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은혜 (10)
뿌드득….
머리로 열이 잔뜩 뻗쳐 오르는 것 같았다.
지금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란 말인가.
지금 기묘성채에 탑승하여 광한계로 돌아가길 기다리는 인족 병사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패잔병들이기는 했지만 그 수는 수천을 넘는 정도.
비록 총연맹 전체의 인구수를 따져 본다면 티끌같은 인력이라지만, 이렇게 헌신짝처럼 무심하게 버릴 수 있단 말인가?
"혹, 차원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없네. 차원문을 열려면 차원의 경계에서 가까운 지역에 자리를 잡고 10년은 넘게 차원 장벽에 간섭하는 법술을 써야 해. 뭐, 광한계 쪽에서 차원문을 닫은 셈이니까, 광한계 측에서라면 다시 문을 열 수도 있겠지만…."
"진마계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거군요."
현운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읊조렸다.
"애초에 여는 데에도 힘이 많이 들지만, 차원문을 닫는 것 역시 상당한 수고가 들기에 일부러 닫지는 않을 거라 여겼는데… 도대체 어째서…."
우리의 얼굴에 전부 침음성이 깃들었다.
그때, 문득 현운이 우리가 지나온 자리를 돌아보았다.
"잠깐, 그것보다도… 흑룡왕께서 이쪽으로 오고 계시는군."
그의 말에 오현석이 의아한 듯이 말했다.
"도대체 그 흑룡왕이란 자는 왜 우리를 쫓아오는 건가? 아니, 그것보다도. 애초에 우리를 쫓아오는 게 아니라, 흑룡왕도 인족 측에서 마계 입구를 닫아 버렸다는 데에 격노해서 이쪽으로 오는 거 아닌가?"
잠시 고민하던 현운이 한숨을 쉬었다.
"…그럴 가능성도 있으니, 일단 자리를 피하도록 하지. 괜히 차원문에 도착해서 인족 총연맹측에 분통을 터트리다가 우리에게 화풀이라도 하면 곤란하니."
현운의 말에 김연은 기묘성채를 움직여 다른 곳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산맥 한두 개를 넘어 다른 지역으로 갈 때였다.
오현석은 현운에게 의아한 듯이 물었다.
"그나저나 현운 군사께서는 어째… 흑룡왕이라는 분과 만나기를 꺼려 하시는 것 같군요. 그분의 후손이라는 것 같으신데, 후손이라면 어째서 대화를 해 보는 대신 피하자는 의견을 내신 겁니까?"
"…흑린어령문의 개인적인 사정일세. 신경 쓸 건 없네."
현운은 미간을 찌푸리는 듯하더니 흑룡왕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때, 현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입술을 짓씹었다.
"제길, 이쪽으로 쫓아오시는군. 인족 측에서 문을 닫은 것에 분노하는 게 아니라, 애당초 우리를 쫓아오고 있던 것이야!"
그의 말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긴장을 끌어 올렸다.
"전투 준비를 하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쿠릉, 쿠르르릉!
얼마 후.
하늘이 시커먼 음기로 충천하며, 저 멀리서 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용(龍)이었다.
"…거대하군."
나는 그 압도적인 '크기'에 질려 허탈하게 웃음을 뱉었다.
산맥!
말 그대로 기다란 산맥이 하늘을 날며 움직이면 저렇지 않을까?
수계에서 보았던 서휼의 본체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다.
저런 것을 진짜 용이라고 한다면, 서휼은 새끼 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몸길이가 몇 리나 되는 거냐…."
"어마어마하군요."
그 자리에 있던 이들 중 대다수가 기가 질린 채, 우리를 쫓아오는 흑룡왕의 거체를 보며 한 마디씩을 내뱉었다.
그리고.
쿠구구구구궁!
천지간의 음(陰)한 기운이 진동하며, 곧이어 흑룡왕이 우리에게 달려들어 기묘성채의 주변을 돌았다.
산 하나 크기의 그의 머리가 기묘성채를 한 바퀴 돌자, 자연스레 그의 거체는 기묘성채를 둘둘 말아 포위한 형국이 되어 버렸다.
우릉, 우르릉!
흑룡왕의 주변으로 먹장구름이 나타났고, 그는 머리와 발아래에 먹장구름을 둔 채, 먹장구름 위에 그 몸을 얹었다.
나는 그를 주시하며 문득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노… 한 건 맞다. 그런데….'
뭐지, 저건?
제대로 감정을 읽기가 힘들다.
단순히 경지가 높아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 심족의 시야를 피하는 법기를 쓴 것인가?
그러나 서휼이 쓴 시야를 회피하는 법기나, 혹은 다른 합체기 태수들에게서 얼핏 봤던 그런 느낌과도 확연히 달랐다.
아예… 사고의 구조가 일반적인 생명체들과는 완전히 다른 듯했다.
'도대체 뭐지?'
이런 느낌은.
혈음계 쇄성기 존자의 왼손을 봤을 때 느낀 것과 같았다.
그리고, 흑룡왕을 향해 현운이 어두운 안색을 애써 떨치며 일어나 예를 올렸다.
"시조께, 흑린어령문 장로 현운이 인사 올립니다."
뒤룩, 뒤룩….
그리고, 흑룡왕의 커다란 눈알이 움직이며 현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얼마 후 흑룡왕이 혀를 차는 소리가 울렸다.
[쯧쯧… 하잘것없군. 혈맥이 형편없으니, 교배시켜도 좋은 혈맥은 못 잇겠구나.]
너무나도 태연하게 '교배'라는 말로, 현운을 마치 가축처럼 취급하는 흑룡왕의 말에 현운의 감정 상태가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현운은 얼굴에 그를 드러내지 않고 태연하게 흑룡왕에게 말을 올릴 뿐이었다.
"시조께서 어째서 저희를 찾아오셨는지, 혹여 이유를 들려주실 수 있다면 감사하게 경청하겠습니다."
[너희를 찾아온 게 아니다. 조용히 있거라. 그보다도….]
그의 눈알이 기묘성채를 향하였다.
[그 성에, 개열기(開涅期) 수사가 숨어 있지 않으냐? 그자를 불러와라.]
"…???"
흑룡왕의 말에, 장내에 있던 모두의 표정이 아리송해졌다.
너무나도 뜬금없지 않은가?
'기묘성채에 개열기 수사가 있다고?'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당장 쇄성기 존자조차도 여태껏 분신이나 분체만 구경했지, 본신을 본 적도 없고.
성반기 수사조차 이름만 들어 본 상황인데 뜬금없이 개열기 수사라니?
나와 다른 이들이 의아해할 때.
흑룡왕이 진노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의 감정은 너무 일반적인 존재와 구조가 달라서 알아보기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격노의 감정이 짙어지니 대강은 알 수 있었다.
[어떤 녀석이냐, 감히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어째서 진마(眞魔)와 광한(廣寒) 사이에 간섭하느냐. 남아 있는 모든 개열기들은 모두 성계(星界)에서만 박혀 있어야 함을 잊었단 말이냐!?]
찌릿, 찌릿….
전신이 떨린다.
'이 자….'
단순히 합체기가 아니다.
[그녀]에게서 느꼈던 위압감이 아니었다.
'아니, 아니지….'
분명 힘 자체는 합체기 최고봉 정도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 정도 위압감은, 괴군이 쇄성기에 도달시켰다는 [그녀]를 상대로도 느낀 적 없는 압박감이었다.
'뭐지, 이 자는?'
개열기들과의 약속?
그리고 기묘성채에 개열기라니?
내가 의문을 지닐 때였다.
얼마간 이쪽을 노려보던 흑룡왕이 점차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뭐지? 개열기라면 이 약속을 무시할 수는 없을 터. 너는 누구냐…? 다른 천역에서 온 존재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개열기씩이나 되는 존재가 타 천역에서 건너온다면 누구도 모를 리가 없어. 그런데 개열기가 지금 내 존재를 느끼고도 가만히 있다는 거냐?]
횡설수설하는 듯하던 그가,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설마 아니겠지만… 네놈들에게 묻겠다.]
흑룡왕의 시선이, 기묘성채를 조종하고 있는 김연에게 향했다.
[며칠 전, 운명의 인력을 움직여 시공간을 헤집었던 사건… 그것이, 개열기 수사가 아니라 이 성의 공능이었던 건 아니겠지?]
"…."
그제야 나는 흑룡왕이 무얼 오해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연의 연의 힘을 느끼고, 그걸 개열기 수사가 한 짓이라 오해한 거였던 건가….'
미치광이가 일생을 바쳐 펼쳐 낸 최후의 연극.
그것은, 개열기 존재에게 해당할 정도로 막대한 힘이었던 것 같았다.
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기묘성채의 힘으로 기의 계위에서 영기를 끌어모아 인공 혼을 끌어모으고, 다시 인공 혼들의 움직임으로 명의 계위에 영향을 끼쳐, 그를 바탕으로 시공간을 잠시 왜곡한 것은 분명 이 기묘성채가 지닌 자체적인 공능입니다. 다만 주요 기관은 전부 과부하가 걸리고 파열되어서 다시 그 기능을 쓰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요."
[….]
흑룡왕의 안색이 바뀌었다.
그의 감정은 읽기 힘들었으나, 너무나도 강력한 감정이 표출된 덕에 대강 읽을 수는 있었다.
어처구니없음.
당최 믿기가 힘들다는 기색.
그리고 얼마간 우리를 쳐다보던 흑룡왕은 두 눈을 흘겼다.
[…뭐, 그리되었다면 알겠다. 거짓을 고하는 건 아닌 듯하니… 좋다. 개열기가 혈음의 아이를 죽인 건 아닌 듯하군. 하면….]
쿠구구구구!
흑룡왕의 기운이 천지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너희는 그냥 죽어라.]
꽈르릉, 꽈릉!
춥다.
갑자기 천지사방의 기운이 내려간다.
분명한 합체기 최고봉의 힘.
계멸천공진의 폭발을 자신의 힘으로 재현할 수 있는 무지막지한 존재.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우우우우웅!
김연이 의식을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기묘성채가 진동하며, 총 8기의 빛 덩이가 기묘성채의 팔방을 점한다.
쿠우웅!
8기의 합체기 괴뢰가, 흑룡왕의 기세를 틀어막았다.
나는 흑룡왕의 기세를 어렴풋이 느끼며 확신했다.
'역시, 방금 보였던 압박감은 합체기의 것이 아니지만, 가지고 있는 힘 자체는 합체기 수준일 뿐이야.'
이 정도라면 절대 질 이유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흑룡왕은 8기의 합체기 괴뢰를 보자 다시 한번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만 한 수준의 괴뢰라니, 요즘 떠들썩한 그 괴군이라는 놈의 작품인 건가? 허….]
그리고, 그가 비릿하게 웃으며 울부짖었다.
쿠르르르릉!
[이곳으로 오라, 존자의 좌족(左足)!]
그와 동시에, 흑룡왕의 등 뒤로 네 개의 원영이 떠오르더니, 네모난 공간 균열을 만들었다.
그리고 공간 균열의 너머로, 붉은빛이 비치더니 시뻘건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촤라라라락!
무수한 산호로 이뤄진 발들!
지난번 존자의 왼손이 전체적인 형상 자체는 그래도 '손'의 형태였다면.
존자의 왼발이라는 것은, 발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뼈로 이뤄진 말미잘 같은 느낌이었다.
붉은 산호들이 얽히고설키며 하나의 뼈 같은 형상을 만들어 내고 있었고, 그 뼈들이 다시 돋아나 엉켜 있어 말미잘처럼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왼손]에 눈이 돋아나 있던 것처럼, 저 [왼발]에는 입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꿈틀꿈틀꿈틀….
존자의 왼발이 움직이며 천지마기를 끌어모은다.
그 모습을 본 현운의 충격을 받은 듯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시조께서… 왜 혈음계 존자를… 아니, 잠깐. 처음부터 광한계를 배신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흑룡왕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존자를 불러낸 후 힘을 끌어모았다.
쿠구구구구!
흑룡왕이 으르렁거리며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존자의 왼발이면 합체기 4기쯤은 감당하겠지. 그리고….]
흑룡왕의 등 뒤로, 흑룡왕을 닮은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난다.
[선수(仙獸) 진혈을 가진 나라면, 너희를 쓸어버리는 일 따위는 일도 아닐지니….]
콰아아앙!
다음 순간.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감지할 수도 없었다.
'뭐지?'
주변이 어둡다.
그리고 혼란스럽다.
그러나, 익숙하다.
이곳은….
'허공간?'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고는 경악했다.
흑룡왕의 일격에, 우리가 존재하던 지역 전체의 공간이 무너져, 우리가 전부 허공간으로 진입한 것이었다.
꾸구구구구!
그리고, 어둠 속 저 멀리.
그곳에서 흑룡왕이 똬리를 튼 채 힘을 끌어모으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부우우웅!
기묘성채가 열리며 무수한 괴뢰들이 합체기 괴뢰들에게 합세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존자의 좌족이 붉은빛을 흩뿌리며 괴뢰들을 상대했기에 필연적으로 전력이 분산된다.
[천지에 명하나니, 흑룡왕 현음의 이름으로 검은 바다를 짓는도다.]
우르릉!
다음 순간.
먹장구름이 허공간을 채우는 듯하더니, 일대의 풍경이 바뀌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간에, 시커먼 흑수(黑水)로 된 바다가 나타났다.
촤아아아!
아래로는 시커먼 바다가, 위로는 검은 먹장구름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흑해의 중앙에서, 흑룡왕이 힘을 쓰기 시작했다.
쩌억!
그가 입을 벌린다.
그의 입가로 잿빛의 빛 망울이 몰리며, 칙칙한 흑해의 세계를 밝혀 왔다.
번쩍!
잿빛의 광선이 우리를 향해 쇄도한다!
그 충격파에 그대로 바다가 두 쪽이 나서 갈린다.
하지만 김연은 담담하게 기묘성채를 조작하였다.
이윽고 기묘성채에서도 빛 망울이 몰리며, 흑룡왕과 비슷한 광선을 뿜어냈다.
쿠구구구구!
두 광선이 맞부딪혔다.
'기묘성채도 하나의 괴뢰. 흑룡왕을 견제하기에는 충분하다!'
흑룡왕의 광선과 기묘성채의 광선은 팽팽하게 부딪혔다.
그때였다.
쿠구구구!
광선의 충격파로 인해 갈라진 바다가, 형태를 변화하기 시작했다.
두 쪽으로 갈라진 바다는 하나의 턱이 되었다.
그리고 턱에서는 날카로운 이빨들이 돋아나며, 이내 거대한 '입'으로 변화하였다.
그것은 거대한 용의 아가리였다.
