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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 - 12

공연이 끝나고 (1)

내가 '귀의하나이다'를 입에 담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언가 반응이 오기도 전, 눈으로 좇기도 힘들 정도의 속도로, 서휼이 내게 달려들었다.

꽈드드드득!

서휼이 나를 후려치고, 그의 발이 내 가슴팍을 짓밟았다.

"끄…으으으윽!"

[말]이 안 나온다.

아니, 뭐라고 해야 할까.

[말]을 포함한 내 [의지] 자체가 갑자기 억눌린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서휼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나를 이 세계 전체와 격리시킨 것만 같은 느낌.

그러나,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휼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처음이었다.

서휼의 심상이 이 정도로 요동친 것은, 처음이었다.

서휼은 여전히 얼굴 표정이 박제된 듯이 웃고 있었지만, 그의 심상은 처음 볼 정도로 놀랍게 폭풍이 치는 중이었다.

[말]이 봉인되었지만, 나는 서휼이 똑똑히 볼 수 있도록 입모양으로 말을 전했다.

―너라도 진선은 무섭나 보지?

"…하하, 안 그래도 머나먼 차원에 유폐되어서 고생하고 계시는 분을 귀찮게 사바세계에 오라 가라 하는 것 역시 불경이 아니겠습니까."

'유폐?'

어쩐지 서휼은 천뢰번의 주인에 대해 뭔가를 아는 것 같았다.

'머나먼 차원에 유폐되었다는 존재가 그 정도의 힘을 보여 주었다라….'

알면 알수록, 역시 진선이란 존재들은 언제나 내가 생각하는 한도와 한계라는 것을 가볍게 초월하는 것 같다.

우우웅!

나는 내 몸 상태를 확인했다.

가슴팍은 이미 뇌전화되었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서휼은 뇌전화된 몸을 '밟고' 있었다.

눈알을 돌려보니, 내 중단전, 하단전에는 그 위에 호(好)와 덕(德) 자가 차례대로 떠올라 있었다.

나는 내 머리.

상단전 위쪽에 있는 유(攸) 자를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서 도우께서 쓸데없이 입을 놀리신 덕에, 제 축 중 무려 하나를 소모해서 당신을 봉인 중입니다."

'봉인 중…!?'

말 그대로, 점차 내 전신이 우득거리며 점차 세계와 더더욱 격리되어 가는 듯했다.

"당신 덕에 네 번째 축을 소모해야 하니,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예정에도 없이 혈음계에 가야겠군요. 덕분에 일이 상당히 성가셔졌습니다."

'성가시다라….'

물론 표정만 보면 그냥 나를 놀리려고 하는 말인 듯싶다.

하지만, 서휼의 심상은 정말로 조금 복잡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혈음계에 가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서휼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 같았다.

'왜지, 서휼은 혈음계와 연결 고리가 있는 게 아닌건가.'

어쩐지 지금 서휼의 모습은 혈음계에 가기 꺼려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혈음계에 가기 싫었으면, 다른 축을 소모했어도 됐지 않나.

분명, 지난번 서휼의 설명에 의하면.

명귀는 수.

자금은 부.

고력은 강녕, 진마는 유호덕이라 하였다.

혈음계는 진마계에서 떨어져 나간 곳이니 진마계와 다를 바도 없었고, 유호덕의 힘으로 나를 봉인하는 그가 혈음계에 가서 다시 힘을 보충한다는 것은 이해하였다.

하지만, 그가 혈음계에 가기가 싫다면 그냥 다른 축을 사용해서 나를 봉인하면 되는 게 아닌가?

그리 생각했을 때였다.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아니면 정말로 모르시는 겁니까."

'뭐지? 뭔가 잘못 말한 건가?'

내가 의아해할 때였다.

"자금계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왕복하는 데에만 천 년은 걸리니 시간이 너무 낭비되고… 고력계는 진입하는 데에 조건이 필요하니 소모된 축을 보충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럼 왜 명귀계로 가지 않았지?

내가 묻자, 서휼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나는 서휼의 심상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잘못 말했나.'

나는 서휼의 심상을 보며, 내가 무엇인가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서휼의 심상에 끓어오르던 긴장이, 방금의 내 대답으로 인해 많이 가라앉았다.

"이상하군요. 당신은 너무 이상합니다."

서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추며 얼굴을 들이댔다.

"아까 했던 말에 이어서, 객체는 소중한 것. 즉 목적을 알기만 하면 제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도대체 뭐지요. 저는 백여 년 동안 줄곧 원립의 혈체를 통해 당신의 동향을 감시해 왔지만, 도저히 당신의 목적을 모르겠습니다."

"…."

"당신의 소중한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때때로 당신은 소중한 게 있는 것도 같지만, 방금 전에 판을 부숴 버리려던 것처럼, 아예 어떤 것도 소중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서휼의 새파란 동공이 쭉 찢어져서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내가 도대체 무얼 하는 존재인지, 이해하겠다는 듯.

"목적도 알 수 없고, 소중한 것도 없으며, 분명 힘을 잃고 영락한 존재일 터지만 어째서인지 명귀계의 흉험함 같은 당연한 정보는 아무것도 모른다라…. 힘을 잃고 영락한 게 아니라, 혹 어떤 고명한 존재의 찌꺼기인 겁니까? 기억 전부를 전수받지 아니하고 일부만이 눌어붙어 탄생한 찌꺼기라면 그럴 수도 있지요."

서휼이 눈매를 가늘게 휘게 하며 웃었다.

"이단아 양수진의 시기를 제외한 근 12만 년 안쪽으로는 진선이 쇠락했다는 정보는 없으니, 당신은 높은 확률로 양수진 시기에 그에게 쇠락한 고명한 존재겠지요?"

"…."

"도우께서 그분을 부르려던 것을 보고 전후 사정을 유추해 보았습니다. 필멸자의 육신으로 그분을 직시했다면 필히 삽시간에 그분에게 귀의해 버렸겠지요. 하지만 도우가 천인도 증발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는 것은, 그분께서 당신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겁니다. 제 예상으로, 아마 대천벌의 정화가 제 주인을 찾아가도록 직접적으로 도우신 것일 테지요? 그분의 호의를 살 만한 행위는 그밖에 없을 테니…."

서휼의 추론이 이어졌다.

"그리고 대천벌의 정화를 도운 방법은 높은 확률로 그녀의 진명을 알고 입 밖에 불렀다는 것일 터. 그리고 그렇게 한다면 그분에게 원한을 산 양수진의 후예들이 어찌 될지는 너무나도 뻔히 알고 있었을 터였으니, 당신은 높은 확률로 양수진에게 살해당해 그에게 앙심을 품은 진선 중 하나일 터입니다."

"…."

"양수진이 박살 내고 다닌 존재가 한둘이 아니라서 그래도 후보는 많지만, 후손들까지 그렇게 처참하게 몰락시킬 정도로 양수진에게 원한을 품은 존재들은 많지 않고… 거기에 그분의 힘을 절대 빌리지 않을 존재들을 제한다면, 열 손가락 안으로까지 후보지가 좁혀지는군요."

내 정체에 근접했다는 듯, 서휼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이쯤 됐으면 그냥 정체를 공개해 주시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닌 듯합니다. 서 도우도 제가 누구인지는 짐작이 가지 않으십니까?"

나는 뭐라 해야 할지 잠시 답을 찾을 수 없어 입을 뻐끔거리다가, 차갑게 웃었다.

―우리 사이에 그런 걸 알려 줄 이유가 있나?

"음? 우리 사이라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러나 서휼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내게서 얼굴을 떨어뜨렸다.

―수십 년간 서로를 감시하고, 의심하고, 뒤통수를 치려 준비한 사이가 아닌가?

"아, 그거야…."

서휼은 내 입 모양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장난일 뿐이잖습니까?"

"…."

순간, 나는 서휼의 대답에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다.

"하하, 왜 그러십니까. 서 도우. 당신이 제가 짐작하는 존재들 중 하나라면… 우주를 손아귀에 쥐고 차원과 차원을 넘나들며 무수한 음모와 계략을 운명과 역사의 단위에서 풀어 나가던 것이 우리와 같은 존재들이 아니었습니까. 이깟 사바세계에서의 사건 몇몇 개 가지고 왜 그리 다투려 하십니까. 저희에겐 그저… 장난과 같은 것이 아닙니까."

'장난…?'

나는 서휼의 말을 듣자 정신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이 모든 게, 전부 장난이라고…?'

어이가 없다.

하지만 나는 요동치는 심상을 억누르며 서휼을 쳐다보았다.

'동요하지 말자.'

분명하다.

저 중에도 또 거짓말이 섞여 있다.

그리고, 서휼은 또다시 거짓이 섞인 정보를 내게 던지며 나를 관찰하고 있다.

'서휼에게 휘말리지 말고, 시간을 끌어야 한다.'

조금만 있으면, 괴군이 아예 봉명주의 정식 입구인 7층을 뚫고 이곳으로 올 터다.

그때까지만 서휼이 나를 완전히 봉인하지 않고 나와 대화를 나눠주면 희망이 있다.

'서휼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있어 보이는 척하며 녀석에게 정보를 더 뜯어내 보자.'

―모든 게 장난이라면, 명귀계가 조금 흉험하더라도 모험심 정도만 있다면 명귀계에 다녀오는 것도 좋지 않나. 혈음계에 가는 건 싫은 듯한데?

"흐흠… 명귀계에 대해서는 정말 뭐가 뭔지 모르시는 겁니까."

'…?'

"아시다시피, 절대다수의 개열기 진인(眞人)들은 편법으로라도 진선계에 진입하고 싶어 하고… 그렇기에 득시글대는 개열기들이 눈을 시뻘겋게 뜨고 관측하고 있는 곳이 명귀계입니다. 개열기쯤 되면 장난의 대상으로는 하기에는 많이 성숙한 존재들이니… 왜 명귀계를 관측하는지는 대강 짐작 가시겠지요?"

―….

'명귀계가 진선계로 진입하는 편법과 관계가 있다고?'

이 역시 거짓일 수 있었지만, 어쩐지 이번에 내뱉은 서휼의 말은 사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명귀계는 득시글거리는 개열기 수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관측하는 곳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직접 들어가서 찾지 않고 구태여 [관측]한다는 건 아마 흑룡왕과의 약속 때문일 테고….'

흑룡왕.

명귀계.

혈음계.

개열기.

성계.

서휼….

모든 게 어떻게 관련이 있는가.

어떻게 하면 이런 정보들을 취합해서 서휼과 더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는가.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다시 묻겠습니다. 서 도우."

서휼은 빙긋 웃으며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저 저희끼리의 장난이었을 뿐입니다만. 그래도 정체를 알려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그리고 그때였다.

"장…난…?"

꿈틀, 꿈틀….

아까 쓰러졌던 규백이.

심장이 뚫렸던 그녀가, 몸을 꿈지럭거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호오…."

서휼은 흥미롭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심장이 뚫려 구멍이 난 자리는 벌써 지혈이 되어서 피가 흐르지 않고 있었다.

난 규백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고 헛숨을 들이켰다.

'체내 곳곳에서 기를 강제로 순환시키며 몸을 일으켰다.'

일시적으로 심장이 해야 할 일을 기운을 돌려 본인이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된 이상 이미 규백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최대한 저런 방식으로 생기가 빠져 나가는 걸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은 실시간으로 파리해지고 있었다.

이미 죽음이 목전에 있는 상태였으니 더 이상 뭔가를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규백은 떨리는 목소리로, 폐에서 공기를 쥐어짜 말했다.

"장난… 이었다고? 다시 말해라, 서휼. 너에게, 규련과의 시간은, 정말로 장난일 뿐이었나?"

가슴에 구멍이 뚫린 규백은 구멍난 가슴에 덜덜 떨리는 손을 가져다 대며 서휼을 노려보았다.

"규련은… 나는… 너를 사랑했어… 진심으로…! 그런데, 네게 있어 나는 단순히 장난이었던 건가?"

규백은 울부짖듯이 외쳤다.

"대답해, 서휼…! 이 모든 게, 그냥 장난질일 뿐이었냐고!"

그리고, 서휼은 혀를 찼다.

"자네는 규 선배가 아니네."

그 냉랭한 태도에, 규백은 입술을 악물었다.

"찌꺼기 주제에 심도공법을 익혀 여기까지 어찌어찌 온 것 같네만. 그게 다야. 자네는 그냥… 규 선배의 찌꺼기일 뿐. 그 본인이 아니야. 착각하지 말게. 규련은 이미 죽었고, 자네가 이러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뿐일세."

"나는… 아니."

규백은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래, 규련은… 정말로 너를… 너를 좋아했단 말이다. 서휼…!"

"흐음, 어쩌라는 건가. 혹시 규 선배님께 이전에 드렸던 말이 자네에게는 전승되지 않은 건가? 감정이란 폐 안쪽에 들어간 공기의 양에 불과할 뿐이고…."

"아니야!"

촤르륵!

서교정표가 다시금 발동했다.

사슬이 서휼에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서휼이 손을 휘젓자, 서교정표의 사슬은 그대로 튕겨 나갈 뿐이었다.

