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난 마음 (3)
투웅!
전투의 시작을 알린 것은 유화의 금이었다.
그녀의 금이 울리며, 사방으로 주홍빛 강물이 넘쳐흐른다.
노을빛이 주변을 물들이며 수마를 불러온다.
나는 그녀의 노을빛에 닿지 않게 적당히 피하며 장익의 빈틈을 찾았다.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단 하나의 빈틈조차 허용치 않는다.
'지금 들어가면 목이 잘린다.'
감이 그걸 경고해 주고 있었다.
촤르르!
유화의 연주가 장익을 휩쓸었고, 장익은 그녀의 연주에 닿지 않게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네 개의 박도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부웅!
어느새 그의 손아쉬에 있던 박도가 내 눈앞으로 날아왔다.
피이잉!
박도는 그대로 허공에서 내 목을 노리고 휘둘러져 왔으며, 나는 땅을 박차며 겨우 박도를 피했다.
'어검술?'
장익의 박도는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휘둘러지며 나를 쫓아왔고, 나는 무형검으로 장익의 박도를 쳐 낸 후 그의 박도를 관찰했다.
'아니, 아니야.'
어검술은 아니었다.
장익과 박도의 손잡이는 얇은 기사(氣絲)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는 자신과 연결된 기사를 움직여 박도를 허공에서 움직인 것이었다.
자신의 의식을 떼어 내서 무기에 불어넣어, 무기에 행동을 입력하는 어검술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부웅, 붕, 붕, 붕!
그리고 내가 장익의 박도를 관찰할 때.
장익은 양손에는 박도를, 주변으로는 기사를 연결한 두 개의 박도를 회전시키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뭔가 기술을 준비하는 건가.'
그렇다면 기술이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지를 보는 게 좋을 것이다.
내가 그의 기술에 대비할 때였다.
후우웅―
공기가 빨려 들어간다.
장익의 주변으로, 주변의 공기는 물론 천지영기 자체가 슬슬 흡수되고 있었다.
찌릿, 찌릿….
나는 전신이 찌릿거리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등골이 싸해진다.
'아니, 잘못 생각했다.'
저 기술은, 완성되게 두면 나와 유화는 죽는다.
유화 역시 어렴풋이 위기감을 느낀 것인지 더더욱 빠르게 금을 뜯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빠르게 장익의 주변을 회전하며 그의 틈을 노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장익의 초식에서 나는 어떠한 틈새 같은 것을 발견했다.
찌릿, 찌릿….
육감이 경고한다.
저 틈은 분명 함정이다.
저 함정에 들어가면 분명 낭패를 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함정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져 들어갔다.
'낭패를 보겠지만, 이게 아니면 기회조차 없다.'
장익은 거대한 절벽이었다.
단순히 높은 절벽이 아닌, 폭포가 떨어지고 있어 아예 오르는 게 불가능한 절벽.
저 절벽을 넘어서려면, 설령 함정이더라도 우직하게 진입한다!
단악검법, 월악!
파앗!
장익이 보여 준 틈새로 진입한 나는 무형검을 잡고 틈새를 향해 가로 베기를 시행했다.
그러나 찰나, 장익은 그 작은 체구를 움직여 허공으로 뛰어올라 내 무형검을 피한 후, 계속해서 주변을 회전하던 두 자루의 박도를 내게 내리꽂았다.
황급히 뒤로 빠지며 피하려 했으나, 순간 내 등 뒤로 무언가가 걸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기사(氣絲)!?'
장익이 박도를 회전시키며 사용했던 기사가, 내가 다시 뒤로 빠지는 것을 막아 내고 있었다.
'단순히 박도를 회전시키고 있던 게 아니었어!'
박도를 통해, 주변으로 그의 기사를 흩뿌리고 있던 것이었다.
어느덧 사방은 인식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얇은 기사로 빼곡하게 덮여 있었다.
[걸렸군.]
장익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손에 들린 박도를 던졌다.
