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쿠르르릉―
두 명의 천인기 원로들이 보호막을 치고서 나와 전명훈을 보호해 주었다.
나는 보호막 바깥에서 휘몰아치는 '여파'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저게 전성기의 연위와, 천뢰번을 든 금벽호의 힘인가….'
금벽호 자체는 나와 싸워도 질 정도로,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뢰번을 들자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흉악한 힘을 보여 주었다.
저건 차라리 준 합체기 요왕 수준이었던 규련에 준할 정도로 보였다.
쿠릉, 쿠르르르릉!
"…!"
나는 천지간이 흔들리는 와중.
저 멀리, 육비의 뇌신이 쌍두의 귀신에게 점차 밀리는 광경을 보며 숨을 들이켰다.
'저게 무슨… 연위가 금벽호를 몰아붙이고 있는 게 아닌가?'
말 그대로였다.
흑발과 백발을 산발한 귀신은 번개를 먹어치우고, 먹어치운 번개를 다시 뱉어내며 육비의 뇌신을 몰아치는 중이었다.
한 번 공격이 반사될 때마다 뇌신은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비쩍 마른 쌍두의 거인이 뇌신에게 달려들려 할 때였다.
육비의 뇌신이, 손에 든 여섯 개의 깃발을 전부 흡수해 버린 후 여섯 개의 손으로 천뢰번을 움켜쥐었다.
천뢰번은 주변의 벼락을 흡수해 크기가 커지며, 뇌신이 딱 들기 좋은 크기로 거대해졌다.
그 모습을 본 연위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미친놈! 뭘 하려는 거야!!! 하지 마라! 어찌 뒷감당을 하려는 거야!]
어찌나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 연위의 음성이 뇌령도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고, 천인기 원로들과 우리 역시 그 목소리에 서린 분노를 읽으며 식겁했다.
이윽고 연위의 주변으로 뇌전으로 이뤄진 사축기 수사의 '장막'이 나타나며 두 존재를 삼켜버렸다.
* * *
봉두난발을 한 쌍두의 거귀.
연위는 눈에 핏발을 세우며 금벽호를 노려보았다.
[흉물의 봉인을 기어이 한 겹 풀었구나. 멍청한 녀석. 집안싸움을 끝내려고 최악의 선택을 했어. 오직 시조만이 걸어 놓을 수 있는 봉인을 풀었으니, 흉물이 횡액을 불러오기가 더더욱 쉬워졌겠구나! 무슨 병신 같은 생각으로 봉인을 푼 것이야!!!]
방금 전보다는 작은 소리로, 연위가 금벽호에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금벽호는 비릿하게 웃으며 거대해진 천뢰번을 휘두를 뿐이었다.
[시조께서 천뢰번에 걸어 놓으신 봉인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지. 천상금뢰지체만이 할 수 있는 봉인이라지?]
[그래, 이 어리석은 놈! 오직 신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천상금뢰지체가 없다면 봉인을 복구하는 건 불가능하다. 피눈물을 흘리며 동문들을 삼킨 나보다 네 죄가 더 크도다!]
[…괜찮다.]
[뭐야?]
쿠릉, 쿠르르릉!
뇌신은 여섯 개의 팔로, 거대해진 천뢰번을 휘두르며 외쳤다.
[천상금뢰지체는 이미 손에 넣었다. 봉인의 한 겹 정도는 풀어도, 천상금뢰지체가 원영 중기에만 이르면 다시 복구할 수 있어!]
[…천상금뢰지체를, 손에 넣었다고?]
연위는 멍한 눈으로 그에게 쏘아지는 번개를 피하지도, 삼키지도 않고 얻어맞으며 금벽호를 바라보았다.
마치 금벽호의 말에 진위를 판별하려는 듯.
그의 네 개의 눈이 금벽호를 바라보았다.
얼마 후.
연위는 더더욱 강화된 천뢰번의 힘에 직격으로 얻어맞으며 잿더미가 되었다.
그렇게, 4만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살아왔던 태수 급의 수도자, 연위는 명을 달리했다.
치이이이―
잿더미만이 남은 뇌운봉 위쪽.
금벽호는 뇌신화를 풀고, 거대한 숯덩이 형태로 뇌운봉에 기댄 연위의 시체를 보며 말했다.
"유언은 있나."
"…천상금뢰지체를 손에 넣었다고? 하, 하하…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럼 내가 4만 년 전에 했던 짓은… 도대체 나는 뭘 위해… 내 동문들은 뭘 위해…."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가 겹쳐졌던 기이한 음성은 이내 하나로 합쳐지며, 옥구슬 같은 여인의 목소리로 변해 갔다.
얼마간 횡설수설하던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숯덩이가 된 목 하나를 들어 올렸다.
"…금신천뢰문이 다시 만대에 이름을 누리겠군. 축하한다."
"그게 마지막 말인가."
"…내 죄는 씻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천상금뢰지체가 후에 잘못된 방식으로 축을 쌓게 할 수는 없으니, 정통 기축에 대해 알려주마."
"정통 기축?"
"그래. 4만 년 전의 전쟁 때, 명귀계에서 온 흑색귀골곡의 귀수(鬼修)에게 들은 진실이지."
부스스….
숯덩이는 점차 무너져 갔고, 그 사이 금벽호와 연위는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명귀계에 사람을 보내 봐라. 보다 많은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도록 하지."
"나는 문파의 대죄인이지만, 마지막은 문파를 위해 좋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어… 좋…았…."
부스스―
마침내, 거대한 거귀의 숯덩이는 모조리 흩어졌고, 그 자리에는 한 명의 여인의 시체만이 남아 있었다.
그나마도 번개 때문에 전부 숯이 되어 본래의 형상은 알 수 없었지만, 금벽호는 문파의 선배로 죽어 간 연위를 보며 눈을 감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편히 주무십시오, 선배ㄴ…."
그리고.
번쩍!
연위의 시체에서 빛 덩이가 번쩍이더니, 번개와 같은 속도로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금벽호와 천인기 원로들이 전부 긴장을 풀고 숙연해진 상황에서, 그 빈틈을 노리고 빠르게 날아간 빛 덩이.
빛 덩이를 보며, 금벽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제길…! 전부 연기였던 거냐!?"
콰르릉!
금벽호가 천뢰번을 휘두르자, 빠르게 날아가던 연위의 진혼에 한 줄기 낙뢰가 꽂혔다.
낙뢰가 꽂힌 그의 혼은 비틀거리는 듯했으나, 다시 어딘가로 멈추지 않고 날아갔고, 금벽호는 그를 쫓으려다가 결국 포기해 버렸다.
"미리 어딘가에 부활할 육체를 숨겨 놓았나 보군. 저 정도의 속도는 반대편에서 부활체가 '당겨야' 나오는 속도다."
"태상장문… 하면 어찌합니까? 사문의 배신자, 미치광이 요괴가 또다시 제 실력을 찾아 나타나면…."
"흥! 아마 그건 쉽지 않을 것이다. 천뢰번의 낙뢰에 혼을 직격당했으니, 원기를 회복하는 데에만 5백 년은 걸리겠지. 그리고 그 정도 시간이면, 이번에 우리에게 온 천상금뢰지체가 능히 합체기에 이를 수 있는 시간이다!"
금벽호는 천뢰번을 든 채 명했다.
"뇌운각의 최대 전력은 죽었으니, 빠르게 뇌운각을 몰아내고 금신천뢰문을 안정시킨다! 그리고… 명귀계로 사람을 보내 봐야 하니 명귀계에 갈 탐사대를 소집하거라! 또한 금위의 후손을, 뇌령도 곳곳을 뒤져서 찾아내라! 이번에 올라온 이들을 제하고, 모든 금씨(金氏)를 잡아 색출해 내라. 놈은 분명 부활체로 제 후손을 찾아 부활할 것이니!"
금신천뢰문이 뇌령도에 발을 딛고, 하루.
금신천뢰문은 빠르게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 * *
"자, 일단 문파가 안정화를 하느라 바쁘기는 해도 네 재능을 썩힐 수는 없으니… 오늘부터 노부가 네 스승이 되어 기본공부터 가르치겠다."
금신천뢰문의 당대 부문주이자, 천인기 대원만의 원로.
진휘(震輝)가 나의 스승이 되기로 하였다.
원래는 전명훈도 나와 함께 기본공을 익혀야 했지만, 전명훈은 금소해와 함께 이 세상의 문화와 예절을 주입받아야 하기 때문에 며칠 후에야 수련에 들어갈 것이라 하였다.
나는 진휘와 함께 금신천뢰문의 서고에 들어갔다.
금신천뢰문이 쇄천봉에서 건물째로 뽑아 온 서고 안쪽은, 창천개벽문의 서고보다도 압도적으로 넓고 방대했다.
"본문의 공법은 방대하지만, 가장 유명한 공법은 세 가지이지."
진휘는 서고 안에서 세 개의 공법서를 꺼내주었다.
"칠뢰진경(七雷震經), 그리고 태극진뢰신(太極震雷身), 멸뢰내천궁(滅雷內天宮)."
칠뢰진경은 금벽호와 전명훈이 사용했던 육비 거인으로 변신해 칠색의 번개를 다루는 공법.
태극진뢰신은 연위와 연진이 익혔던 공법.
그리고 멸뢰내천궁은 체내에 뇌궁(雷宮)이라는 것을 형성해, 뇌 속성 법술에 극단적인 저항력을 가지게 하고, 뇌궁을 중심으로 하늘에 제의(祭儀)를 지내는 데에 최적화된 공법이라고 하였다.
"가장 익히고 싶은 것을 골라 보거라."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전부 익히고 싶습니다."
검은 뱀(2)
"전부 다 익히고 싶다고?"
내 말에, 진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흐음, 원래라면 욕심부리지 말라며 경을 쳤겠지만, 뇌성체는 또 모르겠군…."
"그런데… 뇌성체라는 것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나는 이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질문했다.
그 말에 진휘는 선선히 설명을 해 주었다.
"천상금뢰지체가 '모든 번개에게 사랑받는 자질'이라면… 뇌성체는 '번개 그 자체인' 체질이다. 벼락이 인간의 몸으로 화했다고 일컬어지는 체질이기도 하지. 따라서 모든 종류의 뇌도공법을 익히는 데에 제한이 없으며, 일반적인 영근을 지닌 이들보다도 훨씬 뇌도공법의 수행 속도가 빠르다."
"호오…."
"사실, 본 금신천뢰문의 뇌도공법은 전부 시조인 금신자님을 따라가고자 만들어진 것이다."
"…?"
진휘는 간혹 제어하지 않으면 번갯불을 튀기는 내 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언으로 삼천세계의 모든 뇌전을 다루며 천겁조차 손에 넣으려 했던 시조의 천상금뢰지체…. 그 천상금뢰지체를 흉내라도 내려 했던 것이 본문의 시작이지. 따라서, 결국 본문의 모든 뇌도공법은 천상금뢰지체의 열화판이나 다름없다."
어째서인지 자조적인 눈빛을 한 진휘의 설명이 이어졌다.
"하지만 천상금뢰지체는 말 그대로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체질…. 아무리 인간의 몸으로 뇌도를 갈고닦아도 신화를 재현하기는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 먼 옛날 문파의 중흥기 때, 뇌성체가 나타났다. 분명히 전설적인 체질이지만 천상금뢰지체보다는 덜 허황된 체질…. 천상금뢰지체를 흉내 내려 하는 본문의 뇌도공법의 중간다리가 될 수 있는 체질이었지."
턱!
진휘는 내 어깨를 잡으며 진중한 눈빛으로 말했다.
"네가 타고난 뇌성체는… 천상금뢰(天上金雷)에 인간이 도달할 수 있게 하는 징검다리이다. 뇌성체가 옛날 본문에 출현했을 당시 본문의 뇌도공법은 시조님의 직계만이 이해할 수 있던 비밀스러운 공법에서, 무수한 제자를 받을 수 있는 공법이 되어 금신천뢰문의 세를 불렸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천상금뢰지체와 뇌성체가 같이 본문에 들어왔으니… 앞으로 네 역할이 막중하다."
"명심하겠습니다."
"본래라면 모든 공법을 익히는 건 스승으로서 말렸겠으나, 너와 전명훈, 그 녀석이 문파에 들어옴으로써 문파는 앞으로 비약적으로 성장할 터…. 하니 너희에게 미래를 맡기고 허락하겠다."
