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16. 모독자들 (2)
지겔슈타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농민 폭도라고 했나?"
"네. 대부분은."
지겔슈타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루페르트 쪽을 돌아보았다.
"농민 폭도 따위라면 걱정하실 건 하나도 없습니다."
지겔슈타트의 눈에서 은은하면서도 기이한 빛이 번득였다.
루페르트는 순간 질식해 버릴 것 정도로 강도 높은 마법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마법사의 후각을 발동하지 않아도 냄새가 후각으로 밀려들 정도의 마력이 지겔슈타트 쪽에서 뿜어져 나온 것이다.
루페르트는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것이 사각의 마법사인가. 전쟁 마법사 아래라고 하나 그야말로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이군. 저 삐쩍 마른 몸 안에 몇 인분의 힘이 축적되어 있을까?'
제국의 마법사는 강하다.
타국에 마법사가 있다고 하나 견줄 수가 없다.
실제로 루페르트는 전쟁 마법사가 성벽 위에서 성을 포위한 대군을 상대로 파멸의 불꽃을 비처럼 쏟아내며 물러서게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단 한 명이 수천 명에 달하는 군대의 진격을 멈춰 세웠다.
지겔슈타트는 그 정도까진 이르진 못하겠지만 그 바로 아래 단계까지는 이른 자다.
"도펠죌트너. 폭도의 숫자가 5천 정도라고 했나?"
"네."
마를로네는 무표정으로 답하며 과자를 더 집어 입에 가지고 갔다.
"걱정하실 건 하나도 없습니다."
지겔슈타트가 자신감을 드러냈다.
늘 신비스러웠던 눈동자엔 가벼운 흥분이 약동하는 게 보였다.
"산악의 폭도 따윈 이 사각의 마법사 지겔슈타트가 홀로 쫓아내 보이겠습니다."
가능한 일이다.
제국 마법사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아는 루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지요."
지겔슈타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며드는 찰나였다.
"저기. 전하."
마를로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나칠 정도로 차가운 느낌이 들어 그녀 쪽을 응시했다.
그녀는 이미 특유의 흐릿한 눈동자로 루페르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할아버지가 그러던데 폭도 안에 상당한 강자가 있다던데요?"
"그래?"
"잘은 모르겠지만, 이 마법사분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지겔슈타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마를로네를 노려보았다.
어김없이 그의 눈동자엔 경멸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마법사가 있다고?"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네 느낌 따윈 중요하지 않아. 도펠죌트너."
"폭도들이 자기들한테 마법사가 있다고 떠들어 대는 것도 들었어요."
지겔슈타트의 눈동자에 섬뜩한 살기가 떠올랐다.
"...마법사라고?"
그 살기는 장내의 공기를 싸늘하게 얼어붙게 할 정도로 현실적인 힘으로 변환하며 루페르트와 마를로네의 피부에 두드러기를 돋게 만들었다.
"아, 실례했습니다."
지겔슈타트가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마법사 이야기를 들으니 저도 모르게 그만, 부족한 힘을 드러내고 말았군요."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제국의 마법사가 가장 증오하는 건 도펠죌트너도 마법 대학 폐지론자도 아니다.
도펠죌트너는 오히려 경멸의 대상에 가깝다.
제국의 마법사들이 가장 증오하는 건 다름 아닌 그들과 같은 마법사다.
정확히는 대학에 속하지 않는 마법사.
제국 마법 대학만이 진정한 지식의 요람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들은 마법 대학 이외에 마법사를 배척하고 경멸하며 용서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타국의 마법사가 제국의 마법사에게 살해당했던가.
지겔슈타트가 드러낸 분노는 그만의 분노가 아니다.
거의 천 년간 쌓아 올린 마법 대학 그 자체의 분노이리라.
"전하. 저는 이쯤에서 실례하겠습니다. 상대방이 마법사이니 이쪽도 만반의 준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상세한 계획은 내일 다시 연대장 쪽과 의논하는 게 옳을 듯싶군요."
자리가 파하고 지겔슈타트가 자리를 떠났다.
떠나가는 그의 얼굴엔 아직 식지 않은 분노의 잔열이 남아 있었지만, 그 발걸음은 자신만만했고 확신에 차 있었다.
마를로네가 흐릿한 눈으로 사라져 가는 사각의 마법사를 보다가 과자를 입에 넣었다.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지자 그녀는 루페르트에게 다가가며 귀를 빌려달라는 시늉을 했다.
루페르트가 귀를 내밀자 그녀가 서기와 자부아 사람을 힐끗 쳐다보며 속삭였다.
"할아버지가 말했어요. 폭도를 이끄는 건 저 건방진 사각의 마법사보다 더 강한 마법사라고."
"뭐라고?"
루페르트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지겔슈타트보다 더 강하다고?!"
"네."
"불가능한 이야기다."
제국 전쟁 마법사는 오직 제국만이 보유하고 배출할 수 있는 마법사의 정점.
그 어떤 나라도 제국 전쟁 마법사급을 보유하지 못한다.
최고의 지식, 최고의 스승은 물론이고 최고의 인재가 필요하니까.
제국 마법 대학은 그 모든 걸 갖췄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마법사의 꿈을 안고 제국으로 찾아오는 재능 있는 소년 소녀들이 부지기수다.
'당장 지겔슈타트만 해도 타국에 가면 능히 대마법사 칭호를 받을 수 있는 인재다. 그런데 그보다 더 뛰어난 자가 이런 곳에 나타났다고?'
루페르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제국 마법대학 사람인가? 아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마법대학의 정점 오각의 마법사들은 허투루 움직이지 않는다.
한 명, 한 명이 그야말로 군대와 다를 바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대학 밖에 나가려면 황궁에 통지해야 하고 자신이 지나가고자 하는 땅의 군주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무엇보다 오각의 마법사는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건 그들이 진리라고 부르는 마법의 지식뿐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도 없었을 터이니.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마법대학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르지만 적어도 그 급이 아닐까 하는?"
"네 조부는 어디에 있지?"
"폭도의 뒤를 따르고 있어요. 기회가 오면 그 마법사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겠죠."
"터무니없군."
"어쩌겠어요? 그게 할아버지 성격인데."
갖은 눈치를 주고 구박하던 지겔슈타트가 사라지자, 마를로네는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앉아 몸을 편안하게 기댔다.
루페르트는 마를로네를 가만히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네가 한 말이 진실이냐?"
"황제가 되실 분한테 왜 곧 들통날 거짓말을 말하겠어요? 거기다가 상대는 폭도만 있는 게 아니에요."
"폭도만 있는 게 아니라고?"
"저지대 사람으로 보이는 소규모 용병대가 폭도 안에 있었어요."
"왜 말을 안 했지?"
"10명도 채 되지 않아서요. 하지만 할아버지가 말하길 그들도 평범한 용병은 아니래요."
"군사 고문인가."
"군사 고문이 뭔가요?"
"전문가인가?"
"그런 느낌?"
아무튼 마를로네의 말을 종합하면, 현재 자부아 공국으로 다가오고 있는 폭도는 그냥 폭도가 아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전쟁 마법사급의 마법사를 갖추고 전문적인 군사 집단까지 동반했다.
평범한 농민 반란군과는 성격이 다르다.
"전하."
마를로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 흐릿한 기운 대신 날카로운 빛과 결의가 그녀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연막을 친 얼굴에서 감정을 읽어 내는 건 불가능했지만, 심상치 않은 말이 나오리라는 건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어디 한번 말해 보아라."
마를로네는 고개를 끄덕이고 흐릿한 눈으로 루페르트를 바라보았다.
"반란군이 오기 전에 우리끼리 몰래 성을 탈출해요."
"호위대를 남겨 두고?"
마를로네는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서 황제가 되고 싶으시다면요."
* * *
다가오는 위협을 피하기 위해서 호위대 몰래 혼자 탈출해 마를로네 일행과 함께 제국으로 향한다.
극적인 이야기다.
두고두고 사람들 사이에 전해질 정도의 낭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우선 위험을 동반한다.
현재 루페르트를 지키는 건 제국의 최정예 연대와 기병대, 그리고 마법사다.
이들보다 든든한 방패가 어디 있겠는가?
제아무리 강대한 위협이라고 해도 이 방패를 과연 뚫어 낼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호위대를 버려 두고 혼자 달아나는 건 정치적으로도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일반 백성 사이에서야 재밌는 이야깃거리로 오가겠지만, 궁정 사회에선 평판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당장 분더발트 일행의 체면을 바닥으로 처박는 건 물론이거니와 마법대학과 사이가 나빠지는 것도 불 보듯 뻔하다.
'베르크 란이 본 위협이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이 수많은 불이익을 무릅쓰고 지레 달아날 정도로 큰 것일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
루페르트에겐 소라고둥이 없다.
과거를 돌릴 수 없는 지금 그는 가장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리프니에의 말마따나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니까.
그의 목숨도, 그의 인연도, 그리고 제국의 운명마저도.
"...."
루페르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고 비강에선 짙은 근심이 어우러진 날숨이 새어 나왔다.
마를로네가 갈등에 잠긴 루페르트를 빤히 쳐다보다 과자 하나를 입에 가지고 갔다.
"역시 안 되겠죠?"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마를로네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다운 빠른 행동이라고 할까.
"그럼 전 빠져나가게 해 주세요. 또 그 마법사한테 잡혀서 사슬에 묶이는 건 사양이니까요."
"잠시 여기서 대기해라. 내일 보내 주지. 일단 네가 본 건 분더발트 일행도 들어야 하니."
루페르트는 시종에게 그녀를 위한 방과 편의를 제공하게 지시했다.
마를로네는 사양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기는 눈치였다.
"모처럼 침대에서 잘 수 있겠네요."
마를로네는 루페르트에게 예를 표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게 전부였다.
사소한 눈빛도 사적인 말도 없었다.
보이지 않지만 명백한 벽이 느껴졌다.
두 번의 인연에도 그녀는 마음을 열 생각이 추호도 없는 듯 보였다.
섭섭하긴 하지만 사소한 문제다.
마를로네가 사라진 이후에도 루페르트는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다.
"...."
짙은 한숨이 젊은 왕의 입에서 한탄처럼 토해졌다.
'젠장.'
생각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떠오르는 게 없다.
머리가 움직여 주지 않는다.
처음 겪는 상황, 불길한 예감, 주체할 수 없는 불안감이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던 것이다.
미간에 주름을 새긴 채 루페르트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전쟁 마법사급에 상궤를 넘어선 우수한 용병 집단. 뜬금없는 폭도. 대체 이건 다 무어란 말인가.'
문득 오싹한 무언가가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기묘한 전율 속에서 터무니없는 생각이 뇌리를 지배해 갔다.
어쩌면 이 세상이 그를 원하지 않는 게 아닐까?
그가 황제가 되는 걸 결코 용납하지 않으려는 거대한 흐름이 앞에 놓인 건 아닐까?
끔찍한 가정을 고개를 가로저어 털어 버리며 루페르트는 의자에 푹 기대며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여신님은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예측하지 못했던 건가."
소라고둥의 빈자리가 어느 때보다 크다.
잔혹한 일이지만 그 빈자리가 클수록 루페르트는 자신의 작음을 오롯이 직시할 수 있었다.
* * *
슈발츠마인주.
선제후의 집무실.
선제후가 황제로 선출되어 룸왕의 의례를 치르기 위해 남쪽으로 떠나면서 집무실은 자연스레 사람이 없는 공실이 되었지만, 하녀와 경비 사이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건 현재 제국 각지에서 영웅적인 활약으로 회자하는 루페르트 가우저의 평판과는 상반된 오싹한 소문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말이야."
선제후의 저택에서 일하는 경비 하나가 주점에서 술잔을 쿵 하고 내려놓았다.
"그 석상 말이야. 분명 움직였어! 돌로 만든 물건이 살아 있는 사람처럼 움직인다니까?"
주변 사람들이 깔깔 웃어 대며 그를 비웃자,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허공을 공포스럽게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틀림없어. 그 조각상...!! 그날 저녁 분명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다음 날 아침엔 문 쪽. 그러니까 내 쪽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고!"
60화 16. 모독자들 (3)
"제국 쪽 산길을 따라 폭도가 접근 중이라는 걸 확인했습니다."
"숫자는 약 5천 정도이며 마을을 거쳐 오며 점점 세를 불리고 있습니다."
"3시간 뒤엔 성벽에 이를 거 같습니다."
장교와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소식을 전했다.
분더발트와 마르틴 후스는 갑작스러운 사태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제반 업무를 처리했다.
폭도의 규모, 무장 상태는 물론이고 그들의 동기까지 속속히 전달됐다.
"지난 수년간 지속적으로 흉년이 들었고, 가축이 병들어 죽어 밭을 갈 수도 없는데도 자부아 공작은 세율을 낮추기는커녕 부르봉 왕국 내 고향 영지 궁전의 증축을 위해 세금을 더 거뒀다고 하더군요. 북쪽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제국으로 떠났지만, 남쪽 사람들은 이도 저도 못 하는 처지라 부르봉 왕국까지 영민 대표를 보내 탄원했지만, 문전박대를 했다고 합니다."
다만 루페르트가 알고 싶어 하는 정보는 확인되지 않았다.
"마법사가 있는지는 불명입니다. 마법에 자질이 있는 병사가 가까이서 확인했지만, 마법의 냄새 같은 건 맡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가장 큰 위협, 마법사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저 소녀가 말한 범상치 않아 보이는 용병 집단은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분더발트는 마를로네를 힐끗 쳐다보며 루페르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헨드릭 빌렘 남작의 모독자들입니다."
최근까지 전장에서 복무했던 분더발트는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헨드릭 빌렘 남작? 그는 어떤 사람인가요."
"진짜 남작은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그 망할 놈에게 작위를 준 적이 없지요. 스스로 남작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근본 없는 저지대 놈다운 발상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놈들의 실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제국 북서부, 슈타인마인 주 경계 너머엔 지대가 낮아 수시로 바닷물이 범람하는 습지대가 있다.
원래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었으나, 제국과 다른 왕국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습지대를 간척해 사람이 살 수 있는 비옥한 옥토로 바꿔 놓았다.
이후에 저지대로 불린 그 땅 위엔 제국의 대도시에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는 부유한 도시들이 들어섰다.
타고난 반골 기질과 돈에 대한 탐욕, 늘 서로 반목하면서도 외부인에 대해선 똘똘 뭉치는 기질이 그들을 대륙에서 무시하기 어려운 강자로 만들었다.
철혈대제의 절묘한 정치 공작으로 저지대의 파벌이 둘로 쪼개져 예전만큼의 위세를 잃었지만, 그럼에도 저지대인들은 대륙 곳곳에서 우월한 지식과 탐욕, 기술의 힘으로 활약을 펼치고 있다.
그들은 국가라기보다는 느슨한 도시연합이기에 왕은 없지만, 제국을 둘러싼 다섯 강국, 다섯 개의 왕관 중 하나를 당당하게 점하고 있다.
"모독자들은 공성과 수성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 명, 한 명이 각 분야의 마스터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전문가라고 하더군요. 저지대인들 사이에서 모독자들은 만 명의 군세와 맞먹는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그런 자들이 폭도들을 돕는다는 겁니까?"
"용병들이란 돈만 주면 어디로든 달려가는 무리니까요. 다만, 걸리는 점이 하나 있군요."
"듣고 싶군요."
"모독자들은 실력만큼이나 몸값이 비싼 것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저지대의 1급 도시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을 부르는데, 어찌 이 가난한 땅의 농민들이 그들을 고용했는지 의문이군요."
잠자코 그 말을 듣고 있던 마르틴 후스가 중얼거렸다.
"뒷배경이 있는 건 아닐는지."
분더발트가 그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군요. 다만 지금은 뒷배경을 논의할 자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당장 우리의 사명은 룸왕 전하를 테타우까지 안전하게 모시는 것이니까요."
농민 폭도에 막강한 용병단이 붙었다고 하나 이쪽도 제국 최정예다.
공성전에 작은 재주가 있다고 해서 어떻게 해 볼 상대가 아니다.
게다가 루페르트 쪽엔 누구보다 자신만만한 사람이 있다.
"마법사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은 모양이군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어제부터 지겔슈타트는 평소보다 강한 힘을 은근하게 드러내고 있다.
소리는 나지 않지만, 귀가 윙윙거리는 듯한 압박감, 때때로 기이한 빛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은 경험 많은 분더발트와 마르틴 후스조차 눈치를 볼 정도의 기세를 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왜 룸 제국에서 마법을 금지했는지 알 것 같군.'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지겔슈타트가 앙상한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폭도가 몰려오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이곳 성벽 위에서 말이죠. 어느 누구도 감히 황제가 되실 분의 즉위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게 할 겁니다."
과한 자신감을 드러낸 직후 지겔슈타트는 마를로네 쪽을 힐끗 쳐다보며 냉소를 머금었다.
"이능은 본시 마법사의 소관입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하다.
도펠죌트너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힘을 보여 주겠다는 소리다.
마를로네는 억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돌렸다.
"사각의 마법사께서 나서겠다면 마음이 든든하군요."
"일단 농민을 흩어 놓으면 우리 기병대가 그들을 산중으로 쫓아내겠습니다."
분더발트 일행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마법사가 나선만큼 그들이 할 일도 줄어들게 되는 법이니.
"오늘 중으로 출발하도록 하죠. 뒤처리는 이쪽에 맡기도록 하고요."
"최대한 피를 덜 보는 방향으로 시도해 보겠습니다. 룸왕 전하의 발에 하찮은 피를 묻히는 건 제국에 오물을 묻히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니 말입니다."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 마를로네의 경고는 깨끗이 지워진 상태였다.
루페르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확실히 지금 상황이 기묘한 건 맞아. 하지만 이 정도의 전력이다. 멸망기의 제국도 아니고 전성기의 가락이 남은 제국군과 제국 마법사를 상대로 누가 감히 맞설 수 있단 말인가?'
평온하면서도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끝났다.
"저기."
그림자 속에 소리 없이 머물러 있던 마를로네가 루페르트에게 다가왔다.
"전하."
"아, 너 거기 있었구나. 한마디 말이라도 하지 그랬어?"
"저 이제 가 봐도 되죠?"
"내 인장을 찍은 서류를 시종이 가지고 있을 거다."
"고마워요."
마를로네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언제나처럼 구름 위를 산책하는 듯한 명랑하고 가벼운 걸음걸이.
복도를 향해 걸어가던 그녀가 갑자기 돌아섰다.
"전하."
"뭐냐?"
"전 분명히 경고했어요."
늘 무표정한 얼굴 구석에 희미하지만 명백한 실망감을 드러낸 채 그녀는 다시 돌아섰고, 가벼운 걸음걸이로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 * *
자부아 산악지대의 백성이 떼를 지어 자부아 공국의 수도인 드부이성 앞에 몰려들었다.
농기구와 몽둥이, 아마 경비대에서 탈취했을 조잡한 구형 총기 등으로 무장한 그들 위엔 무릎 꿇은 채 두 손을 모아 자신의 눈에서 흐르는 피눈물을 받는 여인이 그려진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섬뜩한 그림 아래엔 '어쩔 수가 없다'라는 룸어로 적힌 문구가 핏빛으로 갈겨 쓴 것처럼 적혀 있었다.
"저들이 폭도군요."
드높은 성벽 위엔 루페르트를 위시한 제국의 장수들이 서서 몰려드는 폭도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폭도들은 수레에서 미리 준비한 목책으로 도로를 막고 도시를 포위했다.
대표라는 자가 앞으로 나와 뭐라고 떠들었지만 그건 루페르트 일행에게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다.
루페르트는 자신이 믿고 있는 자들을 응시했다.
분더발트와 마르틴 후스.
최근까지 전쟁을 경험한 그들의 안목은 예리했다.
"역시 평범한 폭도군요. 기율의 편린조차 찾아볼 수 없는 무질서한 전열을 보십시오. 장비도 형편없기 짝이 없군요."
"말을 타고 다니는 장정이 여럿 보이지만 백 명도 채 되지 않고 제대로 된 기마술도 기병 전술도 훈련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말을 탄 기수. 딱 그 정도 수준이군요."
순식간에 적의 상태를 파악하고 공격을 준비했다.
공격의 선두에 서게 될 것은 지겔슈타트다.
그가 손을 한 번 휘저으면 저 폭도들은 시체 몇 구를 남긴 채 흩어질 것이다.
문득 루페르트의 눈앞에 복도에 서서 자신을 응시하던 마를로네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만요."
루페르트는 망원경을 들어 포위군을 살폈다.
행여나 마를로네가 말한 그 강대한 마법사가 있는 걸 아닐까 확인하기 위해.
'마법사는 없다.'
망원경으로만 들여다본 게 아니다.
루페르트는 테타우에 있을 영혼 동맹 피리스의 능력인 마법사의 후각까지 발휘해서 꼼꼼하게 적진을 살폈다.
