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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 6

이름있는 자 (2)

"대군(大君)께서 명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원영기 장로들이 서휼에게 읍을 하며 예를 올렸다.

서휼은 광한계에 온 이후로 왕작(王爵)에서 내려와 대군(大君)의 칭호를 쓰는 것을 허가받았고, 이후로는 대군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하오나, 혹 대군께서 찾으시는 존재가 특정한 운명을 타고난 존재가 맞습니까?"

"그렇네."

장로의 물음에 서휼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특정한 운명을 타고난 존재는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정한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반드시 존재야 하겠으나.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이미 늙어 죽었을 수도 있는 법입니다."

"상관 않네. 그런 이들의 기록이라도 찾으면 내게 보내면 되네. 그런 기록들을 찾아 모아, 그 존재가 윤회하는 규칙을 찾아낼 수 있다면 언젠가는 그것이 태어날 곳을 예측해서 갈 수 있겠지."

"예… 하오나, 최소한으로 잡아도 300년은 걸릴 것입니다. 대군께오서는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여부가 있겠는가."

나는 서휼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서휼이 말하는 건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아이들이다.

인과 연의 이름을 가지고, 서로 다른 성별로 가까이에서 태어나.

반드시 사랑에 빠지고, 반드시 한날한시에 죽는 이들.

나는 그런 이들을 본 적이 있다.

'그는 도대체 왜 저런 존재를 찾는 것인가….'

서휼에 대해 알면 알수록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수계에서부터 그랬다.

그가 천인기라는, 내가 닿지 못할 영역의 존재인 것은 둘째치고, 그는 늘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계획을 짜고 그것에 맞추어 움직이는 듯했다.

도대체 무엇일까.

서휼이 바라는 것은.

"…하루빨리 수행을 늘려야겠군."

어쨌든 원영기에 이르면, 사축기인 서휼 앞에서도 살아나갈 방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나누려면 최소 저 경지는 도달해 주어야 할 것이었다.

꿈틀, 꿈틀….

나는 내 방에 보관된 유리 상자.

그 안쪽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절지동물을 바라보았다.

수계에서부터 나를 따라온.

봉명인의 인력이 내게 점지해 준 인연이었다.

'처음 만날 때는 그 마을에서 본 어미 지네가 낳았던 알이었었지.'

지난 생에서는 창천개벽문도로 처음 살아갈 때 당시.

그때 처음 붙었던 서령문의 장로를 쓰러뜨리고 얻은, 요족에 대한 서적을 바탕으로 녀석을 키워 갔다.

요수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충환을 제작해 먹이고, 광한계의 영기 속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내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 건지, 지네는 내가 마계로 파견 가기 직전까지 잘 살아 있었다.

다만 지네로서의 수명 자체는 어쩔 수 없었던 건지 노환으로 죽어 버렸지만 말이었다.

"…이번에는 요족들의 영역이다."

과연 이곳에서는 조금 더 오래 살아, 요족으로 각성할 수 있을까.

나는 지네를 살펴보던 중, 문득 '이름'에 대한 것이 생각났다.

'그나저나, 나도 아직까지 이 녀석에게 이름도 안 지어 줬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미안하다.

이번 생은 아니더라도, 괴군과 함께했던 회차에서는 나에게 상당한 도움을 줬던 녀석이었는데.

그냥 이름도 없이 몇 년을 지냈다 생각하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네 이름은 뭐가 좋을까…."

이름에는 운명이 깃든다.

서휼이 말해 준 광한계의 고사와도 같이, 좋은 이름은 좋은 운명을 불러온다는 것이었다.

'좋은 이름으로 지어 주는 게 좋겠는데….'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앞으로 실행될 전 지족작명과업에서 이 지네의 이름을 지어 주기로 했다.

'그런 큰 계획이라면 녀석에게도 좋은 이름을 잘 지어 주겠지.'

거기다가 전 지족작명과업은 운명을 읽고 거기에 맞춘 이름을 지족들에게 부여하는 작업의 일환이니.

거기에서 이름을 짓는다면 지네의 운명에 딱 맞는 이름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몇 개월 뒷면 시행될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리거라.'

나는 꼬물거리는 지네에게 먹이를 주며 생각했다.

지네는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 * *

전 지족작명과업.

모든 지족들의 이름을 받아 관리하고, 이름이 없는 지족들에게는 이름을 붙여 줘서라도 관리하는 작업.

이름에는 운명이 담겨 있으니, 이름들을 관리해서 이름의 동향을 관찰해 간접적으로 지족 전체의 운명을 알아보자는 의도의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서휼 등에 의해 진행되게 되었고, 회귀 직후 2년이 조금 안 된 오늘에서야 시행이 되었다.

서휼이 작명과업을 위해 진룡맹에 보낸 원영기 장로들은 서휼에게 주기적으로 그가 부탁한 조건에 맞는 이름들을 보냈다.

물론 이름만 맞다 뿐이지, 서휼이 내건 조건에 맞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전 지족작명과업이고 뭐고는 핑계일 뿐이고, 저 이름의 주인을 찾는 게 서휼의 진짜 목적인가 보군.'

서휼의 성격상 지족의 운명을 알아보느니 하는 공익적인 일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을 것이리라.

그저 전세계에 퍼져 있던 지족들의 이름, 그리고 이름의 '기록'들을 한 군데로 모아 편찬할 수 있는 기회이기에 몰아붙였을 뿐.

그의 진정한 의도란 그저 저 이름의 주인들을 찾는 것뿐일 터.

"대군께 아침 인사 드립니다."

나는 서휼의 집무실에 찾아가 그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오오, 어쩐 일인가?"

서휼은 그의 집무실 가운데에 연단로를 만들어 놓고 단약을 제조하고 있는 듯 했다.

은은한 피 냄새가 나는 것이, 아무래도 요단을 통한 단약인 듯했다.

"…이번에 전 지족작명과업이 전 지족 영역에 선포되고 시행된다 들었습니다."

"하하, 그렇지."

서휼이 싱긋 웃으며 단약로 안에 든 내용물들을 휘저었다.

"13개 대형 종족들 역시 모두 만족하는 모양일세. 아무래도 내 제안이 듣기 좋았을 테니 말이야."

"…그렇겠지요."

서휼은 작명과업에 반대하는 반대파들에게,

작명과업에 반대하는 약소 종족이나 산수 출신 요수들을 잡아서 자원으로 만들어 반대파들에게 제공하는 계획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에 반대파들은 전부 흡족하게 작명과업에 찬성했고, 모두가 만족하는 방식으로 전 지족작명과업이 시행되게 되었다.

'서휼의 제안에 의해 희생당하는 약소 종족만 빼고 말이지.'

그 흐름은 너무나도 역겨웠지만, 아직 내 수준으로는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번에 작명과업이 시행될 때, 제 친우의 이름도 지어 주었으면 해서 말입니다."

"호오, 자네 친우라니? 자네 친우도 이름이 없는 건가?"

"예, 제 친우는 아직 이름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나름 소중한 친우인지라 녀석에게 좋은 이름을 주고 싶어서 말입니다."

"하하, 알겠네. 내 작명관에게 잘 부탁해 놓지. 그래서 그 친우는 누군가?"

나는 저물도에서 유리 상자를 꺼내, 서휼에게 지네를 보여 주었다.

서휼은 지네를 보며 재밌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 조그마한 게 자네 친구인가?"

"그렇습니다."

"흐음…."

나는 서휼의 의념이 조금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최근에는 서휼의 의념을 알기가 힘들었으나, 저런 식으로 간혹 보이기도 했다.

서휼은 뭔가를 아쉬워하고 있었다.

'지네를 인질 삼으려고 했는데, 진짜 친구가 아니라 애완동물이라고 생각하니 가치가 없어서 아쉬워하나 보군.'

그런 의미에서 아쉬워할 확률이 10할이었다.

잠시 지네를 살펴보던 서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귀여운 친우 같으니, 잘 대해 주게나. 그럼 본 군은 단약을 계속 제련하겠네."

서휼은 음기와 양기를 지닌 푸른색과 붉은색, 두 개의 요단을 연단로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나저나 자네는 연단법은 관심이 없는가? 비록 우리 요족의 연단법은 인족에 비해 달린다지만 그래도 수도를 걸어가는 데에 있어서 연단은 떼어 놓기 힘든 일이니 배워두면 좋을 걸세."

"…마음은 감사하나, 저는 제 수행도 하기 바쁜지라 연단술에는 관심 가질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지만 연단술 역시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재미있다네. 연단의 깨달음 역시 수행의 깨달음과도 연결되는 게 있으니 말이지."

우우웅!

서휼이 음기와 양기를 뿌리는 두 개의 요단을 집어넣은 연단로 안에서는 태극(太極)의 형상이 나타났다.

"본디 요족이 익히는 요수공법의 기본이자 총의는 음양의 순환과 회전, 조화일세. 하지만 하계에서부터 연단을 해 오며 깨달은 것이 있다네."

서휼은 저물도에서 초록색의 옥병을 꺼내, 안에 담긴 액체를 꺼내 태극의 빛깔이 도는 연단로에 뿌렸다.

"이건 녹립산(綠立酸)이라는 영액이라네. 음양이기가 서로 섞이지 않게 해 주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

우우웅!

서휼이 녹립산을 연단로 안에 뿌리자, 서로 순환하며 섞여 가려던 태극의 형상은 더 이상 섞이지 않고 분립되었다.

"하지만 신기한 건 말이지, 음과 양은 본디 서로 하나가 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네. 그렇기에 서로를 분리해 주는 영액을 집어넣어도, 음양이기는 서로 섞이기 위해 움직이지."

우우웅!

그의 말대로, 음양이기가 단로 안에서 서로의 꼬리를 물고 섞이기 위하여 저절로 회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음양은 함께 있으나 서로 섞이지 못할 때에 이렇게 가장 격렬하게 회전한다네."

"…."

"잘 흐르던 음양의 흐름을 분리해 놓고, 서로가 만날 듯 만나지 못할 듯 아슬아슬한 상태를 유지만 해 준다면, 음양은 끊임없이 회전하며 무한에 가까운 힘을 낸다는 것일세. 어떤가, 본 군이 연단을 하며 알아낸 사실이지만 우리 요족들의 공법에도 적용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군요, 정말 놀라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하, 귀찮게 잡아 두어서 미안하네. 이제 가 보게나."

도대체 이 녀석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걸까.

나는 서휼에게 인사를 한 후, 그의 집무실에서 빠져나왔다.

* * *

서휼은 그의 집무실에서, 연단로의 안쪽에서 끊임없이 회전하는 태극을 바라보았다.

"…본디 기(氣)는 곧 혼(魂), 혼(魂)은 곧 명(命). 그러므로 기와 운명이 결국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는 미소를 지으며 서은현이 나간 곳을 바라보았다.

"서로 만나야 하는 운명을 아슬아슬하게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 역시 어마어마한 운명의 인력을 만들어 낼 수 있겠지."

우우웅!

그와 동시에, 서휼의 옆쪽에서 공간 균열이 나타나며, 서은현과 마찬가지로 백의를 입은 인영이 나타났다.

"저어… 서휼 님. 호풍성혈변의 구결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러는데…."

"이리 오십시오. 마침 그대를 위한 단약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치직, 치지직….

백의의 여성이 공간 균열을 넘어 서휼의 집무실로 들어오자, 공간 전체의 음양의 흐름이 더더욱 빠르게 회전하며 서휼의 집무실에 설치된 세세한 영력 회로를 이용한 법기들이 전부 빛을 잃었다.

서은현이 설치한 괴군의 회로 역시 순간적으로 작동을 멈추었다.

그 광경을 본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정말 죄송해요, 서휼 님. 힘을 조절하지 못해서 늘…."

"아닙니다. 쓸데없는 눈을 가려 주니 오히려 좋군요."

"…?"

"자, 이리 오시지요.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제가 반드시, 당신이 동료들과 만날 수 있도록, 원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그렇게 약속드렸으니까요."

서휼은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동료들과 다시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그 모습은 정말 보기 좋습니다. 늘 정진하시지요."

* * *

부우웅!

나는 유리 상자를 들고, 진룡맹 봉명주를 찾아갔다.

봉명주 최상층은 오늘도 여지없이 바쁜 듯했다.

나는 봉명주 최상층에서 행정 구역을 찾아 작명과업이 시행되는 부서를 찾아갔다.

"이름을 지으러 오셨다고 하셨습니까?"

사슴벌레를 닮은 요족은, 흑룡 혈맥을 드러내 사슴뿔과 비늘을 드러낸 내게 공손하게 물었다.

"그렇소. 다만 내가 아니고 내 친우의 이름이오."

"친우분께서는…."

나는 유리 상자를 들어 그에게 보여 주었다.

"이 녀석이오. 애완동물을 데리고 와서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예전에 이 녀석 덕택에 목숨을 구한 적이 있어, 꼭 이름을 지어 주고 가능하다면 요족으로 각성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외다."

"아… 그러시군요."

사슴벌레 요족은 잠시 지네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시다면 제가 막을 이유도 없지요. 도리어 용족께서 저희 충족(蟲族)을 좋게 봐 주시는 듯하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음, 지네가 곤충이던가?'

"…뭐, 어쨌든 큰 은혜를 입은 몸이니까 말이오."

내 말에 사슴벌레는 조심히 지네가 담긴 유리 상자를 받아들었다.

"일단 저희 측에서 작명관에게 말해서 이름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친우분…을 요족으로 각성시키고 싶으신 것이 맞으십니까?"

"그렇소."

"하면 이름을 지어 주시고, 같은 지네 요족들을 찾아서 도움을 받아보시지요. 같은 종의 요족이라면 뭔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르신이 원하신다면 제가 알고 있는 친우들을 소개시켜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오, 그래 준다면 감사하겠군."

"영광입니다."

사슴벌레 요족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얼마 후, 지족의 작명관이 지네에게 걸맞은 이름을 적은 종이와 함께 지네가 담긴 유리 상자를 돌려주었다.

'녀석의 이름은 과연….'

나는 지네의 새로운 이름은 무엇일지 궁금해하며 작명관에게서 받은 종이를 펼쳤다.

지네의 이름은, 홍범(洪範)이었다.

"그게 그 아이의 운명에 가장 걸맞은 이름입니다. 천족만큼은 아니지만, 저희 지족의 작명관은 영기의 흐름으로 점을 쳐서 운명을 옅게나마 읽는 법을 훈련해 온 이들이고, 그런 작명관이 지어 준 이름이니, 분명 그 아이에게 가장 잘 맞는 이름입니다. 홍범이라는 이름의 뜻을 설명해 드리자면…."

작명관이라는 사슴 요족은 공손하게 내게 종이에 적힌 이름의 뜻을 설명해 주었다.

"그래, 고맙소. 좋은 이름으로 지어 주어서 감사하오."

나는 그들에게 감사를 표한 후 행정 구역에서 나왔다.

'홍범이라….'

나는 지네를 보며 생각했다.

'왜 이렇게, 기시감이 드는 이름이지?'

왜일까.

나는 어쩐지 예전에 이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뭐,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보면 알겠지.'

우선은 홍범을 데리고, 사슴벌레 요족이 소개해 준 지네 요족들을 만나 봐야 할 터였다.

* * *

지족 진룡맹을 형성하는 13개 대형 종족은 다음과 같았다.

용족(龍族), 붕족(鵬族), 공작족(孔雀族), 호족(虎族: 호랑이), 호족(狐族: 여우), 마족(馬族), 원족(猿族), 귀족(龜族), 봉황족(鳳凰族), 교족(鮫族), 우족(牛族), 아귀족(餓鬼族), 충족(蟲族) 등이 13개 대형 종족이었다.

그중에서도 용족이 가장 고귀하게 여겨졌으며, 충족이 가장 비천하게 여겨졌다.

애당초 다른 12개 종족은 선수의 진혈을 이어받은 선수혈통의 종족이었으나, 충족은 그냥 지족 전체에 포진한 모든 벌레형 요수들의 연합체를 뜻하는 것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리고 내가 찾아가는 이는, 그런 충족 중에서도 유난히 세력이 약하다고 여겨지는 지네 요족이었다.

부우웅!

나는 충족 구역으로 가는 전송진을 통해, 지네 요족이 있는 곳까지 빠르게 도착하였다.

지네 요족들은 충족 구역에서도 상당히 깊은 계곡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사슴벌레가 소개해 준 지네 요족과 만나 담소를 나눈 후, 그에게서 홍범을 각성시킬 비술들을 몇 개 받아 오는 데에 성공하였다.

"제명비신대법(祭名碑神大法)이라…."

지네 요수들의 신체에 흐르는 영기의 흐름을 파악한 뒤.

그 흐름에 걸맞게 영기를 불어넣어 지네의 몸이 폭발하기 직전까지 가게 한 후.

지네의 이름을 통한 제의를 지내어 지네의 뇌리에 그의 이름을 강하게 새기게 하여 영성(靈性)을 일깨우는 방법이라고 했다.

"본래는 천족들이 자기 애완 요수를 만들 때에 쓰는 방법입니다만, 선수의 진혈을 받으신 어르신이라면 제의를 통해 같은 효과를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나는 지네 요족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천족 전용 비술이라면 오히려 잘 됐군.'

제명비신대법을 통하면, 다음 생에는 굳이 서휼을 따라 지족을 오지 않아도 다른 곳에서도 홍범을 각성시킬 수 있다는 말이니 오히려 좋았다.

나는 지네 요족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제명비신대법을 구매하여 해룡궁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신경 써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나는 새 이름을 받은 홍범을 쳐다보며, 원유와 함께 대법을 준비했다.

'앞으로는 같이 가 보자꾸나.'

방 안에 제문이 적힌 진도가 깔렸다.

나는 방음 법술을 펼친 후, 지네를 진도의 정 중앙에 놓은 후 진도를 발동시켰다.

제명비신대법이 발동하였다.

우우웅!

홍범의 체내로 영기가 흘러 들어가며, 홍범이 꿈틀거렸다.

나는 체내로 흘러 들어가는 영기를 녀석의 몸에 알맞게 조정하며 진도를 조작했다.

"홍범(洪範)은 이리 오너라!"

쿠웅!

내가 녀석의 이름을 부르자, 진도가 발동하며 홍범의 안쪽에 있는 영기들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하였다.

이름을 세 번 부름으로써 지성 없는 벌레 요수의 영성을 각성시키는 제의.

"홍범(洪範)은 이리 오너라!"

다시 한번 이름을 부르자, 이름에 의해 홍범의 체내에 있는 영기들이 폭발하며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영기의 폭발은 곧 정순한 생명력이 되어 홍범의 육신을 강화시켰고, 홍범의 체내 안쪽에서 영기들이 회전하며 안착하기 시작했다.

"홍범(洪範)은 이리 오너라!"

쿠웅!

이번에는 내 귀에 들릴 정도로 큰 폭발이 홍범의 몸에서 터져 나왔다.

녀석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듯했으나, 고통을 견뎌 내자 마침내 영기의 흐름이 녀석의 몸에 안착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름을 세 번 부르자, 홍범은 마침내 영성을 각성하여 요족(妖族)의 반열에 오르는 데에 성공하였다.

키륵, 키르륵….

홍범은 괴상한 소리를 토해 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기기 초기에 해당하는 기운이 녀석에게서 느껴졌다.

요족들은 영성을 가지더라도, 선수 혈통을 타고난 특별한 종족이 아니라면 축기경에 이르기 전까지는 지성이 거의 없다.

축기경에 이르기 전까지는 내가 알던 이전의 지네와 크게 다를 리 없으리라.

나는 홍범에게 다가가 녀석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앞으로 잘 지내 보자꾸나."

봉명인이 내게 끌어와 준 천운.

홍범은 과연 앞으로 내게 어떤 도움을 주게 될까.

