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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 - 11

광대와 공연 (3)

나는 유화와 규백에게 나와 함께 온 것을 소개해 주었다.

달각, 달각달각….

그것은 괴군의 꼭두각시였다.

원영기 급의 괴군을 닮은 곱사등이 꼭두각시는, 등 뒤에 벌의 날개가 달린 형태의 괴뢰로, 내가 일전 괴군에게 쫓겨서 자살했던 회차에 봤던 것이었다.

얼마간 내 옆에서 달각거리던 꼭두각시는, 갑자기 자기 팔을 미친 듯이 물어뜯으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서휼, 서휼, 서휼 어딨어! 서휼 어딨어! 서휼 어딨어! 서휼, 서휼, 서휼서휼서휼….]

갑자기 발광하는 괴뢰를 보며 규백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냐, 이 기분 나쁜 장난감은."

"장난감이 아닙니다. 이건…."

나는 서휼을 부르짖는 꼭두각시.

괴군과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는 괴뢰를 가리키며 말했다.

"서휼의 숙적(宿敵)과 직통으로 연결된 연락망이지요."

"서휼의… 숙적?"

"예. 소개해 드리지요. 이분은 괴군 조연이라는 분으로, 서휼이 하계에서 비승하기 이전, 가장 꺼려 했던 괴뢰술사이십니다."

규백은 별 반응이 없었으나, 오히려 유화가 화들짝 놀라며 괴뢰에게서 떨어졌다.

"괴, 괴군 조연!? 최근 지족은 물론이고 천족 영역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그…!?"

아무래도 지족 영역에 도착한 후, 지족의 동향과 최근 광한계의 정세를 알아봤다더니 괴군에 대한 정보도 수집한 모양이었다.

유화는 괴군의 악명에 두려워하면서도, 괴뢰에 담긴 인공 혼에 흥미가 동했는지 괴군의 꼭두각시에서 시선을 떼진 않았다.

"저는 어렵사리 괴군 대인을 설득해서 서휼을 상대하기 위해 이번에 그분의 원조를 약속받았습니다. 다만 이분은 본래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시는지라 저희가 날짜를 잡을 순 없었고, 괴군 님께서 지금부터 103일 후 지족 영역에 와서 서휼이 있는 운심호에 폭격을 시작하실 겁니다."

"…!"

내 말을 듣자 유화는 흥미가 동한 기색이었고, 규백은 복잡한 기색이었다.

"그럼 일단, 남은 103일 동안 어떻게 서휼을 유도할 것이며, 어떻게 서휼을 함정에 빠뜨릴지 계획을 세우도록 하지요."

"좋습니다."

"그러도록 하지."

그렇게 나와 유화, 규백은 셋이서 모여 서휼에 대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 * *

한창 회의가 끝난 후, 나는 마원루에서 나왔다.

어느덧 하늘은 밤하늘이 되어 있었다.

"후우…."

유화와 규백을 보고 한창 회의를 하며, 나는 그제야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한숨을 쉬었다.

'정말 개조당하는 줄 알았지.'

괴군은 의외로 논리적인 인물이었다.

다만 그 논리가 미치광이의 논리라서 세상과 잘 맞지 않을 뿐.

그는 그가 가진 미치광이의 논리에 잘 맞춰서만 말해 주면 어떤 얘기든지 잘 들어 주는 수도자였다.

―오호라, 이건 또 뭐야. 내 기묘성채에 제 발로 찾아오다니,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 녀석이 제 발로 진화의 기회를 찾아왔으니 가능한 한 훌륭한….

―안녕하십니까, 괴군 어르신.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어디 보자, 이름이 서은현이라고? 서 장군, 서 태자, 서 제후 중 마음에 드는 걸 골라 보거라.

―혹시 해룡왕 서휼에게 연인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저는 이번에 서휼을 결혼시키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예상컨대, 서휼의 혼례를 진행하여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 부부가 된다면, 더러운 심상을 가진 서휼 역시 조금은 나은 존재가 되지 않을지요?

―…뭐?

―해룡왕이 곧 부부가 되려 합니다. 그 혼인식에 괴군 어르신을 초대하려 하니, 혼인식에 와 주셔서 서휼이 사랑하는 연인과 부부가 되는 것을 도와주시지요.

―서휼이… 서휼이… 서휼이서휼이서휼이부부가된다고?그러면당연히도와주어야지녀석이드디어사랑하는사람을찾았구나아주좋아…!

서휼을 제 손으로 결혼시킬 수 있다는 말에, 괴군은 기쁨에 젖어 기일을 정해 지족 영역으로 와서 서휼의 혼례식을 돕겠다고 하였다.

―그럼 이 때에 만나 뵙는 걸로 하지요. 연락은, 저 괴뢰로 하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또, 괴군 어르신의 괴뢰술을 평소 흠모해 왔으니 제자분께 한 수 배우려 합니다만. 거사 날짜까지 대인의 제자분은 저와 함께 가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

―괴군 어르신?

―…그런데 네놈은 서휼 얘기를 하면서 은근슬쩍 자기 자신의 진화에 대한 얘기는 뒤로 물리는구나. 그래서 서 장군, 서 태자, 서 제후 중 뭘로 할 거냐니까.

―…제자는 빌려 가겠습니다. 앞으로 연락은 저 괴뢰로 하지요!

그런 후, 바로 괴군의 기묘성채에서 김연을 데리고 탈출해서 지족 영역까지 어떻게든 오는 데에 성공했다.

다행히도 괴군에게서 훔쳐 온 괴뢰로 괴군과 계속 연락을 하며 의견을 주고받으며 알아본 바, 일단 괴군은 확실하게 서휼의 결혼을 제 손으로 진행하기 위해 103일 후 이곳으로 올 것은 확실했다.

'괴군을 끌어들이는 데엔 성공했으니, 앞으로 남은 건 우리가 계획을 짜서 서휼에게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다.'

이제 서로가 원하는 부분만 잘 조율하면 될 터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마원루 옆.

저 멀리서 달을 바라보고 있는, 연분홍빛 궁장을 입은 이에게 다가갔다.

김연.

"연아, 춥지 않니?"

"…."

"들어가자."

괴군의 손에서 김연을 빼내는 데엔 성공했다.

하지만, 구해낸 김연의 상태는 이상했다.

그녀의 의식은 다시 두개골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고 있었으며, 두 눈은 흐리멍덩해졌고,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그마한 괴뢰 장난감들을 눈앞에서 조종하며 그것으로 놀 뿐이었다.

수십 년.

괴군에게 연이를 맡겨 놓고 수십 년간 방치한 결과.

김연은 또다시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서휼 때문에 이번 생에서는 그녀와 연락하지 못했던 것은 불가항력이었지만, 전부 변명일 뿐이지.'

서휼 밑에서도 내가 머리를 더 굴렸으면 분명 그녀와 연락할 방법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기괴고의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 거리를 주파해 이야기를 나누려면 의식을 치러야 한다는 이유로, 서휼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너무 그녀를 오래 내버려 두었던 것이었다.

나는 들어가기 싫다고 버티는 김연의 옆에 앉아 한동안 괴뢰 장난감들을 가지고 노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얼마 후 그녀는 피곤한지 내 어깨에 기대서 잠에 들었다.

나는 한쪽 팔로 그녀를 살며시 껴안았다.

치직, 치직….

문득, 전기로 변하며 기화해 가는 손가락 끝이 보였다.

남은 시간, 103일.

짧으면 그 안에 전신이 기화할지도 몰랐다.

'그 안에, 김연을 깨우는 것도 목적으로 삼자.'

의해은산으로 그녀의 심상에 계속해서 말을 건다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나는 곤히 자는 김연을 안아 들고, 인근에 만들어 놓은 임시 동부로 들어갔다.

그런 후, 나는 다시 동부 바깥으로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와라… 홍범?"

나는, 내 기억보다도 한참은 커져 있는 거대 지네를 보며 되물었다.

분명 저 의념의 느낌은 홍범이 맞았다.

그런데, 녀석은 정말 예상외로 컸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주인님."

"어, 음. 그래… 너는…."

나는 결단경의 기운을 내뿜는 홍범을 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해 가만히 있다 물었다.

"…결단기에, 이른 거냐?"

"예, 그렇습니다. 주인님께서 창고에 남겨 주신 자원들을 써 경지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창고는 어떻게 열었지?"

난 몇십 년 전, 서너 살 아기 수준의 의식 수준을 지닌 홍범에게, 창고의 결계를 해제하는 방법 따위는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결계를 해체해서 열고 들어갔습니다. 쉽더군요."

"…."

나는 속으로 침음성을 흘리며 홍범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 녀석, 천재구나.'

지성을 각성하기 전에는 그저 지네라고만 생각했지만, 지성을 각성하고 나니 이만큼이나 엄청난 천재인 것이었다.

'…자칫하면 홍범에게 수행이 뒤처질 수도 있겠군.'

"그래서, 어쩐 일로 찾아온 거지?"

"주인님께서 오셨으니 당연히 찾아뵈어야지요."

"아니, 그리고 일단, 나는 네 주인이 아니다. 호칭을 제대로 하는 게 좋겠군. 그냥 서은현이라고 불러라."

"어찌 주인님께 그러겠습니까. 주인님, 주인님을 처음 보던 그 날부터 저는 주인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습니다. 부디 주인님으로 모시게 해 주십시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지족이 운명을 본다는 건 둘째치고, 천족도 저렇게까지 자신의 운명을 정확하게 들여다본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한 마디로, 지금 홍범의 말은 정말로 운명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아닌 일종의 비유로, 자신이 나를 그만큼 모시고 싶어 한다는 반증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왜 나를 갑자기 모신다는 거냐.'

물론 나로서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봉명인… 때문인가.'

생각해 보면 천운을 가져다준다는 봉명인이 선택한 것이 이 홍범이었다.

어찌 보면 내게 있어 천운이라 할 수 있는 존재가 홍범인 셈이었다.

'단순히 봉명인의 천운으로 만난 인연이기 때문인가….'

지금으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래, 나중에라도 나를 모시게 된, 조금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해 주도록."

"말씀이야 드렸습니다만… 뭐, 나중에라도 그런 이유를 찾으면 말씀드리지요."

"그래, 그럼 오늘은 그 말을 하려고 찾아온 거냐?"

"이것도 있고, 그동안 주인님께서 어디에 계셨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여쭙고자 합니다."

"흠, 조금 길어지겠군. 좋아…."

나는 홍범의 옆에 앉아, 홍범에게 여러 가지를 말해 주었다.

서휼에게 규련과 함께 배신당해 하계로 떨어진 일.

하계에서 어찌어찌 규련의 조각인 규백과 함께 다시 비승한 일.

다시 올라와서 금신천뢰문으로 갔다가 진선을 만났던 일….

치직, 치지직….

나는 한쪽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게 해서, 손이 이렇게 된 거지."

"그럴 수가…."

홍범은 내 손끝.

그리고 펄럭거리는 반대쪽 팔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그랬다.

이미 양손 중 왼손은 완전히 전기로 기화해서 흩어진 상태였고, 오른손도 벌써 손끝부터 시작해 기화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이미 죽어 가고 있었다.

―귀의하라….

아직도 진선의 속닥거림이 귓가를 울린다.

"주인님…!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어쩌겠느냐, 진선의 옥체를 감히 훔쳐본 죗값이지."

"그런…!"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일단 천뢰번을 통해 진선에게 축복이란 것도 받았고, 이 상태는 저주나 다름없지만, 번개에게 침식당하는 동안에는 뇌 속성 친화력이 굉장히 상승한단 말이지."

―귀의하라….

웃기지도 않은 이 속닥거림이 울릴 때마다 내 신체가 번개로 기화해 간다.

