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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4

* * *

다음 날이 되었다.

나는 서휼에게 불려갔다.

서휼이 해룡족의 근무를 보는 서휼의 방 안으로는 기묘한 영력의 흐름이 흐르고 있었다.

'뭐지, 이 영기의 흐름은?'

영기의 흐름을 보고 있자니, 어째 머리가 맑아지는 것이 상쾌한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정신을 각성시키는 요술의 일종인 듯싶었다.

내가 잠시 영기를 쐬고 있을 때, 서휼이 웃는 낯으로 내게 물어왔다.

"해룡궁에서의 밤은 평안했나?"

"아, 서휼님께서 신경 써 주신 덕에 평안한 밤을 보냈습니다."

"다행이군. 앞으로도 신경 써 주겠네."

그러나 서휼이 내뱉는 말과 달리, 그의 정신 속은 어제 이후로 불어난 의심으로 인해, 상당히 예민해 보였다.

그의 눈은 웃고 있는 듯했으나, 자세히 보니 내 곳곳을 관찰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6개월 후에 선수혈합이 열린다 하더군. 선수혈합에 출전하는 요족들은 대다수가 원영기 요족들이네만, 아무래도 자네에게 6개월 후에 바로 선수혈합에 나가는 것은 무리겠지?"

'6개월 후라….'

듣자 하니, 선수혈합은 100년에 한 번씩 열린다고 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100년 후에나 기회가 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신중하기로 했다.

'과연 그 선수혈합이라는 게, 정말로 내게 필요한 건가?'

선수 진혈이라는 게 있으면 요족 사회로 진입하기에 굉장히 편해진다.

하지만 문제는 서휼 놈이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선수혈합에 내보내냐는 것이다.

'십 할 확률로 꿍꿍이가 있다.'

거기에 원영기 급 요족들이 참여하는 경합에, 아무런 수행도 없는 인족 놈이 6개월 안에 수행을 쌓아 참여한다?

굉장히 수상쩍어 보이기 십상.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100년 안에 진선이 강림해서 금신천뢰문을 쓸어버린다.'

그 안에 금신천뢰문에서 천뢰번을 훔쳐, 서휼이나 현음, 혹은 꿍꿍이속이 있는 용족들의 저물도에 넣어 주는 게 내 목표였다.

하지만 그러려면 100년 안에 내가 용족 사회 깊숙이 흘러들어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나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혹 선수혈합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 경합인지 알 수 있는지요?"

"간단하네. 봉명주의 최하층에 있는 비지에서, 엄선된 요족들과 생존 경쟁을 하면 된다네.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는 최후의 100명이 각기 선수 진혈을 하사받을 기회를 얻지."

"간단하군요."

"그렇게 간단하진 않을 걸세. 봉명주의 비지는 상당히 혹독할 터이니."

나는 잠시 고민한 후, 서휼에게 말했다.

"참여하겠습니다."

"호오…?"

서휼의 눈에 의심의 빛이 어렸다.

하지만 나는 이 정도는 감내하기로 했다.

'어차피 서휼은 내가 숨만 쉬고 밥만 먹어도 계속 의심을 할 거다. 아니, 생각해 보면 내가 지금까지 보인 행동들을 제3 자 입장에서 보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의심스럽지.'

이왕 의심스러운 대상으로 찍힌 것.

어느 정도는 의심스러운 모습을 밀고 나가기로 했다.

"하하, 좋군. 어쨌든 자네도 우리 해룡족 소속이니, 해룡족에서 나온 인재가 선수 진혈을 하사받으면 그 또한 영광이지."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미소지었다.

"그런데 6개월 안에 원영기에 도달할 방법은 있나?"

"음, 혹시 원영기가 아닌 이들은 참가를 못 하는 겁니까?"

"꼭 그렇진 않네. 단지 원영기가 아닌 이들은, 비지의 혹독함에 선수혈합이 끝나기도 전에 죽어 나가는 경우가 상당해서 말이지."

"그렇다면 괜찮습니다. 충분히 살아남을 자신은 있습니다."

"흠, 그렇다면 알겠네."

서휼은 싱긋 웃으며, 비단을 꺼내 그곳에 요족어로 추천장을 쓰고는 비단을 접어, 법술을 부려 어딘가로 날려 보냈다.

"추천장을 선수혈합 개최회로 보냈으니, 차후에 자네도 선수혈합에 참여할 수 있네."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괜찮네. 자네야말로 지내는 데 불편하다든가, 그런 건 없나? 뭔가 더 필요한 거라거나…."

나는 잠시 고민하며 생각했다.

'오혜서 대리가 어찌 되는지, 한 번은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뭐, 서휼 성품에 어련히 잘 대해 줬으려니마는….'

기대는 되지 않았지만, 어쩌면 상당히 쉽게 말해 줄 가능성도 있었기에 나는 한 가닥 희망을 붙잡고 그에게 질문을 하려 했다.

그때였다.

'…잠깐.'

나는 등에 소름이 오소소 돋으려는 것을, 신체를 통제해서 빠르게 막아 냈다.

서휼의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느낀, 정신이 맑아지는 기이한 영기의 흐름.

나는 막연히 '정신을 맑게' 해주는 법술인 것 같다 생각하며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나는 기묘성심전을 속으로 운용하고, 답천의 경지에서 심상을 운용하며 의식을 관조하고 있었기에, 의식에 이상이 생기자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자식, 나를 세뇌하고 있어!'

그랬다.

방에 들어오면서부터 느꼈던 기이한 정신 각성 효과는 사실 각성 효과가 아니다.

머리를 맑게 해 주는 효과도 아니었다.

서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서휼을 향해 무한한 호감이 솟아나게 하는 세뇌 작업!

나는 방에 들어오면서부터 세뇌에 걸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놈이 이 요술의 핵이자 술자.'

서휼이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 그가 짓는 부드러운 표정 하나하나가 세뇌의 일종이다.

나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면서도, 신체 반응을 억눌렀다.

'내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서휼에게 세뇌당했겠어.'

원영기의 의식을 지니고, 답천에 달하는 심상의 깨달음에, 의식에 특화된 기묘성심전을 익힌 내가 이제야 세뇌당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정도였다.

천인기 수사들조차 전심전력을 다해 서휼을 의심하고 처음부터 조사하지 않으면 그에게 세뇌당한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리라.

"음, 필요한 건 뭔가 없나?"

그때, 서휼이 재차 내게 물어왔다.

나는 감정을 정리하고,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휼 님의 은혜가 하해와 같습니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본래 제 동료였던 오혜서라는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있을지요?"

이 세뇌의 용도는 '서휼에게 호감을 품게 하고 그를 의심하지 않게 하는' 것.

내가 동료의 안위를 그에게 묻는 것 자체는 이상할 건 없다.

그리고 내 질문에 서휼은 따스하게 웃으며 답해 주었다.

"물론 아주 잘 지내고 있네. 다만 지난번 말했듯이, 그녀는 내 진혈을 받아들여 우리 해룡족으로 받아들이기로 했고, 지금은 해룡궁의 안쪽에서 내 진혈을 받아들이는 대법을 받는 중이지. 안정을 취해야 하는 대법이니만큼 만나고 싶더라도 조금 참아 주게나."

"아, 그렇군요. 대답에 감사드립니다."

'거짓말하고 있군.'

원립 역시 서휼의 피를 받아 연화했던 녀석이었고.

놈을 고문해서 서휼의 피를 연화했던 법 역시 토설하게 했었다.

녀석의 자백에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느니 하는 과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혹여 제가 선수혈합에 나가서 선수의 진혈을 받으면, 저 역시 오혜서처럼 안정을 취해야 하는 겁니까?"

"하하, 물론이네. 자네가 선수혈합에서 선수진혈을 받을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게 되면, 내 친히 자네를 데려와 자네가 선수진혈을 연화하는 것을 도와주지. 이번에 그녀가 진혈을 연화하는 연화실 역시 자네에게 빌려주겠네."

"은혜로운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서휼의 말을 듣고 확신할 수 있었다.

'서휼은 지금 거짓부렁을 토해 내고 있고, 오혜서는 지금 무슨 꼴을 당하고 있는지 모른다.'

"자, 그럼 더 궁금한 게 있는가?"

"…."

내가 여기서 오혜서를 보러 가려 한다고 하면, 서휼은 안정 핑계를 대며 절대 안 된다 할 터였다.

'지금도 아마 내가 세뇌가 잘 걸리고 있는지 계속 관찰 중일 터.'

이 이상 녀석을 자극할 수 있는 질문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더 궁금한 건 없습니다. 허락하신다면 가서 선수혈합에 참가하기 위해 수행을 쌓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네. 들어가 보도록 하게나. 아, 그리고 자네는 따로 익히고 있는 인족 수도공법이 있는가?"

"예, 있습니다."

"그럼 나중에 제의를 지내는 일도 있을 테니, 제단을 만들고 싶다면 해룡족 원로 전률을 찾아가게나. 인족 제단에 관심이 많은 자이니, 친절하게 설치해 줄 걸세."

"예, 감사드립니다."

나는 서휼에게 인사를 한 후 그의 방을 나왔다.

그의 방을 나서면서도, 나는 한숨을 쉰다거나 긴장을 푸는 일 없이 그대로 쭉 내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해룡궁 전체에, 서휼의 방으로 통하는 영맥의 흐름이 보였다.

내 방에 설치되어 있던 것과 똑같은 흐름.

서휼은 해룡궁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중이었다.

'저조차도 의념의 시야와 영기의 시야, 그리고 계위의 깨달음을 동시에 얻은 내가 아니라면, 해룡족들도 알아차리지 못했겠지.'

미리 회로를 설치해 놓은 내 방 안에 들어서고야 나는 긴장을 풀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도대체가, 이 해룡궁 안에서는 숨도 쉬기가 힘들겠어.'

서휼의 눈이 도처에 깔려 있는 만큼, 실시간으로 감시당한다고 생각해야 하리라.

그래,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해야 했으리라.

'앞으로 내 거처가 될 곳인데, 당하고만 살 수 있겠나.'

우우웅!

나는 어젯밤, 만상인연도를 통해 연기기 6성의 수행을 되찾았다.

하룻밤 안에 연기기 6성이 된 것이다.

7성을 넘지 못하는 이유는, 7성은 제의를 치러야 하기에 그저 절차상으로 넘지 못했을 뿐.

'법력은 충분하다.'

우우웅!

나는 서휼이 내 방에 깔아 놓은 감시용 영맥에 손을 대고, 영맥에 도리어 내 법력을 불어넣었다.

'해룡궁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부 네 뜻대로 놀아난다고 생각했겠지, 이 뱀장어 놈.'

츠츳, 츠츠츳!

서휼의 영맥을 역류해서, 괴군의 회로를 깐다.

영맥 너머로, 미치광이의 회로가 깔려 가며 내 방에만 깔려 있던 회로들이 다른 곳으로 점차 침범하기 시작했다.

월수궁무록으로 정보를 차단하며 회로를 깔았기에, 서휼에게는 정보 자체가 전해지지 않을 터.

'오늘부터, 해룡궁은 내 손아귀에 들어온다.'

서휼은 아마 나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나를 받아들였으리라.

하지만, 그 생각은 잘못되었다.

나는 독(毒)이었다.

이천 년 넘게 고이고, 오래 묵어, 완전히 썩어 버린 독.

그 독이 용족의 심처에 들어왔으니, 이제 곳곳을 중독시켜 버릴 것이다.

츠츠츠츳!

'나한테 오혜서가 뭘 하고 있는지 보여 줄 생각은 없고, 나를 세뇌시킬 생각만 가득한 게 네 의지라면….'

나는 괴군의 회로로 해룡궁 전역을 덮으며 생각했다.

'해룡궁을 손에 넣어 내가 직접 알아내 주지.'

음습하게 자기 성궁 전체에 이따위 법술을 깔아 두어서 고맙다.

이제부터 내가 잘 써 주마.

* * *

6개월은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축기 후기의 수행을 되찾았고, 1, 2년 후면 결단기의 수행 역시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힘을 쓰며 해룡궁 전역에 걸린 서휼의 눈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서휼의 눈을 장악하여 해룡궁을 감시한 결과.

나는 아직도 오혜서를 찾지 못했다.

해룡궁 안쪽에 오혜서가 있다는 말부터가 거짓이었다는 뜻.

'빌어먹을.'

나는 이를 짓씹으며 방 안에서 눈을 떴다.

어느새 선수혈합의 시일이 다가왔다.

나는 준비를 마치고, 해룡궁 밖으로 나갔다.

운심호 밑바닥에 자리한 해룡궁에서 나서니, 해룡궁을 감싼 결계와 그 너머로 펼쳐진 운심호의 호숫물이 보였다.

그리고 결계의 안팎으로, 해룡족들이 거닐거나 헤엄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지나가자 해룡족들은 수군거리며 조금 피하는 기색을 보였다.

대충 들어보자니 아무래도 대체적으로 인족인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것 같았다.

"저 인족 놈, 이번에 선수혈합에 나선다며?"

"서휼 님께서 선수혈합 추천장을 써 주셨다는군."

"도대체 왜 저런 녀석에게…."

"아무리 의식 크기가 뛰어나다지만, 저건 너무 큰 특혜가 아닌가…."

나는 담담히 그들의 말을 흘려넘기며 결계의 가장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얼마 후 서휼이 본체로 호수를 헤엄쳐 내려왔다.

"많이 기다렸나 보군."

"아닙니다."

"일단 내 목에 타고… 모두 듣게나. 이번에 선수혈합에 참가하는 참가자들은 모두 나를 따라 날아오게!"

서휼의 말에, 해룡족의 젊은 원영기, 혹은 결단기 해룡들이 서휼을 따라 날아왔다.

나는 서휼의 목에 매달려 호수를 날아, 그와 함께 봉명주로 날아갔다.

내가 그에게 매달려 있을 때.

서휼이 따스한 목소리로 나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최근 우리 해룡족 사이에, 자네에 대한 험담이 많이 나돌더군. 아무래도 용족이 아닌 인족인 자네에게 특혜를 많이 주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는 자들이 많은 듯하네."

"…그런 것 같더군요."

"우선, 내가 해룡족을 대표하여 사죄하겠네. 자네를 해룡족에 받은 것은 분명 나인데 내가 신경 써 주지 못해 미안하네. 그리고, 그들이 무어라 하든지 신경 쓰지 말게. 나는 이번에 진룡맹의 주요 인사가 되었으며, 비승 전에도 해룡족의 신임받는 왕이었다네. 이 내가 자네의 자질을 눈여겨보고 데려왔으니, 자네는 자네의 길을 걸어가면 될 걸세."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아마 창호자가 이 말을 했으면 감동받아서 절이라도 올렸으리라.

하지만, 정작 이렇게 멋진 말을 내뱉는 서휼의 심상은 시커먼 악의로 꽉 차 있는 것이 보였다.

'향화 때랑은 반대로 신선한 기분이군.'

자신을 잊으라고 일부러 험한 말을 내뱉으며 속으로는 내게 사랑을 전했던 그녀와, 겉으로는 상냥하고 믿음직한 말을 뱉으며 속으로는 나를 의심하고 어떻게 이용해 먹을까 하는 서휼.

굉장히 극단적이었지만, 오히려 너무 극단적이라 신선할 지경이었다.

'아마, 서란의 경우를 생각해 볼 때. 지금 수군대는 용족 놈들의 뒤에는 결국 이 녀석이 있겠지.'

해룡궁에 있는 서휼의 눈을 장악했다지만.

서휼과 함께 있던 날부터, 한시도 긴장을 푼 적은 없었다.

내 행동의 제약은 조금은 풀렸지만, 서휼은 법술이나 요술을 쓰지 않고도 사람의 행동을 제약하는 방법을 너무나 잘 아는 이였다.

세뇌되거나 감시당하지 않음에도, 나는 서휼이 내뱉는 의미심장한 말들 덕분에 해룡궁에서 그동안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사람의 심리를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것에 능한 녀석이다.'

서휼과 지내면 지낼수록.

나는 답답함에 목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방이 막혀 있고, 오직 서휼이 제시하는 길만이 그나마 뚫려 있는 느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나 서휼이 제시하는 것은 언제나 함정이다.

2,000년이나 된 나 같은 노괴쯤 되니 이렇게 숨 쉴 틈이라도 있는 것일 터.

'그렇다면… 오혜서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나는 분명히 서휼과 함께 왔을 오혜서를 걱정하며, 봉명주 안쪽으로 진입했다.

도대체 어디에서 서휼에게 잡혀 세뇌당하고 있는 걸까.

나는 이번 생에 세운 목표가 녹록지 않다는 것을 느끼며.

서휼을 따라 봉명주 최하층.

선수혈합이 치러지는 비지에 도달했다.

이제 선수혈합이 시작될 때였다.

지(地)의 종족 (4)

'어둡군.'

서휼과 함께 도착한 봉명주의 최하층은, 시릴 정도로 춥고 어두운 곳이었다.

'이곳이 봉명주 7층 중 마지막 층.'

봉명주 역시 봉명성처럼 총 7층으로 이뤄져 있었다.

서휼이 행정 업무를 보거나, 진룡맹의 회의가 이뤄지며, 요족들의 시장과 사교회 등 만남이 주로 이뤄지는 최상층인 7층, 생명의 층.

지족의 후기지수들, 혹은 원로들에게 제공되는 영맥이 풍부한 6층, 수행의 층.

지족의 일원이 수행의 경계를 넘기 전, 천겁을 맞기 가장 적절하며, 동시에 가장 안전하게 천겁을 맞을 수 있는 피난처인 5층, 결실의 층.

죽은 지족들의 사체가 모여 있는 영안의 4층, 죽음의 층.

봉명주의 동력실이자, 봉명주 전체에 흐르는 영기의 근원인 근원의 3층, 대지의 층.

동력실 아래에서 뭔가를 보관하는 역할을 하는 2층, 현재는 지족이 모은 보물들을 저장해 놓는 저장고 역할을 하는 저장층.

그리고 봉명주 최하층이자, 선수혈합이 벌어지는 비지가 있는 곳.

봉명주 1층, 허무의 층.

나는 허무의 층이라는 이름을 가진, 최하층에 도달하자 전신의 영기가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게 허무층의 한기인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다.

빛도, 열도, 공기도, 소리도.

심지어 영력마저 희박해, 한번 빠져나간 영력은 어두컴컴한 허공으로 흩어지기 일쑤였다.

까마득한 어둠을 앞에 두자, 나 말고 다른 지족들도 당황했는지, 나를 제외한 다른 지족들 역시 흠칫거리고 있었다.

서휼을 따라온 해룡족의 원영기들 역시 몸을 움츠리고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아니, 해룡족뿐이 아닌 곳곳에 도착한 다른 요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가 선수혈합을 치르는 곳인가?"

"이곳에서 생존 시험을 치른다고? 쉽지 않겠군."

"숨만 쉬어도 영기가 흩어지고 있어."

그들이 모두 두런거릴 때였다.

번쩍!

문득, 어두운 최하층이 밝게 물들었다.

황금빛의 섬광이 사방을 비춘다.

그 섬광에 놀라, 최하층에 도착한 요족들 전부가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를 데리러 왔던 진룡맹 원로, 규련이었다.

"대강 다들 도착한 것 같군. 본 룡은 이번 선수혈합을 주관하게 된 시험관인 진룡맹 장로, 규련이라 한다. 우선 대형 종족에서 온 사축기 수사들이 있으면 모두 자기 종족을 보호하는 걸 멈추고 이쪽으로 오게."

그 말에, 해룡족 측에 있던 서휼과 다른 장소 곳곳에 있던 몇몇 요족들이 하늘로 날아올라 규련의 옆에 섰다.

"으윽…."

"으, 으흐흐… 추, 추워…."

서휼이 사라지자, 주변에 있던 해룡족들이 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이, 이게 서휼 님이 보호를 멈춘 허무층의 추위인가…."

