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겁 (4)
번쩍!
쿠과과과광!
서 장군의 입에서 섬광이 번뜩이며, 전명훈의 머리통이 서 장군포에 의해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전명훈은 순식간에 머리를 재생해 버리며 다시 서 장군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서은현!!!"
콰르르릉!
전명훈은 완전히 눈이 돌아간 채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분명히 보였다.
녀석은 정려에게 조종당하고 있었다.
녀석이 드러내는 감정의 5할 이상이 정려에게 의도당하는 것.
하지만….
그렇다는 것은 즉.
나머지 5할은 진심이기도 하다는 뜻이었다.
전명훈은 반쯤은 진심으로 내게 분노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나는 전명훈을 향해.
그리고 내 가족이 된 금신천뢰문을 향해, 사과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미안합니다."
콰과과광!
벼락이 번뜩이며 서 장군이 전명훈에 의해 튕겨 나갔다.
전명훈은 분노 탓인지, 현재 끝없이 강해지고 있었고, 처음에는 천인기 대원만을 상대할 수준이었던 전명훈은 점차 서 장군에 버금갈 정도로 힘이 강해지고 있었다.
'아니, 아니군.'
단순히 분노 때문에 저 정도로 강해지는 게 아니었다.
전명훈은 현재, 자신의 잠력을 격발하고 있었다.
원영기씩이나 되었고 수명도 일천 년이 넘으니, 막대한 수명을 조금 깎아 쓰면서까지 나를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서은현!!!"
"…."
나는 눈이 돌아간 채로 내게 달려드는 녀석을 보며 말했다.
"…그래, 분노해라."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전명훈이 더더욱 분노하게 만들어 녀석의 성장세를 더욱더 가파르게 하는 것도 좋은 일이리라.
"분노하고 또 분노해서, 언젠간…."
나는 전명훈을 수련시켰던 목검을 꺼내 든 채 녀석을 맞이했다.
전명훈의 양손 위로 거대한 뇌조(雷爪)가 생겨났고, 그 뇌조에 맞자마자 전신이 저릿하기 시작했다.
"흐아아아아아!!!"
콰직, 콰지지직!
전명훈의 힘은 이제껏 내가 상대해 왔던 녀석의 힘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대해졌다.
"들고 있어라, 원유."
나는 원유를 꺼내 잠시 천뢰번을 맡긴 후.
목검에 힘을 불어넣었다.
[네가, 감히! 금신천뢰문을! 배신해!!!]
"…네 힘으로, 배신자를 처단하고, 천뢰번을 다시 봉인해 가 보아라."
그리된다면, 나 역시 바라마지 않는 일.
성장해라, 전명훈.
이 분노를 동력으로 삼아, 더더욱 강해지고 격이 높아져 오거라.
쩍, 쩌저적!
전명훈과 맞닿아 있던 목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저적!
이윽고.
파캉!
전명훈은, 마침내 스스로를 구타했던 내 목검을 박살 내는 데에 성공하고, 압도적인 힘으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번쩍!
일순간 녀석의 힘의 폭은 나조차도 깜짝 놀랄 정도로 거대하게 성장했고, 그대로 내 한쪽 팔이, 전명훈의 몸통 박치기에 터져 나갔다.
전명훈은 내 팔을 터트리고도 멈추지 않은 채, 원유에게 날아갔다.
퍼어엉!
녀석은 발길질로 원유를 폭파시켜 버리곤, 원유가 잡고 있던 천뢰번을 손에 넣는 데에 성공하였다.
"허억…! 헉, 허어억!"
녀석은 숨을 몰아쉬었다.
보아하니, 갑자기 실력이 성장한 것이 아닌 잠력 격발과 극에 달한 분노가 만나며 일순간.
아주 일순간 자신이 낼 수 있는 힘의 한계치를 크게 초월했던 것 같았다.
스스로도 모르는 순간 다음 경지를 엿본 것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전명훈과, 녀석이 일순간 내게서 탈취한 정려를 바라보았다.
정려는 어째선지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당황하면서도 전명훈을 조작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녀석이 끝없이 전명훈에게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끝없이, 끝없이.
그리고, 전명훈이 입을 열었다.
"ㅈ…."
퍼엉!
찰나.
전명훈의 머리통이 폭발했다.
내가 찰나의 시간을 뚫고 나가 녀석의 머리를 걷어찬 탓이었다.
"방금 네가 보인 그 공법의 위력을 더더욱 쫓아가라. 그리하면 언젠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다."
스릉―
나는 3천 자루의 무색유리검 중 한 자루를 꺼냈다.
"어쨌든 오늘로써, 내 목검을 부러뜨렸으니 더 이상 애송이 취급할 수만은 없겠지."
분명 15회차의 마지막 당시.
내 무색유리검은 한 자루 한 자루가 단화를 먹어 질 좋은 철검 수준으로 강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16회차는 통으로 건너뛰었기에 기억은 나지 않았으나 16회차 당시에 단화로 제련해 왔던 무색유리검의 강도는 더더욱 강해져 있었다.
첫 백 년 동안 질 좋은 철검에서 최고급 강철검 수준으로 강화되었다.
다음 백 년 동안은 강철검에서 명검 수준으로 강화되었고,
그다음 백 년 동안은 명검에서 보검 수준으로 강화되었다.
무색유리검 3천 자루는 3백 년 동안 범인(凡人)들이 얻을 수 있는 검의 극한까지 강화되었다.
그리고 다음 백 년 동안에는 보검에서 수도자들이 다루는 최하급 법기(法器) 수준으로 강화되었으며, 마지막 백 년 동안에는 최하급 법기에서 하급 법기 수준으로까지 강화되었다.
거기에 더해, 금신천뢰문에서 보낸 시간 동안 다시금 단화로 단련되어, 현 시점에서 무색유리검은 중하급 법기 수준까지 강화된 상태였다.
이전에는 검을 휘두를 때에 필요한 힘이 10이라면, 항상 무색유리검을 휘두를 때엔 7, 8 정도를 무색유리검이 부러지지 않게 강화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이전의 무색유리검은, 말 그대로 유리의 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평범한 검을 넘어, 수도자들의 법기 수준까지 그 강도가 올라왔다.
이제는, 무색유리검 한 자루를 휘두를 때에도 3, 4 정도의 힘만 무색유리검을 강화하는 데에 사용하면 된다.
부웅!
무색유리검을 휘둘렀다.
단 한 번의 참격.
그리고 그 한 번의 참격에, 전명훈의 몸통이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분단되었으며, 녀석의 뒤편에 늘어져 있던 금신천뢰문의 봉우리 수십 개도 일거에 같이 잘려 나갔다.
찰나.
난 시간의 틈새에 진입하였다.
의식을 가속시키며 정지된 세계로 들어선 나는 무색유리검을 휘둘렀다.
참격을 꽂아 넣고, 꽂아 넣고, 또 꽂아 넣는다.
그리고.
파앗!
나는 그대로 전명훈을 지나치며 녀석이 든 천뢰번을 다시 빼앗아 왔다.
다음 순간이었다.
퍼엉, 퍼벙, 퍼버버벙!
전명훈의 전신이, 참격으로 인해 가루가 되기 시작했다.
"으, 으오오오!"
녀석은 자신의 몸에 쏟아지는 참격의 여파에 저항하려 어떻게든 힘을 내 보는 모양이었지만, 저항조차 불가능했다.
방금의 일격은 적당히 목검으로 녀석을 수련시켰던 것과는 달랐다.
내 본명법보를 들고, 나름 진심을 다해 검초를 펼친 것이었으니까.
"흐아아아아!"
퍼엉!
결국, 전명훈은 금단 하나만을 남긴 채 완전히 육신이 부스러져 버렸다.
놈이 딱히 마도공법을 익힌 마수가 아닌 이상 금단만 있는 상태에서 몸을 재생하려면 며칠은 걸릴 터.
"잘 있어라, 전명훈."
나는 오행혈주번을 꺼냈다.
한 개의 붉은 깃발이 내 손에 들린다.
푸콱!
그대로, 오행혈주번을 전명훈의 금단 안쪽.
놈의 원영에 박아 넣었다.
"…!!!"
"네 정신에 금제를 박아 두었다."
내가 금신천뢰문을 떠나면 더는 녀석을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없으니 해 놓는 조치였다.
"앞으로, 네가 천뢰번의 이름을 말하려 할 때마다 오행혈주번이 발동할 거다."
내가 생각해도 겉보기에는 조금 잔인한 조치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전명훈이 실수로라도 이름을 말하는 날에는, 모든 게 끝이었으니까.
"금제를 해제하고 싶으면… 강해져 나를 찾아와라. 기다리고 있겠다."
녀석의 금단은 오행혈주번이 박힌 채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앞으로 오행혈주번은 전명훈의 의식 안쪽에 잠재되어 있다가, 녀석이 내가 말한 금제를 어기면 발동하여 전명훈에게 극렬한 고통을 줄 것이었다.
'미안하다.'
나는 떨어지는 전명훈에게 사과를 한 후, 녀석에게 맞아 나가떨어진 서 장군을 회수해서 날아갔다.
금신천뢰문에서 만든 서 장군은, 창천개벽문의 공법과 금신천뢰문의 공법들을 적용해서 기존보다 몇 차례는 더 개조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가장 기본형인 현재의 형태 말고도, 창천개벽문의 힘을 쓸 수 있는 2형태, 금신천뢰문의 힘까지 쓸 수 있는 3형태.
원유와 합체해서 마공까지 쓰며 재생하는 4형태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명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직접 내 힘으로 녀석을 상대해 주기로 했다.
"천뢰번, 당황했나 보군."
나는 아직도 당황의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천뢰번을 보며 피식 웃었다.
[….]
"전명훈이 네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해서 그런가?"
[…어찌, 적뢰천겁은 주인께서….]
"양수진과 네 주인과 있었던 일은 잘 모른다. 하지만…."
분명 전명훈은 처음에는 정려의 통제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녀석의 움직임은 정려의 의지대로 통제되지 않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려의 유도대로 나를 공격해 왔다면, 조금씩 자신의 의지대로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랬다.
정려가 처음 전명훈에게 가르쳐 준 것은 천벌의 주인이 창시한 적뢰천겁공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전명훈은 적뢰천겁공을 사용하며 머리끝까지 분노에 차오른 상황이었고, 그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적뢰천겁공을 '다른 방향으로' 진화시키고 있었다.
"내가 볼 때, 양수진이 사용한 적뢰천겁공은 네 주인에게 배웠던 게 아닌 것 같군."
양수진도, 전명훈도.
같은 명을 타고났을 것이 거의 확실한 두 사람이 배운 공법은, 처음에는 천벌에게 사사한 것이었을 터.
하나, 둘은 적뢰천겁을 계속해서 '자신의 것으로' 진화시켜 왔던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양수진이 자신의 후대에게 물려주려 했던 '진짜' 적뢰천겁공이었을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되는… 어찌….]
나는 당황하는 그녀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많이 당황했나 보군. 하지만 아직 안 끝났다."
[뭐…?]
"너는 봉인될 것이다. 조력자도 구해 놓았다. 너는 하계로 다시 가서 봉해질 것이다."
[…!]
그 말에, 정려의 의념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내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은현아, 그게 무슨 말이니. 나를 그 흉한 곳에 처박아 놓겠다는 것이니?]
"…."
[제발 다시 생각해 보렴. 그곳은 안 된다. 제발! 차라리 명계 가장 깊숙한 곳에 처박아 놓아 다오, 제발, 그곳은 안 돼!]
"…."
[나, 나는 그곳에 가면 안 돼. 그 불길하고 흉험한 세계에 더는 있고 싶지 않다. 제발, 제발! 그곳은 너무 공포스러워. 아니, 네게도 좋지 않아. 진심으로 권고하겠다. 그곳은 절대다수의 진선들이 찾지 않는 외지고 무시무시한 세계다. 왜 진선들이 찾지 않겠느냐? 옛적부터 그곳에는 공포스럽고 흉하며 무시무시한 존재가 거하고 있다는 소문이 진선계에서 돌아 왔다. 단순한 소문이 아니야!]
그녀는 숫제 정신이 나가 버릴 듯한 공포에 질려 버린 것 같았다.
[내 주인님을 위협할 정도로 무시무시했던 명계의 고명한 판관도, 주인님과 가장 절친했던 벗도, 필멸자의 수명을 관장하는 명계의 선군도, 한때 선수왕(仙獸王)에 봉해질 예정이었던 존재도, 진선계 곳곳의 사건을 배후에서 지원한 흑막도, 모조리 그 세계와 관련하여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 필멸자여, 부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말아 다오. 증오스러우나, 그만큼 강력했던 무시무시한 금신자 양수진조차 그 세계에 나를 봉해 둔 이후에 실종되었다!!! 내가 이렇게 빌겠다. 제발, 제발 나를 그 공포스러운 곳에 두지 말아 다오!]
"…."
나는 천뢰번을 힐끗 쳐다보았다.
"…미안하게 되었군."
아무리 내 마음을 돌리려 해도 소용없다.
이미 천뢰번을 그곳에 봉하기로 마음먹었다.
오히려 내게 이렇게 비는 것이야말로, 정려를 그곳에다가 봉인하면 절대로 천벌의 주인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반증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었다.
"내게도, 지켜야 할 이들이 있어서 말이다."
아직도 뇌리에 뇌령도가, 천인도가 사라졌던 그날의 모습이 생생하다.
어쩔 수 없다.
내 가족이 된 금신천뢰문을 살리려면.
나는 정려의 비명과도 같은 애원을 무시한 채.
헌위에게 전음부를 보내고, 그녀와의 약속 장소로 향하였다.
이제, 금신천뢰문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 * *
파아아앗!
나는 뇌령도의 바깥으로 나와, 시운도로 향했다.
타앗!
시운도는 여전히 바위투성이었다.
애당초 시운도는 한구석에 몰려 명적을 관리하는 것 외엔 딱히 사용되지 않는 섬이었으니 별로 거주하는 인원도 없었다.
시운도에서 며칠을 기다렸을까.
파아앗!
헌위의 둔광이 보이며, 그녀가 비둔술을 통해 날아왔다.
"오랜만이군. 지금 뇌령도는 네 배신 덕에 떠들썩하다."
"…그렇습니까."
나는 무덤덤하게 말하며 일어섰다.
"약조를 지켜 주시지요."
"뭐, 알겠다. 사람은 모아 왔겠지?"
"예."
"아버님께도 말씀드려 놓았다. 봉래궁주께서 너를 신 금신천뢰문의 장문인으로 인정하고 지지하실 것이다. 아버님을 연결할 터이니, 예를 갖추거라."
"알겠습니다."
그녀가 저물도에서 작은 호리병을 꺼냈다.
촤락!
호리병의 뚜껑을 꺼내 물을 뿌리자, 호리병에 담긴 물이 허공으로 떠올라 하나의 수경(水鏡)처럼 변하였다.
우우웅!
물의 거울이 진동하더니, 이내 먼 곳의 풍광을 비추었다.
건곤성의 내부.
그 안쪽의 한 공간에서, 자욱한 먼지 바람에 휩싸인 한 인영이 보였다.
먼지 바람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그 인영의 안광이 나와 마주쳤다.
"불초 수도자 금은현이 대 봉래궁주이시자 건곤성주이신 합체기 태수 헌원 대인을 뵙습니다."
[….]
헌원은 내 인사에도 별말이 없이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헌위는 내 옆에 무릎을 꿇은 채 헌원에게 진언을 올리기 시작했다.
"궁주님, 이전에 말씀드렸던 그 자입니다. 부디 궁주님께서 권위로 새로운 금신천뢰문의 활동을 인정해 주시기를 청해드립니다."
[…새 금신천뢰문에 제자는 얼마나 되는가.]
그리고, 딸의 청원에 헌원이 입을 열어 물었다.
헌위가 나를 향해 눈짓했다.
나는 화상부(化像符)를 통해 연진과 홍수령을 연결했다.
부적은 허공으로 떠올라, 헌원이 만들어 낸 수경과도 같이 그들을 연결했다.
홍수령은 현재 사축기에 오르기 위해 자신의 동부에서 스스로를 꽁꽁 묶어 놓은 채 수련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잠시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눈앞의 합체기 태수 헌원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 금신천뢰문 소속 천인기 원로 홍수령은 신 금신천뢰문을 지지합니다."
그 말에 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원유가 앞으로 나왔다.
나는 원유의 입을 움직여 말했다.
"나 금신천뢰문 소속 원영기 장로 원유는 신 금신천뢰문을 지지합니다."
[….]
헌원은 잠시 원유를 쳐다보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챘나.'
하지만 어째선지 원유가 내 인형이라는 걸 알아챘음에도 그냥 그러려니 하는 듯.
헌원은 큰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헌원의 시선이 연진과 연결된 수경으로 향했다.
연진은 현재 마계행 원정에 참여한 상태로, 마계의 입구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어, 태, 태수님 안녕하신가요? 아, 아니 이게 아닌가? 태수님을 뵙습니다!"
[….]
"저, 저… 그러니까 금신천뢰문 제자 연진은 신 금신천뢰문을 지지합니다."
[….]
헌원은 말없이 연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며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이상의 인원들이 새로운 금신천뢰문을 원하니, 궁주께 청하여 저희를 인정해 주시기를…."
그리고.
[…네놈.]
갑자기, 헌원의 주변으로 시뻘건 의념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뭣…?'
먼지 바람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인영의 안광이 흉흉해졌다.
그는 연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 이 요괴 놈…! 아직도 살아 있었더냐!!! 정말로 비루하고 질기고 더러운 목숨이로구나!!!]
헌원이 격노하자, 통신 술법 너머로 그의 의지가 전해지며 천지영기가 마구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봉래궁 호법 헌위에게 명한다! 저 더러운 요괴 놈이 지지하는 신 금신천뢰문이니 뭐니는 절대 인정하지 아니한다! 나는, 종문을 배신하는 배반자를 제일 혐오한다!!! 당장! 내 앞에 저 배신자 놈들을 잡아 오거라! 봉래궁의 전력을 총동원해서라도!]
"이런…!"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고, 다음 순간 눈빛이 바뀐 헌위가 내게 일격을 날렸다.
[봉래궁주로서 명한다! 인족 전체에 저 배신자 놈들을 수배해라!!!]
천겁 (5)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일단 중요한 건 눈앞의 적이다.
'헌위와 헌원이 동시에 적이 된 상황이다.'
헌원은 현재 인족 구역에서 멀리 떨어진 건곤성에서 영상을 보내는 중이었고, 헌위는 내 앞에서 공격을 쏟아내는 중.
하지만, 나는 빠르게 판단을 마치고 움직였다.
부웅!
의식이 가속하며, 나는 무색유리검을 꺼내 헌원이 비췬 수경을 향해 휘둘렀다.
쩌어엉!
헌원이 채 반응할 틈새도 없이 수경이 그대로 박살 났다.
그리고 그 틈을 타 헌위가 쏘아 보낸 빛 덩이가 아슬아슬하게 내 등을 스치고 지나쳤다.
위험하기 그지없었던 판단!
하지만 나는 빠르게 천기를 읽어 보았다.
'다행히 액운이 사라졌다.'
합체기쯤 되면 단순히 비췬 영상만으로도 신통을 부릴 수 있었기에, 선조치는 필수였다.
나는 싸늘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헌위와 눈을 마주쳤다.
"이렇게 되어 유감이다만, 아버님의 명은 절대적인지라 어쩔 수 없구나."
"그렇습니까. 이해합니다."
"얌전히 잡혀라. 아무리 네가 소문난 천재라 해도 원영기와 천인기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 하물며 상대가 나라면 더더욱."
"실력에 자신이 있으신가 보군요."
나는 무색유리검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지난번 대충 날린 일격을 막아 보고, 나를 상대할 수 있을 만하다고 여긴 건 아니겠지?"
그와 동시에, 평범하게 팔을 뻗고 법력을 쏘아 내던 그녀가 갑자기 자세를 바꿨다.
쿠웅!
그녀는 발을 구르며, 마치 권법(拳法) 같은 자세를 취했다.
'무공? 아니야….'
자세에 실전성이 없었다.
오로지 보여 주기 위한 자세.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절도 있어 보이는 동작이었다.
무림인의 식견에서 보자면, 단순히 절도 있는 자세를 취할 뿐인 겉멋만 잔뜩 든 기수식.
그러나 '무림인'이 아닌 '수도자'의 시점에서 본다면 저것은 의미가 또 달라졌다.
'저 동작이 하나의 결인이다.'
찌릿, 찌릿, 찌릿….
공기가 따끔거리는 느낌이다.
지금까지의 헌위와는 느낌이 달랐다.
살짝 맹탕이었던 것 같았던 그녀의 기세가 정반대로 바뀌며, 소름 끼치는 흉악한 기운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쿠구구구구!
"…!!"
일대가 마구 진동하기 시작했다.
"보여 주마. 봉래궁주와 그 직계에게만 허락되는, 신(神)의 가르침을…."
다음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검을 내밀었다.
'막아야 한다'는 느낌이 내 뇌리, 영혼을 적시는 것이 느껴진다.
"음양산(陰陽山)."
하늘에서부터 붉은 양기가, 땅에서부터 푸른 음기가 휘몰아치며 태극(太極)이 되어 휘몰아쳤다.
거대한 태극의 형상은 세계 전체에 휘몰아치는 듯하더니, 그대로 하나가 되었다.
쿠웅!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이건….'
나는 검을 들고 헌위의 바로 앞까지 쇄도해 있었으나, 동시에 내 검은 그녀의 몸에 닿지 못했다.
태극의 형상!
세계를 덮고, 내 몸을 뒤덮은 거대한 태극의 형상이, 원구형의 주박(呪縛)이 되어 나를 가두고 있었다.
꾸구구구구!
태극의 형상 안쪽에서, 어마어마한 압박이 느껴졌다.
"오행산(五行山)."
이어서 헌위가 낭랑한 목소리로 다른 자세를 취하며 전신으로 펼치는 결인을 맺는다.
용맥(龍脈)!
천지간에 흐르는 거대한 대지의 용맥이 치솟아 올랐다.
그녀의 의지에 의해 치솟은 용맥은 그대로 오행의 기운으로 분리되는 듯하더니 나를 가둔 태극의 옥 주변을 돌며, 태극의 형상 주변으로 오색의 띠를 둘렀다.
키잉!
나는 태극과 오행의 기운이 합쳐지며, 나를 두른 이 주박의 힘이 더더욱 강해짐을 깨달았다.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산(太山)!"
그리고 나는 빠르게 뇌리를 굴리며 이 주박의 정체를 알아냈다.
'축복?'
이 주박의 성질은 일종의 축복이었다.
내가 안에서 움직일 수가 없다지만, 동시에 이 주박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지켜 주고 있기도 했다.
'왜 내게 축복을 걸어 주려는 거지? 아니지, 제길!'
나는 헌위가 가하려는 공격을 알아채며 이를 질끈 악물었다.
꾸구구구국!
상당한 압박이 몸을 짓누르고 있어 움직이기가 번거로웠다.
쿠웅!
헌위가 자세를 바꾼다.
그녀의 양손에는 각각 흑색과 백색의 빛무리가 휘돌고 있었다.
각각이 성스러운 기운을 흘리는 기운과, 진득한 마기(魔氣)를 흘리는 기운이었다.
"열제(裂帝)!"
짝!
그녀가 흑백의 기운이 맴도는 양손을 부딪쳤다.
그런 다음 그녀는 다음 발을 내디디며, 내가 갇혀 있는 음양오행의 옥에 달려들어 부딪친 양팔을 활짝 벌렸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나를 가둔 음양오행의 옥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걸 느꼈다.