두렵고도 무서운 일이었으나, 그래도 신기한 점도 있었다.

―귀의하라….

속닥거림이 멈추고, 신체가 번개로 변이하면, 그와 동시에 나는 그만큼 뇌전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다.

말 그대로였다.

속닥거림을 극복하면, 나는 번개의 속성에 대한 이해도, 그리고 뇌전의 형성 원리.

뇌도공법의 근간, 뇌 속성 법술에 대한 원리 등을 알 수 있었다.

'재밌군.'

속삭임이 곧 지식인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진선의 본체를 목격하여 시한부가 된 대신.

천둥의 깨달음을 얻어 낸 것이었다.

'앞으로 103일….'

그 안에, 부디 내 몸이 전부 먹히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달을 바라보았다.

광대와 공연 (4)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괴군 도착으로부터 50일이 남은 시점이 되었다.

"그럼, 지금까지 세운 계획에 대해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유화와 규백의 앞에서 지금까지 짠 계획과 각자의 입장, 각자가 원하는 것을 정리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유화가 원하는 것은 백녕의 동태 확인과 구출. 그리고 가능하다면 백염족들도 역시 구출해서 나가는 것을 원한다. 맞나?"

"예."

"그리고 규백 님은 서휼과 만나서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맞습니까?"

"그래."

"그렇다면, 우선 서휼을 해룡궁과 혹은 다른 이들로부터 떨어뜨려 그가 혹시라도 다른 이들에게 지원을 받을 가능성 자체를 남겨 두면 안 됩니다. 그렇게 서휼을 해룡궁에서 떨어뜨리면, 유화는 해룡궁에 잠입해 백녕과 백염족을 찾고, 저와 규백님은 서휼을 찾아가는 거지요. 이게 계획의 골자입니다."

그렇다면 계획을 실행할 방법이다.

"일단, 50일 뒤 괴군이 나타나면 서휼은 어떻게 해서라도 최대한 괴군과 먼 곳에서 떨어져 있고 싶어 할 것입니다. 지금 시점에서 괴군은, 솔직히 합체기 대원만 용왕인 흑룡왕 현음이 덤벼들어도 이길 수 있는 존재이니까요."

지난 생.

김연이 괴군의 기묘성채와 괴뢰들을 가지고 흑룡왕 현음을 상대로 조금 밀리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쇄성기 존자의 발이라는 신체 부위 때문이었다.

합체기 최고봉의 전투 경험 많은 흑룡왕 역시 고작 김연이 조종하는 괴뢰들에게 밀렸다.

그렇다면 더더욱 괴뢰술사로서 경험이 많은 괴군에게 조종당하는 괴뢰들이라면, 합체기 대원만 수사가 넷 이상이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서휼이 괴군의 눈에 띄는 순간 서휼은 그 자리에서 [서 대군] 행이라는 소리였다.

서휼도 그 사실은 아주 잘 알고 있을 테고, 그러니만큼 최대한 괴군에게서 떨어져 있으려 할 터.

그리고 서휼이라면 흑룡왕의 처소 역시 괴군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을 것을 잘 알 테니, 흑룡왕뿐이 아닌 다른 무수한 지족들의 합체기 태수들이 모이는 곳에 숨으려 할 터였다.

그리고 운심호 인근에 그런 곳이라면, 단 한 군데밖에 없다.

'봉명주!'

서휼은 봉명주 안으로 숨으려 할 터.

그렇다면 우리는 그 틈을 타 각기 계획을 실행하면 된다.

유화는 해룡궁으로 가 백염족과 백녕의 근황을 알아보고, 나와 규백은 함께 봉명주로 가 서휼을 찾는다.

유화 역시 서휼에게 한 방은 먹이고 싶다고 했으니 아마 백녕을 구하고 나면 우리에게 다시 와서 합류할 터였다.

그렇다면 유화와 함께 서휼에게 그녀의 구현 3단계를 먹인다.

그렇게 하면 서휼은 무조건 다음 경지에 이를 때 유화의 천겁 역시 맞아야 할 터였다.

'그리고 나 역시, 서휼에게 재밌는 걸 보여 주지.'

서휼의 뒤통수를 얼얼하게 후려칠 수 있는 비장의 법술을 준비해 놓았다.

서휼이 아무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곳에 가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서휼을 그런 곳에 던져 놓는가.

'서휼에게 미끼 같은 걸 던져서 서휼이 오게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서휼은 반드시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

아마 봉명주에 숨어들어서도 최소 수십 인 이상의 동급, 혹은 높은 경지의 요수들과 함께 움직일 터였다.

'하지만 서휼은 움직일 수 없어도 다른 이들은 움직이게 할 수 있지.'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유화였다.

그녀는 봉명주 최하층에서 자신의 기척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구현 3단계 심족인 유화의 기척을 알아차린다면, 다른 지족들은 격분하여 그녀를 잡으러 봉명주 최하층으로 향할 터.

유화는 월수궁무록으로 봉명주 최하층에서 기척을 숨기고 잘 빠져나올 터였다.

물론 서휼이라면 뭔가 싸해서 몇몇은 남겨 둘 테지만, 그런 녀석들을 위해서 원유를 준비했다.

원유의 본체였던 원립은 본래 혈음계로 비승하기 위해 준비하던 마도 수사.

한 마디로, 원유가 익힌 혈마진해광과 혈쇄수림결 등의 마공은 혈음계 천마들의 기운과 굉장히 비슷했다.

그 말은 곧 서휼에게 남아 있는 다른 수사들은 혈음계의 천마를 미끼로 보내 버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서휼 역시 원유를 미끼로 한 것에는 따라갈 수 있겠지만, 난 서휼이 움직일 수 없도록 비장의 수를 준비해 두었다.

'이 수를 발동하면 서휼은 무조건 그 자리에 남아야 하겠지.'

그리고 그렇게 서휼이 완전히 혼자가 되었을 때.

유화와 규백, 그리고 내가 서휼을 포위하여 도망칠 틈을 없앤 후.

규백과 서휼이 대화할 틈을 준 다음, 유화와 내가 서휼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 이번 계획이었다.

"…이상이 이번에 저희가 짠 작전입니다. 뭔가 더 추가하거나 제외해야 할 것 같은 부분이 있습니까?"

"큰 틀에서는 더 없군. 이제 세부적인 틀로 들어가서, 어떻게 서휼이 봉명주 몇 층에 숨어들었는지를 알아챌 것이고, 또…."

우리는 그렇게 세세한 틀로 들어가, 계획의 잔가지들을 정리했다.

* * *

파아아앗!

오늘 하루 회의가 끝난 후.

나는 동부로 돌아와, 김연이 몸부림치지 못하게 그녀를 잠시 묶어 놓은 후 의해은산을 사용했다.

츠아아앗!

은하빛 검이 그녀에게 날아가는 듯하더니 그녀의 심상 안으로 들어갔다.

내 원영을 담은 일격은 그녀의 정신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안쪽을 여행했다.

그리고, 그녀의 안쪽을 드나들며 점차 내 부름으로 그녀를 깨워 나가는 것이 목표였다.

의해은산이 효과가 없지는 않았는지, 연이의 점차 흐리멍덩했던 눈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점차 상태가 나아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어쩌면 거행일이 다가오기 전에 그녀와 재회할 수 있을 듯했다.

'부디, 이번 생이 끝나기 전에 너와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구나.'

나는 어느새 팔꿈치까지 사라진 오른팔을 보며 속으로 옅게 한숨을 쉬었다.

이 기세라면 거행일 당시에는 팔다리가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죽을 날이 가까워지는군.'

나는 의해은산을 쓰고 지친 몸을 이끌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 * *

위이이잉―

한 무리의 자그마한 파리 괴뢰들이 허공을 날고 있었다.

말 그대로 손톱만 한 파리 형태의 서 장군들이었다.

나는 서 장군들을 작게 양산하여, 봉명주 곳곳으로 날려 보냈다.

봉명주는 넓으니만큼, 미리 이렇게 괴뢰로 하여금 감시망을 뿌려 놓는다면, 계획을 실행할 때 서휼이 어디로 움직이는지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소형 양산형 서 장군들은 봉명주 곳곳에 퍼져 나갔다.

* * *

점차 거행일이 다가왔다.

규백은 거행일이 다가올수록 표정이 복잡해졌고, 유화는 더욱더 금을 뜯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는 거행일까지 매일매일 연이에게 의해은산을 사용해서 그녀의 의식을 수면 위로 올라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홍범은, 나에게 도움이 될 무언가를 만들겠답시고 곳곳의 약초와 영초, 독초들을 뜯어 와 뭔가를 계속 배합하고 있었다.

이제 소형 서장군들은 봉명주 곳곳에 흩어져, 봉명주 안의 구조물들 중 많은 구조물에 안착했다.

이대로라면 그것들은 나의 충실한 눈과 귀가 되어 서휼이 어디로 도망치든 나를 안내해 줄 터였다.

위이이이잉―

나는 소형 서 장군들을 움직여 봉명주를 조사하며, 혹시라도 서휼에게 도움이 되거나, 혹은 반대로 해가 될 지형이 있는지를 조사했다.

그리고 소형 서 장군들로 지족들의 소문을 염탐하며 정보를 얻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째.

위이이이잉―

소형 서장군을 조종하던 나는, 봉명주 곳곳에 '숨겨진 공간'이 있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어 알아챘다.

'숨겨진 공간이라….'

그런 게 있다면 서휼이 숨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내가 빠르게 알아내는 게 좋겠어.'

나는 숨겨진 공간이 있다고 의심되는 봉명주의 장소 곳곳에 소형 서 장군들을 통해, 원격으로 괴군의 회로를 깔기 시작했다.

회로가 깔리며, 숨겨진 공간이 있는 곳에서는 회로가 지나갈 자리가 없어 회로의 연결이 막혔으며.

공간이 없는 곳에서는 회로가 지나갈 자리가 많아 순조롭게 괴군의 회로가 깔려 갔다.

그렇게 나는 약 봉명주 각 층마다 약 2만 개가 넘는 숨겨진 공간들을 발견했다.

'기가 차는군.'

다행히 내게 소형 서장군들이 있어서 망정이지.

만약 내가 아무런 능력이 없어서 서 장군들을 만들 수 없었다면 약 12만 개나 되는 무지막지한 숨겨진 공간들을 찾아다니며 고생을 해야 했을 테였다.

소형 서장군들로 한꺼번에 모든 공간을 알아낼 순 없었지만, 나는 순차적으로 조금씩 공간 안쪽으로 소형 서장군들을 들여보내 숨겨진 공간들을 파악했다.

그리고, 각자가 노력하는 사이 점차 거행일이 다가왔다.

* * *

"주인님, 이걸 받으십시오."

"음?"

나는 홍범이 건네는 것을 받았다.

"이게 뭐지?"

홍범이 건낸 것은, 옥색 병에 담긴 푸른빛 액체 같은 것이었다.

나는 액체의 향을 슬쩍 맡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독이군."

"예, 독초로 만든 것이니까요."

"무슨 독이지?"

"고통을 증폭시키는 독입니다. 단순히 신경에만 듣는 게 아닌, 독에 담긴 영력이 혼(魂)을 자극해서 의식에도 고통이 듣는 독이지요. 한 방울당, 고통의 감도만 짧은 시간 동안 6만 배 이상 증폭시켜 줍니다. 이 독을 만들기 위해 제 재능을 총동원했습니다."

"…그렇군. 내가 쓰라고 만든 거냐?"

"예. 어떤 이들도 이 독이 한 방울이라도 피부에 닿으면 정신이 나갈 정도로,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독입니다."

"하지만 살상력은?"

"살상력은 거의 없습니다. 오로지 고통을 주기 위해 만든 독이니까요."

