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여신님. 드디어 바이엔에 도착했습니다."
여신의 수레 안.
어두컴컴한 차 안에 정물처럼 앉은 소녀를 보며 루페르트는 여신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래요?"
리프니에가 활짝 웃었다.
그녀가 루페르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차에서 나오시려고 합니까?"
루페르트가 다급히 묻자 그녀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페르트가 리프니에의 손을 잡았다.
여전히 소름 돋을 정도로 차가운 손이다.
루페르트의 손을 잡고 리프니에는 처음으로 마차 밖으로 나섰다.
루페르트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다.
황제나 되는 자가 여성을 전쟁터로 데리고 오는 건 구설수에 오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리프니에는 그의 여신.
외부에서 어떻게 생각하건 그녀의 뜻을 거스를 순 없다.
"아, 여기군요."
루페르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프니에는 태평스러운 얼굴로 주변의 풍광을 감상하며 주변을 돌아다녔다.
바이엔은 산과 구릉, 늪으로 가득 찬 렌타이어마르크에서 가장 넓은 평야 위에 큰 강을 끼고 자리 잡은 유서 깊은 고대의 도시다.
렌타이어마르크에서 발원해 노르드마르크로 흘러 들어가는 하나우강의 중상류를 낀 도시는 오랜 시간 동과 서의 육상 교역로의 집산지로 높은 명성을 누렸다.
그 부의 흔적이 도시를 둘러싼 견고한 성벽과 별 모양으로 증축된 막강한 요새의 형태로 남아 있다.
타인의 시선을 걱정하던 루페르트는 바이엔의 위압적인 모습을 보며 또 다른 걱정에 빠져들었다.
'역시 동방 제국 수십만 군세를 막아 낸 도시답군. 듣던 것보다 훨씬 견고하고 단단해 보여. 과연 이런 도시를 단지 빠르게 도시 앞에 당도하는 것만으로 굴복시킬 수 있다는 소린가?'
만슈타인의 가장 큰 지지자라고 하지만 루페르트도 그의 계획엔 강한 회의를 품고 있었다.
'뭐, 지켜볼 일이지만.'
루페르트는 리프니에의 시선을 응시하고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리프니에가 손가락으로 바이엔으로 통하는 길목 하나를 가리켰다.
그것은 강변을 따라 난 포장도로였다.
"저길 보세요. 루페르트 가우저."
"저 길 말입니까?"
"길옆에 뭐가 보이나요?"
"바위. 큰 바위가 있습니다."
"저 바위, 사람 같지 않나요?"
리프니에가 가리키는 바위를 보았다.
일견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지만, 자세히 보니 뾰족한 모자를 쓴 팔다리가 짧은 사람이 웅크리고 앉은 듯한 모양새다.
물론 인간이라고 부르기엔 여러모로 조잡한 점이 많았지만 말이다.
'야만 문명의 원시적인 유물처럼 생겼군. 룸 제국 양식은 결코 아니야.'
아마 룸 제국이 제국 영역에 진출하기 전에 선주민들이 만든 토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옆에서 노랫말처럼 들려왔다.
"저 바위가 움직인다면 믿으시겠어요?"
"저 큰 바위가요? 못해도 높이만 30미터는 족히 넘을 거 같은데."
"움직여요. 지금은 모종의 사정으로 봉인되어 있지만 말이죠."
루페르트는 믿기 어려운 눈으로 거대한 바위를 노려보았다.
"...."
믿기 어렵지만, 그녀의 말이 맞을 것이다.
리프니에는 측정이 불가능한 과거부터 살아온 존재니.
그녀가 새침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바위를 움직일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멀리서 경쾌한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무리의 기병대가 경쾌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루페르트는 선두에 선 사내를 유심히 노려보았다.
만슈타인.
이미 무한한 믿음을 주었다.
이제는 그가 그 믿음에 보답할 시간이다.
* * *
탁자 위에 지도가 펼쳐졌다.
바이엔과 인근 지형을 간략하게 그린 조잡한 지도였다.
분더발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채 지도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상황에서 지도를 보는 게 의미가 있는 건가.'
분더발트의 시선은 저 너머 내다보이는 바이엔의 강력한 성벽을 향했다.
계약된 수비병만 3천 명 규모일 것이다.
도시에서 백성을 징병해 무장시키면 숫자를 배나 불리기 가능하다.
훈련받지 못한 병사가 야전에서 쓸모없다고 하나 성벽 위에 세우면 이야기가 다르다.
포위도 불가능하다.
이쪽에 마법사가 하나 있다고 하나 저들의 성벽 위엔 열 문이 넘는 대포가 설치되어 있을 것이다.
5천 남짓한 병력으로 5개나 되는 성문을 틀어막을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단지 바이엔의 성벽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말고 무슨 효과가 있다는 거지? 두 번이나 황제에게 반기를 든 선제후가 고작 그 정도에 지레 겁을 먹고 항복할 것 같진 않은데.'
이제는 직언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황제의 권위를 존중해 억지로 여기까지 왔지만, 현실이 눈에 보인다.
당장이라도 군대를 물리고 테타우와 카렐리아에서 정규 병력을 모집해야 한다.
전쟁이 커지는 게 문제라고 하지만 여기서 패배하는 건 더 큰 문제로 이어질 것이다.
분더발트가 헛기침을 하며 루페르트의 눈치를 살필 때였다.
"보다시피 바이엔은 다섯 개의 성문을 가지고 있고, 이 성문으로 통하는 길은 수십 개가 있습니다."
만슈타인이 입을 열었다.
분더발트와 루페르트의 시선이 동시에 그의 얼굴로 향했다.
분더발트는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지만, 루페르트는 달랐다.
'이 친구.'
여전히 확신에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지켜보리라.
만슈타인이라는 별을 보는 자의 날갯짓을.
"허나 자세히 도시로 통하는 흐름을 살펴보면 주로 이용되는 성문은 두 군데입니다."
만슈타인이 검은 돌로 지도 위의 두 지점을 표시했다.
동남쪽의 그리폰 문, 그리고 서쪽의 쌍두 독수리 문이다
만슈타인은 목탄으로 성문으로 통하는 길 위에 선을 그렸다.
분더발트가 그 선을 보고 불쑥 말했다.
"이건 뭘 의미하는 거지?"
만슈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엔으로 통하는 길은 여럿이 있습니다. 그중엔 새로 닦인 길도 있지만, 가장 많은 사람과 수레가 오가는 전통적인 길은 바로 이 길이지요."
만슈타인이 목탄이 이미 선을 그은 길 두 지점에 동그라미를 표시했다.
루페르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건?"
목탄으로 그은 길의 궤적 양 끝단에 표시한 동그라미 주위로 여러 개의 길이 모여든다.
바이엔에서 출발한 가도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다른 마을과 도시, 혹은 외국으로 통하는 끝없이 갈라지고 수렴하는 길들의 병목점이다.
"성을 포위할 것도 없이 이 두 지점을 장악하는 것만으로 바이엔의 물류를 장악할 수 있습니다."
"도적의 수법이군."
분더발트가 코웃음을 치며 날카로운 눈으로 만만치 않은 부관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저들도 바보는 아니야. 길이 장악되어 있다는 걸 알면 다른 길로 물자를 운송하면 그만이지. 산적마냥 길목에 죽치고 앉아 물자나 뜯는 게 그대의 계획인가?"
처음엔 소극적으로 시작했던 분더발트의 반론은 말미에 가서는 군인답게 거칠고 강압적인 모양새를 띠었다.
만슈타인은 장군의 분노에도 일말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물건이야 흐름을 바꾸겠죠."
"무슨 뜻이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평범한 자를 보며 만슈타인은 별을 바라보던 확신에 찬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며 힘 있게 말했다.
"사람은 어떨까요?"
"사람?"
그건 분더발트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영역이다.
허를 찔렸다고 할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지?'
의문 속에서 장군이 입을 다무는 동안 루페르트는 자신의 진정한 장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담담하게 물었다.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건가? 만슈타인."
만슈타인이 빙그레 웃었다.
"선제후는 지금 군대를 모으는 중입니다."
"그건 알고 있지."
"그 군대는 어디서 만들어질까요?"
"글쎄. 바이엔인가?"
"바이엔이지요. 렌타이어마르크에서 대량의 장비와 물자를 마련할 수 있는 곳은 거기뿐이니까요. 그런데 병사들은 어디서 올 것 같습니까?"
"그건."
누군가 탁자를 주먹으로 쳤다.
분더발트다.
99화 25. 믿음 (7)
완고한 연대장 출신의 군인은 미세한 경악이 깃든 눈으로 자신의 부관을 노려보았다.
"설마? 그대가 말한 사람이라는 게 모집병인가?"
미소를 유지한 채 만슈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에서 올 겁니다. 도시의 인간들은 제국의 적보다는 자신의 아내나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걸 선호하는 작자들이니까요. 대저 보병은 농촌에서 답을 찾지 못한 시골뜨기가 지원하고, 기병은 상속받을 재산이 없는 하급 귀족이 지원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만슈타인이 고개를 돌리더니 망원경을 들어 가도 저편을 주시했다.
망원경의 둥근 시야 안에 촌뜨기 네다섯 명이 봇짐을 들고 삼삼오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도 모집병이 오고 있군요. 이 모집병은 렌타이어마르크 안에서 연대 장교를 만나 계약서에 서명하고, 장비를 받고, 훈련을 받아 한 명의 병사로 탄생할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신병은 한 번이라도 모아서 훈련할 필요가 있으니."
누구보다 보병대의 운영에 대해 잘 아는 게 분더발트다.
신병은 말 그대로 한 마리 짐승이다.
어디로 튈지도 모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골칫덩이다.
그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이 제자리에서 죽는 법이다.
죽음을 강요하기 위해서는 기율을 필요로 한다.
기율은 다그침만으로 되지 않는다.
하나의 덩어리진 큰 집단 속에서만 효율적으로 주입할 수 있다.
어깨를 맞댄 동료, 코앞을 스치고 지나갈 듯이 지나가는 성마른 하사관, 매의 눈으로 주시하며 처벌할 거리를 찾는 장교 따위가 필요하다는 소리다.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분더발트가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눈으로 부관을 노려보았다.
만슈타인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그들을 우리의 진중에서 훈련시키려 합니다."
"!!!!"
그 말을 듣는 순간 분더발트는 좀처럼 느껴 보지 강렬한 전율을 느꼈다.
입이 떡 벌어지고 소름이 돋으며 식은땀이 솟았다.
머리 위에 포탄이 스치고 지나가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던 천상 전장의 남자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극히 드물다.
'이런 수를 생각해 냈다고? 이 일천한 경력의 카렐리아 촌놈이?'
드디어 분더발트도 만슈타인의 생각을 이해했다.
그의 계획은 터무니없었다.
적진에서 적진에 모여드는 병사를 가로채 이쪽으로 끌어들인다.
'설마 지금까지 한 무모한 행군은 이를 위한 포석이었나?!'
"...사람이 오가는 주요한 길목을 우리가 막아섰습니다. 렌타이어마르크 다른 지방에서 올라오는 모집병과 서쪽 드라쿨레아 공국을 비롯한 외국 출신 모집병 대부분을 우리가 장악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할 일은 아마 그들의 고향에서 활동하고 있을 렌타이어마르크 모병관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겁니다. 제가 볼 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으로 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 전장에 황제와 반역자 두 군주가 있습니다. 폐하가 병사라면 누구를 따르겠습니까?"
루페르트가 미소로 화답했다.
"당연히 황제 아니겠나?"
'역시.'
루페르트는 흡족함을 감추지 않았다.
'여신님의 통찰력은 완벽하군. 이 친구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의 거물이다.'
아직 배워야 할 게 많겠지만, 그가 배우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기계적인 행정과 관습에 불과하다.
만슈타인에겐 번득이는 천재성이 있다.
범인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인재가 뒤셀하펜에서, 리히트보덴에서 그리고 테타우를 거쳐 여기까지 와서 그 반짝이는 원석의 진가를 드러낸 것이다.
'이 친구가 이대로 잘 성장해서 나의 군대를 대신해서 이끌어 줄 대리 장군이 되어 준다면.'
루페르트의 눈앞에 불타는 테타우의 풍경이 펼쳐졌다.
늘 보는 광경이지만 이제 그의 시선은 그 너머, 테타우를 포위한 융커스 베샤문트의 군대를 바라본다.
성벽 너머에서 또 하나의 군세가 횃불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그 구원의 군대를 이끄는 건 저 사내, 만슈타인일지도 모른다.
"저기."
루페르트의 감상은 분더발트의 목소리에 의해 깨어졌다.
분더발트가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만슈타인에게 물었다.
"자금은 어떻게 하지?"
"자금 말입니까?"
"병사들을 새로 모집하고, 고용하고, 장비를 마련하려면 많은 자금이 필요하지 않겠나?"
단순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지적이다.
돈은 거의 모든 걸 결정한다.
특히 돈은 전쟁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
장비를 마련하고, 병사를 병사답게 만드는 군대의 연료다.
급료를 받지 못한 군대는 폭도로 돌변한다.
현재 루페르트는 그다지 많은 금전을 지참하지 않았다.
워낙 소규모이기도 할뿐더러 딱 그 소규모 군대를 유지할 정도의 금전만을 가지고 왔을 뿐이다.
테타우나 더 가까운 카렐리아에 지원 요청을 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걸릴 것이다.
적지에서 보급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또 다른 군대를 마련해야 한다는 소리와 다를 바 없으니.
"병사 계약금은 선금조로 지급되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이미 격의 차이를 느꼈지만, 그걸 받아들이기 싫은 강렬한 마음을 안고 분더발트가 그답지 않게 조롱하는 투의 말투로 물었다.
'이건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슈타인.'
그러나 만슈타인은 다르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마련하고 있었다.
"세금을 거두죠."
"세금? 누구에게?!"
만슈타인이 명랑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렌타이어마르크의 모든 촌락과 도시에 말입니다."
"그게 가능할 거라 믿나?"
마지막 자존심을 부여잡고 분더발트가 물었다.
만슈타인은 전보다 더 간단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기병이 더 많지 않습니까?"
* * *
헤켄바하는 바이엔으로부터 10km 떨어진 작은 촌락이다.
부유하진 않지만, 늪지대도 적고 역병도 돌지 않아 바이엔에 공급하는 곡식과 채소의 상당량을 공급하는 곳이다.
이 평화로운 도시에 한 무리의 기병이 도착했다.
챙 넓은 모자에 새의 하얀 꽁지깃을 탄 멋들어진 기병대의 우두머리가 촌장과 장로를 불러 모아 놓고 두루마리를 펼친 채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다시피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는 황제에게 반기를 든 제국의 반역자이며, 너희들은 선제후의 부역자다. 그 죄를 면하기 어려우나 황제가 특별히 너희들에게 사면받을 기회를 주셨다. 황제 폐하의 군대를 위한 특별세를 부과하겠다. 촌장과 장로는 책임지고 이하의 금원을 제국을 위해 납부하도록."
사람들이 술렁거렸지만, 누구도 느닷없이 들이닥친 기병대에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기병대장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황제의 명에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황제의 군대 권한을 행사하겠다. 다시 말해 강제력을 동반한 공출을 하겠다는 소리다."
바꿔 말하면 약탈을 하겠다는 소리다.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촌락에 불을 지르고, 밭을 칼로 갈아엎고, 사람을 죽이고, 아이를 내던지고, 부녀자를 겁간하고, 찬장에 남은 동전 하나까지 싹싹 긁어 가겠다는 소리다.
압도적인 폭력을 동반한 위협 앞에 촌장과 장로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화, 황제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오후까지 준비해라."
협박은 헤켄바하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성벽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지킬 병사가 없는 인근 취락 대부분이 비슷한 꼴을 겪었다.
거기서 마련한 돈은 바이엔에 모여드는 촌뜨기들의 손에 들어갔다.
"제국의 병사가 되겠는가? 반역자의 병사가 되겠는가? 승리자가 되어 고향에 금의환향하겠는가? 시체가 되어 아무도 모르는 벌판에서 썩겠는가?"
분더발트의 모병 장교가 신교 목사보다 더 쩌렁쩌렁한 어조로 얼치기 촌놈들을 속박했다.
멋모르고 바이엔에 오던 신병들은 고스란히 황제의 군대에 흡수됐다.
군대의 규모가 가파르게 오르자 만슈타인의 협박은 더욱 대담해졌다.
다수의 병사를 동반한 협박 무리가 이제는 성벽에 보호받는 도시 아래까지 와서 세금을 요구했고, 그 규모를 보고 지레 겁먹은 군주나 도시의 의장이 성문을 열고 황제에 대한 특별세를 냈다.
분더발트는 굵은 얼굴로 이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루페르트에게 말했다.
"이 방법은 대단히 효율적이나, 대단히 사악하군요."
적지에서 뜯은 돈으로 적지에서 병력을 모집하고, 그 병력으로 더 큰 협박으로 돈을 뜯어낸다.
분더발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말이 특별세지, 폭력을 동반하지 않는 약탈 아닌가? 그것도 같은 제국인에 대해서?!'
만슈타인의 세금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제국의 군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외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제국군이 외국의 도시와 촌락에 어떤 요구를 하는지.
겨우 아사를 면할 수준까지 착취해 전쟁 비용과 물자를 충당한다.
말을 듣지 않으면 밭을 갈아엎고 가축을 죽이고 가옥에 불을 지른다.
선제적 약탈은 제국군의 오랜 관습이다.
그런데 만슈타인은 오래전부터 행해 오던 관습을 외국이 아닌 제국의 영토에 시전하려 한다.
아무리 반란자의 영역이라고 하나, 그들 또한 제국인이다.
제국 헌법과 황제의 보호를 받아야 할 존재들이다.
만슈타인은 그런 허울뿐인 방패를 너무나도 간단히 무시했고,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장군님. 보십시오. 이번에는 드라쿨레아에서 온 기병들이 황제 폐하의 군대에 합류했습니다."
어느 시점부터 분더발트는 만슈타인의 행동에 어떠한 제동도 걸지 않고 그저 지켜보기만을 했다.
만슈타인은 밝고 활기차며 평균 이하의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잡아끄는 신비한 매력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관습과 도덕을 비웃는 이단아의 위험성도 품고 있다.
"장군님. 만슈타인의 군대가 수녀원에 불을 지르고 수녀들을 겁박해 거액의 돈을 갈취했다고 합니다."
"에팅겐에서는 재판도 없이 반란죄 명목으로 몇 명의 목을 매달았다고 하더군요."
"상단으로 추정받는 한 무리의 시체가 길바닥에서 널브러진 채 발견됐습니다. 어지러운 말발굽은 만슈타인의 진영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분더발트의 심복들이 앞다투어 만슈타인의 새로운 군대가 일으키는 비행을 보고했다.
그는 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분더발트는 이를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그 앞엔 테타우를 출발할 때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군대가 모여 있었다.
2만 명의 보병, 3천 명의 기병.
그것은 순전히 만슈타인이 만들어 낸 기적이다.
승리가 눈앞에 보인다.
어떤 장군이 이를 마다할 수 있단 말인가.
"제국인은 장창을 아래에서 위로 찍듯이 비스듬히 내리친다. 위에서 아래로 올려 치는 건 산악 민족의 저급한 방식이다!"
바이엔의 성벽 앞에서 새로 모집한 병사들이 다름 아닌 분더발트의 장교와 하사관의 지도를 받으며 훈련하고 있다.
강에서는 테타우에서 보내온 물자가, 육로에선 카렐리아에서 보낸 무기와 장비가 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느새 군대 뒤엔 종군 상인들이 따라붙었다.
종군 상인단에 속한 대장장이들이 경쾌한 망치 소리를 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제국군에 공급할 무구를 만들고 있다.
봄이 끝나기 전에 황제의 군대는 바이엔을 완전 포위했다.
성벽 위에서 조촐한 황제의 군대를 비웃던 렌타이어마르크의 반역자들은 그들의 운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체감했다.
비난의 화살은 이 모든 일을 일으킨 원흉,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로 향했다.
* * *
명분 없는 전쟁이란 입 안에 독을 넣은 채 내달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형태로든 피해가 오는 법이다.
특히 전쟁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원하는 국면과 거리가 멀어질 때 입 안에 넣은 독의 독성은 더 치명적으로 변한다.
"선제후의 미친 짓이 우리 렌타이어마르크를 멸망으로 이끄는군."