나에게 '축복'의 형식으로 걸어 준 후, 내 기운과 동화시켜 버린 음양오행이 그대로 일곱 조각이 되어 분해되어 버렸다.
나는 전신에 흐르는 기(氣) 자체가 그대로 잘게 분해되는 느낌과 함께 빛무리에 파묻혔다.
* * *
쉬이이이이―
헌위는 그녀의 눈앞에 생겨난, 반경 약 5백 리에 달하는 거대한 먼지구름을 보며 무표정하게 손을 털었다.
"해치웠나…."
이 정도면 되었을 터였다.
봉래궁의 최고위 공법인 태산열제공의 일격에 직격한다면 동 경지라도 즉사였고, 그보다 윗 단계인 천인기 후기나 대원만이라 해도 치명상을 피할 수가 없었다.
'원영기 대원만인 녀석에게 쓰기에는 조금 과분한 일격이었다만, 그래도 나름 금신천뢰문의 천재인 녀석이었으니 격에 안 맞진 않겠지.'
헌위는 먼지구름을 쳐다보며, 서은현의 원영이 튀어나오기를 기다렸다.
이 일격이라면 원영기 수사의 연약한 육신쯤은 가루가 되어 버렸을 테니, 원영만 포획해서 그녀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면 이번 '돌발 임무'는 끝이었다.
'나름 재밌는 녀석이었다만, 아쉽게 되었군.'
그녀는 혀를 차며 손을 휘저었다.
휘이이이―
그녀의 손짓에, 바람이 불어오며 그녀의 전방 5백 리의 먼지구름이 일시에 걷힌다.
그리고,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휘이이이―
"…!"
전신에서 연기가 나는 나신(裸身)의 남성이, 한 자루의 유리검을 들고 이빨이 드러나도록 웃은 채 서 있었다.
나신의 남성, 서은현은 히죽 웃으며 죽은 피를 한 움큼 내뱉으며 말했다.
"3천 년 동안 천인 중기라고 소문이 나셨길래, 본래 저희 금신천뢰문에서는 헌 선자에 대해서 둔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스륵….
그는 입가의 피를 닦으며 충혈된 눈으로 헌위를 바라보았다.
"그에 대해서는 금신천뢰문을 대표해 사죄드리겠습니다. 이런 공법을 익히고 계셨다면 시간이 조금 걸릴 수도 있었겠다 싶어지는군요."
"…놀랍군. 이걸 맞고 살아 있어?"
헌위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연체공법이라도 주워다가 익혔나 보군. 하지만 그 정도가 끝이겠지.'
위이이잉!
다시금 천지영기가 진동하며, 음양오행의 기운이 구체의 형태로 서은현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양손에 흑백의 힘이 서리기 시작했다.
"대단하구나. 그럼 어디, 한 번 더 맞아 보거라."
"…흐하."
하나 다음 순간.
서은현이 검을 휘둘렀다.
'뭣!'
소리도 인식도 반응도 채 따라가지 못했다.
어느새 헌위는 서은현의 무색유리검이 그녀의 음양오행의 옥을 뚫고 그녀의 가슴에 쇄도해온 것을 목격했다.
어쩔 수 없었다.
헌위는 공격을 위해 모았던 선마기(仙魔氣)를 방어를 위해 돌리며 서은현의 공격을 막아 냈고, 다시금 섬광이 천지사방을 뒤덮었다.
쿠구구구구!
섬광이 잦아들고, 보인 것은 한 손으로 무색유리검을 내리누르는 서은현과, 서은현의 무색유리검을 양손으로 잡은 채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헌위의 형상이었다.
"놀랍군요, 헌 선자."
서은현은 진심으로 감탄한 듯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의 무식한 힘에 놀란 헌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뭐…?'
그리고 하늘에 드러나 있는 그녀의 천기는, 필패(必敗)를 상징하는 천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서은현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이 익힌 공법도 저와 비슷하다니…."
* * *
나는 그녀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녀는 여려 보이는 팔로, 내 검을 잡고서 막아 내고 있었다.
어떻게 요수공법을 익혀 육신의 힘을 극한까지 단련한 내 검을 자신의 양팔로만 막을 수 있을까?
간단한 대답이었다.
그녀 역시도 요수공법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익힌 것은 천족의 공법이기도 했다.
"태산열제공이라는 것은, 천지족의 힘을 전부 다루는 공법인 겁니까?"
천족은 법력과 법술을, 지족은 육신과 생명력을 주로 단련한다.
하지만 천족은 이론상 천, 지, 심족의 모든 공법을 익힐 수 있기에, 천족 중에서는 간혹 다른 종족의 공법을 익히는 이들도 나온다.
그중에서도 법력을 중시하는 천족의 공법과, 육체를 중시하는 지족의 공법을 둘 다 익히는
수련법을 일컬어, 법체쌍수(法體雙修).
혹은 천지족의 수련법을 전부 익힌다 하여 천지쌍수(天地雙修)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헌위의 태산열제공은 그러한 천지쌍수의 공법이었던 것이었다.
꾸구구국….
'3천 년 동안 천인기 중기까지밖에 못 도달한 게 이해가 되는군.'
그녀는 심각한 둔재가 아니었다.
자질로만 따지면 그냥저냥 평범한 범재라 해야 할까.
도리어 범재의 자질로 천지쌍수의 수련법을 병행하며 천인기 중기까지 도달한 것이 대단한 것이었다.
그만큼 천지쌍수의 수련 방식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마련이었으니 말이었다.
"미친… 말도 안 되는…. 네가 어떻게 천지쌍수의 수련을 해 왔단 거냐…?"
그리고 그런 만큼, 내 근력을 확인한 헌위의 동공이 파르르 떨려 왔다.
"수선을 시작한 지 백 년도 안 된 네놈이 천지쌍수로 나를 압도할 정도까지 올라왔다고…? 말도 안 되는…."
"…."
확실히 내 성장은 겉보기만 보면 말이 되지 않는 성장 속도긴 했다.
그녀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게… 진짜 천재인 건가."
"…."
나는 대답하지 않고 검을 쥔 손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쿠구구구!
그녀가 서 있던 대지가 그대로 움푹 파이며, 그녀는 땅 밑으로 박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슈칵!
나는 일순간 큰 폭으로 힘을 주어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 그녀의 머리통을 쪼개 버리고, 금단 직전까지 무색유리검을 박아넣어 그녀를 반쯤 갈라 버린 후 검을 회수했다.
치지지직….
그녀는 천천히 재생을 시작했고, 나는 그런 헌위를 보며 말했다.
"일반적인 천인기 수사라면… 아니, 천인기 대원만이라 해도 대비 없이 헌 선자의 공격을 맞으면 분명 갈려 나갔을 겁니다."
그만큼 그녀의 태산열제공은 흉악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근력으로 압도했던 것 역시, 그녀의 태산열제공이 육신 자체를 '출구'로 하여금 기운을 '발출'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진 공법이라면,
창령성광오채대법은 순수한 '육체' 그 자체를 성장시키는 데에 주력이 된 공법이라는 차이였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내가 요수공법으로 진화시킨 후, 선수의 힘과 괴군의 회로까지 체내에 일시적으로 깔아 사용했기에 그녀를 제압할 수 있는 것뿐이었다.
'순간 답천으로 몸을 보호하지 않았으면 분명히 서은현 미숫가루가 되었겠지….'
천, 지족의 힘. 괴군의 회로, 거기에 선수의 힘, 그리고 답천 무형검을 몸에 둘러서야 겨우겨우 몸이 멀쩡할 수 있었으니, 더 이상 헌위의 공격의 위력을 설명해 봤자 불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의복의 술법으로 다시금 가루가 된 옷을 재생해 입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약속이 결렬되어 유감입니다."
헌위를 인질로 삼거나 해서 건곤성 비선대로 돌격하거나 해 볼 생각도 해 봤지만, 바로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봉래궁주 헌원이 자식을 대할 때 드러내는 의념으로 보아, 그는 딱히 헌위에게 애착이 없었고, 도리어 인질과 함께 나를 통째로 갈아 버릴지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건곤성 비선대는 이용을 못 하게 되었다.'
나는 하늘로 날아올라 시운도를 떠나며 상념에 잠겼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합체기 태수가 거하며, 사축기 수사들이 득시글거리며 순찰을 도는 건
곤성으로 쳐들어가 비선대를 이용할 만큼 간이 크진 않았다.
'그리고 헌위가 익힌 태산열제공은 결국 헌원의 본명공법…. 태산열제공이 천지쌍수의 수련방식을 주로 하는 공법이라면 합체기에서도 한두 단계는 뛰어넘는 위력을 지니고 있겠지.'
내가 알기로 헌원은 합체기 초기의 수사였으나, 방금 전 헌위가 보여 준 태산열제공을 떠올리자, 헌원의 본 실력은 절대로 초기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대일로는 사축기 대원만도 버거운데, 사실상 합체 중후기 수사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지.'
건곤성을 깔끔히 단념한 나는 머리를 굴렸다.
'그렇다면 어디를 통해서 수계로 내려가야 하지?'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봉명주 최하층이었다.
봉명주 최하층이라면 하계로 내려갈 수 있으니 시도해 볼 만했다.
'물론 요족들이 득시글거리는 봉명주까지 찾아가서 서휼의 눈과 오혜서의 능력을 피해 봉명주 최하층에 내려가 준 합체기 관주사자 규련을 넘어야 하니….'
난이도 자체가 미쳤다는 것만 아니라면 당장 실행에 옮겼을 터였다.
'그럼 다른 방법은….'
나는 또 다른 방법을 떠올렸다.
바로 마계에 있는 '공령지'였다.
'공령지를 이용하면 하계로 내려갈 수도 있다….'
하지만 공령지는 안정된 비선대가 아니었고, 중간에 공간 폭풍에 휘말려 어디론가 떨어질 가능성도 컸다.
'어디로 가야 하지….'
이미 정려에게 걸려 있는 봉인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상당히 풀려나간 상태였다.
어쩌면 얼마 안 있어 그 인력을 느끼고 천벌의 주인이 찾아올지도 몰랐다.
고민은 빨랐다.
'공령지로 간다.'
안 그래도 한시가 급한데, 의뭉스러운 서휼 놈의 눈치나 보면서 시간 끌 수가 없다.
괜히 정려를 서휼의 아가리에다 꽂는다는 계획을 세우는 것도 녀석을 상대로는 어떻게 꼬일지 몰랐다.
'무엇보다, 물어볼 것도 있고 말이지….'
나는 헌원이 연위를 향해 보인 태도를 기억하며 이를 갈았다.
'분명 내게는 헌원이 자신을 못 알아볼 것이라 했었다…!'
그렇게 호언장담했지만, 결국 한눈에 보자마자 알아보며 격노하여 일이 이렇게 꼬였으니.
반드시 이번 일에 대해 추궁하리라.
천겁 (6)
금신천뢰문 형뢰동(刑雷洞) 밑바닥.
그곳은 죄를 지은 금신천뢰문의 후기지수를 벌하는 데에 쓰이는 장소였다.
그리고, 그런 형뢰동으로 금벽호가 뇌전을 튀기며 날아갔다.
콰르르릉!
형뢰동 가장 깊은 밑바닥.
그곳에는, 수십 개의 쇠사슬에 묶여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홍수령."
금벽호가 여인, 홍수령에게 물었다.
"정보가 들어왔다. 네가 금은현 그 놈이 천뢰번을 탈취해 나가는 것과, 그리고 녀석이 새로운 금신천뢰문을 선포하는 것을 지지했다는 정보다."
"…."
"그 일로 인해 봉래궁이 갑자기 격노해 수배를 내렸다. 너는 지금 본문의 형뢰동에서 면벽을 시키고 있다고 변호를 해서 수배에 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너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다. 당장 네 원로직을 박탈해야 한다고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아…."
"…그렇습니까."
"한 가지만 말해라. 왜 금은현을 지지한 거냐? 단순히 쌍수도려라서?"
그 물음에 홍수령은 싱긋 웃었다.
"단순한 쌍수도려를 떠나… 그 녀석은 문파에 해가 될 일을 하지 않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으으음…."
금벽호는 침음성을 흘렸다.
"녀석이 하는 일 자체가 현재 금신천뢰문의 위신 자체를 땅에다 처박고 있는 일이란 말이다…."
"저는 녀석을 믿습니다."
"…곧이어 금은현… 아니, 서은현의 파문(破門) 절차가 끝나고, 시조령으로 녀석을 완전히 금신천뢰문에서 제명할 예정이다. 녀석이 완전히 파문당한 후에도 놈을 싸고돈다면, 나로선 너를 계속 형뢰동에서 면벽시킬 수밖에 없다."
"그렇습니까. 그럼 사축기에 이를 때까지 면벽이나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난 가 보마."
파아앗!
금벽호는 이내 떠났고, 형뢰동의 밑바닥에서, 홍수령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뭘 하고 있는 거냐, 네 녀석….'
그녀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서은현을 떠올렸다.
사슬에 묶여 있었기에, 천뢰번에 의해 문파의 전원이 잠시 넋이 나갔을 당시에도 강제로나마 무사할 수 있었다.
그녀를 묶은 사슬은 그녀 스스로 만들어 묶은 것이었다.
홍수령은 이미 '다음 단계'를 보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 사슬을 풀지 않겠노라, 그리 맹세
였으니 말이었다.
'해가 될 일은 하지 않겠지만… 서은현. 그래도 지금만큼은 이 사슬이 원망스럽군.'
당장이라도 찾아가서,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묻고 싶은 건 다름 아닌 그녀였다.
서은현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도 그의 의념을 보고서 결정하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로 서
은현이 말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일은 이미 일어났다.
'어찌해야 하는가….'
당장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 사슬은 그녀 나름의 비술로 만든 것이기에 그녀가 정해 놓은 제약을 해제하기 전에는
풀리지 않을 터니까.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경지를 높이자.
힘을 키우자.
그것이, 홍수령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반드시 힘을 키우고, 경지를 높여, 네게 찾아가 묻겠다. 서은현. 과연 네가 한 일에는 의미
가 있었느냐고.'
그를 힐난하거나 추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서은현이 절대로 삿된 짓을 한 게 아니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를 확인하려 함이
었다.
'그러니 기다려 다오. 네가 내게 알려 준 길을 따라 걸어, 반드시….'
우우웅!
그녀는 눈을 반개하며, 스스로의 의식을 분리했다.
분리된 의식은 얼마간 그녀의 주위에서 움직이는 듯하다가 다시 그녀의 의식으로 회귀해 버렸다.
'내가 여태껏 알아 왔던 무공의 극한을 탈피할 터이니…!'
등봉조극.
서은현이 알려 준 오기조원 그 너머의 경지로, 반드시 도약하겠노라고 다짐하며.
반드시 서은현의 무고함을 밝히겠노라고 다짐하며 그녀는 그렇게 형뢰동 밑바닥에서 수
을 이어 나갔다.
* * *
금벽호는 심란한 마음이었다.
그는 태상장문이라는 직함이 무색하게도 종문의 곳곳을 뛰어다니며 사태를 수습하고 있었
다.
"…그러한 이유로, 앞으로 서은현 장로는 파문될 것이다. 더 이상 서은현을 추종하는 파벌의
형성을 금한다."
서은현은 문파 내에서 상당한 위상을 지니고 있는 천재 중 천재였고, 그런 그였으니만큼 추종자도 한둘이 아니었다.
금벽호는 그런 '추종자들'에게 알려 더 이상 서은현을 공식적으로 추종하지 못하게 당부하며 다녔다.
그러던 중, 그는 뇌운봉.
봉뢰당의 잔해가 있는 곳에 멍하니 서 있는 한 인물을 바라보았다.
금신천뢰문의 부문주, 진휘였다.
"…진 원로."
금벽호는 심란한 표정으로 진휘에게 다가갔다.
진휘는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게 서은현은 가장 큰 자랑이자 긍지였다.
비록 스승으로서 가르친 것은 거의 없었으나, 어쨌든 서은현은 진휘의 제자였고, 여태껏 늘 진휘를 존숭해 왔었다.
진휘 역시 서은현 덕에 근 수십 년간 입가에서 웃음이 떠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진휘는 마치 초상집에 온 노인 같았다.
"…금은현… 아니, 서은현은… 본문 최고의 천재였지요."
서은현은 천재이자, 금신천뢰문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 '문파의 자랑'은 이제 문파를 배반하고 천뢰번을 훔쳐 도주하여 새로운 금신천뢰문을 세우려 하고 있었다.
동시에 봉래궁에서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서은현은 금신천뢰문의 배반자이자 여태껏 금벽호가 찾아 왔던 '금위'와 내통하고 있었다 한다.
"…어쩌면, 저희는 전명훈의 예절을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서은현의 본의를 신경 썼어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전부… 스승인 제가 제자를 살피지 못한 죄입니다."
진휘는 괴로워하며 자리에 주저앉아, 탄식을 토했다.
금벽호는 한참을 진휘의 등을 바라보다, 무겁게 한 마디를 토해 냈다.
"…시조령으로, 서은현을 파문할 예정이네."
"…예."
진휘는 무겁게 대답했다.
"신물을 훔치고, 현 본문을 부정하며 새로운 금신천뢰문을 참칭하며 본문의 배신자와 손을 잡은 일은… 그만큼 대역죄이지요. 거기다가 그는 차차기 장문이 확정된 녀석이었으니, 그만한 벌을 내리는 것이 옳습니다."
"…."
"하오나… 사형(師兄)."
진휘는 금벽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경지 상으로는 재능이 더 뛰어났던 금벽호가 한참 위였지만, 진휘와 금벽호는 전대 태상장문의 제자로, 사형제 간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녀석의 파문을 미루어 줄 수는 없습니까?"
진휘는 떨리는 목소리로, 서은현의 저주에 의해 다 썩어 버린 봉뢰당의 잔해를 만지며 말했다.
"…봉래궁에서는 녀석을 빨리 정식으로 파문하고 추적하라고 압박하고 있네. 또한 본문의 제자들이 동요하고 있기에 빠르게 파문을 해야 해,"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사형의… 아니, 태상장문의 뜻이 그러하다면 따르겠습니다…."
그는 축 늘어진 모습으로 힘없이 대답했고, 금벽호는 씁쓸하게 진휘의 곁을 떠났다.
* * *
"…두 사람은 어찌 생각하나?"
금벽호는 현 문주 금린, 차기 문주 금진찬을 불러 물었다.
금벽호의 사촌인 금린과, 그 아들인 금진찬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하루빨리 서은현을 파문해서 문파에서 동요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일축하고, 봉래궁에 지원을 받아 서은현을 추격해 천뢰번을 되찾는 것이 맞다고 사료됩니다."
금린은 냉정하게 의견을 냈고, 금진찬은 침음성을 흘렸다.
"…금은현, 아니, 서은현은… 문파의 희망을 상징하던 녀석이었습니다. 그런 녀석을 시조령으로 파문한다고 공고한다면 문파 곳곳에서 잡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찬이 너의 의견이냐?"
"…모르겠습니다. 이성적으로는 서은현을 파문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 서은현에게 영향받은 인물들은 현재도 굉장히 흔들리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명훈이가 가장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전명훈이? 녀석은 서은현을 싫어하지 않았나?"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만…."
쿠릉…!
그들이 말을 하는 새, 전명훈의 거처에서 붉은 벼락 몇 줄기가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알겠다. 일단 전명훈에게도 가 보지."
금벽호는 한숨을 쉬며 전명훈에게로 날아갔다.
* * *
금벽호는 전명훈의 동부 앞에 내려앉았다.
"…소해야."
"아, 할아버님."
그는 전명훈의 동부 바깥에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금소해와 눈이 마주쳤다.
"전명훈은 어떠냐?"
"…지금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요."
"서은현과 녀석은 사이가 안 좋지 않았던가?"
"예, 명훈에게 서은현 장로는 뛰어넘어야 할 벽이자 태산이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 있어 강력한 지지대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런가…."
콰르르릉!
다시금 전명훈의 동부 안쪽에서 붉은 벼락이 마구 휘몰아쳤다.
금벽호는 잠시 그 벼락을 바라보더니, 전명훈의 동부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콰르릉!
그는 붉은 벼락을 걷어 내며 안으로 진입해 갔고, 붉은 번개가 가지는 강력한 힘에 흠칫 놀랐다.
'강하군….'
그는 전명훈의 분노를 어림짐작했다.
전명훈이 분노와 함께 강해지는 것은 이미 금신천뢰문의 고위직들은 대다수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시조인 양수진조차도 분노와 함께 성장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니 그를 바탕으로 전명훈 역시 똑같으리라 받아들인 것이었다.
"흠?"
하지만 금벽호는 전명훈의 앞에 도착하자 의외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길길이 날뛰고 있을 줄 알았건만….'
예상외로 전명훈은 차분한 모습으로 가부좌를 틀고 공법을 수련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금벽호는 차분한 전명훈의 모습을 보자 오히려 더욱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격발하는 분노가 아닌, 꾹꾹 눌려서 압축되고 정제된 분노가 은은히 느껴졌다.
"…오셨습니까, 태상장문. 고비를 넘는 중인지라 일어서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너…."
금벽호는 눈을 부릅떴다.
그가 잘못 보는 것이 아니라면, 현재 전명훈은 양신(陽神)을 얻기 직전의 단계였다.
원영기에 이른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벌써 원영 중기에 도달하려 하는 것이었다.
"…알겠다. 하던 것을 계속해라."
"감사합니다."
감사보다는 억눌린 분노가 느껴지는 눈빛에, 금벽호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그는 전명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서은현을, 시조령을 이용해 파문하기로 결정했다."
"…."
"네 생각은 어떠냐?"
"…제 생각이 중요합니까? 문파의 규율에 따르면 그를 파문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닙니까?"
"네 생각이 중요하다."
"어째서입니까? 제가 천상금뢰지체이기 때문입니까?"
전명훈의 물음에 금벽호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서은현의 영향을 받은…."
금벽호는 전명훈의 모습을 보며 단어를 고르다,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의 친우이기 때문이다."
"…친우라. 하, 하하…."
그리고, 전명훈은 웃기 시작했다.
"흐하하하하하!"
"…."
"잘못 보셨습니다. 놈은 제 친구 같은 게 아닙니다. 저희가 본문에 입문하기 전. 녀석과 제 관계는 상사와 부하의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입문해서는 관계가 역전되고, 제가 수십 년간 이를 갈며 관계를 예전처럼 되돌리려 노력했을 뿐입니다."
"…."
"놈에 대해서는 늘 열등감과 울분이 쌓여 있었습니다. 파문이라니, 정말로 잘된 일입니다. 그렇게 해 주십시오. 녀석은 제게 있어 울화를 유발하는 원인이었고, 소해와 시간을 보내지 못하게 만드는 원흉이었으며, 본문에 입문하기 이전의 일로 저를 두들겨 패는 소인배 같은 놈이었습니다.
또한 늘 제 신경을 긁어 대는 말을 했고, 저를 두들기며 제멋대로 실력을 증진시켜 준답시고 필요도 없는 것들을 잘난 듯이 가르치고, 고향 생각이 나면 가끔 개 같았던 기억이나마 고향을 상기시켜 주고, 소해와의 관계에 쓸데없이 참견을 하기도 하고, 정말 가끔은 술도 못했던 주제에 술도 한두 잔 하고, 내가 금신천뢰문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도움도 줬는데!"
파직, 파지지직!
금벽호는 전명훈에게서 급격히 끓어오르는 핏빛 번개를 보며 무심코 한 발짝을 뒤로 물러섰다.
