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 (6)
"심족으로 의심되는 자는 없었나?"
"너무 순식간이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전부 망가진 해룡족 영역을 수습해 주며, 그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심족에 대한 질의응답은 곳곳에서 이뤄지는 중이었다.
"어마어마하게 큰 심족이었습니다. 사자를 닮은 것 같은데… 커다란 뿔이 세 개가 달려 있었고, 심족이 울부짖자 시커먼 안개가 뿜어져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 안개 속에서 주홍빛 뭔가가 뿜어졌고, 그다음에 정신을 잃었습니다."
"…."
나는 옆에서, 다른 사축기 수사에게 심문받는 원영기 해룡족의 답을 듣고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기분이 들었다.
'뭘 본 거지? 뿔이 세 개? 사자를 닮아?'
아무래도 유화가 그들을 재워 버리며,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이상한 것을 보도록 유도한 모양이었다.
"자네가 본 심족도 그렇게 생겼나?"
"어… 예. 그렇습니다."
나 역시 일단 해룡족들의 장단에 맞추며 유화의 외모를 마구 왜곡하여 답해 주었다.
"뿔은 크고 사나웠고, 얼굴은 보랏빛이었습니다. 눈에서는 번개가 튀어나올 듯이 무시무시한 형상이었지요."
"흐음… 그게 무슨 종족이지?"
"음… 종족의 특성이 아니라 심도공법의 특징 아니겠습니까? 심족의 심도공법은 기오막측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지."
사축기 심문관은 나와 여러 해룡족에게서 유화에 대한 여러 왜곡된 정보를 받아 가고, 부상을 입은 해룡족의 치유를 도와주었다.
쿠릉, 쿠르릉!
그리고 그러는 사이, 황금빛 번개를 품은 먹장구름이 이쪽으로 날아왔다.
쿠구구구!
그리고 먹장구름 안쪽에서 황금빛 비늘을 가진 용이 뛰어내리더니, 황금빛 뿔을 단 갈색 장포의 여인으로 변하였다.
규련이었다.
"악독한 심족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 괜찮으냐?"
그녀의 걱정에 해룡족 원로들은 크게 감격하며 대답하였다.
"예, 다행히 다른 종족의 선배님들께서 와 주신 덕에 큰 피해는 없는 듯합니다."
"저런… 조심하게. 심족들은 하나같이 악독하니까. 그건 그렇고… 서은현, 잠시 이리 와 보거라."
천인기 원로와 이야기하던 규련이 나를 불렀다.
"내 알기로 너는 천족 공법도 수련한 것으로 알고 있다. 혹 네 천기를 읽을 수 있느냐?"
"예, 있습니다."
"네 천기에 뭔가가 변화가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나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다들 심족에 대한 소문만 들었지, 제대로 맞서 본 적은 없을 터이다. 거기다 여기가 지족의 중심부인 봉명주에서 가까운 곳인지라 다들 마음을 놓고 심족에 대해 설명해 준 적이 없기도 하니…."
그녀가 우리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잘 들어라, 너희도 이제부터는 심족에 대해 알아야 한다. 심족에서 천인기에 대응되는 경지에 이른 괴물들은, 그 괴물들의 일격을 맞은 순간 천겁을 맞은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예…?"
심족에 대한 규련의 설명이 이어졌고, 얼마 후 그녀의 설명을 들은 해룡족 장로들은 식겁한 표정이 되었다.
지금껏 소문만 무성히 들었지, 제대로 만나본 적도 없는 심족이란 존재들.
지족의 최심부인 진룡맹의 총본산, 봉명주 인근에 자리를 잡은 것이 바로 운심호였기에, 여태껏 해룡족은 딱히 큰 외세의 위협이 없이 지내 왔다.
그런 그들에게 규련이 들려준 심족에 대한 특성은 정말 충격적이었던 모양인지, 하나같이 당황스러운 기색을 흘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의 눈빛에서도 심족에 대한 혐오와 공포심이 제대로 돋아났다.
"…하면, 이제 저희가 경지를 올릴 때는 두 종류의 천뢰를 맞아야 하는 거로군요. 본래 맞던 천뢰에 더불어, 그 심족 때문에 어처구니없게도 생겨난 천뢰까지 말입니다!"
"…그래."
"흐, 흐하… 흐하하하!"
실력에 자신이 있어, 강력한 육신을 바탕으로 일반적인 천겁쯤은 쉬워 하던 이들은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본래도 아슬아슬하게 천겁을 극복하던 약한 이들은 분통을 터트렸다.
특히나, 원영기 때부터는, 원영 초기, 중기, 후기, 대원만에 도달하며 각기 한 번씩 천겁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한 마디로 천인기인 그들 역시 앞으로 경지 내에서 한 단계를 올라갈 때마다 천겁을 맞아야 한다.
그렇기에, 다음 경지를 뚫기까지 거의 남지 않은 해룡족 원로들은 눈이 돌아갈 듯이 분노하였다.
그들은 규련과 사축기 지족들 앞인 것도 잊고, 심족들을 향해 온갖 상스러운 욕을 내뱉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모두 진정하라! 그래도 이번에 심족에 피해를 입은 이들은, 차후에 진룡맹의 임무를 수행하여 봉명주를 이용하게 해 주마! 나, 진룡맹의 관주사자(管舟使者) 규련의 이름에 대고 약속하마!"
그녀의 제안에, 그제야 격노한 용족들의 눈이 다시 돌아왔다.
'봉명주 하층에는 분명 천겁을 돌파할 때에 도움을 주는 장소가 있었지.'
규련은 진룡맹의 장로이자, 관주사자라는 직위를 맡고 있었다.
관주사자라는 직함은 봉명주 곳곳을 필요에 따라 관리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봉명주에 있는 시설을 이용할 수도 있는 직함이었다.
해룡족 원로들은 규련에게 감사를 표했고, 나는 그런 해룡족 원로들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관주사자께서 봉명주의 시설을 이용할 기회를 주셨으니, 이 은혜를 갚기 위하여 제가 관주사자의 업무를 돕는 시자(侍子)에 지원하려 합니다만?"
"대서장…께서는…."
"제 직함도 사실상 이름뿐인 직함이었는데, 오히려 이번 기회에 해룡족을 위해 일할 수 있으니 더 잘된 일이 아닙니까? 아니면 원로들께오서는 관주사자님과 대군님의 연락책이기도 한 제가, 이번 은혜를 갚기 위해 시자로 들어가 관주사자님께 봉사하는 게 마음에 안 드시는지요?"
"아, 아니외다. 그럴 리가 없소…."
내 질문에 원로들은 똥 씹은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규련 역시, 내가 지난번 받아들인 서휼의 피를 통해 서휼과 연락을 취할 수 있으니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내 제안을 쉽게 수락해 주었다.
나는 그렇게, 해룡족 원로들이 나를 얽어맨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 해룡족 영역에서 벗어나는 데에 성공하였다.
* * *
"앞으로 서휼과의 연락을 잘 부탁한다, 서은현."
규련은 해맑게 웃으며 나를 봉명주로 데려갔다.
