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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3

29화 9. 세계의 끝 (2)

"이 능력은 대체 무엇입니까?"

루페르트의 손안에 오동나무로 만든 것 같은 기이한 책갈피가 나타났다.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눈으로 보이고 촉감도 느껴지지만, 영혼 동맹의 카드처럼 현실엔 존재하지 않는 신적인 물건이리라.

"시간을 거스른다는 건 대단히 매력적인 사건이겠지만, 인간이란 건 의외로 빠르게 질리는 동물이랍니다."

소라고둥이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두 번째 회귀를 하면서 느낀 점이 없나요? 같은 시간대에서 같은 사람을 만나며 같은 일을 진행할 때 말이죠. 가령 예를 든다면 당신이 좋아하는 룸어 공부?"

"아, 그건."

회귀 이후 에르바하 교수와의 첫 만남은 퍽이나 자극적인 사건이었다.

다시는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일념하에 건강을 잃을 정도로 공부를 했고 결국 그들의 인정을 받아 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자부할 만한 사건이었다.

허나 두 번째 회귀에서 에르바하 교수와 나머지 가정교사들은 깊은 감명을 주진 못했다.

그저 지나가는, 해야만 하는 의례라고 할까.

이미 루페르트는 그들에게 배울 만큼 배웠고, 충분히 오랫동안 같은 시간을 보냈다.

같은 노래를 두 번 듣는 것도 은근한 짜증이 느껴지는데 같은 수업을 두 번 받는 건 어떠하겠는가.

확실히 전에 없던 권태감을 느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이미 경험한 모든 것의 반복은 처음 경험했을 때보다 모든 면에서 열화된 상태였다.

"무뎌진다는 건 아주 위험한 징조지요. 같은 사건의 반복은 당신을 비단 무뎌지게 할 뿐만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금 시간의 권태감이라는 좋지 않은 선물을 준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첫 회귀만 해도 감히 할 수 없었던 상상이다.

하지만 실제로 몸으로 겪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깨달은 경험은 루페르트에게 엄혹한 현실을 속삭였다.

거듭되는 회귀라는 것은 자신에게도 짐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말이다.

"그렇다면 이 책갈피는...."

"어렴풋이 짐작했겠지만, 회귀 지점을 특정 시간대에 묶을 수 있는 아티팩트랍니다."

"특정 시간대에 말입니까?"

"운명을 가를 사건, 혹은 한 번에 모든 것이 결정 지어지는 결전을 앞두고 회귀 지점을 정해 두는 것이지요. 그 책갈피는 당신이라는 이름의 운명의 책에 이정표를 새길 거예요. 당신이 무의미한 사건을 반복하지 않아도 중요한 일을 반복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것이 시간의 책갈피...!!"

확실히 매력적인 아티팩트다.

통찰의 만화경처럼 특정 상황을 변화할 수 있는 도구는 아니지만 같은 사건을 반복하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다.

한스 징펠만을 구하기 위해 보냈던 시간들을 생각하면 이번 아티팩트의 가치는 자명하다.

'확실히 도움이 되는 아티팩트다.'

"이 책갈피는 여러 번 사용할 수 있나요?"

"음. 여러 번 쓸 수 있어요. 하지만 책갈피는 하나랍니다."

"그 말씀은?"

"네, 당신은 당신이라는 운명 속에서 오직 단 하나의 시간대만을 저장할 수 있답니다. 어느 때가 중요한 고비인지는 당신이 정해야 할 문제겠지요."

"그렇군요...."

조금은 아쉽다.

솔직히 책갈피의 가장 큰 장점은 귀찮고 번거로운 사건들을 지나쳐서 현재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편리함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법.

어느 때가 중요한 순간인지 자신이 판단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나의 책갈피가 더 있었으면 하는데.'

제단 위의 소라고둥이 가만히 루페르트를 내려다보더니 곧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루페르트 가우저. 이미 완결된 과거 속에서 더 이상 개선할 사안이 보이지 않는다면 아예 시작 지점을 바꿔 버리는 방법도 있답니다."

"네?!"

"지루한 룸어 수업이니, 가정교사니, 하녀와의 알력이니 그런 귀찮은 사건이 해결된 시점을 원점으로 삼을 수 있다는 이야기죠."

"그런 것도 가능합니까?"

"네. 하지만 그 경우, 당신은 지워진 원점으로 돌아갈 순 없어요. 다시 말해 새로운 원점 이전으로는 회귀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죠."

"원점을 다시 설정하는 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군요."

"정하는 건 당신이에요. 루페르트 가우저. 수레바퀴 위에 올라선 건 제가 아니라 황제인 당신이니까요."

루페르트는 새로운 아티팩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새로운 회귀 원점.

그리고 간이 원점의 지정.

두 개의 시간 축을 동시에 움직일 수 있다.

이 중 새로운 회귀 원점은 리프니에에게 말했다시피 신중하게 정해야 할 것이다.

잘 살펴보며 더 이상 얻을 것이 없고, 더 이상 개선할 게 없는 상황이 확인된 이후에 정해도 늦지 않다.

보다 자주,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건 책갈피의 원래 기능인 시간대의 저장 기능이리라.

'황제가 된 이후, 전쟁은 피할 수 없다.'

곧 내전이 벌어질 것이다.

누가 먼저 시작한 지는 황제인 루페르트조차 알 수 없었다.

전쟁 당사자인 선제후들의 정치 공작은 뭐가 진실이 아닌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정보만을 안겨다 줬으니.

일각엔 레벤호스트가 먼저 군대를 일으켜 침공했다는 설이 있는 반면, 다른 곳에서는 골트문트가 레벤호스트의 영지를 약탈하고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설도 있었으니.

누가 내전을 시작했건 간에 그 내전을 종식해야 하는 건 황제 루페르트다.

무력이든, 중재든, 아니면 정치 공작이든 어느 쪽이건 좋다.

제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루페르트는 운명을 건 선택을 해야 한다.

시간의 책갈피는 루페르트가 감당할 노고를 크게 덜어 줄 것이다.

'여신님.'

루페르트는 제단 위의 소라고둥을 가만히 응시했다.

차분한 눈동자 안엔 여신에 대한 무한한 감사함과 경배가 깃들어 있었다.

'당신의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황제 시절 아무도 그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 주지 않았고,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제국의 주신 호라에게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하며 간절히 기도했지만 돌아오는 건 조롱과 파멸뿐이었다.

리프니에는 다르다.

그녀는 루페르트에게 실체적인 힘과 권능을 아낌없이 제공했다.

그녀의 진의가 무엇이든 간에 루페르트는 영원히 그녀의 신도로 남을 것이다.

가장 어려운 순간에 도와준 신을 어찌 배신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로 감사합니다. 여신님."

루페르트의 감사에 소라고둥은 우쭐거리는 것처럼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시간을 움직이는 것은 당신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힘이 소모되는 것. 그 중심에 선 당신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 거스름을 단축하는 건 당신에게나 저에게나 커다란 도움이 되겠지요?"

"...그 말 명심하겠습니다."

리프니에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루페르트를 향해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앞으로도 착실하게 저의 퀘스트를 수행하세요. 당신이 달성하는 퀘스트가 많을수록 당신은 당신의 이상에 보다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테니까요."

* * *

모든 준비가 끝난 후 루페르트는 위버하임 장원을 떠났다. 도리안 비하스와 빌헬미나가 사라졌기에 위버하임 장원을 위협할 만한 세력은 없었다.

그는 배웅 나온 하인들의 손짓을 받으며 위버하임 장원을 떠났다. 가장 멀리까지 나온 것은 피리스였다.

"무사히, 꼭 무사히 돌아오셔야 해요."

눈물까지 보이는 피리스를 향해 루페르트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이곳에 돌아오지 못하는 미래는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것은 피리스에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자기에게 말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든 대황후의 시험을 통과하겠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실패할 생각도 없다.

빙해 너머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루페르트는 이번 시험에 사활을 걸고 이겨 낼 것이다.

루페르트 일행을 실은 마차는 따뜻한 봄 햇살을 받으며 신록이 피어나는 대지를 지나 루페르트는 제국 서북쪽에 자리 잡은 노르드마르크로 안전하게 나아갔다.

동행한 도펠죌트너들과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지만, 그들은 여행 내내 루페르트의 앞과 뒤에서 주변을 물 샐 틈 없이 경계했다.

마침내 도착한 노르드마르크 지방은 여전히 겨울과 봄의 경계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추운 지방답게 아직 녹지 않은 눈들이 그늘을 따라 쌓여 있었고, 개울가엔 얼음과 물이 반쯤 섞여 흐르고 있었다. 잿빛에 가까운 벌판 너머엔 해무에 가려진 검푸른 바다가 멀리서 보였다.

"앗, 바다다."

뒤에 앉은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페르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빙해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다.

황제 시절 노르드마르크를 들리긴 했지만, 내륙에 위치한 영지 수도가 전부였고 바다가 보이는 지점까지 가 본 적은 없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바다 냄새가 섞여들 무렵, 루페르트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뒤셀하펜.

룸 제국 시절까지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 높은 성벽에 둘러싸인 천혜의 항구 도시로 노르드마르크 최대의 항구이자, 빙해 상을 오가는 교역의 중심지다.

루페르트는 바위와 벽돌로 만든 항구에 크기는 물론 다양한 종류의 배들이 오밀조밀하게 정박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과연, 빙해 최대의 항구 도시라 할 만하군.'

불행하게도 이 도시는 루페르트의 치세 중 북부인들에게 습격당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루페르트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과거에 보지 못했던 유서 깊은 항구 도시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찾은 곳은 하스 상회였다.

지배인은 이미 루페르트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친절하게 그를 응대했다.

"어서 오십시오. 남작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금전이 준비되는 동안, 하스 상회의 지배인은 루페르트에게 소개할 인물이 있다며 루페르트는 잠시 응접실에 대기하게 했다.

루페르트는 개의치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대황후의 안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배인은 곧 높은 우관을 쓰고 치렁치렁한 로브를 걸친 젊은 성직자를 데리고 왔다.

그는 다소 여성스럽지만, 고집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이번 기회에 리히트 보덴 지방의 주교로 승진된 클로버스라고 합니다."

나이는 이십 대 중반가량. 나이에 비해 대단히 빠른 승진이지만, 서임지가 리히트 보덴인 걸 감안하면 납득이 가는 승진이다.

'주교라.'

그건 그렇다 쳐도 의외의 인물군이다.

루페르트는 대황후가 준비한 인물이 필경 노련한 항해자나 지역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는 대황후의 안배를 이해하고 내심 속으로 경탄했다.

'리히트 보덴까지 안전하게 도착한다는 전제하에 이 사람만큼 유용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제국의 힘이 미치지 않는 지역일수록 종교가 갖는 힘은 커진다.

리히트 보덴은 10년간 연락이 끊긴 지역.

과거에 파견된 주교는 나이가 들었을 것이고 어쩌면 노환으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곳에 새로운 주교를 보낸다는 것은 장기간 방치됐던 오지의 주민들에게 제국이 아직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증표이자, 주교를 통한 지역 장악에도 유리한 일이기 때문이다.

루페르트는 기꺼이 클로버스를 환영했다.

간단한 인사치레가 끝난 후 클로버스는 주위를 살피며 루페르트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황후께서 남기신 전언이 있습니다."

30화 9. 세계의 끝 (3)

선제의 치세 때 대륙엔 아래와 같은 말이 떠돌아다녔다.

제국엔 두 개의 태양이 있다.

하나는 철혈대제라 불리는 클라우데 2세이며, 다른 하나는 그의 반려인 안젤리나다.

으레 황후는 낮과 밤과 빗대 달에 비유되는 게 일상이나, 안젤리나는 그렇지 않았다.

당대 외국의 군주와 세인들은 안젤리나를 철혈대제와 동급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실제로 경험한 대황후의 일 처리는 그야말로 빈틈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모든 일을 안배에 둔 상태에서 각 단계에서 해야 할 일과 그 일을 할 사람을 배치해 모든 일이 마치 톱니바퀴처럼 맞물리게 처리하게끔 했다.

베르크 란이 첫 번째 톱니바퀴였다면, 클로버스는 그 첫 번째 톱니바퀴와 맞물린 또 다른 톱니바퀴다.

그는 대황후 본인이 남긴 또 다른 서찰을 루페르트에게 내밀었다.

새로운 서찰에서 대황후는 100만 탈러라는 거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항목별로 나누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 100만 탈러 중,

50만 탈러를 상한선으로 하여 양질의 선박을 마련한다. 최상의 방법은 배를 빌리고 그 부담을 저지인들의 해상보험 회사에 떠넘기는 것인데, 선박의 목적지를 안다면 아무도 그 부담을 안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클로버스는 지역의 조선공들과 인맥이 있으며 좋은 배를 구할 때 도움을 줄 것이다.

10만에서 20만 탈러를 들여 철괴를 구입한다. 그 수량은 배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항해 중에 사고가 발생해 짐을 버려야 할 경우가 있더라도 가능한 한 철괴를 보존하는 것이 좋다. 배에 여유가 있다면 땔감으로 쓸 만한 잡목들을 공간에 채워 넣을 것.

5만 탈러를 상한으로 해서 선장과 승무원을 구한다. 선장은 전투 경험이 있는 쪽을 추천하며 승무원은 최소한으로 고용하되, 보수를 높여 질적 수준을 높이는 게 좋다.

주의. 외국인은 되도록 승무원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특히 저지인과 부르봉인.

선상 반란의 위험이 있다.

나머지 자금은 예비비로 하스 상회에 보관하라. 리히트 보덴의 일을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온다면 하스 상회의 지배인이 남은 돈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알려 줄 것이다.

끝으로 항해자에 관해서는 내가 해 줄 말은 없다. 빙해를 누비던 선장들은 이미 죽거나 은퇴했고 과거의 항로를 기억하는 사람은 사라졌다. 황제의 자질 중 하나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 황제는 설령 자기가 알지 못하는 영역이라고 할지라도 소임에 걸맞은 인물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그대에게 그런 능력이 있기를 바란다. ]

편지를 단숨에 읽어 내려간 루페르트는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껴졌다.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내 편이 있다는 자각은.

물론 대황후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루페르트를 시험하는 것이지만, 오랜 기간 철저한 고독 속에서 홀로 싸워야 했던 루페르트에게 대황후의 철두철미한 조언은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환대이자, 지원이었다.

'지도를 가지고 여행을 한다는 게 이토록 편한 것이었을 줄이야.'

벅찬 마음을 뒤로하고, 루페르트는 클로버스와 함께 빙해를 건널 선박을 알아보았다. 클로버스 본인은 항해와 선박에 대해 무지했지만, 주민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그 주민들 중 일부가 기꺼이 클로버스의 힘이 되어 주었다.

"이 3개의 가로돛을 지닌 범선은 건조된 지 이제 겨우 5년이 지난 새 배입니다. 크기도 적당하고 화물칸도 넉넉해 많은 물품을 적재할 수 있지요. 속도가 빠른 건 덤이고요! 다만 배의 특성상 숙련된 선원을 필요로 하고 무장이 빈약한 게 흠인데 이 부분은 그쪽에서 따로 개조하거나, 무장을 늘이면 해결될 것입니다."

루페르트는 튼튼하고 날렵하면서도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는 배를 구할 수 있었다.

선박의 가격은 35만 탈러. 제값을 주고 샀다면 50만 탈러까지 호가할 정도로 훌륭한 선박이었다.

배의 이름은 때까치 호로 원래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과거의 선주가 북부인과 싸우면서 그 시체를 때까치처럼 돛 위에 꿰어 놓았다고 해서 새로 붙인 이름이다.

기원이 섬뜩하긴 하지만 루페르트는 그 배의 이름을 그대로 승계하기로 정했다.

다음으로 루페르트는 하스 상회의 지배인에게 철괴의 매입을 부탁했다. 하스 상회의 지배인은 12만 탈러로 때까치 호의 최대 적재 중량에 가까운 철괴를 구입했다.

다음으로 루페르트는 유명한 여인숙에서 한스 징펠만과 재회했다. 한발 앞서 뒤셀하펜에 도착한 한스 징펠만은 항해의 안내자가 될 선장 및 항해사들을 알아보는 일을 맡았다.

"안타깝게도 1급의 선장은 찾지 못했습니다. 경기가 호황이다 보니 실력 있는 선장들은 죄다 상선으로 몰렸거든요. 남은 자들은 실력이 부족하거나 품행에 문제가 있는 사람, 그리고 외국인 선장입니다."