용의 입이 우리를 집어삼켰다.
부웅, 파앙!
하나, 8기의 괴뢰 중 한 기가 앞으로 나섰다.
한령족 합체기 태수의 몸으로 만든 괴뢰.
그 괴뢰가 손을 뻗자 단숨에 바다로 이뤄진 용의 아가리가 얼어 버렸다.
그에 그치지 않고 괴뢰가 결인을 맺자, 천지간이 순식간에 얼어 버렸다.
바다가, 구름이, 공기가.
삽시간에 주변은 겨울로 변해 버렸다.
촤아아아!
눈보라가 몰아치며 흑룡왕이 눈의 감옥에 갇히는 듯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눈의 감옥 안에서 잿빛이 터져 나왔다.
꾸구구구궁!
그리고, 흑룡왕의 주변으로부터 어마어마한 기세가 몰아치며, 그가 기묘성채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서염족 합체기 태수로 만든 괴뢰가 앞으로 나서며 불꽃으로 된 검을 들어 올렸다.
흑룡왕이 자신의 뿔을 내밀며, 서염 괴뢰가 내민 검과 자신의 머리를 부딪혔다.
콰아아앙!
삽시간에 충격파가 온 천지로 퍼지며, 여파만으로 얼어붙었던 바다와 하늘이 마구 쪼개졌다.
'여파 하나하나가 송진의 일격 급….'
이것이 합체기 급들의 전투!
그러나 김연은 물론이고, 괴뢰들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나 역시 안색이 좋지 않았다.
'서염 괴뢰가….'
흑룡왕의 일격을 직접 받아 낸 서염 괴뢰가, 벌써부터 덜걱거리고 있었다.
반면 흑룡왕은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은 채, 빠르게 서염 괴뢰를 향해 입을 벌리고 용의 숨결을 내뱉으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전투가 이어지면 점차 이쪽이 밀린다!
'[그녀]까지 있었으면, 이쪽이 이길 수 있을지도 몰랐는데….'
연의 연 이후, [그녀]가 완전히 망가졌으니 어쩔 수 없다.
한령족 괴뢰와 서염족 괴뢰가 흑룡왕에게 달라붙어 공격을 퍼붓는다.
그리고 산원족 괴뢰가 원숭이답게 빠르게 이동하며, 흑룡왕의 주의를 끌었다.
콰아앙!
산원족 괴뢰의 일격이 흑룡왕의 몸에 적중하자, 적중한 곳에서 산(山)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산은 흑룡왕의 기력을 빨아먹으며, 마치 종양처럼 계속 커지기 시작하였다.
산원족 괴뢰의 뒤쪽으로 태호족 괴뢰가 범의 형상을 한 채 날아들어 흑룡왕의 목을 물었다.
쿠구구구!
태호족 괴뢰의 힘은 단순했다.
압도적인 육신의 힘!
일격 일격이 공간을 찢어발겨 버릴 정도로 무식한 힘!
그것이 태호족 괴뢰가 가진 능력!
그리고 그것 말고도 204기의 사축기 괴뢰들이 각기 존자의 왼발과 흑룡왕에게 나뉘어 붙어 그를 지원 사격하였다.
간혹 가다 기묘성채에서 광선을 뿜어 흑룡왕을 쏘아 주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그렇게, 흑룡왕을 수세로 몰아가는 듯했다.
그렇게 보였다.
콰아아앙!
흑룡왕이 몸을 떨쳐 내자, 그에게 달라붙었던 모든 괴뢰들이 한 번에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파아아앙!
다음 순간, 흑룡왕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움직이며 우리의 주변을 둘러쌌다!
'빠르다!'
그리고 그의 몸이 스쳐 지나가는 자리는, 전부 검은 물로 녹아서 변해 버린다.
점차 사방은 다시 검은 바다로 변해 갔고, 흑해의 물이 각기 우리를 압박해 왔다.
촤아아악!
기어코 마침내 산원족 괴뢰가 흑해의 물에 잡혀 버렸다.
콰드드득!
얼마 후 산원족의 괴뢰가 빠득거리며 점차 망가지는 소리가 들렸다.
콰아아앙!
그리고 다음 순간, 흑룡왕의 뿔이 기묘성채의 한쪽 면을 강타했다.
기묘성채가 어마어마하게 흔들렸고, 김연이 무언가 반격을 하려 했으나 흑룡왕은 어느샌가 다시 뒤로 빠져 입을 벌리고 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체급이나 힘도 힘이지만, 전투 경험이 많다!'
합체기 수사쯤 되면 그 수명은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길어지고, 오랜 세월을 살며 온갖 일을 경험했다.
그런 만큼, 그가 지금까지 치러 온 전투의 전투 경험만 해도 어마어마한 경험치이리라.
파아아아앗!
흑룡왕의 숨결이 이곳을 향한다.
김연은 기묘성채의 광선을 모아 흑룡왕에 맞서 기를 끌어모았고, 다른 합체기 괴뢰들 역시 흑룡왕에게 향하게 한다!
하지만 다음 순간.
쩌어어억!
흑룡왕의 뒤편으로 네모난 공간 균열이 다시 뚫렸고, 그는 순식간에 공간 균열을 통해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바로 다음!
흑해의 밑에서부터 흑룡왕이 나타나, 우리의 뒤편으로 날아올랐다.
"뭣!"
그리고 그가 지금껏 끌어모은 숨결을 내뱉었다!
"이건 못 막…."
다음 순간.
나는 김연을 충격에서 보호하기 위해 그녀를 감싸 안으며 이어질 충격에 힘을 끌어 올렸다.
"…."
"…."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
그림자.
누군가의 거대한 그림자가, 흑룡왕의 일격으로부터 기묘성채를 가리고 있었다.
나는 그림자의 정체를 알아채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스승님?"
쉬이이이….
흑룡왕의 일격을 맞은 창호자의 전신에서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창호자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미안하다. 총연맹의 옹졸한 수뇌부들을 설득하고, 차원문을 부수고 오느라 조금 늦었다."
촤라라락!
창호자.
이번 생의 스승.
"다시 차원문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라. 내가 도와주마."
그의 등 뒤에서, 열 쌍의 날개가 돋아났다.
"너희는 내 제자이니…."
쿠구구구구!
나는 창호자가 어떻게 흑룡왕의 일격을 막았는지 이해했다.
그리고 창천개벽문에 전해지는, 열 쌍의 날개로 펼치는 창익천쇄의 전설에 대해서도 이해했다.
"내 생명을 걸어서라도, 어른으로서 책임을 지겠다!"
우우웅!
푸른빛이 창호자를 휘감는다.
자신의 생명을 불태워서 얻는, 창천개벽문 최후의 열 번째 날개.
문파의 어른이, 후학들을 구하기 위해 생명을 불태우며 이 자리에 도달하였다!
스승의 은혜 (11)
[웃기는 녀석이군.]
흑룡왕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연체공법을 익힌 인족? 감히 내 앞에서? 너희가 익히는 절대 다수의 연체공법이란, 결국 요수공법의 열화판이라는 걸 모르는 거냐? 지족의 최강자 중 하나인 내 앞에서 감히 열등한 공법을 앞세워?]
창호자는 말이 없었다.
치이이이―
"…?"
그리고, 나는 창호자를 바라보며 흠칫 놀랐다.
'색이, 바뀌고 있다.'
말 그대로였다.
그의 양 주먹에 담긴 창령격원결.
본디 푸른빛으로 넘실거려야 할 그의 주먹과, 그의 날개가 점차 다른 색으로 변화한다.
적색(赤色)이 점차 창호자의 몸에서 빠져나온다.
무엇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생명의 근원이, 그 피의 기운이 넘실거리며 창호자의 전신에서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창익천쇄의 청색과 창호자의 혈색이 합쳐지며, 자색(紫色)으로 화하고 있었다.
열 번째 날개가 펼쳐지며, 창호자는 보랏빛의 화신으로 화하였다.
그 모습은 마치, 혼원(混元)의 기운으로 몸을 변화시켰던 오현석과도 얼핏 닮은 듯했다.
[하, 감히 나에게 대적하겠다는 거냐? 연체사가?]
쿠릉, 쿠르르릉!
점차 흑룡왕의 주변으로 먹장구름이 몰려들며, 흑룡왕의 힘을 더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창호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흑룡왕을 향해 걸어갔다.
쿵, 쿠웅, 쿵!
그리고, 그가 한 발짝을 걸어나갈 때마다 점차 그의 전신이 거대해지고 있었다.
한 발짝을 걷자 일 문(文)만큼 커지고, 두 걸음을 걷자 한 치(寸)만큼 커지며, 세 걸음을 걷자 한 척(尺)만큼 커진다.
네 걸음을 걷자 한 칸(間)만치 거대해지며, 다섯 걸음을 걷자 한 길(仞)만치 다시 거대해졌고, 다시 여섯 걸음을 걷자 한 정(町)만큼 또 거대해졌다.
마침내 일곱 걸음을 걸었을 때, 창호자의 몸은 일 리(里)만큼 또 커져 있었다.
쿠웅!
여덟 걸음.
창호자는 다시 10리만큼 거대해진다.
쿠웅!!!
아홉 걸음.
100리!
그리고 마지막.
열 걸음!
콰아아앙!
[뭣…!?]
흑룡왕이 당황하였다.
그리고, 창호자의 몸은 그대로 계속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저게, 창령성광오채대법으로 천인기에 이르면 펼칠 수 있다는, 거신화 신통…!'
하지만 저 모습은 내가 들었던 것보다도 더더욱 거대한 신통이었다.
'생명을 태움으로써, 사축기가 아닌 그 너머의 힘을 얻는 거란 말인가!?'
그것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을 힘이다!
이내 산맥만 한 크기의 흑룡왕보다도 더더욱 거대해진 창호자가, 주먹을 들어 올렸다.
마치, 자색의 거신(巨神) 같아 보이는 모습!
어느새 창호자의 날개는 그의 몸 안쪽으로 들어갔고, 그의 양팔에 두 마리 자색의 용(龍)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뭣…!]
그리고 흑룡왕이 채 당황을 추스르기도 전.
콰아앙!
창호자의 일격이 흑룡왕에게 내리꽂혔다.
꾸구구구구궁!
"…!?"
말 그대로.
천지가 찢겨 나간다.
흑룡왕이 만들었던 흑색의 바다가, 그대로 찢어발겨진다.
그리고 여태껏 우리를 상대로 선전하는 듯했던 흑룡왕이 입에서 피를 토하며 내려앉는다!
[이…놈…! 생명을 태운다는 거냐!?]
쿠르릉, 쿠릉!
창호자의 몸은 마치 자색의 우주(宇宙) 같아 보였다.
그의 몸 안쪽으로 무수한 자색 성천의 형상이 떠다니는 것이 보인다.
창호자는 흑룡왕을 상대하면서도 말이 없었다.
그저 몰아붙일 뿐!
'저게, 창령성광오채대법, 최후의 단계.'
창익천쇄의 일격이, 목숨을 태우는 동안 기본(基本)이 된다.
창령격원결의 최후절기인 창익천쇄가 기본적으로 주먹에 둘려 있는 상태, 거기에 성광호체공의 성체화(星體化)로 거신화를 한 후, 오행장원전의 막대한 동력(動力)이 그를 지탱한다.
어둠을 두른 흑룡왕과 싸우는 그 거대한 거체는, 마치 자색의 천신(天神)과도 같아 보였다.
김연도 보고만 있지 않고 흑룡왕을 향해 합체기 괴뢰들을 움직여 그를 몰아붙였다.
합체기 괴뢰들과 팽팽하게 맞서 싸우던 흑룡왕이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는 창호자를 상대로 분명히 점차 패퇴하고 있었다.
꾸과과광!
창호자의 주먹이 그의 비늘을 스칠 때마다.
흑룡왕의 몸 곳곳이 뜯겨 나가는 게 한눈에 보였다.
꽈아앙!
흑룡왕이 피를 토하며 밀려나간다.
그가 피를 흘리며 우리를 노려보았다.
[네놈들… 크, 크흐… 감히… 감히…!]
그가 진노한다.
그리고, 흑룡왕이 울부짖었다.
[내가 네놈 따위들에게 질 것 같으냐!? 나는 지지 않는다! 나는 흑룡왕 현음이다! 다시 위대한 자리로 돌아갈 자란 말이다!]
치이이이이!
그와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붉은 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흑룡왕의 검은 비늘 사이로, 붉은 혈기(血氣)가 치솟기 시작했다.
[좋다, 네놈들의 각오를 알았으니, 나 역시 각오를 좀 하지. 광영으로 여겨라, 이 몸의 수명을 줄여서라도 네놈들을 격살하려는 것이니!]
키이이잉!
"…!?"
그리고 다음 순간.
흑룡왕의 몸에서 뿜어지는 혈기가 더더욱 치솟으며, 흑룡왕이 갑자기 존자의 좌족을 향해 돌진하였다.
그와 동시에, 흑룡왕과 존자의 좌족이 합체하였다.
키이잉!
붉은 빛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꿈틀거린다.
그리고.
[오오오오…!]
꿈틀거리는 존자의 좌족, 그 붉은 산호의 촉수 안쪽으로, 흑룡왕의 몸체가 끌려들어가는 듯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존자의 좌족이 완전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
존자의 좌족은 구름이 되었다.
아니, 폭풍이 되었다.
쿠릉, 쿠르르릉!
동시에 그것은 바다였다.
붉은 혈운이, 안쪽에서 검은 번개를 품고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동시에 그 붉은 구름 사이사이에 가득 차 있는 핏물은 마치 바다와도 같아 보였다.
우릉, 우르릉!
"…!?"
흑룡왕은, 존자의 좌족과 합체하여 하나의 천지현상(天地現象)으로 화하였다.
진마계의 마기가 붉은 폭풍 안쪽으로 끌려 들어가며 거신으로 변한 창호자를 덮쳤다.
창호자는 검붉은 폭풍 속에 파묻히며 묵묵하게 흑룡왕과 존자가 합쳐진 거대한 뭔가를 막아섰다.
김연 역시 합체기 괴뢰들을 총동원해서 저 붉은 폭풍을 막아서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막을 수 없다!'
이미, 합체기 수사의 힘을 넘어섰다!
나는 저 정도 힘을 뿜어내는 존재를 본 적이 있었다.
[그녀]!
괴군이 쇄성기 급이랍시고 개조했던, [그녀]가 딱 저 정도의 권능을 뿜고 있었다!
'도와야 한다!'
나는 생명을 태우는 창호자를 바라보았다.
저 붉은 폭풍은 단순히 그의 몸만을 공격하고 있지 않았다.
정신!
창호자의 정신 역시 빠르게 저 폭풍에 의해 갉아먹히는 것이, 내 눈에는 또렷하게 보였다.
