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네게 나의 힘은 독이나 다름없다. 네가 그 힘으로 인하여 얻을 것은 재액에 불과함이다.]
흑룡의 음성이 어렴풋이 어둠 속에서 들려온다.
[그래도 정녕 내 힘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냐. 마음대로 해 보아라. 죽을 때나 되어서야 후회할 녀석이구나.]
점차 다시 의식이 흐릿해져 간다.
나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이번 기회가 이번 생에서 흑룡과 나눌 수 있는 마지막 대화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겐, 안 된다.'
이 기회를 놓쳐 버린다면, 나는 엄청난 기회를 놓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위대한 흑룡이시여. 필멸자의 의문을 들어주소서.'
어둠은 침묵하였다.
하지만 나는 침묵 속에서 질문을 허한다는 기색을 느꼈다.
'당신의 혈통을 타고난 흑룡왕 현음은 혈음계와 어떤 연관이 있나이까….'
흑룡에게, 직접 흑룡왕 현음과 용족에 대하여 물어보자.
[그렇군. 최근 그분께서 내 핏줄을 빌어 발버둥을 치고 계시다지.]
어쩐지, 내 질문에 흑룡은 굉장히 재미있어하는 듯했다.
[명계의 명망 높은 판관이었던 분이 어찌 그 꼴로 영락해서 발버둥을 친다는 말인가. 선악을 관장하는 판관이라면 누구든 벌벌 떨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진선(眞仙) ◈#■(攸好德)께서 찌꺼기만 남아서 벌레처럼 내 핏줄에 기생하신다니… 아하하하….]
찌잉!
콰아앙!
다음 순간.
진선의 이름을 듣자마자 내 머리는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흑룡에게 뭔가 더 묻고 싶은 것도, 더 알고 싶은 것도 많이 남아 있었으나.
그 순간 모든 것이 머리에서 지워졌다.
감히 진선의 진명을 망령되게 함부로 들은 자.
그 정신이 온전하지 못할진저.
"끄아아아아악!"
이름에는 운명의 일부가 담겨 있다.
나는 진선의 이름을 엿들음으로써, 진선의 명을 엿본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게서 지워 영향이 없었으나, 흑룡이 아무런 배려 없이 내뱉은 진선의 이름은 내 뇌리를 어지럽히며 정신을 혼돈으로 몰아간다.
지운다!
방금 나눴던 대화를 지운다.
방금 들었던 이름을 지운다.
머릿속에서 그것을 지우지 않는다면 ▒▒▒攸好德이 나를 들여다보리라.
나는 정신이 어둠 속으로 침잠하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 * *
"…헛."
나는 숨을 들이켜며 정신을 차렸다.
'방금, 머리가 터졌던 것 같은데….'
맞다, 규련이 내 머리를 밟아 터트렸다.
그런데….
'머리가 재생되어 있다?'
나는 아직 축기기였다.
그런데 벌써부터 내 머리가 재생되어 있는 것이었다.
'머리를 재생하려면 결단기는 되어야 할 텐데….'
꿈틀….
"…어?"
나는 몸을 움직여보며, 흠칫했다.
이상하다.
이 정도 기력이 축기기라고?
그 때였다.
"뭣…!"
나는 다음 순간.
내 단전 안에 있는 뭔가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금단(金丹)? 아니, 아니다.'
내 내단이 진화하여, 금단만큼 커져 있었다.
뚝, 뚜두둑….
내가 손을 움직이자, 내 팔다리에 박혀 있던 혈창이 으스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뭣…!"
"깨어났느냐?"
그리고, 내 옆에 앉아 있던 규련이 말을 걸었다.
"선수 진혈이 잘 안착됐나 보군."
"헛…!"
우드득!
내가 황급히 놀라며 일어서자, 내 몸에 박혀 있던 혈창들은 마치 과자 조각처럼 으스러졌다.
"축하한다. 이제 너도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우리 용족의 일원이라 할 수 있게 되었구나."
규련은 장하다는 듯이 팔짱을 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 아니, 규 선배님… 그나저나 제 뱃속의 내단, 아니, 요단이…."
"넌 지금 결단기다."
"예…!?"
"가끔 너 같은 녀석들이 있지. 선수 진혈의 힘이 유난히 잘 들어서 수행이 폭증하는 녀석들. 네 요단은 금단화가 완료되었기에, 너는 이제 결단기이다."
나는 상상 외의 경지 상승에 입을 벌렸다.
육신 전체에 힘이 가득가득하다.
이대로라면 아무런 초식도 법술도 쓰지 않고 맨몸만으로 결단기의 힘을 재현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몸 안쪽에서 넘실거리는 태음의 힘은 잘만 조정하면 그대로 법술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라는 게 느껴졌다.
'아니, 법술이 아니지.'
내가 흑룡의 진혈을 얻어 부리는 태음의 힘은 법술이 아닐 터.
이는 요술(妖術)이라 불려야 옳을 터다.