'아니, 도움을 못 줘도 상관없다.'

도움을 받는 못 받든.

어쨌든 나를 찾아온 인연이니.

최선을 다해 녀석을 도우리라.

창호자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나는 홍범의 머리 부분 갑각을 쓰다듬어 주었다.

"이 살얼음판 같은 용족의 복마전 속에서, 나와 함께해 다오."

앞으로도, 서휼의 아래에 있으면서 굉장히 괴롭고 힘든 일이 많을 터.

이 해룡궁에는 누구도 내 편이 없었으나, 어쨌든 홍범이 있게 됨으로써, 최소한 한 명의 내 편은 만들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앞으로, 잘 버텨 보자.'

이제 서휼의 아래에서 고작 2년이다.

고작 2년이지만, 서휼의 따사로운 눈길을 느끼다 보면 2년이 아니라 200년은 지낸 것 같았다.

하지만 앞으로, 내가 이번 생에 정한 목적들.

용족의 진의 탐색, 오혜서 근황 확인, 그리고 천뢰번 절도를 어떻게든 이뤄 내려면 계속해서 버텨야 한다.

'계속 버티며, 반드시 모든 목적을 이뤄 내리라.'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영성을 막 얻은 홍범과 함께 해룡궁의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5년이 지났다.

* * *

쿠릉, 쿠르르릉!

나는 주변으로 몰리는 태음의 기운을 지닌 먹장구름을 흡입하며 눈을 반개했다.

'드디어….'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천족공법으로 어느덧 결단기 대원만 천상분야열차의 단계에 올랐고,

요수공법으로도 결단기 극한에 이르렀다.

'이제, 제대로 원영기에 돌아갈 시간.'

회귀햇수 7년.

아니, [그]가 나를 시험한 시간까지 합치면 17년이었지만, 어쨌든 시간의 흐름상으로는 7년이었다.

나는 7년 만에 만상인연도의 힘을 통해 원영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원영에 이르면, 그때부터는 조금 더 서휼의 아래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겠지.'

또한 본격적으로 원영기 공법을 수련할 수 있으리라.

'그럼… 원영기로 돌아가 볼까?'

이름있는 자 (3)

답천의 경지야 일반적인 수도공법들과는 확연히 다르니 신경을 끌지언정.

천족과 지족의 수도공법은 각각 분명하게 호환이 되었다.

'결단 최고봉에서, 금단 내의 정순한 기를 끌어모아 혼의 계위로 도약한다.'

이것이 천족공법의 원영의 경지.

그렇다면 요수공법에서의 원영은 또 달랐다.

'자기 자신과 같은 형태로 압축시켜 온 의식을 요단 안쪽까지 쭉 압축시킨다.'

그렇게 의식 자체가 단 안쪽에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과 똑같은 형체로 응결되면 그것이 곧 요족의 원영이었다.

부우웅!

현재, 내 단(丹)은 상당히 기묘한 상태의 단이었다.

일반적인 천족 수사의 금단은 금빛이 돌며, 표면에는 28수의 별자리와 3원의 자리를 담은 천상열차분야도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일반적인 지족 요수의 요단은 금단화가 되면 금빛이 돌며, 그 표면에는 태극(太極)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내 단(丹)에는 천족의 별자리도, 지족의 태극도 둘 다 새겨져 있었다.

'천, 지족 양족의 방식으로 동시에… 원영을 응결한다.'

우우웅!

광한결을 통해 완전히 요수공법화시킨 창령성광오채대법과, 천린수해성 등의 공법이 동시에 격발되며 기의 계위를 떠나, 그 너머에 도달한다!

키이잉!

의식이 단 안쪽으로 압축되며, 그와 동시에 단 안쪽에 뭉쳐 있던 기운이 혼의 계위로 도야한다.

번쩍!

나는 단전 중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보며, 다시금 익숙한 광경을 보았다.

음과 양이 회전한다.

그리고 나는 그 회전을 따라가며 과거의 광경들을 주르륵 흝는다.

이전에는 원영에 오를 때 보았던 이 음양의 회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요수공법을 익힌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생명의 유전자는 모두 음양의 힘을 품고 있다.'

그리고 그 음양의 힘 사이에 생명의 정보가 기록되고, 전승되어 온다.

그와 같이 인간의 삶 역시, 음과 양의 영기 속에서 회전하며 세계 자체에 쭉 기록되어 온 것이다.

'나라는 혼백에도 음양의 기운은 존재하고, 그 음양의 사이에 기록되어 온 나 자신의 기록이….'

기와 혼의 계위가 얽히기 시작하는 원영의 경지에서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원영의 경지에서 보이는 주마등의 실체이다.

기(氣)는 곧 생명(生命).

그리고 생명은 곧 역사(歷史).

요수공법으로, 지족공법으로 원영에 이르자, 나는 그제야 흑룡이 한 말을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나 자신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다시금 내가 태어났을 때의 기록에 도착하였다.

일반적인 원영기 수사들이라면 이 순간에서 바로 원영을 얻기에, 태어났을 때의 감사함에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지난 생의 경험으로 인하여, 한 생명이 태어날 때에 어떤 축복을 받으며 태어나는지를 알았기에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섰다.

두 남녀가 아기를 안고서 웃고 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미소지었다.

예전에도 보았던 광경이지만, 다시 보아도 여전히 마음이 떨려 오는 장면이다.

'감사합니다.'

내게, 생을 선물해 주셔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음양과 태극으로 이뤄져 있다.

음양은 건곤, 하늘과 땅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나를 태어나게 해 준 하늘과 땅에게 가슴 깊이 감사 인사를 하며 다시금 원영의 경지에 발을 디뎠다.

번쩍!

이곳은 해룡궁 바깥, 운심호에서 벗어난 작은 산맥의 위쪽이었다.

주변은 진법으로 잘 방비해 두고 있었기에 방해받을 일도 없다.

파아앗!

단전의 중심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오며, 아기 형상의 원영(元靈)이 탄생을 알렸다.

모든 생명은, 아니.

적어도 대다수의 생명은 부모에게서 태어난다.

그리고 암수가 존재하는 생명체의 경우, 생명체는 어머니의 양수 속에서부터 태어나게 되어 있다.

암수는, 남녀는 예로부터 음양으로 표현되어 왔고.

그중에서도 남(男)은 양(陽)을, 여(女)는 음(陰)을 상징한다.

그렇기에 원영 초기.

어머니에서 막 태어났을 때의 기억을 기반으로 형성된 원영은 음신(陰神)이 되어 금단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그렇게 음신이 성장하여, 바깥과 교류하기 시작하며 빛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원영의 성질에 양(陽)이 더해지게 되어, 원영 중기에는 음양신(陰陽神)을 모두 다루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음신을 달로, 양신을 해로 표현하기에.

원영기의 주요 구결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다.

원영 초기 여월지긍(如月之恒).

음신을 완성하며, 지금껏 만들어 온 28수와 3원의 성천도(星天圖)에 밤(夜)을 완성한다.

원영 중기 여일지승(如日之升).

양신을 완성하여, 밤 너머에 떠오르는 아침 해로 낮(晝)을 만들어 하늘을 이분(二分)하여 음양신을 형성한다.

원영 후기 여오악지수(如五岳之壽).

음양신을 완성한 후, 그렇게 완성한 하늘을 떠받칠 오악(五岳)을 만들어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으로 삼는다.

이때 오악(五岳)은 오행(五行)에 대응하여 만들어야 하기에, 원영 후기에 오르려는 이는 체내에 오행의 힘을 받아들여야 한다.

단일 영근으로 원영 후기에 도전하려는 수도자는 이 경지에서 제대로 수행을 쌓으려면 오행 속성에 대응하는 법보를 체내에 받아들여 오악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이때에 받아들인 오행의 힘은 추후 사축기에서 축(軸)을 만들 때에 주요하게 작용하게 되어있다.

원영 대원만 불건불붕(不騫不崩).

음신을 달로 하여 우상(右上)에.

양신을 해로 하여 좌상(左上)에.

오행을 제좌(帝座)로 하여 중앙에 두어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를 그리고, 그렇게 그려 낸 일월오악도의 제좌에 앉아 음양오행(陰陽五行)의 힘을 체내에서 합일(合一)하여 원영을 완성시킨다.

그것이 원영의 경지를 수행하는 방법.

'창령성광오채대법은 애당초 원영기에 가장 최적화된 공법이군.'

창령격원결은 낮을 상징하고, 성광호체공은 밤을 상징한다.

그리고 오행장원전은 오행으로 하여금 오악(五岳)을 형성할 수 있게 해 주는 기반이었다.

나는 천족과 지족의 방식을 융합하여 만들어 낸 원영을 관조하였다.

파스스스….

원영을 형성하느라 단전 안으로 집중되었던 의식이 다시 풀려 나가며 주변으로 펼쳐진다.

그와 동시에,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쿠릉, 쿠르르릉!

원영을 형성한 역천자를 향해.

하늘이 금색의 천뢰를 내리꽂으려 한다.

그와 동시에, 감히 운명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는 천거자를 향해, 하늘은 청색의 천뢰 역시 준비시켰다.

쌍색의 번개가 하늘에서 일렁이며, 내게 떨어져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번쩍!

어마어마한 힘을 머금은 빛의 기둥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나는 내 위를 메운 쌍색의 빛보다는 다른 것에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을 느꼈다.

'저것은….'

음양, 거대한 태극(太極)이 하늘에서 회전한다.

이것은 요족의 시야.

'훨씬 더, 음과 양의 흐름이 또렷하게 보인다.'

음양이 만물을 형성한다.

그리고 만물을 넘어 계위를 만들어 내고, 공간을 형성한다.

그래. 요족의 시야에 공간이 음양(陰陽)의 이치에 의해 형성된 것이 보였다.

저 시야를 통해, 그대로 공간을 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 그게 끝이 아니다.'

하늘에서 태극이 회전한다.

그리고 음과 양이 힘을 주고받으며, 그 사이에서 천뢰가 형성되어 나를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그래, 나는 천겁(天劫)이 형성되는 과정을 두 눈으로 직시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보인다.'

음과 양의 결과 결이.

그리고, 천뢰가 형성되는 원리 자체가 뚜렷하게 인지된다.

'그렇다면 음과 양 사이에서 형성되는 천뢰의 힘을, 역(逆)으로 되짚어 가기만 한다면….'

쿠르르르릉!

나는 흑룡의 진혈이 가진 태음의 힘을, 지금 하늘에서 회전하는 태극과 역(逆)으로 회전시키며 하늘로 쏘아 올렸다.

쿠르르릉!

뇌전이 가진 음의 힘이 흑룡의 태음에 중화되고, 양의 힘만이 남아 내게 내리꽂힌다.

그러나, 힘을 주자 전신에서 흑룡의 비늘이 돋아난다.

그와 동시에 성광호체공의 구결에 따라, 은은한 별빛이 전신에 깃들었다.

'답천까지 쓰면 더 쉽겠지만….'

이곳은 지족 영역 한복판이며, 서휼의 근거지 근처이니 답천은 지양한다.

대신, 천족과 지족의 공법을 합친 일격을 그대로 하늘로 쏘아 올린다.

일순간, 흑룡의 기운이 내 팔로 스며드는 듯하더니 등 뒤로 4장의 검은 날개가 돋아난다.

'창익천쇄가 변질되어 버렸군.'

나는 한 팔에 흑룡의 힘과 창익천쇄를 몰아넣으며, 그대로 주먹을 하늘로 뻗었다.

'받아라!'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

하늘에 가득하던 먹장구름은, 둥글게 찢겨 나가며 푸른 하늘을 드러냈고, 나는 볕을 맞으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로써, 나는 드디어 지난 생의 경지를 회복했다.

아니, 흑룡의 힘까지 더해졌으니 초월했다고 해야 하리라.

짝짝짝짝―

"헛…!"

내 옆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박수의 주인은 서휼이었다.

"아, 오셨습니까, 서 대군."

'분명 나름 원영기에 도전하느라 진법결계로 주변을 메워 놨는데….'

역시 사축기에겐 진법결계고 뭐고 아무 의미 없는 모양.

내가 원영을 응결하는 사이 서휼이 어느샌가 다가와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다.

다만, 정말로 서휼이 내 옆에서 홀로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면 소름이 돋았겠으나 다행히도 서휼은 혼자서 박수를 치고 있지는 않았다.

"정말로 엄청나군. 서 대군, 그대가 옳았어."

규련은 회귀 7년 만에 원영을 얻은 나를 보며 감탄의 미소와 함께 서휼의 옆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근 7년간.

나는 규련을 자주 해룡궁으로 불러 서휼과 함께 있을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규련과의 약속도 있었으나, 동시에 나 서휼의 주의를 나 자신에게서 돌리기 위함이었다.

그 덕인지, 근 7년간 서휼과 규련은 상당히 가까워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규련은 최근에는 숫제 서휼에게 거의 붙어다니다시피 하기까지 하였다.

"후한 평가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니, 너는 정말로 후한 평가를 받을 필요가 있다. 7년 만에 원영기라니! 이전에 만 년, 이후에 만 년. 너 같은 천재는 다시는 없을 거다!"

"…."

"어쩌면 지족 출신 쇄성기 존자님이 한 분 더 탄생하실 수도 있겠군. 그때 가서 날 잊으면 안 되는 건 알고 있겠지?"

"예, 규 선배님이야 늘 제게 있어 은혜를 주신 분이시지요."

내가 규련과 덕담을 주고받고 있자, 서휼은 은근슬쩍 나와 그녀의 틈에 끼어들어 그녀를 살짝 끌어안았다.

"아무렴, 제가 눈여겨본 아이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래도 너무 친하게 지내시면 섭합니다."

어쩐지 내가 규련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게 질투가 난다는 그 어투에, 규련은 행복해서 죽을 것 같은 얼굴이었으며, 나는 소름이 끼치는 걸 느꼈다.

'최근 의념은 잘 안 읽힌다지만… 저 심상으로 태연하게 저런 언급을 하는 건 언제 봐도 소름이 끼치는군.'

질투의 의념이고, 연모의 의념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

그저 시커먼 뭔가가 꿈틀거리는 것이, 사람 껍질을 뒤집어쓰고 사람 흉내를 내는 것 같아 역겨울 따름이었다.

"흠, 음흠. 알겠다. 험험. 그건 그렇고, 서 대군. 이제 슬슬 말해 줘야지?"

"아, 예. 그렇지요."

규련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서휼에게 말했다.

서휼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건가?'

나는 긴장을 끌어올리며 서휼이 하려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본 군은, 앞으로 몇 년간은 지족 영역을 벗어나 외유를 나갈 참이라네."

"아…."

나는 순간 헤벌쭉 웃을 뻔했지만 긴장을 놓치지 않고 일단 서휼의 말을 끝까지 들어 보기로 했다.

"광한계에 도착하자마자 사축기에 올랐고, 근 7년간 경지를 안정시키는 데에 성공했으니, 이제 축(軸)을 세워 경지를 올려야 하니 말일세."

"아, 기축수행(基軸修行)을 시작하려 하시는군요."

사축기의 경지에서는 네 개의 축(軸)을 세우는 것으로 수행을 해 나간다.

"그래, 그리고 아무래도 최근 인족 측에서 진마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서 말일세. 양 계면 간 전쟁이라도 일어나기 전에, 정통기축(正統基軸)의 재료를 타 계면에서 구해 올 예정이라네."

사축기의 수행은 크게 정통기축과 외법기축으로 나뉜다.

사축기는 네 개의 축을 만들어 수행을 쌓아 갔고.

원영기 후기에서 받아들인 오행 중 한 가지 성질을 자기 자신으로 삼고, 나머지 네 개의 성질을 사방(四方)에 두어 자신을 중심으로 한 사축(四軸)을 완성하고, 고유 영역의 기초를 완성하는 것이 사축기의 근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 개의 축을 만들 때마다, 원영기 때에 받아들인 오행 속성의 힘을 기준으로 제의를 지내는 것이 바로 기축수행이었는데,

이러한 기축수행의 제의는 한 가지 속성을 익힌 수도자를 죽여 그 속성을 빼앗아 축으로 삼아 제의를 지내는 외법기축.

그리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 재료를 구해서 스스로가 제대로 된 제의를 치러 축을 만들어 내는 정통기축이 있었다.

"서은현, 너 역시 말도 안 되는 천재지만, 서 대군 역시 나름 상당한 인재다. 만약 그가 나처럼 외법기축이 아니라, 최상의 재료를 가져와 정통기축을 쌓으면 우리 용족은 이전에 없었던 전성기를 맞이할 터!"

규련은 흐뭇한 표정으로 서휼을 쳐다보며 말했다.

듣기로는, 외법기축이 아닌 정통기축으로 경지에 도달하는 사축기 수사가 오히려 더 드물다고 하였다.

힘들게 재료를 모아 제의를 치르는 것보다 다른 수사의 것을 뺏는 게 천 배는 더 쉽기 때문인 듯했다.

'한 개의 축을 외법기축으로 채우려면, 동급 경지의 사축기 수사 한 명, 혹은 천인기 수사 백 명, 혹은 원영기 수사 일만 명만 잡아 죽여 그 속성을 추출해 축으로 삼으면 외법기축이 완성된다니… 일반적인 수도자들은 참기 어려운 유혹이겠지.'

특히나 지족의 경우, 절대다수가 요수였기에 약육강식의 요족 사회에서는 죽고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니만큼 압도적으로 외법기축이 많다고 하였다.

"더군다나 서 대군은 이번에 타 계면까지 가서, 정통기축의 최상위 재료를 구해온다 하니 그 얼마나 대단하느냐?"

"아… 타 계면 말입니까?"

"그래, 너도 알다시피 다섯 개의 중경계는 오행(五行)에 대응된다."

규련의 설명이 이어졌다.

"광한(光寒)은 토(土), 진마(眞魔)는 화(火), 자금(紫金)은 금(金), 명귀(冥鬼)는 수(水), 고력(古力)은 목(木). 알다시피, 다섯 중경계는 오행에 대응되며, 각기 상징하는 속성을 수련하기가 더 유리한 환경이지."

꿈틀.

서휼은 규련의 말에 안면 근육을 살짝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런 만큼 정통기축의 최상위 재료는, 타 이 오행계면의 기운을 머금은 물건들이다."

"…그래서 대군께선 타 계면의 기(氣)를 구하기 위해 출타하시는 겁니까?"

"그래, 정통기축이 외법기축보다 훨씬 우대받는 이유는 제의에 사용한 재료의 질에 따라 일반적인 사축기보다 훨씬 강해지기 때문이지. 그리고 각 계면의 기운이라면 오행을 구현하기에 그만큼 상징적인 게 없으니 더할 나위 없는 재료다!"

꿈틀.

다시금 서휼의 안면 근육이 살짝 꿈틀거렸다.

나는 서휼의 의념에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며 그의 의중을 알아보려 하였다.

'저 의념은….'

뭔가 규련의 말에서 정정하고 싶은 게 있는 모양.

하지만 그는 딱히 규련의 말을 정정하진 않고 가만히 있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나?'

나는 서휼이 규련의 말에 반응을 보였던 때를 떠올렸다.

'각 계면이 오행에 대응된다고 했을 때. 주로 의념을 드러냈군.'

어쩌면 규련의 말처럼 각 계면은 단순하게 오행에 관련된 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나저나, 제가 알기로 진마계를 제외한 다른 차원은 광한계에서 차원 간의 거리가 상당히 멀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 하여 빠르면 20년 안팎. 늦으면 100년 안팎의 시간이 걸릴 예정이네. 그동안 규 선배님을 보지 못하니 아쉬울 따름이지."

서휼은 규련과 떨어져 있다는 것이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이 슬픈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짓말이군.'

