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난 마음 (5)
50년의 세월 동안.
규백은 지옥 수련을 거듭했다.
처음에는 나 혼자서 그녀를 지도해 주었으나, 시간이 지나자 장익 역시 그녀를 같이 지도해 주었고, 그녀의 실력은 일취월장하기 시작했다.
어찌어찌 그녀는 나와 장익의 지도로 등봉조극의 극한에 이르는 데에 성공했다.
그 와중에 장익이 등봉조극의 구결을 내게서 받아갔다거나 한 사소한 일이 있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등봉조극에 이르렀고, 월도입천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월도입천에 결국은 제대로 들지 못했다.
파아아앗!
규백의 강환들이, 그녀의 의식 영역과 겹치며 그녀의 의식 영역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꿀렁, 꿀렁….
얼마간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규백의 의식 영역은, 순간 밧줄.
혹은 사슬 같은 모습으로 변하나 싶더니 그대로 스러져 버렸다.
"뭐냐, 이건. 장난하는 거냐?"
영역의 주인인 원숭이 요수는 규련이 하는 짓을 보고는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쾅쾅 쳤다.
규련은 잠시 한숨을 쉬는 듯하더니, 손가락을 굽혔다.
쿠드드득!
그녀의 손끝에서, 샛노란 강기가 맺혔다.
얼마 후, 규련의 전신에서 황룡을 닮은 강기가 끓어올랐다.
"뭐, 뭐냐, 정순지력? 축기경 요수였느냐? 하지만 결단경에 도달한 이 몸에겐…."
다음 순간.
강환으로 의식을 가속시킨 규백은 득달처럼 원숭이 요수에게 달려들어 공격을 가했다.
마치 짐승 같은 모습이었다.
애당초 요족 중 신령한 혈통을 타고난 용족의 움직임을 기반으로 만든 것이 용형비호조.
용형비호조는, 규련이 사용하던 전투 방식대로 만들어진 무공이었기에, 본체로 싸울 때는 늘 야성 넘치게 싸우던 규련 본인의 전투 방식이 녹아 있었다.
쿠구구구구!
규백의 용형비호조가 원숭이 요수의 몸을 스쳤다.
마치 사나운 용처럼 상대를 몰아치는가 했으나, 동시에 그것은 무공이었기에 완급 조절을 하며 상대를 몰아붙이기도 했고, 무예의 묘리가 드러나며 적은 힘으로 큰 효과를 보기도 했다.
이미 용형비호조는 50년간 그녀의 손에서 펼쳐지며, 내가 만들었던 최초의 용형비호조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규백이 자기류로 개조해 오기도 했고, 장익이 충고를 해서 고친 부분도 꽤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한때 준 합체기였던 이의 조각답게, 규백은 삽시간에 원숭이 요수를 제압하는 데에 성공했다.
"크헉, 꺼허억! 사, 살려…."
원숭이 요수는 처음의 기세는 사라지고 규백에게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규백은 그제야 강기를 거두고 원숭이 요수의 위쪽에서 내려왔다.
"어떤가."
"많이 성장하셨습니다."
내 칭찬에 규백은 팔짱을 코웃음을 쳤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그저 재활 운동일 뿐이다."
"예, 예."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장익이 다가왔다.
[상대에게 달려들 때 발 사이의 보폭을 조금 더 넓혀라. 그리고 의념의 간합에 조금 더 신경 쓰면서 정순지력을 쓰도록.]
"예."
규백이 장익에게 강의를 듣는 동안, 나는 원숭이 요수에게 가, 내가 만든 진법 깃발을 건넸다.
"이보게, 도우. 자네가 이 근방 원숭이들의 대장이라고 들었네."
"그렇…다만?"
"혹시 원숭이들을 시켜, 이 진법 깃발을 습지 정 가운데, 영기가 가장 풍부한 곳에 꽂아 줄 수 있나?"
원숭이 요수는 자신을 두들겨 팬 규백의 눈치를 슬쩍 보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래, 그럼 잘 부탁하지. 참고로 허튼짓하지 말기를 바라네."
쿠구구구구!
원숭이 요수에게, 원영기에 달한 내 영기의 압박을 흘려 주자 요수는 안색이 파리해져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선배님.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반드시요!"
나는 친절한 원숭이 친구들에게 진법의 설치를 맡겨 둔 후, 장익의 잔소리를 듣는 규백과 유화에게 다가갔다.
"자, 오늘로 마지막 진법이 설치되었습니다. 이젠 정말 준비를 하셔야 할 겁니다."
"그래, 알겠다."
"좋아요."
우리는 장익과 함께, 우리가 처음 떨어졌던 황무지.
규련의 사체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우우웅!
규련의 사체는 산맥만 한 크기로, 여전히 황무지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크기였다.
규백은 그런 규련의 사체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규련의 사체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피가 뽑혀서 말랐을 뿐 여전한 위엄을 자랑했다.
규련이 자랑하던 황금빛 비늘은 하나도 바래지 않았고, 그녀의 발톱도 여전히 살아 있는 듯이 날카로웠다.
다만, 그녀의 두 뿔은 서휼에게 뜯겨 나가 있어 없어진 상태였지만.
얼마간 규련의 사체를 바라보던 규백은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래서, 비승은 언제 할 거냐."
"오늘 저녁에 진법들이 일제히 발동됩니다. 그때를 빌어 해야겠지요."
"…알겠다."
규백은 규련의 사체를 보고 있자 마음이 복잡한 듯.
착잡한 얼굴로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제 작별이군.]
"예, 그동안 존자께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별것 아니다. 나야말로 재미없는 작업 중에 너희를 가르치게 되어서 썩 재미를 봤다.]
어느덧, 나는 장익의 가르침 아래에서 답천의 극한에 이르렀고, 답천 너머에 대한 깨달음도 얻어 갈무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화는 장익의 아래에서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하현 마지막 달에 도달하는 데에 성공했으며, 규백 역시 입천을 조금씩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규백은 투혼 1보에 못 도달할 거다.]
장익은 규백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혀를 찼다.
[그녀의 심상은 아직도 너무 혼란스럽고, 갈망이 강하기는 하지만, 하나의 어떤 개념으로 통합되지 않았어.]
"…하지만, 보셨지 않습니까? 규백의 의식 영역이 찰나 간 변화했던 모습을."
내 질문에 장익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투혼이 아니다. 차라리 의식공법이라는 말이 더 맞겠지. 아니, 의식공법이 아니라 천족의 제사법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고대 비술을 통한 요술이라 해야 하나?]
장익의 말이 이어졌다.
[규백이 도달한 것은, 자신에게 아직 이어져 있는 광한지약을 향한 집착이야. 그녀는 제대로 투혼을 연마하고 심상을 갈고닦아 투혼 1보를 디딘 게 아닌, 광한지약이라는 고대 비술에 심신이 녹아들어 투혼 1보와 유사한 뭔가를 보이는 것이지.]
"…그렇다면, 오히려 광한지약의 대상이 있는 곳에서는 입천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하, 특정한 대상에게만 효력을 발휘하는 투혼 1보…. 그런 구현이 없는 건 아니다만, 그녀는 자신의 광한지약에 너무 의존하고 있다. 광한지약은 애당초 발동 조건을 찾지 못해 사장된 고대 비술이거늘, 결국 광한지약을 발동시키지 못하면 제대로 발동도 할 수 없는 구현이야. 쓸 수 없는 반푼이 구현이란 소리지.]
장익은 규백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규백은 월도입천의 실마리를 찾았다.
하지만, 그녀가 도달한 월도입천은 그녀에게 남아 있는 서휼과의 광한지약에 굉장히 큰 의존을 해서 발동하는 기묘한 월도입천이었다.
눈앞에 서휼이 없으면 제대로 발동하지 않고,
광한지약의 발동 조건도 고대 적에 실전되어 제대로 발동해도 반편이이며,
평소에는 사용도 불가능하다.
한 마디로, 월도입천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규백의 서휼을 향한 기묘한 집착이 낳은 무언가였다.
'하지만… 만약 규백이 서휼과 단둘이 대면하여, 그녀 자신이 입천의 조건을 만족시킨다면….'
서휼에 한정하여, 어쩌면 규백의 입천은 서휼이 절대 벗어날 수 없는 무서운 입천이 될지도 몰랐다.
오직 서휼을 그리며, 서휼과의 만남을 갈구해 온 규백이 얻은.
서휼에게만 통하는 특이한 입천.
그것이 규백의 입천이었다.
'독특하단 말이지….'
나는 속으로 재밌다는 생각을 하며, 규련의 사체에 다가가 비늘을 쓰다듬었다.
"이제, 떠날 날이 다가왔으니 몇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존자시여?"
[물어봐라.]
나는 여태껏 함천존자에게 궁금했던 질문들을 물었다.
"심족의 경지는, 어떻게 나눠집니까? 심족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지요?"
[각각 결단, 원영, 천인에 대응하는 구현 1, 2, 3단계. 혹은 투혼 1, 2, 3보가 있고, 그 너머에도 3보가 있다.]
"3보라면…"
[사축, 합체기에 대응되는 1보, 쇄성, 성반기에 대응되는 2보, 개열기에 대응하는 3보가 그것이지.]
"그냥 3보가, 구현 3단계 너머의 명칭입니까?"
[각자에 따라 다르다. 유화 같은 경우는 상현 첫째 달, 중간 달, 마지막 달로 너머의 경지를 칭하고. 나 같은 경우는 어전삼보(御前三步)라고 칭하지.]
"…3보가 개열기에 대응된다고 하셨는데, 진선의 경지에 대응되는 경지는, 모르시는 겁니까?"
[안타깝게도 모른다. 애당초 3보의 개념을 만든 게 나다. 누군가에게 가르침 받아서 만든 개념이 아니기에 너무 높은 경지는 알 수 없어서 모르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나를 쳐다보았다.
[또 묻고 싶은 게 있느냐.]
"예, 한 가지 더 여쭤도 될지요?"
[그래.]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레 장익에게 물어보았다.
"혈음계를 제외한, 모든 중경계의 쇄성기 존자들께서는 현재 출타 중이라 들었습니다. 듣기로는, 성계에 있는 부해계, 그런 것을 찾고자 한다더군요."
[뭐 틀린 말은 아니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걸 찾으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뭐, 큰 비밀은 아니니 말해 주마.]
그는 큰 비밀은 아닌 듯이 가볍게 얘기를 했다. 하나 이어진 장익의 말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현재, 전 계의 쇄성기 존자들은 12만 년 전의 망나니, 뇌선(雷仙) 양수진의 유해(遺骸)가 있는 곳으로 진입하려 집결해 있는 상태지.]
"뇌선… 양수진의 유해…?"
[그래. 뇌선 양수진의 유해 중 일부는 산산조각 난 채 성계를 떠돌아다니고 있고, 그 성계를 떠돌아다니는 유해 중 일부는 부해계로 변화하였다.]
"부해계…."
역시, 부해계란 진선의 사체 조각으로 만들어지는 하계인 듯했다.
[4만 년 전… 양수진의 유해를 찾으려 그가 임종을 맞이했다는 수계에 내려갔으나, 수계에는 그의 유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수많은 고위 수도자들이 온 천역을 뒤져 마침내 양수진의 흔적이 있는 곳을 알아냈지.]
"…어째서 양수진의 흔적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입니까?"
[…양수진은 생전에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을 각 중경계에서 도둑… 아니, 대여해 가 놓고 돌려주지 않았다. 각 중경계에게는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것인지라 그에게서 그것들을 되찾기 위해서지.]
아무래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일부러 말하지 않는 듯했다.
[양수진은 자신의 선보에 중경계의 귀중한 핵심들을 꽂아 넣었고, 양수진의 유해를 찾으면 선보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양수진의 선보… 말씀입니까?"
나는 문득 천뢰번을 떠올렸다;
"혹 천뢰번이라는 것이 그것입니까?"
그러나 장익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천뢰번은 양수진의 선보가 아니야. 양수진이 사용한 선보는 맞지만, 전설로는 그가 진선계의 어느 고명한 존재에게서 강탈해서 쓰는 것이라 하더군.]
"…."
[이건 그냥 내 생각이긴 한데, 양수진에게 선보를 강탈당한 존재는 피눈물을 흘리며 선보를 되찾을 날을 기다리고 있겠지? 하하하….]
어째, 흘려들을 수 없는 얘기였다.
그 말대로라면, 얼마 후 금신천뢰문에 강림할 진선은 양수진에게 원한이 덕지덕지 눌어붙은 진선계의 고명한 존재라는 것이 아닌가.
'천뢰번만 가져가서 현음의 입에 꽂아 넣으면 문제가 해결일 거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진선이 강림한 시점에서 양수진의 의발을 이은 문파들은 모조리 끝장인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장익에게 몇 가지 궁금했던 점을 더 질문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시간이 흘러 하루가 흘렀다.
나는 규련의 사체 옆에서, 내가 행성 곳곳에 설치한 진법들이 작동하는 것을 느꼈다.
우우웅!
규백과 유화 역시 내 쪽으로 모여들었다.
행성 전체의 희박한 영기들이, 행성 전역의 용맥을 타고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희박한 영기였으나, 한곳으로 몰리니 광한계 본토보다도 일순간 영기의 농도가 짙어진다.
키이이잉!
나는 영맥들의 중심에서 수결을 맺으며 공간 균열을 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50년 동안, 광한계로 비승하기 위해 만든 진법.
귀환광계진.
나는 귀환광계진을 제어하며, 옆에서 우리를 쳐다보는 장익의 분체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래, 다들 수고했다. 서은현, 너는 뭐 딱히 할 말은 없다. 앞으로도 꾸준히 정진하면 투혼3보, 구현 3단계에 닿을 것이야.]
장익은 우리를 차례대로 뜯어 보며 말을 이었다.
[유화, 너는 하현 마지막에 올랐지만 아직 경지가 일정치는 않다. 그리고 비승하면 비승 직후는 천, 지족 놈들이 관리하는 건곤중역 비선대일 테니 긴장해야 할 터다. 네가 다 대 일에 능하고, 서은현이 알려 준 월수궁무록이 있더라도 사축기 수사들이 바글거리는 곳이니 긴장해라. 거기에 건곤성에는 합체기 태수도 머물 테고… 뭐, 내가 알려 준 방법을 쓰면 건곤성 합체기 태수도 함부로는 못할 터다.]
그는 유화에게 충고를 준 다음, 규백에게 시선을 돌렸다.
[규백, 너는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가르쳤던 놈들 중 최악이었다. 자질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마음 상태에 대한 것이 문제지.]
"…."
[늘 네 자신을 찌꺼기라 생각하지만, 너는 어떤 의미로 관주사자 규련 본인이기도 하다.]
"…그럴 리가…."
[흥, 존재의 본질에 대해 고찰하여 경지에 달하는 게 심족인데, 그런 심족 쇄성기 급 존자께서 하는 말을 못 믿는 게냐?]
"…."
[늘 스스로를 찌꺼기라 생각하고, 서휼이란 녀석에 대한 애증에 사로잡혀 있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골치 아픈 녀석이 너였다. 하지만….]
장익은 그녀의 어깨를 짚어 주며 미소를 지었다.
[천, 지, 심족을 떠나. 한 명의 선배로서 네가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다.]
우웅!
장익은 그녀의 심상에 무언가를 불어넣었다.
[자, 그럼 이제 다들 가 보거라! 짧지만 즐거운 만남이었다!]
우우우웅!
나는 귀환광계진을 발동시킨 후, 장익에게 절을 올렸다.
유화와 규백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예를 올렸다.
나는 장익에게 예를 올린 후 규련의 사체를 쳐다보았다.
규백 역시 규련의 사체를 쳐다보았다.
규백은 스스로를 규련의 조각, 찌꺼기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말에 따르면 진짜 규련은 죽은 것이었고, 고로 오늘 보는 규련의 사체가, 내가 이번 생에 기억하는 규련의 마지막 모습인 셈이었다.
'편안히 잠드십시오, 규 선배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나는 규련에게 역시 마음속으로 절을 올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귀환광계진이 빛을 발하며 우리를 저 공간 너머로 쏘아 올렸다.