꾸드득….
주먹을 쥐자 웅혼한 힘과 함께, 음기가 주변으로 몰리며 우릉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요족의 요술과 인족의 법술을 합치고, 이 육신의 힘에, 힘을 극대화시키는 초식을 더불어 사용하면….'
결단기 수준의 실력만 가지고도 원영기 수사가 전혀 두렵지 않았다.
내가 육신의 힘을 살펴볼 때였다.
앉아 있던 규련이 동부 바깥을 가리켰다.
"힘을 살펴보는 건 나가서 해 보거라, 널 찾으러 온 손님이 찾아왔으니."
"예?"
"내가 지금 손님을 막고 있느라 썩 힘이 드니, 네가 가서 제대로 맞아 드리거라."
"아…."
나는 그녀가 말하는 '손님'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쿠릉, 쿠르릉, 쿠릉!
먹장구름이 하늘에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먹장구름 사이로 익숙한 청뢰가 우르릉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청뢰는 떨어지지 않았다.
황금빛의 용이 그려진 주술진이 규련의 동부 위쪽, 하늘 전체를 뒤덮고 있어, 청뢰는 규련이 펼친 주술진에 갇혀 꿈틀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결단에 오르는 동안 천뢰가 떨어지지 않게 막아 주고 있었던 건가.'
쿠릉, 쿠르릉!
물론 하늘에서 몰아치는 힘은, 타인이 막아 주고 있는 만큼 훨씬 더 강해져 있었다.
감히 타인의 힘을 빌어 천겁을 이겨 내냐는 듯, 하늘에서 우릉거리는 천뢰의 위력은 결코 우습게 볼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동부 안에 있는 규련에게 우선 절을 올렸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됐다, 이제 천겁을 해방할 테니… 한번 새로 얻은 선수의 힘을 시험해 보거라."
"예."
그녀의 말과 동시에, 하늘의 진이 사그라들며 청뢰가 나를 향해 떨어져 내린다.
꾹, 꾸구구국!
나는 내 체내에서 용솟음치는 힘들을 정련했다.
음혼귀주와 백란축성, 천린수해와 규토장성 등의 천족 공법.
광한결로 인해서 완전히 요수공법화시킨 창령성광오채대법과 흑룡의 힘 등의 지족 공법.
그리고 무(武)을 쌓아 올리며 다다른 심족의 힘.
무형검은 드러낼 필요 없다.
무(武)의 극점으로 얻은 무형검은 이미 내가 상용하는 초식 전반에 녹아 있었다.
무형검을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내 몸에서 펼쳐지는 궤적은 모두 내 지배하에 있으니.
전신에서 끌어 넘치는 이 힘들을 최선의 궤적으로 휘두르기만 하면 될 뿐.
파아아앗!
천, 지, 심 삼재의 힘을 담아.
'단악검법.'
청뢰(淸雷)를 향해 내지른다.
'유릉!'
법력과 요력이 뒤섞이며, 극한으로 증폭된 육신의 힘과 함께 최적의 궤적으로 하늘을 향해 뻗쳐 나간다.
하늘을 향해 쏘아올려지는 힘에는 자연스레 태음의 기운이 깃들며, 하늘을 향해 질러지는 찌르기는 커다란 흑룡(黑龍)의 형상이 되어 청뢰를 박살 내 버렸다!
콰과과광!
청뢰는 산산조각 났고, 그 위에 있던 먹장구름은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 푸른 하늘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후우….
무형검을 직접적으로 쓰지 않고도 이 무지막지한 청뢰를 받아 냈다.
우우웅….
시야에도 변화가 있다.
지금까지는 그냥 영기의 흐름을 보는 정도였던 지족의 시야는, 이전보다도 훨씬 더 뚜렷하고 광대한 광경을 보여 주었다.
'이것이, 음양….'
하늘과 땅은 그 자체로 거대한 태극(太極)을 그리고 있다.
그 태극은 공간(空間)이었다.
월도입천에 도달해 심상을 보게 되고, 천족 공법을 익히며 운명을 보는 눈이 더더욱 강화된 것처럼. 요족으로서 경지에 달하자, 천지에 흐르는 음과 양이 더더욱 거시적으로, 더더욱 확실하게 보인다.
나는 새로이 진화한 요족의 시야를 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는 확고하게, 지(地)의 종족이 되었다.'
드디어, 천, 심에 이어 지(地)에 영역에도 발을 딛는 데에 성공하였다.
나는 비로소 그렇게 느낄 수가 있었다.
이름있는 자 (1)
개운하게 하늘을 바라볼 때였다.
"천거 현상이라. 굉장히 희귀한 현상이라 들었는데. 오래 살다 보니 직접 볼 수도 있게 되었군."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규련이 신기하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거 현상에 대한 전승은, 하늘조차 질투할 만한 자질을 지닌 이들에게만 타인들보다 일찍 천겁이 떨어진다는 전승이었지. 보아하니 너는 과연 천거 현상이 올 만한 천재로구나."
