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대제 ⓒ 로드워리어
[ 당신은 회귀의 수레바퀴 위에 올라섰습니다. ]
불타는 황궁 속에서 죽어 가던 황제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나타났다.
루페르트 가우저.
전생의 기억을 안고 과거로 돌아가다.
선제후들의 꼭두각시가 아닌 진정한 황제가 되기 위해.
#계약관계 #가상현실 #시스템 #책/소설판무 #환생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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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황제의 회귀 (1)
전임 황제 클라우데 2세가 붕어한 지 4년이 흘렀다. 그동안 제도 테타우에서는 갖은 모략과 정치 공작이 기승을 부렸다.
우여곡절 끝에 4년 만에 새로운 황제가 선출됐다.
루페르트 가우저라는 클라우데 2세의 먼 친척뻘인 젊은이였다.
그는 분명 젊고 혈기 왕성했지만, 그가 황위에 올랐을 때 제도 테타우의 궁정에서 그가 황제직을 제대로 수행하리라고 기대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황제에 오른 것이 아닌, 선제후들의 치열한 정치 공작 속에서 일어난 타협의 산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이 예상한 것처럼 그는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 능력도 없었다. 그가 잘하는 건 공놀이와 플루트 연주가 전부였다.
사람들은 그를 허수아비 황제라고 불렀다.
허수아비 황제의 치세는 갖은 불명예와 재앙으로 얼룩졌다.
제국은 쇠락했고 종교 갈등이 일으킨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실권도, 힘도, 지식도, 제국을 지킬 군대도, 조언해 줄 신하도, 가르침을 줄 스승도, 마음을 터놓을 벗도 아무것도 없는 루페르트 가우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황제직에 선출된 지 10년째.
제도는 함락됐고 황궁은 불탔다.
제국은 멸망했다.
근위대에게마저 버림당한 황제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거기까진 감내할 수 있었다.
자신의 부덕의 소치이니.
제위를 거절했어야 했다.
누가 뭐라고 했건.
하지만 백성들은 무슨 죄인가?
테타우를 함락시킨 용병대장 융커스 베샤문트의 병사들은 제도의 백성을 능욕하고 학살했다. 도처에서 처참한 절규와 신을 찾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무력감 속에서 그리고 절망 속에서 죽어 가던 황제는 난생처음으로 기도라는 것을 했다.
제국과 제국의 백성들을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노라고.
눈앞이 어둠으로 잠식되는 순간, 루페르트 가우저 앞에 소라고둥 하나가 초현실적인 형태로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것은...?'
루페르트 가우저는 눈을 부릅떴다.
한 달 전 황궁 안에서 소란을 피운 엉터리 예언자가 놔두고 간 물건이다.
놀랍게도 소라고둥 안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그 목소리는 빛으로 된 문자로 실체화되어 루페르트 가우저 앞을 가로막은 어둠을 밝혔다.
[ 정말 무엇이든지 하겠습니까? ]
루페르트는 그 음성이 신의 목소리인지 악마의 목소리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에게 선택지는 없다.
제국의 폐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른 문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 당신은 회귀의 수레바퀴 위에 올라섰습니다. ]
빛나는 문자가 흩어지는 순간, 루페르트는 보았다.
자신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소라고둥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 * *
루페르트 가우저는 어두운 복도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황궁에서 들려오는 비명도 모든 걸 집어삼키는 불도, 폐부와 옆구리에 느껴지는 불로 지진 듯한 통증도 없었다.
그곳은 그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였다.
복도 너머 살짝 열린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없었다면, 복도 안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으리라.
루페르트 가우저는 천천히 낯선 복도를 따라 걸었다.
살짝 열린 문 옆엔 두건을 뒤집어쓴 노인이 낡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노인은 루페르트 가우저가 다가오자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손님이 왔군. 6년? 7년? 아니 어쩌면 10년이 넘었을지도 모르지. 날을 세는 건 오래전에 그만뒀으니."
노쇠하고 지친 목소리. 주의를 기울여서 듣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한 발음이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노인의 발치 아래 빽빽하게 새겨진 숫자를 세는 기호가 새겨진 걸 발견했다.
날마다 노인이 새겨 둔 흔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기다림에도 끝이 왔군."
어둠의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루페르트에게 내밀었다.
하나의 물건이 노인의 앙상한 손바닥 위에 떠올라 있었다.
신비로운 색채를 머금고 은과 황금으로 세공된 목에 걸 수 있게 줄을 덧대 만든 소라고둥이다.
"받아 들게."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받아 들었다.
소라고둥이 손에 들어가자마자 그의 눈앞에 빛으로 이루어진 문자가 떠올랐다.
[ 영겁의 파도 ]
-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의 성스러운 유물
- 소라고둥을 불면 세상의 시간이 멈추고 당신은 과거로 회귀할 수 있다.
- 당신은 아래의 것을 가지고 회귀할 수 있다.
1. 기억
2. 소지품
3. 축복
4. 인연의 조각
- 현재 당신의 능력은 형편없습니다.
- 이 상태라면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은, 아니 더 처참한 미래에 직면하겠지요.
거기까지 읽어 나가던 루페르트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한치의 틀림도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빛나는 문자는 계속해서 나타났다.
- 구제 불능인 당신이라도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의 퀘스트를 수행한다면 초월적인 능력과 아티팩트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겁니다.
- 여신의 퀘스트는 예기치 못한 때 발생하는 경우가 많고 시기를 지나면 실패로 간주되는 것도 있으니 이 점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당신이 뜻한 바를 이루고 싶다면 다른 어떤 것보다 여신의 퀘스트를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 경고의 말. 회귀는 당신의 유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 당부의 말. 소라고둥을 부는 순간, 수많은 환영이 당신 옆을 지나갈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환영에 시선을 뺏기는 일은 삼가세요.
- 격려의 말. 부디 초심을 잃지 않도록.
소라고둥에서 흘러나온 문자는 이내 모래처럼 스러져 사라졌다.
루페르트는 자신의 목에 걸린 소라고둥을 들어 올려 바라보았다.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
듣지 못한 신이다.
그런 신이 있다는 것은 들은 적이 없다.
아마도 사교 집단에서 숭배하는 신이거나 잊힌 고대의 신일지도 모른다.
"문을 열고 나가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네."
노인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노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첫눈에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노인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어둠과 동화가 된 것처럼 안락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댄 채 입술을 다물었다.
"...."
루페르트 가우저는 노인을 남겨 둔 채 살짝 열린 문을 열어젖혔다.
문 너머에 있는 풍경은 어떤 아름다운 산골 마을의 풍경이었다.
루페르트 가우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여기는?'
어떻게 잊겠는가.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을.
하켄하임.
황실에서 보낸 사자들이 그를 황위 계승자랍시고 테타우로 데려가기 전까지 유년기를 보낸 곳이었다.
그의 길지 않은 인생 중 가장 행복했던 때다.
망설일 게 없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성큼 앞으로 열린 문 너머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그가 문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노인의 흐릿한 목소리가 갈고리처럼 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문 너머에 뭐가 보이나?"
노인이 물었다.
루페르트는 자신을 기다리는 낙원 앞에서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상향으로 가는 문이 보입니다."
"이상향이라...."
덥수룩한 흰 수염 너머 노인의 야릇한 미소가 언뜻 비쳤다.
루페르트는 그런 노인을 가만히 보다가 열린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맨바닥에서 잔 것처럼 허리가 아프다.
루페르트는 딱딱한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퀴퀴한 냄새와 보잘것없는 실내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루페르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곳은...?!"
기억에 있는 방이다.
그렇다.
그가 황위 계승자 후보로 선택당해 제도 테타우로 끌려가기 전 유년기를 보냈던 하켄하임의 공동주택의 방이다.
그는 창가로 가서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를 돌봐 주었던 공동주택의 관리인 아주머니가 긴 빨랫줄 옆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고 그 옆에서 그녀가 키우는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을 자고 있었다.
그들은 과거의 인물들이다. 하켄하임은 루페르트의 치세 중 오크 약탈자에게 파괴되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과거로 돌아온 건가?"
루페르트 가우저는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한 폭의 그림이 액자에 담겨 있었다.
아직 젊어 보이는 남성과 여성의 초상화.
'아버지. 어머니.'
그의 양친은 일찍이 그의 곁을 떠났고 남은 건 초상화 한 점과 따뜻한 온기가 남은 흐릿한 추억뿐이다.
루페르트는 황제가 된 이후 사라져 버려 영영 찾지 못했던 추억 속의 액자를 뚫어지도록 응시했다.
묘한 일이다. 이미 잊어버렸을 거라 생각했던 얼굴들이 이토록 친숙한 것이었을 줄이야.
루페르트는 액자를 두 손으로 안은 채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한동안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18세의 루페르트 가우저.
낯익으면서도 낯선 모습이다.
문득 목에 걸고 있는 소라고둥이 눈에 들어왔다.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의 선물이다.
그 소라고둥을 보는 순간 루페르트는 불타는 황궁과 잔혹한 용병에게 학살당하는 자신의 백성, 멸망하는 제국의 모습을 눈에 떠올렸다.
빠드득.
이가 갈렸다.
두 눈엔 불꽃이 튀었다.
'두 번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
자신에게 다짐하듯 속으로 되뇔 때였다.
닫힌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알록달록한 화려한 색상의 제복을 걸친 장교와 투구를 쓴 병사들이 방안으로 물밀듯이 밀고 들어왔다.
"제국의 이름으로 왔소이다!"
선두에 선 장교가 긴 두루마리 양피지를 아래로 늘어뜨리며 루페르트에게 말했다.
"당신이 루페르트 가우저입니까?"
루페르트는 그를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교는 이어 말했다.
"외람되오나 루페르트 가우저 님. 당신은 황위 계승권자 후보에 지명됐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마차에서 말씀드릴 테니 일단은 저희와 동행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14년 전.
루페르트 가우저는 이들의 동행 요구를 거절하고 쓸데없는 소란을 피웠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루페르트는 말없이 낯선 병사들을 따라나섰다.
마차 안에서 루페르트는 이름 모를 장교에게 자신이 왜 황위 계승권자 후보가 되었고 왜 제도 테타우로 향하게 되는지 대한 설명을 들었다.
요약하자면 사정은 이렇다.
철혈대제라 불리던 선제 클라우데 2세가 붕어한 이후 룸 왕 막시밀리안이 차기 황제로 등극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의 갑작스러운 지병으로 인해 급사로, 후사가 끊겨 버리고 말았다.
자연스레 선제후들은 황제직을 두고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였는데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선제후들은 젊은 황제 후보를 몇 명 둔 후 그중 가장 적임자를 황제로 옹립하기로 합의를 봤으며 그 후보 중 하나가 루페르트라는 것이다.
지난 생에서 루페르트 가우저는 황제로 선출됐다.
이유는 알지 못했다. 경쟁 후보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기에 왜 자신이 황제로 선출됐는지 비교할 방법도 없었고 황제가 된 이후엔 정신없는 일정을 소화하느라 과거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루페르트가 회상에 잠겨 있는 동안 그를 태운 마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멀리 제도 테타우의 거대 성벽이 보이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시골에 자리 잡은 2층짜리 저택이었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면서도 그 옛 됨이 보기 좋게 익어 있는 모습.
위버하임 장원.
모든 것이 시작되는 곳이다.
2화 1. 황제의 회귀 (2)
저택에 들어서자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를 필두로 한 하인들이 일렬로 늘어서 저택의 새 주인을 반겼다.
어제까지 번듯한 집 한 채 없이 공동주택에서 살던 루페르트는 이제 황위 계승권자 후보 자격으로 공석인 위버하임 남작 대우로 취급받음과 동시에 장원의 주인이 된 것이다.
"저는 이 집의 관리인을 맡은 세바스티안 브톤입니다. 앞으로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고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언제든 기탄없이 불러 주시길 바랍니다."
저택엔 세바스티안을 포함해 여섯 명의 하인이 있었다.
집사 세바스티안와 정원사 막스를 제외하면 모두 하녀로 하녀장 마르그리트의 지휘를 받아 집안의 관리, 가사 전반을 전담하는 사람들이다.
전생에서 루페르트는 이들과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그들은 대체로 친절했지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려고 했다.
친절하지만 자기편이 아닌 사람들로 둘러싸인 곳.
루페르트가 이 저택을 감옥이라 부른 이유다.
'그나저나 여전히 예쁘네.'
고개를 숙인 하녀 중 유독 눈에 띄는 여성이 있었다.
불꽃을 연상케 하는 붉은색 머리칼과 굴곡 있는 몸매, 고양이처럼 큰 눈을 지닌 아름다운 소녀였다.
나이는 루페르트 가우저와 비슷한 또래.
회귀 전, 한창때의 나이였던 루페르트는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다. 우연을 빙자해 말을 걸어 보려는 수작을 건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철벽이었다. 무엇보다 루페르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기운을 노골적으로 풍겼다.
그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그녀가 피리스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는 게 전부.
소문에 따르면 마법 학교로 진학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했다.
아마 잘되지 않았을 것이다.
마법 학교라는 곳은 아주 재능이 특출나거나, 집안이 유복하지 않으면 수료하기 어려운 곳이므로.
그런데 지나치게 오랫동안 옛 추억에 잠겨 있던 모양이다.
"피리스. 저분 너에게 반했나 봐?"
루페르트가 한참 동안 피리스를 보고 있자 다른 하녀들이 킥킥거리며 말을 주고받았다.
당사자인 피리스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루페르트를 곁눈질로 힐끗 응시했다.
14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빨려들 것 같은 푸른 눈동자.
그런데 루페르트는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시선의 온도가 다르다.
전생에서 루페르트를 바라보던 피리스의 눈빛은 차가운 경멸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영락없이 꾸밈없는 소녀의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이 녀석, 날 처음부터 싫어한 게 아니었어?'
조금은 마음이 설렌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건 루페르트 본인도 알고 있다.
살짝 둥글어진 마음 너머로 불타는 제도의 광경이 서늘하게 비쳤다.
"...."
루페르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고 옆에서 집사 세바스티안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긴 여정에 피로하셨나 봅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여장을 푸시지요."
루페르트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침대와 서재가 딸린 넓은 방.
전에 살던 방보다 다섯 배는 큰 방이었다.
침대 위에 누워 있던 검은 고양이가 루페르트를 보더니 입이 찢어지라 하품을 한다.
"이 녀석도 있었잖아?"
하녀들이 귀여워하던 녀석이다.
그 녀석은 루페르트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자 도도하게 몸을 일으키고는 열린 창밖으로 훌쩍 몸을 날린다.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었다. 하켄하임의 침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안락감. 하지만 그에 반비례하여 루페르트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이제, 뭘 해야 하지?'
과거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모든 것은 불투명하다.
무엇보다 자기에 대한 자신이 없다.
황제직을 10년 동안 수행했지만, 그의 경험은 모래알 같은 허상이었다.
제대로 아는 게 없었기에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고 긍정적인 경험으로 승화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껏해야 궁중의 시시콜콜한 예법과 몸가짐, 위엄 있는 목소리로 좌우로 명하는 것 정도가 그가 제위에 있으면서 익힌 것들이다.
그래도 전보다 사정이 낫다.
이 전생에서 루페르트 앞에 놓인 미래가 지도도 등불도 없이 암초로 가득 찬 해역을 항해하는 것이었다면 적어도 지금은 대강의 지도라도 손에 쥐고 있다.
그는 미래를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루페르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알게 된 것이다.
'나의 능력을 키울 때다. 진정한 황제에 어울리는.'
곧 가정 교사들이 방문할 것이다.
황실에서 뽑은 실력자들이다.
전생에서 루페르트는 그들의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당시 그는 철이 없었고 황제가 되겠다는 의지도 없었으며 수업의 난이도도 지나치게 높았다.
간신히 글줄이나 읽을 줄 알던 루페르트에게 당대 내로라하는 석학들의 수업은 따라가기 벅찬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늦은 오후, 집사 세바스티안이 가정 교사의 내방을 알렸다.
루페르트는 그의 이름을 물었다.
"테타우 제국대학의 에르바하 교수님입니다. 룸어(語)의 권위자시죠."
"에르바하라."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늙은이.
첫 대면은 아직도 기억난다. 고리타분한 원리 원칙주의자가 그렇듯 그는 첫인상과 외관으로 상대방을 평가하는 사람이다.
전생에서 그는 루페르트의 단정치 못한 옷차림과 얼빠진 태도를 보고 루페르트의 기분이 나쁘지 않을 정도로 지적한 후 다음 수업부턴 자신의 제자를 후임으로 보냈다.
후임은 젊은 청년 학자로 수업에 적극적으로 임하기보다는 루페르트의 비위를 맞춰 주는 부드러운 남자였다.
루페르트는 엄격한 가정 교사 중 그 젊은 학자를 제일 좋아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에게 배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룸어는 제국이 들어서기 전 대륙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던 고대의 강국, 룸 제국의 언어다.
비록 룸 제국은 멸망했으나 그들의 찬란했던 예술과 문화는 여전히 살아남아 그들의 문자로 전해지고 있다.
이런 문화의 근간이 되는 룸의 언어를 모른다는 건 상류층 사이에서 근본 없는 인물로 치부되는 가장 좋은 구실이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제위 내내 룸어로 자기 이름도 못 쓰는 무식한 인간이라고 뒤에서 조롱받았다.
루페르트도 뒤늦게 룸어를 배우려고 시도했지만, 고대의 언어는 대단히 어려운 언어다.
룸어를 문법적 오류 없이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가장 고도의 교육을 받은 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배운 자의 특권이자 상징이다.
'작은 것부터 바꾸자.'
변화란 거창한 게 아니다.
루페르트는 제위 내내 단 한 번도 자신 있게 구사할 수 없었던 룸어를 정복하고자 마음먹었다.
에르바하 교수는 그를 위한 최적의 스승이다.
루페르트는 거울 앞에서 구석구석 자신의 옷차림을 살피며 의관을 단정히 했다.
긴장되는 첫 만남.
응접실의 소파에 하얀 수염을 드리운 날카로운 인상의 노학자가 눈을 반쯤 감은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에르바하 교수를 보자 루페르트는 문득 자신도 모르는 강점 하나가 부지불식간에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도 긴장되지 않는다.
14년 전에는 제국대학 교수의 기백에 눌려 제대로 말도 못 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비록 허수아비 황제라고 하나 루페르트 가우저는 제국 권력의 최상층에서 내로라하는 당대의 인물들을 두루 만났다.
하물며 일개 제국 대학교수 정도야.
긴장감이 사라지자 루페르트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세련된 몸가짐으로 교수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제가 루페르트 가우저입니다."
평온하면서도 점잖은 위엄이 깃든 목소리.
의자에 앉아 있던 교수가 반쯤 뜬 눈을 슬며시 뜨고 루페르트를 바라보았다.
비굴하지 않으면서도 겸손한, 그러면서도 주인의 자리를 잊지 않은 당당한 태도로 선 청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교수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분. 평민에게 거두어져 평민처럼 살았다고 들었는데.'
애당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는 루페르트 가우저가 선제후들의 협잡으로 황위 계승권자 후보에 오른 '자격 없는' 후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마주한 루페르트는 소문과는 달랐다.
무엇보다 굽히지 않는, 거만하지 않은 당당함이 후광처럼 돋보였다.
에르바하 교수는 태도를 바르게 하고 루페르트를 상대했다.
루페르트와 이야기를 하면서 교수는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 기품은 하루아침에 몸에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역시 그의 몸에도 제국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인가.'
인물됨은 확실히 좋다.
지금까지 만난 다른 황위 계승권자 후보들과 비교해도 조금도 꿀림이 없으며 오히려 나은 모습까지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룸어의 지식은 어떨까?
에르바하 교수는 루페르트에게 간단한 테스트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지참한 책을 펼쳐 그중 한 문장을 앙상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 문장은 어떻게 읽습니까?"
올 것이 왔다.
루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에르바하의 테스트에 응했다. 아주 잘하진 못하지만, 재위 기간 틈틈이 익혀둔 지식을 최대한 동원해 대답했다.
그러나, 루페르트의 룸어는 조악했고 특히 기초가 빈약했다.
에르바하의 얼굴에 미세한 경직이 나타났다.
'사람됨은 괜찮은 것 같으나 교육 수준은 높지 않군. 기본도 안 되어 있다니. 결국 평민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라는 건가.'
자신이 직접 가르칠 만한 인재는 아니다.
에르바하 교수가 그렇게 루페르트를 정의 내릴 때였다.
교수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황위 계승권자 후보 루페르트 가우저가 자신 앞에 서서 머리를 숙인 게 아닌가?
아무리 그가 평민 손에서 자랐건 교육 수준이 낮건 간에 그는 저 철혈대제 클라우데 2세의 핏줄, 황제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다.
일개 제국 대학교수와는 근본이 다르다.
그런데도 저 청년은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저의 부족함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배울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교수님이 제국에서 가장 룸어에 정통한 분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어려운 과제도 좋습니다. 부디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가르치는 입장에서 열의에 찬 학생만큼 보람을 느끼게 하는 대상은 없다. 그것도 고귀한 신분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저 학생은 황제가 될 수도 있는 존재 아닌가?
구제 불능의 인간이라면 모를까, 저렇게까지 열의에 넘치는 황위 계승권자 후보면 가르치는 보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도 지금까지 느꼈던 어떤 보람보다 거대한 지고의 보람을 말이다.
에르바하 교수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루페르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제가 황위에 올랐을 때 룸어도 모르는 황제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비난과 치욕을 떠나, 무식한 자가 제위에 오른다면 제국 전체를 욕보이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 거침없는 말에 에르바하 교수의 마음은 굳어졌다.
교수가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루페르트에게 다가가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검 대신 펜을 쥔 기사, 제국 대학교수들의 서약이다.