"그래, 좋군. 내게 큰 도움이 되겠어."

나는 이 독이야말로 홍범이 지난번 우리 작전을 듣고, 내가 숨겨 둔 서휼을 상대할 방안을 유추해서 만든 답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 독만 있으면, 서휼도 순간 혼이 나갈 터다….'

나는 홍범이 배합한 독을 품속에 소중히 넣어 두었다.

이 독은 필요할 때에 요긴하게 쓰일 터였다.

그리고, 그렇게 괴군이 도착하여 거사를 치르기 하루 전날이 되었다.

파츠츳….

나는 이제 양팔이 전기가 되어 기화했고, 하반신도 사라졌다.

아마 곧 있으면 전신이 기화되어 죽을 것이리라.

물론 답천의 무형검이 내 팔다리를 대신하여 옷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기에 겉보기에는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이제 하루.'

드디어 내일.

서휼을 향한 나의 사소한 반격이 시작된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위이이잉―

"…잠깐."

양산형 소형 서 장군을 통해 봉명주의 숨겨진 공간 곳곳을 확인하던 나는, 한 곳의 숨겨진 공간에서 소형 서 장군을 멈춰 세우고, 공간 안쪽을 비추게 하였다.

"…잠깐, 잠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 장군의 눈에 달린 시야 법술이 내게 전해지며, 숨겨진 공간 안쪽을 비추었다.

나는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황급히 일단 봉명주로 날아갔다.

얼굴이 들킬 수 있었기에, 혈체피갑을 뒤집어쓰고 원유 특유의 얼굴을 주물러 바꾸는 법술로 얼굴을 잔뜩 바꿔 놓은 후, 나는 빠르게 소형 서 장군이 찾아낸 공간으로 갔다.

그곳은 봉명주 7층.

봉명주의 갑판 바로 아래층이자, 생명층.

진룡맹 전체의 행정을 담당하는 층이었다.

그리고 나는 용족의 기운을 드러낸 채, 다른 이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게 피부에 비늘까지 덮은 후 그곳으로 날아갔다.

타악!

그곳은 익숙한 곳이었다.

봉명주 7층.

내가, 회귀하고 난 후 서휼과 처음 온 봉명주의 장소.

내가 서휼의 눈을 피해 시장을 둘러보았던, 그 날의 그 행정 건물 앞.

"그랬군…."

나는 행정 건물 앞에 서서, 저 안쪽에 느껴지는 숨겨진 공간을 느끼며 헛웃음을 흘렸다.

오혜서는, 저 안쪽에 있다.

내가 진룡맹에 온 첫날.

내가 시장에 가서 요족들의 시장을 구경하고 온 사이, 서휼은 행정 구역에서 업무를 보는 척하며 오혜서를 봉명주 안쪽, 생명층의 숨겨진 공간에 숨겨 두었던 것이었다.

"이러니 해룡궁을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었지…."

나는, 오혜서가 어떻게 살아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행정 구역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광대와 공연 (5)

저벅, 저벅….

내가 행정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내가 용족인 것을 알아본 몇몇 지족들이 허리를 숙이며 다가왔다.

"용족 어르신께서 찾으시는 게 있으신지요?"

"비켜라, 내 알아서 찾겠다."

"예, 예…."

나는 흑룡족의 모습을 하고 최대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오기 힘든 분위기를 만들었다.

내 분위기를 읽은 지족들은 허리를 숙이며 멀리 가 버렸다.

'어디 보자….'

나는 행정 건물 안쪽.

13개 대형 종족의 각 상징이 걸려 있는 복도로 걸어갔다.

이 복도를 넘어서면 13개 대형 종족만을 위한 행정 업무반이 따로 있었다.

복도에는 갈림길이 있었고, 나는 용족 표시가 된 갈림길로 들어갔다.

이 너머로는 용족만 들어올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나는 흑룡진혈을 더욱 활성화시키며 용족 중에서도 음(陰) 계열 신통을 다루는 용족의 표시가 그려진 갈림길로 향했다.

'여기서부터는 흑룡족, 혹은 해룡족이나 수룡족 등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소형 서 장군이 발견한 공간은 바로 이곳.

나는 복도를 걷던 중, 석재 복도에 음각된 흑룡 표시 중 하나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흑룡 진혈의 힘을 불어넣자, 갑자기 흑룡 표시로 손이 쑤욱 들어가졌다.

'역시….'

벽 형상을 하고 있는 결계였다.

나는 결계를 관통해 숨겨진 공간에 입장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

저벅, 저벅, 저벅….

얼마간 숨겨진 공간으로 향하는 통로를 걸었을까.

저 아래로 아래로 계단을 내려간 나는, 썩 넓은 공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간의 왜곡률을 보니 역시 압축 공간인 듯, 상당히 넓은 부지가 나왔다.

파아앗!

그리고 천장에 박힌 영석이 마치 태양광같은 빛을 내고 있어, 대낮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규련의 목화 농장 급의 크기로군….'

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부지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부지에는 천장에서 뿜어지는 광량을 이용해, 잔디가 자라나 초원을 이루고 있었다.

초원 곳곳에는 시원한 계곡이 흐르고 있었고, 좋은 향기가 나는 나무들이 자라나 있었다.

그리고, 초원의 중심.

그곳에는 커다란 장원이 있었다.

장원 안쪽으로는 멋스럽게 기와로 지붕을 쌓은 저택이 여러 채 있었고, 그 안쪽에서는 한 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장원을 향해 다가갔다.

주변에는 기이하게도 결계나 금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 그렇군.'

나는 장원에 가까이 다가가며 알 수 있었다.

장원에 다가갈수록.

정확히는 장원 안에 인기척을 내는 이에게 다가갈수록, 음양의 흐름이 제멋대로 흐른다.

천지영기가 마구 회전하며 뒤엉켰기에, 금제고 결계고 설치하지 '못한' 것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내가 장원의 앞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탁탁탁탁―

장원 안쪽에서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장원의 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튀어나왔다.

"서휼 님, 오셨나요?"

오혜서였다.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나는 정말로 오랜만에 만난 옛 동료를 향해 딱딱하게 인사했다.

"서휼 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아, 서휼 님께서요? 이리 들어오세요."

오혜서는 서휼이라는 말에 활짝 웃으며 나를 장원 안으로 들였고, 나는 그녀를 따라 장원 안 저택으로 들어갔다.

"부인, 서휼 님께서 보내신 손님 오셨어요!"

"예, 아가씨. 준비하겠습니다."

"음?"

그리고, 나는 저택에서 오혜서를 맞이하는 중년의 부인과 저택 곳곳에서 일하는 인부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런 금제도 결계도 없는데, 바깥에서는 분명 인기척이 오혜서 한 명의 것이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오니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곧바로 이들의 정체를 알아채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강시로군.'

전부 다 사람의 살 내음이 나는 강시들이었다.

즉, 진짜 사람의 시체로 만든 강시들인 셈이었다.

'소름 돋는 저택이군.'

나는 깨끗하게 관리되는 저택의 이면을 보며 헛숨을 들이켰다.

중년의 부인은 상냥하게 웃으며 나를 안채로 안내했다.

얼마 후 안채에서, 나는 오혜서와 대면할 수 있었다.

"서휼 님이 무슨 얘기를 해 주셨나요? 평소라면 직접 오셔서 얘기하시는데…."

"…서휼 님께선, 혜서 님이 잘 지내시는지 확인하고 오라 하셨습니다."

"어머, 정말인가요?"

"예."

"흐음…."

'…? 뭐지?'

나는 오혜서의 의념을 읽으며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계속 그녀에게 질문을 이어 나갔다.

"최근 생활에 불편함은 없으십니까?"

"없어요. 서휼 님께서 전부 다 챙겨 주시는걸요?"

'거짓말이군.'

"몸이 편찮으시거나, 혹은 건강에 대해서 염려되는 부분이 계십니까?"

"전혀 없어요. 완전 멀쩡해요."

'거짓말이다.'

"정신적으로 뭔가 힘들지는 않으시지요?"

"후후, 서휼 님도 참. 서휼 님이 계신데 뭐가 힘들겠어요."

'또 거짓말이다.'

나는 속으로 침음성을 흘리며 물었다.

"혹여나 바깥으로 나가거나 하고 싶으시지는 않으신지요?"

"바깥이요? 에이, 서휼 님께 못 들으셨어요? 서휼 님하고 며칠에 한 번씩은 단둘이 봉명주 거리를 거니는데 정말 좋거든요. 바깥으로 이미 나다니고 있어서 뭐…."

'이건 거짓말은 아니다. 하지만 뭔가가 조금 더 있는데….'

내가 생각을 정리할 때였다.

"그나저나, 서휼 님은 매일 제 호풍성혈변 공법 수준을 확인해 주셨는데 그쪽은 확인해 주시지 않으시는 건가요?"

"호풍성혈변 말씀입니까…."

"공법 수준 좀 잠시 확인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예, 그럼 일단 나가서…."

"에잇!"

그러나 그녀는 좁은 방 안에서 수결을 맺더니 영기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기이이잉―

방 안에 있는 천지영기가 오혜서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흠칫 놀랐다.

나 역시 호풍성혈변 공법은 알고 있다.

그러나, 호풍성혈변에 이런 기능 따위는 없었다.

내가 흠칫 놀랄 때였다.

여태껏 살짝은 익살스럽고, 살짝은 행복에 절은,

한참 밝은 얼굴을 유지하고 있던 오혜서가 삽시간에 얼굴을 뒤바꾸며 나를 노려보았다.

싸아아―

방안이 조용해진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 누구죠."

"…."

"서휼이 보낸 사람 맞나요? 서휼이 보냈다면 나와 그가 주기적으로 산책을 다닌다는 걸 모를 리가 없는데?"

"…."

'어떻게 할까.'

흑룡 진혈과 원유의 얼굴로 만들어낸 가짜 신분을 벗고 말할까?

하지만 위험했다.

만약 오혜서가 서휼에게 세뇌라도 된 상태라면, 내가 왔다는 것을 서휼에게 즉시 고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리고, 내가 이것저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나를 관찰하던 그녀가, 갑자기 경악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을 쳤다.

"아…!"

"…?"

오혜서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뭐지? 뭔가에 화들짝 놀랐다. 나를 보고 뭔가를 알아챈 의념이다. 뭘 생각한 거지? 혹시 저택의 사용인들을 부르려는 건가?'

그러나, 이어진 그녀의 말은 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서은…현?"

"…!!!"

나는 무표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화들짝 놀라 오혜서를 바라보았다.

"서은현! 맞지? 그 얼굴 기억나! 시간 감각이 말도 안 되게 이상해져서, 몇십 년 전에 본 얼굴이었는데, 서은현!"

나를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노려보던 오혜서의 표정에서 의심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러나 나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뭐지? 내가 서은현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아하하, 정말, 오랜만에 동향 사람을 만나니까 너무 반갑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서 대리님이라고 불렀던 거 같은데. 글쎄, 너무 오랜만에 네 얼굴을 보니까 그냥 이름이 나오는 거 있지? 후후…."

나는 오혜서의 앞에서 한동안 얼어 있다가, 굳은 표정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얼마 후, 얼굴에 씌여진 혈체피갑이 벗겨지며 내 원래 얼굴이 드러났다.

"…오랜만이군."

"그래, 정말… 정말로 오랜만이야."

우리는 잠시 서로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 오혜서가 내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아? 얼굴까지 바꿨는데."

"음?"

"내 능력인데 말이야…."

"잠깐, 말하지 마라!"

"음?"

나는 오혜서가 함부로 그녀의 능력을 발설하기 전에 막았다.

"…혹시, 누군가한테 네가 얻은 능력을 말한 적 있나?"