마법의 징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쪽은 어떻습니까?"
루페르트에겐 날카로운 눈이 있다.
동행한 한스 징펠만이다.
그는 투박하지만 확실한 성능의 단 안경으로 적진을 차분히 관찰한 후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저는 마법과는 연이 없어서요. 누가 강대한 마법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한스 징펠만의 냉담한 시선이 적진 후방에 화살처럼 매섭게 꽂혔다.
"배신자가 하나 있는 거 같더군요."
지휘부로 보이는 어두운 실루엣 중에서 확연히 구분되는 붉은 투구를 쓴 사내가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그는 장창을 연상케 하는 긴 총을 등 뒤에 창처럼 세워 메고 있었다.
'매잡이 프리츠.'
한스 징펠만의 눈동자에 불타는 마을과 시신이 널브러진 광경이 떠올랐다.
아울러 마을 입구 옆에 인형처럼 서 있던 갈 곳 없는 쌍둥이 또한.
'결국 다시 만나는군.'
루페르트가 한스 징펠만을 돌아보며 물었다.
"배신자요?"
"우리 형제단을 배신한 사람입니다. 꽤 오랫동안 찾아다녔는데, 설마하니 저지대에 있었을 줄이야."
한스 징펠만은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
루페르트는 늘 온화한 그가 그토록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사연이 있는 모양이군. 허나 지금 들을 이야기는 아니다.'
이 전장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
대기가 거칠어졌다.
옷깃은 휘날리지 않지만 명백한 강풍 같은 것이 소용돌이치며 성벽의 한가운데로 모여들고 있었다.
두 눈에 형형한 빛을 번득인 채 지겔슈타트가 성벽의 난간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루페르트는 느낄 수 있었다.
감각이 마비될 정도로 아찔한 마력의 폭풍이 저 사내의 몸에서 휘몰아치고 있다는걸.
'이것이 사각의 마법사인가?!'
시공을 뒤틀고 섭리마저 부정하는 자.
제국의 마법사가 성벽 위에 서서 아래의 열등한 자들을 노려보았다.
61화 16. 모독자들 (4)
눈으로 보이지 않는, 그러나 온몸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소용돌이가 성벽 위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성문 앞에 대기 중인 제국군과 성벽 위를 지키는 자부아군 모두 경외에 찬 얼굴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자를 올려다보았다.
"물러나라."
지겔슈타트가 말했다.
낮고 힘없이 발한 목소리는 소용돌이를 타고 증폭되어 종국에는 마치 천둥 같은 울림으로 붉은 산맥의 산봉우리까지 닿는 웅웅거리는 메아리를 만들어 냈다.
"마법사다!"
"마법사야!"
농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마치 사형수가 형리를 보고 동요를 일으키는 것처럼 농민들은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돌렸고, 더러는 달아나기까지 했다.
두 눈에 형형한 빛을 발한 채 지겔슈타트가 코웃음을 쳤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지팡이가 하늘 높이 들렸다.
나무로 만든 지팡이의 겉면은 원 재질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기름칠한 종이로 뒤덮여 있었다.
수백 년간 거쳤던 무수히 많은 주인들이 지팡이에 마력을 담고 증폭했다. 그 마력을 제어하기 위한 술식이 유구한 세월에 걸쳐 쌓인 지층처럼 지팡이의 표면을 덮고 있는 것이다.
소용돌이가 부적 바른 지팡이의 끝단으로 급속도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지겔슈타트의 빛나는 눈이 타점을 찾았다.
어쩔 수가 없다는 문구가 적힌 피눈물 흘리는 여인의 깃발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아랜 평범한 농민과 구분되는 준수한 복장과 꼿꼿하게 허리를 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저쪽이 좋겠군.'
힘의 소용돌이를 지팡이의 끝에 집중시키며 지겔슈타트는 속으로 죽음을 불러오는 주문을 영창했다.
그가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자와 이단을 불태우는 정화의 원소.
불이다.
그가 지팡이를 휘두르는 순간 깃발을 중심으로 수십 미터에 달하는 영역이 불바다로 화할 것이다.
"불타 죽어라! 제국의 적들아!"
지겔슈타트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끝났군."
분더발트가 중얼거렸다.
그만이 아니다.
모두가 한 번의 휘두름으로 막간의 소요가 끝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루페르트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
루페르트의 눈가가 문득 미세하게 떨렸다.
다음 순간 말도 안 되는 폭력과도 같은 무언가가 코로 밀려들며 폐부를 억누른다.
마치 목이 졸리는 느낌.
루페르트는 갑자기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며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폭력적인 기운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했다.
곧 답이 나왔다.
'이, 이건?!'
이 폭력적인 냄새는 평범한 향취가 아니다.
섭리를 왜곡하는 힘, 마법의 냄새다.
성 아래에서 루페르트는 능력을 발동조차 하지 않았음에도 질식할 것 같던 압박감을 토해 내던 기운의 원점을 노려보았다.
"마법사다."
루페르트가 중얼거렸다.
동시에 지겔슈타트의 지팡이가 멈췄다.
"?!"
지겔슈타트의 눈동자에 서려 있던 형형한 빛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경직된 얼굴엔 신비로움과 오만이 빠르게 걷혔고, 그 빈자리를 당황과 의문 공포 따위의 감정이 앞다투어 질주했다.
"이, 이런 일이!"
소용돌이가 그쳤다.
"무슨 일입니까?"
루페르트가 지겔슈타트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지팡이에 서려 있던 마법의 기운이 산산이 조각나며 말라붙은 각질처럼 그 기운을 덧없이 흩뿌린 것이다.
"!!"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지겔슈타트는 성벽 아래를 맹렬히 탐색했다.
성벽 아래 누군가 있다.
남루한 로브를 걸치고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누군가.
손에 들린 건 복장만큼이나 볼품없는 지팡이 하나.
그러나 마법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자의 눈엔 다르게 보일 것이다.
저 남루한 자 주위에 모인 야수처럼 날뛰는 무형의 기운들을, 그 기운들이 또 다른, 지겔슈타트와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을 말이다.
"억!"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지겔슈타트가 비틀거렸다.
루페르트가 다가가자 그는 혼백이 빠져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자는! 저자는...!! 틀림없습니다. 다섯 개의 이치를 깨닫고 육신 너머의 세계를 직시하는 자."
지겔슈타트의 목울대가 불안하게 떨리며 불길한 한마디를 마저 쏟아 냈다.
"...오각의 마법사!!"
"제국 전쟁 마법사급이라는 소립니까?"
"그, 그렇습니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마법사가 그토록 강력한 존재임에도 정작 전장엔 몇 찾아볼 수 없는 이유를.
조금이라도 머리가 굴러가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강력한 마법사 하나를 키우기 어렵다면 그보다 열등한 마법사 여럿을 키우는 게 낫지 않냐는.
그러나 그것은 이론상에서나 가능한 상상이다.
마법사는 대지와 하늘에서 마법의 기운을 뽑아 그들의 힘으로 치환한다.
지겔슈타트가 보여 줬던 권능의 소용돌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한 장소에 끌어 쓸 수 있는 마력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바로 여기에 열등한 마법사 여럿이 우수한 마법사 하나를 감당할 수 없는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우월한 마법사는 주변의 모든 마력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인다.
다른 열등한 마법사가 사용할 몫까지.
사각의 마법사는 그 아래 다른 모든 마법사를 압도한다.
그러나 그가 전장의 여왕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사각의 마법사 위에 오각의 마법사가 있기 때문이다.
"전, 전쟁 마법사급입니다! 도망쳐야 합니다!"
모든 권능을 강탈당한 지겔슈타트의 얼굴엔 베일처럼 늘 감싸고 다니던 신비로움도 오만함도 찾아볼 수 없다.
거기엔 창백하고 삐쩍 마른 사내가 있었을 뿐이다.
사각의 마법사는 부러졌다.
탕!
아래에서 총성이 울렸다.
총성이 멀다.
총탄이 닿을 거리가 아니다.
실제로 반란군은 대포의 사거리 바깥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툭.
자부아 공국의 깃대가 꺾였다.
산맥에서 내려오는 바람을 받아 우아하게 나풀거리던 깃발이 지면에 처박히는 광경은 성벽과 성 아래의 모든 이가 볼 수 있었다.
성벽 너머에서 함성이 터졌고, 성벽 위와 아래엔 싸늘한 침묵이 전염병처럼 퍼졌다.
"전하. 몸을 피하십시오."
한스 징펠만이 철제 가방에서 신들린 손놀림으로 총기를 조립하며 급히 다가왔다.
"아까 말한 배신자 형제의 짓입니다."
"배신자 형제?"
그러고 보니 아까 한스 징펠말이 말했다.
저 아래엔 불과 철의 형제단을 배신한 자가 있다고.
"매잡이 프리츠."
한스 징펠만의 분노에 찬 눈이 성벽 아래 하늘을 찌를 듯이 뾰족 솟은 장식이 달린 투구부터 시작해 온통 붉은색의 옷으로 치장한 사내를 향했다.
움푹 들어간 눈에 툭 튀어나온 광대, 감정의 편린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의 무표정으로 무장한 그 사내는 단지 보는 것만으로 오싹함을 느끼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우리 형제 중 가장 장거리 사격에 능한 자였습니다."
한스 징펠만은 그의 손에 들린 다른 총과 차원이 다를 정도로 긴 총신을 가진 길쭉한 총을 노려보았다.
"형제단에서 쫓겨난 후 실력을 더 키운 모양이군요."
도제로 보이는 사내들이 장창만 한 꽂을대를 그 총구에 쑤셔 박고 재장전을 부산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헨드릭 빌렘의 패거리에 들어갈 줄이야."
지겔슈타트의 무참한 패배, 한 발의 저격으로 꺾여 버린 군기.
두 가지 사건은 자부아군의 사기를 바닥에 처박기에 충분했다.
"도망쳐야 해!"
"승산이 없어!"
병사들이 공포에 떨고 있다.
무기까지 내던지지 않았지만, 창과 총을 쥔 그들의 손엔 경련이 일어났고 다리엔 이미 힘이 빠져 자세가 무너졌다.
이런 상황에서 적들이 기세를 타고 공격해 온다면 이들은 주저 없이 달아날 것이다.
반면 제국군은 건재하다.
두 개의 사건이 사기에 영향을 끼친 건 같지만 그들은 공포에 떠는 대신 호라신에 대한 기도를 올리거나 품 안의 술을 들이켜며 다가올 전투와 죽음을 담담하게 가슴 속에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예병과 잡병의 차이라고 할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성벽 아래로 내려갔던 마르틴 후스가 성벽 위로 올라갔다.
순간 루페르트는 그가 입은 번쩍이는 흉갑과 챙 넓은 모자에 꽂은 화려한 깃털이 유난히 눈에 띈다고 생각했다.
불길함이 짙어지는 가운데 한스 징펠만이 소리쳤다.
"위험합니다. 몸을 숙이십시오! 라우켄 백작님!"
총성이 울렸다.
라우켄의 백작, 마르틴 후스가 불이 꺼진 양초처럼 덧없이 쓰러졌다.
"즉사다."
"심장이 뚫렸어!"
제국 병사들이 죽은 기병대장의 시체를 확인했다.
"도망쳐야 합니다."
루페르트를 늘 옆에서 모시던 시종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슈발츠마인 가문에서 붙여 준 그 사내는 말수가 적고 성실했으나, 공포는 그다지 경험한 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당장 도망치셔야 합니다!"
"어디로?"
탕!
한스 징펠만이 매잡이 프리츠의 것만큼은 아니나, 과도하게 긴 총으로 프리츠에게 맞섰다.
무정한 총탄이 서로를 노리고 대기와 바람을 가르고 양쪽을 오갔다.
불과 철의 형제단 사이의 대결.
탕!
두 자루의 총이 경쟁하듯 불을 뿜었고, 그때마다 콩을 볶는 소리를 내며 파편과 가루를 만들어 냈다.
분더발트가 허리를 숙인 채 루페르트에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탕!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슈욱-
치명적인 한 발이 아슬아슬하게 루페르트의 머리 위를 날아갔다.
일어서 있다고 해도 맞지 않을 지점을 지나갔지만,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엔 충분한 거리였다.
소름 끼치는 감각을 느끼며 루페르트는 상기된 분더발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포위당했습니다."
제국 보병 연대장이 현실을 말했다.
마법사는 꺾였고, 기병대장은 죽었다.
제국군이 건재하다고 하나 자부아군의 사기는 와해 직전에 몰렸다.
무엇보다 저쪽의 전력을 가늠할 수 없다.
최소 확인된 것만 해도 귀신 같은 총솜씨를 지닌 불과 철의 형제단, 그리고 오각의 마법사다.
반격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다.
수성 측이 움츠러든 것이 명확해지자, 반란군 측에서 말쑥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백기를 들고 성벽 아래 나타나 요구 사항을 말했다.
"우리의 요건 조건을 말하겠소. 당장 룸왕을 이쪽으로 보내시오. 지위와 고귀함에 부족함 없이 정중하게 대접할 것을 조상과 땅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리다."
그들의 목적이 명확해졌다.
처음부터 그들은 루페르트를 노리고 왔다.
"답변이 없으시다면 좋습니다. 계속 기다리겠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룸왕 전하의 신병을 이쪽에 인도하기 전까지 포위는 계속될 겁니다."
이름 모를 대표의 말대로 포위가 시작됐다.
공포가 성안에 전염병처럼 감돌았다.
가장 큰 문제는 비축된 식량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군량미는 일주일 안에 동이 날 것이고, 곧 성안의 가축의 씨가 마를 것이다.
또 한 달이 지나면 역병이 돌고 두 달이 지나면 지옥도가 뭔지 보게 될 것이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더 이상 지겔슈타트는 회의에 나오지 않는다.
보다 우월한 마법사에 꺾여 버린 그는 방안에 틀어박힌 채 물과 음식조차 기피하고 있다.
회의를 주재하는 건 이제 분더발트 하나.
들판에 핀 꽃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억센 잡초의 꽃처럼 분더발트는 위기 상황에 귀족 이전에 군인이라는 천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하나의 방법은 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이쪽이 보다 안전하고 위험도 적을 수 있겠죠. 하지만 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우리 군은 뭔가 하기도 전에 스러지겠지요."
"두 번째 방법은 뭡니까?"
"병사들이 힘을 잃기 전에 성문을 열고 싸우는 겁니다."
"빨리 죽느냐, 천천히 죽느냐의 차이겠군요."
"안타깝지만 그런 상황입니다."
원군이 오지 않을 거라는 소문은 이미 성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 와중에 농민 폭도들에게 식량을 실은 수레 행렬이 도착했다.
병사들은 농민 폭도 사이에 배급되는 곡물 포대가 고어문트에서 만든 것을 발견했다.
골트문트, 고어문트의 선제후가 저 농민 반란군의 배후에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빠르게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다.
설상가상으로 고어문트 지방은 붉은 산맥의 바로 위.
당장 원군을 보낼 수 있는 건 골트문트뿐이다.
"대단히 외람된 말씀이오나."
분더발트가 결심한 듯 루페르트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질문을 던졌다.
"전하와 고어문트 선제후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분더발트의 입장은 이해가 간다.
군대의 지휘자로서 무조건 확인해야 하는 문제다.
혹 고어문트가 배후라면 최후의 돌격을 감행해야 하는 게 최선의 선택지니까.
"으음...."
루페르트는 생각에 잠겼다.
이번 회귀에서 골트문트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 건 맞다.
몇 번이고 정치 공작을 펼쳤으며 암살 시도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그의 작품일까?
그건 알 수 없다.
적어도 골트문트는 이번 선거에서 그에게 투표했다.
'골트문트. 그 사람이 가장 가능성이 크다 하나 이번 일의 배후라고는 단정하기 어려워.'
질식할 것 같은 무거운 공기.
변화.
변화가 필요하다.
이 억눌린 공기를 날려 버릴 산뜻한 바람이 필요하다.
"전하."
시종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신분이 모호한 자가 전하를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루페르트가 벌떡 일어섰다.
"누가?"
변화를 갈구하는 욕망이 행동으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전에 나타났던 마를로네라는 여성입니다."
"그, 그래...?"
루페르트의 얼굴에 진한 실망이 드러났다.
마를로네 하나 가지고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시종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만이 아닙니다. 한 초로의 사내도 동반하고 있더군요."
"그 사람 이름은? 베르크 란인가?"
처음보다는 덜 뜨거운 목소리로 루페르트가 물었다.
"아닙니다."
"그럼?! 빨리 말하세요."
"안드리아의 루돌프라고 하더군요."
"안드리아의 루돌프...?"
거듭 실망하던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드디어 이채가 떠올랐다.
'저를 도우러 오신 겁니까?'
드디어 불었다.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변화의 바람이.
62화 16. 모독자들 (5)
그 사내는 새벽의 미명이 밝아 오는 석주 사이의 회랑에 넓고 강인한 등을 보인 채 당당하게 서 있었다.
타고난 군주의 위엄이랄까.
절로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보며 눈빛이 닿고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신하의 기분을 느끼며 루페르트는 그 사내에게 다가갔다.
안드리아의 루돌프가 고개를 돌렸다.
어둠을 닮은 색채를 띤 두건을 뒤집어쓴 그의 얼굴은 늘 그랬던 것처럼 어슴푸레 속에 잠겨 있었다.
더할 나위 없는 감정의 격동을 느끼며 루페르트가 그를 폐하라는 호칭으로 부르려고 할 때였다.
석주 사이에서 익숙한 호리호리하고 가벼운 인영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전하. 안녕하세요?"
순간 루페르트는 시종의 말을 기억해 냈다.
'아, 이 녀석도 있었지.'
마를로네가 루돌프 뒤에 비스듬히 서서 루돌프와 루페르트를 번갈아 보았다.
"진짜 아는 사이 맞아요?"
루돌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시피."
루페르트는 마를로네에게 눈짓으로 아는 체를 하고 루돌프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저는요?"
마를로네가 따라온다.
"잠깐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식사가 필요하지?"
"따뜻한 목욕물과 갈아입을 옷도요. 제 발에 맞는 장화가 있다면 더 좋을 거 같아요."
요구 사항이 점점 많아지는 부분에 쓴웃음을 머금으며, 루페르트는 시종에게 손짓했다.
시종이 마를로네를 별실로 안내했고, 루페르트는 루돌프와 함께 임시 집무실로 들어갔다.
"어떻게 알고 찾아오신 겁니까?"
루페르트는 몸소 물병을 들어 물을 잔에다 따라 내밀었다.
루돌프는 물잔을 가만히 바라보다 단숨에 들이켠 후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고어문트에서 자부아 쪽에 기이한 사람이 나타나고 농민 사이에 불온한 움직임이 감돈다는 소문을 들었지. 그림이 그려지더군."
"어떤 그림입니까?"
"반역."
단순하지만 강렬한 울림에 루페르트는 간밤의 피로에 더해 앞이 살짝 아찔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반역이라...."
"어쩌면 테타우에선 이미 정치 공작이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르지."
"테타우에서 말입니까?"
루돌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란군은 포위할 뿐 공성을 할 기미는 없어. 참호도 파지 않고 방책을 강화하지도 않지."
"시간을 끌겠다는 거군요."
"여기에 갇혀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제국의 미래도 암울해질 거야."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지겔슈타트보다 강력한 마법사가 입구를 틀어막았다.
돌파는 쉽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그 마법사의 권능의 구체적인 형태는 미지수다.
교활하게도 자신이 지겔슈타트보다 위라는 걸 드러냈을 뿐,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는 철저히 숨긴 것이다.
늘 그렇듯 모르는 것이 더 위험해 보이는 법이다.
"...제국군을 움직여야 할까요?"
"그들이라면 앞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겠지. 하지만 굳이 그들을 희생할 필요는 없어."
"복안이 있습니까?"
"숨겨진 통로를 알고 있네."
"숨겨진 통로."
"그대와 나, 그리고 극소수의 호위만을 동반해야 할 걸세.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발견될 확률도 높아지는 법이니."
루페르트는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지나칠 정도로 과감한 작전이다.'
성안에 갇혔다고 하나 루페르트에겐 여전히 강력한 호위대가 있다.
현재 자부아 성벽을 지키는 천 명 남짓한 수비대는 가볍게 제압하고 도시 전체를 손에 넣을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이다.
제아무리 성벽을 포위한 마법사와 용병 집단이 전쟁의 프로라고 하나 농민 반란군 따위로 성벽을 넘어 루페르트의 목을 가져가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루페르트가 그 호위를 포기할 경우엔 이야기가 달라진다.
천천히 말라죽을지언정 절대적인 안전이 보장되는 현재와 달리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는 불안정한 처지로 전락하는 것이다.
하지만 늦출 수가 없다.
"시간을 지체하면 성벽의 인간들을 사주한 자가 목적을 달성하게 될 걸세."