"왜! 정작 그 개 같은 놈은 나를 이곳의 가족으로 만들어 놓은 주제에 왜 제 놈은 사문을 배신한 거지!? 왜!? 정말!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콰지지직!
차분해 보였던 전명훈의 얼굴은 말을 꺼내며 점차 배신감으로 일그러져 갔고, 벼락의 굵기와 적광은 점차 강해져 갔다.
[왜!]
콰르르릉!
다시 한번 붉은 벼락의 파도가 장내를 휩쓸었고, 금벽호는 한쪽 팔을 들어 법력을 끌어올려 벼락의 파도를 막아 냈다.
'…그렇군.'
금벽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전명훈은 원영 중기나 다름없었다.
천겁만 맞으면 바로 원영 중기에 도달할 수 있을 터였다.
'이것이 천상금뢰지체.'
지금까지는 서은현에게 성장 속도 면에서 상당히 뒤떨어졌으나, 금벽호는 지금 이 순간 직감했다.
지금부터는, 전명훈의 성장 속도가 서은현의 성장 속도를 단숨에 따라잡으리란 것을 말이었다.
"알고… 싶습니다. 왜 그놈이 그 지랄을 하면서 본문을 배신한 건지."
전명훈은 한 번 격노를 쏟아 낸 이후 조금 지친 얼굴이 되어 말했다.
금벽호는 전명훈을 바라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 * *
금뢰전.
금벽호는 태상장문인의 태좌에 앉아, 서은현에 대해 생각했다.
문파의 문도들을 만나 보고, 서은현의 파문 소식을 전하고, 의견을 물어 왔다.
이성적으로는 시조령으로 바로 파문을 내리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감성적으로는 그럴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금벽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어째서, 왜 본문을 배신한 것이냐…."
그는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탄식을 내뱉었다.
종문의 역사를 뒤바꿀 천재가 서은현이었다.
그리고 금신천뢰문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라 불리는 금위와 함께 '최악의 배신자'의 목록에 올라갈 이름 역시 서은현이었다.
금벽호는 서은현을 믿었다.
그 역시 진휘만큼 서은현을 금신천뢰문의 자부심이라 믿어 왔다.
하지만 결국 서은현이 숨겨온 꿍꿍이로 인해, 금신천뢰문은 서은현에게 배반당했다.
그 자신마저도 서은현을 파문시켜야 한다는 사실이 쉽사리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서은현은 종문을 배반했고,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서은현의 목적은 분명했다.
'아마 일전에 말했던 대로, 천뢰번을 수계에 가져다 놓는 것일 터.'
그렇게 된다면 현 금신천뢰문의 전력 중 7, 8할 이상이 바로 날아가 버리게 된다.
그리된다면 천뢰번도 없는 지금, 금신천뢰문의 위치는 어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최악의 경우 금신천뢰문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가능성마저 있었다.
서은현을 따라 수계로 다시 내려가서 천뢰번을 가져온다거나 하는 선택지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계(下界)로 내려간다는 건, 천인기 이상만 되어도 가능했지만 광한계로 비승한 절대다
의 수사들은 다시 하계로 내려가는 일이 없었다.
기껏해야 하계에 남겨 놓은 자신의 후손들에게 정보를 전달한다거나 하는 일이 대부분이었고, 대다수는 하계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정말로 간단한 이유였다.
하계로 내려가면, '다시' 비승해야 했으니까.
비승은 천인기 대원만만 되면 쉽게 쉽게 할 수 있는 애들 장난이 아니었다.
공간 폭풍에 휩쓸려 죽을 위험도 컸고, 차원의 틈새에 사는 기괴한 생명체와 맞닥뜨릴 위험도 있었으며, 간혹 차원의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무시무시한 존재'들도 있었기에 비승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건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특히나 그들이 비승한 수계는 더더욱 그런 위협에서 컸다.
바깥에서 안으로 진입하는 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수계 안에서 다시 비승하려고 하면 사축기라 할지라도 승천문이 열리는 시기까지
다시 기다려야 했다.
수계는 다른 부해계에 비해서도 특히나 세계의 장막인 세계순력이 견고했기에, 사축기 수
사라도 마음대로 오가기 힘든 세계였으니 말이었다.
'서은현 녀석이라면, 원영기 수준이지만 천인기에 도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곧 스스로의
힘으로 수계로 갈 수준이 될 것이야. 그게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천인기 이상의 조력자를 통
해 수계로 돌아갈 수 있겠지.'
한시가 급했다.
서은현이 수계로 돌아가기 이전에 그를 잡아들여야 했다.
"…서은현."
금벽호는 이를 악물었다.
"결정했다. 너는…."
그리고, 그는 마침내 복잡한 마음을 끌어안고, 서은현에 대한 결정을 완전히 정하는 데에
성공했다.
* * *
금신천뢰문의 신물을 봉해 두던 뇌운봉.
그 정상으로, 금신천뢰문의 장로급 이상의 수사들이 모여들었다.
태상장문의 장문령으로 소집된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위쪽에서 금벽호가 외쳤다.
"모두 들어라!"
금벽호는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근래에 불행한 일을 당했다. 문파의 최고 귀재라 믿었던 제자에게 배신을 당했다. 이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요, 문파의 항렬과 배분, 사승 관계를 부정하는 극악한 죄이다. 하지만 본 태상장문은 알고 있다. 우리를 배신한 그 제자가 어찌나 본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어찌나 추종하는 이들이 많았는지. 하지만 들어라. 현재 그 제자는 본문의 신물인 천뢰번을 들고 도주했고, 새로운 금신천뢰문을 선포했으며, 동시에 본문의 배반자인 금위와 손을 잡고 수상한 일을 꾸미고 있다. 이에 본 태상장문은, 장로진, 원로진들과 의견을 나눈 끝에 그 제자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였다!"
금벽호는 품속에서 시조령을 꺼내 들었다.
"본문의 배반자, 서은현을 금신천뢰문에서 파문함을 선언하는 바이다! 단! 시조령에 의한 영구 제명은 아니 한다. 앞으로 배반자 서은현을 추적할 금신천뢰문의 추적대를 선발할 것이다. 그리고, 배반자 서은현을 시조령으로 영구 제명하는 것은, 추적대가 그를 잡아들여 본문의 신물을 되찾는 그때에 어찌할지를 결정하겠다!"
그는 장로진들을 둘러보며,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추적대장, 전명훈은 앞으로 나오라!"
그 말에 전명훈이 앞으로 나섰다.
"앞으로, 서은현의 동기이자 본문의 기둥인 전명훈이 배반자를 추적할 추적대의 추적대장을 맡을 것이다. 그에게 시조령을 맡기며, 서은현을 잡고 천뢰번을 되찾는 그때에! 추적대장의 결정에 따라 시조령으로 그를 영구 제명할지, 아니면 시조령으로 파문한 그를 다시 제자로 받아들일지를 결정케 하겠다!"
금벽호는 시조령이라고 적힌 영패를 전명훈에게 넘겨주었다.
"합체기 태수인 헌원도 역시 개인적인 은원 때문에 본문의 배신자이자 서은현과 손을 잡고 있는 금위를 수배하여 추적하고 있다! 아마 본문의 배반자들이 헌원 대인의 세력인 봉래궁에 잡힌다면 그들의 방식대로 처벌받을 터! 그들은 본문의 배반자일지언정, '본문의' 배반자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붙잡히기 전 우리의 손으로 붙잡아, 본문의 오점을 회복한다!"
금벽호는, 전명훈은, 진휘는, 서은현과 관계되었었던 모든 이들은 이어지는 금벽호의 말에 형용치 못할 씁쓸함을 느꼈다.
"추적대에 지원하라. 부디… 본문의 미래였던 이를, 하다못해 우리의 손으로 끝내주어라."
그렇게, 금신천뢰문의 배반자.
서은현 추적대가 결성되었다.
천겁 (7)
우릉, 우르릉….
날씨가 좋지 않았다.
먹장구름이 사방에 뭉쳐 있어 하늘을 올려다보기가 방해되었다.
나는 얼핏얼핏 보이는 구름의 틈새를 보며 천기를 읽었고, 내 천기에 나를 추적하는 이들이 많이 따라붙었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성가시겠군.'
물론 그것뿐이었고, 딱히 그 외에 감흥은 없었다.
합체기 태수들은 딱히 나를 쫓고 있지 않았다.
고작해야 원영기 대원만 수준이라 생각하고 잘해 봤자 천인기, 최대 전력을 보내 봤자 사축기 초기 수준의 추격자들만이 나를 쫓아왔기에 도망치는 데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현 시점에서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저기 슬슬 보이는군….'
나는 눈을 찌푸리며, 저 앞에 보이는 '마계의 입구'를 노려보았다.
진마계와의 전쟁이 슬슬 시작될 시점.
내가 회귀하며 생겨난 소소한 나비 효과들에 따라, 진마계 전쟁의 시기는 지난 생과 조금씩 달라졌지만 전쟁 자체는 분명히 일어났다.
그리고, 현 시점에서, 인족은 진마계의 입구를 뚫고 들어가 막 진마계를 점령하기 시작한 상태였다.
나는 진마계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두 명의 사축기 수사들을 바라보았다.
봉래궁주 헌원의 명에 의해, 나는 인족 전체에 수배가 되어 버렸고, 아마 저곳으로 지나가면 사축기 수사 둘에게 제지당할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둘을 뚫고 가야 한다.
'연위는 저 너머에 있으니까….'
연진에게 연락해서 그를 헌원에게 보여 줄 그 시점.
그 시점에서 연진과 연위는 진마계에 진입하기 직전이었고, 헌원이 연위를 알아차린 직후 진마계 침공이 시작되어 진마계로 도망쳤다고 했다.
뒤늦게 인족 총연맹 측에 헌원의 요청이 들어가 연진을 잡아들이려 했으나, 여기까지 오는 길에 듣기로는 연진은 이미 진마계에서 행적이 묘연해진 모양이었다.
'일단 진마계로 가서 그녀와 이어진 전음부를 통하면 위치를 알 수 있겠지.'
연진이 진마계로 넘어간 이후에는 차원간의 거리 때문에 전음부가 통하지 않았지만, 나도 진마계로 넘어가면 전음부를 통해 위치를 식별할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저 둘을 돌파해서 진마계로 넘어가는 건데….'
사실 사축기 둘 정도는 문제가 없었다.
서 장군이 한 명, 내가 한 명씩을 맡아서 처리하면 충분히 처리하고 넘어갈 자신이 있었으니.
문제는 그로 인해 내 전력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내가 최소 사축기 중기 두 명분의 힘을 가지고 있단 사실이 드러나면 수배 금액이 미친 듯이 올라갈 터고, 천인기 수사들이나 조금씩 쫓아오던 상황에서 사축기 수사들이 나를 바글바글 쫓아올 가능성이 생긴다….'
물론 금신천뢰문에서의 난동과 헌위를 상대한 내 전력이 퍼져 나가면 점차 사축기 수사들이 달려들 테였지만, 그건 말 그대로 '점차' 일어날 일이었고, 벌써부터 그런 전력들이 우르르 나를 쫓아오는 그런 짜증 나는 일만은 피해야 했다.
'연위가 진마계로 갔다는 정보가 이미 인족 총연맹을 통해서 봉래궁에 전해졌을 테고, 봉래궁은 금신천뢰문과 정보를 공유하면서 나를 쫓을 테니, 나를 쫓아 진마계로 올 가능성도 높다.'
서둘러 가지 않으면 봉래궁과 금신천뢰문에서 나를 추격하기 시작할 터였다.
'어떻게 저 둘을 넘어 진마계 입구를 넘지?'
월수궁무록을 쓰기에는, 두 명의 사축기 수사가 각자의 축(軸)을 연계해서 기축장막 비슷한 것으로 차원문을 덮고 있었다.
단순한 월수궁무록으론 장막 안쪽까지 속이긴 힘들었다.
'어떻게 하지?'
내가 고민할 때였다.
[주인님, 저 사축기 수사들을 넘어가려 하십니까?]
"아, 홍범."
나는 내 도원도에 들어 있는 홍범이 말을 거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 뭔가 방법이라도 있느냐?"
[흠… 주인님께오서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저 장막을 넘고자 하시는 듯합니다만… 맞습니까?]
"그렇다."
[하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허어? 어떻게 말이냐?"
스르륵!
홍범은 생물체를 보관하는 종류의 저물도인 도원도에서 빠져나왔다.
"일전에 홍 원로님의 인체 실험 일지를 보고 알아낸 사실입니다만, 사축기 수사의 기축장막은 의식 영역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합니다."
"음, 그렇겠지."
"그리고 홍 원로님의 인체 실험 내용에 따르면… 인족의 의식 영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인족의 뇌. 그중에서도 뇌의 앞쪽 전두엽 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래, 그렇긴 하다만…."
"제가 배합한 독이라면, 일순간 인족의 전두엽 부분에 큰 손상을 끼칠 수 있습니다. 사축기 수사들이라면 호흡 몇 번에 바로 회복할 정도의 독입니다만, 내성이 없는 이상 한 번은 무조건 통합니다."
"호오…."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하독(下毒)의 과정이 중요하겠군."
"그렇습니다. 상대는 사축기 노괴들이니, 하독 과정에서 상대가 알아차리고 독 자체를 막아버리면 답이 없지요."
"좋다, 그럼 하독은 내가 하지."
"계획은 있으십니까?"
"그래, 일단…."
나는 홍범과 상의하며 독을 하독할 계획을 세웠고, 얼마 후, 실행에 들어갔다.
처억!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나는 대놓고 우선 사축기 수사들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진마계로 가려는 거냐? 인족 총연맹에서 통행증은 부여받았… 잠시만, 네놈, 봉래궁에서 수배한 녀석이 아니더냐?"
"예, 맞습니다."
당당하게 밝히며, 나는 빙긋 웃었다.
계획의 첫 단계.
우선 봉래궁에서 수배한 내 얼굴을 대놓고 드러내서 그들의 주의를 끈다.
'두 번째.'
백란축성문의 축문에 홍범의 독을 섞어, 월수궁무록으로 숨긴 후 내게 주의가 집중된 사축기 수사들에게 흩뿌린다.
"헛, 네놈 우리에게 뭘 한 거냐!"
사축기 수사들은 내게 집중하고는 있었으나, 자신들의 장막 안쪽에 내 월수궁무록으로 감싼 술법이 들어오자 바로 알아차리며 경계했다.
'세 번째.'
하지만, 그들은 내 백란축성문을 알아차리고도 바로 백란축성문을 몰아내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절대다수의 생명체는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받아들이고, 불이익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생명체의 당연한 본능이었다.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절대다수의 생명은 '저주'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차단하려고 해도 '축복'의 형식을 띤 것은 본능의 차원에서 저항 없이 받아들이기 마련이었다.
헌위가 내게 태산열제공의 일격을 사용할 때, 그녀의 음양오행의 구속 술법이 '축복'의 형식을 띠자 내가 쉽사리 저항하기 어려웠던 것처럼.
오히려 웃는 얼굴에 침을 못 뱉는다는 속담처럼.
축복이야말로 가장 떨쳐 내기 힘든 술법 중 하나였다.
"이건, 축복…?"
"힘이 강해지고 있… 크허억!"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독(毒)이었다.
그 틈새를 타, 홍범의 독이 두 사람에게 흘러 들어갔다.
홍범의 말마따나 생명력이 극점에 달한 사축기 수사들이라면 몇 호흡 만에 전부 해독해 버릴 정도의 독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우우웅!
둘의 전두엽에 충격이 가해지며, 의식 영역이 흔들렸고 곧이어 두 사축기 수사가 힘을 합쳐 펼친 기축장막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찰나.
일반적인 원영기 수사라면 절대로 잡아내지 못할 정말로 찰나의 틈새였지만, 그것으로 되었다.
부웅!
나는 사고를 극한으로 가속시키며 비둔술, 요수의 활공술을 전부 사용하며 장막의 틈새로 달려들었다.
두 사축기 수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나는 그 찰나를 지나쳐 차원문을 넘어서는 데에 성공했다.
'됐다!'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원영기.
잘해 봐야 천인기 수준의 힘만으로 사축기 수준의 경계를 돌파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었다.
이걸로 내 전력이 노출돼서 사축기 수사들이 나를 우르르 쫓아올 가능성도 크게 줄어들었다.
"됐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뒤쪽의 차원문을 쳐다보았다.
차원문 너머로 사축기 수사들이 쫓아오려는 기색이 보였으나, 나는 그들이 진마계로 넘어오기 전 그대로 월수궁무록을 써 존재감을 지우고, 진마계의 인족 점령지를 벗어났다.
"훌륭하구나, 홍범."
나는 홍범과의 합작에 흡족한 기분을 느끼며 미소지었다.
내가 사축기 둘을 따돌렸지만, 그 둘은 그것을 내 실력이 아닌 독 따위의 '얄팍한 수' 정도로 인식할 터였고, 지금 당장 내 전력이 탄로 나지는 않을 테였다.
"이렇게라도 주인님께 도움이 될 수 있어 기쁩니다."
"하하, 넌 언제나 내게 도움이 되어 왔다."
나는 홍범을 칭찬해 주며, 전음부를 꺼내들었다.
이제, 연위를 다시 만날 때였다.
* * *
진마계.
오음곡(汚陰谷).
그곳은 질척질척하고 불순한 마기가 모여 늪을 이루는 곳이었으며, 그 덕에 진마계에서도 더럽기로 정평이 난 종족들이 모여 사는 장소였다.
그리고 그 덕에 진마계는 물론이고, 진마계를 침공한 타 계면의 침략자들 역시 오음곡만은 내버려 두는 편이었다.
한 마디로, 오음곡은 진마계에서 눈에 띄지 않는 일종의 쓰레기장인 셈이었다.
파아앗!
나는 비둔술을 쓰며 오음곡의 상공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마나 오음곡의 위쪽에서 기다렸을까, 저 멀리에서 신호가 왔다.
연위의 신호였다.
파아앗!
나는 비둔술을 사용해 곧장 그녀의 신호를 따라갔다.
얼마 후.
오음곡에 있는 무수한 계곡 중, 눈에 띄지 않고 음기가 자욱한 계곡의 위쪽.
그 위에 도착한 나는 계곡 안쪽에 있는 틈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틈새로 들어가자, 얼마 후 주변의 환경이 마구 변화하기 시작했다.
진법이었다.
촤르르르륵!
내가 발을 디디자 진법은 천변만화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내 앞으로 길이 열렸다.
나는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갔고, 곧이어 조금 전의 오음곡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청량하고 깨끗한 영기가 풍기는 도원(桃園)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왔느냐."
나는 도원의 한 곳에 있는 누각을 보았다.
그곳에는 연진의 몸을 빌린 연위가 가부좌를 틀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위는 나를 보다가 내가 들고 있는 천뢰번을 보며 흠칫 몸을 떨었다.
"이런 미친… 천뢰번의 봉인이 왜 한 겹 빼고 다 풀려 있는 게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천뢰번이 혼자서 어찌어찌 봉인을 푼 것 같습니다."
연위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4만 년 전과 같은 일이 일어나려는가…."
"…? 무슨 얘기십니까?"
"…알 것 없다. 그보다도 원래는 연진과 내 안위만이 중요했다만… 천뢰번이 그 꼴이 된 걸 알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겠구나. 본래는 그냥 널 버리고 마계 깊숙한 곳에 들어가서 유유
자적하게 살려 했다만… 특별히 도와주도록 하지."
"예…?"
스르르―
그녀가 손을 휘젓자, 도원 전체에 걸려 있던 어떤 진법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가 무슨 짓을 획책했는지를 알아채고 어이가 없어져서 입을 벌렸다.
방금 그녀가 해체한 진법은 봉인 계열의 진법이었다.
즉, 그녀는 원래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후 나를 봉인해 버리고 연진의 몸으로 도망칠 예정이었다는 뜻이었다.
"이 무슨… 안 그래도 태수에 대해 호언장담했던 것부터 이상했습니다만…. 저랑 장난하십니까?"
"미안하구나. 그래도 결과적으로 네게 협력하기로 했으니 된 거 아니냐."
나는 그 태연한 태도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참으로 태연하십니다. …그리고 어쨌든 선배님의 호언장담을 믿고 연진을 내세웠습니다만.
결국 태수의 눈에 들키지 않았습니까?"
그랬다.
내가 아무리 맹한 부분이 있다곤 했지만, 연위가 헌원의 정인을 잡아먹었다는 얘기를 듣고
도 그녀가 들어간 연진을 헌원의 앞에 드러낼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모두 연위가 자신은 연진의 영혼 깊숙한 곳에 숨어 있을 것이며, 화상으로만 대면한다면 절대로 태수가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연위는 합체기 태수인 헌원에 대해서 나보다는 잘 알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녀의 말에 호언장담을 믿고 화상을 통해서 연진과 헌원이 대면하게 해 주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이 꼴이었다.
연위는 혀를 차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다만 헌원에 대한 건 내 원영에 대고 맹세한다만, 너를 속인 게 아니다. 헌원 그 녀석에게 그런 재주가 생겼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예전에는 없었던 강력한 영안(靈眼)을 개안했을 줄은…."
"영안 말입니까?"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말했다.
"그런 신통을 익힐 줄 아예 예상 못 하셨단 겁니까?"
"그래. 그 녀석을 가장 최근 대면했던 것은 5백 년 전 인족 총연맹 회의에서였다. 나 역시 준 합체기 태수 자격으로 참여했다만, 그때는 분명 녀석에게 그런 신통이 없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확인이라도 해 보셨습니까?"
"그래. 5백 년 전에 만났을 때 녀석이 내 사지를 뽑으려 들길래 내가 놈의 두 눈알을 후벼 파 줬거든. 그때 파 봤을 땐 눈알에 특별한 것이 없었었다."
"…."
"5백 년 만에, 투영을 통해서 수천 리 밖에 있는 연진의 혼 속에 숨어든 나를 바로 알아차리는 말도 안 되는 영안 신통을 익혔다는 게 말이나 된다 생각하느냐? 당연히 상식 밖의 일이라 괜찮을 줄 알았단 말이지."
나는 둘의 관계에 머리가 아파져 오는 게 느껴졌다.
"그 정도로 그분과 사이가 나쁘다면, 어떻게 여태껏 그분에게 살해당하지 않은 겁니까? 그리고, 그분이 건곤성에서 벗어나 선배님을 직접 쫓아올 가능성은 없습니까?"
"흐흐, 그럴 일은 절대 없다. 내 장담하지."
연위는 음충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4만 년 전 헌원을 상대할 때, 내 수행을 깎아서 녀석에게 저주를 걸었었다. 놈의 체내에 있는 태극의 기운을 내 태극진뢰신으로 완전히 뒤틀어 꼬아 버려서, 녀석을 빈사 상태로 몰아갔던 적이 있지. 그 덕에 원래 합체 중기였던 녀석을 사축기 수준까지 끌어내리는 데에 성공했었다. 그리고 녀석이 건곤성주로 있는 이유는, 건곤성의 특수한 기운만이 녀석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에 건곤성주의 위에 앉은 것이다. 그때의 치명상을 전부 회복해서 꼬인 태극의 힘을 회복하기 전까지, 녀석은 절대 건곤중역을 벗어나려 하지 않을 것이야."
"…그건 다행이군요."
다행히 합체기 태수 헌원이 직접 연위를 쫓아오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일이 이렇게 꼬이게 되어 원래 계획대로 비선대를 통해 수계로 돌아갈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본래는 헌위의 도움을 받으려 했습니다만 그것도 안 되게 되었고 말입니다."
"흠, 마계에서 공령지를 찾아야 하는 건가…."