시간을 말할 때 의념이 꿈틀거린 것을 보아, 실제로는 저것보다 빠르거나 더 늦을 수 있었다.

그가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이번에 가기 전에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찾아왔다네."

"예, 하명하십시오."

서휼은 웃는 낯으로 내게 옥병을 건네며 말했다.

"본 군의 진혈이 들어있는 병이네. 해룡족 역시 흑룡족의 방계이니, 선수 진혈이 중복되진 않을 것이야. 자네를 지금껏 해룡족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아 궁내에서 겉돌게만 하였네. 신경 써 주지 못해 미안하군. 이제라도 자네에게 내 피를 주어 해룡족의 제대로 된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네. 선수 흑룡의 진혈에, 7년 만에 원영을 응결하고, 본 군의 진혈까지 받았다면 더는 누구도 자네를 경시하지 못할 걸세."

"…."

"본 군의 피를 받아들이면, 본 군이 먼 차원에서 떠돌아도 피를 통해 자네와 연락을 할 수 있다네. 자네가 내 피를 받아들여 규 선배와 본 군 사이에 연락책이 되어 주게나."

서휼은 빙긋 웃으며 내게 옥병을 들이밀었다.

규련 역시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만약 서 대군과 본녀의 연락책이 되어 준다면… 나 역시 섭섭지 않게 보상을 하지."

지금껏 규련을 해룡궁에 수없이 초대하여, 서휼이 내게 손 쓰는 것을 제어해 왔다.

하지만 이제 서휼은 규련과 자신의 연락을 명분으로 내게 자신의 피를 주입하려 하고 있었다.

미칠 듯이 찜찜하다.

하지만 문제는, 서휼의 피를 거절할 명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본 군의 해룡 진혈까지 받아 연화하면 자네를 해룡궁의 정식 제후로 봉하고, 자네의 이름 역시 밀어붙여서 용명부에 남길 수 있다네."

규련이 얼굴을 붉히며 내게 은근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고, 서휼 역시 웃는 낯으로 옥병을 들이밀었다.

"자네의 이름이 전 용족에 울려 퍼질 좋은 기회이지. 부디 내 호의를 받아 주겠는가?"

배신 (1)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서휼의 제안을 구색 좋게 거절할 수 있을까.

'어지간한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지금껏 규련을 이용해서 그녀의 환심을 산다는 명목으로 행동해 온 게 한두 번이 아니고,

지금은 서휼이 규련을 움직여서 나를 압박하고 있으니, 어설픈 변명은 서휼뿐 아니라 규련마저 적으로 돌리는 행동일 뿐이다.

'그렇다고 무력으로 둘을 떨쳐 내고 달아나는 것도 안 된다.'

천, 지, 심족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낸다 치더라도 내 실력은 사축기 초기에 간신히 비할 정도.

의해은산과 일멸도차안을 사용하면 더 올라가긴 하지만 딱 그정도였다.

'서휼과 규련을 따돌리는 건 불가능해.'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츠츠츳….

사고를 가속시키며 미친 듯이 머릿속으로 궁리하였다.

'높은 확률로 피를 받겠다고 하면, 서휼이 직접 연화를 이 자리에서 돕겠다고 해 주겠지. 그 역시 규련이 보고 있는 앞에서는 거절할 명분이 없다. 거기에 서휼은 사축기인지라 뭔가 법술로 수작을 부리기도 힘들다.'

외통수다.

이대로라면 서휼의 피를 몸에 받아들이는 찜찜한 짓을 강요받게 되고, 그렇다고 거절할 명분은 아무리 찾아도 없다.

'솔직히 흑룡의 진혈보다, 서휼의 진혈이 더 껄끄럽군.'

흑룡은 너무나 격이 높아서 별로 내게 무슨 짓을 할 것 같지 않았다면.

서휼은 지금 내미는 저 핏방울에 또 무슨 수작을 부려 놨을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개수작좀 그만 부려라.'

나는 서휼을 욕하며 머리를 팽팽 돌렸고,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감사합니다."

답이 없다.

아니, 솔직히 몇 가지 조금 추한 방법이 생각나기는 했으나 그런 방법들은 구질구질하기도 했거니와 성공 확률도 낮았다.

'정 이렇게 됐다면, 정면으로 받아 주겠다.'

"그래, 그렇다면 지금 당장 연화를 시작하지."

'이럴 줄 알았다.'

이렇게 됐다면, 답천의 경지를 사용해 체내로 들어오는 핏방울들을 빠르게 잘라 낸다!

'어차피 서휼도 백녕을 통해 내가 심족이란 건 충분히 알고 있었을 터.'

그런데도 지금껏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어쨌든 쓸모가 있으리라 파악한 것.

'답천의 경지로 핏방울을 쳐 내도, 그라면….'

그리고, 서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상초월이었다.

"아 참. 연화는 규 선배님께서 도와주실 걸세."

"…!?"

툭툭.

그가 내 어깨를 친근하게 두들겨 주며 말했다.

"사축기 초기인 본 군보다야, 사축기 대원만이신 규 선배님께서 연화를 도와주시는 게 자네같은 천재에게 더더욱 격에 맞겠지."

"그래, 그래. 본녀가 도와주면 분명 제대로…."

"…."

제대로 걸렸다.

이렇게 되면, 규련의 앞에서 은근슬쩍 답천으로 체내에서 서휼의 진혈을 소멸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

'물론 서휼이 직접 연화를 돕는 것보다야 훨씬 덜 껄끄럽지만….'

껄끄러운 것은 서휼의 피 자체였다.

"자, 그럼 자리에 앉거라. 본녀가 도와주마."

"…예."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규련이 손가락을 펼치자, 주변 땅 위로 지난번 흑룡 진혈을 연화할 때와 비슷한 주술진이 음각되었다.

"이미 네 몸에는 흑룡 진혈이 흐르고 있고, 서 대군의 피 역시 흑룡의 방계 혈통이니 지난번처럼 엄청난 준비는 필요 없을 거다. 지난번보다 쉽기도 할 터고."

"…예."

"그럼 시작하자꾸나."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눈앞의 옥병을 보다가 눈을 질끈 감고는 옥병 안에 담긴 서휼의 진혈을 들이켰다.

꿀꺽!

그리고.

찌이이잉!

서휼의 진혈이 내 체내로 들어오며, 나는 마치 거대한 해룡이 나를 집어삼키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우우웅!

규련이 황금빛 기운을 일으켜 내 몸을 도는 서휼의 진혈이 갈 길을 인도해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며 이 진혈을 어떻게 하면 제압해 놓을 수 있는지를 궁리했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쿠릉, 쿠르르릉!

몸 속에서 먹장구름이 이는 듯하며, 핏줄 속에 잠들어 있던 흑룡 진혈의 기운이, 해룡 진혈의 기운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휼의 피는 흑룡 진혈의 방계 혈통인 탓인지 자연스럽게 흑룡 진혈과 섞이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때, 내 귓전으로 규련의 목소리가 들렸다.

"억지로 흑룡 진혈과 해룡 진혈을 섞으려 하지 말고 적당히 겹쳐 있게 해 놓거라. 시간이 지나며 둘은 천천히 섞일 터고, 억지로 섞으려 하면 폭주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

그리고,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거다!'

우우웅!

규련이 황금빛 기운으로 혈맥의 힘을 잘 인도해 주는 듯했으나, 나는 은근슬쩍 해룡진혈과 흑룡진혈을 강제로 합일시키려 시도하였다.

그와 동시에, 두 진혈이 폭주하며 전신의 기혈이 들끓기 시작했다.

"잠깐, 서은현! 뭘 하는 거냐, 위험해! 멈춰!"

규련이 황급히 내 등에 손을 대고 황금빛 기운을 흘려넣으며 외친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진혈을 짓눌러 합일시키는 데에 주력했다.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다 못해 기화할 것 같았으나,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 기회를 통해, 서휼이 자기 피에 무슨 수작을 부려 놓았든 전부 영향력을 지워 버린다!'

그리고 내가 억지로 두 기혈을 통합시키려 할 때였다.

촤락, 촤라라락!

흑룡 진혈이, 서휼의 피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본류(本流)는 같은 탓일까.

흑룡 진혈은 서휼의 피에 닿자, 마치 물 그릇에 떨어진 먹처럼 서휼의 피를 물들이고 그의 영향력을 지우는 것이 느껴졌다.

'좋다, 이대로 가자!'

그러나, 나는 어쩐지 서휼의 피를 잠식한 흑룡의 진혈이 더더욱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슨, 왜 힘이 계속 강해지는….'

부글부글부글!

그와 동시에, 나는 내 전신에서 들끓던 기혈이 흑룡 진혈의 힘에 완전히 잠식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왈칵!

내 입에서 피가 터져 나오고, 칠공에서 피눈물이 줄줄 흘렀다.

'아, 안돼….'

이대로면 죽는다.

증폭되는 흑룡의 힘을 내 몸이 버티지 못하고 으스러져 버린다!

나는 그제야 서휼이 파 둔 양자택일의 함정에 걸렸음을 인지했다.

'만약 흑룡 진혈로 서휼의 피를 잠식시키는 걸 이어 나간다면, 나는 죽는다. 이 짓을 멈추면 서휼의 피를 체내에 받아들여 살 수 있겠지. 하지만 서휼이 무슨 수작을 부려 놓았는지 모를 피를 내 몸속에 넣어 둔다고?'

뱃속에 칼을 삼켜 두고 지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게 아닌가.

나는 양자택일의 순간에서 고민했다.

고민은 짧았다.

'죽을지언정, 서휼 이 더러운 놈에게 순순히 이용당할 것 같으냐.'

이 녀석의 위험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어쩌면 서휼의 피를 그대로 받아들였다가, 나도 모르게 놈의 꼭두각시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나는 그대로 서휼의 피를 흑룡 진혈에 먹여 버렸다.

다음 순간, 나는 정신세계 안쪽으로 서휼의 환영이 비치는 것을 느꼈다.

그의 사념이었다.

서휼의 사념은 흑룡의 기운에 먹혀 부스러지고 있었다.

'역시나, 뭔가 수작을 부려 놨었군.'

하기사 오히려 아무 수작도 안 부렸으면 그게 더 수상할 뻔했다.

꾸구구구국!

그러나 서휼의 피를 흑룡의 피에 먹인 대가인지.

흑룡의 피는 어마어마한 음기를 내뿜어 댔고, 나는 몸이 폭발할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이를 악물었다.

'규련이 내 연화를 도움으로써 심족의 기술은 쓰지 못하지만, 도리어 서휼은 알지만 그녀는 모르는 기술은 써도 무방하다!'

츠츳, 츠츠츳!

나는 내 등 뒤에 손을 얹고, 황금빛 기운으로 내 흑룡의 힘을 눌러 주려는 규련의 힘을 받아 내 체내에 '회로'를 그리기 시작했다.

뿌득, 우드드득!

본래는 꼭두각시에 새기는 회로였기에 몸이 으깨질 듯이 고통스러웠으나, 나는 이를 악물고 회로를 새겨 갔다.

전신에 회로를 새기는 것까지는 지난 생에서도 무형검을 통해 일시적으로 회로를 까는 등 종종 해 왔던 일.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위이이잉!

'금단' 위쪽.

성천도와 태극이 새겨진 그 위로, 이미 그려진 별자리에 닿지 않게, 미세한 회로가 금단에 새겨졌다.

기기기긱!

"끄으으으읍!"

결단기 이상의 수사는 금단이 박살 나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말은 즉 결단기 이상의 수사에게 금단은 가장 큰 약점이라는 의미도 되었다.

나는 그 약점에, 생물이 아닌 괴뢰에게 새기는 회로를 새기며 증폭되는 흑룡의 힘을 인도하였다.

쿠구구구!

태음의 기운이 괴군의 회로를 통해 순환한다.

하지만 그 힘은 가없이 패도적이었기에, 나는 금단이 박살 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아니, 분명히 원래의 나라면 박살 났다.'

현재 내 금단과 원영은 천, 지족의 공법이 합일하며 타 수사의 금단보다 더더욱 크고 넓었으며 단단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겨우겨우 괴군의 회로와, 그 위로 실려 나오는 태음의 힘을 버틸 수 있는 것이리라.

그 끔찍하고 거대한 흑룡의 기운을 얼마나 받아들였을까.

나는 마침내 어찌어찌 몸이 폭발할 듯 불어나던 흑룡의 힘을 제어할 수 있었다.

"…후우."

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떴을 때였다.

짜악!

매서운 손바닥이 내 뺨을 후려쳤다.

"이 멍청한 녀석! 내가 억지로 합일시키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방금 금단은 물론이고 막 응결한 원영까지 폭발해 죽을 뻔한 걸 모르는 거냐!?"

"…죄송합니다."

규련은 노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말로 천재라고 오냐오냐해 주니까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나? 사축기 선배의 말을 무시해도 될 정도로 네 자신이 잘나게 생각됐던 거냐?"

쿠구구구!

어마무시한 압박감이 내 몸을 내리눌렀다.

그녀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여지껏 친절하고 부끄럼을 타는 그녀의 모습만 보아 왔기에 잊고 있었다.

"끄흡…!"

'이게 사축기 수사….'

아직 천인기도 되지 못한 나와는 격이 다르다.

그녀가 진노하는 것만으로, 갑자기 중력이 거세지고 몸이 짓눌린다.

전신의 영기와 생명력이 들끓으며 폭발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그만 하시지요. 서은현의 실수는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

우우웅….

서휼이 규련을 달래자, 규련은 그제야 기세를 진정시켰다.

"자네 역시 천재성을 이용해서 어떻게 흑룡의 힘을 잘 제어한 것 같지만. 그래도 너무 무모했네. 거기다 사축기 선배이신 규 선배님의 말을 무시하고 일을 진행하다니…."

서휼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내 앞에 다가와 내 어깨를 짚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와 자네, 그리고 자네와 규 선배님의 사이가 그렇게 멀지만은 않기에 크게 넘어가진 않을 걸세. 하지만 수도계의 선배의 말을 잘 유의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일세."

싸아아아….

나는 서휼의 눈을 보며 오한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은 오랜만에 세로로 쭉 찢어져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나는 규련이 분노하는 것보다 서휼이 나를 웃으며 쳐다보는 것이 더 소름이 끼쳤다.

그는, 이제껏 없었던 수준으로 나를 향한 의심의 의념을 내뿜고 있었다.

'제길….'

세로 동공을 드러내며 나를 은은하게 쳐다보는 서휼은,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결국 대놓고 의심을 받게 되었나.'

솔직히 이전까지 내 행동들은 그래도 의심스럽기는 해도 내가 직접적으로 서휼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보여 주진 않았다.

하나, 방금 서휼의 피를 흑룡 진혈에 완전히 잠식시키며 서휼의 잔념을 흩어 버린 짓은 내가 직접적으로 서휼의 의지에 반한 일이었다.

물론 그 역시 규련 앞에서 자신의 피에 수작을 부려 놓았다는 것을 말하기는 싫은지 부드럽게 나를 타이르는 듯했으나.

나는 서휼이 대놓고 보여 주는 의념을 읽으며 깨달았다.

'서휼에게, 나는 이제 완전히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7년.

고작 7년 만에 벌어진 일.

'아니,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

서휼이라면 분명 제거를 한다고 해도, 최대한 나를 이용하면서 제거하려 할 터.

'최소한 그가 기축수행의 재료를 찾고 돌아올 때까진, 내 수명은 끝나지 않아.'

그리고 그때쯤이면….

'서 장군을 어떻게든 급조할 시간은 될 터!'

서휼에게 대항할 힘을 찾기 충분한 시간이다!

서휼은 세로 동공으로 나를 쳐다보며 얼마간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교를 이어 나갔고.

나는 감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서휼에게 감복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휼 역시 내가 어찌되었든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서로 칼을 품고서 규련의 앞에서 재미없는 연극을 이어 갔다.

* * *

"…뭐,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만. 어쨌든 오늘 일은 예정대로 진행하지."

규련은 살짝 째려보고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서휼은 그녀와 함께 허공으로 떠오르며 말했다.

"자네도 따라오게나."

"예? 무슨 일이신지…."

"이번에 출타를 나가기 전, 규 선배님께서 우의를 다지자는 의미로 요선루(妖仙樓)에 가서 공연이나 보자고 하시더군. 자네를 비롯한 해룡족의 주요 인사들도 이번에 본 군을 송별하는 송별회를 겸하여 참석할 터라네."

"아… 예. 알겠습니다."

나는 서휼의 말을 듣고 날아올라 그들을 따라갔다.

서휼은 요선루로 이동하며, 규련의 앞에서 자신의 피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는 법을 내게 알려주었다.

흑룡의 진혈에 잠식당했어도 어쨌든 서휼에게서 나온 피이니 그를 통한 연락은 되는 듯했다.

'다행히 서휼이 피를 통해 내 몸에 심으려 했던 사념 자체는 없애 버렸다.'

같은 혈통의 피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는 방식은 규련 역시 알고 있는 법술이라 하니 문제는 없을 성싶었다.

중간에 해룡족 장로와 원로들 몇몇이 우리에게 합류했고, 우리는 진룡맹의 중심지인 봉명주로 향하였다.

얼마 후. 우리는 마침내 요선루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요선루는 요족들에게 선주(仙酒)를 판매하는 주루로, 요족들은 하계에 범인들처럼 간혹 요선루로 와서 선주를 마시고는 했다.

하지만 이들이 마시는 선주는 마시면 수행이 증가하거나, 백홍주처럼 법보와의 연계가 강화된다거나 하는 효능이 있었기에 광한계의 '주루'라는 곳은 하계의 주루보다는 법기점, 단약점, 혹은 공법서점의 개념에 가까웠다.

물론 그래도 풍류를 즐기는 '주루'였기에, 광한계의 주루에서는 주루를 찾는 귀한 고계 수사들을 위하여 그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할 공연을 준비하고는 했다.

'이곳이 요선루….'

규련이 앞장서 도착한 요선루는 거대한 거북의 등껍질로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듣기로는 파산마원 진혈을 가진 원숭이 요족과 음귀현무 진혈을 가진 거북 요족이 만나 술을 먹고 놀며 벗으로 지내다가, 거북 요족이 죽자 원숭이 요족이 슬퍼하며 껍질을 벗겨 주루로 삼았다는 것이 이 요선루라고 했다.

'…본인 친우의 시체로 만든 주루라….'

뭔가 그 원숭이 요족의 감성은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그냥 그러려니 하며 일단 규련과 함께 주루로 들어갔다.

주루에는 규련과 해룡족 일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본녀가 이번에 서 대군을 송별하기 위해 오늘 하루 요선루를 통째로 빌렸으니, 다들 음미하고픈 선주를 마음껏 음미하시게."

규련은 해룡족 원로와 장로들을 바라보며 서휼을 주루의 위층으로 데리고 갔고, 그에 해룡족 원로들은 감사를 표하며 주루 곳곳으로 흩어져 앉았다.

나 역시 눈치가 있었기에 규련을 따라가지 않고, 요선루의 입구 근처에 따로 앉았다.

요선루는 총 4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4층에는 서휼과 규련이 단둘이 앉아 있었고, 3층에는 해룡족 천인기 원로들이.

1, 2층에는 나를 포함한 원영기 해룡족 장로들이 앉았다.

그리고 1층의 중앙에는 거대한 무대가 있었는데, 그 무대로 공연자가 올라와 무언가 공연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각자가 요선루의 점원들에게 원하는 선주를 주문했다.

나는 익숙한 백홍주를 주문했다.

모두가 선주를 주문하자, 주루 전체의 불이 갑자기 꺼졌다.

'공연이 시작되나 보군.'

나는 백홍주를 홀짝이며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우우웅!

어찌된 일인지, 요선루 전체에서 강력한 금제가 발동하며 우리의 의식을 제약했다.