"카셀 에르바하. 제국대학의 교수. 기꺼이 남작님을 도와 지식의 빛을 밝히는 데 일조하겠나이다."
이렇게 루페르트는 제국 내 룸어의 일인자 에르바하를 스승으로 모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이다.
루페르트는 잇따라 방문하는 다른 모든 가정 교사들을 자신의 스승으로 붙들어 놓을 수 있었다.
논리학, 역사, 수사학 등등 하나같이 제국에서 일류로 손꼽히는 호화로운 교수진이었다.
그들의 지식을 흡수할 수 있다면 예정된 파국으로 향하는 미래가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3화 1. 황제의 회귀 (3)
회귀한 지 한 달이 지났다.
루페르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교수진들의 수업을 정리하고 진도를 따라가느라 혼신의 힘을 부었다.
사실 루페르트는 공부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다.
"룸어에서 '가다'라는 뜻의 동사 변형은 모두 몇 개입니까?"
에르바하 교수가 열정적인 어조로 물었다.
"다섯 개, 아니 여섯 개입니다."
"이 구문에서 화자가 의도하는 것은 청유입니까? 명령입니까?"
"명령입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제가 알려 드린 각 용법을 이용한 문장을 스스로 생각하고 작성해 다음 방문에 제출해 주십시오. 참고로 문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에르바하의 수업은 마치 질척한 개펄 위를 전력으로 달리는 느낌이었다.
한 번 수업을 듣고 나면 진이 빠졌고, 혹독한 과제는 다른 수업에마저 차질을 줄 지경이었다.
그런데 최근 루페르트의 마음속에 고민거리가 생겼다.
'제대로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네.'
아무리 공부를 거듭해도 모르는 것투성이고 시험에선 실수 연발이다.
열심히 하는 건 맞지만 실력이 오르는 것 같지가 않다.
공부와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으레 직면하는, 답보(踏步)라는 최악의 적이 그에게 도래한 것이다.
공부에 뜻을 둔 사람 중 다수가 공부의 힘듦보다 진전이 없을 때 포기의 유혹을 느낀다.
의외의 지점에서 복병을 만난 루페르트는 당연한 일이지만 여유를 찾게 되었다.
'휴식이 필요해. 머리를 식힐 휴식이.'
루페르트는 저택 뒤 푸른 잔디가 깔린 고분처럼 생긴 동산으로 올라갔다.
첫 외유였다.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그가 바깥으로 나가자 하녀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며 수군거릴 정도다.
동산 위에는 수많은 풀을 뉘게 하는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루페르트는 보는 눈도 없겠다, 모처럼 그 동산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위버하임 장원의 풍경을 한눈에 응시했다.
실로 아름다운 광경이다.
왜 전생에선 알지 못했을까.
시원스레 뻗은 아름다운 장원의 풍경을 신선한 바람을 맞아가며 감상하고 있노라니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플루트라도 가지고 올 걸 그랬나.'
플루트는 축구와 더불어 오랜 취미이자 몇 안 되는 위안거리 중 하나다.
아쉬운 김에 루페르트는 이름 모를 풀을 꺾어 풀피리 형태로 만들어 한 번 불어 보았다.
바람 샌 웃긴 소리가 났다.
요령이 없다는 게 이런 작은 일에서도 드러났다.
한 번 익힌 건 대체로 잘해 냈지만, 해 보지 못한 일은 아주 젬병이였다.
루페르트는 풀밭 위에 벌러덩 드러누워 하얀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는 푸른 하늘을 눈에 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깜빡 잠이 들었다.
"아차."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즉시 품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10분을 잤을 뿐이다.
오후에 있을 가정 교사 방문까지는 시간이 넉넉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루페르트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그것은 소라고둥이었다.
늘 자신의 목에 걸고 있던 소라고둥이 자신의 가슴팍 위에 똑바로 서 있는 게 아닌가?
'뭐지? 이건?'
회귀를 한 이후에 처음 보는 풍경.
다음 순간 벌떡 일어선 소라고둥에게서 어떤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신은 정말로 둔감한 사람이네요. 제가 몇 번이나 불렀는데."
점잖고 기품도 깃들어 있지만 젊은 음색.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
루페르트는 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일어설 수 없었다. 가슴팍 위에 오뚝 선 소라고둥이 천만 근처럼 무거웠기 때문이다.
소라고둥에게서 다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튼, 처음으로 단둘이 되었네요. 저는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랍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리프니에...?"
"어머, 벌써 저를 잊으신 건가요?"
소라고둥이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반응이 왜 그렇죠? 당신에게 기적을 베푼 아름다운 여신을 만날 땐 좀 더 경건하고 열광적인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게 아닌가요?"
"그... 그건!"
놀라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을 과거로 데려다준 이와 만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흐음.... 신비로움이 부족한가. 그럼 이건 어떤가요?"
소라고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페르트 앞에 빛나는 문자가 표시됐다.
[ 흐음.... 신비로움이 부족한가. 그럼 이건 어떤가요? ]
틀림없다. 죽기 직전에 봤던 빛나는 문자다.
"아니, 충분히 신비롭습니다. 여신이여."
"리프니에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그쪽이 이 끔찍한 세상에선 적합한 호칭이니."
리프니에는 조소를 섞어 말끝을 흐렸다.
그 말이 끝난 직후 풀밭엔 정적이 흘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루페르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고 리프니에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먼저 정적을 깬 건 리프니에였다.
"그나저나 당신도 참 피곤한 환경에서 살고 있네요."
"제가요?"
루페르트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곧 납득이 갔다. 이미 충분히 피곤한 환경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하루에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 사이 정도만 자고 나머지 시간은 학업에 열중하는 삶을 사니 말이다.
"뭐, 조금 힘들긴 하죠. 하지만 제국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힘듦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습니다."
이에 소라고둥은 퉁명스레 말했다.
"저기, 제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닌데."
그 말은 빛나는 문자로 다시 한번 루페르트 앞에 표시됐다.
[ 저기, 제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닌데. ]
루페르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리프니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당신, 감시당하는 거 몰라요?"
"감시요? 제가?"
리프니에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네요. 이 저택은 감옥이에요."
"감옥이라고요?"
과거 루페르트는 위버하임 장원을 푸른 지붕의 감옥이라고 농담 삼아 부르곤 했다.
하지만 이 저택이 진짜 감옥이라니.
"저택 안에 있는 사람 중 일부가 당신을 주야로 지켜보는 데다가 당신의 방 안에서 나는 소리를 엿듣고 있어요. 심지어 당신의 침대에도 도청을 위한 관이 설치되어 있답니다."
"그럴 리가."
그러고 보니 묘하게 사람들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친 기억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상하다고는 의식했지만, 문제 삼을 정도는 아니었다.
"정 못 믿겠으면 야밤에 침대 모서리에 있는 황동 장식을 향해 갑자기 소리를 질러 보세요. 아마도 깜짝 놀랄 반응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굳었던 그의 머리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여신이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
루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리프니에에게 물었다.
"그것이 정말입니까?"
"당연하고말고요.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좀 더 당신 앞에 빠르게 말을 걸었겠죠. 당신이 할 일이 태산인데 말이죠."
그러고는 소라고둥은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뭐라고 투덜거렸다.
그동안 대단히 불만이 쌓였던 모양이다.
"아무튼, 저택 쪽에서 당신을 망원경으로 지켜보는 무리가 있네요. 빨리 간단히 용건만을 말하고 끝내도록 할게요."
리프니에는 서둘러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루페르트 앞에 빛나는 문자가 나타났다.
[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의 퀘스트 ]
[ 그 첫 번째 ]
[ 지금 이 암울한 시대에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를 모시는 신도는 단 한 명도 없으며 그녀를 위한 신전 또한 한 채도 없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그녀의 유일한 사도인 당신이 이런 신성 모독을 그냥 지켜보면 아니 되겠지요? ]
- 가련한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를 위한 신전을 지어라.
"으음."
첫 번째 퀘스트.
예상한 것과는 조금 내용이 다르다.
그는 영웅 서사시에 나오는 영웅의 과제 같은 걸 연상했었다. 드래곤이나 괴수의 처치 같은 것들 말이다.
"아니,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리프니에가 퉁명스런 어조로 불쑥 물었다.
루페르트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든 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요?"
소라고둥 안에서 정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루페르트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용이야 어쨌든 리프니에의 첫 번째 퀘스트다.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고 맹세했는데 겨우 신전을 짓는 것쯤이야.
그는 저택으로 돌아가 즉각 신전을 짓는 작업에 착수했다.
필요한 것은 건축 자재와 인부.
루페르트에겐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는 연간 60,000탈러의 수입을 올리는 위버하임 장원의 주인이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기리는 작은 사당을 만들고 싶은데."
"어디에 만들려 하십니까? 저택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면 제가 지원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지원하겠습니다."
세바스티안은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저택에서 오십 보 거리를 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 루페르트에겐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일주일 정도의 날림 공사가 이어진 후 저택 뒤편에 리프니에의 신전이 완성됐다.
조촐하고 투박한 작은 신전.
서슬 퍼런 이단 심문관의 시선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신전 바깥엔 어떤 표식도 새기지 않았다.
아무튼 새롭게 완성된 신전 안에 들어서자 한마디 말도 없던 소라고둥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흐음. 이런 움막 같은 걸 저를 위한 신전이랍시고 만든 건가요?"
리프니에는 한 평밖에 안 되고 장식물도 촛대 하나밖에 없는 작은 신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아무튼, 엉망이긴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퀘스트 달성에 따른 답례를 드리도록 할게요."
소라고둥 안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것은 화려한 색채로 치장된 만화경이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만화경 같지만 루페르트는 예사롭지 않은 힘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만화경을 집어 드는 순간 그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나타났다.
[ 통찰의 만화경 ]
- 아무도 없을 때 거울 앞에서 그것을 사용해 자신을 바라보세요.
4화 2. 통찰의 만화경 (1)
이른 새벽.
침대에서 자던 루페르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침대 곁의 작은 탁자 위에 놓인 금박과 은으로 장식된 화려한 물건을 눈에 담았다.
통찰의 만화경.
여신 리프니에로부터 받은 아티팩트다.
손에 넣은 시점은 어제지만 저택 전체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좀처럼 쓸 기회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가장 안전한 시간이리라.
루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고 무심코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려 침대 상부의 화려한 황동으로 만든 장식물을 보았다.
리프니에의 말에 따르면 이 황동 장식은 관의 형태로 아래층에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루페르트는 심호흡을 하고 갑자기 침대맡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으라차!"
아래쪽에서 외마디 비명과 함께 희미하게 우당탕하고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루페르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진짜였군.'
딱히 화가 나는 건 아니다.
황궁에서 받던 견제와 감시에 비하면 오히려 귀여운 수준이다.
루페르트는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나 만화경을 낚아채듯 손아귀에 쥔 후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아직 실내는 어슴푸레한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창가로부터 비치는 새벽의 미명이 실내의 사물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루페르트는 통찰의 만화경의 접안부에 눈을 갖다 대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만화경 특유의 다채로운 색채로 이루어진 풍경만 어른거릴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좀 더 기다려보기로 하고 천변만화의 색채 너머 떠오른 자신의 얼굴을 계속해서 노려보았다.
만화경의 중심에 그의 얼굴만이 둥그러니 떠올랐다. 그걸 본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솔직히 나 정도면 잘생긴 얼굴이지.'
아주 눈에 띄는 미남은 아니지만, 호감 정도는 살 수 있는 얼굴이다.
실제로 그가 황위에 올랐을 때 그가 듣던 몇 안 되는 칭찬 중 하나는 인상이 참 좋다는 것이었다.
인상만 좋아서 문제지.
"...음?"
갑자기 손안에 들린 만화경이 사라졌다.
그것은 마치 스펀지에 끼얹은 물처럼 그의 손바닥 안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루페르트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나타났다.
- 당신은 아티팩트 통찰의 만화경을 흡수했습니다.
- 지금부터 당신은 '통찰'의 권능을 지니게 됩니다.
- '통찰'의 권능은 마법처럼 강하게 연상하는 것으로 기동이 됩니다.
- 그럼 직접 한번 시도해 보세요.
루페르트는 시키는 대로 했다.
강한 연상.
곧 기별이 왔다.
[ 통찰의 권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
루페르트는 강하게 긍정했다.
[ 통찰의 권능을 사용합니다. ]
다음 순간 루페르트는 놀라운 광경을 목도했다.
자신의 왼쪽 눈에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자와 마법진, 그리고 음울한 짙은 녹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닌가?
'이건?'
당황하는 그의 눈앞에 일목요연한 표가 나타났다.
< 루페르트 가우저에 관한 보고 >
1. 개요
종족: 인간 - 남부 제국인
분류: 범인
성별: 남성
연령: 18세(누적 32세)
명성: 알려지지 않음
2. 일반 평가
무력: D-
마법: F
군략: F
경영: F
지식: E+
기예: C+
3. 능력치
- 의미 없음
4. 축복과 가호
- 수레바퀴에 올라선 자
- 아티팩트
"통찰의 만화경"
5. 영혼 동맹
- 없음
6. 총평
- 벌레
"벌레...?!"
루페르트 가우저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 그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떠올랐다.
[ 이야기는 신전 안에서. ]
소라고둥의 메시지다.
* * *
힘든 하루 일정을 마치고 루페르트는 리프니에의 신전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가 신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정원사 막스가 정원 가위를 들고 주변을 서성거리는 게 보였다.
저택의 모든 이들이 그를 감시하고 있다는 걸 알고 나니 정원사의 작은 행동 하나조차 신경이 쓰인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소라고둥이 입을 열었다.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의 목소리다.
"이 신전은 저의 영역으로 선포된 성역, 평범한 인간의 이목 따윈 가볍게 속일 수 있답니다."
한 평 남짓한 비좁은 신전이 울릴 정도의 목소리였다. 루페르트는 정원사 막스 쪽을 응시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정원 가위로 가지를 쳐 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여기선 자유롭게 말해도 되는 겁니까?"
루페르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이죠. 이야기를 하기 전에 거울 하나를 구해 오세요. 그래야 본격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루페르트는 즉시 밖으로 나가 거울 하나를 구해 신전 안으로 돌아왔다.
이야기는 루페르트가 통찰의 권능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됐다.
전에 봤던 자신의 능력치가 눈앞에 나타났다.
너무나도 직관적인 처참한 능력치.
리프니에의 기품 어린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통찰의 만화경은 당신의 대략적인 능력을 수치화하여 보여 주는 힘을 지니고 있답니다. 뭐, 보다시피 당신의 능력치는 형편없지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이게 현실인데."
"...."
"그렇다고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 당신에겐 시간이 있으니까요. 조금씩 개선해서 나가는 거죠. 아 여담으로 통찰의 권능을 남들 앞에서 사용하는 건 자제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루페르트는 통찰의 권능을 쓸 때 자신의 동공 위에 떠오르던 기이한 형상들을 연상하며 말했다.
'함부로 썼다간 이단 재판에 회부되기 딱 좋겠어.'
하루가 멀다고 광장에서 사람들을 불태우던 이단 심문관들을 떠올리며 루페르트는 몸서리를 쳤다.
"일단 소라고둥을 제단 위에 올려 주세요."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루페르트는 목에서 소라고둥을 끌러 헌화 몇 송이가 올려진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제단 위에 놓인 소라고둥은 스스로 몸을 일으켜 직립했다.
루페르트는 소라고둥 너머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보는 것 같은 꺼림칙한 시선을 느꼈다.
"당신은 이곳에 도착한 이래 룸어라는 고대의 언어를 가장 열심히 공부하고 있더군요. 제가 옳게 봤나요?"
소라고둥 안에서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습니다."
"룸어. 물론 중요하죠. 제가 이해한 바로 권력층의 언어이니."
"정확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룸어도 좋지만 다른데 힘써야 할 거 같아요."
직립한 소라고둥이 미약한 움직임을 보였다.
"곧 당신에게 내릴 퀘스트가 있거든요."
"어떤 퀘스트입니까?"
"사냥이에요."
"사냥?"
"네. 그것도 아주 위험한 사냥이죠."
리프니에의 말이 끝나자 빛나는 문자가 루페르트의 눈앞에 떠올랐다.
[ 메헨부르그의 야수 ]
그 문자를 본 루페르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메헨부르그의 야수라고?'
전생의 기억 속에 있는 이름이다.
뒤이어 떠오른 빛나는 문자가 루페르트의 기억을 보충했다.
[ 메헨부르그의 야수, 혹은 괴물이라고 불린 존재는 제국력 981년에서 982년 사이, 테타우 남쪽 메헨부르그 영지 일대에서 출현한 악명 높은 야수입니다. ]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명 높은 정도가 아니었다.
메헨부르그의 야수는 메헨부르그 일대를 돌며 수십 명의 여성과 어린아이를 잡아먹었다.
황실에서 고용한 사냥꾼이 사살하기 전까지 메헨부르그의 야수는 제도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험한 일 하기 싫어하는 위버하임 장원의 하녀들도 공포에 질려 몸소 못과 망치를 들고 저택 창문에 판자를 덧대는 작업에 나설 정도였다.
하지만 그 메헨부르그의 야수에 대해 왜 리프니에가 관심을 두는 것일까.
[ 알려진 역사에 따르면 메헨부르그의 야수는 제국 수렵대의 안투안 쿠르스트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그가 메헨부르그의 야수라 주장하는 커다란 늑대를 증거물로 제출한 이후 메헨부르그의 야수의 활동은 종언을 고했습니다. ]
"...하지만 저는 여기에 대해 약간의 의문을 지니고 있어요."
문자가 사라지는 시점과 맞물려 리프니에가 입을 열었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거든요."
"안투안 쿠르스트가 사냥한 야수가 진짜가 아니라고 믿고 계시는 겁니까?"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요."
"...."
"메헨부르그의 야수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은 석 달 후, 그전까지 당신의 무력 평가를 C 이상으로 만들어 놓는 게 좋겠어요."
"무력을 중점적으로 키우라는 말씀이군요."
"네. 제 예상이 맞는다면 아주 위험한 임무가 될 것 같으니까요. 어쩌면 당신은 제국을 구하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어요. 운이 나쁘면 산 채로 괴물에게 먹히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
"아무튼, 자세한 내용은 추후 알려 드리도록 하기로 하고 지금부터는 통찰의 만화경의 사용법을 알려 드리겠어요. 일단 당신의 능력치를 띄우고 지식 평가 항목을 봐 주세요."
루페르트는 시키는 대로 했다.
지식: E+
바람직하지 못한 능력치.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식 평가 항목을 손가락으로 눌러 보세요."
루페르트는 손가락을 들어 지식 항목을 눌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눈앞을 덮은 문자열이 스러지면서 새로운 항목이 표시된 것이다.
룸어: 23
논리학: 12
윤리학: 12
역사학: 11
수학: 0
물리학: 0
< 루페르트 가우저: 지식에 대한 보고 >
세부적인 항목이다.
"각 항목의 평가는 이렇게 평가 항목을 열면 세부 평가를 볼 수 있어요. 보다시피 처참한 능력치가 보이죠?"
"으음. 네. 그런데 이 점수들은 뭘 기준으로 산정한 건가요?"
"각 영역에서 마스터라고 불리는 달인의 기준을 백 점 만점으로 잡았어요. 백 점에 가까울수록 마스터에 가깝고 멀수록 초심자에 가깝다는 이야기에요. 물론, 당신의 능력이 마스터를 웃돌 정도에 이르면 백 점을 넘길 수도 있답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요."
"세부 항목을 골고루 잘해야 평가가 올라가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어느 한 항목에 통달하기만 해도 평가는 올라간답니다. 정확한 기준은 제 마음대로지만 아무튼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겠죠?"
리프니에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프니에의 말은 물처럼 이어졌다.
"처음 당신이 이 저택에 왔을 때 당신의 룸어 수치가 얼만지 아시나요?"
"글쎄요. 10점 정도?"
어림짐작으로 말해 봤다.
그러나 리프니에는 자비심이 없다.
"아니요. 5점이었어요."
"5점요...?"
루페르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네. 한 자리도 안 되는 처참한 능력치였죠. 다시 말해 당신은 두 달 동안 18이라는 수치를 올린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루페르트는 그동안 가슴 속에 응어리졌던 답답함이 한 번에 해소되는 걸 느꼈다.
'그래, 실력이 안 느는 게 아니었어! 여신님의 눈으로 볼 땐 착실하게 실력이 늘고 있었던 거야!'
리프니에가 자신에게 통찰의 만화경을 준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리프니에는 계속해서 말했다.
"보다시피 대단히 빠른 성취지요. 그뿐만 아니라 당신이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논리학과 윤리학, 역사학의 점수도 룸어만큼은 아니지만 가파른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자신의 성장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건 좋은 동기 부여 효과를 주죠. 수시로 통찰의 망원경으로 당신의 능력치 변화를 예의 주시하세요. 물론, 지금 가장 중시해야 할 게 뭔지 알고 계시죠?"
리프니에가 루페르트에게 원하는 것은 무력, 다시 말해 전투 능력의 집중적 향상이다.
루페르트도 물론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리프니에의 상상 이상으로 크다.
그의 일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단지 자신의 일과에 검술 수련과 체력 단련을 추가했을 뿐이다.
두 배의 노력, 두 배의 수고로움.
머리가 터져 버릴 정도의 공부와 뼈와 힘줄이 끊어질 정도의 운동.
루페르트의 몸에 걸리는 부하는 더욱 커졌지만, 그는 쉬지 않았다.
아니, 쉴 수 없다.
제국의 미래는 오로지 그의 손에 달려 있으니까.
5화 2. 통찰의 만화경 (2)
통찰의 권능에 표시된 지식 평가 항목과 마찬가지로 무력 평가 항목에도 세부적인 능력치가 존재했다.
무력 평가의 경우엔 지식 평가보다 직관적이었다.