규백은 용형비호조를 펼치며 사슬을 몇 번이나 서휼에게 다시 날렸지만, 서휼은 우습지도 않다는 듯이 사슬을 튕겨 냈다.

"이거 참. 귀찮게 하는군. 혜서 양, 저 찌꺼기 좀 치워주시겠습니까?"

"예? 싫은데요? 재밌잖아요."

"…."

오혜서는 규백과 서휼을 보며 재밌다는 듯이 원유의 몸으로 한쪽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뭐… 혜서 양이 귀찮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저벅, 저벅….

서휼은 내 가슴팍을 밟던 발을 내렸다.

그러나 여전히 내 상중하단전 위쪽에 떠올라 있는 유호덕의 문자 때문인지.

나는 말은 물론이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힘들었다.

챙, 채앵!

서교정표의 사슬이 몇 번이고 서휼을 노렸으나, 서휼은 여전히 그 특유의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몇 번이고 사슬을 튕겨 냈다.

유화에 의해 잠들었을 당시 잠시 사슬이 박혔던 것은 그냥 잠들었을 때 잠시 박혔을 뿐이라는 듯.

규백의 마음은 절망적일 정도로 서휼에게 들어가지 않았다.

투웅!

서휼이 마지막으로 사슬을 튕켰다.

그리고, 어느새 서휼은 규백의 바로 앞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분풀이는 조금 되셨습니까?"

"너…!"

따악!

서휼이 규백의 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규백의 칠공에서 피가 뿜어지며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규백의 안에서 억지로 순환하는 천지영기를 그대로 진탕시켜 버렸다.

규백의 몸이 폭발해서 한줌 육편이 되지 않은 것이 더 용할 정도의 충격.

서휼은 규백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이쪽으로 질질 끌고 왔다.

"한이 많은 몸이니, 혈음계에 혈제로 바치면 바로 서 도우의 봉인을 강화할 수 있겠군요. 자, 서 도우. 잠시 소요가 있긴 했지만, 봉인되시기 전에 하던 얘기를 계속해 보시겠… 뭘 하시는 겁니까?"

우득, 우드드득….

[말]은 어떻게 해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은 온 힘을 짜내자 어떻게든 되는 것 같았다.

나는 무형검의 힘을 한쪽 팔에 집중하며,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유호덕의 문자가 나를 더욱 더 거세게 내리눌렀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규백에게로.

"흐음, 다 죽어 가시면서 이 찌꺼기에게 무슨 볼일이 그렇게 남으신 겁니까. 아, 혹시 봉인되기 전에 교미라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닥쳐.

"이해가 안 되는군요. 사바세계의 찌꺼기에게 뭘 원하시는 건지…. 장난감에게 정이 많이 드신 겁니까?"

―아니야.

"아니다?"

나는 온 신경을 규백을 향해 뻗은 팔.

무형검에 집중했다.

답천에 달한 무형검은 계위의 수준에서 유호덕의 문자를 헤집어 가며, 느릿하게 규백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장난이, 아니야!

규백은 이번 생에서밖에 만날 수 없다.

만약 다음 생에 그녀를 만난다면, 그때의 규백은 절대로 지금과 똑같을 수 없다.

오직 규련의 집착과 원망, 잔념에 의해 태어난 자이기에.

이번 생과 완벽히 똑같은 감정과 기억을 지닌 규련이 아니라면, 절대로 이번과 똑같은 규백을 볼 일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게 있어서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 한 번의 생에서밖에 못 만나는 존재였고, 규백 역시 똑같은 존재였으니.

그래.

이번 생에서밖에 못 만나는 인연들이다.

―유일한 인연들과 쌓은 추억이, 어떻게 장난이라는 거냐.

나는 마침내, 규백의 손을 잡는 데에 성공했다.

용형비호조를 익히느라 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많이 배긴 손이다.

서휼을 만나기 위해 단련한 손이며, 나와 함께 무공을 익힌 손이다.

동시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동료의 손이기도 했다.

"장난이 아니라는 겁니까."

내 입모양을 관찰하던 서휼은 잠시 우리를 지켜보더니, 규백의 머리채를 놓았다.

그녀는 힘없이 땅에 처박혔다.

'…?'

그러나 나는 서휼의 행동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뭐지?'

방금 뭔가를 잘못 본 것인가.

순간, 나는 서휼의 심상 속에서 아주 얄팍한 빛살을 본 것 같았다.

너무 순간적으로 지나간 것이라 진짜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잘못 본 거겠지.'

나는 서휼에게 일어날 리 없는 일에 대해서는 신경을 끄고, 쓰러진 규백의 손을 맞잡았다.

규백은 아직 죽지 않았다.

곧 죽기야 하겠지만, 그녀의 손은 미약하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떨리는 손을 통해 그녀의 감정을 느꼈다.

분노와 원망.

그리움과 슬픔.

그리고… 사랑.

규련은 서휼을 사랑했다.

그리고 규련의 기억을 이어받은 규백은 서휼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규련의 기억 역시 이어받았기에.

규련의 원망으로 점철되었을지라도, 규백은 서휼을 사랑하는 마음도 존재했다.

비록 사랑하는 대상은 너무나도 역겨운 존재일지언정, 그녀의 사랑 자체는 서휼에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빛났다.

나는 그녀의 심상을 바라보며, 그 빛을 내 가슴에 담았다.

'기억하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이 생에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인연이니, 마음 속에 묻어 이 마음을 기억할 것이다.

그렇게, 만상인연도에는 규백의 마지막 모습이 추가되었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사라락―

"…?"

연분홍빛의 실 한 가닥이 내 손에서 뻗어나오기 전까지는.

사라라락―

어쩐지, 향긋한 꽃 내음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내 몸에서 뻗어 나온 한 가닥의 실에서 뿌리가 돋아났다.

실이 여러 갈래로 쪼개지며 사방으로 펴져 나가는 듯했다.

사방으로 퍼져 나가려는 듯하던 실은 이내 한데 묶여 얽히더니, 하나의 형상을 취하였다.

그것은 김연의 형상이었다.

* * *

우우우웅―

홍범이 파 놓은 지네굴 안쪽.

그 가장 깊숙한 곳에, 한 명의 인영이 누워 있었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김연이었다.

그녀는 몇 날 며칠을 멍한 눈으로 누워만 있었다.

김연은 꿈을 꾸고 있었다.

좋아하던 사람과 출장을 가서, 과수원에서 모과나무의 꽃이 흐드러지게 핀 것을 보았던 그때 그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꿈 안쪽으로 무엇인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억하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그것은 김연이 의식을 붙여 놓았던 서은현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서은현의 목소리 너머로 서은현이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이, 서은현에게 붙여 놓은 의식을 타고 그녀에게 전해졌다.

그것은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이의 마음이었다.

서휼에게 모든 것을 다 바쳐 왔던 규련의 마음.

비록 결말은 파국에 치달았으나, 그 과정에서 있었던 규련의 마음만큼은, 너무나도 빛이 났고.

그 빛은 서은현을 통해 김연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그 빛이 김연에게 전해짐과 동시에.

그녀의 기묘성심전은 김연의 재능과, 그녀의 명(命)과 결합하여 어마어마하게 증폭되었다.

그 결과, 김연은 잠든 상태에서 기묘성심전을 통해 그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진짜 능력을 개화하였다.

* * *

츠츠츠츠츳!

연분홍빛으로 이뤄진 김연의 형상은 규백의 손을 잡은 내 손과 포개어졌다.

나, 규백, 그리고 김연 셋의 손이 포개진 형상이 되었다.

서휼은 예상외의 상황에 당황했는지 몇 발짝 뒤로 떨어졌고, 오혜서는 반가운 얼굴로 김연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머나, 연이잖아?"

그리고 오혜서는 반가운 얼굴로 김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연아, 방해되잖니. 다시 찾아가서 옛날처럼 귀여워해 줄 테니까 잠시 사라져 줄래?"

츠츠츠츳!

김연의 주변으로 음양이 휘몰아치는 듯하며 그녀의 모습이 잠시 흐릿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연분홍빛 김연의 형상은 규백의 구멍난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그와 동시에, 규백의 텅 빈 가슴 안쪽에서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서휼이 오혜서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혜서 양! 빨리 저걸 막으세요!"

우우웅!

동시에 푸른빛이 번뜩였고, 서휼은 그대로 본체로 변해서 날아가려 하였다.

하지만, 황금빛이 더더욱 빨랐다.

황금빛은 한 가닥의 얇은 실이 되어 서휼을 향해 날아갔고, 서휼의 가슴팍과 자연스레 이어졌다.

나는 저 황금빛 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했다.

'저것이… 광한지약…!'

그와 동시에, 가슴이 황금빛으로 채워진 규백이 파르르 눈을 떴다.

그녀는 얼마간 김연의 형상과 눈을 마주치더니, 피를 토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아아아악!!!"

그리고, 광한지약의 실타래를 빠르게 읽어내리던 오혜서는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원유의 몸을 입고 있음에도, 그녀는 눈알이 터져 버린 채 눈을 부여잡고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봐서는 안 될 것을 봐 버린 듯이.

"저게뭐야저게뭐야저게뭐야…."

공포에 질린 듯이 머리를 부여잡던 오혜서는 얼마 후 원유의 육신과의 연결을 끊어 버리고 그대로 어딘가로 사라졌다.

원유의 육신은 눈알을 잃은 채 그대로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그리고, 규백은 가슴을 부여잡고, 저 멀리 도망치는 서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우웅!

그녀의 의념이 사방으로 흘러넘쳤다.

월도입천.

"서교정표."

다시 한번, 규백의 월도입천이 발동되었다.

이번에는 규백의 가슴에서 사슬이 뻗어나왔다.

갈색의 사슬이 아니었다.

황금빛의 사슬이, 서휼을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쫓아가 서휼이 반응할 틈새도 없이 그에게 연결되었다.

촤라라락!

서휼과 연결됨과 동시에, 황금빛 사슬은 빠르게 짧아지더니 멀리 날아가던 서휼을 다시 이곳으로 끌고 왔다.

서휼은 끌려오는 와중 다시 인간형으로 변화하며 이곳으로 내려앉았다.

서휼은 규백을 쳐다보고, 다시 김연을 쳐다보았다.

"…너는 뭐지."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

하지만, 서휼의 목소리는 그 어떤 때보다 싸늘했다.

"오직 광한이 주재하여야만 발동하는 비술이 광한지약이거늘…. 어째서 네가 광한지약을 주재할 수 있는 거지? 너는 누구냐."

그의 미소는 어느 때보다 냉랭했고, 서휼의 심상은 어떤 때보다 요동쳤다.

* * *

진룡맹 모처.

흑룡왕의 동부.

그 안쪽에서, 거대한 용의 거체가 움틀거렸다.

검은 용의 거체가 하늘로 머리를 들어 올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광한…? 대체 어떻게…?"

* * *

봉명주 바깥.

기묘성채.

그 성채의 중심에서, 갑작스레 괴군이 머리를 부여잡고 [그녀]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괴군의 기묘성심전이, 무엇인가에 의해 강하게 공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괴군은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더니 눈물을 흘렸다.

여태껏 시끄럽게 발광해 대며 뿜었던 눈물이 아니었다.

말없이 흐르는 괴군의 눈물은 그의 진심을 담고 있었다.

"…내 제자가, 뭔가를 하고 있군."

기묘성심전의 공명 너머로 느껴지는 김연의 존재를 느끼며, 괴군은 봉명주를 바라보았다.

"저곳에서 뭔가가 일어나고 있구나. 가 봐야겠어. 연의 연과 비슷한, 아니… 더더욱 엄청난 뭔가를 목격할 수 있을지도…."

가슴을 부여잡던 괴군은 눈물을 닦지 않고, 진중한 표정으로 기묘성심전을 펼쳤다.

우우웅!

괴군의 기묘성심전이 밝게 타올랐다.

"어설픈 인형놀이는 그만 해야겠어. 제자가 무얼 하려는지 봐야 한다. 기묘성심전에서 느껴지는 이 공명으로 보아… 제자가 하려는 것이, 기묘성심전이 나아가야 할 진정한 다음 단계일 터…!"

부우우웅!

잠시간 이성을 되찾은 괴군에 의해, 기묘성채가 더더욱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껏 무식하게 수량으로만 사방을 폭격하던 기묘성채의 괴뢰 군단이, 빠르게 편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 * *

"이 아이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서휼?"

규백은 김연의 형상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다시 서휼과 눈을 마주쳤다.

"실로 기적 같은 일… 아니, 기적이 맞지. 기적이 일어나서, 광한지약이 발동되었어. 서휼."

규백은 해맑게 웃으며, 황금빛이 뿜어지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내 심장은 이미 사라졌고, 나는 이제 죽어. 그리고 광한지약은 기적에 의해 발동되었고, 너도 이제 죽을 거야."

"…."

"나보다 더 잘 아는 것 같으니 알고 있겠지만… 광한지약은 천명과 관계된 술법이야. 육신을 갈아타도, 생명력을 보충해도 소용없어. 부활도 불가능해. 하늘이 우리의 운명을 끝내겠다고 하는 것이니까."

"…."

"하지만… 알다시피 서휼. 이건 서로가 합의 하에 맺은 광한지약이 아니야. 오직 규련이 일방적으로 네게 걸어 둔 광한지약. 거기에 증인도 이 자리에 참석했으니, 네게는 광한지약을 풀 자격이 있어, 서휼."

