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마를로네는 언제나 상점가를 거닐고 있었다
문득 어떤 골목이 그녀를 마술처럼 잡아당겼다.
아무도 없는 골목.
와 본 적이 없는 골목.
하지만 여기에 누군가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 이쪽을 보고 자신을 향해 시종일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단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은 남자가 있었던 것 같다.
'누구지?'
그녀는 목걸이를 꺼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는 목걸이.
처음엔 불길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적어도 지금 이 목걸이는 그녀의 기분을 좋게 해 주고 있었으니까.
141화 35. 재회 (1)
제국의 동쪽 국경엔 잡다한 소국이 자리 잡고 있다.
공국, 공령, 백국, 에미르국, 자치도시 등 잡다한 이름을 가진 그 소국들이 대국에 흡수되지 않고 제한적이나마 독립성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두 개의 강력한 제국 사이라는 지리적 여건 때문이다.
노예 반도라고도 불리는 그 땅은 제국과 동방 제국 두 강력한 나라의 완충지대로, 일부는 제국 혹은 제국 선제후의 봉신이며 또 일부는 동방 제국의 봉신이기도 하다.
노예 반도의 가장 중간 즈음, 카렐리아를 바라보는 산악을 차지한 드라쿨레아 공국도 그러한 완충지대의 봉신국 중 하나다.
달의 예언자를 믿는 동방 제국과 달리 드라쿨레아 공국은 호라교-그중에서도 신교라고도 불리는 새로운 개혁 종교-중 가장 급진적인 종파의 믿음을 따른다.
공국의 종교적 성향은 제국에서도 가장 서쪽에 자리 잡은 트라이아 선제후령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이 공국의 지배자는 드미트리에 공작은 현재 쓰는 이름보다 비스투라라는 과거의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며 더 많이 알려진 자로 공작에 오르기 전엔 동방 제국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민족의 영웅으로 취급받던 자였다.
중과부적으로 동방 제국에 머리를 숙이고 봉신이 되었지만, 사실상 그의 나라는 독립국과 다를 바가 없다.
후계자를 자신이 지명할 수도 있고 종교도 자신이 정하고 군대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
의례에 따라 동방 제국에 아이를 볼모로 보냈지만 그건 남의 자식이다.
물론 자기 직함으로 선전포고나 친선을 맺을 수 없지만, 동방 제국이 묵인하는 행위. 이를테면 동방 제국의 적을 마음대로 치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노예 반도와 동방 제국에서 비스투라는 질풍 같은 기마 무리의 지도자이며 그 자신도 뛰어난 전사라는 평가를 받지만, 서쪽 제국에선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이웃한 강대국조차 우습게 보는 제국이 다른 나라의 봉신에 불과한 소국의 인물을 눈여겨본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비스투라."
레벤호스트는 식견 넓음을 자랑하고 또 칭송받는 걸 즐기는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이름 없는 나라의 군주 이름은 생전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 친구가 뭘 할 수 있는가?"
선제후가 루돌프라는 신비로운 사내에게 질문을 던졌다.
루돌프가 답했다.
"그의 기마 무리는 솔직히 말해서 제국 군대를 이기기 어렵겠지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잘 조직된 제국군을 만나면 산산이 조각날 것입니다."
"그런 자를 끌어들이는 게 과연 옳은 건가? 다른 나라도 아니고 이교도의 수장인 동방 제국의 하수인을."
레벤호스트는 비스투라라는 인물이 탐탁지 않았다.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저 북방의 젊고 강력한 왕이라는 스베아 왕국의 왕조차 성에 차지 않는데 왕국조차 아닌 하찮은 공국, 그것도 동방 제국의 봉신을 끌어들인다는 것이 제국 선제후이자 황제를 배출하기도 한 명문가 출신인 그에겐 지저분하고 하찮아 보였다.
무엇보다 비스투라라는 이름은 그의 스승 마르틴 보엠이 알려 주지 않은 인물이다.
마르틴 보엠은 암살당해 죽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여전히 레벤호스트의 정신에 남아 숨 쉬고 있다.
"그의 군대는 약하지만 빠르지요. 그의 군대는 사실상 약탈자 기마 무리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그래서?"
레벤호스트가 불쾌감이 남은 표정을 드러내며 날카롭게 물었다.
"제국의 동쪽을 흔들 수 있겠지요."
루돌프가 담담하게 말했다.
"흔든다라. 그게 어떤 의미지?"
레벤호스트도 알고 있었다.
루돌프라는 사내가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하지만 그 생각이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끔찍한 것이기에 자기 생각이 아니라는 걸 중신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질문을 던진 것이다.
선제후의 질문에 루돌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교회를 불태우고 사람을 죽이며 아녀자를 겁탈하고 재물을 빼앗아 역병을 퍼뜨리고 시체를 나무에 장식처럼 걸고 지나가는 모든 곳을 폐허로 만들겠지요."
그 적나라한 말에 선제후의 신하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지나칠 정도로 끔찍한 계획이다.
제국을, 제국인도 아닌 야만인과 다를 바 없는 반도인보고 약탈하고 파괴하라고 하라니.
"그런 짓을 하면서까지 이 전쟁에서 이겨야 하나?"
레벤호스트가 중신들의 시선을 느끼며 차갑게 물었다.
"그런 짓을 하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 전쟁이라 생각하시면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허나."
루돌프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선제후님의 적들이 이 땅을 침범할 때, 그들은 저 동방의 야만인처럼 행동하겠지요."
선제후의 날카로운 시선이 흐릿한 안개처럼 일렁거리는 루돌프의 얼굴에 화살처럼 꽂혔다.
하지만 루돌프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말을 이었다.
"제가 걱정인 건 선제후님이 자랑하는 마구간입니다. 대륙에서도 으뜸가는 준마를 모아 놓지 않았습니까? 아름답고 우아하고 기품 있는."
"...."
"선제후님이 패배하면, 적의 군주는 그 마구간부터 찾아가 말들을 빼낼 겁니다. 이건 보장할 수 있어요. 제가 그들이라도 비슷한 선택을 할 테니."
레벤호스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어처구니없지만 마구간 이야기가 선제후의 마음을 꿈틀거리게 했다.
그 정도로 이 루돌프라는 신비로운 남자의 말은 불쾌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그래. 맞아. 적들의 병사가 도시를 약탈하기 전에 황제가 내 궁전에 먼저 들러 궁전을 살펴본 후 내 말들을 빼 가겠지.'
그의 마구간엔 제국과 이웃한 왕국, 심지어 사막에서 데리고 온 최상의 준마가 넘쳐난다.
그걸 빼앗긴다는 상상은 막연하게 백성이 약탈당하고 교회가 불타는 것보다 레벤호스트에게 치명적인 감정을 안겨다 주었다.
전자가 책에서 본 전형이라면 후자는 그의 현실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으리라.
레벤호스트라는 긍지 높은 선제후가 처음으로 패배라는 막연한 상상을 현실로 인식하는 순간이.
그 패배를 면하기 위해 선제후는 중신들이 보는 가운데 엄숙하게 말했다.
"비스투라라는 자에게 서신을 보내라. 그도 신교의 가르침을 믿는 자. 친구는 많을수록 좋겠지."
선제후는 그 말을 하며 루돌프를 찾았다.
그러나 그 신비로운 사내는 어느 순간 그의 시야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멍청한 놈."
그 사내 루돌프는 궁전 바깥에 있었다.
그는 트라이아 선제후 궁전이 자랑하는 꽃과 덩굴로 가득 찬 아름다운 정원을 주름진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 정원은 그렇게 크지 않지만 봐도 봐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다채롭고 아기자기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루돌프의 눈에 비친 그 정원은 불에 타고 시신이 도처에 널린 지옥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다.
"자신이 땔감에 불과한지도 모르고, 그 아비가 내게 개처럼 고개를 조아려 얻은 자산을 자신의 실력으로 이루어 낸 것이라 단단히 착각하고 있구나."
미래를 아는 자는 루페르트만이 아니다.
그 또한 미래를 알고 있다.
어쩌면 루페르트보다 더 정확하고 확실하게.
최초의 황제는 그늘진 눈으로 정원을 바라보다 문득 자기도 모르게 가슴 앞을 더듬었다.
있어야 할 물건이 없다.
소라고둥이다.
조금은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허공을 더듬던 최초의 황제는 두 눈을 감은 채 여신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제게 가장 힘든 일이 뭐냐고요?"
그 여신은 천진난만했다.
그토록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고도.
"음~ 글쎄요? 시간을 돌리는 걸까요?"
순진무구했다.
* * *
아카이아 성직 선제후령.
슈발츠마인과 트라이아, 디터팔츠 세 선제후령과 경계를 맞댄 이 작고 아름다운 땅은 선제후령이라고 하지만, 크기도 작고 인구도 보잘것없으며 상업도 대단하지 않다.
하지만 대단히 역사가 깊은 유서 깊은 도시가 있고 제국의 신자들이 우러러보는 제국 유일의 성지가 있는 제국 정신의 고향이기도 한 상징적인 영역이다.
아 작지만 풍요로운 땅을 다스리는 아카이아 대주교-선제후는 그 직위의 특성상 선제후령보다 슈발츠마인 안에 있는 제국 수도 테타우에 머무르는 일이 잦지만, 가끔은 대주교도 자신의 영지를 찾아와 밀린 일을 처리하곤 한다.
"그런 시시콜콜한 문제는 그대들이 알아서 하게."
신하들 입장에서 성직 선제후들은 세속 선제후보다 모시기 편한 존재다.
선제후령의 모든 걸 자신과 가문의 것으로 여기는 세속 선제후와 달리, 성직 선제후는 상속이 불가하고 그러므로 그 땅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 잡다한 공무를 대충 토착 귀족과 유력자에게 떠넘기려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카이아 선제후령은 세 유력 가문이 사실상 지배하는 땅이다.
한때 최고는 아니지만, 두 번째로 제국에서 가장 명민하다는 평가를 들었던 아카이아 대주교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이 선제후령의 주인은 자신이지만 정작 이 땅을 좌지우지하는 건 저 기생충 같은 세속 귀족이라는걸.
'역겨운 놈들.'
하지만 대주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는 더 고귀하고 먼 것을 보고 있다.
그가 선제후령을 오랜만에 찾은 것도 그 고귀하고 먼 것을 위한 작업 때문이다.
그의 별궁엔 제국은 물론 대륙 각지에서 모은 고문서 해석가들이 모여 있다.
그중엔 피부색이 다르고 생김새마저 다른 동방 제국에서 온 학자조차 있을 정도였다.
그 이교도는 그러나, 어떤 해석학자보다 탁월했다.
"에."
이교도가 일말의 존중도 담기지 않은 푸른 눈으로 대주교를 똑바로 쳐다봤다.
"이번에 새롭게 발견한 신성한 사 음절의 발음 중 하나입니다."
"에."
대주교가 과할 정도로 혀를 굴려 그 음절을 발음했다.
"프. 리. 에."
대주교의 근엄한 얼굴이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프리에. 프리에. 에리프?"
이교도가 고개를 저었다.
"리가 최초의 발음일 것입니다."
"그, 그래?"
그 이교도에 관해 대주교가 아는 사실은 하나다.
그 이교도는 동방의 악마학을 전공했다.
동방에서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던 몇 개의 왕국과 민족을 집어삼킨 소름 끼치는 악마를 연구하는 신비스러운 학회의 일원이라고 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대주교가 묻자 이교도는 두 눈을 내리깔았다.
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몸을 바들거리게 하는 끔찍한 광경을 연상해서 자신이 이교도-아카이아 대주교-에게 약해 보이는 걸 피하기 위해서다.
확연히 힘이 줄어든 목소리로 이교도가 대답했다.
"불사자의 왕국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무엇을?"
"악마의 진정한 이름을 말이지요."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진 악마가 있다.
수많은 왕국과 민족을 파멸로 몰아넣은 그 악마는 이름의 가짓수만큼이나 많은 민족을 나락으로 몰아넣었다.
그 악마가 가진 수많은 이름 중에 진정한 이름은 단 하나.
이교도는 끝끝내 그 이름을 발음하지 않았다.
* * *
같은 시각, 리프니에는 인간의 몸으로 발코니에 서서 한 사내가 공을 갖고 노는 걸 보고 있었다.
"...루페르트 가우저."
여신의 눈앞이 흐려졌다.
졸음이 느껴지는 빈도가 부쩍 늘었다.
잠이라는 개념을 모르던 태고의 자신이 떠올랐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멸하는 존재.
신도 예외는 아니다.
142화 35. 재회 (2)
한때 루페르트 가우저라 불리던 새로운 황제를 두고 세간에서 많은 의혹의 눈초리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슈발츠마인 가문이라고 하나 그는 제대로 된 가문의 구성원도 아니니.
출신과 배경을 누구보다 따지는 제국인들은 황제의 유년기의 행적이 거짓말처럼 삭제된 부분에 관해서도 은밀하게 흉을 보곤 했다.
"대체 누구한테 교육을 받고 어디서 자란 것이지?"
최근 유행하는 권세 높은 가문의 아이가 자라는 방식은 이렇다.
먼저, 제국에서도 전통 있고 격조 높은 지역이라 평가받는 디터팔츠의 중산층 이상 가문에서 자란 유모 아래서 걸음마와 말을 익힌다.
디터팔츠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외국의 억양이 크게 침범한 트라이아나, 촌스럽고 낙후된 이미지를 가진 렌타이어마르크 출신만 아니면 크게 상관은 없다.
아이가 걷기 시작할 무렵엔 노르드마르크 출신 가정 교사에게 검을 비롯한 무기를 쓰는 법을 배우며 고어문트 출신의 말벗을 할당받는다.
그런데 새로운 황제는 그런 유년기의 행적이 불분명했다.
목동을 비롯한 갖가지 천박한 일을 했다는 정도는 알려졌지만, 나머지는 오리무중.
말벗은커녕 어릴 때 같이 자란 친구도 없다.
분명 시골에서 황제가 날 정도면 저를 황제의 소꿉친구라 칭하는 인간이 나타날 법인데도 말이다.
심지어 그의 부모라는 작자를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분명 슈발츠마인 가문에 붙은 가문의 나무엔 그 이름이 적혀 있지만, 정작 실제로 만난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해괴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다른 나라라면 모를까 남을 흉보고 헐뜯고 뒷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 제국인들이 그 중대한 하자를 놓칠 리가 없다.
특히 극성스러운 호사가들은 조심스레 말하곤 한다.
황제 루페르트는 어쩌면 철혈대제의 사생아가 아닐까 하는.
그런 음습한 평가와 달리 새로운 황제 루페르트의 치세는 최초의 동란을 제외하면 평온하고 온건했다.
궁전 바깥에서 흉을 보는 사람들은 황제의 출신을 두고 욕을 하지만 실제로 황제를 만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칭찬했다.
새로운 황제는 젊지만 늙은이와 같은 노회함이 있고, 결단이 빠르다고.
그가 유능한 황제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저 철혈대제라 불리던 클라우데 2세를 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충분히 풍요로운 시대를 이끈 황제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폐하. 밤이 깊었습니다. 공무도 중요하지만, 폐하의 건강은 공무보다 더 중요한 제국의 보물입니다."
그 황제는 궁전 안에서는 근면 성실한 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모두가 은밀하게 손가락질하는 공놀이 시간을 제외하면 황제는 술도 마시지 않았고 과식하지도 않았다.
사냥 같은 일로 시간을 허비하는 일도 없었고 음악과 춤도 멀리했다.
여자를 멀리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
그는 어떤 의미로 진정한 수도승-황제였다.
"...."
루페르트는 강한 피로를 느끼며 눈가를 마사지하듯 꾹꾹 손으로 눌렀다.
피로가 쌓였다.
확실히 황제의 업무는 선제후 시절보다 곱절은 많았다.
저마다 읍소하고 중재를 바라는 문서가 대다수를 이뤘지만, 어떤 문서는 교묘하게 진의를 숨기고 황제의 실수를 유도하는 내용을 담기도 했다.
중신들이 일을 돕는다고 해도 결국 서명을 하고 책임을 지는 건 루페르트 본인이다.
매일의 격무는 황제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매번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다.
긍정적인 신호도 몇 개 있었다.
골트문트의 변화다.
내심 대립각을 세우던 그는 루페르트가 울피아나를 찾아간 이후엔 조금씩이지만 우호적인 태도로 손을 내밀기도 하고 국정을 운영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아직 완전히 내 사람이라고 믿을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적이 아니라는 걸 정도는 분간할 정도가 됐다.
고무적인 일이다.
골트문트가 없다면 레벤호스트 하나에만 전념하면 되니까.
그런데 그 레벤호스트도 최근 들어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마르틴 보엠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세계 전역에 끝도 없이 보내던 사절이 싹 끊겼다.
이는 루페르트가 심어 둔 제국 첩자들이 보고한 사안으로 레벤호스트가 더 이상 외교적인 수단으로 동료를 늘리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걸 시사했다.
물론 테타우의 호사가 사이에선 여전히 레벤호스트가 사람들을 보내 각국의 왕과 군주를 떠본다는 이야기가 속출하지만, 왕이나 군주에게 보낼 사람은 정해져 있다.
군주 정도 되면 보내는 사람도 격식을 갖춰야 한다.
최소 귀족이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상대방 군주가 대외적으로 신뢰한다고 알려진 인물이어야 한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찮은 인간을 보내는 건 그 군주에 대한 모독이다.
상대방이 우습게 보이니 그에 걸맞은 인간을 보낸다고 해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벤호스트가 최근에 조용해진 건 루페르트도 인정하는 바다.
그런데 또 다른 첩자가 이상하고 은밀한 이야기를 전했다.
"선제후의 궁전에 알 수 없는 사내가 드나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최근은 중신들의 회의에까지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더군요. 기이한 건 그 사람이 분명 존재는 하는데, 무슨 말을 했고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첩자들은 그 의문의 사내를 안개로 비유했다.
요하네스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고 오토 브라에는 첩자를 꾸짖어 밖으로 내보냈지만, 정작 루페르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 흐릿함은 자신이 아는 어떤 사내가 가진 속성이니까.
'클라우데 2세.'
약속했던 1년이 다가오고 있다.
* * *
클라우데 2세가 1년의 시간을 준 이후 제국 성인의 움직임은 없었다.
루페르트를 강박증으로 몰아넣던 크리오네도 그중 하나다.
이제 곧 과거의 황제와 만나게 될 것이다.
"...."
어떻게 할 것인가.
마를로네 덕분에 사안을 마주 볼 수 있을 정도로는 성장했다.
하지만 그 섭리를 벗어난 존재를 상대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는 여전히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결국 최고의 전사들을 모아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전사들은 렌타이어마르크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겔슈타트는 전보다 더 쇠약해졌고, 한스 징펠만도 좀처럼 궁정에 모습을 비추는 일이 없으니.
한스 징펠만이 궁정에 출석하지 않는 가장 이유는 그의 고향에 벌어지고 있는 환란 때문이다.
노르드마르크는 내전이 벌어지기도 전에 몰락하고 있었다.
신의 회초리라 불리는 역병이 해안가를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퍼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흑사병처럼 병이 퍼지는 속도보다 사람이 죽는 속도가 빨라 전염병이 멀리 퍼지진 않았지만, 해를 넘긴 이후부터 이상할 정도로 자주, 넓게 노르드마르크 곳곳의 마을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근 한 달 만에 이름이 알려진 마을 열다섯 개가 지도에서 지워졌다고 한다.
늘 큰소리를 치고 남자다움을 강조하던 선제후 게오르크 아르님은 궁정에 틀어박혀 그저 그의 신에게 기도만 하고 있다고.
심지어 그 신은 호라가 아닌 사냥의 신 다르타니아라고.
'이 역병이 강한 건 맞아. 노르드마르크의 뿌리를 뽑으려 든 것도 맞고.'
루페르트는 과거를 회상했다.
노르드마르크를 멸망하게 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역병이고 다른 하나는 빙해 약탈자라고도 불리는 북부인의 침략이다.
자세한 정황까지는 분석할 여유가 없었지만, 후자가 노르드마르크의 멸망에 더 기여했다는 게 루페르트가 알고 있는 상식이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정반대다.
북부인이 침략을 해 오기도 전에 노르드마르크가 빈사 상태에 빠졌다.
"그 병은 너무나 끔찍하고 잔인하기에 역병이 퍼진 땅을 봉쇄하고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게 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제국 의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신의 회초리라는 역병이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재앙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건 루페르트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걸리면 3일 안에 귀족도 평민도 군주도 공평하게 죽이는 역병이라는 걸.
하지만 루페르트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그에겐 이 문제를 상담할 뒷배가 있다.
"그래. 신전은 다 완성됐는가?"
루페르트는 한때 안젤리나가 머물렀던 저택 쪽으로 향했다.
저택은 흔적도 없이 허물어졌다.
그 저택이 있던 자리엔 아담하지만 하얀 대리석으로 여러 개의 기둥을 박아 지은 작고 아름다운 신전이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최소 10년이 걸린다는 견적이 나왔지만 막대한 돈과 루페르트의 사비마저 털어 공기를 앞당겼고, 결국 1년이 조금 넘은 현재 개장을 앞두고 있었다.
이 신전은 그러나 단 하나를 위한 신전이다.
"안에 들어가 봐도 될까?"
"네. 부디.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머리 위에서 뭔가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신전 안은 다채로운 금붙이와 조각상, 이국에서 온 갖가지 진상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는 루페르트의 마음이다.
리히트보덴으로부터 오는 개인 자금 전체를 이 신전을 만드는 데 썼다.
역시 돈은 인간이 부릴 수 있는 최상의 마법인 모양이다.
루페르트는 꽤나 흡족한 눈으로 여신의 신전을 돌아보았다.
'작지만 괜찮아. 이전에 내가 지은 것과는 급이 다르군. 역시 사람이란 힘이 있고 볼 일인가.'
늦어도 한 달 안엔 완성되리라.
소소한 만족감을 안고 루페르트는 그의 여신을 찾았다.
여신은 여전히 미궁 2층을 혼자 차지하고 있었다.
문이 열린 후에도 어둠만이 있는 건 전과 같았다.
"루페르트 가우저."
어둠 속에서 여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신님. 상의드릴 게 있습니다."
이제 과거의 앙금은 거의 다 사라진 상태다.
시간의 흐름이 감정을 희석한 부분도 있겠지만 둘의 앙금을 녹인 가장 큰 계기는 역시 솔직한 대화와 용서일 것이다.