루돌프가 의자에 앉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조언은 절대적이다.
저 철혈대제라 불렸던 대제의 조언만 한 힘을 가질 발언이 얼마나 되겠는가.
"어쩔 수가 없군요."
루페르트는 과감하게 결정을 내렸다.
루돌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약간의 여운을 둔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이번 문제의 원인이 뭔 줄 아나?"
"원인 말입니까? 글쎄요."
"세간에서 전하를 두고 말하기를 대단히 비범한 자라고 하더군."
"비범하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입니다."
"세상은 다르게 생각하지. 그들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경로는 인쇄소에서 찍어 낸 싸구려 팸플릿이나 대자보, 소문이 전부니까. 대중은 그대라는 사람을 알기보다는 그대가 한 일만을 기억하는 법이야."
"...."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 쪽의 빈 자리를 어루만졌다.
소라고둥이 있는 자리다.
리프니에가 없었다면 그 숱한 업적을 과연 해낼 수 있었을까.
아니, 불가능할 것이다.
중도에 죽거나 포기하거나 아니면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루페르트 자신이 말한 대로 그는 지극한 평범한 사람이니까.
"그대의 적이 위명만을 듣고 지레 겁을 집어먹고 있어. 이번 사태 또한 그 일환이겠지."
루돌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움직이세."
"벌써요?"
"명심하게."
루돌프가 바람처럼 문을 나섰다.
"늘 상대의 생각보다 빠르게."
* * *
계획을 이야기했을 때 분더발트는 강한 반감을 드러냈으나, 루페르트의 뜻은 확고했다.
무엇보다 루페르트의 부드러운 한마디가 완고한 연대장의 고집을 누그러뜨렸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대와 그대의 뛰어난 장병들은 이런 궁벽한 산맥에서 죽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목숨들입니다. 그대들에게 어울리는 더 위대하고 격이 높은 전장이 있을 것입니다."
분더발트는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자신을 설득한 듯 결심한 얼굴로 완고한 얼굴을 들어 루페르트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의 손엔 죽은 기병대장의 투구에 달렸던 붉은 깃털이 쥐어져 있었다.
깃털을 꼭 쥐며 분더발트가 물었다.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어쩔 수 없지요."
루페르트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대로는 공멸을 면하기 어려우니."
"알겠습니다. 전하의 명을 받들어 성의 수비 및 기만 공작을 펼치겠습니다."
루페르트는 그의 손을 맞잡으며 눈을 마주쳤다.
"조금만 버텨 주십시오. 정치 공작을 타파하고 상황을 정리하는 대로 원군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전하."
분더발트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반드시 탈출하십시오. 이 분더발트 백작과 자랑스러운 자식들이 전하의 전장에서 가장 위험하고 가장 궂은 곳을 맡을 기회를 주십시오!"
마주 잡은 두 손이 힘을 더했다.
분더발트의 설득이 끝난 후 루페르트는 탈출 행렬에 낄 인선을 발표했다.
탈출 인원은 총 다섯 명이다.
루페르트와 루돌프, 마를로네와 한스 징펠만.
그리고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을 베르크 란이다.
형식적인 지위라고 하나 무려 왕이자 선제후인 신분에 시중을 들 시종이 없다는 건 위신에 손상이 가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루페르트는 시종을 포함하지 않았다.
체력도 약하고 전투에 도움도 되지 않을뿐더러 약간의 편의를 위해 적대적인 영역에서 정체를 드러내는 우를 범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소라고둥이 없는 현재 루페르트는 그 어떤 위험 요소도 배제해야 한다.
"그럼, 이 인선으로 출발하겠습니다."
루페르트는 분더발트와 극소수 장교의 배웅을 받으며 루돌프가 말한 비밀 통로로 향했다.
비밀 통로의 입구는 붉은 산맥의 낭떠러지가 바로 아래에 내려다보이는 첨탑에 숨겨져 있었다.
루돌프가 판자를 치우자 구멍 하나가 드러났다.
까마득한 과거에 용변을 보던 곳이다.
수백 년 전에 용도가 바뀌었지만, 당시의 꿉꿉한 악취가 첨탑 안에 맴돌고 있는 기분이다.
한스 징펠만이 씨익 웃었다.
"호오? 선조의 근심을 덜어 내는 장소를 통해 탈출하다니. 이거 꽤 흥미롭군요."
늘 모험을 찾는 그에겐 화장실 구멍을 이용한 탈출도 이색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루돌프와 마를로네가 먼저 구멍 아래로 내려갔다.
둥그런 구멍 아래에 내려다보이는 건 까마득한 낭떠러지와 그 사이에 흐르는 실개천이 전부지만, 구멍 바로 아래 발을 디딜 수 있는 돌출부가 있었다.
루돌프는 노구라고는 믿기지 않을 민첩함으로 바위와 틈새를 잡고 능숙하게 절벽을 타고 절벽 사이에 난 좁은 통로에 진입했다.
그다음은 마를로네다.
루페르트와 뒷사람을 위한 로프를 쥐고 훌쩍 구멍 아래로 뛰어내렸다.
가장 가볍고 민첩하며 이능의 힘을 지닌 도펠죌트너답게 언제나처럼 가볍고 살랑거리는 듯한 움직임으로 절벽을 타고 루돌프가 들어간 바위 사이의 틈새에 진입했다.
로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만일에 대비한 보험이다.
한스 징펠만이 나섰다.
"다음은 제가...."
"아니. 제가 가겠습니다."
루페르트는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보고 인간이라면 모두가 가진 높이에 대한 본연적인 공포를 느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마음이 조마조마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가야 할 길이다.
가야만 하는 길이다.
침을 꿀꺽 삼키고 루페르트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구멍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가 구멍으로 내려가기 전에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첨탑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루페르트는 물끄러미 갑작스러운 침입자를 응시했다.
"당신은?"
"저, 전하!"
루페르트 앞에 깡마른, 잿빛 로브를 걸친 훤칠하게 키 큰 사내가 허리를 숙였다.
그는 다름 아닌 사각의 마법사 지겔슈타트였다.
미지의 마법사에 기가 꺾여 두문불출하던 그가 갑자기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뭐 하러 온 거지?'
아무리 그가 사각의 마법사고 마법 대학을 대표하는 자라고 해도 이번 계획을 반대한다면 그냥은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잘난 척을 해 놓고 성벽 위에서 싸워 보지도 않고 지레 겁먹은 개처럼 달아난 주제에 이제 와서 루페르트의 중대사를 막는 건 선을 넘은 행위다.
반감은 루페르트 본인조차 놀랄 정도로 냉담한 시선으로 이어졌다.
"전하."
지겔슈타트가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입니까?"
눈빛만큼이나 싸늘한 목소리로 루페르트가 물었다.
"다름이 아니오라 전하께서 은밀히 피신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찾아왔습니다."
"이 계획에 이의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지겔슈타트가 말했다.
정수리를 드러낸 그의 모습엔 과거의 신비로움은 그 작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또한 평범해진 것이다.
더 강력하고 더 신비로운 존재에 의해.
"당신의 이의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내 직이 위험합니다."
"하오나."
"당신은 그 마법사 상대로 날 지켜 줄 수 없지 않소?"
"!!"
지겔슈타트의 훤칠하고 깡마른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루페르트는 슬슬 인내의 한계에 달하는 걸 느꼈다.
'더 이상 내 앞길을 막지 못하게 하겠다.'
지겔슈타트에 대한 반감은 그의 반대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저 아래 절벽 사이의 틈새에 빼꼼 고개를 내밀고 로프를 잡은 채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소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저 소녀와 그 조부는 자신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했다.
가장 어렵고 위험할 때 그의 곁을 지킨 사람이다.
계약에 묶인 차가운 관계라 할지라도 루페르트에겐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다.
지겔슈타트는 그들을 몇 번이나 무시했고 욕보였다.
"당신이 뭐라고 하던 저는 제 앞길을 가겠습니다."
이것은 루페르트의 뜻이다.
그 어떤 주장과 궤변도 꺾을 수 없는.
"전하!"
"뭡니까?"
"저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루페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저 신비롭고 고고한 척을 하던 사각의 마법사가 고개를 숙인 채 부탁하고 있다.
"제 사명은 전하를 옆에서 지키는 일입니다. 한 번 추태를 부린 점은 뼛속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그 마법사 상대로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 마법사만 아니라면 충분히 전하의 여정에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고개를 숙인 채 말하는 그의 음성엔 오만함도 신비로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존감을 빼앗긴 사내의 간절한 바람만이 절절하게 담겨 있었다.
'어떻게 한다.'
이 청까지 뿌리칠 순 없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겔슈타트는 정당한 루페르트의 수호자다.
게다가 저렇게까지 자존심을 꺾었다.
이 이상 그의 체면을 무시하는 건 그만이 아니라 마법대학에 대한 모독일지도 모른다.
"...."
루페르트가 지겔슈타트의 어깨를 잡았다.
"지겔슈타트 법사."
"전하."
"당신이 저를 따라오시겠다면 저야 오히려 기쁠 따름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중에 당신만큼 높은 진리를 본 사람은 없으니까요."
"...."
지겔슈타트의 몸에 떨림이 있었다.
그 생생한 떨림을 손끝으로 고스란히 느끼며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인외의 힘을 지닌 강력한 존재도 결국은 사람. 우리와 다르지 않구나.'
냉담하던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오랜만에 그다운 온화함이 돌아왔다.
"동행을 원하신다면 이쪽에서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만."
그는 탈출구 아래 서서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마를로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를 돕는 또 다른 사람들. 즉, 도펠죌트너에 대한 위협이나 멸시는 가급적 피해 주셨으면 하군요."
"명심하겠습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지겔슈타트가 답했다.
그가 약속을 어디까지 지킬지는 의문이지만, 이것으로 황제의 진용은 갖춰졌다.
수백 년간 무수히 많은 사람의 해우소로 쓰이던 구멍을 통해 미래이자 과거의 황제가 빠져나왔다.
발밑에 펼쳐진 건 까마득한 낭떠러지.
루페르트는 로프에 의지해 위태로운 절벽을 타고 자신을 향해 뻗은 하얗고 가는 손을 응시했다.
손과 손이 허공에서 맞잡았다.
순간 루페르트는 느꼈다.
마를로네라는 소녀의 손이 기이할 정도로 차다는걸.
"어서 오세요. 황제 폐하."
차가운 손이 그를 힘껏 잡아당겼다.
동시에 가벼운 빈정거림이 찬바람처럼 루페르트의 귓가에 살랑거렸다.
"왜 꾸물거리시나 했더니 짐덩이 하나를 달고 오셨네."
63화 17. 하얀 죽음 (1)
여정이 시작됐다.
안내는 루돌프가 맡았다.
길이라고 할 수 없는 가파른 오르막과 비탈길, 수직에 가까운 내리막을 지났고 한쪽은 얼음 한쪽은 녹음의 우거진 경계선을 지나기도 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 루페르트는 문득 호기심을 느끼고 마를로네에게 다가갔다.
"마리."
"무슨 일인가요?"
"저분과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거냐?"
루페르트는 홀로 떨어진 채 휴식을 취하는 노인 쪽을 바라보았다.
"그냥 저분이 다가오시던데요?"
"그래?"
"네. 성이 포위되고 우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다가오더니 성에 들어갈 방법을 알고 싶냐고 그렇게 말했죠."
"네 할아버지는 뭐라고 했지?"
"별말 없었어요."
"아는 사이?"
"그런 거 같진 않았어요. 그래도 불쾌감을 드러내진 않았죠. 드문 일이긴 하지만. 뭐, 저와 달리 할아버지는 전하에게 기대하는 게 많아서 걱정이 됐나 보죠. 처음 보는 사람의 말을 들어줄 정도로."
'베르크 란은 철혈대제의 챔피언이라고 들었다. 그런데도 못 알아본 건가?'
가장 궁금한 건 마를로네와 루돌프의 관계가 아니다.
베르크 란과 루돌프의 관계다.
죽은 황제가 나타나 뻔뻔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철혈대제의 챔피언은 그러나 루돌프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건 물론이고 그를 특별하게 여기는 것도, 은밀한 교감이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었다.
루페르트의 눈에 비친 베르크 란과 루돌프는 전혀 관계없는 타인 그 자체였다.
'그러고 보니. 안젤리나 대황후의 시녀도 클라우데 2세를 알아보지 못했었지.'
어떤 원리로 철혈대제가 과거의 인연들에 인지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구의 권능인지는 확실하다.
'여신님의 권능인가. 타인의 눈을 속이는 그런 계열의 권능을 클라우데 2세에게 부여한 건가. 그것 외엔 설명할 길이 없어.'
테타우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물어보리라.
아니 그것 말고도 묻고 싶은 게 너무 많다.
한시바삐 다시 여신님과 만나고 싶다.
그런 찰나에 루돌프가 손을 들어 올렸다.
"잠깐."
그는 호들갑이나 거추장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고도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는 법을 알고 있었다.
단지 한마디 말을 하는 것만으로 루페르트 이하 모든 일행이 서늘한 살기를 감지하고 숨을 죽였다.
"저길 보시오."
루돌프가 베르크 란을 불렀다.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을 유심히 관찰했다.
'역시.'
늘 무뚝뚝하고 폭력 같은 증오를 버무린 그의 얼굴엔 일말의 변화도 찾아볼 수 없다.
"무슨 일이오?"
베르크 란에게 있어 루돌프는 철혈대제가 아닌 평범한 타인에 불과했다.
"저기."
루돌프가 눈으로 뒤덮인 산악 절벽 쪽을 가리켰다.
마치 인간 같기도 하고 원숭이 같기도 한 하얀 털로 뒤덮인 두 발로 걷는 무언가가 눈 덮인 소나무 숲 사이를 성큼 걸음으로 배회하고 있었다.
생긴 것도 기묘하지만 공포감을 배가하는 건 그 크기다.
그 괴물은 10m를 족히 넘어갈 침엽수와 거의 키가 비슷했다.
그토록 거대한 것이 사람처럼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이 원시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저게 뭔 줄 알고 있소?"
베르크 란의 눈동자가 루돌프가 가리키는 지점을 향했다.
"!"
미세하지만 명백한 놀라움이 베르크 란의 눈동자에 떠올랐다.
놀라움은 이내 경계와 더 진한 살기로 대체됐다.
베르크 란의 손이 검집을 만지작거렸다.
"잘은 모릅니다. 허나.... 저건...."
마를로네가 어느새 검집을 들고 나타나 조부 옆에 섰다.
그녀는 루페르트에게 목례를 한 후 괴물을 노려보며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가문의 숲에서 만난 것과는 차원이 달라 보이네요."
지겔슈타트가 나타나 일행 옆에 서서 가늘게 뜬 눈으로 숲을 거니는 괴물을 응시했다.
그의 목젖이 꿈틀거리며 침을 삼켰다.
곧 지겔슈타트는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겁에 걸린 목소리로 말했다.
"트, 틀림없습니다. 저건... 저건, 울타니아의 설인입니다."
지겔슈타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하필 저 전설의 괴물이 설봉에서 내려올 줄이야...!"
멀리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개가 인간의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는 것 같은 섬뜩한 짖음.
"저 괴물은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저건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후방 경계를 서던 한스 징펠만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
그는 지겔슈타트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후 루페르트에게 아마도 지금까지 보여 줬던 얼굴 중 가장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설인은 사냥의 여신 다르타니아가 창조하지 않은 짐승입니다. 인간의 사냥감이 아니라는 소리지요."
죽음과도 같은 적막 속에서 루페르트 일행은 그 끔찍한 소리가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이 세상에 저런 괴물도 존재했단 말인가.'
제국은 물론 제국 내외에 갖가지 괴물이 존재하는 건 익히 알려진 상식이다.
제국 내에만 해도 오크를 위시한 갖가지 괴물들이 제국의 절반을 뒤덮은 광대한 삼림에서 서식하고 있고, 바다로 나가면 크라켄의 자식 같은 오로지 인간을 해치기 위한 마물들이 주기적으로 나타나 해로를 위협한다.
저 먼 땅끝 리히트 보덴엔 스크라엘링이 무리 지어 호시탐탐 그들의 땅에 발을 디딘 인간을 몰아내려 하고 있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저 먼 남쪽 작렬하는 태양의 사막에선 영원히 사는 사람들의 땅이 있다고 한다.
그 무수한 괴이 중에서 저 설인은 아마 정점에 서 있는 존재일 것이다.
지겔슈타트, 한스 징펠만은 물론이고 저 베르크 란마저 두려움을 느낄 정도니.
한 가지 확실한 건 저 괴물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효만으로 알 수 있다.
그것의 포효는 단지 공포를 느끼게 하는 걸 넘어 사람의 심력 그 자체를 갉아먹는 힘이 있었다.
소리 자체가 저주라고 할까.
'회귀 전에 이 괴물을 안 만난 건 그야말로 천만다행이군. 룸 제국의 일개 군단? 아니, 저런 건 몇 개 군단이 와도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설인은 한동안 끔찍한 포효를 내지르다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눈 쌓인 소나무 숲 안쪽으로 사라졌다.
"움직입시다."
루돌프가 노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기민한 몸놀림으로 속보로 걸어 나갔다.
일행은 빠르게 숲을 통과했다.
곧 길이 나타났다.
"여기서부터는 저분에게 안내를 부탁하게."
루돌프가 베르크 란을 가리켰다.
베르크 란은 길을 알고 있었다.
안내역을 인계받은 그는 주변의 산봉우리의 형태를 보고 지형을 가늠한 후 거침없이 일행을 다음 목적지로 안내했다.
그의 길은 거칠고 험했으나 적어도 루돌프가 안내했던 길 같지도 않은 험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다만 베르크 란의 걸음이 워낙 빨라 루돌프 때와 달리 루페르트는 숨이 차는 걸 느꼈다.
'발걸음이 상당히 빠르군. 이 사람.'
그 외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없나 살펴보았다.
한스 징펠만은 낯빛 하나 호흡 하나 틀어지지 않았고 나머지도 사정도 마찬가지.
지겔슈타트 정도가 루페르트와 비슷한 숨참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루페르트에게 마법사에게 다가갔다.
"갈 만합니까?"
"네. 이 정도는."
참았던 거친 숨을 한 번에 몰아 내쉬며 지겔슈타트는 저만치 앞서가는 베르크 란의 등을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빠르게 갈 필요가 있을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하가 함께하고 있는데."
자제하겠다고 약속하고 있지만 원래 싫어했던 도펠죌트너가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전처럼 드러내 놓고 비난하진 않지만 지겔슈타트의 표정과 목소리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전 괜찮습니다."
루페르트는 이 사내를 데리고 온 걸 조금은 후회했다.
해가 어둑해질 무렵 민가가 보였다.
목동들이 거처로 쓰는 간이 오두막으로 안은 비어 있었다.
오두막 안에 들어가자 꾸릿한 냄새가 코안으로 확 밀고 들어왔다.
"전하께서 묵기엔 지나칠 정도로 누추한 곳이긴 하지만 밤의 추위와 이슬을 피하기엔 여기만 한 곳은 없을 것입니다."
베르크 란이 그답지 않게 쭈뼛거리며 말했다.
그가 보기에도 여긴 룸왕이자 선제후이오, 곧 황제가 될 루페르트가 묵기엔 지나치게 누추한 곳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루페르트는 괘념치 않았다.
"괜찮습니다. 이런 곳에선 몇 번이고 신세를 졌으니까요."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짚을 정리한 후 보란 듯이 편안하게 누웠다.
베르크 란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오르자 루페르트는 미소 지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황제 후보가 되기 전에 잠시 목동 일을 한 적이 있었죠."
"그렇습니까?"
"슈발츠마인 선제후 가문의 핏줄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조부 때부터 의절한 사이라서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의지할 곳도 없고 결국 하켄하임에서 갖가지 일을 하며 살았죠."
다사다난했던 과거의 풍경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기억나는 건 헤아릴 수 없는 밤하늘의 별들, 그 별자리를 보며 플루트를 불던 과거의 자신, 스쳐 지나가는 양과 충성스러운 사냥개.
하켄하임 시대의 삶들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빈곤하고 비루했지만, 걱정은 없었다.
'그냥 그대로 하켄하임에서 목동이나 하며 사는 삶이 내게 맞았을까.'
"저기."
옆에서 마를로네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희미한 불빛 탓인지 늘 눈동자에 머물러 있던 안개가 보이지 않는다.
명백히 흥미가 있는 듯한 시선.
'이 녀석이?'
흔치 않은 사건에 루페르트는 흥미를 느끼며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할 말이라도 있나?"
마를로네가 주변을 돌아보더니 조심스레 묻는다.
"혹시 거세해 보신 적 있으세요?"
"거세...?"
루페르트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갑자기 무슨 주제냐?'