'물리적으로 저 폭풍을 막을 순 없다. 아마 김연이 기묘성채를 총동원해도 힘들겠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는 다시금 덜걱거리는 몸을 겨우겨우 움직였다.
'그가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그의 마음 안에 축복을 불어넣는 것뿐!'
의해은산은 원영을 뿜어 가르는 것 외에도, 일순간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뿜어내는 일격이다.
원영뿐 아니라, 당연히 몸에도 어마어마한 무리가 간다.
지난번, 의해은산을 써 존자의 일격에게서 모두를 구하고, 김연의 금제를 해제하기 위해 다시 한번 의해은산을 썼다.
하루에 두 번씩이나 모든 것을 쥐어짜 내는 절초를 펼쳤기에, 내 몸 상태는 그때부터 굉장히 좋지 못했다.
아마 이번에 또 의해은산을 쓴다면, 못해도 수명이 200년은 깎이리라.
하지만….
'그 정도면 별 거 아니군.'
어차피 원영기쯤 되면 시간은 남아난다.
그러니, 더 이상 망설일 필요도 없다!
츠츠츳!
나는 전신에 힘을 쥐어짰다.
김연은 합체기 괴뢰들을 움직이며 창호자를 지원했고, 오현석 역시 창익천쇄를 짜내며 힘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기묘성채의 인족 패잔병들 역시, 모두 기묘성채 바깥으로 나와, 각기 창호자를 지원할 법술을 준비했다.
"스승님!"
오현석이 크게 외치며 뛰어나간다.
촤라라락!
그의 등 뒤에서 총 일곱 장의 날개가 뻗어 나왔다.
필시 수명까지 깎아서 만들어 낸 날개였다.
무수한 이들이 펼쳐 낸 일격이 창호자를 도우려 할 때.
그때였다.
문득, 폭풍을 막아 내던 창호자가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는 창호자의 눈을 본 순간,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 소리쳤다.
"스승님! 안 됩…."
다음 순간.
쿠구구구구구!
창호자는 우리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
그의 주먹이 움직이며, 점차 그가 입고 있던 갑옷.
그의 공법에 따라, 자색으로 함께 물들었던 청천갑(靑天鉀)이 벗겨지며 이쪽으로 함께 날아왔다.
그리고 청천갑의 공능일까.
우리는 그의 주먹에서 뿜어진 권풍(拳風)에, 공간 자체가 뒤로 밀리며 그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창호자의 목소리가 나직이 우리에게 닿는다.
[총연맹에서, 곧 있으면 다시 차원문을 닫을 거다. 빨리 나가라.]
"스승님!!!"
오현석이 눈물을 흘리며 창호자를 불렀고, 나는 필생의 집중력을 동원해 의해은산의 초식을 사용하였다.
파아아앗!
섬광이 나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내 원영은 창호자에게 닿지 못했다.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탓에, 그에게 닿으려면 더더욱 원영을 몸에서 멀리 떨어뜨려야 한다.
아슬아슬하게, 내 원영은 창호자에게 닿지 않고 내게로 돌아온다!
하지만, 나는 입을 다물고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의해은산으로 휘둘렀던 원영이 창호자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
나는 견신이 준 신통을 사용했다.
기괴고(奇怪蠱)의 술!
피이잇!
내 원영에서, 혼(魂)의 조각이 떨어져 나가며 창호자의 체내로 스며든다.
본디 혈음계의 존재들의 정신 간섭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술법.
나는 기괴고의 술을 통해, 창호자의 영혼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리고 그의 영혼을 지원하며, 그의 정신을 좀먹는 존자의 정신 간섭에 같이 저항해 갔다.
'너는… 서은현?'
내 혼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창호자가 물어왔다.
나는 창호자의 의식에 힘을 실어 주며, 그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이쪽으로 오십시오! 지금이라면 아슬아슬하게 스승님께서 광한계로 넘어오실 수 있습니다!'
나는 기묘성채의 위쪽에서 창호자에게 남긴 분혼과 시야를 공유하며 창호자를 설득했다.
점차 저 뒤쪽으로, 창호자가 부수고 왔다는 광한계의 차원문이 보인다.
우리는 창호자가 날린 권풍과 청천갑의 권능에 의해 차차 차원문을 향해서 밀려가고 있었다.
차원문은 지금도 실시간으로 닫히는 중이었다.
'지금 빨리 오신다면 스승님까지만 이쪽으로 오시고, 저 괴물은 못 건너오게 시간을 맞출 수 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은현아.'
그리고, 창호자가 부드럽게 내 말에 대답하였다.
'총연맹에 잠시 차원문을 열게 하는 대가로, 내가 무얼 약속했는지 아느냐?'
'예?'
'내 목숨을 던져서라도, 쇄성기 존자의 진격을 막겠다고 했다. 혈음계 존자가, 분체라도 광한계에 발을 디디면 그 즉시 광한계와 혈음계 간의 차원 좌표가 공명하고, 혈음계 존자'들'이 광한계로 넘어올 수 있는 단초가 된다고 하더구나.'
창호자가 쓰게 웃으며 나를 격려하였다.
'이것으로 괜찮다. 내 후학들을 구할 수 있다면, 내 제자들을 구할 수 있다면… 이것으로 만족한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츠츠츳!
기묘성채는 기어이 광한계의 차원문을 넘었다.
'왜, 도대체 왜 그렇게 당신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제자들을, 후학들을 위하려 하는 겁니까? 제가 아는 수도자들은 이기적이고, 오직 저만을 아는 이들이란 말입니다! 당신도! 그렇게 살면 아니 된단 말입니까!'
'….'
얼마간 침묵하던 창호자가 내 분혼을 향해 웃어 보였다.
'은현아, 현석이에게 내 유언(遺言)을 전해 다오.'
콰득, 콰드드득!
점차 창호자의 정신 방벽을 깨고서, 붉은 빛살들이 들어온다.
나는 분혼을 갈아 가면서 막아 내려 했으나, 쇄성기 존자의 힘은 분혼 정도로는 도저히 막아 낼 길이 없었다.
뿌드득….
나는 잠자코 창호자의 유언, 마지막 가르침을 들었다.
우우우웅!
창호자의 몸이 점차 과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언을 끝마친 그가, 완전히 갈려 가는 내 분혼에게 말하였다.
'…고맙다.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벌써 존자의 정신에 먹혀, 어쩌면 현석이를 내 손으로 죽이러 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스승님.'
'다시 말하지만, 부디 현석이에게도 내 말을 전해 다오. 너 역시 내 말을 가슴에 담고 살아 다오. 그래….'
그가 싱긋 웃었다.
'지금껏, 스승으로서 너희에게 아주 많이 배웠다. 고맙다, 제자들아.'
번쩍!
다음 순간.
내 분혼은 완전히 갈려 나가 버렸고, 창호자의 정신 안쪽으로 붉은빛이 밀려들었다.
나는 창호자의 안쪽에서 스러지며, 창호자가 전력을 다해 기운을 끌어올려 자폭을 하는 것을 보았다.
파아아앗!
나, 오현석, 김연.
그리고 기묘성채에 있던 무수한 인족들.
그들은, 저 너머의 마계에서 커다란 별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마치 폭죽 같기도, 불꽃 같기도 하였다.
확실한 것은, 그것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이었다는 것이었다.
"아, 아아… 아아아아…!"
오현석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별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우리는 차원문을 넘어서 광한계에 다시 도착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주변으로 어마어마한 기운들이 우리를 둘러쌌다.
합체기 태수(太修)들!
인족 합체기 태수들 7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니, 아니다.'
그들은 투영(投影)이었다.
자신들의 모습을 천지영기에 투영하여 우리에게 보낸 일종의 분신인 셈.
그리고 그 분신들은 각기 결인을 맺으며, 우리가 나온 차원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폐문(閉門)!"
쿠구구구!
차원문이 닫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오현석이 절규하며 외쳤다.
"자, 잠깐! 잠깐 기다리십시오, 스승님이, 스승님이 저기에 계십니다!"
그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외치며 창호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용! 가만히 있어라. 창호자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겠다 맹세하고 너희들을 구하러 갔다! 네 스승의 죽음을 헛되이 할 셈이냐!"
합체기 태수 중 한 명이, 오현석을 쳐다보며 준엄하게 외쳤다.
그러나 오현석은 반쯤 실성한 채로 기운을 끌어모았다.
"자, 잠깐! 네놈, 뭐 하는 짓이야!"
그의 등에서, 여덟 번째 날개가 돋아났다.
명백한 사축기 최정상 급의 힘이 그에게서 뿜어졌다.
오현석 역시, 수명을 깎아 가며 창호자를 구하려 하는 것이었다.
"비켜라! 스승님을 구할 거다!"
파아앗!
눈부신 푸른빛이 일렁이며, 합체기 태수들이 닫으려던 차원문을 찢어발겼다.
그 결과, 차원문이 일렁이며 닫히는 속도가 늦어졌다.
그리고 그 찰나의 틈새로.
콰아앙!
'뭔가'가, 광한계에 손을 디밀었다.
"이, 이런 빌어먹을 놈이!"
"제길, 존자의 혈시(血屍)다!"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팔'이었다.
차원문의 틈새에 내리꽂힌 '팔'은 점차 움직이며 차원의 틈새를 열어젖히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차원의 틈새 너머로, '팔'의 주인이 내던 목소리와 똑같은 목소리 들려왔다.
"은…현, 아. 현, 석…아. 열어, 다오. 뒤에서, 놈이, 쫓아오고, 있, 어."
"스, 스승님…!?"
오현석은 놀라서 '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와 합체기 태수들이 동시에 외쳤다.
"형님, 안 됩니다!"
"그만! 그만해라, 저건 창호자가 아니다!"
뿌드득….
나는 이를 갈았다.
원립이 자기 얼굴을 주물럭거리며 향화의 얼굴로 내게 목숨을 구걸하려 했던 순간이, 그 모독적인 분노가 다시금 뇌리에 치솟았다.
창호자는 죽었다.
장렬히 산화하였다.
그리고, 저 빌어먹을 쇄성기 존자라는 놈은, 그리고 흑룡왕이라는 놈은!
원립처럼 죽은 이의 고혼을 모독하는 것이었다!
"현, 석, 아…! 괴, 괴, 롭다! 아, 아아! 네, 가, 도와, 주면… 살, 수 있…."
"스, 스승님? 정말 스승님이…."
뚜두둑!
나는 덜걱거리는 몸을 일으키며, 김연에게 말했다.
"연아, 현석 형님을 제압해 줘."
"…네."
김연 역시 괴로운지, 입술을 질끈 쥐어뜯으며 괴뢰들을 움직여 오현석을 제압했다.
촤락, 촤라라락!
그와 동시에, 합체기 태수들의 투영 역시 법술을 써 오현석을 꽁꽁 포박했다.
"안 돼! 놔! 놓으라고! 서은현! 지금 뭘 하는 거냐, 스승님이 저기 있잖아! 스승님이…!"
"…."
'그렇군.'
나는 지난 생.
오현석이 어째서 타락해서 미쳐 버렸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과 상황은 달랐겠지만.
창호자는 그 때에도 오현석을 구하러 진마계로 들어갔고, 그 때에도 자폭하며 오현석을 탈출시켰으리라.
하지만 지난 생의 창호자는 내 기괴고의 술로 정신도 보호받지 못해, 어쩌면 자폭 전에 존자에게 아예 몸을 뺏겼을지도 몰랐다.
지금에야 팔 한쪽만 남긴 채 존자에게 쓰이고 있다지만, 지난 생에는 어쩌면 육신 전체를 존자에게 뺏겨 저 짓을 했고.
합체기 태수들은 망설임 없이 저 꼴이 된 창호자를 오현석의 눈앞에서 격살하고 진마계의 입구를 닫았으리라.
존자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창호자의 입을 빌려 오현석에게 살려 달라고 했으리라.
그렇게 끝까지, 창호자의 죽음을 모독했으리라!
그리고!
이번 생에는, 내가 그의 제자로 들어갔으니.
절대로 그리 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죽음을…."
뿌득, 뿌드드득!
전신이 삐걱거린다.
움직이면 그대로 죽을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움직인다.
자세를 잡고, 의해은산의 초식을 준비한다.
"그 더러운 입으로…."
쿠우웅!
다시금 원영을 쥐어짜며, 창호자의 팔을 덜렁거리며 그의 죽음을 모독하는 녀석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모독하지! 마라!"
번쩍, 번쩍 번쩍!
김연의 괴뢰들이 저마다 광선을 쏘고 법술을 발하며, '팔'을 차원 밖으로 내보낸다.
태수들의 투영들 역시 저들 나름대로 '팔'을 내보내려 노력했다.
"오 사형(師兄)."
현석 형님의 동생, 서은현이 아닌.
창천개벽문의 제자로서 오현석을 부르며 나는 기력을 일 점 집중했다.
"태, 수, 들! 내가, 좋은 정보, 알려 주마! 저놈, 심족, 이다! 심도공, 법을 익혔, 다!"
'팔'이 꿈틀거리며 나를 가리켰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스승님의 유언을 당신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지난 생의 오현석은 어째서 타락했을까.
어째서 정신이 나가 버린 채로 슬퍼했을까.
그것은 혈음계 존자의 농간도 있었을 터지만, 어쩌면 창호자의 유언이 그에게 전해지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창호자가 가진 무력의 상징인 청천갑은 물려받았지만, 창호자의 진정한 근간이 되는 그의 정신은 물려받지 못했던 것일 터였다.
그랬기에, 그는 힘만을 가진 채 정신이 주저앉아 타락했으리라.
지이이잉!
'팔'이 점차 붉게 물든다.
그리고 '팔'에서 붉은 산호가 돋아나며 주변을 물들였다.
흑룡왕의 목소리가, 누군가의 목소리와 겹쳐 사방으로 울렸다.
[악덕(惡德)이 느껴지는군. 같은 동족을 헌신짝처럼 마계에 버려 두고 문을 닫은 더러운 인족의 악덕이….]
치이이이!
"이, 이게 무슨…!"
"혈음계 존자가, 뭔가 사술을 쓰고 있다!"
"혈음계의 마공이다!"
합체기 태수들의 투영에서 붉은 산호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붉은 산호는 그대로 광한계의 천지영기를 마기로 물들였고, 그 마기는 '팔'에게 힘을 더해 주고 있었다.
점차 합체기 괴뢰들의 공격에 밀리던 '팔'이, 이쪽으로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또 다른 악덕이 느껴지는구나. 광기에 미쳐서 멀쩡한 타 종족을 꼭두각시로 개조한 미치광이의 악덕이….]