"혹독하군…."

"…?"

나는 주변에서 벌벌 떠는 해룡족들을 보며 순간 의아해졌다.

'뭐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처음 왔을 때부터 끔찍하게 시리던 허무층의 온도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해룡족 후기지수들이 벌벌 떠는 것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뭔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서휼 놈. 나는 처음부터 보호를 안 해 주고 있었나 보군.'

정말로 간단한 사실이었다.

우우우웅!

사축기 지족들이 규련의 옆에 서자, 그녀에게서 뿜어지는 빛이 더더욱 밝아졌다.

'이건….'

나는 규련에게서 뿜어지는 빛의 본질을 알아채며 흠칫 놀랐다.

'생명력, 그 자체?'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허무의 공간 속에서.

규련은 가장 순수한 본원의 영력, 생명의 힘을 '생산'하고 있었다.

'저게 사축기 수사….'

생명의 힘을 깨우친 이들이다.

사축기에 이르면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수명을 얻는다는 것이 사실인 듯, 그녀는 생명력 자체를 뿜으며 어둠을 밝혔다.

'아니, 혼자서 내뿜는 건 아닌가.'

주변으로 몰려든 사축기 수사들의 기운을 빌어, 더더욱 밝은 빛을 뿜고 있는 것이었다.

여하튼, 사축기 수사들이 뿜는 황금빛이 주변을 물들이며, 어둠이 몰려가고 주위의 모습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우리가 있는 곳은 모래사막 위였다.

모래사막 위로, 수많은 특이한 요족들이 뺴곡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해룡족을 비롯하여, 생전 처음 보는 종족들, 그리고 생명체가 맞는지 의심되는 돌멩이 같은 종족들까지.

무수한 요족들이 지천에 깔려 있다.

'만 명? 만천 명? 넉넉잡아 만이천 명 정도 되겠군.'

심지어 저들 대다수가 결단기, 원영기였다.

축기기는 나 혼자밖에 없었다.

그때, 규련이 황금빛 속에서 말을 이었다.

"우선, 이 자리에 와 준 전 요족의 후기지수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대들 모두, 선수혈합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용기 있게, 고작 100명을 뽑는 선수혈합에 참여하였으니. 그러나 동시에 한편으로는 선배로서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 선수혈합은, 재차 말하지만 허무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극한의 생존 시험이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선수혈합은 죽음을 동반한 시험이며, 포기할 이는 지금 당장이라도 포기하기를 권하는 바이다. 선수혈합을 포기할 이는 없는가? 당장 나와라."

그러나 어떤 요족도 나서지 않았다.

규련은 그 모습을 보며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듯했으나, 나는 그녀의 의념에서 안쓰러운 감정을 읽었다.

"좋다. 포기할 이들은 없는 것 같으니 지금부터 선수혈합을 개최하겠다. 선수혈합의 내용은 정말 간단하다. 최후의 100명이 남을 때까지, 그저 살아남으면 된다!"

번쩍!

그녀가 손을 휘두르자, 황금빛 생명력이 주변으로 퍼져 나가며, 각 요족들의 팔, 다리에 기묘한 문양을 새겼다.

요족어로, 만삼천이백오십이(萬三千二百五十二)라는 숫자였다.

"그대들의 몸에 새겨준 숫자가, 현재 비지에 들어온 다른 선수혈합 참가자들의 숫자다. 한 명씩 줄어들 때마다 숫자도 그에 맞춰 달라지지. 그 숫자가 백(百)을 가리킬 때까지 버티면 된다. 하지만 그대들도 알다시피, 선수혈합은 중도 포기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들에게 나눠 준 숫자가 백 이하가 되려면 그대들 중 상당수가 죽거나, 혹은 경합 불능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거다. 자, 그럼 대강 설명은 끝났고, 뭔가 궁금한 게 있나?"

"저, 시험관님. 불능 상태라는 건 뭡니까?"

한 요족이 규련에게 질문하자 그녀는 냉랭한 눈으로, 그러나 속으로는 안쓰럽다는 의념을 흘리며 큰 소리로 답해 주었다.

"죽기 직전까지 몰려, 가사 상태에 이르면 선수혈합 불능 상태라고 인정되어 봉명주 2층으로 전송된다. 다만 보통 그런 상태까지 간다면, 십중팔구 수행이 몇 단계는 떨어질 테니 각오해야 할 거다."

"…알겠습니다."

"또 질문 있나?"

"있습니다. 한 가지 확실히 해 두고 싶은게 있어서 말입니다만… 남은 지족이 100명 이하가 될 때까지 생존하는 게 이 경합의 목표라면, 결국 선수혈합의 주 목적은 다른 경쟁자를 빨리 줄이는 게 관건인 게 맞습니까?"

마치 사마귀를 닮은 듯한 요족이, 살기를 흘리며 규련에게 질문했다.

규련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조금 다르다. 이 선수혈합이란 결국, 선수의 진혈을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 강한 '생명력'을 가진 요족을 뽑는 경합이고, 그런 만큼 '생존력'이 주를 이루는 경합이다. 아마 경합이 제대로 시작되면 이해할 거다."

"예, 뭐… 다른 경쟁자들을 줄여도 된다는 의미로 알겠습니다."

"마음대로 하도록."

사마귀 요족은 킬킬거리며 살기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 요족의 주변에 있던 요족들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그에게서 한두 발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규련은 오히려 그 요족에게도 불쌍하다는 듯한 의념을 보내고 있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진짜 선수혈합이 시작되면 엄청난 생존력을 요한다는 거로군.'

어려울 건 없었다.

지난 6개월간, 나뿐이 아닌 원유 역시 수행을 되찾게 했다.

회귀 직후라서 수행의 기반 자체가 없는 나와는 달리, 원유는 본래 결단기였던 수행의 기반이 있었으니만큼 녀석은 순식간에 결단기 수행을 찾을 수 있었다.

이번 선수혈합에는 원유를 입고 왔으니, 생존력 자체는 걱정되진 않았다.

이내 몇몇 질문들이 더 이어졌다.

"100명이 남기 전에는 선수혈합은 안 끝나는 겁니까?"

"그렇다. 뭐, 뭘 걱정하는지는 안다. 몇 년이 지나도록 선수혈합이 질질 끌릴까, 그게 걱정인 거겠지? 그럴 일은 없다. 길어도 4개월 안에는 결판이 날 테니."

몇몇 질문이 더 이어졌고, 얼마 후.

규련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더 질문은 없는 거겠지? 하면 이제, 진짜 선수혈합을 시작하겠다!"

"옛!"

수많은 요족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규련이 손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내리쳤다.

"지금부터, 선수혈합을 시작한다!"

콰과과광!

그와 동시에, 모래사막이 그대로 산산조각 나며 아래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건…!'

순수한 완력으로 쪼갠 것이 아니다.

나는 규련과 사막 사이에서 일어난 영기의 흐름을 보고, 이 '사막'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사막 자체가 규련의 법술이었던 건가?'

우수수!

사막이 쪼개지며, 그 아래로 시커먼 공간이 드러났다.

마치 허공간 같은 절대적인 어둠이 드러난다.

하지만 허공간과는 다르게, 계위를 읽어서 현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어둠 자체가 허공간이 아닌 현계의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싸아아아아!

'흡!'

나는 몸을 엄습해 오는 정신 나간 한기에 순간 정신을 잃을 뻔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춥다.

선수혈합이라는 것이 만만찮을 줄은 알았다만, 이 정도로 시릴 줄은 몰랐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

절대적인 어둠!

차라리 우주 공간이 이럴까.

'생명력 자체가 빠져나간다.'

이 시커먼 허무 속에서는,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생명력이 빠져나와 허공에서 흩어졌다.

나는 이 정신 나간 추위 속에서 견디며, 왜 규련이 경쟁자를 줄이려 하는 요족에게 냉소를 지으며, 동시에 그 요족을 불쌍히 여겼는지 알 수 있었다.

'경쟁자를 줄여? 웃기는 소리군.'

그딴 짓은 불가능하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영혼까지 얼어붙을 듯한 추위다.

아니, 추위조차 아니다.

이것은 차라리 죽음이었다.

'4층이 죽음의 층이라는데, 죽음의 층은 차라리 1층에 걸맞은 말이 아닌가.'

어느덧 우리의 대지가 되었던 모래사막도 어둠 속으로 흩어져 없어졌고.

빛을 비춰주던 규련과 사축기 수사들 역시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주변에 있던 다른 요족들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우선 무작정 법력을 운용시켰다.

우우웅!

정순지력이 체내를 활발하게 흐르며 죽어 가는 내 몸을 일깨웠다.

웅웅웅!

몸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지며,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대론 안 된다.'

그러나 나는 희미한 빛살마저 점차 어둠 속으로 흩어지는 것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해. 이대로는 생명력이 전부 흩어져 죽는다. 생명력, 생명력을 보는 시험이라.'

딱, 딱딱, 딱딱딱딱!

그동안 한 번도 제어되지 않은 적 없던 몸이, 저절로 이를 부딪쳤다.

의지의 문제가 아닌, [죽음] 그 자체가 목전까지 다가오자 몸 자체가 움직이는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무조건 죽는다.

'그럴 순 없지. 생명력을 보는 시험이라면, 생명력을 활성화시키면 된다.'

그리고 생명력을 활성화시키는 데에는, 수행만큼 좋은 게 없다.

'영기도 희박한 공간이지만, 차라리 잘 되었어.'

이런 공간이라면 오히려 서휼의 눈이 닿지 않는다.

즉, 얼마든지 제대로 수련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영기가 없다는 것 역시 문제되지 않았다.

우우웅!

'만상인연도.'

츠츠츳!

내 앞에 기령의 모습이 떠올랐다.

만상의 인연을 담은 무수한 기령의 군체는, 내 의지에 따라 다시금 '나'의 모습으로 변했고.

'나'는 곧 내 몸에 겹쳐졌다.

즈우우웅!

기령의 체내에 저장되어 있던, 막대한 영기가 내 몸으로 전해져 왔다.

애당초 선수혈합이 생존 경쟁이었다는 걸 들은 순간부터, 최후의 100명 안에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고 여겼다.

월수궁무록으로 기척을 지운 채, 만상인연도의 영기만을 흡입하며 버티기만 하면 끝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혹독한 허무의 환경을 볼 때, 대다수의 요족은 허무의 공간 속에서 버티는 데에만 모든 생명력과 원기를 소진할 터였다.

월수궁무록을 쓸 필요도 없다.

만상인연도의 영기로, 차근히 수행을 하며 시간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우우웅!

나는 그동안 서휼이 의심할까 봐 제대로 수련하지 못했던 창령성광오채대법의 수행을 몸으로 가져왔다.

서휼은 창호자와도 아는 사이였기에, 창령성광오채대법을 수련하는 게 들키면 곤란할 확률이 높아서 지금껏 그의 공법은 수련하지 않았다.

'6개월 동안, 사흘에 한 번씩 서휼이 불러내서 수련 진도를 확인하는데, 창령성광오채대법은 초기에는 몸의 변화가 심해서 바로 알아차릴 수 있으니 조심해야 했지.'

하지만 규련의 말에 의하면, 어쨌든 이 비지 속에서는 4개월 정도의 시간은 벌 수 있는 모양이었다.

'4개월이면, 지난 생에 저장해 놓았던 창령성광오채대법의 기혈을 끌어올 수 있다.'

기(氣)는 곧 혼(魂).

그렇기에 내 혼에 매달린 법보와, 법보에 저장된 만상인연도의 수행이 시간을 넘어서 내게 나와 함께 넘어올 수 있었다.

기(氣)는 곧 생명(生命).

극도로 순수한 영기는, 생명력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영기를 극한으로 밀집시켜, 생명력을 극대화시키는 창령성광오채대법의 수행 역시 회귀 후로 가져오는 게 가능했다.

우득, 우드득!

막대한 생명력이 전신을 맴돈다.

"끄으읍!"

지난 생에 창령성광오채대법을 수련하며 겪었던 고통들이, 짧은 시간 안에 압축되어 내 뇌리를 강타한다.

"…!"

뇌가 얼얼해질 정도의 고통!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내며, 전신을 들이치는 생명력을 받아들였다.

막대한 생명력이 전신을 회전하며 기혈을 끌어올렸고, 지난 생에 만들었던 금강불괴의 육신을 다시 재현하기 시작했다.

우드드득!

나는 전신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겪으며 이를 악물고 수련을 계속했다.

전신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지만, 그 격통은 최하층의 한기와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버틸 수 있다.'

나는 봉명주 최하층에서, 생명력으로 수행을 이어 나가며 미소지었다.

'이대로라면, 끝까지 버틸 수 있어!'

전신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휩싸였지만, 도리어 고통이 주는 열기에 힘입어 한기를 몰아낼 수 있다.

선수혈합에서 끝까지 버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며, 나는 시간을 보냈다.

* * *

어느덧 팔에 기록된 숫자는 빠르게 줄어 나갔다.

며칠만에 만삼천에 달했던 요족들은 오천 명까지 줄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왜 규련이 4개월 안에 결판이 날 거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군, 수가 줄어들수록, 어둠이 강해진다.'

이전보다 더 춥고, 더 황량해졌다.

허무의 층에 있는, 무(無)가 그 자체로 형상화되어 나를 잡아먹으려 드는 것 같았다.

'아직까진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수가 더 줄어든다면 어둠이 더 강해질 것이다.'

그때가 된다면 창령성광오채대법을 수련하며 끓어오르는 생명력보다도, 몸에서 빠져나가는 생명력이 더 많아질 터였다.

'과연 버틸 수 있을까.'

나는 이를 악물고 추위에, 이 죽음에 저항하며 버텨 냈다.

* * *

시간은 매우 느리게 지나갔다.

아무런 빛도, 열기도 느낄 수 없이 어둠 속에서 둥둥 떠다니며 버티기만 몇 개월째.

'이제… 200명이군.'

추위와 어둠은 더더욱 진해졌다.

이제는 숫제 어둠이 눈코입으로 기어들어오는 것 같다.

혈관 자체에 피 대신 어둠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다행히도 나는 만상인연도를 통해 다른 이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자원을 지닐 수 있었다.

버티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그리고, 마침내 규련이 말했던 4개월째.

"후우우…."

숨을 내쉬는 것만으로, 입에서 빛무리가 뿜어지며 어둠 속으로 흩어진다.

'죽는다, 더 버티면 죽는다.'

정말로 죽음이 목젖까지 다가온 느낌이었다.

버티는 요족이 줄어들수록 어둠과 한기는 강해졌고, 이제 남은 요족의 수는 103명.

3명만 더 떨어지면 된다.

하지만 영혼까지 얼리는 듯한 이 한기에, 나는 선수혈합이고 뭐고 그냥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감히 의지력 같은 것으로 극복하기 힘든 추위다.

뿌드득, 뿌드드득!

나는 이를 갈며, 팔에 표시된 숫자에 정신을 집중했다.

백삼이었던 숫자는 다시 백이로 줄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이 정신 나간 추위는 지나간다.

다시 나갈 수 있으리라.

* * *

백일(百一).

이제 한 명만 더 가사 상태에 빠지면 선수혈합은 종료였다.

그러나 나는 그 숫자를 보며 자조섞인 웃음을 지었다.

'생각 외로, 내 생명력이 질기군.'

아니, 내 생명력이 질기기보다는 만상인연도 덕이리라.

만상인연도로 창령성광오채대법을 수련하며 버티는 중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창령성광오채대법으로도 막기가 힘들 정도로 춥다.

단순히 음(陰)의 속성이 아닌,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허무의 공간이었기에 더더욱 버티기가 힘들었다.

정신 자체가 바싹 말려지는 느낌이었다.

'4개월이 아니라 4년 같군.'

하지만 그래도 이제 곧 끝날 것이다.

나는 백일(百一)이라는 숫자를 보며, 빨리 일(一)이 사라지기를 바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친내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백(百).

'드디어!'

선수혈합이, 끝났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뭐지?'

선수혈합이 끝나면 2층으로 전송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아직 아무 일도 없는 거지?

분명히 규련이 말했다.

숫자가 백이 되면 선수혈합이 끝난다고.

'그래, 조금 시간이 걸리는 것일 거야.'

뭔가 문제가 있을 리가 있겠는가.

나는 추위 속에서, 차분히 전송을 기다렸다.

* * *

열흘이 다시 지났다.

'뭔가 이상하다.'

이럴 리 없다.

왜 선수혈합이 끝났는데 아직도 이곳에 있다는 건가?

'서휼의 농간인가?'

서휼이 선수혈합에 참가한 요족들을 모조리 골로 보내 버리려 조작을 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서휼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아니면 내가 추위에 정신이 나가 버려서 시간 감각이 이상해진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정신이 너무 또렷하다.

'내가 미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금의 정신머리로 몇 번이고 생각해 봐도 서휼이 이럴 이유는 없다. 그리고 선수혈합에 참가하기 전 6개월간, 내 나름대로 알아본 바 선수혈합은 매번 공정하게 치러진 경합이다. 서휼이 개입할 여지도 없어….'

나를 죽이려고 일부러 이 짓을 하는 건 아닐 터였다.

내가 아무리 의심스럽다지만, 서휼의 성격이라면 최대한 이용하다가 죽게 만들지, 이렇게 아무 쓸모도 없이 죽이진 않을 터.

'뭔가 잘못됐다.'

나는 추위에 떨며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다시 한 달이 지났다.

'어쩌면… 극악의 확률로 하필 내가 참가했을 때 허무의 층에 이상이 생긴 건가?'

내가 미친 것도 아니고.

서휼이 나를 그냥 한번 심심해서 죽여 보기로 작정한 것도 아니라면.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그것보다, 나는 만상인연도에 축적한 생명력으로 창령성광오채대법을 수련하며 버틴다지만, 다른 요족들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선수혈합이 끝날 때가 된 지 더 2개월이 흘렀다.

그런데도 숫자는 아직도 백을 가리키고 있었다.

'역시, 선수혈합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다. 제길, 이렇게 서은현 냉동식품이 되어 죽을 순 없어.'

나는 죽을 수 없다는 일념으로, 어떻게든 이곳에서 탈출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빠득, 빠드드득!

무형검을 꺼내 주변으로 휘둘러 보았다.

하지만 영기 자체가 없는 구역인 탓인지, 뭔가를 베기도 힘들었다.

허공에 떠 있는 상태로 영기를 끌어모아 분사하며 어둠의 공간을 돌아다녀 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광활하다.

그리고 춥다.

'제발 선수혈합을, 이 허무의 층의 어둠을 발동시키는 뭔가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나는 이를 악물고 어둠 속을 헤쳐 나가며 방법을 찾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 * *

'….'

우득, 우드득….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려 해도 전신이 빠득거린다.

'이대로는… 안 된다….'

뭔가 심각한 이상이 생긴 게 틀림없다.

선수혈합에 참가한 요족들이 전부 최하층에 봉인이라도 된 것일까?

1년째 아무런 희망도 찾지 못한 채.

나는 허무의 공간을 둥둥 떠다녀야만 했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이대로라면 출구를 찾거나 바깥으로 나가는 건 둘째치고.

어둠에 먹혀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추워서, 너무나도 아무것도 없어서 죽을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허무의 공간을 떠다니며 고민할 때였다.

투욱!

팔짱을 끼려던 순간, 내 품속에 있던 뭔가가 내 손을 스쳤다.

'이건….'

작은 영석이었다.

나는 영석의 정체를 기억하고는 영석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요족 상인에게서 샀던 광한결(廣寒訣)이었다.

'가장 기초적인, 요수공법의 기본이라 했나.'

나는 문득, 창령성광오채대법과 광한결을 함께 수련해 보기로 했다.

'허무의 층을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없다면, 구조될 때까지 최대한 버텨 보기라도 하는 수밖에.'