진휘는 내게 세 권의 서책을 쥐여 주었다.
칠뢰진경, 태극진뢰신, 멸뢰내천궁.
나는 세 가지의 공법서를 받아들고 진휘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 * *
창천개벽문에 오운제자부터 일운제자까지의 계급이 있던 것처럼, 금신천뢰문에도 제자들간의 계급이 존재했고, 계급에 따라 허리에 제자의 계급을 표시하는 혁대를 차고 다녔다.
금신천뢰문의 가장 유명한 공법인 칠뢰진경에서부터 계급의 이름을 따.
연기기에서 칠성제를 지내지 못한 제자는 적뢰(赤雷)라고 적힌 혁대를 부여받은 적뢰 제자.
칠성제를 지낸 제자는 주뢰(朱雷) 제자.
연기기 극성에 도달한 제자는 황뢰(黃雷) 제자라 하였다.
적, 주, 황.
이 세 계급은 금신천뢰문의 잡일을 담당하는 하뢰(下雷) 제자라고 통칭되었고, 그 위인 축기기 제자부터가 제대로 된 금신천뢰문의 전력으로 인정받는 제자들이었다.
축기기 제자는 녹뢰(綠雷) 제자, 결단기 제자는 청뢰(靑雷) 제자.
결단기 대원만의, 원영기에 도달할 자질이 보이는 이들은 남뢰(藍雷) 제자로 취급받으며, 금신천뢰문의 미래로 인정받는 상뢰(上雷) 제자로 불렸다.
그리고 원영기에 도달한 이들은 장로 급으로 취급받으며, 자뢰(紫雷)로 묶여 불리며 자색의 혁대를 지급받았다.
또한 천인기 원로부터는 금신천뢰문의 이름을 딴 금뢰(金雷)라는 글자가 적힌 금색의 혁대를 지급받았으며, 원로 중에서도 문파를 이끄는 최고 배분 몇몇은 천뢰(天雷)라는 자가 적힌 백색의 혁대를 받았다.
태상장문인 금벽호를 비롯한, 한두 명의 인원들만이 천뢰의 혁대를 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진휘로부터 축기기 제자를 상징하는 녹색 혁대를 받았다.
"네 자질에다가, 광한계의 밀도 높은 천지영기를 생각하면 축기기도 금방일 테니 일단 네 계급은 녹뢰 제자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네게 준 세 공법서는 네가 익히라고 준 게 아니다. 그 공법서들을 익히려면 최소 결단기에는 도달해야 하니까. 네가 앞으로 익힐 것은 적뢰공(積雷功)이라는 금신천뢰문의 기본 공법이다."
"예."
나는 '적뢰공'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진휘의 허락 아래, 적뢰공이 적힌 서책을 열어 본 나는, 그에게 받은 칠뢰진경도 같이 펼쳐보았다.
"…스승님, 이 적뢰공이라는 것 말입니다만…."
"그래, 칠뢰진경의 초반 부분과 매우 유사하지?"
그랬다.
적뢰공은 칠뢰진경의 초반 부분인 적뢰진경(赤雷震經)과 거의 유사했다.
적뢰진경의 몇몇 부분을 연기기가 익힐 수 있게 조금 더 열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의아해하자, 진휘가 설명해 주었다.
"칠뢰진경은 시조님이 직접 창안하신 공법이다. 12만 년 역사의 금신천뢰문에 최중요 공법이지. 그리고 그런 만큼, 많은 제자들이 칠뢰진경을 익히려 하며 제자들이 차후에 칠뢰진경에 입문할 때 난항을 겪지 않도록 칠뢰진경의 초반부를 연기기 시절부터 익숙해지게 바꿔 놓은 게 그 적뢰공이다."
"그렇군요…."
나는 얼마간 진휘에게 적뢰공과 칠뢰진경, 그리고 태극진뢰신, 멸뢰내천궁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그에게 뇌도공법의 가르침을 조금 더 받은 후, 나에게 배정된 동부로 돌아갔다.
우우웅!
뇌성체를 가진 내게는 금신천뢰문 최고의 영맥이 흐르는 동부가 분배되었고, 나는 동부 안쪽으로 들어가 영기를 들이마셨다.
"적뢰공이라…."
나는 뇌도공법의 기초라는 적뢰공을 들여다보았다.
뇌도공법은, 일반적인 속성공법 중에서도 굉장히 익히기가 난해한 공법 중 하나였다.
애당초, 뇌(雷) 속성이라는 것은 오행에 포함되지 않았으니까 말이었다.
오행 영근에서 자연스럽게 발전된 공법이 아니고, 수도공법 체계가 한참 발전된 이후에야 겨우 생겨난 것이 뇌도공법이었다.
그러므로 오행영근을 타고난 이들이 뇌도공법을 익히려면 방법은 두 가지.
목(木) 속성 영근을 타고나거나, 아니면 음양의 교류를 통해서 체내에서 억지로 뇌전의 힘을 키워 가거나 둘 중 하나였다.
'목 속성 영근을 타고나지 않은 이들이 뇌도공법을 익히려면 음양의 교류는 필수지만… 금신천뢰문에서는 칠성제를 지낸 이들에게만 쌍수 상대를 찾아 주지.'
그 말은 무엇인가.
칠성제를 지내지 못한 저계 연기기 수도자들은, 뇌력을 얻기 위해서는 혼자의 몸으로 음양의 교류를 해내는 방법을 찾아내거나 혹은 외부에서 강제로 뇌력을 끌어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외부에서부터 뇌력을 어떻게 끌어오느냐?
간단했다.
뇌전 속성을 지닌 단약을 왕창 섭취하거나, 혹은 선배들에게 전기 고문을 당하거나.
혹은 번개가 떨어지는 지역에 가서 맨몸으로 번개를 맞거나다.
당연히 세 가지 방법 모두 엄청난 재화가 필요하거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금신천뢰문의 적뢰급 수도자들은 적뢰공을 익히기보다는 외부에서 파는 오월입도경 같은 기본공으로 칠성제를 지낸 후 그 이후부터 쌍수 교류를 하며 공법을 익히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내 경우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말이었다.
'이게 적뢰공인가.'
나는 어차피 오행영근을 지니고 있었기에 목 속성 영근으로 뇌전의 힘을 구현할 수 있었다.
목(木)은 팔괘의 괘상에서 진(震), 즉 벼락을 상징하니 충분히 자격이 있는 셈이었다.
따끔, 따끔….
처음 공법을 운용하자, 손끝에서부터 따끔거리는 정전기가 올라온다.
우우웅!
나는 숨을 들이쉬며 법화단전을 바로 형성했다.
단전 안쪽에서 음양이 얽히며 단수기의 법화단전을 형성했다.
'그럼, 어디 한번….'
연기기에 진입할 자격을 얻었다.
우우우웅!
나는 내단 안쪽에 있는 무색유리검들을 방출했다.
츠츠츠츠츳!
무색유리검에 만상인연도로 보전해 놓은 수행들이, 다시금 내게 밀려들기 시작했다.
'뇌도공법을 수행해 볼까?'
목 속성 영근도 가지고 있다.
요수공법을 통해서 나 혼자서 음양의 교류를 체현하는 방법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뇌전화의 저주를 통해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뇌력이 자발적으로 공급되며,
몇 번이나 연기기를 반복한 탓에 연기기의 구결들은 아예 인이 박인 상태.
거기다가 지난 회차의 수행들 역시 무색유리검에 만상인연도를 통해 저장해 놓았으니….
치직, 치지지지직!
나는 동부 안쪽의 진득한 영기를 빨아들이며, 요수공법, 오월입도경, 그리고 적뢰공을 모두 동시에 운용했다.
파지지지지직!
따끔거리는 정전기에 불과했던 적뢰공의 뇌전은, 내가 수련을 시작함과 동시에 순식간에 육안으로 보일 정도의 뇌전으로 증폭되었다.
파지지지직!
양손 위쪽으로 푸른 뇌전이 넘실거리며 마구 꿈틀거렸다.
"칠십이지살."
순식간에 칠십이 개의 영맥이 전부 활성화된다.
동시에 단전 안쪽의 음양이 폭발하며, 요수공법 역시 연기기 1성에 대응하는 경지로 변화한다.
그리고 요수공법의 음양의 흐름에 적뢰공의 구결을 조금 더하니, 뇌전의 기운 역시 더더욱 거세졌다.
"삼십육천강."
서른 여섯 개의 영성이 곳곳에 맺히고, 요수공법도 그만큼 다시 성장했다.
양손에서 넘실거리는 뇌전의 굵기가 더더욱 굵어졌다.
"십이지율."
영기에 존재하는 열두 종의 영파가 내 손아귀에 잡힌다.
"십천간."
열 개의 영력의 상징이 영력을 인도했다.
"구궁, 팔괘."
구궁귀일과 팔괘완로의 단계를 빠르게 지난다.
순식간에 연기기 6성.
연기기 7성을 진행하려면 천기와 시운을 맞추어야 한다.
하지만.
체내의 요수공법은 계속해서 치고 올라오며 음양을 서로 부딪쳤다.
그에 적뢰공의 뇌력 역시 더더욱 거세졌고, 어느 순간 음양의 충돌이 극에 도달했다.
꽈아아앙!
푸콱!
단전이 터져 나갔다.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아랫배에서 피가 솟구쳤으며, 입가에서 피가 왈칵 올라왔다.
요수공법은 매우 간단하다.
말 그대로 단전 안쪽에서 음양의 기운을 폭발시키는 걸 반복만 하면 되니까.
그렇다면, 요수공법은.
지족의 공법은 천족의 공법보다 난이도가 낮은가?
절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몸이 견디지 못하면 그대로 몸이 폭발하며 사망에 이르는 것이 요수공법.
오직 강한 이들만이 살아남는 것이 요수공법이다.
천족공법이 하늘에게 제사를 지내 수도를 허락받는다면.
지족공법은 자기 자신을 불살라 살아남으면 세계에게 허락받은 것이요, 죽으면 허락받지 못한 것이라는 적자생존의 방식이었다.
물론.
츠츠츠츳!
나는 빠르게 무형검을 일으켜, 무형검을 실의 형태로 뽑아내 빠르게 의술 지식으로 상처를 봉합하고 기운을 돌려 재생시켰다.
폭발한 요수공법의 기운은 정순한 생명력이 되어 재생을 도왔다.
'몇 번 더 폭발시켜야겠군.'
천족공법이나 지족공법이나 7성이 항상 고비다.
천족공법에서는 시운을 맞추면 된다면, 지족공법은 시운이고 뭐고 없는 순수한 운과 육신의 강도를 측정하는 것이었기에 어떤 면에서는 천족공법보다도 더욱 까다로웠다.
꽈아앙!
꽈앙! 꽈아아앙!
푸콱, 푸콱, 푸콱!
나는 몇 번이고 아랫배가 터져 나간 후에야 겨우겨우 연기기 7성 수준을 벗어날 수 있었다.
"후우…."
요수공법에는 시운이 필요 없다.
하지만 내가 연기기였던 시절에 요수공법을 익혔다면 과연 연기기 7성을 쉽게 넘을 수 있었을까?
'아마 배가 터지는 것에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그대로 죽었을 확률이 더 높겠지.'
물론, 그래도 감을 잡기만 한다면 제의 절차가 필요 없이 바로 연기기 7성을 넘어설 수 있다는 건 좋다.
'천족공법에서의 연기기 제의는 추후에 지내기로 하고….'
꾸궁, 꾸웅! 꾸우웅!
나는 계속해서 요수공법을 운용해 가며 경지를 되찾았다.
츠츠츳!
내가 광한결을 통해 요수공법으로 개조한 창령성광오채대법이 점차 푸른 빛을 발하며 내 몸을 물들였다.
꾸우우웅!
마침내, 나는 순식간에 연기기 극성의 경지를 되찾았다.
우우웅!
내단이었던 것은 어느새 정순한 생명력을 머금은 요단이 되어 커져 있었다.
우우웅!
나는 요단을 다시금 폭발시켜, 축기기로 진입하기 이전까지 경지를 올려놓은 후, 피가 묻은 옷가지를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바깥으로 나갔다.