"하하…."
천재라….
그만큼 내게 어울리지 않는 말도 없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과분하기는… 나는 원래 네 자질을 알아보지도 못했고, 너를 요족으로 데리고 온 건 서휼이지. 정말, 보는 눈도 있다니까…."
서휼을 떠올리자 기분이 좋은 건지.
규련의 뺨에 홍조가 돋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말해 줘야 하려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서휼의 진실을 바로 털어놓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다.
조금 시간을 두고 서서히 전하기로 하였다.
"…그나저나, 이제 흑룡 진혈도 다 연화했으니 해룡궁으로 돌아갈 터냐?"
"예, 물론이지요. 돌아가서는 반드시 규 선배님과 서휼 님이 만나실 자리를 주선해 드리겠습니다."
"험험, 아니 꼭 만나야겠다는 게 아니라… 그, 흠…."
그녀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고개를 흔들었다.
"서휼 얘기는 됐고. 결단기가 되었으니 이제 혼자 돌아갈 수 있겠느냐?"
"예, 물론이지요. 해룡궁의 위치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흠 그렇군. 그렇다면, 혹시 가는 길에 서신을 전달해 줄 수 있느냐?"
규련은 내게 비단으로 접은 한 장의 서신을 내밀었다.
'이건….'
"천붕족(天鵬族) 장로 호열에게 가져다주면 된다."
"예, 알겠습니다."
"호열이 어디 있는지는 아나?"
"봉명주 7층 생명층에 들어가 문의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뭐, 알겠다. 3개월 안에만 서신이 도착하면 되니. 그럼 잘 부탁한다."
"예, 알겠습니다."
나는 규련에게 절을 올려 감사를 표한 후, 그대로 허공을 날아올랐다.
파아아앗!
'요족의 비둔술은 또 느낌이 다르군.'
아니, 이걸 비둔술이라고 불러야 할까?
천족의 비둔술은 금단에 새겨진 별빛의 기운을 빌려 둔광 속에 몸을 숨기고 빠르게 이동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지족의 활공술은 몸 주변으로 음양의 기운을 회전시켜 생명력을 증폭시킨 후, 그 생명력으로 육신을 잔뜩 강화해서 무작정 허공을 달리는 느낌이었다.
허공답보와 달리 공기의 결과 결을 밟는다기보다는, 허공에 음양의 흐름을 조종해 만든 영기의 판을 만들어 밟고 뛰는 것이 요족이 하늘을 나는 법이었다.
'효율이 좋은 허공답보로군.'
파앙, 파앙, 파앙!
나는 허공답도와 지족의 이동술을 동시에 쓰며 날아갔다.
허공답보는 힘의 소모율을 줄여 주었고, 지족의 활공술은 힘의 증폭률을 높였다.
보다 적은 힘으로 더더욱 빨리 날아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우릉, 우르르릉!
거기에, 내가 흑룡의 힘을 끌어올리자 주변으로 음기가 몰려들며 먹장구름이 생겨났다.
우르르릉!
"호오, 이것도 편한데?"
나는 먹장구름에 올라타서 방금 내가 빠르게 쏘아지던 속도와 똑같이 나아갈 수 있었다.
흑룡의 혈맥이 알려 주는 구름의 술법을 타고서, 나는 그렇게 쭉쭉 앞으로 나아갔다.
* * *
봉명주 생명층에 들러 천붕족의 위치와, 천붕족 장로 호열의 거처에 대해 전해들은 나는 봉명주에 있는 전송진을 통해 천붕족의 거주지로 이동했다.
천붕족은 용족 영역 바깥, 천심곡이라는 계곡에 거주했고, 특이하게도 조류임에도 계곡 아래에 있는 물에서 헤엄치며 산다고 했다.
나는 천심곡을 잠시 둘러본 후.
천붕족 장로 호열을 찾아가 규련의 서신을 전했다.
규련과 같은 사축기 장로인 호열은, 내 서신을 전해받은 후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전 지족작명과업… 도대체 이딴 계획을 어떤 놈들이 발의했단 말인가."
"…."
나는 서휼에게 저 계획에 대해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모든 지족의 이름을 파악하고, 이름이 없는 지족이라면 이름을 지어서라도 만들어 관리하는 계획….'
그리고 이름에는 운명이 담겨 있으니, 이름을 가진 이들의 움직임에 따라 지족의 전체적인 운명을 읽어내려는 계획이라고 했다.
계획 자체는 좋았지만, 나는 조금 터무니없다는 생각을 했다.
'들에서 태어나는 들짐승들이, 날짐승들이 모조리 지족인데… 그들에게까지 전부 이름을 지어 줘서 관리한다고?'
아예 길가에 벌레한테도 이름을 주자고 할 수도 있는 소리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5, 600년 이상은 걸리는 작업이겠군.'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천붕족 장로 호열이 한숨을 쉬며 내게 말했다.