그에 해룡족 원로와 장로들 사이에 잠깐 소란이 있었다.

"모두 걱정하지 말아라. 요선루는 본래 공연을 하기 전, 공연의 완성도를 위해 의식을 제약한다. 본녀와 서 대군 역시 의식을 뻗치지 않고 있으니 당황하지 말도록."

그제야 소란은 잦아들었고, 곧이어 요선루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파앗!

무대 중앙에 불이 들어오며, 몇몇의 아리따운 무희와 악사(樂士)들이 들어왔다.

무희들은 각기 인족을 닮은 무희들이었고, 악사들은 생김새가 전부 다양했다.

원숭이같이 생긴 악사는 비파를 들고 있었고,

인간의 상체에 거미의 하반신을 가진 악사는 금(琴)을 들고 있었다.

얼굴은 물고기였지만 하반신은 인간의 몸을 가진 악사는 피리를, 홍합 주제에 팔다리가 달린 악사는 북을 잡고 있었다.

얼마 후 무희들이 춤사위를 시작했고,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했다.

그리고 그 음색에, 나는 솔직히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상외로 훌륭하군.'

비파를 키는 원숭이는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비파를 통해 감정을 표현했고,

거미 여성은 눈을 뜨지 않고서 금을 타며 아름다운 음색을 만들어 냈다.

물고기 요족은 아가미로 공기를 빨아들이고 입으로 피리를 불며, 한 번도 숨이 멈추지 않고 피리를 계속 부는 신기를 보여 주었으며.

홍합은 북을 잘 쳤다.

거기에 다들 요수들인 덕인지, 전부 각자 영기(靈氣)를 음색에 실으며 더더욱 아름다운 파동을 만들어 내었다.

나는 물론이고, 해룡족 원로와 장로들 역시 악사들이 만들어 내는 음색이 만드는 파동.

그 파동이 음양의 흐름과 맞추어 이지러지는 것을 보며 모두 경탄을 터트렸다.

말 그대로 엄청난 예술이었다.

무희들 역시 음색에 맞추어 하늘하늘한 옷자락을 휘날리며 사위를 추었고, 요선루에 방문한 해룡족 원로와 장로들은 모두 공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수준이 굉장히 높다.'

나는 진심으로 악사들에게 경탄하며 음악을 들었다.

음색을 들으며, 나는 서휼에 의해 한참이나 긴장되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킬 수 있었다.

흘끗 서휼과 규련이 있는 사층을 보니, 규련이 뭔가를 했는지 의식은 물론이고 영기의 흐름조차 아예 안쪽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막아져 있었다.

'…모르겠다. 내가 더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안에서 서로 뭘 하든, 규련과 서휼의 일이다.

나는 신경을 끄며 음악에만 집중했다.

음색을 듣다 보니, 나는 어쩐지 악사들 사이에서의 실력차를 알 것만 같았다.

'눈을 감고 금을 타는 거미 여인이 최고수로군.'

그다음이 장인의 얼굴로 비파를 키는 원숭이, 그다음이 피리 부는 물고기 머리였다.

홍합은… 열심히 하고 있었다.

'금의 음색에 맞추어 전체가 어우러지고 있다.'

어느덧, 금을 중심으로 한 음악은 점차 절정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음색이 절정에 도달하며, 음색에 담긴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

파앗!

주루의 불이 켜지며, 제약당해 있던 의식들이 전부 해방되었다.

"아…!"

순간 답답했던 의식의 제약이 풀리자, 해룡족 족원들은 모두 탄성을 터트렸다.

'훌륭한 연출이군.'

공연이 절정에 달함과 동시에 억제해 둔 의식 제약을 해제하여 답답함을 풀어 주니, 느껴지는 감동이 배가 되는 듯했다.

마침내 공연이 끝났다.

어쩐지 졸음이 밀려왔다.

"훌륭한 공연이었소이다."

"규 선배님께서 오자고 하신 이유가 있으셨군."

"비록 경지는 축기기 이하들이지만, 진정 위인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악사들이군."

공연이 끝나자, 모든 이들은 전부 어쩐지 나른해진 표정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무대 위의 무희와 악사들에게 극찬을 해 주었다.

공연이 끝나고 악사와 무희들이 무대에서 내려갔으며, 이내 잠시 요선루 측에서는 쉬는 시간을 가지겠다고 하며 불을 켜고 선주들을 추가로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백홍주를 가지고 오는 원숭이 점원 중 하나에게 물었다.

"방금 공연이 너무 인상깊어서 그러는데, 악사들을 만나려면 어찌해야 하오?"

연기기 수준도 안 되는 점원은 내가 말을 걸어 주자 황공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악사님들은 모두 요선루 지하 3층에 있는 대기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원하신다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탁 좀 하지."

나는 원숭이 점원에게 영석 주머니를 내밀었고, 원숭이 점원은 나를 요선루 지하 3층으로 안내하였다.

"상당히 넓군."

말 그대로, 요선루의 지하는 상당히 거대했다.

공간 압축 법술이 걸려 있는 듯, 지하로 내려갈 때마다 공간이 웅장해지는 것 같았다.

내 말에 원숭이 점원은 헤실헤실 웃으며 설명을 해 주었다.

"아, 저희 요선루의 지하에서는 간혹 경매회 같은 게 열리기도 합니다. 경매회에 오시는 요수 선사님들 중에서는 크기가 거대하신 분들이 많으셔서 불편함이 없도록 공간을 압축해 놓았습지요."

"호오…."

"도착했습니다. 여기가 악사님들 대기실입니다."

"안내 고맙네."

나는 원숭이 요족에게 영석을 쥐여 보낸 후, 지하 3층으로 들어갔다.

'넓군.'

상당히 넓다.

그리고 경매회가 열리기도 하는 장소인 탓인지, 곳곳에 안과 바깥을 차단하는 금제진법들이 깔려 있기도 했다.

악사 대기실로 들어가자, 한담을 나누던 악사들이 일제히 내 쪽을 보며 인사를 올렸다.

"아, 어쩐 일이십니까, 어르신?"

그 중 대표로 보이는 비파의 원숭이가 내게 다가오며 물었고, 나는 그에게 웃어 주며 대답하였다.

"좋은 연주를 듣게 해 주어 고맙네. 개인적으로라도 보답을 하고 싶어서 쉬는 데 방해가 되게 찾아왔다네."

"아…! 영광입니다. 용족 분께서 저희를 좋게 봐 주시다니…."

원숭이는 감격한 듯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원숭이에게 영석이 든 주머니를 건냈다.

"영석 일만 개를 넣어 뒀네. 나눠 가지게나."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리고…."

나는 거미 여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대를 빼고 모두 잠시 나가 있게나. 그 금 타는 실력이 상당하여 감동을 많이 받았네. 잠시 독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말이지…."

내가 원숭이를 바라보자 원숭이는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모두 잠시 나와라! 유화(油畫) 너는 용족 어르신을 잘 보필하도록!"

원숭이는 다른 악사들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크지는 않았으나, 바깥에서 악사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저 용족 어르신은 취향이 굉장히 특이하신 모양…."

파앗!

나는 괴군의 회로를 금제 위에 깔아, 대기실의 바깥과 안을 차단시켰다.

바깥에서 떠드는 소리가 차단되었고, 안에서 들리는 소리도 밖으로 나가지 않을 터였다.

우우웅!

결계가 발동하며 안팎이 차단된다.

그와 동시에, 나는 무형검을 꺼내 들고 거미 여인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목을 노렸다.

다음 순간.

투웅!

그녀가 금을 튕기자, 주홍빛 강물이 눈 앞에 나타나 흐르며 내 무형검을 막아 냈다.

"역시… 그쪽이었군."

나는 씨익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오, 심족 양반."

그녀의 음색을 들으며 알아챘다.

그녀가, 지난번 만났던 주홍빛 강물의 심상을 다루던 심족이라는 것을.

'정말… 김영훈 때문에 나쁜 버릇이 생겼단 말이지.'

파앙!

나는 그녀의 주변에 둘려 있는 주홍빛 강물에게서 떨어지며 무형검을 들어 올렸다.

'기(技)가 예(藝)에 달한 고수를 보면, 피가 끓는다니….'

너무 오랫동안, 무(武)를 제대로 겨루지 못했다.

심족이라는 이들이 쓰는 게 무(武)가 맞는지 아닌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제대로 마주하게 된 동 경지의 심족 고수를 만나자.

음악을 예술의 경지로 펼치며, 그 음색에 기와 심상을 담을 수 있는 존재를 만나자.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한판, 붙어 보지."

나는 검을 들어올리며 기수식을 잡았다.

투웅!

그리고 다시 다음 순간.

그녀가 금을 튕겼고, 주홍빛 강물이 움직이며 내 몸을 후려쳤다.

나는 그대로 뒤쪽으로 튕겨 나가, 홍합이 치던 북 위에 상반신이 처박혔다.

배신 (2)

"흐음…."

우수수….

나는 박살 난 북에서 상반신을 빼내며 먼지를 털었다.

"과연 기오막측하군."

주홍빛 강물이 나를 튕겨 낸 것이 아니었다.

주홍빛 강물에 닿자마자 내 몸이, 아니, 내 체내에 흐르는 정순지력들이 저절로 반응하며 튕겨 나간 것이었다.

한 마디로 주홍빛 강물은 내 몸에 닿기만 했을 뿐.

내가 튕겨 나가 처박힌 건 온전히 내 체내에 흐르는 힘들 덕이었다.

"흐음, 그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군요."

거미 여인.

유화라고 불린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팔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팔에는 내 무형검이 남긴 검흔이 생겨,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설마하니 그대로 제 방어를 통과할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내 체내의 법력이 타인의 의지대로 움직일 줄은 또 몰랐다만… 어떻게 한 거지?"

"순순히 자기 절기를 가르쳐 줄 리가 있겠습니까, 스스로 알아내 보시지요. 저 역시 최선을 다해서 그 검(劍)의 능력을 알아내 볼 테니까."

"호오, 검이라는 걸 알아본 건가?"

아무런 형태도 없는 무형검을 보고 어찌 알아낸 거지?

"형태가 없을지언정 의(意)가 그리도 또렷한데 뭘 들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겠습니까."

"우문현답이었군."

나는 무형검을 들고서 그녀를 덮쳐 갔다.

하지만 그녀의 주홍빛 강물이 내 몸에 닿을 때마다 나는 이리저리 튕겨 나갔다.

마치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느낌.

부웅!

뭔가가 붕 떠 있는 느낌을 느끼며, 나는 그녀에게 접근하려고 했으나 저 주홍빛 강물이 문제였다.

부웅, 쾅, 쾅, 쾅, 쾅!

무형검이 휘몰아치며 어느새 대기실은 난장판이 되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접근하는 것에만 집중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그녀와 공방을 치고받았을까.

"잠깐…."

그녀가 어느덧 갑자기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쯤 하시는 게 어떨지요?"

"음?"

그녀는 양 손을 금에서 떼어 내며 두 손을 들어올렸다.

"저희가 계속 싸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 무인이 만났으면…."

문득, 생각해 보니 유화라는 녀석은 무인인지 아닌지 잘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뭘 원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심족 영역 내에서도 당신 같은 분은 상당히 많으십니다. 자신의 구현과 타인의 구현을 겨루어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으시다거나, 혹은 그냥 대련을 순수하게 좋아하시는 분들도 한둘이 아니시지요. 당장 저희 존자께서도 그런 취향이시니 말이십니다."

"…그럼 왜 안 싸우겠다는 건가."

"저는 그런 부류의 심족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귀하의 검에 흥미가 있기는 하지만, 저는 본래 잠입과 첩보, 그리고 선동과 반란 작업에 더 적합한 몸입니다."

"흠…."

"이런 무의미한 짓보다는, 조금 더 건설적으로 서로의 정보를 나누는 것은 어떻습니까?"

나는 그녀를 쳐다보며 씨익 웃었다.

"혹시 '날조'도 네 특기 중 하나인가?"

"예?"

부웅!

나는 무형검을 역수로 잡은 채, 내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무형검은 그대로 머리통을 훑고 가며, 혼의 계위에서 내 뇌리에 영향을 미치는 기이한 음파(音波)를 베어 내었다.

슈칵!

그리고, 그제야 나는 뭔가가 깨어지는 느낌과 함께 '현실'로 의식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의 상황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나는 그녀와 대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의 강물에 튕겨 나가 북에 처박혀 박살이 난 상황부터 시작해.

나와 그녀가 합을 주고받은 흔적은 전부 사라져 있었다.

"상당한 환술이군."

그녀와 싸우며 계속 느꼈던,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기분.

붕 떠 있던 것 같은 감각.

그것은 전부 실재가 아닌, 내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었다.

"환술 속에서 싸우는 것도 재밌어서 계속 해 보려 했더니만… 환상 속에서도 나와 싸우기 싫다면서 대놓고 정보를 뽑아가려길래 나왔다."

그녀는 정보를 나누자고 했지만, 환술 속에서 그녀와 주고받는 정보가 진짜라는 보장도 없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담담하게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제가 보여 드린 것은 환술이 아닙니다. 귀하를 잠재우고 꿈을 꾸게 만들어, 귀하가 원하던 방향으로 꿈을 유도한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네가 조금 끼어들어 궁금한 것도 질문하고 말이지."

"부정은 않겠습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와 말투가 상당히 달라졌군."

"심족 첩보공작원인 제가 그렇게 쉽게 특정당할 수 있는 말투를 쓰면 쓰겠습니까. 목소리도 말투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도록 연습해 왔지요."

"음(音)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것, 그게 네 답천… 아니, 구현 2단계인가?"

부웅!

슈칵!

나는 은근슬쩍 금에 손을 가져가는 그녀의 손에 무형검을 날려 상처를 냈다.

나와 대화를 나누는 채 하며 슬금슬금 금을 타 나를 잠재워 버리려는 속셈인 듯했다.

그녀는 자신의 팔에 난 상처를 보며 웃었다.

"쉽게는 말씀드릴 수 없지요. 귀하는 천족인지 지족인지, 저희 쪽인지 당최 감이 잡히지 않으시는 분이시니까요."

"하긴… 그럼 그건 됐고, 정말 나랑 한판 붙지 않을 텐가? 너희 쪽에서도 어쨌든 내 정보를 얻으면 유리한 건 맞을 텐데?"

"그건 그렇지요."

그러나 그녀는 은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나, 당장 몇 층 위에 사축기 지족이 둘씩이나 자리 잡고 있는 이 상황에서 전력으로 붙어보자는 겁니까? 분명 들통이 날 겁니다. 지금 대련을 해 봤자 아무런 이득도 없다는 겁니다."

나는 그녀가 하려는 말을 눈치챘다.

"이득이 있다면 나와 대련하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못할 것은 없지요."

"좋아, 원하는 것을 말해라."

"귀하는 분명 현재 해룡족의 궁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래."

"해룡족의 궁에, 제가 지난번에 구출하여 심족 영역으로 탈출시키려 했던 백염족, 백녕이란 자가 억류되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자를 제가 구출할 수 있게 도와주시겠다고 약조해주신다면 대련 한번 못 해 드릴 것도 없지요."

"…으음…."

억류라….

그걸 억류라고 표현해야 하는 건가.

내가 답천의 경지로 심상을 숨기면서도 심각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그걸 다른 의미로 오해했는지 혀를 찼다.

"아무래도 귀하께 너무 큰 폐가 되는 부탁이었던 겁니까. 해룡족에 정 소속감을 느끼신다면…."

"아니, 그게 아니다."

나는 어느새 본인들이 지배 계층이 되어서 채찍을 휘두르고 다니는 운심호 인근의 백염족들과.

그들을 통솔하는 백녕을 떠올리며 아리송한 기분이 들었다.

"…내일이나 모레쯤 서휼이 기축수행을 위해 진룡맹을 떠날 거다. 그 이후에 시간을 맞춰 너와 백녕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지."

"아…!"

"다만… 음. 구출하게 도와주는 것은 모르겠군. 일단 네가 운심호 인근 백염족들이 거주하는 거처로 들어올 수 있게 해룡족 순찰대를 물려 주고, 빠져나갈 수 있게도 도와주겠지만… 그를 데리고 가는 건 스스로 하도록."

"감사합니다. 그 정도라면 굉장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나는 밝게 웃으며 좋아하는 그녀를 보고 문득 의아해져서 물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려는 거면 어쩌려고 그러지? 같은 답천경… 아니, 구현 2단계라서 거짓말도 할 수 있을 텐데?"

"후후… 귀하께서는 혹여 동 경지의 심족과 대련해 보신 적이 없으신 겁니까?"

"…없군."

"뭐, 그렇다면 오히려 잘 되었군요. 가르쳐 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

그녀가 금에 손을 대며 말했다.

"서로 힘 조절은 하면서 대련하기로 하지요. 말씀드렸듯이 위층에만 사축기 지족이 둘에… 대기실에 결계가 쳐져 있으며 요선루의 금제가 의식을 억제하고 있다곤 해도 자칫하면 들킬 수 있으니까요. 서로 힘은 연기기 초반으로 제어하고, 각기 구현의 공능만을 겨루는 것으로 하지요."

"좋지."

오히려 순수한 공능과 깨달음의 대결이라면 나야 환영이다.

다음 순간.

투웅!

그녀의 금이 울려 퍼졌고, 내 검이 허공을 쇄도했다.

하지만, 막 자세를 잡고 초식을 사용하려던 나는 그대로 몸이 엎어지려던 것을 참아냈다.

'졸리다!'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수마(睡魔)가 나를 덮쳐 오고 있었다.

'이게 연기기 급으로 힘을 제약한 수준임에도 이 정도의 졸림이라니….'

힘을 제약하지 않고, 서로가 제대로 된 답천으로 싸우면 방금 전처럼 내가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고 환몽 속으로 빠졌으리라.

퉁, 투웅, 퉁!

그러나 그녀의 연주는 이제 시작이었다.

점차 금이 튕겨지며, 음률이 생겨나기 시작하자 내 전신의 힘이 흩어지며,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끄으으읍!"

쿵!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우우우웅!

점차 그녀의 주변으로 옅은 빛의 주홍빛 강물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제 이것이 제 하현(下弦), 환람연하(幻籃宴霞)이오니, 부디 즐겨 주시길."

주홍빛 강물이 아니다.

저것은 노을(霞)이었다.

하루를 마친 이들이 집으로 들어가 잘 준비를 시작하는, 저녁놀!

티이잉!

나는 안간힘을 써, 겨우 졸음을 쫓아내며 산명곡응의 초식을 내게 사용했다.

무형검이 파동으로 바뀌며, 검명이 계위를 넘어 내 혼을 때려 제정신을 들게 한다.

하지만 정신이 맑아진 것도 그 순간뿐.

그녀의 연주가 계속되자, 나는 다시금 수마에 빠져드는 것을 깨달았다.

"무시무시한… 절기로군."

연기기 급의 힘만 써서, 나를 졸도시키기 직전까지 몰아가는 졸음이다.

천인기 수사라도 기습적으로 그녀가 작정하고 펼치는 연주를 듣는다면 바닥에 처박혀 잠들어 버리리라.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힘들다.

'내게는 특히나 더 치명적이군.'

졸리다.

당장이라도 쉬고 싶다.

지금 당장이라도 푹 드러누워 잔다면, 정말 오랜만에 마음 놓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서휼의 아래에 들어온 후 7년간… 한 번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뿐인가.

이전 생, 마계에서 총독 짓을 했을 때도.

그 이전 창천개벽문에서 온몸을 두들겨 맞을 때도.

그 이전 괴군에게 잡혀서 개조되어 일천 년을 버텼을 때도.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는 제대로 쉬었던 적이 있었나.'

향화와 함께하며 마음이 풀어졌을 때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쉬었던 것이 얼마 만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쉬고 싶다.