"음, 없어. 처음에는 서휼한테 말하려 했다가 생각을 고쳐먹었지 뭐야. 아, 그나저나, 넌 왜 얼굴을 그렇게 하고 들어온 거야?"

그녀의 물음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서휼하고 안 친해서 말이지."

"아하, 그렇구나."

오혜서는 꺄르르 웃으며 말했다.

"나도 사실 서휼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혹시 눈치챘는지 모르겠는데, 이 저택 사용인들, 사람으로 보여?"

'음?'

오혜서는 엄청난 비밀을 말하는 듯이 소곤거리며 말했다.

"저거, 다 시체들이야. 그리고 항상 나를 감시하고 있어. 그리고 서휼이 오면 나를 관찰했던 걸 서휼한테 그대로 일러바쳐."

"…."

"그리고 서휼도 있지, 처음엔 굉장히 좋은 사람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있지. 나한테 어느 순간 최면? 세뇌? 그런 걸 걸기 시작하더라고. 그때부터 알았어. 서휼이 미친놈인걸."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오혜서는 예상외로 서휼에 대한 것을 전부 꿰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 능력을 깨우치기 전에는 정말, 멋지고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얼마 전에 원영기에 이르면서 능력을 다루는 법을 어느 정도 몸에 익히니까, 서휼에 대한 환상이 전부 박살 나 버렸어. 서휼이 나한테 걸어 놨던 세뇌들도 함께 말이야."

그녀는 얼마간 내게 한참 수다를 떨었다.

나는 쉴 새 없이 수다를 떠는 그녀를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회사에서 종달새라는 별명을 달고 다니며, 회사원들 사이에서 가장 동경받았던 여직원, 오혜서.

그녀는 서휼에게 잡혀 있음에도, 내가 알던 그때의 그녀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여전히 밝았다.

"오혜서, 원한다면 데리고 나가 줄까?"

나는 오혜서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 말에 얼마간 침묵하더니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니, 괜찮아."

"…?"

"내 능력 말이지, 극한으로 갈고닦으면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우리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 세계에 떨어지게 되었는지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게 여기 남는 거랑 무슨 상관이지?"

"상관있어. 내 능력을 갈고닦기 가장 좋은 상대가 서휼이거든."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서휼에 대해서 알아보자고 생각해서 내 능력으로 그를 알아봤어. 그리고, 나는 '서휼'의 이야기를 역순으로 짚어 가며 알아가는 중이야. 서휼은, 정말로 많은 일을 벌였더라고. 그래서인지 그와 인과관계가 많은 이들이 엄청나게 많아서, 내 능력이 극한으로 단련돼. 그리고 또 그러다 보니, 서휼 자체에 대한 흥미도 생겨서 최근에는 서휼이 왜 저런 인간이 되었나 알아보려고 하는 중이야."

"엄밀히 말하면 서휼이 인간은 아니지."

"어머, 생각해 보니 그러네."

오혜서의 능력은 도대체 뭘 하는 능력인 걸까.

마치 앉은 자리에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분명 선수 혈통 관련한 능력이 아니었었나?'

그런데 어째서 전지(全知)와도 같은 능력으로 변화한 것일까?

문득,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가 내 회귀에 대해서도 알아차릴지 궁금했다.

"나도 읽고 있는 건가?"

"맞아. 읽고 있어.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렵지 않았는데 너는 좀 어려워. 책장의 무게가 굉장히 무거운 느낌이랄까…. 그리고 또 뿌연 안개 같은 것들도 있고… 그런 것들 때문에 잘 읽기 힘드네."

"흠…."

나는 그녀와 얼마간 대화를 나누고 피식 웃었다.

"그래서, 너는 서휼 곁에 계속 있겠다는 거지?"

"응."

"…그래. 조심해. 너도 알겠지만, 숨 쉬는 것처럼 수작을 부리는 데에 능한 존재야."

"그렇긴 하더라고."

"…무사한 걸 봤으니, 난 갈게."

"조금 섭섭하네. 서휼은 어차피 며칠은 여기 안 오는데 자고 가지 그래? 사용인들 눈 때문이라면 내가 힘을 쓰면 어떻게든 할 수 있긴 해."

"아니, 미안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왔다.

처음이었다.

이 세계에 온 뒤로 처음으로 가슴이 조금 가벼워졌다.

오혜서는 서휼에게 10할의 확률로 이용당하거나 세뇌당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앉은 자리에서 전지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주며 상대를 '읽어 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오혜서는 서휼에게 쉽게 당할 것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초반에는 조금 당했을지 몰라도, 점차 능력을 깨우치며 도리어 서휼의 수를 읽어 내고 있다.'

어쩌면, 그녀는 내 동료들 중 가장 걱정할 필요가 없는 동료였는지도 몰랐다.

내가 장원을 나갈 때였다.

우우우웅!

뒤쪽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며, 저택의 강시들에게 닿았다.

그러자 강시들은 눈이 희미하게 풀려 그 자리에 멈춰섰다.

오혜서의 목소리가 울렸다.

"선수 유리공작의 힘이야. 격하의 존재가 빛에 닿으면 잠시 바보가 되거든. 강시들도 네가 오늘 왔던 건 잊어버릴 거야. 그럼 잘 가."

"…그래, 너도 잘 있어라."

나는 홀가분하게 오혜서를 등지고 숨겨진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치직, 치지직….

내 육신은 이미 이제 거의 기화되었다.

하지만, 생의 마지막에서 목표했던 것 중 하나는 이룰 수 있었다.

'정말….'

살아 있기를 잘 했다.

나는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이번 생의 마지막 공연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하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찌릿, 찌릿….

내 기묘성심전에, 아득하게 먼 곳에서 기묘성채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괴군 조연이, 진룡맹 영역에 발을 들였다.

광대와 공연 (6)

휘이이이이―

거대한 협곡 위.

그곳으로 기묘한 성채가 날아들어 왔다.

그 성채 안쪽에서는 끊이없이 도르레가 돌아가고 뭔가가 계속해서 철컥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와, 듣는 이로부터 하여금 기묘하다는 생각을 들게 하였다.

철컥철컥철컥철컥….

그러나, 계속해서 허공에 떠서 앞으로 나아가던 성채는 어느 순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쿠구구구구―

저 멀리, 새하얀 산맥들이 있는 곳에 희미한 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지족 진룡맹 영역.

그 안쪽이었다.

우우우웅―

더군다나 결계 안쪽에서는, 기묘한 성채를 보고서 합체기 태수 셋이 나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요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네놈이 최근 사방에 악명이 자자한 괴군이구나!]

태호족의 요왕이 으르렁거리며 요기를 잔뜩 곤두세운 채 기묘성채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본 진룡맹 영역에 무슨 일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네놈이라도 진룡맹 영역에 들어오고자 한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거다! 썩 돌아가기를 강력하게 권고하는….]

그리고.

철컥, 철컥, 철컥!

기묘성채의 안쪽에서, 무수한 포신(砲身)들이 튀어나와 포구를 결계 방향으로 겨누었다.

위이이잉!

벌떼 울리는 소리와 함께, 기묘성채 안쪽에서 무수한 벌 괴뢰들이 튀어나와, 대포 안쪽으로 포탄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포탄은 사축기 급 장군 괴뢰였다.

펄럭, 펄럭!

기수 괴뢰들이 깃발을 펄럭여 신호를 보내자, 포수 괴뢰들은 대포를 격발시켰다.

콰앙, 콰앙, 콰앙!

합체기 요왕들의 설득은 듣지도 않은 채, 괴군의 기묘성채는 장군 괴뢰들을 결계를 향해 쏘아 내 버렸다.

쩌어어엉!

장군 괴뢰들은 결계까지 날아간 채, 그대로 머리부터 결계에 틀어박혀 결계에 균열을 내 버렸다.

하지만 합체기 요왕들은 피식피식 웃으며 결계에 힘을 불어넣을 뿐이었다.

[하, 아무리 괴군, 네놈의 악명이 높다 한들 본 진룡맹의 결계는, 개열기 시조님의 몸체에서 힘을 빌려오는 결계로….]

그와 동시에 장군 괴뢰들의 전신에서 광선이 사방으로 튀겨나가며 결계의 한쪽에 무수한 회로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쩍!

끼이이이익!

마치 전염이라도 되듯이 결계의 한쪽 귀퉁이에 회로가 퍼져 나갔고, 얼마 후 결계는 그대로 시원하게 열려 버렸다.

[….]

그 모습을 본 합체기 요왕들은 할 말을 잃고 잠시 허공에 떠 있다, 모두 황급히 본체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저 미치광이 인족을 막아 세워라!]

[아무리 제 놈이라도 비승한 지 100년은 간신히 됐을 애송이 주제에 합체기 요왕 셋이 지키는 관문을 통과할 수 있을 리는 없다!]

그러나, 기묘성채의 문이 열렸다.

끼이이이익!

철컹!

그와 함께, 기묘성채의 안쪽에서는 어마무시한 괴뢰들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부우우우우웅!

수십억, 아니, 수백억은 될 정도의 괴뢰들이 미친 듯이 터져 나오며, 천지사방이 괴뢰들로 인해 새까맣게 물들었다.

그 중에는 사축기 급 괴뢰들 역시 어마무시하게 많았다.

요왕들은 사축기 장군 괴뢰들의 기세를 느끼며 긴장했으나 자신감을 잃지는 않았다.

[괘, 괜찮다. 아무리 사축기가 많아도 합체기 요왕 셋이 모였는데….]

그리고, 어느 순간 기묘성채에서는 합체기 괴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쿠우우우웅!

어마어마한 기세와 함께, 안쪽에서는 28기의 합체기 수준의 기세들이 나타났다.

그 기세에, 합체기 요왕 셋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각자 산개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합체기 급 괴뢰들은 한 명에게 9기씩 붙어서 요왕들을 추적하기 시작했고,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최강의 괴뢰이자, 마지막 합체기 괴뢰.

[그녀]는 다시 기묘성채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기묘성채의 최심부, 기묘성채의 조종실로 들어가, 안쪽의 옥좌 밑에서 손가락을 빨고 있는 한 곱사등이 노인에게 걸어갔다.

곱사등이에게 걸어간 [그녀]는 꼽추 노인을 공주님처럼 안아 든 후, 자신이 옥좌에 앉았다.

[그녀]의 품에 다소곳이 안긴 채 손가락을 빨던 꼽추.

괴군 조연은 눈알을 이리저리 번들거리며 [그녀]를 조작해 옥좌 위에서 기묘성채를 지휘해, 앞으로 나아가게 조작했다.

"아아… 드디어, 내 생전에 서휼의 혼례식에 가 보게 되다니. 서휼 녀석, 그동안 몇 명의 여인과 혼인했음에도 여태껏 나를 초대하지 않았겠다!? 그럴 순 없지, 이건 분명 잘못된 일이었어. 내가 바로잡아 주마. 바로잡아 주겠어. 서휼도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야. 혼례와 함께, 가장 아름다운 순간과 함께 새로운 존재로 진화시켜 주는 거야!"

서휼을 혼인의 순간 박제해서 영원히 길이 남을 작품으로 만들 생각에, 괴군은 그의 모든 재능을 총동원해서 합체기 태수들을 닥치는 대로 습격하고 잡아들여 괴뢰로 만들 어댔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이번에 만들어낸 27기의 합체기 급 괴뢰들.

서휼을 사랑의 순간에 박제할 생각에 흥분하여, 괴군의 광기는 최고조로 치달았고, 그의 악마적인 재능 역시 최고조에 도달했다.

이것이 그 결과물,

비록 급조해 낸 합체기 괴뢰들인지라, 유지력도, 그 강함도 진짜 합체기 태수들에 비하면 한참은 부실하다.