나는 무형검을 천변만화시키며 기사들을 잘라 내고 뒤로 빠졌다.
박도는 내 코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쳤으나, 나는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부웅!!
내 코끝을 스치고 지났던 박도가, 사방에 깔린 기사들을 따라 허공을 회전하더니 다시 내게 쏘아져 왔다.
내가 잘라 낸 기사들은 어느새 다시 이어 붙여져 있었다.
'이대로라면 장익에게 접근 자체가 불가능해.'
겉보기에는 단순히 4개의 박도가 그의 주변을 회전하는 것 같지만, 4개의 박도가 기사를 흩뿌리고, 장익은 기사들을 통제하며 마치 꼭두각시처럼 4개의 박도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그리고 저 기사들은 물리력을 부여해 상대의 움직임을 방해할 수도, 예기(銳氣)를 부여해 상대를 가둬 잘라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정신 나간 수준의 정밀한 조작력이 필요할 텐데….'
장익은 이 정밀한 기사를 자유자재로 조작하며 나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일단, 날아오는 박도를 한 번 흘려 낸 후 장익에게 돌진한다.'
사방에 펼쳐진 기사들은 귀찮기는 하지만, 답천의 능력으로 계위 수준에서 잘라 버리면 충분히 자를 수 있다.
그렇다면 일단 박도를 한 번 막아 내거나 흘린 후, 장익에게 달려들어 기회를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장익의 박도를 향해 무형검을 뻗쳤을 때였다.
"…!"
콰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음이 울리며, 나는 피를 토했다.
왈칵!
내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충격에, 간신히 이를 악물고 피를 토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일순간, 사방에 흩어져 있던 기사들의 힘이 일 점 집중됐다!'
언제라도 흩뿌린 힘을 다시 일 점 집중해서 상대에게 충격을 주는 기법.
상당히 무서운 기예였다.
그리고 내가 충격을 추스르는 사이, 나와 장익의 주변을 노을빛 강물이 채웠다.
유화는 나까지 함께 집어삼키며 장익을 재워 버리려는 듯, 모든 방위에서 강물로 우리를 덮쳐 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윙, 윙, 윙, 윙!
주변에 흩뿌려진 기사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장익의 박도들이 기사들의 궤적을 따라 미친 듯이 주변으로 회전하였다.
위이이잉!
마치 폭풍 같았다.
녹빛의 박도가 폭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커헉…!"
난 장익이 '방어'를 위해 폭풍을 만든 그 찰나, 혼신의 힘을 다해 그의 기사의 영역에서 빠져나왔고 곧이어 녹빛의 폭풍이 주홍빛 강물을 쓸어버렸다.
[조금 더 분발해 봐라. 이 분체에 담긴 기운 자체는 연기기 급도 안 된다. 그리고 그조차도 아껴서 사용하는 중인데, 이런 나조차 공략하지 못하는 거냐?]
쉬이이….
장익의 폭풍이 지나가고, 나는 그의 박도들이 쓸고 지나간 곳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미쳤군…."
직경 30장이 그대로 쓸려 나가 있다.
물론, 축기기 수사가 법술을 난사하기만 해도 그 정도는 쓸어버리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내가 경악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장익이 쓴 기사, 그 기사에 쓰인 기운의 양과, 박도에 불어넣은 기운의 양 자체는 분명, 검기를 한 시진 정도 유지할 양이었다.'
그러니까, 장익이 쓴 힘의 총량 자체는 검강 한 번 휘두른 것만도 못했다.
하지만 검강을 한 번 휘두르면 바위 하나를 자를 수 있을지언정 저런 광범위한 파괴 행위는 불가능했다.
'뭘 어떻게 한 거지?'
유화 역시 그 사실을 알았는지 안색이 어두워져 있었다.
'유화가 사용한 연주는, 힘의 총량으로만 따지면 원영기 수사의 전력을 다한 일격과 맞먹는다.'