루페르트는 그 일련의 사건에서 리프니에를 다르게 평가했다.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고 의도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 본성만큼은 악이 아니라는 걸 확신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먼저 찾아와 상담을 요청할 수 있었다.
"신의 회초리라는 역병 말이죠?"
"네. 그렇습니다. 제국 의사들도 손을 쓸 수가 없을 정도로 극악한 역병이라고 하더군요."
"그 병은 그래요. 회귀 전에 본 기억이 있네요."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인영이 움직였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숙인 채 여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병은 전염되지 않아요. 당신의 의사가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요? 전염되기엔 너무나 빠르게 사람을 죽인다고."
"정확합니다."
"그 병을 고의로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라요."
"병을 퍼뜨린다고요...?"
"네. 공성전에 유목민이 역병에 걸린 시체를 투석기로 안으로 집어넣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겠죠?"
"그렇습니다."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몰라요."
이것이 여신의 답이었다.
역병 그 자체를 해결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현상을 해결한 방안 하나 정도는 찾은 것 같다.
루페르트는 장기간 칩거에 들어간 자신의 사냥꾼을 불렀다.
"한스 징펠만."
"네. 폐하."
처음 만났을 때보다 사냥꾼의 얼굴은 나이가 들어 보였다.
고작 몇 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의 얼굴은 수십 년의 세월을 거친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 노화의 핵심에 렌타이어마르크의 괴물이 있다는 걸 부정할 순 없겠지만, 비단 그것만이 이 사냥꾼의 기력을 앗은 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 역병을 퍼뜨리는 자가 있다는 첩보를 들었다."
"...그렇습니까?"
사냥꾼의 두 눈에 흉흉한 살기가 떠올랐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그 역병에게 잃었다.
최고의 사냥꾼이라고 하나 역병 그 자체를 사냥하는 능력이 없기에 그는 허송세월하며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역병을 퍼뜨리는 자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산 것은, 살아서 대지를 걷는 것은 죽일 수 있다.
"진상을 파악하고 가급적이면 그 범인을 찾아내길 바란다."
"알겠습니다."
제국 사냥꾼 한스 징펠만이 엄선된 사냥꾼을 이끌고 노르드마르크로 떠났다.
첫 번째 영혼 동맹이 그의 전장으로 향하는 걸 눈으로 배웅하며 루페르트는 또 다른 전사의 안부를 물었다.
"베르크 란은 완벽하게 회복했다고 합니다."
그 베르크 란이 다시 루페르트 앞에 섰다.
공손하게 예를 갖추고 있지만 당당한 자세로 초로의 전사는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부르셨습니까?"
"그대를 다시 나의 챔피언으로 삼겠다."
베르크 란은 루페르트가 아는 모든 인간 중 가장 강한 자다.
"나를 옆에서 지켜 주길 바란다."
황제의 말에 전사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최고의 전사가 이제 루페르트를 옆에서 수호한다.
'선제여.'
루페르트는 속으로 그에게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 위압적인 전사를 떠올렸다.
두 황제의 재회가 멀지 않았다.
143화 35. 재회 (3)
익명으로 쓴 한 장의 편지가 황제에게 전달됐다.
통상 익명으로 쓴 편지가 황제에게 도달되는 일은 없다.
어떤 놈이 보냈는지도 모르는 잡스러운 편지가 감히 제국의 통치자에게 간다는 것 자체가 황궁의 수많은 관리들이 일을 안 한다는 증거니까.
하지만 그 편지는 몇 번의 심각한 논의를 통해 황제에게 전달됐다.
가장 큰 이유는 편지의 화려함 때문이다.
그 편지를 감싼 봉투는 은사(銀絲)로 만들어졌다.
그 봉투의 봉인 또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순금을 끼얹어 그대로 인장을 찍어 만들었다.
단 한 번도 보기 어려운 보석과 장식이 편지의 곳곳을 장식했고, 편지 안에서는 단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한 이국의 매혹적인 향기가 풍겨 나왔다.
그 편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성을 살 가치가 있었다.
그렇기에 관리들은 그 편지를 보낸 자가 익명임에도 불구하고 황제에게 보낼지 말 것인지 3일 밤낮으로 토론에 토론을 거듭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토론을 거듭하는 사이 한 장의 편지가 더 도착했다.
전보다 더 사치스럽고 고급스럽게 꾸민, 이루 말할 수 없는 가치를 품은 편지가 하나가 아닌 둘이나 온 것이다.
그걸로 우편국의 관리들은 그 편지를 황제에게 보내기로 결의했고, 두 장의 편지를 황제에게 올렸다.
루페르트는 그 편지의 내용을 확인하고 왜 이제야 보냈냐는 짧은 질타를 한 후 자신의 처소인 미궁으로 돌아갔다.
"...."
그는 섭리를 벗어난 존재.
한낱 제국 성인인 크리오네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는 판국에 제국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그 사내를 그렇게 처리하는 건 너무나 안일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가야 한다.
선제의 말대로 단 한 명의 수행원만을 이끌고 가문의 숲으로 가야 한다.
보험은 있다.
여신의 소라고둥이다.
"여신님. 들립니까."
소라고둥을 쓰다듬으며 루페르트가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 그 사람이 드디어 저를 찾는군요. ]
여신은 평소답지 않게 상당히 명랑하면서도 분함이 느껴지는 어조로 이야기했다.
[ 그래요? 그러면 저를 데리고 가세요! 한번 들어 보고 싶네요. 그 사람이 날 보고 무슨 이야기를 할지를. ]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여신님."
루페르트가 정색했다.
"여신님을 데리고 가시라는 말씀은 이 소라고둥만으로 족하다는 이야기지요?"
[ 아니요. 아래에 있는 제 인간 형상을 데리고 가 달라는 이야긴데요? ]
"여, 여신님. 그건 좀."
[ 왜요? ]
"아니, 그게. 그러니까 말입니다. 여신님. 제가 볼 때 선제가 여신님에게 실망을 한 게...."
[ 아. ]
여신의 가벼운 조소가 들려왔다.
[ 겨우 고작, 그런 거 때문에 저에게 실망을 했다? 그 말인가요? ]
"제가 볼 땐 그런 거 같습니다...."
일련의 대화를 하며 루페르트는 과거의 자신에게 칭찬했다.
'역시, 그때 사과를 하는 게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지금 같은 대화는 이어 나갈 수 없었겠지.'
뭐랄까, 그전까지의 관계가 일방적으로 수직적인 관계였다면 루페르트가 여신에게 감정이 상하고, 그 죄를 참회하는 과정에서 둘의 관계가 조금은 수평적인 관계로 올라온 느낌이 들었다.
지금 대화도, 잦은 상의도 그 과정의 결과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 하여간, 인간들이란 개복치와 비슷하네요. ]
"개복치요? 그게 뭡니까?"
[ 바다에 살아가는 수많은 물고기 중 하나죠. 아주 잘 죽는답니다~ ]
"그, 그런 물고기도 있었군요."
[ 먼 남쪽 따뜻한 바다에 사는 애들이니까요. 암컷 한 마리가 제국인 전체를 합친 것보다 많은 알을 낳는데 그중에 살아서 어른이 되는 아이는 하나둘? 어쩌면 하나도 없을 경우도 많고요. ]
"그렇군요."
[ 아, 갑자기 그 이야기를 하니 그립네요. 그 3억 명의 아이들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주며 관찰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
루페르트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처음 아닌가?'
실제로 처음이리라.
그의 여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건.
문득 강한 욕구가 내면에서 솟았다.
알고 싶다.
여신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욕구가 말이다.
"그,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 아, 전부 다 살렸어요. ]
"3억 마리 전체를 말입니까?"
[ 저한테는 아무런 일이 아니지만, 그 결과 바다의 생물 전체가 죽어 버릴 정도의 위기가 찾아왔답니다. 아니, 제가 살린 개복치들이 해파리를 모조리 먹어 치우니 다른 물고기들이 굶어 죽고, 그 물고기들이 굶어 죽으니 그 물고기를 잡아먹는 다른 물고기들이 굶어 죽고, 악순환의 연속이었죠. ]
여신이 신나서 떠든다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왜, 목에 찬 소라고둥이 발랄한 이야기와 함께 끝없이 좌우로 흔들리고 있으니까.
"그렇군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 어쩌긴 어째요. 제가 이름을 붙인 3억 마리의 개복치 중 암수 두 마리만 남겨 놓고 모두 죽였죠. ]
"...아."
[ 저 균형의 여신이잖아요? ]
소라고둥이 의기양양하게 삐죽거렸다.
"...인정합니다."
[ 아무튼, 당신이 인간 형태를 원하지 않으니 이 모습 그대로 데려가 주세요. 저도 보고 싶네요. 그 인간이 저에게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할지. 당신이 저의 사도인 걸 알면서도 당당하게 부르는 그 용기의 실체가 궁금하기도 하고요. ]
여신이 의욕을 드러내고 있다.
이보다 더 큰 호재가 어디 있겠는가.
'여신님이 진심으로 도와준다면, 사실 그 황제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겠지.'
신은 신이다.
여신의 한마디에 루페르트는 그간의 모든 고민이 가볍게 날아가는 기분을 느꼈다.
플루트가 있다면 불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축구는 해도 플루트까지는 불지 않는 것이 루페르트가 황제로서 지키는 나름의 선이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수행원을 누구로 할 것인지.
처음 생각한 건 역시 베르크 란이었다.
황제의 챔피언으로 임명한 것도 그 때문.
하지만 이제는 여신님이 옆에서 지켜본다.
티그리트, 선제에 대한 실망과 분노도 루페르트가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티그리트를 만날 때 데리고 갈 수행원으로 루페르트는 마를로네를 선택했다.
명백히 약한 자를 골랐다는 건, 그 자체로 티그리트에 대한 도전과 자신감의 표현이다.
'당신이 제국을 세우고 제국을 이끌어 나갔다고 하지만, 현재의 황제는 나다.'
당당히 서서 마주하리라.
무슨 말을 하는지 들으리라.
혹 그가 용서받지 못할 발언을 한다면 벌 또한 줄 것이다.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수많은 감정이 내면에서 뒤엉키는 걸 느끼며 루페르트는 선제와의 재회를 준비했다.
때는 제국력 992년. 루페르트가 치세에 오른 지 이제 3년 차를 바라보는 겨울의 일이었다.
* * *
새로운 황제가 찬사를 받으며 치세 초반기를 단단하게 다지고 있을 때 제국의 한구석에서는 죽어 가던 사내가 눈을 떴다.
"루페르트 가우저!!!!"
그의 이름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였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인생은 기구하기 짝이 없었다.
선제후라고 하나 날 때부터 그의 가문은 슈발츠마인이라는 강력한 가문에 눌려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쭉정이 가문밖에 되지 않았다.
끝없이 빈발하는 역병과 백성의 저항은 안 그래도 죽어 가는 가문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매년 제국의 밤 행사에 동료 선제후들과 어울릴 때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과 가문을 은근히 괄시하는 돈 많은 친척들을.
그는 그러나 동료 선제후들을 원망할 정도로 근시안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쇠락의 원인을 찾고 해결하려 했다.
그가 발견한 원인은 슈발츠마인 가문이다.
정확히는 제국의 황위를 수백 년간 독점한 탐욕스러운 씨족 집단.
그들이 렌타이어마르크에 길고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제 때가 왔다.
유능한 황제가 쓰러지고, 족보 없는 놈이 황위에 올랐다.
음모를 준비했고, 그 음모가 통하지 않았을 경우에 대비해 동란을 준비했다.
일차적인 목적은 렌타이어마르크의 부흥이지만, 그게 실패할 경우 그는 제국이 멸망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본심은 제국의 멸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대담한 모험은 비참한 패배로 끝났다.
선제후 가문이라는 타이틀은 지켰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렌타이어마르크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걸.
그가 긴 잠에서 깨어났을 땐, 이미 그는 자신이 죽음을 불과 몇 시간밖에 앞두지 않았다는 불유쾌한 사실마저 알게 되었다.
창문 너머에서는 때 이른 웅성거림이 일고 있었다.
"무슨 소란이냐?"
최후의 힘을 쥐어짜 내 선제후가 시종들에게 물었다.
"망자의 목동입니다. 그들이 별궁에 가까이 와서 병사들과 시비를 빚는 모양입니다."
시종 하나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망자의 목동? 아."
시체를 일으켜 세워 매장지로 인도하는 인간들의 존재를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도 알고 있다.
루페르트처럼 그 또한 그 불쾌한 집단을 인간 취급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것들이 자신의 영지에 있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마녀처럼 탄압을 한 건 아니지만, 그는 적어도 그것들이 자신의 눈에 띄지 않게끔 하라고 주변에 명했었다.
그 추악한 자들이 눈앞에 어른거리다니.
여기가 선제후 궁전이 아닌, 변경의 요양지라고 해도 있어서는 안 될 처사다.
즉각 명했다.
두 번 다시 여기서 일자리를 구하고 싶지 않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꺼지라고.
일할 권리를 박탈하겠다는 으름장을 곁들이라고 명했다.
망자의 목동에게 다녀온 병사가 황급히 보고했다.
"아무래도 좋다고 합니다."
"뭐?"
"그들은 렌타이어마르크를 떠난다고 하더군요."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자들이 떠난다고?"
"네. 그렇습니다. 노르드마르크로 간다고 하더군요."
그 짧은 대담에서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깨달은 사실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저런 밑바닥의 인간조차 자신의 땅을 떠난다는 음울한 사실.
그리고 하나는 저 죽음을 찾는 자가 다른 땅으로 향한다는 유쾌한 사실이다.
'그래, 이제 멸망의 불씨는 노르드마르크로 뻗어 나간다는 건가.'
자신을 은근히 깔보던 게오르크 아르님의 얼굴이 이제 거의 보이지 않는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망자의 목동이 일자리를 구했다는 건 그보다 많은 죽음이 있다는 이야기.
덕분에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웃으면서 두 눈을 감을 수 있었다.
향년 52세.
세 번이나 황제를 배신한 자의 마지막 유언은 "지옥"이라는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지옥을 보지 못했다.
그가 죽어 가는 날, 렌타이어마르크 동쪽 경계엔 한 무리의 기마 집단이 깎아지른 고개 위에 서서 음산한 산야를 염탐했다.
그 우두머리는 반백의 머리에 늑대의 가죽을 걸치고, 뾰족 솟은 동방 제국식 투구를 쓴 잔혹한 호걸이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뭐라고 했나?"
그 사내가 말했다.
그는 공작이며 군주이며 잔인한 마적 떼의 대장이기도 하다.
"이 땅의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하며 여자들을 겁탈하고 사람을 죽이라고?"
비스투라.
드라쿨레아 공국의 공작이자 군주.
그는 이미 두 눈으로 지옥을 본 사람이다.
동방 제국의 군대가 자신의 고향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며 아녀자를 겁탈하고 아이를 말발굽으로 짓밟는 걸 보았다.
거기에서 그가 얻은 교훈은 대단치 않았다.
깨달음도 참회도 후회도 없었다.
비스투라가 그 참상에서 보고 배운 건 그들이 저지른 것과 똑같은 악업의 방식이다.
더 잔인하고 더 참혹한.
"아니, 나는 이 땅에 두 발로 서 있는 것이 없도록 하겠다."
그와 그의 전사들은 동방 제국보다 더 잘해 낼 자신이 있었다.
올 것이 왔다.
선제의 부름이다.
과거의 황제가 현재의 황제를 부르고 있다.
두 장의 편지 전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 가문의 숲, 게슈나그 연못 앞에서 단 한 명의 수행원만을 거느리고 만나세.
그대의 벗 - 안드리아의 루돌프가 ]
가지 않을 수도 있다.
무시할 수도 있다.
아니면 미리 군대를 보내 선제를 잡을 계획을 획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144화 35. 재회 (4)
슈발츠마인의 저택은 여러 개가 있지만, 본가라 불리는 곳은 휘핑겐이라는 이름을 가진 숲을 낀 작은 촌락이다.
이 씨족은 숲에서 발원했다.
숲에서 나고 자라 숲의 산물을 먹고 또 그들의 시체를 숲에 돌려주는 삶을 유구한 세대를 이어 오며 거듭했다.
씨족의 운명을 바꾼 건 룸 제국에서 온 정복자지만, 그전에 이미 씨족의 구성원이 지나치게 불어나 휘핑겐 숲 하나만으로는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큰 지분을 차지했다.
숲을 나온 씨족은 부족이 되었고 부족은 제국을 만들었다.
씨족을 상징하는 짧은 창과 방패는 그 시절의 무장이다.
"다시 이 지긋지긋한 숲을 보다니 즐거우면서도 슬프네요."
마를로네와 함께 여행을 다닌 적은 여러 번 있지만, 그녀를 마차 안에 태운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신분이 낮고 호위역인 그녀는 늘 마차의 뒤나 마부석 옆자리에 앉았으니.
하지만 지금은 그녀는 루페르트의 안내인이다.
함께 가문의 숲에서 비밀스러운 일을 처리할.
루페르트가 생각하기에 이런 일은 마를로네 쪽이 베르크 란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다 떠나서 베르크 란이라는 사람이 가까이 다가서기 쉬운 사람은 결코 아니니.
아랫사람이라고 하나, 그는 단지 옆에 있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을 짓누르는 위압감을 드러냈다.
루페르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지 그를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잘 단조되고 날카롭게 날을 세운 칼날 같다고나 할까.
무엇보다 이번 만남에 베르크 란이라는 검은 필요가 없다.
[ 루페르트 가우저. 그 사람을 만나면 소라고둥을 가볍게 두 번 두드려 주세요. ]
그 어떤 존재보다 위에 있는 여신님이 그와 함께한다.
여러 번 회귀했지만, 여신이 직접 발 벗고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당연한 일이다.
저 티그리트는 여신의 권능을 받고도 여신을 배신하고 여신을 우롱하러 들었으니.
루페르트가 리프니에라고 해도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신의의 문제다.
'분명 그 사람에게도 뭔가를 애걸하던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여신님을 싫어할 수는 있어. 나도 여신님의 행동에 이상한 기분을 느꼈으니. 하지만 자신이 은혜를 애걸하던 순간을 기억한다면, 어떻게 배신할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루페르트는 지금 이 순간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불타는 테타우의 궁정에서 죽음 직전에 신의 도움을 갈구하던 장면을.
사실 그때만이 아니다.
비록 호라에게 기도하긴 했지만, 몇 번이고 루페르트는 섭리를 벗어난 초자연적 존재의 도움을 바라고 또 갈구했다.
이제 두려워해야 할 쪽은 티그리트다.
'과연 여신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군.'
한때 그는 루페르트의 우상이었다.
그가 되고 싶었던 이상의 존재였다.
더 이상은 아니다.
루페르트는 천천히 가문의 저택에 들어섰다.
입구로 통하는 드넓은 홀 중앙엔 들어오는 이를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로 방대하고 상세한 가계도가 그려져 있었다.
루페르트의 이름은 그 수많은 가지 중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가문의 나무를 보던 중 루페르트는 한 가지 의문에 잠겨 들었다.
'내가 황위를 양보한다고 치자. 그런데 어떻게? 어떤 식으로 그 사람이 황위를 이어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 가문의 구성원 전체는 이 가문의 나무에 적혀 있는데.'
오래전에 가문을 떠났던 그의 조부인 헤르베르트 가우저와 그 자손의 이름마저 적힌 가계의 나무는 너무나 상세하여 이 가지에 속하지 않은 바깥의 인간이 어떤 식으로 가문의 일원을 주장한다고 해도 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페르트는 가문의 나무를 보며 계단을 올라 그를 기다리고 있는 가문의 원로들을 방문했다.
"폐하."
비밀스러운 출장이지만 가문의 원로들은 황제의 예방을 알고 있었다.
원로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문의 수장이자 제국의 통치자를 진심으로 반겼다.
그들의 반응을 보며 루페르트는 의아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가문의 나무를 봤을 때와 비슷한 맥락이다.
한 번 물어보았다.
"만약 내가 제위에서 내려온다면 가문에서는 어떤 자를 황제로 내세울 것인가?"
티그리트의 말만 들어 보면 이미 그는 가문을 휘어잡은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원로들이 서로를 보며 귓속말을 주고받는 동안 루페르트는 하나의 질문을 추가했다.
"가문의 나무에 이름이 기재되지 않은 자도 가문이 내세우는 황제 후보가 될 수 있는가?"
누굴 황제로 세울 것인가 대해서 원로들은 고민하고 상의했지만, 두 번째 질문은 즉답했다.
"가문의 나무에 이름이 적히지 않은 자는 우리 가문의 일원이라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자는 우리 슈발츠마인의 사람이 아니기에 후보로 세울 수 없고 우리의 지지도 얻지 못할 겁니다."
"가문의 나무를 위조할 가능성은?"
"불가능합니다."
잠자코 있던 백발이 성성한 원로가 답했다.
루페르트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라간바르드라고 했나.'
가문의 의식, 예복, 절차 같은 가문의 법도를 관장하는 자였다.
선제후직에 오를 때 많이 맞부딪쳤기에 그 이름과 얼굴은 물론이고 성격까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적어도 예법에 있어서는 황제 앞에서도 딴지를 걸 사람이다.
그 정도로 시시콜콜한 예법에 자신을 거두고 그 틀에 맞게 살아가게끔 설계된 사람이다.
특히 그는 각도에 집착했는데, 그 집요함이 어느 정도냐면 선제후 의식을 치를 때 루페르트가 든 창을 쥐는 법 각도, 방패가 보는 방향과 각도, 시선의 각도 거의 모든 영역에서 칼날 같은 각도를 엄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 원로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황제를 노려보며 말했다.
"가문의 구성원의 태어나면 가문에 소속된 화가가 나무 위에 새로운 가지를, 그리고 그 이름을 적습니다. 그 새로운 가지와 이름을 그리는 데 쓰이는 물감은 동방 제국에서 직수입한 진주를 갈아 만든 것으로 그 독특한 색채와 색감이 있지요. 그 물감은 우리 가문 일원이 보는 앞에서 일일이 진주를 갈아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만들어집니다. 우리의 허락 없이 가문의 나무에 가짜 구성원의 이름을 그리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혹 그런 짓을 저지른다고 해도 물감의 색채만으로 거짓이 탄로 날 겁니다."