하지만 27기나 된다면 진형만 잘 짜도 합체기 태수 10명은 상대할 수 있다.

괴군은 희망에 찬 채, 서휼을 진화시켜 줄 생각에 감격과 흥분의 눈물을 찔끔 흘리며 기묘성채에 명령했다.

"전진해! 전진해라! 서휼에게로! 서휼에게로! 서휼의 혼례식에 늦으면 아니 되지 않으냐! 내 앞에 서휼을 데려와라! 서휼을! 서휼을! 서휼을 잡아서 진화시켜 줄 테다! 서휼을! 서휼을서휼을서휼을서휼을서휼을서은현도서휼을서휼을서휼을서휼을서휼을반드시잡아서아름다운순간에영원히머무르게진화시켜줄것이야…!!!"

눈이 회까닥 뒤집힌 채.

괴군과 기묘성채는 진룡맹 본부, 봉명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느껴진다.

괴군의 기묘성채가 진룡맹 영역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 속도는, 명백한 합체기 태수 급의 이동 속도였다.

'기묘성채가 합체기 급으로 진화했다.'

단순히 서휼을 개조시킨다는 일념이 아니다.

서휼의 혼인식에 참석해서, 서휼이 혼인하는 순간을 반드시 본인의 손으로 박제하겠다는 집념이 만들어 낸 결과물.

'저 속도면 아마 두 시진 후에는 봉명주에 도착할 터.'

그리고 그 소식은 그 이전에 이미 이쪽으로 도착해 진룡맹의 모두에게 알려질 것이었다.

조금 있으면 계획이 실행에 들어갈 때였다.

그러나, 나는 왠지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혜서를 만나고부터다.'

오혜서를 만난 이후부터, 무언가 기이한 기분이 정신을 지배하는 느낌이었다.

왜인지 기묘한 부조화가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부조화가 무엇인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대체 이건 또 무슨….'

나는 이를 악물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눌렀다.

'설마 오혜서도 모르는 사이에 서휼이 그녀에게 함정이라도 심어 둔 건가?'

가장 합리적인 의심은, 일단 서휼이 오혜서를 통해, 그녀도 모르게 내게 함정을 발동시켰다는 것이었다.

나는 통증의 원인을 짚어 나가며 생각을 했다.

'일단 영기의 흐름이 어딘가와 교신하고 있지는 않아. 서휼은 현재 내게 실시간으로 뭔가를 시도하는 건 아니야. 오히려 저주 같은 쪽인가? 오혜서를 자신 외에 누군가가 만나면 바로 걸리는 저주?'

하지만 초일류의 저주술사인 내가 보건대, 저주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저주는 아니야. 그렇다면 뭔가가 있다는 말인데….'

도대체 이 부조화는 뭘까.

나는 지끈거리는 뇌리를 억누르며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시간이 없다. 조금 있으면 괴군이 서휼을 찾아 봉명주 쪽에 들이닥칠 거야. 그렇다면….'

철컹!

나는 일단 부조화가 느껴지는 의식 부분을 잠시 오행혈주번을 사용해서 봉인해 버렸다.

거기에 음혼귀주문까지 잔뜩 끼워넣어 봉인을 변형시켰기 때문에, 설령 서휼이 오행혈주번을 통해 뭔가를 또 하려 한다 해도 소용 없을 터였다.

'좋아, 이제 수작을 부린다 해도 소용없어.'

느껴지는 영력 흐름이 없는 걸로 보아서, 서휼이 나를 감시한다거나, 내가 돌아온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나는 이제 계획을 실행하면 될 뿐이다.

츠츠츳!

나는 마지막으로 김연에게 가 의해은산을 사용했다.

파아아앗!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의 의식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에 비해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으, 음…."

그 퀭했던 초반의 눈빛에 비해, 지금의 그녀의 눈빛은 상당히 맑아져 있었다.

이대로 두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적으로 다시 의식을 되찾으리라.

홍범에게 말해두었으니, 내가 죽어도 홍범이 그녀를 돌볼 터였다.

"그럼, 잘 있어."

나는 아직도 조금은 멍한 눈을 한 김연의 뺨을 쓰다듬고 뒤를 돌았다.

"아, 아아…."

그때였다.

"…?"

츠츠츳….

김연에게서 뿜어져 나온 기묘성심전이, 그녀의 의식 실 한 가닥이 내게 달라붙었다.

어쩐지, 내가 곧 멀리 갈 것을 알고서,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

나를 잡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애처롭게 내게 붙어있는 김연의 의식 한 가닥을 본 나는, 구태여 그 의식을 떼어 내지 않고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우우우우웅!

천지영기가 진동한다.

사방에서 합체기 태수들의 기운이 들끓는다.

[비상! 비상! 괴군이 쳐들어왔다!]

[괴군이 봉명주로 온다!]

[저 미치광이를 막아! 막으란 말이다!]

이제 괴군이 침입해 왔다는 사실이 전 지족에 널리 울려 퍼진 상황.

나는 전음부를 사용해 유화에게 전음을 날린 후, 월수궁무록을 사용한 채 봉명주로 날아갔다.

그리고, 저 하늘 위.

쿠구구구구!

그곳에서, 한 마리의 푸른 용이 재빠르게 봉명주로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서휼이, 괴군이 온다는 소식에 봉명주로 대피하는 것이었다.

서휼의 주변으로는 수많은 사축기 수준의 요족들이 그를 따라서 봉명주로 날아가고 있었다.

'역시나, 수많은 자신의 지지자들과 함께 대피하는군.'

봉명주는 유사시에는 최하층에서 하계로 내려갈 수도 있으니, 정말로 최고의 대피 장소이자 탈출로였다.

'물론 하계로 도망치게 둘 생각은 없다.'

서휼은, 절대로 우리 앞에서 도망칠 수 없다.

나는 봉명주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던 규백을 데리고 봉명주를 향해 올라갔다.

* * *

봉명주 안쪽에는 서은현이 미리 깔아 놓은 수천 기의 초소형 서 장군들이 있었다.

서 장군들은 서휼이 어디에서 들어와 어디로 향하는지를 관찰했고, 실시간으로 서은현과 교신하며 서휼의 위치를 고했다.

서휼은 현재 봉명주 4층의 대피 공간 중 한 곳에 도착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대피 공간에 있던 이들 중 수많은 요족들은 서휼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서휼 님, 괴군 조연과 같은 하계에서 비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도대체 그 자가 얼마나 강하기에 서휼 님께서 도망 오신 겁니까?"

"그 자가 정말로 그 악명만큼이나 위험한 자입니까?"

"너무 걱정이 많으신 게 아니신지…."

그러나, 그들의 말에 서휼은 안심이 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괴군은 분명 위험한 자가 맞습니다. 절대로 경시하면 아니 되지요. 하나, 이곳은 지족 진룡맹 최고수들이 모여 있는 봉명주. 너무 긴장하실 것도 없으십니다. 합체기 요왕님들께서 전부 모이셔서 괴군을 처리할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고 그냥 모든 분들이 함께 모이는 몇 안 되는 기회라고 생각하지요."

"이런 위기도 기회라 하시다니, 역시 서휼 님은 비범하신 생각을 가지고 계시군요."

"별말씀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담소를 나누던 그들은, 문득 흠칫 놀라 한쪽을 바라보았다.

서휼 역시 갑자기 세로로 찢어진 동공을 어딘가를 향해 노려보며 눈을 흘겼다.

"이, 이건…."

"혈음계 마공의 기운이 아닌가!?"

요족들의 표정에 경악의 기운이 서렸다.

"봉명주에 혈음계 마족이 침입한 게 분명하오!"

"내 당장 본때를 보여 주겠소!"

요족들은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진한 혈음계의 탁기를 느끼며 이를 갈았다.

한 요족이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일단, 우리 전부가 그곳으로 가는 건 위험하니 저희 중 몇몇만 꾸려서 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음, 그것도 좋지. 느껴지는 기운도 잘 쳐 줘야 천인기 정도이니…."

이곳에 모인 이들은 서휼을 필두로 대다수가 사축기 수사들.

아무리 혈음계 천마의 힘이라도 딱히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서휼이 싱긋 웃으면서 좌중을 향해 외쳤다.

"안 됩니다, 여러분."

그 말에, 수많은 사축기 요족이 이해가 안 된다는 눈으로 서휼을 바라보았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서휼 님?"

그리고 서휼은 친절한 얼굴로 설명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무릇 맹수란 사냥감이 얼마나 크든 작든 사냥할 때 전력을 다해야 하는 법'입니다. 대다수의 요족들은 이 격언을 알고 계실 겁니다. 아무리 천인기 급 혈음계 마족이라고 해도 방심해서는 아니 되지요."

서휼의 말에 수많은 사축기 요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나 혈음계 천마가 이곳에 왔다면, 혈음계와 이어지는 차원문을 봉명주 안에 열었다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게 된다면 천마가 혈음계의 존자를 부를 수 있으니 조심, 또 조심이야말로 상책입니다."

"과연 그렇군요. 저희가 경솔했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너무 과민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일단 정말로 천인기 급 마족밖에 아니 되더라도, 산책 삼아 전부 같이 가 보도록 하지요."

서휼은 빙긋 웃으며 무수한 요족들의 중심에서 그들을 이끌고 함께 탁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몸을 띄웠다.

그리고.

우뚝!

문득, 서휼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 서휼 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서휼이 그 자리에 멈춰서자, 요족들이 의아한 듯이 서휼에게 물었다.

그러자 서휼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아, 생각해 보니 제가 이 근처에서 지난번에 놓고 갔던 물품이 있어서 말이지요. 금방 챙겨서 합류할 테니, 여러분들은 먼저 가 주시기 바랍니다."

"도와드릴 일은 없으십니까?"

"마음은 고마우나 괜찮습니다. 모두 먼저 가 주시지요."

"예, 뭐. 알겠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요족들이 혈음계의 탁기가 느껴지는 곳.

서은현이 원유를 통해 마기를 흩뿌리는 장소로 전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서휼만이 남게 되었다.

서휼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 후.

치이이이이―

서휼의 전신에서 시꺼먼 저주문들이 뿜어져 나오며, 서휼의 전신을 결박하고 있는 것이 드러났다.

서휼은 빙긋 웃으며 한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서 도우. 그간 강녕하신 걸 보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 * *

서휼이 내게 준 피를 먹어 연화시켜, 서휼의 해룡진혈을 받아들인 건 단순히 흑룡진혈로 덮어 버릴 생각만 하고 먹은 게 아니었다.

저주술사에게 피를 준다는 것은, 저주의 가장 근원적인 매개체를 준다는 것이니까.

서휼에게 서휼의 피를 받은 그날부터, 나는 언제든지 서휼에게 저주를 걸 수 있는 상태였었다.

그때 받은 서휼의 피를 매개체로, 나는 언제라도, 얼마든지 서휼에게 저주문들을 떠넘길 수가 있다.

그래, 본래대로라면 이때 저주문으로 서휼의 발을 잠시 묶은 후.

잠시 후 유화가 오면 유화의 도움을 받아 서휼의 곁에서 서휼을 돕는 몇몇 요족들을 다 떼어 낼 요량이었었다.

그런데, 왜일까.

"왜지?"

나는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을 느끼며 서휼을 노려보았다.

"왜 너를 지켜 줄 요족들을 모조리 보내 버린 거냐."

한 명도 그를 돕지 않게 하고 보내 버릴 줄은 몰랐다.

오히려 서휼이 저러니, 나는 그에게 어떤 꿍꿍이속이 있는지 몰라 불안해졌다.

서휼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렇게 빠르게 하계에서 다시 비승하는 데에 성공하시다니, 거기다가 하계는 영기가 한참 옅어서 경지를 회복하는 데에 오래 걸릴 텐데…. 이렇게 빠르게 경지를 다시 올렸다는 것은 역시, 당신은 높은 존재였다가 영락한 이라는 것이겠군요."