"대군과의 연락책이 아닌, 제가 규 선배님의 업무를 도울 것은 있습니까? 아무래도 관주사자이신 선배님의 시자로 따라온 것인데 아무것도 하는 게 없어서야…."
"흠, 그럼 서류 작업 몇 가지만 네가 맡아 주거라. 일단."
나는 그녀를 따라, 그녀의 업무를 확인하기 위해 봉명주의 하층으로 내려갔다.
"…후우…."
나는 익숙한 눈앞의 어둠을 보며 침을 삼켰다.
"하하, 긴장되느냐?"
그 말대로였다.
나는 봉명주 최하층, 어둠층의 시꺼먼 어둠을 보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규련은 관주사자로서 봉명주 최하층, 어둠의 층을 주로 관리하였다.
선수혈합이 있을 때 관주사자이자 선수혈합의 진행자로서 업무를 수행하기도 한다고 했다.
"내 주 업무는 봉명주 최하층의 공간 균열들을 관리하는 거다."
그녀가 저물도에서 내게 몇 가지 서류들을 꺼내 주며 설명을 이어 갔다.
"봉명주는 본래 세계를 뛰어넘어 여행하던 선보로, 봉명주 최하층에는 세계를 넘어서기 위한 힘이 가득 차 있지."
'세계를 넘어서기 위한 힘….'
"물론 지금은 폐함이 되어서 별로 의미 있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런 힘들은 간혹 봉명주 최하층에 공간 균열을 낸다. 그리고 그런 공간 균열은 높은 확률로 하계(下界)로 연결되지."
"하계 말입니까?"
"그래. 잘못하면 봉명주 최하층에 온 녀석들이 실수로 성계나 부해계들 중 무작위로 날아가 버리는 사고가 일어날 수 있으니 내가 공간 균열을 관리하는 것이다."
"…선수혈합에서는 괜찮았던 겁니까?"
"물론! 선수혈합에서도 내가 눈에 불을 켜고 공간 전체를 감시하고 있었으니 공간 균열의 위협은 없었다."
"…."
나는 선수혈합에서 [그]를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봉명주 최하층은 다른 세계와 연결되기 쉽다는 그녀의 말을 들어 보면, 나는 이런 봉명주의 특징에 이끌려 [그]에 의해 어떤 이공간에 끌려들어 가 [그]와 대면했던 것이리라.
"…그나저나, 하계와 연결된 공간 균열이라면… 공령지로 만들어 비승대로 써도 되는 게 아닙니까?"
나는 봉명주 최하층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녀에게 질문했다.
"비선대는 저런 공간 균열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안정적인 시공간의 입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인데, 공간 균열로 비선대를 만들면 공간 균열이 쉽게 닫혀 버리지. 광한계의 긴 역사 속에서도, 공간 균열로 만든 비선대가 오래도록 유지된 경우는 12만 년 전 뇌선(雷仙)의 일화밖에 없다지?"
"…."
나는 뇌선이란 존재가 어떤 자인지 알 것 같았기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규 선배님은 주로 평소에는 이곳에 계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왜 굳이 이런 음침한 곳에 자처해서 오래 머물겠느냐."
우웅!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봉(奉)이라 적힌 글귀가 빛나고 있었다.
"봉명주 최하층을 관리하는 관주사자로서 받은 낙인이다. 이 낙인을 이용하면 언제든지 봉명주 최하층으로 전송해 올 수 있지. 만약 봉명주 최하층에 공간 균열이 생겼다는 신호가 오면 그때만 얼른 가서 공간 균열을 닫으면 될 뿐이다. 사실 선수혈합 때를 제외하면, 관주사자가 제일 할 일이 없는 층이 최하층이지."
"그렇군요…."
"네가 해야 할 일은, 내가 앞으로 공간 균열을 닫을 일이 생기면 그때마다 내가 준 서류에 내가 한 일을 기록해서 진룡맹 장로회에 제출하면 된다. 어렵진 않지만 귀찮은 일이지. 사실 공간 균열을 닫을 일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에 네가 주로 할 일은 대군과 내 연락책이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마."
그리고 규련은 그 자리에서 서휼에게 서신을 써서 내게 들려주었다.
나는 서휼에게 받은 혈맥을 이용해, 내 피를 통해 서휼에게 그녀의 서신을 전달했다.
얼마 후 서휼에게서 답장이 왔고, 나는 규련에게 서휼의 답장을 들려주었다.
나는 그렇게 얼마간 인간 전서구가 되어 서휼과 규련 사이의 연애 편지를 서로에게 전달했다.
* * *
그녀에게 관주사자 시자의 업무를 들은 이후.
규련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관주사자 규련의 시자로 들어온 나는 그날부터 규련과 서휼의 혼례를 위해 전심전력을 쏟아부었다.
그녀의 시자는 그렇게 많은 일을 할 필요는 없었기에 규련과 서휼의 혼례를 도울 시간 자체는 충분했다.
'서휼이 돌아오면 그가 반응을 할 기회도 없이 몰아쳐서 규련과 서휼을 결혼시켜야 한다.'
서휼이 돌아오는 순간, 다른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틈새도 없이 그를 예식장에 데려다 앉히는 것이 내 목표였다.
'그렇다면 우선 서휼이 규련과 혼인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으로 만들어야겠지.'
물론 규련이 합체기에 도달하는 순간.
어차피 그 순간부터 서휼에게 선택지는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나는 더 확실하게 그녀가 서휼을 차지할 수 있게 작업을 시작하였다.
'우선 서휼의 반대파를 결집시킨다.'
서휼이 하는 일은 늘 완벽해 보였지만, 어느 세력이나 그렇듯 그에게도 반대를 하는 반대파들 역시 상당히 존재했다.
주로 서휼의 제안에 의해, 작명과업에서 손해를 본 지족들, 혹은 진룡맹에게 강제로 이름을 관리당해야 하는 약소 종족들이 그들이었다.
물론 서휼은 늘 교묘하게 그에게 있는 불만을 다른 이들에게 돌렸기에, 약소 종족들과 손해를 본 지족들 중에서도 서휼을 직접적으로 적대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한 줌 정도?
'그렇다면 그 한 줌을 전부 끌어모은다.'
나는 봉명주에 눌러앉은 후, 서휼의 반대파들에게 은밀히 연락을 돌려 그들을 결집시켰다.
그리고 나는 수일에 걸쳐 그들에게 서휼의 안 좋은 정보와 소문들을 뿌리고 다니며, 그들이 자신들의 세력에 서휼에 대한 악담을 퍼뜨리도록 조종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서휼은 짧으면 십몇 년, 길면 백 년 정도 자리를 비우니 이들이 뭐라고 하든 반박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서휼이 직접 반박을 하지 못하는 것뿐이지, 그의 편을 들어줄 이들은 굉장히 차고 넘친다.
흑룡족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서휼과 운명 공동체처럼 보였고, 다른 용족들 역시 규련을 필두로 서휼과 상당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 더해 다른 13개 대형 종족들 역시 서휼이 늘 친분을 유지했기에 어중간한 약소 종족들을 내세워 서휼을 음해한다면 오히려 그들이 서휼을 변호할 터였다.
'그리고 그 틈을 노린다.'