나는 허무의 층을 벗어날 방법을 찾는 대신, 최대한 버티는 방향으로 진로를 정했다.

'버티자, 어떻게든 버티자. 서휼이 수작을 부렸든, 봉명주에 문제가 생겼든, 최대한 버티자!'

우웅!

이를 악물고 영석에 박혀 있는 요족어를 읽어내리며 광한결의 구결대로 영기를 운용한다.

우우웅!

처음에는 조금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허무의 공간에서 1년이 다시 지났다.

나는 영기를 운용하며, '요수공법'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요수공법은 곧 폭발이다.'

호풍응룡변을 익힐 때도 느꼈던 것.

내단, 요수들은 요단 안으로 영기를 밀집시킨 후 폭발시킨다.

그렇게 폭발을 반복하며 점차 요단의 그릇을 넓히고, 그릇의 성장에 따라 더더욱 많은 기를 흡입하여 성장해 간다.

그것이 모든 요수공법의 기반이었다.

하지만 나는 광한결을 읽어 내려가며, 호풍응룡변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공법인지 알 수 있었다.

'서휼 녀석, 호풍응룡변 같은 폭탄을 나한테 익히라고 던져 줬던 건가?'

모든 요수공법의 근간은 다음과 같다.

천지영기는 모두 음양(陰陽)이 태극(太極)을 그리며 회전한다.

그렇기에 영기의 본질을 보는 요족의 눈으로 볼 때 삼라만상이 곧 태극으로 보이는 것.

그리고 요수공법은, 이러한 태극을 요단 내에서 강하게 회전시킨 후, 그 태극을 강하게 부딪쳐서 폭발시키는 것이 핵심이었다.

음양은 서로 부딪히며 폭발하지만, 폭발함과 동시에 조화를 갖추어 순식간에 안정되기에 요수공법은 익히면 고통스러울지언정 그 안정성은 보장되었다.

하지만 서휼이 줬던 호풍응룡변은 태극의 순환에 대한 구결은 없고, 무작정 요단을 폭발시키는 방법만 수록된 것이었다.

'빌어먹을 용가리 놈.'

나는 속으로 서휼을 욕하며 계속 광한결의 구결을 반복해 갔다.

3년이 더 흘렀다.

이제 어둠 속에서 5년을 보냈다.

요수공법은 정말로 단순했다.

연기기 수준에서는 미약한 기를 순환시키며 폭발시킨다.

축기기 수준에서는 자신의 생명력을 요단과 연동시켜 더더욱 강렬하게 태극을 순환시킨 후 부딪혀서 폭발시킨다.

결단기 수준에서는 인족의 금단과 같아질 정도로 튼튼해진 요단을, 몇 번이고 폭발시켜 재구성하며 기를 정련한다.

태극을 순환시켜서 부딪히게 하여 폭발시킨 후.

그 과정에서 정련된 순수한 영기.

즉 생명력을 끊임없이 몸에 채워 가는 것.

그것이 모든 요수공법의 본질이었다.

인족이 음양의 흐름으로 법화단전을 만들고, 다시 원영기에 이르러 음양신을 수련하는 것과 달리.

요족은 처음부터 음양의 흐름만을 무식하게 고집하고 원영기에 이르러 원영을 다시 음양의 흐름으로 순환시키는 것이었다.

'미쳐 버릴 정도로 복잡한 구결을 외고, 제사 의식을 치르고, 하늘의 시운을 읽어야 했던 천족 공법에 비하면… 차라리 본능에 맡긴다고 할 정도로 간단하군.'

아니, 어쩌면 요족들은 본능에 맡겨서 요수공법을 익히는 게 맞는 것일지도 몰랐다.

본래 지성이 없는 들짐승들이, 영성을 얻어 영기를 보는 시야를 얻은 후.

자신들의 시야에 따라 체내의 음양을 순환시킨 후 폭발시킨다.

그만큼 단순하니 오히려 지성이 없었던 요수들이 익힐 수 있는 공법이었던 것이리라.

쿠웅!

나는 단전에서 폭발하는 영기를 느끼며 눈을 찌푸렸다.

'만만찮군.'

비록 인족을 포함한 천족의 공법처럼 복잡하지는 않고 단순했으나, 그게 익히기 쉽다는 뜻은 아니었다.

요수공법은 연체공법처럼, 아니, 어떤 면에서는 연체공법보다 더 끔찍한 고통을 동반했다.

매번 단전에서 영기를 폭발시키는 게 수행의 일환이고, 결단경 요족은 요단 자체를 폭발시켜서 수행해야 하니만큼 매 순간 단전이 박살 나는 고통을 이겨 내야 하는 것이었다.

다시 5년이 지났다.

허무의 층에서 10년!

'도대체 얼마나 시간을 낭비한 건지, 가늠이 안 가는군.'

본래대로라면 영기가 충만한 바깥에서 원영의 경지를 되찾았어야 할 시간!

하지만 나는 허무 속에서 겨우겨우 생존을 도모하며 요수공법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있을 뿐이었다.

꾸웅!

나는 단전이 으스러질 듯한 고통을 느끼며, 광한결과 창령성광오채대법을 동시에 수련했다.

어느덧, 허무의 층의 한기가 고통의 열기에 다시금 밀려나기 시작했다.

두쿵, 두쿵, 두쿵!

'심장 같군.'

요수공법을 수련하고 있자니, 마치 단전에 심장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았다.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동맥을 통해 피가 전신으로 뿜어졌다가, 정맥을 통해 심장으로 돌아오듯이.

단전의 음양이 폭발할 때마다 그 폭발력이 전신을 쓸고 지나가며 몸을 단련시키고, 다시 단전 안으로 응축되며 정순한 생명력이 되어 몸을 회복시킨다.

'생명은, 곧 폭발….'

두쿵, 두쿵, 두쿵!

광한결과 창령성광오채대법이, 폭발을 일으키며 내 생명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

파아아아앗!

나는 내 내단을 축으로, 광한결과 창령성광오채대법이 합일(合一)하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창령성광오채대법이 진화한다.

아니, 아니다.

본래 연체공법이란 요수공법을 열화시킨 하위공법.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요수공법의 운행을 설명한 기초 요수공법인 광한결의 구결이 내단 안에서 운용되며, 열화판이었던 연체공법이 요수공법과 똑같은 조건이 되어 그 본질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게… 창령성광오채대법의 진짜 위력…!'

부우웅!

우득, 우드드득!

춥다.

너무나도 춥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내 몸 곳곳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깨달았다.

뿌득, 뿌드드득!

환골탈태!

오기조원에 이르며 천지영기가 내 몸이 어떻게 해야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는지 알려 주었듯이.

이번에도 천지영기가 다시 한 번 어떻게 해야 내 몸이 더더욱 올바르게 진화할 수 있는지 그 길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뿌드드득!

'이건….'

영기(靈氣)가 눈 앞에서 회전한다.

음양(陰陽)이 이지러지며, 체내로 들어가 이중나선(二中螺旋)을 그렸다.

'아아….'

음양은 이중나선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로부터 쌓여 온 육신의 비밀을 파헤치며 올바른 진화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뿌드드드득!

나는 그 방향에 따라 육체를 맞추어 갔고, 마침내 환골탈태를 끝마쳤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내 의식이 특정한 형(形)을 자연스럽게 취하는 것을 느꼈다.

'그렇군.'

주변을 원형으로 뒤덮던 의식 영역이, 완전한 인간형(人間形)으로 화하여 나를 덮는다.

'인간 역시 제사법을 찾아내어 천족이 되기 전까지는, 일종의 요수였다는 건가.'

꾸구국….

인간으로 변한 의식과 동시에 몸을 움직이며 주먹을 쥐자,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정도로 막대한 힘이 주먹에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후우우….'

드디어, 요수공법의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

그와 동시에 나는 김영훈에 대한 경외감에 휩싸였다.

'연체공법도 접하지 않은 무림인의 몸으로, 무공의 연원을 거슬러가 인간의 요수공법으로 가는 길을 찾아냈단 말인가?'

한때 김영훈이 등봉조극 너머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분투하며 찾았던 '또 다른 길'.

그것은 바로 요수공법이었던 것이었다.

서란의 서고에서 찾았던, 진짜 짐승들을 위한 요수공법이 아닌, 인간을 위한 요수공법!

그것이 김영훈이 무공을 진화시키며 찾아낸 또 다른 길이었던 것이다.

'허, 결국 그 길은 제가 다다르게 되었군요.'

난 그 당시 회차의 김영훈을 떠올리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치이이….

'여기까지인가보군….'

나는 환골탈태를 마치고, 전신에서 빠져나가는 생명력을 보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환골탈태를 하며, 요수공법의 진의를 깨달은 건 좋았다.

하지만 환골탈태를 하며 체내에 있는 영기를 거의 다 써 버렸다.

만상인연도에 남은 생명력도 거의 없었다.

천지영기가 충만한 곳이었다면 바로 영기를 보충할 수 있었겠지만, 이 절대 죽음의 영역에서는 그런 것이 불가능했다.

'이렇게 어이없게 죽는 건가….'

나는 점차 눈이 감겨 오는 것을 느끼며 웃었다.

'뭐, 그래도… 김영훈이 발견했던 다른 길이 뭔지, 확인은 했으니….'

어쩌면 그렇게까지 허무한 죽음은 아니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것이 내 열여섯번째 회귀인 줄 알았다.

* * *

[십 년을 버텼군.]

"…?"

타닥, 타닥….

나는 모닥불 앞에서 눈을 떴다.

'여긴… 어디지?'

어둡다.

춥지는 않았지만, 이곳 역시 어두웠다.

하지만 뚜렷하게 잘 보였다.

하지만 '빛'이 없다!

이상하다.

눈 앞이 이렇게나 잘 '인지'되는데, 정작 '빛'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나 뚜렷하게 느껴진다.

'뭐지, 이건?'

기이하다.

생물은 '빛'을 통해 사물을 인지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빛'이 없는데도 주변의 모든 것이 인지되는 느낌이었다.

눈앞에는 모닥불이 있다.

하지만 모닥불은 '빛'이 없었고, 그저 '열기'만 있을 뿐이었다.

모닥불의 주변에는 수많은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하나같이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예술 작품들이었다.

내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할 때였다.

[앉게. 십 년을 견뎠으니, 본좌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십 초뿐일세. 물론 진짜 십 초만 대화하면 서로 아무것도 못 건질 테니, 본좌가 시간을 왜곡시켜 일 초가 일 다경으로 흐르게 했네.]

"무슨…."

앞에 '누군가'가 앉아 있다.

나는 [그]를 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 끄으으으윽!"

눈알이!

눈알이 갑자기 기화(氣化)한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상대를 '인식'하려 하자마자 눈알 자체가 증발해서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다.

아니, 눈알뿐이 아니다!

전신이, 전신이 기화한다!

'주, 죽는….'

[앉게.]

다음 순간.

[그]가 앉으라고 하자마자 기화하던 육신은 다시 가라앉았다.

그리고 나 역시 어느새 주변의 조각상 중 한 곳 위에 다소곳이 걸터앉은 자세가 되어 있었다.

[본좌를 직시하지 말게. 본좌의 본체라면 자네 격에 맞추어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본좌는 본체가 남긴 잔념, 분체이기에 오히려 격을 조절하지 못해 죽을 수 있다네.]

"허, 허억… 허억…!"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본좌는 해방(解放)의 주인이니, 본좌를 직시한다면 자네를 이루는 본질이 모두 자네라는 틀에서 해방되어 기화해 소멸할 것이네.]

"다, 다, 당신은…."

머리가 어지럽다.

눈앞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짐작하자마자, 갑자기 의식이 무너질 듯이 흔들렸고, 방향 감각이 사라지며 당장이라도 바닥에 처박힐 것만 같다.

10년의 세월 동안 허무 속에 처박혔던 고통은 순식간에 잊혔고, 새로운 공포와 경외, 숭배감이 뇌리에 덧칠된다.

[본좌의 이름은 봉명(奉命). 자네가 들어온 봉명추(奉命鎚)의 제작자라네.]

눈앞의 존재는, 최소 진선(眞仙)이다.

[자네와 이야기하기 위해 십 년의 세월을 왜곡하여 자네를 이곳으로 불러들였다네. 그럼 어디 얘기를 나눠 보겠나, 종명자(終命者)?]

지(地)의 종족 (5)

머리가 얼얼하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것 같다.

뇌가 그대로 뭉개지는 것 같다.

버틸 수가 없다.

기이한 이명이 사방에서 울리고, 눈앞이 흐려진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하지만, 미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이제 그만하지.]

우뚝!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내 정신은 강제로 다잡아진다.

천장단애 아래로 떨어지려는 그때, 누군가가 내 머리채를 강제로 잡아 끌어올리려는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목이 뽑혀 나갈 것 같은 고통이 온다.

마찬가지로 나는 영혼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강제로 혼란 속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허억…! 흐억…!"

[내가 자네를 찾은 건 세 가지가 궁금해서라네. 세 가지만 답해 주면 물러가지.]

나는 강제로 정신이 다잡혔지만, 그래도 도저히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버텨라, 버텨…!'

하지만 버텨야 한다.

버티지 않으면, 설령 회귀를 하더라도 몇천 년간, 몇만 년간 수많은 생을 정신이 나간 채로 낭비하게 될지도 모른다.

버텨야 한다!

"끄…으아아아아아!"

콰드득!

나는 내 팔을 들어, 그대로 입을 열고 팔목을 쥐어뜯었다.

붉은 피와 아릿한 고통이 들어온다.

고통이 생기자, 고통이 혼란을 중화하며 조금 정신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하문…하십시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눈앞의 존재에게 말했다.

눈앞의 존재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정신력이 강하군. 아무리 종명자라도 이야기의 초반부에는 벌레나 다름없는데, 이렇게 빨리 제정신을 찾을 줄은.]

"…."

[좋아, 자세가 된 것 같으니 질문을 하도록 하겠네. 첫 번째 질문, 자네가 받은 명(命)은 무엇인가.]

"…!?"

발설하면, 안 된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문득 혼란스러운 뇌리 안쪽으로 그런 생각이 지나쳤다.

'발설하면 안 되고 자시고, 뭔지도 모르는데?'

뭐라 대답해야 할까.

내가 멍청하게 가만히 있자, 봉명이 말했다.

[흠, 아직 모르나?]

"…."

[흠, 신기하군. 어떻게 자기 명도 모르는 종명자가 봉명추의 어둠 속에서 10년을 버티고, 내 앞에서 이리 빨리 의식을 찾는단 말인가?]

봉명은 의아한 듯이 읊조리고는 다음 질문을 이어 갔다.

[두 번째 질문, 자네는 자네를 데려온 존재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

그건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나를 데려온 존재?

내가, 우리가 이 세상에 떨어진 것이 그냥 떨어진 것이 아닌 누군가가 우리를 데려온 거라고?

내가 의아해할 때였다.

[이것도 모르나 보군. 하긴 명도 못 깨달은 종명자에게 많은 기대를 할 순 없지. 이야기가 더 진행되면 나중에라도 기억이 날 터.]

"…."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내가 아리송하게 그의 얘기를 듣고 있을 때였다.

[마지막 질문, 자네는 상제(上帝), 혹은 천존(天尊)을 만난 적이 있나? 직접적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도 그런 존재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적이 있나?]

"어…?"

그와 동시에.

뿌드드드득!

"끄아아아아아아!"

나는 머리가 폭발할 것 같은 고통에 휩싸여 비명을 질렀다.

봉명의 목소리가 뇌리를 파고든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는 아무 반응이 없었건만, 세 번째 질문이 뇌리에 닿자 당장이라도 머리가 폭발해 버릴 것 같았다.

"흐아아아악! 끄아아악! 어아아악!"

당장이라도머리를폭발시켜죽어버리면조금편할까나는기억하면안되는것을지금기억하려하고있는지도모른다그때그마을에서나는분명히….

[진정하게.]

뚝―

"…?"

'뭐였지?'

방금 뭔가 굉장히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났던 것 같다.

봉명이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군, 벌써 두 번이나 접촉했군. 충분히 대답이 됐네. 대답에 응해 줘서 고맙군.]

"…??"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나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이 존재는 침묵만으로도 뭔가 정보를 얻은 듯했다.

내가 이해를 못 하고 있자, 봉명이 내게 말했다.

[나는 의문을 풀었으니, 자네가 궁금한 것을 말하게. 벌써 6초나 지났으니, 4초 안에 전부 대답해야 할 걸세.]

"4초…?"

나는 순간 의아해했다가 봉명이란 존재 앞에서는 시간의 개념이 의미 없다는 걸 기억하고는 그러려니 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시간을 왜곡하는 게 가능하시다면 어째서 10초를 열흘 정도로 바꾸시지 않았는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물었다.

[나는 분체(分體)고, 내가 영향력을 투사하는 봉명추는 폐기된 선보이기 때문이네. 그러니 왜곡의 정도가 적을 수밖에.]

"진선은 시간을 왜곡시킬 수… 아니…."

나는 쓸데없는 질문을 빠르게 넘겼다.

지금은 진선의 능력 같은 것보다 더욱 중요한 걸 물을 수 있는 기회다.

"종명자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 같은 존재가 더 있는 겁니까?"

[종명자가 무엇인지는 종명자들 자신밖에 모르지. 그래서 내가 아까 자네에게 명을 깨달았느냐 물은 것이고. 종명자들은 나보다도 아득한 시간 이전부터 쭉 있어 왔네.]

"양수진은… 전대 종명자…입니까? 그도 진선에 도달했습니까?"

[맞네. 그도 이야기 초반에는 자네만큼 약했지만, 이야기의 종장에는 진선의 한계에 도달하는 데에 성공했지.]

"이야기란 무엇입니까?"

[명(命).]

"…."

운명이라….

"혹시, 종명자를 찾아다니는 [뭔가]가 당신…."

[쉿.]

툭!

갑자기 입이 사라졌다.

문자 그대로였다.

[입]이 사라졌다!

[보아하니 선대 종명자가 남긴 전언을 받은 적이 있나 보군. 하지만 입을 조심하게. 생각을 조심하게. 떠올리는 것 자체를 조심하게. 내가 자네를 만나게 된 것은, 선보를 준비해 놓고 수많은 역사를 살며 깔아 놓은 안배이자 인력(引力)이지만, 선대가 자네에게 전한 방식은 말도 안 되는 확률의 기적이야. 내 방식은 종명자의 기적만큼 안전하진 않네.]

어쩐지, 만약 봉명이라는 존재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존재라면.

그는 지금 자신의 입에 검지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입을 다물라는 표시를 하고 있을 것만 같다.

물론 그를 직시할 수 없기에 자세히는 몰랐지만, 만약 저 존재가 인간처럼 생겼다면 왠지 그럴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네가 뭔가를 들여다보려 하면, 그 뭔가도 자네를 자세히 들여다볼 걸세. 생각하지 말게. 떠올리지 말게. 입에 함부로 담지 말게. 종명자와 안전한 곳에서 대화하기 위해 굳이 하계에 이런 본원의 어둠을 남겨 놓은 것이니 부디 입을 열어 화를 부르지 말게.]

"…."

어느새 다시 내 입이 생겨나 있었다.

"…바깥에서는 함부로 입을 열고 다니지는 않았습니다."

[좋군. 늘 경계하게, 삼천세계 삼라만상 [빛]은 [그것]의 끄나풀이니, 빛이 비취는 곳에서는 늘 다물게.]

빛?

"영원히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말씀…이시군요."

[이야기의 초반부에서는 그것도 좋겠지.]

나는 경악했다.

빛?

빛을 조심하라고?

빛이 살아 있는 존재라도 된다는 듯한 저 말투.

그동안 평온하게 햇볕을 쬐고, 달빛을 쐬며, 별빛을 맞았던 그 모든 순간이 문득 공포스러워졌다.

'그래서, 이 공간에 [빛]이 존재하지 않는 건가?'