"아니, 목동이라면 다 하잖아요? 씨 숫양 하나 남겨 놓고 나머지는 모두 새끼 때 거세하는 거."
"저기, 그건 잘 모르겠는데."
"목동 하신 거 맞으세요?"
마를로네는 이상할 정도로 열의가 넘쳤다.
다행히 그녀의 열의는 바깥에서 들려온 조부의 근엄한 목소리에 가로막혔다.
"마리. 무엄하게 전하한테 뭐 이상한 걸 묻고 있냐?"
"궁금해서요."
"할 일 없으면 땔감이나 모아 와라."
"네."
마를로네가 자리를 뜨자 지겔슈타트와 한스 징펠만이 들어왔다.
한스 징펠만은 사냥꾼이자, 총사답게 오두막 여기저기를 살피며 총안구로 쓸 만한 틈새나 방벽 등을 살핀 반면 지겔슈타트는 바로 루페르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전하."
"네. 무슨 일인가요?"
"방금 저도 그.... 소녀의 말을 들었습니다."
"문제가 있나요?"
"아니 지나치게 허물이 없는 거 같아서요."
"아직 나이가 어리니 호기심이 강한 모양이겠죠."
"도펠죌트너는 실제 연령보다 나이가 어려 보입니다."
"그런가요?"
"스물 아니, 어쩌면 서른을 훌쩍 넘었을지도 모르지요. 손녀라고 하지만 딸일 가능성도...."
그때 바깥에서 또 한 번 베르크 란의 냉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일곱입니다."
지겔슈타트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와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불쾌감이 떠올라 있었다.
'감히 도펠죌트너 따위가....'
그러나 그의 분노는 강풍 앞에 촛불처럼 꺼졌다.
거의 모두가 동시에 남쪽을 노려보았다.
곧 시선들이 서로 맞부딪쳤다.
한스 징펠만이 루페르트에게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추격자가 있습니다."
남쪽에 불빛이 어른거린다.
등불이다.
숫자는 다섯.
한스 징펠만의 총기에 희미하게 타오르는 화승을 제외한 모든 불이 꺼졌다.
"음."
루돌프가 소리를 냈다.
베르크 란은 물론 한스 징펠만마저 놀라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둘 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언제 거기에 있었냐는 놀라움이 역력하게 묻어 나왔다.
루돌프가 루페르트에게 귓속말을 했다.
"아무래도 버거운 상대가 온 모양입니다."
"버거운 상대라고요?"
떠오르는 건 단 하나.
루페르트는 저 오만한 지겔슈타트를 겸손하게 만들어 준 두건을 쓴 마법사를 떠올렸다.
'설마 그 마법사가 나를 추적한 건가?'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엔 검, 한 손엔 누군가의 팔을 잡아끌고.
그에게 붙잡힌 건 다름 아닌 마를로네였다.
'저 녀석!'
잠깐 땔감으로 주우러 가는 사이에 붙잡힌 모양이다.
그런데 그 마를로네가 붙잡혔다는 건 또 다른 사실을 나타냈다.
루페르트는 어둠 속의 사내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어쩔 수 없다. 들킬 위험이 있더라도 통찰의 만화경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불길한 녹색 빛이 일렁거리기 시작한다.
천변만화하는 녹광 속에서 빛나는 문자가 떠오르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 루페르트의 어깨를 잡았다.
64화 17. 하얀 죽음 (2)
"그 권능을 여기서 사용하는 건 현명하지 않아."
루페르트를 막은 건 루돌프였다.
"우수한 마법사도 있어. 더욱 조심해도 나쁘지 않아."
다른 누구도 아닌 선제의 충고다.
루페르트는 즉시 통찰의 만화경을 회수했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사과할 건 없네. 급박한 상황에서는 현명한 판단을 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까."
오두막 안엔 루돌프와 루페르트 둘만이 있었다.
한스 징펠만은 지붕에 올라 묵직한 철제 가방을 열어 그 안의 탄환과 장비를 조정하고 있었고 지겔슈타트는 문 앞에 우뚝 서서 모처럼 오랜만에 사각의 마법사다운 오만과 위엄을 과시하며 신비로운 눈으로 다가오는 불빛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적과 가장 가까이 있는 건 베르크 란이다.
그는 오두막으로 통하는 길목 앞에 짧은 스틱 하나만을 든 채 다가오는 적을 동상처럼 서서 미동도 없이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본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저 사람도 손녀를 걱정하는 걸까.'
"이거 놓으세요. 키 차이가 커서 어깨가 빠질 거 같네요! 그러니 제 발로 걸어갈게요. 보세요? 무기도 없잖아요?"
손목을 잡힌 마를로네가 얌전하게 걸으면서 투정하듯 말했다.
그 음정과 표정은 평소 루페르트를 대할 때와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딱히 두려워하는 거 같진 않네.'
급박한 상황이지만 천연덕스러운 마를로네의 모습을 보니 절로 헛웃음이 나오는 루페르트였다.
한편 루돌프 또한 마를로네를 두건 아래의 어둡고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귀중한 걸 저 계집에게 쓴 모양이군."
루돌프가 혀를 찼다.
"둘도 없는 지고의 보석을 진흙탕에 처넣었구나."
루페르트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루돌프가 그답지 않게 감정을 드러냈다.
냉소적인 비음이 두건 너머에서 들려온 것이다.
처음 알았다.
저 어두운 회랑의 노인이 냉소를 내비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는 마를로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저 계집이 어떻게 도펠죌트너의 힘을 얻었는지 아나?"
"글쎄요. 그건 제가 알지 못하는 일이라."
"내가 저자에게 준 물건이 있지. 그의 모든 걸 빼앗기 전에."
"베르크 란을 알고 계십니까?"
"당연히."
질문 자체에 어폐가 있다.
어떻게 자신의 챔피언을 모를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까지 루돌프는 베르크 란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고 의식하는 모습 또한 보여 준 적이 없다.
그래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으나, 이번에 확실히 드러났다.
그런데 왜일까.
이 꺼림칙한, 마치 물과 기름이 서로를 밀어내는 듯한 이질감은.
"나름 기대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작은 사람이었어."
루돌프는 베르크 란을 매도하고 있다.
매도를 넘어선 진한 실망이 중저음의 칼날 같은 예리함을 가진 음성에서 뚝뚝 떨어졌다.
"하늘이 내린 선물을 갖고 있음에도 두 번의 기회를 전부 저버렸군."
다음 순간 총성이 울렸다.
지붕 위가 아닌 저 너머다.
총성이 울려 퍼진 직후 웅웅거리는 무언가가 고막을 강하게 밀어냈고, 금속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고막을 할퀴고 지나갔다.
루페르트는 순간 시야가 쥐구멍처럼 좁아져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루돌프는 그 찰나의 혼란 속에서도 모든 걸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천정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마법사. 성벽 위에서는 낭패를 봤지만, 역시 사각의 마법사답군. 그 찰나의 시간에 탄환의 궤적을 읽어 내고 은의 방벽으로 총사를 보호하다니."
아니나 다를까 곧 지붕 위에서 한스 징펠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한스 징펠만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물의 표면처럼 일렁거리는 환영을 또렷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환영의 중심엔 거울이 깨진 듯한 균열과 더불어 그의 미간 바로 위에 시커먼 구멍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적의 총탄이 닿은 자국이다.
지겔슈타트가 아니었다면 한스 징펠만은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을 것이다.
"...호겔 프리츠."
늘 여유롭던 총사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동시에 명랑하던 눈동자엔 그가 사냥하던 야수와 다를 바 없는 번들거림이 떠올랐다.
"확실히 실력을 키웠군."
치지지직-
타오르는 화승을 지붕 위를 엮은 널판으로 가리면서 눈동자가 맹렬히 움직이며 어둠 속의 적을 찾는다.
그의 사냥감은 보이지 않는다.
그처럼 어둠과 하나가 되어 그림자 속에 숨어 있다.
눈에 띄는 건 앞으로 흔들리며 다가오는 등불 하나. 마를로네를 붙잡은 자다.
총성이 울려 퍼지는 데도 전진을 멈출 줄 모르는 겁 없는 등불이 만들어 내는 원형의 영역과 그 아래 초연하게 적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는 마를로네를 보며 한스 징펠만은 담담하게 기도했다.
"사냥의 여신 다르타니아시여. 제 운과 목숨을 그대에게 맡기겠나이다."
기도에 맞춰 한스 징펠만은 등불을 든 상대의 심장을 가늠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성이 울려 퍼졌다.
불과 철의 형제단 비전의 기술로 만들어진 황동 탄환은 밤공기를 갈랐다.
순간 등불이 흔들리고, 등불을 든 자의 형체를 희미하게 드러냈다.
'명중이다.'
두말할 것 없는 명중이다.
마법사가 있다고 해도 막기 어려우리라.
실제로 지겔슈타트는 총성이 울리기도 전에 적을 발견하고 방벽을 펼쳤으니.
한 명을 죽이고 시작하는 건 사기 진작은 물론 전투의 방향에 큰 도움이 된다.
운 좋게 지휘관이라도 쓰러뜨린다면 이 막간의 싸움은 싱겁게 끝나리라.
탄환이 상대방의 심장에 꽂히는 걸 기대하며 한스 징펠만은 숨을 죽였다.
형체가 움직였다.
"?!"
한스 징펠만의 눈동자에 경악이 떠오른 순간, 일은 일어났다.
검이다.
한 자루의 검이 허공을 갈랐고 그를 향해 날아오던 탄환을 튕겨 냈다.
"!!"
놀란 건 한스 징펠만이 아니다.
"호오?"
루돌프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고, 베르크 란의 이글거리는 눈동자 안엔 미세한 경악이 떠올랐다.
"탄환을 튕겨 낸다고?"
루페르트도 놀라긴 매한가지.
등불이 움직이며 마를로네를 붙잡은 존재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검은 옷을 입은 사내였다.
훤칠하면서도 넓은 어깨, 균형 잡힌 몸.
그 얼굴은 염소의 머리를 가공해 만든 기괴한 가면으로 가리고 있었다.
'저건 누구지?'
의문이 루페르트의 눈동자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사내의 검신이 스스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도펠죌트너인가?"
루돌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베르크 란이 앞으로 나섰다.
"이름을 밝혀라."
좀처럼 말이 없던 그는 평소 상상하기 어려운 천둥 같은 일갈을 사내에게 쏟아 냈다.
"내 이름은 베르크 란이다."
그 이름을 듣자 가면의 사내는 마를로네의 팔목을 놓아주었다.
마를로네는 미간을 찌푸리며 팔목을 어루만진 후 마치 날아오르는 새와 같은 도약으로 일거에 조부에게 당도했다.
"할아버지."
그녀의 얼굴은 진지했다.
"강해. 저 사람."
"알고 있다. 가서 황제, 아니 룸왕 전하를 지켜라."
"싸울 거야?"
"나 말고 누가 있겠나."
"우리한텐 마법사가 있잖아? 재수는 없지만.... 아."
마를로네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도펠죌트너의 감각이 꿈틀거렸다.
저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음습하고 눅진한 썩은 마법의 기운을 비로소 느낀 것이다.
폭도 속에 있던 그 마법사다.
사각의 마법사 지겔슈타트를 찍어 눌렀던.
마를로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괜찮겠어? 내가 싸울까?"
"너로서는 1초도 버티지 못할 게다."
"할아버지가 그 멍청한 선제후를 지킨다면?"
손녀의 물음에 베르크 란은 스틱을 허리띠에 꽂은 후 검의 손잡이를 어루만졌다.
"우리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저자를 죽이는 것뿐이다."
베르크 란은 검과 등불을 든 채 다가오는 가면의 사내를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저자는 도펠죌트너다.
모든 증거가 그가 도펠죌트너라는 걸 말해 준다.
마를로네 같은 특별한 경로가 아닌 이상, 모든 도펠죌트너는 베르크 란의 이름을 알고 있다.
한때 제국의 검이었지만 추방되고 빨간 명찰을 강제로 부착당한 채 걸인의 삶을 강요받은 도펠죌트너 사이에서 베르크 란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전설이다.
그런데 저 사내.
베르크 란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다가오고 있다.
틀림없다.
그는 결투를 원하고 있다.
말이나 생각에 의한 결론이 아니다.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사내의 인생이 속삭여 주는 예정된 운명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지만 이런 데서 죽을 생각은 없다.'
베르크 란이 검을 뽑았다.
낡고 비루해 보이는 검집 안엔 검은색을 은은하게 머금은 거울처럼 맑은 검신이 숨겨져 있었다.
베르크 란은 두 손으로 검을 잡아 날을 적에게 향하게 돌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는 제국의 검이니."
검에 불길이 타오른다.
한때 철혈대제 아래서 제국의 이름으로 무수한 제국의 적을 분쇄했던 투사들의 검이 제국의 변경에서 서로 경쟁하듯 불타올랐다.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이 그 경합의 증인이다.
그리고.
"이건 꽤 흥미롭군."
한 사내만이 진심으로 웃을 수 있다.
철혈대제. 클라우데 2세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계승자가 둘이었나?"
순간 루페르트는 보았다.
저 루돌프의 눈동자 주변에 불길한 녹색의 안광이 일렁거리는걸.
'저건? 통찰의 만화경?!'
지금까지는 사용하는 입장이기에 알지 못했다.
통찰의 만화경을 사용할 때 그 불길한 안광이 얼마나 크고 눈에 잘 띄는지.
단지 잘 띄는 것만이 아니다.
제아무리 미신을 믿지 않는 불신자조차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떨게 할 정도의 불경함이 서려 있었다.
'이 정도였나?'
루페르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몇 번이나 쓰고도 들키지 않은 자신의 행운에 감사하면서 말이다.
"꽤 흥미롭게 됐군."
루돌프의 눈동자 주변에 서린 안광이 사라졌다.
"상대방의 정체를 알았습니까?"
"알다마다."
루돌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가세."
"네?"
루페르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베르크 란이 목숨을 걸 동안 여기를 빠져나가자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루돌프는 불타는 검을 든 채 가면의 사내와 대치한 베르크 란의 넓은 등을 주름이 팬 눈으로 지그시 응시했다.
"그는 이 싸움에서 패배하겠지. 져서 바닥에 나뒹굴겠지. 그가 죽였던 상대방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땅이나 하늘을 맥없이 응시하겠지."
"그 사람이 진다고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네."
루돌프가 먼저 오두막의 뒤편으로 빠져나갔다.
루페르트가 그의 뒤를 따라가려 할 때 누군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마를로네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가운데, 루페르트는 루돌프를 따라 오두막을 빠져나갔다.
찰나의 마주침 속에서 루페르트는 느꼈다.
마를로네의 늘 흐릿했던 눈동자 안에 그토록 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그 감정은 안도, 놀라움, 그리고 실망으로 이어졌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상황을 읽어 낸 것이다.
루페르트가 자신의 조부를 버리고 달아나는 결정을 했다는걸.
"...."
그녀는 어두운 오두막 안에 홀로 남았다.
바깥엔 과거의 황제가 기다리고 있다.
철혈대제, 클라우데 2세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랜 인연도 끝이군. 베르크 란."
그 미소는 루페르트에게 전에 느꼈던 이질감을 상기시켰다.
결코 하나로 섞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그런 종류의 다름.
"자, 가세. 루페르트 가우저. 총사와 마법사를 부르게. 그들은 여차할 때...."
루돌프가 중간에서 말을 멈추고 루페르트를 응시했다.
철혈대제라 불린 그 정도 되는 자가 애송이 황제의 감정을 읽어 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는 루페르트의 표정과 태도, 거기에 서린 강한 주저함과 반감을 순식간에 읽어 냈다.
루돌프의 미소가 걷혔다.
얕은 한숨을 내쉰 후 루돌프가 물었다.
"저 싸움의 끝을 보고 싶나?"
"...."
루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겨울보다 무거운 침묵을 뚫고 오두막 너머에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검과 검이 부딪쳤다.
가면의 사내와 베르크 란이 마침내 격돌한 것이다.
그 싸움은 이쪽에선 관측할 수 없다.
다만 쉴 새 없이 들려오는 파공음의 짧은 간극, 변화무쌍한 그 위치, 고막을 찢어 버릴 듯한 굉음이 그 싸움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실제로 보는 것보다 더 섬뜩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이게 도펠죌트너라고...?"
창백한 얼굴로 지겔슈타트가 중얼거렸다.
"저 정도란 말인가?! 그들의 권능이?!"
한스 징펠만과 지겔슈타트가 합류했다.
하지만 마를로네는 여전히 오두막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한스 징펠만이 오두막에 접근했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를로네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네. 루페르트 가우저. 우리가 얻어 낸 기회가 아니야. 우리의 적이 우리에게 수여한 기회지."
루돌프가 출발을 종용했다.
그러나 루페르트의 발걸음은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루돌프가 은근한 노기가 드러냈다.
"...."
이유는 없다.
정말이다.
차가운 침묵 속에서 머릿속을 맴도는 수천 개의 단어와 그 번뇌 속에서 서서히 루페르트의 생각이 형태를 갖춰 나갔다.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쪽이 누구든 좋다.
어떤 사람이든 좋다.
적어도 그는 나를 위해 싸우고 있다.
죽음마저 불사한 채.
버림받고 죽었던 황제를 위해서.
어찌 지켜보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누구라도 좋다. 날 위해 싸워 준다면.'
루페르트의 눈앞에 과거의 풍경이 떠올랐다.
자신을 버리고 황궁을 떠나던 근위병들.
황제의 애타는 호소를 무시하던 기사와 전사의 후예들.
불타는 황궁 속에서 이름 모를 병사에게 유린당하던 비참했던 자신의 모습.
폐부를 뚫고 들어오던 칼날의 섬뜩함과 이루 설명할 수 없는 고통.
루페르트의 눈동자 가장 깊숙한 곳에서 작지만, 결코 꺼뜨릴 수 없는 불꽃이 타올랐다.
'나 또한 그 싸움을 기꺼이 지켜볼 것이다.'
루페르트가 한스 징펠만과 지겔슈타트에게 손짓했다.
계속해서 베르크 란을 엄호하라는 뜻이다.
둘은 고개를 끄덕이고 저 어둠 속에 숨겨진 각각의 적수를 대비했다.
루돌프가 뒤돌아섰다.
"그대는 자상하군."
칭찬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허나 자상함은 평범한 자의 덕목이야."
담담하고 부드러운 말이 채찍처럼 루페르트를 질타했다.
특히 평범하다는 말이 무엇보다 루페르트의 마음을 날카롭게 긁었다.
'평범하다라....'
"명심하게. 천 번의 채찍질 뒤에 보여 주는 한 번의 자상함이 수십 년간 베푼 자상함보다 더 심심한 감사를 받는다는 것을."
그때 먼 곳에서 음산하고 음울한 마음 그 자체를 긁는 듯한 기괴한 포효가 들려왔다.
모두의 얼굴에 본능적인 경악이 떠오르는 가운데 외마디 외침이 저편에서 터져 나왔다.
"서, 설인이다!"
포효가 다시 한차례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울려 퍼졌다.
그 직후 전장의 소음이 사라졌고 오싹한 적막이 자리를 채웠다.
쿵! 쿵! 쿵!
발소리가 들려온다.
대지를 흔들고 태산마저 떨게 할 정도의 격렬한 진동이 믿기 어려운 속도감으로 거리를 좁혀 온다.
설인이 다가온다.
기록된 역사 이전부터 살아 있었을 불가해한 존재가 전설을 찢고 나와 현재를 파멸하기 위해 진군한다.
그 거역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무력한 도주뿐이다.
한스 징펠만이 서둘러 지붕에서 내려오고, 마를로네마저도 오두막 밖으로 튀어나왔다.
소리 없는 혼란 속에서 루돌프는 탄식하며 뒷짐을 진 채 돌아서서 진동이 울리는 방향을 그늘진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발 디딜 틈 없이 흩뿌려진 과거의 업보가...."
옛 황제의 그늘 진 시선은 이어서 루페르트의 얼굴을 향했다.
"새로 싹을 틔우려는 업보를 물어뜯으려 하는군."
순간 루페르트는 보았다.
늘 어둠에 가린 두건 아래 눈동자에 서려 있는 감정의 색채를.
루페르트의 생각이 맞다면 그 감정은 동정 혹은 연민이리라.
다음 순간 루페르트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살기를 느꼈다.
"!"
위기다.
지금까지 느꼈던 모든 위기가 장난처럼 보일 정도로 측량하기 어려운 위기가 다가온다.
'뭐지? 이 위험의 크기는...?!'
느닷없는 고함이 오두막 바깥에서 들려왔다.
"달아나!"
누가 그 말을 한지 알 수 없다.
모든 걸 찢어발기는 야수의 포효가 모든 걸 덮어 버렸으니.
루페르트는 우두커니 선 채 자신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믿기 어려운 광경을 목도했다.