< 루페르트 가우저: 무력에 대한 보고 >
근력: 45
민첩: 52
체력: 53
검술: 29
궁술: 51
창술: 3
부술: 22
지식 평가의 점수가 마스터 급의 달인을 기준으로 한 것처럼 무력 평가의 점수도 전사 길드 마스터의 기준으로 배점했다.
평균적인 숫자만 놓고 보면 루페르트의 신체적 능력은 평균 이상이다.
하켄하임에서 먹고 살기 위해 별의별 일을 다 했고 시간이 나면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축구 같은 격렬한 운동을 즐겼다.
특히 그의 축구 실력은 다른 동네까지 소문이 나서 동네 대항전에 용병으로 뛸 정도로 뛰어났다.
다른 건 몰라도 공놀이에 있어서 루페르트는 모든 황제를 통틀어 최고의 실력자일 것이다.
이 세상이 축구로 하나 될 수 있는 세상이었다면 그의 치세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을지도 모른다.
"루페르트 가우저."
이곳은 리프니에의 신전.
리프니에가 자신의 능력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루페르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 여신님."
"리프니에."
리프니에가 딱딱한 어조로 주의를 줬다.
여신님이라는 어휘가 바깥세상에선 딱 이단으로 몰리기 좋기 때문이다.
유일신 호라를 숭배하는 제국에서 호라 이외에 다른 신을 믿는 것은 국법보다 무섭다는 교회법에 어긋난다.
"네. 리프니에."
리프니에의 뜻을 잘 아는 루페르트는 즉시 호칭을 정정했다.
소라고둥 안의 여신은 기분이 좋지 않은 거 같았다. 그녀는 대뜸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최근, 너무 무리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글쎄요. 무리한다면 무리하는 것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단련되고 정련된 소수의 강자들이라면 모를까, 평범한 인간인 당신의 육체는 아직 약해요. 지금처럼 무리를 거듭하다간 버텨 내지 못할 거예요."
리프니에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루페르트는 여신의 걱정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내가 믿을 것은 내 몸뚱이 하나다. 솔직히 다른 사람보다는 강골이잖아.'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는 산책길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낯선 사람이 저택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발견했다. 수수한 평상복을 걸친 젊은 여성이다.
가까이 다가가자 루페르트는 그 낯선 여성이 저택에 고용된 하녀 피리스라는 걸 알게 되었다.
늘 입던 하녀 복이 아닌 다른 옷을 입어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바깥에 나갔다 오는 거야?"
루페르트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아마도 둘 간에 처음으로 이루어진 대화이리라.
단 한 번도 말을 걸어오지 않던 루페르트가 갑자기 말을 걸자 피리스는 놀란 듯 고양이처럼 큰 눈을 치켜뜨고 루페르트를 바라보다 이내 황급히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루페르트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피리스가 자신을 싫어하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엄연히 장원의 주인이다.
아랫사람으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가 있다.
바로 잡을 건 바로 잡아야 한다.
루페르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피리스가 한발 빠르게 입을 열었다.
"저, 지독한 감기에 걸려서 남작님께서 옮을 수도 있다고요."
피리스는 황급히 쏟아 내듯 말하고는 입을 가리고 낮은 기침을 했다.
"...."
잘못 짚었다. 피리스는 자신을 생각해 주느라 그런 말을 한 것이다.
루페르트의 마음이 빠르게 누그러졌다.
"괜찮아. 어차피 방향도 같겠다, 함께 돌아가지."
그는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피리스가 뒤에서 우물쭈물하자 루페르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난 감기에 잘 안 걸리는 체질이거든."
"정말요?"
피리스가 눈을 크게 뜨며 묻는다.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잖아?"
실제로 루페르트는 제위에 오르기 전은 물론 제위 중에도 잔병치레를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당당하게 말한 것인데 피리스는 그 모습이 웃긴지 입을 가리고 킥킥 웃었다.
루페르트는 그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앞으로 걸어갔다.
길동무가 있는 길은 혼자 걸을 때와 또 풍경이 다르다는 걸 느끼면서.
둘은 특별한 말 없이 저택에 도착했다.
루페르트는 피리스에게서 별다른 악의를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미세하지만 약간의 호의마저 느낄 수 있었다.
같은 사람이지만 전생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전생엔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뭘 잘못했길래 날 그렇게 싫어했지?'
딱히 실수를 한 기억은 없었다.
그래서 어떤 계기로 미움을 샀는지 알 길이 없다.
루페르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차차 알아 가면 될 일이다.
회귀의 묘미라고 할까.
"콜록! 콜록!"
루페르트는 뒤에서 나는 피리스의 기침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나쁜 것들엔 악한 마음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다.
"...."
유행성 질병도 그중 하나다.
피리스의 감기가 루페르트에게 옮았다.
당황스러운 결과다.
그는 원래 감기에 잘 걸리지 않는 체질이고 다른 건 몰라도 몸뚱이 하나만은 튼튼하다는 자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무리를 거듭한 일정이 그의 면역력을 떨어뜨렸다.
독감은 지독했다.
펄펄 끓을 정도의 고열과 오한에 주야로 시달리고 몸살까지 나다 보니 천하의 루페르트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제국의 미래를 향해 쉬지 않고 질주하던 미래의 황제는 침대에 누운 채 몸이 낫기를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침대 위에서 루페르트는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리프니에의 말을 뼈저리게 상기했다.
'공부를 너무 했더니 더 이상 바보가 아니게 됐군.'
뒤늦은 후회였다.
아픈 것보다 고통스러운 건 귀중한 3일을 그냥 날려 버렸고 앞으로도 며칠을 날려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약간의 호재는 있었다.
"아직도 몸이 달군 숯처럼 뜨겁네요."
피리스가 마른 천으로 루페니에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정성스레 닦아 냈다.
부드러운 손놀림과 천 너머로 보이는 아름다운 신형과 하늘거리는 빨간 머리칼, 그리고 은은하게 풍겨 오는 좋은 향기.
미인의 정성 어린 간호를 받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피리스는 그의 얼굴을 닦고 화병의 꽃을 갈고 해열제를 물 그릇에 타서 루페르트에게 먹였다.
"고마워. 피리스."
"천만의 말씀이에요. 저 때문에 루페르트 님께서 이렇게 되셨는데요. 루페르트 님이 나을 때까지 당연히 제가 곁에서 모셔 드려야죠."
전생과 달리 피리스는 예의 바르고 착한 소녀였다. 말도 점잖게 하려고 했고 행동거지에도 남에게 배운 게 아닌 스스로 우러나오는 기품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루페르트의 간호를 마치고 방구석에 있는 팔걸이가 없는 의자 위에 앉아 대기했다.
한참 동안 새침하게 의자에 앉아 있던 그녀는 갑자기 치마 안에서 커다란 책 하나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치마 안 어디에 그런 공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큰 책을 허벅지 위에 앉혀 두고 정독하기 시작했다.
루페르트는 슬며시 시선을 돌려 피리스가 읽는 책의 제목을 읽었다.
[ 마법 전서, 헨드릭 반 네헤겐 ]
마법에 관한 입문서로 보인다.
'역시 피리스는 마법 쪽에 뜻을 둔 모양이네.'
사각사각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기분 좋은 고요 속에서 하루가 지났다.
다음 날, 루페르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의사와 피리스는 그가 누워 있길 청했고 본인도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다고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 여신의 신전으로. ]
소라고둥, 아니 리프니에가 그를 호출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뭐죠?"
신전에 들어서자마자 소라고둥 안에서 질책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답했다.
"루페르트 가우저입니다."
"이름을 묻는 게 아니에요. 루페르트 가우저. 다시 물을게요. 당신은 뭐였죠?"
루페르트는 잠시 침묵했다.
여신의 저의가 뭔지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곧 그는 여신의 뜻을 헤아렸다.
"황제... 입니다."
"바로 그거예요."
목에 건 소라고둥이 살짝 움직이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뒤이어 리프니에의 낭랑한 목소리가 신전 안에 메아리쳤다.
"당신은 모든 방면에서 최고가 될 필요가 없어요.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은 남들을 부리는 입장이지, 부림 당하는 처지가 아니잖아요. 자신을 좀 더 소중히 하세요."
"...."
맞는 말이다. 반박하기 어렵다.
"그리고 너무 급하게 무언가를 하려 하지 마세요. 지금처럼 그렇게 자신을 깎아 내면서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당신은 금방 지쳐 버리고 말 테니까요."
"제가 지친다고요?"
약간의 반발심이 섞인 음성.
리프리네가 곧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인간이 지닌 내면의 불꽃은 때로는 신조차 놀라게 할 정도로 맹렬하게 불타오르곤 하지만 인간의 열정이란 그들의 운명이 그러하듯 무한하진 않거든요."
리프니에게 힘주어 말했다.
"첫 회귀부터 이렇게 해 버리면 당신은 금방 지쳐 버릴 거예요."
"...."
병환으로 창백한 루페르트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의 두 눈을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비명으로 얼룩진 불타는 테타우.
전생의 기억.
루페르트의 두 눈에 형형한 빛이 번득였다.
그는 고개를 들었고 힘차게 가로저었다.
"...제국을 구하기 전까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한 평 남짓한 신전 안에 긴 침묵이 흐르고 지나갔다.
"당신의 뜻이 그렇다면 저는 말리지 않겠어요. 아무튼, 제가 당신을 이곳으로 부른 건 훈계 이외에도 다른 목적이 있어서랍니다."
리프니에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루페르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어떤 목적인가요?"
"신전 바깥을 보세요."
신전 뒤엔 익숙한 위버하임 저택의 후면과 잘 관리된 나무 몇 그루, 그리고 나무 뒤에서 이쪽을 지켜보는 정원사 막스가 있었다.
'...저 친구.'
노골적으로 이쪽을 감시하고 있다.
"저기 바깥에 이쪽을 염탐하는 정원사가 보이죠?"
"네. 아주 보란 듯이 이쪽을 보고 있네요."
"건너편에선 신전 안이 보이지 않아 그렇답니다. 아무튼 통찰의 권능을 저 사내에게 사용해 주시겠어요?"
"타인에게도 사용 가능한 겁니까?"
"네, 당신처럼 아주 정확하진 않지만."
루페르트는 너도밤나무 뒤에서 이쪽을 향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정원사 막스에게 통찰의 권능을 사용했다.
"당신과 달리 시간이 걸릴 거예요."
그녀의 말대로 조금 시간이 걸렸다.
직접 마주 본다면 어색함을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
이윽고 루페르트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펼쳐졌다.
정원사 막스의 능력치다.
통찰의 만화경은 루페르트 자신의 능력뿐만 아니라 타인의 것도 볼 수 있던 것이다.
"어떤가요? 정원사 막스의 보고가 보이나요?"
"네.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루페르트의 것과는 차이가 있다.
리프니에는 바로 그 차이점에 대해 설명했다.
"아직 제 권능은 미약하답니다. 저의 힘이 미치지 않는 다른 존재의 능력치까지 들여다보는 건 불가능하죠. 당신이 저의 퀘스트를 착실히 수행하면 보다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은 운명의 실로 그 사람을 가늠할 수밖에 없어요."
"운명의 실요?"
"모든 사람의 운명은 실타래처럼 얽혀 있답니다. 저는 그 운명의 실타래에서 몇 개의 가닥을 골라 그 사람의 미래를 점치죠. 운명의 실타래에 열거된 것은 그 사람의 잠재적인 미래의 다양한 모습들이랍니다."
"...그런 게 가능합니까?"
"균형의 여신이란 이름은 장식이 아니랍니다. 평범한 인간의 미래를 보는 것 정도는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죠."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편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시간을 역행시켜 그를 과거로 회귀시킬 정도의 힘이 있는 여신이다.
그녀의 말대로 평범한 인간의 운명 정도 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리라.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리프니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가련한 정원사 막스는 당신이 보기에 어떤가요? 밑에 두고 부릴 만한 사람 같나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속단은 금물이죠. 가능성의 동물인 인간들은 여신인 저로서도 좀처럼 찾을 수 없는 숨겨진 운명의 실 한 가닥을 감춰 두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저 정원사도...?"
"으음. 그건 아닌 거 같아요. 가련한 막스에 대한 기대는 접읍시다."
"...."
전부터 느끼고 있는 바지만 리프니에는 가차 없는 여신이다.
"아무튼 통찰의 만화경을 타인에게 사용하면 당신은 그 사람의 가치를 알 수 있답니다. 그렇게 파악한 능력으로 당신은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겠지요."
"여러 가지 일이라...."
"아까도 말했듯이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은 모든 걸 직접 할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유능한 인재를 찾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겠지요. 통찰의 만화경은 당신이 인재를 찾을 때 큰 역할을 할 거예요."
실로 맞는 말이다.
리프니에가 그에게 뭘 말하려고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좀 더 천천히 성장하고 주변 사람을 보는 안목을 기르라는 것.
이튿날.
루페르트의 수련은 아침부터 시작됐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극한까지 자신을 밀어붙이지 않는다는 것.
그는 휴식을 충분히 즐겼고 하루 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최소한으로 관리하는 데 주력했다.
물론 그 결과 그의 성장은 다소 늦어졌지만 루페르트는 서두르지 않았다.
조금씩이지만 확실하게 단점을 수정해 나갔다.
1. 개요
종족: 인간 - 서부 저지대인
분류: 범인
성별: 남성
연령: 37세
명성: 알려지지 않음
신체상의 특징: 없음
2. 운명의 실타래
가혹한 포주: E+
게으른 정원사: E-
비루한 걸인: D+
3. 특기사항
- 특별히 없음
4. 등급
E+
< "정원사" 막스 비터핀에 관한 보고 >
6화 2. 통찰의 만화경 (3)
통찰의 만화경은 타인의 운명과 자질을 볼 수 있는 영험한 능력이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동공에 명백한 이상 현상이 일어난다.
남들이 봤을 때 경악할 정도로 기이한 일이 말이다.
이단 심문관 같은 피곤한 존재가 냄새를 맡으면 곤란해진다.
그래서 꾀를 냈다.
리프니에의 사당이 여신의 힘으로 바깥에선 내부를 볼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 하녀들에게 양초나 향 같은 걸 가지고 오라고 명해 신전 안에서 하녀들의 능력치를 보는 것이다.
오늘은 피리스가 신전에 쓸 양초를 가지고 왔다. 루페르트는 신전 안에서 그녀에게 바깥에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후 통찰의 권능으로 풋풋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빨간 머리 아가씨를 들여다보았다.
약간의 기다림 끝에 그녀의 대략적인 운명과 등급이 나타났다.
< "하녀" 피리스 홀리바레스에 관한 보고 >
1. 개요
종족: 인간 - 카스무어인
분류: 범인
성별: 여성
연령: 16세
명성: 알려지지 않음
신체상의 특징: 없음
2. 운명의 실타래
학대당하는 마법사의 아내: E-
군대를 따르는 매춘부: E
스스로 목을 매단 자: F
3. 특기사항
- 특별히 없음
4. 등급
E-
"...."
루페르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까지 본 사람 중 단연 최악이다.
답이 없다고 생각했던 정원사 막스는 그녀에 비하면 팔자가 핀 것이다.
"흐음. 저 여자의 운명의 실 일부가 정원사 막스와 연결되어 있네요."
소라고둥 안에서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루페르트는 이전에 봤던 막스의 가능성 있는 미래 중 하나를 상기했다.
가혹한 포주: E+
"...기분 나쁜 미래군요."
"가능성 있는 미래지 확정된 미래는 아니에요. 게다가 운명의 실은 대략적인 미래를 보여 주는 것이지 그 사람의 전부를 보여 주는 건 아니랍니다."
리프니에가 그렇다고 하니 조금은 위안이 됐다.
루페르트는 신전 바깥에 양초를 들고 인내심 있게 기다리는 빨간 머리 소녀를 눈에 담았다.
'피리스.'
그런데 갑자기 저택 모퉁이 쪽에서 사람 하나가 급히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집사 세바스티안이다.
"루페르트 님은 어디에 계시나?"
피리스는 손가락으로 신전 안을 가리켰다.
"저기요."
하녀도 아니고 집사가 직접 뛰어온 걸 보니 무언가 일이 생긴 모양이다.
루페르트는 신전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나타나자 집사 세바스티안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트라이아의 선제후 레벤호스트 님의 방문입니다."
뜻하지 않은 손님의 예방이다.
루페르트의 미간에 희미한 주름이 새겨졌다.
'선제후 레벤호스트?'
어찌 모르겠는가.
제국의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일곱 선제후 중 하나.
명목상 신하이면서도 황제 앞에선 상전처럼 굴었던 신교 세력의 우두머리를 말이다.
대부분의 선제후들이 황제를 우습게 봤지만 레벤호스트는 그중에서도 두드러지게 황제를 깔보는 부류였다.
특히 그는 황제와 선제후들이 모인 자리에서 틈만 나면 룸어를 써서 황제를 소외시키는 행동을 일삼았다.
지금 루페르트가 룸어에 집착하는 건 어찌 보면 그 사내의 탓이 팔 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곧 레벤호스트가 나타났다.
나이는 서른 중반.
중키에 풍채 좋은 몸매를 지닌 날카로운 관상의 사내로 앵무새를 연상케 하는 알록달록한 색상의 화려한 옷을 입고 불사조의 깃을 단 모자를 써서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남자였다.
"만나서 반갑다. 본인이 트라이아의 선제후. 비고 레벤호스트다."
그는 언제나처럼 거만한 태도로 자신을 소개했다.
얄궂은 만남이다.
지금 루페르트는 이 사내에게 대항할 수 없다.
그는 제국의 최상위 제후인 선제후이고 루페르트는 아직 일개 남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뭐라고 하건 지금은 감내해야 한다.
'뭐, 가끔은 룸어 사전 찾으며 문장 짜내느라 머리 씨름하는 것보단 이런 신선한 자극도 좋겠지.'
다르게 생각하니 의외로 나쁘지 않은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제후 옆엔 그와 꼭 닮은 소년이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레벤호스트의 아들이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루페르트를 우습게 봤고, 공개적인 석상에서 몇 번이고 루페르트를 망신 주려고 했던 인간이다.
트라이아가 오크 군세에 멸망 당한 이후엔 황제에 대항하는 반란군까지 조직했으나 결국 진압당해 뒷골목에서 변사했다.
좋은 기억이라곤 단 하나도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일었다.
왜 이들이 루페르트 앞에 나타난 것일까.
루페르트가 기억하기로 그가 직접 선제후들과 대면하는 시기는 약 1년 후 있을 테타우의 궁정 모임에서다.
즉, 이렇게 빠른 시기에 선제후가 직접 루페르트를 만나러 온 건 예정에 없는 일이다.
'무슨 의도로 온 거지?'
레벤호스트는 응접실 소파에 편안히 앉아 루페르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루페르트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선제후의 도전적인 눈빛을 받아 냈다.
이윽고 선제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소문과는 딴판이군."
"...어떤 소문 말입니까?"
"듣기 거북할지 모르겠지만, 무지렁이 시골 청년 하나가 황위 계승권자 후보에 올랐다는 소문이 돌고 있거든."
"...."
무지렁이 시골 청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의 루페르트에겐 그보다 어울리는 수식어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시골 청년이 아주 열심히 학업에 매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그 깐깐한 에르바하 교수가 직접 내방해서 가르친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선제후는 에르바하 교수의 이야기를 꺼내며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교수를 아는 눈치다.
루페르트가 물었다.
"에르바하 교수님을 알고 계십니까?"
"당연하지. 나도 그 사람에게 룸어를 배웠거든."
선제후는 데리고 온 시종에게 명해 펜과 종이를 대령하게 한 후 종이 위에 잊힌 고대 제국의 문장을 갈겨썼다.
대충 쓴 것 같은데 힘 있고 정려한 필치다.
레벤호스트에 대한 악감정은 차치하고서라도 루페르트는 솔직히 그의 글자가 감탄스러웠다.
"종이 수천 장, 아니 수만 장은 썼을 거야."
레벤호스트는 자랑삼아 말하며 곁눈질로 루페르트의 얼굴을 살피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자네도 한 문장 써 보는 건 어떤가?"
생각지 못한 위기. 루페르트는 당황하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
"전 이제 겨우 룸어를 배우기 시작한 초학입니다. 함께 오신 아드님께도 못 미치는데 어찌 공작님의 문장과 견줄 수 있겠습니까?"
선제후는 아들의 머리를 매만지며 피식 웃었다.
깜짝 찾아온 위기는 그렇게 넘어간 걸로 보였다.
선제후는 시종을 불러 시간을 물었다.
"벌써 이런 시간인가."
선제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뭔가 바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실은 이 주변에 사냥하러 오는 김에 들렀다네. 불편을 끼치지 않았나 모르겠군."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야말로 생전 처음으로 선제후님의 귀한 존안을 직접 뵈니 생각의 경계가 넓어진 기분입니다."
능수능란한 대응. 누가 이 청년을 갓 시골에서 상경한 무지렁이라 보겠는가.
실제 선제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곳에 온 의도는 다른 곳에 있었다.
레벤호스트는 망토를 둘러매고 시종의 손질을 받다가 갑자기 루페르트를 향해 물었다.
"자네는 황위 계승권자 후보로서 이 제국을 어떻게 생각하나?"
생각지 못한 질문이다.
루페르트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을 느꼈다.
직감적으로 와닿은 것이다.
레벤호스트가 직접 이곳에 온 이유가.
레벤호스트는 제국의 일곱 선제후로서 직접 자신의 눈과 귀로 황위 계승권자 후보를 평가하러 왔다.
이 질문의 대답에 따라 향후 레벤호스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해지게 될 것이다.
선제후 하나를 적으로 돌린다는 게 얼마나 쓰라린 일인지는 황제 루페르트 가우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뼈 있는 질문을 던진 레벤호스트를 담담한 눈으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제국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위기?"