서휼의 반대파라고 할 수 있는 약소 세력들을 밀집시켜서 덩치를 불리고, 그들로 하여금 서휼이 가진 신분적 한계를 계속 지적한다.
서휼의 신분은 겉으로는 대군이었으나, 그는 엄연히 흑룡족의 '방계'인 해룡족의 우두머리였다.
그러므로 고귀한 선수의 혈통을 타고난 13개 대형 종족이 이끄는 진룡맹의 중책을 맡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나, 그동안 서휼은 그 특유의 매력으로 진룡맹 장로회를 휘어잡았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흑룡족의 방계인 해룡족의 우두머리란 신분은, 솔직히 고귀한 선수 혈통 요족들이 지배하는 진룡맹 장로회에는 격이 맞지 않기는 했다.
거기다가 본토 출신이 아닌 하계 출신이기까지 하니, 서휼의 태생 자체는 그리 고귀하지 않은 편이었다.
'그렇다면 진룡맹 13개 종족 장로회는 서휼을 변호하기 위해 서휼의 신분을 끌어올리기 위해 조치를 취할 터.'
13개 종족 장로회에게는 솔직히 현재 서휼만큼 좋은 거수기가 없었기 때문에 서휼은 당연히 중용될 터였다.
서휼이라면 분명 자신이 중용되도록 조작을 해 놓고 떠났을 테였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때 서휼의 혼인을 주장한다.'
그 상대는 당연히 규련이었다.
규련은 서휼의 부족한 신분을 채워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대였으며, 그녀가 요왕이 된다면 오히려 서휼의 완벽한 방패가 될 수 있다.
'물론 방패인 동시에 서휼에게는 엄청난 감옥이 되겠지만.'
거기에 규련의 직함은 관주사자.
그녀가 속한 황룡족의 소속이 아닌, 엄연한 진룡맹 소속의 봉명주 관주사자인 만큼, 13개 대형 종족들 역시 서휼이 편파된 거수기가 되지 않을지에 대한 걱정 역시 덜어도 된다.
봉명주 관주사자라는 직함은 그녀가 합체기에 도달해도 달고 있을 터였고, 오히려 그녀가 요왕이 되면 봉명주에서 맡은 구역이 넓어질 테였다.
그리고 그녀가 봉명주를 관리하는 구역이 많아질수록 진룡맹의 권력 투쟁에서 멀어질 테니, 나로서도 진룡맹 장로회 측에서도 걱정할 부분은 아니었다.
'이렇게 된다면, 합체기 요왕이 된 후, 서휼을 취하겠다는 규련의 의지에 따라 서휼은 어떻게 되든 그녀와 혼인을 해야 할 터다.'
나는 규련의 업무를 도와주면서 서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반대파들을 통해 서휼에 대한 악소문을 흘리며, 그들이 서휼에 대한 악감정을 자신들의 세력에 흘릴 수 있도록 도왔다.
'이렇게 점차 서휼을 향해 그물을 조여 가면, 언젠간 잡힐 터.'
얼마 남지 않았다, 서휼.
기대해라.
그렇게, 서휼의 결혼을 위한 밑 작업을 하며 다시 3년.
회귀 10년 차에 접어들었다.
* * *
"서휼의 약점을 찾았다고?"
"그렇소, 서 수사."
나는 나를 찾아온 서휼의 반대파, 반서파의 우두머리 역인 요족 천인기 수사 천량을 보며 되물었다.
3년이었다.
반대파를 결집시키고, 서휼 혼인 계획을 차근히 진행시킨 지 3년.
그리고 그 안에, 반대파의 수장인 천량이, 서휼의 약점을 찾았답시고 찾아온 것이었다.
천량은 개 요수였는데, 그는 방 안이 더운지 혀를 내밀고 열을 식히며 설명을 이어 갔다.
"후우, 놀라지 마시고 설명을 들어 주시오. 본 천견족 원영기 장로 중 한 명이 서휼의 약점이 될 만한 사실을 물어 왔소이다."
"흠… 약점이 될 만한 사실이라…."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약점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소리.
"무슨 사실이길래 그러시오? 정보의 출처는 확실한 거요?"
"아주 확실하오. 증인까지 구했소."
천량은 내게 은밀하게 주둥이를 들이밀며 말을 이었다.
"서휼이, 혈음계(血陰界)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오. 이게 사실로 밝혀지든 아니든 상당히 그에게 타격을 줄 수 있겠지."
천량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혈음계….'
확실히, 서휼이라면 혈음계와 연관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증인이란 자는 확실한 거요? 만약 확실치 않은 정보를 가져와서 서휼을 흔들려다간 되려 역공을 맞을 수 있소."
내가 걱정을 표하자 천량은 씨익 웃으며 양손을 두드렸다.
짝짝!
그가 손뼉을 치자, 얼마 후 나와 그가 얘기를 나누는 방으로 한 명의 장년인이 들어왔다.
그는 잔뜩 살이 찐 인간형으로 화형을 한 요족이었는데, 입가에는 엄니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붉은 머리를 한 채, 배를 다 드러낸 옷을 입은 그가 나와 천량에게 인사를 올렸다.
천량이 그를 소개하였다.
"이 자는 홍국! 이래 뵈어도 700년 전 혈음계 천마들이 지족 영역에 침공했을 때에 그들과 겨뤄 본 실력자요. 그 업적을 인정받아, 관주사자인 규련 님의 영지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지."
"아…!"
나는 그제야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지난번, 규련의 영지에서 백녕에게 두들겨 맞았던 원영기 멧돼지 요족이었다.
배신 (7)
"아,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그때 잠시 뵈었지요?"
홍국 역시 나를 알아본 듯 아는 척을 했다.
'그랬군, 그래서 홍국도 규련에게 서휼이 백녕을 데려갔다고 얘기하지 않은 거였어!'
"…처음에는 잘못 봤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때 대군님이 쓰셨던 투영 법술은, 혈음계 천마들이 쓰던 것과 굉장히 유사해 보였습니다. 아니, 거의 흡사했지요. 혈음계 천마들과 겨뤄 본 제가 잘 압니다."
"그렇다는군."
천량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서휼 그자가 돌아와서, 그 가당치도 않은 작명과업에서 손을 떼게 할 기회일세!"
천량이 속한 천견족은, 자신들의 이름을 진룡맹에서 관리하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종족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도 천견은 직접적으로 작명과업을 시행한 13개 대형 종족보다는, 그들을 은근슬쩍 작명과업의 찬성 쪽으로 넘어가게 한 서휼을 더 싫어하는 이였고, 그가 실각해서 정치권으로는 다시는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고 싶어 하였다.
나 역시 서휼을 싫어하는 천량의 성향은 잘 알고 있었고, 그때 당시 나도 홍국의 옆에 있었으니 그 상황은 잘 알았다.
'홍국의 증언은 사실일 확률이 매우 높다.'
아니, 보나 마나 서휼이 동족을 희생해서 자신의 투영체를 강림시킨 그 술법은 분명 혈음계의 것이다.
'나 혼자만 증인이었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나 혼자만 서휼이 혈음계의 첩자라고 떠들었을 때는 아무런 발언력이 없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천견족의 장로인 천량과, 증인인 홍국.