대황후의 당부에 따라 루페르트는 외국인은 배제하고 나머지, 하자가 있는 인물들을 만나 보길 원했다.

선발 방식은 토벌대장을 뽑을 때와 동일하게 진행됐다. 선원 길드의 직원을 면담자로 내세우고 루페르트가 비켜서서 통찰의 권능으로 상대방의 진정한 능력을 알아보는 방식이다.

수많은 지원자 중에 3명의 후보가 남았다.

그러나 한스 징펠만이 말한 것처럼 하나같이 하자가 있는 인물들이었다.

첫 번째 인물은 군터 야스펠이라는 칠순이 넘은 노인이었다. 그는 오랜 항해 경험을 지녔고 어렸을 때 리히트 보덴에 간 경험이 있다고 주장한다. 한스 징펠만이 이 노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밝혀내긴 했지만, 이 노인이 지닌 풍부한 경험과 지식은 진짜다. 통찰의 만화경은 그를 아래와 같이 판단했다.

- 뭍에서 천수를 누린 뱃사람 C+

두 번째 인물은 슈미트 헬젠이라는 사내로 바다를 배에서가 아닌 책에서 배운 특이한 인물이었다. 뱃사람으로의 경험은 일천하지만, 그는 북방 빙해 항로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지식을 지녔다. 운명의 실타래 항목에서 루페르트가 주목한 항목은 다음과 같았다.

- 북쪽 항로의 외로운 연구자 B-

한편 뱃사람으로서 그의 자질은 아래와 같다.

- 뱃멀미를 하다 죽은 익사체 E-

마지막 후보인 페르난도 오르도라는 사내는 30대 후반으로 경험과 실력,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가 없는 인재다. 하지만 그에겐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바로 외국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제국의 남서쪽에 있는 반도 국가 카스무어 출신이다.

카스무어 왕국은 제국의 오랜 동맹국이지만 카스무어인이라는 족속들은 게으르고 속임수를 좋아하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 알려졌다. 운명의 실타래는 항해자로서 그의 자질을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 천상 뱃사람 B+

능력만 놓고 보면 고민할 것도 없다.

군터 야스펠은 언제 죽을 줄 모르는 노인이고, 지식만 있고 경험은 없는 슈미트 헬젠은 제대로 된 항해는커녕 선원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지나 의문이다.

그에 비해 페르난도 오르도는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딱 한 가지 단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대황후는 외국인을 등용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

하지만 대황후의 말은 절대적인 명령이 아니다.

그녀는 되도록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선은 루페르트의 몫이다.

그는 섣부른 선입견 대신 자신이 지닌 궁극의 무기, 리프니에의 힘을 믿기로 결심했다.

'앞으로 수많은 선택의 순간이 있을 것이다. 내가 내게 주어진 권능을 믿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루페르트는 페르난도 오르도를 불러오게 했다.

"당신에게 내 배를 맡기려고 하오."

"...그게 정말입니까?"

페르난도는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정말로 믿기 어렵군요. 저 같은 외국인을 선장으로 임명해 주시다니요."

떨리는 눈동자는 양처럼 유순했지만, 루페르트는 양의 눈동자가 어떻게 늑대의 눈동자로 변하는지 몇 번이고 보아 왔다.

"대신, 그대에겐 최대의 노력과 봉사를 기대하겠소."

그가 양이 될지, 늑대가 될지는 루페르트에게 달렸다.

'사람을 쉽게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지.'

루페르트는 페르난도 오르도를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후보, 슈미트 헬젠을 고문 자격으로 배에 태웠다. 그는 부선장 자리를 원했지만, 루페르트는 허락하지 않았다.

슈미트 헬젠이 기질이 드세고 사람들과 작당하는 걸 좋아하는 인물이라는 걸 알아봤기 때문이다.

견제를 위해 데려오긴 했지만 지나친 힘을 실어 줄 경우 역효과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

"아무리 제가 해상 경험이 없다고 해도 외국인 선장보다 한참 못한 대접을 받는 것은, 솔직하게 한 명의 제국인으로서 자존심과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슈미트 헬젠은 즉각 불만을 드러냈지만, 루페르트는 이 또한 능수능란하게 대처했다.

"이 금액이라면 어떻습니까?"

"이 금액요?"

금액 자체엔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금액 그 이상의 무언가.

루페르트는 페르난도 오르도와 체결한 계약서를 내밀었다.

슈미트 헬젠의 눈은 계약서 첫 장에 기재된 보수 쪽을 향했다.

"이건...?!"

슈미트 헬젠의 삐쭉 내민 입이 쏙 들어갔다.

자신의 보수가 선장보다 많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루페르트는 능글맞게 웃으며 은근히 속삭였다.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무, 물론입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가장 어려운 고비는 그렇게 쉽게 넘어갔다.

이후의 인선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선장으로 임명된 페르난도는 즉각 각지에서 쓸 만한 뱃사람을 모집했고 일주일이 지나가기 전에 그는 삼십 명에 달하는 승무원을 모았다.

루페르트는 그들의 능력 하나하나를 통찰의 만화경을 통해 들여다보고, 선상 반란의 위험성이 있는 자를 미연에 걸러 냈다.

얄궂게도 한 번 선장 후보에서 제외된 군터 야스펠이 수석 항해사 겸 부선장 후보로 추천받았다.

칠순의 노인이긴 하지만 루페르트는 이것도 운명이겠거니 하고 그를 부선장으로 받아들였다.

위험한 항해이니만큼 루페르트는 선원들에게 최상급의 보수를 약속했다.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봄은 빙해 항해에 있어 겨울보다 더 위험한 시기였지만, 선원들의 사기는 높았고 선장 페르난도의 열정도 뜨거웠다.

오래된 항구에서 때까치 호는 자갈 같은 얼음이 뭉친 바다를 해치고 북쪽으로 향했다.

항로는 북동.

목적지는 잊힌 개척지 리히트 보덴.

쾌조의 출발로 시작된 항해는 이후에도 순조롭게 이어졌다.

뒤셀하펜을 떠난 지 3일이 지날 무렵, 갑판 쪽에서 경보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둘러 갑판에 나온 루페르트 앞에 베르크 란의 손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루페르트를 호위하는 것처럼 옆을 지켰다.

그다지 친한 사이도 아니고 말을 할 기회도 없었지만, 이왕 가까운 거리에 마주친 김에 인사를 건넸다.

"안녕?"

소년이 이쪽을 돌아본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처음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확연히 시선을 사로잡는 짙은 에메랄드빛 동공 너머로 몽환적인 색채가 해무처럼 서려 있지만, 그 중심엔 안개 속에서도 뚜렷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자기주장이 강한 눈빛이 반짝이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소년은 불쾌감을 드러내며 고개를 돌렸다.

완연한 무시.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 녀석.'

솔직히 귀여운 녀석은 아니다.

오히려 무서운 녀석이랄까.

당장 도리안 비하스 부녀를 죽이던 그날의 모습이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다.

게다가 여느 제국 촌놈처럼 루페르트도 도펠죌트너라는 존재에 대한 미지의 공포감을 품고 있었다.

황족이라고 하나 일단 그도 촌놈 출신이니 말이다.

'날 싫어하나?'

잠시 쓴웃음을 머금은 채 잠자코 있자니 페르난도가 다가왔다.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난 선장에게 인사를 건네며 루페르트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난리 통의 원인을 물었다.

이에 페르난도는 망원경을 건네며 바다 저편을 가리켰다.

"북부인입니다."

과연 먼 바다에 길쭉하고 갑판이 없는 날렵하고 미려한 배 한 척이 바다를 떠돌고 있었다. 그 배 위엔 멀리서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는 크고 건장한 몸을 가진 사내와 여성이 탑승하고 있었다.

'저게 북부인들인가?'

북부인.

빙해 너머 영구동토의 대지 위에 살아간다는 이교도. 그들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다.

평균 신장이 2m가 넘는다는 소문은 진짜였다. 그들은 하나 같이 기골이 장대하고 덩치가 컸다. 남자의 덩치도 덩치지만 여자 쪽도 만만치 않다.

"저, 저! 빌어먹을 이교도 놈들! 당장 대포로 쓸어버립시다!"

부선장 군터 야스펠이 역정을 내며 당장이라도 저 배를 침몰시키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루페르트의 눈에 저들은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페르난도의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괜한 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습니다. 빙해의 날씨는 시시각각 변하니까요."

군터 야스펠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저 야만인 놈들을 그냥 돌려보내면 안 됩니다. 놈들은 지나가는 배를 봐 놓았다가 나중에 무리를 이끌고 습격하는 방법을 씁니다. 당장! 저것들을 물속에 가라앉혀야 합니다!"

페르난도의 말도 군터 야스펠의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루페르트는 배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감지했다.

그것은 선장에 대한 선원들의 태도였다.

페르난도 본인이 뽑은 선원이긴 하나 대부분 제국 출신들이다. 그들은 페르난도가 아닌 군터 야스펠의 편을 은밀히 들고 있었다.

'페르난도 정도 되는 경력을 지닌 자라면 간부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채워 넣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건 능력만 보고 선임했다는 것이겠지.'

루페르트는 배에 숨겨 두었던 한 사내를 갑판 위로 불러냈다.

두꺼운 외투를 걸친 건장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가 외투를 벗자 갑판 위가 술렁였다.

붉은 명찰, 도펠죌트너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베르크 란이 낡은 기병도를 칼집 채로 쥔 채 루페르트에게 다가왔다.

루페르트는 가만히 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손자와 같은 짙은 에메랄드빛.

그러나 몽환적인 흐릿함을 간직한 손자와 달리 그의 동공에 담긴 건 오로지 이글거리는 분노뿐이었다.

세상에서 철저히 버림받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분노 말이다.

"...."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 사내가 가장 적절한 예시일지도 모르리라.

루페르트는 위축되는 감정을 억제하며 베르크 란에게 말했다.

"내 호위는 이 꼬마로 충분하오."

"꼬... 꼬마!?"

금발 꼬마가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루페르트를 슬쩍 돌아봤다. 루페르트는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은 이 선장을 지켜 주시오. 혹, 누가 선장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하면 누구든 좋소. 당신에게 처분을 맡기리다."

베르크 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무시무시한 살기가 담긴 눈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어느 누구도 그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페르난도의 권위는 그렇게 살아났고, 배는 신속하게 동쪽으로 나아갔다.

때까치 호는 신속하게 항진을 계속해 사흘이 지난 후엔 멸망한 개척지 잿더미 섬을 지났고, 다시 사흘이 지난 후엔 눈과 안개로 뒤덮인 신천지에 도착했다.

리히트 보덴.

빛이 머무는 바닥이라는 뜻을 지닌 제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개척지가 삼십 년의 세월을 넘어 루페르트 앞에 생생한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사망자는 물론 부상자 하나도 없는 완벽한 항해였다.

루페르트의 눈은 정확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선원들이 술렁였다.

루페르트도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모피를 덧댄 방한복마저 파고드는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굴뚝엔 연기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31화 9. 총독 (1)

선발대는 암울한 소식을 가지고 왔다.

-정착지 생존자는 전무.

-본토로 가지고 갈 가치 있는 재보 또한 찾을 수 없음.

때까치호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우울해진 건 당연한 결과였다.

리히트 보덴의 옛 모습을 기억하던 군터 야스펠은 주름진 눈으로 폐허가 된 정착지를 보며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결국 세월의 흐름을 버티지 못하고 전부 죽어 버리고 말았군요."

예상 범위 내에 있는 일이지만 현실로 이런 결과를 맞이하니 천하의 루페르트도 풀이 죽는다.

그동안의 고생이 수포로 돌아가는 기분이랄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직접 상륙해 정착지를 살폈다.

선발대의 보고는 정확했다.

사람 하나 심지어 개미 한 마리 찾을 수 없다.

찾을 수 있는 건 몸서리쳐지는 추위와 정적뿐.

죽음에 색채가 있다면 그건 분명 하얀색이리라.

"이쪽에 주민들의 시체가 있습니다."

탐사대의 안내를 받아 사람들의 시신이 있다는 구덩이로 향했다.

직사각형으로 깊숙이 판 구덩이 안엔 수백 구에 달하는 시체가 눈 속에 파묻혀 꽁꽁 얼어 있었다.

루페르트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못해도 500구는 가볍게 넘어 보였다.

"리히트 보덴의 전성기 시절 인구는 천 명을 넘어섰다고 들었습니다."

슈미트 헬젠이 침울한 표정으로 시체들의 개수를 헤아리며 한마디 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리히트 보덴은 멸망했다.

얕은 한숨과 함께 루페르트는 돌아섰다.

"클로버스 주교를 불러 주세요. 간소하게나마 장례를 치르고 싶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은 여전히 그 자리에 떠 있지만, 루페르트의 눈에 보이는 건 짙은 어둠뿐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대황후가 원한 결말은 이런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루페르트가 여기서 행운을 얻길 바랐을 것이다.

그녀가 투자한 100만 탈러 그 이상의 이득을 능히 뽑아낼 수 있는.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절반의 성공을 이뤄 냈지만, 그게 전부다.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빙상에서 행운을 찾았지만 결국 돌아온 건 얼어붙은 시체뿐이다.

'빌어먹을.'

얼마 만인가.

이토록 무력감을 느끼는 건.

'이건 회귀의 힘을 가지고도 어찌할 방도가 없어.'

"저기."

뜻밖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시선을 돌리자 짙은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몽환적인 안개에 뒤덮인 것 같으면서도 확연히 이쪽을 잡아당기는 듯한 강한 시선.

베르크 란의 손자다.

뭔가 할 이야기가 있는 눈치다.

루페르트는 의아해하며 소년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

"여기."

소년이 시체 한 구를 가리켰다.

"뭘 보라는 거냐?"

"상처요."

"상처?"

"맹수한테 당한 거 같은데."

"그게 중요한 문제냐?"

"하나가 아니니까 그렇죠."

소년이 시체를 뒤집었다.

딱딱하게 굳은 시체는 벽돌처럼 쿵 소리를 내며 뒤집혔다.

"이것도 그렇고."

"...."

루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이 소년이 뭘 이야기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존엄을 가져야 할 시체를 저렇게 물건처럼 함부로 뒤집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의심을 키워 가는 루페르트의 눈빛을 받으며 소년은 턱 매무새를 매만짐과 동시에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최근에 죽은 게 많네요."

루페르트의 눈빛이 달라졌다.

"최근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구덩이 밖으로 걸어 나갔다.

'대체 뭘 근거로 저런 소리를 하는 거지?'

[ 어머. ]

갑자기 소라고둥이 가볍게 흔들렸다.

'여, 여신님?!'

[ 저 여자아이의 말이 맞는 거 같네요. ]

루페르트는 황급히 돌아서서 조용한 곳으로 향했다.

"여자아이?"

[ 아직도 눈치를 못 챘나요? 아니면 관심이 없는 건가요? 제국을 거하게 말아먹은 탕아가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를 구분 못 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요? ]

"...타, 탕아라니요."

[ 황제 시절, 못된 계집한테 놀아난 건 사실이잖아요? ]

"어떤 못된 계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무슨 뜻이죠? ]

"못된 계집이 하나둘이 아니라서요."

[ 어휴. 불쌍한 루페르트 가우저. 그걸 자랑이라고.... ]

"...면목 없습니다."

[ 좌우지간, 당신만큼이나 불쌍한 그 아이의 말은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네요. 시체를 자세히 보여 주세요. ]

루페르트는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구덩이에서 내보낸 후 시체 더미에 가까이 다가갔다.

얼어붙고 뒤틀리고 색깔이 변한 주제에 여태 생전의 모습을 간직한 섬뜩한 시체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멀리 구덩이 입구에서 선원들이 의아한 눈으로 루페르트를 바라본다.

모두가 꺼리는 죽음을 누구보다 진지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선주의 태도를 쉬이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범인(凡人)의 시선 따윈 루페르트에겐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 흠흠. 역시. ]

그의 여신이 입을 열었다.

[ 루페르트 가우저. ]

"네. 여신님."

[ 지금 바로 달아나세요. ]

"네?!"

[ 음, 아직 시간이 있긴 한데 선택은 당신의 몫이겠죠? 여차하면 저의 권능을 사용하면 그만이니까요. 그나저나. ]

소라고둥이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 당신을 찾아온 여인이 있네요. ]

그제야 루페르트는 뒤편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베르크 란의 손녀가 어느새 그의 뒤에 다가와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발밑에 널브러진 시체를 응시했다.