규백은, 서휼을 향해 천천히 양 팔을 벌렸다.

"규련이 네게 사랑의 마음을 전달해서 광한지약을 걸었듯이, 광한지약을 푸는 것 역시 역순으로 해야만 하지. 서휼, 광한지약을 푸는 방법은 간단해."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내게 입맞춤을 해 줘, 진심으로. 규련이 네게 준 것 이상의 마음을 돌려주지 않으면 광한지약은 풀리지 않아."

연인이 등장하는 많은 동화에서는, 입맞춤으로 연인의 저주를 풀고 백년해로하는 결말이 대다수이다.

그렇듯이, 저주에 걸린 서휼은 저주를 풀기 위해 진심을 담은 사랑의 입맞춤을 규백에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

"자, 서휼. 네 진심을 보여 줘."

마음을 잃어버린 서휼에게 진심만이 지약을 풀 방법이라 알려 준 규백은, 잔인하며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서휼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제 길고 길었던 공연은 끝났다.

무대 아래로 끌어내려진 서휼만이 남았을 뿐.

공연이 끝나고 (2)

"흐음…."

서휼은 무표정한 얼굴로 규백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눈 앞의 규백을 관찰하는 것만 같았다.

"진심이라…. 전횡 장로도 마지막에 그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너도 비슷하군."

저벅, 저벅….

서휼은 규백에게 다가갔다.

"정말, 내 진심이 보고 싶나?"

"당연하잖아?"

"…후회할 텐데."

서휼은 표정이 없이 공허한 얼굴로,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내 몸을 압박하고 있던 유호덕의 문자가 서휼에게로 돌아갔다.

한 마디로, 서휼은 현재 내가 천뢰번의 주인과 연결되는 것보다도, 광한지약을 더더욱 위급하게 여겼다는 것이었다.

치직, 파지지지직!

나는 전신이 빠르게 번개로 화하는 걸 보면서, 서휼과 규백의 결말을 눈에 담았다.

우우우웅!

서휼의 주변.

사방(四方)으로 네 개의 축(軸)이 떠올랐다.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네 개의 축은 서휼을 중심으로 네 개의 탑을 만들어 냈다.

'음?'

마치, 원립을 보호하던 네 개의 보탑 법보와도 비슷한 그 모습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원립의 보탑 법보가 결계를 펼쳐 원립을 보호했듯이, 서휼의 사축은 서로 연결되며 장막을 만들어 냈다.

"탁혼살목(濁魂煞目)의 주(呪)."

우우웅!

그리고, 서휼과 규백의 위쪽으로 시뻘건 눈알이 떠올라 사축의 위쪽에 천장을 만들어 냈다.

천장이 완성된 서휼의 장막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규백과 서휼을 뒤덮었다.

우우웅―

그와 동시에, 나는 저 안쪽에서 음산하고 역겨운, 그리고 형용할 수 없이 구역질이 나는 듯한 느낌을 느꼈다.

'저건….'

마치, 서휼의 심상을 그대로 저 안쪽에 재현이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

김연의 형상은 평온한 모습으로 여전히 저 안쪽에 손을 뻗고 있었고, 광한지약도 문제없이 발동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저것은 서휼의 밑천 중 하나다.

그 서휼이 최초로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꺼낸 밑천 중 하나인데, 과연 어떻게 될까.

우우웅―

그때였다.

나는 만상인연도에서 기이한 느낌이 드는 것을 느꼈다.

'왜지, 뭔가 또 있는 건가?'

그러나 나는 만상인연도를 관조하던 중 한 가지를 알아챘다.

'저건…!'

서휼이 사용하는 탁혼살목의 주.

나는 저것이, 어째서인지 만상인연도와 굉장히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군….'

오혜서가 나를 읽으며 보았다는 희뿌연 것은 높은 확률로 만상인연도일 터였다.

그녀가 나를 보며 '희뿌옇다'라고 표현할 만한 것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구태여 그녀가 내 만상인연도를 흔들어 보려 했던 이유는, 어쩌면 그녀가 읽고 있는 서휼 역시 나와 비슷한 공법을 익혔기에 어찌하면 서휼을 공략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오혜서가 만상인연도를 사용하는 나를 완전히 읽을 수 없었다는 것은… 서휼 역시 완전히는 못 읽었다는 소리다.'

파직, 파지지지직….

나는 완전히 번개로 변해 기화하려는 몸을 다잡았다.

우우우웅!

선수 흑룡의 진혈에 담긴 힘이, 천뢰번의 주인에게 귀의하려는 나를 반대쪽에서 잡아당긴다.

파직, 파지지직!

죽을 때가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흑룡 진혈의 힘은 축복이나 강력한 힘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재액(災厄)이었다.

꿀럭, 꿀럭….

흑룡의 힘이, 나를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었다.

내가 번개로 변해서 귀의하는 것을 막아 준다거나 하는 친절한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먹잇감을 뺏기기 싫기에 나를 잡아당기는 것일 뿐.

막상 내가 천뢰번의 주인을 직시해서 전신이 뇌전화되는 이 상황에 처하지 않았다면, 나는 오히려 흑룡 진혈에 서서히 잡아먹혔으리라.

하지만 어쨌든 나는 양쪽에서 나를 잡아당기는 진선 급 존재들의 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몸의 형태를 다잡았다.

우득, 우드드득….

번개로 변해 가는 내 몸은, 반인반룡의 형체를 취하며 흑뢰(黑雷)를 뿜어냈다.

'조금이라도 균형을 잃으면, 흑룡의 힘이나 번개의 힘이 바로 나를 잡아먹을 터다.'

꿈틀, 꿈틀….

나는 저물도에서 백홍주를 꺼내 마셨다.

무색유리검들이 나와 바로 연동된다.

'흑룡의 힘….'

꿈틀, 꿈틀….

나는 만상인연도 사이로, 무언가 질척거리고 꿈틀거리는 태음(太陰)의 힘이 기어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꿀꺽….

식은땀이 흐른다.

느껴진다.

전신이 뇌전화되는 저주는 몰라도, 흑룡 진혈은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흑룡의 힘이 내 역사(歷史)를 침식하는 것이 만상인연도를 통해 너무나도 여실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뇌전화보다도 더 위험하다.'

정했다.

생의 마지막이 코앞이니, 정말로 마지막 순간에는 천뢰번의 주인의 힘에 전신을 정화하여, 흑룡의 힘을 떨쳐 내야 한다.

기나긴 역사를 쌓아온 회귀자인 나에게는, 흑룡의 힘이야말로 더더욱 큰 재액이다.

후우우―

나는 번개와 흑룡의 힘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주변에 떠오른 3천 개의 무색유리검 중 하나를 손에 쥐었다.

무색유리검은 근 백 년간 금단 속에서 연화된 덕에, 한 자루 한 자루가 청동검에서 동네 대장간에서 파는 철검 정도 수준으로 단단해지고 예리해져 있었다.

"무색유리검, 합(合)."

우우웅!

3천 개의 무색유리검이 각기 열 개씩 겹쳐졌다.

3백 개의 무색유리검은 하나하나가 싸구려 수준에서 상당히 좋은 철검 수준으로 올라갔다.

다시 무색유리검이 열 개씩 겹쳐진다.

30개의 무색유리검은 좋은 철검 수준에서 최상위 제련 기술로 만들어진 철검 수준이 되었다.

무색유리검은 다시금 겹쳐졌고, 3개의 무색유리검은 하나하나가 명검(名劍) 수준으로 단단해지고 예리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3개의 무색유리검이 다시 합쳐졌다.

스스슷!

3개의 명검이 합쳐지자, 한 자루의 보검(寶劍)이 탄생했다.

무색유리검 최후 단계.

총천(總天).

보검 수준의 무색유리검에 법력을 주입하자, 3천 개의 회로가 작동하며 만상인연도로 인해 힘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힘은 충분하다.'

남은 것은, 규백을 도와 서휼의 최후를 보러 갈 뿐.

무색유리검에 다시 무형검을 덧씌우며 다시 한번 무색유리검을 강화했다.

쩌엉!

무색유리검이 휘둘러지며 서휼의 장막이 흔들린다.

그러나 장막에는 흠집도 없었다.

'계속.'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쿠웅, 쿵, 쿵!

나는 우공이산의 오의를 사용하며 점차 파괴력을 증폭시켰다.

천, 지, 심 세 가지의 힘을 섞은 나의 힘은 점차 올라가며, 사축기 수준에 이르기 시작했다.

쩌엉!

쩌엉!

쩌엉!

한 번 부딪칠 때마다 점차 울림은 커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오혜서가 뿜었던 유리공작의 빛에 당했던 유화가 다시 일어났다.

그녀는 딱히 상황을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내가 서휼의 장막을 후려치는 것을 보며, 상황을 파악한 건지 말없이 연주를 시작했다.

쿠르르릉!

천뢰.

뇌겁(雷劫)과도 같은 소리가 그녀의 주변으로 울려 퍼지며, 서휼의 장막에 몇 번이나 내리꽂혔다.

나와 그녀의 일격이 몇 번이고 서휼의 장막에 꽂힌다.

하지만, 서휼의 장막은 흔들림이 커질지언정 금이 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김연의 형상은 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 것인지 그저 광한지약을 주재하고만 있었고, 나는 김연의 형상을 통해 규백과 서휼의 생존 여부를 파악하며 끊임없이 서휼의 장막을 후려쳤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쿠구구구구구!

저 멀리서, 익숙한 성채가 날아왔다.

공간 도약이 아닌, 정식으로 봉명주 최상층의 입구를 때려 부수고 들어온 것이다.

괴군의 기묘성채가 마침내 이곳에 도착했다.

'과연 괴군은 우리를 보며 어찌할까.'

당장 나를 잡아서 괴뢰 재료로 삼고 서휼은 따로 잡겠다고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예상외로, 기묘성채는 당장 나를 공격하거나 하지 않았다.

대신, 안쪽에서 진중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휼의 사축장막인가. 오행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기축을 쌓았군. 일반적인 사축기가 아니라, 합체기 수사의 고유 영역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견고하군. 거기다가 안쪽에서 무언가로 인력(引力)을 강화해서, 저 장막의 견고함은 합체기 최정상이나 다름이 없다."

나는 괴군의 목소리를 들으며 흠칫 놀랐다.

'저 목소리는….'

괴군이, 제정신인 상태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괴군은 정신이 맑았다.

"조연 선배님. 부디 서휼을 잡는 데에 힘을 빌려주십시오."

"그것도 좋겠지. 다만, 나는 내 제자를 보러 왔다."

끼이이익….

기묘성채의 문이 열리며, [그녀]와 함께 괴군이 뒷짐을 지고 나타났다.

괴군은 김연의 형상을 보더니 눈가를 씰룩였다.

"흠, 본체가 아니군. 의식체만이 이곳에 와 있어. 그리고… 의식으로 법칙을 건드리는 건가? 도대체 뭘 하는 거지?"

괴군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왜 연이의 본체를 이곳에 데려다 놓지 않은 게냐."

"조연 선배님께서 도착하시면 다시 연이를 잡아가실까 봐 연이의 본체는 숨겨 놓았습니다."

"하하하, 좋구나. 좋은 판단이다."

괴군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건 그렇고. 연이는 현재 의식으로 법칙을 건드리며, 뭔가를 관리하는 것 같은데…. 아니, 뭔가를 진행한다고 해야 하나? 지금 뭘 하는 거지? 상황을 설명해 보아라."

나는 괴군에게 규백과 서휼.

그리고 광한지약과 김연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그렇군… 규련이라고 했나? 하하, 아마 살아 있었으면 나처럼 됐을 수도 있겠어."

규련과 규백의 이야기를 들은 괴군은 규련에 대해 짧게 평하였다.

"…?"

내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괴군을 쳐다보자, 괴군은 씹어뱉듯이 뇌까렸다.

"[그녀]가 이렇게 된 것은… 서휼이 판을 만들어 놓은 탓이었으니 나 역시 서휼에게 연인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흐… 어찌 되었든 오늘은 복수를 하기에 최적의 날이기도 하겠구나. 서휼을 사랑하는 이에 의해서 몰락하는 서휼이라니…."

괴군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우우우웅―

27기에 달하는 합체기 급 괴뢰.

그리고 기묘성채 그 자체와 [그녀].

총 29기의 합체기 괴뢰들이 일제히 서휼의 장막을 향해 각자 포구를 들이밀었다.

"발포."

괴군이 손을 내리자, 천지를 불사를 빛살이 서휼의 장막에 내리꽂혔다.

합체기 최정상 급의 방어력?

30여 기에 달하는 합체기 괴뢰들의 일제 사격 앞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서휼의 장막은 순식간에 누더기가 되었다.

물론 합체기 최정상 급의 장막이라는 괴군의 분석답게, 누더기가 되어서도 구멍은 뚫리지 않았다.

하지만 괴군은 평온한 표정으로 손을 다시 한번 들었다 내리쳤다.

"2격."

쩌어어어엉!

서휼의 장막이 있는 곳을 제외한 봉명주의 층 바닥 부분에 어마어마한 구멍이 파였다.