"그나저나, 용족에서는 이 멍청한 계획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
"아…."
나한테 묻는 건가?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일단 서휼의 경우만을 들어 얘기했다.
"저 역시 말단인지라 잘은 모릅니다만. 일단 제가 모시는 사축기 해룡족이신 서휼 님께서는 이 계획에 대해 적극적으로 찬성하셨습니다. 지족들의 미래에 꼭 필요한 계획이라 하셨지요."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서휼은 확실히 이 '전 지족작명과업'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줬었다.
내 말을 들은 호열은 다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 종족의 이름을 한 집단에서 관리한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인족의 명적을 보고 지족도 전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본데, 인족이 시운도에 세운 명적은 그들이 단일 종족이기에 가능한 짓이야. 지족은 단일 종족이 아닌 수많은 요족의 집합이고, 그런 이들의 이름을 전부 관리한다는 건 터무니없는 짓이란 말이네…. 안 그래도 지족은 행정력이 부족한데, 이딴 계획으로 인해 행정력이 얼마나 낭비될지 모른단 말인가…?"
"…."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기에, 나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호열의 푸념을 들어 준 후, 며칠간 천붕족 영역에 머물며 몇몇 천붕족들과 안면을 텄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지족 영역 곳곳을 유람하며, 2개월에 걸쳐 다시 해룡궁으로 돌아갔다.
* * *
휘이이이―
나는 구름을 타고 강산을 지나며, 저 멀리 해룡궁이 있는 운심호를 향해 눈을 크게 떴다.
"…허, 그사이에 어마어마하게도 변했군."
운심호 일대에는 커다란 산호 밭이 자라나 있었다.
말 그대로, 산호가 육상에 자라나는 산호 밭이었다.
산호 밭에서는 규련의 목화 농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수많은 노예 종족들이 일을 하고 있었고, 그들로 인해서 운심호 바깥은 상당히 시끄러운 상태였다.
'서휼이 또 이상한 사업을 벌이는 건가.'
나는 노예들을 흘끗 쳐다본 후 운심호에 들어가려 했다.
그때, 나는 문득 노예들을 관리하는 관리관에게 시선이 갔다.
엄한 눈으로 노예들을 관리하는 관리관은, 이족 보행의 염소였다.
"…!?"
문득 내가 잘못 봤나 싶어 제대로 바라보았으나, 여전했다.
운심호 인근 산호 밭의 노예들을 관리하는 관리관으로, 이족 보행의 염소가 서 있었다.
'백녕? 아니….'
그들은 염소'들'이었다.
백녕의 종족들이, 각기 채찍을 들고 엄한 눈으로 산호밭의 노예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목에는 아름다운 산호 장식들이 둘러져 있었다.
'…저게 어떻게 된 거지?'
자세한 건 일단 서휼을 만나면 알 수 있으리라.
나는 해룡궁으로 내려갔고, 익숙한 해룡궁의 결계에 이르르자, 해룡궁의 결계를 지키던 해룡족들의 안색이 크게 달라졌다.
"아, 아니…."
"너는…!?"
나는 흑색의 사슴뿔과 흑색의 비늘 등을 내비치며 흑룡 진혈을 연화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 모습에, 해룡궁의 결단 초기경 문지기들은 흠칫 놀라는 듯하며 불신 어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서휼 님이 데려오신 인족…! 크윽, 어째서 너 따위가 흑룡 진혈을…."
"우리가 진혈을 받았다면 더 강해질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문이나 여시게. 나 같은 인족이나 선수혈합에 참가할 때 추천이 필요했지, 당신들 같은 지족은 선수혈합에 참가할 조건이 전부 충족되기에 자유롭게 신청해도 됐을 텐데?"
내 조롱에 그들은 이를 악무는 듯하더니만 해룡궁의 결계를 열었다.
그리고 내가 결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허공이 일렁였다.
우우웅!
공간이 열리며, 공간 너머로 서휼의 집무실이 보였다.
그가 집무실에 앉아 편한 얼굴로 내게 손짓했다.
"어서 오게, 그동안 규 선배님 밑에서 잘 지냈는가?"
나는 서휼의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규 선배님께서 상냥하시니 매우 즐겁게 지냈습니다."
"그래, 흑룡 진혈을 연화하는 데에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네만…. 휴식이 필요할 것 같은데, 이번에 해룡궁 곳곳을 증축하며 새 방을 지었다네. 새 방으로 가서 휴식을 취하는 건 어떤가."
해룡궁에 오자마자 나를 수상한 방으로 보내 수작을 부리려는 서휼이었다.
"진혈의 연화 자체는 하루 만에 끝냈습니다. 다만 규 선배님께서 제게 서한을 전달하는 일을 맡기셔서 천붕족 등과 몇몇 종족을 들르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서휼이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내가 이미 지족 사회에서 아는 이들이 생겼다고 알렸다.
"그들과 좋은 인연을 맺었길 바라네. 수선의 길에서 인연이란 소중한 것이지. 특히나 긴 세월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찰나를 스치는 시간이 인연이니 말일세."