금신천뢰문의 곳곳은 이전 뇌운각에서 썼던 건물들을 밀어내고, 하계에서 가지고 올라온 금신천뢰문의 전각들을 산봉우리 곳곳에 얹어 놓는 중이었다.
이제 저 전각들을 산봉우리에 흐르는 영맥들과 연결하고, 문파의 대진을 발동시키면 비로소 제대로 된 문파가 완성되는 것이리라.
나는 빠르게 월수궁무록을 써서 존재감을 감춘 후.
무형검을 사용해 뇌령도의 인적이 드문 곳으로 날아갔다.
이전에는 천공도의 총령이 감시하고 있는 것이 무서워서 무형검을 사용치 않았다.
하지만 성계에서 장익과 대화를 나누며, 인족 총연맹에서 인족 영역 곳곳을 감시하는 합체기 태수 위령선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위령선의 감지력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내 월수궁무록을 사용하면 절대로 그에게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장익으로부터 전해 들은 바 있었다.
'그랬으니, 내가 15회차 때에 월수궁무록을 쓰고 뇌령도에 천뢰번을 훔치러 잠입했을 때에 위령선이 나를 감지하지 못했던 거겠지.'
나는 뇌령도의 적당한 산봉우리에 자리를 잡은 후, 무색유리검에 저장한 수행과 주변의 천지영기를 빨아들였다.
쿠구구구구!
삽시간에 하늘이 일렁이며 먹장구름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꾸웅!
요단이 부서져라 영기를 운용한다.
'부순다.'
요족은 어떻게 축기기로 올라가는가.
바로 막대한 영기를 먹어치운 후, 그 영기를 요단 안에서 일시에 폭발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요단이 박살 날 정도의 폭발이 일어난다.
여기에서 박살 난 요단을 다시 응집해 전신의 영맥을 활성화시키고 전신 영맥과 요단이 확실하게 연결이 되면 축기기에 오른다.
그리고 실패하면 요족은 수행을 모조리 잃고 짐승으로 변한다.
콰아아앙!
나는 망설임 없이 요단을 박살 냈다.
요단을 이루던 영력은 곧이어 전신 혈맥으로 퍼져 나갔고.
동맥과 정맥, 붉고 푸른 혈관들 안쪽으로 순환하며 음양의 순환을 맞추었다.
음기는 정맥, 양기는 동맥.
그리고 모든 음양이기는 심장, 즉 중단전에서 다시 만난다.
쿠구구구!
심장이 터져라 부풀어 오르고, 나는 심장이 터지기 직전.
중단전에 몰린 기운을 다시 하단전으로 모조리 내려보냈다.
'집(集)!'
기운을, 응집한다!
츠츠츠츳!
음양의 흐름이 하단전에서 다시 얽히며, 확고한 '요단'을 형성해 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내공과 조금은 헷갈렸던 영력은 확실한 '요력'으로 변화하며 전신에 생명력을 더하였다.
우우우웅!
요단에서 뻗어 나간 음양이기가 전신의 동맥과 정맥을 회전하며 심장으로 모이고, 심장에서 모인 혼원의 요력이 다시 요단으로 내려간다.
단(丹)이 육(肉)과 완전히 연결되었다.
영기와 생명력이 합일한 이 기운.
이것이 바로 요력(妖力)!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한 줄기 청뢰가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평시라면 무형검으로 베어 냈을 청뢰.
하지만, 나는 적뢰공을 운용하며 하늘을 향해 전신의 모공을 활짝 열어젖혔다.
'흡수한다.'
파치지지지직!
막대한 뇌력이 단전에 쌓인다.
칠성제를 지내지 않아 아직 바로 법력으로 전환할 수는 없지만, 적뢰공으로 붙잡아 놓을 수는 있다.
칠성제를 지내면 이 막대한 뇌겁의 힘은 바로 수행으로 전환해, 천족공법 역시 삽시간에 연기기 극성으로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
'끝이 아니지.'
더 간다.
쿠웅, 쿠웅, 쿠웅!
음양은 계속해서 충돌한다.
축기 초기에 이르렀던 내 수준은 무색유리검에 저장해 놓은 수행을 먹어치우며 다시금 축기 대원만이 된다.
'폭발!'
꽈아아아앙!
결단기에 오르는 충격은 축기기에 오르는 충격과도 비할 바가 되지 않는다.
축기기에 오를 때는 그저 요단만을 박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면, 결단기에 오를 때는 훨씬 더 강력한 폭발을 요한다.
축기기에서 요단을 잃으면 수행을 잃고 짐승으로 돌아가는 것에 그치지만, 결단기에 이를 때 요단이 폭발하면 그 요족은 십중팔구 치명상을 입고, 짐승으로 돌아가도 장애를 안고 살게 된다.
우웅!
그러나 나는 요단 안쪽에 다시 강환을 만들어 내, 다시금 내단을 만들어 냈다.
내단이 요단의 중심에서 중심을 잡아 주며 폭발의 위력을 경감시켜 줄 것이다.
'간다!'
창령격원결의 푸른빛과, 성광호체공의 별빛.
그리고 오행장원전의 오색빛이 요단 속에서 빛난다.
퍼어어엉!
울컥!
입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됐다.'
이 정도 충격이라면 충분히 수습할 수 있다.
다시금 폭발한 요단이 전신 혈맥을 휩쓴다.
정맥과 동맥으로 나뉘어진 음양이기는 심장으로 모였다.
그러나 결단기에 이를 때는 심장에서 하단전으로 가지 않는다.
'올린다.'
츠츠츳!
심장에 모인 막대한 요력이 상단전으로 향했다.
그렇게 상단전을 완전히 활성화시키며, 요족의 상, 중, 하단전 곳곳에 영성이 생겨나게 한다.
'그리고 다시….'
상단전에도 요력을 깃들이게 하면 다시 기운은 하단전으로 내려보낸다.
그렇게, 상, 중, 하단전은 촘촘하게 연결되어 이전보다도 훨씬 더 단단하고 강력한 요단을 얻게 된다.
이것이 요족의 결단기.
쿠르르릉!
나는 다시 한번 내게 날아드는 천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 역시 적뢰공으로 흡수해 두고 싶지만, 이미 적뢰공으로 흡수할 수 있는 한도는 넘어섰다.
나는 속으로 입맛을 다시며 천뢰를 갈라 버렸다.
'그럼 마지막으로….'
꽈아아앙!
나는 결단기에 이른 상태에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무색유리검의 수행을 빨아들였다.
꽈아아아앙!
그리고 마침내 어느 순간.
츠츠츳!
내 의식 영역이 나와 같은 형태로 압축되기 시작했다.
압축된 의식 영역은 내 체내로 들어오더니, 요단 안쪽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먹장구름 안쪽으로 청색의 뇌전과 더불어, 금색의 뇌겁이 꿈틀거린다.
꽈르르르릉!
쌍색의 천뢰가 나를 때렸다.
콰지지지직!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형검을 씌운 채로 천뢰를 맞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월수궁무록은 계속 쓰고 있으니, 들킬 걱정은 없다.
우우웅!
나는 빠른 주마등을 경험한 후.
체내에 아기 형상의 의식과 요력의 집합체.
원영(元靈)이 탄생한 것을 의식하자마자 눈을 뜨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피이잇!
푸확!
그리고, 그대로 하늘을 향해 발돋움을 하자 내 육신은 쌍뢰(雙雷)를 베어 버리며 먹장구름을 뚫고 구름 위쪽에 도달했다.
"후우…."
내 주변으로는 3천 자루의 무색유리검이 나를 따라 올라왔다.
요수공법으로 개조한 청령성광오채대법의 힘이 내 밑에서 음양으로 소용돌이친다.
우우우웅!
나는 무색유리검들을 다시 요단 안쪽으로 회수하며 미소지었다.
"원영경, 회복."
내가 경지를 회복하는 걸 반복하는 것만을 도대체 몇 번이나 해 왔던가.
이제, 절차가 필요 없이 육신의 희생만을 요하는 지족공법의 경우.
수행을 저장해 놓은 만상인연도와 무색유리검만 있다면 언제라도 다시 수행을 되찾을 수 있다.
"이번 생에는, 반드시 천인기에 도달한다."
금신천뢰문에 들어온 지 하루.
나는 원영의 경지를 회복하고서 목표를 다시금 되새겼다.
검은 뱀(3)
휘이이이이―
나는 하늘 위쪽에서 잠시 바람을 맞던 중.
어쩐지 찌릿거리는 느낌과 함께, 저 멀리서 뭔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위령선.'
인족의 합체기 태수 중 하나인 위령선은 인족 총연맹에 위치한 모든 천공도에 자신의 분신을 '총령'으로 파견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총령으로 하여금 천공도에 일어나는 대소사를 감시하게 하였고, 지금 이쪽으로 날아오는 것 역시 위령선의 분체인 총령일 터였다.
위령선의 분신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천인기.
아마, 천공도에서 누군가가 천겁을 연달아 맞는 일이 벌어지는데도, 정작 내 월수궁무록으로 천겁을 맞는 주체는 파악이 안 되니 본인이 달려오는 것일 터다.
'물론 달려와 봤자 내가 작정하고 종적을 감추면 녀석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만….'
하지만 나는 문득, 저 멀리서 날아오는 기세를 보며 육신이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흠…."
한번, 해 볼까?
본체야 합체기라지만, 지금 저 녀석은 천인기.
나는 문득 위령선의 분신과 붙어 보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다.
답천과 지족 원영기의 힘을 전부 더하면 아마 천인기도 충분히 상대할 만할 터였다.
우우웅!
지난 생에 얻었던 선수(仙獸)의 재(才)가 희뿌연 안개를 뿜어내며 나를 자극한다.
요족의 강력한 육신으로 얻은 힘, 그리고 답천의 무형검이 발하는 예기가 전신에서 솟구친다.
답천의 힘이 내 육신을 검(劍)과도 같이 단단하고 날카롭게 벼리고 있었고, 요수의 힘이 자체적인 신력(身力)을 강화하며 답천의 힘의 효율을 수 배나 증폭시켜 줄 터.
거기에 이번에 얻은 선수의 힘과, 무색유리검까지 가세한다면….
'천족의 수행이 없어도 천인기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아니다.'
하지만, 나는 욕망을 억눌렀다.
'다음 기회를 노리지.'
인족 총연맹의 대소사를 감찰하는 합체기 태수 위령선.
그는 합체기 초기에다가 전투 위주 공법을 익힌 것이 아니었기에 합체기 초기 중에서도 약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합체기는 합체기였고, 내가 그와 붙어서 분체를 죽여 버린다면 위령선이 본체로 이곳에 날아올 터였다.
나는 아쉽지만 위령선과의 전투는 다음으로 기약한 채, 허공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쉬칵!
무형검이 깃든 손은 그대로 허공을 베어 내며, 천지영기의 사각(死角)을 만들어 냈다.
나는 월수궁무록으로 인지와 영기, 그리고 공간의 사각지대 안쪽으로 진입하며 위령선의 시야에서 허깨비처럼 사라져 버렸다.
위령선은 내가 있는 곳에 도착해도 나를 찾지 못하자, 수결을 맺으며 다시금 천공도 전역을 뒤덮는 감시 법술을 사용해 나를 찾으려 하기 시작했다.
* * *
나는 내 기척을 찾지 못하고 당황해하는 위령선을 지나쳐, 나는 다시금 뇌령도의 적절한 곳에 내려앉았다.
뇌령도에 있는 수도자들을 위한 작은 성(城)이었는데, 마침 성 안쪽에서는 시장이 열리고 있는 것인지 활발했다.
'인족 시장도 오랜만이군.'
나는 월수궁무록을 쓴 채 시장 안쪽으로 진입했다.
수많은 의식과 의념이 오가는 이런 번잡한 곳이야말로 월수궁무록으로 숨어 있기 딱 좋은 곳이었다.
'위령선이 당분간은 나를 찾으려 평소보다 더 집중할 테니, 감시 법술의 기세가 약해질 때까지는 시장 안쪽에 숨어 있어야겠군.'
찌이이잉―
위령선의 감시 법술이 평소보다 더더욱 강하게 펼쳐진 것이 느껴진다.
나 이외에도 시장에 있는 몇몇 원영기 수사, 결단기 대원만 수사들은 이상을 느꼈는지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천인기 수준에서 뇌령도 전체를 감시하는 법술을 저렇게 강하게 펼치는 건 오래 유지 못 하겠지.'