아기를 안은 아낙의 시체다.

아이도 어머니도 모두 얼린 생선처럼 어떠한 존엄성도 없이 무참하게 얼어 있었다.

"보이는 게 있나요?"

소녀가 얼어붙은 아기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물었다.

루페르트는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최근에 죽었다는 네 말이 맞다."

소녀가 루페르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용한 응시.

흐릿해 보이는 눈동자 안에 담긴 생각이 무엇인지 루페르트는 읽어 낼 수 없었지만, 적어도 적대나 혐오는 아닌 것은 분명했다.

"어떻게 알았지?"

침묵을 깨고 루페르트가 물었다.

"냄새가 났어요."

소녀가 시선을 거두며 시체 사이를 거닐었다.

"평범한 사람은 느낄 수 없는."

'죽음의 냄새를 맡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하지만...."

소녀의 발걸음이 한 시체 앞에서 멈췄다.

"한 달 전, 큰 전투가 있었고 패배가 있었고 대부분이 죽임당했어요. 한 사람이 간신히 살아남아 시체들을 이곳에 옮겨 놓았지만...."

소녀는 자신 옆에 두개골이 드러날 정도로 짐승에게 파먹힌 시체에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를 뜯어냈다.

펜던트의 뚜껑을 열자, 누군가의 초상화와 더불어 그의 이름과 직함이 적힌 가죽 명패가 수놓아져 있었다.

[ 제국 기사 아서 픽튼 - 리히트 보덴의 영주 ]

"시체들 위에서 힘이 다해 죽은 거죠."

소녀가 펜던트를 내밀었다.

루페르트는 펜던트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아서 픽튼."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저 북쪽의 섬나라 앙쥬 왕국 출신의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철혈대제에게 인정받고 제국 기사 작위를 받은 전설적인 리히트 보덴 총독의 이름을.

'이 사람이 그 총독인가.'

전설적인 리히트 보덴의 개척자는 마지막까지 식민지를 지키다가 외로이 죽어 간 것이다.

"거룩한 죽음이군."

루페르트는 모자를 벗고 묵념을 했다.

그가 묵념하자 소녀 또한 모자를 벗고 묵념을 했다.

모자를 벗자 긴 금발이 실크 커튼처럼 아래로 드리워졌다.

루페르트의 두 눈에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긴, 저 명찰을 달고 여자로 사는 것보다 사내아이 행세를 하는 쪽이 그나마 낫겠지.'

다음 순간, 루페르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틀림없다.

한스 징펠만의 위기 감지 능력이 발동했다.

'이건.'

주위엔 폐허와 시체, 눈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 언저리에 무언가가 이쪽을 살기 어린 눈으로 보고 있다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동시에 루페르트는 리프니에의 충고를 떠올렸다.

"여기서 나가야 해!"

루페르트는 소녀와 함께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루페르트는 알 수 있었다.

개척지를 끝장낸 재앙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압박 속에서 루페르트는 소리쳤다.

"나팔을 불어 모두에게 알려라!"

탐사대원이 나팔을 꺼내 힘껏 불었다.

부우우우우--

청량한 울림이 순백의 대지 위로 퍼져 나감과 동시에 일행은 보았다.

하얀 대지 너머로 하얗고 창백한 거적때기를 걸친 삐쩍 마른 괴인들이 앞다투어 달려오는 것을.

'저, 저건 대체?'

그것은 일견 인간처럼 보였다.

그러나 인간은 아니다.

시체처럼 창백하게 변색된 거죽, 악귀처럼 일그러진 혐오스러운 입과 상어 같은 이빨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니.

"스, 스크라엘링!"

슈미트 헬젠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 말을 들은 선원, 특히 노련한 고참 선원들이 경악을 드러냈다.

"스크라엘링?!"

"틀림없습니다! 리히트 보덴 개척민이 입으로 전하던 하얀 대지 저 너머에서 살아가는 마물들입니다!"

'이, 이것들이 주민들을 죽인 그 재앙의 정체인가?'

겉보기엔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흉측하긴 하나 체구도 작고 뒤틀렸으며, 강한 힘 또한 느껴지지 않는다.

제도의 성벽을 에워쌌던,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 융커스 베샤문트의 광기의 군대와는 비할 바가 아니다.

문제는 숫자.

눈대중으로만 수십 마리가 넘어 보이는 것도 모자라 뒤쪽에서 끔찍한 비명이 메아리치고 있다.

'숫자가 너무 많아!'

루페르트 일행은 배 쪽으로 달아났다.

신호를 들은 배 위에서 선원이 깃발을 힘차게 움직였고, 함께한 페르난도 선장이 손짓으로 응답했다.

쾅!

때까치 호의 두 문밖에 없는 선회포가 불을 뿜었다.

포탄은 아슬아슬하게 루페르트 일행의 머리 위를 지나가 스크라엘링 무리에게 위협적으로 꽂혀 들어갔다.

사상자는 없었지만, 대포의 충격은 스크라엘링 무리를 잠깐 주춤거리게 했다.

그것도 잠시.

얼어붙은 대지의 마물들은 일제히 끔찍한 고함을 지르며 맹렬히 추격했다.

폐허와 시체에 쌓인 눈들이 떨리고 있지만, 그보다 더 격하게 떨리는 건 인간들의 덧없는 심장이리라.

당장이라도 적들이 뒤를 덮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선착장에 도착했다.

루페르트 일행이 타고 온 보트 앞에 선원 둘이 서서 맹렬히 손짓하고 있었고, 그 뒤편에 때까치호가 성채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탕!

한스 징펠만이 건현에 서서 이쪽을 엄호했다.

부정확한 선회포와 달리 한스 징펠만의 장총은 한 번에 두 마리의 스크라엘링을 꿰뚫고 지나갔다.

루페르트가 제일 먼저 보트에 탑승했다.

뒤이어 선장과 고문 등 탐사대가 보트에 올랐다.

마지막 남은 건 베르크 란.

줄곧 선장 옆을 지키던 그는 보트에 타려다 문득 뒤를 돌아보며 당장이라도 따라잡을 듯이 거리를 좁힌 마물의 대군을 무심한 눈으로 보았다.

"이대로는 전부 죽겠군."

스르릉.

베르크 란이 검을 뽑았다.

평범한 장검이지만 함께 달리는 모든 이가 순간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고개를 돌릴 정도로 섬뜩한 살기가 번져 나왔다.

"내가 막겠소."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이대로 보트를 출발시킨다고 한들 저 민첩한 마물들이 줄지어 보트 위로 달려들면 끝장이다.

보트가 뒤집히기라도 하면 몰살을 피할 수 없으니.

"괘, 괜찮겠습니까?"

루페르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베르크 란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답했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니까."

"의무...."

제국의 병사는 기본적으로 용병들이다.

연대장 혹은 다른 직함의 고용주와 계약을 하고 계약에 따라 싸우고 죽이고 죽는다.

대부분 농민 출신인 그들이 가장 닮기 싫어하는 건 그들의 출신인 농민들이었다.

누구보다 겁이 많고 비열하지만, 생의 의지만은 충만한 놈들.

그 과거를 용병들은 그 무엇보다 혐오하며, 그렇기에 그들은 의무에 집착한다.

그것이 눈앞에 탄환이 빗발쳐도, 동료가 대포나 마법의 불길에 산 채로 짓이겨지거나 불에 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다.

겁이 나서 도망을 친다면 그들이 가장 혐오하던 존재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전락하니까.

아마 저 사내가 말하는 건 용병의 의무일 것이다.

도펠죌트너도 기본적으로 제국의 병사이며 또한 용병이니.

루페르트는 말없이 멀어지는 사내의 등을 가만히 응시했다.

'한 끼 식사의 은혜치고는 지나치게 값비싼 대가가 아닐까.'

다음 순간 시커먼 무언가가 루페르트의 눈앞을 지나쳤다.

다름 아닌 그의 손녀다.

"뭐냐? 마리."

베르크 란이 싸늘하게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눈빛이지만 소녀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생긋 웃었다.

"내가 할게."

소녀의 손에 들린 것 또한 한 자루의 검.

그녀는 명랑하게 웃으며 조부를 지나쳤다.

"해야 할 일이 있잖아?"

베르크 란은 잠시 당돌한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루페르트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베르크 란이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죽을 날이 가까운 자가 젊은이에게 생을 양보하는 것은 매우 흔하며 상식에 부합하는 일이니까.

실제로 용병들도 고참병이 앞에 서고 신참을 뒤에 서게 한다.

그러나 잠시 후 벌어진 일은 전혀 뜻밖의 결과였다.

뒤돌아선 건 베르크 란이었다.

그는 자리를 지키고 선 자신의 손녀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사자처럼 싸워라."

베르크 란이 보트에 올라탔다.

선착장 위엔 이미 수백 마리의 스크라엘링이 가득 찼다.

확정된 죽음을 눈앞에 둔 소녀는 가만히 뒤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조부의 얼굴.

베르크 란은 멀어지는 손녀를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의 눈동자가 살짝 움직였다.

루페르트와 소녀의 눈이 마주쳤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그것을 알 방법은 적어도 이 세계에선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끔찍한 비명을 신호로 스크라엘링 무리가 공격을 시작했으니.

소녀는 검을 수직으로 세운 채 그 손잡이를 가슴 정중앙에 갖다 대며 낮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우리는 제국의 검이니."

그 직후 검신이 불타는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선원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도, 도펠죌트너의 검은 불탄다는 이야기는 정말이었나."

"진짜 도펠죌트너였어!"

불타는 검은 스크라엘링을 무자비하게 찢고 불태우고 후려쳐 바닥에 눕히며 루페르트 일행에게 귀중한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보고만 있던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 있는 힘을 다해 로프를 소녀 쪽으로 집어 던졌다.

"어서! 어서 이쪽으로!"

탕!

한스 징펠만이 엄호 사격을 가하고 선회포가 쉴 새 없이 불을 뿜었다.

소녀는 잠시 이쪽을 돌아보았다.

다시 눈과 눈이 마주쳤다.

"...."

그것이 끝이었다.

옆에서 튀어나온 스크라엘링의 발톱이 소녀의 얼굴을 할퀴었다.

소녀는 간발의 차이로 발톱을 피해 냈으나 모자가 발톱에 찢겨 날아갔다.

모자 안에 숨겨져 있던 길고 탐스러운 장발이 햇살처럼 퍼져 나왔다.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베르크 란을 응시했다.

소녀의 조부인 그는 시야를 돌리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갑시다."

짧은 한마디 안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은 결코 손녀를 떠나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스크라엘링과 함께 바다에 가라앉아 두 번 다시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

32화 9. 총독 (2)

안도감과 공포, 수치 속에서 일주일간 항해했다.

익숙한 바다와 해안선이 나타나자 모처럼 선원들의 얼굴이 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잠시뿐, 선원들의 얼굴엔 다시금 걱정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임무가 실패했다.

그 간단한 사실을 모를 정도로 선원들은 멍청하지 않았다.

리히트 보덴은 철저히 파괴됐고,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으며 끔찍한 마물의 둥지가 되었다.

두둑한 급료와 반짝이는 기회를 찾던 선원들은 다시 선술집으로 돌아가 이미 기율이 잡힌 다른 배의 신참으로 들어가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훌륭한 항해였소."

루페르트가 페르난도를 치하했다.

페르난도의 표정은 선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더 이상 그는 제국에서 일자리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는 쓸쓸히 모자를 쓰고 북적이는 항구 저편으로 조금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호라신의 가호가 있기를."

클로버스도 다시 뒈셀하펜의 종교 공동체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항해인 듯싶습니다."

군터 야스펠도 선장을 따라 사라졌다.

세 사람이 떠나갔다.

절반의 성공.

잃어버린 식민지를 찾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식민지에서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리히트 보덴의 부유함은 전설적이었죠. 그곳에 나는 일각고래의 뿔은 남쪽에서 수입한 상아와 맞먹을 정도의 가치를 지녔습니다. 철혈대제의 치세 초기, 불안한 정국에서 철혈대제에게 크나큰 재원이 되었죠. 하지만 그것도 다 옛이야기가 됐군요."

슈미트 헬젠은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도 사라졌다.

다음을 기약하지 않고.

"...."

루페르트도 알고 있다.

대황후가 이곳에 자신을 보낸 이유를.

잃어버린 정착지를 되찾아 그곳의 부를 거머쥐라고 임무를 내린 것이다.

꼭두각시 황제라면 모를까, 자신의 힘으로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금전적인 지원이 필요하니까.

리히트 보덴은 그 텃밭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안타까운 건 정착민들의 죽음이리라.

겨우 한 달 남짓한 시간의 차이로 구하지 못했다.

한두 명도 아닌 수백 명에 달하는 목숨을.

"회귀의 힘을 가지고도 그 사람들을 구해 낼 수 없었던 것인가."

뿐만이 아니다.

마물의 대군을 앞에 두고 이쪽을 바라보던 소녀의 눈빛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마리라고 했던가. 그게 너의 진짜 이름이었나.'

"이쯤에서 실례하겠소."

뒤이어 베르크 란도 루페르트의 곁을 떠났다.

목례도 없었고 시선의 마주침도 없었다.

베르크 란은 거침없이 몸을 돌려 빠르고 위압적인 걸음으로 붉은 명찰을 드러낸 채 사람들에게 공포를 퍼뜨리며 거리 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그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루페르트는 보았다.

이따금 그 사내가 고물 앞에 서서 멀어지는 빙해를 한참 동안 응시하는 것을.

"오싹한 사람이었습니다."

한스 징펠만이 멀어지는 베르크 란을 보며 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의 손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몇 번이고 느꼈죠. 그의 살기를...."

"...."

"아마도 몇 번이고 고민했을 겁니다."

"고민하다니요?"

한스 징펠만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를 모두 죽일지 살릴지."

"당신도 그를 막을 수 없나요?"

"아마 어려웠을 겁니다. 이쪽이 먼저 공격한다면 모를까, 불타오르는 제국의 검 상대로는 이쪽도 뾰족한 수가 없으니까요."

이제 한스 징펠만과도 작별할 시간이다.

그는 베르크 란이 완전히 시야에 사라진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섰다.

이미 저 앞엔 그의 도제들이 무거운 가방을 든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일이 잘 풀릴 수는 없지요. 다음엔 좀 더 남작님의 운이 좋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당신에게도 행운이 깃들기를."

"이번 여름은 바쁠 겁니다. 크라켄의 자식들이 부쩍 늘어났다는 소문이니까요. 형제들이 줄어드니 싸울 사람도 몇 남지 않았죠."

한스 징펠만이 모자를 고쳐 쓰며 잿빛의 북해를 날카로운 눈으로 주시했다.

잠시 후, 한스 징펠만도 곁을 떠났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루페르트는 마차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테타우에 자리 잡은 슈발츠마인 선제후 가문의 저택 안에서 루페르트는 대황후의 접견을 신청했다.

그러나 대황후는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

"대황후께서는 잃어버린 정착지를 재발견한 남작님의 활약에 인상적이라고 언급하셨습니다. 하지만, 리히트 보덴이 황폐화되고 아무것도 건질 수 없는 불모의 땅이 됐다는 말엔 짧은 유감을 표했습니다."

대리인이 지극히 사무적인 어투로 대황후의 의사를 전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것이 끝이었다.

궁정의 법도를 누구보다 잘 아는 루페르트는 그 짧은 한마디 안에 담긴 대황후의 진의를 읽어 냈다.

'이것으로 끝이라는 소리군.'

더 이상 대황후는 이쪽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다시는 만나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시험은 비단 루페르트가 잊힌 정착지를 찾는 것만이 아니다.

그녀는 아마도 루페르트의 운 또한 시험했을 것이다.

루페르트는 운이 없었다.

정확히는 한 달 분의 운이 없었지만, 결과는 정해졌다.

루페르트는 저택의 담장을 가득 채운 장미 덤불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괜찮지 않다.

생애 처음으로 얻은 후원자를 잃어버렸다.

그뿐만 아니다.

지난 10년간 리히트 보덴의 정착민들은 제국의 도움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겨우 한 달을 남겨 두고 북극의 마물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정착민들의 시체를 땅에 묻고 죽임당한 총독 아서 픽튼의 최후는 또 어떠한가.