서휼은 내가 만난 인맥을 찰나 안에 스쳐 가는 인연으로 정하며 내가 그들과는 더 만날 일이 없지 않느냐고 물어 왔다.
"짧은 인연들이지만, 그 사이에 우애가 깊어 몇몇 분들은 근시일 내에 봉명주에서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특히나 서휼 님께서 일전 언급하셨던 전 지족작명과업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은 분들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나는 서휼에게 미리 약속을 잡았다고 못을 박아 놓으며, 그가 다른 수작을 부릴 수 없게 하였다.
"흠, 봉명주라. 자네는 아직 결단기인데 거기까지 가는 게 위험하진 않겠는가?"
"선수 흑룡의 진혈을 융합한 후, 위대한 용의 힘을 얻게 되어 지족 영역 내에서는 더 이상 제게 위협이 될 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는 내 경지를 빌미로 내가 나가는 것을 허락지 않으려는 듯했으나, 나는 흑룡의 이름을 빌렸다.
서휼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 그렇다면 다녀오게. 전 지족작명과업 같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러 다녀온다니, 마음이 놓이는군."
"…감사드립니다."
'휴우.'
나는 서휼과 대화를 나누며 진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한 마디라도 실수하면, 바로 어딘지 모르는 방에 감금되어서 서휼에게 괴군과는 다른 방식으로 개조당할 것만 같다.
'차라리 칼날 위에서 맨발로 춤추는 게 낫겠군.'
내가 속으로 식은땀을 삼킬 때였다.
"그나저나, 자네는 인사를 못 했겠군."
"…?"
"지난번 규 선배의 농장에서 난동을 피운 자라네. 인사하게."
"…!"
스르륵….
서휼이 손가락을 튕기자, 공간 균열이 생기며 백녕이 그곳에서 튀어나왔다.
'이게 무슨….'
"백녕, 지난번에 봤겠지만… 우리 해룡족의 후기지수 중 하나인 서은현이라네. 앞으로 둘이 서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군."
"예, 주군."
백녕은 당연하다는 듯이 서휼에게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이 자는, 심족이 아닙니까?"
"맞네."
"한데 어떻게…."
심족을 세뇌라도 한 건가?
하지만 백녕의 의념은 정상이었고, 딱히 세뇌를 당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기는. 백녕의 백염족은 광한계 곳곳에서 노예로 부림받으며 학대받는 종족이라네. 내 힘을 다해서, 인근 농장에서 학대받는 백녕의 종족들을 구매하여 해방시켜 줬다네. 그리고 우리 해룡족이 운용하는 산호밭에서 지배종으로 살 수 있도록 조치해 주었지. 수행에 적합한 종족은 아닌지라 공법은 익히기 힘드네만, 그래도 다들 바뀐 삶에 만족하는 것 같더군."
"…."
나는 백녕을 쳐다보았다.
이 자는 서휼의 심상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서휼의 심상이 보여도, 자신의 종족이 지금 구원받고 있다는 사실도 같이 보였던 것일까.
확실한 것은, 백녕은 그 짧은 몇 개월 사이에 서휼에게 감화되어 충성을 다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침을 삼켰다.
'이 자는 내가 심상을 구현했다는 것을 안다.'
그걸, 서휼에게 고했을까?
아니, 뻔하다.
'10할 확률로 고했다.'
그렇다면, 지금 서휼은 내가 심족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나와 대화하고 있다는 소리.
어찌해야 할까.
'…모르쇠로 가자.'
"…광한계에서 경외받는 심족을 손에 넣으셨으니, 이제 서휼 님의 앞길을 막을 이들이 없겠습니다."
"하하, 너무 아부가 심하군그래."
"아닙니다, 서휼 님께선 분명…."
나는 서휼과 대화하며 느꼈다.
'서휼 이 녀석….'
이전보다도 더더욱 상대하기가 까다로워졌다.
이전에는 그래도 의념을 쉽게 쉽게 흘려서 그의 의도를 어느 정도라도 짐작이 가능했지만.
백녕과 함께한 몇 달 사이에 무슨 훈련을 한 것인지 의념 자체에 동요가 거의 없었다.
'제길….'
안 그래도 상대하기 까다로웠던 뱀이, 심족을 손에 넣고서 더더욱 상대하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지난 몇 개월간, 나도 관광만 하고 있던 건 아니야.'
천붕족을 비롯해, 다른 몇몇 종족들과도 만나며 안면을 텄다.
서휼이 모르는 곳에서 인맥을 텄다.
서휼 역시 앞으로는 내가 누구와 어떤 인맥을 맺었는지 모르니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터였다.
'그전까지는 자신의 손안에 완벽히 놓여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한번 네 손을 빠져나간 이후로는 제어하기가 쉽지 않을 거다.'
"그나저나, 자네가 며칠 후에 봉명주로 가 전 지족작명과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했었나?"
