 향했다.

"살아 있지."

그랬다.

청문령은 소금 기둥으로 변했음에도, 분명 [의념]을 흘리고 있었다.

살아서 감정과 생각을 지닌 이들만이 의념을 흘린다.

청문령은, 사실상 살아 있는 것이었다.

기이하게도 청문령의 의념은 광기에 절어 있다거나 슬픔에 젖어 있지는 않고, 굉장히 차분하고 평안했다.

마치 편안하게 단잠을 자는 것만 같았다.

"…."

그를 보며 억장이 무너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토록 청문령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를 위해 운명을 바꾸고자 해 놓았건만.

그 결과가 이것이란 말인가.

'청문령….'

나는 침울하게 소금 기둥을 보며 생각했다.

'평안하십니까.'

답은 없었다.

그저 평안을 상징하는 의념이 소금 기둥에서 흘러나올 뿐이었다.

"…저는."

나는 김영훈에게 말했다.

"무기물(無機物)에서, 이렇게 의념이 흘러나오는 물건을 본 적이 있습니다."

"…!? 뭐?"

내 말에, 김영훈이 화들짝 놀랐다.

"청문령과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단 말이냐???"

"예. 그리고, 청문령과 [같은] 의념을 지닌 이들도 본 적이 있지요."

나는 천벌의 주인을 처음으로 만났던 회차를 떠올렸다.

천인도의 인간들이 단체로 [귀의]했던 순간.

그 당시, 그들이 번개로 변해 빨려 가며 느꼈던 감정은, 정확히 지금 저 소금 기둥 안에서 나오던 것과 같았다.

그리고, 나는 무기물인데도 의념을 내뿜었던 존재를 떠올렸다.

'정려.'

처음에는 그저 법보의 일종이라 생각했지만, 법보 주제에 의념을 흘리고 나와 심어로 대화까지 했던 그녀의 존재를 떠올렸다.

'천뢰번은 의념을 흘렸을 뿐, 심상까지는 들여다볼 수 없었어. 청문령도 마찬가지다. 무기물이지만 의념을 흘리고, 심상은 들여다볼 수 없어. 정려와의 차이점은, 그녀는 나에게 심어로 답을 했다만….'

청문령은 그저 소금 기둥인 채로,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것이냐? 청문령을 인간으로 되돌릴 수 있는 단서가 혹시 있느냐?"

김영훈의 다급한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최고위 진선 중 한 명이 쓰던 법보가 있습니다. 그 법보의 상태가 지금의 청문령과 비슷합니다. 어쩌면… 청문령은 어떤 고위 존재에게 '귀의'한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귀의?"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제가 알기로, 진선들은 대강 어떤 영역을 관장하고, 그 진선이 관장하는 영역의 존재로 변해 그 진선에게 흡수당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지요."

"그럼 청문령은… 하늘을 관측하며 어떤 진선이란 괴물에게 찍힌 상태란 건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천벌의 주인을 떠올렸다.

그 존재는 무수한 인명을 귀의시켜 흡수하면서도 별 관심은 없어 보였다.

"아마 그건 아닐 겁니다. 저 하늘 위의 존재들은 인간들에게 큰 관심은 없겠지요. 단지 청문령이 그 존재를 '인지'했기에 이렇게 된 것일 뿐입니다."

"…그런가…. 그렇게 되면 뭔가 방법이 없는 거냐?"

"저로서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고력계에 있다는 방법을… 믿어야겠지요."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돌아가지요. 청문령의 상태는 확인했습니다. 조금 쉬고 싶군요."

나는 울적한 마음을 추스르며, 천문각에서 나왔다.

산, 정상, 삼십삼, 알현실 등.

추상적인 저 단어들에 대해서도 뭔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아직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새삼, 진선이라는 거대한 존재들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벌레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아앗!

뇌속으로 천문각을 벗어나며, 천천히 대륙 쪽으로 가며 생각했다.

'힘을… 기르자.'

약자인 상태로도 운명 안에서 살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결국 운명을 바꿔 내려면 더더욱 높이 올라가야 할 터였다.