"공령지의 위치는 제가 압니다."
"호오?"
내 말에 연위는 희색을 보이며 말했다.
"그럼 뭐, 굉장히 잘 됐구나. 바로 공령지에 찾아가서 수계로 내려가면 되겠군. 공령지의 위치가 뭐 진마계 태수의 안방 그런 곳만 아니면야…."
"다행히 저희도 찾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뭐가 문제지?"
"천인기 수사가 없잖습니까."
내 말을 들은 연위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네가 천인기에 오르면 되잖느냐. 천지영기가 부족한 것이라면 인근 인족 점령지에 몰래 숨어들어 천인기에 오르면 되는 게 아니냐?"
"…그에 대해서 할 말이 있습니다만…."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천인기에 오를 수 있는 조건은 전부 충족했다고 생각합니다. 금신천뢰문의 원로들에게 천인기의 깨달음을 전부 들어 이해했고, 천인기에 오를 때에 간직할 '마음' 역시 단련해 왔습니다."
"그럼 뭐가 문제인 거냐?"
"천인기에 오를 수가 없습니다."
연위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천인기에 오를 조건을 전부 갖췄음에도, 천인기로의 승급이 되지 않는단 겁니다."
체내의 소우주와 체외의 자연을 연결하는 깨달음은 전부 소화했다.
어찌 승급하는지 구결도 전수받았고, 대자연의 격류로부터 정신을 지킬 광기도 철저히 정신에 덧칠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천인기에 도전하려 하면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아무리 천지영기를 끌어모아도 체내와 체외의 천지영기가 섞이지 않았다.
칠성제 때처럼 하늘이 방해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천인기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천지영기를 끌어모아 소우주를 자연과 연결시키려 해도 묵묵부답이었다.
"혹시 이런 경우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나는 혹여나 연위가 이런 경우에 대해 알까 싶어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리고 뭔가를 고민하는가 싶던 연위는 얼마 후 흠칫 몸을 떨며 나를 쳐다보았다.
"…짐작 가는 게 있긴 하다. 나 역시 고사(古事)로나 들어본 적 있는 일이긴 하다만…."
"…!"
나는 황급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천인기에만 오를 수 있다면, 그게 가장 확실한 해법일 터였다.
그러나, 이어진 그녀의 말은 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너는… 이미 천인기다. 그것도 천인기 대원만."
"…예?"
천겁 (8)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내가 천인기라고?
그것도 천인기 대원만?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우선 천인기에서 하게 되는 수행의 요체를 생각해 보거라. 네가 천인기에 오르며 만들었던 광기의 씨앗을, 점차 키워 나가며 네 원영 자체를 광기의 씨앗으로 성장시켜 나가는 것이 천인기 수행의 요체라 할 수 있지. 여기까지는 알고 있겠지?"
"예, 그렇습니다."
천인기는 지금까지 거쳐 왔던 경지 중에서 가장 마음 수련이 중요시되는 경지였다.
"그리고 천인기 대원만에 달하면 원영의 안에 네가 추구해 온 광기, 그 광기의 극점이 원영 안에 가득 차게 된다. 한데 간혹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한다. 천인기에 이르기 전부터, 너무 심각하게 미쳐 있어 원영기 수준에서부터 원영이 광기로 충만한 경우."
"…."
"천인기는, 상징으로 생각하면 사상(四象)의 태극을 생각해 보면 쉽다. 태음, 태양, 소음, 소양이 사상의 태극이지?"
"그렇습니다."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말하자면, 천인기에 오르는 과정은 태양(太陽)의 중심에 소음(小陰)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쉽다. 혹은 반대로 태음(太陰)의 중심에 소양(小陽)이 있거나."
우우웅!
그녀가 허공에 양손에 사상의 태극을 띄웠다.
태극의 형상 안쪽, 그 안에 각 태극의 색과 반대되는 색상의 기운이 작게 들어간 태극의 형상이었다.
"큰 부분이 천지자연이라 한다면, 작은 부분은 천인기에 오를 때 모으는 광기의 씨앗이다. 체내의 소우주와 천지자연을 연결하여 소우주에 천지영기를 받아들여야 천인기에 오르는 거지. 너 자신을 그릇으로, 광기의 씨앗의 그릇의 중심으로 천지영기라는 물을 채워 넣어야 천인기에 오를 수 있다면 현재 너는 이런 상황이다."
우우웅!
그녀가 태극에 있는 태양과 태음의 중심.
소음과 소양의 부위를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태극의 중심에 있던 자그마한 원이 커지고 커져, 아예 태극보다 커져 버렸다.
"이미 너라는 그릇 안쪽에 광기가 너무 가득 차 있어서 천지의 힘이 들어올 틈이 없는 게지."
"…."
"그런 경우에만이 광기가 가득 차 있어, 원영기 대원만에서 '그냥' 천인기로 올라갈 수 없다고 하더구나."
"…천인기 대원만이란 뜻은 그럼…."
"이렇게 천지영기와 광기의 비율을 잘 맞춰 천인합일을 맞춘 후."
우우웅!
연위는 다시 손 안쪽의 천지영기를 조작해 사상의 태극을 만들었다.
사상의 태극이 회전하며, 점차 그 크기가 커졌다.
회전하며 거대해진 태극은 어느덧 소음과 소양의 크기가 원래의 태극보다도 더더욱 커져 있었다.
"천지영기와 광기의 비율을 맞춰 성장시킨 광기의 크기와,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광기의 크기가 비슷하거나, 혹은 더 크다는 말이다."
"…."
"원영기 대원만 수준에서 이미 천인기 대원만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인 수준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니, 너도 참 파란만장하게 살았나 보군…. 쯧쯧."
그녀는 혀를 차며 내가 불쌍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나는 그녀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어떻게 해야 내가 천인기에 오를 수 있는지를 물었다.
"간단하잖느냐. 천인기 대원만이 천인기 초기 수준의 힘으로 경지를 올리려 하니 문제가 발생하는 거다. 천지영기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끌어모아라."
"…하."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제가 이미 가지고 있는 광기의 양에 맞게 비율을 맞춰 천지영기를 끌어모아야 천인기로 승급이 가능하다는 겁니까…?"
"그래. 하도 특이한 경우라 나도 고사로만 들었지, 직접 보는 건 네놈의 경우가 처음이다."
"…."
그녀의 말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본래 자기 객관화가 힘들다지만, 나는 내가 어느 정도로 미쳐 있는지 정도는 대강 알고 있었다.
'내 광기에 맞는 수준의 힘을 끌어모아야 천인기 승급이 가능하다고?'
지금까지는 천인기로 승급할 때 광기는 문제가 없다고 여겼다.
내가 얼마나 미쳐 있는지는 나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도리어 그 광기가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내 광기에 맞춰서 천지영기를 끌어모아야 하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천지영기를 끌어모아야 한다는 말인가.
* * *
며칠이 지났다.
결국 내가 상정하는 정신 나간 수준의 천지영기를 모으려면, 사축기 대원만 수사를 두세 명 이상은 죽여서 그 수행을 뽑아야 얼추 이 미친 천지영기의 양을 감당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어떻게 내 광기를 이렇게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가.
그야 간단했다.
내가 미쳐 있는 것은 나의 삶.
그리고 나의 삶의 족적은 만상인연도를 통해 끝없이 기록된다.
즉, 만상인연도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의 수가 곧 내 광기의 크기였다.
'불가능한 일이다.'
사축기 수사는 이미 그 자체로 작은 천지자연이나 다름없는 경지였다.
천지자연 그 자체를 통째로 들이키는 수준이 아니라면 천인기에 오르는 게 불가능하단 소리였는데, 그 정도의 힘을 모으려면 진법으로 천지영기를 끌어모아도 최소 6백 년은 족히 걸릴 일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은 천인기에 오를 수 없으니, 계획을 바꿔야 했다.
'천인기 수사를 구해서 수계로 내려간다.'
그렇다면 나를 도와줄 우호적인 천인기 수사는 어디서 구하는가?
답은 정말로 간단했다.
"결국 선배님이 힘을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흐음. 어떻게?"
나는 연위를 바라보며 품에서 살덩이를 하나 꺼내 허공으로 던졌다.
철퍽!
살덩어리는 허공에서 터지더니, 그대로 원유로 변화하였다.
연위는 원유의 모습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꼭두각시에 태극진뢰신을 익히게 한 건가…."
"그렇습니다."
"흠, 저기에 나보고 들어가서 너를 수계로 데리고 내려가란 소리로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연위는 고개를 저었다.
"단기간에는 무리다. 애초에 내가 왜 다른 녀석이 아닌 후손인 연진의 몸에 빌붙어 있겠느냐."
"다른 몸으로 갈아타 본 적이 없어 모르겠군요."
"파장이 안 맞기 때문이다. 마도 계열 수도자들이 몸 갈아타기를 할 때 자기 자신의 피륙으로 만든, 네가 부리는 류의 꼭두각시를 쓰거나 자신의 후손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자신들의 후손이야말로 자신의 영혼과 파장이 비슷하여 혼백이 들어가기 쉽기 때문이지."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 꼭두각시는 애당초 다른 놈의 피륙을 기반으로 만든 꼭두각시라 파장이 안 맞을뿐더러, 더군다나 이전에 마공까지 익혀 놓아서 더더욱 나와 파장이 맞지 않는다. 잠시 들어가서 힘을 부리는 정도라면 몰라도 그 안에 들어가서 천인기 급의 신통을 제대로 부리려면 파장이 나와 더더욱 잘 맞아야 해."
나는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문득 한 가지를 눈치챘다.
"선배님께서는, '단기간에는' 무리라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장기간'으로 가면 파장을 맞출 방도가 있으시다는 겁니까?"
"그래, 뭐… 그 안에 들어가서 꾸준히 내 혼백과 파장을 동일시시키면 언젠가는 가능하겠지."
나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 동일시의 과정을 단축시키는 방법은 혹시 있습니까?"
"있긴 하다. 다만 어마어마한 양의 생명력이 필요하지. 사축기 급의 내 의식으로 파장을 일순간 강제로 맞춰 버리는 것이기에, 내가 깃드는 육체가 순식간에 생명력이 쇠하여 죽어 버릴 가능성이 있으니 말이다."
"그거라면…."
"참고로, 그 꼭두각시가 마공을 익혀서 생명력이 강하니 뭐니 하는 소리는 하지 말아라. 그 꼭두각시의 생명력으로도 부족할뿐더러, 애초에 나와 그것의 파장이 안 맞는 이유 중 하나가 그 마공 때문이다. 꼭두각시의 생명력을 보충시키려 마공을 더 성장시키면 그만큼 나와의 파장이 더더욱 반발할 뿐이니."
"아니, 그게 아닙니다."
"흠?"
"마공이 아니더라도, 순수하게 이 혈체의 생명력을 증폭시킬 방법이 있습니다."
"호오, 네 생명력이라도 나눠주려는 게냐?"
"더 좋은 방법이지요."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방법을 말했고, 내 설명을 들은 그녀는 잠시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하지만 네 방법대로 하려면 정공법으로 파장을 맞추는 것은 아니어도,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하다. 거기다가 눈에 띄는 방법이라 높은 확률로 인족에 알려질 테고, 너를 잡으려는 떨거지들이 잔뜩 달려들 법한 방법이고."
"얼마 정도가 걸리리라 예상하십니까?"
"못해도 10년. 10년은 필요하다. 10년간 버틸 자신은 있느냐?"
"모든 힘을 드러낸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이지?"
그녀의 불신 어린 눈빛에, 나는 내가 숨기고 있던 패를 보여 주었다.
스릉―
내가 무형검의 기운을 확연하게 드러내자, 연위는 께름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심족…!? 이런 빌어먹을. 그렇군. 도대체 어떻게 수십 년밖에 안 살았을 어린 원영기 대원만 따위가 그런 광기를 가지고 있었나 했다만… 심족이었다니. 아니, 그보다, 네가 심족이란 걸 들켜 버리면 사축기 수사들이 대거 나설 게 분명하잖느냐!"
"괜찮습니다. 절대 안 들킬 자신이 있으니까요."
슈칵!
나는 그대로 인지를 베어 내며 연위의 앞에서 사라져 보였다.
사축기의 의식을 지닌 그녀 역시 나를 찾기가 힘들었는지 애를 먹는 느낌이었다.
"…뭐, 좋다. 심족이니 뭐니 이전에 아예 존재 자체를 느끼기 힘드니 심족인 것은 들키지 않는다 치자. 하지만 그래도 네가 10년씩이나 버틸 수 있단 소리냐? 사축기 수사들이 몇 명이나 달려들지도 모르는데?"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어떻게?"
나는 말없이 그녀에게 서 장군을 보여 주었다.
서 장군의 위력을 본 연위는 잠시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해 보도록 하지."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4만 년 전과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천뢰번을 돌려놓겠다. 어떻게 해서든…."
그렇게, 나와 연위의 계획이 시작되었다.
* * *
쿠구구궁!
나는 토둔술을 이용해 땅을 헤집으며,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투명한 호수가 존재하는 수정 동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깨끗한 수정 동굴 위쪽.
그곳에 연위와 내가 도착해 허공에 떠서 아래를 바라보았다.
"이곳이 마계의 공령지인가?"
"예, 이 인근에서 시작해 주시면 될 듯합니다."
"오냐. 그나저나 진아에게는 미안하게 됐군."
그녀가 천뢰번의 현재 상태에 심각성을 느끼고, 나를 제대로 돕기로 한 후, 그녀는 한동안 연진의 몸을 차지한 채로 생활하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내 뒤통수를 치려 했던 연위에게 오행혈주번이나 기괴고를 박아넣고 싶었지만, 그녀 역시도 원영에 대고 천뢰번을 제대로 해결할 때까지는 나를 돕겠다 했으니, 지난 생의 연진과의 친분을 생각해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믿어 주기로 하였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품에서, 인족 점령지에서 훔쳐 온 광한옥을 꺼냈다.
그리고 인근의 마맥(魔脈)이 위치한 곳에 광한옥을 박아 넣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광한옥이 마계의 대지를 침식하며, 마기가 가득한 마계의 땅을 영기로 오염시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일대의 천지마기가 천지영기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연위는 공령지 옆.
용맥이 모이는 부근에 앉아, 내가 알려 준 '규토장성공'의 공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연위의 바로 앞에 원유를 앉혀 원유에게도 규토장성공을 익히게 하였다.
점차 그녀가 규토장성공의 구결에 따라 인근의 용맥을 장악해 갔고, 그녀는 용맥을 제어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진법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녀가 오음곡의 근거지를 숨기기 위해 사용했던 진법을 비롯해, 존재를 숨기는 진법을 겹겹이 펼치기 시작했다.
지난 생에선 인족의 점령지였던 지역 일대가 연위의 진법에 의해 가려지기 시작했다.
"자, 그럼 네가 말한 진법의 구조를 다시 말해 봐라."
"예, 장생진(長生陣)의 진도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장생진(長生陣).
청문령과 함께, 장생과를 성장시키기 위한 진법을 제작하고자 만들어 낸 진법으로, 인근의 용맥을 끌어모아 축적해 생명력으로 전환시키는 진법이었다.
나는 진법의 일부분을 변형해, 나무에게 적용되는 부분을 '연위'와 '원유'에게 적용하도록 전환하였다.
'됐다.'
이대로 10년만 천지영기를 축적하면 연위가 원유의 몸을 차지하며 강제로 파장을 맞출 때, 원유의 몸이 버틸 정도의 생명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연위가 원유의 몸에 들어가 천인기 급의 신통을 발휘해 나를 데리고 수계로 가면 그때에 천뢰번을 수계에 봉인한다는 계획이었다.
'인족의 침략군이 이 공령지가 있는 곳까지 점령군을 끌고 오려면, 현 인족 침략군의 진군 속도를 볼 때 3년은 걸린다.'
하지만 3년은 너무 짧다.
인족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들이 이곳까지 치고 들어오는 시간은 더 걸려야 마땅했다.
'인족의 발목을 최대한 붙잡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총동원해서, 반드시 더더욱 느리게 오게 할 것이다.
우득, 우드득, 우득….
나는 나무 인형들을 만들어, 그 자리에서 괴뢰로 개조하며 시간을 보냈다.
'앞으로 최소 3년.'
그 기간 동안, 원영기 괴뢰 군단을 만들어 낸다.
괴군의 괴뢰 회로를 깔아놓은 양산형 서 장군들을 너무 많이 만들면, 기묘성채의 회로와 같은 효능이 발생해서 정신이 광기에 침식당할 터였다.
그렇기에 본래 양산형 서 장군을 만들어도 일정 개수 이상은 만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제한 따위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최소 3년의 기간 동안,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전쟁과 더불어 그 3년의 기간을 늘릴 방법을 강구한다.
나는 그렇게 굳게 다짐하며, 준비를 이어 나갔다.
그렇게 5년 반의 시간이 지났다.
* * *
끼이익….
어두운 밀실 안.
밀실의 문이 열리고, 금색 장포를 입은 여인이 밀실로 들어왔다.
"전명훈, 드디어 찾았어."
희색이 도는 얼굴로 전명훈을 찾는 금소해는 어둠 속을 향해 말했다.
"최근 괴군의 기묘성채가 지족 진룡맹과 전쟁을 벌인다 어쩐다 하는 사건 때문에 찾기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결국 서은현의 꼬리를 잡는 데에 성공했어!"
다음 순간.
저벅, 저벅….
어둠 속에서 금색 장포를 입은 남성이 걸어 나왔다.
"정말이야, 소해?"
"응. 최근 용족을 전부 사냥하겠다고 날뛰는 괴군과 관련됐다는 정보조의 예측과는 정반대로, 진마계 측에 있었다고 해. 그동안 괴군 측에서 발견했던 서은현에 대한 애매한 흔적들보다 훨씬 확실한 증거야."
"진마계…!"
금색 장포의 남성, 전명훈은 금소해가 건넨 서한들을 받아들고 살폈다.
"…그렇군. 진군하는 인족 대군과 충돌했다고?"
"그래."
"…때가 됐어, 소해."
전명훈의 눈이 번뜩였다.
"배반자를 잡으러 갈 시간이야."
콰지지직!
전명훈은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붉은 뇌전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금소해는 경이로운 눈으로 전명훈을 바라보았다.
지난 5년간.
전명훈은 원영기 대원만에 오르는 데에 성공했다.
천겁 (9)
마계 입구.
그곳으로 붉은 둔광이 날아들었다.
이내 둔광 속에서는 금포를 입은 전명훈이 나타났다.
얼마 후, 전명훈을 따라 그의 뒤쪽으로 원영기, 혹은 천인기 수준의 금포 수사들이 속속들이 나타났다.
금신천뢰문의 서은현 추적대, 천인기 원로 22인 원영기 장로 40인, 전명훈까지 포함해 도합 63인의 인원이 진마계의 차원문 그 입구에 도달했다.
얼마 후, 감색의 장포를 입은 수사들 672인이 뒤이어 내려앉았다.
사축기 급 수사 2인, 천인기 급 수사 203인, 원영기 급 수사 467인.
전원 봉래궁의 사자 급 인원이었고, 봉래궁주 헌원의 자식 17명 역시 전원이 동행하였다.
뒤이어 또다시 한 무리의 수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각각이 다른 복색을 하고 있었다.
원영기 급 수사 13인, 천인기 급 수사 23인. 사축기 수사 1인. 총 37인의 수사들이었다.
전명훈은 모인 수도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 모인 것 같군. 금신천뢰문, 봉래궁, 그리고…."
전명훈의 시선이 37인의 수사 무리에게 향했다.
"용병들까지. 이상이 '서은현 토벌대'의 전원이로군."
주변을 둘러본 전명훈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우선, 본문의 배신자를 잡기 위해 다들 이리 신경 써 주심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순수한 선의가 아닌, 봉래궁에서 건 막대한 현상금을 노리고 오신 분들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여러분들께서 본문의 악적을 잡아 주신다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특히나 악적을 잡는 데에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시지 않아 준 봉래궁주님께 큰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는 봉래궁의 1호법, 헌원의 맏이이자 사축기 초기 수사인 헌량에게 고개를 숙였다.
"궁주님께 전해 드리겠소."
"예. 일단 앞서 본문의 배반자인 서은현을 토벌하러 가기 전, 여러분들에게 서은현에 대한 정보를 뿌리겠습니다."
전명훈은 저물도를 꺼내, 그 안에서 수십 개의 옥간을 꺼냈다.
파아아앗!
그의 손에서 떠난 옥간들이 자리에 모인 수도자들의 손아귀로 날아갔다.
"지난 5년간 저희 금신천뢰문 추적대에서 서은현에 대해 조사하며, 녀석의 능력에 대해 조사한 자료입니다."
전명훈은 5년 동안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의 옛 동문인 서은현은, 지난 5년간 노골적으로 '괴군'의 곁에 있다는 흔적을 드러냈다.
특히나 괴군의 기묘성채에서 서은현을 봤다는 증언들이 상당히 많이 퍼졌으며, 기묘성채의 서은현이 그 특유의 저주문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짐에 따라 금신천뢰문은 괴군의 동향에 대해 조사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서은현이 그동안 금신천뢰문에 숨겨 왔던 전력에 대해 알아낼 수 있었다.
옥간을 받은 용병 수도자들 중 한 명이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이걸 믿으란 건가? 뇌도공법에 괴뢰술, 저주술, 천지쌍수 수련자에다가 마도공법도 사용할 수 있고, 독공에 능한 요수까지 데리고 다닌다고?"
"그렇습니다. 저희가 조사한 바로는 그런 녀석이며, 심지어 뭔가를 더 숨기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전력은… 사축기 급 전력? 원영기라 하지 않았나? 신빙성이 있는 건가?"
서은현의 전력에 대한 의문에, 봉래궁에서 헌위가 앞으로 나섰다.
"봉래궁의 7호법인 이 헌위가 직접 몸으로 겪어 보았습니다. 놈은 천지쌍수의 공법을 익힌 검수(劍修)로서, 태산열제공에 직격을 맞고도 멀쩡하게 저를 제압했으며, 그 상태에서도 딱히 이 옥간에 수록된 다른 전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녀석의 전력은 최소 사축기 급으로 상정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금신천뢰문 최고의 천재로 백 년도 안 되어 원영기에 오른 귀재인 만큼, 지금은 천인기에 올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흐음, 괴물이로군. 다른 건 둘째치고 원영기 수준에서 천인기 수준의 헌 선자가 펼친 태산열제공을 직격하고도 죽지 않고 도리어 제압했다고? 미쳤군."
용병 무리 중 가장 수행이 높은 사축기 수도자, 위립이 혀를 내둘렀다.
"예, 거기에 진법 지식 및 기초법술에 대한 이해도도 상당해, 분명 선통후각으로 경지에 도달한 것이 분명하건만 선각후통의 방식으로도 싸울 줄 안다고 합니다."
"흐흐, 이거 사냥할 맛이 나겠군."
봉래궁 2호법, 사축기 수사인 헌천이 혀를 핥았다.
전명훈은 그런 그들을 보며 말했다.
"일단 현재 마계에서 인족의 군세를 막아 내고 있다는 서은현에 맞서, 인족의 군대와도 합작할 예정이긴 합니다만…."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 된 일인지 인족 군대 측에서는 천인대 하나만을 지원해 준다고 하니, 사실상 저희끼리 녀석을 해치워야 하는 처지입니다."
"하, 천인대면 천인기 수사 한 명에 원영기 수사 열 명인가? 있으나 마나 한 전력이로군."
"그렇습니다. 사실상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이 이번 서은현 토벌대의 진짜 전력입니다.