"3격."

번쩍!

봉명주 4층의 바닥이 무너져 내려, 3층과 4층 사이에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마침내.

서휼의 장막에 커다란 바람구멍이 뚫려 버렸다.

괴군은 뒷짐을 지고 말했다.

"구멍은 뚫어 줬으니, 서휼을 끌고 나오는 것 정도는 너희가 하거라."

말만 보아서는 나와 유화에게 임무를 내린 것 같았지만, 나는 괴군이 나와 유화에게 복수의 기회를 주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시끄럽다, 어서 가라! 지금은 기묘성심전이 공명 중이어서 정신이 맑지만, 언제 다시 미쳐 버릴지 모르니 시간이 없다!"

"…예."

우리는 장막 안쪽으로 들어갔다.

우우웅!

밖에서는 조그마한 장막이었지만, 안으로 들어오자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사축기에 이르러 축을 세 개 이상 쌓으면… 합체기 때에 얻는 고유 영역의 기초가 되는 공간을 얻는다.'

그리고 그 공간 안쪽에선, 수사는 어마어마하게 강해지고 할 수 없었던 일도 할 수 있게 된다.

우웅―

저 멀리서, 광한지약의 기운이 나를 끌어들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서휼과 규련의 광한지약의 증인.

광한지약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장막의 안쪽은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는 어둠의 공간이었다.

바깥에서는 장막에 커다란 바람구멍을 뚫었다 생각했으나, 어둠의 영역을 헤엄쳐 나가고 있자니, 우리가 들어온 구멍은 어느새 저 뒤쪽에서 작아져 있었다.

'춥다….'

나는 이 공간의 느낌이 어쩐지 서휼의 심상 그 자체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춥고, 더럽고, 끈적하고, 역겹고, 어둡다.

이곳에 자리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오염되는 기분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먹었던 원립의 심상이 똥 밭이었다면, 서휼의 심상은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 자리 같았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서휼의 어둠에 물들어 미쳐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파앗!

저 멀리, 희미한 황금빛이 보였다.

"규백…!"

그것은 규백이었다.

규백은 황금빛 빛살을 가슴에서 뿜으며 어둠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규백, 괜찮으십니까?"

나는 유화와 함께 그녀에게 날아가며 외쳤다.

그러나 규백은 답이 없었다.

나는 규백의 심상을 읽으며 침음성을 흘렸다.

상당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이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규백…?"

그리고 그때.

저벅, 저벅….

어둠 속에서, 서휼이 걸어 나왔다.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 나온 서휼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괴군을 불러오셨군요, 서 도우. 하지만 문제없습니다. 괴군이 온다 할지라도 저는 충분히 도망칠 수 있습니다."

"…규백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녀가 원하던 것을 주었을 뿐입니다. 진심을 보여 달라기에, 저장해 놓았던 진심을 보여 주었을 뿐이지요."

"…."

아무래도 서휼이 익힌 만상인연도와 비슷한 술법은, 기억이 아닌 감정을 저장해 놓는 류의 술법이었던 듯했다.

"자. 어떻나, 규백. 이래도 내가 그대에게 입맞춤을 해 주었으면 하나?"

서휼은 무표정한 얼굴로 규백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흠칫!

규백은 서휼의 행동에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서휼은 텅 빈 얼굴로 말했다.

"…감정이란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감정에 따라 제 진심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처럼 말하더니, 감정을 확인하고 나서는 오히려 무서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규백을 쳐다보며 명령하듯 말했다.

"그 정도가 네 진심이다. 규백. 광한지약의 증인이 모였으니, 술자가 원한다면 다시 푸는 것도 가능하지. 광한지약을 해제해라, 규백. 내가 네게 진심을 주는 것 따위 말고도, 네가 풀려 하면 풀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아, 아아…."

규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무언가 수결을 맺으려 했다.

그 모습에, 나는 우렁차게 외쳤다.

"안 됩니다, '규련' 선배님!!!"

"…!"

그 말에 규백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난… 나는…."

"서휼의 속내가 얼마나 구더기 같은지, 얼마나 오물 같은지는 잘 압니다. 그렇기에 규련 선배님께서 어떤 충격을 받으셨을지도 이해합니다."

북향화인줄 알고 청혼했는데 알고 보니 원립이었다면 어떨까.

상상만 해도 정신이 혼미해지고 구토가 나온다.

아마 규련의 심정은, 그런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규련' 선배님께서는 서휼에게 복수하고 싶으신 게 아니었습니까!"

"…나는, 규련이 아니야."

한참이나 약해진 규백은 서휼에게서 뒷걸음을 치며 말했다.

그녀는 서휼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

단순히 서휼의 심상을 본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더더욱 깊숙한 것.

나조차도 보지 못했을, 더더욱 추악한 무언가를 본 것이 틀림없었다.

"얄궂군요. 서 도우. 감정은 저런 것입니다. 누군가를 좋아했다가도, 누군가의 다른 면모를 보면 확 스러져 버리는 것. 그것이 감정입니다. 객체에게 감정은 폐 안의 공기량.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게 감정의 전부입니다."

"아직도 폐는 금에 대응하니, 감정은 금속성이다 같은 논리를 펼치는 거냐."

씹어뱉듯이 서휼에게 차갑게 말을 내뱉은 난 규백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가 뭘 봤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규백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규련은 이해할 수 있다.

"분명, 당신은 규련 선배가 아닙니다. 독립된 개체니까요. 하지만 규련 선배의 의지가 형을 빚어 태어난 것이 바로 당신입니다. 단순한 찌꺼기가 아닌, 규련 선배가 가지고 있던 무수한 일면 중 하나가 바로 당신입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분명 규련이기도 하다.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쓸데없기는."

서휼이 나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공간 전체가 우그러지며, 막대한 인력이 나를 짓눌렀다.

그때, 유화가 나를 막아섰다.

"멈춰라, 백녕."

그리고 공간의 인력이 옅어지며, 어둠 속에서 녹빛이 꿈틀거렸다.

서휼의 옆에서 백녕의 형상이 떠올랐다.

"…스승님…."

유화는 서휼에게서 나와 규백을 지켜 주며 백녕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제가 각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그 둘을 잠시 보다 규백의 눈을 바라보았다.

"규련 선배는, 서휼에게 받은 것을 돌려주고 싶어 했지요. 그렇기에, 당신은 규련에게서 태어난 첫날 '서휼을 죽여 버리겠다'고 한 게 아닙니까?"

"…맞아. 하지만…."

규백은 입을 떨며 머뭇거렸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휼을 죽이기 힘들어진 것입니까?"

"…미안, 하다. 녀석의 진심을 확인한 순간… 나는 녀석의 진심을 받아낼 자신이… 없어졌다."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제게 맡겨 주실 수 있으십니까?"

"뭐…?"

"제 손에, 서휼에 대한 당신의 감정을 맡겨 주시겠습니까?"

"…할 수, 있는 거냐?"

"해내 보겠습니다."

"…알겠어."

규백은 천천히 내게 다가와 나를 안아 주었다.

나 역시 규백의 몸을 꼬옥 안아 주었다.

규백이 무언가 수결을 맺었다.

츠스스….

그녀의 가슴에서 뿜어지던 황금빛 사슬이 옅어졌다.

그녀는, 스스로 광한지약을 해제한 것이었다.

서휼에 대한 복수를, 서휼을 옭아맬 기회를 멍청하게 차 버린 것이 아니다.

나에게 그녀의 마음이 깃든 것이 느껴졌다.

"흐음? 이거 참. 허무하게도 끝나는군요."

이윽고 규백의 몸은 차가워졌다.

심장이 없는 상태로, 합체기 준 요왕이었던 경험을 살려 기를 억지로 순환시키며 생을 연명했던 규백은, 그렇게 죽었다.

나 역시 흑룡과 뇌전의 힘 사이에서 버티고는 있다지만 얼마 있으면 완전히 잡아먹힐 터였다.

유화 역시 이 공간 안에서는 절대로 혼자서 서휼을 당해 낼 수 없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죽기 전.

최후의 힘을 짜내, 서휼에게 일격을 먹인다.

스아아아아―

총천의 단계에 도달한 무색유리검이 총천연색으로 빛났고, 희뿌연 만상인연도가 서휼의 어둠 속에서 펼쳐졌다.

츠츠츠츳!

나는 뇌전으로 변화하는 육신을 관조하며 눈을 감았다.

김연에게 매일같이 의해은산을 사용하며, 나는 끊임없이 뇌전으로 변하는 육신에 대해, 그리고 무공에 대해 참오했다.

그리고 번개로 변해 흩어지는 육신을 보며, 뇌전은 무엇인가에 대해 참오하며, 뇌전에 대해 깨달았다.

'지금부터….'

"귀의하나이다…."

단순히 귀의한다는 말로 진선을 불러올 수는 없다.

어쩌면 '시선'을 받을 수는 있겠지.

서휼도 시선을 받는 게 두려워서 나를 막아섰을 터겠고.

하지만, 나에게는 진선의 시선보다 두려운 것이 있다.

그렇기에 진선의 시선을 받는 것을 감수하고서, 그때 보았던 '눈'을 강하게 떠올리며 더더욱 빠르게 전신을 뇌전화시켰다.

파치지지지지직!

구현 3단계.

월도답천 너머의 단계에 달하면 공격의 속성이 천겁과도 같이 변화한다.

그렇다면.

이미 전신이 천겁으로 변화하는 도중인 내가 월도답천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다음 단계'의 경지와 똑같은가?

정답은.

치지지지지직!

'9할 이상 비슷하다!'

전신을 휘감은 번개와 답천의 무형검이 자연스럽게 합일하며, 번개의 색이 무색으로 물들었다.

쿠릉, 쿠르르릉!

번개의 본질은 찰나(刹那).

우리의 삶도 찰나.

그렇기에, 삶을 극대화한 월도답천의 너머는 천겁과도 비슷한 형질을 띄는 것이다.

더욱더 정확한 것은 내가 '정말로' 다음 단계에 이르러야 알 수 있겠지만.

"문제를 내지."

나는 히죽 웃으며 서휼에게 무색유리검을 겨눴다.

"지금부터."

지금은,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쿠르르릉―

"네게 추가될 천겁은, 총 몇 개일까."

공연이 끝나고 (3)

서휼은 뇌성을 울리는 나를 보며 웃었다.

우르르르릉―

"후후, 아무리 심도공법이 대단해도 안 맞으면 그마…."

꽈르르릉!

뇌성이 울리며, 나는 다음 순간 서휼의 머리통을 무릎으로 찍고 있었다.

녀석의 머리는 그대로 예기에 잘려 나갔다.

"우선 한 개."

"하…."

쿠구구구구!

서휼이 본체로 변한다.

거대한 해룡의 거체가 어둠의 공간을 채웠다.

[요술, 대해천리주(大海千里珠).]

촤르르륵!

반경 오백 리.

직경 천 리는 될 정도로 거대한 물방울이 어둠의 공간 속으로 생겨났다.

순식간에 나와 서휼은 둥그런 바다 속에 갇힌 형국이 되었고, 서휼은 바다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나를 압박했다.

[요술, 삼억근수밀도(三億斤水蜜桃).]

우우웅!

우드드드득!

갑작스레, 물의 수압이 어마어마하게 무거워졌다.

그리고 물방울들은 내 얼마 남지 않은 육신으로 흘러 들어오며 내 육신을 물복숭아처럼 물컹물컹하게 불려 버리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내 전신을 감싼 무색의 번개는 황금빛으로 변화하였다.

첫 번째 번개.

보이지 않고 감지도 되지 않으며 모든 방어막을 관통해서 원영을 타격하는 천겁.

그리고 두 번째 번개.

번쩍!

내 몸이 대해천리주의 요술을 넘어 그대로 공간을 뛰어넘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능광.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내리꽂혀 공간째로 갈려지는 천겁.

내 공격은 서휼의 목덜미에 적중하였다.

물론 썩어도 사축기 최정상인지, 서휼의 몸 자체는 멀쩡하였다.

하지만.

"이제 두 개."

심족들이 혐오당하는 이유는, 후에 경지를 올릴 때 내리치는 천겁 때문이다.

서휼이 합체기로 올라가려 할 때쯤이면, 상당히 재밌는 꼴이 되리라.

세 번째 천겁.

'할 수 있을까.'

내가 능광도를 재현 가능한 이유는, 김영훈의 무공이 나와 함께 발전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능광도와 무형검의 뿌리가 되는 단악검과 단맥도의 근간이 같기 때문이다.

규백에게 호언장담하기는 했지만, 나는 과연 다른 이들의 마음도 재현할 수 있을까.

나는 깊숙히 참오하며 더더욱 의식을 집중했다.

* * *

우우웅!

서휼의 장막 바깥.

그곳에 있던 김연의 형상이 더더욱 밝게 타올랐다.

그녀와 연결되어 있는 서은현이 밝게 빛나자 더더욱 빛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동안 미동도 없던 그녀의 형상이 손을 움직였다.

"으음…?"

괴군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제자의 의식체… 원영은 아니지만 뭔가 더더욱 진화한 것…. 저것이 기묘성심전이 향해야 할 방향인가?"

우우웅!