"예."
"그거 좋군. 나도 같이 가지."
"…예?"
나는 서휼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 역시 전 지족작명과업에는 지대한 관심이 있으니 말일세."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 * *
나와 서휼은 봉명주로 들어갔다.
'제길, 상대하기가 힘든 자다.'
나는 내 옆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서휼을 생각하며 느꼈다.
'일단 내가 심족인 것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다. 거기에 무엇이든 이용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으로 보아, 내가 심족이란 사실은 본인이 숨겨 뒀다가 필요할 때 써먹을 터.'
그것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그가 나를 따라다니며, 내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감시하는 것이었다.
'친분을 맺어서 봉명주에서 이날 만나자고 하긴 했다만….'
엄밀히 말하면, 표면상 결단기 경지인 내 주제에 타 요족의 높으신 분들과는 그리 큰 친분을 맺진 못했다.
그저 규련의 이름을 팔아서 전 지족작명과업 논의회에 참관할 자격을 어찌어찌 얻어 냈을 뿐.
'서휼에게 내 밑천이 드러나지 않으면 된다…!'
나는 서휼과 함께, 봉명주 7층 작명 과업 논의회로 향하였다.
"아, 자네 왔는가. 아, 그리고 그쪽이 해룡족의…."
"서휼이라 합니다."
"서휼 공이시군. 반갑소, 천붕족 호열이라 하외다."
서휼은 사축기 용족의 신분으로 논의회에 더없이 쉽게 참석할 수 있었고.
본래라면 호열의 뒤쪽 먼 곳에서 논의회를 구경할 예정이었던 나는 얼떨결에 서휼의 옆자리에서 논의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런 제길….'
나는 서휼의 옆자리에 앉아 안색을 관리했지만.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해서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얼마 후, 지족 13개 대형 종족에서 온 사축기 수사들이 원탁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하며 논의회가 시작되었다.
용족의 대표는 흑룡족의 현찰이라는 용으로, 나와 서휼은 현찰의 옆자리에 참관자의 자격으로 앉게 되었다.
"우선, 전 지족작명과업이라는 멍청한 계획은 있어서는 안 되는 계획이오!"
천붕족 장로인 호열이 거세게 원탁을 치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행정력이 낭비될 거외다. 그러고도 천족들이 천기를 보는 행위에 비해 확연한 효과가 나타난다고 단언할 수도 없소!"
그리고 그에 반대편에서 태호족의 대표가 그르렁거리며 말하였다.
"멍청한 계획인 건 동의한다만. 쓸모가 없는 건 아니지. 필요한지 아닌지는 한번 해 봐야 아는 거 아닌가?"
"전 지족의 이름을 알아내서 관리하는 게 쉬워 보이시오? 제대로 관리도 아니될 거요!"
호열의 외침에 현무족의 장로 역시 걱정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관리하는 것이 비록 하찮아 보이지만, 모두 아시다시피 이름에는 운명이 깃들어 있소이다. 우리가 관리하려는 것은 전 지족의 운명이란 말이오. 합체기 태수분들도 전 지족의 운명을 관리하실 자신이 없으실 터인데 어찌 그런 무모한 계획을 실행한단 말이오?"
"현무족 장로께서 맞는 말을 하셨습니다만, 이름에는 분명 운명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려는 것은 운명을 어떻게 하려는 것이 아닌, 이름의 흐름을 통해 운명을 관찰하려는 것뿐입니다."
흑룡족 대표인 현찰이 현무족 장로에게 반박을 했고, 논의회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돌았다.
서휼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용족 대표께, 방계 일족인 해룡족의 이 서 모가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한참 논의회의 열기가 과열되었을 때쯤.
서휼이 현찰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제안하였다.
현찰은 뭐라고 하려는 듯했으나,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는 듯하더니 서휼의 발언을 허락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둘이 그사이에 뭔가 교신을 했다.'
전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요술이나 법술이라기엔, 내 어떤 감각에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서휼은 흑룡족과 늘 어떤 연계가 있었지.'
아무래도 서휼과 흑룡족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인 듯싶었다.
서휼이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보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이 서 모는 흑룡족의 방계족인 해룡족의 우두머리를 맡고 있는 용입니다. 분위기가 과열된 듯하니, 이 서 모가 잠시 양측의 의견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서휼은 능수능란하게 논의회에서 양쪽의 의견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는 아무 규칙도 없이 서로 언성을 높이기만 바빴던 요수들의 논의회를 마치 토론장처럼 변화시키기 시작하였다.
'…논의회에, 규칙이 생겨 간다.'
사축기 요족들이 토론하는 논의회는 굉장히 고상할 것 같았으나, 실상은 딴판이었다.
하나같이 흉폭한 야성과 육신에 기대 수행을 이어 온 요수들의 논의회에서는 목소리가 크고, 종족의 힘이 강대한 것이야말로 진리였기에, 지금까지는 정상적인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서휼은 양측의 주장을 들어주고 주장들을 정리해 주는 듯하며, 둘 사이에서 균형을 얻고 그 균형을 이용하여 논의회에 규칙을 하나둘 만들고 있었다.