그리고, 앞서 설명드렸듯이 본문의 배신자 서은현은 이 정도로 흉악한 강자입니다. 그렇기에 서은현을 토벌하기에 앞서, 토벌대를 지휘할 통수권자를 정하고 진입했으면 좋겠습니다만?"
전명훈의 말에 용병 무리의 사축기 수사인 위립, 봉래궁의 1, 2호법인 헌량, 헌천이 앞으로 나섰다.
"그럼 우리 중에서 통수권자를 정하면 되겠군."
"맞는 말입니다, 형님. 뭐 사실상 봉래궁의 1, 2호법인 저희끼리만 잘 정하면 될 것 같지 말입니다?"
헌천은 위립을 흘끗 보며 피식 웃고는 팔짱을 꼈다.
위립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시는 도련님들이 토벌대장이라니, 그래서는 안 되지. 진짜 생사를 가르는 전투를 해 본 적도 없는 도련님들이 어찌 우리를 이끈단 말이오?"
"하하, 아직 축도 쌓지 못한 무축(無軸)인 주제에 감히 대봉래궁의 호법들과 맞먹으려 하다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헌량은 짐짓 대범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위립을 깔아뭉갰고, 위립과 헌량, 헌천 사이에서 불똥이 튀기는 듯했다.
얼마 후 한 걸음을 물러선 위립이 말했다.
"뭐, 그럼 두 분 호법들께서 통수권을 맡는다고 하고, 둘 중에서 누가 대장이 되실 거요?"
그 말에 헌량은 선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천아, 아무래도 이런 막중한 자리는 1호법인 이 형에게 맡기거라. 너는 너무 어려 일을 그르칠까 두렵구나."
"무슨 말입니까, 형님. 늙고 병드신 형님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드리자니 아우로서 너무 죄송스럽습니다."
두 형제 사이에서 또다시 불똥이 튀기는 듯했고, 위립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둘 사이에 끼어들려 했다.
그때였다.
전명훈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 제 말은 간단하게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토벌대장을 맡기로 하자는 의미였습니다만?"
그의 말에 세 사축기 수사의 얼굴에 각자 미소가 떠올랐다.
"그거 좋군. 그럼 간단하게 여기서 대련이라도 하지."
어느새 위립의 손에는 세 개의 단도가 들려 있었다.
단도에서는 심상치 않은 음기가 흐르고 있었고, 헌량과 헌천 역시 각자 주먹과 다리에 각반이 나타났다.
얼마 후, 세 사람의 사축기 수사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꾸과과과광!
진마계의 차원문 입구.
그 상공 10리 위쪽에서 사축기 수사들의 대련의 여파로 거대한 광구가 나타나며 안쪽의 모든 것을 소멸시켰다.
이윽고, 광구의 안쪽에서 위립이 튕겨 나왔다.
입에서 피를 뿜어내며 튕겨 나온 위립은 헛웃음을 흘렸다.
"빌어먹을 태산열제공… 이따위로 위력이 강할 줄이야."
쿠구구구!
잠시 후 빛이 잦아들며, 허공에는 헌량과 헌천만이 남았다.
두 호법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더니,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각기 양손에 흑백의 선마기가 흐른다.
"태산(太山)!"
"열제(裂帝)!"
일순간, 두 사람의 몸 위로 음양오행의 기운이 떠오르는 듯하더니, 서로를 찢어발길 일격을 뿜어냈다.
다시금 천공이 빛으로 물들었고, 아래쪽으로 헌량이 떨어져 내렸다.
"크, 흐흐…. 역시 순수한 태산열제공의 힘으로는 네게 못 미치는가."
칠공에서 피를 뿜어내며 떨어진 헌량은 쓴웃음을 지었고, 빛무리 속에서 헌천 역시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앙천광소를 지었다.
"흐하하! 형님께서는 푹 쉬시지요. 이번 토벌대의 대장은 제가 맡아 궁주님께 최상의 결과를 전할 것이니."
"쯧, 마음대로…."
그때였다.
"자 그럼, 이제 세 분 중에선 2호법께서 가장 강하단 게 증명되었으니, 2호법님께 저와 대련하실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뭐?"
앞으로 한 발짝을 나선 전명훈의 발언에, 헌천의 눈에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 깃들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네가, 나와 대련하겠다고?"
"잘 들으신 것 같습니다."
"…미친 거냐. 원영기 대원만 주제에, 나는 이미 오행축 중 1축을 쌓은 진정한 사축기 수사다. 네가 태산열제공의 위력을 모르는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만, 제 공법도 태산열제공에 비해 그리 뒤지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전명훈은 비릿하게 웃으며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고, 그의 표정을 본 헌천은 앙천대소를 터트렸다.
"흐하하! 뭐 좋다.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 사내놈이지. 그럼 덤벼 봐라."
헌천은 전명훈을 향해 덤벼 보라는 듯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네가 과연 나를 이길…."
다음 순간.
파직!
전명훈은 헌천이 반응하기도 전 그의 얼굴을 가격하고 있었다.
"뭣…!"
와드득!
전명훈은 금빛 천뢰(天雷)로 이뤄진 창을 헌천의 턱에 꽂아 넣고 있었다.
"크윽, 빠르군…!"
파앗!
비둔술을 써 전명훈의 속도에 대응한 헌천은 곧바로 턱을 재생시키며 손을 뻗었다.
전명훈의 주변으로 음양오행의 기운이 서렸다.
"하지만 태산열제공에 한 번이라도 맞는다면…."
그러나, 음양오행의 기운이 전명훈을 완전히 가두기 전, 전명훈은 음양오행의 족쇄를 빠르게 벗어나서 헌천에게 쇄도해 그의 배에 창을 꽂아 넣었다.
"크윽, 이놈…!"
헌천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속도가 너무 빠르다. 비둔술을 상시 사용해야 겨우 따라갈 수 있겠어.'
파아앗!
헌천의 몸이 비둔술의 둔광에 휩싸이며 빛무리가 되었고, 전명훈의 속도에 조금이나마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영언을 터트리며 헌천이 웃었다.
[뭐, 뇌도공법이 조금 빠른 건 인정한다만, 그래 봤자 이 정도면 따라잡을 수 있다!]
콰지지지직!
전명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붉은 뇌전을 뿜어 댔고, 그의 등 뒤에서 여섯 개의 깃발이 튀어나왔다.
곧이어 육비의 뇌신으로 변신한 전명훈이 깃발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 크기가 커지면 오히려 태산열제공을 펼치기가 쉬워진다는 걸….]
하지만 다음 순간.
콰르르릉!
칠색의 번개가 헌천의 사각을 파고들었고, 헌천은 순간 전신이 마비되어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 틈을 타 전명훈의 벼락이 천지사방에서 쇄도하며 헌천을 노렸다.
'마, 마비가… 제길!'
그는 속으로 이를 악물며 눈을 충혈시켰다.
'이대로면 패배한다! 이럴 순 없어! 아무리 천재라 해도 고작 백 살도 안 된 핏덩이 주제에 나를…! 고작해야 비리비리한 뇌도공법 주제에 본문의 태산열제공을 넘어선다고!? 인정 못 한다!?'
[흐아아아아!]
쿠구구구!
양손에 흑백의 기운을 두르며, 헌천은 이를 악물었다.
[태산열제공은, 초대 봉래궁주께서 산(山)의 신(神)에게 예를 취하여 직접 사사한 신공(神功)이다! 뇌도공법 따위에 지지 않는다!!!]
전명훈은 벼락의 정령이 된 채로 헌천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며 헌천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군. 원래는 이렇게 놀아 줄 생각이 아니었는데, 저 태산열제공이란 걸 보자마자 호승심이 치솟는다….'
마치, 그가 익힌 적뢰천겁공 자체가 태산열제공을 짓밟아 버리라고 성화를 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느낌은 공법을 익히면서도 처음이었기에, 전명훈은 신선한 느낌으로 헌천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 버리며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간다….]
벼락의 정령 그 자체가 된 전명훈이 영언을 터트리며 적뢰천겁의 힘을 극한으로 끌어냈다.
다음 순간, 전명훈은 한 자루의 붉은 뇌창(雷槍)이 되어 양손에 기운을 모으는 헌천의 몸을 꿰뚫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콰지지직!
붉은 번개가 하늘 가득히 만천(滿天)하였다.
그렇게, 전명훈은 일행 중 최강자임을 증명함으로써, 서은현 토벌대의 토벌대장직을 맡게 되었다.
* * *
쿠구구구구!
어두운 마계의 하늘 아래를 수백 명의 수도자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수도자들의 선두에는 붉은 둔광을 흘리며 나아가는 전명훈이 있었고, 그 뒤로는 세 명의 사축기 수사들이 조금씩 불만이 있는 얼굴로 뒤따르고 있었다.
얼마 후, 그들은 마계의 하늘을 활공하며 저 멀리서 날아오는 일단의 무리들을 발견했다.
천인기 수사 1명, 원영기 수사 10명으로 이뤄진 천인대였다.
"인족 원정군에서 지원을 왔습니다. 저 앞쪽 분지의 괴인(怪人) 서은현을 상대하러 가시는 중이십니까?"
"그렇다."
"일단 가며 저희 부대가 서은현에 대해 캐낸 정보들을 드리겠습니다."
전명훈은 천인기 천인장에게 정보가 적힌 옥간을 받아 읽었다.
전명훈이 지난 5년간 조사했던 것보다 조금 더 상세한 정보들이었다.
"…그렇군. 고맙다."
전명훈은 옥간을 뒤쪽으로 넘기며 눈을 찌푸렸다.
옥간에 적힌 서은현의 전력은 그의 상상 이상이었다.
'무엇보다도 독을 다루는 홍범이 제일 까다롭군. 독은 경지가 낮아도 잘못 들이쉬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으니….'
그는 눈을 찌푸리며 지원을 온 천인기 수사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인족 총연맹 측에서도, 마계 점령을 방해하는 서은현은 배신자일 텐데 어째서 토벌하지 않고 지금껏 내버려 둔 거요?"
"아, 사실은 그게 참모부인 흑린어령문 측에서 괴인을 건드리지 말라고 지령이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흠? 그게 무슨 말이지?"
그는 인족 육대종문 중 하나인 흑린어령문이 뜬금없이 튀어나오자 눈을 찌푸렸다.
'봉래궁이 녀석을 추살하겠다고 대놓고 선포했는데, 다른 육대종문인 흑린어령문이 정면으로 반발해? 육대종문 간 전쟁이라도 벌일 셈인가?'
전명훈의 불만을 읽은 것인지, 천인장이 설명을 이었다.
"정확히는, 저희가 괴인 서은현과 맞닥뜨린 시점에서 5년간은 진군에 방해가 되어도 내버려 두라는 지령이 왔다 합니다."
"5년? 인족 군대가 서은현과 맞닥뜨린 게 최근의 일이라 알고 있다만…."
"예, 그렇습니다. 그 전까지는 괴인 서은현의 요수가 살포한 것으로 추정되는 독에 진군 속도가 느려져 그와 만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때문에 다른 천인장, 만인장님들께선 참모부에서 내려온 지령의 시간이 지날 때까지 벼르고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5년이면… 녀석이 본문을 배신한 지 딱 10년이 되는 해군. 흑린어령문은 갑자기 뭐지? 이러면 봉래궁과 직접적으로 반목한 건 아니다만 왜 갑자기 그런….'
그는 속으로 찜찜함을 느끼며, 천인장의 안내에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후, 토벌대의 눈앞에 거대한 산맥이 나타났다.
산맥에는 마계답지 않게 자욱한 영기가 깔려 있었으며, 산맥은 분지의 형태로 인근의 지역 전체를 감싸 안고 있었다.
"저기가 괴인 서은현이 자리를 잡은 지역입니다. 무슨 짓을 하는 건지 광한옥으로 일대를 침식시키곤 안쪽으로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어 원정군에서도 골치를 썩이고 있습니다."
"정보 고맙다. 그럼 우선…."
전명훈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 위로 한 자루의 뇌창이 만들어져 잡혔다.
부웅!
그는 있는 힘껏 뇌창을 투척했고, 뇌창은 산맥으로 날아갔다.
그때였다.
철컥, 철컥, 철컥!
산맥의 땅 아래쪽에서, 갑자기 수십 기의 꼭두각시들이 나타나 입을 벌렸다.
번쩍!
어쩐지 기분 나쁘게 서은현을 닮은 괴뢰들은 일제히 입을 벌려 광선을 내뱉었고, 전명훈의 뇌창은 그대로 광선과 부딪혀 소멸되었다.
"…보다시피 저런 괴뢰들이, 산맥 전체에 바글바글하게 숨어 있습니다. 한 놈 한 놈의 일격이 원영기 수사의 일격과 동급이라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을 뚫기가 매우 힘듭니다."
천인장의 말에 전명훈은 잠시 산맥을 쳐다보다 비릿하게 웃었다.
콰직, 콰지지직!
그의 전신에서 붉은 번개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뭐, 좋다. 쉽게 뚫을 수 있으리라곤 기대도 안 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서은현이지.'
그는 한때, 아득한 벽을 느꼈던 서은현을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지금부터, 본문의 배반자 서은현 토벌에 들어간다!"
콰드드득!
전명훈의 등 뒤로 여섯 개의 깃발이 뽑혀 나왔고, 토벌대는 각자의 본명공법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은현 토벌전이 시작되었다.
천겁 (10)
쿠구구구구!
전명훈과 토벌대가 기운을 끌어올리기 시작하자, 산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뭐야!?"
"이런 미친…."
산 곳곳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빼곡한 숫자의 괴뢰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벌레 떼처럼 바글바글 기어 나오는 무수한 괴뢰 떼에, 다들 질린 표정이 되었다.
"그래 봤자 전부 원영기네. 천인기 수사들이 돌파하도록 하지."
그 말에 금신천뢰문과 봉래궁의 천인기 수사들이 앞으로 나왔다.
천인기 수사들이 각기 결인을 맺자, 인근의 천지영기가 진동하며 천인기 수사들의 의지에
따라 움직여 파도가 되었다.
고오오오―
영기의 파도가 벌레 같은 괴뢰 떼를 향해 날아가자, 원영기 급의 괴뢰들은 저항조차 못
고 그대로 으스러져 죽었다.
"산맥이 일종의 진법을 형성하고 있군요. 산맥 자체를 무너뜨려야겠습니다."
봉래궁의 천인기 호법 세 명이 앞으로 나서, 각자 법술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각자 삼 방위를 점한 세 명의 호법은 삼재진을 짠 후, 삼재진 안에서 기운을 증폭시키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산보다도 아득히 큰 산맥이었고, 산맥에서 느껴지는 기운도 심상치 않았으나, 점차 천인기 호법들의 기운이 증폭되며 산의 기운마저 넘어서려 하기 시작했다.
"거(去)!"
천인기 호법들이 결인을 맺자, 기운은 거대한 용형의 빛무리로 변화하며 산맥을 향해 날아갔다.
쿠구구구구!
산맥과, 산맥을 통해 발현되고 있는 진법이 용형의 기운에 닿자 미친 듯이 흔들리며, 당장이라도 붕괴될 듯 깜빡였다.
그러나 그때였다.
콰드득!
시커먼 형체가 나타나, 용형의 빛무리를 양팔로 쥔 후 그대로 쥐어 터트려 버렸다.
퍼어엉!
빛무리가 사라지고, 전명훈은 시커먼 형체를 바라보았다.
"또 너로군."
산맥 곳곳에서 기어 나왔던 벌레 같은 괴뢰 떼들과 비슷한 외형이었으나, 쓰인 재료가 훨씬 고급스럽고, 공정 과정이 훨씬 복잡한지 몸 곳곳에 복잡한 회로가 은은히 빛나는 괴뢰.
은근히 서은현을 닮은 그 괴뢰, 서 장군이 입을 벌렸다.
콰아아앙!
서 장군의 입에서 빛무리가 터져 나가, 토벌대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흠!"
헌천이 앞으로 나가 손을 내밀었고, 서 장군의 광선을 막아 냈다.
빛무리가 헌천의 손에 맞고 사방으로 갈라진다. 헌천은 눈을 찌푸렸다.
"꽤 아프군. 괴뢰 주제에 사축기 급 괴뢰란 말인가?"
그러나 그가 무언가 반응하기도 전.
서 장군이 발을 한번 거세게 굴렀다.
쿠우우웅!
거대한 진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듯하더니, 산맥 곳곳이 들썩거리며 또다시 무수한 괴뢰 떼들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헌량은 헛웃음을 흘렸다.
"원영기 괴뢰를 대체 얼마나 만들어 놓은 건가…. 괴물 같은 자로군. 물론 그래도 수도자들에게 인해전술만큼 어리석은 소리도 없지."
헌량의 눈짓에, 봉래궁의 천인기 수도자들이 앞으로 나서 다시금 결인을 맺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부웅!
번쩍!
서 장군의 입에서 다시금 광선포가 발사되며, 원영기 괴뢰들에게 법술을 날리려는 천인기 수사들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헌량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각자 산개해서 원영기 괴뢰들을 노려라. 어차피 저 괴광선도 한 번에 하나씩밖에 발사하지 못한…."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서 장군의 양어깨, 가슴, 배, 무릎, 손바닥 등이 열리며, 서 장군의 머리가 각각 돋아나기 시작했다.
철컥, 철컥, 철컥!
서 장군의 몸 곳곳에 돋아난 서 장군의 머리들은 각자 입을 벌리더니, 사방으로 동시에 광선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피해!"
여유롭던 헌량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고, 그가 천인기 수사들의 앞쪽으로 나가며 힘을 끌어 올렸다.
세 명의 사축기 수사, 그리고 전명훈이 앞으로 나서 서 장군의 광선을 막아 냈다.
"단숨에 이대로 가서 밀어붙이겠소, 모두 나아가시오!"
"알겠다!"
전명훈의 지휘에 세 명의 사축기 수사들은 각기 광선을 맞으면서도 서 장군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순간 서 장군의 몸 위쪽으로 음양오행의 구체가 떠올랐다.
헌량과 헌천이 동시에 손을 뻗으며 양손에 기운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부우우웅!
서 장군의 등 뒤로 여덟 장의 푸른 날개가 돋아났다.
"뭣!?"
그리고, 방금 전의 광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빛의 폭풍이 각기 헌량과 헌천에게 날아들었다.
서 장군의 몸을 옥죄었던 음양오행의 구속은 단숨에 박살 나 갈가리 찢겨 나갔고, 헌량과 헌천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전명훈도 서 장군의 창익천쇄의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뒤쪽으로 물러났고,
그 와중 위립은 몸을 음기로 뒤덮으며 은신하여 순간 서 장군의 등 뒤를 점하는 데에 성공했다.
위립이 단검 법보를 들고 서 장군의 배후를 찌르려 할 때였다.
철컥!
서 장군의 등이 열리며, 그 안쪽에서 태극의 형상이 나타났다.
"뭣…!"
콰지지직!
거대한 뇌전의 기둥이 서 장군의 등 뒤에서 뿜어졌다.
그와 동시에 서 장군의 형태가 다시 한번 변했다.
머리통 위쪽에 달려 있던 머리통이 두 개로 쪼개지며 각자 쪼개진 머리통에 음기와 양기가 깃들었다.
전명훈은 그를 보며 눈을 찌푸렸다.
"태극진뢰신…."
그를 보며 다른 사축기 수사들 역시 헛웃음을 흘렸다.
"괴뢰 주제에 다채롭게도 공법을 운용하는군. 사실상 사축기 중기 전력이오. 거기다가…."
츠츠츠츳….
동시에 서 장군은 물론이고, 곳곳에 산재한 양산형 서 장군들의 몸에서도 시커먼 저주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헌량이 저주문들을 보며 말했다.
"저것들, 하나하나가 저주문을 잔뜩 머금은 저주인형이오. 앞으로 저것들과 싸우면서 티끌만큼의 상처라도 허용하면, 그대로 우리에게 대응하는 저주인형으로 변해, 저것들에게 공격을 하면 우리 서로가 공격을 퍼붓는 효과를 보게 될 것이오."
"정말 개 같은 작품을 만들어 놓았군."
위립은 침음성을 흘렸다.
"이대로 시간을 질질 끌며 우리가 힘을 빼도, 정작 문제는 서은현이란 놈은 전혀 힘을 낭비하지 않고 힘을 비축하고 있단 거다. 여기서 힘을 전부 빼면 결국 서은현이란 놈과 싸울 시간을 뺏기고, 우리의 정보를 놈에게 다 넘겨주는 것과 다를 바 없소."
위립의 말에 헌량이 그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어쩌잔 말이오?"
"저 서 장군이란 것, 사축기 중기 수준이지만 괴뢰답게 나름의 규칙성을 가지고 있소. 내가 규칙성을 연구하며 놈을 막고 있겠소. 그 사이에 얼른 산맥 안으로 진입해 서은현을 쓰러뜨리시오!"
"…알겠소."
전명훈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립과 함께 남겠다는 몇몇 천인기, 원영기 수사들을 내버려 둔 후, 그들은 빠르게 산맥 너머로 향했다.
쿠웅!
서 장군이 그들을 향해 입을 벌린 채 달려들었다.
그러나 위립은 입에서 사슬 형태의 법보를 뱉어 날렸고, 시커먼 사슬이 서 장군을 휘감았다.
"네 상대는 나다."
부웅!
서 장군은 위립에게 달려들었고, 두 사축기 존재들은 빠른 속도로 치고받기 시작했다.
* * *
부우우웅!
산맥을 넘은 전명훈은 눈을 찌푸렸다.
산맥 안쪽.
그곳은 시커먼 안개가 가득했다.
"독이오, 모두 피부 호흡을 포함한 모든 호흡을 멈추시오."
헌천의 말에 모든 수사들이 각기 보호 법술을 펼치며 숨을 참기 시작했다.
그 상태에서 그들이 독기 안쪽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끄으으윽…!"
삽시간에 원영기 이하 장로들이 비틀거리며 중독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 무슨…!"
전명훈과 천인기 원로들이 모두 흠칫 놀리며 원로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전명훈은 그 역시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제길, 그렇군. 천지영기 그 자체에도 독(毒)이 깃들어 있어! 단순히 호흡을 참아도 원영기 이하는 구조적으로 주변의 천지영기를 흡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기를 마시지 않아도 중독되는 거다….'
그는 독의 제작자가 누구일지 짐작이 갔다.
'홍범…!'
그가 가장 절망스러울 때 그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친근하게 지냈던 지네 요수를 떠올리며, 전명훈은 눈에 핏발을 세웠다.
파직, 파지지지직!
전명훈의 전신에서 번갯불이 튀기며, 그는 마치 벼락의 정령 같은 형태로 변화했다.
[크으윽… 일단 이 상태로 있어야겠군. 모두, 독에 당한 자는 그 자리에 모여서 가만히 요상을 해라!]
"괜찮겠습니까? 안개 속에서 습격이라도 당하면…."
전명훈은 고개를 저었다.
[독의 제작자가 만든 독은 무시무시하지만, 제작자의 성격상 독에 당해서 운기요상을 하는 상대를 건드리진 않을 것이다.]
서은현은 믿을 수 없지만, 늘 일관된 모습을 보여 준 홍범은 믿을 수 있었다.
전명훈은 홍범의 성격을 믿고, 독에 중독당해서 거동이 불가능해진 이들을 모아 독기가 약한 곳으로 끌어올려 독을 몰아내게 했다.
"피독주라도 물고 있어라. 그리고…."
전명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홍번의 독으로 인해, 순식간에 원영기 이하의 전력은 모조리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
'빌어먹을….'