"…위대하신 분…께서는 왜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까?"

[종명자는 기적을 일으키기 때문이지.]

"…?"

모호한 답이다.

하지만 나는 봉명의 말투에서 더 이상 자세한 질문을 불허한다는 기색을 읽었다.

아니, 읽었다기보단 그가 보여 줬다고 해야 하리라.

"만약 도와주실 거라면, 직접적으로 도와주시면 아니 되는 겁니까?"

[예를 들면?]

"소원을 들어주신다거나…."

[진선은 종명자에게 액(厄)을 제외한 그 무엇도 직접적으로 줄 수 없네. 횡액이라면 얼마든지 점지해 줄 수 있지.]

"…."

[이렇게 정보를 전달하는 정도가 한계야. 그리고 이마저도 벌써 시간이 다 되어 가는군.]

봉명이 내게 말하였다.

[마지막 질문을 골라 하게.]

"…당신들은, 종명자들의 능력을 전부 알 수 있습니까?"

[불가능하진 않지.]

"…!"

내가 흠칫 놀랐을 때였다.

갑자기 시야가 일그러진다.

동시에, 나는 내 몸이 녹아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 그렇구나.'

지금껏 내가 이 존재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이 존재가 그것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본체도 아닌 분체를 마주하는 것조차 만나자마자 소멸했어야 옳다.

그와의 만남이 다하자마자, 그가 관심을 돌리자마자 이렇게 몸과 혼 자체가 붕괴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눈앞이 녹아들어 감과 동시에.

[본래의 시간으로 돌려 주마.]

봉명의 목소리가 들리며, 나는 의식을 잃었다.

* * *

춥다.

"…!!!"

나는 눈을 번쩍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허억…헉…!"

입을 벌리자마자 생명의 빛이 흘러나온다.

나는 팔뚝을 바라보았다.

백(百)자가 적혀 있다.

여전히 추웠으나, 나는 어쩐지 따스하다고 느껴졌다.

죽을 듯한 어둠과 한기였지만, 어째선지 상당히 밝고 따스하게 느껴진다.

어째서일까.

'이것보다, 더욱 깊고 거대한 어둠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나는 방금 만났던 존재를 떠올렸다.

'잠깐, 내가 누구를 만났지?'

[이름]이,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와 만났던 일들은 전부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가 누구였는지는 뇌리에서 지워진 듯했다.

오싹, 오싹….

너무나 공포스럽다.

아니, 차라리 이름을 잊은 건 다행일 수도 있었다.

'뭔가를 들여다보면, 뭔가도 나를 들여다본다.'

내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계속 떠올린다면.

그 역시 나를 계속 들여다보리라.

어쩌면 그것은 격외의 존재로서 필멸자인 나를 배려해 준 것이리라.

내가 가슴을 진정시킬 때였다.

번쩍!

저 위쪽에서, 익숙한 황금빛이 퍼져 나왔다.

"선수혈합이 끝났다. 마지막까지 남은 100명에게, 선수진혈을 부여할 것이다!"

규련이었다.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이제야 현실로 돌아왔음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황급히 외쳤다.

"어, 얼마나 지났습니까? 저희가 이곳에 갇힌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습니까?"

"흠? 4개월 하고도 딱 나흘이 더 지났다. 어둠 속에 갇혀 있으니 시간 감각이 무뎌졌나 보군."

"…4개월…."

규련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4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10년의 세월을 경험하고 온 것이었다.

체내의 혈맥에, 10년간 쌓아 올려 진화시킨 창령성광오채대법이 또렷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배려인지는 몰랐으나, 내가 10년간 소모한 만상인연도의 생명력은 10년 치가 아닌 딱 4개월 치만 소모되어 있는 상태였다.

직접적으로 내게 뭔가를 줄 순 없지만, 이런 식으로 간접적인 선물은 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진선들은 정말로, 무시무시한 존재다.'

나는 10년 동안 어둠 속에 갇혀서, 빛 한 점 보지 못했던 공포스러운 세월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내가 10년을 버텼기에 10초 정도를 준비했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 말인즉슨, 내가 버틸 수만 있었다면 [그]는 100년이고 1000년이고 시간을 왜곡할 수 있었다는 뜻이었다.

'아니, 더 생각하지 말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를 계속 생각한다면 [그]가 나를 들여다볼지도 몰랐다.

그 존재는 내게 우호적이었으나, 나는 그런 존재가 나를 들여다볼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공포스러웠다.

'생각하지 말자,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지금은 그냥…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규련의 인도에 따라 봉명주의 최하층을 나갔다.

* * *

"…하여, 위 요족의 유망주들은 훌륭하게 선수의 혈통을 이을 수 있음을 증명하였으므로 진룡맹 최고회에서는 이번 선수혈합에 참가한 인재들에게…."

선수혈합이 끝난 후.

살아남은 100명 안에 든 나는 말 없이 봉명주의 2층에서 원기를 회복하며 선수혈합을 주관한 규련의 연설을 들었다.

하지만 솔직히 별 실감은 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추위와 어둠 속에서 미쳐 버렸고, 지금 보고 있는 건 전부 환영일 수도 있지.'

그만큼 [그]의 존재감을 맨정신으로 받아 내는 일은 힘겨운 일이었다.

'전명훈이 정신이 나가 버린 게 이해가 간다.'

[그런] 것이, 호의를 가진 것이 아니라 작정하고 악의를 뿌려 대며 천벌을 내렸다.

전명훈 하나 정도는 충분히 광인으로 만들어 버리기 충분한 존재감이었다.

나는 문득, [그]의 존재감을 생각하자, 천뢰번을 훔친다는 목표가 더할 나위 없이 두렵게 느껴졌다.

'천뢰번을 훔치다가, 혹여나 내가 [그런] 존재를 직시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과연 나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과연 목표를 지켜 나가는 게 옳은 일일까.

'내가, 과연 진선을 보고도….'

그때였다.

투욱….

서휼이, 내 어깨를 잡았다.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칭찬해 주었다.

"축하하네. 이제 진정 선수 진혈을 받아들여 우리 지족의 일원이 되겠군."

그의 웃음은, 여전히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선수 진혈을 선택해 받고 나면, 지난번 주었던 호풍진혈변의 상위 판인 호풍성혈변(呼風聖血變)을 내어 주지. 호풍성혈변을 익히면 선수의 진혈을 자네의 몸에 빠르게 연화시켜 경지를 높일 수 있을 걸세."

"…하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호풍성혈변.

이름만 들어도 서휼이 정겨운 뒤통수를 준비해 놓았을 게 뻔한 이름에다가, 내게 호풍성혈변을 제안하는 서휼의 심상은 온갖 더러운 꿍꿍이속으로 가득 차 있다.

"자네 동료인 오혜서, 그녀 역시 내가 익힌 호풍성혈변을 현재 훌륭히 수행 중이지. 자네도 그녀와 같은 공법을 익히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야."

'아….'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하해와 같은 은혜에, 늘 감사드릴 뿐이옵니다."

알 수 있다.

오혜서는 지금 분명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고, 그런 그녀가 익히는 호풍성혈변이라는 공법을 익히면, 그때부터 나도 서휼의 노예 생활이 시작될 터.

'…그렇군.'

"참가자 서은현은 앞으로 나오라!"

규련이 생존자 중 한 명인 나를 호명했다.

선수혈합의 생존자들을 가리는 단상 위에는 수 개의 선수 진혈이 한 방울씩 준비되어 있었고, 나는 올라가서 선수 진혈을 골라 받기만 하면 된다.

나는 등 뒤에서 눈웃음을 짓고 있는 서휼을 보며 웃었다.

"…정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서휼 님."

"하하, 아닐세. 전부 자네가 노력한…."

나는 내 앞에서 사탕발림을 하며 떠드는 서휼의 거짓부렁을 모조리 흘려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서휼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고맙다, 서휼.'

잠시 진선이라는 공포스러운 존재에게 쫓겨 내 목적을 잊어버릴 뻔했다.

하지만 서휼의 수작질을 보는 순간, 그 더러운 놈 특유의 의식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역겨움이 공포를 이겨 냈다.

'천뢰번을, 반드시 훔쳐 낸다.'

전명훈을 위한 애틋한 마음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상만사 제 잘난 줄만 알던 전명훈이 모든 것을 잃고 구슬프게 울던 그 모습은 얼핏 지난날의 나를 떠오르게 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심상을 가지게 되는 건, 괴군이나 서휼.

나 정도만 있으면 이제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전명훈이 미쳐 날뛰게 되면, 이렇든 저렇든 무수한 인족은 물론이고 마족들도 낙뢰자 전명훈에게 학살당하게 된다.

전명훈에게서 시작되는 비극을 막을 수 있다.

'천뢰번을 훔쳐서….'

쉴 새도 없이 역겨운 수작을 부리는 서휼의 주머니 속에 꼭 넣어 주기로 결심했다.

[그]와 대화했던 기억은 무시무시하게 공포스럽고 끔찍했다.

이런 좋은 경험을, 나 혼자만 누려서야 되겠는가.

서휼도 반드시 알게 해 주리라.

'고맙다, 서휼.'

네놈 덕에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서휼을 뒤로한 채, 단상 위로 올라가 규련 앞에 섰다.

"선수혈합의 생존자로서, 그대는 총 일곱 종의 선수 진혈 중 한 진혈을 고를 수 있다. 어떤 진혈을 고를 것인가."

눈앞으로 각각 한 방울씩의 핏방울이 떠올랐다.

각각, 선수 흑룡(黑龍).

선수 태호(太虎).

선수 청붕(靑鵬).

선수 유리공작(琉璃孔雀).

선수 음귀현무(陰鬼玄武).

선수 파산마원(破山魔猿).

선수 백익천마(白翼天馬).

"저는…."

핏방울에 영기가 서리며, 각각의 핏방울 위로 선수들의 형상이 아른거린다.

흑색의 비늘을 가진 용의 형상이, 거대한 범의 모습이, 청색의 붕조의 모습이,

칠채색의 공작의 모습이, 귀신을 거느린 현무의 모습이, 전신에 산이 돋아나 있는 원숭이의 모습이, 백색의 날개를 단 말의 모습이 핏방울 위로 스친다.

"이것으로 선택하겠습니다."

나는 한 가지 선수진혈을 가리켰다.

작가의 말 :

전개에는 그렇게 큰 영향은 미치지 않는 사소한 설정집.

회귀수선전에 등장하는 선수들 간의 관계.

―흑룡과 태호는 성정이 맞지 않아 만나면 싸운다. 두 선수는 다른 선수들 대다수와 사이가 좋지 않아 만나면 으르렁거린다.

―청붕은 흑룡을 만나면 새끼를 잡아먹으려 하고, 태호를 만나면 기가 눌려 도망친다. 유리공작을 제외한 다른 선수들과는 사이가 좋다.

―청붕은 유리공작을 만나면 죽이려 하고, 유리공작은 청붕을 만나면 자기 알을 낳게 하려 한다. 청붕뿐이 아닌 태호를 만나도, 흑룡을 만나도, 마원을 만나도, 천마를 만나도 알을 못 낳을지언정 모두 교접하고 싶어 하기에 선수들 사이에서는 가장 평판이 나쁘다. 다만 음귀현무의 음기는 자기 알에 도움이 되지 않아 피해 다닌다.

―음귀현무는 파산마원을 만나면 귀신들을 데리고 와 신나게 함께 노닌다. 음의 기운이 강한 선수들 사이에서는 환영의 대상이나, 양의 힘이 강한 선수들에게는 경원시당한다.

―파산마원과 백익천마는 서로가 가진바 힘의 성질 때문에, 서로가 만나면 사이가 좋든 나쁘든 무조건 천재지변이 일어난다. 두 선수는 다른 선수들과는 늘 무난한 관계를 지닌다.

지(地)의 종족 (6)

내가 선택한 것은, 흑룡(黑龍)의 진혈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용족 안으로 파고들려면, 같은 용족의 피를 받아 연화시키는 게 가장 유리하겠지.'

더군다나 흑룡은 태음(太陰)을 상징하며, 물(水)의 힘을 다스리는 선수였기에, 흑룡족의 방계인 해룡족의 안에서는 고개를 당당히 들고 다닐 수 있었다.

더군다나 흑룡의 진혈을 받으면 흑룡왕 현음의 비밀 역시 파고들 여지가 생기며.

동시에 현재 인족 총연맹에서 마계 침공의 선봉장이 될 흑린어령문과도 관계를 맺을 기회가 생길 터.

흑룡의 진혈 하나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물론, 흑룡의 진혈을 받아들임으로써 역으로 흑룡왕이 내게 영향을 끼친다거나 하는 일도 있을 수 있겠으나, 솔직히 그는 그렇게 두렵지 않았다.

'정말로 두려운 건, 그런 자가 아니지.'

[그]를 만났을 때의 공포감과, 흑룡왕을 만났을 때의 압박감을 생각해 보면 흑룡왕이 피를 이용해 내게 어떻게 영향을 끼친다거나 하는 일은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래, 흑룡 진혈이라니 좋은 선택을 했다."

규련은 같은 용족의 진혈을 선택한 내가 대견한 듯이 빙긋 웃으며 나를 칭찬해 주었다.

나는 흑룡 진혈 한 방울을 하사받은 후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서휼 역시 빙그레 웃으며 내게 덕담을 쏟아부었다.

"역시 자네는 혜안이 탁월하군. 지족에서 용족의 힘만큼 존숭받는 힘은 없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했네. 더군다나 흑룡의 힘이라면 호풍성혈변에도 완벽히 궁합이 맞겠어."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좋네, 이번에 해룡궁에 돌아가는 대로 즉시 자네가 흑룡 진혈의 연화를 빨리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겠네."

'최선을 다해 도와주기는 무슨.'

하지만 나는 겉으로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마주 웃을 뿐이었다.

"서휼 님의 은혜에 늘 감사할 뿐입니다."

돌아가자마자 나를 돕는다고?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이번에 선수혈합에 참여하기 4개월 전에, 씨앗을 뿌려 놓고 왔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소식이 들릴 때가 됐지.'

아니, 해룡왕이 딱 해룡궁에 도착하면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일부러 이 시간대에 소식을 들을 수 있게 조작해 놓았기 때문.

나는 선수 진혈을 받고 서휼과 함께 웃는 낯으로 다른 해룡족들과 해룡궁으로 돌아왔다.

"자아, 본 해룡족에 자네같은 경사가 났으니, 이번에 큰 잔치를 열어 볼까 생각 중이네. 아, 그리고…."

서휼이 뭐라고 떠들 때였다.

"음?"

그는 문득, 해룡궁이 자리한 운심호 바깥으로, 무수한 해룡족들이 나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흠, 다들 무슨 일로 나와 있습니까?"

"저, 그것이…."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해룡족의 원로 중 한 명이, 송구스러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해룡궁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하여 해룡궁 곳곳에서 여러 귀중한 보물들을 털어 갔습니다."

"허어, 어찌 도둑 따위가 해룡궁에 침입하였단 말입니까?"

"그, 그것이… 송구하옵니다. 신 등이 열과 성을 다해 조사를 하고 있사오나…."

"우선, 도둑맞은 해룡궁 재산의 규모부터 고하십시오."

"…해룡궁의 내탕금이 모조리 털렸습니다."

"…뭐라?"

서휼이 눈꼬리를 씰룩였다.

그는 인간형으로 변하여, 지엄한 표정으로 원로들을 둘러보며 말하였다.

"지금 천인기 원로인 그대들이 철통같이 지키는 해룡궁을, 듣도 보도 못한 도둑놈들이 그리 쉽게 드나들며 도둑질을 했단 말인가?"

원로들을 대하던 그의 말투가, 종족의 원로가 아닌 자신의 신하들을 대하는 말투로 변했다.

"내 보아하니, 이는 바깥의 도둑이 아닌, 본 족 내부에 도둑이 있거나, 혹은 공조한 자가 있는 것인즉. 그대들 모두 내탕금이 전부 사라진 이 상황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일세."

"…송구할 따름입니다."

지금껏 보아왔던 서휼의 모습에서는 처음 보는, 그가 '화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화난 척만 하고 있군. 별로 동요도 없어.'

서휼은 자기 내탕금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별로 아쉬워한다거나 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저 이 일을 빌미로 신하들의 기강을 잡으려는 듯 보일 뿐이었다.

'심상이 악의로 가득찼지만, 물욕은 없군.'

나는 서휼을 자세히 관찰했다.

'하지만 물욕이 없는 대신, 이런 기회를 살려서 자신의 정치력으로 바꾸는 데에 능한 자다.'

아마 당분간은 이 일을 빌미로 해룡궁 집안 정리에 바쁠 터.

그 정도면 된다.

며칠 정도의 시간만 번다면 나는 그 시간 동안 흑룡진혈을 서휼의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까지 연화할 수 있었으니 말이었다.

애당초, 해룡궁에 든 도둑은 내가 끌어들인 녀석들이었다.

해룡족에게 운심호의 패권을 빼앗긴 수많은 수저 요족들에게, 회로를 깔아 완전히 내 손아귀에 넣은 해룡궁의 곳곳을 열어 주고, 해룡궁의 구조를 그린 지도를 넘겨주었을 뿐이었다.

'안 그래도 해룡족에게 불만이 있었는데, 내가 이런 기회까지 만들어 주니 신이 나서 서휼이 선수혈합에 가 있는 동안 도둑질을 해 댔겠지.'

해룡궁에 이런 일이 생겼다면, 서휼 본인 역시 바로 나에게 집중한다거나 하진 못할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자네의 수행은 사흘 후에 봐 주겠네. 그동안은 일단 함부로 흑룡 진혈을 연화하려 시도치 말고, 최대한 생명력을 끌어올려 놓게나."

"알겠습니다."

서휼은 해룡궁 내탕금 문제로 해룡족 원로들과 상의를 하러 떠났고, 나는 일단 해룡궁 안으로 들어가, 우선 선수혈합에서 입고 있었던 혈체피갑을 해제했다.

촤르르륵!

내 몸과 합일해 있던 살덩어리가 떨어져 철퍽거리며 한 명의 인영을 형성했다.

원유였다.

나는 원유를 시켜 먹과 붓, 그리고 광한계에서 편지를 보낼 때 쓰는 질 좋은 비단을 가져오게 했다.

전음부라는 편리한 수단이 있음에도 구태여 편지를 보내는 것은,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 최대한 잘 보이고 싶을 때 쓰는 일.

사흘의 시간을 벌었으니, 이제 사흘의 시간동안 서휼에게서 벗어날 방도를 찾아야 한다.

회귀한 지도 벌써 10개월.

나는 서휼의 추천으로 인해, 해룡족에 속한 명백한 구성원이었다.

그러나 서휼은 내가 고작 축기기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나를 늘 해룡궁 바깥으로는 일부러 나가지 못하게 했다.

해룡궁 안쪽은 어차피 장악했다지만, 해룡궁 바깥으로는 나가지 못하는 바람에 해룡족과, 해룡궁 인근에 있는 수저 요족 몇몇을 제외하고는 안면을 틀 이들도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호풍성혈변 같은 걸 익힌다거나 하면 해룡궁은 나갈 수 있을지 몰라도, 서휼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

이쯤에서 해룡궁을 나가야 한다.

나는, 서휼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나와 안면이 있는 용족.

규련에게 편지를 보냈다.

―존경하는 규 선배님께.

후배 말학인 서 모가 서한을 보냅니다.

규 선배님의 배려에, 서휼 님과 해룡족 전원, 그리고 저는 운심호에 자리를 잘 잡고 평안하게 수행에 힘쓰고 있습니다.