그리고, 김연이 조종하던 합체기 괴뢰들에게서도 갑자기 붉은 산호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덜걱, 덜걱덜걱덜걱…!
"크윽…!"
김연이 이를 악물고 합체기 괴뢰들을 조종하려는 듯했으나, 붉은 산호가 그녀와 괴뢰들의 사이에 명령 체계에 균열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붉은 산호가 뿜는 붉은 기운이 김연의 의식 실을 타고 역류하며, 그녀의 상단전을 침범했다.
"아아악!"
김연이 고통을 이겨 내며 의식을 운용해 붉은 기운을 뇌리에서 밀어내려 발악하였다.
삽시간에 김연이 무력화되었다.
[또 다른 악덕이 느껴지는구나…. 같은 지성종을 아무 거리낌 없이 단약으로 구워 잡아먹은 더러운 이들의 악덕이….]
"흐아아악!"
"이, 이게 뭐야…!"
"내, 내 몸이…!?"
그리고, 주변에 있던 인족 패잔병들의 몸에서 붉은 산호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저게 무슨…!'
나는 그 광경을 보며 기함했다.
'악덕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저렇게 다룰 수가 있다고? 아니, 그보다… 혈음계 존자의 왼손이나 왼발은 저런 술법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흑룡왕이 존자의 왼발과 합체하고 나서부터 저런 법술을 쓰기 시작하는 건가?'
피싯, 피싯….
내게도 산호가 돋아나긴 했지만, 다행히도 내게서 돋아나던 산호들은 그대로 말라비틀어져 죽어 버렸다.
그런 것들을 보며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전까지의 흑룡왕은 그저 요족의 용왕 중 하나였을 뿐이다.
선수 진혈을 조금 타고나긴 했지만, 그 정도일 뿐인 합체기 흑룡왕.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혈음계 쇄성기 존자의 육신과 합쳐진 지금, 흑룡왕은 무언가 [다른] 존재로 변모한 것 같았다.
'쇄성기 존자의 분체조차도 쓰지 못한 법술을 자유자재로 쓴다…. 도대체 뭐지, 저 자는?'
악덕이란 개념을 저렇게 자유자재로 사용한다고?
"크윽, 안 돼!"
"제길, 혈음계 놈이…!"
태수들의 투영이 삽시간에 산호에 뒤덮였고, 차원문 인근의 인족들이 모조리 산호에 뒤덮여 전멸하기 시작했다.
'하….'
나는 피식 웃었다.
나는 창호자가, 아니.
스승님이 해 준 말을 떠올리며 웃었다.
이렇게 되어 버렸다면, 나 역시 그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제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 나밖에 없다면, 내가 지금 그의 의지를 받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저물도에서 이전에 구해 둔 백홍주를 얼른 꺼내 마신다.
무색유리검이 내 혼과 단단하게 연결된다.
나는 이를 악물며 의해은산을 끌어올렸다.
눈앞의 저 존재에게 심상을 파고드는 일격을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저 존재의 사고 구조는 내가 당최 읽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혼(魂)의 계위를 파고드는 데에 쓰던 의해은산의 힘을, 모조리 물리력으로 전환한다.'
키이이이잉!
원영을, 기의 계위에서 폭발시켜 버린다!
그 정도의 일격이라면, 녀석이 이 주변을 마기로 치환시키든 어쩌든 충분히 저 너머로 보내버릴 수 있다!
"들으시오, 오 사형."
나는 서슬 퍼렇게 눈빛을 태우며 저 존재에게로 다가가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전하신 마지막 가르침이오."
사락, 사라라락!
등 뒤로 무수한 인영들이 나타난다.
만상인연도.
본디 만상인연도를 이루는 기령들은, 내 눈에만 또렷한 사람의 모습으로 보일 뿐.
타인들의 눈에는 그저 희뿌연 안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마 지금 오현석과 김연의 눈에는, 내 뒤로 무수한 안개 같은 것들이 깔린 듯이 보일 터.
그리고 이 만상인연도는 기령들로 하여금 그 장면의 기억을 '재현하는' 식으로 기억을 보관하는 방식이었으므로 기령 안에 딱히 기억이 담겨있거나 하지 않았기에, 기본적으로 만상인연도를 통한 기억의 전송 등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내 영혼이 폭발하는 그 순간이라면.
내 영혼의 기운이 갈가리 찢어지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그 순간이라면, 그 순간에는 '죽음'이라는 이름 하에 자타(自他)의 경계가 사라지기에, 내 만상인연도를 아주 짧은 찰나에 타인에게 보여 줄 수 있다.
나는 그 짧은 시간을 틈타, 만상인연도로 창호자가 내게 유언을 전달하던 그 순간을 재현해내 오현석에게 보여 줄 요량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오현석.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김연.
김연의 눈이 떨렸다.
다행히 그녀의 머리를 침범한 붉은 기운 자체는, 충분히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가지… 마세요."
내가 하려는 걸 알아챘는지,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 눈물을 흘렸다.
"…미안하다."
난 이를 악물었다.
나라고 죽고 싶지 않았다.
회귀자에게 목숨은 무한하다지만, 이 시간은 한 번뿐이니까.
매 순간은 한 번뿐이니까.
오히려 회귀하기에 죽음이 너무나도 공포스럽다.
오히려 회귀하기에 이 순간을 버리고 시간을 역류하는 것이 너무나도 원통하다.
그리고.
오히려 회귀하기에, 이 순간은 너무나도 소중하다.
소중하기에.
나는 이 소중한 이들을 지킬 것이다.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스승님의 유언처럼… 특권(特權)이니까.
창호자가 마지막에 전해 준, 그의 의지를 떠올렸다.
단악검법(斷岳劍法).
또다시 새로운 초식을 개화한다.
아니, 사실 새로운 초식이라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다.
제이십육초(第二十六招).
의해은산이 원영을 검에 담고, 그 안에서 모든 힘을 통합시켜 내지르는 일격이라면.
새로 만들어낸 초식은, '내지른다'라는 과정을 '폭발시킨다'로 변형한 것에 불과하니.
'스승님.'
"일멸도차안(一滅導此岸)."
내 손에 쥔 검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온다.
원영 속에서 모조리 통합시켰던 힘을, 기의 계위에서 있는 힘을 다해 폭발시킨다.
다음 순간, 새하얀 빛이 온 만상을 덮으며, 뇌리가 하얗게 물들었다.
원영(元靈)이 무너진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이것으로 내가 이번 생에 맺어 온, 나의 소중한 인연들을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무수한 인영이 내 뒤를 따른다.
만상인연도를 통해, 지금껏 만났던 모든 이들은 내 인연이며, 동시에 내 스승이었다.
그렇기에 스승들에게는 받은 만큼 은혜를 돌려주었다.
그러나 창호자에게 받은 은혜는 돌려주지 못했다.
그러니 창호자의 의지를 받드는 것으로, 도리를 다하자.
나는 그렇게, 창호자의 말을 품에 안고서 웃으며 죽음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 * *
"아, 아아…."
김연은 눈물을 흘렸다.
죽는다.
서은현이, 혈음계의 저 사악한 존재가 쓰는 법술에 아무도 반응 못할 때, 오직 그만이 움직일 수 있기에 목숨을 바쳐 혈음계의 존재를 막는다.
'그럴 수 없어!'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힘을 끌어올리며 그를 막으려 할 때였다.
사라라락….
그녀의 눈앞으로.
희미한 환영들이 떠올랐다.
서은현의 뒤편에 떠올랐던 희뿌연 안개가, 마치 사람처럼 구현화되며 어떠한 인물을 그렸다.
그것은 창호자였다.
창호자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저건…!'
서은현의 기억 속 장면이다.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안 김연의 눈동자가 바싹 졸아들었다.
그리고, 창호자의 모습을 본 오현석 역시 눈물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왜, 도대체 왜 그렇게 당신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제자들을, 후학들을 위하려 하는 겁니까? 제가 아는 수도자들은 이기적이고, 오직 저만을 아는 이들이란 말입니다! 당신도! 그렇게 살면 아니 된단 말입니까!]
서은현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의 질문은 오현석에게도 해당하는 것이었다.
오현석도 창호자에게 묻고 싶었다.
도대체 의(義)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정(情)이 무엇이기에… 당신은 어떻게 그리도 쉽게 후학을 위해 몸을 던질 수 있었습니까.
[은현아, 현석이에게 내 유언(遺言)을 전해 다오.]
그리고, 창호자가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오현석은 창호자의 투영이 마치 자신을 쳐다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사람은, 태어나서 자라기까지, 도저히 필설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아 온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의(義)를 지켜 오고, 선(善)을 내 나름대로 지켜 온 이유는, 그것이, 살아오며 은혜를 받아 온 모든 사람의 임무이자 의무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의무가 아니라, 특권(特權)이다.]
창호자의 유언이 이어졌다.
[의를 행하며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
의를 행하고 끝없는 고난을 이기며,
의를 위하여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의를 향한 고귀한 이상을 위해 죽는 것.
의를 바라보며 잘못을 고칠 줄 알고….]
그것은 그의 노래였다.
창호자가 평생을 추구하여 온 믿음이었다.
타고나기를 강하고 축복받은 신체로 태어나, 뼈를 깎는 노력을 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서 살아오며.
선택받은 자로서, 약자에게 자비를 베풀고.
능력 있는 자에게 기회를 주며, 어른으로서 후학을 지키며.
자신의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 책임을 다하는.
괴군에 의해 순수하다고 평가받은 창호자가 추구해 온 순수한 선의(善意)의 노래였다.
[…순수함과 선의로 서로 사랑하는 것.
불가능한 꿈속에서 긍지를 가지고….]
창호자의 노래를 듣는 오현석은 눈물을 그쳤다.
눈물을 닦고 일어서, 정중하게 창호자의 환영을 향해 절을 올렸다.
김연 역시 더 이상 서은현을 막으려 시도할 수 없었다.
모든 수도자들.
그중에서도 원영기 이상, 천인기가 되는 이들은 모두 미치광이이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어느 한 부분이 맛이 간 이들뿐이다.
그랬다.
창호자는 선의(善意)에 미친 자였다.
아니, 정확히는 순수함에 미친 자였다.
남을 위해, 자신이 책임진 자를 위해, 자신의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는, 미친 논리를 진정으로 믿고 행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김연은 서은현의 행동을 더는 막을 수 없었다.
서은현은 지금, 창호자의 의지를 계승하였다.
창호자가 남긴 유언을 가슴에 묻고, 진정으로 그 의지를 받들고 있었다.
기묘성심전으로 심상을 읽을 수 있기에, 그녀는 그 단호한 서은현의 마음을 읽고서, 더더욱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창호자의 노래가, 그의 순수가 마침내 끝나간다.
[…그렇게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
단순한 시가 아니다.
이것은, 서은현과 오현석.
그리고 남아 있을 창천개벽문의 모든 제자들에게 전하는, 그의 순수함이었다.
[부디 현석이에게도 내 말을 전해 다오. 너 역시 내 말을 가슴에 담고 살아 다오. 그래….]
파아앗!
창호자의 몸이 터져 나갔다.
그리고 방금 보았던 것처럼, 그가 노래했던 것처럼.
창호자는 별이 되어 갔다.
[지금껏, 스승으로서 너희에게 아주 많이 배웠다. 고맙다, 제자들아.]
번쩍!
창호자의 기령이, 창호자 본인과 똑같이 별이 되어 사방으로 빛을 밝혔다.
순수함에 미쳐 버렸던 광인.
하지만, 이 세상이 지옥이라면 어쩌면 그는 순수하기 때문에 지금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선하기에 더 살아가지 못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서은현을 통하여 오현석에게 확실히 전해졌다.
오현석은 별이 된 창호자 너머, 새하얀 빛무리와 함께 흩어지는 한 사람을 보았다.
"…앞으로, 계속 이 의지를 계승시키겠다."
오현석이 주먹을 쥐고 외쳤다.
"그렇게 해서… 반드시. 반드시 스승님의 마음이 의미 없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 피안에서 지켜봐 다오, 서은현!"
오현석은 결의를 다지며 울음을 삼키고 서은현에게 외쳤다.
단순히.
사람의 마음이, 사람에게 전해진 것.
단순히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창호자 사후 폐인이 될 오현석의 운명은 비틀렸다.
저벅, 저벅….
김연은 천천히, 서은현에게 다가갔다.
서은현은 검을 휘두른 자세를 한 채, 그렇게 서 있었다.
서은현은 그렇게 선 채로, 자신의 원영을 격발시켜 죽었다.
차원문은 완전히 닫혀 있었고, 창호자의 팔은 완전히 사라져 더 이상 모독을 당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웃고 있는 채로 죽었다.
어쩌면 자신의 인연들을 지킨 채 죽을 수 있었다는 안도감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서은현에게 다가가,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리고 서은현의 몸은 그제야 쉴 수 있겠다는 듯, 천천히 김연의 품으로 쓰러졌다.
김연은 고개를 숙이며, 쓰러진 서은현의 입에 살짝 입을 맞췄다.
오현석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너는…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었나 보구나, 은현아."
서은현의 주변에는, 희뿌연 무수한 인영들이 그를 중심으로 서 있었다.
그 인영들은 김연과 함께 잠든 서은현을 안아 주고 있었다.
"내게 있어 스승님은 한 분뿐이셨다만, 은현아…. 네게 있어 스승은, 지금 너를 감싸 주는 모든 사람이겠지?"
오현석은 언뜻, 그 인영 중에서 자신의 인영을 본 것 같다고 느끼며 눈을 감았다.
"잘 자라, 서은현. 네가 지키려던 그 모든 스승들의 은혜는, 충분히 갚았다. 이제… 피안(彼岸)에서 쉬어라."
오현석은 그렇게 서은현을 추도하였다.
하지만 오현석의 바람과는 다르게, 서은현은 피안에 이르지 못했다.
일멸도차안이라는 절학명처럼, 서은현이 도달할 곳은 또 다른 차안(此岸)일 뿐.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삶 속에서 만났던 모든 스승의 은혜를, 있는 힘을 다해 갚고,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잠든 지금만큼은.
서은현은 편안하게, 수많은 사람들의 품에 안겨 잠들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서은현의 열다섯 번째 회귀(回歸)였다.
작가의 말: 창호자의 유언은 '돈키호테'에서 오마쥬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창호자는 돈키호테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인물입니다. 특히나 돈키호테의 '순수'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돈키호테와도 같은 창호자의 순수함은 서은현에게 전승되었네요.
창천개벽문 에피는 최근 서은현도, 저 자신도 초창기의 조문도석사가의같은 마음을 조금 잊은 것 같아, 서은현과 작가 자신을 일깨우기 위해 만든 에피였습니다.