파아아앗!
천인기에 대응되는 답천 너머에 도달한 유화가 금을 타기 시작했고, 나와 규백은 그녀에게 붙어서 공간 압력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휼에게 배신당하고 60년의 세월이 흘러, 우리는 귀환을 위한 비승(飛昇)을 시작하였다.
번갯불 (1)
파아아앗!
환한 빛과 함께, 우리는 공간 압력을 받는 허공간으로 방출되었다.
그와 동시에 귀환광계진이 빛나며, 내가 진법에 입력해 놓은 광한계의 좌표와 연동된다.
우리는 광한계를 향하여 강하게 쏘아 올려졌고, 어마어마한 공간 압력으로부터 유화가 우리를 지켰다.
쿠구구구구!
천인기 수사들 중, 실력이 있는 이들은 타인의 공간 압력을 대신 맞아 주며, 다른 이들을 데리고 비승하기도 하였다.
그런 천인기 수사들은 자신이 본래 맞아야 하는 공간 압력보다 더한 압박을 받으며 비승해야 했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느라 안면이 찌그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에 원영기 수사인 나와, 실질적으론 범인이나 다름없는 규백을 데리고 비승하는 유화도 마찬가지였다.
유화의 얼굴은 공간 압박과, 고통에 짓눌려 잔뜩 찌그러져 있었고, 나는 그녀의 뒤에서 생명력을 공급해서 그녀가 짜부라지는 것을 막아 주며 함께 비승하였다.
쿠르르릉!
천겁과 다름없어진 그녀의 연주가 울릴 때마다 주홍빛 강물이 위쪽으로 솟구쳤고, 공간 압력을 떨쳐 내었다.
[언제든 기력이 떨어지면 말하시오, 교대해 주겠소.]
[아직 괜찮습니다.]
나 역시 천, 지족 원영기에다가 답천까지 얻어서 전신이 어지간한 천인기 수사 이상으로 단단했기에 교대해 줄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등 뒤에 매달려 가며, 주변의 풍경을 보았다.
아름다운 성계의 별하늘들이 이지러지며 우리 아래쪽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침을 삼켰다.
'이번에 올라가게 되면, 어쩌면 또 회귀 시점이 고정될지도 모르지.'
회귀 시점이 고정되는 기준은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알 수 없었다.
차원을 넘는 것인가 하면 진마계에 갔을 때는 시점이 고정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비승하는 것이라면 시점이 고정이 될까?
'…일단 가 보자.'
시점이 고정되든, 되지 않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왔다.
'지금까지 인생에, 부끄러운 점은 없었으니….'
설령 고정되더라도, 그저 감사하며 앞으로 나아가자!
얼마 후 유화가 나와 교대를 청했고, 나와 그녀는 번갈아 가며 교대로 공간 압력을 정면에서 맞았다.
그렇게 사흘이나 지났을까.
파아아아앗!
저 멀리, 익숙한 영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나는 유화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제 시작이오. 긴장하시오.]
[예.]
파아아앗!
난 저 멀리서 보이는 빛살에 눈을 찌푸리며, 곧 나를 덮쳐 올 차원 장벽의 충격에 대비하였다.
'무형검!'
나는 무형검을 곧추세우며 차원 장벽으로 딸려 갔고, 얼마 후.
번쩍!
우리는, 마침내 비승에 성공하여 광한계로의 귀환에 성공하였다.
파아아앗!
* * *
촤악!
익숙한 영기다.
여태껏 희박하게만 느껴졌던 하계의 티끌 같은 영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바다와 같은 천지영기가 내 몸을 감싼다.
그리고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익숙한 옷을 입은 사축기 수사가 다가왔다.
"어서 오시게, 이곳은 광한계 건곤중역 건곤성의 비선대라네. 자네들은… 으응?"
그리고, 그는 내 경지를 훑어본 후, 내 뒤에 있는 규백과 유화를 훑어보았다.
"…아니, 원영기 하나에 축기기 하나… 그리고 저건… 노예 종족인가?"
규백을 보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무심하게 노예 종족이라고 말하자, 규백의 눈에 일순간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너희, 뭐냐? 어떻게 비승한 거지? 혹시 허공간에 사는 괴물들인 건가?"
그리고 다음 순간.
유화는 부드럽게 웃으며 금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연주를 시작하였다.
투웅―
그녀의 연주는 제대로만 듣는다면 너무도 아름다웠으나, 제대로 듣지 않고 현상만을 느낀다면 오로지 천둥소리로만 들릴 터.
그리고, 그녀의 주변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주홍빛 강물과 천둥소리를 들은 인근의 사축기 수사들의 안색이 와락 일그러졌다.
[심족 첩자다!!!]
[일단 쳐 죽여라!]
[구, 구현 3단계 심도공법이다! 모두 피해!]
다음 순간, 사방으로 주홍빛의 천뢰가 흩뿌려진다.
사방에서 천인기 수사들은 물론이고, 사축기 수사들의 비명 소리 또한 들려 왔다.
천인기 급의 공격력인 환람연하가 사축기 수사들에게 위협이 되진 않지만, 축을 쌓을 때마다 천겁을 맞아야 하는 사축기 수사들로썬, 지금 유화를 상대한다는 것은 어지간히 실력에 자신이 있지 않으면 앞으로 수행을 포기한다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었다.
그러나 지휘관이 없지는 않았는지, 냉엄한 목소리가 사축기 수사들을 휘어잡았다.
[전원 정신 차려라! 모두 저 심족 첩자를 중심으로 차륜전을 펼치며 접근해라! 몇 발 맞아도 상관없다. 건곤성에서 천겁에 도움이 되는 부적 및 단약을 지급할 것이다!]
그 말에 허둥지둥 유화의 공격을 피하던 사축기 수사들이 대열을 다잡고 법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천인기 수사도 아니고, 다수의 사축기 수사들이라면 제아무리 구현 3단계에 이른 심족이라도 위험하다.
하지만.
"자, 그럼."
나는 유화의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잡은 후, 허공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답천으로 하나된 무형검이 허공에서 인지를 끊어 가른다.
의식뿐이 아닌 기운을, 기운뿐이 아닌 우리의 생명 그 자체를 일순간 베어 내서 사축기 수사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우리는 하늘로 빠르게 날아올랐다.
"조심해라, 건곤성에는 전역에 결계가 쳐져 있다. 저기 저곳이 하늘길에서 건곤성을 나가는 출구야."
규백은 구름이 날개 한 쌍 모양으로 갈라진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전, 규련이 요족들을 그녀의 몸체에 태워서 데리고 나갈 때 지나쳤던 구름이었다.
나와 유화는 그 말을 듣고 방향을 전환해 그녀가 알려 준 길을 따라 무사히 건곤성의 결계에서 빠져나왔다.
그렇게, 우리는 성공적으로 비승하여 비선대에서 빠져나왔다.
* * *
"이제 어디로 가실 거죠?"
유화는 익숙한 주홍빛 강물의 형태로 변하여, 인근 산맥에 내려앉아 우리에게 물었다.
"저는 일단 진룡맹으로 돌아가, 서휼의 동향과 제자 백녕의 상황을 알아볼 것입니다."
"나도 그럼 따라가서 함께 서휼의 동향을 알아보도록 하지."
유화의 말에 규백은 그녀를 따라가겠다고 했고, 나는 둘에게 말했다.
"저는 아무래도 인족 영역 측에 볼일이 있는지라 잠시 인족 영역에 다녀와야겠습니다."
"그래, 다녀와라."
"차후에 다시 만나지요."
나는 규백과 유화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빠르게 헤어졌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천뢰번을 가져가려는 진선이 강림하기 전.
금신천뢰문으로 가, 선보를 훔쳐 지족 영역으로 향한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도, 양수진에게 원한이 있는 진선이라면 어떻게든 금신천뢰문에 저주를 내릴 테지만, 일단 할 수 있는 걸 해 보기로 했다.
'너무 빨라서도, 늦어서도 안 돼.'
진선이 오기 전에 너무 빨리 선보를 훔치면 선보를 들고 오래도록 도망을 다녀야 하니 비효율적이며, 진선이 오기 직전에 선보를 훔치면 서휼이나 현음의 아가리에 선보를 꽂기 전에 나 혼자만 벼락을 맞을 수 있다.
'선보를 훔쳐서, 딱 지족 영역, 서휼이나 흑룡왕의 영지에 가져다 놓기 적당한 시간을 계산해 거사를 진행한다.'
서휼의 밑에 있던 당시 굳이 천뢰번을 바로 훔치지 않았던 것은, 내가 서휼의 눈치 속에서도 정신이 피폐해져 가고 있기도 했지만, 시간 문제도 있었다.
괜히 몇십 년이나 앞당겨서 선보를 훔치면 몇십 년 동안이나 금신천뢰문의 추격을 받아야 할 테니 말이었다.
나는 인족 영역으로 날아가며 계획을 짰다.
'우선 뇌령도로 가 금신천뢰문에 대한 전반적인 걸 알아봐야 해.'
천뢰번의 위치, 특징, 생김새.
누가 지키고 있는지 등.
'어디에 있는지 알고, 어떻게 생긴 건지 알고, 어떻게 운반해야 하는지만 알아내면, 천뢰번은 내 손에 들어온다.'
웃기는 일이지만, 내 능력들은 은근 도둑질에 치중되어 있었다.
무형검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자물쇠를 해체할 수 있었고, 월수궁무록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
거기에 음혼귀주문으로 저주인형을 만들어 놓으면 저주인형을 조종해서 조사하는 이들을 헷갈리게 만들 수 있으며, 흑룡 진혈이 지닌 태음의 힘으로 한밤중에는 존재감이 크게 옅어진다.
'거기다가 내가 익혀 온 공법들은 절대다수가 토 속성.'
번개와는 상극인 속성이기에, 금신천뢰문에서 나를 막을 이들은 아마 없을 터였다.
'좋아, 천뢰번을 훔치러 가자.'
나는 마음을 다잡고, 인족 영역.
뇌령도로 향하였다.
* * *
쿠릉, 쿠르르릉….
뇌령도 인근에는 늘 먹장구름이 번뜩이며, 곳곳에서 우렛소리가 울렸다.
나는 월수궁무록을 사용하며 존재감을 감추고 뇌령도 인근으로 접근했다.
우우웅!
뇌령도에는, 여느 인족 천공도들이 그렇듯이 커다란 결계가 둘려 외부인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시운도의 명적에 이름을 등록하지 않은 인족이 함부로 결계를 통과해 진입하면 곤혹을 겪게 될 터.
하나 나는 걱정하지 않고, 결계 위에 손을 댔다.
우우웅!
결계는 반발하려는가 싶었으나, 나는 결계 위로 괴군의 회로를 깔기 시작했다.
결계의 아주 작은 일부가, 그대로 괴군의 꼭두각시로 변화하였다.
"개문."
철컥!
나는 결계의 문을 쉽게 따고 들어간 후 주변을 살폈다.
'이곳이 뇌령도….'
우릉, 우르릉….
어두운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나 곳곳에 구름이 떠다니며, 구름 안쪽에서는 푸르거나 혹은 누런 번갯불이 번뜩였다.
'일단 정보를 모으자.'
나는 뇌령도에 있는 시장으로 잠입하여 일단 금신천뢰문과 천뢰번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로 했다.
며칠 후.
나는 천뢰번과 금신천뢰문에 대한 정보를 상당히 모을 수 있었다.
금신천뢰문은 뇌령제일종문이었던 뇌운각을 밀어내고 자리를 잡은 문파였다.
그 과정에서 뇌운각 소속 사축기 원로를 금벽호가 일격에 격살했다는 소문은 뇌령도 곳곳에 파다하게 나 있었다.
'아마 그 원로는 연위겠지. 그리고 연위는 후손 연진의 몸을 입은 채 진마계에 가 있을 터.'
금신천뢰문의 신물인 천뢰번은, 금신천뢰문이 자리를 잡은 뇌운봉의 가장 높은 봉우리.
그곳에 있는 사당에 보관되어 있으며, 평시에는 장문인만이 꺼낼 수 있었다.
물론 태상 장문인이나 원로원 역시 천뢰번을 꺼내는 것은 가능하나, 원칙적으로는 장문인이 관리하는 신물이 천뢰번이었다.
'천뢰번은 주로 문파 제의 때에 꺼내진다. 그리고 평소에는 천뢰번의 경비가 빽빽하지만, 오히려 문파 제의 이후에는 조금 경비가 느슨해지는군.'
천뢰번이 봉해진 사당은 금신천뢰문의 제자들 중 급수가 가장 높은 이들이 교대하며 감시를 했는데, 이들의 경지는 창천개벽문의 일운 제자처럼 원영기 경지가 한가득이었다.
'경비는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여차하면 전부 밀어 버리고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천뢰번이 봉해진 뇌운봉이라는 곳은 금신천뢰문의 중앙에 있는 봉우리.
'내가 천뢰번을 가지고 나오면, 뇌운봉 인근에서 수련을 하는 천인기 원로들이 눈이 뒤집혀 달려들 터다.'
사실 그래도 상관은 없다.
어차피 흑룡 진혈을 격발시켜서, 뿔과 비늘을 드러낸 채로 훔칠 거였으니까.
나 용족이오, 하고 훔치면 어차피 욕은 용족이 다 얻어먹으니 훔치다가 들켜도 문제는 없었다.
내가 현재 가장 걱정하는 것은 금신천뢰문의 현 태상 장문이자, 유일한 사축기 수사인 금벽호였다.
'과연 사축기 대원만인 연위를 격살한 것은, 금벽호 단독의 실력인가, 아니면 천뢰번이 있었기에 가능한 요행인가.'
후자라면 금벽호고 뭐고 두들겨 패고 강탈해 오면 된다.
하지만 전자라면 상당히 골치가 아파졌다.
'제일 좋은 방법은, 일단 금신천뢰문 제자로 위장을 한 다음, 사당 가까이에 가서 천뢰번을 훔치고 얼른 월수궁무록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그게 가장 깔끔하다.
그럼 일단, 어떤 제자로 위장을 하는 게 가장 효율적일까.
나는 금신천뢰문의 제자들 역시 조사하기 시작했다.
금신천뢰문 인근 영역을 돌아다니며 금신천뢰문의 제자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행동 양식, 특징, 배경 등을 알아냈다.
그렇게 몇 주간 금신천뢰문의 뒤를 캘 때였다.
"흠…!"
나는 그러던 중, 익숙한 얼굴의 남성이 한 여성과 다정하게 거리를 걷는 모습을 보고 몸이 굳었다.
'…오랜만이군, 전명훈.'
나는 그날, 이 세상에 떨어지고 금신천뢰문에 납치된 후.
내가 본 것 중 가장 행복해 보이는 전명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연인인 듯 보이는 여인과 거리를 거닐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진선을 만나기 전의 녀석은, 저런 상태인가.'
너무 괴리감이 컸다.
금신천뢰문이 망한 후, 산발한 머리에, 시뻘건 적포를 입고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명한 그 얼굴과는 너무도 다르다.
'…내가 천뢰번을 어떻게 처리하지 못하면, 전명훈은 결국 그렇게 되겠지.'
전명훈 자체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진선의 강림으로 피해를 볼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기에, 전명훈을 비롯한 이 뇌령도 전체를 구하겠다고 다짐했다.
천뢰번이라는 흉물을, 더 좋게 써 줄 이에게 가져다주어 모두가 행복해지는 이야기를 만들자.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나는 전명훈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네가 가장 적당하겠지.'
근시일 내에, 전명훈을 납치할 계획이었다.
'며칠 정도만 네 신분을 빌려 쓰겠다, 전명훈.'
번갯불 (2)
전명훈을 납치하는 건 굉장히 쉬웠다.
혼자 있는 틈을 타서 월수궁무록으로 접근해, 무형검으로 혼의 계위를 타격해 기절시켜 버린 후 들쳐 매고 다시 월수궁무록을 쓰면 끝이었으니까.
거기다, 전명훈이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약했던 것도 있었다.
'너무 약한데?'