아마 얼마 안 있어서 다시 평소 수준의 감시 법술로 돌아갈 터였다.
나는 마음 편하게 시장을 구경하면서, 홍범의 각성에 필요한 재료들도 구했다.
'지난 생… 나는 분명 홍범하고만 돌아다녔다.'
딱히 홍범 이외의 동료를 두지 않았던 것은 기억난다.
그러니 아마 홍범을 각성시켜 녀석의 수행을 끌어올리면 지난 생의 일이 생각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홍범의 영성 각성을 위한 재료를 찾아다닐 때였다.
"흑린어령문에서 이번에 들여온 요수공법이외다. 한번 보고 가시오!"
나는 요수공법이라는 소리에 문득 흥미가 끌려 한쪽을 돌아보았다.
'흑린어령문은 현음과 연결 고리가 있으니 지족 영역에서 요수공법 등을 공수해 오기가 더 쉽기야 하겠지….'
요수공법을 파는 이는 대략 축기기 수준으로 보이는 산수였다.
그리고 그 산수의 앞에는 뱀의 허물로 보이는 것들이 잔뜩 늘어져 있었다.
'요수공법'이라는 말에 흥미가 동한 것은 나뿐이 아니었는지, 몇몇 축기기 수사들과 결단 초기 수사들도 사내에게 다가갔다.
"흠, 공법서는 어디 있소?"
"이 허물들이 요족 공법서요. 요수들은 우리 천족들처럼 책이나 옥간에 구결을 기록하는 게 아닌 이렇게 신체에다 공법을 기록한다 하지."
"뭐, 확실히 흑린어령문이 간혹 지족에서 요수공법을 공수해 온다는 말은 들었는데…."
한 염소수염 사내가 요수공법 상인에게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냈다.
"당신이 도대체 어떻게 흑린어령문에서 요수공법을 받아서 판매한다는 거요? 흑린어령문은 요수공법 판매를 할 때 고계 수사들에게만 판매한다고 아는데?"
"하하, 뇌령도에만 지내서 흑린어령문의 사정은 잘 모르시나 보오?"
축기기 산수의 말에 염소수염 사내는 '그럼 제대로 설명을 해 봐라'라는 눈빛으로 산수를 쳐다보았다.
"흑린어령문이 가끔 공수해 오는 지족 공법들은, 흑린어령문이 지족에서 엄선해서 뽑아 가져오는 것들이 아니외다. 요족 측의 상인들이 무수한 요족들의 공법을 한데 모은 다음, 흑린어령문에게 떠넘기듯 다 팔아 버리는 거지."
산수의 말이 이어졌고, 나 역시 요족 상인들의 요수공법에 대한 취급을 대강은 알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요수공법은 넘쳐나는 재원 중 하나였고, 천족 측에서 사 가겠다고 하면 있는 것 없는 것을 모조리 끌어모아서 팔아 이문을 남기는 것이 요족 측 상인들에게는 바람직한 일이었으니 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요수공법 중, 흑린어령문은 인족이 도저히 못 익히는 공법, 급수가 너무 낮은 공법, 불안정한 공법은 모조리 폐기 처분해 버리고 그중에서 쓸 만한 요수공법들만을 골라 고계 수사들에게 판매하는 거라오."
"아니, 그래서, 그럼 이 자네가 내놓은 이 공법서들은 '폐기 처분당한' 공법들이라는 거요?"
"아니, 아니, 말은 끝까지 들어 보시오. 흑린어령문이 그렇게 '쓸 만한' 요수공법을 골라 놓고 나면 매번 '처리해야' 하는 요수공법 부류가 생긴다오."
"음?"
사내의 말이 이어졌다.
"우선 용족(龍族) 공법. 흑린어령문은 지족의 용왕과 연줄이 닿아 있다 하니, 용왕 측에서 이건 당연히 천족 측에 새어 나가지 못하게 제어할 터고. 그다음은 조족(鳥族), 즉 '새' 부류 요족공법이라오. 용족은 조족의 요수들에게 간혹 약점이 드러나곤 하니까 그 역시도 유출을 피하려 하지. 또한 마지막으로 사족(蛇族) 공법이 그것이오."
"사족? 뱀 요수 말이오?"
"그렇소. 뱀 계통의 요수공법은 특이하게도 흑린어령문 측에서 껄끄러워하는 요수공법이라 하오. 하지만 유출이 금지된 건 아니고, 사들이긴 한 만큼 팔아서 이문은 남겨야 하지만 별로 대놓고 판매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흑린어령문에서는 간혹 이렇게 뱀 계열 요수공법은 아무에게나 싸게 싸게 떨이로 내놓는 경우가 많지. 나 역시 그 덕에 흑린어령문에서 요수공법을 공수해 올 수 있었던 거고."
"으음… 왜 흑린어령문에선 뱀 계열 요수공법을 꺼리는 거요? 사실 그쪽이야말로 용족과 관계가 있으니 뱀 계열 요족공법을 가장 아껴야 하는 게 아닌가? 사족 공법은 뭔가 문제가 있는 마공 부류인 게 아니요?"
"글쎄… 내 알기로 공법에 있는 문제라기보다는, 흑린어령문 내부에서는 [뱀]에 대해 안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소."
'흑린어령문이 [뱀]에 대해 안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어?'
이건 또 처음 듣는 비사였기에 나는 궁금증이 들어 대화에 집중했다.
"아니, 흑린어령문이 왜 뱀을 싫어한다는 거요?"
"나도 모르지. 자세한 건 그 치들한테 물어보시오. 자자, 그것보다, 정말로 요수공법에 관심이 있는 도우는 없소? 흑린어령문이야 내부의 사정으로 사족 공법을 익히지 않는다지만, 이래 뵈어도 뱀은 항상 이무기가 되어 용이 된다는 전설이 있지 않소? 어쩌면 사족 공법을 이용해서 지족의 가장 고귀한 종족인 용족 공법의 비밀을 알아낼 기회일지도 모른다오!"
'그런 게 가능했으면 흑룡왕의 개나 다름없는 흑린어령문이 그걸 유출했겠나….'
다들 나와 생각이 비슷했는지, 이 자리에 모인 수도자들의 안색에 한심하다는 기색이 맴돌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요수공법을 팔러 온 축기기 산수는 신이 나서 계속 떠들었다.
"본인이 익히기 꺼려지거나 힘들다면, 아예 이참에 저 건너편 요수방에 가서 뱀 요수들을 구매해 애완 요수에게 익히게 해 보시오! 애완 요수에게 지족 진룡맹에서 건너온 정통 사족 요수공법을 익히게 해 줄 좋은 기회외다!"
"흐음…."
"그래도 흑린어령문에서 버린 공법이라 하니 조금 꺼려지는걸…."
"으으음…."
그러나 상인의 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다른 수도자들은 찜찜한 기분이 든 듯이 혀를 차며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 모습에 축기기 산수인 상인은 울상이 되어서 허물을 쥔 손을 축 늘어뜨렸다.
"장사를 하려면 조금 더 말솜씨를 키우는 게 좋을 것 같소. 괜히 찜찜한 부분까지 전부 알려 주니 아무도 관심을 안 갖지."
심지어 한 수도자는 그에게 장사에 대한 훈수까지 둔 후에 다른 곳으로 가 버렸고, 그의 좌판 앞에는 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제 슬슬 감시 법술도 약해진 것 같고….'
스르륵….
나는 은근슬쩍 월수궁무록을 풀고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물었다.
"본인이 팔려는 공법들의 그런 찜찜한 점 말고… 뭔가 강점은 없소?"
"아, 당연히 있습지요, 어르신!"
그는 얼굴을 들어 나를 보다가, 내가 최소 결단 중기 이상의 수도자라는 걸 알았는지 머리를 박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사족은 용족이 된다는 전설을 믿고, 본인들이 이무기가 되기 위한 수련을 끊임없이 하는 종족입니다. 정말로 용족이 될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사족 공법을 익히면 '이무기'는 될 수 있습니다."
"이무기라…. 인족이 익혀도 이무기가 된다는 소리요?"
"아, 그런 것은 아니고 이무기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말입지요. 물론 어르신께서 만약 애완 요수로 뱀 요수를 키우신다면 뱀 요수에게 익히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나는 뱀 요수는 안 키우는데…."
"꼬, 꼭 뱀 요수가 아니어도 됩니다! 잉어 요수라거나, 혹은 지네, 거북이, 도마뱀 요수 등 용과 관련이 있는 요수를 키우셔도 사족의 공법은 효과가 있을 겁니다…!"
"음? 지네?"
나는 그 말에 흥미가 동해 그에게 물었다.
"지네에게도 사족 공법이 효과가 있다고?"
"그렇습니다! 왜, 지네가 만 년을 수련하면 용이 된다고도 하지 않습니까? 지네도 용과 관계가 있는 것인 만큼 이무기가 되는 사족 공법이 효과가 있다고 압니다!"
"호오…."
'마침 홍범을 각성시킬 재료를 사러 왔는데 홍범도 익힐 수 있는 요수공법이라면….'
한번 사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마침 내가 지네 요수를 한 마리 키워 보려는데, 그럼 자네 생각에 어울릴 만한 공법서를 줘 보게."
내 말에 축기기 산수는 희희낙락하며 내게 허물들을 들어 보였다.
"사족들 사이에서는 비늘이 검은빛에 가까워질수록 상서로운 취급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한 빛깔의 허물일수록 고계 사족 공법이지요."
"그럼 검은 뱀의 허물은 없나? 이왕이면 최고의 요수공법을 주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검은 뱀은 사족에서 매우 상서롭게 여겨지는지라 검은 뱀의 허물은 유출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가…?"
사족이라면 나 역시 기억에 있다.
진룡맹에서 스쳐 지나가듯 몇몇을 본 기억이었다.
대다수의 사족은 본인들의 근거지에 틀어박혀 세상의 풍파와 상관없이 수련에만 힘쓰는 인내심 많은 종족이라도 들었었고, 간혹 만나본 사족들 대다수가 그런 성향이었었다.
'애초에 대부분 틀어박혀 수련만 하느라, 만날 일 자체가 별로 없어 잘 몰랐군.'
나는 그런가 보다 하며 축기기 산수에게서 검푸른빛의 허물, 그리고 새하얀 백사의 허물을 하나씩 받아 품에 넣었다.
'지네가 용이 된다라…. 홍범의 재능이라면 가능할지도.'
왠지는 몰랐다.
하지만 어째선지, 나는 홍범이 위대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 * *
우우웅!
난 뇌령도의 영산 곳곳에, 원유의 도움을 받아 내 원영을 쪼개서 묻어 놓았다.
원립의 혈영과 같이 영맥이 있는 곳에 원영 조각을 묻어 놓고, 차후에 다시 찾을 수 있는 비술이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원립은 혈영 조각을 인간들이 사는 곳에 묻어 놓아 꺼낼 때 대량의 혈제를 필요로 했다면.
나는 굳이 그런 혈제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하루 만에 원영기에 오르면, 천재가 아니라 첩자나 인두겁을 뒤집어쓴 괴물 취급을 받겠지.'
멍청하게 금신천뢰문에 가서 '나 하루 만에 원영기에 올랐소.' 하고 광고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원영은 잠시 흩어 놓고… 요단도 봉인해 놓는다.'
치지직….
원유가 결인을 맺자, 원유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내 요단의 힘을 봉인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오행혈주번을 꺼내 요단에 다섯 군데에 박았다.
푸콱, 푸콱, 푸콱, 푸콱, 푸콱!
오행혈주번과 원유의 법술이 봉인을 완성했다.
'이제 요족의 방식으로 원영기에 올랐던 것은 들킬 일이 없다.'
체내에는 순수하게 천족 공법 연기기 6성의 힘만이 남았을 뿐.
'첫날에 원영기라면 의심을 받겠지만, 그래도 연기기 6성 정도라면… 납득 가능한 범위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금신천뢰문으로 돌아갔다.
* * *
"스승님, 불초 제자가 수행에 도움을 구하러 찾아왔습니다."
나는 진휘를 찾아가 읍을 하며 말했다.
진휘는 따스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재능에 법화단전이야 다 생성했겠고… 칠십이지살지결의 이해가 어려운 것이냐?"