그는 한숨도 쉬지 않고 제법 긴 말을 순식간에 내뱉었다.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인간이 그렇게 말한다면 맞는 거겠지.'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대체 티그리트는 뭘 믿고 자신이 가문이 지지하는 후보가 될 거라고 말한 것일까.
"혹시, 그대들이 은밀히 밀고 있는 후보가 있는가?"
루페르트는 진솔하게 물어보았다.
원로들은 단호하게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우리의 황제는 오직 폐하뿐입니다."
"새로운 후보를 생각하는 건 어디까지나 폐하의 건강이 위중하거나 혹은 불의의 사고로 붕어하신 이후일 겁니다."
이것이 가문 구성원의 생각이다.
'집단 세뇌라도 하는 건가.'
루페르트는 자신이 일전에 대주교를 상대로 사용한 바가 있는 하얀 벌레-황제의 멍에를 생각했다.
그런 게 여러 마리가 있다면 뭐,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두진 않겠다.
루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원로들이 생각하는 차기 황제의 후보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베른하르트입니다. 그 친구 말고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는 폐하를 제외하고 가문 구성원 중에 가장 뛰어난 젊은이지요."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봐서 안다.
유능한 사람이고 영민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티그리트가 아니다.
"가문의 숲으로 가겠다."
이제 그 티그리트를 만날 시간이다.
루페르트는 벌써부터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보고 싶고 듣고 싶다.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
스스로도 자신의 변화에 놀라움을 느꼈다.
여신이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사람 마음이란 게 이렇게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이.
그래서 다들 종교를 믿는 모양이다.
루페르트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신을 보았다.
그 신은 소라고둥 안에 있다.
* * *
"다시 이런 곳에 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저택 안에서는 죽은 쥐처럼 잠잠하던 마를로네는 숲에 들어오자마자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저, 이 숲. 정말로 싫어요. 폐하도 아시죠? 제가 여기서 폐하 조상님들처럼 생활한 거? 지네는 또 어찌나 많은지. 왜 폐하 가문의 문장에 지네가 안 그려졌는지 조금은 놀라곤 한답니다."
평소엔 말이 적지만, 불만이 많으면 말이 많아지는 마를로네의 투정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루페르트는 조용히 기억에 남은 숲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이 숲에서 처음으로 만났지. 제국 성인이라 불리는 존재와.'
이 방대하고 유서 깊은 숲은 태곳적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소수의 숲지기를 제외하면 나무꾼은커녕 그 사냥을 좋아하는 귀족들도 얼씬도 하지 않는 곳이니.
누가 감히 제국 최강의 가문인 슈발츠마인의 숲에 함부로 흙발로 침범하겠는가.
그래서 제국 성인 같은 괴물이 똬리를 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약속의 장소는 마를로네가 알고 있었다.
게슈나그 연못이라는 장소다.
"게슈나그 연못요?"
루페르트는 가문의 숲에 무지하지만, 한때 이곳에 살았던 마를로네는 숲에 대한 일화에 대해 가문의 수장인 루페르트보다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아, 아기를 공양하던 연못으로 알고 있어요."
영아 살해는 과거부터 이어진 어쩔 수 없는 악습이었다.
아이는 끝없이 나오는데 먹여 살릴 길이 없으니, 작황이 좋지 않거나 기근이 예상되면 부모들은 아이를 죽여야 했다.
가난한 제국 시골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보통은 어머니가 아기와 한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몸을 뒤척여 아이를 깔아뭉개는 사고의 형태로 위장한다.
영아 살해에 관한 재판 기록을 읽으면 대동소이한 내용이다.
예전에는 비극으로 보였지만, 황제가 된 지금은 달라 보인다.
아기와 어머니의 개인적인 비극의 문제라기보다는 제국의 땅이 태어나는 모든 생명을 다 먹여 살리기 부족하다는 암시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매년 13월에 태어나는 아기들을 예외 없이, 심지어 부족장의 아이조차 이 연못에 빠뜨려 연못 안에 사는 괴물에게 공양했다지 뭐예요."
13월은 지금은 없어진 달이다.
룸 제국이 개량된 달력을 가지고 오면서 사라졌다.
연못에 아이를 빠뜨리는 악습도 13월과 함께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죽이는 풍습이 사라진 건 아니다.
그저 형태만 달라졌을 뿐이다.
'어쩌면 과거에 이 땅에 살던 부족과 현재의 제국은 별다른 차이가 없었을지도. 아니, 부족장의 아이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에서 과거가 오히려 지금보다는 수평적인 세상이었을지도 모르겠군.'
루페르트는 천 년 전의 세상을 모른다.
그렇기에 티그리트라는 사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제국을 세웠는지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어렴풋이 읽었다.
그는 한 마리 짐승과 다르지 않았다.
그에게선 신의가 없었고 믿음도 없었고 존중도 없었다.
대의를 이야기하지만, 루페르트의 눈에 비친 건 그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굶주린 야수의 행동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잘난 대의나 혹은 안배도 멀리서 보면 먹이를 먹는, 혹은 짝짓기 상대를 향해 구애하는 짐승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이제 그 과거의 황제가 저 너머에서 기다린다.
태곳적부터 이끼 색을 띤 연못 앞에 건장한 체구에 로브를 걸친 사내와 모래색을 닮은 피부를 가진 여성이 요염한 자태로 서 있었다.
"루페르트 가우저."
두건을 벗으며 금발의 전사가 수염 없는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루페르트를 그늘진 눈으로 노려보았다.
루페르트는 그 시선을 똑바로 받으며 대답했다.
"다시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선제, 아니 선제들이여."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두 번 가볍게 두드렸다.
145화 35. 재회 (5)
그 사내 티그리트는 인간 중에 솟은 산맥과도 같은 기도를 풍기고 있었다.
타고난 전사라기보다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존재라는 신호를 곳곳에서 섬뜩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저 크고 두꺼운 손은 인간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다.
루페르트는 그의 강인한 손에게서 황소와 곰을 연상했다.
'이 사람은 진짜 티그리트인가.'
제국인이라면 노예제 티그리트의 전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제국의 가장 권세 높은 가문의 난롯가는 물론, 짚더미 위에서 가축과 같이 뒤엉켜 자야 하는 하찮은 인간의 쓰러져 가는 움막에서까지 노예제의 이야기는 두루두루 제국 사람들의 입에 오른다.
그는 가장 비천한 신분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로 일어섰고, 당대 최강의 제국을 무너뜨리고 그보다 더 강한 제국을 만들어 냈다.
매 행적은 신화와 전설이며, 전장에서는 무패의 명장이자 무쌍의 장수다.
그 티그리트를 마주 보고 있는 것이 한 번 제국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망국의 황제라는 건 시간의 나선이 빚어 낸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아마 리프니에조차 예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루페르트 가우저. 이 사람과 이야기를 해 보세요. 저는 듣고 있겠어요. ]
여신이 루페르트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연못 앞에 두 황제가 마주 보았다.
각자의 수행원들은 멀찌감치 서서 각자의 주군을 지켜보았다.
티그리트의 수행원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두건으로 얼굴을 가렸고, 마를로네는 연못과 통하는 개울가에 쪼그려 앉아 개울의 돌멩이를 들췄다.
가재 몇 마리가 놀라 집게발을 들어 올리며 달아나는 장면을 마를로네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보다가 멀리 서 있는 두 황제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뭘 하려는 거지?'
이해할 수가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냥 상황을 관망하기로 했다.
그녀가 개입할 성질의 사건도 아니고 개입한다고 해서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날 것 같지도 않으니.
하지만 조금은 걱정된다.
저 칠칠치 못한 황제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거한 앞에 굳은 얼굴로 서 있는 걸 보면.
'지금의 내가 이 사람을 지켜 줄 수 있을까?'
사막을 닮은 색을 가진 여인이 마를로네에게 다가왔다.
"수행원은 멀찌감치 뒤로 빠지라네요."
그 목소리는 달콤한 연기 같았다.
마를로네는 어떻게 같은 인간이고 여자인 저 여자의 목에서 저런 소리가 날 수 있는지 궁금해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수행원들이 사라진 자리엔 이제 두 황제만이 아이를 빠뜨려 죽였다는 연못 옆에 남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두 황제의 대담은.
"두 번이나 서신을 보내게 해서 대단히 송구합니다. 본의 아니게 기다리게 했군요."
루페르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을 하면서 그는 티그리트의 얼굴을 살폈다.
그 무쇠 같은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희미했다.
티그리트가 뒷짐을 진 채 천천히 옆으로 걸었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겐 눈치를 보고 낮은 사람에겐 모욕을 일삼는 하찮은 관료들의 행태야 익히 아는 바, 그대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내가 듣고 싶은 건 오직 하나야."
티그리트가 고개를 돌렸다.
"대답은?"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루페르트는 협상이라는 실낱같은 가능성을 마음에서 깨끗이 지웠다.
'역시, 이 사람과 대화는 성립할 수 없는 거구나. 이 사람은 티그리트지만 동시에 클라우데 2세이기도 하니.'
반쯤 신격화된 티그리트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행적 말고는 아는 바가 없지만, 클라우데 2세의 행실과 언행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철혈대제는 협상하지 않는다. 타협하지도 않는다.
그의 대화는 대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의 언어는 대체로 명령으로 이루어졌고 명령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는 드물게 협박이나 회유로 살짝 변화할 뿐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내 제국을 돌려받겠다."
그는 지금 루페르트에게 명령하고 있다.
과거의 황제가 현재의 황제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루페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누구도 내 제위를 요구할 권리는 없소."
티그리트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설령 당신이 이 제국을 세운 자라고 할지언정."
잠시 후, 티그리트가 코웃음을 쳤다.
"어리석은 건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어리석구나."
그의 입에서 나온 건 날 선 조롱이었다.
루페르트는 그 행동이 대단히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적어도 나는 당신처럼 은혜를 모르는 금수처럼 행동하지는 않아."
예의와 허울을 지키려던 루페르트도 어느샌가 선제처럼 날카로운 말로 응수하기 시작했다.
"은혜라."
티그리트가 코웃음을 쳤다.
잠시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옆으로 거닐면서 자조적인 음성으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은혜를 입었지. 비할 바 없는 은혜를 입었지. 하지만 말이야."
"듣지 않겠소."
루페르트가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이 뭐라 하건 나는 당신을 배은망덕한 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루페르트가 선제에 맞서는 논리다.
그 완강한 태도에 티그리트는 살짝 놀라는 눈치였지만 그게 전부였다.
"협상은 결렬이군."
그는 빠르게 포기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나?"
루페르트의 물음에 티그리트는 두 눈을 감았다 천천히 떴다.
다시 치켜뜬 눈동자에 서린 건 확신이었다.
"지켜보면 알겠지."
"여신님 또한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그 여신은 너의 편이 아니다."
"이간질이라는 게 철혈대제의 술수인가?"
"글쎄."
티그리트가 돌아섰다.
성벽처럼 드넓은 등을 보인 채 최초의 황제가 물었다.
"평범한 자가 제국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강하게 마음을 먹었지만, 그 질문은 루페르트의 가슴 위에 무거운 돌을 괴는 듯한 압력으로 다가왔다.
"...."
이미 몇 번이고 주고받은 문답이다.
티그리트가 루돌프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때 루페르트에게 수시로 말했다.
평범함이라는 악덕에 관하여.
루페르트는 어떻게 보면 그 악덕으로부터 빚은 도자기와 같은 존재.
행동도 사고도 판단도 평범하기 짝이 없다.
그가 잘하는 건 축구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괴이 앞에서도 잘 버틸 수 있다는 정도?
리프니에가 없었다면, 다음 기회가 없었다면, 루페르트가 이 자리에 설 일은 영원히 없었을지도 모른다.
티그리트는 그 루페르트의 약점을 정확하게 찔러 왔다.
"그대는 평범하다. 식견은 좁고 아둔하고 사람을 잘 골라서 사귀는 것도 아니며, 주체적으로 자신이 나서서 뭔가를 만들어 내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만든 사건에 휘말려 호되게 두들겨 맞은 뒤에야 행동에 나서지. 그런 군주는 자신뿐만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만드는 법이다."
티그리트가 냉소를 머금었다.
"착한 황제는 미친 황제만큼이나 제국을 병들게 하지."
루페르트는 이 사내가 황제가 되기 전에 룸 제국의 검투사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약점을 잘 찾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는 점에서 확실히 검투사답다.
신랄한 말투는 상대방의 살점과 심장을 갈라놓던 칼날처럼 날카롭다.
하지만, 이쪽도 각오라는 걸 했다.
잠시 주춤했지만,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매만지며 담담한 눈으로 티그리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평범한 자도 제국을 지킬 수 있다."
"어떻게?"
"왜 뛰어난 자만이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당신이 입고 있는 옷, 매일 신에게 감사하고 먹는 곡식, 당신이 허리에 찬 검조차 평범한 사람의 손에서 빚은 것이다."
"양이 양 떼를 인솔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에게 인도받는 걸 꺼리는 법이지."
"당신의 치세를 많은 사람이 비난하고 저주하는 걸 보았다."
"클라우데 2세 시절의 이야기인가?"
선제가 미소 지었다.
그가 룸어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 뜻은.
"너라면 더 잘할 수 있겠는가?"
룸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티그리트에게 마지막에 했다는 그 말을 티그리트 본인의 입에서 재연하고 있다.
"...."
루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룸어로 대답을 할까 고민했지만, 대답하지 않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다.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치세의 결말을 지금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허무한 메아리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티그리트가 연못을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의 여신은 네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잔혹한 존재다."
루페르트는 대꾸하지 않았다.
여신의 눈치를 본다기보다는 대꾸할 가치가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티그리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마치 사악한 어린아이 같지. 순진무구한 손으로 벌레의 날개를 잡아 뜯고, 움직이지 못하는 짐승을 끝없이 나뭇가지로 찔러 결국엔 죽음에 이르게 하는."
"...."
루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 대목에서는 약간의 공감대를 느꼈다.
'우리 여신님이 아이 같은 구석이 없잖아 있긴 하지.'
"그대에게도 장점은 있더군."
연못을 보고 있던 루페르트가 턱을 들어 선제와 눈을 마주쳤다.
시선이 닿자, 티그리트가 냉소를 머금었다.
"사람이 무디다는 거지."
"...."
그것도 사실인 거 같다.
렌타이어마르크의 괴물을 보고 멀쩡한 건 자신과 마를로네 둘밖에 없는 거 같으니.
"하지만 말이야. 루페르트 가우저. 시간이 갈수록 너는 여신님의 행동에 실망하게 되겠지. 너도 알고 있지 않나?"
"신과 인간이 같을 수는 없지."
긴 침묵을 깨고 루페르트가 대꾸였다.
굳이 대답을 한 이유는 이대로 놔두면 티그리트가 끝도 없이 떠들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다.
"너로서는 여신님의 변덕을 견딜 수 없다. 나 정도나 되니 천 년 동안 견딘 것이겠지만. 하지만 어떤 사람은 우리의 여신님을 악마라고도 부르더구나."
"내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게 악마라면, 나는 기꺼이 그걸 신이라 부르겠다."
"멍청한!"
티그리트가 고함을 내질렀다.
"너처럼 평범한 자가 제위에 있으면 그 자체로 이 제국엔 미래가 없단 말이다!"
아무리 흔들어 봐야 흔들리지 않는 루페르트의 태도에 분노한 것이다.
루페르트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고 위축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겨우 이 정도였나.'
제국의 건국자, 위기를 이겨 낸 구국의 황제.
역사에 새겨진 문구만 보면 망국의 황제인 루페르트와는 비할 바 없는 위대한 존재다.
하지만 막상 그 위대한 존재 앞에 대치하고 있자니 뭔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
그 위대한 존재도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루페르트의 눈엔 평범해 보였다.
"당신이 뭐라고 하건, 나는 듣지 않겠다. 나는 여신님의 유일한 사도이고 내 마음은 영원히 변치 않을 테니까."
"그 여신님이 네 제국을 파괴해도?"
"여신님이 만들어 낸 재앙이라면 여신님이 수습할 수 있겠지. 무엇보다 나에게는."
루페르트는 자신의 소라고둥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는 힘이 있다."
"그건 저주가 될 수가 있지."
"제국을 지킬 수 있다면 기꺼이 그 저주를 뒤집어쓰겠다."
루페르트의 굳건한 모습에 티그리트는 입을 다물었다.
"...."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루페르트의 어리석음에 대한 실망? 분노?
아니면 자신이 지키지 못한 맹세에 대한 수치심?
어느 쪽이건 루페르트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소라고둥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다.
[ 슬슬 지루하네요. 제가 나서도 될까요? ]
그의 여신이 직접 나서려 한다.
146화 35. 재회 (6)
같은 시각, 가문의 숲의 한 귀퉁이.
마를로네는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국적인 여성과 함께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진짜 신경 쓰이네.'
첫인상은 단순했다.
예쁘다, 아름답다, 하브루타인인가?
하지만 곱씹어 볼수록 저 여성은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마성의 매력을 품고 있었다.
뭐랄까, 이쪽과 전혀 다르다.
나름 제국의 여자들보다 이쪽이 낫다고 으레 자신감을 품고 있었고 그에 걸맞게 수수한 차림으로 다니는 걸 고수했지만, 그럼에도 자기보다 괜찮아 보이는 여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 여성은 다르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존재다.
의식을 안 하려고 해도 쇳가루가 자석에 끌리는 것처럼 저 같은 여성에 눈길이 간다.
딱히 화려한 건 아니다.
그 옷차림은 평범한 하브루타인의 복식이다.
몸매의 굴곡을 드러내지만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은 모두 천으로 싸맸다.
하지만 그 꽁꽁 싸맨 복장 너머로 풍겨 나오는 아찔한 아우라가 있다.
그 잘났다는 울피아나는 마를로네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지만, 이 여자는 보는 것만으로 절로 의식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뭐랄까, 근원적인 이질감을 느꼈다.
뇌쇄적이라고 할까, 매혹적이라고 할까.
마치 밤하늘에 떠오른 달을 보는 기분이다.
저 하브루타인이 숭상한다는.
마를로네는 왜 자신이 저 여성에 끌리는지에 관해 생각했다.
어머니가 없이 자란 마를로네는 여자보다 남자의 문화와 양식에 익숙하다.
그것도 베르크 란이라는 무뚝뚝하고 무자비하며 용서를 모르는 살인자 아래서 자랐다.
또래를 사귀면서 같은 나이의 여자아이가 지녀야 할 소양과 생각을 익히긴 했지만, 그녀가 사귄 또래 친구는 하찮은 집안의 자식들이다.
하지만 이 여성은 뭐랄까, 어른이다.
널리고 널린 나이만 먹은 어린이들과 진정한 어른의 향기가 났다.
그것도 동경으로 가득 찬.
그 여성이 이쪽의 시선을 비로소 눈치챘다.
그녀가 마를로네를 보았다.
"안녕?"
마를로네는 마지못해 목례를 하며 인사를 받았다.
"이름이 뭐니? 나는 아가티아."
그 여성이 손을 내밀었다.
순간 마를로네는 온몸이 감전된 듯한 섬뜩함을 느꼈다.
자신에게 내민, 달빛을 머금은 듯한 유려한 손에 순간 갖가지 종양과 검버섯, 썩어 가는 농양이 가득 찬 환상이 나타났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네가 죽인 제국 성인 중 하나란다."
아가티아가 눈웃음을 머금었다.
마를로네가 흠칫 놀라며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이국적인 색채를 가진 손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 손은 사막을 닮았지만, 사막의 온도를 머금지는 못했다.
마를로네가 느낀 체온은 뱀의 비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 폐하는 미래를 보는 재주가 있어."
"그래서요?"
"폐하가 말씀하시길."
아가티아가 고혹적인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가 엄청난 일을 저지른다고 말씀하시지 뭐야."
마를로네는 도펠죌트너의 눈으로 아가티아를 다시 보았다.
그녀가 느낀 동경이 구역질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여신님에게도 장점은 있다."
티그리트가 말했다.
그건 루페르트에게 한 말이지만 어째서인지 반응한 건 리프니에다.
[ 조금만, 더 지켜보죠. ]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참으며, 다시금 신경을 티그리트에게 옮겼다.
여신을 배신한 자가 말하려는 여신의 장점을 듣기 위해서다.
사실 루페르트는 리프니에의 장점을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당연한 일이다.
신의 속성 중 하나가 전지전능이니.
신에게 장단점이 있다는 건 그 신격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제국 호라 교단에서 호라의 장단점을 언급하면 가볍게는 훈계를 받겠지만, 심할 경우엔 광장에서 산 채로 불태워질 정도의 중죄다.
그런 점에서 리프니에는 호라보다는 마음이 열려 있는 신이란 게 분명하다.
[ 기대가 되네요. 룸 대경기장의 무패의 챔피언이 말하는 저의 장점이. ]
신이면서 장점을 들을 용기가 있다는 점에서.
스르릉.
티그리트가 검을 뽑았다.
그의 검은 짧고 투박했다.
단검보다 조금 더 긴 정도.
크고 강한 것을 추구하는 제국의 취향과는 멀리 떨어진 물건이다.
티그리트가 그 검 끝을 하늘을 향해 뻗어 그 날카로운 끝단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여신님은 적어도 부름엔 답하지."
[ 아, 그건 저도 모르고 있던 장점이네요. ]
루페르트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다른 무정한 신과 달리 리프니에는 인간을 돌아봐 주었다.
"하지만 그 결과가 현재의 상황이다."
소라고둥이 가볍게 몸을 떨었다.
루페르트는 어째서인지 방금 그 말이 자신보다는 리프니에한테 강하게 먹힌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네 자리는 나의 것이다. 여신은 그렇게 약속했다."
[ 루페르트 가우저. ]
"내가 여신에게 빈 소원은 나의 제국이 건재한 채 천년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단지 그뿐이었다. 즉, 너의 자리는 나의 것이다. 여신도 반박하진 못할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거 같네요. ]
"정직하게 말하지."
[ 듣지 마세요. ]
"너는 말이다. 루페르트 가우저."
[ 루페르트 가우저. ]
선제와 여신이 동시에 루페르트를 다그쳤다.
그 상황이 루페르트에겐 순간 꿈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티그리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다.
그는 가감 없이 진실을 이야기하려 한다.
"너는 나의...."
티그리트의 말은 거기서 끊겼다.
그의 시선은 루페르트 너머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 방대한 원시림을 향했다.
숲은 밤보다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그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곧 그것이 낭랑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여자의 목소리.