말 그대로였다.
전명훈은 고작해야 결단기 수준밖에 되지 않았고, 계위도 차마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수준이었기에, 납치하는 건 정말로 우스울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찌푸렸다.
'지난 생의 전명훈은 사축기 감찰관을 쓰러뜨릴 정도로 강했다.'
그리고 그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다.
'몇 개월 뒤다.'
고작 몇 개월 만에, 이 녀석은 어떻게 결단기에서 사축기 수준으로 도약하는 것일까.
그것도 의아한 일이었다.
'뭐, 지금 내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지.'
나는 내 의식을 뜯어냈다.
우우웅!
기괴고의 술.
견신에게서 받았던 기생의 술법이다.
촤르륵!
기괴고의 술을 발동시키자, 내 의식이 손안에서 꿈틀거리며 자그마한 애벌레 같은 형상으로 변했다.
회색빛의 애벌레는 내 손 위에서 꿈틀거리다가, 내가 전명훈의 얼굴로 손을 가져다 대자 녀석의 콧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기괴고의 술이 전명훈의 상단전에 안착해 녀석의 의식에 자리 잡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계속 아무도 모르게 전명훈을 침식시켜 나가면, 10년 정도만 있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전명훈의 인격을 지워 버리고 녀석을 내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었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다만….'
내가 전명훈에게 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며칠간의 연기였다.
우우웅!
전명훈의 상단전에 흘러 들어간 기괴고의 술법을 발동시키자, 전명훈이 눈을 번쩍 떴다.
이렇게 기괴고의 술법으로 상대를 강제로 조종하면 효율은 좋지만, 기괴고가 빠르게 닳아 버려 상대의 의식 속에서 녹아 버린다는 단점이 있었다.
물론 며칠 정도만 버티면 충분하긴 했지만.
"들어라, 전명훈. 너는 이제부터 금신천뢰문으로 들어가서, 금신천뢰문의 뇌운봉에 있는 천뢰번을 가져와라. 알겠나?"
"…예, 알겠, 습니다…."
전명훈은 기괴고의 술법에 지배당한 채 흐리멍텅한 눈으로 대답했다.
나는 전명훈을 장악한 후, 그를 풀어 주었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이제 전명훈을 원격으로 조작하며 그를 통해 천뢰번을 빼돌려야 한다.
나는 전명훈의 시점으로 시야를 돌리며, 그의 몸으로 금신천뢰문에 돌아갔다.
'어디, 그럼 조사를 해 볼까.'
"사제! 어디 갔다 온 거야?"
그때였다.
전명훈을 향해, 금색 궁장을 입은 여인이 아는 척을 하며 다가왔다.
그녀는 전명훈을 보자 발갛게 볼이 달궈지며, 기쁨의 의념을 토해 냈다.
이전 전명훈과 거리를 거닐던 여성이었다.
'태상장문인 금벽호의 현손녀, 금소해.'
그리고, 전명훈과는 금슬 좋은 한 쌍의 연인이라고 들었다.
금신천뢰문에서는 애당초 유명한 이야기였기에 딱히 조사할 필요도 없이, 소문만 접해도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애당초 전명훈은 금신천뢰문에서 현재 제일 유명한 녀석이니까.'
말 그대로, 천상금뢰지체를 타고났다는 전명훈은 금신천뢰문에서 가장 유명한 유명인사였다.
그런 전명훈이 태상장문인의 현손녀와 사귀고 있는데 소문이 안 날 리도 없었다.
나는 둘의 소문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며, 전명훈의 입을 움직여 대답했다.
"그냥 바람 좀 쐬고 왔습니다."
"…?"
그러나, 금소해는 뭔가 위화감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사제. 왜 갑자기 바람 잡고 있어? 언제부터 나한테 존댓말 했다고?"
"…그냥."
나는 전명훈의 말투를 기억 속에서 떠올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한번 해 봤다. 무슨 일이냐."
"아, 그게 말이지. 사제가 지난번에 나한테 한 말 있잖아? 그거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
"…."
그녀가 말을 걸자 나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제길, 전명훈하고만 아는 얘기를 꺼내면 반응할 수가 없는데….'
전명훈의 의식을 깨워야 하나.
내가 고민할 때였다.
"역시… 같이 도망가자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 거 같아."
"…."
'전명훈 이놈은, 앞길이 창창한 문파 규수를 데려다가 무슨 얘기를 하고 다녔던 거냐.'
"내게 금신천뢰문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함께 했던 문파야. 사실상 금신천뢰문은 가족이나 다름없어. 가족을 버리고 어디를 가겠어. 너를 아무리 좋아한다고 하지만, 미안…."
"…."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일단 전명훈의 입을 빌어 얘기했다.
"…나중에 얘기하지."
"그래. 너도 복잡하겠지. 나중에 다시 보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일단 전명훈의 몸으로 자리를 벗어나 문파 깊숙이 들어갔다.
'전명훈의 거처는 뇌운봉과 그리 멀지 않다.'
그렇다면 일단 뇌운봉에도 한번 가 볼까?
나는 녀석의 몸을 움직여 뇌운봉에 도착했고, 뇌운봉 정상에 도착했다.
'이곳이 뇌운봉 정상, 천뢰번이 보관된 사당….'
내가 자그마한 사당을 바라볼 때였다.
"전 공자, 여기는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원영기 장로 한 명이 전명훈에게 날아오며 그를 훈계했다.
"천뢰번이 보관된 이 봉뢰당에 들어오고 싶으시면, 열심히 수련을 하셔서 우선 천인기에 도달하시는 게 먼저입니다. 전 공자의 자질이면, 이백 년 안에 충분히 천인기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 마음을 추스르시지요."
'역시, 전명훈이 아무리 좋은 자질을 지녔다고 해도 들어가 보지는 못하는군.'
태상장문인의 직전제자라도 함부로 들어가기는 힘든 것이다.
"아무래도 최근 여러 일로 심란하시겠지요. 약혼했던 소해 아가씨와 혼인하는 것이 아닌, 합체기 태수의 딸과 갑자기 혼담이 오가니, 전 공자의 마음도 이해는 갑니다. 더군다나 태수의 딸은 성질이 굉장히 해괴하다고 하니 고민되시겠지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봉뢰당을 지키는 장로는 한숨을 쉬며 전명훈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실 건 없으십니다. 전 공자는 개파사조이신 금신자와 같은 자질을 지니셨으니 당신의 가치는 결코 천뢰번에 비해 떨어지지 않습니다. 금신천뢰문에서 최대한 전 공자를 비호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전명훈의 입으로 감사를 표한 후, 전후 상황을 조합해서 그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알아챘다.
'금벽호의 현손녀에게 같이 도망가자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합체기 태수의 딸과 혼담이 오갔다. 태수의 딸은 성격이 괴팍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합체기 태수의 딸과 덜컥 혼인이라도 하게 될까 무서워, 금소해와 함께 금신천뢰문에서 달아나자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동시에 나는, 전명훈의 가치가 천뢰번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머릿속에 천뢰번 탈취 계획에 틀이 팍 짜이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렇다면….'
나는 머리에 떠오른 구상을 정리한 후.
뇌운봉에서 내려와 금소해를 찾아갔다.
"전 사제, 답은 생각했어?"
"그래."
나는 전명훈의 몸으로 금소해를 금신천뢰문의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대고, 비밀스러운 얘기를 하는 것처럼 속삭였다.
"떠나기로 했다. 말리지 마라."
"…! 너…."
"뇌령도를 떠날 거다. 아예 인족 영역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 버리면 문제가 없겠지."
"…."
"그동안 고마웠다. 잘 있어라."
"잠깐…!"
그녀가 전명훈을 불렀지만, 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걸로 됐다.'
아직 전명훈의 말이 정말인지 아닌지는 진위를 파악하지 못할 터였다.
그러나 오늘 저녁부터 시작해서, 전명훈은 정말로 며칠 정도 사라질 예정이었다.
나는 전명훈의 몸을 사람이 없는 곳으로 끌고 간 후, 녀석 안에 있는 기괴고를 통해서 월수궁무록을 펼쳤다.
슈칵!
전명훈은 곧이어 타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나는 그 상태로 전명훈을 조작하여 녀석을 뇌운봉 아래쪽.
땅 밑을 파서 전명훈의 몸체를 집어넣은 후 기다렸다.
'원유, 갔다 와라.'
그리고 나는 원유를 통해 뇌령도 끝자락, 뇌령도의 보호 결계를 후려쳐 누군가가 강제로 뚫고 나간 듯한 흔적을 만들었다.
이제 며칠 동안 전명훈이 금신천뢰문에서 보이지 않으면 금신천뢰문은 난리가 날 것이다.
그리고 금소해는 전명훈의 말을 그대로 금신천뢰문 상부에 전할 것이고, 금신천뢰문에서 조사를 해서 뇌령도의 결계에 누군가 뚫고 나간 흔적이 있는 것을 본다면, 그대로 금신천뢰문이 뒤집혀서 전명훈을 찾는답시고 사방으로 사람을 파견할 터.
'금신천뢰문이 한바탕 난리가 날 테고, 문파 고위직들도 전부 바깥으로 나가 있을 테니 그사이 전명훈의 몸을 움직여서 천뢰번을 훔쳐 오면 된다.'
훔칠 방법은 마련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도주로였다.
'천뢰번이 도둑맞은 걸 알면 금벽호가 눈이 뒤집혀서 쫓아올 터다.'
천뢰번같은 귀중한 선보에 추적법술이 안 걸려 있으리라거나, 혹은 금신천뢰문의 인물들이 천뢰번에 감응하는 공법을 익히지 않았으리라는 건 너무 어린 생각이다.
'제아무리 잘 훔쳤다 해도, 결국은 들키게끔 되어 있어. 그러니 도주로를 확보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디로 도망칠 것인가.
어떻게 도망칠 것인가.
'도주로는 답이 나와 있지.'
인족 영역 바깥으로 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인족 영역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인족 총연맹 총본산, 천인도로 간다.'
그런 다음 천인도에 있는 타 종족 전송진을 이용하여 다른 곳으로 날아간다.
1차 경유지는 한령족 영역 광령지였다.
'이번 생에는 김연을 어떻게 돌봐 줄 틈이 없었다.'
초반에는 서휼의 눈칫밥을 먹으며 생활하느라, 숨 쉴 틈도 없었고.
그 이후에는 서휼 때문에 하계에 떨어져서 장익에게 가르침을 받는 나날이었다.
'연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쨌든 내가 연이를 돌봐주지 않고, 그녀를 괴군에게서 뺏어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괴군은 현재 아직도 광령지 인근에서 히히덕거리며 [그녀]를 매만지고 있을 터.'
광령지 인근.
괴군이 있는 장소를 경유해서 지족 영역으로 향한다.
그렇게 한다면 금벽호 역시 차마 괴군 근처를 쫓아올 엄두는 못 낼 터였다.
그리고, 그렇게 훔쳐 낸 천뢰번을 서휼의 아가리에 집어넣는 것이 이번 생의 가장 큰 목표!
나는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
'어떻게 되든, 서휼에게 한 방을 먹인다.'
탈취 방법도 마련했고.
도주로도 확보했으며.
천뢰번의 처리 방법도 생각했다.
물론 천뢰번을 처리해도, 천뢰번을 찾으러 온 진선이 금신천뢰문에게 또 저주를 건다면 어쩔 순 없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그리 된다면 지금의 나로서는 손쓸 방법 따위가 없다는 거니까.
'좋아, 기다리자.'
나는 전명훈의 의식 속에 숨겨 둔 기괴고로, 전명훈의 몸으로 월수궁무록을 극한까지 펼친 채.
그렇게 뇌운봉 아래에서 쭈욱 시간을 보냈다.
* * *
칠 주야가 지났다.
금신천뢰문은 뒤집어졌다.
문파의 개파사조 양수진과 같은 자질을 지닌 전명훈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연인인 금소해의 증언이 더더욱 충격적이었다.
문파의 사람들은 전명훈이 합체기 태수의 딸과 혼약하기 싫어 잠시 가출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금소해의 말에 따르면 전명훈은 뇌령도를 아예 떠 버린 상황!
그에 금신천뢰문의 원로들이 뇌령도의 결계로 가서 조사를 했고, 다시 한번 뒤집어졌다.
뇌령도의 결계를, 누군가가 우악스레 뚫고 나간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에, 금신천뢰문 전역에 비상이 걸렸다.
원영기 장로 70명, 천인기 원로 33명.
그리고 태상장문인이자 문파의 유일한 사축기 수사, 금벽호가 직접 전명훈을 찾으러 나섰다.
그렇게, 금신천뢰문은 빈집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몸을 움직였다.
'지금이다.'
우우웅!
나는 전명훈의 몸으로 뇌운봉을 올라, 천뢰번을 보관하는 봉뢰당의 앞에 섰다.
'오늘, 천뢰번은 내 손에 들어온다!'
이것으로, 부디 금신천뢰문에 그 끔찍한 재앙이 덮치지 않기를.
나는 봉뢰당 인근에서 봉뢰당을 지키는 원영기 장로들 중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봉뢰당에 손을 댔다.
그리고 전명훈을 원격으로 조작하며 봉뢰당 표면에 괴군의 회로를 깔기 시작했다.
치지직….
얼마 후, 봉뢰당이 내 손에 들어왔다.
'이제 들어가서 훔치기만 하면 된다만….'
아무래도 옆에 있는 원영기 장로들이 거슬린다.
월수궁무록이야 '시야'를 기반으로 펼치는 무학이기에 충분히 펼칠 수 있었지만, 기괴고의 연약한 의식으로는 무형검 같은 것은 무리였다.
한 마디로 기절시키거나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걸로 시선을 끌어 볼까.'
나는 원유를 꺼냈다.
"시간을 끌어라, 원유."
내 품속에 잠들어 있던 원유는, 내 명에 의해 인간형으로 변하며 일어섰다.
나는 전명훈을 원격으로 조작하여 월수궁무록을 유지하며, 원유를 금신천뢰문의 앞으로 보냈다.
지난 50년간.
우리가 떨어졌던 행성의 용맥에 손을 뻗치며, 원유 역시 원영기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원립이 답천사막 인근 곳곳 용맥 속에 뿌려 놓았던 혈영.
그 혈영들을 용맥으로 응결해서 다시 합쳐, 원유는 주가 되는 혼(魂)이 없는 상태임에도 원영을 응결한 상태였다.
'정확히는 기괴고의 술법으로, 영력을 억지로 뭉쳐 놓은 형태지만….'
어쨌든 원유는 원영기 경지를 찾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원립이 심혈을 다해서 만들어 놓은 원유의 몸은 나보다 자질이 뛰어났는지, 벌써 원영 중기인 상황이었다.
'자아, 보여 줘라.'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솔직히 불쾌한 술법들이었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의 술법들일 뿐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나은 것 같았다.
"혈마진해(血魔鎭海)."
원유가 결인을 맺자, 그와 동시에 그의 주변으로 시뻘건 피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꽈아아앙!
원유의 법술이, 금신천뢰문의 결계를 강타했다.
'이제 시작이다.'
문파의 주요 전력은 전명훈을 찾으러 대다수가 나가고, 빈집이 된 금신천뢰문.
남은 금신천뢰문에는 과연, 전성기 원립과 비할 만한 인재가 있을까?
번갯불 (3)
"이런 미친, 어떤 놈이 금신천뢰문을 습격한 게냐!?"
"더 살기가 싫은 놈이로구나!"
다섯 명의 원영기 장로들이 눈에서 번갯불을 튀기며 원유의 주변을 빠르게 에워쌌다.
그들은 원유의 외모를 보고 잠시 헛숨을 들이키는가 싶더니, 각기 수결을 맺으며 법보를 불러내고 법술들을 준비했다.
나는 원유의 시선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어쩐지 굉장히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일반적인 인족 수도자들과 붙어 보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군.'
괴군에게 잡혔을 때는, 꼭두각시의 몸으로 상대와 붙는다기보다는 내가 꼭두각시인 서 장군을 제압하기 위해 기묘성채와 싸우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간 창천개벽문에서는 모두가 웃통을 벗고 다니며 강철같은 몸으로 육탄전을 즐겨 했기에 법보나 법술을 쓰는 이들이 없었다.