[…천인기 다섯 명만 여기에 남아 중독당한 장로들을 보살피시오. 그리고 멀쩡한 이들은 앞으로 계속 전진하겠소.]
전명훈은 이를 악물고 앞으로 전진했다.
헌량이 그의 옆에서 진법의 맥을 읽으며 길을 가리켰다.
"진법의 기운이 저곳으로 몰리고 있군요. 저곳으로 가지요."
[알겠소.]
헌량과 헌천, 전명훈을 필두로 한 천인기 수사들이 앞으로 날아갈 때였다.
"잠깐, 이건…!! 멈추시오!"
헌량이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외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진법의 기운이 꼬이며 헌량은 외딴 곳으로 떨어진 것을 느꼈다.
그것은 전명훈과 헌천도 마찬가지였다.
헌량은 미간을 찌푸렸다.
"진법의 형세가 굉장히 복잡하군. 아버님께서 잡아 오라 하셨던 그 금위라는 자의 진법 실력이 상당하다더니, 정말인 건가?"
그는 의식을 움직이며 주변을 탐사하려 했으나, 진법의 기운이 헌량의 의식을 짓누르고
어 의식 영역을 제대로 펼칠 수가 없었다.
헌량이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저 멀리, 독기 사이로 두 명의 인영이 보였다.
"전 도우, 천아!"
그가 희색을 드러내며 그쪽으로 달려가려다 그 자리에 멈춰 경계를 돋웠다.
"네놈들은…?"
그러나 독기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건 헌량의 동료들이 아닌, 흑색의 옷을 입은 채 장죽을 물고 있는 백발의 꼬부랑 노인.
그리고 시뻘건 혈포를 입은 요사스러울 정도의 미모를 가진 미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갑자기 죄송하지만, 주인님의 명에 따라 귀하를 잠시 묶어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장죽을 물고 있는 흑의 노인, 홍범의 말에 헌량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기껏해야 원영기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네놈들 따위가 말이더냐? 재밌는 말이로군."
그는 피식 웃으며 홍범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터져 죽어라."
퍼어엉!
하지만 헌량의 명에 터진 건 홍범이 아닌, 그 옆에 있던 혈포의 미인.
원유였다.
'저주인형? 저 노인 모습을 한 요괴에게 가해지는 충격을 전부 저 저주인형이 떠안게 되어
있군.'
촤륵, 촤르르륵!
그는 꿈틀거리며 몸을 재생하는 원유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재밌는 장난질이군. 전 도우 같은 특이한 경우를 제하면, 너희 원영기들 따위는 발로 밟아 죽일 수 있는 벌레에 불과하다. 그냥 죽…."
따악!
다음 순간, 홍범이 손가락을 튕겼다.
쿠구구구구!
그와 동시에, 헌량은 갑자기 전신이 어마어마하게 묵직해진 것을 느꼈다.
"지난 몇 년간 금위 님께 진법에 대해 조금 배웠습니다만… 진법이란 건 정말 좋더군요. 적은 힘으로도 강적을 제압할 수 있으니, 이 역시 독(毒)과 꽤 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따악!
홍범이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진법의 기운이 헌량을 옥죄며 그가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로 그를 억압했다.
'이런 미친, 진법의 위력은 둘째 치고, 저놈…. 이 거대하고 복잡한 진법을 마치 수족처럼 다루고 있다…!'
홍범이 오른손을 움직이자, 주변의 기운이 변화하며 진법의 힘이 더더욱 증폭된다.
그가 왼손을 움직이자 주변에 깔린 독기(毒氣)가 성질을 변화하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독으로 배합되기 시작되었다.
[이놈…! 이 벌레 따위가…!!]
헌량이 홍범에게 손을 뻗었으나, 다음 순간 헌량은 그의 감각이 완전히 거꾸로 뒤집힌 듯한 느낌을 느꼈다.
'이런 제길, 진법이 감각마저 혼란을 주고 있어!'
털썩!
헌량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뭣… 왜 힘이 안 들어가는… 내게 독이 통한다고?]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시커멓게 변해 가는 자신의 피부를 바라보았다.
홍범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허허 웃었다.
"어찌 저 같은 미천한 것이 사축기 대인께 통할 독을 만들겠습니까. 그저… 이 근방에 깔린 것은 제 독기뿐만이 아닐 뿐입니다."
[무슨…! 이, 이건!]
치이이이―
헌량은 자신의 팔 위로 올라오는 깨알 같은 저주문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독기와 진법의 기운에 가려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시커먼 독기 아래에, 저주문들이 자욱이 깔려 있었던 것이었다.
홍범이 진법과 독기로 헌량의 정신을 돌리는 동안, 바닥에 깔려 있던 저주문이 어느새 그에게 흡수되었던 것이었다.
"너 이놈…!"
콰르르릉!
헌량이 주먹으로 바닥을 치자, 진법의 기운이 변화하며 그 반동만큼 헌량을 더욱더 거세게 옥죄었다.
헌량은 산 채로 뱀에게 잡아먹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홍범의 앞에서 두 무릎을 꿇었다.
'내, 내가 어떻게, 아무리 적의 아가리 속이고, 독공을 익힌 놈이 상대하기 어렵지만 원영기 요수 따위에게….'
저항하고 싶었지만, 점차 기운이 빠지기 시작했다.
* * *
"…형님이 당했군."
헌천은 눈을 찌푸리며 시커먼 독기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혈맥에 그의 형제가 당했다는 사실이 찌릿거리며 느껴졌다.
'미적거릴 때가 아니다. 전명훈과 빨리 합류해야 해. 각개 격파당한다.'
그는 처음 진마계의 입구에서 전명훈과 대련할 때, 그에게 몰래 붙여 놓았던 기운을 감응하며 전명훈이 있는 곳을 감지했다.
진법의 영향인지 의식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으나, 그가 익힌 독특한 공법 덕택에 그는 전명훈의 위치를 점차 가늠할 수 있었다.
얼마 후, 전명훈과 헌천이 같은 자리에서 만났다.
"드디어 찾았군. 형님이 당했다. 죽지는 않았지만 현재 빈사 상태다."
"…천인기 원로들은 도저히 찾을 수 없더군. 진법도 함부로 못 부술 것 같았다. 안쪽에서 부수려 하면 도리어 힘을 옥죄는 구조다."
전명훈은 독기로 가득한 진법을 노려보며 눈을 찌푸렸다.
그 말을 들은 헌천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뭔가 방법이 있나?"
"…있다."
"뭐지?"
"서은현을 쓰러뜨리면 된다."
그 말에 헌천은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건 세 살배기 어린애도 할 수 있는 대답이다. 장난하지 말고…."
"장난이 아니다."
전명훈은 헌천을 보며 말했다.
"잠시만 호법을 서 다오. 녀석과 가까이 왔어. 조금만 집중하면 녀석의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뭐? 어떻게?"
"내가 익힌 공법과 녀석이 익힌 공법은… 마치 형제 같은 관계다."
금신천뢰문의 모든 공법을 익히면 나타나는 멸신겁천.
금신천뢰문의 기본공법을 익혀서 얻을 수 있고, 대성하면 모든 공법의 특징을 드러내는 적뢰천겁.
전명훈은 두 공법이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문의 시조인 금신자가 두 공법을 닮게 만든 것 같다. 두 공법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번개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그에게 끈적하고 요사한 목소리로 적뢰천겁공의 구결을 알려 주던 번개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서은현이 천뢰번을 가지고 도망친 날 이후.
전명훈은 이전까지와는 '다른' 번개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분명히 이전과 같이 번개가 말을 걸었다.
하지만 최근 듣는 번개의 목소리는 예전에 들었던 번개의 목소리에 비해 훨씬 작고, 부드러우며, 연약했으나 편안한 느낌이었다.
소곤소곤….
그는 번개의 목소리를 쫓았다.
'서은현을 찾아 다오….'
전명훈은 마음속으로 목소리에게 부탁했다.
찌릿, 찌릿, 찌릿….
의식은 막혀 있었지만, 번개가 그에게 지식을 불어넣어 주었다.
전기가 흐르는 곳의 장면이 전명훈의 뇌리 속에 선명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의 옆에서 생체 전기를 흘리며 서 있는 헌천.
저 멀리 헌량을 상대하고 있는 홍범과 그 옆에 서 있는 혈체 원유.
곳곳에 흩어진 천인기 원로들.
그리고….
'서은현!'
명백히 이질적인, 투명한 번개의 목소리를 내는 서은현의 모습이, 전명훈의 뇌리로 들어왔다.
전명훈은 뇌리에 들어온 서은현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거기 있었나.'
그때였다.
스륵―
저 멀리서 가만히 있던 서은현이, 전명훈의 시선과 눈을 마주쳤다.
움찔!
전명훈은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
"…찾았다."
"찾았나? 어디로 가면 되지?"
"정북 방향으로 가라. 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헌천과 전명훈은 그대로 비둔술을 사용하며 날아갔다.
전명훈은 독기를 헤치고 나가며 입술을 깨물었다.
서은현이 번개의 목소리를 통해 그를 감지했을 때.
자신과 눈이 마주쳤던 것이 떠오른다.
'예전부터 그랬지.'
항상, 서은현은 어째서인지 무엇이든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지하며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너는 도대체 뭘 보고 사는 것이길래, 서은현. 어째서 본문을 배신한 거냐.'
전명훈은 입술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강하게 입술을 짓씹으며 서은현에게로 날아갔다.
* * *
퍼엉!
전명훈과 헌천이 도착한 곳은, 독기가 전혀 미치지 않는 공터였다.
"서은현!"
콰지지지직!
전명훈은 담담한 표정을 짓고, 무색유리검을 든 채 그를 기다리는 서은현을 보며 소리쳤다.
"내가 왔다!"
서은현은 담담하게 웃었다.
"너무 일찍 왔군."
그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번쩍!
전명훈과 서은현은 거의 동시에 빛이 되었다.
한천 역시 기운을 끌어모으면서 전명훈에게 외쳤다.
"놈을 잠시만 잡고 있어라! 태산열제공을 먹여 주마!"
전명훈과 서은현은 찰나의 시간 속에서 무기를 부딪쳤다.
전명훈은 그동안 경지를 올려오며 모아 두었던 천겁을 마구 꺼내서 휘둘렀다.
번개는 하나하나가 모두 뇌창이 되어 전명훈의 손에서 휘둘러졌다.
그는 벼락 그 자체가 되어 폭풍처럼 서은현을 몰아붙였다.
서은현은 번개가 되지 않았다.
딱히 비둔술을 쓰지도 않았다.
그저 열심히 몸을 움직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는 벼락으로 변한 전명훈과 대등하게 움직이며 유리검을 움직여 전명훈의 뇌창을 모조리 쳐 내 버렸다.
'여전히… 이길 순 없다.'
전명훈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직도, 그는 서은현을 이길 수 없었다.
보자마자 전력으로 달려들었으나, 서은현은 아직도 그의 앞에서 힘을 아끼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위립, 헌량과 같이 덤볐어도 놈에겐 안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조차도 그에게 숨기고 있는 기술들이 잔뜩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도 여유가 가득한 저 눈!
전명훈은 그 눈을 보며 이를 거세게 악물었다.
[법술을… 써라!]
쿠르르릉!
전명훈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그의 몸에서 여섯 개의 팔이 돋아났고, 팔 안쪽에는 어느새 여섯 색의 깃발이 들려졌다.
전명훈의 머리가 두 쪽으로 쪼개지며 각각 남성과 여성의 얼굴로 변하며, 그의 등 뒤에서 태극이 회전했다.
콰르르릉!
거대한 뇌신의 단전 부근에서 64개의 괘상이 회전하며 뇌궁(雷宮)을 형성했다.
전명훈의 여섯 개의 팔이 미친 듯이 움직였다.
두 개로 쪼개진 그의 머리가 각기 흑색과 백색의 뇌전을 내뱉었다.
점차 육비 뇌신의 속력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힘을 더 꺼내라! 서은현!!!]
점차 서은현이 움직여도 전명훈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전명훈은 서은현의 주변으로 희뿌연 안개 같은 것이 뿜어지는 것을 보았다.
'놈이, 제대로 힘을 쓴다!'
부웅!
꽈아앙!
서은현이 날린 참격에, 전명훈은 더더욱 긴장을 끌어 올렸다.
검격의 위력이 올라갔다.
'저 희뿌연 안개가 놈의 신체 능력을 극대화시키고 있어.'
그는 본능이 경고를 보내는 것을 느끼며 잠시 뒤로 물러났다, 한 줄기 붉은 별똥별이 되어 서은현에게 달려들었다.
번쩍!
일순간, 전명훈은 그 자신이 한 자루 붉은 뇌창이 되었다.
그 순간 그는 가없이 빨라졌고, 서은현은 그에 순간 흠칫 놀라며 황급히 방어하였다.
콰아앙!
굉음이 울렸다.
하지만 전명훈은 쓴웃음을 지었다.
"…방금 건 내가 할 수 있는 최강의 공격이었다."
치이이이―
어느덧 전명훈의 몸에서 나오는 뇌전들은 전부 방전된 것인지, 그의 몸이 벼락의 정령의 형체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서은현은 그런 전명훈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더 정진해야겠더군. 아직 멀었다."
"…그래, 그래야겠지. 하하, 네게는 아마 안 될 거야. 그런데 말이야…."
전명훈은 서은현을 올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그래도, 잠깐이나마 나한테 한눈은 팔았지?"
"…!?"
키이잉!
서은현의 몸 위로, 음양오행의 태극이 떠올랐다.
"속도는 내가 녀석의 공법보다 한참 빨라서, 바깥에서 대련할 땐 이길 수 있었다만…."
전명훈은 뒤쪽으로 물러섰다.
양손에 흑백의 기운을 두른 헌천이 서은현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적중당했을 때의 공격력 자체는, 저놈의 태산열제공이란 게 훨씬 압도적일 거 같더군."
헌천이 외쳤다.
"태산!"
전명훈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고, 서은현의 눈에 일순간 긴장이 맴돌았다.
"열제!"
이번의 공격에 모든 법력을 불어넣은 것인지, 헌천은 새하얘진 얼굴로 공격을 펼쳤다.
쩌어어어엉!
다음 순간, 빛이 폭발하였다.
* * *
쉬이이이이―
"허억… 헉…."
전명훈과 헌천이 자리에서 숨을 헐떡였다.
전명훈은 서은현과의 전투에서 체력을 전부 써서, 헌천은 방금의 일격에 모든 힘을 쏟아부어서였다.
헌천이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해, 해치웠…."
"닥쳐!"
전명훈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헌천의 말을 끊었다.
"네놈, 확실히 끝낸 게 맞겠지?"
"태산열제공을 뭐로 보고! 태산열제공은 기(氣)의 본질을 구분한 후, 기의 단위를 음양오
의 일곱 조각으로 만들어 상대를 분해해 버리는 공법이다. 태산열제공으로 명(命)의 계위에 도달해 진선이 되면 운명조차 일곱 조각으로 낼 수 있다고 전해진단 말이다! 태산열제공을 무시하는 건…."
"그래, 알았다. 네 공법 잘난 거."
전명훈은 시끄럽게 떠드는 헌천의 말을 흘려들으며, 끝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고 저물도를 펼쳐 손을 집어넣었다.
쿠구구구!
저물도 안쪽에 있던 영석들의 영기가 전명훈의 몸으로 흘러들어오며 그의 법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이봐, 나도 영석 좀 나눠주지 그러나?"
"봉래궁 부자잖나. 네 거 써라. 그리고…."
전명훈은 헌천을 돌아보며 혀를 찼다.
"네 태산열제공, 안 통한 것 같은데?"
"…뭐?"
저벅, 저벅….
먼지구름을 헤치고, 나신이 된 서은현이 걸어 나왔다.
"방금 건…."
그의 육신은 곳곳이 그을리고 찢어져 있었다.
방금의 일격에 상당한 타격을 입은 듯 보였다.
"정말로 죽을 뻔했다. 태산열제공이라는 건 대단하군…. 헌위 선자의 공격보다도 훨씬 흉험했었다."
"…!"
헌천의 동공이 바싹 졸아들었다.
"어, 어떻게 그걸 맞고…."
"네게는 미안하게 됐다만, 몸을 삼중으로 강화하고 있어서 말이다."
키이잉―
서은현의 몸 곳곳에서, 은은한 회로가 빛났다.
그리고 은은한 요기가 빛나며 그의 몸을 치유했고, 자세히 느껴지진 않았지만 마치 검(劍)을 연상시키는 힘이 그의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몸을 강화하고도 다 감당 못 해서 저주인형들에게 위력을 떠넘겨야 했을 정도니, 솔직히 대단하긴 하군. 하지만 결국 그 정도다. 특히 전명훈, 너는 천인기에 도달하고 왔었으면 확실히 해볼 만했을 터다. 하지만 아직 너는 너무 미숙해."
"…."
"돌아가라. 홍수령과 약조를 했다. 너희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조했으니,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려는 건 결코 금신천뢰문을 배신하려는 게…."
그때, 전명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가 배신이 아니란 거냐."
그는 충혈된 눈으로 서은현을 노려보았다.
"네 행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충격을 받았는지 알기나 한다는 거냐!?"
"…."
"설명조차 해 주지 않고, 본문에서 그동안 수행을 쌓아 온 이들의 전력을 날리고, 신물을
인한답시고 날뛰는 네 행동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았는지, 충격을 받았는지… 네가 뭘 안다는 거야!"
"…설명해선 안 되는 일이다. 미안하다."
"본문의 촉망받는 천재로서 활약한 네 배신에, 모두들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있단 말이다! 너는, 너는…!"
파직, 파지직!
전명훈의 주변에서 붉은 뇌전이 떠올랐다.
서은현은 조금 긴장을 끌어올리며 무색유리검을 그에게 겨누었다.
"뭘 꺼내려는지는 모른다만, 꺼내지 마라. 베겠다."
"흐흐, 항상 내가 뭘 하려는지 알고 있다는 그 눈. 정말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
"내 마음이라도 읽는 거냐, 응?"
서은현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눈에, 이상하리만치 자신만만한 전명훈의 속내가 비췄다.
뭔지는 모르지만, 위험하다.
"손을 움직이지 마라. 바로 벨 것이다."
서은현은 전명훈의 저물도를 노려보았다.
"벨 수 있을 것 같나?"
"못할 거 같나?"
"…."
"…."
다음 순간.
파앗!
벼락으로 변한 전명훈의 손이 저물도를 향했고, 서은현은 일순간 빛이 되어 검을 휘둘렀다.
댕겅!
전명훈의 팔이 잘려 나갔다.
하지만 전명훈은 미소를 지었다.
"다가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쿠구구구!
전명훈의 주변으로 천지영기가 몰려든다.
서은현의 얼굴에 아차 싶었다는 기색이 맴돌았다.
그와 동시에, 전명훈의 소우주와 천지자연이 소통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오직… 배신자에 대한 응징만을 목표로 하면서, 몇 번이고 연습했다!"
쿠릉, 쿠르르릉!
"네놈을 응징하기 위해, 그 분노를 광기로 삼아 여기까지 왔다!"
하늘에서 금빛과 청빛이 웅웅 울렸다.
전명훈이, 천인기 승급을 시작하였다.
콰르르릉!
서은현은 황급히 전명훈에게 내리꽂히는 천겁을 피해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순간, 그는 전명훈이 팔을 재생하며 저물도로 손을 가져가는 것을 보았다.
"크윽…!"
서은현은 전명훈의 팔을 다시 잘라 내며 그의 곁에서 전명훈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전명훈의 팔을 자르느라 전명훈의 법술을 미처 막지 못했다.
전명훈이 한 손으로 결인을 맺자, 천겁이 휘어지며 서은현에게 내리꽂혔다.
"우리 시조님도 자주 쓰신 방법이셨다지? 아예 천상금뢰지체만 사용 가능한 전용의 술법으로 내려오고 있더군."
콰지지지직!
전명훈의 천겁을 서은현이 대신 맞고 있다.
서은현이 저항하면 할수록, 하늘은 감히 편법을 이용해 천겁을 극복하려 하느냐며 천겁을 더더욱 거세게 내리친다.
콰지지지직!
천겁의 범위는 점차 커져, 어느덧 전명훈과 서은현 두 사람을 완전히 삼켜 버렸다.
하지만 전명훈도 분명히 천겁을 맞고 있음에도, 그의 결인에 따라 천겁은 더더욱 거세지
만 있었다.
촤르르륵!
서은현은 전명훈이 다시 팔을 재생하고 저물도로 손을 가져가는 것을 보았다.
'제길, 천겁이 더 거세진다!'
이대로 가다가는 천겁에 몸이 갈려 나갈 상황!
전명훈에게서 물러나면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서은현은 전명훈에게서 물러날 수 없었다.
불길한 느낌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물러나면, 땅을 치고 후회한다!
[네놈…!]
서은현이, 천겁을 상대로 비로소 법술을 쓰기 시작했다.
시커먼 저주문이 나타나며 천겁을 약화시켰고, 목 속성의 법술이 천겁을 향해 쏘아지며 천겁을 상쇄한다.
서은현은 무형검까지 서슴없이 드러내며 천겁을 갈라 가며 전명훈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천겁은 더더욱 강해져 갔다.
'젠장!'
하늘이 격노하며, 무한정하게 뇌겁을 쏟아붓고 있었다.
[하늘을 속여 더더욱 노하게 만드는 술법이다. 아무리 너라도 서은현. 하늘을 이겨 낼 수는 없겠지!]
[네놈…!]
거대한 뇌겁의 기둥 안쪽에서, 두 사내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서은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전력을 다하고 있음에도, 천겁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그대로 재가 되어 버릴 터였다.
서은현의 판단은 빨랐다.
부웅!
찌이이잉!
서은현이 결인을 맺자, 그가 이전 전명훈에게 박아 놓았던 오행혈주번이 발동하였다.
"…!"
전명훈은 고통 속에서 머리를 부여잡았다.
서은현은 그제야 비로소 번개의 기둥 속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때.
서은현이 물러나자, 전명훈은 고통 속에서도 파들파들 떨며 저물도로 손을 가져갔다.
"놈!"
서은현은 얼굴을 찌푸리며 더욱더 결인을 거세게 맺었다.
오행혈주번이 최대로 힘을 발휘한다!
시뻘건 빛이 뇌겁 속에서 전명훈의 머리를 뒤덮었다.
'이제 시간 싸움이다. 천겁이 그치는 순간 바로 놈을 제압하고 저물도를 뺏어 버린다!'
하지만 서은현은 전명훈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만약, 전명훈이 오행혈주번의 고통을 이겨 내고, 천겁이 그치기 전에 저물도에 손을 넣는다면 전명훈의 승리였다.
"이제 그만 포기해라, 전명훈! 제발 나를 믿어 다오. 나는 결코 금신천뢰문에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니야!"
전명훈의 머리를 덮은 붉은빛이 더더욱 강해졌다.
그는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뇌겁 속에서 울부짖었다.
"내가 하려는 건 금신천뢰문 동포들을 살리려는 일이다! 제발 이제 그만해라, 전명훈!"
"…!"
서은현은 오행혈주번을 더더욱 강하게 진동시켰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전명훈은 악귀같은 미소를 지으며, 점차 손을 저물도로 가져가기 시작했다.
"전명훈!"
"…서…은…현…!"
전명훈은 울부짖듯이, 천겁 속에서 말했다.
천둥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서은현은 전명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네… 스승은… 너를… 믿었다…!!!"
그리고, 전명훈의 손이 저물도로 들어갔다!
파앗!
그와 동시에 천겁이 그쳤다.