김연의 형상의 손이 기묘성채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녀가 하려는 것을 알아챈 괴군이 헛웃음을 흘렸다.

"연의 연을 발동시키겠다고…? 혼자서? 아니, 아니군. 안에 들어간 서은현과 뭔가를 합작하려는 거야. 그래, 어디 한번 해 보거라."

괴군은 기대감이 서린 눈으로 김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김연이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손아귀 안에, 무수한 의식의 실이 잡혔고, 그 실이 기묘성채로 들어가 기묘성채의 최후단계를 발동시켰다.

쿠구구구구!

우우웅!

연의 연의 황금빛 광휘가 발동한다.

그리고, 서휼의 장막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괴군은 잠자코 그 광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리 바깥에서 연의 연을 발동시키려 해도, 안쪽에서 시공간의 좌표를 만들어서 그 좌표를 향해 힘을 공급하지 않는다면 쓸모가 없다. 너는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 * *

'더욱더, 더욱더 깊숙히 파고든다!'

내가 의식을 집중하며 타인의 마음을 펼쳐내려 할 때였다.

우우웅!

나와 연결되어 있는 김연의 의식 실이 빛났다.

그와 동시에, 황금빛 광휘가 나를 둘러쌌다.

'이건….'

광휘에 닿자마자 느껴졌다.

이건 연의 연이다.

김연이, 바깥에서 연의 연을 발동해 그 힘을 내게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걸로 어찌해야 하는가.

어찌해야….

'…잠깐.'

뇌리를 번뜩이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가….'

나는 생각이 들자마자 바로 실행하였다.

우우우웅!

기묘성채를 연구하며 연의 연의 작동 원리는 이해했다.

그리고 두 번이나 그걸 보면서 괴군이 어떻게 시공간을 끌어오는지도 이해했다.

바라 왔던 그때의 그 순간을 우선 꼭두각시극으로 재현해서 시공간의 좌표를 잡는다.

그리고 자신의 인력을 이용해 시공간을 일그러뜨리며 끌어올 시공간과 현재 사이의 길을 만든다.

중요한 것은 좌표를 잡는 것.

그리고 괴군의 꼭두각시극과, 내 만상인연도는 재료의 차이일 뿐.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부우우웅!

나는 연의 연의 힘을 만상인연도에 불어넣었다.

만상인연도에 담긴 힘이 무색유리검으로 몰려들었다.

운명은 인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운명에 버금가는 역사도 비슷한 인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파아아앗!

만상인연도에 쌓인 나의 역사가 빛을 발하며 시공간을 일그러뜨린다.

나는 검무를 추었다.

그리고 검무를 추는 내 바로 옆에, 한 사내의 그림자가 나타나 나와 함께 춤을 추었다.

나는 그 춤을, 그 마음을 무형검에 투명하게 담아 내 펼쳐냈다.

꽈르르릉!

다시금.

황금빛의 빛살이 서휼에게 직격했다.

나는 만상인연도로 구현된 사내의 옆모습을 보며 미소지었다.

"오랜만입니다."

이번에 구현해 낸 능광도는 방금 전 억지로 구현해 낸 능광도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사내는 내게 미소를 남기고 만상인연도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그렇군….'

나도 몰랐지만, 나의 만상인연도는 연의 연을 펼쳐 내기에 최적의 공법이었던 것이었다.

자신감이 든다.

지금 이 순간.

만상인연도와 연의 연.

그리고 나의 답천과 뇌전화의 저주가 모두 합쳐진 지금.

나는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츠츠츳!

만상인연도에서 녹색의 소인이 튀어나왔다.

녹색의 소인은 박도를 든 채로 연의 연에 의해 구현되었다.

사보멸천도.

함선멸천(陷仙滅天).

사보멸천도의 마지막 멸천도.

녹색의 소인이 함천(陷天)존자라는 존호를 받게 된 일격.

하늘마저 함몰시켜 버리는 최강의 일격.

준 쇄성기에 달한 기묘성채를 두 쪽 내 버렸던 말도 안 되는 힘의 결정이, 내 무형검에서 펼쳐졌다.

꽈르르르릉!

녹빛의 번개가 서휼의 옆구리를 때렸다.

세 번째 번개.

모든 것을 공간째로 뜯어 내 파괴해 버리는 천겁.

서휼의 옆구리는 그대로 비늘이 벗겨져 근육과 혈관이 드러났다.

그러나 서휼은 대해천리주의 술법 안으로 들어가 수 속성 영기를 빨아들이며 차분히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요술, 멸릉우천(滅陵雨天).]

쏴아아아아!

대해천리주의 물이 날카로운 빗물이 되어 천지사방으로 비산한다.

빗줄기 하나하나는 능히 구릉을 파괴할 수 있는 정신 나간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꾸구구국!

거기에 서휼이 인력을 내게 집중시키자, 빗줄기는 모조리 내게 내리꽂히는 것이 보였다.

거기에 백녕이 법기 속에서 인력에 힘을 더해 준다.

그러나, 내 만상인연도 속에는 백녕의 모습 역시 있었다.

백녕이 구현되고, 나는 백녕의 절기 역시 받아 내어 펼쳤다.

척산편!

무형검이 채찍처럼 늘어나며 사방으로 뻗쳐 나가 [무게]를 왜곡한다.

결국 나를 덮친 빗줄기는, 영기는 담겨 있으나 먼지 한 톨만큼도 무게가 없는 그런 물줄기가 되어 버렸다.

우르르릉!

나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물줄기로 형성된 구름을 뚫고 나가 서휼의 등에 공격을 박아 넣었다.

백녕의 미숙한 입천 역시 내 무형검 속에서 천겁이 되어 서휼을 때렸다.

네 번째 번개.

맞으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몸이 무거워지는 천겁.

쿠르르릉!

나는 서휼의 등에서부터 무형검을 휘두르며, 놈의 앞발을 향해 달려들어, 앞발에 매여져 있는 작은 목걸이의 끈을 잘라 내고, 목걸이를 걷어찼다.

파앙!

백녕의 혼이 담긴 수정 조각은 유화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고, 나는 마지막 공격을 준비했다.

쿠르르릉!

다시금 전신에 황금빛이 맴돌았다.

그리고, 만상인연도 속에서 규백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니, 단순히 규백이 아니었다.

규련의 첫 모습부터 시작해서, 서휼과 사랑에 빠지고, 배신당하고, 규백으로 변하고, 다시 이 자리에 도달하기까지.

모든 그녀의 모습이 만상인연도 속에서 나타나 구현된다.

황금빛은 사슬이 되었다.

나는 사슬을 무색유리검에 감고서 서휼을 쳐다보았다.

[요술, 환무만영(幻霧萬影).]

서휼도 이것만은 맞으면 큰일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맞지 않기 위해 환무를 일으키고 숨어 버렸다.

하지만 소용없다.

천, 지, 심족의 시야를 합친 눈을 가진 것이 나다.

보인다.

나는 황금빛 사슬을.

규련의, 규백에게 받은 마음을 가슴에 품고, 다시 무형검에 불어넣었다.

"간다."

내 등 뒤로, 규련과 규백이.

그리고 이번 생에 만났던 모든 인연들이.

이전 생부터 쌓아 왔던 무수한 과거의, 역사의 기록들이 나를 떠밀어 주었다.

'아아….'

나는 순간.

만상인연도에 기록된 모든 장면들 하나하나가.

나라는 사람을 이루는 듯한 환영을 보았다.

츳, 츠츠츠츳!

'흑룡진혈이….'

어째서, 선수혈합에는 천 살 이하의 어린 요족들만 참여하게 하는 걸까.

어째서 그 이상에게는 선수의 힘을 주입하여 종족의 전력을 강화하려 하지 않는 걸까.

나는 오늘에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진혈이, 몸 바깥으로 배출된다…!'

선수는 역사를 관장하는 존재들.

자신의 원래 수명의 9배 이상을 살아내며, 장대한 역사를 쌓아 낸 모든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선수의 씨앗이다.

나는, 이미 2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며 그 자체로 선수가 될 자질을 개화했던 것이었다.

거추장스러운 흑룡의 힘은 필요 없다.

흑룡의 진혈은 자칫하면 내가 내 자신이 선수로 개화할 수 없게 가능성을 틀어막을 재액이 될 뻔했다.

그러나 이 순간 깨달았다!

쉬이이이이―

내 몸에서 용의 형상은 사라지고, 만상인연도의 희뿌연 안개가 나를 감싸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주기 시작했다.

아직은 이 정도지만, 계속해서 역사를 쌓아 나간다면….

나는 정말로 새로운 선수로 등극할 수도 있으리라.

파아아앗!

* * *

흑룡의 형상도, 뇌전의 힘도.

일순간 서은현의 몸에서 밀려났고, 서은현은 백의를 입고, 새하얀 안개를 두른.

그냥 서은현의 모습으로 황금빛 사슬을 잡고서 서휼에게 쏘아져 나갔다.

서은현이 서휼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

최후의 번개.

서휼이 죽기 전까지 계속해서 내리는 천겁.

규백에게 받은 서교정표가 구현된 천겁이, 일순간 새하얀 안개의 힘을 받아 더더욱 빨라진 서은현에 의해 뇌속을 잠시 뛰어넘었다.

서은현의 검은, 규백의 마음은.

그대로 서휼의 심장에 틀어박혔다.

파치지지직….

서휼은 피를 토했고, 어둠의 공간을 자신의 몸 안으로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다.

네 개의 축이 서휼의 체내로 돌아갔다.

서휼은 서은현을 쳐다보고는, 기묘성채 바깥에서 그를 쳐다보는 괴군을 쳐다보았다.

스르르륵―

일을 마친 김연의 형상이 점차 사라져 갔고, 그에 괴군 역시 다시 광증이 도지기 시작했다.

"서, 서휼? 서휼… 서휼. 오… 서휼!!!"

서휼은 인간형으로 변해 잠시 미소를 짓다가 푸른빛이 되어 어딘가로 사라졌다.

괴군은 침을 질질 흘리며 기묘성채를 이끌고 서휼의 발자취를 따라 어딘가로 날아갔다.

그리고, 서은현은 그대로 쓰러졌다.

파치지지직….

서은현의 옆에서는 유화가 백녕의 혼이 담긴 법기를 깨뜨려, 백녕을 성불시키며 서은현을 바라보았다.

"…만족하셨습니까?"

"만족했소."

"다행이군요…."

"한 가지…."

서은현의 전신은 희뿌연 안개와 뇌전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안개는 뇌전을 몰아내려 했으나, 뇌전에게 서은현의 육신이 잡아먹히는 속도가 더 빨랐다.

서은현은 번개가 되어 흩어지며 유화에게 말했다.

"함천존자께서… 규백에게 불어넣은 것이 있소. 규백이 나에게 마음을 전달하며 지금 내 안에 왔지…. 당신에게도 전달해야 할 것 같아, 전달하겠소…."

이것은, 함천존자가 규백에게, 규련에게 전하는 위로의 말.

동시에 마음이라는 것에 대한 존자의 깨달음의 일부.

―어떤 수사는 마음을 폐 속에 담긴 공기의 양이 마음이라고 하며, 폐가 금에 대응되니 마음을 금속성이라 한다. 하지만 너희 수사들의 논리대로라면… 오행의 금(金)은 팔괘의 건(乾)에 대응되니….

"'마음은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겠는가. 하늘과 맞닿아 살아가는 것이 너의 마음이며 하늘을 부정할 수 없듯이 마음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마음을 부정당했어도, 네 마음이 절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장익이 규련과 규백에게 전했던 말.

그리고 그녀를 통해 그들에게 불어넣었던 말이자 깨달음이었다.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늘이 운명이고 땅이 생명이라면, 명과 명 사이에서 와, 명과 함께하는 것이 마음이 아닐는지.

공연은 끝났으나, 마음만은 끝나지 않고 남아 이어진다.

서은현은 장익의 깨달음을 유화에게 전해 준 후, 마지막으로 번갯불 조각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것이, 서은현의 열여섯 번째 회귀(回歸)였다.

17회차의 첫날

홍범과 5백 년을 떠돌아다니며 힘을 기르기 위해,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행을 쌓았다.

하지만 결국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홍범의 눈앞에서 녀석에게 유언을 말한 후 죽었다.

그것이, 나의 열일곱 번째 회귀(回歸)였다.

* * *

17번째 삶.

나는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서휼의 모습.

그리고 비승대의 인물들이었다.

"…?????"

'뭐지?'

나는 너무나도 위화감이 드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했다.

분명 이것은 '17번째 회귀'였다.

하지만 '15번째 회귀'에서 바로 17회차로 넘어온 것만 같은 기시감이 전신을 엄습했다.

아직도 눈앞에서 규백의 마음을 받아 서휼에게 찔러 넣고, 유화에게 장익의 말을 전한 후 죽었던 그 기억이 생생하다.

바로 방금 전의 일이었던 것만 같다.

아니, 정확히는 '16번째 회차'가 그냥 통으로 날아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뭔가가 잘못되었어.'

16회차가 있었다는 기억은 있었다.

그런데 16회차가 기억나지 않는다.

15회차에서 그냥 17회차로 건너뛰기를 한 것만 같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나는 당혹스러움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찌이잉!

구주(九疇).