이번 생에서는 아예 인족이 아닌 요족 측에서 지내 왔기에, 법보 대신 요족의 강인한 육신을, 법술 대신 요술을 쓰는 요수들과 대련해 오다 보니, 저렇게 정통적으로 법보를 꺼내 쓰는 수도자들 자체는 어마어마하게 오랜만에 상대하는 것이었다.
"내리찍어라, 뇌격번!"
수염이 긴 장로가 노한 듯이 푸른 색의 깃발 법보를 휘두르자, 하늘에서 푸른 벼락이 원유에게 떨어졌다.
"혈쇄수림."
다음 순간 원유는 결인을 맺어, 주변의 피안개에서 붉은 혈목을 뽑아내 방어막을 만들었고, 벼락은 혈목을 불태웠다.
그리고 수염 긴 장로를 시작으로 하여, 다른 장로들 역시 각기 법술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 오문선사(五門仙師)를 상대로 감히 싸움을 벌이다니, 단단히 돌아 버린 것이로구나!"
"오문선사…."
나는 원유의 몸으로 그들의 법술을 맞으며 씨익 웃었다.
"금신천뢰문의 방어 결계를 지키는 문지기들이라 들었다. 한 마디로, 너희만 붙잡고 있으면 금신천뢰문의 정문은 지킬 자가 없다는 게지?"
"…! 동료가 있었는…."
콰아아앙!
오문선사라고 불린 원영기 장로들의 말이 끝나기도 전.
내가 천린수해성으로 뽑아낸 꼭두각시 괴뢰들이 다시 한번 금신천뢰문의 정문에 부딪혔다.
즉석에서 제조한 양산형 서 장군들이었다.
하나하나가 원영기 급의 일격을 날릴 수 있는 쓸 만한 괴뢰들이, 우르르 금신천뢰문의 입구로 몰려가며 입을 벌리고 서장군포를 쏘아 댔다.
쩌어어엉!
서 장군 하나가 쏘아 낸 일격에, 금신천뢰문의 정문이 박살이 났고, 박살 난 정문을 향해서 양산형 서장군들이 우르르 몰려간다.
"이, 이 무슨…!"
오문선사들이 당황하며 양산형 서 장군들을 제지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원유가 그들을 막아섰다.
"못 지나간다."
"이 빌어먹을 놈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헷갈리는 것아, 당장 비키지 않으면 반으로 갈라서 죽여 버리겠다!"
"못 지나간다."
나는 원유의 몸을 움직이며 미소를 지었다.
원유의 입가에서 피어나는 요사스러운 미소에, 다시 한번 오문선사들은 흠칫 놀라는 듯했지만 다들 분기탱천하며 법결을 맺었다.
"죽어라!"
"흠…."
그리고, 원유가 입을 열어 금단에서 법보들을 뱉기 시작했다.
지이이잉!
원유를 노린 공격들은, 전부 원유가 뱉어 낸 네 개의 탑에 막혀 버렸다.
원유의 주변으로 하나하나 법보들이 빠져나왔다.
열일곱 개의 단검 법보.
혈창 법보, 수정 해골 지팡이, 그리고 호풍혈파 등.
"못 지나간다."
그 외에도 자신이 소환한 피 구름 속에서, 원영기 급의 귀왕을 불러낸 원유는 요사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결인을 맺었다.
콰아아앙!
다음 순간 원유의 단검이 오문선사 중 한 명에게 날아갔고, 그의 방어 법술과 정순지력의 호신강기를 두들겼다.
방어 법술은 부서졌으나, 원영기의 호신강기는 뚫지 못했는지 원유의 단검은 허공을 맴도는 듯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원유가 소환한 핏빛 귀왕이 대낫을 들고 방어 법술이 부서진 오문선사를 내리찍었다.
쩌어어엉!
다시금 경천동지할 소리가 울렸고, 이번에는 원유의 공격이 상대의 호신강기를 뚫는 데에 성공하였다.
"크윽…! 이놈, 질 것 같으냐!"
원유에게 호신강기가 부서진 오문선사가 결인을 맺자, 그는 한 마리의 뇌사(雷蛇)로 변하여 원유를 향해 입을 벌렸다.
피싯!
원유의 단검이 그를 노렸으나, 그는 목덜미에 작은 상처만을 남긴 채 원유의 공격을 피하고 원유의 옆으로 공격을 날렸다.
쩌어어엉!
그 공격에, 원유의 탑 법보가 펼친 결계가 박살이 나 부서졌다.
"혈쇄수림."
촤르르륵!
원유가 다시 결인을 맺자, 그의 주변으로 수많은 혈목이 자라나며 수많은 뾰족뾰족한 가지와 나뭇잎들을 원영기 장로들에게 휘둘렀다.
대부분 번개처럼 움직이며 원유의 공격을 피했으나, 모두 호신강기와 방어 법술이 덜걱거리기 시작했다.
"혈무창."
그리고 원유가 불러낸 혈창 위쪽으로, 혈창을 잡은 귀왕의 형상이 떠올랐다.
귀왕은 원유의 피 안개를 들이마시며, 낫을 든 귀왕처럼 원영기 경지로 순식간에 경지를 높였고 그 상태에서 눈앞의 상대를 향해 혼신의 찌르기를 하였다.
쩌어엉!
"커억!"
혈창의 찌르기에 한 오문선사의 법술과 호신강기가 그대로 박살 나며 그의 옆구리를 찢어 버렸다.
원유의 조작에 의해, 혈창을 든 귀왕은 사방으로 창을 휘두르며 오문선사들의 호신강기와 방어 법술을 깨뜨렸다.
"박(縛)!"
파지지직!
그러나 대머리인 오문선사가 결인을 맺자, 번개로 이뤄진 포승줄이 귀왕을 묶었다.
삽시간에 귀왕이 무력화되었으나, 원유는 다시금 열일곱 개의 핏빛 단검을 조작하여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 기세는 섬뜩했으며, 원유의 조작에 의해 단검들은 원영기 장로들의 피부 곳곳을 스치며 핏방울을 만들어 냈다.
"모두 긴장해라, 만만찮은 녀석이다!"
"정신만 바싹 차리면 이 녀석에게 당할 일은 없다!"
오문선사들은 원유에게 밀리는 듯하다가도 원유를 압박했고, 점차 그를 밀어붙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원영기 장로 다섯의 합격이 딱딱 맞아떨어지며 원유의 몸이 오문선사의 공격을 전부 허용해 버리는 순간이 찾아왔다.
콰르르르릉!
뇌성벽력이 울려 퍼지며, 원유는 번갯불에 의해 전신이 갈기갈기 찢겨져, 금단만 남은 채로 튕겨져 나갔고, 그 금단을 향해 최고참으로 보이는 이가 번갯불로 이뤄진 화살을 쏘아 원유의 금단을 깨뜨려 버렸다.
그렇게, 원유는 죽었다.
"후, 질긴 녀석이었소."
"이제 원영만 포획하면 끝이군."
"원영기 수사 한 명이 아니라, 원영기 수사 셋을 상대로 싸운 기분이오."
"그만큼 강자였다는 거지. 그럼 이제…."
그리고.
촤르르르륵!
원유가 한참을 주변으로 뿜어 댔던 피 안개가, 그들이 부순 금단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원유의 금단이 재생된다.
그리고 금단을 중심으로 원유의 육신이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다.
꿈틀, 꿈틀….
붉은 고깃덩이의 집합처럼 꿈틀거리던 원유의 살덩어리들이 몰려들며, 다시 원유의 형상으로 변하였다.
그렇게, 원유는 부활하였다.
"못 지나간다."
"이 무슨…!"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부활한 원유를 보며, 오문선사들이 이를 악물었다.
"그래, 마공을 쓸 때부터 명줄이 조금 질길 줄은 예상하고 있었다! 마수(魔修)들은 죽어도 불사 계열 신통을 많이 익히고 있어,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많으면 세 번은 죽여야 한다지?"
"…."
원유는 무표정하게 결인을 맺을 뿐이었다.
"세 번은 죽여 주마! 어디 계속해 보자!"
다시금 오문선사들과 원유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금신천뢰문 곳곳은 난리가 났다.
내가 만들어 낸 양산형 서 장군이, 곳곳에서 입을 벌리고 광선을 쏘아 내 전각들을 무너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난리를 진압하기 위해, 곳곳의 원영기, 혹은 천인기 수사들이 날아가 원영기 괴뢰들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산형 서 장군들이 뇌운봉 인근에서 광선을 발사해 대자, 봉뢰당의 장로 역시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봉뢰당의 원영기 장로는 미간을 찌푸리며 빠르게 양산형 서 장군들에게 내려가 양산형 서 장군들을 박살 냈다.
그리고, 나는 전명훈의 몸을 움직여 그 틈새에 봉뢰당의 문을 열고 잠입했다.
금제는 당연하게도, 괴군의 회로로 무력화시켜서 작동하지 않았다.
'이곳이 봉뢰당….'
넓다!
밖에서 볼 때는 작은 사당이었지만, 안쪽은 거대한 궁궐의 대전처럼 넓었다.
공간 압축 법술.
나는 이 넓은 대전의 저 멀리에, 강력한 뇌기(雷氣)를 지닌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곤, 저 대전 너머를 향해 걸어갔다.
파직, 파지직….
무언가 번개 속성의 금제들이 작동하는 듯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반응할 것도 없이 전부 전명훈의 체내로 빨려 들어갔다.
'뇌 속성 기운은 저항없이 전명훈에게 먹히는 건가?'
이것이 천상금뢰지체의 힘인 것 같았다.
얼마간 전명훈의 육신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뇌 속성 금제들을 뚫고 갔을까.
나는 마침내 커다란 단상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단상 위에는 선명한 황금빛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쿠릉, 쿠르릉….
'저것이 천뢰번….'
천뢰번은 거대했다.
손으로 들고 휘두를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천뢰번의 기 부분만 해도 전명훈을 넷 이상 합친 것보다 거대했으니까.
파직, 파지직….
전명훈의 손으로 천뢰번을 만지자, 천뢰번은 윙윙거리며 마구 진동했다.
'음?'
그러나 나는 기괴고의 눈을 통해 천뢰번을 보며 흠칫 놀랐다.
'이 천뢰번….'
천뢰번에서는, 마치 사람처럼 의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살아… 있다?'
우우웅!
전명훈이 천뢰번에 손을 대자, 천뢰번은 공포스럽다는 의념을 흘려보내며 마구 진동했다.
전명훈의 손에 닿은 것이 어지간히도 싫은 모양.
그러나 싫고 공포스러워도, 전명훈이 잡자 거부하지는 못하는지 싫은 기색을 띄면서도 천뢰번은 전명훈의 손에 얌전히 잡혔다.
'허, 신기하군.'
나는 이 기물을 신기하게 쳐다본 후, 천뢰번을 들고 바깥으로 나왔다.
아직도 봉뢰당 장로는 양산형 서 장군들과 씨름하는 중이었다.
'이제 천뢰번을 들고 나가기만 하면 끝이다.'
* * *
금신천뢰문의 정문.
그 위쪽에서, 다섯 명의 금신천뢰문 소속 원영기 장로, 오문선사들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제, 이제 죽었겠지?"
"벌써 네 번을 죽였다, 또 부활하면…."
그리고, 그들의 눈앞으로 피 안개가 모이며 다시금 원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흐아아아아! 또 부활한단 말이냐!"
"저 피 안개, 피 안개가 놈을 부활시키고 있어!"
"그, 그래도 이제 피 안개도 거의 떨어졌소, 한 번만 더 죽이면…."
그때였다.
원유가 수정 해골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다음 순간, 수정 해골 지팡이가 입을 벌리자, 그동안 원유의 핏빛 단검에 스쳤던 상처들이 크게 벌어지며 오문선사들의 기혈이, 원유에게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 안돼!"
"이런 빌어먹을, 내 기혈이…!"
그리고 얼마 후.
해골 수정 지팡이가 입을 닫았고, 원유는 해골 수정 지팡이에서 기력을 보충했다.
그리고 기력을 보충한 원유가 입을 열자, 그의 입에서 또다시 어마어마한 양의 피 안개가 흘러나와 주변을 메웠다.
원영기 수사 다섯에게서 흡수한 생명력이었다.
"이, 이 빌어먹을 것…!"
"우리의 생명력으로 목숨을 보전하고 있어!"
"제발 좀 죽어라!"
원유에게 생명력을 빨리고, 그를 죽이기 위해 고전하느라 기운을 잔뜩 소진한 오문선사들이 피곤한 기색을 감추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뒤에서 보던 나는, 월수궁무록을 쓰고 이쪽으로 나오는 중인 전명훈을 기다렸다.
얼마 후.
"해, 해치웠나?"
오문선사들이 원유를 여섯 번째로 죽일 때쯤.
전명훈이 드디어 금신천뢰문 바깥으로 나왔다.
"좋아, 드디어…!"
나는 희희낙락하며 녀석이 들고 왔을 천뢰번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
보이지 않는다.
내 눈에는, 전명훈이 그냥 허공을 잡고 달려온 것처럼만 보였다.
'뭐지?'
이상했다.
전명훈의 몸을 차지한 기괴고의 시선으로는 전명훈은 분명 천뢰번을 들고 있다.
하지만 내 시선으로는 천뢰번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나는 당혹스러워하며, 일단 전명훈이 들고 있을 천뢰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쿠르르릉!
"…!"
나는 찌릿한 번갯불이 내 손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 손이 번개에 지져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천뢰번을 잡으려 해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천뢰번은 잡히지 않았다.
내 손이 천뢰번의 번개를 뚫지 못한다거나 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아….'
천뢰번이 있는 곳을 잡으려 하면, 내 손은 '번개'만을 만지게 된다.
그랬다.
천뢰번의 본질은 뇌전(雷電) 그 자체!
진선이 사용했다는 선보답게, 그 재료는 일반적인 물질 따위가 아닌, 번개 그 자체인 것이었다.
나는 천뢰번의 특징을 알아내며 헛웃음을 흘렸다.
'전명훈의 눈과 시선으로는 전부 보인다. 하지만 내 눈과 시선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 말인즉슨….'
금신천뢰문의 제자로서, 금신천뢰문의 뇌도공법을 익히지 않은 이들은, 천뢰번을 만지기는커녕 육안으로 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금신천뢰문의 공법을 익혀야만 만질 수 있는 선보!
그것이 곧 천뢰번이었다.
나는 허탈한 눈으로 저 멀리서 싸우고 있는 원유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일곱 번째 부활한 원유를 보며, 오문선사들은 절망하고 있었다.
"일곱 번씩이나 부활하지 말란 말이다!!!"
"슬슬 좀 죽어라, 이 빌어먹을 놈!!!"
"죽을 때도 되지 않았느냔 말이다!!! 제발 좀 죽으란 말이다!"
'이런 맹점이 있었을 줄은….'
천뢰번을 훔치는 데에 성공은 했다.
하지만 나는 천뢰번을 육안으로 볼 수 없었으며, 천뢰번은 번개로 이뤄져 있기에 잡아도 벼락만 잡힐 뿐이었다.
'그렇다면….'
"전명훈도 어찌되었든 같이 납치해야 하는 건가."
어쩌면 그것이 최선일지도 몰랐다.
"원유, 돌아와라. 이만 간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턱―
"…!"
누군가가, 소리소문없이 내 뒤에 나타나 내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뒤이어 소리가 늦게 따라온다.
쿠르르르릉!
아찔한 천둥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본 놈인가 했더니, 지난번 혼자서 비승한 그 원영기 의식을 가진 놈 아닌가?"
나는 황급히 뒤를 돌며 원유를 불러들였다.
익숙한 황금빛 장포, 금신천뢰문의 사축기 수사.
태상장문인 금벽호였다.
"일단, 갑자기 미쳐서 본문의 제자의 정신에 금제를 걸고, 천뢰번에 손을 대는 이유가 뭔지나 들어 볼까?"