하나의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
산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영원토록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것 같은 산이 쓰러지며 이쪽을 향해 해일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달아나십시오! 전하! 설인! 설인이 이쪽으로 곧장 달려오고 있습니다!"
한스 징펠만이 다급히 소리쳤으나, 그 목소리 또한 설인의 포효에 잠겼다.
"...."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언젠가 생각했었다.
죽음에도 색채가 있다면 하얀색이리라.
지금도 그 생각은 같다.
몽롱함 속에서 루페르트는 무의식적으로 가슴 쪽을 어루만졌지만, 그가 기대하는 소라고둥의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다.
"...여신님."
눈이 멀 것 같은 백색에 홀로 남겨진 과거의 황제는 옆에 없는 여신을 찾는다.
여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신님!"
보인다.
저기 눈보라를 몰고 이쪽을 향해 곧장 달려오는 괴물이.
그것은 다섯 개의 눈을 가지고 있었고 그 다섯 개의 눈은 셀 수 없을 정도로 겹눈으로 채워져 있었다.
마치 역겨운 곤충의 군집처럼 빽빽한 그 수십 개의 겹눈은 오로지 하나의 상을 담고 있었다.
바로 황제, 루페르트 가우저다.
모든 것이 또렷해졌다.
저 괴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루페르트 가우저를 노린다는 것을.
하얀 죽음 속에서 루페르트가 느낀 건 터무니없는 불합리함으로 뭉친 의문이었다.
'왜? 왜 하필 나를...?'
우두커니 선 채 루페르트는 다가오는 하얀 죽음을 응시했다.
'여신님.'
그의 여신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 대신.
차갑지만 부드러운 감촉이 그의 손을 포개듯이 잡았다.
"뭐 해요?"
루페르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의 손을 붙잡은 여성을 응시했다.
"마리...!"
그녀가 황제를 잡아당겼다.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은 아마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눈보라와 눈사태가 죽음의 흰색으로 모든 걸 덮어 버렸으니.
65화 17. 하얀 죽음 (3)
못 보던 천장이다.
군데군데 이가 빠지고 스러진 폐허 같은 광경.
실제로 그곳은 폐허였다.
루페르트는 자신이 누운 자리가 짚더미라는 걸 알아차리며 몸을 일으켰다.
"괜찮으세요?"
작은 체구의 여성이 등을 보인 채 냄비에 뭔가를 끓이고 있었다.
"마리?"
루페르트는 어렵지 않게 그녀를 알아보았다.
"마를로네입니다."
끓는 냄비를 보며 마를로네가 가볍게 대답했다.
"마리, 다른 사람은?"
"저 말고 한 명이 더 있네요."
그렇게 말하는 마를로네의 얼굴엔 노골적인 불쾌감이 묻어 나왔다.
루페르트는 어렵지 않게 그 또 다른 한 명의 정체를 파악했다.
'지겔슈타트인가.'
"전하!"
지겔슈타트가 버려진 오두막에 뛰어 들어왔다.
"무사하십니까?"
"다친 곳은 없군요. 움직일 수도 있고. 여러분이 전부입니까?"
"안타깝게도 안드리아의 루돌프 님과 나머지의 행방은 찾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지겔슈타트가 말을 멈추고 서쪽을 바라보았다.
"울타니아의 설인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뭐가 그걸 그렇게 화나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최근 보인 행보는 제가 대학의 서고에서 읽은 내용과 동떨어져 있더군요."
"책엔 뭐라고 적혀 있었습니까?"
"설인은 결코 영역을 떠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의 영역인 다섯 봉우리를 침범하지 않는 한은 말이지요. 기록된 마지막 출현도 룸 제국의 미친 총독 하나가 감히 설인을 사냥하러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겔슈타트가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그제야 루페르트는 지겔슈타트가 복도에 감은 헝겊과 그 헝겊에 밴 검붉은 핏물 자국을 발견했다.
"지겔슈타트 법사."
"대수롭지 않은 상처입니다.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나, 테타우까지 능히 도보로 전하를 호위하고도 남을 정도로 가벼운 상처입니다."
상황이 상황이다.
가벼운 상처도 무시할 수 없다.
루페르트는 그를 쉬게 하고 마를로네에게 다가갔다.
"마리."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또 한 번 목숨을 구원받았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제국은 또 다른 나락으로 굴러떨어졌을 것이다.
"고마워."
루페르트가 마를로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감사는 루페르트 혼자만의 감사가 아니다.
전 제국을 대표한 과거 황제의 감사다.
이에 대한 마를로네의 답은 그러나 조금은 퉁명스러웠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그녀가 솥에서 뭔가를 꺼내 후후 입김으로 식혔다.
"그보다 식사하실래요?"
그녀가 나무 그릇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무언가를 담아 루페르트에게 내밀었다.
"감자?"
"네."
"어디서 난 거지?"
"늘 가지고 다니죠. 우리도 먹고살아야 하잖아요?"
루페르트는 마를로네의 감자를 입에 가지고 갔다.
'음.'
그냥 감자 맛이다.
입에 착 달라붙는 전분 맛이 입맛을 돋우지만 이내 담백한 맛 속에 숨겨진 톡 쏘는 맛이 입맛을 도로 버려 놓는다.
그래도 배가 출출하다 보니 그럭저럭 넘어가는 편이다.
"마법사님도 하나 먹을래요?"
지겔슈타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를로네는 입을 삐쭉 내밀고는 자기 그릇에 감자를 담아 입김으로 불었다.
바람이 들어오는 오두막에 잠시 감자와 나무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조촐한 식사가 끝난 후 루페르트가 물었다.
"나머지 사람의 행방은?"
"잘 모르겠어요. 그 설인이 나타난 이후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루페르트는 눈사태를 일으키고 눈보라의 눈이 되어 자신을 덮쳐 오던 형언할 수 없는 하얀 죽음을 떠올렸다.
"...?!"
루페르트의 두 눈이 의지와 관계없이 부릅떠졌다.
숨이 멈췄다. 입에선 침이 질질 흘렀다.
몸을 움직이려고 하는 순간 루페르트는 눈사태 그 이상의 무언가가 마음을 덮치는 걸 느꼈다.
"엌!"
갑자기 입에서 토사물이 역류했다.
"어어억!"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루페르트 본인조차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마를로네가 놀란 눈으로 루페르트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지겔슈타트의 눈이 마주쳤다.
서로를 싫어하고 경멸하는 사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뜻이 통했다.
그들은 약속한 듯이 루페르트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루페르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며 크게 뜬 두 동공을 경련하고 있었다.
루페르트가 진정을 찾은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허억! 허억!"
루페르트는 급한 숨을 몰아 내쉬며 벽에 기대 호흡을 달랬다.
마를로네가 시커먼 걸레를 내밀었다.
루페르트가 뭐냐고 눈으로 묻자 그녀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헝겊이요. 입과 그 주변이라도 닦으셔야죠."
"...마음만 받겠다."
루페르트는 품속에서 새틴으로 만든 손수건을 꺼내 스스로 입 주변을 닦았다.
"...."
마를로네는 못마땅한 눈으로 자신의 걸레 같은 헝겊과 루페르트의 손수건을 비교했다.
입 주변과 옷가지를 닦은 후 루페르트는 자리에 앉은 채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루페르트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갑자기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지겔슈타트가 답했다.
"전설에나 등장하는 괴물의 습격을 정면으로 받으셨습니다. 평범한 자라면 미쳐 버리고도 남을 정도의 공포를 느끼셨겠지요. 허나 전하께서는 이겨 내셨습니다."
충격은 서서히 온몸으로 전이됐다.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고 오한이 돋았으며 등이 흥건할 정도의 식은땀을 쏟았다.
뜨거운 잔을 손에 간신히 쥔 채 루페르트는 덜덜 떨며 생각했다.
'이 정도란 말인가. 그 괴물이 내게 심어 준 공포가?'
"전하."
지겔슈타트가 다가왔다.
"여기에 접근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미 마를로네는 검집에 손을 댄 채 날카로운 눈으로 어둠 너머의 희끄무레한 능선을 경계하고 있었다.
"추격자인가요? 아니면 우군인가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경계는 해야겠지요."
"그래요?"
문득 루페르트는 강한 피로감과 귀찮음을 느꼈다.
몸 상태도 몸 상태이거니와 끝도 없이 지속되는 위기에 나른한 권태감을 느낀 것이다.
어쩌면 설인이 심어다 준 공포가 루페르트를 그토록 대담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전하?!"
지겔슈타트가 화들짝 놀라며 오두막 바깥으로 나가는 루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가 제지하려 하자, 루페르트가 손을 들어 올렸다.
"기다려 보시오. 대학의 마법사."
루페르트가 손길을 뿌리쳤다.
"내가 볼 때 저쪽은 우리 편처럼 보이니."
아무 근거 없이 한 말은 아니다.
루페르트는 위기 감지 능력을 발동한 채 미지의 인물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적이라면 권능이 알아서 알려 줄 것이다.
적이라는 걸 안 이상 양옆의 사람들이 어떻게든 해 줄 것이다.
'지긋지긋하다. 이제는.'
설인이 망가뜨린 건 어쩌면 마음의 형태가 아니라 인내심과 신중함일지도 모른다.
루페르트는 자기도 놀랄 정도의 대담함으로 미지의 인물에게 곧장 다가갔다.
"누군가? 그쪽은? 이름을 대라!"
건너편의 다가오는 인영이 머뭇거렸다.
그토록 사이가 나쁜 지겔슈타트와 마를로네가 루페르트의 양옆을 호위하듯 지키고 섰다.
곧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루페르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건너편의 목소리는 다름 아닌 그에게 위기 감지 능력을 준 사람이었다.
"몸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습니다. 제 자랑인 수염이 살짝 헝클어진 걸 제외하면 말이죠. 허나 총기를 든 가방을 분실했지요. 현재 가진 건 겨우 피스톨 다섯 정입니다."
평범한 자에게 피스톨 다섯 정은 어지간한 중무장이겠지만 한스 징펠만에겐 비무장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빈약한 무장이다.
설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인간이 사냥할 수 없는 짐승입니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사냥감이지요."
한스 징펠만이 합류했다.
그는 루돌프와 베르크 란과 더불어 이 산맥에서 위치를 파악하고 길을 안내할 수 있는 귀중한 한 사람이다.
지도는 잃어버렸지만, 그는 특유의 날카로운 기억에 의지해 먼지 쌓인 판자를 칠판 삼아 빠르게 주변 지형을 그려 냈다.
"하루 정도 거리에 제국령이 있습니다."
"에반하우젠?"
"그렇습니다. 에반하우젠 백작령이지요. 거기까지 도착하면 안전할 겁니다. 허나 그전에 추격자들의 추격을 뿌리쳐야겠지요."
그때 바깥에 있던 마를로네가 다소 무례하게 오두막 안으로 황급히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하자 그녀가 동그랗게 뜬,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한 명 더 오고 있어요."
"그래?"
지겔슈타트와 한스 징펠만의 시선이 바깥에 향했다.
지겔슈타트가 의아해하며 일어서려 하자 마를로네가 제지했다.
"거기 계세요."
"뭐?"
"제가 아는 사람 같으니까요."
잠시 후 모두가 그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됐다.
미명이 서리는 하늘, 음산하게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산맥 아래 펼쳐진 구릉 위를 한 사내가 느릿한 걸음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베르크 란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그러나 무서우리만치 경직되어 있었다.
돌아온 그가 루페르트를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맡아서는 안 될 의뢰였어."
최소한의 경의도 보이지 않은 채 그는 돌아섰다.
"우리는 모두 여기서 죽게 되겠지."
베르크 란이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본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설인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은 건 자기 하나만은 아니라는걸.
* * *
돌아온 베르크 란은 불길한 기운을 사방에 흩뿌렸다.
"적은 사방에 있어! 설인은 가까운 데 있고! 끝났어. 이건, 살아나갈 수가 없어!"
한스 징펠만이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지겔슈타트가 경고의 시선을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지겔슈타트가 한마디를 했다.
"예의를 지켜라. 도펠죌트너."
베르크 란은 코웃음을 치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허리춤에 맨 검이 질질 끌리다 위로 튕겨 올라갈 듯이 솟구쳤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적이 우리보다 뛰어나. 우리보다 숫자도 많고 지리에도 능숙해. 게다가 우리 강한 사수가 있고 우리보다 강한 마법사가 있지."
들으라는 듯이 불평을 쏟아 낸다.
지겔슈타트가 불쑥 말했다.
"우리보다 뛰어난 검사도 있는 거 같은데."
베르크 란이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검을 손으로 잡았다.
"할아버지!"
마를로네가 다급히 그를 제지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피를 보았을 것이다.
루페르트는 신비로운 눈빛을 번들거리며 지팡이를 든 지겔슈타트 쪽을 달래야 했다.
"법사님. 이쯤 합시다."
"하오나 전하. 저자의 무례는 대학의 마법사로서는 참기 어렵군요."
베르크 란이 반쯤 누운 채 비릿한 냉소를 머금었다.
"뭐? 또 도펠죌트너가 열등하다고 운운하고 싶은 건가? 해 봐."
베르크 란이 몸을 일으켜 양반다리로 고쳐 앉으며 형형한 살기를 드러냈다.
"다시는 주문을 못 외우게 혓바닥을 도려내 줄 테니."
"이 천한 것이!"
루페르트가 지겔슈타트를 맡고 마를로네가 베르크 란을 맡았다.
"할아버지! 적당히 해요! 대체 왜 그래?!"
마를로네가 다시 한번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사내아이로 오인할 정도로 작달막한 체구의 그녀가 마치 개미가 짐을 옮기는 것처럼 거구의 조부를 안간힘을 쓰며 오두막 바깥으로 끌고 갔다.
그가 나가자 지겔슈타트가 한마디 했다.
"그래도 손녀는 알아보는 모양이군."
한스 징펠만이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바깥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엔 어쩔 수 없다는 살기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경우에 따라 베르크 란을 죽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강력한 우군인 그가 미쳐 버리기라도 하면 가장 위험한 적으로 돌변할 테니.
"저 도펠죌트너. 이능을 다루는 힘은 제가 지금까지 본 어떤 도펠죌트너보다 강력하나, 마음의 성채는 이 오두막보다 못할 정도로 초라한 모양입니다."
지겔슈타트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그는 설인을 보고 반쯤 미쳐 버린 거 같군요."
지겔슈타트의 눈동자가 루페르트를 향했다.
"거기에 비하면 전하는 정말로 강인한 마음의 소유자이십니다. 설인에게 직접 공격을 받으셨는데도 그 정도 경련만으로 그치셨으니까요."
그제야 루페르트는 지겔슈타트의 오른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 또한 설인을 보고 마음이 뒤틀린 것이다.
그만이 아니다.
한스 징펠만 또한 평소답지 않게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으로 눈동자를 쉴 새 없이 사방으로 굴리고 있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란, 단지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에 쉬이 지워지지 않을 그늘을 드리웠다.
삐이이이이--
날카로운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호각 소리다.
"하하하하하!!!"
베르크 란의 웃음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뒤이어 마를로네의 애타는 외침이 뒤를 따랐다.
"할아버지!"
느닷없는 호각 소리가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불편한 침묵 속에서 한스 징펠만이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저 특징적인 호각 소리는 카제인호프 수렵 길드의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사람인가요?"
"산맥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냥꾼 집단이죠. 화약에 능한 우리 불과 철의 형제단과 달리 과거의 석궁과 투창을 사용하는 노련한 사냥꾼이라고 들었습니다. 우리처럼 크고 강한 것보다는 조심스럽고 경계심 강한 짐승을 잡는 데 특화된 사람들이지요."
한스 징펠만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인간도 사냥감에 올린다고 들었습니다만, 불운하게도 그게 사실이었던 모양입니다."
눈 덮인 침엽수림 아래 하얀 눈표범의 가죽을 뒤집어쓴 한 무리의 사냥꾼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주시하는 곳은 반쯤 무너진 목동의 오두막.
사냥꾼 하나가 석궁을 들어 오두막 밖을 서성거리는 베르크 란을 겨냥했다.
뒤편에서 한 사내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자색의 로브를 걸치고 두건을 쓴 차림.
두건 안에 희미하게 보이는 건 은은하게 광채를 발하는 은 가면이었다.
그 은 가면이 손을 들어 사냥꾼을 제지했다.
"굳이 손을 댈 필요는 없다. 어차피 그들은 독 안에 든 쥐. 손대지 않아도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소모될 것이니. 섣부른 싸움은 설인의 주의만을 불러오겠지."
은 가면의 말에 사냥꾼은 즉시 석궁을 거두고 다른 동료들과 함께 간격을 둔 채 오두막 쪽을 감시했다.
죽음과 같은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은 가면은 눈구멍 사이로 드러난 퀭한 눈동자로 무너진 오두막 중심을 가만히 응시했다.
"만족의 황제여."
은 가면 안에서 낮고 음산한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여기 진정한 황제가 왔노라."
그의 손가락엔 불경하기 짝이 없는 해골 반지가 끼여져 있었다.
66화 18. 망국의 황제 (1)
한 번 꺾인 마음에서 새어 나오는 광기는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눈앞에 가시적인 위기가 닥쳐왔음에도 베르크 란의 헛소리는 더욱 심해졌다.
"끝났어! 이건 프라이베르그 전투보다 더 상황이 안 좋아! 최소한 프라이베르그 때는 적어도 포병은 압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어냐? 우리가 적들보다 나은 게 무엇이냐? 우리에게 상승 무패의 장군이 있기라도 한 건가? 숲속에 숨겨 둔 기병대가 있기라도 한 건가? 있다면 내게 보여다오!"
루페르트는 조용히 베르크 란의 눈을 보았다.
여전히 제대로 마주 보기 어려운 분노로 끊임없이 이글거리는 암녹색 눈동자다.
희미한 공포가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공포만이 아니리라.
손녀와 색채가 같은 그 눈동자 안에선 또 다른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루페르트가 베르크 란에 대해 아는 건 그다지 많진 않지만, 그는 그 분노의 정체가 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가면을 쓴 남자에게 분노를 느끼는 건가.'
황제의 챔피언이라 불린 최강의 도펠죌트너였다.
영락했다고 하나 그 자존심만큼은 꺾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슈발츠마인 선제후 쟁탈전에서도 나름 저명한 도펠죌트너가 베르크 란을 보는 것만으로 전의를 꺾고 자신의 귀를 스스로 잘라 냈다.
그토록 강한 자가 자기도 모르는 낯선 자와 대등하게 싸웠다.
지겔슈타트의 말이라 걸려들어야겠지만, 그 싸움에서 베르크 란은 밀리는 모양새였다고 한다.
실제로 베르크 란의 주군이었던 루돌프마저도 그의 패배를 점치기도 했고.
최강이었던 자존심마저 희미해진 것이 설인을 만난 공포에 더해 그의 마음을 더 거칠게 흔든 걸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한스 징펠만이 다가왔다.
"숫자는 열여덟. 대부분 카제인호프 사냥꾼이나 한 명 하얀 로브를 걸친 사내가 있습니다."
한스 징펠만은 최초의 영혼 동맹이다.
그의 덕을 숱하게 보았지만 루페르트는 지금 이 순간만큼 한스 징펠만이라는 사내의 진가를 느낀 적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적의 숫자와 동향마저 파악하다니.'
의심할 여지 없다.
한스 징펠만은 최고의 정찰 자원이다.
제국의 눈, 아니 황제의 눈이랄까.
그의 강력한 화약 병기도 화약 병기지만 그의 진가는 비상한 기억력과 관찰력, 매의 눈처럼 날카로운 분석력에서 우러나오는 정찰력에 있으리라.
그것은 베르크 란도 지겔슈타트도 갖추지 못한 그만의 힘이다.
"다른 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저를 거의 죽일 뻔했던 배신자 형제도 보이지 않는군요. 어딘가 가까운 곳에 숨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습니다만 현재 우리 시야 안에 없는 건 확실합니다. 아마도 설인의 관심을 끌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요."
한스 징펠만의 설명을 듣고 감탄한 건 루페르트만이 아니다.
저 오만한 지겔슈타트마저도 조금은 얕잡아 보던 사냥꾼의 진가를 알아보고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럼 나머지 하나는 누구인가요?"
찬탄은 적극적인 질문으로 이어졌다.
한스 징펠만은 잘 정돈된 콧수염을 스윽 문지르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 은 가면을 쓴 자는 카제인호프 사냥꾼보다 상관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확실치는 않지만, 그 은 가면은 아마도 적측의 마법사가 아닐는지...."
"적의 마법사라고요?"
루페르트가 물었을 때 바깥에서 또 한 번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법사! 우리의 마법사보다 강한 마법사!"
베르크 란이다.
지겔슈타트는 분노를 드러냈지만, 곧 체념한 쓴웃음을 머금으며 루페르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왜 우리 마법사들이 도펠죌트너를 싫어하는 줄 아십니까?"