이제 창호자의 순수를 전승받은 서은현은 불가능한 꿈을 안고서, 무적의 적과 싸우며, 끝없는 고통을 견디면서도 고귀한 이상을 위해 다시 죽을 수 있는 마음을 얻었습니다.
어찌 보면 초심을 되찾았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초심을 되찾는 것이 이번 에피소드의 주 목표였던 만큼, 서은현도, 그리고 작가 본인도 앞으로 초심을 찾고 더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봐 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감사의 말씀 올리며, 앞으로도 좋은 이야기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5회차의 첫날
스스슷….
의식이 돌아온다.
원영을 그대로 폭발시켰던 대가일까.
머리가 어질어질한 걸 넘어서 토할 것만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나는 의식을 차렸다.
그리고, 익숙한 음성이 들려온다.
"선택하시게. 우리는 이제 각자 광한계 선배분들의 인도에 따라… 아니, 무슨…!"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눈앞의 서휼을 바라보았다.
그는 상당히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닌, 금벽호, 허곽… 그리고 창호자 역시 나를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괴군 역시 눈에 탐욕이 깃드는 것이 보였다.
머리가 어쩐지 너무 지끈거린다 했더니, 의식의 크기가 너무 커진 것 같았다.
원래부터 오기조원을 얻은 후부터는 동급 수사들보다 의식의 크기는 조금 더 컸고, 기묘성심전을 익히며 의식의 크기가 더 커졌다.
그런 상황에서 지난 생애에 원영(元靈)의 경지에 이르렀다.
막 원영기에 이르렀던 내 의식의 크기는, 순수한 크기로만 볼 때 이제 원영 중기 최고봉 수사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의식의 크기가 너무 커진 탓일까.
수계에서 이미 환골탈태를 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 오기 시작했다.
한 번 몸의 조화를 맞춘 걸로도 이제 크기가 너무 커져서 버티기 힘든 것이었다.
다행히도, 조화가 깨졌다 하더라도 오기조원의 육신은 그럭저럭 버텨는 주는 것인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뿐 당장 머리가 폭발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아, 아니! 원영기 수사의 의식이 아닌가!?"
"저 정도 의식 크기라면 혼의 계위에서 의식이 넘쳐서 기의 계위에도 영향을 미칠 터…."
"원영을 얻는 데에 굉장히 유리할 거란 말이지…."
"저 녀석 정도라면 당장 전력으로 쓰기에 부족함이 없는 듯한데?"
분명 결단기 급 의식을 지녔던 인족 녀석이, 서휼과 몇 마디 나누다가 갑자기 원영기 급으로 의식의 크기가 커졌다.
신기한 건 둘째치고, 원영기 이상의 의식 수준은 저들의 말대로 의식이 기의 계위에 영향을 미치는 단계이기에, 잘만 하면 당장 전력으로 써먹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봐, 우리 금신천뢰문에 들어오지 않겠느냐? 바로 외당 장로직을 주고, 경지를 높이면 내당 장로직까지 주겠다!"
"아니, 보아하니 혼(魂)이 죽음에 친숙한 듯한데, 흑색귀골곡에 들어오면 어마어마한 성취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본 곡의 역사에 걸맞은 무궁무진한 공법들이 자네를 기다리고 있어! 내 볼 때 자네의 의식과 그 죽음의 기운으로 볼 때 흑색귀골곡에 들어오면…."
"원영기 급 의식이라니, 우리 창천개벽문의 훈련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인재구나! 만약 지금 창천개벽문에 들어오면 일운(一雲) 제자의 자리와 내 직전제자의 지위를 주마!"
금벽호와 허곽, 창호자가 너 나 할 것 없이 밝은 얼굴을 하고 내게 소리쳤다.
지난 생 초반, 결단기 급 의식을 지닌 걸 신기해하긴 했어도 신기할 뿐, 그렇게 열성적이진 않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기이할 정도의 열기였다.
그리고 그뿐이 아니었다.
"이거… 이렇게 보니 더더욱 욕심이 나는군. 자네 정도의 자질이면 진룡맹에 자리를 추천해 주고, 원한다면 내 피뿐이 아니라, 아예 선수혈합(仙獸血合)에도 참여할 수 있게 추천권을 써 주겠네."
서휼 역시 내 의식을 보며 경이롭다는 표정을 짓고 말했다.
그리고 괴군은 내 의식 크기를 보며, 뭔가 또 광증이 도지려는지 눈알을 뒤룩거리며 손가락을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경험상, 저건 광증이 도지기 직전의 상태였다.
저러다가 광증이 도지면 손가락을 물어뜯으며 발광하는 것이다.
'이럴 때가 아니다.'
나는 속으로 침을 삼켰다.
괴군의 반응을 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이대로 멍 때리고 있으면 괴군에게 납치당해 선택권 같은 건 사라진다.
'물론, 지금 상태라면….'
나는 뱃속에 잠들어 있는 무색유리검을 느꼈다.
백홍주를 먹고서 지난 생에서 전승된 무색유리검들.
무색유리검들과 연동된 만상인연도.
만상인연도 속에, 지난 생의 수행이, 그때의 경험이 축적되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잘만 하면 만상인연도를 등대로 삼아, 10, 20년 안에 원영의 경지를 전부 되찾을 수 있다는 게 느껴졌다.
더 줄이고 싶었지만 공법을 수련하면서 치러야 할 제의와 제례의 시운을 맞추는 것이 문제였다.
어쨌든 짧은 시간 안에 수행을 되찾는 게 가능해진 만큼, 괴군에게 납치되어도 얼마 안 있어 탈출하는 게 가능할 테지만, 솔직히 그렇게 한다면 별 의미가 없어진다.
'지난 생애의 감상은 차후에 젖어 있기로 하고, 일단 선택부터 하자.'
나는 머리를 팽팽 굴렸다.
수도자는 경지가 높아지고 의식의 크기가 커질수록, 조금씩 비례해서 지능과 사고 속도, 기억력 등이 증가한다.
물론 비례의 정도는 사람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의식의 크기에 따라 사고할 수 있는 폭이 달라진다는 것은 사실.
나는 원영기에 달한 의식을 팽팽히 돌리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결단을 내렸다.
금벽호가, 허곽이, 창호자가… 괴군과 서휼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나는 망설임 없이 한 인물의 앞으로 걸어갔다.
"호오… 나를 선택해 준 건가."
그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괴군의 표정이 나빠진다.
나 역시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으나,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예를 올렸다.
"아직 부족한 이 서 모가, 명성이 자자하신 서휼 님의 안배에 따라 수학해 보고자 합니다."
"하하하, 좋은 선택이네. 내 부족함 없이 챙겨 주겠네. 비록 자네는 요족이 아닌 인족이지만, 요족들 사이에서 절대 겉돌거나 따돌림당하지 않도록 힘써 주지."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서휼의 심상의 역겨움에 익숙해지려 노력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다른 이들의 시선에 안타까움이 서렸고, 괴군은 혀를 차며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나는 괴군의 아래에 있는 연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난 생에는 애초에 창호자를 선택할 예정이었기에, 순수한 그의 특징을 생각해서 괴군의 앞으로 가서 김연을 안아 주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에게 다가가기 힘들었다.
괴군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건 물론이고, 순수한 창호자와 달리 서휼의 앞에서 괴군과 친한 척을 한다면 훗날 어떻게 뒤통수를 맞을지 몰랐기에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또다시 사축기 녹갑 목인과 괴군이 말싸움을 시작하더니, 괴군이 발광을 시작했다.
괴군의 눈이 돌아가는 걸 보는 서휼은, 황급히 서휼과 요족들을 데리러 온 사축기 요족 규련에게 말해 이곳을 뜨자고 하였다.
그리고 나는 괴군이 발작하고 서휼이 뜰 채비를 하는 사이, 누구도 모르게 월수궁무록에 섞어 내 혼백을 떼어 내 분혼을 만들었다.
그런 후 월수궁무록과 함께, 누구도 모르도록 김연에게 던졌다.
내 분혼은 기괴고의 술이 되어 그녀의 의식 안쪽을 누구도 모르게 파고들었다.
이번 생 초반에는 달래 주지 못했지만, 기괴고의 술을 통해 앞으로도 계속 연락하며 그녀를 위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기괴고의 술을 전해 준 견신에게 속으로 감사를 전하며 서휼을 따라갔다.
규련은 내가 그녀의 머리에 올라타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듯했으나, 서휼의 설득에 내가 목 위에 올라탈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다.
얼마 후, 그녀는 하늘로 날아올라 건곤성을 떠났다.
나는 규련의 위에서 저 아래를 내려다보며, 괴군이 발작하고 기묘성채를 꺼내는 걸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사이에 껴 있는 창호자를 바라보았다.
조금 여유가 생긴 틈을 타, 나는 창호자를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그에게 절을 올렸다.
지난 생애의 스승이었을지라도, 이미 시간을 거스르며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할지라도.
이미 그를 향한 마음에는 변함이 없으니 그는 내 마음속의 굳건한 지지대이자 스승이었다.
'당신의 정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서휼의 아래로 들어갈 것이다.
녀석의 아래가 얼마나 속 시커먼 마굴일지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나는 더더욱 창호자의 정신을 잊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괴군에 의해 소란이 일어나는 건곤성에서 고개를 돌렸다.
'이번 생의 목표는 정했다.'
본래는 금신천뢰문, 혹은 나한테 적성이 맞는다는 흑색귀골곡 쪽을 생각해 볼까 하였다.
하지만 비선대 위에서 생각을 정리하며, 이번 생의 목표를 정하고 결정했다.
'첫째, 일단 서휼에게 잡혀 간 오혜서 대리는 도대체 무슨 상태가 되는 건지 알아본다.'
나는 규련의 머리 위에, 다른 요족들과 함께 앉아 사람 좋은 미소로 두런거리는 서휼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안쪽에 있는 시커먼 속내로, 도대체 오혜서에게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둘째, 흑룡왕 현음부터 시작해서… 저 용족이란 놈들은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인지 알아본다.'
혈음계 쇄성기 존자와 딱 봐도 관련이 있는 흑룡왕 현음.
그리고 수계에서부터 혈음계로 비승하려는 원립을 지지한, 속 시커먼 용가리 서휼.
도대체 이 용족 놈들은 뭘 원하길래, 그리고 정체가 뭐길래 혈음계와 엮여 있고, 이 녀석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광한계의 정세를 따라가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러니 이번에는 내부에서부터 파고들어 가 녀석들의 목적과 정체를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오혜서의 정황 확인과 용족들의 목적과 정체.
그리고, 그것들보다도 중요한 것.
어쩌면 가장 난이도가 높을지도 모르는 일.
'지금부터, 서휼의 밑에서 수행하며, 요족의 핵심부에 도달한 후.'
미쳐 버린 전명훈과 금신천뢰문의 비극을 생각하며 결정한 일.
'금신천뢰문에 침입해서, 진선에 의해 멸망하기 전, 금신천뢰문의 천뢰번을 훔쳐 낸다.'
그리고, 훔친 천뢰번을 요족 영역으로 가지고 와, 서휼이나 현음의 아가리 속에 집어넣어 버린다면 완벽한 이독제독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
이 세 번째 목표야말로, 내가 서휼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이번 생에는 오혜서의 근황과 용족의 목적을 확인하고, 천뢰번을 훔쳐 내어 놈들의 근거지에 심대한 타격을 입힌다.'
그것이 이번 생의 제일 큰 목표들이었다.
나는 규련이 눈치채지 못하게, 답천의 무형검을 체내에서 흩어 없앴다.
그런 후 단전 가운데에 바로 강환을 생성하여 내단을 형성하였다.
우우웅!
내단이 생성되며 육신의 중심을 잡아 주자, 자연히 지끈거리던 머리도 조금은 안정되었다,
그리고 내단의 기운을 느낀 것인지, 우리를 태우고 지족의 영역으로 나아가던 규련이 말했다.
[뭐야. 네놈, 요족이었나? 요력이 느껴지는데… 혹 인요 혼혈인 거냐?]
나는 헛기침을 한 후, 요족어를 사용해서 규련에게 대답하였다.
"혼혈은 아니고, 인족이 맞습니다만 하계에 있을 때 굉장히 특이한 공법을 익혔는지라 인간의 몸으로도 요단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광한계에 오니, 지금껏 막혀 있던 성취가 뚫리며 요단이 바로 생겨나는군요. 하하하…."
"호오, 요족어까지? 하긴, 너희 천족들은 이론상 지족공법도 익힐 수 있으니…."
내가 요족어를 완벽히 구사하며 내단의 기운을 드러내자, 규련은 조금 호의가 생겼는지 마냥 불편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본 서휼이, 규련의 머리에서 내려와, 목덜미에 앉아 있는 내게 걸어왔다.
휘이이이!
지족 구역으로 향하는 규련의 목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척하다, 서휼에게 예를 취했다.
"해룡왕께, 다시 한번 저를 받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왕이라 부르지 말게. 광한계에서 왕(王)이란 말은 합체기 태수 급 요왕들이나 사용할 수 있는 칭호이니…. 어쨌든 그리고, 자네 같은 인재를 거둬들이지 않는다면 눈알이 없는 머저리라는 뜻이지. 거기에 요단도 형성할 줄 알다니,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우리 요족에 친화적인 인재였군."
"감사합니다."
"거기에 요족어까지 배웠다니, 정말 호감이 들 수밖에 없어…. 이거 지족 영역까지 도착할 때까지 자네 같은 인재에게서 신경을 끌 순 없으니, 이 공법이라도 익히고 있게나. 내가 직접 만든 공법인데, 자네 같은 훌륭한 수재를 위한 공법이지."
서휼은 웃으면서 품속에서 요수의 가죽으로 장정된 공법서를 꺼내 내게 건넸다.
"아…."
공법서의 이름은 호풍진혈변(呼風眞血變)이었다.
"…."
내가 공법서를 보며 침묵을 유지하자 서휼이 미안하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조금 더 제대로 된 요공법을 구해주고 싶네만…. 아무래도 요족의 본부인 진룡맹에 도착하기 전에는 인족 출신인 자네에게는 이게 최선이겠군. 이해해 주게나."
하지만 나는 서휼의 심상을 읽으며, 그가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하고 있지만, 점차 나를 향한 의심이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제길.'
호풍진혈변을 받으면 저놈의 꼭두각시 겸 가축이 되고, 안 받으면 서휼이 나를 의심한다.
놈에게 제대로 신뢰를 받을 생각은 원래도 없었지만, 서휼을 선택한 지 반나절도 안 되어서 바로 의심을 받을 줄은 몰랐기에, 나는 극한의 양자택일 속에서, 호풍진혈변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작가의 말:
15회차 메인퀘 목록: 1. 오혜서 근황 확인. 2. 용족 첩자. 3. 천뢰번 돗거질. 4. (New!)서휼 수작질에서 살아남기.