그런데 장익은 고작 무림인의 검강보다도 약한 힘을 가지고 원영기 수사의 일격을 떨쳐 낸 것이었다.
실로 사량발천근(四兩拔千斤)!
'아무리 쇄성기 급 존재라지만… 말이 되는 일인 건가?'
정말로 검강 정도의 힘으로만 원영기 급 일격을 떨쳐 낸 건 아닐 터였다.
뭔가가 더 있다.
나는 유화와 눈빛을 주고받은 후, 바로 전력을 다해 장익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환람연하가 내 뒤를 받쳐 주며, 나와 함께 장익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부웅!
장익은 다시금 기사를 흩뿌리며 기사를 통해 박도를 집어던졌고, 나는 그 자리에서 피하며, 환람연하의 강물과 동시에 장익을 공격해 나갔다.
다음 순간.
쩌어어어엉!
내가 피했던 장익의 박도가 방금의 폭풍보다도 더더욱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인근의 땅을 헤집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된다!
방금 박도에 담겨 있던 힘은, 흩어진 기사를 전부 합쳐도 검기보다도 한참 허약한 힘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파괴력이 나온단 말인가?
'단순히 사량발천근 같은 게 아니다.'
뭔가, 장익이 우리에게 숨기고 있는 뭔가가 있었다.
나는 감각을 곤두세우고 장익의 주변을 회전하며 그의 기사들을 관찰했다.
그리고 문득, 나는 그의 기사들을 보며 어떠한 기시감이 드는 것을 확인했다.
'저건….'
어째선지, 김영훈이 외부 내단을 사용하며 월도답천의 실마리를 잡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김영훈은 외부로 경락과 혈관을 이어, 외부에서 내단을 만들어 공격의 위력을 증폭시켰다.
"…! 그건… 단순한 기사가 아니군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장익에게 물었다.
[호오, 벌써 알아챘다고? 어떻게 안 거지?]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비슷한 걸? 호오….]
"이미 그 일대는, '당신' 그 자체로군요."
그랬다.
장익이 박도를 휘두르며 생긴 기사는 단순한 기사가 아니었다.
기운으로 이뤄진 경락이자 혈관, 영맥이었다.
김영훈은 외부의 영맥을 내부의 생명력과 연결하여 강화하는 것을 꾀했지만, 장익은 달랐다.
그는 김영훈과는 반대로, 외부로 뻗친 경락이 살아 숨쉬게 하며, 외부의 천지영기를 빨아들여 자신의 몸이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욱 큰 기운을 저 기사로 빨아들이게 한 것이었다.
'회전력에 의해 천지영기가 빨려가는 줄 알았다만, 아니었군.'
회전과 함께 장익이 깔아 놓은 기사가 영맥이 되어, 살아 숨 쉬며 주변의 천지영기를 들이마시기에 천지영기가 빨렸던 것이었다.
나는 장익의 수법도 수법이었으나, 그 정밀함에 기함하였다.
'외부의 천지영기를 빨아들여 자기 공격을 강화한다고?'
그게 말처럼 쉬웠으면 다 그런 식으로 싸웠지, 누가 일반적인 무공을 익혔겠는가.
실제 자신의 몸과 같은 정밀도를 요한다.
그리고 실제의 몸과 같은 정밀도가 맞지 않으면, 장익이 외부에서 빨아들였을 천지영기는 그대로 다시 흩어져 쓸모가 없게 되어 버렸을 터였다.
쉬링, 쉬링….
장익은 빠르게 알아챈 나를 칭찬하는 듯이 보면서도, 계속해서 박도를 회전시키며 기사의 영역을 늘려 가고 있었다.
동시에 나는 박도에서 느껴지는 흉험함이 점차 거세지는 것을 깨달았다.
'기사의 영역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장익의 공격은 무한대로 강해진다.'
어찌보면 내 우공이산과도 통하는 데가 있는 수법.