'나와 다르지 않아.'

무엇보다 눈에 밟히는 건 루페르트와 나머지를 위해 죽어 갔던 마리라는 이름의 소녀와 그녀의 죽음을 묵묵히 지켜보던 한 끼 식사를 빚진 사람들이다.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던 신비로운 눈빛.

그 눈빛이 뭘 요구했는지 알고 싶다.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소라고둥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강한 회의가 마치 무형의 손처럼 황제의 팔목을 붙잡았다.

'회귀를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객관적으로 루페르트가 회귀를 한다고 해서 그 역사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소녀의 목숨 정도는 구할 수 있겠지만 정착지는? 정착지에 갈 배와 그 금전은?

누가 그 마물들과 싸울 것이며 대황후의 퀘스트는 또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

가슴이 아려 온다.

익숙한 무력감이 그림자처럼 얼굴을 덮어 간다.

'회귀의 힘을 가지고도 난 여전히 무력한 존재인가?'

그때였다.

운명처럼 온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면에서 울려 퍼진 것은.

[ 루페르트 가우저. ]

"여, 여신님?!"

실로 오랜만에 리프니에가 말을 걸어 주었다.

[ 회귀를 생각하시나요? ]

"자, 잠깐 했었습니다."

[ 했었다니요?! ]

루페르트는 선원들의 눈을 피해 자신의 선실로 향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회귀를 한들 뾰족한 수는 없을 거 같아서요. 배와 선원을 마련한 돈도, 함께 싸워 줄 동료도 없으니 말입니다."

[ 저기,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은 아직 자신의 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네요. ]

"네?!"

[ 당신에겐 영혼 동맹이 있잖아요? ]

"네. 그렇습니다."

[ 이참에 한번 시험해 보는 게 어떤가요? 영혼 동맹의 진정한 힘을? 아직 사용할 기회가 없었죠? ]

"하오나 여신님. 가장 큰 문제는 돈입니다. 리히트 보덴까지 항해할 배. 배를 다룰 선원들 말이죠."

[ 돈이라면 대황후에게 받은 금액 일부가 있지 않나요? 은행에 맡긴 것으로 기억하는데. 대황후가 구차하게 돌려 달라고 요구도 안 했잖아요! ]

"그건 현재의 돈인데."

[ 루페르트 가우저. 그 돈을 모두 제가 좋아하는 황금으로 바꿔서 위버하임에 돌아가요. ]

"위버하임에 말입니까?"

[ 당신이 세웠잖아요? 수레바퀴와 연결된 조촐한 사당을. ]

실의에 젖어 있던 루페르트의 눈이 활짝 뜨였다.

새로운 가능성이 제시됐다.

* * *

하스 상회의 본점.

"이 금액을 전부 현물로 받고 싶은데."

대황후는 루페르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투자한 금원을 단 한 푼도 요구하지 않았다.

고로 예비비로 상회에 맡긴 거금은 고스란히 상회의 금고 안에 있다.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후 지배인이 웃으며 돌아왔다.

그의 뒤엔 한 사내가 손수레를 몰고 왔다.

그 손수레에 담긴 건 눈이 멀 정도로 반짝이는 금괴와 금화.

"호위를 붙여 드릴까요? 물론 공짜입니다. 남작님 같은 큰손께 드리는 일종의 서비스라고 할까요?"

루페르트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눈으로 반짝이는 재물을 바라보았다.

* * *

"남작님!"

피리스가 웃음기 띤 얼굴로 그를 반긴다.

"무탈하셨어요? 아무 일도 없었죠? 건강한 남작님을 보게 되니 정말이지...."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니 그간의 모든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의 미소가 주는 힘이란.

루페르트는 빙그레 웃으며 신전으로 향했다.

"미안한데 잠시 홀로 기도를 드리고 싶은데."

"네, 물론이죠. 남작님. 그런데 이것들은 다 뭐죠?"

피리스가 깜짝 놀란 눈으로 하인의 손수레에 담긴 막대한 재보를 응시했다.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답했다.

"음, 공금이랄까."

"공금요?"

"뭐, 그런 게 있어."

피리스를 뒤로하고 루페르트는 홀로 막대한 재화를 리프니에의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금괴와 금화, 셀 수 없는 은화 뭉치.

제단을 꽉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재화의 가치는 그 가치는 자그마치 45만 탈러에 육박한다.

"어머."

돈 냄새를 맡자 소라고둥이 몸을 흔들었다.

그걸 본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신님. 기분 좋으신 모양이네.'

"제 신전을 증축할 수 있을 정도의 거금이네요! 지금 당장 황금 기둥 하나 세우는 건 어떨까요?!"

"여, 여신님...!"

"알고 있어요. 루페르트 가우저. 저만 믿으세요."

리프니에의 온화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루페르트는 모든 의문이 눈 녹듯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래, 여신님이다. 나의 여신님이야. 나만의, 유일하게 나를 위해 주는 여신님이다. 그분을 의심하는 건 그녀의 유일한 사도인 내가 할 일이 아니지!'

다시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의 여신, 리프니에가 또 어떤 기적을 일으킬지.

그런데 여신님은 여전히 깐깐한 구석이 있다.

소라고둥이 홱 이쪽을 향해 돌아서더니 마치 물끄러미 쳐다보는 모양새로 가만히 서 있다.

"혹 이번 일이 성공하면 남는 금액으로 제 동상을 만들어 줄 수 있나요?"

"다, 당연하죠. 여신님!"

"그 약속, 반드시 지키세요."

"그런데 여신님."

"네. 루페르트 가우저."

늘 궁금했었다.

이미 그에겐 둘도 없는 거룩한 여신님이지만 그 여신님이 왜 그토록 사당이나 신전 같은 것에 집착하는지.

내친김에 물어보았다.

왜 그토록 화려한 신전을 고집하는지.

"왜 화려한 신전을 원하냐고요?"

리프니에가 소라고둥을 갸우뚱거리며 되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으음.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보다 많은 사람의 숭배를 받으려면 화려한 신전이 있는 쪽이 낫지 않을까요?"

"숭배.... 말입니까."

어불성설이다.

이교의 신이 엄격히 금지되는 호라 교단의 가르침 속에서 리프니에 같은 알려지지 않은 신의 신전이 세워지고 그 교도가 생길 리는 만무하다.

요즘에야 덜하다지만 호라 교단의 이단 사냥은 여전히 살벌하기 짝이 없으니까.

"왜 그런 표정을 짓죠? 루페르트 가우저."

"그게, 여신님. 현실적으로 좀 어려운 일이 아닌가 싶어서요."

"뭐가요?"

"아니, 그러니까 제국엔 호라라는 주신이 이미 있지 않습니까."

"아, 그런 신도 있었죠. 그런 신도."

리프니에가 살짝 빈정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그런 신이 아니라 여신님. 제국의 주신입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아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어요! 하지만 루페르트 가우저. 혹시 알아요? 그 잘나신 호라신의 사당에 제 이름이 울려 퍼지게 될지?"

"그건 아무리 여신님이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 같습니다만!"

"저도 그렇게 생각한 시절이 있었죠!"

"?"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뭔 자신감이지?'

제단 위의 소라고둥이 마치 몸을 으쓱거리는 것처럼 들썩거렸다.

"자, 자, 어서 나팔을 부세요. 다시 같은 일을 한다는 게 괴롭긴 하겠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뭐 그런 것도 하다 보면 적응이 될 테니!"

그렇게 여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루페르트는 나팔을 불었다.

소금기 나는 냄새와 함께 밀물처럼 다가온 시간의 파도가 미래의 황제를 감쌌다.

"자주 보는군."

어두운 복도에 앉은 노인이 루페르트를 지그시 응시한다.

"또 동료를 구하기 위해 왔나?"

"아니오."

루페르트는 빙그레 웃으며 미지의 노인에게 쾌활하게 답했다.

"제국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백성이라...."

노인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알 수 없는 탄식 같은 것이 노인의 폐부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왔다.

그를 지나치려 할 때 노인의 목소리가 추격하는 늑대처럼 루페르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 마음 잊지 않도록 하게."

루페르트는 돌아선 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게 노인을 뒤로 루페르트는 활짝 열린 약속된 원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국의 이름으로 왔소!"

세 번째 회귀의 막이 열렸다.

33화 9. 총독 (3)

"...이런."

진짜로 서 있다.

여신의 신전이.

시간을 거슬러 왔건만 여신의 신전은 홀로 시간을 거스른 듯 위버하임 저택 옆에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이 신전의 관리를 맡고 있는 피리스라고 해요."

피리스의 지위가 변했다.

하녀에서 신전 관리인으로.

회귀 전과 동일한 지위다.

"남작님을 모시게 되어 정말로 영광입니다."

시선과 행동에서 호의 또한 듬뿍 느껴진다.

피리스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 기묘한 일이지만 오래전부터 남작님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루페르트는 손바닥 안의 카드를 확인했다.

영혼 동맹.

피리스의 카드는 전과 같은 색채를 담고 있었다.

'이것이 회귀의 진정한 힘인가.'

벅차오르는 가슴을 안고 루페르트는 제단 안 숨겨진 공간을 확인했다.

벽면으로 위장된 공간을 힘껏 열어젖히자 황금빛 광채가 번뜩인다.

"이, 이건?!"

틀림없다.

금괴와 금화.

특히 금괴의 표면엔 하스 상회의 문장이 찍혀 있다.

틀림없다.

다른 미래에서 가지고 온 다른 시간 축의 보물들이다.

[ 어떤가요? 루페르트 가우저. ]

제단 위의 소라고둥이 으쓱거렸다.

"여, 여신님!"

묻고 싶은 게 너무 많다.

루페르트는 여신에게 예를 올리며 숨을 돌린 후 가장 큰 의문점에 대해 물었다.

"정말로 놀랍습니다. 그런데 피리스는 대체 어떻게 한 것인가요?!"

[ 영혼 동맹의 힘을 조금 응용해 봤어요. 영혼 동맹은 시간의 역행 속에서 특별한 작용점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존재. 단지 과거의 인연만이 아니라 역사를 지나치게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그 사람의 상태를 바꿀 수도 있죠. ]

"!!"

[ 하지만 하녀이던 사람은 귀족 영애로 바꾼다거나 아예 마법사의 제자 같은 동떨어진 상태로는 바꿀 수가 없어요. 이 저택의 하녀나 신전의 관리인이나 결국 당신이 부리는 사람 아니겠어요? ]

"그렇군요."

루페르트는 제단 아래 수북이 쌓인 금전으로 시선을 옮겼다.

리프니에가 루페르트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가볍게 웃었다.

[ 더 크고 아름다운 신전을 짓는다면 더 많은 금전을 보관하는 게 가득하겠죠? ]

"그, 그렇습니다!"

루페르트는 심호흡을 하며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여신님은 정말로 대단해. 정말이지, 너무나 대단해.'

눈물이 많은 성격이었지만 황제가 된 이후 눈물을 흘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끝없는 냉대와 무시, 무력감 속에서 루페르트의 눈물샘은 사막처럼 말라붙고 만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무리 빌어도 갈구하고 애원해도 응답하지 않던 제국의 주신과 다른 그만의 여신님이 있다.

"여신님!"

루페르트는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여신님...!!"

회귀 이후 거의 흘리지 않았던 감동의 눈물이 황제의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여신님. 정말이지...."

소라고둥은 그런 황제를 가만히 응시했다.

곧 소라고둥 안에서 소녀의 풋풋함마저 느껴지는 청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의 신심이 깊어지는 게 보이네요. ]

"이런 기적을 보고 어찌 신심을 안 가질 수 있겠습니까?"

[ 부디 그 신심을 마지막까지 가지길 기원할게요. ]

"물론입니다!"

[ 그나저나. 또 시작이네요? ]

"그렇습니다."

[ 지치진 않나요? ]

"그럴 리가요. 멀쩡합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할 수 있습니다!"

[ 훌륭한 기세네요. 하지만 제가 드린 책갈피도 잊지 말아 주세요. ]

"알고 있습니다."

이번 사안은 책갈피가 활약할 여지는 없었다.

그가 대황후의 시련을 받아들이기 전부터 리히트 보덴은 멸망하고 있었으니.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리프니에가 다시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 아무튼 저와의 약속은 잊지 않았겠죠? ]

소라고둥이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무, 물론입니다."

[ 저의 새로운 사당을 최대한 화려하게 지어 주셔야 해요. 그리고 저의 동상도! ]

"네. 여신님!"

루페르트는 힘차게 대답했다.

'이번 일을 성공할 수만 있다면야 당연히 동상을 만들어 드려야지! 내 재산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최상의 동상을 만들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아는 흐름이다.

황실에서 파견한 교수들과 레벤호스트를 만났고, 메헨부르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메헨부르그의 야수 사냥은 인쇄기에 찍어낸 것처럼 똑같은 흐름으로 흘러갔다.

야수와 다를 바 없는 악인들, 권력을 지닌 야수, 그리고 사냥꾼과의 연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한스 징펠만의 포섭 과정이리라.

단지 주점에서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 한스 징펠만은 루페르트를 따라왔다.

"당신,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꿈에서 보았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신과 함께해야 한다는 확신이 듭니다."

손안에서 반짝거리는 영혼 동맹 카드를 보며 루페르트는 표정을 관리해야 했다.

야수 사냥 또한 같은 흐름으로 전개됐다.

대황후 안젤리나와의 만남이 있었던 후 루페르트는 집 안을 청소했다.

청소의 대상은 역시 빌헬미나.

방식은 전과는 사뭇 달랐다.

한스 징펠만의 총기가 그 탐욕스러운 하녀와 부친을 꿰뚫었고, 한스 징펠만의 도제가 집 안에 불을 질렀다.

명백한 살인이지만 양심의 가책 같은 건 없었다.

그들은 죽어야 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배후를 알지 못했다는 점 정도.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으리라.

대충 배후는 짐작하고 있었으니.

그 이후 루페르트는 문제의 조손을 만난다.

베르크 란과 아마도 마리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

둘에게 한 끼의 식사를 대접한 후 루페르트는 골트문트와 만났다.

"빙해로 간다고?"

아직 루페르트는 진가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골트문트는 루페르트를 적잖이 떠보는 눈치였다.

"위버하임 쪽에 살인사건이 일어난 거 같은데. 알고 있나?"

"지방 판사라는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골트문트는 집요하게 루페르트의 얼굴을 살폈지만, 루페르트가 어떤 사람인가.

이런 종류의 암투는 진저리나도록 했다.

천 년을 바라봐도 그는 루페르트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흉흉한 세상이네. 빙해에서 무엇을 찾을지 모르겠지만 행운을 비네."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빙상에서 반드시 행운을 거머쥐겠습니다."

골트문트는 이에 야릇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최대의 장벽을 넘어선 한스 징펠만과 함께 뒤셀하펜으로 향했다.

"리히트 보덴 말입니까? 아, 그러고 보니 북서쪽에 그런 이름의 식민지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45만 탈러라는 거금으로 배와 승무원을 구했다.

배는 전과 같은 때까치호.

전처럼 클로버스의 도움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소 사람을 설득하는 데 애를 먹었지만, 돈 앞에 안 되는 건 좀처럼 없는 법이다.

고급 선원은 전처럼 구성했다.

페르난도가 선장을 맡고, 군터가 부선장을 맡았으며, 슈미트가 고문을 맡았다.

완벽하게 진용이 구성된 이후 루페르트는 한스 징펠만과 슈미츠 헬젠을 불렀다.

"스크라엘링에 대해 아십니까?"

어떻게 보면 이번 회귀의 목적.

그 빙해의 마물들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

"스크라엘링이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요."

한스 징펠만은 빙해의 마물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개개의 전투력은 별 볼 일 없지만, 속도가 매우 빠르고 떼를 지어 움직인다고 들었습니다."

슈미트도 나름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구전에 따르면 스크라엘링에겐 우두머리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 우두머리를 쓰러뜨리면 제아무리 많은 스크라엘링도 왕겨처럼 흩어진다고 들었습니다."

중요한 건 하나다.

이쪽의 전력으로 그 마물에게 맞설 수 있는가?

"우리만으로는 어렵겠지만 리히트 보덴에 사람들이 있다면, 물론 전투 경험이 있는 사람들 말이죠. 적절한 무기 지원만으로 충분히 해 볼 만한 싸움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그들이 살아 있다면 나름 그 마물에 대처할 방법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답은 그렇다였다.