내 뇌리에, '구주'라는 단어가 틀어박혔다.

'구주?'

뭐지? 이 단어는?

잃어버린 16회차의 기억과 관련이 있는 건가?

'구주, 구주….'

나는 혼란스러움에 '구주'라는 말을 속으로 뇌까렸다.

그러던 어느 순간.

'구주…!'

나는 '구주'가 뭘 뜻하는 건지 기억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구주는 [이름]이다!'

[누군가]의 이름이었다!

나는 그 [이름]을 되뇌면서 순간 흠칫했다.

천뢰번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가 낭패당했던 15회차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그러나 어슴푸레한 기억이 뭔가 더 떠올랐다.

'아니, 아니야….'

[구주]는 천뢰번의 주인이나 천뢰번처럼 무시무시한 무언가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굉장히 친근한 누군가의 이름이었던 것으로 기억되어 있다.

내가 '구주'라는 단어를 입에 담아도 어쩐지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을 것이리란 근거 없는 믿음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구주가 누구인 거지?'

혹여나 내 16회차를 통으로 뇌리에서 지워 버린 누군가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

'진선, 혹은 최소 쇄성기 이상의 존재가 내게 개입한 건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보게?"

그때, 나는 나를 친숙하게 부르는 서휼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상태가 괜찮은 건가? 갑자기 눈에 공황이 오더니 너무 혼란스러워 보여서 말이네."

"아…."

나는 일단 '구주'와 잃어버린 16회차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 두고 서휼을 바라보았다.

16회차를 잃어버린 탓인지.

나는 15회차에서 느꼈던 감정이 지금도 여실하게 서휼에게 느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서휼을 잠시 바라보다, 서휼의 뒤쪽에서 요족들을 진룡맹으로 데려가려 하는 규련을 쳐다보았다.

규련은 빨리빨리 움직이지 않는 서휼과, 서휼이 영입하려는 나를 보며 불만족스러운 눈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씁쓸한 기분이 되었다.

내가 알던 15회차의 규련은 사라졌고, 그때의 인연 중 하나인 규백 또한 영원히 더는 만날 수 없다.

나는 그러한 심정을 느끼며 우선 규련에게 요족어를 통해 대놓고는 아니더라도 작게 예를 취했다.

"지족의 관주사자께 인족 서은현이 인사 올립니다."

[흥, 말 걸지 마라, 인족 놈.]

"…."

나는 귀찮다는 얼굴을 한 규련에게서 시선을 돌린 후, 흑색귀골곡을 이끌고 있는 허곽,

그리고 금신천뢰문을 이끌고 있는 금벽호를 바라보았다.

금신천뢰문과 흑색귀골곡.

이 두 문파만이 이제 내가 가지 않은 세력이었다.

우우웅!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의식 영역을 풀어헤쳤다.

쿠구구구구!

거대한 의식이 장내를 메웠다.

그리고 내 의식 크기에, 서휼을 비롯한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영 후기 수준 의식 크기!

'16회차 당시, 원영 중기, 양신을 형성하는 경지까지는 갔던 것 같다.'

내 의식은 오기조원 당시부터 동급 수도자보다 더 컸었고, 기묘성심전을 익힌 이후부터는 동 경지의 수도자보다는 무조건 컸다.

16회차 때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원영 중기에 이르렀으니 그보다 한 한계는 위인 원영 후기 수사의 의식과 크기가 비슷한 것이었다.

"우리 창천개벽문에 들어와라! 의식 크기를 보니 연체공법을 훌륭히 소화할 인재로구나!"

"하하, 훌륭하군. 자네… 혹 지족에 들어오는 게 어떤가?"

"흠~ 음흠. 음흠흠흠흠~ 흠흠~"

창호자와 서휼이 서로 내게 손을 뻗었고, 내 의식 크기를 지켜보던 괴군이 갑자기 몸을 들썩거리며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괴군은 여차하면 납치라도 하고 싶은 모양.

그리고 금벽호와 허곽 역시 눈이 뒤집힌 채로 내게 달려들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너는 꼭 우리 흑색귀골곡에 와라! 흑색귀골곡이야말로 네가 재능을 펼치기에 최적의 장소야! 혼에 죽음이 가득 쌓여 있는 것도 그렇고, 네 의식 크기라면 지금 상태로도 귀도공법의 기초만 배우면 귀왕을 수십 마리씩이나 부릴 수 있단 말이야!!!"

"우, 우리 금신천뢰문도…."

"닥쳐라, 금벽호! 이 녀석은 정말로 우리 흑색귀골곡에 반드시 필요한 인재란 말이다! 귀도공법을 익히기에 최적의 재능을 두루두루 갖춘 놈인데 너희 뇌도공법이 무슨 끼어들 틈이 있다고…."

바로 그때였다.

찌이잉!

"…!?"

금벽호가 가지고 있을 천뢰번.

그 천뢰번이 내게 근접하자, 나는 전신에서 갑자기 열이 올라오는 듯한 느낌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파직, 파지지지직!

"…!?"

나는 내 몸 곳곳에서 튀기는 뇌전을 보며 기함했다.

'이런, 제길…!'

16회차 때의 기억이 또다시 어슴푸레하게 떠올랐다.

15회차.

진선 천뢰번의 주인을 직시하고 얻은 뇌전화의 저주.

그것은, 회귀를 넘어서까지 따라왔었다.

나는 뇌전화의 저주를 벗기 위해, 16회차 당시 5백 년 동안 홍범과 함께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고군분투했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뇌전화의 저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 가, 죽기 직전에는 뇌전화되는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느려졌었다.

그리고, 다시 17회차인 지금.

'빌어먹을….'

나는 내 몸에서 튀겨지는 이 뇌전들이, 내 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내 체내의 피.

그 핏방울들이, 느릿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뇌전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난 회차보다는 '확실히' 느리게 저주가 진행된다.

그러나 분명히 내 신체는 '확실하게' 뇌전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나는 15, 16회차 때에 두 번이나 죽었음에도 여전히 진선의 저주에 의해 시한부인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지난 생에서는 그래도 5백 년을 살다가 뇌전으로 변해서 몸이 흩어졌었으니, 이번 생에서는 시간 자체는 꽤 널널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번 생에서도 뇌전화의 저주를 벗기 위해 힘을 쓰긴 해야겠군….'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갑자기 금벽호의 눈이 돌아갔다.

"이, 이, 이것은…! 뇌성체(雷聖體)…!!! 저리 썩 꺼져라, 허곽! 이 녀석의 체질은 우리 금신천뢰문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뇌성체와 매우 흡사하다! 분명 하계에서 검사할 때는 아무 반응도 없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 녀석은 우리 금신천뢰문에서 데려가야 한단 말이다!"

"미친 소리 하지 마라! 귀도공법의 천품을 타고난 녀석을 왜 금신천뢰문에 줘야 하는 거냐!?"

"귀도공법의 천품? 이 녀석은 뇌성체를 타고난 뇌도공법의 천재임에 틀림없는데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잡소리를 하는 거야!?"

허곽은 흥분한 표정으로, 금벽호를 무시하며 나를 보며 소리쳤다.

"뇌도공법은 50만 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 흑색귀골곡에도 충분히 많다! 금신천뢰문의 태극진뢰신에 비견되는 육극음뢰신부터 시작해서, 원뢰진마공, 대혈뢰벽력전 등, 네가 뇌도공법의 자질을 타고났어도 흑색귀골곡에서도 재능을 꽃피울 수 있다! 하지만 역사가 짧은 금신천뢰문에는 귀도공법이 없기 때문에, 금신천뢰문으로 간다면 네 또 다른 자질들은 절대 개화할 수 없어!"

"흥! 귀도공법 같은 거야 다른 종문에 있는 걸 뺏어오면 그만이 아니냐? 본문에 와서도 충분히 익힐 수 있다! 그리고 허곽이 말하는 흑색귀골곡의 뇌도공법은 파사현정의 힘을 지닌 우리 금신천뢰문의 뇌도공법에 대항하기 위해서 개발한 것일 뿐이다! 저놈이 예를 든 태극진뢰신에 비견한다는 육극음뢰신의 경우, 실제로 두 공법을 익힌 이들이 붙으면 육극음뢰신이 두들겨 맞다가 목숨만 부지해서 달아나는 경우가 부지기수! 금신천뢰문에 들어오면 흑색귀골곡의 마공들을 상성에서부터 이겨 먹을 수 있다! 실제로 흑색귀골곡 제자와 금신천뢰문 제자가 대련했을 때 승률은 금신천뢰문이 7, 흑색귀골곡이 3 정도다!"

"헛소리! 이놈이 말하는 예시는 '친선 대련'일 뿐이다. 실전에 임하면 대등한 걸 넘어서, 본 곡의 마공이 유리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허곽과 금벽호는 나를 두고 눈이 뒤집혀서 침을 튀겨 가며 설전을 벌였다.

그 과열된 분위기에, 서휼이 앞으로 나서 둘을 중재하기 시작했다.

"두 분 중 한 분이 양보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승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 시기에 이렇게 얼굴을 붉히시면 안 되지요."

"흠, 그것도 그렇지만…."

"정 그러시다면 두 분이 후학에게 왜 꼭 자신들의 문파로 와야 하는지를 차근히 설명해 주시지요."

서휼은 몇 마디 말로 두 사람을 조금 더 타일러 준 후.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서휼의 중재에 의해 일단 금벽호가 앞으로 나서 말했다.

"본문의 뇌도공법을 어떻게 익히는지는 영근을 가진 수도자라면 다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본문의 의기는 뇌도공법의 수행 방법에 따라, 흑색귀골곡보다도 더욱더 끈끈하다. 거기에 뇌성벽력의 힘을 익힌다면 차후 천겁을 극복할 때에 확실한 도움이 되지. 수도자에게 있어 천겁을 극복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게 또 어디 있겠느냐."

금벽호의 다음으로, 허곽이 나왔다.

"다 필요 없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뇌성체를 타고났고, 귀도공법에 최고의 재능을 지닌 너는 육극음뢰신의 공법을 익히기에 최고의 인재다. 금벽호는 태극진뢰신에 진다고 말했지만, 그건 본문 역사상 육극음뢰신을 대성한 이들이 한 명도 없기 때문이야. 만약 육극음뢰신을 대성할 수만 있다면 상성 차이고 뭐고 금신천뢰문의 뇌도공법에 절대로 지지 않는다! 50만 년의 역사를 지닌 본문에는 없는 공법이 없다는 걸 알아두어라!"

금신천뢰문이냐, 흑색귀골곡이냐.

나는 두 문파 중 어느 문파를 고를지를 고민했다.

솔직히 어떤 공법이 있는지는 별로 큰 관심은 없었다.

어차피 지금 내 수준에서는 경지 회복만 하면 사축기 수사와도 일전을 벌일 수 있기에 공법 욕심은 없다.

나는 그보다는 앞으로 있을 두 문파의 사건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금신천뢰문은 천뢰번에 이끌려 천뢰번의 주인이 강림하고, 흑색귀골곡은 강민희가 귀도성모가 되어 거의 망한다.'

금신천뢰문과 흑색귀골곡에 있을 두 사람을 생각해 보았다.

'금신천뢰문에는 전명훈, 흑색귀골곡에는 강민희….'

전명훈은 솔직히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악감정은 다 풍화되었지만, 그렇다고 좋은 마음도 딱히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강민희를 떠올렸다.

"으음…."

강민희를 떠올리자 드는 첫 번째 생각은.

'껄끄럽다'였다.

말 그대로, 강민희에게 있던 감정은 '껄끄러움'이었다.

전명훈과 단둘이 있으면 전명훈은 나를 괴롭히려 들 터였다.

하지만 그건 참을 수 있다. 귀여운 수준일 테니까.

하지만 강민희와 흑색귀골곡에서 둘이 있게 된다면….

"…으으음…."

'미칠 듯이' 껄끄러울 것만 같았다.

'나야 시간이 지났으니 상관없지만… 강민희는 어색해서 어지간하면 나와 안 만날 거 같은데.'

나는 2천5백 년도 넘게 세월이 흘렀지만, 강민희는 고작 1년 반 전의 일일 테니까.

그런데 문제는 강민희가 왜 귀도성모로 각성하는지를 알아내려면 강민희와 접촉해야 한다.

'제길….'

나는 강민희와 내 관계를 생각하자 조금 머리가 아파 오는 게 느껴졌다.

강민희는 무조건 나와 대화를 안 할 것이다.

그나마 등선향에서는 회사 사람들과 함께 있느라 나한테 말하는 척이라도 했겠지만, 단둘이 있게 되면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할 게 뻔했다.

'곤란하군….'

결정했다.

나는 금벽호를 바라보며 인사를 올렸다.

"예로부터 금신천뢰문의 위명은 많이 들어 왔습니다."

"흐하하! 좋은 선택이다!"

금벽호는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고, 허곽은 그 창백한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뒤로 물러났다.

"제길… 제길…."

그때, 허곽에게 서휼이 다가가 그의 귀에 뭔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허곽은 서휼의 말을 전해 듣더니 침음성을 흘렸다.

"흐으으음…."

그는 뭔가를 굉장히 고심하는 듯하더니, 이를 악물고 저물도에서 뭔가를 꺼냈다.

"…?"