'한동안 수계에서, 서휼이 네 장소에서 어떻게 기축제를 치렀는지를 알아보고, 광한계로 올라가서 사축기에 올라가자.'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천인기에 이르러 더더욱 구체화된 천기안에 의해, 나는 단편적인 미래를 보았다.

내가 전명훈과 함께 수계에서 벗어나 비승하는 미래였다.

'운명의 인력이, 나를 중경계로 이끌고 있다.'

운명에 의해 아마 나는 근시일 내로 비승할 터였다.

실제로도 비승할 예정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높이 올라가는 것밖엔 없어.'

내가 천인기가 아니라 쇄성기였다면, 저렇게 변한 청문령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까?

그냥 저렇게 내버려 두기만 할 수 있었을까?

아니었다.

쇄성기부터는 더더욱 많은 진실을 볼 수 있고 더더욱 많은 진리를 접할 수 있으니, 최소한 청문령이 '왜' 저렇게 됐는지 파악할 수라도 있었을 터였다.

'수련하자.'

더더욱 오르고 올라, 언젠가 운명을 제대로 바꿀 수 있을 그날까지.

* * *

나는 김영훈과는 잠시 헤어지고 연국에 들렀다.

'연국 황실에 기록되어 있을 천문 자료를 조금 빌려야겠어.'

앞으로 돌아다니며 각국의 천문 관측 자료를 전부 읽어 볼 예정이었다.

'기초법술 중 연기기 1성과 2성. 칠십이지살과 삼십육천강은 하늘의 별이 지닌 108가지 기운에서 따온 법술이다.'

천문 관측 자료에 내가 청문령에게 배운 법술 지식을 적용해 해석해 볼 요량이었다.

'해룡궁에서 관측한 것보다 정확하진 않겠지만, 많은 자료를 써서 양으로 밀어붙여 보지.'

청문령이 목도한 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내게는 멸신겁천이 있었다.

'멸신겁천으로 천벌의 주인의 저주도 떨쳤다. 염화의 저주를 받는다 해도 견딜 수 있다. 더군다나 내 목숨은 남들에 비해 귀한 것이 아니니….'

내 법술 지식 자체는 청문령에 비해 깊이가 부족했다.

그런 청문령이 결단기에 이르러 더더욱 많은 이해를 접했으니, 그는 선각후통에 한해서는 소경계에서는 최고의 경지일 터였다.

'그런 만큼 내 이해도로도 청문령이 뭘 얻었는지는 못 따라갈 확률이 높다만….'

그래도 최소한 시도는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연국 황실의 천문을 관측하는 천체소로 들어가, 자료들을 읽어 보았다.

황성에도 뭔가 결계 같은 것이 가득했지만 내게 문제 되는 수준은 아니었기에 그냥 슥 통과해 버렸다.

"어디 보자…."

내가 그렇게 천체소에서 천문 자료들을 열람하고 있을 때였다.

"네, 네 이놈!"

"…?"

나는 갑자기 큰 소리가 들리길래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꼬장꼬장하게 생긴 붉은 적포의 노인이 서 있었다.

"감히 황실 천체소에 어찌 몰래 숨어들어 온 거냐!"

"아…."

생각해 보니, 너무 황실 결계를 자연스럽게 통과했어서 월수궁무록이나 은신 법술을 쓰는 걸 까먹었었다.

"이것 참, 미안하게 됐군. 이것만 읽고 나가겠네. 조금만 양해 부탁하네."

천인기 수사들부터는 의식이 천지영기와 반쯤 동화되기에, 저계 수사들은 천인기 수사들이 일부러 드러내지 않으면 천인기 수사의 의식을

알아챌 수 없었다.

거기에 천인기 수사는 체내의 법력이 천지영기와 통하기 때문에, 오히려 영기의 압박이 사라져 버리게 된다.

그렇기에 저계 수도자들 입장에서 천인기 수도자는 자칫 보기에 범인(凡人)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마 그가 보는 나는 천체소에 침입한 범인과 다를 바가 없을 터였다.

"이 하찮은 범인 주제에! 대 진씨세가의 황실에 침입하고도 그 죄를 모르고 수도자를 똑바로 쳐다봐!"

"흐음…."

나는 연기기 초반의 수도자를 바라보며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꼬마 아이를 놀라게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말했다.