그리고 서휼의 반대파가 온 힘을 다해서 서휼과 혈음계의 관련성을 외친다면, 어쩌면 서휼에게 정치적으로 상당한 피해를 끼칠 수도 있을 터였다.
'좋군.'
실패해도 성공해도 내게 불이익은 없다.
그냥 서휼이 첩자다 하고 소리나 질러 보는 거니까.
실패하면 실패한 대로 서휼이 이런 음해에 시달리는 것은 그의 신분이 하계 출신 흑룡족의 방계 해룡족이라서이니, 그를 혼인시켜야 한다고 밀어붙일 수 있고.
성공한다면 그를 혈음계의 첩자로 밀고 가서 지족 내에서 서휼의 영향력을 말소시킬 수 있었다.
'서휼 정도 되면 혈음계의 첩자라 하더라도, 축(軸)에 대고 다시는 혈음계와 접촉하지 않게 하는 맹세를 시킨 후에 가택 연금을 시키거나 할 뿐이겠지.'
어쨌든 사축기는 귀중한 전력이니 말이었다.
여하튼 그 경우라 해도 내가 원하는 방향이었으니 좋다.
"좋습니다. 다만, 서휼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증인 한 명의 증언만으로는 발언력이 크지 않습니다."
"하면…."
"혹 증거가 있습니까? 홍 수사?"
내 말에 홍국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혈음계 천마들이 쓰는 투영술은, 대지에 영향을 남깁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그 목화 농장에 다시 가면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좋네, 부하를 시켜 증거를 수집해 오라고 하지."
"다만…."
그러나 바로 누군가에게 손짓하려던 천량에게, 홍국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가 지금까지 목화 농장에 가서 일부러 증거를 수집해 오지 않은 이유는, 용족이신 대군님이 그럴 리 없으리라는 생각도 있었으나, 동시에 천마들의 투영술의 흔적은 영기의 파동을 접하면 쉽게 날아가는 특성이 있어, 제가 감히 조사하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증거를 가져오긴 곤란하고, 우리가 가서 확인해야 한다는 건가."
천량의 말에 홍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 말에 나는 조금 난처한 기분이 되었고, 반대로 천량은 좋아라 하며 혀를 내밀고 헥헥거렸다.
"아주 좋군! 그럼 반서파 전원이 모여 일단 그 농장으로 가지! 모두가 확인하면 되겠어!"
그러나 기운차게 외치는 그를 보며,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건 곤란할 것 같군요."
"음?"
"잊은 겁니까? 홍국이 말하는 목화 농장은, 규 선배님께서 관주사자의 이름으로 진룡맹에서 하사받은 영지입니다."
"음…!"
"흙 조금 퍼 와서 증거를 관찰한다면야 문제가 없었겠으나… 반서파 전 원영, 천인기 수사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증거를 관찰한다고요? 관주사자께 어떤 말씀을 듣고 싶으신 겁니까? 안 그래도 관주사자께서 서휼과 어떤 사이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군. 내 생각이 짧았네."
"차후에 시간을 내서, 저희 둘만 조용히 가 증거를 확인하는 것으로 하지요."
반서파가 전부 몰려가는 건 당연히 문제가 되겠지만, 나와 천량 정도가 가서 확인하는 것 정도는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렇게 우리는 시일을 정해, 규련이 관주사자로서 업무에 충실할 때에 맞추어 농장에 증거를 찾으러 가기로 하였다.
그리고, 천량에게 서휼이 혈음계와 관계되었다는 증거를 찾으러 가자고 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오늘부터 칠 주야 간, 규 선배는 봉명주 최하층에서 공간 균열을 정돈하신다.'
내일이면 공간 균열을 수리하는 데에 몰입하여, 정신이 그쪽으로 쏙 빠질 테니, 내일 천량과 함께 규련의 목화 농장에 가면 될 터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투웅!
익숙한 금 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나는 흠칫 놀랐으나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이오, 유화."
"잘 지내셨는지요."
난데없이 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미의 하반신을 가진 반인지주족 여인, 유화였다.
"월수궁무록이 많이 늘었군."
"워낙 기본이 말도 안 되는 구결이었는지라 쉽게 익힐 수 있었습니다."
"당신 재능이 뛰어난 탓이었겠지… 그래서, 어쩐 일로 찾아오셨소?"
"…제자의 일 때문입니다."
유화의 얼굴에서 씁쓸한 빛이 감돌았다.
"제자에게 해룡이 걸어 놓은 세뇌는 전부 풀었습니다. 해룡의 유도로 생겨난 자기 암시 역시 흩어 버리는 데 성공했고요. 하지만… 제자가 말하기를, 그 해룡이 자신에게 해 주기로 한 것들이 많다 합니다."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백염족들의 훌륭한 생활과 지배 계층으로서의 권리, 자신의 대우, 자신의 척산편에 대한 대우 등, 무수한 권리를 백녕과, 백염족 전체에게 쥐여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더군요. 그래서 자신 역시 해룡이 훌륭한 자라고 자기 암시를 했던 것이고요."
"이권에 서휼에게 넘어간 것인가?"
"…그것만은 아닙니다. 백녕이 원하는 것은…."
유화의 말이 이어졌다.
"홍국이라는 멧돼지 요족을 아시는지요?"
"…안다만."
어쩐지, 최근 그 멧돼지의 이름을 들을 날이 참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홍국은 목화 농장의 감독관이던 시절, 백녕에게 자신의 노부모를 채찍질하게 시켰던 자입니다."
"…."
"결국 백녕의 노부모는 홍국의 명령에 의해 백녕의 손으로 생을 떠났지요. 서휼은… 백녕에게 홍국을 가장 잔인하게 죽여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백녕이 말하기를, 제가 서휼 대신에라도 홍국을 찢어 죽여 준다면, 이제는 완전히 서휼에 대한 마음을 접겠다 하더군요."
"…홍국 때문에 온 것이로군."
"예."
"복수 때문에 날 찾아온 건가? 복수를 도와달라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허공에서 흐르는 미약한 의식의 흐름을 노려보았다.
"왜 그걸 네 입으로 직접 얘기하지 않는 거지?"
흠칫!
내 말에 유화가 흠칫 놀랐고, 곧이어 허공에서 백녕이 튀어나왔다.
"네 스승보다 월수궁무록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떨어지나 보군. 원영기만 되어도 알아챌 수 있겠구나."
백녕은 잠시 침묵하는 듯하더니 유화를 쳐다보았다, 다시 나를 보았다.
"본래는 제가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하나 스승님께서 막으셨지요."
"흐음…."
나는 유화를 쳐다보며 물었다.
"나에 대한 신뢰는 없었나 보오?"
"당신에 대한 신뢰는 있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신경 쓰여서 말입니다."
그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현재 당신이 반서파와 접촉하고, 그들이 홍국을 필요로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소."
"하면 당신 역시 홍국을 필요로 함에 따라 저희와 적대할지도 모르니, 제자는 필요할 때 탈출할 수 있도록 조치해 뒀습니다만… 의미가 없었나 보군요."
"당신과 내가 월수궁무록을 익힌 기간만 해도 차이가 난다만… 재능이 떨어지는 저 녀석에게 월수궁무록을 익히게 하면 당연히 내 눈에는 구멍이 잔뜩 보이지."