지(地)의 종족 (1)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 최선이었다.
나는 안면 근육을 세세하게 조종하며, 억지 웃음이어도 전혀 티가 나지 않게 활짝 웃었다.
심박 수를 조절해서 정말로 기쁜 듯한 신체 반응을 함께 보여 주자, 그제야 서휼의 의심이 더 자라나지 않았다.
'의심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냥 더 자라지 않는 선에서 끝이라….'
아무래도 녀석은 세상 모든 일에 건수만 생기면 의심을 하고 보는 성격인 듯했다.
"하하, 그럼 지족 구역에 도착할 때까지 열심히 익히고 있게나. 자네 정도의 자질이면 적어도 나흘 안에 의식의 형(形)을 잡을 수 있겠지."
'나흘 안에 용형으로 의식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의심하겠다는 소리군.'
나는 잠자코 서휼의 덕담을 조금 더 들은 후, 하는 수 없이 호풍진혈변 공법서를 펼쳐 보았다.
요족어로 쓰인 공법서에는 세세한 호풍진혈변의 수련 방법이 적혀 있었다.
예전 원립이 서휼에게서 훔쳐 냈다고 자랑하던 호풍진혈변은, 원영기의 인족 수사가 익힐 수 있는 요수공법이었다.
하지만 나는 구결만 대강 읽어 본 후, 호풍진혈변에 대해서는 그냥 잊어버렸다.
'이 미친 공법을 내 손으로 익힐 이유는 없다.'
하지만 서휼이 지나가듯 말한, 나흘 안에 의식의 형태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은 곧.
내가 나흘 안에 의식의 형태를 잡지 못하면 나를 의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호풍응룡변을 익히자.'
원영기 공법인 호풍진혈변이 아닌, 예전 내가 훨씬 더 낮은 수준일 때에 받았던 호풍응룡변을 익힌 후, 차후에 경지를 되찾아, 원영기 수준에서 저계 공법인 호풍응룡변의 영향을 완전히 뜯어 버리면 될 터였다.
물론, 내가 익힐 건 아니었다.
우우웅!
나는 혈체피갑으로 내 몸 안에 녹아있는 원유와 교감하며, 녀석을 통해 호풍응룡변을 수행해 나갔다.
나와 겹쳐져 있는 녀석의 의식이 변화하며 점차 용형을 잡기 시작했다.
이전에 이미 익힌 공법인 탓인지, 난도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원유의 의식에 맞춰 기묘성심전을 운용하여 의식 형태를 원유의 의식 속에 숨겼다.
이제 내 의식은 겉으로 볼 때는 완전한 용형이었다.
내 의식 형태가 바뀌자, 규련은 물론이고 이번에 같이 비승한 수계 출신 요족 대표들 역시 내게 와서 덕담을 늘어놓고는 했다.
"하하, 서 용왕… 아니, 이제부터는 서 공이지. 서 공과 좋은 인연을 맺게 되었으니 자네도 참 복이 많군."
"앞으로 자네 앞길은 탄탄대로일 걸세. 서 공은 자기 편은 늘 만족스럽게 챙겨 주는 편이니, 흐하하!"
거호왕과 성붕왕, 두 요족은 내 어깨를 두드려 주며 덕담을 이어 갔고, 며칠 후.
우리는 마침내 규련을 타고서 요족.
아니, 지족(地族)의 가장 큰 세력인 진룡맹(眞龍盟)의 영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휘이이이!
나는 하늘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진룡맹의 대지를 구경했다.
무수한 산맥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산맥의 색은 새하얬고, 하나같이 농밀한 영기를 뿜어내고 있었으며 신령한 느낌을 주었다.
산 아래로는 흑백(黑白)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은 대지 전체를 얼기설기 엮기라도 하는 듯 그물처럼 산맥 아래 곳곳에 뻗쳐져 있었다.
백색의 강과 흑색의 강은 대부분 나뉘어 있었으나, 간혹 만나서 섞이는 구간도 있었는데, 그런 구간은 주변으로 오색(五色)의 운무가 피어나는 것이 상당히 신령해 보였다.
진룡맹의 영역은 대다수가 그런 식이었고, 하나같이 인족의 천공도 구역을 전부 합친 것보다도 어마어마한 크기와 광활함을 자랑했다.
그 끝없는 지평선을 보고 있자니, 나는 그 크기와 광활함에 질려 헛숨을 들이켰다.
그런 식으로 무수한 산맥과 흑백의 강을 구경하며, 규련의 위에서 진룡맹의 영역을 구경하던 나는 문득 뭔가를 알아챘다.
'저 산맥의 모양, 강들의 흐름. 저건 마치….'
"뼈와, 혈관 같군요. 자연지형… 인 겁니까?"
"오, 인족 주제에 보는 눈이 있군."
내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하자, 규련이 씨익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순수한 자연지형은 아니다. 저건 먼 옛날, 우리 용족 중에서 개열기에 이르셨던 한 위대한 용족 조사(祖師)의 시신이지. 우리 진룡맹은 그분의 시신 위에 세워졌다. 네 말대로, 저 산맥들은 그분의 뼈요, 강들은 그분의 혈관과 피이다."
"…!?"
나는 이 광활한 대지를 보며 입을 벌렸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용족의 조사라는 개열기의 용의 크기는, 그 크기만으로 인족 영역을 모조리 합친 것보다 더 거대하다는 뜻이었다.
'인족 천공도 하나가 수계의 대륙보다 조금 작았지.'
그런 무수한 천공도가 몰려 있는 인족 영역을 생각하면, 그 인족 영역보다 크다는 것은….
'신체 부위 하나하나가 대륙 급의 크기라고? 그건 차라리….'
우주적(宇宙的)인 크기가 아닌가?
나는 그 용의 거체(巨體)를 상상해 보며 자연히 입을 벌렸다.
규련의 설명을 들은 다른 요족 대표들도 놀랐는지, 입을 떡 벌리고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서휼 역시 뭔가 호기심이 동했는지 규련에게 질문을 하였다.
"개열기쯤 되면 수명의 한계가 사실상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들었는데, 그런 분께서도 돌아가시는군요."
"원래대로라면 선수에 등극할 예정이었던 조사께서 돌아가실 일은 없었을 터다. 하지만, 진마계가 아직 혈음계와 분리되기 이전 시절…. 진마계와 전쟁을 하고, 광한계를 진마계로부터 지켜 내고 돌아가셨다 한다. 그분의 희생에, 전 광한계의 생령들이 이렇게 위세를 누릴 수 있는 것이지."
"아~ 그럼 조사께서는 진마계의 개열기 마족에게 살해당한 겁니까?"
"흠, 그렇지 않겠나? 조사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기록이 자세하지 않아서 잘은 모른다네."
서휼은 규련의 대답에 침묵하며 광활한 대지를 내려다 보았다.
얼마 후, 우리는 마침내 진룡맹의 영역의 중심부, 진룡맹 본부라는 곳에 도착했다.
"저곳이…."
진룡맹의 본부라는 곳 역시, 인족 총연맹 본좌인 천인도만큼의 크기를 자랑했다.
아니, 사실상 크기로만 보면 천인도보다 큰 것 같기도 했다.
쿠구구구구!
그것은 광활한 대지 위에 서 있는 태산(太山)이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산맥들보다 더더욱 거대한 그 산맥은, 기이하게도 사방(四方)이 명확하게 나뉜 정사각형 형태의 산이었다.
'음, 좀 이질적이군.'
나는 그 산의 형태를 보며, 지금까지 보아온 용족 조사의 '뼈'라는 산맥들과는 확연히 다른 이질감을 느꼈다.
본래 이곳에 존재하던 산이 아닌, 뭔가 다른 곳에 있던 산을 뚝 던져 놓은 듯한 기묘함.
'뭐지?'
내가 의아해할 때.
규련이 다시 진룡맹 본부를 소개했다.
"그럼, 환영하네. 진룡맹 본부, 봉명주(奉命舟)에 온 것을."
"봉명주?"
요족 대표 중 한 명이 묻자, 규련은 네모난 태산을 보며 말하였다.
"우리 진룡맹 본부가 자리를 잡은 곳은 봉명주라는 이름의 방주(方舟) 안쪽일세. 하하하, 다들 놀라지 말게나. 저 방주 안쪽에는, 상상도 못 할 만큼의 공간이 다시 압축되어 있어서 저 안쪽의 공간이 진룡맹 영역 전체를 합한 것만큼 넓지."
"허어…."
"듣기로는 고대 진선계의 선보 중 하나였다지만, 지금은 그때의 기능은 거의 없이 폐함이 되어서, 그 껍데기만을 우리가 쓰고 있는 중이지."
나는 규련이 설명하는 정신 나간 크기에 감탄하면서, 봉명주라는 이름에 집중했다.
'봉명성과는 무슨 관계지?'
내가 그 생각을 할 때였다.
서휼이 웃는 낯으로 규련에게 다시 질문하였다.
"그나저나 선배님. 우리 진룡맹 본부가 자리 잡은 이 지역은, 조사님의 어떤 부위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 봉명주가 자리 잡은 저곳은, 조사님의 목뼈 부위라네. 저 뒤로 조금만 더 가면 진룡맹의 성지(聖地), 조사의 머리가 있는 곳이지."
"목이라…."
서휼은 잠시 규련의 말을 되뇌는 듯하고는 웃는 낯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진룡맹 본부, 봉명주 안으로 진입하였다.
쿠구구구구!
네모난 태산.
아니, 규련이 방주라고 불렀던 봉명주의 윗부분 중 한 곳이 열리며 우리를 맞이하였다.
* * *
"자, 진룡맹은 지족 영역의 중심이니, 여러 지족의 사절들이 많이 와 있지. 다들 각기 본인들에게 맞는 종족의 사절들을 찾아서, 해당 지족으로 가면 될 것 같군."
츠츠츠츳!
봉명주 안으로 들어온 규련은 안으로 들어와 우리를 내려놓고 모습을 변화했다.
그녀의 모습이 변화하며 얼마 후 털털하게 생긴 갈색 장포를 입은 여인의 모습이 되었다.
머리는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으나 딱히 관리하지 않는지 전체적으로 삐죽거리고 있었고, 그녀의 이마에는 금빛이 도는 사슴뿔이 작게 돋아나 있었으며, 뺨과 팔 곳곳에는 일부러 드러낸 것인지 황갈색의 비늘들이 돋아나 있었다.
"일단 너희 해룡족이랑… 거기 인족도 나를 따라와라. 너희는 진룡맹의 용명부에 이름을 올려야 하니 내가 안내해 주지."
"예, 감사합니다."
규련은 지난 생 초, 인족을 인솔하던 허령처럼 나와 서휼, 그리고 해룡족 원로들을 향해 진룡맹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우리 지족은 다들 대강 알겠지만 수많은 요족의 집합이다. 요족이니 지족이니 번거롭게 말은 하지만 사실 용족이나 다른 몇몇 종족을 제하고는 전부 다른 종족이지.
그 무수한 타 종족들을 인솔하기 위해, 선수 혈통을 타고난 용족과, 다른 우월한 대형 종족 몇몇이 모여 지족 전체를 통솔하는 게 지족의 현 상황이다. 그리고 그런 대형 종족들은 지족 전체를 통솔할 하나의 연맹을 만들어 냈고, 그게 바로 우리 진룡맹이지."
그녀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들 진룡맹의 이름을 들으며 대강 짐작했겠지만, 맹 내에서 가장 목소리가 큰 건 역시 대형 종족 중에서도 유난히 강한 힘을 가진 우리 용족들이다.
때문에 연맹의 이름이 진룡맹으로 지어졌고, 연맹 본부 역시 우리 용족의 구역 중심부에 지어졌지. 한 마디로, 우리 용족은 지족의 최상위 지배층이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모두 긍지를 갖고 행동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규련은 서휼의 태도가 흡족한 듯 유쾌하게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봉명주의 안쪽은, 말 그대로 또 다른 세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광활했다.
'저거… 하늘인가?'
나는 봉명주 안쪽을 떠다니는 '구름'과 안쪽에 있는 '산맥'을 보며 입을 벌렸다.
이건 공간 법기인 봉명성 같은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이건 차라리, 하나의 세계라고 하는 게 옳을 듯했다.
규련을 따라 걷고 있자니, 우리는 사축기인 그녀의 힘에 의해, 공간을 압축해서, 수많은 산맥과 강산을 휙휙 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걸어가는 것임에도 공간이 압축된다.
'축지법….'
최소 사축기 후기는 되어야 쓸 수 있는 무지막지한 법술!
나는 축지법의 흐름을 관찰하며 사축기의 깨달음을 읽고자 노력했다.
얼마 후.
우리는 봉명주 안쪽.
아까 보았던 인족 영역 전체만큼 큰 용의 사체만큼은 아니지만, 흑룡왕 현음 급의, 마치 산맥 같은 용들의 뼈가 잔뜩 널려 있는 장소에 도착하였다.
새하얀 산들이 이곳저곳에 널려져 있는 것 같았다.
"이리 와라. 용족 용왕들의 무덤이자, 우리 용족의 본거지, 용왕릉(龍王陵)이다. 이곳에서 너희의 신분 증빙 패를 받을 수 있지."
우리는 용왕릉의 중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용왕들의 뼈 중, 머리뼈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머리뼈만 해도 마치 산처럼 거대했다.
그리고 규련은 머리뼈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 역대 용왕의 머리에 너희 이름을 새겨라. 역대 선조들의 뇌리에 너희의 이름을 새겨 비로소 광한계의 용족이 되었음을 선조들의 앞에 알리는 의식이지."
해룡족들은 전부 서휼의 저물법기에서 나와 하나같이 용왕들의 머리뼈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그들이 이름을 새기자, 용왕들의 머리뼈에서 서광이 흘러나오며, 이름을 새긴 용족들의 몸 곳곳에 흘러 들어가, 용족들의 몸에 기이한 문양을 남겼다.
"앞으로 그 문양이 너희의 신분 증빙 패이다. 아마 개개의 자질과 특성에 따라 다른 문양을 다른 위치에 받았겠지. 나는 보여 줄 순 없지만 골반에 문양이 있다. 그리고 문양에 기를 주입하면…."
우우웅!
은은한 용형의 기운이 규련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듯하더니, 그녀의 몸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이렇게 용족임을 증명하는 환영이 나타나지. 앞으로는 이렇게 신분 증명을 하면 되니 모두 알아두고… 그리고 인족, 너는."
그녀는 서휼을 보며 말했다.