"글쎄요."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 혼자 싫어하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겔슈타트가 고소를 머금은 채 중얼거리듯이 말을 이었다.
"선제의 치세 때 선제와 대학의 사이가 틀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금시초문이다.
애당초 마법대학은 제국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제국의 수호자.
제국의 이익과 보존을 위해서 활동한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정치를 멀리하며 구설수가 일어날 일을 철저히 배제한다.
그러므로 황제와 대학이 틀어질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지겔슈타트는 루페르트가 알고 있는 상식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클라우데 2세와 대학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는 건가.'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이?"
"그건 저로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계속해 주세요."
"네. 전하. 아무튼 모종의 사정으로 우리 대학은 선제에 대한 지원을 일체 거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때 선제께서 만드신 것이...."
"도펠죌트너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마법사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겠군. 애당초 그들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 낸 집단이니....'
"그런데 도펠죌트너에겐 여러 문제가 있었지요."
"여러 문제요?"
지겔슈타트가 여전히 손녀의 만류 속에서 오두막 바깥을 짐승처럼 서성이는 초로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성격적인 문제."
"...그건 반박의 여지가 없군요."
루페르트가 쓴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그 외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만, 풍문에 의하면 도펠죌트너 중 일부는 몸에 기괴한 변이가 일어난다고 하더군요."
"기괴한 변이?"
지겔슈타트가 목소리를 낮췄다.
"일부가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변했다는 이야기를 대학에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
루페르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지겔슈타트가 조심스럽게 한 이야기다.
풍문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애당초 아무 권능도 없고 섭리를 이해할 자질도 없는 자들을 무작위로 뽑아 인위적으로 이능의 힘을 주입한 존재입니다. 불안정성은 처음부터 예정된 대가지요. 선제는 반란을 구실로 도펠죌트너를 말살했지만 어쩌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까요?"
루페르트는 루돌프를 생각했다.
그의 전범(典範). 그가 닮고자 했던 우상.
그러나 실제로 만난 루돌프는 루페르트가 상상 이상 이상으로 차가운 강철의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분이 도펠죌트너를 허투루 만들어 내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더 큰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겠지.'
생각에 잠긴 루페르트를 향해 지겔슈타트가 말했다.
"전하께서 황제가 되시면, 곧 되시겠지만 도펠죌트너들을 주의하십시오. 그들이 살아 있는 한 문제를 일으키게 될 테니까요."
지겔슈타트가 가진 충심은 진짜다.
오만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깔보는 구석이 있지만, 부상을 입고 자존감이 꺾이고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루페르트 옆을 지키고 있다.
루페르트가 지금까지 겪은 배신자들과 결이 다른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허나 그의 모든 말을 귀담아들을 순 없다.
도펠죌트너를 박해하라니.
'그럴 순 없어. 지금 베르크 란이 이상해졌다고 하나 그들에겐 몇 번이고 목숨을 빚졌다. 오늘만 해도 마리 덕분에 살아남지 않았던가.'
"묘하군요."
한스 징펠만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대화가 끊기는 시점인지라 지겔슈타트와 루페르트의 시선은 자연스레 빙해의 사냥꾼에게 향했다.
"저쪽이 적의 마법사라면 왜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 걸까요?"
한스 징펠만의 푸른 눈동자가 지겔슈타트를 향했다.
"마법사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우세하다면 바로 공격을 했겠지요."
"흠, 설인을 두려워하는 걸까요? 그런데 설인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그냥 우리가 여기서 소모되기를 기다리는 것일지도?"
철컥.
한스 징펠만이 피스톨을 살폈다.
"전하."
"네."
"괜찮다면 이쪽에서 한번 공격을 시도해 봐도 되겠습니까?"
루페르트는 한스 징펠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첫 번째 영혼 동맹은 열의보다는 강한 흥분에 젖어 있었다.
몇 번의 인생을 살아도 쉬이 경험할 수 없는 모험을 그는 한껏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모험은 파멸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루페르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봅시다. 법사님 생각은 어떤가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적의 마법사가 있는 한 저는 무력합니다. 상대방이 노리는 게 우리가 스스로 약해지는 걸 기다리는 거라면 총사님의 판단이 옳을 걸로 사료됩니다."
"좋습니다."
루페르트는 반쯤 박살 난 틈새 사이로 다가갔다.
"마리."
베르크 란 옆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던 마를로네가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와."
"네? 그래도 될까요?"
"지금 한스 징펠만 총사가 공격을 시작할 거야."
"으음."
마를로네는 우두커니 선 조부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봤다.
"죄송하지만 안 되겠네요. 저 혼자선 덩치 크고 늙은 아기를 안으로 들일 깜냥이 안 되니까요. 그놈의 소시지라도 있다면 모를까."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마를로네가 힘없이 웃었다.
"최대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 볼게요."
마를로네의 얼굴에 서린 체념을 보고 루페르트는 쉬이 납득했다.
'저 녀석이 저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마를로네가 자신한텐 무뚝뚝하고 벽을 치고 있지만, 거짓말도 빈말도 하지 않는 녀석이다.
"죽지 마라."
"전 안 죽어요."
'죽는 거 봤다고. 그것도 수십 번!'
쓴웃음을 머금은 채 루페르트는 한스 징펠만에게 손짓했다.
"해 봅시다."
한스 징펠만이 고개를 끄덕이고 적을 유심히 노려보았다.
한동안 적을 관찰한 그는 총신은커녕 총구조차 가릴 정도로 작은 구멍에 피스톨의 총구를 들이밀었다.
벽에 가로막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계 제로 상태.
한스 징펠만은 그러나 마치 벽 너머에 보이는 것처럼 부릅뜬 눈으로 적의 위치를 가늠하더니 총구를 당겼다.
탕!
총성과 더불어 하얀 연기가 약실에서 피어나오며 오두막 안을 하얀 연기와 매캐한 냄새로 뒤덮었다.
결과가 나타난 건 그 직후였다.
투두두두둑!
오두막 벽면에 마치 강한 빗줄기가 내려꽂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제인호프 사냥꾼들이 일거에 석궁을 발사한 것이다.
그 목적 없는 일제사격엔 살의보다는 분노가 더 강하게 깃들어 있었다.
"명중인 거 같군요."
지겔슈타트의 말에 한스 징펠만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다음 피스톨을 꺼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푸른 눈동자가 강한 경계심이 떠올랐다.
"적의 마법사겠지요. 느껴지십니까?"
"아니오."
지겔슈타트가 말했다.
"마법의 기운은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루페르트의 생각도 같다.
'상대편에서 마법의 기운은 방출되지 않는다.'
"전부터 느꼈습니다."
한스 징펠만이 입을 열었다.
"적의 마법사가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걸."
"적의 마법사가요?"
"제가 볼 때 최소한 세 번은 우리를 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스 징펠만이 손가락 세 개를 폈다.
"한 번은 성벽 위에서."
손가락 하나가 굽혀졌다.
"한 번은 이전의 오두막에서."
또 다른 손가락 하나가 굽혀졌다.
"그리고 현재."
마지막 손가락이 굽혀졌다.
동시에 한스 징펠만의 푸른 눈동자에 강한 이채가 떠올랐다.
"문외한의 황당한 가정일 수도 있겠지만, 적의 마법사는 공격 마법을 쓸 줄 모르는 건 아닐까요?"
"제국 마법 대학의 교육을 생각하면 그건 현실성 없는 이야기입니다."
지겔슈타트가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겔슈타트는 오두막의 틈새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은 가면을 쓴 사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제가 볼 때도 저 마법사의 태도는 묘하군요."
"그렇다면 한 번 더 시험해 보겠습니다."
탕!
한스 징펠만의 두 번째 피스톨이 불을 뿜었다.
또 하나의 사냥꾼이 구슬픈 비명을 흘리며 쓰러졌다.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격술은 적을 두렵게 하고 안달 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5분에 걸쳐 분노를 담은 응징의 화살이 오두막에 꽂혔다.
루페르트의 걱정은 하나였다.
화살이 섬뜩하게 박히는 파공음이 집안 전체를 두들기는 가운데서 루페르트는 바깥에 있을 마를로네와 베르크 란 쪽을 걱정스럽게 응시했다.
"작작 좀 쏘라고!"
마를로네가 화살을 피해 민첩하게 동과 서로 회피기동을 하며 숲을 향해 소리쳤다.
베르크 란도 적어도 싸울 때만큼은 정상인지 스틱과 검을 휘둘러 화살을 튕겨 내거나 베어 냈다.
"저쪽은 쌩쌩하군요."
한스 징펠만이 웃었다.
그의 시선은 전보다 더 큰 자신감을 머금고 있었다.
"저 마법사. 어떻습니까?"
그때 후다닥 하고 누군가 들어왔다.
"저 사람에겐 그다지 많은 죽음의 기운이 보이지 않아요. 사람을 죽인 일이 거의 없다는 소리겠죠."
마를로네다.
"다 듣고 있었냐?"
루페르트가 묻자 그녀는 눈이 덮인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
"귀가 밝아서요."
"할아버지는 어쩌고?"
"몰라요. 알아서 살겠죠. 어휴. 저래서 결혼은 어떻게 했는지. 할머니를 만났다면 꼭 물어보고 싶어요. 아빠를 안 낳았으면 내가 이 고생을 할 일이 없었을 텐데."
가볍게 푸념하는 마를로네를 향해 지겔슈타트가 딱딱하게 물었다.
"죽음을 맡는 능력인가."
"하찮은가요?"
"...하찮지는 않은 거 같다."
작지만 명백한 변화의 기류가 느껴졌다.
저 지겔슈타트가 마를로네를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그렇게 벌레 보듯 보더니, 이제는 좀 사람처럼 보이는 건가. 하긴 더 크고 흉악한 벌레가 바깥에 있으니 상대적으로 귀여워 보일지도?'
그때였다.
루페르트의 머릿속에 뭔가 번득이고 지나간 것은.
"마를로네의 가정이 맞다고 칩시다."
전장에서 적을 베어 넘기고 군기를 취하는 건 병사의 일이다.
전장의 판세를 짜고 군을 이끄는 건 장군의 일이다.
황제에겐 황제의 일이 있다.
황제는 판단하고 결정하는 자다.
"모두의 의견을 말씀해 주세요. 내 신중히 듣고 판단하겠습니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과거와 미래의 황제다.
67화 18. 망국의 황제 (2)
한스 징펠만이 상황을 정리했다.
오두막 바깥은 노련한 사냥꾼에게 포위되어 있으며 그 우두머리는 아마도 오각의 마법사다.
이쪽은 숫자에서 밀리고 있으며 원거리에서 대응할 수 있는 건 한스 징펠만이 전부.
그런데 그에겐 겨우 세 자루의 피스톨만이 있을 뿐이다.
지겔슈타트는 가장 강력한 전투원이지만 그의 마법은 적의 마법사에 의해 봉인된 상태.
지겔슈타트에 견줄 만한 전투원인 베르크 란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지금도 오두막 밖에서 분노에 찬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한편 이쪽의 식량은 부족하며 지원군이 올 희망도 없을뿐더러 적에겐 더 강력한 지원군이 아마도 근거리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상황은 절망적이다.
그런데 한스 징펠만과 마를로네가 적의 균열을 찾아냈다.
그건 가장 강력한 적이어야 할 적의 마법사다.
"반쪽짜리 마법사라는 게 존재할 수 있습니까?"
루페르트가 지겔슈타트에게 물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면 반쪽짜리 마법사라는 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 저자는 대학의 마법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외부의 마법사라는 겁니까?"
"어디서 저런 능력을 개화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제가 아는 어떤 전쟁 마법사와도 닮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닮았다는 건 마법의 파동, 혹은 후각이라 불리는 고유의 마법 발현 양식입니다. 그는 명백히 이질적이며 제가 알지 못하는 냄새를 갖고 있습니다."
"마를로네."
"네."
"저자에게 죽음의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아요."
마를로네가 지겔슈타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지겔슈타트 주변엔 검은 얼룩 것들이 세상 그 자체에 낀 곰팡이처럼 눌어붙어 있었다.
시야에서 검은 곰팡이를 지워 버리며 마를로네가 말했다.
"우리 마법사님에 비하면 말이죠."
"마법의 권능을 익힌 자는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겔슈타트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맡은 임무도 임무이거니와 사람을 죽인다는 행위가 다른 이에 비해 덜 수고롭기 때문이죠."
그는 가볍게 지팡이를 흔들어 보였다.
아마 그 행동은 그 정도의 수고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암시로 보였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쉬우니까 많이 죽일 수 있다. 일리 있는 말이군요."
"생각만으로 사람이 죽는다는 세계를 상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사람이 남아나겠습니까?"
"그렇겠지요."
"우리 마법사는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그 비슷한 수준만으로 적을 멸할 수 있습니다. 대학과 황궁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저조차 적지 않은 사람을 해쳤는데, 저 사람은 대학 출신조차 아닙니다. 그 말은...."
지겔슈타트가 말끝을 흐렸다.
"더 많이 죽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이 도펠죌트너의 말이 맞다면 저 마법사는 확실히 상궤를 벗어난 존재인 게 틀림없습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스 징펠만을 응시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적의 마법사는 이쪽을 멸할 기회가 있음에도 멸하지 않았고 자신의 부하들이 흥분해 화살을 낭비할 정도의 상황에 이르렀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제가 볼 때 능력이 없습니다. 저 마법사는. 우리 마법사님을 막는 재주 이외엔 말이죠. 한 번 더 쏴 보면 확실해질 겁니다."
탕!
세 발째의 총성이 울렸다.
이번엔 죽이지 못했다.
적들도 바보는 아닌지라 나무 뒤에 엄폐를 확실히 했다.
한스 징펠만은 그럼에도 그중 한 사내의 손을 맞추는 데 성공했다.
"아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이 산중에 울려 퍼졌다.
"하하하하하!"
베르크 란의 광소가 지나가듯 울려 퍼지는 가운데 마를로네가 두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뭐 하는 거야! 우리 편이 죽어 나가는데."
"다 죽거나 다치는 걸 지켜볼 셈인가."
가장 먼저 들려오는 건 뚜렷한 불만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노골적이진 않았다.
하나, 둘, 그리고 셋.
한스 징펠만의 총격이 거듭되고 사상자가 생길 때마다 누적되어 이렇게 목소리가 커진 것이다.
"마법을 쓸 줄을 알기나 한 건가? 내가 아는 삼각의 마법사라면 진작 불덩이로 저 오두막째로 놈들을 날려 보냈을 텐데."
"듣자 하니 드부이에서 제국 마법사의 마법을 봉했다던데."
"직접 본 건 아니잖아?"
"적에게도 마법사가 있어. 봤잖아? 우리 법사님이 있으니 힘을 못 쓰는 거지."
"마법사처럼 차려입기만 한 인간 아닐까?"
두 번째로 들려오는 건 아군 마법사에 대한 회의다.
그들은 그들의 마법사를 의심하고 있다.
한스 징펠만이 그러했던 것처럼.
얼치기 농부도 아닌 노련한 사냥꾼인 그들의 눈에도 적을 끝장날 기회가 보이는데도 뜸을 들이는 게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 그 불만과 의심은 이쪽보다 수 배는 될 것이다.
"저쪽도 저 은 가면을 의심하고 있는 눈치네요."
그들의 불평은 루페르트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상관을 믿지 못하는 부하들.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루페르트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다.
'저 마법사, 부하들의 신뢰를 잃고 있군.'
부하들의 신뢰를 잃을 때 상급자가 할 수 있는 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급자를 처벌해 본보기를 보여 기강을 유지하거나, 아니면 하급자의 불만을 날려 버릴 정도의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이다.
루페르트는 둘 다 불가능했다.
과거의 황제 루페르트는 항명하는 장교를 처벌할 힘도 권한도 없었고, 그렇다고 자신이 앞장서서 테타우 성벽 밖에서 일어나는 전란을 다스릴 능력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황궁 깊숙한 곳에 틀어박혀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건 두 번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경험이다.
루페르트는 시간을 들여 마법사를 지켜보았다.
5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마법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불만이 들끓는데도 우두커니 선 채 마치 석상처럼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불만 소리가 잦아들 무렵 루페르트 가우저가 한스 징펠만에게 손짓했다.
한스 징펠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탕!
네 번째.
이제 한스 징펠만에겐 피스톨 하나만이 남았다.
하지만 그 등가교환으로 또 하나의 사냥꾼이 쓰러졌다.
탄환은 유독 크게 불평을 늘어놓던 사냥꾼의 미간을 정통으로 꿰뚫었다.
"프라이헤르! 프라이헤르! 빌어먹을! 프라이헤르가 죽었어!"
카제인호프 수렵 길드는 불과 철의 형제단만큼 인기가 높지 않지만 붉은 산맥은 제국 남부에서 예민한 야수의 추적 및 은밀한 살인의 전문가로 나름의 명성을 떨치는 집단이다.
그들의 몸값은 결코 싸지 않다.
오히려 순이익은 불과 철의 형제단보다 클 것이다.
그들의 무기는 값비싼 화약과 총기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 그들이 산중에서 양처럼 도륙당했다.
이미 셋이 죽었고, 하나가 상처를 입었다.
그들의 분노가 향하는 곳은 일차적으로는 미지의 저격수겠지만, 최종적으로는 그들의 무능한 고용주이자 책임자를 향했다.
"마법사 양반."
나이 지긋한 초로의 사내가 등 뒤에 성난 사냥꾼을 거느린 채 마법사 앞에 섰다.
"당신이 뭐 잘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소. 나도 드부이에 있었으니. 그런데 지금은 뭐 하자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구만. 그 잘난 능력을 가지고도 왜 가만히 있는 거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항명 직전이군.'
루페르트는 석상처럼 서 있는 은 가면을 주시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건가. 마법사 양반.'
이제는 마냥 입을 꾹 닫고 있을 수만은 없다.
뭐라도 해야 할 것이다.
"설인의 주의를 끌고 싶은가?"
마법사가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루페르트의 귀까진 닿지 않았지만, 유난히 귀가 밝은 마를로네가 듣고 즉시 전해 주었다.
"라고 하네요."
그녀의 말을 전해 들은 루페르트는 미소를 머금었다.
"설인! 그놈의 설인! 그래 설인이 무섭긴 하지. 하지만 설인은 이제 없잖소? 놈은 산 위로 진즉에 올라갔지."
사냥꾼들이 비아냥거린다.
이 또한 루페르트에겐 익숙한 반응이다.
하급자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을 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얼마나 많은 비아냥과 비웃음이 루페르트 뒤에서 일어났던가.
"내 동료들이 두렵지 않은가?"
"헨드릭 빌렘 남작과 그 패거리는 확실히 두렵지. 한때 당신도 두려웠어. 하지만 지금처럼 당신이 우리를 이끌 자격을 보이지 않는다면 무시할 수밖에. 안 그렇소?"
루페르트의 눈앞에 쓰라린 장면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비슷한 상황이 전에 있었다.
입장은 정반대였다.
루페르트는 그나마 남아 있던 명성을 바닥에 처넣은 사내의 행동을 기억한다.
그때는 단지 용병대장 정도로만 알려졌던, 제국의 파멸자 융커스 베샤문트의 행동을.
루페르트가 돌아서서 모두에게 손짓했다.
"내가 그들을 흔들어 보이겠다."
황제가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루페르트에게 향했다.
"내가 시선을 끄는 사이에 누구라도 좋다. 마법사를 죽여라. 마법사가 죽는다면."
루페르트는 지겔슈타트를 온화하면서도 힘 있는 시선으로 응시했다.
"우리의 마법사가 나머지를 정리할 것이다."
지겔슈타트의 눈동자에 벅찬 감동이 차올랐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위험합니다. 전하."
지겔슈타트가 급히 만류하려 들었다.
"알고 있어요. 법사님."
"하지만...."
루페르트가 걱정하는 마법사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만큼 훌륭한 미끼가 따로 있겠습니까?"
불안 요소는 명백히 있다.
용병 집단 모독자들, 특히 베르크 란과 호각으로 싸운 도펠죌트너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마법사를 죽였을 때, 혹은 죽이는 과정에서 숨어 있는 그들이 갑자기 나타나 역공을 가한다면 루페르트의 반격은 완벽하게 분쇄될 것이고 루페르트의 목숨 또한 거기서 끝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루페르트 가우저가 바라보는 세상 속에선.
'시간을 지체해 봐야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다. 그들이 분열한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행동해야 할 때다.'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대단히 위험하다.
죽을 수도 있다.
그가 좀 더 특출나고 뛰어났다면 이보다 더 좋고 안전한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페르트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도 알고 있다.
자신이 얼마나 범용한 재능의 소유자인지.
그런데 평범하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게 옳은 것일까?
평범한 자도 선택할 권리는 있다.
루페르트는 선택했다.
여신의 도움이 없어도, 회귀라는 보험이 없어도.