루페르트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서두릅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국의 백성들이 애타게 도움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다음 작업은 화물의 선정.

철괴 일변도인 과거와 달리 적절한 철괴와 무기를 섞었고 다량의 화약과 목재를 준비했다.

루페르트의 의욕 넘치는 지휘 아래 선적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제 출발의 시간.

루페르트는 의외의 인물들과 마주쳤다.

"여기에 있었군."

베르크 란이다.

그 뒤엔 모자를 푹 눌러쓴 그의 손녀가 조금은 경계하는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황후께서 당신을 지켜보라는 명을 받았소이다."

상정하지 않은 만남이지만 루페르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좋은 흐름이다.

'이때부터 대황후는 날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무엇보다 둘은 강력한 전투원이다.

치열한 전투가 예상되는 국면에서 이들만큼 훌륭한 자원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전처럼 둘 중 하나를 허투루 희생하진 않을 것이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하겠어.'

출항 전날, 루페르트는 손안에 태고의 향기를 머금은 목제 책갈피를 만들어 냈다.

시간의 책갈피.

루페르트는 그것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 현재라는 시간의 페이지에 책갈피를 꽂아 넣겠습니까? ]

루페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모든 준비는 완료됐다.

* * *

"육지입니다! 온통 눈, 얼어붙은 대지군요. 틀림없습니다! 저곳은 리히트 보덴입니다! 제국의 가장 먼 식민지!"

하얀 안개와 암초, 유빙으로 가득한 위험한 해안선을 따라 깎아지른 듯한 빙벽으로 이루어진 곶을 넘자 때까치호는 마침내 목적지를 발견했다.

루페르트에겐 두 번째 발견이지만 선원 중 몇 명은 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서 눈물을 흘렸다.

루페르트는 선장의 공을 치하했다.

"훌륭한 항해였소."

선장은 겸손하게 답했다.

"그다지 어려운 항해는 아니었습니다. 숙련된 견시원(見視員)과 용기만 있다면 누구나 가능한 뱃길입니다. 저보다 뛰어난 선원은 많은데 왜들 이런 쉬운 길을 기피했는지 의문이군요."

견시원의 청량한 목소리가 마스트 위에서 울려 퍼졌다.

"사람입니다!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버려진 폐허에서 검은 점들이 하나둘 개미 떼처럼 비칠거리며 나타났다.

"남작님."

페르난도가 망원경을 건넸다.

루페르트는 망원경을 통해 오랫동안 격리된 식민지인들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수척하고 왜소한 체구.

피부 또한 누렇게 뜨거나 검게 그을렸고, 주름진 얼굴엔 오지의 거친 삶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가장 심각한 건 옷가지였다. 그들은 마치 걸인처럼 기우고 또 기운 것도 모자라 알 수 없는 동물의 가죽을 덧댄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살아 있다. 모두가 살아 있어!'

지난 회귀보다 3개월이라는 시점을 앞당겼다.

아슬아슬하게 가느니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다.

결과는 대성공.

정착지는 건재했다.

정착지를 향해 보트 세 척이 향했다.

주민들은 때까치호에 걸린 제국의 문장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부는 무릎을 꿇었고, 일부는 기도를 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환희와 충격 속에서 한 무리의 사람이 나타났다.

루페르트는 그 중심에 선 완고한 인상의 중년 사내를 응시했다.

낡고 다 떨어져 기운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지만, 멀리서도 알아볼 정도로 강렬한 원색을 지닌 복장.

틀림없다.

시체구덩이 제일 위에 죽어 있던 식민지 총독 아서 픽튼이다.

"아서 픽튼이오."

첫인상은 거대했다.

그는 대단히 신장이 컸고 위압적인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노르드마르크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북부인을 연상케 할 정도로.

초로의 나이지만 허리는 꼿꼿했고, 행동거지에는 젊은이의 힘참이 묻어 있었다.

"루페르트 가우저라고 합니다."

루페르트는 아서 픽튼의 손을 보았다.

손가락 몇 개가 없다.

'동상으로 잘라 낸 건가.'

그런데 이 총독이라는 사내의 눈빛.

기대한 것과 다르다.

10년 동안 얼음 속에 방치되어 구원만을 애타게 바라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적의가 꿈틀거리고 있다.

"가시오."

아니나 다를까.

매몰찬 말과 함께 총독은 되돌아섰다.

"그쪽과 할 이야기는 없소. 우리는 필요한 걸 모두 가지고 있고 아무런 도움도 필요하지 않으니."

총독은 개척민에게 안으로 들어가라고 거칠게 손짓했다.

총독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개척민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총독의 명에 따랐다.

'아서 픽튼.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이쪽 사람은 꽉 잡고 있군.'

루페르트가 떠나가는 아서 픽튼의 뒤를 따랐다.

"잠깐. 당신은 이곳의 총독이 아닙니까?"

"지금은 아니오."

아서 픽튼은 돌아보지도, 발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답했다.

"무슨 뜻입니까?"

아서 픽튼이 멈춰 섰다.

"더 이상 이곳은 제국의 땅이 아니라는 소리지."

이에 베르크 란이 서늘한 살기를 발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를 제지한 후 아서 픽튼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잠시 후 무너지는 듯한 한숨과 함께 회한 서린 한마디가 거대한 사내의 등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제국이 먼저 우리를 버렸잖소?"

34화 10. 얼음 속에 숨겨진 것 (1)

총독의 태도는 완강했고 총독에 대한 주민의 지지 또한 굳건했다.

아서 픽튼이 명하자 주민들은 누추한 집으로 돌아갔고, 그것으로 제국과 리히트 보덴 사이의 연결도 칼로 자른 것처럼 끊어졌다.

예상 밖의 사태에 루페르트 일행은 선박에 돌아가 머리를 맞대야 했다.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는 제거돼야 합니다."

"그가 반역자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죽여 버립시다."

중론은 아서 픽튼의 제거를 요구했다.

온화한 의견도 아서 픽튼을 체포하고 제국에 압송, 제국 법원에서 반역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정은 다르지만, 결론에 있어서는 전자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의견이다.

'확실히 아서 픽튼 하나를 없애는 건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쉬운 해결책이다.'

주민들이 아서 픽튼을 따르는 건 사실이지만 그들도 제국인이며 외부에 대한 동경과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오랫동안 함께해 온 충성심이든, 아서 픽튼에 대한 공포건 총독 하나가 사라지면 주민들은 순한 양처럼 루페르트 일행에 복종할 것이다.

"검이 필요하다면."

여간해선 입을 열지 않는 베르크 란이 어둠 속에서 눈을 번득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입을 열자, 그와 그의 손녀를 제외한 모두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섬뜩함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볼 것도 없다.

베르크 란이 나선다면 아서 픽튼은 쉽게 죽을 것이고 주민들은 다시 제국에 복종할 것이다.

선장을 위시한 간부진의 시선이 일제히 루페르트를 향했다.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단순한 구도에 단순하게 해결할 수 있는 사안.

그러나 루페르트의 표정은 심각할 정도로 굳어 있었다.

'확실히 저 사내 하나를 죽인다면 식민지는 확보할 수 있겠지. 스크라엘링과의 싸움에만 집중하면 그만이야. 그러나.'

눈에 밟히는 게 있다.

어둡고 춥고 습한 눈구덩이 안.

루페르트는 저 베르크 란의 뒤에 서 있는 소녀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시체를 헤집으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해 주던 한 사내의 거룩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 또한 기억한다.

아서 픽튼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제국 총독이라는 걸 증명하는 신물을 몸에 품고 있었다.

지금 보이는 행동은 어쩌면 진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루페르트는 늙어 가는 거한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하나의 세상을 지키다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동분서주했지만, 결국 이겨 내지 못하고 죽임당했다.'

그 삶의 형태는 회귀 전 루페르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루페르트는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들었다.

처형 혹은 압송을 원하는 눈동자들이 그를 향한다.

루페르트는 그 무수한 눈동자 중에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흐릿한 안개를 두른 듯한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베르크 란의 뒤에서 그의 손녀 또한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한 번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모두의 눈동자에 실망이 스쳐 간 건 당연한 수순.

그러나 소녀의 눈동자엔 어떠한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빙상 위에 뭔가 있다! 뭔가 보인다!"

마스트 위에서 해상 및 지상을 감시하던 견시원이 날 선 목소리로 소리쳤다.

루페르트는 망원경으로 빙원 저편을 주시했다.

익숙한 마물들이 보인다.

루페르트의 미간이 깊은 주름이 팼다.

'역시 현재 시점에도 스크라엘링은 활동 중인 모양이군. 아직 정착지를 완전히 파괴하는 데 이르지 않았지만, 얼마 남지 않았겠지.'

정착지에서도 이를 알아차린 눈치다.

무너진 종탑에서 쇠바가지를 긁는 듯한 탁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눈 덮인 폐허에서 정착민들이 잡다한 무기를 가지고 모여들었다.

그들의 무기는 조잡하고 행색은 걸인과 다를 바 없었지만, 하나 되어 움직이는 모습은 그들이 이런 상황에 익숙하고 오랫동안 훈련되어 왔음을 말해 줬다.

"꽤 익숙한 것 같군요. 이 사람들."

한스 징펠만이 콧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허나 스크라엘링은 결코 만만치 않은 적수인데."

베르크 란은 사람들의 손에 들린 무기를 보고 있었다.

쇠못을 박은 클럽, 낡은 검, 반 토막이 난 창.

화기는커녕 쇠붙이부터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런 빙상에서 철을 캐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철이라는 건 나무처럼 소모되는 법이니.

부족한 불은 짐승의 지방으로 대체한다고 하지만 철을 대체할 방법은 없다.

그렇기에 대황후는 철괴를 가득 실을 걸 주문한 것이다.

베르크 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는 못 버티겠군."

그의 손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조부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선원들 사이에서 공포감과 불만의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이런 곳까지 왔는데 돈 되는 건 하나도 없고 마물만 한가득이라니."

"빨리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저 인간들 자기 입으로 제국인도 아니라면서?"

웅성임 속에서 루페르트가 선장에게 명했다.

"보트를 준비해 주시오. 다시 한번 총독을 만나 보겠습니다."

의아한 눈빛이 루페르트의 얼굴에 꽂힌다.

흐릿하지만 명백한 불평도 귀에 들려온다.

슈미트 헬젠이 선원들의 입장을 대변해 직접 루페르트 앞에 나섰다.

하지만 루페르트의 얼굴엔 일말의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고 뒤이어 베르크 란이 루페르트의 뒤를 지키듯이 섰다.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에게 조용히 말했다.

"내 호위로는 당신 손녀 정도면 충분할 거 같군요."

손녀라는 말을 듣자, 베르크 란의 눈동자에 미묘한 일렁임이 떠올랐다.

"당신은 한스 징펠만 엽사와 더불어 이 배 쪽을 예의 주시해 주시길 바랍니다."

베르크 란이 손녀에게 손짓했다.

루페르트가 떠나가려는 그를 향해 불쑥 물었다.

"그나저나 당신 손녀, 이름이 뭐죠?"

베르크 란이 루페르트를 힐끗 쳐다보았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에 루페르트는 살짝 주눅이 들었지만, 시선을 돌리진 않았다.

짧고 강렬한 시선의 부딪힘이 있고 난 뒤, 베르크 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를로네."

"마리라고 부르면 되겠군요."

루페르트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베르크 란은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려 버린 후 선장에게 다가갔다.

한편 그의 손녀는 명백한 불쾌감을 담아 루페르트를 노려보았다.

살이 에는 듯한 싸늘함.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시선을 피한 후, 선원 몇 명과 함께 보트 위에 올라탔다.

다시 뭍에 오르자 무기를 든 정착민들의 시선이 루페르트에게 꽂힌다.

적대적이라기보다는 갈등하는 눈초리.

루페르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아서 픽튼의 명에 절대복종하지만, 한편으로는 구원의 동아줄인 루페르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라면 모를까 명백한 위기가 드리워진 지금이라면 해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루페르트는 정착민들을 바라보며 온화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총독님을 뵙고 싶습니다."

총독과의 재회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누구보다 아서 픽튼 자신이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터이니.

* * *

총독과의 두 번째 만남은 그의 관저에서 이루어졌다.

관저라기보다는 눈에 파묻힌 폐허에 가까웠지만, 군데군데 사치스러움이 퇴적물처럼 남은 복도의 세련된 흔적이나 낡은 집기들은 한때 이곳이 부유함으로 이름을 떨친 리히트 보덴의 총독 관저라는 걸 흐릿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몇 없는 총독은 낡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방 안은 바깥보다 더 춥고 으스스했지만 아서 픽튼은 외투를 벗은 채 제국의 불청객을 맞이했다.

"무슨 일이오?"

아서 픽튼이 말했다.

여전히 날이 선 목소리지만 처음 만났을 때의 단호함은 희미해진 상태였다.

자존심을 세우고 있지만, 그조차 지금 상황이 위험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루페르트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스크라엘링."

마물의 이름이 나오자 아서 픽튼이 고개를 돌려 루페르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아냐는 놀라움이 주름진 눈동자 안에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빙해의 마물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혼자서 오지 않고 언제나 무리를 이루어 인간을 공격한다고 들었습니다."

"...이쪽의 곤란을 기회로 삼으려는 거요?"

아서 픽튼은 여전히 자존심을 버리지 않는다.

부쩍 높아진 언성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루페르트는 그런 총독을 가만히 노려볼 뿐이다.

"묻겠습니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총독으로서 당신은 이 땅을 지킬 수 있습니까?"

작고 희미하지만 단호한 꾸짖음이 차가운 실내를 흔들었다.

아서 픽튼의 눈동자 또한 가볍게 흔들렸다.

'이 사람.'

젊다기보다는 어리다고 표현해야 할 나이인데 이 정도 기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의아할 따름이다.

궁색함을 느끼며 아서 픽튼은 오랫동안 마주치던 루페르트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 버렸다.

"당연히."

"당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

"진지하게 모두를 지킬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루페르트가 재차 물었다.

첫 물음에 꾸짖음에 가까웠다면 두 번째 물음엔 이해할 수 없는 절박함이 간절하게 느껴진 것이다.

'뭐지?'

아서 픽튼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자기 백성도 아닌데, 왜 저런 태도를 보이는 걸까.

총독의 감정과 관계없이 루페르트의 물음은 계속됐다.

"당신만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습니까?"

"당연하오."

시선을 돌린 채 아서 픽튼이 인상을 쓰며 답했다.

"무엇으로?"

"무슨 뜻이오?"

아서 픽튼의 눈썹이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무기도 사람도 병사도 부족한데. 당신이 모두의 죽음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스크라엘링의 공격을 잘 버텨 왔소. 이번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

"그건 오만입니다."

아서 픽튼이 다시 고개를 돌려 루페르트를 노려보았다.

"오만이라니."

"누구보다 당신이 가장 잘 알지 않습니까?"

"...?!"

"당신이 위기를 느끼지 않았다면 나를 다시 만났겠습니까?"

"...."

잠깐 노기를 드러내던 아서 픽튼은 고개를 숙였다.

진한 한숨이 거인의 폐부 깊숙한 곳에서 새어 나왔다.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인정한 것이다.

지금 상황이 결코 호락호락한 상황이 아니라는걸.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다.

인정해서는 안 된다.

외부인은, 특히 제국인은 이 땅에 들여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루페르트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총독은 보았다.

"전부 다 죽은 뒤에 후회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진심을 담은 한 사내의 눈동자를.

'이 사람.'

아서 픽튼이 느낀 건 진한 슬픔과 후회다.

그 나이대 젊은이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그러한 회한.

'대체 무슨 경험을 했기에 이런 눈빛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

"부탁입니다."

루페르트가 고개를 숙였다.

"그쪽을 돕게 허락해 주십시오."

아서 픽튼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바깥에서 웅성임이 들려온다.

잠시 의식하지 못했던 발작적인 종소리 또한 다시금 의식을 파고든다.

'어쩔 수 없는 건가.'

총독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루페르트를 응시했다.

이제 총독의 눈동자 안에서 적대감과 의심은 찾아볼 수 없다.

빈자리를 채운 건 두려움이다.

"...우리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소이까?"

"죄라니요?"

"약속할 수 있겠소?"

"무슨 말씀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최대한 힘을 보태겠습니다."

아서 픽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십시오."

그가 루페르트를 데리고 간 곳은 루페르트가 잘 아는 장소다.

시체구덩이다.