제대로 푹 자고 싶다.

유화가 발현하는 그녀의 답천은, 내가 지금껏 가져오고 있던 근원적인 욕망을 부추기고 있었다.

'조금 쉬어도 되지 않나.'

그러나.

씨익….

"쉬는 건."

콰드득!

나는 내 어깨에 무형검을 박아 넣었다.

찌릿한 고통에 눈이 번쩍 뜨였다.

"죽어서 쉬어도 되지 않나."

나는 무형검을 잡은 채 히죽 웃었다.

"오늘 아침에 깨달음을 얻으면 저녁에 죽는 것도 좋겠지. 참아라, 서은현! 이 좋은 기회를 처자는 것으로 놓칠 셈이냐. 죽어서라도 쉬게 해 줄 테니 눈을 떠라!"

나는 고함을 지르며 어깨에 박은 무형검을 비틀었다.

피싯, 피싯!

어마어마한 고통이 어깨에서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핏발이 선 눈으로 무형검을 비틀어 뽑아낸 후, 유화에게 겨누었다.

"좋군. 그럼 계속해 볼까?"

"…그러시지요."

다음 순간, 나는 찰나를 찢고 그녀에게 쇄도하여 무형검을 내리쳤다.

검은 일순간 도끼와도 비슷한 형체가 되어 그녀에게 꽂혔다.

그러나 이번에도 여실히 그녀의 주홍빛 강물이 내 무형검을 틀어막는다.

하나.

'못 막는다.'

슈욱!

내 무형검은 그대로 노을빛을 통과하여 그녀에게 쇄도하였다.

부웅!

그녀는 금을 든 채로 메뚜기처럼 뛰어 뒤쪽으로 물러났고, 나는 검을 내리친 직후 자세를 바꾸었다.

내 자세와 함께 무형검은 길쭉해지며 창처럼 변하였다.

'쏜다!'

다음 순간.

내 손에 들린 무색의 창은 마치 포탄처럼 쏘아지며 그녀의 주변으로 세 발의 산바람을 꽂아 넣었다.

투웅, 퉁, 투웅!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손을 놀리며 금을 탄다.

노을빛 강물이 넘실거리며, 강물에 닿은 무형검들이 그대로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저건….'

나는 그녀가 방어한 원리를 깨닫고 놀랐다.

'내 무형검을, 살아 있는 객체로 취급하여 [재우고] 있다?'

단순히 흩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내 무형검은 그녀의 노을과 닿을수록 잠들어 가고 있었다.

점차 내가 쥔 무형검의 기운이 연기기 이하로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단순히 검강을 쓴 것만도 못한 위력이 되리라.

'재밌군.'

먼 예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절정 고수도 되지 못해 김영훈을 따라다닐 때.

김영훈은 연국 여러 문파들을 찾아다니며 간판 떼기를 벌였고.

그 결과는 당연히 백전백승.

그리고 그가 대련을 했던 문파 중에서는 음공(音功)을 주력으로 하는 문파도 존재했었다.

그때의 김영훈은 분명 음공을 상대로 하는 문파의 장문인을 이기며, 가장 까다로운 상대였다고 말한 바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후우, 제일 쉽지 않은 상대였다.]

[형님 입에서도 '쉽지 않다'라는 말도 나오시는군요.]

[뭐, 아무래도 음공 고수는 찾기 힘드니 말이다. 어중간한 음공을 익힌 놈들이야 전부 병신이나 다름없지만, 저렇게 삼화취정에 달한 이들이 제대로 우리의 시야에서 음공을 펼치면 상당히 끔찍한 위력이 된단 말이지.]

[그 시야라는 게 뭔지 모르니, 저로서는 잘 모르겠군요.]

[아, 참. 안 그래도 이걸 말해 주려고 했는데 말이다.]

그때 들었던 김영훈의 조언을 떠올렸다.

[음공이란 결국 소리이다. 그런데 어떻게 소리 따위로 상대에게 해를 끼치느냐, 그건 네가 연구하는 독과 같다.]

[독 말씀입니까?]

[그래, 독이지. 상대의 음률을 처음 들은 순간부터, 상대가 만들어 낸 음(音)에 기(氣)가 실리며 그 순간부터 내 체내에는 상대의 음이 들어와 있는 거지. 상대의 음파가 내 체내에 집어넣은 음파와 공명하면 공명 수에 맞춰 체내가 붕괴하는 거다.]

[무시무시하군요.]

[그래, 그래서 결국 음공을 쓰는 고수를 만나면, 선발제인으로 먼저 상대가 음파를 쏘기 전에 제압해 죽이던가. 그렇지 못하고 상대가 음파를 쏘는 것을 허용했다면….]

[해독법을 찾아야겠군요.]

[의원다운 시점에서의 방법이군. 하긴, 내가 독으로 비유했으니…. 하지만 내 해법은 조금 다르다.]

나를 향해 덮쳐 오는 노을의 파도.

유화가 사용하는 저것은, 음공(音功)과 다를 바 없다.

아니, 사실상 음공을 수 단계나 진화시킨 진화판이라 할 수 있으리라.

어쩌면 내가 오늘 요선루에서 그녀의 음향을 처음 들었을 그 때부터.

나는 그녀의 독에.

그 '자고 싶다'라는 심상의 독에 걸려 있는 상태일지도 몰랐다.

'선발제인은 불가능해졌고, 그녀가 내게 불어넣은 것은 심상 그 자체이니 해독도 안 된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독을 네 것으로 만들어라. 전신의 기를 완벽히 조절하면, 체내의 파동 역시 지배할 수 있다. 상대와 대련하며, 끊임없이 기를 순환시키고 움직이며 파동 자체를 상대가 흘려넣은 것과 다르게 변질시켜 버려라!]

나는 내 몸과 연결된 무형검을 통해 사고를 가속시키기 시작했다.

점차 시간이 느려지고, 나는 가속한다.

콰앙, 콰앙, 콰앙!

월악으로 가로 베기.

직후 다시 가속한 상태로 측면으로 파고들어 유릉으로 찌르기.

전부 막힌다.

하지만 다시 가속한 후 위쪽에서 떨어져 내리며 용맥의 초식으로 내려 베기.

꾸구구궁!

내려 베기를 하며, 그녀의 노을빛 강물에 무형검이 다시금 막힌다.

저 강물에 닿으면 투과하고 말 것도 없이 힘 자체가 '무화'되기에 투과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피잇!

그녀의 뺨에 작은 상처가 났다.

무화되었을지언정, 어쨌든 그녀의 강물을 투과한 무형검이 유화의 얼굴에 상처를 낸 것이었다.

촤라락!

다음 순간 나를 향해 주홍빛이 파도처럼 덮쳐 왔기에 나는 뒤로 물러섰다.

졸리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이건 내 심상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자신의 답천을 통해 내게 은근슬쩍 불어넣은 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독을 내 것으로 만든다!

'졸린 게 아니라, 한계를 마주한 것이다.'

그리고 한계를 마주했다면.

한계를 넘어설 수도 있다!

붕, 붕, 붕붕붕!

점차 내가 무형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한 번 졸음을 견딜 때마다 한계가 찾아온다.'

유화 역시 금을 타며 내게 끊임없이 강물을 몰아쳐 왔다.

'하지만 한계를 마주하고, 졸음을 극복할 때마다 한계를 돌파하는 것이다.'

내 안의 심상이 변질되며, 졸음이 아닌 정신 도약으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졸음을 이겨 낼 때마다 나는 강해진다!'

진짜로 내 영력이 늘어난다거나 모르는 검법을 알게 된다거나 하진 않는다.

하지만, 본디 무(武)란 스스로를 어찌 정의 내리는가를 포함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성장하고 있는 게 맞다!'

연기기의 힘으로 힘을 제약하고 있으나, 점차 내 속도는 빨라져 갔다.

힘 그 자체를 더더욱 완벽하게 조절하고, 더더욱 힘의 묘용을 극대화할 방법을 찾는다.

단악검, 요산요악!

무형검의 검기가 마치 바둑판처럼 종횡하며 상대에게 쏘아져 나간다.

유화가 다시 금을 튕기자, 노을빛 파도가 굽이치며 무형검을 막아선다.

내 초식은 무화되는 듯했으나, 그게 끝이 아니다.

피싯, 피싯!

유화의 전신에 핏줄기가 스쳤다.

점차 그녀가 연주하는 '졸음'의 심상은 내 무형검에 먹혀들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졸음을 내 안에서 '성장의 기회'로 변질시켜 그녀와 싸우고 있었으니.

'이대로라면, 이긴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씨익….

"동 경지의 하현과 싸우는 건 오랜만이라… 역시 안되겠군요."

유화의 입에 진득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즐거움이었다.

나와 수를 주고받는 것이 너무나도 즐겁다는 감정!

"조금 더 거칠게 해도 되겠지요?"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꽁무니에서 무수한 백색의 거미줄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하반신에 달린 거미 다리들이 움직이며, 사방으로 거미줄을 엮어 마구 던진다.

곧이어 대기실 전체가 거미줄에 휩싸였다.

그리고.

투웅!

그녀가 거미 다리를 움직이며 거미줄 하나를 퉁겼을 때였다.

지이잉!

"…!!!"

대기실 곳곳에 그녀가 뿌린 거미줄들이 일제히 진동한다.

그리고 주변의 공간 전체에 노을빛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크윽…!'

내 심상 안에서 그녀의 심상을 변질시키려 해도, 계속해서 바깥에서 새로운 독이 스며든다.

'제길…!'

졸리다.

미칠 듯이 졸리다.

'눈앞이 희미하다.'

어느덧 나는 벌써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비몽사몽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육신은 지금껏 휘둘러왔던 대로 정직하게 무형검을 휘두른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내 눈앞의 대기실이 사라지고, 사방이 기묘한 심산유곡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꿈을 통해 내 정신을 제압하려는 건가.'

촤아아아!

심산유곡의 안개가 살아 있는 듯이 나를 덮쳐 왔다.

그와 동시에, 현실에서 강물이 나를 덮쳐 온다.

비몽사몽한 상태였으나, 나는 정신을 분할하여 심산유곡의 안개를 베어 버린 후.

반쯤 정신이 나가 버린 육신을 이용해 노을빛을 피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대대적인 반격이 이어졌다.

눈앞의 심산유곡은 어느새 바다가 되어 나를 에워쌌고, 파도가 나를 덮쳐 온다.

그런가 하면 어느새 뜨거운 사막 위에서 모래폭풍이 나를 집어삼켰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내 몸은 끊임없이 뛰어다니며 심상에서의 나와는 다르게 계속 다른 공격을 그녀에게 넣고 있었다.

정신이 분할된 채로, 각자 다른 환경에서 싸우는 것을 강제받는다.

'어마어마하군.'

상성만 잘 맞으면 천인기 수사와도 일대일로 붙어서 살해할 수 있을 법한 절기였다.

물론 암습이라면 상성이고 뭐고 없이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을 터였다.

현실의 시야와 꿈속의 시야를 병행하며, 나는 졸음을 참고서 계속해서 그녀와 공방을 주고받았다.

'주홍빛 강물은 그녀의 곡(曲)을 유형화시킨 심상.'

저 강물에 닿으면 내 '힘' 자체가 잠들어 버리며, 내 몸에는 졸음의 심상이 불어넣어져 결국 잠들게 된다.

겨우겨우 심상을 변질시켜 꿈과 현실을 병행하고는 있다지만, 정통으로 맞으면 그대로 기절해 버릴 게 뻔했다.

'강물 자체로 물리력을 가지고 있으며, 힘 자체는 강하지 않지만 닿으면 잠들어 버리는 저 무시무시함…. 그리고 사방에 자신의 금과 같은 거미줄을 깔아 놓아서 어디서든 곡이 연주될 수 있게 했으니….'

대기실 전체가 주홍빛으로 가득 찬 상황이었다.

나는 주홍빛의 틈새를 겨우겨우 찾아 숨어들어 그녀의 틈을 노려야 했으며, 그녀는 사방에서 내게 폭격을 퍼붓는 형국이었다.

'즐겁군.'

그러나, 그녀가 내쏘는 주홍빛은 하나하나가 서로의 의념과 심상을 읽어 내며 최적의 경로로 내쏘는 빛살이었다.

내 무형검도 마찬가지였고, 나는 그녀와 합을 주고받으며 점차 신이 나는 걸 느꼈다.

우리의 공방이 격화된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서도 황금빛 의념을 느낄 수 있었다.

즐겁다.

재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꿈의 세계에서, 어느덧 주홍빛 강물이 가득 찬 세계로 진입하였다.

'이곳은….'

촤르륵….

강물에 발을 담글 때마다 어마어마한 피로가 내 정신을 덮쳐 왔다.

―피곤하다.

―쉬고 싶어….

―제발, 조금이라도….

'이건….'

같은 답천경끼리 부딪치면, 의념을 교류하다 못해 서로의 심상을 공유하게 되는 모양.

나는 유화의 심상을 헤쳐 나가며 그녀의 피로를 느꼈다.

피곤함.

그것이 곧 그녀가 도달한 깨달음의 본질이었다.

'이건….'

그리고, 답천의 시야뿐만이 아닌 지족의 시야를 가진 내게.

이 심상 속에 있는 음양의 흐름이 회전하며 나에게 얼핏 어떠한 장면들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유화의 삶이었다.

그녀는 반인지주(半人蜘蛛)라는 종족으로 태어났다.

그녀의 종족은 거미줄을 뿜어, 거미줄을 튕겨서 좋은 소리를 만드는 종족으로 유명했다.

물론 그 외에 가진 능력은 아무것도 없었고, 선천적으로 영력의 격렬한 흐름을 버티지 못해 요수공법도 익힐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종족은 노예 종족으로 취급받으며 광한계 곳곳으로 팔려 나갔다.

유화는 이곳저곳으로 팔려다니며 금을 연주하는 법을 배우고, 잠시도 쉴 틈 없이 금을 연주해야 했다.

그녀의 금 타는 솜씨는 정말 좋았고, 그녀를 소유한 주인은 그녀를 데리고 공연을 시키면 공연 시간만큼이 곧 부(富)였으니.

절대로 그녀를 쉬게 하지 않았다.

피곤하면 피로를 없애 버리는 영액을 주고, 게으름을 피우면 갈아서 단약으로 만들겠다고 협박하며 쉴 새 없이 공연하기를 5년.

유화는 점차 미쳐 가기 시작했다.

피로하지 않다고 하여 누가 쉴 새 없이 금을 타며 끊임없이 재능을 뽑아낼 수 있겠는가.

―자고 싶다.

간혹 다른 공연장으로 이동하며 기절하듯이 쪽잠을 자는 게 아닌, 제대로 푹 자고 싶었다.

바라고, 바라고, 또 바랐다.

그녀가 바라던 휴식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연 중에 졸기라도 하면 즉시 주인이 그녀를 갈아서 단약으로 만들 테였다.

피로를 강제로 없애는 영액을 주입하다시피 넣고 있으니, 피곤하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잠을 안 자기를 몇 년째.

그녀는 이제는 잠을 자지 않으면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방안을 찾았다.

그리고 그녀가 찾은 방안이란 바로 '다른 것'에 미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연주에 몰두했다.

잠을 자고 싶다는 광기를 모조리 금을 타는 것에 쏟아부었다.

그녀의 연주 실력은 어느덧 같은 반인지주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일 정도로 성장했다.

더더욱 완벽한 연주를, 더더욱 완벽한 음색을 갈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음(音)에 기(氣)를 싣는 법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어느 날.

그녀는 음(音)을 연주하며, 음에 감정의 색(色)이 보이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부터 그녀는 그녀의 연주를 들으러 온 손님들의 의념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또다시 어느 날, 그녀는 어느 순간 무수한 감정의 색이 하나로 통합되며 하나의 의식 영역을 형성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연주가 어떠한 방향성을 띄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 방향성에 도달하기 위해 계속해서, 손과 발에서 피가 나도록 금을 연습했다.

그리고 마침내.

금(琴)의 연주가 완벽에 완벽을 더하여 마침내 극의(極意)에 달한 날.

그녀는 자신에게 있는 기본적인 기(氣)와 금을 타며 흘러나오는 의(意)를 합일하여, 그녀가 수년 동안 갈구하고 또 갈구해 온 것을 얻는 데에 성공했다.

자고 싶다.

평생에 한 번도 제대로 얻지 못한 '휴식'을 구현해 낸 그녀의 연주는 그 날 그녀를 찾았던 모든 손님과, 그녀의 주인.

그녀 자신까지 모두 잠재우는 데에 성공했다.

그녀는 잠든 상태에서도 연주를 하며, 그동안 자신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던 악독한 결단경의 주인을 죽여 버렸다.

그렇게 그녀는 심족(心族)으로 각성하였고.

추후에 심족 영역으로 도망쳐, 심족들과 합류하였다.

그것이, 그녀의 이야기였다.

콰아아앙!

번뜩!

나는 눈을 떴다.

내 무형검은 어느새 유화의 목 끝에 닿아 있었고, 그녀의 금은 두 쪽으로 박살이 나 있는 상태였다.

"파란만장한 생을 살아왔군."

나는 이제야 왜 그녀가 내 대련에 응했는지 알 수 있었다.

심족은 동 경지의 같은 심족과 대련하면, 상대의 심상과 그 심상에 녹아 있는 상대의 본질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녀는 나에게 백녕과 만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과연 거짓말을 한 것인지 알아보려 대련을 청했던 것이리라.

'대련을 받을지 말지 떠본 게 아니라, 나를 봤을 때부터 대련을 하는 건 예정되어 있었다는 거군.'

상당히 발칙한 여자다.

내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하자,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귀하야말로, 저에게 뒤지지 않는 삶을 사신 것 같군요. 당신의 심상에 들어가서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답니다."

"아무래도 내 심상이 조금 쉽지 않지."

그랬다.

내가 그녀의 꿈과 심상에서 빠져나와 그녀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역시 내 심상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내 도산지옥에 입장하여 전신이 꿰이는 경험을 했으니 그녀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던 것이리라.

"그나저나 신기하군."

나는 눈을 감고 있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그냥 눈을 감고 있는 건가 했지만, 그녀의 심상과 기억을 얼핏 읽으며 확실해졌다.

"그냥 눈을 감은 게 아니라, 여지껏 계속 자고 있는 거였나?"

그랬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는 게 아니라, 계속 자고 있는 것뿐이었다.

입천에 들어간 그 날부터,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잠에서 일어난 적이 없다.

계속 잠을 자며, 자신의 꿈 속에서 자신의 육신을 통제하여 움직이는 신기한 존재인 것이었다.

"어머, 숙면은 정말 중요한 것이랍니다. 어린 시절에 한 번도 잔 적이 없다면 보상을 받기 위해서라도 계속 자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됐다."

도대체 어떻게 잠을 자면서 꿈속에서 자기 몸을 통제한다는 짓거리가 가능한 것일까….

"그나저나… 귀하께서는 제 기억을 읽으셨나 보군요? 지족의 끈적한 시야가 제 머릿속을 훑는 느낌이 들었는데…."

"미안하게 됐군. 시야는 내가 어찌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

"뭐, 괜찮습니다. 당신의 심상은 광인의 것이긴 해도, 당신 자체는 악인이 아니란 것은 확연히 느꼈으니까요. 당신의 투명한 하현(下弦)만 해도 말이지요."

"하현이란 건… 뭐지?"

"구현을 뜻하지요. 심족들이야 서로 만나면 그래도 어느 정도의 통일성을 위해 모두 구현 1, 2, 3단계 등이라고 칭하지만…. 솔직히 모든 심족은 모두 각기 다른 단어로 '구현'을 칭한답니다. 저는 '하현'이라고 부르는 편이지요."