"아니요, 연기기 6성에 도달했습니다."
"…."
"칠성제를 지내야 하는데 조금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진휘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고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 거짓말하지 마라! 적뢰공을 아침에 줬는데 저녁에 연기기 6성에 도달했다고? 네가 감히 스승을 능멸하느냐!!!"
"…."
'연기기 6성이 아니라 원영기에 도달했는데….'
아마 사실을 말했다면 놀라는 수준이 아니라 심장마비에 걸렸을 것 같은 반응이었다.
"사실입니다, 스승님."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 손을 내밀어 봐라. 정말로 연기기 6성인지 확인해 보겠다."
그리고 나는 진휘에게 손을 내밀어 그가 내 수행을 확인하게 했다.
얼마 후.
내가 기본 공법을 받은 지 하루 만에 연기기 6성을 도달한 것에, 금신천뢰문이 뒤집어졌다.
검은 뱀(4)
금신천뢰문의 부문주, 진휘는 자신이 제정신인가 싶었다.
아침에 서고에 데려가 적뢰공을 주고, 기초에 대해 가르쳤다.
법화단전까지는 알아서 만들 거라고 생각했다.
진휘는 천영근자였기에 법화단전도 알아서 척척 만들었고, 뇌성체를 타고난 서은현 역시 당연히 그 정도는 하리라 생각했다.
물론 연기기 1성의 구결을 외우는 건 조금 헷갈리니 며칠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진휘도 그랬으니까.
'아니, 좋아. 전설적인 자질이니 연기기 1성도 빠르게 넘어갈 수 있다고 친다. 연기기 2성도 1성과 연동되니 같이 넘어갈 수 있다고 치지. 그런데….'
진휘는 도저히 그의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불가해의 천재를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아침에 적뢰공을 배우고 저녁에 연기기 6성? 이게 무슨 말이나 되는 소리란 말인가?'
그리고, 그것은 진휘의 주변에 모인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지 모두가 하나같이 서은현을 괴물 보듯이 보고 있었다.
부문주인 진휘를 비롯해 문주인 금린, 태상문주인 금벽호를 비롯하여 원로들이 모조리 서은현의 동부 앞에 모였다.
서은현을 빙 둘러싸고!
"그러니까… 이 녀석에게 적뢰공을 준 게 오늘 아침이었다고?"
"그렇습니다."
진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벽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정말로 지금 가르친 게 맞나? 혹 비선대에서 금신천뢰문과 합류했을 때 자네가 몰래몰래 가르친 게 아니라?"
"아니, 태상문주님께서는 실례지만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오히려 제 쪽에서 묻겠습니다. 이 녀석을 하계에서 처음 만나서 자질 검사를 하셨다 들었습니다. 그때 이 녀석이 정말로 범인이었습니까? 연기기 6성이 아니라요?"
"아니, 정확히는 단수기에 들락 말락 하긴 했지. 그래… 그렇군."
금벽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애초에 원래부터 단수기 초입이긴 했었다. 어쩌면 칠십이지살지결이나 삼십육천강법결, 십이지, 십천간, 구궁, 팔괘 등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을 수 있지. 그게 말이 되지 않나?"
"태상문주께서도 방금 확인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이 녀석이 연기기 6성의 공법을 쌓은 건 단순히 외부 공법이 아닙니다. 순수한 '적뢰공'으로 연기기 6성에 도달한 것입니다!"
"…."
"외부 공법의 구결을 알고 있다고 해서 적뢰공으로 저렇게 빨리 연기기 6성에 도달한다고요? 자기 수행을 모조리 흩었다가 선각후통으로 경지에 이르는 법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정신 나간 짓을 하지 않으면 저런 짓은 불가능합니다!"
"으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금벽호는 어쩐지 잔뜩 흥분한 진휘에게 물었다.
진휘는 눈이 돌아갈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소해를 주시지요! 소해 정도의 자질이 아니라면 이 녀석의 정신 나간 자질을 절대 받아 낼 수 없습니다!"
"으음!"
금벽호의 현손녀인 금소해의 이야기가 나오자, 금벽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진휘는 흥분한 표정으로 서은현을 가리켰다.
"만약 소해가 아니라면, 이 녀석의 쌍수도려는 원영기 장로들로 선택해야 균형이 맞을 정도입니다. 1천50년을 살아왔지만, 평생 이런 말도 안 되는 오성(悟性)은 처음입니다! 은현아, 보여 주거라."
흥분한 진휘의 명에, 서은현은 앞으로 나서 침착하게 칠십이지살의 수인.
삼십육천강법결의 주언, 십이지율의 영파, 십천간의 문양을 모조리 구현했다.
그뿐일까, 구궁과 팔괘의 이치까지 전부 장악한 모습에, 금벽호는 물론이고 다른 원로들마저 침음성을 흘렸다.
"완벽하군…."
"적뢰공으로 칠십이지살지결의 이치를 다 깨쳤단 말인가?"
"흡사 선통후각이 아니라 선각후통만 수년 하여 경지를 올린 아이들을 보는 것 같군. 그만큼 완벽하다."
원로들의 찬탄에 서은현의 눈가가 순간 꿈틀거렸지만 알아차리는 사람은 없었다.
"확실히, 말도 안 되는 재능이군. 칠성제를 지내면 또 얼마나 성장세를 보일지 기대가 되기도 한다. 축기단이고 뭐고 아무것도 먹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오성이 아닌가? 거기에다가 그런 녀석이 뇌성체에, 원영기 급 의식을 지니고 있다니…."
잠시 멍하니 있던 금벽호는 껄껄 웃었다.
"흐하하하! 좋다! 좋구나, 12만 년 금신천뢰문의 명성이 다시 세계에 울릴 때가 도래했어!"
껄껄 웃은 금벽호가 발을 굴렀다.
쿠웅!
그의 뒤편에서 흙으로 된 의자가 솟아오르는 듯하더니, 금벽호의 몸에서 뿜어지는 뇌전에 녹아 유리가 되었다.
유리로 된 옥좌에 앉은 금벽호는 껄껄 웃으며 뇌전을 줄기줄기 뿜었다.
"소해 역시 벽력체를 타고 났으니 뇌성체의 쌍수도려로 주라는 말은 이해하네. 아마 둘이 쌍수를 맺는다면 어마어마한 힘을 내겠지. 하나… 미안하지만 나는 소해를 그 아이가 원하는 사람과 맺어 주겠다고 그 아이의 어미 아비와 약속했어."
즐거운 웃음을 짓던 금벽호는 서은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저 아이와 소해를 맺어 주고 싶다면, 저 아이가 소해를 반하게 하면 될 뿐이네. 그게 아니라면, 그냥 본문의 원영기 여장로를 붙여 주는 게 낫겠지."
"흐음…."
"그리고, 뇌성체도 저럴진대 시조의 재림이라 할 수 있는 천상금뢰지체의 전명훈은 또 얼마나 뛰어난 자질을 지녔겠는가!"
금벽호는 즐겁다는 듯이 한쪽을 바라보았다.
전명훈이 금소해에게 교육을 받고 있을 전각이었다.
"개인적으로 소해의 선조로서, 소해는 금신천뢰문의 상징인 천상금뢰지체를 지닌 녀석과 이어졌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만. 그것도 어찌 될지 알 수 없지.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천상금뢰지체를 지닌 녀석에게 오히려 소해가 부족할 수도 있겠군. 하하하하! 이렇게 뛰어난 자질을 지닌 천재들이 본문에 둘이나 들어왔으니, 12만 년 전의 위세를 다시 가져올 홍복이로다!"
금벽호는 진심으로 기쁜 듯 임시로 만든 옥좌에서 일어나 서은현에게 다가가 서은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모든 문파가 네게 기대를 걸고 있다, 서은현. 부디 기대를 실망시키지 말거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뇌성체가 이럴진대, 시조의 의발을 진정으로 이어받을 천상금뢰지체는 도대체 얼마나 뛰어날지 벌써부터 두근거리는군! 하루빨리 소해가 예절 주입을 마쳤으면 좋겠구나. 하하하!"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이 좋아진 금벽호는 웃음을 끊이지 않으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본문에는 전공점이라 하여, 본문의 임무를 맡으면 전공점을 부여하고, 그 전공점을 이용해서 본문의 공법서, 단약, 법기, 법보 등을 대여하거나 얻을 수 있는 제도가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태상문주로서 명하니, 앞으로 서은현과 전명훈, 문파의 두 천재들은 전공점 제도에서 제외시킨다! 원하는 모든 것을 전부 지원해 주어라! 알겠는가?"
"예!"
말을 마친 금벽호는 입이 귀까지 찢어진 채로 비둔술을 써서 날아가 버렸다.
* * *
'금빛의 번개와 의념이 구분이 안 될 정도로군.'
나는 금벽호에게서 뿜어지는 금빛의 뇌전과, 그의 황금빛 의념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전명훈이 있을 전각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초장부터 거하게 시선을 집중시켰으니, 전명훈도 좋든 싫든 수련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솔직히 15회차 당시.
전명훈을 멀쩡한 상태에서 처음 만났을 때 꽤 놀랐다.
그 미친 재능을 가지고서 아직도 결단기라니.
수십 년 동안 놀기만 한 게 아니고서야 그런 짓은 불가능하다.
'이번에는 내가 옆에서 자극시켜 주마.'
그뿐이랴.
이해가 안되면 창천개벽문의 방법을 써서 주입시켜 주고, 그래도 안되면 서휼처럼 세뇌를 해서라도 경지를 억지로 상승시켜 줄 요량이었다.
'천뢰번은, 전명훈의 손길을 두려워했다.'
분명히 기억났다.
전명훈의 손으로 천뢰번을 잡았을 당시.
천뢰번이 전명훈의 천상금뢰지체를 두려워했던 것을.
'녀석이 경지를 되찾으면 천뢰번을 장악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렇게 되면 어쩌면 천뢰번을 수계에 봉인하는 것도 더 쉬워질 터였다.
물론 전명훈이 내 말을 듣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나 역시도 무력을 키워 나가야겠지만.
나는 전명훈에게 뒤처지지 않게 빠르게 경지를 올리겠노라 다짐하며, 스승인 진휘를 따라 뇌운봉에서 며칠 뒤 칠성제를 지내기로 했다.
* * *
"다행히 뇌운각의 자료에 광한계의 별자리에 대한 자료가 있더구나. 이걸 보고 익히거라."
"예."
이미 별자리는 전부 꿰고 있었기에 필요는 없었지만 진휘의 명을 듣는 척하며 책을 휘리릭 넘겼다.
"자, 그럼, 솔직히 네 칠성제는 무난할 것 같으니 앞으로 칠성제를 지내고 누구를 네 쌍수도려로 데려올 건지를 정해 보자꾸나."
"…."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원영기 여장로를 나랑 맺어 준다고?'
금신천뢰문에 있는 절대 다수의 수도자들은 쌍수도려가 이미 있다.
그렇기에 여자든 남자든 대다수가 부부 상태인 것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내게 원영기 쌍수도려를 맺어 준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과부거나, 혹은 태극진뢰신 등을 익혀 남자인지 여자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거나.
'어느 쪽이든 꺼려지는데….'
거기다 내가 칠성제를 지낸 후에 쌍수를 맺겠다는 논리로 쌍수도려를 맺는 것을 피했는지라 이번에는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이번에 쌍수도려를 맺고 나면, 바로 폐관 수련에 들어 천족 원영기 경지를 회복한다.
그 후에 원영기 장로가 되어 쌍수도려는 필요가 없다고 하면 될 터였다.
'실제로 과부인 원영기 수사들도 지금까지 다시 쌍수 상대를 찾지 않는 이들이 꽤 있는 걸로 보면, 장로 이후부터는 무조건 쌍수를 맺어야 하는 게 아닌 모양이고.'
그렇게 되면 만사가 해결이다!
나는 속으로 계획을 세우며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래그래. 칠성제를 지낸 후의 네 쌍수 상대는 홍 원로다."
"…예?"
'원로? 장로가 아니라?'
원로라는 말은, 곧 천인기라는 소리다.
"천인 후기 수사인 홍 원로가 앞으로 네 쌍수 상대로 배정될 거라는 게다. 이해했느냐?"