나는 번개의 속도로 뇌령도까지 다시 날아온 금벽호를 보며 침을 삼켰다.
그가 풍기는 기백은, 절대 창호자의 아래가 아니었다.
'한번 해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저게 끝이라면, 어쩌면….
그와 동시에, 그가 손을 뻗자 내가 그토록 손에 넣으려 했던 천뢰번은 자연스레 금벽호의 손으로 들어가 그가 휘두르기 딱 알맞은 크기로 변하였다.
천뢰번이 금벽호의 손에 돌아갔다.
'안 되겠군.'
번갯불 (4)
찰나.
나는 거의 본능에 가깝게 하늘을 향해 무형검을 휘둘렀다.
부웅!
쩌어어엉!
답천의 경지에 달하는 무형검이 하늘에서 떨어진 낙뢰를 베어 낸다.
"명훈이는 이리 내라."
우우우웅!
내가 뭔가를 할 새도 없이 금벽호가 손을 뻗자, 그의 손에서 인력(引力)이 생겨나며 전명훈을 끌고 갔다.
전명훈의 머리통을 붙잡은 금벽호는 혀를 차며 손에 힘을 주었다.
그와 동시에, 내가 전명훈의 상단전에 넣어 놓았던 기괴고가 그대로 불타 없어져 버렸다.
찌릿!
내 의식을 떼어 만든 술법이었기에, 기괴고가 불타자 내 의식에도 찌릿한 고통이 흘러 들어왔다.
"자, 그럼 이제 천천히 얘기를 나눠 보도록 할까?"
어째서일까.
상대는 사축기 초기, 단 하나의 축도 쌓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나는 천뢰번을 들고 있는 금벽호가 어째서인지 규련이나 서휼보다도 막막하게 느껴졌다.
위이이잉!
천뢰번에서 흘러나오는 의념이 금벽호와 교신하는 것이 보였다.
다음 순간, 금벽호가 다시금 천뢰번을 휘둘렀다.
쿠르르릉!
하늘이 밝게 빛난다.
다음 순간, 나는 나를 향해 내리떨어지는 백여 줄기의 낙뢰를 볼 수 있었다.
'이런 미친…!'
꾸과과과광!
왈칵!
나는 피를 토해 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원영기에 이른 정순지력과, 요수공법으로 단련한 육신.
흑룡 진혈로 더 강화한 피부.
그리고 답천의 경지로 만든, 전신을 흐르는 무형검이 합쳐져서 겨우 살 수 있었다.
나는 백 개의 벼락이 떨어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금벽호의 바로 앞 자리.
방금 내가 있었던 그곳은, 거대한 계곡이 생겨나 있었다.
단순한 계곡이 아니었다.
'공간 균열…!'
저 천뢰 하나하나가 사축기 수사의 일격 일격과 동급이다.
그나마도 어쩐지 금벽호가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다고 느껴졌다.
'도망쳐야 한다.'
금벽호가 천뢰번을 들고 있는 한, 절대로 승산은 없었다.
파앗!
나는 허공을 베어 내며 월수궁무록을 사용했다.
금벽호는 내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순간 놀란 표정이었으나, 이내 피식 웃으며 다시 천뢰번을 휘둘렀다.
그리고.
쿠르르르르릉!
하늘 전체가 푸르게 물들며, 반경 십 리의 영역 안쪽이 낙뢰로 가득 찼다.
"…!"
월수궁무록은 순간 이동을 하는 기술이 아닌, 상대의 인지를 이용해서 숨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한 마디로, 인지고 뭐고 없는 광역 기술 앞에서는 쓸모가 없다는 소리였다.
나는 덜덜 떨려 오는 뼈마디를 제어하며 흑룡진혈을 끌어올렸다.
우득, 우드드득!
이마에서 검은 뿔이 돋아나고, 곳곳에 검은 비늘이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엉덩이 쪽이 불룩해지더니 꼬리가 튀어나오고, 팔다리는 짐승의 것처럼 뾰족해졌다.
쿠구구구구!
나는 먹장구름을 소환해 주변으로 두르며, 구름을 타고 빠르게 도주했다.
계위를 이용해 공간 그 자체를 찢어 가르고 허공간에 진입한 후.
천족의 비둔술, 지족의 활공술, 그리고 답천의 무형검과 하나 되어 날아다니는 방식을 이용하여 쏜살같이 쏘아져 갔다.
그러나, 뒤쪽에서 뇌성벽력이 울리며 황금빛이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게 서지 못할까!!!]
준엄한 목소리가 허공간을 울리며, 금벽호가 번개와도 같은 속도로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부웅!
그가 다시 천뢰번을 휘두르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간이 푸른 번개로 가득 차올랐다.
"…!"
파치지지지직!
나는 이를 악물고 번개를 맞아 가며 전진했다.
우그그그극!
그러나 그와 동시에, 사축기 수사의 인력이 나를 그에게로 끌어당겼고, 점차 금벽호와 나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잡혀 죽는다!
나는 생명의 위기를 느끼며 천인도 방향으로 날아갔다.
콰르르르릉!
물론 그 사이에 몇 번이나 천뢰를 얻어맞으며, 그렇게 죽기 살기로 날아야만 했다,
'설마 이렇게 죽는 건가.'
금벽호가 흩뿌리는 천뢰는 정말로 가공할 것이었다.
천겁은 그나마 내 경지에 맞춰서 하늘이 벼락을 뿌린다지만, 금벽호는 망설임 없이 사축기 급의 일격으로 천뢰를 뿌리는 것이니, 더 이상 막기도 힘들었다.
콰르르르릉!
나는 허공간에서 푸른 번개를 다시 한 번 맞으며,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헛웃음을 흘렸다.
'이번 생에 죽는다면, 서휼에게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천뢰번을 아예 잡지도 못해 금벽호에게 죽을 줄은 몰랐다.
최소한 금벽호가 천뢰번을 못 휘두르게 내가 쥐고만 있었어도 해볼 만했을 테지만.
금신천뢰문의 인물들만 천뢰번을 잡을 수 있다는 불합리함에 패배한 것이었다.
'그래, 이것도 뭐….'
쿠르르릉!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려 최선을….'
그렇게 의식이 저 아래쪽으로 침잠해 가기 바로 직전.
찌이잉!
나는 무언가, 내 머리를 울리는 울림을 들었다.
아니, 울림이 아니라 '보았'다고 해도 좋으리라.
'뭐지, 이 기묘한….'
무언가가,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기묘한 음성은?'
"…핫!"
나는 흠칫 놀라 눈을 떴다.
나는 혹시나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나를 쫓아오는 금벽호 쪽에서, 이 '음성'이 들리고 있었다.
아니, 음성이 아니었다.
입천의 시야, 의념의 시야와 같이 무언가 제 3의 새로운 감각이었다.
무언가 이 감각을 칭할 길이 없어 여지껏 '시야'라고 표현하며 '본다'고 칭했으나, 사실은 보는 게 아니라 느끼는 감각이었던 것처럼.
이 '음성'은 그런 식으로 내게 뜻을 전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음성의 뜻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답천의 시야를 지녔기 때문인가?'
'말'이 들린다.
―나를 구해다오.
'천뢰번'의 말이!
―나를 구해다오.
'역시 잘못 들은 게 아니야.'
천뢰번은 끊임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자신을 구해 달라.
천뢰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육감이 속삭인다.
천뢰번에게 말을 걸어라.
그것이 살 길이다!
"크윽!"
나는 허공간에서 떨어지는 낙뢰를 맞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나를 쫓아오던 금벽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천뢰번을 들어 올렸다.
"놀랍군, 감히 천뢰번을 든 내게 맞서려는 건가?"
"하…!"
나는 정신을 더더욱 집중했다.
그리고, 천뢰번에게 의식을 집중했다.
'심상은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의념은 보인다.'
그 말인즉, 심어가 통할지도 모른다는 뜻!
나는 심어를 통해 천뢰번에게 뜻을 전달했다.
―어떻게 구해 달라는 거지?
그러자, 천뢰번은 즉시 내게 답을 들려주었다.
―해방시켜다오… 금신자의 후예들에게서….
―나는 너를 잡는 건 고사하고 육안으로 볼 수조차 없다.
―내 진짜 이름을 알려 주겠다. 내 진짜 이름을 강하게 염(念)하며 나를 잡아라. 그리하면 나를 잡을 수 있을지니….
천뢰번의 진짜 이름?
생각할 것도 없다.
―알려다오!
그리고, 천뢰번의 의념을 통해, 녀석의 [이름]이 내 뇌리에 틀어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대천벌(大天伐)의 정화(精華), 정려(政勵).
'정려!'
나는 천뢰번의 이름을 깊숙이 염하며, 금벽호와 마주 섰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우드드득!
전신에 괴군의 회로가 깔린다.
금벽호에게서 도망치며 챙겨 온 원유 역시 혈체피갑이 되어서 내게 녹아든다.
그리고 나는 금벽호를 보며 그를 떠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
"혹시, 금 태상장문께선 천뢰번의 진명을 알고 계십니까?"
"음?"
내 질문이 의외였던지, 금벽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천뢰번이 천뢰번이지, 무슨 개떡 같은 소리를 하는 거냐."
"…."
모르고 있다.
하지만 어찌 보면 내게는 잘된 일이다.
'외부인인 내가 정려를 손에 넣어도 알아내지 못한다.'
일순간 그를 당황시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어쨌든, 왜 해룡왕을 따라간 네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본문의 제자와 신물을 훔쳐 가려 했는지, 단단한 심문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실직고한다면 선처를 생각해 보지."
"이실직고라…."
나는 쓰게 웃으며 금벽호를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천뢰번을 들고 중경계에 온 순간부터, 당신들 금신천뢰문은 큰일이 난 것을 모르는 겁니까?"
"뭐?"
"등선향에 떠 있는 금신천뢰문 사조 양수진의 비석에는, 천뢰번을 들고 비승하면 안 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사축기쯤 되면 차원 여행은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다시 내려가서 확인해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또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냐."
역시나 통하지 않는 건가.
"등선향의 비석의 내용은 본문에도 전해져 내려온다. 마음을 내려놓고 비승하는 것! 그것이 비석의 내용일진대, 네놈 따위가 뭘 안답시고 주절대는 것이야!"
"…?"
뭐지, 뭔가 비석의 내용을 이상하게 알고 있는 것 같다.
'전승이, 잘못되어 내려오고 있던 거였어!'
자신이 믿는 것이 정답이라고 알고 있는 한,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양수진의 비석을 모셨던 사당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양수진이 생존해 있던 시기에는 중령성국에서 쌓아 올렸던 그의 사당은, 답천사막에 떨어졌고, 양수진의 비석의 나머지 절반 역시 사당과 함께 답천사막에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원립의 흑색성이었다.
"존경하는 해룡왕 서휼의 명성과 인품에 대고 맹세하니, 제 말은 정말로 거짓이 아닙니다!"
"으음…! 해룡왕의 이름을 건다고…?"
서휼의 이름을 걸자 금벽호는 흠칫 놀랐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네가 천뢰번을 도둑질하러 온 것도 해룡왕의 뜻인가?"
"예, 바로 그렇습니다. 해룡왕께서는 지족 영역에 있는 양수진에 대한 고사를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고사를 토대로 몇 가지 조사를 진행하셨고, 천뢰번은 금신천뢰문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결론과 함께 얼른 저를 파견해서 천뢰번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내 말에 금벽호는 잠시 침묵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그는 고개를 흔들며 강인하게 외쳤다.
"거짓말이로군. 내가 아는 광명정대한 해룡왕 서휼이라면, 진솔하게 나를 초대해서 진실을 털어 놓고 경고를 해 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지랖을 부리며 타 문파의 것을 훔치려고 하지 않는다!"
'역시 안 속나.'
애당초 서휼이 금벽호, 허곽, 창호자 등과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 모르는 나로서는 소설을 써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하지만 됐다.
금벽호는 서휼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들은 뒤 그 자체만으로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그래, '흔들리는' 정도라면 된다.
파아아앗!
전신을 감싼 답천의 무형검이, 일순간 황금빛으로 변했다.
'되살린다.'
능광(能光)의 빛살을!
파아아앗!
일순간.
나는 번개보다도 빠른, 빛조차 뛰어넘은 한 자루의 도(刀)가 되어 금벽호에게 달려들었다.
찰나, 마치 시간이 쪼개진 듯한 그 찰나 안에서, 나는 정려의 이름을 강하게 염상하며 금벽호에 손에 들린 투명한 깃발을 움켜쥐는 데에 성공했다!
파지지직!
엄청난 뇌전이 올라왔으나, 이전과는 다르게 분명히 '실체'가 잡힌다!
콰득!
그렇게 천뢰번을 쥔 상태로, 나는 다시 뒤로 물러나 빠져나갔다.
파아앙!
눈을 반쯤 깜빡일 정도.
아니, 사실 그보다도 더 짧은 찰나.
나는 그 찰나에, 답천의 무형검을 답천의 능광도로 변화시켜 찰나를 쪼개, 천뢰번을 훔치는 데에 성공한 것이었다.
"우웩, 거허헉! 끄헉!"
무형검을 억지로 바꾼 반동인 탓인지, 칠공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며 단단한 육신 자체가 마구 뒤흔들렸으나 어쨌든 나는 성공했다!
"그, 그하하, 그하하하하!"
금벽호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고, 나는 광소를 지으며 허공간을 쪼개고 다시 현계로 들어왔다.
"후우…."
농밀한 영기와 함께, 저 멀리 천인도가 보였다.
뒤쪽에서는 금벽호가 노갈성을 터트리며 공간을 쪼개고 나온다.
"노오오옴!!!"
나는 천뢰번을 쥔 채로 천인도로 향하며 웃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그때였다.
속닥속닥속닥….
어떠한 속삭임이 내 귓가를 간질였다.
그것은 천뢰번의 속삭임이었다.
―뭐냐, 무슨 일이지?
천뢰번은 감격스럽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나를 학대하던 금신자의 후예들에게서 나를 꺼내 주어 감사한다. 한 가지, 한 가지 부탁만 더 들어다오.
―부탁?
―내… 내 이름을 불러다오. 육성으로.
―…?
굉장히 해괴한 부탁이었다.
'뭔가 있는 건가?'
나는 혹시 천뢰번이 내게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인가 싶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천기를 측정했다.
딱히 별 일은 없었다.
내 운수(運數)는 평탄했다.
―이름은 왜 불러 달라는 것이지?
―지난 몇만 년간, 금신천뢰문의 누구도 나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너무 외로운 시간이었다. 내 이름을 불러다오. 제발 부탁이다, 내 이름을 불러다오.
단순히 이름이 불린 적이 없어서 외로워서 그렇단 말인가?
나는 다시 한번 천기를 쳐다보았다.
내가 이름을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며 천기를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이름을 부르든 말든 천기에는 변화가 없다.
'뭐, 순수하게 이름을 불리고 싶은 것이라면….'
나는 천뢰번의 고독한 의념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투웅!
동시에 내 몸은 한 자루의 검이 되어 천인도의 장벽을 뚫고 천인도로 진입하였다.
이제 광령지로 가는 전송진에 올라타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계획이 끝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광령지로 향하는 전송진으로 쏘아져 가, 전송진 앞에 도착하여, 천뢰번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타앗!
전송진 위로 올라간 나는 천뢰번의 이름을 불렀다.
"정려(政勵)."
그와 동시에, 나는 저 멀리서 나를 쫓아오는 금벽호를 보며 전송진을 발동했다.
"안녕히 계시오. 천뢰번은 내가 안전한 곳에 박아 두지."
전송진의 빛이 번뜩이며 나를 이동시킨다!
"…."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후, 후후후… 드디어 잡았다. 이 빌어먹을 도둑놈. 정말로 간발의 차로구나."
위이이잉―
금벽호가 숨을 몰아쉬며 전송진 안쪽으로 들어왔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전송진이 작동하지 않아…!'
"네놈이 해룡왕의 사람이라는 것도 거짓말 같으니, 일단 전통적인 금신천뢰문의 형벌 방법을 써서, 네놈을 뇌창에 꽂아 100일간 지져 주마. 그런 다음…."