"황제가 한 번 용서했는데도 선제후는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왜 일족 군주와 가문의 원로들은 가만히 있는 거지? 자격 없는 선제후를 그렇게까지 모셔야 할 이유가 있는가?"
바이엔 의회에서는 이미 선제후를 인정하지 않는 의견이 지배적인 위치를 점했다.
"우리 장군은 뭐 하는 거지? 저들이 모집병을 가로챌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이제 와서 도시민들을 무장시키겠다는데. 글쎄...."
"황제 폐하 군대의 급료가 우리보다 높다더군."
병사들의 사기 또한 급격하게 악화됐다.
저자에선 선제후를 둘러싼 음울한 소문이 퍼져 나갔다.
"들었나? 일전에 선제후가 말 안 듣는 군주와 봉신들을 불러 모은 적이 있잖아. 그 높으신 분들 상태가 하나같이 이상하다고 하던데."
"제국 성인이라는 자가 선제후의 궁정에 있다던데. 아 글쎄 그 사람 나병에 걸렸다고 하더라고."
"악마와 손을 잡은 건 아닐까?"
렌타이어마르크에 독이 풀렸다.
그 독은 걷잡을 수 없이 상층부에서 시민 사회로 시민 사회에서 하층민의 영역까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제국력 991년 늦은 봄, 황제가 도시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선제후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야음을 틈타 백기를 든 시민이 성벽을 내려왔다.
"우리는 반역자인 선제후를 위해 죽을 생각이 없습니다. 언질만 주시면 정해진 때에 저의 동료들이 스스로 성문을 열 것입니다."
투항자들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파멸을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증거였다.
루페르트는 흡족한 얼굴로 그의 진정한 장군을 보았다.
만슈타인 또한 황제를 마주 보았다.
또 한 번, 신뢰는 보답받았다.
100화 26. 성 에디지우스 (1)
장미의 저택.
대황후 안젤리나가 말년을 보낸 곳은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다.
마지막 주인인 안젤리나의 시녀가 실종된 이후로 이 저택은 빈집이 되었다.
하얀 보를 씌운 가구로 가득 찬 실내의 풍경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섬뜩한 별세계를 연상시켰다.
먼지와 빛줄기를 뚫고 한 사내가 저택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안드리아의 루돌프.
철혈대제라는 이명을 가졌던 과거의 황제가 저택을 찾은 것이다.
저택 안은 비워진 상태라 소수의 관리인 이외엔 아무도 지키지 않았다.
설령 그들이 있었더라도 루돌프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겠지만.
저택 뒤뜰에 조촐한 비석이 세워진 묘가 보인다.
그 누구도 멈출 수 없을 것 같던 루돌프의 발걸음이 멈췄다.
묘지 위에 누군가 서 있다.
검은 코트를 걸치고 높은 모자를 쓰고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거구의 사내가.
루돌프는 그 사내를 뚫어지게 쳐다보다 미련 없이 돌아서서 저택을 떠났다.
그것은 굽은 허리임에도 3미터에 가까운 거체, 기이할 정도로 긴 팔과 거대했던 발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복장을 하고 있지만,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것은 그림자가 없었다.
"...리프니에."
심해보다 깊은 분노를 담아 루돌프가 낮게 읊조렸다.
* * *
점점 커지는 황제의 군대 앞에서 바이엔은 항전 의지를 잃었다.
모든 비난의 화살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에게 쏠렸다.
"선제후는 무능하고 아무런 비전도 없습니다. 그는 단지 억지를 부리기 위해 우리를 반역자로 만들려 합니다. 우리가 비록 법적으로 선제후의 신민이나 폐하의 선처에 고마움을 느끼긴커녕 은혜로 원수로 갚은 제국의 적을 따를 의무는 없습니다. 우리는 선제후의 신민 이전에 제국인이니까요."
피를 토하는 듯한 사내의 말을 들으며 루페르트는 회귀 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인기를 잃은 군주의 말로는 한결같군.'
인기가 군주를 만들어 주는 건 아니지만 인기를 잃은 군주는 정상적인 활동을 하기 어렵다.
모든 행동이 비난의 대상이 되고, 거의 모든 영역에 강한 저항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황제의 권한이 절대적이라고 하더라도 실제 그 일을 수행하는 건 평범한 사람이다.
평소의 반감이 쌓이면 황제조차 피부로 느낄 정도로 국정 수행에 악영향이 간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아마도 과거의 루페르트보다 상황이 좋지 않을 것이다
무능한 꼭두각시 황제라고 하나 정당하게 선출된 루페르트와 달리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제국의 반역자니까.
누가 반역자의, 그것도 힘도 비전도 없는 신민을 자처하겠는가?
그가 버림을 받는 건 시간문제다.
"포위를 시작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이 모양인 걸 보니 바이엔도 끝난 모양입니다."
분더발트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성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 전쟁은 폐하의 승리로 끝날 것으로 보입니다."
분더발트의 시선은 만슈타인을 향했다.
만슈타인은 분더발트와 눈이 마주치자 웃음을 지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분더발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무서운 남자다. 하지만 동시에 극도로 위험한 자다.'
부관으로서 만슈타인은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는 것 외엔 늘 예의 바르고 정성을 다하고 낮은 위치에서 하나하나 배워 나가는 썩 괜찮은 군인이었다.
황제를 등에 업은 것이 명백함에도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뒷배를 과시하거나 암시하려 들지도 않았다.
한 번은 분더발트의 부하가 면전에서 모욕에 가까운 말을 쏟아 냈지만, 만슈타인은 화를 내기는커녕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이 먼저 사과를 했었다.
그걸 본 분더발트는 만슈타인의 사람됨이 꽤 선한 쪽일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그러나 렌타이어마르크에서 그가 보여 준 모습은 선량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자신이 앞장서서 채찍을 휘두르거나 폭언을 가하는 것이 아닌 조직을 이용해 렌타이어마르크라는 사회 그 자체에 체계적인 폭력을 휘둘렀다.
지금 만슈타인은 예의 바르고 쾌활한 신하지만 그가 힘을 얻는다면?
저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는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를 것인가?
한 가지 확실한 건 만슈타인이 수행한 전쟁은 지금까지 분더발트가 아는 전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 전쟁의 형태가 어떻게 발산될지는 분더발트는 알지 못한다.
분더발트는 황제를 보았다.
'과연 황제 폐하는 저 속을 알 수 없는 사내를 잘 다룰 수 있을까?'
제대로 다룰 수만 있다면 만슈타인은 황제 최고의 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어쩌면 그 검은 황제 자신을 찌르는 시해의 도구가 되리라.
분더발트는 이 감상을 황제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감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 * *
바이엔의 북쪽 성문이 열렸다.
수비병의 방관 속에서 분더발트 연대를 필두로 제국군이 줄지어 도시 안으로 입성했다.
선두에 선 분더발트가 손짓했다.
매복도 없고 함정도 아니다.
렌타이어마르크를 상징하는 기도하는 손이 그려진 깃발이 내려지고, 창과 방패를 들고 정면을 응시하는 초대 황제의 모습이 그려진 황제의 깃발이 걸렸다.
지겔슈타트를 비롯한 최정예 전투원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루페르트는 백마를 탄 채 병사들과 함께 바이엔에 입성했다.
도시 안에서는 반가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스 징펠만이다.
그는 안면이 있는 지겔슈타트와 마를로네에게 눈인사를 한 후 루페르트에게 다가왔다.
"폐하."
"징펠만 총사."
"먼저 승전을 축하드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나,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루페르트는 한스 징펠만에게 말 한 필을 내주었다.
"그래, 말씀하시오."
말머리를 나란히 한 한스 징펠만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뭔가 불길합니다."
"불길하다고?"
"이쪽이 적진 앞에서 군대를 모으고 도시를 포위하는 동안 선제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모집한 병력이 도시 안에 있고 장비를 만들 상인과 물자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
확실히 불길하다.
만슈타인의 계획이 기발한 것 맞지만, 너무 쉽게 일이 풀린 감이 있다.
실제로 분더발트와 만슈타인은 교통로를 막은 초기 렌타이어마르크의 반격에 극도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둘이 돌아가면서 쪽잠을 잘 정도로 말이다.
실제로 그때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성내 수비군을 이끌고 성문 밖으로 나와 이쪽을 방해했다면 만슈타인의 구상은 미완의 구상으로 그칠 확률이 높았다.
"더욱 이상한 점은 선제후 궁전의 움직임입니다."
한스 징펠만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성내 잠입했던 첩자들의 기이한 보고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포위가 지속된 두 달 동안, 궁전 안에 다수의 사람이 들어갔지만 나오는 사람이 이상할 정도로 적었다고 하더군요."
"어느 정도로 차이가 나기에 그런 말이 나오는 거지?"
"100명이 들어갔다고 치면 2명 정도만이 나오는 수준입니다. 그마저도 정기 보고를 하러 간 군인과 식료품을 공급하는 상인들이 전부라고 합니다."
루페르트는 광장에 들어섰다.
멀리 시계탑이 보이는 관청 너머로 음울하게 서 있는 선제후의 궁전이 눈에 들어왔다.
루페르트의 시선을 주변을 둘러싼 바이엔의 시민들을 향했다.
일부가 손을 들어 이쪽을 환호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점령당한 도시의 전형적인 우울한 무표정과 걱정과 두려움이 반반 섞인 눈으로 점령자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한스 징펠만이 더욱 목소리를 낮추었다.
"식료품을 공급하러 간 상인들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군요. 선제후 궁전 안에서는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그야말로 죽음과 같은 정적이 궁전을 덮고 있다고요."
순간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광장에 서 있던 이름 모를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황제의 시선이 닿자 소년은 허리를 숙였지만, 루페르트의 눈을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루페르트는 침상 위에 얼굴에 하얀 천을 덮은 채 죽어 있던 소년의 시체를 떠올렸다.
쟁반 위에 담긴 악취 나는 붉은 벌레 또한 떠올렸다.
루페르트가 물었다.
"제국 성인은?"
"선제후의 궁전 안에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습니다."
"그런가."
어쩌면 이 모든 일의 원흉은 한 괴물로부터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루페르트는 광장에서 군대를 대기시켰다.
"분더발트 장군."
"네. 폐하."
"선제후의 군대를 무장 해제시키고 광장에서 최대의 방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게."
"선제후의 궁전에 바로 들어가시지 않는 겁니까?"
"그의 죄를 당장이라도 묻고 싶지만 느낌이 좋지 않아."
"군대도 잃고 성벽을 잃은 그가 뭘 할 수 있을까요?"
"글쎄."
루페르트는 말끝을 흐렸다.
'어쩌면 그런 것이 필요 없을지도 모를지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반란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진압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루페르트가 생각하기에 이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 * *
"역시 똑똑하군. 똑똑해. 이번 황제는."
온몸을 흰 천으로 감싼 사내가 종이 달린 철제 지팡이를 흔들며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냈다.
그 옆엔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권좌에 앉은 채 병든 눈으로 끝없이 펼쳐진 긴 복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루페르트의 첩자가 보고한 것처럼 선제후의 궁전 안은 소름 끼칠 정도의 정적에 잠겨 있었다.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처럼.
"그대보다 유능한 건 확실하군."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선제후는 말없이 항의를 담아 그 사내를 노려보았다.
"나병의 에디지우스."
선제후의 입에서 불쾌한 음성이 악취와 함께 새어 나왔다.
"그대가 제국 성인인 것은 알고 있지만, 말은 삼가시게. 나는 렌타이어마르크계 황제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국의 선제후니까."
"그래서 창칼 한 번 부딪치지 않고 전쟁에서 패한 건가?"
"내 장군이 그렇게 무능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눈동자는 기둥을 향했다.
기둥엔 말라비틀어져 미라처럼 변한 시체가 천 개의 못에 박힌 채 고정되어 있었다.
"루페르트 가우저. 그 친구가 운이 좋은 거야. 훌륭한 지휘관을 장군으로 뒀으니. 하긴 황제니까 그런 인재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거지. 제국의 모든 좋은 건 슈발츠마인 놈들이 가져가니까."
"적진에서 적군이 될 장정을 자신의 병사로 모집하는 발상은 대단히 감명 깊었어. 내가 모시던 황제는 꿈도 못 꿀 정도의 재치와 지략이 엿보이더군."
에디지우스가 말할 때마다 몸을 가린 흰 천에서 악취 나는 점액과 붉은 실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역겹게 꿈틀거렸다.
여간한 인간이라면 제대로 눈을 마주칠 수 없는 광경이지만 반쯤 눈이 먼 선제후는 웃으며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제국 성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미소 지었다.
"그대는 초대 황제를 모시지 않았나? 그대가 제국 성인이 맞다면 말이지."
에디지우스의 입 쪽에서 키득 소리가 났다.
"노예제는 머리가 나빴어. 생각을 해 보라고. 선제후. 룸 제국의 투기장에서 사람을 잡던 백정 같은 인간에게 무슨 가르침이 있었겠나? 글자도 못 읽는 인간인데."
"그가 룸 제국을 무너뜨리지 않았나?"
"그건 그가 사람을 잘 뒀기 때문이지. 이를테면 나 같은."
복도 너머에서 웅성이는 소리와 군홧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제후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때가 왔군."
"그래."
"황제를 죽일 수 있겠나?"
선제후의 물음에 에디지우스는 두 눈을 부릅떴다.
"황제 따위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선제후."
허옇게 뜬 그의 흰자 안엔 붉은 벌레 수십 마리가 혐오스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제국을 멸하는 자다."
그가 손을 저었다.
죽음과 같은 정적에 휩싸인 복도의 기둥 뒤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귀족, 군인, 시녀, 시종 저마다의 복식과 신분을 가진 그들은 분명 사람이었으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주검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과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미동도 하지 않고 응시하는 그들의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밀랍 인형에 가까웠다.
그들 중 숨을 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101화 26. 성 에디지우스 (2)
북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선제후의 궁전 앞에 황제와 그의 군대가 도착했다.
"손쉬운 승리군요."
말 머리를 나란히 한 분더발트가 궁전을 노려보며 담담히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선제후가 저렇게까지 소극적으로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광장에선 선제후를 따르던 연대가 저항을 포기하고 군기를 황제군에 넘겨주고 있었다.
뒤늦게 장교들이 전황을 분석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이번 전쟁은 너무 이상한 형태로 종결됐기 때문이다.
만슈타인의 한발 빠른 움직임과 그 기발한 후속 조치가 탁월하다고는 하나 그 승리는 만슈타인의 오롯한 재능만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의 과실에도 비슷한 지분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곧 드러난 결과는 상대방의 실수가 컸다는 걸 드러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에겐 기병대만 부족했을 뿐이지 루페르트가 도착한 직후엔 황제군에 대항할 병력이 있었다.
수비군과 합세해서 회전을 벌였다면 황제군은 어쩌면 패퇴하여 국경을 도로 넘어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즉, 만슈타인의 승리는 절반이 상대방의 실책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분더발트는 이를 시기하지 않았다.
운이라는 것은 막강한 적의 패착과 더불어 위대한 명장이 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덕목이니까.
오히려 마음을 비우니 보인다.
그 불안한 반석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만슈타인의 과감함이.
처음에는 무모한 만용으로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둘도 없는 날카로움으로 느껴졌다.
이러나저러나 전쟁은 끝났다.
곧 선제후는 궁전 밖으로 끌려 나올 것이고 이제는 누구의 비호도 받지 못한 채 황제의 단죄를 받을 것이다.
그런데 황제의 표정이 썩 밝지 않다.
손쉬운 승리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불안한 심경을 은은히 내비치고 있었다.
"폐하?"
"아, 장군. 미안하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곧 병사들이 선제후를 데리고 나올 겁니다."
활짝 열린 궁전의 문안에서 병사들의 외침이 들렸다.
"선제후다. 선제후가 출두하고 있다!"
황제의 군기가 휘날리며 만들어 낸 그림자 아래로 루페르트와 그의 장군, 호위와 관료들이 지위에 따라 도열한 채 마중 나오는 선제후의 행렬을 저마다의 감정이 담긴 눈으로 응시했다.
곧 루페르트의 눈에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윤곽이 들어왔다.
틀림없다.
저 불쾌한 걸음걸이로 끈적거리며 다가오는 건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다.
곧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 햇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웃고 있었다.
선제후의 맨발이 태양이 달군 땅을 밟았다.
"오, 위대한 승리자시여. 오, 둘도 없는 제국의 정당한 군주시여, 오, 신의 가호 아래 제국을 지배하는 유일자시여."
입에 발린 찬사를 내뱉으며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루페르트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또 용서를 구하는 건가."
"아무리 황제 폐하가 관대하다고 하나 두 번의 용서는 없을 터인데."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무릎을 꿇었다.
루페르트는 싸늘한 눈으로 선제후를 노려보았다.
한마디 대꾸도 대응도 없었다.
"선제후를 호송할까요?"
분더발트가 조심스레 묻는다.
루페르트는 이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불안한 눈으로 어둠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또 다른 것들을 보았다.
궁중의 사람들이다.
법관의 옷을 입은 자, 귀족의 옷을 입은 자, 하녀와 하인들, 악사, 주방장, 병사들, 정강이를 드러낸 집달리 풍의 하급 관리들.
루페르트의 궁정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군상들이지만 어째서인지 루페르트는 그들에게서 피가 얼어붙을 정도의 오싹함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피부에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이 느낌은?'
권능 위기 감지가 발동했다.
군대를 보고도 발동하지 않았던 권능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람들 상대로 발동한 것이다.
마를로네가 루페르트를 돌아보며 불쑥 물었다.
"폐하?"
루페르트는 표정을 관리하며 손을 내저으며 명했다.
"선제후를 포함한 모든 이를 체포해라."
그때 궁전 안에서 조잡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병사들의 눈동자에 의문 부호가 떠올랐다.
조잡한 쇠붙이로 만든 작고 조잡한 종들이 울리는 경박한 울림은 모든 제국인의 기억에 있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보고 손가락질하고 두려워했던 존재들.
문둥이라 경멸당한 나병 환자들이 몰려다니며 내는 소리니까.
마을이나 도시에 들어오는 게 용납되지 않은 그들은 반드시 소리 나는 싸구려 종을 옷이나 지팡이에 달고 그들이 있다는 걸 알려야 했다.
기억에 묻힌 음울한 소리가 선제후의 궁전 안에서 울려 퍼졌다.
곧 온몸을 하얀 천으로 감싼 깡마른 사내가 여러 개의 종이 달린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궁전 밖으로 걸어 나왔다.
루페르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다.
말 아래 서 있던 마를로네가 눈을 부릅뜨며 뒷걸음질 쳤다.
"폐, 폐하...."
"나도 알고 있어."
처음 보는 인간이지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제국 성인이라 불리는 존재는 현실에 서 있는 괴이 그 자체니까.
루페르트가 말 머리를 급히 돌리며 명했다.
"장군. 저 인간을 죽이시오."
"저 인간을요?"
분더발트가 의아해하며 묻는다.
이미 그들의 수장인 선제후는 투항했고, 상대는 비무장에 힘도 없어 보이는 나병 환자인데 군대를 동원해 죽이라니.
"저건, 평범한 인간이 아니오."
그때 나병 환자가 미소 지었다.
그의 얼굴은 하얀 천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얼굴을 둘러싼 천이 움직이며 웃는 입 모양을 그대로 재현했다.
"황제 폐하. 어딜 그리 급히 가십니까?"
나병 환자가 루페르트를 향해 손짓했다.
"설마 우리 같은 존재를 전에 만나 보신 건가?"
분더발트가 장교들에게 명했다.
총을 든 병사들이 일렬로 서서 총구를 나병 환자에게 거뒀다.
자신을 노린 수많은 총구 앞에서도 나병 환자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이게 황제의 답인가?"
수많은 종들이 움직이며 경박하게 울렸다.
"쏴라!"
장교가 구호를 내리자 십여 정의 총이 하얀 연기와 굉음을 내뿜으며 총탄을 흩뿌렸다.
모두가 사내의 죽음을 예상한 순간 검은 그림자가 사내와 병사 사이에 뛰어들었다.
병사들은 의아한 눈으로 사내를 막아선 사람의 정체를 눈으로 확인했다.
아까 궁전 밖으로 나왔던 하인과 귀족 여성이다.
옷차림에서 말해 주듯 전혀 접점이 없는 듯한 두 사람이 마치 방패처럼 흰옷의 사내를 막아선 채 그를 대신해 총탄을 몸으로 받은 것이다.