"…그렇군요. 그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혹 아까 저를 보러 오신 원로진들 중 계신 분이십니까?"
"아니다. 홍 원로는 평소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기 동부 바깥으로 잘 안 나오는 성격이라… 그녀가 어떤 사람이냐면…."
진휘는 홍 장로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듯하더니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음… 음… 좋은 사람이다. 그냥 조금… 특이한 사람이라 지금까지 그녀와 맺어진 쌍수 상대들이 다 도망치긴 했지만… 그래도 본성이 나쁘지는 않아."
"…."
나는 순간 어이가 없어져서 반문했다.
"왜 쌍수 상대가 도망치려 한… 겁니까?"
"홍 원로는… 그게 말이지, 사실…."
"…."
"으으음…."
한동안 침음성을 흘리던 진휘는 진실을 말해 주었다.
"금신천뢰문 전설의 체질들을 구현해 보겠다고, 자기 쌍수 상대를 데려다가 인체 실험을 해왔기 때문이란다."
"…."
나는, 말을 듣자마자 홍 원로라는 인간이 괴군에 못지않은 미치광이라는 걸 깨달았다.
"…저는 문파의 중요 인재가 아닙니까?"
"맞다. 하지만, 홍 원로도 뇌성체를 지닌 너라면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다가 그녀의 목적은 전설의 체질들을 구현해 보는 건데, 자네는 그녀가 바라왔던 목표점이나 다름없어."
"천상금뢰지체도 있잖습니까?"
"홍 원로도 천상금뢰지체까지는 넘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뇌성체를 목표로 해 왔기 때문에 너는 절대로 해치지 않을 거야."
"…확실합니까?"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진휘의 의념을 읽으며 물었다.
"혹, 스승님께선 이미 그 홍 원로라는 분과 말을 맞추고 온 게 아니신지요?"
내 일침에 진휘는 식은땀을 흘리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제자야! 홍수령 그 미치광이가 너를 자신에게 넘기지 않으면 어떤 발광을 할지 몰라서, 일단 말이라도 전해 보겠다 했다!"
"…."
"네가 정 싫다면 평범한 과부 원영기 장로로 바꿔 주마. 홍수령이 발광은 조금 하겠지만… 그래 봤자 괴군이 금신천뢰문에 찾아와서 패악질을 부렸던 때에 비할까. 태상문주께서 처리해… 주시겠지…."
"…."
'이거….'
나는 '홍수령'이라는 사람에 대해 조금 어이가 없었으나, 생각해 보니 은근 괜찮은 것 같았다.
'나쁘지 않은데?'
씨익.
'나를 실험하려 한다고?'
괴군처럼 나를 아예 개조하려는 게 아니라면 그 정도야 용인해 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악명이 자자한 대신 얻을 수 있는 반사 이익을 생각해 보았다.
'우선 그녀가 나를 실험하려 한다는 걸 핑계로 금신천뢰문에서 도망치거나 아예 바깥으로 도망쳐도 다들 그러려니 할 거다.'
진휘의 반응을 보면 홍수령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망나니 같은 인간인지 알 수 있다.
아마 괴군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미치광이인 모양.
'거기다가 원래 상정했던 원영기 장로가 아니라 천인기 후기의 원로라면….'
그녀에게서 뇌도공법에 대한 조언을 더더욱 많이 들을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그런 미치광이들은 정상인의 논리가 통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미쳐도 괴군만큼 미쳤겠는가.
괴군의 논리에 익숙해진 나는 그녀에게도 익숙해질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말로 나를 인체 실험하려는 미치광이라면, 내 예상보다 정을 덜 붙일 수 있겠어.'
어차피 인체 실험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도망 다니며 쌍수도 딱히 맺지 않을 예정이었고, 나를 쫓아다니며 발광하는 모습만 보다 보면 정이 들고 싶어도 안 들 터였다.
'회귀해도, 내 정신이 붕괴될 정도의 충격은 없을 거야.'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물론 한 식구가 되기로 한 이상 금신천뢰문의 동지로서의 정은 들 터였다.
그러나 정말로 나와 밀접하게 엮인 '가족'의 범위까지는 들어오지 않을 터.
'그 정도면, 회귀했을 때의 충격도 조금은… 덜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진휘의 제안을 수락했고, 진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고마움과 미안함이 섞인 의념을 펄펄 흘려 대었다.
* * *
칠성제의 날이 다가왔다.
나는 진휘가 만들어 준 제단 위에 올라, 제의를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여지없이 다시금 먹장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끊는다.
천지영성을 받아 낼 길이 닫혀 버린다.
그 모습을 본 진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게 무슨… 오늘은 제의를 지낼 시운이 아닌가? 그럴 리가… 내가 전부 확인했건만."
"스승님, 저 구름은 무엇입니까?"
"으음, 아무래도 오늘이 시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제가 알기로, 저런 류의 구름은 제의 당사자가 직접 씻어내면 제의에 문제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는지요?"
"맞긴 하다만… 너는 고작 연기기 6성에 불과하다. 네 힘으로 어찌…."
진휘의 말이 끝나기도 전.
나는 그대로 적뢰공을 끌어올리며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요수공법으로 축기기에 오를 때 받아 놓았던 천뢰의 힘을 양손으로 뿜었다.
콰르르르릉!
내 손에서 뿜어진 청뢰가, 하늘을 향해 올라가며 그대로 구름을 찢어발겨 천지영성이 내려올 길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본 진휘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이, 이게 도대체…."
어찌나 놀랐는지, 진휘는 내가 칠성제를 지낼 동안 나를 도울 생각조차 못 하고 그 자리에서 멍하니 나를 지켜만 볼 뿐이었다.
파직, 파지지직!
슈우우우―
나는 천지영성을 내려받으며 다시금 천족의 시야를 얻었음을 확인했다.
연기기 7성에 도달했다.
이전보다도 적뢰공의 성취가 더더욱 늘어났으며, 무언가 막혔던 길이 뚫린 기분이었다.
"스승님, 칠성제를 끝마쳤습니다."
"…도, 도대체 적뢰공으로 어떻게 그런 번개를…."
"글쎄요, 그냥 하니까 되더군요."
"허, 허어, 허허허허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진휘는 이내 진심으로 웃기 시작했다.
"허허…흐하하하하하! 그래, 그래!"
이제야, 내 재능을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
"이것이 뇌성체로구나! 과연 본문의 홍복이로다. 뇌성체가 이 정도인데, 시조님의 체질인 천상금뢰지체는 도대체 어느 정도라는 말인가! 아! 시조시여, 진정 당신께서 본문을 돌보시고 계시나이다!"
나는 옆에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남아있는 청뢰의 양을 계산했다.
'이 정도면 축기기까지는 무리더라도 연기기 극성까지는 무리 없이 가겠군.'
그 정도만 되어도 상관없다.
아직 무색유리검에 저장해 놓은 천족의 수행도 전부 사용하지 않았으니 그걸로 넘어가면 될 뿐이다.
* * *
칠성제를 지내고 다음 날이 되었다.
"네가 서은현이라는 놈이냐."
내 동부 앞에, 금색 장포를 입고, 금색 혁대를 맨 인물이 나타났다.
진한 흑발을 허리까지 기른 그녀의 주변으로는 찌릿찌릿한 정전기가 흘렀다.
정전기가 잔뜩 흐르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머릿결은 흑단처럼 흐트러짐이 없었다.
깨끗한 피부를 가진 그녀는, 겉보기에는 꽤 멀쩡해 보이는 여성이었다.
"나는 금신천뢰문의 원로 홍수령이다. 오늘부로 네 쌍수 상대가 되었지."
"아,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일단은 그녀에게 예의 바른 태도를 취하며 인사를 올렸다.
'앞으로는 피해 다닐 처지지만 어쨌든 첫날은 잘 보여야 하니….'
그리고, 그때였다.
"네 이놈!"
"…???"
갑자기 그녀가 버럭 화를 내며 발을 굴렀다.
그러자 저 바깥에서 벼락이 번뜩거리며 하늘이 울렸다.
"내가 네놈의 쌍수 상대가 되었다고 해서 정말 너와 나의 지위가 같은 줄 아느냐! 내가 문파의 어른이거늘 어찌 예법이 그따위란 말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성제국의 정통 예법인데….'
"나 때는 문파의 어른들이 행차하면 무조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860년 전만 해도 예법이 살아 있었거늘, 왜 이렇게 방만한 것이야!"
"…."
'…8백 년 전의 예법을 따르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 것인가.'
나는 순간 짜증이 났지만 일단 내가 배웠던 성제국의 전통 예법을 수정해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일단은 맞춰 주지.'
"예, 후배가 미욱하여 방만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쯤 했으면 됐겠지?'
그러나, 어쩐지 그녀의 의념이 다시 꿈틀거리며 분노하는 것이 보였다.
'또 뭐냐?'
"예법이 틀렸잖느냐! 다시 하거라!"
"…선배님, 후학이 한 말씀 올리자면… 제가 알기로 이게 맞는 예법입니다만?"
성제국 황실의 고문서를 뒤지고, 황실의 행사를 몇 번이나 보며 확인했던 동작이었다.
틀릴 리가 없었다.
그러나 홍수령은 고집을 부리며 눈을 부릅떴다.
"네가 뭘 안단 말이냐! 8백 년 전에는 그렇게 안 했단 말이다!"
나이를 들먹이며 내 자세가 틀렸다며 고집을 부리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순간적으로 어이가 없어졌다.
'나이도 어린 것이 지금 내 앞에서 도대체 뭐라는 거지?'
자꾸 나이를 들먹이며 역정을 내자, 슬슬 짜증이 올라온다.
그리고 홍수령은 갑자기 얼굴이 시뻘게지더니 마구 고함을 질렀다.
"이놈! 이 버릇없는 녀석 같으니. 좋다, 네놈이 정 예법을 고칠 생각이 없다면 내 친히 네놈의 몸을 연구해서…."
'교육을 조금 해 주는 게 좋으려나….'
나는 성질을 돋우는 홍수령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뇌성체라고 해서 내가 특별 대우할 거라는… 어?"
"…허."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왜 갑자기 그녀가 내게 찾아와서 발광하며 역정을 냈는지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잡생각이 많아 쓸데없는 의념으로 선배님을 괴롭게 했군요."
그녀의 성격이 괴랄해서 내게 갑자기 나이를 들먹이며 시비를 건 게 아니다.
내가 그녀에게서 달아나고, 이용하기만 하려는 의념을 풀풀 풍기고 있으니 대뜸 역정을 낸 것이었다.
"아, 아니… 어떻게…."
괴군과 창호자, 오현석 이래.
나는 네 번째로 삼화취정에 달한 수도자를 만나게 되었다.
검은 뱀(5)
스르르―
상대가 삼화취정이란 것을 알자마자, 나는 바로 의념을 갈무리했다.
그와 동시에 홍수령의 눈에 흥미가 깃들었다.
방금 전까지의 불쾌감은 씻은 듯이 사라져 더는 보이지 않는다.
"흐음… 네놈."
잠시 흥미로운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홍수령은 갑자기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와 함께 그녀의 팔이 내게 쇄도해 내 심장을 꿰뚫는 그림이 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러나 나는 그 그림 속에서 그녀의 몸을 반으로 갈라서 죽였다.
흠칫!
홍수령이 흠칫 놀랐으나,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랬군. 원래부터 평범한 놈이 아니라 무림인이었던 거냐?"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좋아. 주무기는 뭐였지?"
"검(劍)입니다."
"검! 하하하!"
그녀는 희열에 찬 의념을 숨기지 않았다.
"검수(劍修)가 되기에 최적의 조건이구나!"
후우―
그녀가 입을 열어 금단에서 몇 개의 빛 덩이가 뿜어져 나와 그녀의 주변을 에워쌌다.
총 16자루의 금빛 검!
"나 역시 검수(劍修)다! 비검술에는 혹시 조예가 있느냐?"
'그렇군.'
나는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전 벽문성과 마찬가지로 비검 조종을 주로 하는 검수였던 것이었다.
"법기를 하나 빌려줄 테니 한번 겨뤄 보자꾸나. 진휘 대신 내가 스승 노릇도 해 줄 테니."
그러나 나는 피식 웃었다.
'내 스승 노릇?'
검을 들고? 내 앞에서? 감히?