레벤호스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건국 이래 제2의 전성기라 불리는 이 태평성대에 말이야."
선제후의 말은 틀린 구석이 없었다.
실제로 선제, 철혈대제라 불리운 클라우데 2세의 치세 하에 제국은 대륙 최강국의 위치에 올라섰다. 제국의 군대는 가는 곳마다 승리했고 무력으로 이루어진 평온 속에서 무역과 문화가 꽃폈다. 누구도 제국의 쇠락을 예견하지 못했다.
레벤호스트의 날카로운 시선이 루페르트의 얼굴에 꽂혔다. 그는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긴장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다지 긴장할 건 없다.
루페르트 가우저가 누군가? 제국의 멸망을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본 최후의 황제 아니던가?
착잡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현재의 영화는 선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선제는 돌아가시고 황위는 공석인 상태입니다."
"...."
레벤호스트는 입을 다물고 경청했다.
"아까 저보고 시골 무지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엄밀히 말하면 맞습니다."
레벤호스트는 가볍게 웃었고 그의 아들도 킥킥거리고 웃음을 참았다.
루페르트는 계속해서 말했다.
"저 같은 시골 무지렁이가 황위를 두고 다투고 있는 게 작금의 제국의 상태죠. 저처럼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황위에 오른다면 제국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레벤호스트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싹 사라졌다.
"그래도 잘 굴러가지 않을까? 철혈대제가 남긴 유산이 있으니 말이야. 상승 무패의 군대는 여전히 제국의 영토를 지키고 있고 제국의 곳간엔 금은보화가 넘치고 있다. 이런 제국에 위기가 닥쳐오려면 적어도 몇 세대가 흘러야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레벤호스트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제국엔 일곱 선제후가 있다. 각각의 선제후령은 여간한 나라의 국력을 능가한다. 제국을 쓰러뜨린다는 것은 대륙 최강의 국가 일곱을 연이어 무너뜨려야 한다는 말과 같지."
레벤호스트의 말은 정론이다.
각각의 선제후는 일국의 왕과 유사한 지위와 힘, 군대를 지닌다.
문제는 거기에서 비롯됐다.
파멸적인 미래를 아는 루페르트는 오만하기까지 한 선제후를 똑바로 노려보며 겸손한 어조로 말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그 막강한 선제후가 제국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이지?"
레벤호스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화살 비와 같은 매서운 눈빛을 받으며 루페르트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자격 없는 자가 황제가 되면 선제후들은 서로 다투게 되겠지요. 아무리 막강한 제국이라고 해도 그 집안부터 흔들리면 바깥의 위협에 대항할 수 없습니다. 호시탐탐 제국의 분열을 노리는 타국의 왕들은 모든 힘을 기울여 선제후 간의 다툼을 부추기겠지요. 하지만 자격 없는 황제는 그 다툼을 중재하지 못할 것입니다. 선제후들은 그 황제에게 복종하지 않을 테니까요."
직접 경험한 일이다.
거짓이 있을 수 없다.
진실이 깃든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본 레벤호스트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이 친구.'
처음 본 관상이 옳았다.
만만한 자가 아니다.
"...선제후 간의 대립과 연합은 최초의 황제 시대부터 엄격히 금한 바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그는 약간은 궁색한 어조로 말한 후 자리를 떠났다.
장원을 나서기 전에 그는 배웅하는 젊은이를 돌아보며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이름도 모르고 왔다는 건 레벤호스트가 루페르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 주는 단편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과거형이다.
루페르트는 그렇게 확신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루페르트 가우저. 헤르베르트 가우저의 아들이자 철혈대제 클라우데 2세의 혈족입니다."
루페르트 가우저.
트라이아의 선제후 레벤호스트는 그 이름을 확실하게 머리에 담았다.
7화 3. 메헨부르그의 야수 (1)
그 야수가 나타난 것은 어느 초가을의 청명한 날이었다.
다섯 명에서 일곱 명 사이가 되는 사람들이 번듯하게 닦인 도시의 길거리를 걷고 있었다.
저녁 무렵이긴 했지만 해는 지지 않아 세상은 밝음 속에 있었고 권태로울 정도의 평화감에 도시는 젖어 있었다.
길을 걷던 다섯 명에서 일곱 명 사이의 사람들은 저녁 메뉴 혹은 저녁에 즐길 유흥에 대해 중구난방으로 떠들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작은 말다툼이 일어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친한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허용 가능한 다툼에 불과했다.
사람들의 중재 속에 말싸움이 흐지부지 끝나고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 무렵, 일행 중에서 말수가 적은 사내가 대단히 거칠고 음습한 숨소리를 들었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 순간, 그의 몸은 얼어붙었다.
성벽으로 보호받는 도시의 석조포도(石造鋪道) 위에 있어서는 안 될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마리 야수였다.
그것이 늑대인지, 곰인지 아니면 다른 흉악한 마물인지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그 야수가 대낮에 다수의 사람들 앞에 나타나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을 살해하고 그 자리에서 포식한 건 이견이 없는 사실이다.
앞으로 메헨부르그의 야수라 불릴 식인귀는 그렇게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드디어 때가 왔네요."
조촐한 신전. 제단 위에 모신 소라고둥 안에서 점잖고 기품 있는 여성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루페르트 가우저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떠올랐다.
[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의 퀘스트 ]
[ 그 두 번째 ]
[ 메헨부르그의 야수는 북방에 서식하는 마물인 다이어 울프의 변종이라고 알려졌지만, 글쎄요. 이 여신의 눈엔 좀 더 다른 사정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인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듯 직접 그 괴물을 사냥해 정체를 밝힌다면 저의 호기심도 해소되지 않을까요? ]
여신의 퀘스트: 메헨부르그의 야수를 사냥하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는 게 좋아요. 제 예상이 맞다면 그 야수는 평범한 야수와는 궤를 달리할 테니까요."
루페르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준비는 해뒀다.
거울 앞에서 그는 통찰의 만화경으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 루페르트 가우저에 관한 보고 >
1. 개요
종족: 인간 - 남부 제국인
분류: 범인
성별: 남성
연령: 18세(누적 32세)
명성: 알려지지 않음
2. 일반 평가
무력: C+
마법: F
군략: E-
경영: E-
지식: D+
기예: C+
3. 능력치
- 의미 없음
4. 축복과 가호
- 수레바퀴에 올라선 자
- 아티팩트 "통찰의 만화경"
5. 영혼 동맹
- 없음
5. 총평
- 졸병
반년간 몸져누워 있을 때를 제외하면 하루도 고된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결과가 일목요연하게 눈앞에 드러났다.
총평도 벌레에서 사람으로 격상됐다.
루페르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다른 항목을 보며 질문을 던졌다.
"저기 리프니에 님. 전부터 궁금하던 게 하나 있는데. 질문드려도 될까요?"
리프니에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
루페르트도 리프니에에 대한 질문은 최대한 삼갔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이 신장된 지금은 리프니에도 기분이 좋아 보여 조심스레 질문을 던진 것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저는 질문에 답하는 주의는 아니지만. 뭐, 물어보는 건 자유니 말씀하셔요."
여전히 까칠한 여신.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질문을 마저 던졌다.
"...저에 관한 보고 중에 다른 건 알겠는데 능력치와 영혼 동맹은 뭘 말하는 거죠?"
이에 제단 위에 똑바로 직립한 소라고둥에게서 얕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능력치는 현재의 당신으로선 아무 의미도 없는 항목이에요. 아직 범인, 다시 말해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당신이 신경 쓸 부분이 아니라는 거죠. 인내하고 착실히 저의 퀘스트를 수행하세요. 그리하면 언젠가 그 항목이 유의미해질 날도 올 테니까요."
"그렇군요."
"그리고 지금의 당신에게 보다 의미 있는 건 능력치가 아니라 영혼 동맹 부분일 거예요."
"영혼 동맹은 어떤 것입니까?"
루페르트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에 리프니에는 짓궂지만 기품을 간직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언제나처럼의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이번 퀘스트를 해결하면 알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영혼 동맹은 당신이 회귀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는 사실이죠."
"필수 불가결한...?!"
"뭐, 지금은 그 정도로 알고 있으면 돼요. 그보다 지금 당신에게 중요한 건 보상이 아니라 퀘스트 자체를 성공시키는 것이겠죠."
리프니에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번 퀘스트는 결코 쉽지 않을 거예요. 어중간한 각오로 나섰다간 제국을 구하기도 전에 당신이 먼저 끝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하세요."
루페르트는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으로 돌아온 루페르트는 사냥 준비를 시작했다. 가장 핵심적인 준비물은 돈이다.
신화시대도 아니고 루페르트가 직접 메헨부르그의 야수를 사냥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는 지역의 전문 사냥꾼을 고용해 야수를 사냥할 생각이었다.
그는 집사 세바스티안에게 임시 영주로서 자신의 몫을 요구했다.
비록 임시직이라고 하나 루페르트는 위버하임 영지의 영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그에겐 영지 소득의 일정 부분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세바스티안은 기다렸다는 듯 루페르트의 요구에 대처했다.
"제국 궁내부에서 루페르트 님의 몫으로 책정한 수입은 연 2만 탈러입니다만, 아직 루페르트 님께서 이곳에 오신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올해분을 전부 요구하신다면 전부 내어 드릴 용의는 있습니다."
"2만 탈러라."
소시민 기준으론 고소득자에 속하는 금액이지만 제국의 상위 귀족 기준으론 연회 한 번에 써 버릴 수 있는 금액이기도 하다.
한편, 루페르트가 황제 시절 고정적으로 지급받던 기본 수입만 5백만 탈러였다.
하지만 지금은 황제 시절의 수익을 생각해선 안 된다.
들판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농사일에 힘쓰는 농부의 연 수입이 1천 탈러를 간신히 넘길까 말까 한 수준이라는 걸 생각하면 2만 탈러도 충분히 큰돈이다. 루페르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편리한 방식으로 지급을 요구했다.
"2천 탈러는 현금으로, 나머지는 믿을 만한 상회를 지급인으로 한 어음으로 부탁해."
"하스 상회는 어떨까요?"
"메헨부르그에 지점이 있어?"
"메헨부르그라. 어두운 숲 쪽에 있는 도시 말이죠? 아마 있을 겁니다. 하스 상회는 대륙 곳곳에 지점이 있고 지점이 없는 곳이라도 다른 곳에서 합리적인 가격으로 할인받을 수 있으니까요."
하스 상회.
그다지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이다.
'아이젠쉴트나 야스푸거 급은 아닌 모양이다.'
아이젠쉴트와 야스푸거는 제국은 물론이고 제국을 둘러 싼 소위 다섯 개의 왕관이라 불리는 주요 국가에 지점을 갖춘 강력한 상회다. 특히 야스푸거 가문은 전시대에는 황제의 목줄을 쥐고 전 대륙을 전쟁판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비난을 가질 정도로 거대한 영향력을 누렸다.
이 둘에 비하면 하스 상회의 규모는 한미한 수준이지만 세바스티안이 자신 있게 추천하는 걸로 봐서는 큰 문제가 없는 곳으로 보인다.
"그럼 하스 상회에 다녀오겠습니다. 반나절 정도 걸릴 예정입니다."
세바스티안이 돈과 어음을 찾으러 오는 동안 루페르트는 피리스에게 부탁해 여행에 필요한 간단한 옷가지와 짐을 챙겨 줄 것을 부탁했고 자신은 가정 교사들에게 당분간 수업을 미루겠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작성했다.
미리 벼르고 있었던 일이라 그런지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루페르트는 오랜만에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청량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하녀 한 명이 갑자기 루페르트의 방에 찾아와 딴지를 건 것이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루페르트 가우저 님은 영지 안에 머무셔야 합니다."
골격이 크고 사나워 보이는 관상의 여자였다.
그런데 그 하녀를 보던 루페르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구지?'
못 보던 얼굴이다.
분명 입고 있는 하녀 복은 위버하임 장원의 하녀들이 입는 옷인데 얼굴은 전혀 기억에 없는 얼굴이다.
"너는 누구냐?"
루페르트가 당돌한 하녀를 향해 물었다.
"저는 빌헬미나라고 합니다."
당돌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하녀를 보며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런 하녀가 있었나.'
전생에서 장원의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저런 이름과 얼굴을 지닌 하녀는 보지 못한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루페르트는 빌헬미나를 노려보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지금 나더러 여행을 떠나지 말라는 거냐?"
"그런 뜻이 아닙니다. 루페르트 님은 황위에 오를 수도 있는 분, 위버하임 장원에 오신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안전의 확보입니다. 안전한 장원을 떠나 위험한 야수가 나타난다는 메헨부르그로 가신다는 건 루페르트 님이 이곳에 온 의미를 퇴색시키는 일입니다."
루페르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그가 메헨부르그로 간다는 말은 오로지 세바스티안에게만 말했다.
세바스티안은 곧장 하스 상회로 가겠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저 빌헬미나라는 하녀가 그 이야기를 아는지 궁금하다.
"세바스티안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나?"
루페르트는 즉시 빌헬미나를 추궁했다.
"네. 집사님께 직접 들었어요."
빌헬미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
순간적으로 루페르트는 이 빌헬미나라는 하녀가 집사인 세바스티안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냈다.
누군가 뒤를 봐주지 않는 이상 일개 하녀가 저렇게까지 고자세로 나올 순 없을 것이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수렴한다.
'이 녀석이 날 감시하는 무리의 총책인가.'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개연성은 있다.
자신이 감시당한다는 걸 알았을 때 루페르트도 가만 있지 않았다. 그 또한 저택의 주요 인물을 감시했다.
세바스티안과 마르그리트를 주요 용의선상에 놓긴 했지만, 그 둘은 혐의가 희박했다.
루페르트는 빌헬미나라는 이름과 얼굴을 머릿속에 각인하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빌헬미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루페르트가 강하게 나올 걸 예상했지만 이렇게 쉽게 승복하는 모습을 보여 주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듯하다.
이윽고 빌헬미나는 평정을 찾고 답했다.
"제국 궁내부 쪽의 허락을 받아야 할 걸로 보입니다. 루페르트 님을 이곳에 모신 건 제국 궁내부니까요."
"그래? 제국 궁내부라."
"네. 제국 궁내부요."
"그들이 널 고용했나?"
갑작스레 던진 말이다.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 녹아들어 있던 빌헬미나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굳어졌다.
"무...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에 루페르트는 한 차례 쾌활하게 웃고는 빌헬미나에게 되물었다.
"농담인데 왜 그리 정색해?"
무늬만 상급자로 10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온 꼭두각시 황제의 지혜라고 할까.
루페르트는 마음대로 말을 막 던질 수 있는 상급자의 위치를 최대한 이용했고 빌헬미나에게 동요를 일으켰다.
'역시 제국 궁내부와 이 녀석 사이엔 뭔가 있는 모양이군.'
루페르트는 빌헬미나를 노려보며 담담하지만, 힘이 서린 위엄 있는 어조로 말했다.
"비록 임시직이라고 하나 나는 이 위버하임 장원의 법적인 주인이자 위버하임 영지의 정당한 영주이다. 나는 내 권한의 안에서 마음대로 결정할 권리가 있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 권리와 자유에 터 잡아 나는 메헨부르그로 가려고 한다."
"하... 하지만."
"그렇게 걱정되면 제국 궁내부엔 네가 가서 직접 보고해라. 빌헬미나. 결과를 기다리겠다."
"...."
루페르트는 빌헬미나와 제국 궁내부라는 이름을 특히 힘주어 말함으로써 그녀에게 압박을 가했다.
이름을 부른 건 책임을 지우기 위해서고 궁내부를 언급한 건, 그녀 뒤에 도사린 흑막을 건드리기 위해서다.
"왜? 대답이 없나?"
궁정 안에 도사리는 교활한 여우 상대로 10여 년을 싸웠다. 그런 루페르트에게 어쭙잖은 기량으로 덤빈다는 건 자살행위와 같다.
"그... 그건 일개 하녀인 제가 결정할 사안이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 싸움을 걸어온 빌헬미나는 고개를 수그렸다.
루페르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섰다.
"더 할 말이 없으면 물러가라."
빌헬미나는 고개를 숙인 채 방을 떠났다.
그녀의 양 귀는 귓불까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루페르트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노려보았다.
'빌헬미나라고 했나.'
곧 다시 격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다.
메헨부르그의 야수다.
8화 3. 메헨부르그의 야수 (2)
메헨부르그는 테타우의 남쪽 어두운 숲이라 불리는 대삼림의 입구에 위치한 소도시다.
인구수는 약 3천 명, 특산품은 가죽과 목재 등 숲의 산물로 도시의 재정 상태는 그다지 부유하다고 볼 수 없고 시민들도 중하층에 머물렀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높은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벽돌로 가득 찬 도시 안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외지인 출신의 건장한 사내들이 많다.
루페르트는 모험자 길드의 게시판 전면을 당당하게 차지한 야수 현상금 광고를 눈에 담았다.
5만 탈러.
제국 황실에서 메헨부르그의 야수의 목에 건 현상금이다.
원래는 천 탈러 정도였던 몸값이 잇따른 야수의 살육으로 인해 가파르게 상승했다.
하지만 이건 중간 과정일 뿐이다.
루페르트는 머지않은 미래에 야수의 몸값이 10만 탈러 이상을 찍는다는 걸 알고 있다.
루페르트는 야수 수배 전단 아래 즐비하게 자리 잡은 작은 전단으로 시선을 옮겼다.
구인 광고로 빼곡하다.
대부분 메헨부르그의 야수를 처치하기 위한 귀족들의 토벌대 모집이다.
판이 커지다 보니 귀족들도 가세했다.
그들은 길드 게시판에 풍족한 보수와 대우를 약속하며 토벌대 모집 공고를 내고 있었다.
착수금만 최소 1,000탈러 보장이라는 문구가 심심찮게 보였다.
1,000탈러는 빈농의 1년 수입이다.
그걸 본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메헨부르그의 야수는 한 마리만은 아닌 모양이야.'
도시 전체를 휘감은 탐욕의 불길.
그것은 메헨부르그에 서식하는 또 한 마리의 야수이리라.
루페르트는 섣불리 움직이는 대신 고급 여관에 여장을 풀고 도시를 돌아다니며 대략적인 분위기를 파악하는 한편, 정보 수집에 힘을 썼다.
메헨부르그의 야수는 이제 사냥꾼 한둘이 감당할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평이 돌고 있었다.
북방의 노르드마르크 지방에서 이름난 야수 사냥꾼 하나가 자기 실력만을 믿고 홀로 야수 사냥에 나섰는데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시체로 발견된 이후 이런 움직임이 가속화됐다고 한다.
결국 몇 번의 비극적인 사고 이후에 단독으로 사냥에 나서려는 사람은 싹 사라졌고 대규모 토벌대를 조직할 수 있는 부호나 귀족들에게 차례가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메헨부르그의 야수는 끊임없이 무자비한 식인 행각을 계속하고 있었다.
과격한 축에선 사냥꾼에게 맡겨 둘 게 아니라 군대를 불러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리프니에 님의 예측이 맞는 모양이야.'
사냥꾼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태연하게 식인 행각을 벌이는 걸 보면 터무니없는 녀석이다.
루페르트는 목걸이처럼 패용한 소라고둥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소라고둥 안의 여신은 위버하임을 떠난 이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혹 평범한 장식물로 생각될 정도였다.
덕분에 루페르트는 소라고둥 안에 여신이 살고 있다는 생각을 수정할 필요를 느꼈다.
'이 소라고둥은 말씀을 전하는 도구에 불과한 건가.'
아무래도 좋다.
이미 여신님은 명을 내렸고 그녀의 유일한 사도인 루페르트는 명을 받들 뿐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토벌대의 조직이다.
토벌대의 규모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규모가 커지면 비용도 크게 든다.
지참한 20,000탈러가 적은 돈은 아니지만, 각지에서 온 귀족들이 저마다 사냥꾼들의 몸값을 올려놓은 탓에 고용할 수 있는 숫자는 적은 반면, 돈 냄새를 맡고 몰려온 어중이떠중이들 덕분에 사냥꾼의 평균적인 질은 조악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정된 자원으로 최적의 인재를 뽑아 토벌대를 꾸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사냥 경험이 있다고 하지만 기껏해야 작은 새나 토끼 사냥이 전부인 루페르트로선 야수 급의 강력한 짐승을 상대하는 전문적인 사냥꾼의 기량을 알아볼 안목도, 그런 사람들을 소개받을 인맥도 없으니.
그런데 루페르트가 지닌 단점은 잠재적인 경쟁자인 다른 귀족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루페르트에겐 타인에겐 없는 막강한 능력이 있다.
바로, 통찰의 만화경이다.
"...."
루페르트는 품속에서 검은 천으로 만든 안대를 꺼내 자신의 왼눈을 가렸다.
끼이익-
루페르트는 먼저 도시 내의 위치한 여관 겸 주점을 방문했다.
안정보다는 위험 속에서 살아가길 택한 거친 사내들의 시선이 비수처럼 루페르트의 전신에 날아와 꽂힌다.
그럴 법도 한 게 루페르트의 복색은 모험자의 것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귀족 자제의 외출복이기 때문이다.
다분히 의도한 결과다.
"어떻게 오셨나? 못 보던 젊은 양반."
머리칼이 벗겨진 사내가 다리를 절며 루페르트에게 다가왔다. 그는 루페르트의 복장과 얼굴을 노골적으로 번갈아 응시했다.
"솜씨 좋은 사냥꾼을 찾는데."
루페르트는 그 사내에게 1탈러짜리 은화 하나를 내밀었다.
사내의 입이 귀에 걸렸다.
"샌님처럼 보이는데 뭘 좀 아는 친구군. 날 따라오시오."