귀족 여성이 입은 드레스에 핏물이 꽃처럼 피어올랐다.
"뭐, 뭐야!?"
"오, 맙소사! 호라신이시여!"
병사들이 총기를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나병 환자를 대신해 총탄을 맞은 여성은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똑바로 서서 나병 환자 옆으로 움직이다 푹 고꾸라졌다.
"하하하!"
루페르트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광기에 들린 그 웃음은 방금 귀족 여성이 보여줬던 기괴한 장면과 더불어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오싹함을 느끼게 충분한 광기를 머금고 있었다.
선제후가 루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황제여. 아니, 하켄하임의 촌놈 루페르트 가우저여."
기병들이 칼을 뽑고 루페르트와 선제후 사이를 막아섰다.
루페르트는 번쩍이는 투구를 쓴 기병들 너머로 미소 짓는 선제후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내가 왜 너 같은 작은 놈의 장난질에 반응하지 않은 줄 아나?"
"...제국 성인과 손잡은 건가?"
루페르트가 엄숙하게 물었고 선제후는 광소를 터뜨렸다.
그 광소에 루페르트의 탄 말이 동요를 일으키며 위아래로 혼잡하게 날뛰었다.
"촌놈 주제에 제국 성인을 알고 있다니. 에디지우스의 말이 진짜인 모양이군."
"에디지우스?"
선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유령처럼 서 있는 흰옷의 사내를 돌아보았다.
"나병의 에디지우스."
"...."
흰옷의 사내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지팡이를 가볍게 흔들었다.
"제국 성인이 나와 함께한다."
"장군!"
루페르트가 두려워하는 말을 진정시키며 분더발트에게 명했다.
"선제후를 처형해라!"
"폐하?"
"황제의 명령이다."
"황제께서 명하신다면."
분더발트가 친히 병사들에게 명했다.
"사격 준비!"
수많은 총구가 선제후를 겨눴다.
선제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에디지우스에게 향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마치 쏴 볼 테면 쏴 보라는 표정.
장교의 구령이 떨어지며 수십 개의 총탄이 선제후와 에디지우스를 향했다.
그런데 같은 일이 벌어졌다.
또 다른 검은 그림자가 믿기 어려운 속도로 달려 나가 선제후와 에디지우스를 감싼 것이다.
악사와 장교, 귀족과 상인, 주방장과 병사.
이번에도 전혀 접점이 없는 사람들이 방패를 자처하여 둘을 감쌌다.
"마리."
루페르트가 마를로네에게 물었다.
"저 인간들 몸에 뭐가 보이지?"
마를로네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에리히가 생각나네요."
"네가 데려온 소년 말인가?"
"네, 셀 수 없는 죽음이 보이네요."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 엄숙한 목소리로 명했다.
"궁전에서 나온 모든 이를 죽여라. 그들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불경한 이단이며 혐오이며 제국의 적이다."
황제의 명령이다.
허수아비 황제가 아닌 진정한 황제의.
저마다 저항감과 다른 생각은 가지고 있겠지만, 병사들은 기꺼이 황제의 명을 따랐다.
화승총이 불을 뿜었고, 기병들이 군중들 사이를 휩쓸고 지나가며 죽음의 칼날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시체가 쌓였고 궁전 앞은 피바다가 되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다.
특히 전장의 경험이 풍부하고 학살을 저질러 본 노병들의 얼굴에 먼저 두려움이 나타났다.
"뭐, 뭐야. 이것들."
비명도 공포도 없다.
사람을 죽이는 기분이 조금도 들지 않는다.
살아 있는 인형을 벤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그러나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에디지우스가 종 달린 지팡이를 흔들며 광소를 터뜨렸다.
"가라, 나의 종들아. 가서 가짜 황제를 잡아라. 나머지는 필요 없다! 모두 죽여라!"
그가 명하자 멍하니 죽임을 당하던 자들이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도처에서 총성과 날 선 비명이 울려 퍼졌다.
무수한 시체가 바닥에 널브러지며 핏물이 바닥을 적셨다.
황제군의 피해는 전무했으나, 황제군의 진영은 뒤로 밀리고 있었다.
공포도 고통도 모르는 인간들에게 정신으로 압도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공포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아비규환 속에서 마를로네는 각막을 뒤덮을 정도로 짙게 드리운 검은 얼룩이 한 점으로 모여드는 걸 발견했다.
혼절할 정도로 끔찍한 죽음의 악취가 인간들의 방벽 너머에서 풍겨 왔다.
얼룩을 지우고 깨끗한 시야로 전방을 주시했다.
"아."
마를로네가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몸은 누군가의 몸에 부딪혔다.
"뭐가 보이나?"
지겔슈타트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앞으로 밀며 물었다.
마를로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괴물."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 안에서 불그무레한 것들이 기어 나왔다.
이빨이 있는 벌레들.
하나의 문명을 멸망시킨 미네아의 붉은 벌레들이다.
그것들이 하나로 뭉치며 전승되지 않은 진정한 악몽을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현세에 재현하려 한다.
한곳에 모인 벌레들이 서로를 깨물었고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자 수천, 아니 수만 마리에 달하는 벌레들이 사방에서 급류처럼 모여들며 거대한 구체를 이루었다.
곧 제국인들은 볼 수 있었다.
시쳇더미를 헤집고 일어나는 거대한 붉은 구체를.
병사들의 입에서 헛소리와 비명이 튀어나왔다.
일부는 무기를 던지고 달아났고 일부는 끝없이 불어나는 구체를 보며 헛소리를 내뱉었다.
"저, 저걸 어떻게 하라고...!!"
고참 하사관의 말만큼 병사들의 심정을 제대로 대변하는 것도 달리 없을 것이다.
그늘진 골목, 검은 머리칼을 지닌 소녀가 현세에 나타난 악몽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그냥 자연사하게 두는 게 나았으려나. 저런 귀찮은 걸 꺼내 오다니."
그 소녀, 리프니에는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폐, 폐하!"
분더발트가 사색이 된 얼굴로 루페르트를 돌아보았다.
분더발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
황제의 얼굴엔 일말의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
대리 결투 당시, 챔피언이 처참하게 밀리는 가운데서도 터럭만큼의 감정 변화도 보여 주지 않은 루페르트의 굵은 신경에 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침착을 유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저토록 젊은 나이에 저렇게 심지가 굳다니!'
분더발트의 생각은 일부만 맞았다.
루페르트는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
'역시 이런 수를 남겨 둔 건가. 그래서 만슈타인에게 선수를 뺏겼을 때 가만히 있었던 것이군.'
[ 루페르트 가우저. ]
여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페르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신님."
옆에 분더발트가 있지만 거리낄 게 없다.
이미 그의 손엔 소라고둥이 들려 있으니까.
"장군."
"폐하?!"
어리둥절한 얼굴로 돌아보는 장군을 향해 루페르트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수고했네. 아무래도 지금부터는 내가 나서야 할 때인 거 같아."
모두가 돌아보는 가운데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불었다.
청명한 소리가 지옥도 위에 울려 퍼졌다.
102화 26. 성 에디지우스 (3)
루페르트는 어두운 마차 안에 있었다.
이미 전쟁의 승부는 기울었다.
만슈타인이 도시를 차단했고, 황제의 이름으로 지원병을 가로채 병력을 불렸다.
하지만 그걸로 이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회귀했다.
루페르트는 이제 사람의 모습을 한 리프니에를 응시하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여신님."
"루페르트 가우저."
리프니에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고혹적이고 뇌쇄적인 미가 느껴지는 아찔한 미소였지만, 루페르트에겐 그저 끔찍한 추억을 부르는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 소녀의 얼굴은 그가 두 번째 부모로 여겼던 안젤리나와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으니까.
그녀가 콧노래를 불렀다.
제국에서 널리 연주되고 불리는 곡조와 전혀 다른 이국적인 곡조.
루페르트는 리프니에의 콧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옛날 옛적에 심술 맞은 왕이 살았답니다."
어둠 속에서 소녀가 화롯가에서 동생에게 책을 읽어 주는 소녀처럼 말했다.
"왕은 매력이 없었어요. 얼굴은 그럭저럭 봐줄 만했지만, 성격이 마을에서 놀림 받는 곰보 꼽추의 얼굴보다 못생겼지요. 낳아 준 부모도, 아내도, 첩도, 자식도 모두 그를 싫어했답니다. 그래서 그는 악마를 불러냈어요."
처음 루페르트는 리프니에가 무슨 의도로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야기가 진전될수록 리프니에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과거의 이야기를 하시려는 건가.'
리프니에가 계속해서 말했다.
"'사람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주세요.'라고."
리프니에가 미소 지은 얼굴로 말을 멈추고 루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루페르트 가우저. 이 이야기는 희극일까요? 비극일까요?"
"글쎄요. 비극 같군요."
"땡-. 희극이랍니다."
"희극요?"
"네. 누구도 믿지 못하던 왕이 결국 모두와 한 몸이 됐으니까요."
"설마...."
루페르트는 선제후 궁전 앞에서 서로를 깨물며 하나의 구체를 이룬 셀 수 없는 벌레들을 떠올렸다.
"미네아의 붉은 벌레?"
리프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아주 잠깐 당혹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여신님. 전에는 분명 그걸 모른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지는 몰랐네요. 워낙 옛날 일이고 그보다 더한 희극과 비극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저처럼 영원을 살아가는 존재는 참 뭔가를 떠올리는 것도 큰일이지 뭐예요."
리프니에가 새침하게 너스레를 떤 후 루페르트를 똑바로 쳐다봤다.
별처럼 맑은 눈동자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서려 있었다.
"루페르트 가우저."
"네. 여신님."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역시 그 괴물을 처리해야겠지요?"
"처리할 방법이 있습니까?!"
"당연하죠. 저, 여신이라고요?"
루페르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얼굴을 본 리프니에가 해맑게 웃었다.
"어머, 루페르트 가우저. 오랜만에 보여 주는 진짜 미소네요."
"그, 그런가요?!"
"제가 그 여자의 시체를 먹은 이후 줄곧 저에게 거부감을 느꼈었잖아요?"
"아, 아닙니다."
"정말요~?"
리프니에가 대담하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루페르트는 그답지 않게 시선을 회피하며 다급히 얼버무렸다.
"사, 사실은 조금 좀. 그런 감이 없잖아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여신님!"
리프니에가 싱긋 웃으며 거리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이제야 좀 솔직해졌네요. 역시 당신은 그 사람보다 나은 구석이 없잖아 있어요."
"그 사람요?"
"삐치면 혼자 꽁해서 마음에 담아 두고 룸인들이 게걸스럽게 먹던 생선 썩은 것처럼 삭히는 사람이 있어요."
'설마, 루돌프 님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아무튼, 루페르트 가우저."
"네. 여신님!"
"이번 일은 당신이 나서 줘야 할 거 같아요."
"제가요?"
어리둥절해 하는 루페르트를 향해 리프니에가 부탁하는 모양새로 두 손을 내밀며 애교를 섞어 덧붙였다.
"네!"
* * *
루페르트는 그답지 않게 불안한 얼굴로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는 병사들을 보았다.
황제의 숙소로 사용 중인 여관 건물 주위엔 창과 할버드를 든 병사를 위시해 커다란 깃을 꽂은 챙 넓은 모자를 쓴 기병들이 수시로 순회하며 가까이 접근하는 모든 이를 검문했다.
여관 안엔 루페르트의 호위인 도펠죌트너와 제국 마법사까지 있다.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경계라고 할까.
이런 곳을 루페르트는 몰래 빠져나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것은 몰래 들어오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당장 늘 곁에 머무는 시종부터 속여야 하니 말이다.
시종이라는 작자들은 눈치가 빠르다.
애당초 눈치가 없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직종이겠지만.
루페르트는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 문을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복도 벤치에 앉아 있던 시종은 문이 열리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종이 물끄러미 루페르트를 올려다본다.
스무 살 조금 넘은 시종은 디터팔츠 출신으로 현재 루페르트를 모시는 다섯 시종 중에 가장 교활하고 눈썰미가 좋은 친구다.
그 시종을 보며 루페르트는 여신의 호언장담을 떠올렸다.
"제 권능은 장난이 아니라고요? 루페르트 가우저. 일단 한번 써 봐요. 저의 선물을! 분명 깜짝 놀랄 거예요!"
여신에게 권능의 아티팩트를 받았다.
그 아티팩트의 이름은 "안개 가면".
여신은 이 권능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이 가면을 뒤집어쓰고 가면에 당신이 생각하는 모습을 마음으로 전해 주세요.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상으로 타인의 눈에 비춰 보이게 될 거예요. 아, 물론 당신 같은 건장한 남성이 어린아이나 저처럼 아리따운 여성을 생각하진 마세요. 변태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당신과 비슷한 체격의, 얼굴 가죽 정도만 다른 생명체로 변할 수 있답니다!"
당시 루페르트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이지 인간 형태로 변한 이후, 우리 여신님. 왜 이렇게 호들갑에 사사건건 귀여운 척을 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소라고둥 형태일 때도 귀여운 척을 많이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몸을 떨기도 하고 똑바로 일어서기도 했을뿐더러 삐치면 홱 돌아서는 행동도 했었으니.
다만 소라고둥이라서 그다지 와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지금 루페르트는 디터팔츠에서 온 눈썰미 좋은 시종이라는 벽을 넘어야 한다.
시종의 밝은 초록색 눈동자가 루페르트의 얼굴을 상에 담는다.
그가 보는 건 의심할 길 없는 제국의 황제.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 맺힌 상은 그가 알던 황제와 모습이 다르다.
젊고 활기차면서도 겸손한 청년 황제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볼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삐쩍 마른, 수도사 같은 사내가 퀭한 눈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폐하...?"
시종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잘못 봤습니다."
고개 숙인 시종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진짜야. 진짜로 속여 넘겼어!'
시종만이 아니다.
늘 2층 계단을 지키는 장교도, 홀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장군도, 문 앞을 지키는 병사와 순회 기병도 어느 누구도 루페르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것만으로 놀라운 권능인데 안개 가면엔 또 하나의 특별한 권능이 숨겨져 있었다.
여신의 입을 빌리자면,
"아, 안개 가면을 쓰면 타인의 관심이 현저하게 줄어든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특별한 흥미를 느끼지도 못하고 인식조차 잘하지 못하게 되는 거죠. 마치 안개 그 자체가 된 것처럼요!"
처음 들을 때만 해도 말도 안 되는 능력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안개 가면의 성능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 유용함은 통찰의 만화경과 회귀에 버금갈 정도.
'이런 게 가능했다니. 역시 여신님. 여신님은 대단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황제의 처소를 빠져나온 루페르트가 향한 곳은 군대가 장악한 촌락 경계 밖에 자리 잡은 작은 마구간이었다.
울타리가 쳐진 작은 목장엔 한 마리의 말도 보이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되자 기병대를 마련하겠답시고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병사들이 모두 징발했기 때문이다.
돌볼 말이 없어지자 주인이 자리를 비운 마구간엔 빈집이 되어 버렸지만, 그 빈집 안엔 일단의 무리가 어둠 속에 소리 없이 숨을 죽인 채 모여 있었다.
문 앞에서 루페르트는 안개 가면을 벗었다.
"폐하?"
안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겔슈타트의 목소리다.
루페르트가 문을 열어젖혔다.
열린 문안엔 루페르트가 가장 믿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각의 마법사 지겔슈타트, 불과 철의 형제단의 한스 징펠만과 그의 쌍둥이 도제들, 그리고 앞선 다른 이들보다는 믿기 어렵지만 여러 번 거듭 행운을 안겨다 주었던 마를로네.
루페르트는 처소를 빠져나오기 전에 미리 그들에게 이곳에 모여 있으라고 말했다.
루페르트의 경호를 맡은 지겔슈타트가 의문을 표했지만, 황제의 명이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머물러 있었는데 황제 홀로 용케도 이곳에 찾아온 것이다.
"혼자 오신 겁니까?!"
지겔슈타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었다.
루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십니다. 이곳이 비록 우리 군대의 장악하에 있다고 하나 이곳은 렌타이어마르크입니다. 어디에 암살자나 첩자가 숨어 있을지 모르는데...."
"걱정하지 말게. 지겔슈타트. 내 황제가 되기 전엔 자유로운 영혼이었으니까."
루페르트는 웃음기 띤 얼굴로 마구간 안으로 들어갔다.
양초가 켜진 탁자에 황제를 중심으로 그의 전사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심에서 황제가 눈을 반짝이며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쟁은 우리가 이기고 있지만, 아직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첩보에 따르면 선제후는 제국 성인과 손을 잡았다고 하더군."
루페르트가 마를로네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리. 네가 볼 때 제국 성인들은 어떤 존재들이지?"
"...제가 본 건 한 명뿐이지만, 그건 괴물이었어요."
"설명해 줘. 네가 슈발츠마인의 숲에서 본 그것을."
"배움이 짧아 잘은 설명 못 하겠지만...."
마를로네는 담백하게 자신이 보고 상대했던 제국 성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것이 어떻게 총알을 튕겨 내고 어떤 괴력을 가졌으며 어떻게 인간을 뒤틀린 괴물로 만들어 사육했는지.
정수리에 달려 있던 두정안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지겔슈타트와 한스 징펠만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마법 대학은 이미 제국 각지에서 암약하는 괴인에 관한 정보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제국의 가장 어두운 그늘에서 활동하는 한스 징펠만은 빛에 가려진 수많은 악몽을 보아 왔으니까.
"그들은 제국의 어둠이야."
루페르트는 회귀 전 보았던 감정 없이 죽어 가던 무수한 사람과 시체에서 기어 나온 붉은 벌레들을 떠올리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대체 그건 어떤 끔찍한 마술을 부린 걸까.'
알고 싶지도 않고 알아서도 안 된다.
제국 성인이라는 이름의 괴물들은 인간의 인지를 넘어선 존재들이니.
중요한 건 하나다.
"그 어둠을 걷어 낼 수 있는 건 우리뿐이다."
루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겔슈타트와 마를로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문가를 쳐다보았다.
소녀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문가에 머물러 있었다.
'언제?!'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그 소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리프니에.
루페르트가 인간의 형체를 한 여신을 그의 전사들에게 소개했다.
"이분은 내가 특별히 모셔 온 귀인이시다."
황제가 존대하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다.
일곱 개의 창과 다섯 왕관으로 불리는 제국 선제후나 강대국의 왕 정도는 되어야 한다.
모두에게 공손했던 루페르트마저도 이제 황제의 어법을 쓰는데, 그런 그가 저 정체 모를 소녀에게 극존칭을 쓰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한스 징펠만은 그 소녀를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그 이상의 감각을 느끼진 못했다.
지겔슈타트는 한스 징펠만과 달리 앳된 겉모습 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꿈틀거리는 걸 느꼈지만 확신에 이를 정도는 아니었다.
한편 마를로네는 가장 어린 소녀답게 직관적으로 사물을 보고 평가했다.
"대황후님...?"
마를로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이내 자신의 실수를 발각했다.
"...은 아니네요."
모두의 시선을 한눈에 받은 채 리프니에가 다소곳하게 인사했다.
"저는 리프니에라고 해요."
그녀가 활짝 웃었다.
"참고로 계시의 성녀랍니다."
103화 27. 더 끔찍한 것 (1)
이상한 소녀다.
명랑하고 밝은 미소를 두르고 있지만, 미소로도 감출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역력하여 모두가 그것을 느꼈다.
가장 충격을 받은 건 지겔슈타트였다.
그는 리프니에와 마주치고서 마치 고양이를 본 쥐처럼 내장이 떨리는 전율 속에 잠겨 들었다.
그가 태어난 이래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뭐지, 저 소녀는? 대체 뭐냔 말이냐.'
마치 영혼 밑바닥에서부터 거부하는 느낌이랄까.
알고 싶지도 않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대학에서 배운 금단과 금기가 뇌리를 뱀처럼 휘감았다.
위대한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외면을 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되는 걸 들여다본 대가는 혹독하다.
자신은 물론 소중한 모든 걸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으니.
저 소녀에겐 그런 위험한 금단의 냄새가 났다.
'못 본 척하자. 그게 답이다.'
그뿐만 아니다.
한스 징펠만도, 마를로네도 지겔슈타트처럼 확실하진 않지만 리프니에에게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부감을 느꼈다.
그 결과 기이한 침묵이 리프니에와 루페르트를 사이에 두고 서리처럼 내려앉았다.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녀의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
침묵 속에서 리프니에가 앞장섰다.