티그리트는 숨을 죽이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천하의 티그리트 또한 가볍게 경련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를 부른 건 이제는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사랑하던 여인의 모습이었으니.
"안젤리나."
그만이 들을 수 있는 낮은 울림으로 그 이름을 부르며 티그리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흑발의 소녀를 흐릿한 눈으로 보았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났다.
그것은 숨길 수 없는 분노였다.
절제한, 그럼에도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티그리트가 말했다.
"...당신이 내 자리를 돌려준다면, 언제든 당신에게 돌아가겠나이다."
티그리트가 루페르트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분노를 참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루페르트의 눈에 비친 선제의 얼굴에 떠오른 건 비웃음이었다.
이 상황을 견딜 수 있는가 하는.
꼭두각시 시절에 몇 번이고 경험한 바가 있다.
표정 너머의 감정을 읽어 내는 것 정도는.
안젤리나의 모습을 한 리프니에는 차분히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곧 그녀가 돌아섰다.
"...저를 악마라고 불러 놓고."
"그것 또한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티그리트가 그 덩치와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세 가지 이름을 가진 악마라는 칭호를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았습니까?"
"...폐하. 역시 당신은 저를 너무 잘 아네요."
리프니에의 표정이 온화해졌다.
"제 자리만 돌려주십시오. 그러면 다시 여신님의 옆을 지키겠나이다."
티그리트는 자기 허리밖에 오지 않는 소녀를 향해 무릎을 꿇고 서약의 자세를 취했다.
리프니에는 그 모습을 보고 아무런 반감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마치 그 상황을 즐기는 듯 티그리트의 모습을 음미했다.
"당신의 이름을 그 피의 경기장에 몇 번이고 울리게 한 저의 공양을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폐하."
"저는 몇 번이고 당신의 순교자가 될 각오를 했습니다. 그런 제가 어찌 이제 와서 여신님을 배신하려 든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루페르트는 또 다른 혼란에 잠겨 들었다.
'뭐, 뭐냐? 지금 상황은.'
먼저 루페르트를 놀라게 한 건 선제의 변화다.
상상조차 못 했다.
철혈대제라고 생각했던 시절부터 선제는 근엄하고 기품이 있고 당당하며 날을 세운 칼날과 같은 엄정한 기도가 있는 우뚝 선 남자였다.
그 남자가 지금은 저 동방 제국에 있다는 환관처럼 체통도 자존심도 없이 비굴하게 여신에게 아부하고 있다.
'이, 이건.'
마음 속에 굳건히 세운 벽 하나가 무너지는 느낌이다.
그 벽의 이름은 클라우데 2세이기도 했고 티그리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루페르트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리프니에를 보았다.
저 소녀의 형태가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다.
중요한 저 표정이다.
당장이라도 선제를 만나면 찢어 죽일 것처럼 떠들던 여신은 이제 그 찢어 죽여야 할 배교자를 향해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강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 눈빛은 뭐랄까, 적어도 루페르트 본인에겐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을 그런 눈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신님!!'
리프니에가 종잡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건 알고 있다.
그 얼마나 많은 혼란과 실망이 있었던가.
그럼에도 루페르트는 그 실망을 마주 보고 여신과 다시 마음을 이었다.
그 재결합은 강철로 만든 사슬보다 단단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여신의 속성은, 그녀가 풍기는 냄새처럼 바다를 닮은 모양이다.
"폐하. 당신이 저를 떠난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나요?"
저토록 쉽게 마음이 변하는 걸 보면.
평온하던 바다가 모든 걸 집어삼킬 것처럼 날뛰고 그 격랑의 바다는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물결조차 일지 않는 잔잔한 호수의 표면처럼 변하곤 한다.
"폐하."
또 하나가 거슬린다.
"...."
호칭이다.
전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리프니에는 늘 그랬다.
선제를 언제나 폐하로 불렀다.
루페르트는 여전히 루페르트 가우저인데.
지금까지는 그 차이를 조금도 심각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다.
루페르트는 매사 의심하기보다는 사람 좋게 넘어가려는 성질이 있으니.
그 여신과 선제의 이야기가 마침내 끝났다.
"...이번 한 번은 용서해 주겠어요."
"감사합니다."
여신이 선제를 용서했다.
자신을 악마라고 욕하고 자신의 품에서 뛰쳐나가 루페르트라는 또 다른 사도를 해치려고 한 자를 너무나도 쉽게 용서한 것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아주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 화기애애한 장면에서 불길한 이유는 전조를 드러내고 있었다.
"저도 참, 매몰차지 못하네요. 겨우 천 년 남짓을 함께했다고 제 마음이 이렇게 약해지다니."
둘은 한두 해를 같이 보낸 게 아니다.
천 년을 함께했다.
가장 금슬 좋은 부부조차 100년을 함께할 수 없는데, 저 여신과 황제는 천 년이란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이다.
"게다가 폐하는 제가 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죠. 저도 폐하를 좋아했고요."
"...."
"표정이 왜 그러세요? 루페트르 가우저?"
멀리 선제가 슬그머니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루페르트는 그 모습을 보며 여신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저를 버리시는 겁니까?"
147화 36. 대경기장 (1)
그 말은 루페르트 본인조차 당황으로 몰아넣었다.
'내, 내가 어떻게 이런 말을.'
왜 그런지는 이해할 것 같다.
한때 티그리트-클라우데 2세는 루페르트가 닮기를 원했던 동경의 상징이다.
그 동경은 천천히 무뎌졌고, 결정적인 계기로 돌이킬 수 없는 갈등으로 변했다.
그 동경하던 자가 권력을 요구한다.
루페르트 본인은 단 한 번도 자신이 권력욕의 화신이거나, 권력을 위해 많은 걸 희생하는 폭군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
비록 무능할지언정 그는 주변 사람에겐 다정다감했고, 특별한 위해를 끼치지 않는 소극적인 군주였다.
그러나 이제 힘을 얻고 황제의 자리라는 게 익숙해졌다.
은연중에 들려오는 찬사는 격무로 지친 황제의 목을 해갈하는, 중독성 있는 생명수였다.
선제후들은 이제 루페르트를 더 이상 우습게 보지 못한다.
루페르트를 하인처럼 보던 레벤호스트는 이제 루페르트의 눈치를 보고, 나머지 선제후들은 저마다의 셈법을 가지고 있지만 황제 루페르트를 인정하고 있다.
여기까지 이르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는데 이제 와서 황위를 내놓으라니.
밖으로 표출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티그리트-클라우데 2세에 대한 루페르트의 감정은 증오보다 깊었다.
상대가 너무 강하기에, 이 세상의 섭리로 종잡을 수 없기에, 주눅이 들어서 그 사실을 본인도 잘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신이 그의 편을 들고 나섰다.
두 명의 황제 중 여신이 택한 건 루페르트였다.
그녀는 자신이 루페르트를 돕고 나서겠다고 스스로 말했고, 그 사실은 루페르트가 여기까지 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 여신이 보인 모습은 실망 그 자체였다.
배신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당연히 눈앞의 반역자를 신의 권능으로 소멸할 줄 알았는데, 그 여신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과거의 인연을 이야기하며 저 반도에게 자기보다 더 살가운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닌가?
아마 그 증오와 실망이 루페르트에게 그조차 당황하게 하는 말을 내뱉게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
후회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은연중으로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신마저 날 버리면 난 이제 진짜 끝이다. 제국의 운명을 논하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 없을 정도로.'
"오해예요."
그의 여신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해 보지만, 루페르트는 잠시 잊고 있던 저 "안젤리나 비슷한 것"에 대한 혐오가 내면에서 다시금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그 표정과 감정조차 꾸며 낸 것 같다는 애써 외면하던 사실이 선명하게 들어오는 걸 보면 말이다.
"...오해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루페르트는 담담하면서도 단호하게 자신의 실망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의 실망은 여신에겐 그다지 와닿지 않는 그러한 감정으로 보인다.
"이게 그리 화를 낼 일인가요?"
여신은 얼굴에서 당혹감을 지워 버리곤 오히려 정색하며 물었다.
"그는 저를 끝까지 위협할 겁니다."
"그는 약속했어요. 다시는 당신에게 손대지 않기로."
여신이 다가왔다.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의 사도를 올려다보았다.
"루페르트 가우저."
"...."
"그 제국 성인이라는 조잡한 장난감이 당신을 공격하는 일은 더는 없을 거예요. 폐하는 잘 삐치긴 하지만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랍니다. 저와 약속했으니 이제 안심하세요. 당신의 치세는 보장될 거예요."
"...왜 저를 폐하라고 불러주시지 않는 겁니까?"
루페르트가 안젤리나 비슷한 것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소녀가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그러나, 싸늘한 냉소였다.
"...주제넘게."
순간 루페르트의 귓가에 선제의 매몰찬 한마디가 느닷없이 떠올랐다.
"언제까지 저 자칭 여신이라는 괴물을 견딜 수 있는지 보겠다."
선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왠지 그런 말을 했을 것 같다.
짧은 시간 걷잡을 수 없이 쌓인 악감정이 그 말을 의식 속에 메아리치게 한 것이다.
"당신에게 보여 줄 게 있어요."
거부권은 없었다.
여신이 단지 돌아선 것만으로 루페르트의 의식은 마치 불이 꺼지는 것처럼 사라져 버렸으니까.
풀썩.
두 황제 중 하나가 쓰러졌다.
순진무구한 새 몇 마리에 그 소리에 놀라 하늘 위로 푸드덕 날아올랐지만, 빽빽한 숲은 그 모습을 보여 주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 * *
깡! 깡!
루페르트의 의식을 깨운 건 망치 소리였다.
뒤이어 비릿한 악취와 불쾌감, 텁텁함, 갈증, 만연한 고통이 날카로운 바늘처럼 정신을 헤집어 루페르트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헉!"
언제 흘린지도 모를 땀방울 몇 개가 횃불이 비추는 벽면 주위로 비산했다.
그곳은 처음 보는 장소였다.
'여기는?'
끼리릭- 끼릭-
날카로운 쇠사슬 소리가 루페르트의 귓전을 강하게 때렸다.
루페르트는 엉겁결에 몸을 움직였고, 뒤이어 자신이 알 수 없는 마치 지하 감옥으로 보이는 곳에 사슬로 묶여 있다는 걸 발견했다.
옷은 걸치지 않았다.
국부를 가리는 누렇게 뜬 더러운 천이 루페르트의 알몸을 가린 전부였다.
만연한 악취의 원인을 그제야 발견했다.
그 방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수도 없이 있었다.
하나 같이 헐벗어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무엇보다 그 두 눈동자 안에 예외 없이 절망을 품고 있었다.
한 사내가 루페르트를 보고 뭐라고 말했다.
외국어다.
루페르트는 곧 그 외국어가 자신이 아는 언어라는 걸 발견했다.
'룸어?'
회귀 초반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고 갈고닦았던 룸어다.
그런데 그 사내가 말하는 룸어는 루페르트가 배운 세련된 명사와 동사의 변형은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굳이 해석을 한다면.
"눈 떴어? 눈 떴어?"
이런 느낌이다.
루페르트는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복기했다.
수많은 회한과 증오, 실망이 루페르트의 눈동자 위에 떠올랐다 사라졌고, 그는 곧 자기도 모르게 한 이름을 증오를 닮아 뇌까렸다.
"티그리트...!!"
"티그리트?"
알 수 없는, 삐쩍 말라 피골이 상접한 사내는 그 이름을 아는 눈치였다.
"티그리트. 티그리트. 나쁜 놈. 개자식, 창녀의 아들."
고개를 처박고 있던 또 다른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루페르트 앞에 있는 사내보다는 완성된 문장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 배교자는 왜 찾나?"
그의 피부는 흑단처럼 검었다.
루페르트는 불사자의 땅 너머에 산다는 흑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제국과 그들의 땅 사이엔 이해하기 어려운 거대한 건축물로 가득 찬 불사자의 땅과 죽음의 사막이 가로막고 있으니까.
심지어 그 중간엔 동방 제국이 호시탐탐 지나가는 모든 서쪽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그들의 무역로를 지키려 한다.
"그를 아나?"
루페르트는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말했다.
기이하게도 루페르트는 그 언어에서 마치 자신이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들었던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나라의 언어 같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모국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 흑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그 배교자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여기는 어디지?"
그의 물음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중에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얼굴에 파란 문신을 새긴 사내가 시커먼 이를 드러내며 욕을 내뱉었다.
"미친놈인가? 이 새끼. 드디어 정신이 맛이 간 모양인데?"
루페르트는 그를 눈을 휘둥그레 크게 뜨고 응시했다.
틀림없다.
이 사내가 말한 언어는 루페르트가 말한 제국어다.
남부 저지대의 어눌한 방언처럼 들렸지만, 그가 쓰는 언어는 루페르트가 사용하던 제국어와 놀랄 정도로 흡사했다.
그만이 아니다.
비슷한, 얼굴에 문신을 새기고 머리에서 썩은 버터의 악취를 풍기는 야만인들이 루페르트의 언어로 역겨운 소리를 내뱉었다.
흑인이 경멸을 숨기지 않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어인들은 무시해. 룸인조차 교화를 포기한 짐승 같은 놈들이니."
"룸."
"그래. 여기가 룸이다."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복도를 때리는 날카로운 채찍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날카로운 룸어가 복도를 채찍처럼 후려쳤다.
"기어 나와! 노예들아! 뒤질 시간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천지를 구르는 발 구름과 환호성이 들려왔다.
쿵! 쿵! 쿵!
죽여! 죽여! 죽여!
세상천지가 들썩이고 그 천지를 들썩이게 하는 건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다.
루페르트는 룸어 교육 시간에 읽은 여행자의 수기가 묘사하는 사악한 한 장면을 떠올렸다.
"설마 여기는?"
루페르트가 이름을 모르는 흑인에게 물었다.
"대경기장이다. 친구. 정신 차려라. 정신 차리지 않으면 곧 죽게 될 테니."
노예 감독관들이 노예들을 끌어냈다.
일부는 저항하며 나가려 들지 않았지만, 무자비한 채찍질이 가해지자 제 발로 헐레벌떡 감옥 안을 뛰쳐나갔다.
"너."
감독관이 루페르트를 보았다.
그는 루페르트의 팔목을 채운 수갑에 적힌 문자를 보고는 코웃음을 치더니 갑자기 루페르트의 뺨을 후려쳤다.
짝!
고통보다 참기 어려운 건 분노였다.
"넌 오늘 죽는다."
루페르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대체 무엇이 나를 이 이상한 꿈의 세계로 데려왔나 말이다.'
짐작 가는 곳은 있다.
그의 여신이다.
의식이 불처럼 꺼지기 전에 여신이 말했다.
보여 줄 게 있다고.
'대체 뭘 보여 준다는 거지? 룸 제국의 유명한 악취미를 구경이라도 하라는 건가.'
노예들과 함께 복도를 걸었다.
저 너머에 빛으로 가득 찬 창이 보인다.
기이하게도 루페르트는 이 어두운 복도와 저 네모난 빛으로 이루어진 별세계의 입구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
그곳은 회귀 전에 보던 복도를 연상케 하는 이 있었다.
어두운 복도에 유독 그 출구만 빛으로 가득하다는 점에서.
그러나 그 복도엔 죽음이 가득했다.
복도의 벽엔 시체가 걸려 있었다.
마치 보란 듯이.
이 행렬을 벗어나면 어떤 운명이 기다리는지.
그 시체의 일그러진 얼굴과 온몸에 가해진 학대의 흔적을 루페르트는 쳐다보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
그보다 그는 이 악몽에서 벗어날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악몽에서 깰 수 있는 거지?'
악몽은 그러나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 한 방울의 궤적마저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빛이 가까워진다.
지린내가 풍겼다.
앞에 걸어가던 노예 하나가 오줌을 지린 것이다.
그 노예는 다름 아닌 루페르트와 같은 말을 쓰던 야만족이었다.
루페르트가 그 오줌으로 이루어진 웅덩이를 피하려 하자, 옆에서 걷던 흑인이 말했다.
"겁쟁이의 오줌은."
그가 오줌을 밟았다.
"용기 있는 자의 행운이 된다고들 하더군."
"...."
흑인이 그를 보며 빙그레 웃었지만, 루페르트는 오줌을 피했다.
곧 빛이 둘을 감쌌다.
거대한 광장과 그를 에워싼 넘을 수 없는 벽들과 그 위 단상을 가득 채운 군중들이 루페르트의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대경기장인가.'
꿈인지 현실일지 모를 세계, 황제는 과거의 대경기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148화 36. 대경기장 (2)
일전에 룸에 왔을 때 무너진 잔해를 본 적이 있다.
무너진 잔해만으로도 충분히 크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본 대경기장의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
대리석과 아치만으로 이렇게 크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룸제국인의 기술력
은 가히 명불허전이었다.
실제로 본 대경기장은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크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거인을 벽돌로 삼아 쌓은 성을 보는듯한 기분이다.
"집정관 포르필리우스 님께서 이번 경기를 준비하셨다. 경기만이 아니다. 뒤를 볼지어다. 룸의 시민들이여!"
커다란 바구니를 인 노예들을 거느린 사람들이 바구니에 담긴 빵과 소시지, 말린 생선 따위를 보이는 대로 던졌다.
군중들의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일부는 포르필리우스라는 이름을 연호했지만, 일부는 야유를 보냈다.
"비첸자드보다 못한데? 왜 검은 빵이냐고. 비첸자드는 하얀 빵을 줬는데!"
룸어는 지위가 높고 고도의 가정교육을 받을 수 있는 상류층의 언어라는 것이 룸 제국의 정신적 후계자라고 주장하는 제국 전반에 깔린 생각이다.
그러나 실제로 본 룸 사람들의 말은 더럽고 천박했고 잔망스러웠다.
수많은 사람이 떠들고 있지만, 진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세련되고 위엄에 찬 듣기 좋은 목소리는 찾을 수 없었다.
남자들의 음정은 제국보다 훨씬 높았고, 말이 지나치게 많고 빨라 수다스러워 보였다.
마치 음표가 많은 악보처럼 말이다.
그 소란 속에서 이름을 알지 못하는 흑인이 말했다.
"내 이름 기억하나?"
루페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달이네."
비달이 움푹 파인 눈두덩 아래 자리 잡은 검은 눈동자가 경기장 곳곳을 분주하게 움직이는 진행 요원들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이번 경기는 고슴도치인 모양이군."
"고슴도치?"
"정말로 기억을 잃은 모양이군. 그 끔찍한 경기마저 잊어버린 걸 보니."
철컥.
경기장 위에 오른 노예들의 발목엔 어김없이 쇠사슬로 묶을 수 있게 고리를 부착한 발찌가 채워져 있다.
간수들이 그 발찌에 쇠사슬을 집어넣고, 경기장 바닥에 튀어나온 고리와 연결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페르트는 고슴도치의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간수들이 투창이 가득 담긴 통을 노예 앞마다 갖다 놓는 걸 보고 루페르트는 고슴도치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고슴도치가 될 정도로 많은 투창이 꽂혀 죽는다는 의미인가.'
경기장 위엔 30명에 달하는 간신히 국부만을 가린 노예들이 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들의 배치는 제각각이었다.
멀찌감치 구석에 자리 잡은 자도 있고 거의 서로 맞닿을 정도로 밀접하게 배치된 자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그들 앞에 8개의 투창이 담긴 통이 있었다.
화려한 색채를 가진 예복을 입은 사회자가 천둥 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집정관 포르필리우스 님의 제공으로, 이제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고슴도치 경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음껏 즐겨 주시길."
환호성과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루페르트에게 낯선 세계를 이야기해 주던 흑인도 루페르트에게 익숙한 언어를 내뱉으며 욕질을 하던 야만인도 모두 발목에 족쇄가 차인 채, 피를 갈구하는 군중의 환호성에 에워싸였다.
"멋진 경기를 펼쳐라."
방패를 든 병사 뒤의 감독관이 싸늘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곳의 왕은 군중이다. 만약 그들이 야유를 보낸다면, 너희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그럼에도 노예들은 주저했다.
갑자기 투창을 들고 상대방에게 집어 던져 죽여야 하는 상황이 바로 수긍하고 받아들이기엔 지나치게 난이도가 높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군중들의 야유가 하나둘 들려오자 감독관이 박수를 쳤다.
그러자 루페르트 일행이 나온 문과 반대쪽, 황동으로 장식되고 거대하며 누가 봐도 훨씬 더 강한 무언가가 안에 도사릴 것 같은 문이 열렸다.
그 너머에 있는 건 전사 그 자체를 육체로 빚은 듯한 사내였다.
크고 강력하다.
그 이상의 수식어는 필요 없었다.
한 가지 더 보탠다면 날래다는 표현도 쓸 수 있을 것이다.
은으로 만든 가면을 쓴 사내가 등장하자 군중들이 일제히 야유를 퍼부었다.
"배교자! 배교자!"
"신을 버린 놈!"
"역겨운 놈!"
하지만 루페르트는 그 야유 속에 자신이 받았던 것과 전혀 다른 감정이 숨겨져 있는 걸 발견했다.
그것은 기대이자 열망이다.
저 잔혹한 룸의 군중들은 저 사내를 야유하면서도 그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한 뚱뚱한 사내가 술잔에 가득 담긴 술을 배에 전부 쏟아 버릴 정도로 칠칠치 못하게 들이킨 후, 금지된 이름을 소리쳤다.
"티그리트!"
한 사내가 외치자, 다른 군중들이 덩달아 그 이름을 외쳤다.
"티그리트!"
"티그리트!"
"티그리트!"
대경기장 전체가 하나의 이름으로 들썩거렸다.
그 안에서 경기장 곳곳을 감시하는 군인과 감독관, 문 너머에 으르렁거리는 야수, 경기장 위에 족쇄를 찬 채 죽음을 기다리는 스물아홉 명의 노예와 루페르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이 사내가 티그리트라고?'
투구가 부착된 가면을 썼기에 얼굴은 알아볼 수 없지만, 저 몸.
저 크고 강한 야수를 닮은 육체는 루페르트의 기억에 화상처럼 새겨진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틀림없어. 선제다. 철혈대제, 아니 노예제 티그리트다.'
이야기로만 듣던 검투사 시절의 노예제를 만났다.
그러나 그는 친절한 조력자도 권력을 두고 다투는 경쟁자도 아니었다.
병사가 그 앞에 투창이 담긴 통을 내려놓았고, 그가 투창을 들었다.