서은현은 찰나의 시간에 진입해 전명훈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는 찰나 속에서 전명훈이 저물도에서 꺼낸 물건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천뢰(天雷) 자가 그려진 백색의 혁대였다.
다음 순간.
서은현은 도저히 인지할 수 없는 빠른 천겁이 그의 몸을 후려치는 것을 인지했다.
"…!?"
콰르르릉!
그대로 서은현은 뒤쪽으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전명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금신천뢰문의 최고 원로들에게 지급되는, 천뢰 혁대는 천뢰번의 힘을 추출해 만드는 혁대지."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전명훈은 서은현에게 말했다.
"천뢰번을 꺼내지 않더군. 내가 훔쳐갈까 두려워하기라도 한 건가?"
파직, 파지지직!
서은현의 동공이 바싹 졸아들었다.
전명훈의 손에 들린 백색의 혁대가 흩어진다.
그리고, 그 대신 그의 손아귀에 천뢰번이 들어왔다.
"네 최고 전력을 이끌어 내려고 최선을 다했다. 기껏 천뢰 혁대를 이용해 천뢰번을 소환해도, 천뢰번을 사용하는 나보다 네놈이 강하면 답이 없으니까. 한데…."
전명훈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천뢰번을 휘둘렀다.
"다행히 네 힘은 그 정도까진 아니더군."
다음 순간, 천뢰번은 전명훈에게 현 상태에서 빌려줄 수 있는 가장 큰 힘을 빌려주었다.
천겁 (11)
우웅, 우우웅.
여기는, 어디지?
나는 아찔한 정신을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웨엑… 우웨에에엑…."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와 입을 벌리자, 뱃속에서 내장 조각과 함께 피가 한 움큼 쏟아져 나왔다.
"거헉… 커헉…."
나는 내 몸을 바라보았다.
내 몸은 노릇노릇하게 익어,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아, 그렇군.'
생각났다.
나는 방금 전까지 전명훈과 싸우고 있었고, 전명훈이 내 근처까지 온 후 천뢰 혁대를 사용해서, 인근에 천뢰번을 소환했다.
그리고, 녀석이 천뢰번을 휘둘렀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허헉.. 컥…."
나는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휘이이이이―
홍범과 금위가 심혈을 다해 만들어 펼친 진법이, 모조리 날아가 있었다.
홍범의 독기는 전부 증발해서 사라져 있었고, 곳곳에서 금신천뢰문의 제자들은 힘을 얻어 압도적인 뇌력을 내뿜고 있었다.
무수한 천인기, 원영기의 수도자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저 앞에서는 전명훈이 천뢰번을 쥔 채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전… 명… 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다시 다리에서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세히 보니, 다리 근육이 아예 타 버려 움직이는 것조차 신기한 상태였다.
"천뢰, 번을…!"
나는 이를 악물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처음부터 홍수령의 말을 듣지 않고, 몇몇 정도는 죽이거나 인질로 삼아서 쫓아내야 했을까.
아니면 전명훈이 덤비지조차 못하게, 갈기갈기 녀석의 육신을 찢어 버렸어야 했을까?
아니면 녀석의 수행을 폐해 버리고 목숨만 살려서 보냈어야 했을까?
모른다.
하지만 이미 결과는 이리되었다.
천뢰번이 놈의 손에 들어갔다.
"전…명, 훈…."
나는 타버린 성대에 힘을 몰아 어떻게든 재생시키며, 말을 짜냈다.
"천뢰, 번은… 하계에… 봉해져야, 한다…."
"…이유를 설명해라."
"이유를, 설명하면… 너희 모두… 미쳐 버린다…."
"납득할 수 없군."
"제발… 나를 믿어…줘…."
"…우리도 너를 믿었었다. 네가 우리를 배신하고 천뢰번을 훔치기 전까지는."
전명훈은 차가운 얼굴로 내게 쏘아붙였다.
"너는 우리의 믿음을 배반했다. 믿어 달라고? 진즉부터 믿어 줬었다. 태상장문이, 장문이, 차기 장문인이, 네 스승이, 네 추종자들이, 내 연인이, 문파의 모든 제자들이…. 그리고 이 내가."
그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외쳤다.
"너를, 믿어 줬단 말이다. 그런데 너는… 그 모든 걸 배반하고 도망쳤다."
"아…냐…."
"설명을 못 한다고? 아니, 너는 그저 우리를 불신하는 거다. 네가 무슨 세상을 보고 있는
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너는 자신이 보는 세상을 우리와 공유하지 않으며 너 자신만이
가를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뿐이야. 설명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너는 그냥 설명을 하지 않는 것뿐이다!"
"…."
"마지막 기회다. 설명해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선들에 대해서, 천벌의 주인에 대해서.
정려에 대해서, 양수진과 종명자와 무수한 거대 존재들에 대해서.
도대체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나는 끝끝내 입을 열 수 없었다.
전명훈은 차가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설명할 수 없단 거냐."
"…."
"알겠다."
그는 품을 뒤적이더니,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시조령이라는 글자가 음각된 영패였다.
"나, 시조님과 같은 천상금뢰지체이자, 금신천뢰문 차기 문주 금진찬의 제자, 동시에 배신자 서은현의 추적대장인 전명훈이 시조령으로서 명한다!"
철컹!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이 순간 부로, 서은현을 금신천뢰문의 아래에서 영구 제명하겠다! 서은현, 너를 영구히 파문(破門)한다!"
쿠우우웅!
그와 동시에 시조령에서 익숙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것은 양수진의 의지였다.
폐(廢)!
거대한 폐(廢) 자가 허공에 새겨지더니, 천천히 나를 향해 내려왔다.
번쩍!
폐 자는 내 몸에 새겨지는 듯하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치이이이―
그와 동시에, 나는 무언가를 느꼈다.
철컹, 철컹, 철컹!
천기가 변화한다.
그리고, 천기 너머.
운명 너머, 나와 이어져 있던 금신천뢰문의 인연이 완전히 끊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아….'
동시에, 나는 내 체내에 흐르던 투명한 기운이 변화하는 걸 느꼈다.
제례용 공법답게, 운명의 변화에 직결되어 변화하는 공법.
멸신겁천.
멸신겁천공이, 내게 완전히 종속되는 게 느껴진다.
동시에 나는 멸신겁천공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랬던 건가.'
적뢰천겁공을 익힌 이가 금신천뢰문을 이끌며, 그들과 가족이 된다.
그리고 가족에게서 버림받음으로써 그들 자체를 부정하고, 운명으로 하나로 엮여 있던 그들과 나를 부정함으로써 '나'와 '가족이었던' 이들이 분리된다.
분리된 이들은 이제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비인간이다.
그러니 한때 나 자신을 구성했던, 나의 일부였었던 이 비인간들을 제물로 바쳐, 운명을 비틀고.
비튼 운명으로 새로운 미래에 도달해라.
그랬다.
삼라만상 모든 것을 비인간으로 보았던 양수진은, 이 세계 전체를 갈아서라도 자기 자신이 행복해지고자 했다.
모든 것을 희생해서, 오로지 자기 자신을 완성함으로써 행복에 다가가는 마공(魔功).
그것이, 멸신겁천이었다.
속닥속닥속닥….
어쩐지 양수진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제물로 바쳐 버려라.
―너 자신이 제사장이 되어, 나를 버린 비인간들을 구축하여 희생 제물로 삼아 운명의 액을 막아 버리고, 운명을 비틀어서 새로운 미래를 손에 넣어라.
―처음은 금신천뢰문.
―다음은 더더욱 많은 이들.
―다음은 더더더더 많은 이들을 갈아넣고.
―끝내에는 이 세계마저 갈아넣어, 너 자신만을 완성시켜라.
아니, 이건 양수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내 마음속의 심마(心魔)였다.
"지금부터, 죄인 서은현을 봉인(封印)하겠다!"
척, 척, 척, 척!
금신천뢰문의 장로와 원로진들이 각자 결인을 맺으며, 나를 중심으로 방위를 잡고 진법을 펼쳤다.
계속해서 멸신겁천이 내게 속삭인다.
내 마음속의 심마가 나를 유혹한다.
멸신겁천을 사용하라고.
멸신겁천을 사용해 저들에게 재액을 떠넘기고 운명을 바꾸라고.
하지만,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저 가만히, 심마의 목소리를 무심히 흘려들으면서.
하늘을 보며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비인간이었으면, 내가 지금까지 노력해 올 필요가 없었잖나.'
멸신겁천이, 내 심마가 내게 속삭인다.
지금 당장 제물을 바치고 운명을 바꾸라고.
하지만, 애당초 내가 바꾸고 싶었던 미래는 '제물'들을 구하고 싶었던 미래였다.
"…나는…."
나는 있는 힘을 짜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천인기 원로들이 내 움직임에 흠칫 했지만, 봉인의 술법을 멈추지는 않았다.
"나는…."
나는 억울하고, 너무나 억울하여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문명 사회에서 온… 지구인이다…."
나는, 운명이 없는 세계에서 온, 인간이다.
그렇다면, 운명이 있는 세계의 존재들은 운명의 노예이니 비인간이며.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해도 변할 수 없단 말인가?
"하늘이여…."
나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며 눈을 감았다.
봉인의 법술이 나를 휘감으며, 어둠이 주변을 덮어 갔다.
'운명은… 정말로….'
* * *
쉬이이이―
전명훈은 눈 앞의 작은 옥구슬을 바라보았다.
"봉인, 완료되었습니다."
천인기 원로들이 이마에 땀을 닦으며 말했다.
서은현이 봉인된 작은 구슬.
전명훈은 그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서은현을 포획하면 가슴이 뻥 뚫릴 줄 알았건만.
이상하게도 찜찜했다.
무언가 피하지 못한 액운이나 대흉이 있을까 싶어 하늘을 바라보았으나, 천기는 이상이 없었다.
문득, 전명훈은 천뢰번을 바라보았다.
'왜 서은현은 천뢰번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한 거지?'
왜인지는 모르지만.
정말로 뜬끔없이, 전명훈은 천뢰번의 이름을 불러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ㅈ…."
그리고.
찌이이잉!
전명훈의 머리에 아직까지도 박혀 있는 오행혈주번이 윙윙 울며, 그의 말을 방해했다.
"크윽, 제길… 이 금제도 어떻게 제거하든지 해야겠어."
그는 천뢰번의 이름을 부르는 건 나중으로 넘기고, 서은현을 봉인한 옥구슬을 집어들었다.
"금위는 주변에 없나?"
"지하에 공령지가 있고, 공령지 아래쪽에 누군가가 있었던 흔적이 있습니다만, 현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도주한 것 같습니다."
"그런가…."
전명훈은 주변을 수습했다.
금위.
그러니까 연진은 빠르게 도망쳐서 잡을 수 없었으나, 배반자 서은현을 포획했다.
"이 괴뢰는 봉래궁에서 가져가지."
봉래궁 역시 많은 인원을 보낸 만큼, 전리품으로 서 장군을 가져가고자 했고, 금신천뢰문 측에서는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너도 항복해라, 홍범."
"예."
홍범은 딱히 격렬히 저항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 순응이라도 하듯이 순순히 잡혔다.
홍범 역시 원영기 장로들에 의해 봉인되어, 서은현보다 작은 옥구슬 안에 갇혔다.
"…이제."
전명훈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 끝났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약간은 시원하게, 약간은 섭섭하게 읇조렸다.
"정말로 다 끝났다…."
이젠, '집'에 갈 시간이었다.
* * *
전명훈 일행은 금신천뢰문에 복귀했다.
전명훈의 소식을 들었는지, 금신천뢰문의 모든 제자가 나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명훈은 금신천뢰문의 정문 앞에서, 말없이 천뢰번을 꺼내 들어보였다.
"…!"
"…!!"
"…!!!"
곳곳에서 귀가 떠나가라 어마어마한 함성이 울렸다.
함성에 땅이 윙윙 울릴 정도.
전명훈은 모두의 함성을 받으며, 금벽호의 앞으로 자랑스레 다가가 천뢰번을 반납하였다.
금벽호는 대견하다는 듯이 전명훈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한때, 너를 가르치는 걸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었다."
"…."
"내가 틀렸다. 과욕이었던 게지. 너야말로 진정한 금신천뢰문의 후계자이며, 제자다."
금벽호는 잠시 전명훈을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잡아들고 외쳤다.
"모두 들어라! 본래 차차기 장문인이었던 제자는 본문의 믿음을 저버리고 천뢰번을 절도하여 파문당했다! 그 덕에 본문의 차차기 장문인의 자리는 빈 상태다!"
금벽호의 말에 전명훈은 그를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너희에게 묻겠다! 누가, 그 누가 차차기 장문인의 위에 머물러야 하는가!"
"전명훈 사형입니다!!!"
"전명훈 사형!"
"전명훈, 전명훈, 전명훈!"
곳곳에서 전명훈의 이름이 불렸고, 금벽호는 크게 웃으며 외쳤다.
"오늘부로, 전명훈에게 금씨의 성을 하사하며, 금명훈을 차차기 장문인의 위에 봉한다!"
"와아아아아!"
"금명훈! 금명훈! 금명훈!"
그렇게, 금명훈은 문도들의 환호 속에서, 비로소 '집'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정말로 간만에, 활짝 웃었다.
금명훈도 웃었고, 금소해도 웃었으며, 금벽호도 웃었다.
금신천뢰문의 모두가 웃었다.
그리고, 정려도 웃었다.
[아하하, 아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
천겁(12)
서은현이 봉인되고 난 후, 근 몇 년간 신물인 천뢰번의 부재에 혼란스러워하던 금신천뢰문은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금명훈은 천인기에 이른 경지를 안정시키는 동시에, 오행혈주번을 없애 버릴 방안을 찾았으며, 금벽호는 다시금 봉뢰당을 지은 후 그곳에 천뢰번을 봉하였다.
그리고 현 장문인인 금린은 아들인 금진찬에게 장문인 직을 물려줄 준비를 시작했고, 진휘는 몸소 '죄인 서은현'의 봉인 관리를 자처하였다.
금신천뢰문은 평화로웠다.
그리고, 평화로워진 금신천뢰문에서는 평화와 번영을 상징할, 금소해와 금명훈의 사랑이 마침내 절정에 달했다.
"다, 다시 혼례를 하자고?"
금소해는 얼굴이 발갛게 물든 채, 금명훈에게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금명훈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 도려식을 맺을 땐 굉장히 검소하게 맺었잖아. 이제 나도 금씨를 받았고, 차기 장문인 위를 확정받은 만큼… 그때 제대로 된 도려식을 못 올린 게 조금 후회돼서 말이야."
"으, 으음…."
"이번에는, 문파에서 정해 준 도려가 아닌 내 의지로 너와 혼인하고 싶어, 소해."
그 말에, 금소해의 얼굴이 붉어졌다.
"서은현과 싸우며 너무 급하게 천인기에 올랐기에 안정시킬 시간이 몇 년 정도는 필요하지만, 천인기 경지를 전부 안정시킨 후에 나와 정식으로 다시 혼인식을 치러 줬으면 해."
"…약속해 줘."
"음?"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금명훈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서은현, 그자가 그렇게 갑자기 문파를 배신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잖아? 그러니까… 전명훈. 아니, 금명훈. 너는, 절대로 금신천뢰문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약속해 줘."
금명훈은 그 말을 들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절대로 내 가족을 배신하지 않아."
"…그래."
"약속할게. 자…."
그는 금소해에게 손을 내밀었다.
금명훈이 그녀에게 속삭이며 말했다.
"우리 고향에서 약속을 할 때 쓰는 결인(結印)이야. 두 사람이 함께 맺는 인인데…."
두 사람은 금신천뢰문의 봉우리 중 한 곳의 위쪽에서,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손가락을 마주 부딪쳤다.
"약속할게, 소해. 절대로 문파를 배신하지 않을게."
말을 마친 금명훈은 천천히 금소해에게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떨어졌다.
금소해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진 듯, 전명훈과 손을 잡고, 금신천뢰문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 그나저나 금명훈. 왜 진마계에서 그냥 돌아온 거야?"
"응?"
"진마계에서 서은현을 봉인하고, 그가 점령했던 곳을 금신천뢰문 소속 점령지로 분할받아도 괜찮았잖아?"
"음, 아무래도 봉래궁 쪽에서 성화를 많이 부렸거든."
"봉래궁에서?"
"그래, 자기들이 서은현을 토벌하기 위해 수배 금액도 뿌렸고, 인원도 가장 많이 파견했으니, 녀석을 포획하며 얻은 이권 중 대다수는 본인들이 가지겠다는 거야."
"아하… 사축기 괴뢰도 가져갔다고 했는데, 욕심도 많네, 참."
"뭐, 그것도 그렇고…."
그는 봉래궁 1호법 헌량을 떠올리며 말했다.
"봉래궁 1호법이 금위가 쳐 놓은 진법에 호되게 당했다 하더라고. 그래서 그 일대에 펼쳐진 진법을 연구하기 위해서라도 본인들이 그 점령지를 가져가야 한다고 난리를 치더라고."
"진법?"
"그래. 용맥을 움직여서 펼치는 진법인데, 서은현 일행이 펼쳐 놓은 진법이라 해. 무슨 의도로 진법을 펼쳐 놓은 건지는, 봉래궁 쪽에서 나중에 진법을 분석해서 의도를 알게 되면 공유해 주겠다 하더라고."
"그럼, 진법을 아직 해체하진 않은 거야?"
금소해의 질문에 금명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듣자 하니 계멸천공진이나 염명진 같은 위험한 진법은 아니라서 해체는 안 해도 된다네."
"흐음… 그럼 됐겠지."
금소해는 고개를 끄덕이며 금명훈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상단전의 금제는 어떻게 됐어?"
"지금 백방으로 실력 좋은 해금사(解禁士)를 찾아보고 있어. 아무래도 정신에 박힌 금제인지라 상당히 조심해서 풀어야 한다나 봐."
"그래, 뭐… 이제 어차피 서은현도 봉인되었으니 금제를 발동시킬 사람도 없고, 천천히 찾아도 되겠지."
그녀는 빙긋 웃었고, 금명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천천히 해도 되겠지. 이젠 급할 필요는 없으니까…."
금명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최근 금신천뢰문은 여유와 평화, 그리고 낙관적인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모두의 긴장이 풀려 있었다.
봉래궁과도 서은현 토벌전과의 합작을 겪은 후 부쩍 사이가 가까워졌고, 천뢰번도 되찾았으며 문파의 배신자도 봉인했다.
뇌령도의 지배권도 공고해지고 있어, 금신천뢰문의 규모도 점차 커지고 있었다.
그렇게, 금신천뢰문은 평화와 여유 속에서 번영하고, 또 번영하였다.
…그렇게, 8년이 흘렀다.
* * *
우우우웅!
동부 안쪽, 가부좌를 틀고 있던 금포의 인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주변으로는 의식 영역이 압축된 채 요동치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가라앉았다.
금포의 사내, 금명훈은 눈을 반개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디어, 천인경을 전부 안정시켰다."
마음을 완전히 단련했기 때문에 더 이상 정신이 천지자연의 대류(大流)에 휩쓸리지 않게 되었다.
전명훈의 광기는, '금신천뢰문' 그 자체.
가족과 같은 금신천뢰문을 수호하고 비호하자는 것이 그가 선택한 마음이었다.
저벅, 저벅….
동부 바깥으로 나간 금명훈은 여전히 번영한 금신천뢰문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이제, 소해에게 가자."
완전한 천인기에 올랐으니, 문파의 어른들에게 경지를 고하고 원로직을 받을 때가 되었다.
아마 금명훈에게는 천뢰번의 힘으로 만든 천뢰 혁대가 주어질 터였다.
그는 천인기의 힘으로 허공에 둥실둥실 떠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며 금뢰전으로 향했다.
저 아래쪽에선 연기기 제자들이 깃발 형태의 법기를 들고 도열하여 뇌도신통을 수련하고 있었다.
그 인근에는 축기기 수준의 제자들이 칠뢰진경으로 주황색의 깃발을 형성해서 수련하고 있었고, 곳곳의 결단기 제자들도 깃발 형태의 법보를 들고 다녔다.
곳곳에서 만나는 제자들은 금명훈에게 인사를 올렸다.
평안하고 유유자적한 분위기가 금신천뢰문에 맴돌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남는 제자들은 곳곳에서 먹과 종이를 준비해서 깃발을 그리고 있었다.
마침내 금소해의 동부에 도착한 금명훈은 금소해를 불렀다.
"소해!"
"아, 명훈?"
동부 안쪽에서 금소해가 놀란 얼굴로 튀어나왔다.
그녀는 금명훈을 보며 희색을 띤 채, 환하게 웃으며 달려나가 그의 품에 안겼다.
"어서 들어와! 드디어 천인경을 안정시켰구나?"
"응. 이제 원로직을 정식으로 부여받을 예정이야."
"축하해, 이제 금뢰(金雷) 원로가 되시겠네."
"하하, 이제 태상 장문을 먼저 찾아가서 금뢰 혁대부터 받으려고."
"아, 혁대. 참."
금소해는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가 폐관에 들어간 사이, 혁대 규정에 대해 논의가 되었어, 그리고 아마 한 달 내로 바뀐다고 하던데… 조금 애매한 시기에 나왔네?"
"뭐가?"
"앞으로는 장로 급 이상에게는 혁대가 아닌, 번(幡) 형태의 법보를 수여할 예정이거든. 지난번에 혁대를 받았던 장로 급들도 전부 깃발 법보로 교체를 해 줄 예정이야."
"깃발?"
금명훈은 그녀의 말에 지나오면서 보았던 풍경을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오면서 봤는데, 본문 곳곳에서 깃발(幡)들이 굉장히 많이 보이던데, 뭔가 관계가 있는 건가?"
"음, 아무래도 네가 천뢰번을 되찾아 오며 너에 대한 인기가 올라가고, 네가 천뢰번을 되찾아 돌아온 모습을 떠올리면서 깃발 법기, 깃발 법보에 대한 선망이 문파 내에서 굉장히 올라갔거든."
"아아…."
'어쩐지, 문파 전체가 8년 새에 깃발 페티쉬라도 걸렸나 했군.'
그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금소해와 잡담을 하다 동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금명훈은 금소해의 동부로 들어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쩐 일인지, 금소해의 동부 안쪽도 무수한 깃발(幡)들로 가득 차 있었다.
금명훈은 얼마간 그 깃발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금뢰전.
그곳에서 금벽호의 웃음소리가 울려왔다.
"드디어 천인기에 이른 것이냐! 흐하하, 축하한다! 아니지, 일단…."
금벽호는 천인기를 완전히 안정시킨 전명훈을 보며 껄껄 웃다가, 생각이 났다는 듯 저물도에서 금색의 혁대를 꺼냈다.
"한 달 후부터는 참고로 금번(金幡)이라는 새로운 깃발을, 장로 급 이상부터 수여받을 것이다."
"예, 소해에게 들었습니다. 최근 문파에서 깃발에 대한 선망이 높아졌다지요?"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금뢰전 역시 곳곳에, 과할 정도로 많이 깃발들이 들어차 있었다.
"그래, 그렇지. 뭐, 원래 본문의 공법 중에서도 뇌번(雷幡)을 형성하는 공법이 많지 않았었느냐."
"그렇긴 하지요. 다만 저로서는…."
금명훈은 눈을 찌푸리며 자신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를 본 금벽호가 껄껄 웃었다.
"서은현의 금제 때문에 껄끄러운가 보구나. 걱정하지 마라. 안 그래도 최근, 수계에서부터 인자하고 광명정대하기로 소문이 났던 해룡왕께서 네게 박힌 금제에 대한 소문을 듣고, 금제를 해주하러 방문하신다 하시더구나. 대략 반년 후에 방문하신다 하니 반년만 조금 참으려무나."