그렇다고 저걸 파훼하겠답시고 기사의 영역 안으로 들어서면, 영역 안에서는 무한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장익의 박도를 상대해야 하며, 또한 기사들이 움직임을 쉴 새 없이 방해하기에 성가시다.
'…한 번에 승부를 본다.'
계속 시간을 끌면, 장익은 무한대로 강해져 버릴 터였다.
물론 장익은 분체인 상태였기에 그의 몸이 버티지 못하고 터져 버릴지도 몰랐으나, 그런 식으로 승리를 얻어 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
나는 유화와 심어를 교환했다.
우리는 뜻을 일치시킨 채 각자 장익의 양옆으로 가 자리를 잡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최대의 공격을 퍼부었다.
단악검법 오의, 단악.
환람연하 오의, 환천하.
쿠구구구!
일시에 펼쳐지는 21개의 초식이 장익의 기사들 중 가장 틈새가 넓은 곳에 내리꽂혔고, 여덟 갈래로 나뉜 주홍빛 강물이 다시 한 갈래로 합쳐지며 노도처럼 장익의 기사들을 밀고 들어갔다.
다음 순간, 장익은 미소를 지으며 양손에 든 박도들을 들어올렸다.
[가상하군. 나도 조금 힘을 써 볼까?]
그리고 의념의 세계로 장익의 절학명이 울려 퍼졌다.
투혼(鬪魂), 제일보.
느껴진다.
장익이 쓰려는 것은 입천의 깨달음에 해당하는 일격.
그러니까, 지금까지 장익이 우리와 싸워 온 것은 입천조차 달하지 않은 순수한 그 자신의 기예였다는 뜻이었다.
장익의 주변에서 회전하는 네 개의 박도, 장익은 박도와 함께 그 자리에서 춤추며, 사방으로 공격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사보멸천도(四寶滅天刀).
주선멸천(誅仙滅天).
육선멸천(戮仙滅天).
"아…."
아름답다.
분명, 지지난 생.
괴군의 기묘성채를 반으로 쪼개 버렸던 그 일격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더더욱 가까운 곳에서, 장익이 보고 배우라는 듯이 세세하게 펼치고 있기에 더더욱 그 아름다움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의(意)가….'
기는 곧 의.
장익의 기사가 일 점 집중되며 어마어마한 위력을 보여주었듯이, 장익의 의념이 일 점 집중되며, 기의 계위로 내려온다.
그리고 기의 계위로 내려온 그의 의식은 무수한 기사들과 하나 되어, 주변에서 빨아들인 기를 조작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극한으로 예리하게 다듬어진 박도의 기운.
그것이, 각기 오의를 펼치는 나와 유화에게 날아갔다.
피잇!
깨끗하다.
그걸로 끝이었다.
내가 쏟아 내던 단악의 오의는, 장익의 주선멸천에 그대로 베여 나가 스러졌다.
쩌저저저정!
유화가 쏟아 내던 오의는, 장익의 육선멸천에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 흩어져 버렸다.
차라리 폭력적일 정도의 절기가 그녀의 오의를 흩어 내어 버렸다.
피싯!
어느덧, 나는 내 몸이 그대로 세로로 반으로 쪼개졌다는 것을 인지했다.
'…어마어마하군.'
그나마 장익의 배려로 금단은 쪼개지지 않아 죽지는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실전에서 장익의 절기를 맞았을 경우 금단은 물론이고 원영까지도 한 번에 쪼개졌으리란 것을 느꼈다.
쿠과과광!
유화는 장익의 절기를 얻어맞고, 전신에 멍이 든 채 저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완벽한 패배였다.
그리고, 장익이 기운을 응결해 만든 박도를 흩어 버리며 팔짱을 꼈다.
[그래, 다들 내가 뭘 말하려는 건지는 이해했나?]
"…예. 좋은 가르침이었습니다."
나는 장익과 한 번 대련해 보고 나서야 그가 말하려는 것을 이해했다.