여기서 티그리트는 사형 집행인이다.
졸렬한 경기를 펼치는 하찮은 노예들을 벌하기 위한.
"노예들이 지나치게 소극적이기에 경기 내용을 변경하겠습니다! 오늘의 경기는 늘 하던 것. 배교자 죽이기입니다. 아니, 티그리트로부터 살아남기인가? 어느 쪽이건 좋습니다! 자, 판돈을 걸어 주십시오! 곧 속행하겠습니다!"
노예들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늘 침착하던 비달도 온몸이 땀에 젖을 정도로 긴장하면서, 열 발자국 거리에 있는 루페르트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역시 믿을 건 자네뿐이군."
"...."
갑작스러운 기대.
루페르트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비달을 응시했다.
"옛 미네아의 경기장에서 원반과 투창을 던지는 경기를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하지 않았나?"
"그, 그런가?"
"기억 안 나나? 그대도 그곳의 챔피언이라고 했잖아?"
기억이 날 리 없다.
루페르트가 그런 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
"내 이름이 뭐였지?"
엉겁결에 루페르트가 물었다.
비달이 뭐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루페르트의 귀에 들려오는 일은 없었다.
군중의 함성이 주변의 모든 하찮은 소음을 묻어 버렸으니.
"티그리트!!!!!"
군중들이 소리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경기장에 한 사내가 미간에 창이 꽂힌 채 누워 있었으니.
루페르트에게 험한 말을 쏟아 내던 야만인이다.
룸인의 언어로는 고어인.
제국의 일부 부족을 일컫는, 이제는 사전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옛말이다.
티그리트는 제국을 통일하게 제국 이전의 색채를 가진 차별적인 용어를 모조리 정리했으니까.
제국이라는 이름에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룸 제국 시절에 제국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고어인, 아우리아 사람, 숲 부족, 트리에인, 마인인 등 다채로운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 수많은 이름 가진 야만인 중 가장 강한 자가 투창을 들었다.
"저 마인인은 죽일 수 없어."
비달이 투창을 들려다 내려놓았다.
다음 순간 번갯불처럼 날아온 투창이 흑인의 몸통에 정확히 박혔다.
그 투창에 담긴 힘이 얼마나 강한지 비달은 투창을 맞은 채 쇠사슬이 끊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당겨지는 거리까지 날아간 후 숨을 거뒀다.
"...."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루페르트는 저 멀리 서 있는 거대한 전사를 노려보았다.
'이, 이게 노예제?'
언젠가 그와 검을 겨룬 적이 있다.
그는 말했다.
자신과 세 번 이상 합을 겨룰 수 있는 상대는 없다고.
자신이 강하다는 수사의 한 종류로 이해했다.
전혀 아니었다.
저건 괴물이다.
도펠죌트너니 마법사니 이런 이능의 힘을 더하고 뺄 것도 없다.
저 경기장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자는 존재 그 자체로 인간을 넘어서는 무언가다.
"죽여! 안 죽이면 우리가 죽어!"
노예들이 창을 들고 티그리트를 향해 반격하기 시작했다.
티그리트는 날아오는 창을 때로는 피하기도 하고 때로는 창대로 쳐 내기도 하며 때로는.
툭.
날아오는 창을 얼굴 바로 앞에서 붙잡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의 손엔 창이라고 불릴 정도의 길이를 가진 단창은, 그러나 저 가면을 쓴 전사에겐 단도처럼 작아 보였다.
핑그르르 단창을 손위에서 돌린 후 그는 그 단창을 그대로 원래의 소유자에게 돌려주었다.
푹!
"가아아아아악!!!"
또 한 명이 쓰러졌다.
열댓 개의 투창이 신경질적으로 날아갔다.
누가 봐도 티그리트가 고슴도치처럼 변할 정도의 화망이건만 티그리트는 그 안에서 무엇을 봤는지 흐느적거리는 움직임만으로 모든 투창을 피해 내고 그중 하나를 붙잡아 또 다른 노예의 몸통을 꿰뚫었다.
"어억!"
"아아아악!!"
노예들이 죽어 나간다.
30 대 1이라는 전력비도 절대적인 괴물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티그리트!"
"티그리트!"
경기장엔 그들의 신앙을 버린, 그러나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애증의 챔피언 이름만이 종교처럼 연호했다.
경기장이 떠나갈 것 같은 환호성 속에서 노예들은 순식간에 절반 이하로 줄었다.
이제 그 쓰러뜨릴 수 없는 존재는 루페르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저 살인자가 이제 루페르트를 주목하고 있다.
그가 통에 담긴 투창 하나를 가볍게 꺼내 루페르트를 겨냥했다.
꿀꺽.
루페르트는 침을 삼키며 그 끝을 노려보았다.
"...."
머리로 생각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다.
몸이, 아니 생의 의지가 그를 움직이는 것이다.
이 만연한 죽음과 피의 냄새, 지금도 온몸을 괴롭히는 갈증과 사슬에 묶인 쓰라림은 지금 상황이 꿈의 세계라기보다는 또 다른 현실이라는 걸 똑똑히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죽여라!"
"죽여!"
"에피크로티아 놈을 죽여라!"
"사니움 놈을 죽여라!"
갑자기 관중석에서 소요가 일었다.
투기장에 만연한 살육의 흥분이 관중석에 옮겨붙었는지 두 관중이 갑자기 단검을 들고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칼날을 휘두르고 있었다.
"무식한 새끼! 저건 에피크로티아 놈이야!"
"사니움 놈이라고! 에피크로티아는 북쪽 미네아고 사니움은 남쪽 미네아야. 북쪽 미네아 놈들은 저런 금발이 나오지 않아. 우리 집 여종 하나가 에피크로티아 출신이라 잘 안다고!"
룸 제국 시민 사이의 결투는 관중석의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려나 싶었지만 루페르트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었다.
이제 저 항거할 수 없는 사내가 루페르트를 창으로 노리고 있다.
어디로 향할 것인가.
늘 그랬던 것처럼 몸통인가.
순간 생각 하나가 들었다.
이것이 꿈이라면?
이 상황이 리프니에가 자신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한 환상의 세계라면?
죽어도 되는 게 아닐까?
맞서 싸우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닐까?
푹!
창이 루페르트의 몸에 꽂혔다.
죽진 않았다.
하지만.
"아아아아아악!!!!!!!!"
그 고통은 과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온몸이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쭈뼛거리며 몸이 차가워지고, 시야가 어두워지는 걸 느끼며 루페르트는 의식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루페르트는 사슬에 묶여 있었다.
익숙한 흑인이 그를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이. 괜찮나?"
"...."
하얗게 질린 얼굴로 루페르트는 현실을 인지했다.
경기 전으로 돌아왔다.
회귀.
그 울림이 이토록 씁쓸하게 입 안에서 울린 적은 없었다.
149화 36. 대경기장 (3)
'꿈에서마저 회귀를 한단 말인가.'
루페르트의 온몸이 위태로울 정도로 떨렸다.
"어이. 괜찮나?"
주변에서 걱정을 할 정도로.
아까 죽임당했던 고어인이 시커먼 치아를 드러내며 비슷한 악취가 나는 동족들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어이. 저 미네아 놈을 봐. 뭔 원반던지기? 하찮은 장난질 챔피언이라고 하더니만 역시 이런 전사들의 경기장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군. 어제는 무슨 깡으로 그렇게 노래를 불러 댄 거지?"
루페르트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어떻게 해야 이 빌어먹을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거지?'
치열한 고민 속에서 감독관이 나타났다.
짝!
어김없이 이번에도 그는 루페르트의 뺨을 때렸다.
"넌 오늘 죽는다."
살벌한 협박을 곁들이면서.
"...."
옆에 있던 비달이 물었다.
"어이. 괜찮아?"
"...."
루페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이한 일이다.
투창을 맞기 전만 해도 비달은 루페르트에게 이 낯선 세계가 어떤 곳인지 알려 주는 둘도 없는 소중한 조언자였는데, 창을 맞고 회귀한 지금은 귀찮은 소품 그 이상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어이."
"말 걸지 말라고!"
루페르트가 고함을 질렀다.
자신도 왜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화를 낼 이유는 충분한 것 같다.
몸통을 꿰뚫은 투창의 서늘한 감각은 지금도 발가락을 저릿하게 할 정도로 선명하게 남아 있으니까.
"...."
비달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뭐라도 한마디 할 것 같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감독관들이 노예들에게 바깥으로 나오라고 호출했다.
루페르트는 순순히 그들의 명을 따라 다시금 경기장에 섰다.
오줌이 흘러내리는 게 보인다.
큰소리치던 고어인이 다시금 오줌을 지린 모양.
루페르트는 실개천처럼 경사를 타고 흘러내리는 오줌을 피하며 경기장 위에 섰다.
익숙한 장엄함, 익숙한 수많음.
대경기장의 대지가 황제의 눈앞에 펼쳐졌다.
'대체 나는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지금 나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먼저 느껴진 건 여신에 대한 증오였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배신을 한 건 티그리트 아닌가? 왜 나를 탓하는 거지? 왜 내가, 내가 그런 배신자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거지?'
수많은 분노와 증오가 루페르트의 눈앞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래서인지 루페르트는 병사들이 자신의 발목에 사슬을 묶고 투창을 담은 통을 갖다 놓아도 조금도 의식하지 못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사회자가 우렁찬 목소리로 경기 시작을 알릴 때였다.
집정관 포르필리우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
여신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루페르트가 알고 싶은 건 그것뿐이다.
"자! 그럼 경기를 시작합니다!"
루페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티그리트의 등장을 기다렸다.
그를 봐야 뭔가 떠오를 것 같았다.
그러나.
푹!
티그리트가 나타나기도 전에 루페르트는 자신의 배를 뚫고 나온 날카로운 것을 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무시당한 흑인이 매몰찬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다 이내 다른 투창을 집어 들고 있었다.
'이, 이런...!!'
또 다른 격통이 루페르트를 덮쳤고, 그 열병 속에서 루페르트는 다시금 의식을 잃었다.
* * *
"...."
다시 사슬에 묶여 있다.
'벌써 세 번째인가.'
온몸이 아까보다 더 떨리고 있다.
창에 꿰뚫린 격통에 무슨 차이가 있겠냐마는, 적어도 루페르트가 느끼기엔 비달이 던진 창이 더 많은 고통을 주었던 것 같다.
떨어지는 각도라고 할까, 투창이 꿰뚫은 부위가 신경이 더 많은 부위를 지나간 거 같으니.
"괜찮나?"
비달이 물었을 때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공포를 담아 몸을 움츠렸다.
'이, 인간. 이 인간이 내게 창을 던졌어....'
기묘한 일이다.
첫 번째 경기에서는 루페르트의 둘도 없는 조력자였고 결코 그에게 창을 던질 생각을 하지 못했던 인물이, 두 번째 경기에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루페르트의 등에 창을 던졌다.
이유는 명확하다.
두 번째 경기 전에 루페르트가 그에게 고함을 지르고 예의 없이 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나 사람 등에 저토록 쉽게 창을 던진다는 것이, 어쩌면 이 룸 제국 시대의 광기가 모든 이의 마음에 스며든 탓인지도 모른다.
루페르트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격통의 잔여감을 느끼며, 비달에게 간신히 말했다.
"나, 나는 괜찮아."
말조심해야 한다.
그가 회귀의 소품처럼 여겨진다고 해서 하찮게 대접해서는 안 된다.
이 세계에 오기 전에 루페르트는 황제였지만, 여기서는 일개 노예다.
서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비달이지?"
그의 이름을 확인한 건 단지 이름만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이 비달이, 첫 번째 시점의 그 친절한 조언자인지 알고 싶어서다.
"알면서 왜 묻는 거냐?"
"그렇지."
가슴이 뛴다.
아니, 터질 정도로 고동치고 있다.
고통이란 그런 것이다.
채찍이 짐승을 움직이게 하는 것과 같다.
고통만큼 단순하고 명확한 울림이 어디 있을까.
회귀 전만 해도 루페르트는 폐부를 꿰뚫은 창날이 안겨다 준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세 번은 안 돼. 또 그 창에 맞을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의 여신이 당장 여기서 그를 꺼내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고통이야말로 리프니에가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신님.'
실망할 기운도 없다.
원망할 여력조차 없다.
중요한 건 여기서 어떻게든, 당장 다가올 고통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 창에 꿰뚫린다면, 그것이 내장을 찢어발기고 몸 안으로 파고드는 감각을 느낀다면 솔직하게 이제는 루페르트라고 해도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하나의 단순한 질문이 루페르트의 의식에 경종을 울렸다.
기다리는 건 티그리트다.
그 인간 같지 않은 괴물이 기다리고 있다.
그 괴물을 상대로 이긴다는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인간으로 맨손으로 곰을 이길 수 있을까?
사자나 늑대를 이길 수 있을까?
맹견조차 어려울 것이다.
짐승을 상대해 본 자는 알 수 있다.
도구 없는 인간은 조금 더 똑똑하고 느리고 약한 한 마리 양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슴도치라는 경기에 대해 아나?"
루페르트가 비달에게 물었다.
비달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지. 그건. 허나 끔찍한 방식이고 흥행주도 좋아하지 않아."
"흥행주?"
"우리의 주인이자 경기를 기획해서 돈을 버는 사람이지."
"왜 고슴도치를 싫어한다는 거지?"
"우리도 재산이거든. 고슴도치는 특히 재산을 많이 잃는 경기지. 물주가 흥행주에게 어지간한 특권과 금액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좀처럼 하려 들지 않지. 하지만."
비달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는 갓 흥행주가 산 노예들 아닌가? 우리들은 상대적으로 값어치가 싸."
"그렇다는 이야기는?"
"마음대로 던질 수 있다는 소리겠지."
"그 고슴도치는 전부 다 죽여야 끝이 나나?"
"아니?"
비달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어도 절반 정도가 남았을 때는 종료를 선언해."
"그렇군."
루페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두 눈에 생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 창에 꿰뚫리지 않고 살 수가 있는 방법이 있다. 아니, 티그리트를 만나지 않을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이란, 멀리서 보면 비참한 굴종이었다.
푹!
루페르트는 주저 없이 자신의 조언자인 비달에게 창을 던졌다.
몸통이 꿰뚫린 머나먼 황무지에서 온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루페르트를 노려보며 왜냐고 물으려고 하다 그대로 고꾸라졌다.
"...."
어쩔 수가 없다.
그가 가장 가까이 있다.
그가 배신을 할 수도 있다.
사실 배신이라고 하기도 뭐 하다.
여기 서 있는 노예들은 전부 서로를 죽여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이미 한 번 루페르트에게 창을 던진 자의 선의를 믿고 마냥 믿었다고 다시 등 뒤에서 창을 맞는 우를 범할 순 없다.
'미안하다.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다.'
순식간에 한 명을 죽인 루페르트는 또 다른 창을 집어 들고 두 번째로 가까이 있는 사내를 향해 던졌다.
기이하게도 루페르트는 투창을 던져 본 적이 처음이었지만 투창을 쥐는 법과 던지는 법, 어떻게 해야 상대방을 일격에 죽일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마치 솜씨 좋은 어부가 작살로 물고기를 한 번에 찍어 올리는 것처럼 루페르트의 작살은 그가 알지 못하는 이국적인 노예의 몸통을 꿰뚫었다.
와아아아아-!
순식간에 두 명을 죽인 루페르트를 향해 관중들이 환호를 보내왔다.
노예들의 시선이 루페르트를 향했다.
'어쩔 거냐.'
그들의 냉담한, 차가운 시선을 보며 루페르트는 속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함과 동시에 전의를 다졌다.
'여기서 안 싸우면 그놈이 나타난단 말이다. 그놈이....'
떠올리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리는 그 괴물.
티그리트.
그를 이 전장에 소환하지 않는 방법은 관중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즐거움은 피와 죽음이다.
티그리트가 나타나기 전에 경기장의 절반을 죽인다면, 적어도 오늘은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리프니에도 이 끔찍한 세계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그다음에 생각할 문제다.
그의 잔혹한 여신은 적어도 이 전장에선 그녀의 유일한 사도가 숱한 고통을 받아도 무시할 기세니 말이다.
슉--
루페르트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창을 던졌다.
그 창을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가 정확히 노예의 목에 적중했다.
"끄르르르...."
공교롭게도 방금 죽인 자는 루페르트와 같은 언어를 쓰는 고어인이다.
경기장을 나설 때마다 마치 매미처럼 오줌을 지리던.
와아아아아-!!
또 다른 환호가 루페르트를 감쌌다.
"저 에피크로티아 놈! 제법인데?"
"사니움 놈이야. 뭐 안다고 에피크로티아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 무식한 놈이."
"이 대머리가?!"
그런데 관중석에서 싸움이 벌어진다.
아까 싸우던 그 관중들이다.
루페르트는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분명히 상황이 달라지고 판 자체가 바뀌는 데 큰 틀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별다른 영향이 없다는걸.
무수한 회귀를 경험한 루페르트에게 이 현상은 단순한 흥미를 넘어 몇 가지 생각할 거리마저 남겼다.
'싸울 놈들은 뭘 어떻게 해도 싸운다는 것인가.'
싸움을 말릴 방법은 있다.
아예 경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두 관중 중 하나를 여기에 못 오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의미가 있는 행동일까?
싸움박질 한 관중 중 하나가 남는다고 해도 그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시비를 건다면?
알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이.
그것만으로 이 변화무쌍한 세계 전체를 통제하려 든다는 것이.
이 루페르트의 짧은 깨달음은 또 다른 형태로 루페르트에게 교훈을 주려 한다.
"저 새끼. 미네아에서 날리던 놈이야."
"미네아 경기장의 챔피언이라더니."
"거기서는 창과 원반을 던진다더니, 어쩌면 이 경기 자체가 흥행주가 놈을 위해 기획한 경기가 아닐까?"
"맞아. 투창 전문가이니 우리를 전부 죽이려고 판을 깔아 준 거야."
"어제 밤새 노래를 부르며 우리를 괴롭혀 대더니."
살아남은 노예들이 이제 루페르트와 똑같은 생의 의지를 눈동자에 빛내며 눈빛을 교환했다.
"...."
루페르트는 어렵지 않게 상황을 파악했다.
살아남은 스물여섯 명의 노예가 이제 루페르트를 적으로 인식한다.
"회귀의 덫."
루페르트는 조용히 한마디를 읊조렸다.
150화 36. 대경기장 (4)
삼십 대 일의 절망적인 전장을 피하려고 노예들을 죽였지만, 돌아온 건 이십구 대 일의 또 다른 절망이었다.
무수한 투창이 루페르트에게 날아들었다.
슉- 슉-
한 대만 맞아도 죽음에 이르는 투창이 화살 비처럼 루페르트에게 내리기 시작했다.
기이하게도 루페르트는 그 무수한 투창의 빗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
길이 보인다.
저 속으로 뚫고 가야 할 길이.
루페르트는 민첩하게 옆으로 구르고 질주하면서 날아오는 투창을 전부 피해 버렸다.
툭! 투두두둑!
그가 있던 자리에서 열 개에 달하는 투창이 박혔다.
나머지는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거나 혹은 지면에 박혔다.
어떤 놈은 자기 발을 찌르기도 했다.
"아아아아악!!!"
관중들의 폭소가 울리는 가운데 루페르트는 다른 창을 뽑아 들고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차분하게 응시했다.
"...."
순간 드는 의문 하나.
전부 다 죽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투창은 이제 네 개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싸워야 한다.
투창이 하나밖에 없더라도 어떻게든 싸워서 이 상황을 연장해야 한다.
다시는 그 창에 맞고 싶지 않다.
루페르트는 주저 없이 또 다른 노예를 향해 창을 던졌다.
이번엔 멀다.
앞에서 경계하는 놈 대신, 뒤편에서 여유를 가지고 보던 노예를 노렸다.
창은 정확히 무방비한 노예의 심장을 관통했다.
"커억!"
와아아아아-!!
"주, 죽여!"
"이 새끼가!"
노예들이 재차 창을 던졌다.
루페르트는 이번에도 모든 창을 피해 냈다.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는 루페르트도 모른다.
그냥 뭐랄까.
축구처럼 했을 뿐이다.
돌이켜 보니 루페르트는 축구를 잘했다.
축구라는 운동은 단순히 힘만 세고 날래서 되는 일이 아니다.
힘은 물론이고 유연함과 체력, 세련된 기술과 육박해 오는 상대 전체를 두루두루 봐야 하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저 바다 건너, 레벤호스트의 장인의 나라이기도 한 앙쥬 왕국에서는 축구를 병사들의 훈련을 겸한 놀이로 이용한다고 한다.
제국군도 훈련까지는 아니지만,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축구를 즐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달리 말하면 축구는 그 자체로 또 다른 전투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거기서 정점을 찍었다는 것이 당시엔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자신에겐 자기도 모르는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하지만 그 재능이라는 것도 결국은 현실에 발목이 잡히는 법이다.
철컹!
신들린 듯 날아오는 투창을 피하던 루페르트의 몸이 멈췄다.
발목에 묶은 사슬이 한계에 걸린 것이다.
'이런!'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루페르트가 떠올린 건 한 마리 고슴도치였다.
푸푸푸푹!
셀 수 없는 투창이 루페르트의 몸에 박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진 루페르트의 몸을 향해 또 한 차례의 창들이 분노를 담아 날아왔다.
한 마리 고슴도치가 된 채 황제는 또다시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 * *
"...."
이제 몇 번째 회귀인지 알 수 없다.
기이하게도 루페르트는 자신의 몸이 더 이상 떨지 않는 걸 발견했다.
뭔가 차분했다.
차분하고 조용하고 안온하기까지 했다.
여전히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은 지옥과 다를 바 없지만 루페르트의 마음은 홀가분하기만 했다.
뭐랄까.
미련이 없어진 느낌이다.
몸에 박힌 수십 개의 살의가 머릿속을 지탱하고 있던 무언가를 끊어 버렸다고 해야 할까.
이 끔찍한 세계에 던져졌을 때만 해도 루페르트는 여신에 대한 애증, 자신을 도울 거라는 기대와 여신에 대한 원망을 동시에 가졌지만, 여러 개의 창을 몸에 받아들인 이후에는 그런 고민도 방황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중요한 건 하나다.
이 상황을 빠져나가는 것.
오늘을 살아나가는 것이다.
"내 이름이 뭐였지?"
루페르트는 옆에 있던 비달에게 물었다.