"…앞으로 발언을 할 때는 진행자의 허락을 받고 발언을 하는 게 어떻습니까?"
어느새 서휼은 논의회의 의장 역을 하던 현찰을 제치고 '진행자'가 되어 있었다.
'…허.'
나는 서휼이 능수능란하게 요수들의 싸움을 중재하며 자신이 주도권을 가져가는 모습을 보며 작게 감탄을 흘렸다.
"음, 그럼 전 지족작명과업의 반대 측에서는 이 계획은 논의할 가치가 없다고 느끼시는 거로군요."
"그렇소."
"그렇다면 천족의 사례를 알고 계시는 현찰 님께 발언을 부탁드리겠습니다만…."
하지만 주도권을 가져가고서도 서휼은 자신의 주도권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았다.
현찰, 혹은 작명 과업 계획에 찬성하는 요족 측에 발언 기회를 더 많이 주며 은근슬쩍 논의회의 분위기를 작명 과업의 찬성 측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나절이 지났다.
"자, 그럼 오늘, 전 지족작명과업은 지족의 대형 종족 13족의 협의 아래에 이뤄지는 것으로 결정이 났습니다. 모두 이의가 있으신 분은 없는 것이겠지요?"
"없소."
"없소, 만족스럽군."
"서 수사의 제안이 아주 탁월하구려. 하하, 작명 과업에 응하지 않는 요족들은 모조리 단약으로 만들어 각 종족에 배분할 생각을 하다니."
결국 서휼이 바라는 대로, 전 지족작명과업이라는 해괴한 계획은 그렇게 실행되어 버렸다.
작명에 반대하는 약소 요족들은 모조리 단약이나 자원으로 바꿔서 각 대형 종족에 배분되기로 한, 초유의 구역질 나는 서휼의 제안과 함꼐 말이었다.
* * *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나는 서휼과 함께 해룡궁으로 돌아가며 그에게 물었다.
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휼의 말에 반대했던 요족들과 만나고 다니며 말을 맺어 놨으니 서휼에게 쥐도새도 모르게 살해당할 일은 이제 없을 터였다.
"어째서 전 지족작명과업이라는 계획을 밀어붙이셨는지 감히 이유를 여쭤도 될지요?"
'어차피 제대로 대답은 안 해 주겠지만.'
그러나 궁금하기는 했다.
도대체 이 서휼이라는 녀석은 왜 이렇게 [이름] 같은 걸 알아내는 것에 열중인 것일까?
그때, 서휼이 입을 열었다.
"광한계에는 이름 없는 요족들이 대다수이지."
"그렇지요, 요족들 중 다수가 처음부터 요족으로 태어나는 건 아니니까요."
"자네, 그걸 알고 있나?"
"어떤 걸 말입니까?"
파아아앗!
서휼은 해룡궁의 위.
운심호의 상공에 도착해 하늘을 가리켰다.
"광한계에는 한 가지 전설이 있다네."
"전설이요?"
"광한계의 이름은, 본래 광한(光寒)이 아닌 광한(廣寒)이었다는 것을 아나?"
"광한(廣寒)…."
나는 마계를 영기로 오염시키고 침식하는 광한옥(廣寒玉), 요족 공법의 기본이 되는 광한결(廣寒訣)을 떠올렸다.
둘 모두 광한(廣寒)이라는 이름이 들어갔다.
'광한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만, 광한계의 옛 이름이었던 건가.'
"견문이 짧아 처음 듣습니다."
"그렇겠지. 이건 아는 이들만 아는 고사니까. 먼 옛적, 혈음계와 진마계가 분리되기 이전…. 진마, 명귀, 고력, 자금, 광한계는 전부 동등한 중경계였네. 하지만, 용족의 개열기 시조께서 진마계와 전쟁을 끝마치신 후. 광한계는 개열기 시조를 잃고서 타 중경계들에 의해 호시탐탐 노려지는 세계가 되었다고 하지."
서휼은 공간을 쪼개고, 해룡궁 안쪽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로 바로 들어서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광한계의 지도자들이 모여 의논했다네. 이대로 가다가는 광한계가 타 중경계에 의해 전부 뜯겨 나가겠다고 말이야. 그래서 그들은, 세계의 이름을 개명(改命)하기로 했네."
해룡궁의 집무실에 들어간 서휼은 전음부를 사용해서 몇몇 해룡들을 집무실로 불렀다.
호명된 이들은 전부 원영기 급의 해룡족 장로들이었다.
나는 서휼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 있었다.
"그들은 하늘의 명(命)을 받아내려, 광한계에 가장 좋은 이름을 받아내었고…. 광한계에는 [빛]을 의미하는 광한(光寒)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네."
'빛?'