"제 불찰입니다."
나는 두 사제를 바라본 후 홍국에 대한 처분을 고민했다.
"…홍국과 백녕의 은원 관계는 인정을 하지. 다만, 지금은 녀석이 필요한 시점이오."
백녕은 분한 듯 양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농장에 가서 서휼이 혈음계와 관계되었다는 증거 자료를 확보하고, 진룡맹 장로회에 제출하면 그 이후부터는 홍국의 쓰임새가 다하게 되니, 홍국을 백녕과 단둘이 만날 수 있게 주선해 주도록 하지."
내 제안에 유화의 얼굴이 밝아졌다.
백녕의 의념 역시 감정이 잦아들었다.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유화와 백녕이 차례대로 내게 인사를 올렸다.
유화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면, 홍국은 내일이면 쓰임새가 다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아니, 내일은 아니오. 내일 나와 천량이 목화 농장으로 가서, 서휼과 혈음계의 연관성을 찾은 후 그것이 확실해지면 진룡맹 장로회에…."
"예?"
그때, 유화가 내 말을 끊고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지금 천량이라는 천인기 요족이, 반서파라는 이들을 전부 데리고 홍국을 앞세워 규련의 목화 농장으로 날아가고 있던데… 서휼의 약점을 확보하려는 게 아닌가요?"
"…!"
벌떡!
나는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 빠르게 천량과 연결된 전음부에 법력을 불어넣었다.
우우웅!
하지만 전음부는 얼마간 진동하는 듯하다가, 상대쪽에서 전음을 흩어 버렸다.
'제길, 신중히 하자고 했건만!'
규련이 봉명주 최하층에 들어간 것은 오늘이다.
그녀의 성격상 관주사자의 업무를 시작하고, 하루 정도 지나면 업무에 몰두하여 다른 일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하루가 지나지 않았고, 만약 그녀의 영지에서 무언가 신호가 온다면 그것을 알아보러 봉명주에서 나올 수도 있었다.
"이런 멍청해 빠진 놈들이… 손님 대접을 해 주지 못해 미안하네만, 잠시 규련의 목화 농장에 다녀오지."
나는 봉명주에 있는 관주사자, 시자의 업무실에서 나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때, 유화와 백녕 역시 내 옆으로 올라왔다.
촤르륵!
유화는 주홍빛 강물로 변해 백녕을 집어삼키더니, 허공으로 나풀나풀 날아오르며 월수궁무록으로 모습을 감췄다.
[저희도 동행하게 해 주시지요. 어차피 당신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니, 이번 일에 도울 일이 있다면 돕겠습니다.]
"뭐, 마음대로 하시오. 일단 가면서 얘기하지!"
파아앗!
나는 비둔술과 요족의 활공술, 그리고 허공답보 등 모든 것을 사용하며 빠르게 날아올랐다.
* * *
휘이이이이―
어느새 시간은 밤이었다.
한밤중, 저 멀리 산맥 너머로 규련의 영지에 있는 목화 농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츠츠츠츠―
장령목화들은 한밤중에도 달빛을 받으며 새하얗게 타오르는 듯했다.
그리고, 저 멀리 목화 농장의 한 구석에서 어마어마한 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입을 벌렸다.
일전, 서휼이 해룡족 전사들의 육신을 통해 투영술을 펼쳤던 자리.
그 인근의 대지가, 대지에 흐르는 용맥째로 뽑혀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장령목화 농장의 일부가 통째로 뽑혀 나가고 있었다.
약 2, 3리에 달하는 면적의 목화밭이 하늘로 그대로 뽑혀 올려졌고, 그 주변에는 원영, 천인기 수준의 요족들이 천지영기를 운행하며 목화밭을 들어 올리는 중이었다.
"이런 미친, 뭘 하는 짓이오!"
나는 그 중심에 있는 천량을 향해, 얼굴이 하얗게 된 채로 고함을 질렀다.
"규 선배가 들어간 게 오늘이라 하지 않았소!? 내일은 되어야 우리 둘이 와서 조사를 할 수 있을 터라고 말했을 텐데! 나랑 동행도 하지 않고, 천인기 이상 요수선사들을 우르르 끌고 온것도 모자라, 지금 규 선배의 농장에 무슨 짓을 하는 거란 말이요!"
내 말에, 천량은 태연하게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게 됐소, 서 수사. 하지만 서 수사의 방식은 너무 무르오!"
"뭐…?"
"그리고 또, 우리 반서파가 단결하게 만들어 준 것이 서 수사라는 것은 인정하오만, 반서파 내에서 당신이 관주사자의 시자 신분이라는 지적이 나와서 당신의 계획을 전부 따르기도 조금…."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관주사자께서 서휼과 무슨 사이인지는 전 요족이 아는 일이오. 그런데 서휼과 그런 관계인 관주사자의 시자인 서은현… 당신의 계획을 곧이곧대로 실행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에 거사를 진행하기로 했소."
"이 무슨… 좋소, 그럼 일단 규 선배의 농장을 어떻게 하려는 거요?"
내 질문에, 천량이 아닌 홍국이 답하였다.
"관주사자님의 농장에는 분명 서휼님이 혈음계의 술법을 쓴 증거가 있습니다. 하지만 증거만 따로 떼어서 진룡맹 장로회에 제출하면, 혈음계 투영술의 특성상 영기의 파동에 의해 사라질 것입니다. 하여 저희는 이 일대를 전부 떼어서 장로회에 제출하기로 했습니다."
"하! 규 선배가 지금 봉명주 최하층에 계신데, 봉명주로 이걸 가져간다고?"
그 말에 천량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봉명주로 가져가지 않을 걸세. 규 선배의 농장은 호족(虎族)의 영역으로 이송될 것일세. 태호족이 주도하여 이번 일의 진상을 조사할 것이고, 진룡맹 장로회도 이번에는 호족 영역에서 열릴 것일세."
"…!"
하필이면 용족과 사이가 제일 나쁜 호족의 영역에서 일을 거행한다.
"처음부터… 호족의 영향을 받았던 거요?"
"그건 아닐세. 반서파라는 이들이 생긴다는 걸 알고, 용족의 명예에 어떻게든 흠을 내고 싶어 하는 호족 쪽에서 접근해 왔지."
"…."
즉, 그의 말대로라면 이건 더 이상 나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호족과 용족 간의 정치 알력 다툼인 것이었다.
'나쁠 건… 없나?'
생각해 보면 이번 일이 호족 쪽으로 넘어가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용족과 사이가 나쁜 호족이라면, 어떻게든 용족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서휼이 혈음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만들어 내기라도 할 터였으니 말이었다.
'오히려 서휼을 더 확실하게 실각시킬 수 있는 기회다.'
하지만….
"…다 좋군. 하지만… 너무 무모하오…! 규 선배가 알아차리기라도 하시면 어쩌려고!"
"하하하! 우리 역시 정보통이 있다네. 관주사자께서는 이미 봉명주 최하층의 공간 균열 수리에 들어가셨고…."
"아니! 내가 규 선배의 옆에서 일하는데 왜 내 정보를 믿지 못하는 거요! 내일까진 기다려야 한다니까!"