비달이 뭐라고 말했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루페르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깃들었다.
여신은 있다.
지켜보고 있다.
지켜보고 있기에 현재 자신이 머물고 있는, 이 놀랄 정도의 운동력을 가진 육체 주인의 이름을 안 들리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좋다.
여신이 보고 있다면.
"고슴도치라고 아나?"
육체와 정신은 둘이 아니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은 대부분 맞는 말이다.
몸이 떨림이 멈추자 루페르트는 자기도 놀랄 정도의 침착함과 사려 깊음을 느끼며 주위를 살폈다.
자신을 포함해 총 30명의 노예들.
이들은 적도 아니고 아군도 아니다.
하나의 퍼즐이다.
이 퍼즐을 어떻게 움직여서 어떻게 배치해야 오늘의 전장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보았다.
하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티그리트를 불러내는 것.
그건 살기 어려운 방법이다.
두 번째는 노예들끼리 살육을 펼쳐 경기를 끝내는 것.
이 또한 쉽지 않다.
표적이 되는 순간, 루페르트는 협공을 받아 죽게 될 터이니.
하지만 루페르트가 볼 때는 후자가 더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레벤호스트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와 벌인 수많은 협잡질의 경험이 있어서일까.
루페르트는 더럽고 냄새나는 노예들만 모인 이 상황이 정치의 또 다른 연장으로 느껴졌다.
'비달 말대로 절반이 살아남고 끝나는 경기라면 아군은 필요하다.'
누구를 아군으로 할 것인가.
한 명은 정해졌다.
"비달."
"어, 그래. 누로스인."
"누로스? 그건 뭐지?"
"네 고향이라며?"
"에피크로티아도, 사니움도 아니야?"
"뭔 소리야. 어제만 해도 누로스 술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고 누로스 여자가 제일 예쁘다며?"
"...그렇군."
루페르트는 조용히 비달에게 자신의 계책을 말했다.
"뭐? 힘을 합치자고?"
"고슴도치라는 경기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고슴도치?"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투창 하나는 자신이 있거든."
"레슬링과 원반던지기도 잘한다며? 뭐, 제일 잘하는 건 여자를 기쁘게 하는 기술이었나."
"...그건 잠시 잊어 줘."
루페르트는 속으로 이 육체의 전 주인이 어떤 인간이었는지 궁금해했다.
루페르트처럼 다정다감하고 조용히 자신의 취미를 즐기는 사람은 아니리라.
그의 심증은 곧 나타난 감독관에 의해 완벽히 굳어졌다.
짝-!
감독관이 루페르트의 뺨을 때렸다.
여기까지는 전과 비슷한 흐름.
루페르트는 하나의 질문을 추가했다.
"왜 제가 맞는 거죠?"
"뭐?!"
"아니, 감독관님. 진짜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이 새끼가! 네놈이 밤새 노래를 처불러 대서 이 방의 노예는 물론이고, 다른 방의 검투사도 잠을 못 잤다고 하잖아!"
"마, 맞을 짓 했군요."
짝-!
"한 대 더 맞아!"
매를 하나 더 벌긴 했지만, 루페르트의 입가에 걸린 건 희미한 미소였다.
'대체 어떤 놈인가. 내가 움직이는 이놈은.'
거울이 있다면 보고 싶다.
이 육신의 얼굴을.
행실은 경박하지만 누구보다 잘 단련되고 잘 움직여 주는 육체를 만들어 준, 이 사람의 얼굴을 말이다.
"노예들은 일렬로 서라. 곧 경기를 시작한다."
회귀의 복도를 연상케 하는 복도에 다시금 섰다.
저 멀리 빛의 영역을 보며 루페르트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더 이상의 떨림도 두려움도 미련도 없다.
앞만 보는 짐승이 두려움을 모르는 것처럼, 적어도 오늘은 그런 한 마리 짐승이 되리라 생각하면서.
주르륵-
오줌 줄기가 실개천처럼 흘러내린다.
그때마다 피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같은 언어를 쓰는 자의 오줌을 맨발로 밟으며, 루페르트는 비달에게 미소 지었다.
"겁쟁이의 오줌은 용기 있는 자의 행운을 준다고 했나?"
이에 비달이 웃으며 답했다.
"네가 한 말이잖아."
이제 대경기장이 두 사내 앞에 펼쳐졌다.
"비달."
"응."
"투창에 경험이 있나?"
"우리 고향에서는 투창으로 사냥을 했지. 사자, 코끼리는 물론이고 바실리스크와 코카토리스조차 투창으로 잡았지."
"귀여운 동물이 많이 사는 곳이군."
"귀엽지는 않던데."
"나는 귀여운 동물을 좋아하지. 나중에 돌아가면 황궁에 있는 동물원을 돌봐야겠어."
"황궁? 무슨 소리 하는 거지? 어제부터 이상하더니 드디어 미쳐 버린 건가?"
감독관들이 발목 족쇄의 고리에 쇠사슬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루페르트는 룸 숫자로 13이라는 숫자가 쓰인 자신의 족쇄를 물끄러미 보다 비달에게 말했다.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만한 놈이 있을까?"
"우리 편?"
"고슴도치를 한다면 편을 먹는 게 좋지 않겠어?"
"일단 너는 아무도 안 좋아해."
비달이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그, 그렇겠지?"
다른 건 몰라도 이곳의 루페르트가 만인의 원망을 산 건 확실하다.
지난 전장에서 나머지 모든 노예가 일치단결해 루페르트를 죽이려 든 것도 어떻게 보면 루페르트의 실력 탓만은 아니리라.
'쉽지 않군. 이건.'
어째서인지 루페르트는 지금 상황에서 강한 흥미를 느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회귀라는 권능. 아니 돌아갈 수 있다는 권능의 메리트를.
지나칠 정도로 많은 제약과 정치적인 문제, 여신의 어려움으로 그 권능의 사용을 주저했다.
사실, 정치라는 게 돌린다고 해서 획기적인 변화가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처럼 찰나에 운명을 걸고 덤비는 상황이라면?
회귀의 힘을 통해 상황을 만들어가고 재구성하는 맛이 있는 게 아닐까?
'내 편은 비달뿐인가. 둘로는 어려워. 최소한 다섯은 있어야 한다. 내 실력을 감안하면.'
다섯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안 그래도 미움받는 천덕꾸러기인 현재의 시점에서.
'아니.'
루페르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방법은 있다.
있을 수밖에 없다.
"어이! 시꺼먼 이빨! 이야기 좀 하자!"
루페르트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가장 놀란 건 비달이었다.
"어이. 너. 고어인의 말을 할 줄 아는 거냐?"
"...기본 소양이지."
루페르트는 자신을 바라보는 야만인을 향해 자신의 언어로 당당하게 말했다.
"살고 싶나? 살고 싶으면 나와 함께 싸우지 않겠나?"
"무, 무슨 소리냐?! 이 건방진 곱슬머리!"
"이번 경기가 무슨 경기인지 알고 있지? 살고 싶으면 한 명이라도 같은 편을 만드는 게 좋은 거 아닐까?"
루페르트의 말은 다른 노예들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다.
대놓고 편을 짜고 자기들을 죽이자는 소리니.
당장 이쪽에서도 편을 짜고 맞서려 들 것이다.
하지만 현재 루페르트가 말하는 언어는 오직 야만인만이 알아들을 수 있다.
고어인이라 불리는, 새로운 제국을 이룰 부족만이.
주저하는 고어인을 향해 루페르트가 담담하게 말했다.
"고어인은 겁쟁이인가?"
도발이다.
"오줌을 지리고 아녀자처럼 벌벌 떨며 바닥에 누워 죽는 게 고어인의 천성인가?"
머리에서 썩은 버터 냄새가 나는 야만인들이 앞다투어 욕을 내뱉었다.
루페르트가 그들을 보며 말했다.
"우리 언어는 우리만이 알아들을 수 있다. 우리가 편을 먹는다고 해도 여기 있는 다른 놈들에겐 들리지 않는다는 소리지. 이 유리함을 그냥 허투루 날려 보내는 게 고어인의 수준인가?"
야만인은 야만인이다.
모두가 역정을 낼뿐 누구도 루페르트의 말을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니, 한 명이 있다.
"기다려 봐!"
검은 치아가 말했다.
오줌을 지린 그 사내다.
"내 이름은 우줄두스다."
"우줄두스."
루페르트가 쾌활하게 웃었다.
"룸어에 더럽히기 전의 이름이구만."
용기 있는 자는 겁쟁이의 오줌에서 행운을 얻는다고 한다.
그 겁쟁이가 루페르트를 진지한 눈으로 보았다.
"우리를 살려 줄 수 있나?"
이에 황제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명에 따른다면."
151화 36. 대경기장 (5)
위버하임에서 배움에 매진할 때 루페르트가 가장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과목은 전쟁에 관한 학문이었다.
뭔가 와닿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는 걸 업으로 하는 자들을 움직이고 배치해서 비슷한 인간들을 죽인다는 행위 자체가.
사실 군주가 전쟁과 전술에 관한 기술을 배울 필요는 없다.
군주가 직접 친정(親征)을 하는 일이 드물기도 하거니와, 현재의 전장은 전문적인 직업군인들이 지휘를 맡기 때문이다.
제국이 내전에 휩싸였을 때 골트문트도 직접 자신이 사비로 모집한 군대를 이끌고 친정에 나서긴 했지만, 그 군대를 지휘한 건 당대에 불패의 명장으로 명성을 떨치던 직업군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머리를 굴려야 할 때다.
여기 삼십 명의 노예가 있다.
이 삼십 명의 노예는 절반이 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여야 한다.
열다섯 명이 죽기 전까지 살아남는 것이 당면한 목표다.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루페르트는 암암리에 아군을 만들었다.
그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했던 비달, 그리고 고어인.
고어인의 숫자는 총 일곱 명이다.
즉, 루페르트가 즉석에서 만든 파벌의 숫자는 아홉 명.
이들을 이용해 열다섯 명을 빠르게 제거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딱히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루페르트가 전술에 아무런 흥미가 없다는 건 본인도 잘 알고 있는 바였으니.
그러나 지금은 머리를 쥐어짜 내야 한다.
'생각하자. 루페르트 가우저.'
곧 루페르트는 축구를 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 바로 그거야.'
축구에도 전술이란 게 있다.
대부분은 부정하지만 루페르트 정도의 가장 우수한 선수는 축구라는 놀이가 육체적인 능력과 발재간만큼이나 다른 선수들을 잘 조련하고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축구와는 다르다.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해야 한다.
천하의 루페르트도 공을 뺏길 때가 있다.
여러 방향에서 에워싸였을 경우다.
'방면을 하나씩만 줄인다면, 좀 더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겠지.'
루페르트가 우줄두스에게 말했다.
"우리 뒤에 있는 놈들부터 제거해 줄 수 있나?"
우줄두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 겨우 두 놈이니."
"편을 짜더라도 편을 짠 것처럼 보이게 하면 안 돼.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가 합칠 수도 있어."
기이하게도 루페르트는 이 상황이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곧 그는 입가에 쓴웃음이 절로 머금어지는 걸 느꼈다.
'나의 제국과 같군.'
제국 내에서 루페르트의 세력은 어떤 선제후나 군부도 강하다.
국력으로 따지자면 일대일로 감히 슈발츠마인에게 덤빌 수 있는 자는 없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감히 도전장을 내밀 수 있었던 건 제국 성인이라는 상식을 넘어선 괴물이 뒤에 있어서였지, 그런 게 없었다면 그 음침한 사내는 조용히 자신의 영지를 관리하며 무탈하게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을 것이다.
그 루페르트가 제국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건 혼자의 힘이 강할지언정 모두를 휘어잡기엔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다.
아홉 명의 우군을 확보했다.
나머지 스물한 명은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아홉 명이 한통속으로 다른 경쟁자를 죽이기 시작한다면 그들도 곧 힘을 합칠 것이다.
그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지시를 내리면서 루페르트는 자신의 제국을 떠올리고 만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의 팀엔 제국인의 선조 되는 이들이 있다.
그 대목에서 루페르트는 자신과 제국 사이에 보이지 않는, 거룩한 연결을 희미하게 느꼈다.
'제국이 나의 운명일지도.'
혹 이 지옥에서 나와 현실로 돌아가 내전을 방지하고 제국이 무사히 천년기를 넘겨 안정된 반석 위에 놓였을 때 그때 루페르트는 무엇을 할 것인가.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 기묘한 전장 속에서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계속 떠오른다.
제국을 구원한 이후의 자신의 모습이.
'결혼도 할 수 없고 아이도 가질 수 없다. 영원히 일만 하다 죽는 황제가 되란 말인가.'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순결제는 빨리 죽었다.
어쩌면 자신이 택한 고독과 단절의 비참함을 알고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이. 누로스."
비달의 지적인 목소리가 루페르트의 상념을 깨뜨렸다.
"시작한다. 뭘 멍하니 있는 거야?"
"미안. 나도 긴장을 한 모양이야."
"고어인들이 뒤편의 적을 죽여 주기로 했어. 다음은 어떻게 할까?"
"일단은 수비하다가 고어인들이 뒤에 있는 두 놈을 처리해 주면 정면의 적을 도모해 보자. 한 번에 한 녀석을 죽일 수 있겠어?"
"견제만 안 받으면."
루페르트는 비달의 검고 탄탄한 근육질의 팔을 보았다.
'이 팔로 날 꿰뚫은 건가.'
점잖고 이지적인 이미지지만 루페르트는 이 비달이라는 자가 화가 나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을 가볍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잘 알고 있다.
투창 솜씨도, 힘도 상당하다.
사람의 몸을 꿰뚫는 투창을 던지는 걸 보면 말이다.
한편, 경기장 중앙에선 번쩍거리는 갑주를 걸친 군인들이 경기를 주최한 물주의 이름이 적힌 휘장을 들고 질서정연하게 사슬에 묶인 노예들 주변을 행진했다.
[ 집정관 포르피리우스 ]
룸의 역사에 의하면 집정관은 아무에게나 주는 자리가 아니다.
한 시대에 단 두 명만이 집정관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룸 제국 후반기엔 집정관이라는 명칭은, 부르봉 왕이 아랫사람에게 뿌리다시피 살포하는 남작 작위나 장자 상속제가 확립되지 않아 공작령 하나가 아들의 숫자만큼이나 자체 분열되는 제국의 작위만큼이나 흔하게 남발됐다.
이 집정관도 수십 명에 달하는 집정관 중 하나일 것이다.
'망해가는 나라는 이유가 있겠지.'
긴장 속에서 긴 나팔이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죽고 죽여라! 어서!"
감독관들이 날카로운 채찍 소리를 내며 살인을 독려했다.
루페르트는 투창을 든 채 좌우를 살폈다.
루페르트와 비달의 자리 운은 좋았다.
가장자리다.
3면에 적이 있지만 정면의 적은 사방의 적을 상대해야 하기에 이쪽을 신경 쓰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루페르트의 양 측면엔 각각 두 명의 노예들이 있는데 거리가 꽤 가깝다.
이들을 제거해야 저 중앙 쪽에 있는 고어인들을 지원할 수 있다.
문제는 협공의 우려다.
양 측면의 노예들이 우연히 마음이 맞아 루페르트와 비달을 공격하면 이쪽은 꽤 난감해진다.
최초엔 수비에 힘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빨리 죽이라고!"
다행스럽게도 최초 국면에서는 모두가 얼어붙은 듯이 긴장했다.
이 긴장은 티그리트라는 재앙을 부르는 단초가 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루페르트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었다.
'내가 먼저 공격할 수도 있겠지만, 주목받는 건 피해야 한다.'
루페르트의 시선은 정면 너머에 있는 고어인 패거리를 주시했다.
그들은 제국처럼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경기장의 거의 모든 노예를 안정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위치지만, 역으로 사방팔방에서 협공을 받을 수도 있는 위치이기도 하다.
이들이 주목을 받아야 한다.
손을 잡았다고 하지만, 이들의 안위를 챙겨 줄 정도로 넉넉한 상황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이들이 희생을 해 주어야 한다.
"우줄두스!"
루페르트가 자신에게 행운을 줄 사내의 이름을 외쳤다.
"뭐 하는 거야! 고어인은 다 겁쟁인가?!"
제국의 언어를 말하며.
이 당시에는 확실히 야만의 언어다.
사슬에 묶인 노예들조차 경멸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노예 중에 어리석은 자만 있는 건 아니다.
"너희들 아까부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냐?"
키가 작고 갈색 곱슬머리를 짧게 깎고 몸에 아무런 문신도 표식도 없는 자가 이쪽을 노려보며 볼멘소리를 해 댔다.
'룸인인가.'
주변에서 야유를 내는 인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김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루페르트의 눈엔 관중 하나를 잡아다 옷만 벗겨 놓은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룸인의 얼굴이 씰룩거리며 다음 말을 내뱉으려 한다.
'막아야 한다.'
순간적으로 루페르트는 저 사내가 다음 말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투창을 들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몸에 익은 움직임으로.
마치 투창이 몸의 일부분이었던 것처럼 익숙하다.
그걸 천천히 겨누어 허리를 뒤로 젖히고 앞으로 도움 발을 내밀며 어깨가 찢어질 정도로 강하게 던졌다.
슈육-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간 투창은 미려한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가더니 그대로 말을 내뱉으려는 룸인의 목에 박혔다.
"꺼어어어억!!!"
사내는 목을 움켜쥔 채 눈을 부릅뜨고 뭐라고 말하려다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와아--!!
미약한 환호가 관중석에서 터져 나왔다.
노예들의 시선이 일제히 루페르트를 향했다.
'어쩔 수 없다. 저놈을 말하게 내버려 두었다간 계획 자체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으니.'
이제는 고어인들이 해 줘야 한다.
루페르트는 사방에서 날아드는 차가운 시선을 감내하며 우줄두스 일행의 행동을 살폈다.
실망스러운 모습이 루페르트의 눈에 들어왔다.
우물쭈물하고 있다.
그토록 전사다운 표식으로 빈약한 알몸뚱이를 치장하고 있음에도.
"고어인!"
결국 루페르트가 고함을 질렀다.
"겨우 이 정도냐? 숲의 버러지들아."
짧은 외침.
그러나 그 외침은 고어인들의 방황을 날려 버렸다.
우줄두스는 여전히 겁먹은 눈치지만 그의 동료들은 그렇지 않았다.
고어인 하나가 약속을 상기하고 투창을 꺼내 루페르트의 양 측면을 위협하는 노예를 향해 창을 던졌다.
루페르트 하나만을 주시하고, 다른 노예들도 그러할 거라고 기대했던 갈색 피부의 노예 눈앞으로 투창이 지나갔다.
"헉!"
그가 뒤늦게 고개를 돌려 고어인 패거리를 봤을 땐 이미 늦었다.
슉- 슉-
여러 개의 투창이 그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순식간에 투창 두 개가 꽂힌 채 사내는 고꾸라졌고, 그 옆에 있던 노예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양 측면의 위협 중 하나가 사라졌다.
"멋지군!"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뜨거운 칭찬을 내지르며 자신 몫의 투창을 들었다.
겁에 질린 두 노예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한 놈은 투창을 든 채 싸울 뜻을 내비치지만, 다른 놈은 아무것도 들지 않고 대신 자세를 낮춘 채 호시탐탐 피하려고만 시도한다.
"비달."
루페르트가 말했다.
"왼쪽을 맡아 줘."
"오른쪽 놈은 피할 생각만 하는 거 같은데?"
이에 루페르트는 빙그레 웃었다.
"나에게서 달아날 순 없지."
두 개의 창이 허공을 갈랐다.
푹! 푹!
그 창은 정확히 원하는 목적의 몸통에 박혔다.
어째서인지 루페르트는 사람을 죽일 때 몸이 찌르르 울리는 전율과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을 죽이고 기뻐하다니.'
이 육체의 성능은 루페르트 본인보다 곱절은 뛰어나다.
하지만 이 육체에 깃들었던 영혼은 그다지 바른 모양새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죽일 때마다 찾아드는 흥분 중에 성적인 흥분조차 뒤섞인 걸 보면 말이다.
터무니없게도 루페르트는 다리 사이에서 뭔가가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변태 아닌가. 이놈.'
한번 얼굴을 보고 싶긴 하다.
실제로 그 얼굴을 볼 수 있을 거 같다.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는 걸 보면 말이다.
152화 36. 대경기장 (6)
"아아아악!"
푹!
"커억!"
곳곳에서 노예들이 쓰러지고 있다.
"이 자식!"
겉만 당당한 겁쟁이 우줄두스의 투창마저 운 없는 노예의 몸을 꿰뚫었다.
뒤늦게 노예들은 루페르트 일행과 고어인의 동맹을 알아차렸지만, 너무나 늦은 깨달음이다.
"이 새끼들?! 감히 짜고 우리를 공격해?"
고어인들의 후방에 자리 잡은 어두운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투창을 들고 저항했다.
그들의 솜씨는 꽤나 날카로웠다.
고어인 하나가 죽었다.
"끄아아악!"
우줄두스가 루페르트를 향해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누로스 놈! 뒤를 지켜 준다며?"
"기다려 봐."
루페르트가 투창 하나를 들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비달이 말했다.
"거리가 꽤 있는데. 괜찮을까?"
루페르트가 노리는 어두운 피부의 노예는 가장 먼 거리에 있다.
힘껏 던져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닿지 않을 거리다.
그러나 루페르트의 눈엔 닿는 거리다.
그것도 가장 자신 있는 거리다.
투창 하나를 집어 들고 루페르트는 뒤로 물러났다.
스르릉-
발목을 묶은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질 때까지.
한 팔을 적을 향해 내밀어 적에 대한 가늠자로 씀과 동시에 사슬의 길이와 자신의 보폭을 순간적으로 계산하고 힘껏 앞으로 달려나갔다.
잘 조련되고 조정되고 단련된 육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루페르트가 생각하는 움직임을 재현했다.
짧은 거리를 질주 후, 그 속도를 실은 투창을 화살처럼 쏘아 낸 것이다.
쉬익--!
소리가 다르다.
투창을 주고받던 노예들이 확연히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소리가 다르다는 건 속도조차 다르다는 이야기.
포물선이라기보다는 직선에 가까운 궤도로 한 줄기 투창이 어두운 피부를 가진 노예의 목을 측면에서 꿰뚫었다.
"커억?!"
그 노예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루페르트처럼 측면의 안전을 확보해 기습받을 우려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당하다니.