'그렇군….'

내 '답천'과도 같은 느낌이리라.

그때였다.

그녀가 눈을 감은 채로 내게 물어왔다.

"그래서 어떠셨나요, 저라는 존재에 대한 평가는?"

"아…."

그랬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번에 심족과 지족의 시야를 동시에 사용하며, 한 가지를 새로 발견하게 되었다.

상대의 심상을 읽는 답천의 시야.

그리고 영기의 궤적을 읽는 지족의 시야.

두 시야가 합쳐지자, 마치 원영기에 이를 때에 음양의 궤적을 통해 내 인생의 주마등을 보았던 것과 같이.

타인의 생을 아주 짧게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생스러운 삶이었군."

나는 유화를 보며 말을 이었다.

"고생 끝에 염원하던 것을 넣었으니, 축하해야 할 삶이기도 하고."

내 말에 그녀는 활짝 웃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나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역시 귀하가 어떤 분인지 본질을 잠시 접하였으니… 이번 제 임무가 끝나고 나서,

원하신다면 심족 영역으로 가 정식으로 심족(心族)의 일원으로 삼아 드리겠습니다."

배신 (3)

"…하!"

나는 순간 그녀의 말을 듣고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이제 딱 두 번 만난 자를 자신의 집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너무 조심성이 없는 게 아닌가.

"어머나, 귀하께서 제 입장이시라면 어쩌실 건가요?"

"그야…."

"똑같은 심족을 만나 한판 붙어 보신다면 알 수 있는 게 아닌가요?"

"…."

웃기는 소리지만,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긴 했다.

심족끼리 한번 서로의 기예를 겨루어 보면 서로의 본질을 읽을 수 있다.

물론 내 경우야 지족의 시야까지 합해져, 순간 과거까지 읽어 내기까지 했고,

유화는 내 심상을 접해 내가 어떤 존재인지만 그럭저럭 알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쉽사리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본질을 접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우리는 충분히 서로에 대해 알아 버린 것이었다.

"…뭐. 무슨 느낌인진 알겠군."

"후후, 귀하께서도 올곧은 분이신 건 알았으니, 약속은 지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지키지. 서휼이 차후에 해룡궁을 떠나면 반드시 자리를 주선해 보마."

"감사드리지요."

촤락, 촤라락!

그녀는 이리저리 뱉었던 거미줄을 다시 회수하고, 어질러진 대기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완벽히 그녀의 과거를 읽은 것은 아니다.'

원영기 때에 느꼈던 그 눈 깜짝할 만한 사이에 스쳐 지나가는 주마등을 살짝 읽었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입천에 달한 경위는 대강 이해할 수 있었지만.

달리 말하자면 그녀가 입천에 달한 경위를 읽는 게 고작이었다는 것이었다.

기억의 편린 몇 조각을 읽는 것이 정말로 끝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상대가 살아오며 격한 감정을 느꼈던 순간을 읽는 건 분명 가능하다.'

그렇다면.

나는 위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이 시야로 서휼을 바라보면 서휼의 과거도 알 수 있을까.'

* * *

덜컹.

나와 유화는 지하 3층 대기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지하 2층으로 올라가니, 그곳에서 유화의 동료 악사들이 있는 것이 보였다.

혹시나 싶어 그들의 심상도 읽어 보았으나, 홍합 요족을 제외하면 그들은 그냥 평범한 노예종족인 듯싶었다.

"아, 유화 왔구나."

"네. 후, 덥네요."

그녀가 땀을 훔치며 2층으로 들어서자, 어쩐지 그녀의 동료들의 눈빛이 이상해졌다.

그들은 나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고, 우리 둘이 모두 땀을 흘리는 것을 보자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서로 이상한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 왜 저러는 거지….'

나는 의아해하며 그들을 바라보다 다시 요선루로 올라가기로 했다.

"오늘은 좋았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만나기로 하지."

"예, 저 역시 고대하겠습니다."

나는 언젠가 유화와 다시 대련을 하게 될 날을 기대하며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 역시 거미의 형태인 하반신을 굽히며 내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어쩐지 그녀의 동료 악사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수군거림이 들려왔지만 나는 신경을 끄고 다른 것에 생각을 집중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일단 기억을 보는 시야는, 그녀와의 격렬한 대련 중에 잠시 보았던 것.'

그리고 그녀는 같은 심족이었고, 답천경 이상의 심족끼리는 대련할 때 서로의 심상이 얽힌다.

그런 현상 덕에 내가 그녀의 기억 몇 조각을 읽었던 것이었다.

'만약 심족이 아닌 이의 심상에 진입하여 그 속내와 기억을 보려면 어찌해야 하지?'

일단 첫 번째로 떠오른 것은 의해은산이었다.

의해은산으로 서휼의 머리통을 내리꽂으면 내 원영이 그 녀석의 의식 안쪽으로 직접 들어가서 심상을 엿보며 기억을 엿보는 게 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 계획은 기각시켰다.

'내 영혼이 썩어 버릴지도.'

의해은산도 어느 정도는 감당이 가능한 상대에게 써야지, 서휼 같은 녀석의 심상에 내 원영을 담근다면 농담이 아니라 원영이 부식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의해은산은… 생각하지 말자.'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없을까.

나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도중, 기묘성심전에 생각이 닿았다.

'음, 어쩌면 기묘성심전이라면….'

기묘성심전으로 나와 서휼의 의식을 잠시 잇고, 그 사이에 심상을 통해 기억을 엿보는 것은 어떠한가.

'그것도 의식이 썩어 버릴 듯하겠지만, 의해은산보다는 조금 더 낫겠군.'

어쩌면 괴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조금 더 제대로 된 서휼의 정보 탐색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괴군과 손을 잡고 서휼을 납치해서 서 대군으로 개조해 버린 후, 괴뢰에 갇혀 있을 서휼의 의식을 조사하면….'

그러나 이건 너무 서휼 같은 방법이라 기각했다.

거기에 괴군을 도와 서휼을 납치하자고 하면, 괴군은 일단 나부터 대뜸 개조하려 할 터였다.

'말이 안 통하는 상대니 상식을 기대하면 안 된다.'

저벅, 저벅….

어느덧 요선루 1층에 다시 올라온 나는, 4층에서 있을 서휼과 규련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이 주루에는 사축기 수사의 의식도 제어하는 금제가 펼쳐져 있지.'

물론 사축기 수사쯤 되면 의식이 금제 당하는 것이 아니라, 공연 관람을 위해 금제를 '당해 주는' 것이고, 언제라도 풀어헤칠 수 있었지만.

분명 어쨌든 그들의 의식은 분명하게 금제당한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서휼이 규련과 함께 있으면서 가장 큰 틈을 드러내고 있는 순간일 수도 있겠어.'

그렇다면, 일단 오늘 깨달은 이 시야를 한 번은 시도해 보자.

만약 심상과 섞이지 않고, 외부에서 심상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기억의 조각을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한 이득일 테니.

'일단 공연이 다시 시작되길 기다리지.'

지금도 주루 안쪽의 의식들은 조금은 제약당하고 있었으나, 공연 도중만큼 제약당하진 않았다.

나는 일단 때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얼마 후.

다시금 주루의 불이 꺼졌고, 유화와 악사들이 다시금 올라와서 연주를 준비했으며, 모두의 의식이 다시 제약당했다.

일반적인 수사들은 의식이 제약당한다면, 감각이 제약당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제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본래 의식 영역을 가지지 않던 범인 시절부터 잘 살아왔던 것이 나였다.

'어디….'

슈칵!

나는 월수궁무록을 사용하며, 어둠 속에서 수많은 이들의 인지의 틈새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지족의 시야와 원영의 시야로, 기의 흐름 자체를 베어 버려 누구도 찾을 수 없게 몸을 숨겼다.

'그리고, 내 생명의 흐름 역시 감춘다.'

지족의 경지로 원영에 도달하고 난 후 깨달은 게 있다면, '생명'에 대한 깨달음이 그것이었다.

'사축기는 생명의 깨달음을 얻은 이들….'

내 생명의 흐름도 베어 내어, 일순간 생명의 깨달음을 얻어낸 이들에게 들키지 않게 한다…!

슈칵!

마지막으로 나 자신을 베어 내어 완전히 인식과 영기, 생명의 흐름 그 틈새에 숨어든 나는 4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혹시나 싶어 귀식대법까지 사용한 나는 소리를 죽이고 4층에 올라섰다.

우웅!

비록 억제당했다지만, 서휼과 규련의 의식은 4층 전체를 거의 꽉 채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물론 본래 그 둘의 의식 크기를 생각하면 그 역시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억제당한 것이었으나, 나는 긴장을 곤두세우며, 그 둘의 의식 틈새를 베어 내며 겨우겨우 안쪽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나 신경을 세우며 그들에게 다가갔을까.

"…?"

나는 규련과 서휼이 앉아서 악사들의 연주를 듣는 게 아닌 선 채로 서로 말다툼을 하는 것을 보았다.

'…?'

무슨 일이지?

규련이 방음 법술을 펼쳐 놓고, 4층 전체가 어두운지라 왜 싸우는지는 몰랐으나, 분명 규련은 서휼에게 강력한 질투심과 안타까움.

그리고 집착심과 연심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서휼은 겉으로는 쩔쩔매는 것 같았지만 역시나 속으로는 아무 감정이 없었다.

그때였다.

우웅!

어두운 4층 안쪽.

규련이 연분홍빛이 도는 기이한 법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결인을 맺자, 무언가 형이상학적인 변화가 주변으로 일어나는 게 느껴졌다.

그러자 그동안 잠잠하던 서휼의 심상이 조금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서휼이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호오….'

규련은 울분과 질투심, 그리고 연심으로 가득 찬 채 서휼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서휼의 얼굴을 그대로 자신에게 끌어당긴 후 서휼에게 입을 맞췄다.

규련에게 기습 입맞춤을 당한 서휼은 당황하는 듯했으나, 이내 감정을 가라앉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하지만 잘 됐다.

서휼이 조금이라도 당황한 지금이라면, 어쩌면 그의 심상을 파고들어 그의 기억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였다.

"…!"

규련이 서휼에게 입을 맞추자, 그 둘에게서 무언가 형이상학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듯하며,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나 역시 그 변화에 무언가 엮이는 듯했다.

'이게 무슨…!'

그때였다.

우우웅!

규련이 서휼에게서 입을 떼고, 방음 법술을 해제한 채 이쪽을 쳐다보았다.

"웬 놈이냐! 누가 훔쳐보고 있는 것이야!?"

'이런…!'

월수궁무록의 문제라기보단, 규련이 펼친 법술을 제삼자가 '보는' 것 때문에 걸린 듯했다.

나는 황급히 4층에서 내려갔고, 규련의 노호성이 뒤쪽에서 울렸다.

"어떤 놈이 감히…!"

쿠구구구!

억제당해 있던 그녀의 의식이 금제들을 박살 내며 사방으로 팽창한다.

하지만, 아슬아슬하다!

파앗!

나는 그녀의 의식이 나를 찾아내기 전에 그녀의 의식 영역에서 벗어나 요선루 1층, 내 원래 자리에 도착하는 데에 성공했다.

'휴우….'

내가 자리에 앉아 신체 반응을 정상화시키고, 백홍주를 홀짝인 직후.

규련의 의식이 요선루 전체를 마구 훑었다.

'뭔가 서휼에게 법술을 사용했다.'

그리고, 규련의 행태에 그 서휼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상황으로 보아, 입맞춤으로 성립하는 주술의 일종인 것 같은데….'

결혼을 강제하는 주술이라도 쓴 건가?

나는 서휼이 당황하는 모습을 떠올리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규 선배께서 그래도 서휼에게 한 방 먹였군.'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규련이 서휼에게 강제로 그 주술을 사용하기 이전엔, 둘의 사이가 뭔가 틀어지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규련은 뭔가 억울함과 질투심, 집착심과 연심이 들끓어 오르는 모습이었다.

아니, 지금도였다.

쿠구구구구!

그녀의 의식 영역이 인근을 샅샅이 훑고 있었고, 나는 그녀의 의식 영역 전체에 실린 짜증과 질투심, 연심을 관찰할 수 있었다.

아닌 척 연주를 이어 가던 유화 역시 규련의 질투심을 본 것인지, 순간 흠칫하며 연주에 흠을 낼 뻔했다.

물론 일류 악사답게 바로 마음을 진정시키며 금을 계속 뜯어 갔지만.

'…재밌는 일이 많이 벌어지는군. 오늘 저녁은….'

나는 백홍주를 전부 들이키며 유화의 공연을 편안하게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요선루에서의 일정과, 서휼의 송별회가 끝났다.

이제 서휼은 해룡궁으로 돌아가서 출발 준비를 할 차례.

해룡궁 일행과 규련이 요선루 앞에서 인사를 마치고 헤어지려 할 때였다.

"서은현, 너는 잠시 남거라."

"예?"

규련이 갑자기 나를 불러세웠다.

서휼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나와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잠시 이 녀석에게 할 말이 있어 그러니, 서 대군은 먼저 가시오."

"예, 알겠습니다."

서휼은 부끄러운 듯 그녀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헛기침을 하며 빠르게 요선루에서 날아갔다.

'소름 끼치는 연기력이군.'

나는 서휼의 심상과 그의 태도를 비교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때였다.

"너였느냐, 서은현?"

"예?"

"우리를 훔쳐본 것 말이다."

"…."

규련이 냉랭한 표정으로 내게 물어 왔다.

나는 한동안 입을 다물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규련이 쓴 주술의 변화에 내가 끌려들었다.'

어쩌면 규련은 그 변화를 찾아내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만큼 발뺌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리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규련은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디부터 봤지?"

"…규 선배님께서, 대군께 그… 입을…."

"그래, 알겠다. 후우…."

그녀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왜 우리를 엿본 거지?"

"실례했습니다. 다만 대군께 보고드려야 할 일이 있었는지라…."

"그래, 뭐. 서 대군이 맡고 있는 일이 많으니 이해하겠다. 뭐… 오히려 너라서 다행일 수도 있겠지."

그녀는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나는, 광한가약(廣寒佳約), 혹은 광한지약이라고도 불리는 고대 주술을 사용했다."

규련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아주 아주 아주 먼 옛적. 백홍주를 이용한 혼례의 예식이 없던 시절, 정말로 상상하기조차 힘든 까마득한 그 시절에는 광한지약을 통해 서로가 혼인을 증명했지."

그러나 그녀는 그토록 바라던 서휼과 맺어지는 주술을 사용했음에도 어쩐지 조금 씁쓸한 표정이었다.

"축하… 드립니다. 규 선배님께선 서 대군과 맺어지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뭐… 그이와 맺어지고 싶어 했지. 이런 식으로 억지로가 아니라,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자연스럽게 하고 싶었거늘…."

나는 그녀의 의념을 읽으며 그녀가 원하는 질문을 해 주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규련은 지금 누군가에게 답답한 속내를 풀어놓고 싶어 했다.

"…지난번에, 서휼이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누구입니까?"

"백의를 입은 인족 여성이었지. 그녀와 서휼이 손을 잡고 봉명주의 거리를 거니는 것을 봤어. 둘은… 너무나 행복하다는 듯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

"한 번이면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서휼을 몇 번이고 미행해 본 바… 둘은 주기적으로 만나서, 더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는 듯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휼과 같이 다닌다는 인족 여성의 이야기에 흠칫 놀랐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를 사랑한다고 했으면서… 나와 함께하고 싶다고 했으면서…! 왜 다른 여자와, 그것도 인족과 함께 있는 거냔 말이다…!!"

그녀가 울분을 토하며 말을 이었다.

"이번 기회에 그녀가 누구냐고 물었다. 서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나는 알 수 있었어. 서휼은 나 말고 그녀를 더더욱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어! 아니, 설령 인족 첩을 들이고 싶다면 이해를 한다. 하지만 나한테 상의는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

"그래서… 이번에 광한지약을 서휼과 억지로 맺어 버렸다. 서휼은 내 것이라고, 그렇게 세계에 대고 맹세하고 싶었다."

그녀는 갑자기 자괴감이 든 듯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한숨을 쉬었다.

"그… 그 여자만 없었으면, 이렇게 다급하게 그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어. 내가,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느냐…?"

"…제가 서 대군을 잘 압니다만."

나는 그녀에게, 서휼과 거리를 두라고 충고를 해 주기 위해 말을 꺼냈다.

"서 대군의 여성 편력은 굉장히 심한 편입니다. 아시겠지만 해룡궁의 인사 중 몇몇은 서 대군의 자손이기도 하니까요. 하계에서부터 무수한 처첩을 축첩해 온 자가 서휼 대군이십니다."

"…그런가."

"예… 그러니 서 대군에 대한 기대는 안 하는 것이 어쩌면…."

"뭐… 좋다."

내 말을 들은 그녀의 황금빛 눈이 노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황금빛 뿔과 함께 불타오르는 그녀의 황금안이 세로로 찢어졌다.

"그렇다면, 서휼이 기축수행을 다녀올 동안, 합체기에 반드시 도달하겠다."

"…?"

"합체기 요왕이 되어서, 내가 서휼을 거두겠다. 하면 감히 더 이상 축첩을 할 엄두를 못 내겠지."

"…."

나는 그녀에게 뭐라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하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어쩌면 잘된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규련은 사축기 대원만의 수행을 가지고 있다.'

꾸준히 수행을 이어 가면 합체기 용왕이 되는 것이 예정된 용.

그것이 황룡 일족의 규련이었다.

'규련이 서휼을 남편으로 맞아들이고, 서휼보다 높은 수행으로 의부증이 걸려 서휼에게 집착하면서 그를 계속 의심해 댄다면….'

어쩌면 서휼의 행동 반경이 확 줄어들 수도 있다.

'계산적인 속셈으로 응원해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응원해 드리겠습니다. 저도 사실 대군께서 여성 편력을 즐기시는 걸 마음에 안 들어 했습니다."

"응원해 주어 고맙구나."

"그리고 아마 규 선배께서 보셨다는 인족 여성 말입니다만…."

"그래, 그 마음에 안 드는 여자?"

"예, 그 여인은 본래 서 대군께서 저와 함께하게 해 주실 예정이었던 여인입니다. 다만 서 대군께서 데리고 다시니는 거지요. 하여 만약 규 선배님께서 경지를 이루시고 서 대군님과 혼약을 이루신다면, 그 여인은 제게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서 대군님이 다른 여성을 만나는 것도 신경 쓰이실 테니 말입니다."

"그래, 그것도 좋겠군."

물론 서휼이 함께 다닌다는 인족 여인.

오혜서일 확률이 높을 그녀가 나와 '함께할 예정'이었다는 뜻은 중의적인 의미였다.

혼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이 세계에 떨어지지만 않았다면 동료로서 계속 함께했을 테니까.

'어찌 되었든, 규련을 통해서라도 할 수 있다면 오혜서와 서휼을 떨어뜨려 놓아야 해.'

규련은 둘이 행복하게 거리를 거닐고 있는 모습을 봤다고 했지만, 나는 솔직히 그녀가 서휼에게 무슨 짓을 당하는 중인지 몰랐기 때문에 불안할 뿐이었다.

"흠흠!"

그녀는 갑자기 머리를 부르르 떨더니 입에서 희미한 기운을 내뿜었다.

'아….'

취기였다.

아무래도 선주를 마시고 조금 취했던 모양이었다.

"…추한 꼴을 보여 주어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규 선배님과 서 대군님의 사이를 응원하는 것은 진심입니다."

"그래, 고맙구나. …술에 취해 조금 이상한 것들만 떠들었다만… 사실 내가 할 말은 따로 있다."

"말씀하십시오."

"내가 서휼에게 건 광한지약은, 본래라면 아주 많은 이들이 보는 곳에서 맺거나, 혹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맺어야 하는 주술이다."