"인족을 용족의 용명부에 넣을 수는 없다. 인족이 용명부에 적히는 게 가능한 것은, 선수 진혈 본원을 불어넣어, 인족이 선수 진혈의 힘을 수련하여 그 자신의 피가 선수 진혈로 7할 이상 덮였을 때에나 가능하지. 그런 상황이 아닌데 용족 소속으로 인족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추천자의 신체 일부로 녀석에게 신분 패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요."
우웅!
서휼이 팔을 드러내자, 그의 팔 위로 푸른 비늘들이 우수수 돋아났다.
서휼은 그중 비늘 하나를 뜯어냈다.
그의 팔에서 뽑힌 비늘은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손바닥만 하게 커졌다.
파츠츳!
서휼이 손을 까딱이자, 그의 비늘이 허공에서 가공되며 내 이름이 적힌 신분 증빙 패가 하나 완성되었다.
"자, 여기 받게나. 내 비늘로 만든 이 신분 패가 앞으로 지족에서 자네의 지위를 보전해 줄 걸세."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서휼에게 감사하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다른 해룡족들이 전부 나와서 용명부라는 것에 이름을 올리는 중이고, 나도 신분 패를 발급받았는데, 왜 오혜서는 안 보이지?'
나는 서휼의 저의를 짐작하며 고민했다.
'왜 오혜서에겐 신분 패를 지금 만들어 주지 않는 거지?'
고민해 보았지만, 일단 지금 알 길은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신분 증빙을 할 수단을 전부 손에 넣었다.
그런 후, 우리는 다시 봉명주를 나가, 규련의 안내에 의해 해룡족이 생활할 생활 공간을 소개받았다.
용족 조사의 앞발 부근에 있는 커다란 '호수'였다.
…물론 말이 호수였지, 사실상 크기는 수계의 바다나 다름없었지만.
호수는 용족 조사의 핏줄이라는 강물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흑백의 물들이 뒤섞이며 오색의 운무가 호수를 덮고 있었다.
그리고 흑백의 물이 섞인 탓인지, 호수 자체는 흑백이 아닌 일반적인 투명한 물이었다.
'어마어마한 천지영기가 주변을 덮고 있군.'
오행영기가 진득할 정도로 주변에 퍼져 있었다.
이곳에서 수련한다면 빠르게 지난 생의 경지를 찾을 수 있으리라.
"이 운심호 아래에는 수 속성 요족들이 꽤 살고 있다만. 너희 해룡족이라면 제압하고 차지할 수 있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래, 그럼 앞으로 호수 아래에서 잘 살기를 바라지. 그럼 난 이만 가 보도록 하고… 궁금한 게 있으면 나를 찾아오면 된다."
"지금까지 정말 감사드렸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찾아뵈어 광한계에서 가르침을 청하지요."
서휼이 미소를 지으며 규련에게 인사를 표하자, 규련의 볼에 홍조가 돋았다.
"험험, 나는 이만 가 보지."
그녀는 헛기침을 몇 번 하는 듯하더니, 서휼에게 황급히 인사를 하고 다시 용으로 변해서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서휼은 규련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고개를 돌리고는 해룡족 원로들에게 말했다.
"어디… 운심호라는 곳을 점령하는 데에 얼마나 필요한지요? 원로회가 생각하기에는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서휼의 말에, 해룡족 원로들 중 나이가 많아 보이는 원로가 그에게 예를 취하며 말을 올렸다.
"저희의 힘이면 사흘 안에 운심호에 하계에서보다 더 큰 해룡궁을 세우고, 주변 종족들에게 조공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용왕께서 도우신다면 사흘이 아니라 이틀이면 충분하지요."
"그렇군요. 그나저나 해룡족 사이에서 다시 의전과 명칭에 대해 논의해야겠습니다. 광한계에서 용왕이란 칭호는 제가 함부로 사용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용… 아니, 서휼 님이시라면 분명 합체기에 도달하시어 정식으로 다시 왕의 칭호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격려 고맙습니다. 그럼 사흘 정도 기다려 드릴 테니, 모두들 수고 부탁드립니다. 저는 따로 할 게 있어 진룡맹 본부에 갔다 오지요."
"맡겨만 주십시오."
말을 마친 해룡족 원로들은, 빠르게 용형으로 변화하여 운심호로 뛰어들었다.
얼마 후.
쿠구구구구!
운심호의 바닷물이 마구 끓어오르는 듯했다.
아마 호수 아래에서 상당한 전투가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자네는 날 따라오게나."
"예?"
"자네가 날 따라오면 선수혈합에 참가할 수 있도록 추천을 해 준다고 했지. 약속을 지켜 주겠네."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선수혈합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하하, 선수혈합이 뭔지도 모르고 나를 따라왔단 건가?"
'아차.'
나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서휼의 심상에 또다시 의심이 피어올랐다.
그렇게 많은 의심은 아니었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의심이 쌓이면 언젠가 녀석에게 확정적으로 뒤통수를 맞으리라.
"선수혈합보다는, 명성이 자자하신 서휼 님의 인품을 믿고 따라왔으니 말입니다. 하하하…."
"아하하, 그런 거군. 이거 참 부끄럽게 되었네."
우리는 활짝 웃으며, 얼굴 뒤편에서는 서로를 향한 칼을 갈고 있었다.
"가면서 설명해 주지. 따라오게."
나는 본체로 변한 서휼의 목에 올라타 봉명주로 향하며, 그의 설명을 들었다.
선수혈합이란, 나이가 어린 요족 후기지수들을 모아, 100년에 한 번씩 선수의 진혈을 걸고 하는 경합이라고 하였다.
선수혈합에서 승리한 요족들은 각기 원하는 선수의 진혈을 한 방울 받아, 자신의 피에 연화시켜 우월한 요수의 자질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다.
본래라면 지족이 아닌 천족은 선수혈합에 참가가 불가능했지만, 사축기 급의 수사의 추천이 있으면 선수혈합에 참가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선수의 진혈이라….'
내가 선수라는 존재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어느덧 서휼은 봉명주 안쪽에 다시 도달했다.
봉명주 안.
거대한 석조 건물 앞에 내려앉은 서휼은 다시 인간형으로 변하더니, 안에서 뭔가를 처리하고 오겠다 하고는 나를 남겨두고 들어갔다.
아무래도 건물은 요족들의 여러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건물인 듯했고, 나는 서휼이 눈앞에서 사라지자마자 뒤를 돌았다.
'일단, 호풍응룡변이니 호풍진혈변이니 하는 웃기지도 않는 것들은 머릿속에서 지우지.'
석조건물이 세워진 산맥의 아래쪽에는 요족의 시장으로 보이는 커다란 장터가 열려 있었고, 그곳에서 수많은 요족들이 물건을 거래하는 것이 보였다.
'일단, 조금 제대로 된 요수공법을 구한다.'
타닷!
나는 월수궁무록을 쓰며, 요족들의 시장으로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들어갔다.
지(地)의 종족 (2)
휘오오오!
뜨거운 열풍이 주변을 휩쓸었다.
진룡맹 봉명주 내부의 요족 시장.
그곳에는 수많은 요족들이 모여 물건들을 교류하고 있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본모습으로 돌아다니며 뜨거운 열기를 뿜고 있었기에 시장 인근은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인간형으로 화형(化形)한 요족들은 찾기가 힘들군.'
하긴 천족이나 인족의 땅도 아닌데, 구태여 화형을 유지할 필요는 없었다.
간혹 덩치가 너무 큰 요족들이나 크기 때문에 화형을 하는 정도였다.
"자자, 천족 측에서 공수해 온 단약이오!"
"선수 진혈 등을 체내에 연화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혈련법(血鍊法)이 만들어졌습니까? 저희의 혈련법은 그동안 나온 혈련법과는 격이 다른 것으로…."
"지난번 오광족을 정벌하고 얻어 낸 오광족의 공간 법보요, 경매에 부치겠소!"
요족들의 음성은 커다랬고, 서로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기 위해 악을 쓰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정작 요족어는 영기를 진동시켜서 말을 전하는 방식이기에, 지족의 감각을 가지지 못한 인족이 와서 듣는다면 영기가 조금 출렁일 뿐 상당히 시장은 조용한 편이었다.
'요족들의 시장도 인족들과 크게 다를 건 없군.'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인족들보다 훨씬 점잖아 보이기도 했다.
나는 잠시 요족 시장을 구경하고는, 주변 요족들의 반응을 살피며 공법서를 판매하는 곳을 찾았다.
얼마 후, 나는 요족 공법서를 판매하는 시장 거리에 들어설 수 있었다.
'많군….'
요족 공법서를 판매하는 거리가 따로 있을 정도로 요족 공법서는 어마어마하게 넘쳐났다.
그리고 책이나 옥간에 기록된 인족의 공법들과 달리, 요족의 공법들은 뼈나 가죽, 혹은 이빨 등에 기록된 경우가 대다수였다.
'요족어의 특성 탓인가, 아예 기록 방법 자체가 다르군.'
요족 문자는 기본적으로 천지영기에 흐르는 음양의 흐름을 기록화하여 뜻을 주고받는다.
그렇기에 그 언어 체계는 일반적인 인족의 언어 체계와는 판이했다.
그러므로 그를 기록하는 법 역시, 영성을 머금은 뼈나 암석 등에 자신의 뜻을 기록한 음양의 흐름을 새겨 차후에 뼈에 영력을 불어넣으면 새겨진 흐름에 따라 영기가 진동하며 내용을 알리는 식이었다.
때문인지 요족 중에는 아예 자신의 몸이나 뼈 같은 곳에 공법을 새기고 다니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리고 그런 요족들 중 상당수가 요수공법서를 판매하는 거리에 와서, 공법의 내용이 수록된 자신의 신체 일부를 뜯어 내어 팔고 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뿌드드득!
"끄아하! 여기 내 뿔에 담긴 건 우리 각우족의 각우흑원변이오! 얼마 쳐 주시겠소!"
"흠, 각우족은 내 들어 본 적도 없는데…."
"아니! 지금 내 종족을 모욕하는 거요!?"
"아니, 그게 아니라… 에잇, 화내지 말고, 이 정도 쳐 주면 만족하겠나?"
"흠…."
눈앞에서 각우족이라는, 커다란 이족 보행의 검은 소가 콧김을 뿜으며 요족 상인에게 자신의 뿔을 뽑아 주고, 요족 상인에게서 영석을 받아 챙기는 모습을 보며 상당히 문화 충격을 받았다.
각우족이라는 이족 보행 소는 영석을 받아 챙긴 후, 콧김을 뿜으며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그가 몇 발자국을 딛자, 그의 뿔이 있던 자리에서 새 뿔이 돋아나는 것이 보였다.
결단기 이상의 요족인 만큼, 저 정도는 충분히 재생이 되는 모양.
그리고 망둥이를 닮은 요족 상인은 낄낄거리며 소의 뿔을 받아들고는 좋아하고 있었다.
"최근 용병 종족 중에서 각우족이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는데, 그런 각우족의 공법이라니 비싸게 팔리겠군."
나는 혈체피갑으로 내 몸을 덮은 원유를 조종해, 내 뺨에 비늘이 돋게 만들고, 이마에 붉은 사슴뿔이 돋아나게 만든 후 그의 앞에서 월수궁무록을 해제하였다.
"이보게, 내 이번에 비승하고 나서 지족 시장에 처음 오는 몸인지라 한 가지 묻겠네만…."
우우웅!
용형의 의식에, 내단의 기운을 바깥으로 흘려 주자 망둥이 상인은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귀하신 용족 분께서 어찌 이런 시장에 오셨습니까?"
"말했듯이 내가 광한계에 비승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묻고 싶은 게 좀 있어 말이네."
"예, 예, 하문하시지요."
"우선 방금 전처럼 요수공법을 팔러 오는 요족들이 흔한 건가?"
"아무렴요. 뭐, 사실 저런 요족들이 팔아 주는 요수공법이야말로, 우리 지족의 주요 특산물입지요."
망둥이 상인의 설명이 이어졌다.
"어르신께서도 아시겠지만, 우리 지족은 사실상 '시야'의 특성 때문에 한 가지로 묶여 불린다고는 하나, 전부 다른 종족입니다. 지족이 본래 대다수가 들이나 강산에서 나돌던 짐승이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자명하지요. 그런 지족이기에, 그 분류는 가히 세는 게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지족 공법은 종류가 어마어마합니다."
"음? 그게 무슨 말이지?"
"예? 무슨 말이냐니요?"
내 질문에 망둥이 상인은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왜 이런 간단한 말을 이해 못 하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험, 그러니까 내가 살던 하계에서와 광한계 환경이 너무 많이 달라서 말일세."
나는 적당히 하계 핑계를 댔고, 망둥이 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하긴 방금 비승하셨다 했지요. 하기야 하계는 수가 무수히 많으니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일단, 용족 어르신이 오신 하계의 상황은 잘 모르니 광한계 지족들의 상황을 잘 설명드리자면, 일단 저희 '지족 공법'이란 사실상 어르신이 속하신 용족이나 봉황족 등을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획일화된 것이 거의 없다는 건 아시지요?"
"…그렇지."
나는 잘은 몰랐지만, 이것까지 모른다고 한다 하면 그가 더더욱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것 같았기에 일단 안다고 대답하였다.
'뭐, 잘은 모르지만 대강 짐작은 되기도 하고.'
지족이란 곧 요족.
그런데 후대에게 공법을 계승해 주고, 점차 발전시켜 나가는 천족과 달리, 요족들은 대다수가 들에서 굴러다니던 들짐승이었기에 선대로부터 공법을 전승받을 수 없다.
그렇기에 힘을 쌓는 요족들은 사실상 자기 자신이 개별적으로 공법을 만들어 가며 성장해야 할 터였으니, 획일화된 공법이 없다는 말도 이런 식으로 대강 짐작은 됐다.
"예, 아시다시피 우리 요족들은 체내에 영성을 각성하고, 지성을 획득한 날부터, 끊임없이 본능에 기대서 자신에게 알맞은 공법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각 종족마다, 각 개인마다 만들어내는 공법이 천차만별로 다르지요. 그리고 그런 요수공법들은 각기 수많은 요족들이 자신의 본능에, 몸에 기대서 만듭니다. 그렇기에 영기의 흐름이 본인들의 신체에 새겨지고, 그 새겨진 신체 일부를 잘라 내서 이렇게 파는 요족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이지요."
"음, 그렇군."
아무래도 요족들이 자신의 뼈에 공법을 새기는 것은 그러한 이유도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천차만별의 요수공법이 열려서 활성화된 시장은, 이미 지성을 얻은 수많은 다른 요족들이 자신에게 맞는 공법이 있나 찾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파는 이들이 있다면 또 사는 이들도 많다는 얘기지요. 예를 들어, 본능대로 공법을 만들었는데 그 공법이 너무 구린 공법이라면 공법 시장에 와서 자신에게 맞는 공법을 사갈 수도 있는 겁니다. 그리고 또한, 천족 측에서도 저희의 요수공법을 원하는 이들이 아주 많지요."