와아---!!
미미하던 관중석의 환호가 들불이 일어난 것처럼 커졌다.
방금 루페르트가 보인 묘기가 살육을 질릴 정도로 즐긴 룸인에게 강하게 와닿은 것이다.
"저 에피크로티아 놈. 제법인데?"
"사니움 어부 출신답군."
"뭔 어부야?"
"사니움 어부는 작살을 던지는 걸로 물고기를 잡지만, 그물을 던진 것보다 많은 양을 건져 올리지."
끊임없이 다투던 관중조차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정도다.
물론 그들의 잡담을 신경 쓸 처지는 아니다.
루페르트는 치열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경기장 안에 나뒹구는 시체와 날아가는 투창들, 자신과 비달, 고어인들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며 머리를 굴렸다.
'남은 건, 둘. 고어인들이 견제받고 있다.'
"비달."
"어."
"저쪽에 있는 놈들 잡아 줄 수 있나?"
"나한테는 먼 거린데."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해 보지."
"신호하면 동시에 던지자고. 놈들이 눈치채기 전에."
루페르트와 비달, 두 노예가 동시에 투창을 들었다.
강인한 등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걸 느끼며 두 사내는 동시에 먼 곳을 향해 투창을 조준하고 하나가 된 것처럼 두 개의 투창을 동시에 날렸다.
슈육-
포물선을 그린 두 개의 투창이 고어인을 노리는 노예들의 몸에 나란히 박혔다.
"커억!"
"크으으으윽!"
두 명이 더 쓰러졌다.
이걸로 마지막이다.
'열다섯 명째.'
루페르트는 속으로 세던 숫자를 되새기며 주위를 보았다.
감독관과 병사들이 움직이는 게 보인다.
곧 이 살육극은 종막을 고하리라.
루페르트에게 내일이 온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주위를 위협하는 적은 없지만 루페르트는 사방을 주시하며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며 감독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부우우우우---
나팔 소리가 울렸다.
"무슨 소리지?"
확실히 하기 위해 루페르트는 비달에게 물었다.
비달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드디어 끝이야."
그가 웃었다.
"살아남았어! 누로스인!"
루페르트의 그의 이가 유난히 희고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크윽!'
몸이 흥분 상태였다는 걸 깜빡 잊었다.
깜찍한 고통이 고간을 찌르르 울리는 걸 느끼며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덧없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살아남은 건가."
"대단하더군. 역시 누로스의 챔피언다운 솜씨였어! 대체 얼마나 죽이고 다닌 거지?"
"글쎄."
루페르트는 모른다.
이 육체의 원주인이 어떤 사람이고 무슨 일을 하며 살아왔는지.
이 대경기장까지 끌려온 걸 보면 순탄한 팔자는 아닌 것 확실하리라.
게다가 루페르트에게 중요한 건 이 인물의 정체는 아니다.
그의 문제는 처음부터 이 세상에 있지 않았다.
'이놈의 얼굴도 보고 싶긴 하지만, 대체 언제쯤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지? 여신님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경기장에서 승리를 거두었건만 악몽은 끝나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북소리와 나팔 소리, 함성 소리가 더 높아지는 까닭은 왜일까?
고어인들이 웅성거렸다.
우줄두스가 루페르트에게 소리쳤다.
"어이!"
루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보았다.
"뭔가 낌새가 수상하지 않냐?"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고어인 하나가 문을 가리켰다.
정면에 있는 황동으로 사자의 모습을 표현한 크고 화려한 문.
저 문은 루페르트가 아는 문이다.
노예들이 서로를 죽이기를 주저하고 있을 때 저 문이 열리고 사신이 나타났다.
"룸인들이 저 문을 보고 있어!"
루페르트는 관중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고어인의 지적은 정확했다.
그들은 이 경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히려 기대하고 있다.
더 잔인하고 더 화려한 살육을.
'설마, 아직 안 끝났단 말인가.'
루페르트는 고어인들을 응시했다.
'저들을 죽여야 하나.'
아니다.
그것만으로 저 잔혹한 민족이 만족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심심하고 단조롭지 않을까.
평범한 노예들의 살육전은.
룸인들이 저토록 흥분하는 건, 이 뒤에 있을 쇼의 화려함이 이전에 있던 것과는 격이 다르기 때문이리라.
무엇보다 이 환호의 뜨거운 온도는 전에 느낀 적이 있다.
"티그리트! 티그리트! 티그리트!"
불길한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군중들은 연호하고 있다.
루페르트를 비롯한 노예들에게 죽음을 안겨다 줄 최악의 전사를.
우뢰와 같은 환호 속에서 문 너머에서 하얀 증기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군중들의 환호가 더욱 거세졌다.
"티그리트! 티그리트! 티그리트!"
그 터질 것 같은 연호 속에서 경기장 위의 노예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죽어야 사명을 다하는 장기 말에 불과했다.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엔 저 큰 문마저 압도할 정도로 위압적인 체구를 지닌 전사가 우뚝 서 있었다.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인간의 얼굴을 모사한 은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늑대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쓴 근육질의 전사가 한 손엔 검, 한 손엔 방패를 들고 나타났다.
"...티그리트."
루페르트의 입가에 비릿한 냉소가 떠올랐다.
왜 여신이 이 악몽을 끝내지 않았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아직 이야기도 시작하지 않은 모양이다.
여신이 보여 주려는 건 아무래도 저 가증스러운 챔피언으로 보이니까.
가벼운 짜증을 느끼며 루페르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같은 장면을 보는데도 느끼는 감정이 이렇게 다를 줄이야.
한쪽은 죽음과 절망을 보고 좌절하는데, 다른 한쪽은 다가올 살육극에 흥분을 금치 못하고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룸인들은 절반의 목숨을 원했던 건 아닌 모양이다.
그들은 30인의 노예 전원이 죽기를 원했다.
그 부름에 응해 티그리트가 나왔다.
감독관이 방패를 든 병사들을 좌우에 세우며 노예들을 진정시켰다.
"가만히 있어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싶지 않다면."
그들은 노예들이 손에 들린 투창을 내려놓으라 고함을 질렀고, 이에 응하지 않는 노예들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노예들이 흥분을 가라앉히는 동안 단상엔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회자가 나와 천둥 같은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준비한 희극은 잘 보셨습니까? 뭐, 재밌는 장면도 있었지만 지루하고 조잡한 장면도 없다고는 못할 겁니다. 저 위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집정관 포르피리우스 님께서는 이 경기가 그분의 이름을 걸고 하는 것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조야하고 졸렬하기에 좀 더 새롭고 흥미를 돋울 수 있는 무대를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그 사내가 황동 문 아래 우뚝 선 거구의 전사를 가리켰다.
"티그리트. 대경기장의 무패의 챔피언. 그러나 그는 동시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배교자이기도 하지요."
연설자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제야 티그리트에게 환호를 던지던 관중들이 티그리트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우우----
경기장 전체를 음산하게 울리는 야유 속에서 루페르트는 비달에게 물었다.
"티그리트라는 놈에 대해 잘 아나?"
"룸 제국에서 저자를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지. 황제조차 그를 아는데."
"저자가 배교자라고 하던데."
"그래. 이교의 신을 모신다고 들었다. 원래라면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검투사답게 최고의 경기에만 나오게 되지만, 배교를 했기에 이런 잡스러운 경기에마저 출현하게 된 것이지."
"그가 믿는 신의 이름을 알고 있나?"
확인해 보고 싶다.
티그리트가 믿는다는 신을.
그 이름은 루페르트도 잘 알고 있다.
'리프니에.'
"아니, 그는 자신이 믿는 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어. 단지 호라가 아닌 다른 신을 믿는다고 이야기했을 뿐이지."
"그래?"
"혹독한 고문이 있었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하더군."
"...왜 이름을 말하지 않는 거지?"
"그가 말하더군."
비달이 비릿한 냉소를 머금으며 찬사와 야유를 한 몸에 받는 전사를 그늘이 진 눈으로 응시했다.
"자신의 신은 아직 이 세상에 그 이름이 알려져서는 아니 된다고."
이제 그 챔피언이 노예들 앞에 다가왔다.
병사들이 그의 손에 들린 방패와 검을 수거하고, 대신 그를 위해 준비한 청동으로 만든 우아하고 미려한 투창을 그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 투창은 어째서인지 루페르트가 현재 깃든 육체의 영혼 깊숙한 곳을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뭐랄까, 그리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저 투창은 이 육체의 주인이 살던 고향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루페르트는 차분하게 현재 상황을 분석했다.
'우리끼리 죽이든, 죽이지 않든 결국 티그리트의 등장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군.'
그렇다면 지금이 전보다 훨씬 불리한 상황이다.
전에는 30 대 1의 싸움이었다.
숫자가 이제는 반으로 줄어들었고, 투창의 수도 별로 없다.
루페르트의 투창 통에 담긴 투창은 이제 2개뿐.
나머지 노예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숫자도, 투창도 전보다 훨씬 부족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루페르트는 전보다는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기세라고 할까.
여전히 살육이 가져다준 성적인 흥분은 고간 쪽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만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를 죽이고 피를 본 남자들의 몸에 흐르는 피는 이쪽이 30명이 있을 때 몸에 흐르는 것보다 더욱 뜨거울 것이라는 사실을.
무엇보다 루페르트는 저자를 증오한다.
'티그리트.'
여신의 총애를 차지한 자.
그렇게 비열하고 못난 배신을 하고도 여신의 사랑을 받는 자.
그가 싫다.
그를 죽이고 싶다.
그 분노와 현재의 육체에 남긴 삐뚤어진 인격이 루페르트의 내면에서 그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격렬한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그 결과물은 기이하게도 놀이에 가까웠다.
'죽여 보자. 저놈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고간에 팽배한 성적인 흥분이 더욱 강렬해지는 걸 느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변태의 심장은 적어도 겁쟁이의 심장은 아니다.'
153화 36. 대경기장 (7)
"경기를 시작하라."
관중석 곳곳엔 툭 튀어나온 발코니가 있다.
지붕이 있고 기둥이 있는 그곳은 특권층을 위한 좌석이다.
그 여러 개의 발코니 중 정중앙, 가장 좋은 자리에 자리 잡은 발코니엔 이 경기의 주최자 집정관 포르피리우스와 그의 가문 일원들이 앉아 경기를 보고 있었다.
머리에 가발을 쓴 늙은이가 완고한 집정관에게 비굴하게 말했다.
"저 미네아에서 온 곱슬머리가 그 배교자를 죽일 수 있을까요?"
모든 이의 시선이 집정관에게 향했다.
집정관은 코웃음을 치며 포도알 하나를 포도에서 분리해 입 안에 넣고 가볍게 굴려 넘긴 다음에야 느릿하게 대답했다.
"백만 데나르를 주고 사 온 놈이다. 하찮은 노예와 함께 묶여 있지만, 미네아에서는 그들이 믿는 패배한 신의 환생으로까지 여겨진 무패의 챔피언이다. 특히 투창과 원반던지기에서는 대적할 자가 없지."
집정관의 말에 발코니에 모인 좌중들의 입에서 일제히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이 자리는 저 배교자, 티그리트를 죽이기 위한 자리라는 겁니까?"
집정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흑인도 만만치 않아. 마우리타니아 총독의 말에 의하면 투창 숫자만 충분하다면, 혼자 코끼리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민첩하고 날랜 사냥꾼이다. 가장 강한 사냥꾼을 하나가 아닌 둘이나 데리고 왔다. 저 티그리트가 이교 신의 가호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신이란 게 언제 인간을 지켜 준 적이 있기나 했나?"
알려진 역사에서 포르피리우스는 마지막 황제를 다투는 야심가 중 하나로 기술된다.
쟁쟁한 후보 중에서 그가 자신을 포장한 문구는 '종교의 수호자'였다.
우둔한 친족들의 찬사를 들으며 포르피리우스는 자세를 낮게 낮추고 저 아래 곧 서로를 죽여야 할 운명의 인간들을 교만한 눈으로 내려보았다.
'가장 훌륭한 선택지는 티그리트를 죽이는 게 아니야.'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저 배교자를 죽이는 것보다 저 배교자의 잘못을 깨닫게 하여 뉘우치게 하는 것이 자신의 평판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그걸 위해 막대한 돈을 주고 두 명의 사냥꾼을 사 왔는데 그중 하나, 누로스에서 온 곱슬머리는 상상 이상으로 움직임이 뛰어났다.
'아까운 백만 데나르를 안 버려도 되겠군.'
집정관이 장교를 손짓으로 불러 무언가 지시했다.
번쩍이는 갑주과 마구를 걸친 장교는 굳은 얼굴로 집정관의 명령을 마음에 새겼다.
* * *
스르릉-
병사들이 들고나온 건 번쩍이는 사슬이었다.
루페르트와 다른 노예들은 의아한 얼굴로 병사들의 방향을 지켜보았다.
이쪽이 아니다.
티그리트 쪽이다.
철컹!
병사들이 티그리트의 발목에 사슬을 채웠다.
마치 저 너머에 있는 열등한 노예처럼 말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훌륭하게 싸운 자에겐 기회를 줘야지."
감독관이 루페르트에게 다가가 몸소 고개를 숙이고 루페르트의 발목에 찬 형구를 풀어 주었다.
"역시, 쓸 만한 친구군."
그가 루페르트를 향해 게슴츠레 웃는 얼굴을 드러냈다.
루페르트는 그 얼굴에서 악의와 비열함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지만, 그 안에 삶의 기회가 있다는 것 또한 놓치지 않았다.
"살고 싶나?"
감독관이 속삭였다.
"살고 싶다면 손등을 두 번 두드려라."
탁. 탁.
루페르트의 행동엔 주저함이 없었다.
감독관은 그 기민함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역시 재능 있는 놈은 까다롭군. 어제 그 소란을 피우더니 이렇게 잘 싸워 줄 줄이야."
"...."
"저 챔피언을 죽이지 마라."
루페르트는 의아한 얼굴로 감독관을 응시했다.
"천천히 저 육중한 몸에 죽지 않을 만큼의 창을 꽂아 넣으라는 소리다."
"무엇을 위해서?"
"그의 잘못된 믿음을 고치기 위함이지."
감독관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대부분의 정신병은 몽둥이로 고칠 수 있지."
"...."
"이교신을 믿는 것도 정신병의 일종이야. 다만 저 친구가 너무 크고 강해 몽둥이로 교정하기 어려울 뿐이지. 그래도 창이라면 그에게 따끔한 가르침을 새겨 줄 수 있지 않을까?"
감독관의 말을 들으면서 루페르트는 자신이 새겼던 전의가 무의미해지는 걸 느꼈다.
뭐랄까, 허망하다.
하나의 난관을 넘고 또 다른 난관을 넘으려고 몸과 정신을 긴장한 상태에서 전투에 대비하는데, 정작 루페르트를 기다리고 있던 건 난관이 아닌 통과의례였다.
쇠사슬을 묶는 형태만 봐도 알 수 있다.
루페르트처럼 줄을 길게 늘어뜨려 최소한의 회피를 할 수 있게 한 것과 달리 티그리트는 선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게끔 단단히 지면에 붙들어 맸다.
이건 싸움이 아닌 처형이고 고문이다.
아마 룸인들은 좋아할 것이다.
그들은 다른 민족의 피를 보는 걸 즐기는 족속들이니.
감독관이 루페르트에게 일렀다.
"나팔이 울리면 싸움을 멈춰라. 혹 나팔의 지시를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그를 죽여라. 죽여도 좋다. 안 그러면 너에겐 내일이 없을 것이다. 그 나팔은 집정관 포르피리우스 님의 지시하에 부는 것이니까."
대경기장엔 기묘한 흥분이 감돌기 시작했다.
열다섯 명의, 이미 피를 본 노예들과 대경기장의 부동의 챔피언으로 군림하는 최강의 검투사.
그들의 대결이 시작되려 한다.
누가 봐도 불리한 건 티그리트였다.
그는 날아오는 투창을 피할 수 없다.
몸으로 받아 내거나 쳐 내거나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쉬운 일인가.
아무리 티그리트라고 해도 열다섯 개의 투창을 어떻게 받아 낸단 말인가.
"야! 이거! 우리가 저놈을 죽일 수 있겠는데?"
우줄두스를 비롯한 고어인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
비달은 평소와 다른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설마 저 얼굴로 날 죽인 건가.'
루페르트는 비달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리고 고어인에게 물었다.
"왜 그리 좋아하나? 같은 북쪽 사람 아닌가?"
"마인인이?"
우줄두스가 코웃음을 쳤다.
"나는 마인 놈들이 룸인보다 더 싫어."
그만이 아니다.
다른 고어인들도 티그리트에 대한 맹렬한 적의를 드러냈다.
"놈들이 룸인에게 이웃 부족을 팔아먹었지."
나팔이 울렸다.
경기의 시작.
고어인들이 맹렬한 고함을 내지르며 투창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푹!
시작과 동시에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투창이 고어인들을 꿰뚫었다.
"어?!"
우줄두스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분명 조금 전만 해도 가만 서 있던 놈이 어느새 창을 던졌다.
두 명이 죽었다.
같은 고향에서 나고 자란 형제 같은 친구들이다.
"이, 이놈이?!"
그의 고함은 그러나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푹!
창이 그의 벌린 입 안으로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시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노예들 사이에 차가운 기류가 흘렀다.
'저게 티그리트인가.'
'묶여 있지만 묶여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단지 손을 흔든 것만으로 저렇게 빠른 투창을 날릴 수 있다니....'
고어인들이 당한 건 우연이 아니다.
제삼자의 시선에선 티그리트는 투창이 담긴 통을 손으로 쓸 듯 가볍게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그러나 그 단순한 움직임 안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담겨 있었다.
가볍게 휘저음만으로 티그리트는 살인적인 속도의 투창을 날려 보냈고, 순식간에 세 명을 불귀의 객으로 만들었다.
그 압도적인 무용은 잠시 느슨해졌던 루페르트의 긴장을 되살렸다.
동시에 루페르트는 자신의 고간에 또다시 역겨운 성적 흥분이 감도는 걸 느꼈다.
'대체 이 몸은 어떻게 된 거지? 이 끔찍한 상황 어디에 흥분할 거리가 있다는 거냐?'
미친 몸이다.
하지만 동시에 훌륭한 몸이다.
슈욱-
루페르트는 조건 반사적으로 자신에게 날아든 두 개의 투창을 공중제비를 돌며 피해 냈다.
그건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
은 가면을 쓴 티그리트가 이쪽을 우두커니 보았다.
천하의 챔피언도 살짝 놀란 모양이다.
루페르트가 소리쳤다.
"모두 창을 들어라."
그는 티그리트가 가장 경계하고 막으려고 하는 움직임을 이끌었다.
"놈은 움직이지 못한다. 한 번에 노려라. 단! 심장과 얼굴은 겨누지 마라!"
루페르트가 몸소 창을 들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열한 명의 노예가 일제히 창을 들었다.
티그리트 또한 큼지막한 두 손에 두 개의 창을 들었다.
그가 루페르트를 향해 무시무시한 창격을 날렸다.
쉬익─
루페르트가 도움닫기를 하던 것보다 더 빠른 창이 루페르트를 향해 쇄도했다.
그러나 루페르트의 육체는 그 투창을 농락하듯 피해 내고는 감각적으로 자신의 투창을 날렸다.
챙캉!
루페르트의 투창은 가볍게 허공에서 격퇴당했지만,
"지금이다!"
나머지 열 개의 투창이 챔피언을 일제히 덮쳤다.
티그리트는 몇 개는 쳐 내고 몇 개를 붙잡았지만,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모든 걸 막을 순 없었다.
푹!
투창 하나가 불가침의 육체에 박혔다.
"...."
자루까지 깊숙이 박혔음에도 티그리트는 신음하나 내지 않았다.
와아아아-!!
군중들이 열광했다.
노예들이 다음 투창을 준비했다.
그때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만!"
루페르트가 투창을 준비하는 노예들에게 명했다.
"정지해라! 잠시 멈추라고!"
모두가 그의 명에 따랐다.
단 한 명, 루페르트의 옆을 지키던 비달만이 창격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비달!"
루페르트가 그를 만류했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다.
"동생의 원수...!!"
순간 내면의 속삭임이 들렸다.
[ 감히, 내 명을 거절해? 그렇다면 죽여야지. ]
그 음성은 오싹할 정도로 잔혹하고 희열에 넘쳤다.
루페르트는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설마, 방금 그것이 이 육체의 주인 목소리인가?'
뿐만 아니다.
루페르트의 몸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투창을 들고 자신과 함께 싸우던 적의 목을 노려보고 그걸 향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창을 던졌다.
푹!
창은 정확히 비달의 목에 박혔다.
창이 박힌 채 비달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루페르트를 보았다.
"어, 어, 어...."
잠깐이나마 루페르트와 함께 싸우던 사내의 최후였다.
"...."
루페르트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왜...?'
왜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와아아아아---!!
동료의 죽음은 환호로 치환됐다.
끝없는 배덕감 속에서 루페르트는 빈사의 챔피언을 보았다.
멀리서 사회자의 포효가 들려왔다.
"티그리트!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거짓된 믿음을 버리고 진정한 믿음으로 복귀하겠는가?!"
이에 티그리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감독관이 손짓했다.
또 한 번의 벌을 내리라는 신호.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루페르트가 창을 들었다.
'빌어먹을!'
모두가 루페르트를 보고 깔깔 웃었다.
고간을 간신히 가리는 하얀 천 부분이 불쑥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이런 반응이 나온다고? 얼마나 미쳐 버린 건가. 이 몸은.'
자신의 육체와 원주인의 잔혹한 마음에 진저리를 느끼면서도 루페르트는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자유로워진 두 발로 챔피언의 주위를 돌며 창을 박아 넣을 빈자리를 노렸다.
챔피언이 기습적으로 창을 날려 보지만, 루페르트의 육체는 그 창격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곧 루페르트가 창을 날렸다.
푹!
또 하나의 창이 챔피언의 등에 박혔다.
옆구리다.
"...."
이번에는 티그리트가 신음을 흘렸다.
사회자가 물었다.
"티그리트! 믿음을 바꾸겠는가?!"
챔피언이 신앙을 꺾는 일은 없었다.
그때마다 루페르트의 투창이 챔피언의 몸에 박혔고, 곧 챔피언은 고슴도치와 비슷한 형상으로 전락했다.
쿵!
결국 티그리트가 무릎을 꿇었다.