그가 대련 전, 어째서 그런 질문을 했는지도 대강 이해했다.
[심족의 기술이란, 투혼이란, 약자의 입장에서 강자에게 맞서는 것!]
그렇다.
장익이 말도 안되는 정밀도를 보여 주며 운용했던 기술은, 사실 강자의 입장에서는 그냥 복잡한 것을 운용할 필요 없이 그냥 주먹을 뻗으면 된다.
그러나 장익은 검강 하나 분량의 힘으로 원영기 이상의 위력을 지닌 공격을 몇 번이고 펼쳐냈다.
사량발천근도 사량발천근이지만, 그 힘을 이용해서 다시 힘을 불려, 적은 힘으로도 상대를 제압한 것이었다.
장익은 강자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런 식으로 기운을 복잡하게 운용하여 기술의 위력을 증폭시켜야만 하는 것이었다.
약소 종족으로 태어나, 용족, 인족, 거인족 같은 무시무시한 종족들을 상대하기 위해 그가 만들어 낸 절학!
그것이 바로 그의 투혼이었다.
[약자로서, 노예로서, 하찮은 미물로서! 강자에게, 주인에게, 지배자들에게 저항하고자 했다. 약자들이 억울하게 핍박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해 온 의(意)가 바로 나의 투혼(鬪魂)이다!]
장익이 말했던, '모두에게 구현의 자질이 있다'는 말은 곧,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언젠가 약자의 입장이 될 수 있단 의미.
그러므로, 그는 약자를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었다.
[너희에게 다시 묻겠다.]
나는 장익의 물음에 마음 깊숙이 고민하였다.
[네게 있어 무(武)란 뭐냐?]
조각난 마음 (4)
내게 있어 무(武)란 무엇인가.
월도입천에 이르며, 내게 있어 무란 자유라고 생각했다.
운명의 굴레에서 발버둥 치며, 회귀라는 운명을 벗어나고자 갈망했던 내 마음이 구현된 것이 지금의 무형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회귀를 벗어나기 위해서만 사는 것인가.
'아니다.'
내 삶은 그 자체로, 무수한 은혜와 감사함 속에 이뤄져 있었다.
그러므로 내 삶은 회귀를 벗어나기 위해서만 사는 것이 아닌, 삶 그 자체를 충실히 살기 위해 사는 것도 있었다.
매 순간 매 순간.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매 순간은,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을 돌아갈 수 있는 나이기에 느끼는 사실.
시간은, 절대로 돌아올 수 없다.
그렇기에 충실한 삶을 살자.
그렇다면, 충실한 삶이란 무엇이고.
내게 있어 충실한 무(武)란 무엇인가.
무엇이 나의 충실한 삶이며, 무엇이 나에게 있어 진정한 무(武)인가.
'내게 있어, 무란 뭐지?'
나는, 지금 당장 이 알량한 머리로는 도저히 답을 내는 게 불가능한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고민해 봤자 도움 되는 것은 없다.
'앞으로, 계속… 생각해 나가야 할… 문제겠지.'
나는 세로로 썰린 몸을 재생시키며 점차 눈을 감았다.
아직 완전한 원영기로 회복되지 않아서인지, 고작 몸이 반으로 잘린 것 가지고도 의식이 침잠하며 기절해 버린다.
'하루빨리… 경지를 찾아야겠군.'
나는 의식을 넘기며 잠에 들었다.
* * *
눈을 뜨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유화, 그리고 규백이었다.
"일어났나."
"여기는…."
"동굴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으나, 나는 내 옷매무새가 정리되고, 땀이 닦여져 있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규백이 내가 깨어날 동안 나를 보살펴 줬군.'
규련의 조각인 그녀라지만, 그녀 역시도 규련의 본성을 이어받아 선했다.
내가 그녀의 성품에 대해 생각할 때, 그녀가 말했다.
"대놓고 보여 주더군. 함천존자께서."
"…?"