"저리 가서 놀려무나."

"이이이익…!!!"

내 말에 얼굴이 시뻘게진 진씨세가의 수도자가, 결인을 맺더니 화탄(火彈)을 손에 띄워 내게 날렸다.

화르르륵!

"죽어라, 침입자 놈!"

그리고.

투웅―

나는 손가락에 강기를 입혀 화탄을 툭툭 떨쳐 냈다.

"으음, 결인을 맺을 때 결인에 의식을 더 집중해 보려무나. 영근에서 기운을 끌어올리는 것보단 결인이 가진 뜻을 찾아보는 걸 추천한다."

"아, 아니, 어떻게!? 연기기 1성을 끝마쳐 가는 내 일격을!!! 칠십이지살지결을 전부 익혀 내어 연기기 2성으로 넘어가기 직전이건만!!!"

"…."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해 고개를 저으며 손을 휘저었다.

"정말 이것만 보고 가마. 저리 가거라."

아마 생각건대, 내 의식 영역과 영력의 수준을 드러내면, 어쩌면 이 꼬마는 심장 마비에 걸려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냥 힘을 드러내지 않기로 하며 수도자에게 손짓했다.

그는 덜덜 떨며 바깥으로 나갔다.

"위, 위병! 위병 전부 모여라! 천체소에 침입자가 나타났다!!!"

"…."

그 소리에, 순식간에 장내에 절정경 이상의 무림 고수들이 나타났다.

무려 삼화취정의 고수조차 있어, 내게 검을 들이대며 위협했다.

"수도자를 놀라게 한 걸 봐서 꽤 한가락 하는 양반인 듯싶군. 하지만 우리 황립 천체소 호위대는…."

꽈악!

내가 주먹을 쥐자, 천지영기가 수면 법술의 형상으로 자연스레 변하며 무림인들에게 스며들었다.

절정 고수들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눈을 뒤집은 채 그 자리에 쓰러졌다.

"크으윽!"

그나마 대장으로 보이는 삼화취정 고수가 저항하는 듯했지만, 지금 쓴 건 숨쉬기보다도 쉬운 법술을 한참은 낮은 위력으로 끌어 올렸을 뿐

었다.

"너도 자라. 황실 소속 무림인이면 항상 벽이나 천장, 침대 밑에 붙어 있어야 해서 피곤할 텐데."

"크…으으윽! 그냥 당하지 않는다!"

부웅!

녀석은 꽤 기개가 있던 놈이었는지, 검에 검강을 두르고 나를 향해 휘둘러 왔다.

하지만….

카앙!

"뭣!!!"

녀석의 검은, 검강째로 부러져 튕겨 나갔다.

축기기 수도자만 해도 체내에 흐르는 정순지력.

즉 강기가 자연스레 호신강기를 만들어 준다.

그런데 천인기 수사쯤 되면 어찌 될까.

나는 아무런 방어법술을 펼치지 않아도 결단기 수도자들이 모여 방어법진을 펼치는 것보다 더 강한 호신강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충격을 받아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리는 무림인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래도 기개는 훌륭했으니 상을 주마."

"크…으으윽…."

그는 더 이상 수면 법술을 견디지 못하고 혼절해 버렸고, 난 쓰러진 녀석의 머리에 오기조원에 이르는 구결과 정확한 수련 방법.

그리고 오기조원에 이르는 데에 도움을 주는 무공 구결을 그의 머리에 집어넣어 주었다.

그렇게 처리를 한 후, 천문 자료를 마저 읽으려 할 때였다.

"이 노오옴! 이 고얀 놈! 내가 진씨세가의 어르신을 모셔 왔느니라!!!"

아까 도망쳤던 노인이 한 젊은 여인을 뒤쪽에 대동하고 왔다.

'꽤 젊어 보이는데, 진씨세가의 촉망받는 후기지수인가?'

내가 묻지도 않았음에도 노인은 여인을 알아서 소개해 주기 시작했다.

"이 분은 진위연 대인! 대진씨세가의 촉망받는 후기지수 분이자, 수도가문 본가에서 온 황실 감찰사시다!"

"오… 그러냐?"