"자, 그럼 출발을 해 볼까요?"
리프니에가 마차에 올랐지만, 누구도 마차에 탈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다.
오직 단 한 명, 루페르트만이 거부감 없이 마차에 동승 했을 뿐이다.
나머지는 각자의 말을 탔고, 말이 없는 마를로네는 마지못해 마부석에 앉았다. 마부의 얼굴을 보고 마차 뒤편으로 돌아가 앉아 난간을 붙잡았다.
그녀보다 작고 어린 쌍둥이 도제들이 조랑말을 탄 채 그녀를 지나치자 그녀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한스 징펠만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마를로네는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 도제가 아니라 저 마부가 이상하다고!'
마치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느낌이랄까.
불길한 예감이 들어 죽음의 냄새를 추적했으나 이상한 구석은 없었다.
하지만 불길한 건 불길한 것.
마를로네는 기꺼이 불편을 감수했다.
'그 여자아이. 결투장에 나타났던 그 반짝이던 사람? 닮은 거 같은데, 전혀 느낌이 달라. 전에는 사람 같은 느낌조차 안 들었는데 오늘 만난 건 사람이었지. 응, 겉은 확실히 사람 같았어.'
의문 속에서 마차가 출발했다.
중간에 만슈타인의 기병이 마차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왔으나 그들은 마차에 채 접근하기도 전에 말 머리를 돌렸다.
검은 마차는 순탄하게 렌타이어마르크의 가도를 따라 늪지대로 들어섰다.
렌타이어마르크의 악명 높은 늪지대는 소문대로 악취 섞인 해로운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마를로네는 진녹색의 늪에서 조부에게 들었던 오싹한 소문을 연상했다.
빈궁한 겨울이 다가오면 렌타이어마르크의 어머니들이 불필요한 자식을 베개로 눌러 죽여 늪 속에 던져 버리는데, 어떤 아낙네가 갓 죽인 아이의 시체를 늪 속에 던져 넣었을 때 늪 안에서 썩어 가는 수많은 아이들이 고개를 쳐들고 아낙네를 원망스런 눈으로 바라봤다는.
'이 비참한 동네에서 도망가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어.'
마를로네는 황궁에 있을 조부를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황제 앞에서 공적을 세울 수밖에.'
조부의 소원은 그녀의 소원과 맞닿아 있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소원 속엔 조부의 소원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걸 위한 원정이다.
끔찍한 악취와 살풍경한 곳이지만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굳은살이 밴 자신의 손바닥을 차분하게 응시했다.
"저쪽에 마을이 보입니다."
한스 징펠만이 음울한 숲과 늪 옆에 자리 잡은 촌락을 가리켰다.
[ 호스 ]
이끼 낀 쓰러져 가는 간판에 적힌 이름이다.
마을에서는 삶의 흔적이 희미해 보였다.
인기척도 없고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굴뚝에도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다.
버려진 촌락이다.
루페르트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마을을 보며 리프니에에게 물었다.
"여기에 뭔가 있습니까?"
"은둔자 한 명이 살고 있을 거예요."
"어떤 사람입니까?"
"렌타이어마르크에 올 때 커다란 바위를 본 거 기억하세요?"
"바위. 바위라...."
기억을 가다듬던 루페르트는 렌타이어마르크 입구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을 닮은 거대한 조각상을 떠올렸다.
'맞아. 분명 여신님께서 언급하셨지.'
"그때 여신님께서 말씀하신 그 바위 말씀입니까? 스스로 움직인다는."
"기억력이 좋네요. 루페르트 가우저."
리프니에가 미소로 화답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루페르트는 여신이 농담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진짜 움직인다는 건가. 그 바위가.'
"그 바위를 움직이는 열쇠를 그 은둔자가 가지고 있지요."
"어떤 사람입니까?"
"좋은 사람은 아닌 걸로 기억해요."
리프니에가 차창 밖으로 보이는 루페르트의 전사들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말이 안 통할 수도 있겠지요."
그 말을 들은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안 좋은 예감밖엔 안 드는데.'
마차의 문이 열렸다.
"자, 가세요. 루페르트 가우저."
리프니에는 내리지 않았다.
혼자 가라는 소리다.
루페르트는 만일에 대비해 시간의 책갈피로 현재를 기록했다.
마차 밖엔 시간이 멈춰 버린 마을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는?'
수백 년 전에 멈춰 버린 마을이다.
고고학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고 지식도 얼마 없지만, 스러져 가는 폐허의 양식은 어지간히 오래됐다는 도시나 마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조잡하고 원시적이었다.
드문드문 들어선 룸 제국 양식 건물이 이 마을이 세워진 연대를 어렴풋이 말해 주었다.
"룸 제국의 식민지로 보이는군요. 이 마을은."
일행 중에 가장 유식한 지겔슈타트가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룸 제국의 식민지?"
"룸 제국 전성기엔 우리 제국은 물론이고 북부인의 땅까지 식민지를 건설했다고 하죠. 대부분은 사라지거나 다른 마을, 도시로 변했지만 여기는 과거 룸 제국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군요."
지겔슈타트가 마을 중앙에 서 있는 외로운 오두막을 가리켰다.
"저기에 사람의 흔적이 느껴집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행을 불러 모았다.
"나와 함께 한 귀인께서 말씀하시길, 이 마을엔 마술적인 힘을 가진 은둔자가 있다고 한다."
루페르트의 발언에 대한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지겔슈타트는 의문을 표했고 마를로네는 쓴웃음을 머금었지만, 한스 징펠만은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왜 황제인 내가 이런 곳까지 은밀히 와서 은둔자를 찾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겠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제국 성인이라는 괴물과 손을 잡았다. 미네아의 붉은 벌레는 그 증거. 그들이 악마와 손을 잡았다면 우리 또한 악마를 물리칠 수단을 확보해야겠지."
또렷하고 맑은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한 후 루페르트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폐허 속에 외로이 서 있는 건물을 노려보았다.
"저 오두막 안에 고대의 은둔자가 살고 있다. 내 친히 그분을 설득할 것이다."
루페르트가 한스 징펠만에게 손짓했다.
"이번엔 함께하세."
웃음에 대한 보답이다.
한스 징펠만은 기꺼이 루페르트의 옆을 지켰다.
둘은 오두막을 향해 걸어갔고 나머지는 둘의 뒤를 따랐다.
"어떤가. 도펠죌트너."
지겔슈타트가 마를로네에게 말을 걸었다.
"네? 뭐가요?"
"저 안에서 죽음의 기운이 풍기는가 묻고 있는 거다. 일일이 풀어서 설명을 해야 하나?"
"저는 못 배우고 무식해서요. 돌려 말하면 알아듣지 못한답니다."
"...뭐가 보이나?"
마를로네가 오두막을 노려보았다.
오두막 안엔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글쎄요. 잘은 모르겠는데요."
"그래?"
지겔슈타트가 눈을 찡그리며 오두막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그도 딱히 오두막에서 특별한 기운을 느끼진 못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지? 황제 폐하가 말씀하시는 은둔자란.'
루페르트와 한스 징펠만은 오두막 앞에 섰다.
한스 징펠만이 목소리를 높였다.
"거기 계시오? 안에 계시오?"
오두막 안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사람이 있다.
지겔슈타트와 마를로네는 언제라도 싸울 수 있게끔 경계 태세에 들어갔고 한스 징펠만의 도제들은 가방을 내려놓고 언제든 무기를 조립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 시간에도 한스 징펠만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황제 폐하의 행차이시오. 안에 사람이 있다면 응당 문을 열어 그대의 황제를 맞이하시오."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엔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키가 작은 사내가 유령처럼 서 있었다.
"황제 폐하가 당신 앞에 있소. 예를 갖추시오."
한스 징펠만이 사내를 독려했다.
그러나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루페르트를 쳐다볼 뿐이었다.
잠시 후, 사내가 입을 열었다.
"나에겐 황제가 없지만 도움이 필요한 것 같군."
사내가 두건을 벗었다.
두건 너머엔 익숙하지 않은 이국적인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밀림 부족? 하브루타인? 동방 제국? 그것도 아니면 신 칼란의 사람들인가. 아니, 어느 쪽도 아니야. 내가 모르는 민족이다.'
"뭐가 필요한가."
루페르트는 경직된 한스 징펠만에게 은밀히 손짓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서지 말라는 신호였다.
'어떤 인간인지는 알 수 없다. 허나.'
지금은 이 사람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
그 수밖엔 없다.
터무니없는 제국 성인을 이기기 위해서 말이다.
"그대가 거대한 석상을 움직이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루페르트가 담담하게 말을 걸었다.
사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누구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지?"
"그건 말할 수 없다."
"악마에게 들었겠지?"
사내의 입에서 침 한 줄기가 새어 나왔다.
주름진 손 또한 미세하게 경련했다.
'악마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루페르트는 표정을 관리하며 담담하게 답했다.
"악마는 아니다."
"악마가 시켰나?"
"악마가 아니라고 했다."
"악마가 시켰다면 따라야지. 하지만 악마가 아니라면 따를 수 없다!"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상할 정도로 악마에 집착하는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신이 말하는 악마가 누구지?"
루페르트의 물음에 사내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하얗게 질렸다.
곧 그의 벌어진 입에서 거품이 흘러나왔고, 온몸에서 그냥 봐 주기 어려울 정도의 경련이 일었다.
"마, 말할 수 없다!"
가까스로 사내가 경련을 이겨 내며 대답했다.
루페르트는 한스 징펠만과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하나의 공감대가 형성됐다.
저 사내는 '악마'에 대해 지나칠 정도의 공포감을 가지고 있다는걸.
그렇다면.
"그래. 악마가 날 시켰다."
이용하는 수밖에.
아니나 다를까 알 수 없는 사내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미친 사람처럼 떠들어 대더니 루페르트에게 비열하게 절을 했다.
절조차 제국에서 하는 것과는 형태가 다르지만 아무렴 어떤가.
저 은둔자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 루페르트 가우저. ]
'여, 여신님?!'
[ 방금 그 말, 취소하세요. ]
순탄치가 않다.
루페르트는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는 농담이고."
은둔자가 고개를 들었다.
"제국의 황제라는 작자는 말을 이리 가볍게 하나? 내 고향에서 그런 짓을 하면 가죽을 벗기고 혀를 뽑았을 것이다."
"훌륭한 고향이군. 그래, 이름이 뭔가?"
"이름? 그런 건 진즉에 잊었지만."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로브를 훌러덩 벗었다.
벗은 로브 뒤엔 햇볕에 탄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체가 드러났는데 그 몸엔 마치 그림 같은 문자가 무질서하게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사내가 자신의 몸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깔끔하게 사람 가죽 벗기는 놈."
"?"
"그게 내 이름인 모양이다."
사내가 자신의 몸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가리켰지만, 루페르트의 눈엔 그다지 뜻을 알고 싶지 않은 흉측하고 괴괴한 그림만 보일 뿐이었다.
'이름은 말하지 말자.'
"잠깐 안에 들어가서 단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한스 징펠만이 머뭇거렸다.
루페르트는 그를 돌아다보며 무언의 언질을 줬다.
여긴 괜찮으니 안심하라고.
대신 루페르트는 목에 걸린 소라고둥에 손을 올렸다.
'어쩔 수 없다. 여신님의 이야기는 영혼 동맹이라고 해도 함부로 입 밖에 내기 곤란하니까.'
그렇게 해서 루페르트는 사내의 오두막 안에서 단둘이서 독대했다.
오두막 안엔 강렬한 시체 냄새가 났다.
사내가 양초를 켜자 그나마 희미한 빛이 나왔으나, 그 양초에서도 이루 말하기 어려운 역한 냄새가 났다.
루페르트는 구역질이 나오는 걸 참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는 여신 리프니에님의 사자다."
"뭐?"
사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건 또 뭐 하는 잡신이냐?"
104화 27. 더 끔찍한 것 (2)
"리, 리프니에님을 모르나?"
"모른다!"
사내는 당당하게 답했다.
"보나 마나 여기 인간들이 믿는다는 호라 같은 실체도 없는 잡신이겠지."
사내가 히죽 웃으며 촛불이 밝히고 있는 오두막 정경을 돌아보았다.
루페르트도 그를 따라 했지만 곧 후회했다.
오두막 천장과 벽엔 벗겨낸 인간 가죽이 빽빽이 걸려 있었으니까.
이미 마음이 어느 정도 찌그러져 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루페르트의 마음은 여기서 한 번 더 꺾였을지도 모른다.
'끔찍하군. 이 인간의 소행인가. 아니 그보다 이 인간은 어디서 온 거지?'
루페르트가 마음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어디서 왔나? 남쪽인가? 동쪽인가? 북쪽은 아닌 거 같다만."
사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루페르트는 그 방향이 어딘지 몰랐으나 곧 사내가 방향을 알려 줬다.
"서쪽이다."
"부르봉? 부르봉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그보다 더 서쪽. 바다 건너에서 왔지."
"...신대륙?"
들은 적이 있다.
제국의 동맹국 카스무어가 대양 너머에 새로운 땅을 발견했다는.
그러나 그 땅은 죽음의 땅이었다.
풀 한 포기, 벌레 하나 살아갈 수 없는.
카스무어인이 신대륙에서 가지고 온 건 부도 희망도 아닌 끔찍한 역병뿐이다.
"제국의 황제라면 제국인 백 마리 정도는 내어 주겠지?"
은둔자가 긴 담뱃대를 꺼내 입에 물며 불을 붙였다.
"사람이라니."
"우리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싶다. 그리 많이 필요하지도 않아. 100마리면 충분하다."
은둔자가 정신이 알싸해지는 연기를 뿜어냈다.
"신?"
"우리 신은 너희들의 메아리 같은 신과 달리 실체가 있고 힘이 있으시지. 우리 신은 인간의 비명과 살가죽을 원하신다."
"취향이 독특한 신이군."
"내게 원하는 게 있어서 온 게 아닌가? 제물을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루페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람을 바치라니. 그것도 백 명이나.'
루돌프라면 기꺼이 바쳤을 것이다.
방법은 많다.
부랑자, 범죄자, 반역자, 연고가 없는 자를 아무나 잡아서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루페르트의 자존심, 정확히는 황제의 자존심을 능멸하는 것이다.
'아무리 범법자라고 해도 황제가 자신의 백성을 어디서 온 지도 모르는 이상한 놈에게 판다고? 그건 아무리 급해도 할 수 없는 일이야. 자유인들의 제국의 황제가 해서는 아니 되는 일이다.'
"바깥에 계집 하나가 있던데."
은둔자가 눈을 번들거렸다.
그 말을 들은 루페르트는 정신 번쩍 들었다.
"그 계집 하나와 교환해도 돼. 그 계집한테는 좋은 냄새가 나더군."
"내게서 더 좋은 냄새가 나지 않나?"
"고약한 향수 냄새는 두통만 일으킬 뿐이지! 뭐, 그래도 황제의 가죽은 벗겨 보고 싶군."
"좌우지간, 그 거래는 불가능하다."
"이유가 뭐지?"
"생각보다 사나운 녀석이라 당신 가죽이 벗겨질 수도 있거든."
마를로네를 생각하니 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오는 루페르트였다.
덕분에 괜찮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안개 속을 걷던 무질서한 인간의 무리가 루페르트의 눈앞에 그린 듯이 떠오른 것이다.
'그거 괜찮을지도?'
루페르트가 표정을 관리하며 은둔자에게 물었다.
"인간 100명이 필요하다고 했지?"
"그렇다."
"상태가 안 좋은 인간도 괜찮나? 상태가 좋지 않지만 자기 발로는 걸을 수 있지. 한 번에 인도할 수 있어. 그것도 빠른 시간 내에."
루페르트의 물음에 은둔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건, 받아들이겠다."
* * *
"내가 필요하면 이 요술 깃털을 하늘 위로 날려라. 그리하면 나와 나의 백성들이 그대를 도우러 달려올 것이다."
은둔자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화려한 새의 꽁지깃을 주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아무 설명도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은둔자는 루페르트를 쫓아내듯 자신의 오두막에서 몰아냈다.
그 기이한 깃털을 손바닥에 올린 채 물끄러미 쳐다보던 루페르트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의 여신을 눈에 담았다.
"여신님. 그 은둔자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궁금한가요?"
평소보다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매서운 느낌이다.
소라고둥처럼 귀여운 모습이 아닌 사람의 실체로 싸늘한 시선을 보내다 보니 체감 온도는 더욱 싸늘하다.
"...제가 아는 세계의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루페르트는 시선을 돌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맞아요."
리프니에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재의 대륙에서 왔죠. 당신들이 신대륙이라 부르는."
"재의 대륙? 그곳은 어떤 곳입니까?"
"거기도 사람이 살았어요. 아주 많이요. 당신의 제국보다 큰 나라를 세우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 욕심이 많았고 너무나 어리석었죠."
리프니에가 활짝 웃었다.
"그래서 전부 죽었어요."
"...아."
달리 할 말은 없었다.
전부 죽었다는데.
리프니에는 더 이상 말하기 싫은 듯 눈을 감아 버렸다.
어둠이 그녀 주위를 감싸는 걸 보며 루페르트 또한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은둔자의 정체가 아니다.
루페르트는 손안의 깃털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그리고 제국 성인.'
이 깃털이 무슨 힘을 가져다줄지는 아직 모른다.
어렴풋이 예전에 본 스스로 움직인다는 바위가 움직여 무언가 해 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여신이 장담했다.
그것이라면 제국 성인의 장난감을 능히 가볍게 박살 내 버릴 수 있다고.
'다른 방법은 없다. 이 깃털에 모든 걸 걸겠다.'
제국을 파멸시키려 하는 자들에게 철퇴를 내릴 시간이다.
* * *
작은 부분에서 변화가 일었다고 하나 시간의 흐름은 큰 틀에서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형태로 흘러갔다.
황제군은 도시를 포위했고 충성스러운 제국 신민이 황제를 위해 성문을 열어 주었다.
무혈입성으로 도시를 점령한 황제군은 황제 루페르트를 거느리고 선제후의 궁전으로 향했다.
"위대한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장군 분더발트가 루페르트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정중하게 말했다.
"아직 끝난 건 아니오. 장군."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다.
루페르트는 깃털을 손에 쥔 채 분더발트에게 명령을 내렸다.
"대포와 폭약을 준비하여, 광장을 비우고 병사들을 반월형으로 배치하시오. 궁전 안에서 무엇이 나오든 쉽게 처리할 수 있도록."
분더발트는 의아한 눈으로 루페르트를 바라보았다.
늘 동석하기만 했던 황제가 전투 지시를 내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가?'
전쟁에 문외한이 시시콜콜한 지시를 내리는 건 패배로 가는 지름길이다.
얼마나 많은 군주나 성직자가 장군의 일에 간섭하다 패배로 이끌었는가.
이른바 위대한 승리엔 늘 그런 무능한 상관의 패착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전쟁은 끝났다.
중요한 국면도 아니다.
한 번쯤이야.
분더발트는 기꺼이 루페르트의 지시에 따랐다.
다만, 준비를 하면서도 루페르트의 저의를 의심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항복한 군주 앞에 궁전을 무너뜨릴 정도의 화약과 대포를 들이대라니.
그것도 동료 선제후에게 말이다.
그래도 충실한 성격답게 분더발트는 시킨 대로 행했다.
황제군은 광장을 비우고 골목만을 점령한 모양새로 선제후의 궁전을 둘러쌌고, 궁전의 입구엔 야전용 대포 두 문이 늠름하게 자리 잡았다.
궁전을 무너뜨리진 못하겠지만 맹렬한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화약통도 입구 주위에 촘촘히 배치됐다.
만슈타인이 이끄는 기병대는 광장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두 무리로 나뉜 채 흥미로운 눈으로 보병대가 벌이는 작업을 지켜보았다.
모든 준비가 갖춰지자 루페르트는 분더발트에게 명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변명을 듣겠다."
궁전 안에 들어간 건 소수의 전령이었다.
전령이 빠져나온 후 문이 열렸고 죽어 가는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맨발로 걸어 나왔다.
전처럼 그는 미사여구를 내뱉으며 맨발로 걸어왔다.
루페르트는 그에게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루페르트는 선제후 다음에 나타날, 제국의 진정한 위협만을 생각했다.
곧 종소리가 울렸고 온몸을 흰 천으로 감싼 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병의 에디지우스.