회귀 전처럼 시체의 수는 많지 않지만, 꽤 많은 시체들이 얼어붙은 상태로 어둡고 눈으로 뒤덮인 구덩이 안에 방치되어 있다.

루페르트의 옆을 지키던 마를로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곧 선명한 경멸이 그녀의 눈동자 위에 떠올랐다.

아서 픽튼이 고개를 숙였다.

"도펠죌트너는 역시 알아보는군. 죽음의 냄새를 맡는 자들이니."

"...."

아서 픽튼이 마리를 어려워하는 걸 알자 루페르트는 그녀에게 잠시 바깥에 나가 있을 걸 명했다.

그녀가 구덩이를 떠나자 아서 픽튼이 시체 한 구를 가리켰다.

"이걸 보시오."

루페르트는 시체를 보았다.

"이건."

시체의 몸에 상처가 나 있다.

평범한 상처가 아니다.

엉덩이와 넓적다리 쪽에 인위적인 상처가 나 있다.

마치 고기를 먹기 위해 잘라 낸 것 같은.

"가장 어려울 때 우리는 죽은 가족들을 먹었소. 아버지가 아이를, 아이가 어머니를, 형제가 형제를."

아서 픽튼이 등을 보인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나, 호라 교단이 안다면 우리는 모두 화형대 위에 오르겠지. 식인은 중죄이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루페르트는 깨달았다.

왜 총독이 그토록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도움을 거절했는지.

'이것 때문에 우리를 배척한 것인가.'

헛웃음이 나온다.

식인이 중죄인 건 맞다.

호라신이 금지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러나 루페르트는 이들이 감당해야 했을 어려움을 잘 알고 있고 무엇보다 그는 호라의 신도가 아니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리프니에의 사도다.

거구를 축 늘어뜨린 총독을 향해 황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들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

아서 픽튼이 돌아서며 루페르트를 부릅뜬 눈으로 보았다.

"당신들이 식인이라는 죄악을 저지를 정도로 방치한 신의 잘못이지요."

"!!"

이 얼마나 이단적인 발언인가.

이쪽이 계율을 어겼다면 저쪽은 드러내 놓고 신성 모독적인 발언을 하고 있지 않은가.

어느 쪽이 중죄인지는 명실상부하다.

계율의 위반보다 신성 모독은 언제나 더 큰 죄악이다.

그러나 그 엄청난 모독을 저지르고도 루페르트는 빙그레 웃을 뿐이다.

"이 말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 둘만의 비밀이니까."

"다, 당신은 대체?!"

"물론 당신들의 비밀 또한 지켜 드리겠습니다."

황제가 손을 내밀었다.

"루페르트 가우저라는 이름을 걸고."

거구의 총독은 주저하다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합쳐서 손가락이 10개가 되지 않는 손이 서로 굳게 마주 잡았다.

35화 10. 얼음 속에 숨겨진 것 (2)

리히트 보덴의 부두는 너무나 낙후되어 범선이 바로 접안하기엔 지나치게 위험했다.

닻을 내린 때까치호에서 보트들이 부산하게 드나들며 화물을 하역했다.

화물의 대부분은 무기와 철괴였다.

깡! 깡! 깡!

거의 10년 만에 리히트 보덴의 대장간이 가동됐다.

총독처럼 손, 발가락 몇 개를 잘라 낸 늙은 대장장이가 즐겁게 땀을 흘리며 담금질을 했고, 아직 어린 소년과 소녀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익숙하지 않은 불길과 쇳물의 뜨거움을 지켜보았다.

정착지 입구엔 마을 사람 일부가 방책을 보수했다. 철괴와 마찬가지로 때까치호가 가지고 온 잡목을 눈을 잘라 내 만든 벽돌과 뭉쳐 빙상 위의 정착지 다운 단단한 요새를 구축했다.

외로이 서 있는 망루 위엔 총을 가진 선원 두 명이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주시하며 마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야기 들었습니다."

처음과는 전혀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온순해진 총독이 루페르트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제 후보 중 한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의 눈엔 선명한 경탄과 경외심이 떠올라 있었다.

신체의 나이나, 태어난 날짜 같은 건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미 그는 루페르트라는 인물 자체에 깊숙이 빠져 있었다.

무기를 점검하던 루페르트가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슈발츠마인 선제후가의 방계이긴 합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선조인 비두킨트 씨족 일원에 불과할 뿐, 선제후 가문의 일원으로는 대접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힘도 재산도 없는 들러리 후보죠."

"...그렇군요."

아서 픽튼의 깊은 눈이 좌우를 살폈다.

루페르트를 비롯한 선원 일부가 작업을 돕고 있으나 때까치호의 승무원 대부분은 배 안에 머물러 있었다.

선원들이 전투 참가를 거부했다.

애당초 계약서상에 해상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전투 이외엔 전투에 참가할 필요가 없다고 기재되어 있다.

해적이나 북부인을 만난다면 모를까, 이런 추운 곳에서 정체불명의 마물과 싸울 의무가 없는 것이다.

일부 적극적인 선원을 제외한 나머지는 마지못해 짐을 하역하는 정도만 거들 뿐이었다.

루페르트는 아서 픽튼의 시선을 눈치채고 배 쪽을 보았다.

갑판 위엔 베르크 란과 한스 징펠만이 있다.

루페르트의 최강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두 명이 배의 통제에 묶여 있는 것이다.

여기서 베르크 란을 뺄 순 있지만, 한스 징펠만을 뺄 순 없다.

이는 한스 징펠만이 요구한 일이다.

"저까지 배에서 내린다면 선원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평소 온건한 선원이라고 할지라도 빙해의 마물들과 마주치면 판단이 흐려지고 평소라면 결코 상상도 못 해 봤을 일을 저지르곤 하니까요. 선원들이라는 건 바다와 비슷합니다. 잠잠하다가도 배를 집어삼킬 정도로 날뛰는 파도가 될 수도 있지요."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고급 선원의 불만도 상당했다.

특히 믿었던 페르난도 오르도 선장이 가장 노골적인 변화를 보였다.

"선원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그는 수시로 돌아갈 걸 요구했다.

남쪽 사람인 그에게 빙해의 추위는 견디기 어려웠을뿐더러 빙상에서 마주친 끔찍한 스크라엘링 무리는 외국인임에도 자신을 써 준 루페르트에 대한 감사를 능히 덮어 버릴 정도의 공포를 선사했으니.

루페르트는 그때마다 거부 의사를 피력했지만, 페르난도의 요구 또한 점점 구체성을 띠어 갔다.

"정착민들과 이야기한 선원들이 말하더군요. 정착지 안에 돈이 될 물건은 하나도 없다고. 제국과 연락이 끊어지고 기근이 닥쳤을 때 저 아서 픽튼이라는 자가 역정을 내며 제국에 바칠 사치품을 모조리 바다에 던져 넣었다고 합니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페르난도의 표정엔 불만이나 불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합리성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점에서 루페르트는 대황후의 충고를 깊이 되새겼다.

'이래서 외국인을 쓰지 말라고 말씀하셨군.'

외국인에게 정착민 몇 명의 죽음 따윈 관계없는 사건이다.

그들이 무슨 험한 꼴을 당하건 몰살을 당하건 잠깐 묵념의 대상이 될 순 있어도 구속될 이유는 없다.

그렇기에 그는 칼같이 잘라 말할 수 있다.

"남작님께서 전투를 고집하신다면 말리시진 않겠지만, 선원들은 이에 따르지 않을 겁니다."

루페르트는 한 사내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클로버스 주교가 있었다면 선원 상당수를 전투원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겠지.'

클로버스 주교는 다른 시간 축에서 만난 사람. 정식으로 대황후의 의뢰를 받지 않는 지금은 별개의 타인이다.

선원들은 썩 괜찮은 전투원이다.

특성상 총기 사용에도 능하고 백병전에 대한 대비도 훌륭하다.

오랜 기아와 영양결핍에 시달린 정착민에 비할 바는 아니다.

페르난도와 달리 고문 슈미트 헬젠은 전투에 적극적이었다.

"스크라엘링. 책으로만 보던 그 빙상의 마물을 보게 될 줄이야. 한 마리 잡아서 해부를 해 보고 싶군요."

슈미트 헬젠을 따르는 선원도 다수 있다.

슈미트 헬젠을 포함해 열다섯은 족히 넘는다.

상당한 전력이다.

허나 루페르트는 슈미트 헬젠을 배에 남겨 두기로 했다.

그만의 생각이 아니다.

[ 저 사람은 남겨 두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루페르트 가우저. ]

오랫동안 침묵하던 여신님이 입을 열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전투 중에 배가 떠나 버리기라도 한다면 바로 나팔을 불어야 하니.

애당초 슈미트 헬젠은 페르난도를 견제하기 위해 들인 인물이다.

리히트 보덴에 도착할 때만 해도 페르난도는 믿음직한 선장이었지만, 지금은 잠재적인 위협이 되었다.

실제로 그가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동조하는 선원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 다른 배의 한 축, 군터 야스펠은 조용히 중립을 지키고 있지만 그가 루페르트의 방침에 적극 따르지 않는 건 명백한 사실.

루페르트는 상당한 보수를 약속하며 선원들을 한 명이라도 더 전투에 투입하려 시도했지만, 결과는 시원치 않았다.

저 망루 위에 서서 스크라엘링을 감시하는 십 대 소년 선원 이외엔 아무도 뭍에 오르려 하지 않았다.

루페르트와 아서 픽튼이 전투 준비를 하며 동분서주하는 동안 스크라엘링 무리는 더욱 가열차게 그 숫자를 불렸다.

"못해도 천 마리는 족히 넘을 거 같네요."

선원들의 보고를 들으며 루페르트는 아서 픽튼에게 고개를 돌렸다.

"원래 이렇게 많습니까?"

아서 픽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숫자가 불어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것들의 본진은 저 까마득한, 말 그대로 빙하로 뒤덮인 바다 건너의 영구 동토거든요."

"지금까지 어떻게 버틴 겁니까?"

정착민 수의 숫자는 이백 남짓.

제대로 된 전투원은 여성을 포함해 절반에 불과하다.

"제가 지키고 있었으니까요."

아서 픽튼은 늙었지만, 여전히 건장하고 강한 힘의 소유자다.

손가락이 몇 없지만 무기를 쥐는 자세나 사람들을 가르칠 때 힘참은 확실히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상당한 강자다.

하지만 그 혼자서 저 많은 무리를 상대할 수 없다.

당장 도펠죌트너인 마를로네마저도 숫자의 폭력 앞에서 무너지지 않았던가.

"우두머리가 있습니다."

아서 픽튼이 조용히 적들의 비밀을 말했다.

"우두머리요?"

"네. 스크라엘링. 저 저주받은 자들에겐 전투 무리를 이끄는 족장 같은 게 있지요. 그놈만 쓰러뜨리면 저 마물들은 왕겨처럼 흩어집니다."

아서 픽튼이 무너져 가는 예배당 지붕 위로 루페르트를 데리고 왔다.

아서 픽튼의 억센 손이 눈 덮인 가죽을 벗겨 냈다.

"이건?"

가죽 안엔 거대한 석궁이 숨겨져 있었다.

"발리스타라는 고대의 무기입니다. 룸인들의 무기지요."

정착민 장정 두 명이 거대한 화살을 힘겹게 들고 올라왔다.

아서 픽튼은 그 거대한 화살을 손가락 3개밖에 없는 한 손으로 가볍게 잡으며 발리스타의 장전대에 올려놓았다.

"이 녀석으로 우두머리를 관통했죠."

아서 픽튼이 장전 도르래를 돌리기 시작했다.

두꺼운 방한복을 입고 있지만 상박이 터져나갈 정도로 육중한 근육이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무시무시한 힘이다.'

루페르트는 속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철컥-

발리스타의 장전이 완료됐다.

아서 픽튼은 그 거대한 고정 포대를 장난감처럼 이리저리 돌리며 사각을 보더니 힐끗 뱃전을 쳐다봤다.

"그나저나 함께 데리고 온 분 중에 도펠죌트너가 있던데."

"두 명입니다."

"...."

아서 픽튼의 얼굴이 묘하게 굳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전장에서 황제의 검은 무엇보다 믿을 수 있는 든든한 동료지요. 그런데 그중 하나. 저 배에 타고 있는 사람."

"그의 이름은 베르크 란입니다."

"베르크 란이라.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인데 아무튼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드는군요."

"과거에 철혈대제 아래서 복무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어쩌면 그때 함께 전장에서 싸웠던 도펠죌트너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서 픽튼의 얼굴엔 여전히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루페르트가 눈을 반짝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선제에 대해 잘 아십니까?"

"선제 말입니까?"

아서 픽튼의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자신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번뇌 같은 감정에 사로잡혔으리라.

"글쎄요. 제가 그분을 옆에서 모시긴 했지만,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잔인한 통치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잔인하고 비정했죠. 하지만 언제나 결과는 좋았습니다. 늘 승리했고 늘 성공했죠. 그 과정에서 늘 희생이 있었지만, 그분을 믿고 따랐습니다. 우리 같은 자에게 승리만큼 신뢰감을 안겨다 주는 과실은 달리 없었으니까요."

승리를 말하는 사내의 얼굴엔 그러나 짙은 패배감이 묻어 있었다.

"...정작 자신이 희생양에 오르기 전까진 말이죠."

루페르트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모호함이 젊은 황제의 몸을 달게 했다.

'철혈대제.'

루페르트는 한 사내를 생각했다.

홀로 영원한 시간의 틈바구니에 앉아 있던 노인을.

* * *

스크라엘링의 결집이 점점 늘어나는 가운데 밤이 찾아왔다.

"배로 피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오늘 밤, 놈들이 공격을 시작할 것 같으니까요."

아서 픽튼이 대피를 권고했다.

그러나 루페르트의 결심은 처음부터 확고했다.

"함께하겠습니다."

"...남작님."

이쪽도 생각은 있다.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

그것이 루페르트의 가장 큰 장점이다.

보험으로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 란. 두 도펠죌트너를 모두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였다.

전투에서 패배한다고 해도 둘이 시간을 끌어 주는 이상 회귀를 할 찬스는 벌 수 있으니 말이다.

'설령 여기서 패하더라도 놈들의 약점을 알아가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같은 사건의 반복뿐이다. 책갈피로 회귀의 수고로움을 덜었다고 하나, 같은 사건을 경험하는 건 지루한 일이니까.'

때까치호의 증원은 없었다.

루페르트와 도펠 죌트너가 전부다.

자원했던 두 명의 견시원도 나이 지긋한 선원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배로 돌아갔다.

루페르트는 그것까진 말리지 않았다.

허나 명백히 전력이 부족한 건 사실이다.

전운이 고조되는 가운데 보트 한 척이 때까치호에서 어두운 부둣가로 힘차게 노를 저어 왔다.

한 무리의 선원이 배에 탑승하고 있었다.

한 사내가 선원들을 이끌고 왔다.

그는 루페르트를 보자 과할 정도로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이 사람은?'

"남작님에게 인사드립니다."

고급 선원은 회귀 전과 같은 사람으로 채워 넣었지만, 선원까지 동일하게 채워 넣는 건 불가능했다.

일부는 다른 배를 타고 있고 일부는 다른 지역에 있었으니.

절반 정도는 같은 인원으로 구성했지만, 나머지는 새로 구해야 했다.

문제는 시간.

루페르트는 전처럼 일일이 통찰의 만화경을 사용하는 대신 전과가 없고 의심 가는 경력이 없는 선에서 빠르게 인원을 선발했다.

이 강한 동부 억양을 지닌 사내는 그 새로운 선원 중 한 명이다.

루페르트는 이 낯선 사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매부리코에 주걱턱, 구부정한 허리.

호감 가는 인상은 아니지만, 사물을 꿰뚫어 보는 듯한 짙은 갈색 눈동자엔 묘한 매력이 있다.

"다들 전투를 꺼리는 눈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닙니다. 노르드마르크 뱃놈 특유의 동료 의식에 묶여 전투를 원하면서도 몸을 사리던 친구들이 있었죠."

동부 억양이 강하게 배어든 목소리는 탁하고 흐릿했지만, 눈동자처럼 묘하게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대의 이름은?"

루페르트가 물었고 선원이 대답했다.

"만슈타인입니다."

'만슈타인.'

얼굴은 모르지만, 기억에 있는 이름이다.

그럴 만한 포인트가 있다.