"그렇기 때문에 믿기 힘든 걸세.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빠르게 일을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네. 듣자 하니, 관주사자께서 공간 균열 수리를 한 번 들어가시면 그 집중력이 대단하시어 바깥 일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못하신다지?"
"…제길, 그 문제가 아니라…."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젠장, 나도 모르겠군.'
"…마음대로 하시오. 단, 이미 일이 이리된 것, 최대한 빨리 농장을 호족 영역으로 나르시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소. 재촉하지 마시오."
나는 일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도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천량을 보며, 속에서 열불이 나는 걸 느꼈다.
"규 선배라면 어쩌면 지금쯤 눈치챘을 수도 있소, 지금 당신들 때문에 한시가 급하게 됐으니, 속전속결로 처리해야 하오!"
"…."
"뭘 하시오! 빨리 증거를 호족으로 옮기라니까!"
"…."
"왜들… 그렇게 조용하오?"
"…뒤, 뒤…."
나는, 순간 뒷골이 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서은현."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작은 공간 균열이 나 있었다.
기껏해야 손바닥만 한 균열일까.
그러나 그 손바닥만 한 균열 사이로, 익숙한 황금빛 동공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냐?"
"…."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또 다 뭐고?"
"…."
"저들은 최근 반서파라며, 그이에게 노골적으로 험담을 하는 이들이 아니냐? 왜 저런 이들과 같이 있느냐? 내 농장은 또 뭐고? 호족으로 옮기라는 건 또 뭘 말하는 거냐?"
"…."
얼마간, 좌중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그리고, 그 침묵의 틈새에서, 나는 이를 악물고 고함을 질렀다.
"뭐 해, 이 멍청한 새끼들아! 내 말 안 듣고 이미 저질렀으면 저지른 일이라도 제대로 하란 말이다! 옮겨!!!"
"흠!"
"헛!"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반서파의 천인기 요족들이 흠칫 놀라며, 빠르게 요술을 사용해 규련의 농장을 호족 영역 방향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얼마간 얼이 빠져 있던 규련에게서 어마어마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네놈들… 이게 지금 무슨 일인지… 똑똑히 해명해야 할 것이다…!]
찌릿, 찌릿찌릿…!
나는 전신을 에는 듯한 살기를 흘려 내며, 있는 힘을 다해 그들이 옮기는 목화밭 위에 올라타, 나 역시 법술을 써 목화밭의 속도를 올렸다.
"전력을 다해 영기를 불어넣으시오! 곧 규 선배가 쫓아오실 거요!"
"아니, 규 선배께서는 사축기 수사가 아니시오? 아무리 사축기 대원만이시라지만, 현재 봉명주 안쪽에서 자신의 영지까지 공간 균열을 찢어 놓은 상태일 텐데, 그만한 거리를 격해 공간 균열을 내고 쫓아오시려면 상당히 시간이…."
"이 병신 같은 새끼들아! 규 선배는 이제 사축기 수사가 아니란 말이다!"
"뭣…!"
나는 뒤쪽에서 어마어마하게 불어나는 기운을 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이미 천지합일(天地合一)을 시작하셔서, 합체기(合體期)로 도약하고 계시단 말이다!! 내가 왜 내일 거행하자고 했는지 아냔 말이야!? 규 선배님께서는 지금 공간 균열을 수리하며, 내일쯤 아예 최하층에서 폐관 수련에 들지 말지 알려 주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란 말이다!!!"
나는 내 말을 지지리도 듣지 않고 멍청하게 일을 그르친 이 요족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지금 쫓아오는 건 사축기 대원만이 아니다! 준(準) 합체기(合體期) 요왕(妖王)이란 말이다!"
배신 (8)
쿠구구구!
환한 보름달 밤이 뜬 날이었다.
쿠구구구구!
달이 유난히 밝은 그 날 밤.
그 밝은 어둠을 뚫고, 거대한 땅덩어리가 하늘을 날았다.
땅덩어리 위에는 수많은 장령목화들이 달빛을 맞으며 새하얗게 피어나 영기를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목화밭의 위쪽.
그 위에서는, 우리가 땅덩어리에 영력을 불어넣고, 허공에 띄우며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목소리를 높이며 싸우고 있었고.
"아니! 왜 처음부터 관주사자께서 합체기로 도약하는 중이라 말을 하지 않으셨단 말이오!"
"내일 완전히 폐관에 들지 말지 알려 준다 하시고, 확정하지 않으셨으니까! 당신들이 나를 불신하며 이렇게 멍청한 짓을 저지르지만 않았어도 문제없었을 일이오!"
그러나 서로를 헐뜯어도 생기는 건 없다.
파아아앗!
번쩍!
뒤쪽에서 섬광이 번뜩인다.
그리고 황금빛 광선이 우리의 위쪽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오싹!
나는 그 모습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일단 농장에 영력을 더욱더 불어넣었다.
저 멀리.
뒤쪽에서 규련이 이쪽을 향해 숨결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토해 내는 광선의 굵기는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굵어지고, 정확도가 정밀해지고 있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공간 균열이, 거의 열렸다.'
공간 균열이 완전히 열리면, 사축기 대원만을 넘어선 준 합체기 황룡이 날아올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 사축기 수사는 없었고, 대다수가 천인기, 가장 경지가 높은 천량도 천인기 대원만일 뿐 사축기조차 아니었다.
"제길, 어떻게 한단 말이냐! 이게 다 네놈 때문이다, 이 반푼이 용족 놈!"
"…일단 닥쳐 봐라."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천량을 밀치고 땅에 손을 파묻었다.
그리고 서휼이 혈음계와 연관되었단 증거가 있는 쪽은 피해서, 이 땅덩어리 전체에 영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천린수해성의 구결에 따라, 목화의 뿌리들이 대지 곳곳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대지 아래에 있는 목화의 뿌리들은 괴군의 회로를 그리며 땅속에 뿌리내렸다.
"반 각 후면 이 땅덩어리를, 썩 속도를 낼 수 있는 비행법기로 만들 수 있소."
"뭣…!"
"반 각의 시간을 버시오. 곧 규 선배님께서 강림하실 거요."
"…제길, 알겠소!"
천량은 이를 악무는 듯하더니,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반서파들을 지휘하여 규련이 광선을 쏘는 곳을 향해 천지영기를 끌어모았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최대한 빠르게 흙덩이들을 비행형 괴뢰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그와 동시에 뒤쪽에서 끔찍한 천지영기의 파동이 울려왔다.
저 멀리서 황금빛이 타오르듯이 일렁인다.
규련이, 마침내 공간 균열을 넘어 봉명주 최하층에서 이곳에 도달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거기 서라…!]
찌이이잉!
수천 리는 멀리 떨어져 있을 그녀의 명(命)에, 천지영기 전체가 출렁이며 허공을 날아가는 땅덩어리를 잡아세웠다.
그러나 천량과 천인기 수사들이 사방으로 요술을 쏘아 대며 천지영기를 조작하자, 다시 땅덩어리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번쩍!
그러나 저 멀리서 황금빛이 일렁였다.
땅 전체를 개조하며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우우웅!