"나 역시 너희 대련을 봤잖느냐. 함천존자께서 너희에게 주신 깨달음은, 나 역시도 멀리서나마 알 수 있었다. 적은 힘으로도 큰 힘을 이길 수 있다, 약자로서 강자를 상대하는 법을 몸에 익혀라. 전체적으로 그런 뜻이 아니었나?"
"예, 맞습니다."
"존자께서는, 나에게도 그 말을 하고 싶으셨나 보군."
그녀는 동굴 속에서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존자의 깨달음을 전달받으며 깨달았다. 나는 아직도, 나 자신을 강자였던 규련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아니, 사실 규련이었던 시절부터, 정확히는 서휼을 만났던 시점부터 강자는 없었다."
우우웅!
그녀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새끼손가락과 연결되어 있는 희끄무레한 선이, 허공 어딘가로 이어진 것이 보였다.
"쭉 서휼에게 매달려 오기만 했었지. 그래, 나는 서휼을 만난 날부터 사랑에 사로잡힌 약자였다. 나는 약자 주제에 스스로를 강자라고 착각하며 앉아 있었기에 존자는 내게 가르침을 주기 싫어했었던 거겠지. 그래…."
뚝, 뚝뚝….
규백이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규련의 조각 난 마음일 뿐이다. 그녀의 찌꺼기일 뿐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서휼을 사랑했던 마음을 절절히 이어받았어. 동시에 그녀의 광한지약 역시 이어받았다. 지금껏 입으로는 서휼에게 복수하고 싶다고 외쳐 왔다. 하지만…!"
그녀가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절규했다.
"동시에 나는 규련의 마음을 이어받았기에, 서휼을 사랑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내가, 나 스스로가 너무 무섭다. 서휼이 너무 증오스럽지만, 동시에 서휼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공포스러워! 내 마음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답해다오, 너라면, 혹시 답을 알고 있지 않으냐?"
규백은 절규하며 내 손을 잡고 물어 왔다.
유화는 동굴 입구로 나가 우리의 사이에서 시선을 돌렸고, 나는 규백의 절규를 들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되물었다.
"한 가지, 규백 님께서 서휼을 사랑하든, 증오하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않습니까?"
"…?"
"서휼은, 규련 선배를 어찌 생각하는가. 이것이 더 중요한 게 아닙니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일방적일 수 없다.
누군가가 반응을 하면 상대가 받아 주어야 관계가 형성된다.
지금 규백은, 서휼을 향해 자신이 온갖 반응을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서휼이 그녀의 반응을 받아 줄지가 더 중요한 것이었다.
"서휼이 당연히 규백 님의 반응을 받아 줄 것이라는 생각은, 강자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규련 선배님도 확인하셨듯, 서휼은 규련 선배님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
"규백 님께서는, 서휼과의 관계에 있어 관계의 약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서휼은 당신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고, 규백 님은 지금 서휼에게 어떤 반응을 던질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닌, 서휼이 규백 님을 바라봐 줄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말에, 규백의 동공이 커졌다.
"…날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냐."
"규백 님, 규백 님은 지금… 스스로 답을 구해 놓으시고, 제대로 답을 확인하기가 두려워 제 앞에서 울부짖는 것처럼 보이시는군요."
나는 규백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규백 님께서 생각하신 답을 말해 주십시오. 당신은 어떤 답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네 말이… 맞다."
규백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나는… 그래. 지금 서휼을 사랑할지 증오할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서휼이 나를 상대라도 해 줄지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지. 네 말이 맞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목표를 정했다. 네 말대로, 심도공법이라는 걸 익히겠다. 심도공법이라는 걸 익혀서, 어떻게 해서라도 서휼과 다시 만나서…! 서휼의 감정을, 제대로 확인할 것이야!"
"…훌륭하십니다."
나는 규백의 결의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부터, 나는 규백에게 무공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손을 이렇게 뻗으십시오."