"이보시오, 금 태상장문인."
"겁이 난 거냐? 하지만 본문의 제자와 신물을 훔친 죄는…."
"태상장문!"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몸을 떨었다.
쉬이이이―
전송진의 빛은 꺼져 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지족의 눈을 가진 내 눈에, 천지영기의 흐름이 이상하게 흐르는 것이 포착되었다.
"실성한 놈인 줄은 알았지만, 이 상황을 눈앞에 두고서도 소리를 지를… 읍…!"
왈칵!
금벽호가 내게 다가오던 중 비틀거리며, 피를 한 움큼 쏟아 냈다.
아니, 그뿐이 아니었다.
우욱…!
나 역시 칠공에서 피가 더더욱 많이 뿜어지며, 전신의 피가 마구 들끓는 것이 느껴졌다.
'뭐, 뭔가가 이상하다!'
천지음양의 흐름이, 뒤엉키고 있다.
세상의 이치가 제멋대로 흐른다.
콰아앙!
나는 주먹을 휘둘러 전송진 건물의 천장을 부수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눈이 부릅떠졌다.
방금 전까지도 멀쩡했던 천기가, 마구 뒤틀리고 있다!
"어, 어어…?"
―고맙다. 정말 고맙다. 너무나도 고맙다.
다음 순간, 천뢰번으로부터 끝없는 감사인사가 울려 퍼졌다.
―드디어, 나의 정명한 주(主)께 다시 귀의(歸依)할 수 있게 되었나니….
"이, 이게 무슨…."
―고맙다. 매우 고맙다. 이름을 입 밖에 낸다는 것은, 운명을 입 밖에 낸다는 행위. 운명이 '말한다'라는 행위를 통해 삼천세계 전체에 울려 퍼졌으니… 나의 주께서 당장이라도 나를 찾으실 수 있을지어라!
찌릿, 찌릿찌릿…!
그와 동시에, 마구 어그러져 비틀려 흐르던 음양의 흐름 사이로.
뇌기(雷氣)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작은 전신에 맴도는 정전기였다.
하지만 정전기가 점차 강해지며, 강력한 전기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곧이어 나는 물론이고 천인도 위쪽에 있는 모든 건물과 행인들 사이에 번개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아…아아…."
나는 천뢰번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함부로 이름을 내뱉어서는 안 됐다.
함부로 알아선 안 될 지식을 알아 버렸다.
꿈벅―
하늘이, 두 쪽이 나며 '열린'다.
그리고, 열린 하늘 너머로 하늘 전체를 채운 거대한 '눈'이 천인도를 굽어보기 시작했다.
진선(眞仙)이, 머나먼 차원을 넘어 본체(本體)로 이 땅 위를 들여다보기 시작하였다.
번갯불 (5)
찌이이잉―
무언가 기묘한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자마자 갑자기 의식이 폭주하며 폭발해 버릴 듯이 울렁였다.
'멀다!'
흑룡처럼, 아니 어쩌면 흑룡보다도 더 머나먼 차원에 존재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진선 급 존재들은 하나같이 분체이거나, 피 한 방울에 깃든 사념이었다.
하지만 머나먼 차원에 존재할지언정, 지금 이 자리에 강림한 것은 분명한 '본체'였다!
'보, 보면 안 돼!'
나는 [그]를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진선을 쳐다보지 않고 땅으로 고개를 숙인 채, 최대한 저 존재를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직시하지 않고 생각을 멈췄음에도 불구하고 저 찌이잉거리는 소리가 내 뇌리를 마구 헤집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눈앞의 금벽호를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 끄으으읍!"
"…!"
금벽호는 번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그는 두 눈부터 시작해서 몸 전체가 벼락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지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금벽호는 자신의 머리를 틀어쥐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드, 듣지 마라! 저, [저것]이 말을 하고 있다! 말을, 저 말을 들으면 안 돼!"
'말…?'
이 찌이잉거리는 소리가 금벽호에게는 어떠한 '말'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금신천뢰문의 공법을 익힌 이만이 천뢰번을 보고 잡을 수 있듯이, 뇌도공법을 익힌 이에게만 들리는 '말'일 수도 있었다.
"말을! 아, 아니, 말 걸지 마! 나를 들여다보지 마! 제발! 흐아아아아!"
나는 온 힘을 다해 방금 봤던 진선의 '눈'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며, 땅에 머리를 처박고 눈앞의 전송진의 문양 하나에 의식을 집중했다.
최대한 다른 것을 생각해야 한다!
최대한!
그와 동시에, 천뢰번 정려가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츠츠츠츳!
어느 정도 허공으로 떠오른 천뢰번은, 어느 순간 빛을 발했다.
꽈과과광!
다음 순간.
천뢰번이 떠오른 자리, 그러니까 나와 금벽호의 중간 자리에 금빛의 뇌전이 떨어졌다.
나는 금색의 뇌전을 맞은 천뢰번에서, 무언가가 '풀려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천뢰번에서 빛살이 뿜어지더니 빛살 속에서 뭔가가 나타났다.
"…?"
그것은 작은 발이었다.
사락….
뇌전으로 이뤄진 궁장의 끄트머리가 바닥에 닿았다.
그리고 궁장 안쪽으로 보이는 작고 하얀 맨발이 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고운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주인님, 저의 주인님. 드디어 저를 구하러 오셨나이까.]
오싹, 오싹!
그 목소리를 듣자, 등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저를 데려가소서.]
벼락으로 이뤄진 궁장을 입은 존재가, 무릎을 꿇었다.
그 존재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새하얀 백색의 머리칼을 늘어뜨린 그 존재의 음성은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기이했다.
무릎을 꿇은 존재가, 마치 기도하듯이 양손을 모은 채로 하늘을 향해 빌기 시작했다.
[당신에게 귀의하게 해 주소서. 당신에게 돌아가게 해 주소서. 당신에게 다시 저를 바치게 해 주소서….]
'그것'이 기도를 시작하자,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귀, 귀의…."
번개로 변해 흩어지고 있던 금벽호가, 갑자기 그것과 똑같은 자세로 무릎을 꿇고 양손을 깍지 낀 채 고개를 숙였다.
"귀의… 하나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의식으로 느껴진다.
천인도에 곳곳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귀의하나이다…."
"귀의하나이다…."
"귀의하나이다…."
거리를 지나던 행인, 수도자들, 그들 모두가 경지를 가리지 않고 바닥에 주저앉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번개로 기화하던 모두의 몸체가 더더욱 빠른 속도로 번개 그 자체가 되더니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번개 그 자체가 되어 더더욱 위대한 존재에게 귀의하는 듯했다.
그때였다.
――――!
찌이잉거리는 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와 동시에 새하얀 머리칼을 늘어뜨린 '그것'이 감격한 듯이 말했다.
[아아… 알겠나이다. 12만 년 동안 금신자의 후예들에게 착취당했던 원을 풀게 해 주시니, 명을 받잡아 따르나이다.]
동시에 맨발의 '그것'은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찌릿, 찌릿….
'위험하다.'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
도망가야 한다.
하지만….
'도망치면 저 존재에게 귀의당한다!'
이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나 역시 기이하게 번개로 변화하여 하늘로 흡수당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가 멀쩡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정려'의 이름을 불러 준 것, 단지 그것 때문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간 그것.
천뢰번 정려일 것으로 예상되는 존재의 목소리가 천인도 전역으로 울려 퍼졌다.
[나, 대천벌의 정화가 주(主)를 대리하여 천겁을 불러오노니….]
쿠구구구구!
하늘에서 어마어마한 빛살이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부터, 심판을 시작하겠노라.]
다음 순간.
파아아앗!
빛살이 천인도 전역을 메우며 인족 총연맹의 총본산을 산산이 조각내었다.
* * *
전명훈은 눈을 떴다.
"으윽, 여기는…."
분명 거리를 거닐고 있다, 갑자기 어둠 속으로 끌려갔다.
그 이후부터 기억이 끊겼다.
"내 동부?"
그러나 그는 이곳이 자신의 동부이자 수련실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옆에서 금빛 장포를 입은 여인이 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소해…?"
그때, 금색 장포의 여인, 금소해가 눈을 떴다.
"아, 사제. 눈 떴어?"
"소해…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되기는 멍청아! 갑자기 떠난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뭐?"
"아무리 악적(惡敵)한테 조종당하고 있어도 그렇지. 그렇게 망설임 없이 나를 내버려 두고 떠난다고 할 수 있어? 흐, 흐윽…."
금소해는 뭔가를 말하려던 듯했으나 말을 멈추고 눈물을 쏟으며 전명훈의 품에 안겨 울었다.
전명훈은 상황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멋쩍은 듯이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널 두고 떠날 수 있을 리 없잖아, 소해."
"…그래. 좋아."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일단 나가자, 나가 보면 알 거야."
전명훈은 금소해와 함께 그의 동부에서 나왔다.
이윽고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금신천뢰문 곳곳이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무너져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너와 천뢰번을 노린 한 외부의 악적이 금신천뢰문을 습격했어. 너는 며칠간 그 악적에게 조종당해서 악적에게 협력했고."
"그런…."
"지금 사존께서 천뢰번을 들고 악적을 처단하러 가셨어. 곧 돌아오실 거야."
"그런 일이…."
잠시 당황하던 전명훈을 보며, 금소해가 진지하게 물었다.
"…너, 악적한테 조종당할 때 망설임 없이 나를, 그리고 금신천뢰문을 떠나겠다고 했어."
"…내가 그랬다고?"
"그래. 그래서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전명훈과 눈을 마주쳤다.
"만약, 나중에 금신천뢰문에 어려운 일이 닥친다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닥친다면, 너는 본문을 떠날 거야?"
그녀의 말에 전명훈은 잠시 눈을 감고 금신천뢰문에서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약속할 거지?"
"그래, 약속할게. 나 전명훈은 어떤 일이 있어도, 금신천뢰문을, 그리고 금소해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전명훈은 새끼손가락을 소해에게 건넸다.
"네 고향에서 약속하는 법이랬었나?"
"맞아."
두 사람은 새끼손가락을 묶어 약속을 한 다음, 엄지손가락으로 도장을 찍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여기에 있는데, 왜 배신하겠어. 지난번에 같이 도망치자고 한 것도 너무 답답해서 그냥 한번 해 본 말이야."
전명훈은 금소해를 보며 믿음직해 보이기 위해 허리를 펴고 미소를 지었다.
"날 믿지?"
금소해는 그 말에 안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하늘이 노랗게 물들었다.
쩌어어어엉!
"…!"
천겁이 금신천뢰문에 내리쳤다.
아니, 천겁이 아니었다.
그것은 천겁이라기엔 너무나도 거대했고, 너무나도 악의로 뭉쳐 있었다.
쿠구구구궁!
수계의 대륙보다 조금 작은 뇌령도 위쪽.
그 위로, 어떠한 '눈'의 형상이 투영되며 뇌령도 전역에 번개의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소리가 사라진다.
색상이 사라진다.
눈앞에 남은 것은 오로지 새하얀 세상뿐.
금신천뢰문의 모든 이들이,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천겁에 휘말리며 그들이 서 있는 대지째로 녹아서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녹아 버린다.
전명훈만을 제외하고.
"아, 안 돼…!"
전명훈의 자질은, 천겁을 맞는 와중에도 천겁마저 흡수하며 천겁의 위력에서 빗겨 가고 있었다.
천겁을 포함한 삼라만상 모든 번개에게 사랑받는 재능.
그것이 천상금뢰지체.
그러나 전명훈은 천겁을 맞으며 자신의 수행이 미친 듯이 널뛰는 도중에도 좋아할 수 없었다.
도리어 그는 공황 상태가 되었다.
눈앞에서, 자신의 연인이 산 채로 튀겨지고 있었다.
채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안 돼!"
전명훈은 절규하듯이 일단 금소해를 끌어안아 금소해에게 내리치는 천겁의 면적을 줄여 보고자 노력했다.
법술을 써서 천겁을 막으려고도 해 봤다.
하지만 대륙 전체를 뒤덮으며, 세상을 쪼갤 듯이 내리치는 천겁은 절대 막을 수 없다.
그의 품 안에서, 금소해는 죽어 갔다.
"안 돼, 안 돼, 안 돼! 죽지 마! 죽지 마!"
전명훈은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금소해의 손을 잡고 외쳤다.
하지만 그가 품에 안은 사랑은 잿더미가 되어 가고 있었고, 전명훈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비참하게 부르짖는 것뿐이었다.
"안 돼! 안…."
그리고, 전명훈은 그의 품속에서 연인의 마지막 말을 전해 들었다.
"금신…천뢰문을…."
전명훈이 사랑했던 사람.
금벽호의 현손녀이자, 금신천뢰문의 촉망받는 인재 중 하나였던 금소해는, 바들바들 떨며 전명훈에게 마지막 말을 짜 냈다.
"떠나지… 말아… 줘…."
그것을 끝으로, 그녀는 점차 재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전명훈은 비명을 지르며 금소해를 움켜잡으려 했다.
그러나 소용없다.
그녀의 육신은 가루가 되어 흩날렸고, 전명훈은 남은 부분이나마 움켜잡으며 절규할 뿐.
그리고, 전명훈은 이 번개의 빗속에서 뭔가의 음성을 들었다.
속닥속닥속닥….
그것은 천겁의 음성이었다.
번개가 그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참회하라….
―귀의하라….
―참회하라….
뭘 참회하라는 걸까.
누구에게 귀의하라는 걸까.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통과 절망 속에서 전명훈은 번개의 소리를 들으며 눈을 부릅떴다.
속닥속닥속닥….
그에게 속삭이는 번갯불의 '말' 중. 뭔가가 그에게 정보를 주고 있었다.
"아… 아아…."
그는 천겁의 목소리를 들었다.
천겁을 흡수해 가며 천겁이 속삭이는 진실을 전해 들었다.
지금 갑자기 그의 일상을 빼앗은 존재, 진선(眞仙)에 대해서.
"아아아아…!"
전명훈은 절망했다.
자신에게 갑자기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저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았다.
모든 것을 앗아 갔지만, 모든 것을 걸어도 절대 닿지 못한다.
그는, 무력하다.
번개를 통해 진선에 대해 전달받으며, 그는 동시에 진선의 시선을 받게 되었다.
진선의 악의에 찬 시선을 보며, 전명훈은 미쳤다.
분노와 절망 속에서, 고통과 저 위대한 존재의 시선 아래에서.
그는 정신이 나가 버려 울부짖었다.
"흐아아아아아!!!"
그리고, 마침내 영겁과도 같았던 천겁의 시간이 끝났다.
"…어?"
전명훈은 잿더미 위에서 눈을 떴다.
"…여긴…."
그는 퀭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그렇군."
그는 마침내 깨달았다.
"꿈이 틀림없어. 하, 하하… 합체기 태수의 딸과 혼담이 오고 가니, 별 사실 같은 악몽을…."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손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아…."
그것은 '손'이었다.
잔뜩 말라 비틀어져, 번개에 튀겨진 손!
전명훈은 그 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아, 아아… 아아아아!"
그리고 그는 마침내 이곳이 꿈속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으아아아아아!"
덜덜덜덜….
그는 양손을 떨며, 자신의 손 위에 있는 말라 비틀어져 튀겨진 손을 내려다보며 울었다.
그것은 금소해의 손이었다.
그가 사랑했던 연인은, 전명훈이 꼭 쥐고 있던 손 한 짝만을 남긴 채 이 세상에서 소멸해 잿가루가 되어 버렸다.
"아, 아흐아… 아아아아악…!"
고통에 울부짖으며, 전명훈은 연인의 손을 가슴에 품고 눈에 핏발을 세웠다.
위대한 존재를 본 광기와 고통 속에서, 그는 새롭게 각성하였다.
"아, 그래… 알겠어…."
그는 한 가지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내 명(命)이 뭔지, 알 것 같아…."
피눈물을 흘리며, 잿더미 속에서 일어난 전명훈은 하늘을 노려보았다.
"…복수… 복수할 거다. 이 분노를, 해갈해야만 해…!"