그 사내는 루페르트를 주점 안 깊숙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왁자지껄한 술집 안을 걸으면서 루페르트는 유독 눈에 띄는 사내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뭐지? 이 사람은?'
선명한 노란 색의 제복이 시선을 확 끌어당긴다.
그것도 몸에 착 달라붙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디자인이다.
시선을 위로 올려 얼굴을 보니 더 가관이다.
허옇게 분칠한 얼굴에 갈색 콧수염을 가지런히 길렀는데 그 콧수염 끝엔 우유 거품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것만으로 피식 웃음이 나올 만한 광경이건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몰골이 어떤지 아는지 모르는지 쓸데없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우유를 홀짝이고 있다.
그런데 더욱 웃긴 건 사람이 빼곡한 주점 안에 그 사내 중심으로 손님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설마 이 사람에게 안내하려는 건가.'
루페르트의 예상은 빗나갔다.
머리칼이 벗겨진 사내는 노란 제복의 우스꽝스런 사내를 지나, 좀 더 안쪽에 자리를 차지한 덩치가 크고 기골이 장대한 사내에게 데려갔다.
"이 친구는 메헨부르그 최고의 사냥꾼이지. 야수뿐만 아니라 마물과 사람을 잡는 데도 일가견이 있어."
머리칼이 벗겨진 사내가 추켜세우자 거구의 사내는 자신의 팔 근육을 씰룩거려 보였다.
루페르트는 실소가 터져 나오는 걸 참으며 그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 기다려 주시오."
루페르트는 지그시 그를 관찰했다.
겉만 보면 힘 좀깨나 쓰는 타입에 옆에 장식처럼 놔둔 장비도 예사롭지 않다.
머리칼이 벗겨진 사내가 가게 벽면에 걸린 커다란 곰 머리 박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술집에 있는 박제는 전부 이 친구가 잡아 온 물건이지. 그는 총을 아주 잘 다루거든!"
그러자 거구의 사내는 탁자 위에 올려 둔 화승총을 스윽 만지며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들이 뭐라고 하건 루페르트는 듣지 않는다.
들을 필요도 없다.
루페르트에겐 루페르트만의 방법이 있으니까.
[ 통찰의 권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
강한 긍정.
루페르트의 왼쪽 눈에 변화가 일어났다.
단순히 형태만으로 사람에게 기괴하고 오싹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미지의 문자와 마법진, 그리고 음울한 짙은 녹색의 빛이 차례로 그의 눈동자 위에 나타났다.
통찰의 권능이 발현됐다.
하지만 주점의 어두운 분위기, 머리 위에 쓴 넓은 챙이 드리운 그림자, 그리고 무엇보다 왼쪽 눈을 직접 덮은 안대로 인해 루페르트의 눈에 일어나는 변화는 눈에 띄지 않았다.
평온 속에서 루페르트는 타칭 최고의 사냥꾼이라는 자의 민낯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 "멋쟁이" 가스트에 관한 보고 >
1. 개요
종족: 인간 - 동부 제국인
분류: 범인
성별: 남성
연령: 24세
명성: 알려지지 않음
신체상의 특징: 없음
2. 운명의 실타래
눈먼 포탄에 맞은 병사: D-
목숨 건 결투의 패자: E
곰 가족의 한 끼 식사: E-
3. 특기사항
- 특별히 없음
4. 등급
E-
"...."
최고의 사냥꾼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피리스도 한 수 접어 둘 처참한 미래만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사냥꾼은 왜 찾는가? 젊은 형씨도 다른 젊은 귀족처럼 메헨부르그의 야수를 처치해 명성을 얻고 싶은 겐가?"
루페르트의 속을 알 리 없는 사내들은 이죽거리며 말을 걸었다.
루페르트는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떠났다.
"미안하지만, 급한 용무가 생각나서 이만."
주점에서 직접 사람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의외의 행운을 기대했는데 사실 루페르트는 행운과는 거리가 먼 남자다.
'평범하게 가자.'
루페르트는 그 길로 주점을 떠나 모험자 길드로 가서 길드의 게시판에 공고를 내 줄 것을 요청했다.
[ 야수 토벌대 모집, 상당한 착수금 약속, 현상금 보장 ]
길드 게시판에 토벌대 모집 광고는 이미 발에 챌 정도로 많다.
루페르트도 그들의 본을 따랐다. 그러나 루페르트는 그들보다 한 발 더 앞서 갔다.
그는 길드 관계자에게 웃돈을 주고 자신의 광고 문구를 다채로운 색으로 표시했다.
다른 광고가 검은색 일색인 것에 비해 확실히 눈에 띄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눈에 띄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오히려 조건이 좋지 않으면 여론의 몰매마저 맞을 우려가 있다.
광고의 진가는 화려한 색채 뒤에 숨겨진 문구에 있었다.
바로 5만 탈러에 달하는 현상금을 가볍게 포기한 것이다.
이것이 루페르트가 생각한 핵심이다.
명예에 관한 욕심만큼이나 돈 욕심도 많은 귀족들은 현상금은 당연히 자신의 몫으로 떨어질 전리품으로 생각했고 최소한 현상금의 일부는 본전치기용으로 자신의 몫으로 책정했다.
그에 비해 루페르트는 단 한 푼의 현상금도 손에 쥘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 현상금을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한 무기로 만들었다.
'어차피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도 아니다.'
그 말인즉슨, 루페르트의 구매력은 수중에 쥐고 있는 자금에 더해 현상금 5만 탈러까지 더해진 셈이다.
이 정도면 메헨부르그에 모인 수많은 귀족 중에서도 단연 상위권에 달하는 자금력을 지니게 된 셈이다.
그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루페르트를 보고자 하는 사냥꾼들이 줄이 지어 나타났다.
"현상금을 그쪽에서 수령하지 않는다는 게 정말이오?"
주점에서 본 우락부락한 사내와 달리 날렵하게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을 지닌 자들이 나타났다.
그럴듯한 사냥꾼들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두고 볼 일이다.
두꺼운 안대로 가려진 루페르트의 왼쪽 눈에 짙은 녹색의 음울한 광채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사라졌다.
9화 3. 메헨부르그의 야수 (3)
모험자 길드가 제공한 별실.
한 여성과 사냥꾼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냥 경험은 얼마나 되나요?"
"열두 살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녀 산천과 들을 누비고 다녔으니 이십 년은 족히 될 거요."
험난한 삶이 고스란히 얼굴에 새겨진 사내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답했다.
"야수급의 짐승을 사냥한 적이 있습니까?"
젊은 여성이 앞에 놓인 질문지를 보며 물었다.
사냥꾼은 설렁설렁 질문에 답했다.
거기까진 평범한 선발 과정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장이다.
진짜 테스트는 별실 구석에서 팔짱을 낀 채 사냥꾼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는 루페르트의 몫이다.
검은 안대 너머에 희미한 빛이 일렁였다.
곧 그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나타났다.
< "사냥꾼" 도르가스 릴리에에 관한 보고 >
1. 개요
종족: 인간 - 부르봉인
분류: 범인
성별: 남성
연령: 31세
명성: 알려지지 않음
신체상의 특징: 없음
2. 운명의 실타래
준수한 사냥꾼: C-
엽병대대의 병사: D+
잘나가는 피혁업자: C+
3. 특기사항
- 특별히 없음
4. 등급
C
'C등급이라.'
루페르트는 기록지에 새로운 기록을 추가했다.
나쁘지 않은 등급이다.
통찰의 만화경을 통해 볼 수 있는 인간의 등급은 크게 일곱 개로 분류된다.
리프니에의 말을 빌려 설명하면 각 등급의 가치는 아래와 같다.- F, 입에 담을 가치도 없는 무가치한 존재.
- E, 운명에 짓눌려 인생의 나락을 전전하다 죽어 가는 가련한 존재.
- D, 재능은 평범. 인생은 가혹. 결국 보잘것없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
- C, 그럭저럭 자기 영역에서 자리를 잡은 사람.
- B, 행운도 따르고 능력도 있지만, 최고는 될 수 없는 범재.
- A, 어떤 방면에서 마스터라는 칭호를 붙일 수 있는 존재.
그리고.
- S, 천재. 시대를 움직이는 자.
이 일곱 개의 등급에 리프니에는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붙여 같은 등급 중에서 그나마 나음, 평균보다 떨어짐을 세부적으로 표시했다.
그런데 리프니에의 평가엔 특별한 점이 있다.
개인의 평가에 환경이 끼치는 영향이 대단히 크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합리적인 기준이다.
리넨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청결하고 아늑한 자신의 방에서 가족의 관심을 받아 가며 자라나는 아이가 있는 반면, 일가족은 물론 돼지와 함께 잠을 자야 하는 아이도 있으니까.
후자 쪽의 아이에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해도 아마도 평생 그 재능을 알지 못한 채 무의미한 일을 하다 죽어 갈 확률이 높다.
리프니에식 평가에 따르면 도르가스 릴리에라는 사냥꾼은 딱 보통 정도의 사냥꾼이다.
루페르트는 조용히 자신의 메모지에 도르가스의 등급을 적으면서 도르가스에게 질문을 던지는 여성에게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질문은 이 정도로 할게요. 도르가스 씨. 결과는 추후 급사를 통해 알려 드릴게요."
"거참, 이런 질문으로 날 알 수 있다고 생각하나!"
사냥꾼은 툴툴거리며 자리를 떴다.
질문을 던지던 길드 사무소의 여직원이 루페르트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방문한 사냥꾼은 이걸로 전부예요. 토벌대에 누굴 선발할지 정하셨나요?"
루페르트는 자신이 작성한 서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서류엔 지금까지 면접을 본 사냥꾼의 이름과 통찰의 권능으로 파악한 그들의 등급이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루페르트는 그중 여섯 명을 추릴 생각이었다.
전부 C등급의 사냥꾼.
C등급은 리프니에 등급 기준에선 평범한 정도로 보이지만 실제로 C등급 정도 되는 사냥꾼의 수는 적고 업계에서 나름의 명성과 역전의 기록을 지닌 자들이다.
당연히 몸값은 주점에서 본 어중이떠중이와는 다르다.
그들의 착수금은 인당 3천 탈러.
현재 쓸 수 있는 재산이 2만 탈러니 그중 대부분이 사냥꾼의 고용 비용으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남은 2천 탈러로는 메헨부르그의 체재 비용과 루페르트 개인 장비를 사는 데 쓸 예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록에서 C등급에 속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을 여섯 추려 그 목록을 모험자 길드의 여직원에게 전달했다.
목록을 보던 여직원이 살짝 놀란 목소리로 말하며 루페르트를 돌아봤다.
"윔버트, 르종, 도르가스.... 하나 같이 잔뼈가 굵은 사람들을 고르셨네요. 안목이 있으신가 봐요?"
모험자 길드에 의뢰해서 양질의 사냥꾼을 소개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을 사용할 경우엔 적지 않은 수수료를 모험자 길드에 지급해야 한다.
한정된 금액 안에 최대한 많은 사냥꾼을 선발해야 하는 루페르트로선 안 될 일이다.
루페르트는 자신이 직접 선발하겠다고 하고 중개만 부탁했다. 그가 길드에 빌린 건, 방 하나와 루시아라는 이름의 똑 부러진 여직원 하나.
비용은 고작 5백 탈러가 들었다.
만약 길드를 통해 이들을 소개받았다면 최소한 3천 탈러는 나갔을지도 모른다.
과열된 도시의 경기는 길드의 물가마저 올려놓았으니 말이다.
아무튼 솜씨 좋은 사냥꾼들을 모집하는 일은 끝났다. 다음은 그들과 함께 메헨부르그의 야수가 있다는 어두운 숲으로 가서 야수를 사냥하는 일이다.
본격적인 퀘스트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악재가 루페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루페르트가 시장을 돌며 자신이 사용할 장비를 보던 중이었다.
조그만 사환 하나가 루페르트에게 달려가 급히 길드로 와 줄 것을 요청했다.
"무슨 일이냐?"
루페르트가 사환에게 묻자 사환은 자신은 잘 모른다며 그냥 빨리 와 달라고 말하며 울먹였다.
루페르트는 뭔가 꺼림칙한 예감을 느끼며 모험자 길드로 향했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루페르트는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꼈다.
입구에 떡 버티고 선 떡대 좋은 두 사내가 팔짱을 낀 채 루페르트에게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닌가.
루페르트는 그들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분이에요."
루페르트가 들어오자마자 루시아가 루페르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루페르트는 차분한 얼굴로 길드 사무소 안을 살폈다. 문가에 서 있던 사내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길드 안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건의 원인은 그들이 아니다.
루페르트는 사내들 사이에 선 화려한 예복을 입은 청년과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소녀를 차가운 눈동자에 담았다.
"당신이 새로 토벌대를 모집한다는 사람인가?"
팽배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청년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루페르트가 지그시 그를 응시하고 있자, 그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거 실례했군. 나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메헨부르그의 야수를 토벌하기 위해 토벌대를 조직 중인 사람이야."
"오라버니."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소녀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루페르트의 시선은 그녀에게 넘어갔다.
제법 예쁘장한 얼굴, 잘 꾸며 놔서 그런지 귀티가 흐른다. 하지만 성격을 보아하니, 경멸이 서린 눈동자와 찌푸린 얼굴이 보여 주듯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우리끼리 처리하면 되지, 굳이 이 사람까지 불러와서 일을 크게 만들어야겠어?"
"나라고 그러고 싶은 게 아니야. 그런데 여기 길드의 관리자분들이 협상을 하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
청년은 소녀에게 유쾌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루페르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청년의 얼굴에 불쾌감 서린 오만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 녀석.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루페르트는 그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 청년이 말했다.
"미안한데, 거기 신사분. 귀족분이신가? 아무튼, 당신과 할 이야기가 있어."
그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부하들을 향해 손짓했다. 허리가 굽은 사내가 루페르트에게 서류를 가지고 왔다.
그것은 루페르트가 모험자 길드에 넘긴 사냥꾼 목록이었다. 그런데 그 목록에 누군가가 종이가 찢길 정도로 강한 필압으로 사선을 그어 놓았다.
저 청년의 짓거리다.
"당신이 고용하기로 한 사냥꾼들 말인데. 안타깝게도 내가 먼저 찍어 놓은 사람이거든."
그러자 옆에 있던 루시아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 계약이 된 건 아니...."
"아랫것들은 가만히 있어!"
갑자기 청년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루시아에게 일갈했다.
안 그래도 불길한 기류가 흐르던 길드 안에 차가운 폭풍이 휘몰아쳤다.
청년의 부하로 보이는 사내들은 들고 있는 무기를 만지작거리며 길드 사람들에게 위력을 과시했다.
침묵 속에서 청년은 심호흡을 한 차례 하고는 웃는 얼굴로 루페르트를 바라보았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 내가 조금 다혈질이라서 말이지."
그는 실실 웃으며 품속에서 코담배를 꺼내, 킁킁거리고는 다시 말했다.
"아무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당신이 찍은 사냥꾼 말이야. 내가 길드의 소개를 받고 선점한 사람이니 먼저 채가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당장 철회하고 그 사냥꾼들에게서 손을 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뭘 알았다는 건지 고개를 끄덕이며 루페르트 앞을 지나쳤다.
그런데 그가 채 몇 걸음 걷기도 전의 일이었다.
"무례하군."
루페르트가 입을 열었다.
더할 나위 없는 기품과 위엄이 서린 어조로.
그 목소리를 들은 청년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고개를 회까닥 루페르트를 향해 돌렸다.
"방금 뭐라고 했냐?"
청년의 얼굴은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고 하얀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겨우 이런 잔챙이의 협박에 눈 하나 꿈쩍할 루페르트는 아니다.
그는 얼어붙은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무게감을 자랑하며 청년에게 말했다.
"무례하다고 했다."
"...?!"
흔들림 없는 어조. 두려움이라고는 터럭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그 태도에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루페르트에게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느꼈다.
'뭐 하는 사람이지?'
'어떻게 이 많은 건달들 앞에서 이렇게 당당한 거지?'
혼란스러웠던 그들의 머릿속은 빠르게 정리되며 하나의 가정으로 굳어갔다.
'설마, 높으신 분의 자제인가?'
믿는 구석이 있지 않고서는 이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이름 모를 청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핏발 선 눈알을 부르르 떨며 뭔가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입을 열기 전에 화려한 정장을 입은 소녀가 그 옆에 다가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보통내기가 아닌 거 같은데? 일단 이름이라도 물어보는 게 어때?"
"제국에서 어떤 새끼가 내 위에 있겠어?"
청년은 버럭 화를 내며 소곤거렸다.
"솔직히 백 명은 넘잖아."
"크흠...."
청년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헛기침을 하면서 곁눈질로 루페르트를 힐끗 쳐다봤다.
화려하진 않지만 엄연한 귀족의 복색이다.
수행원은 한 명도 없지만, 밖에 몇 명을 거느리고 있을지는 또 모를 일이다.
청년은 루페르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거 무례하다고 느꼈다면 심심한 사과를 드리는 바이오. 그런데 댁은 누구시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청년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번득였다.
별 볼 일 없는 소 귀족이나 부호의 자제라면 그냥 내버려 두진 않으리라.
최소한 자신에게 덤빈 대가는 여기서 톡톡하게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제깟 놈이 뭐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낯선 청년 쪽을 응시한 순간이었다.
"루페르트 가우저."
작지만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가 루페르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10화 3. 메헨부르그의 야수 (4)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청년의 뇌리에 떠오른 건 의문 부호였다.
'뭐야?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인데.'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암기에 암기를 거듭한 제국 및 주변국의 주요 인명록에 실린 1천여 개의 이름 중 그런 이름은 물론 비슷한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무것도 아닌 잔챙이라는 것이다.
청년의 눈동자에 살기가 떠올랐다.
"낯선 이름이네. 어디 촌구석에서 올라오셨나?"
청년이 손을 들어 올렸다.
길드 사무실 곳곳에 독버섯처럼 도사린 험악한 사내들이 루페르트를 둘러쌌다.
"저기... 길드 내에서 폭력은 곤란합니다."
길드의 직원들이 황급히 청년에게 달려와 애원하듯이 말했다.
청년은 히죽 웃으며 모자를 고쳐 쓰며 말했다.
"걱정 말라고. 피 볼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대신 눈물 콧물은 쏙 빼 놓겠지만!"
청년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루페르트를 거만한 눈으로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루페... 뭐시기 양반. 어디 출신이지? 미안한데 그다지 듣지 못한 이름이라서 말이야. 출신이라도 들으면 혹시 알아? 내 좋지 않은 머리가 기억을 되살려 낼지 말이야."
"하켄하임."
루페르트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켄하임...? 거기가 어디야?"
청년이 좌우를 둘러보며 묻자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그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소곤거렸다.
청년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실소를 터뜨렸다.
"하켄하임! 하켄하임!"
그는 명백히 루페르트를 조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청년은 주위를 둘러보며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떠들었다.
"이분, 촌 동네에서 오셔서 세상 물정을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누가 저분에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가르쳐 줄 사람 없어?"
그가 말하자 장내의 험악한 사내들은 기다렸다는 듯 루페르트를 향해 다가왔다.
털이 숭숭 난 검은 손 하나가 루페르트의 어깨 위에 닿으려는 찰나였다.
"지금 나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건가?"
루페르트가 자신의 어깨를 건드리려는 사내를 노려보며 차갑게 물었다.
"그렇다면 어쩔 텐가?"
험악한 사내는 자신의 고용주와 비슷한 비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주변에서 같은 패들이 낄낄 웃어 댔다.
"감당할 수 있겠나?"
루페르트가 물었다.
사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루페르트가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제국에 대한 반역을 저질러도?"
그 말이 나온 순간 떠들썩하던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제국에 대한 반역.
그것은 제국민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다.
철혈대제 클라우데 2세는 반역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반역이 개인 단위로 이루어지면 그 사람은 물론 그 일족을 처형했고, 도시 단위로 이루어지면 도시 전체를 학살했다.
반역에 대해서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스스로 몸을 가누기 어려운 노인에서부터 갓난아이까지 반역죄에 연루된 이는 제국의 이름하에 피와 철로 심판받는다.
"제... 제국에 대한 반역이라고?"
루페르트에게 시비를 걸던 사내가 움츠러들었다.
물론 저 시골 촌놈이 허풍을 떤다는 생각 정도는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철혈대제의 치세 속에서 살아온 이라면 반역이라는 말에 치를 떠는 건 당연한 일이니.
사내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자신의 상전인 청년을 응시했다.
도움을 청한 것이다.
청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덩치는 산만 한 녀석이....'
청년은 혀를 차고는 자신이 직접 루페르트 앞에 나섰다.
그는 더 이상 미소라는 가면을 쓰지 않았다.
짜증으로 버무려진 딱딱한 얼굴과 사갈 같은 시선으로 루페르트를 노려보며 청년이 말했다.
"장난이 심하네. 설마 너 같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시골 촌놈 하나 건드린다고 제국에 대한 반역이 성립될 거 같아? 그딴 말을 내 앞에서 잘도 하네."
청년은 뒤돌아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밖에 끌고 나가서 죽여.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네가 책임을 진다고?"
등 뒤에서 루페르트의 비웃음이 비수처럼 그의 귓전에 꽂혀 들어왔다.
청년의 눈동자가 크게 일그러졌다.
그는 뱀처럼 홱 돌아서며 루페르트를 노려봤다.
"내가 누군지 아나?"
루페르트가 물었다.
불같은 감정 기복을 수시로 보인 청년과 처음부터 끝까지 당당한 자세를 변함없이 견지한 루페르트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네가 누군데?"
청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폭풍 전야.
장내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가장 무식한 인간조차 분위기에 압도되어 입을 다물고 루페르트의 입술을 지켜봤다.