'이 친구였나. 대학을 다녔다는 친구가.'

중퇴생이라고 들었다.

대학을 다니다가 중퇴를 해 배를 탈 정도면 제대로 된 인생은 살지 않았을 것이다.

여느 대학생처럼 공부는커녕 술만 먹고 행패를 부리는 삶을 살았으리라.

그러나 저 무지렁이 선원 집단 가운데서는 능히 엘리트로 자부할 수 있는 학식 정도는 갖추고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위기 속에 기회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이 얼음 굴에 급료나 벌자고 온 건 아닙니다. 더 큰 기회를 찾기 위해 온 거죠. 해서 남작님을 도우러 왔습니다."

'이 사내.'

보통내기가 아니다.

만슈타인에겐 뭐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기이한 아우라가 흘러나왔다.

오로지 자신을 무한히 신뢰하는 사람만이 풍길 수 있는 그러한 광휘가 말이다.

황제 시절 그러한 인간들을 본 적이 있었다.

황제라는 타이틀을 가지고도 늘 무대의 구석에 있던 그와 달리, 광휘를 두른 사람은 역사의 무대 중심에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였고 검을 휘둘렀으며 화려하게 퇴장했다.

그 만슈타인에게 특별함을 느낀 건 루페르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 어머. ]

리프니에가 탄성을 발했다.

36화 10. 얼음 속에 숨겨진 것 (3)

[ 이 사람, 운명이 요동치고 있네요. 일견 평범한 운명으로 보였지만 당신이라는 존재와 만나 큰 변화를 맞이하려 하고 있어요. ]

루페르트가 돌아서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렇습니까?"

[ 네. 천천히 지켜보죠. 그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은가요? ]

리프니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개처럼 질질 끌고 툴툴거리는 기괴한 나팔 소리가 낮에 울려 퍼졌다.

스크라엘링의 것이다.

아서 픽튼이 발리스타 앞에서 소리쳤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반쯤 깨진 종탑 위의 종이 거칠게 흔들리게 기괴한 경고를 정착지 전체에 퍼뜨렸다.

노약자들은 집 안에 대피했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남녀를 막론하고 무기를 들고 방책 위에 섰다.

궁금증을 뒤로 미뤄 두고 루페르트는 만슈타인에게 아서 픽튼의 지시에 따를 걸 명했다.

"알겠습니다. 남작님. 하지만 제 동료들은 제가 지휘하고 싶은데 윤허해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만슈타인은 총기와 할버드 등으로 무장한 선원들을 데리고 방책의 한 구역으로 향했다.

건장한 체격, 영양 상태, 전투에 대한 열의.

그들은 정착민보다 훨씬 믿음이 가는 전투원이다.

그것도 선상 반란이라는 위험 요소 없는 자원자만 모였다.

루페르트는 아서 픽튼에게 향하기 전에 배 쪽을 보았다.

잦아드는 석양 너머로 어둠에 잠기고 있는 뱃전엔 한스 징펠만과 그의 도제들이 저마다 위치에 선 채 적은 물론 선상을 감제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불온한 기색이 보인다면 한스 징펠만의 총구는 스크라엘링이 아니라 반역자의 미간을 꿰뚫을 것이다.

루페르트는 아서 픽튼에게 향했다.

"어떻습니까? 전황은? 이길 것 같습니까?"

이겨야 한다.

이겨야만 한다.

적어도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아서 픽튼의 얼굴은 어둠의 베일을 한 꺼풀 뒤집어쓰고도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굳어 있었다.

"보, 보이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놈들의 우두머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직감적으로 루페르트는 아서 픽튼의 당황을 읽어 냈다.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는 소린가.'

"분명 놈들의 우두머리는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덩치가 크거나 우두머리라는 걸 알려 주는 조잡한 왕관과 장식을 두르고 있을 터인데 이번에 덮친 무리엔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발리스타의 발사대를 쥔 손가락 몇 개가 없는 손이 덜덜 떨렸다.

"놈들도 학습을 한 것이지요. 몇 번이고 공격이 격퇴됐으니."

"우리 전력만으로는 막기 어렵습니까?"

"불가능할 겁니다."

아서 픽튼이 절망적인 시선으로 방책 위에 선 정착민들을 둘러보았다.

"정착지의 인구가 천 명에 달하던 때에도 패배할 뻔했습니다. 지금보다 잘 먹고 추위에 시달리지도 않고 무기도 충분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열악하고 거기다 놈들의 숫자는...."

"진정하세요. 총독. 아직 패배한 건 아닙니다."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도 루페르트는 뼈저리게 체감했다.

패배의 그늘이 이미 정착지 전체를 뒤덮고 있다는걸.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바로 옆에서 따끔거린다.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 란의 시선이다.

'이대로는 저들의 불만도 터져 나온다. 하지만 적어도 실마리는 찾아야 한다. 무익한 회귀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

포성이 울려 퍼졌다.

때까치호의 선회포가 불을 뿜은 것이다.

포탄은 정착지 위와 정착민의 머리 위를 지나 스크라엘링의 전열을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피 분수가 빙원 위에 흩뿌려지며 분리된 살점들이 빙원을 물들였다.

탕! 탕!

방책 위에 거치된 총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스크라엘링 몇 마리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그것은 노도처럼 몰려오는 마물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곧 마물의 파도가 방책에 닿았다.

성난 발톱이 머리 위의 인간을 해하려 벽을 긁어 댔고, 뒤편에서 달려온 스크라엘링들이 동료의 머리를 밟고 방책 위로 뛰어올랐다.

인간의 쇠붙이가 놈들의 복부를 찔러 떨어뜨렸다.

단창과 할버드, 파이크와 곤봉 등 잡다한 무기들이 춤을 추며 방책 위를 오르는 스크라엘링을 밀어냈다.

최초의 반격은 성공적이었으나 놈들의 숫자는 끝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어둠이 짙어지고 있다.

어둠 속에서 마물을 힘을 얻고 인간은 힘을 잃는다.

보이지 않은 깜깜함 속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비명은 폐허 안에 웅크린 인간들의 공포를 극한으로 자극했다.

아기가 우는 소리가 높게 울리고 아낙의 흐느낌과 기도가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익숙한 아우성 속에서 루페르트는 마음이 차게 식는 걸 느꼈다.

'그때와 같다. 그때와.'

테타우가 함락되던 날.

루페르트는 같은 소리를 들었다.

"...."

베르크 란이 그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할 말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루페르트는 그를 무시했다.

살기 어린 눈빛이 꿰뚫어 버릴 것처럼 루페르트의 옆얼굴을 찔렀지만, 루페르트는 잠시 위축됐을 뿐이다.

그는 다시금 아서 픽튼 앞에 섰다.

고지대의 발리스타 앞에서 그는 표적을 잃은 채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방황하고 있었다.

"또 없습니까?"

루페르트가 달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까지 부드러움과 점잖음이 씻겨 나간 힘 있고 박력 있는 물음.

"우두머리의 특징 말입니까?"

"그, 그건."

아서 픽튼은 전의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겁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을 것이다.

장기간의 고통과 절망이 저 거한을 밑바닥부터 좀먹었고, 결국 공포에 굴복하게 만들었다.

루페르트가 위엄 있는 어조로 일갈했다.

"제국 기사 아서 픽튼!"

"!!"

갑작스러운 고함에 아서 픽튼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루페르트를 부릅뜬 눈으로 보았다.

"생각하시오. 우두머리의 또 다른 특징을!"

루페르트는 자신의 뒤편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도펠죌트너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나에겐 제국의 검이 있소."

루페르트는 배를 가리켰다.

"여차하면 선원들을 전부 투입할 수도 있소."

"...."

아서 픽튼이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다.

손자뻘밖에 안 되는 어린놈에게 한 소리를 들은 수치감, 보여 줘서는 안 될 모습을 보였다는 수치감.

두 가지 수치감이 뒤섞여 늙은 거한의 얼굴을 석양보다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우, 우두머리는."

아서 픽튼이 입술이 터질 정도로 굳게 깨물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순간 총독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잠깐 망각했던, 영원히 떠오르지 않을 것 같은 기억의 사각이 훤히 드러난 것이다.

바로 저, 루페르트 가우저라는 젊은 태양에 의해.

"마법!"

아서 픽튼이 크게 뜬 눈으로 소리쳤다.

"놈은 마법을 쓴다오! 마법을 써요! 그래! 우두머리는 늘 마법을 썼어! 조잡한 것이지만!"

잠깐의 흥분은 그러나 곧 잦아드는 목소리와 함께 가라앉았다.

"그, 그런데 그걸 여기서 어떻게...."

마법을 쓰는 걸 아는 것과 마법을 쓰는 개체를 찾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잠시 찾았던 희망의 불이 급속도로 꺼지려는 순간이었다.

루페르트가 종탑 아래로 내려갔다.

"갑시다."

두 도펠죌트너를 거느리고.

등만을 보인 루페르트 가우저의 눈엔 기이한 녹색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는 한 여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손엔 그가 생각하는 여인의 카드가 들려 있었다.

[ 피리스 홀리바레스 ]

아직 꿈꾸는 완성되지 않은 마법사.

피리스 홀리바레스의 영혼 각인 능력은 마법사의 후각.

마법의 기운을 읽는 능력이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지만 루페르트의 눈엔 보인다.

저 수많은 스크라엘링 중 유독 강렬한 마법의 기운을 품고 있는 녀석이.

다른 놈들처럼 똑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지만 루페르트는 알 수 있다.

'아서 픽튼에게 말해서 저격을 하기엔 지나치게 먼 데다가 어두워. 거기다 한 발밖에 없는 발리스타가 빗나가면 정착민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질 게 뻔해.'

그가 믿는 건 또 다른 카드다.

아직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은 타인들.

"베르크 란 님."

루페르트가 붉은 명찰을 단 초로의 사내를 향해 공손히 올려다보았다.

"죽여 줘야 할 녀석이 있습니다."

루페르트는 종탑의 중간에서 문제의 스크라엘링을 지목했다.

"저 녀석을 처리해 줄 수 있습니까?"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다.

"...."

베르크 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루페르트는 톱니바퀴가 어긋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침묵 속에서 베르크 란의 중저음의 음성이 이어졌다.

"내 임무는 당신의 경호지, 죽으러 가는 돌격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배로 돌아갑시다."

'이 사람.'

그뿐만 아니다.

그의 손녀도 불쾌하면서도 짜증 난 눈빛으로 배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루페르트는 머릿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었지. 이 사람들은 내 영혼 동맹이 아니야. 이들은 그저 대황후의 명을 받고 날 지켜 주는 사람들이었지.'

지나치게 많은 걸 요구했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도 루페르트도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루페르트는 들었다.

테타우에서 듣던 것과 같은 종말의 소리를.

'이대로 회귀를 해야 하나.'

죽으면 끝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오기가 생겼다.

정확히는 두려움이 생겼다.

다음 시간 축에서도 지금처럼 몸이 뜨거울 것인지.

온몸을 감싼 영혼마저 태워 버릴 것 같은 열정을 다시금 느낄 수 있을까?

다시 저 아서 픽튼에게 소리치고 베르크 란의 시선을 무시할 수 있을까?

수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루페르트는 조용히 두 주먹을 쥐었다.

'해 보자.'

베르크 란이나 아서 픽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의 육체는 상당히 단련된 육체다.

검술과 기예 또한 평균 이상.

자랑은 아니지만 때까치호에서도 몇 명을 빼면 다 이길 자신이 있을 정도다.

무엇보다 루페르트의 마음속엔 계산이 섰다.

'나는 사람을 부리는 자다. 여신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루페르트는 만슈타인에게 다가갔다.

치열한 전투를 펼치며 적을 막던 중에도 그는 루페르트를 보고 이를 드러내며 웃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총독의 말에 의하면 우두머리만 쓰러뜨리면 놈들은 흩어진다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우두머리를 알 수 있습니까?"

"느낌이 오는 놈이 있습니다."

만슈타인은 기민한 사람이다.

그 치열한 전투 중에서도 몇 명을 추려 내어 특공대로 재편성했다.

'이 사람.'

처음 본 게 틀리지 않았다.

만슈타인은 그 어떤 누구보다 자신의 운명을 굳게 믿고 있다.

총탄이 오가는 전장 한가운데에서도 나만은 죽지 않을 거라는 그런 종류의 믿음을.

"자,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어디로 모시면 될까요?"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에도 베르크 란 조손의 살벌한 눈빛이 뒤통수를 찔러 온다.

'그렇게 노려봐도 내 생각을 꺾진 않겠어.'

루페르트는 차오르는 미소를 억누르며 검을 빼 들었다.

"그럼."

선원 하나가 신이 난 얼굴로 뿔피리를 불었다.

"남작님, 아니 황제 폐하의 행차시다!"

만슈타인이 쾌재를 부르며 가장 먼저 아래로 뛰어내렸다.

성난 스크라엘링들이 발톱으로 할퀴려 들었지만, 만슈타인과 뒤이어 따라온 선원들의 검과 할버드에 찢겨 나갔다.

루페르트도 방책 아래로 뛰어내렸다.

"미친 짓을!"

지켜보던 베르크 란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냈다.

그의 손녀가 쓴웃음을 머금으며 그의 조부를 응시했다.

"할아버지."

쓴웃음을 머금은 채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조부를 밀었다.

"도와줘. 밥줄 끊기는 건 딱 질색이니. 거기다 그 할망구 성난 얼굴 볼 거 생각하면 어휴."

"네가 가라."

"싫어."

"...."

베르크 란이 움직였다.

순간 모두가 홀린 듯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기묘한 기운이 초로의 사내의 전신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발리스타 앞에서 망연자실 서 있던 아서 픽튼 또한 베르크 란을 발견했다.

횃불 아래 일렁거리는 그 얼굴을 본 순간 아서 픽튼은 빛바랜 기억의 일부분이 떠오르는 걸 느꼈다.

"저, 저 사람은?"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 베르크 란이 방책 아래로 뛰어내렸다.

방책 아래엔 루페르트와 만슈타인 일행이 악전고투를 하며 스크라엘링과 싸우고 있었다.

우두머리의 목을 딴다고 호기롭게 외쳤지만, 자기 목숨 건사하기도 버거운 상황이다.

한숨을 내쉬며 베르크 란이 말했다.

"미친 짓을 하는군."

이에 루페르트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들을 움직일 수 없잖소?"

"!!"

한 방 먹었다.

저 그저 황실의 핏줄을 물려받았을 뿐인 애송이에게.

하지만 유효타다.

베르크 란이 얕은 한숨을 쉬며 묻는다.

"...어떤 놈이오?"

제국의 검이 고집을 꺾었다.

루페르트는 감정을 절제하며 전장 한구석을 가리켰다.

"저놈입니다. 저기, 두건 같은 걸 뒤집어쓴 놈 뒤에 웅크리고 있는."

"...."

베르크 란이 방책 너머로 소리쳤다.

"마리!"

그 이름을 부르자 모자를 쓴 소녀가 한 마리 새처럼 사뿐히 조부 옆에 착지했다.

"남작님을 지켜라."

"응."

마리라고 호명된 소녀가 약간의 불만을 담아 루페르트를 노려본다.

하지만 아주 싫지만은 않은 눈치.

적어도 몽환적인 안개를 머금은 눈동자엔 적대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베르크 란이 검을 뽑았다.

그의 검은 칼날이 불길처럼 휘어진 양손 대검.

"...우리는 제국의 검이니."

검이 불타오른다.

감당하기 어려운 살의의 파동과 함께.

그 기세에 스크라엘링들이 일제히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이 사람.'

알고는 있었다.

이 베르크 란이라는 사내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실제로 본 그의 진심은 황제인 그조차 주눅이 들 정도였다.

"그럼."

베르크 란이 섬전처럼 앞으로 뛰쳐나갔다.

수십 마리의 스크라엘링이 앞을 막아서지만 불타는 검 앞에 도륙이 나 흩어질 뿐이다.

"괴, 괴물이군."

만슈타인이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불타는 궤적이 전장에 일직선을 새겨졌다.

단 한 명의 인간이 수백 마리의 마물의 벽을 뚫고 일점으로 돌파했다.

그 믿기지 않는 광경에 인간은 물론 스크라엘링마저 잠시 넋을 잃고 쳐다볼 정도였다.

폭풍처럼 전열을 가른 베르크 란 앞에 눈을 휘둥그레 뜬 스크라엘링이 보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검격이 마물을 둘로 갈랐다.