"그렇게, 광한계가 [빛]의 이름을 받게 된 후. 광한계에는 늘 천운이 뒤따랐다네. 세계를 개명한 후에는 광한계는 혈음계와 더불어 중경계 중에서 최강의 세계가 되었다고 하지. 이는 광한계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름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고사(古事)라네."
"…광한계의 역사인 겁니까?"
"역사가 아니라 전해져 내려오는 고사일 뿐이야. 이게 정말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지. 중요한 것은, 이름을 통해 운명에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이며, 좋은 이름을 가진 이가 많아진다면 그것은 지족의 복이란 걸세. 한 마디로, 이름이 없는 수많은 요족들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지족의 일원으로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란 것이지."
"…그렇습니까."
최근에는 서휼이 하는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기가 어려웠다.
백녕을 들인 이후로, 의념이 더더욱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심상을 직접 보고 판단하기에는, 심상을 직접 보고 있자면 눈이 썩을 것 같았기에 그러기도 힘들었다.
"어떤가, 궁금증은 조금 해결되었나?"
"예, 감사드립니다."
"하하, 궁금증이 해결되었다니 다행이군. 들어가 있게. 아, 그리고, 이번에 흑룡족 진혈을 연화하였으니 자네 역시 어엿한 용족의 일원이지 않은가."
"예, 그렇지요."
"그럼 자네 역시 어엿한 용족으로서, 용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힘을 쓰겠네."
"…감사합니다."
'용명부라….'
용족의 시조들의 머리뼈에 내 이름이 새겨진다고 하니, 기분이 기묘했다.
안 그래도 [이름]에 대한 중요성을 들은 후인지라 영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용명부에 이름이 올라가면, 그 이후부터는 제대로 해룡궁 안에서 벼슬을 주고 당당하게 생활할 수 있게 하겠네."
"황공할 따름입니다."
나는 서휼과 덕담을 주고받은 후 그의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나는 집무실에서 나가며, 서휼의 집무실로 들어가는 원영기 장로들을 흘끗 보았다.
'서휼이 이런 식으로 회의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서휼은 항상 원로나 장로들에게 뭔가 말할 게 있을 때에는 공개된 장소에서 했다.
저런 식으로 원로나 장로들을 자신의 집무실로 부르는 일은 없었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나 들어 볼까.'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 회로를 통해 서휼이 하는 말을 엿듣기 시작했다.
이윽고 서휼이 집무실에서 나누는 얘기가 회로를 통해 내게 전해져 왔다.
"…하여, 전 지족작명과업은 이제 전 지족에서 행해질 것이라네. 또한 이제 지족작명과업에 동원될 행정력이 필요할 터니, 나는 해룡족에서 몇 명의 관리를 뽑아 전 지족작명과업의 주요 인물로 추천하겠네."
'뭔가 꿍꿍이가 있었나 보군.'
솔직히 서휼이 적당히 던져 준 그런 동화 같은 얘기는 별로 믿기지도 않았다.
서휼이 지족의 이름을 좋게 지어서 지족을 좋게 이끈다느니 하는 공익적인 일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자네들은 아마 전 지족 영역에서 쏟아지는 [이름]을 확인하는 위치로 가게 될 걸세. 자네들이 거기에서 할 일은 하나야."
'자, 서휼. 도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건지 말해 봐라.'
그리고, 서휼의 말이 이어졌다.
"이름에, 인(因)과 연(緣)이 들어가는 이들을 찾게."
'음?'
인과 연?
도대체 뭘 원하는 거지?
"조건을 하나씩 말해 주지. 이름에 인과 연이 각각 한 자씩 들어갔을 것. 인과 연이 들어간 이들의 거주지가 가까울 것. 그리고 암수가 있는 종족일 경우, 이름의 소유자들이 암수로 나뉘어 있을 것."
'….'
왜일까.
서휼의 조건을 듣자 하니, 어쩐지 기시감이 든다.
"이 이름을 가진 이들은 근처에서 태어나도록 '결정되어' 있네. 서로와 가까이 붙어 지내도록 '결정되어' 있으며, 서로와 사랑에 빠지도록 '결정되어' 있고, 또한 한날한시에 죽는 것이 '결정되어' 있지."
'…잠깐.'
나는 서휼의 설명을 들으며, 뇌리를 스치는 이들이 떠올랐다.
"이들은… 운명적으로 아주 특이한 존재들이야. 부부나 연인일 가능성이 아주 높네. 그런 이들을 찾는다면, 그 문서를 내게 가져오게. 몇천 년 전에 그런 이들이 있었다는 기록이라도 좋아. 그것은 끊임없이 윤회(輪回)하며 운명을 영원토록 반복하니까. 기록이라도 찾으면 반드시 가져오게."
'….'
왜일까.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되었으나, 나는 서휼이 찾는 이들이 어쩐지 내가 아는 이들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은 우리 해룡족의 번영을 위하여… 이번에도 나를 믿고 따라와 준다면 수계에 있었을 때와 같이 번영이 우리를 뒤따를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