서휼 님께서도 얼마나 규 선배님에 대한 감사를 표하시는지 모릅니다. 이번에 이렇게 귀찮게 서한을 보낸 것은, 이번에 선수혈합에 참가하여 얻은 흑룡 진혈의 연화를 도와주십사 부탁드리고자 함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규 선배님의 용족다운 기풍을 늘 경외하였고, 규 선배님께서는 저와 제가 속한 해룡족의 은자이시니 규 선배께서 흑룡 진혈의 연화를 도와주신다면 하늘에 대고 감사할 일일 것입니다.

만약 규 선배께서 흑룡 진혈의 연화를 도우신다면, 제가 해룡궁에서 서휼 님을 도와 업무를 처리하며 서휼 님께 보상으로 받은 영석 2만 개, 청해석(靑海石) 백 근, 오색염(五色鹽) 십 근, 비색산호(緋色珊瑚) 일곱 개, 그리고 서휼 님께서 탈피하신 비늘 조각을 은의의 표시로 드리겠습니다.

또한 저는 서휼 님께 신임받으며, 저렇듯 수많은 재물을 하사받는 몸이니만큼, 흑룡 진혈을 연화한 후에는 이 은의를 바탕으로 해룡궁에 규 선배님을 초대하고자 합니다. 서휼 님께서도 규 선배님과 만나 수행의 깨달음을 묻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시나 늘 적당한 자리를 만들기 힘들어 그러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후에 그 자리를 빌어 두 분이 깨달음을 주고받으실 수 있는 자리 또한 만들어 드릴 것인즉, 부디 후학이 진혈을 연화하는 것을 은의를 베풀어 도와주십사 청합니다.

후배 말학 서 모 올림.―

규련이 서휼을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두근거리기 시작해, 지난번 선수혈합에서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것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거기에 재물까지 든든히 안겨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도 없겠지.'

물론 서휼에게 하사받았다거나 한 건 아니고, 당연하게도 인근 수저 요족들에게 해룡궁의 지도를 건네주고, 해룡궁의 방호벽을 열어 재물을 도적질하게 해 준 대가로 내가 수저 요족들에게 나눠 받을 재물들이다.

내일 중으로 수저 요족들이 몰래 재물들을 나눠 줄 터.

나는 서한을 쓴 비단을 잘 접은 후.

해룡궁 모처에 있는 용련소(龍聯沼)로 향했다.

용련소는 용족들의 거처에 있는 연락 수단으로, 용족끼리 멀리에서 회의를 하거나 연락을 할 때에 쓰는 연락 수단이었다.

우우웅!

밝게 빛나는 연못 앞에 선 나는 비단을 들어 올린 후, 규련에게서 하사받은 선수 진혈이 든 옥병을 꺼냈다.

용련소는 용족끼리 나누는 대화의 보안을 위해, 용족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용족이 용족의 기운을 불어넣어야 작동하는 것이다.

물론.

우우웅!

선수 진혈이 담긴 옥병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을 용련소에 불어넣자, 연못이 밝게 빛나며 해룡궁과 연결된 용련소의 용족들을 보여 주었다.

용련소에는 가장 많이 연락을 나눈 순서대로 용의 형상이 크게 떠올라 있었다.

가장 큰 형상은 흑룡왕 현음의 형상, 그다음은 해룡궁 밖에서 사는 해룡족 원로 몇몇, 그다음은 흑룡족의 사축기 수사, 그리고 천인기 원로들이었다.

'흑룡족과도 굉장히 자주 연락하나 보군.'

그리고 흑룡족의 천인기 원로 다음으로 있는 것이 규련의 형상이었다.

"규련, 연결."

츠츠츳!

규련의 형상이 커지며 용련소가 규련의 처소에 있는 용련소와 연결되었다.

"전송."

우우웅!

나는 규련의 용련소와 연결된 용련소 위에, 잘 접어 놓은 비단을 떨어뜨렸다.

파아아앗!

연못이 빛나며 비단을 규련의 용련소로 전송시켰다.

나는 용련소의 발동을 취소시킨 후, 해룡궁을 조작하여 내가 용련소에 출입했다는 기록을 지워 버린 후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아마 사흘 안에는 답신이 올 것이다.

* * *

약 이틀이 지났다.

쿠구구구구!

해룡궁 위로, 거대한 규련의 거체가 나타났다.

나는 규련의 기운을 느끼며 해룡궁 위로 날아갔고, 해룡궁의 결계에 얼굴을 들이밀고 뭔가를 찾던 그녀는 나를 보자 눈을 빛내며 인간형으로 화형하였다.

파아앗!

갈의를 입은 여인의 모습으로 변한 그녀가, 결계 안쪽으로 들어와 내 앞에 서며 말했다.

"험험, 정말인 거냐? 정말 서신에 쓰인…."

어쩐지 얼굴이 붉어진 채 양손을 꼬며 내게 묻는 그녀를 보며, 나는 약간의 가책을 느꼈다.

'사랑에 빠진 이를 이용하려니 조금 미안해지는군.'

어쨌든 그녀를 보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규련은 확실히 서휼을 좋아하고 있다.

"예, 당연하지요. 아, 그리고, 서휼 님께는 서신에 쓰인 일은 말씀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도 서휼 님께 깜짝 선물을 드리고 싶어서 말입니다. 하하."

"아, 알겠다. 그것도 좋겠군. 그렇게 하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는 사이 해룡족 원로들이 그녀의 등장에 빠르게 해룡궁으로 날아왔다.

"아니, 규 선배님이 아니십니까?"

"해룡궁에는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아…."

그녀는 헛기침을 하며 나를 가리켰다.

"이번에 이 아이가 흑룡 진혈을 선수혈합에서 받아가지 않았느냐. 인족 주제에 선수인 흑룡의 맥을 이으려는 것이 매우 가상해 보여 본녀가 직접 진혈의 연화를 도와주러 온 것이다."

"아…."

"험험, 그러시군요."

그러자 해룡족 원로들은 당황하는 듯하면서도 일단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왜 인족 따위인 나를 이렇게 열심히 도와주는지 납득지 못하겠다는 의문이 쓰여 있었다.

그때였다.

파앗!

서휼이 어느덧 장내에 나타나 미소를 지었다.

"이거, 규 선배님께서 이리도 따스한 마음씨로 해룡족의 구성원을 돌봐 주시니 감동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아, 서, 서 수사도 왔군. 뭐, 인족이라지만, 아직 경지도 제대로 오르지 못한 주제에 원영기 급 의식을 가지고 있고 흑룡 진혈을 선택한 인재이니, 내가 이리 돕는 건 당연하지."

그녀는 서휼을 보며, 부끄러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심박을 조종해 안색을 평온하게 조절하며 얘기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내 눈에는 서휼이 나타나자 좋아 죽으려는 그녀의 연심이 훤히 보였다.

"규 선배님께는 늘 감사드릴 뿐입니다. 제 직전제자로 삼으려는 서은현은 본족의 훌륭한 인재이니, 선배님께서 연화를 도와주신다면 너무나 감사한 일일 것입니다."

서휼은 구태여 그녀가 내 연화를 돕겠다는 것은 막지 않고 허락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서휼은 규련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저희 해룡족을 이렇게 생각해 주시고, 제가 아끼는 서은현에게 이렇듯 따스하게 대해 주시니, 규 선배님을 향한 마음이 넘쳐 흐르는군요. 서은현의 진혈 연화는 원하신다면 해룡궁에서 하셔도 됩니다. 제가 자리를 마련해 드릴 테니, 녀석의 연화를 도우시며, 간혹 저와 차라도 한잔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제가 감사를 표할 길이 없어 이렇게라도 감사를 표하고자 합니다."

"…!"

서휼이 손을 잡자 규련은 심박을 조종하는 것도 실패하고, 얼굴이 폭발할 듯이 빨개졌다.

그리고 나 역시 속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제길, 서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고, 규련이 나를 그녀의 처소에 데려가 진혈의 연화를 도와주게 하여 이 일을 벌인 거다만….'

만약 그녀가 서휼의 제안을 받아들여 해룡궁 내에서 내 연화를 돕겠다고 한다면 곤란해진다.

'용족은 어지간하면 자신의 동부에서 일을 처리하는 걸 좋아하는 습성을 믿고 부탁한 것인데….'

예전 서란과 함께 지내며, 그의 동부에서 호풍응룡변을 익힐 때 알아낸 용족의 습성을 통해, 그녀가 나를 데려갈 것을 상정하고 짠 계획이다.

하지만 서휼이 말하는데로 되어 버린다면….

그때였다.

"흠, 흠. 미안하지만, 최근 내 영지에 있는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서 그것들을 제압해야 하니 말일세. 아무래도 그건 조금 힘들 듯하군."

"아, 그렇군요. 정말 아쉽게 되었습니다."

"그러게 말일세."

"저도 며칠 전, 해룡궁에 도적이 들어 내탕금을 털어 가는 덕에 곤욕을 겪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규 선배의 일이 남 일 같지 않군요."

"하여튼 최근에 분위기가 뒤숭숭하긴 하지. 혈음계의 차원 장벽에서 불온한 분위기가 보인다는 전언도 있고, 심족들의 활동도 점차 활발해진다는 얘기도 있으니…."

"정말 혼란스러운 시국입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규 선배께서 곤욕을 치르시는 것 같으니… 저희 해룡족 족원들을 규 선배의 영지에 파견해서 반란 제압을 돕겠습니다."

"아, 정말인가?"

"예, 말씀드렸다시피 며칠 전에 도적이 들어 남 일 같지가 않으니 말입니다."

서휼은 남 일 같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규련에게 해룡족 족원 몇몇을 붙여 주었다.

말이야 규련을 도와 반란 진압이었지만, 의도는 뻔했다.

'나를 감시하라는 거겠지.'

정말, 어떻게든 놈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음에도 부득부득 감시를 붙이는 모습이, 정말 징할 정도였다.

"그럼, 이렇게 규 선배께서 자네를 도우시는 행운을 잡았으니 흑룡 진혈을 잘 연화하길 바라네."

툭툭.

서휼은 내 어깨를 툭툭 쳐 주며 용기를 북돋웠고, 그러는 척 은근슬쩍 내 신분 패에 영기를 흘려보내 뭔가 수작을 부렸다.

'규련의 동부에 도착하자마자, 신분 패는 어디 처박아 놔야겠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휼에게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한 후 규련과 함께 그녀의 영지로 향하였다.

반 각 정도를 날아서 도착한 규련의 영지는 울퉁불퉁한 바위산이 잔뜩 늘어져 있는 절경이었다.

바위산 사이로는 새하얀 운무가 끼어 있어 마치 신선들이 사는 신선향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녀의 동부는 바위산 중 가장 높은 산자락에 뚫린 동굴에 있었다.

"자, 그럼 일단 내려 있거라. 그리고, 해룡족에서 온 전사들이라 했나?"

규련은 우리를 따라온 해룡족의 젊은 원영기 전사들을 보며 말했다.

"노예 종족이지만, 내 영지에 있는 놈들은 정말 폭넓게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다들 수고를 좀 해 줘야 할 터다."

"명심하겠습니다."

"반란을 일으켰다지만 그래도 놈들은 내 재산이니 되도록 학살은 지양하고, 반란의 수괴들을 잡아 오는 걸 주 목표로 삼아라."

"예!"

"그럼 나는 서은현의 진혈 연화를…."

그리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규련의 앞에서 말했다.

"아니, 저도 해룡족의 구성원으로서 해룡족의 전사님들이 고생하시는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저 역시 이분들을 따라 반란을 진압하고 오겠습니다."

"뭣?"

내 말에, 해룡족 전사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을 부릅떴다.

반란 진압은 명분이고, 실상은 나를 감시하러 온 놈들일 터다.

그렇다면 명분을 같이 없애 주면 그만이다.

"오오, 과연 인족이지만 해룡족을 생각하는 충성심 깊은 인재로군."

규련은 내 태도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고 오너라. 비록 종족은 다르지만, 같은 구성원으로서 조직의 일을 돕겠다고 솔선수범하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아직은 축기기지만 너도 선수혈합을 견뎌 냈으니 그 생명력과 힘은 원영기 수사에 필적하겠지."

"예, 지금껏 해룡족에 은의를 베풀어 주신 규 선배님께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이 마음을 갚고자 했는데, 기회를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내 말에 그녀는 점차 기분이 좋아지는 듯 푸근한 미소를 지었고, 그 모습을 본 해룡족 전사들은 뭔가 말을 하려 했으나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우웅!

그녀가 손 위로 황금빛 영기의 구체를 띄워 올렸다.

"이 구체를 따라가면 현재 반란이 일어나는 영지의 구역이 나올 것이다. 가서 반란을 진압하고 왔으면 한다."

"…예."

해룡족 전사 셋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굴 바깥으로 날아올랐다.

나 역시 해룡족 전사 한 명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의 목에 올라탔다.

"그럼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규 선배님."

"오냐, 그러려무나."

그리고, 해룡족 전사가 비둔술을 쓰기 직전.

그녀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참! 비록 최대 전력이 축기기 수준인 약소 노예 종족이라지만, 조심하거라."

"원영기 급 전력이, 이 녀석까지 합해서 넷입니다. 아무리 수가 많고 반란이 광범위해도 조금 귀찮을 뿐. 규 선배님께선 걱정을 다잡으시지요."

"아니, 내가 듣기로는 노예 종족 중에서 심족(心族)이 나타났다는구나."

그녀의 말에, 내 눈이 바싹 졸아들었다.

"비록 전해 듣기로는 결단기 급 전력밖에는 되지 않는 허약한 심족이라지만… 그래도 심족은 기오막측한 신통을 쓰니 모두 몸조심하도록."

지(地)의 종족 (7)

'심족!?'

나는 놀라서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으나, 어느새 해룡족 전사들은 하늘을 빠르게 날아오르며 규련의 빛무리를 따라가고 있었고, 규련과의 거리는 순식간에 빠르게 멀어져 버렸다.

"잠깐, 규 선배님께 심족에 대해 좀 물어보는 게 어떻습니까?"

나는 해룡족 전사들에게 황급히 말했지만, 그들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못 들었나, 심족인지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결단 급이라고 했지 않나."

"빨리 가기나 하지."

"아니…."

나는 해룡족 전사들에게 한소리를 하려고 했으나, 순간 시간상으로는 우리가 비승한 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아직 광한계에서 심족이 얼마나 두려움과 경외시의 대상이 되는지 모르는 건가.'

생각해 보면 아직 1년도 안 된 시점에서 광한계에 대한 무슨 얘기를 해 봤자였다.

'어쩔 수 없군. 그렇다면, 이들은 내버려 두지.'

규련이 보내 준 빛덩이를 따라 날아가며, 나는 아직 어리숙한 해룡족 전사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들은 내버려 두고, 이들이 반란을 진압하는 사이… 심족을 만나 본다.'

여태껏 심족이라는 이들에 대해 들어는 봐 왔지만 도대체 뭘 하는 이들인지.

또 심도공법이라는 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야 할 터.

이제는 그들에 대해서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만나 보자, 그들이 뭘 하는 존재인지에 대해 알아야 해!'

파아앗!

얼마나 강산을 지나쳤을까.

번쩍!

규련이 보내 준 빛이 거대한 산맥 하나를 넘으며 폭발했다.

"이곳이…."

빛이 폭발했다는 의미는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뜻.

"용족 영역 최대의 장령목화(長靈木花) 농장…?"

산맥을 넘어서 도달한 그곳은 새하얬다.

햇살을 빨아들이며 환하게 빛나는, 눈앞의 대농장은 하얀색의 불꽃을 토해 내는 것만 같았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정말로 규련의 농장에 있는 새하얀 식물들의 꽃 주변으로는 불꽃 같은 새하얀 영기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장령목화.

혹은 불절(不絶)목화라고도 불리는 저 새하얀 목화는, 광한계 선사들이 입는 절대다수의 의복에 들어가는 중요한 목화솜을 만들어 내는 목화였다.

수사들 중 대다수는 축기기만 넘어가도 전투를 하며 옷이 걸레짝이 되거나, 찢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경지가 높은 이들이야 법술로 옷을 만들어 낸다지만, 경지가 낮은 이들은 옷이 찢어지면 예비 옷을 꺼내 입거나 발가벗고 다녀야 하니 굉장히 불편했다.

그렇다고 늘 분쟁이 끊이지 않는 광한계에서 옷이 멀쩡하기를 바라는 것 역시 웃기는 심보였다.

그렇기에 수많은 수사들은 은근히 옷에 대한 것을 고민했고, 해결책은 크게 세 가지가 나왔다.

영기를 짜내 옷을 만들어 내는 법술을 익히는 방법.

혹은 찢어지거나 불에 타 버려도 원상복구가 되는 옷을 입는 방법.

마음의 부끄러움을 이겨 내고 벗고 다니는 방법 등이 그것이었다.

세 번째 방법은 웃기기는 하지만, 의외로 창호자 등을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저러고 다니기는 했다.

물론 절대적으로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이들만 저러고 다니기야 했지만.

어쨌든 첫 번째 방법은 고계 수사들이나 되어야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나.

옷 자체에 복구 법술을 걸어 놓는 두 번째는 저, 고계 수사들을 포함해서 정말 수많은 이들이 택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런 복구 법술이 걸려 있는 옷을 만드는 데에 쓰이는 주 재료가 바로 저 장령목화였다.

장령목화로 만든 옷은 다 찢어져도, 전부 불타 버려도 한 조각만이라도 남아 있다면 조각에 영기를 주입해 다시 옷을 재생시킬 수 있는 매우 유용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옷이었다.

그리고 그 재료인 장령목화는 영기가 매우 넘쳐나는 지역에서만 자랐고, 목화솜을 딸 때 영기를 많이 지닌 고계 수도자들이 법술을 부려 따면 목화솜이 계속 재생되기에 목화가 떨어지지 않는 특이한 성질을 지녔다.

그렇기에 장령목화를 기르는 수도자들은, 가진바 영기가 약한 약소 종족을 노예 종족으로 삼아 장령목화를 따는 목화 노예로 만들어 목화를 관리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화륵, 화르르륵!

내가 목화밭을 바라보며, 장령목화에 대한 것을 생각할 때였다.

저 멀리서부터, 시뻘건 불길이 목화밭을 물들이고 있었다.

"저게 반란군인가."

"다들 하나같이 연기기도 못 되어 보이는 것들이군."

불길 뒤편에서는 어마어마한 기척이 느껴졌는데, 정말로 식겁할 만큼의 숫자였다.

'몇만인 거지?'

"자, 그럼 내려라. 다들 각자 알아서 노예들을 진압하고, 반란의 수뇌부를 전부 몰아 죽인 후 규 선배께 보고하면 될 터."

"그러지."

나를 태운 해룡족 전사가, 머리를 털어 내며 나를 떨어내고는 말했다.

해룡족들은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빠르게 수많은 종족들을 제압하기 위해 그들에게로 날아갔다.

나는 잠시 그들을 보다가 목화밭에 불을 지르는 노예 종족들을 바라보았다.

'심족이 있다고 했다. 결단기 수준이라는 말은 분명 월도입천의 실력일 터.'

심족이 뭔지는 아직도 헷갈렸지만, 그래도 일전 장익의 말을 들은 후, 그의 일격을 본 후 추측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분명, 심족이라는 이들은 서로를 보자마자 알아챌 수 있다.'

파앙, 파앙!

나는 허공을 박차며 불길 너머로 향했다.

그곳에서 방화를 하는 종족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수많은 종족들이 섞여서 불을 놓고 있다.

광한계 종족들은 밀도가 높은 광한계 영기를 쐬며 살았기에 대다수가 태어날 때부터 연기기 급의 강함을 지닌다.

하지만, 그럼에도 광한계에서조차 약한 이들이 있었다.

타고난 육신이 너무나 허약해서 광한계의 밀도 높은 영기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요수 공법을 익히지 못하는 이들.

그리고 제사법도 찾지 못해 천족 공법도 익히지 못하는 이들.