나는 내 동부 안쪽에 있는 작은 탁자에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빠르게 손을 휘둘러 탁자의 다리를 하나 잘라 내 손에 들었다.
"검술만 겨뤄 보는 것이라면 이걸로도 충분할 것 같군요."
"하하하, 미친놈. 뭐, 두들겨 맞고 원망하지 말거라."
파직, 파지지직!
그녀의 비검 법보가 뇌기를 끌어올리며 황금빛을 뿜어냈다.
파앙!
그녀의 비검이 내게 빠르게 쇄도했다.
나는 탁자 다리를 잡고 한 바퀴 회전하며 비검을 부드럽게 흘려 낸 후 그녀에게 쏘아져 나갔다.
그러나 후방, 전방, 그리고 상공과 지면 밑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내 뇌리에 '그림'이 그려졌다.
소리소문없이 기척을 죽이고 있는 검이 오른쪽 대각선 아래에서 튀어나와 내 목을 찌르는 장면.
나는 달려가던 도중 몸을 비틀어 허리를 숙였다.
그러기가 무섭게 내 시야의 사각에서 날아들던 비검이 내 머리가 있던 곳을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내가 몸을 비튼 틈을 이용해 전후좌우에서 몰려들던 비검들이 나를 찔러 왔다.
빙글―
그러나 나는 한쪽 발을 땅에 딛고, 그 발을 축으로 삼으며 한 번도 끊이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부우우웅―
탁자의 다리에 기(氣)를 실은 채로 천인기 수사의 법보들을 모조리 쳐 내며, 나는 그 상태로 회전력에 힘입어 홍수령의 사각을 향해 빠르게 쇄도했다.
그런 후 아래에서 위로 검을 올려 베며 휘둘렀고, 홍수령은 희열에 찬 얼굴로 금빛 검을 잡고 휘둘렀다.
찌이잉!
우드득!
충격파가 사방으로 울렸고, 탁자 다리가 우득거리며 부서질 듯이 구부러졌다.
"뭐냐, 너는! 정말 최고다, 단순히 삼화취정의 무림인이 아니구나! 수백 년에 한 번 나온다는 오기조원이냐? 내가 죽여 왔던 그 어떤 수도자들보다도 네놈과의 싸움이 가슴 떨린다!"
쿠구구!
천인기에 달한 그녀의 힘에, 내 몸은 그대로 지면에 천천히 박혀 들어가고 있었다.
'동부의 지반이 버티지 못하는군.'
내 몸은 그녀의 힘을 완전히 분산시키며 피해가 없다시피 했지만, 분산받은 힘을 견뎌야 하는 주변의 지형지물은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모양.
'요수공법으로 얻은 육신의 힘이나 등봉조극, 무형검의 힘을 조금이라도 쓰면 이길 수 있겠다만….'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수준을 파악했다.
그저 검을 맞대고 있었으나, 뇌리에 수 개의 '그림'이 그려진다.
몇 번이고 그녀가 나를 압박해 오다가 내 탁자 다리에 머리통이 꿰뚫리는 장면들.
분명 지금 상황은 내가 밀리고 있었지만, 우리의 의념이 서로 교류하며 보이는 미래는 백이면 백 그녀가 내 탁자 다리에 패배해 형편없이 전신을 꿰뚫리는 중이었다.
"흐…!"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홍수령은 내 몸을 쪼개 버릴 기세로 법보에 힘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와 의념을 교류하며 뭔가를 깨닫고 흠칫 놀랐다.
'잠깐, 삼화취정이 아니야!?'
이건….
대략 만 번 이상의 '그림'이 뇌내에서 돌려지며 그녀의 패배를 확정지었을 그때.
만 번 중의 한 번!
단 한 번의 그림이 나와 그녀가 동귀어진하는 그림을 만들어 냈다.
나와 그녀의 무학의 이해도를 생각하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삼화취정의 수준으론 답천에 달한 내 세계와 전혀 싸움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삼화취정보다도 높은 경지라면 가능하다.
'오기조원!'
꽈과광!
그녀가 번개의 속도로 내 가슴을 차 동부의 한쪽 벽으로 날려 버렸다.
나는 한쪽 벽에 처박혔고, 그대로 동부의 벽에는 거미줄 같은 금이 와르르 가 버렸다.
"마지막에는 수도공법으로 절 차 버리시다니, 제대로 이길 자신이 없으셨나 봅니다?"
"뭐 어떠냐. 수도공법도 내 힘인데. 꼬우면 너도 천인기 하든가."
"…."
홍수령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법보들을 회수했다.
"원래는 널 잡아 놓고 비검술로 회 쳐 버리려고 했는데, 그건 무슨 수법이지? 수도공법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우우웅!
홍수령은 내 동부에 둥둥 떠 있는 채로, 아직도 회수되지 않은 비검들을 보며 물었다.
난 그녀의 비검들에 불어넣은 내 의념을 회수해서 그녀의 검들을 돌려주며 말했다.
"어검술(馭劍術)입니다."
"호오, 흥미가 이는군."
그녀는 방금 전까지 내 의념에 의해 묶여 있던 비검들을 돌려받으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비검은 완전히 내게 장악당해 있었다.
내가 마음만 먹었다면 장악한 그녀의 비검을 이용해 도리어 그녀를 공격해도 되었을 만큼.
그랬기에 만 번의 의념을 주고받았을 때 만 번 다 그녀가 패배하는 결과가 나왔던 것.
그러나, 나는 만 번 중 한 번 나왔던 그 동귀어진의 수를 떠올렸다.
'내 어검술이 순간 풀렸다.'
그 순간 그녀의 비검술이 나를 노렸고, 홍수령을 반으로 갈라 죽인 후 비검술에 대응하려 했으나 미처 한 개의 비검을 놓쳐서 나도 죽는 그림이었다.
'물론 요수공법을 안 썼을 때의 가정이었긴 하다만….'
그건 어차피 제대로 뇌도공법을 안 썼던 그녀도 마찬가지일 터니 의미가 없는 가정이었다.
"그나저나, 너도 최소한 오기조원 이상이군. 한데 그럼 오기조원에 도달한 상태라면, 혹시 환골탈태를 한 거냐?"
"예, 그렇습니다."
"하면… 뇌성체이자 오행영근이라는 것일 터인데…."
그녀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진 사형에게 억지를 부려서라도 네놈의 쌍수 상대가 되길 잘했어. 너처럼 흥미가 넘치는 녀석은 처음이다!"
"…."
나는 어쩐지 광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움찔했다.
"…인체 실험을… 해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제게도 실험을 하시렵니까?"
"흥미가 생기긴 하지만, 의미 없겠지."
"예?"
"내가 어쩌다 인체 실험을 시작했는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홍수령은 동부의 한곳을 향해 결인을 맺었다.
그러자 그곳에서 나무줄기가 자라나며 의자를 만들었다.
그녀는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을 시작했다.
"검(劍). 나는 수도자의 길에 들고 나서부터, 비검술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비검술과 뇌도공법을 꾸준히 연구해 왔지. 그러던 어느 날, 수도계에서 벌레 취급하는 무림을 구경할 날이 생겼다."
그녀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충격이었지! 검을 잡고 그렇게 치열하게, 그렇게 치밀하게 약자로서 강자에 대응하기 위해 처절하게 싸우는 건 처음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수도계에서, 비검술 찔찔 날리면서 나 검수요, 하며 꺼드럭대는 놈들은 모조리 병신 새끼들이라는 걸!"
"…."
"평생 검을 잡아서 직접 휘둘러 본 적도 없는 머저리들이 비검 날리기만 하면서 검수라니! 그런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일이 없지!"
그녀의 말은 거칠었지만 내심 내 생각과 통하는 것도 있었기에 가만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그날부터 나도 무공이라는 걸 배워 봤다. 심법보다는 주로 검법 위주였지만, 그래도 내가 직접 내 손에 검을 잡고 휘두른다는 것 그 자체로 짜릿했다! 그렇게 싸우고 또 싸워 가며, 어느 순간 의념을 깨닫게 되고, 의념의 색조를 보는 삼화취정에 도달하고, 그 극의에 이르러 오기조원에 도달했다!"
"…혹여 선배님께서도 환골탈태를 했습니까?"
나는 혹시나 싶어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다만 나는 원영기 대원만 때에 오기조원에 이르러 환골탈태를 했기 때문에 딱히 오영근 때문에 불편한 거야 없었다만."
'어쩐지….'
나는 그녀의 육신을 감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육신은 상당히 균형이 잘 잡혀 있다는 게 느껴졌다.
환골탈태를 했거나 요수공법을 익힌 게 아니라면 저런 육신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뭐, 어쨌든… 오기조원에 달하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어떤 생각 말입니까?"
"인간의 의(意)로 육신을 변화시켜 환골탈태에 이르고, 영근이 없던 자에게 오기조원으로 오영근을 더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지와 노력 여하에 따라, 사람의 '체질' 역시 변화할 수 있다는 게 아닐까?"
파직, 파지지직!
그녀가 주먹을 쥐자 그녀의 주변으로 뇌전이 넘실거렸다.
"그렇다면 시조의 전설적인 체질인 천상금뢰지체야 너무 신화적이니 그렇다 친다면, 뇌성체 정도는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재현'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거기에 생각이 미쳤지. 그래서 나는 내 쌍수도려랍시고 나한테 붙은 것들의 인체 실험을 시작했다."
"…."
"아, 걱정하지는 말아라. 실험을 한 녀석들은 다들 장애가 생기거나 안 좋은 결말을 맡지는 않았어. 다들 더 강해지면 강해졌지. 후후…."
'그래서 저 미친 짓이 금신천뢰문에서 제지되지 않았던 건가.'
그녀에게서 도망친 쌍수 상대들은 어찌 되었든 이전보다 강해지고 문파의 전력이 늘어난 셈이었기에, 동문을, 그것도 쌍수 상대를 상대로 실험한 것이 용서받은 모양이었다.
"뭐, 어쨌든… 그런 건 둘째 치고, 너는 뇌성체를 타고난 것도 그렇지만 무(武)의 극점에 도달해 오기조원의 경지까지 손에 넣었으니 내가 전혀 너를 개조하거나 실험할 이유가 없다. 너는 내가 재현하려 그토록 애써 왔던 내 목표점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렇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의와 노력 여하에 따라 체질을 바꾼다라….'
굉장히 흥미로운 견해로부터 시작된 연구였다.
"그렇다면, 선배님께서는 '재능'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재능?"
"예. 인간의 수도공법에 대한 총체적인 재능. 혹은 무공에 대한 총체적인 재능 등에 대해서도 바뀔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아, 재능이라. 확실히 그런 것을 연구했던 적도 있긴 하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 나름의 연구를 한 결과, 나는 이 세상에 '재능'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재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는 그런 관점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재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나는 기문법재인 북향화와 괴군.
그리고 김영훈의 무재를 옆에서 봐 온 사람으로서, 그 말에는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나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 혹시 벽라국의 청문령이라는 이름을 아느냐?"
"예?"
여기서 갑자기 그 이름이 나온다고?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예, 들어는 봤습니다. 청문세가와 친분이 조금 있어서 말입니다."
"그래, 그러면 청문령의 별호가 뭔지도 알겠군."
"…예?"
나는 청문령의 별호라는 말에 당황했다.
'뭐지, 청문령한테 별호가 있었나?'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축기기 3대 위인이라고 불린 것만 압니다."
"엥? 그건 또 뭐야."
"예?"
그러나 오히려 홍수령은 그런 말을 또 처음 듣는다는 듯 의아해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 결단기 이하들은 또 그렇게 부른다는 말도 들어봤지. 축기기 주제에 결단기 급 전력을 내는 수도자이니…. 하지만 결단 후기부터 천인기에 이르기까지, 고계 수도자들 사이에서 청문령의 별호는 따로 있었다."
'아, 고계 수도자들 사이에서 떠돌던 별호라면 내가 모를 수도 있었겠군.'
내가 청문령과 만난 것은 원영기 이상은 다 잡혀간 후였으니 말이었다.
"청문령은 수도자들 사이에서 '재능 없는 지혜자'라는 뜻에서 황사(黃蛇), 즉 '누런 뱀'이라고 불렸다."
"누런 뱀… 말입니까?"