평범한 살육이나 루페르트의 눈엔 다르게 비쳤다.

구름처럼 모인 마법의 기운이 흩어지고 있다.

그 결과는 즉각적이다.

스크라엘링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왕겨처럼, 무질서하게.

빙해의 마물은 그들이 기어 나온 혹한의 대지로 돌아갔다.

부우우우우우--

만슈타인이 직접 승리의 나팔을 높이 불었다.

믿기지 않는 승리 속에서 종탑 위에 선 총독은 반평생을 함께한 무기 아래 스러져 내리듯 무릎 꿇으며 하나의 이름을 기억한다.

"이제 기억나는군. 외국인 연대에 부르봉 왕국 특유의 비음 섞인 사투리를 구사하던 촌놈이 있었지."

아서 픽튼이 몸을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쟝 끌로드 란."

그의 시선은 유유히 돌아오는 한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철혈대제의 챔피언."

37화 10. 얼음 속에 숨겨진 것 (4)

"이 정착지의 개척을 지시한 건 클라우데 2세, 철혈대제 본인이었습니다."

이른 새벽, 루페르트는 아서 픽튼과 함께 정착지의 외곽으로 향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처음에 이 섬에 도착할 때만 해도 섬은 초록색의 대지였습니다. 날씨는 충분히 온화해 소와 양을 기를 수 있을 정도였고, 짧지만 간단한 농사 정도는 지을 수 있을 정도였죠. 그리고 바다. 이 빙해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부가 숨겨져 있었죠."

아서 픽튼은 당시의 풍요로웠던 나날이 눈 앞에 펼쳐지기라도 한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이곳에 와서 부자가 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술주정뱅이, 다리를 저는 병사, 거리의 악사, 심지어 매춘부까지 모두가 일생에 다시 오지 않을 거금을 손에 쥐었지요. 물론 그 부유함의 가장 큰 조각을 차지한 건 클라우데 2세였습니다."

"클라우데 2세."

철혈대제라 불리운 루페르트의 선제.

그가 죽었다는 건 세상이 알고 있지만, 그가 어떤 죽음을 맞이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황제였던 루페르트조차 선제가 어떤 식으로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알지 못한다.

그가 기억하는 건 황궁의 벽에 장식된 선제의 벽에 조각된 선제의 모습뿐.

한 가지 확실한 건, 선제는 위대한 황제였다는 것이다.

'시간의 회랑에 있는 그 노인은 필경 클라우데 2세일 것이다. 처음 볼 땐 알아보지 못했지만 보면 볼수록 그 사람은 선제의 조각상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그분은 이곳에서 실어 나르는 부로 군대를 유지했고 영지를 경영하며 힘을 키우고 선제후를 견제하고 마침내 모두를 휘어잡고 세상을 호령했지요."

"이 땅이 선제의 부의 원천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아서 픽튼은 거리를 두고 뒤따라오는 베르크 란과 그의 손녀를 조심스럽게 응시했다.

"...저 사람은 왜 저런 운명을 맞이했는지."

"저분을 아십니까?"

루페르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짧은 시간 함께 군 복무를 한 적이 있지요. 하지만 그가 선제가 가장 신뢰하던 전사라는 건 알고 있지요. 그는 최초의 도펠죌트너 중 하나였고 무수히 많은 전장에서 활약했습니다."

"...."

"하지만 그의 얼굴은 과거의 광휘를 잃었군요. 못 알아본 게 무리도 아닙니다. 그 쾌활하고 순수하던 부르봉인이 저렇게 음침하고 살벌한 마치 망령 같은 존재가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아서 픽튼의 발걸음이 멈췄다.

둘 앞엔 눈 무더기가 가로막고 있었다.

혹한의 대지에 널려 있는 여느 눈 무더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아서 픽튼은 망설임 없이 부족한 손가락이 달린 큰 손으로 눈을 파헤쳤다.

"이것은?"

루페르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숨겨진 바닥 문이 있다.

아서 픽튼이 문을 열어젖히자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왔다.

"어디로 통하는 길입니까?"

선원에게 들었다.

정착지가 고립되고 구원의 희망마저 사라졌을 때 아서 픽튼은 정착민 앞에서 보란 듯이 진귀한 바다의 보물을 바다에 던져 버렸다고.

정착지엔 돈이 되는 게 없다.

선원들이 전투에 참가하기 꺼렸던 주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 소문은 사실과는 달랐던 모양이다.

"제가 사치품의 일부를 바다에 버린 건 맞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착민들의 분노를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횃불을 든 아서 픽튼이 층계를 내려갔다.

루페르트는 알 수 없는 야릇한 고양감을 느끼며 총독의 뒤를 따랐다.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것들이 보인다.

"하지만 총독으로서 저의 임무는 단 하나."

아서 픽튼이 돌아섰다.

그의 뒤엔 은빛으로 빛나는 무수히 많은 뿔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빙상의 부를 제국에게 가져다주는 것이지요."

"이건."

틀림없다.

아서 픽튼의 뒤에 쌓인 저 뿔들은 빙해의 가장 진귀한 보물, 일각수의 뿔이다.

남쪽 미지의 땅에서 수입되는 상아와 맞먹을 정도로 진귀한 재보.

한 배에 다 실을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보물들이 루페르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서 픽튼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남작님이 황위 계승권자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무시를 했지요. 그러나."

아서 픽튼이 고개를 숙였다.

"이 부를 남작님에게 온전히 바치겠습니다."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남작님은 우리들의 은인. 그리고 버림받은 우리를 돌아봐 준 유일한 제국인입니다. 선제 클라우데 2세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 리히트 보덴은 루페르트 가우저 님, 당신에게 우리의 모든 부를 바칠 것입니다."

순간 루페르트의 손안에 카드 한 장이 나타났다.

'이, 이것은?'

틀림없다.

카드의 군단.

[ 아서 픽튼 ]

새로운 영혼 동맹이 루페르트의 군단에 합류한 것이다.

고개를 숙인 총독을 내려다보며 루페르트는 통찰의 만화경을 사용했다.

[ '세상의 끝의 외로운 개척자' 아서 픽튼 ]

- 등급

A- 특징

강철의 정신 B+

노련한 섬나라의 전사 A+

빙해의 총독 A

- 영혼 동맹 효과

북부의 힘 A

눈동자에 일렁거리는 부정한 빛이 사라지는 순간과 맞물려 새로운 영혼 동맹이 고개를 들었다.

"일어서시지요."

루페르트는 몸소 총독을 일으켰다.

"우리는 비밀을 공유한 사이입니다. 같은 배를 탄 것이지요."

루페르트가 손을 내밀었다.

총독은 그 손을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얼굴로 응시하다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다시 한번 합쳐서 열 개가 되지 않는 손들이 굳게 맞잡았다.

"부탁하겠습니다. 총독."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폐하."

"...."

아마 처음일 것이다.

타인에게 어떤 사심도 없이 황제로 인정받은 건.

아직 그는 황위에 오르지도 않았고, 제관을 쓰지도 않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인정받은 이 기분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 그리고 이건 제가 들어도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입니다만 그래도 남작님에겐 알려 드려야 할 거 같아서 결례를 무릅쓰고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아서 픽튼이 주위를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밀을 공유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분위기가 심상찮다.

루페르트는 자세를 낮추며 아서 픽튼의 입을 주시했다.

"지금은 죽은 목동의 증언입니다."

거대한 화산 폭발이 정착지를 덮치고 제국과의 연결이 끊어졌을 때만 해도 아직 리히트 보덴은 건재했다.

쌓은 식량과 자재는 충분하고 인명 피해도 거의 없었으니.

그때 외곽에서 양을 치던 목동이 한 사람을 만났다.

점점 겨울이 다가오고 대지 전체가 얼어붙어 가는 혹한임에도 얇은 수도승의 로브 하나만을 걸쳤고 맨발로 진눈깨비 쌓인 대지를 걷고 있었다 한다.

더욱 기이한 건 명백한 외부인임에도 불구하고 타고 온 배의 흔적이나 동료는 눈 씻고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사내가 한 잔 물을 청해 마시고는 목동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즉시 이 섬을 떠나시오. 욕심을 버리고 남은 자재를 활용하면 조촐한 배나마 만들 수 있겠지. 하지만 서두르시오. 곧 버림받은 자식들이 이 땅을 덮칠 터이니."

자기도 알 수 없는 경외감과 신비감에 압도당한 목동이 결례를 무릅쓰고 그 신비인의 이름을 물었다.

이에 신비인이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발렌티아누스. 세간에선 통풍의 발렌티아누스라고들 하더군."

루페르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경악이 떠올랐다.

"발렌티아누스...?!"

제국의 여덟 성인 중 하나와 이름이 일치한다.

동명이인이 아니다.

스스로 자신을 통풍의 발렌티아누스라고 했다.

제국의 수호성인은 제국에 유행하는 주된 질병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니까.

즉, 그는 자신이 제국 성인이라고 말했다.

"그 사람이 진짜 제국 성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흔적도 사라졌고 그의 말대로 스크라엘링이 공격을 시작했지요."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다.

아서 픽튼 조차 반신반의하는 동화 속 이야기다.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루페르트는 한 사내를 떠올렸다.

제국을 거의 끝장낼 뻔한 미치광이 예언자를.

'얀란트의 크로지우스. 그가 말했다. 여덟이 오리라고. 여덟 제국 성인이 그들이 만든 제국을 부수러 올 것이라고....'

루페르트는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빙상을 희미한 빛이 서린 눈동자로 가만히 응시했다.

멀찌감치 서 있는 두 도펠죌트너가 나란히 이쪽을 향해 몸을 돌린다.

먼바다에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잔잔하게 시간을 채워 나갔다.

* * *

귀환.

그야말로 화려한 귀환이다.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나아가 정기 항로까지 마련했다.

돌아오는 길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가장 기세가 드높은 건 역시 만슈타인과 그에게 협조한 용기 있는 친구들이었다.

반면 페르난도를 위시한 반전파들은 침울함 속에서 시기 어린 눈으로 동료들의 기회를 부러워했다.

페르난도를 회의장에 부른 건 제국으로 항해를 시작한 지 3일째의 오후였다.

회의실에 들어오는 그의 얼굴은 마치 초상을 치르는 사람처럼 어두워 있었다.

마치 그의 운명을 안다는 것처럼.

아마도 해고당할 것이다.

이번을 끝으로 더 이상 리히트 보덴 항로에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루페르트의 은전 덕분에 기회를 잡았지만,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걸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것이다.

"선장."

루페르트가 미소를 띤 얼굴로 페르난도를 바라보았다.

페르난도는 고개를 숙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각오한 바입니다. 제가 상황을 잘못 판단했습니다. 남작님께서 절 해고하셔도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해고라니요?"

루페르트가 활짝 웃으며 되물었다.

놀란 시선이 루페르트의 얼굴에 꽂혔다.

모두가 페르난도의 해고를 예상하고 있었다.

리히트 보덴에서 그가 보인 모습은 총만 안 들었다 뿐이지 사실상 항명이며 반역 직전까지 갔으니까.

"당신처럼 검증된 뱃사람을 또 어디서 찾겠습니까?"

루페르트는 그러나 그런 페르난도를 포용하려 했다.

"앞으로 이 배의 운항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 남작님...!"

"하지만 다음번엔 조금은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줬으면 하는군요. 저 아서 픽튼 총독도 외국인이지만 여느 제국인보다 더 치열하지 않았습니까?"

"...."

페르난도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였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이 수치심은 외국인이라는 믿을 수 없는 타이틀을 가진 선장에게 흉터이자 훈장이 될 것이다.

그가 좀 더 믿을 수 있는 뱃사람이 되기 위한.

'위험한 항해다. 괜히 어설픈 뱃사람에게 항해를 맡기느니 차라리 이 사람에게 빚을 줘서 부리는 게 나을 것이다.'

군터 야스펠에게 들었다.

페르난도의 처는 제국인이며 그의 자식 또한 뒤셀하펜에 있다고.

거대한 사역을 맡기는 것도 아니니 이 정도면 충분한 인선이라 생각했다.

루페르트가 진정으로 예의주시하는 건 다른 사람이다.

바로 만슈타인이다.

어두운 방에 불러낸 뒤 루페르트는 여신의 권능을 사용했다.

<'신학 대학생' 알브레히트 폰 만슈타인에 관한 보고 >

1. 개요

종족: 인간 - 동부 고지 제국인

분류: 범인(아마도)

성별: 남성

연령: 25세

명성: 알려지지 않음

신체상의 특징: 미약한 통풍

2. 운명의 실타래

하찮은 용병대장: C+

동네 신부: C-

고치 속에 있는 자: 측량 불가

3. 특기사항

- 특별히 없음

4. 등급

알 수 없음

'이건?'

지금까지 본 인물들과 다르다.

모든 운명의 지도가 그려졌던 다른 이와 달리 이 사내는 모호한 점이 너무나 많다.

[ 루페르트 가우저. ]

여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 리프니에 님."

[ 사람을 부리는 당신의 배짱과 기술, 잘 보았어요. 당신에 대한 평가를 상향할 필요가 있겠네요. ]

"감사합니다. 여신님."

[ 지금 보는 사람의 평가가 특이하죠? ]

"네, 그렇습니다."

[ 그는 지금 변화의 도상에 있어요. 가장 높은 운명의 파도를 타는 자만이 이러한 과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자리 잡을 수 있죠. ]

"...변화."

[ 그의 운명은 아마도 그 소용돌이가 그친 후에 비로소 윤곽을 드러낼 거 같네요. ]

"저 사람과는 연을 만들어 둬야 할 것 같군요."

[ 그게 반드시 현명한 선택은 아니에요. 운명의 소용돌이의 끝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균형의 여신인 저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니까요. 저 만슈타인이라는 자의 운명이 당신이 가장 신뢰하는 검이 될지, 아니면 당신의 목을 찌르는 창이 될지, 그건 오직 시간의 흐름만이 답을 내려 주겠지요. ]

"그 말, 명심하겠습니다."

[ 하지만, 지금은 적절한 포상을 내려 주는 게 좋을 거 같네요. ]

"동감입니다."

루페르트는 어둠 저 너머에 홀로 앉아 있는 사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감이라는 광휘에 가득 찬 그 얼굴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무엇을 그리는지 아직 루페르트는 알지 못한다.

* * *

"쿨럭! 쿨럭!"

황제의 반려였던, 한때 여신처럼 아름답다는 칭송을 받던 여인의 얼굴엔 짙은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기침을 할 때마다 검붉은 피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나왔다.

"대황후님."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시녀지만 지금은 그녀조차 당황할 정도로 대황후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의사가 달려오고, 약을 먹이고, 시종들이 몇 번이고 분주하게 오가며 수발을 든 결과 간신히 대황후의 병세는 가라앉았다.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얼굴로 대황후는 창밖을 응시했다.

"그래. 그 녀석에게 소식은 왔느냐?"

시녀가 입가에 흐르는 미세한 핏물을 조심스럽게 닦아 냈다.

"도펠죌트너들이 도착했습니다."

시녀가 정중하게 답했다.

"그래? 결과는?"

시녀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대성공이라고 합니다. 시장을 흔들 정도의 상품이 배에 실려 있다고 합니다. 테타우에서 각 상회의 수뇌부가 뒤셀하펜으로 출장을 갈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

안젤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흐드러진 장미 담장 너머로 높고 푸른 하늘이 보인다.

가을을 지나 겨울이 오고 있다.

호흡을 멈추고 소리를 들었다.

멀리 움직이는 수레바퀴의 소리, 두런거림, 높은 하늘을 나는 맹금류의 길게 이어지는 울음.

마지막에 귀에 걸린 건 규칙적인 태엽 시계의 소리였다.

무한의 째깍거림 속에서 대황후는 한 사내를 생각했다.

어떠한 징후도 없이 갑자기 그녀의 운명에 끼어들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던 끝까지 신비롭고 경이로웠던 남자.

"...폐하."

죽어 가는 여인이 두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당신의 여신이 드디어 후계자를 내려보낸 것 같군요."

안젤리나가 다시 눈을 떴다.

잠시 고통과 운명에 지쳤던 두 눈은 다시금 맹렬한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모든 걸 맡기진 않겠습니다."

얼음에 숨겨져 있던 건 보물만이 아니었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운명의 실타래 또한 세상에 던져졌다.

38화 11. 가문의 시련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