규백에게 내공심법을 익히게 하는 건 불가능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는 했지만, 그녀는 사축기 지족인 규련의 생명력이 낳은, 일종의 규련의 부산물이었으니.
그녀의 기경팔맥은 인간과 완전히 달랐다.
겉모습만 인간을 닮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겉모습이 인간을 닮았다는 건, 겉모습이 필요한 무공을 익힐 수 있다는 뜻.
규백은 내 지도에 따라 팔다리를 움직여서 기를 끌어모으는 기공을 익히고, 내가 가르쳐 주는 대로 무공을 익혔다.
규백에게 가르친 무공의 이름은 용형비호조(龍形飛號爪).
용의 움직임을 본뜬 조법(爪法)이었다.
붕, 부웅, 붕붕!
내 지도 아래에, 규백은 상당히 빠른 성취로 용형비호조를 익혀 나갔다.
"음, 익히기 쉽군. 심도공법이란 것도 별거 아닌 거 아니냐?"
"규백 님께서 재능이 있으신 덕이지요."
"뭐, 그것도 맞겠지."
그녀는 서휼을 만나겠다는 일념 아래에 용형비호조를 미친 듯이 수련했다.
물론 그녀가 빠르게 용형비호조를 익히는 이유는 당연했다.
'애당초 내가 규련의 본체의 움직임을 보고 기억해서 만든 무공이니까 당연하겠지.'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황룡 일족인 규련의 움직임을 보고 만들어 낸 무공이다.
그런 만큼, 규련의 조각인 규백에게 그보다 잘 맞는 무공은 없었다.
새로운 무공을 익히게 하는 것이 아닌, 무공을 통해 본래 자신의 움직임을 재현하게 하는 것이니 말이었다.
물론, 그녀 자신에게 최고의 적성을 지닌 무공을 수련시키는 것 외에도.
그녀는 정말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철주야 용형비호조를 수련했다.
오로지 서휼을 다시 만나기 위한 일념으로!
그렇게, 하계에서의 10년이 흘렀다.
* * *
쿠구구궁!
"끼르르륵!"
"끄에에엑!"
"끼에에엑!"
한적한 숲속.
그곳에서 커다란 폭음이 울리며, 한 나무가 쓰러졌고, 나무 근처에 있던 짐승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나무의 밑동 부분.
그곳에서는 한 갈의의 여인이 손을 털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벌써 용형비호조를 대성하셔서 조강(爪罡)을 사용할 수 있으실 줄이야."
그녀는 규백이었다.
규백은 내 칭찬에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굽혔다.
부우웅!
황금빛 기운이 그녀의 손가락 위로 날카롭게 서리며 조강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도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피처럼 흐르던 정순지력을 이제야 재활 훈련으로 다시 구현시킬 수 있게 됐을 뿐이다, 그마저도 정순지력을 구현시키는 데에 초식이 굳이 필요하니 한참 멀었지."
"정순지력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규백 님."
난 그녀가 내뿜는 수십 개의 의념들을 바라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벌써 삼화취정에 오르셨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규백의 집념은 놀라울 정도였다.
아무리 자신에게 최고의 적성을 가진 용형비호조에, 내가 붙어서 가르쳤다지만 말도 안 되는 세월 안에 삼화취정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녀 역시, 그래도 합체기에 도달할 뻔한 규련의 조각이란 건가.'
재능은 만상으로 달라 보여도 결국 통하는 법이 있는 법이었다.
또한 규련은 외법기축으로 사축기 대원만을 찍은 황룡이었고,
사축기 대원만을 찍기 위해 아래 경지 수사들을 학살하는 것이 아닌, 동 경지 수사를 네 명 격살하여 사축기 대원만에 오른 전사였다.
그런 만큼 실전 경험의 경험치 자체는 어마어마하게 많았으며, 그 경험치를 이어받은 규백 역시 상당한 속도로 무공에 적응해 나가는 중이었다.