"그래. 예로부터 '뱀'은 곧 '지혜'를 상징하는 짐승이었다. 그리고 천지현황(天地玄黃)이라 하여, '하늘'은 검은빛, '땅'은 누런빛이라 알려져 있지. 고계 수도자들 사이에서 그 녀석은 재능이 땅에 떨어져 있다는 뜻에서 '누런 뱀'이라 불렸다."
'누런 뱀이라….'
나는 문득 그녀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그럼 반대로 천재는 검은 뱀이라고 칭하는 건가?'
나는 의문점을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음, 흑사에 대해 묻는 게냐?"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설명했다.
"흑사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른다. 애초에 뱀이 '지혜'를 상징한다는 것도 수계의 뱀 요족들 사이에서 은밀히 내려오는 전설 같은 거라…. 아, 대강 들은 바로는, 검은 뱀은 뱀들 사이에서 천재의 의미보다는 길조(吉兆)로 통한다더군."
'검은 뱀은 길조를 의미한다라….'
지난번 사족 공법을 살 때도 그렇고.
뱀들 사이에서 '검은 뱀'은 길조, 혹은 상서로운 존재로 통하는 듯했다.
'천지현황.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고 하며… 뱀이 지혜를 상징한다면, 검은 뱀은 하늘의 지혜를 상징한다는 건가.'
하늘은 명(命)이니.
어쩌면 뱀 요족들 중 명의 계위에 도달해 진선이 된 존재가 검은 뱀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뭐, 여하튼. 청문령에 대한 얘기를 꺼낸 이유는…."
파치지직!
그녀가 16개의 금빛 비검 법보를 다시 꺼냈다.
8개의 검이 팔방을 점하고, 그 바깥으로 다시 8개의 검이 팔방을 점했다.
"내괘(內卦), 외괘(外卦)."
순간, 검에 팔괘의 인장이 찍히며, 안쪽에 있는 비검과 바깥쪽에 있는 비검이 서로 역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비검들은 서로 팔괘의 힘을 주고받으며 무수한 변화를 일구어 냈다.
그 변화의 총합은 66개였다.
그리고 내 눈이 정확히 변화의 흐름을 좇자, 홍수령은 흠칫 놀라며 말했다.
"호오, 변화를 한 번에 눈에 담아? 몇 개의 변화를 보았지?"
"저는…."
"숨길 생각은 마라. 내가 이걸 몇 사람한테 시험해 봤는데. 네 눈빛만 봐도 몇 개의 변화를 봤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조금 줄여서 말하려다가, 내가 본 대로 말하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의념을 숨겨도 그녀라면 내가 의념을 숨길 수 있다는 걸 아니 그런 식의 거짓말도 안 통할 테고….'
"…66개입니다. 내괘와 외괘가 합일해 64개의 변화를 만들고, 상하에 음양의 흐름까지 합해서 66개로군요."
"역시… 청문령 외에 변화를 한 번에 알아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너…."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정말로 선통후각으로 한 번에 연기기 6성에 도달한 게 맞느냐?"
나는 속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이건 재능과 경지와는 상관없이 선각후통의 방식으로 기본 법술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가 더 중요한 건데…."
홍수령과 만난 지 첫날.
"네놈, 정말로 20대가 맞긴 한 거냐? 경지를 흩어서 본문에 잠입한 노괴인 건 아니겠지?"
그녀는 내 '재능'의 비밀에 순식간에 근접해 왔다.
검은 뱀(6)
'이래서….'
나는 수상쩍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홍수령을 보며 생각했다.
'눈치 빠른 애송이는 싫다니까.'
하지만 그녀가 갑자기 이렇게 추궁해 봤자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선선히 그녀에게 한쪽 팔을 내밀었다.
"의심스러우면 제 신체 나이라도 측정해 보시지요."
"하?"
내 말에 그녀는 바로 결인을 맺고 내 팔의 맥을 짚었다.
홍수령의 법력이 번개처럼 내 전신을 쓸고 갔다.
그리고, 그녀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십 대 후반이군."
그렇다.
아무리 그녀가 내가 수상하니 어쩌니 해 봤자.
이 몸 자체는 미래에서 가져온 게 아니었기 때문에 신체 자체에 쌓인 정보와 역사는 이, 삼십 년 치밖에 되지 않았다.
"흐으음…."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꿀릴 게 없다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눈을 마주보았다.
"…뭐, 좋다. 일단 그런 걸로 알지."
결국 내가 수상쩍은 노괴라는 증거 따위는 없었기에, 홍수령은 혀를 차며 넘어가야만 했다.
"선각후통 방식의 공부에도 원래부터 관심이 있어 줄곧 공부해 왔기에 한 번에 흐름을 읽은 것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뭐, 알겠다."
홍수령은 미심쩍은 듯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노괴든 노괴가 아니든… 별 상관이야 없겠지. 중요한 건…."
스르르릉!
66개의 변화를 보여 주던 그녀의 검진(劍陣)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저건….'
64개의 변화 안쪽으로 칠십이지살, 삼십육천강의 법술들이 자연스레 자리잡았다.
그리고 그를 기반으로 십이지, 십천간과 구궁의 변화가 따라온다.
그리고 이십팔수와 칠성에 해당하는 변화, 육합과 오행, 사상에 대응하는 변화.
삼재와 음양, 일원과 무극에 이어지는 변화가 그녀의 검진 안쪽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아….'
츠츠츠츳!
점차 그녀의 검진이 일으키는 변화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기초법술은 단순한 초창기 법술들이 아니다.
수도계에서 통용되는 수도계의 '언어'가 바로 기초법술이다.
고계 수도공법을 익힌다고 해도, 연기기 때 배웠던 기초법술의 내용이 복잡하게 얽히고 기초법술에 공법 창시자의 해석을 더한 것이 바로 고계 공법.
그렇기에 연기기 때의 기초를 잘 닦아 놓으면 후반에 가서도 편한 것은 물론이요, 고계 공법의 위력 자체를 한층 끌어올릴 수 있었다.
청문령의 천린수해성이 결단기의 힘을 끌어낼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가 고계 공법에 쓰이는 언어인 기초법술의 언어를 완벽히 장악하고 천린수해성의 진의를 10할 완벽히 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눈앞에 또다시 청문령과 같이 기초법술의 이해도를 바탕으로 공법의 힘을 끌어내고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
우릉, 우르릉!
"멸뢰내천(滅雷內天)."
그녀의 단전에서부터 뇌성벽력이 뿜어지며, 무수한 변화를 뿜어내는 검진과 이어졌다.
'저건…!'
검진 안쪽에서 일어나는 기초법술들의 변화가 그녀의 단전에서 일어나는, 그녀의 본명공법의 변화와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 눈앞에서 휘몰아치는 검진은 완벽히 홍수령의 공법을 재현하고 있었다.
'아름답군.'
그녀의 검술 실력 자체는 나보다 한참은 달렸고, 검에 대한 깨달음도 낮았다.
거기에 선각후통에 대한 이해도 자체도 청문령으로부터 직접 사사받은 내게 비할 순 없을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선각후통과 비검술을 완벽하게 합일하였다.
내가 각각의 방식을 둘 다 극점으로 익혔다면, 홍수령은 각각의 방식을 완벽하게 합일한 것이었다.
'내가 그녀와 동귀어진했던 한 수는 저것이었군.'
수도법술과 비검술의 완전한 합일.
내 어검술과 무형검을 조작하는 방법이 오로지 극한에 도달한 검에 대한 깨달음이라면.
그녀의 방식은 수도법술과 검의 깨달음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저 손안에서 춤추는 듯했다.
"자, 봐라."
파직, 파지지지직!
검진으로 자신의 수행과 함께 뇌력을 끌어올린 그녀가, 검진을 움직였다.
그녀의 앞에서 회전하며 변화를 보이던 그 검진이, 일순간 그녀의 조작에 따라 맹호와도 같은 기세로 동부의 한 곳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참(斬)!"
분명히 느껴진다.
저 검진에 담긴 힘 자체는 결단기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아니, 그마저도 아슬아슬하게 결단기이고, 사실은 축기기 대원만이 전력을 다한 공격이라고 봐야 했다.
하나 다음 순간.
번쩍!
휘광이 몰아치며, 뇌성벽력과 함께 나는 내 동부의 뒤편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는 것을 보았다.
꾸구구구구!
동부의 천장이 그대로 날아가고, 저 멀리 검진의 검기에 휩쓸려 금신천뢰문의 다른 산 몇 개에도 거대한 검흔(劍痕)이 나 버린 것이 보였다.
쉬이이이―
홍수령의 검진은 멈춘 상태에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미쳤군.'
나는 그녀가 내게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축기기 수준의 기운만 넣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헛웃음을 흘렸다.
파괴력도 파괴력이지만, 일순간 그녀의 검은 뇌속에 도달했다.
천인기 이하는 피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데.
축기기 대원만 수준에서 결단기 대원만 수준의 힘을 뿜는 검진을 천인기의 힘으로 쓴다면….
'어쩌면 금벽호보다 조금 실력이 떨어지는 게 그녀일 수도 있겠어.'
난 비검을 회수하는 그녀를 보며 그녀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인체 실험에 미친 미치광이에서, 상당한 실력자로.
그때였다.
[홍수령, 이 미치광이야!!!]
"앗…."
누군가 홍수령에게 욕지거리를 퍼붓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가 흠칫 놀랐다.
저 멀리, 그녀가 검기를 뿜어 갈라 놓은 산에서 분노에 찬 영언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망나니 같은 놈! 도대체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새 터전에서도 난동을 피우는 거냐! 난리를 피우는 건 나가서 하란 말이다!!!]
"흠, 흠… 거, 미안하외다. 사형님들!"
홍수령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기본만 제대로 장악하면 단계를 넘어선 위력을 내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기본을 장악하는 건 단순히 재능의 문제가 아니지. 노력과 의지의 문제이다. 그래서 나는 재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게야."
"그렇군요."
'노력과 의지가 재능을 결정한다라….'
하지만 그렇다면 천재와 둔재의 차이는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나는 그녀에게 바로 내 생각을 물어보았다.
"천재와 둔재의 차이는 무엇으로 만들어지느냐고?"
그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모두가 어떤 면에서는 천재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천재라고 일컫는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알맞은 분야를 찾았을 뿐이야. 모든 이는 자신에게 '끌리는' 분야를 찾아가고, 의지에 따라 계발하다 보면 그 분야의 대가가 될 수 있는 거지. 나는 그것이 세간에서 말하는 '천재'라고 생각한다."
"흐음…."
"인력은 곧 운명이니. 한 마디로 '재능'이 존재한다기보다는. 자신에게 끌리는 운명이 존재하는 것이겠지. 그래, 어찌 보면 세간에서 말하는 재능이란, 곧 운명일 터이다."
한 마디로, 그녀에게 있어 재능이란 곧 운명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었다.
'운명이라….'
자신에게 끌리는 것이 자신의 재능이고 운명이라면.
'내 재능은, 내 운명은 무엇인 거지.'
처음부터 무공이 끌려서 무공을 배웠다기보다는.
0회차 당시 비누 장수를 하다가 비누 제조법을 뺏기고 비적들에게 핍박당했던 것이 한스러워 무공을 배운 것이었다.
끌림이 운명이라면.
나는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운명이라고 할 만한 끌림을 느낀 적이 없었다.
'…모르겠군.'
나는 내 운명에 대한 것은 천천히 고민하기로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챘다.
"…그나저나, 홍 선배님."
"무슨 일이냐."
"제 동부… 말입니다만."
"아…."
그녀는 천장이 날아가고 뒤편 벽이 뻥 뚫려 버린 내 동부를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동부(洞府)란 수도자의 본거지를 칭한다.
보통은 산이나 절벽, 혹은 비밀스러운 곳에 동굴을 뚫어 놓고 그 안에서 오래도록 수련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영맥이 많이 몰리는 동부일수록 수도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대형 수도종문이 좋은 이유는, 제자들에게 그러한 동부를 무상으로 제공해 주기 때문도 있었다.
그런데….
'내 동부….'
내가 망연하게 다 망가져 버린 동부를 바라보자, 홍수령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흠, 흠. 이왕 이리된 것, 더 좋은 동부를 찾아 가져다주마."
"…."
"며, 며칠만 기다리려무나. 그럼 난 이만…."
파앗!
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비둔술을 써서 사라져 버렸고,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