왜냐하면 그의 입술이 열리는 순간 무언가가 벌어지리라는 예감이 당연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전생의 황제는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루페르트 가우저. 위버하임 영지의 영주이자 제국 궁내부에서 인정한 황위 계승권자 중 한 명이다."
"황위 계승권자...?!"
단 한마디가 청년의 눈을 튀어나오게 할 정도로 놀라게 했다.
'황위 계승권자라고? 저놈이...?!'
그뿐만 아니었다.
길드 사무소에 위협적으로 자리 잡은 건달 패들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루페르트의 말이 맞다면, 황위 계승권자에 대한 위해 행위는 제국에 대한 반역과 다름없으니까.
눈을 부릅뜬 청년에게 젊은 여성이 다가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최근 궁중백이 새로운 후보를 추천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내 예상이 맞다면 저 사람이 진짜 그 후보일지도 몰라."
"나도 그 소문을 듣긴 했지만...."
"궁중백. 고어문트 선제후가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
"으음...."
고어문트 선제후라는 이름을 듣자 로이겐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골트문트라 불리는 수많은 영지의 군주는 세 가지로 유명하다.
제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딸로 두었으며 그리고 가장 음험한 책략가라고.
그의 위험성은 어릴 때부터 부친에게 귀에 박히게 들었다.
'설마 이것도 그 자의 술수인가....'
쥐새끼처럼 속닥거리는 그들을 향해 루페르트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이름을 밝혀라."
거역할 수 없는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태도와 음성은 이제 갓 약관에 이른 청년에게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여 준 기백에 더해 황위 계승권자라는 지위에 압도당한 군중들은 그저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모습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침묵 속에서 청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로이겐 뇌르겐틀링."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로이겐 뇌르겐틀링...?'
아는 이름이다.
왜냐하면 그 이름은 일곱 선제후 중 하나 디터팔츠 공작의 아들과 일치한다.
그러고 보니 생김새도 미묘하게나마 부친에게서 이어받은 걸로 보인다.
이어 청년이 말했다.
"너와 같은 황위 계승권자 후보다...."
그 한마디는 루페르트의 마음속에 거친 파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루페르트가 자신 이외의 황위 계승권자 후보를 알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아무튼 반역죄에 대한 두려움은 디터팔츠 공작의 아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됐다.
그는 모자를 벗고 머리를 숙이며 착잡한 감정이 묻어난 목소리로 말했다.
"무례엔 사과한다. 그래도 앙금이 있다면 합리적인 한도 내에서 배상할 용의가 있으니 청구 바란다."
로이겐 뇌르겐틀링은 지친 목소리로 말한 후 부하들을 이끌고 길드 사무소를 빠져나갔다.
그것으로 메헨부르그 모험자 길드에서 일어난 단막극은 마무리됐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하나가 결정적이었다.
그것은 루페르트의 상대방인 로이겐 뇌르겐틀링은 막강 일곱 선제후 중 하나인 디터팔츠 공작의 맏아들이라는 것이다.
같은 황위 계승권자 후보라고 하나, 아무 배경도 없는 루페르트 가우저와 동일 선상에서 볼 인물이 아니다.
더군다나 동쪽의 디터팔츠 영지는 제도 테타우보다 훨씬 가깝다.
힘없는 사냥꾼들이 어느 쪽에 붙을지는 명약관화하다. 루페르트가 점찍은 사냥꾼들은 모두 계약을 거절했다.
"미안하지만 사정이 그렇게 됐습니다."
"...."
루페르트는 말없이 자신이 선택한 사냥꾼들이 하나둘 떠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역시, 힘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황제 시절 느꼈던 무력감이 그를 엄습한다.
오랜만에 맛보는, 더러운 기분이다.
하지만 낙담하고 있을 순 없다.
루페르트는 다시 한번 루시아에게 부탁해 새로운 사냥꾼을 모아 달라고 부탁했다.
통찰의 권능이 있는 이상, 새로운 사냥꾼은 얼마든지 발굴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루시아가 미처 방을 나서기도 전에 길드 사무소에 키가 큰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저 사람은?'
노란 제복에 허옇게 분칠한 얼굴, 장난감 병정 같은 콧수염을 기른 기이한 행색의 사내.
주점에서 딱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너무나 강렬한 인상이라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주점에서 거뭇한 수염에 하얀 우유를 묻히고 있던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함께 말이다.
그런데 그 기이한 사내는 다름 아닌 루페르트에게 볼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이 현상금을 안 받는다는 고용주요?"
쓸데없이 좋은 목소리.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날 고용해 주시오."
사내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겉모습만 보면 미덥지 않다.
하지만 겉모습만 보고 평가할 순 없다.
루페르트는 루시아에게 눈짓했다.
면접이 시작됐다.
루시아가 의문의 사내를 앞에 앉혀 두고 미리 준비한 선택지를 낭독하는 동안, 옆에 팔짱을 끼고 선 루페르트의 안대에 음울한 녹색 광채가 서렸다.
'사냥꾼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의문의 사내에 대한 보고가 그의 눈동자 위에 떠올랐다.
< "고독한 총사" 한스 징펠만에 관한 보고 >
1. 개요
종족: 인간 - 북부 제국인
분류: 범인
성별: 남성
연령: 35세
명성: 유명함
신체상의 특징: 없음
2. 운명의 실타래
불과 철의 형제단의 야수 사냥꾼: A+
근위 엽병대대의 총사: A+
등 뒤에서 찔려 죽은 자: B-
3. 특기사항
- 특별히 없음
4. 등급
- A+
[ 어머. ]
실로 오랜만에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소리와 문자 두 가지 형태로 동시에 울려 퍼졌다.
11화 4. 야수의 자취 (1)
그는 겉모습부터 괴짜라는 분위기를 진하게 풍기고 있었고 행동도 그러했다.
"당신이 필요한 건 돈이오? 명예요?"
한스 징펠만은 다짜고짜 루페르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루페르트가 황위 계승자라는 사실을 귀띔받은 게 분명할 텐데 평범한 사람처럼 대접했다.
그 원인이 오만이나 멸시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루페르트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특이한 사람이군.'
루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둘 다 아니오. 내가 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야수를 처치하는 것뿐이오."
"명예군."
한스 징펠만은 루페르트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보다 이내 검은 이각모를 벗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종이 위에 무언가 흘려 쓰기 시작했다.
계약서다.
문구를 써 내려가며 한스 징펠만이 말했다.
"다시 한번 나를 소개하자면, 노르드마르크에서 온 한스 징펠만이라는 사람입니다. 원래라면 이 시기에 빙해의 괴수들을 사냥하며 돈벌이를 할 시기지만 친우의 죽음을 전해 듣고 허겁지겁 북쪽 땅에서 여기까지 내려왔지요."
"친우의 죽음?
루페르트가 물었다.
그러자 한스 징펠만은 갑자기 펜을 멈추고 허공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윽고 그의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그렁그렁한 눈물방울이 허연 분가루를 바른 눈자위를 타고 흘러내렸다.
"오! 루돌프! 코가 유난히 빨갰던 루돌프!"
한스 징펠만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으며 슬피 울더니 우렁차게 코를 풀었다.
"...."
옆에서 지켜보던 루시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루페르트는 개의치 않았지만, 저 한스 징펠만이라는 사내가 감정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했다.
"루돌프 슈미트는 나와 같은 불과 철의 형제단 출신이었소. 형제처럼 친하게 지낸 것도 함께 술잔을 기울인 적도 별로 없었지만, 몇 남지 않은 우리 형제단의 형제였지요."
한스 징펠만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불과 철의 형제단이라.'
풍문으로 들은 적이 있다.
노르드마르크 지방을 근거지로 활동한다는 폐쇄적인 총사(銃士)집단. 그들은 화약과 총에 대해 다른 어느 곳도 따를 수 없는 고도의 지식을 독점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비싼 값에 그들의 실력을 파는 존재라고 알려졌다.
안타깝게도 전생에서 루페르트는 이들을 만날 일이 없었다. 노르드마르크는 루페르트의 치세 중에 북쪽에서 긴 배를 타고 나타난 북부인 군대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기 때문이다.
루페르트는 단지 그를 보필하던 제국 장군의 입을 통해 어렴풋이 불과 철의 형제단이라는 특이한 장인 집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뿐이다.
"빌어먹을, 불과 철의 형제단만 있어도 저 성벽 아래서 알짱거리는 놈의 마빡을 납탄으로 뚫어 버렸을 텐데!"
걸걸한 음성의 늙은 외눈 장군의 얼굴을 떠올리며 루페르트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고립된 루페르트에게 몇 없던 자기의 편.
그 늙은 장군은 난전에서 휩쓸려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직후 황제에게 최후의 시간이 다가왔었다.
"...."
루페르트가 회상에 잠겨 있는 동안 한스 징펠만의 슬픔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한스 징펠만은 루시아에게 우유 한 잔을 청해 우유를 홀짝이며 한숨과 함께 자신의 사연을 마무리했다.
"내가 메헨부르그로 온 것은 첫째로 형제의 복수고, 둘째는 형제의 남겨진 피붙이들을 부양하기 위한 자금의 마련이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개인적인 의문을 해소하고 싶은 동기도 있지요."
"...어떤 의문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루페르트의 물음에 한스 징펠만은 수염에 묻은 우유 자국을 옷 소매로 닦으며 의미심장한 어조로 답했다.
"루돌프는 나와 막상막하의 실력을 지닌 총사입니다. 메헨부르그의 야수란 녀석이 어떻게 그 노련한 사냥꾼을 처치했는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군요."
순간 한스 징펠만의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강한 호기심이었다.
루페르트는 이 사내의 진짜 목적이 어쩌면 마지막 언급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 *
상당한 능력자답게 한스 징펠만은 높은 가격을 불렀다.
그는 10,000탈러의 착수금을 요구했다.
착수금을 받아 그 돈으로 자신이 직접 아래에 두고 부릴 사람을 고용하는 조건이었다.
어차피 그 이상을 쓸 생각이었던 루페르트에겐 오히려 싼 가격으로 남는 장사다.
약속한 기일, 루페르트는 메헨부르그 광장에서 한스 징펠만과 재회했다.
유독 눈에 띄는 화려한 제복을 입은 그는 총 5명의 사람을 대동하고 왔다.
사냥꾼이라기보다는 용병 분위기의 중년 사내와 낡은 옷을 걸친 가난해 보이는 노파, 어떻게 봐도 술집 여자로 보이는 퇴폐적인 눈빛의 여인, 그리고 흑백으로 양분된 눈에 띄는 옷을 입은 창백한 피부의 남녀 쌍둥이.
특이한 구성이다.
루페르트의 눈에는 누구도 사냥꾼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럼 루페르트 님. 함께 사냥을 떠날 이들을 소개하겠소."
한스 징펠만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선 순서대로 자신의 수행원을 소개했다.
먼저, 용병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는 아돌프. 루페르트가 본 것처럼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용병으로 최근 전쟁이 없어 여기까지 흘러들어 왔단다. 루페르트는 그가 왼쪽 다리를 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낡은 옷을 걸친 노파의 이름은 사디. 메헨부르그 토박이 출신인 약초꾼이란다. 이단 심문관에게 잡혀 고초를 겪었는지 눌어붙은 흰머리 사이에 드러난 주름진 이마에 칼로 긁어낸 상처가 드러나 있었다.
젊음의 그림자가 간당간당하게 남은 풍만한 여인은 메이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는데 실제로 술집에서 일하며 간간이 매춘도 하는 소위 말하는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자였다. 그녀는 밤을 새운 듯 선 채로 꾸벅꾸벅 졸며 간간이 코담배를 피우며 침을 뱉어 댔다.
마지막 쌍둥이는 열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 감정이 없는 인형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소년, 소녀였다. 이들은 한스 징펠만이 직접 데리고 다니는 도제들이라고 한다. 이름은 소녀 쪽이 루, 소년 쪽이 기라고 한다.
한 바퀴 간단한 소개가 끝났을 때 루페르트 가우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의문이었다.
파격이라는 단어만으로 포장할 수 없는 토벌대원 전체의 낮은 수준이었다.
아무리 한스 징펠만이 강력한 사냥꾼이라고 하나, 이런 오합지졸을 이끌고 가는 것은 제대로 된 일 처리는 아닌 것 같았다.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대략 8천 탈러의 여유자금이 있으니 그걸로 새로운 사냥꾼을 추가 모집할까?'
한스 징펠만은 그런 루페르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양 한발 먼저 선언했다.
"이 이상의 인원은 불필요합니다. 다른 사냥꾼들은 걸리적거릴 뿐이니 행여라도 추가 인원을 모집할 생각은 접어 두는 게 좋을 겁니다."
한스 징펠만은 우스꽝스러운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어설프게 경험만 쌓인 우물 안 개구리들이라오."
그 말을 듣자 루페르트는 어느 정도 한스 징펠만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방해꾼을 배제하기 위함이군.'
노련한 사냥꾼 하나둘 고용하면 당장 전력엔 보탬이 되겠지만 중요한 순간 의견 대립을 일으킬 수 있다. 저마다의 경험과 자부심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으레 보이는 모습이다.
한스 징펠만은 아예 그런 경우의 수를 차단하기 위해 발언권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을 선발한 모양이다.
그들의 쓰임새가 뭔지는 저 특이한 총사만이 알고 있겠지만, 루페르트는 더 이상 한스 징펠만에게 인원 구성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튿날, 루페르트 가우저가 대장을 맡고 한스 징펠만이 지휘하는 메헨부르그의 야수 토벌대가 도시의 정문을 나섰다.
정보에 따르면 메헨부르그의 야수의 행동반경은 사냥꾼이 많아짐에 따라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숲 일대로 옮겨졌다고 한다.
하늘마저 가릴 정도로 울창하게 나무가 자란 음침한 숲길을 걸으면서 루페르트는 시종일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기괴한 느낌을 받았다.
'역시 마귀 들린 숲이라는 건가.'
지금은 그나마 간간이 숲속에 사람이 살고 있지만, 과거엔 감히 사람이 얼씬하지도 못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국경지대도 요충지도 아닌 메헨부르그 시를 둘러싼 두꺼운 성벽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고래(古來) 숲속은 인간이 상상도 못 할 것들이 창궐하는 악의 자궁이자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다 쳐도 루페르트를 신경 쓰이게 하는 건 역시 한스 징펠만이 데리고 온 사람들이다.
원래 평범하지 않은 무리지만 지금 단연 눈에 띄는 건 용병 아돌프와 한스 징펠만의 도제인 쌍둥이들이다.
아돌프는 마치 전쟁이라도 나서는 양, 길이 5m에 달하는 장창, 파이크를 지참하고 왔다. 제국 보병대의 표준 무장이다.
갑주까진 걸치진 않았지만, 문제는 그의 좋지 않은 다리가 창의 무게 때문에 보기 민망할 정도로 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득바득 일행과 속도를 맞추는 걸 보면 보통 악바리는 아닌 모양이다.
아돌프만큼 시선을 확 잡아끌지는 못하지만 한스 징펠만의 쌍둥이 도제들도 만만치 않은 짐을 지고 있었다.
둘은 각각 마치 관처럼 생긴 철제 상자를 등에 짊어 메고 있었다.
뭐가 들어 있는진 모르겠지만, 걸을 때마다 무른 땅이 푹푹 패는 게 보통 무게가 아닌 모양이다.
힘들 법도 한데 창백한 피부를 지닌 쌍둥이들은 한마디 불평도 힘든 기색도 없이 묵묵히 가벼운 지팡이 한 자루만을 든 주인의 뒤를 따랐다.
'이유가 있겠지.'
도제식으로 운영되는 폐쇄적인 집단은 외부인의 시선으로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종종 일어난다. 간섭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한스 징펠만은 일행을 로흐족이란 작은 마을로 안내했다.
세대수 삼십 개 남짓의 개척촌이다.
숲의 산물인 통나무와 가죽을 섞어 지은 집들을 보면서 루페르트는 이상한 점을 느꼈다.
마을에 사람이 없다.
이윽고 루페르트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모두 숨어 있었다.
불과 며칠 전, 마을의 여자와 아이들을 찢어발긴 무시무시한 야수를 피해서.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은 그나마 튼튼하게 지은 촌장의 집에 모여 공포로 뜬 눈을 지새우고 있다고 한다.
루페르트는 마을 한구석에 마련된 초라한 무덤 앞에 놓인 아직 채 시들지 않은 들꽃들을 눈에 담았다.
한스 징펠만은 우유를 마시며 촌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언제 덮친 건가?"
그는 짧고 간결한 질문을 선호했고, 그렇게 많은 질문을 하진 않았다.
몇 마디 담화가 오간 후 그는 수염에 우유를 묻힌 채 흐릿한 시선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한스 징펠만은 자신이 정리한 바를 루페르트에게 보고했다.
"전부터 어렴풋이 추측한 바이지만, 메헨부르그의 야수는 늑대나 곰 같은 짐승은 아닌 것 같군요."
"그렇다면?"
루페르트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한스 징펠만은 수염에 묻은 우유 자국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차가운 살기가 묻은 음성으로 답했다.
"사람."
"사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존재겠지요."
그때 마을 어귀에서 떠들썩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루페르트와 한스 징펠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수수하지만 손이 많이 간 멋들어진 가죽 갑옷을 걸치고 깃털을 단 멋진 모자를 쓴 사내를 필두로 또 다른 사냥꾼 무리가 마을로 진입하고 있었다.
곧 사냥꾼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루페르트에게 다가와 자신을 소개했다.
"이런 곳에 토벌대가 있다니. 놀랍군요."
모르는 얼굴이지만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저는 안투안 쿠르스트. 제국수렵대에서 파견한 사냥꾼입니다."
사냥꾼의 우두머리가 외국의 억양이 섞인 경쾌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을 때 루페르트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안투안 쿠르스트.'
회귀 전의 역사에서 메헨부르그의 야수는 이 사내가 처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2화 4. 야수의 자취 (2)
불과 일주일 전, 메헨부르그의 야수가 숲속의 개척촌을 덮쳤다.
3명이 죽고 한 명이 실종됐는데, 그 실종된 어린 사내아이의 피 묻은 옷가지가 개울을 타고 마을에 흘러들어 왔다.
제국수렵대 소속 안투안 쿠르스트가 그의 사냥꾼들을 이끌고 이곳에 온 간략한 이유다.
"저희도 야수를 쫓고 있습니다만, 쉽지가 않네요. 워낙에 신출귀몰한 녀석이라...."
루페르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안투안 쿠르스트는 높은 빈도로 멀찍이 홀로 앉아 있는 한스 징펠만에게 눈길을 주었다.
관심이 있거나 용무가 있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루페르트는 선뜻 안투안 쿠르스트를 위해 자리를 비켜 주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밥상이 차려지니 거절한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보기 힘든 특별한 옷차림을 하신 분이라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가는군요. 딱히, 저분과 할 이야기는 없습니다."
멋들어진 차림새에 수려한 용모, 게다가 공손하며 목소리도 좋은 그는 호감형의 사내였다.
안투안 쿠르스트는 자신보다 어린 루페르트에게 끝까지 예를 갖추며 자리를 떠났다.
마지막으로 그는 한 가지 당부를 했다.
"자세한 위치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이 근방에 유력 가문의 저택이 한 채 있습니다. 그 저택과 그 주위는 사유지니까 접근을 삼가시고 행여라도 자신이 사유지에 들어섰다면 그대로 되돌아가 주시길."
야수를 물리친 자, 안투안 쿠르스트는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마을을 떠났다.
"어떤 것 같나요?"
자리가 파한 후 루페르트는 한스 징펠만에게 안투안 쿠르스트에 대한 평가를 물었다.
한스 징펠만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수염을 매만지며 답했다.
"딱히 사냥꾼처럼은 보이지 않더군요. 그뿐만 아니라 그의 부하들도. 전문적인 사냥꾼이라기보다는 취미로 사냥을 하는 무리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솔직히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루페르트는 마을 공터에 우두커니 서서 잡담을 하고 있는 어중이떠중이들을 눈동자에 담았다.
술집 여급에 절름발이 군인에 정신이 조금 이상한 노파. 인간이라기보다는 인형에 가까운 괴팍한 쌍둥이는 덤이다.
그런 루페르트의 생각을 알 리 없는 한스 징펠만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내 예상이 맞다면 메헨부르그의 야수는 이 마을 주변에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휴식을 취하고 내일 사냥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실례지만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는지요?"
루페르트가 질문을 던졌다.
딱히, 그가 알 필요는 없는 일이다.
야수의 사냥은 황제의 영역이 아니니.
하지만 이번 사냥은 리프니에가 내린 퀘스트와 연결된 중요한 일이다.
행여라도 실패한다면 그 원인을 알아야 한다.
한스 징펠만은 루페르트의 질문에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손가락을 튕겨 옆에 말없이 서 있던 소년을 불렀다.
"기. 지도를 꺼내라."
"네, 주인님."
처음으로 소년이 입을 열었다.
변성기가 오지 않은 앳된 음성.
그 소년은 무거운 금속제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복잡한 시건장치를 풀어 뚜껑을 열었다.
뚜껑이 열리자 매캐한 화약 냄새가 코를 찌른다.
상자 안엔 여간한 성벽 정도는 가볍게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의 화약과 위험한 느낌이 드는 약병들, 그리고 펜과 필기구, 종이 같은 잡동사니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소년은 그중 양피지로 만든 지도를 꺼내 한스 징펠만에게 넘겼다.
한스 징펠만은 한 손으로 지도를 받아 들고는 루페르트 앞에 펼쳤다.
양피지 위엔 메헨부르그 시와 어두운 숲 일대에 대한 지리 정보가 표시되어 있었다. 얼마나 세밀한가 하면 오솔길은 물론 인구수 10명 이하의 일가족이 사는 오두막까지 표시될 정도였다.
한스 징펠만은 소년에게 빨간색 유리구슬이 달린 핀을 건네받아 지도 위에 능숙한 손놀림으로 핀으로 지점을 표시해 나갔다.