그것은 두개골이었다.

그것도 깨알 같은 공법 구결들이 기록된 두개골.

마치 요수공법처럼 신체 일부에 공법을 기록한 공법서 같았다.

치지직!

허곽이 두개골을 움켜잡자 두개골 위쪽으로 기이한 원혼들이 흘러 들어가더니 두개골에 음각된 문자들을 가렸다.

그는 내게 두개골을 내밀며 말했다.

"받거라, 육극음뢰신이 수록된 공법서다."

"…!?"

"금신천뢰문에 가게 된 건 안타깝게 생각하고, 뼈아프게 생각하지만… 오히려 차후에 네가 금신천뢰문을 나와 흑색귀골곡으로 오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는 이 공법서에 들어간 혼백에게 진심을 토로하거라. 그리하면 공법서에 봉인한 혼백이 네게 육극음뢰신의 구결을 알려줄 터이니, 육극음뢰신을 익혀 흑색귀골곡에 찾아오면 된다."

"이, 이런 걸…."

허곽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육극음뢰신을 대성할 수밖에 없는 자질을 지닌 인재가 있는데, 공법을 서고에 처박아 두고 썩힐 수만은 없지 않으냐. 너는 반드시 육극음뢰신을 익혀야만 하는 인재이니, 받아두어라."

나는 허곽의 관대함에 그에게도 예를 취해 인사를 올렸다.

금벽호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었지만 일단 허락하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내가 금신천뢰문을 선택한 이후.

규련과 서휼은 다시 진룡맹 영역으로 떠났고, 다시금 괴군이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나는 괴군이 난동을 피우는 틈을 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김연에게 기괴고를 다시 심어두었다.

또다시 괴군은 목인을 납치해 갔고, 괴군에게 수배령이 떨어졌다.

괴군이 난동을 피우고 간 후, 나는 금벽호를 따라 인족 영역으로 다시 한번 가게 되었다.

* * *

시운도에서 명적에 이름을 올린 후.

나는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이번 생에 금신천뢰문을 택한 것은 꼭 강민희가 껄끄러워서는 아니었다.

금신천뢰문을 택한 첫 번째 이유는 마공에 대한 반감.

'우선 흑색귀골곡은 마공을 익히는 마도종파지.'

원래도 마공은 별로 익히고 싶지 않았으나, 원립을 상대한 이후로는 마공에 대한 반감이 극에 치달았다.

원유 같은 경우야 원립을 죽이고 얻은 전리품이라는 느낌이 강했기에 사용하고는 있었지만 사실 원유도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에 안 들어서 주기적으로 저주공법의 연습 상대로 쓰고 있었다.

어쨌든 마공에 대한 반감이 큰 것 외에도.

두 번째 이유는 우선 금신천뢰문의 경우는 해결책이 보이긴 하지만 흑색귀골곡은 정보가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강민희가 왜 귀도성모가 되었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도 아직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해결책이 명확한 금신천뢰문 쪽이 내게는 더 나았다.

세 번째 이유로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지난 생… 아니, 지지난 생인가? 여하튼 15회차 당시 나는 금신천뢰문을 멸문시켰다.'

나로서는 불가항력이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이긴 했었다.

하지만 어쨌든 나 때문에 수천만 명의 인족이 죽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15회차 당시에는 갑자기 몸이 시한부가 되고, 서휼을 끝내는 것에만 집중했던 탓에 제대로 죄책감을 가질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그것은 나의 크나큰 업보였다.

나는 지나간 회차의 사람들에게 가진 죄책감에, 이번에도 흑색귀골곡을 택해서 모르쇠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네 번째 이유는 뇌전화의 저주였다.

'금신천뢰문은 어쨌든 뇌도공법을 익히는 뇌선 양수진의 후예들이니, 뇌전화의 저주에 대한 사료나 해결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꼭 금신천뢰문이 아니더라도, 이들이 자리 잡을 뇌령도는 뇌도종문으로 유명한 천공도였으니, 뇌령도 곳곳을 조사해 보면 한 곳쯤은 이 저주에 대한 실마리를 풀 곳이 나올 터였다.

다섯 번째 이유는 답천 너머에 대한 실마리였다.

번개와 삶의 공통점은 단순히 찰나뿐이 아닐 터였고.

금신천뢰문에서 뇌도공법을 익히며 천겁에 대해, 천뢰에 대해 고찰하면 너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번 생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인가.'

나는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첫째, 뇌전화의 저주를 풀 방법을 찾는 것.

둘째….

'천뢰번을, 금신천뢰문의 안쪽에 들어가서 안에서 훔쳐낸다.'

그리고 다시 수계로 갈 것이다.

'서휼의 아가리에 꽂아 넣는다는 계획 따위는 세우지 않는다.'

다시 상계에서 하계로 갈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으니, 금신천뢰문에서 천뢰번을 훔쳐 내 수계로 간다.

그리고 천뢰번을 수계에 봉인할 것이다.

뇌전화 해제와, 천뢰번 절도가 이번 생의 가장 큰 목표가 될 터였다.

'물론 16회차 때 잃어버렸던 기억도 찾아보도록 하자.'

다만, 잃어버린 16회차를 찾는다는 걸 이번 생의 목적으로 세우지 않은 이유는….

16회차의 기억은 어째선지 절대로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인식이 무의식 속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이 주입한 것이 아닌, 내 스스로의 본능이, 인식이 그렇게 인지하고 있었다.

마치 역사의 일부분이 그대로 잘려 나간 듯한 이 공허감은, 어쩌면 내가 진선에 도달하기 전에는 다시 찾을 엄두도 못 내리란 육감이 들었다.

'16회차의 기억은… 일단은 천천히 찾아보도록 하지.'

16회차의 만상인연도 역시, 희뿌연 안개로 가려진 것처럼 내 눈에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단 두 개의 목표를 머릿속으로 정립한 후.

금벽호와 함께 뇌령도에 도착했다.

뇌령도에 도착한 금벽호의 주변으로, 금신천뢰문의 천인기 원로들이 나타났다.

파직, 파지직!

금벽호가 손을 휘두르자, 그의 손에는 익숙한 깃발이 들렸다.

천뢰번!

나는 천뢰번을 애써 못 본 척하며 원로들과 안면을 텄다.

"허허, 홍복이오!"

"본문에 이 정도의 자질을 지닌 제자가 둘이나 생기다니. 시조 금신자께서 보우하심이십니다."

원로들은 뇌전화의 저주를 '뇌성체'라고 부르며 껄껄 웃었다.

금벽호는 나와 담소를 나누는 원로들에게 말했다.

"그럼 본 태상문주는, 본문의 배신자와 비열한 뇌운각 녀석들을 정벌하러 다녀오지. 원로들 역시 두어 명만 남고 전부 따라오시오. 남은 두어 명은 금신천뢰문을 꺼내서 제자들에게 따라올 준비를 하라 이르고… 새 제자들이 뇌도공법을 익힐 준비를 하게 해 주시구려."

"알겠습니다."

천인기 원로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두 명의 원로가 자리에 남았고, 나머지 원로들은 전부 금벽호를 따라 뇌령도의 한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럼 우선 뇌도공법을 익힐 준비부터 해야 할 터인데…."

원로가 헐헐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를 은근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뇌도공법이라….'

뇌도공법 자체를 익히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간접적으로 접해 본 적은 많아도 직접적인 숙련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과연 어떻게 익히길래 준비까지 해야 한다는 거지?'

창천개벽문의 경우처럼 묶어 놓고 전기로 지지는 것일까?

아니면 괴군처럼 뇌기를 받아들이기 쉽게 개조라도 하는 것일까?

어떤 가혹한 수련이라도 받아들일 준비는 되었다.

내가 결의를 굳히고 있을 때였다.

"천뢰는 음양의 순환으로 태어나는 것이 모든 뇌도공법의 핵심이라네. 그렇기에 뇌도공법을 익히는 이들은 모두 음양, 즉 태극의 순환을 주로 해야 하지."

"예,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연위에게 성별이 바뀌는 공법인 태극진뢰신에 대해 들으며 받은 정보였었다.

"그렇기 때문에 본 금신천뢰문은 수련을 할 때 음양의 원활한 교류를 위해 쌍수도려(雙修道侶)를 맺는다네."

"…?"

"지금부터 자네에게 어울릴 만한 쌍수 상대를 찾아 주도록 하지."

검은 뱀(1)

쌍수도려?

나는 순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말이 없는 걸 보니 부끄럼이 많은가 보군. 그럼 어디 보자…. 일단 뇌성체 외에도 자네가 가진 혈맥을 조사해서 혈맥에 가장 적합한 여인을 찾아 줄 테니…."

"자, 잠깐!"

나는 정신이 퍼뜩 들면서 황급히 원로를 말렸다.

"쌍수도려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쌍수도려. 아까 태상장문께서 설명해 주셨잖은가. 뇌도공법을 익히는 방법과 우리 금신천뢰문의 문파원들의 사이가 어째서 끈끈한지 등…. 자네도 같은 수계 사람이면 모를 수가 없을 텐데?"

"…."

몰랐는데….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쌍수(雙修)란 무엇인가.

두 명 이상의 수도자가 서로의 기운을 교류하는 식으로 수행을 증폭시키는 방법의 일종이었다.

의형제를 맺은 수도자들끼리 나란히 앉아 수도공법을 수련한다거나, 같은 문파원 사이에서는 쌍수진법 등을 만들어서 기운을 교류하게 하여 쌍수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보통 음과 양, 혹은 남과 여가 들어가는 '쌍수'는 그러한 건전한 쌍수 방법과는 많이 달랐다.

음양의 교류를 주로 하는 쌍수란 절대다수가 방중술을 통해 기운을 증폭시키는 부류였으니 말이었다.

거기다가 그냥 쌍수라면 몰라도, 수도계에서의 부부를 일컫는 '도려'라는 말까지 등장한 이상 너무나도 명백했다.

눈앞의 원로는 나와 음양의 쌍수를 맺을 여인을 찾으려 하는 것이었다.

"본래 금신천뢰문에 가입하자마자 쌍수 상대를 맺어 주지는 않는다네. 왜냐하면 그렇게 했다가는 남녀 성비가 깨져 버릴 수도 있으니, 일반적으로는 금신천뢰문의 기본공을 어느 정도 익혀 칠성제를 지낸 이후에야 쌍수를 맺을 수 있게 해 주지."

"그, 그럼 저는 왜…."

"그야 자네 같은 전설상의 체질은 빠르게 쌍수를 맺어 진정한 뇌도공법을 빨리 익히는 게 모두에게 도움이 되니 말일세. 물론 이건…."

따악!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원로의 허리춤에 있던 호리병 안쪽에서 빛 덩이가 뿜어지더니 땅바닥 아래쪽으로 뭉쳤다.

파앗!

빛이 빛나고, 빛 덩이는 한 명의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였다.

기절해 있는 전명훈이었다.

"여기 천상금뢰지체를 타고난 이 녀석도 마찬가지일세. 자네들 둘 다 금신천뢰문에 전해지는 전설적인 혈맥을 각성한 것이니 빠르게 쌍수 상대를 맺어 주는 게 어마어마한 도움이 될 터."

"…."

나는 잠시 침묵했다.

'곤란하게 됐군.'

인연에게 정을 주느냐, 주지 않느냐에 대해서는 회귀를 거치며 마음을 결정했다.

회귀를 아무리 하더라도 그 생에서밖에 볼 수 없는 인연이니만큼 정을 줄 수 있는 이라면 정을 준다.

그것이 나의 신조였다.

하지만 이 건은 얘기가 달랐다.

부부가 되고 서로와 정을 나눈다는 것은, 인연을 만나는 수준이 아니라 인연이 맺어지는 수준.

비록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쌍수 상대로만 맺어졌다 하더라도 앞으로 수십 년간 얼굴을 마주 보며 정이 안 들 리가 없었다.

그리고, 금신천뢰문은 앞으로 언제고 천뢰번의 주인이 찾아와 멸문한다.

'정려의 이름을 안 부르고 입만 꾹 닫고 있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야….'

전신이 번갯불이 되어 '귀의' 당하며.

나는 점차 뇌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점차 천뢰번과 그 주인 사이에 있는 인력(引力)을 깨달았다.

정려의 이름을 부르든 안 부르든.

천뢰번의 주인은 결국 자신의 선보와 이어진 인력으로 인해 언젠가 반드시 광한계를 찾아오게 되어 있다.

수계에서 나온 순간부터, 그것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던 것이다.

'천뢰번을 수계에 봉인하기 전까지는, 함부로 정을 줄 수 없다.'

거기에….

'김연도 있는데 쌍수 상대까지 만들어 놓으면….'

어쩌면 김연을 괴군에게서 구하자마자 김연이 나를 서 장군으로 개조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리라.

"저는… 기본공부터 익히고 싶습니다."

"으음?"

나는 천인기 원로에게 내 의견을 피력했다.

"특별한 체질을 타고났다고 해서 특별 취급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금신천뢰문의 기본에서부터 차근히 기초를 다지며 위로 올라가고자 합니다."

"흐음…."

나와 전명훈에게 쌍수 상대를 찾아 주기 위해 이 자리에 남은 두 명의 원로.