'...가자. 루페르트 가우저.'
루페르트는 과감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마를로네가 장난기를 담아 말했다.
"황제 폐하의 출진! 황제 폐하의 출진!"
루페르트는 따르는 병사들과 나부끼는 깃발 하나 없지만, 황제는 누구보다 위풍당당하고 명예로운 걸음으로 적을 향해 다가갔다.
'그때도 그랬었지.'
회귀 전 루페르트는 골트문트가 마련해 준 군대로 융커스 베샤문트의 반도를 포위했다.
누가 봐도 전투는 끝났고 그 승리는 꼭두각시 황제라 불리던 루페르트에게 작지만 확실한 명성을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 융커스 베샤문트는 대담하게도 홀로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가면을 쓰고 있기에 얼굴을 알아볼 순 없었지만, 자신을 겨눈 수백 개의 총구를 앞에 두고도 그의 발걸음은 의연했고 망설임이 없었다.
루페르트는 앞에 두고 융커스 베샤문트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이름은 융커스 베샤문트. 너의 제국은 내 검 아래 파멸할 것이다."
수백 개의 총구가 흔들렸고 융커스 베샤문트는 루페르트에게 뛰어들었다.
전열이 무너졌고 포위당한 반도들이 역공을 가했다.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반도를 놓쳤다.
황제 루페르트 가우저의 정치적 생명이 끝장나는 순간이었다.
'융커스 베샤문트. 너에게서 배우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군.'
마법사를 둘러싼 사냥꾼들이 루페르트를 발견했다.
"누군가 온다!"
"뭐 하러 오는 거지?"
"무기는 없어."
사냥꾼 우두머리가 부하에게 명했다.
"뭐 하러 온 놈인지 물어봐라."
사냥꾼 하나가 멀리서 경박한 목소리로 물었다.
"뭘 하러 온 거냐? 제국 놈. 정체를 밝혀라!"
이에 루페르트는 기다렸다는 듯 어깨를 펴고 흉중에 오래전부터 머금고 있던 용암의 숨결 같은 말을 한마디 한마디 뚜렷하게 토해 냈다.
"리히트보덴의 자치 총독, 위버하임의 남작, 슈발츠마인의 선제후이자 노예제 티그리트께서 세운 유일하고 적법하며 축복받은 천년 제국의 적법한 후계자 룸왕 루페르트다."
사냥꾼들의 얼굴에 일제히 경악이 떠올랐다.
68화 18. 망국의 황제 (3)
"루, 룸왕이라고...?"
"우리가 쫓는 게 제국의 황제였다는 말인가?"
"이건 약속이 다르잖아!"
루페르트는 무너지는 사냥꾼들의 얼굴을 보며 담담히 일갈했다.
"너희들은 무엇인데 제국의 황제가 될 나를 위협하고 겁박하는가? 날 죽이겠다는 건가? 나는 곧 제국 전체의 군주이며, 나를 해하는 건 제국을 해하는 것이다. 일곱 개의 창을 적으로 돌리고 싶다면 계속해라."
그 한마디는 이미 흔들리고 있는 사냥꾼들의 다리를 떨게 하고 물러서게 하기에 충분했다.
괄괄하게 마법사에게 대들던 우두머리마저 손을 덜덜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그때 한 사내가 나섰다.
은 가면을 쓴 마법사다.
'호오.'
적어도 저 마법사가 당시의 루페르트보다 낫다는 건 자명하리라.
그때 루페르트는 융커스 베샤문트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못 한 채 근위대장의 뒤통수만을 쳐다보고 있었으니.
그 은 가면을 쓴 마법사가 루페르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자는 가짜 황제다. 얄팍한 술수로 투표 결과를 조작해 불법적으로 선거에서 이긴 가짜 황제다. 지금쯤 테타우에서는 이 가짜 황제의 선거를 무효로 돌리는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동요하지 마라. 그대들은 제국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 아닌, 제국의 충신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니."
그의 말은 흥미롭다.
그 발언은 루돌프가 말했던 음모와 거의 일치하고 있으니.
하지만 그보다 루페르트를 흥미롭게 한 건 내용이 아닌 은 가면의 목소리이리라.
'이 목소리는...?'
틀림없다.
루페르트는 자신 앞에서 벌거벗은 등을 드러낸 채 수레를 끌던 깡마른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흥미로운 이야기군. 가면을 쓴 마법사여."
루페르트가 웃으며 말하자 은 가면은 날이 선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뭘 믿고 혼자 나선 건가? 가짜 황제?"
"나는 네가 누군지 알고 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고?"
"그래. 마법사. 아니, 멸망한 제국의 말예여."
쿡쿡 웃는 소리가 은 가면 너머에서 파도처럼 부서졌다.
곧 마법사가 은 가면을 벗었다.
은 가면 너머엔 루페르트가 예측한 것과 같은 얼굴이 고소를 머금고 있었다.
"내 이름을 기억하나? 만족의 황제여."
옛 제국의 말예가 물었다.
루페르트는 지체없이 답했다.
"파비안 아비투스."
옛 제국의 말예가 희게 웃었다.
"영광이군. 동시에 치욕스럽군."
그 순간 루페르트는 느꼈다.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가지의 움직임을.
마를로네가 머리 위에 있다.
한스 징펠만의 피스톨을 손에 쥔 채.
* * *
파비안 아비투스에게 이 세상은 뒤틀린 액자 안의 그림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조국은 멸망했다.
남겨진 황실의 후손은 증오스러운 적의 볼거리로 전락했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멸망한 제국의 후손은 말 대신 수레를 끌어야 했다.
대부분의 황제는 온화하거나 무관심했지만 그렇지 않은 자도 있었다.
어떤 황제는 채찍질을 가했다.
어떤 황제는 조상과 현재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쏟아 내며 반응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어떤 황제는 학살했다.
철혈대제라 불리던 제국의 명군은 폐허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던 옛 제국의 수도를 군홧발로 짓밟았다.
사람이 벽에 산 채로 못 박혔고 아이가 창에 꿰이고 여성은 끌려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부친도 그때 사라졌다.
가문의 시종이 말하길 제국의 병사들이 그를 끌고 갔고 산 채로 우물에 던져 놓고 사람 머리만 한 돌로 우물을 덮어 버렸다고 한다.
그 우물을 발견해 돌을 들어냈을 때, 파비안 아비투스는 뒤틀린 백골의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그가 자신의 부친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그때 그는 강한 의문을 느꼈다.
왜 우리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언제까지 이런 모욕을 당한 채 노예로서 살아야 하는가.
열등하고 한미한 족속도 아닌 그 위대했던 룸 제국의 후예가 말이다.
뒤틀린 액자를 바로 잡고 싶다.
파비안 아비투스의 평생을 망령처럼 따라다닐 목적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루페르트 가우저."
옛 제국의 후예가 새로운 제국의 황제를 불렀다.
루페르트는 싸늘한 눈으로 파비안 아비투스를 노려보았다.
"복수를 하려는 건가?"
파비안 아비투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지금 와서? 왜 천년 간 당하기만 하다 왜 하필 내 대에서 복수를 하려는 건가?"
"아직 너희 민족의 제국은 천년 기에 이르지 않았다."
파비안 아비투스가 정정했다.
"아마 네 치세에서 달성하게 되겠지.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루페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마법을 배운 건가? 명색이 호라의 제사장을 자처하는 룸 제국의 후예가?"
"스스로 배워 익힌 게 아니다. 받은 것이지."
"받았다고?"
어감이 묘하다.
마법에 문외한인 루페르트지만 마법이라는 능력을 양도의 대상이 아니다.
그건 끊임없는 학습과 성찰을 통한 개화의 과정이지, 누군가 선물처럼 던져 주는 게 아니다.
피리스만 해도 갖가지 고생을 하며 마법을 익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저 사내, 파비안 아비투스는 그가 아닌 상식 너머의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누구에게 받았다는 건가?"
등줄기가 서늘해질 정도의 불길함을 느끼며 루페르트가 물었다.
무표정하던 파비안 아비투스의 얼굴에 비릿한 냉소가 떠올랐다.
"제국의 멸망을 바라는 사람으로부터."
"제국의 멸망을 바라는 사람?"
루페르트의 언성이 높아졌다.
눈동자엔 지금까지 볼 수 없던 사나운 불길이 으르렁거렸다.
"그게 누구인가? 파비안 아비투스."
루페르트가 싸늘하게 묻자, 파비안 아비투스는 거만하게 답했다.
"황제라고 불러라."
"그래?"
루페르트는 실소를 머금었다.
'대답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좋다.'
황제가 손을 들어 올렸다.
"뭘 하는 건가?"
황제를 참칭하는 자가 물어보지만 루페르트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상황을 알아차렸다.
저 오두막 너머에서 마력이 감지됐다.
강력한 마법사 특유의 주변의 모든 마력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강한 인력을.
파비안 아비투스가 조소했다.
"네 마법사는 내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파비안 아비투스가 지팡이의 끝을 바닥에 접지한 채 바닥을 중심으로 지팡이를 빙글빙글 휘저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느껴지는 소용돌이가 지팡이가 그리는 궤적 속에서 선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역시, 이자가 지겔슈타트의 마법을 봉인한 당사자군.'
지겔슈타트를 움직이게 한 건 대상을 확실하게 정하기 위함이었다.
기껏 은 가면을 죽였는데 진짜 마법사가 뒤에 숨어 있으면 모든 게 허사니.
그건 루페르트가 가정한 첫 번째 불안 요소였다.
첫 번째 불안 요소가 배제됐다.
두 번째 불안 요소가 남아 있긴 하지만 이 세상에 위험 없는 승리라는 게 얼마나 되던가?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왼손을 내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마리."
미리 준비한 죽음의 덫을 움직일 때가 왔다.
검은 그림자가 나무 위에서 은밀히 모습을 드러냈다.
사냥꾼들은 그제야 암살자의 존재를 눈치챘다.
평상시라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타고난 생명 그 자체의 강함을 추구하는 그들의 감각은 불과 철의 형제단보다 훨씬 예리하니.
그러나 한스 징펠만이 뿌린 불화의 씨앗과 루페르트라는 존재가 그들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그 찰나의 틈새를 통해 마를로네가 사각에 숨어들었고, 이제 황제를 참칭하는 자를 처단하려 한다.
총구가 파비안 아비투스의 심장을 정확히 향했다.
루페르트는 승리를 직감했다.
'여기까지 왔다면 우리의 승리다.'
두 번째 불안 요소.
그것은 오두막에서 관측할 수 없는 지점에 숨어 있을 복병이었다.
특히 한스 징펠만을 죽일 뻔했던 총사와 베르크 란과 대등한 대결을 펼쳤던 도펠죌트너는 가장 위험한 적이다.
그들은 그러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탕!
용서 없는 총성이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
찰나 속에서 루페르트는 파비안 아비투스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 미세한 경악이 떠올랐다.
그도 발견한 것이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탄환을.
이건 막기 어렵다.
막을 수도 없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팅!
총탄이 허공을 갈랐다.
마를로네의 조준이 어긋난 것이다.
'이 총, 왜 이렇게 화력이 강해?!'
가장 당황한 건 마를로네 본인이다.
한스 징펠만에게 그의 권총을 넘겨받을 때 짧은 경고를 들었다.
총이 반동이 대단히 강하니 사용하는 데 유의하라고.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화력과 반동이 강할 줄은 몰랐다.
그 계산 착오가 허공을 가르고 눈을 뚫고 땅속 깊이 박혔다.
하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즉각 파비안 아비투스를 향해 비호처럼 쇄도했다.
'총탄이 안 맞으면 칼로 베어 버리면 그만.'
루페르트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찌 됐든 그는 죽은 목숨이다.'
또 한 번의 승리를 기대하며 루페르트가 파비안 아비투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으려 할 때였다.
발밑에서 무언가가 유령처럼 튀어나왔다.
찰나의 흐름 속에서 루페르트는 그 유령의 얼굴을 보았다.
"!"
그 유령은 말라비틀어진 염소 가면을 쓰고 있었다.
'저 인간은?!'
틀림없다.
베르크 란을 저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인 적의 도펠죌트너다.
챙강!
그의 검이 허공에서 쇄도하는 마를로네의 검을 가볍게 쳐 냈다.
마를로네는 사색이 된 얼굴로 지면에 처박혔다.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아는군. 대단히 인상적인 시도였다."
염소 가면이 등을 보인 채 말했다.
그의 음성은 낮고 음울했으며 높낮이가 비인간적일 정도로 일정했다.
마치 어둠 그 자체를 목소리로 구현한 것처럼.
루페르트는 강렬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이 목소리는...?!'
염소 가면이 돌아섰다.
"허나 운이 나빴군. 황제."
그때였다.
그와 루페르트 뒤를 검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간 것은.
푹!
멀리서도 뚜렷이 들리는 살과 뼈가 관통되는 소리가 오싹하게 울려 퍼졌다.
"커억!"
파비안 아비투스의 등을 뚫고 칼날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그의 몸이 번쩍 들렸다.
"끄으으으으윽!"
황제를 참칭하던 자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떨리는 눈으로 파비안 아비투스는 자신을 꿰뚫은 살인자의 얼굴을 간신히 눈에 담았다.
'저, 저놈은?!'
루페르트는 충격에 빠진 얼굴로 자신 앞에 우뚝 선 초로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베르크 란. 당신이 어째서?!"
비호처럼 쇄도해 파비안 아비투스를 일격에 처리한 건 베르크 란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광소와 폭언을 쏟아 내던 자가 마치 시공 그 자체를 뚫고 나온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등장해 적의 마법사를 끝장낸 것이다.
툭.
파비안 아비투스를 바닥에 내던지며 베르크 란이 루페르트에게 약식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갖가지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연기였나.'
베르크 란의 늘 분노에 불타는 눈동자가 염소 가면을 직시했다.
"다시 붙어 보자. 애송이."
검을 쥔 오른손의 굵은 핏줄이 터질 정도로 불거졌다.
"이번은 전과 다를 것이니!"
염소 가면이 베르크 란을 노려본다.
일촉즉발의 상황.
염소 가면이 갑자기 손을 들었다.
동시에 멀지 않은 곳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쐐액-
탄환은 루페르트와 베르크 란 사이를 가르며 지나갔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느끼는 가운데, 루페르트는 염소 가면이 뒤돌아 달아나는 걸 보았다.
주저 없는 후퇴.
베르크 란이 추격하려 하나 연이은 총성이 그의 발을 붙들어 매었다.
염소 가면의 후퇴는 지극히 합리적인 행위였다.
루페르트는 뒤쪽에서 후각이 마비될 정도로 강렬한 마법의 냄새를 감지했다.
뒤를 돌아보았다.
오두막 쪽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소용돌이를 지팡이 위에 몰고 다니는 사내가 천천히 그리고 오만한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겔슈타트.
봉인이 풀린 사각의 마법사가 마침내 그 진정한 실력을 드러내려 하는 것이다.
"마, 마법사다!"
"히익!"
사냥꾼들이 부리나케 달아났다.
지겔슈타트가 손을 내저었다.
소용돌이치던 무형의 기운이 마치 도깨비불처럼 의지를 가진 것처럼 그의 팔에 모여들더니 그의 팔목에서 마치 탄환처럼 쏘아져 불덩이라는 실체를 갖추며 달아나는 사냥꾼의 뒤를 급습했다.
콰쾅!
숲 전체가 떨게 할 정도의 폭발이 일어났다.
지겔슈타트가 마치 멱살을 잡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무형의 기운이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가더니 이윽고 한줄기 벼락의 형태로 치환되어 달아나는 사냥꾼들의 정중앙을 강타했다.
한 명이 직격당해 마치 개구리같이 바닥에 엎어져 검게 그을렸다.
"아아아아악!!!"
사냥꾼의 숫자는 여전히 이쪽을 압도한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여기 있는 사냥꾼 아니 전체가 달려들어도 저 진정한 이능의 소유자를 이길 수 없다는걸.
이 싸움의 결과는 정해졌다.
루페르트는 죽어 가는 마법사, 아니 과거의 황족에게 다가갔다.
"끄으으으으...."
아직 파비안 아비투스의 목숨을 끊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곧 죽을 것이다.
루페르트는 무심한 눈으로 패배자를 내려다보았다.
파비안 아비투스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억지로 미소 지었다.
"기쁜가? 응? 만족의 황제여. 짐을 죽여서 승리감을 느끼나?"
이에 루페르트는 쓸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루페르트의 눈은 파비안 아비투스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가 실제로 보고 있는 건 또 다른 시공 속. 불타는 황궁 아래에 방치됐던 또 다른 황제였다.
그것은 바로 루페르트 가우저, 그 자신이다.
그가 파비안 아비투스에게 그토록 싸늘하게 대했던 이유다.
둘은 어떤 의미로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69화 18. 망국의 황제 (4)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루페르트가 물었다.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다.
단지 한 명의 인간으로 궁금했다.
비슷한, 아니 그보다 못한 처지의 황족이 어떻게 이런 결말에 이르렀는지.
"그건 네가 뛰어나서다. 만족의 황제여. 네가 특출나기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다. 네가 멍청하고 무능한 인간이라면 내가 나설 일은 없었겠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너의 제국은 무너질 테니."
파비안 아비투스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이에 루페르트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특출나지 않아. 평범한 사람이다."
"헛소리."
파비안 아비투스의 동공이 수축됐다.
"저 도펠죌트너를 광인으로 꾸며, 내 함정을 파훼한 게 천재의 발상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루페르트는 힘없이 웃었다.
'역시 그런 건가. 함정에 걸려든 건 나였던 건가.'
루페르트는 마를로네에게 꾸중을 듣고 있는 베르크 란을 응시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 제국에서 목이 매달리면 어쩌려고!"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던 그녀는 눈가에 굵은 눈물방울이 맺힐 정도로 흥분한 상태로 거구의 조부를 올려다보며 꾸지람을 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 속이 좁을 줄 어떻게 아냐고!"
'내 속 그리 안 좁단다....'
고소와 함께 루페르트는 진한 한숨을 쏟아 냈다.
"내가 생각해서 움직인 게 아니야. 그가 혼자 꾸민 일이다."
"뭐라고?!"
파비안 아비투스가 부릅뜬 눈으로 루페르트를 응시했다.
죽어 가는 와중에도 곧 그는 루페르트의 진심을 발견했다.
"그, 그런 건가. 너의 지시가 아닌, 독단으로 움직였다는 소린가...?"
낮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파비안 아비투스가 몸을 뒤집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활짝 열린 상처에서 핏물과 함께 내장이 흘러나왔다.
"하하하하...."
기이하게도 파비안 아비투스의 표정은 어린애처럼 해맑았다.
승리감을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루페르트의 평범함을 알고 만족하는 걸까.
"제국 성인이다."
파비안 아비투스가 웃는 얼굴로 루페르트를 돌아보았다.
웃음 너머 죽음의 그림자가 깔리는 게 선명하게 보인다.
"제국 성인이다. 내게 마법의 힘을 준 것은."
"...제국 성인이라고?"
"그래, 너희 제국을 세운 자들이 그 제국을 끝장내려 하는 거지. 우리의 신 호라가 우리 제국을 버린 것처럼!"
파비안 아비투스의 동공이 풀렸다.
숨이 넘어가려 한다.
"누구냐? 너에게 힘을 준 제국 성인의 이름이?"
루페르트는 그를 붙잡고 흔들었다.
파비안 아비투스의 손이 루페르트의 뺨을 덥석 붙잡았다.
루페르트는 뜨겁고 끈적한 기운을 느꼈다.
피다.
룸 제국 마지막 황제 후손의 피가 그의 뺨을 적셨다.
"루페르트 가우저."
"대답해라. 파비안 아비투스."
"나를 황제라고 불러주겠나...?"
"...룸 제국의 황제여. 이러면 만족하나?"
"그대는 상냥하군."
파비안 아비투스가 소리 없이 웃었다.
"지나칠 정도로 상냥하군."
죽어 가는 황제의 눈앞에 뒤틀린 액자가 나타났다.
무수히 많은 끔찍한 그림으로 가득 찬.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보랏빛에 가까운 하늘과 하늘 위를 흐르는 하얀 구름, 그리고 그 하늘을 시기할 듯이 솟은 깎아지른 설산이 펼쳐져 있었다.
멸망한 제국의 황제는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며 죽어 가는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산뜻한 미소를 머금었다.
미소를 머금은 채 파비안 아비투스가 말했다.
"매독의 아가티아."
파비안 아비투스가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가락엔 반지처럼 생긴가가 무언가가 스러지며 소멸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모래로 만든 밧줄 같다고나 할까.
파비안 아비투스의 고개가 꺾였다.
룸 제국 마지막 계보가 끊어졌다.
* * *
"뭐라고 책망하시든 다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하지만 감히 말씀드리길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베르크 란이 건장한 상체를 숙인 채 사과했다.