진선이 내린 천겁을 먹어치워, 삽시간에 결단기에서 선통후각으로 원영기, 천인기에 도달한 전명훈은 섬뜩하게 웃었다.
"방해하는 놈은… 모두 죽여 버려도 되겠지."
그렇게, 벼락을 몰고 다니는 낙뢰자 전명훈은 잿더미 위에서 태어났다.
광대와 공연 (1)
몽롱하다.
나는 마치 물에 잠겨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기이한 환상 속을 부유했다.
기이한 공간이었다.
색과 색의 경계가 모호하고, 동시에 수많은 지식과 역사, 그리고 미래가 사방에 떠 있는 듯한 세계.
나는 그곳에서 둥둥 떠서 부유하며 몽롱한 정신을 붙잡았다.
'나는 분명….'
천인도에 떨어지는 천겁을 맞고 정신을 잃었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내가 의식을 차리고 주변을 인지하려 할 때, 새하얀 섬섬옥수가 내 뺨을 더듬었다.
[그대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대가 내 이름을 발설함으로써 주께서 나를 보다 빠르게 발견하셨으니… 끔찍한 금신자의 후예들에게서 마침내 해방되었구나.]
부드러운 목소리.
새하얀 백발을 지니고 번개로 된 옷을 입은 누군가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대는 천겁이 사나운 팔자를 가지고 있으니, 나를 도운 공을 인정하여 축복을 내려주마.]
그 존재가 아련하게 울리는 음성으로 내 귓가에 속삭인다.
그리고, 나는 내 존재 자체에 뭔가가 깃드는 것을 느끼며 그 존재의 속삭임과 함께 의식을 잃었다.
* * *
번쩍!
"…!"
나는 눈을 떴다.
주변은 잿더미였다.
마지막 기억에서, 분명 천뢰번이 진선의 힘을 빌어 뭔가 심판을 내린답시고 사방으로 천겁을 뿌려 댔던 것이 기억났다.
'여기는….'
천인도, 분명 천인도였다.
그러나 내가 아는 천인도와는 달랐다.
아무것도 없었다.
번성했던 인족의 총본산은 모조리 한 줌 재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고, 거리를 거닐던 이들은 모두….
지끈!
"끄으으윽!"
나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내 뇌리로, 사람들이 기도하는 자세로 번개로 변하여 기화해 하늘로 빨려 올라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귀의하라….
―귀의하라….
―귀의….
"흐, 흐악, 흐아아아악!"
나는 머리를 감싸쥔 채 마구 비명을 질렀다.
지금까지, 나는 몇 번은 진선을 만나 보았고, 그 진선들과 꽤나 대화를 할 만하다고도 여겼다.
그러나 바로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생각이 얼마나 교만하고 어리석고 우둔했는지를 깨달았다.
―귀의하라….
귓가에서 누군가가 계속! 계속 속닥이고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편해질 것 같다!
그러나!
'안 돼, 안 돼!'
나는 가까스로 몸을 제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억…! 허억!"
식은땀이 뚝뚝 떨어진다.
지금까지 만난 다른 진선들이야, 떠올리면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떠올리는 것 자체로 부담이 있지 않았다.
하나 지금에야 알 수 있었다.
'전부. 전부 고작 분체, 혹은 핏방울에 깃든 잔념을 마주했기에 그랬던 거야…!'
내가 오늘 본 것은 '본체'였다.
그리고, 필멸자에게 아무런 배려도 하지 않고 모습을 드러낸 진선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는 그야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귀의하라….
"흐, 흐아아아아!"
나는 귓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아니, 놀랐다기보다는 공포에 질렸다.
"이, 이게 뭐야!"
내 손끝이, 파직거리며 푸르게 일렁였다.
전기였다.
뇌성(雷性)이 손 끝에서 일렁인다.
하지만 단순히 뇌 속성 영력을 뿜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공포스러워하는 것은, 내 손끝이 천천히 전기로 '변하고'있다는 것이었다.
―귀의하라….
속닥거림이 들려오자, 변화하는 범위가 느릿하게 넓어졌다.
"후욱… 훅…."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잔뜩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정말… 이번 생은 쉽지 않군."
번개로 변화하는 손끝은, 영력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 흩어져 사라졌다.
분명히 느껴진다.
내 몸을 잠식하는 이 번개는, 종래에는 내 원영마저 잠식해 버려 나를 완전히 번개 그 자체로 만들어 흩어 버릴 터였다.
번개의 령이 된다거나, 다른 존재로 진화한다거나 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한 줄기 번개가 되어 더욱 위대한 존재에게 '귀의하는' 것이었다.
함부로 손을 자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귀의하라….
이 속닥거림이 내 귓가에서 머무는 이상, 나는 설령 몸을 갈아타도 계속 이 증상이 반복될 터였다.
'완전히, 내 전신과 원영이 모두 번개가 될 때까지 속삭임이 계속되는 건가….'
어이가 없다.
공포스러운 것은, 이게 딱히 진선이 악의를 가지고 한 게 아니란 것이었다.
진선이 악의를 가졌던 대상은 금신천뢰문.
금신천뢰문 방향으로 천겁의 기운이 날아가던 것이 똑똑히 기억났다.
금신천뢰문은 진선에게 귀의하는 것이 아닌, 그저 모두가 한 줌 잿더미가 되어 스러졌을 터.
즉, 이 현상은 진선이 내게 악의를 품고 저주를 내린 것이 아닌.
내가 진선 본체를 한 번 직시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한 번!
진선이 처음 하늘에 그 커다란 눈알을 들이밀었을 때, 1초도 채 보지 않고 잠시 스치듯 본 그 한 번!
그 한번의 시선이 이런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귀의하라….
"난데없이 시한부가 되었다라…."
손끝이 조금씩 조금씩 잠식되는 속도로 보아, 내 수명은 길면 1년.
짧으면 100일 안팎이었다.
"…하, 하하… 하하하하!"
문득 어이가 없어서 광소를 터트렸다.
"흐하하하하!"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서휼을 골랐을 때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번 생은 어째 되는 것이 없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초반에는 서휼에게 이용만 당하고, 서휼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하계에서 보냈을 때에는 하계여서 별다른 영향력을 쓸 수 없었고.
그나마도 다시 올라와서 천뢰번을 훔치려는 계획은 아예 실패하고.
그 직후에는 천기를 보고 문제가 없을 것이라 여겼다가 함부로 이름을 불러서 시한부 인생이 되었다.
'정말….'
액(厄)이 가득하다.
'환장해 버리겠군.'
나는 찌릿거리며 흩어져 가는 손끝을 잠시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찌해야 하는가.
시한부가 된 채로 길어야 1년이다.
'그 안에, 뭔가 다른 걸 할 역량이 될까.'
아니, 그 이전에.
나는 뭘 해야 하지.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서휼과 흑룡왕 등, 용족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도.
오혜서의 근황을 확인하는 것도.
천뢰번을 훔치는 것도.
모두 실패했다.
내가 이번 생에 세운 목표는 전부 이룬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뭘 더 해야 하는가.
이 짧은 시한부 인생 안에서, 뭘 더 할 수 있는가.
그냥, 이대로 죽음을 천천히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은가.
그래, 이대로 그냥 편하게 주저앉자.
그냥….
"아냐."
나는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냐."
나는 도대체 뭘 할 수 있는가.
아니, 그런 질문을 할 게 아니다.
질문하지 말고, 일어서자.
뿌드득….
"이룬 것 하나 없는 인생이지만…."
그렇다고, 가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엿 같았던 인생이었지만, 그래도 이번 생애는 괴군의 괴뢰로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지금은 내 심장이 뛰고, 내 몸이 움직이고, 내 의지대로 행할 수 있지 않은가.
"후우…."
절망적일 정도로 이룬 것이 없지만, 아무리 실패만을 반복해 온 생을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직 살아 있다!
그렇다면!
살아 있다는 것 자체로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머릿속에 드리운 그림자들을 걷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아직 한 가지. 해야 할 게 남아 있지.'
서휼의 목적, 오혜서의 근황, 천뢰번의 절도.
이 외에도, 한 가지 더 목표한 것이 있었잖는가.
'서휼의 결혼.'
아니, 정확히는 서휼과 규련의 광한지약의 증인이 되어 주기로 한 약속.
그것을 지킬 기회는 남아 있다.
'규백에게는 광한지약이 남아 있다.'
그 말인즉, 아직 규백과 서휼은 청산해야 할 관계가 남았다는 것이었다.
둘의 관계를, 둘의 인과응보가 어떻게 끝나는지를 확인하는 것.
그 일이, 아직 내게는 남아 있는 것이었다.
'실패하기만 한 인생이었다.'
이제 1년이면 끝나 버릴 인생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남은 시간 안에 약속한 것을 이행하자.
'지족 영역으로… 가자.'
나는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지족 영역으로 가서, 둘의 관계를 정리해 주자.'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하는 법이니.
그렇게, 나는 남은 인생의 마지막을 규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쓰기로 결심하며.
서휼에게 그 마지막 안에 어떻게라도 한 방은 먹여 주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천인도에 있는 광령지로의 전송진을 일단 발동시켰다.
'미친놈을 상대할 때는, 미친놈으로 상대해야겠지.'
일단, 괴군을 만날 생각이었다.
* * *
지족 진룡맹.
봉명주 인근, 운심호.
그 운심호의 인근으로, 봉명주의 요선루를 흉내 낸 주루가 들어섰다.
주루의 루주인 결단기 마원(魔猿)은 요선루처럼 악사와 무희를 모집했고, 얼마 안 있어 두 명의 지원자가 나타났다.
"이름은?"
"유화입니다."
"특기는?"
"금을 탈 수 있지요."
한 명은 유화.
그녀는 금 타는 실력으로 빠르게 합격을 받았다.
마원은 유화의 연주에 가슴이 울릴 정도의 감동을 받았다.
'대단하군. 엄청난 수재가 들어왔어. 유화만 있다면 내 마원루도 요선루처럼 인근 요족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 좋은 터가 될 거야.'
마원은 희망에 부풀어 유화를 합격시킨 후 다음 지원자와 면접을 보았다.
"이름은?"
"규백."
"특기는?"
"춤."
"음… 말이 좀 짧군."
"어쩌라는 거냐."
"…."
다음 지원자인 규백은, 마원이 대하기 곤란할 정도로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보아하니 영맥도 안 느껴지는 게, 노예 종족 같은데 뭘 믿고 결단기인 내 앞에서 이러는 거지….'
마원은 까칠한 규백의 태도에 당황했으나, 일단 그녀의 춤을 보기로 했다.
'유화가 훌륭하다곤 하지만, 솔직히 지금 지원자도 이 둘 말고는 없는데… 일단 실력이나 봐야겠어.'
그러나 이윽고, 규백이 일어나 보법을 밟기 시작하자 마원은 탄성을 질렀다.
'마치 한 마리 황룡을 보는 것 같군.'
그녀의 움직임은 엄밀히 말해서는 용형비호조의 움직임이었으나, 마원은 그 화려한 움직임에 규백의 무공을 보고 춤이라고 인식했다.
규백의 춤 시연이 끝나자, 마원은 머릿속에 계산을 완료했다.
'이 둘은 무조건 잡아야 한다.'
결단기인 마원이었지만, 결단기 요족 치고는 몸이 약해 제대로 싸우지도, 일을 하지도 못하는 마원이었다.
그는 결국 이런 가게를 운영해서라도 수행 자원을 모아야 했다.
보통의 루주들은 노예 시장에서 노예 종족으로 팔리는 약소 종족들을 구매해 그들의 특기를 잘 개발시켜서 가게를 운영했으나, 마원은 자금도 한 푼도 없었기에 노예가 아닌 직원을 데려와야 하는 처지.
"본 마원루에 원하는 봉급 조건이 있나?"
마원은 규백과 유화를 합격시킨 후, 그녀들과 임금 협상을 하기 위해 그녀들을 불렀다.
"뭘 원하든 최대한 맞춰 줄 생각이 있네."
'어차피 기껏해야 축기, 그리고 연기기도 못 도달한 노예 종족들 출신이니 큰 욕심은 없겠지.'
마원 입장에서는 거의 거저 부릴 수 있는 자원들이었기에, 일단 그들의 기분이라도 맞춰 주려 마치 무엇이든 지원해 줄 것처럼 말을 했다.
그리고, 규백은 그런 마원을 퉁명스럽게 쳐다보며 물었다.
"맞춰 줄 능력은 되나?"
"음? 당연히 되고말고. 뭔가 원하는 게 있나?"
"상급 청명석 백 근, 일품 요호초 한 단, 그리고 중급 이상의 흑정향은 기본으로 지급되는 거지?"
"…? 뭐?"
"요선루에서는 노예들한테도 지급하던 물품들이다. 여기서는 지급이 안 되나?"
"아, 아니, 잠깐. 청명석이나 요호초는 둘째 치고, 흑정향은 하급만 해도 원영기는 되어야 구할 수 있는 물건인데? 도대체 뭘 바라는 거냐!"
"흠, 이것도 못 해 주나?"
규백은 잠시 이해가 안 되는 듯 머리를 갸웃했으나, 옆에 있던 유화가 무어라 눈짓을 주자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욕심을 버리지. 그럼 기준을 조금 낮춰서…."
얼마간 규백과 마원은 서로 원하는 타협점을 찾으려 끙끙거렸다.
'제길, 춤 실력이 환상적이지만 않았으면 당장 단약으로 만들어 버렸을 노예 종족 주제에 원하는 것도 많군.'
'규련이 살아 있었을 때, 규련의 동부 앞 들짐승들이나 받는 정도의 취급으로 기준을 낮췄는데 이것도 못 들어준다고? 하계와 다를 것도 없군.'
두 요족은 서로 불만족스러워하며 어찌어찌 계약을 맺었고, 유화와 규백은 일단 배정받은 숙소로 들어갔다.
"음, 마음에 안 드는군."
그녀의 방을 본 규백은 혀를 차며 들어갔고, 유화가 따라들어오며 웃었다.
"규백 님께서 느끼시기에는 별로시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가난한 결단기 요족이 제공할 수 있는 방 중 상당한 수준이랍니다."
"친한 척하지 마라, 심족. 그동안은 서은현과 함께라서 가끔 어울려 줬다만, 아직도 심족이란 존재는 불유쾌하다."
"어머나, 규백 님께서도 불완전하지만 하현에 드셨으니, 이제는 엄연한 심족의 일원이신 걸요?"
"…흥."
규백은 유화를 무시하며 방으로 들어갔고, 유화는 그녀를 따라 들어가며 말을 이었다.
"제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거야 어쩔 수 없습니다만, 그래서 마음은 정하셨는지요?"
"…."
규백은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배정된 방의 탁자에 걸터앉았다.
지난 한 달간, 건곤중역에서 지족 영역으로 돌아오며, 규백은 서휼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려 애썼다.
하지만 여전히 서휼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알 수 없었다.
너무나도 증오스러웠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애틋했던 기억 역시 남아 있었다.
도대체 어찌 대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도 모르겠다."
"한번, 멀찍이라도 만나 보시겠습니까?"
"뭐? 그랬다가 놈이 알아채면 어쩌려고?"
"조금 잔인한 일이지만 규백 님, 서휼은 규백 님을 보고 규련 님을 연상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게 무슨… 하긴, 그렇지."
규백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튼튼한 비늘도, 강력한 이빨도, 늘씬한 본체도.
그리고 그녀의 경지도.
모두 잃어버렸다.
화형체의 외모가 똑같기는 했지만 그뿐.
화형체의 외모야 가리고 저 멀리서 보기만 하면, 서휼은 절대 그녀를 알아채지 못한다.
'보고 오면, 내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가.'
그녀는 잠시 답답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았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모르겠군, 서휼을 맨정신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서휼의 얼굴을 본 순간 폭주해서 달려들지도 몰랐다.
결국 잠시 고민하던 규백은 고개를 저었다.
"됐다. 나 자신을 제어하지 못할 것 같군."