제국 성인이 모두를 조롱하며 만인의 눈앞에 나타났다.
시간의 흐름대로.
"에디지우스."
루페르트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얀 천으로 감싼 입 부분에 미소 짓는 형태가 떠올랐다.
"오. 황제 폐하가 내 이름을 불러주다니. 필생의 영광이구만."
"제국의 이름으로 너를 심판하겠다."
"할 수 있으면. 가짜 황제."
에디지우스가 비웃음을 흘렸다.
"오냐."
루페르트가 손을 내저었다.
그와 동시에 뒤편에 있던 포병들이 대포의 화구에 불을 붙였다.
콰쾅!
두 구의 대포가 동시에 불을 뿜으며 사람 머리만 한 포탄을 날렸다.
그 포탄은 제국 성인의 몸에 구멍을 냈고, 머리통을 글자 그대로 날려 버렸다.
"우와."
지켜보던 마를로네가 탄성을 내질렀다.
"제국 성인도 대포알을 맞으니 죽는구나...."
"대포를 맞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임시 포수를 맞은 한스 징펠만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도제들은 한마디 말도 없이 벌써 다음 포탄을 장전했다.
한편 광장에 모인 병사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현장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나온 자칭 제국 성인도 기괴한데, 그 괴인이 나타나는 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대포알로 날려 버리는 모습은 평범한 병사의 눈에도 기괴해 보였으니.
가장 놀란 건 다름 아닌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철석같이 믿었던 제국 성인이 등장한 지 1분도 되지 않아 퇴장했다.
연극으로 치면 주연 배우가 나타나자마자 발이 고꾸라져 무대 아래로 자빠진 격이다.
안 그래도 죽어 가던 선제후의 낯빛이 그야말로 검은색으로 변해 버렸다.
루페르트는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쓰러진 제국 성인의 시체를 주시했다.
'자, 이제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은둔자의 깃털은 어디까지나 보험용이다.
여신이 보증했지만, 은둔자는 그다지 믿음이 안 가는 인간이었고 믿기도 싫었다.
할 수만 있다면 루페르트 자신의 힘만으로 이 상황을 처리하는 게 최선의 방안이다.
그 궁리가 현재의 상황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일이 운명처럼 일어났다.
제국 성인의 시체에서 붉은 벌레들이 꿈틀거리며 몸 밖으로 흘러나온 것이다.
'역시 이걸로는 안 되는 건가.'
루페르트는 즉시 좌우에 명했다.
"저 불경한 자의 시체와 기생충을 당장 불로 정화해라."
"황제 폐하의 명령이다! 저것들을 불태워라!"
분더발트의 우렁찬 명령이 떨어진 직후 용감무쌍한 분더발트 연대의 병사들이 제국 성인의 시체에 불을 지르기 위해 접근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궁전 안에서 오싹한 포효가 터져 나왔다.
한두 명이 아닌, 수십, 수백 명이 일제히 내지르는 마치 지옥에서 터져 나온 듯한 흐느낌.
곧 병사들은 보았다.
궁전 안에서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안면을 가진 인간들이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뒤집어 누운 채 벌레처럼 네다리로 기어 궁전으로 튀어나오는걸.
그 속도는 인간의 속도가 아니었고, 뒤틀린 채 네 발로 질주하는 그 모습 또한 인간이 갖추어야 할 모습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발이 묶인 듯 부릅뜬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장면을 지켜보았다.
"저, 저건 뭡니까?!"
분더발트조차 경악을 숨기지 않았다.
그 경악의 크기는 이전보다 훨씬 컸다.
'전에는 그냥 순순히 죽어 줬던 건가.'
타타타타탕!
황제군의 총이 불을 뿜었다.
하늘을 향해 뻗은 창들이 일제히 아래로 내려가 창의 벽을 세웠고, 측면에선 만슈타인의 기병대들이 피스톨과 기병도를 뽑고 공포를 다스리며 기회를 엿보았다.
인간 꼭두각시의 목적은 황제군의 격퇴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에디지우스, 정확히는 에디지우스의 몸에서 기어 나온 벌레들을 전력으로 감쌌다.
'벌레가 본체였나.'
적에 대한 지식을 하나둘 깨달아 가며 루페르트는 분더발트에게 명했다.
"폭약을 터뜨리시오."
분더발트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우렁찬 목소리로 주위에 명했다.
"놈들을 이 세상에서 쓸어버려라!"
병사들이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치직거리는 소리를 내고 타고 들어간 도화선은 폭약통에 닿았고, 곧 광장 전체가 울릴 정도의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악마조차 살아남을 수 없는 폭발의 향연 속에서 인간들은 터져 나가고 사지가 찢겨 나가며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틀렸고, 그마저도 매캐하게 피어오른 하얀 연기가 감싸 버렸다.
자욱한 화약 연기 속에서 루페르트와 황제군은 연기 너머를 노려보았다.
"지겔슈타트."
루페르트가 그의 마법사를 불렀다.
"네. 폐하."
"어떤가?"
"으음. 확신을 할 수 없군요. 잠시 시간을 주십시오."
지겔슈타트가 뒤편에 서 있는 마를로네를 불렀다.
"도펠죌트너."
"네."
"뭐가 보이나?"
"죽음밖엔 보이지 않네요."
"어떤 죽음이지?"
지겔슈타트의 물음에 마를로네는 가늘게 뜬 눈으로 불쾌감을 섞어 말했다.
"꿈틀거리는 죽음요."
지겔슈타트가 곧장 루페르트에게 보고했다.
"안에 뭔가 있습니다. 크고 거대한 무언가가."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역시, 나의 군대만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재앙이라는 소린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제국 성인은 이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는걸.
즉, 표면에 속한 존재가 아닌 이면의 존재.
이면의 존재는 표면의 군대로 처리할 수 없다.
이면의 존재는 같은 이면의 존재로 처리해야 한다.
리프니에는 그 길을 제시했고 수단마저 손에 쥐여 주었다.
[ 루페르트 가우저. ]
마음이 통한 걸까, 루페르트가 여신을 생각할 때 여신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 당신의 진정한 힘을 사용할 때가 온 거 같네요. ]
"기꺼이."
루페르트는 하얀 연기 솜에서 거대한 구체가 형상을 갖추어지는 걸 보며 다채로운 색채를 가진 깃털을 하늘 위로 날렸다.
깃털은 바람을 타고 하늘 위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올라 사라졌다.
105화 27. 더 끔찍한 것 (3)
아카이아 대주교가 황제의 집무실을 찾아온 건 선제후와 황제의 전쟁이 한창 중이던 시기였다.
집무실엔 잡다한 관료가 저마다의 업무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현재 책임자는 베르너였다.
제국의 선제후이자 종교 지도자이기도 한 대주교가 통보도 없이 누군가를 방문하는 건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른한 오후 햇살을 받으며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던 베르너는 대주교의 등장에 황급히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와 머리카락을 정리한 후 대주교를 맞이했다.
대주교는 껄껄 웃으며 친근한 덕담을 건넨 후 상석에 앉았다.
'대체 무슨 일로 이분이 갑자기 찾아온 거지?'
아카이아 대주교는 양면의 얼굴을 가진 자다.
이단 심문관으로서 그는 무자비하고 지칠 줄 모르는 박해자인 반면, 개인으로서는 극단적일 정도로 조심스러운 인간이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 대주교는 후자의 경향이 두드러지는 경향을 보였는데, 어째서인지 지금 대주교는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
"그래, 남작. 전쟁은 언제 끝날 거 같나?"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대략 한 달 전후로 끝나지 않을까요?"
"놀랍군."
대주교가 과할 정도로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 생각하지 않나? 저 렌타이어마르크를 반년도 안 되는 시기에 정벌하다니 말이야. 저지대의 요새 도시 하나 함락시키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생각해 보면 놀랍다는 표현밖에 쓸 수 없는 일이지."
"만슈타인이라는 자가 큰 역할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만슈타인?"
대주교는 그 이름엔 별다른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그의 흥미는 다른 곳에 있었다.
"우리 폐하를 보면서 느끼는데 말이야. 선제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지 않나?"
"선제라면 클라우데 2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분 또한 놀라운 분이었지. 언제나 위태로운 결정을 하는데 그 위태로운 결정이 늘 맞아떨어졌어. 모두가 안 될 거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해도 그분은 흔들림이 없으셨지."
대주교는 등받이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앉으며 탁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과자를 발견하고 하나 집어 입 안에 넣고는 즐거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차를 내오겠습니다."
"달지 않고 꽃냄새가 나지 않는 녀석으로 부탁하네."
차를 준비하는 동안 대주교는 계속해서 자리를 지키며 집무실 전체를 흥미로운 눈으로 돌아보았다.
중간중간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걸 보며 베르너는 점점 대주교의 생각이 뭔지 알 수 없어졌다.
'대체 뭐 하러 오신 거냐고.'
잠시 후 시종이 차를 내오자 대주교는 기다렸다는 듯한 모금 음미하고는 베르너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국의 역사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나?"
"기본 소양 정도는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대학을 나왔나?"
"네."
"차남이군."
"장남입니다."
"호오."
아카이아 대주교가 자세를 고쳐 앉아 얼굴을 좀 더 베르너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제국 태동기, 그러니까 최초의 황제 티그리트가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글쎄요."
"생략이 많고 모호하지 않나?"
"신화나 전설에 가까운 느낌이긴 합니다. 그럴 만한 사건도 많고요."
"렌타이어마르크 통합 당시도 비슷한 느낌이었지?"
"네, 그렇습니다."
베르너는 소싯적 역사서에서 읽은 노예제 티그리트의 렌타이어마르크 통합에 관해 떠올렸다.
늘 그렇듯 티그리트는 소수의 전사만을 거느렸고 적대적인 부족으로 가득 찬 적지에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행군을 했다.
당시 렌타이어마르크는 여러 잡다한 부족의 연합체였는데, 그중 가장 강력한 자가 야난이라는 자였다.
야난은 곰처럼 강력한 전사임과 동시에 뱀처럼 교활한 자로 티그리트를 함정으로 몰아넣고 완벽하게 포위한 상태에서 싸움을 걸었다.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진 전쟁이었다.
역사에 따르면 티그리트의 전사는 삼천 명 남짓에 반해 그를 공격하는 야난의 전사는 삼십만에 달했으니.
"숫자의 과장이야 그 시대의 기록이야 늘 있는 거지만 말이야. 내가 볼 땐 삼만 명이 아니었을까? 그조차도 지금 기준으로도 많은 숫자긴 하지."
대주교가 차를 음미하며 입을 열었다.
"노예제가 그때 어떻게 이겼더라?"
"패색이 짙어지자...."
자신이 생각해도 황당무계한 결과였다.
"노예제 자신이 신이 되어 모든 걸 부숴 버렸다고 하더군요...."
대주교는 소리 내어 웃었다.
어린아이도 안 믿을 이야기다.
그러나 제국에서 가장 엄격하고 보수적이어야 할 대주교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난 그 말을 믿어."
일말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대주교는 힘주어 말했다.
"우리 제국은 살아 있는 신이 지키는 나라야."
* * *
바이엔. 선제후의 궁전 앞.
자욱한 연기가 걷혀 가는 가운데 병사들은 보았다.
현실 위에 너무나 당당하게 서 있는 뒤틀린 이형의 존재를.
수천수만 마리의 벌레가 한 곳에 뭉친 역겨운 덩어리가 어둠 속에 눈처럼 보이는 붉은 불빛을 번들거리며 인간들을 무가치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직 홀로 인간의 형체를 갖춘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광소를 터뜨리며 벌떡 일어서서 루페르트에게 손가락질했다.
"어떤가? 루페르트 가우저. 이 하켄하임에서 축구나 하던 촌놈아. 이제 너와 나의 고귀함의 차이를 느끼겠는가?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나의 자랑스러운 가계와 근본조차 모호한 혈통 사기꾼 사이의 격의 차이가 느껴지냐고 묻고 있는 거다."
"그 격의 차이라는 게 저 괴물인가?"
루페르트가 비릿한 냉소를 머금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이런 걸 가질 수도 없고 만들어 낼 수도 없겠지. 그게 너와 나의 차이라는 것이다."
"어린아이 같군.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순간 속으로 생각했다.
'회귀 전엔 그래도 선제후다운 품격이 남아 있었는데.'
무엇이 인간을 어리게 만드는가.
훈련된 품성과 성찰이 치기를 거스른 것일까, 아니면 감정의 과잉이 미숙함을 불러온 것일까.
아무래도 좋다.
이제 상황은 루페르트의 손을 떠났다.
"장군."
"네, 네! 폐하!"
"병사들을 물리시오."
"병사들을요?!"
"당장!"
이제 기다릴 뿐이다.
루페르트의 진정한 지원군이 나타나기를.
한편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구체에 애걸했다.
"에디지우스! 가짜 황제를 죽이고 제국을 멸해라! 그게 그대의 소원 아닌가?!"
구체가 세 개의 눈을 번들거렸다.
그것은 마치 젤리처럼 몸을 늘였다 기울이며 루페르트 쪽으로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면 셀 수 없는 붉을 벌레들로 이루어진 그것의 움직임은 도저히 맨정신으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병사들이 자리를 떠나서 망정이지 계속해서 자리를 지켰다면 필경 미쳐 버리는 인간이 속출했을 것이다.
"폐하. 여기는 위험합니다."
지겔슈타트가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매섭게 소리쳤다.
그의 눈동자와 목소리엔 이미 넘쳐흐를 것 같은 마법의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제가 폐하를 지키겠습니다."
"그거 고맙군."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느닷없는 밤.
칠흑 같은 어둠이 주위를 예고도 없이 뒤덮었다.
갑작스러운 격변에 모두가 하늘을 바라보는 가운데 루페르트는 들었다.
수천 명이 내지르는 고통에 찬 비명과 아우성을.
순간 루페르트 눈앞에 환상이 떠올랐다.
모든 걸 태워 버릴 듯한 작열하는 태양 아래 펼쳐진 드넓은 광장.
그 광장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고 심장이 산 채로 뽑히던 낯선 사람들의 모습을.
광장 너머 우뚝 솟은 피라미드 위에 한 사내가 앉아 그 모습을 음료를 마시며 보고 있었다.
루페르트가 하늘 위로 날린 깃털과 같은 깃털로 장식된 화려한 의장을 입은 그 사내의 얼굴은 버려진 마을의 은둔자의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 사내가 말했다.
"리프니에."
사 음절의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온 순간 환상은 깨어지고 현실이 빈자리를 밀려 들어오는 격류처럼 시야를 채웠다.
다시 돌아온 현실 속엔 거대한 형체가 느닷없이 루페르트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이것은...?"
렌타이어마르크에 접어들 때 보았던 거대 석상.
그것이 지금 먼 거리를 넘어 선제후의 궁전 앞에 우뚝 서 있다.
"황제."
빛바랜 두건과 로브로 몸을 가린 은둔자가 어느새 루페르트 옆에 서 있었다.
누구도 그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다.
"약속은 기억하고 있겠지? 인간 백 마리다."
"기억하고말고."
쪼그려 앉아 있던 석상이 일어났다.
그것이 일어나자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졌다.
수천 명의 절규가 석상 안에서 아우성쳤고 움직일 때마다 관절에서 시뻘건 선혈이 폭포처럼 흘러나왔다.
그것은 고통 그 자체를 악의적으로 형상화한 거신이었다.
거신이 움직이는 걸 본 자들은 놀라움보다는 심장에 스며드는 소름 끼치는 고통부터 먼저 느꼈다.
사람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부리나케 달아났다.
자리를 지킨 건 황제 루페르트와 소수의 수행원이 전부였다.
저마다 역전의 용사라고 하지만 악의 우상 앞에서는 한낱 하찮은 존재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끄윽!"
누구보다 신비에 민감한 지겔슈타트가 버티다 못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보다 둔감한 한스 징펠만은 부릅뜬 눈으로 지켜볼 수는 있었지만 그의 손에 들린 총기는 그조차 모르는 사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그의 도제들은 이미 달아난 뒤였다.
마를로네는 두 눈과 두 귀를 막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마, 마음에 멍이 드는 느낌이야. 뭐냐고. 저건. 대체 뭐냐고?!'
괴물 사이에도 악의 우열이 있다면,
마를로네는 확답할 것이다.
저 거인상은 저 눈앞의 구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악의로 뭉쳐졌다는걸.
규모가 다르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수천이라는 숫자와 수백만이라는 숫자의 차이라고 할까.
몸이 쪼그라들 것 같은 공포 속에서 마를로네는 문득 호기심을 느꼈다.
행여라도 그 끔찍한 거인상이 눈에 들어올까 봐 눈을 가늘게 뜨고 루페르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냥 궁금했다.
황제라는 자가 이런 상황에 대체 어떻게 반응하고 느낄지.
황제라고 하나 그 또한 인간 아니던가.
'황제.'
곧 승마용 장화를 신은 루페르트의 발이 눈에 들어왔다.
두 다리는 마치 다리를 떠받드는 기둥처럼 우뚝 선 채 버티고 있었다.
"?"
가늘게 뜬 눈 사이로 의아함이 떠올랐다.
시선을 좀 더 위로 향했다.
잘 다려져 정리되어 잡풀 하나 찾을 수 없는 바지의 올곧은 라인을 따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당당하게 편 허리와 굳게 쥔 주먹이 보였다.
이 대목에서 마를로네는 어째서인지 분한 마음이 들 거라는 확신을 품어갔다.
'그럴 리가 없어. 슈발츠마인의 나약한 인간 따위가 나조차 감히 쳐다볼 엄두도 못 낼 저 괴물을 똑바로 바라본다고?!'
분명 그 얼굴은 다를 것이다.
지겔슈타트처럼 거품을 물고 있거나 한스 징펠만처럼 혼백이 나갔을 것이다.
어쩌면 선 채로 기절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 희망을 품고 루페르트의 얼굴을 눈에 담았을 때, 마를로네는 모든 가정이 눈처럼 녹으면서 씻을 수 없는 치욕감으로 변해 가는 걸 느꼈다.
황제의 얼굴은 당당하고 안온했다.
일말의 공포를 품었으나 그는 여전히 황제였다.
'어, 어떻게 이런!'
그녀만이 아니다.
의식을 차린 지겔슈타트도, 정신이 반쯤 나가 버렸던 한스 징펠만도 그들의 주군을 약속한 듯 동시에 쳐다보았고 보았다.
모든 걸 무너뜨리는 폭풍우 속에서 홀로 오롯이 선 황제의 모습을.
하나의 생각이 모두의 생각에 깃들었다.
황제는 제국의 기둥이니.
"...."
꼭두각시 황제 시절 루페르트는 늘 표정의 가면을 쓰고 다녔다.
그것은 습관을 넘어선 삶의 일부였다.
그 가면이 지금 시공을 넘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 황제의 얼굴을 덮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태연한 척하는 것.
꼭두각시 황제에게 남은 마지막 누더기처럼 찢어진 자존심이었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어떻게. 이런. 어떻게 이런 끔찍한 게 존재할 수 있지?'
마치 악몽의 한가운데 있는 기분.
정신 그 자체가 찢겨 버릴 것 같다.
그러나 루페르트는 도망칠 수도 없고, 고개를 돌릴 수도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남들보다 머리가 좋지도 않고 무력이 강한 것도 아니며, 마법의 재능도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위태로운 정신을 지탱하는 건 과거의 고통이다.
불타는 테타우, 망국의 황제가 보았던 끔찍한 편린들.
'내가 무너지면 제국 또한 무너진다.'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루페르트는 다른 생각을 했다.
감정이 한곳에 몰려 미쳐 버리는 걸 막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의 전환을 시도했다.
수많은 생각이 초원의 꽃처럼 덧없이 피었다 사라진 후 몇 가지 의문만이 뇌리에 남았다.
남겨진 생각은 극도로 단순했다.
무엇이 이런 걸 만들어 냈을까?
그 기이한 은둔자?
아니다.
그에겐 이런 걸 만들 힘이 없다.
저런 신적인 존재는 오직 같은 신격을 가진 자만이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설마. 리프니에님이?'
뒤늦게 루페르트는 고막에 아까부터 꽂히고 있던 소음을 자각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것이다.
기세등등하던 그는 개처럼 바닥을 뒹굴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의 귀와 입과 콧구멍에서 시뻘건 붉은 벌레가 역겹게 꿈틀거리며 튀어나오고 있었다.