그런 이들이 광한계의 밑바닥을 깔아 주는 약소 종족들로 구분되며, 천족, 지족들에게 잡혀 노예로 부려지거나 단약이 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그리고 지금 불을 놓고 있는 수많은 종족들 역시, 규련의 농장에서 일하던 그런 약소 노예종족들이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피잉―

갑자기 긴장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갑자기 내 목이 쪼개질 것 같은 느낌!

차라리 미래 예지라고 할 수 있는 살의(殺意)를 예지하는 감각!

'이건….'

단순한 살기가 아니다.

심어!

입천의 경지에 오른 무인들이 주고받는 심어였다.

누군가가 심어를 통해 말하고 있다.

아니, 묻고 있다.

너는 누구냐.

찌릿, 찌릿….

'이건….'

나는 씨익 웃으며 심어가 주는 감각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감각을 타고 올라가, 이 심어를 보낸 존재가 있는 곳을 향해 눈을 빛냈다.

규련의 정보가 잘못된 것 같다.

'입천이 아니라, 답천경인데?'

쿠구구구구!

저 멀리서, 세 명의 해룡족 전사가 입을 벌리고 숨을 내쉬고 있다.

나는 그들을 보며 외쳤다.

"피하시오, 그쪽에 심족이 있소!"

그러나 그들은 명백히 내 외침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한 채 입에서 빛살을 뿜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번쩍!

촤아아아!

주홍빛의 물살.

노을빛의 강이 파도치며, 해룡족 전사들의 입김을 막아 낸다.

'아아….'

느껴진다.

지금 원영기 해룡족 셋의 공격을 막아낸 저자는 분명 답천경이다!

나는 등골을 타고 오르는 흥분을 삭이며 그쪽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그쪽으로 달려가려고 할 때였다.

쉬릭!

오싹!

나는 순간 뇌리를 파고드는 불길함에 빠르게 뒤로 보법을 밟으며 물러섰다.

쿠과과광!

그리고 다음 순간, 내가 지나치려던 자리 아래로, 커다란 계곡이 생겨났다.

"…이거, 규 선배님께 항의를 해야겠군."

심족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잖은가.

'아니, 어쩌면 규 선배님도 지금 이 녀석밖에 파악을 하지 못한 걸지도.'

우우우웅!

저 멀리서 흘러나오는 주홍빛 노을의 강이, 파도처럼 몰아치며 세 마리 해룡족을 휩쓸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노을빛 바닷속에 갇힌 세 마리 뱀 같아 보였다.

저쪽은 분명한 답천경이었으나, 내가 느끼는 답천경만의 감각이 아닌, 요수 공법이나 천족 공법의 감각으로는 전혀 감지가 안 된다.

'감지가 안 되니 뭐, 저쪽은 몰랐던 것 같고….'

저벅, 저벅….

나는 목화밭을 헤치고 나온, 한 명의 인영을 쳐다보았다.

이족 보행을 하는 새하얀 털을 가진 염소.

"네가, 규 선배께서 말하신 결단 급 심족인가."

녀석은 확실한 입천 급의 실력자였다.

그리고, 나는 이 염소 인간이 들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채찍?'

그것은 얇은 가죽 채찍이었다.

노예를 매질할 때에 쓰는 얇은 채찍.

그러나 기이하게도 노예를 때리는 데에 쓰는 채찍을 쥔 이 염소 인간의 이마에는 분명한 노예의 표식이 있었다.

이마에 노예의 인장이 찍힌 염소 인간은, 전체적으로 순하고 동글동글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털 자체가 굉장히 보송보송하고 부드러울 것 같았고, 눈빛 자체가 맑고 말랑말랑한 기질을 띄고 있었다.

거기다 체구도 작은 탓인지, 한눈에 보아서는 썩 귀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침을 삼키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털 아래로….'

흉터가 몇 개나 있는지 모르겠다.

보송보송하고 귀여운 털 아래에는, 채찍 자국 같은 것이 마치 빗줄기처럼 빼곡하게 차 있었다.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나는 긴장을 끌어올리며 녀석에게 질문했다.

"네가 심족이냐?"

"…."

"네가 익히고 있는 게, 심도공법이 맞나?"

"…."

"너희 심족은…."

그리고.

메에에에―

녀석이 울부짖으며 채찍을 휘둘렀다.

쿠과과광!

"…!"

그리고, 다시금 채찍이 맞은 곳에 계곡이 생겨났다.

'아, 그렇군. 나는 멍청이인가.'

나는 심족이 메에 거리는 것을 보며 깨달았다.

내가 쓰는 요족어는 요족들 사이에서는 만계 공용어였으나, 생각해 보면 이 심족이란 녀석들은 지족의 시야를 못 얻었고, 그에 따라 자연히 요족 언어도 익히지 못했을 터였다.

[이봐, 너는 심족이냐고 물었다.]

나는 다시금 의식을 쓰는 영언으로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심도공법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나, 너희 심족은 뭘로 경지를 구분하지? 네가 얻은 깨달음은 어떤 거냐?]

그리고, 나는 그제야 녀석에게서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아까부터 혼자 주절주절, 당신은 입으로 대결하나?]

"…하."

왜일까.

분명 나보다 낮은 경지의 상대에게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다.

나는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허공을 움켜잡았다.

[실례했다.]

이제 말은 필요 없을 터.

부웅!

공기를 찢어발기며, 무형검을 전신에 흐르게 하며 놈에게 돌진한다.

요수 공법은 끌어올리지 않는다.

원영 역시 잠재워서, 계위를 보는 눈 역시 강제로 봉인한다.

천, 지족 공법을 모조리 봉인한 후.

순수한 답천의 상태를 유지한 채로 녀석에게 쇄도하였다.

'과연, 심도공법이라는 것은 무(武)인가?'

오늘 그 답을 알게 되리라.

나와 염소의 공격이 부딪쳤다.

* * *

쿠구구구!

주홍빛 강물이 해룡족 전사들을 집어삼켰다.

세 명의 전사들은 숨을 몰아쉬며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누군지는 파악이 되지 않는다.

쓰는 법술도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거기에 본체조차 어디 있는지 감지되지 않는다.

그런데 느껴지는 의식의 크기는 한없이 작다!

'뭐란 말인가, 이 자는….'

해룡족 전사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고참.

전격이 호풍환우를 불러내, 주변의 하늘을 메우며 이를 악물었다.

쿠릉, 쿠르르릉!

먹장구름이 해룡족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준다.

일반적인 상대라면 그들은 체력이 다하지 않는 불멸의 전사가 되어 적을 몰아쳤겠으나,

눈앞의 존재를 상대하고 있자니.

그들은 이 법술로 겨우겨우 목숨을 연명하는 기분이었다.

"크윽, 네놈이 반란의 수괴로구나! 원영기 급 반란 세력이 있다는 정보는 못 들었다만…."

전격은 상대를 떠보기 위해 우선 아무 말이나 던졌다.

하지만 상대는 반응이 없었다.

여러 제안이나 질문 등으로 상대를 떠보려고 했으나 계속 묵묵부답.

전격은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요력이 모두 동난다. 규 선배님께서 오지도 않으셨는데, 이렇게….'

그때였다.

[흐음, 영지의 주인, 사축기 지족은 안 나온 건가?]

전격은 눈앞의 상대가 읊조리는 말을 들으며 눈을 빛냈다.

'그래, 동급 경지를 상대로는 선전한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계 수사를 상대로는 자신이 없나 보군.'

그는 짐짓 준엄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우리는 선발대일 뿐, 반 시진 안에 진룡맹 장로 규련 님께서 도착하실 것이다. 우리는 네놈을 이기지 못할지언정, 그때까지 잡아 둘 수는 있지."

전격은 다른 해룡족 전사들에게 신호를 보내 당장이라도 결계진으로 눈앞의 존재를 묶어 놓을 듯이 요력을 끌어올렸다.

'이렇게까지 했으니, 분명 당황해서 일단 물러나려 할 터. 그때를 노려 잠시 후퇴해서 규 선배님께 지금이라도 도움을… 청해야 한다.'

"모두 저 녀석을 포위…."

그리고.

주홍빛 강의 주인이 피식 웃었다.

[허세가 대단하구나. 사축기 괴수(傀修)는 안 오는 모양이지?]

"하하, 그렇게 믿고 싶은…."

[아까부터 눈알 굴리면서 서로 의견 주고받는 거 모를 줄 알았나? 큭큭… 아까부터 초조해하더니만, 역시… 사축기는 오지 않았어.]

"…사축기는 오지 않았지만."

전격은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키며 살길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해룡족의 전사들이다. 전부 죽을 각오를 하고 너희… 심족을 진압하러 왔기 때문에, 우리의 패색이 짙어진다면 자폭할 수 있는 요술을 미리…."

[거짓말이네?]

"…어리석긴, 설령 우리가 자폭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와 함께 온 인족은, 우리와 막역한 사이로 그가 전력을 다하면 천인기 수준의 힘을 낼 수 있다. 우리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그가 우리를…."

[그것도 거짓말인 거 같은데.]

"의심이 많군. 하지만 아무리 의심해 봐야 소용없다. 진실은 바뀌지 않으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라. 사축기 선배께서 이곳으로 오고 계시고, 우리는 자폭용 법술을 두르고 왔으며, 사실 저 인족 친우가 있기에 실제 전력은 우리가 네놈보다 유리하다. 또한 반란을 일으킨 이들을 생포하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적당히 싸우고 있던 것뿐. 우리는 흑룡족의 머나먼 방계이므로 선수 흑룡의 힘 역시 선수진혈로 상당수 끌어내는 것이…."

[세상에나, '생포'라는 단어와 '흑룡족의 방계'라는 거 외에는 전부 거짓말이구나. 너희, 해룡족이 아니라 허풍족인데, 혹시 소개를 잘못한 건가?]

"…."

전격은 눈앞의 상대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뭐지?'

마음이 속속들이 읽히는 느낌이다.

자신은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 상대는 실시간으로 자신에 대해 읽어 내려가는 듯한 기묘한 불쾌감.

[불쾌한가 보군. 그리고 점차 무서워지고 있지?]

"…."

전격은 물론이고,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다른 해룡족의 전사들 역시 안색이 파리해졌다.

분명하다.

눈앞의 존재는, 상대의 속내를 가볍게 읽어 낸다.

그 불쾌함과 공포스러움.

전격은 저런 존재를 딱 한 번 본 적 있었다.

'괴군, 조연….'

하계에서부터 사축기 괴뢰를 두 기나 부렸던 미치광이.

그자의 앞에 섰을 때에나 느꼈던, 영혼까지 꿰뚫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물론 전격은 미치광이 노인네가 속내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믿지 않았으나, 괴군의 투명한 눈동자가 주는 그 불쾌한 느낌과, 지금 드는 이 불쾌한 느낌에는 무언가 공통점이 있었다.

[너희 천족과 지족은 그게 문제야. 늘 죽음의 위기를 앞에 두고는 어떻게든 살려고만 발버둥 치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만, 한두 명 정도는 자기 신념을 지킨다거나 그런 놈들도 있을 법하지 않나? 내가 너무 잔챙이들만 상대해 왔던 건가?]

"너는…."

[됐다, 닥쳐라. 너희 멍청이들과는 이제 별로 더 놀고 싶지 않고, 저기 저놈이 그나마 재밌어 보이는군.]

주홍빛 강물이 낄낄 웃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전격은 뭔가 말하려 했으나, 다음 순간.

그는 문답무용으로 그에게 달려드는 주홍빛 파도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제길, 정녕 끝까지 해 보자는 거냐!"

[하하하, 네들 따위가 나랑 끝까지? 심족에 대해 잘 모르는 걸 보니 대강 비승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잘 기억해 둬라. 심족은… 잡고 싶으면 늘 함정을 잘 파두고 과잉 전력으로 상대하지 않으면, 너희 천, 지족의 힘으로는 결코 쉽지 않아.]

삐이이이이―

그와 동시에 전격은 어떠한 이명을 들었다.

그것은 노랫소리였다.

'이, 이건…!'

그리고, 노랫소리를 인식하자마자 전격은 전신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느낌이 아닌, 실제로 생명력과 영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 안돼….'

뭐지?

이렇게 죽는다고?

이렇게 어이없게?

전격은 몸 안에서 빠져나가는 생명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생명이 통제를 받지 않는다.

기(氣)가 그의 통제를 받지 않고,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흩어져 내린다.

'이렇게, 쉽게, 죽을 순….'

[너희의 패착은 우선, 심족을 몰랐다는 것. 그리고… 내가 너희 천, 지족을 징글징글하게 많이 봐 온 놈이라는 것. 그 정도가 되겠군. 잘 가라.]

투웅!

전격은 뭔가, 줄이 튕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의식을 잃었다.

전격은 그것으로 죽었다.

마치 사람이 벌레를 때려잡듯이, 너무나도 간단하고 허무하게.

해룡족의 전사 셋은 그렇게 죽었다.

그리고, 해룡족의 전사들을 죽인 주홍 강물의 주인은 다른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한창 폭음이 터지고 있었다.

* * *

쿠과광, 콰과과광!

대지가 떨리며, 먼지구름이 비산하고 기다란 채찍이 사방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채찍에 맞춰 길이가 늘어나며.

투명한 무형의 검이 채찍처럼 휘둘러진다.

서은현은 염소에게 쇄도하여 양팔을 들어 올리며 하복부와 등짝, 그리고 어깨에 힘을 주었다.

일순간 그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는 듯하더니, 무형검이 염소를 향해 내리찍혔다.

염소도 만만치 않았다.

염소가 채찍을 잡고 우하에서 좌상으로 올려 휘둘렀다.

그리고 그사이에 손목에 힘을 주고, 채찍에 기(氣)를 불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채찍의 중량(重量)이 변하며 서은현의 무형검을 떨쳐 냈다.

촤락!

염소가 다시 손목을 굽히자 채찍의 무게가 깃털처럼 가벼워지며, 가공할 속도로 채찍이 빠르게 회수되었다.

스팟!

서은현이 검을 휘두르고, 염소가 채찍을 휘둘렀다.

중량이 변화하는 채찍, 형상이 변화하는 무검.

둘의 공방은 얼핏 대등해 보였다.

피싯, 피싯, 피싯!

하지만, 염소의 하얀 털 아래로는 참격들이 점차 그를 스치고 있었다.

염소의 팔목, 엄지, 검지, 소지….

늑장뼈, 명치, 배꼽….

발등, 발뒤꿈치, 오금….

슈칵, 슈칵!

서은현이 두 번을 움직이자 염소의 몸에 난 상처들이었다.

염소는 이해했다.

지금 그의 상대는 그를 봐주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지도해 주고 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처음에는 마치 염소의 실력을 탐색하듯, 뭔가를 시험하듯 조심스럽게 몰아붙였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시종일관 몇 번이고 염소의 머리통을 쪼개 버릴 기회가 있었음에도 봐주는 중이었다.

그리고 벌써 몸 곳곳이 붉어진 염소와는 다르게, 서은현의 몸은 옷자락 하나 찢어지지 않고 멀쩡했다.

'기술의 숙련도가, 하나하나 무시무시하다.'

염소는 서은현을 보며 생각했다.

'하나하나가, 간단한 기술조차도 형상이 변화하는 검에 담기니 천변만화로 이어지고, 천변만화의 일 초식 일 초식이 모두 극한으로 숙련된 기본기에 기반하니 일격필살 급이야.'

거기에 저자가 휘두르는 검은 투명하다.

의식으로야 확인이 된다지만,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불합리함이었다.

'투명해서 지금 변화하고 있는 도중인지도 제대로 감을 못 잡겠다.'

이대로는 안 된다.

'큰 기술로 승부를 봐야 한다.'

염소의 기세가 달라졌다.

'내 모든 걸 쏟아부어… 나의 종족을 해방시키리라…!'

다음 순간.

염소의 채찍이 하늘 위로 높이 치솟았다.

이제는 태산보다도 무거운 무게와 함께 떨어질 시간.

그의 기세를 알아챘는지, 서은현 역시 태세를 정비했다.

짐작할 수 있다.

서로가 쓰려는 것은, 서로가 그 나름의 오의라고 부르는 기술.

'결과가 어찌 되든, 존경의 의미를 담아 전력을 다해 펼친다!'

그리고, 서로의 기술이 서로를 향해 쇄도하려 할 때였다.

투웅!

청아한 소리가 울리며, 염소는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허억…!]

힘이 빠진다.

전신에 탈력감이 깃들며,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들의 사이로, 주홍빛 강물이 흘러 들어왔다.

* * *

[안녕, 재밌게 놀고 있었는데 방해해서 미안하네. 그런데 말이지, 우린 시간이 없어. 사축기 수사가 직접 올 거란 예측도 떨어지고 이런 떨거지들만 걸렸으니… 어쨌든 약속대로 사축기는 안 나왔으니, 약속대로 너희 종족 전부 심족 영역으로 진입을 허용하겠네.]

[…! 네! 감사합니다!]

나는 눈앞에서 떠드는 주홍빛 강물을 보며, 전신이 나른해지고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느낌을 느꼈다.

'위험하군.'

졸리다.

너무나도 졸리고 힘들다. 아마 이게 그녀가 구현한 답천의 능력인 듯했다.

[이봐, 친구도 그만 싸우지 않겠어? 친구를 보아하니 인족에다가, 요족 밑에서 요수공법을 배우고 있고… 거기다 보자니 우리처럼 구현 2단계에 올랐어. …솔직히 내가 이길 자신이 별로 없군. 하지만 그래도 친구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릴 정도는 된다만, 나와 이 친구의 종족만이라도 나가는 걸 묵인해 준다면 참 고마울 텐데.]

나를 이길 자신이 없으니 그냥 물러가게 봐달라는 건가.

이전이라면 당연하게 일소해서 헛소리 취급했을 말이다.

하지만,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덤빌 경우, 대흉.

덤비지 않을 경우, 무난.

'숨겨 두고 있단 최후의 한 수가, 상당히 무서운 것일 수 있어.'

나는 일단 가만히 속마음을 잠재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해라."

[아하하, 정말 고맙군. 그럼 혹시 뭐, 물어보고 싶은 거 있나? 묵인의 대가로 궁금한 걸 알려 주지.]

나는 즉시 그에게 질문했다.

"심도공법이란, 뭐지?"

오늘로써 심도공법에 대해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강물의 주인이 답하였다.

[푸, 푸큭큭큭… 크하하하하!]

맹렬한 웃음으로 말이었다.

너무나도 웃기다는 듯한 반응.

그리고 그의 말이 이어졌다.

[이보게, 친구. 심도공법이라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지(地)의 종족 (8)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순간 혼란이 와서 그를 쳐다보았다.

[아하하하하!]

순간, 가냘픈 여성의 목소리였던 그녀의 목소리가 굵은 남성의 목소리로 변했다.

[심도공법 같은 말은 천족과 지족이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 어거지로 가져다 붙여 놓은 말… 우리에겐 공법 같은 체계적인 체제가 존재하는 게 불가능하단 말이지. 자네도 알지 않나? 구현 두 번째에 이르렀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은 각기 다른 가능성을 지녔다는 걸 알 텐데?]

"…."

맞는 말이다.

나는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이 녀석의 말에 미간을 좁히며 생각했다.

"그럼… 심도공법, 아니… 심족은 이 '경지'를 뭐라고 부르지? 심상은 전부 다르지만 '경지'에 이르르는 과정은 같은 게 아닌가? 그냥 말 그대로 '구현'이 끝인 건가?"

[흐음… 알려 주고픈 마음도 있긴 하지만….]

다시금 그의 목소리가 어린아이의 것으로 변했다.

[아무래도 질투가 나는걸? 천족의 몸으로 지족의 아래에서 수학하며 우리의 힘까지 얻는다니. 천지심(天地心) 삼재(三才)를 전부 대성한다면 어떤 괴물이 탄생하게 될지 꺼려진단 말이지.]

사라락….

주홍빛 강물이 내 주변으로 흘렀다.