"그렇군요. 어쨌든 저도 서휼의 상황이 어떤지, 그리고 제 제자는 어찌 되었는지 알아봐야 하니 일단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나도 어차피 봉명주 인근에 다녀올 곳이 있으니."
"다녀올 곳이요?"
규백은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서휼이 사는 곳 인근에 위장 취업하긴 했지만, 솔직히 정말로 이딴 곳에서 춤추고 노래할 생각은 없겠지? 봉명주 인근에, 결단기 수준에서 쓸 만한 자원들이 몇 개 있으니 가지러 가겠다."
"음, 뭐… 저야 연주하는 게 좋으니 여기서 얼마나 지내도 상관없습니다만. 좋습니다. 어쨌든 자원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그렇게 웃으며 규백의 방을 떠나려던 유화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는지 다시 규백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흑정향 같은 원영기 급 재료가 아니면 취급도 안 하셨던 규백 님께서, 규련님이실 적에는 어찌 봉명주 인근에 고작 결단기 급 재료를 보관해 두셨던 겁니까?"
그 말에 규백은 별 것 아니란 듯이 대답했다.
"내가 보관해 둔 게 아니다."
"예?"
"서은현이 키우던 애완 요수가 하나 있었는데, 애완 요수에게 줄 수도자원을 찾길래 일전 적당한 결단기 급 자원들을 준 적이 있다. 서은현에게 그 위치는 들었으니 거기 가서 찾으면 있겠지."
"흐음, 서 도우도 애완 요수 같은 걸 키우다니 예상외군요."
"본인은 애완 요수가 아니라 친구라 하기는 했다만… 뭐, 경지 차이가 그렇게 나는데 애완 요수나 다름없지. 서은현이 하계로 떨어질 때 광한계 봉명주 인근에 놓아두고 왔다 했는데… 지금쯤이면 축기기는 됐으려나?"
"친구라, 아 그런데 그 요수는 무슨 종족이지요?"
유화의 물음에 규백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무슨 긴 벌레였던 것 같은데… 지네였나? 아마 맞을 거다. 그리고, 서은현이 이름도 지어줬다 했는데 아마… 이름이 홍범(洪範)이었었더랬지?"
광대와 공연 (2)
파아아앗!
진룡맹의 광활한 산맥과 숲을 헤쳐 나가며, 한 인영이 허공을 밟아 가며 날아가고 있었다.
규백이었다.
'허공답보라는 것도 어렵지 않군.'
규련의 기억 속에 있던 활공술에서 조금만 더 기예를 더하면 되는 일일 뿐이었다.
서은현은 규백에게 예상외의 무재라는 것이 있다며 놀라워했으나, 규백의 시선에서 이건 그냥 재활 운동도 되지 못했다.
합체기 용왕이 될 예정이었던 규련은 죽고, 규련의 찌꺼기인 규백은 결단기 수준의 심족조차 채 되지 못한 상태였으니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재라는 게 있다면, 왜 나는 그 입천이라는 것에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거냐.'
규백의 입장에선, 합체기에 달하는 경험을 지닌 그녀가, 결단기에 대응되는 심족의 경지에도 들지 못한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깨달음은 극에 이르면 서로 통한다는 말처럼, 그녀는 심족의 경지에도 어느 정도는 그것이 통할 줄 알았다.
실제로도, 서은현이 말한 등봉조극이라는 것까지는 합체기까지 이른 규련의 경험이 통용되었고 말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입천이라는 경지부터는 짜증이 나 미칠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나마 어찌어찌, 광한지약을 이용해, 서휼에게만 적용되는 반편이 입천에 반쯤 발을 걸치긴 했지만 그게 끝.
그녀는 자신이 입천이라는 경지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갈구하고 또 갈구해야 한다고?'
그녀는 분명 갈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갈구하는 것이 서휼에 대한 증오인지, 아니면 서휼에 대한 사랑인지.
규백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갈구하기는 하지만, 뭘 갈구하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입천에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심족의 구현이라는 건, 너무 이질적이야.'
천, 지족의 깨달음과 통하는 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특유의 규칙성이 있는 천, 지족의 공법과는 달리 심족의 구현은 너무나도 불규칙적이었다.
심지어 심족의 고수인 유화와 서은현마저도, 그녀가 광한지약을 이용해서 한 사람에게만 통용되는 답천을 만들어 내니 그런 것은 처음 봤다고 하지 않았던가.
함천존자는 한두 번 봤다고 했지만 그녀가 설명을 해 달라고 하자, 규백과는 경우가 너무 다르다며 설명해 주지 않았다.
도대체가 규칙성이라고는 없고, 너무나도 이질적이다.
아니, 그녀는 사실 규련이었을 시절에도 '심족'이란 존재들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다.
너무나도 이질적인 존재들이다.
규백은 규련일 시절 예비 용왕으로서 천, 지, 심족과, 진선에 관한 한 가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천족에는 천족에 대응하는 천선들이 존재하고, 지족에는 지족에 대응하는 지선, 즉 선수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심족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심족에 대응되는 진선 급 존재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었다.
심지어 놀라운 것은, 그녀가 어릴 적 만났던 성반기 성사.
백운성사 역시도 심족에 대응되는 진선은 무어라 불리는지,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 모른다고 답했었다.
'마치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역사의 흐름 안에 억지로 욱여넣은 것 같은 이들….'
너무나도 기이하다.
규백은 그리 생각하며 허공답보를 밟으면서, 서은현이 숨겨 두었던 그의 애완 요수의 자원 창고로 향하였다.
* * *
쏴아아아―
얼마 후, 규백은 봉명주 인근 커다란 폭포 앞에 도착했다.
폭포는 백색과 검은색의 두 물줄기로 정확하게 나뉜 채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으며, 그 폭포 뒤쪽으로 시커먼 동굴이 은은하게 보였다.
'저곳이 자원을 보관해 놓았던 곳….'
규백이 이전에 지내던 그녀의 동부는 황룡 일족의 다른 이들이 와서 자원들과 그녀의 유품들을 회수했을 터였기에, 이렇게 서은현의 애완 요수를 위한 자원 창고를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황룡 일족을 찾아가면, 나는 규련으로 인정받고 용족으로 대우받을 수 있겠지.'
사축기 수사는 죽으면 한 번, 혹은 특이한 몇몇은 두 번 이상도 부활할 수 있었다.
이는 어중간하게 원영이나 금단이 남은 수사를 칭하는 것이 아닌, 원영마저 붕괴해 버려 진정한 죽음을 맞은 이들을 뜻했다.
물론 원영마저 붕괴하고 나서 하는 부활은 무조건 원영기 이하로만 부활할 수 있지만, 어쨌든 부활하여 다시 수행을 쌓아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축기 이상은 어마어마한 이들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죽은 후 제대로 부활할 시간을 놓치거나, 죽은 후에도 다시 부활하고 싶어 하지 않는 요족들은 부활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혹 그런 이들이 있었다.
부활하고 싶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욕구, 혹은 살아오며 해결하지 못한 한(恨)을 가진 이들은 부활하기를 원치 않아도 그들의 마음의 조각 중 일부가 사축기 수사의 막대한 생명력에 힘입어 부활하곤 했다.
그들은 대체로 '조각'이나, 아니면 멸시하는 호칭인 '찌꺼기'라고도 불렸다.
왜냐하면 정식으로 부활한 것이 아닌, 사축기 수사의 집념으로 인해 탄생한 존재였으며, 그렇기에 제대로 된 수행을 쌓을 수 없는 몸으로 부활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찌꺼기들이라도 각 종족에 따라 생전의 사축기 수사 본인으로 예우하느냐, 혹은 그냥 찌꺼기대로 예우하느냐는 모두 달랐다.
그리고 규련이 속했던 황룡족은 찌꺼기에게도 사축기 수사 본인의 예우를 갖추는 종족이었다.
찌꺼기일지언정 사축기 수사 본인의 기억을 상당수 가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황룡족에서는 찌꺼기가 탄생하면, 어린 용족 자재들을 가르치는 선생의 역할로 많이 업무를 주고는 했다.
아마 규백 역시 그렇게 예우받으며 살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원한다고 해도 서휼이 그녀가 찌꺼기 형태로 부활한 것을 알게 되면 찾아와 죽일 터였고.
'일단 서휼을 언젠가 다시 만나자.'
서휼과 다시 만나, 제대로 마음을 정리하고 최후를 맞이하자.
서휼에게 한 방을 먹이든, 아니면 그의 손에 얌전히 죽음을 맞이하든.
그것이 규백이 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그녀의 재산이 아닌 부하였던 서은현의 애완 요수가 먹던 사료일지라도 찾아 먹어야 한다.
'고작 결단기 급 영약으로 뭔가 되리라 기대는 안 하지만, 그래도 축기기 수준으로 영맥을 끌어올려 체내에 정순지력은 돌릴 수 있겠지.'
체내에 정순지력만 돌아도 그녀로서는 상당한 전력의 상승을 맛볼 수 있었다.
물론, 이전에는 발가락으로도 밟아 죽일 수 있던 축기경의 힘을 얻으려고 아등바등하는 자신이 우습기는 했으나, 그뿐.
그녀는 우습다거나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동굴 속을 뒤졌다.
'서은현이 이쯤에 결계를 쳐 놨다고 했었는데….'
그녀는 서은현이 펼쳐 놓았을 결계를 더듬거리며 찾아갔다.
얼마 후, 그녀의 눈에 영력의 흐름이 비틀리는 곳이 보였다.
찌꺼기가 되었을지언정 지족의 시야는 남아 있었기에 그녀는 영기의 흐름을 좇아 조강을 날렸다.
부웅!
그녀가 허공을 할퀴자 그녀의 손에서 뻗어져 나온 조강이 영기의 흐름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건드려 결계를 해체했다.
"흠…."
그녀는 눈앞에 있는 몇 개의 곤충 먹이용 단약, 그리고 영석 몇십 근과 결단기 수사용 영초, 영과들을 보며 살짝 한숨을 쉬었다.
'많이 채워 놨다더니, 별로 많지도 않군.'
우스울 정도의 자원이었다.
아마 규련 시절의 그녀에게 이 자원을 내밀었으면 모욕한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하지만 그녀는 일단 이 정도라도 감지덕지하기로 하며, 근처에 있던 영과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였다.
타다다다다―
기묘한 소리가 들리며, 동굴 안으로 뭔가가 들어왔다.
규백은 경계심을 곤두세우며, 들어온 누군가를 노려보았다.
곧이어 그것이 몸을 드러냈다.
그것은, 동굴 안을 꽉 채울 정도로 거대한 지네였다.
지네와 규백의 눈이 마주쳤다.
둘은 서로를 잠시 쳐다보았고, 규백이 지네를 공격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할 때.
지네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귀하는 누구시길래 남의 창고에서 도둑질을 하고 계신 겁니까?"
"엇…."
의외로 예의 섞인 말투였다.
* * *
"아… 주인님의 지인이셨군요."
"…."
규백은 동굴 밖으로 나와 거대 지네.
홍범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눴다.
의외로 홍범은 규백의 말을 선선히 믿어 주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의 지인분이시라면야,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전부 가져가셔도 됩니다. 어차피 제가 결단기에 이른 후부터는 큰 쓸모가 없던 물건들이니까요."
"허…? 결단기?"
규백은 홍범을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지난번, 새끼 때 봤을 때는 연기기 초기에 갓 도달했었는데…."
"후후, 제 어린 시절을 기억하시다니 주인님의 오랜 지인이신가 보군요."
"…뭐, 그렇다 할 수 있지. 그나저나, 고작 몇십 년 사이에 그 지네가 결단기에 이르렀다고?"
규백은 당황하며 눈앞의 지네 요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지네 요수는 당황스러운 규백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껄껄 웃을 뿐이었다.
"별것 아닙니다. 체내의 영성을 높여 주는 법기를 가지고 있어, 신외지물의 도움을 받았지요."
쑤욱!
지네는 그 수많은 다리를 꿈틀거리더니, 얼마 후 갑각 사이에서 기다란 장죽을 꺼냈다.
"요선죽이라는 법기입니다만, 한 번 빨면 영성이 진해지며 요족으로서의 자질이 향상됩니다. 주인님이 제게 주셨던 법기지요."
"요선죽…!?"
규백은 요선죽을 빠는 홍범을 보며 흠칫 놀랐다.
그녀도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내 알기로 그 법기는 요족이 영성을 응집하게 도와주지만, 계속 사용하면 독성(毒性)이 나와서 중독으로 사망할 수 있다고 알고 있고, 그래서 아주 옛적에 제작이 금지된 것으로 아는데…."
"저는 독에 내성이 강해서인지 아무렇지도 않더군요."
후우우우―
홍범은 장죽을 입에 물었다가, 연기를 빨아들이고 다시 뱉으며 껄껄 웃었다.
규백은 그런 홍범을 보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너 정도의 자질이라면, 충분히 서은현이 무슨 금제를 펼쳐 놓았든 탈출해서 자유를 찾을 수 있을 텐데, 무슨 충성심이 있어 아직도 서은현을 대우해 주는 거지?"
후우우―
홍범은 장죽으로 연기를 마셨다 다시 내쉬며 웃었다.
"오해가 있으시군요. 주인님은 저에게 아무런 금제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 의지로 주인님을 주인님이라 부르는 거지요."
"…?"
"태어나서, 첫 기억은 제가 자연스럽게 주인님의 몸 위로 올라갔고, 주인님은 그런 저를 받아들여 주셨다는 것이었지요. 주인님과 함께 비승했던 짜릿했던 기억은 아직도 뇌리에 깊이 박혀 있습니다."
"단순히 서은현이 너를 어릴 때부터 돌봐 주어서인 거냐?"
"아니요, 제가 영성을 가지고 지성을 가지게 되었을 무렵. 저는 그 무렵에 제 운명을 깨달았습니다."
"…?"
"저는 주인님을 보좌하기 위해, 그분을 지키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그것이 제 운명이라는 것을 느꼈지요."
"지족이 운명을 느꼈다고? 그것도 연기기 시절에?"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독특하군…. 서은현도 네가 그런 걸 알고 있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주인님은 제가 연기기 시절에 갑자기 실종되셨는걸요. 참, 그러고 보니 몇십 년 동안 주인님과 못 만났습니다만… 주인님께서는 어디에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
홍범의 기이한 의식 흐름에, 규백은 기묘함을 느꼈다.
'연기기 지족이 운명이니 뭐니 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몇십 년 동안 얼굴도 안 본 서은현을 주인이라 부르며 아직도 따르고 있다고?'
규백은 눈앞의 지네 요수.
홍범이 어지간히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다.
"서은현이 지족 영역으로 오면 어디 있었는지 제대로 설명해 줄 거다. 그나저나…."
규백은 동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서은현이 말하기를, 저 동굴에는 원래 가득 찰 정도로 결단기 요수용 영과와 영초가 많았다고 했는데, 혹시 네가 먹은 것이냐?"
"예, 그렇습니다. 주인님 덕택에 그동안 수련 자원은 부족함이 없었지요."
"…서은현이, 결계의 해제 방법을 애완 요수인 네게 알려 주고 갔다고?"
"아닙니다. 제가 결계의 흐름을 보고 진법을 알아서 해체해서 들어갔습니다."
"알아서 진법을 해체해…?"
규백은 홍범과 대화를 나누며 확신했다.
'이 녀석, 엄청난 재능을 지닌 녀석이다.'
홍범은 천재였다.
규백은 홍범과 대화를 나누며 그것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약 두 달이 지났다.
규백은 홍범과 만난 후, 서은현이 홍범을 위해 준비해 놓았던 영약들을 먹고 정순지력을 되찾았다.
그러는 사이 마원의 마원루 역시 개점을 준비했고, 유화 역시 서휼의 동태와 현재 지족의 전체적인 흐름을 조사해 왔다.
그렇게 그녀들이 시간을 보내던 와중.
마침내, 서은현이 돌아왔다.
"오랜만입니다."
"그래, 인족 영역에서 하려던 일은 잘 했나?"
"…잘은 되지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성과는 있었습니다. 아, 그리고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서은현의 뒤쪽으로는 작은 곱사등이가 하나 따라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