루페르트와 더불어 유일하게 평온한 은둔자가 그 벌레를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악마가 새로 만든 장난감인가. 조잡하군. 그래, 조잡하구나."
"...그 악마는 누구지?"
황제가 작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묻자 은둔자가 크게 웃었다.
그때 루페르트는 보았다.
은둔자의 혀가 있어야 할 자리에 혀 대신 새하얀 갑각질의 벌레가 자리 잡고 있다는걸.
그 벌레가 혀처럼 움직이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루페르트는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유지하던 마음의 테가 또다시 일그러지는 걸 느꼈다.
'어, 어억!'
마음은 일그러지지만, 표정만은 악착같이 지켰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당당한 태도만이 루페르트가 내세울 수 있는 전부니까.
"너도 알고 있지 않나?"
"...."
은둔자가 꿈틀거리는 구체를 노려보며 팔을 내저었다.
거신이 셀 수 없는 사람의 아우성과 선혈을 뿜어내며 광장을 광기와 피로 물들이며 구체에 다가갔다.
구체는 세 개의 붉은 눈을 번들거리며 극산성의 용액을 뿜어내 보지만 거신의 주먹이 높이 올라갔다 내리치자 깡통처럼 찌그러졌다.
그게 끝이었다.
어떤 군대, 어떤 병기, 어떤 마법으로도 처리할 방법이 보이지 않던 붉은 구체는 단 일격에 으스러졌고 뿔뿔이 흩어졌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하나의 악몽을 종식한 은둔자는 비릿한 냉소를 머금은 채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악마, 예전만은 못하군."
순간 이국의 깃털이 바람처럼 눈앞을 덮쳐 왔다.
한 줄기 바람이 그친 후 거신과 은둔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겨진 건 도처에 널린 벌레 사체와 광장은 뒤덮은 시뻘건 선혈, 광기의 잔향과 미친 채 뒹굴거리는 선제후뿐이었다.
루페르트는 천천히 돌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들의 전사들을 미소 지은 얼굴로 응시했다.
부동(不動)의 루페르트.
당분간 그의 이름 뒤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칭호를 획득하는 순간이었다.
106화 27. 더 끔찍한 것 (4)
그날 렌타이어마르크 바이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설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제후가 괴물을 불러냈고, 그보다 더 괴이한 괴물이 나타나 선제후의 괴물을 쓰러뜨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기괴한 벌레로 이루어진 괴물이 흐릿한 안개 속에서 수백만 명의 비명을 내지르며 붉은 피로 변해 녹아 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혹자는 말한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괴물에 군대도 장군도 달아나자 황제 본인이 신이 되어 괴물을 응징했다는.
마치 제국을 만들어 낸 노예제 티그리트처럼.
소문의 진위가 무엇이든 하나의 전쟁은 끝났다.
자칫하면 제국 전체를 불태우는 내전으로 치달을지도 몰랐을 이 사달은 렌타이어마르크 동란(動亂)이라는 짧은 사태로 종결됐다.
선제후는 다시 구금됐고, 렌타이어마르크 주는 제국의 품에 돌아왔다.
모두의 시선이 황제의 손끝에 몰린 가운데 루페르트는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그대를 또 한 번 용서하겠다."
루페르트는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를 거듭 용서했다.
강경론자들이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유약한 정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실은 알려진 사실과 사뭇 다르다.
루페르트는 자신 앞에 반쯤 정신이 나간 채 연신 머리를 흔들어 대는 죽어 가는 사내를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제국 성인을 어디서 만났지? 그 잘난 유산을 내게 말해라."
누가 봐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삶은 얼마 남지 않았다.
길어 봐야 수개월, 1년은 결코 넘지 못할 것이다.
"...끄으."
세련된 룸어를 입에 담던 입에선 더 이상 악취가 나지 않았지만, 그 대신 죽어 가는 자의 숨결이 흘러나왔다.
"끄으으으...."
몸만 시든 게 아니다.
그보다 더 크게 상한 건 선제후의 정신이다.
그는 미쳐 버렸고, 이지를 상실했다.
어떤 의미에서 세상을 반쯤 떠난 그는 루페르트의 말을 그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였다.
"...제국 성인? 그래. 제국 성인. 그런 게 있었지."
선제후의 손가락이 경련하며 꼼지락거렸다.
"그래, 제국은 멸망했나? 그런데 제국이 멸망하면 그 뒤엔 뭐가 생기는 거지? 왕국? 공국? 후국? 그것도 아니면 공화국?"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의 망막 위엔 실체 있는 무언가가 떠오른 것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내 아내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부군이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듬성듬성 이어지는 선제후의 말을 듣던 지겔슈타트가 루페르트에게 속삭였다.
"이미 그는 광기의 강을 건넜습니다."
"그렇게 보이는군."
루페르트도 더 이상 선제후에게 얻어 낼 게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단지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토록 순수하다던 제국 황실의 혈통이 어떤 모습으로 전락했는지.
"...."
미쳐 버린 선제후를 놔두고 루페르트는 뒤돌아섰다.
선제후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이것이 에디지우스가 입고 있던 옷입니다."
제국 성인 나병의 에디지우스의 시신은 사라졌다.
정확히는 핏물로 녹아 버렸다.
그만이 아니다.
황제군을 도망치게 했던 괴물의 잔해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토록 많던 미네아의 벌레 중 단 한 마리도 발견되지 않았다.
뒤늦게 바이엔에 도착한 마법대학의 악마학 교수 예나가 상황을 나름의 지식으로 해석했다.
"전설 그대로군요. 미네아의 붉은 벌레는 셀 수 없이 많았으나, 실제로는 오직 단 한 마리의 왕을 가지며 그 왕이 죽는 순간 모든 벌레는 마치 한 몸처럼 사라진다는."
에디지우스는 벌레들의 왕이었던 모양이다.
루페르트는 역사서에서 에디지우스의 이야기를 찾아 읽었다.
...지친 전사들의 기운을 북돋게 하기 위해서는 황금이 필요하나, 그 많은 황금을 가지고 있는 건 그늘진 언덕 아래 모여 사는 썩어 문드러져 가는 자들뿐이니.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가장 현명하고 아름다운 자를 보내야 할 터. ...추악한 자들은 모름지기 아름다운 자를 경외하는 법이니.
이야기는 군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티그리트가 막대한 재보를 가진 나병 환자를 설득하기 위해 에디지우스를 보내는 부분에서 시작한다.
나병 환자들은 약속한 황금을 보내 주었으나 에디지우스를 돌려보내진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티그리트의 천막 앞에 썩어 문드러져 가는 자가 나타났다.
티그리트의 막하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사내, 에디지우스였다.
술에 취해 있었던 티그리트는 직접 몽둥이를 들어 그를 쫓아냈고, 두 번 다시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진짜 에디지우스이건 아니건 그가 가지고 있던 고대의 지식은 극도로 위험한 것입니다. 미네아의 붉은 벌레를 만드는 법은 마법 대학의 금서 목록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이 저질렀던 만행을 통해 붉은 벌레를 어떻게 육성하는지는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루페르트는 예나와 함께 바이엔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촌락을 향했다.
역병이 휩쓴 마을로 마을 전체가 사라진 곳이었다.
병사들이 집단 매장지로 추정되는 땅을 파헤치자 시체들이 나타났다.
시체들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 같이 복부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내장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역병은 단지 핑계에 불과했습니다. 선제후는 붉은 벌레를 양산하기 위해 애꿎은 마을 몇 개를 지워 버리고 그들을 미네아의 붉은 벌레에게 던져 준 것이지요. 전승에 따르면 붉은 벌레는 오직 인간의 내장만을 파먹는다고 하니까요. 대량으로 그걸 만들어 내려면 많은 사람이 필요하겠지요."
"선제후니까 가능했다는 소린가."
"이해가 맞았겠지요."
함께 있던 마를로네가 무심한 눈으로 죽은 사람들을 보며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뭔가 중얼거렸다.
그녀만이 볼 수 있는 무언가를 보았던 것일까.
루페르트는 그녀가 응시하는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아무 죄도 없는 평범한 백성들이 죽어 갔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그가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했건, 선제에게 어떤 원한을 품었건 그것은 백성을 제물로 바치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그는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작고 보잘것없으며 저열한 인물이었군.'
루페르트를 업신여기던 선제후의 민낯 하나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예나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이 어두운 시대에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요?"
루페르트가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답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비단 마법사에게만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 * *
망자의 목동을 찾아간 건 그다음이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가장 믿을 수 있는 한스 징펠만 한 명만을 데리고 은밀하게 망자의 목동을 접선했다.
루페르트가 두건을 벗자, 시체를 이끌던 자들이 고개를 숙였다.
"존귀하신 분이여."
그들은 루페르트가 황제라는 걸 알지 못한다.
밝힌 적도 없고 밝힐 생각도 없으니.
루페르트는 그들에게 적잖은 금화를 건네며 자신의 요구를 말했다.
"시체 100구를 호스라는 마을에 보내라고요?"
시체를 다루는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고 이지적인 미를 갖춘 여성이 미세한 경악을 드러냈다.
"문제라도 있나?"
"그 마을은 아무도 살지 않습니다. 저주받은 곳이지요."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답은?"
강령술사들은 잠시 고민한 후 고개를 숙였다.
"존귀하신 분의 뜻이 그러하다면."
백 구에 달하는 살아 있는 시체가 안개와 함께 렌타이어마르크의 저주받은 산천을 걸어 버려진 마을로 향했다.
이동하는 동안 루페르트는 말 아래 느릿하게 걸어가는 여성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장이 없는 시체를 본 적이 있나?"
"네. 자주 보았습니다. 자주 그들을 장지에 이끌기도 했고요."
"이상하게 느끼진 않았나?"
"소문에 의하면 내장을 파먹는 기생충이 창궐했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그 기생충을 본 적은 없지만요."
여성의 말엔 거짓이 없었다.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떠한 악의도 드러내지 않았다.
문득 루페르트는 미안함을 느꼈다.
단지 그녀가 하는 일이 끔찍하고 기괴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죄인처럼 다뤘고 인격체로 여기지조차 않았다.
하지만 정작 인간이길 거부한 건 제국의 선제후라는 당당한 직위를 가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였다.
"이름이 뭔가?"
황제가 강령술사의 이름을 물었다.
강령술사는 루페르트의 질문에 의아해하면서도 부드럽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아그네스라고 합니다."
아그네스의 인도로 루페르트는 무사히 백 구의 살아 있는 시체를 은둔자에게 인도했다.
문을 열고 약속한 물건을 확인하자마자 은둔자는 희게 웃었다.
그가 두건을 벗어 이국적인 풍모를 드러내며 루페르트를 쏘아 보았다.
"얕은꾀를 쓰는군. 황제."
"뭐라 비난해도 관계없다. 나는 내 말을 지켰으니. 그대가 필요한 건 스스로 걷는 백 구의 사람 아니었나?"
"시체로 받는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시체를 안 받겠다는 소리도 하지 않았지."
은둔자가 코웃음을 쳤다.
"그 악마가 시켰나?"
거듭 악마라는 말에 루페르트는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
"나는 악마를 숭배하지 않는다. 이방인. 그리고 나는 제국의 황제로 누구의 명도 따르지 않는다."
"그대가 믿는 게 뭐든 간에, 그대는 그대가 숭배하는 것과 닮아 가겠지."
은둔자가 이죽거렸고,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무슨 뜻이지?"
"오물을 가까이하면 오물 냄새가 배고, 피를 가까이하면 몸에 피 냄새가 나는 법이지."
"거듭 말하지만 나는 제국의 황제다. 더 이상의 망언은 묵과하지 않겠다."
황제의 경고에 은둔자는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고 돌아섰다.
"다음엔 이런 어리석은 장난은 받지 않겠다."
시체 냄새가 나는 은둔지로 발걸음을 옮기며 그가 말했다.
"다음은 없다."
루페르트가 딱 잘라 말했지만, 은둔자는 자신의 말을 다 했다.
"다음도 백 명이다. 살아 있고,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제국인."
문이 닫혔다.
루페르트는 차가운 눈으로 닫힌 문을 노려보다 돌아섰다.
마지막 행선지가 남았다.
* * *
과거 선제후의 집무실엔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 가문의 구성원들이 형장에 오르는 죄인 같은 표정을 지은 채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선제후령의 운명은 이제 황제의 손에 달렸다.
정당성도 명분도 전쟁의 결과도 모두 황제가 쥐고 있다.
더욱이 이미 두 번이나 배신한 렌타이어마르크에 손을 뻗칠 선제후나 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황제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 것인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친척들은 가슴이 조마조마하는 걸 느끼며 황제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루페르트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렌타이어마르크를 두 번이나 용서했지만, 또 한 번 거듭 용서할 생각이오."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세 번의 용서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를 용서했다고 하나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가문을 용서한 건 아니다.
그런데 루페르트는 가문마저 용서했다.
황제의 말을 들은 가문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고개를 숙이며 감사와 사죄를 온몸으로 드러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적어도 루페르트의 치세 동안 렌타이어마르크가 반란을 일으킬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자발적인 동맹이 될지도 모른다.
영지의 특성상 큰 힘은 되지 못하겠지만.
* * *
루페르트가 선제후의 궁정에서 가문에 미래의 씨앗을 심는 동안 바깥에서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저걸 봐. 대체 저 소녀는 뭐지?"
"글쎄. 알 수 없어. 하지만 저 사람에게선 신성함이 느껴져."
한 소녀가 병든 대지를 배경으로 맨발로 선 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그 노래는 천상의 목소리 같은 경건한 울림이 있었고, 그 춤사위는 모든 이의 넋을 빼놓을 정도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분명 별 볼 일 없는 한 소녀의 움직임이건만 자리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까닭 모를 운명을 감지하고 소녀의 춤을 지켜보았다.
누구도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고 누구도 방해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 어느새 바이엔의 성벽 밖엔 도시 거의 전체에 달하는 시민들이 모인 채 홀로 춤사위를 펼치는 미지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무수한 웅성임 속에서 성직자가 기억 속에 묻혀 있던 단어를 생각해 내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저, 저건 틀림없어! 계시의 성녀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녀는 성직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남녀를 불문하고 인간이라면 혼백마저 빼앗길 정도의 힘을 갖고 있다고 전해졌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다.
황제가 가문의 구성원을 복속하는 사이, 바깥에서는 계시의 성녀가 춤추고 있었다.
그 춤은 단순한 춤사위가 아니다.
그녀의 발끝이 이르는 곳마다 잃어버린 색채가 피어났고, 그녀의 유려한 손짓이 이르는 곳마다 구름을 뚫고 서광이 커튼처럼 드리워졌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놀라운 일이건만 더 크고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렌타이어마르크를 오랜 침체에 몰아넣은 병든 대지가 정화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렌타이어마르크의 주민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새로운 황제, 그리고 계시의 성녀가 가져올 제국의 영원한 평화와 번영을.
* * *
새로운 황제의 승리는 멀리 떨어진 이국의 군주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
계시의 성녀니, 사람 몸을 파먹는 벌레니, 인간을 미치게 하는 거신상이니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거르고서라도 새로운 황제의 승리는 완벽에 가까웠다.
"난공불락의 렌타이어마르크를 1년도 되지 않은 시간과 최소한의 피해로 정벌했다니."
그곳은 전쟁터였다.
포성과 포연과 함성과 비명이 끊이지 않는.
적진에서 쏜 포탄이 귀곡성 같은 비명을 지르며 다가오지만 왕의 낯빛은 터럭만큼의 변화도 없었다.
포탄은 왕을 스치고 지나가 뒤편에 떨어졌다.
"새로운 황제의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왕이 물었고 신하가 대답했다.
"루페르트입니다."
"루페르트."
스베아 왕국의 왕 아돌푸스 4세 바사.
그는 이미 전장 한가운데 있었지만, 또 다른 전장이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는 걸 느꼈다.
더 진한 화약 냄새를 머금은.
107화 28. 황제의 멍에 (1)
제국 성인.
학자에 따라 8명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호라 교단이 정식으로 성인으로 인정한 건 일곱 명이다.
그들은 제국을 건국한 노예제 티그리트의 신실한 신하로 목숨을 걸고 가장 어려운 시기에 건국의 주춧돌을 자청했다.
그들은 제국 백성들에게 멀리 있는 호라신보다 가까이 있는 존재로 인식되어 오랫동안 높은 인기를 누리며 숭배받았다.
특이하게도 그들의 별명은 제국에 유행하는 각종 질병과 연결되어 기복의 대상이 되었는데, 해당 질병을 이명으로 가진 제국 성인에게 기도를 하면 그 병이 낫는다는 믿음이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그 일곱 명의 별명과 이름은 아래와 같다.
통풍의 발렌티아누스, 매독의 아가티아, 나병의 에디지우스, 천연두의 크리오네, 소아마비의 크리스토포루스, 열병의 메아불린, 이질의 에라스뮈스, 백내장의 판텔레온.
일부 학자는 흑사병의 생시몽을 넣어 여덟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흑사병에 걸려서 살아남은 자는 거의 없기에 백성들은 그를 신통력 없는 성인으로 여겼고 아무도 숭배하지 않았다.
제국력 600년경에 호라 교단에서 제국 성인 숭배 금지령을 내린 이후 그들의 이름은 서서히 희미해졌으나 여전히 민간에서는 기복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그들은 살아 있었고, 이제는 명백한 위협이 대상이 됐다.
황제 루페르트가 제국 마법 대학의 고위 마법사를 부른 건 그 때문이다.
황제의 요청에 따라 제국 마법 대학의 최강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우둔한 자 빌렘 반 네헨, 굼뜬 자 두비오 아리시니, 발작하는 자 프리츠 에센바하, 눈먼 자 헬브라이트 베틀렌.
선제후조차 생애에 걸쳐 한 명을 보기 힘들다는 오각의 마법사들이다.
"제국 성인을 참칭하는 자가 제국의 그늘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과거에도 심심찮게 흘러나오던 이야기였습니다."
눈먼 자라는 이명과 달리 헬브라이트 베틀렌은 별빛처럼 반짝이고 명민한 눈동자로 좌우를 살피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 갔다.
"다만 지금까지 그들이 실제로 행동을 옮긴 적은 없었습니다.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죠. 하지만 제국이 천년기를 눈앞에 둔 현재, 그들의 위협은 실체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고 그 위협의 수준도 상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학의 마법사들은 만장일치로 황제를 도와 제국 성인을 추적, 적발, 섬멸하기로 결정했다.
조만간 대학에서 뽑은 최고의 인재들이 제국 전역을 들쑤실 것이다.
대학의 전폭적인 협력은 루페르트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다만 일부 마법사는 조심스럽게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고대의 악몽이라 불리던 미네아의 붉은 벌레도 이미 우리에겐 커다란 충격입니다만, 대체 그 정체불명의 석상은 무엇일까요. 저는 오히려 사각의 마법사 지겔슈타트를 혼절하게 만든 그 석상이 더 위험하다고 보입니다. 아는 위협은 대처할 수 있지만 모르는 위협은 대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우둔한 자 빌렘 반 네헨은 별칭과 달리 네 명의 최상위 마법사 중 가장 지혜로운 자로 알려져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빌렘 반 네헨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독심술마저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루페르트는 그 말을 믿지 않지만 조심할 필요성은 느꼈다.
"신의 뜻을 우리가 어찌 알겠나."
황제가 그리 말하자 마법사들도 더 이상의 의문을 제기하진 않았지만 인간 중에서 가장 예민한 감각을 지닌 그들이 냄새를 맡은 이상 마음을 놓을 순 없으리라.
마법사들이 떠나자 또 다른 중요한 손님이 루페르트의 집무실을 찾았다.
"폐하."
다름 아닌 아카이아 대주교다.
그는 루페르트를 보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괴한 말을 덧붙였다.
"프리."
"?"
"어려운 싸움에서 위대한 승리를 축하드립니다프리."
"대주교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미에 붙이시는 생경한 단어는 대체?"
"아, 이거 말입니까프리?"
"?!"
거듭 경악하는 루페르트를 향해 대주교는 득의만면한 표정을 지은 채 주위를 둘러보더니 은밀하게 속삭였다.
"우리들만의 비밀이잖습니까프리?"
'이 늙은이, 갑자기 노망이 들었나?'
"호라신의 진정한 이름 말입니다 프.리."
"아, 그런 거였군요."
그제야 루페르트는 대주교가 자신에게 말했던 호라의 진정한 이름에 관한 건을 떠올렸다.