"…혹시 저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긴 겁니까?"

"아니, 큰 문제는 없다. 광한지약을 맺을 때 보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자를 '증인'으로 삼아 우리의 혼약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아…."

"한 마디로, 너는 본녀와 서휼의 유일한 혼약의 증인인 셈이다. 하지만 오늘 맺은 광한지약은 제대로 된 지약이 아닌, 본녀가 술에 취하고 울분과 질투심에 휩싸여 서휼에게 강제로 건 것에 불과하니…."

그녀가 조금 부끄러운 듯이 머리카락을 손으로 꼬며 내게 물어왔다.

"추후에, 본녀가 합체기 요왕이 된 후. 제대로 서휼과 혼인식을 치르면, 광한지약의 유일한 증인인 네가 우리 혼약의 진행을 봐 줄 수 있느냐?"

'그래서 나를 바로 알아챈 건가.'

나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어쨌든, 규련의 제안은 내게 하나도 나쁠 것이 없었다.

"예. 두 분의 광한지약이 제대로 이뤄지는 그 날에는 반드시… 두 분의 지약을 진행해 드리겠습니다."

"고맙다."

규련은 활짝 웃으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서휼을 어찌 상대해야 할지 조금은 해법이 보이는 것 같군.'

그동안 온갖 음흉한 수를 꾸미는 그에게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지, 어떻게 서휼을 따라갈 수 있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하지만 오늘 규련의 속내를 듣고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서휼을 결혼시킨다!'

집착이 강한 규련이 합체기 요왕이 된 후, 서휼과 결혼하면 서휼은 몇백 년 동안은 그녀에게 잡혀 살며 행동 반경이 좁아질 터였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이번에 결심한 목적들을 이룰 확률은 매우 높아질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면 천뢰번은 새신랑인 서휼의 입에 꽂는 게 아닌, 흑룡왕 현음의 입에 꽂아야겠지만.

'서휼이 나가 있는 동안, 서휼이 돌아오면 서휼이 규련과 결혼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짜 놓자!'

나는 이번 생의 목표들을 수정하며 각오를 다졌다.

작가의 말: 악역 영애 규련과 편 먹고 로판 남주를 강제 결혼시킨 후 여주를 차지하려는 사악한 흑막 서은현….

배신 (4)

다음 날.

나는 해룡궁의 앞에서, 타 계면으로 향하기 위해 본체로 변해 날아가는 서휼을 배웅하였다.

[그럼 내 다녀오겠네. 부디 모두 해룡궁을 잘 부탁한다네.]

파아앗!

직후, 서휼은 먹장구름을 타고 빠르게 저 멀리 날아갔다.

'됐다….'

나는, 그제야 숨을 몰아쉬며 미소를 지었다.

서휼이, 드디어 갔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니 그제야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지난 7년은 그야말로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든 나날들이었었다.

'이제야 숨을 쉴 틈이 생겼다.'

물론 숨 쉴 틈이 생겼다고 해서 진짜로 멍청하게 숨만 쉬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나에겐 수작을 못 부려 놨다지만, 해룡궁에는 무슨 수작을 부려 놨을지 모른다.'

해룡궁이 아니라 해룡족들은 물론이고 인근의 수저 요족들 역시 전부 요주의 대상이었다.

서휼의 영향권이 미치는 모든 곳의 모든 존재들을 믿어선 안 된다.

"대군께오서 가시며, 흑룡 선수 진혈자이신 서은현 님께 대군의 진혈을 남기시며 관작을 하사하라 명하셨습니다."

서휼이 가고 나자, 해룡궁의 원로들이 나를 불러세웠다.

"이제 진혈자께서는 대군과 선수의 진혈을 둘 다 물려받으셨으며, 원영기 장로가 되셨으니 관례대로 대서장(大庶長)의 관작을 부여하겠습니다. 이는 대군(大君)의 명이시니, 거부는 불가하옵니다."

"서 대군의 영지(令旨)를 받잡사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서장."

나는 서휼의 명에 따라, 해룡궁의 관작을 받았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서휼이 남기고 간 족쇄는 고작해야 그의 피 따위가 아니었다.

"대서장께오선 귀한 몸이시오니, 앞으로 해룡궁 전사들이 상시 호위를 맡을 것입니다."

원영기 해룡족 전사 10명이 내게 하루 종일 붙어서 나를 상시 감시한다.

"또한 대서장께서는 대군이 내리신 관작을 받으셨으니, 대군이 남기시고 간 영지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무슨 임무입니까?"

"주로 해룡궁의 내정과, 또한 몇 가지 제의(祭儀) 때에 나서 주시어 제의를 도와주시면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하지요?"

"우선 제의를 도울 때 쓰일 공법을 드릴 터이니, 공법을 익히시고 공법 흐름에 따라 제를 지내시면 됩니다."

"…."

이제는 서휼이 아닌, 해룡궁 원로들이 들이대는 공법서들을 익혀야 했다.

"참, 해룡궁의 해서제가 앞으로 한 달이니, 한 달 안에 빨리, 앞서 드린 해월진룡변을 익혀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서휼은 그뿐이 아닌, 온갖 사회적 제약을 내게 걸어 놓아 그가 없는 틈에도 내가 해룡궁 바깥으로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게 해 놓았다.

'지독하군.'

하지만, 우습다.

키이잉―

나는 해룡궁에 깔아 놓은 괴군의 회로를 만지작거렸다.

괴군의 회로란, 단순히 서 장군을 만드는 회로를 뜻하는 게 아니었다.

기묘성채 전역에 깔려, 그의 기묘성심전과 연동되던 회로가 괴군의 회로였다.

한마디로, 기묘성채 곳곳에서 운용되던 모든 괴뢰의 기술이 총집합된 것이 내가 다루는 괴군의 회로인 것이었다.

괴군의 회로가 깔린 이상.

이 해룡궁은 나만의 괴뢰나 다름없었다.

'물론 진짜 괴뢰로 쓰려면 한참 개조를 더 해야겠지만, 일단은 해룡궁의 금제나 결계, 혹은 곳곳에 걸린 법술을 장악한 것에 만족하지.'

괴군의 회로의 가장 큰 효용은, 상대의 '법기나 법보'를 '괴군의 꼭두각시'로 강제로 개조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괴뢰나 다름없어진 해룡궁 전체의 금제를 자유자재로 조작하며, 다른 해룡궁의 원로들 몰래 누군가에게 전음부를 발송하였다.

'한 달 뒤에 제의를 지낸다고?'

아마 그것 말고도 서휼이 나를 위해 준비해 놓은 제약은 한두 개가 아닐 터다.

하지만, 녀석이 무슨 제의를 준비해 놓았든 전부 소용없어질 터다.

왜냐하면, 당장 한 달이 아니라 며칠 후면 해룡궁은 난장판이 될 테니까.

* * *

내가 전음부를 보내고 사흘 후.

나는 월수궁무록을 써서 내게 붙은 감시 10명을 따돌리고 해룡궁의 모처에 도착했다.

"간만에 다시 뵙습니다."

"간만은 무슨. 고작 며칠 만이 아닌가."

나는 내 도움을 통해, 해룡궁의 금제를 그냥 전부 통과하다시피 들어온 유화를 반겨 주었다.

"그나저나, 이 시간이면 한창 요선루가 활발할 시간인데 그냥 와도 되는 건가?"

"뭐… 귀하를 만나러 간다 하니 동료들이 선뜻 보내 준 것도 있긴 합니다."

"…? 날 만나는 데 왜 보내 주는 거지? 혹시 뭔가 알아챈 건가?"

"흠…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다만 저희가 심족인 걸 알아챈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힘내라면서 오히려 응원해 준 것이… 음. 아무래도 귀하께서 지난번 영석을 듬뿍 기부해 주셔서인지도 모르겠군요. 어쩌면 후원금을 더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닐까요?"

"아, 그래서였나 보군."

"뭐,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어차피 제 본직은 요선루의 악사가 아닌 심족 첩보공작원이니까요."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하였다.

"그럼, 이제 백녕에게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지."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지만, 나는 해룡궁의 금제를 통제해 주고 자네가 나갈 수 있도록 돕겠네. 하나 백녕을 데려가는 것은 순수하게 자네의 몫이야."

"예, 당연한 말씀이지요."

나는 그녀를 데리고, 해룡족 원로들에게 들키지 않게 백녕과 그의 백염족이 지내는 해룡궁 옆, 산호초가 펼쳐진 마을로 향했다.

백녕과 백염족은 해룡궁 옆. 산호초로 이뤄진 마을 안에서 지내고 있었다.

산호초들은 수중에서 결계의 축이 되어 마을 전체에 커다란 공기 방울을 씌워 주고 있었고, 백염족 대다수는 그곳에서 값비싼 산호를 몸에 치장하고 생활하고 있었다.

그 사치스럽고 평화로운 모습에 유화는 흠칫 놀라는 듯했다.

"이게 무슨…."

"…현재 백녕과 그의 백염족은 서휼이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잘 지내고 있는… 중이지."

유화는 당황한 듯이 사치스럽고 부유한 백염족을.

그리고 백염족 마을 곳곳에서 노예로 부려지는 다른 노예 종족들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백녕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저기 가장 호화로운 장원이 백녕의 것일세."

나는 산호 마을 안쪽.

거대한 장원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녀는 잠시 얼이 빠진 모습을 하고 있다가, 들고 온 금을 튕겼다.

우웅!

그녀의 주변으로 주홍빛 강물이 휘몰아쳤다.

얼마 후, 그녀는 노을빛과 완전히 동화(同化)되어서 노을빛 그 자체로 화하였다.

아무래도 내 답천처럼 자신의 곡 그 자체와 동화되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노을빛 강물로 변한 그녀는 너울거리며 백녕의 장원으로 빠르게 잠입하였다.

나 역시 그녀를 따라 백녕의 장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와 유화를 맞이한 것은 전신에 푸른 갑주를 입고, 용의 비늘로 만든 용린편을 든 채 장원에 서 있던 백녕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유화 님. 그리고 대서장님."

그가 목에 차고 있던 목줄에서 음양의 흐름이 흘러나오며, 자연스레 요족어가 되었다.

아무래도 그의 말을 요족어로 통역하는 법기인 듯했다.

유화는 당혹스러운 듯 주홍빛 강물의 모습으로 그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말을 걸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것이냐? 내 너를 구하…려고 왔다만.]

"아, 유화 님.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대군 아래에서 충성을 바치는 지금의 생활이 매우 만족스러우니까요."

[…지족 아래에서 충성을 바치는 게 만족스러워? 바깥에서 네 동족들이 다른 노예 종족들을 학대하는 것을 보았다. 어찌 된 일이냐?]

"어찌 된 일이긴요.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이제 상위 종족이 된 저희가 제대로 된 권리를 누리는 것이지요."

[그게 무슨 말 같잖은… 네가 목화 농장에서 채찍질을 당하던 기억은 잊은 거냐?]

"그때는 약해서 그랬습니다. 아, 어쨌든 유화 님께는 정말 감사드립니다. 유화 님께서 의념을 막 깨달은 제게 접근하여 지도를 해 주지 않았다면 하현에 도달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하현… 내가 부르는 대로 구현을 칭하면서도 너는 내 뜻과 반대로 무고한 노예 종족들을 학대한다는 거냐?]

"무고하다니요? 저들에게는 죄가 있습니다."

[뭐…?]

유화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강물 속에서 백녕에게 찌릿한 의념을 쏘아 보냈다.

"저들은 약합니다. 그게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뭐…라고?]

"유화 님, 당신은 제 스승님이나 다름없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이끌어 주신 덕분에 이 경지에 이르렀지요. 그렇기에 오히려 당신이라면 아실 겁니다! 제가 이 경지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피땀을 흘리며 노력했는지! 제가 강해지기 위해 어떤 노력을 쏟아붓고, 어떤 집념과 갈구를 통해 도달했는지!"

[…그래. 너는 노력했다. 하나….]

"그렇다면! 약자들이란 노력하지 않은 자들이 아닙니까!? 현재 우리 백염족의 밑에서 일하는 이들은 나태하기로 이름이 난 종족들밖에 없습니다. 저희 백염족은 그런 이들을 교화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채찍을 든 것입니다!"

백녕의 기막힌 논리에 유화는 어이가 없어진 듯했다.

[…그럼 이전에, 네가 나타나기 이전의 너희 백염족도 나태한 이들이라서 학대받았다는 거냐?]

"예, 슬프지만 그것이 진실입니다. 이 세상의 진리는 약육강식! 오직 그것입니다!"

[…그렇군.]

스르르….

백녕은 강물의 형태에서, 본래의 형태로 되돌아와 백녕의 앞에 나섰다.

물론 상반신 부분은 일렁이는 강물처럼 변화한 채인지라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았다.

백녕은 그 모습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유화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 세뇌가 진행되어 있구나. 누군가 네게 지독한 세뇌와 암시를 걸어 놓았어. 해룡궁의 주인… 너를 납치한 서휼인 건가?]

그러나 그 말에 백녕은 찌푸린 얼굴을 더더욱 일그러뜨리며 일갈하였다.

"세뇌라니! 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저는 제 의지로 대군께 충성을 맹세한 것입니다!"

[뭐…?]

"솔직히, 유화 님께서는 지금도 마찬가지이시지만, 한 번도 제게 진짜 얼굴을 보여주신 적이 없으시지요."

[그건… 천, 지족들은 혼백을 고문해 기억을 읽는 능력도 있으니 내 얼굴이 드러나면 곤란할 수도 있어서고… 심족 영역에 도착하면 얼굴을 드러내고 제대로 사제의 예를 맺자고 하지 않았느냐!?]

아무래도 백녕이 의념을 각성할 때 그와 접촉하여 그를 입천까지 이끈 것이 유화인 만큼.

그녀와 백녕의 사이는 스승과 제자에 준하는 듯했다.

"하, 사제의 예 말씀입니까? 제가 대군의 손에 잡혀갈 때 유화 님께선 뭘 하셨지요? 계속 심상 속에 심족 존자의 일격을 품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한 번도 안 쓰지 않았잖습니까? 제가 대군의 손에 잡혀갈 때에 존자의 일격을 썼다면 저는 어쩌면 당신과 함께 심족 영역이란 곳에 도착해서 말씀대로 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백녕의 일갈에 유화는 침묵하였다.

"하! 저는 오히려 당신과 함께 가지 않아 다행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끝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던 당신과 달리 그분은 처음부터 웃는 얼굴로 저를 반겨 주셨고, 천한 종족인 제게서도 의념을 통제하는 기술을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더군다나 늘 말뿐이었던 당신과 달리, 대군께서는 인근의 백염족들을 해방시켜 준 후 해룡궁 인근에서 지배종의 위치까지 주셨습니다!"

[….]

"이래도 제가 세뇌되었다고 하실 겁니까!?"

잠시 그녀와 백녕 간에 침묵이 일었다.

그리고, 유화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구나.]

"하, 이제 와서…."

[하지만!]

투웅!

그녀가 금을 뜯었다.

동시에 사방팔방으로 주홍빛 강물이 넘쳐흐르기 시작하였다.

[너는 세뇌된 것이 맞다.]

"변명하실 게 없으시니 저를 세뇌된 놈으로 만드시는군요."

[세뇌된 게 아니라고? 그렇다면 한 가지 묻지. 너는 서휼의 심상에서 무엇을 보았지?]

"대군의 심상이요? 말해서 무엇합니까, 향기가 풍기고 깨끗한 바람이 부는, 마치 신선향 같은 무릉도원을 보았습니다!"

[….]

쩌억….

나는 백녕의 대답에 너무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고, 유화도 잠시 어이가 없었는지 침묵하였다.

놀랍게도, 답천의 눈에 달한 나와 유화의 눈에도 전혀 거짓말을 하는 의념이 포착되지 않았다.

정말로 본인이 서휼의 심상을 무릉도원이라 믿고 있는 것이었다.

[…역시 세뇌되었구나.]

"제가 볼 때, 세뇌는 유화 님께서 심족 존자란 놈에게 당한 게 아닙니까!"

"글쎄…"

나는 듣다 듣다 못 해 백녕의 말을 끊었다.

"나 역시 함천존자의 분체를 한 번 뵌 적이 있네. 그분께선 힘은 강대하지만 세뇌를 잘 걸고 다니실 분은 아닐 것 같군."

"아, 이것 참. 대서장님께서도 계셨지요. 하하, 대서장님도 생각해 보니 하현의 중간 달에 도달하신 분이셨지요? 이제 보니 유화 님을 이곳까지 데리고 오신 분이 대서장님이셨나 봅니다?"

백녕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대군께서, 본인이 자리를 비우시면 대서장님을 잘 감시하라 하셨는데 이렇게 바로 심족 첩자이신 유화 님을 해룡궁의 옆까지 데리고 오시다니. 당신은 해룡족을 배신하려 하시는 겁니까?"

"너…."

그때였다.

콰앙!

주홍빛 강물이 넘실대더니 실컷 떠들던 백녕을 후려쳐 장원의 저 멀리로 날려 보냈다.

"끄… 으으으…!"

백녕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화가 보낸 노을빛에 맞은 뒤, '잠'에 저항하고 있는지 비틀거리며 겨우 눈을 뜰 뿐이었다.

[…배신자는 네가 아니냐, 백녕!]

"뭐…?"

유화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언젠가… 학대받는 노예 종족들을 모두 구원하겠노라고… 다시는 자신들 같은 종족이 생기지 않게 하겠다고 맹세하던 그때의 백녕은 어디에 있느냐! 너는, 그때의 너 자신을 배신한 거다!]

"내가… 배신자라고? 웃기지 마! 배신자는 당신이다, 유화! 심족 존자의 일격을 가지고 있다고 백날 잘난 체하며 나를 안심시키더니,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를 방치하지 않았나!"

[그래… 긴말은 필요 없겠지. 네가 그리 나온다면, 너를 하현으로 이끈 내가 책임질 수밖에.]

"하, 이제 와서 스승 노릇을 해 보겠단 거냐!?"

[…못난 스승으로서, 네게 씐 세뇌를 두들겨 패서라도 풀어 주마.]

투웅, 퉁!

그녀가 금을 뜯었고, 유화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녀의 연주는 백녕에게만 향하는 연주였다.

그렇기에 나에게는 영향이 없었고, 모든 힘은 백녕에게만 집중되었다.

본래라면 일순간에 잠에 빠져들어 환몽의 세계를 헤맸어야 할 백녕이었다.

하지만, 백녕이 찬 장신구 중 하나가 빛을 발하였다.

파아아앗!

그리고, 희미한 영기가 백녕의 백회로 흘러 들어가 상단전을 휘몰아치더니, 그의 미간으로 뿜어져 나왔다.

'정신 각성…!'

잠에 빠져들려던 백녕은, 가지고 있던 법기를 써 정신을 다잡았다.

그러나 나는 그 법술을 보며 소리쳤다.

"너…! 그건 위험한 법술이다!"

단순한 정신 각성의 술이 아니었다.

일전 내가 상단전을 불태웠던 기술, 혹은 진씨세가에서 상단전에 귀신을 불어넣어 격발시켰던 기술과 비슷하다.

자신의 정신을 격발시킴으로써 어마어마한 의식을 일순간 얻게 되는 기술!

키이이잉!

백녕의 주변을 둘러싼 의식 영역의 크기가 일순간 거대해지더니, 그의 기운과 일체화하여 그의 채찍에 스며들었다.

촤라락!

하현, 척산편(斥山鞭)!

쿠구구궁!

그가 지어낸 절학명이 의식을 통해 울리며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유화가 금을 뜯으며 연주를 이어 갔으나 정신을 격발시키는 중인 백녕은 유화의 연주를 버텨 내며 그녀에게 채찍을 마구 휘둘렀다.