"벌벌 떨어 봤자 소용없다! 보아하니 무공깨나 익힌 놈 같은데, 이 분은 무려 연기기 6성의 고수! 칠성제를 치를 논의가 이뤄지시는 대인이

다!"

"허어…."

노인은 호랑이를 등 뒤에 둔 여우처럼 가슴을 쭉 펴며 말했다.

"하찮은 네놈에게, 연기기 6성의 수도자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 주마."

'그것 참 궁금하군.'

도대체 어떤 존재인 거지?

진위연이라는 수도자 역시 법결을 맺으며 외쳤다.

"연기기 6성의 힘을 보아라!"

봤다 (2)

천무신마(天武神魔) 김영훈이 창시한 신마결(神魔訣) 이후로, 절정 이상의 무림인이 수도자의 의식에 혼선을 주는 방법이 전 무림에 퍼져 나갔다.

초반에는 그저 고위 무림 문파의 원로들을 대상으로 느릿느릿 퍼져 나갔던 무공 구결이었다.

하지만 천무신마 김영훈이 결단기 수도자이자 청우맹의 핵심인 청문령과 대등히 싸웠다는 이야기가 수도계에 퍼지고, 범인들의 귀에마저 들어간 이후.

그가 창시했다고 전해지는 신마결은 무림 곳곳에 퍼졌다.

애당초 김영훈이 곳곳에 수주를 주며 구결을 퍼뜨렸다는 설도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 범인들을 다스리는 연기기 수도자들은 무림인을 완전히 얕볼 수 없게 되었다.

잘못하면, 아무리 귀족이나 황족이라 해도 경지 높은 무림인에겐 목이 잘릴 수도 있다.

고계 수도자들이야 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무림인들이 조금 강해진다 하더라도 광범위 파괴법술을 행사할 수 있는 그들이라면 별 신경 쓸 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연기기 중계 이하의 수도자들은 달랐다.

그들이야말로 범인들을 다스리는 핵심.

여태 그들이 '가축' 취급을 해 왔던 범인들이 반격을 할 수 있게 된 걸 안 이상, 더 이상 오만함을 가질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연기기 6성 대원만의 수도자인 진위연 역시 눈앞의 사내를 보며 긴장을 끌어올렸다.

'틀림없이 삼화취정의 고수… 천무신마의 신마결도 틀림없이 익혔을 테니, 일반적인 연기기 6성이었다면 꼼짝없이 당했겠지.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연기기 12성 이상이나 사용할 수 있는 상급 법기를 들고 왔으니 말이었다.

법력을 조금 많이 먹는 것이 흠이었지만, 영력을 보충할 영석도 충분하니만큼 승산은 충분했다.

'내가 이긴다!'

그녀는 사자 머리가 양각되어 있는 붉은 색의 불진을 들어 올리며 법술을 발동했다.

"리(離), 십양(十陽)!"

화르르르륵!

열 개의 불덩이가 불진에서 튀어나오며 사내를 덮쳐 갔다.

그녀의 옆에 있던 진씨세가의 외부 구성원.

장혁 역시 결인을 맺으며 진위연을 보조했다.

'기회다, 아가씨에게 잘 보인다면 진씨세가 본가는 몰라도 황궁에서의 지위는 올라갈 터! 아가씨에게 잘 보여서 천체소장의 자리를 얻을 것이다!'

콰아아앙!

얼마간 천체소 안쪽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두 명의 수도자는 천체소에 침입한 간악한 무림인을 상대로 혼신의 힘을 다해 격전을 펼쳤다.

그리고 마침내, 장혁과 진위연은 무림인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다.

"이겼다! 하하, 전투 와중 막힌 부분이 뚫려, 연기기 7성으로 진입할 완벽한 근간이 이뤄졌어!"

진위연은 전투 도중 일어난 기연에 기뻐했다.

"잘 했다, 장혁! 너에 대해서도 축기기 장로님들께 말해 주마! 천체소장, 아니, 네 충심과 능력이라면 천체소까지 총괄하는 제례부의 서장을 맡아도 되겠어!"

기쁨에 찬 그녀의 말에, 장혁 역시 뛸듯이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감사합니다!"

마치 이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