"말하지 않겠다는 건가."

유화가 막 백녕을 구출하고 있을 지금.

서휼은 순수하게 나의 기지와 능력 만으로만 상대해야 하는 상황.

하지만 나는 딱히 걱정되지 않았다.

서휼이 제아무리 합체기 요왕에 준하는 실력자라 한들, 이미 서휼에게는 저주가 걸려 있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나는 저물도에서 홍범이 제작해 준 독을 꺼내들었다.

고통의 감각을 일정 시간 동안 6만 배 증폭시키는 독액.

그에 비해 살상력은 거의 없다시피 한, 오직 고통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약품.

나는, 망설임 없이 옥병을 열고 독액을 삼켜 버렸다.

그런 다음, 오행혈주번을 꺼내 들어 저주문을 듬뿍 먹여 흑색귀주번을 만든 후, 그대로 내 가슴에 꽂아 넣었다.

푸욱!

"…!!!"

고통에 정신이 나갈 것 같다.

아니, 나간 게 틀림 없다.

뇌가 새하얗게 백열하는 느낌이다.

범인이라면 고통에 진즉 죽었겠지만, 수도자는 강인한 육신과 드넓은 의식을 지닌 만큼 고통에 쉬이 기절하지도, 죽지도 않는다.

그 말인즉슨, 나는 6만 배로 증폭된 고통의 감각을 온전히 느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러나, 정신이 기화하고 의식이 분해될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나는 한 줄기 미소를 지었다.

치이이이이―

서휼에게 걸어놓은 저주문들이 빛나며, 서휼은 내가 느끼는 고통을 저주에 의해 증폭된 채로 맞고 있다!

"…!!!"

서휼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무리 합체기급 요왕이라 해도 이건 꽤 견디기 힘들 거다…!'

내 고통에 대한 내성은 이미 한참 강해진 상태다.

그런 나조차도 정신이 기화해 버릴 정도의 고통이다.

이 정도의 고통이라면, 합체기 최고봉 수사에게도 어느 정도는 통할 터!

찌이이이잉!

나는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흐릿한 시야로 서휼을 마주보았다.

'서휼, 저놈….'

그리고, 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서휼을 보며 굉장히 기괴한 느낌을 받았다.

서휼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부여잡은 상태에서도 웃고 있었다.

눈가와 동공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그의 심상 역시 고통에 흔들리고 있는 게 맞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얼굴은 여전히!

여전히 상냥하고 친절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그 모습은 상냥한 순간의 모습이 얼굴에 박제된 것만 같은 기괴함이었다.

나는 그 순간, 정말로 서휼이 인두겁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 상냥한 미소는, 얼굴에 고정되어 있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저런 미소밖에 짓지 못하기라도 하는 건가?

나는 분명히 고통을 느끼면서도 상냥한 표정을 풀지 못하는 서휼을 보며, 기괴한 심정이 느꼈다.

'서휼, 네놈은 도대체….'

뿌드드득….

나는 이를 악문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 움직임을 눈치챈 서휼 역시 머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했을 뿐 고통에 절어 무언가를 하지는 못했다.

우우우웅!

그때, 서휼의 몸에서 빛나는 저주문들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치치칫!

저주문에서 불꽃이 튕긴다.

나는 서휼이 저주를 밀어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우웅!

서휼의 몸에 박혀 있던 저주문이 불꽃을 튀기며 그의 몸 위쪽으로 떠오르려 하기 시작했다.

'그렇겐 안 되지.'

위이이잉!

나는 고통 속에서, 음혼귀주문의 고통을 더더욱 저주에 불어넣으며, 서휼의 몸에서 떨어지려는 저주를 더더욱 서휼의 몸 깊숙이 박으려 했다.

치치치칫!

저주문에서 불꽃이 튀기며 팽팽한 구도가 이어졌다.

저주를 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다수의 저주는 어떠한 '조건'이 필요했다.

저주술사가 대상의 신체 일부를 가지고 있을 것.

술사가 대상을 잘 알고 있을 것.

술사의 저주문이 대상에게 닿았을 것.

술사에게 대상이 위해를 가한 적이 있을 것.

술사가 대상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을 것.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하지 않고 그냥 저주를 걸려 하면 그 저주는 위력이 한참 반감되고 떨쳐 내거나 해주하기도 쉬워진다.

하지만, 조건들을 충족한다면 저주는 훨씬 떨쳐 내기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조건들을 대부분 충족한 상태였다.

저주가 발동하기 전이라면 얘기가 다르지만, 내가 기습적으로 저주를 발동시킨 이상 이 대결의 판도는 분명 내가 유리했다.

쿠구구구구!

수천수만 개의 저주문들이 서휼에게 흘러 들어간다.

서휼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기운을 뿜어댔다.

치치치치칫!

분명 내가 유리한 판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체기에 준하는 서휼의 저력은 어마무시했다.

내가 서휼의 심장을 쥐고 있는 것과도 다를 것 없는 상황이었으나, 서휼은 조금씩.

분명 조금씩 내 저주를 밀어내고 있었다.

'경지 차이는 어쩔 수가 없는가.'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천, 지, 심족의 힘을 모두 익혀 증폭률이 어마어마하게 강했지만, 경지 자체는 고작 원영기에 불과했으니.

이대로라면 분명 저주는 풀린다.

그러니까….

대락 1시진쯤 지나면?

씨익.

고통에 벌벌 떨면서도, 나는 웃었다.

분명 서휼의 저력은 대단했지만, 1시진이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너무 많았다.

'이 고통도 슬슬 익숙해지고 있으니, 조금만 더 익숙해진 후, 남은 1시진 동안 서휼을 몰아넣으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서휼은 무언가 수결을 맺기 시작했다.

'저건…!'

진득한 탁기가 서휼의 주변에서 흘러나온다.

끔찍한 귀곡성과 비명이, 서휼이 수결을 맺을 때마다 주변으로 퍼져 나간다.

법술도, 요술도 아니다.

저것은 차라리 마술(魔術).

분명한 혈음계의 술법 중 하나다.

나는 서휼이 사용하는 혈음계의 술법, 그 마력의 흐름을 눈여겨보았다.

'느껴진다.'

내가 쓰는 기괴고의 술법과 비슷하다.

누군가에게 미리 몰래 술법을 기생시킨 후, 천천히 잠복시켜 필요할 때 격발시키는 마술.

거기에, 원립이 사용했던 혈제(血祭)의 술법 역시 섞여 있다.

나는 빠르게 서휼이 사용하는 술법의 정체를 간파해 냈다.

'미리 타 상대에게 잠복시켰던 기생 법술을 격발시켜 대상을 죽인 후, 그 대상을 혈제로 쓰는 술법!'

치이이이―

서휼이 마지막 결인을 맺으며 입을 열었다.

"탁혼식명(濁魂食命)의 주(呪)."

치이이이이―

저 멀리서 갑작스레 피비린내가 풍겼다.

원유가 있는 곳으로 향했던 사축기 요족들이 향한 방향이었다.

'자기를 따르는 이들에게 전부 저 법술을 걸어 놓았던 건가?'

언제든지 죽여서 혈제를 바쳐 자신의 여벌 목숨이 될 수 있게 조치해 놓았던 것이리라.

쿠구구구구!

약 이십여 명의 사축기 수사를 모조리 혈제로 바친 탓일까.

저 멀리서 느껴지는 혈제의 기운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저게 지금 서휼에게 보급된다면….'

단박에 내 저주를 떨쳐버릴지도 모른다.

뿌드득….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나는 고통에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저물도에 손을 넣었다.

원래는 조금 더 고통에 익숙해지고 난 후에 하려던 것이었지만, 이왕 이리된 것, 지금 일을 마친다.

촤라락!

나는 저물도 안쪽에 있던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괴뢰였다.

괴군과의 연락용으로 써 왔던 괴뢰!

괴뢰는 저물도에서 나오자마자 눈알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주변 상황을 확인하더니, 서휼을 보고 눈알을 고정시켰다.

"괴, 군… 선배님. 들리십니까?"

씨익….

나는 히죽 웃으며 괴뢰 너머에 있을 괴군에게 외쳤다.

"서휼이 있는 곳의 좌표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 * *

위이이이잉!

지족 진룡맹.

봉명주 인근에서 12명의 합체기 요왕과 전투를 벌이던 기묘성채.

기묘성채의 주변에서 날갯짓을 하던 벌 괴뢰들이, 갑자기 하던 일을 멈추고 기묘성채의 곳곳에 내려앉았다.

위이이잉!

벌떼 우는 소리와 함께, 기묘성채에 내려앉은 벌 괴뢰들이 파닥거리며 뭔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그와 동시에, 기묘성채가 어느 한 방향으로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합체기 요왕들과의 전장에서 도망치려는 것 같았기에 합체기 요왕들의 얼굴에 희색이 맴돌았다.

"괴, 괴군이 후퇴하려는 건가?"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던 괴군의 기묘성채에 붙어 있는, 수백억 기의 벌 괴뢰들이, 공간을 찢었다.

합체기 요왕들은 깨달았다.

"저건, 공간 전송?"

"너무 먼 곳으로 가는 건 불가능할 텐데, 어디로 가는…."

"자, 잠깐…! 저 공간 전송 방향…."

"안 돼!"

"막아라!"

요왕들은 사색이 된 채 기묘성채를 향해 달려들었다.

"괴군이 봉명주로 공간 도약을 하려 한다…!!!"

서은현의 신호를 받은 괴군이, 봉명주 4층으로 공간 도약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광대와 공연 (7)

온다, 온다, 온다!

그가 온다!

기기기기긱!

공간의 틈새가 열리며, 저 멀리서부터 거대한 존재감을 지닌 뭔가가 이곳으로 도약해 오려는 것이 느껴졌다.

기묘성채!

괴군의 기묘성채가, 봉명주 안쪽으로 도약해 오려 하고 있다.

서휼 역시 익숙한 괴군의 기묘성채를 느낀 것인지, 기묘성채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머리를 꺾었다.

"어, 떠, 냐…!"

서휼이 정신을 못 차리는 지금!

괴군이 도착한다면, 서휼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어떠한 수작도 부릴 수 없게.

어떠한 흉계도 더 꾸밀 수 없게, 말 그대로 날것처럼 조리되어서 괴군의 앞에 놓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어차피 며칠 뒤면 전신이 전부 뇌전으로 화해 죽을 목숨.

서휼이 괴군에게 박제당해, 괴군의 괴뢰와 혼례식을 올린다면 그 역시 죽어 간 규련과 서휼에게 희생당한 모든 이들에게, 나름 만족스러운 결말일 것이다.

쩌어어억!

공간 균열이 열리고, 저 멀리, 허공간 너머로 철컥거리는 기관장치의 성이 이곳으로 날아들려 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휼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통이 익숙해졌는지 나와 같이 입을 열었다.

"봉명주는… 폐기된 선보라지만… 그래도 선보는 선보…."

잠시 기묘성채를 바라보던 서휼은 고통을 간신히 견뎌 내면서도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이내 기묘성채에서 떨어졌다.

"안으로 바로 진입할 수 있는… 특별한 직인이 없다면… 아무리 괴군이라도… 이곳으로 그렇게 쉽게는 못 들어온답니다."

"…들어오고 있는 거 같은데?"

기기기기긱―

서휼의 말을 농락하기라도 하는 듯.

거대한 기묘성채는 공간을 넘어 이곳으로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봉명주의 영향인지, 분명 중간중간에 무엇인가가 기묘성채를 막아 내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기묘성채는 그러한 항력을 모조리 뚫어 버리고 이곳에 진입하는 중이었다.