"아, 그렇습니까?"
"그래, 그리고… 한 달 후에 뇌번을 수여받으며, 너를 정식으로 원로에 봉하도록 하마."
"그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어냐?"
"원로로 인정받고 난 후… 소해와 다시 한번 혼례를 올리고 싶습니다."
"호오…."
금명훈은 금벽호에게 이유를 설명했고, 금벽호는 껄껄 웃으며 문파의 미래를 책임질 금명훈과 금소해의 재혼인을 허락해 주었다.
그렇게, 한 달이 다시 흘렀다.
금명훈의 원로 봉정식과, 이번에 새로이 장로와 원로들에게 뇌번(雷幡)을 수여하는 수여식이 거대한 규모로 열릴 예정이었다.
금명훈은 뇌운봉 위쪽.
봉뢰당의 앞에 서, 금벽호가 봉뢰당에서 천뢰번을 들고 나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번 수여식 때엔 하늘에 제의를 지낼 목적으로 본좌부터 시작해, 본문의 원로들이 모두 한 번씩 천뢰번을 휘둘러 볼 것이다. 너 역시 마지막 차례에 천뢰번을 휘두른 후 뇌번을 부여받을 것이니 그렇게 알거라."
"알겠습니다."
뇌운봉에는 장로와 원로들이 전부 모였고, 뇌번을 수여받는 원로, 장로.
그들의 도려들은 각자 자유롭게 뇌운봉의 공터, 가장 앉기 좋은 자리를 골라 자유분방하게 앉았다.
금명훈과 금소해 역시, 적당히 앉기 좋은 넓적한 바위로 다가갔다.
"여기 앉자."
금소해는 최근 그녀가 제작했다는 깃발 법기를 만지작거리며 자리를 지정했다.
금명훈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수여식 이후 치러질 혼례식을 기대하며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곧이어 금신천뢰문의 모든 원로진들이 자리에 앉자 금벽호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금소해는 금벽호의 연설을 듣던 와중, 문득 금명훈을 바라보았다.
"…명훈."
"응?"
그녀는 한참이나 금명훈을 바라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오늘따라, 잘 생겼네."
"뭐야, 갑자기?"
금명훈은 피식 웃었다.
금소해는 애정이 듬뿍 담긴 표정으로 금명훈의 손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사랑해."
"나도 마찬가지야."
금명훈은 빙긋 웃으며 금소해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금벽호의 연설이 끝났다.
"자, 그럼 이제 전 원로진과 장로진들에 대한 뇌번(雷幡) 수여가 있겠다! 우선 원로진들의 뇌번 수여를 시작한다!"
부문주인 진휘가 금벽호의 옆으로 날아올라 저물도를 꺼냈다.
그가 저물도를 펼치자, 저물도의 안쪽에서 무수한 금색의 뇌번들이 쏟아져 나와, 각각의 원로들 머리 위쪽으로 떠올랐다.
"자 이제, 모든 원로들이 천뢰번을 한 번씩 휘둘러 본 후 그대들에게 뇌번을 수여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뇌번 수여식을 시작한다!"
부웅!
금벽호가 천뢰번을 휘둘렀고, 천뢰번이 천뢰를 불러일으켰다.
쿠르르릉!
그와 동시에 원로들의 머리 위에 떠오른 금색 뇌번들이 진동하며 천뢰를 이끌었다.
콰지지직!
금벽호의 바로 아래에 앉아 있던 원로의 머리 위에 있던 뇌번이 천뢰를 받아, 주변으로 퍼뜨렸다.
파지지직!
첫번째 뇌번의 천뢰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뇌번과 이어졌다.
두 번째 뇌번의 천뢰가 다음 뇌번과 이어졌다.
그렇게, 원로들이 앉아 있는 위치에 따라 천뢰가 이동하며 뇌번과 뇌번을 이었다.
그 모습을 위에서 보던 금벽호는, 문득 의아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저건 꼭… 어떤 문자 같군.'
"보이는가, 부문주?"
"예, 보입니다. 신기하군요. 원로들이 모두 본인이 자유롭게 자리를 선택하여 앉은 것인데 마치… 문자를 형성하는 것 같습니다."
"허허, 정말로 신기한 일이로군. 어쩌면 금신천뢰문에게 하늘이 어떠한 계시를 내리는 것인지도 모르니 한 번 무슨 문자인지 볼까."
금벽호는 껄껄 웃으며 아래에서, '우연히' 생겨나는 문자를 읽었다.
"정(政)…려(勵)."
* * *
문주 금린은 당당한 얼굴로 뇌번을 바라보았다.
그의 아들인 금진찬 역시 곧 있을 그의 장문인 취임을 고대하고 있었다.
금명훈과 금소해는 서로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손을 맞잡고 있었다.
금신천뢰문은 희망과 번영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그렇게.
그렇게,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갈라졌다.
꿈뻑.
* * *
어둠 속.
나는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무색유리검을 휘둘렀다.
답천 너머에 다다르기 위해서라고, 그렇게 이유를 두고는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피어나는 심마(心魔)를 잠재우기 위한 방안이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검을 휘둘렀을까.
시간의 흐름마저도 잊을 정도로 검을 휘두르던 어느 순간.
파아아앗!
갑자기, 어둠이 걷혔다.
"…!"
'봉인이….'
"풀려난다고?"
파아아앗!
내가 봉인에서 풀려나자마자 본 것은, 전신에 피 칠갑을 한 홍수령.
그리고, 저 [위]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의 '시선'!!!
"…그렇군."
나는 홍수령을 보며 물었다.
"금신천뢰문은, 멸문했습니까?"
그 말에 그녀는 피식 웃었다.
"아니, 멸문이 진행 중이다. 바깥에 나가면… 하늘을 보면 안 된다."
나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저를 데리고 탈출하러 오심이십니까?"
"아니. 따라와라."
나는 그녀를 따라 나갔다.
내가 봉인되어 있던 곳은 부문주 진휘의 동부 옆에 있는 봉령전이라는 전각 안이었다.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거대한존재의시선을….
푸콱!
우우웅!
나는 멸신겁천을 운용했고, 눈앞에서 홍수령이 자해를 하며 정신을 유지하는 것을 보았다.
"크, 흐흐… 역시 미쳐 버리겠군. 알겠나, 서은현. 우리 금신천뢰문은, 곧 멸망한다."
"…."
"멸망 전, 너를 보고자 형뢰동에서 나와 너를 찾아왔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제 우리는 죽는다. 그러니…."
부웅, 부웅, 부웅, 부웅!
그녀의 주변으로 16개의 비검 법보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손을 펴자 그녀의 손 위로 9개의 동그란 구슬이 떠올랐다.
"그건…!"
"마지막으로, 너와 대련하고 싶다."
"…."
"수락해 줄 거냐?"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무색유리검을 꺼내 들었다.
말은 필요 없었다.
우리는 각자 검을 잡고, 멸망의 코앞에서 서로를 향해, 마지막 대련을 장식할 무공의 기수식을 잡았다.
겁천(劫天) (1)
그녀의 황금빛 비검과, 내 무색유리검이 서로를 겨눴다.
머리가 과열된다.
우리는 수십 합의 공방을 서로서로 예견하며 가상에서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리고 공방의 결과는, 백이면 백 전부 나의 승리였다.
분명 등봉조극의 극한까지 미친 듯한 속도로 도달한 그녀였지만, 나는 공방 속에서 더 이상 봐주지 않았다.
답천까지 꺼내 쓰며 그녀를 밀어붙였고, 그 결과 의념 속에서 이뤄지는 공방의 예견은 몇 번을 싸우든 홍수령의 패배였다.
스릉―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 보를 내디뎠다.
부웅!
홍수령이 비검을 잡고 좌하에서 우상으로 대각선으로 올려 벤다.
일순간 비검에서 뿜어진 뇌전이 크게 몰아치며 내 상반신을 쓸어버리듯 베어 왔다.
피이이잉!
공기가 찢어진다.
다음 순간, 나는 단악검법 1, 2, 3초를 한 번에 터트리듯 사용하며 상단세, 하단세, 올려 베기를 통해 그녀의 뇌전검을 찢어발겨 버렸다.
이어서, 그녀가 반응할 틈새도 주지 않는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비둔술도, 요수공법의 육체 능력에도 의지하지 않은 채.
순수한 의식의 가속으로만 앞을 향해 나선 내 몸뚱어리에, 그대로 공기가 밀려 나가며 충격파가 생기는 것이 보였다.
일순간 소리마저 뛰어넘은 나는 홍수령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가슴을 향해 부드럽게 찌르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찰나의 틈새에서 나와 눈을 마주친 홍수령은 비둔술, 그리고 뇌도공법, 그리고 아홉 개의 강환을 써 내 가속에 쫓아 붙으며 찌르기를 튕겨 내었다.
일 보를 뒤로 물러선 그녀가 들고 있던 비검을 내게 던진 후, 양손을 벼락으로 변화시키며, 벼락이 된 손으로 결인을 맺었다.
파칙!
그에, 16자루의 비검이 순차적으로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제 싸움은 무공 대 무공이 아닌 비검술의 영역까지 넓어졌다.
그녀가 겨루고 싶은 것은, 무(武)가 아닌 검(劍)의 기예(技藝).
그녀 자신도 한 명의 검객으로서 죽기 전에 검을 겨룰 수 있다면 무공을 쓰든 비검술을 쓰든 상관은 없는 것이었다.
부우웅!
나는 더더욱 의식을 빠르게 가속화하며, 무색유리검을 들고 사방에서 나를 몰아치는 16개의 비검을 상대했다.
16개의 비검을 나를 중심으로 회전하며 검진을 짰고, 64개의 변화를 보여 주며 나를 몰아붙였다.
일전에라면 그저 비검술이라는 '술법'에 뇌도공법의 조화가 이뤄진 '법술'이었을 홍수령의 검진.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게서 검에 대한 깨달음을 전해 듣고, 나와 만나 무(武)의 관점에서도 검을 다룰 수 있게 된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쓰는 것은 더 이상 단순한 술법이 아니었다.
윙, 윙, 윙, 윙!
홍수령의 검진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변화하며 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마치, 16명의 홍수령이 직접 검을 잡고 사방에서 나를 몰아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정말로 오랜만에 무공 대련다운 대련을 하는 느낌을 받으며 찰나의 시간 동안 수천 합을 주고받았다.
부웅!
검진에 갇힌 채 활로를 뚫기 위해 진의 약한 곳을 향해 무색유리검을 찔러 들어간다.
투콰앙!
그대로 진의 일부가 붕괴하는 듯싶었으나, 16개의 비검은 나를 포위한 것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따라붙었다.
나는 봉우리 하나를 찔러 들어간 후, 무너뜨리곤 자세를 바로잡고 나를 향해 쏟아져 들어오는 검기들을 향해 빠르게 가로 베기를 날렸다.
―――!
소리조차 끊겨 버린 찰나.
그대로 인근의 높은 봉우리들이 모조리 잘려 나가 버렸고, 홍수형의 검진 역시 일순간 흐트러졌다.
하지만 그녀의 검진이 흐트러지자마자 보인 것은 검진의 바깥에서 가속을 하며 내게 달려드는 홍수령이었다.
타악!
흐트러진 검진에서 한 개의 비검을 낚아채 잡은 홍수령은 그대로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붕, 붕, 붕, 붕!
비둔술, 뇌도공법, 등봉조극의 가속.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사용하는 그녀는, 오직 순수하게 무공의 가속만을 사용하는 내 움직임에 간신히 따라오며 나와 합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그사이에 어느덧 또다시 그녀의 비검들이 검진을 안정시키기 시작했다.
수만에 달하는 미래를 서로서로 예견하며 서로의 경우의 수를 차단한다.
그 과정을 머리에서 겪은 후 현실로 옮기며 상대와 수 싸움을 벌인다.
나는 압도적으로 그녀를 밀어붙이며 공격을 가할 준비를 했다.
검진이 다시 발동되기 전 홍수령을 제압한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비검 중 8개가 내가 예상치 못한 각도로 갑자기 검진을 펼쳐 왔다.
나는 순간 놀랐으나 빠르게 홍수령을 향해 강하게 검을 떨쳐 그녀를 날려 버리고 여덟 개의 비검진과 부딪혀 검진을 파훼해 버렸다.
하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8개의 소형 검진이 파훼되며 비검들이 날아간 자리로 나머지 8개의 비검들이 모이며, 완전한 검진을 펼치기 딱 좋은 각도가 되었다.
파아아앗!
16개의 비검이 검진을 펼치며 다시 나를 가뒀다.
그녀와의 수 싸움에서 처음으로 밀린 것이었다.
나는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동시에 의념을 읽으며, 상대의 수를 차단하고 내 수를 이어 가며.
점차 그녀와 속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셨군요.
나는 검을 휘둘러 검진을 뒤흔들고 눈을 돌려 검진의 약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는 너는, 검끝이 흔들리고 있군.
홍수령이 검진 밖으로 와, 결인을 맺었다.
그녀의 양손에 기(氣)가 응집되며 뇌검(雷劍)이 생겨났다.
―순수한 실력 차만으로, 나는 네게 닿을 수 없다. 이렇게 우리가 공방을 주고받을 수 있는 건… 네가 현재 검 끝에 너무 많은 망설임을 담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녀는 망설임없이 검진 안쪽으로 뛰어들며 검진을 상대하는 내게 폭풍처럼 검을 몰아쳤다.
―그래야 대련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제대로 검을 쓰기 시작한다면, 대련이 더 이상 성사되지 않습니다.
콰아앙!
나와 그녀가 부딪혔다.
우리는 서로의 검을 마주 대고 서로와 눈이 마주쳤다.
홍수령이, 육성으로 말했다.
"…상관 없다. 네가 힘을 숨기고 있단 건 알고 있어. 진짜 네 검을 보여 보아라."
"제 진짜 검을 보이라고요?"
나는 공망한 미소를 지으며 뇌까렸다.
"의미 없습니다. 그리해서는 아무것도 성사되지 못합니다. 당신은 생의 마지막을 최고의 대련 속에서 보내고 싶은 게…."
"서은현!"
그리고, 그녀가 진심으로 화가 난 듯 외쳤다.
"진짜 검을 꺼내라."
"…."
"최고의 대련 속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싶은 게 아니야. 아직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의념을 넘어서 아예 그 너머의 시야를 가지고 있단 건 안다. 그런데도 알지 못하느냐?"
"…그 모든 게…."
나는, 음울한 표정으로 검에서 힘을 빼고 검을 늘어뜨렸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양수진이 주장한 비인간론.
금신천뢰문을 살리고자 이번 생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결과.
운명에는 저항할 수 없다는 쓰라린 결론.
나는 허망한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이제 전부 죽을 것이 아닙니까. 이를 막으려면 제 멸신겁천을 쓰면 어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멸신겁천을 쓰면 금신천뢰문은 사라집니다."
나는 악을 쓰듯이 외쳤다.
"어떻게 해도, 내가 지키려 했던 것이 멸망합니다! 도대체 여기서 더 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겁니까…!"
"…서은현."
홍수령이 내게 비검을 겨눴다.
"나는."
하늘의 거대한 '시선'을 견디느라, 수없이 자해를 해 대서 피 칠갑이 된 몸.
홍수령은 붉게 물든 장포를 입은 상태에서도, 피칠갑이 된 몸을 가눈 상태에서도 형형한 안색으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너와, 검을 겨루러 왔다."
"…."
"하늘이 아니라, 너와 겨루러 왔단 말이다."
"…."
"무슨 의미인지 알겠느냐?"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의도가 보였다.
그녀의 각오와 의지가 보였다.
홍수령이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가, 네 손으로. 검을 겨루며 나를 끝내 줬으면 하는 것이다."
"…."
"하늘이 아니라 네 손에 검으로 죽고 싶다. 그렇기에 널 찾아와 지금 겨루고 있는 것이다."
"…잔인도 하시군요."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잇몸이 아플 정도로 이를 거세게 악물었다.
그러지 않는다면, 울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
"뭐 어떠하겠느냐. 너도, 나도, 이미 둘 다 잔뜩 미쳐 있는 몸이요, 언젠가 죽어 흙이 될 몸인데. 한순간이라도 살아 있는 지금. 이미 멸망이 예정된 것, 하고픈 것을 하면 아니 되느냐?"
"…."
"운명을 이길 수 없다면, 하물며 운명의 안에서라도 선택을 하면 안 되는 거란 말이냐."
"…."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지.'
울적했던 방금의 기분이 무색하게, 나는 그녀의 말이 내 가슴에 '닿았'다고 느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어차피 죽음이, 멸망이 예정된 운명이라면 그 안에서라도 내 마음 가는 길을 찾으면 아니 되냐는 소리였다."
"…예?"
순간, 진심으로 죽음을 앞둔 채 내뱉는 그녀의 그 말에.
내 동공이 흔들렸다.
꽈르르릉!
어디선가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이 울린다.
천벌의 주인이 힘을 쓰려는 모양.
하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 눈앞의 홍수령에게 더더욱 집중하였다.
"우리의 삶은 찰나. 번개의 본질도 찰나. 한순간 피고 지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멸망을 코앞에 둔 지금의 짧은 찰나의 순간조차 내 삶이 아니냐. 수백 년간 뇌도공법을 익혀 온 종사로서, 검수로서, 나는 지금!"
부웅, 부웅, 부웅!
16개의 비검이 그녀를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붕붕붕붕!
점차 회전 속도가 빨라지며, 천지영기가 그녀에게로 점차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죽음의 형태만은, 하늘이 아닌 네게 맡기려는 것이다!"
번쩍!
황금빛 뇌전이, 검기와 하나 되어 수천 개의 변화를 머금은 채 내게 쏘아져 들어왔다.
명백한 천인기 대원만 급의 일격.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그녀의 마음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검을 휘둘렀다.
슈쾅!
무색유리검이 휘둘러지며, 그대로 홍수령이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그녀의 상반신이 대각선으로 잘려 나갔다.
푸콱!
"흐, 그래. 그거다!"
홍수령은 빠르게 상반신을 재생하며 비검을 움직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처음으로 공망한 마음이 떨어져 나가는 걸 느꼈다.
"…알겠다."
나는, 백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천재 서은현이 아닌, 2천5백 살을 넘게 먹은 본래의 나로 돌아가 그녀를 상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소원을 들어주마, 홍수령."
슈릉―
나는 검(劍)이 되었다.
대지를 디딘 발도, 몸을 지탱하는 다리도, 사지를 다루는 허리도, 검을 휘두를 팔도.
그 모든 것을 판단할 머리도.
숨을 쉬는 폐도, 기운이 도는 영맥도, 피가 도는 혈맥도. 신호가 도는 신경도.
손끝과 이어진 무색유리검도, 내게서 뿜어지는 일말의 기운 하나하나마저도.
내 의념마저도 모조리 검이 되어 내 안에서 하나 된다.
나는 그녀와의 대련에서 처음으로 무형검을 꺼냈다.
스르르릉―
동시에, 나는 금단에 보관되어 있던 나머지 2,999개의 무색유리검을 전부 꺼냈다.
무색유리검이 허공에 만천하며,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은은한 투명함을 자랑하였다.
"지금부터, 너를 죽이겠다."
나는 그 자체로 검이 된 상태에서 홍수령과 눈을 제대로 마주하였다.
"목숨을 태워라."
"그럴 예정이었다."
번쩍!
홍수령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천인기 대원만의 홍수령이, 일순간 전신의 수행을 격발시켰다.
자신의 본래의 수명을 전부 깎아 내서, 지금 이 순간!
번개와도 같은 멸망 직전의 찰나에 모조리 태워 빛낸다!
쿠구구구구!
찌릿거리는 느낌과 함께, 나는 그녀의 기운이 사축기 수준까지 치솟아 올랐다는 걸 인지하였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고.
다시금 말은 필요 없었다.
시간이 정지한다.
나는, 홍수령을 상대하며 처음으로 진심을 다해 무학을 펼쳤다.
자신의 목숨을 태운 그녀의 일격 일격은 한 대만 스쳐도 치명상이었기에, 월수궁무록을 극한까지 운용하며 피해야 했고, 3천 자루의 유리검을 전력을 다해 운용했다.
무형검의 천변만화에 따라 무색유리검은 서로서로 위치를 바꿔 가며 무형검의 이점을
대화시켰다.
목숨을 태운 그녀는 뇌전 그 자체가 되었다.
번개의 속도로 움직이며 비둔술, 등봉조극 등 모든 가속을 사용하는 그녀에 맞서, 나는 무형검을 통해 극한으로 의식을 가속했다.
정지된 시간 속인 탓인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저 먹먹한 세상에서, 나는 봉우리 하나를 그대로 깔아뭉개며 검무를 펼쳤고, 무형검의 검무에 따라 인근에 있는 봉우리 수 개가 그대로 조각조각 나 흩어졌다.
홍수령은 내 검을 피한 후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비검을 움직였다.
그녀는 그 자체로 하나의 검진(劍陣)이 되었다.
스스로가 진의 축이 되어, 진을 운용하며 검을 다룬다.
번쩍!
검이 움직이며 빛을 쏟아낸다.
'이건 못 막겠군.'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나 역시도, 수결을 맺기 시작했다.
청문령에게 배워 극한까지 파고들었던 법술들이 무색유리검들의 사이로 섞이기 시작했다.
청문령의 기초법술.
김영훈의 무공.
둘로 인해 나는 각각의 분야에서 극점을 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홍수령과 함께했던 나날들.
나는 그 나날들을 통해, 두 분야를 완전히 합일할 수 있게 되었다.
홍수령을 중심으로 검진이 회전하는 것처럼.
나를 중심으로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이 일사불란하게.
그러면서도 무형검의 영향을 받아 자유분방하고 변화무쌍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무(武)와 법술(法術)의 완전한 일체.
피이잉!
단악검법(斷岳劍法).
제이십팔초(第二十八招).
나는 새로운 일체감을 느끼며, 단악검법의 새로운 장을 개화해 냈다.
3천 자루의 무색유리검이, 무색유리검에 실린 무형검이.
나를 중심으로 원(圓)을 그린다.
원(圓)은 천인기의 핵심 이치이기도 했다.
어쩌면 하늘의 이치이기도 했고.
나는 천인기에 대한 어렴풋한 깨달음과, 내 무학의 지식, 홍수령에게서 배운 검진에 대한 지식을 총동원해 만든.
나만의 검진(劍陣)을 펼쳐 냈다.
검진의 이름은 금강(金剛).
단악검법의 새로운 초식이자 금강 속 변화의 이름은 일만이천봉(一萬二千峯).
쉬리리릭!
3천 자루의 무색유리검이 회전하며, 각각 세 개의 검영(劍影)을 만들어 냈다.
무색유리검은 검 본체와 검영을 포함해, 총 네 개로 나뉘었다.
각각의 검과 검영은 춘하추동의 사계(四界)를 상징했다.
사계절이 회전하며 원을 이룬다.
3천 자루의 무색유리검에 네 번의 변화가 더해지며 1만 2천의 공격 횟수를 만들었다.
나의 일만이천봉과, 홍수령의 검진이 부딪혔다.
내 무색유리검에서 뿜어지는 검기 하나하나에 봉우리들이 갈라지고, 계곡이 생겨나며 산이 깎인다.
홍수령의 비검에서 뿜어지는 뇌전 줄기 하나하나에 산이 녹아 유리가 되고, 숲이 불타 재가 된다.
우리는 정지된 시간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얻어 낸 극의를 펼쳐 내며 그렇게.
빛무리에 휩싸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