'그래, 빙해 문선지 뭔지 거기서 진짜 신의 이름을 밝혀 낸다고 했었지.'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대주교한텐 일생일대의 중대사일지 모르겠지만 루페르트에겐 아무래도 좋은 죽은 신에 관한 학문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건 그렇고 왜 자꾸 프리프리 거리지?'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이 미친 노인은 루페르트에게 필요한 사람이다.
게다가 대주교는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오는 사람이 아니다.
시종이 차를 내오자 대주교는 환희에 찬 얼굴로 차향을 음미한 후 본론으로 넘어갔다.
"계시의 성녀가 나타났다고 들었습니다프리."
"그 프리 좀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그 비밀스러운 이름을 함부로 불러 대면...."
"아, 우리의 가장 은밀한 비밀이니까요. 진정한 신의 이름만큼 축복스러운 단어가 있겠습니까? 저와 폐하, 나아가 제국을 위한 마음에서...."
"첩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 자중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오, 그런 경우의 수도 있었군요."
대주교는 조금은 실망스러운 눈치지만 자신의 말투를 정정하기로 마음먹은 눈치다.
"아무튼, 계시의 성녀가 또다시 폐하가 계신 곳에 나타나 기적을 행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고들 하더군요."
루페르트의 표정엔 별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뭐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겠지만 이번 리프니에의 동행이 어쩌면 그걸 위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깃들기 시작한 것이다.
안젤리나의 육신을 취한 것도,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던 것도, 렌타이어마르크의 오염된 대지를 정화할 정도의 권능을 갖고 있음에도 기분 나쁜 은둔자의 힘을 빌리라 한 것도, 그리고 루페르트가 승리하자 기다렸다는 듯 모든 이의 눈앞에서 계시의 성녀다운 기적을 행한 것도.
"...."
나쁘게 생각하면 끝도 없다.
루페르트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책망했다.
'여신님은 날 거두어 주시고 기회를 주신 분이다. 굳이 이런 식으로 나쁘게 생각해 봐야 뭐가 돌아오겠어?'
"폐하?"
잠시 딴생각을 하던 루페르트의 귀에 대주교의 목소리가 슬그머니 파고들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위대한 생각을 하셨습니까?"
"위대한 것까지는 아니고 계시의 성녀를 생각했지요."
"폐하도 그분이 기적을 행하는 걸 보셨습니까?"
"아니요. 안타깝게도."
"듣자 하니 계시의 성녀는 아직 앳되지만, 그 아름다움은 가히 미의 여신답다고들 하더군요. 그 계시의 성녀가 추하든 아름답든 중요한 건 그녀가 폐하가 이르는 곳마다 나타난 진실한 기적을 행하고 있다는 겁니다."
대주교가 숨을 헐떡였다.
"이 기세대로라면 우리는 더욱 큰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리되길 바랍니다."
대주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소식이 있으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프리."
대주교가 떠난 후 루페르트는 의자에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
무심코 바깥을 보았다.
창가 너머로 펼쳐진 정원은 유난히 밝아 보였다.
때마침 정오였다.
수직에서 내리쬐는 태양이 정원의 그늘을 지워 버린 것이다.
가급적이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번 전쟁이 루페르트의 완벽한 승리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너무나 많은 것을 보았다.
특히 그 은둔자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흐름은 상상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함의 연속이었다.
특히 수천 명의 아우성을 울리며 선혈을 자아내며 움직이던 거신의 엽기적인 움직임은 인간의 마음을 찌그러뜨리기에 충분한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
"...흡!"
갑자기 숨이 막힌다.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아무 이유 없이 이 집무실과 이 풍경이 낯설어 보인다.
까닭 모를 불안감이 발목부터 덩굴처럼 휘감고 올라가 전신을 휘감는 걸 느끼며 루페르트는 비틀거렸다.
"폐하?"
시종이 루페르트를 보며 조심스레 묻는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어느새 이마에 땀이 흥건히 맺혀 있다.
시종이 루페르트의 이마를 닦아 냈다.
루페르트는 그동안 심호흡을 하며 호흡을 가라앉혔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과연 여기가 내 자리가 맞는가 하는.
분명 그렇고 그래야겠지만 전신을 휘감은 불안감과 공포는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너무 무리했나. 오늘은 일찍 들어가 볼까.'
집을 생각하자 또 다른 막막함이 루페르트를 벽처럼 막아섰다.
집이라는 게 지금 있는 걸까.
침소로 쓰는 별궁이 있긴 하다.
미궁이라는 이름의.
하지만 그곳이 과연 루페르트의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거기엔 여신이 있다.
"!!"
어두운 방 안에 창백한 인간의 모습으로 서 있던 여신을 떠올린 루페르트는 또 한 번 비틀거렸다.
거기는 집이 아니다.
집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무엇보다 그가 잘 아는.
그런데 지겔슈타트는 지금까지 몸져누워 있고 한스 징펠만은 휴가를 청했다.
유일하게 남은 건 마를로네지만 그녀의 상태가 어떤지는 알지 못한다.
아마 황궁 안에 머무르고 있을 조부의 간호를 하고 있진 않을까.
'그 녀석이라도 한번 만나 보고 올까.'
루페르트는 마를로네 일행이 머무는 작은 가옥으로 향했다.
곧 그 아담한 가옥이 눈에 들어왔다.
훤칠하게 뻗은 노간주나무 아래 갓 길어지기 시작한 그림자를 받은 작은 집 앞엔 목발을 짚은 베르크 란과 그의 옆에서 뭔가를 먹고 있는 마를로네의 모습이 보였다.
둘은 드문드문 담소를 나누며 정오의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멀리서 본 그녀의 모습은 괜찮아 보였다.
기이하게도 황제의 불안은 아는 사람의 얼굴을 보자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뭐였던 거지. 이 불안감은. 너무 쉬지 않고 일을 해서 그런 건가.'
황제는 모든 걸 할 수 없기에 적당히 하라는 여신의 말이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신님의 말씀이 맞을지도. 인간의 열정은 한계가 있다고 했나.'
그렇게 생각하며 뒤돌아섰을 때였다.
"!"
여간해서 깨지지 않는 표정의 가면에 금이 갔다.
그의 뒤에 한 여성이 웃는 얼굴로 서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은발에 가까운 창백한 금발을 드리운 푸른 눈의 미녀.
무엇보다 확신에 찬 환한 미소는 루페르트가 생애를 통틀어 가장 보기 두려워했던 것이었다.
'우, 울피아나!'
골트문트의 딸, 그리고 전생의 황후.
루페르트가 가장 두려워하고 지금도 두려워하는 여인이 운명의 장난을 쳐 놓은 모양새로 가장 예상하지 못한 영역에 나타난 것이다.
"폐하."
울피아나가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루페르트는 황급히 마음을 다잡으며 그녀의 인사에 답례했다.
울피아나가 환하게, 마치 소녀처럼 웃었다.
그녀의 투명한 피부 위에 희미한 홍조가 띠는 걸 보며 루페르트는 입 안이 바짝 타는 걸 느꼈다.
기억해 낸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과거의 행동을.
'그, 그랬었지. 골트문트에게 딸을 달라고 했었지!'
"아버님에게 말씀은 전해 들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꼭 한번 찾아뵙고 싶었는데 전쟁이니 뭐니, 폐하께선 늘 다망(多忙)하셔서 그럴 기회를 찾지 못했는데, 운명의 여신이 이끈 것처럼 의외의 장소에서 폐하와 만나게 되었네요."
"하, 하하."
"폐하?"
"아, 전쟁의 피로가 갑자기 밀려와서요."
"아, 들었어요.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거대한 마물이 전장에 강림하듯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폐하는 그 마물 앞에서도 한 걸음 물러나지 않으셨다고. 그야말로 부동 그 자체라고."
"그건 와전된 이야기입니다. 사실 제일 먼저 뒤로 물러났지요. 뒤도 돌아보지 않았지요. 별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먼저 피신해야지. 그렇다고 제일 먼저 도망갔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하하. 폐하도 참.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위버하임 남작 시절이라면 모를까, 저 또한 폐하의 일개 백성에 불과한걸요."
천연덕스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울피아나를 보며 루페르트는 거대한 빈대를 연상했다.
'제발 좀 떨어져라.'
"폐하. 그런데 여긴 어인 일로."
"아, 그게."
잠시 까맣게 잊고 있던 울피아나의 특징 하나.
그녀는 눈치가 대단히 빠르다.
오전에 만났던 오각의 마법사 빌렘 반 네헨이 독심술을 익혔다는 소문이 있지만 울피아나는 진짜 독심술을 잊힌 것마냥 사람의 의중을 잘 꿰뚫어 본다.
그 눈치로 루페르트를 영혼 밑바닥까지 추락시켜서 문제지.
아무튼 그 눈치가 시공을 넘어 다시 현세에 재현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아, 설마 저 여자를 만나러 가신 건가요?"
울피아나가 멀리 조부와 함께 햇살을 뻔뻔하게 즐기고 있는 금발의 소녀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흐음~"
"...."
"아, 기억났다! 대리 결투에서 폐하의 챔피언을 맡았던 노인의 손녀죠? 이름이 뭐였더라. 마리 루이즈?"
"마를로네."
루페르트가 입을 열었다.
울피아나를 떠들게 놔두면 한도 끝도 없이 떠든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 거신을 보고 모두 마음의 병을 얻었는데 저 녀석은 멀쩡한 것 같구려."
"어머. 폐하께서는 마음도 넓으시네요. 일개 도펠죌트너의 상태까지 걱정해 주시다니."
"나의 챔피언의 병세도 확인할 겸 겸사겸사. 아무튼, 건강한 걸 확인했으니 이만 가 보겠소."
"네. 폐하. 저야말로 하찮은 여성이 폐하의 중요한 시간을 뺏은 것 같아서 송구할 따름이네요."
울피아나는 특히 하찮은 여자라는 말을 강조하며 마를로네 쪽을 웃는 눈으로 보았다.
"...."
루페르트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전과 달리 이번엔 루페르트에겐 더할 나위 없이 우호적이지만 그 본성.
그 사람을 영혼째로 갉아 먹는 본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음 만남을 기대하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는 울피아나를 보며 루페르트는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했다.
"이쪽이야말로."
루페르트는 절도와 체통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그 자리를 이탈했다.
그러나 울피아나.
역시 지독한 여자다.
"마를로네 양~!"
루페르트가 있는 자리에서 마를로네를 큰 소리로 불렀다.
"마를로네 양이죠?"
루페르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
안 좋은 예감밖에 들지 않는다.
108화 28. 황제의 멍에 (2)
루페르트의 승리는 어떤 이에겐 환희에 찬 성가로 들렸겠지만, 어떤 이에겐 대단히 불쾌한 불협화음으로 들리기도 했다.
트라이아 선제후 레벤호스트의 심경을 말하자면 후자에 가깝다.
그는 루페르트의 승리에 사절을 보내 승리를 축하하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눈을 부릅뜨고 황제가 렌타이어마르크에 저지른 일과 일들을 주시했다.
책 잡을 건수는 얼마든지 있었다.
특히 만슈타인이라는 애송이 장수가 저지른 전횡은 제국의 군주라면 누구나 반감을 살 만한 짓이었다.
같은 제국인을 상대로 협박과 갈취를 하다니.
선제 철혈대제가 반역을 일으킨 땅에 일말의 자비도 없이 학살과 파괴를 자행했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반역의 본거지에 대한 응징이었다.
마지못해 끌려들어 간 무고한 촌락과 도시까지 철권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런데 만슈타인은 마치 저잣거리의 깡패처럼 돈을 뜯었고, 그 돈으로 승리를 일궈 냈다.
"그런 인간을 아래에 두다니. 대체 제국의 질서가 뭐로 보이는 건지."
더욱 마음에 안 드는 건 렌타이어마르크의 변화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음침한 리더쉽 아래에 있던 선제후령은 해묵은 종교 논쟁에서 늘 중립을 지켜왔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사실상 실각하고 슈발츠마인의 입김이 미치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 가문의 구성원들이 구교 신앙을 하나둘 드러냈고, 후계자 또한 전통적인 구교 신자를 추천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던 것이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운명 따윈 이제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잠재적인 신교 동맹 구성원이 떨어져 나가는 건 어릴 때부터 급진파 신학자에게 교육받았던 레벤호스트에겐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루페르트 가우저."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다.
촌놈처럼 수더분하게 행동하기도 하면서도 필요할 땐 누구보다 명민하게 행동한다.
대리 결투 때 보여 줬던 그 의연함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젊은 친구가 승리를 맛보았다.
레벤호스트는 철혈대제의 치세를 떠올렸다.
철혈대제도 그랬었다.
즉위 초기, 빈약했던 입지를 한 번의 전쟁과 벼락같은 승리로 뒤집었다.
루페르트와 클라우데 2세.
출신은 천차만별이라지만 결국 둘 다 슈발츠마인 가문이다.
견제가 필요하다.
저 루페르트가 클라우데 2세의 전철을 되풀이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레벤호스트는 자신의 동료들을 생각했다.
신교동맹.
말 그대로 신교를 지지하는 군주들의 회합이다.
정식으로 선포된 적도 없고 집단 명의로 뭔가를 한 적은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신교 군주들을 하나로 뭉뚱그려 불렸고 그 기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레벤호스트는 같은 종교를 믿는 선제후를 찾아갔다.
"그대의 생각엔 동의한다만, 명분이 없지 않나? 나도 그 애송이가 싫지만 당장은 그 하켄하임 촌놈이 원하는 대로 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노르드마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아르님은 호방한 이미지와 달리 신중한 자였다.
"황제가 선을 넘으면 그때부터 움직여도 늦지 않아."
옷처럼 입고 있는 호탕함을 연기하는 동료 선제후를 보며 레벤호스트는 강한 실망감을 느꼈다.
'내가 앞장서면 언제든 뒤따라올 거라는 언질을 주던 인간이 막상 때가 오자 비열한 본성을 드러내는군. 하긴 선제후가 저따위니 제 땅 하나 못 지켜 북부인이 자기 땅에서 난리법석을 피울 수 있는 거겠지.'
레벤호스트는 속으로 게오르크 아르님을 욕하며 다른 신교동맹의 주축인 디터팔츠 선제후를 찾아갔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제국의 국체를 거부했고 제국의 헌법마저 흔들었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그는 입에 담기 어려운 이단과도 손을 잡았다고 하더군. 저 마법대학에서 마법사 회의 자문단 전체가 황제의 출석에 응한 건 알고 있겠지? 당장은 새 황제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하는 게 옳다고 봐야겠지."
디터팔츠 선제후 막스 게오르크는 게오르크 아르님보다 훨씬 더 많이 루페르트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대단히 서운한 일이었다.
신교의 대들보 같던 그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건.
"내가 보기엔 철혈대제의 악몽이 되풀이되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올해는 새 황제의 해라는 걸 부정할 수 없어. 해가 바뀌고 황제의 행보를 봐야겠지. 어차피 곧 제국의 밤 행사가 열리지 않던가? 그때 황제의 의중을 떠보세."
레벤호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날카로운 신경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
'지금 움직여야 한다고. 시간이 전부야. 루페르트를 보라고. 빠르게 움직이니 전쟁을 손쉽게 종결했잖아? 당장 우리 신교 군주들이 손잡고 미리 황제의 전횡에 대비해도 모자람이 있을 터인데, 단박에 뿌리를 뽑아도 모자랄 일을 차일피일하자고?'
"레벤호스트."
막스 게오르크가 세월이 준 지혜를 머금은 깊은 눈동자를 반짝였다.
올해 오십 즈음 된 그는 선제후단 가운데서도 아카이아 대주교를 빼면 최연장자로 평소는 늘 중립을 지키며 온건하게 움직이지만 가끔은 모두가 놀랄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 주곤 했다.
지금이 그런 순간이었다.
"혹시 그대는 새 황제의 공적을 시기하는 건 아닌가?"
"무슨 말씀인가."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허나 새 황제의 공적에 조바심을 느끼지 말게. 성공이라는 순항 뒤엔 능력보다도 행운의 바람이 더 크게 작용하는 법이니까. 계시의 성녀가 렌타이어마르크에 나타나 오염된 늪지대를 정화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겠지?"
노회한 군주답게 말을 돌리지만 이미 레벤호스트는 마음을 자극받은 뒤였다.
'내가 그런 애송이 촌놈보다 못하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레벤호스트는 늘 생각했다.
제국의 모든 군주, 동료 선제후 중에서 자기보다 뛰어난 자는 아무도 없다는.
실제로 레벤호스트는 선제후 중에서 가장 글을 잘 썼고 펜을 바르게 잡았으며 엄격한 규칙을 가진 룸 제국식 시를 짓는 것으로 유명했다.
전쟁 경험은 없지만 전쟁에도 관심이 많아 두 권의 군사 저술을 전문 문필가를 시켜 간행하기까지 한 사람이다.
그런데 루페르트 가우저라는 촌놈은 반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렌타이어마르크를 정벌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위업인지는 군사에 관심이 있는 자라면 모를 리가 없다.
'막스 게오로크 말대로 마냥 운이 좋았다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 허나 내가 볼 땐 극도로 위험해.'
레벤호스트는 평소 자랑하던 명민한 두뇌를 굴렸다.
곧 괜찮은 수가 생각났다.
"만슈타인."
레벤호스트의 입가에 오랜만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의 비위를 마지못해 맞춰 주던 막스 게오르크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르는 걸 보며 레벤호스트가 웃음기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만슈타인이라는 자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
막스 게오르크는 레벤호스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한 번에 깨달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동료 선제후의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들었다.
이야기가 끝난 후 막스 게오르크가 한숨을 내쉬며 동료 선제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걸로 그대가 만족한다면 돕겠네. 하지만 이 이상은 안 돼."
이건 찬동과 동시에 경고다.
"종파를 떠나 우리는 황제의 신하라는 걸 잊지 말게. 레벤호스트."
막스 게오르크의 경고에 레벤호스트는 상징과 같은 오만한 미소로 화답했다.
"명심하겠네."
* * *
오랜 회의와 순방 끝에 노곤해진 몸으로 자택에 돌아온 골트문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울피아나. 저건?"
틀림없다.
도펠죌트너다.
그것도 모르는 얼굴이 아니다.
저 안젤리나가 은밀하게 고용했다는 베르크 란의 손녀다.
루페르트를 따라 리히트보덴이라는 오지에도 따라갔고 렌타이어마르크 동란 때도 황제의 호위로 종군했다던 작달막한 소녀가 자신의 저택에 당연하다는 듯이 앉아 과자를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어머. 아버님."
울피아나가 다소곳하게 인사하며 부친에게 인사했다.
"네가 데리고 온 거냐?"
멀리 응접실에 앉아 있는 마를로네를 보며 골트문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또 기행인가.'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울피아나의 선행은 널리 알려졌지만, 그녀의 기행에 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를 놀라게 하는 미모와 마음에 호소하는 그윽한 목소리, 타고난 기품에 가려 그렇지 울피아나는 꽤 자주 엉뚱한 짓을 일삼곤 했다.
그녀의 부친인 골트문트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언제까지 충동으로 살아갈 건지. 집에 야생동물을 키우는 기분이라니까.'
아무튼 이번 기행에 관한 이유는 꼭 들어야겠다.
저 도펠죌트너가 루페르트의 사람인 건 명백하니까.
당장 황제가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빨간 명찰을 떼 주지 않았던가.
"왜 데리고 온 거냐? 저걸."
"저를 잘 따르더라고요. 마치 강아지처럼요."
"당장 돌려보내라."
"굳이요? 귀엽기만 한데. 조금만 자극하면 부르봉 억양이 나오는 게 얼마나 사랑스러운데요."
울피아나가 마를로네 쪽을 보며 손을 흔들며 크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를로네~! 인사드리렴. 나의 아버님이시란다."
마를로네가 이쪽을 바라보며 꾸벅하고 인사한다.
못 배워 먹은 촌놈 식의 인사를 보며 골트문트는 표정을 구기진 않았지만, 못 볼 걸 봤다는 기분을 느끼고 시선을 치워 버렸다.
"긴말은 않겠다. 다음에 내가 여기 나올 땐 안 보이게 해 놓거라."
"아버님."
울피아나가 눈을 반짝였다.
골트문트는 섬뜩한 감정을 느꼈다.
딸이 부탁이 있을 때 짓는 표정이다.
울피아나는 거의 부탁을 하지 않지만 일단 하나에 빠지면 대단히 강하게 집착하는 여자다.