나는 이 강물의 정체가 실재하는 물이 아닌 이 존재의 심상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실체가, 없다?'

하지만 나는 이 기묘한 강물을 보며 흠칫 놀랐다.

답천은 결국 자신이 구현한 심상과 일체되는 경지일 터.

하지만 이 강물은 분명 답천경과 같은 기세를 풍기는 강물이면서도, 본체로 추정되는 실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내가 속마음을 숨기며 그 존재를 들여다볼 때였다.

[허허, 하나 이토록 투명한 도산의 지옥이라니….]

다음 순간, 다시 강물의 목소리가 늙은 노인의 것으로 변하였다.

[천, 지족은 물론이고 우리 중에서도 이토록 극단적인 심상은 본 적이 없다만… 과연, 삼재의 괴물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를 알 수만 있다면 자네에 대한 태도를 정하거나 할 텐데 말이지….]

강물은 나를 휘감고 목소리를 흘려 냈다.

그 모습은 마치, 심족이란 존재가 뒷짐을 지고 나를 바라보며 빙글빙글 도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바라보는 와중, 무형검을 일으켰다.

단악검법.

산명곡응.

티이잉!

맑은 검명이 울리며 정신을 강타했다.

기의 계위에서 울려 퍼진 파동이 혼의 계위로 전해지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난히 지족에 들어와서는 세뇌를 좋아하는 놈들을 많이 만나는 것 같군."

[아니 이런. 벌써 들켰네. 그나저나 그거 도대체 뭔가? 기운이 의식으로 전환했어? 계위를 이동한 건가?]

"…."

나는 이 녀석의 헛소리에 답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

어느새, 목화농장에 불을 지르던 노예들은 전부 사라져 있었다.

내가 이 녀석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저 멀리까지 이동한 듯싶었다.

'환상에 빠져 있었다? 내가?'

나는 이를 악물며 강물을 노려보았다.

"내게 무슨 짓을 하려 한 거냐. 나를 세뇌해서 뭘 하려 한 거지?"

[아, 혹시 오해가 있을까 해서 말한다만. 내 구현의 힘은 세뇌가 아니야. 숙면(熟眠)이지. 꿈속으로의 침잠(沈潛)이 내가 깨달은 깨달음이지. 그냥 자네를 곤히 재운 다음에 잘 묶어서 보쌈하고 심족 최고회로 보내려 한 거였다네.]

"…."

뭐지 이놈은?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리며, 그러면서도 정신을 극한으로 곤두세우며 말했다.

"이래 놓고 내가 너를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하는 건가?"

[너무 그러지 마시게. 우리 심족은 누구도 믿을 수 없거든. 천, 지족이 하도 음흉한 수로 우리를 납치하고, 단약으로 만들어 가려 혈안이 된 탓에 그들을 상대하려면 우리도 음험해져야 할 필요가 있거든.

그래도 자네에게는 이렇게 다 털어놓고 있으니 그걸로 용서해 주시게나. 자네 실력은 알았으니 납치 시도도 더는 하지 않겠네.]

"…."

속내가 안 읽힌다.

같은 경지인 탓인지, 이 녀석 역시 내게서 자신의 깊은 심상을 보호할 수 있는 탓이었다.

"…저 해룡족 전사들은 어떻게 한 거지?"

나는 흘끗 기절한 해룡족 전사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잠재웠네. 다만 본인들은 내 숙면의 과정을 죽음의 과정이라 착각하는 듯해서, 한두 시진 안에 깨우지 않으면 영혼이 정말로 죽음을 착각해서 죽어 버릴 테지만.]

무시무시하다.

또한 기오막측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 눈앞의 녀석을 노려보며 말했다.

"시간을 끌고 있군. 뭘 노리는 거지?"

심상은 읽히지 않는다지만, 녀석이 구태여 나를 감싸며 쓸데없는 말들로 시간을 때우고 있다는 건 알 수 있다.

필시 시간을 끌려는 것일 터.

[이런, 벌써 들켜 버렸군. 뭐 대단한 건 아니야. 나는 심족 최고회에서 파견된 심족 특명해방존사(特命解放尊使). 천, 지족에 스며들어, 그들에게 학대받는 연약한 노예종족 중에서 심족이 탄생하도록 돕고,

심족이 탄생하면 심족의 종족과 함께 심족 영역으로 그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약 천, 지족의 사축기급의 고수를 만난다면 그들을 살해하는 임무 역시 맡고 있지.]

"…!?"

나는 이 녀석의 기운을 노려보며 말했다.

"영지의 주인인 규련을 기다린다는 거냐?"

[아무래도 그렇다면 좋겠지만 말이지… 영지의 주인이 오지 않으면 뭐 그냥 종족들을 인솔해서 탈출시키는 데에 집중해야겠지.]

사축기 수사를 살해한다니.

이게 이 녀석이 가진 '한 수'인 것 같았다.

'녀석에게 덤볐을 때 대흉이 뜬 이유가 이것이었군.'

어줍잖게 들이댔다가는 죽은 목숨이었으리라.

아무래도 이 녀석이 나를 지금 가만히 내버려 두는 이유는 그저 내가 같은 '심족'의 항목에도 발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때였다.

우리 옆에 있던 염소가 문득 한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옵니다.]

염소의 눈에는 은은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저 멀리에서 전신이 시뻘겋게 물든 멧돼지가 날아오고 있었다.

원영기의 기운을 지닌 멧돼지의 코에서는 새하얀 증기가 마구 뿜어지고 있었다.

[장령목화 농장의 총관리인… 영주인 규련을 대신하여 우리를 학대하고 괴롭혔던 놈….]

뿌드득….

염소에 손에 쥔 채찍이 살아 있는 것처럼 마구 펄떡였다.

[그래, 한판 붙고 오려무나. 밀리는 것 같으면 도와줄 터이니.]

[예, 어르신. 한데 그자는 그래서 누구인 겁니까.]

[흠, 나도 모른단다. 그래서 지금 담소를 나누면서 붙잡아 놓고 있는 게 아니니. 그래도 최소한 우리를 일부러 적대하려는 생각은 없는 거 같으니 시원하게 원을 풀고 오면 될 것 같구나.]

[예!]

염소는 굳게 대답하며 채찍을 쥐고 허공을 밟으며 멧돼지에게로 날아갔다.

'허공답보로군.'

나는 강물을 보며 물었다.

"심족이란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해 줄 수 있는가?"

강물은 다시금 젊은 여성의 목소리로 대답하며 말했다.

[무슨 당연한 말을. 심상을 통합시킨 존재들을 칭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심상을 통합?"

[그래, 자신의 외부 심상과 내부 심상을 하나로 통합시켜 하나의 완전한 심상을 만들어 낸 이들. 그렇게 심상을 만들어 내, '구현'시킬 수 있는 자들. 그런 이들이 심족이라 통칭되는 게지.]

"그렇다면 의식공법을 통해 그 구현이라는 것에 도달할 수 있는 이들 역시 심족이 아닌가? 의식공법만 잘 익혀도 심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아하하, 의식공법을 익혀 심족에 도달해?]

강물은 웃기다는 듯이 낄낄거렸다.

[이보게 친구. 외부 심상과 내부 심상을 통합하는 것은, 상상 이상의 고통과 압력 속에서만 이뤄지는 거라네. 단순히 의식의 크기를 키우고 정련하는 의식공법은 의미 없어.

심족이 되려면, 심상을 구현시키려면 상상을 초월하는 [갈구(渴求)]가 필요하다네. 심족의 존자께서는 본인의 종족을 구원할 압도적인 힘을 갈구했고, 저기 저 신입은 자기 종족을 구한다는 책임감의 '무게'를 갈구했으며, 나는 '잠'을 갈구했지. 그리고 형태가 자유스러운 자네의 구현을 얼핏 보니 자네는 '뭔가에서 벗어나는' 것. 그런 걸 갈구한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

"…."

[뭔가를 강하게 갈구하지 않는다면, 의식공법을 아무리 익혀 봤자 구현은 절대 얻지 못하네. 만약 의식공법을 익힌 이가 외부와 내부의 심상을 통합시켜 구현에 이르렀다면, 그건 그자가 뭔가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갈구하고 있다는 뜻이지.

그래, 상상을 초월하는 갈구(渴求). 끝없는 갈증. 뭔가를 향한 끊임없는 광신(狂信). 그를 향해 모든 것을 내던질 각오를 하고서 스스로를 고통의 압력 속에 밀어 넣는 것만이, '우리'가 되는 법이지.]

우우웅!

녀석이 일부러 자신의 의념을 흘려 내게 보여 주었다.

그것은 호감이었다.

[자네는 분명 천족이며, 동시에 지족이지만 내가 자네를 싫어하지 않는 이유는 자네가 구현, 두 번째에 도달할 정도로 끊임없이 스스로의 신념을 갈구해 왔다는 것 때문이지.

그토록 투명한 도산의 지옥이라니, 그건 분명 광인(狂人)의 심상이야. 하지만, 미치광이의 그것일지언정, 한 번도 손에서 놓지 않고 달려온 덕에 그 경지에 이르른 게 아니던가?]

"…맞지."

콰광, 콰과과광!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채찍을 휘두르는 염소와 주변을 불바다로 만드는 멧돼지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멧돼지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원영기였으며, 염소는 결국 입천에 불과했다.

하지만, 염소는 멧돼지와 팽팽하게 맞붙고 있었다.

'멧돼지가 원영기 극초반인 것도 있겠지만… 염소 녀석, 멧돼지가 쓰는 법술을 전부 꿰고 있는 것 같군.'

그에 반해 멧돼지는 염소의 채찍질의 움직임을 하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 녀석의 이름은 백녕(白寗). 이 목화농장에서 자기 종족을 위해 노예감독관 자리까지 올라간 노예지.]

강물이 말하였다.

[동족들을 자기 손으로 채찍질하겠다고 솔선수범하며 나섰지만, 자신이 채찍을 잡은 그 날부터 무수히 채찍을 연습하며 어떻게 하면 '안 아프게' 동족을 때리는 척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녀석이다. 채찍에 무게를 싣고, 또 빼는 법을 익히며,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을 해 가면서 채찍에 무게를 조종하는 법을 극한까지 익혔지. 그렇게 무게를 조종하는 법을 극한의 극한까지 밀어붙이며 도달한 것이 녀석의 구현이다.]

쿠과과광!

염소, 백녕이 내지른 채찍에 멧돼지는 비명을 지르며 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후웅!

쿠구구구!

다시금 채찍이 휘둘러졌고, 그의 채찍이 스친 자리에 채찍 형태의 계곡이 생겨났다.

[저 총 관리관 요족은 백녕에게 자기 가족을 채찍질하도록 시켰던 지족이지. 백녕이 저놈만은 기다렸다가 죽여 버리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영주를 기다릴 겸 놀고 있었던 게지.]

쿠과광, 콰광, 꽈아앙!

백녕은 두 눈이 뒤집힌 채로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무게]의 극점을 살린 입천의 공격에, 불길을 뿜던 멧돼지는 점차 의식을 잃고 죽어 가는 듯했다.

'공격력에 특화된 경지군.'

나는 그의 입천을 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아무리 멧돼지가 원영 극초기에 백녕이 그의 법술을 전부 알고 있다고는 해도, 원영기와 입천의 차이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상대를 죽기 직전까지 몰아가는 것은, 백녕이 방어를 도외시하고, 자살이라도 하려는 듯이 공격에만 주안점을 두고 멧돼지를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냘픈 채찍이 도대체 어디까지 무거워질 수 있는가.

꽈아아앙!

[사, 살려….]

멧돼지가 백녕의 채찍을 피해 날아올랐다.

백녕은 눈이 뒤집힌 채로 멧돼지를 쫓아가려 했고, 강물의 주인은 신이 난 듯이 백녕을 응원했다.

나 역시 백녕과 저 멧돼지는 은원 관계가 확실한 걸 알았기에 함부로 끼어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푸콱, 푸확!

"…!?"

저 멀리, 강물의 주인의 공격에 잠들었던 세 명의 해룡족 전사들의 몸이 마구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강물의 주인이 흠칫 몸을 떨었다.

동시에.

푸콱!

푸화아아악!

해룡족 전사들의 심장 부위에서 피가 솟구치며, 어마어마한 천지영기가 그곳으로 몰리기 시작하였다.

고오오오….

천지영기는 허공에 푸른 빛을 응결하더니, 한 마리 거대한 청룡의 형상을 응집시켰다.

그것은, 서휼의 형상이었다.

강물의 주인이 흠칫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뭣… 자기 종족을 제물로… 백녕! 돌아와라, 퇴각한다!]

그리고, 장내에 강림한 서휼의 형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느껴진다.

눈앞의 형상은, 해룡족 전사 셋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 강림한 형상.

원영기 셋의 목숨을 제물로 바쳤기에, 짧은 찰나일지언정.

저 형상은 서휼 본체와 똑같다.

쿠구구구구!

어마어마한 압력이 전신을 짓누른다.

그리고, 서휼의 고개가 강물에게 휩싸여 있는 나에게 향했다.

[흐음, 규 선배의 영지에 있던 반란군이 이토록 위험할 줄이야. 반란군에 죽으라고 보낸 아이들이 아니거늘….]

'아니, 자기가 죽인 거 아닌가?'

나는 순간 어이가 없었지만, 서휼은 흥미롭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백녕과 주홍빛 강물에게 닿았다.

[과연, 그대들이 광한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심족인가?]

주홍빛 강물이 짜증 난다는 듯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윙윙거렸다.

[이런 젠장. 최악의 형태로 사축기 수사가 관여하는군. 내 목숨을 버려서 당신을 죽여 봤자, 본체에게는 피해가 안 가는 형식이겠지?]

[그렇다네. 본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강림하려고 한 수단이었다만, 자네들 따위 덕에 강림하게 되어 조금 섭하군.]

[그래, 그럼 잘나신 사축기 수사께서는 지금 우리를 어찌할 것이지? 말해 두지만 나는 심족 최고회로부터 만만치 않은 절기를 부여받았기에, 목숨을 건다면 당신의 형상이나마 없애 버릴 수 있다.]

[궁색한 위협이군.]

스스스!

용형의 서휼이, 인간형의 형상으로 다시 응결된다.

인간형의 서휼은 선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본인은 별로 자네들을 어찌할 마음이 없다네. 규 선배의 농장에 반란이 일어난 건 슬프지만… 심족이라는 이들에게 우리 소중한 해룡족 전사들이 전부 몰살당할 정도라니,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아니, 너희 전사들을 몰살시킨 건 너 아닌가?]

주홍빛 강물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이 서휼을 바라보았다.

현재 서휼은 본신이 아닌, 해룡족 전사들의 생명력을 기반으로 본체를 투영시킨 것이기에 그의 심상을 읽을 수도 없어 상대를 파악하기가 힘든 듯했다.

[우리 해룡족 전사들은 심족에게 혼을 바쳐 맞서 싸웠으나 전원이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었고, 본인이 먼 거리에서 분신을 투영하여 도우려 했으나 이미 전부 죽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네.]

[…미친놈.]

[하여, 본인은 그들을 기리는 마음으로, 심족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쿠구구구구!

서휼의 손에서, 강한 인력(引力)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 인력은 백녕에게 향해 있었다.

백녕은 갑작스럽게 그를 빨아들이는 서휼의 인력에 잡혀 빨려가기 시작했다.

[잠깐, 뭐 하는 거냐!]

[이렇게 적의 수괴를 잡기라도 해야, 억울하게 죽은 본 족의 전사들이 저승에서라도 한을 풀지 않겠는가.]

파아아앗!

서휼의 손 위로, 공간이 일그러지며 공간 균열이 나타났다.

필시 저 공간 균열의 너머는 해룡궁일 터!

[본디 이런 일에 쓸 것은 아니고, 본족의 일원인 서은현이 위험해지면 데려오는 용도로 쓰려 했다만… 일이 이리되었으니 어쩔 수 없군. 그래도 광한계에서 소문이 무성했던 심족을 생포할 수 있으니….]

[당장 그 손을 치워라!]

쿠구구구구!

주홍빛 강물이 진노한 목소리를 드러내며 서휼에게 날아갔다.

주홍빛 강물의 전신이 일순간 녹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녹빛 속에서 한 자루의 환한 박도(朴刀)의 형상을 찾을 수 있었다.

'저것은….'

저것이 저 녀석이 숨겨 두고 있던 일격!

존자(尊者)의 일격이었다!

그러나, 서휼은 자신의 발치 아래에서 심장이 뚫려 죽은 해룡족의 사체들을 향해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렸다.

쿠드득!

해룡족의 사체들이 영기에 의해 들어 올려지며, 주홍빛 강물을 막아섰다.

주홍빛 강물은 사체들보다는, 동족을 아무런 감정 없이 방패로 쓰는 서휼의 태도에 놀라서 잠시 움찔거렸으나, 그대로 몸을 밀고 들어갔다.

콰드득!

주홍빛 강물의 돌진에 해룡족 전사들의 사체는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하나 서휼은 아랑곳하지 않고서, 더더욱 손에서 강한 인력을 뿜어낼 뿐이었다.

촤라라락!

그리고, 강물이 움찔거렸던 찰나.

사체들을 박살 내며 걸렸던 찰나.

그 찰나들이 모여 틈을 만들어 냈고, 서휼은 그 틈에 자신의 손 위에 생긴 공간 균열로 백녕을 빨아들였다.

[안 돼에에에!]

촤라락!

강물이 서휼의 형상을 향해 돌진했으나, 서휼의 형상은 그저 허공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서휼의 밝은 목소리가 허공으로 울려 퍼지며 사그라졌다.

[좋은 선물을 줘서 고맙군. 덕분에 억울하게 전사한 본 족의 영웅들 역시 편히 잠들 수 있을 걸세.]

스르르….

서휼이 만들어 낸 공간 균열 역시 사라져 버렸고, 주홍빛 강물은 함천존자의 일격을 쏟아 내지도 못한 채 망연자실하게 주변을 휘돌았다.

[….]

나는 서휼이 공간 균열을 통해 백녕을 데려갔던 것을 보며 나는 서휼이 한 말을 떠올렸다.

내가 위험해지면 나를 데려가는 용도였다는 그 말.

'서휼은, 원래 수틀리면 자기 전사들을 희생해서라도 나를 해룡궁으로 강제로 끌어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였나.'

물론 아닐 수도 있었다.

말만 저렇게 해 놓고, 해룡족 전사들을 통해 규련에게 뭔가를 하려던 것일 수도, 규련의 동부에서 뭔가를 훔쳐 내려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원래 끌고 가려던 대상이 정말로 나였다면.

'녀석이, 오혜서를 통해 우리의 가치를 깨달았단 것일 터…!'

범인 주제에 사축기 급의 의식을 지닌 김연.

양수진과 같은 체질이라는 전명훈, 100년 안에 천인기 급 전투력을 갖추는 오현석, 500년 내로 쇄성기에 오르는 강민희 등….

서휼과 세 명의 천인기 수사들이 발견했던 우리의 가치는, 그 잠재력은 그 정도로 어마어마했던 것이리라.

'그러니 자족 원영기 셋을 희생시켜서라도, 수틀리면 나를 끌고 가려고 했던 것이겠지….'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나를 납치할 수단이 사라진 게 아닌가? 백녕이 서휼이 생각하기에 나보다 가치가 높은 것이었나?'

그때였다.

오싹!

나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며 문득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서휼은… 대놓고 내 앞에서 원래는 원영기 셋을 희생시켜서라도 나를 끌고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은 내 가치를 원영기 셋보다 높게 잡았다는 뜻.

그리고 그 말은 곧, 나와 비슷한 가치를 지녔을 오혜서의 가치를 깨달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지난 10개월간 내 행동을 관찰하고 내 언행을 살펴봄으로써 내가 동료인 오혜서의 행방을 알아내려 노력한다는 것을 알아냈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이미 오혜서와 나의 가치를 깨달았으니, 오혜서를 만나려면 어쨌든 다시 자신에게 찾아오리라는 것을 예측한 건가…!?'