주르륵-
정수리를 스치고 지나간 창격이 남긴 상처가 가면을 가득 채웠고, 그 일부가 은 가면의 눈구멍을 통해 피눈물처럼 흘러내렸다.
루페르트의 눈에 비친 그 모습은 잔혹극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열광하는 룸인들에겐 참회의 눈물로 보인 모양이다.
사회자가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믿음을 바꾸겠는가?"
종용하는 물음에 티그리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어 해일과 같은 무게가 느껴지는 중저음의 음성으로 답했다.
"...내가 믿는 건 오직 한 분뿐이다."
그 말을 들은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신의 이름을 뇌까렸다.
"리프니에."
무릎을 꿇은 티그리트가 루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가면에 하나의 얼굴이 비쳤다.
루페르트는 그 가면에 비친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놀랄 정도로 경쾌하고 빠르고 단련된 육체와 더불어 피와 죽음에서 희열을 느끼는 변태성을 가진 사내의 얼굴은 다름 아닌 루페르트 그 자신이었으니.
'...이, 이게 나라고?'
짐승이 거울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고 물러서듯 루페르트 또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부정하며 뒷걸음질 쳤다.
'이 가학적인 변태가... 나란 말인가...?'
집행인이 한 걸음 물러선 순간 쓰러진 사내가 천천히 일어섰다.
"사, 살아 있어?"
"저토록 많은 투창을 몸에 받고도?"
"괴물이다."
"아니, 역시 황제의 챔피언인가?"
"이교신의 챔피언이겠지."
"하지만 저 모습은... 불경하게도 신과 같군."
수만 관중의 증오와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그 사내는 피투성이가 된 채 우뚝 일어섰다.
"...나는 믿음을 꺾지 않는다."
그 모습은 불굴의 신념 그 자체를 형상화한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티그리트였다.
그 끔찍한 현실이 갑자기 잿빛으로 변했다.
"어떤가요? 루페르트 가우저."
또 다른 현실이 잿빛으로 변한 현실이었던 세계를 찢어발기며 개입했다.
그제야 루페르트는 자신에게도 여신이 있다는 걸 기억해 냈다.
"그에게도 저런 꺾이지 않고 향기로운 시절이 있었답니다."
익숙한 바닷바람의 냄새와 소리가 루페르트를 감쌌다.
순간 광적인 연호도, 바닥에 널린 피투성이가 된 시체도, 그리고 그 위에 우뚝 서 있던 전사도 덧없이 사라졌다.
어두 칙칙한 북부의 숲이 루페르트의 앞에 펼쳐졌다.
"...."
저 앞에 티그리트가 서 있다.
대경기장의 챔피언이자 옛 황제, 그리고 이제 루페르트와 양립할 수 없는 진정한 적이.
검은 머리의 소녀가 생긋 웃으며 루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제 마음을 이해하시겠어요?"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 여신의 힘은 필요하다.
여신에게만큼은 진솔한 모습을 보였던 루페르트의 얼굴에 하나의 가면이 덧씌워졌다.
"...네.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 가면은 은으로 만들어졌으리라.
라고 루페르트는 생각했다.
154화 37. 진창과 도랑 속에서 (1)
"자, 화해의 악수를 하세요."
여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의 황제와 현재의 황제가 악수를 교환했다.
악수라는 행위는 흔히 협상과 화해로 은유되곤 한다.
하지만 적어도 루페르트에게 있어 이 악수는 적의의 재확인이다.
'여전히 이 자는 내 제위를 노리고 있다.'
여신이 사라진 후, 티그리트가 남긴 말만 봐도 알 수 있다.
수많은 아이를 빠뜨려 죽였다는 연못 앞에서 티그리트는 자신을 기다리는 미지의 여인을 향해 걸어가며 등을 보인 채,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한 목소리로 조롱하듯 말했다.
"그대 앞에 놓인 난관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 그대는 아는가? 그런 거지. 쌓이고 쌓인 병폐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손도 발도 쓸 수 없는 마치 화산이 분화하여 모든 걸 뒤덮는 모양새지."
루페르트는 대꾸는커녕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티그리트는 그런 루페르트를 노려보며 은근히 말했다.
"난 여전히 그대의 편이야. 그대가 원한다면 기꺼이 그대의 편이 되어 드리지."
잔잔한 비웃음을 흘리며 티그리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후 루페르트는 강한 현기증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뒤이어 현기증보다 더 지독한 한기가 황제를 엄습했다.
기온이 차갑거나 병에 걸려서 추위를 느끼는 게 아니다.
'이 세상에 내 편은 단 한 명도 없구나.'
한기의 원인은 견디기 어려운 현실이다.
의심하지 않으려고 세상을 밝게 보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자세를 길렀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실망 속에선 마음의 형태가 찌그러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 숲 너머엔 그가 아주 잘 아는 금발의 여성이 기다리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폐하? 안색이 안 좋으세요. 무슨 일 있었나요?"
문득 한 그루 전나무가 황제의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변치 않는 불변을 상징하는 나무가.
하지만 그는 전나무는 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 아무 일도."
감정이 무디어져 가는 게 느껴진다.
심장이 강철처럼 굳어지는 감각 또한 느껴진다.
하지만 그 머리 또한 차갑게 식었다.
한기를 머금은 눈은 더 먼 곳을, 더 날카롭게 볼 수 있다.
"가자."
* * *
루페르트가 티그리트라는 최대의 라이벌과 증오 어린 악수를 교환하며 휴전을 선언하고 있을 때 저지대 전쟁에서는 치명적인 사건이 터졌다.
저지대인들이 자랑하는 5성급 요새-그레나스가 함락됐다.
저지대인들에게 충격을 준 건 그레나스의 전략적 위치도 위치겠지만, 그 도시가 함락된 과정이다.
식량이 떨어지거나 요새 안 시민과 군대의 사기가 떨어져서 항복을 했다면 농담을 좋아하는 저지대인들은 전략적 위치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새의 함락은 순전히 외력에 의해 그것도 불과 3개월 만에 이루어졌다.
하드리아멘디쿠스는 난폭한 새가 단단한 알을 부리로 부수고 그 안의 내용물을 취하듯이 요새의 축선과 성벽을 힘으로 찢어발기고 수비군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여전히 저지대 연방엔 열 개가 넘는 5성급 요새와 막강한 함대와 부유한 시민들이 있지만 그레나스의 함락은 저지대인에게 불길한 미래를 암시했다.
그레나스가 함락됐다는 건 또 다른 5성급 요새 도시가 언제든지 하드리아멘디쿠스의 손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니.
막강한 요새의 사슬을 앞세워 침략군을 막아 내는 저지대 연방의 방어 정책이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대륙의 이목을 집중하기에 충분한 사안이었다.
물론 그 소식은 제국의 황제 루페르트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래?"
최근 황제의 표정과 행동이 지나칠 정도로 정적이라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사람이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불과 며칠 사이에 황제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다.
다정다감하던 성격은 거리를 두려는 조심스러운 성격으로 변했고, 그 좋아하던 취미 생활도 더 이상 즐기지 않았다.
총신들을 사적으로 부르는 일도 없었다.
이제 루페르트는 모든 관료를 한자리에 모아 그 자리에서만 국사를 논했다.
내심 루페르트의 총신을 시기하던 자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선제후 시절에 알게 되었다고 남들보다 한 단계 윗급으로 취급받던 안젤리나의 3 총신의 위치가 평범한 관료와 다를 바 없는 위치로 떨어졌으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루페르트는 그들의 개인적인 면담 요청도 모두 거절했다.
모든 건 정해진 법도에 따라라.
그것이 루페르트가 주장하는 일관적인 논리였다.
하지만 그 너머엔 오직 이 세계의 비밀을 아는 자만의 권능이 도사리고 있다.
'나는 누군가와 생각을 교환할 필요가 없다. 내가 필요하지 않는 이상 말이지.'
알고 있었다.
미래를 알고, 알고도 과거로 돌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자가 굳이 누군가와 생각을 나눌 필요는 없다는 걸.
눈에 보이는 원인을 힘으로 찍어 누르고, 그게 실패한다면 그 실패의 원인도 찍어 누르면 그만이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철혈대제.
저 제국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명군의 방식은 지극히 단순하다는걸.
문제가 발생하면 그 원인을 찍어 누르고, 그럼에도 또 다른 문제가 불거지면 그 문제의 원인마저 힘으로 짓밟는다.
생각도 고찰도 필요 없다.
그런 단순한 방법만으로 철혈대제는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내가 그런 자보다 못하다고?'
투기장에서 보았던 건 현제라기보다는 한 마리 괴물에 지나지 않았다.
투기장에서 아무리 잘 싸우고 관중의 열광을 얻어도, 그건 황제가 할 일이 아니다.
룸 제국에서도 검투사 황제가 있었다지만 그는 제국의 멸망을 앞당긴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두고 보라지.'
황제가 주관하는 회의에서 관료들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애썼다.
그간 3 총신에 가려 모습을 보이지 못했던 관료들이 황제의 눈에 들고자 인생을 건 일생일대의 능력을 보이려는 것이다.
그러나 루페르트는 그 모습을 보고 하품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그레나스 함락은 신교 세력이 감히 구교라 부리는 정통 호라 교단의 믿음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극적인 승리를 안겨다 줄 최고의 호재입니다. 카스무어 왕국이 제국의 서쪽을 든든하게 장악하는 것만으로 부르봉 왕국을 견제하는 건 물론이고, 트라이아와 고어문트, 디터팔츠의 배후를 노릴 수 있으니까요."
이 관료의 말도 일리는 있다.
강력한 신교 지지 세력인 저지대 연방을 누르는 것만으로 틈만 나면 황제에게 고개를 쳐드는 건방진 선제후들에게 목줄을 채울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총신들의 생각은 달랐다.
"카스무어 왕국이 제국의 동맹국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그들의 지나칠 정도로 빠른 승리는 우리 제국 내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겁니다."
총신 삼인방 중 하나, 베르너의 의견이다.
나머지 두 총신이 그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모양이다.
루페르트는 묻지 않았다.
그가 묻지 않더라도 다른 관료가 알아서 질문을 던지며 논쟁을 유도할 테니.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이에 베르너는 즉답했다.
"저지대 연방이 너무 빠르게 무너진다면 제국 외부는 물론이고, 내부의 신교 세력에게 위기감을 심어 줄 겁니다. 그들이 예상보다 빠르고 단단하게 결집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말을 듣던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쪽이 일리 있는 의견이다.'
허나 맞서는 관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속으로 맞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의견을 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앞으로 뻗어 나가려면 결국 그 앞을 가로막은 것들을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 자라나는 가지의 숙명이니.
"카스무어 왕국의 패배를 원하기라도 하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다만, 승리를 하더라도 느긋한 시간을 들인,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그러한 승리가 우리 제국 측에 가장 우호적인 전개가 아닐까요?"
이러한 논쟁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루페르트가 최근 신경 쓰는 건 제국 내외의 정치보다는 신비적인 것이었다.
그는 국정에 전념하는 대신, 별궁에 틀어박혀 고대의 역사와 인물을 탐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어차피 이번 시간대는 버리기로 한 시간대니.
그 루페르트가 찾고 있는 건 룸 제국 말기의 기록이다.
포르피리우스, 비달, 우줄두스, 기타 흐릿하게 기억 나는 꿈속의 이름들.
그중에서도 가장 알고 싶은 건, 은 가면에 비친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지닌 검투사의 이름이었다.
그의 이름만큼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대체 그자는 누구지? 나는 아니야. 내 얼굴을 했지만 절대 나 같은 게 아니다.'
정신이 육체에 지배받는다고 하지만, 그 육체는 달랐다.
근저마저 썩어 버린 정신이 육체에 남았고 그 잔향이 육체를 지배한 루페르트의 정신마저 추악한 악취로 물들이려 했다.
수많은 사람을 봤지만, 그건 루페르트가 경험해 보지 못한 존재다.
적어도 사악함이라는 측면에서 루페르트는 그 육체의 주인이 저 티그리트보다 훨씬 흉흉하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타고난 잔인함과 오만함, 추악한 욕망과 일그러진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추악한 자아라고 할까.
'여신님이 내게 주려는 일종의 언질인가. 아니, 나의 여신은 그런 언질 같은 걸 주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모든 걸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행동한다. 나와 똑같이 생긴 자는 존재했어.'
그자는 대체 누구인가.
사람의 몸에 작살을 꽂아 넣고 희열을 느끼던 그 미네아에서 왔다는 괴인은 누구이며, 그는 어떻게 된 것일까.
기록에 의하면 티그리트는 스스로의 손으로 자신을 해방할 때까지 무패의 챔피언으로 남았다.
루페르트가 경험했던, 그 가혹한 투기장의 전투에서 승리한 건 결국 티그리트였다는 이야기다.
'여신님이 그에게 힘을 줬다면 이길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 죽은 자와 나는 무슨 상관인가. 왜 그가 나의 얼굴 하고 있는 거냐.'
루페르트는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면서 알 수 없는 조바심을 느꼈다.
그건 어쩌면 그의 아래에 사는, 아니 존재하는 소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소녀는 한 여성의 시체를 갉아 먹은 존재가 다시 빚어 내 만든 것이다.
여신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 시체를 먹음으로써 그 시체의 주인에 관한 모든 걸 알 수 있다는.
'설마, 그 시체를 여신님이 먹은 건 아니겠지.'
루페르트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사람의 손이다.
석고나 대리석 같은 손이 아니다.
그는 사람이다.
부모가 있고 유년기가 있고, 성장기와 첫사랑의 고통과 무서운 아내에게 핍박을 당했던 생생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는 투기장에 있던 그 존재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전혀 다른 인종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내야 한다.'
나머지는 시간이 흐르는 대로 놔두면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루페르트는 가슴에 달고 있는 소라고둥을 더듬었다.
곧 소식이 들려올 것이다.
이 고둥을 불게 될 불길한 소식들이.
* * *
예상했던 악재는 반드시 터지는 법이다.
레벤호스트가 새로운 신교도 동맹을 창설하고 그 수장에 올랐다.
그레나스가 함락된 후 불과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레나스의 함락이 구교의 힘이 되기는커녕 신교도를 결집하는 효과만을 가져올 뿐이라는 총신들의 예측들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루페르트는 오랜만에 총신들을 불러 그들의 의견을 구했다.
오랜만에 황제가 총신들과 화기애애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총신들을 질투하는 기존 관료들의 분노에 부채질을 하기에 충분했지만, 그 자리에 참석한 루페르트의 총신들은 이구동성으로 황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건 시선의 변화다.
과거 황제의 시선은 미래를 향했다.
늘 미래의 일을 묻고 그것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고 다가올 문제를 선제적으로, 미리 해결하려고 노력했었다.
현재의 황제는 전혀 다르다.
과거에 일어난 일의 이유를 묻고 어떻게 했어야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냐고 묻는다.
황제의 시선은 과거를 향한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안젤리나가 고르고 고른 수재와 천재들의 식견으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까, 그 도시가 최대한 늦게 함락하는 게 우리에게 최상의 결과를 가져다 준다 그 말인가?"
은 가면을 쓴 황제는 이제 비밀스러운 신의 권능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니까.
155화 37. 진창과 도랑 속에서 (2)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진다.
그건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사람에겐 알지 못하고 그러므로 두려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근원이다.
베르크 란은 여전히 황궁에 있었다.
지긋지긋한 병마는 물러갔고 육체는 예전의 완전성을 되찾았다.
그러나 야속한 시간은 하루가 다르게 초로의 노인에게서 전성기의 힘참을 서서히 앗아 가고 있었다.
"...."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베르크 란은 자신의 시간이 머지않았다는 걸 느꼈다.
흰머리가 부쩍 많아졌고 주름도 깊어졌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눈빛이다.
자신조차 두려워하던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이 농장에서 일하는 농마 비슷한 서글서글함을 띠어 간다.
이건 그가 원하는 게 아니다.
정확히는 마음의 일부분이 원하고는 있다.
늘그막에 햇볕이 드는 안락한 집에서 가족들의 축복을 받으며 영면에 드는 건, 모든 늙어 가는 사람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최후니까.
하지만 그에겐 할 일이 있다.
그처럼 늙어 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자들이 있다.
여전히 명예를 박탈당한 채 구걸만을 해야 하는 동료들의 기대를 짊어진 그는 이런 평온한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내는 것에 억지로라도 죄책감을 만들어 내야 했다.
"할아버지."
손녀의 눈치가 빠른 건 그가 싫어하는 특징이다.
며느리를 닮았다.
'그 빌어먹을 년.'
아들은 그처럼 우둔했다.
앞만 보았다.
하지만 그 교활한 며느리가 모든 걸 망쳐 버렸다.
헛바람을 넣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끔찍하게도 손녀는 나이가 차면서 며느리의 모습을 놀랄 정도로 닮아 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요즘 우리 황제 폐하 좀 이상한 거 같지 않나요?"
"어디가?"
"멀리서 본 적이 있는데 시선이 뭐랄까, 꼭 그런 거 같아요. 아, 뭐라고 해야 하지?"
궁정 생활도 1년 넘게 하다 보니 마를로네도 슬슬 자신도 궁정 사람 같은 기품 있는 행동과 언어를 써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해서, 시적이고 교양이 느껴지는 표현을 생각하려 했는데 생각하는 것마다 비참한 농촌의 풍경이며 기억하는 것마다 끔찍한 지옥의 현장이다.
베르크 란이 고개를 돌리는 걸 보며 마를로네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나는 대로 자신의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했다.
"카스무어에서 봤던 새장에 갇혀 죽어 가는 사람 눈빛 같았어요."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죠. 아, 맞다. 공허하다."
"공허?"
"네. 공허한 눈빛이었어요. 듣자 하니 요즘은 그 좋아하는 공놀이도 안 한다고 하시던데."
"황제가 할 유희는 아니지."
베르크 란은 자신의 손을 오므렸다 펴는 걸 지켜보다 갑자기 마를로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숲에서 봤다는 거. 진실이냐?"
마를로네는 주위를 둘러보며 낮은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 숲에서 본 건 루돌프라 알려진 미지의 노인, 그리고 그와 짝을 이룬 자신을 제국 성인이라 칭하던 신비로운 여인 둘이었다.
황제와 루돌프가 무슨 이야기를 한 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때부터 루페르트의 얼굴은 어딘가 전과 달라 보였다.
"아무래도 슈발츠마인 사람들과 제국 성인은 모종의 연관이 있나 봐요."
"목소리를 낮춰라."
"괜찮아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거 아시잖아요. 그나저나."
마를로네는 최근 들어 이상한 현상을 종종 경험하곤 한다.
꿈에서 봤던 장면이 눈앞에서 벌어지거나, 아니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어떤 풍경과 상황이 꿈처럼 떠올랐다.
그 꿈은 지나칠 정도로 생생해서 여간해서 주눅 들지 않는 그녀의 심장을 무겁게 짓누를 정도였다.
"그 루돌프란 사람 말이죠. 전에 저한테 이상한 짓을 했었던 것 같은 기억이."
"그 노인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아니. 분명 눈에 뭔가 시퍼런 불같은 걸 번들거리면서 저를 본 것 같은 장면을 본 것 같은 ...."
"사람이 밤에 잠을 자야지. 너처럼 뻔질나게 돌아다니면 개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법이다."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가 동시에 입구를 노려보았다.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제국의 관리였다.
"베르크 란. 폐하의 호출이다. 즉각 출두하라."
마를로네의 얼굴엔 걱정이, 베르크 란의 눈동자에 기대가 떠올랐다.
드디어 출진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쟁이 마침내 손짓하고 있다.
* * *
황제의 호출이라고 해서 갔더니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마를로네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아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베르크 란이 무골이라 하나 정치에 아주 둔감한 건 아니다.
이 재기발랄하면서도 짓궂은 소년 같은 금발 남자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다.
'제국 기사 요하네스라고 했던가.'
그가 루페르트의 총신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일개 제국 기사는 제국 회의에도 들어갈 수 없는 신분이지만 황제의 총애를 얻어 황제 곁에서 갖가지 조언을 한다는 이 젊은 천재는 베르크 란과 비할 바 없이 높은 신분의 인간이다.
내키진 않지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요하네스는 고개를 까딱거려 인사를 받은 후 밤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생각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로 베르크 란을 보며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전쟁 경험이 풍부하다 들었는데."
"그렇습니다만."
"공성전에도 참가한 적이 있나?"
"당연히."
"역시 폐하의 안목은 정확하군."
"폐하께서 저를 부른 겁니까?"
"그대를 콕 집어 지목했네."
"그렇군요."
요하네스가 베르크 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처음부터 기분 나빴던 오만한 미소가 더욱 짙어지는 걸 보며 베르크 란은 강한 반감을 느꼈지만, 자신의 어깨에 걸린 무게를 느끼고 무표정한 얼굴로 오만하고 작은 젊은이가 무례하게 다가오게 내버려 두었다.
"동맹국이 그레나스를 공성 중인데, 그 장군이 유능한 모양이야. 그런데 그레나스는 빠르게 무너지면 안 돼. 시간을 벌어 줘야 해."
"...신교도를 도우라는 겁니까?"
"그대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제국을 위해서라는 것 정도는 알아 뒀으면 하는군."
"제가 원하는 보상은 하나입니다."
"임무를 완수하면 폐하가 직접 그대를 찾을 것이야."
"...."
베르크 란은 잠시 고민했다.
지금까지 숱하게 겪었던 거짓들의 또 다른 재현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거짓 약속을 하는 자들은 대리인을 세우는 걸 좋아한다는 게 지금까지 살면서 느낀 경험이니까.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을까?
협상이란 걸 해 본 기억이 없다.
협상이라는 단어 자체를 꺼낼 수 없을 정도로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다.
늘 그래 왔다.
'어쩔 수 없다. 하라면 하는 수밖에.'
하지만 베르크 란은 알고 있다.
그 일조차 없어졌을 때 전쟁에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진정한 종말이 찾아온다는 걸.
수많은 병사의 삶들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전쟁에서 죽은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전우들의 말년은 비참했다.
일부가 고향에 돌아가 부농이 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대부분은 구빈원의 싸늘하고 더러운 침상 위에서 외롭고 시끄럽게 죽었다.
칼을 쥐었던 자가 쟁기를 다시 쥐는 건 극히 어려운 일.
"어디로 가면 됩니까?"
전쟁이 부르면 병사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
승패는 그다음이다.
병사는 전쟁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니까.
* * *