루페르트는 쾌활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 염소 가면이 숨어 있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바로 복귀할까 생각했지만, 그자를 발견한 이상 평범한 방법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리 전하께 자초지종을 말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 도펠죌트너들의 귀는 대단히 밟습니다."
"강적을 속이려면 아군까지 속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실로 그러하군요."
오판했다.
베르크 란의 정신이 꺾인 적은 없었다.
그가 광인 행세를 한 건 루페르트 일행과 합류하기 전 마법사와 그리고 그 염소 가면을 쓴 도펠죌트너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자가 어딘가 숨어 있으리라는 건 예측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더군요. 그때부터 의심했습니다. 그자가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다는걸."
아무도 모르게 2차전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 승리는 베르크 란에 돌아갔다.
그는 최대의 걸림돌인 마법사를 죽였다.
마법사가 죽었을 때 염소 가면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친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지겔슈타트가 깨어난 이상, 이제 루페르트 일행을 건드릴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다.
"고개를 드세요. 베르크 란. 당신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당신의 손녀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냈습니다. 이 공은 두고두고 잊지 않을 겁니다."
루페르트의 한마디에 지난 모든 무례가 청산됐다.
아무도 그 결정에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도펠죌트너를 혐오하는 지겔슈타트마저도.
지겔슈타트의 관심은 베르크 란의 사면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매독의 아가티아? 제국 성인? 이해가 안 가는군요. 마법의 권능이라는 건 누군가 툭 던지듯 선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반역자의 손끝에서 모래시계 안의 모래처럼 흘러내리던 반지엔 분명 기묘한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그 마도구가 그 반역자에게 그토록 강대한 힘을 줬는지도 모르죠."
"대학에선 제국 성인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까? 최근 제국 곳곳에서 돌아다닌다는."
한번 가볍게 떠보았다.
마법 대학에선 제국 성인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안타깝게도 지겔슈타트는 이 부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는 듯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제국 성인을 참칭하는 사기꾼들은 늘 있어 왔죠. 성인 숭배가 금지된 이후에도 곰팡이처럼 주기적으로 창궐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건은 제 생각을 아득히 뛰어넘는군요. 대학에 돌아가면 신중하게 동료와 스승과 더불어 논의할 작정입니다."
"그렇군요.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전하. 왜 자칭 제국 성인이라는 자는 마법 봉인의 권능만을 준 걸까요? 다른 권능을 줬다면...."
지겔슈타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혼잣말을 했다.
"혹시 성격이 더러운 건가?"
그의 눈동자엔 마법사들만이 이해할 수 없는 미묘한 공감의 빛이 흘렀다.
곧 그는 아직 대화가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리고 황급히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강력한 마법사라고 하나 본질은 학구파답게 궁금한 게 있으면 자기만의 세계로 빠지는 모양이었다.
루페르트는 지겔슈타트의 공 또한 치하해 주며 남은 여정을 부탁했다.
"추격자는 더 이상 없습니다. 적어도 가시거리 안엔 단 한 명도 없군요."
한스 징펠만의 보고대로 추격자들은 종적을 감췄다.
그토록 집요하고 잔인하게 쫓아오던 자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이다.
'역시 마법사는 마법사라는 건가. 그 염소 가면이 강하다고 하나 지겔슈타트의 족쇄가 풀리니 가까이 올 생각조차 못 하는 걸 보면.'
남은 여정에 어려움은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장비를 점검하고 있자니 마를로네가 갑자기 이쪽으로 불쑥 다가왔다.
그녀가 루페르트에게 뭔가 내밀었다.
식고, 설익은 감자다.
아까 냄비에서 끓이던 걸로 보이는데 당시엔 몰랐지만 감자 곳곳에 변색한 부분이 눈에 띈다.
"뭐냐? 이건?"
"시장하실까 봐요."
루페르트는 마를로네를 빤히 쳐다봤다.
'이 녀석 눈치가 없는 건가?'
조금만 더 가면 제국 영내다.
루페르트가 신분을 밝히는 순간 귀빈으로서 최상급의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위장 안에 식고 설익은 감자를 위한 자리 따윈 없는 것이다.
"약간의 허기는 있지만 지금 들고 싶진 않군."
루페르트는 단칼에 거절했지만 마를로네는 물러서지 않았다.
"모처럼 제가 드리는 선물인데."
"곧 제국 영내에 갈 텐데 굳이 이런걸?"
"그래서 드리는 거예요."
그제야 루페르트는 마를로네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제 성의가 마음에 안 드세요?"
상상도 못 했다.
저런 무미건조한 얼굴로 장난을 걸어올 거라고는.
루페르트는 맥없이 웃으며 말했다.
"가서 네 조부나 챙겨라."
"네-."
얼마 지나지 않아 건너편에서 베르크 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안 먹어. 너나 먹어라. 아니 안 먹는대도?"
마를로네는 집요하게 베르크 란을 따라다니며 감자를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한스 징펠만이 한마디 했다.
"저 아가씨, 오늘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요."
"그런가요?"
"표정에 별 변화가 없는 대신 행동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사람이 종종 있죠. 제 지인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스 징펠만이 게슴츠레 눈을 뜨며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저 아가씬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타입이네요."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그 생각에 동의했다.
적당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루페르트 일행은 여정을 재개했다.
목적지는 에반하우젠 백작령이다.
선두 그룹에 서 있는 베르크 란이 뒤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드디어 제국 국경에 도달했다.
루페르트는 감회에 잠긴 눈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성벽에 둘러싸인 소도시의 풍경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처음 국경을 지날 때 이런 고생을 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루페르트는 가슴 앞 텅 빈 허공을 자기도 모르게 어루만졌다.
'여신님의 도움 없이 해냈다. 리히트보덴, 메헨부르그, 선조의 숲과 비교해도 조금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크나큰 위기를 극복해 냈어.'
여신의 도움 없는 승리.
이건 그 어떤 보상보다 달콤하리라.
물론 그 승리는 루페르트가 가지고 온 것이 아니다.
그 최대의 공로는 베르크 란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손녀가 내미는 감자를 한사코 무시하거나 거부하며 베르크 란은 뒤로 물러나 자신 앞에서 걸어가는 루페르트의 뒷모습을 늘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뭘 그렇게 노려봐?"
한참 동안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마를로네가 베르크 란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저분이 약속을 안 지키기라도 할까 봐?"
"권력자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경우는 흔하디흔한 법이지."
"하긴 저 사람도 슈발츠마인 사람이었지? 그 할망구와 같은."
"그걸 떠나서."
베르크 란은 앞서가는 루페르트에게서 시선을 떼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굳은살과 흉터로 가득 찬 거칠고 큰 손.
여간한 인간의 얼굴 정도는 한 손에 들어오는 그 큰 손이 가볍게 경련했다.
"저 황제, 잘할 수 있을까?"
베르크 란은 기억한다.
그가 모시던 선제, 철혈대제의 모습들을.
소름 끼치도록 비정하지만 동시에 소름 끼치도록 효율적인 그의 방식은 옆에서 지켜보는 자들의 오금을 저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떤 길로 가든 철혈대제는 늘 승리했다.
나중엔 약속된 승리에 대한 믿음이 충성의 발판이 되었다.
그에 비해 저 루페르트 가우저라는 뭐랄까, 기복이 심하다.
리히트보덴과 선조의 숲에서는 마치 미래를 내다보는 것 같은 통찰력을 보인 반면, 황궁과 다른 곳, 특히 붉은 산맥에선 범인과 다를 바 없는 판단과 행동의 연속이었다.
이따금 불안한 듯 가슴 앞에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를 쓰다듬는 습관은 베르크 란의 의구심을 부채질했다.
"너는 어떻게 보느냐? 마리."
베르크 란이 손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마를로네는 눈을 깜빡이며 앞쪽에서 걸어가는 루페르트의 옆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잘 모르겠어. 친한 척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 빼면. 아, 그리고 또 하나."
마를로네가 루페르트와 베르크 란에게 권하던 감자를 덥석 깨물었다.
"재수 하난 지지리도 없는 거 같더라."
그 말을 들은 베르크 란은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그조차 웃음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정곡을 찔렀다.
뒤에서 들려오는 얕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루페르트를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재밌는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베르크 란의 조손은 루페르트가 쳐다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과 관심 없는 태도로 싹 돌아섰으니.
루페르트의 시선은 자연스레 앞으로 다시 향했다.
"전하. 이제 이 고생도 끝이군요."
신비로움을 되찾는 지겔슈타트가 다가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잠깐만요."
루페르트가 손을 들었다.
모두의 발걸음이 멈췄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지겔슈타트와 한스 징펠만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루페르트의 시선은 도시, 정확히는 도시 옆에 펼쳐진 수많은 막사를 향하고 있었다.
"저건 군대 아닙니까?"
루페르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런 곳에 군대가?'
위기 감지가 발동한 건 아니다.
그건 본능적인 위기의 영역이다.
루페르트가 맡은 위기의 냄새는 그러한 위기와 종류가 다른 것.
음모와 공작의 냄새이다.
70화 19. 하류 (1)
한스 징펠만이 망원경으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도시 옆에 숙영지를 만들었군요."
"규모는 어느 정도로 추측됩니까?"
"최소 2개 연대는 되어 보이는군요. 간이 마구간을 세우고 건초를 쌓아 둔 걸 보니 기병대도 포함한 모양입니다."
한스 징펠만이 물끄러미 루페르트를 응시했다.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전하."
"잠깐만 살펴봅시다."
루페르트가 범용한 건 맞다.
체력과 순발력은 일반인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고 지능과 학식도 간신히 상류층과 보조를 맞출 수준이다.
지략의 부분에선 말할 것도 없고 군략이나 병략 또한 아는 바가 없다.
이능 부문은 단연코 우월하긴 하나 그건 리프니에 덕분이다.
루페르트라는 인간 자체를 놓고 보면 정직하게 저 철혈대제와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 루페르트라고 해서 아무 재주가 없는 건 아니다.
그 또한 10년 간 황제 노릇을 했다.
아무 실권도 없고 비난만 받은 꼭두각시라고 할지라도 그에게도 눈이 있었고, 귀가 있었고, 생각이 있었다.
지금 저 앞의 군대는 명백히 이상하다.
* * *
'에반하우젠 백작령은 사실상 고어문트 선제후 아래에 있는 종속된 영지다. 보리스였나. 보가트였나. 아무튼 에반하우젠 백작 자체가 고어문트 선제후 가문의 혈족이다. 그 영지에 왜 군대가 있는 거지? 최소한 저 정도 규모의 군대는 일개 독립 백작 따위가 불러 모을 수준이 아니다.'
10년간 꼭두각시 황제를 했다고는 하나 허투루 하진 않았다.
간절히 자신의 편을 찾아 제국의 거의 모든 귀족, 일개 제국 기사까지 손을 뻗치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무수한 전쟁을 보았고, 군주라는 느슨한 명칭 아래 각 군주가 어느 정도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동원할 수 있는지도 감각적으로 아는 안목을 익혔다.
그건 일개 총사와 마법사로는 알기 어려운 일이다.
여기 분더발트가 있다고 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군주의 땅에 어떤 군대가 머무르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는 건 제국이라는 거대한 무대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의 눈에나 보이는 것이기에.
"저 군대의 소속을 알아봐 줄 수 있습니까?"
손녀와 함께 천천히 뒤를 따르던 베르크 란이 루페르트의 말을 듣고 앞서 산비탈 아래에 내려다보이는 숙영지를 가늘게 뜬 눈으로 응시했다.
"렌타이어마르크 쪽 연대로 보입니다."
"렌타이어마르크?"
"군기에 그려진 저 합장한 손 모양은 렌타이어마르크 가문 문장에서 따온 걸로 보입니다. 선제후가 직접 고용한 연대가 아닐까요?"
루페르트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렌타이어마르크라. 왜 렌타이어마르크 쪽 연대가 이 시점에 이런 곳에 있는 걸까요?"
루페르트의 손짓과 행동이 유례없이 바빠졌다.
"수고스럽겠지만 가까운 곳에서 저 군대의 동정과 목적을 살필 수 있겠습니까? 이왕이면 에반하우젠 안의 반응도 알고 싶군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영역에서 이의를 제기한다.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확신 혹은 경험 둘 중 하나가 있어야 한다.
지금이 그런 순간이다.
"듣자 하니 테타우에서 저를 둘러싼 모략이 진행되고 있다고들 합니다. 고로 모든 걸 의심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베르크 란의 눈동자에 희미한 이채가 떠올랐다.
'호오.'
아주 잠깐 베르크 란의 눈에 비친 루페르트의 등에 선제의 모습이 흐릿하게 겹쳤다.
* * *
베르크 란의 추측은 정확했다.
에반하우젠 옆에 숙영지를 마련한 군대는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가 직접 고용한 그나우젠 보병연대와 그 분견대였다.
그들이 렌타이어마르크 주를 떠나 여러 군주의 땅을 거쳐 에반하우젠에 도착한 건 4일 전의 일이라고 한다.
다른 군주가 그러하듯 에반하우젠 백작도 자신의 영지에 다른 군주의 군대가 들어오는 걸 반기지 않았다.
군대가 머문 곳엔 반드시 크고 작은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군대가 몰고 오는 역병은 지난 수백 년간 모든 군주의 골칫덩이였다.
렌타이어마르크처럼 역병이 수시로 도는 곳이라면 더더욱 경계의 대상이 된다.
에반하우젠 백작은 어릴 때 같이 놀이 친구를 하기도 했던 골트문트의 이름을 빌려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에게 직접 퇴거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벌어진 장면이 도시 옆에 애꿎은 경작지 위에 펼쳐진 숙영지다.
"소문에 의하면 골트문트 선제후 본인이 직할 연대에 소집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목적은 불명이나 아마 에반하우젠에 침범한 저 군대를 밀어내려는 게 아닐까요?"
도시에 다녀온 한스 징펠만이 수집한 정보를 전달했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
과거의 일이란 이제 큰 의미가 없다.
그가 겪고 있는 현재와 모습이 크게 달라졌으니 말이다.
'왜 하필 그 많은 선제후 중에 렌타이어마르크 쪽이 이곳에 나타난 걸까?'
현재 루페르트에게 적대적인 선제후는 두 명이다.
대놓고 으르렁거리는 노르드마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아르님, 그리고 회귀 전과 회귀 후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는 속을 알 수 없는 고어문트 선제후 골트문트다.
만약 저 벌판에 주둔한 군대가 두 선제후의 소속이었다면 미련 없이 우회로를 찾았을 것이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루페르트는 죽어 가는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의 창백한 잿빛 얼굴과 입에서 풍겨 나오던 썩은 선창 냄새를 연상케 하는 고약한 구취를 떠올렸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회귀 전에도 중립이었고, 이번에도 중립에 가까운 위치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가 루페르트를 적대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
그의 영지는 가난하고 척박할뿐더러 주기적인 역병으로 뭔가를 꾸밀 여력도 없고, 무엇보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아내도 잃고, 후사도 남기지 못한 채 죽어 가는 사람이다.
차라리 내전을 시작한 주범으로 주목되는 레벤호스트가 위험하면 위험했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위험과는 거리가 먼 선제후다.
그런데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선제후의 군대가 골트문트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이 시점에 루페르트가 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
이건 그다지 좋은 현상이 아니다.
자부아 공국에 갇혔을 때 루페르트는 구원 요청조차 보내지 못했다.
설령 당시 구원요청을 보냈다고 해도 렌타이어마르크에서 출발한 군대가 벌써 도착할 리가 없다.
저 군대는 루페르트가 포위당하기 전부터 출발한 것이다.
"전하."
생각에 잠긴 루페르트 앞에 가벼운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다름 아닌 마를로네다.
저편에서 지겔슈타트가 매의 눈으로 노려보지만, 간섭은 하지 않았다.
설인에 맞서 루페르트를 구해 낸 걸 두 눈으로 보았으니까.
"무슨 일이지?"
루페르트는 또 마를로네가 감자를 내밀지는 않을까 싶어 살짝 경계심을 드러냈다.
"저기 왜 우리, 도시에 들어가지 않는 건가요?"
"왜 안 들어가냐고?"
"네. 저긴 제국령 아닌가요? 곧 황제가 되실 전하가 가면 저쪽에서 가장 높은 분이 맨발로 뛰쳐나와 환대할 거 같은데요."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고 있지만, 속내가 빤히 보인다.
당장 도시에 가서 안락한 목욕물과 따뜻한 침대, 훌륭한 음식을 만끽하며 편안하게 쉬고 싶은 모양이다.
루페르트는 그런 마를로네를 평소와 사뭇 다른 진지한 눈동자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저 군대가 심상치가 않아."
"저 군대가요?"
"렌타이어마르크의 군대다."
"그게 문제가 되나요?"
루페르트는 저 아래 나부끼는 기도하는 손이 그려진 군기를 보며 턱 끝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지금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군대다."
그의 목소리엔 일말의 흔들림도 주저함도 없었다.
불만을 가지고 찾아왔던 마를로네지만, 확고한 루페르트의 뜻을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이 황제님. 이런 얼굴도 할 줄 아는구나.'
마를로네가 감자를 내밀었다.
"거절한다."
마를로네와의 대화는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새로운 의견이나 관점이 제시된 것도 아니고 기발한 전략이나 술책을 꾸민 것도 아니니.
하지만 루페르트의 결심을 굳히는 데는 도움이 됐다.
자신의 생각을 타인과 함께 정리한 느낌이라고 할까.
루페르트는 마를로네를 제외한 전원을 불러 모았다.
"도시를 우회했으면 합니다."
루페르트의 의견에 반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얼굴엔 내심 탄복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젊다기보다는 어린 왕이 그들조차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을 짚고 넘어갔으니까.
그들이 보기에도 렌타이어마르크 군대, 그것도 거의 2배로 증원되고 용병 기병대까지 거느린 자들이 제국의 길목을 떡하니 막고 있는 건 생각할 여지가 있다.
그런데 여기엔 작은 문제가 있다.
"우회로라. 제가 기억하는 지도 속에선 여기서 저곳을 우회하지 않는 경로는 없습니다. 우회를 하더라도 크게 돌아가야 하죠."
한스 징펠만이 미간을 찌푸린 채 기억을 가다듬었다.
"험준한 산맥을 최소 5일은 더 돌아가야 할 겁니다. 지겔슈타트 님이 있는 이상 추격자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하겠지만, 카제인호프 사냥꾼들의 기습은 무시 못 할 요소입니다."
에반하우젠을 우회하면 지나칠 정도로 긴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 건 물론 추격자의 위협에 다시 맞서야 한다.
"게다가 당장 우리는 물자가 부족합니다. 당장 저부터 쓸 수 있는 탄환이 두 발도 남지 않았습니다."
루페르트의 계획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계획이라는 건 언제나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
루페르트는 당면한 현실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걸 발견했다.
'물자야 몰래 사람을 보내 보충할 수 있다고 해도 시간이 문제군. 평지라면 말을 빌려서라도 시간을 단축할 수 있겠지만 산맥을 우회해야 한다.'
다시 루페르트가 생각에 접어들 때 짙은 그림자가 루페르트의 몸을 뒤덮었다.
루페르트는 자신에게 그림자를 드리운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다름 아닌 베르크 란이다.
"지름길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인가요?"
"다만 고귀한 분이 가기엔 지나치게 비루하고 비천한 길입니다."
"길이 비천할 수도 있나요?"
"지나칠 정도로 급이 낮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건 괜찮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최대한 빠르게 테타우에 도착하는 것이니까요."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루페르트는 강한 흥미를 느꼈다.
'이 사람도 부탁이라는 걸 할 줄 아는 건가.'
"어떤 약속입니까?"
이에 베르크 란은 그답지 않게 시선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름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못 본 척해 주셨으면 합니다."
역시 무언가 사연이 있었다.
예상한 바다.
루페르트는 활짝 웃으며 흔쾌히 베르크 란의 청을 수락했다.
"그들이 우리를 적대하지 않는 이상,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겁니다. 저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정이 재개됐다.
베르크 란은 한동안 룸 제국 시절부터 깔린 포장도로를 따라 걷더니, 갑자기 방향을 틀어 들판으로 방향을 틀었다.
겉보기엔 아무것도 없는 들판.
표지 하나, 얼씬거리는 이 하나 없다.
하지만 그 방대한 버려진 들판 안엔 분명한 길이 있다.
루페르트는 오래전에 짓밟혀 누운 채 말라비틀어진 풀들을 지나 개울 사이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듯한 통나무를 건넜고, 야트막한 동산 위에 돌과 나무로 만든 비석들을 보았다.
한스 징펠만이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밀수꾼의 길인 모양이군요."
비석 너머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인다.
마을이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얼굴을 가리고 말을 삼가는 걸 추천합니다."
늘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이 무질서한 천막들을 눈에 담았다.
"이런 제국의 하류에 원해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71화 19. 하류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