"이 기세라면 수십 년 안에 오기조원은 물론이고, 등봉조극에도 도달할 수 있으시겠군요."
"흥, 아부는 필요 없다. 수십 년 걸려서 재활 운동에 겨우 성공하는 것만큼 어불성설인 것도 없지."
물론 그녀는 무공을 단순히 '재활 운동' 정도로만 생각하는 듯했지만.
'어쨌든, 이 정도 속도라면 어쩌면 본래 맞춰 놓았던 시간 안에 비승할 수 있을지도.'
서휼에 의해 하계로 떨어졌다지만.
아직 이번 생의 내 목적들은 유효했다.
'금신천뢰문에 진선이 강림하기 전, 그 전에 비승해서 금신천뢰문의 천뢰번을 도둑질한다.'
그 중에서도 금신천뢰문은 시간 제한이 있으니, 되도록 빨리 비승해서 천뢰번을 훔치는 것이 목표였다.
'지금이라도 비승은 할 수 있다.'
원유도 평소처럼 입고 있었고, 거기에 원영기 수행은 전부 되찾았다.
거기에 흑룡 진혈에 담긴 태음의 힘을 통해, 음신(陰神) 역시 키워 나가고 있었다. 아마 빠른 시일 내에 원영 초기를 끝마치고 원영 중기에 도전할 수 있을 터였다.
'지금 내 육신의 강도라면, 경지는 천인기 이하일지언정 공간 압력을 버틸 수 있어.'
정통 비승 방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성계에서 공간 균열에 몸을 싣고, 광한계의 좌표를 향해 몸을 날리면 되니까.
광한계의 좌표 자체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문제 될 것도 없었다.
다만….
'함천존자에게 지도를 받을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그냥 날릴 수는 없지.'
최근 장익에게 지도를 받으며, 그동안 나도 몰랐던 무공의 미진함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유화는 지난번 얻었던 구현 3단계.
그녀의 말로는 하현 마지막에 대한 깨달음을 성숙하는 중이었으며, 나는 답천의 극한에 달려가며 점차 답천 너머의 경지에 대한 감을 잡아 가고 있었다.
'느긋하게 600년 정도만 수련하면 답천 너머도 도달할 수 있을 것 같군.'
하지만, 이번 생에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런 것으로 시간을 끌어선 안 될 터였다.
'이미 회귀 햇수 20년 차.'
금신천뢰문의 진선은, 회귀 햇수 7, 80년 차에 나타난다.
내가 마음 놓고 수련할 수 있는 시간도 50년 남았다.
'50년 안에, 유화와 규백과 함께 다시 올라간다.'
이번에 올라가, 제대로 서휼의 얼굴에 한 방을 먹여 줄 요량이었다.
'기다려라, 서휼…!'
그리고, 그렇게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 마침내 회귀 햇수 70년이 되었다.
* * *
끼끼끼끽!
나와 규백, 그리고 유화와 장익은 원숭이들이 몰려 있는 습지에 도착했다.
이 행성에는 딱히 문명화된 지성체가 없었다.
요수들이 몇몇 있긴 했지만, 행성 자체가 영기가 희박하여 별로 많지는 않았다.
다만 많지 않다는 것이었지, 없다는 것은 아니었고.
오늘 찾아온 요수도 그런 부류였다.
"누가 이 어르신의 영역에서 소란이냐!"
쩌렁쩌렁한 요족어가 울려 퍼지며, 습지 안쪽에서 축기기 대원만 수준의 거대원숭이가 튀어나왔다.
나는 원숭이를 보며 규백에게 신호를 보냈다.
규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들이쉬었다.
후우우우―
그녀의 등 뒤로, 아홉 개의 구체가 떠올랐다.
위이이잉―
그와 동시에, 아홉 개의 구체가 그녀의 등 뒤에서 회전하며, 일순간 규백의 의식 영역에 녹아들었다.
파아아앗!
그리고, 규백의 의식 영역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조각난 마음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