내가 동료를 아낀다는 것을 10개월간 파악하며.

자신이 나와 동료의 가치를 알아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리하면 나는 내 성정 때문에라도 다시 돌아가게 되어 있다.

'…공간 균열로 나를 직접 잡아가는 것보다도, 더더욱 확실한 방법이군.'

아니, 내가 서휼의 계획대로 10개월간 그를 만나며 세뇌를 제대로 당하기만 했다면,

내가 위험해 처했을 때 나를 구하기 위해 원영기 셋을 희생시켰다는 상황에 벌써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서휼을 위해 내 마음을 바치리라 맹세했을 것이다.

나는 서휼의 간교함에 치를 떨었고, 주홍빛 강물은 허망한 듯이 백녕이 끌려간 곳을 빙빙 돌다가 그대로 다른 노예 종족들이 도망친 곳을 향해 날아갔다.

[…상황이 조금 더 좋았다면 더 얘기를 나눴겠지만, 일이 이리되었으니 언젠가 나중에 다시 만나도록 하지.]

파아앗!

주홍빛 강물은 그렇게 말하며 저 멀리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멍청하게 목화농장에 남아, 백녕에게 당한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멧돼지를 바라보았다.

멧돼지는 뭐가 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서휼이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보게."

나는 멧돼지에게 다가가 말했다.

"영지의 주인, 규 선배님께 연락을 할 수 있는가?"

"음? 아, 그렇다만…."

"연락을 넣어 주게나. 선배님께는 송구스러우나, 반란 진압은 실패했다고."

"알겠…네."

멧돼지는 서휼이 사라진 곳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술법. 어디서, 본 것 같은데…."

"…?"

"아니, 아니네. 영주님께 연락 드리지. 제기랄…."

그렇게.

짧고도 굵었던 심족들과의 만남은 일단락이 되었다.

* * *

"…뭐, 그렇게 되었다면 어쩔 수 없지."

규련은 나와 이 멧돼지, 홍국(紅鞠)이라는 녀석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서휼이 직접 자신의 종족을 죽이고 강림한 것에 대해서는 일단 다물고 있기로 했다.

해룡족이 전부 죽은 상황에 대해, 홍국은 서휼이 동족을 죽인 걸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고, 나 역시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서휼과의 관계 때문이었으나, 홍국은 진짜로 제대로 못 본 것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것 때문인지 몰랐다.

여하튼, 규련의 한숨과 함께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고.

나는 어찌 되었든 규련과의 약속에 따라 흑룡 진혈의 연화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규련의 동부 깊숙한 곳.

그곳에는 규련의 용혈(龍血)로 그려진 주술진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나는 주술진의 중심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었다.

내 앞에는 흑룡 진혈이 한 방울 담긴 옥병이 세워져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선수 진혈을 연화해 보도록 할까."

농장 반란과 더불어, 서휼의 부하들을 죽게 했다는 자책감 때문인지.

규련은 조금 힘없이 결인을 맺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시뻘건 핏빛이 피어올랐다.

그그그그극!

내 앞에 있던 옥병 역시 빛에 호응하여 마구 흔들리더니, 안쪽에 있던 흑룡의 피 한 방울이 내게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다음 순간.

'…어?'

나는 새카만 어둠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한 마리의 거대한 용(龍)이 나를 바라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군, 이게 흑룡 진혈에 담긴 선수 흑룡의 잔념….'

이 잔념을 극복해야 선수진혈을 연화할 수 있으리라.

'지금부터, 잔념을 제압한….'

다음 순간.

[왜 살아온 세월은 반 갑자도 안 되는 녀석이, 어째서 2000년이 넘는 역사(歷史)를 지니고 있는 것이지?]

어둠 속의 거대한 용이, 내게 말을 걸었다.

[선수(仙獸)의 앞에서 어찌 역사(歷史)를 속이려 하느냐. 태음(太陰)을 관장하는 흑룡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 필멸자는 제대로 된 역사를 고하도록 하여라.]

선수진혈의 연화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는 규련에게서 선수진혈을 통해 선수가 직접 말을 건다는 소리 따위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지(地)의 종족 (9)

찌릿, 찌릿찌릿….

전신이 찌릿거린다.

하지만 이전 [그]와 만났을 때처럼의 압박감은 없었다.

눈앞의 존재도 피 한 방울에 깃든 잔념이고, [그] 역시 분체였으나 뭔가가 달랐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으나, 나는 어쩐지 둘의 거리감이 다르게 느껴진다고 느꼈다.

어쩐지, 이 흑룡은 [그]보다 한참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아, 그런 건가.'

이 흑룡은 어쩌면 이 광한계에서 [그]보다도 멀리 떨어진 차원에 자리하는 존재인 것 같았다.

'본체가 더 먼 차원에 있는 존재인지라 [그]만큼의 압박감이 없는 거야.'

물론 [그]만큼의 압박감이 없다는 것이지, 이 흑룡 또한 피 한 방울에 남은 잔념에 불과함에도 어지간한 합체기 태수 이상의 압박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내가 흑룡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촤라라라락!

"…!!!"

갑자기,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내 전신이 흑룡의 앞에서 분해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비록 현실 세계가 아닌, 흑룡의 잔념과 만나는 정신세계기는 했으나, 나는 현실에 있는 내 몸이 분해되는 착각에 빠지는 듯했다.

"끄으으읍!!"

내가 비명을 참았으나, 흑룡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몸 가장 깊은 곳을 속속들이 분해하며 관찰했다.

뼈와 살이 분해된다.

피와 내장이 분해된다.

이윽고 세포 하나하나가 분해된다.

세포 하나하나의 속에 잠들어 있던 무수한 이중나선들이, 몸 안을 회전하던 무수한 영기의 음양들이 흑룡의 눈 앞에 까발려진다.

분명 정신세계임에도 불구하고 내 육신이 현실의 것처럼 구현되는 건 둘째치고, 나름 월도답천에 오르고 기묘성심전을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흑룡의 시선 앞에서는 아무런 저항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나는 흑룡이 내 몸을 까뒤집어보는 것과 동시에 내 눈앞에도 흑룡이 보는 음양과 이중나선에 대한 정보가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건….'

원영(元靈)을 얻을 때 보았던 광경.

체내의 음양이 회전하면서 내 과거를 돌아보았던 광경이었다.

그랬다.

나는 흑룡에 의해 원영을 얻을 때의 광경을 한 번 더 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건… 내 역사…!!?'

태어나고, 자라고, 이 세계로 날아오고….

그리고 비승해서 서휼을 따라와 지금에 이르기까지, 약 30여년에 달하는 인생이 눈 앞을 지나간다.

'어?'

그러나 나는 뭔가 이상한 걸 알 수 있었다.

평소에 보던 주마등이나, 혹은 원영기에 이를 때 보았던 삶의 순간들은 모두 회귀의 시간을 포함한 흐름이었다.

그러나 흑룡이 보여 주는 흐름은 회귀가 포함되지 않고, 원래 세계에서 이 세계로 넘어올 때에서 바로 회귀 직후로 기억이 끊겨 있었다.

그리고 기억이 스쳐 지나가며, 마침내 봉명주로 들어가 [그]와 마주쳤을 때의 기억이 뇌리로 떠올랐다.

그때였다.

피잇!

갑자기 주마등이 끊겼고, 내 몸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

나는 그제서야 공간 안에서 움직일 수 있었다.

"…! 허억, 허억…."

죽는 줄 알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몸이, 유전자 단위로 분해된다고?'

그리고 그 유전자를 영기의 음양이 타고 올라가며 이중나선을 그리고 과거를 보여 주었다.

말 그대로, 내 인생의 역사(歷史)를 한 눈에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흑룡의 음성이 내 귓전을 때렸다.

[도대체 필멸자에게 이천 년이 쌓여 있는 건 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와 독대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그분께서 과거를 들여다보는 걸 허하지 않으시니, 이쯤 하겠다.]

"…? 아…."

아무래도 [그]와 만났던 기억을 보며 흑룡은 뭔가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제 기억을… 전부 읽으신 겁니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눈앞의 어둠의 용에게 질문하였다.

어둠의 용은 잠시 침묵하는 듯하더니, 그대로 어둠으로 흩어져 버렸다.

사방팔방의 어둠으로 흩어져버린 흑룡의 목소리가 천지간에서 울렸다.

[전부 읽으려 했다만, ――께서 막으셔서 감히 다 읽지는 못했노라. 너는 무얼 하는 필멸자이기에 ――께서 너를 귀히 여기시는가.]

'음?'

나는 흑룡이 말하는 ――이 뭔지 들어보려 했으나, 그가 말하는 단어 자체가 인지되지 않았다.

'…진선이 뭔가를 해 놓은 거겠지.'

"…송구스러우나, 저 역시 그분께서 제게 어찌 관심을 쏟는지 잘은 모르나이다."

[그런가… 알겠다. 하나, 내가 너를 신경 쓰는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노라. 너는 지금 선수 진혈을 연화하려 하는 것이 맞느냐?]

"…? 예, 맞습니다."

[선수의 혈통을 이은 이들에게 정식으로 인정을 받고 진혈을 연화하는 방법은, 우선 극한의 환경에 내몰려 선수 진혈을 받을 만한 생명력이 있음을 확인받는 것. 너도 분명 이 과정을 치렀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예."

나는 분명 선수혈합을 치렀다.

[네게 묻자면, 그 선수혈합에 참여한 이들의 최대 수행이 어느 정도였느냐?]

"분명 원영기가 최대였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천인기 이상은 참여가 불가능했었다.

[왜 천인기 이상은 참여를 막아 놓았다고 생각하지? 천인기 수사가 원영기 수사보다 몇 배는 더 생명력이 질길 텐데?]

"그건…."

어둠 속에서 흑룡의 목소리가 울렸다.

[천 년. 선수 진혈을 받아 연화시킬 수 있는 조건은, '천 년 이하의 세월을 살았을 것'이다. 원영기 중에서도 천 년 이상을 먹은 녀석들은 당연히 선수 진혈을 받을 수 없고, 천인기는 절대다수가 그보다 오래 살았으니 선수 진혈을 받을 자격이 없지.]

"…!"

[그런데 너는 육신은 반갑자인데, 어찌 필멸자 주제에 이천 년의 세월을 쌓은 것이냐. 천인기에 필적하는 세월을 쌓은 주제에 선수 진혈을 받으려 한다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노라. 본디 선수 진혈에 남겨진 본좌의 잔념은 겁도 없이 선수의 진혈을 연화시키려는 천인기 수사들에게 충고를 주기 위해 남겨진 것이니….]

"그, 그럼 저는 자격이 없단 말입니까?"

나는 어이가 없어서 흑룡에게 되물었다.

이천 년을 넘게 살아온 것 때문에, 그것 때문에 자격이 막혀서 선수 진혈을 연화할 수 없다고?

내가 기막혀 할 때, 어둠 전체가 웃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니지. 되려 자격이 너무 넘치기에, 천인기 이상의 짐승들은 선수의 힘을 담을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다 채워진 그릇에 뭔가를 더 채우려면 넘쳐 버릴 뿐이니.]

"….?"

[영기(靈氣)는 곧 폭발. 폭발은 곧 생명(生命). 그리고 모든 생명은 음양을 본따 이중나선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

어둠 속에서 흑룡이 말을 잇는다.

[이중나선은 모든 정보의 총람이자, 생명이란 존재의 역사(歷史). 아이야, 어째서 영기를 폭발시켜 생명을 키워가는 종족에게 땅(地)의 종족이란 이름이 붙는지 아느냐?]

우욱!

갑자기 헛구역질이 난다.

[그]를 만날 때와 같다.

'이, 이건….'

지금껏 먼 차원에 있다고 생각했던 흑룡이, 점차 이곳으로 '가까워' 지고 있다.

온 세상이 핑글핑글 돌아간다.

흑룡이, 나를 향해 '관심'을 보이고 있다.

비록 머나먼 차원에 있을지언정, 그가 나를 향해 관심을 보이는 것만으로 피 한 방울에 담긴 잔념을 넘어 그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전해져 왔다.

본체는 멀리 있으나, 그의 관심이 차원을 넘어오며 그 관심만으로 나의 존재가 짜부라지고 있는 것이었다.

[하늘이 운명(運命)이라면 땅은 곧 역사(歷史). 역사는 정보, 정보는 곧 생명. 그러므로 생명의 극의를 향해 달려가는 이들은 모두가 지(地)의 종족인 것이란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의 본질은 이미 어둠으로 흩어져 사라진 채였고, 나는 내 몸을 이루는 유전자 하나하나가 어둠 속에 잡아먹히는 느낌을 느끼며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녹아 내려갔다.

나는 그 부드러운 목소리 한 음절 한 음절에 녹으며 죽어 가고 있었다.

[우리 선수(仙獸)란 생명과 역사의 영역에서 노니는 신(神)들일진저, 진정한 땅(地)의 대변자이노라. 그렇기에 우리의 힘을 받들기 위해서는 도리어 너무 많은 세월을 쌓아 오면 아니 된다. 왜냐하면, 많은 세월을 쌓아 왔다는 것은 하나의 그릇에 충분히 많은 내용물이 들어있다는 뜻이니, 그 그릇에 새로운 걸 불어넣으면 그릇이 깨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노라.]

쿠구구구구!

"아악… 아아악! 아어…아악…."

[역사는 절대적인 '하나'. 그렇기에 한 존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선수의 힘도 하나이다. 그렇기에 아이야, 너는 본래라면 내 힘을 받아들일 수 없노라. 너는 이미 자기 자신의 한계를 한참이나 뛰어넘을 정도로 세월을 쌓아 왔으니….]

점차 비명조차 어둠 속으로 침잠해 간다.

[하지만 도리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그 정도의 세월을 쌓았기에, 어쩌면 또 모르지. 그렇기에 한번 지켜보도록 하마. 너는 내 힘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부스스….

어둠에 의해 전신이 갈려 나간다.

나는 내 자신이 먼지가 되어 버리는 것을 인지하며, 그대로 어둠 속에서 정신을 잃어버렸다.

* * *

"그학…! 그하학! 크학!"

허억!

나는 번뜩 눈을 뜨며, 내 목에서 나는 기이한 소리에 몸을 흠칫 떨었다.

'여긴… 어디지?'

맞다.

나는 규련에게 나를 도와 선수 진혈을 연화하는 것을 부탁하며, 그녀의 동부 안에서….

"…헛!"

나는 황급히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보려 했다.

하지만, 나는 목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이물감에 자리에 주저앉아야 했다.

아니, 목뿐이 아닌 전신 곳곳에서 끔찍한 이물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

그것은 핏빛의 창이었다!

피로 이뤄진 혈창이 내 목, 사지, 그리고 심장과 단전 바로 윗부분에 꽂혀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쿨럭!

말을 할 때마다 피가 토해진다.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인영이 걸어왔다.

규련이었다.

"정신 차렸느냐?"

"규… 선배님?"

"원래 선수 진혈을 연화할 때는, 피에 녹아 있는 선수 흑룡의 힘의 편린을 마주하기에 이지가 날아가서 날뛰게 되지. 하도 날뛰어서 주술진 안에 제압해 놓았다."

"아… 감사합니다. 혹시 이제 빼 주실 수 있으실지…."

그녀는 말없이 내게 다가와, 내 목에 박힌 창과 심장에 박힌 창, 그리고 단전 위에 박힌 창을 뽑아 주었다.

촤라락!

창을 뽑자마자 웅혼한 기운이 몰려들며 창이 꽂혀 있던 부위가 재생되는 것이 느껴졌다.

'재생력이… 차원이 다르다…?'

나는 이전과는 달라진 몸 상태에 눈을 빛냈다.

이정도 재생력은 결단기는 되어야 볼 수 있는 재생력이었다.

"저… 그런데 팔다리에 박힌 창들도 뽑아 주시면 안 됩니까?"

"아직 안 끝났다."

"예…?"

"이제 겨우 흑룡의 힘이 남긴 잔류를 경험하고 깨어난 게 아니느냐."

"무슨… 흐읍!!!"

나는 그와 함께 닥쳐 오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춥다!

이전에 봉명주 밑바닥에 처박혔을 때처럼 춥다!

이것은….

"흑룡은 태음의 힘을 관장하는 선수이시다. 그분의 힘을 네 몸에 녹여 내는 과정이다. 아득한 옛적부터 전해진 태음의 권능을 받아들여라."

파아아아앗!

규련의 말이 울려 퍼진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팔다리에 꽂혀 있는 혈창에서 황금빛 생명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너무 추워서 얼어붙어 버릴 것만 같거늘.

혈창은 내 추위를 몰아내주며 내 정신을 이끌었다.

'이것이, 태음….'

나는 이를 악물며 전신에서 날뛰는 음기를 가라앉혔다.

"흐오오오오오오!!"

가라앉아라!

규련이 황금빛 뿔을 드러내며 내 전신에서 날뛰는 음기를 제압해 주고 있었고, 나는 제압된 음기를 내 의지 하에 두며 날뛰지 못하게 억눌렀다.

"그 상태에서 네가 익힌 요수공법을 운용해라. 음양의 흐름이 태음을 포용하도록 유도해!"

'음양의 흐름이 태음을 유도하도록….'

나는 창령성광오채대법을 운용하며, 음의 기운을 유도했다.

음과 양의 영기가 폭발하며, 그 폭발 사이로 이중나선이 그려진다.

나는 그 이중나선 사이로 음의 기운을 유도했다.

음의 힘은 이중나선 사이로 스며들며, 내 육신 자체를 개조해 나갔다.

우득, 우드드득!

전신에 흑룡의 힘이 스며든다!

뿌득, 뿌드드득!

이마에 흑색의 사슴뿔이 돋아나고, 이빨이 삐죽삐죽해지는 게 느껴졌다.

손끝으로 매의 발톱 같은 날카로운 발톱이 생겨났고, 피부 위로 드문드문 흑색의 비늘들이 돋아난다.

"그…아아아아아!"

고함을 지르자, 내 성대에서는 인간의 고함이 아닌 용의 그것이 터져 나왔다.

흑룡의 힘이 주는 강력한 흉성이 뇌리를 지배하는 듯했다.

'저, 정신이….'

귓가에서 흑룡의 고함이 미친 듯이 터져 나온다.

이대로라면 흑룡의 야성에 정신이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아니, 아니다.

'이건….'

나는 내 내면에 숨겨진 야성을 마주하고 있었다.

흑룡의 힘은 내 안쪽으로 스며들며, 이천 년에 달하는 나 자신의 세월을 끄집어냈다.

이천 년을 살며 내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 온 부정적인 기운들, 그동안 강력하게 억눌려 왔던 욕망이 미친 듯이 꿈틀거렸다.

'그런가,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자일수록 자기 자신에게 쌓여 온 야성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거구나.'

나는 흑룡의 힘에 고개를 드러낸 나 자신의 야성을 마주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라면 정신이 나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크아아아아아!"

포효를 내지른다.

이제 내 포효는 용의 포효와 다를 바 없었다.

규련의 동부 전체가 흔들거렸으나, 그녀는 무덤덤하게 황금빛 기운을 끌어올렸다.

"조금 아플 거다. 그래도 선수혈합을 통과한 정도라면 충분히 견딜 수 있을 테니 걱정은 말도록."

다음 순간, 그녀가 자신의 발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발에 황금빛 기운이 몰린다.

그리고, 그녀의 발이 내 머리통을 거세게 짓밟았다.

"크왁!"

뭔가를 느낄 새도 없이.

야성과 욕망에 사로잡혔던 내 머리통은 그대로 규련의 발에 밟혀 박살이 나 버렸다.

퍼엉!

나는 내 머리통이 수박 터지듯이 폭발하는 느낌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