그 작업을 지켜보던 루페르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 사내. 설마 메헨부르그의 야수가 일으킨 사건을 모두 기억하는 건가?'
사냥에 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메헨부르그의 야수가 마구잡이로 날뛴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야수가 구체적으로 어디서 몇 건의 살육을 벌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알아보기 어려울뿐더러 알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대단히 많다는 추상적인 관념으로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한스 징펠만은 다른 사람과 달랐다.
메헨부르그의 야수가 일으킨 모든 사건과 장소, 구체적인 희생자의 수를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겉모습 안에 갈무리해 두고 있었다.
빨간 핀의 행렬을 내려다보며 한스 징펠만이 입을 열었다.
"이 메헨부르그의 야수는 처음엔 메헨부르그 주변에서 활동했습니다. 표식이 도시 주위에 난잡하게 배치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그런데 토벌령이 떨어지고 사냥꾼들이 메헨부르그에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 야수의 행동반경은 어두운 숲으로 옮겨 갔습니다."
한스 징펠만의 손가락은 어두운 숲 쪽에 빽빽이 꽂힌 빨간 핀들의 행렬을 훑었다.
"그런데, 이 형태.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
루페르트는 한스 징펠만이 손가락으로 훑은 지점을 가만히 응시하다 곧 뭔가를 발견해 내고 입을 열었다.
"도시 주변에서 나타나던 때와 달리 일직선을 이루고 있군요. 숲에 난 도로를 따라서요."
"정확합니다. 깊은 숲에 들어간 이후 메헨부르그의 야수는 주로 큰길을 따라 이동하며 대로변을 횡단하는 개척민이나 개척촌을 습격하는 걸로 행동 방식을 바꾸었죠. 그런데, 보십시오."
한스 징펠만은 깊은 숲 곳곳에 점점이 자리 잡은 정착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나 같이 도로와 연결되지 않은 고립된 읍락이었다.
"이런 좋은 먹잇감을 놔두고 굳이 금방 외부와 연락이 되고 눈 벌건 사냥꾼들이 수시로 출몰하는 대로를 따라 행동한다는 게 말입니다."
"고립된 마을이니 변을 당해도 알리지 못한 가능성도 있지는 않을까요?"
루페르트는 외딴곳에 떨어져 사는 소규모 정착민들 주거지를 눈동자에 담으며 말했다. 한스 징펠만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그 점도 조사했지만, 여기 지도상에 표시된 개척촌 중에 그런 사례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가요?"
"네. 게다가 놈이 최초로 출몰한 곳은 메헨부르그 시 한복판이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벽에 가로막힌 도시 한가운데에서 커다란 야수가 느닷없이 나타났다는 건 말입니다. 그리고 방금 말했다시피 녀석은 인간의 길을 따라다니며 살육을 일으키고 있죠."
"기괴하군요."
루페르트는 아까 한스 징펠만이 말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한 단어를 입에 담았다.
"사람?"
한스 징펠만의 잿빛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번득였다.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것들이 더러 존재하죠. 자세한 건 직접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사냥꾼들의 의혹이란 대개 눈으로 직접 봐야 확인되는 법이니까요."
"야수가 이 주변에 있는 건 확실합니까?"
루페르트의 질문에 한스 징펠만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전, 이 마을에서 4명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놈은 만족하지 않았겠지요. 아직 죽일 인간이 많이 남았으니까요."
* * *
다음 날 저녁, 본격적인 사냥이 시작됐다.
거기서 루페르트는 용병 아돌프와 술집 작부 메이어의 쓰임새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야수를 꾀어내기 위한 미끼다.
한스 징펠만은 그들에게 마을 주변을 돌아다닐 걸 요구했다.
대단히 위험한, 목숨마저 잃을 수 있는 임무지만 용병과 작부는 순순히 한스 징펠만의 명에 따랐다.
그들은 단지 선금으로 각각 1천 탈러를 요구했을 뿐이다. 이미 출발하기 전부터 합의된 사항으로 보였다.
돈을 받아 든 용병은 손때가 묻은 장창 한 자루를 든 채 술집 여급과 함께 마을을 떠났다.
얼굴에 두려움과 걱정이 가득했지만, 기어코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은 루페르트의 감정에 미약한 파문을 일으켰다.
루페르트는 우회적으로 우려 섞인 생각을 밝혔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위험은 하겠지요. 하지만 쉽게 죽도록 내버려 두진 않을 겁니다."
"혹 저들이 손쓸 사이도 없이 당한다면 그땐 어떻게 됩니까?"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지만 설령 저들이 죽어도 사냥에 큰 지장은 없을 겁니다."
냉랭한 말투.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반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저들이 죽더라도 흔적은 남게 될 테니까요. 식지 않은 흔적만 있다면 야수는 저에게서 달아날 수 없을 겁니다."
한스 징펠만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그들이 죽길 바랍니다."
선을 넘어선 발언이다.
루페르트는 명백한 반감을 눈동자에 흘려 넣으며 한스 징펠만을 노려보았다.
'호오?'
한스 징펠만의 입술이 희미하게 뒤틀렸다.
범상치 않은 기도.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보아 왔지만, 저 나이에 저 정도 기백을 뿜어내는 이는 본 적이 없었다.
한스 징펠만은 놀라움을 의식 깊숙한 곳에 감춰 두고 태연한 표정으로 루페르트에게 말했다.
"저들이 걱정됩니까?"
둘 사이에 강한 바람이 불어와 타오르는 모닥불을 흔들리며 두 사내의 길게 늘어선 그림자를 뒤흔들어 놓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 휘하에 있는 사람이 죽는 건, 그다지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스 징펠만은 소리 내지 않고 피식 웃었다.
"보기 드문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시군요."
"평균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는데."
루페르트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한스 징펠만은 고개를 숙여 유감을 표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딱히 제 방식에 변명하려는 건 아니지만 저 용병과 여급의 과거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한스 징펠만은 자신의 대원에 대한 충격적인 과거를 무덤덤한 어조로 구술했다.
"점령지에서 약탈과 학살, 강간은 흔히 있는 일상이지만 아돌프는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의 뒤틀린 욕망을 충족시키는 녀석이었습니다. 그는 아이가 있는 집에 들어가 아이들 앞에서 부모를 강간하고 죽이는 데 집착했죠. 나중엔 아이들마저 범하기에 이르렀는데 그의 잔인한 동료들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죠. 하늘이 도와 그의 무릎에 탄환이 박히기 전까지 그의 만행은 계속됐습니다."
루페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한스 징펠만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메이어. 그 여자는 어려서부터 수시로 순진한 남자를 꾀어 몇 명이나 지옥의 나락으로 보낸 여자지요. 깡패들과 합심해 돈 좀 있는 홀아비를 홀라당 털어먹는 게 주특기였습니다. 최근엔 하급 귀족가의 첩으로 들어가 전처소생의 벙어리 아들에게 뜨거운 수프를 강제로 먹여 죽여 버리기도 했지요."
"...."
듣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을 정도의 악행이다.
한스 징펠만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이리라.
문득 전에 말했던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존재라는 말이 불현듯 루페르트 가우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스 징펠만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름 엄선한 미끼들입니다. 원래는 메이어 하나만을 쓰려고 했는데, 혼자서는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해서 수소문해서 아돌프라는 자를 찾아냈지요."
"일부러 악인들을 선택했다는 겁니까?"
"딱히 저들을 벌주고자 하는 의도는 없습니다. 그것은 법관의 관할이지요. 단지 저는 야수의 흥미를 끌 만한 미끼로 같은 야수만 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주의라 굳이 그들을 이곳에 데리고 온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저 사람들은 메헨부르그의 야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들이니까요."
루페르트는 멀리 마을을 따라 엉금엉금 숲길을 걷는 두 명의 남녀를 바라보았다.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미지의 길을 헤쳐 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사람의 모습이다. 조금 전만 해도 그들의 의지하는 모양새는 루페르트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었다.
하지만 그들의 과거를 안 지금, 이 자들을 과연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루페르트는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삼 일이 훌쩍 지나갔다.
개척촌 주위는 물론 미끼 역할을 맡은 이에게도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가 또 다른 평온한 밤을 예상하던 때였다.
루페르트는 숲속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지는 걸 듣고 침대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스 징펠만은 그의 도제들과 함께 이미 바깥에 나와 있었다.
숲속에서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용병의 호각 소리다.
한스 징펠만은 모자를 고쳐 쓰며 두 눈을 반짝였다.
"가시죠."
13화 4. 야수의 자취 (3)
서둘러 도착한 현장엔 처참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중심에 선 것은 전직 제국 보병 아돌프였다.
그는 5m에 달하는 장창을 양손과 다리의 한 축을 이용해 지탱하며 숲속 어딘가를 향해 날카로운 창끝을 겨누고 있었다.
그의 이마는 땀으로 번들거렸고,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억센 두 손은 반평생을 함께한 무기를 굳게 움켜쥐고 있었다.
그가 꼬나든 창 아래엔 여급 메이어가 횃불을 들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주변을 필사적으로 돌아보고 있었다.
그들의 땀방울 하나, 눈빛 하나엔 그야말로 순수한 생의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루페르트는 그 모습에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백 번 고쳐 죽어 마땅한 자들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려고 하는 장면이 어딘가 어색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옆에서 그 장면을 함께 지켜보던 한스 징펠만이 비릿한 냉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악인들이 오래 산다는 말이 있죠. 별거 아닙니다. 자기밖에 모르니까,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에게 해를 가할 수 있는 겁니다. 뭐, 그 덕에 다른 사람보다 오래 버티더군요."
루페르트는 착잡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악인들의 발버둥을 눈동자에 담았다. 한스 징펠만이 말한 것처럼 그 악인들은 그리 쉽게는 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메헨부르그의 야수는 보이지 않았다. 루페르트는 울창한 숲에 드리운 짙은 어둠 속을 뚫어지게 쳐다봤지만, 야수를 발견할 수 없었다.
"잠시, 여기서 관망합시다."
한스 징펠만이 손으로 루페르트의 앞을 막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루페르트는 지참한 석궁을 장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스 징펠만은 루페르트의 석궁을 힐끗 보며 가볍게 말했다.
"높으신 분이 들 만한 무기는 아니군요."
"손에 익어서요."
짧은 대화를 주고받는 그 순간, 앞쪽에서 외마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아!"
아돌프의 고함이다.
그는 안구가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크게 뜨고 숲속 어딘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스르륵.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루페르트는 숨을 죽이고 그쪽을 응시했다.
이윽고 멀리서 비추는 희미한 불빛을 받아 숲속에서 시커먼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꺄아아아아악! 호라신님! 제국 성인들이여! 염병할! 누가! 누가 도와줘!"
메이어가 날 선 비명을 지르며 뒤로 엉금엉금 기었다.
곧 루페르트는 그 검은 형체의 정체를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뭐냐? 저건?'
그것은 두 발로 걷는 생명체였다.
하지만 그 실루엣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떡 벌어진 상반신은 인간과 흡사했지만, 머리 위에 산양의 뿔을 방불케 하는 원형으로 굽은 뿔을 지녔고 두 다리는 네 발로 걷는 짐승의 것처럼 무릎이 앞쪽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저벅.
그 괴물이 모습을 드러내려는 찰나, 메이어는 괴성을 지르며 그만 횃불을 떨어뜨렸다.
"꺄아아아악!"
바닥에 떨어진 횃불은 단지 검은 형체의 발 부분만을 비췄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루페르트는 의문의 괴물이 발굽을 지니고 있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 어머, 역시나! ]
이윽고 그의 의식 깊은 곳에서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추방당한 옛것들, 그 악의에 물든 가련한 존재가 메헨부르그의 야수의 정체였군요. ]
루페르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리프니에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그의 눈과 귀에 문자와 소리의 형태로 동시에 전송됐다.
[ 루페르트 가우저. 저 가련한 괴물을 처치하세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
루페르트는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리프니에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그의 눈앞을 덮어 나갔다.
[ 하지만 위험하다 싶으면, 지체 없이 소라고둥을 부세요. 제가 모호하게 말한 것 같은데, 회귀의 수레바퀴는 스스로 동작하는 게 아니거든요. ]
"네?!"
[ 행여라도 야수의 급습을 받아 즉사라도 한다면, 당신의 열띤 소망은 그것으로 끝난답니다. ]
죽으면 끝이다.
그 말은 루페르트에게 더할 나위 없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안 그래도 야수를 보고 놀란 가슴은 터질 듯이 뛰었고 넘칠 정도로 혈류 속을 흐르는 격한 흥분은 그의 몸을 떨게 했다.
한스 징펠만은 몸을 미세하게 떠는 루페르트의 창백한 얼굴을 힐끗 쳐다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위험을 느끼신다면 뒤로 물러나셔도 좋습니다. 여기는 저에게 맡겨 주시지요."
"아니오. 괜찮습니다."
루페르트는 어느덧 이마에 흐르기 시작한 땀을 소매로 닦으며 앞을 주시했다.
'물러서진 않겠다. 겨우 이 정도엔 물러서지 않겠다.'
그는 알고 있다.
앞으로 제국에 닥쳐올 무수한 위기를.
지평선 끝에서 끝까지 이르는 반란 세력의 대군.
기근과 역병으로 희생당해 산처럼 쌓아 올린 제국 시민의 시쳇더미. 그리고 그 시쳇더미가 되살아나 황궁의 벽을 기어오르던 모습.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 융커스 베샤문트의 군대가 제도 테타우를 휘젓고 다니며 모든 걸 불태우고 학살하던 장면.
이 모든 미래는 루페르트의 치세 중 다시 찾아올 수도 있는 것들이다.
겨우 이 정도로 겁을 집어먹고 내뺀다면 앞으로 닥쳐올 위기엔 어떻게 하겠는가? 그때도 내빼겠는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있어서도 안 될 일이다.
루페르트는 그동안 착실하게 단련된 육체의 견실함을 몸으로 떠올리며 당당하게 허리를 폈다.
"함께하겠습니다."
루페르트는 사냥꾼 한스 징펠만에게 흔들림 없는 어조로 말했다. 최초에 보여 주었던 당황과 초조함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한스 징펠만은 미약한 탄성을 발하고는 앞쪽을 주시했다.
검은 형체를 드러낸 야수는 서서히 용병과 여급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아돌프는 필사적으로 장창을 휘두르며 야수의 접근을 막았다.
검은 형체가 루페르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루페르트는 석궁을 야수에게 겨누며 소리쳤다.
"물러나라. 추악한 괴물아."
루페르트는 석궁을 정확히 야수의 몸통을 향해 발사했다.
어둠 속에서 검은 형체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번득였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화살이 먹히지 않는 건가?'
루페르트의 심장이 싸늘하게 식었다.
검은 형체는 루페르트와 한스 징펠만 따위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장창을 든 용병과 여급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크르르르르...."
인간의 성대에서 나올 수 없는 극저주파의 파장을 머금은 소름 끼치는 숨소리가 어둠 너머에서 물결처럼 밀려왔다.
그 모습을 본 한스 징펠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루. 기."
도제들의 이름이다.
호명된 쌍둥이는 무거운 금속 가방을 멘 채 바람처럼 한스 징펠만 앞에 다가와 일제히 가방을 열었다.
관처럼 길쭉한 루의 가방 안에 담긴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이한 형태의 금속 막대들이었다.
그런데 루는 그 금속 막대를 꺼내더니, 아주 능숙하게 섬세하고 유려한 손으로 빠르게 조립해 나갔다.
철컥. 척.
그 옆에서는 기라는 이름의 소년이 자신의 가방 안에 든 화약통을 꺼내면서 자신의 마스터에게 물었다.
"마이스터예거. 탄환은?"
"태어나서는 안 되는 부정한 존재에겐 정화하는 은이 좋겠지."
기가 탄환을 찾는 동안 루는 어느새 금속 막대를 조립해 하나의 완벽한 형태를 만들어 놓았다.
그것은 총이다.
루페르트는 거기까지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성인 남성의 키보다 긴, 나팔 모양의 총구를 지닌 기이한 형태의 총은 장담하건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물건이었다.
"마이스터예거."
루가 두 손을 바들바들 떨며 자신이 조립한 창처럼 긴 총을 그의 주인에게 내밀었다.
한스 징펠만은 수염을 힐끗 매만지고는 한 손으로 가볍게 총을 들어 올렸다.
허옇게 분칠을 한 얼굴 위 눈동자엔 송곳같이 예리한 눈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장전해라."
기는 마치 제국 포병처럼 능숙하게 삽입대를 이용해 자신의 키보다 큰 총신에 화약과 은의 탄환을 장전했다.
야수가 이쪽을 힐끗 보고 고개를 돌린 지 겨우 10초가 지났을 따름이었다.
기와 루는 끝이 새총처럼 갈라진 나무 막대기를 들고 한스 징펠만 앞에 섰다.
한스 징펠만은 그 갈라진 막대의 끝에 나팔처럼 생긴 총신의 끝을 걸친 후 한쪽 눈을 감고 어둠 너머 서린 검은 형체를 조준했다.
"사냥의 여신 다르타니아시여. 제 운과 목숨을 그대에게 맡기겠나이다."
그는 낮은 숨을 내쉬며 희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옆에서 그 기도를 듣던 루페르트의 눈동자가 한스 징펠만의 상기된 얼굴을 향했다.
'이교의 신을 모시는 건가.'
신심 깊은 신도나 완강한 성직자가 들었다면 필경 문제의 소지가 있는 발언이다.
현 제국의 국교인 호라교에서는 호라 이외에 다른 신의 숭배는 철저히 엄금하니까.
한스 징펠만은 숨을 멈추며 장창을 들고 선 용병 너머 시커먼 형체를 드러난 야수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야수는 파르르 떨리는 장창의 끝에 이르러 있었다.
핏빛 도는 검은 색 털로 뒤덮인 억센 팔이 바닥을 태우고 있는 횃불의 빛에 비쳤다.
"으아아아아! 서... 선두! 대열 유지!"
이미 공포에 마비된 아돌프는 전장에서 내지르던 구령을 섞어 횡설수설하고 있었고 그 아래 웅크린 메아리는 손에 잡히는 대로 풀과 돌멩이를 집어 들어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야수에게 집어 던졌다.
야수의 억센 팔이 신경질적으로 자신을 막아선 장창 끝을 잡았다.
아돌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는 단단한 물푸레나무로 만든 창대가 마치 활의 시위처럼 휘는 걸 보았고 다음 순간 그대로 압도적인 힘에 이끌려 창대를 잡은 채 앞으로 끌려 나갔다.
또 다른 야수의 손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 아돌프의 목덜미를 움켜쥐려 했다.
메이어의 비명과 아돌프의 단말마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아아!"
처절한 비명이 밤의 침묵을 깨뜨리던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울린 한 발의 총성이 비명을 지워 버렸다.
탕!
총성이 울려 퍼지는 순간, 야수는 순간적으로 루페르트 쪽을 보았다.
그곳엔 흑백의 옷을 입은 두 명의 도제를 좌우에 거느린 사내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긴 총을 자신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야수의 눈동자가 흠칫 흔들렸다.
조금 전까지 석궁 말고는 아무 무장도 없는 인간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긴 총을 꺼내 든 것이다.
다음 순간, 강렬한 충격이 야수를 강타했다.
픽!
검은 피가 튀었고 야수의 신형이 크게 휘청였다.
한스 징펠만은 싸늘한 눈으로 야수의 상태를 살피며 그의 도제에 명했다.
"재장전."
"네. 마이스터예거."
기와 루는 총에 달라붙어 재빠르게 새로운 탄환을 장총에 장전했다.
야수는 큰 충격을 받은 듯 두 다리로 선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나저나 이상한 일이군."
한스 징펠만이 장전된 총을 야수에게 겨누며 중얼거렸다.
"겨우 이 정도 기형아에게 루돌프 마이어가 당했다고? 크라켄의 자식들을 청어마냥 채 써는 그 루돌프 마이어가?"
한스 징펠만은 둥글게 난 양 뿔의 중심을 겨누며 중얼거렸다.
"사냥의 여신 다르타니아시여. 제 운과 목숨을 그대에게 맡기겠나이다."
한 방에 끝내리라.
총성과 함께 또 하나의 탄환이 야수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탄환이 야수를 맞히기 전 야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픽!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야수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어둠 너머에서 들려왔다.
바닥에 주저앉은 아돌프와 메이어 발밑에 무언가 떨어졌다. 피 묻은 뿔의 파편이다.
야수는 구슬픈 비명을 내지르며 어둠 저편으로 사라졌다.
"루, 기. 푸주한의 망치를 준비해라."
야수가 사라진 곳을 칼날 같은 눈빛으로 노려보며 한스 징펠만은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루페르트는 앞서가는 그 사내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통찰의 권능은 진짜였군.'
제국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메헨부르그의 야수. 그 괴물은 단 한 명의 사냥꾼에 의해 처참하게 당했고 곧 사냥당할 운명에 놓였다.
14화 5. 야수의 정체 (1)
쌍둥이는 새로운 총을 조립해 그들의 주인에게 건넸다.
그것은 두 개의 총구를 지닌 총이라기보다는 화포에 가까운 무기였다.
10kg은 가볍게 넘길 법한 무기지만, 한스 징펠만은 가볍게 들어 올리며 아돌프와 메이어 쪽으로 뛰어갔다.
그는 미끼 역을 맡은 자들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야수가 남긴 흔적만을 살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뒤에서 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나으리, 시키는 대로 했으니 나머지 몫도 주시오."
미끼 역을 맡은 아돌프다.
오늘 죽음의 문턱을 본 그는 혼이 빠진 얼굴로 격한 숨을 몰아 내쉬면서도 추가 수당을 요구하려 했다. 메이어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똑바로 뜨고 행여라도 한스 징펠만이 떠나면 그의 바짓가랑이라도 잡을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한스 징펠만은 이들에 대해 단지 싸늘한 눈빛을 보내는 것만으로 이들을 침묵시켰다.