망둥이 상인은 낄낄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저희 요수공법을 연구하고 싶어 하는 천족 측에서는 늘 이렇게 쌓여있는 공법서들을 일정 기간마다 대량으로 구입해 갑니다. 그렇기에 이 요수공법 시장이 이렇게 활성화된 것이지요. 어르신이 오셨던 하계는 어떤 곳인지 모르나, 이런 제도가 없었나 봅니다?"
"음. 확실히, 광한계의 독특한 제도구려."
나는 망둥이 상인에게서 지족에 대한 것들을 몇몇 개 더 물어본 후, 하계에서부터 가져온 영석들을 건네주었다.
'지족 시장은 결국 지족의 특성 자체와 연관이 있는 거로군.'
공법을 익히면 공법의 특징에 따라, 신체 곳곳에 영기의 흐름이 족적처럼 남으니.
그 족적의 흐름이 남은 신체 일부를 떼어서 파는 요수공법 시장.
그것이 지족만의 독특한 특징인 것이었다.
나는 망둥이 상인의 가게에서 물건을 본 후, 다른 가게들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가게들을 돌아다니던 와중, 나는 몇몇 가게에서 공통적으로 파는 공법서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보시오, 이 공법서는 다른 가게에서도 상당히 자주 보이던데 도대체 무슨 공법서요? 내 비승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런 것이니 설명 좀 해 주실 수 있소?"
다행히 내가 용족의 모습을 흉내 내며 상인들에게 묻자, 그들은 영광이라도 된다는 듯이 선선히 설명해 주었다.
"아, 비승하신 용족 어르신이셨군요. 이 공법들은 광한계 요수공법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공법입니다. 일종의 기초공법이라고 할 수 있지요."
홍합처럼 생겼으나, 홍합 주제에 팔다리가 달린 요족 상인이, 작은 영석을 들어올리며 설명을 이었다.
영석에는 빼곡한 요족 문자가 적혀 구결을 이루고 있었다.
"무수한 요족들이 서로 다른 공법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저희는 모두 요족이니만큼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겹치는 부분들을 모아 만든, 요족의 기본 중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공법인 셈이지요."
"호오… 이름은 뭐지?"
"광한결(廣寒訣)이라 합니다."
"광한결이라…."
나는 광한결을 구매해서 품에 넣었다.
요수공법의 기본 중 기본이라 불리는 공법과, 그 외에도 한두 가지 적정해 보이는 공법을 구매한 후, 나는 다시 서휼이 있던 석조 건물로 올라가 보았다.
'아직 서휼은 나오지 않는 건가.'
아무래도 안에서 처리할 일이 많은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서휼을 기다리기를 몇 시진째.
천지영기가 회전하며, 저녁 시간을 알릴 때쯤.
서휼이 석조 건물에서 나왔다.
"오래 기다렸나 보군. 지루하진 않았는가?"
"예, 서휼님을 기다리는 것에 어찌 지루함이 있겠습니까. 또한 수도를 하려 함에 있어 기다림은 본래 미덕이지요."
"좋은 말이군. 그동안 내가 준 호풍진혈변을 수련하고 있었는가?"
"그렇습니다."
"하하… 그렇군."
서휼은 눈웃음을 지으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갑자기 서휼의 의심이 폭증하는 것을 느꼈다.
'…? 아니,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갑자기 의심을 하는 거지.'
입천의 시야를 갖지도 못한 이 녀석이 내 속내를 꿰뚫어 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서휼은 음험할지언정 이성적인 자였다.
'아무 이유 없이 나를 갑자기 저따위로 의심할 리가 없다. 뭔가 근거가 있었다는 것일 텐데….'
월수궁무록을 써, 서휼이 석조 건물 안에서도 의식을 뻗어 알아차릴 수 없도록 하고 내려갔다 왔다.
거기에 강환 분신을 몰래 남겨 두고 가, 서휼이 가끔 의식을 뻗어 확인해도 알 수 없었을 터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일단 오늘 일은 대체로 만족스럽게 처리가 되었으니,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지금쯤이면 운심호를 정복하진 못해도, 본족의 원로들이 해룡궁은 새로 하나 지어 놨을 터이니."
"예, 알겠습니다."
츠츠츠츳!
서휼은 다시 본체로 변하며, 그의 목에 나를 태웠다.
나는 서휼의 목에 매달려 날아가며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진원진기를 태워서라도 무형검을 꺼내, 이 녀석의 목을 쳐 버릴까.'
이 녀석이 나를 의심하는 정도가 어마어마하게 폭증했다.
그냥 지금 당장 이놈을 죽여 버리고 탈출하는 게 장기적으로 좋을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아, 그리고, 오늘 진룡맹 사무국에 들어가 일을 처리하며 한 가지 좋은 정보를 들었다네. 앞으로 지족 내에서 대대적으로 실행될 계획이지."
"제가 들어도 되는 것입니까?"
"문제없네, 그리 큰 비밀은 아니니까. '전 지족 작명 과업'. 앞으로, 진룡맹에서, 현존하는 모든 지족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하여, 인족 총연맹에서 행하며 인족들의 생사를 총람하는 '명적' 제도와 같이. 앞으로 진룡맹에서 모든 지족의 '이름'을 지어 주고, 그를 관리하기로 했네."
"…이름 말입니까?"
나는 갑작스레 뜬금없는 말이 나오자 당황했다.
'갑자기 여기서 이름 같은 게 왜 나오지?'
"이름(名)은 운명(命)을 일부 담고 있지. 우리 지족은 천족처럼 하늘의 운명을 읽는 느낌이 없어. 그러니 늘 천족들에게 정보전에서 뒤처져, 지족의 세력이 근래 많이 위축되었다 들었네. 그런 만큼, 앞으로는 진룡맹에서 전 지족의 이름을 관리하고, 이름이 없는 지족은 이름을 직접 작명해 줄 커다란 계획을 짜고 있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그게 무슨 쓸모가 있는 건지…."
"아, 운명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조금 어려운 말일 수 있네만… 그렇게 모든 지족의 이름을 관리한다면, 지족의 이름에 담긴 운명의 힘을 간접적으로 읽어, 앞으로 지족의 전체적인 운명의 동향을 읽어 낼 수 있다는 진룡맹 최고회의 결정이라네."
"그런 결정을 제게 일러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될지요?"
"간단하네. 앞으로 전 지족 작명 과업에 모든 지족에서 한두 명씩 자기 관리를 파견할 걸세. 내 생각에는, 우리 해룡족에서는 자네를 포함해서 몇몇을 파견할 생각이니 말일세."
"…좋은 기회를 주시어 감사합니다."
'이 녀석은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지.'
나는 속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가 운심호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진 후였다.
나와 서휼은 호수 밑으로 들어가, 새로 지어진 해룡궁에 입성했다.
"그럼 자세한 얘기는 내일 나누지. 일단 오늘은 푹 쉬게."
나는 내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도대체 무얼 해야 할까.
서휼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걸까.
그걸 고민하며, 무심코 서휼이 내게 준 그의 신분 패를 들어 보았을 때였다.
"…어?"
왜, 신분 패에 의념이 녹아 있지?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신분 패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나는 오싹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미친.'
오늘 시장에 갔다 올 동안.
나는 줄곧 서휼에게 위치를 감시당하고 있었다.
지(地)의 종족 (3)
뿌드득….
나는 이를 질끈 악물고는, 혹여나 잘못 본 것일까 싶어 감각을 더더욱 끌어올렸다.
입천의 시야, 거기에 요족의 시야.
그리고 계위를 넘는 깨달음을 동원해 신분 패를 쳐다보았다.
얼마나 신분 패를 또렷하게 들여다보았을까.
치지짓….
'보인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보였다.
신분패에 연결된 영력의 흐름이, 의식 파동과 같은 기운을 흘리며 어딘가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곳의 종착지는, 느껴지는 기운으로 봐서는 영락없이 서휼.
'제길.'
나는 한참을 관찰하고서야 이 위치 추적 패의 원리를 알아챘다.
지족들은 공법을 익히며, 공법의 흐름이 자신의 신체에 기록된다.
그러므로 공법이 기록된 신체 일부는 곧 떨어질지라도 수도공법의 영향을 받는다.
그 원리를 이용하여,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진 신분 패를 끊임없이 감시할 수 있는 것이리라.
나는 이를 질끈 악물며 신분 패를 더 조사했다.
다행히 영기의 흐름으로 봐서는 그저 내 위치 정도만 감시되는 모양.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특히나 이 해룡궁 안에서는 말이지.'
썩 인족의 처소와 비슷하게 꾸며진 해룡궁의 방 안.
서휼이 직접 지은 게 아니고, 해룡족 원로들을 통해 지은 곳이라지만,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높은 확률로, 내가 들어온 이 방 역시 수작이 부려져 있어, 실시간으로 감시당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나는 신분 패를 든 채, 편하게 침상에 누우며, 혹여나 들키지 않도록 억지로 표정을 펴고 드러누웠다.
'일단 급선무는 수행을 찾는 거다.'
나는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서휼에게 달려들어 사생결단을 내려고 해도, 지금은 아예 진원진기를 모조리 태울 요량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최대한 빨리 수행을 찾고, 어느 정도의 힘은 갖춰야 서휼과 생활하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겠지.'
눈을 감고, 은은하게 기묘성심전의 구결을 운용해 의식을 실처럼 뻗어, 사방을 아무도 모르게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는 방 곳곳을 의식 실로 조사한 결과.
곳곳에서 희미한 영맥들이 느껴지는 걸 알아챘다.
이러한 영맥들은, 방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기록하여 어딘가로 이송하고 있었다.
'역시나 감시당하고 있었군.'
이 상태에서, 수행을 되찾겠다거나 할 수는 없다.
내가 익힌 공법도, 전부 서휼이나 해룡족 원로들의 눈 아래에서 수행하게 된다는 뜻이니….
'그럼, 역시나 지금부터 행동해야지.'
아무래도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최소한의 진원진기는 태울 각오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치이이이….
정순한 생명력이 기묘성심전의 의식 실을 타고 방 안 곳곳으로 뻗어 나간다.
의식 실 하나하나에 월수궁무록을 적용하였기에, 이 행위가 들킬 일은 없다.
그리고, 생명력을 머금은 기묘성심전은 내 방을 관음하는 방 안의 영맥들에 달라붙어, 내 의지대로 [회로]를 새기기 시작했다.
'역으로 잠식해 주지.'
치이이이….
[회로]는 영맥 곳곳에 새겨지며, 내 의지에 따라 통제된다.
그리고 그러한 회로들은 이내 방 안의 상황을 '다르게' 기록해서 송출시켰다.
아마 영력으로 정보를 받는 누군가는, 내가 방에서 얌전히 잠에 드는 장면을 볼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회로를 새겨 행동의 자유를 얻은 후에도 기묘성심전으로 방 곳곳을 한 번 더 뒤져본 후, 그제야 안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이 증명 패도 당장 괴군의 회로를 새겨 버리고 싶다만….'
서휼의 비늘로 만든 이 증명 패는, 서휼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확률이 농후하다.
이 방이야 재료 자체가 용족과는 무관한 재료였으니 상관없었지만, 비늘에 손대는 것은 아직 위험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비늘에는 위치 추적 기능만 붙어 있을 뿐, 실시간으로 뭘 하는지 감시하는 건 불가능해.'
나는 신분 패를 방 안의 적당한 곳에 올려 둔 후.
자리에 앉아 영기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생명력은 좀 태웠지만, 그래도 이것으로 해룡궁 안에서 자유를 얻었다. 그러니 걱정은 없어. 이제 수련을 시작해 볼까.'
츠츠츳!
입을 벌려, 체내에 있던 무색유리검들을 꺼냈다.
촤라락!
해룡궁에 배정된 내 방은 상당히 넓은 편이었기에, 삼천 개의 유리검이 방 안에 둥둥 떠 있어도 문제가 없었다.
나는 어검술로 유리검들을 띄워 놓은 채.
의식을 집중하며 입을 열었다.
"만상인연도."
파아아앗!
그와 동시에, 유리검들이 빛을 발하더니 기령을 뿜어냈다.
삽시간에 방 안이 희뿌연 기령들로 가득 찼다.
아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기령들은 방 안에서 서로 겹쳐지며 빛나기 시작했다.
자리가 없다 보니 서로 포개어져야 나타날 수 있는 탓이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편하다.
지금까지는 만상인연도에 수행을 저장해 놓기만 했던 입장.
그런 입장에서는 기령들이 전부 세세하게 나뉘어 있는 것이 편했다.
반면 만상인연도에 저장해 놓은 수행을 되찾으려면….
"합쳐져라."
츠츠츠츳!
기령들이, 하나하나 빛무리가 되며 겹쳐졌다.
내 앞으로, 셀 수도 없을 만치 많은 기령들이 쭉 몰리며 '하나'의 인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인영의 얼굴은 수시로 바뀌었다.
나와 만났던 모든 인연들, 선연, 악연, 사랑했던 이, 증오했던 이, 믿었던 이, 존경했던 이….
어마어마한 인연들의 얼굴이 인영의 얼굴에서 소용돌이치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 모든 기령들이 합쳐지자, 인영은 마침내 제대로 된 형을 갖추었다.
그것은 나였다.
스스스….
새하얀 백의를 입고 있는 녀석.
나와 정확히 똑같은 형태를 한 그 기령이 눈을 떴다.
나는 내 기령과 눈을 마주쳤다.
시야가 이분된다.
기령의 시야와 내 시야.
삼령공과 군마용갱권을 합쳐 만든 만상인연도였기에, 삼령공의 경우처럼 이렇게 또 다른 분신을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나'는 나에게 팔을 뻗었다.
두 명의 '내'가 서로에게 팔을 뻗어 양손을 맞대자, 얼마 후.
기령인 '나'의 시야가 다시 '나'의 시야 안쪽으로 흡수되었다.
정신을 차려 보자, 기령이 내 몸 안으로 흡수된 상황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겹쳐진' 상태였다.
우우우웅!
'과연….'
나는 기령과 겹쳐진 상태에서, 기령 속에 넣어 두었던 힘을 체감했다.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앞으로 시간을 들여, 기령에게 깃든 힘을 차근히 내 몸으로 옮기면 나는 10년 안에 원영의 경지를 전부 찾으리라.
스스스스….
나는 눈을 감고, 밤을 새며 만상인연도를 통해 수행을 되찾는 과정을 이어 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