황금빛 서광과 함께, 약 삼천 리 바깥에 있을 게 분명한 곳에서 황금색 실지렁이 같은 게 몸을 일으켰다.
'규 선배와 벌써 몇천 리 이상 거리를 벌렸는데 실지렁이 같은 모습이 보인다고…?'
실지렁이가 아니다.
'저건….'
천량이 다급하게 외쳤다.
"과, 관주사자가 본체로 쫓아온다! 모두 있는 힘을 짜내!"
규련이, 본신을 드러내고 우리를 쫓아오기 시작한다는 것!
그리고.
번쩍!
다시금 황금빛 광선이 우리에게 쏘아져 왔다.
이번에는 우리 옆이나 위를 스쳐 가지도, 굵기가 애매하지도 않았다.
직경 3리는 될 법한 크기의 이 목화 농장 전체를 감쌀 정도로 굵은 광선이 우리를 향해 정확히 쏘아져 왔다.
천량과 천인기 요수들이 있는 힘을 다해 방벽을 만들고, 대지에 영력을 불어넣으며 속도를 올렸다.
황금빛이 우리의 바로 뒤쪽에 도착하며, 우리를 집어삼킬 듯 광명을 토해 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개조 완료.'
목화 농장이 움직이며, 그 아래의 땅덩어리가 변화하였다.
땅덩어리들은 내 의지에 의해, 그리고 목화의 뿌리들에 의해 움직이며 하나의 형상을 취해갔다.
그것은 서 장군의 얼굴이었다.
곧이어, 목화밭을 담은 땅덩어리는 거대한 서 장군의 머리통으로 변해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서 장군, 회피!"
파아아앗!
서 장군의 머리통 형상으로 변한 땅덩어리는 기민하게 움직이며 규련의 숨결을 회피했고, 천인기 요수들이 친 방벽에 그녀의 광선이 빗겨 맞으며 일격에 전멸해 버리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모두! 내가 지정하는 자리로 가시오!"
짧은 시간 내에 땅덩어리 전체를 비행형 서 장군으로 개조한 나는 영력을 불어넣어야 하는 곳을 가리키며 원영기 수사들을 채근했다.
원영기 요족들은 내 명령에 따라 각 부위에 영력을 불어넣기 시작했고, 서 장군의 머리통은 눈빛을 빛내며 밤하늘을 주행하였다.
그와 동시에, 몇천 리 밖에서 빛나는 실지렁이가 움직였다.
규련이 날아오고 있었다.
"천량! 광선이 날아오면 방향을 전달해라!"
나는 천량에게 악을 쓰며 외쳐 댔고, 천량이 뒤이어 답했다.
"서북 방향으로 회피! 천인기들은 방벽을 세워라!"
나는 천량의 말에 따라 '머리통'을 서북 방향으로 틀었고, 천인기 요족들이 다시 천지영기를 끌어모아 방벽을 세웠다.
다시금 황금빛 광선이 요족들이 세운 방벽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맞았다.
단순히 빗겨 맞았기에, 천인기 수사들이 부담해야 할 것은 고작 여파에 불과했다.
하지만 규련이 뿜어낸 광선의 여파만으로도 천인기 요족들의 대형과 방벽은 모조리 무너져 버렸다.
'태호족은 진룡맹 북쪽에 위치해 있다!'
남은 거리는 약 육천 리!
'그 안에 제발 도착할 수만 있으면….'
서 장군의 뒤통수에서 빛이 뿜어지며, 점차 속도가 빨라진다.
하지만 점차 저 실지렁이의 크기가 더 커지는 것이 보였다.
"정북 방향으로! 천인기들은 방벽 세워!"
다시 정북 방향으로 '머리통'을 틀고, 규련의 공격을 튕겨 낸다.
달이 밝은 그 날.
나는 전력을 다해 규련에게서 달아났고, 우리는 그녀의 공격을 튕겨 냈다.
하지만, 역시나 경지의 차이는 모든 것을 끝내 버렸다.
쿠구구구구!
몇천 리는 떨어져 있던 그녀와 우리 사이의 격차가 삽시간에 좁혀져 버렸다.
어느덧, 작은 산맥 크기의 몸통을 굽이치며 날아온 그녀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하…."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고, 천량 역시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쿠구구구!
잠시 본체로 우리를 근엄하게 굽어보던 규련은 이내 인간형으로 화형하여 목화 농장의 중심에 몸을 드러냈다.
"…서은현, 그리고 너희 모두."
그녀의 서슬 퍼런 황금빛 동공이 모두를 둘러보았다.
"지금 뭘 하는 짓인 거냐."
"…."
그녀는 상당히 분노한 상태였다.
세로로 찢어진 그녀의 동공은 격노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으며, 그녀의 주변에서 진동하는 천지영기 역시 흉흉함에 떨리고 있었다.
'제길….'
끝났다.
규련에게 서휼이 혈음계와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절대 믿지 않을 것이다.
천량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어 왔다.
"서, 서 수사. 어떻게… 해야 하오? 사, 사실대로 말하면… 지족의 위협을 배제하려 일을 벌인 것이니… 참작을 받을 수도…."
저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믿을 리가 없다.
'아니, 믿을 가능성은 있었지.'
나와 천량이 조심스럽게 증거를 확보한 후, 규련에게도 절차를 거쳐 확인시켰다면 그녀 역시 모른 체할 수는 없었으리라.
규련은 서휼을 사랑하지만, 서휼이 혈음계와 내통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광한계의 공적이 될 수 있는 사실이기에, 그녀로서도 눈물을 머금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게 뭐란 말인가.
이 멍청한 천량은 지금 무단으로 규련의 사유지에 침입하여, 그녀의 재산을 도둑질해서 용족과 사이가 좋지 않은 호족으로 끌고 가려다 걸린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서휼이 혈음계와 연관이 있어 그 증거를 수집하려 규련의 사유지를 뽑아 호족으로 가져간다고 말해? 규련이 퍽이나 믿어 주겠군.'
츠츳, 츠츳….
현재 규련은 인간형으로 화형했지만, 전신에 황금빛 비늘이 돋아나, 인간보다는 뱀 인간에 가까운 형태였다.
이빨도 삐죽거렸으며, 동공은 세로로 찢어져 살기를 드러내고 있다.
그녀의 이마에 돋아난 사슴뿔은 어느 때보다 찬란히 빛나며 황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상당히 격노한 상태.
그리고, 천량이 내게 묻자, 그녀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빌어먹을 똥개 놈….'
과거로 돌아가면 그때의 천량은 지금의 천량과 별개이지만.
그럼에도 과거로 돌아가서 천량의 머리통을 반으로 쪼개 버리고 싶은 충동이 치솟아 올랐다.
"서은현."
"예."
"나는 너를 믿었다. 대군과 나의 연락책으로 쓰며, 관주사자인 나의 시자 업무를 맡기며, 그리고 그동안 네 수행을 돕기도 하며… 너를 믿었다."
"…."
그런 만큼, 어쩐지 그녀의 눈에는 큰 배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무릇 가장 큰 배신은 가장 믿음직한 자의 손에서 일어나는 법이다.
나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도저히 무어라 변명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 인정하자.'
변명할 것 없다.