기기기기긱―

봉명주의 항력을 다 뚫어 버리고 점차 이곳으로 가까워지는 기묘성채의 모습에, 서휼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리 서휼의 흉계가 음흉한들, 아무리 놈의 지략이 출중한들.

괴군에게는 어떠한 상식도, 논리도, 흉계도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기기기기긱!

끼이이익….

허공간에서 봉명주 안쪽까지, 약 10장 정도의 거리만을 남겨 놓은 채로, 기묘성채는 그대로 멈춰 서 버렸다.

그리고, 기묘성채의 문이 열렸다.

끼이이이익!

철컹!

전신이 찌릿거린다.

저 안쪽에서 느껴지는 28기의 어마어마한 기세들.

나는 그 기세들이, 하나하나가 일전 보았던 합체기에 도전하던 규련의 기세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침을 삼켰다.

쩌억, 쩌어어억!

물론, 봉명주가 다 망가졌어도 선보라는 서휼의 말은 완전히 허언은 아니었는지, 28기의 괴뢰들은 이쪽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하지만 28기의 괴뢰들이 일제히 이쪽으로 손을 뻗자, 봉명주에 둘려 있는 보이지 않는 어떠한 항력에, 틈새가 나는 것이 느껴졌다.

쩌저저적!

그리고 마침내.

어린아이 한 명이 겨우 들어올 정도의 틈새가 만들어졌다.

부우우우웅!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저 너머에서, 괴군이 괴뢰들을 지휘하는 것이 느껴진다.

기묘성채 안쪽에서, 무수한 일벌 괴뢰들이 날아와 작은 틈새 안쪽으로 진입하여 사방을 감쌌다.

부우우우웅!

벌 괴뢰들은 우리가 대치하는 곳으로 넘어와, 나와 서휼을 둘러싸고 마구 회전하였다.

벌 괴뢰들에 의해 우리를 둘러싼 회오리가 생겨났고, 그 덕에 서휼은 혈제를 지내 사축기 수사들을 제물로 바쳐 힘을 강화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어쩔, 거지?"

나는 혈제의 기운이 모여 있는 곳으로 손을 뻗은 서휼을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느껴진다.

방금 전까지 어마어마하게 거대했던 혈제의 기운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많은 부류의 마공이 그렇듯이, 이러한 대규모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비술은 유지 시간이 짧다.

그 짧은 시간 안에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기운이 순식간에 작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휼이 혈제로 만들어 낸 저 기운은, 흩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가 이 일벌 괴뢰들은 분명히 공간 도약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일벌 괴뢰들.

분명 이 녀석들은 봉명주의 안쪽에서 기묘성채를 완전히 이곳으로 불러낼 작업을 준비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괴군이 완전히 안쪽으로 진입할 터였고, 서휼은 끝이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지 말자.'

하지만, 나는 여기까지 서휼을 몰아넣었음에도 도리어 더더욱 긴장을 곧추세웠다.

내가 아는 서휼이라면, 분명 뭔가를 더 해 뒀다.

갑자기 땅 밑에서 서휼이 하나 더 튀어나와, 사실 지금까지 상대한 건 분신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고.

홍범이 배합한 독에 갑자기 수작을 부려 놓았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오혜서와 만난 이후부터 부조화를 느꼈었다.'

십중팔구 서휼의 수작이다.

오행혈주번으로 봉인을 해 놓았다지만, 어쨌든 나는 지금 서휼이 부려 놓은 수작에 빠진 것이니 끝까지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리라.

'지금도 서휼을 더 몰아넣을 수는 몇 개가 더 있다.'

하지만, 나는 일단 유화가 원군으로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더더욱 확실한 전력이 생길 때까지는 신중해야 한다.

'참자. 놈에게 더더욱 확실한 타격을 입힐 때까지!'

쩍, 쩌저저적!

일벌 괴뢰들의 너머.

공간 균열 방향.

그곳에서, 일벌 괴뢰들이 뭔가를 해낸 것인지 기묘성채가 공간 균열을 조금 더 벌려 냈다.

'좋아, 이대로라면….'

그러나, 그때였다.

덜컹!

갑자기 기묘성채가 움찔거리더니, 뒤쪽으로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뭣…!'

서휼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지족의… 요왕들이… 놀고 있지만은 않나… 보군요."

우우웅!

나는 어쩐지 공간 균열 쪽에서 기이한 인력이 느껴지는 것을 보며 깨달았다.

공간 균열 너머.

기묘성채 뒤쪽.

그곳에서, 지족의 합체기 태수들이 괴군을 다시 봉명주 바깥으로 끌어내기 위해 기묘성채를 인력으로 당기고 있는 것이었다.

"저걸, 믿고, 있는 거냐?"

그러나 나는 피식 웃었다.

기묘성채라면 내가 제일 잘 안다.

기묘성채는, 아직 제대로 힘을 쓰지 않고 있다.

쿠구구구구구!

기묘성채의 뒤편에서 몇 개의 원통형 추진체가 나타났다.

그리고 동시에, 추진체들에게서는 어마어마한 영력이 뿜어지더니, 기묘성채를 당기는 인력에 저항해 다시 원위치가 되어, 공간 균열 안쪽을 뚫고 들어올 듯이 달라붙었다.

'애당초 기묘성채를 쉽게 막거나 제지할 수 있었으면, 괴군이 천 년씩이나 마음대로 활개 칠 수 있었겠나.'

성과 같은 형태라서 굉장히 둔해 보이지만, 기묘성채의 실상은 어마어마하게 빠른 기동 요새다.

진심을 낸 괴군의 기묘성채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확실히, 조금 어렵겠군요."

그러나, 서휼의 안색은 달라지지 않았으며, 심상 역시 아무런 요동도 치지 않았다.

'뭐지?'

뭘 믿고 있는 거냐.

서휼.

서휼은 씨익 웃었다.

그리고 나는 그 웃음에서 말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저는, 일반적인 생물들이 말하고 나눈다는 감정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말도 하기 힘든 고통일 텐데, 뭐지? 벌써 고통에 완전히 익숙해졌나?'

"폐의 진동으로 감정이라는 것을 분석해 보고 모사해 보려 해도 그것만으로는 생물들의 행동 양식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요. 그래서 저는, 괴군의 행동 양식을 연구하며 한 가지 가설을 세웠습니다."

나는 서휼의 헛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그가 무슨 수작을 또 부리려 하는지에 정신을 집중했다.

달각….

서휼은 품속으로 손을 넣어, 품 안에서 한 개의 목걸이를 꺼냈다.

얇은 무명실로 만들어진 볼품없는 목걸이였으나, 목걸이의 장식물은 녹색의 수정으로 된 아름다운 보석이었다.

서휼은 목걸이를 손에 감아, 보석이 자신의 손바닥에 묶이게 하였다.

"생물들에게는, 각 개체가 저마다 '소중한 것'이라고 부르는 삶의 목적 같은 것이 있는 겁니다. 지성체라고 불리는 이들은 대다수가 이런 걸 가지고 있더군요. 놀랍게도 저를 포함해서도 말이지요."

"…?"

나는 서휼의 개소리에 집중하지 않으려 했으나, 스스로에게도 소중한 것이 있다는 서휼의 말에는 순간 흠칫하며 녀석의 눈을 바라보았다.

"괴군에게는 [그녀]가 그것이었고, 후손인 란이에게는 '가족의 애정'이 그것이었으며, 제가 거둔 백녕은 '종족의 안녕'이 그것이었지요. 그리고 백녕을 구하러 갔을 그 심족에게는 '제자의 안전'이 그것이었을 테고 말입니다."

척!

서휼은 수정 목걸이를 감아쥔 손을, 괴군이 진입하려는 공간 균열을 향해 내밀었다.

'뭔가를, 하기 전에, 막아야 해!'

그러나 움직일 수가 없다.

도대체 서휼이 어떻게 갑자기 저렇게 태연하게 움직이는지도 이해가 불가능하다.

'처음부터 고통을 못 느꼈나? 아니야, 그럼 처음에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지면서 저주문을 밀어내려 하던, 그런 병신같은 연기는 하지 않았겠지.'

그렇다면 서휼은 현재도 나와 같은.

아니, 나 이상의 고통을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저렇게 멀쩡한가?

역겨운 심정을 뒤로하고 서휼의 심상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객체들이 원하는 것만 알아내면, 그 원하는 것들을 조금 통제하는 것으로 각기 다른 객체들은 너무나도 쉽게 제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제자의 안전을 위해 완전히 다른 곳으로 멀리 돌아가서, 지원을 오는 데에 한참은 걸릴 그 악사와, 종족의 안녕을 위해 제게 스스로 영혼을 바친 백녕처럼 말이지요."

위이이잉!

서휼이 쥔 녹옥에서 녹색의 빛이 터져 나오며, 백녕의 환영을 비추었다.

'저건…!'

백녕!

백녕이었다!

'그런…!'

서휼은 백녕의 혼백을 뽑아 목걸이에 불어 넣어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백녕, 척산편을 발동해라."

[…예, 주인님.]

그와 동시에, 혼백이 뽑힌 백녕은 서휼의 힘과 자신의 혼백을 결합하여 그의 입천을 발휘하였다.

서휼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천, 지족들은 심도공법 3단계에 이른 심족들만을 보고 혐오하지만, 제가 보기에 심족들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고작 원영기에 불과한 당신이 천, 지, 심 삼재를 융합하여 사축기에 준하는 저력을 낼 수 있듯이… 심족의 힘은 잘만 이용하면, 이렇게…."

쿠구구구구!

백녕의 '무게'를 조절하는 입천의 힘.

그리고 서휼의 손에서 뿜어지는 인력(引力)이 합쳐지며 미친 듯이 증폭하기 시작했다.

'저건…!'

마치, 단순한 답천의 무형검과 내 원영이 합쳐지자 어마어마한 증폭률을 보였던 것과 같이.

서휼의 손에서 뿜어지는 인력이 어마어마하게 증폭된다.

그리고.

파아아앙!

파공음과 함께 서휼의 손에서 뿜어지던 인력은 일순간 척력(斥力)이 되어 괴군의 기묘성채를 밀어내었다.

꾸구구구구!

천지족의 수행이 더하기라면, 심족의 수행은 곱하기.

안 그래도 사축기 최정상을 넘어, 합체기에 준하는 힘을 가진 서휼이다.

그런 서휼의 힘에, 비록 입천일 뿐이지만 [무게]를 조종하는 백녕의 능력이 더해지자, 그의 인력은 합체기 최정상만큼이나 올라갔다.

뒤쪽에서는 합체기 요왕들이 당기고, 앞에서는 서휼이 민다.

결국, 기묘성채는 점차 밀려 나가는 듯하더니 다시금 허공간의 어둠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이렇듯이 심족을 잘만 이용하면 너무나도 유용한 것을 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심족을 이용한 법기나 법구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기이하지 않습니까? 심상을 읽는다거나, 천겁을 추가한다거나 하는 둥 심족을 혐오할 개연성 자체는 차고 넘칩니다만. 어째서 광한계 주민들은 심족을 이용하는 것에조차 생각이 닿지 않았던 것인가…. 그런 간단한 것조차 혐오감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인가?"

그는 나를 향해 싱긋 웃으며 물었다.

"마치, 누군가가 광한계에 일부러 이식해 놓은 혐오감 같지 않습니까? 천지심을 전부 품은 서 도우께서는 혹시 이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신지요?"

"…."

"알려 주시지 않는 겁니까?"

"…그렇군,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게 아니야."

나는 그제야 서휼이 어떻게 이 정신 나간 고통을 견디고 있는지 깨달았다.

서휼은 자기 자신의 정신을 해체했다.