나 역시 그들의 싸움에 가세하려 했으나, 유화가 나를 막았다.

[끼어들지 마십시오, 저희의 일입니다!]

그녀의 의지는 너무도 확고하였기에 나는 일단 그들의 싸움의 여파를 통제하며 가만히 있었다.

쿠궁, 쿠구구궁!

백녕의 정신 각성을 위해, 녀석의 수명이 그대로 깎여 가고 있었다.

백녕은 자신의 수명을 깎아 가며 유화에게 저항하고 있었다.

'서휼에게 장생단을 받았었던가?'

아무래도 수명이 조금 깎여도, 다시 늘리면 된다는 식으로 생명을 불태우는 모양.

그리고 자신의 제자를 공격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수마(睡魔)를 극복한 상대에게는 상성이 좋지 않은 것인지 유화는 그렇게 생명을 불태우는 백녕을 상대로 큰 힘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장기전으로 간다면 유화가 당연히 유리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곳은 해룡족의 영지, 해룡궁의 바로 옆에 있는 마을이라는 것이었고, 이 정도의 소란이 일어나고 있으니 곧 해룡족 원로들이 출몰할 것이란 것이었다.

아무리 내가 여파를 통제하고 있다곤 해도, 해룡족의 영역에서 천인기 해룡들의 눈을 완전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뭐, 잘 됐다.'

어차피 소란이 이렇게 난 것.

해룡궁을 아예 폭발시켜 버리고 그쪽으로 주의를 끌어 둘의 시간을 보장해 준 후, 그것을 빌미로 해룡궁의 여러 잡다한 제약에서 벗어나면 될 터.

그러나 그때였다.

[뭔가 저희를 도우시렵니까?]

유화의 영언이 내게 전해져 왔다.

[도우실 것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이건 저와 제 제자의 일이니.]

"하지만 곧 해룡족 천인기 원로들이 올 거다."

[…저와 제자의 일입니다. 누군가의 간섭은 필요 없습니다.]

"아니, 현실적으로…."

[또한, 저는 심족 첩보공작원. 주요 임무는 천, 지족 영역에서 각성하는 심족들을 포섭하여 심족 영역으로 오게 하는 것. 그리고 당신 역시 제 임무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하나 당신은 심족인 동시에 천, 지족이기도 하시니 심족의 공부에 관심이 없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그러니, 제자의 일을 처리하는 김에 더러운 지족들의 영지를 불태워 버리고, 동시에 당신에게도 심족이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드린다면, 조금은 당신도 심족에 관심을 가지시겠지요?]

투웅, 퉁!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완전히 자신의 본신을 드러내었다.

지금껏 백녕에게는 보여 주지 않았다는 그녀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해룡족의 호수 바깥으로 피하시기를 권장합니다. 지금부터 하현의 마지막 달, 구현 3단계라고 불리는 경지를 보여 드릴 테니까요.]

말하자면, 답천 너머를 보여 주겠다는 소리.

분명 무의 다음 경지를 보여 주겠다는 말이었으니, 평소의 나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 광경을 보겠다고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어째서였을까,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지며 천기가 갑자기 변화하는 것이 보였다.

'하, 하늘이….'

겁(劫)의 천기를 드러내고 있다.

당장이라도 도망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낭패를 볼 것이다.

육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천지영기가 불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으며, 천기는 경고를 해 준다.

당장이라도 그녀가 말하는 범위 바깥으로 도망쳐라.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산호 마을의 공기 방울 너머로 천인기 해룡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냐!]

[네놈은 누구냐! 어찌 본 해룡족의 영지에서 난동을 피우는 것이야!]

그들은 으르렁거리며 유화를 향해 이를 드러냈고, 각기 천지영기를 끌어모으며 요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덤덤하게 금을 뜯으며 다시 한번 내게 권하였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지금부터 구현 3단계를 펼칠 것이니, 해룡족의 구역인 운심호를 벗어나십시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순간 하늘을 쳐다보았다.

도망치는 게 맞다.

하지만.

"…아니, 옆에서 지켜보지."

[…무모하시군요. 당신이 심족인 동시에, 천, 지족이기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당신은 상당한 손해를 보실 겁니다.]

나는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나저나 궁금하군, 원래 구현 3단계의 강자였나?"

[하현 중간 달의 극한에 있기는 했고, 원래부터 하현 마지막 달을 목전에 두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줄곧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그녀의 눈은 그녀가 다루는 주홍빛 강물처럼 노을빛을 띄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존자께서 심어 두신 일격을 등대로 삼아, 제 생명을 불태우면 짧은 순간이나마 구현 3단계를 제 손으로 펼칠 수 있겠지요.]

그녀는 노을빛이 도는 눈으로 백녕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제 제자에게, 그리고 더러운 지족의 용들에게만 보여 주면 족한 힘입니다. 다시 권하겠습니다. 멀리 떨어지십시오. 실력으로 펼치는 게 아니기에 당신이 곁에 있더라도 조절은 불가능합니다.]

"상관없다."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다음 경지를 볼 수 있다면, 딱히 목숨이 아깝진 않아."

[…뭐, 그러신다면야.]

쿠구구구!

산호 마을의 결계 너머로, 천인기 해룡들이 들어와 그녀를 포박하기 위하여 요술들을 사용하였다.

삽시간에 사방이 물로 가득 차오른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뜬 채로 금을 뜯기 시작하였다.

[하현, 마지막 달.]

월도답천 이후의 경지.

구현 3단계로 불리는 심족의 힘이 펼쳐졌다.

그날.

나는 천족과 지족이 어째서 심족을 끔찍할 정도로 박멸하려 하고, 그들을 공포스러워했는지를 이해하였다.

동시에 어째서 고수의 숫자가 만 명도 되지 않는 약소 종족이 어째서 광한계의 패권을 다투는 천, 지족의 사이에서 독립적인 칭호를 얻는지도 이해하였다.

천지만상이 노을빛으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배신 (5)

'나는 충동적인가.'

수십 년 만에, 꿈속을 헤매던 상태에서 벗어나 두 눈을 뜬 유화는 자신의 결정이 맞는지 고민했다.

아무리 심족 두 명 이상을 포섭할 수 있는 기회라도.

아무리 더러운 지족 영역에 한 방을 먹여 줄 수 있을지라도.

아무리 지금 펼치는 이 공격이, 그녀가 후에 구현 3단계에 제대로 이를 때에 도움이 되더라도.

그것을 위해, 안 그래도 짧은 심족인 그녀의 수명을 10년 치 이상이나 소모하는 것이 과연 맞는가.

하지만 그녀의 손이 그녀가 수년을 연주해 온 그녀의 금에 닿는 순간.

그녀의 고민은 눈 녹듯이 사그라들었다.

그녀가 수십 년을 뜯어 온 금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백녕은 그녀가 수년을 들여 각성시킨, 그녀의 제자였다.

쓸데없지 않다.

충동적이지도 않다.

왜냐하면, 가르침을 준 자로서, 자신에게 배운 이가 저렇게 되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주어야 하는 게 맞으니까.

그녀는 백녕이 걸린 세뇌가 어떤 성질의 것인지 깨달았다.

강력한 자기 세뇌!

도대체 그 음험한 용이 어떻게 그녀의 제자를 구워삶은 것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백녕은 자기 자신이 자신의 세뇌를 강력하게 믿고 있었다.

설령 거짓이더라도 스스로가 그렇게 '믿고 싶어' 했다.

저런 강력한 세뇌를 깨려면, 더더욱 강력한 충격이 필요했다.

'내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심족의 심상에 충격을 주려면, 더더욱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구현 3번째 단계!

구현 3번째 단계의 심족은 기껏해야 만 명 안팎.

그러나 달리 말하면, 구현 3번째부터를 달성한 심족들은 정말로 천, 지족이 식겁하며 위협이 될 정도의 존재들이라는 소리였다.

'간다.'

그리고, 그녀가 연주를 시작하였다.

천지만상이 주홍빛으로 차올랐다.

* * *

쿠릉, 쿠르르릉!

해룡족이 자리 잡은 운심호.

그곳에, 기이한 뇌성벽력이 울렸다.

아니, 그것은 '분명히' 뇌성벽력이 아닌 다른 소리였다.

하지만 천둥소리가 아니었음에도, 운심호 인근에 사는 무수한 원영기 요족들은 그것을 천둥소리로 인식했다.

왜냐하면, 운심호에서 느껴지는 저 '힘'은, 요족들이 여태껏 수행을 이어 오며, 원영기에 이를 때에 맞았던 천벌의 힘과 그 성질이 놀라우리만치 성질이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운심호에는, 주홍빛 천겁이 몰아치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 천겁은 하늘이 아닌 운심호의 밑바닥.

한 노예 종족 출신의 연주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 * *

"…!"

나는 영기를 운행하며, 답천의 경지를 드러내고서 나를 향해 내리치는 주홍빛 힘에 저항하였다.

너무나도 익숙한 힘이다.

천겁(天劫)!

이것은 천겁이었다!

내가 수 번의 생을 거치며 몇 번이나 마주했던, 하늘의 진노!

나는 그제야 어째서.

지난번 전명훈의 공격들을 보고서 왜 함천존자의 일격을 떠올렸는지 깨달았다.

전명훈의 뇌도공법은 천뢰를 연상시켰다.

그리고, 심족 구현 3단계.

답천 너머의 경지로 추정되는 이 힘은, 놀랍도록 천겁과도 닮아 있었다.

"…!!!"

있는 힘을 다해 유화의 천겁에 맞서 나가며, 나는 그녀가 '어떻게' 3번째 구현을 펼쳐 내는지를 눈에 담으려 했다.

물론 단순히 눈에 담는 것조차 버거웠다.

하지만, 영기를 읽으며, 의념을 읽으며.

그리고 다시 천겁을 예측하는 예뢰안의 법술을 사용하며.

나는 유화가 쓰는 구현 3번째 단계의 힘을 눈에 담았다.

'저것이….'

그런가….

답천 너머로 발돋움하는 방법은….

쿠르르르릉!

그녀의 연주 소리는 분명 아름다웠으나, 나는 그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아니, 지족의 입장에서 저것은 분명 천둥소리였다.

그러나 지족과 의념의 시야를 둘 다 가진 내게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예술로만 보였다.

'아름답다….'

절로 경탄이 나올 정도의 완성도.

보고만 있어도 영감이 샘솟는 기예.

그리고, 그녀 자신의 의지!

나는 기이한 홀황경에 휩싸이는 느낌과 함께 그녀가 구현한 '아름다움'을 감상하였다.

전신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나는 하염없이 그녀의 예술을 관람하였다.

츠스스스….

"…헛!"

나는 순간 다시 정신을 차렸다.

"어, 어어?"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갑자기 현실 감각이 이상해진 것 같았다.

'뭔가, 천겁을 맞던 중에 기억이 끊겼던 것 같은데….'

비몽사몽하다.

순간 졸기라도 했던 듯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정신이 드셨나요?"

"…!"

다음 순간, 내 옆에서 말을 거는 유화 덕에 나는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는…."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

그리고,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헛웃음을 내뱉었다.

산호 마을은 사라졌다.

아니, 산호 마을뿐이 아닌, 해룡궁 역시 '해룡궁이었던 것'으로 변해 가루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방으로 해룡족 원로들과 장로들이 쓰러져 기절해 있었다.

그것은 산호 마을의 백염족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저 앞에는 백녕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와 그녀를 제외한, 운심호의 모두가 '자고' 있었다.

유화는 한층 초췌해진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제 환람연하로 모두 재웠습니다. 제가 깨우지 않고 자력으로 일어나려면, 천인기 수사는 하루, 원영기 수사는 열흘. 그 이하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무시무시하군."

어느 순간 기억이 끊겼다 했더니, 저항할 틈도 없이 잠들었던 것이리라.

이런 무시무시한 심족이, 강력한 공격력을 가진 심족과 함께 다닌다면 그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들이 없을 터였다.

더욱 무시무시한 건, 그녀가 현재 운심호에 거주하는, 20명이 넘는 해룡족 천인기 원로를 모조리 재웠다는 것이었다.

해룡족의 천인기 수사들은 모두 예순두 명이었으나, 나머지는 전부 서휼의 명에 따라 지족 곳곳에서 활동을 이어 가고 있었다.

해룡궁에 남은 것은 3분지 1밖에 안 되는 숫자였으나, 그래도 그녀 한 명으로 교환비가 20 대 1이나 되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선보인 것이었다.

"심족 구현 3단계에 이르면… 천인기 수사라도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제압할 수 있는 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여기 있는 천인기, 원영기 지족들은 전부 며칠 전 요선루로 와서 제 음색을 미리 들었기에, 음색을 기억하는 이들의 심상을 파고들기가 압도적으로 쉬웠답니다."

"…."

역시나 음공은 한 번 음색을 들었다면 빠져나가기 힘든 독이나 다름없다.

다만 유화의 연주가 음공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일반적인 음공은 그래도 음악의 진동이 가시면 더 이상 영향이 없지만.

그녀의 환람연하는 음악의 진동이 아닌 심상에 그 음색의 영향이 남아 있는 한 언제든지 그 영향을 강하게 증폭시켜 상대를 재워 버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인근 수저요족 중 한 번도 유화의 연주를 들은 적 없던 원영기 요족 몇몇은 일어나려고 몸을 움찔거리는 중이었다.

물론 그녀가 몇 번 더 금을 뜯자 다시 기절해 버렸지만 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요?"

"탈출해야겠지요. 해룡족은 심족에 대해 잘 몰라 기습에 당한 것이지만, 인근에 사는 지족 중 심족에 대해 아는 이들이라면 전부 방금의 일격을 보고 이곳에 심족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내 운명에 섞인 말도 안 되는 일격을 쳐다보았다.

하늘을 보자, 그녀의 일격을 맞은 것으로 내 운명이 변화해 있었다.

안 좋은 쪽으로 말이었다.

"왜 천, 지족들이 심족을 혐오하고 공포스러워하는지 이제야 알겠군."

"…."

"심족의 구현 3단계는 천겁과 거의 동일하지. 그리고…."

나는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유화를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천기를 보며 확인한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심족의 천겁을 맞으면, 천족과 지족은 앞으로 맞는 천겁의 종류가 추가되는군. 그렇지 않소?"

"…맞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양대 종족이 저희를 박멸하려 노력하는 것이지요."

그랬다.

내 운명에는 한 종류의 천겁이 대뜸 하나 더 추가되어 있었다.

본디 청색과 금색의 천겁을 맞던 나는, 이제부터는 주홍빛의 천겁 역시 같이 맞아야 하는 것이었다.

"심족의 선배님들께 듣기로, 정확히는 구현 3단계 심족의 일격은 천겁과 그 성질의 거의 흡사해 하늘이 착각을 한다고 하더군요."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구현 3단계의 일격 역시 천겁과 거의 흡사하기에, 하늘은 그 일격을 맞은 이가 그 일격을 극복해 내는 데에 성공하면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일격을 극복해 내지 못한다면, 하늘은 천겁을 극복해 내지 못한 것으로 인지하여 다음 경지 상승 때에, 한 번에 한하여 심족이 쏘아 낸 일격과 같은 성질의 천겁을 더 내리꽂는다 하더군요."

"…."

다행히 영원히 내가 맞아야 할 천겁의 종류가 하나 더 늘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번에 한한다 치더라도, 맞아야 할 천겁의 종류가 늘어난다는 것은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심족 구현 3단계와 싸우면, 누구든지 앞으로 맞아야 할 천겁의 종류가 한 번에 한하여 늘어난다.

정말로 무시무시한 일이었으며, 과연 천, 지족이 어떻게 해서라든지 심족을 뿌리 뽑고 싶어 하는 이유다웠다.

"그래서 천, 지족이기도 한 당신은 피하라고 한 거였습니다만…."

"뭐, 상관없소."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천겁의 가짓수가 늘어난 것은 분명 어질어질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다음 경지를 엿보았으니 만족한다.

"어쨌든 그래서 어떻게 탈출할 건지는 계획이 있소?"

"구현 두 번째인 본래 실력으로 몸을 제 곡과 동화하여 도망친다면…."

"무모하군. 당신이 너머의 경지를 보여 주었으니, 나도 답례를 하지."

나는 의식을 집중한 후, 그녀의 앞에서 그녀의 인식을 잘라 내는 월수궁무록을 펼쳤다.

파아앗!

순간 그녀의 시야에서 벗어난 내가 그녀의 앞에 나타나자, 그녀는 월수궁무록이 가진 의미를 깨달았는지 헛숨을 들이켰다.

"그, 그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건 월수궁무록이라는 내 기술이오. 아마 당신이라면 사용할 수 있을 테지."

월수궁무록에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그녀가 금을 잡고 있던 두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이 보였다.

"당신이… 만든 기술인 겁니까?"

"아니, 나도 배운 기술이오."

"어, 어떤 분이 만든 기술인 거죠?"

"…나를 이 경지에 이끈 스승이시지."

"부, 부디! 그분을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하계에 계시오."

"하계…."

그 말에 그녀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차후에 존자께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그런 분을 모실 수 있다면 저희 심족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음… 그렇긴 하겠지."

김영훈이라면 어째 정말로 심족을 천, 지족에 버금가는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종족으로 탈바꿈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유화는 내가 보여 준 월수궁무록의 구결을 되뇌고, 몇 번 펼쳐 본 후.

자신의 연주에 접목하여 순식간에 자기류로 변형하였다.

그녀 역시 어찌 되었든 심족으로 각성할 정도의 재능은 있었으니 변형 자체는 어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츠츠츳!

인지 사이에 곡의 형태로 숨어 든 그녀는 내게 인사를 한 후 강물의 형체를 한 채 날아올랐다.

강물에 딸려 올라가는 백녕의 몸체를 보았다.

"네 제자만 데려가는 거냐?"

[…세뇌는 억지로라도 풀어 두었습니다. 그 용이 다시 걸지 않는 한 추가로 세뇌가 걸리지는 않겠지요. 만약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백녕이 남겠다고 한다면… 백녕의 의지는 존중하여 돌려보내겠습니다. 하지만… 백녕이 남은 백염족을 데리고 가고 싶어 한다면 그와 함께 다시 해룡궁으로 와, 남은 백염족들도 전부 심족 영역으로 함께 갈 것입니다.]

"그렇군, 알겠다."

나는 월수궁무록을 쓴 채 사라져 가는 그녀를 배웅한 후.

다른 용족들처럼 자리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쿠구구구!

저 멀리, 운심호 바깥에서 어마어마한 천지영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보나마나 유화의 구현 3단계를 보고, 심족이 쳐들어온 것을 확신한 채 날아오는 지족 사축기 수사들이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다른 천인기 원로들처럼 기절한 척을 하면서 기묘성심전으로 의식을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혔다.

쿠구구구구!

운심호의 물이 모조리 위쪽으로 빨아올려지며,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때린다.

그리고 사축기 수사의 광대한 의식 영역이 운심호를 휩쓸며 곳곳을 거침없이 조사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디 있느냐, 이 빌어 처먹을 심족 나부랭이야! 당장 튀어나오너라!]

'이것으로….'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목적은 이뤘다.

유화가 나타날 때부터 내 손으로 난동을 일으킬 생각은 있었지만, 그녀가 내 예상보다 거하게 날뛰어 준 덕에.

해룡궁은 가루가 되었고, 해룡족 영역 전체도 혼란에 접어들었으니, 앞으로 해룡족 원로 놈들이 나한테 뭔가를 시킬 여유가 없으리라.

서휼이 남겨 놓은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났다.

'이제 남은 건 자유를 통해, 서휼에게 불만이 있던 몇몇 요족의 대표들과 접촉하는 것.'

이제부터가, 서휼의 뒤통수를 향한 배신의 진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