야수는 그들을 잡는 사냥꾼에 대항하지 못한다.
그것이 인간의 탈을 쓴 야수이건, 짐승의 탈을 쓴 야수이건 관계없다.
"내 앞에서 사라져라. 다음 사냥감이 되고 싶지 않다면."
한스 징펠만에게 있어 야수란 인간 또한 포함하는 것이기에.
간신히 살아남은 악인들은 고개를 떨구었다.
한스 징펠만은 루페르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지금 바로 추적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주변은 암흑천지다.
제아무리 숲길에 익숙한 사람이라고 해도 방향을 잃고 헤맬 것이다.
한스 징펠만은 이에 대한 대비책도 준비해 뒀었다.
그가 데리고 온 또 다른 대원.
사디라는 이름을 지닌 노파다.
"이 노파는 평생을 어두운 숲을 돌아다니며 약초를 캐고 돌아다닌 사람입니다.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땅의 감촉과 나무들이 풍기는 냄새, 희미하게 들려오는 개울 소리만 듣고도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죠."
미끼로 쓴 두 남녀와 달리 약초꾼은 오로지 실력을 보고 데리고 온 인물이었다.
루페르트와 한스 징펠만은 사디의 안내를 받아 어두운 숲속으로 향해 과감하게 들어갔다.
야수가 흘린 핏자국은 군데군데 이어져 있었다.
한스 징펠만은 새로운 핏자국이 보일 때마다 추적을 멈추고 피의 상태를 확인했다.
"약 10분 전에 이곳을 통과했군요.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야수가 우리보다 빠르다고 하나 우리보다 끈질길 순 없을 테니까요."
한스 징펠만은 사냥의 성공을 자신하고 있었다. 중상을 입힌 걸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추세라면 야수는 그들이 발견하기도 전에 출혈로 죽을지도 모른다.
추적은 밤새도록 계속됐다.
거리 자체는 멀지 않았지만, 어둠의 장막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에 지나친 힘을 쏟아서 그런지 빠르게 지쳤다.
사디는 간신히 따라오는 상태다.
야수도 슬슬 힘이 다하는지 여기저기 바닥에 쓰러지고 나뒹군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한스 징펠만은 콧수염을 매만지며 칭찬했다.
"꽤 의지가 강한 녀석이군."
하지만 모두들 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동녘에 희미한 여명이 다가올 무렵, 약초꾼 사디가 입을 열었다.
"저기, 나으리들. 죄송합니다만, 여기서부터는 들어가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요."
여명이 서렸다 하나 여전히 칠흑의 장막에 가려진 숲속이다. 루페르트로선 뭐가 문제인지 알 도리가 없다.
"문제라도 있소?"
한스 징펠만이 노파에게 물었다.
노파는 거칠게 숨을 내쉬고는 허리를 두드리며 답했다.
"자작나무 냄새와 장미 향기가 바람에 섞여 날아오네요. 자작나무는 어두운 숲에 살던 나무가 아닙니다. 바깥에서 들여온 거죠. 장미도 마찬가지. 어두운 숲에 들장미는 군데군데 피지만 이토록 코를 혼미하게 할 정도로 짙은 향은 풍기지 못한답니다."
"그래서, 앞에 뭐가 있다는 거요?"
한스 징펠만이 재차 물었다.
노파는 뜸을 들이고 대답했다.
"이 앞엔 비두킨트 가문의 저택이 있어요."
"비두킨트 가문?"
루페르트 가우저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비두킨트 가문.
일곱 선제후 중에 가장 부유하며 강대한 영지인 슈발츠마인의 선제후 가문이다.
메헨부르그는 물론, 북쪽의 제도 테타우도 그들의 영지 안에 포함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전임 황제 클라우데 2세가 바로 이 비두킨트 가문 출신이다.
루페르트 가우저 또한 넓은 의미로 보면 비두킨트 가문의 혈족. 비록 조부 대에 비두킨트 가문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기원이 같은 핏줄을 지니고 있기에 황위 계승권자 후보로 선택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비두킨트 가문 사람 중 조부를 기억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래전 사람이기도 하거니와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전부 죽은 탓도 있겠지만, 비두킨트 가문의 구성원으로 황제직에 오른 루페르트에겐 대단히 불리한 사정이었다.
그러나 비두킨트 가문의 저택 안엔 가계의 계보를 그린, 조상의 나무가 존재한다.
비두킨트라는 하나의 씨앗에서 나온 무수히 갈라지는 나뭇가지의 형태를 빌어 기록한 가문의 계보도다.
그 계보도에 정확히 조부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다.
가문으로 받은 이름은 물론 개명 후의 이름까지.
그렇기에 비두킨트 가문은 루페르트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조상의 나무에 적힌 이름을 부정하는 건 조상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기에.
"비두킨트 가문의 영지라."
그 가문의 영지에 도착했다.
문득 안투안 쿠르스트의 목소리가 생생한 형태로 재현됐다.
그는 어두운 숲 어딘가에 높으신 분의 저택이 있으니 들어가지 말라고 말했다.
'안투안 쿠르스트. 그 사람. 평범한 사냥꾼은 아니야. 사냥꾼이라기보다는....'
안투안 쿠르스트는 제국수렵대의 황실 사냥꾼.
비록 클라우데 2세는 승하했지만, 황실 내엔 비두킨트 가문이 심어 둔 고관대작이 즐비하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안투안 쿠르스트는 단순히 야수 토벌을 명목으로 이곳에 파견된 게 아니라 비두킨트 가문의 사유지를 지키기 위한 호위병일지도 몰라.'
제국수렵대의 황실 사냥꾼을 개인 호위로 돌리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저 막강한 선제후 중에서도 불가능한 이가 부지기수다.
그러나 비두킨트 가문은 그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할까요?"
루페르트의 흔들림을 읽은 한스 징펠만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냥꾼으로서 끝을 봐야 하는 것이 그의 본심이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고용된 사람이다. 중대한 사항에선 고용주의 의견에 따라야 한다. 그것이 고용된 사냥꾼이 지켜야 할 계율이다.
루페르트는 장고에 들어갔다.
두 가지 가치가 부딪치고 있다.
하나는 비두킨트 가문에 대한 두려움이다.
전생에서 비두킨트 가문은 철저한 중립을 지켰다.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았고, 통치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적도 없었다.
악운으로 얼룩진 전생에서 몇 안 되는 호재였다.
혹 그들이 루페르트의 자격을 문제 삼는다면 황제가 되지 못함은 물론, 제위에서 끌어 내려질지도 몰랐으니.
무엇보다 루페르트는 비두킨트 가문의 떨어져 나간 조각이다. 사이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의 근본이 비두킨트 가문에 있다.
'비두킨트 가문의 눈 밖에 나는 일은 삼가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사냥을 포기한다면 리프니에의 퀘스트를 포기하는 것이 된다.
리프니에가 누군가.
치욕스런 죽음 직전의 그를 이곳으로 돌려보낸 그가 섬기는 신이 아닌가.
그가 섬기는 유일한 여신.
루페르트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퀘스트를 수행하자니, 막강한 비두킨트 가문의 미움을 사 버리고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나면 퀘스트를 포기하는 일이 된다.
야속하게도 지금 이 순간, 리프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페르트는 본능적으로 지금 리프니에가 차분히 자신의 행동을 관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라, 루페르트 가우저. 뭐가 더 중요한 일인지!'
혼란으로 흔들리는 그의 눈길은 이윽고 목에 건 소라고둥으로 향했다.
그 끝을 불면 회귀라는 기적을 일으키는 신비로운 물건. 그 소라고둥을 보는 순간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렇다. 나에겐 무한의 기회가 있었지.'
회귀의 힘이 있다고 하나 루페르트는 아직은 한 번 사는 삶에 익숙하고 그렇게 적응되어 있었다.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커다란 격차가 있다.
오랜 장고는 어쩌면 그 격차를 메우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수레바퀴 위에 선 자. 나에겐 무한한 기회가 있다. 지금 나는 진정으로 실패를 어머니라 부를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
흔들림 없는 확고한 결의가 투명한 눈빛 너머로 번득였다.
결정을 내린 루페르트 가우저는 초조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스 징펠만을 바라보며 쾌활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 야수 놈의 목을 따야 직성이 풀릴 거 같네요."
"비두킨트 가문의 영지인데 괜찮겠습니까?"
"그런 건 일단 잡고 생각합시다."
루페르트의 호쾌한 웃음에 한스 징펠만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는 푸주한의 망치로 명명된 육중한 화기를 든 채 야수가 흘린 핏자국을 따라 전진했다.
어두운 숲의 우거진 가지 위로 떠오르는 태양의 빛이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15화 5. 야수의 정체 (2)
"죄송합니다만, 저는 더는 못 가겠네요. 이해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약초꾼 사디는 비두킨트 가문의 사유지에 출입하는 걸 거부했다.
한스 징펠만도 딱히 고집을 부리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쌍둥이 도제도 사유지 바깥에서 대기하라고 명했다.
"혹, 무슨 일이 생기면 나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너희들끼리 노르드마르크로 돌아가라."
따뜻한 말 한마디, 격려 한마디 없이 무거운 짐을 지운 채 부려 먹기만 하던 그가 그런 행동을 취하자 루페르트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주 가혹한 주인만은 아닌 모양이네.'
이제 추적자는 두 명으로 줄었다.
루페르트 가우저와 한스 징펠만은 어둠이 걷히는 숲속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갔다.
한스 징펠만은 앞서 두어 걸음 걷다가 멈춰 서더니 루페르트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갑자기 제복 상의를 열어젖혔다.
루페르트가 흠칫 놀랐으나, 그것도 잠시 곧 그의 눈에 흥미가 떠올랐다.
제복 안엔 네 자루가 넘는 피스톨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바깥에서 볼 때 아무 표도 나지 않았는데 제복의 외피 부분을 흉갑 형태로 만들어 그 안에 수납한 것이다.
실제 한스 징펠만의 상체는 드러난 것보다 호리호리했다. 그래도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무장을 들고 나비처럼 훌훌 날아다니는 걸 보면 힘은 결코 약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한스 징펠만은 피스톨 한 자루를 건넸다.
제국 서부 영지들의 기병들이 으레 쓰는 단발 기병총이다. 평범한 피스톨로 보이지만, 불과 철의 형제단 총기답게 어딘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차가운 강철 안에 버무리고 있는 걸로 보였다.
"혹시 모르니 이걸 가지고 있는 게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반동이 매우 강하니, 적이 목전에 이르렀을 때 양손으로 잡고 쏘시면 됩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피스톨을 품 안에 갈무리했다.
다시 추적이 계속됐다.
이제 그들은 마르지 않은, 신선해 보이기까지 한 야수의 핏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숲속 너머에서 헐떡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야수 특유의 고약한 체취가 풍겼다.
야수는 가까이 있다.
한스 징펠만은 잎사귀에 이슬과 섞여 흘러내리는 야수의 피를 보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놈도 이제는 한계인 모양이군요."
철컥.
한스 징펠만은 허리를 펴고 육중한 총포를 앞에 겨눈 채 느릿한 걸음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걸어갔다.
루페르트는 피스톨을 들고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었다. 성긴 관목이 목에 건 소라고둥의 줄을 잡아당긴다. 몇 번이고 걸리적거리자,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풀어 안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타락자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발걸음을 옮기며 한스 징펠만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이교도가 믿는 신에게 축복을 받은 자를 칭하는 거 아닙니까?"
"세간에서는 그렇다고들 하죠."
스르륵.
수풀 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루페르트는 기민하게 피스톨을 겨누었지만, 한스 징펠만은 미동도 않고 그것을 노려봤다.
"뀨뀨."
귀엽게 생긴 다람쥐다.
그 녀석은 루페르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부리나케 일행을 가로질러 갔다.
한스 징펠만은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소가 곳곳에 있는 테타우 일대와 달리 제국의 변경 곳곳에선 사악한 마신의 기운이 밑바닥 근저에서 창궐하고 있습니다."
"사악한 마신의 기운?"
"제국 마법 대학 출신의 고명한 마법사들이 그렇게 부르더군요. 끔찍하고 음습한 부정한 기운 정도로 해석하시면 될 듯합니다. 아무튼, 이런 기류에 노출된 변경 지방에선 종종 사람이 변해 버립니다."
"사람이 변한다고요?"
"하루아침에 사람이 짐승처럼 변해 버리는 일이 일어나지요."
"그것은...?"
루페르트의 눈앞에 용병을 위협하던 거대한 야수의 형체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베어볼프. 늑대인간. 타락자. 뭐든 좋습니다.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무언가지요."
"그럼 메헨부르그의 야수도 타락자라는 겁니까?"
"대부분의 타락자는 변이가 일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하죠. 하지만 일각에선 그런 타락자마저도 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걸 키운다고요?"
"네, 아무리 짐승의 형상이라고 해도 제 몸에서 나온 것이니 정을 주는 모친이 있기 마련이죠. 그런 일들은 주로 법과 교회의 힘이 미치지 않는 오지에서 발생합니다만, 아주 드물게 권세 있는 집안에서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침 햇살이 한스 징펠만의 눈동자에 갈고리처럼 파고들었다. 한스 징펠만은 살짝 눈을 찡그리며 나무 사이로 파고드는 햇살 너머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형체를 주시했다.
건물이다.
비두킨트 가문의 저택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한 것이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철컥.
한스 징펠만이 갑자기 측면으로 돌아 푸주한의 망치로 명명된 소형 화포를 앞쪽에 겨누었다.
옹이가 곳곳에 팬 아름드리나무, 그 거체가 드리운 어두운 영역에 섬뜩한 무언가가 딱 달라붙어 있었다.
루페르트는 어둠 너머에서 번득이는 두 개의 눈빛과 섬뜩한 이빨, 핏빛을 머금은 검은색의 털과 대지를 엉거주춤 딛고 선 갈라진 발굽을 보았다.
우제류의 발굽과 식육목의 이빨을 동시에 가진 자.
메헨부르그의 야수다.
그 야수는 사람처럼 등과 양손은 나무의 어두운 면에 딱 붙인 채 이쪽을 번들거리는 붉은 눈동자로 노려보고 있었다.
한스 징펠만은 푸주한의 망치를 겨눈 채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녀석이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야수가 이빨을 드러냈다.
"크르르르...."
"이 녀석은 사람 손에서 자랐습니다."
한스 징펠만이 총구를 야수에게 들이대며 말했다.
그는 나무 사이에 우뚝 선 저택을 눈에 담았다.
"...저 저택 안에서 말이죠."
이를 드러낸 야수는 붉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그 형상은 분명 인간이 아닌 야수였지만, 그 야수는 겁에 질린 인간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우그르 샤 말릭! 이카!"
야수가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이상한 소리를 냈다.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언어다.
"이교도의 언어입니다. 타락자는 오직 그들이 섬기는 신이 하사한 언어로만 말할 수 있죠."
"부루타이! 카르 말 샤이 이라카!"
야수는 격한 숨을 내쉬며 알아들을 수 없는 위협적인 단어를 나열했다.
한스 징펠만은 총을 겨눈 채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기서 총을 격발하면, 아마도 그 총성은 저 저택 안의 사람들에게 들릴 겁니다."
루페르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비두킨트가의 사람들, 그들의 호위병들이 일제히 뛰쳐나올 것이다.
안투안 쿠르스트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떻게 할까요?"
한스 징펠만의 시선이 루페르트를 향했다.
'더 생각할 건 없다. 여기서 끝을 내야 한다.'
루페르트는 안주머니에 있는 소라고둥의 무게를 느끼면서, 그것을 목에 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갑자기 야수의 눈이 부릅떠졌다.
겁에 질린 채 매미처럼 나무에 딱 달라붙은 녀석이 갑자기 루페르트에게 손을 뻗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네이 야둔! 오로메!"
갑작스런 야수의 위협적인 행동에 한스 징펠만은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 리프니에의 음성이 문자의 형태로 떠올랐다.
[ 어머. ]
매몰찬 웃음소리도 희미하게 들려왔다.
한편 한스 징펠만은 루페르트가 위기에 처하자 지체 없이 푸주한의 망치를 야수에게 격발했다.
꽈광!
천둥 같은 포성이 울려 퍼지며 총포 안에 담긴 무수한 탄환과 칼날이 폭풍처럼 야수를 덮쳤다.
한줄기 폭풍이 흘러간 직후, 루페르트는 야수의 최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갈가리 찢긴 채 지면에 쓰러져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야수는 루페르트를 향해 손을 뻗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이 야둔... 오로메 말릭...!"
루페르트를 향해 뻗은 야수의 흉측한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한스 징펠만은 쓰러진 야수에 다가가 단검으로 야수의 목을 그으며 야수의 죽음을 행동으로 알렸다.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메헨부르그의 야수는 그렇게 죽었다.
리프니에의 퀘스트가 달성된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곧 빛나는 문자가 루페르트의 눈앞에 떠올랐다.
- 당신은 메헨부르그의 야수를 처치했습니다.
- 균형의 여신은 당신의 노고에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 퀘스트 보상: 아티팩트 카드의 군단
루페르트의 오른손에 딱딱한 질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순백색의 카드였다.
곧 또 다른 문자가 그의 눈앞을 덮어 나갔다.
- 당신은 지금부터 영혼 동맹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영혼 동맹...?'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의문부호가 떠오르는 순간 리프니에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떤 사람과 강력한 인연의 끈을 만들 수만 있다면 수레바퀴 위에 올라선 당신은 회귀 이후에도 그 사람과 강한 유대를 이어 나가는 게 가능해요. 그 카드의 군단을 통해서 말이지요. ]
그때, 가까운 곳에서 호각 소리가 들렸다.
"저쪽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군."
한스 징펠만은 싸늘한 눈으로 숲 너머에서 달려오는 무리를 노려봤다.
제국수렵대다.
"내 친우, 루돌프 슈미트는 기형아 따위에 죽은 게 아니야."
그는 푸주한의 망치를 버리고, 제복 안에 숨겨 둔 피스톨을 꺼내 들었다.
"비두킨트 가문의 개들에게 죽은 거지."
그는 그렇게 읊조리고는 루페르트 앞을 막아섰다.
"달아나시지요. 루페르트 님. 여기서부터는 제가 맡겠습니다."
"...한스 징펠만 엽사."
"어차피 저는 이미 오래전에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껍데기만 남은 인간이었죠. 그런 찰나에 친우의 죽음이 만들어 낸 호기심이 이곳에 저를 데리고 왔고, 그 호기심은 이렇게 달성했으니 여기서 죽어도 여한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살아야 합니다."
철컥.
한스 징펠만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손놀림으로 총탄을 장전하며 총구를 앞으로 겨누었다.
그 순간 루페르트는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손에 쥔 카드 위에 한스 징펠만의 초상화가 마술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제가 보기에 당신은 그럭저럭 괜찮은 황위 계승자 후보로 보이거든요. 적어도 그 뇌르겐틀링가의 망나니보다는 낫겠지요."
앞에서 날카로운 구령이 들려왔고 총성이 울려 퍼졌다. 총탄이 바람을 가르는 서늘한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달아나세요! 어서요!"
한스 징펠만이 총탄을 응사하며 소리쳤다.
수풀 너머에서 외마디 구슬픈 비명이 울려 퍼졌다. 루페르트는 주저했다. 한스 징펠만을 여기서 버리고 간다는 게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죽으면 끝이에요. 루페르트 가우저. ]
그 말을 듣는 순간 루페르트는 한숨을 내쉬고 마음을 굳혔다.
"미안합니다."
그는 그대로 숲을 질주해 앞으로 뛰쳐나갔다.
총성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안전지대로 가자 한스 징펠만의 쌍둥이 도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와 루였나?'
그들은 물끄러미 루페르트를 바라보다 앞으로 뛰쳐나갔다.
"이쪽으로."
총성과 비명을 뒤로한 채 루페르트는 어두운 숲을 빠져나갔다.
허옇게 분칠한 얼굴에 선명한 황색의 제복을 걸친 기인 한스 징펠만은 사자처럼 싸웠고, 사자처럼 죽었다.
한 달의 시간이 유수처럼 흘렀다.
황실에서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메헨부르그의 야수가 토벌됐음을 세상에 공표했다.
토벌자의 이름은 루페르트의 전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안투안 쿠르스트는 이번에도 커다란 늑대의 사체를 황실에 제출하며 야수를 사냥했다 보고했고, 제국수렵대의 고관대작은 그것을 인정했다.
역사는 바뀌지 않았다.
위버하임의 장원에서 루페르트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카드의 군단.
한스 징펠만의 마지막 순간, 카드 위에 떠올랐던 초상화는 어느새 깨끗하게 사라졌다.
리프니에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 강한 인연의 끈이 만들어질 뻔했지만, 곧 찾아온 죽음이 인연의 끈을 끊어 버렸네요. ]
또 그녀는 이렇게도 말했다.
[ 아까운 인재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희생으로 보여요. 어차피 당신이 다시 사냥할 일은 없을 테니까 이대로 묻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
하지만 루페르트는 다르게 생각했다.
한스 징펠만의 우스꽝스러운 이면에 숨겨진 확고하고 진실한 모습을 바로 곁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과연 이대로 끝내는 게 옳은 일일까?'
그냥 버리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남자다.
루페르트는 그를 데리고 가길 원했다.
자신이 만들어 갈 새로운 제국에 필요한 인재로 말이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목에 걸고 있던 소라고둥을 뚫어지게 응시하다 갑자기 집어 들고 양 볼이 터질 정도로 팽팽하게 바람을 넣어 소라고둥을 불었다.
맑고 청량한 바다 내음 나는 오묘한 음색이 위버하임 장원 위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