그중 한 명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한 명은 마뜩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칙상 그게 맞기는 하지."

"하지만 저런 자질을 칠성제를 지낼 때까지 썩혀야 한단 말인가…."

의견이 둘로 갈렸다.

잠시 고민하던 둘은 한숨을 쉬며 전명훈을 일으켰다.

"이보게, 일어나게나."

파치지지직!

원로 중 한 명이 기절한 전명훈에게 전기 충격을 가했고, 전명훈은 전신을 바르르 떨면서 비명을 질렀다.

"흐어어억!"

"자, 일단…."

수염을 기른 원로는 전명훈의 머리통을 붙잡고 영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명훈의 머릿속으로 빠르게 성제국어를 비롯한 인족 총연맹 공용어를 주입하는 것이 보였다.

"흐끄아아아아악!"

전명훈은 강제로 머릿속에 주입되는 지식에 비명을 지르며 저항하려 했지만, 천인기 원로들의 손에서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나도 지금보다 약하거나 식견이 낮았다면 저 꼴을 당하고 있었겠지.'

새삼 내가 수준이 낮았을 때는, 천인기라는 존재들이 그 존재만으로도 얼마나 위협이 되는 이들이었는지가 실감이 되었다.

지금이야 답천의 힘과 월수궁무록 등을 쓰면 눈앞의 원로 한 명과도 단기전으로는 대등히 싸울 수 있으니 전혀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수계에 있던 시절만 해도 천인기는커녕 원영기조차 내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번 생의 초기 목표는, 최대한 빠르게 힘을 쌓는 것으로 해 보자.'

원래 경지만 회복해도….

아니, 양신을 이뤘던 16회차의 경지까지 전부 회복한다면!

'원영 후기, 그리고 대원만은 다시없을 정도로 빠르게 건너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천인기를 코앞에 두게 되는 것이었다.

'이번 생에서, 반드시 천인기에 오른다.'

단순히 원영 중기 같은 걸 노리지 않는다.

무조건 천인기를 뚫을 것이다.

어째서인지, 천족공법, 지족공법.

그리고 답천 너머의 경지.

이 셋을 모두 함께 올리게 된다면, 천인기부터는 무언가가 확실히 변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정신을 차린 전명훈은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마 정신이 없을 것이다.

갑자기 금벽호에게 납치당한 후 눈 떠 보니 등선향에서 이상한 장소였고, 이상한 장소에서 다시 이상한 지식들을 주입받았다.

"자, 그럼 내 말을 알아듣겠나?"

천인기 원로들의 질문에 전명훈은 흠칫 놀라더니, 어눌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 여긴, 어디, 어딥니까. 당신들, 누구…."

"좋아, 좋아. 언어가 제대로 입력되었군. 언어뿐 아니라 성제국의 기본 문화와 금신천뢰문, 그리고 수도계에 대한 간략한 정보들도 추려서 입력했으니, 용어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라 생각하네."

"예, 예? 금신… 천뢰문… 수도계… 으윽…."

전명훈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새로 들어온 지식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눈을 빛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는… 선협 소설? 그런 곳인가?"

"…?"

"그게 뭔가?"

전명훈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군…. 이곳은 선협 소설 속 세상이었던 거야. 그리고 나는 소설 속으로 들어온 게 틀림없어. 책 빙의물인 건가? 후후… 딱 봐도 내가 보던 소설인 '뇌조도사'의 세계관이었던 거로군."

"…."

나는 현실 분간을 하지 못하는 전명훈을 딱하게 내려다보았다.

아마 본인이 월급 도적질을 하며 봐 왔던 선협 소설인 모양이었는데….

'전혀 아닌데.'

나도 녀석이 뭘 보는지는 대충은 알았다.

하지만 애당초 전혀 달랐다.

전명훈은 자신이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천인기 원로들에게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래, 다시 한번 말해 주시오. 뭘 맺어 준다고?"

그리고, 그 말에 천인기 원로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너는 쌍수 이전에 일단 예절부터 가르쳐야겠구나."

퍼억!

원로의 손이 전명훈의 머리통을 후려치자 전명훈은 다시 그 자리에 기절해 버렸다.

전명훈이 기절한 후, 원로들은 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자네와 이 자는 동료로 알고 있는데, 이 자는 왜 처음 보는 어른에게 다짜고짜 저런 오만한 태도인 건가? 혹 본인이 천상금뢰지체인 걸 알고 있는 건가?"

"…모릅니다. 이 녀석 성격이 이런 건… 원래 귀한 집안에서 자라 예절이 조금 없는 녀석이어서 그러니 이해해 주시지요."

"그런가…. 아직 속세의 물이 덜 빠진 거로군."

원로들은 혀를 차며 손을 털었다.

"그럼 일단… 자네는 문파가 안정된 후에 기본공을 익히도록 하고, 이 녀석은 예절을 주입하도록 한 후에야 쌍수도려를 맺어 주어야겠어."

"하나 예절 주입은 누구에게 맡겨야 하겠소? 당분간 모두가 문파 안정에 한참 바쁠 텐데…."

"소해에게 맡기면 되겠지. 원래도 문파의 규율을 어기는 문도들을 잡아 심문하는 기율대의 일원이었는데, 태상 문주의 직계 혈손인 이유로 이번 문파 안정화 시기에는 문파 내부에서 보호받고만 있으니…."

"딱 좋구려."

그렇게, 나와 전명훈은 일단은 쌍수도려를 맺지 않고 넘어가게 되었다.

우르릉―

그리고 나는 기절한 전명훈과, 두 명의 원로들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뇌령도 전체가 떨려 오며, 뇌령도의 하늘 전체에 번개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 * *

"뇌운각에 들어간 금신천뢰문의 배신자는 열을 셀 동안 나와라."

금벽호는 굳은 얼굴로 천뢰번을 들어 올린 채 뇌운각을 바라보았다.

뇌운각의 천지영기가 가장 많이 몰려 있는 영산.

뇌운봉의 끝자락에서 뇌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저게 수세월 이전 금신천뢰문을 배신했다던 배신자인가… 사축기 최정상이라….'

금벽호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태극진뢰신을 극성까지 익혔다는 무시무시한 문파의 선배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면 당하는 것은 금벽호가 될 터였다.

"하나, 둘… 열."

금벽호는 열을 세고서 바로 천뢰번을 휘둘렀다.

콰르르르릉!

천뢰번에 의해, 뇌령도 전체에 낙뢰가 요동쳤다.

쿠르르릉!

빛살이 뇌운각 인근을 완전히 잠식했다.

금신천뢰문의 천인기 원로들은 모두 금벽호의 뒤쪽에서 뇌력의 힘을 피해 보호막을 치는 중이었다.

찌릿, 찌릿, 찌릿….

그러나 금벽호는 뇌전에 의해 뇌운각은 물론, 뇌령도 전체가 번갯불에 휩싸이는 상황에서도 전신이 찌릿거리는 것을 느꼈다.

'저것이, 합체기에 도달할 자격을 지닌 존재….'

어마어마하다.

'사실상 준 합체기 태수(太修)라 봐야겠어….'

저것은 금신천뢰문의 긴 역사 동안, 합체기를 목전에 둔 몇 안 되는 괴물.

양수진의 직계 제자를 제외하고 저 존재만큼의 천재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아마 이번에 들어온 천상금뢰지체와 뇌성체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금벽호 역시 저 존재를 죽이는 것이 아닌, 수행을 전부 폐하고 살려 두는 방식을 택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문파에 배신자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천상금뢰지체가 손에 들어왔다.

양수진 생전, 전 대륙을 넘어 전 삼천세계에 이름을 날렸다는 금신천뢰문의 위명을 재현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안 좋은 선례는, 그저 잘라 낼 뿐!'

쿠르르릉!

금벽호는 천뢰번에 더더욱 힘을 불어넣으며 낙뢰의 힘을 증가시켰다.

콰지지지직!

그리고, 금벽호의 이마에 한 줄기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우우웅!

거대한 태극(太極)의 형상이 낙뢰 속에서 불거졌다.

음양의 상징이 회전하며, 뇌운각이 있던 자리에서 천뢰번의 번개를 흡수하고 있었다.

쿠릉, 쿠르르릉!

사방이 낙뢰로 인한 빛살뿐이던 공간.

그 공간에, 태극의 흐름이 나타나 벼락을 먹어치우며 다시금 뇌운각과 뇌운봉의 형상이 드러났다.

뇌운봉 최정상.

그곳에 있던 작은 전각.

그 전각의 위쪽으로 떠오른 태극의 형상은 뇌전을 먹어치운 후, 먹어치운 뇌전의 힘을 전각의 안쪽으로 전송하는 중이었다.

[나와 배분 차이가 4만 년은 날 핏덩이 주제에… 사문의 어른에게 무얼 하는 게냐?]

찌이이잉―

금벽호는 상대의 [음성]에 머리가 띵해지고, 내장이 진탕되는 걸 느꼈다.

"웃기지 마라, 금위(金瑋). 네놈은 아예 시조령(始祖令)으로 파문되었으니 장문의 자격을 지닌 이들에게 주어지는 '금' 씨의 성은 빼 버리는 게 맞겠지. 네놈 따위가 무슨 사문의 어른이라는 말이냐! 네놈의 배신 때문에, 4만 년 전 금신천뢰문의 위상이 얼마나 추락했는지 아느냐! 그 죗값을 알렸다!"

[4만 년 전의 당시에는 네놈의 증조할애비도 태어나지 않았을 텐데, 건방진 것이 뭘 안다고 입을 나불거리는 것이야…. 내가 금신천뢰문을 위해 뭘 했는지나 알고 지껄이는 게냐?]

쩌적, 쩌저저적!

음성이 들려오는 전각이 점차 쪼개진다.

그리고.

콰아아앙!

전각의 지붕이 뻥 뚫리며, 그 안쪽에서 길쭉한 [팔]이 튀어나왔다.

금벽호는 점차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시조의 의발을 이어받은 금신천뢰문의 이름이 중경계에 존재하면 아니 되었어. 그랬기에 내가 피눈물을 머금고 시조의 흔적을 일일이 지운 것이다.]

거대한 팔!

마치 인간의 것 같지 않고, 비쩍 말라붙은 채 뇌기를 흘려 대는 그 팔은 작은 봉우리만 한 크기였다.

쿠구구구!

곧이어 또 하나의 팔이 전각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비좁은 전각 안에서 거대한 괴생명체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네놈은 지금 뭘 하는 게지? 불길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그 흉물(凶物)을 기어이 중경계로 가지고 올라온 것도 모자라, 사문의 어른에게 흉물을 들이대는 게냐?]

"무슨 소리… 천뢰번은 수세대 전부터 신성하게 봉양받아 온 본문의 신물이다! 불경스러운 얘기를 하지 마라!"

[그 불길한 년이 신물로 봉양받아 왔다고? 대체 4만 년 전의 사건 이후로 얼마나 문파가 망가졌던 것인가… 금신천뢰문에 망조가 들었구나. 시조시여, 어찌 후예들을 버리시나이까.]

쿠구구구구!

이윽고, 마침내 금벽호의 눈앞에 위(瑋)의 진체가 드러났다.

'저것이, 태극진뢰신을 대성한 금위의 모습….'

봉두난발을 한 흑발과 백발.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말라 비틀어진 거인이 뇌운봉 위쪽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흑발의 머리에는 말라비틀어진 모습이 어울리지 않게 화려하고 요사스럽게 분칠이 되어 있었고, 백발의 머리에는 땟국물이 줄줄 흐르며 수염이 달려 있었다.

거인의 등에는 네 개의 싯누런 북이 원형을 그리며 매달려 있었고, 누란 색의 북에는 각기 소음, 소양, 태음, 태양의 사상(四象)이 그려져 있었다.

[자아, 덤벼 봐라, 후배 놈아. 부디 내게 이길 수 있기를 바란다. 너희가 지면 내 눈물을 머금고 횡액을 피하기 위해 후학들을 모조리 집어삼켜 흉(凶)으로 하늘을 뒤덮어야만 하노니….]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가 겹쳐 울리며 금벽호를 비롯한 천인기 원로들이 피를 한 움큼 내뿜었다.

"…동문들을 잡아먹었다는 식인 요괴의 전설이 사실이었나…. 쓰레기 같으니. 이 자리에서 네놈을 벌하겠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나불대는 것만큼 꼴 보기 싫은 것도 없구나…. 올라오자마자 사축기에 이른 걸 보니 재능은 나와 비슷해 뵌다만, 나는 네놈이 상정하던 사축기와는 다를 것이다….]

키이이잉―

거인의 등에 떠오른 사상이 그려진 북들의 위로, 문자가 떠올랐다.

수(壽), 부(富), 강녕(康寧)… 그리고 토(土).

쿠르르릉!

뇌령도 전체에 휘몰아치던 모든 벼락이 뇌운봉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뇌운봉 위쪽.

여섯 개의 팔에, 여섯 개의 육색(六色)의 깃발을 들고 머리 위쪽에는 천뢰번을 띄운 뇌신(雷神)이 떠올랐고, 그 앞에 봉두난발한 흑발과 백발,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귀신이 벼락을 먹어치우며 일어섰다.

무지막지한 두 존재의 싸움에, 천지간이 진동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