지금껏 나를 위해 상당한 호의를 베풀어 준 규련이었다.
그녀의 앞에서는, 혀 길게 왈가왈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저는…."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은 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상황을 설명해라."
그녀의 세로 동공이 나를 향했다.
"그동안 믿어 왔기에, 한 번만 더 믿어 보기로 하마.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라. 만약 합당한 설명이라면, 내가 믿어 주겠다. 설령 너와 마지막으로 보게 되더라도, 한 번은 믿어 줄 테니, 상황을 고하라."
"…."
정말, 창호자와는 다른 의미로 빛나는 존재다.
그녀의 모습은 비늘로 뒤덮여 있고, 흉흉한 살기를 내뿜고 있는 무시무시한 모습이었으나, 나는 그녀의 내면에서 나를 향한 신뢰의 끈을 아직 놓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녀에게 속으로 사과를 했다.
여지껏 서휼과 암투를 벌이며 그녀를 이용하기만 해 왔다.
하지만, 어쩌면 그녀는 암투에 이용할 만한 이가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문득 그녀를 이용하고 속여 온 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래, 말하자.'
서휼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믿지 못할 모습을 보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신뢰를 보여 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차라리 시원하게 진실을 누설하는 게 나을 터였다.
"저희는 서 대군을 조사하려 이런 행위를 벌였습니다."
"서 대군을…?"
"서 대군께서는 사실…."
그리고, 서휼에 대한 진실을 입에 담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사실… 어떤가?"
툭툭….
서늘한 손아귀가, 내 등 뒤에서 내 어깨를 친근하게 두들겼다.
"…어?"
오싹!
왜, 벌써?
푸른 장포를 입고, 비취빛 뿔을 지닌 미청년이 등 뒤에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장내에 걸어 나왔다.
'무슨…!'
왜일까.
괴군에게 추적당하던 회차보다도 공포스럽고, 등골이 싸하다.
서휼이, 돌아왔다.
"아, 아아…."
그리고 규련은 허겁지겁 얼굴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비늘이 잔뜩 돋아나 있던 그녀의 얼굴의 비늘이 다시 들어가며, 완전한 인간형으로 변하였다.
그녀는 얼굴을 상기시키며 서휼에게 물었다.
"빠, 빨리 왔군. 지난번에 서은현에게 서신을 보낼 때는 몇십 년은 더 걸린다고…."
"아,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혹시 그것도 서은현이 뭔가 서신을 조작해서…."
"아니, 그게 아닙니다."
서휼은 빙긋 웃으며 규련을 껴안았다.
"애초에, 저는 다른 중경계로 떠난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푸콱!
"…어?"
다음 순간.
서휼의 손이 규련의 심장을 꿰뚫었다.
"슬픈 사실이지만, 선배님."
서휼은 반대쪽 손으로 애틋하게 규련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한 가지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여태껏 한 번도 선배님 앞에서 사실을 말씀드린 적이 없답니다."
"…어…?"
"애초에… 진룡맹 영역을 떠난 적도 없었답니다. 흑룡왕의 거처에서 머무르며 수행을 완성시켰지요."
규련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몸을 떨었고, 서휼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사실, 규 선배님 몰래 봉명주 최하층을 통해 그동안 분신을 잠시 하계에 보내 보았다네. 자네 때문에 영 신경이 쓰여서 말이지."
푸확!
규련의 심장에서 손을 빼낸 서휼이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정말 놀라웠다네. 해룡궁에 남겨 놓은 함정부터 시작해서, 란이도 그렇고, 봉명성도, 흑색성도, 남아 있는 것들이 없이 다 때려 부숴 놓았더군? 거기다 내가 공들여 키운 번견(番犬)까지… 전부 자네 손에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자, 그럼…."
그리고, 서휼이 내게 천천히 다가올 때였다.
[서휼, 너…!]
서휼의 뒤쪽에서, 합체기에 준하는 압박을 쏘아 내며, 규련이 심장을 재생시키며 일어났다.
[나한테 왜….]
그리고 다음 순간.
콰드드득!
서휼은 그녀를 잡아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쩌어어엉!
목화 밭 전역에 핏빛 비가 내렸다.
규련의 몸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사방을 물들였다.
새하얗던 목화 밭이, 붉어지고 있었다.
꾸드드득….
서휼은, 싱글거리는 낯으로 규련의 목덜미를 발로 짓밟았다.
쿠구구구!
규련이 저항하려 하는 듯했지만, 어째선지 그녀는 서휼을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외법기축으로 힘을 쌓으신 규 선배님께서, 합체기도 채 되지 못한 몸으로 정통기축을 쌓은 제게 저항하시렵니까?"
"너, 너…! 어떻게…!"
"이미, 하계에서 기축제의는 전부 지내고 왔습니다. 천뢰를 미리 맞고 왔듯이요. 영기가 부족해서 축을 제대로 쌓지는 못했지만, 흑룡왕의 밑에서 혜서 양의 도움을 받으니 쉽더군요."
서휼에게서, 사축기 대원만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 기운이 주는 위압감은 어지간한 합체기 태수들 이상이었다.
서휼은 천 년 후에도 사축기 대원만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천 년 후에는 해룡'왕'의 칭호를 되찾는 만큼, 그 때에는 그저 실력을 숨겼을 뿐.
최소한 합체기 이상의 존재다.
그는 나를 보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해룡궁에서, 봉명성에서, 흑색성에서, 등선향에서. 전부 제의는 미리 치렀습니다. 애당초 오행 속성을 무식하게 모을 필요는 없습니다. 사신사방(四神四方)을 사축(四軸)으로 쌓기 위한 이해도가 모자라니, 오행을 축(軸)으로 쌓는 사도(邪道) 따위가 횡행하는 것이지요."
얼마간 규련의 목을 짓밟던 서휼이 내게 다시 걸어왔다.
"다섯 중경계가 상징하는 것이, 오행(五行)이 아닌 오복(五福)이듯. 사축기에서 쌓아야 하는 축 역시 그에 대응되지요."
콰득!
서휼의 손아귀가 내 목을 잡아 들어 올렸다.
저항하려 했지만, 눈앞의 서휼은 마치 합체기 수사와도 같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명귀(冥鬼)는 수(壽). 자금(紫金)은 부(富). 고력(古力)은 강녕(康寧). 진마(眞魔)는 유호덕(攸好德). 축의 힘이 되는 기운을 오행에서 모을 필요 없이, 네 중경계의 상징을 제대로 깨달아 선각후통의 방식으로 '제대로 된' 정통기축을 쌓는다면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습니다."
어쩐지 너도 알고 있지 않냐는 듯이 떠보는 듯한 말투.
"물론, 이것도 역시 한 번 길을 걸어 본 사람이나 해 볼 수 있는 방법이지만요."
콰드득!
서휼은 시퍼런 세로 동공을 내게 들이대며 물었다.
"원영기에 7년 만에 도달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더군요. 그래서 하계에 다녀오고 나서야 확실해졌습니다. 당신은 천재가 아니에요. 원래 그 경지, 혹은 더 높은 경지의 동급 수사였는데 영락한 것일 테지…."
서휼은 여전히 상냥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질문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서 도우(道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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