자신의 혼백을 여러 조각을 자른 후, 완전히 붙지는 않게 다시 붙였다.

그렇게 하여 정신을 해체해서 기절한 것과 같은 형태가 된 것이다.

한 마디로, 내 앞에서 말을 하고 있는 저것은 서휼 본인이 아닌, 서휼이 자신의 혼백을 해체하기 전 자신의 몸에 입력해 놓은 행동들인 것이었다.

'괴군이 나타난 그 순간, 자신의 정신으로 고통을 견디는 걸 포기하고 일시적으로 정신을 해체한 후 괴군을 밀쳐 냈다.'

괴군을 떨어뜨리는 데에 성공했으니, 아마 이제 입력해 놓은 대로 정신을 되돌려서 돌아올 터였다.

'서휼이 하는 말은 그 어떤 것도 귀담아들을 필요 없다.'

놈의 말은 모조리 거짓말.

뭔가 있어 보이는 말로 주저리주저리 떠든 이유는 자신이 의식을 잃었다는 것을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한 눈속임일 뿐!

그렇다면.

'지금이, 서휼의 빈틈이다!'

촤락!

내 옆으로 내 저물도가 떠올랐다.

단순한 저물도가 아니었다.

생물을 넣어놓을 수 있는 특별한 저물도.

도원도(桃園圖)라는 종류의 저물도였다.

촤라라락!

그리고 그 안쪽에서, 낡은 갈의를 입은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규백이었다.

괴군이 물러갔지만, 그것도 좋다.

어쨌든 이것으로 서휼이 빈틈을 보였으니!

[규백 님!]

나는 심어로 규백에게 바로 내 뜻을 전달했다.

규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 손을 뻗었다.

키이이잉!

그녀의 손에서 황금빛 인장이 빛났다.

관주사자(官舟使者)의 인(印).

봉명주의 안팎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규련의 권한 중 하나.

그리고 그 권한을 사용하면, 미리 지정해 놓은 장소와 봉명주의 안쪽을 일순간 연결하는 것이 가능했다.

공간의 문이 열린다.

'괴군의 앞에서 규백을 꺼내면 규백이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서 쓰지 않았지만….'

"유화!"

유화를 부르는 것이라면, 오히려 지금 사용해야만 한다.

"백녕은 이곳에 있소, 넘어오시오!"

그리고, 공간의 문 너머로 주홍빛 강줄기가 빠르게 이쪽으로 넘어왔다.

키이이잉!

완전히 괴군을 밀어내 버린 서휼의 손에서는 아직도 백녕의 형상이 아른아른하게 비치고 있었고, 유화는 도착하자마자 그 광경을 포착했다.

백녕, 유화가 아꼈던 그녀의 제자는 서휼의 손에서 혼백이 뽑혀 법기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유화는 별말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본모습을 드러내고, 금(琴)을 자신의 앞에 내려놓은 채로.

이제껏 없었던 진중한 표정으로 금을 뜯기 시작했다.

지이이이잉―

공간 전체가 울리는 듯했다.

유화의 환람연하는 오직 서휼에게만 집중되며, 해체되어 있는 서휼의 의식을 깊숙이.

더더욱 깊숙이 끌어내렸다.

분명히 서휼에게만 집중되는 음색임에도, 그 편린을 듣는 것만으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졸음이 솟구쳤다.

하지만 나와 규백은 각자 정신을 다잡고 서휼이 비틀거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이번에 유화에 의해 잠들게 되면 다시없을 악몽을 꾸게 될 것 같았으니까.

나는 규백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저주로, 유화가 잠으로. 그리고 서휼 자신이 잠시 정신을 해체하여 어렵사리 만들어진 틈새입니다."

규백은 두 주먹을 꽈악 쥐었다.

"마음은 다 정하셨습니까?"

"…그래."

그녀의 심상은 서휼을 본 순간부터 매우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흔들리는 심상 속에서도 한 가지의 심상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제한이 덕지덕지 붙은.

그러나, 그렇기에 특정한 대상을 상대로는 다시 없을 위력을 보이는 규백의 입천.

"규련의 원한을, 갚겠다."

월도입천(越道入天).

서교정표(瑞交情表).

오직 서휼 한 명만을 끝내기 위한.

서휼과 나누었던 약속의 정표.

광한지약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월도입천이, 지금 발동되었다.

철컹, 철컹, 철컹!

규백의 옷과 같은 갈색의 사슬이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갈색의 사슬은 서휼의 심장 부근을 자연스레 투과해 들어가, 서휼의 심장을 비롯해 주요 장기, 그리고 서휼의 요단 곳곳에 얽혀 갔다.

'그렇군….'

나는 규백의 손에서 뿜어진 저 사슬이, 규백의 어디와 이어져 있는지를 눈치챘다.

규백의 심장과 이어진 사슬.

그 사슬은 마찬가지로 서휼의 심장과 주요 장기, 그리고 요단과 이어져 있었다.

말 그대로, 서휼과 함께 죽기 위한 월도입천.

서로가 한날한시에 죽기 위해 만들어진 광한지약의 내용을 구현시키는 것이 바로 규백의 월도입천, 서교정표인 것이었다.

철컥, 철컥, 철컥!

나는 저물도에서 무수한 서 장군들을 꺼내, 등 뒤에서 입을 벌리게 했다.

그리고 언제라도 내 몸을 바쳐, 저주와 무형검을 폭발해 자폭할 준비를 끝마쳤다.

혹여나 규백이 서휼을 죽이지 못하더라도, 내 자폭과 같이 서휼은 끝난다.

설령 서휼을 끝내지 못하더라도 서휼이 잠시 거동이 힘들 만한 부상은 입힐 수 있고, 그 정도라면 괴군이 다시 이쪽으로 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다사다난한 생이었다.'

서휼의 밑천을 까고자 그의 밑으로 들어왔다.

실제로 서휼의 밑에서 그를 지켜보며 많은 걸 얻기는 했지만, 모든 것을 알아내지는 못했고, 오히려 폭탄 같은 것만 많이 터졌다.

'과연, 후회는 없었는가.'

이 생에 후회가 있었는지는, 최후의 일격을 휘두르며.

그때에 주마등을 다시 보며 알게 되리라.

'마지막까지 절대 긴장을 풀지 마라.'

서휼은 서휼이다.

저 심상을 보면 분명히 저 녀석은 서휼 본인이 맞으니,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

서휼에게 온 집중을 쏟으며 그를 관찰해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절대로 긴장을 놓지 말….

푸욱!

"…어?"

부웅!

규백이 서교정표를 발동하기도 전.

시뻘건 손아귀가 규백의 등 뒤에서 그녀의 심장을 뚫고 나왔다.

키리리릭!

음양이 제멋대로 회전하며 규백의 몸에서 나왔던 사슬이 그대로 흩어졌다.

그리고, 시뻘건 손은 다시 내게 쏘아져 왔다.

쩌엉!

나는 시뻘건 손에 실린 가공할 힘에, 그대로 내리찍혀 자리에 주저앉았다.

왈칵!

이미 8할 이상 뇌전화된 내 몸체가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 같다.

2할밖에 안 남은 육신에서 붉은 즙이 줄줄 흘러나오며 주변으로 퍼져 나간다.

"넌…."

나는 황망한 눈빛으로 규백과 나를 기습한 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원유…?"

서휼이 사축기 수사들을 모조리 혈제 지내서 얻은 막대한 힘.

나는 그것이 모조리 흩어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것은, 모조리 원유가 흡수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원유가 입을 열자 나는 허탈한 심정이 되었다.

"이상하네, 유리공작의 빛을 맞았는데 어떻게 나를 인식하는 거지?"

원유의 입에서는 아주 익숙한 목소리.

오혜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넌 너무 이상해, 서은현. 희뿌연 안개 같은 게 너를 지켜 주고 있어. 그 안개 때문에 너에 대해서는 피상적인 것들밖에 읽을 수가 없단 말이지."

츠츠츠츳!

나는 그제야 머릿속에서 느껴지던 기묘한 부조화의 정체를 깨달았다.

내 기억은 유리공작의 빛에 의해 왜곡되어 있지만, 내가 무의식 수준에서 운용하고 있던 만상인연도가 정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오혜서와 만나고 '돌아갈 때' 유리공작의 빛을 맞은 게 아니다.

오혜서와 '만나러 갈 때' 기습적으로 유리공작의 빛을 맞았다.

오혜서와 만나서 그녀와 나눴던 대화들, 내가 그녀의 심상을 읽었던 일들, 유리공작의 빛을 맞았던 시간의 서순 등….

모든 것이, 그녀가 내게 최초로 걸었던 유리공작의 빛에 의해 뒤섞이고 왜곡되었던 것이었다.

비틀, 비틀….

유화 역시 원유의 몸으로 새하얀 빛을 내뿜는 오혜서의 힘에 의해 비틀거렸고, 유화의 연주는 그쳐 버렸다.

그와 동시에, 서휼이 해체되었던 정신을 다시 봉합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원유의 몸을 입은 오혜서는 천천히 서휼의 곁으로 걸어갔고, 서휼은 상냥한 미소를 띠며, 친근하게.

아주 친근하게, 내게 굉장히 자주 했었듯이 원유의 어깨를 두드렸다.

툭툭―

"원립은 고대 유적에서 혈체를 만드는 법을 배웠고, 자신만의 비술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애초에 원립에게 고대 유적을 통해 혈체 제작법을 전달한 건 저랍니다, 서 도우."

툭툭―

"혈음계의 법술이 섞여 있는 호풍성혈변을 제 권고대로 얌전히 익히셨다면, 제가 혈체에 무슨 짓을 했는지도 알아채셨겠지만… 안타깝게 되었군요."

툭툭―

오혜서는 자꾸 원유의 어깨를 두드리는 서휼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

"혈체를 활성화시키는 정확한 법을 아는 사람이 이 혈체라는 걸 만지면 혈체에 기록된 기억을 열람할 수 있대. 비술의 활성 방법이 아마… 극한 환경에서 혈체의 생명력을 끌어올린다고 했었나요?"

"저런, 혜서 양. 그런 엄청난 비밀을 함부로 발설하시면 곤란합니다."

"뭐, 상관없지 않나요? 어차피 서은현도 죽을 거고, 내 입장에서는 서은현의 감정을 흔들면 저 희뿌연 것들을 흔들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요."

"흐음…."

분명 그랬다.

어쩐지, 서휼은 이번 생에 유난히 내 어깨를 툭툭 치는 짓을 자주 했다.

그리고, 내 어깨를 칠 때의 절대다수는 내가 혈체피갑을 입고 있을 때였다.

'극한 환경에서 혈체를 활성화시키는 게 비술의 일부라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친근한 듯이 계속 어깨를 두드려 주었었다.

그냥 친근감을 연기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서휼은 어째서 처음 보는 녀석이 원립의 혈체를 입고 비승했는지, 그것부터 알아보려 했던 것이었다.

선수혈합 이전에도 계속 어깨를 두드려 주고, 선수혈합 이후에는 제대로 혈체를 활성화시켜서 혈체의 기록을 열람했으리라.

나는 그동안 서휼이 얼마나 내 어깨를 친근한 듯이 두드려 댔는지를 깨닫자,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네놈의 앞에서 춤추던 광대(廣大)에 불과했던 거군."

지금껏 괴군의 회로로 서휼을 감시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혈체를 통해서 나야말로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말 그대로, 광대가 펼치는 한 편의 연극이었을 뿐.

그래, 광대의 공연이다.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광대의 공연은, 이렇게 막을 내린 것이다.

"…그래, 내가 졌다."

나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내 앞에서 나를 바라보는 서휼과 원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양손을 맞잡아 깍지를 끼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읊었다.

"…귀의하나이다."

공연이 끝나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