"뭐, 뭐냐. 울피아나."
"저, 폐하를 만났어요."
"뭐?!"
"황궁에서요."
"무슨 이야기를 했지?"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폐하 말이죠. 외로워 보이시더라고요."
"외롭다고?"
"네. 아무리 궁정 안이라고 하지만 호위 하나 없이 궁전 안을 정처 없이 방황하시더라고요. 결국 발길 닿은 데가."
울피아나가 마를로네 쪽으로 힐끗 시선을 주었다.
그녀의 입에서 코웃음이 흘러나왔다.
"정작 마를로네 양 말로는 그리 친하지도 않나 봐요. 뭐라더라. 슈발츠마인 사람들과는 친해지고 싶지 않다든가."
"도펠죌트너라면 그런 소리를 할 수 있겠지."
"폐하는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찾아갈 정도로 내몰려 있는 거 같아요."
"근거는?"
"그러니 마를로네 양을 찾아간 거겠죠."
"우연히 발걸음이 닿았겠지."
"슈발츠마인 가문이라고 하나 실제 그쪽 출신도 아니잖아요? 데리고 다니던 몸종도 말벗도 없으실 정도로 인간관계도 빈약하시다던데."
울피아나의 눈이 더욱 반짝였다.
골트문트는 더욱 강한 부담을 느끼며 사랑스러우면서도 두려운 외동딸의 입술이 열리는 걸 지켜보았다.
"황제 폐하. 슬슬 결혼을 생각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생각해 보마."
마지 못한 답이다.
이번 전쟁에 대해 골트문트의 입장은 알려진 바가 없다.
사람들은 으레 같은 구교 측 제후인 그가 루페르트의 승리에 찬동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내막은 다르다.
골트문트는 어느 누구보다 루페르트의 승리를 경계하고 있었다.
강력한 황제는 그가 구상하는 제국의 가장 거대한 적이니까.
실제로 오늘 그는 레벤호스트의 은밀한 제안에 응하고 오는 길이었다.
레벤호스트는 제국 의회에 전쟁의 주역 만슈타인에 대한 13가지 전쟁 범죄에 관한 기소를 촉구할 예정이다.
* * *
"마를로네 양. 오늘은 정말로 즐거웠어요. 다음에 언제 다시 한번 더 다과회를 열기로 해요."
문이 닫히자마자 마를로네의 미소는 무서울 정도로 싸늘하게 걷혔다.
억지로 반짝거리던 눈엔 다시 짙은 안개가 끼었고 손에 들린 거추장스러운 짐덩이를 무감각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
울피아나가 입던 옛날 옷이란다.
필경 사치스럽고 화려하며 가격이 나갈 것이다.
그래서 버릴 수가 없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시궁창에 버리고 싶지만.
"그래, 울피아나 님을 만났다고?"
베르크 란은 여전히 거동이 불편했다.
초반의 회복세는 빨랐지만, 결투의 상처는 치명적이었다.
도펠죌트너의 우월한 회복력으로도 완전히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특히 가장 중요한 오른팔의 감각이 예전만 같지 않다.
무릎이 시큰거리고 발걸음을 옮기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주기도 했다.
완전한 회복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회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베르크 란도 마를로네도 어느 누구도 그 가능성은 입에 담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문제를 외면한 채 조손은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응. 소문대로 아름다웠고 기품이 있는 분이었어."
베르크 란이 손녀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더니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불만이 많아 보이는군. 그래, 털어놓아 보거라."
"결혼하고 싶어 하더라고."
"결혼? 누구랑?"
"위버하임 남작."
"황제 폐하 말인가."
베르크 란이 면모를 하지 못해 까끌까끌한 수염이 난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울리는 배필이군."
"전혀."
마를로네가 부정했다.
"무슨 뜻이지?"
"그 여자 말이야."
마를로네가 방 한구석에 놔둔 꾸러미를 흐릿한 눈으로 응시했다.
"우리를 속여 먹은 안젤리나 대황후가 차라리 천사처럼 보일 정도였다고!"
"악녀라는 건가?"
베르크 란이 그답지 않게 씨익 웃었다.
마를로네는 재차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사람 자체가 악한 건 아니었어."
"그럼?"
"글쎄. 뭐라고 해야 좋을까. 상처 주는 사람?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그런데 정작 본인은 자각이 없는 듯한 그런 느낌."
베르크 란이 한마디로 정의했다.
"순수악이군."
마를로네는 고개를 들어 창밖으로 보이는 높이 솟은 건물들을 흐릿한 눈으로 응시했다.
"...황제 폐하. 불쌍할지도."
109화 28. 황제의 멍에 (3)
쉬운 일은 없다.
가 보지 않은 길을 간다는 건 새로운 위험을 아는 것과 같다.
그토록 주체적인 황제가 되길 원했던 루페르트 앞에 이제 새로운 암초가 나타났다.
"선제후를 위시한 유력한 군주들이 제국 의회의 소집을 요구하며 만슈타인의 처벌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루페르트를 꼭두각시로 여기지 못하는 선제후들은 루페르트 대신, 그의 신하를 공격하려 한다.
죄목은 모호했지만, 황제의 과실과 맞닿아 있게끔 공소장을 작성했다.
황제가 묵인했기에 만슈타인이 제국 군주의 권위와 명예를 짓밟는 법 위반을 저질렀고, 그 결과 제국의 질서가 문란해졌다는 것이 그들의 주된 논조였다.
오토 브라에를 위시한 루페르트의 중신들은 이를 새로운 전쟁으로 규정했다.
황제와 선제후 간의 힘의 균형점을 찾기 위한.
여전히 루페르트는 동맹이 적다.
기껏해야 아카이아 대주교 하나다.
구교파 선제후인 골트문트가 저들의 편에 섰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큰 암초를 암시했다.
"오늘은 먼저 들어가 보겠네. 이 일에 관해서는 다음에 논하도록 하지."
그날 루페르트는 일찍 미궁으로 퇴근했다.
전일 느꼈던 갑작스러운 공포와 당황함이 다시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을 느껴서다.
정적만 흐르는 넓은 방 안에서 루페르트는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술잔을 홀짝이고 있지만 술을 마시는 일은 없었다.
몸이 모든 걸 거부하고 있었다.
문득 손을 보니 수전증 환자의 그것처럼 거칠게 떨고 있다.
"...빌어먹을."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핑 도는 걸 느꼈다.
"이렇게 힘들 줄이야...."
그가 원한 길이었다.
그러나 정작 들어선 그 길은 루페르트의 상상 이상으로 험난했고 거칠었다.
눈을 감으면 떠오른다.
바이엔의 광장을 가득 메운 창백한 사람들의 행렬과 그들의 몸에서 튀어나온 이빨 달린 붉은 벌레, 그것들이 뭉친 덩어리와 상상하는 것만으로 마음을 찢어놓을 것 같은 끔찍한 거신상.
특히 그 거신상은 상상 이상으로 깊은 멍을 루페르트의 마음에 안겨다 주었다.
처음엔 몰랐지만, 점점 그 상처가 아프게 느껴지는 느낌이랄까.
무엇보다 루페르트를 당황하게 하는 건 현재 상황이었다.
"내전만 바로 잡으면 되는 게 아니었나. 내전만 막으면 제국을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냐고?"
그 생각으로 회귀했다.
그놈의 내전만 막는다면, 제국의 국력을 서로 낭비하여 갉아 먹히지 않게 한다면 제국은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펼쳐진 현실은 전혀 달랐다.
특히 그 저주받은 제국 성인.
상상 이상의 권능과 어둠으로 무장한 그 괴인들이 루페르트의 대적, 융커스 베샤문트만큼이나 음울한 그림자를 황제의 운명 위에 드리운 것이다.
술잔을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술을 마시고 싶지만, 위장이 떨려서 아무것도 마실 수도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함 속에서 루페르트는 아편을 생각했다.
과거에 딱 한 번 피워 본 적이 있었다.
마음이 거짓말처럼 안정됐다.
물론 그런 종류의 마약이 결국 자신을 파괴하게 되리라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당면한 고통이 너무나 크다.
시간이 흐르는 것 자체가 고문이다.
'아편을 내오라고 할까.'
유혹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가운데 루페르트는 갑자기 딱딱한 무언가가 바닥을 긁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린 순간 루페르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소라고둥이다.
늘 몸에 걸치고 다니는 여신님의 소라고둥이 제단 위에 똑바로 서 있는 게 아닌가.
"여신님...."
아래층에 여신의 인간 형태가 있다.
그건 아무리 봐도 정이 가기는커녕 거부감만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건 안젤리나의 시체를 파먹고 만들어 낸 거니.
하지만 오랜만에 본 소라고둥은 느낌이 전혀 다르다.
단지 그 모습을 본 것만으로 짙은 구름으로 뒤덮인 어두운 하늘에 한 줄기 서광이 비치는 환각을 보았다.
"루페르트 가우저."
여신이 그윽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페르트는 진심을 담아 고개를 조아렸다.
"어머."
"여신님?"
"느낌이 자못 다르네요."
리프니에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밝고 윤기가 흘러 보였다.
"어디가 다르다는 겁니까?"
"왜요. 제가 인간 형태일 때는 늘 딱딱하고 꺼리시던데."
"그, 그랬습니까?"
"제 눈엔 다 보이는걸요. 그런데 오랜만에 이 모습으로 말을 거니 태도가 정반대네요? 검은 머리 소녀는 별로 안 좋아하나 봐요? 금발 소녀는 좋아하는 거 같던데."
"...하하."
"아무튼,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은 이번에 커다란 승리를 일궈 냈어요. 해서 선물을 주려고요."
소라고둥이 마치 콧대를 세우는 사냥처럼 고둥의 출입구를 하늘에 대고 쭉 뻗는 것처럼 몸을 늘였다.
"선물, 말입니까?!"
이미 선물이라면 받았다.
아티팩트 안개 가면은 그 자체로 말도 안 되는 권능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선물이라니.
"미네아의 붉은 벌레라고 했었죠? 이번에 상대한 마물요."
"네. 그렇습니다."
"그걸 제 나름대로 해체해서 당신이 쓸 수 있게 개조해 봤어요."
소라고둥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자 소라고둥의 구멍 안에서 허여멀건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건 하얀색의, 갑각을 가지고 지네만큼은 아니지만, 거미보다는 다리가 많은 기괴한 벌레였다.
'서, 설마 이게 여신님의 본 모습은 아니겠지?!'
소라고둥 안에 뭐가 있을지 늘 궁금했는데 이런 게 튀어나오니 그리 생각하는 게 무리는 아니리라.
그런데 잘못 짚었다.
"혹시 이 벌레가 제 실체라고 믿으시는 건 아니겠죠?"
"아, 아닙니다!"
"그런 표정인데요. 아무튼, 오랜만에 예전 같아서 기분은 좋긴 하네요. 그 소녀의 모습은 당분간 적어도 당신 앞에서는 봉인하는 게 좋겠어요."
어째서인지 루페르트는 그 말을 듣고 큰 위안을 느꼈다.
그 모습을 보기 싫은 것도 있겠지만 여신이 자신에게 신경을 써 주는 상냥함이 상처 입은 마음에 부드럽게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느끼지 못한 사이에 루페르트는 자신의 손 떨림이 드디어 멈췄다는 걸 발견했다.
"이 벌레는 제가 당신에게 드리는 선물이랍니다."
"선물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이런 건 필요 없는데!'
"이건 미네아의 붉은 벌레를 제 식으로 해석해서 개조해 만든 새로운 벌레랍니다."
벌레가 루페르트 앞에 마치 애완견처럼 차분하게 기립해 서서 겹눈으로 물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이건?"
"아직 이름은 정하지 않았는데, 루페르트의 벌레라고 할까요?"
"그건 좀."
"황제의 벌레가 좋겠네요. 황제충 어떤가요?"
"이 벌레는 어디에 쓰는 겁니까? 아까 미네아의 벌레라고 말씀하셨는데...."
"네. 비슷한 용도예요. 하지만 미네아의 붉은 벌레처럼 사람의 희생을 요구하지도 않고 사람을 해치지도 않죠."
소라고둥이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손을 내밀어 보세요."
루페르트는 내키지 않지만, 여신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가 손을 내밀자 벌레가 기다렸다는 듯 손바닥 위에 올라타더니 옷 소매 사이로 슬그머니 들어갔다.
갑각질의, 여러 개의 다리가 피부를 긁으며 지나가는 소름 끼치는 느낌에 루페르트는 온몸의 털이 곤두선 듯한 섬뜩함을 맛보았지만, 결코 소리를 내진 않았다.
"이 벌레는 미네아의 벌레처럼 인간을 완전하게 복종시키는 힘은 없어요. 부작용을 줄인 대신 효과도 줄어든 셈이죠."
"그렇다면, 이건."
"네. 사람을 조종하는 벌레예요. 단, 제약이 따르죠."
"제약 말씀입니까?"
"네. 먼저 당신을 신뢰해야 해요. 신뢰까진 하지 않더라도 당신에게 바라는, 의존적인 마음이 있어야 하죠. 이를테면 마음의 빗장을 푼 상태라고 할까요."
그때 시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손님께서 예방하셨습니다."
소라고둥이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때마침 좋은 시험 상대가 왔네요."
"시험, 상대요...?"
루페르트가 의아해하며 문을 향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분인가?"
"아카이아 대주교님이십니다."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이 웃는 듯한 착시를 느꼈다.
"네. 그 사람이랍니다. 한번 시험해 보죠. 어리석은 고트프리트에게."
서 있던 소라고둥이 천천히 자리에 누웠다.
"자, 시작해 봐요. 제가 지도해 드릴게요."
루페르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유는 복합적이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과 새로운 권능에 대한 기대, 앞이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뒤죽박죽 섞여 혼란을 가져왔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흔들어 머리에 깃든 혼란을 털어 버리고는 소라고둥을 목에 걸었다.
곧 아카이아 대주교가 들어왔다.
회귀 전, 노회한 얼굴로 딱딱하고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던 늙은이는 이번 생에서는 쾌활하고 항상 웃는 밝은 노인네로 변했다.
그가 양팔을 벌리며 과도할 정도로 충성스러운 인사를 올렸다.
"폐하! 프리!"
루페르트는 경멸을 감춰야 했다.
'미친 늙은이.'
그를 좋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루페르트의 적이 아니었고 대놓고 경멸한 적도 없지만 어째서인지 루페르트에 대한 그의 반감은 앞에서 그에게 수치심을 안겨다 준 레벤호스트보다 심했다.
당시엔 몰랐지만,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저 늙은이가 싫다.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 자체가 혐오스럽다.
이건 기호의 문제다.
[ 가까이 오라고 하세요. 보여 줄 게 있다고 해 보세요. ]
여신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최근 관계가 소원해진 건 사실이지만 대주교에 대한 반감은 루페르트를 다시 여신의 가장 충성스러운 사도로 만들었다.
"대주교님.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보여 드릴 거요? 어떤 것입니까?"
"그 사 음절의 이름에 관한 것입니다."
"오오! 정말입니까?!"
대주교가 기뻐하며 루페르트에게 다가왔다.
루페르트는 주머니 안에 넣고 있던 왼손을 천천히 꺼냈다.
[ 자, 대주교에게 입을 벌리라고 하세요. ]
"...."
등줄기에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리는 느낌이다.
그 시점에서 루페르트는 자신이 해서는 안 되는 금역에 발을 내디디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일이다.
"입을 잠시 벌려 주시겠습니까? 아, 하고."
"이유가 있습니까?"
"발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고대인의 발성이 우리와는 조금 다르다는 걸 발견해서요."
[ 루페르트 가우저. 진지한 얼굴로 잘도 술술 거짓말 잘하시네요? ]
자랑은 아니지만 나름의 특기다.
루페르트는 표정을 유지한 채 대주교의 입이 벌어지는 걸 보았다.
[ 지금이에요! 턱을 잡으세요! ]
루페르트는 이를 악물고 대주교의 턱을 붙잡았다.
"프, 프햐?!"
대주교의 눈자위가 하얗게 질려가는 가운데 루페르트는 보았다.
소매 안에 들어간 벌레가 대주교의 입 안으로 뛰어가는걸.
"으그그그극!"
대주교가 입을 다문 채 비틀거렸다.
"으그그극!!!!"
대주교의 머리가 지진이 온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주교가 입을 벌리더니 손을 넣어 안에 있던 뭔가를 끄집어내려 했다.
그러나 진동은 돌이킬 수 없이 강해졌고, 동시에 입에서 핏물이 새어 나오더니 피거품이 게처럼 일었다.
"끄르르르르륵!!!"
루페르트는 미세한 경악을 머금은 채 대주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신님. 이건."
[ 조금만 지켜보세요. 루페르트 가우저. ]
곧 발작이 멈췄다.
입가에 피가 흥건했고 피부가 하얗게 질려 버렸지만, 대주교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루페르트를 인자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폐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루페르트는 자신의 눈과 귀, 심지어 현실마저 의심했다.
"이, 이건?"
저 대주교가 복종하고 있다.
그토록 심한 일을 겪고도.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을 조종하는 벌레입니까?"
"영혼 동맹만으로는 당신의 우호 세력을 구축하기 어렵잖아요?"
다음 순간, 루페르트 앞에 빛나는 문자가 일렁거렸다.
[ 고트프리트 시데우스 폰 클라인하르트는 이제 당신의 노예다. ]
"폐하. 저 고트프리트는 언제까지나 폐하의 충실한 종복으로 죽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주교님."
"아, 물론 우리들 사이의 밀약도 잊지 말아야겠죠. 신의 이름! 진실을 탐구하고 파헤쳐 신에게 진정한 복음을 내려야겠지요!"
횡설수설하는 대주교는 보며 루페르트는 메아리를 연상했다.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잔재만이 남아 덧없이 울리는 산맥의 메아리를.
눈앞의 대주교는 그런 존재였다.
벌레에게 뇌가 파먹히기 전의 발상과 기억만으로 살아가는.
"걱정 마세요. 루페르트 가우저. 이 사람은 죽은 게 아니랍니다. 정신이 나간 것도 아니고요. 클라인하르트는 클라인하르트랍니다."
"그렇습니까?"
"네. 당신의 벌레가 자극한 건 그의 일부인 충성과 신뢰에 관한 부분에 불과하니까요."
루페르트는 대주교를 바라보았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충성스러운 대주교가 노구로 지탱할 수 있는 가장 곧은 자세로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리를 편 대주교는 그보다 키가 머리 하나가 더 컸다.
당연하다는 듯 굽어 있어서 알아보지 못했을 뿐.
"가 보십시오. 대주교님."
루페르트는 대주교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신의 말대로 대주교의 정신이 완전히 나간 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나가기 전에 그는 루페르트를 보며 루페르트가 정말로 싫어하는 한마디를 덧붙였으니.
"프리!"
쓴웃음을 머금으며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어떤가요? 당신의 새로운 능력이?"
"후, 훌륭한 것 같습니다."
"마음에 들진 않는 건 알아요. 하지만 당신의 제국은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큰 위기에 처해 있답니다. 누구보다 당신이 잘 알고 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경험했던 제국의 멸망은 쉬운 멸망일지도 모르겠지요."
쉬운 멸망이라는 말이 비수처럼 루페르트의 죄의식을 파고들었다.
'쉬운 멸망이라. 그래, 그런지도 모르지. 제국을 멸하려는 자들 입장에선.'
"하지만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은 달라졌어요. 당신에겐 제가 있잖아요."
"여신님."
루페르트는 열과 성을 다해 정중하게 여신에게 고개를 숙였다.
"새로운 권능의 이름을 정해야겠죠?"
예전처럼 밝은 목소리로 여신이 즐거워하며 말했다.
"영혼 속박? 영혼 예속? 아니, 영혼 노예가 좋겠네요."
소라고둥 안에서 흉측한 벌레가 고개를 내밀었다.
마지못한 마음과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이 상충하는 걸 느끼며 루페르트는 그 벌레를 직시했다.
"황제의 멍에는 어떻겠습니까?"
"그거, 좋은 이름이네요."
여신이 소리 내어 웃었다.
좀처럼 들려주지 않는 그녀의 웃음은 노래의 선율처럼 아름다웠다.
"다음에 새로운 노예 후보를 발견하면 제가 알려 드릴게요. 황제의 멍에는 보기보다 수줍음이 많아 낯을 잘 가리거든요?"
110화 29. 성 크리오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